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1-6.9-12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praise of the Father
말씀의 초대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가, 불타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께서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린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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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양 떼를 치던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리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불꽃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서네’입니다. 이 낱말은 잡초, 가시덤불, 덤불을 의미하는데, 금세 타고 없어질 듯한 존재라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서네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는데,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상징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금세 타고 없어질 잡초, 덤불 같은 존재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그들을 태워 없애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께서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는 모세에게 한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모두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존재, 곧 제1독서가 이야기하던 ‘서네’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서네’ 같은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을 알게 해 주십니다. 자신이 ‘서네’임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결코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를 알려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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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이집트인을 죽인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미디안으로 도망쳐 양치기가 됩니다. 한때 이집트 공주의 양아들로서 온갖 명예와 부귀를 누리던 모세의 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에 다다른 것이지요. 이런 실패와 좌절은 모세에게 마음을 비우게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세에게 손길을 내미십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어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지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우리도 극심한 실패, 좌절을 이겨 내며 마음을 비울 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지식에 만족하다 보면, 스스로 자신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만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주님마저 자기 스스로 판단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오만함에 빠지게 되어, 결국 하느님마저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위험까지 있지요.
그러기에 겸손하고 순수해야만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바로 보게 됩니다. 아무런 사욕이나 이기심에 얽매이지 않은 철부지와도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실천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손길을 내미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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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독서에서 모세는 좌절과 실패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동포를 위한 열정과 정의감은 있었으나 아직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채 나섰기 때문에, 모세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하고 말하면서 거칠게 반항하는 사람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제의 장면은 모세가 파라오를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음을 절감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라는 모세의 반문은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러한 깨달음이 전화위복이 되어 그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호렙 산(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한 다음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입니다(탈출 19장 이하 참조).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 이것이 이집트 탈출로 시작된 해방의 완성입니다.
파라오의 권력을, 또는 모세의 능력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구원을 엎드려 경배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이 해방된 백성임을 보여 주는 표지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자기의 지혜나 슬기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을 신뢰하는 철부지 같은 이들에게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똑똑하거나 영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욱이 어리석고 우둔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철부지 아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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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파견되어 나갔다가 싱글벙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없이 빈 몸으로 파견되었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루카 10,17 참조).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하고 돌아와서 어린이처럼 행복해하며 자신들의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철부지 같았던 제자들을 현장으로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걱정하셨지만, 이제 그들이 아무 일 없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기쁨에 넘쳐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철부지처럼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말할 때마다 “주님께서 하셨다.”라는 말 대신에, “내가”라는 말을 자주 하며 틈만 나면 자신을 내세웁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성경』에는 4복음서는 없고 오로지 자신이 만든 제5복음서만 있다고 합니다. 바로 ‘내가 복음’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조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자신의 ‘덫’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내’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곳에 안 계시고 오로지 나만 남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기쁨이 없고 공허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는지 내 일을 하는지 정직하게 물어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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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동물도 사람 대하는 것이 다르고 나무와 풀도 ‘옛날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두 인간의 자업자득입니다. 사료를 먹이며 가두어 키운 동물이 고운 눈빛으로 사람을 대할 리 없습니다. 비료와 농약에 시달리는 식물이 순한 느낌으로 다가올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대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변해도 주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에 대한 그분의 애정은 바뀌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의 ‘한결같으심’을 믿고 있는 이들을 ‘철부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소유가 많으면 달리 대접받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똑같이 대해 주십니다. 학식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재물이 많거나 적어도 똑같이 대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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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에서 철부지는 철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철이 없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그날이 되면’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결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은돈 서른 닢에 스승님을 팔아넘깁니다. 이 모두가 철부지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시고 아버지의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넓디넓은 마음입니다.
철부지는 단순히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세상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주님 눈에는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판단해도 예수님의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권력에 기대거나 인맥을 찾거나 재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배경이 있어야 조직이 잘 돌아가고 탈이 없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주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철부지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앞에서는 철부지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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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은 자식들을 누구나 다 사랑하지만 특히 장애나 어려움을 지닌 자녀들을 더 사랑합니다. 측은한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 역시 그런 측은한 마음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철부지와 작은 이들, 곧 보잘것없는 사람을 더욱 좋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카인 대신 아벨을, 에사우 대신 야곱을 선택하십니다. 다윗의 여러 형제들 가운데 보잘것없는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똑똑한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 또는 사두가이들을 뽑지 않으시고, 세리나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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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해답을 보면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답을 찾아내려면 세상을 한 바퀴 돌아야 할 경우가 있지요. 집회서도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집회서는, 지혜가 어디서 오는지 깨닫는 책입니다. 집회서의 마지막 장에서 시라의 아들 예수는 자신이 어디서 지혜를 찾아냈는지 말해 줍니다. “기도 가운데 지혜를 구하였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율법의 가르침을 통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들리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집 회서는 기원전 2세기의 책입니다. 이전에 오랫동안 사람들은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지혜를 찾으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사람이 가 볼 수 있는 곳까지 찾아가 보고, 파헤칠 수 있는 것은 모두 파헤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진리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른 길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혜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진리입니다.
그 전환점을 이루는 책이 집회서입니다. 문화사적으로 찬란했던 이집트 사람들의 지혜를 탐구하고 그리스 철학을 만나게 된 바로 그 시점에, 시라의 아들 예수는 인간적인 지혜의 한계를 이미 넘어서서 참된 지혜는 하느님 말씀 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집회서에서 말하는 지혜에 도달하려면 배우는 마음, 겸손하게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절대로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인간 지혜의 한계 그 이상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수 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절대 진리 자체이신 당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어디에서부터 권한을 받고 세례를 베푸는지 되물으셨습니다.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자 그들은 진실과 진리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진리 또는 옳고 그름에 대하여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곧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말과 주장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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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셨던 일을 염두에 두고 던진 질문입니다(마르 11,15-19 참조). 이들은 예수님께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했는지 따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한 것이라고 대답하신다면,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집인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도록 그 누구에게도 권한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하며 하느님을 모독한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발할 속셈이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의 권한으로 한 것이라고 대답하신다면, ‘율법과 관습을 이렇게 함부로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며 신성 모독의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당신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한다면, 요한 스스로도 메시아로 인정한 예수님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모순입니다. 또한 ‘사람에게서 왔다.’고 대답한다면, 요한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의 반발을 사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진리를 애써 부정하고 있기에, 예수님의 단순한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지만,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진리로 말미암아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진리를 외면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무력하게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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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장사를 하는 큰아들과 짚신 장사를 하는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우산을 못 팔게 될 큰아들이 걱정이고, 날씨가 궂으면 짚신을 팔기 어려우니 작은아들이 걱정입니다. 날씨가 맑거나 궂거나, 어머니는 그래서 늘 걱정입니다. 이것을 두고 진퇴양난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꾸면 전혀 상황이 달라집니다. 날씨가 맑으면 작은아들 때문에 즐겁고, 비가 오면 큰아들 때문에 즐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양도 논법’으로 대응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세상에서 온 것인지 대답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믿지 않는 그들 자신이 문제가 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으로 도리어 궁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곤혹스럽게 하시려고 이렇게 응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편견과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세례자 요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진리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궁지로 몰리는 때가 많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맑은 날은 짚신을 팔고, 비가 오면 우산을 팔면 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펴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주님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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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명하게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삶이 그러한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시원하게 말해 주는 이도 드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남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타인의 허물에 너그러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이 곧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힘이 함께합니다. 이렇듯 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삶이 두렵게 느껴진다면 누군가에게 너그럽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의 부족함을 들추는 건 참으로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행동을 지혜로 간주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유혹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남에게 주는 상처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남의 상처를 감싸 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베풀면 곱절로 되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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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을 들여서 식사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식사 시간으로 2~3시간씩 소비한다면 어떤 이들은 바쁜 이 세상 안에서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바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식사 하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 그 많은 패스트푸드 음식점들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먹는 것에 시간 쓰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식사 시간을 줄이고 일을 많이 하면 더 행복할까요?
세계에서 가장 긴 식사를 하는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식사를 하니까 비만도가 높을 것 같지만, 오히려 비만도가 가장 낮은 나라가 프랑스라고 하더군요. 건강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며 먹는 식사는 건강뿐 아니라 행복도를 높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식사할 때에는 식사에만 집중해야 한다면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식사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스마트폰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더 대화는 사라졌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충분히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곳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큰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 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한다고 합니다. 일이나 물건들에 초점을 맞춰서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춰서 사는 삶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와 같은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음에 감사드린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솔직히 당시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학벌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훌륭한 집안도 아니고 특별하게 내세울 수 있는 조건들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신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기란 정말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철부지 같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하늘나라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합니다. 바로 내 이웃들, 특별히 세상 안에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이들과 함께 할 때 우리 역시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모르는 것은 진짜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진짜로 부끄러운 것은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이다.
성공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 하네다로 가던 비행기에 이상이 생겨서 파리로 비행기가 다시 회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객실 승무원들은 고객들에게 사과했지요. 그런데 앉은 자리에 따라 반응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퍼스트클래스 고객: “파리에서 깜빡 잊고 못 사온 것이 있었는데 잘 되었네요.”라고 말하면서 기뻐합니다.
비즈니스 고객: “내일 꼭 참석할 회의가 있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불평을 하며 인상을 씁니다.
이코노미 고객: 승무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고 합니다.
반드시 이런 것은 아니겠지요. 특히 우리나라의 갑질 문화는 아주 유명해서 위의 상황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일수록 어려운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성공해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즉,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돈에도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여유를 남겨두십시오. 분명히 삶이 달라집니다.
주님께 선택 받는 철부지 어린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국의 코미디 드라마 ‘사인펠드’는 처음에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철저히 관행을 벗어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영자들과 전문가들은 사인펠트의 평가서에 ‘빈약하다’와 ‘보통’ 사이에 점수를 주었다가, 그냥 ‘빈약하다’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오류는 엄청 많은데, ‘스타워즈’, ‘이티’, ‘펄프픽션’ 등의 수많은 성공작들은 영화 제작 스튜디오 경영자들에게 여러 번 퇴짜 맞은 작품들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해리 포터’ 등도 출판사들에게 퇴짜 맞은 작품들입니다. 우리나라 가수 서태지가 신인이 검증받는 프로에 나와 전문가들에게 혹평을 받는 장면은 아직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인기 스타들과 전문가들은 서태지가 음악 시장의 판도를 뒤집어 놓을 신인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시청자 평가단입니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너무 편협한 시각을 지니고 있어서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점수를 먹이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시청자 참여단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시청자들의 대표로 ‘선택 받았다’는 생각이 올바른 시각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리지널스’의 애덤 그랜트는 어떤 작품에 대해 가장 평가를 어긋나게 내리는 사람들은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팔아야하는 경영자들, 그리고 그 작품을 평가하는 전문가 집단이라고 합니다. 작품을 내어놓은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의 작품을 과대평가 하는 경향이 있고, 경영자들은 돈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하며, 그리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뛰어남을 내세우기 위해 새로운 것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구상을 하여 자신의 사업이 잘 될 수밖에 없다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서 망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확신을 믿고 보증까지 서 주어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만 믿고 투자를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마도 이런 심리로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다른 아이들보다 과대평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잘 알아볼까요? 선생님들은 잘 알아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에 성장한 아이들은 선생님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게 자랍니다. 놀던 아이들이 더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류를 변화시킬 역사적 성과를 낸 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평균 이하의 평가를 받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선생님도 자신이 전문가라 아이들을 잘 평가할 수 있다고 교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물을 물로, 산을 산으로 못 보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일단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교만이 들어서면 그 사람의 판단은 흐려지게 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자신이 내리는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처음 책을 쓸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읽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평가엔 교만이 섞여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교만은 뱀처럼 나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 결국 선악과에까지 손을 뻗치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누가 옳게 내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항상 ‘어린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이란 것이 아직 어린이의 눈을 흐리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전문가들이라 자처하고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사제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드님을 못 알아보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당신의 아드님을 내려 보내셔서 겸손한 이들을 찾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어린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선택받아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큰 지혜는 어린이와 같이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이가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지난주엔 외방 선교회 소속 윤대호 신부님이 계신 캄보디아 프놈펜 교구 쩜빠 성당에서 미사와 공연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먼저 미사 안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성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천사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프레젠트가 공연을 하는 동안 너무나도 흥에 겨웠는지 모두가 다 일어나 기뻐 용약하며 춤을 추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정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교회의 많은 경우 너무나도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전례를 거행합니다. 물론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전례이기에 우리가 정성을 다해 경건하고 엄숙하게 거행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례가 반드시 그렇게 경건함과 엄숙함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율법적인 생각 속에서 어쩌면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제적인 기쁨과 환희마저도 우리 스스로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차례에 걸쳐서 세계 청년 대회에 참가를 하면서 아프리카 청년들의 봉헌예절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봉헌 시간은 그야말로 기쁨의 축제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흥겨운 장단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봉헌을 합니다. 혹자는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경박스러운 전례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흥겨운 노래와 춤을 추며 봉헌하는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진정 기쁘게 사랑으로 받아주시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철부지’의 의미는 아마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인간적인 계산과 주저함이 없는 이들을 뜻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하느님의 사랑받는 철부지들이 되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누가 하느님을 아는가?
곽승룡 비오 신부님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11,27)
종교는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과 접촉하고, 대화하며, 기도하는데 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과의 관계는 단지 이성들과 감각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영적인 조명 곧 성령의 비추심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비추심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충만한 시간이 이르렀을 때, 말씀이 육이 되셨듯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런데 20세기 익명의 그리스도인 신학사상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칼 라너 신부가 전개한 초월신학이다.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선과 진리의 일반적인 가치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적인 요소 아래에서도 그리스도를 분명 알 수 있다는 개방된 신학사상을 전개하고 가르쳤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인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이 어디 계신가?’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사는데, 그 눈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겠는가? 들을 귀로 다 들어야 하는데 어디 다 정확히 알아 듣는가? 그 귀로 말씀을 들어 받아 쓰겠는가? 입을 가지고 제대로의 말을 하고 살아야 할텐데 그 입이 제대로 말을 하고 사는가?
잘 보고, 잘 듣고, 잘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똑똑이가 “하느님 어디 계신가?” 하고 묻고 있지 않는가? 사람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데, 그것을 왜 인정하려 하지 않는가?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랬다. 겉으로 똑똑이다.
철부지들은 말한다. 보는 눈도, 듣는 귀도 , 말할 입도 언제나 저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언제고 당신께서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온전함으로 채워주소서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하고 부르는 순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 철부지는 ‘하느님 어디 계신가?’묻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생생히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또 기도하자
위대한 국민이 우리에게 있다. 3,1 운동, 4,19혁명, 6,29 선언, IMF시절 ‘금모으기’ 나라가 부패정국이었을 때 ‘촛불혁명’, 일본의 반도체 부분 수출규제시 ‘극일체제운영’ 이로써 우리나라는 더욱 강해지고 발전할 것이다. 또 기도할 거리가 생겼구나. 일본이 회개하길 바란다.
위기는 곧 기회이다. 어짜피 위기는 우리가 넘어야 한다. 이를 넘기 위해 국민에게 하늘이 준 기회다. 국민은 강한 힘으로 나라를 지켜 우뚝 설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전범국이면서 회개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 남아있다.
제헌절에도 태극기는 휘날린다. 국회만 잘하면 될텐데 이제 민생법안 처리를 위해 일하거라. 당리당략 소비전 그만 하거라. 국민은 벌써 냉정한 이성으로 바라보며 정의로 향해 위대해지고 있다.
<아 좋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랜만에 만난
한 아이가
멀리서 나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와
환하게 웃으며
품에 쏙 안깁니다
아 좋다
이 맛에 살지요
어린 철부지나 어른 철부지 좋아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이 감추신다는 뜻 생각하니 아예 입 다무시는 거라 생각 듭니다.
우리도 아예 통하지 않고 들을 마음도 없으면 소귀에 경 읽기라합니다.
똑똑하고 지혜롭다 자칭하며 잘난 사람 나밖에 없단 사람 꼴 못봐줘요.
세상은 돈돈 권력 미모 그러지만 영혼을 아시는 하느님은 안 그러시죠.
세상의 똑똑함 요령 꾀부림 등이 사람은 속여도 하느님은 못 속입니다.
어린 철부지들과 착하고 선행하는 어른 철부지들과 하느님은 통합니다.
육신감각기관 의지해 살고 영의 영감기관들 무시하면 겁난세상 옵니다.
똑똑한 짐승들이 세상판쳐도 영감살린 철부지로 하늘향 삶 일궈갑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감사 기도로 시작합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0,25)
철부지! 세상이 인정하는 지혜와 슬기를 갖추지 못한 이들, 공식적으로 지혜와 슬기라고 일컫는 학문에 접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 당장 시급한 생계유지에 매달리느라 현학적인 이슈는 떠올리기조차 버거운 이들, 누구에게도 지혜와 슬기를 청하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한 단순하고 소박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가 열리고 있는데 대해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계십니다. 당대의 내노라 하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 최고의회 의원들에 속하지 못하는, 부족하고 투박한 당신 제자들이 한 걸음씩 아버지의 진리 안으로 다가가는 과정에 스승인 예수님께서 더할 나위 없는 감사를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마태 10,27)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를 알 수 있는 특권은 예수님께 달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이들만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곧 "철부지"입니다. 그가 세상 지혜와 슬기로 가득 차서 자기의 앎을 주장하는 세상의 학자가 아니라 "철부지"라서 예수님이 그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부르심 장면으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무렵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탈출 3,1) 그런데 이 첫 구절이 이미 탈출기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백성을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시나이로 갔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두려워 주저하는 모세의 모습이 이어지겠지만, 그런 그의 망설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은 이미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탈출 3,12)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은 이루어집니다.(탈출 24장 참조)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40년을 살다가 살인죄로 도망쳐 미디안 땅에서 목자로 40년을 삽니다. 그리고 80세가 되어서 부르심을 받고 파라오에 맞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지요. 그렇게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둔 채 숨을 거둔 때가 120세(신명 34,7 참조)입니다.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탈출 3,3)
하느님께서 타오르되,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길로 나타나시자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이방인이고 살인 죄인으로서 낯선 곳에 몸 붙여 산 긴 세월은 그를 보다 단순하게 낮추어, 신비에로 다가갈 줄 아는 이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탈출 3,4)
주님과 모세의 시선이 서로를 향합니다. 모세는 놀라운 광경을 보기 위해 떨기나무 속 주님께 다가가고, 주님은 당신을 보러 오는 모세를 보십니다. 관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다가서는 순간은 찰나인 듯 영원합니다. 물리적으로 좁혀질 듯한 거리나 시간도 무한대로 이어집니다. 이 "봄"이 교차하는 가운데 말씀이 등장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이 말씀은 "봄"을 "앎"으로, 그리고 "참여"로 확장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모세에게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를 당신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탈출 3,11)
모세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조심스레 아뢰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집트 왕자, 의협심에 불타올라 살인을 저지르는 자, 동족을 가르치려 들던 이의 톤이 아닙니다. 미디안의 40년은 그를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하고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은 철부지에게 온갖 지식과 처세술을 채워 똑똑해지라고 재촉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의 온갖 지식과 처세술을 비워내고 다시 철부지가 되라고 초대하지요. 모세는 그렇게 되기까지 40년이 걸렸고 마지막 비움이 완성되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더 닦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도 체험하듯이 삶에서 우리에게 허락되는 약함, 죄스러움, 낯설음은, 강하고 결백하고 능력 충만할 때보다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철부지들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모자라고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 철부지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상에 감추어진 신비가 꾸밈 없고 단순한 마음으로 불길을 향해 다가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에, 아직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한 목소리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고 외치는 날이 오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철부지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제가 뭐라고'(마태오 11장 25~27)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지혜롭다는 자들 내치시고 철부지를'
제가 뭐라고 부르시고 살게 하시나이까?
제가 뭐가 잘났다고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제가 뭐나 된다고 소리를 내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하지 않으렵니다.
못합니다 ᆢ ㅠ ㅠ
어리석은자여!
허약하고 부족하다는것 다 알면서 부르셨고 보내시고 살게 하십니다.
말더듬이 모세를 보내시는 것처럼!
나를 보내셨고 능력도 주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예' 하고 행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시간, 건강, 능력을 내어놓지 못하게 누가 꼬십니까?
