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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8월 2일 (녹)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08.01|조회수525 목록 댓글 0

제1독서

<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23,1.4-11.15-16.27.34ㄴ-37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5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6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7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8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이날은 집회일이므로, 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을 일러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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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과 그에 맞게 바칠 제물을 일러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자,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의 축일들, 곧 목축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파스카 축제, 땅을 일구어 얻은 맏물을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누룩 없는 빵의 축제인 무교절, 그리고 주간절 또는 추수절,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하는 속죄일과 초막절에 대하여 일러 줍니다.우리는 날마다 일의 노예가 되어 생기 없이 권태롭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은 이따금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많은 시간과 관심을 빼앗으며 이웃에게 마음을 쓰는 것마저 막습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큰 축일들을 지내면서 자유롭고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주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주님을 위한 축일들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십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관대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축일은 두 가지 목적을 지닙니다. 첫째, 주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기도와 찬미와 찬양으로 그분과 하나 되고자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더 기쁘게 맞이하고 말을 들어주며, 우리 시간과 일을 기쁨과 자유와 특히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나눌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교회는 이런 하느님의 원의를 자기 것으로 삼아 한 해 동안 많은 축일을 제정하여, 예수님께서 주님과 부활로 이룩하신 새로운 삶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합니다.이따금 사람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맞서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한 “목수의 아들”로 여기고 맙니다. 우리는 이웃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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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에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면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그 위인이 고향을 방문하면 모두 모여 환영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마을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어디서 기적의 힘과 신적 지혜를 얻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들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하느님을 배척하였습니다.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육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상황과 성장 배경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영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하느님의 말씀을 보았음에도 영적으로 눈이 멀었으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었으나 제대로 듣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귀는 성경 말씀을 들어도 공허한 메아리처럼 듣고 망각해 버립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새로운 은총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인 기준에 머물면 나자렛 마을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홀대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준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방문을 알아채며 기뻐합니다. 비안네 성인처럼 그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희망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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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생업에 푹 파묻혀 살아갈 때에는 놓치기가 아주 쉬운 것들을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파스카와 무교절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겪었던 힘겨운 종살이를 회상하면서, 그 고통의 질곡에서 건져 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이집트 땅에서 급히 떠나느라 빵의 누룩이 부풀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무교절이지요. 추수절에는 땅을 주시고 한 해의 농사를 가능하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초막절에는 광야의 떠돌이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또한 천막 성소를 지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축제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지내게 됩니다. 설이며 추석에 가족이 모이듯, 이스라엘의 축일들은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뻐하는 날입니다. 가족이 모이지만, 축일 거행을 위한 규칙들에는 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들어 있습니다. 축제 때는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하는데, 그 음식들을 먹을 것 없는 이들, 고아와 과부와 떠돌이들, 또는 가난한 레위인들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축일에 생업을 멈추는 것은 결국 내가 먹고 살기 바빠서 잊고 살았던 하느님과, 내 일을 하느라고 바빠서 돌보지 못한 이웃을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일요일, 곧 주님의 날인 주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일을 멈추고 쉬는 그 자리에는 하느님과 이웃이 들어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맞이하여 그동안 밀린 일과 취미생활 등도 해야 하겠지만, 촌각을 다투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잊고 살았던 하느님과 이웃을 기억하는 시간을 배정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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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를 보통 33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대부분 마지막 3년 동안의 공생활입니다. 나머지 30년의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곧 ‘목수의 아들’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귀족의 아들이나 왕자로도 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셨다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실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목수의 아들로 살아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프랑스 혁명 때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인 나머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듣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후대에 와서 이 말은 당시 혁명군이 왜곡해서 퍼뜨린 모함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그 당시 왕족이나 귀족들이 얼마나 평민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겪고 있는 삶을 몸소 살아가지 않고서는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목수의 아들로 사신 것은 특권층의 삶이 아니라 온 인류의 삶을 겪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고통과 수치, 모욕을 온몸으로 느끼시며 우리 인간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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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성경을 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말씀에 대한 더 강한 적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이러한 자세는, 비록 양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 레미야는 악행을 저지르며 잘못된 길을 가는 유다 백성을 꾸짖고, 또한 회개하지 않으면 닥칠 파국을 외쳤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경고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해야 할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는 대신에 오히려 백성을 부추겨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고향 나자렛에서 말씀과 행위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예수님에 대한 냉담한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주님 말씀의 깊은 지혜에 놀라워하면서도 시기하는 마음과 알량한 자존심을 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그들 앞에서 ‘발생’하였건만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 제 시선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로 돌려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유다인들의 살의나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노골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교묘한 방식으로 복음이 우리를 관통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은근히 느끼는 ‘복음의 기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뜻에 따른 생각과 삶 속에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세상 흐름의 가치관에 따른 안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8월에 우리는 ‘복음의 기쁨’이 인생의 참행복임을 새롭게 깨닫도록 해 주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교황님의 말씀은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사하신 ‘영원히 새로운’ 복음이 지금 우리를 관통해야 함을 힘 있게 말씀하실 따름입니다. 우리가 교황님을 합당하게 맞이하는 것은, 거창한 행사보다 먼저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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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그리워하게 마련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하시면서 떠돌아다니시다가 가끔씩 고향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과 기적들을 듣고 보았음에도, 쉽사리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찾고 있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는 적은 것과 같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 상황과 성장 배경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분의 말씀과 행위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습니까? 주변의 가장 가까운 분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합니까? 일상생활 안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삶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이웃을 통하여, 또는 우리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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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은 조선 시대 선조 임금 때 역모 사건에 연루된 분입니다. 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고 합니다. 천 명 이상이 죽거나 귀양 간 조선 시대 최악의 사건입니다. 정여립은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 사람입니다. 그의 사상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통할 리 없었습니다. 당연히 고발되었고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왕위 세습을 반대했습니다. 왕권이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설파했습니다. 엄청난 진보 사상입니다. 선조는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쳐 맥을 끊고 연못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이른바 ‘파가저택’의 형벌입니다. 가족과 친척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대부분 처형됩니다. 그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았다면 모두 색출되어 엄한 문초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후유증도 컸습니다. ‘개혁적인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아무도 바른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그것은 그대로 조선 사회를 썩게 만들었습니다. 선각자들은 늘 반대를 받습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푸대접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편견을 깨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사람들에게서 반대를 받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형제와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겉모습에 매달려 예수님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견을 깨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본질’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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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마을 한복판에는 시장이 있고, 왁자지껄한 거리를 지나면 회당이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흰 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년 시절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어린 시절,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보였던가!’

회당에 들어가시어 말씀을 전하시는 그분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저 사람이 누군가?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형제들도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언제 저런 실력을 쌓았단 말인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다 곧바로 인간적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모처럼 찾아온 영적 기회를 잃는 순간입니다. 

편견의 어리석음입니다. 고정관념의 해악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신심이 깊었음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한쪽만 생각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도 때로는 너무 쉽게 인간적인 것에 빠져 듭니다.

은총은 영적인 모습을 갖출 때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겉모습을 뛰어넘는 ‘영적 시각’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의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이었기에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이 편견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기적을 베풀고 싶어도 참으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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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함께했던 친구가 성공했어도 고향 친구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어릴 때 자신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했거나, 오히려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는데 더 훌륭하게 된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자존심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친구라도 그의 숨은 능력을 잘 볼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한 까닭에 그 친구의 진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능을 지니고, 또 어떤 능력은 어려서는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과 성공을 인정하는 자세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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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무섭습니다.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쓰라림과 좌절을 겪는 가운데 서서히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편견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내린 지도자도 적지 않습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에게는 대부분 좋은 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참모는 지도자의 편견을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편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기적마저 이상한 행동으로 여길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편견은 무섭습니다. 기적을 방해할 만큼 두려운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의 또 다른 모습은 고정관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1코린 13,7 참조). 그러므로 편견을 깨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누구나 자기 시야의 한계가 세상의 한계인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큰 공감을 갖게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한 분이 좋은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자 다른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거 제가 해봤는데 별로 효과가 없어요.”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효과 없다면서 단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자신의 행동에서는 실패를 맛보았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가장 큰 효과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자기가 생각한 것이 모두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시각을 보편적인 관점으로 믿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들은 자신의 말 앞에 이런 말들을 자주 붙입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말을 붙임으로 인해 자신의 시각을 정당화하지만, ‘누구나’는 일부분에 불과하고 ‘상식적으로’는 비상식적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러한 착각의 늪에서 절대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의 크기를 더욱 더 넓히면서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단순히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내 시야를 더욱 더 넓혀주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십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 이분이야 말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향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곳에서 행하셨던 많은 기적들을 고향에서 오히려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고향이기에 더 많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좁은 시야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은 오히려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내 시야를 넓혀주는 겸손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혼자만의 비전은 몽상이나 망상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최태성).


도둑질

어느 스승이 한 제자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도둑질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제자는 “곧바로 뉘우치고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라고 공손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도둑맞은 것이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평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것 역시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어야 하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 특히 부정적인 판단은 이렇게 그의 평판을 훔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훔친 평판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겠는가? 바로 그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고 또 그에게 칭찬과 지지를 해주었을 때 비로소 그 평판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남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 우리이지요.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남에 대한 ‘뒷담화’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뒷담화가 남의 평판을 훔치는 도둑질이었네요.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본격적인 공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나자렛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어서 빨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동기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드뎌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고향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경탄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말씀에 완전히 빠져든 사람들, 마음 깊숙히 감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오 복음 13장 54~56절)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릇된 질문, 그릇된 의혹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여야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眞意)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건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심장으로, 영혼으로, 전력투구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개방성의 결여’였습니다.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는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앞에 우선 마음과 영혼, 정신을 활짝 개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고향 마을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인간 측의 활짝 열린 마음과 깊은 신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기적을 계승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은 우리를 심각한 자아 성찰로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서 있는 존재로 전락하기는 너무나 쉽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번 여행을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저희 차 앞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는 트럭 두 대가 고속도로를 막아 그 앞에 서있는 사고 차량들을 보호해 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여 내려서 도로 위에 떨어진 잔해들을 조금 치우던 중 사고 난 차량에서 스마트폰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집어 주인에게 전해주는데 뒤에서 앞에 트럭을 박은 차량 주인 것이었습니다. 그 두 대의 트럭이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받는 분은 아파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앞의 차 운전자는 이리저리 걸으며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저는 앞의 트럭운전자에게 혹시 신고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도 당황하여 아직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5분 정도는 지난 것 같았는데 모두가 그저 구경만 하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뒤의 차 운전자는 차에 발이 끼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핸드폰이 있는 제 차로 다시 돌아와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뒤에 차들이 잔해가 치워진 두 트럭 사이로 빠져서 앞으로 가는 틈에 저도 앞으로 운전을 해서 그 트럭 두 대를 빠져나왔습니다. 마음은 갓길에 다시 세우고 구조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신고까지 해 주었으면 됐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남들처럼 사고 난 두 차량을 뒤에 놓아두고 제 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경찰서, 소방서, 119 구조대, 앰뷸런스 등에서 전화가 계속 오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10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전화가 오는 것을 보니 그 차에 끼인 사람은 계속 그렇게 있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차에 끼어봐서 아는데, 그때는 아프기보다는 외로웠습니다. 사고를 내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고 혼자만 차에 끼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인 그분을 두고 그냥 떠나버린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쁜 일도 없었고 놀러가는 중이었는데 뭐가 급하다고 휩쓸려 가버린 것일까요? 맨날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강의를 하며 사람이 물이 빠져있는데 어떻게 구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정작 그런 처지가 되니 제 자신도 사제나 레위인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자라실 때 본 것만 기억하고 자신들이 아는 것 안에 갇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그들이 메시아가 되었을 것입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뜻은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합니다. 평범한 인간의 수준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고 그리스도가 되어야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는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보려 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메시아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이니 예수님이 하신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가장 예수님을 잘 알아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이 예수가 되어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맞습니다. 애벌레 눈에는 모든 애벌레들이 자기 수준으로 보이겠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비는 다른 애벌레를 볼 때 자신처럼 나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가 되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을 당신 아버지의 수준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도 당신과 같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애가는 부모님을 보면서 네 발로 걷고 짐승처럼 먹고 싸기만 하는 존재지만 그 안에서 자신보다 더 위대해질 미래를 봅니다. 그래서 아기들이 짐승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행동하는 대로 대접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이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기 안에서도 자신들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난 이들도 모든 인간을 자신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하루를 지나고 보면 ‘저 분이 예수님이라면 내가 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러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차에 끼여 있는 사람을 두고 그냥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면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이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기 때문에 저절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나타나셔도 나자렛 사람들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성소에 대한 갈등을 느끼던 중 기차 역에 쓰러져 “목마르다!”라고 말을 하는 한 행려자를 보고 그가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도 그 순간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처럼 말하려고 수만 번의 옹알이를 하고 걷기 위해 수천 번을 넘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되려는 노력은 어떤 것이 되어야할까요? 바로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 보고 그렇게 대하는 노력이어야 할 것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나도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을 때 이미 예수님으로 새로 태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에 놀라면서도 가족들을 다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서로가 이해하고 믿어줄 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깊어져 갑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믿어주지 않을 때 서로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올해 6월에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준우승을 했었습니다. 사실 세계 축구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가 세계 2위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을 보자면 감독과 선수들 서로간의 믿음이었다고 봅니다. 서로가 믿어주니까 더 힘이 날 수 있었고, 그 믿음의 분위기 안에서 작은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끝없이 믿어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역시 하느님께 언제나 믿음을 드리며 매일 매일이 기적의 삶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Body Language이신 예수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2000년전엔 고모 이모 삼촌 친척을 형제누이로 간략히 썼다고 합니다.

하느님 심심해서 말씀을 인간 되게 해 모욕 저주 십자가 처형되셨나요?

사람들이 괴물들과 하도 어울려 망해가니 안타까워 구하시려 오셨지요.


태어나서부터 십자가죽음까지 하늘 뜻 따르며 사는 인생길 알려주셨죠.

생일을 예수탄생에 맞추고 그대로 살라는 Body Language이신 예수님.

인생 삶으로 보이신 ‘몸말’이셨던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님이셨습니다.


아무리 쓴 잔이라도 아버지 뜻대로 그냥 마신다면 영원안식성공입니다.

인생은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고 예수님 앞에서 절대 주름잡지 맙시다.  




<그분의 힘은 어디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참으로 지혜로우시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으시고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셨지


그분을 잘 아는

고향사람들은

놀라며 수군거렸어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저 사람도 아버지 따라 목수가 아닌가?

기껏 노동자 주제에

어디서 저런 힘이 나왔을까?


그분을 잘 모르는

고향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었던 거야


그분은 목수의 아들이시요

그분은 아버지 따라 목수이셨기에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으셨으니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일상의 고된 노동 속에서


아무 바람 없이 온 세상을 빚으시는

일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일하시는 하느님과 하나 되셨으니까


일하시는 하느님의 뜻 따라

묵묵히 피땀 흘리며 일함에도

온갖 천대와 수모에 시달리는

일하는 벗들을 느끼고

일하는 벗들과 하나 되셨으니까


그분은

참으로 지혜로우시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으시고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셨지


그분을 잘 아는

고향사람들은

놀라며 수군거렸어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그의 가족들이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나 그의 가족이나

우리처럼 보잘것없지 않는가?

그나 그의 가족이나

우리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가?


그분을 잘 모르는

고향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었던 거야


그분은 보잘것없는 이요

그분은 보잘것없는 이들과 함께 하시기에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으셨으니까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잘났다 못났다

귀하다 천하다

특별하다 보잘것없다

제멋대로 가르는 불의한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이기에

보잘것없는 이를 소중히 품으시는

당신 모습대로 사람 빚으신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셨으니까


보잘것없는 이로서

보잘것없는 이들

틈바구니에 비집고 들어가

부대끼고 부둥키며

하느님의 마음과 손길로

보잘것없는 이들을

특별하게 보듬고 품으셨으니까


그분은

참으로 지혜로우시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으시고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셨지


그분을 잘 아는

고향사람들은

놀라며 수군거렸어


그분을 잘 모르는

고향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었던 거지


그분은

안타까워하시며

고향사람들을 떠나실 수밖에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참으로 지혜롭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을 지니고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라고 하시지

당신의 고향사람들과 다르라고 하시지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계시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예언자는 ...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


그리스 기원의 언어가 말하는 것처럼, 예언자는 다른 자의 자리에 말을 전하는 자이다.


