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4-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4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며,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하느님을 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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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드러났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안다(제1독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어 그들을 가르쳐 주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하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런데 또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면, 하느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자신이 가진 것만을 줄 수 있는데, 하느님과 단절되면 줄 수 있는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불러,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가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내 힘으로 누군가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손을 거치니,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사랑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사랑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 안에 자신들이 참여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담을 기적의 재료를 제공하고, 또 그 기적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태양에서 오는 빛을 통과시켜 사람이 태양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선글라스의 역할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글라스는 그 자체로는 사랑도 빛도 아니지만, 그 사람이 태양을 볼 수 있게 하였다면, 빛을 전해 주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세상으로 향하는 사랑의 물을 받아 전달해 주는 봉사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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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는 말씀은 성가로도 부를 정도로 많이 듣게 되는 말씀인데, 그 다음 구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언급하는 내용은 자주 기억하지 않는 듯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성탄 시기를 보내면서 되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태어나게 하시는 이 성탄이 있기에,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의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의 이십 년 전에 들은 인상 깊은 성탄 강론이 떠오릅니다. 성탄은 고향 집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차가운 세상에 나가서 살다가 언제 돌아가도 늘 모두가 내 편이 되어 주는 따뜻함이 있는 곳,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적으로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랑이 있는 곳, 성탄이 그런 곳 같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지요. 성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찾아 주시는 분이시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없는 격려와 평온함을 느끼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힘을 냅시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어둡고 후미진 이 골목에 하느님께서 찾아오시어 함께 걸어 주십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당신 외아드님을 제물로 삼으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외아드님께서는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게 드러났습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답례로 드릴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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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각에는 누구나 세상 문제를 바라보는 가치관이라는 것이 있다. 그 관점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 방법도 강구하게 된다. 이를테면, 차량 사고가 났다면 어떤 이는 ‘이게 얼마짜리인데…….’라는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이는 ‘다친 데 없으니 다행이다. 차는 고치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며느릿감이나 사윗감을 대할 때도 집안 배경이나 출신, 무슨 자격증을 가졌고 돈을 얼마나 잘 벌 수 있는지를 중시하는 이도 있고, 가정 교육이 제대로 되고 예의염치는 있는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마음 씀씀이는 괜찮은지 등의 품성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다.
물질적 가치를 우선하는 의식을 ‘자기중심적 세계관’이라 하고, 사람을 우선하는 의식을 ‘관계론적 세계관’ 또는 ‘공동체 영성’이라고 한다. 공동체 영성을 지닌 사람은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와 더불어 이웃과 조화롭게 지내는 관계의 능력이 좋다. 그러한 사람은 인정을 베풀 줄 알고 함께 해결하려는 지혜를 낸다. 끼니때가 되어 밥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 앞의 다음 두 방식을 보자.
제자들: “여기는 외딴곳인데, 저들을 돌려보내서 스스로 해결하게 합시다!”
예수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제 자들은 각자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한다면 처리는 간단하지만 돈 없는 사람은 굶게 될 것이니 함께 해결하자.’고 하셨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밥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이웃의 처지를 생각할 때 모른 체할 수 없는 문제다. 오늘 복음의 ‘빵의 기적’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동체 영성의 방식이 어떻게 하늘의 축복을 이끌어 내는지를 깨우쳐 준다. 공동체는 존재 일체라 하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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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군중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여 가여운 마음이 드셨다는 복음 말씀을 들으며,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고은의 ‘별’이라는 시입니다. “저문 강 다리 있어라/ 건너갈 다리 있어라/ 강 건너 기다리는 언덕 있어라/ 산 너머 저녁연기 오르는 마을 있어라/ 그 마을 기다리는 사람 있어라/ 하루 일 다 하고 기다리는 사람 있어라/ 하늘에 별 있어라/ 기다리는 사람의 눈에 별 있어라/ 별 있어라, 별 있어라.”
이 시에서 묻어나는 애절한 마음이 예수님의 눈앞에 있던 군중의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깊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군중에게 채워지지 못한 그리움과 따뜻한 사랑에 대한 갈구를 예수님께서는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고된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별’에 대한 갈망에 응답하시어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게 하시는 기적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 기적은 바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하시며 작은 이들이 내어놓은 것, 곧 지상의 양식을 축복하시고 변화시키십니다. 이러한 자비의 체험 속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란 사실이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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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군중을 바라보는 마음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을 참으로 가엾게 여기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께서는 허기진 군중을 배불리 먹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냥 저들을 돌려보내서 각자가 능력껏 먹을 것을 사 먹도록’ 하자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군중 가운데에는 빵을 구할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굶어야 할 형편인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처지는 단지 그들의 사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볼멘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 나타난 제자들과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세상의 기적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기적은 ‘옹졸하고 고집 센’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적 사건을 마치 하늘에서 빵이 펑펑 쏟아진 마술처럼 이해한다면, 그 기적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옛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기적 사건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체험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나눔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빵이 부족해서 지구 저편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처럼 이 핑계 저 핑계로 나눔을 주저하는 우리의 ‘굳게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기적은 오늘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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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린이들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화’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바구니에 든 빵을 ‘달라는 대로’ 줍니다. 그런데도 빵은 계속 남아 있습니다. 받는 이보다 ‘주는 이들’이 더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의 음식은 제자들의 마음을 더 많이 흔들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저희가 그 많은 빵을 마련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스승님은 기적을 생각하셨지만, 제자들은 불가능을 떠올렸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의 ‘전달자’로 제자들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빵과 물고기라지만, 먹음직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바짝 마른 간식이었습니다. 배고픈 어른 한 사람이 먹어도 ‘시원찮은’ 분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을 거치니까’ 기적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혼자만 갖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면 ‘기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시련이든, 축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분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 기적이 되어 우리를 인도합니다.
시들어 가던 제 마음이 다시 희망을 찾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난 해 마지막 날,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를 진료 하던 중, 불의의 습격을 받고 세상을 떠난 임세원 교수님의 소식이, 오늘 우리 모두를 큰 충격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합니다.
세상을 떠난 임세원 교수님께서 더 이상 직무상 위험이나 스트레스, 고통이나 슬픔이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주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안전한 진료 환경을 보장해 드리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마음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긴박한 상황 속에 다른 의료진들을 먼저 챙기다가 참변을 당하셨다는 것이 또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임세원 교수님의 환우 사랑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진료실을 찾아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자신의 것처럼 여겼습니다. 환우들이 겪는 깊은 고통과 외로움에 공감하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지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진료를 끝내고 나가는 환우들을 향해 90도로 인사하셨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훌훌 털고 일어선 환우들의 감사 편지가 한 가득입니다.
살아생전 임세원 교수님께서 SNS에 올린 글을 통해 그분의 각별한 환우 사랑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삶의 가장 힘겨운 밑바닥에 처한 사람들이 한가득 입원해 있는 곳이 정신과 입원실이다. 고통은 주관적 경험이기에 모두가 가장 힘든 상황이다. 도대체 왜 이 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 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
임세원 교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그분의 가족들이 보인 모습 역시 우리를 크게 부끄럽게 합니다. 고인을 떠나보낸 슬픔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마음의 고통이 있는 분들을 향한 사회적 편견이 깊어지거나, 낙인 효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셨습니다.
고인의 죽음이 마음의 상처를 다루는 정신 건강 의료진과 여러 의료진의 안전 확보의 이유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참으로 품격있고 성숙한 유가족들의 태도입니다.
임세원 교수님으로부터 장기간 진료를 받고 치유된 한 가족의 편지는 오늘 우리를 정말이지 크게 부끄럽게 만듭니다.
“일주일 입원 기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지만,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한 시기였습니다. 운 좋게 귀중한 조언을 들어 감사했는데, 이렇게 보낼 수 없는 편지를 보내게 돼 통탄할 뿐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시들어 가던 제 마음이 다시 희망을 찾았습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선생님’이었습니다. 말씀 잘 새기고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시들어 가던 제 마음이 다시 희망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사목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로부터 이런 편지 받아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첫번째 독서는 사랑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서 4장 7~8절)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외치는 사랑이 구체화되지 않고, 허공 중에 떠돌아다니는 메아리 같지는 않은지? 참 많이 부끄러운 하루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인간관계’라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관계란 쉽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언젠가 누군가와의 갈등으로 지금 너무 힘들다는 한 자매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자기를 보려고도 하지 않는답니다.
저는 대화를 어떻게 나눴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이 겁나서 용기를 내서 대화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힘들면 전화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이 역시 자신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분께서는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신부님, 카톡이나 문자는 안 될까요?”
안 될 이유는 없겠지만 직접 대화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은 본인의 적극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계속 뒤로 물러난다면 어떻게 문제 해결의 물꼬를 터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하느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해주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몫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대신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한 기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을 아무리 만나도 지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 그리고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지쳐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도 따를 수가 없게 됩니다.
외딴 곳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장정만도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저 같으면 이들이 알아서 집으로 돌아갔으면 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행하라고 하십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는 그 모두가 배불리 먹기에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들의 봉헌이 있었기 때문에 놀라운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는 청보다는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마음이 내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일단은 시작부터 해야 한다(펄벅).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
만약 삶을 자유롭게 살길 원한다면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천천히 가라.
적은 일을 하는 대신 그 일들을 잘해내라.
삶의 작은 기쁨이야말로 성스럽다.
만약 꿈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잘 쌓아올려라.
시작은 소박해도 끝은 창대할 수 있다.
정성을 다한 순수한 일들은 잘 자란다.
우리의 삶에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살고 있었을까요? 해야 할 것들은 참으로 많은데, 하지 못할 일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누구를 보았을까요>
상지종 신부님
2019. 01. 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마르코 6,34-44 (오천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누구를 보았을까요>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지요
여자 어른과 어린이까지 하면
분명 훨씬 더 많았을 테고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숨었던 바로 그 사람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명하시어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지요
백 명 또는 쉰 명
무리에 섞여 있던 사람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오천이 백이 되고 쉰이 되듯이
백과 쉰이 열과 다섯이 되었겠지요
얼굴빛 숨소리조차 느끼게 된
너 나 우리 사이의 사람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늦은 시간 외딴곳
그분과 함께 하고픈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지요
먹을 것은 턱없이 부족하고
쉴 곳조차 변변치 않았다지요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압도당한
그분의 불안한 제자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시는
가엾은 마음 지니신 그분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들었다. 한때 굶주리셨던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이 지금 많은 사람을 먹이신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을 우선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빵은 “외딴곳”에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그곳은 외딴 곳이었지만 세상을 먹여 살리시는 분이 함께 계시고 시간이 이미 늦었지만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분이 함께 계셨다.
그분은 전에 빵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으로서 승리하셨다(참조: 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배고픔도 겪으셨지만 수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참조: 마태 14,20-21; 15,37-38; 마르 6,42-44; 8,6-9).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참조: 요한 6,51). 목마름도 느끼셨지만(참조: 요한 19,28),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보이는 인간이신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으로서는 우리처럼 잡수셨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지만(참조: 히브 4,15), 하느님으로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참조: 마태 14,17-21; 마르 6,38-44; 루카 9,14-17; 요한 6,10-13).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37절) 하신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38절)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 놓았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풀밭에 앉도록 명하신다. 사람들은 백 명의 식탁에, 쉰 명의 식탁에 둘러앉는다. 말씀의 식탁, 성찬의 식탁에서 그들은 양육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 받는 선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는 순간 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이루셨다. 그러고도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 두 광주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빵의 기적의 신비는 이것이다.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빵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열매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더라도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기적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천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오천의 영적인 의미는 대담하게 행동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갈 용기를 지닌 사람은 천상 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오천 명이 상징하는 의미이다.
성 히폴리토 사제가 한 것으로 보는 주님의 거룩한 공현에 관한 강론에서(Nn. 2. 6-8. 10: PG 10,854. 858-859. 862)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시어 그의 손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거대한 강은 몇 방울의 물로 씻어집니다.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낳아 주며 한없이 흘러 넘치는 샘물이신 주님은 지나가고 마는 하찮은 강물에 덮여지십니다.
모든 곳에 계시고 안 계신 곳이 없으시며 천사들도 파악하지 못하고 인간의 시야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그분은 기꺼이 오시어 세례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랑 받는 이는 사랑을 낳으시며 비물질적인 빛은 접근할 수 없는 빛을 낳으십니다. 요셉의 아들이라 불렸던 그분은 신적 본질에 따라 하느님의 외아들이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분이야말로 자신은 굶주리시면서 수천 명을 먹이시고, 수고하시면서 수고하는 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며,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면서 만물을 손수 지어내시고, 수난당하시면서 모든 고통을 위로해 주시며, 모욕을 당하시면서 세상에 해방을 주시고, 자신의 옆구리를 찔리우시면서 아담의 옆구리를 고쳐 주신 그분이십니다.
