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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7월 15일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07.14|조회수758 목록 댓글 0

제1독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8-14.22

그 무렵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고,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강에 던져 버리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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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한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 임금은 자기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자신들에게 큰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번성하고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파라오는 모든 것을 참 지혜롭게 대처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파라오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곧 “너의 후손은 ……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창세 15,13)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마지막까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안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가족끼리 싸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면 가족이라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린다면,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죽음에 빠트리는 일이 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가족을 진정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끄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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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우리는 예수님을 충실히 따를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적당히 따르거나 미지근한 신앙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는 충돌이 불가피하지요.

세상이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충돌할 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척해야 하는지, 그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정말 지혜를 다해 최선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요. 

더욱이 내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가족과 불화가 생기거나, 또는 가족이 부당한 대우나 박해를 받는다면, 그 어려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시련이 주어지더라도 예수님만을 우리의 최고 가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저마다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앞날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십자가는 결국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상반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과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 점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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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아주 간단합니다. 길을 가다가 네거리를 만났을 때 오른쪽 길과 왼쪽 길을 동시에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면 마태오 복음 전체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둘 다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도 선택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며느리, 시어머니도 선택하고 내 목숨도 버리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양립이 가능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두 가치가 충돌하는 순간에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저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습니다. 현재의 자연 과학에 따르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목숨을 바쳐 가면서까지 맞서 싸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구가 둥글다는 진리보다 제 목숨을 더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가 그러한 타협을 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순간에 다른 무엇과 타협하려고 하늘 나라의 요구들을 애써 외면하거나 내가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한도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희생이 요구되는 순간에는 잠시 귀를 막는다면 하늘 나라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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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새기고자 『성경』에서 칼이 뜻하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의 칼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에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칼을 들어 찌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사랑하는 이를 포기하는 하나의 ‘결단’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로 할례의 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려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칼로 할례를 합니다. 곧 깨끗하지 못한 것을 잘라 내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겠다는 다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칼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하느님의 참백성이 되려는 하나의 ‘결단’입니다.

세 번째로 성모님의 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시메온은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게’ 된다고 예언합니다(루카 2,35 참조). 곧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견뎌 내라는 말씀입니다.

마 지막으로 칼의 의미를 아우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칼이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습니다”(묵시 1,16).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요컨대, 『성경』에서 칼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결단이며,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려고 오셨으니, 결단력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연이나 학연, 더 나아가 혈연보다도 우선시하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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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탱고 음악 작곡가이자 연주가로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년)라는 꽤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민들이 주로 술집에서 연주하는 탱고 음악을 새롭게 하여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곧,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하여 탱고가 오늘날처럼 매력적인 현대 음악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밤에는 찻집이나 술집에서 탱고를 연주하면서도 클래식 작곡가로 성공하려는 야심에 차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음악의 중심지 파리로 가 최고의 작곡가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작곡가는 피아졸라가 작곡한 현대적인 클래식 기법의 악보를 보고서 좋은 작품이긴 하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평하였고, 이에 피아졸라는 크게 낙담했다고 합니다. 작곡가가 그를 위로하며 전에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지를 묻자, 피아졸라는 마지못해 탱고였다고 답했습니다. 작곡가는 그에게 탱고 음악 하나를 피아노로 연주해 보라고 했고, 그는 망설이다가 연주했는데 반응이 이랬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마디에서 그녀는 연주를 멈추게 하고는 그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거야말로 피아졸라야! 절대로 그만두지 말게!’ 후일 그는 자신의 딸에게 그 순간이 마치 계시 같았다고 기억한다. ‘그녀는 내가 나를 찾아내도록 도와주었다’”(『피아졸라: 위대한 탱고』에서). 

피아졸라는 사람들의 통념에 타협하는 대신 자신의 고유하고 참된 길을 찾으라는 현명한 선생의 조언 덕분에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도 이러한 진정한 예술가의 길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시듯, 세상 사람들이 평화라고 말하는 시대의 풍조와 통념에 신앙의 본분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타협의 길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이 들려오는 주님의 소리를 굳게 믿고 꿋꿋이 걸어야 합니다. 설령 비난받고 세상사를 모르는 바보라는 비웃음을 들을지라도 결국은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인생의 참평화와 행복의 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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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사이에는 아주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오시고 살아가심은 사람들 안에 분열을 일으키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우리 삶 속의 진리와 거짓, 진실과 겉치레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이시고 참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평생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동참하게 되고, 전쟁, 소유욕, 이기심, 교만 따위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배척합니다. 또, 주님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는 것이고, 주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 진리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려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결단과 다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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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분명하게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칼은 자르는 도구입니다. 무엇을 자르라는 말씀인지요?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가족을 자르라는 말씀입니다. 평생 사랑해야 할 가족입니다. 삶의 이유요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를 수 있단 말입니까? 

가족만을 위하여 악착같이 재물을 모으고 있다면 이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식 사랑에 내몰려 정신없이 살고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 자식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한 애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집착을 끊는 칼입니다. 아집을 자르고 편견을 도려내는 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칼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가족만 소중한 듯 행동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칼’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당연히 귀한 법입니다. 평범한 이 진리를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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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은 꿋꿋하고 곧다는 뜻입니다. 내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고집이 세서 다른 사람과 타협할 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에게는 부드럽고 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검법(劍法)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려고 갈고 닦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신앙의 가치를 지키고 영적인 수련을 위해 필요한 내면의 칼입니다. 그 칼로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 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유혹이 된다면 거기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삶 속에서 안주하는 거짓 평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잘라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하셨습니다. 날카로운 양심으로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 영적 수련을 하지 않으면, 거짓 평화를 진짜 평화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찾을 때까지 우리를 휘감고 있는 거짓 평화와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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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과 잘 어울리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도 함께 가고 야외 행사 때도 가끔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우인 것은 확실한데 미사 참여는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모임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절에 다니는 관계로 잠시 쉬고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나올 것이라 했습니다. 전임 본당 신부님께는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시어머니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양보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런 ‘처지’를 십자가로 여기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양보하고 물러서면 훗날 자신의 며느리에게도 같은 조건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자매님은 시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해’ 서로 공존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회는 다양해졌습니다. 신앙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모멸하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평화가 아니라 ‘칼’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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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예전에는 종말이나 박해 시대를 염두에 둔 해석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경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이 듭니다. 

두 사람이 길 하나를 가운데 두고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라이벌 관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그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다 들어주겠다. 대신 길 건너 상대방에겐 그 배를 주겠다. 말해 보라.”

한참을 생각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제 눈을 하나 뽑아 주십시오.” 자기 눈 하나를 뽑으면 상대방은 두 눈을 뽑히게 된다는 계산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식으로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유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거나 형제간에 원수가 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돈과 재물을 삶의 중심으로 여겼기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탐욕을 먼저 정화시켜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는 데 방해되는 일이라면 그 무슨 일도 한 발자국 물러나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복원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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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의 옛날 번역에는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되어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모질다고 여겨졌습니다. 훗날 이것은 히브리 말의 비교급으로, 부모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려면 그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여야 합니다.


피곤함이 가득할 때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디 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휴가에 대한 생각은 더욱 더 커지면서 이번 휴가 때에 무엇을 할지 그리고 휴가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다녀왔던 휴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가기 전의 예상이 다녀온 후에도 그대로 맞아 떨어지던가요? 아마 “집 나가면 고생이야. 그냥 집이 최고야.”라는 말씀들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휴가를 통해 지친 몸을 풀고 싶지만, 사실 휴가를 통해서 더욱 더 지쳐서 오게 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지친 몸을 풀기 위해서라면 휴가가 아니라 잠을 자거나 목욕탕에 가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휴가는 이제까지 반복되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체험을 통해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쉬는 시간, 잠자는 시간, 남들 다니는 곳을 그냥 쫓아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휴가를 보내야 할지가 더욱 더 분명해집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동원되고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생각하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그 안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비자들에게 왜 신앙생활을 가지려고 합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행복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행복이 오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때에 비로소 참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도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셨고, 부활하신 뒤에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면서 평화를 빌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막연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것, 세상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평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평화를 추구하십니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부르제).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

우리의 뇌는 다음의 단계를 거쳐서 정보를 처리합니다. 먼저 오감의 단계로 자극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제 선택된 정보를 이제 판단하기 좋도록 묶거나 배열하는 조직화 단계로 넘어갑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정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의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근본적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일을 해야 하는 선택의 단계부터는 게으름을 피워서 우리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하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지 않습니까? 아니 내 자신도 그런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주변에서 말할 때에는 당황스럽게 됩니다. 바로 게으른 뇌가 복잡하기 때문에 기억에 남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뇌가 원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 오감의 단계에만 머무르겠습니까? 아닙니다. 선택의 단계에서 뒤로 미루지 않는다면, 또한 남들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려고 한다면 맨 마지막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의 단계가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선택을 늘 뒤로 미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들이 해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실천이 힘든 이유는 내 뇌에서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루지 않고, 내 자신이 지금 해야 할 것임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뇌는 적극적으로 활동합니다. 이렇게 사랑만 잘 해도 머리가 좋아집니다.




제가 제일 많이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회에 입회한 후, 참 보기 좋았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하는 모습입니다. 빨래며 식사 준비, 담당 구역 청소며 설거지며...특히 식사가 끝나면 서로 먼저 설거지를 하러 들어가려는 바람에 경쟁률이 치열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명품 수도자! 당대 신학의 깊이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던 대신학자로서, 수도회 총장까지 역임하셨던 보나벤투라 추기경님(1217~1274)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가 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여러 측면에서 위기 중에 있던 시절, 그레고리오 10세 교황님께서는 보나벤투라의 빛나는 성덕과 학식을 눈여겨보시고 스카웃하셨습니다. 리옹 공의회 준비를 위해 1273년 그를 알바노(Albano)의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10세 교황님께서는 교황 사절에게 추기경의 서임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빨간 모자를 보나벤투라에게 전해주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빨간 모자를 전달하기 위해 수도원에 도착해보니, 보나벤투라는 주방 안에 들어가 있었답니다.


식사를 마친 보나벤투라는 동료 수도자들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활짝 웃으면서 설거지를 하고 계셨답니다. 빨간 모자를 들고 온 교황 사절을 힐끗 훑어보신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제가 설거지 중입니다. 잠시 후면 끝나니, 그 동안 그 빨간 모자를 나무에 좀 걸어두시겠어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꼭 빼닮아 지극히 겸손하셨던 보나벤투라였습니다.그는 탁월하고 저명한 대 신학자였지만, 단 한번도 우쭐거리지도 않고, 소속 수도회 이름에 걸맞게 평생토록 ‘작은 형제’로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요즘 메스컴에 자주 등장하시는 분들, 어떻게 하면 앞다투어 자신을 드러내고자 기를 씁니다. 바탕이 부족하고 약한데, 자꾸 덧칠을 하고 꾸며대니,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할까, 걱정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빛나는 덕행이 있으니, 바로 겸손의 덕입니다. 겸손은 덕중의 덕, 모든 덕의 기본입니다. 지식이며 기술이며, 아무리 높이 쌓아올렸다 할지라도 겸손의 덕이 부족하면, 사상누각, 모래 위에 지은 성과도 같습니다. 겸손의 덕이 중요한 이유는? 겸손은 자신도 성화시키지만 이웃도 성화시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덕이기 때문입니다.


보나벤투라의 원래 이름은 죠반니 피단자(Giovanni Fidanza)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 시절 치명적인 병을 앓게 되었답니다. 부모는 아들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근처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아이를 들쳐입고 냅다 내달렸습니다.


신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는 프란치스코 앞에서 이런 약속을 드렸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제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만일 낫게 되면 반드시 아들을 프란치스코에 입회시키겠습니다.”


어머니의 서약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크게 기뻐하면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Oh! Buona Ventura!”(오! 참 좋은 행운이여!)


그러자 아이의 병은 즉시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답니다. 그 뒤로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바꾸었답니다. 보나벤투라로. 약속대로 그는 17세가 되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1257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됩니다.


보나벤투라의 겸손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대 신학자이자,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보나벤투라의 탁월성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알아차렸습니다. 평소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한 할머니가 하루는 보나벤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큰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가시게 되고, 주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실 것입니다.”


할머님의 말씀에 몸둘 바 몰라 하던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응수하셨답니다.

“저보다 자매님께서 더 주님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투라를 찾아와 물었답니다.

“형제가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했던 책은 어떤 책입니까?”


보나벤투라는 지체없이 십자가 하나를 꺼내들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가 제일 많이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




샘플 사용 가능한 신앙

전삼용 요셉 신부님

화장품이나 혹은 이와 유사한 제품들에는 ‘샘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샘플을 조금 써보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샘플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한 하나의 장사수단입니다. 샘플을 사용해보지도 않고 많은 양을 구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샘플을 억지로 내밀며 뿌려보라고 하면 ‘미안해서 사야 되지 않을까?’라는 부담감이 들어 아예 그 쪽으로 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어야 우리는 참으로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도 이런 식으로 전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아주 무시무시한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족이 서로 갈라지게 되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면 가족과도 원수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도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박해 시대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이 말씀이 맞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고발하고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가족을 먼저 생각할지, 믿음을 먼저 생각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때 가족을 선택하게 된다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의 애정 같은 것도 버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찬송에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탄이 내미는 것과의 가치를 재며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와 보면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애정까지도 끊을 각오를 하고 당신을 따라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다가, 물 한 잔만 봉헌할 수 있어도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끝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처음부터 뛰어들기 겁나거든 아주 조금만이라도 받아들여 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물 한 모금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봉헌하는 것이 더 좋은지, 그냥 마셔버리는 것이 더 좋은지 일단 해 보고 결정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일종의 복음 샘플인 것입니다. 


저도 강론을 쓰기 싫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생각은 안 나고 올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럴 때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생하면서 사랑받는 게 낫니, 푹 쉬면서 아무 사랑도 못 받는 게 낫니? ... 그냥 안 써도 되게 해 줄까?”

그러면 저는 정색을 하고 “아뇨, 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외칩니다. 


사실 큰 고생도 아닌데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도 인정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면에서는 ‘내가 고생하는 것에 비해 그만큼 만족이 오고 있는가?’란 질문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강론을 주일만 올렸습니다. 그것도 아는 지인들에게만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매일 쓰게 되었고, 지금은 여러 군데 올라가고 있습니다.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읽으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만약 주일 강론만 지인들에게 보낼 때 그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적다고 느꼈다면 지금까지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샘플을 써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거의 공짜인 샘플도 써 보지 않고 지례짐작으로 “안 사!”라고 해 버리는 마음일 것입니다. 


어떤 연예인이 병역을 기피한 일 때문에 괘씸죄로 입국이 거부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까? 만약 군 생활도 샘플이 있었다면 그렇게 겁먹고 바로 국적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다행히 샘플이 있습니다. 냉수 한 잔을 주는 행위도 하늘나라의 행복을 줍니다. 샘플을 잘 이용해 좋은 것을 많이 사서 부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마태10,34)

곽승룡 비오 신부님

우리는 위의 성경 구절을 두 가지 의미로 구별해야 한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다. 일반적인 느낌에서 이해한 평화라는 말은 세상과 마음에서 흩어져 있는 모든 요소들이 이루는 조화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런 관점뿐만 아니라 신적인 조화는 더욱 풍요롭고 은혜로롭고 자비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평화’를 위해서는 ‘칼’도 적대하지 않고 하나가 되는데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평화와 칼의 의미를 우리는 유명 작곡가인 팔레스트리나의 피에르루이지의 음악적인 대위법을 그 예로서 취할 수 있다. 그는 기술적인 사용(4톤 음악전문용어)을 통해 조화를 찾고자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통찰한 것은 비조화(불협화음)도 함께 이루고 따르는 조화로움을 강조한 것이다.


