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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5월 1일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04.30|조회수157 목록 댓글 0

제1독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자, 사도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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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혔다가 주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자,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몹시 당황하며 사도들을 데려 온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이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갇혔기에 도망쳐야 할 텐데 이들은 또 같은 곳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들이 다시 잡힐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참된 진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맛본 이들은 거기에서 얻는 행복 때문에 그 진리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진리를 증언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요한 18,3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선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어두운 동굴에 비치는 한 줄기 빛처럼 우리에게 당신만이 참행복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행복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 빛을 따라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게 됩니다. 분명 그분을 행복이라 믿지 않는 이들은 동굴에 머물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참행복이심을 믿지 않는 이들은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름이, 곧 복음을 선포함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 될 때 오늘 독서의 사도들처럼 영원한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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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두움의 대조는 요한 복음 저자가 복음서 처음부터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반대로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때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면서 온통 빛으로 가득한 삶이란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어두운 인생만 있으란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다 보면 회색 지대도 필요하고,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순간도 필요하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구원의 빛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죽음을 물리쳐 이겼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들과는 달리 복음서 시작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고백하고, 그분이 바로 인류의 빛으로 오시어 어두움과 죽음을 이겨 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이 두려워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대사제와 사두가이파들의 어두움과 반대로, 감옥에 갇혔어도 천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에 나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빛의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씀처럼, 지금 내가 회색 지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내 안의 어두움을 이겨 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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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복음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 방식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시어 악인들을 처벌하시고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만드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메시아,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심판자를 기다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머무는 곳입니다(요한 8,44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드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요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악’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과 그에 속한 사람은 죽음의 심판을 받습니다(요한 8,23-2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로 세상의 악에 대한 결정적 승리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기에(1요한 4,6 참조), 거짓을 일삼는 악의 세력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을 이겨 내는 사람으로서 용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미워하는 사람들과 이웃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고 덮어 줄 은총을 받았습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과 용서는 부활의 능력이 가져다 주는 열매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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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그런데도 하느님을 무섭고 벌하시는 분으로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심판’이란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평소 내가 하느님을 어떻게 대했느냐? 이 점에 따라 내가 먼저 나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기쁨과 평화를 누린다면, 그는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되겠지요. 

반면 악의 경향에 물들어 있는 자들은 빛과 선의 세계가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어둠의 세계가 더 편하겠지요.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자신을 단죄하고 만 것이지요. 우리 인간들이 지닌 온갖 고민과 속박은 스스로 만들어 내고, 거기에 자신이 묶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당신의 빛을 비추시는데, 단지 사람에 따라 그 빛을 거부하기도 하고, 또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점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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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인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1922년에 발표된 이 시는 매우 어렵고 길어서 끝까지 감상한 사람도 드물겠지만 그 첫 소절만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부활 시기에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며 환멸과 불안과 죽음을 음울하게 노래하는 시를 떠올리니 묘한 기분이 듭니다. 사월이 분명 봄이면서도 화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종 변덕스러운 날씨를 보이듯이, 부활 시기에도 여전히 '잔인한' 순간은 우리 삶의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흘 동안 예수님께서 당신을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의 요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밤은 성찰의 시간입니다. 깨달음과 배움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숨기는 어둠의 시간이기도 하고 비겁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뒤로는 늘 이러한 밤의 두 얼굴을 고민하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부 활은 밤으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증언하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일신의 위험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기쁨에 넘쳐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가 순교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황무지'를 노래한 엘리엇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된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 순교자에 대한 영감 어린 시극 『대성당의 살인』을 썼습니다. 켄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 성인은 국왕이 보낸 무도한 자객을 막으려고 성당 문을 걸어 잠그는 사제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빗장을 벗겨라! 문을 열어라! 나는 기도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교회인 이 성소를 요새로 만들지는 않겠다. 교회는 교회의 방식대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중략) 교회의 문은 열려야 한다, 적들에게까지도. 문을 열어라!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직 고난으로 정복해야 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다. 이제 십자가의 승리가 임박했다. 자, 문을 열어라!"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기에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3,8 참조). 또한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자기의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자 빛을 미워하고 그리로 나아가지 않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요한 3,20-21 참조). 

이 '잔인한 달'을 보내며 인간의 속셈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시원한 자유를 느끼며 주님의 부활을 빛 속에서 당당히 증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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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복음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심판 쪽을 더 많이 생각합니다. 미구에 오실 주님도 심판하실 분으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도 ‘단죄’가 많습니다. 별것 아닌데도 가혹한 판단을 내리며 살고 있습니다.

실수를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하기는 더욱 쉽습니다. 이유를 갖다 대기만 하면 됩니다.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실패했으니까 어떤 근거를 갖다 붙여도 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굉장히 ‘좋은 결과’인데도 부정적인 비판을 가하면 긍정적인 반응은 약해집니다. 그럴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쉽게 비판합니다. 혹독한 결정을 내립니다. ‘대항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돌팔매’를 던집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렇지만 실패한 사람을 ‘감싸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사업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혼인 생활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당연히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좋은 점을 더 많이 보십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비판하는 일을 조금은 삼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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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불안을 느낍니다. 막연한 미래와 불투명한 앞날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빛의 생활이 없는 삶은 금방 어두워집니다. 기쁘고 환한 삶이 어느 날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빛의 생활을 멀리했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밝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빛의 생활입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 그리고 자선입니다. 특별히 자선은 남모르게 하는 착한 행동입니다. 쉽게 접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힘들게 생각합니다. 가진 것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베푸는 것에는 물질만 있지 않습니다. 따뜻한 말, 다정한 눈길, 부드러운 표정 등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선의 요소들은 참 많습니다. 그렇건만 우리는 인색합니다.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닌데도 어려워합니다. 몸에 배지 않았기 때문일 테지요. 실천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분명 큰 은총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없애시는 분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보다 내 삶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더 급합니다. 주님께 빛을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다른 이에게 빛으로 다가가면, 어느새 주님께서는 더 강한 빛으로 다가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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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뮤지컬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릭’은 흉측한 얼굴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경멸과 학대를 받으며 다락방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는, 부모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기 혐오와 공격성을 지닌 유령이 되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재적인 음악의 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크리스틴이라는 배우를 만나 그녀에게 자신이 가진 음악의 마법을 부여하여 공연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목소리로만 음악의 능력을 주는 가면 쓴 유령이 크리스틴에게는 ‘음악의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유령은 그녀의 연인 ‘라울’을 향하여 질투와 복수심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결국 그는 라울을 잡아 마법의 밧줄로 묶고 크리스틴에게 자신과 영원히 살든지, 라울을 죽게 하든지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평생을 가면 뒤 어둠 속에서 살았던 외로운 유령이 크리스틴을 만나, 필사적으로 빛으로 나아가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집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유령의 이런 아픔을 깨달은 크리스틴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키스를 합니다. 그녀가 준 단 몇 초의 사랑이, 가면 뒤 긴 어둠의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됩니다. 그러자 유령은 그녀를 놓아주고, 그가 쓰고 다녔던 가면을 벗어 둔 채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누구에게나 가면으로 가리고 사는 흉한 내면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면 뒤 얼굴을 내밀기가 두려워 빛보다는 어둠 속에 있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면 뒤에만 숨어 살면, 어둠은 또 다른 어둠을 낳아, 더욱더 고립되고 맙니다. 결국은 자신의 어둠에 갇힌 ‘오페라의 유령’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 사랑의 빛을 받지 못하면, 또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꺼내 주지 않으면, 세상은 가면을 쓴 유령의 세계가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이런 걱정을 하고 계시네요.



 



내가 닮으려는 사람이 내가 향하는 곳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도시에 아름다운 소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최고의 예술가가 최고로 아름답게 제작한 도시의 명물이었습니다. 비록 동상이었지만 그 소녀 동상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가난한 시골 소녀가 그 도시에 왔다가 그 소녀의 동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골소녀는 그 동상에게 반한 듯이 한참을 쳐다보다가 집에 돌아갔습니다.

소녀는 그 동상의 소녀를 닮고 싶었습니다. 매일 동상을 보고 자기를 보았습니다. 동상의 깨끗한 얼굴을 보고 집에 가서 세수를 했습니다. 동상의 단정한 머리를 보고 자신의 머리 모양을 단정히 했습니다. 다음 날 그 소녀는 다시 동상 앞에 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헤어진 옷을 수선했습니다. 다음 날도 소녀는 동상 앞에 서 있었습니다. 소녀는 동상의 소녀처럼 방긋 웃는 표정을 연습했습니다. 소녀는 매일 동상 앞에 찾아왔고 동상을 닮아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도시를 아름답게 했던 동상의 소녀가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동상의 소녀를 닮으려는 시골 소녀는 어느덧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의 선망의 대상을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선망의 대상이 없이는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의 지향점이 있습니다. 아기들은 부모를 지향합니다. 부모를 닮으려합니다. 그리고는 친구들이나 TV 연예인들, 혹은 책에서 읽고 배운 위인들을 닮으려합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모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방에 갇혀 살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아이는 말을 할 줄도 일어설 줄도 웃을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를 것입니다. 영장류의 뇌 속에는 자신의 선망의 대상을 자신 안에 그대로 복제하는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웃는 것도 말하는 것도 우리는 누군가를 닮으려 했기 때문에 지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성장해서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닮으려하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어떻게 구원하러 오셨을까요? 어둠 속에서 헤매는 우리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세례로 새로 태어난 우리는 이제 온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이신 분께로 나아갑니다. 빛으로 나아간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진다는 뜻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빛이셨고 그 이전까지 우리가 닮으려 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빛을 받아 보여준 달과 같은 역할을 하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빛 자체이신 분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이 그 사람의 잘못됨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매일의 삶을 예수님의 삶과 비교하여 닮지 않은 것이 있다면 수정해나가도록 노력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이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진리를 실천한다는 뜻은 예수님이 사신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새로 태어난 이들은 예수님의 삶을 자신의 삶의 모델로 삼고 살아갑니다. 


오징어잡이 배가 밝게 빛날 때 오징어들은 그 빛을 보고 위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 배와 가까워지면 그물에 걸려 잡혀 올라옵니다. 이것이 어둠의 세계에서 구출되는 방법입니다.

어둠이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의 눈을 진흙으로 만들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부들은 이 내용을 세례성사로 해석합니다. 세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파견 받습니다.

누군가를 바라만 봐도 닮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빛이시고 빛을 볼 눈을 지녔는데 예수님을 닮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면 아직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는 많은 길들이 놓여집니다. 물론 지금 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만이 최선이고 가장 큰 행복으로 인도해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주님께서 더 좋은 길을 제시하시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길만을 고집하면서 더 좋은 길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몇 년 전, 5년째 임용고시 시험을 보고 있다는 청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매번 1차 시험에는 합격을 하는데, 늘 2차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길만이 자신의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험공부를 하고 또 응시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다른 더 좋은 길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물었지만, 지금까지 노력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끝을 보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 청년은 결국 임용고시에 합격을 했고 어느 중학교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만나게 되었는데 교직생활이 너무나 힘들다는 푸념을 털어놓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선생님의 자리였지만, 폭력적인 중학생들이 너무 무서워졌고 그러다보니 선생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 교직이 과연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무엇이 맞는 것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선택한 길이 반드시 최고의 길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정말로 원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질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을 가져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바라볼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의 지극함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께서 세상에 주신 대단히 귀중한 선물이지요.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신 것은 생명 자체, 곧 죽음을 쳐부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목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를 힘들게 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골탕 먹일 궁리를 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 반대로 당신을 굳게 믿고 따르는 이에게 실망을 주시지 않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감동하고, 웃고, 따뜻해지는 능력을 가지면 언제든 행복할 수 있다(강미영).


성가정에 대해...

화가족의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가족 때문에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신에게 희생만을 요구하는 가족의 모습에서 점점 지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만을 이야기하면 “너는 우리 가족이야. 그러니 당연히 해줘야지.”, “너만 감당하면 모두가 편해져.”,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네가 좀 참으면 되잖아.” 등의 말이 되돌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간의 희생은 그 어떤 관계보다도 더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족이라는 한 묶음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내가 누군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관계에서는 서로의 모습이 더욱 더 선명해지고 이를 통해서 진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응원하면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보여주신 성가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 16)


우리의 사랑은 확실히 인간중심에서 출발한다. 내가 느낄 때, 내가 원할 때, 내가 선을 베풀 때 나 또는 우리가 사랑한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존재자체로 인간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 없다. 이 말은 그러므로 신약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 곧 선을 위해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받기 보다는, 내가 드리는 사랑을 하느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선물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처럼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은 인간을 위한 위대한 선물에 따라 나타난다.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당신의 영신수련 결론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주님, 들어주소서! 내 모든 자유, 내모든 기억, 내 모든 지성, 원의 등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서 제게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이제 주님 당신께 그것을 다시 드립니다.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 충만한 기쁨으로 받아주소서. 당신 사랑과 은총허락하소서. 이것으로 제게 충분합니다.

‘거룩한 변화’이다.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되신 것처럼, 내적으로 스스로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선물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할 때 우리도 하느님 아들이 된다. 그래서일까 신앙인이란? 종교적인 본질로 우리의 모습 곧 바른 신원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곧 믿음과 구체적으로 살아온 사랑과 선행실천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주님의 계명과 그분의 길을 걷는 자이다.


하느님을 믿는 생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얻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이미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으로 신원화되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요한 3, 19)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분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실 요즘 세상은 심판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살아가는 우리는 너도 나도 심판하는 데에는 아주 능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장 인터넷 뉴스를 대하더라도 그 밑에 달려있는 댓글들을 보자면 정말 심판의 글들이 수두룩하게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단죄하며 점점 더 갈등의 골이 깊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주님은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심판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 아니시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삶 역시도 심판이 아닌 구원에 초점이 맞춰진 삶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행사가 끝나고 평가회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경우는 인간적으로 잘못한 것에 대한 심판이 중심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 역시도 다음 행사 때에 반복되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행사 안에서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함께했었는지에 대해 공감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이루어질 행사 안에서도 어떻게 하면 더욱더 하느님의 뜻대로 그분 안의 참된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비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과 함께 심판이 아닌 구원을 위한 여정이 되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존엄히 살 길을 선교로 도와드립시다.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 3,17~19)”


사람은 자연을 사랑할까 미워할까. 자연은 사람을 사랑할까 미워할까.

자연과 사람관계는 본래가 사랑관계일까 원수관계일까. 사랑관계겠죠.

심판보다 구원을, 자르기보다 연결을, 중요한 건 그 기준이 있겠지요.


그 기준은 하느님의 법, 그리스도의 법, 자연법 사랑계명이라 봅니다.

이 기준 안에서 인간들의 존엄한 생활 세부사항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 기준선을 어길 때 죄이고 생활 세부사항 어길 때 위법이라 합니다.


교통법규 어기면 고해성사 감 아니고 사랑법 어기면 고백성사 감이죠.

세상 가득 찬 기본 근본법 알고 존엄히 살 길을 선교로 도와드립시다. 




진리를 찾아서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지식은 참일 때 지식이 된다. 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것이 지식이다. 그러나 현재는 지식일 수 있지만 때와 장소가 달라지면 지식이 아닌 것도 생겨난다. 지식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식에 관한 초월적인 가치이며, 지성(知性)이 노리는 목적으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시며 말씀과 행동은 불변이어서 시공을 초월하고 영원하다. 이는 하느님께서 하는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외면하기에 상대주의가 커가고 궤변이 늘어나고 회의론을 펴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인양 설처대고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하다. 왜, 요즘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울까? 사람이 진리를 외면한 까닭이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3,21)




교회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Sermo 12, De Passione, 3,6-7: PL 54,355-35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을 너무도 친밀히 취하셨기에, 모든 피조물의 맏아들인 인간 예수 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 안에서도 하나이시고 유일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머리가 다른 지체들에서 나눠질 수 없는 것처럼 지체들도 머리에서 나눠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은 현세에서가 아니라 후세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분의 약속에 의하면, 지금도 그분은 교회 안에서 교회와 불가분리적으로 거처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의 화목을 위해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다만 과거의 역사로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세에서 이루시는 업적의 능력 안에서도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고 같은 성령의 은총으로 순결한 교회를 잉태하게 하시며 세례로써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자녀들의 무리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들은 혈육이나 육체의 의지를 따라서도 아니며 인간의 의지로서도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라 태어납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축복받게 하시고 모든 민족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새싹이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육체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태어난 약속의 모든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분은 하늘 아래 있는 어떤 민족이건 예외 없이 그들로부터 하나의 거룩한 양 무리를 이루게 하십니다. 또 이렇게 하심으로써 성서에서 약속하신 것을 매일매일 성취하십니다. “내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는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 양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분은 특히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치라.”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목자들을 지도하는 분은 그 홀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바위로 곧 베드로에게로 나아오는 이들 모두를 비옥하고 물이 풍족한 목장에서 먹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름기로 힘을 얻어 수많은 양들은 착한 목자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신 것과 같이 자기들도 목자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용맹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이들의 신앙도 그분께 참여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순결과 진리라는 누룩 없는 빵으로써 주님의 파스카 축제를 합당히 경축합니다. 새사람은 옛 악의 누룩을 내던지고 주님 자신으로 충만되고 부양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것도 받은 그것으로 변화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어 묻히고 함께 다시 일어남으로써 영혼과 육신 안에 항상 그분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5월1일 [노동자의 성 요셉]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목수로 일한 요셉 성인은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해마다 5월1일을 ‘노동자의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복음: 마태 13,54-58 :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회당에는 악의에 찬 믿지 않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을 때 그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의 교만은 주님께서 완전하게 가르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라고 한다. 그들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솔로몬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아직 어릴 때,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왕위를 받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지혜를 받기를 바랐고, 진심으로 그것을 청하여 그것을 받았다. 주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면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고 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신다. 그분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지혜와 기적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들먹이며 그분에게 이런 능력이 생겨나게 할 어떤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샘으로 눈이 어두워졌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요한 7,15)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몹시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했다. 그들은 그분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하고 만다. 우리는 이웃을 보고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무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며 상대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며 이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아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로 예언자들의 고향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들의 혈연관계로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 7,52)라는 말씀대로 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항상 예언자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는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58절) 믿음이 없어 자격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는 권능이 힘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에 대한 놀라움이 커져 갔는데 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보여주는 광경이 아니라 기적의 소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기적이 소용이 없을 때는 행하지 않으셨다. 단지 몇 번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저자가 기적을 일으켰더라면, 우리도 믿었을 텐데’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업과 가족관계를 가지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전혀 틀리는 경우가 많다. 고향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성모성월(聖母聖月·devotio mensis Mariae)

윤종식·허윤석 신부님(가톨릭 전례학회)

우리 천주교우들은 성당에 들어서면 먼저 성모상을 향해서 공경의 예를 표한다. 

그 예(禮)를 표함에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묻는 교우들이 있다.

십자성호를 그어야 하는지, 안 그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고 또 어떤 분은 인사할 때 고개를 얼마나 숙여야 하는지 묻기도 한다. 

십자성호를 그어도 안 그어도 예를 드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통일성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말 많은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여하튼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비신자들이 볼 때는 참으로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신을 모시듯이 성모님께 예를 갖추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성모님을 신으로 모시는 듯이 비추어질 수도 있다. 

