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9월 4일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09.04|조회수1,181 목록 댓글 0

제1독서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다라,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시작입니다. 1,1-8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2 콜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형제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5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6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7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8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cure of simon's mother in law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이 그들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며 인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전해 듣고 감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시고 이어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목숨을 구걸하려고 항소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말을 아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수 만든 수의를 보내며 그것을 입고 마지막 길을 가라고 하였습니다.천주교 신자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란 무엇일까요? 사형을 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일까요? 아닙니다. 사형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니 돈 걱정, 병 걱정, 죽음 걱정 등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기만 하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멀쩡한 사위가 가정을 떠나 예수님만 따라다니니 장모 입장에서는 열병에 걸릴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병을 고쳐 주시고 당신을 시중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병자들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은 모든 병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또한 마귀들도 쫓아내십니다. 마귀들이 죄짓게 만들고 그 죄가 우리를 종살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또한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죄와 상처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시려고 세상에 파견되셨습니다.이 세상에서 잘살게 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생명까지 잃게 되어도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을 아주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장 가까운 당신의 제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저 없이 그 부인을 찾아가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그 “열을 꾸짖으시니”라는 표현을 보면 열병이란 것이 내 안에 있는 불평불만으로 생긴 화병 같은 것인가 봅니다. 내 안에 분노와 미움을 일으키는 악한 영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셨기에 마음의 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병만이 아니라 육신의 병도 치유하십니다.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어 모든 것을 창조의 질서로 되돌리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전하십니다. 그러자 마귀들이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봅니다. 군중은 그런 예수님을 곁에 오래 두고 싶어 합니다. 수시로 삶을 괴롭히는 병과 고통으로부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하느님의 뜻을 물으시고, 당신의 소명을 재확인하십니다. 칭송받고, 영웅시되는 곳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해방과 치유를 바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선교 사명을 엿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러한 복음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복음이 되고, 사람들의 칭송에 안주하지 않으며, 더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자기만족에 머물면, 믿음도 이기적 욕망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언제나 예수님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도로 숨을 쉬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카파르나움에서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외딴곳에 계신 그분을 발견하고서는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 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른 고을로 가십니다.

군중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권위를 보았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가 이미 벌써 도래했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평가가 주님께는 적절하지도 않고 커다란 결례가 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아주 출중하게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시쳇말로 인기 짱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머물려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한 장소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매이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그들만의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그들만을 당신의 지지자로 만들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홀연 떠나서 다른 이들에게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선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곧 기쁜 소식이 아닌 ‘나’를 중심에 세우고 내 주위에 세력을 형성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파견된 사람은 카파르나움에만 남아 있으려 해도 안 되고, 어디를 가든지 늘 카파르나움 사람만 데리고 다녀도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심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선전이 아니라, 치유받은 시몬의 장모처럼 조용히 봉사함으로써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의 하루 일과를 보여 줍니다. 이 대목을 사람들은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4)라고 이름 붙입니다. 주님의 하루 일과는 참으로 바쁘십니다.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시어,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는 등, 하루 종일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무거운 죄에서 풀어 주시며 그들과 함께 지내십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질병은 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병든 이의 질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은 그를 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속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간의 질병을 신비에 속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질병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고쳐 주십니다. 아픈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분을 따르는 우리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아파하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또 매일을 기쁜 소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

사람들은 의학 지식을 앞세워 질병과 믿음을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개입하시면 ‘못 고칠 병’은 없는 것이지요. 다만 그러한 청을 ‘감히’ 못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심하시고 병자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질병도 주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의 치유는 ‘그분의 다스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질병을 그분의 손길로 보게 합니다. 병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병이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병을 이기게’ 되는 것이지요.

병을 친구라 생각하면 인생의 또 ‘다른 불가사의’와 우정을 맺는 것이 됩니다. 그 우정을 주님께서 주관하신다고 여기면 마음은 달라집니다. 질병을 은총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주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유의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겁니다. 그리하여 무서운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질병은 신비에 속합니다. 병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조금씩은 병들어 있습니다. 질병도 ‘인간 본질’의 한 부분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건강만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병 때문에 부정적으로 바뀐 시각을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치유 받은 사람 중에는 좌절이나 포기를 체험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육체의 아픔만이 치유의 대상은 아닙니다. 몸은 멀쩡해도 마음과 정신이 황폐해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개입이 절실합니다. 그분께서 치유해 주셔야 새로운 방향으로 삶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살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

가끔 우리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견이 맞는 사람들끼리 한패가 되어 파벌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견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병자를 돌보아 주고 악의 세력을 쫓아내며, 바로 그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서로 취향이나 의견이 달라도,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사명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자동차 사고로 오랜 시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환자가 깨어나기 힘들 것으로 예측했고,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말씀과 달리 점점 호전되었고 어느 날 드디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 환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손을 꽉 잡아주었습니다. 이 신체접촉을 느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고 이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손을 꽉 잡아준 사람은 당시에 실습 나오는 의대생이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깨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매일 저녁 병원을 마칠 때 들려서 손을 꽉 움켜쥐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작은 신체접촉이 삶을 붙잡는 힘이 된 것이지요. 


신체적 접촉은 그 어떤 치료 약보다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손길 한 번이 더 큰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1960년대, 새끼 원숭이가 엄마의 신체접촉 없이 잘 자랄 수 있는지를 실험했습니다. 비록 엄마 원숭이의 신체접촉은 없었지만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마련해주었지요. 그러나 이 새끼 원숭이는 잘 자라지 못했고 심지어 다른 원숭이보다 빨리 죽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 역시 별 차이가 없습니다. 신체적 접촉은 생명의 영약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치유해주었습니까? 복음은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셨다고 말합니다. 질병을 앓는 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말씀 한마디로 아픈 사람을 충분히 고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시고 또 손을 얹으면서 고쳐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한 번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또 아픈 곳을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도 아니겠지요. 단순히 병이 치유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치유의 손길을 받은 사람이 그 뒤로 어떠한 질병의 고통 없이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질병의 고통도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이 세상의 삶을 마치는 죽음의 고통도 겪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병이 치유되는 것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기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생명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어렵고 힘들 때 당신의 손을 우리가 꼭 잡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손을 꽉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햇빛과 따사로운 온기를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마땅히 천둥과 번개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칼릴 지브란).


감사하는 마음

아마 사람들은 비관론자보다는 낙관론자를 더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관론자가 낙관론자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80세가 넘을 때까지 비관론자로 살았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매일 내용을 달리해서 21일 동안 계속하면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을 비관론자로 살아왔던 84살의 남자가 이 방법을 통해 낙관론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의 성격 구조까지 바꿉니다. 감사의 놀라운 힘을 굳게 믿으면서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해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환영받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도 모자라 벼랑끝까지 내몰리셨던 예수님이셨는데, 카파르나움에서의 상황은 정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파악한 군중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옵니다. 그분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도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며, 단 한명도 제외시키지 않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과 자비가 예수님을 통해 당신 백성 위로 흘러넘치도록 퍼부어졌습니다. 은총의 소낙비가 아낌없이 쏟아 부어진 것입니다. 바야흐로 구원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갖은 횡포를 부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던 마귀들은 예수님의 큰 빛 앞에 힘을 잃고 나가떨어졌습니다.


마치 혜성처럼 등장하셔서, 존재 자체로 위로요 기쁨이 되어주신 분, 평생 따라다니던 불치병을 낫게 해주신 분, 자상한 위로의 눈길로 희망을 주신 분,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 머물러 있던 동네를 순식간에 축제의 고을로 바꿔주신 분, 예수님 앞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예수님만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자신들을 세세대대 지켜주실 영원한 보루요 희망이신 분임을 파악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꼭 붙들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놓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떠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제발 떠나지 말아주십사고 간곡히 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때,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겪으셨던 배척과 실망을 돌이켜보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환대는 참으로 큰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례자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간절한 청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미지의 세상을 향해 지체없이 떠나십니다. 예수님의 발길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유다 지방으로, 유다 지방에서 팔레스티나 전역으로,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이방 세계 전역으로...


예수님은 애초부터 좁은 시냇물에서 머물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강으로, 더 넓은 바다로, 온 세상 전체로 나아가셔야 할 크신 존재셨습니다. 그분은 경계나 국경, 민족이나 인종 사이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존재셨습니다. 그분의 복음과 사랑의 메시지는 세상 방방곡곡 인류 전체에게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복음 4장 43절)


혹시라도 오늘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나 혼자만, 우리들만 독차지하고자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좋으신 분을 어떻게서든 전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발길 닿는 곳마다 예수님처럼 크게 환대받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 존재 자체로 행복해하며, 어떻게서든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합니까. 우리를 보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옷자락을 붙들고 있습니까? 존재 자체로 환영받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정반대 상황은 아닙니까? 우리가 존재 자체로 부담스러운 존재, 반대 표양으로 민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제발 우리가 빨리 떠나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떠나기 가장 완전한 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되었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 마저 잃고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 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 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언제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그것은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였을 때일 것입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분들은 학위를 따지 못하고 들어갈까 봐 공부하면서도 노심 초사합니다. 결과물이 없다면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닌 것입니다. 선교사는 아직 떠날 때가 아니었음에도 지쳐서 먼저 그 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언제 그 자리를 떠야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 하시고, 병자들을 일일이 다 고쳐주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잡을 때가 바로 떠나야 할 때인 것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영광을 받기 시작하면 이제 남은 것은 교만해지는 일뿐입니다. 나를 받아들이고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면 이미 그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일은 다 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내가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첫 본당으로 부임하던 날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이 약간은 저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은 당황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를 맞이하기 위해 먼저 도착한 친구 신부님이 부임 축하를 이미 다 받은 것이 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당신이 부임하는 게 아니라고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지만 신자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었던 그 시기는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임할 때 보다는 떠날 때의 느낌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 때는 누구나 똑 같이 환영받지만 갈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년 반 동안 함께 했던 신자들을 떠날 때 신자분들은 많이도 울어주셨 습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떠날 때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 나도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할 때가 가장 행복한 이별의 순간인 것 같습니다.


만약 너무 오래있어서 ‘올해는 안 가시나?’ 라는 신자들의 표정을 본다면 이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습니까? 혹은 아직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서 떠날 때 신자분들이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슬픈 이별일 것입니다. 떠나기 위해 가장 완전한 때는 바로 서로 눈물 흘릴 수 있는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인정받기 시작할 때 떠나야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러 이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나만 울고 많은 사람은 웃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나만 웃고 많은 사람은 울 수 있도록 사십시오.” 참으로 어떻게 떠나야하는지 잘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떠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고 해 질 무렵까지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주셨으며 마귀 들린 사람들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고 떠나지 말아달라는 사람들에게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하고 말씀하시면서 또다시 복음 선포의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여러 가지 바쁜 사목 일정 중에도 힘든 기색 없이 또 다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길을 나서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사도직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먼저 예수님은 병든 이들을 치유해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실 치유와 구마는 인간적인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도직도 역시 성령과 함께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주님 안에 참된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그 외딴곳은 광야와도 같은 곳이었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힘을 충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예수님처럼 늘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충전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들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사람들에게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하시며 떠나가셨습니다. 우리가 사도직을 수행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곳에 머물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은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매너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잊지 않으셨고, 과감히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복음선포의 여정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도로서의 소명을 늘 기억하며 자신의 안위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늘도 내일도 복음선포의 여정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병의 의미

곽승룡 비오 신부님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루카 4, 40)


건강은 사람에게 살아가는 힘과 그 자체로 자신감과 신뢰심을 느끼도록 한다. 그래서인지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용기까지 생겨 살아간다.

하지만 반대로 병은 허약함과 무능함을 보여 주고, 실행하는 일을 할 수 없도록 방해도 하며, 결국 고통이 기쁨과 사는 맛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보다 광의적인 면에서 병의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 볼 수 있다. 병은 우리를 이웃에게 다가가도록 한다. 부부간에 갈등과 소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둘 중 한사람이 병이 들어 아플 때, 서로 새롭게 가까워진다.

중병과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도 하지만 중병과 긴병은 종종 인간을 하느님께 더욱 가깝게 하는 좋은 효과를 지니게 한다.

병으로 각자가 약해졌지만 그를 통해 고독과 고통을 분명히 인식하는 인간성숙의 소득이 분명 발견된다. 그러므로 병은 그리스도 안에 휴식과 안식을 찾으며 기도 속에서 성장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주님 안에서의 쉼과 기도는 우리의 병을 치유하도록 도와주고, 삶의 의미를 더욱 긍정적으로 깨달으며, 영성적으로 치유하도록 느끼게 한다.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게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 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 퍼질 테니까요.




복음, 기쁜 소식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편안한 사람에게 ‘복음’은 거리가 멀다. 아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무엇이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


소나무 한그루 캐서 둥굴게 뿌리를 보호대로 둘러 싸 놓고는 2-3일 방치를 했다. 안정되게 자라온 소나무는 갑자기 위기상황에 직면한다. 소나무는 자신이 수분공급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다.


자생력은 위기관리대처능력이다. 소나무를 이식을 위해 캐서 2-3일 동안 뉘어 놓으면 살기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할 것이다. 자생력의 한계를 맞이할 때 소나무에 대한 모든 필요한 조치는 ‘복음’ 이 된다.


부족함을 가질 때, 복음의 필요성을 지닌다. 죄인들, 병자들, 마귀 들린자,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없는 사람들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이 부족함의 한계극복을 이루어 주는 구원투수는 ‘복음’이 된다. 오늘도 ‘복음’(루카4,38-44)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바삐 움직이신다. 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부족함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복음의 소명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4,43)는 것임을 명심하라.


어쩌면 이런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가?

오늘 괴산 소수면에 위치한 재단법인 ‘눈비산 마을’을 찾았다. 이사회 모임에 나는 부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사회는 이 마을을 ‘농산촌 복합체험, 연수, 휴양마을’을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한동안 ‘힐링’이 유행어였는데, 요즘은 ‘체험’이 유행어가 되어 있다. 아름다운 꽃 한송이의 만남도 체험이다. 한순간의 체험으로 인생이 확 바뀔 수 있다.

‘눈비산 마을’이 훌륭한 체험장소로 거듭나고, 우리 ‘놀체인 양업 사회적 협동조합’과 연대하기로 마음을 모아 본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우연히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읽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단어 하나하나가 제게는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지만 이웃의 아픔, 망국의 아픔을 괴로워했던 젊은이의 고뇌, 그러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는 굳은 결의가 드러나는 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이 경매에 나왔다고 합니다.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시인의 마음은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윤동주 시인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습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박해의 엄중한 상황 속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시련도, 아픔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교우분이 빛바랜 신문 하나를 제게 주었습니다. 1988년 발행된 ‘미주 평화신문’ 초판이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의 초청 강연 기사가 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사람의 기행문이 있었습니다. 미주 평화신문을 발간하는 이유를 사설로 밝혔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각계각층의 격려와 축하의 글이 있었습니다. 통일에 대한 열망, 인권과 정의의 실현을 촉구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신문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의와 각오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게 평화신문 초판을 주신 것은 그런 열정과 각오로 신문을 제작하라는 염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 홈페이지에 저의 인사말을 올렸습니다. 인사말이면서 저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에파타(열려라)’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보물을 찾아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충실하게 전하겠습니다. 미주 한인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탈리타 쿰’하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이 ‘탈리타 쿰(일어나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합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나의 삶이, 나의 신앙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면, 타성에 젖어있다면, 열정이 식었다면, 희망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새롭게 신발 끈을 매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뜨거운 삶, 바오로 사도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의 열정,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단면이 보여집니다. 그분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복음 선포의 길, 선교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루카 4,38).

예수님께서 공적인 공간인 회당을 떠나 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집으로 가십니다. 물론 그곳에도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이, 심한 열에 시달리는 시몬의 장모가 있어 예수님의 치유는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루카 4,40).

소문을 들은 이들이 병자들을 데려오니 시몬의 집은 공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립니다. 물론 제도적으로 회당과 같은 공적인 공간이라 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거룩한 만남과 모임의 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매우 개별적이고 친밀한 손길을 내미십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이처럼 공동체성과 개별성 둘 다 중요합니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공동체의 공적 예배와 모임도 중요한 동시에, 각자 자신의 인격과 소명에 걸맞게 맺는 주님과의 접촉과 사랑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루카 4,42).

예수님께서 지극히 내밀한 사적 장소를 찾아 외딴곳으로 나가십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머물며 사랑을 나누고 일치를 이루는 침묵과 고독의 시간입니다. 외부를 향해 활짝 열어젖혀진 공간에서 구마와 치유, 설교로 분주한 시간을 꾸려가실 힘은 이 뿌리에서 나옵니다.


"나는 하느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화답송).

하느님과 깊은 만남과 사랑의 일치로 그분께 단단히 뿌리를 내린 영혼의 모습을 시편 저자가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했지요. 사람들 사이에서 활기차게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 올리브 나무 같은 이유가 바로 이 시간, 이 공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43).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드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반해 그분을 소유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얽힐 수도 있는 순간에 당신 사명의 본질을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서도 안주하거나 고착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에게서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관상하며 그 역설적 아름다움에 매료된 영혼 외에는 결코 그분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다른 고을로 떠나보내면 그분을 그냥 놓치고 마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과 자기 고장의 이익에 갇혀 그분을 독점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과 생각이 열려 발걸음을 합하면 결국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고, 또 영원히 그분을 소유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콜로새 성도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치하하며 편지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콜로 1,7).

콜로새 성도들을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인 동시에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사랑을 사도들에게 알려 준 사람"인 에파프라스는 성도들과 사도들 사이의 가교이면서 선하고 충실한 목자임을 사도 바오로가 증언합니다. 성경에 몇 차례 등장하지 않는 에파프라스이지만 우리는 그가 사도 바오로를 닮았고 예수님을 닮았다는 걸 느낍니다.


이처럼 복음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배운 대로, 그분의 마음과 그분의 손길과 그분의 목소리가 될 때 "열매"(콜로 1,6)를 맺으며 퍼져가는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44).

예수님의 동선이 더욱 넓게 확장됩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신앙 선조들, 미약하나마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큰 탄력을 받아 이어집니다. 주님에게서 시작된 동선은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미완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목소리와 발걸음이 그 선을 이어서 온 세상 곳곳으로 연결되고 연장되고 퍼져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푸르른 올리브 나무처럼 한없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늘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를 위해 작은 기도 올려주시길 벗님께 청합니다. 더욱더 말씀과 성체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도록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늘 벗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색용이 아닌 진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시몬의 장모가 치유되는 얘기와 일련의 얘기들인데 잘 아시다시피 이 얘기는 공생활 초 그러니까 시몬 베드로와 첫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 어느 한 날에 있었던 얘기가 아니라 주님의 반복되는 일상이요 그래서 주님의 시간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활 내내 이런 시간표로 사셨다는 주님 시간표의 예시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표 안에 식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식사도 않으시고 쉬지도 않으셨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리 없고 그런 것들은 뺀 영적인 시간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것은 신비주의의 수법인가요?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이 사생활을 숨김으로써 신비로운 매력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게 되는 그런 수법 말입니다.


주님을 신비롭게 만들기 위해 루카복음사가가 주님의 일상에서 먹는 것이나 쉬는 것을 뺐다고 보는 것은 너무 세속적인 이해이겠지요.


우리의 일상에서는 먹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고 쉬는 것이 없는 삶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삶이라고 여겨지지만 주님의 삶에서 먹는 것이나 쉬는 것은 의미가 크지 않기에 뺀 거지요.


