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라.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10,12-22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2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13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
14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15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16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17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18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19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2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만 매달리고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21 그분은 너희가 찬양을 드려야 할 분이시고,
너희가 두 눈으로 본 대로,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크고 두려운 일을 하신 너희 하느님이시다.
22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에는 일흔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Payment of the temple tax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성전 세를 면제받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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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라며,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것이지만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나오는 스타테르 한 닢으로 성전 세를 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합니다. 사람은 큰 권한을 잡으면 가끔 폭군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힘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중함과 관심 그리고 정의에 관한 관심을 수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선익을 추구하시는 분이십니다.모세가 제시하는 계명과 규정 가운데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방인으로까지 확대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족, 친구들, 지인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무관하지만 힘없고 빈곤한 사람, 하느님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이방인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고 싶다면, 우리도 관대하게 열린 마음으로 난민과 이민을 포함한 이방인을 사랑해야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중하심과 힘에 감탄합니다. 임금들은 이방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둡니다. 성전 세를 내라는 재촉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 집을 위한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당신의 특권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매우 신중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필요한 세금을 마련하시려고 당신 능력을 사용하십니다.우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것 없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돕는 데 우리 능력을 이용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나 걸림돌이 될 위험이 있다면 우리 권리마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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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장면 다음에 성전 세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세상 재물의 주인이심을 베드로 사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지라고 하시며, 잡힌 물고기 입 속에 있던 스타테르 한 닢을 성전 세로 내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두 사람 몫의 성전 세인 한 스타테르를 내면서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제와 라삐로 행세하시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답하십니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는 대답을 하십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자녀로 여기셨습니다.
콜베 사제 순교자는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하고 말하며 주님의 벗인 프란치스코 가요브니체크를 대신하여 아사 감방으로 갔습니다. 신부님의 희생으로 절규와 비탄의 소리가 가득하였던 아사 감방은 기도와 사랑의 방으로 변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들과 만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가야 할 사랑의 길을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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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에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 된 남자에 한하여 해마다 ‘두 드라크마’(스타테르 반 닢), 곧 이틀 치의 품삯을 내어야 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의 과세에 대해서는 분개하였지만, 성전에 바치는 세금에 대해서는 민족적인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 세 납부의 여부는 유다인들의 관심거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이 없다고 하시며 성전 세를 내십니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권리가 있기는 하셨지만,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하느님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께 중요한 것은 ‘성전 세 납부의 여부’보다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하여 덜 중요한 가치를 희생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지혜는 우리에게도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많은 부부가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이기려고 인격을 무시하는 말투를 보이기도 하고, 고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소한 부부 싸움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복한다고 해서 서로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의 승리가 그 가정에 행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이러한 분란을 겪을 때마다 자신의 정당함을 굳이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면서 더 큰 가치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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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지 묻습니다. 당시 스무 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는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성전 세를 내야 하는데, 사제들과 라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연 성전 세를 내고 계시는지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전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에 그 가족인 제자들까지 세금을 낼 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응답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성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세금을 내지 않으면 실증법을 들먹이며 끊임없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큰일을 하려는 사람이 가끔 사소한 일에 걸려 넘어져서 본질적인 일을 그르치는 때가 있습니다. 당시 성전 세로 바쳐야 할 ‘두 드라크마’가량 되는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과 부딪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제에 부딪힐 때는 무엇이 본질이고 중심인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소한 것에 매달리다 보면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놓치고 맙니다. 우리 삶에서 양보할 수 없는 참되고 중요한 가치는 지켜야 하지만,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이내 우리 삶을 지치게 하여 결국 헛된 것에 인생을 낭비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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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과 논쟁을 벌이시면서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고, 성전 세금을 내십니다.
세금은 나라를 꾸려 나가는 밑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금 부과는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나라의 지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원천적으로 사람들의 재산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 스스로도 권력의 노예나 이용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세금은 인정할 수 있지만, 부당한 세금은 낼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지불하시는 이유는 이차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양심상 자유롭지만, 남 생각을 해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각도 좋지만, 이웃 사랑의 원칙 때문에 타인의 생각을 앞세우십니다. 그러나 이후로 주님의 공동체는 성전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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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에도 세금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마에 바치는 ‘인두세’는 반란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는 14세부터 의무적으로 인두세를 바쳐야 했으니 분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다 성전 세도 내야 했습니다. 스무 살이 되는 해부터 해마다 두 데나리온을 바치는 세금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화폐인 데나리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화폐인 ‘세켈’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에는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움켜쥐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돈은 죽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기쁘게 내면 기쁘게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세금을 내셨습니다.
돈은 삶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생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탓에 돈의 속성인 불안과 걱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돌고 돌기에 돈’이라는 말은 옛말입니다. 지금은 ‘너무 좋아하면 머리가 돈다.’는 의미에서 돈입니다. 실제로 돈을 너무 좋아해 머리가 돌아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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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예고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으며, 당신께서도 거기에 기꺼이 동의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이성으로 쉽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오합니다. 성전 세는 성전 유지와 희생 제물의 비용을 충당하는 것으로, 성전 주인이나 제관들은 납세 의무가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인 만큼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그 식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시빗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세금을 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려야 할 몫을 제대로 바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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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강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어느 분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자리는 많이 비어 있지만 치우지 않은 그릇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더군다나 손님이 왔는데도 반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직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서 주방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강의를 마친 뒤라서 여유도 있었기에 ‘곧 치워주겠지’ 하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적지 않은 손님들이 있었음에도 혼자 운영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제자리에 놓여 있던 그릇을 정리해서 주인아주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음식을 주문했지요. 알고 보니 함께 일하던 분이 급하게 일이 생겨서 혼자서 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끊이지 않고 와서 이렇게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시더군요. 저는 “바쁘면 서로 도와야지요.”라면서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비스라고 하면서 떡볶이 한 접시까지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만약에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음식이 늦게 나온다면서 화를 냈다면 어떠했을까요? 우선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서비스는 전혀 기대할 수도 없겠지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왜 이 일을 하지 않는 거야?’라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자신이 하면 왜 안 될까요? 그러한 모범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만족스러운 상황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성전 세, 반 스타테르는 부자와 가난한 이를 막론하고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위해 성전을 드나드는 이는 누구나 내야 한다고 율법이 규정한 액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굳이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또한 하느님의 집,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에 굳이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리 원칙을 따지지 않으며, 당신 집에 대한 당신의 특권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신중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필요한 세금을 마련하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원리 원칙을 따지지도 않고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이 모범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지그 지글러).
화
어제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어떤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엄마와 아들의 표정이 아주 심각합니다. 엄마의 심각한 표정은 ‘이렇게 쉬운 문제도 못 푸느냐?’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그들 앞에는 아빠와 동생이 있었는데, 아빠는 앉아서 눈을 감고 졸고 있었고 어린 동생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지요.
엄마와 아들은 심각한데 아빠와 동생은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수학 문제 풀이는 엄마와 아들만의 문제였으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이 둘에게 화를 버럭 냅니다. 자는 아빠에게는 “지금이 잘 때야?”라고 말하고, 동생에게는 “너 게임 하지 말라고 했지?”라면서 화를 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가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화가 나다 보니 그냥 모든 것이 다 불만이고 그래서 더 화를 내는 것이었지요.
삶 안에서 화가 나는 경우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화가 났을 때 그 화의 원인을 먼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 화가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맙니다.
저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주님 그분 밖에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랜 교회 역사 안에서 성화(聖化)의 길,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대체로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점점 폭넓어졌고, 보편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성화의 길은 성직자 수도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고 교회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각자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처지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꿋꿋하고 당당히, 기쁘게 살아가면서 성인이 될 수 있음을 교회는 가르칩니다.
성덕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는 성경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9장 2절)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이러한 흐름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교회 헌장에서는 성덕에 대한 보편성을 결연히 강조하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성화의 길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1572~1641)의 생애가 성덕의 보편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생애는 참으로 기구했고 파란만장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만사를 주님의 뜻 안에서 바라봤고, 오늘 이 순간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늘 찾고 추구했던 그녀는 마침내 성덕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요안나는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의 여인으로 성장했고, 촉망받던 국왕의 충신이었던 바롱 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과 결혼해서 여섯 명이나 되는 자녀를 출산했고, 잘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더없이 화목했던 가정에 큰 불행이 들이닥칩니다. 극진히 사랑했던 남편이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떠나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된 것입니다.
사별의 깊은 아픔을 겨우 추스르며 열심히 자녀들을 양육하던 요안나는 33세 되던 해 프란치스코 드 살(살레시오) 주교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그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명성과 인기를 하늘을 찔렀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 감동적인 설교가였던 그를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했습니다. 특히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아이돌 급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께서 말씀을 시작하면 신앙심이 깊은 여인들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요안나였습니다. 당시의 만남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행동은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갔습니다. 나는 그분 곁에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제 처지가 허락된다면 그분의 몸종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강론과 인품에 완전 매료된 요안나는 그분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영적 지도 하에 신심이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의기투합한 두분은 전통적인 수녀원과는 많이 다른 신심깊은 과부들을 위한 수녀원(성모 방문 수녀원, Order of the Visitation of Our Lady)을 설립하게 되었고,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한 백작의 아내요 여섯 아이의 어머니였던 요안나가 훌륭한 영적 지도자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을 만나 수도자로 거듭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모 방문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다는 것, 오늘 우리 교회와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큰 의미와 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한다면 세상 안에서도 아주 훌륭히 수도생활 못지않은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로 살아가면서도 아주 높은 성덕의 정상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를 찾는 일입니다.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입니다. 영적 여정에서 생기는 모든 어려움 앞에 겸손되이 자문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영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일입니다.
“저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주님 그분 밖에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저는 당신의 말씀을 직접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분을 통해 저를 온전히 바치겠습니다.”(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녀)
내가 기분 좋게 끝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무가 ‘리아 킴’을 들어보셨나요? 요즘 아이들이 제일 되고 싶은 사람이 유튜버라고 합니다. 종전까지는 연예인이었는데 실제적으로 연예인이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유튜버 중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안무가 ‘리아 킴’입니다. 그녀가 가진 구독자가 1500만이니 그 수입이 엄청나리라 예상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춤을 100만 명이 따라하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1 Million Dance Studio’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백종원 씨가 자신의 레시피를 모두 유튜브로 공개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어차피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그냥 다 공유해버리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춤 동작들을 나누게 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데 총력을 기울여왔습니다. 능력을 나눌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왕따를 당하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전교생으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마이클 잭슨의 춤을 보고는 춤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도 포기하고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스승을 만나 피나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만인 앞에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참가하는 수많은 댄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명실상부 한국 대표 춤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계 댄스 대회에서 우승을 할 때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이어 연예 엔터테인먼트에서 유명한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의 춤 선생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춤으로는 돈을 벌수가 없었습니다. 대회에서 우승해봐야 기쁨이 3일 정도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가난하였습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춤꾼인데도 택시 탈 돈도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댄스 경연을 하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친 아이돌들에 의해 심한 모욕적인 판정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수강료도 매우 싼 댄스 학원을 만들고 그 학원에서 자신이 만든 춤을 유튜브로 공개하여 단 500명이라도 구독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1500만 명의 한국 최대 채널을 소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가 만족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부터 이제 자신의 능력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의 전환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려 할 때 내가 필요한 것도 얻게 됩니다. 내가 아니라 타인을 기분 좋게 해주려 할 때 나도 기분 좋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슬퍼한 이유는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은 ‘기쁘려면 먼저 슬퍼야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해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거기에서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십니다.”하고는 집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어찌 아셨는지 세상 임금들이 자녀에게 세금을 걷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당신 아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고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예수님 말씀대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입에서 돈이 나와 그것으로 성전세를 내게 되면 베드로는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기까지는 ‘왜 안 내도 되는데, 자꾸 물고기를 잡아서 입을 벌려보라는 거지?’, 혹은 ‘돈이 있으면 그냥 주시면 되지 왜 물고기 잡는 고생까지 하게 하시지?’라는 불만스런 마음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에 순종하고 나니 곧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십니다. 왜 버리셨을까요? 인간을 기분 좋게 하시기 위해 그러셨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인간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며 이제 주님께 나아가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엄청난 공포와 싸워야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분 좋게 하고 났더니 부활의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처럼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분을 망칠수도 있는 순명의 길로 가지만 결국은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을 드러내는 것과 상대의 기분을 놓고 볼 때, 대부분은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여 옳은 말이라도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곧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듣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말도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강의를 하다보면 듣는 분들이 이미 기분을 상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주어도 그 강의는 실패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옳은 말을 하지만 기분 나쁘게 할 때는 자녀는 그것을 교훈으로 여기지 않고 ‘잔소리’로 여기고 귀찮아합니다. 기분이 먼저 상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주어도 쓸모없어집니다.
상대의 기분을 잡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옳다고 믿는 말을 사정없이 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살려고 하는 행위기 때문에 나중에 죽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기분 좋게 끝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옳더라도 조금 참고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때는 조금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상대도 기분 좋고, 나도 기분 좋은 결과로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연관관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신비를 알려주려 하신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으로는 기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이를 기분 좋게 해 줄 때 결국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혼자 가면 빨리 가고 같이 가면 멀리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행 첫날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먼저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고, 기다리는 일행과 합류해야 했습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행 16명 중에서 4명이 남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4명이 자원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합류하였지만, 기꺼이 희생하였던 분들이 있었기에 산행은 즐거웠습니다. 산행은 많이 불편하고, 많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산행은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 줍니다. 작은 꽃, 흘러가는 구름, 넉넉한 산, 가끔 내리는 비,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또한, 산행은 느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신명기는 우리가 함께 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직자와 사찰의 스님에게도 세금을 걷는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이미 성직자들이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가난한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희생과 봉사의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에게 세금을 걷을 것이 거의 없다면 종교인들에 대한 과세를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몸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따로인 삶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이치입니다. 종교인들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굳이 종교인들의 과세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의 삶이 그들에게는 등대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꽃동네를 세우신 신부님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꽃동네를 후원합니다. 그런 분에게 과세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있습니다. 역시 병들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노벨 평화상도 큰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하게 사셨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동을 주었던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며,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런 분에게 누가 과세를 이야기하겠습니까?
종교인들이 오늘 제1 독서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 사람들은 종교인들에게서 위로와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에게서 희망과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 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가져다가 성전세를 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성전세를 낸다는 것 자체가 합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시고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참 기이한 방법, 곧 물고기의 입을 열어 나오는 돈으로 성전세를 내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의 시작이 그랬고, 만나는 사람들도 그랬고, 얻게 되는 모든 기회와 소유물들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때로는 무감하게 지내면서 감사드리지 못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물고기의 입에서 나오는 스타테르 한 닢의 의미는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주시는 은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물고기 입 속의 스타테르 한 닢과도 같은 주님의 은총을 발견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속된 사람과 다르되
속된 사람과 더불어
밝고 뚜렷하게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게
모든 선한 것을 기꺼이 이루되
아무 것도 아닌 듯
쉼 없이 앞서 나가되
뒷사람과 함께
나만이 지닌 가치를 깨닫되
다른 이와 똑같이
아낌없이 내어주되
되받음에 미련 없이
매순간 살리기 위해 죽되
죽음을 넘어 부활로
말 못하는 고기를 시켜 세금 갖고 오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죽을 준비로 제자들께 벙벙하고 신기한 하늘방법 보이셨죠!
성전 세에 관한 말을 전하는 베드로에게 나는 면제지만 내자하십니다.
하늘과 세상을 구분하시며 지금은 세상 것 따르자는 방안을 내십니다.
말 많은 사람들 말고 말 못하는 고기를 시켜 세금 갖고오게 하셨으니!
역시 예수님의 엉뚱한 방법에 베드로의 벙벙한 기분을 상상해 보세요.
사람이 아무리 꾀부리고 재주 권력 부려도 예수님의 하늘방법 모르죠.
