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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종과 화랑세기

작성자hyang|작성시간26.06.10|조회수33 목록 댓글 0

두 세종과 『화랑세기』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6세 풍월주 세종世宗의 존재는 필사본 『화랑세기』 진위논쟁에 있어 그간 한 가지 쟁점이 되어 왔다. 『화랑세기』의 세종은 그 유명한 태종 이사부와 지소태후 사이의 아들로 등장하여 경주 김씨 신라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인물인 반면, 그 동안 학계가 파악하고 있던 신라 중고기의 세종이라는 인물은 금관국 출신의 “김해 김씨”였기 때문이다.

사료 A
“6세 세종은 태종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태후라 한다. 진흥대왕대제와는 동복형제이다. 六世世宗者 苔宗公子也 (母曰只召)太后也 與眞興大王大帝同胞(兄弟)” -필사본 『화랑세기(모본)』 6세 세종

사료 B
-1. “짐(문무왕)은 곧 가야국 원군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에 데리고 온 아들인 세종의 아들 솔우공의 아들인 서운 잡간의 딸 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심으로 있다.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衡王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 率友公之子 庶云匝干之女文明皇后 寔生我者” -『삼국유사』「기이」가락국기
-2. “왕비는 분질수이질의 딸 계화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간, 둘째는 무도(무력의 오기)각간, 셋째는 무득각간이다. 王妃分叱水爾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삼국유사』「기이」가락국기
-3.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맏아들 노종, 둘째 무덕, 막내 무력과 함께 나라의 재산과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삼국사기』「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

사료 B-1과 B-2를 통해 보면 세종은 금관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구해)왕의 맏아들, 즉 김해 김씨이다. 또 B-3에서는 같은 사람이 ‘노종奴宗’이라는 이표기로 등장해 世는 훈차, 奴는 음차 표기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宗은 夫의 한역 표기이므로 진평왕 원년에 상대등이 된 노리부 역시 노종=세종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와중에 『화랑세기』에서는 세종과 노리부가 서로 다른 사람이며, 그 둘 모두 금관국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학계의 의심을 살 만하다. 이에 대해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서론을 주장하는 서강대 명예총장 이종욱은 본인이 쓴 『화랑세기』 번역서의 주석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삼국유사』 2 「기이」 하 가락국기에는 세종世宗 각간, 무도武刀 각간, 무득武得 각간을 낳았다고 나온다. 『삼국사기』 4 「법흥왕」 19년(532)에는 김구해金仇亥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을 거느리고 항복했다고 나온다. 『화랑세기』에는 무력武力과 무덕武德이 나온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장자 세종世宗은 6세 풍월주 세종世宗과는 다른 인물임이 틀림없다. 풍월주 세종은 지소태후와 태종공苔宗公의 아들이다.”-이종욱(2005), 『대역 화랑세기』, p.242

반면 이에 대해 가야사를 주로 연구하는 고대사학자 김태식(자발백수X 홍익대O)은 본인의 저서를 통해 이렇게 논박하였다.

“한편 근래 1989년에 발견된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는 세종이 제6세 화랑으로서 이사부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고, 노리부(弩里夫)는 진흥왕비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朴氏)의 오빠로 되어 있다. 물론 그런 계보는 단순한 조작에 지나지 않으며, 그 둘이 모두 금관국과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 큰 착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기에 신라 왕실에 세종과 노리부라는 인물이 있고, 동시에 그와 다른 가야계 유민으로서 신라 조정에서 활약하는 세종과 노리부가 있을 수 있을까?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노리부와 그 조카사위인 세종이 함께 진지왕의 폐위를 주도했다고 한 것은, 황종(荒宗)과 거칠부(居柒夫)가 서로 싸웠다고 하는 것처럼 무리한 표현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朴昌和)는 그들이 가야계의 인물이며 동일인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는 그 책, 또는 그 모본(母本)이 김대문(金大問)의 진본이 아니라 위작임을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라고 하겠다.” -김태식(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pp.262-263