이제 청컨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는 이 생명의 샘으로 되돌아가 치료약을 샘솟게 하는 이 샘물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불사 불멸의 아버지께서는 불사 불멸의 말씀이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어 물과 성령으로 사람들을 씻어 주심으로, 우리 영혼과 육신을 불멸의 것으로 소생시키기 위해, 우리 안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불멸의 갑옷으로 입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불사 불멸의 갑옷을 입게 되었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세대에서 받은 물과 성령을 통해서 재생하여 하느님처럼 되었으면 그는 역시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자처럼 큰소리로 선포하고 싶습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들이여, 세례의 불사 불멸로 나오십시오. 이 물은 성령과 결합된 물로서 낙원에 물줄기를 대주고 땅을 비옥하게 하며 식물들을 성장시키고 동물들을 번식시키는 물입니다. 이 물은 또 재생된 사람을 새롭게 하는 물이고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사용하신 물이며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내려오신 물입니다.
이 재생의 세례대에 믿음으로 내리는 사람은 마귀를 끊어버리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칩니다. 그는 원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며 노예 상태를 떠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례대에서 나와 태양처럼 찬란히 정의의 빛을 쏟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은총을 받아 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거룩하고 선하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이제와 항상 세세에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줄 수 있어 기뻐요'(마르코 6장 34~44)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수많은 군중이 모여왔는데 ~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이 목자 없는 양들같이 힘없고 지쳐보여 주린배까지 채워주고 싶어하십니다.
제자들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태지요.
장정만도 오천명이 넘는 상태인데 저희보고 가서 빵을 사오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가진것이 얼마나 되는지 달라는 거라고 하십니다.
고작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말도 안되는 소리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콩알만큼 나눠주신것도 아니고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조각을 모으니 광주리에 가득차게 하셨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내어놓는 마음을 축복하시어 수천 수만배 풍성하게 하시는 능력자시니 망설이지 말고 있는거 내 놓으면 됩니다.
'줄 수 있어 기뻐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아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러자 제자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는지 물으셨고,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며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혹자는 공관복음 안에서 처음에 어떤 아이의 나눔을 시작으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하며 자신들도 가진 것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오천명이 나누어 먹게 된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휴머니즘으로 국한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기적을 이루어주시는 주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개입하심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제병영 신부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이다. 제자들의 대꾸하는 모습과 태도를 보면 짜증스럽고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제자들은 5+2=7이라는 확고한 관념에 갇혀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5+2=5,000을 만드셨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심지어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제자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나의 세계, 관념, 가치, 기대를 뛰어 넘는 생각, 마음, 관대함을 가진다면 하느님을 만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늘의 회오리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을까!
재물은 나눌수록 풍요롭다.<마르코, 6/34-44.>
이석진 신부님
주님을 따라다니던 군중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아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산과 들을 다니다가 그들의 시장 기를 눈치체신 주님은 먹을 것을 주시려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신 일을 빵의 기적이라 합니다. 여기 기적의 의미를 살펴보면 누가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뻥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하늘에서 먹거리가 엣 모세 시대 때 만나와 메추리가 하늘에서 땅에 떨어져 그 많은 백성을 먹게 한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날 수도 있고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있습니다.
그 당시 유태아인들은 길을 떠날 때 중간에서 먹을 것을 준비하여 떠났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방인도 섞여 있어 때가 되어도 먹으려니 아깝고 혼자 먹자니 체면상 안되고 해서 굶고 있다가 주님이 빵 5석 개와 물고기 두 말리를 들고 여기 어린아이가 이것을 모두 먹으라고 내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기적의 두 가지 가능성을 나옵니다. 첫째 천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현상으로 빵 바구니를 돌리면서 하나 나누면 둘이 생기고 둘 나누면 네 개가 더 생겨서 5000명 다 먹기고 그래도 남은 빵의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설명은 나눔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보여주는 협동의 신비입니다. 각자 자기 가방을 열러 가진 바를 나눔으로 풍요로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저는 사회적 개혁으로 적은 것을 나눔으로 위대한 일을 해 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각자 적은 돈을 모아서 큰돈이 되어 서로 도우는 경우입니다. 구미에 신협은 50년이 넘으면서 1200억 원이 모여 수천 명의 경제 사정을 쉽게 합니다. 사업 자금, 가정 경제, 어려운 사람을 도우고 있습니다. 또한 본당에 잔치가 있으면 적은 돈이나 조금씩 추념하여 7,8백 명을 위한 잔치를 치루고 개인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냅니다.
오늘 주님이 빵 더섯 개와 물고가 두 마리를 들고 이렇게 기도하시였을 것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우리를 위하여 빵 과 물고기를 내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각자 가방에 있는 것을 내어놓고 나누어 주린 배를 채웁시다.” 이런 기적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에서 무엇이 떨어지기 바라며 살지 말고 우리가 서로 나누며 살아 풍요로운 생활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나누는 사람은 더 많은 축복을 받고 풍요롭게 됩니다. 적은 것을 나누어 모우고 많은 사람이 풍요로움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어는 동내에 가난한 청년이 결혼하게 되었는데 각 집에서 막거리를 부주 하기로 하여 독에 술을 한 주전자씩 모으려 했는데 막상 잔치에 상요하려 하니 맹물이 였다. 고 합니다. 이유는 모두가 나 한 사람 줌 술독에 물을 넣어도 술이 된다고 각자가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진실과 사랑으로 나누어 풍요로운 삶이되도록 기도합니다.
'그래도 사랑'
최민석 신부님
그 어느 날 어쩐 일인지 성가를 듣고 싶어진 일이 있었다. 그것도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고 싶은 것이다. 다른 계획했던 일을 취소하고 수도원에 달려간 적이 있다. 왜관 수도원 미사다. 파이프 오르간의 그 웅장한 연주로 시작하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다.
장엄하고 아름다워야 할 오르간 소리가 슬프고 애절하기까지 하다. 성당 색유리 글라스 사이로 영롱한 빛이 스며든다. 창문사이로 억울하게 참고 살았던 슬픈 영혼들이 위로를 받는다. 기쁨의 장엄미사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경험이다.
미사 중 사랑과 환대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간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자상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늘 이렇게 사랑으로 보고 계신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도 모르게 그 거룩한 순간이 또 한 순간에 사라진다. 미사 중에 받은 은혜 체험이다.
하늘이 내 품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지켜보듯이. 나를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심을 알게 하신 은혜 체험이다. 다만 나의 앎이 너무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당신이 제 곁에서 저를 지켜보시며 제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시고 가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제가 저 혼자 인생의 주인공인 양 처신할 때가 많은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씀을 주신다. 그렇다. 옳다.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 ‘그래도 사랑’이다. 사랑 말고는 아무 다른 할 일이 없고, 마땅히 없어야 한다. 달빛이 횃불로 환해지지 않고 별빛이 태풍으로 흔들리지 않듯이, 사랑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사랑은 누구의 거절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래도 사랑한다!’ 하신다.
그 사랑의 현존 가운데에 지내는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내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게 해 주시길 청한다. 그래서 밤이 짧아지는 그만큼 길어지는 낮처럼 당신의 현존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느낌에서 오는 생명 에너지로 춤추며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게 해 주시길 청해 본다.
제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이제는 그리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게 바로 내 몸이니 사랑한다. 아낀다. 돌본다. 뭐 어쩐다, 그런 생각조차 없이 그냥 움직여지는 대로 움직이고, 멈추어지는 대로 멈추고, 왼손이 오른손을 쓰다듬듯이, 그렇게 사랑하는 거라 하신다.
기도하는 동안 그분 내게 들려주는 말씀이다. ‘너를 내게 맡기고, 맡기되 온전히 맡기고, 그 가운데 어느 부분이라도 도로 가져가지 말라고, 도로 가져가서 움켜잡지 말라고, 너는 본디 내 몸이고 네 이웃도 내 몸이니, 네가 옹글게 내 속으로 들어오면 거기서 내 몸이자 네 몸인 이웃을 그냥 사랑하게 된다고, 사랑 말고는 무슨 할 일이 없다.’고 하신다.
그렇다. 내가 드리는 기도가 생겼다. 당신께 바친 저를 제가 도로 찾아오지 못하도록 저에게서 저를 아예 거두어 주시라고 기도한다. 제가 아무 한 일이 없고 할 일도 없음을 이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다시 기도한다. 방금 드린 제 기도, 안 들어주셔도 괜찮다고 기도드렸다.
다시 라틴어로 부르는 그 거룩한 음향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거듭 용서해달라는 노랫말이 아프기만 하다. 오랜만에 가슴으로 듣는 소리다. 귀로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다만 사랑으로 들어오는 소리이기에 가슴을 열어본다. 무릎을 꿇고 가만히 듣는다. 어찌나 심장을 떨게 하는지 숨 쉬는 소리마저 정지한 듯하다.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무념무상의 의식 속에 잠긴다.
이 지상의 소리가 모두 숨을 죽이니 고요 가운데 들리다.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 여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은은한 소리가 온몸에 스며든다. 두근거리는 맥박이 어디에도 없는 제 중심을 점령하고 있을 뿐, 사위가 고요하고 저 또한 이렇게 고요하다.
이제, 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지금 있는 이대로 충분히 만족한다. 하지만 개울은 강물로 흐르고 강물은 바다로 흐르듯이 저 또한 성숙한 영혼으로 익어 가지 않는다면 살아 있으나 산목숨이 아니다. 모든 순간을 꽉 차게 살되 어느 한순간에도 멈추지 않도록 바다이신 주님이 강물인 저를 당신 품으로 당겨 주시는 은총에 감사하다.
새날이 밝아오네요. 오늘도 여러 사물과 사람들을 만나겠지요. 무엇을 보든지, 그것을 보면서 그 너머를 보는 눈을 열어 주시고, 그래서 거기, 지극한 사랑으로 숨어 계시는 당신을 느끼게 해 주시고, 그 느낌이 열어 주는 눈으로 보는 것들을 다시 보려한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의 성체성사의 생활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었네’ 끊임없이 찾는 제 졸저입니다. 피정집마다 비치되있는 책중 피정자들이 끊임없이 애독하는 책입니다. 정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인생 무의미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타적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짧은 제1독서 안에 사랑이란 말이 무려 10회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있음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함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공기 같습니다. 하느님 사랑안에 살면서 사랑을 목말라하는, 사랑에 굶주린 참 역설적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음은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 끊임없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이 이런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때 하느님을 알아 가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평생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입니다. 이래서 인생은 ‘사랑의 학교’라 하는 것입니다. 농사에 늘 초보자라는 농부의 고백처럼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늘 초보자입니다. 이런 초보자라는 깨달음이 바로 겸손의 원천입니다. 해도 해도 늘 제자리 사랑 공부 같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사랑 공부입니다. 사랑의 학인, 사랑의 전사가 되어 학우애學友愛와 더불어 전우애戰友愛, 그리고 형제애兄弟愛를 키워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선 공부하여 깨달아야할 바 우리의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 게 해주셨습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영원한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 계시기에 비로소 살 맛 나는 인생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목표할 바 하느님이요,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유감없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에 쉬러 가셨다가 많은 군중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과 같아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대자대비의 하느님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의 만남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신앙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 온 분이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남편이 결혼후에도 계속 불륜의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았고, 해결은 되었지만 무너진 신뢰에 후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지내는 분이었습니다.
“잘 살아 오셨습니다. 끝까지 하느님 앞에서 가정을 지켰고 자신의 품위를 지켰습니다 자매님 사랑이 큰 일을 하셨습니다. 그대로 사십시오. 자매님을 통한 하느님 사랑의 승리입니다.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 하셨는 데, 자매님이야말로 정말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자매님을 신뢰하십니다.”
사랑의 신뢰입니다. 한결같이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뢰보다 큰 자산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이, 사람 사랑이 참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게 되며 사람들도 사랑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주님은 군중을 모두 푸른 풀밭에 질서있게 앉게 한 다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착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이 없어라”
저절로 시편 23장의 고백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광야 외딴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배불리 먹었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고, 빵을 먹은 장정만도 5천명이었다 합니다.
바로 사랑의 성체성사, 미사의 축복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광야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매일의 미사전례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장면은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구성된 미사전례를 상징적으로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사랑의 성체성사입니다.
새삼 사랑은 나눔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나눔입니다. 성체성사의 사랑이 일상의 나눔으로, 사랑의 실천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성체성사의 생활화’, ‘생활의 성체성사화’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미사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일상을 통해 나누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살아있는 사랑의 성체가 될 때, 살아있는 주님의 현존, 사랑의 현존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미사전례입니다. 미사은총은 하루로 확산擴散되고 또 하루의 삶은 미사로 수렴收斂됩니다. 새삼 인생광야순례여정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의 파스카 미사잔치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친히 우리 안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보내셨네.”(에페 2,4; 로마 8,3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당신이 가진 것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당신 자신을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쪼개어 나누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 6,41)
이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공현하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하라 하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람을 움직이는 힘에는 ‘Hard Power와 Soft Power’가 있다고 합니다. 강한 힘에는 군사력, 외교력, 경제력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힘입니다. 미국이 강한 힘을 가지고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진정한 힘은 부드러운 힘에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 영화, 학문’의 분야에서 미국은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영향력입니다. 경제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영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Hard Power’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와 대항할 군대도 없었고, 율법학자와 토론할 학자도 없었고,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와 견줄만한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는 ‘Soft Power’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사랑, 기도, 나눔’입니다.