그러니까 영적인 시간표의 특징은 먹거나 쉬거나 노는 것과 같은 나를 위한 시간이 시간표의 중심이 되거나 비중이 크지 않고, 사람들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타적인 봉헌의 시간과 반대로 세상에서 물러나 하느님 안에 깊이 잠기는 관상적인 봉헌의 시간이 중심이 되거나 비중이 큰 시간표입니다.


그런데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과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은 겉보기에는 정반대로 보이고 실제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럴 경우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열심히 정치활동을 하다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은 정치활동을 그만 두는 것이 되지만 우리 신앙인의 경우, 특히 성인들의 경우는 오늘 주님처럼 이웃 사랑을 위해 세상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갔다가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세상에서 물러나기도 하는 것이며 이때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사랑이고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러므로 영적인 시간표와 그렇지 않은 시간표의 차이는 사랑의 비중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자는 시간과 친구들과의 즐거운 친교의 시간과 쉬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이웃을 위한 봉사의 시간이나 복음 선포의 시간이 거의 없다면, 그리고 거기에 신자구색 맞추기로 기도시간을 아침에 10분 저녁에 5분 겨우 얹는 정도라면 그만큼 그것을 영적인 시간표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신자구색용 시간표와 진짜 신자의 시간표는 확연이 다르겠지요?


그리고 진짜 신자의 시간표도 무엇이 더 중시되느냐, 무엇의 비중이 크냐에 따라 시간표가 다를 것입니다.

기도가 복음선포 시간보다 더 많은 관상적 시간표가 있고 복음선포가 기도 시간보다 더 많은 선교적 시간표가 있겠지요.


수도자구색용 시간표도 있을 것이고, 진짜 수도자의 시간표도 있을 것이며정주적인 시간표와 선포적인 시간표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순례 오셨으니 이 세상에서도 선포를 위한 순례의 삶을 계속 사시겠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아무튼 오늘은 구색용이 아닌 진짜 시간표를 짜 봐야겠습니다. 




'전부를 위하여'(루카 4장 38~44)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기쁜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인기가 급상승!

병을 치유받고자 하는 이들이 밤낮없이 찾아오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위해 파견되셨음을 밝히십니다.

제가 본당에서 소임이동하게 되었을때 ~ 

한 자매님이 '이럴줄 알았으면 정 주지 말껄 그랬어요 흑흑 ~'

공인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일부가 아닌 전부를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일부에 푹 빠지면 주어진 소명을 살지 못하게 되니 아무리 예수님이 좋아도 아무리 신부님이 좋아도 아무리 수녀님이 좋아도 맡겨진 직무를 다할 수 있도록 적정 거리를 두는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소명의식을 살게 하소서'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 43)

( “I must also preach the kingdom of God to other cities, because it was for this reason that I was sent.” )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루카 4, 43)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 4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에 가장 큰 목적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신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인간은 범죄를 거듭하면서, 죄속에 묻혀 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는 암흑의 권세에 짓눌려 인간은 희망도 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시어,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통해서 원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자녀됨으로 회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기쁜 소식으로 우리의 삶을 희망차게 만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바로 예수님의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모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와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구세주 로써 기쁜 소식 자체라는 것을 세상 곳곳을 나가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 곳곳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서 있는 것이지요. 바로 온 세상 곳곳에 서 있는 교회들의 시작이 바로 예수님의 이런 복음전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세상 사람들 안에서 수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일을 함께하는 기쁨과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입니까?

• 나는 예수님이 전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의 성전에 대해 말씀하셨다.

오리게네스 사제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Tomus 10,20: PG 14,370-371)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자기 육신이나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여기서는 유다인들을 뜻합니다.) 즉 아버지의 집을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네들을 성전에서 쫓아낸 데 대해 화가 치밀어 하나의 표적을 청합니다. 그 표적을 통해서, 자기네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는 듯하지만 실은 당신 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하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성전과 예수님의 몸 두 가지 다 교회의 상징이라고 나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산 돌로 세워져 거룩한 사제로서 신령한 집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로 모시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참된 성전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돌들의 일치와 조화는 “내 뼈가 다 흩어졌나이다.”라는 시편 21편의 말씀에 따라 끊겨 나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박해와 혼란을 끊임없이 충동질하고 성전의 일치를 깨뜨리는 자들이 일으키는 전쟁으로 인해 이 일치는 끊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복구되고 몸은 사흘째 되는 날, 즉 환난의 날이 지나고 그 다음날인 완성의 날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을 세우는 이 뼈들이 주님의 위대한 날에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승리로 인해 다시 살아날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셋째 날이 참으로 동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수난을 뒤쫓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온 몸의 부활 신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묻힌 다음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도들의 온 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십자가에 못박혀 이제 생명이 끊긴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처럼 우리 각 사람도 그로 인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은 우리에 대해 죽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세상에 대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묻혔습니다. “실상 우리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우리도 하나의 보증을 얻었다는 뜻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고 말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요즘 “잘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이요,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진 아들은 내 아들.”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큰 도둑, 며느리는 좀 도둑, 딸은 예쁜 도둑.”이란 표현과 함께 “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며느리의 남편을 아직도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 다음에 커서 누구의 아들·딸이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43절) 라고 하시며 여러 다른 회당으로 가셔서 계속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지금 나는 누구의 아들·딸입니까? 아무도 반기지 않는, 그야말로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요 고집쟁이는 아닌지요? 아니면 나만 보면 스슬 피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요? 나를 반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나를 왜 반깁니까? 나는 그에게 무엇을 줍니까? 이 다음에 아주 많이 늙어서 허리 꼬부라지고 움직이지조차 못할 때, 과연 누가 나와 함께해 주리라고 기대합니까? 우리의 생애가 그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며 그리워지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을 방해하는 악마의 농간 <루카 4, 38-4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말에 “호사다마”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 악이 숨어들어 좋은 일에 악마적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의 일에 마귀들이 끼어들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소리치는 마귀들을 꾸짖으셨다고 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악마는 하느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여 행복한 낙원에서 살지 못하게 하고, 주님이 공생활을 준비하시는 광야의 끝날 나타나 유혹하여 인류구원을 망치려 하더니,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서 악마를 내쫓고 병을 낫게 하니 시기, 질투가 난 악마는 주님의 일을 방해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런 악마의 장난은 우리 생활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올바른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악마는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하여 악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사람은 권력, 재력, 명예를 얻어 누리기를 갈망합니다. 무능이 아니라 능력이 있어야 하고, 가난이 아니라 부가 있어야 하고, 왕따와 무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과 친교를 바랍니다. 살고 있으나 이것을 얻는데 부정, 불의, 거짓, 사기, 복수심으로 억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선의와 참사랑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보기 좋고 이름답게 만드시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도록 마련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시기에 좋더라.” 하셨듯이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참 목적이 바로 진실과 사랑 속에 차별 없이 모두 행복하게 살도록 마련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계시 된 말씀은 한 획도 틀림이 없고 진실한 사랑을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참사랑을 심어주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인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악마의 세계는 시작부터 시기 질투로 시작하여 선의 반대 악으로 가득 차고 행이 아니라 불행으로 살고 있으니 모두 그곳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악은 선의 탈을 쓰고 나타납니다. 권력을 가지고 싶은 사람에게 사기, 거짓, 불의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우주가 한 점의 다름도 없이 질서에 따라 밤이 오면 아침이 오게 되어 있고, 하느님의 뜻이 계시 된 말씀은 한 획도 틀림이 없고, 진실한 사랑을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참사랑을 심어주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인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자유를 빼앗고, 서로 평등하게 살려는 평화를 빼앗고, 서로 즐겁고 기쁘게 살려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악마의 손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뜻을 먼저 앞세우는 사람은 악마의 앞잡이고, 다른 이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도 악마의 앞잡이고, 슬픔을 주는 사람도 악마의 앞잡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인 자유, 평화, 기쁨을 방해하는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내 자유와 너의 자유, 내 평화와 너의 평화, 내 기쁨과 너의 기쁨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되도록 일하는 사람으로 하느님 편에 서 있도록 기도합니다. 누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가든지 자유 평화 기쁨의 기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수도자의 참삶은 바로 순명, 청빈, 정결을 통해 자유, 평화, 기쁨을 사는 삶입니다. 수도자로 60년을 살면서 깨우친 진리입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38-40).”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이기도 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고, 치유나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잘 고치는 의사이신 분’이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이것은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사람들이 ‘해 질 무렵에’ 온 것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따로따로,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안수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는 것은, 양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고, 하나하나를 제각각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만 언급되어 있지만, 목자에게 초점을 맞추면,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다 알아듣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즉 ‘내 이름을’ 알고 계시고, ‘내 사정을’ 알고 계시고, ‘내 기도를’, 또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기도할 때, 내가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없고, 내 사정을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 기도를 왜 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란, 내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 주님께 그것을 알려 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내가 잘 듣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내가 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이 좋은 예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아파서 누워 있다는 것은 누가 알려 드리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신 것은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고, 시몬의 장모는 식사 준비를 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이 대단히 크고 넓은 집은 아니었을 것이고,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금방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를 위해서 예수님께 청한 것은, 자신들이 시몬의 장모를 걱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즉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함께 받을 준비를 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병자 자신이 청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청했다는 것은, ‘사랑’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40절의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자 자신이 스스로 걸어서 온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병자들은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치유의 은총’은, 병자들만 받은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받았습니다.

(치유의 기쁨은 병자들만 누린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병자 치유’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만 하고, 병 자체를 없애지는 않으셨을까?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니까, 병 자체를 없애실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 주셨다면 인류 전체가 병고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인간이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안 믿는 사람들만 하는 질문은 아니고, 믿는 사람들도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곧장 옮겨 놓으시지 않고, 그 긴 세월 동안 온갖 고생을 하게 하셨을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서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셨고, 인도해 주셨습니다(탈출 13,21).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여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과 고통이 사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대단히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서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숙제.  




주님이신 예수님

이종훈 신부님

질병은 사람을 절대적으로 가난하게 만든다. 의사를 찾는 환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회복되기를 바랄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해서 회복시켜 주셨다. 기적적인 치유를 받은 이들이 얼마나 기뻤을까?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 하느님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이 늘 자신들 곁에 계시기를 바랐음은 당연하다(루카 4,42). 병이 나았지만 다시 아프게 될 테니까.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예수님은 다른 고을로 떠나셨다. 그분은 병도 고쳐주고 마귀도 쫓아내고 쉬운 말로 잘 가르쳐주셨지만 그것이 그분의 사명은 아니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 곳곳에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루카 4,43).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크고 확실한 기쁨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은혜를 입은 이들이 다시 병에 걸렸을 때 짧았지만 그분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그리며 그분을 찾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지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완성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의 내용을 이해시키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설명해놓았다. 그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그것들은 이해하기 참 어렵고 때로는 억지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혼란을 예상하셨고 잠시만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죄인을 위한 하느님의 죽음은 믿음의 대상이다. 보답해드려야 할 호의가 아니라 그저 감사하게 받는 아버지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실 때 그의 열을 꾸짖으시며 내쫓아버리셨다(루카 4,39). 왜 이렇게 열이 오를 때까지 일했느냐고 그를 탓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죄가 나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은 열을 꾸짖으시고 죄를 없애신다. 그분의 죽음이 그것을 보증한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시몬의 장모가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던 것처럼 당신의 죽음으로 용서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고 초대하신다. 


예수님은 억울한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은 부활하셨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분은 수많은 위인전 중 하나의 주인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시 병에 걸린 이들이 예수님 그리고 그분과 함께 지내던 시간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찾는다.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신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아플 때 오직 회복과 고통에서 해방됨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저를 구원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가 바라는 그것이 진실이고 진리임을 믿게 도와주소서. 아멘.




머리에 손을 얹고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님

중학생 때인가로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발목이나 다리 근력이 좋지 않으셔서 길을 걷다 무게 중심을 못 잡고 쉽게 접질리곤 하셨습니다. 그날도 삐끗하셨는데 하필 넘어지면서 손을 잘못 짚어 팔목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정작 다치신 분은 어머니신데 실제 불편한 사람은 가족이었습니다. 한 집안에 ‘엄마’라는 존재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니, 온 가족이 일단 끼니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당번을 정했습니다. 청소와 설거지도 순서를 정해서 했습니다. 빨래도 가족들이 돌아가며 해야 했습니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문제였는데, 당신이 제일 불편해하셨던 것은 머리 감기였습니다. 제 기억에 어머니 머리를 감겨드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 싶습니다. 샴푸로 거품을 내고 구석구석 시원하게 헹궈드린 후 수건으로 닦아 드라이어로 말려드리면, “이제 다 나았다!”며 미소 지어주셨습니다. 얼른 나으시라고 어머니 머리에 손을 얹어 마사지도 해드렸는데 그것은 일종의 ‘안수기도’였다는 것을 지금 깨닫게 됩니다.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행하시던 방법이었습니다. ‘안수按手’란 단순히 손을 얹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낫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불어넣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위해 안수기도를 한다는 것은 주님께 그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아픔은 치유의 과정이다.

최민석 신부님

병이라고 앓아본 적이 없이 아주 건강하게 사는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늘 크고 작은 병을 지니고 사는 게 사람이다. 내 주위에 지인들도 아프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감기나 몸살이란 것도 잠시 쉬어야 한다는 몸의 신호라고 한다.


병은 사람의 몸 안에 들어온 다음에야 깨닫는 경향이 있다. 병이 사람의 몸에 들어와야 비로소 사람들은 병이 가르쳐 주는 삶의 지혜를 배운다. 병은 시시때때로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스승이 성전인 몸에 들어 와야 비로소 성전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늘 한 발자국씩 늦게야 알아듣는다.


큰 병에 걸리는 이들 중에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과신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가 몸에 병이 찾아오면 그때서야 비로소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 진다. 그런 점에서 한 편으로는 아픔의 과정자체가 은혜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은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루가 4, 40-41)


루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치유자이며 구원자로 소개하신다. 그렇다.예수님은 사람의 몸만 치유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와 부패, 비리와 뇌물과 부정직한 거래는 제거되어야 할 종양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과 비인간적인 경쟁 제일주의, 시장 만능주의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만성질환이다.


이런 병들은 쉽게 뿌리 뽑히지도 않는다. 내성이 강해 웬만한 약은 듣지도 않는다. 아니 이런 병을 부추겨 이득을 보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미 나을 수 없는 병이라고 포기한 이들도 많다. 하지만 어떻게든 고질적인 병은 고쳐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함께 고쳐 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국가가 앓고 있는 고질병을 직시해야 한다. 병을 피하려고 해서는 고칠 수 없다. 우리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지금의 병을 스승으로 모시고 병에서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똑같은 병에 자주 걸리어 나중에는 고칠 수 없는 병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사람들은 아픔의 고통을 거치면서 정신은 더 맑고 단순해지고 마음은 중심을 되찾는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문득 깨닫는다. 이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교만과 자랑은 꼬리를 감추고 겸손이 살며시 찾아온다. 먼저 건강을 자만하고 몸을 함부로 놀렸던 걸 뉘우치게 된다. 그리고 지나온 건강한 일상생활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는다. 건강에 과신은 금물이다.


평소에는 건강의 중요성 까맣게 잊고 살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밖으로만 향하던 관심을 나와 나의 내면을 보게 한다. 내게 건강 주시고 이따금 질병도 앓게 하시는 것. 이 또한 당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나의 몸은 거룩하신 당신이 거하시는 성전(聖殿)이시기에 내가 몸이 아파 신음할 때 내 안에 계신 당신께서도 함께 아파하실 것이니 말이다. 이 땅을 떠나는 그 날까지 내가 입고 있어야 할 몸이지만 나는 아니다. 이 몸이 세월 따라 낡아 가는 것은 꽃잎이 낙엽 되듯 자연스런 일이겠지만 알뜰히 돌보지 않아 병들고 상하는 일 또한 거룩한 성전을 잘 돌보지 못한 탓이다.


몸에 병이 들면 어떻게든 싸워서 병을 내쫓으려 하지만 어떤 병은 잘 구슬려서 데리고 살아야 하는 것도 있다.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병과 함께 오는 아픔과 고통을 맞아들일 일이다. 찬바람도 맞고 또 맞아야 푸르던 잎 비로소 단풍 물든다. 한 잎 나뭇잎도 이러하거늘 무수히 고통을 겪고서야 인생은 깊어지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병은 아플 만큼 아파야 낫는다. 아픔은 치료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충분히 아픔을 참고 견디어 낸 다음에야 비로소 풀리는 경우가 그러하다. 작은 아픔을 겪으면서 삶은 조금 깊어지고 큰 아픔을 견디어내면서 삶은 많이 깊어지리니 고통의 날들을 비켜가려 하지 말이니 오는 고통과 아픔을 반갑게 손짓하며 맞을 일이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육신의 병고를 완치시켜 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 병의 치유의 의미는 바로 하늘 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궁극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이 열의 종류도 다양하다. 성을 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이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래서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바라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자신의 병이 완치되자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의 처지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또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에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명과 

사명사이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생명과 사람

이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을 원하는

자녀들에게 가득찬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자신이

하느님의 소중한

전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가야할 길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치의 길임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사명과 소명의

목적지는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누고 전하며

선포되는

하느님 중심의

사명입니다.


그 기쁨

그 사명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가 만나려 했던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신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묵상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공개적으로 하려고 몇 자 적습니다. 사실 제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탁을 받으면 곧바로 일정표에 메모를 하지요. 그런데 일정을 점검하다가 어느 한 날의 결혼식 주례가 누구 결혼식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저이지만, 상대방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날이기에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일 텐데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실수로 날짜를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청년들과 전에 있었던 본당 신자들에게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날짜에는 결혼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공개적으로 알아보려고 이렇게 묵상 글에 적습니다. 혹시 올해 11월 11일에 결혼식 주례를 제게 부탁을 하신 분이나 제게 부탁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연락 좀 주십시오. 제발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예전에 어느 방송에서 보았던 실험 영상이 떠올려집니다. 중학생 자녀를 둔 엄마에게 ‘문장+대상’을 제시하고, 문장과 대상이 잘 연결되면 Yes 버튼을 그렇지 않으면 No 버튼을 누르게 하였습니다. 문장은 150가지의 형용사(뛰어난, 대담한, 냉철한 등)가 주어졌고, 대상은 엄마(자신), 자식, 타인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fMRI로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확인을 했습니다.

실험 결과, 주로 자신에 관한 단어로 판단될 때에는 내측전두엽이 활성화되었으며, 타인과 관련된 단어를 판단할 때에는 등측전두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이 실험 결과에 따르면, 아이 역시 타인이기에 등축전두엽이 활성화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아이와 관련된 단어를 판단할 때 엄마의 뇌는 자신과 관련된 단어를 판단할 때 활성화되는 내측전두엽이 활성화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엄마는 자신과 자녀를 동일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가 성공하면 엄마의 자존감도 상승하고, 반대로 아이가 뒤떨어지면 엄마의 자존감도 하락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일화의 감정이 자녀를 더욱 더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느끼는 동일화의 감정을 자녀 역시 똑같이 갖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왜 이렇게 간섭하느냐고, 자신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고, 또 집에 있는 것이 숨 막힌다는 말까지 하면서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사랑한다면 오히려 자유롭게 풀어 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대방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를 현명하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기만의 사랑을 말할 때가 너무나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심지어 마귀들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만 있으면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도 사람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니 사람들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소유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특정 몇 사람만이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구원받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뜻을 따라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산에게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내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받아 주는 것이다(엄흥길).


아브라 카타브라

말한 대로 이뤄진다고 하지요. 그래서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난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빌게이츠는 아침마다 주문처럼 되새겼다고 합니다.

