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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8월 3일 (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08.02|조회수1,154 목록 댓글 0

제1독서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25,1.8-17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Death of John the Baptist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년을 일곱 번,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인 희년으로 선언하고 해방을 선포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맹세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건네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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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오십 년째 되는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라며, 이 해가 너희의 희년이라고 하신다(제1독서). 헤로데는 자기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즐겁게 하자, 그가 청하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50년째마다 지내는 희년의 제정으로 해방과 용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소개합니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사용하고 있는 땅은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손대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희년을 통하여 종살이와 재산 몰수와 강제 노동에 한계를 정해 놓습니다. 희년은 정의의 해입니다. 바로 여기에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라는 원칙이 있습니다.모든 정의는 이런 신적 토대에 바탕을 두며 특히 아버지의 유일한 부성애에서 기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형제 관계가 드러날 때 특별히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죄를 용서하는 희년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 한 부분을 읽으십니다(루카 4,16-21 참조).언뜻 보기에 죄는 하느님의 율법에서 해방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힘든 종살이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요한 8,34)이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욱더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에 이릅니다.헤로데는 거침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화를 내며 용기 있게 꾸짖는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다음 목을 베어 죽입니다. 그는 초대한 손님들 앞에서 한 맹세와 약속의 종이며, 특히 자신이 저지른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에서 자유롭게 되고, 우리와 세상의 모든 실재가 온갖 억압에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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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는 헤로데 임금에게 바른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헤로데의 비정상적인 아내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미워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헤로디아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요한에게 증오심을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건에서 우리는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헤로디아의 악한 계략으로 세례자 요한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악한 계략과 요한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밉니다. 빌라도는 유다 지도자들의 계략과 군중들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인간의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은 오늘날에도 지속됩니다. 한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죗값은 후대에까지 이어집니다. 죄의 악순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끊을 수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죽였던 요한이 되살아날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담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님 안에서 되돌아보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악한 계략의 동조자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반성 기도’와 ‘통회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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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재산권에 한계를 긋는 것이 희년에 관한 레위기의 법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땅을 구입하더라도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값을 지불하고 땅을 샀다 하더라도, 오십 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직전까지만 그 땅을 임대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땅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기 소유의 땅을 돈을 받고 완전히 팔아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 땅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이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명합니다. 분명 이웃의 사유 재산권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땅은 다릅니다. 이집트 탈출을 체험한 이스라엘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땅은 삶을 다시 시작하려면 꼭 필요한 마지노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지파, 가문, 가정이 살아가도록 주신 땅을 다른 사람이 영구히 차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주신 땅! 재력과 권력과 폭력을 동원하여 그 땅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이웃의 생존을 위협하고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농경 사회가 아닌 오늘날에도 이웃의 삶을 위협하면서까지 나의 재산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모두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하고 배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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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죄가 불러일으키는 힘을 잘 보여 줍니다. 헤로데는 요한 세례자를 죽였습니다. 단순히 요한 한 사람을 죽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요한을 죽임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정의를 죽였습니다. 순결을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죄의 그늘 속에 있던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앓는 이를 고쳐 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굶주린 이를 배부르게 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죽였던 요한이 되살아났다며 두려워합니다. 죄지은 자에게는 예수님의 출현이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 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처음에 아담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죄짓고 난 뒤에는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만 듣고도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어 버렸습니다(창세 3,8-10 참조). 하느님과의 만남이 기쁨이 아니라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올가미는 사람의 눈을 비뚤게 만듭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예수님의 출현을 무서워하고, 아담이 하느님께서 거니시는 소리를 두려워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출현은 기쁨이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거니시는 소리는 반가움이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에 대한 겸손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뵙기가 두렵지만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믿으며 용기 있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겸손한 태도만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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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희생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죄악이 따릅니다. 죄는 전염성이 강해서 주변을 오염시키고 어느새 그것이 정당성을 갖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동참하는 세 인물, 헤로데와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에게서도 악의 세력이 어떻게 일하는지 아주 잘 드러납니다.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지적하는 요한에게 늘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보다 더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사실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로데에 붙어 권력을 누리며 살던 헤로디아는 이를 반대하는 요한 때문에 늘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지키려고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은 딸을 이용하여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헤로디아에게서 발생한 악한 계략이 그녀의 딸을 오염시키고, 이것이 다시 헤로데의 권력의 힘을 움직여 의인을 죽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민 대사제와 원로들, 여기에 동조하는 유다의 배신, 영문도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정치적 이해관계로 무고한 이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 약자를 조롱하는 병사들, 이 모든 사람이 예수님 수난과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입니다.

의인을 희생시킨 이 모든 사람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식별하며 살지 않으면 의인을 죽게 하는 또 하나의 동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말과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크고 작은 희생을 당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잘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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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합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게 살았고,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의 증오를 받아 어이없이 죽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모습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죽음을 닮는 것이 됩니다. 

조선 시대의 유학자 ‘조광조’는 중종 임금 때 등장합니다. 연산군으로 폐해가 심했던 ‘당시 사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 개혁에 열정을 쏟습니다. 인맥을 끊고, 제도를 바로잡고, ‘임금의 중립’을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 전남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습니다. ‘기묘사화’입니다. 당시 37세로 한창 일할 나이에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지요.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 중에 가짜가 많다면서 가려낼 것을 주장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모든 죽음에는 조금씩 억울함이 있습니다. 애매하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안타까움이 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죽음이 됩니다. 세례자의 죽음 역시 ‘이런 사실’을 묵상하게 합니다. 억울함이 깊으면 희생도 깊은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만 생각하면 ‘어린이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억울함에서 ‘감사’를 찾아낼 때 아름다운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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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한 상세한 정황을 알려 줍니다. 유다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헤로디아의 딸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반드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내용은 헤로데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헤로데의 잘못된 행위가 무엇이며, 그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뛰어난 철학자들의 윤리적 통찰의 도움으로 성찰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에 대해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연회석 손님들 앞에서 춤추어 헤로데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기분이 들뜬 헤로데는 성급하게 약속은 하였으나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자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 앞에서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막강한 힘을 지닌 ‘폭군’이 과연 행복한지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폭군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데, 그 마음이 서로 상반되는 원의와 욕구로 갈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행복한 사람의 특징을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벗’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덕은 다름 아니라 감정과 원의가 갈림 없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데서 비롯됩니다. 

헤로데에게도 회한과 일말의 양심은 있었을 것이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감정도 있었겠지만 혼동되고 무질서한 마음, 갈라진 원의는 올바른 행위의 기회를 놓치게 했습니다. 그의 불편한 심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었고,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여러 욕구와 감정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며 조화와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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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사람들은 공권력(국가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거나 무기력해집니다. 반대로, 공권력은 권력의 눈밖에 난 사람들이나 힘없는 백성에게는 한없이 강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 권력에 대항하면, 국가 기관 모독죄로 몰아세웁니다. 만일 종교인들이 잘못된 공권력에 대항하면, 정치와 종교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데 종교가 정치에 관여한다고 하면서, 파렴치한 종교인으로 몰아세워 세상의 우스개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몇몇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담보로 정치 권력과 결탁하려는 것을 가끔씩 봅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신념(신앙) 등이 이미 자신들의 안위를 유지하려는 수단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 순교 정신은 공염불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와 진실을 위해서 과감하게 국가 최고 권력에 대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공권력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 수많은 교우가 국가 권력이 휘두르는 칼날에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맡겼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권력으로 진리가 거짓으로, 거짓이 진리로 왜곡되는 현실 앞에 그저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끝까지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일로 죽임을 당할지라도, 세상의 권력이나 반대 세력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는 어떠한 권력이나 반대 세력의 박해에 떳떳하게 맞서야 합니다.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주님께 의탁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질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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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느낄 수 있듯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뛰어났던 분이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한 여인의 증오로 의로운 사람이 희생된 것이지요. 역사 안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등장을 준비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 살며 회개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지도자들의 거짓과 위선을 과감하게 꾸짖었습니다. 임금에게까지 직언을 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분이었기에 편안한 죽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장수를 누리며 편안히 숨을 거두는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허락된 임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미구에 당하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견하는 암시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억울한 죽음도 있습니다.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정말 애달픈 일입니다. 그러한 죽음일수록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억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과 연결되는 것인지요?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었음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죽음은 그 자체가 봉헌입니다. 그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후손들이 무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억울함’을 희생과 봉헌으로 감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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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른말보다 ‘듣기 좋은 말’을 더 바라는 까닭입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도 있지만 우선은 입에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간신들로 둘러싸인 통치자를 둔 백성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런 통치자에게서 백성을 위한 좋은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바른말, 옳은 말은 통치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아첨과 아부는 우리를 자만하게 만들고 삶을 망치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른말로 충고하는 친구를 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신의 의견과 자주 충돌해 온 추기경을 국무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할 때에도 참 많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뜨거운 커피인지 아이스커피인지, 좀 더 진하게 마시기 위해서 샷을 추가할지 안할지, 매장에서 마시고 갈지 들고서 매장 밖으로 나갈 것인지... 등등 여기에 계산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 카드까지 선택하려다보면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그래서 결정할 것도 저절로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건을 구입할 때, 싸고 좋은 물건, 디자인도 마음에 쏙 드는 물건, 남들이 부러워 할 수 있는 물건 등을 선택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까요? 하지만 최고의 물건을 선택했다고 해서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에게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제가 필기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하나에 몇 십 만원 한다는 최고의 명품 볼펜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볼펜이었습니다. 너무 무거웠고 제 손에 잘 맞지 않아서 글을 쓰기가 힘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내 기준을 따르는 만족스러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긴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작가는 만족스러운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족스러운 삶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일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일에 시간을 소비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을 떠올려 보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헤로디아와 그 딸은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입니다. 아마 당시에는 스스로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은 결코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을 때까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죽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나쁜 영주로, 나쁜 여인으로, 나쁜 딸로 기억되어 우리들 가운데 회자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선택은 절대로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을 청결하고 환하게 지켜야 한다. 나 자신은 세상을 바라보는 유리창이므로(조지 버나드 쇼).


마음의 성숙

“젊어 보여요.”라는 말을 들으시면 어떠십니까? 거의 모든 분들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는 어떤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젊은 마음을 가지려고 늘 노력해요. 그러다보니 외모도 이렇게 젊어 보이는 것 같아요. 호호.”

이분은 50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외모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말투가 너무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요즘의 젊은이들의 말투를 따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외모를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인다는 말에 마음은 성숙되지 않구나 싶었습니다.


외모. 물론 남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면 좋겠지요. 그러나 마음이 성숙되어 있지 않다면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저들의 최후는 비참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나 지금이나 비열하고 사악한 악인들이 활개를 치며 떵떵거립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끝도 없는 사리사욕으로 가득합니다.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편법과 불의한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비굴하게도 강자 앞에는 바짝 자세를 낮추고, 약자 앞에서는 한껏 거드름을 부립니다. 자신의 약점과 비리를 감추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일삼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가 그랬고, 6백만명을 학살한 히틀러가 그랬으며,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그랬으며, 오늘 백주대낮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횡포와 만행을 저지른 군국주의자의 후손 아베가 그렇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그가 보인 처신의 내막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전 세계가 웃을 것입니다. 세상에 개그도 이런 개그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웃기는 일이 확실합니다.


물건을 생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백퍼센트 딱딱 제값 주면서 사가는 고객이 있다면, 생산자의 태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눈만 뜨면 감사하다고, 몇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최고의 VIP 고객에게 앞으로 거래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세상에 이런 바보 얼간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오늘 저지른 희극이자 비극은 머지않아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1세기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다고대사’에 의하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이의 인기가 높아지자, 혹시 정치적 선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체포한 후,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루스 성채에 감금했다가,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최근 동북아 지역에 조성된 화해와 대화의 국면에서 남북한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부상하는 반면, 자국은 소외되는 느낌(Japan Passing)을 받은 아베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타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


극단적 노령화, 오랜 저성장, 성장 동력의 상실 등으로 인해 국가 경쟁력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자국에 비해, 대등해져가는 경제력,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위를 보이는 민주화와 성숙한 시민의식,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한류 문화, 오랜 세월 보여온 굴욕적인 대일외교를 성찰하며, 역사 바로잡기에 애쓰는 노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뒷통수를 치고 있다는 느낌.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사후(死後), 아버지의 유언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가에 따라 16세의 나이에 갈릴래아 지방과 페레아(현재 요르단 왕국의 일부)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해 동쪽에 위치해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결혼했었는데, 머지않아 그녀와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윤리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끝도없이 타락했던 헤로데 안티파스 인생의 결말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가 버린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이었던 아레타스 4세가 군사를 이끌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토를 쳐들어왔습니다. AD 37년 그를 영주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며, 칼리굴라 황제는 그를 갈리아로 추방시켰습니다.


사악하고 비열한 혈통을 물려받은 헤로데 가문의 사람들은 다들 비슷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애를 썼으며, 베틀레헴의 무죄한 아기들을 살해했습니다.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갖은 불륜을 다 저질렀으며 세례자 요한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지난 역사 안에서 자신들이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저지른 만행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매년, 매일, 참회하고 또 참회해도 부족할터인데, 또다시 무리수를 둬가면서 개헌을 획책하고, 군비 확장을 통한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저들이 참으로 사악합니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저들의 최후는 비참할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을 정치적, 경제적 재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이 추구하는 정신이 무엇입니까? 지구촌의 평화와 일치입니다. 그리고 페어플레이(Fairplay)입니다.


그런데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 건설의 암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틈만 나면 편법을 일삼고, 죽어도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또 다시 군국주의화를 꿈꾸는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라니 자다가도 웃을 일입니다.




작은 죄도 짓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국 성공회는 헨리 8세가 현 왕비와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종교입니다. 왕이 재혼을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번 혼인하면 그 혼인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의 연을 끊고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모든 전례나 예식은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따르지만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분열이라는 것이 그의 작은 욕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짓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에 적극 반대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 성인입니다. 영국의 대법관까지 역임하고 높은 지위의 정치인이었던 그는 왕의 그러한 행위를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멈추지 않고 충언을 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헨리 8세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모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물론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은 헤로데 왕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구원받고 싶어서 믿으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헤로데 왕도 세례자 요한의 쓴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목을 베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혀 믿는 하느님은 언제나 우상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부처나 알라신 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을 믿지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모습이 그들의 죄에 가려진 눈 때문에 변형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렇듯 죄를 지으면 믿고 싶어도 눈이 가려져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자아의 판단을 더 믿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라고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건 죄다, 아니다”만을 말해줍니다. 마치 도로의 중앙선과 같습니다.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책감을 주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자아’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믿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아를 믿었기에 죄책감이 생겨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다면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아를 믿는 이를 에덴동산에 두실 수 없으십니다. 자아가 또 다른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믿고 싶어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자아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됩니다. 죄에 자꾸 빠진다면, 자아가 “거봐. 용서해 주면 뭐하니? 또 죄를 짓잖아. 너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예수님을 정신병자처럼 이상하게 바라본 것처럼, 죄에 빠진 우리들도 각자가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만들어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이 죄책감은 나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이 정해주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리 행복이 오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 행복을 스스로 차버리게 됩니다. 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용서를 해 주어도 화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그들을 지나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도와주면 더 큰 만족이 온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더라도 그들이 정해 놓은 행복은 그저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운데 얻는 보람 정도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그에 합당한 행복을 받을 그릇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이거구나!”라고 외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사랑실천을 통해 오는 만족감이 자신이 잘 살아온 상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 “하느님께서 상을 언제 주실까?”라는 마음이어야지 행복이 오는 순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같은 행복을 부어주시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행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준비란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를 차지 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직언을 했던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었는데, 생일 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는 딸의 청을 듣고 난 후 괴로웠지만 자신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맹세까지 한터라 딸의 청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여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자신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아무런 죄도 없이 자신에게 늘 바른 말을 해왔었던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죄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며 내 욕심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구원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욕심의 말들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파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이 들려주는 달콤한 유혹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왔다면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며 그분 안의 구원의 삶을 시작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본래 바탕이 나쁜 헤로데 영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아기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은 헤로데가 동방박사들에게 이기 예수님을 잘 찾아보고 나에게도 들려달라, “나도 가서 경배하겠다” 경배는 무슨 경배, 싹수가 근본부터 노랬다. 두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 학살한다.

예언자가 기록된 말씀, ‘베들레헴에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헤로데는 이 말씀의 기록을 듣고는 놀랐다. 위기의식을 가진 세속의 권력은 의인의 싹을 아예 없애 버린다. 

헤로데의 권력은 향락을 부른다. 동생의 아내를 취하고 생일을 맞이한 딸은 어머니의 간계를 해로데에게 선물로 청한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생일 선물로 받고 싶다. 권력은 무고한 의인의 생명을 죽였다. 그의 권력은 존재도 없이 사라졌다. 

예수님의 부활이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 부활로 착각한다. 정신병환자가 될 것이 뻔하다. 이렇게 자기가 행한 행동이 비만오면 남량특집이 생겨나 트라우마가 자신을 괴롭힌다. 모든 권력자들이여! 정신 좀 차리거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14,8) 

감이 커간다. 감좀 잡아라. 세상의 권력자들아! 백성을 위해 권위를 살아라




세례자 요한

곽승룡 비오 신부님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성 세례자 요한은 순교로 죽음을 맞이했다.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 하였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이 같은 삶이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만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목소리 통해서 말씀을 하신다면, 그 사람의 말씀이 분명 그리스도의 설교와 같은 결과를 갖게 된다는 것은 더욱 놀라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늘 우리의 목소리 안에 말씀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작은 그룹의 모임에서 일부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받아드리고자 하지만, 대부분은 예언하는 목소리를 자제하며, 입을 닫으려고 애쓴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한 광고는 그만두지 않지만,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증거에 ‘예’하고 동의하고 수용하려는 마음속의 거짓 비밀들이 알려질 까봐, 위기에 처한 듯 진리에게서 회피하도록 자극된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가톨릭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한 분이 그 당시 한국에서 일어난 재난사고에 대해 교황님께 “중립을 지키는 것이 어떠냐” 요청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어떠한 불의에 대해 불성실과 무관심을 말하는 자도, 이미 그의 마음 안에 주님의 진리와 그 증거에 반대하는 적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리다.(요한14,6)


누구든지 진리의 한 부분이라도 취하는 자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어떤 방법에 남아 있지 않는 자다. 

그리스도는 역시 생명이지만, 결국 그리스도는 진리인 당신의 목소리에 입막음을 하려는 모든 자들의 원의를 넘어서 이겨 내실 것이다.




<벗 그리고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길을 걷는 벗이

그 길을 걷기에

짓밟힙니다


벗을 짓밟은 이가

벗을 짓밟음으로써

나에게 멈추랍니다


그 길이 바르기에

홀로라도 걸어야지요

나 또한 짓밟히겠지만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매일 부동산 열기를 미디어에서 보고 듣습니다. 아파트 값이 얼마가 올랐다느니, 어디에 새로 택지를 개발하고, 어디에 신도시를 짓는다느니 등등. 그런데 이스라엘에도 아파트를 짓고 땅을 사고 팝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땅을 매매하지만, 땅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땅을 사용할 권리를 일정 기간 사고파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각 부족 각 가정에게 거져 나누어 주신 것이므로 땅 자체를 사고팔 수 없다는 믿음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땅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물의 개념도 같습니다.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나 물질의 사용권을 사고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낮에 누군가의 겉옷을 담보로 저당잡아 맡아두었다면, 밤이 되어 추워지면 그 옷을 다시 그 옷을 저당잡힌 주인에게 가져다주었다가 밤을 춥지 않게 보내고 다시 따뜻한 낮에 수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 인간 존중에 대한 사랑이 이스라엘 율법의 근간입니다. 실제로는 인간의 근시안적인 이해관계와 탐욕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는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속죄일과 속죄일에 이어지는 희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8-10) 안식일은 일곱 번째 되는 날 쉬는 것이고, 안식년은 일곱 번째 되는 해에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목축을 하면서 일곱 군데로 나누어 여섯 군데를 돌아다니며 양에게 풀을 뜯게 하고 한 지역은 남겨둡니다. 마치 풀이 다 자랄 때까지 기다리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한 지역을 남겨두던지, 여섯 해 동안 농사를 지었으면, 한 해를 쉬게 합니다. 한 해 동안 사람도 쉬고 여섯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며 뽑아내었던 토양의 영양분을 회복할 때를 기다리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식년 제도에 따라 칠 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에 희년을 선포합니다. 희년에는 아예 그동안의 모든 소유권을 다 무효로 하고 원주인에게 되돌려 줍니다. 모든 빚과 담보 및 은원과 죄악을 모두 소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법으로 희년이 되는 해에 모든 질서를 다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희년이 50년 만에 한 번 오니까 결국 일생에 한 번은 재생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제도의 근간에는 하느님께서 인간 생명과 자연을 거저 주셨고 하느님께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거져 건져주셨기 때문에 형제들에게도 거져 되갚아야 한다는 신앙과 사랑의 행동 법칙에서 나옵니다.


이 안식일과 속죄일 및 희년에 대한 법을 보면서, 일과 쉼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해줍니다.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하여 일곱 번째 날에 먹을 것을 준비한다는 것과 엿새 동안 일하고는 일곱째 날에 일해서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이웃에게 돌린다든지. 매일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일 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자신이 부리는 일꾼들과 자신의 일터인 자연도 쉬면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아울러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쉬고, 여덟 시간 인간 문화와 여가생활과 이웃돕기를 실현하며 살도록 인간과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노동과 쉼과 생활 그리고 그러한 노동조건과 환경 그리고 그에 따른 이웃돕기와 자연생태 환경보존과 회복의 이치를 하느님 창조 질서 안에서 재해석하고 실현하며 살아갑시다.




이 순간이 꿀맛 같이 달다.

최민석 신부님

새벽마다 만나는 아주 작은 하느님 풀잎 위에 있다. 지구의 맨살 가린 풀잎 내려다보면 둥글게 올라앉은 하느님의 속살이 투명하게 보인다. 초록의 풀잎 위에 사시는 하느님, 요즘 하느님은 한 방울의 몸뚱이 안에 나를 담고 내 온몸 빨아들이니 하느님의 눈빛 속으로 저릿저릿 침몰하여나 나 또한 잠시 작은 하느님이 된다.


