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생전에 입던 한복입니다.
리폼 가능할까요?"
한복의 상태를 묻자,
오래돼 군데군데 해진 부분이 있지만
이대로 버리기에는 마음 쓰이는 옷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며칠 뒤,
꼼꼼하게 포장된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초록색 두루마기가 곱게 접힌 채 담겨 있었다.
30년은 족히 돼 보였다.
소매는 불룩한 붕어배래로 넓고,
고름은 지금의 한복보다 훨씬 길고 폭이 컸다.
동정은 얇은 종이로 돼 있었다.
세월을 맞아 군데군데 빛이 바래고 해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버려야 할 옷일지 모르지만
의뢰인에게는 쉽게 떠나보낼 수 없는
어머니의 시간일 것이다.
그는 두루마기를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상하복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새 원단으로 옷을 만드는 일보다
이미 완성된 옷을 풀어 다시 짓는 일이 더 어렵다.
기존 바느질 선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단이 한정적인 데다 해진 부분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진다.
두루마기의 고름을 떼어 내고
소매를 풀어 패턴을 다시 잡았다.
넓은 붕어배래는 활동하기 편하도록 선을 정리하고
낡은 동정은 새 천으로 바꿨다.
천을 자를 때마다 한 번 더 확인했다.
오래된 원단은 생각보다 약해
작은 실수에도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작업은 엄마와 함께한다.
어릴 적부터 한복을 만들어 온 엄마를 보고 자라
자연스럽게 이 일을 업으로 삼게 됐다.
우리는 365일을 같이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곳으로 출근한다.
매장 안쪽 작업실은 2평 남짓한 공간인데
재단 받침 하나, 재봉틀 두 대,
오버로크와 원단장을 넣어 공간이 꽉찼다.
재단할 때는 나란히 앉고
재봉할 때는 등을 맞댄 채 박자를 맞춘다.
하루하루 특별한 일은 없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엄마와 가끔 의견이 부딪쳐 대화가 줄어들 때도 있지만,
또 어느 순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야기 나누며 손을 움직인다.
이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단정한 초록색 일상복이 완성됐다.
이전의 두루마기 형태는 사라졌지만
원단이 가진 색과 질감은 그대로 남았다.
의뢰인에게 사진을 보내자 곧 답장이 왔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 짧은 문장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애써 풀고 다시 지은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한숨 돌리듯 웃음이 났다.
요즘의 옷은 빠르게 만들어지고 그만큼 빨리 사라진다.
계절이 지나면 유행이 바뀌고 저렴한 옷은 쉽게 버려진다.
그런 흐름 속에서 오래된 한복을 풀어 다시 짓는 일은
어쩌면 비효율적인 작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시간을
다시 입게 해 주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빛바랜 한복을 펼쳐 든다.
모녀가 등을 맞댄 채
오늘도 바늘 끝으로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김보나 |
로즈리나 한복 대표
역사를 모으는 사람
나는 '역사 컬렉터'다. 과거 자료를 수집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탐구한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진 구체적인 물성을 좋아한다.
자료를 손에 쥐는 순간
추상적인 역사가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새로운 자료를 만날 때면 늘 마음이 떨린다.
오래전에 <사변을 당도하야>라는
제목의 낡은 두루마리 한 점을 수집했다.
세로 30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한지에
세로쓰기로 정성껏 적어 나간 글은
그 길이가 무려 15미터에 이르렀다.
정숙이라는 사람이 6·25전쟁이 끝나고
몇십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인생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전쟁 중 식량을 구하러 나간
어머니가 무슨 영문인지 돌아오지 않았고,
정숙은 졸지에 앞을 볼 수 없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됐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폐허로 만드는 전쟁을
감당하기에 그는 너무 어렸다.
그 폭풍의 세월을 겪어 낸 정숙은
한지 위에 일기 쓰듯 글을 적기 시작했다.
종이가 모자라면 덧대기를 여러 차례,
드디어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가장 마지막에 그는 "사람 팔자 몰라요.
정숙 씀."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이 기록은 남에게 쉽게 말 못 할 넋두리일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원망이나 그리움일 수도 있겠다.
두루마리가 정숙 씨에게 위로가 됐을까,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두루마리 한 점이 무엇보다
소중한 6·25전쟁 기록물이라고 믿는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보기 힘든 생생한 삶의 기록이니 말이다.
<철도 공사 여행 일기>라는 수집품도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3년 경북 영동의 한 청년이
울산 근처 철도 공사장에서 겪은 노동과 일상,
그곳의 풍속 등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일기장은 당시의 종이가 아니라
1971년 달력의 뒷면으로 만든 공책이다.
왜 그는 환갑도 더 지난 나이에 40년 전 옛일을 기록했을까.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 시대 인부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고단함을 후대가 기억하길 바랐던 걸까.
사람은 왜 기록을 남길까?
나는 역사 자료를 수집하면서 알게 됐다.
다른이에게는 그리 대단한 자료가 아니라고 해도
당사자에게는 온 삶이 담긴 역사라는 것을.
그들은 기록을 통해 자신이 이 세상에
당당히 맞서며 살아 냈음을 증언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고유성을 지닌 하나의 우주이기에
이름 없는 민초들의 이야기라도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고 아름답다.
옛사람들이 남긴 자료에는
그 시대의 삶과 역사가 오롯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역사 자료 수집을
단순히 오래된 물건을 모으는 활동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나는 오늘도 운명적인 역사 자료를
마주하길 기대하며 설렘 가득한 하루를 살아간다.
박건호 |
역사 자료 수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