말은 잠재의식을 자극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자율 신경계에 자동으로 입력되어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의도적이라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하루의 시작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로서 한다면, 분명히 고대 히브리어인 ‘아브라 카타브라.’가 될 것입니다. 즉, ‘말 한대로 이루어집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쁨의 순간들을 생각해 봅니다. 어릴 때는 시골에서 친척 어르신들이 오면 기뻤습니다. 귀엽다고 하시고, 용돈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친척 어르신들이 오시면 엄하시던 어머니께서도 잠시 부드러워지셨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합격했을 때도 기뻤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도 기뻤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첫 본당으로 갔을 때도 기뻤습니다. 운전면허를 땄을 때도 기뻤습니다. 8년간의 보좌신부를 마치고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도 기뻤습니다. 이런 기쁨은 주로 저 자신과 관련된 기쁨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4강에 올랐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트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도 기뻤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물건이 해외에서 인정받을 때도 기뻤습니다. 마치 나의 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쁨은 공동체와 관련된 기쁨입니다.

 

신념과 이념 때문에 기쁜 것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해방은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 정부가 들어서는 것도 눈물 나게 큰 기쁨입니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신념을 위해서, 이념을 위해서 기꺼이 땀을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입니다.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아픈 이들의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들 또한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으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독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사제는 긍정적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진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구름 뒤에 밝은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인 사제는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도 배가 12척이나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는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시작되는 곳에서는 씨를 뿌린다는 마음으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사제는 겸손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자세로 지내면 좋습니다. 아는 것은 나눈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시詩같은 삶, -신망애信望愛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예수님 삶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 콜로사이서 서간의 바오로의 삶도 아름답습니다. 흡사 하느님의 아름다운 시같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자연도 때로 아름다울 때는 하느님의 시처럼, 그림처럼 느껴집니다. 어제 아침 미사전 있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미사 시작전 제의방에서 바라본 동편 하늘의 아침노을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움은 짧습니다. ‘지금 못찍으면 곧 사라져 버리는데---어쩌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미사 복사 준비하던 수사님이 즉시 사무실에 가 휴대폰을 가져다 찍어 전달해 주었습니다. 마침 이와 관련된 어제 미사중 화답송 참 좋은 시편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그대로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한평생 사는 수도자들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라는 대목이 참 좋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듯 아름다운 아침노을을 바라봤습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이십니다. 아름다움은 모두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듯 매사 그런 마음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교회의 미사전례, 시편전례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 백치에서 미쉬킨 공작의 입을 빌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마음을 순화하고 치유합니다. 바로 전례의 역할도 그러합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아름다운 전례에 참석하면서 우리의 삶도 순화되고 치유되어 시같이 아름다운 삶으로 변모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명을 수행하는 삶만 보이고 예수님의 이기적인 삶은 추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환히 드러나는 완전 ‘무아無我의 삶’, 역설적으로 참나의 실현인 ‘진아眞我의 삶’만 보입니다. 


어제는 회당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을 쫓아내셨는데 오늘은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 주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다음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4,40).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집단으로 대하시는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마치  한 사람이 전부이신 듯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십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미사에 참석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외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신후 집착함이 없이 바람처럼 떠나는 자유롭고 자연스런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3).


이 한마디가 예수님의 아름다운 삶을 요약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목표와 방향이 분명한 삶이기에 무욕과 이탈의 초연한 아름다운 삶입니다. 집착에서 시작되는 불행과 고통인데 예수님은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전무하니 참 자유롭고 아름다운, 본질적인 단순한 삶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삶이 우리를 구원하고 치유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삶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제1독서 콜로사이서를 통해 바오로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에페소서, 필레몬서와 더불어 콜로사이서 세 서간은 모두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진 옥중서간입니다. 옥중에서도 내적 자유를 누리는 아름다운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축복의 인사와 더불어 감사로 시작되는 참 아름다운 서간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콜로3-5ㄱ).


주목할 바 신망애信望愛, 믿음-희망-사랑의 세가지 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 덕은 동일 선상에 놓여 있지 않고 앞서의 믿음과 사랑의 두 덕의 근거 구실을 하는 희망입니다. 하느님 희망 위에 자리잡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어쨌든 믿음, 사랑, 희망의 세가지 덕을 살아가는 콜로사이 교회 성도들의 삶도 아름답습니다. 바로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아름다운 시같은 삶의 비결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중 신망애를 노래한 다음 대목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태양이 높이솟아 새날이룰제/믿음은 깊어지고 뜨거워지고

 희망은 언약된복 갈망하오며/사랑은 주와우리 결합시키리-


주님은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미사전례를 통해 당신의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어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신망애의 아름다운 시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하느님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 길이길이 하느님 자애에 의지하리라.”(시편52,10). 아멘.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기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35절)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41절)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열을 몰아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루카 4,39)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말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시고, 마귀들도 쫓아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를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며,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다고 밝히십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라고 밝히십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새벽에, “날이 새자”(루카 4,42) 제자들이 외딴 곳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들었을 때, 생긴 일입니다. 마치 마리아 막달래나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붙들고자 했을 때처럼 “다음 날 새벽”에일어난 일이었습니다(요한 20,17 참조). 곧 예수님 당신께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인기나 자신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붙들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면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2-33 참조)라고 꾸짖으신 일을 떠올려줍니다. 곧 파견하신 분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일인 복음을 선포하시는 모습을 떠올려줍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인 것입니다. 아멘.




주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늘로부터 파견되시고, 세상으로 파견되신 주님, 그러니까 아버지에 의해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파견되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따라 이러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겁쟁이거나 이기주의자이며 심지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파견되어 가야 합니다.


먼저 주님처럼 하늘로부터 파견을 받아야 합니다. 파견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자기의 결정으로 가는 것이고,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자기사업을 위한 출장이거나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견을 받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파견을 받아야 임무수행을 위한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루 종일 고된 복음 선포를 하신 후 꼭 사람들을 떠나 외딴 곳으로 가 기도를 드렸고 거기서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도 기도 안에서 매일 주님의 파견을 받고 기도 안에서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것은 파견 받지 않고 셀프파견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갈까 말까, 간다면 어떻게 갈까 혼자 궁리하다가 자기 결정으로 가는 것이고 그래서 곧 힘을 잃게 됩니다.


선교를 포함하여 하느님의 일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다가 Burn out(소진)되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런 분들은 백이면 백 기도하지 않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인 줄 알고 했는데 어느 새 자기의 일이 되었고, 하느님께 힘 받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하다가 소진된 겁니다. 우리의 힘은 힘이 있을 때는 마냥 갈 것 같지만 소진되게 마련인데 청춘의 착각과 자신自信의 착각, 곧 자기를 믿는 착각을 합니다.


다음은 우리도 파견되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이고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성당에만 가두고 우리도 성당에만 머뭅니다. 매일 미사가 끝날 때마다 ‘주님과 함께서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이렇게 파견을 받는데 우리는 종종 주님은 성당에 놔두고, 복음은 들지 않은 채 그냥 집으로 들어와 머물다가 주일이 되면 또 다시 성당에 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으로 가족들에게 파견되지 않았고하여 아직까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아이들과 배우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직장으로 동료 직원들에게 파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했어도 영세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신 다음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장모를 고쳐주시고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병자와 악령 들린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사람들이 붙잡는데도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회당에 칩거하거나 한 마을에 안주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한 회당의 회당장이 아니라 선교사이시고, 한 고을의 의원이 아니라 흩어진 양떼를 찾아가는 목자시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주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 떠나는 우리가 되고 떠나는 오늘이 되게 하십시다.



 

열린 마음과 차별 없는 태도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은총을 받은 이의 하느님 앞에서의 태도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사랑의 폭과 깊이에 대해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어두움과 부자유스러운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이들의 시중을 듭니다. 


열병에서 치유된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른 이들을 악으로부터 해방하는 운동에 기꺼이 자신을 내놓습니다. 열병이라는 마귀의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이 마귀에게 묶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해방시켜주는 일에 시중을 든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예수님과 일치를 꾀하고 고통과 시련에 처한 이들을 도와야겠습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사실 율법은 안식일에 병을 치유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병자들이 맞아들여 ‘사랑의 접촉’을 통해 고쳐주십니다. 


밤새워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께서는 ‘날이 새자’ 카파르나움을 떠나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라와 떠나지 말라고 붙들지요. 늘 그렇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해방활동을 보고 체험한 이들은 그분을 ‘따르고, 붙들고, 곁에 모시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받은 자유와 생명의 선물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한 것이지요. 


군중들은 자신들의 구원과 해방에 몰두하면서도 모든 사람을 악에서 구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모두가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계획에 투신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4,43)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아들여 고쳐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의 선물과 해방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든 똑같이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차별 없이 모든 이가 자유와 해방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 생명의 문, 해방의 문은 나만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겠지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해방자요, 각각의 사람을 각별히 사랑해주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명 또한 예수님처럼 보편적 사랑과 개별적 사랑이 어우러진 통합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전인적인 치유를 통한 참 자유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향하여 모두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자유를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가는 한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또한 누구든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생명을 누릴 권리가 있지요. 따라서 우리 모두 소유의식과 끼리끼리 의식을 버리고, 울타리 없는 열린 마음과 차별 없는 태도로 각자의 고유한 인격을 섬세히 살피는 넓은 사랑을 함으로써 모두의 형제, 자매가 되는 행복한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김준영 안드레아 신부님

우리의 일상이 바쁘고 분주한 것처럼, 예수님의 하루 역시 무척 분주합니다. 복음을 선포하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이를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에 가셔서 장모를 고쳐주시고, 밤늦게까지 병든 이와 마귀 들린 이들을 한 명 한 명 만나시고, 그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 날에도 쉴 수 없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히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이웃 고을에도 복음을 선포하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온 갈릴래아를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분주함은 ‘이 세상에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목마른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도 쉴 시간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조금은 쉬고 싶은 마음이 생길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만 마음을 두십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분주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그분께서는 날에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하루를 마무리 하며 그리고 다시 시작하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께서 하셨던 모든 일의 원천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그분께서 그렇게 분주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기도했다는 사실에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도를 통해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요즘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너무나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허무할 때도 있습니다. 만일 나의 삶이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분주함 가운데 하느님을 찾아가 외딴 곳으로 가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라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나의 하루를 바라보고 쉬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가 진정한 쉼이고, 그 기도가 나를 진정으로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루카.4,40)

김종오 신부님

현대인들이 겪는 많은 질병의 원인인 스트레스는 사람들의 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과도하게 누적된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육체적 혹은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물리치시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께서는 기다리시며 우리에게 ‘치유의 손을 얹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손을 얹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어디서든지 우리를 위해 치유의 손길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제각기 아픈 상처를 하나쯤은 안고 살아가는 우리임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손을 얹어 주십니다.

남이 아는 아픔도 있지만 남이 모르는 깊은 아픔도 있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차마 말도 꺼내기 힘든 고통스러운 사연을 하나씩은 품고 사는 우리를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얹어 주십니다.

우리의 고통에 주님의 손길이 닿을 때 우리의 고통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이 됩니다. 아팠던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공감하게 되고, 상처의 깊이만큼 다른 사람을 깊게 헤아려 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은 자신의 고통을 겪고 이겨낸 사람들이 주는 선물입니다.

억울한 사연이나 가시지 않는 슬픔, 불안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제각기 다른 상처를 안고 주님 앞에 모인 우리는 주님의 손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주며’ 동행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입니다. 




박미라 도미틸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오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시려고 동분서주하시는 주님을 뵙게 됩니다.

한참 전에 저희 교구 사제들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이셨던 최양업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 다섯 시간을 도보 순례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올 해에는 9월 23일에 평신도 도보성지 순례가 연풍성지에서 있을 예정이구요.


얼마 전까지도 11년 동안이나 동분서주하면서 전국을 오가며 사목활동을 하신 우리나라 두번째 사제이신 최양업 신부님은 첫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후광에 묻혀서 그다지 빛을 보시지 못하셨는데, 그분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매일 매일 걷고, 또 걸어서 사람들을 찾아다니신 분이시기에 그분께서는 정말 예수님을 닮았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교구 사제들은 다섯 시간을 걸었는데도 얼마나 힘이 들든지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안일하게 살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교구 신부님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금도 굽힘없이 주님을 닮은 그런 모습으로 동분서주하신 최양업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 힘든 도보순례를 하셨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어렵게 애를 태우며 바삐 걸어 다니셨을 그분을 본받아 도보 순례 후에는 조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으로 사목활동에 임했을 것이라 생각 되니까요.


한 사제가 달라져 그분처럼 하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인지...


“성인 한 사람이 세기를 구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계속 흘러들면 썩은 물로 꽉 찼던 웅덩이도 온통 새 물로 가득 찰 수 있듯이 한 사람이라도 꾸준히 노력하여 하늘 나라의 온갖 것을 전할 수 있다면 세상은 놀라우리만치 달라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그 작고 작은 한 방울의 물이 되기 위하여 매일 매일 어쭙잖은 글이나마 써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특히 최양업 신부님과 같은 사제들이 이 땅에 더 많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제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그렇게 한 방울의 물이 되어 끊임없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그 맑은 물을 전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많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그 날을 위하여 우리 모두 파이팅을 외쳐 봐요!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최원석

묵상글이라고 쓰고 있지만 저도 나름 여러 신부님들의 묵상글은 꼼꼼히 읽어봅니다. 읽어보면서 많이 많이 저의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쓰시는 묵상글 안에는 인문학 혹은 신학 철학등이 녹아 있고 그리고 사목현장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 영적인 물을 마시는 기쁨을 봅니다. 간결하게 말씀하시지만 송곳처럼 뼈를 찌르시는 신부님들의 묵상글.. 한편으로는 통쾌한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저의 묵상글의 성격은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그런것은 아닙니다. 제발 저 이공부 잘 마치게 해주세요 그것을목적으로 묵상글을 씁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체험을 여러가지 신앙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신앙체험을 한것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 너 잘 난꼴을 난 못본다" 이것이 저와 관련된 신앙체험입니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하여서 시험을 치르면 꼭 합격자 발표가 성탄절이 있기 이틀 혹은 삼일 전에 발표를 합니다. 그러면 꼭 가서 보면 불합격이라는 단어를 보고 고개를 떨구고 집으로 향한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어렵게 학교 들어가서도, 남들은 학교 공부한다면 공부 집중하고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술도 마시고 같이 공부에 집중하고 같이 놀러 다니는 그런 대학 낭만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지요..하필 그때 집안에 힘든 상황이 있어서 한쪽에는 공부를 한쪽에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지요 실력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 두가지를 동시에 하니 당연히 공부 성적은 그리 좋지 않은 것이지요 ..학기말이 되면 부족한 성적 매꾸느라고 부단히 뛰어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는 하게 해주시는데 그렇게 인간이 말하는 배두들기면서 공부는 하게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바듯이 공부하는 사람이 저 입니다. 그런데 고비고비마다 한줄기 빛을 보고 그 고비를 넘어 갈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필요한것은 꼭 주시고 그리고 주님이 알아서 입히고 먹여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삶의 여정을 보면 아마도 집착에서 자유로울수 있도록 주님의 인도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여러 고을을 두루다니십니다. 당신은 병자들과 영적으로 매여있는 이들에게 해방을 주시고 병든이에게는 병을 낳게하여주시지요.. 이것이 한명에게만 그러면 모르겠지만 마을 전체가 그분이 오셨다하면 다 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좋은 것에 맛을 보면 항구히 그것을 나의 품에 안으려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주님에게 당신 어디 가시지 마시고 저히와 함께 해달라고 하지요 .. 인간이라면 혹 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곳에 눌러 앉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난 이 일을 하기 위하여서 파견되었다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서 구원을 위하여서 파견되었다는 말씀을 하시지요 ..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그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일하는 분이란 것을 말씀하시지요 ..내안에 내가 없다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일을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참 모습이지만 우리가 닮아야 할 참모습이겠지요 ..내안에 내가 없고 당신의 영광만이 있는... 아멘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게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시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 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 퍼질 테니까요.




"기쁜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를 위한

기쁜소식입니다.


우리를 

우리답게하는

기쁜소식입니다.


기쁜소식은

만남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쁜소식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과의 친교로

삶이 좋아집니다.


기쁜소식은 이렇듯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합니다.


사람의 

기쁜소식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기쁜소식은

우리의 회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십니다.


허느님 나라의

참된 사랑을 

전하여 주십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모아들이십니다.


사랑받는 기쁨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 자녀로서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느님

사랑이 기쁜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기쁜소식이

우리 삶을 

가득채워주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지난 8월에 여행을 다녀온 뒤에 저는 미장원에 가서 파마를 했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픈 상태에서 좀 더 편안한 머리 손질을 찾던 중에 파마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머리가 워낙 뻣뻣한 머리카락이라서 조금만 길면 지저분해져서 잘라야 하거든요. 또한 아침마다 지저분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드라이기로 꾹꾹 눌러주는 것도 아픈 상태에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파마한다는 것이 너무나 쑥스러웠지요. 파마머리는 남자가 아닌 여자만의 전유물로 생각했고, 또 장시간 머리에 무엇인가를 싸매고 있는 모습의 당사자가 내가 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거든요. 그러나 안식년에 파마도 해 보자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파마를 해달라고 이야기를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파마를 하고나서 가장 좋은 것은 머리손질이 정말로 편해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드라이기로도 머리가 쭈뼛쭈뼛 서서 어쩔 수 없이 젤이나 왁스 같은 헤어 스타일링 제품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드라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제 모자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뻣뻣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저로써는 그전까지 모자는 쓸 수 없는 도구였습니다. 왜냐하면 쓰고서 벗을 때의 모습이 아주 이상히 변하게 하거든요. 모자에 눌린 곳은 절대로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막 자고 일어나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자를 쓰고 벗은 뒤에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주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전에는 잘 몰랐던 파마, 아니 오히려 피하려고만 했던 파마.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까 이렇게 편한 것을 왜 안 했을까 라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사실 우리 삶 안에서도 이렇게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피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해보지도 않고서 말이지요. 남들이 그렇다고 하더라, 그렇게 보기 좋아 보이지 않더라, 비슷한 것을 해보니 별 볼 일 없더라 등등의 말들을 내세우면서 하지도 않은 것들을 거절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해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습니다. 어쩌면 이 열병은 화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위가 있는데 집안은 신경 쓰지 않고 ‘예수’만을 쫓아다닌다고 하니 어떻게 화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위도 보기 싫고, 특히 사위가 쫓아다니는 ‘예수’ 역시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만나봐야 뭐하냐면서 부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장모를 찾아와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몸 안에 가득했던 열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밉기만 했었던 그들을 위해 시중을 들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면 화낼 필요가 없고, 당신이 틀렸다면 화낼 자격이 없다(간디).


인터뷰를 보면서(‘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중에서, 박광수)

TV 어느 한 프로그램에서 수십만 마리의 닭을 키우며 양계 사업으로 성공한 이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전 이 사업을 위해 안 먹어 본 닭 사료가 없습니다.”

양계사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그분의 열정은 인정하지만 인터뷰를 듣던 나는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의문이 샘솟았다. 왜 닭 사료를 먹은 걸까? 자신의 입맛과 닭의 입맛이 같다고 생각한 걸까? 자신이 맛있다고 생각한 사료를 닭에게 주면 닭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물론 사료까지 먹은 그 열정이 그분이 양계 사업을 성공에 이르게 한 부분임을 인정하지만 나는 앞에 나열한 의문점 때문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고 그 의문은 뜻밖에도 우리의 아이들에게로 옮겨 갔다.

