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완공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 에즈라기의 말씀입니다. 6,7-8.12ㄴ.14-20
그 무렵 다리우스 임금은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7 “하느님의 집 공사가 계속되게 하여라.
유다인들의 지방관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
8 이제 그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짓도록
그대들이 유다인들의 원로들을 도와서 해야 할 일에 관하여,
내가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왕실 재산 곧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서 받는 조공에서,
지체하지 말고 그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비용을 내어 주어라.
12 나 다리우스가 명령을 내리니 어김없이 시행하여라.”
14 유다의 원로들은 하까이 예언자와 이또의 아들 즈카르야가 선포하는
예언에 힘입어 건축 공사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명령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와 다리우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 건축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15 그리하여 이 집이 완공된 것은
다리우스 임금의 통치 제육년 아다르 달 초사흗날이었다.
16 이스라엘 자손들,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
17 이 하느님의 집 봉헌식에는
황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양 사백 마리를 바치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이스라엘의 지파 수에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를 바쳤다.
18 그런 다음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사제들을 저마다 번별로 세우고 레위인들을 저마다 조별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19 돌아온 유배자들은 첫째 달 열나흗날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20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일제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정결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돌아온 모든 유배자와 동료 사제들과 자기들이 먹을 파스카 제물을 잡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Jesus and his family
말씀의 초대
돌아온 유배자들은 하느님의 집 건축 공사를 마치고 봉헌식을 올리고는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 어머니와 당신 형제들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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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임금은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려,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짓도록 유다인들의 원로들을 도우라고 하고, 돌아온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무리든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법칙이 있습니다. 꿀벌은 꿀벌 무리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기러기는 기러기 무리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꿀벌이 기러기의 법칙을 따르면 더 이상 꿀벌 무리에 속할 수 없습니다. 무리에 속하여 얻는 이득을 위하여 그 무리가 요구하는 법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법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개미의 경우, 무리를 유지하려면 열심히 일하는 3%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러기의 경우라면,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야 하기에 한 마리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인간 공동체는 더한 법칙의 준수를 요구합니다. 부모는 열심히 일하며 가족을 보살펴야 하고,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며 자기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노력을 하기 싫으면 혼자 살면 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당신 가족 공동체를 만드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랑의 법칙’을 따르는 이들만이 당신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 뜻입니다.이 말씀 안에는 성모님을 본받으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하셨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는 겸손한 종이셨고, 또한 당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 가족 공동체에 들어가는 데 가장 완벽한 모범은 성모님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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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된 계약의 궤는 다윗 왕조를 지켜 주는 표징이었지만, 이스라엘이 하느님 말씀보다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아 바빌론 유배의 아픔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되찾아 주고 성전을 재건하는 기쁨을 줍니다. 파스카 축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약과 말씀을 되찾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선언하시어 선택과 혈연이 아닌 믿음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단순히 혈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신 신앙의 모범이심을 암묵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태중에 모시고,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고 곰곰이 숙고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나는 얼마나 성경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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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핏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가족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이가 의아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멀리하셨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형제로 삼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본당 사제의 가족이 본당 구역 안에 살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사제가 가족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당 사목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신자들보다 가족에게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신자들에 대한 보편적 사랑에 장애가 되겠지요. 본인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신자들은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족이 아닌 일반 신자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람들하고만 특별히 만나거나 환대하다 보면 다른 신자들이 불편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작은 가족 대신 한없이 큰 가족을 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하신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브 2,11)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께 제자를 맡겨 드리면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외아들을 잃는 그 자리에서 모든 제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고 부모와 자녀를 버리는 이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마르 10,30)를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영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성직자나 수도자가 가족을 떠나는 것은 더 큰 사랑을 위해서,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사랑을 위해서, 더 많은 이를 형제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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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제주교구장을 거쳐 지금은 원로 사목자로 지내는 김창렬 주교님은 예수님을 ‘형님’이라고 자주 부릅니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그 까닭을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다듬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철이 나고 배울 걸 거의 다 배우고 섭렵했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늘 어린애라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냥 발가벗은 어린애처럼 거리낌 없이 예수님하고 함께 지내려고 해요. 그분께서는 마음이 아주 넓으시고 저를 위해 모든 걸 다 하시는 형님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드네요. ‘예수님께서는 저를 당신의 동생으로 삼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지.’ 제가 죽은 뒤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저를 데리고 가시어 ‘아버님, 이놈이 제 동생인데 아버님 아들로 좀 삼아 주십시오.’ 하실 것 같아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가 ‘그래, 너 이놈아! 내가 아빠다. 그래, 아빠야. 넌 내 아들이라니까.’ 하시며 반기실 것 같고요.
성부 하느님과 저는 부자지간, 또 성자 예수님과 저는 형제지간, 이렇게 한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요. 제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늘 떠나지를 않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림자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완전한 가족이 되지요.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교님의 이러한 말씀은 오늘 복음을 근거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를 둘러싼 군중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형님이시고 오라버니이십니다. 동생이 불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곧장 그 안에 뛰어드시어 꺼내 주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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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근래에 성인 반열에 오른 분 가운데 참으로 열렬히 공경을 받고 또한 그의 시성식이 큰 화제가 된 성인으로 꼽을 수 있는 분이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출신의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사제입니다. 성인의 인기가 고국인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높은지는 도시의 식당이나 카페들에서조차 쉽게 눈에 띄는 그의 사진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지닌 성덕의 위대함은, 세속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심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을 철저하게 증언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들고 인간적으로 추앙받던 상황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환심을 사기보다 때로는 거친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회개하고 참된 신앙을 다시 찾도록 인도했습니다. 또한 성체성사가 예수님과 나누는 참된 친교이며 신비적 실재임을 자신이 혼신을 다해 봉헌하는 미사를 통하여 느끼게 했습니다.
그가 직접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게 하였듯이, 비오 성인은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깊이 염려하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라고 부르듯이, 그의 다섯 군데의 상처는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하며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라는 점을 상징합니다. 그 유명한 ‘오상’과 또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어진 환시들과 수많은 치유의 기적 때문에 그의 존재는 현대에 시성된 어느 성인들보다도 우리가 ‘기적’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기적’은 현대 신학이 애써 외면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오 성인에게 일어난 기적들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피안의 세계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신비로운 ‘초월적 실재’와 마주하며 살아간다는 표징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초월’에 대한 의식과 경외심 없이는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과 희망을 두는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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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 부모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사흘 만에 부모를 만났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말씀하셨지요. 오랜 시간 애가 탔을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섭섭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장차 하느님 일을 할 때 부모라는 혈육의 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예고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의 이런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그 옛날 섭섭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셨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효자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육정을 넘어서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아들 예수님에게 닥칠 수난과 죽음을 육친의 정으로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모자의 육정에만 매달려 더 큰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과 어머니의 관계가 육정에 매인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큰 뜻을 이루는 관계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혈육의 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주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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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말하기 싫어합니다. ‘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는 답변을 피하려 듭니다. 질문 자체를 피곤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답할 수 있어야 삶이 분명해집니다.
답변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족입니다. 자녀와 배우자와 부모 형제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들이 ‘삶의 중요한 이유’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연만큼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기쁨으로 만드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엉망이라면 ‘주님의 개입’을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가족 간의 일치는 주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많은 이들은 계기가 주어지면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좋아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릅니다. 예기치 않은 변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핏 들으면 어머니를 외면하는 말씀인 듯합니다. 하지만 가족을 도외시하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를 어머니와 형제로서 맞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이 건네는 십자가는 언제라도 무겁고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신 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이유는 출가하신 예수님께서 잘 지내고 계시는지, 건강을 괜찮은지? 끼니나 잘 챙겨드시는지? 보통 어머니와 똑같은 마음으로 찾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거처하시는 장소에 도착해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제자 가운데 한명이 성모님을 알아보고서는 안으로 달려들어가 예수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루카 복음 8장 20절)
그 순간, 제자들과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만나러 나가실 것으로 예상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반갑고 안쓰런 마음에, 만사 제쳐놓고 맨발로 뛰쳐나가 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안으로 정중히 모신 다음, 제자들 인사도 시키고, 맛있는 것도 대접해드리고 이렇게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걱정되서 찾아오셨군요. 제가 잘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니 건강이나 잘 챙기세요.” 그리고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장 빼서 손에 쥐어드리면서, “돌아가시는 길에 맛있는 거 사드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처신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멀리서 오셨다는 데, 밖에 나가보지도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정말이지 특별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복음 8장 21절)
이 말씀에 어떤 사람들은 오해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께 대한 효심이 부족한 것일까? 형제들을 하찮게 여기셨을까? 그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의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구약성경의 친족법을 완전히 뒤집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가족 관계, 다시 말해서 종말론적 가족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피와 살을 나누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안에 한 가족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아드님의 말씀으로 인해 성모님의 마음이 살짝 서운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여종으로서,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신앙인이셨습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아들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잘 경청했고, 마음에 간직했으며,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동시에, 예수님의 가장 충실한 제자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진지하게 경청하셨고, 마음 깊숙히 간직하셨으며, 침묵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셨으며, 늘 진리만 말씀하신 성모님을 바라봅니다.
동시에 너무나 경박하고 천박하며, 조심성 없고 거짓된 말이 난무하는 오늘 우리 시대를 걱정합니다.
지적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반짝한 우리 대학생들 앞에 선 한 교수가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왜곡된 역사, 친일 망언을 남발해 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 교수가 인용한 망언의 출처는? 아니나 다를까, 거짓과 왜곡이 전부인 ‘반일종족주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제게 책은 절친한 친구 이상이었습니다. 언제나 책은 흥미거리와 배울거리로 가득찬 보물창고, 새로운 세상과 위대한 인물, 신선한 사상과 가치관을 접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그간 책으로부터 받은 위로와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은 예외이더군요. 읽는 내내 강한 불쾌감과 부끄러움이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자들은 스스로를 일제강점기 역사에 있어서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자화자찬하면서, 이런저런 얼토당토 않은 주장들을 펼쳐놓는데...비전문가인 제가 봐도 여기저기 헛점 투성이입니다. 부실하고 제한된 자료나 증언들을 정확한 근거인냥 부풀려 제시하면서, 대단한 연구 결과인양 자랑스럽게 나열합니다.
결론은 패전국 일본과 이 땅의 친일학자들이 결탁한 결과물인 친일사관(親日史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일제강점기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매국 친일 학자들의 일제 찬양으로 도배된 책일 뿐입니다.
그들이 또한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일제 강점기 초기 시절, 총독부는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는데, 당시 만들어진 토지 대장과 지적도는 아직까지 토지 행정의 기초 자료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지 않느냐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랍니다. 이런 식으로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근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우리나라에 그런 작업을 벌였을까요? 이유는 너무나 뻔합니다. 식량이나 자원의 수탈을 위한 기초작업일 뿐입니다. 더 웃기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웃을 주장인데, 쌀을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수출했답니다. 조선 농민 입장에서 일본이라는 대규모 쌀 수출 시장이 생겼으니 반길 일이었답니다.
고명한 교수님들께서는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한반도 강점과 합병이란는 원초적인 범죄 앞에 그 어떤 명분도 정당화될 수가 없음은 왜 모르시는 걸까요?
책장을 넘길때 마다 모든 페이지는, 역사 왜곡과 일본제국주의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반면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에 대한 조롱과 비하로 가득합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님들을 향한 모욕적 발언으로 즐비합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을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거금을 들여 산것을 정말 후회하고 있습니다. 읽고 나서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부끄러움에 저도 모르게 책을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 책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합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제대로 된 역사 의식이나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노력없이 이 역겨운 책을 읽는다거나 말도 안되는 강의를 듣는다면, 또 다른 반민족 친일 인사들이 우르르 양산되는 것이 아닌가, 큰 걱정이 앞섭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침묵을 통한 동조로 일관했던 한국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이었던만큼, 더 이상 또 다른 친일행위나 왜곡 앞에서의 침묵은 없어야겠습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거짓과 안하무인, 천박함과 뻔뻔함뿐인 저들을 결코 가만 두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속히 이 참혹하고 부끄러운 시절이 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날이 도래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의 내용은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막을 오가며 장사하는 한 아라비아 상인이 어느 날 실수로 잘못 든 길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길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상인은 몹시 기뻤습니다.
그러나 오아시스가 있는 지름길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오가며 오아시스를 이용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물이 말라붙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 이 상인은 혼자서만 그 길로 사막을 횡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한테는 일절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아시스 옆에는 키 큰 야자수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그늘 아래서 사막 횡단에 지친 다리를 쉬어 가기도 하던 상인은 하루는 문득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했습니다.
‘이 나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되면 어떡하지? 게다가 이 커다란 야자수의 뿌리가 어느 날엔가는 귀한 샘물을 다 빨아들여 버릴지도 몰라.’
오래 생각을 거듭하던 상인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야자수를 없애 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상인은 야자수를 잘라 버리고 나서야 마음 놓고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며칠 뒤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오아시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만 나무 그늘을 잃어 바싹 말라버린 오아시스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예화라고 합니다. 어쩌면 오아시스와 야자수는 하나입니다. 물이 있으니 나무가 자라는 것이고 나무가 자라니 물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물을 나누기 싫어서 야자수를 자르면 물도 말라버립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의 관계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도 역시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와 연관해서 이해해야합니다. 씨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열매를 맺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말씀이 마치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밭에 뿌려진 것처럼 내 안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해야합니다. 아니면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놓거나 침상 밑에 놓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안에 말씀이 떨어졌다면 선포되고 있어야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을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말씀을 들으면 실행에 옮겨야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실행이 별개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곧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복음을 전하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전하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말씀을 듣고 전하지 않으면 들은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매일 내 마음 속에 말씀이 뿌려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열매 맺게 하려면 전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할 때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은 먹는 것이기도 하고 내어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는 것도 양식이고 전하는 것도 양식입니다. 말씀을 먹는 것과 말씀은 전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듣지 않으면 전할 수 없고, 전해야 하는데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평화신문사 옆에는 한인 천주교회가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미사를 도와드리기도 하고, 모임이 있으면 함께 하기도 합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사제모임이 대부분 같은 교구였습니다. 본당이 다르고, 선배와 후배가 있지만 모두 같은 신학교에서 배운 같은 교구 사제입니다. 하지만 이곳 사제모임은 한국 사람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다양한 곳에서 온 사제들이 있습니다. 미국 교구에 속한 사제, 멀리 아프리카에서 온 사제, 로마에서 온 사제, 한국에서 파견 온 사제, 수도회에서 온 사제, 저처럼 신문사를 운영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비록 교구도 다르고, 사목의 방향도 다르지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곳이 우리 모두에게는 낯선 곳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길을 가는 사제가 낯선 곳에서 함께 만났으니 서로 의지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먼저 온 사제는 앞에서 끌어 주고, 나중에 온 사제는 하나하나 배우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다른 농사는 노력하고, 마음먹으면 잘 되는데 자식 농사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어느 정치인은 자식의 군 복무 문제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어느 정치인은 자녀의 학교와 관련된 문제로 따가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어느 정치인은 자식의 음주 운전 사고로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좋아하시던 약주를 끊으셨습니다. 음주 문제로 속을 상하게 한 자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친께서는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약주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웬만하면 남의 자식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자식의 문제로 부모의 가슴은 천불이 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수도자와 성직자로 둔 부모님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라고 합니다. 자식들이 수도자답게 성직자답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는데 여러 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권위와 능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선포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권위에 맞서고,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한다고 전했습니다. 맞는 말인데 혹 위험할지 모른다고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 상황과 맞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전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미친 사람 같다고 전했습니다. 성모님은 걱정이 되었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은 만나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입니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이런 마음으로 자녀를 키웠다면 치맛바람이 불지 않았을 겁니다. 지나친 과잉보호로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자녀가 되도록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자식이라는 생각의 지평이 열린다면 교육의 문제도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취업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교구 간의 벽을 허물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도시 교구의 인사 적체 문제도 길이 보일 겁니다. 시골 교구의 재정 문제도 도움을 받을 겁니다. 지구촌이 당면한 빈부의 격차, 질병, 주택의 문제도 해결의 빛이 보일 겁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기도 어려운데 장애아를 입양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을 찾아가서 식사도 챙겨드리고, 말벗이 되어주는 분도 있습니다. 꽃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작은 꽃들이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십니다. 글쎄 게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당히만 하면 상관이 없겠지만, 심지어 학원도 빠지고 게임을 하면서 아예 공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저의 경험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저도 학창시절 이것에 푹 빠져서 공부는 뒷전이었을 때가 있었거든요. 바로 당구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호기심에 한 번 쳤는데 너무나 재미있는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잘 때 천장을 보면 파란색의 네모난 당구대가 떠올려졌고,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머리를 당구공으로 생각하면서 ‘이렇게 치면 이렇게 공이 굴러가서 맞겠지?’라며 이상한 상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당구에 빠지다 보니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학생의 본분인 공부에도 충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만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어른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빠져서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비록 마약이나 도박처럼 범죄도 있지만, 드라마 중독, 게임 중독, 쇼핑 중독 등등 죄는 아니지만 지금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여기에 욕심과 이기심 등 세속적인 마음이 더해지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합니다.