특히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천주의 모친성, 승천설, 원죄 없는 잉태 모두를 부정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그렇게 본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가 구분하는 ‘흠숭지례(欽崇之禮)’와 ‘상경지례(上敬之禮)’ 그리고 ‘공경지례’(恭敬之禮)라는 개념이 없다. 

하느님께는 흠숭의 예를 드리고, 성모님께는 성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공경의 예를 드리며, 신앙인의 모범이며 증인들인 성인들에 대해 공경을 드린다 해 생긴 개념이다.

성모님께 상경지례를 다하고 그분의 신앙적 모범과 증거의 삶을 새기기 위해서 교회는 성모성월을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 초기 문헌인 「셩모성월」을 통해 한국교회에 성모성월의 신심이 널리 전파됐다. 

이 신심서는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이탁(李鐸)의 저술로 1857년 중국에서 간행되었으며 우리나라에 전래돼 로베르(Robert·金保祿) 신부가 우리말로 번역, 1887년 출간했다.

성모성월은 특별히 한국 천주교회의 주보성인이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선교의 주보로 삼아 박해시대에서 성모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청하는 시기로 인식했다.


위의 본문에서 나타나듯이 한국 천주교회의 주보가 ‘성 요셉’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이기에 그 특별한 공경의 이유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으며 우리 육신과 영혼을 보호하심을 간구하는 문장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성모성월의 의미와 실천에 대해 ‘성모성월을 지내는 연고’라는 제목으로 성인들의 말씀을 인용하며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성모님께서 은총의 중재자이심을 깊게 묵상하며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을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그 감사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성 베르나르도)


2.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니 그 은총을 잠시도 떠나지 못하므로 은총을 얻기 위해 악을 고치고 선을 행해야 하는데 이러한 일을 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간구해 도움을 얻는 것이다.


3. 모든 성인성녀들이 성모를 공경한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듯이 나 자신이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나의 의지뿐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시고 그러한 관계성을 은총으로 인식시켜주셨기 때문이다. (성 안셀모)


4. 성모성월은 5월의 싱그러운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열매를 맺는 계절이므로 자연스럽게 성모님의 달이며 신앙의 결실을 상징하는 계절이므로 외적인 표양과 형식으로 공적이며 사적인 공경을 드려야 한다.


미켈란젤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성모 마리아라는 신앙심으로 불후의 명작인 ‘피에타’상에서 젊고 아름다운 동정녀 마리아를 조각했던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5월을 성모성월로 지내는 것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이며 믿음의 모범으로 여기는 교회공동체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일원인 한국 천주교회도 다른 지역교회에 못지않은 성모공경을 해왔다.


1838년 12월 1일 제2대 조선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주보로 정해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며, 그레고리오 6세가 1841년 8월 22일에 이를 허락해 그전까지 주보로 모셨던 ‘성 요셉’과 더불어 조선교구의 주보가 됐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 있던 선교사와 교우들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846년 11월 2일 충남 공주 수리치골에 ‘성모 성심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1861년 10월, 당시 제4대 조선교구장이던 베르뇌 주교가 조선교구 내에 있던 각 선교사의 담당 구역을 성모 마리아와 관계된 호칭으로 명명함으로써 전 지역을 성모님의 보호 아래 있도록 했다.


성모성월의 절정은 아무래도 ‘성모의 밤’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첫 ‘성모의 밤’은 1942년 5월 백동본당(현 혜화동본당)에서 거행되었고, 두 번째는 1945년 5월 20일 종현본당(현 명동본당)에서 이루어졌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에 발표한 성모성월에 관한 교서에서 “성모성월은 세계 도처의 신자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달”이라며 “교회 공동체와 개인, 가정 공동체는 이 기간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마리아에게 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통해 마리아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을 찬양해야 한다”라고 권고한다.


평소에 복되신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깊이 배우지 않고 그분에 대한 공경을 하지 않았던 교우라도 성모성월을 맞이해서 본당에서 행하는 특강, 성모의 밤, 매일 묵주기도 등에 참여하고 교회에서 권장하는 성모에 관한 서적을 읽으며 성모신심을 올바로 키워나가면 좋을 것이다.




<그대 노동자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름다운 그대 노동자여!


벗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묵묵히 피땀을 흘리며

자신을 봉헌하는 이여!


겸손한 그대 노동자여!


자신의 영예를 위해

벗들을 밟고 일어서기보다

벗들의 디딤돌이 되기 위해

낮은 자리에 머무는 이여!


헌신하는 그대 노동자여!


수고의 땀과 피눈물

기억해주는 이 없어도

그 값진 의미를 알기에

기꺼이 힘겨움에 자신을 맡기는 이여!


빛나는 그대 노동자여!


고된 노동 뒤에 주어지는

천대와 멸시에 눈물 흘리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아름다운 세상 일구는

보람에 웃음 짓는 이여!


거룩한 그대 노동자여!


내일의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오늘 혼자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진정 십자가와 부활을

이미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여!




구원은 은총의 선물이자 선택이다. 생명과 빛, 진리이신 주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끝은 시작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4월이 끝나자 오늘부터 5월 성모성월의 시작입니다.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요 꽃과 신록의 축제입니다. 방금 부른 성모성월 입당송 성가244장은 곡도 내용도 5월엔 언제 불러도, 들어도 좋습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고운꽃 모아 성전꾸미오며/기쁜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오월화창한 봄날 녹음 상쾌한데/성모뵈옵는 기쁨 더욱 벅차오리.”-


또 오늘 세상의 노동자들은 노동절을 지내지만 교회는 노동자 성 요셉 기념미사를 봉헌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우리 요셉수도원에는 노동자 성 요셉 기념미사가 더 어울릴 듯 합니다. 마침 주차장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후덕厚德해 보이는 성 요셉상이 생각납니다. 요즘 성 요셉상 배경의 한창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 꽃을 보며 써놓은 글입니다.


-“얼굴은 고요해도/가슴은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다

성요셉상/배경의 연산홍!”-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 가슴마다 타오르는 사랑의 불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성소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일화입니다. 저에겐 2년전 약 50년 만에 찾아 뵌 한 분뿐인 고모님이 계십니다. 고모님은 여덟째이고 그 바로 위 일곱째 오빠가 바로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바로 며칠전 고모님댁 사촌 큰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고모님이 큰 위기를 겪으셨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모님은 1922년생 현재 98세 고령이시나 여전히 정신 맑으시고, 90세까지 성경 필사를 하셨던 아주 독실한 침례교 신자이십니다. 바로 그 고모님께서 저를 잊지 못해 하시며 꼭 용돈을 전해 주고 싶다는 내용과 더불어 제 통장구좌를 알려 달라는 사촌 큰 형님의 전화였습니다.


감동했습니다. 고모님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이자 성모님의 마음처럼 느껴졌습니다. 고모님은 어려운 환경중에도 ‘눈물과 기도’로 5남1녀의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내셨고 자녀분들의 우애友愛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느님은 성모성월 5월에 성모님같은 98세 고모님을 통해 저에게 참 좋은 사랑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구원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우리의 선택입니다. 은총의 선물에 감사하고 만족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지체없이 생명과 빛, 진리이신 주님을 선택합니다. 오늘 복음은 언제 읽어도 감미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7).


믿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바램은 우리 모두의 구원입니다. 은총의 선물인 예수님을 선택하여 믿을 때 비로소 구원입니다. 심판 역시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믿지 않음으로 자초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는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주님은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믿음으로 선택한 자는 생명과 빛이자 진리이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을 선택하지 않는 자는 십중팔구 그 반대의 죽음과 어둠, 거짓을 향하게 됩니다. 생명과 빛이자 진리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선택할 때 구원이지만, 반대로 죽음과 어둠, 거짓을 선택할 때 심판의 멸망입니다. 그러니 구원과 심판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책임이 아니라 내 책임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 제1독서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의 대결을 보여줍니다. 전자가 사도들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시기심에 가득 찬 대사제와 사두가이파를 가리킵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사도들을 공영감독에 가뒀습니다만, 주님은 당신 천사들을 통해 사도들을 풀어 주십니다. 사도들처럼 믿는 이들 곁에는 늘 생명과 빛, 진리이신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결코 죽음과 어둠과 거짓의 세력이, 생명과 빛과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된 우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설교의 본질적인 목적입니다. 사도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지닙니다. 생명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생명과 빛이자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될 때 비로소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생명과 빛, 진리로 충만한 구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미사중 아름다운 본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 빽'(요한 3장 16~2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구원하셨다!

아무리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가리려고 피하고 감춘다해도 꿰뚫어 보시는 주님앞에서는 헛수고 믿는 대상에게 다가가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려하면 두려움이 생기죠.

완전성에 비해 나 자신이 너무나 보잘것없게 여겨지니까요.

그렇다고 도망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다가선다면 그 빛이 내 안에 가득차게 되어 새로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 안에서 힘이 되어주시는 든든한 방패가 있으니 뭐든 못할게 없습니다.

빽 있으세요? 어떤 빽?

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황금보다 더 귀하고 세상에서 젤 가볍고 멋진 예수님빽이 있습니다.

오늘~ 자랑하며 사시길!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 16)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5월의 첫 날입니다. 

5월은 성모성월입니다.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온 세상을 꾸미며, 그 중에서도 장미가 아름다운 계절이죠. 성모 성월을 맞아 성모님의 전구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 오도록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노동을 인간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로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킨 배경에는 가톨릭적인 배경이 깊게 담겨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노동자의 주보성인이십니다. 성가정에서 노동자의 모범을 보여주신 성 요셉을 본받아 모든 노동자들이 가정에 충실하고 또 정당한 임금을 받으며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요한 3, 16~21)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 16) 고 하십니다.

저는이 말씀이야말로 복음의 중심이며 키워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하셨고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가르침과 표징속에 예수님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받들어야 하는 존재이며, 그럴 때 구원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많은 말씀과 표징들과 행적들 그 모든 것을 요약한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의 이 대목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 16)

그러니까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또 인간이 죄 속에서, 악의 세력 속에서, 또 죽음의 운명 속에서, 고통받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쁜 소식이며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길을 가는 것, 또 우리는 원죄의 연대 유산아래, 죄와 죽음과 악의 세력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이니셔티브를 취하셔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는 것, 바로 이 말씀은 구약성서 전체와 신약의 모든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의로음때문에가 아니라 또 우리가 그럴 마땅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또 우리가 어떤 좋은 선행을 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무조건적으로 구원의 길을 가게 하시고, 무조건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그 넘치시는 행위로 사랑이 넘치시는 배려로 인해서, 우리 인간은 그런 구원과 생명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측에서 먼저 하느님께 자랑할 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의 구원의 말씀과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물론 회개가 먼저 있어야 되겠습니다만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대목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 16)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당신 자신을 제물로 희생하시면서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이러한 뜻에 순명하시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감사와 찬미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나의 의로움이나 나의 선행이나 나의 착함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김용재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복음 3장 16-21)

11년 만에 다시 선교지에 파견되었습니다. 과거 살던 곳이지만 여전히 낯설어 적응이 때로 힘겹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선교지에 오면서 결심한 바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하느님 사랑의 실천’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자기 나라를 떠나 선교지로 파견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선교지의 원주민들과 함께 체험하고 그것을 통해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첫 선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위대한 사랑 안에 명확히 드러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도구로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워도 자신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묵묵히 선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선교사인 우리를 통해 세상이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구원의 길로 나아간다면 이보다 더 기쁘고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 사명을 구현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끊임없이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도구로서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제병영 신부님

하느님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것은 우리의 어두운 부분 때문이다. 그 어두움을 없애시려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안에서 빛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빛과 어둠은 서로가 있게 하는 조건이 아닐까? 여명과 석양이 지기전 빛과 어둠은 서로 중화되어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빛과 어둠이 중화되는 그 선상에 설 수 있다면 하느님의 빛을 살아 가는 것일께다. 

오늘 아침 태양이 은은히 세상을 밝히려고 하는 순간 처럼 나의 영혼이 그러하기 바란다.




아! 오월이다.

최민석 신부님

오월 첫 날 노동자의 날이다.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노동이 있기에 꽃 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계절 5월을 맞는다. 인간의 노동은 이렇게 신성하게 생명으로 피어나게 한다.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산에 들에 노동하는 손이 있기에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


어느 덧 진흙더미 속에서 피어난 앙증맞은 새순이 인간의 노동과 더불어 푸른 세상을 이루었다. 순간, 더없이 화려했던 솔로몬의 영광이 내 맘에 떠오른다. 우리를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귀히 여기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내 영혼이 생명축제의 노래를 부른다.


비 온 뒤의 하늘은 참 맑고 푸르다. 검은 구름은 사라지고 햇살이 밝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내 인생 은혜로운 순간이다. 지금 이대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사람들, 서로 사랑하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가고 있는 믿는 이들의 구원이다. 지금 이대로가 주님의 엄청난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새 생명의 구원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주님께서 내 마음의 문 두드리시는 새롭게 열린 이 길은 결코 혼자만이 가는 길이 아니다. 이 축제의 길은 함께하는 행복함이 있다. 이 길은 어울림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길은 복음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 죄악을 회개한 사람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양하며 경배하는 사람들이 가는 진리의 길이다.


진리는 진리다. 진리는 참 단순하다. 진리는 세수하다 코 만지기 보다 더 쉽다고 한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경험하는 이것이 바로 삶이요. 삶 자체가 진리이니까 말이다. ‘진리’라고 할 무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하며,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것을 그렇다 하고 아닌 것을 아니다 하는 것이 진리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마태 5,37)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있는 것도 없다 하고 없는 것도 있다 하며, 아는 것도 모른다 하고 모르는 것도 안다 하며, 그런 것도 아니다 하고 아닌 것도 그렇다 하면서 스스로 고통과 괴로움을 부르며 살았다. 내 스스로 부른 고통과 괴로움을 못 견뎌 하며 진리가 따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 것처럼 마음의 자유를 찾고 진리를 구하기를 반복해 왔다.


진리는 지금 여기 내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다. 매 순간 내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영원한 진리와 자유로부터 조금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으로도 가두어 둘 수 없는 진리다. 삶은 삶이다. 어떤 옷으로도 감추어 둘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은 그리스도교에 갇혀 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언제고 나의 생명이 성숙하여 그리스도를 깨뜨리고 참된 하늘의 아들로 살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나의 생명을 보호하는 그릇이요, 옷이다. 그리고 언제고 이 그릇은 비워져야 한다. 언제고 이 옷은 벗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부활은 없다. 그리스도교 안에 갇히면 내 모든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리스도교 생활이란 나에게 있어 한낱 무덤일 뿐이다.


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믿는 만큼 인간의 유한함을 믿는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은 한계가 있다. 이것이 인간을 구원한다. 우상은 구원 받지 못한다. 열두 살 때 내가 생각하던 하느님의 모습과 지금 생각하는 하느님의 현존이 서로 같으면서도 같지 않듯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나의 신앙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내일의 더 밝은 햇살을 위하여 일 하는 손들이 있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노동의 손들이 있다. 하늘의 축복이 노동하는 손들에게 있다.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날이다. 주님의 평화를 빈다.




노동의 중요성 <요한 3, 16-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노동하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다음 일을 위해 힘을 기르고 저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휴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사람입니다. 요셉 성인을 노동자의 주보로 정하고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할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시려고만 오시지 않고 인간성 회복을 위해 오셨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일을 시키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을 종처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안전과 휴식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할 일을 지정받지 않았지만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자로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 외 수도원 객실에서 보통 오전 3시간, 오후 2시간 30분 상담을 합니다. 오늘 휴가의 마지막 날 충분히 휴식했습니다. 형제들에게 감사합니다. 나이 들었다고 혼자 방을 사용하게 해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습니다.


창세기에 노동은 남자의 죄 보속으로 생각했지만, 노동은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입니다. 일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결실을 사람들이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집에 일이 많은 고진석 신부님, 아프리카 청소년들과 어려운 수도자들을 경제적으로 도우려고 모금을 위해 정신없이 일합니다. 수도원의 삶을 보면 피곤하여 늘 어려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휴식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미사 드리고, 빨리 떠나자고 하니 “이곳에 살고 싶어요”

그래도 오늘 우리는 저녁 기도 후에 들어가지 말고 전에 들어가자고 독촉을 했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재미있고 유익하게 잘 쉬면서 아름다운 휴가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50이 가까운 나이에 “여기도 처음이에요. 저거도 처음에요”하는 소리가 귀여우면서 더 많이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노고단을 넘어 남원으로 가서 광화루를 거쳐 집으로 가는 길에 남원에서 제일 좋은 중국 음식점 찾아 점심 먹고, 행복하게 차 안에서 웃고 즐기고, 우리 사랑의 집으로 가도록 기도합니다. 여행은 서로 부담 없고 소통이 잘되는 사람과 해야 합니다.


이 시간까지 돌봐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는 오월의

싱그러운

첫시작입니다.


성모성월은

우리에게

삶의 참행복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주는 행복이

받는 행복보다

더욱 풍요롭습니다.


성 요셉은 

노동의 참뜻이

사랑임을 절절히 

가르쳐줍니다.


심장이 없는 곳에는

노동도 없습니다.


생명의 심장은

뜨거운 노동의

심장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노동도 있습니다.


삶과 노동은

사랑과 함께 갑니다.


노동을 통해

부끄럽지않는 

삶의 참기쁨을

맛보게됩니다.


예수님또한

성 요셉을 통해

목공 일을 배우고

익히셨습니다.


노동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며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는

십자가처럼


노동은 우리 삶을

성장시키는 선물임을

믿습니다.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사람들 가운데 있는

노동의 신비입니다.


노동을 통해

삶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오월(五月)입니다.



 



 

성지 순례의 시작은 비행기를 타는 것부터 시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출발부터 삐끗거립니다. 짐 부치는 곳의 직원이 오늘 만석이라 좌석이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로 제 앞의 사람 좌석이 업그레이드되고 저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여기에 중국 영토 위를 지나가는 항공기 숫자 제한으로 인해 예정 출발시간보다 30분 늦게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에 타던 비행기보다 작고 좌석도 훨씬 좁습니다. 


여기에 저의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행기가 뜨기 전후로 1시간을 전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모르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따라서 이 상태로 오랫동안 자야 비행기 안에서의 불편함을 느끼는 시간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바람과 달리 비행기가 출발하고 나서 딱 30분 만에 깨어나고 말았습니다(그래도 이번에는 중간 중간 쪽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어떤 점에서부터 삐끗했을까 싶었습니다. 바로 ‘기대’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을 얻으려는 기대가 문제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쉽고 편한 것을 얻는 자리가 아니지요. 그러나 당연한 것을 힘들다고만 생각하니 비행기 타는 것이 힘들고, 마드리드까지 가는 시간이 힘들고, 좁고 불편한 자리에 11시간 있어야 한다는 것도 힘들고... 다 힘든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지순례에서는 편하고 쉬운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주님 만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쉽고 편한 자리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편하고 쉬운 것만 찾는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불편하고 힘든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지요. 그리고 그 외아들을 믿는 이는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빛이신 주님이 아닙니까? 