분명 사탄이 당신 손잡고 있는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모든 시간에 열려있고 영적인 사람은 유연하고 부드럽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솔직하고 진실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탈출 3, 12)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제1독서(탈출 3, 1~12)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우선 이 놀라운 광경을 보러 가야겠다 하고 그곳으로 다가갔다가 "모세야, 모세야" 하며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예,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탈출 3, 4~5)
그리고 이어서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탈출 3, 6) 하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는데, 계속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모세에게 사명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탈출 3, 9)
그러자 모세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탈출 3, 11~12) 그리고 나서 "내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탈출 3,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탈출기 말씀은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사명을 받는 대목이며,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산 이것을 보통 시나이산이라고도 합니다만, 모세는 바로 이 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느님은 바로 조상들의 하느님으로서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입니다. (탈출 3, 6)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도록 모세를 파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새삼 이 대목을 통해서 "예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의 하느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느님으로서 예배 받는 하느님이 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예배 해야 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고난을 받고 있기에, 물론 이집트 안에서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시간도 공간도 주어지지 않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로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공간을 갖고, 그런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지상 과제이며 또 하느님으로서도 꼭 이루어내야 할 일이였습니다. 그것을 모세를 통해서 이루고자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결국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열가지 기적을 하느님의 힘으로 행사하면서,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위대한 일을 해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전통을 이어받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신약의 거룩한 백성인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을 예배하며 감사행위를 매일 체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영원히 하느님을 예배하는 공간과 시간을 갖게 되는 하느님 백성, 바로 그 시작을 모세가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현재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 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 나는 오늘날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십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물은 성령 없이 씻어 줄 수 없습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사론’에서(Nn. 19-21. 24. 26-28: SCh 25 bis, 164-170)
나는 앞에서 여러분에게 보이는 것만 믿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여러분이 낙심하여 “눈으로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그 신비가 이것이란 말입니까? 내가 여기서 보는 물은 매일 보는 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그 물에 여러 번 목욕했지만 아직까지 깨끗해지지 못했는데 나를 깨끗이 씻어줄 물이 이거란 말입니까?” 하고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물이란 성령 없이 씻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 세례에는 물과 피와 영이라는 세 증언자가 있고 이 세 증언자들은 서로 일치한다는 성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증언자들 중 하나라도 제외시킨다면 세례의 성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는 물은 성사에서 아무 효능 없는 보통의 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물 없이도 재생의 성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도 있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비자는 세례를 받기 전에도 그가 십자표를 긋는 주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있어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는 죄 사함과 영적 은총의 선물을 얻지 못합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율법에 따라 일곱 번 물에 들어갔습니다. 이와 달리 여러분은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습니다. 그때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성부를 고백하고 성자를 고백하며 성령을 고백했습니다. 이에 뒤따라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이 신앙 안에서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느님을 위해 다시 일어났습니다. 즉 세상의 것인 물 속에 묻힘으로 죄에 대해 죽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물이 결코 효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베짜타 못에서 중풍 병자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풍 병자가 기다리던 사람은 동정녀에게서 나신 주 예수가 아니었겠습니까? 그 병자는 우리 가운데 오실 때 그림자로서 한두 사람만 치유하시지 않고 당신의 현존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치유하신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자가 강림하심을 기다리던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라고 말씀해 주신 그분이었습니다. 그분에 대해 요한은 또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까? 이는 여러분이 눈으로 볼 수 있고, 의인 노아가 방주에서 내보낸 그 비둘기가 비둘기의 형상을 띤 성령의 예표임을 깨달으며, 이 안에서 세례성사의 상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아래와 같은 많은 증거를 볼 때 이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복음서에 성부께서는 그분을 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실 때 분명히 이것을 주장하시고, 비둘기의 형상으로 성령을 받으신 성자에서 이것을 확인하시며, “주님의 소리는 물들 위에, 엄위의 하느님이 우레 소리 내시니, 많고 많은 물위에 주님이 계시다.”라고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시면서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오신 성령께서도 이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성서가 여룹바알의 기도가 응답되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왔고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불이 내려와 제물을 축성했다고 말할 때 이것을 증언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사제들을 볼 때 그 사제 개인의 공적을 생각지 말고 그들의 직분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람의 공적을 따진다면 엘리야의 공적을 보는 것처럼 주 예수로부터 받은 이 성사를 우리에게 전수해 준 베드로나 바오로의 공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옛적에는 사람들의 믿음을 일으키도록 눈에 보이는 불이 내려왔습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불이 내려옵니다. 그것은 옛적에는 예표였고 현재의 우리에게는 효력을 발합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의 기도로써 주 예수를 청할 때 그분께서 참으로 그 가운데 현존하신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있고 당신의 성사들이 있는 곳에 주님은 더더욱 당신 현존을 베푸시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 여러분은 세례대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대답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부를 믿고 성자를 믿으며 성령을 믿는다고 대답했었습니다. 이 대답은 “내가 가장 위대한 성부를 믿고 덜 위대한 성자를 믿으며 맨 마지막에 나오는 성령을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때 말한 한마디의 말로 인해 성부를 믿는 같은 믿음으로 성자를 믿고 성자를 믿는 같은 믿음으로 성령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로 주 예수 홀로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어야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주님과 만남의 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도 있습니다. 만날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고 젊은 때가 있으면 노년의 때도 있습니다. 찬란한 일출의 때가 있으면 고요한 일몰의 때도 있습니다. 꽃피는 봄의 때가 있으면 열매맺는 가을의 때도 있습니다.
농사의 때는 정말 중요합니다. 씨뿌릴 때도 놓치지 말아야 하고 농약칠 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해의 농사가 때에 따라 질서있게 진행됩니다. 농사뿐 아니라 사람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때의 진리입니다. 참으로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때를 알지 못해 또 때를 기다리지 못해 낭패를 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배가 먹고 싶어도 지금 푸른 열매를 따 먹을 수는 없습니다. 가을의 때가 되어 비로소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의 때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봄철에는 봄철처럼 살고 여름철에는 여름철처럼 가을철에는 가을철처럼 겨울에는 겨울철처럼 사는 것이 삶의 지혜요 성숙된 모습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철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들자 망령난다’란 말도 있듯이 철들어 자기를 아는 삶이 결코 쉽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하여 제가 늘 강조하는 것도 인생여정을 하루로 압축했을 때, 또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지점의 때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귀가준비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 또한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때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탈출기의 주인공은 모세입니다. 구약의 전개되는 역사가 참 흥미진진합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앞서 인물이 사라지면 다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와도 같은 모세와 더불어 시작되는 탈출기입니다.
고독한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침으로 시작된 인생수련자 모세입니다. 하느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놀랍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의 인생수련을 통해 정화의 과정을 겪은 후 때가 되자 하느님은 하느님의 산 호렙의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어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의 성소 장면은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부르심에 즉각 깨어 응답하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의 때가 참 적절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동족을 이끌어 내라는 막중한 소명을 받은 모세의 반응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광야에서의 수련과정을 통해 비워지고 비워져 이집트에서의 혈기왕성하던 때와는 달리 겸손하고 온유해진 모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겸손한 이를 만나 주시고 불러 주시어 당신의 도구로 쓰심을 깨닫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의 든든한 배경이 되시겠다는 주님의 확약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비워 겸손해진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따라 붙는 말씀이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천하무적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누구를,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마침 어제 두 분에게 보속으로 써드린 ‘말씀 처방전’도 생각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참 많이 써드린 보속 때의 말씀 처방전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정서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두려움과 불안도 말끔히 사라지고 위로와 치유, 그리고 기쁨과 평화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답은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바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도 받고 새로운 사명을 받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오늘 복음도 참 아름답습니다. 때가 되어 아버지를 만난 예수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께 주신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감격에 벅차 고백하는 복음에서 하나뿐인 찬양기도이자 감사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감사와 찬양이 하나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었습니다.”
철부지가 상징하는 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하느님께 활짝 열린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유연성, 신축성, 개방성 좋은 진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했고 그 제자들이, 또 우리가 그러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보여줍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과의 일치가 겸손과 온유에 이르는 지름길이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와 하나되는 지름길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천복天福을 누리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다음 화답송 시편처럼 찬미의 응답뿐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안의 온갖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아! 나 그대에게 감사한다.
최민석 신부님
바람 불지 않는 인생은 없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이유다. 숱한 바람이 나를 흔드는 이유다. 오랜 시간의 아픔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의 길은 내 삶의 근원을 튼튼하게 한다는 것을.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길이 있다. 나무에게는 나무의 길이 있고 꽃에게는 꽃의 길이 있다. 그래 서로 가는 길이 각기 달리보이지만 하늘의 시선을 얻으면 실상은 같아 보인다. 사람에게서 하늘이 있듯 개에게도 하늘이 있다. 너에게서 나를 보고 나에게서 너를 보듯이 서로 다르지 않다. 한 근원을 발견하면 경계는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모두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아버지에게 ‘내어 맡김’으로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이룬다. 인종, 피부색, 종교, 빈부귀천을 가르고 차별과 배제를 통해 자기 계급의 이익을 공교히 하려는 이들은 경계선 만든다. 경계선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름으로 경계선 저 너머의 세상을 적으로 돌려세운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을 얻으면 실상 경계는 사라진다. 한량없는 사랑이야말로 경계를 넘어서게 한다. 아버지는 경계가 없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낯선 세상을 떠돌았다. 경계를 넘어 다니는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느님이 지시한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다. 구약의 출애굽 공동체는 익숙한 세계를 떠나 광야로 들어감으로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내면화했다.
예수에겐 경계란 없다. 경계 없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분리의 장벽을 허무셨다. 폭력에 기반한 로마의 평화가 허구임을 폭로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신 분이다. 경계를 뛰어넘는 이들은 기득권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 불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는 사람들이 구하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땅의 인력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말씀이다.
이것을 이미 아주 오래 전에 깨달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다. 그렇다! 나는 자꾸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자꾸 커져야한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법적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당신은 결심과 헌신으로 이러한 마음을 막아야 한다. 내가 매 순간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 2,20)라고 고백하기를 얼마나 원하느냐에 따라 나의 평안과 능력과 결실이 달라진다.
지혜로운 사람은 성령께 ‘내어 맡김’으로 지혜를 얻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이 있다. 만약 마음을 열어 성령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 지혜를 얻는다면 사물이 오면 오는 대로 맡겨 거슬리지 않고 떠나가면 가는 대로 좇지 않는다.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을 행하는 바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험해야 할 소중한 ‘나’다. ‘나’를 스스로 둘로 나누어 하나만 사랑하고 다른 하나는 미워할 것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통째로 받아들여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내 안에 ‘가려서 택하는’ 마음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한없는 평화와 고요와 이완이 가득히 차오르게 된다.
참된 마음의 자유는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올라오는 ‘이것’과의 단 한 번 온전한 맞닥뜨림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내어 맡김’에서 온다. 내어 맡김이 십자가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올라오는 ‘내어 맡김’이 사실 텅 빈 충만이 바로 그것이다. 텅 빈 그 자리는 허공과 같아서 모자라는 것도 아니요 남음이 있는 것도 아닌 다만 ‘있는 그대로’ 영원한 자리다.
예수님이 자리하시는 아이들의 마음
이종경 신부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11장 25-27)
성전에서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만나면 당황스럽습니다. 드러눕기도 하고 소리도 지릅니다. 어린이미사를 드리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과 말들로 난처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성당에 계속 나오면서 교리를 배우고, 또 신부님과 수녀님,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이야기도 나누다 보면, 조금씩 나아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볼 때, 아이들 속에 자리한 영적 보물에 놀라게 됩니다. 저는 사제로서 더 많은 것을 알기에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이들의 진지하고 솔직한 믿음을 마주하면, 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하늘의 진리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취득하는 세속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천상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뛰어난 지식과 명석한 두뇌보다는 주님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철부지 아이들에게 강요된 말과 행동만을 고집하느라 하느님의 사랑 어린 마음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나 반성해봅니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자리하시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참 놀라울 뿐입니다.
* 세상을 밝히는 것은 하늘의 태양이 아니라 낮은 이들에게 뿌려진 작은 빛이 아닐까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첫영성체 교리를 하던 중이었는데, 하루는 제가 “예수님이 왜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을까요?”하고 질문을 던졌더니, 초등부 3학년 어린아이가 손을 들더니 “가난한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초등부 3학년 어린아이의 입에서 그런 답이 나올 수 있을까? 예수님의 이야기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길 어린아이들에게 더 명확히 드러나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주 하느님께서는 겸손하고 순박한 영혼에게 오시는가 봅니다. 아니 순박하고 겸손한 영혼들이 주 하느님을 쉽게 알아차리나 봅니다.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겸손하고 맑은 영혼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버지를 따라 살아야 <마태 11, 25-2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의 기도를 드리며 저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두고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를 느끼면서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아버지” 부르고 감사, 찬미 드리며 이런 약속을 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를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신 것같이 아버지는 진, 선, 미의 근원이십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아버지와 함께 살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삶은 봉사와 섬기는 삶이며, 평화의 삶은 내어주고 나눔의 삶이며, 기쁨의 삶은 만남과 친교의 삶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 이는 주님을 찾는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는 것이며,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처럼 사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찾느냐?” 아버지 안에서 찾는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 안에 있지 그 외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저는 예전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고, 어떤 자리에 있고, 어떤 사람으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아버지는 나를 아버지의 모습대로 만드시고, 아버지를 따라 살라고 이르심을 깨닫고 난 후 나는 없고 아버지만 살아계심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아들은 어린아이입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보다 어린아이처럼 철부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사람들 위에 올라서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배우고 따라 사는 길입니다. 윗자리를 탐하거나 잘난 척하고 산다면 아버지의 은덕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잊고 망각하는 삶입니다.
사람은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고 누릴 수 있습니다. 태양은 모든 생명의 원천입니다. 태양 없이는 지구상에 생명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지구가 태양을 향해 돌고 있듯이 아버지가 계신 곳, 아버지가 움직이는 곳을 따라가야 합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 후에 우리의 청원 기도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우리 가족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지만 아버지만은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야! 성당에 가면 밥을 주냐, 떡을 주냐. 내가 없으면 너희들 살지 못해. 나를 믿어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때는 대답을 못 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성당에 가면 생명을 받고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습니다.” 하고 대답해 드릴 수 있을 것인데. 그래도 저는 지금이라도 실천하고 따를 수 있어 행복합니다.
주의 기도를 깊이 알고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를 따라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참 기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왜 이들이 어리석은가 하면 모르는 것을 모르고 아는 것만 가지고 자기는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안다고 할 때 정확하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하지 않고 아는 것 하나를 가지고 안다고 하고 심지어는 다 안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아는 것이 그 많은 것 중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하나 외에는 다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가 다인 사람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알라고 하는 것이고, 자신을 모른다는 것도 자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 알지 못하거나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라고 하는 것이며, 모르는 것이 많이 있고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많이 있음을 알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겸손한 사람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아는데 비해 교만한 사람은 그것을 모르기에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모르는 것은 없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어떤 현상을 일으킵니까?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 자기가 모르는 것은 없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발전을 합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면 나는 하느님 존재하는지 어떤 분인지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내가 모르니 그런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골에서 땅만 파서 먹고 사는 사람이 서울에 어마어마하게 큰 빌딩이 있고 그 안에서 몇 만 명이 기거하며 일한다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큰 집이 있을 수 있냐며 그런 집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르면 그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지 어찌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까?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현상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고 슬기롭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스도교는 계시 종교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의 계시로 알게 된다는 거지요.
인간의 지식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신비, 곧 신만이 알고 우리는 모르는 신적인 비밀이라고 하는데 이 비밀을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며 우리만은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하십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이 말씀은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만이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들,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러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음이 굳어지면
아무 것도
헤아릴 수 없는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선(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단순함과 열정의
철부지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의 힘찬
물결이 되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선(善)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진실로 믿습니다.
철부지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보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히려 철부지들을
생각하여 주시고
철부지들을
선택하여 주십니다.
오히려 하늘
나라의 신비가
철부지들을 통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만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철부지를
향한 희망이
철부지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게합니다.
철부지의
반항과 실패까지도
껴안아주십니다.
철부지의 순간과
철부지의 기도도
아름답게 받아들이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제아무리 뛰어나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결코 우리 힘만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선(善)하신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철부지와의
믿음의
관계안에서
선하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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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부탁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철사를 반으로 자르고 싶은데, 철사를 자를 연장이 없습니다. 이 철사 좀 잘라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연장 없이는 철사를 자를 수 없다고 말하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은 힘이 없어서 이 철사를 자를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수의 몇 명은 “철사 좀 줘 보세요.”라고 말하면서 철사를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할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철사를 자르는 것인데, 왜 구부리고 펴고만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하면 웬만한 철사는 언젠가 뚝 끊어지는 임계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우리는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히 원하는 상태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임계점이 있는데, 그 임계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포기했던 적은 없었을까요?
어떤 석공이 있었습니다. 이 석공이 망치로 돌을 치면 100번 안에 어떤 돌도 다 두 동강이 났습니다. 어느 날, 석공은 커다란 돌을 깨기 위해서 망치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00번째 망치로 쳤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 달리 돌이 깨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석공은 실망했지만, 100번이나 쳤음에도 불구하고 깨지지 않았다면 깰 수 없는 돌이라 생각하고 포기했습니다. 어차피 깨지지 않는 돌을 계속 붙들고 있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때 초보 석공이 이 돌을 망치로 딱 한 번 치자마자 깨져버렸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딱 한 번만 더 쳤으면 될 것을 안 된다고 포기했던 것이지요. 만약 이 석공이 100번이라는 제안을 두지 않고 깰 때까지 망치를 내리쳤으면 어떠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당시에는 능력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뽑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부족해 보이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철부지 같은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실제로 이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아들였지만 곧바로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제자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부족함을 계속 보여주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결과 이들 역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잘 포기할까요? 임계점을 넘어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명언: 절망 위로 조그만 희망이 점점 자라나 울창한 숲 이루는 걸 보았는가. 기쁨은 슬픔에서 자리고 희망은 절망에서 자라는 것(최일화).
임계점
우리 삶 안에서도 이 임계점이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성당의 한 교우가 제게 큰 잘못을 했습니다. 저는 크게 화를 냈고, 이분도 인정하고 제가 용서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상처가 커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셨으니 얼마 뒤에 한 번만 더 용서해달라고 하면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오히려 저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요?”
그 상대방도 제가 아는 분이라서 조심스럽게 가서 그 자매님과의 관계를 물어봤지요. 그러자 이런 말을 합니다.
“몇 차례 용서를 제가 청했습니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딱 한 번만 더 용서를 청했으면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해주려는 그 순간 그만둔 것이었지요.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다 보면 반드시 원하는 상태로 변화가 일어나는 임계점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 안에는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구태(舊態)를 버리지 못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 없습니다. 교만하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자기만 잘났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만 정답입니다. 그야말로 지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사람들 특징이 뭘 못 배웠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가정이 기반을 받쳐주지 못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쳇말로 ‘금 수저’ 출신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 사격 아래 ‘명문’이라는 단어가 달린 곳들만 섭렵했습니다. 실패나 좌절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로지 합격과 패스만 반복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선도하는 최고급 엘리트로 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엘리트들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망언들을 되풀이 하면서 이 땅의 서민들의 공분(公憤)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 전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공지상주의, 성적지상주의가 판을 치다보니 그렇습니다. 인성이나 예의, 타인에 대한 배려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은 뒷전인 채, 오로지 성적만 끌어올리려고 발버둥친 결과입니다.
그들에게 공동선에 대한 관심이나 우리 사회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이나 그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뇌에서는 그런 요소들이 이미 다 빠져나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사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찹니다. 그 알량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바쁩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하지 말아야 할 망언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같이 여겨야 할 직원들을 종처럼 내려다봅니다. 하늘처럼 섬겨야 할 백성들을 ‘개돼지’로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갑질들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엘리트라고 자신하는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리더들, 꾸준히 자신을 살피고, 틈만 나면 성찰하고, 회심에 회심을 거듭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느 순간 몰상식한 인간,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으로 낙인찍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중학교 여학생들이 학교급식실로 찾아가 무더위에 고생하고 계시는 급식종사자 어머님들에게 이런 감사편지를 드렸답니다.
“급식 선생님들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집에서 먹는 밥보다 더 맛있어서 행복해요. 밥 안 남길게요. 몸 상하시지 않게 쉬어가면서 일하시구요. 아! 그리고 제대로 된 대우 받으시면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나이는 어리지만 우리 중학생들도 나름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이 불편한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인성이나 성숙도 면에서 막말과 갑질을 일삼고 있는 어떤 분들보다 100배 더 낫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세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고통 받고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로 세우시려는 계획 앞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주님! 저는 이미 준비가 잘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제 능력을 눈여겨봐주셨군요. 잘 해보겠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답하는 대신 이런 말씀을 올렸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기 3장 11절)
모세는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홧김에 살인까지 저지른 죄인임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언변도 보잘 것 없어 남 앞에 서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선택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기에, 주님의 보살핌과 인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함을 보시고 그를 뽑으신 것입니다.
겸손해야 하느님께서 부르십니다. 겸손해야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기도는 하늘까지 도달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육아 휴직 중인 직원이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에 왔습니다. 5개월 된 아이는 사무실을 환하게 해 주었습니다. 작은 손으로 포도를 잡으려 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직은 엄마의 모유를 먹어야 하고, 아직은 스스로 걷지를 못하고, 아직은 누군가 도와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것이고, 사회는 아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줄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할 것입니다. 어느덧 아이는 걷고, 말하고, 쓰고, 배워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아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사랑을 받아야하고, 아이는 충분히 잠을 자야하고, 아이는 24시간 보살펴야 하고, 아이가 원하는 시간에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선하신 뜻입니다.
아이의 예쁜 모습도 좋았지만 아이 엄마의 이야기가 진하게 다가왔습니다. 사무실에 오기 전부터 마음이 떨렸다고 합니다. 십여 년을 매일 출근했던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6개월 만에 사무실로 오는 마음은 설렘이었다고 합니다. 사무실은 단순히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터전이었고, 만남의 장소였고, 본인의 가치가 드러나는 곳이었습니다. 육아 휴직을 잘 마치고 함께 일을 하면 좋겠습니다. 아이와 함께 잠시 왔는데도 떨리는 마음이었다면 다시 출근하는 날은 하늘을 나는 마음일 것 같습니다.
오늘 모세는 호렙산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을 것입니다.
첫 부임지로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벌써 26년 전입니다.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열정과 패기만큼은 있었습니다. 성당의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첫 본당에서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떨리는 마음이었고, 설레는 마음이었습니다. 매번 새로운 임지로 가면서 일의 방법은 더 알게 되었지만 첫 본당에서 가졌던 열정과 패기는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보면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저를 통해서도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허위와 욕심, 교만과 미움으로는 결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참된 가치를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고, 세상의 잣대로는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손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거짓과 가식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어우러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를 부르시는가? -철부지 인생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말씀의 분위기는 어제와 완전히 바뀐 분위기입니다. 어제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주했지만 오늘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어제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세 고을을 향해 불행을 선언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셨지만 오늘은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하나의 찬양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5-26).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율사와 바리사이들입니다. 철부지들은 당신의 제자들이자 예수님 자신입니다. 정말 말그대로 어리석은 철부지들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이들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학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선량하고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계시하십니다.
정말 진정한 대가는 학식과 더불어 지혜를 갖춘 참 겸손하고 온유한 철부지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전임 교황이신 베네딕도 16세의 인터뷰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교황님은 어떤 신학자를 최고로 여기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프랑스 예수회 회원이며 신학자인 뤼박 추기경님입니다. 뤼박 추기경님은 매우 솔직했고, 겸손하며 선량했습니다. 우리는 곧장 서로를 오래된 친구처럼 여겼습니다. 우리는 나이 차이가 많았고, 업적이나 삶의 경력이 달랐지만 서로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정중하고 친절했습니다. 뤼박 추기경님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머리에 입은 총상 때문에 두통에 시달려 괴로워했지요. 그러나 독일인에게 어떠한 원한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위대함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주 단순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했습니다. 그분은 침상에 누워있었지만, 시립 도서관에서 16세기의 책 한 권을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그 책의 저자에 관하여 뤼박 추기경님이 글을 썼는데, 그분은 병상에서도 그 책으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뤼박 추기경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런 분이 예수님의 참 제자이며 진정 철부지 순수하고 선량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진정 주님을 믿는 대가들의 진면목은 이러합니다. 반면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헛 똑똑한 이들로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판이합니다.
바로 주님은 이런 철부지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철부지의 전형입니다. 세상의 눈에 크게 어리석은 대우大愚의 사람같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크게 지혜로운 대지大智의 사람이 철부지입니다. 진정 주님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철부지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 역시 전형적인 철부지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탈출기의 모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던 모세는 수련이 끝날 때즘 때가 되자 수련장인 주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광야에서의 수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온유하고 겸손해진 모세임이 분명합니다. 정화되어 겸손하고 순수해진 모세를 찾은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주님과 모세와의 아름답고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발을 벗어라.”
