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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8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8.10.23|조회수2,162 목록 댓글 0

제1독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2-22

형제 여러분,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라며, 그분께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깨어 있는 종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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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라고 고백한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만드시고 적개심을 허무셨으며 인류를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다. 이제 외국인도 이방인도 모두 하느님의 한 가족인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신다.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복음).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 평화는 민족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사람들이 적개심을 버리고 화해하는 방법을 보여 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사람들의 몸은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민족들이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갈구해야 합니다. 그 평화는 진리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현존 속에 들어가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영원한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악과 불의에 대항하려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머물며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 인생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날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상급을 주님께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과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넘치도록 채울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자녀들은 복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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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에 띠를 매고 있으라.’는 오늘 복음의 첫 구절에 머무르며 묵상하고 새겨 본 다른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욥기 결말 부분의 도입부에서 하느님께서 절망에 빠진 욥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시며 거듭 던지시는 말씀입니다.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38,3; 40,7). 하느님께서는 욥이 괴로워하는 무죄한 이의 고통과 하느님의 정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초월성을 받아들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신비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틀에 박힌 신학적 답을 늘어놓는 욥의 비판자들 대신에,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31,35) 하고 처절하게 부르짖는 욥을 받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허리를 동여매라.’는 것은, 질타나 심판이 아니라 이제 고통과 자신의 한계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정화된 그가 주님과 함께 올곧은 길을 걸으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또 다른 명언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의 서사시 『신곡』의 「연옥」 편 첫 곡에서 카토가 단테의 허리에 띠를 둘러 주는 대목입니다. 카토는 공화정을 옹호한 로마 시대의 정치인입니다. 단테는 그를 ‘자유의 수호자’이자 정의와 절제, 용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높이 평가하며 연옥의 파수꾼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카토는 연옥의 여정을 시작하는 단테가 바르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 과정을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가서 저자에게 순수한 갈대를 둘러 주고, 그의 얼굴을 씻어 모든 더러움을 없애 주도록 하시오”(1곡 93-95행). 연옥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갈대는 겸손을 상징하며, 카토가 갈대 끈을 단테의 허리에 둘러 주는 것은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겸허하게 정화의 길을 걸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동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욥과 단테가 체험했듯이, 절망에 빠지거나 자기만족에 빠지려는 위기와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이 참된 영적 여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은 우리를 깨우시고 용기를 불어넣으시는 사랑의 초대였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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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당신의 피로, 십자가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의 대열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하나로 결합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평화이신 주님의 몸에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일구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평화를 일구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평화이신 주님을 기다립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이중적 삶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속한 사람, 주님께 속한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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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복음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동한 주인이 종을 챙겨 준다는 내용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삶이 그것일는지요? 

주인은 주님이시고, 종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깨어 있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인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내 뜻과 다를 경우, 내가 놓여 있는 ‘현실’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비탈에서도 잘 삽니다. 뿌리가 강한 탓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도 ‘소나무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바르게’ 살려는 이들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보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시련에서도 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삶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세상 역시 변덕이 심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소나무처럼 언제라도 ‘푸른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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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작전에 실패한 장군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장군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악마의 유혹이 파고들 수 없습니다. 게으름과 방심 속에 사탄은 우리 마음속으로 헤집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은 제쳐 두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주신 평화를 흩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얻느냐 잃느냐는 깨어 있음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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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이 깨어 있는 삶이겠습니까? 이웃과의 관계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족과는 잘 지내는데 이웃과는 잘못 지낸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족이 그를 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인내로 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가족이 자신을 대해 주듯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삶의 시작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두 얼굴을 지녔습니다. 선한 얼굴과 악한 얼굴입니다. 한없이 참을 줄 알면서도 건드리면 터지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너그러우면서 쩨쩨하고, 어질면서 옹졸하고, 푸근하면서 치사합니다. 이런 이중적 존재가 인간의 본질입니다. 타고난 천성이기에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들과 잘 지낼 수 있을는지요? 인내와 사랑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그렇게 잘 지내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종말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말을 위해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의 삶이 그대로 종말의 삶이 되는 것이지요. 종말은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훌륭하게 산 사람이 허망한 종말을 맞이할 리 없습니다. 평소 믿음의 길에 열심이었던 사람이 구원에서 제외될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미래는 주님께 맡기고 인내와 애정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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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잠자지 않는다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젠가 하리라 마음먹고 있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언젠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다면 ‘지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와 어울리는 삶입니다. 

시간뿐 아니라 장소에도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몸은 성당에 있는데 마음은 집에 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곳에서는 기도해야 하고, 일하는 곳에서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들을 잡고서 정신은 엉뚱한 데 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앞날을 걱정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룹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장차 다가올 일도 미리 만날 수는 없습니다. 어제는 그랬더라도 오늘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은 현재에 충실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실천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오른 손에는 절제의 창을 들고, 왼 손에는 깨어있음의 방패를 들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부터 갑자기 뱃살이 심각할 정도로 두터워지고, 허리가 굵어지면서 좋지 않은 습관이 한가지 생겼습니다. 장백의 띠를 맨다든지, 허리 벨트나 안전 벨트를 찬다든지, 하는 일이 점점 부담스러워져, 잘 하지않게 되는 것입니다. 

 

허리 띠로‘딱!’ 몸의 중심을 잡아주지 않다보니, 웬지 모르게 정신이나 기강이 해이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벨트로 삶의 중심을 ‘딱!’ 고정시키지 않다보니, 삶의 긴장이나 집중력도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군대나 위험한 극한 작업장 같은 데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복장이나 태도, 작은 몸짓 하나 하나를 그렇게 강조하고 중요시 여기는 데는 다 이유가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당신 제자들을 향해 영적 생활 안에서,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제발 정신줄 놓지 말고 살아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복음 12장 35~36절)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참으로 기쁘고 흐뭇할 때가 있습니다. 흐트러져 있지 않고 잘 정리되어 있을 때입니다. 흐리멍텅 촛점 없는 얼굴이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고 정갈한 얼굴을 대할 때입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아니라 주어진 로드맵에 따라 성숙한 분위기 속에 질서있게 진행될 때입니다. 

 

나이를 한살 한살 더 먹어갈수록, 수도생활의 연륜이 한해 한해 더 늘어갈수록, 더욱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겠습니다. 우선 부담스런 뱃살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홀쭉해진 허리에 띠를 꼭 붙들어매야겠습니다. 

 

오른 손에는 절제의 창을 들고, 왼 손에는 깨어있음의 방패를 들고, 성모님께서 밝혀주신 구원의 등불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을 향해 걸어나가야겠습니다.




<깨어있음이란 같이 있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트루먼 쇼’(1998)에서 주인공은 자신도 모른 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생중계 되며 살아가는 행복하지만 실제론 불행한 트루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트루먼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한 여자 ‘실비아’로부터 이 모든 것은 다 가짜라는 말을 듣습니다. 사람도 가짜고 세상도 가짜고 기억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실비아는 이 말을 남기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끌려 나갑니다. 

시간은 그렇게 흐릅니다. 그녀가 한 말은 트루먼에게서 잊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트루먼은 그녀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잡지에 나온 여러 여자들의 얼굴을 조각조각 찢어가며 자신의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갑니다. 그녀의 얼굴을 모자이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말을 잊지 않습니다. 결국 그렇게 끊임없이 기억하려 했던 노력이 트루먼에게 참 인생을 가져다줍니다. 실비아는 보이지 않았지만 트루먼은 실비아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비아와 함께 있었고 실비아의 말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어있음에 대해 말씀해주시는데 트루먼이 실비아를 잊지 않기 위해 했던 노력이 바로 깨어있으려는 노력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잠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함께 계신 것처럼 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셨지만 마치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믿음과 직결됩니다. 언제라도 오실 수 있는 분이라면 항상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그건 잠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항상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는 그래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할 때는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운전할 때 화가 나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남을 험담하게도 됩니다. 마치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으려면 항상 기도해야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기도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좋은 방법은 기도를 일상으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호흡입니다. 기도할 때 호흡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려 노력하였다면 일상에서도 그렇게 의식적으로 호흡만 해도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하루에 50번 정도는 이런 식으로 일상에서 주님의 현존을 되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끊임없이 기억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잠에 빠집니다. 자아에 사로잡히는 것이 잠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 잠에 빠지는 것인데 수시로 자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한 기도를 통해 훈련이 되어 있어야합니다. 평소에 운동을 해야 일상에서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듯, 평소에 주님의 현존을 떠올리며 대화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일상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호흡을 내가 의식하면 내 호흡을 내가 조절할 수 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호흡이 됩니다. 자동적으로 호흡이 된다는 말은 잠자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잠을 잘 때도 꿈을 꾸고 호흡을 합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면 나 자신을 내가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훈련을 기도 때 하고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호흡을 몇 번 하면 기도할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었던 것처럼 일상에서도 그렇게 믿어집니다. 그러면 항상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생각을 끊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음이 깨어있음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으며 주님을 바라볼 때가 깨어있을 때이고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가 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깨어있다 주님을 맞이한다면 행복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아에 사로잡혀 살면 불행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물속으로 빠져들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자아는 세상에 대한 욕구를 집어넣어 자신의 주인을 그 욕구로 익사시킵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자존심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항상 깨어있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는 것이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상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억할 때마다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이런 삶이 기도를 일상으로 끌고 올 때 가능해집니다. 깨어있을 때 가능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홍콩 배우 중에 주윤발이 있습니다. 그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와호장룡’ 등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잘생긴 외모와 빼어난 연기를 기억합니다. 저도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 주윤발이 새로운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는 8,000억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핸드폰도 17년 동안 같은 것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옷도 저렴한 것을 사 입었다고 합니다. 그의 한 달 용돈은 11만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많은 돈이 있었지만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멋진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놈의 경제가 사람 잡네’라는 대담집에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를 잊지 마십시오”라는 말에 영감을 받아 교황명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이 되기 이전부터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와 실업, 빈곤, 환경파괴를 불러왔다고 진단합니다. 돈을 숭배하면서 인간은 수단화되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황님은 이런 경제현실에 빗대어 ‘돈은 가장 유용한 종이지만, 가장 악한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격언을 인용합니다. 이는 교황님이 돈이나 경제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운용하고 돈을 사용하는 특정한 방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주셨고, 태양을 만들어 주셨고, 들에는 많은 먹을 것들을 주셨습니다. 물과 공기가 있어서 우리는 마시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때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서로 싸우며 분열을 일으킬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우리들에게 한결같이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돌아와 바르고 참된 길을 가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많은 축복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신호등을 잘 지켜야 합니다. 즉, 빨간 불이면 멈춰야 하고, 파란 불이면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파란불인데도 가지 않고서 머뭇거린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운전을 하다보면 이런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초보운전자 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군가 앞으로 갈 때 따라하는 것은 쉽지만, 자신이 먼저 앞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맞는지 의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머뭇거리는 이유는 다 동일합니다. 바로 신호등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 뒷면에 ‘초보운전’이라고 크게 붙이고 다니시는 분들이 이렇게 머뭇거리면 이해를 해주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데도 머뭇거리면 뒤 따라오는 거의 모든 차는 같은 행동을 합니다. 경적을 크게 울립니다. 정신 차리고 신호등을 보라는 알림입니다.