묵상을 하다 보니 우리 삶 전체가 하나의 성지순례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주님을 기대하고 주님이 가장 먼저인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을 기대하고 세상 것이 먼저인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의 길을 걷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지금 내 삶의 성지순례를 해야 할까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서는 행복한 성지순례가 될 수 없습니다. 양보와 배려,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장 올바른 내 인생의 성지순례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편하고 쉬운 것만을 생각해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불편하더라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더욱 더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려 합니다. 잠시의 쉽고 편함을 얻는 것을 통한 기쁨보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기쁨이 훨씬 더 크고 오래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 너무 실없이 끝나 버린다고 허탈해할 필요는 없어. 방향만 바꾸면 여기가 또 출발이잖아(영화 ‘가을로’ 중에서).


고수 신앙인

지금 한국에 사시는 분들은 아침 시간에 이 묵상 글을 보시겠지요. 그러나 제가 있는 스페인에서의 시각은 새벽 1시 30분입니다. 지금 막 호텔에 돌아와서 여러분들이 기다릴까봐... 잠시 묵상을 하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실 때, 저는 꿈나라에 있겠지요. 물론 시차 때문에 잠이 제대로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제 저는 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함께 순례를 가는 분들을 맞이했습니다. 하나 둘씩 오시는 순례객들을 보면서 여행고수와 여행초보를 금방 알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짐의 양에서 결정됩니다. 여행을 많이 다니신 분들은 짐의 양이 적고 가볍습니다. 무겁게 가지고 가봐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가지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라서 여행고수들은 짐을 최대한 줄입니다. 

하지만 여행 초보들은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 싶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가방 속에 집어넣지요. 글쎄 여행 가방을 한 달 동안 싼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러다보니 가방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보조 가방 안 역시 가득 채웁니다. 

그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혹시’라는 생각 때문에 그 짐을 줄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까? 아니지요. ‘혹시’라는 마음에 차마 버리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여행해봐야 나만 힘듭니다. 주님을 따르는데도 다 가지고 다니느라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여행고수는 짐이 가볍고 작습니다. 그래서 힘차게 움직여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고수 신앙인도 자기 마음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버림의 시간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불편했던 순례 시작의 마음을 버리고, 지금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의 마음도 버립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 역시 버립니다. 갑곶성지에 없어서 무슨 일 생기지는 않을까 싶은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착각도 버립니다. 사랑을 베풀지 못하게 만드는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버립니다.




구원이나 심판은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이나 심판은 선택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이나 심판은 죽어서가 아닌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서 구원의 천국을 또 심판의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이나 심판은 선택입니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문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구원의 문을 들어서면 구원이고 어둠이 좋아 하느님을 등지면 심판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주신 자유로 선택의 결정권을 주십니다. 봄꽃들 만개한 계속되는 부활축제시기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뿌리내리면/거기가 자리다

하늘만/볼 수 있으면 된다

곳곳에서/피어나기 시작한/봄꽃들

엄동嚴冬추위/견뎌냈기에

하늘사랑만으로/행복하기에

저리도/청초淸楚한가 보다-


하늘이 상징하는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만개한 봄꽃들 구원을 상징합니다. 구원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향할 때 모실 때 있습니다. 탓할 것은 자리가 아니라 내 부족한 하늘 사랑, 부활한 주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구원이나 심판은 스스로 자초하는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셨습니다. 세상에 모두에 대한 활짝 열린 하느님 사랑입니다. 구원에서 제외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단 조건은 외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 너무나 자명한 하느님 마음입니다. 모두가 아들을 믿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구원받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습니다. 새삼 심판도 자기 책임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심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는 일이 악할 때 빛보다 어둠을 향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여 점점 악을 저지르는 자는 어둠을 좋아하게 되고 악의 노예가 되어 불투명한 부패한 인간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자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의 어둠을 선택할 때는 불안과 두려움에 불투명한 인간의 심판이지만 진리의 빛이신 주님을 선택할 때는 평화와 자유에 투명한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러니 탓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주님을 믿어 선택하지 않는 나한테 있습니다. 빛이자 진리이신 주님을 믿어 선택하지 않고 어둠의 악을 선택한 까닭입니다. 정말 구원은 진리이자 빛이신 주님을 믿고 사랑하여 부단히 일치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진리이자 빛이신 주님과 일치의 구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구원이나 심판은 스스로 자초하는 선택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진리와 빛인 주님을 선택할 때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구원의 천국입니다. 이들은 빛이신 주님께서 언제 어디서든 친히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에 아무도 다치지 못합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오늘 공영감옥에 갇혔던 사도들이 그러합니다. 진리와 빛의 사람들을 가둘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들을 말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모습이 아닙니까? 생명의 말씀을 지닌 이들을 가둘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이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벽이 변하여 문이 되어 버리니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당신 천사들을 통해 사도들을 감옥에서 해방시켜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을 믿어 선택한 구원의 사람들이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구원이나 심판은 믿음의 선택입니다. 믿음의 선택에 따라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구원이나 심판입니다. 


악에서 단연 발을 끊으십시오. 악을 저지르다보면 점점 악의 어둠을 좋아하게 되어 불투명한 부패한 인간이 됩니다. 불안과 두려움뿐이요 기쁨도 평화도 자유도 없습니다. 빛을 사랑하여 진리를 실천하여 빛이신 주님께 나아갈 때 넘치는 기쁨과 평화에 자유롭고 투명한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 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3,16-21(부활 2 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차고 흘러넘치어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나라 한반도, 우리의 강과 산과 바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참으로 신비로운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를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복음인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곧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사는 이타적인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곧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심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이처럼,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 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심판 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오늘 하루 하느님 사랑에 ‘피앗’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신부님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 니코데모와 대화를 나누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가만히 우리의 모습을 성찰해보자면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법치주의적인 국가정책과 교육환경 속에서 자라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심판하고 단죄하는 데에는 아주 익숙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아이들의 최고의 꿈이 법관이었고, 판사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법과 규율을 잘 지키는 것이 선하고 훌륭한 것이고 법과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악하고 되먹지 못한 것으로 단순히 이분법적인 판단으로 사람을 대하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오늘 요한복음 사가가 전하는 구세주의 모습은 사람을 심판하고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요즘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인터넷의 댓글을 보면 너도 나도 엄준한 심판관의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물론 법과 규율의 존재는 분명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이 심판과 단죄만이 있다면 거기에 구원의 희망은 없고 절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4. 11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요한 3,16-21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오늘의 어둠을 뚫고

내일의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다


오늘의 빛을 품어

내일의 어둠을 사르는 것이

보수다


빛을 사랑하고

어둠을 미워하기에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오늘의 악을 깨뜨려

내일의 선을 이루는 것이

진보다


오늘의 선을 보듬어

내일의 악에 맞서는 것이

보수다


선을 이루고

악을 깨뜨리기에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오늘의 거짓에 현혹되지 않고

내일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

진보다


오늘의 진리를 무기 삼아

내일의 거짓을 드러내는 것이

보수다


진리를 실천하고

거짓에 저항하기에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선과 악의 판관 <요한 3, 16-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 각자에게 양심 법을 만들어 마음속 깊이 심어주시고,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여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게 하셨으며, 양심을 잘 지키고 살았는지 판단하시어 상과 벌을 주시는 것은 법을 심어주신 하느님의 권리입니다.

양심이 올바로 판단하고 살기 위해서 십계명을 비롯하여 많은 법이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지만, 따르지 않아서 벌도 받고 자유를 잃게 되어 교도소에 갇히게 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법을 따라 살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진, 선, 미 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법에 예속됩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한 존재의 의미를 따라 지켜야 할 법에 속하여 지키지 않으면 규정된 법의 판단을 받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그 많은 법을 지켜야 하고, 신앙인으로서 교회법을 지켜야 하고, 수도자로 살기에 수도 규칙을 지켜야 바른 국민, 바른 신앙인, 바른 수도자로 법을 다스리는 사람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더 하고, 가지고, 누리는 사람일수록 지켜야 할 일이 많아지고 보통 사람보다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의무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어떤 위치에 있던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한 큰 장애는 없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시편 1장에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구별하는 말씀이 있는데,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법을 잘 지키려면 법에 대한 연구가 있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배워 익혀야 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의 법은 악인들이 길을 걷지 않고 기도와 묵상의 삶을 지속해서 살아갈 때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모두가 주님을 믿음으로써 주님이 주신 법을 잘 지키는 행복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교수 신부님이 학생들에게 “점수를 잘 주려고 아무리 쉽게 문제를 내도, 아예 답을 쓰지도 않는 학생들에게는 정말 어쩔 수 없다.” 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그러므로 심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삐뚤어진 사람처럼 엇나가는 사람은 스스로 죄악을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19-21절) 오늘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따라 그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 부활의 빛으로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어둠의 악을 하나하나 비춰 녹여주시고, 주님 사랑으로 가득차게 하시어, 주님 사랑의 도구되게 하소서. 아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은 정녕 

사랑의 참된 

빛이십니다.


참된 빛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사랑의 빛은

심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생명의 빛은

바로 하느님 안에서

구원을 드러냅니다.


생명의 빛은

우리의 역사 안에서

믿음으로 더욱

구체화됩니다.


믿음의 삶이

빛의 삶입니다.


심판의 삶이

어둠의 삶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악에서 선으로

미움에서 용서로

나아가게 하는 분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입니다.


빛 안에서

빛과 함께

빛을 바라보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빛을 미워하고

빛을 심판했던

어둠의 지난 시간을

빛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며 제 어둠과 

제 악을 빛 앞에 

내어드립니다.


내어드리니

모든 것이

빛 안에서 빛으로

드러납니다.


빛의 삶은

사랑을 실천하는

진리의 삶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는

생명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빛으로 나갑시다.


이것이 하느님의

간절한 뜻입니다.



   




요즘에는 게임이 참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 게임은 물론이고 스마트폰 게임 역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공장소에서도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지요. 제가 어렸을 때에만 해도 게임이라고 하면 친구들과 함께 직접 몸으로 하는 것밖에 없었지요. 혼자서 기계와 함께 하는 게임이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자오락실이 생겼습니다. 한 판을 하는데 50원이라는 비용이 들었지만, 전자오락을 하는데 드는 비용은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문제는 초등학생의 신분으로 전자오락을 할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오락을 너무나 하고 싶었던 저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나 했습니다. 어머니 동전 지갑에서 50원을 몰래 꺼낸 것입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락을 하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오락 한 판을 하고 난 뒤에, 저는 어떠했을까요? 죄책감과 두려움에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차마 어머니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성당에 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서 제발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제 심정을 표현한다면 ‘지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면서 느낀 것은 천국과 지옥이 어떤 구체적이고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의 삶 안에서 충분히 느끼고 체험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죄에 무기력하게 사로잡혀 있을 때에 지옥에 갇혀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밖에도 소외된 경험, 사랑받지 못한 경험, 수치심에 억눌렸던 경험 등에서 우리는 지옥에 갇힌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천국에 있는 경험을 할 때에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관계의 회복을 경험했을 때, 자신의 선한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었을 때, 악을 멀리고 선을 행하면서 기쁨을 체험했을 때 등으로 인해 우리는 천국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하지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천국으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드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죄 안에 계속해서 갇혀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만 들어가는 곳이 아닌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의 모서리에 부딪혔을 때 결국 나를 지켜 주는 건 사소하다 여겼던 행복의 조각들입니다(무무).


시간이 있는 사람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였습니다. 탐험가들에게 시계 없이 사는 원주민은 연구대상이었지요. 어떻게 시간을 알지 못하면서 살 수 있는가 라는 것이지요. 시간을 모르면 약속 시간을 맞출 수도 없을 테고, 그래서 이렇게 못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탐험가의 손목시계를 본 한 원주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에게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오.”

시계가 있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시간이 있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쫓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지요.

저 역시 종종 휴대전화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휴대전화에 구속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별 일이 없으면 휴대전화를 보면서 이것저것 하는 모습들, 그러다보니 늘 바쁘게 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시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여유들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스스로 바쁘게 살지 말고, 나의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내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세요. 그러한 시간들이 분명히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파스카의 삶  -어둠에서 빛으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단히 어둠에서 빛을 향한 삶이 파스카의 구원의 삶입니다. 

죽음의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절망의 어둠에서 희망의 빛으로의 삶입니다. 

독일의 시성詩聖이라 일컫는 괴테의 임종어는 “더욱 빛을!”을 이었다 합니다. 

평생 빛을 찾아 낙관적 인생을 살아온 구도과정을 요약한 임종어입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태양을 향하듯 빛을 찾는 인간입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하느님을 더 기다리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란 말은 바로 빛을 찾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 역시 끊임없이 빛이신 하느님을 찾는 삶의 자세를 뜻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삶의 태도에 좌우된다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똑같은 삶의 자리에서 태양이신 하느님을 향해 빛의 삶을 살면 천국이고 태양이신 하느님을 등지고 어둠의 삶을 살면 지옥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어둠에서 빛이신 하느님을 향한 삶이 파스카의 삶이자 회개의 삶입니다. 


며칠전 통화중 초등학교 시절, 옆집 친구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1년동안 담낭암 말기 아내를 간병하는 참 어려운 처지의 친구입니다. 

“꽃병의 꽃이 날로 시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정말 힘들다. 할 수 있는 것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지켜 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으니 참 딱하다. 

이젠 고생 끝나고 살만한데 죽음이다.”

물론 신앙과 인내로 잘 견디고 있지만 꽃병의 시들어 죽어가는 꽃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이 너무 절실해 지금도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합니다. 

하여 평소 빛이신 하느님을 향한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마 친구의 부인도, 친구도 절망과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생명과 희망의 빛이신 주님을 찾고 향하고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의미를 더욱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온 세상에 태양 같은 빛의 선물이 바로 예수님이란 말씀입니다. 

누구든 빛이신 주님을 믿고 바라볼 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태양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로 절망의 죽음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온 세상의 태양으로 선물하셨다는 고백입니다. 

하여 부활 성야 전례중 빛의 예식 중, 사제가 “그리스도 우리의 빛!”하고 세 번 외칠 때 마다 우리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했습니다.

빛이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문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초한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빛을 향하면서도 어둠을 향하는 역설적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진정 구원을 찾는 자는 진리의 빛이신 주님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빛을 향해 살면 빛이신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절망과 죽음의 어둔 공영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감쪽같이 구출한 것은 주님의 빛의 천사였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빛의 세상으로 나와 말합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참 감동적인 장면이요 말씀입니다.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생명의 말씀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말씀의 빛은 바로 생명의 빛이자 주님의 빛입니다. 말씀의 빛이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경비병들의 고백 역시 온갖 어둠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진 사도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참 놀랍고 당황스런 현실이나 얼마나 신나는 장면인지요. 

그대로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이어지는 증언도 점입가경의 즐거움을 줍니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음의 어둠을 넘어 생명의 빛을 살아가는 참 자유인들인 사도들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주님의 빛이 되어 파스카의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게 합니다. 

부단히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으로,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그대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아멘.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사제 수품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할 성경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 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차고 흘러넘치어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나라 한반도, 우리의 강과 산과 바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참으로 신비로운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를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복음인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곧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사는 이타적인“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곧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심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이처럼,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 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심판 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오늘 하루 하느님 사랑에 ‘피앗’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심판이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6-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시작도 끝도 없이 불사하시고 무한하신 지존께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은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체 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로마 3,23)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 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를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장님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들이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20절) 사람들은 진리가 자신들을 비출 때에는 사랑하지만 진리가 자신을 꾸짖을 때는 진리를 미워한다. 그들은 사기를 당하기는 싫어하지만 속이는 기술을 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악행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제나 악행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하는 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약한 자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악행에 빠진 채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드러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서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아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 빛 안에 머물며 선을 실행하는 참 신앙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3,16)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내주신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며, 가장 귀한 ‘외아들’마저 내주실 만큼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친히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건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내어주신 까닭은,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3,16), “구원을 받게”(3,17)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항구히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심판하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3,18).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빛이요 사랑이신 분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그분과 더불어 움직이려는 결단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3,19)라는 요한 사도의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시는 그 사랑을 거슬러, 나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만의 생각과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의 늪에서 헤매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어둠을 없애기 위해 오신 빛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어둠 속에서 서성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아닌 일시적인 욕구 충족을 하며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영원한 생명, 참 행복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사랑과 빛이신 주님을 믿어야 하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소중한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고 바치는 실천이 필수적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고, 선을 실행함으로써 빛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빛 안에 머무는 삶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좋음’과 ‘긍정’의 시선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으로 바라보고, 악을 선으로 바꿔나가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3,17) 그러나 선을 행하지 않고, 사랑하기를 멈춘다면 스스로를 심판하게 되겠지요. 이런 삶은 그저 마음을 그렇게 먹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신자다운 올바른 참정권의 행사를 통해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러 십자가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하느님의 선과 정의와 진실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선거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기회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후보, 인간보다 돈을 중요시하는 후보, 이념 논쟁을 부추기는 후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의 추구보다는 권력을 탐하는 후보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투표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빛을 밝히는 참정권 행사는 부활의 증인들의 소명이기도 함을 기억하는 오늘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빛의 자녀로 초대하십니다 >

고원일 안드레아 신부님

우리는 주님 부활을 기뻐하며 우리가 받은 부활의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부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기쁨을 나눠야 하는데 스스로가 그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나눌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 속에서 이야기하자면 기쁨과 평화를 찾지 못하고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으로, 회개하는 죄인에 대하여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부활하셨고 그 부활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는 시기가 바로 부활 시기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축복과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켜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빛의 자녀로 살게 되고 믿지 않으면 어둠 속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의무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실천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열심히 잘 지키고 기도생활도 충실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표현하며, 스스로도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빛 속에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런 신앙의 삶 속에서 얼마나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할 사람에게 화해하지 못하며 그냥 기도 속에서 생각으로 극기로 이겨내는 모습이라면 그 생활을 진정 빛 속에 살아가는 삶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실천입니다. 스스로 문제들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속에서 모든 것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에 힘이 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실천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은총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문제들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지켜오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좀 위험한 신앙일 수 있습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속에서 기쁨이 되어야 하고 그 기쁨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나눔과 사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기뻐하며 함께 알렐루야를 외치면서도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를 찾지 못하고 외형적인 알렐루야만을 외칠 때 진정 주님의 부활은 내 마음속에 머물 수 없으며, 그 결과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이웃에게 나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빛의 자녀로 초대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어둠을 좋아하고 자신을 들어내기 보다는 남들을 통하여 이득만을 챙기려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들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최원석 님

공학이나 특허를 하다보면 보고서를 작성하여서 공유를 합니다. 보고서에 들어가는 것 중에 하나가 분석입니다. 분석은 정량적인 분석이 있고 정성적인 분석이 있지요 ..정량은 수치적으로 어떤 현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을하지요..공학적인 것들은 쉽게 정량적으로 분석이 가능하지요 ..그런데 사회과학은 어찌 진행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량분석을 이 묵상 시간에 왜? 우리가 천국을 가느냐 못가느냐? 물어보면 아마도 이것을 하루에 카운팅하면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천국과는 거리가 멀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공돌이기에 저는 공돌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네요 ..좀 단순하지요 ..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나"입니다..하루 일과 중에 나의 입속에서 나를 하루에 몇번을 말하는지 가만히 count하여 보면 많으면 많을 수록 천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것이 나중심적으로 바라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천국을 가느냐? 그것은 간단합니다..나의 입속에서 주님이 count되느냐 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편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것이 소통되는 곳으로 인도하시지요 나를 추종하게되면 localize되어서 어떤 한곳으로 치우치게 됩니다..그렇게 되면 주님과 소통이 않되고 절망으로 나아가게됩니다..그러나 주님을 바라보고 가면 모든것이 주님을 통하여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참 자유로와 지고 universal하게되지요 ..그 안에는 주님이 보여주신 자기희생과 사랑, 비움, 겸손, 믿음이 필수적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빛이 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느님께 불순종하여서 이세상은 혼돈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이런 혼돈의 시대에 모든 인간이 갈곳을 몰라 방황하고 나만을 찾게 되고 결국에는 불행한 최후를 보게 된다는 것을 하느님이 보신것 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보내신것 입니다..그와 같이 살아가면 불행하지 않고 천국으로 올수 있다는 Only way를 보여주신것이지요 ..천국을 가려면 주님을 바라보고 그문으로 들어가야지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주님의 문으로 들어가려면 필수 적인 것이 있어요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요 ..이것을 명확히 매순간 똑 바로 바라보면서 가야겠습니다.. 아멘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어둠을 뚫고 내일의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다 

오늘의 빛을 품어 내일의 어둠을 사르는 것이 보수다 

빛을 사랑하고 어둠을 미워하기에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오늘의 악을 깨뜨려 내일의 선을 이루는 것이 진보다 

오늘의 선을 보듬어 내일의 악에 맞서는 것이 보수다 

선을 이루고 악을 깨뜨리기에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오늘의 거짓에 현혹되지 않고 내일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 진보다 

오늘의 진리를 무기 삼아 내일의 거짓을 드러내는 것이 보수다 

진리를 실천하고 거짓에 저항하기에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또한

걸어 가야할 

빛의 길입니다.