내가 하느님으로 안다는 것 그것은 다만 내가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하느님은 보이는 것들을 통해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주신다. 하늘과, 땅 그 안에 사는 천체들과, 공중에 뿌리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생명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비추는 하느님이다. 이 넒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지금 지구의 어머니는 아프다. 나도 아픔의 일부이다. 나의 아픔이 생명과 영혼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주었다. 육체가 건강하고 아름다웠을 때 나는 보이는 세상의 그 아름다움조차 즐기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눈이 가려졌다고나 할까. 더욱 완벽한 아름다움의 관념과 환상을 갖고 있었기에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그저 육체의 흠만 보일 뿐 만족이 없었다.


내 몸이 기울어지고 아파지기 시작할수록 살아 움직이는 것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자각하게 되었다. 때로 움직일 힘이 없어 가만 누워 유리창 너머 보이는 푸른 하늘만 보아도 아!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였다. 숨 쉬고 눈을 떠 그 하늘 바라보는 순간의 충만한 행복과 기쁨, 불편한 육체 속에서 빛나는 영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은 흠 없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이란 본래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로구나. 거듭거듭 깨닫는다.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지금 있는 것’ 대한 마음의 모든 저항이 그칠 때 뜻밖에도 그것은 스스로 힘을 일게 된다. 그 모든 앎은 다시 큰 기쁨이 된다. 본래의 기쁨, 본래의 거룩함 그 안에 만족할 뿐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


하늘의 구름과도 같이 내 마음이라는 빈 하늘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곧 사라지는 생각 감정은 실체가 없다.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 감정은 그때그때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진다. 생각 감정에 저항하지만 않으면 참된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아침부터 줄곧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숲에 관한 기억이다. 숲은 고요하다. 그러나 아니다. 숲 속에 들어가 보면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온갖 풍성한 소리를 만나는 순간 나는 황홀경에 빠진다. 그 충만한 기쁨과 평화는 사라질 줄 몰랐다. 땅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를 사랑으로 품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한 모성을 찾은 기쁨으로 생긋생긋 웃으며 산을 내려왔다.


영혼의 충만함을 체험한 사람은 영혼의 메마름이 무엇인지 안다. 불안에 휩싸일 때, 왠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할 때, 답답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외로울 때, 누군가가 원망스러울 때, 바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릴 때,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사람이 반갑지 않을 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일지 않을 때, 이러한 순간을 대면할 때엔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하루 중 영혼의 눈을 뜨고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순간순간 현존 감으로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 얼이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 영혼은 가슴속에서 움츠리게 된다. 그땐 습관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끊고 내면의 눈을 떠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바라보며 행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요한 명상’을 보태면 영혼은 충만함으로 회복된다. 평화는 영혼의 본모습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다. 거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허공을 가득 메운 나뭇잎들이 초록 향기를 내뿜고 있다. 고맙고 또 고마운 선물이다. 이 새벽, 이 신선한 새벽, 어제 밤새 더위에 시달렸다. 그런데 한 잠 자고 나니 그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나는 어느덧 신선한 공기를 온몸에 맞으며 새벽을 즐기고 있다. 이 순간이 꿀맛같이 달다.




영원한 비전(Vison), -희년禧年의 영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비전이 없으면 곧 무너지거나 부패할 수 있습니다. 비전이 없을 때, 비전을 잃을 때 자유도 여유도 없습니다. 초월적 거점의 비전을 잃을 때 시야는 좁아지고 마음은 삭막해집니다. 영적 인간은 사라지고 육적 인간만 남습니다. 항구하려면, 한결같으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은 영어로 국립국어원에서는 이상, 전망의 우리 말로 쓰기를 권고하지만 ‘비전’이란 영어 그대로의 발음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27년전, 1992년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때 강론 일부가 생각납니다. 참고로 왜관에서는 일제 강점기 지명인 왜관倭館을 칠곡으로 바꾸자는 청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썩 유쾌한 지명은 아닙니다. 강론 내용의 일부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수도원에 비전(vision)이 없다’고 당연합니다. 비전vision이 있다면 그리스도뿐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느님을 찾는 단순한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밖의 모두는 환상이요, 우상일 뿐입니다. 결과는 환멸입니다. 그 무엇도 자기 ego를 충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진짜 참 영원한 비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느님, 또는 하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하느님, 하늘 나라 모두 한 실재에 대한 세 표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예수님은 물론 요한 세례자 역시 비전은 동일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

요한 세례자 설교의 요지입니다. 하늘 나라가 요한 세례자의 영원한 비전이었음을 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예수님 설교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역시 예수님의 영원한 비전이었음을 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의 관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 조건이 회개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비전인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맞아들이려 하는 자에게 회개는 필수입니다. 진정 회개가 없으면 악행은 반복됩니다. 회개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겸손입니다.


바로 이 회개라는 측면에서 일본에 대한 실망이 큽니다. 회개할 줄, 사죄할 줄 모르는 점에서 독일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일본 정부는 2일 오전 각료회의를 열어 일본산 부품·소재 등 전략물자 수출 관련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흡사 일본과의 경제 전쟁이 전개된 양상입니다. 어제 도반과 주고 받은 대화도 생각납니다.


-“일본은 희망이 없어 발악한다!”


“공감합니다. 지도자든 국민이든 원대하고 숭고한 비전이, 희망이, 꿈이 없는 일본입니다. 그러니 강한자에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합니다. 고압적, 단선적, 획일적, 맹목적, 폐쇄적 사고입니다. 일본은 군국주의의 향수와 사고가 여전하고 민주화의 역사가 전무하합니다. 반면 한국은 찬란한 민주혁명의 역사가 있고 지극히 역동적이자 비전이, 희망이, 꿈이 넘치는 사회입니다.--- 좌우간 양측이 ‘상생(win-win)’의 길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참 비전은 하느님이요 하느님 나라요 그리스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의 마지막 소개는 ‘희년’입니다. 어제는 이스라엘의 축일에 대해 소개했고 오늘은 희년입니다. 희년의 영성, 희년의 비전이 참 매력적입니다. 예언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예수님 역시 공생애가 시작되자 출사표를 던지듯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게 희년의 영성이자 비전입니다. 하늘 나라의 회개를 사는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희년의 시작입니다. 구체적으로 희년은 전체적인 해방과 자유를 뜻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창조때의 제자리에로의 귀환을 목표로 합니다.


첫째, ‘인간의 자유(human liberation)’로서의 희년이요, 둘째는 ‘경제적 자유(economic liberation)’로서의 희년이요, 셋째는 ‘생태적 자유ecologicl liberation)’로서의 희년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경제적, 생태적 측면 모두가 망라된 참 아름답고도 영원한 비전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희년이 실천됐다는 증거는 없지만 영원한 비전으로, 후대는 물론 오늘의 예언자들에게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비전과 일치되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모습으로 제대로 서로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 때 비로소 희년의,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없을 때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 장면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하느님 비전이 없기에 우유부단한, 영혼이, 생각이 없는 ‘무지無知의 사람’, 헤로데요 헤로디아요 헤로디아의 딸입니다.


영원한 비전인 하느님 나라를 살지 못할 때 바로 여기 기생하는 악인 것입니다. 마침내 이들에 의해 하늘 나라의 비전을 살았던 세례자 요한은 순교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알립니다.


아마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적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도 분명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기소침, 위축되거나 좌절함이 없이 요한의 몫까지 더하여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바로 이의 생생한 증거가 곧장 이어지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복음입니다.


비전이 삶의 꼴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비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비전에 따른 현실적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부단히 기본에, 기초에 충실하며 ‘실력’을 키워야 할 것이요, ‘겸손’과 ‘신뢰’의 인품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 비전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비전인 희년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25,17). 아멘.




'사람 잡는법'(마태오 14장 1~1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소문, 부추기기, 맹세'

소문이 사람 잡습니다.

진실의 여부 상관없이 말이 부풀려지고 부추기기에 하늘두고 맹세한다는 말까지 붙으면 사람 잡는것 쉽게 됩니다.

선한 사람을 죽일 수도 악한 사람을 교묘히 살릴 수도 있는 인간의 나약함 헤로데를 보면 인간의 술책에 하느님의 선함이 굴복한듯 보이나 헤로데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죄 짓고 못삽니다.

내 영혼이 병들기전에 잘못한 죄 용서받고 떳떳하게 살아갑시다.

말 잘못 내뱉으면 큰일날 수 있어요.

'소문과 진실의 문 잘 구별합시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레위 25, 10)

김웅태 신부님

+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제1독서(레위 25, 1~17)에서는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희년을 선포하도록 하십니다. 

희년이란 것은 기쁜 해라는 뜻입니다. 왜 기쁘냐 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해방의 기쁨을 다시 맛보기 때문입니다.

이 희년은 50년마다 오는 것이고 50년 째를 맞이할 때, 이스라엘 자손들 즉 하느님 백성이 은혜를 입는 기쁜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여라. 그러면 안 식 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 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레위 25, 8~9)

50년째 되는 해는 대단히 기쁜 해이지요. 매 칠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째 겹치는 해이기 때문에 아주 기쁘고 거룩한 해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안식년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주간 중에도 안식일이 있지요. 6일 동안 일하고 일곱 번째 돌아오는 안식일은 육체노동을 피하고 쉬면서 사람의 근본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시간을 갖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자신을 생각하는 그런 날이 되는데, 매 7일마다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 7년마다 안식년이 돌아올 때에도 그러한 정신으로 지냅니다. 이 안식년에는 밭도 휴경지로 지내고, 거룩하게 지냅니다. 7년마다 오는 이 안식년이 일곱 번째 되는 해는 더욱더 거룩한 해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더 기쁘고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나팔을 불어 선포하면서, 진정한 해방을 알리는 그런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는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의 소속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레위 25, 13)

그래서 이런 안식년이 일곱 번째 되는 해, 즉 50년 째를 맞이하는 그 해 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 백성임을 더욱더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께 소속돼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눠주신 그 재산들이 골고루 다시 공평하게 나눠져야 된다는 것, 그리고 감옥에 갇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몸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해서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되면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하는 그런 해가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련해 주신 이 제도는 좋은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50년마다 맞이하며 또한 일곱 번째 겹치는 해인 이 희년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각자 각자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되찾아야 될 권리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그리고 나의 근본은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또 나의 가족과 조상을 통해서 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그런 좋은 시간이 되도록 주셨다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희년 이 온다면 내가 주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기 위해 이웃과 나눠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이 희년에 내가 되찾아야 할 권리는 무엇입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권력의 남용<마태,14/1-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시려 권력과 재력과 명예욕을 주시였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갓을 이기적 야심에서 사용하고 권력을 남용하면서 창조의 목적과 반대되는 핼위를 하며 악의 세력을 키워 나갑니다. 최초의 권력남용은 아벨을 죽인 가인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시기와 질투로 시작하여 “ 너만 없으면 나는 더 편하고 인정 받고 살아 갈 수 있을 것인데 네가 있어 내 멋대로 삶이 방해 받는다고 제거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시간 속에 지속되고 있습이가.

오늘 헤로데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것도 시작은 사람이 무서워 못하든 것을 그의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스스로 두려워 괴로웠지만 무죄한 사람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은 현대 지속적입니다. 내편 나에게 유익한 사람은 살려주고 불리한 사람은 죽도록 고통을 줍니다.


이모든 것의 모순은 자기 안에 가진 권력과 재력과 명예 력 자기 것인 줄 알고 남용 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행위입니다. 국기와 국과 사이 도 마찬가집니다. 일본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보복적 행위 그에 보복을 함으로 이기려고 하면 더 많으 분쟁으로 상처 받고 독재와 살인 따라옵니다. 이런 약점은 어디서 오는 것일 까요. 

권력의 힘만 믿고 바로 사용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저는 나에게 주어진 능력은 남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되어있고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그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데 있습니다. 저의가 아니고 사랑이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고 따르면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권력 주위에는 올바른 사람 정의 따르는 사람 진실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어 권력의 남용을 막고 충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을 붙어 주라.“ 한 사람도 나로 안하여 상처 받거나 생명의 해를 받지 않도록 악을 피하고 선을 해하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뜻인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이기심이나 욕망에 의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의인의 죽음이 많은 이를 슬프게 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사랑의 완성인 생명의 존중과 너를 위해 내 생명을 내어줄지언정 다른 생명을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 많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였습니다. 

이 신앙의 신비를 찬미와 감사드리며 믿음의 삶을 살아갑시다.




선택의 기준

김형진 베드로 신부님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우리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삶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선택을 통해서 인생을 가꾸어 갑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선택이 옳은지 고민하다 보면, 때때로 망설임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도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 때문에 고민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릇된 선택을 하고 맙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세상의 것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과 구원으로부터 멀어져버렸습니다. 우리 선택의 옳고 그름은 그 기준이 무엇인지, 그 선택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앙인의 삶은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어 그분께 나아가는 ‘순례 여정’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선택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무엇이 나와 이웃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참된 목적을 위해 세상을 거슬러 복음의 기준에 따라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가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마르지 않는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폴리카르포에게 보낸 편지’에서 (Nn. 5,1-8,1. 3: Funk 1,249-253)

마술사들의 악한 일에 함께 하지 마십시오. 뿐만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공적으로 그들을 반대하여 말하십시오. 나의 자매들더러 주님을 사랑하고 육신적으로나 영신적으로나 자기 남편에 대해 만족을 느끼라고 권고해 주십시오. 나의 형제들에게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십시오. 그리고 누가 주님의 몸의 영광을 위해 독신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는 그런 생활을 겸손히 해야 합니다. 그가 뽐낸다면 버림받을 것이고 또 주교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활의 공로를 다 잃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 그들의 혼인이 정욕에 따르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도록 주교의 허락을 받아 맺어지도록 하십시오.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배려를 베풀어 주시기 원한다면 여러분이 먼저 주교를 잘 시중드십시오. 나는 주교와 원로들과 부제들에게 순종하는 이들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고 싶습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주님을 모시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속한 관리자요 보존자요 봉사자로서 매사에서 서로 도와주고 함께 싸우며 함께 달리고 함께 경쟁하며 함께 잠자고 함께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사령관으로부터 보수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흡족하시도록 노력을 경주하십시오. 여러분 중 탈영병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를 방패로 삼고 신앙을 투구로 삼으며 사랑을 창으로 삼고 인내심은 온 몸을 두르는 갑옷으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선행을 투자하여 이자를 받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대하시듯 여러분 서로에게 인내심을 갖고 온유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언제나 내 기쁨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한 덕분으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가 다시 평화를 찾았다는 소식을 받고 나는 하느님의 보호 속에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바라는 것은 순교를 통해서 하느님께 도달하여 부활할 때 여러분의 제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지극히 복된 폴리카르포여, 집회를 열어 매사에 충실하고 모든 이들로부터 호감을 받는 한 사람을 하느님의 사절로 뽑아 그를 사절로서 시리아에 보내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열렬한 사랑을 보여 주시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결국 자신이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일은 하느님의 일이고 또 여러분이 그 일을 다 마친 후 여러분의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이 하느님께 속하는 이 좋은 일을 할 마음이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열성을 알고 나는 이 짧은 편지로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우리 배는 하느님의 뜻으로 트로아스에서 네아폴리스로 향해 급히 떠났기 때문에 모든 교회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귀하는 동부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그 교회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할 수 있는 교회들은 자신의 사절들을 보내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회들은 귀하의 사절들을 통하여 편지를 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 모두에게 영원한 열매가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건강하기를 빌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보호 아래 일치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안녕히 계십시오.




<희년의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희년에 대한 규정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얘기를 마치면서 우리의 주 하느님을 경외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한다면 이 규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오금 박기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규정을 마련해주시고 지키라고 해도 과연 이 희년의 규정을 이스라엘 백성이 잘 지켰을지 의문입니다.

왜냐면 이 규정은 보통 사람은 지키기 어려운 규정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늘은 희년의 규정이 어떤 거기에 지키기 어렵다는 건지 보렵니다.


첫째로 희년은 해방의 해입니다.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종살이에서 다 풀려나는 해인 거지요.

그럼으로써 신원회복, 자유회복, 존엄성회복을 하게 하는 해인 것입니다.


그런데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풀려나려면 주인이 풀어줘야 하는데 어떤 주인이 자기 소유의 종을 풀어주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런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얼마 되지 않았을 거고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도 1%가 안 될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이 모든 이의 주 하느님임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 하느님께 모든 소유권을 돌려드리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 김익진과 같은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는 Reddere돌려드린다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요.

모든 것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뜻이지요,


그는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표시로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재물보다도 더 귀한 사람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표시로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함으로써 작은 자/낮은 자가 되었지요.


다음으로 희년은 소유지 회복의 해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소유지를 회복키 위해서는 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땅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곧 자기가 지주地主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소유지를 돌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땅이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땅을 돌려주는 표시로 가난한 사람에게 소유지를 돌려줄 터인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 숨겨져 있습니다.

땅이 내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의 것이고, 땅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공산주의는 땅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을 부정하기에 국가가 모든 땅의 소유권을 가지지만 그리스도교는 국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땅의 소유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초기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인 김익진 선생은 공산주의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 된 분이신데 그를 이렇게 바꾼 분이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김익진 선생은 본래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이었지요.

그의 큰 형이 바로 일제시대 유명한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을 건너다 사의찬미를 부르며 자살한 것으로 유명한 김우진이고요.


그는 만석꾼의 아들이었지만 모택동을 만나면서 공산주의에 심취하여 모택동의 홍군에 가담하기도 하였지만 우연히 일본 서점에서 성 프란치스코 전기를 읽고 난 뒤 천주교 세례도 받고 평신도로서 한국에서 첫 번째로 서약을 한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지요.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자기 땅의 일부는 성당부지로 봉헌하고 나머지는 다 소작인에게 나눠준 그가 진정 희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런 희년의 사람이 된 것은 돼야 한다니 억지로 된 것이 아닐 겁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에서 하느님을 믿게 된 뒤로 진정 하느님을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으로 믿고 경외하였으며 그럼으로써 행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마지막 말씀이 깊이 공명되는 오늘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하느님 안에서 살기

이종훈 신부님

인생이라는 순례의 끝은 하느님이다. 하느님과 함께 혹은 그분 안에 사는 것은 어떤 권력을 가짐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을 포기한다. 그 대신 거기에는 평화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겨주셨던 당신의 평화이고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차원이 다르다(요한 14,27). 


권한은 봉사이다. 봉사하는 이들에게 대중은 권위를 준다. 이것을 권력이라고 오해한 이들이 손을 꽉 쥐는 순간 모래알들은 손에서 빠져나간다. 반면 하느님 안에서 살았던 이들은 주어진 권한으로 사람들은 섬겼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대부분 고단했다.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은 진리와 하느님을 품은 권위자들을 함부로 대한다. 폭력과 비폭력의 대결은 언제나 폭력이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뿐이다. 진리가 승리한다. 어둠은 빛을 덮을 수 없다. 오히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아진다. 


일제강제징용피해자 어르신이 울먹거렸다. 괜히 당신 때문에 나라가 힘들어진 것 같아서 죄송스럽다는 것이었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일을 정확히 끝까지 기억한다. 그 어르신에게 불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한다. 그래야 하느님 안은 아니어도 최소한 하느님 편에는 서있는 것이다. 


헤로데는 체면 때문에 하느님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을 살해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삶을 예언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신다. 비폭력 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것은 거룩한 장소에서는 지시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을 조신하고, 웬만해서는 기도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무지하고 어리석고 오만한 권력자들이다. 가끔 자신에게 부여된 성사권을 권력이라고 착각하는 성직자들이 있어 마음 아프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종처럼 사람들을 섬기고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 그분이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셨다. 고달프고 마음 아파도 끝까지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답게 살기를 기도한다.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그는 요한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들추어내며 비난을 퍼부을까 불안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일이 없는데 요한의 힘이 예수님께로 들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간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따라 이방민족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를 함으로써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라고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 했지만, 그 댓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헤로데의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그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 했을 뿐이다. 그는 교활한 사기꾼이며, 능숙한 암살자이기 때문에 속마음은 기쁘면서도 괴로워하는 척 했던 것이다. 헤로데는 참으로 잔인하고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괜한 맹세를 하여 소녀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 그래서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무엇을 괴로워했던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선은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길한 길에 들어섰고,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의 왕위도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 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또한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 14,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것을

탐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지나친

우리마음들입니다.


위험한 욕망은

하느님까지 내쫓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뜨거운 생명은

우리 것이 

분명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됩니다.


헤로데의 교만한

권력의 폭력은

결국 요한 세례자를

죽음에 이르게합니다.


작은 생명

큰 생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누군인 줄도

모른채 살아갑니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력의 끝은

늘 허무하며

권력의 욕망은

이와같이

끝이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길은

선한 의지안에서

서로를 살립니다.


생명 중심으로

나가는 길이

서로를 살리는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


욕망에 취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단어를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해야 이 세상을 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으로 힘들지요. 그 이유는 영어사전에 수록된 정서적 단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62%가 부정적 단어라고 하네요. 결국 부정적인 성향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 부정적인 성향은 뇌를 통해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뇌의 편도체는 부정적 경험을 탐색할 때 자신의 뉴런 중 대략 2/3를 사용합니다. 또한 뇌가 나쁜 소식을 찾기 시작하면, 부정적 경험은 즉시 장기 기억 속에 저장되지만 그에 반해 긍정적 경험은 우리의 의식에서 12초 이상 정체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긍정적 경험이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긍정적 경험보다 부정적 경험이 더 생각이 많이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몸의 구조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적 성향을 보이데 익숙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부정적인 성향으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런 성향에서 벗어나서 어렵고 힘들더라도 긍정적인 성향을 갖춰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세 그룹으로 나눠서 매주 특정한 주제와 관련해 서너 문장씩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첫째 그룹은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 둘째 그룹은 자신을 화나게 만든 사건에 대해서, 셋째 그룹은 긍정, 부정 상관없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건에 대해서 쓰라고 했습니다. 10주 후에 인상 깊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셋째 그룹은 별 큰 변화가 없었고, 둘째 그룹은 운동하는 빈도가 증가하고 의사를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첫째 그룹은 행복지수가 올라가면서 삶의 질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바로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을 때 삶의 질이 변화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헤로데 영주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주지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했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더욱 더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삶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피하고 악을 실천하는 모습에서 긍정적 성향보다 부정적 성향에 스스로를 내던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긍정적인 성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조금만 노력을 한다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도와주십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자신을 포기한 데 대해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십니다(성 마더 데레사).


