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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10월 4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10.04|조회수597 목록 댓글 0

제1독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였습니다.>

▥ 바룩서의 말씀입니다. 1,15ㄴ-22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6,14-18)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The Destruction of Sodom and Gomorrah


말씀의 초대

바빌론에 유배된 이들은,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다고 고백하며 참회 기도를 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고을들에게, 당신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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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룩 예언자는,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고을을 향해 불행하다고 선포하시며, 카파르나움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무겁고도 매섭습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불행을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려면 이 세 도시가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였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바빌론 임금의 생각을 적은 것에서 가져온 말씀인데,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이 하늘까지 올라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질 것을 꿈꾸다가 저승으로 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장소였고, 당신 구원 사업의 중심 장소로서 들어 높여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교만하고 완고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불행을 선고받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도록 이끄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승복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회개의 여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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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합리화할 수 있지만, 내 양심의 거울을 비추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온전히 자신의 부족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허물을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백성이 가진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아무리 큰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늘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금방 보이는 죄와 허물보다 더 큰 잘못은, 자신의 죄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고서도 그것을 덮어 버리고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도 바로 이러한 교만, 곧 하느님에 대한 교만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 심한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이 칼데아인들에게 점령당하여 불탄 지 5년이 지난 뒤 쓰인 바룩의 참회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고백하는 신앙인의 참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여 주는 성공과 화려함은 세상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진실함과 하늘 나라의 영광은, 비록 죄가 크고 허물이 많지만, 자신의 영혼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소박한 영혼에게 돌아갑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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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빼어난 외모의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하나 얻습니다. 그러고서는 ‘나의 미모는 영원하고, 그 대신 그림 속의 내가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의 자신의 모습이 흉측하게 변해 간 것입니다. 자신의 미모만 믿고 살아온 도리언 그레이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한탄합니다.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대가를 치렀다면 이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복음서 곳곳에서는 예수님께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무섭고 엄하신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준엄하게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돌처럼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깨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세 고을을 향해 불행하다고 한탄하시며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저주의 경고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서 ‘위로’만을 얻고자 합니다. 물론 때로는 진통제 같은 위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통제만 바라며 산다면, 도리언 그레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영적 건강을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치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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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시대의 신흥 도시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와 인접한 국경 도시로 사통팔달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에는 가나안 지역을 통괄하는 로마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더욱 번창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상주하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교 문화와 장사꾼들로 넘쳐 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들떠 있었고, 조용했던 시골엔 돈이 풍족해졌습니다. 미래는 온통 희망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기적도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맒苛求?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과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베푼 기적을 티로와 시돈에서 베풀었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기적 앞에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완고함을 ‘불행’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언제까지나 햇볕만 내리쪼이는 땅은 없습니다. 햇볕만 받으면 땅은 서서히 갈라지고 맙니다. 언제까지나 비바람만 맞는 땅도 없습니다. 바람의 땅도 언젠가는 숲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이 진리를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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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을 하는 듯 보이는 오토바이 몇 대가 곡예를 하듯 자동차 사이를 내달립니다. 교통이 복잡한 도시에서 오토바이 배달은 신속하게 물품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토바이 배달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그날의 할당 물품을 다 배달해야 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폐지가 잔뜩 실린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지만 아직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빵빵거리다가 그 리어카가 앞을 지나가자 신경질이 난 듯 가속 페달을 밟고 쌩하니 달려갑니다. 서울 제가 사는 지역의 풍경입니다.

경제 성장을 말하며 국민 소득 2만 달러를 이야기하지만 사회의 절대 빈곤층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빈곤에서 탈출하려고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은 사라지고 소외감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날마다 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정부패, 사기, 공갈, 협박, 도박, 자살, …….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 이렇다면 우리 사회의 내부는 어떻겠습니까? 거기에다가 경쟁 사회에서 사회적 패자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까지 합하면 우리 사회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혼돈과 어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어느 20대 청년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자신은 성장하면서 오로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으며, 한 번도 삶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영혼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불행한 세대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도시를 바라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바라보며 탄식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도시를 향해서도 똑같은 탄식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정말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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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참으로 뜻밖의 말씀입니다. 일찍이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실 때 그 고을에 의인 다섯 명만 있어도 진노를 거두겠다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그분의 자비를 청했던 것입니다. 자비의 주님께서 왜 불행을 언급하셨을까요? 

벳사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의 고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에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간택하기도 하셨습니다(요한 1,43 이하 참조). 사도들의 절반이 이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드러내시면서 소경을 고쳐 주기도 하셨습니다(마르 8,22 이하 참조).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곳도 바로 벳사이다였습니다(마르 6,30 이하 참조). 그만큼 이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무척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저주라기보다 예수님의 탄식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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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을 하는 듯 보이는 오토바이 몇 대가 곡예를 하듯 자동차 사이를 내달립니다. 교통이 복잡한 도시에서 오토바이 배달은 신속하게 물품을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토바이 배달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그날의 할당 물품을 다 배달해야 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폐지가 잔뜩 실린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지만 아직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빵빵거리다가 그 리어카가 앞을 지나가자 신경질이 난 듯 가속 페달을 밟고 쌩하니 달려갑니다. 서울 제가 사는 지역의 풍경입니다.

 경제 성장을 말하며 국민 소득 2만 달러를 이야기하지만 사회의 절대 빈곤층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빈곤에서 탈출하려고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은 사라지고 소외감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날마다 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정부패, 사기, 공갈, 협박, 도박, 자살, …….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 이렇다면 우리 사회의 내부는 어떻겠습니까? 거기에다가 경쟁 사회에서 사회적 패자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까지 합하면 우리 사회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혼돈과 어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어느 20대 청년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자신은 성장하면서 오로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으며, 한 번도 삶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영혼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불행한 세대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도시를 바라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바라보며 탄식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도시를 향해서도 똑같은 탄식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정말 두렵습니다.


평소에 존경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본당 사목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사랑도 많이 받으시지요. 그런데 어느 본당으로 이동을 하셨는데 부정적인 평가의 말들이 들리는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린다, 신부님께서 개인적인 욕심을 부린다, 기도하기보다는 행사 위주의 일을 한다 등의 말들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는 지금의 본당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이 본당으로 이동하신 뒤에 사람이 바뀐 것일까요? 어느 부분에서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자들과 신부님의 대치로 인해서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서 주님만 보고서 성당 나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나쁜 생각을 버리고 대신 좋은 생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 빠져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만들어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병원에서 식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형제님은 치료도 받지 않으면서 암으로 인한 죽음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서 쓰러졌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아쉽게도 그만 주님 곁으로 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병리학 조사 결과 암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조금 부풀어 오른 림프종 몇 개만 발견된 것으로 죽음까지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부정적인 마음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보여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향해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면 절대로 들을 수가 없겠지요. 듣지 못하는 이유만 계속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 안에서 함께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대화의 기술보다 더 값진 것은 경청의 기술이다(말콤 포브스).


괜찮다. 사랑한다.

어떤 형제님께서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식들을 향해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자녀들을 폭언과 폭언으로 길들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남을 고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을 고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서로가 함께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말이 아닐까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산책을 나갔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강아지를 만났습니다. 보아하니 족보와는 거리가 먼 강아지, 잡종 중에 잡종 강아지였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짖지도 않았습니다. 손만 내밀면 그저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손을 핥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주인 몰래 들고 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녀석이 그렇게 예뻤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녀석이 송아지나 코끼리 만해도 예뻐서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까요? 녀석이 그리도 예뻤던 이유는 작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분명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부담스러워하실 것입니다.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작은 사람, 겸손한 인간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의 한없는 겸손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칭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본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 ‘작고 가난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아래 있는 사람’, ‘죄인 중의 죄인’,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등으로 자신을 칭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을 판박이처럼 빼닮았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하려고 집도, 수도원도, 아무런 재산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덕을 유지하려고 사제직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도회 총장이 되었지만 갓 입회한 지원자에게도 순명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수도원 들어와서 참으로 멋진 선배 사제를 봤습니다. 당신께 들어오는 좋은 선물들은 모두 저처럼 ‘없어 보이는’ 후배들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십니다. 당신은 늘 노숙인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 선배가 인사발령이 나서 다른 소임지로 떠나실 때였습니다.


다들 수도원 마당에 모여서 인사를 드리는데, 깜짝 놀란 것이 이삿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짐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달랑 손가방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걸 손수 양손에 들고 대중교통으로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홀연히 떠나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아가셨던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귀감이 되어야 할 고위 성직자들은 제 몫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갖은 이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했습니다.