한국은 강한 힘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힘은 강점이 있습니다. 방탄 소년단은 음악으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박항서 감독은 아버지와 같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베트남의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김연아, 박세리, 박찬호 선수는 뛰어난 실력으로 한국인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2019년에도 한국의 부드러운 힘이 함께하는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습니다.
댈러스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신자들이 신부님과 한마음이 되어서 아름다운 성전을 신축했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면 영적인 힘이 느껴집니다. 넓은 주차장과 친교실과 모임방이 있습니다. 외적인 모습은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힘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힘은 3가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될 것입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희망을 배우는 것이며, 따라서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낙담한 사람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희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힘을 확신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자신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어 선과 권능을 희망합니다. 기도는 성취되고 있는 희망입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가뭄이 불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조건 없이, 아낌없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 시작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눔을 성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가장 심오한 신비인 성체성사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 내어줄 내 몸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십시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려고 여러분과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십시오.”
사랑은 결심입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의 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시몬 부제님 강론
독서 : 1요한 4,7-10 / 복음 : 마르 6,34-44
종교마다 그 종교의 특색을 잘 드러내는 가치가 있습니다. 유교가 덕을 말하고, 불교가 자비를 말한다면, 그리스도교를 잘 드러내 주는 가치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도 성 바오로는 향주삼덕인 신,망,애 중에서 사랑이 으뜸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랑에 비추어 복음을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기적도 쉽게 이해됩니다.
오늘복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를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목자없는 양들”(마르 6,34)로 비유합니다. 양들의 특징을 알면 이 비유가 어떤 의미인가 알 수 있습니다. 양들은 첫째로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코앞에 있는 다른 양을 따라가죠. 그래서 앞의 양이 낭떠러지로 가면 자기도 낭떠러지로 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 다리가 튼튼하지 않아 잘 넘어지고, 속도도 빠르지 않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 앞에서 죽음을 느끼면 금새 포기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도 고쳐줄 이 없고, 육식동물로부터 쫓겨도 빨리 도망갈 수 없고, 금새 포기하여 곧 죽을 처지에 있는 사람의 상태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마르 6,34)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고 제자들은 시간이 늦었으니, 돌려보내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상태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서 길을 잃었고, 이들을 도와줄 이가 없어 금방이라도 인생이 끝날 것 같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47)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저에겐 ‘너희가 그들을 살려 주어라, 살도록 도와주어라’ 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만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문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이론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마르 6,37)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그것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 6,42) 그러니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과 관심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 길을 잃고, 금방이라도 포기하려는 이들을 보고 계십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가 보기에 자신의 사랑은 부족한 이들을 통해서 사랑을 나누어주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제자들이 가진 빵을 통하여 제자들의 손으로 나누어 줌으로써 일어납니다. 우리들이 가진 사랑이 나 스스로는 작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 마음에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1요한 4,7)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모두를 위한
주님의 빵입니다.
주님의 빵은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줍니다.
성체성사로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말씀과 빵은
하나입니다.
빵을 먹는 모습과
말씀을 듣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빵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빵의 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만나게합니다.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
우리의 삶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빵입니다.
천상의 빵이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빵이 되심으로
사랑이 되는 삶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하나의 빵으로
사랑 가득한
세상을 만듭니다.
빵으로 우리의 일상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합니다.
빵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게됩니다.
빵을 마주하며
우리 영혼이 자라납니다.
감사와 기쁨의
일상이 됩니다.
오늘은 인천교구에 큰 경사가 있는 날입니다. 11명의 사제와 18명의 부제가 새롭게 탄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주님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길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올해로 17년째 사제의 길을 걷고 있지만 이 길이 참으로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의 유혹도 많고, 어려운 일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내 자신의 힘으로만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바로 많은 분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서 사제로 기쁘게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무튼 모든 사제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라며, 아울러 오늘 서품을 받는 새 사제와 새 부제들이 기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금붕어의 수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금붕어는 보통 작은 어항 속에서 키우고 있지요. 이 작은 어항 속에서는 10년 정도, 그리고 몸의 길이는 5C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금붕어를 큰 어항으로 옮기면 수명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것도 1~2년이 아닌, 자그마치 30년 이상을 살 수도 있고 몸길이도 30C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하네요.
어떤 공간에서 자라느냐에 따라서 수명도 또 몸길이도 바뀌는 이 금붕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넓은 세상을 지향하면서 살지 못하고, 좁은 생각과 답답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의 성장을 막게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좁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 보다 더 크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각으로 살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을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기적에 앞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오천 명이나 모여 있는 곳에 과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나누는 것을 꺼리는 좁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먹을 것도 부족한 양이지만, 넓은 마음으로 나누려고 내어 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더 크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생깁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좁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아니라, 보다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서 주님께서는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오늘의 명언: 지식은 말하지만 지혜는 듣는다(지미 헨드릭스).
말하는 대로(박재현, ‘좋은생각’ 중에서)
예부터 어른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말엔 힘이 있기에 말대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됐다. 실험에 따르면 “더 못하겠어.”,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같은 부정적인 말을 내뱉을 때마다 우리 뇌는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낸다. 자율 신경계가 말대로 회로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반면 “즐거웠어.”, “잘 될 거야.”처럼 긍정적인 말을 하면 자율 신경계가 활발하게 활동해 우리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켜, 소망을 실현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우리가 어떤 말을 자주 하나 점검해 보자. 일어났을 때, 직장에서, 친구 앞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말이다. 대화할 때 긍정어와 부정어 비율이 7대 3을 넘지 않도록 하자. 부정적인 말도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도저히 무리야.” 대신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해 보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어떤 말을 많이 쓰고 계십니까? 솔직히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부정적인 말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음에도 왜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좋은 말, 특히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을 통해서 이익을 받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포장마차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회 회원들의 연례피정 기간 동안 ‘사막의 날’이란 행사가 있습니다. 일주일 가운에 하루는 특별한 강의나 다른 프로그램 없이 각자가 알아서 하루를 보내는 것입니다. 아침 식사 후에 원장 신부님은 각 사람에게 만 원 짜리 한 장이 든 봉투를 나눠줍니다. 그걸 들고 하루 종일 무작정 걷는 것입니다.
한번은 홀로 들길을 끝도 없이 걸어가다 보니 엄청 배가 고파졌습니다. 아무리 가도 식당이나 가게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그냥 굶어야겠다, 하는 순간 길모퉁이를 돌아서니 포장마차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신년 일출을 구경하려는 연말연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차린 깜짝 포장마차였습니다.
포장마차 안에 들어갔더니 어묵이며 만두며 산더미처럼 쌓여있긴 한데 손님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마음씨 좋게 보이는 주인아저씨 얼굴도 많이 침울했습니다. 사연인즉슨 작년에 딱 3일 장사해서 순수익만 2백만원 벌어 ‘집사람’이 엄청 좋아했답니다.
그래서 올해도 큰 기대를 안고 포장마차를 열었는데...거의 꽝이랍니다. 그래서 사흘 내내 개점휴업 상태에서 홀로 술만 홀짝이고 있답니다.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면 ‘마누라’ 얼굴을 어떻게 봐야 되나 큰 걱정이랍니다.
주인아저씨의 하소연에 딱한 마음도 든 데다 장난끼 까지 발동한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도 사장님은 행복한거유. 집에 들어가면 그래도 누군가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유?”
주인아저씨가 깜짝 놀라면서 제게 묻습니다. “그럼 사장님은 혼자유?”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무 밖으로만 나돌아 다니다보니 벌써 오래 전에 이혼당했슈. 연초부터 혼자 포장마차 들어온 거 보면 모르겠슈? ㅋㅋㅋ”
제 말 끝에 주인아저씨 아무 말 없이 소주 한 병을 딱 까더니 큰 유리잔에 콸콸 부어주면서 그러는 겁니다. “인생 다 그런거유. 아 그러지 말고 힘내유!” 그러면서 주인아저씨는 생면부지 초면인 제게 자신의 지난 60평생 스토리를 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측은함으로 바라보며 주인아저씨와 저는 소주를 몇 병이나 더 깠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된 아저씨는 “이거 다 공짜니 오늘 마음껏 들라.”고 했고, 저는 “남은 거 이거 다 내가 사갈 테니 안심하라고.” 허풍을 쳤습니다.
꽤나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한 인간의 측은지심이 불러오는 풍요로움과 너그러움을 마음껏 만끽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힘차게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인기와 매력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 대단했습니다. 순식간에 수천수만 명의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오랜 세월 목자 없는 양떼처럼 힘겹게 살아온 군중을 보신 예수님의 시선 역시 측은지심 그 자체였습니다.
가엾은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끼니조차 잊고 있는 백성들을 위한 사랑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의 배경에는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은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암시합니다. 이 기적의 과정 안에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르코 복음 6장 42절) 예수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에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제외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외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차별과 불평등으로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보다 큰 측은지심, 보다 큰 사랑, 보다 큰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주에는 익명의 독지가가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동사무소 앞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써달라는 쪽지와 함께 기부금을 놓아 두셨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말없이 드러나지 않게 선행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지난 성탄 무렵에도 어김없이 기부금을 놓고 가셨다고 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양지의 청소년 수련원을 맡아서 일하게 될 것 같습니다. 덤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는 일입니다. 직원들의 월급을 챙겨 주어야 합니다. 시설을 보수해야 하고, 자주 찾아가야 하고, 피정이나 미사가 있으면 가서 강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제가 해야 하는지, 왜 제가 해보겠다고 했는지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속삼임이 있었습니다. ‘한번 해 보는 거야!’ 열심히 해서 수련원이 잘 되면 교회를 위해서도 좋고, 수련원을 이용하시는 분들에게도 영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소국 일, 신학교 강의, 복음화 학교 담당, 베리따스 기숙사 운영, 양지 피정의 집 운영까지 하게 되면 지금보다 조금은 바빠질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좋은 결실이 맺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저보다 더 바쁘고, 분주하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도 저는 거처할 집이 있고,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분들이 있고, 교구라는 든든한 기둥이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제가 한다고 하면 도움을 주시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앞으로 양지 피정의 집을 찾아 주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암행어사처럼 ‘마패’를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하는 ‘금수저’를 지니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있으셨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표징은 복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분이 태어나기 전과, 그분이 태어나신 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가수 김광석은 ‘일어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겠지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봄의 새싹들처럼
끝이 없는 말들 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저 왔다갔다 시계추와 같이 매일매일 흔들리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봄의 새싹들처럼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 살아 있는 걸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가고
햇살이 비치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순간에 말라버리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봄의 새싹들처럼”
사랑은 결심입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의 길입니다.
주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6,38).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려 하기 전에 “주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많은 군중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6,35-36).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야 된다고 하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베풀어야할 시간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내 놓기를 바라셨습니다.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고 나누니까 많아졌습니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게 나누면 우리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됩니다. 세계적으로 하루 4만 명씩 굶어서 죽어가는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합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늦은 시간이든, 외딴 곳이든, 다시 말하면 언제, 어떤 장소에 있든 항상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도록 헤쳐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이라도 나눔으로써 서로 일치시키는 몫을 하라고 일깨워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25-27).
물질에 굶주린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 마음을 들어줄 상대를 찾는 사람, ......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베푸는 삶, 행동하는 믿음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결핍을 채우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주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만이 답이요 모두이다. -사랑에 대한 묵상-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오늘은 사랑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강론 제목은 ‘사랑만이 답이요 모두이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를 일별一瞥하는 순간 사랑의 흰눈 덮인 들판을 보는 듯, 무수한 사랑의 별들이 반짝이는 듯한 착각을 했습니다.
무려 사랑이란 단어가 짧은 1독서 안에 10회 들어 있었습니다.
1.사랑은 모두입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만병의 근원은 사랑 결핍에 있고,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사랑, 삶, 사람이 모두 같은 어원에서 기인한다는 제 확신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삶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삶에서 사랑빼면 허무이지만 삶에 사랑이 더해 지면 의미 충만한 삶입니다.
사랑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요, 모든 빛을 잃어버립니다.
2.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프고 두렵고 무서운 것이 고립이요 망각입니다.
끊어져 섬처럼 고립될 때, 잊혀질 때 바로 이것이 현세의 지옥이요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음과 같습니다.
손을 내밀어 고립된 이를 잡아 주는 것이, 잊혀진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잡아 주시고 우리를 기억하시며 우리 또한 주님을, 많은 이들을 잡아드리며 기억합니다.
3. 지난 주일 오후의 영적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수시간 동안 독서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독서도중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 마치 텅 빈 진공상태 같았습니다.
사람도 하느님도 없는 순수진공상태의 공간입니다.
순간 하느님과 형제들이 있는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습니다.
공동체 없이는 하느님도 사람도 없는 추상의 진공상태에서 폐인으로, 괴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영원한 초보 학생이 몸담고 사랑을 배워가는 학교입니다.
가톨릭 공동체의 시스템 자체가 겸손을, 사랑을 배워아만 살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죽은 시스템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랑의 시스템 공동체입니다.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 하는데 혼자 살면 어떻게 사랑을 배우며 실천할 수 있겠는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없이는 사랑은 애매모호한 추상이 되고 사랑 확인도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추상명사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라지면 하느님께 이르는 길도 없고 하느님을 만날 길도 없습니다.
