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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9월 12일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09.12|조회수742 목록 댓글 0


제1독서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17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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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콜로새서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을 입어야 한다고 권고하는데,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이다.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주는 것은 죄인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우리는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잘 압니다. 사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어 소년에게 돈을 벌게 하고, 가지를 잘라 집을 짓게 했으며, 줄기를 잘라 배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앉아 쉴 곳이 없자 자신의 그루터기도 내어 줍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또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 그 답이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이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용서도 가능하게 만듭니다.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를 받았으니 그것에 감사하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카인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아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미가 없는 사람은 용서는커녕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낌없이 주는 나무에게 감사하는 소년은 자비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거저 얻은 것으로 돈을 벌었고 집을 지었고 여행을 떠났으며 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자신의 것을 가져가더라도 자신도 그렇게 받았기에 단죄할 수 없습니다.받은 것에 감사하는 만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감사하니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려 노력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감사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감정이 감사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감정을 주시려고 미사 때마다 아드님께서 끊임없이 당신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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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새서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거룩한 사람들은 위엄이나 권위를 갖추어야 하거나, 더욱이 그들이 무슨 벼슬을 받은 사람처럼 위세를 부리거나 세상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콜로새서가 권면하는 덕목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면 한결같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등 어쩌면 약하게만 보이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늘 굴복해야 하는 듯한 태도들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보복하지 말며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고, 하느님처럼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정말로 힘들기 때문에 의지가 따라야만 가능하겠지요.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헐뜯는 사람, 곧 원수 같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를 위해 축복을 기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동태 복수법을 예수님께서는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계명으로 대치시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하는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죄인들도 자기들이 원하는 반대급부가 분명하면 다른 사람을 돌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는데,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선하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강조하십니다. 미운 사람, 원수 같은 사람의 행복을 기원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요. 그러니 그저 결단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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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첫머리’라는 뜻의 ‘화두’(話頭)라는 말은 불교 용어이기도 합니다. 참선 수행을 위한 실마리를 일컫는 ‘화두’란 수행자의 깨달음을 위한 물음입니다. 이를테면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너는 무엇인가?’ 같은 물음을 화두로 삼습니다. 이처럼 화두의 물음이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오랜 수행 끝에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교에도 화두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화두입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 대하기가 참으로 불편한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그러니 우리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화두인 것입니다.

화두는 깨달음을 위한 물음이고, 그에 답하려면 오랜 수행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기까지는 줄기찬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곧 ‘사람’이란 화두를 풀어 나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고통이고 난관이지만, 그 고통과 난관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지고, 하느님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며 좌절하지 맙시다. 용서가 안 된다고 답답해하지 맙시다. 그렇게 우리가 어려워하고 답답해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참된 사랑의 깨달음에 이르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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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라는 숫자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에 대한 테러로 말미암아 불안한 21세기 세계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이 끔찍한 참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게 산산조각 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표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비극적 사태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배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하는 뼈아픈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세계가 지금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한 결과가 다시 폭력과 혼돈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요즈음의 국제 정세에서 확인합니다. 그날 비극의 본질은 증오와 힘이 더 이상 평화를 유지시키거나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 시대는 응징과 테러의 악순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오 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기억하고 서로 자비로워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이 말씀을 선택할 때만이 불안과 증오, 경멸과 좌절이 지배하는 21세기가 평화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 정치로 말미암아 속절없이 희생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시대의 구원이 개인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상실감의 고통 속에서 비극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사랑하며 살아가는 힘을 발견하고, 서로 치유하고 치유받으며 마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미국의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영화는 이러한 개인의 소중함을 잘 보여 줍니다. 어린 소년과 어머니는, 너무나 자상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를, 따뜻하고 책임감 강한 남편을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한복판에서 잃습니다. 상실감은 채워질 길이 없어 어머니와 소년은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모자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어린 아들은 어머니의 표현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어머니는 근심과 슬픔을 묵묵히 이겨 내며 아들과 함께합니다.

이 영화는 참된 애도가 무엇인지, 상처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상실감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상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늘 아버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없이 못 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걸 알았어요. 아빠도 알면 뿌듯할 거예요. 전 그거면 됐어요.”

죽은 아버지를 돌아오게 할 수는 없으나 스스로의 의미 있는 삶이 아버지의 ‘존재와 의미’를 되살린다고 믿는, 영화의 소년과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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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교리서는 세 가지 원수(怨讐)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세 가지 요소를 원수라 하고, 이를 ‘삼구’(三仇)라고 하였습니다. 삼구는 곧 마귀와 세속과 육신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죄로 유인하여 구원받지 못하게 하고, 세속은 허망한 것이며, 육신은 사욕 편정(邪慾 偏情)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에 원수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때의 원수는 삼구만을 가리키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원수가 삼구만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삼구 안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속과 육신, 곧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맺는 관계가 그것입니다. 타인들과 맺는 관계, 세상과 이루는 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마저 흔들리는 경우를 더러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미워하는 사람, 저주하는 사람, 학대하는 사람 등을 원수로 꼽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집착하지 말고, 오히려 냉정을 찾아 잘해 주고, 축복해 주고,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작은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큰 곳으로 옮겨 가고, 마침내 원수를 용서해 주는 데까지 이릅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 안에 더 이상 삼구란 없어지게 됩니다. 삼구는 본디 그 실체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떤가에 따라서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허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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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우리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께서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답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해야 완벽할 수 있는지 그 답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웃 사랑의 완벽한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렵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부 사이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천사의 행위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길을 다시 결심한다면 그는 이미 천사로 변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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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성인(聖人)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니, 남을 심판하지만 아니 해도 성인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는 ‘한이 맺힐 정도로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그러한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은 자주 만납니다. 미운 짓을 하는 이들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남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나쁜 감정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나쁜 소문’을 내고 싶어집니다. 그럴 기회도 자주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럴 때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용서가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용서는 덕입니다. 평생 쌓아야 할 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순간에 용서하려 듭니다. 용서하는 것을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기회가 오면 늘 ‘좋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가 조금은 좋아 보입니다. 헐뜯고 비난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해집니다. 은총이 그렇게 바꾸는 것이지요.

사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서서히 조금씩 ‘좋게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용서 역시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 주는 자세가 용서의 출발입니다. 사랑과 용서에는 계획이 없습니다. 지금 사랑하고 지금 용서하면 그것이 시작입니다.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사실 제가 성령 기도회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성령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아픈 사람들도 참 많았는데,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이상한 말을 외치는 모습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지요. 이 모습을 본 뒤로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면서 피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희소병에 걸렸습니다. 어느 병원에 가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 순간 성령 기도회가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그분들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정말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기도회에 왔던 것이구나.’ 싶더군요.”


그리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간절한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성령 기도회를 이상하게 보았던 것은 제가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안에는 다양한 기도 방법이 있지요. 성령 기도회 역시 다양한 기도 방법의 하나로 너무나 좋은 기도입니다. 따라서 ‘맞다’, ‘맞지 않는다’가 아니라, 이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는 훌륭한 기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절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이상함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특기는 ‘사람의 간절함 파악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믿음만을 보고 치유해주시고 여기에 더 나아가 영적 무장까지 시켜주시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 이웃의 간절함을 보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보통 일반적으로 말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세상의 눈으로는 말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모범으로 십자가에서 당신을 중상하는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사회가 점점 험악해지면서 끔찍한 범죄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그 죄는 자기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그 범인을 몽둥이로 직접 처벌한다면 어떨까요? 법적 처벌을 받아서 교도소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정죄하면, 정죄 받는 것은 그대 자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영역이 우리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역할은 사랑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은 그 보상을 해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크신 주님께서 대신 보상을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오늘의 명언: 좋은 집이란 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어야 한다(조이스 메이나드).


불안한 마음.

이제까지 성지 안에서 강의뿐만 아니라 외부 강의도 참 많았습니다. 물론 성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면 부담감이 없지만, 수도권을 벗어나는 성지에서 먼 지방이면 힘이 좀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다음날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강의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야 할 때는 ‘힘든데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걱정을 안고서 갔던 강의에서는 늘 후회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인해 제대로 된 강의를 하지 못했다는 후회이지요.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든 내 삶 안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것들을 내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으며, 주님의 뜻을 더 많이 이 세상에 펼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교만은 겸손과 사랑이 결핍된 지식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99년에 개봉된 ‘매트릭스’란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이고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스승 모피어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 세계가 꿈인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결코 스승 모피어스를 이길 수 없습니다.

네오는 그것이 모피어스의 힘과 민첩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숨을 헐떡입니다.

그때 모피어스가 말합니다.

“내가 빠르거나 힘이 센 게 내 근육 탓일까?

여기서? (꿈속에서 어떻게 숨이 찰 수 있느냐는 질문)

네가 지금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해?

다시 해봐!

생각하지 말고 인식을 해! (여기가 꿈이란 현실을 믿으라는 것).”

그때야 네오는 무언가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일뿐이라고 믿고는 있지만 아니 믿고 싶지만 지금까지의 삶에서 배운 지식들 때문에, 즉, 자신은 저렇게 힘이 세고 빠른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 사람이 새처럼 절대 날 수 없다는 것,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어야 한다는 것 등이 자신을 사로잡아 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피어스는 계속 말합니다.

“그래. 네 마음을 풀어주는 거야.

나는 문까지만 안내할 수 있지.

그 문을 나가는 건 네가 직접 해야 돼.

모든 걸 버려. 두려움. 의심. 불신까지. 마음을 열어.”

우리가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모든 지식이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지식은 오히려 우리가 깨어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 지식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느 샌가 기쁨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쌓이면 그분을 더 알게 되어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지식이 쌓일수록 교만해져 동시에 내가 배운 지식을 뽐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나 자신을 높이는 도구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로오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신학도 잘못 공부하면 믿음을 잃게 만든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자신의 ‘겸손과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교만은 사랑의 반대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다운 가치는 하느님뿐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은 겸손과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넘지 못하는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신학대전’을 끝마쳐갈 무렵 하느님을 체험하고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신학대전이 ‘지푸라기’와 같은 쓰레기였다며 바로 집필을 멈추고 미완성으로 남겨놓게 된 것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은 쌓일수록 자신을 겸손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코린토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남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라는 구약의 계명이 지금의 시대에 와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꺼리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비록 죄가 아닐지라도 이웃과 약자들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지식만 믿고 살아가는 이들은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됩니다.

그 사람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이 만드는 것입니다.

잔소리는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랍니다.

아무리 옳은 지식이라도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면 잔소리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다 잡힌 1년 새 14건의 절도를 했던 A양(16세)은 당연히 소년보호시설에 들어가야만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서울가정법원 김귀옥 부장판사는 다정한 소리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라는 말만 재판정에서 A양에게 외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 아이가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결국 이 말을 다 마쳤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전년도에 아이들로부터 집단적으로 폭행을 당했었기 때문입니다.

법이 아닌 사랑을 지녔던 판사는 법대로만 하려고 하는 이들보다 법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모든 지식을 완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식을 쌓아가면서도 결코 그것에 겸손과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면 교만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텔레비전을 바꾸면서 전선 정리를 했습니다. 10년이 넘게 있었던 전선은 뽀얀 먼지가 가득했고, 선들은 엉켜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비디오, 인터넷, 케이블 수신기 등의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먼지를 털고 모든 선을 깔끔하게 정리하니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교통정리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꽉 막히는 도로에 교통경찰이 수신호로 정리하면 금세 교통의 흐름이 원활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을 정리해 주십니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래하듯이 선행을 베풀지만, 빛의 자녀들은 손해를 볼지라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학대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전선을 정리하면서 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버렸습니다. 아깝다고 필요 없는 선들을 남겨놓아서는 정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비디오와 연결된 선을 모두 치웠고, 영상과 소리를 전달하는 선도 다 치웠습니다. 요즘 나오는 텔레비전은 그런 선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교회는 2000년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 내부와 외부에서 거센 도전을 받았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적이 있었고,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으로 교회가 흘러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교회는 내부에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산중에서 기도하던 수도자들의 힘이었습니다. 수도자들로부터 기도의 바람이 불었고, 영성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같은 성인들은 정체된 교회, 꽉 막힌 교회에 기도의 바람이 불게 하였습니다. 가난과 비움의 영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막힌 혈관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개혁의 바람, 영성의 바람, 성령의 바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피가 흘러야 합니다. 기도의 바람, 영성의 바람, 나눔의 바람은 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살아있는 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너희가 되질하는 만큼 그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당신 바람 그대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불의하더라도

내가 정의롭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불의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정의로우렵니다


당신은 가르더라도

내가 모으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가름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모으렵니다


당신은 거짓일지라도

내가 진실하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거짓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진실하렵니다


당신은 탐욕스럽더라도

내가 나누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탐욕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나누렵니다


당신은 밀어내더라도

내가 보듬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밀어냄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보듬으렵니다


당신은 모질지라도

내가 부드럽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모짊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부드러우렵니다


당신은 단죄하더라도

내가 용서하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단죄에 맞서

나만이라도 용서하렵니다


당신은 움켜쥐더라도

내가 베풀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움켜쥠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베풀렵니다


당신은 그르더라도

내가 바르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그름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바르렵니다


당신은 말만하더라도

내가 행동하기를 바라기에

당신 바람 그대로

당신의 빈말에 맞서려

나만이라도 실천하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루카 6, 31)

곽승룡 비오 신부님

사랑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세상에서는 그 사랑이 조금 실천되는 것이 슬픈 일이다. 그래서일까 사랑의 태도와 구체적인 사랑실천의 현실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곧 남편이 부인을 위해서는 불 속에 들어갈 준비가 돼있다고 농담을 하면서 말하지만, 부인이 좋아하는 커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듯싶다.