신호등을 잘 지키는 방법은 딴 짓하지 않고 신호등을 잘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은 파란색 신호등만 보겠다면서, 빨간색 신호등에서는 눈을 감고서 앞으로 가면 어떨까요? 커다란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 신호등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사랑의 길을 향해 앞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신호등처럼 당신의 말씀을 통해 멈춰야 할 때 멈추고, 앞으로 가야 할 때에는 가야 할 때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주님의 이 신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신호는 전혀 보지 않으면서 자기가 가고 싶을 때에 가고 가기 싫을 때에는 가지 않는, 자기 마음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하느님 나라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는 있을까요?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는 커다란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일을 마치고 힘들게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서운하고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반대로 집에 들어오면 가족 모두가 반갑게 반긴다면 일터에서의 힘듦이 말끔하게 사라질 것이고, 더욱 더 가족에게 잘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당신께 충성스러운 우리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앞으로 가야 할 때에는 가고, 멈춰야 할 때에는 멈출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때때로 남을 위한 변명은 해도 좋지만 그러나 결코 자신을 위한 변명은 하지 말라(푸블리우스 시루스).


86 연풍 순교성지

연풍성지는 초기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뿌리 깊은 교우촌으로,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문경 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칼레 강 니콜라오 신부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특히 최 신부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우다가 선종하셨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로 연풍은 각처의 신앙을 이어 주는 교차로가 되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이곳은 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고, 성인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황석두 루카 성인은 아내와 동정 부부로 살면서 일생을 교회에 헌신하다가 병인박해(1866) 때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와 위앵 민 루카 신부, 장주기 요셉 회장과 함께 갈메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성인은 교회 학자로서, 다블뤼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들의 한문과 한글 선생이었고 한글 교리서와 한불 사전을 편찬하였습니다.

미사는 월요일은 오전 7시, 다른 요일은 모두 오전 11시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 홍문2길 14이고, 전화는 043-833-5064입니다.




깨어있는 신앙생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고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을 청하도록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를 시작해 봅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어제 박원순 씨의 ‘세상을 바꾸는 천개의 직업’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정말 다양한 아이디어와 직업이 있구나.. 이렇게도 먹고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 중에 ‘교회가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들도 많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이름을 봉사로 바꾸면 이런 것들이 될 수 있겠죠.


농촌 일손 뱅크 봉사...

책에 소개된 것이기도 하지만, 가정 방문을 다니면서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거 같은데요.

농사를 짓는 분 중에 어떤 신자 분이 ‘어떤 때는 일이 너무 많아서 기르는 여러 작물 중에 미처 손이 가지 못하고 내버려 두게 되는 작물이 있다.’ 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도시 본당 신자 분들에게 소개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되면 관심 있는 도시 신자들은 체험도 하고 농작물도 싸게 가져갈 수 있어서 좋고,농사 지시는 분들은 일손 덜어서 좋을 거 같습니다.

본당 홈페이지를 만들게 되면 한 번 시도해 볼 예정인데요.

농촌체험뿐만 아니라 신자 분들의 펜션이나 낚시 배도 홍보하고 연결시켜 줄 수 있도록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펜션 하시는 분들이나 낚시 배 하시는 분들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어떻게 해서 신자분이 오시게 되면 돈도 덜 받고 조금이라도 더 잘해 주게 된다...’

그래서 연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요.

연결만 잘 되면 본당 신자들도 좋고, 오시는 분들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벗 봉사...

본당에 보면 외로워하시는 분들이나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고민을 하소연하고 싶은 분들이 계신데요.

그분들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고 다독여 주고 위로와 안정감을 주는 봉사자들이 많이 생긴다면 치유되고 활기를 찾는 분들이 많아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미 많이 하고 계신 부분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하고 계신 부분이기도 하죠.^^


효도 대행 봉사...

이 부분도 이미 본당 신자들이 하고 계신 부분인 거 같은데요.

어떤 분은 외식을 나갈 때 할머니 한 분을 함께 모시고 나가기도 하고, 어떤 분은 차 없으신 자매님이 다리를 다쳤을 때 자매님을 모시고 병원에 왔다갔다하기도 하셨는데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면 폐가 될까봐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노인 분들에게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친교 봉사...

우리 공동체에 모인 분들을 보면 연령이나 학력이나 직업이나 경제적인 수준이나 성격이 정말 다양하죠.

그 다양함이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그러한 노력을 해 주실 봉사자가 필요할 거 같은데요.

친교의 자리나 놀이만 잘 만들어 내면 많은 유익을 경험하게 될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노인들과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이나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그 안에서 아이들은 노인들의 경험이나 지혜를 배우게 될 거고, 노인들은 아이들에게서 활력과 생기를 얻게 되겠죠.

그 밖에도 정말 많이 있을 텐데요.

신자 각자가 자신만의 봉사를 시작하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 건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교회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기도 할 텐데요.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오늘 하루,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봉사를 시작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될까요?

정답은 물이지만, 어떤 아이는

봄이라고 합니다.




<기다림>

상지종 신부님

2018. 10. 23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루카 12,35-38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기다림>

당신이 내게 줄 기쁨 때문에

부질없는 희망에 애태우며

굳어버린 몸과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진 않겠습니다

힘겨웠던 값진 여정 끝에

나를 다시 찾은 당신에게

따스한 쉼과 작은 기쁨 되고자

설렘으로 당신을 맞겠습니다

오랜 기다림 후에

당신과의 가슴 아린 만남이

나의 기쁨이기보다

당신의 기쁨일 수 있다면

그만큼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2, 35-38(연중 29주 화) 

오늘 우리가 들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는 종말에 관한 비유입니다. “깨어 있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 37)

 

“깨어있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잠들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이가 “깨어있는 사람” 입니다.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깨어있음이요, 임을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임을 기다리고, 열망하고, 희망하고 있는가?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임을 품고, 임의 뜻 안에서 희망할 수 있고 깨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깨어있음”의 표시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 35)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삼가 조심하라고 일러주신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 11)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동시에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곧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임을 반겨 들여 잘 섬기고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 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 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을 의미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곧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임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비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빛을 맞이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깨어있음”의 의미입니다.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곧 빛 속에 있는 것, 그것이 곧 “깨어있음” 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깨어있는 이들 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등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께서 우리 안에서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 아니, 임이 우리에게 시중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임께선 이 순간에도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 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 상을 차려주십니다. 혼인잔치에서 가져오신 음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 미사의 성찬을 차려주시니, 주님 사랑에 깊이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행복한 삶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의 일상화日常化-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어느 수사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사진을 받았습니다. 주방장 수사님이 지인에게 선물 받은 커다란 ‘삼치’를 들고 기뻐하는 사진입니다. 72세 고령에 부원장에 주방장 소임에 농장일도 꼼꼼히 챙기시는 수사님입니다. 수도원을 내몸처럼 돌보며 깨어 충실히 소임하며 기쁘게, 행복하게 사는 수사님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그대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막연히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얼마 못가 졸게 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님을 기다릴 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님’향한 기다림이, 그리움이 있을 때, 외로움은 자연스럽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제 ‘산과 강’이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산/천년만년/님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천년만년/님향해 흐르는 강-

 

물론 '님'자는 주님을 뜻합니다. 문득 ‘님’자를 말하니 신선한 느낌의 체험이 생각나 나누고 싶습니다. 저를 치료하는 물리치료사 젊은이의 저에 대한 호칭입니다. 아주 성실하고 친절한 젊은이인데 ‘신부님’이란 호칭 대신에, ‘이수철님’이라 부르는데 처음엔 어색했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 가을철의 우리나라는 어디나 하늘나라의 절경같습니다. 유난히 아름다워보이는 올해의 단풍들이요 자주 변하는 하늘도 아름답습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하늘이라 ‘당신 모두가 다 좋다’라는 어제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하늘/어느 모습이든 좋다/당신/어느 모습이든 좋다

  당신/모두가 다 좋다/당신/보고플 때 하늘을 본다

  하늘/당신의 얼굴 같다/언제나/아름다운 하늘이다-

 

물론 당신이 가리키는 바, 영원한 그리움, 영원한 기다림의 대상인 주님을 뜻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 비로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의 기쁨이 깨어 있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혼인잔치에서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종들의 자세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기쁘게 깨어 있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시중을 들 것이다.”

 

흡사 깨어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한 미사잔치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종들을 우리들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니 모든 삶이 그래야겠지만 특히 공동전례기도시간중에는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오시는 주님을 깨어 맞이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면 깨어있는 삶은 전 삶으로 확산될 것입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참행복이 어디있는지 새롭게 배웁니다. 오늘 지금 여기 일상의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릴 때 바로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깨어 있음에는 걱정할 까닭도, 두려워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주님은 예상치 못한 때에 오시기에 유일한 해결책은 미래는 미래에 맡기고, 오늘 여기 지금 깨어 있는 것뿐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준비된 종들은 언제나 여기 지금 현재에 살며 지금 여기서 주님을 찾고 발견합니다. 오늘 충실한 삶은 그대로 미래가 됩니다. 결국은 하루하루 깨어 살아감이 미래에 대한 최고의 처방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모습이 바로 내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랑이자 고마움은 막연한 기다림이, 그리움이 아닌 뚜렷한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이자 도반이신 그리스도님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자 고마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그분을 기다립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역설적 진리가 깨어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님 안에서 깨어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삶이기에 내적분열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의 깨어있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있을 때 내적일치의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의 일치, 하나의 평화를 체험케하는 깨어 있는 삶입니다.