사람 사랑을 배우고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공동체가 얼마나 축복된 사랑의 학교인지 깨닫습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바실리오 규칙도 온통 성경의 사랑말씀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복음서 같습니다.
4. 사랑, 깨달음, 자유, 치유, 이 넷은 영적 삶의 요약이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할 때 솟아나는 영감에 빛같은 깨달음이요, 이 깨달음이 우리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깨달음을 통한 자유가 진정한 자유요 이런 자유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입니다.
5. 어느 지인으로부터 좋은 책을 소개해 달라 하여 ‘신의 위대한 질문’이란 책을 소개해 드렸고 감사의 카톡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무지하고 무뢰한 제게 ‘신의 위대한 질문’을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 감사—묵언”.
독서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깊이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6. 수도원의 쓰레기장의 쓰레기별로 잘 분류된 모습이 저에겐 또 하나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똑같은 쓰레기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로 분류된 쓰레기였습니다.
‘아, 사람도 쓰레기처럼 분류할 수 있겠다.’하는 불경한 생각과 더불어, 쓸모없이 버려지는 쓰레기 같은 삶은 살지 말아야 겠다는 자각도 들었습니다.
아,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쓰레기는 그대로 사랑의 흔적, 사랑의 껍데기였습니다.
알맹이를 보호해 주는 사랑의 포장으로, 사랑의 껍데기로 있다가 알맹이가 빠져 나가자 버려진 사랑의 흔적이 쓰레기라는 깨달음입니다.
곳곳의 버림 받은 쓰레기 같다 여겨지는 이런저런 인생들 깊이 들여다보면 사랑의 흔적들입니다.
하여 하느님의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약자에 대한 사랑은 각별할 수 뿐이 없습니다.
7. 어제 읽은 어느 작가의 일화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랑의 끝에는 무엇이 있어요?’
어느날 한밤중에 딸에게서 온 문자다.
“뭔가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듯했어요. 밤새 잠을 잘 수 없었죠. ‘사랑에 완성이 있겠니…’라고 답장을 했지만 밤새 걱정을 했지요.
아침에 아내에게 물어봤어요. 당신이라면 뭐라고 답했겠느냐고.
그랬더니 아내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사랑의 끝에는 사랑이 있지!”
사랑의 끝에 사랑이 있다고 믿는 여자는 어떤 어려움도 다 이겨내는 거 같아요.
사랑에 있어서 단 한 번도 아내를 이겨본 적이 없어요.
자궁을 가지지 못한 자의 한계라고 할까요?
자궁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사랑을 지키고 희망을 접지 않는 것은 남자들이 이를 수 없는 경지죠.”-
사랑의 끝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길이 있듯이 말입니다.
어디나 하느님께 이어져 있는 사랑의 길입니다.
8. 코린도 1서 13장 사랑의 대헌장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13,13).
9. 어느 작가의 인터뷰 중 한 대목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그 갈망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한때 히말라야를 돌면서 그걸 극복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사랑이 최고의 에너지고 권력이었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연민과 자비로 드러나는 온 세상 모두에 미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최고 결정체가, 하느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 바로 예수님이요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그대로 미사의 요약입니다.
앞부분은 말씀의 전례에 해당되고 후반부는 성찬전례에 해당됩니다.
복음의 서두가 하느님의 가이없는 측은지심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이어 주님은 말씀의 사랑으로 영혼들을 배불리시고, 빵과 물고기로 상징되는 성체의 사랑으로 육신을 배불리십니다.
바로 이 장면이 미사의 원형입니다.
예수님 친히 미사를 집전하시는 오늘의 복음의 장면같습니다.
새삼 전례만으로 끝나는 반쪽 미사가 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사는 하루로 확산되고 하루는 미사로 수렴되면서 '삶의 미사화', '삶의 사랑화'가 되어야 온전한 미사, 완전한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가정聖家庭 공동체의 ‘사랑의 학교’에 성실하고 충실한 학생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가엾이 여기며 떠안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보내주셨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0). 사랑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반된 태도를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그분은 먼저 인간 자체에 관심을 두셨고 사람들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다(6,35)고 하며 사람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먼저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외부 환경이나 조건을 우선시한다면 사랑이 아니라 사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어떻게 군중들과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6,36)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었고, 문제 해결마저도 말뿐이었지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결코 누가 대신해주는 것이거나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견디어내는 것이지 ‘그들의 일’로 만들어 제3자나 당사자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가진 것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까지도 함께 떠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제자들은 자신들을 건네어 나누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보리빵 다섯개와 소금에 절여 말린 물고기 두 마리로는 군중의 배를 채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중을 먹일 빵을 사는데 필요한 돈 이백 데나리온을 계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존재 자체를 전부 나누는 것이 사랑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눠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산을 하였고 가능성을 저울질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눈앞의 문제해결과 성과에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속사랑이지 겉사랑이 아닙니다.
한편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의 배고픔과 아픔에 일일이 관심을 가지시고 가엾이 여기셨지만, 제자들은 그저 대상화된 불특정 다수로서의 배고픈 집단을 겉핥기식으로만 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헤아리고 가엾이 여기며 함께하는 인격적인 사랑이 참 사랑임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사랑이야말로 빈곤과 기아, 전쟁, 경제와 복지문제, 사회적 차별 등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물 나눔과 일시적인 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밥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을 나누는 것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하느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을 지닌 사랑의 빵이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봉헌, 나눔, 기적, 기쁨
-이정은 신부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봉헌한 아이의 모습도 바라봅니다.
아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겸손되이 예수님께 빵과 물고기를 봉헌합니다. 사실 그것을 숨겨두고 혼자 먹고 혼자 배불렀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합치면 7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7은 완전한 숫자이고 바로 하느님의 숫자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아이가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형상을 통해 벌써부터 당신의 섭리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섭리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고 아이의 응답과 동의를 통해 예수님은 그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은총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총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정성이 주님께 겸손되이 바쳐질 때 모두를 위한 은총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오상선 신부님-
여러분은 하느님을 잘 아십니까?
잘은 모르겠는데 좀 알긴 안다구요?
하느님을 잘 알고싶은데 어렵지요?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묵상을 열심히 하는데도 잘 모르겠다구요?
사실 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지식적으로는 조금 알 듯해도 하느님은 모든 지식을 초월한 분이셔서
다 담을 수는 없겠지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잘 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껍데기만 아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만큼 비례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내가 하느님을 잘 모른다면 그게 성경부족이나 신앙부족이 아니라 사랑부족 때문이랍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무조건 사랑합시다.
그래야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조건부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하는 유행가 노랫말을 흥얼거려 보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그저 함께 해요>
-상지종 신부님-
배고픔과 아픔에 지쳐
서러움 가득한 눈망울 본다면
비록 우리 아무 것 할 수 없다 해도
그렁그렁 연민에 젖은
우리의 고운 눈길 돌리지 말아요
함께 바라봄 속에 녹아 있던
그 사람 지닌 희미한 희망조차
오간데 없이 사그라질 테니까요
억울함과 노여움에 토해내는
피눈물 섞인 울부짖음 듣는다면
비록 우리 아무 것 할 수 없다 해도
연대의 고결한 슬픔 들이마시는
우리의 착한 귀 막지 말아요
함께 들어줌만으로 풀어지던
그 사람 속 깊은 응어리들이
돌덩이 되어 서로를 짓누를 테니까요
외로움과 억눌림에 졸아들어
빛조차 들 수 없는 마음 느껴진다면
비록 우리 아무 것 할 수 없다 해도
안쓰러움과 가엾음에 찢기는
우리의 따스한 마음 닫지 말아요
함께 있음만으로 되살아나는
그 사람 마음 속 미미한 온기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릴 테니까요
일용할 양식 <마르코 6, 34-44>
-이석진 신부님-
사람이 살기 위하여 의식주 문제는 필수적입니다. 또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믿음, 희망,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두 문제를 염려하시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주시려고 합니다. “목자 없는 양 같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두 말씀은 주의 기도문 전반부와 후반부를 실천하시는 주님의 참사랑입니다. 정치, 경제 문제는 한 민족의 공동체나 모든 공동체의 참삶의 필수 조건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나 관리하는 사람이 자기 욕심만 이루려고 하고 국민을 돌보지 않으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불쌍해 보입니다. 한 공동체의 장이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을 돌보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제 식민지 시대 그들의 억압과 만용으로 서럽게 된 이유는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방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경제의 위기설, 실제로 청년실업 문제, 조기 은퇴 문제로 인하여 가정은 안정을 잃어가고 상대적이지만 빈곤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한 가정도 가장이 경제관념 없이 놀음이나 재산을 낭비하거나 능력 이상의 사치로 저축한 돈이 없으면 집 잃고 먹을 것 없어지고 춥게 살게 됩니다. 가장의 권위가 실추되어 존경심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가족이 일치하지 못하고, 화목이 깨지고, 충돌과 파멸이 옵니다.
주님이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하셨듯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인생은 망치게 됩니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지 않으면 악으로 인생은 끝장이 납니다. 주님을 믿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으면 현실에서 파멸의 길을 가고 결국은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집니다.
저는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는 주기도문을 입으로만 아니고 몸으로 드리도록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사람이 보여야
나눌 수 있습니다.
배고픈 이웃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나누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나누어야 할 시간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배고픈 이웃의
입장이 되어 나누는
풍요로운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나눔이 절실한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나누어야 모을 수 있고
모아야 나눌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욕심에 묶여있는 너와 나를
나눔으로 풀어주는
'풀림의 성사'입니다.
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나눔이 있습니다.
서로를 살리는
성체성사는
가장 풍성한
생명의 축제가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사랑으로 나눌 때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가 먼저 나누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 안에서
같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나눌 때
하느님 현존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초콜릿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돈 많이 벌어 초콜릿을 맘껏 먹겠다는 다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이 초콜릿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렇게 초콜릿을 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이 있어도 굳이 초콜릿을 구입하지도 않고, 제 주위에 초콜릿이 있어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가지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친구들이 자랑하는 유명 메이커의 신발이나 옷도 가지고 싶고, 이성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드디어 1999년 1월 28일 제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던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로 살고 있는 지금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제 마음의 변화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기준인 사랑의 마음을 따르다보니 그 누구보다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통해 오히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제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이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했던 저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모두 해 주셨습니다.
오늘 인천교구는 매우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새롭게 7명의 사제와 12명의 부제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들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커다란 일을 이루시겠지요. 그런데 그 일들은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서품 받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먼저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빵의 기적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배경이 외딴 곳이었습니다. 배불리 먹을 빵을 사오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그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먹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많은 양이었을까요? 예수님 혼자 드신다면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기에도 분명히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위해서는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행복의 기준을 새롭게 세울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이 채워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쓸데없는 기대를 버리고, 대신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항상 우리를 위해 최고의 것을 주시는 주님으로부터 멋진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변화가 클수록 기회도 많다.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 지혜라면, 기회를 잡는 것은 용기다(호설암).
지금 나의 선택은?
어느 마을에 아름다운 고성이 있었습니다. 그 성 한가운데는 연못이 있는데 개구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에 불이 났습니다. 개구리들이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뉘었지요. 하나는 빨리 이 성을 빠져나가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장 안전한 곳은 물속이니 가만히 엎드려 있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그룹은 물 밖으로 도망쳤으며 다른 그룹은 물속에 숨었습니다.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요? 물속이 정말로 안전한 곳이었을까요?
마을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연못의 물을 퍼서 불속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때 물속에 있던 개구리들도 불속에 던져져 죽고 말았지요.
분명히 불과 물은 상극이니 물속에 안전할 것 같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택도 이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생각보다는 순간적으로 모면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중요한 것은 내 행동에 따라올 결과를 늘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시는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선택을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정말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선택을 하십니까?
봉급 받는 날 아빠가 하늘을 보고
-이기정 신부님-
빵5개와 물고기2마리(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장정만도 5천명이 먹었다지요.
예수님의 기도 힘이 그랬다면 우리의 기도 힘은 5명 정도는 먹겠지요.
제자들이 남은 걸 모으니 12광주리 듯 우리도 남는 게 반 봉투는 되겠지요.
봉급 받는 날 아빠가 하늘을 보고 감사의 기도를 이렇게 올리면 좋겠어요.
‘가족이 나눠먹으며 살게 하시고 남은 건 이웃과 나누며 살게 하소서. 아멘’
모두가 자기 수입을 나눔 정신으로 하늘 뜻 따라 쓴다면 그게 천국이겠지요.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르코 6,42~43)”
하느님의 내리사랑, 우리의 치사랑 -사랑은 아름다워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1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2004년 로마에서의 3개월 코스의 '수도자 양성 프로그램(Monastic Formator's Program)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전 세계에서 30명 이상의 베네딕도회,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남녀 수도자들이 참석했었고, 그중 수도사제는 10명이었습니다.
"신부님, 영어 미사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 발음을 심히 불안해 한, 프로그램의 책임자 영국 베네딕도회 신부님의 우려 가득한 물음 이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하여 제 차례 때마다 10회에 걸쳐 맹렬히 준비하여 영어미사와 더불어 A4용지 한 장에 조각하듯 수없이 다듬어 정성껏 마련한 짧은 영어 강론을 했습니다.