참혹하게 예수님 죽였으니 부활하실 하늘방법 뭐 상상이나 했겠어요?
벙벙한 저는 예수님믿음 깜짝 놀랄 요행이며 큰 행운이라 공감합니다.
스타테르 한 닢을 찾아내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예고가 제자들에게 있었다. 부활은 잘 모르것고 수난과 죽으심의 예고는 제자들을 슬프게 했다. 예수님으로써는 이것 말고 거사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장소를 옮겨 성전으로 가셨을 때의 일이다. 성전세를 두고 유대인들이 시비를 붙었다. 이는 당신에게 논쟁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것 안에서 ‘스타테르 한 닢’을 구해 성전세를 지불하신다. 싸움거리가 되지 않으나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오면 해결해야 한다.
슬기는 사랑과 침묵이다. 그리고 욕망을 끊음으로써 얻어진다. 이웃의 말이나 행동, 생활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모든 일에 묵묵히 참을 줄 아는 것이 가장 뛰어난 슬기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문제는 문제이다. 풀어야 한다. 상대의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아도 상대가 고집하면 그 사람에게는 큰 일이다. 그 일을 해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소한 일로 사람과 사람이 충돌한다. 그럴 때 싸우지 말라. 지혜를 모으고 슬기롭게 대처해야 우러러 본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 사랑과 침묵 안에서 찾으면 억지 주장도 해결할 방법이 나온다. ‘스타테르 한 닢’ 이면 족하다. 나에게 바위에 거스리는 상대의 논쟁은 아주 자연스럽게 멈추게 된다.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17,27)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십니까?”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마태 17,24-25)
곽승룡 비오 신부님
우리가 국가에 내는 세금은 일반적으로 금전화폐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더욱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회를 돕는 금전화폐뿐만이 아니라 특히 언행일치 그리고 좋은 생각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참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란 차분한 공동체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공동생활 곧 사회생활은 위로적인 성격을 띠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어려움 중에 빠져있는 자들을 돕고 존중하며 보호되어야 하는 것을 느낄 때 더욱 그렇다. 사회 분위기가 슬플 때, 예를 들어 세월호의 아픔, 특히 오늘날 강대국 사이에서 경제 전쟁이라는 분위기 안에서 아플 때, 서로 경청하고 도우며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 역시 사회에 좋은 일(세금)을 내는 것이 아닐까?
좋은 생각, 아름다운 영혼들이 천천히 사회, 성당, 공동생활을 발전하게 한다. 예를 들어 작은 제스처들 곧 작은 미소들, 작은 생각들, 부드럽고 젠틀한 손짓들... 잔디가 아름답고 풍요로우려면 소소한 물주기 가꾸기를 위한 시간이 그렇게 필요하듯이, 좋고 아름다운 공동생활을 위해서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노력만이 이웃을 향한 좋은 배려와 배치를 보존하고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그 작은 것 자체가 큰 선물로 이미 다가온 것이다. 사회를 위한 성덕생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종교공동체뿐 아니라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덕생활이란 그리스도의 빛을 종교를 위한 공동생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세상에 발산하는 것일 테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 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마태 17, 26)
("But so that we may not become an obstacle to them: go to the sea, and cast in a hook, and take the first fish that is brought up, and when you have opened its mouth, you will find a shekel. Take it and give it to them, for me and for you.”)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이제 말복도 지나고 가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더위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마태 17, 22~27)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세를 내시면서 주민으로서의 납세의무를 정당하게 수행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는 "내십니다" 하고 대답을 했지요. (마태 17, 24~2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상 임금의 자녀들은 세금을 내지않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우어들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비유를 거스릴 것은 없으니 세금을 내도록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성전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시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지요. 그리고 성전의 주인이시기도 한데, 그분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성전의 주인이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성전세를 내도록 하자는 입장을 취하신 것은 예수님도 합리적이며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만한 처신을 원하셨다고 보겠습니다.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 소송을 걸고 재판을 걸면서 성전세를 면제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것을 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은 인간관계 안에서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성품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잡은 그 고기 안에 들어 있는 동전을 가지고 성전세를 내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공돈으로 세금을 낸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해서 노동으로 수입을 통해서 성전세를 내도록 조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몫으로 그리고 베드로 몫으로 성전세를 내신 것은 예수님도 인간 사회 안에서의 질서에 순응하시고 또 이해하셨다고 보겠습니다.
우리도 마땅이 세금을 내고 있지요. 갑근세라든가 지방세, 부가세라든가 여러 가지 명목의 세금들을 내면서, 우리는 정당하게 살아가고 있지요. 인간 사회에서도 이렇게 세금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듯이, 하느님께 대해서도 세금을 바칠 수 있는 마음과 정성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내도록 하셨죠. 지금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무금과 헌금을 바치지만 십일조와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은 살려 나가야 되겠습니다. 성의껏 바치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교무금과 헌금을 바친다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교무금과 헌금은 교직자들이 그것을 관리 운영하지만 그것은 공동선을 위해서 사용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예배하고 선교사업을 수행하고 교회 유지와 또 교회 안의 일꾼들의 생계를 그 안에서 충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성전세를 바치셨듯이 우리들도 교무금과 헌금을 성의껏 바침으로서 신자로서의 의무를 보람차게 수행하도록 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교무금을 책정하고 바치고 있습니까?
• 나는 주일에 미사에 참여하고 성의껏 헌금을 바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길
이종훈 신부님
연일 보도되는 일본정부와 극우인사들의 언행들에 언짢고 화난다. 보잘 것 없지만 마음만은 사뭇 간절하게 매일 밤 함께 남북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어 보인다.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 이방인과 나그네처럼 사는 게 쉽지 않다.
세상일에 무관심하게 사는 게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아닐 텐데. 그렇다고 이도저도 아니고 어정쩡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비겁하다. 득도한 도사가 아니니 모든 것을 초월해 살 수도 없다. 마음이 어우선하고 가끔은 조급해진다.
성전세를 바치라는 요구에 예수님은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간단하게 처리하셔서 더 이상 시끄럽지 않게 하셨다(마태 17,27).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도 그렇게 처리하셔서 그들이 쳐 놓은 올가미를 피해가셨다(마태 22,21). 예수님은 비겁하셨나? 세상일에 무관심하셨나?
세상 속에서 복음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선포하는 게 참 쉽지 않네. 누군가 쳐놓은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앵무새처럼 원론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니 자꾸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가 마음이 시끄러워진다. 이러나저러나 하느님 말씀을 잘 못 듣기는 매 한 가지다. 앵무새 마음은 고요하지만 무디고, 세상일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이지만 시끄럽고 어둡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3). 되살아나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왜 슬퍼했을까? 잘 못 들었나,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었나? 부활을 추억이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 정도로 생각했었나보다. 제자들은 슬픔을 넘어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 손과 발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 바로 그분을 뵙고는 기뻐하였다(요한 20,20). 예수님은 비겁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다. 세상의 상처를 고스란히 다 받으셨다. 그분도 고민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화도 내셨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지 않으셨다, 죽기까지.
예수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신 예수님, 참되고 진지하게 살고 싶지만 바람뿐인 것 같습니다. 쉽지 않네요. 그래도 세상 안에 내어 놓으신 당신의 발자국을 잘 따라가려고 나름 노력합니다. 더디 가고 뒤뚱거려도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길을 잘 따라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나는 그들의 상처를 고쳐 주겠다.
키레네의 테오도레투스 주교의 ‘주님의 육화’에서(Nn. 26-27: PG 75,1466-1467)
예수께서는 자원하여 당신에 관해 예언된 수난을 맞으시려 달려나가셨습니다. 주께서는 그 수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여러 번 미리 말씀하셨고, 당신 수난의 선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베드로를 꾸짖으셨으며, 또 세상의 구원이 당신의 수난으로써 성취될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 때문에 주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찾는 이가 바로 나다.”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나서시어 당신을 넘겨주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주께서는 사람들이 죄목을 들어 말할 때 대답하시지 않고, 또 과거에는 몇 차례 사람들이 당신을 붙잡으려 할 때 빠져나가 피하신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가능한데도 피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불신앙으로 인해 당신을 죽음으로 이끌려 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고, 한때 이름을 떨친 성전을 보시고 그것이 산산이 파괴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영육간에 이중으로 노예였던 한 사람이 당신 뺨을 치는 것을 인내로이 참으셨고, 때리고 침뱉으며 모욕하고 고문하며 채찍질하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신 좌우 편에서 형 받는 두 사람의 강도를 동료로 받아들이시고, 살인자와 범죄자로 취급당하였습니다. 불충한 이스라엘의 포도밭이 맺은 초와 쓸개를 마시고 포도 가지와 포도 송이 대신에 가시로 엮어 짠 관을 쓰셨습니다. 자홍색 홍포를 입으신 채 조롱당하시고, 손발은 못으로 뚫리어 마침내 무덤으로 옮겨지셨습니다.
주께서는 우리 구원을 이루시고자 이 모두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비록 죄가 조금도 없으시고 완전한 의로움의 길을 걸으셨지만, 죄의 노예 된 이들이 그 죄의 벌을 받아야 했기에 친히 죄인들이 받을 형벌을 당하시어 당신 십자가로써 옛 저주의 선언을 무효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가시관으로써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는 선언을 들은 범죄한 아담에게 내려진 책벌에다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쓸개를 맛보실 때 죽어야 할 인간의 고통스런 생활이 지니는 쓰라림과 수고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초를 마심으로써 인간들이 겪는 타락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같은 행위로써 우리 인간 상태를 개선시키셨습니다. 자홍색 홍포를 입으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나타내 주셨고, 갈대로써 마귀 권세의 질병과 연약함을 암시하셨습니다. 뺨을 맞으시고 또 우리가 받게 되어 있는 모욕과 꾸짖음과 채찍질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해방을 전하셨습니다.
찔린 그분의 늑방에서는 아담의 늑방에서처럼 자기 죄로 인해 죽음이 오게 한 여인이 나오지 않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두 물줄기가 흘러 나왔습니다. 한 줄기는 세례의 샘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여 불사 불멸의 옷을 입혀 주고, 다른 한 줄기는 어린이에게 젖을 먹이듯이 새로 태어난 우리를 하느님의 식탁에서 먹여 줍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말씀들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의무들을 상기시킵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신명 10,12-13)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구되는 건, 곧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입니다. 이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면서 이스라엘에게만 "마음을 주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신"(신명 10,15) 하느님께 응당 드려야 하는 응답입니다. 이집트 탈출 때 하느님의 권능과 돌보심을 생생히 체험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의무일 겁니다.
복음은 성전세를 언급합니다. 마침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로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2)는 대목 뒤에 바로 이어서 성전세 납부 요구가 이어지니 다소 긴장감을 유발시키지요. 베드로가 스승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서둘러 "내십니다"(마태 17,25)고 답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먼제받는 것이다."(마태 17,26)
예수님은, 세상의 어느 임금도 제 자녀에게서 세금을 거두지 않듯, 하느님의 아들이며 성전 자체이신 당신께는 성전세를 납부할 의무가 없다는 걸 명백히 하시지요 다만,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마태 17,27)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기 전에 섣부르게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실 필요가 없음을 아시기에, 그것이 하느님 앞에 별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당장의 제도적 요구를 수용하십니다. 그리고 그 세금은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동전으로 지불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셈이지요.
성전세는 성전을 유지, 보수, 관리하기 위해 걷는 세금입니다. 이는 집회와 경신례, 각종 축제와 제사 때마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의 수급을 위해서, 또 사제 계급을 비롯한 레위인들, 성전에 기대어 권위와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는 종교 지배층들을 위해 사용되었지요.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와 성전세로 내는 화폐가 달라서 환전 과정에서 차익이 발생했고 이를 불의하게 착복하는 무리도 존재했고요. 그러니 이런 부정이 거리낌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신 것은 괜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요한 2,13-22)
어쩌면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느라 다할 수 없는 의무를 성전세를 통해 레위인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임하는 구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는 때 맞춰 축제를 준비하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올리고 성전을 보살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아무리 성전세를 내더라도 결코 면제될 수 없는 의무가 존재합니다. 바로 오늘 독서에서 모세의 입을 통해 전달된 의무들, 즉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 등이지요. 이는 유형의 물적 금전적 봉헌으로 대체될 수 없는 영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마음 없이 잣대를 들이대어 힘 없는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든 탓에 예수님의 꾸지람을 들은 율법주의, 문자주의의 맹점이 이를 간과한 결과물이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께 우리가 진정으로 바쳐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사랑입니다. 사랑은 백만금, 억만금으로도 대납할 수 없는 진정한 의무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가 지닌 아름다운 특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나누는 열렬한 사랑은 영혼 안에 갇혀 있지 못합니다. 불길은 어떻게든 번져나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벗님, 오늘 하느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해 고아, 과부, 이방인으로 대변되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보호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들의 보호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마음이 혼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연민의 사랑입니다.
벗님,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바쳐야 할 성전세, 하느님의 거처이며 성전인 우리 영혼을 위해 바쳐야 할 의무는 우선 무엇보다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입니다. 모세가 전한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연스레 이웃 사랑으로 번질 겁니다. 우리는 다만 그 불길을 막지 말고 사랑이 하느님의 보물을 찾아 타오르도록 길을 터주면 됩니다. 설령 우리 자신이 외적으로 볼품없고 흠투성이인 초라한 성전일망정 이렇게 봉헌한 제사는 주님께 영과 진리 안에서 바치는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제사가 될 것입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신앙생활의 진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지 모릅니다. 매일 미사 참례하는 것, 매일 아침, 저녁 기도하는 것, 아침 6시 점심 12시 저녁 6시 하루 세 번 삼종기도 하는 것, 성체조배하는 것, 묵주기도 하는 것, 십자가의 길 하는 것 등등
오늘 독서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새로 주신 다음 덧붙이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과 순종의 법‘이라고 부제가 달린 이 목록에서 모세는 주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와 태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신명 10,12-13)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하느님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18-19절)
그러고 보면, 주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은 함수관계에 있는가 봅니다.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정도가 이웃을 돌보는 정도로 드러나겠지요.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정수는 전례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리는 것 이외에도 그런 기도와 전례 안에서 품었던 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겠지요. 또한 그 이웃 사랑 안에는 주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속죄의 표현도 아울러 포함될 것입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 <마태 17, 22-2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시며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 하셨습니다.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시대에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려는 사람은 원칙과 비원칙적 관계를 잘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 능력의 1%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산다고 합니다. 맡겨진 일뿐 아니라 진실과 사랑과 일치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본능대로 살지 않고 본능을 초월해서 살아야 합니다. 눈앞의 일만 하고 그 밖의 일은 찾지도 않고 찾아도 무관심해져서 서로 불편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한 일은 찾아서 하지만 이익이 없는 일은 아무 소용없다고 찾지도 않고 알아도 모른 것처럼 합니다.
은퇴한 사람은 일하던 시기에 많이 했다고 이제 편히 쉬겠다고 하지만 못 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제 평화방송을 시청하다 성모병원에서 봉사단체를 구성하여 병원 환자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 문턱에 있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을 배우고, 익히고, 봉사 받는 사람 불편함 없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마지막 가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집안에서 편히 쉬는 것보다 참으로 보람이 있어 기도하는 시간이 더 의미가 있고, 신앙생활이 깊이 다가온다고 합니다.
저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는 밥이나 먹고, 쉬는 시간에 운동이나 하고, 기도 시간 지키고, 그동안 하느님의 일을 하였으니 아침저녁 복음 묵상만 하면 되는데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하려고 묵상 글을 페이스북, 우리 수도원 홈페이지, 카톡에 옮기고 900명 넘는 사람들에게 매일 보냅니다. 말씀 한마디가 각자 마음에 유익하기를 바라며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정력을 다해 글솜씨는 없지만 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끔 “신부님 글을 저 아는 카톡 친구에게 보냅니다.” 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얼마 전 아산 병원에 입원할 때 병원에서 주일 미사 참례를 하면서 내지 않아도 되는 헌금을 냈습니다. 체면 때문이 아니라, 병원 성당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생각하고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면서 내가 알 수 없는 결실이 보기도 합니다. 찾아봅시다. 걸음을 잘 못 걷는 노인 한 사람이라도 부축하여 안전하게 건너 주는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참삶이 됩니다.