존 헨리 뉴먼의 기도문(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좋아하셨던 기도문)

사랑하는 주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 향기를 퍼뜨리도록 도와주소서.

제 영혼에 당신 영과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저의 삶 전부가 오직 당신의 찬란한 빛이 되도록 저의 온 존재에 속속들이 스며드소서.

저를 통해 빛을 비추시고 저를 만나는 이들은 누구나 제 영혼 안에서 당신 현존을 느끼도록 제 안에 머무소서.

오 주님,

그들이 눈을 들어볼 때 더 이상 제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만을 보게 하소서.

저와 함께 머무시면 저는 당신처럼 환해지리다.

저는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될 만큼 환해지리다.

주님,

그 빛은 오로지 당신한테서 나오며 제 빛은 조금도 없나이다.

저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분은 당신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둘러싼 이들에게 빛을 주심으로써 가장 큰 사명을 주시는 것처럼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설교하지 않고 당신을 전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모범으로, 전염시키는 힘으로, 제가 하는 일에 공감하는 영향력으로,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의 명백한 충만함으로 당신을 보여주게 하소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인들의 고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존경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할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위대한 대예언자로서 평생에 걸친 노고와 희생에 대한 축복과 선물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다가온 것은 깊은 지하 감방 속에서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이었습니다.

저 사악한 헤로데며, 헤로디아며, 살로메는 저리도 당당하게, 세상을 쥐락펴락하면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데, 잘못한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을뿐더러,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완벽히 수행한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온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인들의 고통!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인류에게 주어지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정말이지 백번 천 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억울한 고통,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소아암 병동에 들렀다가 꼬마 환우들을 보면서 정말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그 여리고 여린 몸에 갖가지 주사바늘들을 줄줄이 꼽고 있는 모습에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저 어린 존재들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주시는지, 참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끔찍한 병고가 또 그렇습니다. 사이코패스들의 만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 역시 하늘을 찌릅니다. 하필 우리 가족에게, 내 자녀에게 다가온 갖가지 중증 장애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때로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하느님의 존재 여부까지 회의하게 됩니다. 감당하기 힘겨운 십자가들은 우리를 근본적인 신앙까지 흔들어놓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의인들이나 무죄한 사람들이 저리도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반해, 악인들은 계속되는 승승장구와 만사형통 앞에 크게 웃고 있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표와 인간의 시간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뒤로 물러서서 마음 크게 먹어도 이해되지 않는 모순된 현실 앞에 방황하고 흔들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 한 가지는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가신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 위대한 대 예언자들 역시 의인들의 고통과 악인들의 번성 앞에 우리와 똑같은 고민과 방황을 거듭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라고 한탄했다는 것입니다. 일관되게 하느님께 충실했으며, 늘 정의 편에 서서 끝까지 불의와 맞서온 자신의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용납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대체 무엇인가 끝없이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두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펼쳐진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 어떤 기대도 그 어떤 보답도 하지 않기로 결심하여 다 내려놓았습니다.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리오?’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눈앞에는 계속해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기억할 일, 하느님께서는 느리시지만 당신 나름대로의 시간표와 계획표에 따라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불평불만을 접고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일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신비스럽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불가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께서는 때로 우리를 따뜻이 어루만져주십니다. 더 당신 뜻에 맞갖은 모습으로 꾸며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를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깨트리십니다. 짓이기시고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다 합당한 존재로 우리를 재창조하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인생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줍니다.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의 길은 흥미진진한 길이지만, 다양한 결핍들과 고통들이 뒤따르는 길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순례자이며, 아직도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희년禧年의 비전과 영성의 실현, -하늘 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 레위기의 희년의 비전과 영성이 참 반갑고 새롭습니다. 아주 오래된 미래의 빛나는 비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비전은 이렇듯 아름답고 신선하고 현실적입니다. 사람은 비전이 있어야 타락하지 않고 고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생 비전은 하늘나라, 하느님이었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로 믿는 이들 역시 원대한 궁극의 비전은 역시 하늘 나라입니다. 하여 가시아노 교부는 수도생활의 직접적 목표는 마음의 순결이요 궁극적 목표는 하늘나라라 했습니다.


희년의 영성과 직결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줄기차게 선포했던 것이 희년의 영성이었습니다. 오늘 레위기에서처럼 세상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아 주는 구원의 해가 희년입니다. 일곱 번의 안식년이 끝나는 50년째 되는 해가 희년으로 이 때는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 해입니다. 해방과 자유는 세차원에서 이뤄집니다.


첫째는 인간의 해방입니다. 노예였던 모든 이들이 풀려나 자유인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해입니다. 둘째, 경제적 해방입니다. 모든 부채를 탕감받아 빚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생태적 해방입니다. 하느님 만드신 자연과 땅도 경작에서 해방되어 휴식을 취하며 자유를 누리는 해입니다. 하느님 창조하신 세상 모두가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균형과 조화를 찾는 희년입니다. 


희년의 영성이 참으로 아름답고 심오하여 매력적입니다. 희년의 영성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오늘 레위기 마지막 말씀이 희년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증언합니다. 


진정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희년의 이상을 현실화하는데 전념할 것입니다. 희년의 하늘나라 비전을 살았던 참 아름다운 사람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돌입하기 직전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신 루카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루카4,18-19).


희년의 영성이 존재 깊이 스며 들어있는 예수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축제이며 희년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노력합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진정한 수도생활은 오늘 지금 여기서 희년의 하늘 나라 삶을 사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문득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셋째 연이 생각납니다. 


진정 희년의 비전과 영성을 살았다면 이 세상 삶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박3일의 대월수도원에서의 삶, 참 아름답고 행복했습니다. 자유롭고 평화로웠습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희년의 비전과 영성을 지니고 상주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아름답고 행복한 삶,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이겠습니다. 오늘 대월수도원을 떠나는 저는 천시인의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에 덧붙여 ‘행복하였다고 말하리라.’고백하고 싶습니다.


수도원과 교회뿐만 아니라 불평등이 날로 심화되는 사회 역시 희년의 비전과 영성의 실천이 참으로 절박한 때입니다. 

모두가 공멸이 아닌 모두를 살리는 공존공생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 희년의 비전과 영성의 실천이겠습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이 실천된 바는 없다하지만 그냥 ‘이상’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으로 희년의 이상을 ‘현실화’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수도원과 교회가 우선적 모범을 보여야 할 희년의 비전과 영성입니다.


희년의 비전과 영성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비전과 영성을 잃어 버렸을 때 세상 탐욕과 권력욕에 눈 멀어 삶은 참 비루해지기 마련입니다. 희년의 비전과 같은 ‘하늘 나라’ 빛나는 비전을, 꿈을, 희망을 잃었을 때 타락과 추락은 필연입니다. 


바로 오늘 마태복음의 헤로데 임금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이런 하늘 나라 빛나는 비전이 없기에 분별의 눈도 없어 우유부단하고 경솔경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여 마침내 악녀 헤로디아 모녀의 유혹에 빠져 자기에게 직언했던 정의와 진리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말 그대로 순교의 죽음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알렸다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통해 분명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나 이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더 하늘 나라 비전의 실현을 위해 투신하려는 결의를 굳혔을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희년의 비전과 영성입니다. 이래야 아름답고 행복한, 자유롭고 평화로운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희년의 비전과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시편145,15). 아멘. 




신앙인이 지켜야 할 명예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신앙인이 지켜야 할 명예는 사랑입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걱정,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불경한 이들은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이며, 타락한 이들에게 고결함은 괴로움입니다. 방종한 이들에게 검소함은 상극이고,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며,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마치,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 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그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합니다.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고,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하는 까닭입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치고 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며,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순교(殉敎)는 산고(産苦)의 아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산모들은 자신을 이렇게 아프게 만든 남편을 욕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답니다.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다가 아이가 나오면 아픔이 싹 사라지고 자신이 그렇게 소리를 지른 것이 창피해진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아팠으면서도 둘째, 셋째를 또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또 아플 것임을 알면서도 또 아이를 갖는 것은 참 신비스럽습니다. 아마도 그 아픔보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기쁨과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당당히 순교하는 것입니다. 순교가 더 가치 있는 일은 아이를 낳는 것처럼 이 세상에도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어떠한 새로운 생명도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새 생명만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피를 함께 세상에 뿌리듯이, 이 세상에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태어나기 위해서도 누군가의 그만한 고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피 흘림을 통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인구가 늘어나자 태어나는 사내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피밭’에서 자라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이 순결한 어린 순교자들의 피는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무고한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하게 됩니다. 이 아이들의 순교 속에서 구원자가 태어난 것이고, 이 구원자의 피 속에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어 낸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옆구리를 찢으면 당연히 피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찢어 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두 번째 하와인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탄생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순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명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뜨면 달과 별은 그 빛 속에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그도, 오시는 태양이신 메시아는 점점 커지셔야하고 샛별이고 여명인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사라져야 함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그의 제자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마지막 남은 한 제자까지도 모두 그리스도께로 보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은 사라져줘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죽는 죽음은 자신도 남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죽음은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들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씨가 됩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누구도, 우리가 알든 모르든 반드시 어떤 사람들의 희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희생하고 순교하여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게 해야 할 때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점점 작아지고 죽어감으로써 그리스도께 첫 번째 제자들을 봉헌하였고 자신이 모은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였듯이, 우리들도 이젠 받기만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어른들이 되어야합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나의 희생이 다른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십자가들도 지고가기 힘겨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불평 없이 지고 가는 것도 커다란 믿음입니다. 그러나 더 성장한 신앙인이 되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아픈 것을 참고 말하지 않는 것으로, 기도 때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는 것으로, 기침을 많이 하는 할머니 수녀님의 옆에서 그 소리를 참는 것으로, 빨래 때 물이 튀는 것을 그대로 맞는 것으로 세상에 셀 수 없는 영혼을 회개시켰고 전교의 수호성인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더 성숙한 신앙인이란, 나의 희생과 순교가 곧 새 생명을 탄생하기 위한 산고로 쓰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악을 폭로하는 의인의 희생과 죽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의 예고편입니다. 요한은 정치적인 통치자의 배척을 받고, 합당한 이유 없이 그리고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정치 지도자들의 반대와 배척을 받고 부당하게 처형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자신의 제자들이 주검을 거두었습니다. 


갈릴래아와 페레아 지방을 통치하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듯이 예수님도 처형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 놀랍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이 처형한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4,1-2). 세상의 막강한 권력을 지닌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며 경계하고 불안을 느낍니다. 


요한의 운명은 헤로데 안티파스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죽음을 향해 치닫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배다른 형제의 딸이면서 동시에 이복형제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는 이 혼인을 위해 첫째 부인 곧 나바테아 왕국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을 버립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여러 차례 옳지 않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였습니다(14,4). 


사실 헤로데의 행위는 율법에서 금지된 근친상간에 해당했기에(레위 20,21) 비판받아 마땅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의 정당한 지적에 잘못을 청산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사생활을 비판한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14,3). 사실 그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려워 차마 죽이지 못합니다(14,5). 


헤로데에 빌붙어 세도를 누리던 헤로디아는 더 큰 불안을 느껴,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덮으려고, 딸을 이용해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멋진 춤과 박수갈채를 받고 즐거움에 젖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감성적이며 일시적인 기쁨에 젖은 그는 사랑의 괘를 벗어나 ‘무질서의 어둠’으로 가 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양심의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허락하고 맙니다(4,6-11).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 자신과 사회 안에도 또 다른 헤로데가 있을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헤로데 안에는 자신의 정치권력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며,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될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지요. 또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거짓과 뻔뻔스러움,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고 감각적 기쁨을 좇는 어리석음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헤로데는 그릇된 선택과 행동임을 의식하여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하느님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시선을 더 의식했지요. 결국 그는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요시하여 불의와 반생명을 선택해버린 비굴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헤로데의 이런 교만과 어리석음, 비굴함과 비열함, 죄의 은폐, 그리고 권력과 명분을 앞세운 폭력 행사를 과감히 버려야겠습니다. 


한편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제자들의 삶 또한 늘 반대와 배척이 따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 때문에 겪게 되는 박해와 시련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탐욕과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요한처럼 충실하고 용기 있는 예언자의 소명을 다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어떤 희생과 죽음이 닥치더라도, 온갖 불의와 억압, 거짓과 폭력, 그리고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권력과 세력도 하느님을 이길 수 없음을 믿으며...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이스라엘 사회에는 제도적인 재기와 회복의 체계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안식일과 안식년이고 그 두 번째가 희년입니다. 안식일이 일주일에 한 번 쉬는 것처럼, 안식년은 7년에 한 번 쉬는 휴식의 해이고, 희년은 7년이 7번 지난 다음해에 맞이하는 대해방의 해입니다.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서 겪어야했던 모든 아픔과 빚과 과오들을 탕감해주고, 특별히 가나안 정착 때에 부족별로 나누어 주었던 토지를 살기가 어려워졌다던지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땅은 하느님의 것이니 팔 수는 없고 그 토지 이용권만 담보 맡겼던 것을 되돌려주고,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인으로서 누리는 모든 권리를 사면 복권해 주는 제도입니다. 희년이 50년 만에 한 번씩 오는 것이니까 결과적으로 일생에 한 번 자신의 과오를 되돌이키거나, 자비를 베푸는 기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8-11)

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이렇게 좋은 제도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 안에서 이 희년 제도를 온전히 실행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 빚은 희년이 되어도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될 수 없는 조건부 빚문서마저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용서해 주고 자유를 선사하는 일, 사랑이신 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주님 사랑을 회복해 주심으로써 형제들을 원망하고 복수하려는 악의 준동을 밀어내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형제들을 내 앙심으로부터 풀어주어 형제자매들을 구하고, 내 앙금을 씻어 버림으로서 우리 스스로도 평안하고 행복해지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14,8)

김종오 신부님 

순수함은 때가 묻지 않아 모든 것을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줍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보여주기에 순수함은 모든 것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정직한 순수의 거울에 비친 오염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를 우리는 부끄러워합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하늘을 무서워할 줄 모르게 됩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면 우리는 잔인하게 됩니다.

순수한 소녀를 부추긴 어머니는 부끄러운 자신을 거부하여 순수함을 짓밟고 잔인하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순수함 앞에서 어머니는 부끄러운 자신을 투사하여 의로운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순수함을 잊고 오염된 자신을 외면하며 부끄러워할 줄 모르기에 우리도 잔인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소녀의 어머니처럼 순수함을 짓밟고 이용까지 합니다.

순수한 주님의 뜻을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주님의 뜻보다 오염된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수한 주님의 뜻마저 이용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입혀 드리는 그대로, 우리가 하자는 그대로 말없이 따라 응해주시는 소녀처럼 순수하십니다.

요한의 목을 베도록 부추기는 어머니가 소녀의 순수함을 유린하듯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도 그리스도의 순수함을 자주 훼손합니다. 오염된 자신을 보지 않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만큼 우리는 순수한 주님의 뜻을 거스릅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자신을 보라고 쟁반 위에 놓인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길이 있습니다

영주 헤로데의 길이 있습니다 


가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가선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계속 가야하는 길이 있습니다

멈춰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 됨의 길이 있습니다

뭇사람 노예 됨의 길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걷는 길이 있습니다

비겁하게 걷는 길이 있습니다 


힘겨운 영광의 길이 있습니다

화려한 치욕의 길이 있습니다 


죽음으로써 사는 길이 있습니다

죽임으로써 죽는 길이 있습니다 


따라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떨쳐 버려야 할 길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길이 있습니다

영주 헤로데의 길이 있습니다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본모습은

과연 무엇일까를 

다시 묵상하게됩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자주

우리의 말과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됩니다.


목숨을 바치는 

이가 있는 반면

목숨을 빼앗는 이도

있습니다.


부당하고

억울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게됩니다.


헤로데를 통해

어리석고 오만불손한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언제나 소중한

관계를 파괴하는 쪽은 

우리자신이었습니다.


저마다의 생명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권력도

영원한 욕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은 벨 수있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양심은 결코 벨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서 벗어나

우리자신이 바로

죄인이라는

겸손함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을 살리는 시작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낮은 자세입니다.


욕망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형제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본모습은

다름아닌 

사랑과 나눔에

있음을 다시 믿습니다.



체면이 뭐길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레위 25,10)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8월 첫날입니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사랑의 땀으로 시원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주일에 하루는 꼭 쉬어야 하고 7년마다 안식년을 갖고 7년이 7번 지나고 50년째는 희년을 선포하며 빚쟁이도 종살이도 없이 원래의 자유인으로 모든 백성이 살 수 있게 하였다지요.


오늘날 우리도 1주일에 한번이상 쉬는 날을 갖습니다.

안식년을 7년마다 갖는 사람은 거의 없고 특수직에 있는 소수만이 10년마다 안식년을 갖기는 합니다.

대통령이 특별한 경축일에 대사면을 베푸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희년과 비슷하지만 극히 일부에게만 해당될 뿐입니다.


오늘과 내일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포르치운쿨라 전대사 축제를 지냅니다.

모든 죄사함을 받기 위해 뙤약볕에 걷고 노숙하며 함께 참회하고 보속하며 고백성사와 성체조배 등을 합니다.

봉헌생활의 해를 맞이하여 모든 프란치스칸들이 이 해방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도록 땀흘려 준비하고 이제 전국에서 모일 1,800여명을 맞이합니다.


이 은총의 축제가 세상 모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데 작은 몫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담아 이리로 가져다주십시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어제와 

다른 시간입니다.


잡고있던 것을

놓는 것에서

새로운 시간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찾아

익숙한 데를

떠날 수 있었던

구속주회 창설자

알폰소 성인의 축일입니다.


복음은 찾아오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먼저 찾아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참된 삶의 중심이란

먼저 하느님께 자기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헌신에서

시작됩니다.


추상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가장 따뜻한

하느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모든 것은 풍요롭고

모든 것은

자유롭게 됩니다.


알폰소 성인은

우리들에게

사랑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삶입니다.


모든 것에 초연할 수

있게 하는 건

하느님의 뜻인

가난함으로 응답하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알폰소 성인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감사의 날 되십시오.


복음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낮아지시고

작아지시는

십자가는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향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욕심이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욕심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사고와 사건을 만납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세례자 요한 같은

의인의 죽음을

보아야 할는지요.


이웃형제의

아픔과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뺐고 빼앗기는

죽음의 악순환을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기적을 위한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더럽히는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서로에게서 삶의 가치를

만나고 배우는

나눔의 길을 우리가

걸어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제 삶을 던진

세례자 요한처럼


사랑을 위해

온 삶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위해

가장 겸손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쁨을

내가 먼저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우리의 만남이

나누고 비우서

서로를 채워나가는

사랑의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당당한 마음

이수환 신부님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한테 여러 차례 했던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요한은 ‘옳은 말’을 하다가 죽음에 이릅니다. 헤로데 영주 앞에서 여러 차례 ‘옳은 말’을 했던 요한의 마음을 한번 떠올려 볼까요?


큰 권력 앞에서 용기 있게 ‘옳은 말’을 하는 요한은 큰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그 마음이 참으로 당당합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하느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데서 당당함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 제인 저는 강론을 할 때마다 ‘당당한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다 싶은 날은 강론의 형식에 상관없이 마음속에 힘이 나면서 신바람이 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지 않은 날은 강론 때 아무런 힘도 나지 않습니다. 강론이 아니라 글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 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강론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삶에는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날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당당함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당당한 마음을 위하여 오늘도 파이팅 !





날이 참 덥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더운 날이면 본당 주보에 기재가 되는 말들이 있지요. 바로 복장을 제대로 갖춰 입자는 말입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 보면, 잠옷 차림으로 미사에 오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민소매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때로는 체육복 차림 그리고 슬리퍼를 신고 성당 오시는 분들을 보면 눈살이 저절로 찡그러질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혼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도 저렇게 입고 나갈까?’


만약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입장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하객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결혼할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서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하지 않을까요? 중요한 자리라면 제대로 된 옷차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는 얼마나 중요한 자리입니까? 자기 편한 대로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서 가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희생은 치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는 희생도 함께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성당을 나가고 성당에서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그냥 지금 살고 있는 그대로 놔두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희생이 전혀 없는 믿음만을 바라면서 전혀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구닥다리 소리를 들을까봐, 요즘의 패션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이렇게라도 성당 나오는 것이 어디냐 등등의 이야기를 들을까봐 그냥 딴 곳만 볼 뿐입니다. 


저 역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면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역시 희생 없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면 바르게 고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면서 싫은 소리 하기 싫다고 말하지 않는 것 역시 희생 없는 믿음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헤로데 영주가 세례자 요한을 죽입니다. 바로 자신의 양딸이 손님들 앞에서 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건네주지요. 사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했었습니다. 분명히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춤 값으로 청하는 대로 무엇이든 다 주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한 맹세를 깰 수가 없어서 그는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했던 그의 행동은 결국 역사적으로 계속 회고되는 악행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희생 없는 믿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나만을 위한 믿음이란 없다는 것, 믿음에는 늘 철저한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가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면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생이 동반하는 믿음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초보자의 머리에는 가능성이 많고, 전문가의 머리에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순류 스즈키).


열린 마음

며칠 전, 점심식사 후 교구청의 한 신부님과 산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항상 식사 후에는 담배를 태우는데, 글쎄 라이터가 없는 것입니다. 담배를 가지고 있지만 라이터가 없으니 그 좋아하는 담배를 태울 수 없는 것이지요. 지나가는 교구청 직원에게도 묻고, 관리실에 들어가서 라이터를 찾아도 봅니다. 또 마침 지나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담배를 태울 수 없으니 불안한 표정이 가득합니다. 담배를 태우려면 라이터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함과 욕구가 커지기만 할 뿐이지요.