위풍당당한 대성전들과 수준 높은 예술작품 등으로 외관상 교회는 활짝 꽃피어났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암울한 시절,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모습, 가장 가난한 모습, 가장 겸손한 모습,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대중들 앞에 등장합니다. 지닌 것이라고는 지독한 고행과 극기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 하나뿐인 그가 부패일로를 걷고 있던 제도교회와의 정면대결을 펼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한 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서슴없이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외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까지만 우리가 잠시 빌린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를 보는 눈이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죄인이었을 때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졌지만, 회개하고 나서는 참 많은 이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우선 아버지가 그를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그가 갑자기 이상해져서 가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취했던 사람이 너무나 이상해져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많은 친구들이 나중에 그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그는 교황님께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당시 부유하기 그지없었던 교회분위기에서 거지로 살아가는 수도회를 세우겠다는 프란치스코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교황의 꿈을 통하여 프란치스코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구걸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많은 외면과 무시와 박해를 받아야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그의 제자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썼던 회칙은 너무나 엄격하여 그 제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에게 외면당해야 했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너무나 그리스도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도 받았습니다. 손과 발, 가슴의 다섯 상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다닌다는 표징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완전히 그리스도처럼 되어버리면 많은 이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재산을 다 뿌려버리고 극도의 극기생활을 하며 부자 교회를 비웃는 듯한 그의 삶은 지금 신앙인들에게도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태어나셔도 그렇게 외면당하실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신앙인이었어도 잘못된 신앙을 가졌음이 프란치스코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파견된 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파견하신 분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파견된 자는 파견하신 분을 품 안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지 않으면 지옥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파르나움, 벳사이다, 코라진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도시들이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는 무엇일까요? 그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눈이 곧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 눈을 가져야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는 가톨릭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래로 계속 복음을 전하고 그 받은 은총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베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교회를 파견 받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제들을 통하여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하셨을 리가 없다며 교회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같은 은총들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을 감소시킨 다른 종파들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어느 종파를 선택하느냐가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판결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당신 살과 피를 주시고 죄의 용서까지도 주실 수 있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는다면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곧 교회를 보는 눈입니다. 아니, 교회를 보는 눈이 그리스도를 보는 눈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올 때 여행 가방을 가지고 왔습니다. 책, 옷, 필기구, 제의, 신발을 가져왔습니다. 잘 챙겨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꼭 가져와야 할 건 놓고 왔고,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걸 가져왔습니다. 몇 년 지낼 동안의 물건이고, 정 아쉬우면 부탁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문득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옆 본당의 신부님이 강론 때 닭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전에 닭을 키울 때입니다. 닭 중에는 유난히 약하고, 병든 닭이 있습니다. 다른 닭은 활기차게 먹이를 찾고 움직이는데 병든 닭은 머리를 숙이고 졸고 있습니다. 그러면 힘이 강한 닭이 졸고 있는 닭의 머리를 쪼아댑니다. 그러면 약한 닭은 죽습니다. 병이 더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닭은 그렇게 죽습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닭의 선택입니다.” 닭만 그럴까요? 사람들의 공동체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왕따’가 있습니다. 왕따 당하는 학생은 악 하거나, 못된 게 아닙니다. 학생들 사이에 약하고, 지적으로 모자란 친구가 왕따를 당합니다.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생존게임이 자연스럽습니다. 승자독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돈도 실력이라는 말도 있었고, 땅콩이 비행기를 멈추기도 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장관의 능력과 자질을 묻는 청문회에서 딸의 성적, 학력이 쟁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기보다는 타인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익숙합니다. 인류는 최근까지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건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권력과 재물과 능력에 따른 새로운 계층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또 다른 삶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병들고 약한 닭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약한 닭을 위해서 병원을 만들고, 공동체가 힘을 다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밤을 새워서라도 찾는 착한 목자가 되라고 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큰아들이 되지 말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가 되라고 합니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자고 합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면 무엇을 가지고 싶으신지요? 나를 외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게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업적입니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서 유익할지 모르지만, 언제가 우리가 모두 가야 할 곳에는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얼 가져가야 할까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리가 가져가야 할 건 외적인 게 아닌 내적인 거라 합니다. 


어둠에 빛을 주는 마음, 의혹이 있을 때 믿음을 주는 마음, 절망이 있을 때 희망을 주는 마음,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마음,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는 마음,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곽승룡 비오 신부님

갈릴레아의 베사이다는 겐네사렛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빵 기적이 있던 곳(루카9,10)이고,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이다.(요한1,44;12,21) 코라진도 겐네사렛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 동네는 예수님을 자주 만나고 잘 알고 있는 곳이다.


한편 띠로와 시돈은 하느님의 심판에 걸려든 이방인 도시들이다.(아모1,9;예레25,22;이사23,1-11;에제26,2)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구약의 이 도시들도 메시아 기적의 증거가 있었다면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처럼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파르나움은 그러지 않았다.


예수님뿐 아니라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 등을 잘 알고 있던 고향 사람들은 구약의 이방 도시 사람들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훨씬 무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일흔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말은 나의 말이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안다는 사람들이 덜 감동적일까? 알기 때문에 마음이 무딜까? 오히려 반대이면 더 좋을 텐데...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에 많이 무딘 듯싶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말씀을 행동으로 믿었다. 그러면 생각이 경직되고 마음이 무딜 순간이 사라지게 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귀족 부호의 아들, 군인, 모험가, 세상을 즐기며 살아간 방랑자. 군인으로 출전, 중상, 장기치료 중, 아마도 그는 그렇게 젊음을 지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은 허전함, 무력감이 컷을 것이다. 이는 부자의 젊은이들이 갖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는 전쟁 중 입은 중상 때문에 병상생활을 길게 했다. 투병 내내 무력감에 시달리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병상 밖 지봉 위를 날고 있는 새들을 보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하루의 삶이 일용할 양식으로 족하고, 죄에서 벗어나면 자기도 하늘 창공을 훨훨 날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유혹에서 탈피하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하겠다고 다짐했으리라. 프란치스코는 이때부터 진정한 자유가 하느님께로부터 옴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서서히 물질에서 벗어났다. 그를 대표하는 모습들, 맨발의 사람,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 참다운 자유인,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갔다. 변신한 프란치스코는 그의 삶이 교회를 쇄신하고 개혁하기에 충분했다. 중세교회가 부에 결탁하고 교권이 속권까지 장악하고 부패했던 시절, 그리스도와 같아진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가난한 젊은이는 복음을 살려고 모여든 젊은이들과 수도회를 세웠다.


그가 부를 살며 방종과 방탕으로 즐기기를 좋아하고, 기쁨과 행복의 부족함을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그는 삶의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회귀하기 시작했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행복한 삶을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채워졌을 때, 이미 세기의 큰 성인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삶에 감동했다. 나도 신학생 시절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고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인을 오늘 또 다시 본받고 싶다.


혹자는 마르틴 루터가 교회 쇄신과 개혁을 주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나는 중세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주도하며 이루어 냈다고 말하고 싶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의 프란치스코 시성은 닫힌 교회를 열었으며 성령의 바람이 크게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세 고을,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바라보시고 탄식하시며, 당신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3대 고을이라고 할 수 있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많이 실망하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바라본 위의 세 고을의 경우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도 살지 않는 거의 폐허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사랑과 은총을 주시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좀처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힘만으로 살고 있는 듯 생각하며 감사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언제나 받아들이고 늘 감사드리는 것이 곧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생명을 얻고 존재하는 사람들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참 신앙인들은 눈뜬 하늘복덩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기적을 보고 싶고 기적 받고 싶어 하는 사람 만날 때마다 전 겁납니다.

기적을 보거나 받으면 하늘생각만 해야지 세상생각 했다간 벌 받습니다.

기적 받은 것은 영원행복 미리받는 건데 그 값은 세상생활로 갚아야죠.


첨단 기발한 로봇보다 더 귀한 인생을 받은 게 기적인데 뭘 더 바라요.

하느님께 받은 신기한 기적적 몸으로 하느님을 무시하다니 어이없지요.

이 몸의 신비한 모든 부위를 언제 내가 설계해서 만들었다 생각합니까.


이미 이 몸은 하늘 최초의 힘님의 소산인데 그걸 믿어야 정상이잖아요.

참 신앙인들은 눈뜬 하늘복덩이고 비신자들은 하늘 불구자들 같습니다.




이철구 요셉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루카10장 13-16)

여러분 돈 좋아하십니까?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돈이 좋다 하면 왠지 속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돈 없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호소합니다. 돈만 많으면 한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엔 효도의 기준마저 돈이 되어 가는 듯하여 씁쓸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다 여기며, 자식에게도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해지라고 무심코 내뱉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에는 나눔도 희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향해 던지셨던 “불행하여라”는 독설을 지금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존경받는 부자를 찾기 어려운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얼마나 가치 있게 돈을 써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돈은 누군가를 위해 선하게 쓸 때 진정 내 것이 되는 것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은 배척이 아니라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충실히 살아갑시다.

* 배척하는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삶 속에서 행복을! ​




'변화될 용기'(루카 10장 13~1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벌써 ᆢ 회개하였을것이다.'

고마움을 모르고 ~

기적을 입은 특혜도 모르고 버릇없이 행동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몹시 화나십니다.

괜히 해줬다 ~ 다른 사람 줄껄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은 더 이상 어떤 혜택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기회를 줄때, 배려할때 배은망덕한 행동 말고 바른 마음 바른 모습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회개하며 사는 모습이 예뻐서 더 많은 은총이주어집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모의 든든한 빽도 버리고 부유와 화려함을 버리고 가난을 부인삼아 부패한 세상에 맨발의 수사로 도전하여 주님 보시기에 흐뭇한 삶이었죠.

'회개는 변화될 용기를 발휘해야합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 16)

(And whoever despises me, despises him who sent me.)

김웅태 신부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182~1226) 성인은 중세의 교회가 영적으로 세속화되고 타락했을 때,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청빈의 정신으로 교회를 쇄신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란시스코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어서 처음에는 세속적으로 출세하려는 마음을 가졌지만, 아시시의 맞은편에 있는 페루지아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많은 보상금을 치루고 풀려나와 계속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가 중병에 걸렸는데, 이때 크게 깨달아 하느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부유한 가정의 상속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살려는 마음으로 부모님의 가정을 떠나서 하느님만을 믿고 살게 됩니다. 그의 거룩한 뜻에 동조한 형제들이 모이면서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를 세우고, 복음적 가난을 모토로 하는 수도회로 자리를 잡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러한 청빈의 영성은 그 당시 중세의 타락한 교회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중세 교회를 다시 일으킨 역할을 했다고 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할 때, 어느 무너져가는 교회, 즉 다미아노 성당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무너져가고 있는 내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환시로서, 당시 중세 교회가 권력과 세속적인 욕망으로 그 본래의 정신을 잃고 영적으로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복음적 가난의 정신으로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상징이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복음적 가난의 삶을 산 그 정신은 오늘날도 계속적으로 교회를 쇄신시키는 영적인 힘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념일을 맞아 우리도 복음적 가난의 영성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지향하고 하느님 안에서만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가난의 정신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의 삶은 어떠하다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회개의 일상화,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기도, 회개의 수행-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사랑을 받는 '만인의 연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생몰연대를 확인해 보니 만44세, 역시 치열히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얼마나 성덕이 출중했던지 선종후 2년만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셨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성인들의 공통점은 산 햇수와 상관없이 죽는 순간까지 참 치열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성인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라 일컫는 평화의 기도와 태양의 찬가는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여/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평화의 기도의 가사와 곡은 언제 들어도 감동이요 새롭고 공감이 갑니다. 참으로 복음적 기도입니다. 더구나 오늘과 같은 극도의 분열의 시대, 내전內戰을 연상케 하는 양극단으로 나뉘어진 우리의 비정상적 현실에는 더욱 절실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미칠 ‘광狂’의 시대같습니다. 이러다 보면 다 미칠 것 같습니다. 광란, 발광, 광분, 광기, 광신 등 참으로 미쳐가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역시 평화의 기도를 통해 모두가 평상심을 회복하고 분열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절박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날로 위태해가는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입니다. 이에 대해 성인의 태양의 찬가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며 자연 피조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태양의 찬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제 장례미사때 퇴장성가로 불러 달라 부탁드리고 싶은 성가입니다. 전문의 아름다움과 깊이는 참으로 탁월하지만 그 일부 요약과 같은 성가 역시 참 흡겹고 아름답습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저명 인사들의 프란치스코에 대한 찬사들입니다.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인도의 성자 간디의 말입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작가이자 성자 프란치스코 전기 소설을 쓴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스키스의 작품 서문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나에게 있어 성 프란치스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며,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것은 윤리나 진리 또는 아름다움보다도 더 지고한 차원의 것, 곧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이 맡기신 물질을 갈고 닦아 영혼으로 승화시키라는 본질의 의무일 것이다.”-


참으로 가장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은 성인으로, ‘살아있는 복음서’ 같은 성인으로 칭송받는 프란치스코입니다.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의 체험으로 인한 성인의 오상이 아닙니까? 오늘 본기도 역시 성인의 생애와 영성을 요약하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바로 성인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삶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하고 관상할 뿐 아니라 성인이 되라고 있는 성인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들인 성인들은 그대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오늘은 제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1988년 요셉 수도원에 부임해 축일을 지냈으니 올해 32번째 맞는 감사한 마음 가득한 축일이기도 합니다. 성 베네딕도 회 요셉수도원 소속의 프란치스코 수사이니 흡사 세 성인들, 요셉, 베네딕도, 프란치스코 세 분이 제 수호천사들이자 롤 모델 성인들이 된 셈이나 얼마나 부자인지요! 어제는 한 형제의 “큰 산이십니다!”라는 말에 아 정말 불암산 큰 산 같은 수도승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치스코는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들입니다. 어제 인용했던 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두 분들입니다.