이어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해 낼 사명을 부여 받은 모세입니다. 반신반의하며 묻는 모세에게 주님은 한 말씀으로 모세의 입을 닫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넘겨주신 하느님은 이미 아주 오래전 모세에게 모든 것을 넘겨 주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사명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모세야말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전형적 하느님의 철부지 사람들입니다.
눈만 열리면 우리가 서 있는 땅 어디나 신을 벗어야 할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땅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철부지들인 온유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이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또 주님을 만날 때 더욱 온유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모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는 이곳이 불타는 떨기나무의 거룩한 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철부지같은 우리를 부르시어 사명을 부여하신 후 각자 세상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주님, 천상 양식으로 새로운 힘을 주시니,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아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찬양의 기도요, <뒷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임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안다.”라는 태도를 지녀가게 됩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를 않게 됩니다. 자기의 앎으로 따질 뿐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이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ξομολο-γουμα?)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히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사랑하고 싶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면 금방 자신의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 꺼내놓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랜 친구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고 잘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겐 제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꺼내는가하면 어떤 사람에겐 술에 취해서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깊은 이야기까지 한다는 뜻은 상대와 친해지고 싶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이미 상대를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남이 모르는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속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을 더 사랑한다는 의미도 되고, 사랑하면 내 자신을 더 상대에게 드러내고 싶다는 말도 됩니다.
물론 반대로 상대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면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도 되고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알게 하고, 또 상대를 더 알려고 하는 것은 관계와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사랑하면 더 알게 되고 더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말을 굳이 들을 필요가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셨다고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가장 완전하게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알고 계시니, 그것은 스토커로서가 아니라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셔서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온전히 다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인간이 당신을 알고 더 사랑하여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사람도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 만큼 그 분을 더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들어내 보이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은 교만하여 그 안에 성령님이 들어 갈 자리가 없지만 어린이와 같이 깨끗한 사람은 자신을 성령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완전히 깨끗한 어린이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겸손한 어린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성령으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아버지를 완전히 볼 수 있으셨고 완전히 아시고 사랑할 수 있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린이만이 어른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읽고 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선 여자 중엔 몇 안 되는 교회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는 성녀입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진리를 많이 깨달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머리가 다 빠지고 희어가며 평생을 공부하지만 그만한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똑똑해지려고 하지 어린이처럼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타살이라는 위대한 신학자는 추기경 직을 수여받기 며칠 전에 성탄 카드를 쓰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성탄 카드에 써 보내려던 마지막 내용은 평생 공부하여 깨달은 마지막 한 마디였습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제가 전에 살았던 기숙사 철문은 센서로 작동을 합니다. 문 양쪽 벽에 센서가 있어서 차량이 통과했는지 안 했는지를 감지합니다. 그러나 가끔 비가 온 다음 날은 잘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먼지가 센서에 붙어서 상대에서 보내는 빛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차에서 내려 손으로 센서에 묻은 먼지를 닦아냅니다. 그러면 다시 잘 작동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가로막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단순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 사랑에 정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만이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만큼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또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얼마만큼 어린이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만들어가고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교만의 탈을 벗고 지금 여기서 만나는 하느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수도생활의 연륜이 깊어가도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이른바 어둔 밤을 경험할 때도 있지요.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거짓 신비주의나 초월, 왜곡된 관상기도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알아보고 만나는 바른 길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1,25-26)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하찮은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한껏 찬양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태초에 창조하시고”(창세 1,1), 만물을 유지하시는 위대한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자들에게 당신을 계시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현명하고 박식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철부지들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지혜와 자비를 알아볼 수 있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5,3) 하셨지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곧바로’ 따라나선 사람들은, 못 배우고 뛰어난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이들이었습니다. 간절한 목마름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녔던 이들은 비천하고 소외된 사람들, 멸시받고 버림받은 사람들, 특히 배운 것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병자를 치유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실 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파하실 때 경탄한 이들은 단순하고 평범한 군중들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인간의 지식이나 힘으로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지요. 현실을 도피하도록 조장하는 감상적 가짜 신비주의에 의해서는 더더욱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하느님을 갈망하는 목마름과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분께 기꺼이 모든 것을 맡기고, 늘 조건 없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단순함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교만을 벗어버릴 때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2코린 2,14; 10,5)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에게 모든 것을 계시해주셨으니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고 만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여럿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살을 취하여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구원의 행적을 통해 만나는 것입니다. 저 먼 신비의 나라에 머물며 하느님을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도록 해야겠습니다.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안에서 신음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도록 힘써야겠지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교만의 탈을 벗고 겸손하고 단순한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저 하늘 위가 아닌 이 땅에서 보여주신 역사 예수의 사랑의 여정을 회상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도록 눈을 뜨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
최승일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라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해야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을 아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심으로써, 누가? 즉 어떤 사람이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사람들”은 “예지의 소유자”라는 뜻이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사람, 어려움을 교묘하게 뚫고 나가는 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계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박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어서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다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함을 단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에 무식함과 우둔함으로 복음을 대한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가정방문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쉬고 있는 교우의 집을 방문하여 “이제 그만 쉬시고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해 봅시다.”라고 권고하였더니 그 분의 말씀이 “신부님,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도 알만큼은 다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책도 여러 종류로 다 읽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 회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그래도 성당에는 나오셔야죠?”라고 다시 권했더니만, “신부님, 내가 이렇게 많이 공부를 하고 있어도 아직 성당에 나가야 할 필요성을 도무지 못 느낍니다. 좀 더 공부해 보고 필요성을 느끼면, 그 때 가서 나갈 테니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친척 가운데 신부도 있고 수녀도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하도 기가 막혀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제님, 그러면 뭐 하러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냥 성경책 한 권을 사다가 읽고, 하느님께 직접 ‘당신을 아버지로 모실 테니 나를 당신 아들로 받아주십시오’ 하면 되지, 부러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기 구원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친척 신부 수녀가 대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년이 지나고 나서 그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돌아가셨겠습니까? 자신이 고집하던 식으로 돌아가셨겠습니까? 그때는 유별나게 성당에 병자성사를 청하고서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목자로서 씁쓸한 맛을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가고 마는 것을, 뭐가 그리 잘났고 똑똑하다고 하느님께 도전하다가 이렇게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지만, 복음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는 그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잘 관리하라고 맡겨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마음, 즉 관리인의 자세로 겸손되이 자신의 시간이나 재능 그리고 재화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자라면서 아버지가 무서웠던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사랑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단 무서운 아버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살면서 주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주 느끼지 못하면서 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하느님이 자기가 해달라는 대로 안 해주시는 것을 보니,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조금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신 느끼게 해 줄 수도 없고, 대신 살아 줄 수도 없고, 하느님이 시공 속에서 우리가 만져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시므로, 영적인 지평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곱씹고 되씹으며 찾아내고 발견해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주 하느님은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 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람과는 확연히 다를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과 확연히 구분되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너무나 친근하게 다가오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6절)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손이 닫지 않는 저 멀리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거룩한 분이시지만, 그분은 우리 아버지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써 우리와 아주 멀리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 처음부터 쭉 같이 와 계시고 함께해주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해주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주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 사랑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 걸인은 왕"
박미라 도미틸라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하려고 복음을 보니 지난 연중 제14주일과 같은 말씀이라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까 망설이다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오경웅박사가 쓴 '내심낙원' 에 있는 "그 걸인은 왕"이라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옮겨왔습니다.
"그 걸인은 왕"
그 이야기대로 말하면 14세기에 위대한 신학자 하나가 있었는데, 진리의 길을 보여 줄 사람에게 갈 방향을 점지해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18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평시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고 나서 그는 하늘로 부터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성당의 현관으로 나가면, 거기서 너는 진리의 길을 가르칠 사람을 만나리라."
그리고 나가자 그는 초라한 걸인을 발견했다.
그 정강이는 고름, 때, 흙 두성이었고, 등만을 덮은 옷은 서푼짜리도 못되었다.
그는 걸인에게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을!"
그 인사를 그 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궂은 아침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데."
그 박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잘 되게 하시옵소서." 라고 말했다.
그 걸인은 "그게 무슨 뜻이오?" 라고 물으면서 "나는 잘 된 것 밖에 달리는 되어 본 일이 없는데..." 라고 말했다.
신학자가 "온 행복을 바랍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초라한 사나이는 "천만에, 나는 불행 하지 않았소." 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말 뜻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설명을 해주시오!" 라고 신학자가 묻자, "그 설명이야 기꺼이 하오리다." 라고 거지는 대답했다.
"궂은 아침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은 이러한 뜻이오. 배가 고프면,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추워서 떨리면 신을 찬양하지요. 우박이 때리고 눈이 날리거나, 비가 내리거나, 날씨가 풀리거나 험하거나,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내가 불쌍하게 되어, 온 세상의 멸시를 받아도, 그래도 역시 나는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궂은 아침을 가져 본 일이 없소. 내가 아까 잘 된 것 밖에 달리는 되어 본 일이 없다고 말한 뜻은 이런 소신과 함께 살기를 배운 이래, 당신께서 하시는 일체는 반드시 최선을 위한 것임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오. 그래서 당신의 의향으로나 당신의 허락으로, 내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것이 즐겁거나, 따분하거나, 달거나 쓰거나, 최선을 위해 당신의 인자하신 손에서 오는 것으로 알고, 나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받소. 그러니까 나는 잘되는 것 밖에 달리는 되어 본 일이 없소. 또 내가 불행해 본 일이 없다고 말한 뜻은 이렇소.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만 매달리기로 결심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언제라도 원할 만큼 자의를 영영 포기했소. 그래서 나는 불행해 본 일이 없소."
그 때 박사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누구신지 또 어떠한 어른이신지요?" 라고 신학자가 물으니, 그는, "나는 왕이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 왕국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신학자가 물으니, "내 왕궁은 내 혼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이렇소. 내 혼의 모든 애정과 능력이 절대적으로 굴복할 정도로 나는 나의 관능을 안팎으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왕국은 의심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왕국보다 더 훌륭한 것이오."
그 때, 신학자는 어떻게 이러한 완덕에 이르렀느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침묵으로, 명상으로,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과의 하나가 되려는 지향으로… 하느님 이하의 것으로는 무엇에든지 나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나는 평화와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소."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 축에 낀 위대한 신학자가 깨달을 수 없었던 "진리의 길" 을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보아도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사람인 그 걸인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제가 이 세상 것을 공부하는 길로 나섰다면 아마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 신학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하다고, 지혜롭다고, 슬기롭다고, 칭송을 받는 위치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어릴 때 머리가 아주 좋다는 사람의 두 배 이상의 IQ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그분 말씀에만 관심이 있어서 저 걸인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일에만 온 힘을 다 쏟아 발가벗겨져 어린아이와 같이 된 후에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 것에서 온전히 죽은 후에 - 한 알의 밀알이 썩어 겉껍질과 속알갱이를 다 없앤 후에 -마치도 밀알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자라 열매 맺고, 추수되어 부수어지고 반죽되어 부풀어 올라 불 속에 들어가 빵으로 구워지는 것처럼 된(평화를 이루는 사람) 후에야 아버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길(진리의 길 = 참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알게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처럼 매일 매일 저 자신의 목숨(살과 피)을 내어 놓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누이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르 4, 9. 루카 8, 8. 루카 14, 35. 마태 13, 9) 고 말씀하셨지요.
저도 이제부터 마음 편히 하려고요.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 것이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보잘것없는 종인 저"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40일이 되어서야 전전긍긍하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복음 말씀을 따라 오면서 그분의 손길이 얼마나 따사로운지도 느낄 수 있었고, 애타는 그분의 마음과는 달리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떤 것인지도 실감할 수 있었고요...
14년이란 공백을 깨고 뜬금없다면 그럴 수도 있게 이 일을 시작한 저의 글을 읽어 오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아침인사를 올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한 하루 되세요~~^^*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최원석
서울 사람인데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충청도가 고향이세요 예전에 직장을 잡기위하여서 서울로 올라오신것이지요 무엇이던지 서울만 가면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신것이지요 그래서 저도 서울 사람이 된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님의 서울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셨어요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면 가정이 평탄히 움직이지는 않았지요 항상 돈 문제로 큰 소리가 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금지된 선까지는 않가셨어요 ..이유는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뼈속까지 안고 가신분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아버님 어머님만 서울로 올라오신것은 아닌것 같아요 예전에는 지방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다들 서울로 올라와서 살았지요 .. 모두들 서울 올라오면 돈을 벌수 있다는 희망하나는 가지고 올라왔지요.. 서울 하면 연상되는 것이 먹고 살것이 있는 곳이 서울이어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하면 돈 벌수 있는곳..이런 대표성이 있는 단어들이 있어요 .. 아버님 세대에서는 서울이 하나의 희망이요 꿈과 같은 세상이었던 것 같아요 .. 다들 먹고 살기 힘이드니 서울 가서 보란듯이 좋은 직장 잡고 좋은 터에 집 장만하고 삼시 세끼 굼지 않고 사는 것이 그분들이 꿈꾸는 세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이 돈이연상되기도 하였지만 희망을 연상할수 있는 곳으로 바라본 것이지요 .. 사람은 누구나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지요..저는 어려서 공부를 너무 못해서 공부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박사가 된다고 하여서 그것을 받으면 특별한 무엇을 보상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노력하게 만들고 그리고 여려움이 와도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 있기에 참고 견디고 그곳을 향해서 가는 것 같습니다. 40넘어서 박사 공부한다고 하면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십자가가 주어졌지만 그러나 희망이 있기에 참고 견디고 있지요 ..아버님 세대에는 서울이 희망의 터전이었고 저는 공부가 저의 희망의 터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이 희망에 대하어서 말씀하십니다. 구원 .. 구원은 주님을 통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것이지요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우리가 바라볼분이 있지요 그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서는 순수한 마음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그것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을 가진이에게 당신의 것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주님과 내가 하나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순수 예복을 입고 주님의 손을 잡고 하느님의 나라에 같이 들어가자고 희망을 보여주신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필요충분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 모든것의 중심은 주님.. 우선 순위에서도 무조건 주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간 성인 성녀들의 공동된 특징이 아마도 순수의 예복을 입고 주님 얼굴을 바라보면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찬 얼굴로 간 분들이 그분들의 세상이었어요 ..주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았지요 ..세상 살다보면 많은 어려움이 있지요 ..그럴때 대부분은 주판알을 틔김니다..나에게 이로운가 ? 그러나 성인들은 나에게 이로운가? 이것보다는 주님 보시기에 어떤 것이 합당한가 ? 나를 찾기 보다는 주님을 찾는 삶..나를 비우고 당신을 모시는 삶.. 그것이었지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님을 따르는 삶이 철부지 같고 어리석어 보일것 입니다. 왜 ? 그들 대부분은 이기적인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 하지만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영원한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요.. 이기적인 것은 성을 쌓게하고 그래서 주님과 벽을 만듭니다. 하지만 나를 내어놓는 삶은 주님이 중심이기에 항상 주님 얼굴을 뵐수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천국 체험을 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죽어서도 천상으로 연결된 삶이지요 .. 보편성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 보편성을 사람에게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 오늘도 순수한 옷을 입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ㅎㅎ
아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철부지의
생명입니다.
철부지의
믿음입니다.
철부지의
행복입니다.
우리모두
철부지에서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입니다.
오만한
바리사이가 아니라
작은 것에 기뻐하는
겸손한 철부지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맨 끝자리에
계십니다.
누군가를 향한
판단을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맑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차별 없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마르고 각박할수록
철부지의 뜨거운
눈물이 그립습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은
따뜻한 철부지의
가슴입니다.
편견을 내려놓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조금씩 배우게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기도하는
철부지의
행복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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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강화에 있습니다. 사실 지난 월요일부터 백령도에 가기로 했는데 태풍의 영향으로 백령도로 들어가는 배가 결항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강화입니다. 그리고 삼 일 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자전거를 타다가 문득 성인이 되어서 자전거를 처음 탈 때가 생각납니다. 자전거 샵에서 클릿(Cleat) 페달을 이용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페달은 미끄럼 방지 클릿이 붙은 전용 신발을 신고 신발을 페달에 고정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힘 전달 과정에서 손실 없이 효과적으로 페달을 밟고,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자전거 탈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했는데, 자전거 신발이 페달에 고정되어 있다 보니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더군요. 교통신호를 보고서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문제는 페달에 고정된 신발이 빠지지 않아서 제 의도에 상관없이 그대로 옆으로 ‘쿵’ 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몇 차례 있고 나서 자전거 샵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처음에는 원래 그렇다고, 넘어지는 법을 배워야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것을 배울 때, 넘어지는 것이 제일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갓난아기가 걸음을 걸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걸음마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무엇일까요?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2,000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걸을 수 있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잘 넘어지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시작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즉, 실패나 절망의 순간을 두려워하면서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원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는다면, 좋을 일을 통한 기쁨 역시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 감사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만나서 하느님의 일을 이제 막 시작한 제자들입니다. 정말로 부족함 그 자체였지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처럼 많이 배운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가난한 어부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성격도 그리 좋았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부족한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일을 잘 했을까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넘어졌고 그래서 커다란 절망 속에 빠질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넘어짐의 시간들을 통해 더욱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하느님의 선하신 일이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각자를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많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통해 우리를 넘어지게 하시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더욱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도 절망하거나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이 힘든 시간이 나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최선만 있는 건 아니야.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이 있고, 차선이 안 되면 차차선도 있는 법이거든. 그래서 끝까지 가 봐야 하는 게 인생이야(김혜남).
엄마와 아들
왕비 병이 심각한 엄마가 음식을 차려놓고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가 묻습니다.
“아들아! 엄마는 얼굴도 예쁜데 요리도 잘해 그렇지? 그러면 이런 엄마를 사자성어로 말하면 무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마는 ‘금상첨화’라는 사자성어를 기대했지요, 하지만 아들의 대답은 ‘자화자찬’이라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른 대답을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과대망상?’하고 아들이 묻습니다. 엄마는 친절하게 힌트를 주겠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4글자이고, ‘금’으로 시작하는 사자성어야.”
이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들은 대답합니다.
“금시초문”
엄마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닌 엉뚱한 말만 계속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가득한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들은 나만을 생각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그 기대에 어긋난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사랑으로 밀어주려는 사람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똑똑한 사람이다. 물방울 소리 들리는 사람이라고 한 적도 있어요. 어때서 똑똑하다는 건지 애매하기만 한데 아마 백과사전 같은 분이라는? 학점위주 일등 우세 잘남 돈 잘 버는 실력가 뭐 다 그런 걸 말할 겁니다.
부모는 자녀가 똑똑하길 기대해 뼈를 깎아서라도 뒤를 밀며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시며 까지 하늘사랑으로 밀어주려는 사람은, 마음 비워 넓고 소박하고 어린 마음 지닌 큰 사람들일 거라고 믿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11,25)”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불경에서도 수미산은 겨자씨 안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겨자씨 이야기를 하십니다. 책을 이만권이나 읽어서 별명이 이만권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미산이 겨자씨 안에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스님께 찾아갔다고 합니다. ‘해와 달이 머무는 수미산이 어찌 저렇게 작은 겨자씨 안에 있습니까?’ 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은 별명이 이만권인데 어찌 작은 당신의 머리 안에 책이 이만권이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만권인 사람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겨자씨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발전해서 겨자씨 보다 작은 공간에 전 세계의 모든 책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제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은 머리로 해결하려고 하니 신앙의 신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믿음으로, 사랑으로 바라보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모든 분자와 원자들은 우주와 지구의 시작 이후 소멸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형태가 변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제 오늘 모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세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에 한명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태어났고, 이집트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피해 다녔고, 광야에서 40년간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면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맞섰으며, 10가지 재앙을 보여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에서 40년간 살았으며, 하느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은 지금도 모든 신앙인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보다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결단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다면 이에 따른 고난을 사랑하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인간 조건을 탓하기에는 모세는 너무나 좋은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믿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몸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하루에 5번씩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가 신앙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런 믿음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두 번째는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믿음의 응답을 잘 합니다. 재물의 봉헌은 축복으로 되돌아온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으로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온 마음으로 응답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만남'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진정 살아있는 만남의 결핍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등 무수한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의 삶인데, 이런 풍요로운 만남이 사라져 가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시대, 갈수록 편리해 지는 통신 매체로 인해 살아있는 만남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가치들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서로간의 대화는 물론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도 날로 빈약해져 갑니다. 말그대로 풍요속의 빈곤한 내적 삶입니다. 통신매체의 분별있는 사용이, 절제가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참으로 활발한 '소통의 시대'같은 데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정말 '불(不)의 시대', 즉 불통, 불신, 불평, 불만, 불화의 시대같습니다. 소통의 욕구는 만남의 욕구요 우리 모두의 근원적 욕구입니다. 정말 만남의 신비, 만남의 선물, 만남의 은총입니다. 살아오면서 길이 남아있는 좋은 만남의 추억은 얼마나 되는지요?
모든 문제는 살아있는 좋은 만남의 부재, 체험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 만남은 많은데 피상적 만남이요 진정한 만남은 절대 부족합니다. 좋고도 아름다운 살아있는 만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만남의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좋은 만남의 추억은 내적부요의 샘이요 내적변화의 지름길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기위해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주님과 만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끝없는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도 주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은 참 나의 만남으로 직결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치유와 위로, 기쁨과 평화, 참 나의 발견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도 '주님과 만남'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님의 천사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 삶의 자리 역시 깨어 살면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나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거룩한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고 주님께서 부르시자 모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수련기를 마쳐가면서 때가 되자 모세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만남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만남을 갈구한다 해도 때가 되어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간절한 만남의 욕구를 전제로 합니다. 모세 역시 미디안 땅 광야에서 양떼를 치는 고독한 삶을 통해 주님을 찾는 마음 참 간절했을 것입니다. 주님과 모세의 만남이 참 좋은 묵상자료입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결코 감상적 하느님 체험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명을 부여 받은 모세는 하느님께 아룁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발견한, 참 나를 발견한 겸손한 모세입니다. 진정 주님을 만났는가의 분별의 잣대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입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는 이 말씀 하나뿐입니다.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이런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만남은 없습니다. 만남을 통한 추억이요 변화입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믿어오면서도 변화하지 않았다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면 변화합니다.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살아계신 주님과 만남의 결정적 체험이 모세를 평생 살게 한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만일 모세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세는 평생 장인 이트로의 양떼만 치다 인생 마쳤을 것이며,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참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하늘 아버지의 만남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아버지를 안전에 두고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바치는 예수님이십니다. 공관복음에 유일하게 나오는 예수님의 찬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이런 아버지와의 만남이 예수님에게도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 철부지 같은 우리들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운명을 바꿉니다. 이런 만남들은 좋은 추억이 되고 우리를 내적으로 치유하고 변화시겨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주님과의 비상한 만남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의 주님과 평범한 만남도 무수합니다. 영혼이 깨어 있을 때 좋은 이웃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우리는 진선미眞善美 사랑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얼마전 써놓은 '모두가 하느님 체험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모두가/하느님 체험이자 기도이다
보는 것도/듣는 것도
입는 것도/먹는 것도/말하는 것도
냄새맡는 것도/감촉하는 것도
모두가/하느님 체험이다.