이렇게 여러 가지가 같이 맞아 떨어져야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딱 한 가지만 가지고 있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예도 하나 들어 볼게요.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에 시원한 음료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음료수의 병뚜껑이 꽉 닫혀 있는 상태라면 어떨까요? 병뚜껑을 따지 않고서는 이 시원한 음료수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가지고 있어봐야 갈증만 날 뿐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요? 성당에 다니고는 있지만 마음을 열고 있지 않다면 어떨까요? 마지못해 성당에 나오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요? 마치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라이터가 없는 것이며, 시원한 음료수를 가지고 있지만 뚜껑이 꽉 닫혀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불안감과 욕구만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두가이, 바리사이 등의 종교 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닫혀 있었기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죄인이라고 평가받았던 세리, 창녀, 병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활짝 열려 예수님을 열심히 따를 수 있었고 실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 (마태오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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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체험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정당한 반응으로서 느끼게 되는 두려움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은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현상에 대해 복음적으로 묵상해보고자 한다.

두려움을 감지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한다.


두려움에는 크게 건강한 두려움과 그렇지 못한 두려움으로 나눌 수 있다.

건강한 두려움이라면 하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일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치유를 해야 할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보여준 두려움을 소재로 해서 생각을 나누고 싶다.

헤로데가 보여준 두려움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서 받게 될 지도 모를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밉고 달갑지 않고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어떤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졌던 세례자 요한,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터에, 헤로디아의 딸의 요청이 발단이 되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성서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여간 그 사건으로 인해서 헤로데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정인지, 아니면 징벌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우리의 삶을 돌아다보자.

우리 역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죄라고 여기는 것들 때문에, 많고 적게 두려움을 체험한다.

예외인 사람이 있을까? 글쎄,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죄의식이라는 말을 쓸 때는 두 가지 면에서 식별해야 한다.

하나는 뉘우침에서 나오는 죄의식과 다른 하나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죄의식이다.

전자는 건강한 두려움이고 후자는 건강하지 못한 두려움이다.


잘못된 두려움은 도움이 되지를 못한다.

그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지기 때문이다.


죄의식으로부터 올바르게 해방되기 위해서는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체험이 중요하다.

고해성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혹시 지금도 잘못된 죄의식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지 않는가?

먼저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인정하라.

옳지 못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대상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 이해하려는,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을 절감하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라.

화해만이 서로를 치유하는 힘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중재가 필요함을 의식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자.


두려움은 필요하다.

단 두려워할 일에 대해 두려워하는 우리이기를 기도해본다.


 


긴 호흡과 거시적인 안목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참수 사건을 묵상하노라면 마치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그만큼 극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 왕의 생일을 맞아 호화로운 대저택은 흥겨운 잔치 분위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상마다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졌고 잔마다 최고급 포도주가 넘쳐흘렀습니다. 악사들의 연주소리와 무녀들의 춤사위가 어울려 한 바탕 ‘놀자판’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잔치마당 지하에 위치한 어두운 지하 감방 안에는 고독한 예언자가 홀로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멀리서부터 가느다랗게 세상 사람들의 가무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들 노느라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나, 생각하는 순간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감금된 감방 앞에서 멈췄습니다. 


그 순간 세례자 요한의 머릿속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지나갔겠지요. 통상 왕의 생일날 죄수들을 사면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혹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헤로데의 생일잔치를 맞아 평소 먹는 식사와는 다른 특별한 식사라도 던져주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세례자 요한에게 건네진 왕의 전갈은 특별사면이 아니라 즉결심판과 단두대 처형이었습니다.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의 간계에 넘어간 헤로데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그릇된 결정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헤로데는 참으로 허풍스럽고 몹쓸 인간의 표본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술김에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언약을 했고, 손님들 앞에 체면치레 하느라 그 그릇된 약속을 취소도 못했습니다. 그 결과 역사에 길이 남을 돌이킬 수 없는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허약한 인간의 대표주자입니다. 


헤로데의 옆에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두 사악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폐륜을 집요하게 고발하는 예언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야마는 악녀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의인의 억울한 죽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두 여인들 주변에는 구린 잔치에 초대된 구린 이들로 가득했습니다. 구차스런 권력이나마 부여잡고 있던 헤로데였기에 그에게 빌붙어 살아가려는 속물스런 인간들이었습니다. 헤로데의 결정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사람도 그의 결정을 중지시켜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사악한 사람들 앞에 한 의인이 고독하게 서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헤로데의 불륜 앞에 쉬쉬하고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 세례자 요한만은 입을 다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과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목소리의 톤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수 사건 앞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정의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토록 큰 불의 앞에 침묵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홀로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순간, 살인자들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희희낙락하며 즐겼습니다. 이 부당함, 이 불평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일은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도 비일비재합니다. 폭력이 합법을 이깁니다. 악당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순결이 불순함으로부터 조롱을 당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느님의 시계는 완전히 멈춰버린 듯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보다 긴 호흡이며 거시적인 안목입니다. 불완전한 이 지상에서 완전함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의인들과 착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억울한 일이겠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 가서야만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완결됩니다. 거기 도착해야 진정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됩니다. 거기에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가 실현됩니다. 


헤로데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끔찍한 죽임을 당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이 세상 현세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성공하고 승리할 것을 믿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다주었습니다. 


우리도 이 현세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실망과 좌절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두운 지하 감방의 처절한 고독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느님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불굴의 신앙입니다.




꽁이를 넘어서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인이 싸웠습니다. 싸우다가 여자가 남자에게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냥 화났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알았어. 안할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은 그냥 맹꽁이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헤어져 주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맹꽁이 남자에게 계속 연락오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이 먼저 전화하지 않는 여자도 맹꽁이입니다.

이런 두 맹꽁이 같은 행동으로 작게 시작한 싸움이 큰 이별을 맞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맹꽁이처럼 답답해지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자존심에 상처가 날 것 같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애초에 맹꽁이가 되는 것은 자아가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차이느니 내가 먼저 차야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것을 챙기기 바쁜 것입니다. 


어제 ‘맹꽁이 같다’라는 말의 의미를 연세가 있으신 큰 수녀님에게 여쭈어 봤더니, ‘앞뒤가 꽉 막힌 답답한 사람’이란 뜻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창옥 교수의 강연 중 한 지인이 도시 하수구에 사는 맹꽁이들을 구출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맹꽁이들은 습지에 살아야 하는데 습지가 점점 사라지자 하수구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여 죽고 마는 맹꽁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수구에 들어가 있는 맹꽁이들은 대부분이 수컷들인데 암컷은 하수구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암컷을 하수구에서 기다리기만 하다가 그 안 좋은 환경에 못 견디고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맹꽁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그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수구로 구하러 내려가면 맹꽁이들은 울음을 멈추어버린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신들을 죽이러 온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피부를 시멘트 색으로 변화시켜 사람이 찾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답답한 맹꽁이들!’ 


그러나 우리도 이런 맹꽁이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도움까지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자신이 먼저 전화도 못하고, 두려워서 자신이 먼저 화해도 못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두렵겠습니까? 자존심과 자아가 상처받는 것을 못 견뎌하는 것입니다.

어제 아이들이 풍선껌을 주어서 오랜만에 씹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풍선을 불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부풀더니 이내 터져버렸습니다. 완전히 단물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자존심이란 불순물이 끼어있는 한 나는 유연하지 못한 맹꽁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엔 자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아직 때가 이르지도 않았고 술이 떨어진 것이 지금 성모님과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이는 분명 첫 기적을 술을 만드는데 쓰지 않으시겠다는 명백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 아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합니다.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면 그러시라고 포기하는 맹꽁이 같은 분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당신 안에 자존심이나 자아, 혹은 죄의 찌꺼기조차도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완전한 믿음과 신뢰, 그것이 없었다면 성모님은 당장 포기하시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두려움 없음은 죄 없이 깨끗한 순결함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남의 부모님에게는 떼를 못 쓰지만, 자신의 부모에게는 무엇을 사달라는 둥의 떼를 씁니다. 그만큼 성모님도 예수님께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거부하는 말에 맹꽁이처럼 움츠려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옛날 어떤 왕이 전쟁 중에 성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전세는 이미 기울었고, 그래서 상대편 장군이 성을 점령하기 전에 여자들만 자신이 들 수 있는 만큼만 짐을 가지고 빨리 성을 빠져나오면 그 뒤에 남아있는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여자들이 각자 짐을 최대한 싸들고 성문 밖으로 줄지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는 자신의 등에 누군가를 업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자는 왕비이고 남자는 임금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지혜에 감탄한 장수가 그 왕비와 임금, 또 그의 군사들을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시장에 가면 콩나물 한 줌이나 백 원, 이백 원 깎으려고 보는 제가 창피할 정도로 물건을 파시는 분들과 실랑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모님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교회에 성령이 오시기를 너무나 절실히 원하셨기에 당신 자존심을 내세울 수가 없으셨습니다. 성모님이 교회를 당신 자녀처럼 사랑하시지 않으셨다면 하느님이신 당신 아드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하시라고 강요하는 모험을 무릅쓰실 필요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면서도 막상 그분이 앞에 오시면 그 두려움 때문에 맹꽁이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고 숨어버리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자존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맹꽁이가 되지 않는 길은 성모님처럼 자신을 비운 깨끗한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뿐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마다 사는 방식은 다르지만

중심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바로 진실하신 하느님입니다.


소신껏 당당하게 살았던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건강한 믿음을 만납니다.

자신이 믿는대로 말하고

자신이 믿는대로 행하는 모습에서

맑은 믿음을 봅니다. 


소신껏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신대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름다운 사람은

변하지 않는 믿음의 가치를 온몸으로 따른

세례자 요한입니다. 


헤로데의 불편과 불안은

자신의 약함을 거부하는 데서 오는

불편과 불안입니다.

이렇듯 모든 불편과 불안은

모두 십자가의 죽음을 거부하는 데서 오는

불편과 불안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약함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평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약함을 거부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바라보십시오. 


헤로데에게 세례자 요한은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이며 형제입니다. 


나약한 우리가 뻗어나가야 할 곳은

바로 가장 좋으신 하느님뿐입니다. 


이제 서로 다르지만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국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런데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정직해야 한다.”


행복은 정직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속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정직이란 다른 사람에게만 솔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한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을 ‘정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정직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부정직한 행동과 말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결과 상대방의 말을 믿지 못하고, 서로간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게 되며,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까지 불신하는 풍토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의 관계 안에서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앞선 영국 속담은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정직하지 않음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남을 속이고 심지어 나까지 속이면서도 편안한 마음, 행복한 마음을 간직하고 계신 분은 없습니다. 겉으로야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새까맣게 탈 정도로 불안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세례자 요한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혼인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그가 틀린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를 죽이게 됩니다. 그것도 그의 생일 날 멋진 춤을 춰서 즐겁게 해 준 헤로디아의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건네주었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했겠지만,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행했던 부정직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님의 소문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죄 짓고는 못 산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부정직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죄는 결국 자기 자신을 힘들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행복이 정말로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는, 즉 진실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언제나 떳떳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웃들에게 솔직한 나,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떳떳한 나,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진실 되고 정직한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밋밋한 일상 속에서 틈을 발견해 꽃 심기. 그것이야말로 행복이다(에쿠니 가오리).


정직

한 우산 회사에서 제작 과정 중 실수로 우산에 결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회사는 이것을 바겐세일로 처분하기로 했으나 도무지 팔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 광고회사가 이를 인수해서 판매를 시작했는데 글쎄 이 결함이 있는 우산이 날개 돋친 듯 삽시간에 팔린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광고 회사는 이 상품을 팔기 위해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신문에 게재했다고 합니다.

"흠이 있는 우산을 싼값에 팝니다. 하지만 사용하기에는 불편이 없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던 것이지요. 고객을 구름 때처럼 몰리게 한 힘은 바로 '정직' 이라는 무기였던 것입니다.

어떤 위기를 돌파하려고 할 때, 우리들은 부정직함을 내세우고 싶어 합니다. 남을 속여야 내가 그를 밟고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더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정직입니다.

어제 한달 피정을 마치고 농촌 체험을 하고 있는 인천교구 대학원 1학년 학생들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이 더운 날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들의 모습에서 ‘싫다’라는 표정을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즐거워하며 동기들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을 행복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바로 서로에게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함께 하며, 도움이 필요한 손길을 아낌없이 내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함께 기도와 미사를 함께 하면서, 주님께도 진실한 모습으로 나아가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자신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 정직한가? 이웃에게 정직한가?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정직한가?

이렇게 정직한 삶 안에서는 불행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저 역시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사실 처음에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는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 때문이었지요. 담배를 피워야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처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을 때에는 이렇게 맛없는 것을 왜 피우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담배를 즐기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로부터 제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가 싫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담배를 많이 피워서 그런지 목도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제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담배 끊기가 쉽지 않더군요. 계속되는 실패에 이렇게 타협을 합니다. 


‘담배를 끊어버리면 체중이 엄청나게 는다고 하잖아. 또 담배를 피우면 집중력이 좋아진다고 하니까 꼭 피워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몸에 나쁜 담배이니, 하나라도 더 피워서 없애자.’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 불이익이 더 많았고 제가 아무리 많이 피워도 담배가 없어지지는 않았기에, 결국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겨우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죄를 범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요. 그러나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내 자신이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이고 융통성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타협을 하면서 죄를 범합니다. 즉, 지금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니 언젠가 이 죄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죄들이 반복되면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 차례 노력을 해도 그 노력들이 헛것이 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점점 죄의 유혹에 빠져서 행복의 길에서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를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결국 헤로데 영주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하지요. 그는 자신의 맹세를 기억했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많은 손님들 앞에서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일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엄청난 죄를 범합니다. 그 결과 헤로데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늘 불안해하며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는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나의 체면과 명예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옳지 않은 것을 행하지 않는 용기와 주님의 큰 계명인 사랑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죄의 유혹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안한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확신에 찬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죄의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나누어주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가슴 안에 저장됩니다.(로빈 세인트 존)


인생 앞에 놓은 세 개의 문

인생에는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로 가는 문이고, 또 하나는 현재로 향한 문이며, 마지막 하나는 미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세 가지 문 어느 것이든 스스로 닫아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어느 문 안에도 마치 보물이 들어 있는 듯한 생활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업적을 쌓은 노인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과거의 문 앞에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활동기의 장년 남녀가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현재의 문 안에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미래의 문 안에 보물이 가득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 전체는 이렇게 소중한 보물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매순간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최고의 다이어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올 봄 국제회의 차 물 건너갔다가 인천공항으로 입국할 때였습니다. 잠에 취해 비몽사몽 헤매다가 겨우겨우 비행기에서 내려 세관을 거쳐 입국장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손에 손에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 가수들이 저희와 같은 비행기를 탔던 것입니다.


호기심에 저도 가수들이 뒤따라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광팬’들과 인기가수들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순간’이었습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순간 가까이서 한번 보는 것,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사진 한 번 찍는 것, 그게 다였습니다.


가수들이든, 팬들이든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 그 촌각의 만남을 위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토록 큰 매력과 가슴 설렘을 선사하는 가수들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인기 역시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 가운데 5명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잘 키우고 훈련시켜서 예수님께 인도한 제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당시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와는 철저하게도 달랐습니다. 궁궐 같은 대저택에서 아쉬울 것 하나 없이 떵떵거리며 살던 다른 종교지도자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집도 절도 없이 황량한 광야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입고 있는 옷도 다른 예언자들처럼 잘 나가는 메이커가 아니라 ‘자연산 옷’, 낙타털옷을 입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산해진미의 잔치였던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겨우겨우 연명할 정도로 음식을 절제했습니다.


보다 준비된 예언자, 보다 합당한 선구자로 존재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은 최고의 다이어트를 한 것입니다.


탐욕과 집착의 뱃살을 빼고

성냄과 질투의 속살을 빼고

교만과 무지의 목살을 빼고

아집과 허영의 얼굴 살도 뺀 결과,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위해 언제라도 무대 뒤로 사라질 준비를 완벽히 하였습니다.


메시아께서 부각되기 위해서라면 그간 쌓아온 입지나 하늘을 찌르는 인기, 목숨까지도 당장 그 자리에서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되어 있던 세례자 요한, 모든 것에서 초월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헤로데의 그 알량한 권력 앞에 조금도 위축되거나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말,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외쳤습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내면은 이미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곧 오시게 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뚜렷했기에, 곧 도래하게 될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참사랑의 소유자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더 대단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루를 드렸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천년을 돌려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 순간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머리에 불멸의 면류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의인의 죽음

정희완 신부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비슷한 인물로 비쳐졌던 것 같습니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것도 비슷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의인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박해하거나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아마도 지금의 세상에서도 의인들은 배척받고 현실의 체제에 의해 비극적 희생의 자리로 내몰리는 것 같습니다. 슬픈 의인의 운명이지요. 의인들의 죽음은 세상의 비열함과 이중성과 악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열한 존재인지, 인간이 얼마나 이중적인 존재인지, 인간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 의인들의 죽음은 그것들을 폭로합니다. 그와 동시에 의인들의 죽음은 의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들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들의 이기심, 우리들의 탐욕, 우리들의 분노가 아무런 잘못 없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이 의인들의 죽음을 기록함으로 기억하듯이, 우리가 자꾸만 의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의인들의 죽음이 정직한 실패의 아름다움을, 정직한 실패는 거짓 승리보다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 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의인들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내가 범한 잘못들이 세상 어느 구석에 있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깨닫고 제 삶의 모습을 언제나 가다듬을 일입니다.




의인의 죽음

강부철 신부님

죽음, 그것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한 생애가 정리되고 완결되는 순간, 한 인간의 결론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고상하고 품위 있는 죽음, 잘 준비되고 정리된 죽음, 이왕이면 비참하지 않고 구차스럽지 않은 죽음, 끔찍하지 않고 큰 고통 없는 순탄한 임종, 자식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죽음, 잠들듯이 평화롭게 떠나는 죽음을 꿈꿉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것과는 정반대로 참혹한 죽음입니다. 더 비참한 것은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의 생명이 마치 노리개처럼 여겨지고 또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 외침이 저절로 나오는 죽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무고한 죽음, 그리고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의인의 죽음, 무죄한 이들의 죽음, 그 비참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의인의 죽음,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전조요 징표요 서곡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나 참혹하기에 마치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죽음, 벌을 받은 죽음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죽음 안에는 불멸의 희망이 가득합니다. 의인의 생애는 언제나 그렇듯이 순탄치 않습니다. 의인의 삶에는 언제나 박해가 따릅니다. 의인의 나날은 언제나 배고프고 춥습니다. 슬프고 힘겹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일편단심과 고결한 생애를 높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들을 당신 사랑의 품에 영원히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실천)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의 의인, 무죄한 이, 선구자, 이 시대의 또 다른 순교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평가받는 아인슈타인이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열등생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죽했으면 선생님이 이렇게 써서 가정통신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잘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가정통신문을 받은 아인슈타인의 어머니의 반응입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아이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는 아들 아인슈타인에게 당당하게 말했답니다. 

“네가 남들과 같아지려고 하면 잘해야 남들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 다르다면 최고가 될 수 있다.”

우리들은 남들과 다를 때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남들과 같아지려고만 노력하고 있지요. 하지만 남들과 다를 때 그래서 남들에게 소외당하고 따돌림을 받고 있다면 최고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역시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국은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생일 날 기쁘게 해 준 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하지요. 그러자 이 딸은 어머니와 상의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청을 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소원으로 청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더 문제는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헤로데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는 것.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그래야 자신의 체면이 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실천이 나쁜 것이라면 절대로 지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바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더 염려하지요. 그래서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그 결과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역사의 큰 죄인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죄를 범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피하기 위해서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남들과 다른 길인 사랑의 길, 믿음의 길, 희망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큰 꿈을 가져라. 너의 행동을 낮게 하고, 너의 희망을 높게 하라.(조지 허버트)

 



왜 죽어야 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어떠한 새로운 생명도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새 생명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피를 함께 세상에 뿌립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 이런 고통이 필요하다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큰 고통이 필요하겠습니까?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인구가 늘어나자 태어나는 사내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피밭’에서 자라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이 순결한 어린 순교자들의 피는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무고한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하게 됩니다. 이 아이들의 순교 속에서 구원자가 태어난 것이고, 이 구원자의 피 속에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어 낸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옆구리를 찢으면 당연히 피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두 번째 아담의 옆구리를 찢어 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죄를 씻으시고 생명의 물을 부어주시어 두 번째 하와인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순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명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뜨면 달과 별은 그 빛 속에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그도, 오시는 태양이신 메시아는 점점 커지셔야하고 샛별이고 여명인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사라져야 함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이 태양만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가끔은 아침에 태양과 함께 희미하게 달도 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태양보다도 사라져가는 달에 더 눈이 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그의 제자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마지막 남은 한 제자까지도 모두 그리스도께로 보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은 사라져줘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내가 사라짐으로써 그 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시며 말씀이신 성자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셨고, 예수님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시며 자신의 뜻을 죽여 아버지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죽임으로써 그리스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그리스도는 항상 내 뒤에 가려져있게 됩니다.

도로의 표지판이 도로의 한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 복판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강을 건너는 사람이 타고 온 배를 남겨두고 떠나는 것처럼 주님께로 가는 사람들을 배가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표지판이 되고 배가 되어야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위해 작아지고 사라져 가는 것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더 밝게 빛나게 하는 선교요 순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려거든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작은 사람으로 만들었기에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순교한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소명을 완성한 이유로 하늘에서 가장 큰 별들 중의 하나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과 피로 증거한 순교자들도 이 세상에서 자신을 죽인 까닭에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선교가 결코 사람들에게 나아가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본질은 이 성경구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자신을 죽임으로써만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고 새로운 영혼이 하느님의 자녀로 탄생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국가 권력

최영균 신부님

군주의 욕망은 정의와 진리를 무참히 자신의 권력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시도하였고 그의 칼날 아래 하느님의 선구자는 자신의 피를 예수님에 앞서 길 위에 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 권력이라는 것이 국가 권력 자체만을 위해서 그 힘을 작용할 때 그 힘은 폭력으로 작용하고 죄 없는 백성의 피를 요구합니다. 국가 권력(권력자)은 자신을 살 찌우기 위해서 진리, 정의 그리고 평화 등은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이 권력의 힘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백성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권력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구성원조차 그 먹잇감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이기적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헤로데 안티파스라는 권력자에게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정의를 외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진리를 말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길과 국가 권력의 길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게를 달아보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을 읽으며 즉시 떠오른 단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습니다.