그러나 그는 이 글을 통해 애써 ‘동명이인의 가능성’을 피하고 있다. 현재도 필사본 『화랑세기』를 진서로 보는 자발백수 김태식과 위서론자 홍익대 김태식이 동명이인으로 동시에 활동하고 있는 마당에, 같은 시기에 신라 왕실의 세종과 가야 유민 출신의 세종이 왜 존재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당장 세종이 살아있던 시기인 진흥왕 대에만 해도 진흥왕의 이름인 심맥부지深麥夫知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즉 동명이인인 감문군주 심맥부지心麥夫智 급척간이 존재하였음이 창녕 진흥왕 척경비를 통해 드러난다.
또 한편으로는 과연 김태식의 말대로 박창화가 세종이 가야계라는 사실을, 즉 금관국 출신의 세종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몰랐을까? 필사본 『화랑세기』의 위서론자들은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비롯한 남당유고 전반의 문건들을 만들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동국통감』 등의 한국 사서와 중국 및 일본의 사서 내용을 참고하여 뼈대를 잡고, 그 자료들 사이의 빈칸을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유추하여 창작해냈기 때문에 꽤 설득력이 있게 읽힌다고 얘기한다.(김기흥, 2003, p.135; 노태돈, 1995, p.354) 그렇다면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봤던 박창화가 이들 사서에 수차례 등장하는 금관국 출신 세종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다.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 사실 『화랑세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남당유고에는 금관국의 세종이 등장한다! 흔히 표지에 쓰여있는 고갑자 연도표기를 따라 상장돈장(경오; 1930)이라고 불리는 박창화 작성의 신라 계보도 자료(이하 『상장돈장』)를 보면 세종은 구해와 계화 사이의 맏아들로 등장하며, 원융元肜이라는 여성과의 사이에 세원世元이라는 자식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박창화는 금관국 유민인 세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첨언하자면, 이 『상장돈장』의 세종은 이미 홍익대 김태식이 2002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전 1997년에 이종욱(p.17)이 이미 논문을 통해 언급한 바 있기도 하다.)
그런데 박창화가 만든 이 계보도는 『화랑세기』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일례로 『화랑세기』에는 금관국 구형왕과 계화 사이의 자식들 중 세종은 등장하지 않고 남은 자식들은 무력과 무득의 순서로 등장한다.

사료 C
“겸지가 그(숙씨) 아름다움에 기뻐하며 후로 삼고 구형을 낳았는데 (구형은) 계황의 딸 계화에게 장가들어 후로 삼고 무력과 무득을 낳았다. 鉗知悅其美 以爲后 生仇衡 娶桂凰女桂花爲后 生武力武得” -필사본 『화랑세기(모본)』 15세 유신공

즉 『상장돈장』의 계보도에는 구해왕과 계화 사이의 자식들의 출생 순서가 세종-무덕-무력으로 나오는 반면, 『화랑세기』에서는 무력-무덕으로 출생 순서가 뒤바뀌어 있으며 ‘무덕武德’은 ‘무득武得’이라는 이표기로 나온다는 말이다. 박창화가 『상장돈장』을 토대로 화랑세기를 창작해냈거나(박남수, 2007, pp.86-87), 혹은 『화랑세기』와 『상장돈장』 계보도가 같은 계통의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결과물이거나(자발백수 김태식, 2002, pp.138-139), 혹은 『화랑세기』만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런 결과는 나올 수 없다.
또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찾을 수 있는 문제가 더 있다. 바로 마지막 금관국왕의 이름 문제이다. 『화랑세기』를 비롯한 남당유고의 신라 관련 기록물에서는 마지막 금관국왕의 이름이 모조리 일관되게 ‘구형仇衡’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계보도에서는 같은 사람이 ‘구해仇亥’라고 명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상장돈장』 계보도 자료가 “『화랑세기』와만 연관성 내지 인과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세종-무덕-무력의 출생 순서는 기존에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중에서는 『삼국사기』「신라본기」법흥왕 조의 금관국 멸망 기사와 가장 유사하다. 세종이 노종이라는 표기로 등장하는 것 외에는 출생 순서도, ‘무득’이 아닌 ‘무덕’이라는 표기도 완벽히 일치한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가락국기와 「왕력」에서 금관국의 마지막 왕이 ‘구형왕’으로 일관되게 등장하는 반면,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본기」 법흥왕 조와 「김유신 열전 상」에 같은 사람이 ‘구해왕’으로 일관되게 등장하여 『상장돈장』의 계보도와 일치한다. 즉 『상장돈장』의 해당 계보는 『삼국사기』 기록을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노종이 아닌 ‘세종’ 표기를 하였음을 볼 때, 박창화는 『삼국유사』 역시 본 것이 확실하며 두 이름이 같은 사람의 것을 달리 표기한 것이라는 이해 역시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즉 “필사본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가 세종이 가야계의 인물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홍익대 김태식의 주장은 이로서 효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상장돈장』 계보도에 등장하는 원융과 세원이라는 이름은 기존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들이다.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와는 다른 박창화가 봤던 제3의 자료 속 정보이거나, 혹은 『화랑세기』의 박창화 위작론을 인정한다면, 박창화의 창작일 것이다. 그러나 둘째로 볼 경우 왜 마찬가지로 박창화의 창작물이며 같은 세계관을 가졌을 『화랑세기』에는 원융과 세원을 비롯해 세종조차 등장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한편 첫째로 볼 경우에도 『화랑세기』에는 금관국 출신인 세종과 그 처자식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도대체 어떤 자료를 보고 박창화가 이런 내용을 집어넣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즉 어떠한 논지를 취하더라도 도대체 왜 무력-무득 형제의 맏형이라는 세종이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하는 미스테리가 남는다. 이것을 풀어낼 실마리는 남당유고에 포함되어 있는 신라 관련 문건인 『금천대제법흥진왕기』에 있다.
『금천대제법흥진왕기』는 법흥왕 시기를 다룬 본기 기록이다. 여기에는 금관국의 멸망 기사가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멸망 이전 금관국에 관련된 기사들 역시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세종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사료 D
-1. “납수의 딸 계화를 공주로 삼아 옷을 하사하였다. 이 때에 계화가 겸지의 총애를 받아 작위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以納水女桂花爲公主 賜衣 時 桂花得鉗知寵 請爵故也” -『금천대제법흥진왕기』 3년 2월 조
-2. “계화가 겸지의 아들 세종을 낳았다. 桂花生鉗知子世宗” -『금천대제법흥진왕기』 8년 7월 조
-3. “9월, 계화를 구형의 처로 삼았다. 九月 以桂花妻仇衡” -『금천대제법흥진왕기』 8년 9월 조