하느님은 최고 작곡가이시다. 하느님 구원의 역사 안에서 끊임없는 조화로움 속에 칼도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는데, 그 칼이란 바로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분리를 취하곤 했을 때, 그 칼이 분명하게 평화를 파괴할 것이다. 하지만 그 칼이 평화를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을 때가 언제이고 무엇일까? 고민해봐야 할 듯하다.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인간들의 분열을 무서워하지 말고 그 칼과 같은 분열이 분명 평화를 향하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마태10,34)




<누구인가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곁에 두고픈 사람이 있어요

내가 받아들이고픈 사람이 있어요

내가 벗하고픈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누구인가요

내가 왜 그럴까요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요


나를 곁에 두고픈 사람이 있어요

나를 받아들이고픈 사람이 있어요

나와 벗하고픈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누구인가요

그 사람 왜 그럴까요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랑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감추고 싶은 면도 있습니다. 빛과 그림자라고나 할까요. 어떤 때는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계발시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신의 단점을 가리기 위해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여 삐뚤어진 인생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과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감추고 싶은 것, 우리가 원해서 짊어지게 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자랑스럽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럽고 달갑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건강이나 성격이기도 하고, 우리의 가족이기도 하며, 어릴 때부터 안고 온 추억과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단점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거부하지 말고 짊어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감추고 싶고 아파하는 면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나 봅니다. 이처럼 우리가 평생 풀어야 하는 숙제처럼 때로는 우리 인생의 열쇠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풀어내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합시다.




‘제 십자가를 지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가는 십자가이다. 남의 십자가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끼지 못함이다. 특별히 하느님 이름 때문에 진 자기의 십자가는 생명과 맞 바꾸는 십자가이다. 평화가 되기 위해 정의를 세우기 위해 날카로운 이성의 칼을 요구한다. 이 보다 더 큰 십자가가 또 있겠는가? 주어진 제 십자가를 가꺼이 지고 갈 때 하느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우리가 간직한 신앙고백은 십자가를 통해 완성 되고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부활의 결실이다. 무당 굿하듯 기복을 위한 푸닥거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고백은 유리수에서 무리수로 점차적으로 나아가 빠스카로 완성하는 고백이다.


그 누구에게도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지 마라. 이는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판단하지 않으셨다.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학교를 할 때, 부정적 언어를 곧잘 사용했었다. “이 학교는 부적응, 중도탈락, 퇴학생들의 학교입니다. 나는 이들과 함께하며 돌보겠습니다.” 라고 언론 매체에서 인터뷰 할 때, 그렇게 말했었다. 구원이 힘들어지고 사건사고로 이어졌고 변화와 고침이 지지부진했다. 이미 내 말 속에 학생들을 부정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목자가 언론매체에서 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냉담자 회두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냉담자’라는 용어는 이미 그 말 속에 부정적이고 천박한 판단이 들어 있다. 조금 정화된 듯한 ‘냉담교우’라는 용어도 존중하는 것 같지만 부정적인 판단일 뿐이다. 사목자가 한 이런 표현이 매체를 통해 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그들이 회두하겠는가? 냉담 ‘자’ 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그 자체로 그들은 기분 나쁠 것이다. 오히려 오기가 작동할 것 같다.


판단은 거리감을 두게하고 구원을 방해한다. 특히 부정적 판단은 듣는 대상으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할 뿐이다. 내가 처음으로 썼던 책 이름이 ‘뭐, 이런 자식들이 다 있어!’였다. 여기서 자식은 놈, 새끼라는 부정적의미였다. 내가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당시의 학생들이 구원이 되었겠는가? 그들을 만나고 함께하며 그들의 틀어진 심기를 들여다 보다가 내가 부정적 언어로 그들을 판단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이런 단죄의 용어를 내 머릿속에서 꺼내 깨끗이 내다 버렸다. 이는 내가 행한 중대한 잘 못의 발견이자 고침이었다.


판단하지 마라. 그들은 시간이 지나고 사회에서 정의롭게 우뚝선 승리자가 되어 있다. 오히려 단죄하고 판단하기 좋아했던 사람들은 사회 속에 권위주의자가 되어 있고, 구제불능형 인간이 되어 있음을 본다. 그런 사람은 구원과 거리가 먼 자기 자랑의 사람일 뿐이다.




더 큰 행복을 위한 아픔 

이종경 신부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족의 유대가 무척 강합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딸과 어머니가 갈라지게 되는 분열은 누구도 원치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족 간의 유대가 소중할지언정 세상의 최고 가치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유대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예수님과의 일치 앞에서 부차적일 뿐입니다. 자신의 가정보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순명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 우리 어머니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삶을 내어놓는 순교자와 같은 선택으로, 역설적이게도 가장 모범적인 성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자기 안위만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선택으로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재산, 자신의 사람만 챙기면서 하느님을 외면한다면,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거기에는 분열이라는 시련, 곧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아픔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마음의 안정만을 위한 도피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과 하나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그분께로부터 지혜와 생명력을 얻으면서 선을 실천해나가는 순례 여정입니다. 행여나 주님과 멀어지는 무질서에 빠진다면, 그곳에 필요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칼입니다.




아! 이렇게 충만하고 아름다운 것을

최민석 신부님

과거는 지나가고 이제 없다. 시위에서 떠난 화살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뿐이다. 나 지금 이 순간 하느님 현존 가운데 있다. 이 현존 감으로 살고 있다. 지금 나 이 순간 현재만이 나의 것이다. '현재'(present)는 하느님의 '선물'(present)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이것 이 현존밖에 없다. 다만 가려서 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즉시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가 영원한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 이미 하느님 나라 그 자리에 있다.


그렇다. 오늘뿐, 아니,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는 그저 내 생각이다. 흐르는 강물을 잡아두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흘러간 어제에 미련 두거나 집착하면 힘들어 진다. 또한 불확실한 내일을 기대하거나 기약하면 불안한 내일을 현재로 가져와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맞이하는 시간은 늘 찰나일 뿐이다. 덩치가 큰 시간이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이다. 땅에서 공중 높은 곳까지 길다랗게 늘어진 연줄의 어느 한 지점에서라도 줄이 끊어지면 안 되듯이 찰나에서 찰나로 이어지는 나의 호흡이고 나의 목숨이다. 그 무수한 찰나들 중의 하나라도 끊기면 나의 존재는 끝난다.


오늘도 동터 온 하루 그것은 은총이다. 나는 오늘도 어둠을 사르는 밝은 햇살 빛나는 세상이 은혜의 바다 속에 풍덩 빠져있다. 높푸른 하늘 아래, 꽃 피는 땅 위에, 이렇게 나의 심장 박동소리 들리고 있고 맥박이 이렇게 힘 있게 뛰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의 기적이요. 신비다. 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감사한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순간이 내게 주어진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찰나! 찰나! 찰나! 순간의 보석! 천상은총이다. 가슴 찡해지는 이 순간순간 축복의 연속이다. 저만치 내 목숨의 끝 소스라치게 느껴지는 이 순간이다. 심장이 한번 뛰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게 주어지는 지상 최고의 선물이며 은총이다. 어제까지의 괴로움과 슬픔바람에 날려 보내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이 축복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39-40)


인생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다. 잠에서 깨어나면 선물같이 주어지는 하루, 이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한 생애가 되는 거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하는 오늘 하루이지만 언젠가는 이 하루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마치 내 생의 마지막 날인 듯 보석같이 소중히 여겨야 하리.


하룻밤 자고 나면 머리맡에 놓여 있는 것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오늘'이라는 선물이다. '영원'이라는 빛나는 보석의 한 조각이며 아직도 내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너무도 소중한 선물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의 빈 잔이 내게 주어졌다. 오늘 나는 무엇으로 채워갈 것인가.


그 마음 너머의 자리란 바로 ‘지금’이며, 그 자리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지금’밖에 없다. 매 순간 ‘지금’ 속에는 모든 언어의 길, 분별의 길, 이원의 길이 다 끊어져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이름도, 과거니 미래니 현재니 하는 개념이나 관념도 붙일 수 없다. 오직 영원한 자유만이, 기쁨과 행복이, 사랑이 꺼지지 않는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며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다.


어제는 강물같이 흘러가고 새 아침이 밝았다. 나 오늘은 이렇게 살아 있지만 나 내일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을 마치 내 생애 최초의 날같이 싱그럽다. 오늘이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날인 듯 애틋하다. 오늘 하루의 매 순간이 보물처럼 소중하다.


다만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즐길 뿐이다. 순간! 순간! 찰라! 찰라! 새 힘 새 희망이다. 마음의 무거운 구속과 굴레가 사라지고 설명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하다. 마음에는 주님의 평화요,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로다. 아! 그렇다. 삶이란 본래 이렇게 충만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칼을 주러 오셨다는 주님말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평화보다 갈라서고 서로 원수되고 칼 주러 오셨다는 주님말씀 놀랍죠.

그간 지배계급들이 하느님 빙자해 법 해석남용 하늘 뜻을 거슬렀지요.

해서 불쌍한 인류구원 영생할 목숨 얻는 방법 알려주시려 오셨습니다.


세상인류를 하느님 아버지와 한 가족으로 영생케 하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기위해 진리 길 생명이신 예수님 따라 인생목숨 바치라는 겁니다.

이에 반대되는 세상사는 모습은 칼로 자르듯 하라고 당부 하셨답니다.


세상 성공이라는 권력 미모 실력 재물 지식 달성 다 무시하란 겁니다.

세상인생이 절대 아니고 하늘 영원생명을 절대라 믿는 이들 대단하죠.




'괜찮은 사람'(마태오 10.34~11.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작은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물 한잔 건네주는 이'

살다보면 고약한 사람을 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무시하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것처럼 배은망덕한 태도ᆢ 봐주기 힘듭니다.

자기 위신 깍이면 파르르 못견디고 사랑으로 주어진 권한을 힘으로 착각하며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사람, 예수님이 한대 때려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힘든 사람안에서 같이 울어주는것을 택하십니다 ᆢ

택배 아저씨에게 시원한 음료 한잔 건네는 손길이 사랑스럽고 약한 사람 소중히 대하며 용기주고 무엇보다 처진 날개를 펴게 해줍시다.

작고 약한 사람 함부로 대했다면 부끄러워하고 사과할 줄 알아야죠.

아무리 보잘것 없는 사람도 존중해주고 인격적 대우를 할때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됩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날까지'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는 신적 지혜

성 보나벤투라 주교의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서(Cap. 7,1. 2. 4. 6: Opera omnia, 5,312-313)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문이시다. 우리를 위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요 운반해 주는 수레이시다. “하느님의 증거 궤 위에 놓인 속죄 판”이요 “영원으로부터 감추어 계시던 신비”이시다. 자기 얼굴을 이 속죄 판에로 완전히 돌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 열성과 경탄, 환희와 기쁨, 찬미와 환호로 그분과 함께 파스카 곧 ‘건너가게’ 된다. 그런 사람은 십자가라는 나무로 홍해를 건너 이집트에서 사막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숨겨진 만나를 맛보고, 외적으로 죽은 사람처럼 무덤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쉬게 되고, 아직 여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함께 매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뜻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건너감’이 완전한 것이 되려 한다면 지성의 온갖 사고 작용을 중단시키고 우리 정감의 주축을 하느님께로 향함으로써 하느님으로 온전히 변모되어야 한다. 이 ‘건너감’은 신비적이고 통상인의 시야에서 완전히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얻어 누리는 사람 외에는 그것을 얻은 사람이 없고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 외에는 그것을 얻는 사람이 없으며, 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보내 주신 성령의 불로 말미암아 영혼의 골수가 불타 오르는 사람 외에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신적 지혜는 성령을 통하여 계시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싶으면 학습하는 교리가 아닌 은총에게, 지성이 아닌 열망에게, 학습할 때의 독서가 아닌 애타게 바치는 기도에게, 스승이 아닌 신랑에게,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광채가 아닌 어둠에게, 빛이 아닌 불에게, 즉 지극히 감미로운 도유와 뜨거운 애정으로 하느님 안에 들어가게 하고 존재를 완전히 타오르게 하는 그 불에게 물어 보라. 이 불은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 불이 태우는 용광로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수난의 불타는 열정으로 그것에 점화하신다. “내 영혼은 십자가에 매달림을 택하고 내 뼈는 죽음을 택하노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이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죽음을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뵐 수 있다. “하느님을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라는 성서의 말씀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죽어서 이 어둠 속에 들어가 온갖 걱정과 욕망과 꿈을 침묵시켜 버리도록 하자. 하느님을 뵌 후 사도 필립보와 함께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도록 하자. 그리고 사도 바오로와 함께 우리도 “내 은총은 너에게 충분하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다윗과 더불어 기쁨으로 이렇게 외치도록 하자.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이시로다. 주여, 영원한 찬미를 받으소서. 또한 억조 창생이 ‘아멘, 아멘’을 외치게 하소서.”




참 평화는 지혜의 칼이 있어야 한다. <마태,10/34-11/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의 말씀은 평화의 하느님이 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 왔다고 하시였을까? 이는 진리와 거짓을 분명이 하고 세상에 매여 있지 말고 매정이 인년을 끊을 줄 알아야 한다. 는 말씀이며 평화를 얻으려면 캉날과 같은 지혜를 지니고 살아야 하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병에 거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병을 고치려면 쓴 약을 먹어야 하고 날카로운 칼로 수술도 받고 물과 금식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견디여야 한다는 말씀도 됩니다. 누구나 고통 없이 세상을 살려고 한다면 험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격은 사람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 여기 까지 저를 보호하고 지켜주신 하느님의 손길에 감사와 찬미를 시간 따라 지내며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살아갑니다.


요사이 일어나는 일 마다 분열의 조짐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두 사람이상 모이면 일치보다도 분열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모두가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잘라 버려야 할 것을 잘라내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 것을 넣지 않아서 분열이 생깁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으며 썩어가는 부위를 잘라내지 않아 온몸에 병이 번져나가는 것과 같이 평화를 잃고 죽음의 기로 나가고 있습니다.


살기위 위하여 썩은 부위를 칼로 잘아내야 하고 저의 사도에 주어진 칼은 세상을 평화의 길로 인도 하는 방향타입니다. 배가 푸른 바다를 해쳐 나가는 것은 발동기의 힘이 아니라 배 안에 기입니다, 기는 가야할 방향을 향하여 길잡이며 기 없는 배는 아무리 동력을 사용해도 나가지 못하고 맴돌기만 합니다.

오늘 저는 묵상 하다가 칼을 주신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며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지혜를 주신 하느님 아버지에게 감사들입니다. 칼을 주시지 않았으면 밤과 낮을 분간 못하는 사람처럼 어리석게 살 것이고 지금내거 무엇을 생각하고 말을 하고 행동 할줄을 모르고 천방지축 살고 있을지 모리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할 곳으로 가고 주님을 향하여 저에게 주신 기를 방향을 찾아 앞으로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부터 휴가 가는 길에 함께 하시며 넘치지 않고 지혜롭게 지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은 돌멩이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지만 어떤 사람은 돌멩이를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지만 어떤 사람은 칼을 가지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칼은 바로 성령의 칼입니다. 에페소서 6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살아가고자 하지만 때로는 세상의 욕심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어쩌면 그 세상의 욕심은 내가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칼은 그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잘라 내는데 유용하게 쓰일 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칼이 언제든지 잘 들 수 있도록 늘 갈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믿음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보물같은 성인, 성 보나벤투라 축일입니다. 당시 도미니코회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뤘던 대 영성가 성인입니다. 성 보나벤투라 성인은 만 57세 사셨으니 저는 성인보다 13년을 더 살고 있네요.


오늘은 잠시 세상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두렵고 무서운 적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아무리 작고 약해도 일치 단결해 있으면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내부의 분열이 참 무섭고 두렵습니다. 강하든 약하든 내부의 분열로 망한 개인이나 공동체들이 대부분입니다.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망했습니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내부의 분열에는 답이 없습니다. 누구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개인이든 공동체든, 나라든 ‘내적 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문득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바쁜 지도자는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문대통령이 생각났습니다. 84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나날의 일정은 정말 초인적입니다. 참 여유없이 힘들고 바쁜 삶중에도 전세계에 대한 자상한 관심과 매일 주옥같은 말씀과 웃음띤 얼굴을 보면 정말 살아있는 성인이요, 세계의 정신적 대통령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전 교황님의 강론 주제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깊은 바다의 고요와 같다.”(The peace of Jesus is like the calm of a deep sea)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요. 겉으로는 시끄럽고 어지럽지만 내부 깊이에는 주님의 깊은 평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가장 힘들고 바쁜 지도자가 한국의 문대통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칭찬과 더불어 받는 비난과 수모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 역동적이고 그러나 참 많은 크고 작은 무수한 내외적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국입니다. 혹자는 ‘미국이나 호주는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어제는 식탁대화중 "문대통령은 너무 착해서 문제다."라는 어느 형제의 말에 공감하면서 즉시 떠오른 것은 참으로 착할 때, 부족한 것은 하느님이 다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착함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요 겸손입니다. 착할 때 부족한 것은 좋은 이웃이, 좋은 하느님이 도와 주십니다. 문대통령은 12일 오후 전남 무안을 찾아 ‘블루 이코노미 비전 선포식’ 연설을 하면서 사전 원고에 없던 “전남의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합니다. 요즘 한일간 갈등으로 겪는 내적 고독과 어려움을 표현한 듯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평자의 글도 잠시 인용합니다.