남이 관심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가장 중요한 지금 이 시각에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제병영 신부님
살면서 많은 순간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위가 상할 때가 많다. 비위를 건드릴때 자신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방식, 생각, 양식 등등에 갇혀 있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판단하는 모습이다. 일상을 살아가며 그렇게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항상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닯도록 오늘을 열어 본다!
작물이 필요한 대로 김을 메어 주는 것이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일께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감상용 도미니코 신부님
현세를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는 교회가 제시하는 윤리적 가치, 곧 이웃사랑과 하느님 공경에 대한 계명에 대해 자주 도전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한 도덕 기반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덕은 자주 훼손 당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매우 자비롭게도 당신 자신이 한평생 굳게 지켜온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성경에 표현된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걸려 넘어지도록 덫을 놓을 필요는 없으니’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충분히 반박할 논리와 근거가 명백한 상황에서조차 주님께서는 우리가 걸려 넘어지도록 그 이유를 바로 앞에 제시하시며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 성심의 근본적인 마음속 지향을 그대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태도로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자비를 경험한 우리는 세상 논리대로 타인과 이웃들에게 눈앞에서 우리의 ‘몫’을 요구하는 잔인함을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몫’을 늘 유보해주시는 주님을 닮아 우리도 이웃들에게 양보와 자애를 베풀어야 할 때입니다.
진실한 마음은 둘이 아니다.
최민석 신부님
나의 첫 번째 평화는 내장의 평화다. 몸의 기능이 쇠해지면 배설 작용에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긴다. 하루에 다섯 여섯 번 정도가 일상이던 배설횟수가 더 늘어나 조금씩 내놓으면서, 그것도 변의와는 상관없는 때에 볼일을 보게 된다.
장장 이틀에 걸친 불편한 내장에 평화가 왔다. 검진 결과를 보러 서울성모병원에 가는 날 온 몸이 가볍고 청정한 기분이다. 이른 아침 간단하게 야채 죽을 한 그릇 비웠다. 아, 이 맛! 이것이야! 눈을 살살 감으며 황홀한 식사를 했다.
모처럼 내장의 평화도 시작되었으니 글쓰기를 하려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인가. 다시 배가 아파오며 배꼽 아래 주변이 단단하게 뭉쳐오는 것이 여간 수상하지 않다. 화장실에 가서 끙끙 힘을 써 봐도 뭐 나오는 것은 없이 느낌은 금방 뭐라도 나올 것 같은 난감한 상황이 계속된다.
통증이 심하여 글쓰기를 그만두고 아예 누워 눈을 감고 배를 쓰다듬으며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 들었다 나왔다가 하며 배의 통증을 바라보는데 밥을 먹고 아무생각 없이 찬 음료와 땅콩 몇 개가 원인이라는 것이 묻혀 있던 기억의 창고에서 문득 떠올랐다.
맞다. 좋은 기분에 달떠서 조심성 없이 먹은 찬 음료와 땅콩 몇 알이 뱃속에 들어가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전쟁’, 그래 전쟁이라. 내장이 싸우느라 애를 먹고 있구나. 내장의 전쟁과 평화는 아주 민감하다.
실상은 전쟁은 내 몸의 내장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 일으키고 있는 것 아닌가. 다음 순간, 마음에서 허허 웃음 한 줄기가 새어나온다. 배설로 인해 내 몸이 불안 해 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배에 통증이 일어나니 벌써 심란한 걱정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 걱정을 꺼내어 들고 싸우는 것은 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이 모든 상황들을 판단해서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머리 굴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자, 순간 배의 통증이 온데간데없어진다. 무엇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이러해야 하는 것도 저러해야 하는 것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금방 모든 것이 풀어지고 아무 문제없는 듯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냥 아무 걱정 없이 모든 것을 맡기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혜다.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일하시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그냥 믿고 맡기기만 하면 될 일을 걱정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살아가는 지혜가 바로 생명의 주인에게 맡기는 것이다. 여름 날 은자처럼 숨어사는 생명을 풀벌레 울음 뚝 그치는 것을 듣고 비로소 알았다.
아침 햇살 받으며 서울성모병원을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다. 어제의 화려함에 미련 두지 않고 새롭게 단장하는 저 푸른 잎 새 앞에 털어내지 못하고 비우지 못한 내 부끄러움을 고백해 본 아침 상쾌한 바람, 뜨거운 태양이 내 마음을 싱그럽고 황홀하게 한다.
몸이 아프다는 것과 고통스럽다는 것은 다르다. 많이 아파도 사랑하는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마음은 달콤한 행복감에 잠긴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은 모든 존재들은 실제로 내 마음의 보자기에 싸여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내가 보내는 사랑을 거울처럼 반사시켜 되돌려 준다.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픈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세상을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 나는 몸이 아프고 나서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 더 넓은 세상이 보였다.
내 몸에도 아픈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픔은 존재를 좀 더 온전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아픔을 넘어 누군가를 향해 이해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이 세상에는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서로의 아픔을 통해서 위안을 주고받는다. 그 위안은 서로에게 되돌아와 행복이 된다.
그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하며 살지. 그래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사랑과 연민이 깊어지는 게 아닐까. 아픔을 겪되 그 속에 빠지지 말자. 아픔은 내가 만지고 빚어서 완성시켜야 하는 대상이지 나 자신의 부분이 아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자. 그리고 아픔과 고통의 드라마를 지켜보며 미소 짓자. 그와 동시에 진정한 자아 속에 빛나고 있는 담담한 눈과 미소를 찾자. 그 눈과 미소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 참된 마음의 눈을 가지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가능하다.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 -무지로부터의 해방-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는 참 행복한 하루의 출발이었습니다. 7.21일 “백합꽃 아침인사 받으세요!“ 꽃 인사 드린후, 거의 20일만에 참 많은 분들에게 새벽노을 선물을 카톡으로 전송했습니다. 새벽 기도하며 산책중 동녘 하늘의 새벽 노을이 참 아름답고 신비로워 휴대폰에 담았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참 많은 분들에게 전송했습니다.
“사랑의 새벽 노을 축복 인사 받으세요!”
강론을 써서 올린 후 즉시 작심한 후 약 2시간에 걸쳐 새벽 노을 사진과 함께 사랑의 마음 가득 담아 위 축복인사를 전송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아름다운 새벽 노을로 표현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아니곤 이런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느님 추구는 바로 아름다움 추구와 직결됩니다. 역시 많은 분들로부터 답글과 함께 아름다운 사진도 받았습니다.
-“정말 아름답네요. 영안으로 구도를 잡고 찍은 거라 완성된 작품이예요. 좋은 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움을 보실줄 하는 시선은 어떤 장소에서든 빛이 납니다. 오늘 날씨를 생각하다 붉은 색마저 이 더위에 사랑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도, 풍경을 아름답게 찍으신 프란치스코 신부님도 모두 예술가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받은 댓글들입니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은 최고의 예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어제 어느 분과 상담 고백중 나눈 대화일부도 나누고 싶습니다. 형제님은 우선 깨달음에 대해 물었고, 다음은 자녀 교육 문제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하느님과 나를 아는 깨달음입니다. 단번의 깨달음이 아니라 평생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깨달음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하느님 은총과 우리의 노력중에 깨달아 가면서 겸손과 온유, 지혜와 자비의 참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여 부단한 기도와 말씀 공부는 깨달음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입니다. 이렇게 부단한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진짜 적인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삼 무지가 모든 인간 불행의 근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평생공부가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깨달음의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자녀 교육에 대한 조언도 드렸습니다.
“자녀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십시오. 끝까지 기다리며 자녀들의 말을 경청하며 이해하고 소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자녀들 나름대로 겪는 고통도 많을 것입니다.”
잘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 敬聽)’,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침묵-경청-겸손-순종이 하나로 이어질 때 성공적 영성생활입니다. 참으로 진지하고 항구한 하느님 탐구가 근원적 해결책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 행복도 하느님을 알고 나는 알아가는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중 선물로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은 제1독서 신명기가 줍니다. 모세가 소개하는 하느님입니다.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바로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가며 참 사람이 되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주님을 닮아가며 참 사람이 내가 되어 갑니까?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고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 사람인 내가 될 길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모세가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fear), 그분의 모든 길을 걸으며(follow), 그분을 사랑하고(love),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serve), 그리고 너희가 잘 되도록 오늘 내가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keep).”
모든 명령이 실행의 동사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떠나 내 중심의 탐욕의 삶을 살기에 그토록 불행하고 힘든 삶입니다. 참으로 근원적 해결책은, 참 행복의 비결은 끊임없는 회개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여 평생, 매일, 끊임없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늘 새롭게 하고자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참 모범은,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2차 수난과 부활 예고후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합니다. 바로 무지로 인한 슬픔임을 깨닫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의 구원을 깨달았더라면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또한 무지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잠정적 과정의 슬픔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완전 기분 전환용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성전세 납부는 하느님 자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에게 주어라.”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예수님처럼 이런 지혜와 여유요 너그러움입니다. 예기치 못한 삶의 기적입니다.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혀주는 말씀의 빛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점차 무지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십니다. 아멘.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마태 17,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가까워야 할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안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됩니다.
무엇을 해야지만
사랑받는 자녀들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생명이라는
불가분의
관계안에서
뜨거운 감사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의 근본이
아버지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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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저는 8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어떤 분께서 책을 출판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글을 쓰는 것? 아닙니다. 사실 제 책들은 이제까지 써왔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을 채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바로 프로필을 쓰는 것입니다. 즉, 저를 어떻게 소개할 것이냐는 것이지요.
이미 책 속에 저의 삶이 들어 있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정리해서 적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쑥스러운지 모릅니다. 특히 프로필이 책의 가장 겉장에 있기 때문에 기왕 소개한다면 멋지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멋지게만 표현하자니 없는 말을 하는 것만 같고, 그냥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쓰자니 사람들의 별 관심을 받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이런 고민 끝에 결국은 그냥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씁니다. 그래도 제 자신을 멋지게 포장하고 싶은 유혹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실제의 삶 안에서도 자주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주교님께서 “***신부는 자기소개를 할 때 자기 자신이 잘 생긴 것을 먼저 말하고 나서 강의를 시작하고, 조신부는 자기 자랑을 먼저 하고 강의를 시작한다면서?”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한 것인데, 누구는 이를 자기 자랑으로 생각해서 주교님께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그런데 실제로 종종 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음을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내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 자유로움을 주님께서는 늘 보여주셨고,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자유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금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는 지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제나 율법학자라면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내십니다. 원래는 성전의 주인이시기에 오히려 성전세를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것으로 인해 논란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또한 제자들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제자들의 세금까지 특별한 방법으로 내십니다. 즉, 사소한 것까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성전의 주인이고, 그래서 성전세를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에서 자유로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이것 역시 우리가 자유로워져야 할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작은 생각만큼 성취를 제한하는 것도 없다. 자유로운 생각만큼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도 없다(윌리엄 아서 워드).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팁(최천호)
‘인생에 공짜는 없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 내가 준비만 잘하고 있다면 남들이 알아줍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우린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우린 언제든지 질 수 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릴 때는 일희일비하며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내가 생각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내 안에는 실력이 있다는 자존을 가지고 ‘Be Yourself’ 하는 게 잘 사는 방법입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걸 선택하고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들죠. 후회는 또 다른 잘못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잊고 말입니다. 최선을 다한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다운 인생이 따로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은 사방 천지에 있고, 생명력이 무척 강한 풀과 같습니다.
자유의 여정, -경천애인敬天愛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카찬스키스의 묘비명입니다. 역설적으로 니코스카찬스키스는 평생 자유를 찾았지만 자유롭지 못했음을 묘비명은 보여 줍니다. 자유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자유롭습니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자유를 찾는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사랑과 직결됨을 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유라면 하느님 없이는 참 자유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참 자유의 소재와 방법을 복음은 참 자유인의 모델인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유일무이한 참 자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자유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갈 때 우리 모두 참 자유인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성인들 역시 예수님을 닮아 자유인들이었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역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아사감방에서 순교하기 직전의 과정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자유인만이 결행決行 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명의 탈출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벌로 열명이 아사감방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 중 한명이 울부짖었고, 그를 대신하겠다고 나선 성인이었습니다.
“나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대신해 죽겠습니다. 나는 늙었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참 자유인의 이웃 사랑의 결단입니다. 이런 결단 또한 하느님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성인덕분에 살아난 ‘프란치스제크’는 성인 순교후 54년동안 살다가 1995년 폴란드에서 95세에 선종했습니다. 그는 선종전 해에 성인의 기념 성전(Houston)에 들려 담당사제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초라했던 수도자를 결코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폐로 숨쉬는 동안 성인의 영웅적 사랑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나의 의무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외적 부자유의 환경안에서도 하느님과 이웃사랑으로 인해 내적자유를 누렸던 성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참 자유의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신명기도 주님은 모세를 통해 유일하신 하느님만을 섬기고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이 명령하신 모든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덧붙여 주님은 고아와 과부는 물론 이방인을 사랑할 것을 명시합니다. 모세 또한 참 자유인의 모델입니다.
어제 있었던 유머러스한 일화도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평생 힘들게 믿음으로 살아온 피정 온 자매와의 미사후 면담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마지막 진심이 가득 담긴 덕담德談의 조언입니다.
“수도원 나가실 때, 수도원은 하느님 안 계셔도 수사님들은 알아서 잘 살 수 있으니, 하느님 같이 가자고 하시며 하느님 손 꼭 붙잡고 가셔요.”
그리고 한 달간 복용할 말씀 처방전도 써 드렸습니다.
“나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18,1).
면담한 자매도 유쾌하게 웃으며 집무실을 나섰습니다. 정말 하느님과 함께 산다면 매사 자유롭고 순조로울 것입니다. 바로 신명기의 모세가, 복음의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두 번째 예고에 이어 성전세를 바치는 내용입니다. 이미 부활을 예견하신 예수님의 자유로운 처사가 주목됩니다. 성전세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그분이 얼마나 자유로운 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참 넉넉하고 여유로운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유모어입니다. 세상 모두가 주님의 것이라는, 당신과 함께 할 때는 언제 어디서나 해결책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이야기입니다.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지 말고 성전세를 바치라는, 즉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하지 말라는 참 자유인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신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의 삶을 사는 것이 내적자유의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자유 역시 발견입니다. 자유의 발견은 하느님의 빌견입니다. 자유의 은총입니다. 멀리 있는 자유가 아니라 지금 여기 가까이 있는 자유요 발견하여 살면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더불어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유의 여정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의 순교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성모님의 종’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1894~1941)이십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헌신했던 사목터는 큰 본당이나 학교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양떼는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 아니라 지하 감방 속에서 신음하던 동료 수감자들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폴란드 출신의 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인 동시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 창립자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한 동료 수감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한때 저는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이다. 그렇게 훌륭한 수도자이자 탁월한 대 영성가였던 콜베 신부님께서 단 한명의 동료 수감자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순교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라도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으셨다면 나중에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 내 지척에서 울부짖는 동료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인권이며 신앙이 철저히 유린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계곡 안에도,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생생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1941년 8월 14일 단 한번에, 혹은 순식간에 또는 엉겁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성모님의 종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순교를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그가 매일 매일 살아온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이 순교하신 후 한참 뒤에 그의 어머니께서 동료 수도자들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년 콜베 앞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는데, 그분의 손에는 두 개의 관이 들려져있었습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붉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정한 음성으로 그에게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즉시 둘 다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사라지셨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흰색의 관은 순결을 의미하고 붉은 색 관은 순교를 뜻합니다. 결국 그는 평생토록 한 송이 백합처럼 순결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아사 감방에서 그토록 원하던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장 병약한 수감자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답니다. 자신에게 배당된 말라비틀어진 작은 빵 한조각도 허기로 고생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매일 배당되는 강제노역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선택했답니다. 간수들의 번득이는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동료 수감자들에게 사목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콜베 신부님의 영적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지옥의 도가니 속에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었으며 또한 자살충동을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갔습니다. 폭력과 증오심을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콜베 신부님의 영웅적 덕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한명 한명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평온한 얼굴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김충귀 베드로 신부님
오늘 지금, 여기의 하느님 나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녀입니다.
