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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의 절과 한 가지 마음 / 딸과 어머니

작성자정남진1|작성시간26.06.13|조회수29 목록 댓글 0

서른 번의 절과 한 가지 마음

 

취업 준비로 하루가 길게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내 불안보다 큰마음으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느 아침, 반찬을 데우던 어머니가 무심한 듯 말했다.

"성진아, 너 잘되라고 절에 가서 108배를 해 봤다."

나는 젓가락을 들다 멈췄다.

 

평소 절에 들를 일이 없기에 더욱 놀랐다.

"엄마가 108배를? 진짜로?"

어머니는 살짝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하려고 갔는데… 서른 번쯤 하니까 더는 못하겠더라."

그러고는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절에 들어섰을 때는 마음이 단단했단다.

'우리 성진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모아 절을 올리니

다섯 번은 가볍고 열 번까지도 괜찮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무 번이 넘어가면서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스물다섯 번쯤 되자 무릎이 덜컥 내려앉을 것 같았단다.

그래도 서른 번째까지는 어떻게든 버렸다.

 

그러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털썩 앉아

눈앞의 부처님만 멍하니 바라봤다고 한다.

 

그러다 문득 '내가 절을 한다고 성진이가

당장 붙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스쳤다고.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서 한참 앉아 있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단다.

"그래도 뭐… 서른 번이면 됐다.

 

나머지는 성진이가 할 몫이지."

어쩐지 그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어머니는 108배를 못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마음의 끝까지 이미 닿았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마음을 다잡았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서른 번이나 마음을 올리며

응원해 줬다는 사실이 단단한 버팀목처럼 느껴졌다.

 

몇 달 뒤, 나는 취업에 성공했다.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봐라. 절은 서른 번이면 딱 좋았다.

 

나머지 일흔여덟 번은 네가 알아서 채워 넣었잖아.

" 그 말이 왜 그리 따뜻했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말이 부처님 말씀 같았다.

지금도 힘든 날이면 서른 번의 절을 떠올린다.

 

그러면 마음속에 이런 문장이 떠오른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이뤄 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마음 덕분에 나는 더 멀리 걸어갈 수 있다.'

 

어머니가 그날 절에서 얻은 깨달음처럼,

나는 지금도 그 마음을 들고 앞을 향해 걷는다.

 

 

남성진 |

경북 안동시 [제21회 생활문예대상]

 

 

 

딸과 어머니

 

여성 교도관으로 일한 지 올해로 10년.

일을 막 시작했을 때는 수용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생생하게 와닿고 모든 하소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능력과 재량의 한계,

또 어느 때는 규정의 벽에 막혀 무력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어느새 지쳐 갔다.

적응 또는 매너리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이곳에는 슬픈 사연이 너무나 많으니까.

 

교정 시설에는 아픈 사람이 많다.

시설에 들어온 뒤 지병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병을 얻기도 한다.

그런 때는 교도관이 수용자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몇 달이 걸리더라도

그가 회복할 때까지 입원시키고 곁을 지켜야 한다.

 

수용자의 병실에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일도 나의 몫이다.

 

그날도 중환자실에서 수용자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발목이 수갑으로 채워진 채 누워 있었다.

 

수용자의 소변 통을 비우고 헹구는 것도,

밥을 먹지 않을 때 억지로라도 한술 뜨도록 설득하는 것도,

밤새 곁을 지키는 것도,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 쏜살같이 달려가

간호사를 호출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이제는 세상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을 이들을 오직 내가 돌본다.

연일 근무로 정작 내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고향의 부모님도 자주 찾아가지 못하는데….

 

수용자의 병시중을 들 때마다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수용자가 온종일 밥도 안 먹고 물도 거부한 날이 있었다.

이러다 큰일 날까 싶어 애가 타서 하소연했다.

 

제발 좀 드시라고, 이러다 큰일 난다고.

그러나 고집을 부리던 그는

끝내 병실 출입문 쪽을 향해 휙 돌아누웠다.

 

한동안 그 자세로 가만히 있기에

자는가 싶었는데 이내 어깨가 들썩였다.

 

어디 아픈가 싶어 그를 부르자,

대답 대신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마치 울음의 이유를 내게 감추고 싶은 듯이,

그의 슬픔은 절제돼 있었다.

 

수용자를 계속 지켜보는 것이 내 일이다 보니

그가 향한 출입문 쪽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병실 출입문 작은 창 너머에서

연로한 할머니가 안을 쳐다보다

사라지고 다시 쳐다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수갑이나 무전기에 호기심을 느끼나 보다 하곤

안을 볼 수 없도록 창문 가림막을 쳤다.

 

시간이 흐르고 식사를 하러

병실을 나서려는데 할머니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작은 키에 등마저

활처럼 굽어 손을 대면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

 

기운도 없는 종아리에 힘을 줘

까치발로 잠시 병실 안을 들여다보다가

힘이 풀리면 발꿈치를 바닥에 붙이기를 반복하던 것이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가서 쉬라고 안내하자 그러겠노라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열린 문틈 사이 수용자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둘의 관계를 눈치챘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딸을, 딸은 어머니를 부르지 못했다.

 

수용자가 외부 병원에 입원하면

그 가족이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보려고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러나 교도관이 완강히 금지하므로 서로 접촉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규정이다.

 

교도관은 정해진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순간,

규정을 입 밖에 내며 그들을 제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둘의 관계를 묻지 않았다. 다만 병실 문을 닫았을 뿐이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할머니를 부축해 복도 의자에 앉혔다.

그날, 오랜만에 교도관으로서 생생한 기분을 다시 느꼈다.

 

어머니와 딸이

서로를 멀찌감치 바라본 찰나에는 죄와 벌이 없었다.

 

오직 진실한 사랑만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수갑조차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김시원 |

부산시 해운대구 [제21회 생활문예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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