구약에서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눴던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다.(탈출24,3) 그리고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한다. “주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셨다.”(예레2,5)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참인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심리학적으로 믿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늘 목전에서 보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신적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5)


그런데도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하느님께서 매일 평범한 일에서 삶 안으로도 들어 오신다는 신앙을 믿는 데 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나누는 말에서도 우리는 신적 목소리를 지각할 수 있다.


지금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누구도 단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소리 안에 신적 섭리의 목소리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 그리고 그의 말씀을 찾는 자만이 그것을 느끼는 법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고향 사람들은 군중들이 무리지어 그를 따라다닌다는 소문을 익히 듣고 있는 터라 고향에 컴백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그 가르침은 일반 가르침을 넘어 ‘권위’가 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의환향한 예수님의 컴백은 그들을 놀라키기에 충분했다.


‘권위’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따르면 된다. 여러 말이 필요 없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편협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도록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언젠가 한 시점에서 나를 보고, 함께 지냈던 사람은 과거의 한 시점에서 모든 것을 보려 한다. 새롭게 훌륭한 사람으로 나타나도 과거의 한 시점에 그 사람을 한정시킨다. 결국 상대에 대해 좋은 점은 없고 험담이 될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마태13,54-55)


험담을 하는 사람은 좋은 점을 보는 눈을 스스로 막아버린다. 이로써 남에 관해 험담하지만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고 끝을 고한다. 관계는 망가지고 받고 누리려던 모든 것을 잃고만다. 고향인들에게 보이려건 예수님의 표징은 그 아무 것도 없이 만들 뿐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참으실 수 있도록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폴리카르포에게 보낸 편지’에서 (Inscriptio; nn. 1,1-4,3: Funk 1,247-249)

테오포로스(하느님을 모신 자)라고도 하는 나 이냐시오는 스미르나 교회의 주교, 아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주교(감독관)로 모신 폴리카르포께서 온갖 축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굳건한 바위 위에 세워진 듯한 귀하가 지닌 신심 깊은 마음을 확인하고 귀하는 거룩한 얼굴을 볼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소리 높여 찬미의 노래를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항상 귀하의 얼굴을 바라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입으신 은총 안에서 귀하가 달리고 있는 길을 한층 더 힘차게 달려가고 또 모든 이가 구원을 얻게 되도록 그들에게 권고해 주시기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영적으로나 실제 활동으로나 최대의 열성을 보여 주어 맡은 교구를 지켜 주십시오. 특히 교회의 일치에 주력하십시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께서 귀하의 짐을 지어 주시는 것처럼 귀하도 모든 이들의 짐을 지어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사랑의 정신으로 모든 이들을 참아 주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고 한층 더 큰 지혜의 은혜를 간청하며 정신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도를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해 주고, 굳센 선수처럼 모든 이들의 약점을 지고 가십시오. 수고가 많으면 많을수록 보상도 커집니다.


귀하가 착실한 제자들만 사랑한다면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보다 말썽 빚는 사람들을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도록 힘쓰십시오. 모든 상처를 같은 연고로 치료하지 않습니다. 격심한 통증이 일어날 때에는 특별한 약을 써서 통증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모든 경우에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합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귀하는 영적 차원과 육신적 차원의 체험을 얻도록 하십시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데 힘쓰고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귀하는 부족한 것이 없어야 하고 모든 영적 은총에 풍요해야 합니다.


항해사가 순풍을 갈망하고 풍랑을 겪는 선원들이 항구를 기대하듯이 이 어려운 시기에 귀하의 마음에도 신자들과 함께 하느님께 빨리 이르고자 하는 갈망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선수로서 절제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귀하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선수에게 약속하는 상급은 불사 불멸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귀하를 위해 작은 희생물로서 내 자신과 귀하고 입맞춘 이 사슬들을 바치고 싶습니다.


겉보기에는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면서 거짓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망치로 치는 대장간의 모루처럼 견고히 서 계십시오. 훌륭한 선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내 승리하는 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참으실 수 있도록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노력을 배가하고 모든 기회를 잘 살피어 놓치지 마십시오. 시간을 초월하시고 무시간적인 분이시며,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 분께 의탁하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이시고 또 고통을 느끼지 않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온갖 고통을 당하심으로 고통을 느끼는 분이 되신 그리스도만을 기대하십시오.


과부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 다음으로 귀하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십시오. 신자들이 귀하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하고 귀하도 하는 일 모두 하느님의 허락 없이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항구히 노력하십시오. 집회를 더 자주 열고 모든 이를 개별적으로 불러 내십시오. 남종과 여종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의무를 더 큰 열성으로 완수하고 그렇게 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더 고귀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처지 이상으로 들어 높이지 않게 하십시오. 종들은 공동체가 종이 대가를 치르고 희생하면서까지 자유를 얻는 데 너무 마음을 두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지나친 욕망의 노예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 <마태 13, 54-5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주님의 출신 어디서 시작되었나 의심을 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오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생각이 아직 유대인들에게 전해오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출신 성분을 따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냐, 가정이 어떤 가정이냐, 어떤 가문에서 나왔느냐?” 알아보고 사람의 진가를 따집니다.

그러나 옛말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말도 됩니다.


저는 아버지의 직업을 밝히기를 싫어했지만, 지금은 밝혀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개천보다 더 못한 시궁창에서 나왔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했고 14살부터 중학교도 못 가고 상점에서 일하고, 시장에서 고구마 야채 장사, 얼음과자 장사, 관공서에서 급사, 부산 피난 가서 부두 노동, 부대 쓰레기 조합에서 쓰레기 치우는 사람 등 18살까지 중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험하고 천하다고 하는 일을 다 했습니다. 틈이 나면 인천 갯벌에서 조개잡이 등 먹고 살기 위해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겉모습은 미군이 입다 버린 군복 입고 어느 성당에 미사에 가니 도둑으로 오해받고 쫓아내려고 할 때 울면서 “나는 헨리코란 신자”라 하고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때 들은 강론 말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개, 돼지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저는 여기 있습니다. 일생 하느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저에게 은총이고, 참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출신은 목수의 아들이라 하지만 사실은 하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저도 근본을 따지면 하느님에서 나와서 하느님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시간 안에 한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니 영원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에게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모든 능력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제가 갖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시작은 아주 작은 아메바 같은 존재로 시작했지만,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근본이 하느님 안에 있으니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자신 있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저 어릴 적에는 대림성탄 판공성사를 보러 가게 되면, 어떤 성당에서는 추워서 그랬는지 이날 성당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먹을 것을 장만해 놓고는 판공을 본 신자들이 친교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날을 마치 잔칫날처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회개를 하는 날은 단순히 자기 죄를 고백하는 부끄러운 날만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죄를 씻어주시는 날로서 기쁜 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어떤 신자분들은 “고해성사 보기 부담스러워서 성당에 가기 싫다.”고도 하신다는데, 새삼스러운 추억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축제 중에 무교절과 초막절 사이에 ‘속죄일’이라는 축제를 넣습니다.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레위 23,33) 그리고 이 속죄일에 바로 이어 초막절 축제를 지내도록 합니다. 어떻게 보면, 부끄럽고 숨기고만 싶은 참회의 순간을 공개적인 날로 정하고, 축제로까지 삼는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레위기 16장에 대대적으로 나오는 이 속죄일은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가 가끔 미디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 벽, 이른바 통곡의 벽 앞에 서서 기도하며 애통해하는 모습으로 연장되어 나옵니다. 히브리 말로 ‘욤 키푸르’라고 불리는 속죄일 또는 사죄일입니다. ‘정결과 부정에 관한 가르침’ 끝에 서술되는 이 대축일은 본디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부정과 자신도 모르게 입게 되는 온갖 부정으로부터 해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는 대정화일이었습니다. 그러다 점점 문자 그대로 죄를 용서받는 전례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전례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생생한 의식을 가지며, 동시에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이 속죄일에만 대사제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등급의 대축제일입니다.


가끔 어떤 종교나 드라마들을 보면, 사람들은 죄를 지은 이에게 죄를 씻도록 도와주기보다, 죄를 지은 이에게 그 죄를 약점으로 삼아 더 옥죄고 이용하려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고 벌하기보다 그 죄를 무상으로 씻어주시고 재생의 기회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감동의 물결로 믿음을 선사해주십니다. 그래서 부활 찬송에서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제사를 올리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복된 죄’라고까지 일컫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보면 우리 죄는 우리를 옥죄고 더 나약하게 하며 죄악의 구렁텅이로 빨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신앙의 단계로 이끌어 들이는 관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죄를 씻고 새로운 관문으로 넘어 들어가면서, 더욱더 자유로워지고 기쁨에 넘쳐 거룩해짐으로써 주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합시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1베드 1,25 참조)




이 세상에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다.

최민석 신부님

아! 덥다. 누구의 입김이 저리 뜨거울까. 불볕더위에 밭두렁에 호박잎 축 늘어지고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애가 타서 울러대는 청개구리 강물에 담긴 산에서 우는 참매미 구경하던 파란 하늘도 하얀 구름도 강물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더위 화염 같은 더위 속에 약동하는 푸른 생명체들 나는 초록의 숲을 응시하며 나 오직 8월의 정열로 살고 싶다. 세상은 온통 초록 이름도 없는 모든 것들이 한껏 푸른 수풀을 이루고 환희에 젖어 떨리는 가슴으로 여름은 생명의 파장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성한 초록의 파고, 영산홍 줄지어 피었다.


봄날에 서늘하게 타던 농심農心이 이제 팔 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된더위 만나 허우적거리지만 기찻길 옆엔 선홍빛 옥수수 간이역에 넉넉히 핀 백일홍 모두가 정열의 꿈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또 한해의 지난날들 앳되게 보이던 저어새의 부리도 검어지는데 홀로 안간힘으로 세월이 멈추겠는가.


목 백일홍 꽃이 지고 풀벌레 소리 맑아지면 여름은 금세 빛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갈 것이다. 나 지금 무더위 한 가운데를 지나는 동안 오곡백과는 저마다 숨은 자리에서 이슬과 볕, 바람으로 살을 붙이고 가을을 준비하고 있다. 단지, 그 은공을 모르고 해와 비를 나무라며 바람을 탓하던 철없던 내가 이제 그리 먼 곳보다는 살아 있음을 감사하고 살아간다는 것에 가슴 벅차한다.


기나긴 시간 뜨거운 존재 없느니. 뉜들 그 뜨거움 함부로 삭힐 수 있으리. 사랑은 뜨거워야 좋다는데 온 대지를 달구는 더위에도 하늘을 보니 하늘이 참 맑기도 하다. 한줄기 소낙비 지나고 나무가 예전에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다. 나무야, 철들지, 철들지 마. 그대로, 그대로 푸르러 있어라.


불볕더위로 인해 사람들 몸부림치고 도망 다니고 하루빨리 사라지라 짜증이다. 그래도 야속타 않고 어머니처럼 묵묵히 삼라森羅 생물체들 품속에 다정히 끌어안고 익힐 건 제대로 익혀내고 삭힐 건 철저히 삭혀내는 하느님의 뜨거운 손길은 여전하다. 하느님이 열나게 일하시니 그 열기다 온 세상에 뜨거운 열기를 내 품고 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살리시는 손길의 열기다.


아무리 더워도 사랑하는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마음은 달콤함 행복감에 잠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은 실제로 내 마음의 보자기에 싸여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내가 보내는 사랑을 거울처럼 반사시켜 되돌려 준다. 모든 존재들이 각자 역할을 갖고 있다. 그 모든 존재들은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들이다.


몸이 아픈 이들에게도 분명 역할이 있다.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픈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다면 그만큼 세상을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 나는 몸이 아프고 나서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 더 넓은 세상이 보인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아픔을 극복하고 초월한 사람에게서는 누구라도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그 위안은 다시 되돌아 와 행복이 된다. 아픈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 맡은 역할은 치유다. 아픔을 넘어 누군가를 행해 이해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내 몸에게도 아픈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픔을 안다는 것은 존재를 좀 더 온전하게 볼 수 게 한다. 치유의 힘은 거기에서 나온다.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이 위안이 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몸이 너무나 아플 때에는 아픔을 겪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가만히 귀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아픈 형제자매들을 떠올린다.


몸이 아파서 구름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몸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은 채 온 세상의 형제자매들을 불러내어 손을 잡아본다. 아픔은 이 작은 몸 하나만의 것이 아니다. 아파하는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더 큰 내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각자 흘려보내야 할 무엇인가를 꽉 쥐고 있고, 가슴을 활짝 열어 그것을 흐름 속에 놓아주라고 한다.


아픔이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동식물의 세계를 보면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는 모른다. 미시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아픔을 극복한 세포들이 치유의 역할을 하는 항체를 만들어 낸다. 아픔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치유의 힘이 거기에서 나온다. 아픔을 있는 그대로 손잡고 느껴본다. 가만히 손을 잡고 모든 존재들을 하나씩 둘러본다.


뜨거운 여름 나무도 있고 꽃도 있고 별도 있고 구름도 있으며 푸른 하늘도 있다. 바람도 있고 향기도 있고 빛도 있다. 때로는 머나먼 별에 사는 외계인도 있고 눈에 익은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다. 분홍빛, 황금빛, 푸르스름한 빛 속에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없다. 어느덧 아픔도 사라지고 없다. 마음엔 사랑과 감사의 미소가 잔잔히 흐른다.


몸이 아파서 모든 것이 끝나 가는 것 같아도 그 순간순간 아픈 것들이 사랑을 주고받는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존감은 아픈 이들의 몫이다. 세상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공감의 순간이 사랑이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기만 해도 치유의 힘이 나온다.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의 은혜가 내게 흘러넘친다.




더 세상 속으로, 덜 세상적으로!!

김형진 베드로 신부님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은 그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지만, 이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지는 못합니다.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적인 앎과 시선이 그들의 눈을 가려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친히 세상 속으로, 우리네 삶의 자리 깊숙이 다가오셔서 함께 사셨지만, 그분께서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을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신앙인은 구체적인 삶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듣고, 보지 못한 것을 알아본 사람들이기에,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농부(마태 13,44-46 참조)와 같이 복음을 위해 투신하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제 스승 예수님께서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더 깊은 세상 속으로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적인 것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분명히 구별되는 복음의 가치로 무장함으로써 참된 구원을 선포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안다는 것'(마태오 13장 54~5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것을 얻었지?'

신분이나 출신을 안다는 것이 좋을때가 있지만 좋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시샘이 작동하면 안다는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어 후하게 받을 수 있는 축복을 걷어 차 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입견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채 놓칠 수 있습니다.

알면 얼마나 알고 모르면 얼마나 모릅니까?

안다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데 유익함이 있다면 행운이니 잡으시고 그렇지 않다면 놓으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몸에 떼가 끼어 있듯이 눈과 마음을 흐리게 하는 오만과 시샘을 닦아냅시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마라"

제병영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두려움은 오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 심해지며서 나타나는 감정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움이다. 왜냐하면 그분을 만나면 나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나고자 하는 열망과 그러고 싶지 않는 긴장이 항상 나 안에 존재한다. 기도 중에 이 긴장이 장벽임을 느끼며 답답하다. 그냥 그분을 만나 두려움 없이 예수님과 동반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이 긴장을 풀고자 희망한다. 

오랜만에 햇빛을 본다. 오늘 앞산 운무산이 나의 희망으로 보인다. 칙칙한 오랜 비 뒤에 구름을 거두며 햇빛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나의 영혼이 칙칙한 비로 씻어지고 이제 구름이 겉치며 맑은 하늘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마태 13, 54)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마태 13, 54~58)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마태 13, 54)

이렇게 놀란 군중들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낭독하시고, 사람들에게 그 뜻을 풀이해 주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놀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게 되었을까?" 하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들 마을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조용한 성품을 지닌 분이며, 요셉의 아들로써 또 마리아의 아들로써 평범하고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공생활에 들어가기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예수님의 지혜와 말씀과 태도를 보면서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생업인 목수 일에 종사하면서도 남모르게 당신이 하셔야 될 일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충실히 읽고 또 성경에 나타나는 말씀을 따라서 좋은 품성을 닦으시고 또 성경에 나타나는 말씀들을 진정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면서 성경의 참된 뜻을 마음에 품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조용한 준비 그리고 충실한 삶의 태도는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스스로 풍겨나는 인품과 지혜와 하느님의 성령에 가득 찬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면서 놀란 것으로 뿐만 아니라, 시기와 부러움에 가득 찬 그런 말로 예수님을 의아하게 여겼다고 성경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범성을 넘어선 지혜와 삶의 태도는 이제는 그들과는 다른 식으로 예수님의 성공과 예수님의 성숙을 축하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 13, 57)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우리의 관계성 안에도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조용했던 친구가 사회에 나가서 두각을 나타낼 때, 나는 그 사람의 성공과 또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해서 축하해주려는 마음보다는 그가 우리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데에 더욱 무게중심을 두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과거에 알고 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현재 잘되고 성공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축하해주고 그런 성공에 대해서 그 사람의 남모르는 피와 땀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주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로 그 사람과 관계성을 새롭게 맺으면서 좋은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과거에 내가 알던 사람이 성공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져왔습니까?