 

새삼 깨어 있는 영성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요즘 널리 유행하는, 일정한 시간 집중적으로 행하는 향심기도는 물론 유사한 모든 관상기도의 수행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의 일상화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참 좋은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시간입니다.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가 그대로 연장되는 공동전례기도 시간입니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들음-묵상-기도-관상의 시스템이 그대로 적용되는 공동전례기도 시간입니다. 이 공동전례 시간만이라도 복음의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깨어 있음에 온 힘을 다한다면 깨어 있는 삶은 점차 전 삶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 기도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후반부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공동전례를 통한 깨어 있는 삶의 일상화가 이런 거룩한 성전의 공동체로, 하느님의 거처인 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공동체의 일치와 평화를 이루어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깨어 기다리다가 당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시편 말씀대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벽을 허물어

김찬선 신부님

아시다시피 저는 어제까지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찬양 순례단과 함께 다녀온 것인데 당연히 여러 어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주일 돌아와야 하는데 하루 늦게 들어오는 일도 생겼지만 아주 의미 있고 보람된 선교 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마침 그저께 주일이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전교주일이었기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했고, 이번 순례를 통해서 어떤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각기 생각을 해보고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제가 얘기한 것이 복음이 한 때는 제 안에 갇혀 있었고, 저를 겨우 벗어났을 때는 우리나라의 복음화밖에는 몰랐으며, 우리나라를 벗어나서는 우리민족의 복음화밖에 몰랐다가 이제 중국이나 다른 나라와 민족들의 복음화에 이르기까지 복음화 개념이 확장하게 되었다는 것과 그러므로 복음은 이렇게 자신이나 가정이나 나라나 민족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사실 나라와 민족과 문화 간의 벽이 의외로 높아서 복음도 그 벽을 넘지 못하고 갇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 주님께서 이 장벽을 허무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성체대회 때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구호를 가지고 남북분단과 적대적인 관계를 극복하자고 하였고, 저는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프란치스칸의 기도를 오늘 에페소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화해와 참 평화의 이치를 깨우치신 하느님,

아직도 남북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있는 저희로 하여금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고

대립의 문화를 공존의 문화로 바꾸어가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제자라면 프란치스코처럼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하고, 평화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형제를 적으로 만들지 말고, 반대로 적을 형제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Fraternitas, 곧 형제애이고 형제성인데 저는 이번 문 대통령이 교황님을 알현했을 때 교황님이 형제애를 언급한 것이 참으로 적절하고 고마웠습니다. 


교황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의 지도자들이....형제애를 기반으로 화해와 평화 정책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 나가도록 전 세계와 기도하겠다.” 


지금 우리는 형제성을 회복하고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 남북이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시점에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평화와 화해를 이룩하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형제로 그리고 형제적 공동체로 하느님께 나아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에페소서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함께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원수로 서로 마주 보고 으르렁 거리지 않을 뿐 아니라 형제로 함께 하느님을 보고 손잡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하느님 나라의 한 시민이요 한 가족임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외국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외국인들 중 유다교로 개종한 이가 들어갈 수 있는 곳, 유다인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유다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구분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라고 하신 말씀에는 이러한 의미도 들어있다고 봅니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특혜와 편애와 차별을 없애고 모두 하나의 인간으로 주 하느님 앞에 서라고.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4-16) 그리고 성령께서 온 민족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묶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19.22절)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예뻐서도 잘나서도 착해서도 아니고, 단지 ‘세상 어느 민족 중에 가장 작고 약한 민족이더라도 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강대한 민족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표징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주 하느님의 선택을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며 주 하느님께서 내리신 계명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구원될 것입니다. 그 때에 주 하느님의 선택하신 바로 그 대로 이스라엘은 세상 곳곳에 주 하느님 구원의 표징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다고 해서 그럼 주 하느님이 이스라엘만 구원하고 다른 민족들은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또는 다른 민족은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의미와 다른 민족을 선택하신 의미가 다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복음화의 표징이 되라고 선택된 것이고 다른 민족은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나는 복음화의 표징을 받아들이고 그 대열에 합류하라고 선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로 선택된 우리 가톨릭 교회 역시 같은 선택의 의미를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곳곳에 가서 우리의 삶으로 주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평화의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라고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루카 12, 25-38>

이석진 신부님

하느님은 높은 곳에 계시며 영원이란 삶 안에 현존하시지만, 시간을 초월해서 현존하심을 알려주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리시려고 주인을 밤이든, 낮이든 어느 때인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어디며 언제 오시겠는가? 무엇을 하고 계실까?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참으로 나와 함께 현존하시는 분인가?” 의심을 품고 멀리 숨어 계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여유로운 아니, 게으른 삶을 살고 있으면 오늘 복음을 듣고 긴장하고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아니 계시는데 없이 어디나 언제나 계시다고 교리로 배웠지만, 그 참 의미를 보편적 진리로만 알고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하시고 어떤 사건 안에도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만나고 싶고, 보고 싶어 찾는 한 어디서나 만나게 되어 있으나 우리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모양 길 잃고 헤매거나 아니면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종, 깨어있는 종들 모두는 맞을 준비와 진정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재미에 빠져 주님을 찾지 않고, 우리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주님의 자리를 없애고, 문을 잠그고 주님을 찾지도 만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만날 준비도 없이 기다림 없이 살고, 세상일에 눈을 뜨고 있으나 하느님의 일에 눈을 감고 깨어있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이면서 불효자 모양 늙으신 부모를 찾지 않고 무관심으로 사는 사람처럼 나의 주님 나의 전 존재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찾지 않고 준비 없이 살고, 세상의 이익에 눈이 어둠에 싸여 보이는 것이 없고 술에 취한 듯 마약에 취한 듯 마녀에게 휩싸여 권력, 재력, 명예에 노예가 되어 살기에 그 많은 냉담자가 이 땅에 “진, 선, 미”이신 주님을 찾지 않고 길을 잃고 살아갑니다.

오늘 저는 믿는 이들이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진실하고 사랑 가득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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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다는 것은 그저 눈을 뜨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저 움직이고 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똑바로 알고, 옳음을 지키기 위해 아픔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실히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진실을 위해 모든 것으로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진실을 위해 꿈을 꾸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숨을 쉰다는 것이 단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닌, 주어진 소명을 위해 허락된 시간임을 아는 삶입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욕망이 아닌 희망을 위해 허락된 기회임을 아는 삶입니다.

하루가 주어질지 백 년이 주어질지 모르는 삶입니다.

짧게 느낄 수도 있고 길게 느낄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행복하다 여길 수도 있고 불행하다 여길 수도 있는 삶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리석음이란 좋음을 좋음으로 보지 못하고, 나쁨을 나쁨으로 보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있으라 하십니다.

죽음이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라 하십니다. (마태오24,43)

손에 움켜쥐고 있는 마음이 그 마지막 날을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하라 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진짜로 살아있으라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잘 살라 하십니다. (2013)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종이 되어본 적이 없는

제자신을 반성합니다.


종들의 진실한 뜻과

행위는 깨어 있는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나 중심의 삶이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주님을 향하는

깨어 있음이

참된 행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인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행복을 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즐겁고 기쁜

깨어 있음이

깨어 있음의

핵심입니다.


깨어 있음이야말로

참된 우리의 

실천입니다.


깨어 있음은

가르침을 주시는

주님께 언제나

머물러있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주님을 향해 있는

순간순간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들이

주님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깨어있음을 향한

진정한 감사와 찬미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행복은 주님을

향하는 모든 시간입니다.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한 학생에게 “너 신부님 되지 않을래?”라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 학생은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도 신부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신부님처럼 아침 일찍 일어날 자신도 없고, 또 매일 다른 내용의 강론을 쓰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따라서 신부님은 도저히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또한 학교 성적도 좋았지요. 그렇다고 신부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사제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본당신부인 저의 모습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제가 반드시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고, 묵상 글을 매일 써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히 임하면 그 자리에서 최고의 사제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학생은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부분으로만 비교하다 보니, 좋은 사제가 될 수 있는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사람을 원하실까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제자들을 그렇게 뽑지 않았겠지요. 더 능력이 많고, 더 많이 교육을 받고, 또한 성격도 좋으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오히려 ‘부족함’ 그 자체인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삼가 조심하라고 일러 주신 것과 비슷하지요. 즉, 육과 영과 정신이 깨어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깨어 있음은 언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라고 나옵니다. 성경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낮, 밤중, 새벽의 의미는 인간의 세 시기인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뜻하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은 어느 정도 주님을 알 때부터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주가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교육과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행복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생각도, ‘나중에 하지 뭐.’라는 안일한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일은 부정적인 마음을 통해서는 할 수 없으며, 지금 당장 해야 하며, 그것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만이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의 모습으로 참으로 행복합니다. 


지금 내 자신은 행복에 얼마나 가까이에 와 있을까요? 


멋지다면 쉽지 않고, 쉽다면 멋지지 않을 것이다(밥 말리).  


넘어 졌을 때가 하늘을 볼 수 있을 때이다.

언젠가 ‘돼지는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돼지의 목이 땅을 향하고 있어 기껏 높이 들어봤자 45°밖에 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하긴 제가 본 돼지는 늘 땅만을 바라보며 킁킁 대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돼지도 하늘을 볼 수 있을 때가 있다고 하네요. 바로 ‘넘어 졌을 때’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삶 안에서도 넘어질 때가 참 많았습니다. 실패했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커다란 실수로 인해 부끄러운 상황에 놓였을 때, 가정과 직장 안에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과 시련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바로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을 때였습니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실패를 해봐야 좀 더 조심하게 되고, 몸의 이상이 생겨야 자신의 건강을 살피게 되지요. 또한 실수와 부끄러운 일을 경험할 때 더욱 더 겸손하게 되며, 각종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을 때 한층 더 성장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넘어 졌을 때’가 끝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멋진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양승국 신부- 

사제들이 미사 전 정식 제의를 입을 때는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칩니다. 하나 하나 걸칠 때 마다 그 순간에 합당한 기도도 바칩니다. 제일 먼저 착용하는 것은 표현이 좀 특별한데 개두포입니다. 어깨 위로 하얀 보자기를 걸친 후 끈으로 묶습니다. 이때 바치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내 머리에 투구를 씌우시어 마귀의 공격을 막게 하소서.”