빛의 길은

분명 생명의 

길입니다.


빛을 향하는 삶은

사랑의 힘을 믿고

사랑을 실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빛은 우리존재의 

모든 의미이며

모든 시작입니다.


진리안에

사랑이 있고

사랑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실천하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에게는 

사랑 아닌 것이

없는 사랑안에서

사랑의 길을 

걸어갑니다.


진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실천하는 이에겐

빛은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진리이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까이 계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거기에 계십니다.


욕망이 아니라

진리에서

우리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제 미사 전 고해소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들어오시더니 제가 앉아 있는 쪽 틈새로 봉투 하나를 밀어 넣고는 얼른 나가시는 것입니다. 봉투에는 꽤 많은 돈과 편지 한 통이 들어있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익명으로 봉헌한다면서 성지에서 요긴하게 써 달라는 것, 그리고 성지를 위한 사랑의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솔직히 주님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내가 한 행동에 대한 어떤 보상 효과를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분께서는 그냥 사랑의 주님께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 굳이 당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릴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신부님, 제가 지금까지 정말로 봉헌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제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서 봉헌을 해야 할 때 망설이게 됩니다.”


봉헌도 투기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개신교의 일부 목사들이 이렇게 투기 형식으로 유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더 큰 보상을 해주신다고 말이지요. 노력은 조금 하고 대가는 크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투기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도둑놈 심보’라고 말입니다. 이 도둑놈 심보로 다가오는 모습과 무조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모습 중에서 어떤 모습을 더 기쁘게 받아들이실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의 지극함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께서 세상에 주신 대단히 귀중한 선물이지요.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신 것은 생명 자체, 곧 죽음을 쳐부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이 넘쳐나게 보입니다. 이 사랑을 내 마음이 품고 있다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그저 도둑놈 심보만을 내세우면서 내 노력보다 더 많이 받아내려는 마음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기준보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니 하느님께 대한 불평불만이 늘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도둑놈 심보에서 벗어나 겸손되이 하느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이석원).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어느 수도원의 수사님께서 묵상하다가 한 성경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 심취되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되었지요. 너무나 큰 기쁨 속에 머물게 되면서, 이 시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매일 수도원 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시간을 알리는 수도원 벨이 울리는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역할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들고 나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묵상의 기쁨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묵상의 기쁨 때문에 갈등이 생겼지만, 음식을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굶을 것이기 때문에 묵상을 끊고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돌아와서 말씀을 묵상하는데 전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서 이런 울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네가 비로소 진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구나.” 

진짜 중요한 진리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일상 삶에 적용할 때 진짜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원하고 또 실천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기쁘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더 큰 기쁨을 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소중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루 24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지혜롭게 사용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게 됩니다. 소중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이 늘 부족합니다.

 

예전에 식당의 식탁에서 본 글입니다.

“읽는 시간을 떼어 놓으십시오.

지혜의 샘입니다.

웃는 시간을 떼어 놓으십시오.

영혼의 음악입니다.

나누는 시간을 떼어 놓으십시오.

이기적 이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습니다.

사랑하는 시간을 떼어 놓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특권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떼어 놓으십시오.

지상 최대의 힘입니다.”

 

그날은 음식과 더불어 좋은 글까지 선물로 받은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쓴 글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을 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글들이 적성 성당에 있을 때의 기억들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지낼 수 있었고,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글들은 읽으면서 잔잔한 웃음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글들은 읽으면서 소중한 만남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우선순위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많은 사람은 어둠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았고, 소중한 것들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우선순위는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사명입니다. 그것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리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고,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 힘들은 지금 모두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력하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박해와 멸시를 받았던 사도들은 2000년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밝혀주는 ‘빛’이 되었습니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이다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선택입니다. 

몰라서 불행이지 알면 행복입니다. 

이미 구원 받은 삶입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저절로 하느님을 선택하게 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심판도 구원도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면 버렸지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부족한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 봄마다 활짝 피어나는 꽃들, 바로 하느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어제 써놓은 ‘부활의 봄’이란 글입니다.

-얼마나/기다렸나

 하늘 사랑/활짝 꽃으로 피어낼/부활의 봄을


 “행복하다”/“충만하다”

 하늘 가득 담은 봄꽃들의 고백


 이제/이런 하늘 사랑의 추억 있어

 여름, 가을, 겨울 지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한 세상의 피조물들입니다. 

꼬박 일년 기다려 피어난 봄꽃들에서 ‘간절함’을 봅니다. 

간절한 믿음, 간절한 희망, 간절한 사랑입니다. 

간절할 때 계시되는 하느님입니다. 

간절함이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바로 구원의 행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증거합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하느님 사랑의 구원의 문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심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누구나 당신을 선택하여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온 누리에 가득한 하느님의 영광이요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당신을 선택하여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았다.”


바로 심판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드님을,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믿지 않음으로 자초한 재앙임을 깨닫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여 어둠을 선택하기에 심판의 불행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진리의 실천, 빛으로 나아감, 바로 우리의 선택이자 결단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섭리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선택할 때 모든 것이 잘됩니다.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유일한 말이 절망입니다. 

내 중심의 삶을 살 때 절망이지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는 넘치는 희망입니다. 


어제 읽은 화두같은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중력에 의해서였다(It is by gravity that Satan fell).’


중력이 상징하는 바 내 중심의 에고(ego)입니다. 

끊임없이 나를 절망으로, 어둠으로, 죽음으로 끌어내리는 이기적 에고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공영감옥에 갇혔다가 천사들의 개입으로 해방된 사도들은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중력의 자기감옥에서 해방된 이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절망이 없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사탄과는 반대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천사들입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중심을 살기에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로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천사들입니다. 

중력重力보다 강한 하느님의 힘, 신력神力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말씀의 은총이 이기적 에고의 중력을 벗어나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합니다. 

“가벼워져라!(Lighten up!)”

역시 어제 읽은, 잊혀지지 않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할 때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경쾌輕快, 유쾌愉快, 상쾌爽快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시편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진리의 빛 안에서 사랑하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3,21)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빛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입니다. 진리의 실천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기초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에게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리킵니다(17,17).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들은 말씀이 곧, 그분께서 선포하고 증언하러 온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요,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말하며(8,45)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1,14)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매우 새롭고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진리라는 것입니다(14,6). 예수님이 바로 ‘사람이 되신 말씀’으로서 아버지를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1,18). 곧 그분만이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1,18)으로 사셨고,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1,2)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성령도 ‘진리’입니다(1요한 5,6). 신앙인은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하며(요한 18,37) 진리에 순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달을 것이며, 이 진리를 통해 죄에서 온전히 해방될 것입니다(8,31-32).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인격, 성령을 받아들이고(3,21) 순종하며 추종하는 것(1요한 1,6)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진리를 어떻게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진리를 실천한다면 ‘말씀’과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 할텐데 제정신이 들 때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일부만 받아들이고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빛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아버지에게서 나온 계시의 말씀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그런데 얼마나 많은 순간 이 평범한 삶의 원리를 잊고 사는지 모릅니다. 진리이신 분을 온전히 수용하고 전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삶을 온몸으로 실천하기 보다는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를 가리는 정도로 만족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진리와 믿음에 따라 행동하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함에도 늘 사랑 자체이신 분의 그 사랑에는 턱 없이 미치지 못함을 봅니다. 진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해야 할 텐데 내 기준과 방식으로 사랑하려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주인이 결코 아니기에 형제애 안에서 진리의 힘에 협력해야 합니다.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습니다.”(요한 3,16) 오늘 이 형언할 수 없는 그 사랑을 품은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 채 서성대는 나의 어둠을 비추어달라고 청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 말씀과 예수님을 사랑으로 실천함으로써 빛으로 나아가도록 분발해야겠습니다.  

 



내 죄는 내가 단죄하겠다는 교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구원은 받지 못하고 심판이나 받는 불쌍한 사람. 이것이 제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든 첫 번째 생각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얘기하고, 강조해서 하는 얘기 중의 하나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그 사람이 받지 않기 때문이고, 반대로 심판을 받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단죄를 하셔서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이든 남이든 단죄를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구원하러 오셨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단죄를 받는 것은 주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고 심판자로 믿기 때문입니다.   

제게 사랑이 많이 있고 사랑을 주겠다고 제가 말할 때 저를 믿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겠지요.   

또 제가 안 주머니에 수표가 100억이 있는데 원하면 주겠다고 할 때 저를 믿는 사람은 달라고 할 것이고 그래서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헛소리 말라며 그 돈을 걷어 차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구원자이시고 구원을 주시겠다는데도 주님을 믿지 않고 그래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않음으로써 구원을 걷어 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자임을 믿지 않아 구원을 받지 않는 경우는 구원을 못 받는 것일 뿐 단죄를 받는 것은 아니기에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정말로 큰 문제는 주님을 심판자로 믿어 단죄를 받는 경우입니다.   

주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는 것과 주님을 심판자로 믿는 것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마치 이해와 오해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도하고 오해도하면서 사는데 이해가 충분치 않다고 해서 이해는 받지 못하고 오해만 받는다고 상대를 오해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해를 내 기대만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아쉬움 정도에 머물겠지만 이해는 못 받고 오해만 받는다고 생각하면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오해를 하는 그 사람이 서운하거나 밉거나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를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믿지 않는 것과 오해하는 사람으로 믿는 것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자를 심판자로 믿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나를 미워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며 그러는 바람에 자기도 사랑은 못 받고 벌만 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왜 구원자를 심판자로 믿습니까?

거의 틀림없이 내 안에 나에 대한 미움과 단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고, 내 안에 단죄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으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노출하기 싫어서 내 선에서 단죄해버리고 말려는 것일 겁니다.   

내 죄는 내가 단죄하겠다!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는 것도 싫고 내 죄는 내가 단죄하겠다는 교만인 것입니다.   

이 교만이 하느님을 구원자로 만나지 못하고 심판자, 벌주시는 분으로 만나게 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 3,19)

-오상선 신부님-

여러분은 빛을 좋아하시나요?

어둠을 좋아하시나요?

동트는 여명을 좋아하시나요?

노을진 석양을 좋아하시나요?


전 사실 둘 다 좋거든요?

해가 나도 좋고

비가 와도 좋아요.


뭐든지 지나친 건 안 좋은 것 같아요.

밤이 너무 길어도

낮이 너무 길어도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너무 안 와도...


하느님 나라도 좋고

이 세상도 좋아요.


어~

이렇게 나가면

복음말씀과는 안 맞는데... ㅎㅎ


적어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이 세상 사는 동안

빛도 경험하고

어둠도 경험하겠지요.

한 때 어둠을 더 즐기기도 했지만

빛이신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그래도 빛을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게 된 것같아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둠의 실체를 알아버렸다고나 할까요.

사실 어둠은 허상이더라구요.

한줄기 빛이라도 비치게 되면

맥을 못추더라구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살 때는

늘 빛 가운데 머뭅니다.

우리가 어둠 속을 헤맬 때는

가만히 살펴보니

내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더군요.


오늘 빛 가운데 머무시길 축원합니다.

진리 가운데 머무시길 축원합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그분과 함께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게 주어지는 온갖 칭찬과 좋은 이야기들을 잠시 뒤로 하고 조용히 홀로 내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내 머리 속에 깃든 온갖 더러운 생각들 속으로 뱉어내는 입에 담지 못할 말들 다른 이의 눈을 피해 행하는 옳지 못한 몸짓들

만약 나의 이런 모습을 다른 이들이 안다면 과연 진정 나를 받아주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의 허물조차 기꺼이 받아주는 벗들이지만 나의 더러움을 애써 감추려 나의 바름을 겉으로 드러내려 했던 거짓조차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을까 

함께 하는 벗들에 대한 죄책감보다도 나를 헛되게 가꾸어 온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말할 수 없는 부자유스러움 어둠에 갇힌 것 같은 갑갑함 나의 모든 것이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 

이 고통이 바로 내가 내 자신에게 가하는 심판이요 벌입니다. 

벗어나고 싶습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투명한 삶으로 거듭남으로써.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분께서 당신과 함께 하자고 부르십니다. 

나를 감추려 어둠 속에 묻었던 나를 벗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이신 당신 안으로 들어오라 하십니다. 

나를 가두기 위해 내가 쳐놓은 어둠의 장막을 걷고 햇살 눈부신 세상 한가운데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나를 감추는 온갖 헛된 껍데기를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만큼 나는 참되고 아름다운 나로 거듭날 수 있기에 이제 기쁘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걸음 내딛습니다. 

언젠가 또 다시 나를 어둠에 가둘지라도 그때 또 다시 나를 부르실 분이 함께 하시기에 어둠에서 빛으로 한걸음 내딛습니다.

 



빛을 비추는 사람<요한,3/16-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회랍의 어떤 철학자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이 대낮에 왜 등불을 들고 다니는가? 물으니 그래요 이런 밝은 대낮에 사람다운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총체적 인물난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빛을 등진 사람들이 빛을 가리고 있으면서 자신이 빛이라고 외치고 있으며 도무지 빛은 고사하고 어둠만 전해 주는 사람들뿐입니다. 초지일관 자기소신대로 살지 않고 바람에 휘날리는 겨와 같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기둥이고 빛이라고 길거리에서 떠들고 다니는 꼴은 시장에서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픔니다.

 

예수님 생존 시대에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율법을 앞세워 백성을 기만하고 진리의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를 벗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국민을 속이는 사람들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상호 비방 모략 막말 도무지 자비로운 마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듣는 이를 실망만 주는 사람들 부족한 것은 하나입니다.

 

나라사랑을 첫째로 하고 국민을 위하여 국민 안에서 함께 고뇌를 같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사랑은 눈꼽 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신영달만 생각하어 정치를 한다고 합니다.

 

빛을 남기려는 사람은 촛불이 자기를 태우며 빛을 밝듯이 자기희생의 삶을 살고 길을 양보하고 다른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참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 늘어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실현 되도록 기도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빛으로 더욱 빛나는

봄꽃들을 빛안에서 

가득 만나고

함께 합니다.


빛은 언제나

우리들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빛으로 나아갑니다.


참된 사랑인 빛은

닫힌 우리 마음까지도

열고 들어옵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빛은 관계의 빛으로

우리와 함께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빛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사랑때문에 미움과

어둠에 갇힙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이

빛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또한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삶은 

서로를 심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또한 자연스레

빛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이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과

참된 믿음의 빛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빛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제가 신학생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바닷가로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태풍이 올라 온 것입니다. 태풍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민박집에 계속 있다가 너무 답답해서 방파제가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정말로 멋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거친 파도의 모습, 특히 그렇게 높은 파도를 처음 봤기 때문에 그 광경이 너무나 멋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우와, 멋있다. 아름답다.” 등의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지요. 한참을 이렇게 감탄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께서 제게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이봐, 이렇게 파도가 높으면 해일이 올 수도 있어. 위험하니까 얼른 방파제에서 나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해일의 모습을 상상하니 끔찍해졌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 저는 수영도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른 방파제를 빠져나왔지요. 아름답고 멋있는 광경이 얼른 피해야 할 무서운 광경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떤 상태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참 많지만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변하는 순간, 부정적인 생각으로 큰 실망을 접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시적인 위로와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참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영원히 아름다운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당신을 쫓기를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상태는 과연 어떠할까요?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주님을 쫓는 우리들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변함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만 주님을 찾는 것으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주일미사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께 신뢰를 두고 충실하게 살아가야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심판 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긴 심판이란 명료하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이지요. 따라서 하느님만을 믿고 있음이 명료하다면 굳이 심판받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심판 없이 즉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까요? 중요한 것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충실하지 못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 세속적 죄를 범하게 된다면 또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자주 죄를 짓는다면 온전히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심판 받지 않는 믿는 사람’은 단순히 믿는다고 입으로 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 그래서 생활 안에서도 온전히 주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다시금 마음먹어야 할 것입니다. 심판 받지 않고 그토록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라도요…….  


자신의 일은 미워하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사랑하라(성 아우구스티노).


약자를 떠미는 사람과는(‘좋은생각’ 중에서)

한 청년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청혼을 하기 위해 그녀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더니 집사가 나와 말하길, 아가씨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일에 놀란 청년은 왜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지 편지로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답장했다. 

“나는 오늘 당신을 기다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우리 집을 향해 바삐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지요. 그런데 당신은 얼마나 급했던지 마주 오던 걸인 여자를 떠밀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하겠습니까?”

영국의 작가 찰스 햄이 겪은 일이다. 이후 찰스 램은 빈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랑은 놓쳤지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배웠다. 


약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연히 관심을 두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식의 생각으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약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한없는 약자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관심을 끊어버리신다면 어떨까요?

나 역시 약자이기에 약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감히 선물 받기에 너무 벅찰 뿐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남녀가 사랑을 고백할 때는 신중을 기하며 참 강한 표현을 하더군요. 사랑의 이벤트로 한쪽 무릎 꿇고 금이나 다이아 반지를 전해주지요. 그 반지를 아주 소중히 늘 간직하고 행복을 확인하면서 기뻐합니다. 


하느님도 사랑의 이벤트로 구세주 예수님을 인간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보석과 비교도 안 되는 자신의 속을 그대로 말입니다. 실수투성이인 우리 인간으로선 감히 선물 받기에 너무 벅찰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사제 수품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할 성경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 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재능보다 태도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각지의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통된 특징을 조사했고 또 장래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되는 좋은 재목들을 미리 찾아다니며 과연 정말로 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지도 조사했습니다. 연구는 몇 십 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워크는 마침내 4가지 성공 요인을 찾아내었습니다.