지금 나 자신이 빠져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중독이 되어 절제하기 힘든 것이라면 과감하게 끊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헛된 것에 빠져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알려 주지요.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찾아가야 할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고, 당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런 분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듣기에 서운할 수도 있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지금 중요한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내가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명언: 좋은 집이란 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어야 한다(조이스 메이나드).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수백 개의 거울 속에 갇힌 개는 어떻게 할까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개라고 생각하면서 경계를 하고 공격적으로 짖으면서 쫓아내려고 합니다. 과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공격적으로 나올수록 거울 속에 비친 모습도 공격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와의 싸움은 질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웃어주고 예뻐해 준다면 어떨까요? 거울 속의 내 모습도 나를 향해 웃어주고 예뻐해 주려고 할 것입니다. 저절로 이기는 싸움이 됩니다.
나 자신을 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꾸짖고 채찍질을 할수록 더욱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리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대인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과 잘 어루어지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관계 중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느님과의 관계는 내 존재 근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하심을 통해 나를 존재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성모님이 예수님을 찾아 오셨는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하시면서 마치 문전박대와도 같은 뉘앙스의 말씀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어쩌면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셨던 당신의 어머니 성모님을 대놓고 자랑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참된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곽승룡 비오 신부님
사람이며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이중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복음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가정에 일치하여 하나가 되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단지 겉모양이 그렇다.
마리아의 신비는 적합하면서도 나아가 넓게 확장되어간다. 곧 마리아는 하느님이 어머니시다. 마리아는 지상에서 하느님을 탄생토록 자신의 몸을 봉헌해 드리면서 성령을 받기 때문에 완전히 그런 경향에 속해있으신다.
하느님께서도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 안에 오신다. 특별히 마음속 영감에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오신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신적인 그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즉시 육체가 되고, 세상 안에서 현실이 된다.
오리게네스와 다른 교부들은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전달하기 위해 하느님을 잉태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고...
한 번은 한 분의 사제가 이런 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강론대에서 하느님께 나의 목소리를 빌려드립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전하시는 사랑의 메시지가 인간인 나의 목소리 안에서 다시 소리가 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손과 발을 하느님께 빌려 드리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육체로 변화되도록...
하느님과 한 가족인 인류형제들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8~21)”
제한받는 인간이면서도 하늘에 계신 초월정신 지니신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이라는 초월정신으로 살면 하느님과 한 가족인 인류형제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이 고향이고 하늘로 귀천할 한 가족입니다.
탄생한 소재지가 고향이고 조상과 부모 개념에 너무 길들여 있습니다.
인생 크기랄까 길이를 영혼참조해서 하늘에서 영원까지로 수정합시다.
우주의 지구는 출생지고 영원한 하늘이 고향이라고 업그레이드합시다.
영혼이 육체 안에 갇혀 사는 지금이 인생 삶이란 점 명심토록 합시다.
육체위한 영혼이란 어림없고 영혼위한 육체라는 건 부족 하지만 맞죠.
<먼발치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비록 당신과
옆에 하지 못해도
당신의 고운 눈망울
하느님의 선함 담았기에
먼발치에서 스치는
눈인사 나눔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비록 당신과
살가운 대화 나누지 못해도
당신의 부드러운 목소리
하느님의 온유 담았기에
먼발치에서 들릴 듯 말 듯
목소리 전해 들음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비록 당신을
품에 안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따스한 삶
하느님의 사랑 담았기에
먼발치에서 희미하게나마
벗들을 품는 웃음 봄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신나게, 치열히, 기쁘게 삽시다. -사랑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한 밤중 떠오른 강론 제목은 ‘신나게, 차열히, 기쁘게 삽시다-사랑이 답이다’입니다. 저는 강론 제목을 참 중시합니다. 제목에 메시지의 핵심이, 제 다짐과 고백이, 결의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첫날 강론부터 사랑이 주제였습니다. 정말 ‘생각이 없다’, ‘열정이 없다’, ‘영성이 없다’, 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악은 바로 이런 상태에 말없이 슬며시 들어와 기생하며 암세포처럼 퍼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 자주 늘 피정 강의 때 마다 강조하는 예가 있습니다. 요즘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중 하나가 '여정旅程'입니다. 삶은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사랑의 여정, 믿음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종의 여정, 자유의 여정 등 끝이 없습니다. 이 삶의 여정중에 과연 나는 오늘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한 생애를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과연 오전입니까 오후입니까? 6시 죽음의 해가 지는 오후라면, 오후 몇시 지점에 와 있겠는지요? 내 한 생애를 인생사계, 한해로 압축했을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는지요?
이런 자각이 분발하여, 쏜살같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중에도 신나게, 치열히, 기쁘게 사랑하며 살게 합니다. 어제 고백성사때 준 보속을 잊지 못합니다. 이건 비밀이 아니라 공개합니다. 모든 고백 수녀님들께 피정 끝나는 날까지 1.기쁘게, 2.평화롭게, 3.감사하며, 4.사랑하며, 5.행복하게 사시라는 다섯 사항의 보속이었습니다.
아니 피정 기간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이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또한 신나게, 치열히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얼마전 자신을 추슬러 다잡기 위해 써놓은 ‘치열한 삶’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치열하기가/흡사 산불같다
마라톤할 때도/갈수록 속력을 냈던 나
산티아고 순례 때/갈수록 나르듯 빠르게 걸었던 나
누군가는 말했지/‘한 번 불븥으면 막을 길 없다’는 나라고
세월흘러/나이들어갈수록/날로 밝게 치열히
주님 향해/불타오르는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시 걸을수록 힘이 나 산티아고 대성전 목표지점에 이를 때까지 나르듯 기쁘게 걸었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되뇌었던 시편 짧은 기도가 바로 화답송 첫구절 시편,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문득 생각나는 천상병 시인의 아름다운 귀천이란 시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 세상 휴가 끝내는 날 하느님께 갔을 때 과연 내 인생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겠는지요? 아니 내 인생 참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며 감사하게 임종할 수 있겠는지요? 이래서 하루하루 갈수록 신나게, 치열히, 기쁘게, 더욱 사랑하며, 부지런히,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랑입니다. 우선 첫 순위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세 측면에 걸쳐 사랑을 권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하느님의 집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이번 피정지도차 수도원을 떠난 지도 거의 열흘이 다 되어갑니다. 1년이상 치료차 수도원에 거주하고 있는 손님 사제로부터 어제 문자 메시지를 받고 행복했습니다.
“신부님이 안계시니까 수도원이 텅 빈 것 같습니다.”
저를 사랑하기에 이런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사랑하는 하느님이, 성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정말 텅 빈 집같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십시오. 유배지에서 귀환하자마자 실행한 것이 하느님의 집 건축이 아닙니까? 얼마나 공동체의 중심인 하느님의 집을 사랑하는 지 깨닫습니다. 돌아온 유배자들은 하느님의 집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고,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일제히 자신을 정결히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에 이어 다리우스 임금까지 전폭적으로 하느님의 집을 짓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새삼 하느님의 집은 믿는 이들뿐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사랑 받아야 할 집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수녀원이 바로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의 집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집인 수녀원을, 수도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수녀원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가 매일 공동 시편전례와 미사전례가 거행되고 있는 하느님의 집, 성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의 집은 물론 하느님의 집에서 거행되는 하느님의 일인 공동전례기도를 사랑할 것입니다.
문득 모닥불의 이치가 생각납니다. 장작도 혼자 타면 얼마 못가 꺼집니다. 물에 젖은 나무라면 아예 처음부터 불붙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함께 모닥불이 되어 타면 심지어 물에 젖은 나무도 끝까지 활활 재가 될 때까지 탈수 있습니다. 바로 공동전례기도가 모닥불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개인기도에 앞서 하느님의 집에서의 하느님의 일인 공동전례기도를 사랑하여 충실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하느님 말씀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환호송도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루카11,28).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참 행복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있으며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자체인 예수님은 물론 성경 말씀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렉시오 디비나의 항구한 수행입니다.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고’로 끝나는 렉시오 디비나가 아니라, ‘행하라’에서 끝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말씀을 실행할 때 비로소 렉시오 디비나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의 집 공동체의 중심에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파스카의 예수님은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이르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세례 받았다 하여, 전례기도 참석 잘 한다하여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비로소 주님의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항구히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과의 형제애도 우애도 깊어집니다.
여기서 내 어머니는 바로 마리아 성모님을 지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의 으뜸은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 마리아 성모님을 닮은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성모님의 수태고지때 순종의 응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지기를 바랍니다.” 고백대로 마리아 성모님은 참으로 하느님 말씀을 잘 들은 ‘경청(傾聽,敬聽)의 어머니’이자 잘 순종한 ‘실행實行의 어머니’이심을 깨닫습니다.
셋째,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하느님 자녀들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서로는 형제가 됩니다. ‘인간답게’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답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인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들인가는 바로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으로 입증됩니다. 또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형제 사랑으로 입증됩니다. 하여 주님은 너희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명령하셨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다음 요한복음의 두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이 답입니다. 정말 살아갈수록 신나게, 치열히, 기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살 때 아름답고 품위 있는 매력적인 삶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1.하느님의 집을 사랑하는 것이고, 2.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3.하느님의 자녀들인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지칠줄 모르는 사랑에 항구할 수 있도록 풍성한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오늘 미사중 본기도가 오늘 강론을 요약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Sermo 46,18-19: CCL 41,544-546)
“내 양들은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온 세상에 흩어졌다.” “온 세상에 흩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온갖 지상적인 것을 따라가고 지상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함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지게 하는 그 죽음으로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지상적인 것을 사랑하고 길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 흩어진 것입니다. 이런 양들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한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가 낳은 것처럼, 그들도 모두 한 어머니인 교만이 낳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만이 분열을 낳게 하는 것처럼 사랑이 일치를 낳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한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와 그 교회 안의 한 목자께서는 어디에서나 헤매는 이들을 찾으시고 허약자를 굳세게 하시며 앓는 이를 돌보시고 상처 입은 이를 싸매 주십니다. 교회가 어떤 이들은 이런 곳에서 찾고 또 다른 이들은 저런 곳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교회는 모든 이와 합치되어 있으므로 그들 모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간 포도나무와 같고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하여 농부의 낫으로 교회라는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쓸모 없는 가지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포도나무를 모조리 잘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려진 가지는 잘려진 바로 그 곳에 남아 있지만 그 포도나무는 모든 곳으로 자라나 붙어 있는 가지도 알고 있고 잘려져 떨어져 있는 가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 헤매는 이들을 되부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진 이 가지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여 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 때를 떠나 헤매는 양들이건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이건 최고의 목자이시고 참된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양들을 되부르시고 또 가지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 양 떼는 온 세상에 흩어졌지만” 그 악한 목자들 중에 “그들을 찾아 다니는 목자는 하나도 없었도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증거로 삼아 맹세하십니다. 목자들은 죽었지만 주님은 살아계시므로 양들은 안전합니다.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런데 죽은 목자들은 어떤 목자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지 않고 자기 이익만 찾는 목자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찾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는 목자들이 앞으로 있겠고 또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있을 것이고 또 분명히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신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면 반갑고 그렇게 일이 잘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살 때나, 거래처를 찾아갔을 때 묵주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식사할 때 성호경을 긋는 상대를 만나면 호감이 가고, 안심이 되고, 일이 잘 풀린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인편으로 가족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전합니다. 이분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리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루카 복음에서도 순서가 바뀌긴 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5) 라고 전합니다. 이런 말을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식구들은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어찌보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다소 반가울리 없었으리라고 봅니다. 어머니와 가족마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어주지 못하는 것에 섭섭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와 가족이 왔다는 말에 반갑게 응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시고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육과 피의 가족에게서 믿음의 가족으로 확산시키십니다. 예수님은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시고 적용하십니다. 우리도 길에서나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실천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즐거워야 하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천주교 신자들끼리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이 있다고들 합니다. 가족들끼리 하는 것도 모자라 대부 대모까지 합세하여 범죄자 일가를 만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실지 모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그 누구를 악에 빠지게 하고 괴롭히고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을 진리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천주교인이 되기로 합시다.
하나가 되어야 산다. <루카 8, 19–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믿음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이신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인 것같이 삶도 생각, 말, 행위가 일치하는데 참삶이 있습니다.
보고 들은 바를 생각하고 말하지만 자기가 말한 바를 실천하지 않으면 제대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은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설계도가 잘 만들어져도 구석구석 여기저기 설명할 수 없으면 현실에 옮겨지지 못하지만, 아무리 설명이 잘 되어도 집을 짓기 위해 재료를 구하고 기초를 쌓지 않으면 꿈에 그리던 집이 되지 못합니다. 지도자가 아무리 좋은 설계도를 가지고 앞으로의 진행을 서약한다 해도 지키지 않으면 헛약속이고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주의 기도 중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듯이 오늘 복음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듣고, 마음에 새기고, 결심을 서원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미사 때 복음을 듣기 전 이마, 입, 가슴에 십자가를 놓습니다. 이는 듣는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에 새기고,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실천하겠다는 마음으로 듣고, 말하고, 실천하겠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가장 먼저 전하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게 드리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믿는 마음입니다. 아침 기도 토빗기 13장 2절에 “주님은 책벌하시고도 자비를 베푸시고, 명부<지옥>에 내려보내시고 다시 부르시는 분이시니” 하는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영원히 벌 받는 지옥은 만들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다시 다짐해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침에 ‘여기 내 형제들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죽기까지 살겠다고 서약하고 사는 것 참으로 신비로운 하느님의 뜻이었네’ 생각하면서 60년을 산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 공동체, 나라, 가정, 자기가 속한 단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면서 한 형제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합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누가 주님의 가족인가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두고 혈육을 부정하는 듯한 냉정한 이 말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정말 아쉽고, 정말 송구스럽고, 정말 안타깝지만, 나자렛을 뛰어넘을 때 이루어집니다. 나자렛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일구기 위해 과거와 결연히 단절하고 계신 것이죠. 주님은 이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겠노라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새로 맺어진 가족들은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그냥 같은 신앙을 지닌 교우인 것만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가족으로 맺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살고자 하는 우리는 가족으로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릅니다. 그러니 새 가족을 품은 교회는 조직이 아니고 제도가 아닌 하느님 안의 한 가정인 것이죠. 교회가 점점 비대해지고 파편화되어 한 가족이면서도 서로를 모른 채 무관심한 관계가 되어간다면 우리 가족 안에 큰 문제가 생긴 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삼으셨는데 정작 우리가 그 관계를 깨뜨리게 됩니다.
정리하고 정돈되면 모두가 기쁘다.
최민석 신부님
내가 보는 바깥세상은 늘 상 시끄럽다. 현제 나라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다. 국민들은 극도의 정치 불안감을 넘어 피로감으로 짜증이 날 정도다. 조국 법무장관을 둘러싼 뉴스가 그렇다. 두 달 째 계속되는 똑 같은 소식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아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짜증나는 현상은 행복하게 살아야 할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국민의 일원으로서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피로감이 없는 상태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은 이런 소박한 백성들의 희망에 부합한 나라이면 좋겠다.
국민주권 행사를 통해 뽑아 세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대신할 법무장관 임명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 너무 오래 간다. 두 달 가까이 계속되는 진흙탕 싸움을 지켜보는 이 나라 국민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해 있다. 한편으로는 기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나라를 걱정하며 깨어있는 시민들의 촛불 함성을 다시 듣게 된다.