 

 이어서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면서 또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조찰함의 띠로 저를 잡아매시고, 또 제 안에 사욕을 없이 하시어 욕망을 절제하며 정결의 덕이 있게 하소서!”

 

 이윽고 마지막 단계 제의를 입으면서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사제의 기도는 이미 제의방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예식을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해 사제는 허리에 띠를 매면서 준비를 시작합니다.

 

 사제서품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장엄한 입당성가와 함께 입장행렬이 시작됩니다. 저희는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고 왼쪽 손에는 제의를, 오른 손에는 큰 초를 하나 들고 입장을 초긴장 상태로 입장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손에 켜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몸과 마음이 흐트러질 때 마다 그때 당시의 가슴 설레고 떨리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언제까지나 사제품 때의 긴장과 설렘의 마음으로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장 35~36절)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 등불을 켜놓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오늘날 신발 끈을 동여매는 것, 손전등을 챙기는 것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한다는 것, 머나먼 밤길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스카 축제일마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이집트를 탈출하던 기억을 되살리는 파스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때 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매었습니다. 이유는 약속의 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응답하겠다는 의미에서의 행동이었습니다.

 

 요즘 미사 전 제의를 갖춰 입을 때 허리에 띠를 맬 때 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 선배 살레시안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주님, 지금 제가 봉헌하려는 이 미사가 제 생애 마지막 미사인 듯 봉헌하게 하십시오.”

 

 매일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짧은 화살기도를 되풀이해야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하루가 제 생애 마지막 날인 듯 살게 하소서. 만나는 모든 인연을 마지막 만남인 듯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지상에서 완수하는 마지막 임무인 듯 정성껏 임하게 하소서. 오늘 매 순간 주님 은총 안에 깨어있는 하루를 살게 하소서.”

 



-조재형 신부-

2007년 9월 5일 자동차를 샀습니다. 주행거리는 35,000킬로입니다. 많이 타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갈 때, 어머님께 갈 때 제게는 친구와 같은 차입니다.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운전하기 전에 살펴 볼 것들이 있습니다. 정기 검사도 받아야 합니다. 운전대 앞에는 각종 계기판이 있습니다. 주로 눈여겨보는 것은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표시하는 계기판입니다. 타이어의 상태도 보아야 하고, 와이퍼의 상태도 살펴야 합니다. 워셔액도 채워야 하고, 가끔씩은 엔진 부위도 점검해야 합니다. 안전한 운행은 꼼꼼한 점검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사회에 각종 사고와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다보면 이런저런 사고와 사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안전에 대해서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아까운 생명이 다치는 사고는 많이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물질과 재물에 집착하기보다, 사람의 생명과 문화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좀 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89년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체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였습니다. 이 주제는 오늘 제1독서인 에페소서에서 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인 이유를 4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한 몸을 이룬다고 합니다. 내 몸의 지체들이 아프면 돌보듯이, 우리들 이웃을 내 몸처럼 돌본다면 그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 올 것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가로막는 벽을 허물었다고 합니다. ‘적개심, 편견, 차별, 분노, 원망, 불평, 시기심, 교만, 욕망, 걱정, 근심’은 우리를 분열시키기 마련입니다. 우리들을 가로막는 벽은 외부에서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들의 내부에서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청하면 주실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며, 구하면 주실 것입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로 오십시오. 내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물, 불, 바람, 흙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입니다. 이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제5원소가 바로 사랑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고 합니다. 고통과 치욕의 상징인 십자가는 이제 우리를 하느님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걸림돌로 여겨지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12,37)

-김대열 신부-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이십니다.

깨어있는 종들을 위해 몸소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그림을 그리어 봅니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광경이 눈 안에 들어옵니다.

시중을 받고 있는 깨어있었던 종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 우리의 논리와 감각을 뛰어넘는 세계일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완벽한 사랑을 우리 역시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 믿을 뿐입니다.

그분과 같은 마음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결국 누구나 맞이해야 할 그 시간을 의식하라는 말씀이시겠지요.

하여,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알고, 그것이 기준이 되는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늘 똑똑한 척하면서도 부질없는 것들로 마음을 빼앗겨,

의미 있는 것들을 잃어가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자주 대하게 됩니다.

너무 아까운 시간입니다. 이 아깝고 귀한 시간을 스스로 안타깝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며,

주어진 시간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 준비는 평소에 미리 잘 하라고 

-이기정 신부-

방청소와 정리정돈을 잘 해놓으면 언제 누가 와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약, 예고, 사전허락 등으로 미리 알려주는 게 생활습관화 되었습니다.

갑자기 누가 들이 닥치면 때론 얄밉기도 하고 때론 화까지 나기도 합니다. 

그 날과 시간을 알아도 그 때에 가서야 급하게 덤비다보면 실수도 합니다. 

시험 준비는 평소에 공부 열심히 잘 하라고들 어른들이 곳잘 말합니다.

예수님도 죽음 준비는 평소에 미리 잘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맞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사람들!    -깨어 있음 예찬-

-이수철 신부-

지금 여기 깨어있는 사람들이 진정 살아있는, 건강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자기를 잊고 잠들어 있는 불행한 영혼들도 많습니다. 


깨어 있어야 일상의 늪에서, 무기력, 무의욕,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하느님의 현존을 살 수 있습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수행생활이,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생활이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 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깨어 있는 당신의 공동체가 주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진정 깨어 있는 주님의 공동체가 아름답습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충만입니다. 

깨어 있음은 갈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찬미입니다.

깨어 있음은 감사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모두입니다. 


그대로 깨어 있음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깨어 있지 못해 세상 것들에 중독이요, 세상 우상들에 종이 되어 삽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보다 영혼의 병에 더 좋은 치유제도 없습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샘솟는 깨달음에, '참 나'의 삶입니다. 

깨어 있음, 깨끗한 마음, 깨달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연 하루중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참으로 깨어 있는 영성훈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깨어 있는 삶입니다. 

바오로가 묘사하는 다음 모습은 그대로 주님을 알아 깨어 살기 전,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오늘날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있습니다.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주 그리스도 안에 깨어 있는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우리를 하나로 만드시고 우리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하여 당신 안에서 서로 다른 인간을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약간 말마디를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미사은총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깨어 있다 당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선사하시며 새 인간, 새 공동체로 창조해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1). 

아멘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

       -전삼용 신부- 

어제 유투브에서 재미있는 원숭이 실험을 보았습니다.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입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시켜 우리 안에 넣어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 원숭이는 돌을 받아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합니다. 조약돌을 주고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도 조약돌을 다시 놓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밖으로 집어던집니다.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버리고는 철창을 뜯고 흔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매우 화가 난 것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했는데 맹맹한 오이만 먹고 다른 원숭이는 계속 맛있는 포도를 먹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오이로도 만족했음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실험이었습니다. 사람이 왜 불행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부족해서 슬픈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제대국이 되었는데도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사실이 돈이 행복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여전히 돈에 치중하는 이유는 아직도 참 행복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처음 원숭이에게 오이 대신 포도, 그리고 더 맛있는 것을 준다면 그 옆에 원숭이가 포도를 집어 던질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는 절대로 마음의 평화도 사람들 간의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평화 때문에 분열 없이 ‘양쪽’ 모두 한 가족처럼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도 외국인도 모두가 구별 없이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한 건물의 부분처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결국 한 건물인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모퉁잇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들에겐 분열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가진 이들은 다 가진 이들이기에 서로 부족하여 시기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당신 생명입니다. 당신 생명을 구분 없이 주고 계셔서 그 생명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믿기만 한다면 더 이상 분열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인종이나 나라에 상관없이 똑같이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누구와 비교하여 질투를 느끼던가, 그래서 불행해진다면 사실 믿음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신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평화이고 기쁩니다. 그분 이외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야 마땅한데 무언가를 더 가지려고 하고 있다면 그분께서 주시는 피의 가치, 성령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성당에 들어서면 우측에 미켈란젤로의 수작 피에타 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모님이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 대리석 조각은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피에타 상은 유리로 막혀져 있습니다. 그것을 유리로 막은 이유는 어떤 조각가가 저것이 어떻게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냐며 올라가 망치로 때려 성모님의 손가락과 코 등이 파손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예술성을 잘 모르지만 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재능이 있는 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느님께 덜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가장 훌륭한 예술품에 흠집을 내고 자기 인생에도 흠집을 내게 된 것입니다.

 

질투는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신 성령은 이 세상의 모든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면 서로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는 바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있는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깨어있는 이들에겐

열쇠와 자물쇠는

불필요한 겉치레일 뿐입니다.


깨어있음 자체가

열려있는 영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과 

행복은 하나입니다.


믿지 않고서는

또한 깨어 기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깨어있는 행복한

시간들입니다.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 안에 깨어 있기에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기에

혼미스러운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날마다 우리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봉헌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알고 있는 종은

깨어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넘치는 주님 사랑에

가장 적극적이고

겸손한 화답은

깨어있는 사랑입니다.


제멋대로

사는 오늘이 아니라

깨어있는 오늘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깨어있음의 사랑뿐입니다.

 


 



깨어있으면 보이는 것들

박경선

얼마 전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참혹한 현실과 맞닥뜨려 대단한 용기로 자기의 믿음을, 그 믿음을 함께하는 동지들과의 형제적 삶을 지켜낸 순교자들을 기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분들의 단호한 선택과 뒤따르는 과감한 실천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묵상하고 따를 수 있게 되었음을 압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면서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 늘 경고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하셨지만, 그 고난에서 우리를 피난시키시는 대신 앞서 그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격려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완성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라면 우리는 아직도 그곳을 위하여 아주 먼 길을 가야 하고, 그 길에는 어느 때 못지않게 거친 장애물들이 우리 발목을 잡고, 우리를 주저앉게 할 것입니다. 

늘 적과 나의 경계가 분명하다면 싸움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조금씩 옅어지는 그 경계에 우리가 무뎌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와 세상 가운데 택일이라는 노골적 선택을 강요받지는 않지만, 단란한 성가정으로 꾸려낼 내 가족의 안정된 삶을 위해 이웃의 눈물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장차 성직자로 키우고 싶은 내 아이의 뒷바라지에 헌신하느라 버려진 아이들의 복지정책에 눈을 감거나, 성실한 신앙인으로서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멀리 제주에서 벌어지는 분쟁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 전기요금 아끼기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도, 그 알량한 전기 때문에 밀양과 청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도 복음의 기쁨은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이 세상에 도전받는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때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중에서) 앞에 우리는 순교자들이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요구를 듣습니다. “깨어 있어라.”