• 내가 지금 성공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를 알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대아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1코린 1,23)로 박해를 받으셨지만, 계약과 무관했던(에페 2,12 참조) 다른 민족에게서는 존경을 받으신다. 


이 회당은 악의에 찬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못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러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끓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 말은 예수님을 폄하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가정에서 훌륭한 자녀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 5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씻지 못할 상처란

편견과 고정관념의

상처입니다.


편견의 먼지를

털어내면 존경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일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한 사람의 소중한

역사(歷史)를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써내려가는 

소중한 역사입니다.


고정관념을 갖고

판단하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더 멋지고 

더 아름답게

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익숙한 판단과

편견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우리가 막았어는

안됩니다.


편견을 내려놓으면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우리의

삶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사람안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존경과 존중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웁시다.



사제서품을 받고서 첫 본당의 보좌신부로 갔을 때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주임신부님께서 휴가를 가시면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내가 휴가 가있는 동안, 성당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니까 조신부가 관심 좀 갖고서 도와줘.”

드디어 드라마 촬영 날이었습니다. 성당 안에서는 세트장 설치가 한창이었고, 몇몇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낯익은 연예인들이 근처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임신부님께서도 도와주라고 말씀하셨으니, 촬영에 도와줄 것이 있는지 보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향해 갔습니다. 물론 이러하면서 연예인들을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를 향해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저씨, 여기 들어오면 안 돼요. 나가세요.”

제가 신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제복이 아닌, 일반 사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이 말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단지 도와줄 것이 있는지를 물으려고 갔던 것인데 이렇게 무안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싶었지요. 그래서 곧바로 외출을 해서 동창신부를 만나고 왔습니다.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돌아오니 사무장님께서 어디 갔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촬영을 하다가 허락을 구할 것이 있어서 저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제관에도 없고, 더군다나 당시에는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기라 연락할 수가 없어서 기다리다가 결국 원하는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앞서 저를 막았던 사람이 제가 촬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신부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촬영장에 다가서는 저를 막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저는 촬영에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인데 과연 주님께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려고 하지만 알아 뵙지 못하고 “여기 들어오면 안 돼요. 나가세요.”라고 막아서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보아왔다고, 또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에 대해 잘 안다고 하면서 별로 대단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기적들, 또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씀에 대해서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지요.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과 가까워졌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아 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쫓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이것이 사명이다(‘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그녀는 빈민가에서 10대 흑인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해 14살에 임신해 조산아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낳은 아이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죽게 됩니다.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마약 중독자로 10대를 보내며 고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곁길로 가기 쉬운 암울하고도 불운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재는 타임지가 뽑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 중 1위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자신이 쓴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에서 네 가지 사명을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

가난과 아픔 속에서 자랐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지우고 싶은 과거도, 지금의 부유함도 인생의 사명으로 여긴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여정 가운데는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사명으로 삼을 수도, 좌절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이 답이다. -마음의 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육신의 병 못지 않게 힘든 것이 영혼의 병, 마음의 병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병은 무지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입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교만과 탐욕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공부에 정통해도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것은 헛공부입니다. 어제 영혼의 고향집같은 대월수도원에 왔습니다. 여기 대월 수도공동체 삶의 기본 수행이 참 선명했습니다.

-하느님만을 위한 은거
단순한 노동
침묵의 기도
검소하고 평범한 일상
사랑의 섬김-

바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공부를 평생 목표로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 때 너도 알고 비로소 참 행복도 뒤 따릅니다. 내적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치유되는 마음의 병입니다. 다음 말씀도 대월수도공동체의 영성을 잘 요약합니다.

“대월의 집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살아있는 심장이다.”-1992.10.16. 마텔.
“대월의 집은 우리 회의 성체이다.”-1992,10.16. 쁘리 마텔.

동방영성에서 참으로 중요시 하는 것이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은 무지에 이어 하느님을 잊은 망각, 완고함, 눈멈, 무분별 등 줄줄이 이어집니다. 마음의 병에는 하느님만이 최고의 약입니다. 하여 수도교부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에 이어 죽음을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하느님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 환상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본질적 삶에 정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면서 점점 치유되는 마음의 병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여지없이 확인해 보는 성인의 생몰연대입니다. 1786년에 태어나서 1859년에 선종하셨으니 만73세, 현재의 저보다 5세를 더 산 것입니다. 성인들의 산 햇수를 나와 견주어 보는 것도 좋은 분발심을 일으킵니다. 참으로 치열했던 성인의 삶을 일부 소개합니다.

-매일11시에 성인은 미사와 더불어 강론을 한 후 오랫동안 고백성사를 주었다. 성인은 하루 12시간을 고백성사를 주었고 죽음을 앞선 해에도 방문자는  20000명에 육박했고 때로 하루 16시간을 고백성사를 주었다. 해가 지나면서 성인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도 깊어졌고, 고백자들의 죄들이 성인을 크게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럴수록 성인은 덜 엄격해졌고 점점더 인간의 약함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성인은 더욱더 하느님의 사랑과 교회 전례기도의 힘을 깊이 깨달아 갔다.-

인간의 약함에 대한 깊어가는 체험과 더불어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 전례기도가 성인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교회의 전례기도요, 끊임없는 전례기도를 통해 깊어가는 하느님 사랑이요 치유되는 마음의 병에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공동전례기도뿐 아니라 여기 대월수도공동체의 공동성시, 공동묵주기도의 은총이 또한 주님 사랑을 촉진하고 마음의 병을 치유해 주며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어 줌을 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례축제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례일정을 질서있게 소개한 이스라엘의 전례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 이 한마디가 제1독서를 요약합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과도 흡사합니다. 

새삼 가톨릭 교회의 영성은 전례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의 중심에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현존하십니다. 바로 전례기도를 통한 살아계신 파스카의 주님과의 일치가 우리 마음의 병인 무지와 완고함을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 줍니다. 특히 공동미사전례의 은총이 그러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 고향 사람들의 문제와 해법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느님과 자신에 무지했고 무지로 인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마음은 닫혔고 이는 예수님께 대한 불신으로 표현됩니다. 비단 예수님 고향 사람들뿐 아니 우리의 보편적 경향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무지의 불신으로 인해 마음을 닫아버리면 주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믿음은 개방입니다. 무지로 닫힌 딱딱한 마음을 하느님 향해 활짝 열 때 비로소 주님의 치유의 은총이 뒤따릅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으로, 당신을 향해 찬미와 감사로 마음을 활짝 연 우리 모두의 마음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기쁨과 평화를 선사하시며, 당신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마음의 옹졸함이 병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여있답니다. 그 밑에는 "불평을 멈추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당신의 삶을 바꿔라".는 문구도 있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저사람이 어디서 지혜와 ~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워했습니다.’(13,54)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13,57)

왜일까?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놀라워한 것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을 알아보고 놀라워하였지만,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곧 하느님으로부터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에 대해 그들은 너무도 잘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그를 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곧 그가 목수의 아들이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우리와 같이 사는 잘 아는 이들이라는‘나는 그를 안다’는 자신의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서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 그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고집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창조주 주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그리고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바로 참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마치, 예레미아처럼 말입니다.

이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아멘.




나는 사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마리아론 시험 볼 때의 일입니다. 교수님이 성모님의 평생 동정의 의미를 지금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현대 젊은이들이라 함은 믿음이 없고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는 평생 동정 교리를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은 기억 했지만 내가 수긍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기는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교수님은 수업 때 말씀하신 대로, “성경으로부터 시작 해야지. 성경 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는 예언도 있고, 복음에서도 처녀로 그리스도를 낳으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은 믿겠습니까?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경도 믿지 않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 성경을 대고 거기에 나온다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수님도 제 말에 대해 대답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물론 기분이 나쁘셨는지 안 좋은 점수를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장에 가셨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요셉의 아들 예수만 생각하며 그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 일을 하는 평범한 나자렛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기적을 하고 싶으셔도 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메시아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기 신부 중 하나는 첫 보좌 발령을 자신의 출신본당에서 분가한 성당으로 받았습니다. 보통은 출신 본당으로는 보내지 않는데 인사에 착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성당에서 첫 미사를 하고 제의를 입은 채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야~ 고추 내놓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신부님이 되셨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부 할머니의 친구 분이셨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한 청년 자매가 뛰어오면서 사람 많은데 “오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술자리를 하여도 사제로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들의 탓도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전에 편하게 대할 때의 모습을 더 원하는가봅니다.

 어쨌건 그 신부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주임 신부님에게 꼭 붙어 있으며 필요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로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사제는 그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사제가 아니고 사제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고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고 그래서 다른 고을에서 더 많이 기적을 행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사제 서품 피정 때 제 앞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일주일 동안 피정을 하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마지막 날 저녁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 조그만 나무에 나뭇잎이 유일하게 하나 달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잎새’를 연상하며 바라보면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자 바로 제 앞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저는 온 우주의 시간이 멈추고 지금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에 집중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태초부터 바로 지금 내가 지나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두신 나뭇잎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렇게 나뭇잎 하나로 주님의 섭리하심이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즉, 성경 말씀대로라면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데 내가 사제가 되기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끌어 주신 주님의 섭리까지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성소를 확신하며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게 뭔 대수라고...”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저는 신부님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믿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는 더 이상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말로는 그 때 느꼈던 소름끼치는 기억을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무의미하겠다는 생각에 그 사람들에게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느끼는 것은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무기력은 그 무기력을 느끼게 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더 이상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마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고 싶지만 우리 믿음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그 분의 활동은 내 안에서 제한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기에 예수님이 나자렛에서는 어떠한 은총도 주시지 못하고, 또 나자렛을 떠나셔야 했듯이, 사제들이 주님의 대리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사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은총도 감소되고 사제의 수도 감소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아직까지 신자들이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유럽과 같은 나라들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따라서 유럽은 사제성소가 말라버렸지만 한국은 아직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은총을 받고 못 받고는, 바로 그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가짐에 달린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처럼 굳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친숙함과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걸림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이 사는 고향에 가시어 “그들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들의 회당”이라는 표현을 통해 유다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며 거부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을 끝으로 더 이상 회당에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듣고 보고, 알고 겪어온 나자렛 예수와는 너무나 다른 예수님의 언행을 접하며 놀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관계와 성장과정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그의 가르침에는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고, 그의 치유행위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깔려 있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예수가 아니었기에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놀람이 분노로 이어져 결국 그것은 불신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의 기원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13,54-56 참조).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13,57)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잘것없는 신분에 대한 자신들의 익숙함과 굳어진 시각 때문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놀랐지만, 불쾌하게 여겨 분노하고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근본 원인은 친숙함과 익숙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험과 지식, 감각적 체험에 익숙해지면 안정감을 느끼게 되지요. 안정감을 느끼면 변화보다는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안주하려 합니다. 


이런 익숙함과 안주가 생각에도 영향을 미쳐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신념고착 등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이런 것들은 새롭게 보고 생각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익숙하고 친숙하게 길들여진 것들을 추구하는 한 창조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삶의 중심이 하느님과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요. 


친숙함과 익숙함의 걸림돌은 결국 불신을 낳게 됩니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선입견과 분노의 장벽에 걸려 넘어져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보고 싶은 것만 보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믿지 않는 고향에서는 더 이상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13,58).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순간 창조의 새로움을 자신에게 허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며 친숙함과 익숙함의 방주에서 안주하고 있습니까? 다른 이들과 세상을 과거의 틀과 선입견, 굳어진 사고의 틀로 바라보고 판단하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은총의 시간이지요. 따라서 매순간 과거의 틀을 버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새롭게 보는 창조의 시간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익숙함과 친숙함,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하느님을 알아 뵙고 그 뜻을 실행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겠습니다. 


오늘도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며, 생각을 바꾸어 선입견과 편견, 과거의 감정과 익숙함의 잠에서 깨어나 평범한 일상사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바의 이방인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기며 실행했던 성모 마리아, 놀라운 겸손을 보인 백인대장과 전 재산을 바친 가난한 과부를 떠올립니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19,33-34)

 김종오 신부님

창에 찔린 주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와 물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범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우리지만,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새롭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창에 찔려 열린 옆구리는 인류를 향해 열린 구원의 소식을 알려줍니다.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특히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모든 이에게 열린 주님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와 물은 당신의 목숨보다 우리는 더 소중한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겠다는 징표입니다.

예수성심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도 옆구리가 찔려 피를 흘려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리라는 마음입니다. 어떠한 고통과 시련이 와도 주님과 이웃을 끊임없이 사랑하리라는 우리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깰 때마다 주님의 옆구리에서는 다시 피와 물이 흐릅니다.

피를 흘리는 고통도 없이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낭만적인 환상일 뿐입니다. 고통을 각오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주님의 피와 물처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우리의 사랑도 조금씩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고통을 통해서 참 사랑으로 됩니다. 현실이 아무리 우리의 사랑을 ‘비틀어도’ 사랑이신 주님을 우리가 떠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찔리신 옆구리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와 물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우스갯말로 “약은 자기 돈 주고 사 먹지 않으면 효능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도 아닌데 왜 이런 말이 나왔나 싶습니다. 누구 돈으로 사먹던 화학적 반응은 똑같을 텐데 왜 여기에 복용자의 인성을 약 효능의 매개변수로 삼는지 의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고향 나자렛에 가신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8) 라고 기록합니다.

이 기사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2) 우리가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최원석

만약에 주님이 다시 우리 일상의 삶으로 오신다면 2000년전과 같이 일가 친척과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할까요 ? 그런 상상을 하여 봅니다. 주님이 이세상에 다시 오시면 사람들은 상상하기를 긴 옷을 입고 머리는 길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성화에서 본 느낌데로 주님의 모습을 그려볼것입니다.그런데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도 예전과 같이 가족들과 일가 친척들로 부터 미쳤다 ..혹은 그만 두게하라 혹은 주님의 동네에 다시 가셔도 제는 어디 사람인데 그런 말이 다시 재생될것인가 ? 그런 물음이 나옵니다. 그러면 2000년전과 같이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그리고 다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와 같은 인물이 나와서 주님을 십자가? 부활이 다시 될것인가 ? 이런 아주 어려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질문에 무엇이라 ? 하지만 성경속에서는 주님이 다시 오실때에는 영광속에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왜 다시오심과 오늘에 나오는 복음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냐 ? 물어보실것 같아요 .. 주님이 구세주로 오셨을때는 어둠으로 가득찬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이 빛이라고는 없는 무질서한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 눈이 원래 두개 달렸는데 대부분은 하나의 눈만을 뜨고 살아왔습니다. 다른 눈은 감고 살았다는 것이지요.. 하나의 눈은 육의 눈이고 또다른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영적인 눈은 감은 상태에서 사람들은 살아왔겠지요.. 자신안에 또 다른 눈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을 것입니다...눈이 감겨져 있는 상황속에서 양눈을 다뜨고 계신 주님의 행동을 보니 그들이 보기에는 이 사람은 나하고 다르네 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지요 .. 그것은 주님의 고향 혹은 주님의 공생활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다름이 있었고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추방 혹은 죽음으로 몰고 간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하늘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게하여주시고 그 곳을 바로 보려면 영적인 눈이 있어야하고 현재 잠자고 있는 눈을 뜨게 우리를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영적인 눈에 대한 몰이해인 시대가 주님이 공생활 하신 시대 같습니다.  현 시대는 영적인 것이 활동하고 있는 시대같습니다. 주님이 다시오시는 시대는 영적으로 완성의 시대일것 같아요 ..영적인 것에 대한 몰이해가 오늘 복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우리의 또 다른 눈, 영의 눈을 뜰수 있어야겠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하여서는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지요 ..주님 안에서 머물면서 즐거운 하루되세요 .. 