하여/삶은 끊임없는 기도가 된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요, 우리의 모든 체험은 궁극엔 하느님 체험이되고 하여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가 됩니다. 이런 모든 하느님 체험에는 주님의 직접적 체험이 바탕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미사와 성무일도 전례의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바로 하루의 시작에 앞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살아계신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복된 새날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만이 살 길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잔머리 굴리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자녀를 뒷돈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병역의무를 빠져 나가고, 배신자로 낙인찍어 심판을 하며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립니다. 최근 대우조선의 공적자금문제가 시끄럽습니다. 국가의 세금을 잔뜩 쏟아 부었지만 그를 악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으면 무엇 합니까? 남에게 도움이 되질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지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탈출 3,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제는 기도와 축복을 하기 전에 항상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때론 자신없고 두렵기도 하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가진다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보나벤투라 성인의 이름은 "좋은 일이(Bona) 있을지어다(ventura)"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때론 걸꺼러운 사람도 만날 겁니다.
비교적 쉬운 일도 있겠지만 도무지 자신이 안 서는 일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겁니다.
"걱정말고 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에게 하셨듯이 나에게도 그렇게 약속해 주시니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습니다.
생명의 기쁨은
삶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불필요한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모든 사랑은
사랑받고 있음에서
시작됩니다.
철부지를 통해
섣부른 판단을
멈추게 됩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와
은총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의 철부지들입니다.
불안한 우리들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맺는
우리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철부지는
혼자가 아님을
잘 압니다.
더이상 복잡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철부지의
단순한 믿음이
하느님 신비로
들어가게 됩니다.
순수한 사랑은
모든 것을 풀어가는
철부지들의 열쇠입니다.
우리의 참된 모습은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맺고있는
관계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이 신비로운
사랑의 철부지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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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부님께서 자신의 은퇴 미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꼭 지키려고 노력한 것 중 하나가 돈에서 멀어지려는 노력이었다.”
그 이유가 자신이 사제서품을 받을 때 은사 신부님께서 “자기 지갑에 정확히 돈이 얼마나 있는지 세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잊지 않고 지켜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제가 돈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집착을 하면 영적인 삶에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요. 매일 ‘돈, 돈, 돈’만을 외치는 사람은 기도 중에도 똑같이 ‘돈’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세상의 돈에 대한 관심이 주님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책에서 ‘조금만 덜 원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돈이 얼마나 많아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이 모으려는데 온 관심을 집중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하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큰 불편함이 없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까지 있다면 더욱 더 좋은 것이고요. 그 이상의 돈은 어쩌면 필요 없는 돈이 아닐까요?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필요 없는 돈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에 반해서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큰 불편함 없다면서 지금의 삶에 욕심 없이 만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철부지라는 말까지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과연 누가 더 행복할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철부지는 나이가 어려서 철부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철부지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것보다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보다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가득한 사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최우선에 두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세상은 “아직 철이 들지 않았나봐, 저렇게 세상을 몰라?”라는 말을 던지거든요. 그러나 어떠한 사람을 주님께서는 더욱 더 좋아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물질을 쫓는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철부지라고 말하는 그런 삶을 쫓고 있을까요?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철부지라는 말을 들어도 주님으로부터는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배우자나 자녀한테는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지녀야 한다. 기대는 나를 위한 것이고 희망은 상대를 위한 것이다(송봉모).
주님의 일에 있어서 더 이상 타협하지 맙시다.
언젠가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먹고 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주일미사를 지킬 수가 없네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아니 새벽부터 일하세요? 정 주일에 바쁘시면 토요일 저녁미사라도 참석하시죠? 또 주일 늦은 시간에 미사를 하는 곳도 있으니 그곳에 가셔도 되잖아요.” 그러자 “피곤해서 새벽과 저녁에 나갈 수가 없어요. 저도 좀 쉬워야지요.”라고 말씀하시네요.
많은 분들이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타협을 하시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일에서만 타협해야 할까요?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주일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타협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일에서는 끊임없이 타협하는 우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 충실하면서도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찾지 않으면서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뻔뻔함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과 이런 식으로 타협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주님께 충실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철부지’라는 말을 듣게 되겠지만, 주님으로부터는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정제천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11장의 앞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박해와 배척을 당할 뿐이다. 마침내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을 군중에게 소개한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는가!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수많은 기적을 목격하고도 예수님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노력에도 실패의 징후들은 여기저기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순박한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복음을 받아들였다. 크게 실패하고 작게 성공을 거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환희와 감사기도를 바치신 것은 이런 상황에서다. 이때의 예수님 마음을 묵상해 본다. 그분의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그분의 희망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에게 있다. 그런 예수님이 좌절과 실패의 순간에 하느님께 ‘나의 힘이요, 위로가 되어 달라.’고 기도드린다. 이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나의 기도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넘겨주셨으니 모든 권한이 그분께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이웃의 필요한 것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면 모두 들어주실 수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또한 모든 권한과 권위가 한 분 하느님에게서 유래하기 때문에 세상의 권한과 권위는 보편성과 일치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위정자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보편적인 공동선에 이바지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전쟁과 침략 없이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은 우리들의 꿈만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꿈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는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서 이 땅에 예수님의 통치를 이루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해 왔다. 경제와 정치권력을 가진 이들이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을 본받기를 빈다.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10,10)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하기를 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오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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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지혜에서 나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가 지혜롭다고 믿는 착각과 오만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역사 안에서 저질러졌고, 지금도 변함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살펴보자.
온갖 종류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내는 부조리라는 괴물. 그 어리석음은 상처가 만들어낸 열등감과 병든 우월감과 삶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에서 만들어진다.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아니,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똑똑한 각자는 타인들을 쉽게 모자라고 가치 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업신여김과 무시와 온갖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 시키는 우리의 어리석음.
누구나 자기 판단이 가능하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늘 신중해야 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면 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교만이라는 것은 정말 많이 알거나, 많이 가지고 있기에 만들어지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교만이란 제대로 알거나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기에 생기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정말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았던 진짜들,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했던 진짜 보물들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함께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과신해서는 안 된다.
내 머리 속의 세상이 모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자신 안의 모든 것이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언젠가 말했듯이 열등감과 우월감은 같은 몸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만약 우리 각자가 각자의 것만을 고집한다면 복음적 가치는 만져볼 수조차 없는 신기루가 되고 말 것이다.
겸손이란 피할 수 없는 약함을 내 것으로 인정할 때 허락되는 덕목이다.
겸손한 마음만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희망하게 될 것이다.
상처에 묶여 사는 이들이 너무 많다.
온갖 논리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저 상처 많은 영혼이고,
안타까운 영혼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려는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있는 동영상 중 하나는 어린 자매 둘이 말싸움하는 ‘찍지마라!’라는 제목의 아버지가 찍은 동영상입니다. 유치원생도 안 돼 보이는 동생이 자기보다 조금 더 큰 언니에게 “언니가 크니까 양보해라!”하며 손을 옆구리에 얹고 한 발을 앞으로 뺀 자세로 따집니다. 언니는 “뭘 양보하는데? 양보해서 뭐 하는데?”라며 응수합니다. 동생은 “아이들이 좋아하잖아.”라고 대답하니, 언니는 “나도 아이다.”라고 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소리를 지르며 다투다가 동생이 말이 막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아버지가 핸드폰으로 자신을 찍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야단치는 것처럼 이렇게 소리칩니다.
“찍지 마라. 뭘 찍고 있는데~”
웃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이렇게 싸우는 것, 혹은 아버지에게 저렇게 소리 지르는 것은 어디서 보고 배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모습, 혹은 엄마가 자신들을 혼내는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무엇이든 다 흡수합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부모의 말투, 습관 하나까지 다 닮아갑니다. 아이는 이렇게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부모를 귀찮아합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벗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배웁니다. 어른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은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음의 여유와 유연성을 지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기까지 완전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 무한성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더 이상 믿음을 증가시킬 노력을 하지 않을 때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일본어 강습반의 새 학기 등록이 막 시작될 무렵 한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아드님을 대신하여 등록하러 오셨습니까?”
등록을 받는 직원이 상냥하게 물었습니다.
“아니, 내가 일본어를 좀 배우려고 하는데요.”
직원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노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글쎄, 며느리가 일본 사람인데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답답해서요. 일본어를 배워서 간단한 대화라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예순 여덟이외다.”
“어르신이 일본어로 대화를 하시려면 최소한 2년은 배워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칠순이 되실 텐데요.”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반문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사이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내 나인 계속 예순 여덟인가요?”
[아침을 열어주는 101가지 성공이야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철부지와 같은 어린이들에게 진리를 보여주시고 스스로 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감추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는 당신이 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임을 밝히십니다. 즉 예수님도 어린이처럼 아버지께 배우신다는 뜻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도 진리를 배우기 위한 자세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이정도면 됐다라고 하며 배움을 멈춰서야 하겠습니까? 자라지 않는 나무는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이와시다라고 하는 저와 같은 또래 신부님과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이태리어도 힘들어 고생을 하고 있을 때 그 신부님은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한국어 교본을 사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저희 한국 사람들과 한국말로 대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말을 잘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자세만으로 우리 한국 신부들에게 매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에 대해 배우려고 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매우 사랑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노력합시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항상 어린이로 머물도록 합시다. 나이가 들면서 아는 것까지도 잊어버릴 지라도 그런 자세 하나만으로 사랑받는 자녀인 것입니다.
행복한 철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철부지’라는 단어에서 ‘철’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 곧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런 ‘철’자에 한자말인 부지(不知)가 붙으니, 결국 ‘철부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가운데만 철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철부지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입니다. 큰 사고가 생겨 다들 심각한 상태인데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깔깔대고 있다면 그는 철부지입니다. 연세가 만만치 않게 드셨는데 10대들이나 즐기는 어울리지 않는 패션을 하고 다닌다면 그는 철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이런 철부지와는 약간 다른 의미의 철부지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인간은 나이 먹어가면서 대체로 자기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안경, 고정관념의 안경, 자기 잣대의 안경, 고집의 안경, 나만의 틀의 안경, 자기중심주의 안경...
특별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통의 안경, 선민의식의 안경, 율법주의의 안경을 즐겨 썼는데, 그 결과 자신들의 코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박학다식하다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기념비를 남기는 것, 그래서 후학들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겸손의 덕을 쌓는 일입니다. 겸손의 덕이 배제된 지혜나 학문은 은총에로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겸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미약함, 태생적 결핍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신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로 끝나고 맙니다.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할지라도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크신 하느님 자비 안에 늘 자신의 전 존재를 기쁘게 내어맡기는 철부지들을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히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부족한
철부지들에게 풍성히
드러났습니다.
마냥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철부지들에겐 경계는 없습니다.
서로를 비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업신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라 가려고만 하는
똑똑한 이들과
좀체 내려올 줄 모르는
힘 있는 이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행복한 철부지들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분별하지 않는
철부지들에게 오히려
하늘나라가 열려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쉽게 용서할 수 없지만
철부지들에게 어리석음은 오히려
주님께 가는 뜨거운 감사가 됩니다.
목적지만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합니다.
철부지들에게는
사랑해야 할 것들로
넘쳐납니다.
속이고 속이는
흥분된 세상속에서
철부지들의 참된 기쁨을
새롭게 배우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오히려 어리석은 십자가에서
선하신 뜻이 드러났습니다.
서로 다른 인격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철부지의 어리석음을
따르겠습니다.
가장 큰 지혜와
가장 큰 어리석음은
철부지처럼 닮아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무 많은 생각때문에 과분수가 되어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보이면서 바보가 아닌 척 하느라 우리는 너무 힘이 듭니다.
조금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철부지처럼 오직 한분 하느님만을 붙들고 산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철부지들만이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철부지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없는 철부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철부지의 단순한 믿음안에 이미 하느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철부지의 진심어린 마음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철부지들을 기쁘게 살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서로의 맑은 마음이 이미 신비입니다.
이렇듯 철부지들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도 철부지같이 하루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철부지같이 영혼의 춤을 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위태롭고 위험한 순간에도 하느님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듯 언제나 우리는 하느님 자비안에 있는 철부지들입니다.
욕심없이 마냥 즐거운 철부지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사랑에 목마른 철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처음보듯 신기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오늘입니다.
철부지처럼 즐겨야 합니다.
걱정하는 삶이 아니라 철부지처럼 사랑스럽고 예쁜 하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기에 행복한
철부지의 믿음을 닮는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철부지가 향할 곳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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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국장으로 있다 보니 많은 신학생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신학생들은 나름대로의 성소를 가지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면서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지요.
덕적도에서 있었던 지난 신학생 하계 수련회 때였습니다. 2박 3일간의 수련회 동안 신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여러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덕적도 성당을 수리하고 주변 정리를 함께 하는데, 어떤 신학생은 어떻게든 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또 어떤 신학생은 그것을 우리 같은 아마추어가 할 수 있느냐며 포기하려고 하더군요. 사실 후자의 신학생은 굉장히 합리적으로 말합니다. 자신들이 하면 할수록 더 일을 망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 마음에 드는 신학생은 합리적인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면서 포기하는 신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힘들어 보이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 보는 신학생이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물론 처음 하는 것이라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보기에 좋았고, 이런 신학생이라면 어떤 일이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되었지요.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지 않으실까요? 사실 우리들 모두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면서 아예 포기해 나간다면, 나중에는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쉽게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그 뜻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시지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합리적인 이유를 말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고 철부지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나갑니다. 과연 어떤 사람을 더 좋아하실까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각종 핑계를 대며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는 어리석고 철부지처럼 보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는 우리가 될 때,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실 것입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 그리고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마라. 다만 무엇인가를 시작하라(빌 파셀스).
무엇이 다를까요?
율사가 대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불도를 닦으실 때 특별한 비법이 있습니까?”
“있지.”
“어떤 비법입니까?”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이네.”
율사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거늘, 그렇다면 모든 사람 또한 대사처럼 특별한 방법을 행하는 것입니까?”
“다르네.”
“무엇이 다릅니까?”
“밥을 먹을 때 기뻐하지 않고 다른 백 가지를 원하며, 잠잘 때 기뻐하지 않고 오만 가지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있지. 그것이 나와 다르네.”
어떻게 생각하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이 세상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그 삶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기왕 이 세상을 사는 것이라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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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할아버지가 TV 건강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심각해집니다. 그때 할머니가 들어와서 물었지요.
“아니, 왜 그렇게 심각해졌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응 아무래도 내가 저 병에 걸린 것 같아. 가끔씩 몸이 아프고 쉽게 피곤하고, 또 요즘에는 밥맛도 없잖아. 저 병의 증세와 똑같아.”
할머니도 생각해보니 정말로 할아버지의 증세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하면서 할아버지와 함께 끝까지 프로그램을 보는데, 마지막에 아나운서가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자궁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남자가 자궁암에 걸릴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자궁암에 걸릴 리가 만무하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증세와 똑같다면서 걱정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으로 힘들게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본 감동적인 글이 생각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불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걱정하는 대신에 지금 당장 행동으로 실천하는 편이 훨씬 큰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걱정하는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그 모범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사실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걱정을 참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뽑았는데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영 시원찮았거든요.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태평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순간에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바치시지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하다보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역시 실천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래야 걱정에서 벗어나 ‘내일’이라는 큰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망으로도 충분하다(스탕달).
잃어버린 활(‘좋은생각’ 중에서)
‘여씨춘추’에 나오는 이야기다. 초나라에 좋은 활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그가 활을 찾지 않자 어떤 사람이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
“자네가 잃어버린 활은 천하의 명품인데 왜 찾지 않는가?”
그러자 활을 잃어버린 사람이 대답했다.
“초나라 사람이 잃어버리고 초나라 사람이 주우면 됐지 무엇 때문에 이를 다시 찾는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공자가 말했다.
“그의 말 중에서 ‘초나라’라는 말만 빼면 훌륭하구나! 즉 사람이 잃어버리고 사람이 주우면 됐지 무엇 때문에 이를 다시 찾는가?”
후에 공자의 말을 들은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말 중에서 ‘사람’이라는 말만 빼면 훌륭하구나! 즉 잃어버리고 주우면 됐지 무엇 때문에 이를 다시 찾는가?”
때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역설의 신비를 살아가는 사람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하면 가고 오라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 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처럼,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늘 세상 사람들과 반대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세파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자랑했습니다. 평생 감추어두고 싶었던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 부끄러운 과거사(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했던)를 세상 사람들 앞에 솔직히 밝혔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부끄러운 과거를 지닌 사람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힘입지 않고서는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철부지임을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오로 사도는 정말 바보 같습니다. 정말 철부지도 그런 철부지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감출까 기를 쓰는데, 스스럼없이 치명적인 자신의 약점을 먼저 밝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썼지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꺼풀들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벗겨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완전한 알몸이 되었습니다. 철부지 중의 왕철부지로 주님 앞에 선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킨 그,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이중성과 위선을 남김없이 벗겨낸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100% 드러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두 눈으로 하느님의 실체를 명확하게 대면하는 인간으로서는 가장 큰 은총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참된 회개를 한 것입니다. 완전한 회개를 통해 드디어 지복직관,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된 바오로 사도의 삶은 180도 돌아서게 됩니다.
더 이상 그의 삶 안에서 불평불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은총이요, 감사였습니다.
극도의 고통과 박해 가운데서 그의 인생은 힘겨운 하루 하루였지만 그의 입에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배은망덕에서 완전히 돌아선 그는 매일 감지덕지하며, ‘백골난망이로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오이다’를 외치며 참 회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영춘 신부님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에 ‘다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그분이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신 뜻이 무엇일까 곰곰이 묵상해 봅니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는 어찌 그리도 물에 뜨기가 어려운지 모릅니다. 물에 뜨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가라앉습니다.
수영강사는 몸에 힘을 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힘을 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물에 뜨는 자신을 발견하고 벅찬 희열을 느낍니다. 바로 그때, 강사가 하는 말. “다 되었군요.” 몸에 힘을 다 뺀 그 순간 다 이루게 된다는 사실.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목숨마저 내맡긴, 그래서 죽음의 순간이 임박한 그때가 바로 다 이룬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 말씀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나를 온전히 비우고 맡기고 죽인 그 순간 이루어집니다. 내가 내 힘으로 뭔가를 해 보려 하고 할 수 있다고 자신할 때는 다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철부지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 고백하십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온 세상 모든 것의 주관자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주관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비워진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정도 (正道) 이겠습니다. 그 의미를 제대로 깊게 알아들은 후에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영적 선익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진리가 왜 철부지들에게 가 닿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에겐 왜 그 진리가 가 닿지 않는지,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도 함께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 점에 대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 또한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그러시는지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라고 하니 묶어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아버지를 알고 아들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깊게 알아듣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안다’ 는 것은 무슨 뜻인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안다는 말과는 어떻게 다른지, 우리의 신앙여정과 관련지어 새겨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묵상자료를 제시하면서 해답 비슷한 것은 전혀 드리지 않습니다. 제가 해답이라고 전해 드리는 것이 오히려 여러분의 기도를 망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직접 땀 흘리며 길어 올린 것이 아니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기도하는 법을 안내하고 기도를 이끌어줄 뿐, 영적 독서자료를 나눠드리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아는 것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지혜롭다는 자는 지혜로운 자와 다릅니다.
지혜롭다는 자는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슬기롭다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지혜롭다고 하고 슬기롭다고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다분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많이 알기에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당시의 보통 사람들을 깔보았습니다(요한 7,49참조).
그런데 안다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알뿐 다른 것은 모릅니다.
율법만을 알 뿐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율법만을 알 뿐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왜 잘 모릅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이들이 잘 모르는 이유가 아버지께서 감추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그들이 아는 것 때문에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인정치 않고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 이외의 것을 인정치 않습니다.
아는 것 때문에 모르는 것이 있음을 인정치 않고 아는 것 때문에 아는 것 너머의 초월과 신비를 인정치 않습니다.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높고, 깊고, 넓은지를 그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알게 되겠지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비빌 언덕도, 배경도 없던 철부지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경에 의인(義人)이란 말이 가끔씩 등장합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 저항의 선봉에 선 투쟁가 등, 강성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한자 옳을 의(義)를 분석해볼까요? 양(羊)자와 아(我)가 결합되어 있네요. 그러고 보니 의인이란 ‘내 안에 양(羊)있는 사람’입니다. 양이란 동물은 고분고분, 순종, 순수, 순결함, 순박함의 대명사입니다.
결국 의인이란 진리 앞에 자신을 활짝 개방시킬 여유가 있는 열린 사람, 예수님이란 새로운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관대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다시 말해서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철부지들을 말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신랄한 독설을 인정사정없이 퍼부으셨던 도시 코라진과 베사이다, 그 도시들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율법학교, 회당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시들은 당시 잘 나가던 율법학자들의 집결지였습니다. 가방끈 긴 사람들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지니고 있던 지식은 산 지식에 아니라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지도자요 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미래를 향한 열린 마음과 겸손함이 결여된 그들이었기에, 교만과 아집으로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초대를 결정적으로 거절하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너무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한평생 목숨 걸고 하느님을 연구했지만, 따뜻하고 열린 가슴이 없었기에, 교만과 불손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하느님만 찾아 헤맸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들의 공부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묘하게도 당대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철부지들 앞에 더욱 자신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가난한 철부지들, 이 세상 그 어디 가도 믿을 구석 한 군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빌 언덕도, 밀어줄 배경조차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다 자연스럽게, 보다 쉽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다보니, 워낙 삶이 절박하다보니, 하느님의 도우심이,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간절했던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로 다가오십니다.
시련의 크기가 큰 만큼 오래지 않아 다가올 그분 사랑도 클 것입니다. 고통의 깊이가 깊은 만큼 하느님 은총과 축복도 커져만 갈 것입니다.