“한반도 평화문제는 미국이나 유럽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대체로 관심이 없고, 서방 언론들도 우리한테 별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의 주류 사회에는 우리의 우군이 없습니다. 있다면 한 사람 있는데, 트럼프죠. 문제는 그의 동기가 노벨평화상에 대한 욕심과 재선을 노린 계산이라는 거죠. 한편으로 잘 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기회를 좀더 근본적인 성찰의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돌아보면 촛불의 힘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약속대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고, 김위원장도 어차피 이대로는 갈 수 없으니까 호응을 하게 되었고 워싱턴 정가의 이방인인 트럼프도 일단 긍정적으로 나오면서 모처럼 절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죠. 그래서 1년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고, 북미정상도 두 번 만났죠. 사실 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에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위기는 기회라 합니다. 한일관계가 복잡 난해하지만 분명한 것은 100년전의 한국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불행의 역사를 반복할 수 없습니다. 새롭게 비상할 수 있는 위기의 기회라 봅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의 보호와 우리의 인내와 지혜로 우리가 개척해야 합니다. 세상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어디도 없습니다. 1차적 관심은 자국의 이익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새벽 언뜻 본 기사도 시사적이었습니다.


-‘현대사의 고비마다 거리의 미사로 민중이 갈 길을 앞서 걸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돌이킬 수 없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매주 월요일 미 대사관 앞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미사를 거행한다. 첫 미사는 15일 오후 7시다.‘-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아시아의 등불같은 나라입니다. 전국에는 얼마나 많은 성지가 있습니까? 전 국토가 역사박물관 같고 성지같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가 한반도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며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어제로서 창세기 야곱과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에로 끝나고 오늘부터는 탈출기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걸출한 지도자들은 사라지고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의 압제하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합니다. 요셉같은 지도자는 없어도 하느님은 친히 축복의 약속대로 그들을 돌봐주시어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처럼 친히 이집트인들의 압제하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봐주신 똑같은 하느님께서 우리 한국을, 한반도의 백성을 돌봐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각성과 기도,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사랑 실천이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참신한 충격으로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거짓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참 평화요 거짓과 진리를 가르는 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선악이, 진위가. 명암이 탄로되니 분열이지만 이는 참된 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과정의 잠정적 분열입니다. 적당히 두루뭉실한 거짓 평화가 아닌 정화된 참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그 누구도 당신 보다 사랑하지 마라 하십니다. 노골적으로 미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오로지 당신께 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랑할 때 모두에 대한 집착없는 초연한 눈밝은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면서 제 본분의 책임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당신께 합당하다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대인관계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들이니 모두를 주님을 맞아들이는 환대의 자세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이들 하나하나 역시 ‘주님의 사람’으로 생각해 소중하게 대할 때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내안에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믿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와 지혜, 겸손을 선물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한반도 땅과 사람들에게 참 평화와 더불어 일치를 선물하십니다.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시편124,7-8).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과도 같은 화답송 시편 마지막 구절입니다. 아멘.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에,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 많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런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서의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런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태어나게 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이 주어진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칼과 평화의

팽팽한 긴장안에서

무엇을 향해야 할지를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가장 위험한 칼이

실은 우리를 살리는

은총의 칼이 됩니다.


묶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됩니다.


거짓 자아를 

벗겨냅니다


칼을 통하여

잘라낼 것을

이제 잘라냅니다.


칼의 중심에는

신앙을 지켜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평화를 

일구어내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아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칼과 십자가로

우리를 되살리시는

주님의 구원을

믿습니다.


모든 관계안에서

매순간 주님을

향합시다.




종종 아동학대에 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됩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참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힘없는 아이, 더군다나 아직 이 세상 안에서 할 일도 많은데 아동학대로 너무 짧게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는 뉴스는 우울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배우자의 학대 행위를 알고서도 아이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방관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체벌이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그런데 살해의 가능성이 있는 체벌이었고 따라서 아이가 느낄 공포와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절대로 방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러한 방관자의 모습을 취했을까 싶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요? 사랑한다면 더욱 더 그런 모습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오히려 함께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빙자한 더 큰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잘못을 행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은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평화는 폭력의 묵인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만히 있음으로 인해서 평화를 완전히 깨뜨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사랑도 또 평화도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고, 죄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부활 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도 가장 먼저 평화를 빌어주실 정도로 ‘평화의 주님’ 아니십니까? 그러한 분께서 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을 하실까요?

그러나 앞선 이야기를 통해 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세상의 평화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짓된 평화를 주님의 말씀이라는 칼을 통해서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악을 제거하는 칼, 온갖 불의와 다툼을 제거하는 칼입니다. 이 칼을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을 향해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평화, 잘못된 사랑을 진짜 평화나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따르면서 진짜 평화와 사랑을 위해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인만이 주님의 커다란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다(퀴리부인).


천재
영국의 예술가이자 조각가인 헨리 무어 경의 이름 앞에는 항상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왔습니다. 그런 그가 80세 생일에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내가 왕립 미술학교를 다닐 때에는 탁월한 조각가가 30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40년 후에 겨울 10명이 남더니, 60년이 지나고 나니 겨우 3명만 남았습니다.”
그의 말은 자신이 천재라기보다는 조각을 계속해 왔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실력이 나아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끈기가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천재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천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는 ‘성소국장 회의’가 있었습니다. 사제양성을 위해서 함께 고민하는 신부님들의 모임이라서 만나면 반갑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시간입니다. 서울교구는 사제의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고,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교재를 제작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함께 나누었고, 다른 교구의 신부님들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사제양성을 위해서 헌신하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역시 더욱 분발 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사제 양성 지침’을 새로이 발표하였고, 이번 성소국장 모임에서는 사제 양성 지침을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습니다. 새롭게 발표된 사제 양성 지침은 3가지 차원에서 준비되었습니다.

첫째, 인류애를 가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제직이 삶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의 직업으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애를 가진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지식을 쌓아야 하고, 종교의 틀을 넘어서 이웃들과 연대하여야 합니다.

 

둘째, 영성을 지닌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위지파 사람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지나쳤습니다. 사제는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지나쳤습니다. 율법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고 하였지만 지식으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고민할 때 자라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시대에 영성은 사제를 지켜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 갈 수 있었던 것은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깊은 사제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며,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셋째, 식별을 잘 하는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식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식별을 잘못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을 억압하고, 남자 아이들을 강물에 던져서 죽게 하였습니다. 파라오가 그릇된 식별을 하게 된 원인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나와 상대방을 갈라놓고, 불신의 벽을 쌓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별의 기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귀함도, 건강도,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을 잘하면 마음에 위로가 오고, 그것이 지속됩니다. 반면에 식별을 그릇되게 하면 두려움이 오고, 고독이 깊어집니다. 식별을 잘 해도 고독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위로로 변할 것입니다. 위로가 되는 식별일지라도 그것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점차 두려움으로 변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끝은 시작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스라엘의 역사가 참 파란만장합니다. 무대는 바뀌어 사람은 떠나도 하느님은 쉼없이 일하십니다. 요셉이 살아있는 동안 이집트에 온 야곱의 자손들은 번영과 행복을 누립니다만 야곱과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새 임금이 군림하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끝은 좋든 나쁘든 새로운 시작입니다. 창세기 독서의 끝은 탈출기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집트에서의 그 좋던 태평시절은 끝나고 이제 이스라엘인들의 종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와중에도 당신의 사람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남은 사람들을 통한 하느님의 활동은 은밀히 계속됩니다. 도대체 하느님께서는 언제 쉬시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쉼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종살이 하던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는 일과 쉼이 동시적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참으로 혹독하게 대하면서 압박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는 생략된 부분입니다. 이집트 임금은 이스라엘인들이 사내아이를 낳는대로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산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임금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사내 아이들을 살려 냅니다. 이런 상황을 탈출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 산파들을 잘 돌보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번성하여 더욱 강해졌다. 산파들이 하느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집안을 일으켜 주셨다.’(탈출1,20-21).


마침내 분기탱천한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에게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지고 딸은 모두 살려두라 명령하지만 이런 와중에서 하느님은 모세를 예비하십니다. 내일부터 역사무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모세입니다. 


인간의 그 무슨 시도도 하느님을 경외하며 하느님의 길을 가는 이들을 좌절시킬 수 없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살아계시어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결정적 순간에 당신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이어 그 시대에 필요한 성인들을 보내 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통해 일하십니다. 수도공동체는 물론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세 단절어도 그리스도 중심의 삶안에 포함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분열은 필수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며 가족내의 분열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거짓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은 저절로 드러나니 분열은 필연적입니다.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참 평화로 가는 창조적 분열입니다. 이런 창조적 분열을 통해 마침내 그리스도 중심의 일치의 참 평화가 실현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주님께 합당한 삶입니다. 주님은 가족뿐 아니라 누구도 주님 자신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당신께 합당하지 않다 하십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형제들에게 집착없는 깨끗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일편단심의 사랑이 성소입니다. 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자기 책임의, 자기 운명의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주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십자가의 길같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의 목숨을 얻는 생명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은 만나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알아 환대합니다. 믿는 이들을 환대함은 바로 그리스도를 환대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환대함은 바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마태11,42).


넓고 깊이 보면 모두가 주님의 작은 이들입니다. 하여 성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 53장 첫마디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명령하십니다. 하여 정주영성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환대영성입니다.


주님 환대의 집인 분도수도원이요 주님 환대의 사람들인 분도수도자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의 자연스런 표현이 환대의 영성입니다. 비단 분도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보편적 영성이 환대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환대의 모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당신을 환대하는 우리 모두를 환대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환대를 통해 일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멘.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입니다.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칼이 자신의 가슴에 꽂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의 불화살인 이 칼을 기꺼이 찔림 당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심이오니,

제 자신마저도 결코 당신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심이오니,

오늘 제게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그 칼로 저의 심장을 가르고 저를 수술하소서! 아멘.




성령은 칼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 로버트가 거칠고 무례한 소년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정원에서 빨간 사과 여섯 개를 따다가 쟁반위에 얹어놓고 로버트 앞에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사과는 아직 익은 게 아니니까 다 익을 때까지 며칠 그대로 간직해두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사과를 보관해두면서 완전히 썩어버린 하나를 그 여섯 개의 사과들과 함께 두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썩은 사과가 다른 사과를 모두 썩게 할 텐데요?”하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싱싱한 사과가 썩은 사과를 싱싱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니?”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8일이 지난 뒤 사과를 꺼내왔는데 과연 모두 썩어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시켰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아들을 타일렀습니다.
“얘야,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너도 결국 나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더냐? 이 좋은 사과 6개가 한 개의 썩은 사과를 싱싱하게 만들지 못할뿐더러 싱싱한 6개 모두 썩어버린 것을 보면 나쁜 친구와 사귈 때 네가 장차 어떻게 될지 이제는 깨닫겠느냐!”

나쁜 아이들 틈에서 혼자 거룩하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 아이들을 떠나던가 아니면 그 아이들처럼 되어버리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분별없이 일치하기 위해 다가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칼과 같이 나누고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내는 미사는 구약의 출애굽 때의 파스카 예식을 그리스도께서 성 목요일에 당신 제사로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누룩이 들지 않은 밀떡을 사용해 성체성사를 거행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빵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누룩을 넣어 준비했다면, 그 빵은 며칠 안가서 곰팡이가 슬고 상해버렸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룩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하느님 백성을 부패시키는 오염물질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하신 이면에는 그들과의 접촉으로 누룩 없이 깨끗한 빵인 당신의 제자들이 오염될까 염려스러워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어떤 이들과는 결별을 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도 대인관계가 협소하지는 않았는데, 어떤 동료 신학생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은 혼자만 하느님께 갈 거야? 쓰러져 가는 사람들과 함께 쓰러지고 함께 가야 하지 않겠어?”
아마도 제가 혼자 도도하게 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름대로 힘겨워하는 친구들과 함께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만 함께 쓰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쓰러지는 것은 저에게나 그 사람들에게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함께 섞여서 하나가 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도 평상시엔 사막에서 살다가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커다란 도시로 복음전파를 나갔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며칠 못 있고 다시 사막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물고기가 있어야 할 곳은 물이다.”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되어버렸다면 더 이상 물 밖에서는 오래 살 수 없습니다. 물 밖에서 오래 살면서 죽어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칼은 자르고 분열시키는 도구입니다. 칼은 사랑이신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사랑이시고 일치시키는 힘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누느냐고요? 일치가 곧 분열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성령으로 일치했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나뉘게 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서 혼인하게 되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나뉘게 됩니다.
이 부부가 아기를 낳게 되면 그 자녀와 다른 아이들과는 분리되게 됩니다.
자신의 아기와 남의 아기를, 혹은 자신의 남편과 모든 남자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없고 또 그것이 좋은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말뜻에는 이미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우리’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분리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라는 말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먼저 누구와 일치하고 있는지 질서와 순서가 있어야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느님의 삼위일체 사랑에 끼어들 수는 없습니다. 그 분들은 당신 완전한 사랑으로 철저히 우리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분별한 혼합의 일치가 아니라, 정확한 질서와 구분 안에서만이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극적인 역사’란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편안한 날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건너갔던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월이 흐르고, 요셉도 세상을 떠나자 찬밥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혹독하게 부려먹었습니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습니다.”(탈출기 1장 14절)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는 반복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이집트 등 당시 초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수시로 침략, 대량학살, 유배를 당하며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애써 건립한 성전들이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똑똑한 젊은이들은 포로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남의 나라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중세, 근대, 현대로 넘어오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대량 학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과 살해, 그리고 마침내 나치에 의한 600만 명의 희생...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역시 돌아보면 잠시라도 태평성대를 누려본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호시탐탐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는 열강들 사이에서 호된 시련의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침략과 약탈, 전쟁과 대량학살, 강제 징용, 강제노동, 그리고 위안부, 남과 북의 극단적 대립과 전면전으로 인한 100만 명의 희생...

지난 세기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 하나 있더군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연합국들은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전범국가에 대한 철저한 응징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주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어서 전범국가인 독일에 대한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고 또 다른 전범국가인 일본에 대한 분리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엉뚱하게도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미소간의 냉전 틈바구니 속에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친일파, 등등의 다양한 세력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했습니다. 그 결과 한 국가, 한 민족이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맙니다.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분단을 종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도 큰 비극이 계속되고 있음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 모진 절망의 세월 속에서도 꾸준히 민족의 해방과 재 건국을 희망했으며, 마침내 그 꿈을 실현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굳게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한 번 흔드시겠지요. 그리고 말끔히 정화시키시겠지요. 그래서 참 주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혹독한 세월을 온 몸으로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최단기간에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초고속 성장을 일궈냈습니다.

우리 역시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에 힘입어, 오랜 소원을 성취하는 그날이 오리라 확신합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분 섭리의 손길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안에는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분명 함께 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늘 희망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겠습니다. 