촛불 시민 혁명으로 태어난 정부를 깨우치는 촛불 함성이다. 촛불 함성은 적폐청산을 계속하라 명령한다. 청산하고 정리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미룬 것이 적폐로 쌓여 오늘의 현실을 어지럽히고 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청산 할 것은 청산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나는 내가 사는 생활공간을 정리하는 것이 서투르다. 그것을 알기에 눈에 잘 띠는 곳에 <정리하고 정돈하라.>는 생활표어를 붙여 놓고 산다. 이 표어는 게으른 나에게 내가 명령하는 말이다. ‘정리를 해야 정돈이 된다.’ 생활 진리가 역사 과정에도 적용되는 것이 지당하다.
우선 분리수거 하고 정리하는 것이 일의 순서이다. 그 순서를 따르지 않으면 적폐는 그대로 남아 썩어 냄새난 불쾌한 세상을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정리가 되어야 정돈이 된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며 적폐청산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적폐청산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적폐를 청산 미룰 수 없다. 이 나라의 안개 헤치며,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다. 쓰레기들을 청소하고 나면 마음까지 시원하고 깨끗해진다. 적폐청산을 이 시대의 사명으로 알고 잘 정리하고 정돈하여 그 모든 것들을 각기 제자리 제 위치에 재배치하면 좋겠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적제적소 꼭 필요한 곳에 불러 쓰시듯이 각자가 자리할 위치와 역할을 알아 제 갈 길을 가면 좋겠다. 흥겨운 아침 햇살을 주시어 지친 어깨 무거움보다 즐거운 일터에 만족하게 하시고 하느님이 주신 두 손과 두 발에 수고함을 알게 하고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몸을 주심에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하늘 땅 모든 존재는 하늘이 정해준 자기의 길이 있다. 서로를 살리고 섬기고 사귀며 한 생명으로 사는 생명 길을 걸어가면 좋겠다. 흰 구름 흐르는 길에 어둠이 사라지고 잃어버린 눈동자에 빛을 주시어 가을 하늘 높음에 미소 짓게 한다.
하느님의 질서에 따라 사랑의 현존을 사는 이들은 진실한 눈물의 의미를 안다. 사랑으로 사는 이들은 작은 일에도 만족을 느끼는 큰마음 가진다. 그리고 새 희망 꿈을 찾아 욕심 없는 세상에서 일하는 이들은 삶의 터전이 피곤치 않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상기쁨을 산다. 은혜로운 이 땅에 빛과 어둠을 주시는 하느님이 빛으로 노래하게 하신다.
올 가을에는 사랑하는 마음 주시고 서로 바라보는 눈빛은 편안한 행복을 주시어 황금빛 노을을 바라보며 어려운 일에 감사할 수 있게 하신다. 하느님의 현존을 사는 이들은 땀방울로 빚어진 씨눈에서 알곡까지 거두어 곳간을 채우는 농부처럼 채워지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산다.
하느님이 사랑이 풍요의 가을에 넉넉함을 담아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두 손 모아 사랑담은 곱게 타는 단풍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보랏빛 포도송이처럼 제 마음도 영글어 오직 당신만을 따르게 하시고 가을 하늘처럼 제 영혼 맑고 푸르게 하시어 당신께 기도하게 하신다.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을 바라보며 제가 갈 곳이 어디인지 알게 하고 사랑을 알고 겸허함을 배워 믿음이 곡식처럼 영글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가을이다. 축복받은 이 가을에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가길 바래본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 21)
(“My mother and my brothers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do it.” )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태풍 타파가 지나갔는데 비피해 없으셨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루카 8, 19~21)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루카 8,21)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어머님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밖에서 뵙고자 한다"고 이렇게 전갈을 드렸더니 예수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이 말씀에 대한 느낌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좀 섭섭해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많은 군중들보다도 우선적으로 혈육을 가까이 해주셨으면 어떻겠는가, 즉 많은 군중들 앞에서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라고 소개하시면서 가족들에게 정을 나눠주신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소개해준 예수님에 대해 어머님과 형제들은 좀 기뻐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 다른 관점으로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현장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는 혈육의 정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대해주고 계시구나하는 생각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로 까지 생각해주시는구나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 더욱더 자부심과 기쁨을 더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물론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한다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함께 했던 그 군중들에게는 좀 더 위로가 필요했고, 좀 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욱 더 느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로와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주고 품어주신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혈육의 정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당신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정신, 바로 이러한 보편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들은 사람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기쁨과 구원의 선물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를 때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 만약 내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이 사람들이다" 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어떤 느낌이 듭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분별'(루카 8장 19~2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
피를 나눈 가족이 사랑으로 느껴질때는 기쁨이든 고통이든 함께 할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족애를 지녔지만 공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냉철함을 보이십니다.
어느 부인이 남편 회사를 자꾸 오든지 일하고 있는데 특별한 일없이 전화를 자주 하면 훼방꾼으로 여겨집니다.
의사가 급한 환자 수술을 앞두고 딸이 다쳤다는 소식 듣고 달려간다면 그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닌것입니다.
공과 사를 혼돈하거나 공과 사를 뒤섞어 살면 혼탁해집니다.
공적인 모습이 발휘될때와 사적인 모습이 발휘될때와 시기를 분별할 줄 알면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님
가족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시는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친척들이 그분을 붙잡으러 나서는 '예수님과 베엘제불' 일화에 이어서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오늘의 대목을 배열했지만(마르 3,20-35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이 대목과 베엘제불 이야기를 별개의 사건으로 뚝 떼어 이야기합니다(루카 11,14-23 참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머니 마리아나 형제들에 대한 거부로 이해하면 곤란할 겁니다. 예수님은 그저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기존의 개념을 확장하고 계실 뿐입니다. 흔히 쓰는 가족 구성원 명칭은 철저히 혈연 중심으로 사용해 왔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안에는 혈연적 관계는 물론 포함될 것이고, 이를 넘어서 하느님의 백성 모두에게 가족의 자격이 부여되는 겁니다. 비록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로 연결되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집 공사가 계속되게 하여라. ... 그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에즈 6,7).
제1독서에서는 키루스 임금의 칙령으로 시작된 해방과 귀향이 그저 장소적 이동만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환희의 날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명령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와 다리우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 건축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에즈 6,14).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방신을 섬기는 타 민족 통치자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명령이 완수됩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대로 그분의 뜻에 순종한 페르시아의 이 세 임금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한 이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들도 예수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이면서 하느님 말씀을 기점으로 혈연을 초월해 우리와 형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율법도 희생 제사도 성전도 모르는 그들이 말씀 실행을 매개로 하느님의 일꾼,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벗이 된 겁니다.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완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사제들은 저마다 번별로 세우고 레위인들은 저마다 조별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였다"(에즈 6,18)고 합니다. 율법 준수와 성전 경신례를 회복하는 장엄한 순간, 그들은 얼마나 감동스럽고 감사하고 행복했을까요! 조상들의 영화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성전에서 어느 누구의 속국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한 자유민으로서 올리는 오십 년 만의 제사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치의 기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앞서 다리우스 임금이 한 말 중, "제자리"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혈연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확장하신 것처럼 "제자리" 역시 공간 개념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안의 예루살렘 특정 지역이 과거 성전의 "제자리"라면, 예수님 이후 "제자리"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억나실 겁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
혈연 개념 파괴(?)에 공간 개념 파괴(?)까지 우리 예수님 참 획기적이고 참신한 분이시지요!
우리는 공간적 "제자리"를 찾았다고 감동하던 구약 백성의 체험을 넘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머무르는 곳에서 제자리를 찾은 존재들입니다. 율법과 제도적 신분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를"(요한 4,23) 드리는 모든 곳이 우리의 "제자리"니까요.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리고 어린아이가 발돋움하듯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그 말씀을 실행하려 애쓴다면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우리의 자리가 곧 "제자리"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머무르는 그곳에서 말씀과 주님 현존으로 충만한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시 말씀으로
돌아갈 말씀의
시간입니다.
말씀의 맛이
곧 삶의 맛입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맺어진 말씀의
형제들이 신앙의
참된 정체성입니다.
말씀은 실행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실행 속에 참된
길이 있습니다.
구원의 길은
실행으로
성장되는 말씀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땅의 생생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입니다.
사람과 말씀
인격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참된 관계는
말씀으로 빚어진
말씀의 관계들입니다.
말씀의 가족
말씀의 식구가
되길 원하십니다.
모든 만남의 방식이
말씀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군더더기를 버리면
말씀만이 남습니다.
지나칠 수 없는
말씀의 여정
말씀의 관계입니다.
혈육도 인연도
말씀으로 깊어져야
생명의 주인을
향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삶의 몫이며
삶은 모든 말씀의
뜨거운 흔적입니다.
아마 이 시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오르면 오르지 못할 까닭이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조선시대 문인이며 서예가인 양사언의 시조입니다. 어렵고 힘든 목적이 있다면 그것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성실하게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학창시절에 이 시조를 배웠던 기억이 났습니다. 태산이 얼마나 높기에 이렇게 시조에도 등장할까 싶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습니다. 중국 산둥성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인 태산은 높이가 1,532m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보다 높은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금강산, 덕유산 등으로 곧 태산이 아주 높아서 못 오를 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담 중에서도 ‘갈수록 태산’이라면서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산으로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별 것 아닌 것입니다. 바로 지례짐작 때문이 아닐까요?
지례짐작으로 섣부르게 판단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또 좌절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남에 대한 부러움 역시 이러한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부러움을 표시하십니다.
“신부님께서는 결혼하지 않아서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바가지 긁는 마누라도 없고, 사고치는 아이도 없고,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저 역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결혼하셔서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그래도 사랑스러운 마누라도 있고, 나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도 있으니까요? 또 함께 하니 얼마나 기쁩니까?”
다른 이에 대해서 지례짐작 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누가 말해주지요.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이라고 말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지례짐작의 생각이 옳지 않음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라고 분명히 하시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례짐작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성실하고 기쁘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기도합시다.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돈을 가장 원하면 어떻습니까? 그 돈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높은 지위를 가장 원하면 그 지위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누군가 함께 하기를 원했는데 함께 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클수록 실망도 크고, 희망이 클수록 절망도 크다.’
자신이 원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하고 궁지에 몰아넣게 됩니다. 결국 무시무시한 적들은 바로 내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조금 더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이 온유하고 겸손해지 위해 언제나 시간을 내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해야 주님께 속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저절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교만한 경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한 없이 낮출 수 있는 것, 그래서 주님과 언제나 함께 하는 행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 고통을 향해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과 함께 함으로써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그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창세기 4장에서 하느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너의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카인은 하느님에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는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질문을 한 이후에 두 번째 하신 질문입니다.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느냐,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라는 질문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사제는 복음을 선포하고, 사목을 하고, 성사를 정성껏 집전해야 합니다. 과연 저는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으며, 최선을 다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이 질문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는 ‘나’라는 범위를 넘어서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와 이웃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이유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과 자비로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의 이 질문을 깊이 성찰한 후에 연설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첫 연설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노예였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케냐에서 온 이민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외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모두 나의 형제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 실직하여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오바마의 이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흑인으로서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질문에 충실하게 응답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 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말씀의 조각가 -예수님 얼굴, 내 얼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말씀의 조각가입니다. 주님과 함께 평생 예수님 얼굴, 내 얼굴을 조각하는 조각가입니다. 예전 읽었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성서를 열 번이나 통독했다는 제자에게 스승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내 묻겠다. 성서가 너를 몇 번이나 읽었는가?”
제자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합니다. 참 의미심장한 물음입니다. 렉시오 디비나 성독에서 전반부 ‘읽기’가 내가 성서를 읽는 부분이라면 후반부 ‘묵상-기도-관상’은 성서가, 하느님이 나를 읽는 부분입니다.
강론 역시 내가 강론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강론이 나를 쓰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하여 강론이 나를 썼던 강론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합니다. 새벽마다 쓰는 강론은 흡사 내 마음판위에 말씀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조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내 얼굴을 조각합니다. 궁극에는 예수님 얼굴은 바로 내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조각입니다. 믿는 이들은 평생 주님과 함께 끊임없이 거짓 나를 깎아내며 참나를 조각해 갑니다. 평생 ‘말씀’과 ‘전례’와 ‘삶’을 통해 나를 조각해 갑니다. 막연한 목표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의 삶 전과정이 예수님의 모습을 바로 참 나를 조각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런저런 삶의 시련을 통해 겪는 아픔은 거짓 나가 깎여져 나감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점차 주님의 꼴을 닮아가는 내 꼴의 조각이 되어가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믿는 이들의 가시적 중심입니다. 말씀과 전례로 1차 예수님 얼굴을 내 마음에 조각하는 동시에 내 얼굴을 조각하는 거룩한 축복의 장소입니다. 따로가 아닌 예수님 얼굴과 동시에 조각되는 내 얼굴입니다. 예수님 얼굴은 바로 하느님 얼굴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얼굴,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 얼굴, 하느님 얼굴 아닌 것을 깎아내는 조각입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지음 받는 우리들이기에 예수님 얼굴이 조각되면서 하느님을 닮은 내 얼굴이 조각되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에즈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리며 기뻐했던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참기쁨은 예수님을 닮은 참얼굴로 조각될 때 피어납니다.
‘그리하여 이 집이 완공된 것은 다리우스 임금의 통치 제육년 아다르 달 초사흗날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
이어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하느님을 섬겼고 자신을 정결하게 했고 돌아 온 유배자들은 첫째 달 열나흗날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 마치 자신을 정결케하고 파스카 축제인 미사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파스카 미사전례은총으로 예수님 얼굴을 닮은 내면의 얼굴이 조각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참 가족은 말씀의 조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전례의 실행만으로 완성되는 예수님 얼굴 조각이 아니라 일상에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완성되어가는 예수님 얼굴의 조각입니다. 물론 삶의 조각에 전제되는바 말씀과 전례의 수행입니다. 이어 말씀의 생활화, 전례의 생활화를 통해 완성되는 예수님 얼굴 조각, 내 얼굴의 조각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하셨던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가장 많이 예수님 얼굴, 하느님 얼굴을 닮은 분이 성모님이실 것입니다. 성모님 얼굴, 예수님 얼굴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 얼굴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주님은 하느님을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비로소 당신 얼굴을 닮은 당신의 형제가 된다 하십니다. 하느님의 집에서의 말씀과 전례 수행에 이어 삶에서 말씀을 실행함으로 생활화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삶은 조각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말씀의 조각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강론을 쓰고, 강론을 읽는 시간은 바로 내 마음 판에 예수님 얼굴, 내 얼굴을 조각하는 시간입니다. 성전에서의 미사전례, 시편전례기도시간 역시 내 마음 판에 예수님 얼굴, 내 얼굴을 조각하는 시간입니다.
두 얼굴 같지만 실은 예수님의 얼굴 하나입니다. 예수님 얼굴을 닮을수록 참 내 얼굴입니다. 이어 일상의 삶을 통해 말씀을 실행함으로 잘 다듬어 지는 예수님 얼굴, 내얼굴입니다. 하여 우리 얼굴을 통해 서로 하느님 얼굴, 예수님 얼굴, 성모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참가족, 한가족의 한얼굴처럼 보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 사랑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얼굴을 닮은 우리 각자의 참얼굴로 조각해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닮은 참 얼굴의 완성은 말씀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첨가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얼굴, 내 얼굴 조각의 완성에 끊임없는 사랑의 기도가 필수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순교자들의 지닌 공통점 한 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덧 순교자 성월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다들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단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고도 부럽습니다.
위대한 순교자들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얻게 된 결론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순교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더군요.
평소 죽어도 조그마한 희생이나 양보 하나 못하는 사람들은, 순교의 기회가 와도 절대로 그 영광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평소 주님의 계명을 떠나 죄와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순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평소 늘 순교를 꿈꾸고 있었으며, 매일 작은 순교의 삶, 백색 순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했습니다, 매일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매일의 고통 가운데서도 환한 얼굴로 살았습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천국을 맞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순교의 기회가 왔고, 아무런 주저없이 그리고 지체없이 순교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90개 살레시오회 관구에서 가장 위험한 관구는 중동 관구입니다. 계속되는 테러와 전쟁으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그 지역에서의 삶입니다. 마치 화약고와도 같은 그곳에서도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적극적으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1년에 한번 연피정 때 만났다가 헤어질때면, 중동 관구 살레시오 회원들은 언제나 이렇게 작별인사를 한답니다. “형제여,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내년에 우리 다시 만날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된다면 저 위에서 만납시다!”
전쟁터 같은 지역에서 사목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를 각오하고 살아가는 그분들의 모습 앞에, 작은 고통 하나 제대로 견뎌내기 힘겨워하는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고 초라해보입니다.