여기에서 우리는 도대체 왜 구형왕과 계화의 ‘맏아들’이라는 세종이 『화랑세기』에서 그들의 자식으로 등장하지 않았는가를 알게 된다. 세종은 구형왕의 친자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종은 구형왕의 아버지인 겸지왕이 말년에 계화에게 총애를 내려 낳게 된 자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종욱의 주장과 같이, 세종을 구형왕의 맏아들이라고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단순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세종의 출생으로부터 2달 뒤에 겸지의 총첩인 계화가 아직 태자 신분이었던 구형의 처가 되었다. 이에 따라 구형은 계화의 아들인 배다른 동생 세종을 자신의 아들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계화에게서 구형의 유전자를 지닌 무력(법흥 11년 10월)과 무덕(법흥 14년 3월)이 뒤이어 태어나며 기존 사료들에 보이는 삼형제가 완성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세종이 무력-무덕 형제에 앞서 ‘맏아들’로서 기록된 배후에는 이런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숨어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당시 사회의 친족구조에 대한 한 가지 원칙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여성이 재혼을 하였을 경우 그에게 딸린 자식은 새로운 남편의 자식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식의 공식적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와는 무관하게 어머니가 어떤 남자를 만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얘기이다. 즉 모계제의 요소 내지 어쩌면 유산이 당시의 친족구조 속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자식이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있는 모계제적 친족구조의 케이스들은 비단 『화랑세기』 뿐 아니라 남당유고 전반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필사본 『화랑세기』 속 형제관계와 조손관계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필사본 『화랑세기』 속 모계제적 요소의 만연을 논한 吉田 愛의 연구(2006)를 참조할 만하다.)
종합하자면, 홍익대 김태식이 필사본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창작물이라 판단하며 들었던 근거, 즉 “세종은 금관국 유민 출신이어야만 하며 박창화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논변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틀린 것이었다. 박창화는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금관국 출신 세종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동시대에 신라 왕실 출신의 6세 풍월주 세종과 금관국 출신의 세종이 동명이인으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서강대 이종욱은 김태식과 달리 풍월주 세종과 금관국의 세종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였으나, 세종이 『화랑세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삼국유사』의 기록이 틀렸을 것이라 섣불리 단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종의 어머니인 계화가 겸지의 총애를 통해 세종을 낳은 이후 구형과 결혼함으로서 세종이 구형의 맏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이 숨어 있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와 『삼국유사』는 서로 상충하지 않는 내용을 전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필사본 『화랑세기』와 남당유고의 『상장돈장』, 그리고 『금천대제법흥진왕기』를 함께 검토함으로써 파악이 가능하였다. 김태식과 이종욱은 비록 관점은 달랐으나 둘 다 『화랑세기』만을 논하면서 『화랑세기』가 속해 있는 남당유고 전반에 대한 검토와 고려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틀린 논지를 펴거나 사료 기록의 사실성을 속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신라 중고기에 동시에 존재했던 두 세종은 우리가 왜 필사본 『화랑세기』 진위 논쟁에 있어 남당유고를 함께 보지 않을 수 없는지를 알려준다. 아아, 남당유고에 대한 검토 없이 그저 서로 열불 올려 싸우기만 했던 지난 35년간의 『화랑세기』 논쟁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나!
이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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