첫째는 지능이었습니다. 타고난 지능이 높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성공했습니다.

둘째는 지식이었습니다. 타고난 지능이 있더라도 지식의 습득을 게을리 하는 삶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기술이었습니다. 지식을 올바로 응용할 수 있어야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는 올바른 태도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아무리 앞의 3가지 요인이 타고났더라도 태도가 엉망인 사람들은 성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성공했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요인이 평균 이하더라도 태도만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워크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성공은 90% 이상 태도가 영향을 끼친다고 발표했습니다.

[출처: 김장환 큐티 365, 나침반 출판사]


신앙도 마찬가지고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이 뛰어나 감동적인 설교로 잠시 신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있어도 그 복음선포자의 삶의 태도가 밑받침이 되어주지 않으면 그런 강의는 결국 허무함만을 남깁니다. 제가 복음화국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방법들만을 찾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을 쓰고 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스템과 교육을 개발하고 적용하면 복음화가 잘 진행될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태도에 대해 반성하고 쇄신해가야 하는 요구가 더 절실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들을 천사가 구해줍니다. 그리고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성전은 그들을 가두었던 이들이 손만 뻗으면 다시 붙잡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천사를 보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잡히면 다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전혀 머리를 쓰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박해가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시간동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복음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복음선포 내용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선포 하는 이들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박해받고 미움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고통을 피하게 해 주시는 이유는 복음을 조금이라도 더 선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베드로처럼 다시 돌아가 순교할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완전한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선포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때가 차자 모두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악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활시켜 주신다는 믿음을 세상에 전해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죽음을 회피하려고 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사도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피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 피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을 원하면 그리스도처럼 당당히 그 죽음을 향해 가야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을 팔아넘기려는 가리옷 유다에게 당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시간과 능력과 기적까지 갖추었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바치려는 자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이 두려워 피하셨다면 세상에 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천사를 보내신 이유는 필요한 때면 당신께서 구해주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위협에 당당히 맞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먼지로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복음 선포자를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 뜻에 끝까지 순종할 수 있는 선포자는 우리가 아니면 안 됩니다. 복음의 선포 기술이나 능력, 방법들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갖추었는지 먼저 살펴야겠습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며칠 화사한 꽃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달콤한 봄비가 내립니다. 온천지가 완연한 봄기운으로 기지개를 활짝 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젠 예전같이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라 훈훈하고 따뜻한 봄바람입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비가 되어 내리는구나! 세상 방방곡곡 그 어떤 지역,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골고루 풍성하게 내리는구나!”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니코데모의 내면에는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강한 주님 체험이 부족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한 하느님 자비 체험, 골수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온 몸으로 느꼈던 절절한 은총 체험이 니코데모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와 이성으로만 자꾸 이해하려하니 이런 저런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씀에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복음 3장 8절)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장 9절)


참으로 묘한 것이 바람입니다. 물론 기압골이나 대기상태, 지형이나 태풍의 영향에 따라 이리 불고 저리 부는 것이 바람입니다. 느낌은 있으나 절대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바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백번 깨어나도 성령의 그 감미로운 바람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묘하고 신비스런 성령의 바람이 스쳐지나갑니다.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느님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임하십니다. 그 결과 육으로만 살아가던 한 인간 안에 참된 내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고스란히 한 인간 안에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 안에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키엘 예언서 11장 19~20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간 측의 신앙 고백은 어찌 보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육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질과 육체의 쾌락만을 최고로 여기고 추구하는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 대가 없는 예수님 사랑, 거저 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의 중요성을 설파해야 되는 신앙인의 삶이 꽤나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사라져버린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확신 갖고 믿음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우리들 삶의 원리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부활은 당신과 함께 다시 시작하자는 우리 각자를 향한 강렬한 초대입니다. 새 인생을 출발하자는 초대, 영적인 삶, 위로부터의 삶을 다시 살아보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도움을 주고 있는 ‘복음화 학교’가 새로이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가톨릭 회관 5층에 새로이 강의실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일반 건물에서 세를 얻어서 지냈습니다. 올해는 복음화 학교가 시작된 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명동의 가톨릭 회관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복음화 학교가 더 많은 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단체가 25년을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단계의 과정을 마치려면 1년 6개월가량 매주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분들이 만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추기경님께서도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는 복음화 학교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지난 3월 한국의 주교님들께서 교황님을 방문하였을 때, 교황님께서는 한국교회에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죽음 위에 세워졌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장은 모두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하는 기도가 적어지고 있으며, 다른 일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신앙이 삶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복음화 학교는 신앙은 실천이며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임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평신도들의 열정을 존중하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직자들의 권위와 독선으로 평신도들의 신앙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직자들은 더욱 겸손한 자세로 사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을 충실하게 준비하고, 정성을 다해서 성사를 집전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직책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평신도들이 25년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을 격려하셨고, 치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리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는 복음화 학교가 사도들의 뜨거운 신앙을 본받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더욱 충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빛과 어둠의 싸움    -주님의 전사(戰士)-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적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삶이 영적전쟁입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빛과 어둠의 싸움으로 요약되는 영적전쟁입니다. 

하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영적전쟁중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하여 끝기도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는 마치 하루의 전쟁이 끝난 듯 해방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빛과 어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우리의 내면이요 사회현실입니다. 

아마 세상 끝날까지 빛과 어둠의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 읽은 기사도 어둠의 현실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실감있게 와 닿았습니다.


'제5회 세계군축의 날을 맞아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이 "우리 세금을 무기 대신 복지에"라며 군사비 축소를 요구했다. 

이들은 1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예산낭비성 무기와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 4대를 사는 8800억원의 예산이면 국공립 어린이집을 1400개나 지을 수 있고, 국제법으로 금지된 무차별 살상 무기인 확산탄(집속탄), 차기다연장 로켓 시스템을 포기하면 그 3조 3415억 원의 예산으로 경상남도 학생들에게 30년간 무상급식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5년 한국의 군사비는 37조 4500억으로 정부 예산의 14.5%이다. 

군사비 액수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다. 

반면에 2014년 한국의 GDP대비 사회복지비 비중은 OECD28개 나라중 꼴찌다.‘

이것이 우리 무지와 어둠의 현실입니다. 

사회 곳곳에 어둠의 현실은 빛을 압도하는 느낌도 듭니다. 

어둠을 이기고 빛으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절망을 이기고 희망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과연 나는 빛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의 전사'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주님은 빛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평생 도반(道伴)이자 전우(戰友)인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하나될수록 우리 역시 주님의 빛으로, 주님의 진리로, 주님의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빛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어둠입니다. 

어둠이 빛을, 죽음이 생명을, 거짓이 진리를, 불신이 믿음을, 미움이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궁극엔 빛의 승리, 생명의 승리, 진리의 승리,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부활로 이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의미하는바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사도행전은 빛과 어둠의 대결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도들이 빛에 속해 있다면 대사제와 동조자들은 어둠의 세력을 대변합니다. 

어찌 하느님을 믿는 대사제가 악의 어둠에 속해 있을 수 있는지 신비입니다. 

누구나 무지(無知)에 눈멀 때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봅니다. 


다음 장면이 빛과 어둠의 대결을, 궁극엔 빛의 승리, 주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사도들을 붙잡아다 공영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 성전에 들어가 가르쳤다.‘


그대로 주님의 승리, 빛의 승리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어둠의 세력이 강하다 해도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주님의 전사들끼리 형성되는 전우애(戰友愛)입니다. 

광화문에서의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미사에 참석한 이들 중 아는 수도자들을 만났을 때 마치 전쟁터에서 만난듯 반가웠다는 한 수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영적전우애의 체험인 것이지요. 

제가 때때로 특별한 카톡의 사진을 나누는 것도 영적전쟁중인 전우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순수한 목적 하나입니다. 


어제도 벗꽃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의 사진이 아름다워 많은 형제자매들과 나눴습니다.

"활짝 핀 벗꽃 파스카 축제예요. 예수님 아우가 오셨어요. 넘 좋아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늘 선물이 되어 주시네요.“

"와, 신부님, 감사합니다. 제게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사진을 보니 마음이 힐링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감사의 응답이었습니다. 

하여 면담성사때도 위로와 격려로 주님의 전우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데 온 힘을 쏟게 됩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힘겹게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주님의 도반들이자 주님의 전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전우애를 두터이 해 주시고, 당신 생명의 빛으로 충만케 하시어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희망의 촛불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우리는 빛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위의 어둠을 봅니다. 빛을 따르는 사람들보다는 어둠을 조장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이 어둠은 우리 주위뿐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을 따른다고 하지만 우리 자신도 거기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슬픔이고 비참한 현실입니다. 자포자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빛이 있습니다. 내 안과 주위에 어둠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이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도 이 말씀이 한 줄기 빛입니다. 여기서 희망이 솟아납니다. 오늘을 살아갈 힘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기운입니다. 희망하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희망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희망의 촛불을 밝힙시다. 작은 빛이지만 이 빛은 희망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하는 작은 불꽃입니다. 세월호 참사 일 주기를 앞두고 오늘 하루 우리 마음에 희망의 촛불을 밝힙시다. 두 손을 모으고 주님 말씀의 초에 불을 밝힙시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20)

-오상선 신부님-

세상의 많은 범죄는 주로 밤에 일어납니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요 재충전의 시간인데 밤은 악이 활동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밤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하지만 왜 진실이 밝히 드러날 수 없는 걸까요?

악을 저지른 어둠의 자식들이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어둠의 세력에 동조하여 진실을 그냥 묻어버리자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더이상 어두운 무덤 속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요즘 날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빛이 나기를 빕니다.

그 빛이 온누리를 밝게 비추어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길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지요?

빛의 자녀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구원을 선택한 행복한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우리 가운데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고, 미움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는 사람의 탓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받는 사람의 탓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주는 사람이 사랑을 주기에 사랑을 받고, 미움을 주기에 미움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주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사랑을 주고 미움을 주는데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은 사랑과 미움 중에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람은 사랑과 미움 중에 미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마치 투수와 타자의 관계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력이 좋은 타자는 좋은 볼만 치는데 실력이 떨어지는 타자는 안 좋은 볼에만 손이 갑니다. 

그런데 야구의 경우에는 선구안(選球眼), 곧 좋은 공과 나쁜 공을 고르는 눈이 떨어져서 그러지만 사랑과 미움의 경우에는 그것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잘 아는데도 사랑은 받지 않고 굳이 미움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얼마나 미련하고, 얼마나 불행합니까? 

왜 기껏 주는 사랑은 받지 않고 미움만 받으며 살아갑니까? 

그런데 그것이 너무도 역설적입니다.

사랑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100% 깨끗하기를 원하고, 그 원하는 것이 집착의 수준이라면 조금만 더러워도 더러운 것에 눈이 꽂이는 것처럼 사랑만 원하고, 완전한 사랑에 집착할 때 미움에만 눈이 갑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랑을 줬음에도 그 사랑은 받지 않거나 받았다고 생각지 않고 미움을 받거나 미움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 사랑을 줬는데도 자기는 미움을 받는다고 믿는 경우입니다. 

주는 사람의 사랑이 받는 사람에게 미움으로 둔갑하는 것이지요.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그것은 주는 사람의 사랑과 받는 사람의 사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는 사람은 이런 사랑을 주는데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랑을 원하기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미움이라고 생각하거나 사랑의 수준이 차이가 나서 주는 사람은 높은 차원의 사랑을 주는데 받는 사람은 그것을 미움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서 어린이는 약을 줬는데 독을 줬다고 생각지요. 


하느님의 사랑의 경우도 이와 똑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는데 우리 중에는 우리를 단죄하러 오셨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단죄를 받는 것은 주님께서 단죄를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을 주러 오셨는데 그 구원을 받지 않음이 단죄를 받는 것이라고. 아니, 구원을 받지 않는 것은 구원의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니 주님을 믿지 않는 것 때문에 단죄를 받는 것이라고. 

이렇게 또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행복을 선택하지 않음이고, 행복을 선택하지 않음은 그것이 행복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듯 구원을 선택하지 않음이 우리의 불행이요, 단죄이고, 구원을 선택하지 않음은 그것이 구원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행복을 선택하는 우리, 구원과 행복을 선택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절절한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구든 고귀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어떤 이는 늘 부족함이 없고, 또 어떤 이는 늘 목마름 속에 살아가는 것일까? 그 간극에 우리의 냉정함과 나누지 못하는 인색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어주고 나누며 산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행위에 ‘충분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해보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3,16) 여기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 사건, 피조물 곧,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고 접하는 모든 존재를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폭이 넓다.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것 또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한없는 사랑은 ‘외아들’을 주심으로써 극에 달했다. 곧, ‘외아들’이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가장 귀한 것,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씨앗을 말한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은 당신 전부를 남김없이 이렇게 건네주셨다.


16 절에서 사용된 ‘사랑하시어’와 ‘내주셨으니’는 모두 과거형이다. 곧, 이는 육화와 십자가상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3,16) 하려는 것이었다. 그분의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건네주시려는 그분의 절절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재분사형의 ‘믿는’이라는 동사는 신앙의 계속성을 말해준다. 곧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항구하게 믿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심판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3,18). 사랑은 사랑이신 분을 향한 결단이요, 계속적인 움직임이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 없이는 자신을 올바로 알 수도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모두를,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보고 싶은 사람과 보기 싫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 없는 사람 등 그 누구도 구별 없이 사랑하여야 한다. 언제 사랑해야 하는가? 항상.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한없이. 어디서 사랑할 것인가? 어디에서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통째로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귀감이며 창조적 원형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베들레헴에서 골고타 산상에 이르는 절절한 사랑. 그 사랑은 ‘생명 전부를’ ‘무조건’ ‘끝까지’ ‘인간의 죄나 처지에 관계없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보편적,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인간 삶의 방식이자 존재 이유요 삶의 방향이요 목적이며 성장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남에게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그것은 ‘맡기는 사랑’이며 ‘원하는 대로 해주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절망적인 순간에도 허탈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신 분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마치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자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절망감과 허탈감에 빠져 엠마오를 향하여 걸어갔듯이 쓸쓸한 인생살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극진한 사랑으로 당신 전부를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꽃으로 피어나는

생명은 결코

누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약한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빛으로

이끌어 갑니다.


삶을 가능케 하는 건

생명의 참빛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나를

받아들이기에

너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모두를

살게합니다.


삶을 만나는 지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삶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속에

함께 하시기에

우리의 삶은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알게되는

은총이 됩니다.


은총은 하느님을

믿는 것에서 시작되며

믿음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주님의 빛 속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은

하느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외아들을 

믿는 믿음은

심판이 아니라

생명을 향합니다.


생명은 

생명 속에서

믿음을 향하기에

지금 이순간도

생명으로 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산책을 하다가 어떤 자매님이 등에 아기를 업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혼해서 애를 갖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을 정도로 젊은 자매님이었지요. 더군다나 요즘에는 결혼을 조금 늦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자매님을 쳐다보다가 등에 업고 있는 아기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글쎄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 한 마리를 업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요. 그리고 강아지를 굳이 저렇게 사람처럼 업고 있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물론 동물에 대한 극진한 보살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물에 대해 이러한 극진함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더 큰 극진함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이 키우는 애완동물에게는 사랑을 쏟아 붓지만, 정작 사람에게는 사랑보다는 미움을 이해하기보다는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려고 하고, 남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보면서도 우리는 주님을 못 본 체 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들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주님을 못 본 체 하며 사는 것입니다. 


올림픽 메달을 딴 선수들이나 세계 정상급 운동선수들의 대부분은 한 결 같이 자신의 성공 비결이 ‘마음속으로 그려 보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경기가 있기 전날 조용히 앉아 자신의 경기 모든 과정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 경기를 할 때,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미 그려 보았던 모든 행동을 자동적으로 밟아 나가게 됩니다. 


사실 저도 이러한 체험을 자주 합니다. 강의가 있기 전날 조용히 앉아서 제가 강의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상상하는 과정을 가져야 실제의 강의에서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그려 보기’를 지금의 내 모습을 통해서 한 번 해 보세요.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우리의 모습이 과연 먼 미래에 주님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잘 했다.”라고 칭찬하실 것 같습니까? 


주님의 큰 사랑에 비교할 때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잘 했다는 칭찬보다는 그것밖에 할 수 없느냐는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이 모습을 얻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내 이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 당장 할 일이 많아짐을 깨닫게 됩니다. 


삶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최고 표현은 시간을 내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안수현).


왜 아직도 들고 있습니까?

평소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병원 치료를 받지만 별 차도가 없어서 피정을 위해 어느 수도원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개인 피정을 하고 있는데, 텃밭을 가꾸고 계시던 노 수사 신부님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신부님께서는 전혀 스트레스가 없어 보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신부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대신 텃밭 옆에 있던 채소가 담겨있는 바구니를 내밀면 말씀하십니다. 

“제가 지금 이 밭에서 캔 채소인데, 그렇게 무겁지 않으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만 들어주시겠어요?”

이 형제님께서 들어보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흔쾌히 허락했지요. 그동안 신부님께서는 밭을 계속해서 가꾸십니다. 형제님께서는 방해가 될까봐 한쪽에 서서 얌전히 기다렸습니다.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요? 점점 어깨가 쑤시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계속해서 말없이 일만 하고 계십니다. 또 다시 삼십 분쯤 지나자, 이 바구니가 마치 커다란 바윗돌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신부님! 이 바구니를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 무거워서 도저히 못 참겠어요.”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깜짝 놀라며 말씀하십니다.

“아니! 진작 내려놓지 왜 아직까지 들고 있소?”


바로 그 순간, 형제님께서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무거우면 그냥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지요. 삶 안에서 어렵고 힘든 그 모든 것을 다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든 그 순간을 꼭 움켜잡으면서 못 살겠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에 나의 모든 마음을 맡기면서 그 안에서 커다란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죄와 멸망 안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유일한 방법, 길을 제시하셨는데 그를 따르지 않으면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거짓의 어둠을 직시하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이곳 왜관에는 이틀 동안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이리 아픈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아픈 비이기에 수도원 정원의 예쁜 철쭉 꽃들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형형색색 떨어진 꽃들이 눈에 밟힙니다. 비에 젖은 땅을 수놓고 있는 떨어진 꽃들은 눈이 시리도록 슬펐습니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도 떨어진 꽃들처럼 눈에 서벅서벅 밟힙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월호 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인 ‘살인’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세상이 점점 무서워집니다.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들을 정말 아무 것도 안한 채 방치하고 있다가 결국 차디찬 어두운 물속에 수장시켰습니다.

단원고 한 아이가 죽기 직전 스마트픈으로 찍은 ‘아이들이 보내온 두 번째 편지’라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내몰려 있는 지도 모른 채 아이들은 선실에 갇혀 “엄마 보고 싶다”며 울먹이기도 하고 “살아서 만나자”며 서로 위로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또 미안합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있으면 자신이 어둠인 줄도 모릅니다.

어둠의 속성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더 많은 거짓을 잉태합니다. 심지어 어둠은 자신을 빛으로 압니다. 그러나 참 빛이신 예수님은 거짓의 어둠을 직시하셨습니다.