우리가 비록 피를 흘리는 순교를 하지는 못할지라도, 매일 직면해야 하는 근원적인 결핍과 고통, 상처와 어둠을 기쁘게 수용하고 극복함을 통해 작은 순교자, 백색 순교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폴리카르포 순교자의 말씀에 따르면 “순교자들은 한 시간의 댓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 처럼 고통은 잠시지만 영광은 영원합니다. 결국 순교와 관련해서도 인내가 관건이고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작은 순교, 백색 순교를 위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매일 매 순간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 상처와 억울함 앞에서 여기저기 떠벌리지 않고, 갖은 불평불만 늘어놓지 않고 기꺼이 수용하고 침묵하는 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이 시대 순교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이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 몰이해와 적개심으로 가득한 눈길 속에서도, 주님의 현존하심과 섭리하심을 굳게 믿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시대 순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 역시 살아생전 순교하는 마음으로, 순교할 각오로 그렇게,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아직 그리스도교가 정식 국교로 받아들이기 전 시대를 살아가셨던 고스마와 다미아노 두 분은 박해와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형제지간이자 의사였던 두 분은 당당하게 자신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가난한 환자들만 골라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스마와 다미아노 두 분은 결코 물러서거나 숨는 법이 없었습니다. 더 열심히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의료봉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심없는 봉사와 나눔을 통해 자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잘 드러냈습니다.
두분의 청렴결백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팔라디아라는 환자가 다미아노로부터 치료를 받았는데, 기적적으로 앓던 곳이 말끔하게 치유되었답니다. 너무나 고마웠던 그녀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은 선물을 하나 그에게 건넸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고스마는 격노한 나머지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나 죽거든 절대로 다미아노와 한 무덤에 넣지 마십시오!”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라고 불린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마태오복음>에서는“제자들”(마태 12,49),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마르 3,34)을, 그리고 여기<루카복음>에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군중”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또 어린아이와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그리고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와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어린이들, 작은이들과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당신의 형제로 지칭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직 십자가 아래서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를 맡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어머니가 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신 것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을 구체적으로‘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하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미우면서도 함께 있어주는 사람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비록 힘들어도, 손해 보면서도 함께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동행자요 동반자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라야 합니다.곧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 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도,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신뢰해주고 그의 말을 따라주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러니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고,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라야 합니다. 그러니 나아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진정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곧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진정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의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애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한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한 명의 대선 후보로서 지금까지와는 자세가 다르게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아버지가 한 잘못들을 공개적으로 대신 사과하였습니다. 이는 이유야 어떻든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 바오로 2세도 과거에 했던 잘못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의 잘못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쨌든 큰 뜻을 위해서는 사적인 관계나 애정을 끊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가봅니다.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 관한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자신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무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왕은 나라를 택할 것인지, 한 남자와의 사랑을 택할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사람들 앞에 나섭니다. 흰 분을 발랐다는 것은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죽은 사람과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가 영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라고 합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까지 격파하고 누구도 두렵지 않은 나라가 무려 4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죽기 직전 숨을 거두며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그 남자의 이름을 부릅니다. 나라를 위해 한 남자와의 애정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한 남자와의 애정을 포기하였지만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 포기가 더 값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며 혈육의 관계가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보다 앞서서는 안 됨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나 엘리자베스 여왕의 경우처럼 혈육의 관계가 싫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그것보다 더 큰 뜻을 위해서 가장 아끼는 애정을 다음 순서로 놓아야 함을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걸림돌이 된 것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유일하게 대학에 다니고 있는 저에 대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지라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못 꺼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약주를 드시고 기분이 좋으실 때 방에 들어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매우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시다가 새벽에 저를 깨우시더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허락하지 않으셔도 제 뜻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라는 말씀처럼 가족의 뜻이 하느님의 뜻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만이 제가 사제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저의 사제직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이후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말하기를, 제가 보좌신부로 있는 성당에 오셔서 사무실에서 저의 어머니라 하시며, “삼용이, 여기서 말썽 안 피워요?”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신부님인데 말썽 안 피우냐는 어머니의 말씀에 신자 분들이 웃으셨다고 합니다. 위신을 너무 세울 필요도 없지만 이렇게 위신이 일부러 깎일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저는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제가 있는 성당에 오시지 말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사제관에 있는데 핸드폰이 왔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당에 저를 보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쯤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앞으로도 낫겠다싶어 전화로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고 다시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찾아오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참으로 사제가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려 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하느님을 뜻을 따르기 위함이지 부모님이 정말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더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가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하셨지만 이것은 성모님을 업신여기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모님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셔도 성모님은 기분이 상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이 없으니 당신만큼 어머니 될 자격을 지닌 사람도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혈육 관계는 하느님을 앎으로써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그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이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 사이의 애정은 하느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이기에 세상의 애정에 집착하려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하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모든 인관관계를 허락하십니다.
하느님의 가족이 되려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영적인 관계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시고 계시다. 즉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 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밖에서 친척들이 찾는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성경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고 잘 될 것이다.”(신명 5,16)고 하셨다. 그분께서 당신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형제들 뿐 아니라,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실 수 있었겠는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고 하셨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시는 말씀이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한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도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에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참 가족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하고 말씀하십니다. 왜 말씀에 충실했던 어머니에게까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자신을 맡겨 드렸지요(1,38). 그녀는 자기 아들에 관한 모든 말씀을 깊이 되새겼고(2,19), 그 말씀을 엘리사벳에게 전해줍니다. 그렇게 선포된 말씀은 풍요로워져 ‘마리아의 노래’(1,46-55)로 메아리칩니다. 그녀는 말씀에 굳게 의지하여 인내로써 결실을 맺었습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 따르면 예수님과 성모님, 형제들 사이의 관계는 소원했고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분의 처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지요(마르 3,21). 몰이해 속에 예수님의 가혹한 말씀을 들었던 가족들이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그분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념하고 있던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사도 1,1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안에서 형성된 영적인 관계가 혈연관계보다 더 우선하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었던 구약의 친족법을 완전히 뒤엎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의 실행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뜻이지요.
예수께서는 결혼생활을 생각하지 말고(마태 19,12), 당신보다 가족을 앞세우지도 말며(10,37), 아버지 장례에도 참석하지 말고(8,21-22),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하러 가지도 말라고 하셨지요(루카 9,61-62). 제자들은 그런 요구를 따랐고(마르 10,28-30), 그리하여 예수님을 중심으로 영적 가족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의 참된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영적 가족은 하느님을 같은 아버지로 모시고, 말씀으로 맺어진 가족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은 영원성을 띠며, 영원한 생명을 지향합니다. 이에 비추어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진정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중심에 두는 영적인 관계라 할 수 있을까요?
또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 경험이나 지식을 더 중요시 여기며 세상과 재물과 현세 권력을 좇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나아가 말씀을 듣기보다는 내 생각과 주장을 먼저 말하는데 정신을 팔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야겠지요. 말하기보다는 경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말씀을 경청하고 가슴깊이 새긴다 하여도 실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 바실리우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이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자유를 되찾고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함께 마시는 주님의 거룩한 가족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8,21)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신부님
범우주적 보편적 부모와 형제관계를 원하셨던 예수님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하느님 나라의 관계는 혈연 뿐 만 아니라 학연이나 지연, 더 나아가 국경을 뛰어 넘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맺는 새로운 관계는 인종과 문화뿐 만 아니라 언어나 종교의 장벽을 허물어 버립니다.남성과 여성을 초월하고 나이의 많고 적음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닙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마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관계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사랑’을 그 첫째 계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우주적 가족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주어진 조건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주님의 전망을 품을수록 ‘사랑의 관계’를 갈망하지만,그 전망을 잊을수록 우리는 사회적 조건에 집착합니다. ‘사랑의 관계’를 갈망하면 사회적인 조건도 풍부하게 만들지만, 사회적 조건에 집착하면 우리는 ‘사랑’도 버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유대인을 치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적대적 민족의 관계를 넘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를 맞은 유대인을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 아니라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박미라 도미틸라 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는 말이 있다.
이는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 흔히 혈육을 제일로 치는 말이다.
헌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엎어 버리신다.
혈육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께는 더 가깝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나 더 혈연이니,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며 무언가 연줄이 닿는 사람들하고만 사귀려고 하며
하다못해 정치판에서도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보다도 일의 중요성보다도 자기와 연줄이 닿는 그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형제들과 어머니께서 찾아오셨는데도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고정관념!
우리 안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부수지 않고서는 그분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헌데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자기들의 생각들을... 자기들의 지식들을... 자기들의 경험들을...
자기들의 수많은 고정관념들을 그대로 고수한 채
그분을 받아들였다고...
그분을 안다고...
그분으로 인해 살고 있다고 말한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세상의 그 어떤 끈도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을 가장 중요시 여기시고 가장 가까이 두려고 하시는 그분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하거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최원석 님
명절이 되면 가기 싫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집입니다.. 요즘에 공시생들이 많지요 취업을 못하고 학원에서 공부하는 백수들 말이지요 ..저도 그들과 다를 것이 없지요 ..학교에서 받는 장학금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학생이라고 하지만 나이와 여러가지 것을 보면 학생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고 참으로 불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명절이라는것이 되면 돈도 못벌고 집에서 자리차지하고 앉아서 말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불편합니다. 아마도 공시생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으로 존재는 있는데 어디다 나의 위치를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백수들의 삶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에 집에 가고 싶어도 집에 가지 못하고 혼자서 고시촌에서 고생하는 한국의 학생들이 응원을 해주고 싶습니다. 가족? 참으로 어려운 사이 입니다. 가까우면서도 가깝지 않고 멀지도 않으면서도 멀지 않은 것이 가족이지요 아마도 가족간에 사이를 어렵게 하는 것이 경제관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돈을 벌고 못벌고 하여서 형제간에도 우애가 많이 깨지는 것을 많이 보게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하루아침에 백수가되어서 두리번 거리고 있으니 가족들은 속이 속이 아닌가봅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이가 가족간인것 같아요 특히나 부부 사이 .. 아주 가까우면서도 한번 신뢰가 무너지면 하루아침에 남이되는 사이 ..이것이 부부 사이 인것 같습니다. 이런 가족간에도 금도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넘어서는 않되는 선.. 이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과 성모님사이를 보면 좋은 모델이 될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30이 넘어서 공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같으면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공양할 나이에 주님은 공생활을 하신것이지요 .. 우리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않되는 생활을 하신것이지요 .. 주변에서 술꾼 혹은 먹보라는 이야기도 들으시고 그리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풍족한 음식도 제공하지 못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신 분이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하층민들과 같이 동고 동락하신 분이 주님이시지요 .. 우리나라관점에서는 입신양면과 같은 그런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으신 분이시지요 ..극기야는 주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돌아기시기까지하는 그런 삶을 살으셨지요 부모 입장에서 보면 극구 말리고 싶은 일을 아들 예수님이 하신것 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처음 잉태부터 주님의 죽음 부활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아들로 속박하려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삶을 같이 동행하신 분이시지요 ..그 중심에는 주님이 그 가슴에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동행할수 있었지요 .. 우리 가족간에도 중심에 주님이 계셔야 우리가족이 화목할수 있습니다. 가족간에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않고 내가 중심이 되어 있으면 가족간에 금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누구를 만나더라고 그 중심에는 주님이 계셔야 평화가 그안에 있을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중심에는 주님이 .. 평생 우리가 가져가야할 길이지요 ..평생 .. 우리 가족들 건강하고 주님안에서 평화를 ..
아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옷을 갈아 입듯
나무들 또한
변화라는 실행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로
가는 길이 있다면
복음적 실행입니다.
참된 소통은
실행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실행을 통해
우리라는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수행의 길이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보여주신 것도
실행이었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은
실행을 통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하느님 말씀에서
실행을 떼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실행을 통해
해답을 주십니다.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인격의
또 다른 이름은
실행입니다.
생명의 양식또한
실행입니다.
삶을 만나고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 우리또한
실행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랑과 구원은
우리의 실행으로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여러 가지 신분증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내에 주소를 두고 거주하는 주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이 있으며, 외국을 여행하는 국민에게 정부가 발급하는 것으로 여행자의 국적과 신분을 증명하는 여권(Passport)도 있습니다. 또한 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운전면허증도 있습니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대한민국 안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여권 없이는 해외를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운전면허증 없이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신분증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는 것으로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분증을 취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을 취득해야만 가능하지요.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만으로 그리고 남들이 가지고 있다고 “저도 그냥 하나만 주세요.”라고 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냥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조하는 혈통이나 가족 관계를 통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돈을 주거나 높은 지위를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 시민에 걸맞은 자격조건을 갖추어야만 갈 수가 있습니다. 이 자격조건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보다는 이 세상 안의 시민을 더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도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친족 관계를 특히 강조합니다(우리나라가 더 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이 얼마나 좋을까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십니다. 친족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에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수도자가 우연히 인기 연예인과 함께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인기 연예인을 뜨겁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수도자를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혼자 쓸쓸이 버스를 내리면서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지요.
‘하느님, 저 사람을 맞이하는 사람은 저렇게 많은데 저를 맞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바로 그때 하느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내 집에 온 것이 아니지 않니?’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 집이 아닌 이 세상의 집에만 머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 조건이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르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이웃 사랑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진짜 사랑입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것, 내게 얻을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이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조건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사랑 실천은 과연 어떤 수준까지 이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떠올렸으면 합니다. 자격조건을 채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생각이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생각부터 바꿔라(마크 피셔).
행복의 네 가지 비결(‘좋은 생각’ 중에서)
어느 날, 한 소년이 마을의 현자를 찾아가 말했다.
“저는 꿈이 있어요. 저 자신과 남을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 꿈을 갖다니 훌륭하구나. 네 가지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실천해 보렴.”
현자가 “첫째는 자신을 남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라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을 남처럼 생각하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겨도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아주 똑똑하구나. 두 번째는 남을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
“그러면 주변 사람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여기고 도와줄 수 있겠네요. 친구가 기쁠 땐 저도 기쁨을 느낄 수 있고요.”
이어서 현자는 얘기했다.
“세 번째는 남을 남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
그러자 소년은 바로 답했다.
“주변 사람을 바꾸려 들지 말고 존중하라는 뜻이죠?”
현자는 소년에게 말했다.
“네 번째는 자신을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란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지. 쉬운 듯해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단다. 네 가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거라. 그러면 여러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게야.”
어떻습니까? 행복의 비결이 조금 명쾌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주일에 안양에 있는 ‘아론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동서울 지역 레지아 단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을 강의하는 것입니다. 도착하니, 단장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부득이 11시 20분까지만 강의를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의 시간이 줄어들었는데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았습니다. 강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강의를 듣는 사람이나, 강의를 하는 사람이나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의 주제는 ‘성사론’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부족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드러나는 표징’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자매님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서울근처까지만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서울로 가야하기에 자매님을 모시고 운전을 했습니다. 자매님은 개포동 성당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저는 내비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내비는 자꾸만 서쪽을 향해서 안내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니 저는 급한 마음에 개포동성당으로 찍지 않고 개봉동 성당으로 찍었던 것입니다. 개포동 성당으로 내비를 조정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니 바로 옆에서 하는 자매님의 이야기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매님을 개포동 성당에 모셔다 드리고, 명동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주 좋았습니다. 음악도 들을 수 있었고,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 숨은그림찾기라는 것을 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신문에 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에는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안에는 또 다른 그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찾았던 그림들은 ‘주걱, 신발, 곰방대, 복주머니’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으면 보물을 찾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다른 방향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공, 명에, 권력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지혜라는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 나눔, 봉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름답고,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경쟁과 승리를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퇴근길에 아내를 위해서 장미꽃을 사가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자녀들,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여보! 사랑해 우리가족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오늘도 힘내세요!’라는 편지를 넣어 주는 아내는 각박한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그림을 볼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현 인류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현대인의 근원지는 아프리카 대륙이었으며, 어느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 조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여성에게 '아프리카 이브'라는 애칭을 붙여주었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다르든지 간에, 유전자 조사를 통해 인류 가계도를 추적한 결과, 지구상의 인류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작은 호모 사피엔스 집단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70억 현대의 인류는 모두 한 가족임을 과학은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과학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사랑 받는 가족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망망대해의 우주에서 지구는 작은 점보다 작습니다. 그 작은 점보다 작은 지구에서 70억 명이 모여 있는 것은 먼지보다 작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을 가르고, 피부와 종교로 가르고, 신념과 계층으로 가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르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우리는 편을 갈라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어리석음을 보여 왔습니다.