유명한 소설의 제목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읽어보지 않아 내용을 모르지만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저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 시대의 존경받는 예언자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지. 한 여자의 앙심이 대 예언자를 죽게 했다는 것은 납득이 갑니다.

어처구니없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헤로데의 처신이고 요한 세자의 죽음입니다.

아무리 약속이라 해도 그래 자기 의붓딸의 훌륭한 춤에 대한 보답으로 한 인간, 그것도 백성이 예언자로 존경하는 사람을 죽인다니, 존재가 참으로 가볍습니다.

대 예언자의 생명이 의붓딸과의 약속보다 덜 중요합니다.


어떻게들 죽는지 호기심 때문에 연쇄살인을 하는 살인마,

공포에 떠는 사람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너무도 비정상적인 살인마, 요한의 존재는 이 살인마에 의한 죽음처럼 가볍지만 요한을 죽이는 사람들의 행위는 미각을 즐기기 위해 살아있는 원숭이의 해골을 가르고 그 골을 먹는 것처럼 잔인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 잔인한 짓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희생될 수 있는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 입맛을 즐기기 위해.

자기 화풀이를 위해.

자기 환상에 의해.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욕심이 있다고 다 채우지 않을 뿐더러 채우려 한다고 해도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채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 심지어는 미물의 생명까지 소중합니다.

적어도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존재의 소중함, 즉 무거움과 가벼움의 차이이고 사랑과 자기중심의 차이입니다.

자기중심적일수록 자기만 있고 사랑할수록 자기의 소중함만큼 다른 존재가 소중합니다.

자기중심적일수록 다른 사람의 말을 가볍게 묵살하고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의 말에 무게를 둡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내 주변의 사람 하나하나의 무게를 달아봅시다.

나에게 그 사람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달아봅시다.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자신의 몸무게만 매일 Check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무게를 한 번 달아봅시다.




소 리

이동훈 신부님

루카는 세례자 요한의 삶을 일컬어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라고 한다. ‘소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뜻하는 바만 전하고 자신은 사라진다. 만일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온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 소음 덩어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소리는 그렇게 자기의 책임만 다할 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 27장에서 “잘 가는 사람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善行 無轍迹).”라고 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공을 세우고는 거기에 머물러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리가 바로 그러하다.

장자는 “도에 이른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거울과 같다(至人之用心略境).”라고 했다. 거울은 모든 사물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여 비추어 주되, 결코 그 비추인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소리가 바로 그러하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無轍迹’, ‘거울’처럼 철저하게 소리와 같은 삶이었다. 요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오시기로 하신 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질문할 때도 우쭐해하지 않고 “나는 그분이 오시도록 준비하는 자일뿐이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도 없는”(루카 3,16 참조)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가자 그를 걱정하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6 ? 30)고 말한다. 선구자요 안내자로서 자신의 역할만을 충실히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겸손한 요한이지만 해야 할 일 앞에서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루카 3,?8)며 가난한 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며, 세리들은 사람들을 그만 속이고, 병사들은 거짓 고소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도 옳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헤로데에게 분명하게 하느님의 뜻을 밝혔다. 그 결과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순교를 통해 소리처럼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나도 그렇게 소리처럼 살고 싶다.

 



"일찍이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운 사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드릴까 합니다. 얼마 전 "승용차 중의 승용차" 티코를 몰고 시내 한 본당 미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수도원 입구 중앙선을 좀 끊어주면 좋을텐데...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좀 불편해도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저는 상습적으로 불법 좌회전을 하곤 했습니다. 그날도 오가는 차도 없고 교통경찰관도 안보이기에 과감하게 핸들을 꺾어 불법 좌회전을 해서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30-40 미터 전방 사거리 사각지점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오토바이를 탄 교통경찰관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짧은 호각소리와 함께 서라는 표시를 하는 것 같았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냥 올라가자. 설마 여기 까지 따라 올라올까" 싶어 그냥 올라왔습니다. 아무래도 불안했던 저는 신속하게 주차를 마치고 마치 총알처럼 2층 식당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저는 제 침실로 들어가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드러누웠습니다.

그런데 염려했던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하필 제 침실이 현관 쪽으로 창문이 나있었는데...오토바이 시동 멎는 소리가 들리더니 휴대용 마이크 소리가 제 귀를 울렸습니다.

"방금 올라오신 빨간색 티코 주인 빨리 나오세요!"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좀 버텨볼까" 하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들려오는 소리. "차량번호 6602 티코 주인 빨리 좋은 말할 때 나오세요."

어쩔 수 없이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참으로 얼굴을 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진해서 면허증을 드렸는데, 사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붙어있는 제 면허증을 확인한 교통경찰관은 "휴!"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하시는 말씀. "아, 거, 신부님들께서 좀 더 잘 해주셔야죠!"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절대권력 앞에서도,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고 진실만을 설파하던 세례자 요한의 당당한 모습이 유난히도 돋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는 순교 신앙의 전형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은 세상 그 어떤 권력이나 군사력보다 우위에 계신다는 것을 순교자들은 그들의 피로서 증거했습니다.

오늘날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피를 요구하는 절박한 상황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교의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예로써 삶 가운데 끊임없이 순교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순교를 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의 순교란 다름 아닌 "기본을 지키려는 노력"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는 교통법규라 할지라도 일단은 법이니 만큼 성실하게 지켜나가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피를 흘려 하느님을 증거하지는 못할망정 기본을 못 갖춰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일, 교통경찰관이 없더라도 교통질서를 늘 지키는 일, 이웃이 당하는 불의에 합심해서 대항하는 일, 먼저 용서하고 화해를 구하는 일, 억울하지만 차라리 내가 손해보겠다는 마음...이런 노력들이 이 시대가 요청하는 순교입니다.

이 시대의 순교는 병인박해나 기해박해와 같은 대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나 시련을 기쁘게 참아내는 일입니다.




당당한 삶을 꿈꾸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에,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불신의 늪에 허덕이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희망이 무엇인지 알기에,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다른 이를 억압하려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에, 불의를 저지르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에, 거짓으로 다른 이를 현혹하려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참된 강함이 무엇인지 알기에, 겉으로만 겉으로만 강한 척하려는 나약한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참된 일치가 무엇인지 알기에, 분열로 치닫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참된 삶이 무엇인지 알기에, 죽음의 언저리를 겉도는 나를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참된 강함, 참된 일치, 참된 삶이 무엇인지

차라리 몰랐다면 행복했을텐데....

이것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지게 된 나의 일부, 아니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불신의 늪에 허덕이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다른 이를 억압하려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불의를 저지르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거짓으로 다른 이를 현혹하려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겉으로만 강한 척하려는 나약한 나를 보지 못했다면,

분열로 치닫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죽음의 언저리를 겉도는 나를 보지 못했다면

차라리 두려움이 없을텐데...

이것을 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내가 내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밖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생기는 것, 내 자신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합니다.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아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두려워하는 가련한 인간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비록 힘에 부치더라도 끝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당당한 사람으로 죽느냐?'는 바로 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생각합니다.

가련하게 살아가는 헤로데와 당당하게 죽어 간 세례자 요한 사이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긴 호흡으로 내 몸과 마음을 다져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어떤 부부의 대화 내용을 한번 보시지요. 

아내: 치약 좀 끝에서부터 짜면 안 돼요? 

남편: 가운데서부터 짜면 안 될 게 또 뭐야?

아내: 매사가 그 모양이라니까. 

남편: 뭐라고? 이 여자가, 당신은 욕실 청소나 좀 잘 해!

아내: 뭐? 내가 청소부야! 허구한 날 청소만 하게? 

남편: 옆집 철수네 집 안 봤어? 그 엄마 얼마나 깔끔해?

아내: 그래 말 잘했다. 철수 아빤 얼마나 가정적인지 알기나 해? 게다가 잘 생겼지, 돈 잘 벌어오지. 당신은 도대체 잘 하는 게 뭐야?


이 부부싸움의 발단은 남편의 평소 습관이었던 양치질할 때 치약 몸통 가운데를 꾹 눌러 짜는 버릇으로, 사실 따지고 보면 싸울 이유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행동 하나가 다른 상대방의 단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과의 비교까지 함으로 인해 인격적인 모독까지 주고 있지요.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함께 하는 행복보다는 나만의 행복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아내가 먼저 치약 몸통 가운데를 꾹 눌러 짜는 남편의 버릇을 단순한 하나의 습관으로 받아들였다면 이렇게 싸움으로 번졌을까요? 또한 아내의 주의어린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그런 습관이 있었지? 그게 당신에게 신경 쓰게 했다면 정말로 미안해. 내가 주의하도록 할게.”라는 식의 답변을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바로 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불러일으킨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이렇게 나만의 행복을 생각했을 때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는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왕 역시 모두가 함께 나누는 행복이 아니라 혼자만의 행복을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행복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을 챙기려는 욕심에,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재혼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픔과 상처를 당했을까요?


재혼이 옳지 못하다고 주장해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 파혼을 당한 헤로데의 본처인 아라비아 공주, 이에 앙심을 품은 아라비아 왕의 전쟁으로 죽음을 당한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죽음을 봐야만 했던 가족과 이웃. 단순히 자기만의 행복을 좇으려는 헤로데의 이 욕심이 이렇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당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헤로데는 행복했을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는 평생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불안해합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혼자만의 행복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남과 더불어 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그래서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할 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오늘입니다.

혼자만의 행복인가? 아니면 함께하는 행복인지를….


함께하는 행복을 찾아보세요.


가슴을 펴라('행복한 동행'중에서)

1954년, 브라질 국민들은 월드컵에서 자국 팀이 우승할 것을 확신했다. 그런데 헝가리 팀에게 어이없이 패하는 바람에 8강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선수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이내 비통함에 젖었다. 귀국하면 욕설과 비웃음 등 온갖 수모를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축구는 브라질 사람들에게 종교와도 마찬가지였기 떄문이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린 선수들은 이외의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공항에는 대통령과 2만여 명의 팬들이 비난의 함성 대신 대형 현수막을 들고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드리고 있는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패배했지만 가슴을 펴라!"

그들은 공항을 빠져 나가는 선수들을 조용히 지켜 보았다. 선수단은 일순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4년 뒤, 브라질 팀은 마침내 줄리메 컵을 조국에 안겼다. 선수단이 입국하던 날, 선수들을 태운 전용기가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자 F-16 전투기가 호위했고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는 3만여명의 팬들이 나와 선수단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시 중심의 광장에 이르는 도로에도 100만 명의 시민들이 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환영 인파의 물결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자아냈다.

선수들의 실패에 질책보다는 묵묵히 지켜보는 것으로 응원을 보낸 브라질 시민들이 함께 일궈 낸 값진 우승이었다.




기적이란

임문철 신부님

부제반 시절 여의도에서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마침 형의 결혼식 때문에 행사에 참석하질 못했는데, 학교에 돌아오니 난리가 났습니다. 모두들 하늘에 나타난 대형 십자가의 기적을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당국에서는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기적이란 믿음이 부족한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니 호들갑 떨지 말라고 진정시켰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무척 섭섭했습니다. 나도 그런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더라면 내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고, 곧 다가올 사제 생활도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그 좋은 은총의 순간을 놓쳐버린 것이 형 탓이라며 형을 살짝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금방이라도 성인이 될 것 같았던 동료들은 여전히 조그마한 일에 다투고, 화를 내곤 하였습니다. 

기적이 믿음을 더해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이인주 신부님

하느님도 인간 세상은 어떻게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역사에 등장하는 폭군들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은 왜 저런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는가?’ 하고는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이만하겠지 싶다. 

필리핀의 가난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여러 아이들을 둔 엄마가 생계를 위해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가정부로 취직해서 먼 곳으로 떠났다.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등살에 꼼짝도 못하니 당연히 일을 할 수가 없다. 남편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곳의 삶이 좋은지 못 오겠다며 버텼다. 그러자 남편은 애들을 다 죽이고 자신도 끝장을 내겠다고 했다. 설마하지만 결국 남편은 피비린내를 내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구조적인 잘못이다. 나라·사회·개인 등 잘못된 구조에서 비롯된 깊은 상처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야 하고 늘 하느님께 여쭤가며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들어 가야 한다.”(탐 오골만 신부의 이야기 기록)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최후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그 시대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최고 권력자에게 정면 도전을 했으니 그 뒷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연회장에서 예언자의 목을 벨 줄이야`…. 그들이 요한만 그렇게 죽였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식으로 죽였을 것이다. 하느님은 왜 악한 사람들은 두고 애꿎은 사람들만 죽게 하실까?

그러나 기도하며 그분을 만나다 보면 답이 나온다. 착한 사람은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연옥도 안 거치고 바로 천국에 가기도 하겠지만, 이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을 빨리 하직하게끔 배려하는 것이라면 좀 위로가 되려나.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린 이런 세상이 되지 않도록 미리 미리 하느님 나라에 접근해 가는 사람들이 많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이 땅도 바로 하느님 나라에 가깝기에 밝고 맑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배려해 주지 않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여, 하느님을 온전히 믿자.’고 말이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근 며칠 동안 에밀 브리에르 신부님의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분도출판사)는 영성서적을 읽고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이 제 눈길을 ‘확’ 끌었습니다.

“사제적 위신과 지위에 대해 그리고 사제들이 품고 있는 욕구에 대해 아주 특별한 변칙이 있음을 가끔 보게 된다. 이 욕구는 사제관이든 사제 양성소이든 어디에도 침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답답함이 있다.

사제들 간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라. 더 큰 본당을 추구하고 신학교나 대학의 학장 자리나 명예롭고 존경받는 지위를 주제로 하고 있음을 가끔 듣게 된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는 전체 신자 수가 23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다 쓰러져가는 작은 시골 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비안네 신부가 뭔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기에 문책성 인사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는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 몸까지 떨었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의 성소여정에 가장 큰 후원자였던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담당주교는 비안네 신부를 불러 아르스로 가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비안네 신부, 미안하지만 아르스로 좀 가 주어야겠네. 그 본당 신자들은 하느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네. 자네가 가서 그곳에 하느님 사랑을 좀 심어주었으면 하네.”

아르스에 도착한 비안네 신부님은 드디어 첫 번째 주일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비안네 신부님의 행색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창백한 얼굴,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온 뼈들, 가냘픈 몸집, 수줍은 표정, 더듬거리는 말투, 흙 묻은 신발, 거친 천의 수단... 그 행색이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너무나 없어보였습니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신부님을 본 신자들은 이렇게 수근 거렸습니다.

“저 꼬락서니 좀 봐! 저러니 이런 시골까지 쫓겨 왔겠지.”

세월이 흘러가면서 비안네 신부님의 덕행은 영롱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가난과 겸손의 덕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명성을 전해들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아르스를 찾아왔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손짓 한번, 눈짓 한번, 단 한 방울의 눈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이 몰려드는 순례자들로 인해 아르스 사람들은 길을 넓혀야 했습니다. 마침내 순례자들의 인파는 유럽 전역에서 아르스를 향해 흐르는 큰 강이 되었습니다.

고백소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질서유지를 위해 경비원까지 써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안네 신부님의 수단 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 몸으로 돌진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옷을 찢어 달아났습니다. 그래도 비안네 신부님은 조금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죄지은 영혼들의 발자국 소리를 낱낱이 듣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그들을 만나셨고, 뒤틀렸던 그들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한편 이렇게 ‘잘 나가는’ 비안네 신부님에 대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30년 이상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비안네 신부님을 괴롭힌 사제도 있었는데, 신부님은 그 모든 수모를 묵묵히 참아내셨습니다.

교구의 동료 사제들조차도 비안네 신부는 지지리도 못생겼고,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놀려댔습니다. 쥐뿔도 모르면서 무식한 시골 본당 신자들을 선동한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낡은 수단과 꿰맨 구두, 거지같은 모자도 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 쇼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든 비방 앞에서도 비안네 신부님은 묵묵히 침묵하셨습니다. 그 모든 업신여김 앞에 겸손하셨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백소 앞 행렬은 비안네 신부님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습니다. 57세 되던 1843년 5월 12일 비안네 신부님은 이런 말을 끝으로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이렇게 저는 빈손으로 당신 곁으로 가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비안네 신부님의 모범을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하루 온종일 헌신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양들을 위해 매일 목숨을 버리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한 매일의 희생양이 되는 길, 그 길이 결국 사제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죄를 낳는 죄

서현승 신부님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인간의 범죄이야기는 원인론적으로 모든 인류가 저지르는 죄의 행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리고, 숨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있는 첫 인간을 몸소 찾아가셔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십니다. 이왕 지은 죄야 돌이킬 수 없지만, 죄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비극적입니다. 끝까지 핑계를 대며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려던 그들은 결국 낙원의 은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헤로데 역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더니 훨씬 심한 죄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였다가 그 잘못을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사람들 앞에서 헛된 맹세를 한 결과로 무죄한 요한의 목을 베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문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합리화하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헤로데는 이스라엘 왕국의 창시자 다윗의 모범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도 하느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겸손함으로 말입니다. 첫 번째 죄가 낳는 두 번째의 더 큰 죄를 두려워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솔직함이 우리를 살립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터무니없는 말로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는..

하화식 신부님

참여정부 시대에 들어서면서 민중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물론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며, 삶의 많은 부분이 정화될 수 있는 좋은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 사람들은 민중의 소리에, 다시 말해 민원의 소리에 예민해졌고 또 두려움과 새로운 힘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헤로데는 바로 이런 군중의 소리에 예민해지면서 자신의 이기적 야심의 뜻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 그런 소리를 양심의 소리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편치 않은 마음에서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또 다른 약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서 오늘날 정치인들의 뇌물의 흐름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자신의 영위를 위해서는 타협을 해나가고 또 자신의 약속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고 쉽게 이루어 나가는 검은 손이 주변의 상황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 가고 있다. 한편 그렇게도 위대한 세례자 요한의 생명이 허무하게 빼앗기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하느님의 뜻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많은 현실의 복잡한 미로에 숨겨져 있다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터무니없는 말로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는 한 인간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다시 그려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누리고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이런 유혹의 손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엄청난 현실을 만든다는 깊은 뜻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장동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습니다. 왕이 동생의 아내를 취하자 예언자가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동생의 아내는 예언자에게 앙심을 품고 음모를 꾸며 자기 딸을 시켜 예언자를 죽일 구실을 꾸밉니다. 왕은 그 음모에 놀아나 예언자를 죽입니다. 

어처구니없는 비극입니다만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불행하게도 현대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즘 과거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독재정권 아래서 행해진 여러 의문사와 절대권력에 의해 자행된 부정한 일을 밝히는 일입니다.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가 망명지를 떠돌며 정권을 비난하자 국가권력기관에서 그를 죽였습니다. 정권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라는 미명을 내걸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수없이 죽여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사건도 있습니다. 이런 비극들 때문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을 거스르는 싸움을 시작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명의 완수를 교회에 맡기고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악을 거스르는 그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차룡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여자 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극찬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예수님이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의 시대를 열어 놓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 하느님의 사람입니 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헤로데도 그 소문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종교계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 집권자에게도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입니 다.

당시 왕의 불의에 대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때 요한 홀로 그것을 거듭 거듭 충고하였기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리고 사 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에 헤로디아는 호시탐탐 눈에 가시 같은 요한을 죽일 기회를 엿보며 가슴에 비수를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들에게 내린 옳은 충고를 비판과 저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사람인 요한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중에 참으로 좋은 기회가 왔고,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한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소녀는 제 어미가 시키는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마태 14, 8) 

결국 헤로데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백성들이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이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충고라 할지라도 그 순간에는 나를 비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태도를 고치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마음에 담아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옳은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와 하느님을 박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법을 용기있게 외쳤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선택하였기에 현세의 부귀영화와 세상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의 대부로서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으로 살았던 토마스 모어 성인은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로 교회법의 혼인 의 불가해소성을 주장하여 왕과 의견이 엇갈리자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부인이 면회를 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보, 내가 왕의 말을 들어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무시하고 그 결혼을 인정하여 내가 살 수 있다면 이 지상에서 얼 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소? 한 20년, 30년? 일시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 영 원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나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 을 얻기 위해 내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예수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 - 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밑거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신앙입니다.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값진 신앙과 교회의 유산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박해와 순교의 원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의 권력에 손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뜻 에 순종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먼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의 편안한 삶을 위해 진 리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불의에 항거하며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세례자 요한과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진리의 증인이 많았으면 합니다.




이영훈 신부님

갓 태어난 세례자 요한을 안고, 아버지 즈카리야는 이렇게 말한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이 말은 요한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에 대한 예언이다. 그의 예언대로 요한은 성장하여 모든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리라는 진리를 전한다. 그러나 진리를 외치던 그가 헤로데에게 바른말을 한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리고 끝내 그를 싫어하던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던 군중들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 못한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여 자신을 즐겁게 해 준 한 소녀와 그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이게 된 것이다. 군중들의 믿음과 희망을 꺾으면서까지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수의 이익과 행복과 자신의 체통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이의 목숨과 그 진리를 듣고 용기와 희망을 얻는 이들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제 진리를 전하는 세례자 요한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지켜본 많은 이가 다시 좌절과 어둠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진리를 전하는 세례자 요한은 죽었지만, 즈카리야가 예언한대로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이제 그가 닦아 놓은 길로 그보다 더 위대하신 구원자가 오신다. 거짓으로 진리를 이기고, 권력으로 힘없는 자를 짓누르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다른 이의 행복을 앗아가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과 해방 그리고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덮을 수는 있어도 진리를 죽일 수 없다. 진리를 덮어 놓고 거짓을 앞세우며 이것이 진리라고 우길 수 없다. 왜냐 하면 진리는 영원하고, 거짓은 결국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진리를 알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진리를 외치면서도 일단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 연관이 되면 거짓과 손을 잡는다.

세례자 요한이 전하려고 했던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홀로 만족하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사랑이다.

