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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양 조씨

작성자이장희|작성시간14.08.18|조회수60 목록 댓글 0

풍양조씨, 파조 조정기 집과 손자,수묵화조 분야 조선중기 대표적화가 조속

1,파조 조정기의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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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판서 경헌공 학당 조상경 가문의 파조 조정기의 조부 조종경은 중종15[1520]에 문과하여 정언,

수찬 등을 거쳐 152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김안로의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1526년 지평이 되고 이조정랑, 장령, 사간을 거쳐 1531년에 사섬시정에 이르렀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과천 호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파조 조정기의 증조부 조익정은 세조11[1465]에 문과하여 주서가 되고 1468년 남이의 옥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뒤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한성부 좌윤으로 한평군에 봉해지고 1491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예조참판, 한성부 좌윤, 공조와 이조의 참판, 부총관을 지냈다. 글씨를 잘 썼다.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공숙이란 시호가 내렸다.

2, 파조 조정기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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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조 조정기는 문과하여 사인을 지냈다. 아들 셋[수륜, 수익, 수인] 중 수륜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157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대흥 현감, 호조좌랑, 평택현감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의 옥사에 관련되어 억울하게 죽었다. 서천의 건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수익과 수인은 무두 문과하였으나 당하관에 머물렀다.

수륜의 아들 셋[, , ] 중 척은 효행으로 정려가 내렸으며 속은 깨끗한 관리로 그 명성이 높았다. 조속은 이 집안에서 특기할만한 인물이다.

******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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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속은 1595년에 태어나 1668년에 졸했다. 자는 희온, 호는 창강이다. 161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우고도 훈명을 한사코 사양했다. 그뒤 평강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암행어사의 장계로 표리를 하사 받았다. 이어 관찰사 조존성의 장계로 포상이 또 내렸다. 1645년에 김제군수로 5년간을 봉직하면서 치적이 좋아 도내에서 1위를 기록하여 암행어사 심택의 보고로 또다시 표리를 하사 받았다.

관직 생활이 깨끗하고 지조가 높았다. 그림을 잘 그렸고 그 중에서도 영모와 매죽이 뛰어났다. 해서, 행서 등 모든 필법이 일세에 부러움을 샀다.

"조속은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조가 높고 또한 청빈하여 칭송받았다. 때로는 끼니를 걸러야 하는 가난함에도 구애치 않았으며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화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산수와 더불어 수묵화조를 잘 그렸다. 특히 까치나 수금 등을 수묵화조화에서 한국적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명대의 수묵사의화조화가인 임량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성기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국 특유의 정취 짙은 서정세계와 상통되는 것으로 이러한 화풍은 그의 아들인 지운을 비롯하여 전충효, 이함, 이하영 등에게로 이어졌다.

그밖에도 공필풍의 [금궤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천연의도]와 같이 주목되는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미법을 기조로 하여 다루어진 [호천연의도는]는 조선 시대 남종화 발전의 초기 단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 뿐만 아니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에도 관심을 보여 그 진적과 금석문의 수집활동을 시작한 이 방면의 선구자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서작도][매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 등이 있다."----정신문화연구원 발간 [한국인물 대사전]에서

 

풍양조씨, 조흡 집과 조상경

조흡은 문과하여 교리를 지낸 조수익의 아들이며 파조 조정기의 손자다. 1591년에 태어나 1661년에 별세했다. 자는 흡여, 호는 서창이다. 광해군 말에 등용되어 승문원 정자가 되고 1623년 이천에서 군병을 모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정사공신 3등이 되고 6품직을 거쳐 양구현감에 이르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도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뒤 청안현감, 창평현령, 부평도호부사를 거쳐 1644년에 공조참의에 올랐다. 1646년 훈맹에 참여한 공으로 가선대부 풍안군에 봉해졌으며 광주부윤이 되었다.

그뒤 부총관, 한성부 좌윤을 지내고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창평 성산사에 제향되고 좌참찬에 추증되었으며 경헌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조흡의 아들 백운 집은 문과 여섯[성보, 진용, 병위, 동만, 철증, 상건]에 참판[함영, 동만] 관찰사[성보]를 내는 것에 그쳤다. 현대인물에는 문필가로 이름을 날린 조풍연[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있다. 또한 기독교 방송 논설위원 조남선, 2대 민의원 의원과 충북지사를 지낸 조대연이 있다.