사제로 지내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불쌍하고 가난해서 도와주신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가는 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같았기 때문에 도와주신 것입니다. 꾸루실료를 함께하신 동기 분들은 23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만나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교포 신자 분들이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차량도 마련해 주셨고, 한국 음식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는 정말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행복했고, 즐거웠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제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안 도현님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는 거라네
해야 할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 것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군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예수님의 참가족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강론 제목은 복음의 소제목인 ‘예수님의 참가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둘러선 사람들처럼, 주님의 제대를 중심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지칭하며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화답송 시편 첫구절을 보는 순간 꼭 작년 이맘때쯤의 산티아고 순례체험이 생각났습니다. 마치 평생 효험의 영적 보약같은 순례체험이었습니다. 두분 형제들과 함께 셋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어 떠난 순례였습니다. 한 형제는 개인사정으로 10일정도 동행했고 한 형제는 50일간 순례여정내내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자며 동고동락했습니다. 이보다 가까웠던 형제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아, 산티아고 순례는 끝나지 않았구나. 죽을 때까지 계속이구나!’ 하는 새벽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대로 하루하루 살며 걸었기에 가능했던 산티아고 순례여정이었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바로 이 시편 말씀이 순례여정에서 활력의 원천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만든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초미니 성무일도의 3시경 시편121장 1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초미니 성무일도는 이미 순례준비때부터 일행과 함께 바쳤고 산티아고 순례중에도 꼭 바쳤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 순례일행은 움직이는 초미니 수도원이자 교회였습니다. 매일 순례목적지에 도달하여 우선 한 일은 알베르게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새벽 강론 쓸 장소와 미사드릴 장소를 물색해 두는 일이었습니다. 날마다 제대도 바뀌었습니다. 때로는 산 정상의 휴게소가, 응접실이, 안내실이, 식당이, 방이, 제대가 되어 미사가 봉헌됐습니다. 새삼 세상 어디나 하느님 계신 거룩한 제대이자 성지임을 깨달았습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4시까지 헤드랜턴 불빛을 이용해 아이패드에 강론을 써서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렸고, 이어 친지들에게 카톡으로 성지 사진을 복음 선포 차원에서 발송하며 소통했습니다. 아침 5시에 미사와 기도를 함께 드리고 짧게 아침식사를 한 후, 출전하는 군인처럼 6시 헤드랜턴에 불을 켜고 출발하여 걷다가 동이틀 때 쯤 멈춰 3시경 시편을 바쳤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정말 은혜로운 시편구절입니다. 순례동안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끊임없는 기도로 바쳤던 성구였습니다. 주님의 집을 상징하는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성전에 가까울수록 더욱 힘이 솟았고 발걸음도 가볍고 빨랐습니다. 정말 산티아고 순례여정 내내 하느님을 중심한 삶이 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기에 축복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이러저런 산티아고 순례여정의 묵상이 오늘 말씀의 이해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기나긴 유배역시 제가 보기엔 하느님이 특별히 의도한 회개와 정화를 위한 보속의 순례기간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다리우스 임금의 배려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배자들이 맨먼저 하느님의 집을 건립했고,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습니다. 돌아 온 유배자들은 파스카 축제를 지냈고, 자신들을 정결하게 한 후 파스카 제물을 잡고 먹습니다. 그대로 성전에서의 파스카 잔치 미사를 연상케 합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이라면 이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 공감할 것입니다. 제 1년여의 순례여정중 어디에 가든 우리의 하느님 계신 성전이 있었기에 고향집에 머물 듯 편안했습니다. 바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우리의 참고향이요 개인은 물론 공동체 삶의 중심이 됩니다. 말 그대로 수도자들에게 하느님을 중심한 삶을 이루어 주는 결정적 ‘하느님의 일’이 이 거룩한 성전에서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흡사 제대의 주님을 중심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우리들 같습니다. 그대로 교회의 참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혈연가족을 넘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형제들로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하여 고향집을 찾듯이,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의 하느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을 찾아 미사를 봉헌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직설적 표현이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믿음이다.”
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 가족은 얼마나 많은지요. 혈연가족이 하느님 믿음으로 리모델링 되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될 때 돈의 마력도 무력화 될 것입니다. 하여 날로 붕괴되고 파괴되는 가정공동체에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가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작금의 추세입니다. 분명 결손가정아이들은 물론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역시 장차 큰 사회문제를 야기 시킬 것입니다. 아니 이미 지금 학교에서 사회에서 군대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인 교회의 사명이 참으로 갈수록 클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함으로 당신의 참가족인 파스카 공동체를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 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혈연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시 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을 보면 출가함으로써 새 가족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억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 13절 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혈연관계에 집착하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한 신부님께서 누드촌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모두가 다 벗고 있을 터인데 나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시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신부님은 모두가 다 옷을 벗었는데 혼자만 옷을 입는 것도 어색할 뿐더러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지? 걱정을 했답니다.
누드촌에서도 역시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드회원이 아닌 신부님을 초대해 놓고 모두 벗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지 않는가? 결국 누드 촌 회원들은 모두 옷을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 라고 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합니다.@@@
더 큰 사랑
-주원준-
대의를 실천하는 삶에 진력하다가, 정작 자신의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예언자들은 물론이고, 신약성경의 세례자 요한과 사도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안중근 토마스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도 그러했고, 현재도 인권운동가나 평화운동가들 가운데 가족을 살뜰히 보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아마 예수님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어머니와 식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군중에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가족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 사랑을 부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가정의 가치를 낮추어 보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모님과 형제들과 군중들에게 참가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큰 하느님의 사랑, 보편적 차원으로 눈을 들라고 말입니다.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문화가 깊은 우리나라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함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내 자식과 내 가족의 안녕만을 추구하는 가족이기주의를 뛰어넘어,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 보편적 인류애의 실천에 눈떠야 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더 큰 사랑’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우리 신앙의 어머님
-박윤식-
왜 살며 지금의 삶은? 가끔은 이런 질문을 떫게 여기면서 그 답변을 피하려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암튼 이 물음에 어떤 형태로든 답은 있어야 삶이 분명해질 게다.
그 답변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족이 있다. 배우자와 자녀, 부모 형제 때문에 산단다. 그렇다.
가족이라는 인연만큼 소중한 건 이 세상에 없다.
그들과의 관계를 기쁨으로 만드는 게 삶에서는 정말 중요할 게다.
그 관계가 엉망이라면 ‘주님의 개입’을 간절히 청해야만 하리라.
가족 간의 일치는 주님의 은총 없이는 정녕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얼핏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 가족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이기에 많은 이가 의아하게 생각할 게다. 그러나 이의 초점은 그분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멀리하셨다는 것이 아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새로운 가족, 형제로 삼으셨다는 데에 있으리라.
본당 사제의 가족이 본당 구역 안에 살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게다.
사제가 가족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당 사목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신자들보다 가족에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신자들에 대한 보편적 사랑에 장애가 되리라.
본인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신자들은 바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가족이 아닌 일반 신자라 하더라도 특정 이들하고만 특별히 만나거나 환대하다 보면 다른 신자들이 불편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임을.
예수님은 열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
축제가 끝나고 사흘이 되어서야 당신을 찾으신 부모님께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며 부모님을 쾌나 섭섭히 해 드린 적이 있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혈육의 정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걸 이미 소시 적부터 예고하신 거다.
예수님은 그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신다.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 싶어 찾아왔으나 그분께서는 성모님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냉정히 말씀하신다.
아들 예수님의 이런 반응에 우리 성모님은 그 옛날 그 섭섭했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셨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작은 가족 대신 한없이 큰 가족을 품으셨다.
이렇게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영적 관계가 중요할 게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가족을 떠나는 것은 더 큰 사랑을 위해서,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사랑을 위해서, 더 많은 이를 형제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요한 제자에게 맡겨 드리면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외아들을 잃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먼저 떠나는 불효자가 아닌, 어머니 마리아를 육정을 넘어서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모자의 혈육에만 매달려서 그 큰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곳 모두에게 성모님의 관계는 육정에 매인 게 아닌 하느님과의 큰 뜻을 이루려는 관계임을 분명히 보인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해타산에만 젖는 안타까운 가족 관계를 주님 말씀으로 다져지는 찐한 혈육의 참 가족으로 거듭나야만 할 게다.
복음적 대조사회의 참 가족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 속에 생존하려다 보니 주변의 환경과 사람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혈연, 학연, 지연 등에 의존하면서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습(習)에 젖어 살아가지요. 이 익숙함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보고 경험해보지도 못한 세계에 자신을 던진다는 건 큰 모험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익숙함과 습(習)이 하느님의 창조와 기쁨의 새 공동체에 들어가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7년까지 나자렛에서 장인(匠人)으로 사시다가 세례를 받으신 다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향하여 매정하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하고 말씀하십니다. 왜 말씀에 충실했던 어머니에게까지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의아해집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자신을 맡겨 드렸습니다(루카 1,38). 그녀는 자기 아들에 관한 모든 말씀을 깊이 되새겼고(2,19), 그 말씀을 엘리사벳에게 전해줌으로써 그 말씀은 풍요로워져 ‘마리아의 노래’(1,46-55)로 흘러넘쳤습니다. 그녀는 말씀에 굳게 의지하여 인내로써 결실을 맺었습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 따르면 예수님과 성모님, 형제들 사이의 관계는 소원했고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분의 처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지요(마르 3,21). 몰이해 속에 예수님의 가혹한 말씀을 들었던 가족들이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그분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념하고 있던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사도 1,1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하느님 안에서 형성된 영적인 관계가 혈연관계보다 더 우선하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었던 구약의 친족법을 완전히 뒤엎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의 실행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생활을 생각하지 말고(마태 19,12), 당신보다 가족을 앞세우지도 말며(마태 10,37), 아버지 장례에도 참석하지 말고(마태 8,21-22),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하러 가지도 말라고 하셨지요(루카 9,61-62). 제자들은 그런 요구를 따라(마르 10,28-30) 예수님을 중심으로 영적 가족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의 참된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느님 안의 새로운 영적 가족의 일원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잘해주는 이들과의 관계, 나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 혈연관계를 더 중요시하며 하느님을 뒷자리로 내치고 헛되이 시간을 보냈던 순간들이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또 말씀을 듣기보다는 내 생각과 주장을 먼저 말하느라 정신을 팔고, 수 없는 말을 쏟아내면서도 실행에는 더딘 영적 굼뜸에 대해서도 가슴을 치는 오늘입니다. 영적으로 맺어진 가족이 육신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 거룩하며(성 암브로시우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이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가족이라(대 바실리우스)는 말씀을 깊이 새기길 희망합니다. 주님! 익숙하고 편한 관계 속에 안주하려는 마음에 새로운 영을 불어넣어주소서! 아멘.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내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분들이 계시나요?
사실 요즘은 어머니와 친 형제들은 자주 만나기 힘들지요.
저도 어머니를 한두달에 한번 뵐까말까 하고 형제들은 몇개월에 한번 볼 정도입니다.
마음은 안 그런데 삶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지금 나와 가까이 있는 어머니 같은 분, 누님 같은 분, 형님 같은 분, 동생같은 이들에게 잘 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바로 실제적으로 나와 더 깊은 친교를 맺고 살도록 하느님께서 엮어주신 새로운 가족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멀리 떨어진 부모형제들을 자주 못찾아 봐서 불효막급하다 괴로워하지 말고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새로운 가족들을 잘 섬깁시다.
그렇게 하면 내 어머니 형제들도 그 주위에 있는 이웃들이 나보다 더 잘 섬기고 모시지 않겠어요!
신앙인은 이렇게 모든 사람, 특히 내 주위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이 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가족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른지요!
오늘 내 주위의 이웃들을 최선을 다해 섬김으로써 내 부모형제들에게 효성을 다하는 멋진 날 꾸미소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만
머물지말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하느님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혈육사이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갈망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는
하느님 방식을
따르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자주 듣게 될 때
우리는 소유와 집착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어떤 이유나 변명으로도
막아설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장시켜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것이 우리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게합니다.
신앙인의 기본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기쁨에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이끌 수 있도록
맡겨드립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
-이장규 수녀님-
오늘 복음 속의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문밖에 세워둔 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냉정하게 느껴집니다. 이 행위와 말씀으로 예수님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신 걸까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말은 특정한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 어떤 신분 또는 특권을 가진 이를 통칭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의문이 좀 풀립니다.
수도원에 입회한 후 저한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깊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날마다 좋은 강론 말씀을 듣고 성경 묵상을 하고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에 성체조배를 할 수 있도록 배려받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미사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배우고 싶지만 시간을 낼 수 없어 말씀에 목말라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저는 수도자라는 신분 때문에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십 년의 수도생활이 내 신앙의 깊이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후회할 때, 천 년쯤 살 것같이 작은 것에 집착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 그렇습니다.
오늘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밖에 세워놓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축복받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신분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가신 길을 기쁘게 따라오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수님의 참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행가기 전에 꼭 해야 할 것은 여행 가방을 챙기는 것이지요. 여행 가방을 어떻게 챙기는 데에 따라 여행에서 고생을 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 가방을 쌀 때, 이곳도 필요할 것 같고 또 저것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방의 부피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정작 가지고 가야 할 짐을 넣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후회하고 말지요. 따라서 어떻게 가방의 짐을 싸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가방의 짐을 가방 한 가득 채워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행지에 가면 구입해야 할 것들이 꼭 생기거든요. 따라서 여행지에서 구입할 것들을 채울 가방의 빈 여백도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여행 가방을 생각하다보니 우리가 장차 하느님 나라에 갈 때에도 이러한 가방을 싸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한 가방, 그래서 정말로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챙겨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물에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자리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필요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도 그 가방에 빈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채울 수 있는 여백, 그래야 먼 훗날 기쁘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챙기고 있는 가방의 내용물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쓸모없는 것들이 많아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챙길 수 없게 된다면, 모든 짐을 다 꺼내놓고 다시 짐을 싸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특히 그 안에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면 더욱 더 하루빨리 짐을 다시 풀고 다시 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로 짐을 다시 싸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정보다도, 심지어는 가족보다도 가장 중요한 짐은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에 군중들을 가리키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의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의 기준으로 싸는 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싸는 짐이 가득할 때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을 다시 싸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를 위해 내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십시오. 내게 정말, 정말,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 내게 필요 없는 이 한 가지를 과감하게 버려보십시오. 나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그 한 가지에서 해방될 때, 참으로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스승이다.(앤드류 매튜스)
행복한 인부(‘앰블러’ 중에서)
1924년, 영국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러셀이 중국 사천성을 방문했다. 그는 인부들이 드는 의자를 타고 어메이 산에 올랐다. 험한 산길을 오르는 그들의 옷이 금세 땀으로 젖었다. 러셀은 인부들이 더운 날씨에 산에 오르는 자신의 일행을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 중턱에 도착할 즈음 잠시 쉬어 가자고 했다.
러셀은 의자에서 내려 인부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재미있게 이야기할 뿐 더운 날씨나 고된 일을 원망하지 않았다. 러셀은 깨달았다.
자신이 있는 곳이 행복의 땅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지금의 내 자리는 어떻습니까? 내 마음에 따라 행복의 땅으로 들어갈 수도, 그 행복의 나라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루카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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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머니 마리아의 관점에서 묵상해보고 싶다.
아들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예사롭지 않다.
아들이 무리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닌다고 한다.
상종해서는 안 될 창녀들과 매국노인 세리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마귀의 힘을 빌어 요술을 부리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모두 하나같이 밥벌이도 제대로 하는 이들이 없다 한다.
더욱이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자들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대중들 앞에서 떠들어댄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다.
물론, 아들 예수를 몸에 가질 때부터 커가는 과정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크게 쓰실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신앙으로 아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들리는 험한 소문에 어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또 간직해도 편치 못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가까운 친척들, 특히 아들 예수의 사촌 형제들이 찾아와서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직접 한 번 찾아가서 예수를 끌고 오던지 아니면 상황이라도 파악하자고 한다.
결국, 아들의 사촌 형제들과 집을 나선다.
몇 날을 발걸음 재촉하여 아들 예수가 있다는 곳에 다다른다.
소문대로 아들이 머물고 있다는 집 문전에는 군중들로 꽉 차있었다.
아낙네로서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아들 예수에게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전한다. (루카8,21)
아들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설렌다.