가난한 철부지인 우리들이 조금만 더 노력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눈이 조금만 더 맑게 트인다면, 우리 영혼이 조금만 더 순수성을 회복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크신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고통 그 한가운데 현존하심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지루함의 연속이 아니라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천국의 한 조각임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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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정말로 바쁜 하루였습니다. 요즘 치과 치료를 받고 있어서 병원에도 다녀왔고, 또 KBS 방송 녹음을 하러 가는 날이라 방송국도 다녀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강의 준비로 인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써야만 했지요. 마지막으로 본당의 저녁미사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 좀 여유가 생겼다 싶었습니다.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켠 뒤 여유 있게 E-Mail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전화가 울립니다.
“여보세요. 조명연 신부입니다.”
“형, 거기 계시면 어떻게 해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제 후배 신부인데, 글쎄 제가 오늘 후배 신부의 본당에서 특강을 하기로 했는데 왜 오지 않았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제 스케줄 표에는 7월 15일 20시-21시30분 **성당 신앙특강으로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7월 14일이랍니다.
제가 날짜를 잘못 적은 것이지요. 후배신부가 며칠 전에 제게 전화를 걸어 직접 확인까지 했었는데, 시간만 확인했지 날짜는 확인을 확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저의 큰 실수니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내일로 알고 있는 저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그 본당의 신자들과 후배 신부에게 정말로 미안했었습니다.
다시금 저의 부족함을 느꼈던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왜 나는 이렇게 덜렁댈까? 나는 왜 이렇게 칠칠맞을까? 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했지요. 그런데 그 순간, 오히려 이것 역시 주님의 또 다른 배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 사랑니를 뽑아서 발음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을 하는데도 조금 불편함을 느끼고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어제 KBS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도 얼마나 NG를 많이 냈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교우들에게 좋은 강의를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조금만 바꿔 생각하니, 여기에도 주님의 사랑은 분명히 계신 것 같습니다. 저의 부족함까지도 선으로 만드시는 분,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당시의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평을 받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바로 부족하고 나약한 철부지 같은 당신 제자들에게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남에 대한 감사의 기도인 것이지요.
이렇게 부족함도 감사드릴 수 있도록 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남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넓은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서 더욱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새뮤얼 존슨)
아름다운 기도문에서.......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수많은 일들로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멀어졌던 발길을 한걸음씩 더 다가가게 하소서.
막연한 이해를 바라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의 소외가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절망이 보이니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삶의 세세한 생활들을 주고받으므로 서로가 믿고 신뢰하며 살아감의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친구 예수님
이훈 신부님
사전을 찾아보면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한 사전에서 선생의 뜻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내가 이해한 대로 사람을 가르치려 하고, 누군가로부터 인도자나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은 마음뿐 아니라 몸으로까지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이 그들의 한 일과 가르쳤던 것을 보고하는 것은 스승으로 불리거나, 선생으로 대접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와 사랑을 실천했음을 보고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지혜롭다거나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달리 말해 선생이나 스승으로 불리는 사람들보다는 철부지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벗으로 다가오십니다. 어린아이들의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은 ‘친구 예수님’이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어린이들의 마음만큼 작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친구이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찬미 놀이
임원지 수녀님
예수님께서 “아버지”, 그리고 즉시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고 부르신다. 이는 하느님이 세상 창조주라는 말씀이다. 모든 예술은 창작의 즐거움이요, 창조주와 나누어 가지는 기쁨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고, 아기도 자기 똥을 가지고 논다고 한다. 자기 작품인 것이다. 어느 의미로 창조요 주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삯꾼이 아니고 착한 목자가 되는 이유도 여기 있겠다. 집나간 탕자를 아버지는 가여워하지만, 형은 같은 젖 먹고 자랐으면서도 제 아우를 거부했다. 아버지와 형의 차이인 것 같다. 하느님께 이 온 우주가 얼마나 끔찍하시겠나. 죄로 더럽히는 것은 인간뿐이어서 하느님의 육화는 일어났는지 모른다.
어버이날 “우리 부모님”이라는 주제의 글쓰기에 어느 어린이가 이렇게 썼다. “우리 부모님이 참 고맙다. 우리 부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나는 고아로 태어날 뻔했다.” 아버지를 모르는 유복자라면 생각만 해도 서럽다. 우리가 하느님, 지존하신 그분의 자녀임을 알려주신 예수님, 그분 아니었으면 아빠도 모르는 유복자녀들이었겠다. 아버지께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복음서 곳곳에 드러내시는 아드님 예수님한테서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배운다.
하늘과 땅의 주님께서 7월에도 많은 꽃들을 선물하셨다. 든든하게 여름을 지켜주는 무궁화·능소화·배롱나무와 자귀, 어느 거리엔 모감주도 꽃을 피웠으리라. 토끼풀·닭의장풀·며느리밑씻개 널려 피고, 짚신나물이 꽃대를 다듬으며, 대문 없는 집 주인의 뜰에는 나팔꽃·한련화·봉숭아·분꽃·백일홍·채송화가 잔잔하여 나비들이 나풀나풀 찾아오고, 붕어들이 노니는 못에 크고 작은 연꽃이 피는 이 때, 어린이 철부지들이 어울려서, 바삐 사는 어른들 몫까지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 찬미 놀이를 하고, 이를 보시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늘 하루, 중세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성 보나벤투라와 함께 아버지 하느님을 어디서나 뵙고 싶다.
사랑할 줄 알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책이나 영화에서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 대신 '당신을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더 알게 되고 더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말을 굳이 들을 필요가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셨다고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가장 완전하게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을 얼마만큼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을 이해하고 또 하느님을 이해하는 만큼 사랑할 줄 압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랑은 항상 유한하기에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황금 송아지입니다. 황금 송아지는 처음부터 우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도 규정될 수 없듯이 사랑도 규정될 수 없고 죽기까지 우리에겐 미스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히 진리를 이해할 수 없고 사랑을 깨달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죄로 인한 인간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완전하게 이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완전하게 아들을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들도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자신을 비우셨듯이 아버지를 완전하게 사랑하십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성령님 안에서 완전하게 사랑하여 한 몸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에게 당신의 성령님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만큼만 하느님을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들어내 보이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은 교만하여 그 안에 성령님이 들어 갈 자리가 없지만 어린이와 같이 깨끗한 사람은 자신을 성령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 즉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셔서 아버지를 계시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그 안에 있는 '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성경학자들도 읽고 쓸 줄도 몰랐던 시에나의 카타리나만큼 사랑이나 성경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은 성인들만큼 그 마음이 겸손하고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성이 바탕이 되지 않은 학문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제가 살던 기숙사 철문은 센서로 작동을 합니다. 문 양쪽 벽에 센서가 있어서 차량이 통과했는지 안 했는지를 감지합니다. 그러나 가끔 비가 온 다음 날은 잘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먼지가 센서에 붙어서 상대에서 보내는 빛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차에서 내려 손으로 센서에 묻은 먼지를 닦아냅니다. 그러면 다시 잘 작동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가로막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영혼을 의미합니다. 현대에 수많은 신학자들이 있지만 소화 데레사만큼 하느님과 사랑에 정통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만큼 깨끗하고 어린 영혼을 지닌 학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단순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 사랑에 정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행복하고 싶거든 어린이처럼 깨끗해집시다. 그러면 진리에 정통하고 또 그 진리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계시자,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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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이면 저는 인천교구의 몇몇 신부님들과 자전거를 탑니다. 물론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매우 유쾌한 시간이지요. 그런데 요즘 계속해서 일이 생겨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다가 어제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날씨까지도 도와주는지 해도 뜨지 않고 그렇게 덥지 않더군요. 그래서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손과 발을 가리는 긴 옷이 아닌 편안한 복장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하지만 12시쯤 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해가 뜨지 않아서 좋았는데, 12시를 넘어서 해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뜨거움이 상당한 것입니다. 저는 갈등을 했지요. 이대로 계속 탈 것인지, 아니면 폭염을 피해서 잠시 쉬면서 선크림을 바를 것인지……. 그러나 1시간 정도만 타면 오늘의 일정을 마치기 때문에, ‘1시간 정도야 뭐…….’라는 생각으로 그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계속 탔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제 몸을 화끈화끈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한 여름 바닷가로 놀러갔다가 새까맣게 탄 모습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1시간 정도야 뭐…….’라는 안일한 생각이 저와 다른 신부님들을 벌써 피서 다녀온 사람의 모습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제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왔던 것 같습니다. 얄팍한 저의 지식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저의 어리석음들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모습을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네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에 노력을 하지요. 바로 인간적인 지식을 하느님의 말씀보다 위에 놓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신과 자기의 이익 속에 갇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기득권만을 도모하지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신과 미움,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자기가 못나고 아직 철부지이기 때문에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했기에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이 자기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철부지일까요?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지혜롭고 슬기로운 척만 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러한 가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어린이 같은 철부지가 되면 어떨까요?
아는 척 하지 맙시다.
행복이 자리하는 곳(‘좋은 글’ 중에서)
현대는 물질 중심주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아픈 현실 속에서도 돈은 행복을 구하는데 최저의 가능성을 보장할 뿐이지 그것이 곧 행복과 맞바꾸어질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대리석의 방바닥이나 금을 박은 벽장식 속에서 행복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속에 행복이 자리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순수함이란 자그마한 일에도 크게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추운 날 애인으로부터 한아름의 제비꽃을 받고 감격할 줄 아는 마음이 순수함이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광고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이 한번 보내는 윙크로 깊은 안정감을 느끼는 아내의 마음이 순수함입니다.
또한 순수함이란 자존심이 사라진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푸른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노는 것을 사상 최대의 행복으로 느끼는 마음이 순수함이며 흙탕물에서 방죽 쌓기 놀이를 하다가 옷을 다 버리고도 기뻐하는 소박한 마음이 순수함입니다. 그래서 순수함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괴테가 지은 "앉은뱅이 꽃의 노래"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의 조그마한 앉은뱅이 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진무구한 시골처녀의 발에 밟혀 그만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 꽃은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녀석의 손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꽃조차도 순수함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순수해야 합니다. 조건을 따짐은 흥정의 조건은 될 수 있어도 사랑의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하루에 백 번이라도 말할 수 있지만 사랑하느냐고는 한번이라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조건을 따
한 마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복음을 묵상할 때,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보나벤뚜라를 묵상할 때 지혜에 관한 한 마디 정의는, 지혜는 지식 더하기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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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즐겨보는 신문이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이 신문을 봐 왔기 때문에, 간석4동에 와서도 곧바로 이 신문을 구독했습니다. 특히 신문 배달을 빨리 해주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저로써는 딱 맞는 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찍 배달되던 신문이 조금씩 배달시간이 늦어지더군요.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기다렸습니다. 5시에서 6시로, 6시에서 7시로, 그러더니 8시나 되어야 배달이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날에는 물이 고여 있는 곳에 신문을 집어 던져서(고의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전혀 보지 못한 경우도 몇 차례 되었지요. 아무튼 이러한 배송문제로 인해서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신문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전화했지요.
“***신문 간석지국이지요?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거든요.”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10시쯤, 신문을 가지러 성당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신문이 없었습니다. 기다렸다가 12시가 넘어서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역시 신문이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문 간석지국이지요? 아직까지도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것입니까?”
“1시쯤 갖다 드리려고요.”
“제가 조간신문을 보는 것이지, 석간신문을 보는 것입니까? 사실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불만이 많은 지 아십니까? 점점 늦게 배달되고, 가끔 물웅덩이에 신문이 빠져 있어서 볼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그러면 저 신문 보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는 뚝 끊어 버립니다. 너무나도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이 신문,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 신문 본사로 전화를 걸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직원이 제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많이 상하셨지요? 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셨겠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었어요. 참 이상한 것이 그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제 안에 있는 화가 하나씩 풀리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신문을 해지하겠다고 결심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주세요.’라는 말만하고서 전화를 끊었지요.
사실 말 한마디로 상처를 받고, 또 반대로 말 한마디로 상처가 치유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할 때가 참으로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용서를 청하는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자신의 자존심과 이것저것 재는 마음 때문에 더욱 더 어렵게 만들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대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우리 역시 이 세상의 관점으로 똑똑한 사람이 되어 이것저것 재려하고 나를 드러내려고만 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절대로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두가 어울려지는 사랑이 가득한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내 행동으로 그 뜻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먼저 용서를 청하세요.
소크라테스의 독배(홍성중 엮음, '행복을 나르는 배달부'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새로운 신을 섬기게 한다는 이유로 시민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재판이 벌어졌고 그는 결국 독배를 마시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조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지도자는 무언가를 말할 때 사람을 들끓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잠자코 있는 편이 낫다."
싸늘히 식어 있는 지도자는 그 성실성에 의심을 받으며, 따라는 이가 적습니다.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열중시킬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항상 불타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뼈에 불이 붙지 않고서는 타인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으로 타고 있는 사람은 비록 틀린 점이 있어도 계속해서 타인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단순함 안에 깃든 독특한 맛>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거리의 사회자’가 있습니다. 대단한 ‘말빨’로 인해 여기저기서 섭외가 쇄도한답니다. 그분이 강조하는 연설의 비법은 이렇습니다.
“듣는 사람을 존중하십시오. 그러면 쉬운 말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잘 들리는 말이 됩니다.”
한 글쓰기의 달인은 글 잘 쓰는 비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미사여구, 유식한 단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쉬운 단어로도 얼마든지 좋은 책을 쓸 수 있습니다. 독자가 쉽게 이해하도록 글을 쓰려면 세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적절한 예제, 딱 맞는 비유, 핵심을 꿰뚫는 인용.”
간결함, 작음, 소박함, 편안함...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표현들입니다. 간결함, 군더더기가 없음, 요즘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쌈빡함’ 그 안에 삶의 독특한 맛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선호하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삶이 행복해지려면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때로 철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찾아옵니다.
기쁨은 고통을 치유하는 힘입니다. 기쁨은 슬픔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은 가장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기쁜 얼굴은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표지입니다.
작고 단순한 삶의 대가(大家)가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그녀의 평생에 걸친 소원은 작고 소박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성화의 도구는 바로 기쁨과 미소입니다. 나는 내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도 미소 지으며 감사드립니다. 많은 일들이 나를 억압할 때,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내게 닥칠 때, 나는 조금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어려움에 미소로써 답합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아주 단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단순함 안에는 하느님께서 거하셨습니다. 당시의 이교도 설교가들은 해박한 지식, 철학적 고찰에 근거한 현란한 설교를 시도했지만,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늘 직설적이었고 단순했습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그가 비록 병들고, 늙고, 가난하더라도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 뽑는 법
남상근 신부님
예수님과 우리의 인선 조건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똑똑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족해도 겸손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유능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유능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을 빛내주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이 더디더라도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노라고 감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의 돌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감사하십니다.
무릇 비어 있어야 생명이 자라고, 빈틈없이 빽빽하면 숨쉴 수 없는데, 가득 차서 너무 똑똑하기만 한 나는 세상이 선호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철부지일까요?
아버지를 통하여
노성호 신부님
예수께서는 하느님아버지를 찾고 간절히 원했던 많은 사람에게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이 곧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자신들 앞에 계신 하느님을 두고도 저 멀리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했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마음을 열면 우리 앞에 계신 하느님을 마주 뵐 수 있을 텐데,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열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봤다. 이곳저곳 펼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찾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찾았던 아버지 얼굴은 없고 그 안에 내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와 똑같은 아버지의 중학교 때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긴 아버지가 나를 닮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옛 어른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나 보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계속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그 아들이 또다시 태어날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이렇게 아버지는 세상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예수께 전하신 모든 것이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쌓은 경험과 사회 통념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사고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사물 그대로, 본 그대로 마치 해면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야가 언제나 신선하지요.
주님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25)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배웠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부와 권세를 모두 가졌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사람, 자신의 주장을 선뜻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여 가장 바른 것을 압니다. 그리고 표현은 서투르지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압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 세상에 펼치실 때 겉으로는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무력해 보이지만 마음이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람들을 택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의 오만이 없고 담담히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무궁무진한 주님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나댄 일은 없었는지, 이 세상에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러 오신 주님을 내 세속적인 사고와 아집 안에 품고 주님을 모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를 낳고 그곳에서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어 살았다.'
경규봉 신부님
어느 날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주님의 천사가 가시덤불에서 불꽃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가 그곳에 가까이 가자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신 후, 그에게 가까이 오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와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어 당신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며 사는 식객이며, 일꾼으로 살았다. 당대 최고의 학문을 연마하고, 화려한 궁궐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하며, 이집트의 왕이 될 수도 있었던 그가 도망자가 되었고, 이드로의 식객이 되어 광야에서 양을 치는 천한 삶을 산 것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는 끝없는 추락이다. 더구나 그 기간이 약 40년이다(사도 7,30). 40년 동안 그가 겪은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젊음의 치기로 인하여 저지른 단 한 번의 살인이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으니, 후회와 통한의 감정이 얼마나 넘쳤겠는가!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삶도 망쳤다고 생각할 때 후회막급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조금만 참고 때를 기다려 왕이 되었더라면, 그래서 이스라엘을 강제노역에서 해방시켰더라면 그들을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을 터인데, 자신으로 인하여 그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잘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잠을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나서 자신의 가슴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자신 안에서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그러한 감정들을 삭히며 살아가는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궁궐에서의 호사스러움도 모두 잊었으며, 양을 치는 천한 목자로서 꿈도 야망도 모두 잊어버리고 그럭저럭 살았다. 비록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아내 시뽀라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 40년이란 기간은 그의 젊음이 모두 소진되기에 충분한 기간이며, 인생을 깨닫고 통달할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이므로 그는 늙고 힘도 떨어졌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는 인간의 꾀와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나이였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꾀하는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점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 속에 하느님의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40년이란 기간을 통해 모세로 하여금 하느님을 제외시킨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닫도록 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당신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40년 동안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훈련을 시키신 것이다. 마치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시기 전에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의 신분으로 집안일을 돌보게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그처럼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방법을 따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자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자신을 삭히며 살았지만, 그 안에는 동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고, 동족을 해방시키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는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시덤불에 붙은 불꽃을 보았고, 그곳 가까이 갔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계신 하느님, 자신의 힘이 되어주시는 하느님,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모세를 철저히 준비시키시어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서 살지 않도록 하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따르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도록 준비시키시는 하느님이시다.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긴 기간 동안 허송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 기간을 통해 당신 계획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준비시키시고, 때가 이르면 당신의 계획을 따르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인생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거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안달하지 말자. 모세가 40년의 기간을 허송생활 한 것처럼 느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기간이 필요하셨기에 그 기간을 주셨던 것임을 믿자. 자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배상희 신부님
말 안 듣는 아이들 야단치면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녀석이 벌써 머리 좀 굵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네"
일단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이 굳어지고 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좀처럼 고치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묻어있지 않은 흰색 종이에 무슨 색을 칠하든 원래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바탕색이 칠해져 있는 종이는 제 색깔을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좀 안다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뭔가 새로운 진리가 밝혀져도 자기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걸 놓기 아깝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다시 찾아 나간다는 게 싫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집니다.
내 머리 속에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
딱 정해 놓고 내 마음대로 하느님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런 하느님은 나 혼자 만의 하느님에 불과합니다.
진짜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은 흰색종이 같은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기 고집에 매여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터져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그려나갑니다.
내 머리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하느님을 전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으로 내 마음을 채웁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 내 일상에서 잠시 떠나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내 안에 나만의 하느님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뒤돌아 봅시다.
내 지식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나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입니다.오늘 하루 내 생각을 버리고 어린이처럼 주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강호성 신부님
주일학교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물어보고, 재잘대고, 쫄랑대고.....철부지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놈들도 점점 학교교육에 익숙해지고 사회에 익숙해지면서 어른들처럼 복잡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서 아이들이 그렇게 사회에 익숙해지고 똑똑해지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일까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단순하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더불어 이 강론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똑똑하고 잘 아는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나고 있다는 예수님의 기도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아마, 하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 주시고 선포하신 후, 당신 스스로 느끼신 체험에서 나온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가끔씩 스승 그리스도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며 외쳐대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꾀죄죄하고 핏발이 선 눈과 힘줄이 붉어져 나왔을 목! 그렇게 열성을 다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고 알렸건만 그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려던 그 똑똑한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 율사들이 가진 그 똑똑함과 그 오만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눈과 귀를 막아버려서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을 보시고 마음 아프게 하신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안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정의가 예수님을 통하여 현존하여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가지고 누리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동안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니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그 영특함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운 것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가진 것도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얻고 너무 많이 받으면 넉넉하고 차고 넘쳐흘러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하느님 보다 앞에 서게 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 할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등 그 기득권들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 어린이는 받들 일 수 있는 맘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해도 자신이 작고 미약하기에 부모에게, 웃어른에게 의지하려고 하며, 겸손 되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복잡다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그 겸손하고 단순한 맘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 되든지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께 어떻게 다가서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살아온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똑똑함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얻은 그것들을 가지고 과연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구원과 하늘의 신비를 알아듣고 행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겸손 되이 사용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볼 때 어떠한 사람을 좋아하시면서, 누구를 위해서 성부께 감사기도를 올리셨는지 우리는 생활 속에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헤헤거리며 다시 아버지께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많은 아이들을 접해오면서 제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되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철부지’들이더군요. 철부지들의 특징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틈만 나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엄청 사람 힘들게 만듭니다. 때로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듭니다.
남의 집 초대형 수족관을 깨트려 집 전체를 물바다로 만드는가 하면, 고가의 식기 건조기를 넘어트려 못쓰게 만듭니다. 아직 사리분별이 명확치 않다보니 형들한테 늘 구박받습니다. 가만있으면 좋을 텐데 또 대들다가 신나게 얻어터져 달려옵니다. 결국 철부지와 살아가기란 엄청 피곤합니다. 늘 손길이 많이 갑니다. 신경도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철부지들은 행복을 줍니다. 기쁨을 선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합니다. 큰 욕심도 없습니다. 이중적이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정도 많습니다. 애정표현도 쉽게 합니다. 늘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찾아옵니다.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찰거머리처럼 꼭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사람 엄청 괴롭힙니다. 그래서 엄청 혼도 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즉시 헤헤거리며 다시 다가옵니다. 결국 철부지로 인해 자식 키우는 재미가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봅니다.
‘전혀 개념 없는’ ‘정신없이 사는’ ‘막 되먹은’ ‘예의도 뭣도 없는’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그런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엄마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엄마를 찾아갑니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 까지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둡니다. 엄마만이 자신의 인생 전권을 지닌 절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엄마에게 모든 것을 겁니다.