거짓 평화를 도려내는 주님의 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10,34) 이어 가족들끼리 갈라서게 하려고 오셨다 하십니다(10,35).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5,9)이라 하셨던 분께서 이제 와서 말을 바꾸시어 저주를 내리시고 분열을 일으키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평화는 세상이 원하는 거짓 평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세상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가짜 평화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평화의 가면을 쓰고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불의와 분열을 조장하는 ‘삶의 독소’입니다. 그런 평화는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와 무관한 차가운 장벽의 침묵일 뿐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나 자신을 향한 칼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탐욕과 교만, 이기심을 도려내기 위한 정화의 칼이기도 합니다. 그 칼로 세상에 재물과 권력에 대한 집착의 끈을 잘라버리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망상과 욕망의 뿌리를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 주님의 칼로 먼저 나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거짓 평화를 칼로 도려내고, 하느님의 참 평화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지요.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은 거짓 평화를 도려내기 위한 하느님의 칼을 주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칼은 지배하려드는 힘의 칼이 아니라 사랑의 칼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칼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강이 흘러가도록 해주는 정의의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이 칼로 세상에 참 평화를 이루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거짓 평화를 과감히 도려내는 결단이 없이는 결코 이 세상에 하느님의 평화를 이루는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이 쉬운 일입니까? 사실 결단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고 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선택하는 결단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겪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데 참 평화가 찾아올까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데 참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내 삶의 가치기준과 방향이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경험과 돈과 능력을 향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을까요? 집착과 편견, 무관심과 무자비, 그리고 불의와 불평등이 팽배한 삶의 자리에 주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0,3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참 평화를 위한 결단과 평화의 도구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지요. 그럼에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이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주신 칼을 손에 들고 목숨을 바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무시와 천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늘 주님을 삶의 첫자리에 두고, 정의의 실천을 통해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는(10,42) 자비를 전함으로써, 온 세상에 참 평화를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계속되는 많은 비와 높은 습도로 우리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뭄 때문에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청한 간절함을 기억한다면 감수 할 수 있는 시간이며, 자연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순응하는 지혜로움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 따라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묵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가 이야기 한 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썩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망설이지 말고 나서십시오!"

박미라 도미틸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이 세상에 오신 분! 

아들과 아버지가.... 딸과 어머니가... 

며느리와 사어머니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오셨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분이 이제는 집안 식구도 원수이니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이나 다 버리고 당신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제까지 하시던 말씀과 너무나도 다르게 들리는 이 말씀 때문에 많이 헷갈리고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2장 35절에 보면 그들 중 한 율법 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것을 올바로 실천해야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구분지어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빛 자체이시며 아무런 더러움이 함께 할 수 없으신 분!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사람이 온갖 욕심으로 더럽혀져 당신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었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속죄의 제물로 바쳐지기 위하여 베들레헴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피다.“ 하시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시어 당신의 살과 피 모두를 우리의 먹이로 내어 놓으신 분! 

그분께서 바로 오늘 내게도 그런 당신을 먼저 닮아야 한다고 간절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죄사함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깨끗한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이로 내어 주신 당신을 닮으라고 간절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이나 모든 집안 식구들을 사랑하기 위해 먼저 나 자신을 깨끗한 제물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간절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지 않고서는...

온갖 욕심이 가득한 세상에 속한 자기 자신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당신처럼 진정으로 이웃을 살리는 먹이가 될 수 없기에 먼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간절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먼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 온갖 욕심에서 죽어 이 세상 그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눈처럼 하얀 옷을 입으신 당신처럼 그렇게 깨끗하게 된 후에 이웃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고 오늘 그렇게 당신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그분을 따라 십자가의 길로 나설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나요? 

그 길은 내가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니라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당신 친히 이끌어 주시는 길입니다.

나는 그저 두 눈을 꼭 감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만 가면 되는 길이지요.... 


그분께서는 "따름과 보상"(마태오 19,27-30. 마르 10, 28-31. 루카 18, 28-30)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라고, 오늘 복음에서 다 버리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분께서는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분이심을 제 삶을 보아도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제가 꼭 40년 전인 1977년 3월에 십자가를 지려고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 그 길로 들어 섰는데, 40년이 지난 지금! 현세에서 이미 그 모든 보상을 다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 길로 나서지 않고 망설이고 계시다면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굳게 믿고 두려움을 모두 벗어버리고 그분을 따라 그 길로 나서시기를 바라오며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아침 인사를 올립니다.


모든 님들! 오늘도 주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참행복 누리세요~~~^-^*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

최원석

천국에 가면 어떤 모양으로 사람들이 있을지 ? 궁금하지요 ..아마도 사람들은 천국에 가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의 자손들은 재벌들 나름데로 하늘 나라에서 좋은 몫을 차지하고 앉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도 천국문의 문 앞에서 간신히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들 그렇게 상상할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사회에서와 같이 빈부 격차도 있구나 하고?? 그리고 집에서 같이 있던 부모님도 천국 가서도 또 나의 부모님이니 거기 가서도 부모님을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상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상에서 어떤 형제 7명이 있었는데 그들중에 첫째가 부인을 맞이하였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형이 죽고 다음동생이 그 형수와 같이 살았는데 둘재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7명이 그 형수와 같이 살다가 죽었는데 죽어서는 그 형수는 누구의 부인이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천국에서는 시집가는일도 없고 장가가는 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느님과 나의 일대일 관계안에서 형성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사이의 관계는 살아있을때 그때가 전부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 살면서 그러면 현재의 부모님과 형제들의 관계를 어찌 설정하여가야 하는지 ? 그것은 주님의 삶을 들여다 보면 보일것 같아요 ..주님이 공생활 하시면서 생활하실때 주변에서 사촌들은 주님을 보고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활동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홀어머님과 해어지고 당신의 사목 활동하실때도 주님의 말씀에는 한마디도 어머님에 대한 인간적인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당신 사목에만 집중하셨어요 ..그리고 성모님도 아무런 모친으로서 아들 예수에게 어떤 지배력을 발휘하지 않았어요..주님의 공생활 활동중에 어머님의 입김 혹은 간섭 같은 것은 전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의 삶도 그리 평탄한 삶은 아니셨지만 아들 예수님 앞에서 어떤 인간의 고통과 아들로 인한 고통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먼 발치에서 묵묵히 기도로 일관하신 분이 성모님이셨지요 .. 주님과 성모님의 관계를 보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말씀을 어느정도 이해가 갈것 같습니다.  주님이 중심이 아니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이지요 ..특히나 우리가 아주 힘든 판단을 할때가 있습니다. 부모와 신앙.. 부모님의 것이면 죄가 죄로 않보이고 자식에 관한것도 죄가 죄로서 않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부모보다 더 중요한것은 주님과 나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일대일 관계가 중요합니다..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곳에 몰입하는 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주님안에서 하나될수 있는 내가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흔들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한

결단의 칼입니다.


탯줄을 잘라내듯

평화는 주님께 돌아서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평화는

칼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평화와 칼은

함께 걸어갑니다.


평화는 칼을

보여주고

칼은 평화를

보여주듯

부활은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살아있는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말씀의 칼이며

칼을 칼답게 

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매순간이 

기도이며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평화일수록

생생한 회심을 

동반합니다,


결단이 없는 삶은

변화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할지는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이란

평화를 살아내야 할

우리의 결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가는 삶이

결단이며 평화임을

믿습니다.


평화와 칼은

함께 걸어갑니다.



제가 아는 분으로부터 얼마 전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통화라 안부 인사를 나눴는데, 그렇게 건강하지 않다는 말씀과 함께 폐에 종양이 발견되어서 수술을 받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기 때문에 종양만 제거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요즘 암 투병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뵙니다. 암세포를 없애기 위해서 수술도 하시고, 또 항암치료를 하시기도 하지요. 만약 암세포를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될까요? 무한 증식을 하면서 다른 좋은 세포를 없애고 결국 생명을 잃게 만듭니다. 따라서 암세포가 잘려 나갔을 때 비로소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나는 싸우는 것이 싫다면서 암세포를 그냥 놔둔다면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암세포를 잘라버리고 제거해야지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평화의 주님이라는 분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시지요. ‘아니 왜 이렇게 폭력적인 말씀을 하시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서 암세포를 잘라버리고 제거하는 것이 평화인 것처럼, 세상의 악을 칼로 잘라 버리듯이 단호하게 거부해야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집안 식구도 원수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우선순위를 빼앗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만화작가가의 자신의 작품을 잡지사와 광고사에 보냈습니다. 그 모든 곳에 넘치는 의욕을 가지고 응모했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지요. 그 이유는 그림에 재능이 없고, 내용에 있어서도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도전했지요. 그가 바로 미키 마우스를 만든 월트 디즈니(Walt Disney)입니다.


주님의 일에 있어서도 이러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외면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또한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한다면 주님의 평화를 얻을 수 없음은 물론 주님과 함께 하는 밝은 미래도 보장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말이지요.


꿈을 지녀라. 그러면 어려운 현실을 이길 수 있다(릴케).


두 명의 탐험가

인터넷에서 보게 된 글이 생각납니다. 두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음을 전해 줍니다.

우선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 ~ 1912)입니다. 1911년 12월에 남극에 도착했지만 그 뒤 9개월 동안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지요. 그러다가 1912년 11월에 그의 일기장과 시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중략).. 안타깝지만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스콧을 비롯한 7명의 대원 모두 사망했지요.

또 한 명의 탐험가는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 ~ 1922)입니다. 그 역시 1916년 8월에 남극에 도착했지만 조난을 당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그와 27명의 동료들은 절망하지 않고 모두 꿈을 간직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조난 당한지 1년 7개월 만에 모두 무사히 귀환을 하게 되지요. 섀클턴은 말합니다.

“나와 대원들은 남극 얼음 속에 2년이나 갇혀 살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


꿈을 간직한다는 것은 이렇게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꿈을 간직하며 살고 계십니까? 용기를 내어 절망을 물리치고 꿈을 실현하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사는 겁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자기가 국가의 주인인양 행동하면 안 됩니다. 회사의 사장이나 윗자리 분들도 회사의 모든 게 자기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며 이룬 가정을 자기만의 것인 양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눈 비 바람 태양 자연의 모든 덕에 살고 있기에 감사할 줄 알아야합니다. 옷이나 장신구로 나를 꾸며 돋보였다면 그것의 소중함도 느껴야 됩니다. 세상 모든 걸 내가 지어내지 못한 한 그 덕에 산다는 걸 느껴야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오 10,37)”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청에서 함께 지내는 개가 있습니다. 작년에 아주 어린 강아지로 와서 지금은 덩치가 커졌습니다. 교구청에서 지내서 편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몸에 상처가 있습니다. 다니면서 더러 다치기도 하고, 긁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교구청 마당에서 지내는 개도 그런데, 야생에서 지내는 동물은 더 많은 위험과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언제나 위기와 기회가 주어진 다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주일 만에 ‘유행성 출혈열’이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보름간 있었고, 사제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느님 품으로 갈 뻔 했습니다. 그 뒤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제 인생은 ‘덤’이었습니다. 너무도 부족한 제가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제게 ‘덤’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매일의 삶은, 매일의 만남은 제게는 선물입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는 제게는 기회도 많았지만 위기도 많았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기회의 순간에도 부르셨고, 위기의 순간에도 부르셨습니다. 그 뒤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욥 성인의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내게 나쁜 것을 주신다 해도 감사 할 뿐입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생활 원칙이 되었습니다.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부터 큰 단위인 국가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것들은 흥망성쇠를 만나게 됩니다. 큰 바위는 바람이 불어도 쉽게 움직이지 않듯이 마음의 수련이 잘 된 사람은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그런 모든 것이 ‘인연’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모든 것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때로 갈등과 분열도 있을 거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양처럼 순수하지만,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인, 성녀들은 어디에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한 잔의 술, 흘러가는 구름, 흐르는 시냇물, 불어오는 바람, 달빛에 비친 파란 꽃을 생각하면 떠오는 것이 있습니다. 한편의 시입니다. 수필, 소설이 줄 수 없는 멋과 향을 시는 줄 수 있습니다. 한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은 도 종환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주님께 합당한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독서의 흐름이 흥미롭습니다. 마치 끊임없이 흐르는 장강長江 같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드라마 같습니다. 영원한 삶을 구가할 것 같던 매력진진한 창세기의 주인공 야곱과 요셉이 죽고, 이제 오늘부터는 탈출기의 시작이며 내일 부터는 새 주인공 모세가 등장합니다. 지난 토요일은 성 베네딕도 대축일이라 평일 창세기 독서를 대하지 못하였지만 야곱과 요셉의 죽음이 동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새삼 인생무상을 느낍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제역할이 끝나면 구원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살아있을 때 베스트셀러지 죽으면 사람도 잊혀지고 책도 거의 읽지 않습니다. 한 세대를 풍미하던 불가의 성철, 법정 스님이 그렇고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대통령, 박완서 작가, 최인호 작가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습니다.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 역시 죽음과 더불어 잊혀지고, 다시 고난의 암흑기가 시작된 오늘 창세기 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것이 삶의 흐름입니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슬픔과 기쁨, 번영과 쇠퇴,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며 흐르는 강같은 삶의 역사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의 역사나 각자의 가정사, 개인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런 인생무상의 현실에서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고 전체를 바라보며 영원한 삶에 희망을 두게 합니다. 언젠가 비오는 날 써놓고 좋아 나눴던 글이 생각납니다.


-햇빛 환한 날도 좋고/비오는 어둔 날도 좋다

 모든 날이 다 좋다/기쁜 날, 행복한 날, 주님의 날이다-


오늘 탈출기의 어둔 분위기에도 역사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늘 살아계심을 믿기에 믿음의 눈을 지닌 우리는 영원토록 주님께 희망을 둡니다. 좌절할 때 마다 주님 향한 사랑의 열망은 더욱 불붙습니다. 오늘 복음도 주님 사랑을 으뜸에 둡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사랑의 중심에는 늘 주님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끝기도 때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하고 노래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에서 다음 한 구절로 요약합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촉구하는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우선적 사랑을 드리는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입니다. 지난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 아침성무일도 즈가리야 후렴이 참 은혜롭고 반가웠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완전케 하는도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모두를 해결하는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만이 우리의 사랑을 완전케 합니다. 우리의 이기적 불순한 사랑을 정화하여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이 되게 합니다. 점차 우리의 사랑을 완전케 하여 자발적 기쁨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하며 만나는 형제자매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합니다. 사람대접은 바로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대접하는 일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의 사랑을 끊임없이 성장, 성숙시키시어 완전에 이르게 하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칼을 주러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내가 왕이 되고싶다면

내 아내를 왕비로 대하면 되고

내가 왕비처럼 살고싶다면

내 남편을 임금으로 받들면 됩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싶다면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기면 되고

내가 부처가 되고싶다면

다른 사람을 부처로 바라보면 됩니다.


내가 남을 무시하면

나도 그렇게 무시당하게 되고

내가 남을 존중하면

그만큼 나도 존중을 받게 됩니다.


내가 남을 욕하고 씹으면

남도 나를 욕하고 씹을 겁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고 우대하면

나도 그런 대접을 받을 겁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왜 애써 외면하며 살아야 하는지

참 바보스런 인생이 아닌지요.


오늘 임금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왕비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성인이 되고 부처가 되어보자구요.

그리되시길 축원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와 칼은

하나입니다.


깨어있는 믿음없이는

그 어떤 것도

끊어낼 수 없는

우리들 평화입니다.


다시 날을 세워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자신의 입맛대로

길들여 놓은 평화는

진짜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왜곡됨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을

아프지만 감사로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착을 끊어낼 수 있는

말씀의 칼날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용기라는

믿음이 칼날이

필요합니다.


참된 평화는

회개의 칼날을

동반합니다.


일순간에 무디어지고

허물어지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성찰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십자가의 칼을

주셨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삶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보여주신

십자가의 평화는

칼의 여정을

걸으신 참된 평화였습니다.


구체적인 결단과

회개의 본질이

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칼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생생한 십자가의 

칼날속에서

매순간 욕심과 집착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그저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봉헌으로

충만해지는 평화입니다.