마음 안에서 이처럼 느껴지는 사랑을 행동과 함께 표현하고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복음은 수세기의 경험으로부터 시도되고 실천해 온 충고와 방향을 제안하고 있다. 무엇이 사람에게 기쁜지도 알고, 다른이들이 망가지는 것을 보기도 하고, 그 때문에 화나고, 무엇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는지도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할 때 내게도 좋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만일 내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 내가 만족하도록, 돕는 누군가가 있지는 않는가?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이 나의 도움을 필요할 때도, 그렇게 동일하게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도록 여유를 가지면 좋겠다.

나의 감정들을 느끼고 살피면서도 그처럼,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좋은 방법을 배우려고 나는 애를 쓰고 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루카 6, 31)




모정이 참사랑의 모델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도 세상사는 사람들이 참 어렵게 산다는 걸 너무 잘 아십니다.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 잘해주는 이들만 주는 것 꿔주는 일등.

하느님 자녀답게 세상사는 새로운 말씀을 해주셨지마는 힘은 듭니다.


원수를 사랑, 그냥 꿔주고, 때리면 맞고, 다른 쪽까지 대주라는 말씀.

성경이 마음에 와 닿긴 해도 따르기 어렵다며 슬쩍 세상핑계 댑니다.

그 때 하느님 자녀처럼 처신하면 후하게 큰상 받는다니 왜 그럴까요.


참 아름답고 너그럽기 그지없는 하느님은 우리를 자녀로 보시거든요.

하느님 사랑을 그대로 내려 받은 모정이 참사랑의 모델인 거 같네요




행복한 추석명절 되세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SNS상에 막말 투성이, 뉴스에 대한 본문이 있고 그에 관한 댓글을 본다. 댓글이 지저분하다. 모두 안하무인이고 그 주장은 가히 폭력 수준이다.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저질스럽고 상스럽다. 정확한 인명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면 되지 않겠나. 왜, 익명으로 자기 주장을 험한 말로 남을 비하하는가? 주장은 서로 다를 것이다. 자기 소개와 더불어 다른 의견이 있다면 좋은 말로 정확히 말하면 되지 않겠는가?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리는 것은 자기의 주장이 떳떳하지 않다는 자기 모순을 드러냄이다. 촛불을 들 때, 얼굴을 가림은 자기 자기의 떳떳함에 대한 위장이 아닌가? 이 또한 익명의 폭력일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석명절 연휴에는 즐겁고 행복한 명절이 되었으면 한다. 좋은 말을 하여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해 주자. 그에 대한 답은 다음 말씀으로 요약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6,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황금률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실 이 황금률은 율법이나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넘어서서 어쩌면 모든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진리이자 자연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바라는 것은 많지만 해주는 것은 참 부족한 모습을 살아갑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정작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데에 인색합니다. 또 내가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지만 정작 다른 이들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지 않습니다. 또 내가 무엇을 갖고 싶어 하지만 정작 다른 이들에게 나누지 않습니다.


하물며 식물도 내가 정성을 드려 잘해줄 때 그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나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는 데로 나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렇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아버지의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역시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자비로운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갈 때 아버지께서는 더 많은 사랑과 은총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일러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절)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관습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굶주리는 사람에겐 참을성을 주고 은총의 상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절)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절)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30-31절)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고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절)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행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여야 한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되갚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내 만일 너를 잊는다면.

성 브루노 사제의 ‘시편 주해’에서(Ps 83: edit. Cartusiae de Pratis, 1891, 376-377)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내 영혼이 주님의 뜰 안에”, 즉 하느님의 도성인 광대한 천상 예루살렘에 “다다르기 소원이니이다.”


시편 작가는 여기서 왜 영혼이 주님의 뜰 안에 다다르기를 소원하는지 보여 줍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하늘의 온갖 권세들의 하느님이시여, 나의 임금 나의 하느님이시여, ‘당신의 집에’ 천상 예루살렘에 ‘사는 이는 복되오이다.’” 이 말은 흡사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이시고 창조자이시고 모든 권세들의 주님이요 임금이시며, 또한 당신 집에 사는 이들이 복된 이들이라면 누구든 주님의 뜰 안에 다다르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뜰과 집은 둘 다 같은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시편 작가가 “복된 이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행복을 누리리라는 것을 의미해 줍니다. 그들은 주님을 열성과 사랑으로 세세 영원토록 찬미할 것이기 때문에 복된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영원토록 행복한 이들이 되지 못하면 영원토록 주님을 찬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지닌 사람이라도 자기 힘만으로는 이 복락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순례의 길을 떠날 적에 주님께 힘을 얻는 자 복되도다.”라는 시편 말씀에 따라, 그 복락에 이르게 되는 데 있어 주님이 도와주시는 사람, 그 사람만이 이 복락에 이르게 되고 또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주님의 은총에서 도움을 받아 많은 덕행과 선행을 통하여 그 곳에 오르기로 마음을 작정한 사람만이 복락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자기 힘만으로는 아무도 오를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자기 힘만으로는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산처럼 세워져 기쁨으로 가득 찬 내세와 비교하여, 우리는 낮고도 눈물로 가득 찬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현세를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오르는 사다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위에서 말한 “주님께 힘을 얻는 자 복되도다.” 하는 시편 작가의 말을 들을 때, “복락에 오르는 데 하느님이 정말 도와주신단 말인가?” 하고 누가 질문을 제기할지 모릅니다. 이 질문에 시편 작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복된 이들은 틀림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의 입법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법을 주셨고 또 계속하여 축복을, 즉 온갖 종류의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이며, 이 축복으로 인해 우리를 복락에 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더욱더욱 힘차게 나아가”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후세 천상 시온에서 신들의 신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신 만큼 그들을 신화하실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신들의 신이신 거룩한 삼위 일체께서는 시온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방법으로 나타나시어, 그들은 이제 자기들 가운데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지성의 빛으로 그 가운데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

이종훈 신부님

이름 모르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맑은 하늘을 가르며 노래하는 새들이 마음을 맑게 한다. 어미 입에 물려 들려가는 새끼 고양이는 집에 가면 야단을 맞을 것 같다. 지붕이 뚫어질 것처럼 내리는 빗소리와 어두운 방을 순간 환하게 만드는 번개는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한다.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보름달은 낭만을 선물한다. 이 모두가 참 좋으신 우리 하느님 작품들이다. 


한 사람의 완전한 내어줌과 희생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준다.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여도 그렇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는 그에게 마지막에는 앉아 쉴 수 있는 자리까지 되어 주고, ‘키다리 아저씨’는 언제나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를 도와준다. ‘워낭소리’의 그 듬직한 늙은 소는 마지막으로 주인이 추운 겨울을 날 땔감을 한 가득 해 놓고서 비로소 그 코뚜레를 풀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숙연해지고 그립고 눈물 난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의 생애가 아니라 참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다. 우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연에서 느끼는 평화와 경외심, 남모르는 희생과 사랑 이야기에서 받는 깊은 감동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내어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하셨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루카 6,28)”고 하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인가? 


하느님 나라는 이곳저곳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참 좋으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다. 비폭력, 보답을 바라지 않는 베풀음, 차별하지 않는 사랑, 원수를 용서함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낸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기에(루카 6,36) 완전하시고(마태 5,48) 거룩하시다(레위 11,44.45). 우리 하느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자비로워서 완전해지고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이 불가능한 사랑에 도전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 되어주어 커진 나의 되에 하느님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나에게만 주실 그 선물을 기대하고 또 그리해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루카 6,38). 


예수님,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요? 저는 할 수 없지만 제 안에 계신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이지만 주님을 따라 주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께 불가능이란 없음을 듣고 믿으셨으니 저에게도 그 믿음을 얻어 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르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자기애와 가족 사랑은 본능입니다. 이웃 사랑은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상식선 안에서 가능한 일이고요. 여기까지는 굳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미풍양속이 나오고 인간의 도리와 정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한 영성가에게서 들었던 말이 기억납니다. 하느님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마태 22,37 참조) 사랑해야 하고, 이웃은 "너 자신처럼"(마태 22,39 참조) 사랑해야 하지요. 그리고 원수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냥" 사랑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처럼 목숨 걸고 사랑하라 하시지 않고, 이웃처럼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저 사랑하면 된다는 해석이었습니다. 부담이 좀 덜어지기는 하지요.


나를 미워하는 자, 저주하고 학대하는 자, 때리고 착취하는 자를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면 초반부터 숨이 탁 막힐 일입니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도 없어지고요. 하지만 다행히도 주님은 그렇게까지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됨됨이를 너무 잘 아시니까요.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루카 6,35).

이 구체적 지침을 들으니 원수에게 잘해 주는 건 (사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영 못 할 일은 아닙니다. 심장까지 다 동의하지는 않아도 그간 예수님 말씀과 동행하며 쌓은 내공으로 어느 정도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내주는 것도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할 정도는 아니니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동안 그분과 쌓은 관계를 염두에 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27).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를 "그냥" 사랑하시지 않고, "자기처럼" 사랑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목숨을 바쳐" 사랑하십니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증명하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 원수도 아니고 그냥 이웃도 아닌, 하느님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 DNA는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죽어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막지 않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 되어버린 사랑은 스스로 제 힘을 발휘하고 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콜로 3,12).

대상을 보지 말고 우리에게 부여된 자격을 염두에 두면 가능한 일입니다. "... 답게!" 감사하면서도 은근 부담이 되는 이 말씀에는 우리 신원의식과 정체성이 들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콜로 3,15).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아름답과 귀한 덕행들은 결국 "감사"로 귀결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니까 실천할 수 있는 권고들인 것입니다.


아버지께 입은 자비에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자비를 베풉니다. 아버지가 쏟아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이는 사랑을 쏟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대상을 보지 말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면 가능한 일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한가위입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떠오르는 인연은 물론 껄끄럽고 아픈 관계들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지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면 너무 잘 하려 하지 말고 또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지 말고, 그저 사랑해도 충분합니다. 대상에 매이지 말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주목하기만 하십시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 나 이런 사람이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사랑하는 명절 되시길 축원합니다. 




<도전받고 격려도 받는 오늘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너무도 좋은 말은 다 나열해놨는데 아마 주님의 제자이니 바오로 사도도 그 제자답게 이렇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참으로 좋은 말이라고 하지 않고 너무도 좋은 말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제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느낀 것의 솔직한 표현입니다.
다 옳은 말이고 실천해야 하지만 저에게는 너무하다는 느낌이고 너무 과한 요구를 성인이 아닌 제게 하기에 실천할 수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지나친 요구이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성인이 아니니 주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지킬 수 없는 것으로 제켜놓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래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니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공자가 이렇게 얘기했으면 옛날 너무 좋은 말만 하는 친구보고 ‘쟤는 꼭 공자 같은 말만 한다.’고 하며 제켜놓았던 것처럼 제켜놓겠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잘 생각해야겠지요.

주님의 말씀은 도전이며 주문입니다.
죄인들도 그 정도의 사랑은 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너희는 그 정도는 넘어야 하지 않느냐 말씀하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다른 죄인들처럼 죄인으로 주저앉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인 것 사실이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냥 죄인으로 살래!’ 하고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오늘 좋은 말을 많이 나열하여 권고하면서 맨 앞에 ‘-답게’라는 표현을 쓴 다음 이어서 여러 권고를 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은 용서에 대한 권고도 부담스럽지만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 받는 사람답게’는 더 부담스럽고 특히 거룩한 사람은 내가 과연 거룩한 사람인가 의문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는 거룩하다고 영적으로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영적으로 살려는 사람이라면 죄인으로 살기로 주저앉지 말아야 하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신원의식을 굳게 가져야 하고 주님의 사랑 실천을 포기치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따르려고 해야 합니다.

저희 수도자의 경우 수도자가 어떻게 그 모양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못 살 수도 있는데 그렇게 잘못 사는 것보다 더 잘못이 바로 신원의식 없이 사는 겁니다.

왜냐면 신원의식을 가지고 있고 노력을 해도 약하기에 잘못 살 수는 있지만 신원의식이 없는 것은 수도자이기를 아예 포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도복 입을 때만 수도자이고 어떤 행세할 때만 수도자로 살 바에는 자신도 불행하고 남에게도 악 표양이 되는 그런 수도생활, 아예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생활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기 위해 사는 것이기에 그렇게 살지 못할 바에는 포기하는 것이 낫겠지만 주님의 제자 되는 것도 포기해도 되겠습니까?