아멘.




<내게 당신은 오직>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제나 내일의 당신으로

당신을 품지 않을 거예요 


내게 당신은 오직

오늘의 당신이니까요 


그러니 지금 그대로

편하게 내게 오세요 


당신이 지닌 무엇 때문에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내게 당신은 오직

당신의 무엇이 아닌 당신이니까요 


그러니 있는 그대로

가볍게 내게 오세요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 5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오늘

한 번뿐인 삶안에서

매력적인 한 사람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시골사제로

살아가는 

비안네 사제를

만나러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정성어린

따뜻한 사랑

때문입니다.


부족함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우리의 삶이란

만들어진 여정이

아니라 분명 

만들어가는

여정입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사제직분을 위해

오래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그 여정을 통해

정성을 배우게 됩니다.


정성들여

미사를 집전하고

정성들여 고해자들의

고해를 들었습니다.


정성을 나누는 

그 마음은

실패와 좌절까지도

은총이 되게했습니다.


많이 아파한 사람이

그래서 더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주저앉았던

한 사람이

다시 일어납니다.


하느님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 기쁨임을

아셨습니다.


실패와 좌절로

아파하는 이들을 향해

비안네 사제는 

따뜻한 시선으로

다시 일어나라며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느님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이냐시오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 이냐시오 신부님이 있습니다. 늘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신부님입니다. 언제나 본당을 잘 지키는 신부님입니다. 그래서 24년 동안 본당 사목만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창 신부님이 언제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이라는 보물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영신수련은 4주간에 걸쳐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길잡이입니다. 준비기도, 구할 은총, 주어진 성서말씀 묵상, 마침기도, 묵상내용 정리의 순서로 30일 동안 하루에 5시간 정도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10년 동안 신학생들과 함께 3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성소국에 있기 때문에 아쉽게도 30일 피정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신수련은 그 내용이 모두 좋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원리와 기초’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따름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유익하면 그것을 사용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병환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기꺼이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작은 가시가 박혀있으면 빼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많은 가시들이 박혀있습니다. ‘분노와 원망,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의 가시들입니다. 이런 가시가 박혀있으면 우리는 참된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영적인 가시가 박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영혼의 쓰레기를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영신수련의 시작입니다.




섣부른 앎이 병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 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 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전례와 삶, -전례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전례와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전례영성, 전례공동체라는 말은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익숙해진 용어들입니다. 교회와 전례가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지 ‘교회는 전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사람만이 전례를 지닙니다. 사람과 여타 동물들을 확연히 구분짓는게 전례입니다. 끊임없이 반복하여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즉 영성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동시에 이들을 표현하는 필수적 수단이 전례입니다. 전례가 사라지면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영성도 사라집니다. 보존, 유지할 길이 없습니다. 


나라는 국격을 말하고 사람은 인격을 말합니다. 우리 삶에 품격을, 즉 격을 주는 전례요, 우리 삶에 향기를 주는 전례축제입니다. 하여 ‘전례의 삶화’, ‘삶의 전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질서를 주는 전례축일들입니다. 만약 우리 수도공동생활에 전례가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애당초 전례 축일없이는 살 수 없는 종교적 인간들이요 오늘날 혼란하고 무질서한 세상 현실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아닌 어디서도 전례가 생활화된 곳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전례교육은 그대로 신앙교육이요 인간교육임을, 또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전례 축일들임을 깨닫습니다. 결국은 전례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동체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고 정체성과 일치를 형성하는데 전례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전례수행의 영적훈련을 통한 참 자유와 기쁨의 삶입니다. 특히 정주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부터 제1독서는 탈출기가 끝나고 레위기의 시작입니다. 탈출의 여정에서 정주의 내적여정에 돌입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우선적으로 확립된 것이 축일들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 23장은 이스라엘의 전례력으로 축일들을 소개합니다. 안실일, 파스카와 무교절,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 주간절, 칠월 초하루, 속죄일, 초막절 등 참 많습니다. 서두와 맺음말을 통해 전례축일들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밝힙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을 이러하다. 이것들이 나의 축일이다.”(레위23,1-3)


“그리하여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의 축일들을 일러 주었다.”(레위23,44)


이런 축일들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선택사항이 아닌 완전히 필수의무사항임을 다음 반복되는 구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사는 어디에서나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레위23,21ㄷ;31,ㄴ)


우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이스라엘의 전례력입니다. 사람이 전례에 참여하고 전례가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2000년 동안 축적된 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얼마나 풍요하고 정교한지요. 일년 내내 아니 평생 ‘전례주년의 궤도’ 따라 반복하여 돌아가는 ‘전례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의 위업을 잊지 않고 기억을 현재화 함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를 살게 하는 전례은총입니다. 우리의 하루 삶도 미사전례와 시간경 전례가 하루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줍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허무인생을 충만인생으로 바꿔주는 전례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위로하고 치유하며, 정화하고 성화하여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하여 저는 오늘 복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전례에서 찾았습니다. 전례에 충실할 때 우리의 무지와 교만과 탐욕, 그리고 불신과 편견과 선입견이란 마음의 병의 치유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정성껏 전례에 참여하면서 주님께 우리를 맞춰갈 때 이런 치유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ㄷ)


예수님은 말씀하시며 쓸쓸히 떠나십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 인간의 보편적 반응입니다. 질투와 시샘, 선입견과 편견, 불신등 마치 원죄의 흔적과도 같은 그대로 마음이 병든 모습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정화하고 성화하시어 우리 모두 당신을 닮게 하십니다. 아멘.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태 13,56-57)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나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이나 나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아보이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축하해 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거나 맘에 안드는 사람이라면 보통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무리 못나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예수님을 비롯한 많은 성인들과 위인들은 오히려 대다수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무지랭이 같은 나도 하느님의 작은 축복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보잘것없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하거나 좋은 말을 하게 되면 하느님의 은혜에 함께 감사드려야겠지요.


오늘 보잘것없는 나를 큰 사람으로 축복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내가 만나는 다른 사람의 축복을 함께 기뻐해 주는 그런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많은 것을 얻었지?"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기도를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를

회심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종신서원을 준비하며

가장 좋으신 주님을

체험했던 그 벅찬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많은 것을 얻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이

닫힌 제 마음을 열었으며

아버지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가장 좋으신 사랑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말씀은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해줍니다.


영신수련은

말씀을 통한 

간절한 기도로

하느님 사랑을

절실히 깨닫고

신뢰하게 합니다.


영신수련의 기도는

제게 있어 삶의 

혁명과도 같은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장 아프고

가장 힘든 시간들속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종신 수련을 준비하며

영신 수련 기도의

마지막 밤을 기억합니다.


모든 생명이 사랑으로

뜨겁게 다가오고

개울물 소리가

부활의 함성으로 들려오던

뜨거운 말씀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분명 살아계십니다.


영신수련은 

삶의 시작과 마침입니다.


기도로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드리니

우리의 일상은 

가장 빛나는 생명의

순간이 됩니다.


가장 소중한 삶의 방법은

분명 기도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 많은 좌절과 실패를

체험했던 알폰소 성인의 삶에서

구속의 의미를 새롭게 만납니다.


생명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알폰소 성인은

생명의 참된 길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알폰소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노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초탈과 육화를 발견했습니다.


자아를 넘어서고

자아를 초월하기 위한 길이

바로 복음의 길입니다.


복음의 길은

언제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해

우리를 초대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현장안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게 됩니다.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곳을 향해

나아갔던 성인의 삶에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용기와 강한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저항하지도 않으며

집착하지도 않으며

지나가야 할 과정에

충실했던 성인의 삶은

매순간 기도로 봉헌되는

기도의 삶 이었습니다.


실패와 위기 안에서도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열정과 인내를 잃지 않았던

성인을 통해 다시금

희망과 용기를 얻는

소중한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실패와 좌절도 주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듯

아픔과 시련에서도

가장 큰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가장 큰 최고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임을 기억하는

기쁨의 날 되십시오.




알고 있다.

이수환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가졌던 의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다’는 마음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겠지요? 다른 사람에게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만 가족에게서 예수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어떻게 하면 ‘알고 있다’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의 작은 경험담이 있어서 함께 나눕니다.


예전에 외국의 어느 공동체에 살 때였습니다. 식사시간이 되면 공동체 책임을 맡고 있던 신부님께서는 항상 “How are you?(어떠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I'm fine, thank you. And you?(잘 지내요. 신부님은요?)”라는 형식적인 답을 하다가 어느 날 그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책임자 신부님이기에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다 알고 있을 텐데 왜 자꾸 어떠냐고 물으시는 걸까?’ 시간이 흐른 뒤 깨닫게 된 것은 제 마음이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책임자 신부님은 제가 하는 일보다 제 마음의 상태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마음이 어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알고 있다’는 마음의 극복도 우리 일상 안에 있지요. ‘(마음이) 어떠니?’ 하고 물어주세요. 그러면 더 중요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볼 때도 있겠지요?





저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납니다. 벌써 13년째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지요. 이러한 저를 새벽 형 인간이라고도 말씀하시는데,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저의 모습이었지요. 또 사람들 만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낮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열심히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마음속에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저만의 시간, 저만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저만의 방에 예수님을 초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는 시간,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과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생각해보니 바로 이 새벽 시간인 것이지요. 이 시간에는 전화도 오지 않습니다. 또 이 시간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과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우울증을 비롯한 불안, 두려움 등의 정신적인 병들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예전에 비해서 풍요로움을 겪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더욱 더 행복한 사람이 늘어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풍요로움을 뒤로 정신적인 고통과 시련을 겪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신의 방에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채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 마약, 돈, 각종 겉으로만 화려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문화들……. 이러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계실 공간이 없는 것이지요. 또한 욕심과 이기심 등으로 인해 주님의 자리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외로워하고, 더욱 더 괴로워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십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 사람들은 이분이야 말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향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들, 자신들이 예수님보다 더 낫다는 우월의식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방에 모시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곳에서 행하셨던 많은 기적들을 고향에서 오히려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고향이기에 더 많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주님을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혜택을 더 받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주님을 내 자신의 방에 모셔야 합니다. 다른 것들이 채워질 때 행복해질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내 자신의 방에서 단 둘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들을 계속해서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작은 일을 특별한 방법으로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마더 데레사).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행복과의 연결 고리를 돈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으로 행복을 만들거나 살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의 양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을 비롯한 연구자들에 의하면 행복의 양은 연 소득 7만 5천 불(약 8천만 원)이 정점이라고 합니다. 이해를 위해 우리나라 화폐로 바꾸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연봉이 2천만 원일 때보다 4천만 원일 때 좀 더 행복하지만, 이 연봉이 8천만 원을 넘어선다고 해서 더 큰 행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은 여전히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돈을 지혜롭게 쓰면 행복을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돈 자체가 행복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 즉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다는 이야기다.

왜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운 눈으로 보지 못했을까?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리가 보통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대로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늘 못마땅하게 여기는 쪽은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은 우리가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 저지를 수 있는 잘못에 대해 묵상해보고자 한다.


보통 우리가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진짜로 그 누군가가 옳지 못한 모습을 보였을 때일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못마땅한 이를 이해하며 품을 것인가 내칠 것인가 하는 것은 개인의 인격에 맡겨야 할 다른 이야기다.


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한 가지 이유이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인해서, 그 누군가의 행위나 모습에 상관없이 그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이다.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셨고, 다른 곳에서 하셨던 똑 같은 모습을 보이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놀라워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결론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문제란 무엇인가?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만 들어보고 싶다.


하나는 굳어진 생각이다. 보통 우리는 이를 고정관념 혹은 편견 혹은 선입견이라고 말한다.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상대의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행위이다.

그것도 좋은 느낌이 아닌 부정적인 느낌으로 닫아버리는 폭력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바라본 동네 사람들의 마음의 반응 중 하나는 “네 집안의 모든 것을 아는데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느냐?”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나는 서글픈 모습이다.


또 하나는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라는 치졸한 감정의 세계이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의 특징 중의 하나는 상대를 가능하면 자신보다 낮은 상태로 끌어내리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되면 미움의 감정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자유로워져야 한다.

누군가가 못마땅해질 때, 먼저 자신의 상처에서 나오는 반응이 아닌가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것이 상처를 치유해 나아가는 방법이며, 또 다른 상처를 만들지 않는 길이다.


 


바깥에서 성인(聖人) 소리 듣는 것보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같은 동네 살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거부한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을 바라봅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특별할 것이 없었던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 역시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예수님이었는데, 율법학교라고는 문턱도 못 넘어가본 예수님이었는데, 그저 조용히 목수 일을 하며 30년을 지낸 예수님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자렛의 한 회당에서 설교를 시작하는데,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고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떨떠름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화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많은 경우 우리 역시 나자렛 사람들과 비슷한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와 동고동락하는 형제들 안에 메시아성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 안에 제2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회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하느님 나라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잘 안다는 이유 하나로, 그의 부족함과 한계, 취약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 가까이 계시는 메시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해 계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반드시 하느님께서 거처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 가까이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찾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며 그들 안에 머물고 계시는 메시아를 발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내가 점점 작아지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점점 커지도록 나 자신을 내어놓고 비워내야겠습니다.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 제2의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시켜나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제 부끄러운 글이 활자화되어 나올 때 마다 다른 누구에 앞서 같이 살아가는 형제들 앞에서 많이 부끄럽습니다. 내가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부분들이 그럴 듯하게 묘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쫌생이’면서도 글로는 성인군자처럼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공동 휴게실에 제 글이 실린 잡지들이 배달되어오면 보는 즉시 깊숙한 곳으로 감춰버립니다. ㅋㅋ 


바깥에서 성인(聖人) 소리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암묵적 살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의 동기 신부 중 하나는 첫 보좌 발령을 자신의 출신본당에서 분가한 성당으로 받았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 미사를 하고 제의를 입은 채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야~ 고추 내놓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신부님이 되셨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부 할머니의 친구 분이셨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한 청년 자매가 뛰어오면서 사람 많은데 “오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술자리를 하여도 사제로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신부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주임 신부님에게 꼭 붙어 있으면서 필요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과는 반대로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로서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누군가가 멀어지려 한다면 내가 그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일 때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들의 생각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늘 외롭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지 판단 받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주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그 가난한 부부의 남편은 매독 환자였고 부인은 폐결핵 환자다. 그리고 그들 부부에게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첫째아들은 병으로 앓다가 죽고 나머지 세 아이들도 선천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병을 가지고 태어나서 잔병을 치루다 허약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부인이 또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자, 학생들 학생들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낙태시켜야 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교수님이 대답했습니다.

“너희들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은 죽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판단하면서 내 안에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주위엔 항상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안해지는 것은 혹시 내 안에 시체들만 즐비한 겉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무덤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모두를 판단하며 내 안에서 죽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왜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아벨만 인정하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다 지도자들은 사람에서건 하느님에서건 자신들이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회사의 경리 책임자가 갑자기 자살을 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경찰은 즉각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표면상으로는 자살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맡아서 했던 회사 장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휴지통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나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니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를 인정해주지 않음으로써 암묵적 살인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인정과 칭찬을 하며 살아갑니까? 북극에서 죽어가는 곰의 책임이 온난화를 일으키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듯이, 오늘 죽어가는 이들의 책임도 우리에게 전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 인정을 받읍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자신을 높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남을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면 됩니다. 이런 사람 싫어할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은 암묵적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사랑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사랑에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픔과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누군가를 환영하고 존중할 마음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호기심은 있으되

사랑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평범한 그대로를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자신의 출발점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의 출발점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장의 시간을 왜곡시켰어는 안됩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순박한 시간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 어떤 이도 상대를 무시할 자격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목수의 아들이란 이유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합니다.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작은 모습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큰 모습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한 가지 모습만 보려했어는 안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생명의 빛을 지닌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우리의 판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편견과 선입견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사랑하는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웃에게 좀 더 너그워지도록

기도하는 시간되십시오. 


이웃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요즘 자신의 환경에 대해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신부들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신학생 때에는 신부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보좌신부가 되어서는 본당주임신부를 부러워합니다. 또 도시의 큰 본당신부는 작은 규모의 시골 본당신부를 부러워하고 있으며, 특수사목을 담당하는 신부 역시 작은 본당이라도 상관없이 본당신부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도 합니다.