 

무주심 

김권일 신부님

며칠 전 쉬고 있던 교우가 30년 만에 미사에 참석했다. 그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시어머니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키며 성당에 나오는 것을 고수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긴 세월이 흘렀어도 믿음을 잃지 않고 다시 성당을 찾아온 그 교우가 고맙다. 정말 고맙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복음적 가치들 때문에 세상 것을 등지고 잘라버려야 할 때가 종종 있다. 하느님 현존을 부인하는 상대주의나 세속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또한 복음적 가치들(사랑, 믿음, 희망, 생명, 비움, 나눔, 섬김, 친교, 평화, 일치 등)에 어긋나는 삶의 방식과는 타협하지 않고 그것들을 배격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때문에 예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불교에는 무주심無住心이라는 용어가 있다. 무주심이란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머무름이 없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하느님께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록 부모나 소중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고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가족들이나 가정사에 얽매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한 적은 없는지 오늘 하루 묵상해 본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고 계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제가 직접 미사도구를 챙겨서 매주일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데 미사 가방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 커다란 초가 아닌 조그마한 티 라이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자주 미사를 해서 그런지 어느새 이 티 라이트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이를 구하기 위해 동네 문구점을 가보니 10개에 3,000원이더군요. 바로 그 순간에 인터넷 쇼핑몰이 더 싸지 않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100개에 9,900원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를 유혹하는 문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글쎄 25,000원 이상 구입하면 배송비 2,500원이 할인된다는 것이었지요.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냥 살 것인지, 아니면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서 다른 물건들도 함께 구입해야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해서 우선 100개들이 티 라이트를 2박스 구입하고 티 라이트를 담을 수 있는 홀더 역시 몇 개 구입해서 25,000원을 넘겨서 배송비를 할인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저에게 이득이 돌아온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티 라이트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또 홀더 역시 기존의 것을 쓰면 되었기 때문에 필요 없었거든요.


결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티 라이트 몇 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동네 문구점에서 3,000원 주고 살 것을 그랬습니다. 많은 것을 싸게 구입해서 커다란 이득을 본 것 같지만, 필요 없는 것을 구입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이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또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려야 커다란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 과연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적게 소유하고, 세상의 자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이 나눠야 할 것이고, 더 많이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융통성 없고 무책임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들이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나쁜 것은 나쁜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사람들의 배척을 당할 수도 있기에 서로 칼을 맞대는 것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주님께서 내세우는 기준을 따를 때, 이 세상 안에서 잘 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분명히 후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올바른 결정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잘못된 결정이며, 가장 나쁜 것은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 것이다(로저 엔리코).


하느님 일이 먼저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볼링이 너무나 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었지요. 

첫째, 아침에 비가 와서 자전거를 탈 수 없어서 운동을 거의 못했습니다.

둘째, 그래서 온 몸이 뻐근합니다. 

셋째, 한 주일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첫째, 며칠 전에 고장 난 컴퓨터를 고쳐야만 했습니다. 

둘째, 집안 청소 및 정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셋째, 강의 준비와 원고 작성으로 인해 시간이 부족합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저녁 묵상을 하지 않았는데, 만약 볼링을 치고 오면 여유 있게 묵상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갈등했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은 볼링이 아니라 묵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성당에 올라가서 한 시간 가량 묵상을 하니, 복잡한 내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침묵 속에서 제 마음 속에 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해야 할 일들을 어느 정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세상 일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 일이 먼저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연습을 필요로 한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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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충무공 이순신의 말씀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이 오버랩 된다.

옳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은 결국 생각이 같은 곳으로 모아지나 보다.


평생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은 쉽게 주어지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어떤 긴박한 상황에 부딪힐 때처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잘 보여줄 때는 없다.

이는 평상시의 우리 모습의 결과가 다급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말 일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삶의 방향을 모든 것을 걸고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해야 할 선택일지 아니면 미경험의 어떤 것에 대한 결단일 수도 있다.


그 때,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자.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이란 옳음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우리의 마지막 결정이 옳음을 선택하는 것이기를 희망한다.

물론 두렵고 떨릴 것이다.

하지만 옳음을 믿고 자신을 내던질 수 있을 때 죽음 없는 삶이 주어짐을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는 늘 연습을 필요로 한다.

평상시의 자기 암시도 필요할 것이고, 옳지 못한 것을 선택했을 때 맛보는 쓰라림의 체험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의 작은 선택들의 기준이 옳음이 되려는 연습이 요구된다.

그래도 준비되지 않은 마음보다는 준비된 마음일 때가 용이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임을 믿는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눔과 봉사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목숨과 목숨사이에

하느님이 계시듯

사랑과 희생사이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시간이며

성장해야 할 생명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목숨은 사랑으로

존재합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사랑이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체성사처럼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에

주는 것이 받는 것이며

잃는 것이 얻는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이기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목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금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시는

밀알의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백 배, 천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시간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생명의 시간이기를 기도 드립니다.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생명의 벅찬 기쁨이기를

기도 드립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칼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칼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오히려 칼과 같습니다.

무디어진 칼로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칼로 베는 듯 우리가 민감하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평화를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때론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도려내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평화가 있기에

이 평화를 이웃과 가족들과 나누고 쪼갤 수있는 칼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칼처럼 고정 되어 있지않습니다.

오히려 칼날처럼 식별과 분별을 요구합니다. 


깨어있는 신앙의 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의 칼없이는 평화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 자신이 칼이 되시어 우리의 거짓된 모습을 깍아내십니다.

아프지만 주님이 주시는 칼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평화를 맛볼수 있습니다.

칼로 우리의 십자가를 벗겨내니 평화가 보입니다.

욕망을 정화시키는 칼은 분명 참된 신앙입니다. 


주님의 칼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 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서로의 가슴에 탐욕의 칼이 아니라

신앙의 칼을 안겨주는 평화의 하루되십시오. 


거짓된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평화는 늘 멀리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칼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제가 있는 답동 교구청 근처에는 커다란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시장이니까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장을 지나가면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줄을 서서 먹는 닭강정, 다양한 색깔의 찐빵,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만두, 떡볶이, 김밥 등의 먹거리, 그리고 좌판에 물건을 내다놓고 파시는 할머니들의 모습까지 옛날 어렸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래시장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대형할인마트가 우후죽순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형할인마트를 가면 편하기는 합니다. 없는 물건도 없고, 또 가격도 싸고, 또한 쇼핑하기에 적당한 온도까지 유지하기 때문에 땀 흘리며 재래시장을 갈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단 돈 100원이라도 깎기 위해 흥정하는 소리, 덤으로 한바가지를 더 퍼주는 아주머니의 따뜻함을 대형할인마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더 커다란 것들만을 쫓을까요? 이렇게 큰 것들만을 만들고 찾다 보니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외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곳에서도 함께 하시는 분이며, 어쩌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이러한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안 되면 가슴이 아프고,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머리가 아프다.’


사랑은 어떻게든 아픔을 가져다주는가 봅니다. 그런데 아픔을 주기는 하지만, 이 뒤에는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작은 곳에서도 계시는 분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큰 아픔을 얻을 것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행복의 길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아주 의외인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칼에 베이는듯한 아픔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선택함으로 인해 가족 간의 분열도 생길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 인해 진정한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말이지요.


아주 작은 일상 안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비록 이를 통해 큰 아픔을 얻을 수는 있지만, 곧 더 큰 선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고정된 이정표다(셰익스피어).


역으로 생각하라.

저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에게 물고기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면 보통은 도망치려고 낚싯줄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데, 그럴수록 낚싯바늘은 더욱 깊이 박힐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영리한 물고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이 영리한 물고기는 오히려 낚시꾼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헤엄침으로써 줄을 팽팽하게 만들지 않고 낚싯바늘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지요.

이 영리한 물고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들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떻게든 도망치려고만 합니다. 즉, 낚싯줄의 반대방향으로만 움직이면서 바늘이 더 깊이 박히는 아픔을 당하는 어리석은 물고기의 모습을 취하는 우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으로 생각해서 오리혀 고통과 시련에 대해 정면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실제로 많은 위인들은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정면에서 마주하면서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고통과 시련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문입니다.





며칠 전, 제가 아는 분으로부터 E-Mail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메일 제목이 조금 이상합니다. 메일 제목이 글쎄 ‘기도하시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였습니다.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 안에는 첨부파일이 있었고, 그 첨부파일에는 저의 얼굴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습이 조금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진 속에 있는 저는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5일에는 인천교구에 새 사제 4명이 새롭게 탄생한 날이었습니다. 저 역시 새 사제들이 성인사제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이 서품미사에 참석했지요. 서품미사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예식이 진행되는데 너무나도 피곤한 것입니다. 전날에는 성서40주간 강의가 있었고, 5일 당일 오전에는 봉성체과 병자성사가 있었거든요. 더군다나 강화까지 직접 운전을 해서 오다보니 더욱 더 피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잠깐 졸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진에 찍힌 것이지요.


사실 그렇게 길게 졸았던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잠깐 나도 모르게 졸았고, ‘이러면 안 되지.’라는 마음을 먹고 그 다음에는 집중해서 정성을 다해 서품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졸았던 그 순간이 사진으로 남게 되면서, 서품식 내내 졸면서 참석한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이 사진을 받아보면서 갑자기 예수님 말씀이 떠올려지더군요. “항상 깨어있어라.”라는 말씀이 말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 깨어 있기 보다는, 세상의 일과 타협하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갈 때가 더 많지 않았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와 같은 모습을 보시고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예수님을 우리는 평화의 주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니요? 그러나 이 말은 악과 타협하지 않는 주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악과 타협하지 않고 싸우시기 때문에 그로 인해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마음도 주님의 일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타협의 말도 주님의 일에서는 없어져야 할 말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라는 비교의 말도 주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삶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평화가 아닌 하늘의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만이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늘 깨어 있으면서 하늘의 평화를 위해 주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원하는 진정한 의인입니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나 그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가장 부족한 자원, 즉 시간이다.(피터 드러커)


마음 길들이기(이원조, ‘마음속 길들이기’ 중에서)

사람의 참된 아름다움은 생명력에 있고, 그 마음 씀씀이에 있고, 그 생각의 깊이와 실천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맑고 고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은 맑고 아름답습니다. 깊은 생각과 자신의 분야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밝고 지혜로운 빛이 느껴집니다. 녹슬지 않은 반짝임이 그를 언제나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옳은 일이라면 묵묵히 하고야 마는 사람에게서는 큰 힘이 전해져 옵니다. 강한 실천력과 남을 헤아려 보살피는 따뜻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눈을 닮고 누구의 코를 닮은 얼굴보다 평범하거나 좀 못생겼다고 하더라도 어쩐지 맑고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만의 향기와 매력이 느껴지는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사람들일 것입니다.

내면을 가꾸십시오.

거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내 마음의 샘물은 얼마나 맑고 고요한지, 내 지혜의 달은 얼마나 둥그렇게 솟아 내 삶을 비추고 있는지, 내 손길 닿는 곳, 발길 머무는 곳에 어떤 은혜로움이 피어나고 있는지, 내 음성이 메아리치는 곳에, 내 마음이 향하는 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있는지...




가고 싶지 않은 주님의 길

이영춘 신부님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세상의 길과 하느님의 길은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향은 나를 드러내 놓아야 하는,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우라는 그런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길은 비움이요 희생이며 나를 죽이는 그런 길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고 자꾸만 욕망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기에만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울 뿐, 먹고 나면 영혼이 죽어가는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누구든지 피하고 싶은 길이지만 생명을 주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육신을 딛고 동시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살기 때문에 이 두 길은 내 안에서 격렬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욕망 깊숙이 들어와 거세게 후벼팝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에 의한 상처는 쉬이 아물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무엇이 세속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를…. 하지만 두려워 맙시다.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며,




태화산을 오르며

신재용 신부님

이른 새벽, 영월 태화산에 혼자서 올랐습니다. 어쩌다가 바쁜 일상을 벗어버리려고 한 번씩 찾기 시작했던 산이 이제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정상 달성을 목표로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체력이 약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오르는 시간의 두 배는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혼자 걷는 산길은 한가해서 여유롭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지나간 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겸손하지 못한 제 마음 하나씩 비우며 그렇게 올랐는데, 오늘은 머릿속이 무척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성경공부며 교리신학원이며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려고 그랬는지, 긴 한숨을 쉬며 복잡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다른 때보다 더 힘이 듭니다. 잠시 앉아 쉬면서 멀리 아름다운 남한강을 바라보며 긴 묵상에 잠겨봅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덕지덕지 붙여서 무거워진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가는 두루미들처럼 살과 뼈를 깎아버리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함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이 따라주질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버리고 비워내어 참된 목적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의 참된 모범이신 예수님께서 사신 삶을 본받아 내 삶이 곧 그리스도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채워가는 과정,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수행이자 신앙이 성숙해 가는 과정임을 나는 이 늦깎이 나이에 깨닫습니다.




칼을 받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역사상 제일 불효한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를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모든 재산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옷을 홀라당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물론 그의 불효는 패륜아의 불효와는 다르지요.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아버지를 온전히 따르는 것을 육신의 아버지가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앙이 깊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자식을 자기 것으로 묶어두고 좀처럼 하느님께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이지만 자식도 나에게 묶고 나도 자식에게 묶이는 그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진리를 따르도록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고, 부부 사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며,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사랑할수록 자유롭게 놔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당할 것이고, 서로 속박하고 얽어매는 관계는 파산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관계는 칼을 받는 것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천국의 예고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점점 연세 들어가시는 분들, 지상생활을 조금씩 마무리 지으셔야 될 분들, 점점 큰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지옥은 또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그곳에서의 생활은 또 어떻겠습니까?

한 형제가 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 들어가 보니 정말 깜짝 놀랄 일 세 가지가 있더랍니다. 너무나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 했다는군요.

첫 번째 놀랄 일은 그간 긴가민가했는데, 그간 이렇게 부당하고 죄 많은 내가 과연 천국이란 곳을 들어갈 수 있을까, 엄청 걱정 많이 했는데, 내가 딱 천국에 와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먼저 놀란답니다.

두 번째 놀랄 일은, 천국이 좋은 곳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신부님 수녀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왔는데,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아름답고, 더 좋은 곳이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놀랄 일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온 것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천국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 얼굴을 찬찬히 보니 절대로 여기(천국)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와 있어서 또 놀란다는군요. 날 그렇게 괴롭히셨던 시어머님도 와계시고,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숱하게도 뺑뺑이를 돌리며 날 사람취급도 안했던 군대생활 직속상관이었던 김 병장도 와계시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목숨보다 소중한 겟돈 떼먹고 달아난 자매님도 와계시고...

그만큼 천국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풍성하게 내리는지, 진홍빛 같은 우리 죄들이 눈 녹듯이 씻겨 내리는 곳이라는 것이겠지요.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젠가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예고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 세상 구석구석에는 천국의 조각들이 숱하게 널려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곳 저 곳에는 지옥이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일찍부터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하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지옥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동료들의 하루도 지옥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한 형제가 꼭두새벽부터 싱글벙글 함박웃음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라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천국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천국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 동료들의 하루도 천국으로 변합니다.

결국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는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천국에서 생활하는가, 지옥불의 고통을 겪느냐 역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옥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나가는 것,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끌어안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참으로 묘해서 떨치려고 기를 쓰면 더 큰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십자가, 참으로 큰 괴로움의 원천입니다만, 그 십자가에 의미를 부여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다 못해 주저앉아버림으로써 극도의 고통만 체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잘 끌어안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그 누구든 빼놓지 않고 십자가를 보내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발걸음을 하느님 당신께로 돌리라는 신호입니다. 하느님 당신과 1대 1로 대면하자는 외침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라는 요청입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호의적으로,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입니다. 새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매일 매 순간이 천국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미학

이훈 신부님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전쟁의 역사를 살아온 인류는 칼을 향해서 죽음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칼은 생명의 칼, 진리의 칼, 믿음의 칼, 신앙의 칼입니다. 

복음은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족이 내 신앙의 걸림돌이며, 나 또한 가족들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탓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할 때입니다. 