이런 도전을 받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왜 사랑해야 합니까? 그냥 마음 한쪽으로 미워하면서 나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안 됩니까? 왜 미워하면 안 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미워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부터 미워하려고 작정한 사람도 없고, 지금부터 미워하기 시작이라면서 결정한 사람은 없지만, 어느새 미워하는 감정은 내 맘 속에 슬금슬금 자리를 잡게 됩니다. 미움은 단순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처럼 속이고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옵니다. 사실 누군가와의 비교와 시샘, 누군가를 향한 불쾌함과 비난, 미움이나 원망 등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간단히 없어져 버리는 그런 감정이 아닙니다. 악마가 계획적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우리의 결심이나 작정도 없이 사무치듯 자리잡는 것처럼, 미움과 각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이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악마의 손잡이로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럼 악마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악마의 하수인이자 노예가 되버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점점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리는 만큼 우리 정신 건강은 병들기 시작하고, 주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잃고 대신 미움과 불안과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피폐한 영혼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누구 때문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내게 심어준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라보며 내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한 내 마음의 변화를 충돌질하여 악마가 사로잡는 것입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없애야 할 또 다른 사람을 없애기 위해 찾아 나설지 모릅니다. 용서를 통해 스스로 악에서 해방되어, 다시 주 하느님의 사랑받고 사랑하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그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미움이 처음 내 결심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진 감정의 골인만큼, 내 결심만으로는 쉽게 몰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의 반 타의 반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주님, 주님의 커다란 사랑으로 저를 휘감아, 제 마음 안에 있는 미움을 녹여 없애 주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사랑의 마음으로 바꿔주세요!’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추석 한가위 가족들이 모처럼 모이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은혜와 원망의 최상단에 가족들이 손꼽히게 들어있다고 합니다. 성급하고 애꿎은 마음으로 악에게 더 깊이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주님 사랑의 애틋한 마음으로 악에게서 해방되어 주님 사랑의 자녀가 되어 기쁨과 행복의 순간들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새 사람의 삶, -사랑하라, 그리고 또 사랑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늘 새롭게 깨닫고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입니다. 사람-사랑-삶, 말마디들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4개월 참 치열히 하늘 사랑으로 청초히 피어났던 수도원 가난한 뜨락 달맞이꽃밭도 어제 말끔히 정리되었습니다.


‘아, 사랑도 때가 있구나, 죽으면 사랑도 끝이구나! 죽는 그날까지 사랑하다 깨끗이 사라지는 삶이 참 아름다운 사랑이겠다!‘


저절로 나온 말이었습니다. 지날 때 마다 자주 눈길 가는 텅 빈 달맞이꽃밭입니다. 늙어 베어지는 그날 까지 치열히 피어났던 청초한 사랑! 달맞이꽃이었습니다. 달맞이꽃을 그리며 다시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날마다

이른 새벽 잠깨어 일어나면

맨먼저 인사 나누는 야생화 달맞이꽃이다.

보라!

하느님 친히 가꾸시고 돌보시는

무수히 피어나는

수도원 가난한 뜨락

야생화 달맞이꽃들

‘더불어의 여정’이다

하느님만 찾는 구도자의 모범이다

놀랍다

반갑다

고맙다

새롭다

애오라지 일편단심

한결같은

하늘 향한 샛노란 사랑이다

땅에 깊이 내린 뿌리와 꽃대는

참 질기고 억세고 단단하다

한낮의 불볕더위 견뎌내며

벌써 3개월째

여름 한 철 내내

끊임없이 폈다지며

하늘 향해 오르는 야생화 야생화 달맞이꽃대!

지칠줄 모르는 열정

파스카의 꽃

야생화 달맞이꽃들

낮에는 죽은 듯 보이지 않다가

밤새 활짝 깨어 피어나

어둔 밤

환히 밝히는

님 맞이 야생화 달맞이꽃들

갈수록 더해지는

청초한 아름다움에 그윽한 향기다

늘 날마다

아침까지 계속되는

황홀한 축제의 여름 밤이다.“-2019.8.20


참으로 살아있는 동안 치열히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줬던 달맞이꽃입니다. 사랑해도 짧기만 한 삶, 미워하며 원망하며 절망하며 걱정하며 불평하며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하여 제가 내심 작정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문자 메시지든, 편지등 시작할 때는 반드시 ‘사랑하는---’ 말마디를 붙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이란 말마디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일단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던저놓고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도 몸도 사랑따라 가기 마련일 거란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콜로새서 말씀과 루카복음 말씀이 완전히 말씀의 보석 창고 같습니다. 무수히 반짝이는 말씀 보석들로 가득차 있어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너무 아깝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성을 띠는 살아 있는 말씀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주님의 단호한 명령입니다. 내 눈에 원수지 하느님 눈엔 사랑하는 자녀일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도 남모르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 역시 각자 사람마다 특수한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기를 알면 알수록 절대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들 역시 무지에 눈멀어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내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내것을 가져간 자에게는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실천의 동사입니다. 참으로 악을 무장해제 시켜 무력화無力化시키는 것도 사랑뿐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원수가 아니라도 못마땅한 모든 이들을 연민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잘 대해 주고, 인격으로 존중하고 잘 되기를 바라며 또 잘 되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말못할 사정에 무거운 인생 짐을 지고 힘겹게 분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지 않는 사랑이, 할 수 있다면 짐을 덜어주는 실제적 사랑이 참 절실합니다.


사랑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일상에서의 실천입니다. 못마땅한 모든 이들에게 선으로 잘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을 상이 클 것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을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부단히 용서하고 내어 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마침내 오늘 복음의 결론이자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예수님의 평생과제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까? 어떻게 항구한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사도, 바오로가 콜로새서에서 명쾌한 답을 줍니다. 구구절절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1.동정과 2.호의와 3.겸손과 4.온유와 5.인내를 입는 것입니다. 앞서의 우리 마음 안 현세적인 것들인 1.불륜, 2.더러움, 3.욕정, 4.나쁜 욕망, 5.탐욕과는 정반대입니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어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 이 모두가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감사야 말로 믿는 이들의 핵심적 덕목입니다. 감사함이 바로 겸손입니다. 감사할 때 저절로 샘솟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게 시편과 찬미가를 불러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한풀이 노래가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노래에서 샘솟는 생명과 빛, 기쁨과 평화, 위로와 치유,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입니다. 더욱 주님 사랑을 닮아가게 되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시편 노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여 우리는 지금 그분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사랑의 성체가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사랑의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런 고마운 주님께 우리가 드릴 응답은 화답송 후렴처럼 사랑의 찬양뿐입니다.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라.”(시편150,6ㄱ). 아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사랑, 축복, 기도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여러분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축복하고, 누구를 위해 기도하시나요? 나를 사랑해주고,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에게 대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히 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십니다. 보통은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했을까요? 가장 먼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스테파노 역시 돌팔매질을 당하기 직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 자체를 살아가시고 보여주고 전해주신 분이셨습니다. 스테파노와 다른 모든 순교자들은 그분께서 전해주신 하느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분과 하나 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굳건히 머무르는 이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부르심 받은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사랑의 옷'(루카 6장 27~3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유명 백화점을 가보면 저 많은 옷을 누가 다 살까?

궁금해하는 저에게 '수녀님, 모모 백화점에는 하루에 사람들이 몇명만 다녀가도 운영이 된답니다' 그만큼 고가라는 얘기죠.

입으면 사랑이 되는 옷을 파는곳이 있고 그 옷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추석이라 고향을 찾아가고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먼저 사랑과 겸손의 옷을 입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도울 일을 팔 걷어 부치고 한다면 당신은 사랑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자비심없이 분쟁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옷장을 열고 사랑의 옷을 꺼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입고 가세요.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어도 자비와 사랑이 없으면 꽝!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콜로 3, 12)

(Therefore, clothe yourselves like the elect of God: holy and beloved, with hearts of mercy, kindness, humility, modesty, and patience.)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가을 장마가 그치니 기온도 선선해지고 하늘도 맑은 하늘이 되었습니다. 또 오늘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지요. 가족들과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콜로 3, 12~17)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축복된 삶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다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답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표양을 보여주셨듯이, 그런 덕을 닮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콜로 3, 12)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선택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은 부모님의 신앙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이며, 성장해서 내가 하느님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좋은 표양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그리스도께로 그리고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사람,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돼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동정심, 호의,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동정심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동정심을 영어로 compassion 이라 하지요. 이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같이 느껴 보는것이며,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호의(goodwill)를 갖는 일입니다.

호의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좋은 마음과 의지, 내가 나의 마음 안에 호의를 갖고 있으면 나의 얼굴에 그런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호의를 갖고 있으면 긴장이 풀어지고 얼굴에 미소가 띠어지며,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호의를 가질 때 그렇습니다.

셋째는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겸손(modesty, humillity)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겸손하다고 보겠습니다.

넷째, 온유란 무엇이겠습니까?

온유함(mildness)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처럼, 사람이 거칠지 않고(gentle), 부드러운 마음씨를 갖는 것입니다 (tender, sweet).

그 다음에 인내심을 가져야 된다고 있습니다.

인내심(patience) 이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나에게 주어지는 안 좋은 상태와 감정에 대해서 내가 그것을 희망을 갖고 견디어내고(endurance), 극복해내는(perseverance) 힘이라고 보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는 것인데, 사도 바오로는 더 말씀하시길, 불평을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주는 일,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지혜를 다하여 서로 권고하는 일,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미를 드리며,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일 (콜로 3, 13~17),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라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까?

•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있습니까?

•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지금의 어려움을 인내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닮은 사람 <루카 6, 27-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이를 낳으면 “누구를 닮았을까?” 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지명하여 “누구를 닮았네”하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한이 많은 세상, 미움, 저주, 원수 관계가 있는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시며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어제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이 하느님을 더 깊이 알려주셨으면 더 구체적 삶을 따라 살며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겠는데’하고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잠들기 전 카톡 글을 보다가 어떤 친구가 “아멘”하고 “아침에 오늘 하루 주심에 감사기도 절로 나오는데 뜻대로 안 될 때는 마음이 행복하지 않지요. 그러나 저녁이 되어 별일 없이 지내면 감사기도 절로 나옵니다.” 이분은 참으로 종일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 현존의 의미를 전해주시며 “나는 있는바 그로다.” 존재 자체이신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며 꿈속에서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시며 나와 같이 살고 계시다.’는 느낌에 잠자는 동안 행복했었는데 끝에 “너와 나의 깊은 관계를 알려면 다니엘서 3, 57-88. 56>를 보라”고 하여 일어나자마자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업적을 보며 새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니 찬미해야 합니다. 많은 말 중에 “추위야,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라.” 우리는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불만 불평하며 감사도 찬미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의 작품들 안에 있고, 주님은 나와 함께 현존하십니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눈만 돌리면 푸른 숲, 온갖 아름다운 꽃들, 그것들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를 살게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은덕을 기리며 찬미합니다. 여기에서 숨 쉬고 움직이는 그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현존하시니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닮아야 합니다.


또한, 추석 명절에 나를 잊고 사는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은 그 사람의 사랑과 현존을 느끼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추석을 기쁘게 지내라고 소식 전해주는 분들에게서도 같은 현존을 느낍니다.


이제 과일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과일,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 모두가 풍요로운 시절, 오늘만이라도 어려운 시국에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모두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행복하기 기도합니다. 아침 식사 시간 지나가는 형제들, 어제 미움이 있던 이들, 마음에 들지 않은 이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사랑합니다. 용서하세요. 함께 갑시다.” 마음에 있는 자비의 손을 흔들어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사는 사람은 아버지의 자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닮으셨다.

최민석 신부님

저녁 늦게 서야 고향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마을 중간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고향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세상도 변하고 시대도 변해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이 곳 내 고향 산천은 큰 변화가 없다. 더욱이 이 고향에 내 어머니 살아계시고 날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추석 명절이 되니 형제들이 고향집 어머니 계신 곳으로 모여온다. 천하에 제일 소중한 이 몸을 내어 주신 부모님 은혜와 고향 산천을 어찌 잊겠는가. 하느님이 내게 생명을 주시고 어머니 그 생명 낳으시고 길러 주신 것을 알기는 하지만 자식으로서 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함이 늘 부끄럽다.


시골집에 계신 구순이 다 되신 어머니는 요즘 학교에 다니신단다. 소위 말하는 어르신들이 다니시는 유치원, 주간보호센터를 이용하신다. 형제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 손수 그린 그림책을 당신 자녀들에게 가져 오셨다. 센터 선생님들이 그 동안 센터에서 함께 그린 것을 그림책으로 묶어 주신 그림 묶음집이다. 그림 책 가져 오시어 자랑하시는 모습이 꼭 어린 아이 같다. “어머니 참 잘 하셨어요.”라며 모두들 한 마디씩 거든다.


오늘 보는 어머니, 언제는 그렇듯 어머니는 눈부시다. 어머니는 지금도 생명의 샘처럼 소담하고 눈부시다. 어머니 당신의 사랑은 하늘 보다 더 높고 바다 보다 더 더 깊으시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기쁨이 내게 스며온다. 어머니 당신의 사랑은 하느님의 현존이시다. 내 어머니 당신은 하느님의 화신이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 분 사랑이 우리에게 완성되리라.”(1요한,4,12)


하느님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짐승이 거처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내 어머니 당신도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특정 지역 사람을 편견을 가지고 대하듯 그렇게 전라도 지역 작은 고을에서 어머니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셨다. 농사일을 하시는 농부 아버지 농사일을 도우며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어머니는 평생 무명의 인물로 사셨다.