혹시 나는 내 입맛대로 아이들을 대하지는 않나? 내 입맛에 맞으니 아이들의 입맛에도 맞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내 그러한 모습을 보며 나처럼 웃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그러면서 양계장 주인이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주며 간절히 바랐던 처음 그 원초적인 바람만 아이들에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 아닌가 싶어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지요? 나의 행동 자체를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입으로만 말하면서 정작은 나만을 위해서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요즘 기분이 좋습니다. 성소국에 온지 2년 만에 함께 일할 신부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비 신학생, 담임 부제님, 조 담임 신학생들을 주로 만났습니다. 나름 열심히 하지만 소통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젊으신 신부님이 오셨으니, 더 많은 소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신부님을 보내 주신 주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뜻밖에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는 것도 기쁨입니다. 자녀가 취업을 한 것도 기쁨입니다.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갔는데 아무 이상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도 기쁨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최근에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인지요?


신앙 안에서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읽는 성서를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과연 성서는 무엇을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 할까요?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만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돈, 명예, 권력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 믿음, 희망으로 갈 수 있는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목마른 이들의 영혼에게 샘물과 같았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표징은 어둠 속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세 번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분입니다. 가장 허망하게 죽으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난 사건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러한 은혜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나의 업적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마음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사업이 잘 되고 부유해지면 오히려 성당에 안 나오는 경우를 볼 때도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세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그분들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복음을 통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박해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순교자의 성월인 9월에 복음을 통한 희망으로 갈등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봉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자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제자리’에 대한 묵상나눔입니다. 광야인생, 제자리를 찾아야 오아시스인생입니다. 오아시는 제자리와 같습니다.

며칠전 작년 안식년에 장충동에서 만났던 분과의 만남에서의 ‘제자리’에 대한 깨달음이 새로웠습니다. 제가 여전히 장충동에 있는 줄 알고 장충동 수도원을 방문했다가 다시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을 찾았습니다.


"제자리에 돌아와야죠. 28년동안 살았던 제자리 요셉수도원인데요.“


대화중 무심코 한 제 말중 ‘제자리’란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는 자매의 고백이었습니다. ‘내 제자리는 어딘가’, ‘과연 나는 제자리를 살고 있는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했습니다.

듣고 보니 평범한 제 말이 저에겐 새삼스런 깨달음이었습니다. 제자리는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내 고유의 제자리를 찾을 때 안정과 평화입니다.

제자리를 잃어 끊임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휘둘립니다.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고 조화롭습니다.

제자리가 바로 구원입니다. 제자리에 있으니 주변의 모두가 매일 새롭게 열립니다.


어제 써놓고 재미있어한 ‘호박이 좋다’란 시를 나눕니다.


-호박이 좋다/넉넉하고 편안하다

나체裸體에도/부끄러움이 없다

호박같은 얼굴/수사님이 따다 놓은

아담한 호박/보이지 않다

“수사님, 생선에 그 호박 넣어 지졌어요?”

생선지짐속에 들어있는/호박조가리들

“예”/대답하며 호박처럼 웃는다-


제자리에 있을 때 발견되는 삶의 기쁨, 삶의 행복입니다.


요셉수도원이 상징하는바 제 삶의 제자리이듯 오늘 복음에서 외딴곳은 예수님의 제자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분주한 삶의 와중에도 활동이 끝난 후이면 외딴 곳의 제자리를 찾아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중에 영육을 충전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상징하는 제자리입니다. 제자리가 상징하는 바 주님입니다. 주님 안이 우리 모두의 궁극의 제자리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주님을 만남으로 제자리를 찾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만나 제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치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어 공동체의 제자리로 복귀하여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든 시몬의 장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질병을 앓던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얹어 고쳐주심으로 제자리로 복귀시키고 마귀들린 이들 역시 마귀를 쫓아냄으로 제자리로 복귀시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제자리를 찾은 이들은 진정 제자리의 중심은 구원자 예수님이심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제자리를 찾을 때 영육의 건강입니다. 제자리를 잃을 때 온갖 우환과 걱정이 뒤따릅니다.

치유활동이 끝나 날이 새자 예수님은 자신의 외딴곳의 제자리를 찾아 영육을 충전시킵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의 움직이는 제자리의 중심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제자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 간청하지만 움직이는 제자리의 중심인 예수님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각자 삶의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음을 봅니다. 진정 이웃을 사랑한다면 파스카의 주님께 안내함으로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의 제자리는 파스카 주님 안이요 여기 제자리에 머물 때 비로소 신망애 삼덕의 충일한 행복한 삶임을 콜로새 신자들이 증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진공상태의 무기력한 제자리가 아니라 하늘 희망에 근거한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 즉 신망애 삼덕이 역동적 균형을 이룬 주님으로 충만한 공동체의 제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제자리의 중심인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치유해주시고 당신의 신망애 삼덕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나는 하느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 길이길이 하느님 자애에 의지하리라.”(시편52,10).

아멘.




악령의 또 다른 얼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아마도 악령에 들린 것으로 추측되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정말 온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서 머리칼이 저절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악령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모욕하고 거스르는 존재. 인간의 구원을 가로막는 존재, 결국 인간을 파괴시키고 타락시키는 존재입니다. 


더러운 마귀의 영이 한 가련한 사람 안에 들어가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한 가련한 인간 안에 들어가, 그의 영혼은 물론, 육체와, 정신, 품위를 완전히 훼손시킨 악령, 그 악령의 활동으로 인해 죽음 문턱까지 도달한 한 가련한 인간의 고통 앞에 사람들은 다들 서둘러 피해갔습니다. 다들 두려워 떨었습니다. 다들 악령이 자신에게 옮겨 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다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분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구원의 손을 펼치십니다. 본래의 고귀한 성품을 되찾아주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시켜주십니다. 


보십시오. 고뇌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한 인간, 그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악령의 활동으로 심신이 지쳤다면, 오늘 우리가 심각한 죄와 깊은 상처로 힘들다면, 오늘 우리가 비참으로 흐려진 눈을 들 수 없다면, 꼭 기억하십시오. 치유자이신 하느님께서 환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올 순간이 가까웠습니다. 


‘오늘 내게 있어 악령은 무엇이겠는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악령입니다.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이웃을 향한 분노가 악령입니다. 공동체 일치를 가로막는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악령입니다. 영적 생활을 파괴하는 악습들이 악령입니다. 하느님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활동주의가 악령입니다. 


오늘 내 안의 악령이 무엇인가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악령으로 인해 우리 공동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권능의 팔을 펼치셔서 그 악령들을 쫒아내 주시도록 합심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여러 모습의 얼굴로 변장한 악령 들린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를 찾아옵니다. 악령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여기저기 다 찾아다니다가 포기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환대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대신 우리가 치유의 손길을 펼치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인간의 본질이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자기 유익이나 출세를 위한 가장된 사랑, 육신의 감각에 집중한 쾌락적 사랑, 왜곡된 사랑, 무지한 사랑, 피상적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물질과 이성, 그리고 정보가 사람 위에서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선교 근거지로 삼았던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에 가셨다. 그 집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침으로써 해방시켜주신다. 그분은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신다.


사랑의 치유는 해방을 불러오고 바로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 사랑이신 분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사랑만이 사랑을 낳는데 사랑을 받아보지도 주어보지도 못한 이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모른다. 사랑하는 방법은 기술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 하느님을 닮아가는 불가결한 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을 본받도록 하자.


먼저 그분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셨다. 남녀, 정신병자와 육신의 병고에 시달리는 이, 가난한 이와 부자, 권력자와 힘없는 이, 이스라엘 사람과 이교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치유해주셨다. 나아가 어디서든 함께하면서 치유와 해방을 불러일으키셨다. 이스라엘 땅과 이교인의 땅, 길가와 집안, 회당 안과 밖, 호숫가와 내륙 할 것 없이 어디서든 사랑을 보여주셨다.어디 그뿐인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든 평일이든 가리지 않고 사랑을 행하셨다.


또 한 그분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실 때처럼 치유와 해방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4,39) 상대방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사랑의 열정을 품고 자발적으로 다가가신 것이다. 그분은 관망자가 아니라 사랑을 발생시키는데 걸림돌이 되는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신 것이다.


치유를 베푸실 때에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얹으시어 고쳐주셨다.”(4,40)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에 마음을 집중하고 각 사람을 친밀하고 따뜻한 애정으로 환대하고 정성을 다해 사랑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섬세하고 친밀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해방을 가져다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안식일법이나 정결례의 관습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함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분은 인간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때와 장소, 대상을 뛰어넘는 지고의 가치임을 실행하시고 가르쳐주셨다.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은 할 일이 많고 바빠서 ‘다음에’라고 말하며 사랑하기를 미루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없어져야 사랑할 수 있는데 나를 비우고 버리고, 낮추기가 싫어서 관념 속에서만 맴도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의 지름길은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바보가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얼마나 자주 나는 때를 가리고 장소를 가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가까운 이들에게만 잘해주는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랑’을 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울타리 없는 사랑’, ‘차별 없는 사랑’, ‘인간의 조건에 상관없는 사랑’, ‘다가가는 사랑’, ‘친밀하고 섬세하며 속깊은 사랑, 온 존재로 하는 사랑’을 혼에 새기고 기쁘게 사랑하도록 하자!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콜로 1,3-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신부님, 목사님, 스님, 교무님이 신도들 때문에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드릴 때는 언제일까요?


재정적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해 줄 때 일까요?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바치고 이런저런 행사에 적극 동참해 줄 때 일까요?

강론이나 설교, 법문을 듣고 고맙다고 인사할 때 일까요?


물론 감사할 일이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수많은 삶의 애환에도 불구하고 믿음 때문에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볼 때 가장 감사드리지 않을까요?


나의 종교가 무엇이든 그 종교를 통해 올바른 믿음과 다른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직자들과 가깝다하더라도 별 볼 일 없는 신앙인입니다.


여러분은 참 신앙인이요 참 종교인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사람이고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시기에 축하드립니다.


내가 아는 분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런 분들이기에 오늘 하느님께 더 깊이 감사드리는 날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되심은

함께 가는 기쁨을

일깨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멈출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소중히

떠받드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어디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사랑이 희망이며

사랑이 출구이며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란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하며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할지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하느님 나라,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가까이 오시고

기꺼이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균형잡힌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휴식과 노동이

기도와 봉사가

기다림과 봉헌이

일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쁜소식입니다.


영원한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금 이순간입니다.


파견은 이기적인 우리를

사랑의 열매를 맺게하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하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기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정제천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의 하루 선교 일정에서 우리는 사랑의 분별력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선별하지 않고 누구나 고쳐주셨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열린 자세로 맞으셨음을 기억하자.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예수님의 이런 자세가 사람들을 대하는 내 자세가 되기를 빈다. 

 

둘째, 예수님은 그들을 고유한 사람으로 대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성껏 손을 얹어서 치유해 주셨음에 머무르자. 이런 예수님의 자세를 나 자신의 태도와 비교하고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 처리할 일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태도로 대할지를 결심하자.

 

셋째,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기도하러 외딴곳에 가셨다. 그분의 사랑은 위에서오는 사랑이다.(「영신수련」 184, 338번 참조) 그분의 시선은 늘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선교를 위해 떠나는 태도 또한 단호하시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남을 위한 삶을 사시지만, 사람들의 반응이나 기대에 좌우되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른 구도나 기획에 따라 움직이신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신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유를 나도 갖기를 원한다.





몇 년 전, 성지에서 본당으로 가라는 인사이동을 받고 그 날짜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성지를 찾으신 분들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성지에 계속 계시면 안 돼요? 신부님 안 계신 성지를 상상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정말로 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성지를 떠나서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된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성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떠난 성지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뒤로 몇 명의 신부님이 바뀌어서 지금은 정말로 그럴싸한 성지로 발전했습니다. 저 때에는 성당이 없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야외에서 미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현재는 아름답고 멋있는 성당이 있어서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있을 때에는 야외 조경이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어수선했으나, 지금은 깨끗하게 잘 정리된 조경으로 많은 이들에게 편안함을 줍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없기 때문에 지금처럼 아름답고 멋있는 성지로 거듭 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속에서 종종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중심이 되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은 믿음과 겸손한 마음만이 자신 안의 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다른 의사에게서 본 일이 있었을까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마귀들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요. 이런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 있다면 질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마귀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며, 배가 고파도 굶어죽을 염려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간청을 뿌리치기가 쉬웠을까요? 사람들의 간청에 응답해서 그 자리에 머무른다면 분명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고, 나중에 있을 십자가의 죽음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면서 그러한 간청을 가볍게 뿌리치십니다.


이렇게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외딴곳에서 하신 기도에 있었습니다. 즉, 인간적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로지 기도에만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인정받고자 하는 유혹. 그래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착각들...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만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빌 게이츠)


얼마나 행복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질병에 걸린 이들을 하나하나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시지요. 당시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단순히 병에 걸렸다는 생각보다는 죄 중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즉, 죄가 많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병자들은 곧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병으로 아파 힘들어 죽겠는데,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더 큰 고통 속에 빠지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죄인이라면서 피하는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따뜻이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병을 고쳐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이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지금 역시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얼마나 기뻐하며, 또 얼마나 행복해 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며,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이라면서 기쁨과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이기심과 욕심을 버린다면, 그 기쁨과 행복은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저의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루카4,40)

---

20년 전에 하늘 나라에 간 어린 친구가 떠올랐다.

이름은 정현진 스테파노, 나이는 12살이었다.


서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풋내기 신부로서 남대문 시장 상인 사목과 주로 피정 지도로 나름대로 열정을 쏟고 있을 때였다.


전화기가 울어댄다. 인천의 어느 본당에서 열심히 사목회 전례분과장으로 활동하시던 분의 음성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저에요. 신부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신부님, 아이를 하느님께서 불러가시려나 봅니다.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분의 말씀은 병자성사를 부탁한다는 말씀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정말 어렵게 생활하며 신앙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던 분이었다.

너무 사람이 좋아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의 눈에 들었고 공장장 역할을 하던 정말 착실하고 소위 세상이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분이셨다.

그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가정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찾아온 것이다.

일단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 순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한 구석에서 슬픔과 분노가 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부모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 가능하단 말인가!" 등등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약속한 날이 되었고 차를 몰고 강남으로 향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도저히 무슨 말로 부모들을 위로할 수 있을 지 난감했다. 결국 병실 문 앞 이름표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는 순간까지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병실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창문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고, 엄마는 아이의 침대에 올라앉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아이를 내려다 본다. 머리에는 아기 손만한 혹이 서너 개가 나와 있었고 한 쪽 눈도 암 세포가 번져 퉁퉁 부어있는 상태로 감겨져 있었다.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스테파노가 복사를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와 복사를 처음하고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티없이 잘생긴 모습이 순간 지나쳐 간다.

아무 말 없이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이내 병자성사를 주려고 영대를 매고 책을 펼쳤다. 성호를 그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나를 도와서 성호경을 대신해준다. 정말 힘들게 병사성사를 집전하고,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 목례와 함께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날 저녁 전화가 걸려왔다.

"신부님, 아이가 성사를 받고 아주 평화롭게 갔습니다."

" ---- ---- "

이틀 후,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해 다시 성모병원을 향해 달려간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병원 영안실 옆에 장례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몇몇 안 되는 조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지칠 때로 지친 상태로 제대를 옆으로 하고 앉아, 관이 놓인 곳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그렇다. 정말 하느님은 이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구나."라는 어떤 깨달음이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미사가 시작되었고,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를 무척 사랑하시나 봅니다. 우리 눈물을 그만 흘립시다. 그리고 기쁘게 이 미사를 드립시다.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우리는 길어야 백 년을 산다고 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놓고 볼 때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여정이지요. 하지만 그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미움과 고통과 욕심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우리 앞에 누워 있는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 아이는 고작 열 두 살입니다. 이 아이가 죄를 지었다면 과연 무슨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성적표를 엄마에게 보일 수가 없어서 엄마 몰래 도장 꺼내서 찍은 것? 아니면 친구들하고 오락실 가고 싶어서 엄마 몰래 주머니 뒤진 것? 이것이 죄입니까? 우리들이 이 삶 안에서 짓는 죄에 비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슬퍼하지 맙시다. 이 아이는 하느님께서 천사로 쓰시려나 봅니다. 죄의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당신 옆에 두시고 싶을 정도로 이 아이를 사랑하셨나 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이 아이는 천사가 되어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엄마, 아빠에게 아무 걱정 말라고 말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

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을 받고 그 병을 치유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절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는 참 많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을 보면서 “하느님은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픈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치유해주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언젠가 말했듯이, 우리의 육체란 완전한 치유를 경험할 수 없다.

반드시 우리의 몸은 끝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치유의 대상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다. 그 치유를 위해 치유를 청해야만 한다


 


당신을 따르는 이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는 예수님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06년 5월 2일자 중앙일보에 ‘보은의 장기 기증’이란 제목으로 이런 기사가 오른 적이 있습니다.

신승경(1981- )선수는 2004년 프로축구 팀인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해 올 시즌 초반 선발로 출장했던 골키퍼입니다. 신 선수는 2006년 3월 중순 팀 훈련 도중에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주전 골키퍼이었기 때문에 신 선수는 물론 팀에서도 걱정이 컸습니다.

신 선수가 계속 운동을 하려면 파열된 십자인대를 제거하고 다른 십자인대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는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지난달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대를 기증받아 성공적으로 수술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신 선수 고향인 충북 제천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씨 없는 수박 농사를 짓고 있던 신 선수의 형 승우(35)씨가 지난달 29일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졌습니다. 병원에서는 회생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뇌사 상태 신 선수의 형을 보며 가족들은 슬픔 속에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신 선수의 형인 승우 씨의 장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삶을 보다 값지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버지 신순선(67) 씨는 "2남3녀의 막내인 승경이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돼 보답하는 마음에서 큰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엄금선(66)씨를 비롯한 전 가족이 이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승우 씨는 지난달 29일 서울 강동성심병원에서 자신의 장기를 7명의 난치병 환자에게 이식해주었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시 갚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또한 그 받은 사람에게 직접 갚을 수 없다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보은의 마음을 표현해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의 장모 집에 가십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다고 아룁니다. 예수님은 곧 가서 장모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직접 고쳐 주십사고 기적을 청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렸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도 치유해 주시는데 하물며 당신을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의 장모인데 그냥 모른 채 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베드로의 장모는 ‘화병’에 걸려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딸을 시집보내 놨더니 딸을 벌어 먹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예수라고 하는 가난한 사람을 쫓아다니며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위를 어떤 장모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성경엔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또 그의 집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것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바로 베드로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서 그의 빈자리를 더 큰 은총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당신께 잘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 많은 은총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떤 수도회의 수녀님들이 저를 그 수도회에 입회하도록 무던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더구나 수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 없었는데 자꾸 그러시니 적당한 핑계를 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형 둘이 대학을 못 갔으니 저라도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님이 “네 빈자리는 하느님께서 몇 배로 채워주실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가 사제로 살아보니 정말 맞는 말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몇 배로 저의 빈자리를 메워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집 핑계를 댈 수 없게 하십니다. 


어디서 읽은 건데, 남편이 아내와 싸웠을 때, 화해하기 위해 쓸데없이 꽃이나 선물을 사오기 보다는 아내의 친정 부모님께 살짝 용돈을 드리고 오라고 권합니다. 물론 아내가 남편 모르게 시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면 그것만큼 남편을 기분 좋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면 그 배우자의 부모님 또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만큼 잘 키워서 나의 배우자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잘 키워서 당신 제자로 봉헌한 부모님들을 어찌 그냥 보고만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족을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아직 가족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가정 때문에 주저함이 있으신 분들은 걱정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내가 있을 때보다 주님을 따르면 훨씬 더 많은 은총이 가족에게 내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고마움을 잊고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가장 반가운 단어, 치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가장 기본적으로 꿈꾸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 다하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큰 고생 않고 세상 떠나는 일입니다. 