잠시 후, 담장 안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아들의 음성이 귀에 들어온 순간, 어머니 마리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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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삶에서 죽음까지의 여정을 바라보아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분명 기쁨과 슬픔과 혼돈과 확신, 고통과 희망이 순서 없이 교차하는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포기하지 않은 선택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자식들에게 옳음을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그 옳음 때문에 어떤 역경이 찾아온다고 해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 복음의 전후 상황은 알 수 없다. 어머니 마리아가 왜 아들을 찾아왔는지에 대해서 복음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떠오르는 느낌만을 옮겨보았을 뿐이다.)
음미하고 되새김질해야할 예수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의나 강론을 위해 사람들 앞에 설 때 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의 한계입니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말에 뒤따르는 진정성, 실효성, 육화된 말, 삶에 녹아든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멋들어진 말이라 할지라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에 부족합니다. 때로 많은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진정으로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인격,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어부 베드로와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세리 마태오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사이의 만남은 또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예수님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인간을 향해 펼치는 예수님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는 진실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해 던지는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심오한 의미로 충만했고, 동시에 힘과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 예수님 말씀에 힘입어 사람들은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새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던지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냥 흘려버릴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말이나 소가 곡물을 천천치 씹고 또 씹고 거기다 되새김질하듯이 천천히 음미해야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정녕 보물처럼 대하고 음미하고 또 음미할 때 그 말씀은 우리 내면 깊숙한 영혼에 와 닿을 것입니다.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깊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제 태도를 돌아봅니다. ‘쇠귀에 경 읽기’란 말처럼 건성건성 듣습니다. 많은 경우 형식적이고 의무적입니다. 소극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데 있어서 진실한 마음, 성의 있는 태도,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하는 사람들은 삶이 통째로 바뀌는 은총, 삶이 크게 한 단계 성장하는 은총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진지하게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표면적으로 꽤 의아하고 특별한 예수님의 말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어김없이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저것 보세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찾아왔는데도 나가서 인사도 않는군요.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인류 구원 사업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기본이 먼저 되어 있어야지요. 기본이!”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정성껏, 진지하고 성의 있게 귀담아 들은 사람은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기도 하지만 인류 전체를 구원해야 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에게 극진한 효심을 표해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명을 안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이나 이스라엘만 구원하실 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셔야 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새로운 주인, 새로운 왕으로 모신 우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가족들입니다. 피를 나눈 혈연도 중요하지만 영혼과 사랑을 나눈 영적 가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 "남자는 제 부모를 떠나"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무석 교수는 자신의 책 ‘30년만의 휴식’(231-232)에서 자신이 썼던 논문 주제인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분석해 놓았습니다.
고흐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을 시작해서 서른일곱 살에 자살하기까지 불과 10년 동안 850여 점의 창조적인 미술 작품을 그린 천재화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불행했고 정신이상으로 귀를 자르더니 2년 후에는 가슴에 권총을 쏘고 자살했습니다. 이 교수는 고흐의 이런 삶 이면에는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고흐는 엄격한 칼빈주의 목사인 아버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엄격함에 고흐는 죄책감을 많이 느꼈고 그것을 씻기 위해서는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지나친 연민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거 누예넨의 광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불쌍한 광부들을 위해 자기 빵과 매트리스까지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는 늙은 창녀와 그녀의 딸을 먹여 살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고 그들의 거친 손을 예찬했습니다. 이런 동정심은 바로 아버지에게 짓눌려 고통 받아온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약한 자들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 것이므로 죗값을 치르는 속죄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그림은 극적으로 발전했고, 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색채도 화려해 졌습니다. 아마 그를 괴롭히던 엄한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남을 비난하고 폭발적으로 화를 자주 냈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아주 안 좋았다고 합니다. 보통은 미워하는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는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는 이상 자신도 결혼하여 아내에게 폭력을 행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귀를 자르던 날 밤도 동거하던 고갱과 싸운 끝에 귀를 잘라 고갱의 단골 창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생겨난 분노와 죄책감, 자학성과 보복의 마음에 순종한 것뿐인 것입니다.
고흐를 도와 준 사람은 그와 네 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 매매업자였는데 고흐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 결혼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업도 잘 되지 않아 수입도 시원치 않게 되어 형이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자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서? 죄책감 때문에? 외로워서? 그건 본인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때까지도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귀를 잘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생에게까지 부담이 되어버린 자신을 그렇게라도 혼내고 벌줘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저는 사제가 될 때 이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했고, 이번 추석에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아들을 보고 싶어 성당에 찾아오시기도 하고 또 아들을 자주 보고 싶어 하지만 가끔은 ‘신자가 먼저냐 어머니가 먼저냐’를 놓고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차피 사제가 된 이상 신자를 우선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저를 낳으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저를 사제로 만들어 신자들을 돌보라는 궁극적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가 되려거든 부모나, 아내, 형제, 친구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시고, 또 과부가 된 불쌍한 어머니를 떠나지 않으시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머리요 신랑으로서 교회와 하나 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이상하지만 마마보이는 한 여자와 온전한 혼인생활을 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인은 더 넓은 세계로 향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에게 사랑을 주고, 혹은 상처도 주었던 부모를 떠나야만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고 그 영향 하에 있다 보면 고흐처럼 누구와도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영원한 아이로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형제가 결혼했는데 결국 며느리가 시어머니 등살에 견디지 못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이 복음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외면하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사실 당신을 믿는 이들을 제쳐놓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러 나가셨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외면하는 듯한 오늘 복음은 30이 넘어 아버지로부터 받은 공적인 소명을 위해 세상에 나온 성인으로서 제 부모를 떠나 교회와 한 몸을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누가 예수님께 알리자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고, 그들은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만 가족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 가족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만' 내 가족이고,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가족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사상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가족답게) 말씀을 듣고 실행하여라."가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족이지만 말씀을 듣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가정에서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교회' 라는 말은 '보편적인 교회' 라는 뜻입니다.
'가톨릭교회 - 보편적인 교회' 라는 말은 민족, 인종, 남녀, 신분, 계급, 이념, 직업 등에 따른 차별이 전혀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의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보편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자격 제한 같은 것은 일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라고 가르칠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입니다.
이 말은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인데, '인간 세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홍익인간 사상은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나라'가 건국이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어떤 차별도 없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지...?)
또 우리에게는 '사해동포주의 사상'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동포이고 한 가족이기 때문에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오직 사랑만 해야 하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홍익인간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적대시하고...
인종이 다르다고 싫어하고...
이런 이유로 멀리하고, 저런 이유로 무시하고...
강론을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강의를 하든지 간에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표현은 정말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위험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특정 전염병 환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병을 앓았던(또는 앓고 있는) 사람이 다른 신자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고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서 그 강론이나 설교를 듣고 있다면?
'그들'이라는 표현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을 '우리'가 아닌 '그들'로 밀어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런 일이 자주 생깁니다.)
(교회에서 만든 신문이나 서적의 묵상글들에서 그런 표현을 자주 보는데, '그들을 제외한 우리'만 읽는 것으로 착각해서 그런 글을 쓰는 것일까?
왜 '우리만의 울타리'를 쳐놓고 형제를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가?
모든 사람이 다 '우리' 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런 일은 많은 경우에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평소에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대단히 비가톨릭적입니다.
신앙인은 항상 모든 사람이 다 '우리' 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한 분이시고, '우리'는 그냥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나라이고, 그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해서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그들'이라고 구분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그들'이 따로 있으면 안 됩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은 가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 하는 '본분'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우리가 집에 있어도, 집을 나가도, 집에 돌아와도 우리는 아버지께서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엄마를 부탁해
-박기석 신부님-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에필로그 ‘장미묵주’에는 다시 그 시작을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다.”라고 합니다. 엄마를 잃은 지 일주일에서 구 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엄마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엄마가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장미묵주를 산 주인공 ‘너’는 성 베드로 성당 안에서 피에타 상을 봅니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단아한 모습에 꼼짝없이 얼어버린 주인공 ‘너’는 “어미 됨을 부정당하고도 아들의 주검에 무릎을 내준 여인”을 통해 엄마를 생각하지요. 그리고 성모님께 하고 싶은 말로 소설을 마무리합니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성모님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부탁합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다.”(요한 19,27) 오늘 복음에서 아들로부터 어미 됨을 부정당하신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 그 아들의 죽음 앞에서야 다시 어미 됨을 인정받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결코 예수님으로부터 어미 됨을 부정당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아드님으로 잉태하신 그 순간부터 이미 취하셨던 것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오히려 성모님께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 우리를 부탁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를 잊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더 끈끈하게 묶어놓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묵주기도를 한 번 더 바치고 싶습니다.
먼저 저의 축일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특별한 축하 행사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시고 또 많은 선물도 받았답니다. 아마 부족한 제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와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제가 받은 선물 중에서 정말로 감동받은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어린이 미사 전이었습니다. 한 꼬마 아이가 제게 다가오더니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영명축일이시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신부님께 선물을 드리려고요.”
그러면서 어떤 종이 딱지 하나를 줍니다. 그런데 그 폼에서 정말로 아끼고 있는 것을 주는 것임이 느껴졌습니다. 즉, 이 아이는 자신에게 있어 제일 소중한 피카추 딱지를 축일을 맞이한 저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지요. 사실 저는 이 딱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딱지를 구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문방구도 가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과 딱지놀이를 해서 이 피카추 딱지를 얻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전혀 필요하지도 또한 관심도 없는 딱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딱지를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선물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피카추 딱지는 물질적인 선물이 아닌 아이의 큰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선물인 피카추 딱지 한 장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드리는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기도와 선행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기도와 선행이 주님께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기도 한 번 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겠지요. 내가 착한 일 했다고 주님께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기도와 선행이라는 우리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단순히 인간적인 혈연 지연으로 얽혀있는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묶여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사랑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 진정한 사랑을 선물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 차고 남는 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앞서 그 꼬마처럼 자기에게 있어 첫 번째의 것도 주님께라면 봉헌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사랑을 주님께 봉헌하는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은 너 자신을 근사하게 보이려는 싸구려 방법이다.(앨렌 애펠)
부끄러운 모정
-이난호-
1987년 12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부정 투표로 얼룩졌다. 사태는 ‘구로구청 점거’로 이어졌고 그 진압과정에서 내 아들과 동갑인 이 군이 구청 옥상에서 추락, 허리뼈가 으스러졌다.
바로 전해, 내가 처음 본 그는 해맑은 웃음 때문인지 대학 2학년인데도 소년 같았다. 그때 이 군의 어머니는 얼마 전 최전방에서 생을 마감한 이 군의 형에 대해 묵상했다. 비리가 만연하던 시절 그의 집안은 이른바 최고위층과 선이 닿을 만해서 큰아들은 편한 군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본인이 이 검은 묘수를 단호히 거부하고 수순에 따라 배치된 곳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 그 올곧은 아들에게 묘수를 부리려 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정을 고백하는 이 군의 어머니가 내 눈엔 초인이었다.
그리고 일 년 뒤, 이 군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아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이 몸과 마음 바쳐 구현하려 했던 것들은 얼마쯤 당겨졌을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셨다. 실행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말씀’은 그 실행으로만 비로소 ‘말씀’일 수 있다는 진리를 나는 수없이 듣고 읽고 묵상하며 끄덕였다. 그러나 그뿐, 나는 데모대에 끼어드는 내 아들에게 제발 앞장서지 말고 어물어물하다가 꽁무니 빼라고 줄기차게 주문하면서도 가책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남의 집 아이들이 내 아이 대신 희생되기를 추호도 바라지 않았다. 그랬지만 나는 이 군의 휠체어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님, 이 군의 저 맑은 웃음을 지켜주소서. 그가 희망했던 걸 기억하소서. 그리고 용서하소서.” 내내 이 군의 미소를 피해 눈길을 다른 데 두고 속으로 성호만 긋고 또 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단순한 인간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교회가 창조되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 예루살렘이 성령님 안에서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이 모든 창조사업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신랑으로서 신부인 교회와 혼인을 하리라는 예언이 창세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 2,24)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와 혼인하게 될 신랑인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는 내용까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한 몸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 인간의 육체를 취함으로써 세상에 오시기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냐?”며 어머니를 떠나십니다. 이는 이미 예고 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에서 예수님은 삼 일 동안 당신을 찾아 헤매던 요셉과 마리아께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시며 미래에 교회에 혼인하기 위해 당신들을 떠나셔야 할 것을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정말 부모에게 매이면 참으로 아내와 혼인하여 한 몸이 될 수 없듯이 저도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참다운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걸림돌이 된 것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유일하게 대학에 다니고 있는 저에 대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지라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못 꺼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약주를 드시고 기분이 좋으실 때 방에 들어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매우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시다가 새벽에 저를 깨우시더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허락하지 않으셔도 제 뜻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라는 말씀처럼 가족의 뜻이 하느님의 뜻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만이 제가 사제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저의 사제직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이후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말하기를, 제가 보좌신부로 있는 성당에 오셔서 사무실에서 저의 어머니라 하시며, “삼용이, 여기서 말썽 안 피워요?”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신부님인데 말썽 안 피우냐는 어머니의 말씀에 신자 분들이 웃으셨다고 합니다.
위신을 너무 세울 필요도 없지만 이렇게 위신이 일부러 깎일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저는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제가 있는 성당에 오시지 말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사제가 되면 이제 신자들의 목자가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어머니가 성당으로 저를 찾아오시면 마마보이가 되는 것도 같고 신자들 보기에도 좀 그러니 성당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제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내려갈게요.”
어머니도 이 말씀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사제관에 있는데 핸드폰이 왔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당에 저를 보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쯤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앞으로도 낫겠다싶어 전화로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고 다시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찾아오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참으로 사제가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려 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하느님을 뜻을 따르기 위함이지 부모님이 정말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더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가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하셨지만 이것은 성모님을 업신여기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모님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실 때 아버지의 뜻에 “Yes!”하신 것은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의 고통까지 다 받겠다는 의미로 Yes를 하신 것처럼, 성모님의 Yes도 처음부터 구속자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의미로 Yes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Yes, "Fiat!"은 예수님 다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가장 완전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셔도 성모님은 기분이 상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이 없으니 당신만큼 어머니 될 자격을 지닌 사람도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혈육관계는 하느님을 앎으로써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그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이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으로서 교회와 혼인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났지만 마지막엔 교회를 아버지와 어머니 집에 데려와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하여 신부를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와 살게 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남이 결코 영원한 이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욱 행복한 가정을 위한 일시적인 떠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시적인 이별은 더 풍요로운 가족을 위한 것이니 오히려 부모님께 참으로 효도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했으니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부모를 더 공경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교회에 나가 당신들을 조금은 떠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자녀들을 놓아 주어야합니다. 결국엔 꼭 껴안으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효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때가 많다.
-강성덕 목사 -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늘 나자렛에서 생활하던 예수님이 공적 복음전도의 일을 시작하신 뒤로 그렇게 자주 가족을 만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온 가족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복음 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바쁘셨다. 복음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으며, 그리고 힘든 여행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어떤 사람이 가족이 온 것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사도직은 모든 인간이 본연의 하느님 자녀의 모습, 곧 한 가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이 그리운 가족을 상봉하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때가 많다. 내 지역사회, 내 종교, 내 나라, 내 민족이라는 장벽 안에 우리를 가두는 때가 많다. 예수께는 아무 장벽이 없었다. 예수님은 죄인들, 이방인들,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셨다. 그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하신 것이다.
한 아이를 위탁받아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 아이가 이 아이의 보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친동생을 챙기는 것보다 더 열성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남다른 기쁨에 잠긴다. 우리 장벽 뒤에 있는 이를 내 가족으로, 다같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웃으로 받든다면 복음 정신에 좀더 일치할 수 있지 않을까?
-최경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짤막한 세가지 교훈의 말씀을 연결없이 모아놓은 단절어 집성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부터 25절에는 이 내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세가지 단절어를 설명해 봅니다.
먼저 이 말씀들의 상황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신 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명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첫번째 말씀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은 그릇으로 가리워지거나 침상 밑에 들어가 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듯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도 드러내야 할 것이며 때가 되면 밝히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은 당분간 사람들에게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환히 밝혀질 것입니다. 이로써 등불이 예수님이라면 등불을 올려 놓는 등경은 십자가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등불이신 주님을 환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야 합니다.