“암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 42(41),2-3)


어머니는 시편 기도처럼 평생 기도 하신 분이시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하고, 숲 속의 호수처럼 고요한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하셨다. 기도 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어머니 따라 그렇게 평생 기도하며 살 것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시니 나도 어머니의 바다처럼 넓은 마음, 첫눈처럼 순결한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나를 위해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도를 해주신 어머니께 기도드린다. 사랑의 심지를 깊이 묻어둔 등불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한다.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마음, 다른 이의 아픔을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정 나의 것으로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연민의 마음으로 기도 드린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에게 담아 주실 것이다.”(루가 6, 27-38)


어머니는 하느님을 닮으셨다. 어머니는 몸은 비록 작고 외소하시지만 늘 하늘마음을 품으셨다. 어머니는 남의 사소한 배려를 잊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남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아무리 속상해도 모진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셨다.


내 인생에서 돈이나 세상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이다. 살려고 발버둥 치면 버둥댈수록 깊이 가라앉아 버리고 죽어도 좋다 편안히 내어맡기면 생각도 못한 힘이 등허리를 밀어 올리는 묘한 힘을 지닌 것이 신앙이다. 그러니 나 자신을 한번쯤 던져볼 일이다. 눈 딱 감고 맡겨볼 일이다. 그리고 순종할 일이다.


온전히 맡기고 순종하여 살아보면 주님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렇다. 주님의 현존을 사는 일이 내 생에 가장 잘한 일이며 내 생애 최고의 일이다. 어머니는 눈으로 평생 눈으로 보고 목격하는 주님의 현존이다. 내 어머니와 함께 주님의 현존을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 벅찬 일이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삶인

자비의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까지 사랑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해줍니다.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악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자비가 있습니다.

자비를 따릅니다.



어느 카페에 갔는데 그곳에 흔들의자가 야외에 설치되어 있더군요. 이 의자에 앉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편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너무 편안하고 약간씩 흔들리는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제 일행이 깨우지 않았으면 아마 한참을 이 의자에 앉아 잠을 자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이 카페에서의 모임을 마친 뒤에 지인의 차를 타고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길이 너무 막히는 것입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밖에 앞으로 전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차 안에서 또 졸았습니다.

이 지인께서는 “신부님, 정말로 피곤하신가봐요. 카페의 흔들의자에서도 주무시고, 이 차 안에서도 꾸벅꾸벅 조시는 것을 보니 말이에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운전하시는 분에게 죄송스런 마음도 생겼지요.


사실 저는 평소에 낮잠을 잘 자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잠이 왔던 것은 무엇일까요?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지요. 제자리에서 흔들거리는 흔들의자, 조금씩만 앞으로 가는 차. 모두가 진행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기 때문에 몸의 긴장이 풀어지고 졸음이 온 것입니다.


목표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의 자리에만 머물려는 나태한 마음, 편한 것만 찾으려는 안일한 마음. 결국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면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하십니다. 더군다나 남을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말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입니까?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모습, 이렇게 살아서는 험난한 이 세상을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께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보다는 지금의 자리에 머물려는 나태하고 안일한 마음으로 자기 사랑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특별한 목표 의식 없이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전 세계에 생명의 소중함과 국가적ㆍ사회적으로 증가되고 있는 자살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제정한 세계자살예방의 날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이 자살 문제가 아주 심각하지요. 그만큼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쏟아 부어 줄 나의 이웃을 찾아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안위만을 추구하고 폐쇄적이며 병든 교회보다는 거리고 나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나는 더 좋아합니다. 나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옥죄이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통장

몇 달 전에 통장 두 개를 개설했습니다. 요즘에는 대포 통장이 많아서 통장 개설하는 것이 좀 까다롭더군요. 그런데 은행 직원이 제게 이 통장의 이름을 적어달라고 합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 적으면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제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하나는 ‘기쁨 통장’, 다른 하나는 ‘절망 통장’이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사실 교구에서 받는 활동비 외에도 저에게는 약간의 수입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강의료, 방송출연료, 원고료 등등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저를 위해서 이 수입들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덕에 강의도 하고 방송 출연도 하는 것인데, 마치 제 능력이 뛰어나서 얻는 수입으로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인 것 같더군요. 그래서 이러한 수입들을 입금하는 통장은 ‘기쁨 통장’입니다. 이 통장은 내가 아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이런 나눔을 통해서 기쁨을 얻게 되니 ‘기쁨 통장’인 것입니다.


또 다른 통장은 ‘절망 통장’입니다. 이 통장은 교구로부터 받은 활동비 중에서 남은 액수를 입금하는 것입니다. 절약이 많이 필요하지요. 적자가 될 때도 참 많거든요. 아무튼 이 절망 통장은 제 스스로가 정말로 어렵고 힘들 때, 즉 절망에 빠졌을 때 이 통장을 가지고 어디든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일명 여행 통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요즘에 이 통장 채우는 재미로 삽니다. 굳이 어디를 가지 않아도 그냥 집에 하루 종일 있어도 남들에게 사랑을 전달 할 수 있음에, 또한 내가 어렵고 힘들면 어디든 튈 수 있는 통장이 있음에 희망을 갖고 살고 있지요.


통장, 잘 만든 것 같지요? 여러분도 한번 만들어보세요. 사는 재미가 솔솔하네요. ㅋㅋㅋ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월요일에 교구청에는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교구장이신 추기경님의 초청으로 2015년 새 사제들과 은퇴하신 원로사목자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달릴 길을 다 달리신 원로사목자들은 새 사제들을 바라보면서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새 사제들은 원로사목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또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을 받으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과 땀은 방황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가 될 것입니다.


원로사목자들께서는 손자 같은 새 사제들에게 사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덕담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새 사제들은 원로사목자들에게 스마트 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카톡은 어떻게 이용하는지, 애플리케이션은 어떻게 다운 받는지 알려드렸을 것입니다. 꽃밭이 ‘장미, 채송화, 코스모스, 나팔꽃’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듯이,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컴퓨터 전문가가 가상의 세상에서 가장 성공하고, 번성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고 합니다. 폭력과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방법, 시기와 모함을 전문으로 하는 방법, 남의 것은 빼앗고 괴롭히는 방법 그리고 평화와 화합, 용서를 전문으로 하는 방법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수백 번 게임을 했는데 늘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폭력과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성공하고 이기는 것 같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평화, 화합, 용서’를 하는 프로그램이 차지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들어도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생명체를 유지할 수 없는 생물과 미생물의 경계선에 있는 개체하고 합니다. 생명체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면 살아갈 수 있지만, 숙주인 생명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인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다행히도 많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바이러스가 ‘너죽고 나죽자’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이러스를 전파할 숙주인 생명체가 바이러스에 의해서 죽어버리기 때문에 널리 퍼질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숙주인 생명체에 살면서 피해를 거의 주지 않는 바이러스는 널리 퍼지게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숙주인 생명체에 도움을 주는 바이러스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갈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공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인생의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 길이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했던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 방법만이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베푸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원망, 분노, 미움은 사라지게 될 거라고 합니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체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든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납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빅토로 위고는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살지 않는 것은 더욱 끔찍할뿐 이다.'라고 말합니다. 옛 사막 교부들의 관심사도 '참으로 사는 것(to be truly alive)'이었습니다.


세상에 참으로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될른지요? 지난 8월 30일 타계한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무엇보다도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나는, 느끼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살아왔으며 이는 그 자체로 크나 큰 특권이자 모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자비로운 삶'이 참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을 한 구절로 요약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Be merciful)’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때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자비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이게 우리가 할 모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유일한 소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입니다.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갈 때 참 나의 실현이요 온전한 인간입니다.


결코 비상한 영성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히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갈 때 진정한 영성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역시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공부도, 일도 없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또 ‘너희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 역시 결국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으로 귀결됩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밝혀주고 있으며, 오늘 콜로새서 독서는 구체적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구체적 실천지침의 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내용은 얼마나 풍부하고 보배로운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누가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입니까?

다음 항목에 따라 자신을 체크하시기 바랍니다.

1.원수를 사랑하는가?

2.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는가?

3.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는가?

4.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5.네 빰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미는가?

6.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는가?

7.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는가?

8.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9.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남에게 해주는가?

10.원수에게 잘해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주는가?

11.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한가?

12.남을 심판하지 않는가?

13,남을 단죄하지 않는가?

14.남을 용서하는가?

15.남에게 잘 주는가?


참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10점을 기본점수로 하고, 각항목별 6점만점으로 하여 15개 항목, 도합 90점에 기본점수 10점을 합하여 100점 만점으로 했을 때 과연 여러분의 자비점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의 점수에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고 문제는 다 공개되었고 지금부터 공부하면 됩니다. 내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평생 사랑공부입니다.

항구한 노력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생과제의 수행도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불가능한 문제는 출제하지 않으십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 자비행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수행입니다.

콜로새서의 다음 항목을 체크하며 얼마나 실행하는지 점수를 확인해 보시시 바랍니다.


1.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는다.

2.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참아 주고 용서해 준다.

3.사랑을 입는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이다.

4.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린다.

5.감사하는 사람이 된다.

6.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머무르게 한다.

7.지혜를 다하여 이웃을 가르치고 타이른다.

8.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린다.

9.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

10.무엇을 하든 주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이대로 평생수행에 항구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과연 항목당 10점만점 도합 100점 만점으로 환산할 때 여러분의 자비행의 점수는 얼마나 되겠는지요?


이 또한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깨달아 지금부터 새로이 시작하면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치유의 구원으로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수행이 우리의 내적상처를 치유합니다.


우리의 성교회는 바로 이런 힐링을 위한 수행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바로 매일의 시편성무일도와 성체성사의 전례 및 성경의 렉시오비나, 그리고 온갖 신심활동과 기도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일’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자비로운 삶의 실현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느자를 돕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위에서 제시한 자비항목들을 잘 실행할 수 있는 실력을 주십니다.

“주님, 매일 미사를 통해 저희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용서

김홍석 신부님

고해소 앞의 긴 줄을 보며 급한 마음으로 달려와 줄을 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제가 왔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저를 용서해 주셔야만 합니다.’

고해를 마치고 나오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는 찰라 내 눈앞에 내가 미워하던 그가 고해소에서 나오는 것을 봅니다.

‘아니 주님! 저런 놈도 용서해 주십니까?’

자신은 고스란히 용서받길 바라지만 남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 마음. 이게 뭡니까?

용서란 내가 값없이 용서받는 것처럼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하느님께서 똑같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부님! 정말 저 사람은 용서가 안 됩니다!”

“맞습니다. 안 되는 것 맞습니다. 용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가 된 이유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한 죄보다 선과 악이라는 경계를 구별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나누는 하느님의 영역을 넘봤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은 과학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단순한 이해관계이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용서임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의 사랑법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수 없이 사랑에 대해 말하고 사랑의 존재가 되려고 애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후회를 하게 마련이지만 가장 후회스런 것은 마음껏 사랑 하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또 사랑을 받아야 할 때 사랑 받지 못하는 것만큼 외롭고 허전한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사랑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오늘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서로 건네주고 나누어줌으로써 사랑의 존재가 되는 길을 가르쳐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사랑에서 제외되었거나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그런 대상들을 사랑의 우선적인 대상으로 언급하신다. 나의 원수,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학대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6,32)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정체성은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데 있다.


예수님의 사랑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에 있다. 원수가 지닌 나에 대한 적대감과 반감, 나를 미워하는 이 안에 있는 미움의 감정, 나를 저주하는 이 안에 있는 남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결여, 나를 학대하는 이 안에 있는 폭력성과 사랑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다. 곧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들을 품어 미움과 폭력, 생명 경시 등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으라는 것이다.


나아가 말씀하신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6,29-30) 그들을 끌어안기 위해 그 악과 폭력과 잔인함과 미움이 사라질 만큼의 여백과 기다림을 지니라는 말씀이리라.


악에 악으로 맞서고,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며, 미움을 또 다른 미움으로 되돌린다면 폭력의 악순환만 계속될 뿐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악은 선으로 이겨야 한다. ‘오히려’ 원수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며(6,35), 남을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말아한다(6,37).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지 그 사람을 있는 그 자체로 사랑하도록 힘쓰자. 내 중심에서 벗어나 뭔가를 받으려 말고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도록’(6,31) 하자.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처럼 오직 “하느님 때문에”(propter Dei) 원수를 사랑하고 그 안의 악이 선으로 바뀌고 그의 영혼이 사랑으로 치유되기를 바라고 기도해야겠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려면 먼저 악을 이기고도 남을 만큼의, 원수를 사랑하고도 넘칠 만큼의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말과 생각과 표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남이 미워질 때, 사람들이 싫어질 때, 내 뜻대로 하고 싶을 때 내 안에 사랑이 고갈되었음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민감성이다. 이런 민감성이 우리를 우리답게 하고 우아하게 하는 것이 아닐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와 온유와 인내를 입고,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주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음으로써”(콜로 3,12-14)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콜로 3,1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았지만

열심한 신자가 된 콜로새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새길 만하지만

오늘 말씀 중에는

이 구절이 눈에 띄네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서로 불평할 일이 참 많지요.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면서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라"고

하시네요.


사실 서로 불평해 봤자

짜증만 나고

사이만 안 좋아질 뿐인데

어리석게도 그게 정상인 양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오늘 사랑 때문에

혹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생기더라도

참아주고 용서해 주면 어떨까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비로소 알게되는

우리 인생의

참된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인생의 신비입니다.


자아에 갇혀있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서로를 축복하는

축복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두려움을

멈추게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용서와 화해

치유와 감사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

하려했던 이 어리석음을

이제야 내려놓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참된 사랑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믿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참된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진실로

믿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과 용서에

부족한 우리자신을

만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산산이 깨어지는

우리의 형제적 사랑입니다.