하지만 살면서 자주 이 사실을 바쁜 일상 일이나 관계 문제, 근심이나 걱정 때문에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어제의 하느님 자녀로 살지 못했음을 오늘 마음 아파하며, 내일 다가올 세상 걱정을 오늘 하면서 하루를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예언하셨고, 성전세와 관련한 대목에서는 베드로가 물어보기도 전에 성전세에 대하여 물어보시면서 하느님과 그 자녀의 권리에 관하여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 당신 수난의 예언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 일어날 이 세상에 한 번도 없었던 놀랍고 신비로운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을 통하여 예수님 당신이 누구이시며 새로운 생명의 상태인 부활로써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당신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합니다.
두 번째로 성전세와 관련한 대목에서는 예수님 당신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 창조질서 안에서 그분이 어떠한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인지를 물고기 입 속에 있는 동전을 통해 베드로에게 보여주심으로써 가르쳐 주었습니다.
복음의 이 두 내용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살아 가고 있는 우리”라는 사실에 저는 주목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잊어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아버지의 창조질서 안에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셨고 그 선물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새로운 창조의 삶이란 하느님 자녀로서 사는 하느님 나라의 삶이며 그 삶은 하루 하루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삶은 먼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는 것이죠.
죽어가던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오늘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사시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안에서 영원을 사시는 삶의 모습을 간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이라는 시 한 편을 낭독하면서 ‘오늘의 강론’을 끝맺을까 합니다.
< 오늘 >
세상에서 우리가 받은 모든 것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오늘”이니
너의 구원자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두 도적 사이에서
자주 십자가에 달리운다.
기쁨은 오직 오늘의 것,
어제나 내일이 아닌
다만 오늘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우리네 슬픔, 걱정, 불안의 대부분은
어제의 잔재이거나
내일에서 빌어온 것일 뿐
우리의 오늘을 고스란히 간직하라
우리의 음식, 우리의 일, 우리의 여가를 향유하라
오늘은 우리의 것이니
하느님께서 오늘을 우리에게 주셨다
모든 어제는 거두어 가셨고,
모든 내일은 아직 그분의 손 안에 있도다
오늘은 우리의 것이니
거기서 기쁨을 취하여 행복을 누리고
거기서 고통을 취하여 사람이 되라
오늘은 우리의 것이니
하루가 끝날 때
“나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사랑했노라”라고 말할 수 있게 하라.
마음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도 있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명기 10장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주신 것과 하느님께서 해주신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주신 것은 그들만을 사랑해주신 것이고 그들만을 사랑하셨기에 그들만을 따로 뽑아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그런데 그들에게만 마음을 주셨다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까?
이 말씀을 처음 읽으면서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간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 이는 마치 무뇌인간, 곧 뇌가 없는 아이로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는데 그 무뇌인간처럼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우리도 무심하다는 말을 흔히 쓰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도 마음을 가졌으되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할 마음이 없는 사람.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 용서해줄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 축하해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의 말 쓰임새를 보니 마음이 없다는 것은 착한 마음, 좋은 마음, 사랑의 마음, 곧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일 마음, 저주하는 마음이 없는 경우에는 마음이 없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좋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신명기의,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는 말씀은 이웃의 사정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딘 마음에 할례를 거행하여 이웃의 사정에 나긋나긋하고 따듯한 마음을 갖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정도만 되어도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고,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뜻, 속뜻은 그 이상일 것입니다.
그 이상이라면 어떤 마음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신명기는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한 다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어제는 조선족 동포 미사를 봉헌하고 한글학교를 시작하기 위한 교사들의 공부모임을 가지며 준비사항을 점검하였습니다. 어떤 교재를 가지고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얘기하다가 교재를 가지고 가르치는 기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자기 시간을 내어 교사로 자원봉사 하겠다는 분들이니 사랑의 마음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임하시겠지만 사랑의 마음일지라도 나는 베푸는 사람이고 너희는 받는 사람이라는 마음이 작용할 수 있고, 머리로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차별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무차별 공격은 안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무차별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속 깊이 생각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철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만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년 은 반 세겔을 성전세로 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 성전세로 성전을 유지하고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과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사제들은 납세의 의무로부터 면제 대상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참 주인이시고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죄짓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못마땅하게 여겨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도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 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아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원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배려,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하면. 성전유지를 위한 성전세와 같은 것이 오늘의 교무금이나 봉헌금입니다. 교무금이나 봉헌금은 성전을 유지하고 사제의 생활을 보장하며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으로 쓰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는 교무금이나 봉헌금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제때에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납세의 의무가 없었지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기쁨과 고마움의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는 만물의 주인이신 분께서 마련하신 것을 잠시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요즘 종교인과세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혜를 받아 다른 이와의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법과 질서 속에 숨어서 제 잇속만을 챙기려는 위선자들에게 꾸짖음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는 그때를 준비하여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교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당신께서 가지신 특권과 자유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사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함을 몸소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는 결코 타협이 아니라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혜라 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여라”(마태 10,16)라고 하셨듯이, 당신께서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슬기롭고 순박한 사랑을 성전세로 바치는 또 하나의 모범을 오늘 기념하는 막시밀리아노 꼴베 성인에게서 봅니다.
그는 천주교 신부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게 되어, 혹독한 중노동과 갖은 형벌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나치 병사들로부터 더 많은 고통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감옥을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용소 책임자는 다른 사람들의 탈출을 막으려고, 남아있는 사람 중에 열 사람을 골라 아사형을 내리는데,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부르며 괴로움에 울부짖었습니다.
이에, 꼴베 수사님은 그 사람 대신에 아사감방으로 가겠다고 나섰고, 그리하여 굶주림의 고통을 겪다가 독극물 주사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그러나 그 감방에서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찬미의 노래와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는 미움을 사랑으로, 저주를 기도로, 절망을 희망으로,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성체성사의 삶을 몸소 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에페 5,2)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온몸을 사랑의 성전세로 기꺼이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온몸을 불살라 예수님께 바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전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 수난을 영광이라고 했으며,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셨다. 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몹시 슬퍼하였다.”(23절) 제자들은 그 사건의 권능이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넘겨지셨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것이다.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여기서 반 세켈을 내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며 세켈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성전 세를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납부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납부하겠다고 대답하고서는 예수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또한 루가 2,49에서 보더라도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소년 예수를 잃었다가 성전에서 3일 만에 찾았을 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는 말씀에서처럼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 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들어 올려진다. 그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 모두는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내가 바쳐야 할 진정한 성전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향한 출발을 앞두고 모였던 갈릴래아에서 두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나, 사흘 만에 일으켜질 것이라는 것입니다(17,22-23). 이에 제자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 위한 긴 여정을 떠올리며 ‘몹시 슬퍼합니다.’(17,23).
예수님과 제자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갑니다. 그러자 성전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바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된 유다인들도 이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가 하는 데로 이어집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전의 주인이신 아버지와 주종관계가 아니라 부자관계에 있기에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17,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 세금을 내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그들의 동족들과 불필요한 갈등과 불화를 일으킬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유다인 남자들은 매년 성전세를 내야했고, 멀리 떨어져 살더라도 선택된 백성의 일원이라는 표시로 성전세 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성전세를 내지 않을 경우, 이스라엘에서 제외되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유다인들은 성전세 대신 로마에 돈을 바쳐야 했습니다. 로마는 그 돈으로 이교신을 모시는 쥬피터신전을 위해 썼는데, 유다인을 비웃는 행위였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는 유다 통치자들이나 식민통치자인 로마의 압제자들의 강압과 술수에 정복될 수 없는 고귀한 가치임을 가르치십니다. 나아가 베드로의 세금까지 해결해 주십니다(17,2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가 내야 할 세금을 내주실 것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향한 파스카 희생제사로서 성전을 대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성전세를 바치심으로써 성전은 정화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의 질서를 받아들이십니다. 세상을 재창조하시려고 세상을 받아들이신 것이지요.
우리가 바쳐야 할 성전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주님께서 선으로 창조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헌신하고 투신하는 세상살이 자체가 바로 성전세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세금은 정의이신 주님을 위해 투신하고,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여 헌신하는 우리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듯 진정한 성전세는 성전이신 예수님께 나 자신 전부를 바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주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궁전입니다. 따라서 성전이 성전에 세금을 낼 수는 없지요. 따라서 내야 할 성전세는 '성전다운 성전이 내가 되고 성전다운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곧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항구히 추구하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것이 값진 성전세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며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거룩한 공생의 삶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성전세입니다.
우리 모두 성전다운 성전이 되기 위해,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않으며, 사람을 차별대우 하지 않고, 이방인을 사랑해야겠습니다.’(신명 10,16-17.19)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하신 주 하느님께 모든 좋은 것을 돌려드리고, 모든 좋은 것이 바로 그분의 것임을 깨달으며, 모든 선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리는”(성 프란치스코, 비인준칙 17,17)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일"
박미라 도미틸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예수님께서도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셨던 모양입니다.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내라고 하시네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써 하느님의 법이 아닌 사람의 법을 따라 잘못된 것인 줄 아시면서도 성전세를 바치시는 예수님!
우리가 살다보면 이해가 안 되는.. 쓸데없는 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지키고 싶지 않은 불필요한 것들이...
그런데 그분은 능히 그러한 것들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러한 일을 하시지 않고 더 중요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시기 위해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라고...
오늘 아침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더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잘 구별할 수 있다면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소한... 세상에 속한 일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시면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영혼에 관한 일에 목숨을 바치시는 주님...
오늘도 모든 일 안에서 그분처럼 더 중요한 일에 시간과 힘을 바치는 그런 하루되시기를 바라며 늦은 아침 인사를 올립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 사랑 안에서 참으로 행복한 하루 되세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마태오.17,22-23)
김종오신부님
죽은 후에 부활하리라는 기쁨과 희망보다 우리는 죽음을 더 슬퍼합니다. 주어진 삶에 그만큼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마음을 묶어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힘이나 이익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그저 슬픈 일일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슬픔보다 부활의 기쁨을 더 갈망합니다. 우리가 죽어도 주님께서 희망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희망을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망의 주님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고통도 견디고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흗날에 되살아 날 것’이라는 희망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그리스도가 생의전부요 죽는것도 이득이 된다'는 믿음은 우리를 멀리 보게 합니다. 믿음은 죽음의 터널을 지나 아주 먼 곳까지 바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뜨게 합니다. 멀리 보는만큼 우리 삶은 풍부해지고 스치는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아버지께 마음을 들어 올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더 많이 보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높이 들어 올릴수록 우리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죽음을 넘어 아득히 먼 영원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들어 올려 높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치시키셨기에, 죽음을 지나시어 ‘사흗날에 되살아 나셨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도 강한 믿음으로 마음을 높이어 멀리 보았기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대신 죽어, ’수감자들의 성인’이요 '자비의 순교자'로서 우리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싶습니다.
짐짓 거룩함을 드러내려는 거짓 표정 아니라
편안하게 다가서려는 환한 웃음으로써
믿음을 강요하는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사랑을 속삭이는 맑은 목소리로써
다른 이 밀치는 거친 손길이 아니라
모든 이 감싸주는 따뜻한 손길로써
이리 저리 갈라 세우는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다름 안에 같음을 받아 안는 넉넉한 마음으로써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마태 17,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일이
분명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슬픈 역사안에
콜베 사제가 있습니다.
슬픈 역사를 위로하는
한 사람의 사제가
있습니다.
생명을 위한
겸손한 생명이
있습니다.
가시밭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간 사람입니다.
찢어진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한 사람의
삶입니다.
이타적 죽음이
중심을 잡아줍니다.
살려달라는
한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봉헌합니다.
우리의 이기심을
쏟아내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희생과 사랑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 세상입니다.
한 사람을
한 시대를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정화시키는 것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분명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또한
우리가 마셔야 할
십자가의 잔을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든 시간이
생명을 사랑하는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눈동자에
비친 하느님 나라는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같이
콜베 사제처럼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꿈은
단지 꿈만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선물임을 믿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인격과 물질
모두가 향해야 할 곳은
삶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더이상 물질이 삶을
좌우할 순 없습니다.
물질때문에
인격이 버려질 순
없습니다.
물질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는
언제나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주님의 인격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욕망과 욕망사이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먹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의 것임에도
주님께 돌려드리지 않는
부조리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십자가의 인격보다는
세상의 물질에
더 마음 빼앗기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다시금
사는 것이 진정
무언지를 묻게 합니다.
회개하는 삶이
사랑하는 삶입니다.
십자가는 끝까지
지켜주어야 할
우리의 인격입니다.
어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사뭇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격은 부조리와
모순된 우리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인격이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빼앗고
거두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나누고
사랑하는냐가
가장 중요한
주님 자녀들의 몫임을
기억하는 하루 되십시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주님의 수난 예고와 나의 선입견
김명숙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통해 예수님은 장차 죽임을 당하겠지만 사흗날 부활하실 것을 알려주셨고, 제자들은 슬퍼했다. 메시아는 왕이 되는 거라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왜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첫 수난 예고 때도 베드로는 메시아가 수난 당하는 “그런 일은 없다.”고 반박했고(마태 16,21-23), 예수님은 인간적인 일만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서 분심을 쫓아내셨다. 유다인들은 고통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투사를 기다려왔고(루카 24,21), 제자들도 주님이 당하실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같은 이유로 유다인들은 지금도 ‘고난받는 주님의 종’을 노래한 이사야서 53장을 메시아를 향한 미래 예언으로 보지 않고, 바빌론 유배 때 고통받던 이스라엘로 해석한다. 메시아는 고통받지 않는다는 뿌리 깊은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수난과 부활 예고에 슬퍼한 걸 보면, 부활 또한 실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다.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주님의 말씀과 행적이 영원히 남는다는 비유적 의미로 이해한 것 같다.
이제까 지 배워온 경험과 지식만 믿으려는 우리 인간 본성이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만들어 내는가! 고정관념에 눈이 가려진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과정은 몹시 길었고,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때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보지 않고도 고정관념에서 일찍 해방될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홍수 같은 지식의 바다에서 내가 아는 것이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편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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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혼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계셨기에 태어났을 것이며, 또 태어나기 위해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의 도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 나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까?
이 이웃들의 배려와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 역시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한 시간만이라도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어쩌면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내가 받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배려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합니다.
어제 내년에 신학교에 들어갈 인천교구 고3과 일반 예비신학생들의 1박 2일 피정이 끝났습니다. 제가 성소국장이라서 총 책임을 맡고 있지만, 모든 것을 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수녀님, 신학생, 성소국 직원이 모두 애를 쓰며 일했기 때문에 잘 끝날 수 있었지요. 참으로 다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이 피정 기간 동안 얼마나 더웠는지 모릅니다. 짜증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피정에 임했기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비신학생 중에서 몇 명은 자신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내고 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의욕도 보이지 않고, 덥다는 이유를 들어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고 배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화가 절로 나더군요.
바로 그 순간, 어쩌면 우리 역시 주님께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마치 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주님께 내가 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주님께 화를 내고 짜증을 낼 때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성전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의 유다인 남자라면 당연히 성전세를 납부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성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자신에게 세금을 내지는 않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세금을 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오해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래서 사람들이 또 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려고 성전세를 내시지요.
이처럼 늘 우리를 배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는 주님을 위한 어떤 배려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배려하시는 것처럼, 이제 우리 역시 주님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 사랑의 삶입니다.