두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나라 정치가들, 공무원들과 재벌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격언이 동서고금에 널리 퍼져있듯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은 드러나지 않을 비밀은 없습니다. 지금 숨은 행적도 장차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서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다 알려지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야 만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전파를 독촉하고 격려하기 위해 다른 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26-27; 루카 12,2-3)고요.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 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어서는 부족합니다. 명백히 드러나게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달란트와 금화의 비유 등으로써 복음서에 여러번 나오는 말씀입니다.(마태 25,29; 루카 19,26 참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리는데에 잘 활용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 큰 일을 하며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도 있고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격언도 있듯이 현재 영적인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에 더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금 가진 것마저 종말에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연 사람은 더욱 더 그 신비를 잘 깨닫고, 마음을 닫은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가지 단절어를 통해 예수님의 교훈을 알아듣도록 합시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은 감추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리는 신자일수록 영적으로 부유해지고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론 왕이 된 첫해(기원전 538년)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예레 29,10)하신 대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다.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나라를 맡기셨고,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맡기셨다고 선언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에게도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예물을 가져가도록 지원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였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왕위에 오른 즉시 페르시아 제국을 통합하였고, 기원전 539년에는 바빌론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다음 해인 기원전 538년에 칙령을 내려 유다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유화정책을 폈고, 그들의 성전이나 제단 등을 복구시켜 주곤 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락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그가 진정 야훼하느님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깨닫고 섬겼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음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바빌론 제국의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남은 유대인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전을 지을 자원을 제공하도록 했다. 당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물을 주는 것은 고대 근동지방의 관습이었다. 상대의 물건이나 사람을 잘못 가진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속죄 예물(1사무 6,1-3)을 피해자에게 주었던 것이다(출애 12,35-36).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바빌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관습을 지키도록 주관하셨으며(출애 12,36), 이 예물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 각지에서 흩어져 살면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갖은 고난과 역경을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들은 언젠가 주님께서 불러주실 그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로마 5,3-4)는 말씀처럼 그들은 고통을 인내로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희망을 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포로가 되도록 하신 까닭은 그들을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거듭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했고,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느님만을 섬기게 되었고,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백성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때가 이르자 이방인인 고레스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당신 백성으로 하여금 새롭게 태어나 당신을 섬기도록 인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섭리 안에서 그처럼 당신 백성을 이끄신 것이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가 힘들게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 듣고 계신다. 다만 당신 섭리 안에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실 따름이다. 우리에게 적합한 때에 맞추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역경이나 환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가족
-최혜영 수녀님-
요즘처럼 가족해체 현상이 심각한 때에 예수님께서 혈연가족의 경계를 넘어 신앙가족을 이루어가시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는 대안가족의 역할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고 봅니다. 캐나다로 이주한 초등학교 1학년 여자어린이의 작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가족의 비전을 봅니다. 교회와 가족 간의 연대를 통해 좀 더 건강한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가족 모델을 만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의 엄마나 아빠가 아니어도 돼요. 당신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도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고아도 고아들로 만들어진 가족을 가지고 있어요. 가족 중에서 하나는 피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더 있을 수도 있죠.
그 가족은 그냥 많은 가족 중에서 한 가지예요. … 한 사람하고 같이 산다고 해서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가족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어요. 어떤 가족들은 당신이 태어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누군지 상관 없어요. 가족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가족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가족은 모든 사람들한테 있어요. 그래서 당신도 있어야 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한테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누가 나의 가족인가?
-김덕진-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주고 30년 동안 길러준 어머니를 외면하고, 대신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모든 이를 자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씀하신다. 아직도 유교적 가족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기 딱 좋은 행동이다.
우리가 ‘가족’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흔히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인자하게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들과 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의 그림이다. ‘화목한 가정’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 모습이 가족의 기준이고 올바른 모습인 것처럼 인식되는 일은 영 불편하다. 이혼이나 사별로 부모 한쪽만 있는 가정이 우리 주위에 매우 흔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기르는 비혼부모 가정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 아이를 공개 입양하여 기르는 가정도, 함께 사는 한 부모가 재혼해 ‘피’가 섞이지 않은 부모나 형제 자매들과 살아가는 가정도 있다. 사회가 많이 변화했지만 ‘정상 가정’의 범주를 벗어난 가정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그러한 가정, 가족관계도 아무런 불편 없이 존중받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독하게 고집하는 혈통주의나 가부장적 구조를 깨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예수님이 풀어 나가시던 방식으로 따라 배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을 지키고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가족하고만 살 수 없는 것이 사회이기에 가정의 테두리를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식들에게 먹이고 입히기 위해 해왔던 일들을 세상을 위해서도 한번 시작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과 형제 되기
- 유영일 신부님-
우리는 합리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런 사고는 처녀가 애를 배어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자기 합리화의 구실은 다 있기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평소에 잘해 주다가도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걸리면 부모자식이건 부부사이건 소용이 없고, 법을 위반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법대로 처리합니다.
반면에 수천 년 동안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혈연, 지연에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는, 공동체란 울타리가 있어서 좋긴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고 감정에 치우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감정이나 파벌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교포사목을 하면서 이 두 사회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나를 기초로 한 이성의 차가운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인간미가 살아있는 공동체 사회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성이든 감성이든 그것이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개인 이기주의냐 집단 이기주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혈육인 어머니와 형제를 무시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정을 함께 언급한 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정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사랑에 바탕을 둔 공정으로 보완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될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6,63에서"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육이 없는 생명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생명을 주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고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신 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앞날에 대해 암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형제로 들어 높이십니다. 인간의 지위가 종에서 친구로, 그리고 형제로 상승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됨으로써 신적인 위치로까지 들어 높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코러스의 감동>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난 2004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 ‘코러스’를 혹시 보셨나요? 함께 본 형제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수작(秀作)이다’, ‘왕감동이었다’, ‘꼭 우리들 영화’라며 좋아들 하더군요.
성장통을 겪고 있는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 문제성 많은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신 선생님들께서도 꼭 한번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학교가 영화의 무대입니다.
다들 날개 다친 참새같이 불쌍한 아이들뿐입니다. 토요일마다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는 전쟁고아 페피노,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썽을 일으키는 모항주, 돌아갈 곳 없이 쓸쓸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의 학교에 미완성의 악보를 든 마티유가 사감선생으로 부임해옵니다.
기숙학교는 군대가 따로 없습니다. 안 그래도 부모사랑을 못 받아 삐쩍 마른 아이들을 교장은 병사 다루듯이 다룹니다. 잘못한 아이들에게 용서란 없습니다. 밥 먹듯이 아이들을 독방에 가둡니다.
마티유 선생은 출세지향적인 교장, 아이들을 위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는 교장, 그래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교장에 온 몸으로 맞섭니다.
마티유 선생은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팽개쳤던 악보를 다시 손에 듭니다. 합창단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구’를 만들어줍니다.
주인공인 사감선생 배역을 너무 잘 골랐더군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선생님, 머리가 시원하게 벗어졌지만, 그로 인해 더욱 편안한 분위기, 대머리라는 아이들의 놀림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옥 같은 분위기의 기숙학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음울한 학교에 마티유 선생은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통해서, 연민과 측은지심을 통해서.
잘못한 아이들에게 만회할 기회를 줍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들 편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음울하던 아이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게 만듭니다.
마티유 선생 한명의 헌신으로 인해 어두웠던 학교 전체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역시 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과 희망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결국 아이들 때문에 학교를 쫓겨나는 마티유 선생, 그러나 교장 선생의 지시로 인해 아이들은 작별인사도 배웅도 못합니다.
어쩔 수 없었던 아이들은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써서 떠나가는 마티유 선생 뒤로 날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코러스’를 창공으로 날려 보냅니다.
오다가다 만난 아이들이지만 혈육 이상의 정으로 대하는 마티유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다 큰 사랑, 보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은 모든 아이들을 내 친 자식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참 사랑은 모든 노인들을 내 어버이로 변화시킵니다. 참 사랑은 모든 가슴 아픈 사람들을 내 가족, 내 혈육으로 바꿉니다.
예수님과 형제 자매되는 법
- 이기양 신부님-
예수님이 효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불효자이셨던 것 같습니다. 출생부터도 부모의 뜻은 전혀 개입이 안 되고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나 부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소년 시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며칠씩 찾아 헤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장가를 가서 부모를 모신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모보다 먼저 죽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은 불효 중의 불효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효자였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쫓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
이렇게 냉랭하고 섭섭하게만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불효자이셨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가정이라는 차원에서는 가장 효자이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부모 곁을 떠났고, 생업까지도 뒤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쫓아오라고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떠나온 집과 가족이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있는 고향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그것을 잘 알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예수님께서 효자였는지, 불효자였는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 이렇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제인 제가 효자이겠습니까? 불효자식이겠습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봐서는 그렇게 효자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옆에서 잘 모시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원의를 채워드리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불효자인가 하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다 집에 가면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치가 높고 또 많은 부분을 제일 먼저 저와 상의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신뢰하고 의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사목자로 있으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맨날 집에만 가 있으면 그것이 바른 효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저로서는 가장 큰 효도일 것입니다.
저도 이럴진대 예수님은 효자 그 이상인 분이시지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며 요셉 성인 역시 천사의 알림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순응하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성가정의 가족들은 효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식에 대한 존경심을 당연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위해서 이 모든 인간적인 인연을 끊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장 자랑스러운 분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은 섭섭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와 형제들이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는 말씀은 과거의 말씀만이 아니라 사목자인 제 안에서도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형제가 몇 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형제보다도 신자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목자로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목위원들이나 구역장, 반장 또는 단체장들이나 주일학교 교사 등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분들과는 저의 육적인 형제 자매보다 오히려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성당 초등부 교사들은 모두 어머니 교사들입니다. 행사 후 수고했다고 1박 2일로 단합대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한 지 15~2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남편 없이 밖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가는 것이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믿음이 있기에 남편이 보내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한 형제 자매임을 체험할 수 있었던 단합대회였지요.
예수님의 형제 자매 또 본당 사제의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해 나갈 때 새로운 형제자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봉사 직분에 더욱 성실히 임하고 항상 겸손된 자세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형제 자매이십니까?
하느님과 함께 하는 가족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만남의 하나의 장벽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찾아온 예수님의 가족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던 예수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들 사이에 자리하여
가족들의 귀한 만남을 방해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야속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나야 한다.
만나게 해 드려야 한다.
혈연을 가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해야만 한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 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의 외침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을, 예수님의 가족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 이 마음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때, 인간적인 것은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장벽이라고 생각했던 그 것
예수님께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
예수님께는 방해꾼이 아니라 한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테두리를 뛰어넘어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을 어머니와 형제로 받아들이셨을 뿐입니다.
복음은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적인 것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혈연 관계만을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를 제약하는 모든 인습적인 관계,
지연, 학연, 계층, 계급.....이 모두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폐쇄적이고 분파적인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의 기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이라는 기준으로 맺어지는 인간 관계는
다른 모든 인간적인 기준에 따른 관계에 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관계들을 완성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관념적이 아닌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정의 실현 과정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이 교회입니다.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부과된 여러가지 인간적인 제약을 깨뜨려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여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이혼할까요? 말까요?
-노우진 신부님-
결혼 생활을 15년 가까이 해온 40초반의 엄마와 6개월 정도 1주일에 두세번씩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이 처음에 나를 찾아왔을 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었다.
대화내내 눈물을 흘리며
"이혼할까요? 말까요?와 자살할까요? 말까요?"였다.
사실 그분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혼하고 싶지 않고, 자살하고 싶지 않기에 나를 찾아왔으리라.
그래서 긴기간 동안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이젠 가끔 전화를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물론 지금 그분은 이혼도 하지 않으셨고 자살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내가 그분께 어떤 일을 행해서라는 말은 아니다.
그분이 이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 생활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외도 등도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15년 넘게 남편과 살아오면서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생활을 끌고 온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해결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기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쌓여온 슬픔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엄마처럼 감정적이 차원만을 생각하기가 쉬운 것같다.
또한 사랑이라는 것이 늘 내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곁에 있으면 가슴 설레이고, 상대가 나의 어려움, 슬픔을 함께해주고, 나의 실수를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것이라고 이해가기가 쉬운 것같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바라는 그런 사랑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사랑의 차원, 즉 상대가 자유롭도록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어린 아이처럼 상대에게 바라기만 하기에 상대를 자유롭도록 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나무뿌리가 되는 것이고, 상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 이라고 말했나보다.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서로에대한 구속력을 갖는 의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자유로이 자신의 방식대로 훨훨 날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의미로 말이다.
이런 사랑의 두가지 차원을 모두 실현하려 애쓸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와있는 대로 주변 사람들, 즉 사랑을 실천하려 애쓰는 모든 사람들을 나의 부모,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온 몸이 마구 쑤십니다. 아마도 어제 일을 특별히 더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네요. 사실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 오늘 제3회 순교자 현양 대회가 열리거든요. 따라서 그 준비를 위해서 어제는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혀있고, 자고 일어난 지금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쑤시네요.
평소에 저는 스스로 일을 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례객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제 방 청소는 잘 하지 않지만 성지 청소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예초기로 풀을 베는 것은 물론, 각종 삽질에 곡괭이질까지 안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따라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성지에서 열린다고 해도 제가 준비할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요? 왜 이렇게 부족한 부분이 많던 지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현양대회 준비를 위해서 일을 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많이 반성하게 되었지요. 평소에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해야 할 일보다는 스스로의 만족을 느끼는 일만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만약 이렇게 미진한 부분들을 평소에 조금씩 고쳐나갔더라면, 지금처럼 현양대회 준비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요. 중요한 일은 제쳐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편한 일만을 하려 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구분을 지으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던 경우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이 구분을 짓나요? 내 편, 네 편.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그러한 구분으로 인해서 정작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사랑을 전혀 실천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한정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직접 말을 합니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즉, 어머니와 형제는 특별하다고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과 예수님의 가족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분리시키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엮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구분을 짓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면서 한정짓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지금 구분 짓고, 한정짓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까지도 구분 지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분해서 차별하지 맙시다.
"안에" 머물러야...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범주에 넣어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시는 내용이다. 복음의 같은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도 보도하고 있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그런데 이 병행대목들의 배치(配置)가 루가복음과는 다르다. 마르코복음은 이 대목을 전하기에 앞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3,21)고 함으로써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예수가 미쳤다는 말은 예수께서 혹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마태 12,24; 마르 3,22)
루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범주에 넣기 위해서 루가가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보도한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가 "하느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11절)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되는 것이다.(15.18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서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므로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과의 가족관계는 이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가족관계는 혈통이나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점을 나자렛에서 온 예수의 형제들은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성모님은 예외이다. 성모님은 벌써부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자렛의 형제들은 예수를 만나보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찍이 예수를 눈으로 보았으나(4,20), 예수의 실체를 보지 못한(4,22-23) 사람들이 아니던가?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밖에"(20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신다. 보려는 사람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참 가족>(루가 8,19-21)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등불을 켠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오늘 복음은 바로 말씀을 정성껏 듣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까지 변화될 수 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족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만일 예수님이 혈연관계로 맺은 이들을 당신의 가족이 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가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연 관계만으로는 안되고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우리가 에수님의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찾는 열성과 원의"가 있어야 한다. 루가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사용한 동사는 "찾다."와"보다."라는 동사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은 갈망과 원의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원의가 있는가? 모든 영성은 이 원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원의는 점 점 더 깊어지고 성숙되어 예수님의 가족으로 될 때까지 성숙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은 흡족하리니."(마태5,6)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배고픔과 목마름만이 우리를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하고 예수님을 찾게 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복음 묵상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이는 복음 묵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신앙인이라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만이 예수님의 가족으로까지 승화 될 수 있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분들과의 형제 자매들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의 어머니요 형제들로 바뀌어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의 위치는 밖에 서 있었다.
밖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늘 밖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더 깊이 더 가까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밖에 서 있는 자세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하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말씀을 잉태하고 말씀을 낳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성모님이시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낳으신 분이 아니시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천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을 낳으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을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때 형제가 될 수 있다. 즉 같은 일을 하는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형제는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라 다 같이 하느님의 생명을 낳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가 6,35)가 되어 모두 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두 번째는 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행은 항상 들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에서 이루워 진다. 그렇기 때문에 루가는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고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우리가 말씀을 잘 들으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아서"(18절)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까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종한 것이다.