-“밖으로는 베네딕도 산/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프란치스코 강/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성 프란치스코”-


정말 산같은 정주의 베네딕도 성인이라면 유연히 흐르는 강같은 신비가이자 시인이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가을철 같이 경쾌하고 아름다운 성 프란치스코라면 겨울철같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침묵의 산같은 성 베네딕도,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들입니다.


요즘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성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30년 이상 친분을 맺고 있는 한 부부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묵주기도 10단을 함께 바치고, 일어나면 부부가 사랑의 포옹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기에 성인성녀부부라 격찬했습니다. 정말 평생 부부인연에 충실하며 신의를 다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성인부부입니다. 사실 참으로 항구히 사랑하면 모두가 아름답게, 또 성인처럼 보일 것이고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답은 세가지 실천입니다. 1.끊임없는 말씀공부, 2.끊임없는 기도, 3.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이 세가지 수행에 충실하면 우리가 소원하는 바 성인이 됩니다. 우리 인간의 평생 적인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즉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이 세가지 말씀, 기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대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역시 저주가 아닌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기적이 의도하는 바도 회개인데 반응이 없는 무디어진 당대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성 프란치스코는 물론 성 바오로, 성 아오스팅, 성 이냐시오 등 모든 성인의 공통적 특징이 결정적 회심의 성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화답송 후렴은 말씀에 늘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언제나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 말씀에 마음 활짝 열고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발생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말씀 공부와 실천에 깨어 항구하라는 깨우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평생, 매일 렉시도 디비나의 수행이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를,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함을 봅니다.


이어 기도입니다. 바로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 바룩서는 바로 온통 ‘참회기도’입니다. 기도가 참 진솔하고 아름다워 일부를 인용합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대로 우리의 참회기도로 바쳐도 손색이 없는 공감이 가는 기도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 본질은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 무지와 광기에 대한 유일한 치유제도, 또 성인이 될 수 있는 길도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회개의 일상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절실한 평생과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함승수 신부님

깊은 정글 속을 탐험하던 한 남자가 우연히 다리를 다친 여우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통 어딘가를 다친 동물들은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해 삐쩍 마르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 여우는 비록 다리는 절뚝거렸지만 털에 윤기가 흐르고 살도 통통하게 올라 있었지요. 강한 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런 약점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비결이 궁금해진 남자는 숨어서 그 여우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호랑이가 커다란 사슴을 한 마리 입에 물고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한참을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먹던 호랑이는 실컷 먹고 배가 불렀는지 남은 고기를 그 자리에 내버려둔채 다른 곳으로 가 버렸지요. 그러자 다리를 다친 그 여우는 호랑이가 남긴 고기를 열심히 뜯어먹었습니다. 호랑이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나는 듯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작은 여우 한 마리도 먹여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크신 사랑에 깊이 탄복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런 작고 약한 짐승도 먹이시는 분인데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같은 사람이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을 하며 하느님께 소홀했던 내가 부끄럽구나. 남은 삶은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살아야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하던 일도 그만두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일 같은 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먹여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도 자신에게 먹으라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야위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져가던 중 문득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진리를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일랑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고을에 사는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등 많은 표징들을 보여주셨음에도 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과 세속적인 즐거움들에만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잘못된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드리려고 하지 않고, 그분께 받으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 속에서 ‘감사’는 사라지고 ‘욕심’만 남아 그 욕심을 채우고자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주님의 길’로부터는 멀어지게 된 것이지요.

받기만을 바라는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이타적’인 사람만이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복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소중한 삶, 기왕이면 ‘여우’보다는 ‘호랑이’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제병영 신부님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질타하신다. 왜 이들은 변화를 꺼려하는가?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모습에서 변화라는 것은 일어날 수 없지 않을까? 나 역시 이런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변화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그 두려움은 한꺼번에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기도 말미에 이런 생각이 들어온다. 지난 2년간의 나의 삶 속에서 분명히 변화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의 존재를 존중하며 함께 그 변화에 동참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나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그래 묵묵히 걸어가자 한꺼번에 존재자체가 변화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천천히 시간에 맞추어 걸어가자! 그것이 나의 시간이요 하느님의 시간일께다.

가을의 문턱에서 나뭇잎이 변하듯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듯 하느님의 시간에 순응하며 오늘을 살아보자!




<기적 같은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땅 공기 물 벗으로

나 있게 하심에 감사를

모두 있게 함으로써 감사를


한 들숨 한 날숨으로

살리심에 감사를

살림으로써 감사를


햇빛 달빛 별빛으로

어둠 밝히심에 감사를

어둠 밝힘으로써 감사를


선선한 바람 한 자락으로

품으심에 감사를

품음으로써 감사를


벗님들 환한 웃음으로

기쁨주심에 감사를

기쁨 줌으로써 감사를


아픔과 시련으로

정의롭게 하심에 감사를

정의로움으로써 감사를


일과 쉼으로

살맛나게 하심에 감사를

살맛 냄으로 감사를


섬김과 나눔으로

더불어 삶 주심에 감사를

더불어 삶으로써 감사를


육화와 성체와 십자가로

내어주심에 감사를

내어줌으로써 감사를


죽음과 부활과 영원한 삶으로

참으로 살게 하심에 감사를

참으로 삶으로써 감사를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루카,10/13-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성지에 살고 있다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거륵한 사람이 살고있어 장소가 빛나게 됩니다. 말이 거룩하다고 거룩해지지 않고 거룩한 실천이 있어야 거룩해집니다. 수도원이 있어 거룩한 땅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사는 수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기적이 일어나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없으면 거룩한 곳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까운 대마도가 풍성하고 해외 영해지로 각광을 받았으나 찾는 사람이 없어 황패해지고 모든 식당 호텔 상점이 황폐해 저기고 있어

3만명의 거주자들이 원성이 높이지고 있다고 합니다.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아무리 물자가 풍요롭고 가진 것이 많아도 그 나라에 사는 사람 관리자 다스리는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기적을 행하고 좋은 것이 머물고 있어도 하느미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물침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집을 화려하게 짖고 잘 꾸며도 그 안에 사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협력하지 않으면 상막하고 행복하지 못한 가정이됩니다.


수도원이 거룩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거룩하게 살아야 거룩한 곳이지 건물 때문에도 아니고 역사적 의미가 있어도 안입니다.

사람이 외모로 잘생기고 호감이가고 가진 것이 많아도 깨끗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인간 쓰레기취급을 받습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성인축일 인데 그분이 있어 쓰러져 가는 중세교회가 바로서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하느님에게로 인도되였습니다.

그분은 매사를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나게 하신 분이였습니다, 저는 믿는 사람이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 각 사람이 있는 곳이 거룩히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주 하느님의 축복와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 예수님만을 선택하여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느님으로서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을 선택하신 것처럼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를 선택한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궁핍한 이들과 마음과 힘을 모아 나누어 가난의 상황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가난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굶어죽지 않게는 할 수 있어도 잘 살 수 있게 할 수는 없다는 말처럼도 들립니다. 나누어 주어야 하는 양도 양이겠지만, 받는 사람의 자세도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그리고 오늘 복음 환호송의 싯구가 우리를 부릅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 7.8)


주 하느님은 지금 당장 우리 모두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팔아버리고 다 같이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책임지라고 하시지도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늘 가난한 이와 가난한 상황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순간에 다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벌써 주님의 권능으로 한 번에 다 해결하셨겠지요.

우리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이 가난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 계시고, 또 그런 상황에 우리를 계속 살게 하시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가난의 문제를 하루 아침에 제도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시는 것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소시민적인 생각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 개인인 우리에게 다가온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른 체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누면서 오늘을 살아가도록 허용하시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누다 보면, 주 하느님께서 나머지는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성 프란치스코의 소품집, 분도출판사, pp.107-113)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지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마리아의 태중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과 약점을 지닌 참다운 육체를 취하여 오시리라는 것을 거룩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셨지마는 지극히 복되신 당신 어머니와 같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축복받은 아드님, 영광을 받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위해 탄생케 하시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 그분의 고귀한 피의 희생 제물을 그분이 직접 바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난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되고 우리 모두가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육신으로 아드님을 받아 모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복음에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결한 마음과 정신으로 예배 드립시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 드리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그분에게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겠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지니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더러운 때에서 직접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애긍 시사를 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겨 둔 모든 것을 결국 잃고 맙니다. 그 대신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가서, 그 행실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롭거나” 현명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이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끝까지 항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이 임하실 것이며” 그것을 당신의 거처와 집으로 정하실 것이고, 그들은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아들이 될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 형제, 모친이 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말씀 내용은 다소 어둡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빌론 유배에 대한 바룩 예언서 저자의 참회 기도가 들려 오고,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탄식이 들려옵니다.


"불행하여라"(루카 10,13).

오늘의 대목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 기사에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런저런 지침들을 당부하시면서 혹여 받아들여지지 않을 상황을 염두에 두어 대응책까지 일러주신 바 있지요(루카 10,,10-12). 이 말씀에 긴장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도 어느 고을들에서 배척당하셨다는 걸 솔직히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한 고을의 이름들이 불리웁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안타깝게도 이 고을들은 예수님과 더 가깝고 친숙한 곳들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한탄과 탄식에 가까운 이 불행 선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무기력, 나아가 하느님의 무기력을 만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복음 내용 앞부분의 2인칭 "너희"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가리켰다면 뒷부분의 "너희"는 제자들을 향합니다. 용기를 주시려는 겁니다. 너희가 받는 환대는 내가 받는 것과 마찬가지고, 혹 너희가 배척을 받아도,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배척하는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움츠러들지도 말라고 격려하시지요.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이름과 존재를 새기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바룩 1,15).