솔직히 완벽하게 만족을 가져다주는 환경이 있을까요? 그러한 환경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로 작정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는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에 남편에 대해 만족하는 아내는 30%도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결혼 전에는 최고의 배우자라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후회할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 “내가 미쳤지. 어떻게 저런 인간과 결혼했을까?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의 배우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자신과 똑같이 상대의 단점만을 바라보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배우자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미쳤지. 어떻게 저런 인간과 결혼했을까?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단점만을 보려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장점만을 보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은 단점을 보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장점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부부 관계 안에서도 장점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드는 것이고, 자기의 일터 안에서도 장점을 바라보며 행복한 직장 생활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부정적인 생각만을 내세운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주님 곁으로 나아갈 때, 내 안에 있는 불평불만을 줄이면서 행복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의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사실 이때 이미 다른 지역에서 누리는 예수님의 인기는 거의 슈퍼스타 수준이었지요. 놀라운 기적과 커다란 위로와 힘을 주시는 말씀에 엄청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단점만을 보려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결국 예수님께서 기적을 많이 일으킬 수 없도록 만드는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즉, 주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고 있나요?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점검하면서, 불평불만의 부정적 마음을 줄이고 주님을 무한히 신뢰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봄에 피는 꽃은 하나의 질문입니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라고 묻는(도종환).


말이 되는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말씀드립니다.

영구가 결혼을 했습니다. 이 결혼을 친척 어르신이 축하하시며 이렇게 물으셨지요.

“축하하네. 그런데 누구랑 결혼했나?”

영구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여자랑 결혼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척 어르신은 “예끼 이사람 농담도...그럼 남자랑 결혼하는 사람도 있나?”라고 반문하셨지요. 이에 영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우리 누나는 남자랑 결혼했는데요.”

어떻습니까? 처음에 했던 영구의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말이 되는 이야기가 맞지 않습니까?

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어쩌면 상대방에 말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수용의 마음이 내 이웃을 이해하고, 내 이웃과 함께 하는데 커다란 몫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10번도 더 바뀌는 인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자들의 양성담당 직무를 맡아 일하면서 가장 마음이 씁쓸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제가 한때 동반했던 형제들이 다른 공동체로 옮겨가서 제몫을 해내지 못할 때입니다. 수련자 때의 초심, 신선함, 초롱초롱함이, 얼마나 됐다고 벌써 퇴색해버리고,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살아갈 때,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 짐이 될 때, 내가 공부 헛시켰구나, 내 부덕의 소치로구나, 하며 가슴을 치게 됩니다.


반대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겠습니까?


제가 동반했던 형제들이 어느새 무럭무럭 성장을 거듭해서 이젠 큰 거목이 되고, 또 다른 스승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큰 그늘 아래 머물며 기뻐할 때,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스승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의 수하에 있는 제자들이 늘 자신의 보살핌 아래, 자신의 지도 아래, 자신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자들이 나를 뛰어넘어 계속 일취월장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스승에게는 제자의 성장이 가장 큰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백지 상태였던 제자들이, 아무 것도 몰랐던 제자들이, 별로 바탕도 없던 제자들이, 그 부족했던 제자들이 내 도움에 힘입어,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의 꼴을 갖추고, 자신의 몫을 다하고, 또 다른 스승으로 세상 앞에 우뚝 설 때 스승은 제 몫을 100% 다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 한 가지를 범합니다. 사람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10번도 더 바뀌는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인간인데, 인간이란 존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한없이 성장할 수 있는데, 그래서 하느님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는데, 그들은 그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한적한 시골에 파 묻혀 조용조용 살아가던 평범한 나자렛의 총각에만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내재되어 있던 폭발적인 잠재성, 무한한 가능성을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 깃들어 있던 신성(神性)을 외면했습니다. 예수님이란 질그릇 안에 담겨져 있던 찬란한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평범함 안에 비범함이, 가까운 곳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의외로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는 우리들 사이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 역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크게 비울 때 사방이 천국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문을 활짝 열 때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까지 무기력하게 하는 작은 믿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마리아론 시험 볼 때의 일입니다. 교수님이 성모님의 평생 동정의 의미를 지금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현대 젊은이들이라 함은 믿음이 없고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는 평생 동정 교리를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은 기억 했지만 내가 수긍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기는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교수님은 수업 때 말씀하신 대로, “성경으로부터 시작 해야지. 성경 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는 예언도 있고, 복음에서도 처녀로 그리스도를 낳으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은 믿겠습니까?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경도 믿지 않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성경을 대고 거기에 나온다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수님도 제 말에 대해 대답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느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장에 가셨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요셉의 아들 예수만 생각하며 그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기적을 행하고 싶으셔도 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능력도 발휘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기 신부 중 하나는 첫 보좌 발령을 자신의 출신본당에서 분가한 성당으로 받았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 미사를 하고 제의를 입은 채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야~ 고추 내놓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신부님이 되셨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부 할머니의 친구 분이셨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한 청년 자매가 뛰어오면서 사람 많은데 “오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술자리를 하여도 사제로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사제가 사제가 되기 이전 모습을 더 좋아하였고 그렇게 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부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주임 신부님에게 꼭 붙어 있으면서 필요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과는 반대로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로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사제는 그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사제가 아니고 사제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고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사제 서품 피정 때 제 앞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일주일 동안 피정을 하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마지막 날 저녁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 조그만 나무에 나뭇잎이 유일하게 하나 달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잎새’를 연상하며 바라보면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자 바로 제 앞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저는 온 우주의 시간이 멈추고 지금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에 집중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태초부터 바로 지금 내가 지나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두신 나뭇잎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렇게 나뭇잎 하나로 주님의 섭리하심이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기에 내가 사제가 되기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끌어 주신 주님의 섭리까지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성소를 확신하며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게 뭔 대수라고...”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수녀님은 “저는 신부님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믿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는 더 이상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말로는 그 때 느꼈던 소름끼치는 기억을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무의미하겠다는 생각에 그 사람들에게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느끼는 것은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더 이상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마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고 싶지만 우리 믿음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그 분의 활동은 내 안에서 제한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권능도 보이실 수 없으셨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에 당신의 권능을 보이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에 사십니다.

좁쌀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그 분의 권능을 드러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나를 버리고 믿음을 증가시켜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더 사시도록 해야겠습니다.




배 아플 때

황지원 신부님

농담을 좋아하시는 노신부님게서 갑자기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황 신부, 우리나라에 좋은 민간요법이 많이 있잖아, 혹시 배가 갑자기 아플 때 어떻게 하면 아픈 걸 싹~ 사라지게 하는 줄 아나?"

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사촌이 땅을 팔면 금방 나아"하고 말씀하십니다.

보지도 못한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우리네 속담을 이용한 농담이었습니다. 예전에 한 일간지에서, 행복이 그 공동체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이웃에 살면 그 옆에 있는 사람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한 사람이 친척이면, 영향력이 뚝 떨어지고, 또한 회사나 이해관계를 가진 공동체에서는 그 영향력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하느님게서는 나를 통해서보다 내 이웃, 내 형제들을 통해서 더 잘 드러나시는데, 거기서 하느님을 보기보다 오히려 눈을 가리고 배만 아파하는 건 아닐까요.

배앓이를 고치는 길은 사촌이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박수를 쳐주고 하느님게 감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믿음2 - 보는 것과 믿는 것

박후임 목사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눈으로 봐왔기에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할 뿐이고 ,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 있으니 못 마땅할 뿐이다 . 예수님은 고향에서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다 . 이상했다 . 내 생각 같아서는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많이 베풀어 생각을 바꾸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는 예수님을 보면서 

보이는 것이 있다. 기적을 본다고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기적은 믿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하느님과 하나 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눈이 떠진다. 이것은 지난번 마르타의 이야기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있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없는 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내가 모르니 온전히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 있을 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기적인 것이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기적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숨 쉬는 것, 걷는 것, 아픈 것조차 기적이요, 은총인 것이다. 

“주는 누구시뇨? 말씀이시다. 

나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주는 한울에 가셨다 하나 말씀은 예 계시다. 

나는 죽겠으나 믿음은 살겠다. ” 

(다석 유영모의 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는 그때 없었지만 지난 달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차원에서 저희 형제들끼리 성격유형을 같이 검사하였고 성격유형에 따라 어떻게 접근하고 대응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약도를 그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형제들이 너무도 잘 아는 길, 시청역에서 수도원까지의 약도를 처음 찾아오는 사람을 위하여 그리는데 감각형의 형제들은 약도를 아주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린데 비해 직관형의 형제들은 한 줄 죽 긋고 중요한 건물 몇 개만 그렸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날 모든 것을 끝내고 자발적으로 뒷설거지를 하는데 설거지하는 하는 형제들이 모두 같은 형의 형제들이어서 같이 웃었답니다.


그러니 많은 경우 어떻게 저런 인간이 있어 하며 그 사람의 인격, 됨됨이를 탓하는데, 사실은 인격을 탓하기보다 성격을 탓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그 사람이 그런 성격을 타고난 것은 부모로부터 타고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이 그렇게 태어나게 한 것이니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를 신앙적으로 보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고향에 가시어 지혜와 기적을 드러내 보이셨는데 이때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하며 놀라고 심지어 못 마땅해 했다고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을 가졌다면 놀랄 것이 아니라 신비가 드러남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을 것이고 못 마땅해 할 것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신앙의 눈을 못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신적 차원을 가진 것이 못 마땅합니다.

숫제 다른 고장이나 다른 신분의 사람이 신적 차원을 가졌다면 한 풀 꺾고 인정해줄 텐데 자기들과 비슷하고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낸, 어찌 보면 자기들보다 비천한 목수의 아들에게 신적 차원이 있다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보통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니.....

그러면 이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이의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도...


그러니 그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고, 못 마땅한 것이 아니라 나도 그분의 자녀임에 감사로울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 내 삶의 터에서 신앙의 눈을 벼려야 할 것입니다.

 




제 동창신부 중의 한명이 어느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을 때 경험했던 일입니다. 그 신부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노력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어떤 교우가 홍탁(洪濁)을 가져온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언제나 처럼 하나를 집어 먹고서는 “와~~ 너무 맛있어요.”를 반복하여 말하면서 홍탁을 드셨다고 합니다. 사실 신부님께서는 심한 냄새를 내는 이 홍탁을 좋아하시지 않았지요. 하지만 본당신부가 왔다고 홍탁을 들고 오신 교우의 성의에 감사해서 정말로 좋아하는 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부님께서 어느 집을 가든지 항상 눈앞에는 홍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교우들이 사제관으로 홍탁을 갖다 주어서 홍탁 처리하는데 참으로 힘들었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신부님께서는 어디를 가든 맛있다는 소리를 안 한다고 합니다.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 싫어하는 음식을 그 본당에 있는 동안 계속 먹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사실 좋아하는 음식도 계속 먹다보면 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본당의 교우들에게는 하나의 편견이 생겼지요.

‘신부님은 홍탁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아마 이렇게 간단한 명제는 이렇게까지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신부님은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 오로지 홍탁만 먹는다.’

그 본당신자들은 신부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신부님을 더욱 더 힘들게 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대한 고향사람들의 편견을 볼 수 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같은 동네 살았던 목수의 아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고향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마저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폄하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까지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각종 편견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편견은 지금의 내 행동을 항상 최선의 방법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편견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최악의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셨고, 그 기준으로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만약 세상의 편견을 가지고 제자들을 뽑으셨다면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만나는 나의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눈인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편견이 사라지는 곳에 주님의 기적도 있습니다.


편견을 버리세요.


산을 넘으면 길이 있다(딩푸, '내 삶에 따뜻한 위안이 되는 책'중에서)

어느 날, 시무룩해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아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힘없이 대답했다. "지난번보다 성적이 많이 떨어졌어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않겠니? 이러고 있지 말고 나와 함께 산에 가자."

아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따라나섰다.

집을 나서며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만약 산 중턱에서 갑자기 비를 만나면 어떡하죠?"

"걱정할 것 없다. 그럴 때는 산 정상으로 뛰어가면 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아버지의 대답에 아들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나요? 산 정상은 비바람이 훨씬 더 세잖아요."

"그래, 물론 산 정상에는 비바람이 더 세지. 하지만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란다. 반대로 산 아래는 비바람이 약해서 안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비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고 홍수를 만나 익사할 수도 있지. 비바람을 만났다고 피하려고만 하면 거센 흐름에 말려들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에 맞서면 살아남을 수 있는 거란다. 삶도 마찬가지야. 역경에 맞서 싸운 경험이 없다면 참된 인생이라고 할 수 없어. 패자는 지름길을 찾으려 하지만 승자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한단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서 조금은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산 중턱쯤 올라가서 그만 길을 잃어 버리자 아들이 울먹이며 말했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제 자신이 미워요. 세상에 성공만 있고 실패는 없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어떻게 성공만 있을 수 있겠니? 실패 없는 성공은 가치가 없단다.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지. 자, 고개를 들어보렴. 너는 지금까지 줄곧 고개를 숙이고 걸어왔지?"

아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아버지가 물었다. "뭐가 보이니?"

"산 너머에 또 산이 있어요. 아! 그리고 하늘도요."

"그래, 그럼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보이겠구나. 앞으로도 어려움을 만나고 실패를 겪을때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렴.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향해 걸어가는 거야. 거센 풍랑뒤에 고요한 바다가 있고, 험난한 길 뒤에 평탄한 대로가 있다는 것을 믿으렴. 그러면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단다. 작은 실패나 잘못으로 주저앉고 싶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란다. 알겠지?"

  



존중

임문철 신부님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그만 택시 기사와 말다툼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당 부근에 늘 차가 막히는데, 기사가 다른 길로 돌아가길래 “다른 길로 가려면 한마디 해주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꽤나 공손하게 지적했다고 했는데, 그 택시 기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면서 막힌 걸 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그때 내려달라지 않고 왜 이제 이야기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다른 상황에서 더 싸울 수도 없고, ‘손님이 그 정도 말도 못하느냐,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라’ 하고 내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그저 당연한 내 권리를 상기시킨 것뿐인데, 고약한 기사를 만났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로만 칼라까지 하고 있었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택시 기사와 말다툼이나 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습니다다. 이런 저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니, 늘 인정받고 대접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자들과 회의를 할 때, 저와 의견이 다를 때는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신부인 제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 때는 쉽게 화가 나곤 합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좀 더 너그러웠다면 택시 기사에게 어쭙잖은 훈계를 하는 대신, “이렇게 막힐 땐 참 짜증나시죠?” 하고 먼저 그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

장용진 신부님

저희 성당 앞에는 1.5톤 트럭을 가게삼아 여러 가지 과일을 파시는 분이 계십니다. 소규모로 하시는 일이다 보니 그 과일들의 상품 정도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맛있지도 않은 과일을 맛있다며 판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을 상인으로서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일이면 어김없이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는 개신교 신자로서 그 교회에서 집사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상인으로서는 별로였지만 교인으로서는 본받을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맛없는 과일을 몇 번 맛있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과일이야 이것이 맛있으면 저것은 맛없을 수도 있고, 자신이 먹어 본 것은 맛있지만 남이 먹은 것은 맛없는 것일 수도 있기에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주일을 지킨다는 점이었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로서 그런지 맛없는 과일을 파는 것 같은데도 여지껏 장사를 계속 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우리 성당 앞의 그 개신교 신자 장사꾼처럼 똑 같은 방식으로 과일 장사를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는 주일에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거룩한 모임을 하라는 계명을 알기라도 하는지 아주 굳굳하게(!) 주일에 장사를 계속 하십니다. 그러다 가끔 주일 미사에 빠지시기도 합니다. 


이런 천주교 신자의 주일 지내는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분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현실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하루라도 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신들이 가진 생각, 신념, 믿음 때문에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자렛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1독서는 계절에 따른 야훼 하느님의 축제일과 거룩한 모임을 하는 날에는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함을 알려줍니다. 


이 두 이야기를 오늘 현실에서 보게 되는 두 과일 장사에게 적용한다면 전자인 개신교 신자 과일 장사는 그 믿음과 행동이 후자인 천주교 신자 과일 장사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개신교 신자의 경우엔 제1독서의 말씀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의식주의 해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루가 복음 12장 31절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걱정하며 휴식도 없이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박혜원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곳이다. 고향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벗은 몸으로 다니는 것과 같다. 또한 인간은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인간이 없다. 음행한 여자를 치려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했을 때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만 남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또한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은폐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어둔 역사에 동참하는 공범자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명성이 통하지 않는 고향에서 그 누구도 떳떳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그 속에 예수님도 함께 몰아넣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고와 지식 안에서 예수님을 인식하려 했다. 그리고 자기의 범주 안에 예수님을 넣으려 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 이것이 우리 인간 인식의 한계다.