행복을 발견하는 첫걸음은 지친 몸과 마음에 참다운 ‘쉼표’를 선물하는 것이다(서정희).
윈스턴 처칠의 일화를 들으면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윈스턴 처칠이 탄광촌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광부 앞에서 그는 아주 유명한 연설을 하지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전쟁 중에 뭘 했느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전함을 타고 싸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최전방에서 빗발치는 총알 앞에서 피 흘리며 싸웠다고 하겠지만 여러분들도 자랑스럽게 ‘나는 군인들을 전선으로 실어 나르는 기차를 움직이게 하고, 군인들이 언 손을 녹이고 따뜻한 막사에서 지내도록 깊은 갱 속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있었다.’고 말하십니다. 당신들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먼 훗날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묻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는 내가 창조한 이 세상에 가서 뭘 했니?”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았을 때에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할 것 같네요.
헌금이나 봉헌은 절대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여러분의 스승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마태오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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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나 봉헌은 절대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즉,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의무 봉헌금인 교무금도 당사자가 책정하고 비밀에 부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순수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의미의 봉헌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동전 두 닢밖에 안되지만 전 재산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알고 있다. (루카21,1-4)
교회 살림을 함께 책임지려는 것은 신자들의 당연한 도리이다. .
나눔을 위해 가진 것을 봉헌하는 것 역시 교회의 이유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경제적 차이도 고려해주여야 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자 배려이다.
교회 안에도 사람들 사이에 경제적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
그 경제적 힘이 신자들의 자리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악마의 짓이다.
돈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서 교회로부터 받아야 할 신자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서 혼배성사를 할 수 없다거나, 장례 미사를 치를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의 정신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없다고 믿고 싶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면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다는 것이 죄나 악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이 선이거나 자랑거리도 아니다.
부유함이든 가난이든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교회가 건축헌금이니 뭐니 하면서 헌금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다.
교회의 경제적 유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서도 교회가 헌금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떤 명목의 헌금이나 봉헌도 자발적이어야 한다.
헌금이 왜 필요한지 교회 안의 신자들이 인식하고 십시일반의 기적을 이끌어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힘든 일에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일행은 허기가 져서 밀이삭을 잘라먹다가 바리사이의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오12,1)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머리 두실 곳조차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오8,20)
그 흔한 참새보다 훨씬 귀한 너희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루카12,6-7)
한국 가톨릭은 제법 오래 전부터 성직자들의 소득이 과세 대상일 때, 그 의무를 실천하고 있다.
개신교를 비롯한 불교계에서도 납세의 의무에 동참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듯 하다.
무척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교회가 속한 세상의 의무를 평등하게 함께 지어야 함은 누구보다도 모범을 보여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성전세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친 의무적인 봉헌금과 같은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무금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세상의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임금과 백성은 하나입니다.
하나이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이 임금을 공경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임금 또한
백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임금은 먼저 욕심을 내려놓아야합니다.
하찮은 권력에 눈 멀었어는 안됩니다.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프고 지친 이들을 친히 안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고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이와같이 신앙인으로 살면서
세상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해드려야 기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가 이미 하나라는
이사실에 기뻐하는
하루 되십시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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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부터 있었던 예비신학생 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장차 사제를 꿈꾸는 예비신학생들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요, 앞으로도 성소자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 예비신학생 피정 때, 면담을 하면서 제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공통적으로 던졌습니다.
“왜 신부님이 되려고 하니?”
사실 답이 쉽지 않지요. 자신의 성소에 대해서 남에게 말한다는 것도 또한 대답이 쉽지 않은 질문이니까요. 그런데 예비신학생 대부분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려고요.”라는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안에서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이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간직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대답도 많았습니다.
사실 텔레비전 등의 각종 매체를 통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유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유혹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화려함에 깜빡 속곤 하지요. 그래서 때로는 이러한 유혹들에 빠져서 더 많은 것들을 얻어야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지요. 마치 물 위 떠 있는 백조는 아주 우아하게 보이지만, 경박스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물밑에서 갈퀴질을 해야지만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즉, 겉은 화려하고 멋져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 안에서의 인정이 아니라 하느님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삶 안에서만이 참 행복, 참 풍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 사랑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만이 하느님께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금 문제가 등장하지요. 그것도 다른 세금이 아닌 성전세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셔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임금이 자기 자녀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을 예를 드시면서, 사실은 성전세를 낼 필요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그들과 다툼을 하시지 않기 위해 고기를 잡아 성전세를 베드로의 몫까지 내주십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세금을 걷는 이들이 무서워서?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과의 다툼으로 명확하게 진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는 성전세 논쟁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일을 하나라도 더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에 더욱 더 주목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세세한 것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요?
이제 하느님의 일에 주목하고 최선을 다함으로 인해 하느님께 인정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일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격려는 없다(오리슨 스웨트 마든).
도우면 행복하다.
미국 오리건 대학에서 한 팀은 강제로, 한 팀은 자발적으로 자선 활동에 참가하게 한 뒤 사람들의 뇌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현상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즉, 자발적으로 남을 도운 사람뿐 아니라 강제로 자선 활동에 참가한 사람의 뇌에서도 행복할 때 활성화되는 ‘보상 부위’ 세포가 바쁘게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자발적으로 하든, 강제로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강제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나중에 시간이 나고 여유가 있을 때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미루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일은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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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후에 한가해서 이발을 하기 위해 미장원에 들렸습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꽤 사람들이 많았고, 저는 의자에 앉아서 저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학생 한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학생은 어떻게 오셨느냐는 말에 파마를 하러 왔다고 말하더군요.
드디어 제가 이발할 차례가 되었고, 그 여학생도 파마를 위해 제 옆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용사가 이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만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 머리카락 가지고 이것저것을 장난쳐서 모발이 너무 상했어. 파마를 할 수 없겠는데?”
이 말에 학생은 울상을 지으며 “방학이라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랬더니 이렇게 되었네요. 어떻게 해야죠?”라고 말을 합니다.
아마도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이라 자유롭게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자유로움은 이 학생처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더 큰 상처와 불안감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하긴 저 역시 그 학생과 같은 나이 때에는 머리카락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장원에 가서도 꼼꼼하게 어떻게 저렇게 깎아달라고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참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많이 썼었음에 미소를 짓게 됩니다.
어렸을 때에만 쓸데없는 데에 온 힘을 쏟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쓸데없는 데에 온 힘을 쏟으면서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에 성실하지 못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마치 목숨을 내어 놓을 듯이 달려드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반복하고 있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들이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 이것만 있으면 다른 것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 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전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에 굳이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으시지요. 또한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가족이기에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성전 세를 내라는 사람들과 맞붙어 정의를 외치며 납세 의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성전 세를 내라는 유다인들과 부딪히면 과연 어떨까요? 아마 예수님께 계속 시비를 걸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신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우리 전부를 거는 어리석음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에 우리 모두를 걸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게 사는 것이며,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무례한 사람의 행위는 내 행실을 바로 잡는 스승이 될 수 있다. 무례한 상황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먼저 내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한다.(공자)
네 자리가 꽃자리니라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래요. 한 농부가 부동산업자에게 자신이 경영하는 농장을 팔아달라고 부탁했대요. 농장이 너무 커서 일거리도 많고, 호수의 물 관리도 너무 귀찮다는 등 한마디로 농장일이 너무 힘들어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중계업자가 판매를 위한 광고 문구를 만들어 와서 농부에게 보여주고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농장을 팝니다!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굽이굽이 이어진 언덕에 푸른 잔디가 쫙 깔린 곳! 그림 같은 호수가 있고, 가축들이 건강하게 풀을 뜯는 축복의 땅. 이 기름진 땅위에서 마음대로 농사지을 수 있는 천국!”
이 광고 문구를 보더니 농부는 마음을 바꿔서 계속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 바로 지금 이 시간이 천국이며 천국을 즐기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어이없고 황당한 성전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탈출기는 성전세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께 예물을 올려야 한다.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탈출기 30장 13절)
그럼 반 세켈의 화폐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약 두 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 통상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10만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성전세 납부 시기는 통상 과월절 전까지였습니다. 유다인들은 과월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방문하여 납부하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세리들이 방문 징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전세의 용도는 유다인들 삶과 신앙의 중심인 성전의 유지, 관리, 보수 등 전반적인 운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세 수입이란 것이 당시 막대한 것이어서 로마로부터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까지 성전세 수입을 계속되었는데, 아무리 지출해도 남아돌다보니 나중에는 성전에 금으로 된 포도송이를 제작해 장식해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해외에 나가 살던 유다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칭했는데, 그들도 1년에 한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세를 꼬박꼬박 바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방국가의 돈을 유다 세켈로 바꾸어 바치도록 되어 있어 환전상들은 막대한 환전차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거룩해야 할 성전이 자꾸만 훼손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전세 납부를 면제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지들은 납부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도 제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존경받는 랍비들도 제외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당대 선풍적인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큰 스승이셨기에 당연히 성전세 납부 제외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전세를 왜 바칩니까? 성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주인에게 성전세를 바치라고 한다면 이처럼 웃기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어이없고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과 신앙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제자들은 당연히 성전세 면제의 첫 번째 대상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성전의 주인이셔서, 이 세상 전체,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셔서 성전세를 낼 이유가 전혀 없지만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셨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당신께서 추진하고 계시는 인류구원사업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기에 아주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처신하신 것입니다. 성전세라는 것 필요한 것이었지만 목숨 걸고 고수해야 할 절대 진리가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 큰 마음먹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시는데, 참으로 그 내용이 의아하기 짝이 없습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왜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 공동체 총무였던 유다에게 한 세켈 달라고 해서 베드로에게 주면서 “옛다. 빨리 갖다 바쳐라!” 하지 않고 낚시를 하게 보내십니까? 그리고 입을 열어보게 하십니까? 또 희한하게 고기 뱃속에서 동전을 꺼내 성전세를 바치게 하십니까?
이 부분에 너무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자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만물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깟 성전세 몇 푼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심을 명명백백히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하시고, 또한 코믹하시고, 더불어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출발
박진형 신부님
국민이라면 국민으로서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 가운데서도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는 납세의 의무가 있는데 세금을 냄으로써 국가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성전세도 모든 이스라엘인이라면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이었습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해마다 성전에 일정량의 세금을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세상의 법을 지키는 일에도 뱀처럼 슬기롭게 대처하는 자세를 보여 주십니다. 세상 속에서 지혜로이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세상 가운데 신앙인의 자세를 취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창한 데서가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기초적인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기본에 충실하였을 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마태 7,25) 어떤 흔들림도 없고 어려운 난관에 부딪쳐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랑의 계명에 더욱 충실하면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오히려 더 나은 방향으로 주님을 올바르게 따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기초적인 것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쌓자
임창현 신부님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한다. 그래서 물건을 살 때 무엇을 덤으로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선택이 많이 달라진다. 1.6리터짜리 맥주를 살 때도 예외가 아니다. 그냥 맥주 PT와 예쁜 꽃다발 같은 안주가 걸려 있는 맥주 PT가 같은 가격으로 나란히 있으면 손은 자연스럽게 안주가 걸려 있는 쪽에 닿는다.
이런 마음 때문인지 내가 어릴 적부터 포도송이를 채우는 동네 슈퍼 스티커, 열 번 미용을 하면 한 번은 공짜인 미용실 도장 등 적립 상품이 많이 있다. 이것이 발전하여 요즘은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 카드가 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 이러한 포인트의 기본 개념은 많이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공짜, 곧 혜택을 많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사랑을 많이 이용하면 할수록 우리 영혼에 행복이라는 포인트가 쌓이고, 이는 하늘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포인트를 쌓는 방법! 오늘 신명기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 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늘나라에 포인트를 쌓는 하느님 자녀가 되어가는 것이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포인트를 그득 쌓는 하루가 되길 희망한다.
통 크게 쓰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
공동생활을 하다보면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깐깐한 사람과 대범한 사람입니다.
여간해서는 깐깐한 사람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수 없고,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무엇을 하려면 당연히 사사건건 시비를 가려야 합니다.
반면 대범한 사람은 중대한 문제가 아니면 잘못이 있어도 눈 감아 주고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이 하려는 것에 동조합니다.
저희 형제들 중에 이 면에서 아주 탁월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늘 긍정적으로 봐주고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려고 하니 그와 함께 일을 하면 마음 편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늘 지지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깐깐한 사람은 일적이고 법적인 사람이고 대범한 사람은 관계적인 사람이라고 성격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사랑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북한에 식량을 보내면서 적잖이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의 눈치도 봐야 했고, 북한 측도 설득해야 했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고, 생각이나 일처리 방식이 다르다 보니 사소한 것에서 오해가 생깁니다.
이런 것들을 따지다가 문뜩 생각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자는 말이고, “신부 선생, 통 크게 쓰시라우요.”하고 북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법이나 절차를 너무 따지지 말고 통 크게 사랑하자는 말,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자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오늘, 저에게는 비위를 건드리지 말자는 주님의 말씀과 통 크게 쓰라는 말이 겹쳐 들리는데 잘못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선한 고해성사
최재도 신부님
아마 2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한 월간지의 표지 기사로 ‘천주교의 신선한 고해성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한 성당에서 1년 동안 성당 재정을 모든 신자가 볼 수 있게 투명하게 공개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비밀리에 부쳐져 사용되던 종교 재산 사용 내역을 공개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모양입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게 하는 성당이 많습니다. 그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주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을 다루는 데 그만큼 자유롭고 자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신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굳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됨을 분명히 알고 계셨지만 세상의 요구에 어느 정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당당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표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십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한 해 동안 사용한 재산 내역을 공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해오지 않았기에 세상은 ‘신선하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내 안에만 가두고 소통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마음이든 가두어 두면 문제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내 안에 움켜쥔 것이 있다면 속시원하게 하느님 앞에, 세상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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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떤 분의 E-mail을 통해 알게 된 유머 하나 소개합니다.
할머니가 너무나도 예쁘고 귀여운 손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기 전화기 색깔이 뭐지?” “노란 색이요.”
“저 화분의 색깔은 뭐지?” “갈색이요.”
“우리 손주 똑똑하기도 하지. 그러면 저 시계의 색깔은 뭐니?”
그러자 손자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할머니, 이제 제게 묻지 마세요. 정 궁금하시면 할머니도 유치원에 가셔서 배우세요. 저도 금방 배웠으니까, 할머니도 금방 배우실꺼에요.”
할머니가 정말로 색깔을 몰라서 손자에게 묻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손자가 얼마나 잘 아는지, 그리고 유치원에 가서 잘 배우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손자는 이렇게 물어보는 할머니가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계속해서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나 당신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며,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께서 답을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나의 부족한 머리로 판단하고 선택하기 보다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척척 알아서 해주시면 얼마나 편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선택과 그에 따른 실천을 존중해주십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선택과 실천을 통해서 보다 더 잘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을 직접 주시기보다는 우리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선택의 문제를 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믿고 참아주시는 주님의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금을 내시지요. 사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그러나 공동체에 어떤 피해가 가질 않길 바라는 배려 차원에서 세금을 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배려. 특히 우리 인간들을 믿고 참아주시며,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주님처럼 배려 깊은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나만 무조건 옳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제는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랑으로 내 이웃들에게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배려와 사랑을 통해 우리는 내 삶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참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미소는 입 모양을 구부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것을 바로 펴 주는 힘이 있다(로버트 이안 시모어).
똑바로 걸어 들어가는 것(론 헌터 주니어, ‘토이 박스 리더십’ 중에서)
명예의 전당 야구 부문에 이름을 올린 토미 라소다가 LA다저스의 매니저로 20년 동안 일한 뒤 은퇴할 때였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워 물었다.