한 마디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8절)는 말씀으로 시작한 8장의 결론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성모님이시다. 루가가 제시한 마리아의 모습을 요약해보면
첫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첫 번째 자세를 말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걸음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1,45)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임을 선언하고 그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받아들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받아들인 말씀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가꾸고 노력하고 돌봄으로서 말씀이 점차적으로 꽃이 피도록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세 번째.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20) 아이를 잉태한 엄마는 태아의 양육을 위해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항상 그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작업" 즉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네 번째.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2,51) 성모님의 마음에는 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고 빛을 받는다. 즉 좋은 땅이다. 즉 마리아의 삶은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의 차를 얻어 타고 어딘가를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부주의로 다른 차와 부딪힐 뻔한 것입니다. 정말로 간발의 차이로 사고를 모면했지요. 그 차의 운전사도 크게 놀랐는지 쫓아와서 창문을 내리고 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신부님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점잖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차 운전수는 그 정도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겠는지 계속해서 옆으로 차를 붙으면서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부님만의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 역시 차선을 바꿔 들어오려는 신부님 차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런 위험 상황이 찾아온 것이니까요.
이제는 계속해서 욕을 해대는 운전수에 대해 저 역시 짜증이 나고 화가 나더군요. 그런데 그 순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허어, 저 친구가 나를 최고로 여기나봐. 자기 갈 길도 가지 않고 계속해서 내게 뭐라고 말하고 있잖아.”
순간 제 기분도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긴 굳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필요가 없지요. 차의 창문만 올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으니까요. 괜히 불편한 마음을 만들 필요 없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 마음을 밝게 만드는 것, 이 순간에 가장 필요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피한다고 해도 어느 곳에선가 또 만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잘 될 거야.’라는 희망입니다. 희망을 간직한 태도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커다란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희망을 우리에게 늘 주십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누구나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만이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주님의 울타리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 곧 주님 안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아닌 세상의 것들에만 희망을 두려고 합니다. 그 세상의 것, 물질적인 것들만 채우려고 애를 쓰지요.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희망을 얻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금세 절망에 빠지고 좌절해서 쓰러지고 말게 됩니다.
희망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 더욱 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있다(데스카).
무엇이 옳을까요?
제 친구 중에 융통성이 없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항상 원리 원칙을 내세우는 친구이지요. 그래서 늘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 친구가 거의 이기고 또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이 친구를 포함해서 몇몇 친구들이 유럽을 함께 여행 갔다가 어느 중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 저녁이었고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식사를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자리를 찾아 이곳 중국식당을 찾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한참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는데 한 친구의 입에서 철수세미 조각이 나온 것입니다. 기분이 나빴지만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냥 식사를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융통성 없이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친구가 앞에 나서서 화를 내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식사를 그만하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또한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서 배고픈 토요일 저녁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참 피곤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냥 종업원을 불러서 당신들이 실수했으니 빨리 새로운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왜 지배인을 부르고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요?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원리원칙일까요? 아니면 무조건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일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친구도 또한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친구도 역시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이든 상관없이 다른 이를 부정하고 거부할 때, 주님의 사랑은 희미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모든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셨던 주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넓은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기 위해.....
주님의 형제, 주님의 전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저와 순례중인 박이냐시오는 주님안에서 형제요 전사입니다. 서로가 '주님의 형제'요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렇게 남은 기간까지 무려 50여일을 어느 육친의 형제도 함께 미사하고, 기도하고, 먹고, 자고, 걷고, 대화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은 당신 말씀을 들으며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들을 향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냐시오와 저 역시 현재 온전히 주님 중심의 삶을 살기에 주님의 형제됨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오늘은 순례35일차가 됩니다. 어제의 순례과정에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틀아이카스텔라에서 이곳 살리아 알베르게까지 24.3km, 아침6시부터 오후1시까지 1회 쉬고 꼬박 7시간을 걸었으니 실제로는 24.3km를 훨씬 넘을 거라 생각됩니다. 서로가 생각해도 정말 잘 걸었습니다.
"형제님의 병과를 수송에서 보병으로 바꿔야 되겠습니다."
형제님의 논산 군번으로 하면 저보다 한참 빠릅니다. 재미있는 것이 40여년 지난 지금도 군번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며 저의 논산 군번은 12092299입니다.
"신부님은 더 잘 걸으십니다."
"저는 논산훈련소 28연대에 근무할 때, 연대 구보선수로 뛴적이 있습니다. 당시 병사들은 측정에 합격해야 진급도 하고 휴가도 가는데 측정에 사격과 구보는 기본이었습니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또 끊임없이 스틱대신 주님의 스틱인 묵주를 잡고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흡사 둘의 모습이 고지를 점령하며 나가는 보병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곳한곳 도착할 때마다 찍은 도장의 순례자 카드가 흡사 훈장처럼 생각되었습니다.
" 이제 몇곳의 고지 점령만 남았습니다. 장군들은 전쟁중에 승리하여, 결국은 사람을 많이 죽여 훈장이지만 우리의 훈장은 그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이 순례자 카드를 훈장으로 여겨 가슴에 달면 가득 찰 것입니다. 가보로 보관해도 될 것입니다."
도장 가득 찍힌 순례자 카드가 마치 빛나는 훈장들로 가득한 느낌이었습니다. 어제 순례여정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이곳 살리아까지는 산실을 통해 가는 18km, 지름길 코스와 사모스를 통해 가는 볼 것 많은 24.3km, 긴 코스 둘이었습니다. 전날 긴코스를 가기로 합의했고 출발했지만 출발하다보니 산실코스로 접어들었고 여러 사람이 이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해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짧은 코스를 가자 했지만 형제는 긴코스를 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형제님이 앞장서 인도하십시오."
후에 저의 분별과 결단, 실행에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하여 한참가다 되돌아와 다시 사모스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끝없이 난 도로였고, 팻말에는 살리아까지 20km라 씌어 있었습니다.
"이대로 도로따라 가다보면 살리아에 도착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도중에 빠져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도로만 계속되다가 마침내 1시간쯤 걸려 이정표와 더불어 샛길이 나타났고 장장 5시간 걸리는 오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다니지 않았던 길처럼 썩은 나무가 길 한복판에 있었고 나뭇잎들도 그대로 였습니다. 스페인 도착후 많은 새소리를 듣기는 처음입니다.
어둔 아침, 인적없는, 나무 우거진, 흡사 동굴같은 길을, 또 강물을 옆에 끼고 오솔길을, 숲길을, 계곡길을 한없이 걸었습니다. 분명 거의 다니지 않은 순례길임에 분명했지만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길은 처음입니다. 무려 5시간을 걸었지만 전혀 피곤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리 한국 농촌처럼 폐가가 된 집들도 많았고 문닫은 동네 성당들도 많았습니다. 성당 옆 마당의 공동묘지도 잡풀로 무성했습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성당이요 공동묘지였습니다. 걷는 도중 지천에 깔린 도토리들을 밟고 걸었습니다. 도토리 묵을 한다면 엄청난 양일 것입니다. 좌우간 5시간 걷는 동안 만난 순례자는 고작 셋이었고, 마지막 합류지점에서 쉽고 빠른 길을 택한 순례자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형제님, 어제의 불명예를 완전 회복했습니다. 오늘의 코스 아주 좋았습니다."
참으로 풍부한 체험의, 결코 잊지 못할 아름답고 신비로운 길이었습니다. 더불어 '둘의 신비'에 대해, 사람 인자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둘이었기에 이 길을 걸었지 혼자였더라면 애당초 포기했을 것입니다. '아, 혼자서는 사람이 될 수 없구나. 둘이 서로 보완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그래서 한자의 사람 인자구나.'하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졌습니다.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주님도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또 사람과 길에 대한 깊은 연관입니다. 길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이 길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더불어 인도, 도인이란 한자 뜻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순례여정중인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그대로 주님의 형제요 주님의 전사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주제도 길입니다. 오늘 순례길을 걸을 때마다 되뇌어야 할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진정 순례길에 충실한 이들은 주님 계명의 길을 좋아할 것이며, 다음 잠언의 말씀에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사람의 길이 제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 앞에서, 온갖 덧없는 환상을 벗어버리고, 정의롭고 공정한 인생순례여정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편애와 공정함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11년 2부 리그 팀이었던 사간도스 축구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고 현재는 1부 리그에서도 1위를 하게 만든 윤정환 감독이 해임했습니다. 사간도스 구단 주장은 윤정환 감독이 선수를 편애하는 탓에 나중에는 더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는 저는 ‘선수를 편애하는데 저렇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편애하면 팀이 갈라져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은 팀을 만들어 준 윤정환 감독은 선수를 편애한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그리고 합당하게 선수를 기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감독이 이끌던 2부 리그 팀이 1부 리그에서 우승을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공을 잘 차는 사람만 뛰게 하고 못 차는 사람은 벤치에 앉혀 놓는다고 불평을 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운동장에서 뛰고 싶다면 그만한 능력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애와 공정함의 차이는 정말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 가장 고민은 누구를 편애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현명했던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못해주었다는 것이랍니다. 모두에게 해 줄 수 없거든 누구에게도 해 주지 않을 때 오히려 편애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분열을 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새롭게 하는 강의들이 많아서 바쁘기도 하였고 4천 명이 넘는 신자들과 일일이 다 친분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자들과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봉사자들과는 자리를 함께 한 적이 많았습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 불평하시는 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공정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봉사하는 분과 하지 않는 분과 똑같이 대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불공정한 것은 아닐까요?
잠언은 참 지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정의와 공정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대해주는 것일까요? 잠언에서는 “하느님을 비웃는 자는 하느님도 그를 비웃는다” 혹은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하느님도 그가 부르짖을 때 귀를 막으신다”와 같은 식의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공정과 정의를 좋아하시는 하느님은 그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일률적으로 혹은 획일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정당하게 보상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한 이는 구원하고 악한 일을 한 이는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공정함이요 정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72제자를 택하셨고 그 가운데 12사도를 뽑으셨으며 그 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특별히 데리고 다니셨으며 그 셋 중에서도 베드로를 수장으로 뽑으셨습니다.
부활하셔서도 처음으로 수많은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고 당신을 사랑하는 순서대로 혹은 그 필요성에 따라 당신 부활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이라고 해서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여자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그 곳에 없었던 토마스에게는 8일이 지나서야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평함입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대해주는 것이 오히려 불공평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편애는 자신이 편애하는 기준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냥 예뻐서 좋아한다는 것은 편애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기준으로 판단해서도 예쁘게 보인다면 그것은 공정함입니다. 하느님은 이웃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 당신도 잘 해 주실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못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이요 정의입니다. 이 기준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편애와 공정함의 차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우리는 버린 자식 같아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편애를 해 달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면 나의 판단 기준이 모두에게 해당하는지를 먼저 살펴야만 합니다. 그래야 공정할 수 있습니다.
빠드레 삐오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이태리말로 ‘빠드레 삐오’(Padre Pio)라고 부르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경축합니다. 신부님은 50년 동안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몸에 지니고 사셨습니다. 그 상처에서 오는 통증도 십자가에서 주님이 받으셨던 것과 똑같이 실제로 밤낮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받으신 마음의 상처는 더 컸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과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기 위해서 비오 신부님은 내적 아픔을 인내하셨습니다.
하 느님의 말씀은 칼처럼, 못처럼, 가시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생각과 계획과 마음과는 다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우리 생각이 가는 길과는 하느님 말씀이 인도하시는 길은 어긋나기 십상입니다. 우리 몸은 핑게와 합리화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꾸 다른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되는 영예는 말씀을 전적으로 따를 때입니다. 예수님의 혈육들이 누리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이 기쁨은 주님이 친히 주시는 내적 평화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성 비오 신부님에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오는 상처를 당신처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루시’를 보았습니다. 영화의 주된 내용은 ‘뇌의 사용량’이었습니다. 우리의 뇌를 100% 다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영화는 상상하여 보여줍니다. 뇌의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자신을 통제하고, 타인을 통제하며, 물리법칙에서 자유로워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궁극의 과정에서 육체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시간은 영원하며 공간은 그 시간에 떠 나니는 알갱이와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감독 릭 베송은 ‘시간’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 생명, 문명, 역사, 신학은 시간이라는 밭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모든 시간을 이끄시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간이라는 밭을 넘어서 분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지런한 것과 조급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밥을 할 때 ‘뜸’이 들어야 하는데 배가 고프다고 자꾸만 뚜껑을 열어보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뜸’이 들 때 까지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비가 빨리 나오라고 밖에서 틈을 벌려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비가 나오기는 하지만 한쪽 날개가 없는 나비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나비는 일찍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부부가 큰 소리가 나는 것도 대부분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끝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데 나의 기준과 나의 생각으로 듣고, 중간에 나의 생각을 말하면 나중에는 왜 싸우는지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정의 문제가 되고, 감정의 문제가 되면 다툼은 더 커지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꾸준하게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인내를 가지고 여유 있게 하면 됩니다. 아기가 조금씩 말을 배우고, 걷게 되듯이 기도도 꾸준하게 하면 나의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충실하게 하면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가난한 이와 불쌍한 이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또한 나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나의 삶이 변화되는 것, 내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나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 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정답이라 깨달았습니다.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언제부턴가 연인들이 결혼해서까지 여자가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건 그 후부터 점점 이혼율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둘이 한 몸인데 사랑의 호칭이 오빠라면 여동생, 누이라는 건가요?
그런가하면 알건 모르건 사람들끼리 형님 언니 동생 그러는데 이건 또 뭐죠?
어떻든 가족이라는 걸 무엇보다 앞세우는 인간관계를 바라는 게 신기하네요.
왜 모두가 가족이길 바라는가에서 예수님 말씀이 정답이라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러 가지 교훈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조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 왔을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하여 있다가 다음 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한 국치의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이 때 한양에 거주하던 많은 부녀자들이 적군에게 정조를 잃고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많은 가정이 파탄되고 사회가 아주 어지러웠습니다.
그 후 나라가 평정이 된 다음 조정에서는 묘안을 한 가지 구안해 냈습니다. 그 묘안은 홍제동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에 부녀자들은 몸을 씻음으로 부끄러움이 없어진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녀자들은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였는데, 이런 사람들만 부정을 씻은 것으로 인정하고 그 부녀자들에게는 정조에 대하여 다시는 재론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는 우리 세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물이라는 물질이 우리 생명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일구이언하면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세례의 영적인 씻음의 상징이 되기도 하니 앞으로도 물을 얼마나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인지 잘 느끼게 해 줍니다.
노자는 사람의 으뜸이 되는 선은 물과 같이 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물은 세 가지 성질이 있는데, 첫째, 만물에게 생명을 주고, 둘째, 그 특유의 유연함으로 다투지 않으며, 셋째,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물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온유하게 따르는 물질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 잠언에서도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라고 하며, 임금으로 상징되는 의인은 물줄기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물은 가장 유연한 물질로서 자연의 섭리를 순순히 따르며 다른 것들도 그 섭리를 따르도록 돕습니다. 그 섭리란 모든 것이 바다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위와 산들은 그것을 거부하지만 당신 말을 잘 듣는 물을 이용해 비록 시간은 많이 소비될지라도 그것들도 아래로 아래로 흐르게 합니다. 물이 없다면 주님은 이 세상을 당신 품으로 이끄시기 매우 힘이 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누군가를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물처럼 자신을 온전히 주님의 섭리에 맡길 준비가 된 의인들만을 이용하셔서 당신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잠언에서는 물을 닮은 사람을 의인이라 하고 그와 반대되는 성격을 지닌 이들을 악인이라 말합니다. 물은 자신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가져다주지만 오늘 독서에서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웃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잠언은 또한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옥상 한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물줄기와 상관없는 삶이 바로 다투는 삶이라 말합니다. 물론 물의 가장 커다란 덕은 아래로 흐르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입니다. 노자가 그리 보았듯이 잠언이 그리 이야기하듯이 물을 묵상하고 물의 성격을 닮는다면 우리는 주님 손 안에 있는 물줄기로서 마지막 때에 주님으로부터 ‘임금’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임금은 크고 강해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물줄기처럼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사람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웠던 미국 군인들의 처참한 죽음을 당한 기록이 있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고 죽었는데 죽은 시체마다 입안에 모래가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 사막에서 문득 저 멀리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을 때에 사람들이 “물이다!”고함치며 물이 있는 쪽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야자수 나무가 있고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눈앞에 시냇물이 흘러가니 사람들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물을 마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신기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래를 물 인줄 알고 허겁지겁 마시다가 죽어간 것입니다.
아마 물처럼 주님의 뜻에 순응하며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하는 물줄기들이 끊긴 세상이 이런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오아시스 있는 사막으로 만드는 참다운 임금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