하느님의 의로움과 그 앞에 선 우리의 부끄러움. 이는 벗어버릴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일 겁니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옴팍 쏟아부은 선택된 백성이라도 스스로 거부하고 배척하고 외면하면 도리가 없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거해서라도 당신 말씀을 듣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이 존중 역시 그분의 의로움이니까요.


바룩 예언서 저자는 유다의 패망과 바빌론 유배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라고 겸허히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고, 말씀을 듣지 않은 죄입니다. 심지어 이집트 탈출 때 이집트에 내리신 재앙과 저주가 이번에는 고스란히 이스라엘에 내린 것이라고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성찰합니다.


핑게 없는 무덤이 없다는 옛말처럼 모든 흥망성쇠에는 원인이 존재하지요.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닥쳐온 행, 불행의 실마리를 아프지만 정확히 성찰해낼 수 있다면 아무리 비참한 흑역사라도 디딤돌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각자의 삶을 "하느님의 의로움과 인간의 부끄러움"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돌이켜 봅시다. 예수님과 가까웠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처럼 각자 삶에 알알이 박힌 사랑의 기적들을 망각한 채 무심하고 미온적인 마음으로 회개를 마냥 미루고만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결국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제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당신께서 주신 것이고 당신이 이루신 일입니다. 반면 제 삶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실패는 제 탓입니다. 그러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 초기 하느님께서 자신의 길을 밝혀 주시기를 청하며 밤새 "하느님 의로우신 당신은 누구시며, 죄많은 저는 또 누구입니까?"를 되내며 기도하였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회개의 삶이었다고 유언에서 고백하지요. 또 자신이 시작한 수도회의 첫번째 명칭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답니다. 큰 회심은 큰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큰 회심과 큰 사랑으로 교회를 쇄신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하느님의 의로움과 우리의 부끄러움을 겸손되이 고백하는 큰 회심의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께 자비를 청해주십사 성인께 전구합시다.


"성 프란치스코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우상인가, 이상인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게 프란치스코는 우상이었다.

이상이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우상이었다.


이것이 사부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은 저의 소감입니다.

인간적으로 얘기하면 운명적인 만남이지만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그것이 성소였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수도원에 들어와 책도 아니고 선배들로부터 처음 얘기로 들은 프란치스코는 그야말로 저를 뿅 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저였지만 하느님은 너무 멀고 예수님은 너무 무거운데 비해 프란치스코는 인간미를 풀풀 풍기면서도 초월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뒤로 밀리고 프란치스코가 저의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저의 이상이 아니고 우상인 이유입니다.

우상이나 이상이나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존재라는 면에서는 같은데 추구하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집착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매이게 하며, 주님을 가리키고 따르게 하는 것이 이상이라면 우상은 하느님과 주님을 대신하고 가리는 것이 차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저를 집착케 하고 매이게 하고 주님을 가리는 존재가 프란치스코였기에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데 있어서 당연히 사달이 났지요.

하느님을 잃고 길을 잃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가야할 곳이고 예수님은 그 길인데 갈 곳도 일고 갈 길도 잃은 겁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되는 것이 돈 버는 것처럼 저의 성취, 욕심, 집착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제가 가야할 종착역이 아닙니다.

종착역은 하느님이고 프란치스코는 그리로 가는 길의 한 역일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차가 종착역을 향해 가면서 프란치스코라는 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우는데 저도 이 역에서 예수 기차에 올라탈 사람 중의 하나지요.


기차에 올라타고 기차가 떠나면 역도 떠나게 마련입니다.

불교 우화가 얘기하듯 강을 건너고 나면 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냥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였으니 너무도 고맙지만 아무리 고마워도 그 배를 계속 메고 다녀서는 안 되겠지요.


사실 프란치스코도 프란치스코라는 역을 우리에게 남겨줬지만 그도 기차를 타고 떠나버려 이제 그 역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집착하고 매였던 저와 달리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떠나고 난 뒤 프란치스코와 같이 쳐다보던 하늘을 보니 하늘로 오르는 계단 꼭대기에 프란치스코가 이미 올라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라라도 프란치스코가 먼저 올라간 그 하늘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 프란치스코의 젖에서 젖을 먹었더니 그 젖이 달콤할 뿐 아니라 황금빛이 났습니다.


클라라가 본 이 환시에서 계단은 천국의 계단이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단이며 완덕의 계단입니다.

겸손이라는 맨 및 계단에서 시작하여 사랑이라는 맨 위 계단까지 오르면 사랑이신 하느님께 도달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계단입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갔기 때문입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참으로 사랑한다면 뭘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해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을 같이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수의 힘

이종훈 신부님

숲 속은 밤은 정말 캄캄하다. 어두워서이기도 하고 고요해서도 그렇다. 한 마디로 무(無)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무엇인가 있으면 그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크다. 반딧불이와 별똥별은 선명하고 전등불빛에 달려드는 나방 날갯짓에도 깜짝 놀란다. 세상에서 사셨던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그러지 않았을까? 지극히 순수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을 것 같다. 


선입견도 유전적으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도 없는 하느님이 처음에 사람에게 불어넣어주셨던 그분의 인격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근거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이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볼 수 있고,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었을 것 같다. 명의는 증상만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 병의 근원을 찾아내기 때문에 병을 제대로 치료한다. 예수님도 그런 마음과 인격을 지니셨으니 사람과 세상을 꿰뚫어보셨을 것이다. 그분의 치유와 구마 등의 신적인 능력도 그 티 없이 맑은 마음과 순수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반딧불이의 작은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보이고 나방의 날갯짓이 비행기소리처럼 들리는 숲 속의 밤처럼 예수님의 마음도 그렇게 순수했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으로 받으신 고통도 컸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지혜로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신적인 능력으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행하셨다.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당신의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고 죄를 뉘우쳐 하느님께로 그리고 하느님이 사람을 지어 만드실 때 불어 넣어주신 그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당신의 예상과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많이, 아주 많이 실망하셨던 것 같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고 그분의 순수한 마음이 지닌 지혜는 당연한 미래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데도 자꾸 똑같은 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렇게 불같이 화내셨지만 그보다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훨씬 커서 그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불사르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아버지 사랑, 인간 사랑이었습니다. 죄인인 저는 그 사랑으로 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실망과 괴로움으로 자신을 위로하거나 감추지 말고 주님의 큰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고 주님의 계명을 더욱 충실히 지켜나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띠로와 시돈에게 기적을 보였더라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큰 기적과 놀라운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마을들을 엄하게 꾸짖으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3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백성이다.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받아들이지도,응답도, 보답도, 회개도 하지 않았음을 한탄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의 오늘의 말씀은 이 마을을 저주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기를 바라시며 걱정하시는 말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다. 


‘너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겠느냐?’라고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은혜, 집, 가족들, 재산, 재능, 건강 등,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조건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교회에 그리고 이웃에게 얼마나 더 많은 선행과 봉사를 나보다 더 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6절)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큰 권한과 최고의 영예를 주셨다. 비록 인간들이지만 하느님 같은 영광을 입혀 주셨다.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분을 물리치는 것이며,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물리치는 죄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전해주는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니, 어떻게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요,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물리치는 것이며 그분과 아버지 하느님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3-16).”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로 제목이 붙어 있고, 또 예수님께서 고을들을 꾸짖으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성경에 어떤 국가나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국가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 그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의 사람들이 무조건 멸망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한 국가나 도시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전체가 심판 대상이지만, 구원을 받거나 멸망을 당하는 것은 각 개인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과 심판의 날에 일어날 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가족이라도 구원과 멸망으로 갈라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은 개인의 문제” 라는 말은 심판결과가 그렇다는 뜻이지, 남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구원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 실천이고, 사랑 실천은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관심 갖지 않고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고, 혼자서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태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도 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죄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도시나 한 국가가 이상한 풍조에 휩싸여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또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죄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일도, 세상을 복음화 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사랑 실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말씀이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안 믿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물론 예수님 말씀에 있는 ‘회개’ 라는 말은 ‘당신에 대한 믿음’도 포함하는 말이긴 합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회개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티로와 시돈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고,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을 언급하신 것은, 그 두 도시 사람들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하느님 뜻’에 합당한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참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믿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할 일은 ‘회개’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고,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받을 심판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받을 심판이 더 엄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처음부터 세례를 안 받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세례를 받았고,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 신앙인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그동안 받은 주님의 은총을 부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은총 속에서 살았던 시간들은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은총이 취소되는 일도 없습니다.)


‘회개’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이미 받은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회개’ 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물론 지은 죄에 대한 회개도 포함되는데, 그 경우에도,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 하는 수동적인 회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응답하는 능동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지옥 가는 것만 피하면 그만이라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를 안 짓기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즉 믿음과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죄는 안 짓겠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열성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이웃 사랑 실천을 하고, 항상 기도하면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살아 있는 삶’입니다.




생명의 빛이 세상에 빛나고 있다.

최민석 신부님

저 어둔 밤에 고요히 빛나는 손톱같이 야위었던 달도 시간이 흐르면 쟁반 같은 보름달로 나타난다. 기울었다가도 꽉 차는 달은 고단한 인생살이에서 위로와 희망이다. 지금 나의 생이 가난하고 쓸쓸해 보여도 실상은 본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다.


어제 밤 아는 수녀님의 초대로 수녀원을 방문하였다. 10월 4일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축일 만찬 초대이다. 축하 전례와 만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둠 밤 예쁘게 빛나는 초승달을 보았다. 가을밤에 빛나는 초승달은 제법 낭만적이다. 초승달과 빛나는 별빛은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어둠에 길들면 세상을 다시 보는 깊은 눈도 생긴다. 어둠은 하루치 빛을 키우는 시간이다. 어둠 속을 거니는 자와 빛 속을 거니는 자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어둠 속을 거니는 자는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자꾸 넘어질 것이다. 빛 속을 거니는 자는 앞이 잘 보여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뒤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생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4-16)


어둠 속에 있는 자는 어둠 속을 헤매다가 자기가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바로 어둠 속에 있는 백성에게 빛이 되시어 어둠에 빛을 보게 하신 분이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강하다. 어둠에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어둠의 장벽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영성적으로 매우 깊이 들어가신 분이시다. 성인은 종교 사이의 장벽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과 인간 사이의 경계, 나아가 해, 달, 바람하고도 장벽이 사라져 그것들 모두가 당신의 언니 누이로 되었다. 성인은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면서는 “나의 누이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 그대는 생명의 문이 될 것입니다.”라 하신다.