“토미, 매니저로서 당신이 한 것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그가 출전 팀 구성이라든지 상대 팀에 따른 선수 기용과 같은, 경기의 전략적인 측면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탈의실에 똑바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8연승을 거두었는지, 8연패를 기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든, 신통치 않은 경기를 했든 무조건 탈의실에 똑바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미소와 낙관적인 눈빛을 띤 얼굴을 하고 똑바로 걸었습니다. 선수들에게 낙담한 얼굴을 보이면 의기소침함이 산불처럼 번지겠죠. 그 의기소침함은 탈의실을 홀라당 태우고 맙니다. 그러니 늘 낙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매니저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나’라는 틀을 깰 때
김희준 신부님
올해로 피정집을 맡아 온 지 3년째에 접어듭니다. 별일 없다면 내년에는 아마도 새로운 소임이 주어질 것이고 새로운 곳으로 파견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소임이 주어질까? 어디로 가게 될까? 또 어떤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될까?’생각하면 할수록 은근히 초조해집니다. 그만큼 피정집 일에 적응됐다는 얘기일것입니다. 지금 일에 적응되어진 만큼 다른 일은 잘 못할 것 같고, 지금의 사람들과 정든 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을 고집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만큼만 행복해질 수 있고 내가 예상한 만큼의 열매만 거두어 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틀을 깰 때 생각지 못한 행복과 예상치 못한 열매들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성전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꺾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지니신 유일한 관심사는 목숨을 다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걸으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온전히 자신을 비우시고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꺾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새로움에 자신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새로움을 통해 더 큰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하고 묻는 성전 세 거두는 이들에게 베드로가 “내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오래 성당에 나가지 않던 신자를 면담한 적이 있는데,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된 이유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분이 다니던 성당에 신축을 하게 되었을 때 하필이면 그 때 그분 가족 경제 사정이 너무 나빠져 신축 기금을 하나도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죄스러워 교회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 이후 저는 교회에서 돈 얘기하는 것이 죄스러워졌습니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헌금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은 더 진짜 이유는 가난한 분들의 없는 돈 내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은 돈을 내시는데 저는 수도자라고 하여 한 푼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그분들의 도움으로 사는 제가 가난하게 살지 않는 것이 너무 뻔뻔스럽고 파렴치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금을 걷어 들이는 세상 임금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세금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를 빌어 하느님의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금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봉헌된 가난을 사는가?
봉헌된 정결을 사는가?
봉헌된 순종을 사는가?
나의 의지와 소유한 것 모두를 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헌하고 오로지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가?
그렇게 나를 다 봉헌하였다면 프란치스코처럼 세금을 내지 않고 얻어먹고 살지라도 당당해도 좋을 것입니다.
수도규칙에서 그는 동냥을 청하는 자세에 대해 얘기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 뿐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 주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권리입니다.
그리고 동냥을 얻는데 수고하는 형제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동냥을 주는 사람에게도 큰 보상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지닐 수 있다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가난과 사랑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때 우리나라에서 일부 종교인들의 사치스런 삶이 쟁점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 평이 넘는 빌라에서 살고 삼억이 넘는 자가용을 타고 별장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도들이 주는 것이라 말하고, 다윗이나 솔로몬, 예수님도 다 부자셨다며 자신들의 사치를 정당화합니다.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님은 당신은 머리 누일 집도 없으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하시고, 하느님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방송이 되자, 많은 국민들이 종교인들도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저도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뜨끔하였습니다. 미사예물과 활동비 명목으로 한 달에 백만 원 정도의 돈을 받고 있기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세금을 내본 적이 없었습니다.
역시 불교와 개신교의 많은 종교인들은 세금 내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합니다. 나름 소신 있게 주장하는 내용이, 신성한 일을 하는데 왜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받는 돈들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수입 명목일 때는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 더 당연할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다른 신부님께 우리도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제들은 이미 세금을 내고 있다는 하셨습니다. 교구청에서 일률적으로 내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법적으로는 내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문제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내기로 결정하였고 이미 오래전부터 세금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같은 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의 종교인들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법적으로 안 내도 되는 것을 왜 내며 신자들이 낸 교회의 돈을 축내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안 좋은 인상을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어리둥절해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당신의 스승은 성전 세를 내십니까?”라고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미리 아시고 베드로가 물어보기도 전에 예수님은 당신은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는 사람임을 설명해주십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느님께서 사시는 집이고 하느님의 아들이 그 집에 산다고 하여 아버지께 돈을 바칠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일을 하는 예수님이나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에서 돈을 받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예수님은 꼬치꼬치 따지지도, 그들을 설득시키려 하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하여 물고기 입에서 나오는 돈으로 당신 것과 베드로 것을 내라고 하십니다. 즉, 그런 식으로 쓰는 돈은 내 지갑을 가볍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성전을 위해 내는 돈이란 것 자체가 하느님보시기에 좋은 것이고, 또 굳이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기에 하느님께서 다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나 자동차의 타이어에는 공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고무만으로는 충격을 온전히 흡수할 수 없어서 고무 안에 공기를 넣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훨씬 충격이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우리 안에 충격 흡수를 위한 공기를 지니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손해나는 일 같아도 작은 일들은 그냥 접어 넘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일에 갈등을 불러 일으켜서 큰일까지 망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것입니다. 죄가 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굳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갈등을 빚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로 결정하신 때부터 하신 모든 일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죄로 우리의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꼬치꼬치 따지며 사는 것도 좋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신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피할 수 있는 분쟁은 피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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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저는 인천의 송도유원지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성당 초등부 여름 물놀이를 이곳에서 했었거든요. 저는 꼬마들과 신나게 물놀이를 했지요. 그런데 초등부 꼬마들은 저를 어떻게든 물 먹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십 명씩 몰려와서는 어떤 아이는 제 발을 잡고 넘어뜨리려고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제 머리 위에 올라타서는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일부러 물 먹는 척을 했습니다. 충분히 아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서 도망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힘없는 척 하고 그래서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척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아이들은 더욱 더 신나합니다. 물론 정말로 허우적거리는 것도 아니고, 그 더러운 물을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수영장 다니면서 익힌 수영 실력이 있는데, 힘도 없는 초등학교 꼬마들한테 붙잡혀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단지 아이들 재미있으라고 그런 척 했던 것입니다.
한참을 이렇게 놀고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 꼬마아이가 제게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요.
“신부님. 이제 제가 신부님을 지켜 드릴게요.”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모든 아이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서 수영장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는 제가 너무나 안 되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지켜 주겠다고 제 앞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다른 꼬마아이들이 저를 물 먹이려고 할 때면, ‘안 돼.’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꼬마아이가 너무나 예쁘더군요. 사실 이 꼬마의 보살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힘도 없었고, 수영도 잘 못하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러나 이 꼬마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했지요.
문득 주님과 우리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 사랑을 드리겠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이 아이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할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무시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에 주님께서는 너무나도 기뻐하실 것이며, 우리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나와 있듯이, 우리를 끊임없이 배려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즉,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까지 배려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유로 성전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지 않고, 당신께서 누구인지 밝혀질 때를 기다리며 세상의 법을 따르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지요.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기에, 우리 역시 사랑으로 주님 앞에 다가가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데 최선을 다합시다.
탈무드의 세 친구 이야기(최창섭, ‘언어와 환경’ 중에서)
탈무드에 세 종류의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물질"이라는 친구와 "인간"이라는 친구, 그리고 "선행"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날 주인공이 죽게 되었다. 주인공은 죽어가는 마당에 평소 가장 친했던 물질에게 달려갔다.
"여보게, 물질! 내가 이렇게 죽게 되었네. 날 좀 도와주게. 염라대왕에게 몇 마디 해주게나!"
그런데 물질은 "나는 자네를 모르네. 자넬 본 적도 없는걸" 하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주인공은 다음으로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인간"에게로 갔다. 주인공의 사정을 들은 인간은 "그거 참 안되었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무덤까지 함께 가주는 것일세. 그 이상은 갈 수가 없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선행에게 가보았다. 선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자네가 나를 평소에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자네가 나에게 한 것만큼만 염라대왕에게 가서 변호해 주겠네."
이 이야기는 세속적인 가치만을 쫓아 길바닥 같은 인생을 산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재미있게 표현해 주고 있다.
아버지 신부님
김호균 신부님
제 책상 위에는 1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신부님(신학교 입학 때 추천하신 분)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던 그 순간 기대고 있던 기둥이 쓰러진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며칠 동안 슬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한번은 시험을 너무 못봐서 학사경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성적표를 보여드렸는데 신부님이 두꺼운 돋보기 안경 너머로 한참을 보시더니 “괜찮아,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물 담을 그릇을 찾다 보면 소주잔 같은 것도 있어야 하고, 컵도 있어야 하고, 큰 통도 있어야 하듯이 사람도 그런 거야.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쓰는 거야. 그저 자기가 담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담으면 그게 가장 적절한 거야. 우리 마르코도 마찬가지야 걱정하지 마라.”
돌아가시기 20여 일 전쯤 편지 한 통을 주셨는데 “요즘 세상이 워낙 혼탁하니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제, 성덕으로 사는 사제’를 원한단다. 마르코도 그렇게 살아주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신부님의 말씀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록새록 돋아나면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분의 행적을 깊이 이해했던 제자들의 마음에 공감하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남궁영미 수녀님
제가 사는 곳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 화양계곡으로 유명한 속리산 자락입니다. 1996년에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8년을 기다린 끝에 파견을 받았습니다. 지역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학교 ‘하늘지기 꿈터’에서 생활한 지 이제 4년이 다 되어갑니다. 하루하루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그리 만만치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성장해 가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나 자주 제 생각이나 판단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그 생각과 판단이란 것이 대의명분일 때도 있고, 예의나 옳고 그름에 대한 저의 가치 판단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무리 옳고 의미 있는 것이라 해도 제 생각이나 판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묻고 스스로 생각해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느끼듯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많이 약해진 요즘 아이들한테는 차라리 “이 길이야!”라고 제시하고 이끄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묻고 생각하는 동안 기다리는 것. 그 긴 과정을 무력(?)하게 기다리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늘 제자들에게 직접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이런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늘 제자들 스스로 생각하여 답을 찾게 하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스승의 모습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잠잠히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안의 잠재된 힘을 믿으며 인내롭게 기다려 줄 때 아이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할 일이란 저를 비워내는 일일 것입니다. 당무유용(當無有用)! 빔이 쓰임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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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제 읽은 책의 내용 중에서 제가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기반성이 담겨 있는 글인데, 그렇게 유명한 그 작가가 한때 심한 고통 속에서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더군요. 즉, 양쪽 귀의 이명(耳鳴)과 어지럼증, 우울증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작가는 항상 따뜻한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책에 담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 분의 책을 쭉 보아왔던 저는 그가 이러한 아픔 속에서 힘들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고통의 나락 속에서 자살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했던 지금 그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물론 여전히 양쪽 귀의 이명은 여전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견디어 내고 있으며, 3년 동안 먹었던 우울증약도 끊으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을 극복했다고 하네요. 그가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명예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는 지금도 책의 수익금을 자신을 위해서 쓰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후원하면서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명예와 재산을 쫓지 않는 그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신앙이며, 사람들의 사랑이 자신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고…….
바로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그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더 큰 용기와 희망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말을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기도의 응답 방식과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기도의 응답 방식은 다르다.”
그 다름을 생각하지 않고, 나의 기도 응답 방식만 옳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세금에 대한 문제가 나옵니다. 성전 세를 내야 하는가? 내지 않아도 되는가? 라는 문제이지요. 성전의 주인인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갖다내라면서 동전을 베드로에게 건네주시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만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까지도 배려하시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서로간의 다툼을 만들지 않으시려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만을 보아도 주님께서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나의 이웃들을 배려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나의 기도 응답 방식만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서, 내 이웃들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한 어리석음. 이제는 내 안에서 사라져야 할 텐데요……. 그런데 잘 안되지요?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기도의 응답 방식을 받아들이세요.
생각에 못을 박지 말자(이철환, ‘반성문’ 중에서)
개굴 개굴 개굴 개굴.
개구리 울음소리가 아니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울지 않는다.
뿌구국 뿌구국 뿌구국 뿌국
쾍, 쾍, 쾍, 쾍, 쾍, 쾍, 쾍, 쾍
낯설게 들리겠지만,
차라리 이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에 더 가깝다.
한여름, 논길을 걷다보면
초록색 볏잎 사이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개구리 우는 소리는 개구리 웃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생각에 못을 박지 말자.
장마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우산 장수’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
장마 때가 되면 사람들은 우산을 준비해 가지고 다닌다.
생각에 못을 박지 말자.
생각에 철로를 깔아놓으면
달릴 수 있는 건 오직 기차뿐이다.
메시아의 비밀 그리고 성전세
황태웅 신부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한가지는 당신의 수난예고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응은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께 대한 실망이었고 낭패였습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며 기적도 행하고 가르침도 주시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루빨리 당신 왕국을 세우고 자기들을 등용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 주님께서 수난하시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단히 나무라셨습니다.“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네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또 부활이야기를 하시지만 수난하게 될 예수님을 미리 알았다면 그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마음도 편하고 또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좀 잘되기 원해서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된다고 하지만,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또 어떤 분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당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 빼놓고 다른 가르침이나 기적으로만 으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고, 우리 모두를 어떻게 구원 해주실 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이 주님이십니다”하고 외쳤을 때 “입 다물어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조차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것도 몇 번이나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메시아의 비밀” 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비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 성령의 내려오시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져야하는 우리자신의 모든 어려움,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피하고서는 즉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또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을 만류했다가 야단맞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 피하고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도 없고, 주님의 질책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두 번째는 성전세금을 내는 문제입니다. 그 당시 유대아에서는 남자가 20세가 되면 매년 성전세를 냈습니다. 세금을 내는 돈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리스 돈 드락메가 아니라 유대아 자기나라 돈 세겔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돈으로만 성전세를 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하던 그들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다른 돈은 일상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성전세금을 내는 데는 불가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신으로 숭배되었으니 당연히 우상입니다.
우상이 새겨져 있는 돈,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우상이 된 돈이 성전마당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돈 그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마당의 환전상 자판을 뒤집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또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관들과 다른 종사자들은 성전세를 면제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세상 임금들은 누구에게서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냐, 아니면 남들이냐?” 베드로는 “남들입니다”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하고 확인하십니다.
그러니 주님도 또 베드로도 성전세를 면제 받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 없다”하시고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이 교회 내 일 때는 교무금이 되겠습니다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잘못도 범하겠지만,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될 것입니다......◆
<독서> : 하느님을 깊이 체험함으로써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예언자
경규봉 신부님
에제키엘은 사제 가문 출신의 예언자이다. 그는 기원전 597년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에 포로로 끌려왔다. 그는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였으며, 사제이면서도 사제로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는 그발 강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가 되었다. 그발 강가는 사로잡혀 온 유다 백성이 하느님께 예배드렸던 강가인데, 이곳에서 그는 이사야가 하느님을 체험했던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 깊이 체험한다.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로 활동하지 못하고 포로로 끌려와 귀양살이를 해야 하는 에제키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느님 백성이라고 굳게 믿던 자신들이 그처럼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포로가 되어 하느님께서 주신 땅을 떠나고, 이국에서 종살이를 해야 하는 그는 하느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선조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하느님께서 선조들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셨는가를 깊이 묵상했다. 동시에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깊이 묵상했다.
이러한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까닭은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더 악하게 죄를 짓고 하느님을 배반했기 때문임을 가르쳐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죄악이 가득한 예루살렘이 완전히 폐허가 되고 멸망하리라고 예언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도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유다 백성이 적의 칼날과 기근, 전염병으로 죽게 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기원전 587년 그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은 바빌론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자신도 포로로 끌려와 고통을 당하면서 남아있는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이 멸망할 것을 예언해야 하는 에제키엘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는 육신적으로도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의 고통이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처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깊이 당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신심 깊은 예언자 에제키엘로 하여금 세상에서 위안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포로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어려움을 이겨냈다.