프랑스의 엠마우스 운동을 이끌고 있는 피에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홀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할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선택을 해야 한다. 그 둘은 서로를 부인하고 우롱하지 않고서는 함께 갈 수 없다. 홀로 만족하는 자는 사랑을 모독한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그가 깨닫기를, 너무 늦기 전에,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우리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도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주님의 길을 미리 닦아야 할 세례자 요한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사랑과 진리 그리고 평화의 길을 살아가야함은 물론이고, 세상이 거짓과 불의 그리고 미움과 다툼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 그리고 사랑과 용서 그리고 평화가 넘쳐흐르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무엇인가?





막대한 재산을 가진 지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시도 마음이 편치 못해서 늘 고민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가난하기 짝이 없는 머슴 하나가 항상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이 머슴은 매일 기쁘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지주는 머슴의 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이 ‘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머슴의 집에 몰래 금화 보따리를 던져 놓았을 때 머슴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 뒤 머슴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주의 추측은 정확히 맞았습니다. 그날 이후 머슴은 더 이상 콧노래를 부르지도 않았고 기뻐해 보이지도 또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금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냉가슴을 앓느라 행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또 이러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골동품, 그림, 보석 등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리는 사업가가 있었지요. 그는 자신이 수집한 것이 도난될 것을 염려해서 철통같은 보안 시스템을 설치한 뒤 평소에는 소장품들을 감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자랑을 하면서 즐거워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수집품들을 자신의 빌딩 청소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지하 금고에 들어간 청소부는 부러운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롭게 감상했지요. 금고실의 철문을 나온 청소부에게 사업가가 물었습니다. “어떤가? 이렇게 많은 예술품과 보석을 본 적이 없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처럼 부유하고, 당신보다 더 행복해졌습니다.”

부자는 청소부의 대답이 너무 엉뚱해서 그 이유를 물었지요.

“나는 당신이 가진 보물을 보았으니 똑같이 부유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나는 저런 물건들을 잃어버릴까 밤잠을 설칠 필요도 없으니 당신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하겠지요.”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과연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세속적인 부와 명예는 우리를 절대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헤로데 임금은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그는 돈도 많았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것만을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세속적인 체면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그는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적인 만족만을 가져올 뿐 죄책감으로 인해 평생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지요. 


행복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너무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더 큰 행복을 가지려는 욕심인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지금 주어져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현재의 생활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주님께서 항상 사랑으로써 나와 함께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 안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순간적인 만족이 주어지는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의 길을 선택하세요.


진정한 성공(‘행복한 동행’ 중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돈과 명예만이 성공의 목표라 생각하며 대기업 중역 자리에까지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중년을 맞은 어느 날, 바람을 쐬러 강가에 나갔다. 낚시를 하고 있는 한 청년이 있었는데, 청년은 미동도 않는 낚시찌를 바라보며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쁘게 일분일초를 살아온 중년의 눈에는 젊음을 낭비하는 한심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남자가 청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이 좋은 날에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보다시피 낚시를 하고 있죠.”

“젊은 나이에 더 멋진 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나는 낚시를 좋아해요. 낚시를 하며 여러 가지 행복한 생각들을 하니까요. 낚은 물고기를 팔아 생활비에 보탤 수도 있고 저녁을 지을 수도 있죠.”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할 생각은 없소? 취직해 돈을 번다든지.”

“제가 왜 그런 일을 동경해야 하죠?”

“열심히만 한다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으니까.”

“높은 자리가 무슨 소용인데요?”

“그땐 당신이 원하는 일은 뭐든 할 수 있소! 원하는 건 뭐든지!”

그러자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이거라면요? 하루 종일 이렇게 앉아 낚시를 즐기는 거요.”

사람은 각기 다른 꿈을 갖고 있다. 행복의 기준과 성공의 의미도 저마다 다르다.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가고 있다 생각되는 이 길이 혹 빙 돌아가는 길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인생의 성공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하는 데 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들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도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일몰의 아름다움이나 명산의 웅장함 앞에 잠시 멈춰서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은 신성(神性, divinity)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세 살 바기 어린아이나, 이른 봄에 맹렬히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들을 보고, ‘귀엽다’, ‘예쁘다’고 하지, ‘아름답다’, ‘곱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서쪽하늘 너머로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석양이 곱다’, ‘장엄하다’,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진정으로 아름답다, 참으로 곱다는 말에는 소멸이 내포되어 있고, 그래서 그 말에는 설움이 배어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 사라지려 할 때, 사람들은 그 마지막 장면을 다치지 않고 생생하게 잡아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이승수, ‘사라지는 것, 그 찰나의 아름다움’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소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너무도 아쉬운 죽음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활활 타오르는 저녁노을보다 훨씬 더 고운 빛깔입니다. 그의 순교는 묵묵히 끌려가 털끝만큼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죽어간 무죄한 어린 양의 죽음과도 흡사합니다. 그의 최후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과 그의 왕국을 위해 온전히 바쳐진 거룩한 산 제물이었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예언자의 삶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의 삶은 혹독하게도 고독한 삶입니다. 이 땅에서 소멸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춥고 허전합니다. 그의 일상은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모든 결핍이 메시아를 위한 것이어서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산(辛酸)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독과 외로움,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누군가로부터 이유 없이 천대받고 갖은 고통을 겪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말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것이 ‘소멸의 과정’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어느 정도 삶을 이끌어 나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상처가 생깁니다. 원치 않는 병고도 뒤따릅니다. 조금도 예기치 않았던 내리막길도 걷게 됩니다.

그 순간이 찾아오면 꼭 세례자 요한의 소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소멸의 과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로 장식하시기 바랍니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한용운, 떠날 때의 님의 얼굴)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이정석 신부님

시(詩)는 처음부터 감동으로 다가와 매번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시집은 부피도 작지만 몇 마디 말이 읽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어 ‘찡’하게 울림을 주고 그 여운도 참 오래갑니다. 윤동주의 시집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가 윤동주의 시 구절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입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서시> 중에서)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그대로 있습니다.’(<자화상> 중에서)


헤로데에 의한 요한의 죽음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9-­10) 마르코복음은 요한에 대한 헤로데의 감정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19-­20)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자신의 판단을 거슬러 하기 싫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체면 차림을 위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의 목을 베어버린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 한편에 짐으로 남아 있던 이 사건을 떠올리고 있습니다(마태 14,1).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스스로에 대한 용서입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위선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참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젊은이가 자신의 스승님을 찾아가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오! 당신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지혜를 가르치고 있소!”

그러자 스승님은 손가락에서 반지 하나를 빼내어 이 젊은이에게 던지면 말합니다.

“장터의 노점상들에게 이걸 가지고 가서 금화 한 냥이라도 얻어와 보게.”

젊은이는 비웃으면서 장터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반지의 대가로 금화 한 냥은 커녕 은전 한 닢도 주려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쓸데없는 반지는 왜 팔려고 하는 거야?’하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스승님은 젊은이에게 다시 말합니다.

“그럼 진짜 보석상을 찾아가서 이 반지의 값을 얼마나 쳐주는지 알아보게나.”

젊은이는 아무런 값어치를 매기지 못했던 장터의 상인들을 떠올리면서, 역시 투덜거리면서 보석상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는 깜짝 놀랄만한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글쎄 보석상은 그 반지를 보자마자 욕심을 내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당장 금화 백 냥이라고 줄 수 있으니 내게 넘기시오.”

젊은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시 그 스승님께 돌아왔지요.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석의 가치를 정말로 알고 싶다면 진짜 보석상이 되어라.”


그렇지요. 값비싼 보석을 장터의 상인들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석상은 그 가치를 잘 알고 어떻게든 그 보석을 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가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앞서 가치를 몰라서 값비싼 보석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장터의 상인과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이 장터의 상인들이 나중에 이 보석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면 어떠했을까요? 분명히 후회를 할 것입니다. ‘내가 그 보석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금화 한 냥이라는 적은 가격으로도 구입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말이지요.

이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분명히 내 판단이 맞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했겠지만, 그 판단이 나중에 커다란 후회로 바뀔 때가 얼마나 많았나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요. 이런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인하여 그는 평생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헤로데는 보석의 가치를 전혀 몰랐던 장터의 상인과 같았기에 평생 후회의 삶을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보석상이 아닌 장터의 상인이 되어 값비싼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어리석음을 가지고 나의 이웃을 얼마나 잘못 판단하고 단죄했었던가요? 이제는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즐거운 주말 계획을 세워 보세요.


오늘도 선물입니다(‘좋은 글’ 중에서)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마음과 생각이 통하여

작은 것에도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오늘 하루도 선물입니다.


늘 실수로 이어지는 날들이지만

믿음과 애정이 가득하여

어떤 일에도 변함없이

나를 지켜봐 주는 가족이 있으니

오늘 하루도 선물입니다.


늘 불만으로 가득한

지친 시간이지만

긍정적이고 명랑하여

언제라도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친구가 곁에 있으니

오늘 하루도 선물입니다.


늘 질투와 욕심으로

상심하는 날들이지만

이해심과 사랑이 충만하여

나를 누구보다 가장 아껴주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으니

오늘 하루도 선물입니다.


그 많은 선물들을 갖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나이지만

하루하루 힘들다고

투정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내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이 소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오늘 하루가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빅토르 위고).


관점의 변화가 필요한 우리

종종 혼자서 여행을 합니다. 바쁜 일상의 삶을 뒤로 하고 하는 이 혼자의 여행은 너무나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기분은 하루 이틀일 뿐입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이때는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냥 함께 대화를 하고 싶어집니다. 


‘좋은 사람만이 의미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외롭고 힘들 때에는 나쁜 사람 역시 내게 큰 의미 있는 사람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관점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관점의 변화를 통해 완성됩니다. 나만 옳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여행길 안에서 변하고 변해서 주님의 뜻에 가장 맞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박혜원

헤로데는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수긍했고, 자기 죄에 대한 번민도 있었다. 그러나 의붓딸 살로메의 뇌쇄적인 춤 앞에서 우쭐해진 헤로데는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고 허세를 부렸다.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의붓딸의 소원을 듣는 순간 암담했지만 한 번 한 약속을 물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역시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항상 그 자존심이 문제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 곳곳을 통해 당신의 메시지를 보내는데 우리는 번번이 그 신호를 무시하고 여전히 체면만을 돌아보며 산다. 아상(我相)에 갇혀 있으니 하느님의 음성에 무디어질 수밖에 없다. 헤로데는 요한의 입을 통해 드러난 자아를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살로메의 춤을 보며 허세를 부렸다. 나탄에게 자기 죄를 고발당한 다윗이 베개가 젖도록 눈물 흘리며 자신을 돌아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양심의 소리에 준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했다. ‘본질적인 문제’ 앞에 서는 일이 중요했다. 헤로데에게 본질적인 문제는 ‘헤로디아’였다. 

허영을 버려야 할 일이다.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 앞에 발가벗고 양심의 소리, 내면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하리라. 이 글을 쓰는 나는 진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어떤 부자가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냈어요.

“누구든지 인생의 참 만족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오시오. 내가 1만 달러를 주겠소.”

지정한 날이 되자 수백 명의 남녀가 이 부자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서 어떻게든 이 현상금을 타가려고 앞 다투어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선생님, 저는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늘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훌륭한 부모와 아내가 있어서 만족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아무런 불평거리가 없습니다. 항상 만족합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삶이 만족스러운 이유를 늘어놓았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러분도 이 1만 달러를 받아내기 위해서 응모한다면, 어떤 이유를 들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한 사람이 1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을까요? 하지만 이들 중에서 현상금 1만 달러를 받아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자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그 누구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신들의 말대로 당신들이 그렇게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면 왜 내 돈 1만 달러를 받아내려고 하십니까?”

지금의 상태가 그렇게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면 굳이 현상금으로 내어 놓은 돈을 타기 위해서 응모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현상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그 부자 앞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편리에 따라서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가, 또 불행한 사람이 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네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왕을 떠올려 봅니다. 그 역시 행복을 찾았고, 그래서 자기 편리에 따라 행복을 선택합니다. 즉,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재혼함으로써 행복을 쟁취하지요. 그러나 정말로 행복해졌을까요? 순간적인 기쁨을 누리기는 했지만, 늘 죄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고 말하면서 불안에 벌벌 떨지요. 즉, 그는 불해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자기 편리에 따라 만들어진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사랑이 가득하다면 진정한 행복도 함께 자리를 하는 것입니다.


해외 토픽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 청년이 라스베이거스에서 단 한 번에 돈 백만 달러를 걸고 노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몽땅 잃어버렸고, 청년은 그 충격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해외 토픽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청년이 썼던 한 줄의 유서 때문에 해외 토픽이 되었다고 하네요.


“내 이럴 줄 알았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 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 내 마음에서 외치고 있는 사랑의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박을 하지 맙시다.


씨앗과 하수관의 차이

콜드는 그룬트비에 의해 세워진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사람입니다. 그의 소박하고 알아듣기 쉬운 강의는 듣는 사람들에게 항상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강의 내용을 필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평생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럴 때마다 그 내용을 써두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콜드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걱정 말게. 땅속에 묻는 하수관은 땅위에 표시를 해두어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살아있는 씨앗은 별다른 표시를 해두지 않아도 반드시 움을 틔우는 법일세. 내 말이 산 것이라면 어느 때이고 자네의 삶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네."

모래나 씨앗은 겉보기에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모래는 생명이 없고 씨앗은 있습니다. 가치의 판단은 겉모양의 크기나 꾸밈에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력에 두어야합니다.




† 헤로데 가문의 족보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를 자기가 목을 베어 죽인, 그러나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으로 착각하는 가운데, 이미 과거사가 된 세례자 요한의 수난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4-29)을 그대로 베끼면서 총 16절을 12절의 분량으로 줄였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러나 마태오는 구구한 설(說)을 일축하고 헤로데의 생각만 전해준다.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자주 ‘헤로데’를 만나게 된다. 헤로데, 또는 헤로데 왕이라는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58번 등장한다. 그 빈도를 살펴보면 마태오복음에 17번, 마르코복음에 11번, 루가복음에 15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15번이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는 헤로데가 다 같은 헤로데가 아니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뒤져보아야 한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이를 중심으로 유대교적 종교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333년 희랍의 알렉산델 대왕군대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헬레니즘의 정신적,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는데, 알렉산델(333-201), 프톨로메오 왕가(200-198), 셀레우쿠스 왕가(198-164), 하스모네오 왕가(163-64)가 차례로 팔레스티나 지역을 다스린다.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제국의 속주(屬州)로 삼았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로마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하스모네오 왕가는 아리스토불루스와 히르카누스 형제의 권력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이를 틈타 헤로데 가문의 안티파텔이 등장하여 권력을 거머쥔다. 


헤로데 가문은 유다가 아닌 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 사람들은 원래 유다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모네오 왕가의 통치시절에 유다에 합병되면서(BC.130년경) 유다백성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안티파텔은 로마제국과 그의 황제들에 대한 적절한 충성심으로 신임을 받아 시민권을 얻었고, 이어 총독에 임명된다. 그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안티파텔은 자신의 두 아들,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암살된다. 아들 헤로데는 이를 기회로 삼아 독보적인 위치를 잡는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과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헤로데 대왕이다.(BC.40-AD.4 통치) 헤로데는 치세 20년경에 대대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증축을 도모하고, 제국에 충성하며,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굳건히 한다. 그는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했다. 거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비용조달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아기 예수께서 이집트 피난길에 오른 것도 헤로데 대왕 때문이었다.(마태 2,13-18) 헤로데 가문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왕’으로 불린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마태 2,19: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시기는 대략 기원전 7-4년 사이로 추정된다),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이 다스리게 된다. 이들 셋은 모두 이복형제들로서 아르켈라오는 헤로데 대왕이 주로 다스리던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아 AD.6년까지 다스린다.(마태 2,22) 필립보는 북동부 요르단 지역을 AD.34년까지,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르단강 동서쪽인 베레아와 갈릴래아 지역을 AD. 39년까지 다스린다.(루가 3,1)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가 신약성서의 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고(마태 4,8),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판에서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가서 고발했지만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출신임을 알고는 헤로데에게 보내어 심문을 받게 한다.(루가 23,1-12) 이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당시 갈릴래아 영주였고, 그 시각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또 한 사람의 헤로데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르켈라오의 아들로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인데, ‘헤로데’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 12장부터 23장까지 15번 등장한다. 사도행전 25장과 26장에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12번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인 ‘마르코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2세’를 말한다. 아르켈라오는 이름난 폭군으로 10년간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 죽는다. 그 후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직접적 통치관할에 편입되지만, AD.41년-44년까지는 아그리파 1세가, 그 후는 아그리파 2세가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마태오복음 2장에 보도된 예수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헤로데 대왕’을 지칭하고, 그 나머지 부분과 마르코와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를 말하며, 사도행전의 헤로데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언자를 죽인 사람은 다리 펴고 잠을 잘 수 없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더 이상 편안히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헤로데는 예수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단언했을까? 


그것은 아무 겁 없이, 아무 욕심 없이 광야를 보금자리로 삼고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와 메시아의 도래를 설파하고, 자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4절)고 간언하다 죽은 예언자 요한의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이며, 결국은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헛된 결심이나 맹세를 남발하지 않으며 정의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옳지 않습니다.>(마태 14, 1-12)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크게 부각된 점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관이었다.

한 사람은 정의를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하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한 사람은 자신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주위상황과 사람에 의해 줏대없이 살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앗아간 헤로데라는 인물이다.


의인인 요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짧고 간단하게 요한의 삶을 표현하였지만 그 짧은 표현 속에 요한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전해주는 데에는 충분하다.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은 아주 짧게 끝났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오늘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메시지를 던져 줄 것이다. 반면 옳게 살지 못한 헤로데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장황하게 늘어 놓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추하고 비열하다. 길게 늘어 놓을수록 더욱 추한 이야기의 나열일 뿐이다. 


요한 세례자는 패했고 헤로데는 승자같지만 정말로 승리한 이는 요한이고 패자는 헤로데이다. 죽은 이는 요한이요,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였지만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삶을 보면서 역사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당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승자이고 영원히 사는 길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럼 좀 더 요한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를 묵상하자.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삶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다. 결국 예수님도 옳은 일을 하다가 반대자들에 의해 죽을 것이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선의의 사람들,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변해주는 것이요, 그리스챤의 삶을 이야기 한다.

요한이 한 일은 옳은 일을 말하고 외쳤고 또 그렇게 살았다. 옳은 일 앞에서 죽음도 명예도 출세도 모든 것을 버렸다. 왜 그렇게 살았는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요한의 인생관이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옳은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바로 의인의 삶이요,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흔들림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삶이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교회는 이런 순교자를 최고의 영예로 여기며 이들을 聖人이라고 한다.

오늘 날 우리 교회는 이런 성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대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철새처럼 자기의 인생관, 가치관도 없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리 붙고 저리 붙어 사는 삶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진리를 쫓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골베 신부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헤로데라는 한 인간의 추한 모습을 잠시 묵상하자.

헤로데라는 인물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헤로데라는 인간을 통해서 강하게 다가 오는 것은 인간이 진리를 모를 때 어떻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헤로데는 자기의 권좌와 명예를 지키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자기에게 옳은 일을 조언하는 의인을 죽였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자기도 원치 않았지만 맹세까지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딸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고, 동생의 부인을 차지하는 불륜의 관계를 서슴없이 범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그의 부인인 헤로디아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헤로디아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혔고 그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인간으로 타락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자기를 얼마나 짖누르고 있는 가를 헤로데와 헤로디의 모습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요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안해 하였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헤로디아도 자기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의 늪에서 허우적 되고 있다. 사실 헤로데 임금이 베푼 잔치는 헤로디아를 위해서 베푼 잔치가 아니다. 그렇치만 요한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는 헤로디아는 그런 자리를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딸이 매춘부나 추는 춤을 추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추켰으며 또 딸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청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하였다. 그로 인해 자기 남편은 물론 자기 딸마저 사람을 죽이는 공범자로 만들었다. 앙심을 품고 있는 한 여인의 무서운 생각이 결국은 자기도 죽이고 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임금이 무슨 원이든 딸의 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요한 세례자를 감옥에서 풀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앙심을 품고 있었던 헤로디아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자기와 다른 가족들을 가장 불행한 기회로 만들어 버렸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잔치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잔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기회가 자주 있는 법이 아니다. 좋은 기회를 잘 살리 수 있는 것, 그것이 삶의 지혜이다. 그것이 성공하는 길이다. 좋은 기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을 살아서는 안되겠다. 이런 모든 불행의 원인은 바로 앙심을 갖고 살아가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즉 인간이 불행해질 수 있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는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중에 내뱉는 말이다.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절대로 앙심을 품고 살아서도 안 되고, 취중에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취중에 어떤 약속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죄는 죄를 낳는 법이다. 모든 죄는 개인적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도 그랬고 헤로디아도 자기 혼자만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과 딸까지도 죄를 짓게 만들었고 또 그들에게도 불행을 가져오게 하였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매일 밤 양심의 소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삶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시는데 그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들을 수 없는 오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기적을 통하여 “나는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된 메시야다,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 하느님이다. 나는 생명의 주, 구원의 주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본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갈릴레아는 물론이고 멀리 유다 땅까지 입소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은 헤로데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는 헤로데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데(헤로데 가문족보 : 박상대 신부강론 참조), 그 내용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헤로데는 오늘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할아버지로서 역사가들은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대 헤로데라고 불렀습니다. 


대 헤로데는 40여년에 걸쳐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임금이고, 지금도 남아 있는 마싸이다라는 요새를 건축한 임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전을 건축하였다고 신앙심이 좋은 임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에돔 사람인 헤로데는 어떻게 하면 유다인들의 마음을 사서, 효율적으로 유다인들을 다스릴까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유다인들이 소망하는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즉, 신앙심에서 성전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서에서 이미 읽으셨듯이, 대 헤로데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2살 이하의 아이는 모두 죽여라 명령을 내릴 정도로 잔혹인 임금이었습니다. 자신의 왕의 자리를 노린다는 의심을 하여 몇 명의 부인과 아이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헤로데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보다 개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 하는 말이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헤로데가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알고는 마을마다 존경받는 유지들을 다 잡아 옥게 가두게 하였고, 자기가 죽을 때에 유지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온 나라에 슬퍼하는 곡소리를 들리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기록하리라. 온 백성이 위대한 헤로데 왕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하였도다” 그러나 헤롯이 죽은 뒤에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대 헤로데의 손주가 되는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레아 지방을 다스리도록 로마 황제에게 위임을 받은 임금입니다. 이 헤로데가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야, 우리들이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메시야이신 것이 틀림없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 분은 다윗과 같은 찬란한 유대 왕국을 세우실거야!”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돌아왔어! 예수 안에서 그가 역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헤로데는 왜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에 자신이 한 일 때문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자신의 한일이란 다음과 같은 추악한 내용입니다. 