영안실에서 가끔씩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병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난 분의 장례식장에서 듣는 말입니다. “호상(好喪)이다!”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신 할머니, 평생 어디 한 군데 크게 아픈데도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민폐 한번 끼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도 안색이 안 좋다든지 특별한 이상 징후가 없었습니다. 평소처럼 오전 내내 텃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며느님이 차려준 점심 잘 드셨습니다. 


다른 때와 다른 것은 오직 한 가지, 점심식사 후에 오랜 시간 정성껏 샤워를 하시고선 깨끗한 모시옷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며느님보고 낮잠이나 한잠 잘란다며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그 길로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정말 누구라도 부러워할 호상(好喪)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호상을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원치 않는 병고가 찾아옵니다. 하나의 병은 또 다른 병을 몰고 옵니다. 계속해서 다양한 병치레를 하며 괴로운 투병생활로 삶을 마무리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 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우들, 불치병 환우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ㅋㅋ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 받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 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아가면 좋겠습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오늘 하느님께서는

친히 우리 삶의 외딴곳이 되어 주십니다. 


외딴곳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외딴곳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만

더 힘있게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외딴곳이 없으면 실패와 좌절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외딴곳은 일과 기도의 건강한 균형을 잡는

은총의 본질적인 시간입니다. 


외딴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

남도 잘 대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은

이웃, 형제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껴안을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남도 껴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딴곳은 자기자신을 신뢰하는 곳입니다. 


하느님과의 친밀한 유대감만이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외딴곳입니다. 


자신이 맡은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 또한 외딴곳이 주는 은총입니다.

외딴곳의 은총을 통해 소중한 가치와

소중한 삶의 뿌리가 언제나 하느님이심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이 확고해야

긍정적이고 행복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외딴곳, 그곳은 균형있는 일과 기도의 소통입니다.

나를 배려하는 것이며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정직하게 만나는 외딴곳을 통해

나와 이웃을 위해 기쁘게 봉사하는

소중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사랑과 참된 변화는

먼저 우리자신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외딴곳은 매일 반드시 필요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글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세 번 놀라게 된답니다.

첫 번째, “어머나, 내가 천국에 왔네. 웬일이니?”

두 번째, “어머나, 저 친구도 하늘나라에 왔네. 말도 안 돼. 저 친구가 얼마나 나쁜 놈인데 이곳에 올 수 있어?”

세 번째, “웬일이니, 웬일이니... 내 친한 친구 **가 안 보여. 그 친구 죽은지가 언제인데? 이곳에 없으면 어디에 있는 거지? 지옥?”

그러면서 이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연히 올 거란 사람은 안 보이고, 없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있다니……. 그러니 함부로 내 잣대로 판단하지 마세요.’


사실 하늘나라로의 초대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예수님 당신께 데리고 온 질병을 앓고 있는 모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시지 않습니까? 누구는 착하니까 고쳐주고, 누구는 악하니까 문전박대하며 그냥 내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도 제외 없이 당신만을 찾아온다면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즉, 병의 치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말씀 한 마디로 쉽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손을 얹으셔서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시면 예수님 스스로도 편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철저히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방해가 있습니다. 그 방해는 절대로 거짓을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치지요. 분명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을 때 하는 이 말을 통해서 혼돈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즉, 아직 주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단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말을 꾸짖으며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지요. 예수님만 있으면 자기들은 아프지도 않고 배고프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욕심일 뿐입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사랑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당신을 채점하러 올 때, 그가 보는 것은 당신의 승패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경기를 했느냐다(그랜트랜드 라이스).


나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들은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표는 절대로 끝이 아닙니다. 마치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목표라고 해서,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한 부부가 결혼을 했는데, ‘우리 50년만 함께 살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만 도달하면 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세우고 있는 목표는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 목표가 내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목표만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특히 그 목표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일 때에는 더욱 더 공허함만을 가져다줍니다. 한 증권회사 간부가 자살하며 유서를 남겼다고 하지요.

“얘들아! 사랑한다! 아빠는 지금까지 성실하게 온 힘을 다해 살아왔다. 누구보다 빨리 승진했고, 누구보다 빨리 돈을 벌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지금 아빠는 너무 허전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 먼저 간다. 너희는 아빠처럼 살지 말라.”

주님께서는 언제나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고 스스로 당신께서도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엉뚱한 것들을 나의 목표로 세워서 행복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을까요?


진정한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오늘은 어제 있었던 부끄러운 일 하나를 고백하며 시작합니다.

어제 사무실 여직원이 제게 종이 한 장을 건네줍니다. 그리고 이 종이는 다름 아닌 교통위반 범칙금 통지서였습니다. 제가 무슨 교통법규를 위반했는지 보니 버스전용차선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버스전용차선을 위반한 적이 없다고 자신했거든요.

그래서 자세히 통지서를 살펴보니, 위반된 차는 제 차가 아니라 성소국에서 운영하는 승합차였습니다. 또 날짜를 보니 제가 운전한 것이 맞습니다. 문제는 저의 운전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위반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지요.

고속도로에서 보면 버스전용차선에는 사람 6명 이상만 타면 9인승 승합차도 다닐 수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시내에서도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떳떳하게 버스전용차선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내의 버스전용차선에는 35인승 이상의 버스만이 다닐 수가 있다고 하네요.

잘못 알고 있었으니, 교통위반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위반 범칙금 6만원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6만원으로 몰랐던 사실 하나를 배우게 되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네요.


모르기 때문에 틀린 것도 틀린 줄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정하는 것을 혼자서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있는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고 말하지요. 제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이 심한 열병이 혹시 ‘화병’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위인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쫓아서 이 고장 저 고장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 떠돌이 생활을 통해 온갖 부귀영화를 얻는 것도 아니지요. 이러한 사위를 보고서 화가 안 났을까요? 사위의 인품을 보고서 딸을 맡겼을 텐데, 딸과 가정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고 있으니 저 같아도 화방이 났을 것 같습니다. 특히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니 지금 하고 있는 사위 베드로의 모습이 옳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시몬의 장모는 그제야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시중을 들지요. 그들의 선택이 옳은 것임을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실수하기가 더 쉬우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모르면 그만큼 힘들게 이 세상을 살 수밖에 없으며, 내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래야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께 최선을 다해 시중드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운명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운명에 동의하지 않고 짊어지고 가는 용기이다.(E. 가이벨)


상대방에게 기준을 맞추는 앎

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떤 형제님의 하소연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친한 사이로 지냈던 옆집 교우와의 마찰로 힘든 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가를 제게 이야기해주시는데 그 말에 깊은 공감이 갔으며, 그 옆집 교우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후 이번에는 그 옆집의 교우분이 저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분 역시 먼저 저를 찾아온 형제님과의 관계 때문에 상담을 요청하신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분의 말을 듣는데 이분의 말씀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즉, 먼저 저를 찾아온 형제님이 잘못한 것이지, 이분은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두 분의 말씀을 모두 들은 결과 잘못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자기는 옳은데 남은 틀리다는 생각에, 둘 다 잘못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기준을 맞춘 앎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기준을 맞추는 앎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앎만이 다툼과 분쟁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만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단 한 명도 고통과 시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어린 꼬마들도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조그마한 입에서 ‘힘들어 죽겠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제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삶 가운데에는 좋은 일만 있지 않았습니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도 있었고, 이 시간이 제발 휙 지나가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주님께 매달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지요.


“주님, 이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의 뜻에 맞게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바치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생각납니다. 신학생 때 한 가지 잘못을 했고, 이 일을 교수 신부님께 지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당시 신학교에서는 그 문제가 민감한 문제였고 성소를 잃을 위험도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신부가 되고 싶었던 저는 매일 성체조배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했지요.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로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멋진 사제가 되어서 당신의 일꾼이 되겠습니다.”


그때 쫓겨나지도 않고 이렇게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분명히 주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열심히 살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가 필요할 때만 주님을 불렀고,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는 주님과 멀리하면서 제 일 하기에만 바빴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내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았다면 당연히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 베드로의 장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의 장모는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청해서 장모가 낫게 됩니다. 그리고 장모는 열이 가시자마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지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순간의 위기만 극복되면 나 몰라라 사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몬의 장모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 기도의 응답을 받았어도 곧바로 주님을 외면했던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고통과 시련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자유인이라고 볼 수 없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에픽테투스)


고난과 시련(박성철, ‘희망 반창고’ 중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고난과 시련이 없을 수가 없지요. 아픔이나 눈물이 없을 수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가 가끔 잊곤 하는 사실이 있답니다. 시련과 아픔, 고난, 힘겨움 같은 것은 우리를 쓰러지게 하고, 삶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더욱 단련시켜 주고, 더 큰 교훈을 주기 위한 값진 것이라는 사실이랍니다.

헨리 제임스란 사람은 충고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런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충고를 한 마디 해 달라고 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난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머리를 하늘로 높이 쳐들고는 말하십시오. '나는 너를 이기고야 말 거야. 결코 너는 나를 꺾을 수 없어.'라고. 그리고 그 말 뒤에는 가장 위안이 되는 이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십시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아픔과 고난은 나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줄 거예요.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말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내 인생의 소음이 아닌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조화로운 멜로디.




기억하고 감사하기

최성기 신부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서간들을 보면, 편지를 시작하면서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오늘 독서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콜로 1,3)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크고 복된지를 마음으로 느끼고, 나와 함께 삶을 섞어가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형제 자매들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이런 여정에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 신앙 공동체가 걸어갈 길이자 하느님과 일치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결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모두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아픔과 고통으로 삶의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일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일입니다. 기적을 베푸는 이의 삶이 감사에 찰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에서 머무신 시간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삶에 대한 기억과 감사를 되살리는 시간, 참된 희망의 힘이 되살아나는 시간, 하느님과 하나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김석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행적은 특별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릴적에 하루를 마무리를 할 때쯤이면 동네 비석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고, 길흉사가 있을 때면 모두들 그리로 모여들어 이야기꽃을 피우던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을 앓는 장모를 고쳐주셨으니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보고 아무도 그가 떠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침 일찍 외딴곳으로 가서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모든 능력이 아버지한테서 나오고 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항상 하셨으니 아버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참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이 시간에 와서 그 동네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하며, 그 일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이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과연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난 예수님이 아니기에 그러한 기적을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곁을 지나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의 얘기를 귀담아들어 줄 수 있다. 아니면 말없이 그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다. 이것을 내 일상 안에서 시도해 볼 수 있다. 함께 사는 가족에게, 직장 동료에게, 학교의 모든 동료에게,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지는 등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순간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라고 하면서 항상, 즉시, 기쁘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복음 선포이며 하늘나라를 전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간다는 것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공생활 초기 예수님은 인기가 좋습니다.

초창기에는 예수님도 Populism을 잘 활용하셨던 것일까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사람들에게서 악령들을 몰아내주시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치유 은사와 구마의 은사를 받은 사람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몰립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요즘의 은사 받은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나 강의를 잘 하여 인기를 끌면 그 인기를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떠나십니다.

이것은 박수칠 때 떠난다는 그런 뜻도 아니고 떠나면 사람들이 더 열렬하고 극성스럽게 따르게 된다는 그런 전술적인 이유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인기 관리 차원에서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의 인연이나 사랑에 머물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상과 같이 떠났습니다.

예를 들어 짧은 본당 사목이었지만 떠난 다음에는 다시 찾아가지 않고 연락이 오기 전에는 제가 아무 연락을 취하지 않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추억을 버리고 떠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분들의 호의와 사랑을 매정히 끊는 것도 죄송하고 어떤 때는 마음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저의 경우에는 그 사랑에 안주할까봐 그래서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지 못할까봐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왜 떠나셨을까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신 다음 날 외딴 곳으로 가시자 사람들은 그곳까지 찾아 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잡을 때 예수님도 뿌리치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십니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당신의 삶이 어떤 삶일지 천명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파견되어 가는 삶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떠나는 것은 또 어떤 식으로든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인기와 인정에 머물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인간의 사랑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떠나가는 것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향해 감, 즉 목적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없다면 방황이겠지요.

방황이 아닌 이상 목적지는 반드시 있는데 예수님의 목적지는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가 계신 하느님 나라요, 우선은 옆 고을입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이것이 당신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처럼 하느님 사랑과 더 많은 사랑을 위해 떠나는 삶이길 기도합니다.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께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시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퍼질테니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맨홀 속 아이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은 제가 무척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 보다 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한국에서의 안정된 기반, 소중한 인연들을 뒤로하고 훌훌 몽골로 떠나신 선교사 신부님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심신은 비록 고달프지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손수 집도 지으시고, 가끔씩 아이들을 위해 팝콘도 튀기시는 신부님, 이 세상 어딜 가도 마땅히 머리 눕힐 곳조차 없어 맨홀 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찾아다니시는 신부님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편지를 통해서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시는 선배님의 삶이 오늘 따라 더욱 부럽습니다.

"양신부님, 오는 10월 6일 대림동 수도원에서 있을 축제-바자회를 저희 몽골을 돕기 위해 개최한다니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래저래 저를 움직이시고 작용하시는 듯 싶습니다.

제가 이곳 길거리 아이들을 위해 몽골에 도착한지 어언 1년, 이제야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뜻을 깨달아 갑니다.

짙은 어둠과 습기로 가득 찬 지하에서도 이곳 몽골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촛불을 밝힙니다.

저는 지금 당장 맨홀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게르(몽골집)를 뜯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 판입니다. 내년 4월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가 봅니다.

밤잠도 못 이루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좋은 소식을 보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래저래 하느님께서는 몽골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아이들과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몽골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제 어린 시절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듯 합니다. 어찌 그리도 꼭 60년대 우리들 모습과 비슷한지 모릅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때묻지 않고 살아가는 이곳 몽골의 <맨홀 속 아이들>을 지상으로 끌어 올려 주고 싶습니다. 맨홀에서 건져낸 아이들과 함께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몽골 아이들에 둘러싸여 진지한 모습으로 설탕을 녹여 소다를 살짝 쳐 젓는 모습, 조심스레 철판 위에 붇고 별 모양의 틀을 찍는 선배 신부님의 모습이 얼마나 기뻐 보이던지...

진정한 복음은 우리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복음, 우리끼리만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복음, 우리 민족만의 복음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점점 보다 큰 동심원을 그리며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도 지구 반대편, 세상 끝 오지에서 비록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가 뚜렷하지 않지만 꾸준히 복음선포에 매진하는 모든 선교사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전국 맛 집 주소록’이라는 자료를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음식관련 프로그램에 소개된 맛 집 만을 정리한 자료였지요.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면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어제 동창 신부와 함께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맛 집 하나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자그마치 3군데의 프로그램에서 소개가 된 음식점이었지요. 얼마나 맛이 있으면 3군데에서나 소개가 되었겠어요? 

하지만 동창 신부와 저는 그 음식점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 음식점에 전화를 하면 이러한 안내 문구가 나옵니다. 

“고객님,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하신 후 다시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영어로 어쩌고저쩌고 말하네요(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 “The dail is wrong number, please call again.”). 그렇습니다. 가게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허무했습니다. 잔득 기대를 하고서 왔는데, 약도에 적혀 있는 곳에는 다른 식당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맛이 있는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들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게를 확장하는 경우가 있으면 모를까, 잘 되는 가게가 없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특별한 이유 때문에 없어지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세 군데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방송되었던 맛 집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점이 듭니다. 바로 이렇게 의문을 품는 제 자신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많은 기대를 가집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딱 맞게 이 세상은 돌아가지 않더군요. 전혀 뜻하지 않은 정 반대로 흘러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판단과 생각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음식점이 없다고 의심을 품고 있는 저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이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군중들의 기대는 자기들하고만 함께 하는 예수님을 원했던 것이지요. 예수님만 계신다면 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굶어 죽을 일도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하느님의 기대에 순종하는 인간의 모습 때문이 아닌,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기대를 주님께 가지고 있었습니까? 혹시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드러내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또다시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의 기대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간절한 기대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에 맞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스티븐 코비 외, ‘오늘 내 인생 최고의 날’ 중에서)

뉴햄프셔 주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 그곳에 아담한 별장이 하나 있다. 농어잡기 대회가 시작되는 날, 11살 난 어느 소년이 별장 선착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낚시찌가 크게 움직였다.

마침내 소년은 조심스럽게 힘이 빠진 물고기를 들어올렸다. 지금까지 잡은 물고기 중에서 가장 큰 농어였다. 소년과 아버지는 멋진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아가미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성냥을 켜서 시계에 비춰 보았다. 밤 10시였다. 대회 시작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물고기를 보더니 아들에게 말했다.

"그 고기를 놓아줘야겠다."

"아빠! 이렇게 큰 고기는 다시 잡을 수 없을 거예요."

소년이 놀라 소리치며 호수를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다른 낚시꾼이나 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원망하듯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농어의 입에서 바늘을 빼고 놓아주었다. 농어는 힘차게 헤엄치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34년 전의 일로, 소년은 지금 뉴욕에서 성공한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아직도 그 별장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소년은 그날 밤 대회에서 처음 잡았던 물고기만큼 큰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때 놓아준 농어가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도 옳은 일을 하는가? 제때 설계도를 제출하려고 눈속임을 하지는 않았는가? 내부 정부를 이용한 주식 거래를 거부했는가?'

만약 여러분이 어렸을 때, 물고기를 놓아주라고 배웠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리를 배웠기 때문이다. 옳은 결정은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생생하게 남는다.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러한 기억은 앞으로의 삶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안내하는 등대가 되어준다.

소년과 아버지가 물고기를 잡은 시각을 속였다고 해도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소년과 아버지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충실해야 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면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그 선택으로 그들은 마음의 안정과 자신감을 얻었다.


 


함께 머물기

김인한 신부님

같은 교구 빈민사목 위원회 신부님들과 함께 부산 범천동에 있는 ‘예수의 작은 자매의 우애회’ 수녀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사글세방에 세 분이 사셨는데, 한 분은 국제시장의 공동화장실 청소부로 일하시고, 다른 분은 양산 터미널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시고, 또 한 수녀님은 나이가 많으셔서 집안 살림을 하시며 동네 아이들의 친구로 살고 계셨습니다. 

사도직의 방향이 어디냐고 묻는 저의 어리석은 질문에 수녀님들이 씨익 웃으시면서 ‘없는데요’ 하시고는 ‘우린 그냥 가난한 사람으로 무력한 사람으로 똑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해야만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을 해야만 예수의 제자는 아닙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그들과 함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있어 보이고 성과가 나와야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뜻을 이루고 나를 전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예수님께서 머물렀던 마을을 떠나셨듯이 내가 이뤄낸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에서 떠날 수 있는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합창

박기호 신부님

2007년 7월 6일은 한국교회에 특별한 날이었다. 한국 최초로 청각장애인을 사제로 서품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필자는 서품식장에 모인 청각장애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기에 창미사와 기도를 수화로 봉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웅장한 합창이었다.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였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기도였다. 자신들의 사제를 가졌다는 기쁨과 자부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었으리라. 필자 역시 장애인 사제 서품을 결정한 교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울먹이는 마음으로 고백했다. 새 사제로 인해 이 땅의 청각장애인들에게 주님의 은사가 풍요롭게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모든 존재에겐 언어가 있다. 자신들의 언어가 엄연히 있기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기도하고 찬양하는데 ‘말 못하는 이, 듣지 못하는 이, 보지 못하는 이’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진실한 것을 보기 위해 눈을 감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하지 않는가? 진짜 장애인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웃음도 눈물도 없는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부나 정치인들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당신께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긍휼히 여기시고 배려하고 사랑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얹으시어 치유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인격체로 소중히 여기시는데 왜 우리는 장애인들을 뭉뚱그려 보며 차별할까?