유다 백성이 귀양살이에 지쳐 낙담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며 격려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신앙인으로 변하도록 이끌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더 큰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며, 당신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체험하는 큰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실패를 하고 그로 인하여 고통 속에 헤맬 때가 많다. 가족이나 친지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당할 때도 있고, 사업의 실패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때도 많으며,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도 많다.
그런 때일수록 세상을 보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자. 세상 것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우려 하자.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자.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맡기자.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서 당신을 찾고 부르짖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을 만큼 크게 당신을 체험하도록 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당신을 체험함으로써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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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저는 팔 골절로 병원에 다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의 X-Ray 검사실 앞에서 느꼈던 일을 하나 말씀드릴게요.
X-Ray를 찍기 위해서 검사실 앞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나 많았고, 저는 심심해서 진열되어 있는 잡지를 꺼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잡지 속의 많은 것들이 언젠가 본 듯 낯익은 것이에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얼른 앞표지를 보았지요. 작년 잡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잡지를 작년에 보았던 적이 있었던 것이지요.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잡지를, 그리고 새로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잡지를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잡지를 덮어서 다시 진열대에 꽂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미 읽었기 때문에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이 잡지처럼 세상의 앞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오해나 착각으로 인한 실수도 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점을 보러 철학관을 다니고 굿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그런데 곧바로 이런 생각도 나는 것입니다. 제가 잡지를 곧바로 덮어서 다시 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미 알고 있어서 어떤 새로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앞일을 미리 알아버린다면 가슴 설레게 하는 새로움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내가 보았던 잡지라고 곧바로 덮어버린 것처럼, 나의 삶도 지겨워서 덮어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나의 앞일을 알 수 없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삶 그래서 가슴 설레게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또 다른 배려가 아닐까요?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배려인 것이지요.
사실 얼마나 부족한 우리들입니까? 그래서 실수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렇게 실수를 하면서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요? 따라서 실수하기 전에, 그리고 다른 길로 가기 전에 우리의 방향을 바꾸시고 싶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꾹 참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배려는 성서에서도 너무나 많이 나오지요. 오늘 복음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조금이라도 잘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미리 말씀해주시는 배려를 행하십니다. 또한 사람들과의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내지 않아도 되는 세금을 내시는 배려의 모습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항상 우리 인간들을 배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런 배려를 우리는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그런 배려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주님께서는 ‘나만 미워한다’는 극단적인 생각만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배려하시는 모습을 하나하나 따져보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남을 배려합시다.
사랑차 끓이는 방법('좋은 글' 중에서)
- 재료를 준비하세요.
1. 분노의 뿌리를 잘라 내고 잘게 다진다.
2. 고민과 자존심을 속에서 빼낸 후 씻어 다진다.
3. 짜증은 껍질을 벗겨 반으로 토막낸 후, 넓은 마음으로 절여둔다.
-이제 끓여 볼까요?
4. 주전자에 실망과 미움을 한 컵씩 붓고, 씨를 빼낸 후 불만을 푹 끓인다.
5. 미리 준비된 재료에 인내를 첨가해, 재료가 다 녹아 쓴맛이 없어지기까지 충분히 달인다.
6. 감사와 기쁨을 잘 젓고 미소를 몇 개 예쁘게 띄운 후, 사랑의 잔에 부어 따뜻하게 마시면 된다.
-사랑차 한 잔으로 기분이 좋아지셨나요?
참된 권위
김광태 신부님
얼마 전에 있었던 지방선거 유세기간 동안 하루빨리 선거가 끝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과연 선거가 끝나니 조용해서 좋습니다.
국가와 자기 지역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의 진지한 호소를 소음으로만 치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봉사하겠노라고 뽑아달라는 그들의 호소를 들으면서 속으로 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제발 선거가 끝나고도 우리를 그렇게 극진히 섬겨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주제가 일반화된 당시 현실을 반영하여 통치자는 백성을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자녀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왕도 아니었고, 왕이 되길 원하신 적도 없고,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피해가신 그분이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직을 추구하는 이유는, 당신을 잡아 죽이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신 그분의 삶과 방식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많은 추종자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김흥주 신부님
스페인 유학시절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나는 한 인간 집단이 다른 민족을 상대로 저질렀던 잔악한 죄악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소름끼치는 두려움과 참담한 분노를 느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아우슈비츠는 하느님께서 왜 침묵하셨으며 또 왜 그들을 죽음에서 구하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셨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그곳 지하 감방을 둘러보던 중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얻을 수 있었다. 그 지하 감방 13호실은 아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갇혀 있던 곳인데, 바로 거기에 막시밀리아노 콜베라는 위대한 성인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천주교 사제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콜베 신부는 혹독한 중노동과 갖은 형벌에 시달리면서도 사제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치 병사들로부터 더 많은 고통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감방에서 한 사람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용소 책임자는 같은 감방에 있던 열 사람을 골라 아사형을 내렸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기혼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콜베 신부가 그 사람 대신 아사형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수용소 책임자도 콜베 신부의 뜻밖의 행동에 놀랐지만 결국 그 뜻을 받아들였고, 콜베 신부는 굶주림의 고통을 겪다가 독극물 주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불에 태워져 없어졌고, 지금은 그곳에 그를 기리는 꽃다발만 놓여 있을 뿐이지만 그의 놀라운 희생정신과 위대한 사랑은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그 당시 수용소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콜베 성인을 통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들과 분명 함께 계셨던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한 인간의 생애가 이렇게 숭고하다는 것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폴란드 태생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회원이자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Militia Immmaculatae) 창립자이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천상탄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정신없는 제게, 아직 제 자신조차도 극복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제게, 성인의 생애는 너무나 커보였습니다.
역사상 자신에게 다가온 마지막 순간인 죽음 앞에서 콜베 신부님처럼 그리도 침착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전기를 꼼꼼히 읽어보면서 신부님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러 나가셨습니다. 가장 값진 선물을 받은 어린이처럼 죽음 앞에서 기뻐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인간의 생애가 이렇게 숭고할 수 있다는 것, 당당할 수 있다는 것,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윽고 때가 되어 나치들이 콜베 신부님이 머무시던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짐짝처럼 실려 죽음의 수용소로 떠나가면서도 신부님께서는 동료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는 선교하러 떠나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여비까지 딴 사람이 치러주니 얼마나 큰 이익입니까? 이제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께 ‘우리는 만족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립시다.”
드디어 신부님께서 죽음의 아사 감방으로 자진해서 내려갈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누군가 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도망친 사람이 끝내 잡히지 않자 소장은 모든 수용자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소장은 10명을 선발해서 아사감방으로 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갑자기 아사감방으로 가게 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유난히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아,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구나!”
그 순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포로가 대열을 이탈해서 소장 앞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이었습니다.
“원하는 게 뭐냐?”
“저 울고 있는 사람 대신 내게 죽겠소?”
“도대체 왜 그래?”
“나는 늙었고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어도 아무 것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천주교 사제요.”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시선은 소장의 얼굴 너머 먼 곳으로 향했습니다. 먼 산 너머로 활활 자신을 불태우며 넘어가는 아름다운 석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그 순간 마지막 미사라도 봉헌하듯이 그렇게 당당하게 서 계셨습니다.
마침내 소장은 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좋다, 함께 가라.”
열 명의 사형수들은 맨발에 셔츠 차림으로 죽음의 감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마치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자처럼 제일 뒤쪽에서 따라갔습니다.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가슴 속으로는 천국을 그리면서...
“나의 모후, 나의 주님, 나의 어머님, 오 원죄 없으신 동정녀시여, 당신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나는 지금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은 이런 측면에서 자청한 죽음, 예정된 죽음, 계획된 죽음, 준비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이 마지막 순간, 장엄하게 낙화할 순교의 순간을 꿈꾸어왔던 것입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순교자적 생애는 지하 감방에서 활짝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은 어쩌면 한 점 티 없는 어린 양이셨던 예수님, 순결한 봉헌제물이셨던 예수님의 삶을 판에 박은 듯이 빼닮았던 죽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수철 프란지스코 신부님
어느 분들의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여정을 듣다 보면, ‘아, 삶은 고해(苦海)구나!’라는 불가의 말씀이 탄식처럼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어떻게 그 어려운 삶의 여정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살아왔는가 생각하면 순간, ‘아, 삶은 기적이구나!’하는 감사의 탄성도 절로 나옵니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서도 이런 진리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적 여정, 유혹과 시련 가득했던 인생 고해의 여정이자 동시에 기적으로 가득 찼던 인생 기적의 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삶은 고해입니다만 뒤집어 보면 또 삶은 기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해와 기적은 한 삶의 실재의 양면입니다.
‘삶은 고해다’라는 쪽만 바라보면, 삶은 절로 부정적 비관적이 되고 어둡습니다.
빛과 생명, 희망도 없습니다.
반면 ‘삶은 기적이다’라는 쪽을 바라보면, 삶은 긍정적 낙관적이 되어 밝습니다.
빛과 생명, 희망이 가득합니다.
똑같은 현실도 어떻게 보고 사느냐에 따라, 부정과 긍정, 비관과 낙관의 양 극단으로 갈립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나 긍정적이요 낙관적이라 유머도 풍부합니다.
삶이 하느님의 기적임을 깨닫기에 감사와 찬미가 그들을 지배합니다.
성서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여 어둠 속에서 빛을, 죽음 속에서 생명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제자들과 비교할 때 그분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이 면이 단연 돋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예고에 비관하여 슬퍼했지만, 예수님은 사흗날에 부활할 것을 믿기에 담담한 모습입니다.
성전세의 납부 문제도 예수님은 딱 부러지게 부정적으로 거부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스캔들이 되지는 않을까 긍정적으로 정황을 참작하여 성전세를 바치라 하지 않습니까?
호수에 가서 낚시하여 첫 번째 잡는 고기의 입을 열어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하면 그 돈을 세금으로 바치라는 기적 이야기 역시, 예수님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할수록 긍정적이고 낙관적이 됩니다.
삶이 모두 하느님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도다.’라는 화답송 후렴처럼, 주님의 기적으로 가득 찬 세상임을 봅니다.
바빌론 유배지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의 찬란한 영광을 체험한 에제키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체험이 있어 예언자들은 그 어둡고 엄혹한 세상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낙관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와 미사를 통해 알게 모르게 체험하는 하느님이 우리를 긍정적이자 낙관적인 사람으로 바꿔줍니다.
삶이 기적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빛과 생명, 희망으로 가득 채워 줍니다.
아멘.
유영일 신부님
현대는 거의 예외없이 모든 나라가 세계화의 과정속에서 급속하게 20:80의 사회로 재편되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지만 소수의 용기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조직적으로 이 현실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라하로, 그리고 지난 7월 20일에서 22일 사흘간 제네바에서 열린 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서는 15만 명이 넘는 대규모시위대가 주도권을 장악해버렸고 그 와중에서 1명이 총에 맞아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이런 소수 선각자들의 활약이 회담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일정 부분 고통을 당하는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이 근원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습니다. 1987년 민주화의 봄을 되돌아보십시오. 수많은 학생들과 국민들이 피를 흘리고 투쟁을 해서 6.29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냈지만 그것이 왜 속이구가 되었습니까? 국민들의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은 지속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거의 200-300년 동안 발전되어온 민주주의를 30년 이상 유지해온 군인정권 하에서 이루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국민들의 의식수준만큼 발전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복음을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이중으로 수탈당하고 있는 민중의 편에서 무력으로 그 불의한 체제를 뒤엎어버리고 하느님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혁명을 원하지도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기존의 질서와 제도에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식의 변화 없는 체제나 제도의 변화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죄악으로 얼룩진 이 세상을 무력이나 제도나 법을 통해 인간의 힘으로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개개인의 철저한 회개를 통해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할 때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견하시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꿋꿋하게 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늘 제1독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너 이스라엘아! 너희 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 따라가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가 받을 할례는 마음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고집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사랑에는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인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마음을 쏟아 사랑해주셔서 그들의 후손을 선택해주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해주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질서 하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고통을 겪고있는 반면, 가진 자들은 과실은 챙기고 책임과 의무는 노동자, 농민 등 가난한 자에게 전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역사상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먼저 내놓은 적은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의식이 변화되어 요구할 때 그들은 할 수 없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수많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구원역사는 하느님의 주도하에 가난한 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암울하다해서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역사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가난한 자들임을 명심하고 우선 우리의 마음의 껍질부터 벗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고집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아멘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
<물고기 안에서 은전(銀錢)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름휴가를 잘 다녀오셨나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휴가도 제대로 못 다녀오신 분들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인데, 저도 짧게나마 휴가못간 아이들과 함께 서해안을 다녀왔습니다.
언제보아도 일품인 서해낙조도 보고, 부드러운 서해모래의 감촉도 만끽하고, 꽤 높은 파도도 즐기면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직접 잡은 물고기 안에서 ‘은전(銀錢)’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회도 뜨고, 매운탕도 끓이면서 잠시나마 천국을 맛보고 온 기분입니다.
또 다시 돌아온 일상의 나날, ‘이곳 역시 천국이다’ ‘이곳이 내 성화(聖化)의 장소다’ 생각하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들은 꽤 생소합니다.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전세’는 무엇인지? ‘관세’며 ‘인두세’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께서도 성전세를 바치시는데, 왜 바치시는지?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는 방법이 꽤 기묘한데(맨 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고기 입속에 들어있는 은전을 꺼내 세금을 바침), 그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등.
성전세: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성인(20세)이 되면 성전유지 및 보수를 위한 세금을 바쳐야했습니다. 여인들과 노예, 미성년자들은 면제되었으나 굳이 원하면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관세: 각종 물품, 곡식, 가축, 노예 등의 매매에 따른 세금, 그리고 다리나 문을 통과할 때 내는 통행세가 여기에 속합니다.
인두세: 토지나 주택 등 부동산에 부과되는 직접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세금을 바치셨는가?: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베드로가 “예, 바치십니다”고 대답하는 것을 봐서 예수님께서는 꼬박꼬박 세금을 바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말하는 성전보다 훨씬 더 귀한 분, 성전 중의 성전인 분이기에 성전세를 따로 바칠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또한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왕자로서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겸손하게 세금을 바치십니다. 왜냐하면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분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런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기묘한 방법(고기를 낚아 입안에 들어있는 한 스타테르 짜리 은전으로 세금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성서학자는 잡은 고기를 베드로가 시장에 가서 1스타테르에 내다팔았다. 그리고 그 돈을 세금으로 바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까지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낚은 물고기를 통해 세금을 바치기 위해 필요한 돈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당신네 선생님은 성전세를 바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보시오! 나는 사제 중의 사제인 대사제이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며, 여러분들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온 메시아입니다. 새로운 성전인 나한테 감히 세금을 내라구요?”하고 정확히 입장을 정리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참으로 하찮은 직책, 별것도 아닌 자리에 앉기만 하면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우쭐거리고 끝도 없이 ‘나대는’ 우리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십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인 예수님께서 겸손하게도 세상의 왕에게 세금을 바치십니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로 생각합니다.
† 수난예고와 성전세의 관계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이 한데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한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세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에 관한 말씀이다.
우선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은 공관복음 모두에 보도되지만 마태오는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마르코와 루가는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마르 9,30-32; 루가 9,44-45)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마태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말로 고쳤다.(23절) 이로써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교육이 한 단계 진척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제자들의 귀엔 수난과 죽음은 크게 들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크게 들리는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것은 스승의 다가올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그러나 그 애도 뒤편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숨어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하는 마음 말이다. 이 마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가야 하실 길과, 제자들이 가고 싶은 길 사이에 갈등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연결된 성전세 납부 문제는 마태오복음에만 수록된 고유 자료이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기 전까지 제관들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일년에 한번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도 성전세를 내야 했다.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 성전세를 징수하는 사람의 물음에 베드로가 예수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말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처음 낚아 올린 물고기 입 속에서 두 사람 몫의 성전세 한 스타테르(이스라엘 은전 한 세겔)를 발견한 것이다. 이 사건이 베드로에게는 기막힌 일이었겠지만 예수께는 대수가 아니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만물은 언제나 말씀이신 예수님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베파게의 당나귀: 마태 21,2-3, 최후만찬을 위한 방: 마르 14,13-16 등)
그렇다면 왜 마태오가 두 번째 수난예고의 말씀과 성전세 납부 문제를 서로 붙여놓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수난예고와 성전세 납부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가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한데 묶어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마태오복음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고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없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물리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야훼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훼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말씀도 여기에 근거한다.(요한 2,14-21; 마태 21,12; 26,61; 27,40; 마르 14,58; 15,29) 하느님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찾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實定法)에 권리를 양보하신다. 입법자와 집행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리 하셨다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때가 오면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며,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가 선포될 것이다.