빛 앞에 어둠은 그 정체가 탄로납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빛은 거짓의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을 잊으려고 합니다. 카톡으로도 ‘그만 잊으라’는 문자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망각은 거짓의 어둠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아니, 망각은 어둠의 동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과 불의의 어둠에 귀를 막고 입을 다문다면 우린 어둠의 동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노의 노예는 되지 맙시다. 분노도 또한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분노에 갇힌다면 어느새 우리 자신도 어둠의 동조자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주님은 진리의 빛으로 오십니다. 진리의 빛이신 주님이 함께 계셔야지만 우리는 우리 내면과 우리 외부의 어둠을 직시할 수 있고, 우리의 인간적인 분노도 맑은 분노, 빛의 분노, 진리의 분노로 정화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진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기억합시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0-21).




진리의 빛   -진리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의 빛입니다.

진리의 빛이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입니다.


진리 상실의 시대, 진리 실종의 시대입니다.

거짓과 불신이 만연하고 상대주의, 회의주의가 범람하는 어둠과 혼란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진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진리를, 진리의 빛을 찾는 인간입니다.

이런면에서 인간은 마음 깊이에서 누구나 구도자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불가의 성철 고승도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것'이 자기의 좌우명이라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빌라도 앞에서 진리가 그 존재이유임을 밝힙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8,37).


빌라도의 엉겁결 질문이 우리에겐 평생 화두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요한18,38).


평생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에게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들이 진리에 대한 명백한 답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17.19).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와 하나되어 갈수록 진실한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또 다음 말씀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주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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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주님의 복음 말씀은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9-20).


이 또한 우리가 겪는 엄연한 세상 현실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향하면서 어둠을 향하는 역설적 인간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이들, 진리를 잊은 업보입니다.

진리의 빛이 사라지면 악의 어둠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3,21).


바로 이게 우리 믿는 이들의 길입니다.

진리를 실천할 때 진리자체이신 분, 빛이신 분,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 주님과 만납니다.


진정 진실하고 자유롭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은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 하나뿐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말 그대로 진리의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선포가 그대로 사도들의 존재이유입니다.


흡사 1독서의 장면이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 같습니다.

악의 어둠의 세력에 의해 공영감옥에 갇힌 사도들입니다.


악의 어둠의 승리 같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은 없습니다(요한1,5).


주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구출하여 명령합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사도5,20).


이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에 들어가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말 그대로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진리의 빛이 되어 삽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진리의 빛이 되어 사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진 거룩한 평생과제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어 진리의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리를 두고 세상에 내려오셨다. 속되고 비천하고 희망이 없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이 마음을 내 속에 담는다.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예수님의 겸손과 비움과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요한 13,1) 모습을 정성껏 내 마음에 담는다. 이제 나의 가정, 내가 속한 일터와 공동체를 바라본다. 그곳이 나에게 주어진 ‘세상’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간다. 바람직한 나의 모습, 말과 행동, 태도를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그런 나를 예수님께서 격려해 주시는 것을 상상한다.


“아 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척도다. 믿음은 진리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가고, 악을 저지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현대 신학에서 말하는 심판과 잘 들어맞는다. 심판은 하느님이 우리 행적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생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행하면서 스스로 내리는 선택으로 인해 굳어진 자기 삶의 양식이다. 심판은 외부에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내리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나는 오늘도 심판과 구원 중에서 선택을 한다. 오늘 하루 구원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어느 성인이 제시한 다음의 기준을 두고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 보자. “선을 보고 모방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선보다 악을 더 사랑한다.”

 



사랑하자. 제대로 한 번 해보자.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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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을 내어주실 정도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so loved world that ……)’라는 표현,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얼마나 사랑하면 외아들을 내어주실 정도인가?


이 생각 저 생각 가볍지 않은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원하면서도 가장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들 중에 애정결핍(愛情缺乏)이라는 말이 있다. (전문의학용어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보통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사랑과 정을 받지 못한 이들이 보이는 증상이나 증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증세는 결과적으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아픔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며 이 세상을 평생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 받는 존재이며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해지고, 모든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끼듯이 말이다.


결국 사랑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다.

어쩌면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가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최소한 옳은 사랑이라면 결말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눈물 나게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 주어져도 아름다워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조차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가장 근접한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어머니의 사랑도 그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반영된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기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해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당신 외아들을 내어줄 정도의 사랑!

평생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랑일 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완벽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우리는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하면, 그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무엇이 완벽한 것인지는 의식하면서 살고자 할 때 근사치에 가깝게 갈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진다.


그 모범은 하느님이시다.


사랑하자. 제대로 한 번 해보자.

그 대상이 하느님이시든,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든, 사랑을 키우고 있는 연인이든, 자식이든, 이웃이든 무엇이든 간에 제대로 한 번 해보는 거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제대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당신은 좋은 친구를 잃었습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손발이 없이 태어났지만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멘토가 되고 있는 닉 부이치치. 그러나 그도 어렸을 때는 그런 모습으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하며 자살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무언가 자신에게 계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돌리던 친구들이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좋은 친구 하나를 잃었습니다. 참 안 됐군요.”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는 친구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지만, ‘자존감’을 되찾고 나서는 자신과 친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놀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그들의 손해임을 당당히 밝히는 것입니다.

 

저도 전에는 누군가 저를 싫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했었습니다. 모두에게 잘 해 주려고 하고 잘못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노골적으로 저를 싫어하는 표현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수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은 예수님도 미움을 받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도 미움을 받는데 사람이 미움을 받는 것이 무슨 큰 대수입니까?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대부분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나를 미워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문제보다는 그들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여 밉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어떤 노력을 해도 밉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닉 부이치치의 모습을 보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받아들이지 않는 것 하나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좋은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나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도 않고 육체적인 모습만 신경 쓰는 사람임을 부이치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하나로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이 하느님이 되셨다는 말은 곧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빛이 싫고 그 빛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 싫다는 말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집 안을 엉망으로 해 놓고 살아가는 빈민굴 실업자 청년에게 등잔을 선물했을 때 그 청년이 자신의 더러움과 엉망진창인 자신의 방을 보기를 원치 않아 등잔불을 창문 밖으로 내던진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빛을 거부하는 것이 곧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과 방이 잘 정돈되어 있다면, 즉 부끄러운 것이 없다면 오히려 빛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다시 등잔을 하나 사서 방에 넣어놓고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내 자신이 받아들여지기를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안 받아들여지면 그만입니다. 예수님도 당신 말씀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든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고 돌아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희아씨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얼굴에 커다란 붉은 점이 있어서 부모로부터 버려져 보육원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좋아하던 한 잘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그녀의 얼굴에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 얼굴에 암이 발생하여 얼굴 한 쪽이 함몰되는 수술을 받고 나서도 그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 남편은 김희아씨를 받아들임으로써 위대한 남편으로 판단 받게 되었습니다. 외적인 모습이 아닌 내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임을 김희아씨를 받아들임으로써 증명해 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김희아씨는 자신의 남편의 위대함을 드러내는데 쓰인 하나의 심판의 도구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뿐입니다. 그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들 탓인 것입니다.

나 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인 내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 주위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사랑을 아는 사람임을 증명하면 그만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다른 사람들의 몫입니다. 내가 받아들임으로 내 자신을 심판하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심판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우리도 닉 부이치치처럼 우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당히 말합시다.

“당신을 좋은 친구 하나를 잃었습니다.”




뻔뻔해야 산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나는 어찌 악을 저지르면서도 빛을 미워하지 않고 빛으로 나아가는가?

 

뻔뻔스러움인가, 가증스러움인가, 위선인가?

그렇다. 세 가지 다다.

 

악을 저지르면서도 선을 사랑하고 거고, 악을 저지르면서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거다.

하느님을 떠나서 악을 저지르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저지르겠다는 거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가 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되지 않고 다윗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한 죄를 감추려고

하느님으로부터 숨었고,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죄와 악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하느님은 시편 139편이 얘기하듯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고,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고, 내 뱃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에 밧세바와 간음죄를 짓고 우리야까지 죽인 것이 드러났을 때 즉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라고 죄를 고백하고 참회의 시편 51편을 다윗은 지었지요.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삽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다윗도 처음에는 자기 죄를 숨기려 하였지만 들통이 난 뒤 자기 죄는 다 하느님 앞에서 짓는 죄임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살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보삼아 뒷산에 오르니 소나무들이 너무도 빽빽이 심겨져 햇빛을 못 본 나무들은 죽어 있고 살아있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기 위해 경쟁하듯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살려면 저렇게 기를 쓰고 빛을 향해 하늘로 올라야 하는구나!

 

저도 그런 것입니다.

진리보다 악을 더 실천하는 저이지만 어차피 저의 죄와 악을 숨길 수 없다면 살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겠다는 겁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진리를 실천치 못할지라도, 그래서 우리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할지라도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살려달라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뻔뻔해야 삽니다.

하지만 이 뻔뻔스러움 안에는 좋은 뜻도 있습니다.

행위는 진실하지 못해도 마음만은 진실하자는 것이고, 행위가 비록 악해도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자는 겁니다.







인도의 갠지스 강에서 열심히 수행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자그마치 20년 동안을 매일같이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물 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기뻤지요. 20년 동안의 수행이 큰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면서 스승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스승님, 기뻐해주십시오. 제가 20년 동안 수행을 한 끝에, 물 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은 전혀 놀라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갠지스 강을 건너는데 드는 배 값이 어떻게 되지?”

“한 20루피 쯤 될 것입니다.”

이에 스승님은 한심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자네는 20년 동안 20루피 번 것이군.”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20년 동안 수행했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갠지스 강을 건너기 위해 굳이 직접 물 위를 걸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20루피만 있으면 쉽게 배를 타고서 건널 수 있는데 자그마치 20년을 수행해서 겨우 20루피의 비용이 드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즉, 물 위를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기 위해 노력하는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말고, 진실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진실로 중요한 일이었지요.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있어 진실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돈 버는 일?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일들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얻지 못해서 좌절에 빠지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해주시지요. 즉,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은행에 저금을 합니다. 그런데 저금을 하기 전에 꼼꼼하게 살피지 않습니까? 아마 어떤 저금이 높은 이자를 주는 지 꼼꼼하게 살펴,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이자가 높은 은행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이름의 은행입니다. 이 믿음은 쓰면 쓸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고이자로 내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높은 이자를 주는 주님 앞으로 가야할까요? 가지 말아야 할까요?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꼼꼼하게 살펴보시고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꼭 바뀌어야 할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이건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 전체가 바뀌기를 바란다(예반).




우린 그분의 약점     

-김현 신부님- 

부활한 당신과 마주친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평안하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그 모진 형벌을 치러 내신 그분이 우리더러 “평안하냐?”고 물으십니다. 눈을 감아도 그저 그분의 마음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평안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걱정뿐이셨나 봅니다.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 약점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 그럴 듯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악당들이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삼아 주인공을 협박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 그를 생각하면 내가 그저 약해지는 것, 그가 내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랑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마음. 지금 사랑하고 계십니까? 내가 바로 예수님의 약점일 테지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분의 약점일 테지요. 

우린 모두 예수님의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깊을수록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더 약해지고 조금 더 포기하고 조금 더 봉헌하게 될 겁니다. 

사랑 때문에 조금 더 바빠질 겁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주님께선 어떠신지 여쭈어 봅시다. “당신께서는 평안하신지요?”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빛의 단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제 제가 본 무지개를 수녀님들도 보셨는지 어제 물었습니다.

아무도 못 보셨답니다.

무지개가 떴건만 보는 사람만 보는 것이지요.

안 봤을까요, 못 봤을까요?

설마 안 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못 보겠지요.


못 본다면 몰라서 못 볼까요?

무지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다른 것, 예를 들어 하늘은 어떻습니까?

알지만 바빠서 못 보겠지요.


그러면 물리적으로 바빠서일까요?

물리적으로 바빠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봄 되어 꽃을 보는 것도 못 볼만큼 바쁘기야 하겠습니까?

어디 멀리 소풍 가서 보는 꽃구경도 아닐진대.


그러니 사실은 무지개, 하늘, 꽃을 볼 마음이 아닙니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아들을 갑자기 잃은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과 방금 헤어진 여인이,

그 슬픔이 가시기 전에,

아니, 그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이며

어떻게 다른 무엇을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경우도 있지요.

내 죄가 크고 큽니다.

죄는 빛과 어울리지 않고 아름다움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죄 지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어둠이고,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퇴폐적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대명천지의 빛과 빛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를 감출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현장을 급습한 서치라이트가 어둠 속 불륜을 드러내고

드러난 사람들로 하여금 옷도 못 걸치고 도망치게 하듯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온상인 어둠을 없애심으로 죄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빛의 단죄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요한 3,16-21)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 또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 외에 다른 이유나 목적이 없습니다.

주님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라든지, 인간들에게 뭔가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라는 구절은 그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믿는 사람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분인데, 그 생명은 믿는 사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안 믿는 사람에게는 안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주시는데도 안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못 받게 됩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다면 회개해야 하고(마태 4,17), 믿고 회개한다면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요한 3,21).

혹시 "하느님은 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가?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 대답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와 같은 말이 되는데, 이것은 절대로 말장난이 아닙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님들의 사랑에서 무슨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이유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활동도 역시 '사랑'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만일에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 영업활동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선포하신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심판'이라면 "회개하여라." 라고 선포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전부 다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나 흠이 조금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가차 없이 잘라버리시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어떻게든 고쳐 주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우리가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하면 됩니다.

앞에서 했던 말과 같은 말인데, '회개'는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주시는 구원을 우리 쪽에서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입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는데, 그 구원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은 못 받게 됩니다.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데도 자기가 안 받는 것입니다.

또 받기를 바란다면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심판(멸망)을 받겠다고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나중의 일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이 됩니다.

"지금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따라서 이미 결정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빛'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어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을 선택하지 않으면 '밖'(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연옥은...? 연옥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보속 장소이기 때문에 사실상 천국에 속한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도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믿지 않고 "나는 죄가 너무 커서 회개해도 소용이 없다."라고 하면서 회개하기를 포기하거나 거부해버리고, 더욱더 죄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요한 3,19-20).

그래서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자포자기'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자살해버린 일이 좋은 예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같은 복음은 묵상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물론 니코데모와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장면 전체라면 복음관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대화 내용 중 일부만 따온 것이라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더 요긴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좀 머물러야 할 대목은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믿음의 주춧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만, 도대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게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 그렇게 인간이 되신 하느님, 곧 예수님과 우리 보통 인간 내지 나와는 무슨 관계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깊은 의미를 길어 올림이 무엇보다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이어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인지 깊게 성찰해 봤으면 합니다.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런 것을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게 알아듣지 않으면, 우리네 구체적 일상이 크게 뒤틀려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살아내는 모습, 곧 행동하기와의 사이에 무슨 간격은 없는지 살펴봐야 하고, 그런 관점에서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깊이 파고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끝으로, 믿지 않는 이는 심판을 받았다면서 심판의 내용과 관련하여 빛과 어둠 그리고 악과 진리에 대해 언급하고 계십니다. 빛과 어둠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 사회 내지 세상의 모습과 관련해서 나름대로 더듬다 보면 얻는 바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봐도 유익하겠습니다.


 



오늘을 청년들이 블랙데이라고 하더군요. 즉,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남녀가 모여서 자장면을 먹는 날이라고 하는데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혹시 자장면 드실 분 계십니까? 저도 못 받을 테니 같이 먹자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죠? 저는 아쉽게도 선물을 받았답니다. 그것도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 화이트데이에 맞춰서 선물을 받았네요. 


사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모두 저와 상관없는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는 날이니까요. 그런데 그 상관없는 날도 저에게 상관있는 날이 될 수 있더군요. 


지난달이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한 권 구입했지요. 그런데 이 책을 구입함으로 인해 화이트데이 이벤트에 자동적으로 응모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당첨이 되어서 며칠 전에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전혀 화이트데이와 상관없는 저이지만 이렇게 선물을 받으니까 그 날이 저와도 상관있는 날처럼 생각되더군요. 


그 어떤 날도 내 자신과 상관없는 날이 아닙니다. 또한 그 어떤 사람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장소도 나와 상관없지 않습니다. 모든 시간, 사람, 장소가 나와 연관이 있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덜 중요한 것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 회복입니다. 세상일과 물질에 대한 욕심과 관심으로 인해 멀어졌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아드님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이, 그리고 내가 접하는 모든 장소가 의미 있는 곳이 된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과 연결시킬 때 우리들은 더 이상 나만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불필요한 욕심이나 이기심으로 힘들게 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다가오시듯이 우리 역시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때, 우리의 구원 역시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세 가지는 믿어야만 하는 것, 원해야만 하는 것, 실천해야만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신앙

-오민환-

이제 사흘간 보았던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니코데모에게 일러주시고 싶었던 신앙의 핵심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육’에서 난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주 분명해집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심판’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결단’에 비롯합니다(요한 1,5-9; 5,22 이하; 8,12; 9,39 이하; 12,25 이하). 신앙은 참으로 죽음과 삶 사이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는 것이 요한 복음서가 전해주려는 핵심입니다. 니코데모는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범상치 않은 “스승”으로 알아봤지만, 믿음의 결단은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니코데모는 아직 “진리를 실천”하며 “빛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생명을 택하는 것’입니다.

 



불신의 심판- 자업자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종 아주 억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선의를 완전히 반대로 알아듣습니다.

저는 좋은 뜻으로 얘기했는데 그분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당신은 제가 나쁜 뜻으로 말했기를 원합니까?”


좋은 뜻으로 말했는데도 왜 나쁘게 받아들이고,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하는데도 왜 아니라고 할까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제가 억울한 것 이상으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 분이 참으로 딱합니다.


양쪽에 문제가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믿음을 주지 못한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저는 좋은 말을 할 사람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평소의 제가 나쁜 인상을 준 것이지요.


그가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을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안 좋은 경험이 쌓여서 그럴 수도 있고 너무도 교만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튼 불신과 부정의 메카니즘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믿지 못할 분이기에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불신의 사람이기에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하시는데도 심판하러 오셨다고 굳이 믿는다면 예수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구원이 발생하지 않고 심판이 떨어집니다.

 



이미 이루어진 심판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더 데레사가 젊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어느 빈민굴을 방문했습니다. 한 청년을 만났는데 씻지도 않고 방도 청소하지 않아 돼지우리 저리가라 할 만한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방엔 램프가 있었지만 그 청년은 그 램프를 키지 않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램프가 있는데 왜 키지 않느냐며 그 램프를 켰습니다. 그 청년은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냐며 화를 내고 다시 램프를 껐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지지 않고 다시 램프를 켰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마침내 화가 난 청년은 램프를 밖으로 내던져 깨 버렸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집으로 돌아가 새 램프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 불을 밝혀주고 돌아갔습니다.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찮게 그 청년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같은 빈민굴에 살고 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려주는 수녀에게 데레사 수녀를 보면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Your light is still burning in my life)”


빛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을 보기 싫어서입니다. 이는 범죄가 어두운 곳이나 외진 곳에서 많이 벌어지는 이유와 같습니다. 남이 본다고 생각되면 좀처럼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인일수록 남들의 시선이 따갑기만 합니다. 저도 괜히 불량배를 쳐다봤다가 맞을 뻔 한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의 시선도 견디지 못합니다.