주님의 치유를 원하는 이는 모두 주님 앞에 나와 함께 찬양드릴 의무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명품(名品)으로 재창조되는 은총의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럽대륙에서는 14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소빙하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 나무들의 성장이 현저하게 지연되었습니다. 특히 1645년부터 1715년 사이 70년 동안이 가장 추웠답니다.

그런 까닭에 알프스의 가문비나무들이 예외적으로 단단하고 큰 밀도를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난히 많은 명품 바이올린들이 생산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혹한의 빙하기 시대, 추위로 인해 비록 나무들의 성장이 더뎠지만, 그래서 나이테를 살펴보면 이 기간이 유난히 촘촘하고 좁지만, 대신 나무의 밀도는 훨씬 높아진다는 것, 나무의 강도는 훨씬 세다는 것, 그 결과 명품 바이올린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경청’, 조신영, 박현찬 공저, 위즈덤 하우스 참조).


유독 혹한의 시기에 많은 명품 바이올린이 생산되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시련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란 너무나 힘겹습니다.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아픔, 아무리 노력해도 수용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물러서 바라보면 그 시련은 우리를 값진 ‘명품’으로 만들기 위한 은총의 도구란 것입니다.


최근 ‘투르 드 코리아 2007’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국을 방문한 사이클 계의 전설인 렌스 암스트롱의 인생 역시 혹한의 계절을 명품으로 꽃피운 모범 답안입니다.

그의 빙하기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이클 선수로 한창 잘 나가던 젊은 시절 그는 암 진단을 받습니다. 생존율도 높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뇌까지 전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 빙하기를 잘 극복했습니다. 2년 만에 다시 페달을 밟았고, 약 3주간 3500㎞ 남짓 달리는 지옥의 레이스 ‘투르 드 프랑스’에서 7연패(1999년~2005년)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그는 이제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고통 앞에서 포기하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고 크게 외치며 동료 암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손수 암(CANCER)이란 영어 단어로 6행시를 지었습니다.

Courage(용기)

Attitude(태도)

Never give up(포기하지 않기)

Curability(치료 가능성)

Enlightenment(깨달음)

Remembrance of my fellow patients(동료 환자들에 대한 기억)

그는 97년부터 ‘암스트롱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Cancer’의 ‘r’(remembrance of my fellow patients: 동료 환자들에 대한 기억)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해질 무렵까지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일일이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도 예수님으로 인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불치병을 앓던 사람 역시 말끔히 치유되어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오랜 혹한기를 꿋꿋이 견뎌온 가난한 백성들이 그간의 모진 고통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명품’으로 거듭나는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고통 앞에서도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뚜렷해졌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명료해졌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신앙의 사막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머지않아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간 우리가 겪어온 오랜 방황과 갈등의 세월을 마무리지어주실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시달려왔던 굶주림과 갈증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부족한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값진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유재훈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이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치는 악마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려지면 더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게 말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면 자기들을 강대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곧 정치적인 해방을 꿈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까 봐 악마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에는 기복적입니다.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들을 위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청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단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단계를 벗어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과 아픔까지도 받아들이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미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일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최종수 신부님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특히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말 한 마디면 모든 병을 낫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씩 치료하지 않고 병자들을 한꺼번에 치료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씩 치료하셨습니다. 

때로는 흙으로 이용하시기도 하고 죽은 사람 위에 올라가시기도 하십니다. 

공생활 동안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으니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치유의 은총을 받았을까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도전과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치유의 기적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병자들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이 기적을 가능케 했던 것은 아닐까요? 바로 사랑의 힘에서 기적이 나왔던 것이지요. 

현대인들에게 치유의 기적은 의술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기적 역시 사랑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가 내 아내나 딸을 수술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 수술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잘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기적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셨다.

이기양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선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년 동안 예비신자 한 명씩은 다 봉헌하도록 하자고 전에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유, 작년에 괜히 다 해버렸네. 좀 남겨둘 것을…” 

부담이 있지요. 많은 신자분들이 선교에 대해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내 신앙도 형편없는데 이 상태에서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더군다나 교리 지식도 짧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괜히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망설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선교는 나 같이 주일 미사만 겨우 나오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장님이나 총구역장, 꾸리아 단장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야." 


한편 선교를 하자고 하면 선전문을 들거나 요란하게 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큰 거부감을 나타내고 힘겨워 하기가 쉽지요. 그렇다면 선교는 신앙심이 깊고 교리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지요.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느 성당에서 8개월 정도의 기간을 갖고 선교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부와 중등부, 어른들 모두가 참여한 행사로 학생들은 각 학년별로, 또 어른들은 각 구역별로 나름대로 목표량을 정해주고 함께 할 것을 제안하였지요. 초등부도 유치부부터 6학년까지 실적표를 다 그려 붙여서 어느 학년이 잘 하는지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잘 하는 어린이한테는 상을 주고, 또 잘하는 학년에는 특별히 칭찬을 해 주며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하고 많이 아는 6학년 학생들이 제일 잘했을 것 같지요?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놀랍게도 유치부 꼬마 어린이들의 결과가 제일 좋았습니다. 처음에 유치부 어린이들은 한 열 명 정도 되었는데 6개월이 지나서 확인해 보니 세배로 늘어 있었습니다. 삼십 명도 넘는 어린이들이 성당 마당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선교를 잘했을까요? 유치부 어린 꼬마들의 신앙이 뛰어났겠습니까? 아니면 교리 지식이 풍부했을까요? 아닙니다. 답은 유치부 어린이들의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선교는 용기입니다. 선교는 용기를 내는 것부터 시작되지요. 유치부 어린이들은 성당에 안 다니는 자기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이 다음 번 성당에 올 때 친구 한 명씩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너 나랑 같이 우리 성당에 가자."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그래." 그리고는 따라나섭니다. 그래서 같이 오면 간식도 주고 또 선생님이 잘 왔다고 칭찬도 해주고 하니까 다음에 또 오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교는 용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어린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6학년만 되도 뭔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제일 못하는 학년이 6학년입니다. 자기 생각이 많아지고 이것저것 따지고 재는 것이 많아지지요. 

"내가 저 친구에게 말을 했을 때 저 친구가 어떻게 나올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에게 어떻게 세상과 신앙을 조목조목 이야기해서 완전히 항복시켜 성당으로 끌고 나올까?" 

이렇게 생각하면 시작도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이야기 꺼냈던 사람이 주저앉고 말지요. 처음 시작이 틀렸습니다. 신앙이 어떻고 성사가 어떻고 이 세상이 어떻고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아주 사소한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친한 친구가 성당에 다니니까 한번 가서 보고 싶어진다거나, 나무를 좋아하는 이웃이 있으면 어느 날 “나무를 참 좋아하시네요. 우리 성당에 참 멋진 소나무가 있는데 한번 구경 가실래요?” 그리고 그냥 가볍게 한번 와서 보는 겁니다. 오면 나무만 보고 갑니까? 성모님도 보게 되고 성당 건물도 보고 해서 눈에 익숙해지는 것이지요. 또 어떤 경우에 이웃과 나란히 성당 앞을 지나 가다가 “우리 차 한 잔 하고 갈까요?”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차는 찻집에만 있습니까? 성당에 와서 차 한 잔씩 뽑아들고 편안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누어 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선교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작은 것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을 해서 서서히 하느님을 알아 가는 것이지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인간적인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은 또 아닙니다. 더불어 필요한 것이 있지요. 


두 번째로 꼭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선교를 시작했다가 상처를 받기가 쉽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고 오히려 내가 흔들릴 수가 있지요. 친구한테 성당에 한 번 가보자고 제안했다가 무안만 받고 친구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성당에 가자고 하면 얘기 한 즉시 싸구려 장사꾼 취급을 하며 너무 쉽게 반응을 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하려고 시도했다가 상처를 받고는 다음에는 말도 못 꺼내고 어색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선교할 때 오는 그런 부담감을 어떻게 소화하면 좋겠습니까? 방법은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로 준비하면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반응에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절에 나가자거나 교회에 가자고 하면 “그래, 당장 갑시다.”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겁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에 오는 사람은 “내가 죄가 많은데 성당 갔다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어쩔 줄 몰라 하지요. 그러므로 성당에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을 내 입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다음 동네에도 이 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제자들이 찾을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피곤하고 지칠 때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재충전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에서 오는 많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상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선포는 특별한 누구만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 신자들이 일년에 한 명 하느님께 예비신자를 봉헌하는 것이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 먹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복음 선포는 해서 뭐합니까? 신자들이 많아져봐야 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교가 교회의 생명이라고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복음 선포가 개인의 신심을 성화 시키는데 첫 번째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복음 선포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가 또 가정이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풍성하게 살고 싶으면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언행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저는 사목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심도 약하고 교리 지식도 짧은데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면 걱정말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면 신심이 탄탄해집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 교리 지식이 나도 모르게 풍부해지지요. 


나 개인에게 오신 주님을 이제는 이웃에 전함으로써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내 신앙을 이제는 개인에서 이웃에게로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선포는 이웃 사랑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구를 정말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만난 주님, 나의 삶을 정화시켜 주시는 주님을 어떻게 전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전하게 되는 겁니다.




정승환 신부님

오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십니다. 우선 예수님은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십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했다는 보기 드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열을 적대적이고 반항적인 하나의 권능으로 보셨고, 그 악의 세력을 어제 복음에 이어 물리치고 계십니다. 


병은 죄와 함께 이 세상에 들어왔고, 이제 예수님은 그 원래의 상태를 복구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영혼과 육신은 온전히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부터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이고, 주님과 함께 미구에 영육으로 고통이 없는 영광에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고통 중에 시달리던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구원의 손길이 그들 앞에 서 계심을 직감하고 주님께 달아드는 것입니다. 마치, 바르티메오처럼 육신과 영혼의 눈이 뜨이기를 희망하면서... 이제 안수를 통해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벌어집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리 덮는 것은 이 치유의 원천이 저 높은 곳,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은총의 내적 효과는 바로 성사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허약하고 병든 육체를 고쳐주시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시고자 그 동네를 떠나게 되십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데 비해 가파르나움의 군중은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나 그분은 떠나셔야했습니다. 당신의 사명은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골로사이서의 말씀처럼 복음은 온 세계에서 열매를 맺으며 널리 퍼져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오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나의 생활은 과연 어떠한지를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나 가파르나움의 병자들처럼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들이며 주님의 자비로움과 사랑 안에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언제나 평화를 전하면서 시몬의 장모처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주님께서 한 곳에 안주하지 않으셨듯이, 폐쇄적인 자아를 부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주님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적 신앙인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보석 - 주님을 가슴 가득 품고 세상을 향해 그분의 사랑을 외쳐야할 것입니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 그 깊은 곳까지 치유해 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치유를 통한 은총

최혜영 수녀님

오늘날 질병의 고통만큼 인간을 위협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의기충천하다가도 덜컥 큰 병에 걸리고 나면 어깨가 축 쳐지고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에 안 걸리려고 온갖 좋다는 약은 어떻게든 구해서 먹으려 하고, 신약(新藥)을 개발하는 데 엄청난 돈이 투자되곤 합니다. 현대 의학이 과거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 감기 바이러스도 퇴치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신약이 많이 발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병도 많이 생겨 인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일뿐 하느님 자체는 아닙니다. 병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의 전부이시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며 해방입니다. 우리가 치유의 은혜를 청해야겠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넘어 하느님의 다스림을 맛볼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은 순례의 여정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한만옥 신부님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주셨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청한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따스한 사랑의 손을 얹어 고쳐주셨다.

날이 새자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셨다. 아마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분은 자주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으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시는 바로 그 기도 안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소외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본 군중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들을 떠나지 말고 함께 계시기를 청한다. 그분이 함께 계시면 모든 병도 낫게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신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복음서에서는 어느 한 곳에 안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늘 떠나신다.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에까지.

신앙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사제들도 이 본당에서 저 본당으로, 이 소임에서 저 소임으로 계속 이동하는 것이 아닐까? 




임성환 신부님

오늘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소문이 나돌았을까요?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신통방통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 그 사람이 손만 얹으면 어떤 환자들도 다 낫더라. 그러고도 돈을 요구하지 않더라. 와~’

이런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온통 예수님께로 모이게 되었고 예수님은 소문 대로 손을 얹으시고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서 함께 살자고 붙들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낫게하는 굉장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을뿐 예수님 그분의 참 모습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받았던 세례의 그 때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세례 예식의 첫부분은 사제의 3가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2가지의 질문이 끝나고 나면 사제는 세 번째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세례받을 사람들의 결심을 묻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세례성사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의를 가지지 못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며 기도에 참여하고 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약속합니까?” “예,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곧 아버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하는 동안 세례를 받을 예비신자들은 굉장히 가슴이 벅차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님이,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강영구 신부님

+악마들도 여러 사람에게서 떠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대에게

태양은 ‘나는 태양이다!’하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대지(大地) 위에 묵묵히 밝고 따뜻한 햇볕을 비추어주기만 합니다.

동녘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의 여명(黎明)이 찾아옵니다.

깊은 잠에 빠졌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솟아오르고 어둠이 물러가면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때 묻고 더러운 것, 병들고 상처 난 것,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고, 가야 할 길도 보입니다. 

태양의 밝음과 따뜻함으로 만물은 생명을 누리고 제 갈 길을 찾아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태양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에 쌓인 중생(衆生)들은 예수를 만나서 새 삶을 얻습니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듯 예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어둠의 세력인 악마도 물러갑니다.


만물이 따가운 가을 햇살을 즐기듯,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세례와 광야유혹 이후, 어느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자기 공생활(公生活)의 목적과 방향을 논리적으로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또 다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첫 공생활의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 회당을 나선 예수께서 오늘은 (아직 제자로 불림을 받지 않은)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뿐 아니라, 해질녘에 사람들이 데려온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다.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에 연결시켜 살펴보면 구마기적과 병자치유는 모두 같은 날, 바로 안식일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4,31-41)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분명히 이 ‘일’을 두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6,2.7) 


앞으로도 자주 접하게 될 예수님의 구마기적사화나 병자치유사화는 그 서술상 일관된 구조를 보이고 있는 바, ① 마귀와 병자의 고백 및 상황묘사, ② 예수님의 기적적 구마 및 치유, ③ 구마 및 치유 실증(實證), ④ 당사자와 목격자의 증언과 반응 등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과 질병으로 앓는 사람을 분명히 구별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은 물론 천재지변까지도 마귀(악)의 다양한 작업이라 보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향하여 마치 ‘구마예식’을 행하시듯이 ‘열이 떨어져라.’(39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곧 이웃에 대한 ‘봉사’로 이어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는 마지막 날까지 연일 계속될 그분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구마와 병자치유가 예수님 일상의 스케줄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어디론가 따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이다.(42절) 왜 그곳으로 가셨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복음의 언급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것이다.(6,16 참조)


기도(祈禱)는 루가가 특별히 선호하는 복음의 테마이다. 루가는 공관복음 작가 가운데 기도에 관한 말씀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셨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권장하셨다. 많은 부분이 루가의 고유사료이다. 그러나 루가는 신자들의 믿음을 보존하고(22,32), 유혹을 이기며(22,40.46), 장차 재림하실 인자를 맞이하는(21,36) 방법으로 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가르침을 받고 치유와 구마기적의 은혜를 입은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늘 그들 곁에 두려고 붙잡았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마냥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으시다. 세상의 만백성을 위한 자신의 길을 가셔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속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만 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입은 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람이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를 묵상하면서 나의 하루는 과연 어떤지 생각해 본다.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루가 4,38-44)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는 열병이 무슨 병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감기 몸살이나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육체적인 열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하였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로도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은 지도 모른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신 후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일이 있다(마르 9, 33).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자기들 안에 부글 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하시면서 그들이 앓고 있는 열병에서 치료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시몬의 장모는 자기 집에 온 손님이 왔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열병 때문에 누워 있어야 했다.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사랑해야할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고, 봉사해야할 인간이 봉사를 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가정과 사회, 공동체, 교회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어떤 열병이든 열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악이다. 악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든다.

열병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즉 나로 하여금 아니면 공동체가 아니면 가정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공동체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이란 공동체가 서로 뜻이 맞지 않을 때 또는 공동체가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났을 때,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개인적인 열병 때문에 공동체가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또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때문에 개인적으로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가족간에 사랑이 없을 때 가족 모두가 열병을 앓는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녀들이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자녀들의 열병 때문에 부모가 열병을 앓고 누울 때도 있다. 가족간에 한 사람이라도 열병을 앓고 있으면 그 열병은 모든 가족에게 번지고 영향을 끼친다. 결국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나만 혼자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열병을 앓게 하는 원인 제공을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열병은 절대로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그래서 공동체가 또는 사회가 더 나아가 나라 전체가 열병을 앓게 만든다. 이런 모든 악(열병)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주위 환경의 잘못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그 열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시몬의 열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듯이 우리도 내가 앓고 있는 열병 또는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가족이 앓고 있는 열병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청하자. 오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앓고 있는 열병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조용히 성찰해보고 그 내용을 적어서 예수님게 봉헌하도록 하자. 아마 오늘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셨듯이 또 마귀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자 마귀가 나갔듯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의 악을 몰아내시어 치유시켜 주실 지도 모른다. 우리도 열병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도록 하자.

복음은 열병을 앓고 있던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손이 부인에게 봉사했던 것처럼 부인의 손도 "봉사하는 손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중들다."는 말은 희랍어로 "디아꼬니아" (Diaconia) 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세르비레"(Servire)라고 하고 영어로는 "써비스"(Service)라 한다. 이 동사의 뜻은 " 노예가 되다. 종 노릇하다. 종살이 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비위를 맞추다. 순종하다. 몰두하다. 힘쓰다"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즉 봉사한다는 것은 "타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요,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요, 타인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봉사하는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경우는 봉사자의 진정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봉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봉사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두가 봉사하려고 하지 않고 봉사를 받으려고만 하는 데에서 미움이 생기고, 상처를 받고, 불목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열병을 고쳐주시어 시중들게 해 주셨다는 것이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되찾아주신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병을 치유시켜 주셨다는 것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하신 것이다. 즉 잃어버렸던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아주신 것이다.


인간이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봉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먼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복음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기적이요, 선물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바로 우리 자신이고 또 열이 가셔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는 모습 또한 열병을 앓고 있는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열병으로 계속해서 누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치유 받고 일어나서 시중드는 아름다운 인간이 되고 싶은가?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자.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펜실베이니아로 가는 중앙 보도에 층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층계는 실력과 성실성이 널리 알려진 ‘옴스테드’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라는데, 글쎄 이상하게도 그 층계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입니다. 

한번은 그 층계에서 넘어져 부상한 한 시민이 그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했지요. 그러자 옴스테드가 말합니다. 

“나는 그 층계를 건축하기 위하여 내 집에 나무층계를 만들어놓고 오르내리며 오랫동안 실험한 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좀 조심해 걸으시지, 제 책임이 아니라니까요.” 

옴스테드의 말에 부상당한 사람은 화가 치밀었으나 할 말이 없었지요. 수십 차례를 실험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시민이 걸어가는 옴스테이를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그는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옴스테이는 한쪽 다리가 다른쪽 다리보다 짧은 것입니다. 