원조의 죄를 사랑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담이 지은 죄는 하느님보다도 하와를 더 사랑한 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또한 하느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지상목표였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떠나가고 계십니다. 복음은 무엇인가요. 기쁨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사람은 기뻐야 하고, 복음을 사는 사람은 애착이나 집착이 아닌 하느님을 향해 열린 자유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로 대접하기

임원지 수녀님

서로 사랑하라 하시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 하시고서, 사랑하라고 내 지금과 내 여기를 주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미워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사랑이 참으로 맹목적일 수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웃 사랑은 쉬운가. 십자가가 따로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잘들 지내 시나요?” “네, 잘들 지내지요, 개와 고양이처럼.” 개와 고양이가 만나 함께 살고 있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취향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견뎌내기만도 고역이다. 평생을 해로하는 부부들은 얼마나 훌륭한가. 주님께 합당하 

려면 우선 나를 참아주는 이들의 노력부터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리라.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주신다 하신다. 지학순 주교님이 북한에도 사람이 살더라 하시던 말씀이 충격적인 시절이 있었다. 월드컵이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김연아의 경기 때는 하나가 되다가도 정치나 사상, 이념이 개입되면 이 작은 나라가 4분 5열 되니 부끄럽다.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수시로 기도로 정화되어야 하는가. 수하든 장상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남이든 북이든, 서로 갈리지 말고 형제로 자매로 대접하면 그 상을 주신단다.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고 미사 때마다 가슴 치는 일이 그냥 형식에 그치고 있음을 자주 나에게서 남에게서 빤히 드러나 보인다. 내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내 이웃을 내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보라시던 어느 신부님 말씀은 사실 무섭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국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오늘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성당에 앉아 일주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내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로마에 있을 때보다 기도를 더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워낙 산골 구석에 있어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것과 더불어 여러 약속을 쫓아다니다보니 정해놓은 기도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 분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가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관례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도 되고 그래서 힘도 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나중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돌아보니 이런 미움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쉬지도 못하면서 먼저 인사드려야 할 분들부터 분주하게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니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내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라는 것이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아직도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일이 우선인지 건강이 우선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성격 때문인지 저는 모든 일을 마치고나서야 시간이 남으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서 몸이 안 좋아 진 것이라고 합니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이 있어야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신앙 다음에 건강을 놓으라고 합니다.

그분들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시간을 줄어들게 한다면 사람 만나는 일은 조금 뒤로 미루어야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정한 기도 시간도 빼앗겨가면서 인사를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마음이 상한다면 그것은 제가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기 위해 그 정도는 겪어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거짓 평화

김찬선 레오날도 신부님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누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해서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 스스로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싫어하는 말을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싫어하는 것을 하여 괜히 긴장과 갈등을 살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좋게 넘어가려 하면 이제는 마음 다른 편에서 저항이 올라와 마음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고, 그것은 거짓 평화이며, 그것은 사랑의 유기라고 계속 쑤석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자니 내 안에서의 갈등이 괴롭고 마음의 갈등을 피하자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어 한 동안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싫어하는 말을 하되 겸손과 사랑으로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야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갈등이 좋고 평화가 나쁜 것이기에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이지요.

하느님을 따르려는데 반대와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이 부모라면 부모를,

그것이 자식이라면 자식을,

그것이 재물이라면 재물을,

그것이 자신이라면 자신을 과감히 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조금 다른 충고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을 갖지 않은 집안에 누가 시집을 갈 경우 저는 전술적으로 물러서라고 말해 주기도 합니다.

시집 식구들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불화를 무릅쓰고 신앙을 고집하지 말고 나는 신앙을 버릴 수 없지만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성당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가족들이 같이 성당에 나가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는 신앙인답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이렇게 충고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하느님과 신앙을 빙자하여 Power Game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고 자기와 가족 모두를 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가족을 사랑하기에 자기를 죽일 때 사랑을 기초한 이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가족들이 모두 깨닫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아주며 일으켜 줄 때,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어깨 두드리며 '힘 내'라고 말 건넬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의 위로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외로움을 환한 웃음으로 달랠 때,

주님의 넉넉함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가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 모두가 곧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사제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제복"과 관련한 기억이 생생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주임 신부님이 피정을 떠나셔서 한 본당 주일미사를 대신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미사가 끝나고 본당 원장 수녀님과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 찾았더니 주임 신부님을 대신해서 돌아가는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수녀님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제가 옆에서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셨습니다. 모든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한편, 근황을 묻기도 하고 바쁘셨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저는 어정쩡한 자세로 수녀님 바로 옆에 서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제가 사제복을 입지 않고 우중충한 잠바를 입고 있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어깨를 툭 쳤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 아래에서 위까지 쫙 때깔나게 차려입은 신사 한 분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아! 자네구먼, 수녀님이 소개하겠다는 사람이. 고생이 되더라도 힘내야지!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테니 열심히 한번 해보라구."

순간판단력이 부족한 저였기에 그 당시 저는 그분 말씀이 제대로 접수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아∼예! 그러죠.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신사는 본당 사목회 간부였는데, 수녀님께서 실직한 교우 한 명의 일자리를 부탁해서 그날 성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형제님이 미사 시간 내내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습니다.

저 역시 가끔 실직자들을 만납니다. 한번은 힘없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찾아온 한 실직자 형제를 만났습니다. 물론 그분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최대한 조용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확실한 도움,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도 속이 상했습니다. 실직자 형제들이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만일 제가 실직으로 인해 당장 끼니걱정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형제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해(苦海)입니다. 비록 오늘 고통스러우시겠지만 희망을 가지십시오. 고통 가운데서도 활짝 웃는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을 했다면 그분들은 "공자님 말씀하고 있네. 날씨가 더워지니 맛이 갔구먼"하고 빈정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다 구체성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친교는 말이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뭔가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①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②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형제를 내 일부로 생각하기에 그들과 구체적으로 기쁨과 슬픔, 고통을 나누며 우정을 맺습니다. ③이웃들을 내 형제로 받아들이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받아들임

남상근 신부님

어릴 적 그리도 좋던 친구들,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나한테 한 그 친구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친구이기 때문에 웃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별 싱거운 녀석 같으니’ 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라도 불러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 쉬운 듯 어렵습니다. 친구임에도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저런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에 끼어든 그 많은 ‘친구’답지 못한 것들이 우리들 사이를 어렵게 만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상을 주시겠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주십시오. 나도 받아들여집니다. 

내게도 주어집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손해나는 일이기에 마다한 일이 혹시 있지 않은지요? 억울해하며 억지로 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 한 잔에도 댓가가 있을 것이며, 환한 미소 한 모금에도 반드시 상이 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하여 그 어떤 것도 손해가 아닙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신다니 모든 착한 일은 그냥 흩어지지 않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노성호 신부님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간혹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시선이 고정되는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주몽’이 그 중 하나였다. 여러 명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주몽과 비류의 군장 송양이 만나는 부분이다.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도모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몽이 송양을 찾아갔다. 송양은 주몽에게 독배와 술잔을 내놓으며, 이 둘을 가려내야만 졸본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주몽은 자신의 안위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두 잔 술을 모두 마셔버린다. 만일 주몽이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든지 다른 이유를 대면서 주저했더라면 결코 송양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졸본의 통합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천하대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수고나 노력, 희생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얻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의미도 없을 것이고, 얻으려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모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역설적인 등식이 성립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아집·집착·욕심·시기·질투·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자신을 버리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야 한다. ‘과거의 나’가 가지고 있던 목숨을 버리면 ‘새로운 나’는 새 생명을 간직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무모해 보이면서도 과감했던 행동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버림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자기 희생이 세상 사람한테는 의미 없는 죽음처럼 여겨지지만 우리한테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된다.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의 힘을 빼고 긴장을 풀면서 쉬어야 한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남을우

요사이 세상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요지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비위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 보면 목청 큰 사람이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니 어느 편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인터넷에 뜨고 지는 네티즌들의 언어가 점점 메마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함까지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념에 젖어봅니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몰이해적인 반응은 일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칼은 옳고 그름의 바른 잣대를 상징하지요. 정의가 바로 설 때 진리가 살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태초적인 가르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언어, 생명이 담긴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현실에서 펼쳐야 할 우리의 소중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 되는 길

김만수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자기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 상식으로는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같이 생각됩니다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마저, 즉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103위 성인 가운데 겨우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 베드로 성인은 배교를 강권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즉 저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님의 계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고 상냥하게 어머니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청에서 유대철(베드로)을 배교시키기 위해 14세의 어린나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혹형과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은 신앙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순교한 이 어린 성인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잃었으며 또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주님을 위해 부모가 주신 육신 생명은 잃었으나 대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마음이 편치 못한 우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세상의 그 어느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부모와 아내나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마저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잃어야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삼주전 우리 중앙 본당 800여명의 교우님들이 배론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성지이지만, 그곳은 1801년 황사영과 그 동료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첩첩 산중에 자리 잡은 교우 촌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신자들이 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해 오던 곳이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이 그 해 2월에 서울을 떠나 이곳 배론으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도 이곳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이 이들에게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9월 29일에 황사영과 김한빈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됨으로써 결국 배론 교우촌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황사영이 쓴 <백서>의 몇 줄만 읽어봐도 그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사영은 말하기를: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황사영이 쓴 이 <백서>는 차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당시 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데로 자신들의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사랑하는 가족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나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를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으며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한 참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한다면 모름지기 주님의 뜻을 따라 부모와 자녀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잃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어떠한 욕망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 위하여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고 비우고 버리는 아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그러한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끔 이러한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신부님, 정말로 미남이세요. 신부님, 목소리가 성우 같아요. 신부님, 너무나 멋져요.” 

그렇다면 제가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눈이 이상하게 아래로 쳐졌어요. 신부님은 말이 너무 빨라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말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진리라 할지라도 듣기 싫은 말 그리고 상처가 되는 말이 되는 말이 있는 반면에, 거짓이라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 그리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실을 이야기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직접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결국은 당사자의 귀로도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람과 당사자의 관계가 좋을 수가 있을까요? 절대로 좋은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싹트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정반대인 ‘미움’입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도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임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바로 세상의 원칙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온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원칙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보다도 하늘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세상의 원칙을 내세워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진실이라는 단어를 포장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함부로 진실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원칙이 이 세상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오늘은 ‘예뻐요. 멋져요. 사랑해요.’ 등등의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세요.





어느 시장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상점도 없이 초라하게 앉아서는 오이 몇 개만을 놓고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는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지요. 이 모습을 본 어떤 한 손님이 “할머니, 이 오이 하나에 얼마에요?”라고 묻습니다. 할머니는 “오백 원입니다.”라고 답을 했지요. 손님은 가격이 싸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묻습니다. 

“그러면 두 개에는 얼마에요?”

“천 원입니다.”

“그러면 세 개 사면요?”

“천오백 원이지. 그것도 계산이 안 돼?”

“에이, 많이 사면 싸게 해 주는 줄 알았죠. 할머니, 그럼 여기 있는 오이를 다 사면 좀 싸게 해주시겠죠?”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전부는 절대로 팔지 않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상점 없이 하루 종일 쪼그려 있다가도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따라서 기회가 될 때 다 파는 것은 할머니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계속 말씀을 잇습니다. 


“돈도 좋지만, 나는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일하는 것이 좋아. 열심히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을 봐서 좋고, 또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고, 또한 오후에 따스하게 시장 바닥을 내려 쬐는 햇볕을 너무나도 사랑하지. 그런데 이 오이를 다 사겠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일과 사람들과 나의 하루를 당신이 몽땅 빼앗아 가는 것이잖아. 그래서 결코 전부를 팔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러다보니 중요한 사랑의 가치는 뒤로 밀린 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실천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평화를 빌어주셨으면서, 평화가 아닌 폭력을 상징하는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뒷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할 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예수님께 이 칼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이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기억하세요.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강시원, ‘생각 한줌, 글 한줌’ 中에서)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은

베품을 미덕으로 여기며

순간의 손해가 올지라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욕심을 부릴 줄 모르고

비움이 곧 차오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은

덕을 베풀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일에 대한 보상과 이득을

따지지 않는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남의 잘못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가슴이 따뜻하고 예쁜 사람은

차 한잔을 마시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을 욕심없이 바라보는,


마음의 눈과 맑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아랫목처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조성숙 수녀님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 앞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예수님 제자의 길은 분명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가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원수처럼 여기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조건은 달랐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열정은 막상 수도 공동체에 살기 시작하면 곧 시들해져버립니다. 

사랑은 이상적인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이 따라오는 의지의 차원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구체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자기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자기 성취’인 이 시대에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죽기 싫어서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합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죽으면 살 수 있나요?”




꽃자리

기정희 수녀님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구상, <꽃자리>)

구상 시인이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찾은 이들에게 건네신 이 시는 가끔씩 허덕이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를 멈추게 한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질 때 나는 ‘네 자리가 꽃자리니라.’는 시인의 말씀을 떠올린다.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의 경륜을 실어 가슴으로 말하는 언어는 얼마나 절절한 울림으로 들리는가!

젊은 시절, 열정과 사랑으로 첫발을 내디딘 수도 생활 초기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런 이의 없이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복병처럼 숨어 있는 십자가를 대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비켜 가길 바라며 마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무게가 전부인 양 허덕이며 숨차했다. 아직 인생의 마지막에는 다다르지 않았지만 훌쩍 세월을 뛰어넘어 나이가 들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그 의미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 십자가는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에 단 하나의 의미로 나를 내셨다. 그 의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비슷해 보여도 내 십자가는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제 것이 아닌 십자가를 부러워한다면 진정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리라.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를 명확히 방향 짓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도 제시하셨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그 무엇도 주님보다 우선일 수 없음을, 자기 자신마저 부정하는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임을 알려주신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믿어주신다. 십자가가 버겁다고 투정을 부려도,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어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것이라고 믿어주신다. 나무는 그 키만한 뿌리를 가졌다고 한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의 깊이는 우리 삶으로 드러난다. 그분을 따르는 데 피할 수 없는 모든 십자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며 앉은 그 자리가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꽃자리임을 잊지 말자.




이성균 신부님

성경에 담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해주고 삶의 방향을 일러 주는 보고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 주는 것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작성되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환경이 과거와 같지 않고 예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개별적인 고민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답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빚어냅니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존속하는 가치들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긴 해도 오늘의 복음은 가치를 달리하고 싶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용하신 적이 있듯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어 이루는 가정과 그 구성원인 가족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바람직한 덕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현합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돌보며 이해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우리도 변함없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엇나가는 말씀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정파괴범이라고 부를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관계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만 사랑해야 한다는 미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임의적으로, 또 쉽사리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은 가족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을 때나 종교로 인해 갈등이 있을 때, 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변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초창기에 복음 선포의 길에 나선 제자들의 경험담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몰이해가 안겨준 상처를 보듬고 복음을 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알뜰히 보살펴야할 가족들을 뒤로 하고 못내 길을 나서야 했을 이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이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적인 삶을 유지해 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덕에 오늘 복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떠나고 가족과 갈라서며 삶을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함을 넘어서 경계해야할 위험한 주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처럼 구체적인 고난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희생적인 삶을 주님과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 생애를 바쳐 증언하고 전해준 복음적 기쁨을 가족들 사이에 펼치는 일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퍼낼 줄 아는 인간이 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서 각별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새로운 모범이 되십시오.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 선포의 길입니다.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그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더 힘찬 선교가 됩니다




반대의 불을 질러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平和,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염원하는 것입니다.

不和,

이것은 우리가 잘 해결하지 못하지만 참으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염원하지만 잘 살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한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러 오셨다 하십니다.

이 무슨 어깃장인가?


그리고 다른 데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하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이런 평화를 어찌 이해해야 하나?


갈라짐,

다툼,

갈등,

이런 것이 없는 것이 평화라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자기 잇속을 차리기보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으며 남을 받아들이는 주님의 사랑은 평화의 왕도입니다.

自己中心性의 탈피, 이것으로 우리는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불화를 각오해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는 좋은 것이 좋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인간끼리 좋은 것이 좋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끼리 짬짜미가 맞아 

하느님을 따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헌 신발짝 버리듯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추종을 방해하는 그를 버려야 하고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그와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해도 주님 추종은 버리고 따르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야 하고 사랑하는 애인과 갈라서야 합니다.