반대로 위의 이야기처럼 빛은 자신을 보게 해 주고 자신을 보면 그런 추한 모습으로 계속 사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우울증 치료 방법 중 하나는 밝은 빛 속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아빌라의 데레사를 데리고 지옥엘 가셨습니다. 그 분은 데레사에게 어느 작은 방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방은 매우 작았고 빛이 없어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습니다. 벌레들이 있는 것 같았고 그 축축한 공기 속에도 온몸을 전율케 하는 기분 나쁜 것들이 느껴졌습니다.

데레사는 이 방이 누구의 방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방이 내가 너를 구원하지 않았으면 네가 영원히 있었어야 할 방이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운명을 지닙니다. 성녀가 된 분에게 그러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면 우리에겐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엔 이렇게 우리 모두가 심판 받은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어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향이 원죄입니다.

저는 구원을 생각하면 항상 오징어잡이 배를 생각합니다. 불빛을 좋아하는 오징어는 그 빛을 따라 올라와 그물에 걸리지만 다른 고기들은 빛이 싫어 빛에서 멀리 떨어져갑니다. 내가 지금 어떤 본질의 인간인가에 따라 이미 심판은 이루어져있는 것입니다.

두 여인이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한 여인을 데려가고 한 여인을 남겨 둘 것이고 두 남자가 밭을 갈고 있다면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 보다도 그 사람이 어떤 본질의 사람이냐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심판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빛을 좋아하는 사람과 빛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사람들의 행실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유일한 계명을 주고 가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빛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 빛의 진리를 끝까지 따를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짧은 묵상>>

우리는 보통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죄인이기 때문에 짓는 것입니다. 즉, 죄는 이미 있는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인이었기에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죄인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죄인이었기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따라서 한 순간에 성인이 죄인이 되는 일도 없고 죄인이 성인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사람이 한 발짝만으로 산을 오르고 내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와는 자신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부터 유혹자에게 돌릴 때부터 이미 죄인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담 또한 하느님을 보지 않고 하와와 그가 건네주는 빛깔 좋은 열매를 쳐다보면서부터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조금씩 멀어지면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특별한 죄를 짓기 전에 진정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합니다. 둑방이 작은 구멍으로 허물어질 수 있듯이 큰 죄도 이런 작은 죄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순간도 그 분을 잊지 않고, 단 한 순간도 그 분이 원하시지 않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항상 시선을 그분에게 두고 살아야겠습니다.

 




얼마 전에 편지를 두 차례나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선거관리법에 위반되지 않도록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아마 제가 신부로써 미사 시간에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미리 경고를 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솔직히 국회의원 선거가 딱 일주일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옳은 것인지 또 누가 더 잘 할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전에 힘을 모아야 대통령 정책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해서 여당을 지지했어도, 또 그 힘의 분산을 위해서 야당을 밀어야 한다고 해서 지지했건만 우리나라의 정치는 그렇게 발전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지나가면서 어떤 한 후보의 선거공약을 들었습니다. 그의 공약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공약이 먹혀 들어가는가?’라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후진국일수록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공약이 난무하고, 선진국일수록 인격적인 삶을 말한다.’라는 말을 어떤 글에서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이러한 공약이 난무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어서 그럴까요? 

선거 때만 되면 성인군자가 되고 슈퍼맨이 되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많지요. 세상에서 가장 옳은 사람들이고,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처럼 비춰집니다. 그리고 열심히 지역구를 돌면서 그 지역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서 얼굴을 비칩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가장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또 그들의 공약들은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요? 말만 무성하고 실천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만 따라도 구름 같이 지지자가 나타날 텐데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뜻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몸을 바쳐서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하셨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고 지지를 했던 것입니다. 바로 말만 아닌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실천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해야 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치인들만 이렇게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 역시 이렇게 빛으로 나아가는 그래서 진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 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이로써 우리나라 정치도 후진 정치가 아니라 인격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선진 정치로 발전되지 않을까요? 




진흙 구덩이에서

- 김우정 신부님-

주일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간 여름 캠프에서 인상적이었던 프로그램은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몸에 진흙이 묻는 것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학생들이 진행자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면서 점점 많은 진흙이 묻자 더 이상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자기보다 진흙이 덜 묻은 친구에게 달려가 진흙을 바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범하는 죄의 문제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만 한번 죄에 빠지면 점점 자신을 더럽히게 되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까지 같은 상황에 빠뜨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깊이 묵상해 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이처럼 악이 깃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악을 저지르는 이는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점점 어둠으로 파고듭니다. 때로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주 바치는 기도 가운데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어둠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 기도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유혹과 악이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대변해 줍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 대해 성찰해야 합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사생활과 애덕의 실천을 통해 망설이지 않고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유혹과 악을 내버려두지 말고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몸에 티끌이나 지저분한 것이 묻으면 털거나 깨끗하게 씻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에 묻어 있는 여러 가지 지저분한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씻어내는 길은 바로 깊은 성찰과 성사생활에 참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머물도록 도와줄 것이고, 우리는 복음 말씀처럼 진리의 빛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독서> : 아집에 사로잡혀 사도들을 박해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 경규봉 신부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효가 날마다 늘어나자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중에 나타나 사도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며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도록 한다. 사도들은 천사의 말씀에 따라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에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한 후 사도들을 다시 붙잡아 심문한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지만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갔으면 하였다.”(사도 5,12.15) 이러한 기적은 주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셨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표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사도들을 가리켜 선량한 백성을 선동하는 자들로 몰아붙이고,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아집에 사로잡혀 있어서 객관적 사실을 바로 보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그분의 놀라우신 지혜의 말씀을 듣기도 했지만, 예수님을 거부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사랑의 하느님을 전할수록 예수님을 더 반대했고, 급기야 예수님을 처형했다. 때문에 사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지만 이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증거를 보여주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정확한 사실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설명해도 거부한다. 자신의 주장과 맞을 때에만 받아들일 따름이다. 


사람은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향 내지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도록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고집불통인 사람은 누구의 말도, 어떤 정확한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을 자신의 아집에 맞추어 해석할 따름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병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사람은 변화되기 어렵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하다고 할지라도 쓸데없으며, 오히려 열심 자체가 자신과 사회를 더욱 더 병들게 할 뿐이다. 사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도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었다(마르 16,14).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가 추구하는 하느님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하느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었다(사도 9,5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을 외면하고 자신의 소리만 따랐다. 실상 그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하느님을 믿는 거룩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주님의 부활도, 사도들이 보여준 기적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도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인물이며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사도들을 박해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오늘 우리가 아집에 사로잡혀 자신의 소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고 거스르지 않도록 기도하자. 자신의 소리에 매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인도하심을 따르자. 하느님을 끌어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는 신앙인이 되자..........◆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치 않고... 

- 차공명 신부님-

요즘은 자기 표현의 시대라 그런지 소위 말하는 얼짱 몸짱들에 관심들이 많다. 게다가 세련된 차림새와 유머스러운 말솜씨에 노래나 춤등에 소질이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는 요즘 십대들이 이야기하는 완소남에 가까워 진다고 하겠다. 


이렇듯 외적인 요소가 크게 관심을 끄는 이 세대에 내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면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진정으로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에는 아마도 세대를 초월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형에 가깝다 하더라도 첨에는 순간적으로 너무 멋지다고 생각될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내면의 아름다움이 뒤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 감정들은 사그러들면서 후회하던지 또 다른 멋쟁이를 찿던지 하게 되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왈 덕불고 필유린]. 그 뜻은 "공자가 말했다. 덕 있는 자는 외롭지 않나니, 반드시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내면의 덕이 쌓이고 인격이 갖추어 지면 주위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덕 있는 사람 곁에 모인다라는 뜻일게다. 


그 비슷한 내용이 논어에 또 나온다. 사마우가 근심스럽게 말하기를 남들은 다 형제가 있는데 나만 홀로 없소! 하자 자하가 말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생사는 운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고 하네. 군자가 조심하여 실수가 없으며, 남에게 공손하여 예을 지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형제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걱정하는가?하였다.. 


사실 사마우 형제가 있었지만 다 악인들로 죄를 지었으므로 이렇게 형제가 없다고 한탄하는데 이것에 대해서 공자의 제자인 자하가 군자다운 자세로 사마우를 위로하며 이끌어주는 장면인데 그 내용이 앞서 공자의 말씀과 서로 뜻이 맞닿아 있다. 공자가 생각한 이상적인 군자는 결코 혼자 일 수 없고 주위를 감화시키고 그들을 군자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그런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덕을 갖춘 사람을 알아보고 그에게 모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덕과는 크게 거리가 먼 사람이라면 십중팔구는 오히려 그 사람을 멀리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양심과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덕을 갖춘 군자를 알아보고 그 주위에 모일 수밖에 없는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생각해 보자! 요한 복음 사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받아들이고 믿으면 그로 인해 구원을 얻게 되나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글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자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빛이신 예수님은 공자가 이야기한 가장 덕을 갖춘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빛을 따라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야 한다. 빛을 사랑하는 양심과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 곁에 와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구원을 받는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 자체가 자신이 어둠쪽에 가까운 것을 인정하는 것 이고 그것은 결국 심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자 이제 빛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는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이 예수님을 대리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덕을 찿아, 군자를 찿아 모여들게 하여야 하고 그로써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빛과생명을 받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문창규 신부님-

제가 거의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SBS에서 화요일 밤 11시에 하는 " 긴급출동 SOS 24"라는 프로그램입니다. 

보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가정폭력, 자녀학대, 알콜 중독, 게임 중독, 등 요즘 사회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무엇이 저 가족을 저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정말 행복하고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나약하고 실수투성이지만 당신 아들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희생 제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주위에 가정 폭력과 자녀학대, 알콜 중독, 게임 중독과 같은 사회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빛에로 나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왜 사람들은 어둠을 사랑하고, 빛에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그 빛이 가시밭길도 비추기 때문입니다.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빛을 따라 걸어가다가도 보이는 가시밭길을 피해, 가시밭길이 없어 보이는 어둠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는 가시밭길이 없겠습니까? 

실상 그 어둠에도 보이지 않을 뿐 똑같이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그저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가시덤불이 없어 보이는 어둠, 빛이 없는, 하느님 없는 어둠이 과연 하느님 나라로 가는 편안한 길일까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밝혀주십니다. 

그 빛 때문에 가기 싫은 가시밭길을 볼 수밖에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빛 때문에 가시덤불을 안전하게 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다가 가시덤불이 보이더라도 자포자기 하지 말고 더 열심히 빛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봅시다.




-홍성만 신부님-

불완전한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오늘의 말씀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21 참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신 하느님의 그 깊고 깊은 사랑을 믿는 사람은, 즉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이신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분기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내주신 아버지의 그 깊고 깊은 사랑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사랑의 표징이신 그 아드님을 '진정으로 믿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 여러분, 그 하느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글쎄요? 사실 우리는 어느 만큼까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믿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외아드님을 내주신 그 큰 사랑을, 즉 어느 정도까지만의 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벅차고 버거운 일입니다. 


-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 성경은 이어집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와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아드님을 보내신 하느님의 그 깊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의 표징이신 아드님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며 곱씹읍시다. 그리하여 믿음이 더 깊이 뿌리내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말씀지기 4-5월호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 3,16-2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셨습니다."(요한 3,16) 


이 짧은 구절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2천년 동안 선포되어 온 기쁜 소식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창조되지 않은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순종한 우리를 죄인으로 낙인찍어 그 값을 치르도록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놀라우신 사랑 안에, 당신 아드님으로 하여금 굽히지 않는 순종으로 무수한 굴욕과 수치를 겪음으로써 우리를 구원케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외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부름에 온 마음으로 응답한 아들의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구원의 드라마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영원히 다가갈 수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사랑이 그러한 희생을 이끌어내는지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친구에게서도 완전히 자기를 내어 주는 희생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이를 체험합니다. 그것도 매일같이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인격적 사랑 안에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고자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삶을 낱낱이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불러주시고, 우리의 응답을 들으려고 기다리십니다. 


"아빠(abba)" - 아버지!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묵상함으로써 경외심과 경탄으로 무릎을 꿇게 되어야 합니다. 또한 숭배와 순종으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바치고픈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 당신 아드님을 보내주신 뜻은, 우리가 당신의 참모습을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완벽한 대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드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곧,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계획, 그분의 마음에 대해 듣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결코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 은총의 힘을 통해서만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들어올려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셨을 때 보여 주신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 세상에서 저와 형제자매들에게 보여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어렴풋이 이해할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그토록 돌보아 주심에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답례로서 온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를 사랑하겠습니다."




빛으로 나아가기

-김유철 신부님-

나 혼자만의 사랑인 ‘짝사랑’의 결론은 슬픔으로 끝납니다. 

결코 나의 사랑을 상대방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외아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외칩니다. 짝사랑은 싫다는 것이지요. 외침에 귀를 기울이며 응답하는 삶을 살 때 사랑은 커져가고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미움이 너무나 큰 사람들은 사랑을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을 알아본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빛보다는 어둠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고 감탄하고, 말씀을 듣고 기뻐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더러는 자신이 쌓아올린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해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3,17)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3,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정민수 신부님-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자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말없이 들고 있거나, 글귀를 설명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짧은 네 단어의 나열이지만 굉장한 의미가 담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종말에 무시무시한 심판을 하시리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유다교의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합니다. 사랑이시고 자비 지극하시다는 하느님께서 나약한 인간을 어찌 그리 모질게 다루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다고 보는 게 옳겠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불신의 결단으로, 구원 또는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종말 심판에 앞서 각자 지금 여기서 신앙과 불신의 결단을 내리는 순간에 이미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이 요한복음을 쓴 사람의 생각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느님보다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 더욱 하느님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저는 적어도 그리 생각하고 싶고 거기에 희망을 두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그것도 외아들의 몸을 희생제물로 삼아 인간을 죄의 사슬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죽음에 대한 많은 연구와 책으로 유명한 퀴블러로스라는 스위스계 미국 여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승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동안 당신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하느님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무시해 버린 당신 자신을 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최악의 적이 바로 당신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황순찬-

◆‘하느님 외아들을 믿지 않는 자/어둠을 더 사랑한 자/악한 일을 일삼는 자/ 자기 죄상을 은폐한 자/빛을 미워하고 멀리한 자’라는 구절이 마치 김지하의 ‘오적(五賊)’처럼 눈에 박힌다. 

나는 가끔 예수님이 하느님의 얼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온갖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과 소통을 해봤지만 별 진전이 없자 당신의 얼굴인 예수를 보낸 것이 아닐까? 우리도 전화 통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거기 어디야? 내가 그리로 갈게. 우리 (얼굴)보면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런데 하느님이 택한 수단이 효과가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기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얼굴, 예수님을 희망으로 생각하였으니 말이다. 주류사회의 대부분은 예기치 않은 예수님의 출현에 대해 ‘이거 어디서 굴러먹은 말 뼈다귀야?’라고 반응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가 오늘은 좀 화가 났다. 하느님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면서까지 소통을 원하시는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 만남을 절대사절하고 있으니 격한 표현이 나올 만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밑바닥 신원으로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사람들 눈에 예수님은 무자격자였고, 일신의 거처도 없는 떠돌이였으며, 고린내 풀풀 나는 지지리 궁상 그 자체였다. 그런 예수를 사람들이 거부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당대의 사람들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하느님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너무 몰라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옛날부터 성경과 교부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 십자가의 최후를 마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하느님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하느님, 제발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십시오. 행여 그게 당신 뜻이 아니라면 우리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십시오.’




사랑예감, 구원 예감

-노우진 신부님-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는 가끔 혼란과 의심에 빠질 수 있다.

과연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과연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우린 그저 자신 안에 채워진 감정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가늠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애써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메달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실 사랑을 등급으로 구분지어 진정한 사랑, 그렇지 않은 사랑으로 명확하게 정의내린 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때로는 어리석게도 보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참된 사랑은 그 사랑으로 인해 상대방이 행복해 하는지 아니면 그 사랑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 하는 지에 달린 문제다.

진정한 사랑인 처럼 포장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보다는 자신의 행복과 감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난 네가 필요해" "너없이 나는 못 살아" 등등의 표현이 그런 표현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오히려 진정한 사랑은 나의 사랑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며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바보같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사람을 위해 .."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 지 모르겠다.

이런 사랑의 행위를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구원을 선물하고 계심을 체험하게 된다.

마치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듯이 말이다.

한낱 인간의 감정으로 어찌 하느님의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원은 단지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깊이 있는 이야기 인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가르침을 왠지 따르고, 믿고 싶기에 부족한 나는 그런 말을 감히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뒷 부분이 말해주고 있듯이 우리가 신앙으로 믿기만 한다면 우리의 나약한 본성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들 보다 앞서서 오늘 나의 나약하고, 부족하고, 제한된 인간의 본성을 통해 세상을 향한 자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려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잊지말아야겠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하지만 모든 것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 그것은 바로 과연 나는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이고, 난 왜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이다.




<표정관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모나 교육자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해야될 일 중에 하나가 아이들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입니다.

청소년 교육의 "도사"들은 만나는 아이들 눈길만 봐도 감정의 상태나 아이가 안고 있는 문제점까지도 즉시 파악합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내적인 감정이 외부로 표출되는 데 있어서 어른들보다 훨씬 단순하고 솔직하지요.

아이들이 부모나 교사와 눈길을 잘 맞추지 못하고 슬슬 피해 다닌다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아이들이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든지 의기소침해있다든지 하면 뭔가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부모나 교육자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한 때입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심각한 고민거리를 지니고 있다든지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상처를 받을 때, 죄 중에 있을 때는 괜히 십자가를 바라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성모님의 온화한 표정을 감히 쳐다보기가 송구스럽습니다. 매사가 귀찮고 사는 재미도 없습니다.

반대로 나름대로 영적인 삶을 살 때라든지, 갓 고백성사를 보고 나서 "다시금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면 삶이 얼마나 재미있고 하루 하루가 신나는지요?

과연 오늘 복음말씀이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빛이 그 사람 안에 머물기에 얼굴이 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그 사람 안에 현존해 계시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감출 일도 없습니다. 매사가 투명합니다. 모든 일에 거짓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하느님의 빛은 언제나 저를 향해 비추고 있었지만 제 스스로 그 빛을 외면하고 어둠의 골방 속으로 도망 다니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 숱한 어두움은 모두 제 스스로 만들어낸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주님의 빛을 이겨낼 수 없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강렬한 주님의 빛은 수시로 우리 삶의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빛 가운데로 걸어나오게 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연약한 질그릇 같은 우리 자신의 어두움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늘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목숨을 바쳐서라도 쟁취해야할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보화, 곧 주님의 빛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각자"란 진흙 항아리 안에 현존해 계시는 주님의 빛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밝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 주위의 이웃들의 얼굴에서 성삼위의 빛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극진한 사랑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사월의 아침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상쾌한 아침 공기로, 

따스한 봄 햇살과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아지랑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목련과 벚꽃, 개나리와 진달래가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며 한껏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열린 가슴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들은 아름다운 꽃을 향기롭게 피웁니다.

당신도 저 목련과 벚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상쾌한 아침 공기입니다. 예수님은 따스한 봄 햇살입니다. 