몇 수도자들의 극찬을 잊지 못합니다.
"Good idea(좋은 아이디어다)!"
"Good message(좋은 메시지를 준다)!"
"Simple!(단순하다)!“
"practical(실제적이다)!
"Colorful(풍요롭다)!“
한 마디로 '아름답다'라는 평이었고, 이후 'Spiritual priest(영적사제)'란 말도 들었습니다. 아마 최선을 다해 준비한,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강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진리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공감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1요한4,9ㄴ).
요한 사도의 고백이 참 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속속들이 깨달은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짧은 1독서 안에 '사랑'이란 단어가 무려 10회 나옵니다. 하느님 사랑의 수원지에서 흘러내린 우리의 사랑임을 연상케 합니다. 이 사랑의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입니다.
그분 없이는 우리도 없습니다.
그분 사랑을 통하여 살고 있음을 깨달을 때 자연발생적 응답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치사랑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사랑한다는 자체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사랑 덩어리이자 하느님 사랑의 현존입니다.
내리사랑은 있고 치사랑은 없다 하는데,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내릿사랑을 통하여 살고 있음을 깨달아 알 때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 치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최고의 징표이자 현존이 바로 예수님이자 성인성녀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이런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깨달을수록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요 이웃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예수님이요 모든 성인성녀들입니다.
며칠 전의 신선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눈 내린 수도원의 풍광도 참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 하늘 향한 묘비명마다 흰눈으로 곱게 덮여 누가 누구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흰눈이 묘비명의 이름과 생몰연대를 덮어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걱정할 것 없다. 세상은 몰라줘도 나는 너를 안다.‘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같았습니다. 마치 묘비명을 덮고 있는 흰 눈이 하느님의 은총을, 겸손한 사랑을 상징하는 듯 참 신비로워 보였습니다.
드러날 때 보다 이렇게 가리워져 있음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세상엔 가리워져 있어도 하느님만은 아시는 사랑의 성인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에 가리워지는 겸손도 새삼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내릿사랑을 깊이 깨달았기에 평생을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삶에 행복해 했던 마리너스 수사님이었습니다.
수사님은 자신의 변신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면 트라피스트회의 라파엘 시몬 신부님의 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말로 응답하기를 좋아했다 합니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80-81쪽).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모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모든 맺힌 실타래 같은 의문들을 완전히 풀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내릿사랑을 깨달아 갈수록 걱정, 근심, 두려움, 불안도 점차 사라지고 '사랑의 빛'속에 삽니다. 도대체 하느님만으로 부요하고 행복하니 저절로 선호하는 숨겨진 삶입니다. 역설적으로 숨겨질수록 드러나는 삶입니다.
요즘 읽는 전임 교황님이신 베네딕도 16세의 저서(Holy men and women of the middle ages and beyond)를 통해서도 그분의 놀라운 하느님 사랑을 깨닫습니다.
재임중 매주 수요일 마다 중세기의 성인들 35분에 대해 강의한 내용인데 그 사랑과 지혜, 학식의 깊이가 그대로 교황님의 깊이를 반영하는 듯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강의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프랑스의 한 작가는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의 슬픔이 있으니, 그것은 성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 즉 하느님께 가까이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고 썼다. 성 프란치스코의 증거를 보건데 바로 이것이 참 행복의 비밀임을 이해하게 된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성인이 되는 것!(to become saints, close to God!)-
우리 인생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내릿사랑을 깨달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수록 성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되었습니다.'라는 성 요한의 고백이 오늘 복음에서 그대로 실증되고 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예수님의 사랑의 기적을 통해서 모두 배불리 먹고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내릿사랑과 예수님의 치사랑이 하나로 만나는 순간 발생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바로 우리가 봉헌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과 똑같은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말씀과 성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려 주시고 성덕을 더해 주시어 우리 모두 아름다운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족끼리 왜이래!’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정과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두부를 만들어 파시는 아버지는 늘 자녀들이 걱정입니다. 노처녀인 딸이 시집가면 좋겠고, 자존심이 강한 둘째 아들은 그 자존심 때문에 상처 받을까 걱정을 하십니다. 자기 앞가림을 잘 못하는 막내아들은 어서 좋은 일자리를 찾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의 자녀사랑에 비하면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도 자녀들은 병원엘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다들 바쁜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면 열일을 제쳐두고 병원엘 먼저 가셨을 것입니다. 가족끼리는 서로 참아 줄 수 있고, 가족끼리는 서로 용서 할 수 있고, 가족끼리는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가족끼리는 부족함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하얗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집을 나갔던 둘째아들을 기다려 주십니다.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여 주십니다. 처벌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가장 가까운 별에 가려고 해도 우리는 갈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이 우주에 우리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외롭게 떠있는 푸른 별이 지구입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작은 먼지와 같습니다. 먼지와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가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제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우리들 모두가 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사이에 세워진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혈연, 지연, 피부색, 학연, 계층, 이념’의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산울림’이란 말이 있습니다. 산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을 봅니다. ‘사랑해’라고 하면 ‘사랑해’라는 말이 들립니다. ‘바보야’라고 하면 물론 ‘바보야’라는 말이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상대방에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주님께 드렸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오늘의 성서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주어야 하는 것, 사랑 받기보다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의 유전자, 사랑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녀가 부모를 닮지 않을 수 있을까요? 거부하고 싶어도 남들이 보면 반드시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닮았을 것입니다. 분명 유전자를 부모에게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은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와 어떤 면이 닮았을까요?
박보영 목사님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었는데 그때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보영 목사의 아버지가 예배를 드리는데 뒤에서 한 여인이 미니스커트에 빨간 립스틱에 긴 속눈썹을 붙인 한 여자가 껌을 쩍쩍 씹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치마가 무릎 위에만 올라와도 경찰들에 의해 제재를 받던 때였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몸을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은혜를 받았는지 집회 중 앞으로 나와 뒤집어져서 실신을 할 정도로 울더랍니다. 자신이 삶을 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빚을 워낙 많이 졌기 때문에 그 다음날이면 계속 몸을 팔러 나가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매우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한 장로와 그의 아들이 그 여자가 매우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는 자신이 가진 땅을 팔아서 그 여자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박보영 목사의 아버지의 주례로 그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녀가 자신을 구해 준 한 사람의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 집에서 땅을 팔아서 여자의 빚을 갚아주면서까지 그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계속 이전의 모습을 하고 다녀야 할까요? 이전에 하던 행동을 계속 해야 할까요?
만약 이전의 삶을 계속 살아나간다면 그 집안에서도 계속 그 여인을 며느리로 인정하며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장로의 집에서 이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면 그래서 그 집안의 딸로 인정했다면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주어야만 그 집의 며느리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 창녀보다 더 깨끗한 사람이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지으면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해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땅을 파신 것이 아니라 당신 외아드님을 제물로 바쳐 그 피로 우리를 닦아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창녀 짓을 하는 것보다도 훨씬 하느님께 큰 아픔을 드렸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죽음의 값으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당연히 변화되어야만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성모님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로부터 태어나서 그분들과 당연히 닮아야 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본성이 사랑이신 분이라 사랑에게서 난 자녀 또한 그 본성인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그 안에 미움과 시기, 질투 등이 있다면 아직도 이전의 죄 속에 살면서 겉만 자녀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 본 대학의 마르틴 로이터(Martin Reuter) 박사는 COMT 유전자의 특정 변이형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선을 베풀 가능성이 2배나 높다고 밝혔습니다. 대학생 100명으로부터 구강면봉으로 구강점막세포를 채취, DNA를 분석해 COMT 유전자의 두 변이형 중 COMT-Val 그룹이 COMT-Met 그룹에 비해 기부하는 돈이 2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랑도 분명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DNA를 통해 이타적인 마음까지 유전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기면서 아무 유전자도 안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맺히게 하는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되돌리는 사랑, 나누는 사랑
-김찬선 신부님-
우리는 오늘 다소 뜻 모를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는 말씀은 맞고 그래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일까요? 우리가 사랑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게 하신 거라는 뜻일까요?
제 생각에 이 말씀은 이 모든 뜻을 다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사랑을 하려하고, 내 사랑으로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이런 사랑의 의지를 가져야지요. 그렇긴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내가 사랑하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기 전에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이런 태도는 이기주이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겸손이고 사랑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어린이이고, 어린이이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 어린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컸다고 부모의 사랑 필요 없다는 교만한 애송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죠. 부모의 사랑을 원하고, 그 사랑에 의지하는 겸손한 아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이 필요 없다고 할 때보다 당신 사랑이 참으로 필요하니 주십사고 할 때 당연히 더 기뻐하실 겁니다. 부모가 되어 가지고 사랑할 자식이 없다면 그것이 부모의 불행이듯 사랑이신 하느님께는 사랑할 수 없을 때 제일 슬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제 하느님을 사랑하되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코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랑의 의지만큼 사랑할 수 없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용돈을 받아 그 중의 일부로 부모님 생신 때 선물을 사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일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일부 <되돌리는 사랑>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이 말에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과 반드시 나눠야 한다는 뜻도 있고 이웃을 사랑하되 하느님 사랑을 제쳐놓고 인간적인 사랑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게 쓰는 말 중에 휴머니즘, 휴머니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냉혹한 사람보다는 인간애가 있는 사람이 좋긴 하지만 우리 신앙인에게 인본주의나 인본주의자는 자칫 무신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사랑의 의지를 가져야지만 없는 내 사랑으로 사랑하려 하지 않고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나누는 사랑>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의 서간도 이렇게 권고합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무릇 위에서부터 오는 내리사랑이고 이 내리사랑을 청해 받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도일 것입니다.
기능인인가? 함께 존재하는 사람인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같은 능력지상주의, 자격증 시대, 끝없는 경쟁 시대에 사랑이나 평화를 말하고 희생과 나눔을 실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선택사항으로 바뀌어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 제1독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주신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6,34).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단순히 불쌍히 여긴 것 그 이상으로 ‘마음이 동하여 한 마음이 되어 아파하셨다’는 뜻이다. 라틴어로는 ‘콤파시오’(compassio’, con + passio)가 잘 말해주듯 ‘더불어 느낀다’, ‘한 마음으로 아픔을 느낀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군중들의 마음 깊이 들어가 그들과 한마음이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허기진 군중들의 영혼의 갈증을 보셨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 현실적인 것을 먼저 찾는 우리와는 달리 그들의 메마른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을 채워주신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돌려보내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시라”(6,35)고 말한다. 이렇게 제자들은 군중과 ‘함께 하는 사랑’이 아니라 ‘눈앞에 벌어진 사람의 갈증’을 사무적으로 처리하려 했고, 각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 했다. 그들은 기능 위주의 해결, 성과(成果) 위주의 해결 방식을 선택하려 한 것이다.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 하신다. 그렇다! 사랑은 나를 건네주는 것이지, ‘저기에 있는’ ‘어떤 좋은 것’을 입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목말라 하는 이들 앞에서 ‘먼저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로 만들어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함께’ 철저히 남을 위하여 ‘움직이는’ 삶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제자들은 계속해서 물질주의적인 시각으로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6,37)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 분부하셨다. 여기서 빵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허리춤의 광주리에 넣고 다니다가 먹는 값싸고 거친 보리빵이고, 물고기는 거기에 반찬처럼 곁들여 먹던 말린 염어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초라한 음식을 보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심으로써 ‘하느님과의 만남’이 중요함을 깨우쳐주신 다음, 육신에 필요한 음식을 나눠주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시선과 제자들의 시선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의 삶을 성찰해 보자. 나는 하느님과의 만남보다는 일을 우선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과위주, 능력위주, 속도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하느님으로 인해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과는 무관한 일처리,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눈길에서 벗어나 ‘그들의 일’로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태도, 육적이고 외적이며 물질적인 시각에서 문제 해결을 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그렇다면 나는 ‘현대가 만든 죽음의 함정’에 스스로를 내모는 것이리라!
이제 예수님처럼 ‘함께 하는 존재’, ‘철저히 남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살아보자.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 안에서 먼저 그들의 영혼의 갈증을 읽고, 일처리보다는 먼저 하느님과의 만남을 중요시하자. 이것이 신앙인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런 태도가 값싸고 거친 가난한 이들의 보리빵을 풍요로운 하느님의 선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 하느님 앞에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는지 겸손되이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체성사는 가장 활기찬
사랑의 초대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는 식사의 자리
우리 삶, 일상의 자리가
성체성사의 자리입니다.
불편한 식사의
자리가 아니라
가장 편한 식사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하느님 사랑을
먹고 나누는
우리들이 됩니다.
행복은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입니다.
우리 마음을 채우던 분이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주님 안에서
한가족이 되는 성사입니다.
가족은 허기진 가족의
배를 먼저 채워 줍니다.
가족은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기다려주고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로움과 아픔을
사랑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삶의 자리에서
따뜻한 사랑을 나누십니다.