바로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는 당신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고상한척, 유식한 척,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척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버지 없이도 아무런 아쉬움 없이 잘 살아 갈수 있다고 여기는 ‘꽉 찬’ 사람, 잔뜩 자만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하게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나는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하니 아버지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버지의 능력을 알기에 수시로 그분께로 나아가는 사람, 그분께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가 지은 죄가 진홍빛같이 붉다 할지라도, 오늘 비록 우리가 큰 죄 속에 살아간다할지라도 절대로 상심하지 마십시오. 우울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철부지처럼 언제 그랬냐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주님께로 다시 나아가십시오. 활짝 웃으며 그분의 품으로 안기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런 ‘철부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공간 복음의 공간
조성숙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단락 안에서 “아버지”라고 몇 번이나 부르며 환희의 찬가를 노래하십니다. 그 흥분된 기쁨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오히려 철부지들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예수님께도 그토록 놀라운 일이었을까요? 언젠가부터 깨닫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제 안에 두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공간과 복음의 공간입니다. 복음의 공간 속에서는 예수님 말씀대로 작은 자, 섬기는 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즉시 다른 세상 버전으로 옮겨가 버립니다.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자가 되어 사람들 위에 서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주시는 스승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분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소위 내놓을 만한 ‘메이커’는 거의 갖지 못한 분이십니다. 작은 신앙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철부지 같은 말투와 어린아이와 같은 그분의 눈빛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며칠을 머물면서 제 안에 “복음 말씀이 진짜구나!” 하는 놀라움이 커져갔습니다.
책을 통해 배워 안다는 사람에게서는 결코 배울 수 없었던 말씀들이 그제야 “아하!” 하면서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안에서 여전히 힘 있고, 우리의 모순을 꿰뚫으며, 진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기정희 수녀님
내가 사는 곳은 지적 장애인 50명이 생활하는 시설이다. 지능이 낮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참 맑고 순수한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얼마 전 주일이었다. 신부님께서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요즘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지요?”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모두들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다투어 말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손을 들더니 남대문 방화 사건이 근래 들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개인의 잘못이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뜻에서 그런 행동은 나쁜 일이라고 하셨다.
보편 지향 기도를 드릴 때였다. 평소와 같이 몇몇 가족은 자신에게 필요한 기도를 했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앞서 남대문 방화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했던 친구가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남대문에 불을 지른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잘못은 많이 했지만 용서해 주세요.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해주세요. 불쌍한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갑자기 모두 숙연해졌다. 문제는 있으나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니 남대문 방화자는 당연히 응징을 받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경종을 울리는 그의 기도는 하느님의 목소리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잊은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되물어 보았다. 내면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다.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하느님의 신비가, 단순하고 이웃을 먼저 헤아리는 이 작은 이에게 드러나는 것을 본 그날 우리 장애인 가족이 더욱 빛나 보였다.
차라리 길을 물어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는 관용적인 우리말을 씹어보는 것이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무심코 쉽게 쓰는 우리말 안에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고, 대단한 영성과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아는 게 병이야!”
“모르는 게 약이다.”
어찌하여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인가?
길을 가다보면 길을 섣불리 아는 게 병일 때가 많습니다.
아예 길을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을 터인데 섣불리 아는 자기 지식에 의존해 가려다 헤맵니다.
옆에서 모르면 물어서 가라 해도 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고 하시고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도 하십니다.
또 다른 데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고 하십니다.
이 말을 통 털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줄 사람이 없고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반드시 길을 통해야 하고 길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는 사람이 묻겠습니까?
길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데 바로 그 짝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철부지처럼 겸손하고 단순하게 길을 물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길이신 그분께서 손수 길을 계시해주시도록 물어야 합니다.
또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까?
길이신 그분께서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준 사람, 그래서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성녀 글라라가 이에 대해 아주 적절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는 유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의 연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며 가르쳐 주셨습니다.”고 회고합니다.
우리는 헛똑똑이가 되기보다 차라리 길을 묻는 철부지가 되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비와 복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나라의 신비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친히 보여주시고 선포하신 후, 당신 스스로 경험하여 느끼신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셔서 들려주시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기적을 통해서 증거해 주셨지만, 그것을 보고, 들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마음 아프게 체험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안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여기서 예수님은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보신 것이 아니라, 안다는 사람의, 똑똑하다는 사람의 그 알고 똑똑함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을 단죄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 말씀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복음의 말씀을 따지거나,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의 문제를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 는다고 할 때, 어떻게 그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면서 부모에게, 웃어른에게 의지하려고 하며 혼자서 무엇을 결단하기보다 겸손 되이 부모와 웃어른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태도이다. 어린이의 눈을 보면 우리는 그 눈이 얼마나 맑은지를 알 수 있다. 이제 그 아이는 자기 눈에 비치는 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눈빛도 흐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을 배우는 것도 그렇다. 그 아이는 많이 들은 말을 먼저 하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좋은 말을 가르치면 좋은 말을, 욕을 가르쳐 주면 욕을 하게되는 것이 아이이다. 무엇 하나 계산되지 않은 행동이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겸손하고 주님께 의지하려 하는 사람에게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구원과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신 것을 감사드린다고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며 똑똑함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나는 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나 않은가? 혹은 구원과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고 행하기 위하여 겸손 되이 사용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푸체, 땅의 사람들
김종근 신부님
중남미 대륙에는 많은 원주민 부족이 있다. 그들은 500여년 전 스페인·포르투갈을 선두로 한 유럽의 세력들이 밀려들기 전부터 고유의 훌륭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잉카 문명·마야 문명은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부이다.
칠레 남부에는 마푸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현대 문명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땅의 사람들’이란 뜻의 부족 이름 그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안데스 산맥의 풍부한 산림과 태평양의 다양한 수산자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감자와 밀을 재배한다. 소나 말의 힘을 빌려 감자와 밀을 심고 나면 추수 때까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오직 농사에 적당한 날씨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땀을 흘려 열심히 일을 하여 씨를 뿌렸으니 이제 거두는 것은 하늘에 맡길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를 내리고 햇볕을 주시며 바람을 움직이며 농사를 짓게 하는 어떤 큰 힘,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삶 속에서 ‘절대자’, ‘신’의 존재를 체험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그들에게 다가가 그 큰 힘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한다고 설명하면, 금방 “아, 그렇군요. 아멘” 한다. 물이 스폰지를 빨아들이듯 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그 존재에 ‘하느님’이란 이름을 달아드린다. 교리공부를 못해도 성서 말씀 한마디 들어보지 못했어도 온몸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한국처럼 잘 짜인 성서공부 과정들, 야곱의 우물을 포함한 교회의 각종 인쇄물, 성지순례, 다양한 신심활동으로 바쁘고 지친 몸에는 하느님께서 쉴 자리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느님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에 굳이 하느님이 없어도 잘 굴러가기 때문이다.
‘세상을 누가 움직이는가? 나인가?, 하느님인가?’ 하느님은 나의 주님, 내 구원자, 내 생활의 모범답안이심을 숱하게 말하고 기도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말과는 다르게 똑똑한 내가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운용해 나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세상을 누가 움직이는가? 하느님인가, 나인가?’ 마푸체 사람들은 하느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없고, 한국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내가 가진 것, 능력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누가 더 행복한가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
최승일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라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해야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을 아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심으로써, 누가? 즉 어떤 사람이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사람들”은 “예지의 소유자”라는 뜻이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사람, 어려움을 교묘하게 뚫고 나가는 사람”을 뜻하는 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계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박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어서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다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함을 단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에 무식함과 우둔함으로 복음을 대한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가정방문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쉬고 있는 교우의 집을 방문하여 “이제 그만 쉬시고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해 봅시다.”라고 권고하였더니 그 분의 말씀이 “신부님,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도 알만큼은 다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책도 여러 종류로 다 읽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 회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그래도 성당에는 나오셔야죠?”라고 다시 권했더니만, “신부님, 내가 이렇게 많이 공부를 하고 있어도 아직 성당에 나가야 할 필요성을 도무지 못 느낍니다. 좀 더 공부해 보고 필요성을 느끼면, 그 때 가서 나갈 테니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친적 가운데 신부도 있고 수녀도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하도 기가 막혀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제님, 그러면 뭐하러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냥 성경책 한 권을 사다가 읽고, 하느님께 직접 ‘당신을 아버지로 모실테니 나를 당신 아들로 받아주십시오’하면 되지, 부러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기 구원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친척 신부 수녀가 대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년이 지나고 나서 그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돌아가셨겠습니까? 자신이 고집하던 식으로 돌아가셨겠습니까? 그때는 유별나게 성당에 병자성사를 청하고서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목자로서 씁쓸한 맛을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가고 마는 것을, 뭐가 그리 잘났고 똑똑하다고 하느님께 도전하다가 이렇게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지만, 복음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는 그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잘 관리하라고 맡겨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마음, 즉 관리인의 자세로 겸손되이 자신의 시간이나 재능 그리고 재화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지혜와 슬기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김대성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자기 고백적인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 즉 어제 복음에 해당되는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감사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사람들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님 마음 속 깊은 곳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감사기도의 형식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은, 아무리 가르치고 설명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드리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탄식인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어떤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어떤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낸데...내가 좀 잘하거든....내가 좀 알거든...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는 낫거든....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고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배울 수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지혜롭다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슬기로운 사람,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약합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며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참된 지혜와 슬기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매일매일 내가 가진 지혜와 내가 가진 슬기를 버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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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요. 사실 저는 비가 오는 관계로 계속해서 운동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비만 오지 않으면 무조건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지요. 도중에 비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어제는 성지에서 유일하게 쉬는 날인 화요일이거든요. 하지만 어제 역시 창밖으로 새벽부터 쉬지 않고 계속해서 비가 내리더군요. 이제는 비가 지긋지긋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
사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듣는 노래에서도 ‘비’에 대한 노래가 많은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비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요즘처럼 계속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겨울에 내리는 눈도 그렇지요. 눈이 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눈이 폭설로 이어지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저처럼 넓은 지역에 내린 눈을 직접 쓸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면서 강아지처럼 좋아할까요? 이렇게 자연의 적당함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도 적당함은 나를 더욱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많이 소유하는 것을 행복의 지름길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들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보았을 때, 부자나라의 국민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가장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더 큰 행복지수를 보인다고 하지요. 또한 로또 복권에 맞은 사람들 중에서 행복한 삶을 꾸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기사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이처럼 행복은 과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적당할 때,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을 때, 행복이 부족함을 채우러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립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겠지요. 그리고 이 모습이 완벽한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그렇다면 우리 모두 철부지 같이 못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일까요?
그런 말씀이 아니지요. 인간 세상에서 완벽해 보이는 그 모습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는 철부지 같다면 스스로를 낮추고 주님 뜻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으며, 행복도 그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완벽하다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지향하면서 교만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모습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못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완벽함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완벽함을 추구합시다.
삶의 메세지('좋은 글' 중에서)
첫번째 메세지
남자는 여자의 생일을 기억하되 나이는 기억하지 말고, 여자는 남자의 용기는 기억하되 실수는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두번째 메세지
내가 남한테 주는 것은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내가 남한테 던지는 것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번째 메세지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네번째 메세지
먹이가 있는 곳엔 틀림없이 적이 있다. 영광이 있는 곳엔 틀림없이 상처가 있다.
다섯번째 메세지
달릴 준비를 하는 마라톤 선수가 옷을 벗어던지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잡념을 벗어던져야 한다.
여섯번째 메세지
두 도둑이 저승에 갔다. 한 도둑은 남의 재물을 훔쳐 지옥엘 갔고, 한 도둑은 남의 슬픔을 훔쳐 천당에 갔다.
일곱번째 메세지
남을 좋은 쪽으로 이끄는 사람은 사다리와 같다. 자신의 두 발은 땅에 있지만 머리는 벌써 높은 곳에 있다.
여덟번째 메세지
행복의 모습은 불행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죽음의 모습은 병든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홉번째 메세지
웃음 소리가 나는 집엔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 소리가 나는 집엔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
열번째 메세지
황금의 빛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애욕의 불이 마음에 검은 그을음을 만든다.
열한번째 메세지
어떤 이는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재물과 싸운다. 가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재물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적다.
열두번째 메세지
느낌 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 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 희생 없는 사람 하나 마나
열세번째 메세지
마음이 원래부터 없는 이는 바보이고, 가진 마음을 버리는 이는 성인이다.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이는 똑똑한 사람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열네번째 메세지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열다섯번째 메세지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낮이 즐겁고, 육체로 결혼한 사람은 밤이 즐겁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은 밤낮이 즐겁다.
마지막 메세지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늘 기쁘게 사는 사람은 주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황영삼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의 말씀에 이어 마음이 닫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고을을 떠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5장 산상설교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가난하고, 철부지 어린이 같은 마음이 하느님을 만나는 열쇠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법구경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그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
상처입은 쇠에는 산화되어 금방 녹이 생깁니다.
그 녹은 점점 자라 어느새 돌아보면 쇠 전체가 녹이 슬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욕심과 거짓, 위선, 오만과 편견, 시기와 질투로 우리의 깨끗한 영혼과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점점 커져 내 마음에는 빈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빈자리가 없다면 내 마음이 온통 나로 차있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머무실 수 없으십니다.
오늘 하루. 무언가로 가득차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조금의 빈자리를 만드십시오.
그것으로 내가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있다면 조금 놓아두십시오.
잠시 그것들과 떨어져. 가난한 마음,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보십시오.
그 빈자리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백남국 신부님
본당에서 신자분들을 만나다 보면 참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레지오를 하고, 재속회를 하고, 매일 기도를 드리러 성당에 나오십니다. 또한 각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너그럽고 희생적이며, 동정심도 많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만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겠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부라고 그들 앞에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척 나서지만 사실 정말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딴에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당신 자신을 감추시고 가르쳐 주는 대로 당신을 믿고 따라오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주님 앞에서 조금 아는 지식으로 까불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신부 노릇 하려면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게을러도 열심한 척, 믿음이 약해도 강한 척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 맡기면서 사는 겸손한 사제가 존경받고 사목도 잘하겠지요. 그러나 저같이 어설픈 겸손쟁이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말기에 그냥 아는 척, 열심한 척하면서 살아갑니다. 뭐, 그렇다고 착하고 성실한 우리 형제·자매님들께 사기를 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착한 신자들, 저 때문에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뿐이지요. 그러니 주님 눈 딱 감고 저같이 조금 안다고 껍죽거리는 사람한테도 당신을 드러내 주시면 안 될까요? 신자들 앞에 체면 좀 서게요.
이석희 신부님
우리모두는 이상한 행동으로 바보짓을 하는 멍청이 영구를 기억합니다. 바보스럽고 멍청하기 그지 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른들 까지도 그의 행동을 흉내 내었고 잠시나마 잔잔한 웃음으로 또다른 영구가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신선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신감과 상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덧 영구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웃음을 전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잘 생기고 멋있는 어느 탈랜트 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게 되어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똑똑함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교훈을 영구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외부적인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들과 보통사람들 보다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젖어있는 권세가들을 향해서 질타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신비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똑똑하고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약삭빠름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지만,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는 이들에게는 위안과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의 복음 말씀 앞에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울 때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말씀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함과 신뢰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신뢰와 받아들임입니다 신뢰와 겸손의 대명사는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이며, 보잘 것 없는 약자들입니다.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육신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에게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전해주는 작자 미상의 “어느 환자의 기도”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신뢰가 물씬 풍겨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약삭빠름으로 유혹하지만,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이기양 신부님
성실하게 노력하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살던 한 양봉업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필리핀을 가게 된 양봉업자는 이 나라가 여름이 길고 겨울이라고 해도 한국의 초여름 같은 날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양봉을 하면 한국에서보다 최소한 세 배는 벌겠다고 계산을 한 그는 한국의 벌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예상대로 따뜻한 날씨에 꽃이 피는 기간이 길었으므로 그는 갖가지 종류의 꿀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첫 해에 많은 이득을 보게 된 그는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대규모로 양봉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에는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 년을 지낸 그의 벌들이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굳이 애써 꿀을 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지혜로운 삶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허황되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을 빗대어 나무라는 이야기지요. 말 그대로 잔머리를 굴리는 삶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사목자로 사목을 하다 보면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빨리 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있으면 구제불능입니다. 그것처럼 변화되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았고 쉼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구세주가 언제 어디에서 나실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으로만 알았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요. 오히려 자기들을 비판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신 하느님을 ??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을 달아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불법으로 백성을 선동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단을 했지요. 많이 안다는 자체가 오히려 무서운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잘 모르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고 믿음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그랬고 병자들이 그랬으며 심지어 회당장과 로마의 백인대장까지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체험을 얻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고 과거의 자기 경험과 지식의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지요. 저는 사람이 참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깨닫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새삼 숙고할 때가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경험을 쌓고 지식을 습득하며 수십 년을 살아가지요.
그런데 인고의 세월이 흐르고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를 알려면 다시 내가 쌓은 그것을 깨부수는 일부터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깨부수지 않으면 옆에 계신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그렇게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쌓아왔는데 그것을 다시 깨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깨우친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고 이만큼 배웠으니 이제 다 되었다라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일일신(日日新)‘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과거의 지식과 경험은 미래의 걸림돌이 될 뿐이지요. 그것은 예비신자 교리를 해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요. 성경을 읽으라고 했더니 한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신약성경을 열두 번이나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신앙 생활을 해 왔어도 한 번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태반인데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하며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열심히 따라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바보여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은 열망에 어린아이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과 함께 한 지난 5년 동안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언제나 심사숙고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신앙 생활이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학교>, <사회복지시설 돕기> 등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하자는 대로 따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대로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하지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내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함께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을 체험하면 자유로워집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유를 얻게 되지요.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바탕은 역시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그 말씀을 성실하게 실천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26)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지요. 저 역시 여러분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복된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은 완고한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처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매일 매일 새롭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욕(無慾)의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얼마 전 미사 중의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아, 이제 기억력도 떨어지고...
머리 좋아지길 기대하긴 힘들겠구나.
머리 대신 마음 좋아지는 일에, 믿음, 희망, 사랑, 겸손, 지혜 등 덕목을 키워가는 데 힘써야 되겠구나.
나이 들어 조금씩 퇴화되어 가는 신체의 기능을 안타까워할게 아니라 속사람을 키워가야 되겠구나.
몸의 눈이 어두워 갈수록 마음의 눈을 밝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느님 떠난 머리 좋은 똑똑한 바보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야 발전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는 한정적인 자원을 고갈시킴으로 자기 무덤을 파는 현대 문명입니다.
편리와 신속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이 알게 모르게 인간의 내면을 천박(淺薄)하게 만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지칭하는 대상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입니다.
외관상 하자 없는 똑똑하고 유식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부지들이 지칭하는 대상,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무욕의 사람들입니다.
알고 보면 여기서 철부지들은 실속의 본질을 사는 지혜로운 이들이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허상을 사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욕심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욕심 없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 지혜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탐욕 덩어리라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무한한 탐욕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탐욕이 눈을 가려버려 학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만듭니다.
똑똑한 머리와 그 많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눈을 가려 패가망신 하는 이들이나 노추(老醜)의 말년 인생 보내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마음 가난한, 무욕의 겸손한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도 이들을 알아주십니다.
공부나 머리 부족해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도달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임금이 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 받았습니까?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로 가득 찬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서 중 확 눈에 띈 대목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눈에 거슬리는 ‘내’라는 단어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시리아 임금은 나로 가득 찬 똑똑한 바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똑똑한 바보들에 대한 결론과도 같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버리시리라.”
아니 하느님을 잊고 끝없는 탐욕의 노예 되어 사는 모든 현대인들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무지(無智)한 현자, 무식한 유식의 철부지 사람들이 새 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문득 계간지 ‘녹색평론’ 89호 책 머리말 마지막 말이 화두처럼 남아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開眼) 혹은 회심(回心)이다.”
너무나 외적 진보라는 허상에 홀려 살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진보가 아닌 개안, 혹은 회심의 철부지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무아의 겸손한, 무욕의 지혜로운 철부지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어린이가 되라
강영구 신부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대에게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어린이의 눈을 보십시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있는 어린이의 눈은 투명하고 평평한 거울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오만과 아집으로 비뚤어진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가식과 허위의식으로 흐려지고 때 묻은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어린이의 작고 붉은 입을 보십시오.
그 입에 기도와 노래가 담겨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어린이의 입에 거짓이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하기 위해서(마태5,37),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어린이의 입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욕하고, 남을 헐뜯고 이간질하며 악담하는 입은 지옥(地獄)의 입구(入口)입니다.
어린이의 작고 앙증맞은 두 손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쥔 것이 없지만 그 손에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모자라서 헐떡이는 탐욕스러운 손으로는 행복을 움켜쥘 수 없습니다. 훔치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는 손으로는 지옥(地獄)을 만들 뿐입니다.
당신도 어린이가 되십시오.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요한3,3).
스스로 죽는 사람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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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시간만 나면 성지 곳곳에서 자라나는 풀을 베고 있습니다. 물론 손이나 낫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초기라는 것을 이용해서 풀을 베고 있지요.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풀이 너무나 많은 곳에서 자리고 있거든요. 더군다나 요즘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풀이 엄청나게 많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시간이 좀 나서 풀을 베기 위해 예초기를 꺼내어 돌리려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초기를 꺼냈습니다(참고로 저희 집에는 예초기가 2개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동이 걸리지 않더군요.
저는 어제 이 두 개의 예초기를 고치러 읍내로 나갔습니다. 수리해주시는 분이 이리저리 보시더니만, “고장이 심각한데요? 다 고치면 연락드릴테니 집에 가 계세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오후에 다 고쳤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물었지요.
“아니, 잘 되던 것이 왜 이렇게 갑자기 안 되었던 거에요?”
그 분께서는 휘발유에 물이 섞여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즉, 아마 예초기가 물에 젖었고, 그러면서 물이 휘발유와 섞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지난 장마 때, 예초기에 빗물이 들어갔던 것 같더군요. 결국 저는 수리비 6만원을 지불하고서 예초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니 모든 기계와 물은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가 물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제가 아는 어떤 신부님은 휴대전화를 화장실 변기에 빠뜨려서 완전히 고장났다고 하더군요. 또한 자동차에 물탄 연료를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 차도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요.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더군요(기름값 싼 곳만 골라서 가면 저처럼 됩니다). 이밖에도 기계에 물이 닿으면 결코 좋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물이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에 물이 없다면 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물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이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고 유익한 것 역시 다른 것과 혼합될 때에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좋아 보이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순수함이 없다면 어떨까요? 좋아 보이는 그 마음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이중적인 마음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순수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진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얼마나 순수한가요? 혹시 온갖 복잡한 것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록 그 복잡한 것들이 하나하나 볼 때는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 수도 있지만, 순수함을 잃게 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에는 들어가고 봐야 하니까요…….