<재림>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10월 21일의 복음 말씀인 루카복음 12장 35절-38절, '깨어 있어라.'의 내용과 루카복음 17장 7절-10절, '겸손하게 섬겨라.'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비슷하면서도 너무나도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12장 35절-38절에서는 종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고 있는데, 17장 7절-10절에서는 주인이 종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종이 주인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두 내용 모두 '주인'은 '주님'을 뜻하고, '종'은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17장 7절-10절의 내용은 현실 세계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면서 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내용이고, 12장 35절-38절의 내용은 주님의 재림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종이 얻게 될 행복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두 내용을 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종'은 주인이 밖에 있든 집에 있든, 언제 어떤 상황이든 주인을 위해서 시중을 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는 밖에 있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새도록 기다렸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종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주님)은 그렇게 충실하게 일하는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시중을 들게 됩니다.

밖에서 종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든지, 집에서 종을 기다렸든지 간에 주인은 충성스러운 종에게 최상의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17장 9절의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라는 말은, 주인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주인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내용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인의 태도가 아니라 종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주인처럼 섬기는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주님과 신앙인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는 주종관계가 아니라서로 사랑하는 벗의 관계입니다.(연인 사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은 사실상'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린 시절에 혼자서 집을 지키면서 엄마가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알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사랑하는 분이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이몽룡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성춘향의 심정?)

그래서 신앙인들이 종말과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한 일을 심판받기 위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 전의 무서운 재앙들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 또는 지상에서의 수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더 연기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재림하신 주님의 심판이 무서운 일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분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온각 억울하고 서러운 일들을 주님께서 바로잡아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일이 바로 '종말의 심판'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요한 묵시록을 마치면서 묵시록 저자는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외칩니다(묵시 22,20).

바오로 사도도 "마라나 타!" 라고 외쳤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 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로만 생각한다면, 재림하시는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마라나타'를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다면, 자기가 왜 그분을 무서워하고 그날을 무서워하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해서 엄마의 칭찬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아이와 뭔가 잘못한 일을 해서 엄마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고 있는 아이의 차이...




  

생각해보면 올 여름 모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여름만 되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더위가 아니라 잠을 못 자게 만드는 모기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모기의 접근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각종 도구와 약을 모두 구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 여름에는 이러한 도구와 약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잘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모기가 없었던 것이지요. 


지난 주일이었습니다. 저는 방의 환기를 위해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여름에는 모기 때문에 잘 열지 않았지만, 이제 10월의 중순이고 또한 모기가 올 여름 별로 없었으니 창문을 열어도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날 밤 저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여름날 모기에게 물릴 양을 이날 밤 저는 단 한 번에 다 물린 것 같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따뜻한 곳을 찾던 모기들이 낮에 활짝 열어 놓은 틈을 타서 제 방으로 들어왔고, 이날 밤 저는 그 모기들의 목표물이 되어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기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모기는 저의 방심을 틈타서 저를 밤새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조금의 방심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라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불쑥불쑥 찾아오거든요. 특히 조금이라도 안일한 마음을 품을 때,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할 때 죄는 그 잠시의 틈을 잊지 않고 찾아옵니다. 이를 통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어렵고 힘들게 이 세상을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우리 모두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안고 오늘 어떻게 해야 행복한 지를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깨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앞서 잠깐의 틈을 타서 모기가 저를 공격했던 것처럼, 죄의 유혹은 우리들 안에 조금의 틈만 있어도 내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행복보다는 불행하다며 어렵고 힘들어 합니다. 


따라서 잠시의 틈도 주지 않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각종 도구와 약이 필요한 것처럼, 죄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각종 도구와 약들이 필요합니다. 즉, 기도와 묵상 등의 각종 영성생활을 통해 우리들은 죄의 유혹을 거뜬하게 물리칠 수가 있으며, 이 모습이 바로 깨어 생활하는 행복한 주님 종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행복을 바로 나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지금 당장 실천하도록 합시다. 행복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것입니다. 


삶은 절망의 저편에서 시작된다(사르트르).

 



하느님을 만날 날

- 유정원-

깨어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복음 말씀에 딴지를 걸고 싶습니다. 혼인을 하면서부터 12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저는 술잔치에서 돌아오는 남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아내로서 결코 행복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새벽 2시든, 4시든 술에 취해 제 흥에 겨워 휘청거리며 들어오는 남편은 얼마나 행복할는지 모르겠지만, 집안 구석에 소외되어 육아와 가사에 지친 저는 눈을 치뜨고 악에 받쳐 남편을 기다리든, 아니면 잠이 들었다가 남편의 기척에 놀라 깨든 결코 행복한 기분과 너그러운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필이면 왜 주인이 밤중과 새벽을 분별함 없이 들이닥치시고, 종들은 분명 낮 시간 동안 일을 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 저는 이런 복음 말씀을 읽으면 솔직히 미간이 찌푸려집니다.

3년 전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어버리셨습니다. 병상을 지키면서 저는 분명 어머니의 체질을 절반쯤 닮았으리라 짐작하며, 그 후부터 언제 찾아올지 모를 병과 건강에 예민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겠지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일상습관 같은 남편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것과 달리 불현듯 별다른 예고도 없이 찾아드는 병과 죽음처럼, 하느님을 만날 날은 갑자기 우리 눈앞에 닥쳐오겠지요.

 



기다리는 행복

-김찬선 신부-

“너희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 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저승사자를 기다린다든지 심판관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겠지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주 행복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비교하여,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입니까?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자기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사람은 정말 불행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사람은 사람은 없고 일만 있으며, 사랑이 없이 일 더미 속에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역시 만남이 있을 때 행복한 것이고, 그럴 때 Happy ending이 되지요.

기다리고 기다려도 님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슬픔이고 불행입니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다림은 몸은 비록 지금 떨어져 있어도 마음 안에 그 존재가 충만하게 현재하고 마음 설레게 하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는 기다림은 부재의 확인이요 그래서 크나큰 슬픔입니다.

만남의 기쁨만큼 못 만나는 슬픔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만남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요 보람을 주는데,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인은 기다리는 종의 그 충성스러움과 노고를 너무도 잘 알아주시고 고마운 마음이 넘쳐서 성찬을 마련하시고 시중까지 드십니다.

주인이 기다리는 종에 대하여 이토록 고마워하시고 성찬까지 마련하고 시중까지 들어주심은 역설적이게도 주인님을 기다리는 종들이 많지 않다는 역설이겠지요.


멀리 갈 것 없이 저를 보면 알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그렇게 기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도 얘기한 것 같은데, 이미 주님이 와 계신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무튼 저조차도 주님 오심을 그리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 비유를 통해서 볼 때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기다림을 기다리시고, 기다리는 우리의 그 사랑과 노고를 너무도 잘 알아주시며, 우리의 기다림을 너무도 고마워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의 주님은 정말로 우리가 기다릴 만한 분이십니다.

 



평화를 생각하며

-김찬선 신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평화를 생각합니다.

평화를 생각하며 평화를 깨뜨리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

다른 이념.

다른 체제.

다른 민족.

다른 지방.

다른 주장.

다른 생각.

다른 성격.


다름으로 인해 하나 되지 못합니다.

다름으로 인해 다툽니다.

다름으로 인해 갈라집니다.


다르면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름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봐야 합니다.

다르기에 하나 될 수 없고

다르기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기에 다름을 미워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틀린 경우도 있지만 나와 다른 것 자체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틀렸으니 고칠 것을 요구하고 그래서 다툽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라고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가르는 적개심을 허무셨다고 얘기합니다.

즉,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하나가 된다고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유다인이나 이민족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몸을 주심으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적개심을 허무셨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 한 가족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한낱 유다인 예수에 불과하고 우리의 평화가 되실 수 없습니다.




<독서강론> : 주님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유다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율법이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의존하여 살았다. 율법은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이며, 삶의 원칙이며 기준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과 똑같았다. 아무도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 죄이다. 


의인과 죄인의 구분은 율법을 지키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율법에 얽매여서 율법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보거나 알지도 못했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서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용서와 은총의 하느님이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가 지극하신 하느님이시며, 용서와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의 희생 제물로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이 지극하신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는 표이다. 


율법이 비록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이었지만, 사람은 결코 율법을 충실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율법을 대신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외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은총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사도 바울로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깊이 체험했다. 그리하여 그는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에페 2,8) 하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알고 구원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셨고(로마 5,10; 2고린 5,18-20), 유대인과 이방인도 화해하도록 하셨다. 이제 율법은 그 힘을 잃어버려 사람을 단죄할 수도 없고(갈라 3,13-14; 골로 2,14 참조),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거나 구분할 수도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 모두를 하느님과 화해시켰고, 그들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과 적대감도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새 아담이 탄생했으니, 이는 곧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같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함께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로 창조된 하느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 


교회 공동체가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모퉁이돌이고(이사 28,16; 1베드 2,4-6),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건물의 기초이다(마태 16,18; 1고린 3,10-11 참조). 교회라는 건물은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세워지고 연결되어서 자라나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된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1이모 2,5)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인종, 성별, 노소의 구분도 없어지고 모두가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하느님의 성전을 이룬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이웃과 일치를 이루는 삶,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삶이다. 


오늘 당신 외아들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끼며 감사드리자.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됨으로써 하느님의 참된 성전을 이루자..................◆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사랑과 존경의 또 다른 이름, 준비>

양승국 신부

언젠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큰 손님’이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보통 조금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하루 전에 전화를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워낙 큰 어르신이고, 워낙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손님을 맞이하는 저희는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쓸고 닦고, 지지고 볶고, 사람들 초대하고, 장식하고, 프로그램 짜고, 그렇게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환한 얼굴로, 설레는 마음으로 그렇게 손님맞이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준비’입니다. 그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잘 준비한다는 것은 존경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일이며 예의를 갖추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허리에 띠를 매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허리에 띠를 맵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봉사할 준비가 잘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오시는 분을 향해 사랑을 실천할 만반의 자세가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들은 부모를 위해, 우리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잘 준비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복음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큰 준비보다는 작지만 정성이 담긴 준비, 사랑과 마음이 담긴 준비에 전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준비 중의 준비, 하느님 맞을 준비에 가장 우선권을 두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잘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사이에 기꺼이 서있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보다 밝은 미래로 인도하기 위해 늘 연구하고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군가를 바라보며 한숨 쉬는 분들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 어디로부터 다가올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절절한 하느님 체험은 한 사람을 완전히 뒤바꿔놓습니다. 그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노력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보다 깊은 하느님 현존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배경입니다

 

 


 

얼마 전, 시국미사 참석을 위해서 명동에 갔다가 겪은 일입니다. 미사 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서 간단한 요기를 위해 근처 분식집에 두 분의 신부님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저희는 워낙 메뉴가 많아서 무엇을 시킬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김밥 두 줄과 만두 하나를 달라고 큰 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듣지 못했나 싶었지요. 그래서 다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여기 김밥 두 줄과 만두 하나 주세요.”