그분이야말로 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몸소 이루신 분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중심’이 바로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고백한 것이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 속의 ‘중심’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 ‘그것’과 ‘너’는 사라지고 존재하는 모두가 ‘나’임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거죽을 보는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지만 속을 보는 눈에는 모든 것이 같게 보일 것이다. 깊이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빛과 어두움을 같이 본다고 한다. 빛 속에 어둠을 보고 어둠 속에 살아있는 빛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둡고 저것은 밝은데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둘이 본디 같은 것임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지향하여 나아갈 곳은 저 끝없이 펼쳐진 ‘지평’이 아니라 들어가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중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갈라져 있는 둘을 하나로 본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본디 하나임을 알아본다는 뜻이다. ‘깊이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말은 매 순간 주님의 현존 안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떠나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숨 쉬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주님의 현존임을 안다. 나의 유일한 수업은 자신 안에 들어가 있는 그대로 그분의 현존 안에 잠기는 것이다.



“나의 누이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 당신은 생명의 문이십니다.”라고 말한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신앙은 어두운 죽음에서 생명의 빛을 노래하신 것이다. 그렇다. 순간마다 ‘나’를 떠나지 않고서는 내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 안에 잠길 수 없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의 삶을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난으로 시작하여

가난으로 돌아갈

가난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가난의 여정입니다.


가난은 모든 여정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삶은

순종의 삶이며

회개의 삶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통하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난을 통하여

풍요로우신

하느님을 기쁘게

만났습니다.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려야 할

가난의 여정입니다.


가난한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랑의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삶이 우리의

관계를 치유합니다.


가난한 삶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끕니다.


하느님께로

이르는

가난의 길을

우리도 걸어갑시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게 하는

겸손한 가난입니다.


가난은 사랑의

회복이며 가난은

끝까지 충실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며칠 전에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마트폰 벨소리가 신나가 울리는 것입니다. 읽던 책을 덮고 전화를 받아서 통화를 했습니다. 한참을 통화한 뒤에 다시 읽고 있었던 책을 펼쳐 들었는데 어디까지 읽었는지가 헷갈리는 것입니다. 즉,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다시 앞으로 페이지를 넘겨서 내용을 파악해야만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제 머리가 나빠서일까요? 그런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은 글씨를 따라가고 있지만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지요.


하긴 인간의 뇌는 계속 움직인다고 합니다. 실제로 피험자들에게 아무런 과제도 주지 않고 가만히만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컴퓨터 단층촬영을 했습니다. 그 결과 두뇌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피험자들은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두뇌는 몰두할 것이 없으면 쓸데없는 생각이라도 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분심이 너무 든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도 별 것 아닌 생각이 계속 떠올려진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 두뇌가 몰두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생각이라도 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주님께 몰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이라 할 수 있는 분심들이 떠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입으로만 주님을 외칠 뿐이라면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다른 것들이 떠올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이 도시는 당시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번창했던 도시였지요. 그래서 자주 방문하셨고 이 도시에서 기적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를 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집중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적을 단순히 신기한 일 정도로만 가볍게 취급하면서 여전히 세상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주님께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현재 이 도시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좀 더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일에만 집중하면서 ‘나는 절대로 안 돼.’라는 생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주님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 안에서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질책의 말이 아닌 칭찬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힘을 얻게 되어 이 세상을 더욱 더 힘차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먼 사람이고, 멀리 있어도 마음이 있으면 가까운 사람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이래요(장문수).


대신 지킨 약속(‘좋은생각’ 중에서)

1979년 3월 16일, 강원도 홍천읍 삼마치고개 일대가 불길에 휩싸였다. 이 산불로 1만 600여 평에 들어찼던 잣나무 9천여 그루가 잿더미로 변했다. 한약재를 캐러 간 이두봉 씨가 담뱃불을 제대로 끄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그는 약 백삼십만 원을 변상금으로 내야 했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갚던 그는 얼마 후 중풍에 걸렸다. 그리고 5년 후 세상을 떴다. 그는 아내에게 “산불 낸 게 늘 죄스러웠소. 당신이 대신 변상금을 꼭 갚아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재산이라곤 집 한 칸이 전부, 사 남매를 키우기도 힘든데 빚까지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내 용간난 씨는 간신히 생계를 꾸리면서도 매년 한두 차례씩 3~10만 원의 변상금을 갚아 나갔다. 그리고 2001년 9월, 20년 만에 변상금을 전부 갚았다. 이 사연 안에는 다른 주인공이 한 명 더 있다. 산림청 공무원 이순옥 씨다.

그가 초임으로 홍천에 부임했을 때 용간난 할머니가 찾아와 변상금을 나누어 갚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못 갚는 게 아니라 나누어서 꼭 갚겠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이후 부임지를 옮겨 다니며 다시 이곳에 왔을 때 대장을 검토해 보니 할머니가 그동안 틈틈이 갚고 딱 십만 원이 남았다. 그는 남은 돈을 대신 내고 할머니를 찾아가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하며 변상금을 다 갚았음을 알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다. “가슴 한구석이 늘 빚 때문에 답답했는데 이제 후련해요. 영감도 저승에서 편히 쉴 거예요.”

이 사연을 안 산림청 직원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할머니에게 백삼십만 원을 건넸다. 돈 갚느라 평생 고생한 할머니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당연히 내야 할 세금도 어떻게 하면 내지 않을까를 궁리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만 한 것이 아니라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도 많지요. 그런데 끝까지 책임을 지면서 정직한 삶을 사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큰 울림을 듣습니다.




사랑의 용기, -끊임없는 회개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모 신부님

누가 진정 용기있는 사람입니까? 진정 남의 잘못을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이요 진정 회개하는 사람이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칭찬하거나 격려하기는 쉬워도 잘못을 질책하기는 어렵습니다. 남을 판단하기는 쉬워도 회개를 통해 자기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대략 60대 후반 나이를 사신 카르투시안수도회의 창립자인 브루노 성인도 용기있는 분입니다.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수도회입니다. 가톨릭교회내 수도회중 가장 엄격한 수도회로 결코 개혁된 적이 없이 고유한 전통을 이어 온 수도회입니다. 창립자인 브루노 성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지위를 버리고 동료들과 함께 은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회개에서 나온 참으로 용기있는 결단입니다. 어떠한 명예와 권력도 원하지 않았던 성인 뜻에 따라 성인의 시성식은 공식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교황 레오 10세가 1514년 10월 6일을 성인 축일로 선포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바룩 예언자가 참으로 용기있는 인물입니다. ‘행복하여라.’행복선언과는 달리 ‘불행하여라.’불행선언할 때의 예수님의 심중이 어떠했을까요? 참으로 용기있는 영혼이 아니곤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자유로운 예수님이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질책이 의도하는바 회개입니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마지막 회개에의 호소입니다. 참 사랑의 용기에서 나온 회개에의 촉구이며 이런 용기의 원천은 사랑이었음을 봅니다. 바로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95,1.8).


언젠가 그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마음 활짝 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을 따르는 형제들의 충고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회개의 표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형제들을 통해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샘솟는 용기입니다.


바룩의 참회기도는 얼마나 겸손한지요. 이런 회개하는 영혼이 참으로 용기있는,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났기에 이런 용기입니다. 참으로 진정성 넘치는 기도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참회기도로 삼아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하느님을 잊음으로 죄에 대한 감각이 날로 무디어져 가는 오늘의 세태입니다. 진정 회개하는 영혼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의 은총이요 회개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회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회개하여 겸손한 영혼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 사랑의 용기입니다.누가 진정 용기있는 사람입니까? 형제들의 잘못에 대해 충고할 수 있는 영혼이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는 회개하는 영혼이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회개의 은총이요 형제들을 사랑할 때 형제들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용기를 가득 선사하십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시편79,9). 아멘.




불행을 피하는 길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 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카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것이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4,5).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회개의 삶을 살지 않는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한가위가 지나고,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외로운 투쟁”이라는 산문집에 들어있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익어가는 가을”을 들려드립니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가을이 익어가고, 사랑이 익어가는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하시면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그 말씀은 그 중에서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희는 심판 때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참조)

 

그리고 그들이 심판받게 되는 이유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회개하지 않았을까? 대체 홰 회개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이신 분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 있습니다.곧 듣고도 듣지 못하는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져 있는 완고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들어서 알게 되었으면서도 마음을 닫고 그것을 바라지 않아 받아들이지 않는 파라오처럼,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7-48)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고귀한 신분이며,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파견 받은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이는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하신 분의 영을 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보내신 분께 메여있어야 하고, 보내신 분의 영을 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우리가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하느님 자비의 집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순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활동의 주무대였던 카파르나움 주민들을 다음과 같이 책망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10,13) 그분께서는 카파르나움 주민들의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신 것입니다(10,15). 


티로와 시돈에서 ‘기적들이 일어났더라면’, 곧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가 드러났더라면 그들은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주민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제 뜻대로 살아가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만 바랐지 그와 무관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네 삶은 어찌 보면 불의와 차별로 채워지고 고통과 시련의 바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다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시간과 공간, 가족들과 친구들, 재능과 건강, 재물과 좋은 성품, 신앙 등이 다 주님의 은총의 표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자비의 선물을 거저주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비이신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당신께로 돌아와 자비를 살고 자비를 나누라는 초대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뜻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실은 ‘실천적 무신론자’라 할 것입니다. 


그저 신앙을 능동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없이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죄와 어둠뿐이며, 스스로를 영혼의 파멸로 내몰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야겠습니다. 깨어 일어나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로 마음 열어 회개해야겠습니다. 