수도원 입회를 결정할 때가 되면 부모의 반대가 너무도 극렬한 성소자가 꼭 있습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성소 담당 신부에게 하소연도하고 폭언도 퍼붓고 심지어 수도원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을 때 성소자 본인 뜻만 확고하다면 그대로 받으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자식 사랑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기에 자식이 이 생활로 진정 행복하기만 하면 언젠가 마음이 바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충고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반대와 불화를 무릅쓰고 주님을 선택해야지만 주님 따름의 의지가 확고해지고 주님 따름의 열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작으면 작은 반대와 만류에 그 의지와 열망이 꺾이지만 그 의지와 열망이 크면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잡아당기는 힘이 크면 클수록 더 강하게 뿌리치고 더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복음의 요구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로서의 참된 삶의 자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슬러 복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신앙적인 결단과 선택 속에, 모든 것에 앞서 항상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우겠다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복음적 가치와 신앙의 진리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과 같은 가족과 혈육까지도 주님 때문에 포기하고 뒤로 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더라도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살아서는 안 되며, 어떤 것도 주님보다 낫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시는데, 칼은 무엇을 자르는 도구로서, 잘라서 서로 갈라놓으면 갈라진 둘이 서로 분명히 구분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칼’이라는 이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과 선택에 대한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보통으로 결단력이 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맺고 끊는 선이 분명한 사람을 보고, ‘칼’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과 나 자신의 유익을 챙기고, 자신의 감정의 요구에 따르는 일에는 조그마한 손해와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칼같이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면서도, 복음의 요구를 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믿음 없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를 자주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는 바보처럼 너그럽고 착하게 살고 주님의 일을 행하고 복음의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칼처럼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칼로도 끊을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혈육의 정과 유대조차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소중한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신앙으로 꿋꿋하게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함으로써, 주님의 크심과 좋으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은총 속에서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행하던 일 중의 하나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 누구의 심부름으로 자기에게 왔을 때, 그 심부름꾼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보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즉 친구가 보낸 사람을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은 보낸 그 친구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웃어른이 보낸 사람을 존경으로 영접하는 것은 바로 그 어른께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과 생활 방식은 하느님의 진리를 전달하고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유대 스승들은 가르치기를 "현자를 대접하는 자는 자기의 수확에서 난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박식한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하느님께 인사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비단 예언자, 의인,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예언자이며, 의를 행하는 자들이고, 성직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대접할 때, 그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는 탁월한 하느님의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목숨 바쳐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의인을 필요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뒷받침해 주는 평범한 봉사에 대해서 그들의 업적과 똑같은 상급으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마찬 가지이지만,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되어 있다. 인간 사회는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며, 이러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며, 나의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충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웃을 통하여 이웃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웃이 보잘 것 없는 사람 같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겠다.





저는 가끔 이러한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신부님, 정말로 미남이세요. 신부님, 목소리가 성우 같아요. 신부님, 너무나 멋져요.”

그렇다면 제가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눈이 이상하게 아래로 쳐졌어요. 신부님은 말이 너무 빨라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말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진리라 할지라도 듣기 싫은 말 그리고 상처가 되는 말이 되는 말이 있는 반면에, 거짓이라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 그리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실을 이야기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직접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결국은 당사자의 귀로도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람과 당사자의 관계가 좋을 수가 있을까요? 절대로 좋은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싹트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정반대인 ‘미움’입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도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임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바로 세상의 원칙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온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원칙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보다도 하늘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세상의 원칙을 내세워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진실이라는 단어를 포장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함부로 진실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원칙이 이 세상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오늘은 ‘예뻐요. 멋져요. 사랑해요.’ 등등의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세요.


금보다 귀한 것(홍성중 엮음, '행복을 나르는 배달부'중에서)

은 시골 마을에 돈 많은 구두쇠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급한 병으로 중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내는 매일같이 남편을 간호하러 병원을 드나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인을 만날 때마다 걱정하면서 남편의 병세를 물었다. 그날도 병원에서 돌아오던 부인에게 마을 사람들이 물었다. 그러자 부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드디어 남편이 의식을 회복했답니다. 제가 남편에게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그런 줄 아세요? 글쎄 마을의 우물에서 길은 시원한 물 한 잔이 마시고 싶다잖아요."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집안에 쌓아둔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 한 잔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별로 가치도 없는 것에 너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투자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김종근 신부님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분과 통화를 했다.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대접을 해야 할 처지여서 음식점을 내가 정했다. 뭘 드시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신부님 좋아하시는 걸로 아무거나 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그분에게 음식 신세를 많이 졌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는 집을 잘도 찾아내어 내 입맛 수준을 높여놓았다. 그래서 시원한 대구탕을 비롯하여 산나물 비빔밥·아구찜·옛날식 비지찌개 등을 먹으러 식사자리를 여러 번 함께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분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둘이 모두 보신탕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10년 이상 알고 지냈고, 우스갯소리, 섭섭한 소리도 주고받을 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대접받기에만 익숙한 나의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사랑에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주고자 하는 속성이 반드시 있을진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나는 입만 벌리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사랑’ 한번 여태껏 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 나는 바리사이 같은 신부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승일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부활하신 당신의 평화를 주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시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선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평화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얻게 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말씀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아들과 아버지가 맞서고, 또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되는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칼은 전쟁이나 분열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전쟁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거짓 즉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의 세력과 싸워 투쟁해서 얻게 되는 그런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빌어주는 너희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평화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사람,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뻐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화의 큰 적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는 삶을 살려 하기 보다는 우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순전히 인간적인 도움이나 잔재주에만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옹고집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마음을 확 풀고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의 품안에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리고 무수한 독신 남녀들(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 외에 어떠한 사랑도 맛보려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그 분을 사랑한 나머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남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는 가족들과도 불화를 맛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칼”을 맞게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로인해서 맛보게 되는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진정으로 평화로우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오십시오. 평화의 주님에게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빨리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평화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진호 신부님

얼마 전에 불량만두 사건으로 온 나라가 소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량만두냐? 우량만두냐? 하는 판단근거는 만두 속입니다. 속재료가 우량하면 그 만두는 우량만두이고, 속재료가 불량하면 그 만두는 불량 만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겉모양이 화려하고 그럴듯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만두는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마침내 법적인 처벌과 제재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량인격자냐? 불량인격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따라 결정됩니다. 속이 바르고 참되면 우량인격자가 되는 것이고, 속이 거짓과 위선이면 불량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모나 외적 조건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량인격자가 되려면, 우량한 속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을 우량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불량하면 그 행위는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리라.” 따라서 우리가 일체의 인간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정신이 없는 제물은 형식에 불과하고,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모든 것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다릅니다. 신앙생활도 달라야 합니다. “ 나는 칼을 주러 왔다 ” 


하느님처럼 살고 싶으면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언자처럼 살고 싶으면 예언자적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선인처럼 살고 싶으면 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도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불량만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속”입니다. “소~~~ 옥!!” 

속이 튼튼하면 몸은 저절로 튼튼해집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 아멘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로렌 헨리 뒤킨 저)란 글을 읽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따뜻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야 정상인데,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봐야 정상인데, 와 닿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교회로부터 크나큰 상처가 입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몰라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의 원인 발생은 교회가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이상은 매우 높지만 현실은 교회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해하고 부인하며 배반하는 제자들, 당신께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을 때 잠을 자고, 붙잡혀 가실 때 도망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의 때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란 말을 자주 씁니다. 돌아보니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도 집요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지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겨워질수록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십자가 위에서 계신 예수님,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르면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끝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십자가가 무거워질수록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와 나란히 서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의 칼

장재봉 신부님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제물을 받지도 않고 분향도 거절하시며 그들의 팔 벌린 기도를 듣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시니까요. 하느님께 혼쭐나게 야단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우리에게 이르신 당부는 얼마나 훈훈하고 따뜻하신지요? 

많은 말씀 중에 특별히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까지도 상을 주실 것이라 하신 걸보면서, 정말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 일은 쉽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말씀이 좀 걸립니다.


묵상

주님께서 주신 칼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칼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어디에? 

무엇에? 

쓰고 계신지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예리한 칼입니다. 

그 말씀의 칼은 자신의 혈연에만 연연한 마음을 잘라내게 합니다. 

자기 가족만 위해서 

자기 자식만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마음을 잘라내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 이기심, 자존심,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심을 잘라내는 일에도 사용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곧잘 그 칼의 용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습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 

말씀을 들먹이며 판단하는 일 

남의 티를 잘라주는 일, 

남의 잘못을 후벼주는 일, 

날카로운 칼 날 같은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뽀족하게 날 선 눈길로 상대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곤 하니까요. 


‘무엇하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는 질책을 들을 일이 아니겠는지요? ‘분향 연기도 역겹다’고 역정을 들을 일이 아닌지요? 


오늘 우리 모두가 말씀의 칼날을 자신 안에 자신의 행위에만 들이대는 축복을 얻기 바랍니다. 말씀의 칼로 내 잘못된 심사와 생각과 행위를 잘라내는 고통의 하루이기를 원합니다. 해서 우리가 모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걷는 이가 되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산간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간지방에만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설었지요. 어느 날, 이 임금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아주 멋진 새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다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 우아해 보였고 심지어 고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새는 흔한 바다갈매기였지만 산간지방에서만 살았던 그에게는 처음 보는 새였던 것이지요. 이 임금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 새는 진귀한 새가 분명하다. 저 새를 우리의 조상신으로 모셔야겠다.”


그는 그 새를 잡아서 자기 조상의 사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소와 양, 돼지를 잡아서 성대한 잔치를 벌였지요. 잔치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악사들도 초대되어 축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새는 음식에 전혀 입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슬프고 씁쓸한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다에 살던 새가 육지에 사는 인간의 음식과 음악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하겠지요. 하지만 임금은 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역시 진귀한 새의 근엄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 그리고 열흘이 지나도록 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임금은 더욱 좋은 음식과 술을 새에게 바쳤지요. 그러나 열하루 째가 되던 날, 새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한탄하며 말했지요.


“고귀한 새여, 제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모셨건만 왜 저를 거부하셨습니까?”


바로 그때 그 옆을 지나가던 현자가 혀를 차며 말합니다.


“쯧쯧, 왕이 아닌 새로 대접했다면 그 새가 굶어죽었겠소? 그 배고픈 새에게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더구나 인간들이나 듣는 궁중 음악까지…….”


그렇지요. 만약 그 임금이 그 새를 새 자체로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새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었다면 결코 굶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신이라는 엉뚱한 모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를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 역시 커다란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들도 실천하라고 십자가를 직접 지셨습니다. 즉,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데, 단순히 보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보기만 하기 때문에 주님께 커다란 실망을 간직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보기만 하는 십자가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들은 나에게 주어지는 그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하나의 액세서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는 짊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방귀와 귀의 차이점(웃긴 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에 가스가 차더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음악 듣던 이어폰을 빼고 몰로 방귀를 뀌었다. (방귀낄 때 소리 나면 대략 낭패다 싶어서)

한참 뒤에도 배가 살살 아파 다시 이어폰을 빼고 방귀를 뀌었다.

이렇게 몇 번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이번에도 이어폰을 빼고 방귀를 뀌려고 하는데 옆자리 짝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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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어폰 빼지마! 귀에서 열라 냄새나!"


유혹에 맞서는 것은 누구? 바로 ‘나’.

어떤 수도승에게 한 사람이 와서 “저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잡념 때문에 위험을 느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승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저고리를 벌려 바람을 멈추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저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누가 바람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수도승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 덮쳐오는 생각들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맞서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유혹들을 인해서 우리 역시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유혹들을 누가 맞서야 할까요? 주님께서 알아서 맞서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맞서야 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백남국 신부님

같은 교구에서 사목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 신부가 있는데 사회 갈등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동료 사제들과도 맞서게 되고 신자들과도 맞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저같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동안은 제가 군종으로, 교포사목으로 교구 밖에 있어서 함께 지낼 일이 없어 괜찮았는데 이제 가까운 데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동생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확신도 있고 또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자기 주장이 강해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참 피곤할 텐데 그냥 조용히 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피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그만큼 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며 편안한 삶이 아니라 세상과 부딪치며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 면에서 늘 맞서기를 포기하고 편한 길만을 찾는 저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부딪치고 맞설 수 있는 자가 살아 있는 것이고 활기를 지닌 삶이겠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주님의 제자답게 맞설 수 있는 열정을 지닌 동생의 삶이 훨씬 더 주님의 제자다운 것 같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왜 우리를 맞서게 하였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이기양 신부님

제 1독서 : 이사 1,10-17 (너희 자신을 씻고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복 음 : 마태 10,34─11,1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우리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10,34-36) 


처음으로 성당에 나온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놀라서 금방 돌아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에 그리 마음 편한 말씀이 아니지요. 오랜 신앙 생활을 해 왔던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대하면 어떤 의도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평화‘이고 집안 식구들과의 '화목‘인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으며 집안 식구들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오늘 복음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미카 예언자의 예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풍전등화의 신세였던 남 유다 역시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에 망하게 되는데 이때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미카7,5-6) 


모든 관계에 정의와 질서가 다 무너지고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이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간에, 또 부모 자식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신과 분열, 악이 끼어드는 이러한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미카 예언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악은 끝까지 승리하지 않으며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아의 승리를 미카 예언서는 예고하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악이 감히 끼어들 것 같지 않은 인간 관계에도 악이 끼어드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시지요.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온다는 말이 있듯이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 승리하는 것은 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듯이 거기에서도 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안에 부활의 희망과 승리의 시점이 내재해 있다는 말씀이지요. 미카 예언자는 말합니다. 


"내 원수야,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주님께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신다.“(미카7,8) 


오늘 복음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부부 간이나 형제지간일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의 직업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지요.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싸워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칼을 주러 왔다는 것은 그러한 불의한 것에 대항하여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싸워서라도 도둑질을 못하게 하고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칼을 주러‘왔으며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어서 도저히 악이 끼어 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의 말씀같이 들려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지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이라는 승리가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작은 이익 때문에 연연해 하거나 불의와 거짓을 알면서도 작은 유혹 앞에 묵인하고 덮어버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타협하지 말고, 문제는 지혜롭게 밝혀서 정의롭게 해결하는 용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또 해야될 일과 해서 안 되는 일을 놓고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하며 덮어둔 채로 슬금슬금 살아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싸워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야 참 평화가 올 수 있지요. 정의와 하느님의 일이 승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어려워도 타협하지 말고 꿋꿋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석희 신부님

계속되는 많은 비와 높은 습도로 우리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뭄 때문에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청한 간절함을 기억한다면 감수 할 수 있는 시간이며, 자연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순응하는 지혜로움을 갖게 만들기도합니다. 


오늘의 복음에따라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묵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한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썪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 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려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칼을 주러 오신 예수

강영구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그대에게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결단(決斷)과 선택(選擇)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복(福)과 화(禍),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하느님 앞에 중립지대(中立地帶)나 회색지대(灰色地帶)는 없습니다.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저주를 받겠느냐?”(신명11,26-28)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어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6,24)

우리 삶은 언제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정쩡한 양다리 걸침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

하느님과 악마, 성령과 악령,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하늘의 소리(天命)와 욕망의 소리 등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단과 선택에 따라서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시퍼렇게 날 선 예리한 칼(劍)을 주십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칼로 일도양단(一刀兩斷)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당신은 오늘도 끊임없이 결단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劍)을 사용하십시오.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평화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 하느님 말씀의 칼 

[두올묵상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하면 평화와 사랑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당연히 평화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평안해지고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와 사랑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을 통한 평화의 복이란 복음의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갈등과 아픔은 무시하고 복음의 결과만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이는 농부가 봄에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씨를 뿌렸던 과정은 무시하고 오직 추수 때 알곡의 기쁨만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 


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지 말라 

사람들의 세상에사에는 평화와 분쟁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쟁보다는 평화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평화가 아닌 분쟁이란 말입니까? 이 말씀에 앞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적대하게 만든 사탄의 권세를 무찌르고 인간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둠의 세력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는 우리 인간에게 참 평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참 평화는 전쟁에서 이겨야만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지난날 정부에서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조폭집단과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만을 제안한다면 과연 이 땅에 폭력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의 대화와 타협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렇지 않는 악질적 속성을 지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될 그런 불가피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 

오늘복음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땅에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의 내용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칼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말씀합니다.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 또한 히브리서 4,12에도 말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고 잘라내는 수술하는 살아있는 수술 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들이 의롭게 소생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즉 미사나 기도시간에 우리의 심령은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조성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에 나와서 좋은 말씀 한 구절을 듣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거나, 일단 교회 문밖을 나가고 가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칼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재창조의 원리 

제철공장에 가면 용광로에서 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불물 위에 다시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그 불물은 엄청난 강도를 지닌 강철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찌들고 병든 인간의 이기심과 야욕을 녹여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하느님의 피조물로 재창조해 내는 불구덩이(용광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비유하면, 하느님은 마치 숙련된 조각가가 크고 단단한 바위덩어리를 수십만번 쪼개고 다듬어 자기가 원하는 조작작품으로 만들어 내듯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쪼개고 다듬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쪼개고 다듬는 책무에 소홀합니다. 특히 신앙에 관련한 믿음, 마음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하고 쉽고 편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당장에 하늘이 갈라지고 복이 쏟아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얻어맞을 때는 얻어맞고 회개할 때는 회개하는 것이 복 받을 자가 되면 복을 받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형상이 되기까지는 수천, 수만 번을 끊임없이 말씀의 칼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2장 34-35절에는 시므온이 갓난 예수를 품에 안고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 때문에 넘어질 자들이 누구이고, 일으킬 자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즉 여기에서 넘어질 자, 즉 패할 자들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으킬 자, 즉 흥하는 자들이란 비록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죄의 드러남을 받고 회개한 겸손한 마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질 권리이고 다른 하나는 버릴 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지 좀처럼 버릴 줄을 모릅니다. 내 뜻과 고집만 주장하지 하느님의 큰 뜻을 받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말씀을 깨닫는 자마다 예수님의 말씀의 칼 앞에 겸손히 엎드려 과연 내 마음가운데 하느님의 큰 뜻을 반역하고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끄집어 내어 회개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어렸을 때 저의 커다란 유혹꺼리는 아마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비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이 자리를 이용해서 이제야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고백하고 싶네요. 물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고백을 이미 다 한 것이지만, 부모님께는 직접 말씀드린 적이 없었거든요. 