이 말에 주인이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저 귀먹지 않았어요. 뭘 그렇게 확인하듯이 또 말합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미사를 앞두고 해서는 안 될 행동 같았지요. 그래서 다른 소리 하지 않고 조용히 음식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뒤,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김밥 한 줄과 만두 하나가 나온 것입니다. 귀먹지 않았다고 왜 또 말하느냐고 구박을 주더니만, 주문한 것과 차이를 보입니다. 다시 말하기도 뭐해서 그냥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맘속으로 생각했지요. 


‘여기 다시는 못 오겠다.’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원합니다. 그러나 음식 맛만큼 중요한 것은 친절함입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회사의 인사이동 때, 각 부서에서 선호하는 일순위는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항상 밝고 인사 잘하고 싹싹한 사람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왜냐하면 처음에 직원을 채용할 때 그에 맞는 적재를 데려온 것이기 때문에 기본 능력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격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성과를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디에서나 이렇게 친절하고 성격 좋은 사람은 환영받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불친절하고 더러운 성격을 드러내는 사람을 더 좋아하실까요?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주님께서도 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행복한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있는 충실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큰 신뢰를 얻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친절하고 성격 좋은 사람의 모습. 그런데 그 모습을 우리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며, 우리는 이 모습을 만들기 위해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 자신도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아름다움에 눈을 가리고 흠만 보는 것은 마음을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깨어 있어라

- 유경희-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신비스러운 사건을 표현할 때 무덤에서 걸어 나오시는 장면을 묘사한다면 너무 직설적이고 주관적인 것은 아닐까?? 


그러나 외젠 뷔르낭(1850~1921)의 유화 작품 ‘달려가는 제자들:베드로와 요한’을 보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 베드로 (그 후 선교와 순교로 성인이 되셨지만)를 통해 그 사건의 놀라움과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 기쁨은 아직 나타나 있지 않은 듯하지만 말이다. 사실 그랬을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부활 사건에 대하여 누차 말씀하셨지만 진정으로 이해한 이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부활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는 어쩌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것을 어떻게 변명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재림을 뜻하시며, 특히 루카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재림 시기가 닥치기 전에 예수님의 지시를 성실히 따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 같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반을 두고 “예수 부활 아니시면 구속 사업 헛되도다.”(가톨릭 성가 134번) 라는 구절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주님께 다가가고 깨어 있는 방법의 하나가 성화를 보고 묵상하며 사람들과 대화하고 가르치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다. 지난 시절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다가 이 시점에는 생각지도 않은 교회의 한 분야에서 봉사하게 된 은혜에 감사하며 항상 깨어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기다림

-전삼용 신부-

한 번은 환청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할 때였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래서 그 자매가 매일 거의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저에게 했었습니다.

전화가 올 시간이 되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정신은 온통 전화 벨 소리에 쏠려 있었습니다.

한 번은 땀을 흘려 샤워를 바로 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샤워를 했습니다. 그러나 물소리가 너무 커서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들려 거의 비누를 칠한 상태로 화장실을 나와 방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전화는 울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것이 기다리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환청까지도 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항상 깨어있으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혼인잔치는 언제 끝날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뜻은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더라도 죄 없는 상태에 있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살라는 뜻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기다리다 혹 잠이 들 수 있지만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바로 달려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데 그 주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종이 주인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릴 수 있을까요? 오히려 주인이 없으니 본인이 주인 노릇을 하느라 주인이 더디 오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님은 제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주인이 무서워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사랑하여 마치 신랑이 오는 것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거의 안달하며 그 분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해야 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잘 기다릴 수 있고 부모가 자녀를 잘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심판자로서 기다리기를 원하시지 않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맞이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정말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인이 아니라 마치 종처럼 사랑해 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그 얼마나 달콤합니까?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기다림이 행복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알면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은 설레임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소풍 가기 전 날 잠을 이루지 못한 것 등을 기억해보면 이것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소풍 가는 날보다 그 전 날이 더 기대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성탄절보다 성탄 이브가 더 즐거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만나는 날이 이 소풍 전날이나 성탄절 이브처럼 기다리는 날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 사제의 아버지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날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신 모습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는 날 주님께 가고 싶은 소망대로 그 날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한 인생을 주님께 바치며 사셨기 때문에 주님께 당당히 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산 사람들은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여 수고한 것을 반드시 갚아주실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월급날만 기다린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월급을 타시는 날이면 초코파이 한 박스를 사오셨습니다. 동네에 가게가 없을 때라 초코파이는 우리에게 가장 맛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을 아시기에 아버지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오던지 양에 상관없이 우리 형제들은 단숨에 끝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산 사람에게 올 것은 당신의 사랑과 보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서 이것을 느끼기 때문에 주님을 더 기다립니다. 어쩌면 죽음을 더 기다립니다.

열심히 삽시다. 주님께서 무서운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띠를 매고 우리에게 시중들 준비를 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극한 섬김을 받는 행복한 종

-김찬선 신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종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보통 생각은 주인이 행복하지 종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고 그래서 무엇이든 자기 좋을 대로 할 수 있는 주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종은 불행합니다.

더욱이 조금만 주인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두들겨 패고 아무 잘못 없어도 화풀이와 분풀이를 종에게 하는 주인의 종이라면 더더욱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종이 행복하다고 할 때 그 주인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주인들과는 다른 주인입니다.

폭력적이고 변덕쟁이가 아님은 물론 주인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도 않습니다.

Very nice한 주인입니다.

아니 Very good 주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띠를 매고 종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종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드는 그런 주인입니다.

보통은 종이 주인 곁에 Stand by해야 하는데 경우에는 주인이 종 곁에 Stand by한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렇게 행복한 종이 우리이고 그렇게 좋은 주인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님은 어째서 그리 좋으신 분입니까?

우리의 주인님은 사랑이 당신의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선이 그 본질이고 겸손이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아, 이렇게 본질적이신 하느님!


그런데 행복한 종의 조건이 있습니다.

주인님께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의 단 하나의 조건은 주인님께 깨어있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의 주인님은 본질적인 분이시니 본질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고 다른 것에 홀려서는 안 되고 다른 힘에 이끌려 다른 것을 섬겨서는 안 되고, 주인님의 좋으심에 홀딱 반해 거기에 온전히 머묾이요, 주인님의 그 겸손하심에 감동하여 온 마음을 다 하는 것이요, 주인님의 그 사랑에 황홀하여 그 사랑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이 행복으로 만족하는 것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대리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눈을 감고 상상해보시라.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분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고 세심한 배려를 받는 상황을.

 



<내 등의 짐>

-양승국 신부-

오늘 미사를 도와주러 오신 한 자매님께서 식사가 끝나자마자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고 일어나셨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면 좋을텐데...무슨 일이냐?"고 여쭸더니 "집에 영감님이 계셔서, 점심 준비를 해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세가 꽤 지긋하신 분이셨기에 제가 농담조로 "영감님한테 전화하셔서 오늘 점심은 짜장면 시켜 드시라.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자매님은 펄쩍 뛰시면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발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영감님 점심준비를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시는 자매님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아 보였습니다.

그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준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루 온종일 직장에서 시달릴 남편을 생각하며 정성껏 그리고 진지한 모습으로 맛갈진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처럼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유아용품들을 목록에 따라 차근차근 준비하는 산모의 모습은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키워드는 "준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준비되어있다는 말처럼 가슴 흐뭇하고 뿌듯한 일은 다시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매사에 충실하다는 것, 그래서 삶에 여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끔씩 한 선배 신부님의 충고가 생각납니다. "여러분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소년들 앞에 서지 마십시오."

가끔씩 저도 삶에 쫓기다보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음으로 인한 결과는 대체로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횡설수설, 우왕좌왕, 좌충우돌을 반복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수도자로서 가장 좋은 준비, 준비중의 준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봅니다.

그 준비는 다름 아닌 영적인 준비이겠지요. 또한 영적인 준비의 핵심은 "깨우침"이겠습니다.

"돌아보니 삶의 모든 국면이 다 은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깨우침",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십자가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것이었음을 자각하는 깨우침"이 우리 삶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좋은 글"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읽은 "내 등의 짐"이란 글을 읽고 큰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과 함께 또 다른 깨우침을 위한 여정을 새 출발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내 등의 짐>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감동은 라디오를 타고..

-노우진 신부-

아침 일찍 청주로 출발해서 하루를 그곳에서 보냈다.

부탁받은 미사와 강의를 끝내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어느 방송인지는 모르지만 결혼 1년 6개월된 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이들은 오랫만에 남편의 직장 앞에서 만나 집으로 같이 들어가기도 약속했다.

시간 11시 30분경 늦은 시간에 만난 이들은 남편의 자가용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부인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하더란다.

지하철 역에서 추위에 떨며 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는 보았는데 그냥 지나쳐온 것이 마음이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그 이야기를 듣고 차를 돌려 지하철 역으로 향했고 3천원에 남은 것을 다 살 수 있음에도 1만원을 드리고 남은 나물을 모두 사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뿌듯했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아내를 만나게 된 것에 감사드리며 남편은 운전하는 동안 부인의 손을 꼭잡아주었다는 얘기다.

아나운서는 감동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치며 그 아내의 마음도 아름답고 아내의 말을 듣고 지하철 역까지 차를 몰고 간 남편의 마음도 너무도 아름답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 방송을 듣는 내내 마음이 큰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한 사람의 친절과 사랑이 이토록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구나! 하는 생각을 깊이 하게되었다.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부부의 순수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가는 순간 그 방송을 듣는 많는 사람들이 받았을 감동을 생각하면 작은 힘이지만 그 영향으로 인해 거대한 힘이 되는 사랑의 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순종할 때 우린 어쩌면 너무도 큰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다리는 이의 기쁨

-상지종 신부-

하느님께서 저에게 오십니다.