이는 인자(人子)가 자신의 죽음으로 취득한 자유이며,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지켜낸 아들에게 선사된 자유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는 누구나 이 무한한 자유를 나누어 누리게 될 것이다.
성전이신 예수님께 바쳐야 할 마음의 성전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17,22) 라고 하십니다. 벌써 두 번째 수난 예고인데 예수님의 말투에는 수난의 임박함이 짙게 묻어 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세를 거두는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성전세 내는 문제에 대해 묻습니다. 서기 70년 8월 29일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제관들을 제외한 스무 살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성전 유지를 위해 매년 반 세켈을 바쳤습니다(탈출 30,13-15).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권위자나 군주들은 자국민들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이들에게 세금을 받듯이,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 받았다고 하십니다. 성전 자체이며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그분을 따름으로써 성전에 속한 제자들은 당연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긴 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까닭은 만물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도 얼마든지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수난의 맥락에서 묵상해보면 성전은 결국 그들의 물질적 탐욕과 이기심, 적대와 배척으로 포장된 세금으로 유지하려 하여도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파스카 희생제사로서 성전을 대체하실 것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바치심으로써 성전을 정화하려 하신 것이지요.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자유로우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의 질서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칠 세금은 손에 만져지는 화폐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성전세를 어떤 마음으로 바쳐야 할까요?
성전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자신 전부를 기꺼이 바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세를 바치심으로써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오시어 세상을 정화하시고 구원하셨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겠지요.
어떤 사람은 철저히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데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금 문제를 포함하여 사회생활 대인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닮기 위해 예수님처럼 행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화폐로 세금을 바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이신 예수님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 거룩한 마음과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바쳐야 할 세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그분을 닮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물질의 봉헌이나 형식적 의무이행은 꼬박꼬박하면서도 동료 인간들에게 무관심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인간답다고 할 수 없겠지요.
오늘도 성전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성전세를 내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진정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나와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기꺼이 봉헌하는 우리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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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부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길이 단위인 1인치가 얼마만큼의 길이인지로 서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저는 1인치가 2.54Cm라고 말했는데, 신부님 중에서 다른 분이 1.54Cm라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2.54Cm가 분명하다고 했지만 이 신부님은 1.54Cm가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맞다, 틀리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잘 모르면 찾아보는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저의 말처럼 1인치는 2.54Cm이었습니다.
이 길이 단위는 전 세계 어디서나 딱 정해진 기준이지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싸움처럼 목소리를 높이 세운 사람 마음대로 기준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한 사람이 새롭게 규정할 자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선(善)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많은 성인 성녀들이 힘주어 강조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어기고 있을까요?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이 발동해서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먼저 생각하다보니 주님의 중심이 되는 삶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전세인 반 스타테르는 부자나 가난한 이 막론하고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위해 성전을 드나드는 이는 누구나 내야 한다고 율법이 정한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낼 의무가 있냐는 것이지요. 성전은 하느님의 집, 따라서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중심에 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세를 걷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냥 성전세를 내십니다.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황금률을 따르는 모습인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남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특히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모범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역시 그렇게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스타테르 한 닢을 성전세로 내라고 하시지요.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전세를 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곧 주님의 명령에 복종했을 때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복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정말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는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도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다(성녀 마더 테레사).
눈물 나도록 사십시오(‘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두 아이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25차례의 방사선 치료와 39번의 끔찍한 화학요법을 견뎌냈지만 죽음은 끝내 그녀를 앗아갔다.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샬럿 키틀리는 죽기 직전 자신의 블로그에 마지막 글을 남겼다.
살고 싶은 날이 참 많은데 저한테 허락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가 되어 함께 늙어 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죽음을 앞두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딸 아이 머리도 땋아줘야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 저만 아는데, 앞으론 누가 찾아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를 얻은 덕에 아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주는 기쁨을 누리고 떠날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복부 비만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요?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이요?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꽉 붙드세요.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먼저 생각하다보니 불행하다고 여기고 있지요.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정말로 눈물 나도록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진리를 관상하십시오! 그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공동체! 하면 언뜻 생각하기에 다툼이나 분열, 상처나 괴로움은 전혀 없는 지상천국으로 상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도공동체 역시 또 하나의 세상일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결핍된 존재들, 세상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모인 수도공동체이다보니 그 안에서 구성원끼리 벌어지는 옥신각신, 티격태격, 아옹다옹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너무나 다른 너로 인해 상처입고 괴로워합니다. 반대로 그로 인해 또한 행복해지고 그와 더불어 성화의 길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고통도 당하고 십자가도 크지만 수도공동체, 그 안에서 성장도 하고 기쁨도 누리는 사랑과 증오로 섞여진 맛있는 비빔밥 한 그릇이 수도공동체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만치 않은 수도공동체 생활 해나간다고 ‘쌩고생’하는 봉헌생활자들에게 참으로 큰 귀감이 되는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스페인 태생의 명설교가이자 정통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이면서 도미니코 수도회 창설자이신 도미니코(1170~1221) 신부님이십니다.
도미니코회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복음의 전달자라는 신원의식을 드러냈습니다. 낮 동안 동료들과 엮어가는 수도생활 속에서 그는 더없이 명랑하고 소탈했습니다.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붙임성이 많았는지 그의 주변은 언제나 그를 존경하는 동료 수도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다가 밤 시간이 다가오면 그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주 밤새워 기도하곤 했는데, 너무 열심히 기도하다보니 동료 형제들이 그의 기도소리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덕행 중에 눈에 띄는 것 한 가지는 그의 과묵함입니다. 그는 수도공동체의 분열과 상처의 주원인이 되는 말을 지극히 아꼈습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은 주로 이런 때였습니다. 하느님을 찬미 할 때. 형제들을 칭찬할 때. 하느님 앞에 형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드릴 때.
무엇보다도 도미니코 신부님은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인품과 높은 성덕에 감화를 받은 그 지역 교황대사가 몇 번에 걸쳐 그를 주교품에 올리도록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마다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교직에 오르기보다는 공동체 형제들과 더불어 겸손하고 가난한 한 수도자로 남기를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도미니코 신부님이 살아가셨던 12~13세기는 교회, 정치, 경제적으로 급변하던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 여러 국가들의 출현이 있었지만 그에 따른 빈곤층을 양산했습니다. 십자군은 이슬람과의 끝도 없는 전쟁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이런 저런 이단으로부터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극단적 청빈주의, 극단적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이단들이 성행했는데,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선물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가 바로 도미니코 신부님이셨습니다.
도미니코 신부님은 여러 이단들로부터 가톨릭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통 교리에 능통한 설교단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유능한 설교자들로 구성된 도미니코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정통 가톨릭 신앙의 파수꾼으로서 선봉에 선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언제 어디서건 누군가의 회개를 위해서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들의 모토인 ‘진리를 관상하십시오! 그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에 따라 밤낮없이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공부하고 그 깨우친 바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미니코 신부님께서 남기신 모범 가운데에서 오늘 날 우리 사제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말로서 만의 설교’가 아니라 복음 선포자가 먼저 복음대로 살아감을 통해 가르치는 ‘행동이 뒷받침되는 설교’입니다.뿐만 아니라 그의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설교의 배경에는 늘 깊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기도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도미니코 사제 축일입니다. 동창 중에는 두 명이 도미니코 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신부님은 운동을 잘 하셨습니다. 테니스, 농구, 축구와 같이 공으로 하는 운동을 잘 하였습니다. 다른 신부님은 음악을 잘 하셨습니다. 전체 회식이 있을 때면 우리 반을 대표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두 분 신부님 모두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실천에 옮기는 성격이었습니다. 한분은 운동만으로 20킬로를 감량하였습니다. 그것을 10년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감량도 중요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신부님은 악기를 손에 잡으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하였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동창 신부님들을 생각하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실천을 할 때는 주저하곤 합니다. 실천을 하다가도 며칠 하고 그만두곤 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금연을 하겠다고, 금주를 하겠다고,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은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업은 이윤을 목표로 사업을 합니다. 기업의 이윤은 고객들에 의해서 생기게 됩니다. 고객의 만족이 높으면 기업은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기업에서 생각해 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기업은 성공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간다면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도 있을 것입니다. 감동한 고객은 본인은 물론 이웃들에게도 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고객을 감동시키는’ 경험을 했습니다. 4달 전에 운동화를 샀습니다. 요즘은 와이어로 조종하는 신발이 생겼고, 저는 그런 신발을 샀습니다. 신발 끈을 묶는 불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와이어를 조종하는 둥근 부분이 떨어졌습니다. 수리를 맡기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어디로 갔다 주어야할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상담원은 제 전화를 받고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가겠습니다. 수리를 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회사에서 저의 신발을 가져갔습니다. 수리를 하면 갖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감동’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만큼 하는지 돌아봅니다. 사목은 ‘서비스’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목의 현장에서 사제들이 교우들이 만족할 때까지, 교우들이 감동할 때까지 봉사하면 좋겠습니다.교황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양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성당에서 주보 정리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제가 있다면, 넓은 마당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줍는 사제가 있다면, 장례가 나면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아가서 연도를 하는 사제가 있다면, 교우들이 오기 전에 성당에서 기도를 하는 사제가 있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그날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제가 있다면, 아픈 신자가 있으면 찾아가서 위로를 하고, 기쁜 신자가 있으면 찾아가서 함께 기뻐하는 사제가 있다면, 약수터로 가서 교우들이 마실 물을 떠오는 사제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계획한 것들, 생각한 것들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다. -하느님 체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심을 입증합니다. 예전 수도공동체 형제들과 에버랜드에 소풍갔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영원한 땅’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에버랜드의 말뜻대로 인상적인 하루 였습니다.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모두가 흥겹고 즐거운 표정들이었습니다. 결론은 한 번이자 두 번은 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외적 화려함과 즐거움과는 달리 내적 공허감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수도원이 진정 하느님 계신 에버랜드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여 한 두 번 왔던 이들도 하느님이 그리울 때마다 찾는 진짜 에버랜드 수도원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유명한 성지만이 아니라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기에 모두가 거룩한 땅 성지입니다.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체험할 거룩한 땅 에버랜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부터 에제키엘 예언서의 시작입니다. 구약 예언자들의 색깔이 참 다양하고 풍부하여 흥미롭습니다. 하느님은 필요한 때, 그에 적절한 예언자들을 보내주심으로 세상에 개입하심을 느낍니다. 마치 그 시대에 필요한 성인들을 보내 주시듯 말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도 이단이 횡행하던 시대에 복음적 가난의 삶과 설교를 통해 이단의 확산을 막아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분도회 중심에서 탁발수도회의 전성기가 펼쳐집니다. 당대 비슷한 시기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와 도미니꼬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대의 필요에 따라 하느님이 보내주신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에제키엘이 하느님을 만난 곳은 하느님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닌 유배의 땅, 바빌론 크바르 강 가였습니다. 에제키엘서의 서두 말씀이 장엄합니다.
‘여호야킨 유배 제 오년에,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렸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은 강하시다.’ ‘하느님은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할 때 실로 내적으로 강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손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는 표현은 6회나 반복하여 나옵니다. 환시 중에 계시된 하느님의 생생한 체험을 표현합니다.
오늘 크바르 강가에서 에제키엘의 하느님 체험은 얼마나 황홀한지요.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이방의 유배지 보잘 것 없는 땅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체험한 에제키엘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어느 수도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요 이런 하느님을 찾아 만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체험하며 사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담담하신 모습의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합니다. 바로 하느님 체험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이어 성전세에 관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서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 체험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전세를 면제 받아 내지 않아도 되지만 내도록 제자들을 설득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지엽적인 일로 걸림돌을 만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지혜로운 조치입니다. 호수에서 잡은 고기 입에서의 스타테르 한 닢은 하느님의 전능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방법으로 도우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위에 있음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입니다. 크바르 강 가에서 에제키엘에게 내린 주님의 손이 오늘 복음에서는 카파르나움의 예수님 위에 내리셨음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손이 우리 모두 위에 내리고 주님의 말씀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내적으로 정화淨化되고 성화聖化되는 복된 시간입니다.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2테살2,14참조). 아멘.
적절한 순서와 아량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희생제물을 봉헌하기 위해서 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참 주인이시고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 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귀 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
정상호 신부님
우리 “어머니!” 라고 부를 때랑 “사장님!” 하고 부를 때랑 스스로 느끼는 게 다르지요? 어머니 하면 왠지 모르게 울컥하기도 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반면에 회사 사장님은 멀고 어려운 관계 또는 딱딱한 느낌이 드실 겁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은 예수께 질문한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는 하느님 경배에 대한 시각의 차이입니다. 성전 세에 대해 예수께 물어본 이들은 규정과 예의범절로 가득 차서 하느님을 회사 사장님 대하듯 모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반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겉으로는 지켜야 할 규정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녀된 도리로서 이 정도는 하자는 취지에서 정해진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규정에만 집중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회사 사장님처럼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신앙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자꾸 사소한 문제에 부딪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미사포를 안 가져왔는데 그러면 성체를 모셔야 되느냐 마느냐 또는 성호경을 왼손으로 그어도 되느냐 등등 말입니다. 이런 질문들은 오늘 예수께 질문을 던지는 이들처럼 신앙생활을 규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내 가족, 내가 모시는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하느님은 내가 미사포를 쓰든 안 쓰든 내가 가진 마음을 더 중요하게 보실 것이고, 성호경을 왼손으로 긋든 오른손으로 긋든 나의 마음을 보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경배는 결코 나의 사정을 하나도 고려해 주지 않고 회사의 이익과 사정을 따지는 사장님에 대한 경배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내 가족, 내 아버지처럼 생각할 때에만 올바를 수 있습니다.
<성전 세를 바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는데(마태 17,24), 이 말은 성전 세를 빨리 내라고 재촉하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내십니다." 라는 대답은(마태 17,25) "곧 내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시고, 베드로 사도가 "남들에게서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다시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7,25-26).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니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마태 17,27)"
이 말씀은 현실 제도와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비위를 건드려서 그들과 충돌하거나 박해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전 세는 하느님께서 직접 정하신 선(善)한 제도입니다(탈출 30,13).
그리고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善)한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의 진짜 뜻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제도를 존중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입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선한 법을 모범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인데, 어쩌면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도들 사이의 논쟁이 반영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사도들에게 "당신들의 스승이 정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세를 안 냈을 텐데, 성전 세를 낸 것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라고 시비를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비에 대해서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원래 성전 세는 단순한 세금이 아니라 속죄 예물이었습니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탈출 30,15)."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세례를 받으신 일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예수님께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라고 말했습니다(마태 3,14).
그때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말씀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또 사람들에게 겸손과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서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고, 성전 세도 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도, 베드로 사도에게도 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기적을 행하셔서 돈을 마련하십니다.
"...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베드로 사도가 물고기를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서 돈을 마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거나...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도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사실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뭔가를 봉헌하는 것은 자기의 것을 바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것'이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모두 다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라고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내게 주신 모든 것 주의 것이오니, 오직 주님 뜻대로 처리하소서.
당신 사랑 은총을 나에게 주시면 아무것도 더 바람 없으오리다(성가 22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