인생은 순례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순례는 자비이신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나를 떠나 그분께로 되돌아가는 몸짓입니다. 나를 버리고 비우며, 그 여백에 주님의 자비를 채우기 위한 비움의 움직임이 우리다운 순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순례는 회개의 순례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여 하느님의 자비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지요.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회개의 응답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했다는 표지는 감사와 행동의 찬미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자비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책망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본성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마음과 의식과 몸을 주님께로 되돌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카파르나움 주민들처럼 주님의 자비 앞에 행실을 바꾸지도 않고 그 사랑에 응답하지도 않은 채 계속 악에 기울어 살아가는 뻔뻔함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열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선과 자비를 발견하고, 감사와 찬미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의 하루가 되길 희망합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 할 것이다.” (루카.15,7)

김종오 신부님

한없이 자비로우신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여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상상할 수 없는 만큼 인내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잊을지라도 주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단지 기다리시는 것을 넘어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십니다. 길을 잃고 애매는 우리를 애타게 찾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멀어질수록 주님은 우리를 더욱 애타게 찾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주님께 멀어지는 것은, 우리가 먼저 참 자아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거짓 자아로 살면서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음성보다 세상이 주는 허황된 탐욕의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우상들은 우리를 주님께 점점 더 멀어지게 합니다.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을 우리가 멀리하게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을 넘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며 삶의 태도를 전적으로 주님께 되돌아오게 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우리는 주님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참 자아로 살아야 합니다.

회개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다가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 주는 엄마를 찾다가,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엄마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입은 상처를 ‘너’에게 되갚기보다, ‘나’의 상처가 이웃을 위한 선물인 ‘복된 아픔’이 되는 것은 회개한 사람만이 누리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가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었고, 자유롭게 여기 저기 맘대로 돌아다니고 싶었고, 정말 시험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고 말합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3-14)

지금 나이가 들어 되돌아봅니다. 내 가족, 내 일가친척들과 친지들을 보내주신 주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답하고 있는지. 또 내가 어릴 때 어른이 되면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잘 이루었는지. 어릴 때 간직했던 내 꿈과 희망이 비단 나의 개인적인 영화와 안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 나아가 인류 사회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기를 기대하며 회개의 첫 걸음을 시작합니다.




박미라 도미틸라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 꾸지람을 들은 코라진과 벳사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직접 기적을 베푸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도시!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저주하신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늘 나라로 이끌기 위해 애쓰시는 예수님! 

마음이 바다보다도 하늘 땅 보다도 더 넓으신 주님께서 화를 내신다. 

아무리 애를 써도 듣지 않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분을 직접 뵈옵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물론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그분을 증거했고, 2000년 역사 안에서 너무나도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라진이나 벳사이다처럼 “불행하여라.” 라는 그 말씀을 듣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 지... 

그들보다도 내게는 더 많은 볼거리, 들을 거리, 느낄 거리들이 주어졌는데...... 

마지막 날에 그분께 그런 엄청난 무서운 말씀을 듣지 않도록 살아야 할 터인 데....... 

 

주님! 아직 늦지 않았지요?

지금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지막 날에 당신 앞에 섰을 때 그런 엄청난 말씀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제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당신의 가르침대로 당신께서 보여주신 대로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 날 당신 앞에 섰을 때 "오! 참 잘하였다. 충실하고 착한 종아!

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나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자!"라고 말씀하여 주십시오. 주님!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 번째도 회개이고

마지막도 회개입니다.


신앙의 결정체는

언제나 회개입니다.


회개와 복음은

하나입니다.


우리자신을

알게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가 아름다운 건

회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회개와 예수님의

비중은 어느정도인지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고 사는

우리들이 회개로

바뀌어지는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을 위해

복음이 되어오신

예수님 마음을

만납니다.


복음은 우리의

신비로운 목숨입니다.


신비로운 생명은

가장 귀중한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것은

코라진같은

벳사이다같은

도시의 불빛이 아니라

회개하는 한 사람의

착한 마음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선물이며 기적임을

뜨겁게 일깨워줍니다.


눈이 멀어서

못보는 것을

예수님은 마음으로

다시 보게 하십니다.


마음과 마음 사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적인

회개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복음의 본질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더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꺼지지 않는 십자가의

광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가면을 벗고

예수님의 신비로운

사랑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회개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회개는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매순간이 가장 소중한

회개의 순간이 되시길

회개의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어젯밤, 저는 밤새 전쟁을 치렀습니다. 무기를 들고서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입은 상처 때문에 더욱 더 없애겠다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피도 보았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서 지금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신부인 제가 왜 이렇게 폭력적이 되었을까요? 


웃을 수도 있겠지만, 바로 모기 때문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모기한테 물린 곳이 너무나 가려워서 잠에서 깼습니다. 제가 잠든 사이 물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거든요. 이 모기를 잡아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한 손에는 파리채를 들고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제 피를 담고 있는 두 마리의 모기를 잡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는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마리가 그렇게 나를 괴롭힌 건가?’라는 생각으로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제 귓가에서 들리는 윙윙 거리는 소리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을 켜고 찾으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고.... 이런 식으로 몇 차례 반복되다보니 잠을 설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별것 아닌 모기 몇 마리가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별 것 아닌 유혹에 넘어가서 많은 죄를 범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또 상처를 받았다고 복수하겠다면서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별 것도 아닌데 마치 대단한 별 것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 역시 별 것 아닌 것을 별 것으로 생각하면서 많은 유혹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의 많은 말씀을 들었으며, 깜짝 놀랄만한 기적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으로 별 것 아닌 유혹들을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사랑 따로 유혹 따로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화를 내시면서 저주의 말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뉘우치지 않았고, 옛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는 심한 저주의 말씀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혹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듣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별 것 아닌 유혹에 내가 가진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 쉽게 빠져들고 있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들이 어쩌면 과거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의 말을 들었던 도시의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별 것 아닌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내는 우리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는 우리로, 그래서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불행하다는 말이 아닌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소중한 기억이 깃든 장소가 있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도,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강상중).


주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느낄까요? 그렇지 않더군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오랫동안 냉담하고 계신 분들은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사람인 신부에게 내 죄를 고백해야 하냐면서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고해성사의 불필요성을 내세웁니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고해성사의 필요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깨끗한 옷을 입고 있지 않음을 알기에 도저히 고해성사를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즉, 고해성사를 통해 깨끗한 자기를 만들고 싶은 것이지요. 오랫동안 냉담하다가 고해성사를 보고서 다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역시 주님께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결국 회개하는 사람은 주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회개하는 사람을 더 기쁘게 맞이하셨고 사랑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까요? 자기 내면의 옷이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주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내 옷은 깨끗하게 세탁이 잘 되어 있나요?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루카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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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의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뉘우침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극도의 안타까움을 토해내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이유가 뉘우침을 보이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저지른 죄에 대해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쓸 정도의 마음으로 뉘우친 기억이 있는지 떠올려본다.


인간의 나약함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욕망에 기울어지기 쉬운 성향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욕망에 사로잡히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 안에만 머무르게 되나 보다.

그 끝이 허무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에는 떠올릴 수 없나 보다.

늘 결과를 보고 후회를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프기만 한다.

그것이 욕망의 힘일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인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옳은 것을 바라는 것을 희망이라고 한다.

옳지 못한 것을 바라는 것을 욕망이라고 한다.

희망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이다.

욕망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마저 죽일 수 있는 힘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삶 안에서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희망과 욕망을 혼돈해가며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때로는 그 혼돈 때문에 좌절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욕망은 우리의 또 다른 하나의 본성임을 인정하자.

따라서 우리가 이 삶을 마치기 전까지는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 모두는 세상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분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희망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통해 얻게 된 상처를 통해서라도 우리를 성장케 하시고자 하는 분이시다.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성 프란치스코 역시 세상의 죄와 자신 안의 죄를 바라보면서 참 눈이 열리신 분이셨다.

죄에 대해 아파하는 만큼, 한 뼘이라도 그분 앞에 다가설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자루 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는 마음으로 눈물로 참회할 수 있는 우리이기를 기도한다.

욕망보다는 희망으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있는 우리이기를 기도한다.




너희를 물리치면 나를 물리치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님

벌써 10년 전 일이지만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선사했는지 우리는 아직 잊지 않습니다. 역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기 힘들었던 우리 축구 대표 팀을 목표인 16강이 아니라 4강까지 올려놓았던 감독입니다. 그가 떠난 후에 아직까지 이런 영광은 오지 않았습니다. 히딩크라는 인물을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맞아들일 줄 알았기에 이런 차이가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우리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8년간 브라질 대통령 룰라를 기억합니다. 그는 퇴임 당시에도 80%가 넘는 국민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으로 많은 국가 부채가 있었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도움에 힘입어 아이들을 길가로 내몰지 않고 교육을 시켰고 8년 뒤인 지금 모든 국가부채를 갚고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을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그런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던 브라질 시민들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을 보면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성경말씀이 떠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성체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체를 생명의 양식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싸이다, 코라진, 카파르나움을 나무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혐오스러워하는 이방인들의 도시인 티로와 시돈에서 그와 똑같은 기적을 예수님께서 행하셨다면 그들은 이미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며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위의 세 도시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해서 구원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위에 세우신 교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사도들 위에 세우신 교회를 볼 줄 아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교회가 가톨릭교회라 믿고 있습니다. 동방교회도 베드로의 수위권이 로마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고, 이슬람교의 경전이란 그리스도교의 신구약 성경을 내용으로 그리스도 이후 6백년 뒤에나 생겨난 것이고, 개신교는 루터 이전에는 가톨릭 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로 이어졌는지 말하지 못하고, 또 누가 베드로에게 맡긴 하늘나라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지도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라면 그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유럽에서 프랑스혁명이란 것은 유럽인들의 정신에 참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지금도 가톨릭을 많이 믿고는 있지만 사실상 유럽교회는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종교가 그들 주요관심사에서 변두리로 내쳐지게 되었습니다. 사제들은 나라에서 돈을 받는 직장인들처럼 여겨지게까지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교회의 잘못도 없지 않지만 가톨릭교회는 조금씩 내쳐지고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도 여기저기서 사제가 신자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물론 사제들이 잘 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 파견한 것입니까? 결국 주교님이 파견한 것이고 교회에 의해 파견된 것이고, 그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된 것입니다. 내가 그 파견을 내 맘대로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도시들이 되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맘에 들건, 들지 않건, 일단 파견되었다면 하느님께서 파견해주었다고 믿어야합니다. 아브라함은 세 손님을 대접하다가 하느님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롯도 손님을 대접하다가 자신을 구해 줄 천사들을 대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롯은 이 손님들을 위해 자신을 딸까지도 악한들에게 내어주려 했습니다. 신자는 사제를, 사제는 주교를, 주교는 교황을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분이라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신다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물이자 치료제, 프란치스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계속해서 들려오는 새로운 교황님과 관련된 소식을 접하면서 교황님께서 자신의 교황 명을 프란치스코로 택하신 이유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일 제가 새로 선출된 교황이었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저희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 교황님은 예수회 출신이면서도 이냐시오 로욜라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교황명으로 택하지 않으시고 프란치스코를 택하셨습니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처음엔 제 개인적으로 꽤나 의아해했습니다만 이제야 그 이유를 명확히 알 것 같습니다. 새 교황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으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셨던 중세교회의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과도한 물욕에 젖어있는 교회, 명예와 자리에 연연하는 교회, 교회의 보물인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회, 겸손과 섬김의 교회가 아닌 교만과 아집의 교회, 작고 소박한 교회가 아니라 번쩍 번쩍 초호화, 초대형 교회, 가난한 양떼의 구원은 안중에도 없이 제몫만 챙기려는 부자 교회...