사랑없는 실체는 가짜이며

성찰없는 실체는 환상입니다.


판단을 거부하고

단죄를 멈출수록

자유로워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매순간

되질하는 우리들이기에

괴롭고 혼돈스러운

우리의 시간입니다.


서로를 축복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우리의 인생입니다.


용서와 사랑만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는 영혼의 원본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움과 아픔을

바꾸어 주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마음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용서입니다.


살과 피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용서와 사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만남과

우리의 나날들이

용서의 축제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용서는 자유이며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손 잡아주는 손

이창순 

곡식이 귀하던 시절엔 양식을 꾸어 먹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양식을 꿀 땐 주로 되로 꾸었습니다. 대부분 나무 방망이로 됫박의 위를 긁어서 평평하게 해서 꾸어오고, 고봉으로 갚습니다. 정말 누르고 흔들어서 후하게 갚습니다. 어려서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꾸는 사람들은 그렇게 갚아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논어의 위령공 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공이 여쭈었다. “한마디 말로 평생 동안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서恕이다 !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정 말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것은 용서하고, 사랑하며, 인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쌀을 빌리러 가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이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과 용서해 주는 사람이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하느님 앞에서 용서를 청하며 울 때 하느님께서는 울고 있는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어찌 이 미천한 나와 같은 마음이 되실지를 생각해 보면, 용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을 닮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나무는 굉장히 크게 자랄 수 있습니다. 토양과 바람, 온도, 습도 등의 조건만 잘 맞으면 5, 6층짜리 건물 높이보다 더 크게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분에 심어진 분재 소나무를 보면 4~50년이 흘러도 그 키는 불과 2~30Cm를 넘지 않습니다.


분재 기술자들이 나무의 꼭대기 가지와 뿌리를 정기적으로 잘라내고, 나무를 매년 다른 화분에다 옮겨 심으며 뿌리가 안정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무의 잠재력을 재거해서 난쟁이 식물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길들여진 나무는 원래의 크기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재된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배운 것이 없어. 나는 배경이 없어. 나는 가난해.” 하는 식으로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 자기 자신의 꼭대기 가지와 뿌리를 계속 잘라내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함으로써 우리들을 더욱 더 쭉쭉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 방법은 이 세상의 룰과 많이 다르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 또 다른 룰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잘 해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갚아주지는 않지만, 더 크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세상이 갚아주는 것이 클까요?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이 클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께 길들여지기보다는 세상에 길들여지는 것을 원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졌으면 좋겠죠? 남을 누르고 그 사람 위에 오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길들여지기를 원하는 우리입니다. 이 모습은 크고 기품이 있는 소나무가 아닌, 분재된 난쟁이 소나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 상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쓸모없는 모습에 길들여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면서 크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성장하는 나를 만드십시오. 그래야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제 발로 서라(칸트).


목표 달성 100%

저는 야구 관람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도 있어서, 시간이 되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열심히 응원을 하지요. 그런데 어제 야구 결과를 보다가 우연히 타격 순위에 눈길이 가게 되었습니다. 글쎄 3할 대 타자가 생각보다 적은 것입니다. 프로야구 선수 중 타자가 300명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 3할 대 타자가 딱 15명밖에 없네요. 이 15명은 팀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아주 우수한 선수이고, 그 팀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선수입니다.

그렇다면 3할이라는 타율은 어느 정도일까요? 10번 중에서 3번 안타를 친 것입니다. 7번을 아웃 되어도 훌륭한 선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3번의 성공 그리고 7번의 실패이지만, 이들은 30%의 성공률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100% 성공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자주 빠져도 다시 기회를 주시고, 어렵고 힘든 그 순간에 당신께서 함께 하시어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100%의 성공을 하지 못하고 ‘실패자’라면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100% 성공하는 우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20% 이하의 성공을 거둔다 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며 사는 우리를 원하시며, 그러한 이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임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십시오. 세상의 눈으로는 100% 성공이 아니지만, 주님의 눈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너희도 자비로운 살람이 되어라.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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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라.”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마저 내밀어라.”

“겉옷을 가져가는 자에게 속옷도 가져가게 하라.”

“달라고 하면 주고, 되찾으려 하지 마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라.”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감동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말씀임을 인정하면서도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동시에 들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들 중, 과연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될까?

모르긴 해도 한 가지를 골라내기조차 버거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철저하게 아름다운 바보가 되라는 말씀이시다.

성인(聖人)이 되라는 말씀으로까지 들린다.

이 삶이 다할 때까지 이 말씀들 중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과연 몇 가지나 될까?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부분적으로나마 실천이 가능할까 말까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실망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희망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선(善)을 지향하는 마음을 그분께 선물로 받았다.

충분히 복음적 바보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나약함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청해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은 그분께서 만들어주신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주님, 당신의 말씀은 저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신께서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당신께서 이끌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옛날에 시어머니가 너무 고약하게 굴어서 정말이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던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이고 하도 야단을 쳐서 나중에는 시어머니 음성이나 얼굴을 생각만 해도 속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어머니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위기의식까지 들게 되어 이 며느리는 몰래 용한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무당은 이 며느리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비방이 있다고 했습니다. 눈이 번쩍 뜨인 며느리가 그 비방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무당은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며느리는 “인절미”라고 했습니다. 무당은 앞으로 백일동안 하루도 빼놓지 말고 인절미를 새로 만들어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인절미를 드리면 백일 후에는 시어머니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며느리는 신이 나서 돌아왔습니다. 찹쌀을 씻어서 정성껏 씻고 잘 익혀서 인절미를 만들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이 년이 곧 죽으려나, 왜 안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했지만 며느리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매일 인절미를 해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보기 싫던 며느리가 매일 새로 말랑말랑한 인절미를 해다 바치자 며느리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어 야단도 덜 치게 되었습니다.

두 달이 넘어서자 시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이 되어 동네 사람들에게 해대던 며느리 욕을 거두고 반대로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게 되었더랍니다. 석 달이 다 되어 가면서 며느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야단치기는커녕 칭찬하고 웃는 낯으로 대해 주는 시어머니를 죽이려고 하는 자신이 무서워졌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가 정말로 죽을까봐 덜컥 겁이 났습니다. 며느리는 있는 돈을 모두 싸들고 무당에게 달려가 “내가 잘못 생각했으니 시어머니가 죽지 않을 방도만 알려 주면 있는 돈을 다 주겠다”며 무당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무당은 빙긋이 웃으며 “그 미운 시어머니는 이미 죽었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친숙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이 속담의 기원이 맞든 안 맞든 그런 의미대로라면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이미 성경에 있는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며 삶의 지혜로 살아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나를 박해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 말씀이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라’고 하는 말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떡 하나 더 주다보면 정말 미운 놈은 죽게 됩니다. 미운 놈이 죽지 않더라도 그를 미워하는 내 안에 있는 놈은 죽습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이미 내 안에서 용서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같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자신의 온 몸을 칼로 난도질 한 청년을 위해 죽어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 분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싶어요.”


그리고 하늘에서 청년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여 그 청년은 감옥에서 회개하게 됩니다. 


저도 가끔 미워지려는 사람이 생기면 습관처럼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잘 되도록, 행복하도록 기도합니다. 떡을 자꾸 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정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내 안에서 미움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 사람을 만날 때도 부드러운 표정이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조금씩 변해갑니다.

결국 용서는 나를 위해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성인들이나 한결같이 미움이 밀려와야 할 순간에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신 것만 보아도 용서의 가장 빠른 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서 미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줍시다. 미운 사람 위해 기도 한 번 더 해 줍시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서가 필요한 우리의 여정입니다.

용서는 십자가가 필요한 은총입니다.

용서의 여정이 십자가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 가장 큰 용서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않고서는 남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서로  간의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간의 존중을 회복해야만 서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용서는 하나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용서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용서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를 결코 체험 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사랑이듯 용서 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악순환을 벗어나는 길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또한 서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살아있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용서해야

충만한 생명의 본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려는 마음만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용서의 삶이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용서로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용서를 지향합니다.

새로운 삶은 용서를 딛고 일어납니다. 


오늘 이하루는 우리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용서를 청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를 성찰하는 기도의 시간 되십시오.



어제는 어디에 갈 일이 있어 전철을 탔습니다. 마침 퇴근시간에 겹쳐서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그래서 앉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책을 보면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간 좋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앉아서 화장을 하고 속눈썹까지 붙이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화장을 하고 속눈썹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얼짱과 몸짱을 요구하는 시대에 맞는 외모 가꾸기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겠지요. 그러나 사람 많은 전철 안에서 행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무척 추해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젊은 여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앞으로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오자,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요즘의 소위 미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앞서 자기를 꾸미는 여성보다 아니 어떠한 여성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외형이 아니라, 내면이 만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긴 밤하늘에 아름답게 떠있는 둥근 보름달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보름달이 우리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화구가 있는 황야나 사막에 불과 하다고 하지요. 또한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받았기에 빛나는 보름달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요? 외적인 아름다움은 진짜 아름다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은 부족하고 나약하며 초라함 그 자체입니다. 단지 주님의 사랑이 그리고 주님의 보살핌이 나를 감싸고 있기에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당신 뜻에 맞게 살아야 함을 그토록 강조하십니다. 주님 없이는 우리는 진정으로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 말씀인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철저히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으며, 주님의 단죄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그 모든 것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외적으로만 보이는 가짜 아름다움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아름다움을 쫓아야 합니다. 그 아름다움은 내면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겸손하고 남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내 내면을 통해 아름다움이 외적으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진정한 아름다움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지켜야 할 오늘의 실천사항.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을 지켜보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진실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사막 어딘가에 샘물이 있기 때문이다.(생텍쥐페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좋은 글' 중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도 어렵지만 자신을 용서하기란 더욱 어렵다.

자신이 못난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히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은 과식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거의 안 먹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모든 관계를 하나하나 파괴해 나가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가난과 질병 속에서 헤어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산다.


이런 행동의 밑바닥에는 ‘참 못할 짓 많이 했어'라든가

‘내가 잘못했지' 아니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행복하게 사냐고'라고 속삭이는

신념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병을 앓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자격이 없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당신이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일로 이미 충분히 고통 받은 셈이다.


그런데 왜 고통을 늘려야 하겠나?

한두 해 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쓸데없는 죄책감은 벗어던져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듯이

건강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노력을 쏟아야 한다.

이건, 그만한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




<하루하루를 천국의 꽃밭으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지상천국, 사실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괴로워하면서, 슬퍼하면서, 하루하루를 지옥 같은 생활로 엮어가라고 우리를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루하루를 천국의 꽃밭으로, 하루하루를 더없이 행복한 봄날처럼 꾸며가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천국,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의 삶 안에 우리의 노력으로 적극적으로 구현해나가야 할 대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 일상 안에 천국을 일구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꽤나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일,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뺨까지 내어주는 일, 심판하지 않는 일, 단죄하지 않는 일, 끝없이 용서하는 일...

정말이지 우리의 하느님은 요구가 너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건 한 마디로 바보가 되라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내 의지를 굽히고 이웃의 의지에 복종할 때, 나를 버리고 이웃을 선택할 때, 사사건건 맞서기보다 크게 한 걸음 물러설 때, 완전히 속을 뒤집어 비워버릴 때, 그야말로 바보처럼 포기할 때, 죽기라도 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정 반대일 때가 많았습니다.

다 포기하고, 다 비워버리고, 다 내려놓을 때, 거기서 오는 마음의 평화는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철저하게도 무(無)로 돌아가니,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주시더군요. 철저하게 밑바닥으로 내려가니, 하느님께서는 힘 있는 당신 팔로 떠받쳐주시더군요.


누가 천국에 사는 사람입니까? 자신이 매일 만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천국을 살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웃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사람, 동료들의 마음 안에 기쁨의 씨앗을 뿌려주는 사람, 이웃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사람, 그 사람은 자신도 천국에 살지만, 이웃들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지옥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신이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스트레스를 주고, 틈만 나면 사사건건 트집 잡고, 숨도 못 쉬게 만드는 사람, 그는 지옥의 사람입니다.

인간이란 정말 특별한 존재입니다. 행복 불행을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행복해지기를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힘겹겠지만, 잘 안 되겠지만, 오늘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한번 노력해보십시오. 크게 한번 비워보십시오. 크게 한번 내려서 보십시오. 크게 한번 물러서 보십시오.


천국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웃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에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매일을 천국으로 엮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복수와 용서 사이

최성기 신부님

<용서-그 먼 길의 끝에 당신이 있습니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유영철 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고정원 씨의 일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유영철이 검거되자,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그를 용서하고 죽으려 했지만, 그를 용서하는 순간 다시 삶의 욕구가 생겨난 과정이 나옵니다. 유영철과 편지를 교환하고, 다른 피해자 가족을 만나서 아픔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폭력으로 망가진 자신을 되돌리는 일,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용서와 사랑을 통해 망가진 인간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16세기 영국의 작가 베이컨은 복수를 “길들어지지 않은 정의”라고 말했습니다. 베이컨이 말했던 것처럼 복수심은 우리 마음에 자연적으로 생겨나기에, 복수심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마치 잡초가 다른 작물의 숨통을 조이듯이 우리의 건강한 감정을 흐려놓고 맙니다. 정의인 것 같지만 정의와 다른 것이 복수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악과 세상의 폭력을 이기는 방법은 단순히 그것들에 반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 악과 폭력을 이겨나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말이 때로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심연에는 폭력 앞에서 자신의 것을 전부 쏟아내신 예수님의 아픈 사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

김석인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는 곧 사랑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또한 주는 것을 잘 받는 것도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짧은 인생이지만 경험을 통해 볼 때 잘 내어 줄 때 또한 잘 받을 줄 알게 되는 것 같다. 복음은 우리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일러주기 때문이다. 물론 되돌려 받기 위해 내어 주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읽을 때면 신이 난다.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하라고 일러주시기 때문이다.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가져가게 하고, 판단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고, 있는 것까지도 내어 주라고 하신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주라고 하시니 우리는 할 일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라고 하신다. 단순하게 사랑하기만을 원하시는 것 같다.


