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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斯文亂賊

작성자이장희|작성시간14.09.25|조회수10 목록 댓글 0

 조선시대 성리학은 국정철학이자 선비들이 추구해야하는 최선의 가치였다. 그러나 임진, 병자년을 겪으면서 그 가치가 무너졌으며 사회질서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이 理,氣 중심에서  禮學 쪽으로 치우치게 된것도 지배계층의 신분 유지와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였다. 그 당시 지배세력은 우암을 비롯한 노론세력으로 송나라 주자학과 주자가례를 금과옥조로 여겨  차별화 하였다. 이때 문제가 생긴것이 임금이 죽었을때 상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노론이 타격을 받게 되고 성리학에 대한 입장에도 서로 충돌하게 되었는데 바로 사문난적 사건이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하자 28세의 송시열의 벼슬은 종9품의 대군사부(봉림대군을 가르치던 직책)으로 청에게 항복한 직후 남한산성을 떠나 속리산으로 갔는데 福泉庵에서 백호 윤증(남원 윤씨)이란 사람을  만나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 우리가 후일 정치를 하게되거던 오늘의 이 치욕을 있지 말자" 굳게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끝나고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임금이 1659년 갑자기 죽자 송시열의 1년복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남인의 논객 윤휴였다. 그런가 하면 윤휴는 주희의 論語集注(四書에대한 주자의 해설서)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갖고 改作을 하였는데 이를두고 송시열은 주자를 모욕한 역적으로 몰아 사문난적 이라 몰아부쳤다.

 더 나아가 이를 서인의 당론으로 하기위해 유력한 서인 학자들을 충청도 강경의 黃山書院 (현 죽림서원)에 모이게 하여 괴씸한 윤휴 문제를 논의 하였는데 이때 모두가 찬성 하였는데 尹宣擧만이  윤휴를 옹호하였는데 이 문제로 파평 윤씨들과 등이 지고 후일 윤휴의 아들 윤증이 그의 아버지 비문을 지어 달라할때 송시열은 그의 비문에 인격적 비하를 하였다고 송시열과 윤증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집권을 한 노론은 더욱 예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흉내도 낼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고 난해해지니 이때부터 祭祀床에 동인들은 紅東白西로  서인들은西栗東枾 등으로 부르는가 하면 민초들은 家家禮文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도 정치권에서 사문난적이란 소리가 들리고 명절이면 홍동백서란 소리가 들리니 이때 당쟁이 얼마나 깊었는지 절감이난다.

  이제 추석이 얼마남지 않았으니 예의 역사적 발자취가 문득 생각납니다. 즐거운 추석명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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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안동사범 11 회 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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