「묵자」 공수(公輸) 편에 보면 묵자가 초나라의 침략을 저지했음에도 송나라 문지기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박대했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믿을 것이 못 된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 존재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인정받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에 진정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기적 속에 살면서도 기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이영훈 신부님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은 수 만 년 전부터 세상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까지 그 사색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아직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알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앎이 넓은 바다의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음을 곧장 깨닫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찾아오면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진다. 그러나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곳은 가로등 아랫니지, 세상 전체를 비추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는 가로등 아래일 뿐, 그 외에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으로 가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향 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름없는 나자렛 촌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 구세주로 외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30여년을 함께 산 동네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살면서 오직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 진리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는 것이 없다. 물론 학문적인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뭔지를 모른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닫아놓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없다. 이미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안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할 때, 참된 앎이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부터 이제 새로운 앎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크고 새로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앎을 추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과 역사와 인간 안에서 말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의 모든 삶의 의미, 십자가 죽음, 부활,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가? 우주보다 더 넓으신 예수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소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끝없는 새로움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어느 사제의 말이 생각이 난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긴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압니다. 그 사람의 직업을 압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 사람에게 속한 무엇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고 정작 그 사람 자신만이 남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누군가 나를 제외한 다른 상대방에 대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로 나에 대해서도 해당됩니다. 과연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껍데기들을 바라 보면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편한 식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 얻어진 상대방에 대한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자기 틀에 맞추기 쉽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잦은 만남을 갖는 사람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가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미워하며, 자기 식대로 믿고 자기 식대로 불신합니다.

만남이란 관계맺음입니다. 나와 나와의 만남, 나와 남과의 만남을 통해서 관계를 맺습니다. 참된 관계라면, 믿음의 관계라면 만남의 당사자인 나 뿐만 아니라 만남의 또 다른 당사자인 또 하나의 나와 남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틀을 고집한다면,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매여 있다면, 상대방을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알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 자신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벗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형제 자매일수도 있고, 친구나 동료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지 생각해봅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 자신을 보고 그들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앎이라는 두꺼운 틀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내 안에, 내 관념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고, 자유로워진 그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꽃다발 대신 푸대접의 원인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방문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6)을 옮겨 쓰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장황한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호수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고향을 떠나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고 갈릴래아 전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한 지 3년만에 이루어진 첫 방문이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향사람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래서 예수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도 했다.(마르 3,21) 한번은 예수께서 한참 설교를 하고 계셨는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러가야 했었다.

오늘 고향을 방문한 예수님께 나자렛 사람들이 준비한 것은 축하의 꽃다발이 아니라 푸대접과 불신(不信)이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움을 표하지만 그 놀라움은 예수께 대한 불신과 거부로 변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라는 인물과 그분의 인격을 서로 떼어놓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예수께서 지니신 지혜와 능력 자체는 인정되지만 그것을 예수라는 인물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는 그들의 고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예수가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요, 그들과 같은 범인(凡人)이라는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객관적으로도 존재한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가져다 준 컴퓨터의 기술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컴퓨터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초적으로는 사람 안에 들어 있었던, 사람의 주관적인 인격이 일구어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물을 배제한 그분의 객관적인 가르침과 업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물과 인격, 즉 예수님 전체를 믿는 것이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알폰소 성인의 설교를 들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성인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잊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입으로만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알폰소 성인이 자신의 삶으로 가르침을 보여주었듯이 예수께 대한 믿음은 그분의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저 사람이 어디서?>(13,54-58)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래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지?" 라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일반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도 온화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지혜로울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묵상을 잘 할까?" "저 신부님은, 저 수녀님은, 저 형제는, 저 자매는 어떻게 저렇게도 덕스러울까?"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 본적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 "저 자매는 어떻게 다이어트를 해서 저렇게 살을 뺐지?" "저 자매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예뻐졌지?" "저 사람이 입은 옷이 참 멋있다. 어디에서 샀지?" 아니면 "저 사람은 성질이 대개 나쁘군. 아니 저런 나쁜 사람이 있나?" "저 사람 형편없는 사람이군. 신부가, 수녀가, 신자가 뭐 저래?" "저 사람은 부정축재 자야, 저 사람은 강도야, 저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무식한 사람이야.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등 등.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 과연 나는 어떤 소리를 주로 많이 듣고 또 어떤 소리를 듣기를 바라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 받은 사람이나,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사목 회장이나 구역반장, 단장이나 모두가 대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요, 그 생각이 그 생각이지 상대방을 크게 놀래킬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빛이라면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로운 말을 들려 주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반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도 아무런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말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그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이 그냥 그냥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라는 놀라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어야 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를 희랍어로 Sofia(소피아)라고 하며, 그 뜻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판단력"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르고 그른 것이 있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등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고, 나중에 해야할 일을 먼저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는 愚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가?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 10 참조)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또 설상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는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사도직에서, 학교 공부에서, 활동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고 싶으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지혜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말씀을 읽기는 읽되 그냥 읽는 것으로 그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샘물을 파듯이 깊이 깊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세계와 사고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깊고 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보고 "참 예뻐졌다. 건강해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도 "참 성숙해졌네, 굉장히 지혜로워졌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몇 년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더군다나 성직자의 삶, 수도자의 삶을 살았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한 삶이요 크게 잘못된 삶이다.


묵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듯이 맑은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저 사람의 저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들에게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삶은 신앙인들 특히 복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만이 가능하다.

신앙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길들여 질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앙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휠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그리고 멀리 내다본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에 충실한다면 분명히 몇 년 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놀랠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이 어디에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저 사람이 옛날의 그가 아니네! 저런 여유가, 저런 평화가, 저런 희생이, 저런 온유함이, 저런 사랑이, 저런 기쁨이, 저런 용기가 어디서 왔을까?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네."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저 형편없이 되어버렸네, 저 사람은 옛날 그대로잖아, 아니 저 사람은 더 못되었네, 성질은 더 나빠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척 추해졌구만. 불쌍도 하지!!!"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인생은 빠스카이다. 시간이 흐른만큼 나는 변해간다는 말이다. 어느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자.





우리 성당에는 올해 아흔 이신데도 불구하고, 매 주일 미사에 열심히 참석하시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리고 이 할머니께서는 미사 전이나 또는 미사 후에 제게 박카스 한 병을 비닐봉지에 싸서 주십니다. 너무나도 감사하지요. 그 연세에 성당 나오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인데, 제게 매주 선물까지 주시니까요.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이 박카스를 한 병 주시면서 이러한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이렇게 사는 것은 박카스 때문이에요. 매일 박카스를 마시니까 이렇게 건강하게 장수하며 산답니다.”

할머니의 장수비결은 바로 ‘박카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찮으실 때에는 하루에 한 병 마시던 박카스의 양을 더 늘린다는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할머니에게 박카스는 만병통치약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박카스’가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 어떤 병에도 가장 좋은 효과를 주는 약 중에서 ‘박카스’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 실제로 편찮으실 때 박카스의 양을 늘리면 실제로 병이 낫더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할머니께서는 박카스에 대한 믿음이 강했고, 또 그 믿음에 의해서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효과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득하다면 어떨까요?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고향 역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곳이기에 고향을 들리신 것이지요. 가족과 친지가 있는 곳. 또한 오랜만에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기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안에서 예수님은 커다란 불신을 발견하십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평가절하하면서 이렇게 못마땅해 하고 있지요.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기적은 믿음을 통해서만이 그 의미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적이란 속빈 강정과 같기 때문이지요. 


지금 나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 점수를 스스로 매겨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믿음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커다란 기적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내 믿음 점수를 매겨보세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들...(‘좋은 글’ 중에서)

세상은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달라서

어느 사람은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기

위해서 끊임 없이 모으고 있습니다.


지식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사회적인 그리고 후세에 남을 명예를

원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기를 원해서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며

절개를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안에 사상이 있습니다.

마음에 생각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도, 명예도, 지식도,

그리고 선하고 의롭게 산 것도 마음에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지면 될 것 같아서

인생을 걸면서 그것을 가지려고

전쟁을 하듯이 싸우지만 가져도 가져도

부족하기만 한 것입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을 가지세요.

사람들이 갖고자 수고하고 애쓰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영혼에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면 배가 부르 듯이 마음을

채워서 포만감이 넘칠 것입니다.




가짜 소금 

홍성남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진짜가 아닌 가짜 소금들이 많습니다. 가짜 소금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삶의 실제보다 이론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론에 의지합니다. 이것은 상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자들은 내담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이론에 근거해 내담자를 파악하고 치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이 지나치다 보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상담자가 지나치게 이론에 의존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은 그냥 지나치기 쉽고 자기 기만적이고 섣부른 이해를 환자에게 강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늘 새롭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요즈음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늘 새롭게 성장한다는 진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얇팎한 지식으로만 모든 걸 바라보고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되돌아봅시다.



  

하느님의 사람과 판단

이정석 신부님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고향 마을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6)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말씀과 그분께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그 청년’의 배경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언자들 스스로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신탁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비록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때 예언자는 배척을 받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겉꾸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도, 청중의 호응을 받으려고 진실을 외면하고 야합하는 사람도 아닌 하느님의 말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예언자가 옳고 그르냐는 청중의 마음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판단됩니다(신명 18,22; 이사 55,8 이하 참조).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보의 바다에는 수많은 말이 떠다닙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예언인지는 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잘나가는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의 마음이라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더 이상 쓸쓸하지도, 허전하지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과 한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수도공동체 청빈생활에 대해 점검하면서, 저희 살레시안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돈보스코의 말씀들을 묵상해보았습니다.

돈보스코는 평생 얼마나 청빈하게 사셨는지, 그리고 몸소 실천한 청빈생활을 얼마나 자주 형제들에게 강조했었는지, 가끔씩 회원들 사이에서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군. 이렇게 먹고 어떻게 견뎌내겠어?’하는 불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청빈생활과 관련해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하신 돈보스코의 몇 가지 권고들입니다.

“한가함이나 논쟁을 피하고, 음식이나 음료 및 침실을 극히 간소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들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오히려 크나큰 영예가 되는 것이니, 이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닮게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로 제대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는 것일까요?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는 것일까요?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것일까요? 부족함이나 불편함 하나도 없이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일까요?

절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 춥고 배고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늘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전하고, 아쉽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고달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권력자들이나 세력가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 예언자이자 모든 수도자들의 모범이신 세례자 요한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청빈하고 당당한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늘 세례자 요한을 보다 편안한 곳으로, 보다 잘 갖춰지고 안락한 곳으로, 보다 빛깔 좋은 곳으로 끌어내리려고 기를 썼습니다만,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 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부패 권력 앞에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다가 순교당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리도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철저하게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반하는 일과 맞서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용기의 바탕에는 그 무엇 앞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도(正道)만을 추구했던 삶이 있었습니다. 청빈하고 티 없이 깨끗한 삶이 있었습니다.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때로 고독하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실한 구도자의 길은 언제나 쓸쓸하고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께서는 그 쓸쓸함, 그 고독함, 그 외로움을 충만한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쓸쓸하지도,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기 인연에 가두지 마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비유로 쉽게 깨우치신 다음 고향에 가십니다.

왜 고향에 가셨을까요?

지나는 길에 그저 들리신 것인가?

그리워서 일부러 가신 것일까?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신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만일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셨다면 그 똑똑하신 주님도 보통 사람들의 보통 심리를 모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스님들에게 나이를 묻고 과거를 묻는 것은 대단한 실례이고 수녀님들에게도 이런 점은 비슷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연, 과거를 털어버리고 미래를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과거의 인연을 들먹이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은 자기와의 인연에 다른 사람을 가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라는 인연에 아들을 가두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코 흘리던 초등학교 때 인연에 친구를 가두어 친구의 놀라운 성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인연에 성공한 고향 사람의 운신을 곤란하게 합니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이가 위인 성직자를 만나면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그러다 어찌 나이 얘기를 하다가 동갑임을 알면 그때부터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성직자로 대하던 사람이 그때부터 동갑네기로 대하려는 기류가 역력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통의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일도 자기 인연에 가두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자기 인연에 가둡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도 예외는 아니었나봅니다.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근 며칠 동안 에밀 브리에르 신부님의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분도출판사)는 영성서적을 읽고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이 제 눈길을 ‘확’ 끌었습니다.

“사제적 위신과 지위에 대해 그리고 사제들이 품고 있는 욕구에 대해 아주 특별한 변칙이 있음을 가끔 보게 된다. 이 욕구는 사제관이든 사제 양성소이든 어디에도 침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답답함이 있다.

사제들 간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라. 더 큰 본당을 추구하고 신학교나 대학의 학장 자리나 명예롭고 존경받는 지위를 주제로 하고 있음을 가끔 듣게 된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는 전체 신자 수가 23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다 쓰러져가는 작은 시골 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비안네 신부가 뭔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기에 문책성 인사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는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 몸까지 떨었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의 성소여정에 가장 큰 후원자였던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담당주교는 비안네 신부를 불러 아르스로 가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비안네 신부, 미안하지만 아르스로 좀 가 주어야겠네. 그 본당 신자들은 하느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네. 자네가 가서 그곳에 하느님 사랑을 좀 심어주었으면 하네.”

아르스에 도착한 비안네 신부님은 드디어 첫 번째 주일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비안네 신부님의 행색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창백한 얼굴,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온 뼈들, 가냘픈 몸집, 수줍은 표정, 더듬거리는 말투, 흙 묻은 신발, 거친 천의 수단... 그 행색이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너무나 없어보였습니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신부님을 본 신자들은 이렇게 수근 거렸습니다.

“저 꼬락서니 좀 봐! 저러니 이런 시골까지 쫓겨 왔겠지.”

세월이 흘러가면서 비안네 신부님의 덕행은 영롱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가난과 겸손의 덕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명성을 전해들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아르스를 찾아왔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손짓 한번, 눈짓 한번, 단 한 방울의 눈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이 몰려드는 순례자들로 인해 아르스 사람들은 길을 넓혀야 했습니다. 마침내 순례자들의 인파는 유럽 전역에서 아르스를 향해 흐르는 큰 강이 되었습니다.

고백소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질서유지를 위해 경비원까지 써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안네 신부님의 수단 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 몸으로 돌진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옷을 찢어 달아났습니다. 그래도 비안네 신부님은 조금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죄지은 영혼들의 발자국 소리를 낱낱이 듣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그들을 만나셨고, 뒤틀렸던 그들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한편 이렇게 ‘잘 나가는’ 비안네 신부님에 대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30년 이상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비안네 신부님을 괴롭힌 사제도 있었는데, 신부님은 그 모든 수모를 묵묵히 참아내셨습니다.

교구의 동료 사제들조차도 비안네 신부는 지지리도 못생겼고,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놀려댔습니다. 쥐뿔도 모르면서 무식한 시골 본당 신자들을 선동한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낡은 수단과 꿰맨 구두, 거지같은 모자도 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 쇼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든 비방 앞에서도 비안네 신부님은 묵묵히 침묵하셨습니다. 그 모든 업신여김 앞에 겸손하셨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백소 앞 행렬은 비안네 신부님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습니다. 57세 되던 1843년 5월 12일 비안네 신부님은 이런 말을 끝으로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이렇게 저는 빈손으로 당신 곁으로 가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비안네 신부님의 모범을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하루 온종일 헌신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양들을 위해 매일 목숨을 버리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한 매일의 희생양이 되는 길, 그 길이 결국 사제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카지노 슬롯머신에서 단 한 번도 따 본 적 없는 사람이 과연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따 본 적 있는 사람만이 ‘이번에는 잃었지만, 다음에는 꼭 딸 거야. 예전과 같은 대박이 또 터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카지노를 찾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한번 대박 났다고 계속 슬롯머신을 당기면 인생 종치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주님을 뜨겁게 체험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초자연적인 기적을 체험했던 분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냉담을 하면서 주님을 멀리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왜 그럴까요? 계속해서 초자연적인 기적, 뜨거운 체험만을 주님께 계속해서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적’에만 연연하면 결국 인생 종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행복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은 어떤 진실이 내게 다가와도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지요. 내 이웃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내가 접하는 그 모든 일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완성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주님을 믿지 못하고, 늘 놀라운 기적만을 원하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고향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예수님의 가르침만 봐도 그 안에 드러난 지혜와 기적의 힘을 충분히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신들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들이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제품을 보다가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이라는 광고를 하더군요. 그리고 이 한정판 제품에 사람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입니다. 똑같은 제품과 비교할 때, 약간의 디자인만 바뀐 것 같은데도 ‘한정판’이라는 말에 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소유하려고 하지요.