나누어야 할 것들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아프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은 인천교구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9명의 사제와 13명의 부제가 새롭게 탄생합니다. 아무쪼록 이들이 모두 주님께서 원하는 그리스도의 봉사자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어제 서품식의 마지막을 점검하면서, 사제직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15년 넘게 사제생활을 하면서 제가 확실하게 깨달은 점 하나는 사제라는 인간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사제직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사제가 거룩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 부분에 있어서 부족했던 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잘 났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제직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거룩함으로 인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룩함을 계속해서 간직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사제로써 자기가 맡은 바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때 그 거룩함은 내 안에서 더욱 더 진한 향기를 내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이 거룩함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이번 서품식을 위해 준비해주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보수도 전혀 없지만 단지 거룩한 사제와 부제가 탄생한다는 사실 때문에 큰 기쁨을 가지고 봉사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봉사와 사랑의 마음이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이 이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세상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셨던 세상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중들을 위해 제자들에게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재정적으로 넉넉한 제자들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말하면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님께 알리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만드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타난 주님의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봉헌했던 작은 정성이 주님의 커다란 거룩함을 이 세상에 드러내게 했던 것입니다. 사제들을 통해서 드러날 그 거룩함 역시 우리 모두의 작은 정성을 통해서 더욱 더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사랑과 봉헌 없이, 모조건 달라고만 한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주님의 뜻도 아니며, 또한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내 자신은 어떤 노력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 컵은 물이 반쯤 빈 겁니까? 아니면 반쯤 찬 겁니까? 그건, 네가 지금 물을 따르고 있느냐, 아니면 마시고 있느냐에 달렸지(빌 코스비).
나눔의 기적
톨게이트(tollgate)를 통과하는 차량 운전자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바로 앞차가 기분 좋은 하루가 되시라고 당신의 통행료를 대신 내주었습니다. 당신은 그냥 가도 되고, 뒤의 차 요금을 대신 계산해 주어도 좋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실험을 했었다고 하네요.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3시간 정도의 실험을 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뒤의 차의 통행요금을 대신 내주었다고 합니다.
사실 자신의 통행요금을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앞 차가 내 대신 통행료를 내주었다는 말에 기쁨을 갖게 되고, 또한 나 역시 뒤의 차 요금을 내주었다는 사실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눔의 기쁨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누군가 나누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적이었습니다.
기적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길 얼마나 원합니까? 그렇다면 나누어야 합니다. 나만 잘 되면 그만, 나만 많은 것을 가지면 그만이라는 이기심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서, 나눔의 실천이 일어나야지만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나누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나눔 릴레이가 계속되어서 주님의 기적 체험 역시 계속되기를 소망하여 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김대열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코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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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조각의 빵과 두 마리의 생선.
장정만 오천이 넘는 이들의 나눔.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했던 기적은 누구든 나눌 수 있고, 나누면 모두가 산다는 체험이었다.
세상의 부는 항상 천문학적이었지만 늘 소수의 차지였다.
마른 젖을 물고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 엄마들의 메마른 눈물의 책임을 우리 모두 피해갈 수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역시 나누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은 선하게 양심적으로 정당하게 살아왔기에 세상의 악과는 상관없다는 말은 하지 말자.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을 밟고 있고, 같은 하느님께서 내려다보고 계시다.
가난이 복음이 아니다.
모두가 부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불행히도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 복음이 될 수밖에 없다.
나누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나누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나누어야 한다.
다섯 조각의 빵과 두 마리의 생선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군중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나눔은 가능해진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섯 조각의 빵과 두 마리의 빵을 내어놓아야 한다.
나누라 하신다.
하느님께서 나누라 하신다.
그래야 진짜로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 하신다.
올해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는 우리이기를 바래본다.
<기적의 원동력, 내 작은 나눔>
-양승국 신부님-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가장 우세한 특징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풍성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고, 궁색하고, 쪼들리고,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고대해왔던 젖과 꿀이 철철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더 이상 가난도 눈물도, 아쉬움, 불평불만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살짝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귀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너무나 넉넉합니다.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십니다. 하인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암소도 한 마리 잡습니다. 풍성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린 배를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셨던 가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해보십시오. 잔치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잔치가 망했다, 파장이 되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니 즉시 상황은 반전됩니다.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던 물이 순식간에 격조 높은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약 600리터의 포도주입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군중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루만 굶어보십시오. 눈이 핑핑 돌면서 오로지 머릿속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흘을 굶어보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승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 쓰라린 뱃속을 외면한 채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필요성, 그들의 눈물, 그들의 슬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는 동질감, 합일감, 일체감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여겨들어야 할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기적의 첫 출발점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우리 인간 측의 미약하고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천 원짜리 두부
- 이영선 신부님-
갑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던 아녜스 할머니, 알고 보니 밭에 갔다 넘어졌답니다. 하필이면 바위에 팔을 짚어 팔이 부러졌습니다. 함께 온 딸은 병원비로 2백만 원 까먹었다고 투덜거리지만 2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오신 아녜스 할머니는 얼굴이 뽀시시 해져 왔습니다. 홀로 살면서 밥그릇과 장그릇 그리고 수저 하나로 진지를 해결하고 사셨습니다.
비린내 나는 반찬 맛보려면 장 보러 송정리나 나주까지 버스 타고 가야 합니다. 마을에서 하루에 두 번은 송정리로, 두 번은 나주로 가는데 버스 시간 맞추는 일도 어렵지만 차를 타고 내리는 일은 중노동입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온통 긴장의 연속입니다. 버스 기다리다 속절없이 하루 품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니 손 가는 곳에 있는 된장이나 간장에 밥 말아 후루루 마시는 걸로 시장기 속이고 논밭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80년을 써온 몸입니다. 이젠 쉬고 싶다고 신호를 보냅니다. 하지만 쉬 그럴 수 있나요. 거기다가 잡수시는 것도 그 모양이니 몸에 힘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습관처럼 호미를 놀립니다. '늙으면 밥심으로 산다는디....' 넘어지면 틀림없이 어디가 부러지고 맙니다. 아녜스 할머니 경우만이 아닙니다. 우리 동네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 할까, 생각다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반찬에 진지 잡수시게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토요일마다 두부를 만들어 저녁미사와 주일미사 때 나누어 먹자고 했습니다. 다들 좋으시답니다. 그래서 천 원짜리 두부를 만들어 팔기로 했습니다. 고등어도 떼어다 팔까?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에게도 공짜로 주셨는디 그 제자인 사제는 팔 생각합니다. 주님 자비를....
한 가난한 의과대학생이 돈이 다 떨어져 평소에 아끼던 서적을 헌책방에 팔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책방의 문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절망에 빠졌지요. 이제 먹을 음식도 살 수 없으니까요.
그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너무나 허기져서 도둑질이라도 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어느 집을 찾아들어갔습니다. 때마침 어린 여자아이가 집을 지키고 있었고, 차마 도둑질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부끄러웠지만 너무나 배고프다며 아이에게 먹다 남은 음식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기꺼이 우유 한 병과 옥수수떡 한 조각을 그에게 내미는 것입니다. 그는 허기를 채우고 난 뒤,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다면서 그 집의 주소와 아이의 어머니 이름을 받아 적어갔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어떤 부인이 병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딸은 너무나 걱정이 되었지요. 왜냐하면 수술비와 병원비를 대기에는 너무나 자신의 집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병원의 계산서를 받아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입원비와 수술비는 우유 한 병과 옥수수떡 한 조각임. 그리고 그 값은 이미 지불되었음.’
맞습니다. 수술을 맡은 의사는 바로 몇 년 전의 그 의과대학생이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이렇게 커다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음식을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청년은 의사가 아니라 도둑놈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어머니는 수술을 받아 치료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작은 사랑이 이렇게 모두를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 사랑의 기준을 따르기보다는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을 더 앞세우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논리적으로 말하지요.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장정만도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배불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에 의지하기보다는 사랑의 기준을 따르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사랑의 기준만 따른다면 그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불가능한 말씀이라며 포기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직접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필요 없음에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 역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눌 때 모두가 만족할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작아 보이는 사랑의 기준이라도 철저하게 따르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 사랑만이 기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서 모든 이가 부족함 없이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분노에서 자기 자신을 억제하려면 다른 사람이 화내고 있는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하면 된다.(세네카)
예언자적 소명의식
- 정찬호-
늦은 시간이 되자 군중들의 배고픔을 염려한 제자들이 그런 상황을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가 뜻밖에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나름 좋은 뜻으로 말씀드린 것인데, 되레 부담만 진 모양새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제자들의 실망하고 서운해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기적은 인간 편의 협조와 응답, 믿음을 요구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선한 지향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가 “그럼 당신이 해보구려”라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거나 후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슬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 위안도 해보고, ‘다음부터는 절대 나서지 말아야지’ 하며 굳은 다짐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돌아가는 일의 허점이 더 크게 보이고 그로 인해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하는 타인의 고통은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도망갈 수도, 침묵할 수도 없습니다. 고민은 깊어만 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마음의 상태를 ‘예언자적 소명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부조리한 사태가 나의 시선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것은 내가 그 일에 합당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의 눈을, 나의 입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찾으려 애쓸 일이 아닙니다. 어렵고 두렵겠지만, 예언자적인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두리가 사랑에 실패함은
-김찬선 신부님-
우리가 진정 사랑하고자 하나 그 사랑에 실패함은 어떤 연유인가?
그것은 내리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를 자식은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 자식을 부모는 그래도 사랑하는 것처럼 진정 사랑코자 하면 내리사랑을 해야 합니다.
내리 사랑이란 자식 때문에 하는 사랑이기보다는 부모이기에 하는 사랑이고 그래서 자식이 어떠하건 하는 사랑인 것처럼 내리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 사랑을 하려면 내리 사랑해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인간적인 상하개념이 아닙니다.
오늘 요한 1서가 얘기하듯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에서 오는 사랑을 하지 않고 인간적이 사랑을 할 때 사랑은 빨리 동나고 사랑은 미움으로 변합니다.
제가 사랑에 실패하는 많은 경우는 상대에게서 고통을 보는데 실패할 때입니다.
상대의 고통을 보게 되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큼을 보게 되고, 왜 그리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지를 보게 되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측은지심이 생기고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상대에게서 고통을 보기보다 잘 못을 봅니다.
고통이 아니라 잘못을 볼 때 우리는 도저히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엔 계산이 없다.
-전삼용 신부님-
어떤 신부님에게서부터 들은 것입니다.
어떤 경상도 신부님께서 나병 환자들이 사는 라자로 마을에 초대를 받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도대체 나병 환자들에게 어떤 강론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곳으로 가기 전까지 고민을 하다가 잠깐 성체 조배를 하면서 “주님 아무리 고민해도 어떤 강론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대답을 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런 문디이 자슥아, 강론을 니가 하나, 내가 하는 기지. 니가 그걸 왜 걱정 하나?”
결국 문둥이는 나병환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요즘에 머리가 빠져서 약간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보내 주셨으면 끝마칠 능력까지 주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의 능력으로 빨리 끝내려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시켜주셨으니 끝까지 책임을 지실 터인데 내 힘으로 하려다보니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이 가엾어 보여 시간이 늦도록 많은 것을 가르치며 일깨워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걱정이 점점 깊어집니다. 왜냐하면 더 늦어지면 남자만도 5천명이나 되는 이들이 모두 쫄쫄 굶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급기야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그런 것은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데 너희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니, 그렇다면 너희들이 한 번 알아서 해 보아라.’
혹은, “내가 먹을 것을 줄 터이니, 너희가 나누어 주어라.”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 세속적인 계산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이미 그 인원을 먹이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다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계산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의 계산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자 제자들은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구나!”하며 서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빵의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주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눈치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빵이 없다고 걱정들을 하다니, 너희는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아직도 모르겠느냐?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나 먹이고도 남아서 거두어들인 것이 몇 바구니나 되었느냐?” (마태 16,8-9)
결국 우리들이 세상 걱정을 하는 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완벽한 운전수입니다. 옆에 타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의 계산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실 때에는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아이들은 당연히 ‘돈?’을 요구합니다. 돈도 안 주고 심부름을 시키면 불량배일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 할 때는 우리에게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주시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 그것을 할 능력이 없어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능력조차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는 말씀은 ‘내가 주는 것을 나누어 주어라.’하시는 말씀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입니다. 아마 그래서 봉헌이나 십일조를 하기가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하느님보다는 우리의 계산을 더 믿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계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계산하며 사는 것은 주님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채워주신다고 믿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계산의 방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고향 가는 차비>
-양승국 신부님-
오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가 언젠가 찾아온 한 형제 생각이 났습니다.
본당으로도 많이 찾아가지만 수도원으로도 종종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보통 자신이 현재 처한 난감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들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비만 좀 해 달라"는 말씀이지요.
그럴 때 "고생 이제 그만 하시고 정말로 고향 내려가셔서 편히 사시면 좋겠다" 마음이 들어 직접 영등포역까지 함께 가서 표까지 끊어 기차를 태워드리곤 합니다.
그런데 그때 오신 분은 요구하는 액수가 벌써 달랐습니다. "포장마차라도 한번 해보려는데, 단 한 푼이라도 가진 종자돈이 있어야 리어카를 사든지 안주를 사든지 뭘 해보지요" 하시면서 "큰 걸로 한 장만 어떻게 안 되겠냐"고 자꾸 졸라대셔서 말리느라 혼났습니다.