중세 교회가 그랬습니다. 당시 많은 교회가 영성이나 쇄신, 이웃 사람의 실천은 뒷전이고 외형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성당 안은 진귀한 보물이나 예술품으로 치장을 해서 호화찬란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 한 가지 외형은 대단했지만 교회는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쓰러져가는 우리 교회, 우리 인류에게 아주 향기로운 선물이자 치료약을 하나 선물로 주셨는데, 그 선물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습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쓰러져 가는 제도 교회의 마지막 기둥을 꽉 붙들고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가식과 위선의 겉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가작 낮은 자로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서,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제도 교회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프란치스코는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는 음성에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열심히 성당을 수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온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던 중 그 수리가 단순히 성당의 수리가 아니라 권력과 탐욕에 빠진 교회의 영적 쇄신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가난의 특징은 사회적응의 실패로서의 가난,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비참하고 궁색한 가난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속적 안녕과 물질만능주의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기해방의 도구로서 가난을 선택한 것입니다. 완벽한 가난을 자신의 삶에 적용함을 통해 대자유인이 된 프란치스코는 가난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부담이나 초조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기에 만민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새로운 교황님께서는 지금 제2의 프란치스코 영성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어찌 그리도 가슴을 콕콕 찌르는지 모릅니다. 새로 임명된 신임 주교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교는 왕자가 아니라 교구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목자여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교구에 충실하십시오. 교구를 자주 떠나는 ‘공항’ 주교가 되지 마십시오.”

최근 하신 말씀은 너무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성직자 중심의 관료제도와 출세제일주의자들을 교회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 청년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세계를 병들게 하는 가장 심각한 죄악은 청년 실업과 노인들의 고독입니다.”

우리 역시 교황님께서 시작하신 제2의 프란치스코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순간입니다. 가슴에 손을 대고 깊이 한번 반성해봐야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녕 우리 공동체의 중심이고 선물인가? 가난한 이웃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무런 소외감이나 차별대우 느끼지 않고 우리 공동체에 편입되고 있는가?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늘 언제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려했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잘나고 못난 것 사이에

귀하고 천한 것 사이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들 사이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철저한 십자가의 믿음을 통해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은

드디어 작은 것을 선택합니다. 


형제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드디어 만나게 됩니다. 


참된 형제애는

오히려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사랑으로 작아지는 기쁨입니다. 


모든 순간이

작아지며 회개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임을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기에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절실히 사랑하였기에

모든 존재는 사랑이 되고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빛을 향하는 나무처럼

그리스도를 향하는

맑은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소통하는

순수한 청빈의 시간 되시길

또한 기도 드립니다.




얼마 전에 감동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전작 역시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 나온 책 역시 구입해서 잘 읽었지요. 어떻게 보면 자기 계발서 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끔 도움을 주었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추천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이분의 책을 직접 지명한 원색적인 비난의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즉, ‘이런 자기 계발서 류의 책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개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라고 대중의 인기를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을 하시는 분의 말이 올라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약간의 설전이 있었고 곧바로 화해했다는 기사가 올라오기는 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들더군요.


자기 계발서라고 할지라도 작가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노력을 했을 텐데, 그렇게 쉽게 ‘쓰레기’라고 단정을 내린다는 것(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지만)은 잘못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작품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이 다른 이들에게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과연 기분이 좋을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저 역시 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했을 때가 종종 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역시 그 기사만을 보고서 그분의 비판을 나만의 잣대를 내세워 쉽게 판단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내가 단죄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힘주어 말씀하셨고, 또한 당신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직접 보여주시기도 했지요.

이 이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웃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입장과 그 이웃의 입장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가리키면서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이 도시들은 당시에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도 가장 번화한 도시였지요. 그런데 이 도시의 사람들이 저승까지 덜어질 것이라면서 악담을 퍼부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회개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내세우면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이웃의 말을 듣는 사람,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주님의 말을 듣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와 이웃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과연 이웃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부끄러운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간절하다는 것. 더구나 사람이 사람을 간절하게 그리워한다는 것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신경숙).


개미를 보면서

어제 아침 자전거를 타다가 잠깐 쉬는데, 우연히 개미 한 마리를 보게 되었네요. 이 개미는 자신의 몸보다도 훨씬 큰 먹이를 운반하고 있더군요. 어쩌면 그 무게 역시 개미의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잠시도 쉬지 않고 나르고 있었습니다. 문득 가볍고 크기도 조그마한 먹이들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무겁고 큰 먹이를 힘들게 운반할까 싶었습니다. 혹시 자신의 앞에 항상 가볍고 작은 먹이만 찾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지요. 우리의 앞길에 항상 가볍고 쉬운 일만 있습니까? 아니지요. 어렵고 힘든 일, 무겁고 커다란 일들이 내 앞길을 막아서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순간에 무조건 피하십니까? 아닙니다. 이것 역시 나의 삶이기에 그대로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겁고 큰 먹이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기 집까지 나르는 개미. 개미도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어떤가요? 불평불만만 하면서 어떻게 하면 피할까를 궁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개미보다 못한 인간은 되지 맙시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매일 매 순간이 기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향이나 코드라는 것 무시 못 하는 것이어서, 여러 사람들 가운데 더 마음이 가고, 더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장소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왠지 다른 곳보다 더 정이 가고, 한번이라도 더 가고 싶은 도시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 비해 더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임을 아시게 된 후 더 애틋한 마음에, 더 각별한 정에 이끌려 다른 곳보다 더 자주 방문하셨을 것입니다. 방문만 하셨겠습니까? 그 도시들에서 당신의 손길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환자들,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그 도시 사람들, 예수님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수많은 기적과 징표를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그 도시 사람들이 끝까지 하느님께 돌아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제발 집나간 아들이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애틋한 심정에 극단적인 발언까지 던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 들으면 이렇습니다. “내가 행한 큰 기적과 표징들을 보고도 변화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고 어제와 똑같이 살아가는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불행하다.” 관건은 돌처럼 완고한 마음이군요. 마음은 굴뚝같았겠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이중성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강경한 발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질책도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일 매순간이 기적입니다. 살아온 날이 기적이고, 살아갈 날이 기적이며,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너무나 큰 죄인이고 큰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어제의 내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징인 새로운 하루 앞에 아무런 감동도, 감사의 마음도 지니지 않는 우리는 불행합니다.

 

너무나 은혜롭고 과분하게도 매일의 미사성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은총을 체험케 하시지만,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우리 매일을 스쳐가지만 둔감함에 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우리는 불행합니다.

 

매일의 영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극진한 자비가 우리 인생을 관통하지만 그저 습관적으로, 무미건조함에 미동도 하지 않는 우리는 불행합니다.




회개

전진 신부님

해마다 재의 수요일에는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합니다. 

사제가 머리에 재를 바르면서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기도문을 외웁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보본반시報本反始’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본에 보답하며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라는 뜻입니다. 나의 근본, 뿌리를 잊지 않고,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석이나 설 명절 때 고향을 찾는 의미가 바로 이 ‘보본반시’인 것입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도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여정, 영원한 고향을 찾아 떠나는 것이 바로 ‘보본반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철이 든다는 것은 봄이면 꽃이 피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 의미를 깨닫고 자기본연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 존재의 뿌리가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시작이며, 진정한 ‘보본반시’입니다.




멋진 여행

심종미 수녀님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길은 머리에서 마음까지라고 합니다. 아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라삐들의 종교교육이 성행하던 종교도시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들의 무디고 무딘 마음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이었을지는 몰라도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분노하십니다.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다는 의미는 우리의 근원이 하느님에게 있고 죽을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 안에 머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회개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 가득 찬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회개는 우리 마음과 삶이 수직적으로는 하느님께로 확장되고, 수평적으로는 다른 사람한테로 확장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근원이신 그분의 현존을 다시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아 힘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회개는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것이며 종교인이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뒤돌아보며 자신의 한계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그 한계 속에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회개는 참다운 나를 찾아 나서는 결단이며 잃어버린 하느님과 이웃을 찾아 나서는 멋진 여행입니다.





영국 군대에 거카 사단(Gurkhas)이라는 특수부대가 있었습니다. 네팔 출신의 거카족으로만 구성된 이 부대는 세계에서 가장 용맹한 군대로 특히 산악전에 능했다고 해요.

2차 세계대전 중 거카 사단이 미얀마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 일입니다. 첨단 장비를 갖추고 고도의 특수 훈련을 받은 거카 사단은 낙하산을 타고 미얀마 정글에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미로와 같은 미얀마의 정글 속에서 부대원 전원이 실종되는 비운의 결과를 맞게 되었지요. 시간이 지나도 이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자, 영국군은 거카 부대원 전원을 전사자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부대원 중 한 명이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4개월간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자그마치 1,400마일(2,240Km)을 걸어 귀환한 것이지요.

기자들은 그에게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남루한 야전복 호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은 바로 런던 시내 관광 안내도였지요.

“정글 속에서 지쳐 쓰러질 때마다 이 지도를 꺼내 보며,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을 여행하는 제 모습을 꿈꾸었습니다.”


꿈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생사를 넘나드는 혹독한 역경 속에서 그를 살아남게 해준 유일한 비결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현재 죽음의 순간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희망은 지금 현재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그냥 정신없이 살아가고만 있을 뿐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공허한 결과만을 나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꾸중을 받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는 그 당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신흥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고, 그래서 바쁘고 분주한 도시가 되면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두 지금이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적으로는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지요. 특히 문제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가슴을 울리는 말씀을 통해서도 그들은 변화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에 주어지는 물질적인 유혹을 이겨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물질적인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 나는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특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지금이라는 시간에 얼마나 하고 있는지도 떠올려 봅시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과거에 당신이 하셨던 말씀을 인용해서 혹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의 네 모습으로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적어 보세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희망 말고...


희망 결핍증(박성철, ‘희망도토리’ 중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매사에 의욕도 생기지 않았고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따분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병원 치료를 권했습니다. 그는 결국 병원 정신과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그의 병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한참 동안 그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제가 어떤 상태입니까?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

의사는 한참 동안 골몰히 생각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보세요. 코를 막고, 호흡을 멈추어 보세요. 숨을 쉬지 않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보세요."