그의 동생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아내, 제수씨인 헤로디아가 얼마나 예쁜지? 제수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셋말로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듯이... 그만 제수씨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긴 헤로데왕은 권력을 이용하여 동생에게서 아내를 빼앗아서 아내로 삼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은 불륜으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감히 헤로데왕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의 아첨꾼들은 “임금님,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습니다. 폐하와 왕비께서는 원앙새도 부러워 할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진작에 만나셨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 이런 아첨의 말에 헤로데는 사랑의 쟁취자라는 행복감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세례자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언자로 믿고,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대신들 앞에서 담대하게 헤로데왕의 잘못을 지적하며 질책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시오! 어찌 동생의 아내인 제수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이오! 동생이 죽은 것도 아니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짐승들이나 하는 부도덕하고 더러운 일인데 어찌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러한 추접스러운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이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준엄한 질책에 당황하였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던 헤로데는 부하들에게 단칼에 목을 베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온 백성이 에언자로 믿고 있는 요한의 목을 베면, 예언자를 죽인 왕으로 그 나마 조금 남아 있는 백성들이 존경심이 사라질 것이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에 폭동이 일어난다면, 갈릴레아 지방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로마 황제의 문책을 받을 것이고, 정치적 생명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보존하기 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목을 베고는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고, 대신에 지하 감옥 깊은 곳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헤로데왕은 문무 대신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흥겨운 노래 가락 가운데 기름진 음식과 술을 먹고 마셨습니다. 여인들은 화려한 의복과 몸에 치장한 장신구들을 자랑하고, 남자들은 헤로데 왕 주변에서 듣기 좋아하는 아첨 소리만을 하면서, 출세의 기회로 삼고 있었습니다. 


헤로데왕은 이전에는 제수였지만 지금은 아내가 된 요염한 헤로디아와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둘려 쌓여 의자에 비스듬이 걸터앉아 거들먹거리고 있었습니다. 분위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흥겨운 노래와 멋진 춤으로 여흥이 절정에 올랐을 때에, 전에는 조카였지만 지금은 딸이 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나와서 춤을 추었습니다. 


헤로데왕이 헤로디아의 아름다운에 반하여 동생 아내를 탈취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딸 살로메 역시 엄마의 아름다움과 요염함을 그대로 빼어 닮았을 것입니다. 잔치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살로메의 감각적인 춤에 넋이 나갔습니다. 춤추는 것이 끝났을 때에 사람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와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기분이 몹시 좋아진 헤롯은 살로메를 불러서 “참 잘 했다. 네가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는데 큰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나라의 반이라도 달라면 너에게 줄 것이니, 너는 무슨 상을 받기를 원하느냐?”하고 말했습니다. 헤롯왕의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환호하며 큰 박수를 쳤습니다. “나라의 반이라도 내어 준다”는 헤로데의 말에 대하여, “역시 왕은 스케일이 보통 사람하고는 달라, 왕의 배짱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어” 하는 말로 헤로데를 한껏 치켜 올렸습니다. 


살로메는 엄마와 상의하였습니다. 엄마 헤로디아는 귓속말로 살로메에게 속삭였습니다. 이윽고 살로메가 헤로데 왕에게 주기로 한 상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살로메가 요구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목”이었습니다. 


이것은 헤로디아가 시킨 것입니다. 그녀는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헤로데 왕을 새 남편을 맞이하였는데, 너무도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화려한 멋진 파티에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의복을 입고, 몸에 반짝이는 보석을 걸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습니다. 보석이 아름답지만 왕비님 때문에 초라해 보입니다” 하는 아첨하는 말에 날아갈 듯 하였습니다. 평상시 꿈꿔오던 황홀한 생활인데 드디어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 꿈을 훼방 놓은 오직 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감히 어디라고 주둥이를 놀려 댄단 말입니까? 단칼에 베 버리면 되는데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세례자 요한을 살려두는 배포 헤로데 안티파스가 원망스럽습니다. 드디어 이제 눈의 가시인 세례자 요한을 제거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는 살로메의 요구 앞에 헤로데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고, 그 소리에 모두들 환호하였는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말하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체면유지와 남의 눈을 의식하는 연유로... 예언자의 목을 베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결국은 흥겨운 파티장에 피비린내가 덮었습니다. 요한이 목이 베어져 쟁반에 담겨 온 것입니다. 붉은 핏방울이 쟁반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입을 벌려 저주를 퍼 부을 것 같은 목이 담긴 쟁반이 살로메에게 주어졌고, 살로메는 이 쟁반을 받아서 헤로디아에게 주었습니다. 헤로디아는 멋진 파티복이 핏방울로 얼룩졌지만 개의치 않고,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세례자 요한의 목이 담긴 쟁판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일을 저지른 후에 헤로데는 늘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잠을 자다가 놀라서 깨어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매일 식은땀으로 이불을 적셨습니다. 이러던 차에 서두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에 대하여 듣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헤로데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 돌아와 예수 안에서 활동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파스칼은 “하느님께서는 길을 알 수 있도록 캄캄한 밤하늘에는 별을 주셨고, 우리의 가슴에는 양심을 주셨다.”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을 닮은 형상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형상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데 그것이 양심입니다. 죄를 지으면 두렵고, 불의를 행하면 떨립니다. 양심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살 수 있어도 양심의 소리에는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로마 1,19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느님을 멀리하면 떨리고, 하느님의 법을 어기면 두렵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위대한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신성과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우리 속에서 속삭이는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을 몰랐다고 어느 누구도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헤로데왕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양심의 소리 때문이며, 떨고 있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은 아주 작은 소리였습니다. 미세한 음성이란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가다듬고 조용히 가운데서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미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미세한 음성이기 때문에 시끄러울 때는 들을 수 없습니다. 온갖 잡념을 가지고 있거나 분심에 빠져 있을 때에는 들을 수 없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앉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미세한 하느님의 음성, 신앙 양심의 소리, 성령 하느님의 재촉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며 백성들을 깨우치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예언자로서 외치는데, 모두들 귀를 꼭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외치면 외칠수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외치지 않겠습니다” 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외치지 않고, 외치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 않고, 핍박을 당하지 아니하고 - 좋았습니다.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집에서 쉬고 있는데 “너는 사명자가 아니냐? 사명자인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네 하느님, 나 야훼가 맡긴 사명인데 네가 그렇게 주저앉아 있느냐?” - 미세한 하느님의 음성, 신앙 양심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예레미야 예언자는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예레 20,9입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이와같이 예레미아는 미세한 하느님의 음성, 양심의 외침에 항복하였고, 다시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보다 믿음이 더 자라고 싶습니까?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싶습니까?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느님을 가까이 함으로 하느님의 더욱 풍성한 은총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럴러면 먼저 하느님의 미세한 음성, 신앙 양심의 외침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음성을 듣기 위하여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묵상의 환경과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 1-2에서는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묵상의 시간, 경건의 시간,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하루 가운데 정해 놓으시고, 하느님이 미세한 음성을 들으며,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하느님 마음에 합치한 자가 되기를 바라며, 하느님께서 더욱 풍성한 은혜와 복을 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면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라의 반이라고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좋아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말을 바꾸는 사람, 실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손해가 되더라도 꼭 지키는 사람, 신실한 사람, 분명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지는 몰라도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습니다. 매일 밤 양심의 소리 때문에 괴로워하여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다르고, 의의 기준이 다르고, 선의 기준이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 되지만, 하느님의 백성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고 해도 하느님의 박수를 받는 일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하느님이 원하시면, 하느님의 박수를 받는 일이라면 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의를 이루어야 하지만 먼저 하느님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의 선을 이루어야 하지만 먼저 하느님의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 것은 다 사라집니다. 세상 나라는 지나갑니다. 세상의 의는 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 같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세상천지는 변하여도 하느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영원한 하느님의 의를 세우기 위한 신앙의 용기, 신앙의 결단이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크리스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를 위하여 때로는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를 위하여 때로는 예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세상의 물결치는 대로, 세상의 사조가 흐르는 대로 이리 저리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잘 순응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에 적합하지 않으면 “NO"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의를 위하여 “YES"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서 물결대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고기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거친 물살을 헤치고 나갑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 깨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의 용기와 결단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하며,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의를 이룬 여러분을 향하여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하느님의 풍성한 상이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두올묵상팀]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옛날 중국 제나라의 위왕은 선정을 베풀어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루는 지방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지를 알아본 후에 청렴한 관리들에게 상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어느 한 지방의 관리를 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경에 대해 온통 나쁜 소문만 들리기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 관리들은 청렴결백하였고 백성을 아끼고 인심이 후하고 배를 주리는 자가 없다 하니 경은 그 곳을 잘 다스린 것이 분명하오. 그런데도 내 주위의 대신들은 경을 악담하니 이는 경이 그들에게 아첨과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이 또한 바른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겠소? 그래서 경의 수고를 치하하려 하오.”

왕은 그에게 포상으로 땅을 주었습니다.

다음날 위왕은 또 한 지방의 관리를 불렀습니다.

“경에 대한 칭찬이 들려 오길래 내가 은밀히 알아보았더니 그 고을의 땅은 황폐하고 백성들은 굶주리는 데도 경은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것이었소. 그런데도 칭찬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또한 경이 아첨에 능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위왕은 대단히 노하여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전기세 낮추어주고 물세 낮추어 주어서 집권당을 계속 찍도록 우민정책을 써서 민심이 오염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는 언론을 차단하거나 조작하고 알아야 할 권리를 박탈하는 등의 수단까지 동원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백성들이 누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지, 아니면 자기들의 사리사욕만 차리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본당에서도 사제나 수녀님들이 몇몇에게만 사랑을 받고 전체적으로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분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제들과 동료 예언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거슬러 예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도시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백성들 앞에 끌어냅니다.

사실 예수님도 똑같은 처지를 당하셨습니다. 안식일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안식일에 그들의 시선으로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셨고, 결정적으로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하면서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사제들은 예수님을 군중들 있는 가운데서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를 매수하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판의 아들 아히캄이 고소하는 이들의 손에서 예레미야를 빼내어 백성들에게 넘겨서 결국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받는 예언자는 없습니다. 백성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고 그래서 눈이 맑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이용하여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려고 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자신의 재산 많은 것을 정당화하면서 다윗도 부자로 살았다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재산이 많은 종교인들은 그 설교에 동의하였을 것이지만, 만약 어떤 이가 종교인들은 예수님처럼 벌거벗겨지고 세상에서 가난한 예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들은 알 것입니다. 아무리 그런 설교를 해도 그건 아니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심은 천심이란 뜻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기득권자들이 아닌 민중, 혹은 일반 신자들의 요구를 존중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사제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를 두고 오히려 그 도성을 거슬러 예언했다고 하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예레 26,11).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26,24). 


한편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듭 말합니다(마태 14,3-4). 그러자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했던(마르 6,20) 헤로데는 자신의 사생활을 지적한 요한을 옥에 가두고 끝내 목을 베었습니다(마태 4,1-12). 


헤로데 안티파스가 요한을 처형한 또 다른 이유는 정치적 불안감이었을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요한 세례자가 세례운동의 인기를 악용하여 정치적 선동을 할까 염려해서 그를 체포하여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론테 요새에서 처형했습니다(유대고사, 18권 116-119항).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이 소생하여 예수로 등장했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죽인 요한처럼 예수님도 기적을 행하셨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종말 설교를 하셨으며, 요한의 참수 후 예수님께서 드러나게 활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죽음은, 그 잘못을 따져 꾸짖는 ‘예언자들’을 없애려는 국가 권력의 횡포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이 낳는 비참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례자의 죽음은 예수께서 당하실 구원의 죽음을 예시해 줍니다. 


이러한 죽음은 이 세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전형적인 모순이지요. 야망, 이해타산, 거짓과 뻔뻔스러움, 비열함, 그릇된 명예 등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권력과 명분을 앞세우고 무죄한 자들을 폭력으로 짓밟으며 자주 의인에게 부당한 죽음을 씌웁니다. 그뿐 아니라 불의 앞에서 비겁한 방관과 침묵을 한 민중들의 태도도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깊이 새겨할 할 점은 온갖 불의와 억압, 거짓과 폭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의 음성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귀를 기울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의 음성을 따르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여러분의 마음에 온전히 간직하시고, 그분의 권고를 정신을 다하여 이행하십시오.”(형제회 편지 7절) 


사실 자신의 힘을 믿고 거기에 기대어 자기 뜻을 이루려 하는 이들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의지하는 현세 재물과 인간적인 능력들은 늘 제한적이기에 그 자체로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살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양심이 무뎌지게 되지요. 


오늘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소리에 충실히 응답하며, 주님께 의지하여 죄악을 폭로시키는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 정의가 뒤따르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무의 수령을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중심에서부터 동그랗게 원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무의 ‘나이테’라고 부릅니다. 움직일 수 없는 나무는 주변의 상황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로 태풍이 불고, 천둥이 치기도 합니다. 심한 가뭄으로 대지가 타들어 가기도 합니다. 산불이 나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나이테는 그런 모든 아픔과 시련을 이겨낸 영광의 흔적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모든 나무는 세상의 온갖 풍파를 온 몸으로 견디며 우뚝 서있는 것입니다.

지구별에 등장한 인류는 다른 생명들에 비하면 ‘나이테’가 아직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이테는 독특하며, 주변의 다른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직립보행이라는 나이테는 우리의 두뇌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야가 더 높아지고, 우리의 성대는 더 많은 소리를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라는 나이테는 나약한 우리를 하나로 연대하게 해 주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부족,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문자라는 나이테는 우리의 지식을 통합하게 해 주었습니다. 문자는 사자의 이빨보다, 곰의 발보다, 독수리의 눈보다, 치타의 다리보다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서 역사, 문화, 신화, 철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의미라는 나이테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영원한 세상을 갈망하게 하였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에 살면서 은하와 우주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앞으로 인류는 어떤 나이테를 가지게 될까요?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신화, 종교, 철학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아직은 세상이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7월의 끝자락입니다.

내 삶의 나이테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바라보는 나의 눈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이 응시하는 눈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입니다. 이 중에서 어떤 눈이 가장 중요할까요?


나의 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자기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게 되지요.


다른 사람들이 응시하는 눈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생각하다보니 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체면치례가 많아집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멋진 삶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과 똑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기준을 먼저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겉치레를 따르지 않으며,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겸손한 마음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실상은 나의 눈과 다른 사람들이 응시하는 눈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밝은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직접 볼 수는 없는 것처럼, 그보다 더 밝으신 주님이기에 보지 못할 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어떤 눈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까? 그는 두 번째의 부류인 다른 사람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며, 엘리아의 영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활을 했으니 더 큰 힘을 지니게 되었고 그래서 기적을 베푸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던 헤로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다시 태어났다고 기쁘고 행복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지금의 이 순간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만 해도 자신의 맹세를 깨뜨리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고 겁냈습니다. 즉, 자신을 보고 있는 손님의 눈에 더 큰 신경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주님의 눈을 더 무서워하고 겁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 나갈 때,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인 구원을 주십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C.쿨리지).


오프라 윈프리의 10가지 법칙(오프라 윈프리,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중에서)  

1. 남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라

2.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말라

3. 일과 삶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라

4. 험담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멀리 하라

5. 타인에게 항상 진실하라

6. 중독된 것이 있다면 지금 끊어라

7.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라

8. 돈 때문에 일하지 마라

9. 당신의 권한을 남에게 넘겨주지 말라

10. 포기하지 말라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10가지 법칙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자신도 스스로 이런 법칙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지금 보다 더 나은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지無知의 악惡 -선과 악에 대한 묵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문득 밀과 가라지의 선과 악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밀속의 가라지가 아니라 가라지 속의 밀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악의 세력에 선의 세력이 너무 미약해 보입니다.

밭의 현실만 봐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선이라 하면 잡풀은 악같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채는 사라지고 온통 잡풀 무성한 밭이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선을 가꾸고 돌보는 수행의 노력이 없으면 악속에서 선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교훈을 줍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대한 복음을 읽을 때면 늘 마음이 불편합니다.

오늘은 ‘무지의 악’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동방영성에서 역시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를 마음의 병중 으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무지가 바로 악이라는 것입니다.

 

몰라서 무지로 인해 악을 저지릅니다.

악을 저지르고도 무엇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앎으로 확신하여 저지르는 악도 얼마나 많은지요.

 

무지가 악인을 만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평생공부입니다.

하느님을 알수록 나와 더불어 이웃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닮아 자비롭고 지혜롭고 겸손하고 순수해집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로 인해 자기를 몰라 교만이요 탐욕이요 본의 아니게 악의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는 수행의 노력이 없이는 인간의 야수성, 잔인성, 공격성을 통제하기는 극히 힘듭니다.

물론 하느님의 은총을 당연히 전제로 합니다.

 

요즘 국내외적으로 창궐하는 악의 세력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다가 헤로디아의 농간에 의해 헤로데에 의해 참수됩니다.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얼마나 잔인한 장면인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을 목베는 일이 옛날에는 일상이었습니다.

 

하다보면 양심도 무뎌져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 시대, 6.25전후 참으로 이런 만행이 얼마나 저질러 졌는지요.

얼마전 미사도중 IS대원에 살해된 프랑스의 아멜 신부도 참수되었다 합니다.

 

그대로 악의 정체를 폭로하는 사건입니다.

그대로 무지의 소산입니다.

 

무지가 얼마나 큰 악인지 깨닫습니다.

 

악마의 도구가 되기 십중팔구의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알게 하는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도대체 악뿐이 보고 배운 것이 없는 환경의 무지의 사람들이라면 참 대안이나 대책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복음의 헤로데나 헤로디아와 같은 악인들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혈통으로 보나 환경으로 보나 도무지 선을 보고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며 하느님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 속한 신망애信望愛의 삶도, 진선미眞善美의 삶도 보고 배웁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알렸다 합니다.

예수님 역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통해 악의 정체를 파악했을 것이며 당신의 죽음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에 추호도 위축됨이 없이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십니다.

이어지는 복음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악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자 대안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복의 악순환의 유혹에 빠지실 분이 아닙니다.

 

악에 대한 보복은 바른 처방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의 유혹에 빠지는 길이며 악의 힘만 증대시킬 뿐입니다.

 

얼마전 독일에서 난민에 의한 총격 테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메르켈 총리의 지혜로운 처신에 감탄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독일 우파 정치인들이 메르켈 총리의 난민 정책을 연일 비판하고 있지만 메르켈 총리는 "나에게 이런 점은 분명한데, 우리는 근본적인 원칙을 고수할 것이며 이는 제네바 난민 협약에 따라 전쟁과 국외 추방 등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은 난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독일 헌법 조항을 자신의 근본 원칙으로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는 "두려움이 정치활동을 위한 지침이 될 수 없다"며 "아무 목표도 없이 겁만 주면서 우리의 결속력을 깨려는 이들이 우리 삶의 방식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슬람국가지 이슬람이 아니라고 명쾌하게 밝히며, 결코 악의 유혹에 휘말리지 않는 메르켈 총리의 현명한 판단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의 무지를 일깨우다 순교한 세례자 요한처럼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백성들의 무지를 일깨우는데 온 힘을 다합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났지만 악의 세력은 호시탐탐 여전히 건재합니다.

 

얼마전 영화 ‘곡성’을 만든 나홍진 감독의 인터뷰 중 한 대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 영화 세 편이 모두 극악極惡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세 편을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각성覺醒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이 이유없이 벌어지고 행해지지 않도록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결국은 사람이요, 각성覺醒을 통해 무지의 악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에서 벗어나 당신을 닮아 신망애의 삶을, 진선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아멘.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악인의 행복과 의인의 고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직 하느님의 메시지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박해와 십자가 길, 그리고 억울한 죽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죄한 이들과 선인(善人)들의 고통과 시련은 또 어떻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측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악이란 악은 다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 이웃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초가 참혹할 정도입니다. 이토록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예레미야 예언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청소년 시절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소명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유다의 왕과 고관대작들, 당대 권세가들에게 ‘인생 그렇게 살지 말고 제대로 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흠뻑 빠져 재미를 느끼고 있는 우상숭배의 길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들을 찾아가 목청껏 외쳤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웬 또라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난리야?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였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그를 정신병자 취급을 했습니다. 세상에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던지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서 15장 10절)

예언자로서의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겪었던 수모와 고통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예언자중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지막 대예언자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덧없는 죽음입니다. 그의 목은 베어져 요부(妖婦) 헤로디아의 쟁반 위에 올려 집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어느 정도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안정감을 선택할 것인가, 올바름을 선택할 것인가?

정상호 신부님

하느님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인간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았던 철학자들은 인간 존재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 있었고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지는 나의 자유다. 그러므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답해 줄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어떠한 기준도 없이 주어진 광대한 자유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불안은 권력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강대한 힘을 가진 이가 행하는 방식에 순응하고 거기에 복종하면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불안해하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에게 안정감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권력자가 옳게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안정감을 누려야 하므로 바른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옳고 그름이 중요했기에 자신이 누리던 안정감을 버렸습니다. 반면 헤로데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라고 할까 봐, 안정감이 박탈되는 것을 두려워해, 옳고 그름을 저버렸습니다. 불의를 보고 덮어버리는 것, 또는 불의에 순응하면서 세상은 다 그런 것이고, 이것이 현명하게 해결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가 아니라 교묘한 악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안정감을 버리더라도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올바른 이야기를 하다 안정감을 박탈당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당신의 양심에 털끝만큼도 걸리는 게 없다면 그건 기억력이 나쁘다는 신호입니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입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정말로 양심에 털끝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기억력이 엄청나게 나쁘지 않은 한 양심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약점, 자신의 부족함을 늘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자기 자신은 정의로우면서 그른 것이 전혀 없는 올바른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하고 또 그렇다고 말합니다. 결국 자기 기억력 나쁜 것을 티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과연 옳은 모습일까요? 기억력 나쁜 것을 티내기 보다는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분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만 떳떳한 척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만큼 더욱 더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명의 대조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임금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그 반대인 임금의 분노를 사는 편을 택하지요. 그래서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헤로데 임금을 향해 부도덕하다고 여러 차례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 임금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눈을 두려워합니다. 즉,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중에서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헤로데 임금처럼 자신의 체면을 중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삶. 그래서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하느님의 품 안에서 참 행복을 느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게 되는 두 가지 실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면서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긴 일에 대해 우리는 이 두 가지 실수를 계속 범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우리의 실수를 조금씩 줄여 나가야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모습은 헤로데 임금의 모습에서 벗어나, 참으로 주님을 증거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 질 것입니다.