왜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게 “너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사도 바오로는 일깨워 준다.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생각될 때도 있겠지만,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우리의 밑천도 무한하다. 우리는 단지 아버지의 자비를 퍼서 주기만 하면 된다.

오늘도 세상을 관장하시는 아버지가 계시기에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맡겨드리며, 어제의 것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 그분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내일은 아직 내 손에 없기에 이 순간만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자비로운 눈길로 모든 것을 바라보며 시작한다.




아버지같은 자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주님의 말씀들은 매우 도전적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언젠가 자식에 대해 욕심내는 부모님이 오셔서 자기 자식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할 때 저는 요즘 자살하고 말썽부리는 젊은이가 많은데 그것만 아니어도 훌륭하다는 투로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런 제가 막상 저의 조카나 저의 수도원 형제들이 보통 사람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하면 젊은 사람이 어찌 그렇게 꿈도 열정도 없냐고 속으로 한탄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오히려 문제가 아닌지, 보통 사람으로 살려는 조카나 형제들이 오히려 예수님이나 성현들이 가르치시는 그 현명과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정말 어찌해야 할까요?


죄인들도 그것은 하니 죄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야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을 자극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일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런 우월감이 대단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하게 살고자 애를 썼는데, 예를 들어, 구호품으로 나온 서양 사람들의 큰 옷을 길이만 맞게 삭둑 잘라 입고는 시내를 활보하곤 하다가 당시 제 또래 애들이 멋을 부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저는 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얼마나 속에 든 것이 없으면 저렇게 겉치장을 하고 다닐까’하고 오히려 그들을 낮추보며 으스댔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도전은 그런 비교 우위적 우월감을 자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지니라는 것이며 진정한 자존감과 자애심을 가지라는 것이며 굳이 비교한다면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와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낮은 가치에 가치를 두지 않고 저열한 감정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自重自愛합니다.

그리고 같은 무게와 같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합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옛날 법조계에서 높은 위치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본당의 궂은일을 손수 하시고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본당의 한 신자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을뿐더러 매우 소중하게 대하십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있기 마련인 진흙구덩이 싸움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을 뿐더러 누가 막말을 해도 그분은 늘 그를 존중하는 말로 답합니다.

미움에 미움으로 응답하지 않고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속을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분에게는 사랑만이 있는 듯합니다.


그분을 보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신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하느님의 공평한 심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었습니다. 군것질 할 가게도 없었고 가끔 찾아오는 뻥튀기 리어카가 밥 아닌 다른 것을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저씨가 오면 집에 있는 모든 쇠붙이나 병들을 모아다 가져다주었고 그 것 때문에 동네가 깨끗해 질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그 아저씨가 서비스 차원에서 뻥튀기를 거저 준다고 아이들만 다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빈손으로 달려 나갔지만 다른 아이들은 각자 그릇을 준비해 나왔습니다. 한 친구는 세숫대야만한 양동이를 들고 나왔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각자가 들고 나온 것에 가득히 뻥튀기를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양 손을 벌려 최대한 많이 받아보려 했지만 결국 옷으로 받혀서 가장 적은 양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저씨가 불공평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들고 나온 그릇의 크기는 각자가 판단했던 뻥튀기 아저씨의 자상함이었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그 아저씨를 판단한 만큼 받아가게 된 것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양을 주는 것보다 각자의 기준대로 주는 것이 더 불평이 적고 더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배우자나 부모, 혹은 자녀에게 대하는 것이 직장사람이나 길에서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과 똑같다면 그것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도 사랑 자체이셨지만 성모님과 가리옷 유다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심판의 잣대대로 심판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남을 모질게 심판했으면 모질게 심판받을 것이고 자비로웠다면 우리의 죄도 자비롭게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무자비한 자는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 2,13)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각자를 다르게 심판하실 것이지만 그 심판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잣대에 따라 한 것이니 하느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심판을 피하는 길은 내가 지닌 심판의 잣대를 부러뜨려 못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나를 심판할 잣대가 없기 때문에 나를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심판의 잣대는 나의 교만과 비례합니다. 내가 교만해지면 그만큼 하느님과 같이 높아져 심판자가 되고 상대를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교만해져서 아담은 하와를, 하와는 유혹자를 심판한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나의 심판의 잣대를 아주 작게 만들거나 부러뜨리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짓기 이전의 겸손한 상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저절로 커진 자신의 잣대로 자동적으로 이웃을 심판하게 되어있습니다.


공기 안에는 좋은 냄새도 안 좋은 냄새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에나는 썩은 냄새만 맡고 그 냄새를 쫓습니다. 상어는 바다에 피가 한 방울만 떨어져도 수 킬로 밖에서 그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꿀벌은 꽃을 보지만 똥파리는 똥만 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존재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나쁜 것만 찾아내서 그것을 보고 판단하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의 본성이 이미 하이에나나 상어, 똥파리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나눌 것이지만 심판 때문에 양과 염소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 25장 참조) 이미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남을 심판할수록 자신은 염소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남을 미워하지는 맙시다. 남을 용서 못하고 미워한다면 나의 죄 또한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남을 단죄하는 사람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사람은 상대를 심판함으로 심판받는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심판함으로 심판받았고, 사울은 다윗을 심판하여 심판받았으며, 유다와 그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를 심판함으로 심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나를 심판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나도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심판하고 있는 사람과 별반 다름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며 모든 심판은 주님께 돌리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과연 내가 지니고 있는 심판의 잣대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새벽님들, 저 어떻게 하지요? 제가 몽유병이 있는 것 같아요. 글쎄 어제 새벽 일어나보니 제가 거실에 있는 것입니다. 분명 그저께 밤에 침대에 누워서 잤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거실로 나온 기억이 전혀 없으니……. 제가 혹시 몽유병이 아닐까요?


이 점에 대해서 어제 새벽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요.왜 거실에서 자고 있었을까?


사실 그저께 밤에 조금 덥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자면 아무런 기억도 못하는 저이기 때문에 그냥 자면 되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그냥 침대에 누웠고, 곧바로 잠들었지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잠이 든 뒤, 너무나 더워서 몸이 시원한 곳을 찾은 것이지요. 그리고 선풍기가 있는 거실을 떠올렸을 것이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거실로 가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도 모르게 선풍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그래서 모든 것이 귀찮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주님 앞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여 질수록 오히려 주님을 떠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선풍기 앞이 시원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주님 앞에서 참 기쁨과 희망이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바로 내 몸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지를, 주님께서 얼마나 큰 힘을 주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가 될 때 우리들은 이 세상에 큰 자신감을 갖고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 못해요. 그런 일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자주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로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면 왠지 적임자로서 나의 모습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능력에 맞는 일에만 부르십니다. 즉, 할 수 있는 일만을 시킴으로써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의 길로 향하도록 하십니다.


그 할 수 있는 또 몇 가지의 일을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솔직히 이 세속의 법칙에 의하면 손해 보는 장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더군다나 손해 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갈 때 진정으로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됩시다.


잡초를 없애는 방법('좋은 생각' 중에서)

한 철학자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마지막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가 빙 둘러 앉았다. 철학자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팜에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를 모두 없앨 수 있느냐?"

제자들은 학식이 뛰어났지만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건성으로 대답했다.

"삽으로 땅을 갈아 엎으면 됩니다."

"불로 태워 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

철학자는 제자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것은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한 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 보거라. 만약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 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자."

일 년 뒤,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마음속 잡초 때문에 고민하다 다시 그곳으로 모였다. 그런데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만 꽂혀 있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는 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을 실천할 때 뽑아낼 수 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내 사랑이 비록 작고 초라할지라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저희 수도원에서는 한 평생 겸손했던 한 평수사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오현교 타대오 수사님, 형제들에게 위문편지나 축일 축하 편지를 쓰실 때면 늘 오소인(小人)이라고 즐겨 쓰시던 분,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멤버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 내 굳은 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정녕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 것 미사 도구며 준비물을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등치가 산만한 후배들의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한 평생에 걸친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5년 전 위암이 발병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일을 해오셨으면서, 그만하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도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면서 수사님은 열심히 투병생활에 임하셨습니다.


항암제 기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호전되면 어떻게 해서든 수도회에 도움이 되어보겠다고 이런 일, 저런 일에 뛰어드시던 수사님은 정말 저희 후배들의 귀감이셨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드러눕기도 앉아있기도 힘겨워서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수그리고 계시던 수사님, 그 와중에도 미사나 기도를 꼭꼭 챙기시던 수사님, 그 고통 속에서도 수도회의 일치를 위해 눈물로 호소하시던 수사님이셨습니다.


어젯밤 그런 수사님의 영정 앞에 백여 명의 저희 후배들이 모였습니다. 한 목소리로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이, 양 신부, 잘 되고 있어? 별 일 없고? 몸은 괜찮냐? 쉬어가며 천천히 해!”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특히 수사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분들, 수녀님...많은 분들이 마치 사랑하는 삼촌이라도 여읜 듯 슬픔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수사님께서는 온화한 성품과 친화력, 들을 줄 아는 ‘큰 귀’를 바탕으로 공동체나 사업체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불화의 조짐이 보일 때, 그로 인해 공동체 일치가 흐트러질 기미가 보이면 백방으로 뛰어다니시면서 중재를 서시곤 하셨지요. 부드러움, 편안함,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떠나신 수사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보통 사람’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통념적인 사랑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지요.


예쁜 아이들, 귀여워해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성적 좋은 아이들,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게 인사 잘 하는 사람, 내 비유를 잘 맞춰주는 사람, 내게 뭔가 하나라도 챙겨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환대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그런 사랑을 뛰어넘어서야만 합니다. 갈 때 까지 간 아이들, 반평균 점수 다 깎아먹는 아이들, 마구잡이로 대드는 아이들조차도 품에 안아줄 줄 아는 사랑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왠지 밉상인 사람, 그저 보기만 봐도 껄끄러운 사람조차도 그러려니 하고 함께 걸어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우리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높은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 사랑이 계속 성장해서 언젠가 당신이 지니셨던 그 큰 사랑 가까이 따라오도록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사랑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꾸준히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큰 사랑, 완전한 사람은 힘들지라도, 좀 더 큰 사랑,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

김인한 신부님

어렸을 때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착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물론 절대적인 악과 절대적인 선은 없는 것이기에 경향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고 무엇보다도 창조하신 그분의 손길이 사랑이셨기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시니 좋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 이기적일 뿐,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나 자신을 미워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끊임없이 부정함으로써 나 자신을 미워하고 사랑에 무기력한 사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분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이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의 모습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는 이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 안에 자유로운 우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황광지

가정폭력상담소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서는 배우자에게 일방적으로 학대받고 살아온 사람도 많지만, 부부간에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다 불화가 일어나고 힘센 남편이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신의 요구만 강요하고 자신은 배우자의 요구가 이치에 맞지 않다며 회피한다. 이렇게 따지고 나가면 영원히 평행선이다. 그러면 결국 주먹이 강한 사람이 이기겠지만 속으로는 두 사람 모두 멍이 든다.


가장 이상적인 가정생활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 어깨가 뻐근하면 먼저 아내의 어깨를 주물러 주자. 남편이 살갑게 말해 주기를 원하면 먼저 상냥하게 이야기를 건네자. 내가 축구중계를 보고 싶으면 자녀들에게도 권해서 함께 즐기자. 내가 하는 공부가 고달프면 부모님의 고달픈 생활도 마음에 새기자.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예수님의 가르침 중,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한 차원 높은 사랑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실천하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 말씀에 따라 살려고 몇 번 애쓰다가 보면 꼭 나만 손해보는 것 같은 억울한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한술 밥에 배부르랴. 그 정신을 마음에 두고라도 열심히 산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질 것이다.




김웅태 신부님

동구와 소련의 개혁은 하느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한 입증이며, 그들의 양심이 하느님의 진실성에 승복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맑스, 레닌주의가 100여년간 인류의 절반을 지배했지만, 그들은 무너지고 하느님의 통치는 영원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며 불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진실된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루까 6:27-38]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말씀을 들려 주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하시면서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와같은 루까 6:27 이하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대인 관계 속에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율인 것이다. 세계의 4대 성인들도 각각 황금율을 말씀하셨는데, 공자님은 仁을 말씀하시고, 부처님은 慈悲를 말씀하시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겸손을 가르치셨다. 예수님 사상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바로 오늘 복음에서 들은 말씀이라고 보겠다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이러한 말씀들이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말씀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품성이며 덕이라 하겠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오래 전부터 들어 온 것이지만, 다시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할수록 위대한 말씀임을 새삼 느끼고 자신이 부끄러워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찬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이러한 경지에 나날이 가까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과거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이러한 말씀을 뚜렷하게 실행했던 기억은 찾아 볼 수 없고 살아 갈수록 이러한 사랑의 경지는 아직도 아주 먼곳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 인간의 사랑과 만남은 여러 형태일 것이다. 세상에는 이웃이나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하고 타인의 선익까지도 강제로, 무력으로 강탈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사랑의 일종이긴 하지만 이기적인 사랑이며, 남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고 이익을 챙기는 방법입니다. 사기, 강도, 폭력, 심지어 살인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참 무서운 괴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古城의 女人」 (La morte vivante) .....