어린아이를 사랑합시다.
괴로움은 괴롭다고 생각하는 마음에 있습니다(이정하)
지금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당신을 괴롭히는 게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판단 때문이 아닌가 한번 의심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겐 언제든 그 잘못된 판단을 제거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고통을 주는게 당신 마음속의 어떤 것이라면, 마음만 고쳐 먹으면 쉽게 해결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쉬운 방법을 두고 내내 고민에 빠져 있는 당신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스럽다 말하기 이전에 그 상황을 한번 냉철히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 빠져 나올 구멍이 보일겁니다.
† 교만과 겸손의 놀라운 차이점
박상대 신부님
오스트리아가 낳은 음악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살 때 건반지도를 받고 5살 때 이미 소곡(小曲)을 작곡했던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작곡과 공연으로 온 유럽을 다닐 수 있었지만, 26세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가정을 꾸리는 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더미에 가정형편이 쪼들리게 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가정교습을 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 쉴링을 내야하는 부모들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자, 모차르트의 해명이 걸작이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은 찬양기도(25-26절)와 계시의 말씀(27절)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어록에서 따온 것이며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찬양기도이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다시말하면 어제복음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두고 불행을 선언(11,20-24)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감사의 환호를 부르신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좀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불행선언을 맞은 대상인물과 오늘 감사환호의 대상인물을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가 불행선언을 맞은 이유는 그곳에서 좀 안다고 뻐기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거부하였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 마귀 들린 자들, 온갖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의 아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다 같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다 같은 조건인데, 왜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교만과 겸손의 차이다. 교만은 거부를 낳고, 겸손은 수용을 낳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과 수용의 표상인‘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통찰은 철저하게 아들 예수께 맡겨져 있으며, 아들이 택한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다. 다행한 일은 예수께서 택하신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계시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철학(哲學)을 통하여 신(神)의 존재(存在)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신(神)은 한낱 절대자(絶對者, Absolutum)일뿐, 이 분이 바로 구약의 야훼 하느님이시며, 신약의 예수님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스스로 사람이 되는 육화(肉化)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든지 육화(肉化)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모세의 성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에집트에서 한때 떵떵거렸던 모세가 동족을 괴롭히던 에집트인을 쳐죽이고는 도망을 간다.
억압받은 동족들을 멀리한 채 자신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자 한다.
그래서 양떼를 먹이는 목동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모세는 하느님의 산이라 불리던 호렙 산 근처에 양떼에게 풀을 먹이러 갔다고 묘한 광경에 사로잡힌다.
이상한 떨기꽃에서 불길이 솟아나는데(신비체험)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모세야!).
모세가 응답한다(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 친히 자신의 신원을 밝히시며 파견의사를 전하신다
모세는 자신없어한다.
하느님께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신다(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모세의 자신없음은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형 아론을 붙여주신다.
모세는 다시 동족들을 구하러 간다.
이스라엘의 영웅 모세가 성소를 받게 되는 과정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소여정은 대부분 위의 과정을 밟게 된다.
우리의 성소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파견보다 소시민적인 삶에 안주하려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의 생각이다.
한때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볼까 생각도 해보다가 또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보자 생각도 해보다가 이런저런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그냥 내 하나, 내 가정이나 꾸리며 살아야지 뭐,
내가 별순가?
그러던 어느날 나는 충격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피정이나 강론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이야기 일 수도 있고 직접적인 목격을 통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것이 내가 마음 깊이 원하던거야!
그렇지만 내가 뭐 별수있나?
마음 뿐이지 뭐...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러한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신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내 이름을 사랑스러이 불러주신다.
<베드로, 바오로, 마리아, 데레사...>
나에게 말씀을 전해주시고자 하신다.
<예, 말씀하십시오!>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예언자들로부터 성직자, 수도자가 서품이나 서원 전에 호명이 될 때 응답하는 양식이다.
이렇게 들으려는 자세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신다.
내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듯한 말씀을 해 주신다.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
그래서 저는 못합니다.
저는 이러한 약점을 지니고 있고, 능력도 부족하고 죄인입니다.
당연하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소자로서 자격이 없다.
교회에서 무슨일을 맡기면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이 사람은 일을 시키면 안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보잘 것없는 사람,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당신 뜻을 나타내 보이신다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렇다!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알고서 일을 맡기신다.
그래야만 당신의 권능이 더욱더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친히 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의 입술이 되어 주겠다>
모든 성소자는 하느님의 함께 하심의 약속이 있기에 성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예, 주님 말씀하십시오>하고 응답해야 하리라.
그리고 그분께서 맡기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귀기울여 들어야 하리라.
겸손되이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하고 아뢰야 하리라.
그러면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 힘이 되어주겠다> 하실 것이다.
자, 주님의 힘을 믿고 오늘도 성소의 길에 정진하자.
성소는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불림 받은 것이다.
성소는 매일의 삶속에서 반복되어야만 한다.
수도자, 성직자라 하더라도 한번 받은 성소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매일 그분의 부르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힘이시여!>
주님을 알아뵙고 그분의 사랑을 살아내는 지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과 땅의 주님”(11,25)이신 하느님께서는 자기 기준으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한 이들에게 ‘말씀과 행적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계시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변이 없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셨지요(탈출 4,10).
예수님께서도 어부 베드로와 세관장 마태오 등 평범한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행복한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셨습니다(5,3). 그분께서 다가가시어 깊은 관심을 갖고 연민을 보여주신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들, 멸시받고 버림받은 사람들, 병자들과 배운 것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1,25-26) 하느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살기 위해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이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문제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지녀야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과 자신을 위해 마음속에 품은 욕구는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도록 내 영혼을 어지럽히고 어둡게 하며,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과 영이 스며들 수 없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지식, 사물의 이유와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뜻합니다. 나아가 어떤 것과 친숙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로마 11,33),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2코린 2,14; 10,5),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콜로 1,9), 사랑으로 실천되는 지식(1코린13,2)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고, 깨달은 바를 이타적인 사랑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머리로 이해한 지극히 작은 지식에 매여 전부를 아는 양 착각하며 교만하게 처신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늘날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쏟아지는 강론들을 접하면서도 이런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 강론 저 강론을 비교하면서 자기 잣대로 평가하는가 하면, 몇 줄 읽다가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며 스쳐 지나가버리는 태도를 지닌 이들이 바로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교만한 이들이 아닐까요? 어눌하고 부족한 듯 보이는 강론을 통해서도 어떻게 이 가르침을 살아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담은 성경말씀은 영원히 ‘다 안다’고 할 수 없으며, 강론이 담고 있는 내용 또한 그 내용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면 결코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하느님께서 거저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참으로 행복한 존재가 되려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단순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내 기준에 따라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시오 지혜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그분과 일치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 참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행복한 우리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주신 사랑과 구원의 선물을 살아내지 못하면서도 다 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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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부산에서 강의를 마치고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 위해 김해 공항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통 체증이 너무나 심해서 아무리 계산을 해도 제 시간에 맞춰서 공항까지 가기가 힘들 것만 같았습니다. 버스 기사님께 탑승 시간을 말씀드리면서 갈 수 있느냐고 하자, 교통 체증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순간 짜증과 언짢은 감정이 치밀어 오르면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연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스 기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손님, 그냥 다음 비행기 탄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안달복달해봤자 공항까지 가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안달복달 한다고 해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두르다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공항 게이트를 잘못 찾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부딪혀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간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냥 비행기를 놓치면 놓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인 것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의 상황과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일 때 많은 부분이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받아들임을 쉽게 선택하지 못합니다. 내가 옳다는 자기중심의 생각, 세속적인 욕심이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이 배웠고 또 많은 재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도 자기보다 잘 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그러나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굴복이나 복종, 행동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라면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감춰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지혜와 슬기를 내세워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부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노력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지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상황이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철부지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적당히 채워라. 그릇에 물을 채울 때 지나치게 채우고자 하면 곧 넘치고 말 것이다. 모든 불행은 만족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최인호).
정면에서 부딪쳐서 이겨낼 수 있는 지혜
‘지푸티’라는 나라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뜬금없이 왠 ‘지푸티’라는 생각이 드셨지요? 아마 ‘지푸티’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분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도 모를 정도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아프리카의 아주 자그마한 나라인 ‘지푸티’의 대통령 선거에 관심을 누가 가질까요? 그 나라에 살고 있거나 또는 그 나라에 연관이 있지 않은 한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심이 생기고 또한 어떤 감정의 동요가 이루어진다면 나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상관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생기지 않고 또한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생기지 않으며 그래서 동시에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강렬할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강렬한 감정 중에서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감정이 들 때에는 아예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피하고 피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정면에서 부딪쳐서 이겨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주일입니다.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그리스도론 강의’를 하였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풀이해 드리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마무리는 ‘내 삶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씀드립니다.고난과 시련을 걸림돌로 여기지 마시고, 영적인 성장을 위한 디딤돌로 여기자고 강의를 마치게 됩니다.
그날도 강의를 열심히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23년 전에 저를 보셨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자매님의 말씀은 제게 약간 뒷맛을 주었습니다. ‘신부님 예전에는 앳되고 젊으셨는데, 순수하고 멋있었는데, 지금 보니 많이 늙었네요.’ 같은 말이라고 해도 ‘신부님, 지금 보니 훨씬 중후해 졌네요.’라고 하셨으면 제가 다음 강의를 더 힘차게 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자매님은 20년 전에 저를 보셨다고 합니다. 자매님도 제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예전에는 얌전하셨는데, 지금 보니 말을 엄청 잘하네요.’ 제가 그렇게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얌전한 모습이 사라졌네요.’라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 액자 속의 사진도 아니고, 사람이 23년이 지나면 이 정도는 변하기 마련이라 생각했습니다. 20년 시간이 지나면서 아직도 '얌전'한 사제로 있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
문득 식당의 화장실에 읽은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매사가 짜증나고, 원망과 미움이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니, 별 것도 아니었습니다. 23년 전 저의 순수한 모습을 기억해 주는 분이 있으니 좋은 일입니다. 얌전했던 모습을 기억해 주는 분이 있는 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옳은 것을 택하고, 그른 것을 버리면서 정해지는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모두 놓아 버릴 때, 마음의 평화가 오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재능과, 능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였습니다. 어떤 선택은 참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선택은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대부분의 신자분들이 저의 선택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하신 결정이니 믿고 따르자!’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늘 최선,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러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그런 저의 선택을 믿고 따라주는 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자기인식(self-knowledge) -하느님의 도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자기를 몰라 판단이지 자기를 알면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여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일한 찬양기도입니다.
찬양기도이자 동시에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철부지들만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주님의 겸손한 철부지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지칭하는 바 바리사이와 율사들입니다.
세속적으로 참으로 똑똑하다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이들이 아닌 자기를 아는 겸손한 이들에게 계시됩니다.
철부지들로 상징되는 자기를 아는 겸손한 이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늘나라의 신비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진실과 함께가는 겸손입니다.
이 반대가 허영과 교만입니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이들이 진실하고 늘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이들을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예수님은 물론 철부지로 상징되는 제자들이 진정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어리석고 어리숙한 듯 하나 실로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독보적 앎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아버지를 알고 나를 아는 것이 크나 큰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간절한 기도 역시 둘로 요약됩니다.
하느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과 자기를 알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지도의 목표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과 자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 합니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알게 되고 이어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겸손한 이들을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과 대비되는 이사야서의 주님의 도구였던 아시리아입니다.
교만으로 인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고 제멋대로 행한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불행 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하느님의 도구로써 출발한 아시리아였지만 하느님을 까맣게 잊은 채, 제 마음대로의 처신이었습니다.
소위 복음이 말하는 똑똑하고 슬기롭다는 자가 된 아시리아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이어지는 말도 온통 내가 주어이고 하느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가 들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소위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이들의 실상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자신을 잊은 똑똑한 듯 하나 실상 어리석은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혹독한 질책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만군의 주님께서는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자기를 잊고 제 분수를 넘어섬으로 하느님의 도구 역할에 실패한 교만한 아시시라아가 상징하는바 우리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자기를 잊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철부지들과 같은 당신의 사람들인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시어 당신의 도구로써 찬미와 감사의 삶, 진실과 겸손의 삶을 잘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참조).
아멘.
주님의 도구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언제든지 승리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과 함께 하시면서도 전쟁에서 진 적이 있었습니다(1사무 4장 참조) 바로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였는데 결국 계약의 궤까지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하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 싸우면서도 이기지를 못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라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을 도구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당연히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며 주님께서 당연히 자신들의 뜻을 따라주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지 주님께서 우리의 뜻을 따라줄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하고 지고 모욕 받고 소외당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축구나 다른 경기를 할 때 성호를 긋고 나오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는데 참으로 많은 실수를 해서 골을 놓치고도 교체되어 나올 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성호를 긋고 나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실패한 것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공만 하도록 도구 역할을 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시리아는 주님의 진노의 막대기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을 안 듣는 아람과 에프라임을 치라고 사용하신 막대기였습니다.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싸우는 족족 승리하기 때문에 교만하여져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이런 교만함을 그냥 보고만 있으실 수 없으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갑인지 명확히 보여주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시리아는 결국 신흥강국, 새로운 주님의 진노의 막대기인 페르시아에 멸망하고 맙니다. 이번 유로 2016에서 포르투갈이 그동안 10전 10패를 했던 프랑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처음엔 포르투갈의 핵이었던 호날두가 부상으로 빠지자 무두가 절망하였습니다. 그동안 프랑스와 싸워서 승리를 거둔 적이 없기에 절망을 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전력의 열쇠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이 호날두 없이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날두가 빠지자 흔들린 것은 포르투갈이 아니라 프랑스였습니다. 긴장을 스스로 늦춘 것입니다. 교만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주님을 도구로 만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주님을 만든 모양이 바로 ‘소’였습니다. 주님을 소로 만든 이유는 주님을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을 소로 만드니 주님의 뜻인 십계명판은 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느니, 축구의 신, 혹은 여신, 아이돌 등의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조금만 잘하면 신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신이 되면 주님은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신이 되려다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 이것 해 주시면 보답을 하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을 도구로 만드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주님의 도구로서 주님만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의 권한으로
김석영 수사님
오늘 복음의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앞부분(마르 11,1-11.15-19)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 장면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날 아침나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처음으로 등에 사람을 태우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분이 지나가시는 길 옆에서 꽃을 던지고, 푸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아이들과 여자들과 서민들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환호하며 외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루살렘 골목길은 좁고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나귀에서 내린 예수님은 나귀의 고삐를 풀어 돌려보내셨다. 그리고 걸어서 성전 경내로 들어가셨다. 거기서 장사하는 이들을 보시고 마음에 거룩한 분노가 일어, 그때까지 들고 계시던 나귀 고삐를 휘두르며 장사꾼들을 내쫓고, 환전상의 좌판을 둘러엎으셨다.
지금까지 성전의 장사꾼들에게서 모종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던 대사제들은 그들이 침해받은 이권 때문에, 다음 날 성전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이 오늘 복음이다. 그때 예수님이 마음속에 품으셨던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인 너희가, 아버지가 시킨 일은 하지 않고, 자기네 뱃속이나 채우려고 아버지의 집을 장터로 만들어 어지럽혀 놓고, 장사꾼에게 자릿세나 받는 너희는 누구에게 권한을 받아 이런 짓들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또 이 집주인의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집을 청소하는 것에 무슨 권한이 필요하다는 말이냐?’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려고 예수님은 에둘러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해 질문하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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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피정 강의를 위해서 집을 나서다가 아주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큰 도로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쳐야 하는데, 골목길에 들어서는 순간 앞에 많은 차들이 이 길을 꽉 매우고 있었습니다. 원래 막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런가 하고 보는데, 맨 앞에 커다란 트럭이 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좁아지는 골목길이었기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맨 뒤의 차부터 후진을 해서 나갈 수밖에 없었네요.
그큰 트럭은 이 좁은 골목길에 왜 들어왔을까요? 잘 모르기도 했겠지만, 아마 자신의 운전 실력을 과신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통계 결과를 보면 운전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운전 실력을 과신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신하는 그 운전 실력 때문에 많은 교통사고가 일어난다고 하지요. 언제라도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탓에 위험한 추월을 서슴지 않으며 빙판길에서조차 가속 페달을 밟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는 다른 영역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범죄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은 범행을 일으킬 당시 자신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선거 때보면 자질이 한참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 후보자로 나옵니다. 이 역시 자기 자신을 과신하기 때문에, 자신이 꼭 당선되어야 나라가 산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과신하는 착각이 안 좋은 상황으로 만듭니다. 다른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유 역시 이렇게 자신을 과신하는 모습 때문에 이루진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말하지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만약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할 생각이고, 당신 스스로의 선택으로 한 것이라면 인간이면서도 감히 율법에 반대하는 행동을 한다고 신성모독으로 고발할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즉, 그들은 무조건 예수님이 잘못되었다고 결정해놓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합니다. 자기들만이 옳다고 과신하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판단이 옳았을까요? 그들의 잘못된 판단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으며, 하느님의 아들을 감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 커다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신하는 모습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만 틀릴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항상 겸손한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을 반대하는 우리가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존재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그들을 삶에 초대하는 과정에서 행복이 만들어진다(테레사 프레이리).
거울과 같은 우리의 삶
거울을 보며 화난 얼굴을 하면 자신이 화난 모습으로 비춰지고 웃는 얼굴을 하면 자신이 웃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이 거울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요? 즉, 남에게 친절하면 남도 내게 친절하고 남을 악하게 대하면 남도 내게 악하게 대한다는 것이지요. 상대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남이 내게 불친절하거든 ‘내게 감히 이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불친절했구나!’라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또 남이 내게 섭섭한 말을 하거든 이때도 ‘나도 모르게 그에게 섭섭한 말을 했구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변하는 상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변하는 상대를 통해서 내가 받고자 하는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질문의 의도’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르코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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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구절과는 조금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고 싶다.
‘질문의 의도’라는 표현이 있다.
복음서를 보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예수님께 적대적이던 이들이 예수님께 자주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의 의도는 늘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넘어뜨리고자 하는데 있었다.
질문이란 모를 때 알고자 물어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질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함정을 파고 그곳으로 빠뜨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적 질문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계속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질문들은 대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최소한 남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거나 비난을 위한 의도적 질문은 피해야 한다.
참 비겁하고 치졸한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자라 한다면 누구보다도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몸에 배야 한다.
상대의 입장에 서보려는 마음으로 일단 지금 내가 입에서 쏟아내려는 말이 순수하고 옳은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은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가끔 충고라는 표현으로, 정의라는 표현으로 누군가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그것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경우도 있다.
만약 그 충고가 진실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문제는 충고를 한다고 하는 쪽이 틀릴 수 있다는 경우의수를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는 질문을 하며 살아간다.
알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순수한 질문이다.
말에 대한 격언은 무수히 많다.
그만큼 말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은 크다는 뜻일 것이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상대에게 질문할 때, 그 질문은 순수해야 한다.
서로를 상하게 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지 않도록 신중해야만 한다.
특히 부정적인 느낌으로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때에는 꼭 한 번만 더 생각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가 내 생각을 만들고 행동을 만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착찹하고 산란한 예수님 마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공생활이 끝나가는 시절 예수님의 머릿속은 참으로 착찹했고 마음은 엄청 산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변 돌아가는 분위기가 다들 작당해서 예수님을 빠져나오지 못할 코너로 몰고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당시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꼬투리를 하나 잡아 신속히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유다 백성의 지도층 인사들(수석사제들, 율법학자들, 원로들, 바리사이들)은 상호 관계가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식민지 국가 권력이었지만 서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고 서로 헐뜯기도 하고 암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예수님 체포)에는 서로 합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을 확인한 사악한 무리들은 아니나 다를까 득달같이 예수님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이런 일’이런 얼마 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전 싹쓸이(성전 정화) 작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 정화는 사제들의 권한인데 왜 보잘 것 없는 갈릴래아 출신이 함부로 나대냐는 질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권한을 주었소?’란 질문은 유다인들의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최고의회를 대표해서 물어보는 질문으로 예수님께서 부여받은 사명이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수임된 사명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던진 질문은 예수님 사명의 진위여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적대자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랍비들의 교육방법 중에 하나인 문답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상대편의 고약한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신 예수님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으시고 그들의 약점을 잡아 강공으로, 정면으로 대응하십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참으로 지혜로운 예수님 편의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적대자들이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요한의 사명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예수님 사명의 초자연성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군중의 분노를 살 것이 분명했습니다. 비록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기는 했지만 유다 백성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그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이지 제대로 한번 잘 받아치신 것입니다. 적대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마침내 애매하게 대답하고 맙니다.
“모르겠소.”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로 따져대며 호시탐탐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적대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도 마음을 접습니다. 적대자들과의 대화를 더 이상 진전시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도 말문을 닫습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 아무리 외쳐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골고타 언덕을 향한 발걸음을 계속하십니다.
성전 정화의 권한자는 누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유다 지도자들이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일>이란 앞서 있었던 성전정화 사건일 겁니다.
자기들의 권한 밑에 있는 성전을 주님께서 무엄하게도 정화하셨으니 자기들의 권한이 침해된 심각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무슨 권한으로 그리 했는지 지금 따지는 겁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권한이 침해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독점적 권한을 인정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권한을 독점하면서 성전을 오히려 더럽혔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도리어 권한을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성전을 정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바로 그들이 성전 정화의 대상이라고 주님은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문득 구약, 다니엘서의 수산나 얘기가 생각납니다.
수산나가 자기를 강간하려던 두 원로의 모함으로 오히려 죽게 되었을 때 주님의 영이 어린 다니엘에게 내리고 영을 받은 다니엘이 수산나를 구하는 얘기지요.
다니엘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늙고 타락한 원로들에 의해 하느님의 공동체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영이 젊은 다니엘에게 내리고 하느님의 공동체는 영을 받은 다니엘에 의해 정화되고 올바로 가게 되었습니다.
권한이 제도에 의해 독점되면 성령의 자리는 없어지고,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는 교회는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이 때 성전의 정화는 누구라도 해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지닌 사람이 성전을 정화할 수 있고, 성령을 지닌 사람이 성전을 정화해야 합니다.
원로들만 성전의 권한이 있고 그들이 정화해야 한다면 그 정화는 아마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만 성전을 정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다니엘처럼 성령으로 타오르면 누구나 성전을 정화할 수 있고 누구나 성전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전 정화의 권한은 성령의 권한이고,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이라는 요한복음의 표현처럼 하느님 집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는 사람이 성령의 권한자입니다.