인과응보

이동훈 신부님

헤로데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결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세례자 요한이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여러 차례 간하자, 그 말을 듣기 싫어한 헤로데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던 차 아내의 계략에 말려들어 요한을 죽이게 되었다. 요한은 백성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었고, 그러한 요한을 아내의 간교한 수작에 넘어가 죽였으니 꿈에도 여러 번 나타나 헤로데를 무섭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죽었던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며 떨고 있는 것이다. 

헤로데는 전처의 아버지가 복수를 위해 벌인 전쟁에서 참패했다. 항간에 떠돌던 소문에 의하면 헤로데의 패전은 그가 세례자 요한을 무고하게 처형한 데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한다. 그 후에도 헤로데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자신이 다스리던 영토에서 추방되어 불행한 말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일순간의 안락과 영달을 위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백성들의 비판에 귀를 막는 헤로데보다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요한의 삶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삶을 살며 그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지 않던가 ? 그러한 삶의 결과가 영원한 생명임을 예수님 친히 보여주었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 하고 ‘활동 안에서 관상’ 을 추구했던 이냐시오 성인의 삶은 인과응보의 밝은 면을 보여준다.

 




저의 부끄러운 과거의 한 조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건강한 남자라면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인 군대에 저 역시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군대 생활의 시작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지요. 저를 괴롭히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한 고참 선임병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선임병이 제게 자신의 수건을 빨아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냄새나는 수건을 들고 세면장으로 가면서 문득 앙갚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수건으로 냄새나는 변기를 깨끗이 닦았지요. 그리고 다시 깨끗이 빨아서 선임병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로써는 최고의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통쾌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선임병이 “너 이거 깨끗이 빨은 거야? 그런데 왜 이상한 냄새가 나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라고, 깨끗이 세탁을 했다고 말은 했지만 제 속마음이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모릅니다. 죄 짓고 못 산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다시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또 누군가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 막을 때, 우리들 대부분은 공격적이고 교묘한 속임수를 쓰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꼴이 되어 버릴 뿐입니다.

사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공격적인 태도나 성급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스스로 힘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몸집이 작은 강아지를 보세요. 이 작은 강아지는 쉴 새 없이 짖어댑니다. 자신의 힘이 없기 때문에 소리로 쫓아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몸집이 큰 개는 자기가 가진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주 짖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 모두는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는 이유만으로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공격적이고 성급한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마음이 편했을까요? 아마 죽을 때까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죽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나쁜 영주로, 나쁜 여인으로, 나쁜 딸로 기억되어 우리들 가운데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 순간의 만족이 이렇게 자신에게 커다란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후회하지 않을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후회할 수밖에 없는 한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순간이 아닌 영원을 지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으면서 주님과 함께 참 행복의 길에 설 수 있습니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이외수).


원하는 것을 얻는 법(김영희, ‘20대, 세계 무대에 너를 세워라’ 중에서)

독일의 대학은 박사과정만 마치는 데도 10년 정도 걸린다. 보통 문리대 학생들은 주 전공 외에 최소 2개 이상의 부전공을 선택해야만 한다. 나 역시 전공인 교육학 외에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철학을 공부했다.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는 라틴어까지 해야 했으니, 공부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했느냐고 묻지만, 내가 믿는 건 ‘머리 좋은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낫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특별한 공부 비법 같은 건 없다. 공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쾰른 대학 예비과정부터 박사과정을 마치기까지 10년 동안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었다. 무조건 양적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수없이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는 ‘박사가 된 다음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매달렸다.

‘죽을 각오로, 정말 독하게 한번 해 보자!’ 박사 논문을 쓸 때는 전투 같은 생활을 했다. 당시는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아 320쪽에 달하는 논문을 타자기로 한 자 한 자 쳤다. 한 자라도 오타가 생기면 그 페이지는 처음부터 다시 쳐야 했다. 그나마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으며 매달릴 때는 나았다. 마지막엔 물만 마시며 타자기와 씨름했다. 논문을 제출하고 돌아와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이 퉁퉁 부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대로 자리에 누워 며칠을 꼼짝없이 앓았다. 열이 나는 몸보다 가슴속의 벅찬 성취감이 더 뜨거웠다. 혹자는 나를 ‘강한 사람’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지독하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나는 반문한다.

“그 정도로 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겠어요?”




예수님을 따르려면

김 맛세오 수사님

이 말씀을 대할 때면, 수도회에 입회하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신심이 돈독하셨음에도 막상 아들인 제가 당신 곁을 떠나 미지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에 극구 반대하시고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께 복음의 이 말씀을 인용해 드리면서 먼 훗날 반드시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는 위로의 말을 해드렸었지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김이 없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에 있어서, 어떤 좋음이나 세상의 논리도 주님보다 우위에 둘 수 없음을 말입니다. 

늦둥이 귀한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냉엄하신 엄명에 그대로 순명한 믿음의 달인 아브라함 이야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 어느 것도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교 신심을 본받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귀한 단 한 번뿐인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순교 성인들의 삶을 묵상해 보면, 하느님을 향한 의지가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공지해서 잘 아시겠지만, 저는 지난 달 29일부터 31일까지 2박 3일간의 본당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우리 본당의 모든 신자들이 함께 하는 전체 캠프라서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많은 분들의 기도덕분에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고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깨끗하고 편안한 시설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요.


아무튼 이렇게 좋은 시간을 배려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캠프를 준비하고 진행했던 많은 봉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이 지면을 통해서 해 봅니다. 이제 오랜만에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평가받는 아인슈타인이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열등생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죽했으면 선생님이 이렇게 써서 가정통신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잘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가정통신문을 받은 아인슈타인의 어머니의 반응입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아이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는 아들 아인슈타인에게 당당하게 말했답니다.

“네가 남들과 같아지려고 하면 잘해야 남들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 다르다면 최고가 될 수 있다.”


우리들은 남들과 다를 때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남들과 같아지려고만 노력하고 있지요. 하지만 남들과 다를 때 그래서 남들에게 소외당하고 따돌림을 받고 있다면 최고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역시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국은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생일 날 기쁘게 해 준 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하지요. 그러자 이 딸은 어머니와 상의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청을 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소원으로 청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더 문제는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헤로데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는 것.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그래야 자신의 체면이 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실천이 나쁜 것이라면 절대로 지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바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더 염려하지요. 그래서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그 결과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역사의 큰 죄인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죄를 범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피하기 위해서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남들과 다른 길인 사랑의 길, 믿음의 길, 희망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큰 꿈을 가져라. 너의 행동을 낮게 하고, 너의 희망을 높게 하라.(조지 허버트)


나중은 없습니다(‘좋은 글’ 중에서)

오늘날 우리는 더 높은 빌딩과 더 넓은 고속도로를 가지고 있지만, 성질은 더 급해지고 시야는 더 좁아졌습니다. 돈은 더 쓰지만 즐거움은 줄었고, 집은 커졌지만, 식구는 줄어들었습니다. 일은 더 대충 대충 넘겨도 시간은 늘 모자라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줄어들었습니다. 약은 더 먹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가진 것은 몇 배가되었지만, 가치는 줄어들었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사랑은 적게 하고 미움은 너무 많이 합니다. 하늘에 있는 달도 정복했지만, 이웃집에 가서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외계를 정복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습니다. 수입은 늘었지만 사기는 떨어졌고, 자유는 늘었지만 활기는 줄어들었고, 음식은 많지만 영양가는 적습니다. 호사스런 결혼식이 많지만 더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이혼도 늘었습니다. 집은 훌륭해졌지만 더 많은 가정이 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제안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날을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매일 매일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찾고, 지식을 구하십시오.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사람들과 보다 깊은 관계를 찾으세요.

이 모든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집착도 요구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도, 자존심도, 돈이나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족들, 친구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십시오. 당신이 좋아하는 곳을 방문하고 새롭고 신나는 곳을 찾아가십시오.

인생이란 즐거움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인생은 결코 생존의 게임이지만은 않습니다. 내일 할 것이라고 아껴 두었던 무언가를 오늘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사전에서 "언제가" "앞으로 곧" "돈이 좀 생기면" 같은 표현을 없애 버리십시오.

시간을 내서 "해야할 일" 목록을 만드세요. 그리고 굳이 돈을 써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을 먼저 하도록 하세요.

그 친구는 요새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하지 마세요. 즉시 관계를 재개하여 과연 그 친구가 어떤지 바로 알아보도록 하세요. 우리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주, 우리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말하세요. 당신의 삶에, 그리고 누군가의 삶에, 웃음과 기쁨을 보태줄 수 있는 일을 미루지 마세요.

매일, 매 시간, 매 순간이 특별합니다. 당신이 너무 바빠서 이 메시지를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보낼 만한 단 몇 분을 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나중"에 보내지 하고 생각한다면,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해 주세요. 그리고 저기 있는 그 누군가는 지금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요구되는 의로움을 삶으로 살아내 봅시다.

김기현 신부님

‘의로움’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어서 옮겨봅니다.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은행가가 되었고, 다른 친구는 판사가 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은행가가 된 친구는 수백만 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사건이 판사가 된 친구에게 배당되었고, 언론은 사태 추이에 큰 관심을 쏟았습니다. 

만약 은행가의 죄가 입증되더라도 피고가 친구라는 이유로 판사가 관대한 처벌을 내릴 것인지, 오히려 언론의 비난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가혹한 처분을 내릴 것인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재판 당일, 재판정의 방청석은 완전히 메워졌습니다. 배심원들에 의해 내려진 판결은 유죄였습니다. 판사는 일어나서 판결문을 읽곤, 해당 죄목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형량인 수십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법복을 벗은 다음,피고인석으로 다가가 친구를 다정히 껴안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모든 재산을 팔았네. 이제 이것으로 자네의 빚을 청산하도록 하세.”

(행복선언 참조) 


이야기에 나오는 판사는 정의와 의리를 동시에 지켜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그렇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친구를 돕는 희생이 없었더라면, 정의와 의리 중 한 가지는 놓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의롭게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위해서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돌아온 백성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바른 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 것입니다. 


또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지적한 요한에게 돌아온 결과도 비참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헤로디아의 음모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의로움을 실천하는 일은 크고 작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명 의식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예레미야를 도왔던 아히캄이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처럼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면 끝까지 걸어낼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주님의 위로가 없다면 금방 지치고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말씀’과 ‘함께 하는 사람들’과 ‘예언자적인 소명’을 바탕으로, 내 삶의 자리에서 요구되는 의로움을 삶으로 살아내 봅시다.




"환생이냐 파견이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환생(還生)’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죽었다가 되살아남’ ‘다시 태어남’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 그리스도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하나의 그리스도’ 바로 이게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약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여러분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어제 신문에서 공개한 전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일부를 인용합니다.

2004년 8월 김대중 도서관 개원 시 방문한 박근혜씨와의 만났을 때 일화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박 대표의 손을 잡았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의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데 대해 사과 말씀드립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과인지요.

이에 감격한 김 대통령의 술회입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참 신앙인 전 김대중의 면모가 선명히 들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이 혹시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 아닌지 의아해합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한데 대한 그의 불안한 양심의 반영입니다.

알게 모르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후 자기의 때를 직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회가 필요로 할 때 마다 그에 맞갖은 당신의 사람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 아닌 하느님이 파견하신 분 이 심을 깨닫습니다.

자연스럽게 세례자 요한의 배턴을 이어 받는 예수님이십니다.

다음 복음 마지막 대목에서 이를 감지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이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1독서의 예레미야의 운명 역시 세례자 요한과 흡사합니다.

두 분 다 누구의 환생이 아닌 하느님께 사명을 받아 파견된 분들입니다.

우리 역시 우연한 존재도 그 누구의 환생도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파견된 자로서의 확신 넘치는 다음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두 번 연거푸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선포에 이어 양분이 일어납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과 온 백성입니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적극적인 두호로 목숨을 건진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복음의 다음 대목도 생각납니다.

‘헤로데는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깨어 결속되어 있는 백성의, 민중의 힘만이 오만한 권력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만한 권력이 무서워하는 것도 이 깨어 결속된 백성들의 힘입니다.

이의 가장 합리적인 의사의 표현이 투표입니다.

투표가 없다면 혁명뿐인데 너무 희생이 큽니다.

깨어있는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의 투표만이 권력을 겸손하게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국민이 객관적인 시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언론의 예언자적 역할이 참으로 중요함을 절감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중 우리를 통해 환생하십니다.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독서> :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

경규봉 신부님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라고 요구한다. 이에 예레미야는 자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따름이라며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재앙을 거두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아울러 죄 없는 자신을 죽이면 그 책임을 백성과 성읍이 져야 함을 말한다. 무죄한 피를 흘리면, 성읍과 나라에 재앙이 닥친다(신명 19,10.13; 21,8-9 참조).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재판관들은 무죄 판결을 내린다. 처음에는 제사장들 쪽에 섰던 군중도 태도를 바꾸어 재판관들의 판결이 옳다고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예레미야는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났다. 그는 아히캄(요시야의 왕궁 관리인 : 2열왕22,12)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죽지 않게 되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안이나 두려움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피해를 입거나 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한다. 자신을 버리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에게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다. 이를테면 사형수나 말기 암환자들처럼 자신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아는 사람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그는 자기를 버린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운다. 믿음으로 인하여 그 안에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그의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였으며,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고발하고 심판하는 이들 앞에서 전혀 불안해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주님께 대한 사명을 받고 온 몸이오.”라고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해 떳떳이 밝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한다. 그는 자신을 원하는 대로 하도록 그들에게 자신 있게 내어놓는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기에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4-3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고 기도하실 정도로 마음 깊이 평화를 누리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먼저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우리가 걸어야할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신앙인, 그는 자신을 버린 사람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을 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바라본다.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으려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힘이 되고 기쁨이 된다. 


오늘, 그러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청하자.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독일의 미네르란 목사는 “전쟁백서”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독재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날 무렵 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일렬로 줄을 서 있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도 그 줄에 끼어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은 옆의 사람을 볼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심판자 앞에서 오직 자신의 모습만 들여다보기도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앞 사람까지 차례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꾸 주위를 두리번대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결국 미네르 목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 사람 때문입니다!’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자세히 보니 자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이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해져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네르야,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비판만 했지 언제 이 사람에게 나를 알게 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니?”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그런 전쟁광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고꾸라져 한참을 울었고, 그래서 써낸 책이 바로 ‘전쟁백서’라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할 때는 반대로 자신을 정당화 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정당하니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이 이를 깨닫고 남을 비판하는 일을 접어야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잡아서 사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그가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랑인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당당히 말합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떱니다. 무슨 말 때문에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내려치기 위해 돌을 들고 서있는 자칭 정의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그리고 바닥에다 그들의 죄를 일일이 쓰시며 이렇게 되뇌셨을 것입니다.

‘너희들의 죄를 스스로 책임지고 싶다면...’

돌을 들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떳떳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앞서서 자신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남의 눈에 티가 보이면서 자신 눈 안에 들보를 어떻게 보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나쁜 의도가 자신의 들보를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려하지 않고 자신에게 여자를 만들어 준 하느님과 그 여자에게 핑계를 돌립니다. 그때 하느님은 아담의 죄가 무엇이라고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가 판단하는 것을 보시고는 바로 그를 죄인으로 단정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판단하는 이의 죄를 일일이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어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죄란 바로 자아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아 자체가 죄입니다. 그 죄가 나의 주인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판단하는 사람 자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심판자이신데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 시민처럼 재빠르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에 그를 살려두기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인데 남을 판단한 사람의 책임이란 바로 자신도 판단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내 탓이오!”를 세 번 외칩니다. 이것이 구원의 외침인 것입니다. 내 탓이라면 다른 사람 탓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처럼 자신의 탓을 인정하여 자비만을 바래야 하는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정당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정당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동생도 판단하여 결국 아버지의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결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다른 이를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지나면서 깨닫는 바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수도원을 떠나 편히 쉬게 되었다고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아주 짧은 생각입니다. 

저에게 안식년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의 하나이자 '수도생활의 연장'이기에 결코 긴장을 끈을 놓지 않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에 대한 여러 호칭이 생각납니다.

수도자, 수행자, 예언자, 구도자, 순례자, 순교자 등 최상의 호칭들입니다.

진정 이 호칭대로 '답게'살 때 하느님의 중심의 삶입니다. 

몇가지 깨달음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사람은 떠나도 하느님은 영원히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집'인 교회나 수도원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있어도 형제들은 한결같이 여기서 살아가고 있고, 수도원을 찾았던 형제자매들도 여전히,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을 찾습니다. 

아무리 본당 신부가 좋아도 발령을 받아 타 본당으로 떠나면 신자들이 그 신부를 따라 가지 않고 여전히 제 본당에 머무는 것은 바로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믿는 것, 사람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 바로 이게 올바른 신앙행위요 가톨릭 신자들의 자랑입니다.

 

또 하나 모든 답은 하느님 안에, 미사안에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살다보면 참으로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며 그럴 때 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 안에서 답을,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래야 중심을, 길을 잃지 않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도 않고, 악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비로소 내적 안정과 평화의 삶입니다. 

믿는 이들에겐 하느님 아닌 어느 곳에도 답은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다른 곳에서 답을 찾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이 거룩한 미사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아닌, 미사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을 찾을 때 혼란과 불안만 가중 될 뿐입니다. 

믿는 이들의 답은 모두 하느님 안에, 미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 안에서 주님을 만나 나를 발견할 때 저절로 풀리는 문제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이들의 모범이 바로 예언자요 순교자입니다.

대부분 순교로 마감한 예언자들의 운명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과 독서의 예레미야가 좋은 모범입니다. 

순교성지를 순례할 때 마다 새삼스레 깨닫는 진리가 있습니다.

전혀 무의미했던, 아무 것도 아녔던 땅이 순교성인으로 말미암아 성지가 됨으로 많은 믿는 이들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성인 하나로 먹고 사는 지역의 사람들도 참 많지 않습니까. 

이 순교성지들 또한 하느님 중심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과 독서의 '예레미야'는 그 상황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이자 순교자인 두분은 그대로 주변을 환히 밝히는 하느님 중심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주연은 예레미야와 요한이고 그 나머지 모두는 중심을 에워싸고 있는, 중심을 잃은 악역들입니다.

중심은 의연하고 안정되어 보이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웬지 혼란하고 불안해 보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상실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중심 자리에 서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바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답을, 살길을 찾으라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자리 잡았기에 이렇게 두려움 없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 역시 흡사합니다.

예언자이자 순교자인 요한과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이 허약한 우유부단한 헤로데는 불안에 전전긍긍입니다. 

-예수님의 출현과 소문에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 살아 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멘붕 상태에 빠진 헤로데 임금의 중심 없는 허약한 삶이 적나라하게 들어납니다.

중심을 잃으면 온갖 탁한 감정에, 주변의 온갖 유혹에 휘말리게 되어 불안과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문제는 모두, 늘 우리 안에 있고 답은 모두, 늘 우리의 중심인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 거룩한 미사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 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시편145,15참조).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무더운 여름입니다. 오늘은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 무더위를 식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 졌습니다.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내 마음에 시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온 세상이 환하고 밝아졌습니다.”

 

짧은 시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나 혼자 한다고 세상이 깨끗해지겠어!, 전에도 해 보았지만 결국은 안 되고 말았잖아!,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우리도 그냥 묻어서 가지 머!,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지 머, 편한 게 좋은 거잖아!’ 저도 이러게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보는 사람 없으면 교통신호를 어기기도 했고, 카메라 없으면 규정 속도를 위반하기도 했습니다. 친구들끼리 없는 친구를 흉보기도 했고, 주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또 다른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지만 작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이야기한 예레미야 예언자, 새로운 세상을 선포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도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 무모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외침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교황님께서 미사를 드리시는 대전까지 가고 있습니다. 교황님께 십자가를 선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단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밀양의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할머니들도 있습니다. 강정의 해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부당함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대한 자본과 공권력 앞에서 아주 작게 느껴지고, 부질없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침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세상을 변화시켰음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벽돌 한 장이 모여서 큰 집이 됩니다. 별들이 있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마태오14,9-10)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우리는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체험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정당한 반응으로서 느끼게 되는 두려움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현상에 대해 복음적으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두려움을 감지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려움에는 크게 건강한 두려움과 그렇지 못한 두려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건강한 두려움이라면 하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일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치유를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보여준 두려움을 소재로 해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헤로데가 보여준 두려움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서 받게 될 지도 모를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밉고 달갑지 않고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어떤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졌던 세례자 요한,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터에,

헤로디아의 딸의 요청이 발단이 되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성서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여간 그 사건으로 인해서 헤로데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정인지, 아니면 징벌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죄라고 여기는 것들 때문에, 많고 적게 두려움을 체험합니다.

예외인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식이라는 말을 쓸 때는 두 가지 면에서 식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뉘우침에서 나오는 죄의식과 다른 하나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죄의식입니다.

전자는 건강한 두려움이고 후자는 건강하지 못한 두려움입니다.

잘못된 두려움은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으로부터 올바르게 해방되기 위해서는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체험이 중요합니다.

고해성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도 잘못된 죄의식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옳지 못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대상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 이해하려는,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을 절감하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화해만이 서로를 치유하는 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중재가 필요함을 의식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필요합니다. 

단 두려워할 일에 대해 두려워하는 우리이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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