남을 희생하여 자신의 유익 만을 챙기는 행위는 바로 이와같은 것으로 더불어 함께 공존해야 할 인간 공동체, 인간성을 거부하는 잔인한 행위이다.


두번째 사랑의 모습은 '주고 받는' (Give and Take) 식의 사랑이다.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 그래도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이 하는 무난하고 또 어쩌면 교양있고 품위있는 이들의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도 않고 또 남에게서 손해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개인주의적인 태도라고 보겠다. 그리고 남이 무엇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그만큼은 베풀 줄 아는 신사적인 사랑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죄인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사랑도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이들을 많이 본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갚을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러한 사람아다. 그 사람에게는 들어가는 것만 있지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남에게 줄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고 받는 사랑의 수준에만 머물러도 그 사람은 공동체 생활에서 그래도 인정받고 더불어 무엇인가 힘을 합해 해 볼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세번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찬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으로서 가장 차원 높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세속적으로 생각해 볼 때 손해받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기에겐 손해가 되는 사랑입니다.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원수,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이들, 옛날에는 부모친척을 죽인 이들이 보통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교묘하게 사기를 쳐서 자기 사업을 망하게 한 이들이 원수일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자기를 못살게 굴고 자기의 성공을 시기하고 저지시키고 온갖 중상모략으로 방해한 이들, 이들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마저도 내어 줄줄 아는 아낌없이 이웃의 필요에 도움을 주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거기엔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이것도 말로만의 축복이 아니라 진실한 뜻이 담겨져 있는 축복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러한 이러한 요구는 우리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인지도 모른다.


남녀 간에 서로 끌리는 정으로 결합하여 함께 사는 부부들도 여러가지 이유로 다투기도 하며, 서로 간에 미움을 갖고 살기도 하는데, 자기를 해치고 못살게 구는 원수들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차원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또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워주어라』고 예수님은 요구하신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의 견지에서 이것을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닮으려는 거룩한 마음과 신적 은총의 힘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희생만을 즐겨하는 심리학적으로 마소키즘(자기 학대증)적인 경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이 있다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진실되이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고 따른 이들에게 빈손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고 그것을 생각해 주신다는 점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는 자기희생적인 거룩한 모범을 통하여 원수도 감화되어 나쁜 마음을 돌이키고 감화되어 참된 인간이 되도록 초대하는 행위라고 보겠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성도들이기에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 인내로서 마음을 새롭게하며, 서로 도와주고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은총을 거져 주셨으니 우리도 자기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거져 주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을 고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게 될 것이다.


희랍말의 아가페라는 말은 타인에게 대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적이며, 능동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이 말은, 타인이 나에게 어떠한 태도로 대하던지 간에 그의 행복을 기도하며, 바라는 태도이고, 자신의 이해를 굽혀서라도 자진해서 상대방에게 착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같이, 마음속으로 부터 원수를 사랑하기는 인간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또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한 일이며, 그릇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자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자면, 상대방이 내 자신을 모욕하고 중상하고, 해독을 끼쳐온다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를 용서하며, 착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좋게 가져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죄 때문에 내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대신 희생 되셨기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 받은 내 자신도 그리스도를 닮아서 타인을 용서하고 착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감정으로가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으로서 이루어 지는 것이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듯이 어쩔 수 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저절로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며, 크리스찬의 믿음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강원도 탄광촌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하루 종일 친구들과 뛰어 놀다 아름다운 빛을 내는 보석을 주웠지요. 날이 저물어 탄광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자 소년은 자랑스럽게 보석을 내밀었습니다.

“아빠, 이것 보세요. 예쁘죠? 놀다가 주웠어요. 난 이런 보석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늘 이렇게 반짝이는 보석 같은 어른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참 동안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창가에 걸려 있는 호롱불 쪽으로 걸어가 성냥으로 불을 밝혔습니다. 어두웠던 방 안이 환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호롱불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얘야, 보석 같은 사람보다 이런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려무나.”

소년은 바람만 불면 훅 꺼져 버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자상히 설명해 주었지요.

“아들아, 보석은 태양 아래에서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단다. 태양의 힘을 빌려 빛을 내는 건 참된 빛이 아니야. 너는 이 호롱불처럼 세상이 어두울 때 제 몸을 태워 세상과 사람들의 가슴을 환하게 밝혀 주는 사람이 되거라.”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의 생각처럼 스스로 보석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 보석은 어둠 속에서는 제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빛 아래에서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스스로 빛이 되어 다른 이의 아름다움을 세상을 알릴 수 있을 때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함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라.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어라. 내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어라.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원수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어때요?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이 길이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이렇게 살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놀림을 당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만을 드러내는 어둠의 길을 선택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받으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 받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짧은 이 세상에서의 보상을 바라기보다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의 보상을 바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당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십시오.


소원

옛날에 아이들만 살고 있던 신나는 도시에 세 명의 마술사가 찾아왔다. 한 사람은 이름이 보르스텐빈더였고, 또 한 사람은 지벤 질린더 였고,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바스두니히트마인스트였다. 그들은 이곳 저곳에서 마술을 했고, 알록달록한 아름다운 색깔의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들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 고마워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궁금해 했다. ‘저 이상한 세 사람은 좋은 사람들일까, 나쁜 사람들일까?’

그런 것은 대개 알기 어려운 법이다. 이별의 날이 되자 세 명의 마술사들이 작별의 인사를 하기 전에 아이들을 시장으로 다 모이게 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친절에 대해 고마움의 답례를 하겠어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작별의 선물로 소원을 딱 한 가지씩 말할 기회를 주겠어요. 여러분이 원하는 소원은 그것이 크든, 작든, 말하는 그 순간 즉시 이루어질 거예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은 소원을 무엇으로 말해야 할지에 대해 오랫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심사숙고한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일단 소원을 한 가지 말하고 나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소원은 소용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한참 지난 후 아이들이 마침내 세 명의 마술사에게 말했다.

"혹시 우리 소원이 너무 크다면 용서해 주세요! 우리들의 한 가지 소원은 바로 이것이에요. 우리가 말만 하면 모든 소원이 즉시 이뤄지게 해달라는 거예요."

"이제 소원을 말했습니다."라고 세 명의 마술사가 말했다.

"곧 그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리라!"

아마 깜짝 놀랐겠지!

마술사는 곧바로 그곳을 떠났다. 아이들만 살고 있는 도시에서 아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서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세 명의 마술사가 한 말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그들은 처음에는 몰래 시도해 보다가 깜짝 놀랐다. 소원을 말하기만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정말로 즉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신나게 소리쳤다.

"그것봐. 마술사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어!"

물론 당연히 그랬겠지!

사정이 그렇게 되고 보니 별의별 소원들이 다 있었다. 어떤 아이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어 했고. 어떤 아이는 여행 기념품 열 개를 갖고 싶어 했고, 또 어떤 아이는 꼭두각시 인형, 장난감 , 케이크, 기차, 바로드 옷감, 비단, 털가죽, 스케이트, 껌, 팽이, 크레인, 황금의 왕관과 공, 인형, 책, 장신구, 나팔 등을 소원했다. 아무튼 소원만 말하면 그 즉시 물건이 생겼다! 물론 그들처럼 하고 싶겠지?

그 후 1년의 세월이 그렇게 지났고, 마술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했다! 계속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차츰 사는 재미를 잃게 된 아이들의 마음속에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날마다 점점 더 작은 소원을 말하게 되었다. 소원하는 것이 모두 이뤄진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소원도 말하고 싶지 않게 되자, 더 이상 즐거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받은 수많은 귀중한 물건들을 불행한 얼굴로 슬프게 쳐다보았다. 그 말이 믿어지지 않겠지?

결국 아이들은 탐험 대원들을 먼 세상으로 내보내 보르스텐빈더 씨와 다른 사람들, 즉 지벤 질린더 씨와 바스두니히트마인스트 씨를 찾아 나서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우리의 소원을 다시 거두어 주세요! 그것 때문에 더 이상 신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길을 떠났던 아이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한 사람씩 차례로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이들은 비통해 했다.

"신이 우리를 구제해 주었으면!"

아이들은 이제야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실의에 빠졌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아이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의 소원을 다 이뤄 준다고 했다면 소원이 이뤄지는 것을 이제 그만해 달라고 말하는거야!"

아이들이 모두 다 그의 말을 따랐고, 그 순간 이후부터 삶이 다시 긴장되고, 즐겁게 변했다. 아이들은 1년 전의 그 날 이전처럼 다시 신나게 놀았고, 조금 더 똑똑해졌다.

다만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이상한 세 남자들은 과연 좋은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여러분 생각은 과연 어떨까?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참 겸손이란 인생의 금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산책로를 따라가며 묵주기도를 드리다가 수풀 속에서 날아오르는 반딧불이 무리를 만났습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과 더불어 유년시절을 필두로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더군요.

‘회한(悔恨)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누구나 한 두 번씩은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미성숙한 탓에 저지른 과오나 충족되지 못한 부분에 대한 후회, 안타까움에 흘리는 눈물을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전히 성취한 꿈보다 못다 이룬 꿈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정복한 산보다 아쉬운 눈물 머금고 발길 돌린 산이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완성, 완전함이란 단어보다는 미완성, 불완전함이란 단어가 더욱 친숙합니다.

환한 대낮보다는 어스름 저녁이, 빛나는 성공보다는 참담한 실패가, 충만한 기쁨보다는 썰물 같은 슬픔이 더욱 정겹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앞에 늘 탄탄대로만 펼쳐주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꿈같은 봄날만 허락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끔씩 칠흑같이 깜깜한 밤을 체험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드시 필요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심연의 슬픔, 나락으로 떨어지는 좌절감, 깊은 상처...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꼭 필요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의 진리는 말이 쉽지 깨닫기 어렵습니다.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할 자세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밑으로 내려서기’입니다. 적당 선에서가 아니라 한없이 깊고 깊은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서기입니다.

내려가는 도중에 우리는 그 알량한 자존심, 웃기는 우월감, 마지막 남은 ‘나’까지도 양파 껍질 벗기듯이 훌훌 벗겨버리고 나서 심연의 동굴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순간 ‘참 겸손’이란 인생의 금맥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작업을 해보라고 우리 각자에게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의 권고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너무 지나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결국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속도 밸도 없는 천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최종적으로 모든 것 훌훌 벗고 알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무지렁이의 신앙

김귀웅 신부님

시골 본당 어디나 고령화가 심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일자리가 없으니 당연할 것입니다. 처음 시골 본당에 부임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신자들이 주보도 가져가지 않고 성가책도 없이 멍하니 서서 입당하는 사제를 맞고 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글을 모르거나 노쇠하시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소공동체 모임에 가 보아도 성경을 읽을 줄 아시는 분이 열에 한두 분도 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두 번 세 번 읽어드려도 어떤 구절도 다시 되뇌이질 못하십니다. 그래서 올 초부터 소공동체 모임 때에 예화를 들려주고 그와 비슷한 경험들을 나누게 하였더니 훨씬 말문이 쉽게 열렸습니다.

성경도 읽을 줄 모르고 금방 들은 말씀도 기억하기 어려워하지만, 양심에 따라 살아가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면서 기꺼이 희생하고 그러고도 자신을 내세울 줄 전혀 모르는 삶의 모습들이 펼쳐집니다. 한여름 뙤약볕이라도 제초작업 한다고 하면 모자 쓰고 손에 호미 쥐고 성당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일하시다가 일 끝나면 슬그머니 사라지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운 것과 사는 것의 차이를 다시 생각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하느님 맛` 을 내는 사람

방순자 수녀님

조금 나이 든 분들은 ‘무짠지’의 매력을 알 것이다. 여름철 더위에 지치면 평상시 맛있게 먹었던 갖은 양념의 반찬이 싫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소금에만 절인 무짠지를 물에 담가 적당히 간을 우려내어 먹으면 그 맛이 개운해서 입맛을 되찾게 된다. 생무는 싱싱한 맛을 내지만 썰어놓으면 부러질 수 있다. 반면에 소금에 절인 무는 성질이 완전히 변해 손으로 비틀어도 부러지지 않고 깊은 맛을 낸다. 생무는 ‘사람 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본성적인 사람이고, 무짠지는 사람 맛이 다 빠져나가고 ‘하느님 맛’으로 변한 ‘하느님의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생무가 짠지가 되려면 긴 시간 장독 속에서 지독히도 짠 소금물에 잠겨 있어야 한다. 더욱이 물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무거운 돌에 꼼짝없이 눌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무 맛이 쏙 빠져나가 변질되지 않는 짠지 맛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이기심과 욕심, 교만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나’를 찾게 된다. 내 본성이 살아 있는 한 부러질 수밖에 없다. 내 안의 이런 ‘사람 맛’을 빼기 위해 하느님은 나의 삶에 이른바 ‘원수’들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사람, 뺨을 때리고 내 것을 가져가는 사람…. 그러나 이들이 나를 가장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하느님의 사신’이다.