말씀으로, 옆에 있는 벗으로, 크고 작은 사건으로 오십니다.

하느님은 오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제 자리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제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됩니다.

오시는 분이기에 제게 하느님이십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제 어깨를 두드려주시기 위해 꺾인 제 다리를 주물러 곧추 세워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저에게 오십니다.

오셔서 제 종이 되신답니다.

주님이신 분이 종이 되신답니다.

종이 되시려는 당신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꼭 오시는 분이시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함께 생활하는 벗들을 통해서 오시는 주님을 제게 주어진 일들과 제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마음의 불을 밝히고 믿음의 눈을 떠 깨어 있으면 됩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요.

주님께서 저의 종이 되어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소개로 만나게 된 남자와 여자,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남자: 혹시…, 담배 피우나요?

여자: (호들갑)어머~, 저 그런 거 못 피워요~!

남자: 그럼, 술은?

여자: 어머~, 저 그런 건 입에도 못 대요~!

남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연애는?

여자: 연애요~? 전 아직까지 남자의 ‘남’자도 모르고 살았는걸요?

남자: 정말 순진하시군요! 전 솔직히 반갑긴 하지만 무슨 낙으로 사시는지? 

그러자 여자는 환한 미소를 띠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자: 호호호~~~,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아요! 


거짓말하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는 이 여자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여기에 자유롭지 않은 것 같네요. 바로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에,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는 마음에 거짓말이라는 옷을 입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결국 드러날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말함으로 인해서 난처하게 될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진실되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한 표정을 지으실지 상상하여 보면 얼굴 들기가 힘들어 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행복한 사람은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거짓말 등으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벌을 당할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말이 생각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 곁에 있는 그 행복을 우리는 왜 찾지 못할까요? 바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거짓된 자기를 만들게 되고,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아닌 주님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은 진실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 앞에 다가올 미래는 항상 밝을 것 같습니다. 즉,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미래만 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코 밝은 미래는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조그만 있다가’, ‘내일 하지 뭐…….’라는 말은 절대로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사랑하고, 지금 당장 봉사하고, 지금 당장 희생하면서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가오는 미래는 분명히 밝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습관 되어요.


  

 

“주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은 위로와 평화로 든든합니다”

-홍성만 신부-

예수님께서 사시던 유다 지방 사람들은 의복을 길게 늘어뜨려 입었기 때문에 일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일할 때는 허리에 띠를 매어 옷을 걷어 올렸습니다. 또한 등잔은 배 모양의 접시에다 무명으로 심지를 만들어 담은 것이었는데, 그 심지는 언제나 깔끔이 손질되어 있어야 불을 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늘 준비된 상태에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깨어 준비된 상태에서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시중을 듭니다.

우리는 체험을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은 위로와 평화로 든든합니다.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담담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봉사하시며 나를 섬기시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 22장 27절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맞습니다. 어린 자녀를 부모가 돌보듯 주님은 나를 돌보십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깨어 있어 그때그때마다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십니다.


삶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깨어있어 주님을 맞아하면 됩니다.

그 주님께서는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섬기십니다.


중요한 것은 늘 깨어 있어, 나를 한없이 품어주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현역(現役)

- 이수철 신부-

‘영원한 현역’은 수도자인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의 병사’인 수도자들에게 영적 전쟁은 죽어야 끝이기에 수도자들은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긴장을 풀 수 없는 게 수도자들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비단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영원한 현역’입니다. 그런데 마치 제대나 한 것처럼 세상 것들에 빠져 긴장을 풀고 냉담한 많은 이들을 보면 얼마나 위태해보이는지요.

마치 전쟁터의 병사들이 군기가 빠져 무기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훈련도 소홀히 하는 경우와 흡사합니다. 이러면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결코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훌륭한 병사는 사기충천하여 깨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체력을 단련하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병사요, 평상시 무기 점검도 철저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병사인 신앙인의 삶도 이와 흡사합니다. 

과연 하느님의 병사로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무기는 충분한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는 종처럼 늘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준비된 만남

-노미화-

초등학교 교사도 오래하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나름대로 고정된 틀이 있어 거기에 맞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초임 때처럼 아이들 앞에서 떨지는 않지만 오히려 뻔뻔해진 것 같아 이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다. 

나는 하루 종일 교실에만 앉아서 수업하는 것이 힘들다. 그런 날이 이삼 일 지속되면 견딜 수 없다. 머리가 아프고 답답해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게 된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새로 돋아난 풀이며 꽃을 발견한 아이들이 소리칠 때 비로소 살맛이 난다. 즐겁게 노래하고 땀 나도록 뛰고 난 뒤 수돗가에 몰려가 세수하고 교실로 돌아오면 비로소 가슴이 시원해지고, 아이들도 나도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런데 우리 반이 늘 소란하고 시끄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여섯 학급 작은 학교에 아이들도 열댓 명 적은 숫자이니 그 아이들이 뛰고 떠들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그런데도 이것이 윗분들 보기엔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올해도 몇 번이나 교장실에 불려갔다. 그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곤 한다. 학급 담임 중에 나이도 제일 많은데 아이들이 떠든다고 불려 다니니 참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이들 앞에 섰을 때다. 이런 날은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진다. 언제까지 더 교단에 서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수업까지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닐까! 




우리가 기다리는 그 대상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이윤벽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은 항상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잘 쳐서 빨리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기다림, 처녀 총각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는 기다림, 가장은 직장의 승진을 기다리고, 우리 재래시장 상인들은 빨리 시장경기가 풀려서 장사가 잘 되기를 기다리겠죠. 특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편안한 죽음과 그 이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기다릴 겁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우리를 동물과 달리 인간으로 특징짓게 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고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고을의 포악한 사또는 백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기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기에 그 백성들은 비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전혀 희망을 찾을 수 없고 힘든 날을 살아가야 하는 고을 사람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희망의 메시지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언젠가 고을 사람들 중에 힘센 장수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장수가 고을 사또 무리들을 물리치고 그 고을에 평화를 가져오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힘센 장수가 될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소식에 모든 고을 사람들은 기뻐 날뛰며 장수가 될 아기의 부모에게 축하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부모는 하루하루가 지나 갈수록 불안해지고 초조해졌습니다. 우리아기가 커서 그 힘세고 포악한 사또 무리와 싸운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싸움에 패배한다면 온 집안사람들이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날 저녁 아기의 부모는 결정합니다. 고운 모습으로 자고 있는 아기 얼굴에 베개를 덮어 누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기야, 아기야, 이쁜 아기야! 다음에 세상에 태어나걸랑 이런 험한 세상이 아니라, 좋은 세상에 태어나거라.”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을 두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대상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거짓된 기다림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실현할 때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한마디로 “우리의 사심”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이재영 신부-

1992년 10월 10월 28일 신문이나 방송을 크게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날 세상 종말이 와서 예수님께서 공중으로부터 재림하게 되고 성도들은 하늘로 산채로 들려 올라가는 ‘휴거’가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다미선교회 목사를 비롯하여 그 휴거설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함께 모여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세상 종말은 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또 다시 사이비 종교 운운 하면서 잠시 흥분하다가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1994년 다시 한번 휴거설이 방송이나 신문을 장식한 일이 있었고 그 날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말세론자의 종말론에 쉽게 빠져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 어느 곳에도 정해진 날짜에 사람들이 공중으로 빨려 올라가고 예수님이 재림한다든지 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 전반을 통해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종말이 언제 어디에서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게다가 당신 자신 뿐 아니라 천사들도 모르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 자신도 언제 어디서 종말이 오는지 거기에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지금 여기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요 종말을 잘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언제 어디서 종말이 오든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지연되는 재림의 상황에 적용시켰습니다. 문지기의 비유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비유는 문지기의 막중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들은 도로로부터 떨어져 높은 담으로 분리되었고, 집 대문으로부터 떨어져 다른 주거지들과 함께 위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입구에 문지기의 집이 세워져 몇 세대의 집들을 지켰습니다. 문지기의 보수는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세대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 담장 안에 사는 세대들의 재산과 안전은 문지기의 성실성에 달려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주로 야근을 하고 낮에는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일할 때인 밤에 깨어 있지 않고 잠자는 것은 문지기의 존재이유의 상실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양 우리의 문지기로 비유하시기도 했었습니다. 문지기가 깨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들고 서서 완전한 준비를 갖추어 인내하며 주인을 고대하고 기다리듯,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세상의 것들에 유혹되어 정신이 다른 데에 붙잡혀 잠든 상태가 되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어 깨어서 주님의 오심을 설레는 가슴으로 준비하여 기쁘게 주님을 영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불확실성으로 감싸여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주셨기에 확실한 시간이지만, 내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나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큰 창고를 짓고 넘치는 풍요를 내일부터 즐기자고 있으나, 그 날 밤이 그 부자의 마지막 종말이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도 오늘이 나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깨어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어 문을 두드리는 주님을 위해 즉시 일어나 빗장을 벗기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오히려 주님은 당신이 띠를 띠고 우리를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나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반성해보도록 합시다. 충실한 문지기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님이 늦게 오시겠지 하며 꽤를 부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충실한 문지기로서의 삶을 잘 살았기에 빨리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며 살아갔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주님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마라나타’ 하고 크게 외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멘.........◆




기도는 기다림...

-이호자 수녀-

하느님의 축복은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이사악이 야곱에게 준 축복을 에사오에게는 나누어줄 수 없었던 것처럼.(창세 27,'37) 그러고 보면 세상만사는 평형저울의 원리란 말인가? 승자의 영광 뒤에는 반드시 패자의 눈물이 있듯이.


얼마 전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한 젊은 엄마의 치유를 위해 여기저기 기도를 청한 일이 있다. 공교롭게도 기도 부탁을 받은 할머니 한 분은 그 다음날로 발가락에 금이 가서 꼼짝도 못하고 깁스를 하고 있다면서 전화로 환자의 병세부터 묻는 게 아닌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환자는 조금 차도가 있어 산책까지 하고 왔다는 소식이다. 그렇구나,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구나. 