스스로 실험을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맞는 이 층계가 정상인 사람에게 맞을 리가 없을테고, 사람들이 계속 넘어져 부상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납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제 판단이 맞다고 박박 우길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되돌아보면 내 판단이 꼭 맞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요. 


제가 신학생 때 좀 못살게 했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후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하는 유행을 다 따라하는 이 후배의 모습이 신학생으로써 맞지 않다고 생각을 했고, 많이 혼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후배의 따른 유행을 훗날에는 저도 똑같이 따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삐삐라고 불리던 호출기가 그랬고, 휴대전화가 그랬으며, 머리에 무쓰나 젤을 바르던 모습 역시 나중에는 저의 모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옳다는 것. 그것처럼 어리석은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고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군중들만의 판단이지요. 주님의 뜻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 전하는 것인데, 주님의 뜻을 자신의 뜻 아래에 놓으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가 없게 됩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보다 더 겸손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일을 합시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앨리스 휘톤, ‘용서’ 중에서)

회의나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청중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여러분 인생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가장 흔하게 나오는 대답이 바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평범한 직장이든 고위직이든 모든 사람이 이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적합한 매너나 사회적인 감수성을 기를 수 없을 것이다. 둥굴에 사는 한 부족 사람들이 구성원 한 명을 쫓아내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그 사람은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직결된다. 그런데도 이런 두려움이 없다면 그 사람은 부족의 안녕에 공헌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불안해하고 자신감도 부족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사회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요구한 것을 상대방이 거절하는 경우, 내가 속한 팀에서 내가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한 경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무시무시한 결과가 몰아닥칠지 미리 추측한다.

그런데 나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려면 반드시 다른 이에게 “Yes”라는 대답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기꺼이 “No”라는 대답도 받아들인다면 성공할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거절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힘을 기를 수는 있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마음, 네가 내 속에 들어와 살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나를 지배할 수는 없어. 너는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고 일과 인생에서 더 큰 게임을 즐기려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이런 태도를 취하면 두려움이 당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두려움을 소유하게 된다.




복음 선포 

서북원 신부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면서도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 자체여야 합니다.

내가 기쁠 때 다른 이에게도 기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먼저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어떤 신자가 잘못했을 경우 그 개인에게 잘못을 돌리기보다 종교 자체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내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인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나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님, 부족한 저에게 당신을 전하기 전에 제가 먼저 올바로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바라보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소서. 아멘.”




결단에 이르는 신앙

이종진 신부님

필자는 주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늘 이런저런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된다. 위대한 성현들의 지혜나 통찰을 배울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체험하는 것은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갖는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대가도 있다. 지식이 쌓일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부담감과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곧 ‘아는 것’과 ‘실천적 삶’ 사이의 간극을 의식할 때 일어난다.

특히 신앙에 관한 지식을 접할 때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하느님의 신비를 벗겨내는 심오한 지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마음과 의지’로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원하고 행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못한다면 그 거룩한 지식은 결국 공허한 느낌으로 귀결될 뿐이다. 누구보다도 이 점을 깊이 통감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서 천국을 잡아채는데 우리는 마음이 없는 학문으로 살과 피의 진흙탕 안에서 뒹굴고 있구나.” 하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앎은 가장 거룩한 지식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귀들도 이런 지식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한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할’ 의사가 없다. 아니 그런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치 어둠과 빛이 함께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마귀들의 고백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신앙은 그 진리를 ‘아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원하고 행하겠다는 ‘결단’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의 신앙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신앙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결단을 유보하고 그저 아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어둠의 세력 역시 빛과 자신을 구분할 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양자 사이의 거리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가 아닌가! 




심고 물을 주는 일꾼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갈라티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체 안의 파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1년 6개월 간 코린토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시리아로 떠난 뒤 아폴로가 바오로 사도의 뒤를 이어 코린토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그만 바오로와 상관없이 파벌이 생긴 것입니다.

종종 본당이나 공동체에서 그런 일이 생깁니다.

본당 신부님이 갈리거나 회장이 바뀔 때 전임자와 친했던 사람과 후임자와 친한 사람들 사이에 전임자 때와 달라진 것 때문에 갈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하느님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믿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고 적어도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이럴 수 없는데 하느님도 공동체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내편이냐 아니냐만 중요합니다.

이런 코린토 신자들을 바오로 사도는 육적이고 속된 사람(Unspiritual person)이라고 강하게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폴로도 다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자신은 교회를 세웠으니 하느님께서 심는 일꾼으로 쓰신 것이고 아폴로는 다음에 와 교회를 돌봤으니 물주는 일꾼으로 쓰신 거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코린토를 당신의 텃밭과 건물로 삼으시고 하느님께서 자기와 아폴로를 일꾼으로 삼으셨는데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믿음도 교회도 다 헛것이고 하느님이 아니 쓰시면 자기들도 다 헛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느님이 완전히 빠져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됩시다. 

김성남 신부님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탄복하고 경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는데, 마침 심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줍니다. 열이 내린 부인은 사람들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시기 전에도 시몬의 장모는 앓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명령 하시자 즉시 사라진 열병은 도대체 어떤 병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위에는 베드로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아픔과 고통도 동반해야 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위 시몬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몬의 장모는 시몬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 외면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시몬을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시몬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스승이신 예수를 장모의 집에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서 친히 장모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해 주고 기쁜 소식을 가르쳐주면 가정불화가 없어지겠지, 그렇게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모를 고쳐주는 치유 장면은 이례적으로 극히 짧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몬의 장인도 그론 되지 않고, 시몬의 아내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환자와의 대화도 없고, 환자의 믿음을 확인 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인 곁에 서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하시자 열이 내립니다. 부인은 열이 내리자 곧 예수의 일행을 위해 시중을 들고 봉사를 합니다. 여러 가지 세상일 집안일로 마음의 열병을 앓고 있던 장모는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파 누워 있던 사람이 낫자마자 즉시 사람들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시몬의 장모는 혼자만을 위한 삶의 방식에서 타인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 전에는 자신만을 위해 존재 하는 삶의 방식을 살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난 후에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각자 자신들의 삶 안에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며 감탄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들은 아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동참하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진정 예수님 말씀의 기쁨과 구원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일어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됩시다. 아멘.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어 섬기고 투신하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의 두 번째 이적을 전해줍니다. 이 이적을 통해 사랑의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십니다. 사랑이신 분이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을 통해서 오고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실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품을 때 사랑이 드러나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자 사람들이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위해 그분께 고쳐주시라고 청합니다(4,38). 사랑은 그렇게 사랑이신 분을 ‘부르고’ 그분께 의탁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고 치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한없는 주님 사랑의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겸손하게 사랑의 도구로 삼아주심에 감사드리며, 더 열성적으로 자유와 해방, 기쁨과 정의를 퍼나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병자, 고통 받는 이들, 불의와 부당한 권력 앞에 짓눌려 억울한 이들, 소외되고 배척당하는 이들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복음적 소명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 때, 사랑의 샘물이 고갈될 때 우리는 사랑의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마귀의 영을 남자에게서 쫓아내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고 고쳐주십니다.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누구든 다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일치를 지향하고 어떤 차별도 없이 모두를 품습니다. 모두를 품는 그 사랑만이 치유와 해방과 변화를 가져옵니다. 


심한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시자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4,39) 병의 치유는 하느님 선의 표지요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랑의 선물에 대한 그녀의 응답은 사랑의 섬김이었습니다. 우리도 병자처럼 섬김 받음을 통해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우고, 치유 받은 그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4,40).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각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모든 이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우리 모두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어, 다른 이들과 이 사회를 사랑과 정의의 땅으로 바꿔나가야겠습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해방을 가져오는 도구가 되도록 힘쓰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1908년 조지 헤이시는 런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2시간 44분 18초로, 당시의 마라톤 세계 기록을 갱신한 것이어서 각종 매스컴에서는 “금세기 최고의 레이스였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지금 현재 이 정도의 기록을 내는 사람은 대략 3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즉, 현재에는 이 기록으로 최고의 레이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큰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글쎄 남자 다이빙 대회에서 한 선수가 공중 2회전을 시도하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할 뻔 했던 것이지요. 그 몇 달 뒤, 이 공중 2회전 기술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금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현재 공중 2회전은 입문자 수준의 다이빙 기술이라고 합니다. 보통 공중 네 바퀴 반을 돌고, 여기에 비틀기까지 동원한다고 하지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한 암기력을 자랑하는 사람, 각종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 부러움을 한껏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뛰어난 능력이라고 부러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조금 미래의 시간에 가서 보면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 안에서 누리는 각종 능력과 재주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삶 안에서 부러워할 것들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누리고 떵떵 거리며 사는 사람, 각종 능력과 재주로 뛰어남을 보이는 사람 등이 스스로 느끼는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다고 합니다. 이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만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은 받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스스로의 만족도는 누구보다도 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주안점을 두면서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에 주안점을 두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늘 주안점을 두어야 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천년 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승천하셨으니 이제 기쁜 소식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쫓아서 그리고 주님과 함께 바로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참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임을 약속해주셨습니다.

무엇에 더 주안점을 두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잠깐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위한다면 선택이 분명해지지 않을까요?

오늘의 명언: 장애물이란 목표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목표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면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헨리 포드).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최천호)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난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 그리고 든사람은 학식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는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좀 살다보니그게 아니더라고요.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정말 힘 있는 사람, 정말로 돈 많은 사람, 정말이지 경륜 높은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는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법정스님의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앞에서 입을 벌렸습니다.

"내 입 안에 뭐가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안 보이느냐?"

"이가 모두 빠진지 오래되었는데 무슨 이가 보이겠습니까?"

"이는 다 빠지고 혀만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제자가 이번엔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다 빠져버린 것이요, 혀는 부드럽기 때문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니라."

부드러운 게 오래가는 법입니다. 무엇이든지 나이 먹으면 딱딱해지게 마련이고, 어린 것은 부드러운 법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게 제대로 사는 비결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내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참사람도 아니고, 난사람도 아니고, 든사람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드러운 사람은 어떨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좀 더 목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사람인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독서: 코린토 1서 3,1-9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고구려 보장왕 25년 당대 영웅인 연개소문이 죽자, 그 외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남생은 연개소문의 자리를 맡은 다음 여러 성을 순찰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듣기 위하여 정사를 자기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어느 날 남건과 남산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남생이가 당신들을 장차 없애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 그의 대책을 모색하라고 하였습니다. 남건과 남산은 형님이 절대 그럴 이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고 보니 혹시나 하고 의심이 되며 염려가 되었습니다.

한편 남생이 민가를 순방하고 있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동생 남건과 남산이 당신의 자리를 탐하고 있으니 그 대책을 세우라고 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생은 믿지 않았습니다. 남생은 그 낯선 사람을 붙들고 동생들이 그런 음모를 품고 있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비밀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비밀사절이 동생들에게 잡혔고, 동생들은 왕명으로 형을 불러들였습니다.

남생은 자기가 보낸 신하는 오지 않고 자기를 불러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들이 음모를 꾸미는구나 하고 믿었습니다. 동생들도 형님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낯선 사람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남건과 남산은 군대를 동원하여 남생을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생은 국내성으로 피신하여 당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남생에게 현도군공에 봉하고 장군을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습니다. 전쟁 2년 만에 신라까지 합병하여 평양성을 에워싸니 한 달 만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 28대 705년간 천년 시작이 하루아침에 끝마치고 말았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는 하지만 각자의 핑계로 인하여 단합이 깨어지면 그 공동체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코린토 교회에서도 이런 분열이 있었습니다. 서로 자신은 바오로파오 자신은 아폴로파라고 하며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씨를 뿌렸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지만 그 복음을 키워주시는 분은 주님이신데 사람들은 주님보다는 바오로와 아폴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어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치아 하나만 아파도 그쪽으로는 아무 것도 씹을 수 없듯이 공동체가 분열되면 복음도 끝이 나고 맙니다.

교회 내에서 얼마나 분열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위 형제들의 마음이 갈라지게 만든 사람들이 있었듯이 항상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마귀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일치시키고 마귀는 분열시킵니다. 전 신부님과 현재 신부님을 비교하며 본당 공동체가 분열되게 한다든가, 신부님 강론 내용을 들먹이며 보수니 진보니 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이들이 바로 여기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왜 사제가 정치에 관한 발언을 하느냐며 본인들 스스로 믿음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임을 자신 있게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제가 뭐고 보수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고 분열될 수 있습니까? 혹은 상처받았다고 성당에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상처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분열되는 이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런 코린토 공동체를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모임’, 혹은 ‘육적인 사람들의 모임’으로 규정합니다.그런 공동체는 참 신앙인의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린이가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더 심오한 진리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어떤 분열이 일어나는 성당에 새로 부임한 신부님의 부탁으로 화해와 용서라는 주제를 들고 강의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가 거의 끝마쳐 갈 무렵 제가 “그렇게도 용서가 안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큰 목소리로 “안 돼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습니다.

본인은 영원한 의인이고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은 영원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용서라는 딱딱한 음식은 소화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열되기 이전에 분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분열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위 예화로 든 이야기에서 고구려가 망한 것이 형제들을 분열시킨 어떤 이들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간의 우애가 그것 밖에 안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공동체가 분열되었다면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어쩌면 우리가 육적인 인간이고,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신앙인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분열되지 않는 공동체가 그 스스로 그 구성원들이 성숙한 신앙인이요 영적인 사람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교구청에도 한분이 오셨습니다. 신학교에 함께 입학한 동창신부입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쾌활한 성격이기 때문에 교구청에서도 잘 지내실 것입니다. 3년이 지나면서 저도 교구청에서 고참(?)이 되었습니다. 동창신부에게 이것저것 안내를 해 주려고 합니다. 성당, 식당, 교구청 회의, 미장원, 식당, 서점, 운동시설이 있는 곳들을 알려 주려고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을 했었습니다. 보좌신부님이 새로 오시면 ‘동네투어’를 함께 했었습니다. 2시간 정도 본당 관할구역을 돌면서 교우들이 하는 가게를 소개해 주기도 했고, 산보를 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해주기도 했습니다. 저희들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면서 교우들이 좋아하셨습니다.

 

교구에 많은 부서들이 있습니다. 저는 사제양성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을 만나고, 성소후원회 모임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서품식 준비를 하고, 성소주일 행사를 기획합니다. 청소년국은 교회와 사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사목국은 교구장님의 사목방침을 전하고 있으며, 교구의 사목현안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해외선교 봉사국은 해외선교를 하고 있는 신부님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선교를 지망하는 사제들의 모임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홍보국은 교구의 소식지인 주보를 발행하고, 교회와 사회의 소통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회사목국은 사회복지 시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관리국은 교구의 살림을 맡아하고 있습니다. 사무처는 이 모든 조직들이 서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조직이지만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각 부서가 자신의 일만이 중요하다고 하면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교구장님이 어느 한 부서에만 힘을 실어 주어도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제가 많고, 직원이 많은 부서도 있습니다. 작은 규모의 부서도 있습니다. 마치 여러 꽃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 듯이, 크고 작은 부서들이 모여서 교구청이라는 꽃밭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루 일과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 지방으로 가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만나셨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사람들의 깊은 탄식을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곳을 향해서 미련 없이 길을 떠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러한 은혜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나의 업적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마음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사업이 잘 되고 부유해지면 오히려 성당에 안 나오는 경우를 볼 때도 있습니다.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통한 희망으로 갈등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봉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느님파 사람들, -영적인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8월 마지막날 8월31일, 참 감회가 깊습니다. 요즘처럼 한 달이 길게 느껴진 때는 없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9월 순교자성월과 함께 ‘기도의 계절’이 시작됩니다. 심기일전, 매일 새롭게 처음처럼 살고 싶습니다. 


어제 춘천에 다녀오던 중 지인과 나눈 대화가 생각납니다. 8월23일 더위가 끝난다는 처서處暑, 바로 로사축일에 손녀를 봐서 마침내 할머니가된 자매입니다.


“손녀 이름을 처서處暑라 하시고 세례명은 로사로 하세요. 너무 좋습니다. 이미 처서날 손녀를 봤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이름입니다. 유난한 불볕더위에 이번처럼 처서가 반가워보기는 처음입니다. 더위를 끝내고 집안과 사회에 시원한 가을을 가져다 주는 처서같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이름은 처서로 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렇게 작명하여 적극적으로 권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또 얼마전 수도원내에서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수도원에 난생 처음 1박2일의 피정을 왔다가 떠나는 할머니가 큰 가방을 들고 주차장앞에서 물끄러미 서있었습니다. 즉시 멀리 차옆에 수사님이 보이기에 손짓을 했고, 수사님이 쏜살같이 차를 몰고 와 짐을 싣고 할머니를 차에 태워 정거장까지 모셔드렸습니다.


“자매님, 수도원 천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세요.”

고맙게 차량봉사를 해준 수사님을 가리키며 수도원 천사의 얼굴을 잘 보라고 드린 덕담에 제 자신도 흐뭇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통해 때로 우리는 천사의 얼굴도 보고, 하느님의 얼굴도 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진정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처서와 같은, 천사와 같은 하느님파의 사람들입니다. 육적이나 속된 사람이 아닌 영적인 사람입니다. 아, 진정 속된 사람이 아닌 거룩한 사람, 육적인 사람이 아닌 영적인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시절입니다. 가볍고 얕은 천박한 사람이 아닌 향기 그윽한 깊이의 사람이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


시기와 싸움, 분열을 일삼는 자들이 속된 사람이요 육적인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하느님파 사람들입니다. 진정 공동체의 일치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분열이라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있는데 하느님파 사람들인 우리는 분열도 부패도 없이 주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 성숙합니다. 


오늘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며 분열상태에 있는 속된 코린토교회 신도들을 준열히 꾸짖는 바오로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명쾌하고 적확한지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는 말그대로 ‘처서處暑’같은 하느님파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상호경쟁’이 아닌 ‘상호협력’ 관계에 있는 자신의 신원을 깊이 깨달은 지혜롭고 겸손한 바오로입니다. 비단 바오로뿐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모든 이들이 귀기울여야 할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평범하게 하느님파가 신자가 되어 서로 보완하며 상호협력관계의 사랑을 살아가는 공동체 형제자매들이 영적인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평상심이 도란 말도 있듯이 이렇듯 평범한 일상의 삶이 구원이요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모두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파를 이루니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알고보면, 깊이 들여다보면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모두가 주님께 치유받아야 할 병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활약상이 한 눈에 들어오는 오늘 복음 장면입니다. 심한 열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 주님은 자기에게 데려온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모두 고쳐주십니다. 마귀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소리 질르며 도주합니다. 흡사 모두가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어 하느님파 사람들로 변하는 모습 같습니다. 이어 날이 새자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가시어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기도중에 당신의 하느님파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신 후 사명을 천명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당신을 닮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느님파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시편107.8-9). 아멘. 




때를 안다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4장 38절-44절,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긴 했지만, '병' 자체를 없애신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병의 치료법이나 예방법을 알려 주신 것도 아니고, 의학을 발전시켜 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려고(또는 없애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사람들을 더 많이 불러 모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자비였고, 사랑이었고,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7)."

예수님께서는 "내가 병을 고쳐 줄 테니 그 대가로 나를 믿어라."라고 하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안 믿었다가 치유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또는 병을 고쳤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의 믿음입니다.

육체의 건강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구원은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은 영혼의 구원,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병을 고치기만을 바라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외딴곳으로 가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카 5,15-16)."