죽어가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햇살 같은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납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병마에서 해방됩니다. 

따스한 예수님의 손길은 나병환자들을 어루만져 깨끗하게 치유시켜줍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용서받고, 

세관장 자케오도 예수님을 만나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가슴을 열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벚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피어납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하늘나라(天國)입니다.


자신에게 사로잡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인 예수님을 거절하면 그것이 심판입니다.

밝고 따뜻한 햇살을 거부하고 어둡고 습기 찬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으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밝고 따뜻한 봄 햇살이 비치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와 따뜻한 햇살을 즐기십시오. 당신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큰 사랑 받는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불신자체가 불신자를 심판한다.

-박상대 신부님-

니고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세상의 일'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니고데모가 '하늘의 일'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고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발설(發說)이라는 보다는 요한복음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동기(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方法)으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목적(目的)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동기(動機: 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극진히 사랑하시는 세상(世上)이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곳이다. 온갖 악(惡)과 불의(不義), 고통과 죽음이 한데 뒤섞여 질서 없이 춤을 추는 곳이 아닌가? 사실 세상은 비구원적 상태 그 자체이다. 비구원적 세상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지거나 툭하면 죄에 빠져 허덕이는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특히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의 동양종교)이 그러한 착각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고도(高度)로 수련한 삶을 통하여 적어도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아집에 빠져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는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너나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적으로(total) 비구원적 상태에 빠져있는 세상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을 하느님은 사랑하신다. 그렇다고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벌어들인 것은 사실상 하느님의 분노(忿怒)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고(1요한 4,8), 그 사랑이 세상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며, 이 사랑이 하느님 스스로를 사람이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靈)이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자기에게 파견된 외아들을 믿는 일 뿐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 받는다. 이 판결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不信) 그 자체가 불신자(不信者)에게 내리는 판결이다........◆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요한 3, 16-21) 

-유광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 외아들을 보내주셨다고 하셨다. 하느님의 뜻은 이 세상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얼마나 감격스런 말씀인가?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을 보내셨고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으며 감사드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선물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단 일분이라도 죽어 가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겠는가? 오늘도 병원에 가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어디 그뿐이랴 살아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말기 암 환자들을 보라. 그저 죽음이 다가 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대책이 없이 슬픔과 절망 속에 침상을 지키고 있는 환자나 가족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몇 년만이라도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 있는 약이 있다면 돈이 문제이겠는가?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 약을 구해서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을 믿기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겠다는 이 엄청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전혀 놀라지도 감사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아무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즉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단순히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다. 즉 

믿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믿지 않는 이는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둘 다 똑같이 에너지를 쏟고 있지만 믿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진리를 실천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에너지를 악을 행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 결과 믿는 이는 점 점 더 빛으로 나아가고, 믿지 않는 이는 빛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어둠으로 간다. 

내가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단순히 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드러난다. 즉 나의 삶이 나날이 빛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어둠으로 가고 있는가? 를 보면 내가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라고 했다. 즉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를 실천하려면 말씀을 알아야 하고 늘 말씀을 자기 품 속에 품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다. 시편 작가는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 105)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따라서 믿는 이는 즉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매일 매일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을 주님의 것이라 불러 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리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했습니다."(예레 15,16)라고 했듯이 말씀을 먹어야 한다.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몸에서 빛이 발산되어야 한다. 만나는 사람에게 빛으로 다가가고 따뜻한 빛이 들어가게 해야 한다. 빛을 발산하는 사람에게는 추운 사람들이, 외로운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헤메이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빛을 쪼이기 위해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희망을 얻기 위해서,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 모여들 것이다. 그래서 만나고 나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따듯함을 느끼고 돌아가게 되고, 마음에 평화를 얻고 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점 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반대로 악을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왔던 사람마저 하나 둘 그 사람 곁을 떠나 갈 것이다. 그리고 만나자고 해도 잘 만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만나고 돌아서면 또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인데 하고 후회하고 돌아서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즉 악을 저지르는 사람과 만나고 나면 악의 흔적이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상했다든지, 기분이 나쁘다든지, 더 큰 실망을 갖게 된다든지, 아니면 더 어둠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든지 될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면서 이런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직접적으로 악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빛을 주지 못한다면 즉 빛으로 나아가게 도와 주지 못한다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지 않는 사람이요,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시간을 낭비하고, 힘을 낭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나를 만나는 사람이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단죄하려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일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복음 묵상 나누기를 하는 그룹이 있다. 그 자리에서 어느 자매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 온 삶을 돌아보니까 헛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동안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복음을 묵상하면서 자기의 신앙생활이 전혀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아주 복음과는 먼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었노라고 하면서 지금 남편이 살아 있으면 진정으로 용서를 청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단지 말로만 믿는 사림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구체적이고 발전적이며 그리고 나를 성숙하게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것은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생활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 동안 진리를 실천하면서 생활한 믿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빛으로 다가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성장했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생활,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생활이었다면 결국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나의 행실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도록 우리가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나의 삶을 통해서.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법†

오늘복음은 어제의 니고데모 질문에 대한 주님의 마무리 답변으로서, 이 내용은 성서 전체를 한미다로 요약하는 복음아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하면 극진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복음은 영으로 새로 태어난 자들이 하느님으로 부터 받는 은총의 선물이며, 거저 받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운 선물을 받는 조건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량하셔서 보내주신 외아들을 믿는' 조건입니다.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가난한 영의 마음만을 주님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잘 할 수 있겠지요? 그지요??? 


그런데 잘 들 안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은 매우 분주하고 번잡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무슨 이유는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때로는 한번씩 숨을 고르게 쉬고 스스로 자신에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바쁜 생활을 늘 해야만 할까? 남들도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까? 물론 바쁘게 활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할 일이 있고,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희망이 있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요즈음과 같이 젊은이들의 실업이나 40-50대가 조기 퇴직 등으로 고통을 받는 실업양상을 보면 그래도 바쁘다는 것은 행복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바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진취적이고 나 자신의 삶에 생동감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목적도 희망도 없다면 아마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과 희망의 열매를 맺기 위한 바쁜 삶은 긍정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쁜 삶 속의 그 목적과 희망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목적달성 즉 성공한다는 것, 이것으로 끝난다면 그 삶은 그리스도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별 의마가 없는 삶인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삶의 의미를 주님에 의해서, 주님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성취하는 가시적인 목적이 그것으로 결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가는 우리 신앙적 삶에서 하나의 도구일 때, 세상에서의 바쁜 삶은 더 큰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더 큰 희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바쁜 삶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짧막한 노랫말로도 불려지는 오늘 복음의 이 구절은 요한 복음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계시를 전하며 누구나 이런 신비스런 존재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요한 복음은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분명한 선택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자 곧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나아갈 것이며, 그의 언행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지적으로 노력한들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해 이룩하신 인간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이고 머리가 아닌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위대한 결과를 낳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실체, 목적적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어제 복음에 이어서 주님을 찾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타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 연이어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우리는 세상적 삶에 너무 깊이 빠져서, 빛이 세상에 왔지만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한 행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새로 터어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바쁜 가운데서 한 일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한 일'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적 삶을 모두 포기하고 하느님에게만 매달리라는 사이비교주들의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세상 삶에서도 밝으면서도 하느님을 항상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를 주님의 대한 감사기도로 시작하고 감사기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적 삶의 모습으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모습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확실한 목표와 희망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나의 모습이 무한한 의미를 갖게 될리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현실에 더 충실할 수 있고 자신 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시다....아멘..........◆

-두올- 





어떤 중학교에 아주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성격 때문인지 친구들은 이 아이를 만만하게 보았고, 그래서 이 아이를 시간만 나면 괴롭혔습니다. 때리고 찌르고 치고……. 6개월간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던 중, 하루는 이제까지 누적된 불만이 최고조로 도달했고 마침내 뇌관에 불이 붙은 모양으로 그 아이 중에서 리더 격인 아이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이 씨, 도저히 못 참겠다. 한번 붙자.”

반 친구들이 모두 구경을 하는 상황에서 싸움이 이루어졌지요. 그런데 싸움이 끝나고 이긴 아이가 서서 쓰러진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그 서 있는 아이가 바로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기고도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아~ 차라리 이제까지 센 놈한테 맞고 있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저런 바보 같이 허약한 놈한테 자그마치 6개월 동안 당하고 있었다니…….’


우리들은 이 아이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겁부터 먹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어서 해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을 괜히 그런 겁을 먹었다고 말을 하곤 하지요.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는 판단이 얼마나 나를 위축시키고 있는지를, 즉 나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어리석은 판단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주님께 대해서도 어리석은 판단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왜 나에게는 저 사람과 같은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까? 저 역시 저 사람처럼 잘난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당신께서는 저 사람만을 위해서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생각들로써 주님과 나의 관계를 더욱 더 멀게 하고, 결국 냉담자라는 굴레 속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크신 주님의 뜻을 유한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교회력으로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이지요. 솔직히 이 말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이신 하느님인데, 또 세 분이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세분이 또 한 분이라는 것. 정말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이 안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를 위한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계속 전달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베푸셨지요.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그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사랑을 전해 주시기 위해 성격이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께 불평 담긴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주님의 그 사랑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해 서로 다른 세 위격이 하나를 이루듯이, 서로 다른 우리들 역시 주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삼위일체의 신비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위축시키는 판단은 이제 그만~~~ 

 



사랑의 신비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그대에게

오늘은 삼위일체(三位一體)대축일입니다.

오늘 아침 독서기도 중에 나오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편지에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대자대비하신 손길로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은 ‘만물 위에 계신’ 성부(聖父)입니다. 만물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신 예수님은 ‘만물을 꿰뚫어 계시는’ 성자(聖子)입니다. 만물이 하느님의 숨결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물 안에 살아계신’ 분은 성령(聖靈)입니다. 

하느님이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는 말은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1요한4,16) 

만물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품을 떠날 수도 없지만, 떠나면 허무가 되고 맙니다.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신비(神秘)는 글자 그대로 신비(神秘)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삶으로 터득하는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 신비는 있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자 

삼위일체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一明)

 


 

삼위일체적 사랑의 삶을 위하여

-박명제 베네딕토 신부님 ( 메리놀병원 관리부 )-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함을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신비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생생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이 삼위일체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 삼위일체적 사랑에 관련되어 있을 때에 참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의 전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살도록 초대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모상의 삶을 보여주신 아들 성자와 함께 하느님의 영인 성령의 힘을 입어 아버지 성부께 나아가도록 불리운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13,13)라는 2독서 말씀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이 되는 대목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활동방식에 관해 암시하고 있으며, 우리를 하느님 사랑의 친교에로 초대하십니다. 


마치 꽃의 생명과 꽃의 모습과 꽃의 향기가 셋이 아니고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세상에서 사랑의 꽃을 피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세상의 생명이 되고, 일그러져 가는 세상에 기쁨의 힘이 되고 희망의 불러일으키는 향기를 풍기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유행하는 유머처럼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에 빠져보시겠습니까? 


복음에서는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사랑의 소용돌이는 인간의 죄에 의해 멎지도 않고 또 무서운 심판으로 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인간을 다시 사랑의 정신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본래 타고난 사랑의 마음을 원상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포기하는 사랑이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주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상처받게 하는 걸림돌들도 있습니다다. 우리는 특히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쉽게 무기력 해지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곁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사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더불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이러한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고 살아가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삼위일체적 신비에 흠뻑 젖어 우리네 사회에 작은 감동을 주는 삶이도록 함께 다짐해 봅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영광받으소서” 

허성 신부님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축일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위격이 서로 다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체를 이루시어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이 완전 무결하신 한 하느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축일이다. 이 진리는 우리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도리이기에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상 많은 논쟁과 이단을 생성했다. 

교리 시간에 교리교사는 삼각형이나 촛불을 가지고 이 교리를 설명하려고 시도도 해보지만 명쾌한 설명은 역시 어렵다. 이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하던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해변을 산책하며 이 교리에 몰두하고 있을 때에 어떤 어린 소녀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떠다가 모래위에 난 구멍에 쏟아 넣는 것을 반복하는걸 보고 이상히 생각되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저 바닷물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떠다가 이 구멍에 넣으려고 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므로 성인께서는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자, 그 소녀의 대답은 당신이 삼위일체 도리를 알아들으려고 하는 노력은 더욱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고는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 도리는 깨닫는 도리가 아니라 믿어야 하는 도리임을 깨닫고 연구를 중단했다는 일화가 있다. 성서에 계시된 삼위의 관계를 찾아보면, 성부와 성자의 만남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마르 1, 10)라는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기쁨을 받는다. 성령 안에서 그분은 아들된 기쁨을 성부께 몰래 바친다(루가 10, 21~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서만 성부와 일치될 수 있는 만큼 성령을 동시에 계시하지 않고서는 성부를 계시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도 신의 위격이라는 것을 계시함으로써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 24)라는 것과 그 표현의 의미를 또한 계시하신다.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일치하시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소유함으로써 만족을 누리려고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교환하시기 위함이다. 

그분들의 일치는 주기 위함이며 주는 선물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통교의 신비이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를 일치로써 결합하신다면, 이분들께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 통교이시며, 또 그분들의 공통된 본질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며, 타자안에서 존재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생명과 통교와 자유의 힘, 이것이 영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이시다라는 말의 뜻은, 하느님께서는 전능자이신 동시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놓으시는 분이시며, 자신의 고유성을 최대로 주장하심과 동시에 자신에게 완전히 이탈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또 당신의 피조물을 소유하시면서 이 피조물들이 개성을 갖고 존재하도록 해주시는 것을 뜻한다. 

물질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한계를 벗어나고 어떤 폐쇄적인 것도 모르며 영원히 그리고 순간순간마다 생명과의 통교를 위한 새롭고 싱싱한 힘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파고들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이 이 삼위일체 교리이기도 하다. 

나는 학창시절에 이 삼위일체론을 4학점이나 따고도 혼란만 더 와서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교수님의 대답은 『나는 여러분들보다 더 모릅니다』하신 것이 기억난다. 유치원생에게 최첨단 전자공학의 이론을 아무리 열심히 강의한들 알아들을리 없다면, 하물며 하느님의 가장 심오한 삼위일체 진리를 한정된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려 드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어린이들이 비록 이해는 못할지라도 현대의 최첨단 과학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편안히 살듯이 우리를 속이지 못하시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이니 비록 이해는 못하더라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예비신자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느냐고 묻고 믿는다는 대답을 확인한 후에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강복을 주어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 신앙의 바탕이요 핵심인 관계로 성호경을 외울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은 성호경을 외우고 있다. 

축복하는 사제도, 축복을 받는 신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영원히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

몇몇 아픈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제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앓아누워 있던 제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해주시던 모습 말입니다. 용돈에는 꽤 인색한 '짠순이'였던 어머니께서 아픈 순간만큼은 앞뒤 재지 않고 팍팍 쓰셨습니다. 고열에 시달리던 제 머리맡에 앉으셔서 당시 구경조차하기 어려웠던 달걀 프라이라든지 복숭아 통조림을 먹여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꾀병을 앓게 됐는데 그런 때 어머니는 꾀병인지 아닌지를 귀신같이 알아맞히셨습니다. 그런 날 복숭아는커녕 단단히 기합만 받았지요.


저희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 그간 세상에서 받아온 상처가 만만치 않은 아이들입니다. '짠한' 마음에 저희들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그들의 상처입은 날개를 치료해주고 싸매주고자 노력하지만 한계를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이 아픈 순간, 외로워하는 순간, 괜찮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해지는 순간, 그래서 만만한 저희에게 무례함을 느낄 정도로 맹렬히 반항하는 순간에는 저희보다 어머니의 그 섬세함, 부드러움, 따뜻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주어도주어도 더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시 뭔가 아쉽고, 뭔가 모자라는 것만 같아 허전해 합니다.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가련한 우리 인생을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조금이라도 더 사랑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그 결과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하느님께서 성삼위(聖三位)로 존재하시는 이유는 보다 완벽하게, 보다 진하게, 보다 강하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랑이 보다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통합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성과 모성, 인간성과 신성이 잘 조화된 통합된 사랑이 요구됩니다. 결국 그 사랑은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삼위께서는 통합된 사랑, 충만한 사랑의 가장 좋은 모범이지요.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하느님이신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 성삼위께서 동시에 존재함은 결국 우리 인간을 보다 확실하게 구원하시기 위해, 보다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최첨단 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정복하지 못할 신세계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난해한 이치라도 명명백백하게 세상 앞에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삼위 신비는 이를 정의 내리기 위한 숱한 시도들이 계속돼왔지만 아직도 베일에 감추어진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연구할수록, 심사숙고할수록 더욱 애매모호해지고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부족한 인간의 필설로는 도무지 명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비입니다. 인간들이 마련한 잣대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너무도 크신 하느님, 인간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풀지 못할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그 존재가 다 알려지고, 모든 사람들 의식구조 안에 뚜렷하게 형상이 포착된 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겠지요. 더 이상 신앙의 대상도 안 되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해 대상이 아니라 신앙 대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느님, 비록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대상이시지만, 그리고 아무리 기를 써도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시지만, 언젠가 우리 신앙이 더욱 깊어진 그 어느 날, 보다 명료하게 우리 앞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보이실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고 희망하며 우리 부족한 신앙을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시기를 간청합시다.




♣ 모두를 내어주는 절절한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누구든 고귀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어떤 이는 늘 부족함이 없고, 또 어떤 이는 늘 목마름 속에 살아가는 것일까? 그 간극에 우리의 냉정함과 나누지 못하는 인색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어주고 나누며 산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행위에 ‘충분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해보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3,16) 여기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 사건, 피조물 곧,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고 접하는 모든 존재를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폭이 넓다.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것 또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한없는 사랑은 ‘외아들’을 주심으로써 극에 달했다. 곧, ‘외아들’이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가장 귀한 것,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씨앗을 말한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은 당신 전부를 남김없이 이렇게 건네주셨다.


16절에서 사용된 ‘사랑하시어’와 ‘내주셨으니’는 모두 과거형이다. 곧, 이는 육화와 십자가상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3,16) 하려는 것이었다. 그분의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건네주시려는 그분의 절절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재분사형의 ‘믿는’이라는 동사는 신앙의 계속성을 말해준다. 곧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항구하게 믿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심판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3,18). 사랑은 사랑이신 분을 향한 결단이요, 계속적인 움직임이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 없이는 자신을 올바로 알 수도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모두를,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보고 싶은 사람과 보기 싫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 없는 사람 등 그 누구도 구별 없이 사랑하여야 한다. 언제 사랑해야 하는가? 항상.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한없이. 어디서 사랑할 것인가? 어디에서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통째로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귀감이며 창조적 원형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베들레헴에서 골고타 산상에 이르는 절절한 사랑. 그 사랑은 ‘생명 전부를’ ‘무조건’ ‘끝까지’ ‘인간의 죄나 처지에 관계없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보편적,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인간 삶의 방식이자 존재 이유요 삶의 방향이요 목적이며 성장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남에게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그것은 ‘맡기는 사랑’이며 ‘원하는 대로 해주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절망적인 순간에도 허탈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신 분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마치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자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절망감과 허탈감에 빠져 엠마오를 향하여 걸어갔듯이 쓸쓸한 인생살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극진한 사랑으로 당신 전부를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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