사실 그분 표현대로 "맨땅에 헤딩하기"는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완전한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기란 정말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뭔가 작은 사업이라도 다시 한번 시작해보려면 어느 정도 가진 돈이-종자돈-있어야 뭐든 해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됩니다.
기적을 일구어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하느님의 역사하심, 함께하심, 도우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종자돈-인간 측에서의 성의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인간 스스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런 열의나 간절한 마음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맡겨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지 가서 알아보아라."
제자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소문한 끝에 겨우 손때 묻은 빵 다섯 개와 말라비틀어진 물고기 다섯 마리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종자돈 삼아 큰 기적을 이루어내십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대 기적 역시 한 소년의 작은 나눔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시절의 슬기로운 극복 역시 그 누군가의, 아니 바로 우리 자신부터의 작은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시작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크게 한번 마음먹고, 크게 한번 희생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 놓을 때 이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 역시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관대한 마음, 이웃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몇 년 전, 어떤 교육 때문에 한동안 전철을 타고서 서울을 매일 오고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내려올 때이면 항상 만나는 분이 계셨지요. 그분은 몸이 많이 편찮으신 듯 힘들게 이동하시면서 전철 승객들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면 항상 만나는 그분에게 매일 천 원씩을 드렸지요. 그분에게 이 돈이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만약에 드리지 않고 외면하면 내 마음이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매일 만날 때마다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요? 일주일 내내 그분을 만났는데, 똑같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듯 한 느낌이 들면서 오히려 불안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가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다는 것을……. 그분은 제게 행복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봉사와 나눔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와 나눔을 세상의 논리로만 판단하려고 하지요. 즉, 내게 있어서 남는 것, 여분의 것만이 베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봉사와 나눔을 해서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왜 이렇게 손해 보는 짓을 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봉사와 나눔은 이렇게 나에게 남는 물건이나 시간을 다른 이를 위해서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은총이 내려지는 통로가 바로 봉사와 나눔 안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것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 차원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하는 봉사와 나눔에 대해 모두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특히 협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또 냉담하면서 문도 열어 주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또한 악의를 품은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느냐고,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이 할 일 없어서 그런 줄 아느냐고 자신도 할 일 많은 사람이라고 큰 소리 치지요.
그런데 정말로 얻는 것이 없을까요? 세상이 나를 몰라줘도 또 본당 신부가 그리고 본당 수녀가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는 알아주십니다.
이렇게 세상의 논리를 내세워서는 진정한 봉사와 나눔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논리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하느님 은총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즉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정말로 대단하지요? 예수님만 계시면 굶어죽을 일도 없고, 아니 먹는 걱정을 굳이 하면서 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기적에서 잊어버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이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은 바로 우리들의 나눔과 봉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나에게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큰 기쁨이며, 큰 행복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이 바로 나의 나눔과 봉사로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 나눔과 봉사를 세상의 논리를 내세워 거부하겠습니까?
미래는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엘리노어 루즈벨트)
나눔의 실천
-류충희 신부님-
구약 성경에도 오천 명을 먹인 이적사화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이적사화(1열왕 17,8-16)와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적사화(2열왕 4,42-44)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엘리야나,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인 엘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41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마르 14,22)과 흡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되새기며 성만찬례를 지내던 초대교회 교우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대할 때마다 틀림없이 성만찬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교회이며 우리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눔을 실천할 때 우리 주변에 고통 받는 이들이 없을 것이고 복음 말씀처럼 항상 먹고 남은 것도 열두 광주리가 될 것입니다.
믿음엔 계산이 없다.
- 전삼용 신부님-
한 번은 연세 있으신 신부님을 옆에 태우고 어디를 가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 출신이고 제대 후에 아르바이트로 기사생활도 조금 해 본 경력이 있어서 어느 정도 운전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앞을 보니 주차되어있던 차가 뒤로 후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속도를 더 내어 그 차가 뒤로 더 빠지기 전에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타 있던 신부님께서 차가 부딪히는 줄 알고 ‘으악!’하며 소리를 지르며 몸을 운전자 쪽으로 움츠렸습니다.
저는 좀 더 안전하게 차를 몰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조수석에 탄 사람은 운전하는 사람보다 더 겁을 많이 먹기 때문입니다. 저도 남들이 운전하는 차에 타면 겁이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끔은 옆에서 놀라는 소리 때문에 더 놀라는 경우를 자주 겪게 됩니다. 나는 안전하게 운전한다고 생각을 하는데도 상대는 그렇게 비명까지 지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무래도 운전자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이 가엾어 보여 시간이 늦도록 많은 것을 가르치며 일깨워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걱정이 점점 깊어집니다. 왜냐하면 더 늦어지면 남자만도 5천명이나 되는 이들이 모두 쫄쫄 굶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급기야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그런 것은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데 너희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니, 그렇다면 너희들이 한 번 알아서 해 보아라.’
제자들은 계속 세속적인 계산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이미 그 인원을 먹이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다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의 계산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의 계산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자 제자들은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구나!”하며 서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빵의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주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눈치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빵이 없다고 걱정들을 하다니, 너희는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아직도 모르겠느냐?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나 먹이고도 남아서 거두어들인 것이 몇 바구니나 되었느냐?” (마태 16,8-9)
결국 우리들이 세상 걱정을 하는 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완벽한 운전수입니다. 옆에 타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의 실력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기 때문에 위기를 느끼고 걱정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지금 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입니다. 아마 그래서 봉헌이나 십일조를 하기가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하느님보다는 우리의 계산을 더 믿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을 오롯이 믿기 보다는 자신들의 계산을 더 믿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
사랑을 해야 사랑을 알리니
-김찬선 신부님-
성경을 통 털어 가장 뛰어난 언표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즉 사랑의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표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도 이것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는 오늘 우리가 들은 첫 번째 독서, 요한의 첫째 편지 4장 7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언표를 꼽고 싶습니다.
불교나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조론도,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이시라는 삼위일체론도, 그 밖의 모든 교리도, 그리고 사랑 실천의 계명도 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여기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어떤 분임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을 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랑하지 않고는 하느님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학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아무리 수덕생활을 많이 해도 사랑이 빠지고 그래서 사랑 실천이 빠지면 다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알갱이가 빠진 것이지요.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를 안다고 합니다.
자식을 낳기 전에는 부모를 알아도 껍데기만 알 뿐 알갱이는 모르고 부분, 부분 조금은 알아도 속속들이 전부는 모르고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사랑이 실천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그러다 자식을 낳아 사랑을 실천하게 되니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그 본질, 알갱이를 알게 되고 사랑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자식에 대해서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리고 책임감으로 이런 사랑을 합니다.
문제는 다른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문턱을 넘어야 하느님의 더 큰 보편적 사랑을 알게 되는데 우리는 보통 이 문턱 앞에서 멈칫거리며 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알고 그 하느님 사랑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머뭇거리지도 말아야 하고 멈추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기도하듯
‘주님 저들에게 옷을 주소서.’
‘주님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소서.’
‘주님 저들을 위로하여 주소서.’하고 하느님께 떠넘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라는 명목으로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의 실천을 하느님께 떠넘깁니다.
실상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드리지 않아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해야 할 뿐입니다.
그것도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사랑을 할 때 사랑을 배우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군중을 돌려보내 먹을 것을 해결하게 하자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군중을 배불리 먹일 계획을 다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없이도 먹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랑 실천의 의지를 북돋우시고 사랑의 그 엄청난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사랑의 그 한량없는 풍요를 몸소 체험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결승선을 통과하며>
양승국 신부님
한때 저도 ‘체력 빼면 시체’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폐기능이 탁월했습니다. 거기다 심장박동도 아주 느렸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마라톤에 꽤 적합한 조건을 갖췄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단축마라톤대회에 참석을 했었지요. 제 짧은 경험상, 정식마라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단축마라톤에서는 초반승부가 중요합니다. 치밀한 작전이니, 페이스 조절이니 하지만, 레이스 초반부터 뒤쳐지면 나중에 따라잡기는 정말 힘듭니다. 초반부터 무조건 선두그룹에 끼는 것이 가장 큰 관건입니다.
저는 시작을 알리는 총포소리가 들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10분정도 달리다보니 다른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 달리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2위권 그룹들은 까마득한 뒤쪽에서 무리를 지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3, 400미터 이상 거리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됐다, 하는 마음과 동시에, 이제부터는 다른 방법이 없다, 포기하지만 말고, 지금 페이스대로만 밀고 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웬걸, 반환점을 돌고 나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초반의 무리가 즉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급격한 체력저하와 동시에 두통, 복통, 호흡곤란 증세가 동시다발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길가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릿속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처럼 멋지게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결승선에 서있는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우승한 사람에게 주어질 커다란 트로피, 꽤 거금이 걸린 우승상금...
고지가 바로 저긴데,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다시 힘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마라톤 코스를 달려가는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매 순간이 얼마나 힘겨운지 모릅니다.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을 가로막는 암초나 장애물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열심히 뛰려는 우리에게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뿌려대는 사람들도 한두 명이 아닙니다. 주저앉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다 집어 치우고 되는대로 살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그럴 때 마다 ‘결승선’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그 결승선은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소개되고 있는 복음구절은 하느님 나라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풍요로운지 모릅니다. 다들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굶주림도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슬픔도 없습니다. 눈물도 없습니다. 죽음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존재인 나약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만이 흘러넘칩니다.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절절한 측은지심만이 가득합니다.
그곳은 우리의 작은 선행, 우리의 작은 봉헌, 우리의 작은 나눔, 우리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몇 천배, 몇 만 배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짊어지고 있었던 고통과 십자가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숱한 죄악과 배신도 말끔히 씻어지는 곳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너무나 힘겨워 그만 모든 것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단 한발자국도 전진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사방이 온통 꽉 막혔다는 느낌이 들 때... 꼭 기억하십시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 견딘 사람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릴 곳을 다 달린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클 것입니다.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신발 끈을 고쳐 묶은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선물은 풍요로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건복 신부님-
본당신부로 사목할 때, 병자를 방문하러 가다가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울면서 무엇인가를 외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학생들은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 당신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들도 당신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이들도 천국의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이들에게도 구원을 주십시오. 이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남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로만칼라를 하고 학생들 옆에 서 있는 저를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순간 저는 부끄러운 생각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저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사제로서 쉬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모르는 비신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또한 큰길가에 서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신다고 소리쳐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에 앞서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사랑을 눈물로 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저를 사랑하시어 사제로 뽑아 세워 주셨고, 평생을 갚아도 못다 갚을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께 어떠한 삶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나누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해 봅니다.
-정연동 신부님-
손들과 입들이 있습니다.
어떤 손은 나아가서 악수를 합니다. 그 손은 화해가 됩니다.
또 손은 누군가를 보듬어 안습니다. 그 손은 평화가 됩니다.
손은 궂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 손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고도 손은 계속 나아가서, 용서가 되고,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손은 나아가서 부딪힙니다. 그 손은 폭력이 됩니다.
또 손은 누군가를 밀어냅니다. 그 손은 배타가 됩니다.
손은 고운 일만 찾기도 합니다. 그 손은 이기심입니다.
그러고도 손은 계속 나아가서, 다툼이 되고, 미움이 됩니다.
입도 있습니다.
어떤 입은 열리면 기도가 나옵니다. 기쁨의 말을 쏟아내고, 화해와 용서, 평화와 진리를 말합니다. 그 입은 사랑의 입입니다.
그러나!
어떤 입은 열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합니다. 욕심을 쏟아내고, 다툼과 오해, 거짓을 말합니다. 그 입은 미움의 입입니다.
오늘 예수님 입을 떠난 찬미와 예수님 손을 떠난 나눔이 오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군중을 먹이는 기적이 됩니다. 군중을 먹이기전 예수님 입과 손을 떠난 찬미 기도와 나눔의 손길은 사랑의 기적을 낳습니다.
오늘 여기에도 손과 입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 기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손과 입을 떠난 그 무엇이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내시길 기도합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월요일이었던 어제 새벽 3시쯤 전화가 울립니다. 잠이 들 깬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지요. 상대방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들떠있었습니다.
“신부님, 너무 이른 시간이라 죄송한데요. *** 형제님께서 지금 너무 위독하셔서 병자성사 청하기 위해서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저는 간단히 양치질과 세수를 한 뒤에 곧바로 그 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에 누워 계신 형제님을 뵙는 순간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형제님은 레지오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성당의 봉사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분으로, 글쎄 불과 몇 시간 전에 저와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사에서 풍산개를 키우는데 새끼를 6마리나 낳았다면서 환하게 웃으시던 그 모습이 선한데, 이렇게 힘없이 누워 계신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 위에서 자신의 뜻대로만 모든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많은 욕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으며, 교만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시지요. 그런데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제자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인간적인 먹을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인데, 그들은 인간적인 먹을 것을 이유로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을 떼어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인간적인 문제를 제자들이 해결해보라고 이야기하시지요.