조흡의 적은 아들 중운 집은 위세당당한 안동김씨에 맞섰던 풍양조씨 세도 가문이다. 조중운과 그 아들 조도보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으나 손자 조상경[조흡의 증손]이 현달함으로써 이 가문은 크게 일어섰다.

**** 조상경, 노론의 실세****

-----공신의 후예로 이조와 병조의 판서, 한성부판윤 등 요직 두루 거쳐

조상경은 1681년에 태어나 1746년에 몰했다. 자는 자장, 호는 학당이다. 김창협의 문인으로 1708[숙종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을 거치고 1717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활동했으며, 경종 즉위 후에 대사간, 승지 등을 지냈다.

신임사화 때 무고로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아산으로 이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병사들에게 조총훈련을 실시토록 하고 군기를 잡았으며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섰다.

1727년에 소론 김일경, 목호룡 등이 처형되었으며 이광좌 등도 유배되고 노론이 요직을 차지했으나 탕평책의 일환으로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 등도 기용되었다. 이 무렵 민진원과 정호가 탄핵을 당하자 이를 변호하다 파직되었다. 1729년에 풀려나 한성부 좌윤, 경기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1731년 사은 겸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명사조선열전]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뒤 이조,형조, 병조의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판의금부사, 판돈녕부사, 한성부 판윤을 고루 지냈다. 시호는 경헌이다.

암행어사 2004-09-10 오전 7:50:00

문중의 비중있는 특정인물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여타 문중 소개 하실때지금과 동일한 구성으로 설명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풍양조씨, 조흡 집과 조상경

조흡은 문과하여 교리를 지낸 조수익의 아들이며 파조 조정기의 손자다. 1591년에 태어나 1661년에 별세했다. 자는 흡여, 호는 서창이다. 광해군 말에 등용되어 승문원 정자가 되고 1623년 이천에서 군병을 모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정사공신 3등이 되고 6품직을 거쳐 양구현감에 이르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도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뒤 청안현감, 창평현령, 부평도호부사를 거쳐 1644년에 공조참의에 올랐다. 1646년 훈맹에 참여한 공으로 가선대부 풍안군에 봉해졌으며 광주부윤이 되었다. 그뒤 부총관, 한성부 좌윤을 지내고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창평 성산사에 제향되고 좌참찬에 추증되었으며 경헌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조흡의 아들 백운 집은 문과 여섯[성보, 진용, 병위, 동만, 철증, 상건]에 참판[함영, 동만] 관찰사[성보]를 내는 것에 그쳤다. 현대인물에는 문필가로 이름을 날린 조풍연[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있다. 또한 기독교 방송 논설위원 조남선, 2대 민의원 의원과 충북지사를 지낸 조대연이 있다.

조흡의 적은 아들 중운 집은 위세당당한 안동김씨에 맞섰던 풍양조씨 세도 가문이다. 조중운과 그 아들 조도보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으나 손자 조상경[조흡의 증손]이 현달함으로써 이 가문은 크게 일어섰다.

**** 조상경, 노론의 실세****

-----공신의 후예로 이조와 병조의 판서, 한성부판윤 등 요직 두루 거쳐

조상경은 1681년에 태어나 1746년에 몰했다. 자는 자장, 호는 학당이다. 김창협의 문인으로 1708[숙종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을 거치고 1717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활동했으며, 경종 즉위 후에 대사간, 승지 등을 지냈다.

신임사화 때 무고로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아산으로 이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병사들에게 조총훈련을 실시토록 하고 군기를 잡았으며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섰다.

1727년에 소론 김일경, 목호룡 등이 처형되었으며 이광좌 등도 유배되고 노론이 요직을 차지했으나 탕평책의 일환으로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 등도 기용되었다. 이 무렵 민진원과 정호가 탄핵을 당하자 이를 변호하다 파직되었다. 1729년에 풀려나 한성부 좌윤, 경기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1731년 사은 겸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명사조선열전]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뒤 이조,형조, 병조의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판의금부사, 판돈녕부사, 한성부 판윤을 고루 지냈다. 시호는 경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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