(이 구절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든 군중은 사실은 병의 치료만을 바라고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은 '병을 고치는 말씀'을 뜻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복음 선포나 설교를 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 쪽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온 김에 병을 고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려고 온 김에 설교를 들으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본받아서 그대로 실천하는 일인데, 그런데 만일에 신자들과 신자가 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만 치료한다면, 또는 치료를 해 주었으니 신자가 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불우이웃 돕기나 다른 여러 가지 사회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와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개인 쪽에서 생각하면, 원래 안 믿었지만 혹시 믿으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신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생각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참 신앙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해진 다음에 더 이상 아쉬운 것이 없어서 떠나버린다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건강해진 다음에 고마워서 신자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랬다가 참 신앙을 갖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냥 무슨 답례를 하는 심정으로 겉으로만 신자로 사는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건강'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면, 또는 병에 걸렸더라도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면, 그것은 복 받은 일이고 은총을 받은 일이지만, 병에 걸리고 건강을 잃었다는 것이 '벌'을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에 '병'이 하느님의 벌이라면, 또는 '벌'은 아니더라도 죄에 대한 보속이라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거스르고 반대로 일하신 셈이 됩니다.

아니면 '병 주고 약 주고' 같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병'이 '벌'이나 '보속'이라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뜻인가?

누가 보아도 죄가 없다고 믿을 수 있는 어린 아기들의 병은 무엇인가?

평생 병고에 시달린 성인 성녀들의 경우는 무엇인가?

죄가 없으신 분이고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는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하셨을까?

만일에 '병'이 하느님의 아주 심오한 어떤 뜻이거나 계획이라면?

인간은 하느님의 뜻, 섭리, 계획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그것을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병 가서 병자에게 함부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이나 '보속'이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떻든 '병고'는 하느님의 선이 아닌 '악'이고,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은(선은) 우리가 모두 '영육 간에'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 퇴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는 일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사랑과 소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으로 많은 사랑이 ‘깨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랑이 비극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향기로움으로, 아름다움으로, 풍성한 결실로 열매 맺지 못하고 참담하게 끝나고 마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사랑과 소유를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소유를 혼동합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억압하기보다는 성장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편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속박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얽매이기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속박되고 싶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근원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인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마치 수족관에 들어있는 열대어처럼 생각합니다. 아니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애완견처럼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은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결과는 깊은 상처요, 괴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의 태도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 같으신 하느님, 좁디좁은 인간 세상에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오지 중의 오지 갈릴래아 지방에만 머물기에는 너무나 아까우신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셨기에, 이런 말씀을 내려놓고 또 다른 길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율법으로 좁혀진 세계를 뛰어넘는 그분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작디작은 사랑, 사랑도 아닌 사랑에 목숨 거는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신앙에 던진 도전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 점점 성장해나가길 바랍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가졌던 사랑에 대한 허상과 환영들을 깨트리길 요청합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청합니다. 상대방의 약함과 쓸쓸한 뒷모습, 실수와 허물 등등.

사랑이 쉽게 깨지는 또 다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기대입니다. 그토록 목숨 걸고 예수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사람들, 목숨 걸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맹세했던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다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잘 나가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죽어가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치유시키시는 ‘명의’ 예수님만 눈에 보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것 내려놓고 십자가 길을 걸어야만 하는 순명의 예수님은 죽어도 보기가 싫었습니다. 마침내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 치욕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고통의 예수님은 절대로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무너질 때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랑, 보다 영속적인 사랑을 추구하길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

정희완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 공생애 전체에 걸쳐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복음 선포 중심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것으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 갔기 때문에,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하느님 나라의 동일시라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가 오랫동안 잊혀져 온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에 힘주어 선포하신 것은 분명 당신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며, 하느님 그 자체에 대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설교의 대부분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였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신 그분의 행위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종의 징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모습은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조금은 허망한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아마 그 구원의 모습은 신나는 열정의 모습일 거라는 상상을 가끔 합니다.

우리의 생은 때론 고요하고 정적인 모습으로 속 깊은 신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무엇보다 환하고 밝은 그리고 기쁘고 열정적인 움직임들 안에서 보다 근원적인 속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생을 보다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서, 신앙의 열정이 더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과 새벽 방송을 한 뒤에, 아침 운동을 했지요. 그리고 곧바로 신학교로 갔습니다. 신학교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신학생 면담을 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곳에 사시는 형제님과 대화를 나눠야만 했습니다. 한낮이 되어서야 강화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교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저의 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5시에는 30년 동안 교구에서 근무하셨던 형제님의 퇴임 미사가 있었거든요. 


저녁 식사 후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일 바쁘다면 정말로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떠올려졌습니다. 제가 바쁘다 바쁘다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바쁨보다 더 바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 인간들을 지켜주시는 주님. 그런 주님이심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하루 일상이 나옵니다.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힘이 되는 좋은 말씀들을 건네주시지요.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베드로의 장모처럼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역시 치유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지요. 그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날이 어두워졌다고 “이제 영업 끝났으니 모두 돌아가십시오.”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날이 샐 때까지도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상처를 치유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지요.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날이 샐 때까지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기에 이제는 푹 쉬셔도 그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회당으로 이동하셔서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바쁨을 생각하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쁜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또한 쉬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바쁜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파견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일을 이어 받아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내 안에서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한 가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어떤 분께서 제가 있는 성소국으로 간편하게 뜨거운 물만 부어 먹을 수 있는 ‘쌀국수’ 1박스를 보내주셨습니다. 사실 어제 강화에 다녀온 뒤, 너무나 배고팠기에 쌀국수가 너무나 예뻐 보였습니다. 정말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화로 드려야 하는데,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서 이 지면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생이라도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와 가치가 있는 법이다(미치 앨봄).


스승의 참 모습(‘좋은생각’ 중에서)

프랑스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1학년 교사가 귀가하는 반 학생들 손에 가정통신문을 들려 보냈다. 그 가정통신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학부모님께, 저는 내일 파업에 참가하기 때문에 수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을 등교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이번 파업은 교육 예산의 확대를 요구하는 한편 교원 감축에 반대해서 수많은 교사들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교사들이 반드시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일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가정통신문에는 정부의 교육 정책으로 벌어질 상황과 그것에 대비한 교사들의 주장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모든 학부모가 교사들의 주장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사들도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수 있고 파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므로 이튿날 그 교사의 파업 참가로 수업을 못하게 된 것 때문에 학교 측에 항의하는 학부모는 없었다.

학기 말이 되었다. 그 1학년 학급에서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이 함께 모여 감사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학부모들은 작은 선물도 선생님께 전달했다. 그런데 이튿날 교사는 학교 게시판에 편지를 써서 붙였다.

“학부모님들이 제게 선물해 주신 알프스 산악지도와 망원경을 받고 감동했습니다. 언젠가 알프스에 오를 계획이라 꼭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망원경은 제게 과분한 물건입니다. 호기심 많은 우리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 같으니 학급 비품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대신 저를 1년 동안 믿고 아껴주신 그 마음은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파업 참가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 낯설겠지만 제자들을 위해 선물로 받은 망원경까지 내놓은 스승의 모습은 존경할 만하지 않을까?




본격 행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와 오늘의 루카복음은 주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행보를 시작하심을 소개하며 소위 말하는 “가파르나움의 하루”를 소개합니다.

가르치심,

병자치유,

악령퇴치. 

이것이 주님이 하루에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공생활 내내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은 이런 일을 하실 때 주님의 모습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인에게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악령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드러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는 단호하고 엄한 아버지의 모습과 부드럽고 따듯한 어머니의 모습이 같이 있습니다.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하시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따듯하신 것이고 두 모습이지만 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 사랑의 두 모습입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없이 단호하시지만 그로 인한 사람의 고통에는 더 할 수 없이 인자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두 가지 태도를 자유로이 취하실 수 있는 주님이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사심이 없는 사랑과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사랑이 이렇게 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엄함과 인자함에서 자유로운 주님은 이제 머묾과 떠남에서도 자유로움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서 병자들에게 가까이 가시고 옆에 계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엄마 손은 약손”처럼 손을 얹어 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자하심이 넘치시기에 그렇게 엄하심에도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스스로 있을 곳을 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으면 더 있고 싫으면 떠나고, 누가 붙잡으며 더 있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정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입니다.

파견되는 대로 가시는 분이십니다.


저도 이런 것을 흉내는 내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디에 있겠다,

이제 그만 하고 떠나겠다고 제 의견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늘 관구장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군소리 없이 가고 가는 곳마다 열심히 했지만 속으로 보면 떠남의 미련 같은 것이 늘 있었습니다.

새로 가는 곳의 싫음은 없었지만 떠남의 미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래도 따듯해졌지만 전에는 떠나고 나면 아주 매정하게 딱 끊어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실 때 주님은 어떠하셨을지 궁금합니다.




<독서> :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하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고린토의 교우들 가운데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린 바울로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그들의 신앙을 길러주며 교회를 부흥시킨 아폴로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바울로나 아폴로를 추켜세우며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살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교회 밖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여 살았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파벌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바울로 사도는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며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권고한다. 바울로와 아폴로는 서로 다른 과업을 맡았다. 바울로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세웠고 아폴로는 교회를 이끌어 갔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에 알맞은 방법으로 각기 하느님의 일을 했다. 이러한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어떠한 과업을 맡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면서 자신을 죽이셨고, 자신 안에 오직 하느님께서 계시기를 기도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길,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을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자존심, 꿈,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을 버리면 죽는 것처럼 생각되어 버리지 못하고 꼭 움켜쥐고 산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맹인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맹인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미끄러졌는데 겨우 외나무다리를 붙잡았다. 그는 살기 위해 다리를 꼭 붙잡고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 다리를 붙잡은 손을 놓으라고 말한다. 손을 놓으면 강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데도 손을 놓으라고 한다. 맹인은 사람들의 말을 믿고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힘이 빠져서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떨어진 곳은 백사장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리를 놓으면 죽는다는 생각과 믿음이 그로 하여금 힘이 빠질 때까지 다리를 붙들게 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말을 믿고 손을 놓았으면 훨씬 더 빨리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붙잡고 있었기에 힘이 빠질 때까지 손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그처럼 자신을 놓지 못한다. 심지어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기보다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고자 한다. 교회 안에 살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다. 자신을 버린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꼭 움켜쥐고 산다. 


고린토 교회의 교우들은 바울로 파, 아폴로 파라고 하면서 각자가 바울로와 아폴로를 추켜세웠지만, 그 안에는 자기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를 고집하고 내세웠던 것이다. 바울로와 아폴로가 전한 분이 주님이었지만, 그들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러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신앙인, 그는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달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다. 자신을 내세우고 고집하고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을 드러내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하자. 이 것 아니면 죽는다고 움켜쥔 그 손을 펴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얼마 전, 아주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래요. 

여자 친구는 반드시 쭉쭉 빵빵 절세미녀야 한다는 생활신조를 가지고 살고 있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우연히 유명한 심리 상담사와 고장 난 승강기에 갇히게 되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심리 상담사에 의해서 외모만 최고라고 생각을 바꾸는 특별한 최면요법을 받게 됩니다. 

이 최면요법을 받은 뒤, 주인공의 앞에 늘씬한 몸매에 환상적인 금발 그리고 성격까지 천사와 같은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녀와의 데이트 시간은 항상 행복했지요. 하지만 이상한 일이 그녀에게 자주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녀가 엉덩이만 살짝 걸쳐도 앉은 의자가 다 박살나고, 아름다운 그녀의 속옷은 낙하산처럼 너무 큰 것이에요. 왜 그럴까요? 

바로 최면요법을 받은 뒤, 외모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즉,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 역시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이 고아야지’라는 옛날 노래에서도 이런 가사가 나오지요.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점점 심해지는 외모지상주의 속에 빠져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성형수술도 과감하게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 번 해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영화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외모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고서 아름다움을 평가한다면 그때에도 지금처럼 성형수술이 판을 칠까요?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성서에서 혹시 이런 내용을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너무나 멋지고 예쁜 여성만을 가까이 하셨다는 내용을 또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서 뿅 갔다는 내용을……. 아마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외적으로 너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질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 외적으로 아름다워 보일까요?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은 어떨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을 보셨고, 그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세요. 내 마음을 주님께 드러내기에 떳떳하십니까? 과연 주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서 “네 마음이 참 예쁘구나.”하면서 칭찬하실까요? 


겉으로만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속마음도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쁜 짓 좀 합시다.


도대체 누가 안된다는 거야?('좋은 글' 중에서)

"넌 도대체 언제까지 체육관에서 온종일 운동만 하면서 환상 속에서 살 거냐? "

-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가족은 미스터 유니버스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라고 야단쳤다

"네 목소리는 좋지만, 특별하진 않아"

- 인기 가수 다이내나 로스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내에서의 공연하는 뮤지컬 배역을 얻으려고 오디션을 받은 로스에게 담당 교사가 불합격을 알리면서 한 말.

"그 사업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 매출액이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화장품 제국을 설립한 에스티 로더가 처음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회계사가 한 말.

" 너는 피아노를 칠 수도 없고, 노래를 부를 수도 없어. 차라리 의자 짜는 법을 배우는 게 나을 거다. 그러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을 테니까"

- 맹인 가수 레이 찰스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이 한 말

" 자네는 출판업계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훌륭한 편집자일세. 그런데 왜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작가가 되려는 거지? 나도 자네가 쓴 책을 읽어 보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저 그래."

- 뉴욕의 어느 출판업자가 제임스 미치너의 처녀작 [남태평양]을 논평한 말. 이 작품으로 미치너는 풀리처상을 받았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하느님의 은총이 소낙비처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들께서 꿈꾸고 계시는 교회의 모습 어떤 것인지요? 아마도 신명나는 교회의 모습이겠지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밝아오고 기쁨에 젖어드는 교회의 모습, 언제든지 마음 놓고 찾아가 비빌 수 있는 든든한 언덕 같은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간의 일치와 친교, 가족적 만남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 약자와 병자들에 대한 배려와 치유가 활발히 전개되는 모습, 사목자들의 헌신적이고 겸손한 봉사에 신자들 모두가 행복해하는 모습, 지금 이 순간이 우리 교회가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이 순간이 영원이었으면 할 정도로 신명나는 교회의 모습...


오늘 복음에 제시되고 있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천상생활의 한 단면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와 충만한 사랑에 힘입어 예수님께서는 활발한 치유활동을 전개하십니다. 관대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소낙비처럼 죄인들 머리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얼마나 관대한지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다들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갖가지 질병에서 치유된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에 겨운 백성들은 그 순간이 너무나 은혜로워, ‘지금 이 상태에서 세상이 멈췄으면’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로 떠나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제발 자신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세상 끝날 까지 자신들 곁에 머물러주시라고.


오늘 설정된 복음 장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 한번만 주어진 이 소중한 우리의 생애, 사실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아쉽고도 아까운 우리의 나날들, 그렇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신명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나 발밑을 내려다보니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삶은 어찌 그리도 혹독한지, 우리의 인생은 어찌 그리도 팍팍한지...

부족하기에, 아쉽기에, 허탈하기에, 다시금 청해봅니다.

신명나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살맛나고 재미있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봅니다.




일치의 중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십인십색(十人十色)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저마다 달라 가지각색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쩌다 외출하다보면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새삼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공동체 일치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극명한 상징입니다.

마음, 생각, 나이, 취향, 기질, 체력, 재능, 지방 무엇 하나 똑같은 것 없는 유일한 개인들입니다.

이래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주장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다르다는 사실 안에 이미 분열의 씨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가장 어려운 게 분열일 것입니다.

내적으로 마음 갈릴 때, 공동체가 분열로 조각 날 때 그 소진되는 에너지는 참으로 막대합니다.

그래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큰 죄로 취급합니다.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을 잊어 육적인 사람들이, 속된 사람들이 될 때 분열은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시기와 싸움으로 갈라진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질책에서 이런 진리가 잘 드러납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농사짓는 누구에게 수긍이 가는 진리입니다.

바오로처럼 하느님 중심의 통합적 시야의 안목을 지닐 때 비로소 다양성 안의 일치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은 한 부분을 책임 맡은 평등한 동료이자 형제요, 하느님의 협력자라는 겸손의 자각이 있어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분주한 치유활동과 구마활동도 바로 내적일치의 중심인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된 삶이였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아니 예수님의 전 활동이 하느님과의 내적일치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갈림 없는 마음일 때 바로 그 사람은 하느님 능력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붙잡아 두려는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적일치의 중심인 하느님 나라가 잘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의 핵(核)이자 예수님의 삶의 통합을 이룬 내적 중심임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하나의 비전이자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이 계실 때 비로소 내적일치요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이래서 공동미사와 공동기도가 절대적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새삼 분도회의 모토가 빛을 발합니다.

영원한 삶의 진리입니다.


기도 없이 일만 하다가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곧 내적 분열로 망합니다.

하느님의 성전 안에서 하느님을 상징하는 제대를 중심으로 모여 끊임없이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며

하느님 중심을 확인할 때 비로소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성격이, 취향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방향이 같아야 일치입니다.

하느님께 찬미 기도를 바치기 위해 모이지만,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살기위해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루 일곱 번 공동기도를 바친다는 그자체가 공동체의 일치가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지를 나타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공동체 일치의 비전이자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고 확인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므로 자신의 내적일치와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저는 지금 현재 시간만 나면 사제관에 들어갑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저에게 있어서 사제관은 단순히 잠자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제관은 잠자는 곳뿐만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 곳이며 공부하는 공간이 되어 있답니다. 즉, 사제관만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냥 편안한 느낌이 든답니다.


사실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사제관이지만, 다른 분들은 테라스만 마음에 든다고 하지 사제관 자체가 좋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조립식 판넬로 지은 집이고, 그 안에는 에어컨, 텔레비전, 냉장고, 책상, 옷장 등등 소위 생활필수품이라는 것들이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제관보다도 마음에 드는 공간이고, 사람들을 만나면 이곳 사제관 자랑하기에 바쁘답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사제관을 이번에 새로 신경을 써서 지은 것이고, 그래서 그만큼 애착이 가기 때문이지요.


남들에게는 별로라고 느껴지는 이 공간이, 저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멋져지게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나에게 참된 기쁨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형편없다는 평을 받는 사제관이 저에게는 그 어떤 사제관보다도 멋있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외적 아름다움이 내 자신의 행복을 이끌어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러한 외적인 아름다움이 최고인 듯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신 뒤에 다른 고을로 건너가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외적인 좋은 모습만을 보고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면서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후에 힘없는 약자의 모습을 갖추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면서 큰 소리로 외치지요. 즉, 그들은 이렇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힘없고 나약한 모습을 갖춘 메시아는 필요 없다면서 이제는 자기들 곁을 떠나라고 아니 자기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이 세상의 좋은 것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이 아님을 우리들의 삶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지금 나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남들이 말하고 있는 아름다움만을 쫓으면서 괜히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참된 기쁨을 쫓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생활 속의 작은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맑은 물처럼 맑은 마음으로('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중에서)

소중한 것은

행복이라는 것은 꽃 한 송이

물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우리는 오직 눈으로만

감각을 통해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정작 찾지 못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눈으로 소중한 것을

찾을 줄 알아서..


작은 꽃 한 송이에서

상큼한 행복을 들추어 내고

물 한 모금에서 감동의 눈물을

찾을 줄 아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감동할줄 알고

사소한 물건에서도 감사를

느끼는 맑은 마음을 ..


단 하루라도 간직하고

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도 이토록

아름다울수 있구나 하는

느낌이 1분이라도 내게 머물러서..


마음으로 조용히 웃을수있는

그런 순수한 미소를 ..


잠시라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