인간에게는 귀소본능이나 절대의존 감정 외에도 수평유지 본능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부를 누릴 때 다른 누군가는 굶주려야 하며, 많이 배운 사람이 있으면 못 배운 한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으며, 누군가의 웃음 뒤에 누군가의 슬픔이 있으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그 누군가는 불행을 짊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는 게 필연이듯이.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한 이는 병약한 이를 위해, 부유한 이는 빈한한 이를 위해, 명예를 누리는 이는 무력한 이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고 유식한 자가 무능한 자를 배척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오히려 그들을 존경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게 순리인 것 같다. 


누구든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더욱더 청할 것이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은혜를 구해야겠다. 


미사 때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언젠가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어떻게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의 선물

-이선희 -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줄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일에서부터 그리운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짧게는 전철을 기다리는 일까지, 그 정도가 어떠하든 기다리는 일은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언제나 팽팽한 긴장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만 사는 어떤 소나무는 몇 십 년을 씨앗의 형태로 땅속에 있다가 산불이 나면 그 열을 받아 종자의 껍질이 벌어지면서 발아가 된다고 합니다. 산불이 나서 토양은 비옥해지고 경쟁이 될 만한 다른 식물들이 없는 땅의 주인이 되고자 기약 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땅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그 소나무의 기다림은 정말 상상이 안 됩니다. 


또 참나무 중에는 땅 위에서는 분명 나무로 크고 있는데, 땅속에는 굵은 뿌리의 형태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답니다. 참나무의 전생치수(前生稚樹)라고 한다네요.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도 크게 자랄 수 없는 조건이라면 위로 자랄 것을 포기하고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뿌리에 살아 있던 눈에서 이듬해 다시 싹을 올리고 다시 실패하고, 다시 싹을 올리고 다시 포기하고,이를 몇 십 번 반복한 결과랍니다. 땅속에서 얼만큼의 세월을 견뎌내야 그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큰 그늘을 만들며 빛나게 살아가는 걸까요? 당장 결과를 보지 않으면 이내 지쳐버려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는 저의 조급함에 경종을 울리는 참나무 얘기입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의 가장 좋은 행위는 묵상하고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들에 대한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려고 해보십시오.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미처 눈여겨보지 못하고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친밀함은 진부함과 맹목적 권태를 낳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치는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새롭게 볼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해보십시오. 먼저 그들에게 당신이 싫어하는 어떤 점이 있는지 관찰하고, 공명정대하고 초연하게 그들의 결점을 연구하십시오. 


이것은 그들에게 ‘우쭐거린다, 이기적이다, 거만하다’ 등의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어떤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 에 이런 일은 정신적인 나태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을 독특한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로 보는 것은 어렵고 도전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태도는 사랑과 용서로 바뀔 것입니다. 


결점에 대한 연구가 끝나면 이제 당신이 싫어했기 때문에 전에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보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에게 일어나는 태도의 변화나 느낌을 관찰하십시오. 그들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봉사의 행위보다도 무한한 사랑의 선물이 됩니다. 


이제 당신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기묘한 사랑의 태도로 말미암아 당신이 당신의 자아를 향해 변화되고 있다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 잠자고 있다는 것, 자기성찰

-이성우-

‘깨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깨어 있다는 것은 잠자지 않는다는 말이겠지요. 깨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다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이 행동의 근본 동기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살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나에게 유익하고 옳은 길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나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이 길을 가겠는가? 지금 내가 행하고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나의 소망과 일치하는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영혼이 간절히 바라는 나의 깊은 소망인가? 아니면 나의 얄팍한 욕구인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의식하고 곱씹으며 가고 있다면, 나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나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자고 있는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다가오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 감고 자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알아보겠습니까? 

깨어서 가는 길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길이지만 충분한 대가가 주어지는 길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꼭 필요한 출발점인 것입니다.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최명숙 목사-

요즘처럼 먹을거리가 흔하지 않던 어린 시절, 어느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이웃집에서 이사를 왔다며 커다란 접시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붉은 팥고물 찰떡을 먹음직스럽게 담아가지고 왔습니다. 순간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시장에 가시고 안 계신 때였습니다. 나는 먹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공부하던 책상 위에 떡 접시를 올려놓고 신문지를 펴서 떡에 닿지 않도록 살짝 덮어놓고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먹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 먹다 남은 떡 접시를 보여드리기 싫었습니다. 

어머니는 떡 접시에 김이 다 가시고 식어갈 즈음 돌아오셨습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기대감으로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나는 옆집에서 이사를 왔다며 가져왔노라는 보고와 함께 보란 듯이 말짱한 떡 접시를 곱게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기다린 것에 감동을 받으셨고, 나는 어머니의 칭찬과 함께 고물이 약간 식어서 말라가는 떡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며 인내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기대감에 부풀어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때 어머니를 기다렸던 것처럼 속히 오시기를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늘 드리는 신앙고백처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고백이 진심이라면, 그렇게 그분의 오심을 참으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있을 때 좀 더 잘할 걸>

양승국 신부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 인사이동 때 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입니다.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둥지를 틀기 위해 떠나던 아침이었습니다.


형들한테 맨 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던 녀석, 못 얻어먹어서 삐쩍 마른 강아지 같던 한 꼬맹이가 계속 저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왜 그러냐고 하니, 자기도 저랑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원망과 아쉬움 섞인 아이들의 눈동자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후회가 막심했는지 모릅니다. 계속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한 생각은 ‘있을 때 좀 더 잘 할 걸’이었습니다. 같이 살 때, 한번이라도 더 품에 안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눈길 주고, 한번이라도 더 용서해주고, 조금 더 뛰어다니고...그렇게 살 걸,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고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장 기대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마도 평생을 하루처럼, 하루를 평생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을 마지막처럼, 오늘이 내 일생의 전부인양, 그렇게 진지하게, 철저하게, 심혈을 기울여,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웃을 바라볼 때도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못 볼 사람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 오늘 배당된 일을 시작하면서 내게 주어진 마지막 업무로 여기는 모습이 아닐까요?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회의 차 긴 배 여행을 다녀오셨답니다. 기나긴 여행이었기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비마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초라한 부두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서니 뜻밖에도 한 할머님이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본당 내에서 가장 가난한 할머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신부님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외쳐대는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신부님이 안계시니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벌써 사흘 전부터 부두에 나와 있었다. 배가 도착하는 시간만 되면 비까지 맞아가면서 목이 빠져라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님은 신부님 앞으로 봉지 하나를 내밀었는데, 풀어보니 거기에는 손때가 묻을 만큼 묻어있는 이상하게 생긴 큰 떡이 여섯 개나 들어있었는데, 보아하니 불상 앞에 놓아둔 떡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할머님을 바라보며 신부님은 이런 진리 하나를 깨달으셨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쁜 일중에 기쁜 일 한 가지는 ‘한 인간이 적어도 다른 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시없는 귀한 존재’로 여기지는 것입니다(A. J. 크로닌, ‘천국의 열쇠’, 바오로 딸 참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아마도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실 삶의 모습은 위의 신부님과 할머님 사이 같은 그런 그림 같은 모습의 삶이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삶의 기쁨이며 희망인 그런 관계, 한 며칠 못 보면 허전하고 쓸쓸해서 못 견딜 정도의 그런 관계... 




준비와 기다림

-박상대 신부-

준비와 기다림. 이 둘은 형제지간 쯤 된다. 준비는 미리 마련하여 갖추는 것이고, 기다림은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을 미리 마련하여 잘 갖추고 있으면서 무엇이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안성맞춤이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면 수험생들은 사전에 그만한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고, 내일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면 계획에 따른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할 것이다.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일이 세상의 종말이라 치자. 그렇다면 종말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종말을 잘 맞이할 것인가? 오늘 복음이 마침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내용을 들려준다. 복음은 우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3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보도하고, 이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마태 24,43-51; 마르 13,34-36) 여기서 준비와 기다림이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가 집필되기 전에 모든 복음공동체에 확실하게 퍼져있었던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와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오실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오심의 시각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급하게 닥쳐와야 할 재림사건이 자꾸 지체하자 초기 교회공동체 안에 초조함과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적절한 입장표명이 4복음서 저자 모두의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과 원전(原典)을 토대로 제각기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맞추어 세상의 종말과 재림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24,1-44; 마르 13,1-37; 루가 21,5-36; 요한 14,1-3; 16,16) 


루가가 집필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1,6)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1,7) 하고 대답하신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왕국창건과 세상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날과 그 시각은 한밤중이 될지 새벽녘이 될지(38절)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림의 날과 시각이 아니라,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믿는 이의 태도는 준비와 기다림뿐이다. 교회는 그 동안 2,000년의 긴 세월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고, 최종적인 그 날과 그 시각을 향하여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세월동안 사라져간 사람들 안에서 그 날과 그 시각을 보았다. 이 말은 한 인간의 죽음이 바로 그 날과 그 시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죽음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산다는 비유의 뜻은 항상 근면하게 일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등불을 켜 놓고 산다는 비유는 자신 안에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게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뜻한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생(生)을 마감할 때,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그를 기쁨과 평화의 식탁에 초대하여 도리어 그에게 봉사해 주실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

-유광수 신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이다.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왜 이토록 기다리는가?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모든 만물을 다 주었지만 거둘 짝이 없는 것을 보시고 아담에게서 갈비대를 뽑아 거둘 짝을 만들어 주셨다. 그랬더니 아담은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하고 행복해 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혼자서는 행복하지 못하고 거둘 짝을 만날 때에서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아무튼 인간은 늘 기다리는 존재이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채워줄 대상을 기다린다.


인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기다린다. 아침을 먹었으면 점심을 기다리고 점심을 먹었으면 저녁을 기다린다. 봄이 왔으면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 오면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기다린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기다리는 것을 받게 되고 얻게 된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회사에 처음으로 입사를 하였으면 승진을 기다린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신부가 되기를 기다리고 수도원이 입회하였으면 서원 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다리지만 완전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것을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인간을 완전히 채워 줄 수 있는 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그분과 행복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분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은 하느님뿐이시다. 인간이 기다리는 분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왜 하느님을 기다리는가?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신랑이시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은 기쁨이다. 신부가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큼 더 간절한 것은 없다.

신부는 오직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살고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안고 살아간다. 신랑이 몇 시에 올는지 모르지만 낮이든 한 밤중이든 늘 신랑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신부의 삶이고 존재 이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신랑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간절히 기다려야할 신랑이시다. 신부의 행복은 기다리던 신랑이 와서 그분을 시중 드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기다림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날게 될 때까지 항상 기다림의 생활이 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모든 기다림은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생은 쓰다가 마는 편지, 부르다 마는 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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