사실 공부하러 도서관 간다고 해놓고 하루 종일 만화방에 있으면서 만화만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서, 문제지 산다고 말해놓고서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의 비용을 마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부모님 심부름 갔을 때, 약간의 돈을 빼돌렸던 적도 기억나네요. 


아무튼 어렸을 때, 저의 이 유혹거리를 이겨내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 유혹 앞에서 항상 흔들렸고, 그 흔들림으로 인해서 마음에 평화가 오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흥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등으로 평화가 올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에 입장하면 마음이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제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어떨까요? 다시 평화로울까요? 죄 지었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한 가득입니다. 


이런 순간적인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평화는 어떤 평화가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했는데, 그렇다면 이 평화는 어떤 것인가요? 분명히 천사들도 말했던 평화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실까요? 순간의 기쁨, 순간의 위로를 통해서는 참 평화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암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런데 마약 성분이 들은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고통을 동반하는 진통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오고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것이 참된 평화일까요? 아닙니다. 순간의 평화를 주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고통이기에 참된 평화라고 할 수 없지요. 여기서 참된 평화를 주는 것은 암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칼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간만 만족하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에, 이 참된 평화를 가로막는 것들을 싹둑 자를 수 있는 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짜 평화는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욕심,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이웃을 비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속 좁은 마음 등등입니다. 이 가짜 평화를 과감하게 잘라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라고 내어준 칼을 들고서 싹둑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평화 안에서 참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어떤 값어치가 있는 일을 성취시킨 적이 없다. 나의 여러 가지 발명 중에 그 어느 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없었다. 그것은 꾸준하고 성실히 일을 함으로써 이룩된 것이다(토머스 에디슨).  


  


나명옥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시며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신 모습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던지십니다. 

‘칼’ 하면 로마에서 공부할 때 가끔 방문한 성바오로 대성당 앞에 있는 대리석상의 바오로 사도가 들고 있는 쌍날칼과, 세종로에 근엄하게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오른손에 있는 ‘칼’ 이 겹쳐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쌍날칼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 12) 라는 말씀에 따른 표상이고, 이순신 장군의 칼은 직접 지은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는 시에서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을 생각하고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표상합니다.

자신의 삶 앞에 놓여 있는 유혹 앞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내면의 갈등이 없는 얼버무리기 식의 적당한 평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하느님과 사탄과의 평화를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해야할 날카로운 쌍날칼이 더없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외제차를 한 번 몰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차였고, 아주 비싼 차였지요. 실제로 운전을 해보니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차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차를 끌고 도로를 주행하면서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혹시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서 차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까, 혹시 신호를 기다리는 이 차를 보지 못하고 뒤에 부딪히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차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제 차에 상처를 냈던 많은 운전수에게 단 한 번도 보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차의 지금 상태는 흠집투성이로 엉망진창이지요. 그러다보니 아주 편안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제차를 타고 운전할 때에는 영 불안합니다. 워낙 비싼 차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차면 무엇 합니까? 내가 운전하는데 불편한 마음을 없앨 수가 없다면, 내게 있어서 더 이상 차가 아닌 것이지요. 차는 차로서 기능을 할 때 가장 ‘차’다운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운전하는 차와 달리 맘 편하게 운전할 수 없고 걱정만 할 수밖에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인해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남들도 다 가지려는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더욱 더 드러내게 한다는 이유로, 우리들은 이 불편한 것들을 어떻게든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마련해주신 모든 것들은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들을 나를 위해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섬기면서 주님의 자리를 오히려 빼앗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의 시선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다보면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상황이 와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으로 살아야 한다고 힘있게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주님 안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진리이시며 참 평화를 주시는 주님의 시선을 간직하며 살아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인 것인 양 살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 제1독서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당장 실천하도록 합시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진리를 깨달음은 달이 물에 비치는 것과 같다. 달은 젖지 않고 물은 깨지지 않는다(도원).


달아날 곳이 없을 때(아잔 브라흐마,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중에서)

캐나다의 젊은 부부가 호주에서 계약직 근무를 했다. 부부는 계약 만료일을 앞두고 다른 부부와 원래 살던 토론토까지 요트를 타고 간다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웠다.

여행 중반쯤 태평양 어딘가에 이르렀을 때다. 망망대해에서 요트 엔진이 고장났다. 두 남자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비좁고 무더운 엔진실로 내려가 엔진을 수리했다. 커다란 나사는 스패너로 아무리 돌려도 꼼짝하지 않고, 작지만 매우 중요한 나사 몇 개는 손 닿지 않는 구석으로 달아났다. 구멍에서는 기름이 계속 새어 나왔다. 절망은 짜증을 불러왔다. 처음에는 엔진, 그 다음에는 서로에 대해. 짜증은 금방 화로 변했다. 남자 중 하나가 연장을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이것으로 끝이야! 난 떠나겠어!”

그는 선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 여행 가방을 들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에 있던 두 여성은 그 모습을 보고 웃느라 요트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는 수평선 멀리까지 둘러본 뒤에야 갈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당황한 그는 얼른 몸을 돌려 선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고 엔진실로 갔다.

갈 곳이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달아나는 대신 문제와 마주한다. 문제 대부분은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엔진은 수리되었고, 두 남자는 가까운 친구로 남았다.




십자가

신효원

해마다 오월이면 학교 실습지가 있는 농장의 식구들이 죽전 공소의 나환우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갑니다. 그분들 중에 세상을 떠나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생기면서 참석 인원이 자꾸 줄어듭니다. 올해는 여덟 분이 오셨습니다. 할아버지 두 분은 한껏 멋을 냈고 할머니들도 곱게 단장을 했습니다. 고단했을 지난 세월의 흔적 없이 모두 밝았습니다. 오히려 시중 드는 우리들의 표정이 더 어두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소 회장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웃고 사는데 당신들이 무슨 걱정이 있어? 정 답답하면 예수님을 부르면 되잖아!” 

십 년째 장기집권 하고 있는 다두 회장님은 여든이신데도 씩씩하고 분위기를 잘 띄우십니다. 술잔이 돌아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서넛은 춤을 추었습니다. 곁에 앉은 루시아 할머니도 즐거워했습니다. “처음 병을 알았을 때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어요. 남편을 붙잡고 며칠을 울었지요. 집 떠나 이곳에 온 지 삼십 년이 지났네요. 이제는 감사하지요. 이 병이 아니었더라면 좋으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사람마다 집집마다 걱정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태도에 따라 고통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 속에 깃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길이 됩니다. 하느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은총입니다. 십자가 없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받아들이는 대로 받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저는 인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는 저에게 와서 남의 흉을 보는 분보다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얘기하거나 어려움을 전해주는 분이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저도 한 몫을 합니다.

저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데 다른 사람과의 안 좋은 점을 얘기하면서 저도 같이 나쁘다고 얘기해주길 바라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저는 동조하지 않거나, 오히려 상대편을 이해하라고 하거나 당신도 문제 있다고 하기도하고 미숙하게도 불쾌한 표정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으려던 마음이 오히려 상처를 받고, 웬만하면 정말 문제가 있어도 제게 얘기하지 않아 문제가 곪아 터진 뒤에야 제가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저는 바뀐 것이 별로 없습니다.

곤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괴롭기도 하지만 인정에 끌려 옳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쉽지 않은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비록 평화가 깨지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예언을 하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감수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우리를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예언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받는 것이 달라지고,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받느냐 못 받느냐가 달라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처음부터 지니고 살았던 인생의 모토는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야 하는 등의 조건들과 함께 생각했던 것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심하게 미워하면서 느낀 것은 누가 미워지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두려움만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유학 생활하다가 치료차 한국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는 것은 세 달로도 모자랐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니 인사를 못 드리고 와서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이도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는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욕먹지 않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어렸을 때 가졌던 행복을 위한 선입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결국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나를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고 아무리 못해도 좋아할 사람은 좋아해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산다는 것이 나의 약함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누구의 미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중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 명확합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사람과의 분열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독서> : 육신의 제사가 아닌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제사를 봉헌하자. 

경규봉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부패를 뒤쫓아 행하는 예루살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유다 백성은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제사가 아니라 제사를 봉헌하는 마음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를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신다. 악행을 버리지 않고, 정결하지 못하며, 착하고 올바르게 살지 못하면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듣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면서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수많은 제사를 봉헌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느님께 제사만 드리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이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제사에 물렸고 지치셨다고 말씀하신다. 제물 타는 냄새에 구역질이 나고, 제물의 피는 보기도 싫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그들이 봉헌했던 수많은 제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하느님을 역겹게만 한 것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곧 악행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억눌린 자들을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돌보며 그들을 감싸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과 질서인 사랑을 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하느님의 마음인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다만 인간의 욕심이며 이기심일 따름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이 봉헌하는 제물을 가져가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제물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가져가실 뿐이다. 그런데 제물 속에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만 담겨져 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아주시겠는가! 


사도 바울로는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1-3) 하고 말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을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주시기를 청하자. 하느님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기도하자. 우리가 매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듯이, 내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제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하자. 오늘 육신의 제사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봉헌하는 제사가 되고, 하느님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중심과 책임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참 사람입니까?

사람이 되는 일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아마 평생 일이 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단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에서 찾아낸 것은 중심과 책임감입니다.

중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주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

 

그 누구보다도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주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중심 부재보다 더 큰 피해는 없습니다. 

정체성의 부재와 직결되는 중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마라."(RB72장) 

이번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지내신 왜관 수도원 김영호 요아킴 수사님의 상본에 적힌 성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신,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바로 허례허식을 싫어하시는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들어내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이사1,11-14).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마음을 알아 준다면 제발 이런 헛된 경신례는 집어 치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인 내가 싫어하는 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이 빠져버린, 내 뜻과 무관한 제멋대로의 경신례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해도 이런 상태에서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주님을 사랑하여 중심에 모신 이들임이 검증되는 것은 중심이신 주님을 따를 때입니다.

생각없이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진, 철저히 책임적 존재가 되어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제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이 제 십자가를 내려 놓고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책임적 존재가 되어 중심이신 주님을 항구히 따를 때 비로소 참 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제 십자가의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웃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 역시 참된 경신례의 정신을 사는 것이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이런 사랑과 정의의 삶이 채워질 때 비로소 참된 경신례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책임적 존재의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온다는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사실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환대합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 시편저자는 화답송 후렴을 통해 말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의 '중심'이신 주님과 각자의 '제 십자가'를 새롭게 확인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양다리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칼! 칼은 날이 서 있습니다. 날이 서 있기에 단칼에 무엇이든 둘로 자릅니다.

날이 서 있지 않은 칼은 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인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양다리는 그분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가족 구성원 하나 하나를 언급하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혈육보다 더 사랑해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칼같은 단호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양다리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결국 양다리는 주님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면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이, 물론 가족들도 포함해서 모든 이를 사랑하게 됩니다.

더 위대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주님의 편에 서는 사람은 혈연 혹은 지역이라는 좁을 틀을 넘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삽니다.

 



성령의 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거짓 평화와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불의에 찬 축제모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부님이 본당에서 하는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그러니 예습하는 차원에서 마르코복음 17장을 모두 읽어 오세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교사는 성경공부 참석자들에게 “지난주에 마르코복음 17장을 읽으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참 재미있군요. 마르코복음은 16장까지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적절한 교훈을 배우게 되겠군요. 오늘은 예수님이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말씀하시는 첫 번째 경고는 위선적 예배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는 안중에도 없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기에 그런 거짓된 예배에 물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이란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고, 고아의 권리를 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신의 뜻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예배에 나와 위선적인 제물을 바치는 것을 오늘 독서는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손에는 이웃에게 해를 끼쳐 피가 가득한데 예배만 드리면 괜찮을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먼저 버리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예배도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당신 뜻을 이미 알려주셨는데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앉아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이웃이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데도 나부터 살고보자는 마음으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그런 예배에서 지금도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미사를 드리러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합당한 옷차림입니다. 미사 이전의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죄 있는 상태로 미사를 본다면 주님을 참으로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사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이고, 그 노력이 미사 때 드리는 참된 예물인 것입니다.

 

예전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남편이 몇 년 동안 고생하다가 귀국하는 날,어떤 부인들은 남편을 기쁘게 맞으러 가고 어떤 부인들은 자살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부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제비들이 있어서 남편이 번 돈을 다 날리는 부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 미사를 위해서도 위선적인 예배,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미사 끝나고 성당 문을 나갈 때부터 이미 다음 미사 때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기 위해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노력에 온 힘을 쏟으며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바라는 말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선 아내에게 있어서는 ‘사랑해’라는 말이 1위를 차지했고, 남편에게는 ‘나한테 당신이 전부예요’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을 차지하는 것으로는 ‘고생했어. 여보’가 2위, ‘정말 고마워.’가 3위, ‘당신이 최고야’가 4위, 마지막 5위는 ‘당신이 더 예쁜데’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설문조사는 이런 설문도 함께 했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나를 화나게 했던 말은 무엇인가?”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을 해보시지요. 생각하셨습니까? 그럼 그 순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아내를 화나게 했던 말 1위는 ‘당신 집안은 왜 그 모양이야?’, 2위는 ‘우리 집(시댁)에 좀 잘해.’, 3위는 ‘당신은 몰라도 돼.’, 4위는 ‘당신도 아줌마 됐어.’, 그리고 마지막 5위는 ‘또 아파?’ 였습니다.

공감이 가십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남편을 화나게 했던 말도 들어보시지요. 1위는 ‘옆집 남편은 안 그렇던데...’, 2위는 ‘우린 아파트 언제 사죠?’ 등의 순서였다고 합니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의 표현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자기 생각에만 있는 말을 뱉어버린다면 어떨까요? 내가 배우자를 확실히 사랑한다고 생각은 할지라도, 그 배우자는 ‘어떻게 내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저 사람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까?’라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부부가 서로에게 원하는 말을 한다는 것, 결혼해본 적이 없는 저이지만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그렇게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또한 이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서 지금 내 자신은 어떤 말을 쓰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가장 가깝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격려와 사랑의 언어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언어를 쓰고 있는데, 하물며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처럼 진심어린 사랑의 언어를 쓰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부부가 서로에게 격려와 사랑의 말을 해나감으로써 더욱 더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안에도 이런 격려와 사랑의 말이 넘쳐나갈 때, 주님께서 약속하셨고 이미 우리 곁에 온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두면서 살겠다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주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그래서 격려와 사랑의 말을 끊임없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나한테는 당신이 전부입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많이 해보시면 어떨까요? 상대방이 그토록 원하는 말이며, 그 말을 주님께서도 듣고 싶어하시니까요.


“나한테 당신이 전부입니다.”라는 말을 최소한 한 명한테는 말합시다.


행복과 가난(김호영)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

불행 하다고 생각 하신다구요?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현재의 삶 자체가 여러분은 행복하신 삶을 살고 계신겁니다.

내가 이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살아 숨쉬고 있는 그 자체가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내 이웃과 마주할 수 있는 그 자체가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지나간 일에 대하여 뒤돌아 볼 수 있는 그 여유만으로도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고 이것은 곧 욕심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세요.

욕심을 버리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가난이라는 단어도 없어집니다.

내가 가난 하다고 생각 한다는것은 현재를 불만족하게 느끼는 욕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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