우리들 역시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손수 만든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한정판입니다. 그렇게 귀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면서 왜 사람들을 우습게보고 쉽게 평가하고 단죄할 수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되네요.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창조하시는 그 어떤 것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계신 주님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프란츠 카프카).


옹졸한 사랑

신부님들과 종종 밖으로 나가 식사를 하거나 술 한 잔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만나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식당을 돌면서 껌이나 초콜릿을 파시는 할머니이십니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만나는 것을 보니, 항상 그 시간에 그 일대를 돌면서 파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가대로 파는 것이 아니라, 정가의 두 배를 얹어서 껌이나 초콜릿을 파십니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고생하신다고 해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물건을 팔아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술 한 잔 더 하자면서 장소를 옮겼는데 또 그 자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할머니, 방금 저 가게에서 초콜릿 샀는데요. 여기서는 안 사도 되죠?”라고 말하면서, 초콜릿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후회가 생겼습니다. ‘그 초콜릿이 얼마나 한다고? 하나 팔아드리는 것, 대단하지도 않은 것인데....’ 싶었거든요.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어쩌면 이렇게 단순한 것이 아닐까요? 거창하고 거대한 데에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마음과 지금이라는 이 시간에 행해야 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한 번 샀다고 외면했던 저의 옹졸한 마음을 이 자리를 통해 깊이 반성합니다.




그 위대하심을 모르다니 참!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시기 질투 샘을 내는 감정에 빠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상대를 파탄으로 몰아가서 망하는 걸 봐야 시원하다고까지 하거든요. 예수님도 바로 이런 인간 감정의 그물에 그만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동네 애들 중 하나라며 비웃고 죽이려고까지 했다지요. 그런데 지금도 예수님을 그렇게 비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맹추들 같더군요. 자기 생일부터 예수님 탄생년도를 쓰면서 그 위대하심을 모르다니 참!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오 13,57)”




필요할 때만 찾는 친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정철상의 커리어노트란 사이트에 이런 고민을 하는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32세 여성입니다. 요즘 인간관계 문제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그러니까 10년도 넘은 인연이네요. 참 오래된 친구지만 만날 때 마다 낯선(?) 사이죠.

그 친구가 아주 오랜만에 연락해서 뜬금없이 어디서 보자하고 일방적인 약속을 하면 그래도 오랜만이니 한번 보자하고 나가면 역시나 하고 짜증나는 시간을 견디죠. 그런 식으로 만나는 친구랑 무슨 얘기 거리가 있고 우정이 쌓이겠어요. 만나면 그냥 동석할 뿐이죠. 같이 있으면 더욱 외롭고 쓸쓸한 느낌... 아주 힘이 들고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요.

안보겠다 마음먹고 있다가도 한번 낚시질에 걸려 다시 기대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또 역시나... 마지막 인간관계마저 끊길까봐 그 친구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제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를 모르겠어요. 참 어려워요. 실제적인 조언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때만 나를 찾는 친구, 정말 얄밉죠. 그런데 정철상 씨는 오히려 그런 친구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이 여성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조언해줍니다.

“일단 말씀처럼 그 친구 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나르시스트적인 경향이 있어서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입니다. 필요할 때는 찾고, 필요 없을 때는 찾지 않죠. 상대의 관심보다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상대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본인입니다. 즉, 그 친구도 문제지만 휘둘리는 본인도 문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가치 없는 친구에게 매달립니까. 왜 버리지 못하십니까. 그것은 내면에 두려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 이 친구라도 없으면 더 외로워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그 친구가 크게 상처받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이든 그러한 두려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저런 친구가 있다면 저라도 에너지를 계속 그 친구에게만 쏟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집착해서 계속 만나주는 것이 나의 외로움을 증명하는 것이겠죠. 예수님도 도저히 안 될 것이라고 판단되었을 때, 유다가 당신을 배신하러 나가는 것을 굳이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나는 필요할 때만이 아니라 항상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까?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상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용당하는 분이 하느님일 때는 나는 내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고, 하느님은 그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마치 ‘실로’처럼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가 왜 실로를 떠올렸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예전에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던 곳입니다.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했습니다. 실로는 하느님의 궤를 모신 성전의 역할을 하였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그 곳에 계시는 동안 내내 사람들은 조각 신상을 만들어놓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판관 18,31 참조).

엘리 예언자가 대사제로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불레셋 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은 계약의 궤를 생각해 냈습니다. 계약의 궤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전쟁에서 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재빨리 실로에 있는 계약의 궤를 옮겨왔고 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불레셋 군도 기가 꺾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불레셋 군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의 궤는 그들 차지가 되었고, 엘리의 두 아들이 죽었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 엘리도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되었습니다.(1사무 4장 참조) 유다가 멸망하자 실로는 그 이후부터 성경에서 저주받은 자의 칭호가 되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대상은 사제와 예언자, 또 성전으로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개인의 필요를 챙기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한 엄청난 사랑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이들을 채찍으로 몰아내셨습니다. 하느님이 사셔야 하는 집인데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모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칫 필요한 때만 주님을 찾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그분이 우리를 저버릴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성서와 현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 역사에 처음 등장한 프란치스코 이름을 지닌 현 교황입니다.

교황청 인류복음화 성성의 차관인 홍콩 출신의 사비오 혼 대주교와의 인터뷰 기사 한 대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특징은 무엇인가?-

"성서를 깊이 묵상하시는 분이다.

그 깊이에서 꺼낸 말씀을 현실에 적응하는 단순명쾌함이 탁월하다. 성서와 현실을 두루 아시는 분이다.“

 

오늘 강론 주제는 '성서와 현실'입니다.

성서와 현실은 함께 갑니다.

'성서 없는 현실은 공허하고, 현실 없는 성서는 맹목이다'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저는 '하늘나라'에 다녀 왔습니다.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인 난지도에 있는 일명, '하늘공원'에서 하늘나라 현실을 체험했습니다.

하늘만 보인다 하여 하늘공원인데 공원대신 나라를 넣어 '하늘나라'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마침 제 운동모자 뒷면에 씌어진 글자가 좋은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Never stop exploring(결코 탐험을 멈추지 마라)“

 

평생 구도자로, 순례자로 살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머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부터 옴을 깨닫습니다.

하여 체험(體驗), 체득(體得)이란 말도 유래됩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길을 가는 순간, '아, 나는 순례자구나!'하는 깨달음이 왔고, 무거운 배낭을 내려 놓는 순간, '짐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를 확실이 깨달았습니다. 

장장 6 시간에 걸쳐 20km여정 중 들린 하늘공원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에겐 하느님만 투명히 현존하는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입니다.

순례여정을 통한 몸의 깨달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평생 순례자로 사신 분입니다.

하여 믿음은 한없이 깊었고 마음도 계속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깨끗했기에 편견과 질투가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서 담박 느껴지는 것은 질투심입니다. 

자기를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인데 저토록 지혜와 기적의 힘을 받았음이 몹시 불편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대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반응이요 바로 이게 인간 현실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러 고인 물 속에 좁은 시야로 살다보니 도저히 질투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삶의 반경이 드넓은 바다 같다면 이들 삶의 반경은 작은 호수 같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 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바로 닫힌 호수 같은 울안에서 살아가는 예수님 고향인들의 인간 현실입니다.

하여 주님은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무지와 질투와 편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부여된 절실한 과제요, 순례여정을 통한 몸의 깨달음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예언자의 고독한 운명입니다.

하느님만 믿고 의지해야 하는 복된 고독입니다. 

예수님의 처지와 1독서의 예레미야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역시 무지와 질투심에 눈먼, 주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걷지도 않는 당대의 온 백성과 사제들과 예언자들입니다. 

정작 회개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모든 이들의 예언자 예레미야에 대한 과격한 반응입니다.

인류역사상, 얼마나 많은 의인들이,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 질투심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는지요.

지금도 반복되는 역사요 인류의 진보가 과연 가능한지 회의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드넓은 하늘나라의 지평을 보여 주시고, 또 하늘나라의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시편69,14ㄷㄹ).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어도 영원을 태우리.’ 이 노래는 노사연의 ‘만남’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수녀원 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 또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녀원 미사를 하시던 신부님께서 외국엘 가게 되셨고, 신부님은 제가 23년 전에 처음 보좌신부로 모시던 주임신부님이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8월 한 달 미사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저의 할머님의 기일입니다. 박 안나 할머니를 위한 기일 미사를 이렇게 수녀님들과 함께 하게 되어서 저도 감사합니다. 할머니께서도 천국에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3가지 차원의 만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부자청년은 꿈도 있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독신’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온전히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자랑일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유다와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유다는 늘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았을 때,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유다처럼 사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곧 후회하였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믿음을 주셨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도 그와 같은 이야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듣고, 하느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 예언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말씀을 듣지 않으면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면 그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알았을 것이고, 영원한 삶에로 초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8월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나와 만나는 가족과 이웃들의 소리를 귀여겨들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잘 듣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지혜를 드러내 보이는 일

김기현 신부님 

오늘 오후에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 주시면서 제 방에 있던 ‘사목정보’를 보신다고 가져가셨습니다. 제가 쓴 글이 조금 포함되어 있는 잡지라 보고 싶으셨나봅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셨습니다. ‘우리 동네 약방 아주머니 있잖아. 그 아주머니가 사목정보에 아들이 쓴 글 보고, 잘 썼다면서 앞으로도 강론 잘 하는 신부 되게 기도한데~’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저도 기분이 좋았는데요. 올해 어울리지도 않게 청소년 강론을 쓰면서 그런 얘기를 손에 꼽을 정도로 들었던 거 같습니다. 분명한 건 제 글재주 때문은 아니라는 겁니다. 책도 많이 읽지 않고, 글도 강론을 쓰면서부터 했던 것인데 깊이가 있을 리 없죠.

 

제가 생각하기에 놀라움과 칭찬은 말씀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말씀을 빼 놓으면 그냥 일기일 뿐이고 개인의 일상일 뿐이지만, 말씀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방향과 힘과 깨달음이 느껴지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 힘이 몇몇 분들을 놀라게 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칭찬 받은 얘기를 또 써야겠네요.^^; 어제 동기 신부들을 만났습니다. 교구청에서 만나 식사도 하고 술도 한 잔 했는데요. 거의 마지막 무렵에 한 동기 신부가 본당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기들이 한 마디씩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요. 문득 말없이 있던 제가 잠깐 언급되었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대략 이런 겁니다. ‘기현이 봐, 할 일이 없을 거 같은 작은 본당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하잖아.. 농사도 짓고, 대림기도도 만들고...’ 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대단해~’ 하고 칭찬해 주었는데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지..’ 하는 신기함은 다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말씀에 따라 살아가보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주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찾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말씀이 삶 안에서 살아지고 있을 때 ‘놀랍네~’ 하는 느낌이 생기는 거 같습니다.

 

제가 저를 볼 때 부족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나의 지혜를 뛰어넘고 내 능력을 뛰어넘는 놀라움이 보여 질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 모습들 있잖아요. 성모발현의 목격하고 증언한 사람들을 보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환시 속에서 본 이야기들을 전하자 사람들이 놀라고, 매일 기도만 하는 수녀님이 설명해주는 성화에 대한 내용들이 세속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그런 모습들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지혜는 더 많이 배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신학을 많이 공부한 신부보다 매일 정성스럽게 묵주기도를 하는 할머니에게서 더 큰 믿음과 지혜가 드러날 수 있음이 바로 그런 한 모습인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 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봅시다. 큰 지혜가 드러나고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본당 신자들이 ‘까만 동기 신부보다 내가 더 까맣다..’고

했다고 동기들한테 이야기했더니,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반에 까만 신부는 그냥 까망이 아니라

붉은 까망이라 비교자체가 안 되지..."

그래서 그 신부가 일인자임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태오13,56-57)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예상 못했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고마워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한 사람이나,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쉽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반면, 누군가 어떤 일에 성공을 하거나, 부러운 처지에 올라간 사람을 볼 때, 부정적인 반응을 숨기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 함께 슬퍼하는 일보다 함께 기뻐하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아마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처에서 나오는 반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열등감이라던가 자격지심, 혹은 질투나 시기도 한몫을 할 것입니다.

멋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왕 한 번 왔다가는 삶, 좀 폼 나고 멋지게 살아보면 어떨까요? 

누구나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조건에서도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껍데기의 화려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TV를 볼 때마다 자연스러운 탤런트들의 얼굴을 보기가 힘듭니다.

얼굴에 무슨 짓을 그리도 많이 했는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예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늙음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그러진 사회의 어리석은 단면을 보게 됩니다.

알맹이가 멋져야 합니다. 삶이 멋져야 합니다. 

그리고 삶이 멋질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멋입니다.

주변을 훈훈하게 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우리 모두는 만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얼마나 아까운 시간들입니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 그래서 ‘좋았다’라는 말이 스스로 나올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멋지게 한 번 살아봅시다. 

 

    


편견

이동훈 신부님

미국 UCLA 의과대학 교수가 졸업을 앞둔 의대생들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그런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 이 사실을 잊지 마라. 의학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하느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겸손하고 신중하게 생각할 일이다.”


학생들의 판단대로였다면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한다. 교육과 경험은 인간을 풍요롭게 살찌우기도 하지만, 그것에 갇혀 헤어나지 못할 때는 오히려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게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남에게 작용할 땐, 편견으로 작용하여 사람을 억누르기도 하고 심각한 오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알량한 지식에 너무 기대지 말고,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판단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일 것입니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지요.

“너희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그러면서 선생님께서는 한 명 한 명에게 장래희망을 말하도록 했습니다. 저의 차례가 왔고, 저는 자신 있게 “신부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요. 그 순간 반 친구들이 웃으며 말합니다.

“너 남잔데 신랑이 되어야지. 어떻게 신부가 되니?”

“네가 무슨 신부님이 된다고 그래? 네가 신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사실 저 역시 당시의 아이들처럼 장난이 많았고 공부도 그리 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저를 쭉 봐왔었던 반 친구들은 그래서 제가 신부님이 될 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도저히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렇게 신부로 10년 이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잘 모르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도 많이 아는 것처럼 부풀리면서 상대의 성장을 가로 막는 것은 물론, 이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이 얻을 이익까지도 막을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판단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제일 오랫동안 봐왔다고 말할 수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아야만 하셨지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봐왔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더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에 딴죽을 겁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좋은 일을 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판단으로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는 고향 사람들.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믿음보다는 의심을 갖게 했으며, 사랑보다는 미움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기적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누릴 이익까지도 얻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섣부른 판단으로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날 하느님의 영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특별한 사람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삶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과 섣부른 판단은 이제 우리에게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모실 수 있으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을 더욱 더 충만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쁨은 영혼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랑의 그물입니다(마더 데레사).


나아짐을 축하하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스스로를 신이 최초로 창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오스틀로이드 족’. 이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광활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횡단한다.

백인 여의사인 말로 모건이 이들과 함께 대륙 횡단 여행을 할 때였다. 사막을 걷다가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모건은 생일 때 축하 노래를 부르고 파티를 여는 자국 문화를 설명했다. 그때였다. 원주민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요? 축하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것 아닌가요? 나이를 먹는 것이 무슨 축하할 일이라도 되나요? 나이를 먹는 데는 아무 노력도 들지 않잖아요. 그냥 저절로 먹는 거니까요.”

원주민의 말에 당황한 모건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얼 축하하죠?”

“우리는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지난해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합니다. 물론 축하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지요. 그래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바로 자신뿐이에요.”