분명히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로 이 세상의 관점으로 문제들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주님과 함께라면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봉헌입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그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실 수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면서 봉헌을 요구하십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이가 먹고도 남는 엄청난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주님께 봉헌한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써 변화시켜서 우리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러한 마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의 삶 안에서 매 순간 놀라운 기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을 굳게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마음
-이중섭 신부님-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특징은 즉각적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나? 이 사람이 기적의 은혜를 입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예수님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당신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불행과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둘 수 없는 그분의 즉각적 반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계속 딴청을 부렸습니다.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 있느냐? 가서 보아라.”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은 있던 빵을 분배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없던 빵을 있게 만드는 기적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곡식 낟알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하느님의 업적을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주를 지어내고 질서를 매겨 운행하는 일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일보다 훨씬 더 큰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인기를 끌거나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예수님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지금 배부르십니까?
-주영길 신부님-
많은 사람들이 늦은 시간 또 외딴 곳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따라왔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적이다. 각자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해결하고 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이다. 풍족한 가운데 나눔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 나눔의 실천이다.
비만·당뇨·고혈압 등 현대의 많은 질병은 먹지 못해 생긴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난 것이다. 영양은 포화상태인데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풍족한 먹을거리에도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한 웰빙 열풍까지 불고 있다. 그리고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 거들고 있다.
언젠가 필리핀에 선교 체험을 다녀온 후배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부자가 나누지 않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엄격히 차단되어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필리핀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라 한다. 부자 동네는 가난한 동네와 엄격히 구별되어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부자 동네는 경비가 철저할 뿐 아니라 울타리까지 쳐 있고 그 안에서 쇼핑과 교육, 여가 생활 모두가 가능했다. 가난이 무엇이고 배고픈 처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종교는 ‘단식’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교회도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 한 끼 단식을 의무화하고 있다. 가장 엄격한 종교는 이슬람교인데, ‘라마단’ 기간에는 낮 동안 물조차 먹지 않는다. 이러한 단식행위는 극기와 보속의 의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배고픈 이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배고픔을 알지 못하는 풍요 속에서 살지만 배고픈 이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단식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1요한 4,7)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신 사랑법
-오상선 신부님-
요한은 우리에게 금년에는 제발 좀 사랑하자고 신신당부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비천한 우리들을 위해 당신의 독생성자까지 아낌없이 보내주셨음을 보지 않았냐는 것이다.
우리가 지내는 성탄시기는 바로 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 축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할까?
오늘은 그 해법을 5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을 것같다.
먼길을 와서 피로에 지친 이들, 말씀에 굶주려 지친 이들, 제대로 먹지 못해 지친 이들, 이들에게 무엇을 먹여야만 할터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적인 난제가 숙제로 주어졌다.
제자들은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그럴싸한 해법을 주님께 내놓았다.
각자 해결하는 방안이 가장 좋겠노라고...
그래서 마을로 돌려보내 얻어먹든지 사먹든지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또 그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신다.
아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황당해 한다.
<아니, 우리가 말입니까?>
우리가 무슨 가진게 있다고...
우리가 돈이 많나, 빵이 많나,
능력이 많나, 재능이 많나...
빤한 우리 사정 잘 아시면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무슨 수로 이 많은 사람을 우리가 먹인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별 능력도 재력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당신의 뜻은 <내가 먹이겠다!>는 말이다.
내가 먹일터이니 너희는 봉사나 하라는 이야기다.
이 논리, 저 논리를 대 가면서 이것이 옳니, 저것이 옳니 따지지 말고 그냥 그분께서 알아서 하실테니 그냥 시키는 대로 <예> 하기만 하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거두어 모았고, 사람들을 50명, 100명씩 나누어 앉게 하였고, 예수님이 나누어 주라는 대로 조금씩 나누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여기서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화신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이 일어남을 믿어야 한다.
단순히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요셉이 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그냥 묵묵히 겸손되이 봉사하면 된다.
이것이 신 사랑법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신식 사랑법이다.
이 사랑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금년 한해 이 신식 사랑을 한번 멋지게 해보자.
그리고 그 사랑의 원 주인이신 하느님께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려 보자.
오늘 30년간 노숙자들을 위한 밥집이었던 용산 베들레헴의 집이 재개발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된다.
이곳은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 시키는대로 묵묵히 봉사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한 수많은 은인들과 봉사자들로 인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제 그 사랑의 기적은 또 다른 현장에서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때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마음의 구유에서 재탄생하시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 천 명이었다."
<고참들끼리만 라면을>
-양승국 신부님
우리가 느끼는 소외감 중에서 가장 큰 소외감은 음식으로 인해 느끼는 소외감일 것입니다. 야심한 시간, 고참들끼리만 낄낄대며 라면을 끓여먹을 때, 구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운 이등병이 느끼는 소외감은 아마도 "죽음" 이상의 소외감일 것입니다. 라면 특유의 은근한 냄새, "후루룩 후루룩" 들려오는 라면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겠지요.
반대로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기분 좋은 말, 가장 귀에 익숙한 정겨운 인사는 "밥 먹자!", "식사하셨습니까?", "한 잔 할래?"와 같은 인사말일 것입니다.
제 어린 시절 절친했던 친구의 따뜻한 어머니 모습은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던 저였기에 은근히 성가시기도 하련만 친구 어머니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친구와 정신없이 놀다보면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 되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 어머니는 "어서 앉거라. 찬은 없지만 한 숟가락 같이 뜨자!" 하시면서 제몫의 밥 한 그릇도 챙겨주시곤 했습니다. 고맙게도 고봉으로 말입니다. 돌아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없이 살던 시절 참으로 눈물겨운 순간이었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특별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행복의 순간은 온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는 순간이겠지요. 도란도란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저녁을 드는 순간의 기쁨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리고 지친 백성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당신 식탁에로 초대하십니다. 말씀에 심취해서 끼니도 잊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현실로 돌아왔을 때 하루 내내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시간,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토록 자비 충만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분, 우리의 멸망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 분이십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허기, 아무리 마셔도 해소되지 않는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주실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연민의 하느님, 우리의 결핍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몸과 피로 채워주시는 나눔과 헌신의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참 신앙인의 표인 사랑
-경규봉 신부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느님의 요구이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3,11; 요한 13,14-17.35).
하느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을 뜻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를 뜻한다(3,18).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난 자녀이며 하느님을 아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서만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과 단절되고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위하여 당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다. 사랑은 영원하며 변함이 없다. 사랑은 부족함이나 모자람, 아쉬움이 없다. 사랑은 풍요로움이며 충만함이다.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감싸는 너그러움이며, 용서이다. 사랑에는 질시나 배척이 없다. 사랑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하느님께서는 풍요롭고 충만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피조물 가운데 유독 사람만은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시되 직접 만드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닮았고 직접 만드신 사람을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욱 더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신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점은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을 통해서 드러났다. 제 2위 하느님이신 성자로 하여금 사람이 되도록 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창조주가 그 모든 지위를 다 버리고 피조물의 지위로 낮아질 정도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다 함은 곧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지위로 들어 올리실 정도로 그만큼 사람을 사랑하신다. 더욱이 하느님이신 성자로 하여금 십자가상의 제물이 되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으로써 사람의 죄를 대신 기워 갚도록 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불사불멸의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죽음을 당할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 - 목숨까지도 바칠 정도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끝이 없고 변함이 없이 영원하다. 사람이 어떤 죄와 악행을 저질렀다할지라도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없이 용서하신다.
참 신앙인은 그와 같은 하느님의 끝없이 크신 사랑을 알고 느낀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신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자신을 사랑한다.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다른 이들도 사랑할 줄 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태 19,19)라는 주님의 계명을 잘 알고 지키는 것이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고린 13,1-3)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했다.
사랑,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참 신앙인의 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며, 그 사랑을 사는 신앙인이 되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윤경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현대 과학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적혀있는 것이 글자 그대로 과연 일어났는가? 하며 당황해 할 지 모릅니다. 기적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지금 여기서 언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이 기적의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사가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기적에 대한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이야기의 핵심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군중과 제자 그리고 예수님인데, 군중은 전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배불리 먹었던 군중에게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라는 것을 직접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이 감동을 받았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그러한 기적이 예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제자들뿐입니다. 제자들의 행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해가 지는 저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외딴 곳까지 따라온 군중을 보고 걱정스러워 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자"(15)고 건의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군중은 무엇인가에 굶주려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고, 정신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진정한 구원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존경하며 동네에서 외진 곳까지 육로를 따라 온 것입니다.
제자들도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목자를 잃은 양처럼 사람들이 지쳐있지만, 손을 쓸 수단이 제자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 그곳에서 음식을 사먹게 하는 일반적인 방법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 볼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력한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식적인 수단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16)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보다 분명히 자신들의 한계와 무력함을 깨닫게 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갖고 있지 않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의 굶주림, 목말라 하는 갈증, 무거운 짐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구원이라는 차원에 관해서 제자들이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노고, 무거운 짐을 메고,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제자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을 위한 빛과 힘을 끌어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일반 군중들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인격에 이끌려,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보다도 깊게 예수님의 신비에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교육시키시고 역할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특별하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그들에게만 비유를 설명해 주시고, 그들을 특별히 지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네를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낫게 하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제자들을 당신과 백성들 사이에 내세우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습니다. 실제로 빵도 제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들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될 때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더욱 더 예수님을 신뢰하고 보다 더 예수님의 신비에 다가가 예수님께 빛과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아멘...........◆
생산자 부담의 원칙
-박상대 신부님-
예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베푸신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언제 들어도 신명나는 일이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여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마르코복음뿐 아니라 4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다.(마태 14,13-21; 마르 6,32-44; 루가 9,10-17; 요한 6,1-15) 이 기적에서 예수께서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도 5,000명을 먹이셨다. 그런데 마르코와 마태오는 또 다른 빵의 기적을 전하고 있다.(마르 8,1-9; 마태 15,32-39) 이 대목은 예수께서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000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셨다고 보도한다. 빵과 물고기의 숫자와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숫자를 빼고는 두 기적사화가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 먹고 남은 조각들을 모두 모았더니, 첫 기적에서는 12광주리(마르 6,43)가 가득 찼고, 두 번째 기적에서는 7광주리(마르 8,8)가 가득 찼다고 한다. 가득 찼다고 하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넘치도록 풍성하다는 뜻일 것이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들을 모았더니 12광주리와 7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말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12광주리는 이스라엘의 12지파(창세 35,23-26; 민수 1,5-49)를 가리키는 상징으로써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온전히 재건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7광주리는 전성기 구약시대, 즉 여호수아가 점령한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였을 당시에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주변의 일곱 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일곱 나라가 정확히 어떤 나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세계와 전인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이 빵의 기적을 두 번씩 보도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이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제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실재(實在)는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으로 드러난다.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은 영적(靈的)인 양식이요, 기적은 육적(肉的)인 양식이다. 육적인 양식으로서의 기적은 병자들의 치유와 일용할 양식으로 베풀어진다. 빵의 기적은 곧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이 어떻게 베풀어지는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예수님의 손에 올려진 양식은 성자(聖子)의 감사기도와 성부(聖父)의 축복으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일용할 양식을 자신의 힘으로 벌어먹는다고 하지만 원초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선물이다. 일용할 양식은 곧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생산자 부담"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37절)고 하셨지만 결국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생산자 부담"의 원칙을 지키셨다. 되도록 "사용자 부담", "수신자 부담", 또는 "소비자 부담"에 익숙해 있는 우리 인간들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생산자 부담"의 원리를 배워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에 대한 "생산자 부담"의 원칙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인간 측의 기여를 원하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 역사 안에서 AD 30년~70년은 기적의 시대라고 칭할 만큼 예수님과 사도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적들이 행해졌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 마귀를 쫒아내는 기적, 죽은 사람조차 소생시키는 기적, 그리고 빵을 많게 하는 기적...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기적 앞에서 신앙을 갖게 되고 마침내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대대적인 회심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배경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 서두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굶주린 군중을 향한 가엾은 마음’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 기간에 접어든 AD 30년경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목자들은 양들에게 거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도움은커녕 양떼를 잘못 인도해 독초를 뜯다 죽게 한다든지 이리떼 근처로 인도해서 잡아먹히게 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어떤 목자는 차라리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눈에 즉시 들어온 것은 ‘가엾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 측의 결핍, 우리 인간들의 죄악, 우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살아가는 한계와 나약함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군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개별적으로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우리 인간 측의 나약함과 한계, 죄와 비참함입니다.
그렇다면 안심이 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 앞에 엄청나게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그리 많이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 순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으로 부르고 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에서 우리가 눈여겨 바라볼 특징적인 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협조 없이도 속전속결로 엄청난 일을 다 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빵을 많게 하시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협조를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정말 작은 기여 손때 묻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반으로 만 여명의 사람들을 배불리는 사랑의 대 기적을 일궈내십니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사도직이 교회나 사회에 별로 큰 기여가 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사도직이라 할지라고 그 일을 하느님과 연결시키고 교회와 연결시키면 그 일이 곧 하느님의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웃들에게 행하는 작은 친절 하나, 해맑은 미소 한번, 환한 인사 한번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엄청나게 큰 사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