나의 교만한 자아는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면서 벗어나려 반항하지만, 사람은 오해와 무시도 받아보고, 육신적·물질적 고통이 무엇인지 겪으면서 기(氣)도 죽어봐야 자기 본성이 정화되고 겸손한 인간이 된다. 무가 소금물 밖으로 나오면 썩어서 버릴 수밖에 없듯이 칭찬받고 인정받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만으로는 하느님 맛을 내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사랑은 성장하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사를 가신 어머니를 찾아뵙습니다.

먼저 살던 사람이 미신을 대단히 숭배해서 방 여기저기에 부적이 많이 붙어 있었답니다.

많은 경우 신자들도 부적을 떼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찜찜해 한답니다.

부적을 떼다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저의 어머니는 그것을 다 떼어버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약간은 자랑스러운 자신감을 보이시는데 저의 어머니께서는 일생 하느님만을 믿으셨기 때문에 그런 일이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3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저희 형제들을 키우시느라 고생도 많으시고 안 좋은 일도 많으셨겠지만 하느님 믿음에 흔들림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신앙을 가지기 전에 이미 하느님 체험을 강하게 하셨기 때문이고 젊으셨을 때 저희 동네에 마귀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 매일 일 끝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는데 그때 하느님의 힘을 몸소 많이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있을 리 없으시지요.


부적은 거기에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부적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종이쪼가리일 뿐입니다.

우상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우상이 있지 이미 하느님을 만나고 믿는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린토 사람들에게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정말 그것이 어떤 힘이 있는 것인 양 생각하고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사람은 거리낌 없이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음식은 음식일 뿐이라고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얘기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보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니 삼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인은 음식에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잘 안다고, 믿음이 강하다고 자만하는 사람에게 충고합니다(로마 14-15장).

어떤 음식을 먹어도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지만 형제를 사랑하기에 어떤 음식은 삼가야 한다는 얘기지요.

음식이 음식일 뿐 아무 것도 아님은 알지만 사랑이 없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자신과 공동체가 성장하게 합니다.




황금률을 뛰어넘어...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어제 복음의 행복선언(20-23절)과 불행선언(24-26절)에 이어 오늘은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판단금지(37-42절)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은 분명 제자들만을 향하여 선포된 말씀이다.(20절) 오늘 복음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된다. 이는 곧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주위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 성서를 통하여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들까지 포함된다.


루가복음의 평지설교(6,20-49)는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5-7장)와 내용상 상통하는 대목이지만, 산상설교처럼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게다가 분량도 매우 적다. 특히 마태오는 5장에서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대비시켜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6개의 대당명제를 조직적으로 설파(說破)하고 있는 반면, 루가는 모든 것을 “원수를 사랑하라.”(27절)는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열거하고 있다. 원수의 미움에는 친절로, 저주에는 축복으로, 박해에는 기도로 대하라는 것이다. 누가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을 대어주고,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고, 달라는 대로 주고, 뺏긴 것을 돌려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저변에 깔고 있다. 따라서 사랑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31절) 황금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마태 7,12 참조) 즉,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 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않으면 단죄 받지 않을 것이고, 남을 용서하면 용서받고, 남에게 주면 받는다는 지극히 간결하고 당연한 황금률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37-38절)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단지 황금률에 머물지 않는다. 평지설교의 결론이자 핵심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것이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요구와도 같은 것이며, 요한복음이 전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13,34)는 새계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 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에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황금률을 기반으로, 당신의 모상을 닮았다(창세 1,26)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겸손하게 배울 때, 비로소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박해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질문에 머물러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원수도 그가 원수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영원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황금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는지에 상관없이 행동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오늘 복음의 구구절절 사랑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고 숙연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볼 뿐이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에 대해서 "어렵다, 힘들다. 그래도 예수님의 계명이니 실천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명 가운데 쉬운 계명은 없습니다. 동시에 실천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계명도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원수' 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

가족이 종교박해를 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학대하면 원수가 되는 것인데, 그래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원수 같은 가족도 가족이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루카 6,35)."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하느님의 자녀이니까 자녀답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가족이고 형제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원수 같은 너도 형제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네가 미워하고 있는데도 형제들은 너에게 잘해 주고 있고, 네가 저주하고 있는데도 형제들은 너를 축복하고 있고, 네가 학대하고 있는데도 형제들은 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어렵고 힘든 일을 나에게 실천하고 있는 형제가 있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형제를 미워하거나 저주하거나 학대한 적이 없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라고 함부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은 사람들이 죄 속에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죄 속에 있다는 것은 하느님 쪽에서 보실 때에 '원수'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원수를 사랑하신 일입니다.


또 실제로 악을 행한 적이 없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했을 수도 있고, 이웃에게 무관심했던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무관심도 큰 잘못입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9)."


이 말씀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형제의 뺨을 때렸을 때 그 형제는 너에게 다른 뺨을 내밀었고, 네가 형제의 겉옷을 가져갔을 때 그 형제는 속옷도 내주었다."

자신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해자 입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가해자 입장이 된다면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이 정말로 고마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황금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이 말씀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네가 형제들에게 바란 그대로 형제들은 이미 너에게 해 주었다. 이제 네가 실행할 차례이다."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적용한다면, "예수님은 원수 같은 우리에게 이미 사랑을 주셨고, 지금도 사랑하신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 우선 먼저 원수를 사랑하는 일부터 실천해야 한다."가 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 원수가 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으로 응답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복수와 처벌을 통해서 "내가 잘못했다." 라고 빌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제로 회개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도 아니고, 그 다음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카 6,32)."


이 말씀은,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고 모두 똑같이 사랑하여라.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입니다. '죄인들이 하는 짓'은 '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세계에는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방부터 더운 열대 지방까지 개미가 8,800여 종이 살고 있으며, 전 세계 개미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많은 개미가 이 지구상에서 일시에 없어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렇게 작은 개미가 무슨 영향을 미칠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아주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미들은 식물의 씨앗을 분산시켜 주고 씨앗에 해가 되는 벌레들을 잡아먹으며 땅을 헤집고 다녀서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흔해서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또한 너무 작고 약해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개미의 역할은 생각보다 많고 중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따져봅니다.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필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의 시선으로 보기 보다는 세상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소중하고 꼭 필요한 것의 기준을 잘못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잘못된 판단을 반복하고 있으며,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의 작품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작고 약한 개미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주님 작품 중에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가장 소중하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웃 사랑을 크게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원수 역시 주님의 멋진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한 인간의 이웃은 모든 인간 개개인이며 여기에는 원수들까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자신이 학대하고 증오하며 저주를 내리는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황금률인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규범을 확대시켜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여기에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규범 안에는 원수에게까지도 선을 행하는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사랑의 계명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손해 보는 행동을 하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코 손해 보는 행동이 아니라고 하시지요.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은 어떠해야 할까요? 바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랑을 얼만큼 주는가에 따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있다(존 레논).


내 이웃, 현주씨(조송미, ‘좋은생각’ 중에서)

형편이 어려워 방 2칸짜리 반 지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7년이나 지내면서도 괜한 자격지심에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도 없고, 아는 이웃 하나 없이 그럭저럭 살았지요.

그러다 작년 봄, 집 앞 공터에 고추와 상추 모종을 심었더니 무럭무럭 잘 자라더군요. 어느 날 볼일 보고 오는데, 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 분이 고추를 따고 있었습니다. “아니, 왜 남이 심어 놓은 고추를 따세요?” 쌀쌀맞게 언성을 높였지요. 아기 엄마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해요. 많이 열렸기에... 너무 죄송해요.” 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앞으로 따 가지 마세요. 계속 서서 지킬 수도 없고...” 하면서 집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정말 한심하더군요.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그렇게까지 무안 주지 않아도 될 것을... 고추와 상추를 한 바구니 따서 아기 엄마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아까는 화내서 무안했죠? 이것 받으세요.” 그러자 아기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해서 고향에 사시고, 남편은 방글라데시 사람이라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군요. 그날 저녁 아기 엄마는 삽겹살을 사 들고 왔습니다.

아기 엄마는 내가 “현주 씨.”하고 이름을 부르면 무척 좋아합니다. 현주 씨는 그 뒤 콩 한 쪽이라도 꼭 나누어 먹고, 나를 친언니처럼 따른답니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힘들 것 같은 현주 씨는 항상 밝고 여유롭습니다. 올해는 같이 모종을 심었습니다. 이웃과 나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자비는 사랑과 용서다.

정희완 신부님

사랑과 용서만이 우리가 맺고 있는 그 모든 관계들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들 안의 절대적 규범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참사랑은 제 욕심을 채우는 이기적 사랑이 아니며, 거짓과 악을 행하게 하는 빗나간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참사랑은 어느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방법적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너무 흔히 쓰이는 이 시대이지만, 참사랑, 그 방법적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문 세상입니다. 용서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의 하나입니다. 아마도 용서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용서를 청하는 것은 인간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가장 닮은 행위를 하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은 가장 사람다운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하는 일과 용서를 청하는 일, 그 모두 다 이 이승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눈부시게 아름다운 행위일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신을 가장 많이 닮은 행위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특권이며 의무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우리 자신이 고해 성사, 화해의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가 되는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사랑할 때, 우리 자신이 사랑의 성사인 성체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미움이 있더라도 나는 사랑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이 말씀에 앞서 주님께서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행불행에 관한 당신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아예 제켜놓고 당신의 말씀을 이미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그리고 더”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행불행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내가 들었다면 그런 나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더 말씀하신다는 것이고, 그 말씀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행복하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에 저는 문득 나에게 원수가 있나 생각해봅니다.

나에겐 원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내 원순가?

자기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종종 그러하지요.

누구는 나를 미워하고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고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는 경우 말입니다.

이 경우 나는 미워하지 않으니 잘못도 문제도 없고 미워하는 것은 너이니 네 문제라고 태평해도 되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미워하지 않으니 문제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문젭니다.

사랑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그가 미워하고, 그래서 고통을 당한다면 어떻게 마음 아프지 않고 태평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그 사람의 그 아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주라”는 말씀은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를 미워하는 그것이 너무도 큰 괴로움을 내게 주기에 너의 미움이 나의 미움에 불을 지르고 나도 그에게 원수이지만 그도 나에게 원수인 경웁니다.

그리고 이 경우가 참으로 난감한 경웁니다.

미워하는데 어떻게 잘 해주라는 것입니까?

잘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잘 해 줄 수가 없기에 이 경우 사랑한다는 것은 잘 해 주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미워하니까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지만 사랑하려는 그 의지에서 원수 사랑의 그 놀라운 기적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원수 사랑의 의지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도 그도 미움을 넘어서는 주님 사랑에 전도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은 원수 사랑의 의지를 지니되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 이 기도가 1년, 2년, 3년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오랜 이 기도가 그 자체로 사랑이지만 오랜 이 기도가 하느님 사랑을 모셔오고 닮게 합니다.

나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으로 도약하게 합니다.


원수 사랑의 은총은 이런 의지와 끈기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곧 은총인 것입니다.

나의 사랑 의지에 하느님 사랑이 은총처럼 내립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배웁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유럽배낭여행을 갔다 온 이후에 외국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강한 열정이 생겼습니다. 마침 본당에 메리놀회의 방인이 신부님이 보좌 신부님으로 계셔서, 조금씩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부님이 교동 공소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부님께 영어일기를 써서 이메일로 보내서 수정을 받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은 기꺼이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어 일기를 몇 번써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냈습니다. 처음 몇 주간은 잘 하다가, 처음에는 며칠씩 일기를 쓰지 않고, 나중에는 몇 달씩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문득문득 다시 일기를 써서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신부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신부님이 화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죄송스런 마음에 이메일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강화지구 체육대회가 있어서 방신부님이 신학교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대화를 나누다가, 신부님께 조심스럽게 다시 영어일기를 써서 보내도 되겠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나는 요한과 영어 공부하는 걸 결코 포기한 적이 없어요... 요한이 영어 공부하는 거 그만둘 때 영어공부가 없는 걸로 되는 거에요...’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의 넓은 마음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이메일을 보내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상대방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죄를 짓고 넘어지는 우리에게 한 마디 꾸지람이나 질문도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기다림과 용서가 있기에, 죄인인 우리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먼저 기다리시고 용서하시지만, 정작 죄인인 우리가 돌아서기 전까지 아버지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묵시록 3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

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문 밖에 서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주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하느님이 나를 용서해 주실까?’ 라는 것을 고민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는, 하느님의 용서 자체가 필요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을 의지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인생의 바닥, 그리고 절망을 체험할 때입니다. 이런 예화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 때문에 자기가 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술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술의 폐해를 깨닫고 제정신이 들게 되는 것은 어느 날 문득 시궁창 속에서 깨어났을 때, 갈 데까지 간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 때라고 합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체험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는 체험을 하곤 합니다. 그러한 느낌과 생각이 있을 때, 즉시 하느님께 얼굴을 돌리고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체험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자비하심을 체험하고, 그 자비하심을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즐거운 하루 되세요~^^


수업 시간에 학생이 모자를 쓰고 있자 교사가 물었다.

“학생은 왜 수업 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나?”

이 말을 들은 학생이 교사에게 되물었다.

“선생님은 안경을 왜 쓰시나요?”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지!”

“저는 머리가 나빠서 모자를 쓰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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