이때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말입니다.
제 2의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교회를 쇄신한 성인입니다.
그래서 새 교황님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하였습니다.
새 교황처럼 우리도 제 2의 그리스도가 되라는, 제 2의 다니엘이 되라는, 제 2의 프란치스코가 되라는 요청을 지금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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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등학교에서 공개 수업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전에 우리가 두 개의 화분을 하나는 볕이 잘 드는 창문 옆에 두고, 하나는 검은 상자에 넣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 살펴봤죠?”
“네!!”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때 어느 곳에 있는 식물이 더 잘 자랐지요?”
선생님께서 질문하자 아이들은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창문 옆에 놓아 둔 거요.”
이때 다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래, 그럼 식물이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게 뭘까요?”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햇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그러나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창문이요!”
이 아이는 창문에 놓아 둔 화분이 더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햇빛이 아닌 창문에 그 원인을 찾은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 창문이란 단지 햇빛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매개체에 불가한 것입니다. 아이라서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 자신도 그 중의 한 명일지도 모릅니다. 즉,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만 판단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 대해 잘 굽히지도 않습니다. 항상 자신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 다른 이들의 생각은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예수님을 배격하기로 마음먹지요.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내세우는데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까지 행하신 모든 일들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부정적인 생각으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할까요? 그런데도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최고인 듯이 행동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기심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좀 더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 참된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허리를 굽혀 다른 이들이 일어서도록 도와 주려면 자신도 일어설 수 밖에 없다.(로버트 이안 시모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아래로부터의 권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관건인 권한, 권위에 대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권한, 권위 둘 다 단어 자체로 꽤나 부담을 주는 말이군요.
권한, 권위를 의미하는 ‘Authority’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 ‘Augere'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Augere'란 단어의 뜻은 ‘자라다’입니다.
결국 그 누군가가 지닌 권한, 권위는 한 인간을 더 큰 자유와 정의, 더 큰 진리와 행복을 향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많은 사람이 권위 있는 직책에 올라앉기만 하면 크게 착각합니다. 권한을 자신의 두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물리적인 힘으로 생각합니다. 아랫사람을 내리누르는 통솔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배려와 존중의 수단으로가 아니라 강압적 통솔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참으로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군가에게 권위, 권한이 부여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아랫사람들을 좀 더 사랑하라고, 좀 더 봉사하라고, 좀 더 성장시키라고 권위나 권한이 주어졌는데, 그것을 반대로 악용하여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권위의 행사가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기를 바랍니다. 강압적 일방 통행식이 아니라 이성적, 논리적, 상호적이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위로부터의 권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권위’를 행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베푸셨는데, 그 권한은 군림하고, 섬김 받고, 억압하는 권한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라고, 병자들에게 치유를 선물로 주라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다시 안겨주라고, 결국 봉사하라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권한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사하신 권한 역시 사랑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랑의 권한, 사랑의 권위, 아래로부터의 권위였습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권한, 권위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무 것도 아닌 나, 내세울 것이라곤 쥐뿔도 없는 제게 이 권한, 권위를 부여하셨는가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제자들 앞에 무릎 꿇으라고, 오랜 여행길에 더러워지고 상처 난 제자들의 발을 깨끗이 씻어주라고, 그들이 입에 발을 맞추라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결국 권위, 권한의 배경은 겸손이며 봉사이며 사랑,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직장 안에서 단체나 공동체 안에서 조금이라도 권한을 지닌 분들, 묵묵히 제자들의 발 앞에 엎드리신 예수님의 겸손한 얼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제자들을 향한 자상하고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저울
신대원 신부님
원래 권한權限 혹은 권위權威를 말할 때, ‘권權’은 저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天]”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輕重을 달아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사람이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거닐고 계셨는데, 사람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저울로 다른 사람을 저울질합니다. 이때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저울로 우리를 저울질 하신다면, 우리 중에서 그 저울에 제대로 들어맞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남을 저울질할 생각 말고, 오히려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저울에 합당한 사람으로 처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하느님의 도구
이은명 수사님
저는 현재 지적장애인복지관의 관리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이 소임을 해온 지난 몇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자원봉사자의 수고에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한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부터 연세 지긋한 어르신까지 날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방법으로 장애인들과 사랑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권한을 받은 이의 독려나 권위 의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원봉사에 대한 눈에 보이는 보상도 없습니다. 다만 저희 수도자들이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 가운데 기억되는 것이 가장 큰 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자원봉사가 일부 사람들의 잘못된 권한 의식에 의해 왜곡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자녀를 둔 일부 부모님들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순수한 자원봉사가 학교 성적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때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녀를 대신해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부모님을 만날 때면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자녀 양육에 대한 권한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여러 권한을 갖고 살아갑니다. 권한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하느님을 위한 작은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안심치 마라, 아들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발은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찾아다녔다.”
이 말씀은 “나는 젊은 시절 지혜를 찾아다녔다.”와는 다릅니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혜를 찾아다녔다는 얘기지요.
안주하지 않는 끊임없는 구도열망이 느껴집니다.
저도 젊을 때는 구도열망이 대단했었습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정말 죽기 살기로 추구하였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 몇 년 추구하고 특히 하느님을 체험한 뒤에는 닻을 내린 배처럼 하느님 안에 정박, 정착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아 헤매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더 이상 저를 크게 잡아끄는 인물도 없고 더 이상 보고 싶은 책도 없고, 더 이상 해보고 싶은 경험이나 체험도 없고, 하느님께 닻을 내리고 복음에 맛들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안하고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자주 그 평안에 안주하고 그 행복에 안주하려고 듭니다.
하느님은 다 알 수 없이 크신 분, 하느님은 그 맛이 참으로 오묘한 분이신데 이 하느님을 알고 맛보려는 열망, 갈망이 현저히 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한 방울만으로도 우리를 만족케 하고도 남기에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安心하는 바람에 하느님 찾기를 멈춘 면이 더 큽니다.
목적지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安堵感)에 육의 욕이 스며드는 것도 모르고 安心하고, 平安함에 安住하였던 것입니다.
안심 안주하는 바람에 가난하지 않고 안심 안주하는 바람에 갈망하지 않고 안심 안주하는 바람에 하느님 찾기를 멈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 우주선을 타고 한없이 가도 다다를 수 없는 우주와 같은 분이신데 하느님의 한 조각인 피조물에 만족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거기서 쉽니다.
그래서 저는 순결하지 않지만 그래서 오늘 집회서는 순결함에서 지혜를 찾았다고 끝을 맺나 봅니다.
아들아,
그러니 안심치 말고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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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깊은 산중에 할아버지 혼자서 외롭게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어서 삶이 무척이나 외로웠지요.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곰과 친구가 되어 둘은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그들은 함께 등산을 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곰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할아버지는 너무나 힘이 들었지요. 할아버지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곰은 점점 멀리 쳐지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앉아서 좀 쉬든지 아니면 나무에 기대서 낮잠 좀 주무세요.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제가 옆에서 지켜 드릴게요.”
이러한 배려에 할아버지는 감동을 했지요. 그리고는 큰 나무에 기댄 채 잠깐 눈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곰은 충직하게 그 옆에서 할아버지를 지켰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파리 한 마리가 할아버지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콧잔등에 앉았습니다. 곰은 재빨리 뛰어와서 손을 저어 파리를 쫓았지요. 하지만 파리는 잠시 뒤 또 다시 날아와서 할아버지의 얼굴에 앉은 것입니다. 곰은 할아버지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자신의 큰 손바닥을 들어 숨죽인 채 쭈그리고 앉아 생각했습니다.
‘이 못된 파리, 내 기필코 혼내주고 말 테다.’
곰은 할아버지의 볼에 앉은 파리를 잘 조준해서 있는 힘껏 손바닥을 내리쳤습니다. 그 결과 파리는 죽었지요. 하지만 그 손바닥에 맞은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곰은 할아버지를 위한다고 행한 행동이지만, 이러한 행동이 절대로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 될 수 없겠지요. 따라서 아무리 선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자립심을 길러주기 위해서 풀뽑기나 청소 같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자주 웃지못할 일들이 생기곤 해요. 글쎄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빗자루와 호미를 들고 아이들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이를 위한다고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을 자신들이 하겠다는 것이죠.”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분명한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이 행동이 꼭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의 실천이 우리들의 삶 안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틀리고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했었던 것이지요. 또한 숫자상으로도 자신들이 훨씬 많으니 예수님과의 언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었지요. 바로 자신들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말을 바꿔버리는 그들이 결코 진리 자체이시며, 사랑 가득하신 주님의 진실성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이 정말로 그들을 위한 사랑이었는지를 잘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나만을 위한 사랑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이기심을 이제는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합시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와 예수님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대를 받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히 죄인들에 대한 당신의 자비로운 태도가 하느님의 태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하고 말합니다.?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며,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요구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판단하게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무지한 탓’이기도 했고, ‘완고한’ 불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하느님 은총의 인도로 ‘위로부터 새로 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죽는 신비로운 죽음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했을 때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 : 지혜를 통해 참된 삶의 길을 걷는 구도자
경규봉 신부님
참다운 지혜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백방으로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해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참다운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때문에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느님께 간구해야한다.
오늘 집회서는 참된 지혜를 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얻기 위하여 지성소 앞에까지 나아가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지혜를 구한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지혜가 꽃 피움으로써 기쁨을 누렸다. 그는 지혜를 통하여 많은 가르침을 얻고 진전을 이루었다. 그는 지혜를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지혜를 실천하고 선을 추구하고, 지혜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
‘참 삶의 길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궁극적인 질문을 던질 때, 인간 스스로는 그 답을 찾기 어렵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하여 산다.’라는 대답도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또다시 부딪히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행복은 비례할 것이므로, 굳이 행복을 위해 사는 것도 삶의 의미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 목적 등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는 결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지혜도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답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실 수밖에 없고,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답에도 만족할 수 없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고,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
오늘 독서 집회서의 구도자는 젊어서부터 삶의 지혜를 백방으로 구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심을 알고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지혜를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혜의 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함으로써 부끄럼 없이 살 수 있었다.
오늘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인터넷에는 자살동호회까지 생길 정도이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목숨을 끊기 위한 모임을 만든다. 삶의 의미와 보람, 삶의 당위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까닭이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고, 인간 이성을 통하여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하느님을 배제한 결과이다.
하느님을 잃으면 사람도 잃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제외시키면 삶의 의미나 보람이 없어진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의 숨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삶의 참다운 지혜를 얻고, 삶의 의미와 보람,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참된 구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길을 걷는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얻는다. 그는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선을 행하고 지혜를 실천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럼으로써 그는 인생의 참된 의미와 보람을 찾고, 삶의 힘과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 참된 구도의 길을 걷는 신앙인이 되자.
김종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떠들썩하게 하셨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 일이 쉽게 넘어갈 단순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오늘 예수님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하셨냐며 따집니다.
그들의 따짐에 예수님은 도리어 반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의 권한으로 하는 것이냐?”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신께서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의 원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권한으로 그와 모든 일을 하는 것임에도 그러한 사실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한 그들의 무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대답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지 못함을 아시고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신 것입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 원로들은 율법의 규정을 잘 이해하고 따르기에, 다른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치고 이끌며 그들의 잘못을 판결하는 모든 권한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에서부터 났고,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기에 모든 권한은 당신 자신이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당신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라 늘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 위에 서있고 그리하여 그들의 모습 안에서 윤리적인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와 세상 사람들을 위한 자기 희생일 뿐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뜻과 말씀과 그 진리의 참 빛이 드러내기 위한 당신의 온전한 희생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심......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권한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고귀한 사명을 지닌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한 또한 지닌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고귀한 사명, 그에 상응하는 권한이란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며, 예수님처럼 세상의 불신과 불의에 맞서서 자신을 내던지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 믿음 안에서 바로 구원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생각하고, 사람의 고귀함과 진정한 아름다움과 참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끊임없는 말씀과 그 삶 안에서 머무르고자 하며, 또한 거기에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찾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바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화, 그리고 주님의 주시는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도희찬 신부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여러 자리와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런 자리와 위치에서 자신의 권한을 가지게 되고 그 권한을 사용하면서 권위를 얻고 싶어합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직장의 한 책임자로, 어떤 모임이나 단체에서 등등 많은 곳에서 그런 권한을 행사하고 그 속에서 권위를 얻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도 한편으로 자기 위에 있는 어떤 권한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뭔가를 바꾸라는 또 변화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라는 강요를 당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위로부터 영향을 받는 권한 속에 살아가고 또 아래로 행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환경 속에 사랑가는 삶에서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가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위의 권한에 구애를 받을 때 또 자신이 권한을 행사할 때 도덕이나, 윤리, 전통, 관습 등등을 기준으로 삼을 지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의 이익, 편리, 이해관계, 기득권 등등 이기적인 면을 기준으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먼저 꼭 한 가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게 뭔가 하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성전을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답게 만드신 주님의 행동을 유대인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 이익을 두고 왜 그런 권한을 행사하고
어디서 그런 권한을 얻었느냐고 따집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질문에 주님은 직접 답해주시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들며 신앙의 참된 자세에 대해 일깨움을 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한에 따라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변화되고,
또 공동체를 하느님께로 이끌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져야 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게십니다.
무엇을 먼저 생각하고 기준을 삼느냐에 따라 신앙인인가 아닌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앙인 답게 생활해야 겠습니다.
권한 행사
김귀웅 신부님
권한이라고 하면 먼저 공무원들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그들이 가진 권한이 무척 무서웠습니다. 하다못해 집을 짓는 건축 허가를 받는 데에도 뒷돈을 집어주어야 했고, 그 허가를 조금 빨리 받게 해달라고 또 돈을 집어주고. 이렇게 권한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권한을 개인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했지요. 무엇인가를 하고, 또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권한은 모름지기 그 일에 대한 이해당사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 즉 공동선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권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이들에 대한 봉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내 고유 권한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했나 생각해봅니다. 신부로서 가장 큰 권한은 성체성사를 이루는 권한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이룰 수 있는 이 엄청난 권한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사용했는지. “이를 행하여라”라고 명하셨기에 당신처럼 몸과 피를 내어놓는 권한을 가졌는데 그 권한을 행사했는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늘나라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한밤중에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그 권한을 사용했는가?
아픈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피곤하다고, 다른 일이 있다고 상담을 꺼리며 권한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제2의 그리스도로서 자비로운 예수님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손을 얼마나 따뜻하게 잡아주었는가?
하늘 같은 마음으로
강영구 신부님
+예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대에게
지금 우리 성당 앞뜰에는 갖가지 장미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향기롭게 피어있고 느티나무는 늠름하고 푸른 자태를 자랑하며 큰 그늘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저는 장미꽃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누구의 권한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꽃을 피우느냐?
누가 너에게 권한을 주어서 그토록 향기로우냐?”
장미는 대답이 없고 그냥 향기로울 뿐입니다.
느티나무에게도 물어 봅니다.
“너는 누구의 권한으로 이렇게 늠름하고 푸르냐?
누구의 권한으로 이토록 큰 그늘을 드리우느냐?”
느티나무도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냥 하늘 향해 푸른 가지를 펼치고 서있을 뿐입니다.
내 가슴이 태양처럼 밝고 따듯하면 태양이 밝게 빛난다고 시비 걸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맑고 푸르면 하늘이 높고 푸르다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은
장미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모습이 느티나무처럼 푸르고 늠름한 사람은
느티나무가 푸르고 늠름하다고 투정부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가슴을 들여다보십시오.
당신의 눈에 남편과 아내,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보입니까?
찬란하게 빛나는 오월의 태양이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一明)
우리말에 ‘겁 많은 개가 더 크게 짖는다’는 말이 있다.
정복례 수녀님
대사제 일행이 오늘 예수께 던진 이 질문은 오히려 예수께서 던져야 할 질문이리라.“너희는 무슨 권한으로 내 아버지 집을 이렇게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내 아버지 집을 잘 돌보라고 너희들을 대사제요, 율법학자로 세우고 합법적인 권한을 주었건만, 어찌하여 너희들 잇속만 챙기고 성전을 난장판이 되도록 방치하느냐?” 이렇게 다그칠 만한 사태이다. 대사제 일행이 예수께 던진 질문에서 이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등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죄게 할 작정 입니까?”(요한 10,24)
우리말에 ‘겁 많은 개가 더 크게 짖는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보고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전전긍긍한다. 그들이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가? 정의에 불타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의 권한을 남용한 것이 드러날까 봐 그러는 것일까? 대사제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 들은 성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합법적인 권한도 받은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눈에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작업이 불한당의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고작해야 갈릴래아 시골 청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자가 예루살렘 대성전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될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듯 당신은 하느님께 권능을 받았다. (요한 6,27)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에는 대사제 일당이야말로 합법적인 권한을 부당하게 남용하여 하느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 들이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집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집을 사고 파는 장터로, 돈을 거래하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킨 대사제 일당을 묵과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중되는 또 다른 부담은 백성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며 그를 위대한 예언자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고 예수님과 대사제 일당 사이에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자들이 그 권한을 남용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에게 돌아간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돌아본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좋습니다. 아버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도 갈 길이 먼 제 자신의 모습, 제 한계, 제 비참한 실상을 수시로 확인하며 스스로를 용납 못하는 제게 한 위대한 영적스승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더군요.
“내가 지체장애인라면 지체장애인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늘이 우중충하면 우중충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늙었다면 늙은 그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그대로, 내 주변 그대로, 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내게 제시하시는 신비로운 요구이자,
내게서 응답을 기다리시는 부름이다.
거름더미 위에 주저앉아 날을 보내야 했던 욥의 눈뜨고 못 볼 처지도
하느님께로부터 온 요구였을 것이다.
<우리 아들은 소아마비입니다.>
<우리 마누라는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는 여편네올시다.>
<저는 타고난 돌대가리인걸요.>
<친구들이 도무지 날 몰라준 단 말입니다.>
이 모든 한탄이 실은 영원으로부터 나를 기다리다 드디어 내게 닥쳤고,
그래서 나는 그 처지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요구가 아닐까?
장애인 아들을 수용소에 버릴 수는 없다.
아내를 바꿔칠 수도 없는 일이다.
알콜중독에 걸린 아버지를 저주할 수도 없는 것이고,
윗사람의 멱살을 잡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를 둘러싼 상황을 받아들이며, 현실을 하느님이 제시하신 요구처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좋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서 현실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카를로 카레토, ‘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바오로딸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성전정화를 끝낸 예수님께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정답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한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그 모든 일들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면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 나오려니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즉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진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 심사숙고할 시간을 주십니다. 그들 스스로 한번 깨우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종속되었던 예수님, 아버지의 품을 단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예수님이셨기에 가장 자유로운 삶, 거침없던 삶, 올곧은 삶을 끝까지 영위할 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모든 일상사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는 일, 우리가 수시로 겪는 시련들 안에서 아버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 매사를 아버지와 연관시키는 일,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 일은 진정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 삶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비참한 우리 인간조건, 지루한 일상, 끝도 없는 괴로움, 그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현존하시며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결국 구원된다는 것은 그런 갖은 고통으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이기보다는 그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유혹 중에 큰 유혹이 내가 뭔가 한번 해보고 싶은 유혹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 능력으로, 내 사람들과 함께 크게 한건 이뤄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내 영역을 확보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 보란 듯이 내 이름을 날려보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조금이라도 뭔가 권한이 주어진다면, 역할과 책임이 주어진다면, 영역이 확보된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쓰라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의 지도급 인사들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들과 논쟁하신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 들은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 런 일을 합니까 ?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을 합니까 ?"(28절)의 '이런 일'이란 성전정화사건이다.
그러나 본 뜻은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그리스도교계의 주장에 대해 유다교의 지도자들이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즉 합법적인 근거의 제 시를 요구하여 그 답변에 따라 예수님을 반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혜 롭게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을 당황케 하신다.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하늘에서 권한을 받은 것이냐 ?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냐 ?"(30절).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에게 허점을 찌른 질문 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대답을 해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무시하였다는 증거이며, 사람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참된 예언자로 생각하는 군중들의 항의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모르겠습니다"(33절)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도 그들의 위선적 태도에 대해 '대화의 단절'을 선언하신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33절).
진정한 신앙보다 자신들의 우월감 과 홀로 잘 살고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예수께서는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 앙의 자세를 확실히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사랑 을 실천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 을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유다인들처럼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이 명하신 계명과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닮기 위하여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이 세상을 변 화시키고, 또한 모든 이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지혜를 가 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지혜롭게 되는 것은 인 간의 능력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어 야 한다.
예수님께서 지혜롭게 답하시면서 유다인들을 당황케 하시는 것은 당신 안에 항상 성령과 함께 하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맺으신 '관계'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즉 하 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인 성령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한 지혜 자체 이신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진정 사랑의 관계를 가진다면 우리도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지혜는 하느님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사랑의 관계를 통하 여 우리도 드러낼 수 있다.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시비거느라고 행복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성바오로 수도회 수사님들의 말씀 묵상
사람에 대해 믿음과 신뢰를 주지않고 시비를 걸때는 그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떻게해서라도 시비를 걸겠다는 악한 마음이 앞서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비록 중요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고싶은 것만 보게되어 있고, 듣고싶은 것만 듣게되어 있다.
사람은 그만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오늘 울법학자와 대사제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러했다.
하도 이들이 왜곡된 비판을 하므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도 예수님을 칭찬하고 본인들도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끝내 그것을 결정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
자신의 야망과 기득권을 잃어버리지 않기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에서, 또 교회에서는 쉬임없이 인생은 순례자의 삶이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우리의 참평화와 행복은 우리의 기득권에 있지않다고 말이다.
우리의 삶은 순례하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편히 쉴곳은 이세상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안에 쉴때만이 가장 또 영원토록 평안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자리에 눌러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어떤 성공이나 열매 등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쉬임없이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나는 세상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을 보고 나는 쉬이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대자연을 보았다면 당연히 나의 입에서는 찬미가 나와야 하고, 비참한 현실에 봉착하게되면 당연히 나의 입에서는 구세주에게 의탁하고자 하는 말이 나와야 한다.
시기질투하느라고,
시비를 거느라고,
불평을 하느라고
경직되거나 위축된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시비거느라고 바쁜것을 볼 수 있다.
영원한 행복을 놓치는 순간인 것이다.
나또한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예수님을 못알아보고 영접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박상대 신부님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고,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입니다. 이 사명과 권한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정화사건을 말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렇듯 믿지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이 듭니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