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967

작성자본연스님|작성시간26.06.08|조회수56 목록 댓글 2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967

 

부처님 가르침을 어렵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십시오.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 부처님 이름이 무슨 부처, 무슨 부처, 일광여래(日光如來)ㆍ 월광여래(月光如來), 뭐다 하여튼 삼천불명이나 있고, 또는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많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부처님이 그 우주 공간내에 가서 어디에 가서 뿔뿔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오직 하나의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상(相)이 없는 자리거니, 모양이 없는 자리거니, 시간성ㆍ공간성이 없는 자리거니, 이른바 이름도 어떻게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 모양도 없지만 무량광명(無量光明)과 모든 그런 만덕(萬德)을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만덕을 갖추어 있으니 그 만덕을 다 우리가 일일이 헤아릴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그 만덕 따라서, 자비심 따라서 또는 지혜 따라서, 또는 행원 따라서 이렇게 그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는다 말입니다. 자비심 따라서 관세음보살, 또 지혜 따라서 문수보살 또는 대세지보살 말입니다. 또는 원력 따라서 보현보살,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을 저 극락세계나 천상으로 인도하는 또 그런 공덕 따라서 지장보살, 그러는 것이지 뿔뿔이 모양이나 몸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 보살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가 장엄염불을 할 때에 …. 장엄염불은 주로 그 나옹(懶翁, 1320~1376)스님, 장엄염불은 나옹스님이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스님께서 주로 하신 것을 간추려서 냈습니다. 또 『화엄경』에서도 뽑기도 하고, 헌데 끝에 가서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그 아미타불이 아미타불이 몇 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도 수가 많으니까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 그 하도 많으니까, 일일이 못 헤아리고서 많은 수를 표현했단 말입니다.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라, 동명동호라, 같은 이름, 같은 호(號)란 말입니다.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나’나 ‘너’나 김가나 박가나 모두가 다 아미타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면 김가, 박가 하지만은 성자의 밝은 눈, 본래 면목을, 본래 실상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동명동호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도신(道信)스님께서나 6조 혜능(慧能)스님께서나 그렇게 우리한테 권장하신 염불은 그런 염불입니다. 그런 염불은 어떠한 공부하고도 절대로 그때는 충돌이 안된다 말입니다.

 

우리가 화두는 무엇 때문에 드는 것인가? 일체 존재가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런 도리를 한 말로 느끼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잠시간 거기다가 무슨 문제를 제시해서 화두가 있는 것이지, 어느 누구나가 다 ‘나’나 ‘너’나 일체 존재가 다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확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화두가 개입할 것이 없습니다. 화두가 나올 것이 없습니다.

 

화두는 빨리 타파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거기까지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타파하라는 것인가? 모두가 다 부처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알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운문스님(雲門文偃, 864~949)한테 어느 스님이 가서 ‘여하시 불(佛)잇고’ 부처가 무엇인가? …. 똥 마른 막대기라. 하필이면 부처를 갖다가 똥 마른 막대기가 있다, 똥 마른 막대기라, 똥 마른 막대기까지도 부처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그런 도리道理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지금 중생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생의 몸을 아직은 지금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처지입니다, 중생의 몸으로 해서 어떻게 빨리 우리가 부처가 될 것인가. 그러면 어느 하나의 방법을 골라서 무간수(無間修)라, 없을 무[無]자, 사이 간[間]자, 말입니다, 사이 없이 사이 없이 닦아 나가야 됩니다. 우리가 과거 전생에도 우리가 많이 업을 짓고, 금생에도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그런 것이 모두가 업으로 해서 우리 불성에 다닥다닥 지금 그림자로 붙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없애야 됩니다.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본래의 중심에다가, 중심은 부처 아닙니까, 본래 중심에다가 딱 우리가 붙여놓고서 그래 놓고서 아까 말한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오로지 우리가 생각생각에 사이 없이 다른 망상이 낄 수가 없도록까지, 우리가 무슨 점포를 보면서 고객을 만나나 우리가 무슨 물건을 파나 말입니다, 다 모두가 부처구나, 미운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다 부처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그래야 상(相)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실은 부처인데 우리가 그렇게 못 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볼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니니깐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 다른 상相을 내지 말고서 무간수(無間修)라, 사이없이 닦아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리 버릇이 차근차근 가신단 말입니다. 딱 그래서 온전히 가시면, 온전히 가시면 그때는 천지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천지가 뒤바뀐단 말입니다. 천지가 광명세계가 됩니다.

 

플라톤Platon의 유명한 『국가론(國家論)』에서 이른바 태양과 동굴의 비유라, 이것도 역시 태양은 성자의 세계고, 동굴은 우리 중생의 세계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다 있는 것보고 우리가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참말로 다 부처가 있는 것인데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없는 것 보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분명히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에 ‘나’같이 지금 보일뿐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화두도 좋고,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한테 가는, 우리의 그 삼독심(三毒心)을 녹여서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가는 하나의 길잡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쉬지 않고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분명히 훨썩 더 가벼워집니다.

 

아까 제가 삼명육통(三明六通) 말씀을 드렸지요. 분명히 참말로 깨달아서 그 번뇌의 습관성이 녹은 사람들은 꼭 신통(神通)을 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 우리 몸뚱이가 본래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순수에너지,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때그때 이와 같이 허깨비같이 그림자같이 모양을 보일 뿐이기 때문에 사실은 어느 몇 킬로나 그런 중량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번뇌로 중량을 느끼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이 가장 건강한 길입니다. 가장 행복스러운 길입니다. 가장 좋은 아버지가 되고, 가장 좋은 어머니가 되고,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되는 길입니다. 그런 길은 가장 쉬운 길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허두에 누누이 말씀드린 바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제일 편안한 길입니다. 세계를 구하는 길도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경제이론이 나와도 그 무아(無我)의 도리(道理), 본래 내가 없다는 도리를 알아야 훌륭한 경제이론을 보다 더 훌륭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훌륭한 경제이론도 역시 본래 내가 없다는, 성자의 보시, 성자의 사회봉사, 이보다도 더 훌륭한 봉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무아(無我)’를 다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지요. 원수가 원수라고 보이면 사랑이 되겠습니까? 원수라고 안 보인다 말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도 끝도 없는 우리의 그런 진여불성(眞如佛性), 불성 자리를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서 위없는 행복을 참구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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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광명 스님 | 작성시간 26.06.08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_()_
  • 작성자본연심 | 작성시간 26.06.08 무척도 깨끗한 접시꽃입니다.
    스님의 손길을 봅니다.
    감사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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