모건은 원주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성장을 스스로 깨닫고 축하하는 원주민의 삶에서 깊은 지혜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으레 먹는 나이를 축하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감을 축하해야 한다.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예언자

김 맛세오 수사님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라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자신 있게 피력하는 예수님을 어린 시절부터 세세히 알고 지내 온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비천한 목수의 아들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태도로 의아해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초기 회개 생활 때 ‘다미아노 십자가상 예수님의 입’에서, “다 허물어져가는 내 집을 수리해 다오.”라는 기적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직후 회개의 표시로 당시의 쓰러져 가는 3개의 성당을 손수 수리하려고 벽돌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 애긍을 청하기 시작하였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구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춤과 노래로 호화판 여흥을 마다하지 않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던 그가 전혀 다른 거지의 모습으로 변하였으니 주민들은 머리가 돌아버린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밖에요.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했던 그에게 그것은 어쩌면 회개의 단단한 각오와 표시로 예수님의 수난 고통을 겪어보기 위한 십자가 체험이었겠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가 하느님의 진정한 바보였음을 깨달은 주민들은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처럼 옳은 일에도 반대의 표적이 되는 시금석으로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어둠의 길이요 정화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잔상을 떨쳐버려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공생활 이전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서 지혜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도에 유학을 갔다는 얘깁니다.

이 얘기대로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 수행을 통해 그루가 되고 그리고 이제 막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쳤다면 고향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의아해 하고 심지어 못마땅해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인도에 가지도 않았고 어떤 유명한 랍비나 예언자 밑에서 수학한 것도 아니었나봅니다.


그렇다면 고향 사람들의 태도는 이해할 만합니다.

특별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특별한 양성이나 수행을 받지 않았다면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출중한 지혜와 기적의 힘을 이해하기 어렵고 더욱이 그것을 인정하며 축하하기는 쉽지 않지요.

나와 같이 ‘야야’ 하며 지내고 ‘이놈저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높은 직위에 오르면 인격적 성숙에 따라 같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친구도 있지만 친구가 그렇게 된 것이 못마땅해 하는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출세를 시기질투하지 않더라도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적인 변화도 인격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못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 즉 신적인 면모를 보임에 대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못마땅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 또는 인간적 성숙 이상의 성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대단한 성숙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즉시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성숙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많은 사람, 보통 사람들은 그 원인을 자기 잘못에서 찾거나, 그러기 싫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방해에서 찾습니다.

자기든 남이든 인간적인 차원에서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깊은 눈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섭리를 찾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뜻이 좌절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좌절에는 하느님의 크신 뜻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즉시 우리의 눈을 높은 곳으로 돌려야 합니다.


눈에는 殘像이 있게 마련이지요.

먼저 본 모습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고 심지어 다른 것을 보고 있는데도 계속 남아있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잔상 말고 심리적 잔상, 의식적 잔상, 관념의 잔상도 있습니다.

누구에 대해 한 번 박힌 상이나 관념이 잘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고정 관념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계속 남아있어 순순히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변화에도 적용이 된다면 앞서 보았듯이 그 변화가 분명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데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잔상의 이런 작용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업적들을 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날이 은총을 입는 길입니다.




<독서> :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박해받는 예레미야

경규봉 신부님

예레미야는 성전 뜰에서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 악행을 버리고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선포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이 파괴될 것을 예언한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가 이처럼 성전의 존속을 문제 삼기 때문에 그가 하느님의 신탁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시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기원전 701년. 1열왕 18-19장 참조).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전을 그 어떤 적에게도 절대로 넘겨주시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누가 혹시라도 성전이 짓밟히리라는 주장을 하면 이를 신앙이 없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느님을 믿는다 함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 욕심이나 기대 등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이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때로 고통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기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아버지께서 더 좋게 이끌어주시리라 믿고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 해석을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하느님을 각기 다르게 생각하고 해석한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매달린다. 그 필요가 채워지면 이내 하느님과 멀어지고,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에 대해 원망하곤 한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자신의 종이나 노예처럼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셔야 마땅한 분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장사꾼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과 흥정하곤 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면 나는 그 대가로 어떤 것을 드리겠다고 하면서 하느님과 흥정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된 것은 모두 하느님 때문이라고 하느님 탓을 하곤 한다.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경우가 많다. 그 까닭은 사람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필요, 욕구에 따라 나름대로 해석하여 보곤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옥좌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성전은 결코 적의 손에 짓밟히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과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하느님의 옥좌인 성전이 있기에 자신들은 안전하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기보다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는 예레미야를 오히려 박해했다. 자신들의 믿음에 반하여 성전과 성읍의 파괴를 예언하는 예레미야가 하느님을 모독하며 성전을 모독하는 자라고 박해했다. 잘못된 믿음은 오히려 하느님의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 함으로써 하느님을 박해하고 죽이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잘못된 믿음,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왜곡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흐리게 한다. 잘못된 믿음, 그것은 하느님의 법인 사랑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고, 증오와 적대심을 키우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참된 믿음, 그것은 순수하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 욕심과 기대까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주님의 법과 말씀인 사랑을 마음에 담고, 따르며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자. 

서유승 신부님

한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한 때는 꽤 명성도 자자하고, 그래서 뭇 선남선녀들이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엔 성소자들도 많아서 늘 수도원은 사람들로 복작복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성소자들의 발길도 뚝 끊겨버렸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수도원의 문을 닫아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그 수도원 가족 모두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사님이 제안을 합니다. “이 근처 숲 속 깊은 곳에 아주 德이 높으신 은수자 한 분이 계시답니다. 우리 모두 그분께 가서 우리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도원 안에서는 곧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벌어졌습니다. “숨어 지내는 고작 은수자 한 명에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수도원이 어떻게 자문을 구할 수 있느냐!” “우리와는 수도회가 다른 그 사람에게 우리의 어려움을 말한다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다!”라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한 번 찾아가 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사실 그 수도원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결론이었지요. 그리고 몇 일 후, 수사님들은 모두 주저주저하며 망설이면서도 그 은수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은수자는 고작 단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위대한 성인이 감추어져 계십니다.” 

수사님들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그 깊은 숲속까지 힘들게 창피를 무릅쓰면서 찾아왔는데 고작 한마디라니, 자존심이 세신 분들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러나 점쟎은 체면에 더 이상 뭘 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모두들 투덜투덜대며 본래의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이 수도원에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발길을 끊었던 뭇 교형자매들이 하나 둘 다시 발걸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성소자들도 많아진 이 수도원은 과거의 활기찬 모습을 찾아나가게 될 희망에 다시금 부풀어 오릅니다. 


여러분,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비밀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빨래가 바람에 날려 떨어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빨래방 베드로 수사는 너무 게을러!”하며 그냥 지나쳐 버리던 마르코 수사도, 주방 바오로 수사가 밥을 태워먹을 때마다 버럭 버럭 성을 내던 마태오 수사도, 요한 수사가 아파 누워있을 때마다 약을 타다주는 것조차 귀찮아하던 스테파노 수사도 “혹시 저 이가 은수자가 말한 그 감추어진 위대한 성인이 아니실까?”라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니, 당연히 그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는 다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은 그러한 수사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그 눈까지도 닫혀있기 마련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말하며 마음의 눈을 열려고 하지 않았던 유다인들이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창세기의 말씀대로 모든 인간은 주님을 닮아 그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1,26) 여기에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 나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내 자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못 살게구는 직장 상사도, 무능력하게만 보이는 학교 후배도 그 안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새겨놓아 두셨습니다. 그 사실을 볼 눈도, 보고자 하는 마음도 닫혀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기적과도 같은 은총이 다가올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가슴을 쫙 펴봅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눈을 크게 떠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내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다 보십시오. 

어쩌면 구세주께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내 가까이에 이미 와 계실 것입니다.




숨겨진 시간 속의 영적 여행

이인주 신부님

사람들은 가끔 잠적 내지 잠수를 한다. 이유가 뭘까? 영원한 시간의 신비를 알고자 함이고, 영혼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설산이나 밀림, 우주를 여행한 사람은 그 안에 자신과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 느낌이 바로 영적 여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분의 숨겨진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의 영역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다.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시몬·유다이다.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저 사람이 지혜를 어떻게 얻었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랄 때 예수는 저런 위인이 아니었는데.’ 하며 부정하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보아 예수님은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성장과정에서 신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이 더 예수님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람에겐 다 때가 있다. 예수님도 홀연 자신의 때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서른이 되어 나자렛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나자렛에 들렀는데 그때는 이미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과거의 행적만 보고 단언을 하는 것일까? 

내 이야기를 해보자. 초중학교 시절 나를 알던 사람들은 “뭐? 그가 신부가 됐다고?”, “야! 서천 소가 웃겠다.”라고 할 것이다. 초중학교 시절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내 영적 삶의 과정을 헤아린다면 과거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 또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뭐 대수인가? 예수님은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갔다.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들에겐 조금의 흔적만 남기고 떠나신다. 그렇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지금보다 한 단계 그분께 더 나아가는 것이 무엇이며, 영적인 삶에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식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요즘 너무나 덥습니다. 글쎄 어제 낮 시간에 제 방 온도가 34도였으니 얼마나 더운 날씨였겠습니까? 특히 요즘에는 밖에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지난 장마로 인해서 물에 잠긴 창고의 물건을 모두 꺼내서 말리는 일, 어제부터 시작된 십자가의 길 설치 작업, 축대 쌓는 작업 등등 할 일이 너무나 많네요. 그런데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일하기가 얼마나 힘들던지요. 그러다보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집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오네요.

“태양이 싫다…….”

그 순간에 저는 깜짝 놀랐어요. 사실 지난 장마 때, 계속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비가 싫다…….”

생각해보니 ‘싫다’라고 말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해가 나와도 싫다고, 비가 내려도 싫다고, 또 흐리면 흐리다고 싫다고 말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과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 라는 의구심도 듭니다.

이렇게 날씨만을 보면서 ‘싫다’라고 말하는 있는 우리들이 아니지요. 우리들의 삶 안에서 ‘싫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었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창세기에서도 나오듯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게 창조했던 이 세상을 우리는 얼마나 ‘좋다’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과 달리 ‘좋다’ 보다는 ‘싫다’를 더 많이 외치고 있는 나는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요? 사람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간직되어 있는 곳이 고향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더 좋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무조건 ‘싫다’라고 말하는 우리들의 나쁜 습관을 이들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깔보고 무시하는 말로써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싫다’라는 말은 이제 그만 써야 하지 않을까요? 태양이 싫어, 비가 싫어, 흐린 것이 싫어, 사람이 싫어……. 그러한 말보다는 태양이 좋아, 비가 좋아, 흐린 것이 좋아, 사람이 너무나 좋아……. 라는 말로써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과는 달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 체험을…….


‘싫다’라는 말보다는 ‘좋다’라는 말만 합시다.


삶은 아픔보다 위대하다(‘좋은 생각’ 중에서)

아버지께서는 고기가 잘 안 잡히면 바다를 보면서 '바람이 한번 불어야 할 텐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태풍이 불어와 바다 속까지 뒤집히면 산소가 풍부해지고 먹이가 많아집니다. 그러면 고기들은 활동을 많이 하게 되고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게 되지요.

우리 삶에도 태풍이 불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면 하늘이 높고 맑듯이 우리의 마음도 깊어지고 생각이 맑아져 한층 성숙해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고통이 없다면 무엇으로 만족을 얻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하나의 고통이 열 가지 감사를 알게 하고, 하나의 감사가 열 가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좋은 님들에게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 지금 어려움 속에 있거나 앞으로 고통이 찾아오면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새로운 성숙과 감사를 떠올리십시오.

삶은 아픔보다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아는 게 병이다.

서현승 신부님

복음에서 묘사하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모두 놀랐으면서도, 그분의 출신을 알아내고는 못마땅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가정이 동네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유별나지 않았으며 예수님 역시 어렸을 적부터 신동이었다거나 특별히 뛰어나 보이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민초 출신인 나로서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분이 그렇게 동네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진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물론 동네 사람을 보면서는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가족과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는 게 병입니다. 우리 말에도 ‘사람은 열 번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정 지음, 생활성서사)

라는 책 서문에서 인용하는 어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중죄를 짓고 수감 중인 아들을 찾아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 알았으면 좋겠다며 끝까지 아들을 믿어주었던 어머니의 마음이 결국 아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뿐더러 실제로 구원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바깥에서 성인(聖人) 소리 듣는 것보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같은 동네 살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거부한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을 바라봅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특별할 것이 없었던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 역시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예수님이었는데, 율법학교라고는 문턱도 못 넘어가본 예수님이었는데, 그저 조용히 목수 일을 하며 30년을 지낸 예수님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자렛의 한 회당에서 설교를 시작하는데,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고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떨떠름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화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많은 경우 우리 역시 나자렛 사람들과 비슷한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와 동고동락하는 형제들 안에 메시아성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 안에 제2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회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하느님 나라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잘 안다는 이유 하나로, 그의 부족함과 한계, 취약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 가까이 계시는 메시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해 계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반드시 하느님께서 거처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 가까이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찾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며 그들 안에 머물고 계시는 메시아를 발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내가 점점 작아지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점점 커지도록 나 자신을 내어놓고 비워내야겠습니다.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 제2의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시켜나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제 부끄러운 글이 활자화되어 나올 때 마다 다른 누구에 앞서 같이 살아가는 형제들 앞에서 많이 부끄럽습니다. 내가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부분들이 그럴 듯하게 묘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쫌생이’면서도 글로는 성인군자처럼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공동 휴게실에 제 글이 실린 잡지들이 배달되어오면 보는 즉시 깊숙한 곳으로 감춰버립니다. ㅋㅋ

 

바깥에서 성인(聖人) 소리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규정될 수 없는 인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지난 6주 동안 파견을 나왔던 부제님이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이 부제님이 처음에 저희 본당에 올 때는 제가 쉽지 않은 본당신부로 약간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제님이 오기 며칠 전에 제가 미리네 성지에 대리구 사제 모임이 있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 부제님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제가 늦게 도착해서 부제님이 저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며칠 뒤, 저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부제님이 저에게 인사한다고 전화 왔을 때 왜 미리네 있을 때 인사하러 오지 않았느냐고 따졌습니다. 부제님은 저를 아는 주위 사람들이 제가 좋은 신부니까 편하게 지내다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가, 막상 통화하고 나니 겁을 먹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파견 나온 며칠간은 매우 부자연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어쩌면 그런 선입관을 갖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선입관을 가져서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도 부제교육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떠나려고 하는 지금은 부제님이 매우 편하게 지냈어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생각보다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고 편하게 대해주어서 나중에는 자신이 버릇없는 행동까지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볼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가졌던 선입관을 깨는 데는 며칠간의 시간이 걸렸어야 했던 것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을 마치고 처음 본당에 보좌신부로 가게 되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 때 저에게 많은 분들이 저의 첫 신부생활에 만나게 될 주임신부님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물론 좋은 점보다는 조심해야 하는 점들을 더 많이 들어야 했고,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자신도 모르게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신부님을 마음속으로 판단하고 규정지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부님을 판단해 놓은 것은 오히려 저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두려워하게 되니 오히려 신부님께 부자연스럽게 대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오히려 제가 신부님께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서 그분과의 사이를 더 벌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판단하고 규정지어 놓은 대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조금 살면서 신부님을 알아가다 보니 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대부분의 것들이 그 신부님과는 들어맞지 않는 자신들만의 개인적인 판단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런 이야기들을 다 무시하고 그냥 판단하지 않고 신부님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더니 신부님은 아버지와 같이 참 좋으신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 때부터 관계가 편해졌던 것 같습니다.
저는 부제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먼저 선입관을 가지면 그 사람과는 그 선입관을 가진 만큼밖에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제님도 사제가 되어 보좌를 해야 할 텐데 그 때에는 사람들의 판단을 듣지 말고, 자신도 판단하지 말고 주임신부님과의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규정지어 놓으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이미 규정된 그 사람과만 관계를 맺으려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겉도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 요셉의 아들로 규정지어 놓고는 그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메시아가 되실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되실 수 없으니 기적도 일으켜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그만큼밖에 되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끝까지 목수 요셉의 아들만큼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한 번은 하트모양의 귤 한 박스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귤이 자랄 때 하트모양의 틀 안에 귤을 자라게 하면 그 모양으로 귤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귤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모양일 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넣으면 그런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틀은 나의 교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교만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짓고 또 그것을 그대로 믿어버립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식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무시하게 된다면 무시당한 상대는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상대를 무시하기 싶지 않더라도 이미 선입관을 지니고 있으면 그 판단된 정황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라 더 깊은 관계의 진전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인터넷에 강론을 올리기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은 고맙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인기 때문에 올린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하는 행위가 제 자신의 인기를 위해 하는 것처럼 저를 판단하고 규정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저는 그런 사람이고 그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상대를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판단되는 것보다 항상 크십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간도 인간이 규정할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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