그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1분 정도가 지나갔습니다.

"캑캑,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정신과 의사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가요? 이 세상은 산소를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산소결핍증 환자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는 곳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희망을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신은 희망 결핍증 환자입니다."




기적도 소용없는 불행한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 말씀을 놓고 볼 때 불행한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는데도 아무런 회개를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주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는데, 그래서 모두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고 이구동성인데 오직 한 사람만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수용체계가 망가진 사람입니다.


담벼락과 같은 사람인데 벽은 소리를 전혀 흡수치 않고 거기에 소리가 부닥치면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담벼락처럼 귀를 막고 살게 되었을까요?


그에게 외부인은 다 침입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침입자란 원치 않는데도 뚫고 들어오는 사람이지요.

그의 경험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불쾌하게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좋은 말을 해 줄 사람도 좋은 것을 선사할 사람도 없고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을 기대하고 문을 열어놓았다가 안 좋은 얘기만 듣게 될 것이기에 문을 열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용체계가 일부 망가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하”자만 나와도 귀를 닫아버립니다.

메일로 치면 “하느님”만 나오면 스팸 메일이 되게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세상 소리는 아주 수신을 잘 합니다.


이런 경우도 하느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기적 할애비가 되도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지 않고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식대로 믿을 뿐이며 하느님을 수용치 않는 경웁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에게 믿음은 자기 신념의 고집이며 고집의 표출일 뿐입니다.

참 하느님을 믿기보다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고집하는 것이며, 자기가 아는 하느님 이외의 다른 하느님의 현존을 거부하고,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여러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수용체계가 망가진 것은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사람이고, 하느님께서 기적을 행하셔도 아무런 변화, 회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이해하면 회개한 사람은 날마다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보세요.”

“신부님, 미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안 나오세요?”

“네? 맞다. 곧바로 나갈게요.”

작년 12월, 간석4동 성당에 부임한 뒤 처음으로 미사 시간에 늦었습니다. 새벽 미사도 아니었습니다. 오전 10시 미사였는데, 글쎄 미사 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때까지 잠을 자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특별히 급한 일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 시간에 제 방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저께는 공휴일이어서 새벽미사였거든요. 문제는 평소 새벽미사가 있는 날은 월요일뿐이기 때문에 어제가 저녁미사 있는 화요일로 착각을 했고, 그래서 미사에 들어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하게 들어가느라 어제 강론 원고가 아닌 엉뚱한 종이 한 장 가지고 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행동까지 했지요. 


그런데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저의 게으름 때문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생겼거든요. 9시 30분쯤,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살 일이 있어서 갈까 말까를 계속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귀찮은 것입니다. ‘저녁미사고 오늘은 특별한 일도 없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가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미루어서 마트에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게으름 피우면 안 되지. 얼른 마트에 가자.’라는 마음을 먹고서 9시 30분쯤에 마트로 향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어제처럼 5분 늦는 것이 아니라, 30분 이상 늦어버리는 큰 사고를 쳤을 것입니다. 


게으름도 득이 될 수 있음을 어제 깨닫게 됩니다. 하긴 주님께서는 부정적인 것도 부정적으로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가진 부정적인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주님께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모두 내어 맡기는 겸손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합니다. ‘잘된 것은 내 탓, 못된 것은 주님 탓’을 외치면서 내 안의 이기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고 계십니다. 이 세 도시는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유명하지요. 그런데도 그들이 변화되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이기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지금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시는데, 이에 반해 나는 얼마나 변화되고 있을까요?


주님께 모두 맡기세요.


양심적인 거래의 대가('좋은생각' 중에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사업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스튜어드. 그가 백화점을 운영할 때다. 그는 점원들에게 정직을 가르치며 언제나 손님들이 믿음을 갖고 거래할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어느 날, 스튜어드는 점원들에게 새 상품에 대해 보고 느낀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해 보라고 했다. 나이든 점원이 먼저 말했다. "기존 상품에 비해 별로 신통한 점이 없는데도 가격만 비싸졌습니다." 누구 하나 새 상품이 좋다는 점원은 없었다.

이때 중년 손님 한 분이 들어왔다. 손님은 새로 들어온 상품이 없는가를 살폈다. 그러자 한 젊은 점원이 새 상품을 내밀며 말했다. "신상품으로 모양도 새롭고 품질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악평을 하던 젊은 점원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손님은 젊은 점원을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꺼냈다.

상황을 지켜보던 스튜어드가 앞으로 나섰다. "손님, 이 상품이 신상품임엔 틀림없지만 방금 점원들과 얘기해 본 결과 훌륭하지 않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이 제품만은 사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손님은 스튜어드의 양심에 감탄하며 돌아갔다.

그날 상점 문을 닫을 무렵, 스튜어드는 젊은 점원을 불렀다. "회계과로 가 보게. 자네에게 줄 마지막 봉급이 준비되어 있을 걸세. 좋지 않은 상품을 좋다고 파는 사람은 우리 백화점에 전혀 필요가 없네." 스튜어드는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고객을 속이는 일을 가장 경계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정직과 믿음을 고객에게 판 대가로 그는 성공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느님의 자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너희를’이 꼭 예수님의 당대 제자들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볼 때 이 구절의 영적 의미는 더욱 풍부해집니다. 

우리와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이 단절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열매를 잡아당기면 줄기에 이어 뿌리가 뽑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기서 열매가 우리들이라면 가지는 그리스도요 뿌리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이치가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됩니다. 

인간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막연히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건강한 신비주의입니다. 

이웃을 물리치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에 이어 하느님을 물리치는 일이 될 수 있다니 이웃들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지요. 하여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서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형제들을 통해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몰라뵙고 얼마나 소홀히 사람들을 대했겠는지요? 새삼 우리의 이중 배경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자녀가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러니 이런 배경이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생각하면 함부로 처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김경숙 수녀님

오늘 복음은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을 향한 경고다. 예수께서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펴 주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예수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이들을 꾸짖는 말씀이다. 

믿음은 감사다. 생활하면서 늘 칭찬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좋은 일을 하고도 감사는커녕 오히려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주님께 부르짖는다. “주님,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나 역시 반성하게 된다. 마음이 나 자신으로 꽉 차 있어 믿음이 상실되지는 않았는지, 받은 은혜에 대해 정말 감사드리고 있는지, 혹 수도자로 선택받았다고 해서 바리사이처럼 자만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은혜를 인정한다면 정말 겸손하게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소년의 집 출신으로 구성된 재부동문회에서 일흔다섯 분의 수녀님을 점심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식당에 들어가니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잘생긴 아들딸들이 다가와 수녀님들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동문회 회원들은 수녀님들과 함께 지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절을 올렸고,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도 전해 주었다. 그날 그들은 우리 수녀님들을 예수님 대하듯이 맞이했다. 

은혜를 아는 사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백하는 예언자 바룩

경규봉 신부님

바룩(‘축복받은 이’라는 뜻)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비서요 친구이며, 동시에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었다. 그는 유다의 명문 출신으로서 마아세야의 손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이며(1,1), 그의 동기 스라야는 시드키야 임금의 재무대신이었다(예레 51,59). 


바룩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파괴에 관하여 전한 신탁을 글로 적어 유다 임금 여호야킴에게 전달하였다(예레 36,1-21). 그러나 여호야킴은 그 두루마리를 칼로 한 조각 한 조각 베어 불에 살라버렸다. 그러자 바룩은 그 내용을 더 늘린 신탁의 두루마리를 새로 만들었다(예레 36,27-32). 그 다음에 바룩은 호사야의 아들 아자리야에게 친 바빌론파로 몰려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끌려갔고(예레 43,1-7),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 독서는 바룩이 드리는 참회기도 가운데 죄를 고백하는 부분이다(1,15 - 2,10). 정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자신들이 당하는 재난과 저주는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이며, 자신들의 마음이 악하여 다른 잡신을 섬기고 하느님 뜻에 어긋난 일을 행하며 자신들 생각대로 살았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죄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곧 죄이다.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그리고 죄의 결과 인간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며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창세기 3장은 이러한 죄에 대하여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그들도 그 열매를 따먹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열매를 따먹지 않기 위하여 열매를 만지지도 않으려고 굳게 결심하였다(3,3).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은 후에 그 열매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진 후에 그 열매를 바라보니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3,6) 보였다. 자신의 생각이 달라진 후 바라본 열매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열매였던 것이다. 생각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진다. 그래서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따주었다. 


사실 열매 하나 따먹은 것이 어떻게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고, 그것까지도 죄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정말 쩨쩨하신 분이 아니신가? 너무 야속하지 않은가? 그런데 대부분의 문제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악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하와는 비록 열매 하나를 따먹었지만, 카인은 친동생을 죽이지 않았는가? 더욱이 중요한 것은 열매 하나를 따먹었다는 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랐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열매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바라본 열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울 정도로 탐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길 정도로 자신의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통과 죽음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열매를 따먹는 것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자신의 생각대로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죄일 수밖에 없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예언자 바룩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순종하지 않은 대가로 재난과 저주를 당했음을 고백한다.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이 죄이며, 그 대가가 너무나도 큰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고 따르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자




종이 되기보다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우리

박규환 신부님

사진에서만 바라보던 아름다운 에머랄드 빛 해변과 야자수 그늘. 이번 휴가로 인해 저 역시 그 그림 속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습니다. 


로만 칼라를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로만 칼라를 하고서 찍은 여권의 증명 사진, 입국 신고서에 적힌 Priest, Father(=사제)라는 신분과 괌 한인 성당 방문이라는 여행 목적. 이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사제임을 알 것인데, 다른 국가도 아닌 가톨릭 국가인 괌에서 세관 검사를 받다니, 사제에 대한 특별한 예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세관원으로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내심 마음은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무어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뭐라 해봤자 나만 구차해질 뿐이지. "볼 때면 봐라. 뭐 특별한 것도 없다"라는 마음으로 세관 조사를 받았습니다. 


공항 밖에서 저를 기다리던 이들은 "이런 적이 없는데 액땜했다고 치십시오. 그 놈들이 뭘 잘못 먹었나 봅니다. 여행 첫날 기분은 나쁘시겠지만 빨리 잊으셔야지 그것 때문에 여행을 망칠 수야 있겠습니까!"라며 위안의 한 마디를 건넸습니다. 


새벽녘 숙소에 짐을 풀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첫 해외 여행으로 인한 설레임 때문인지, 세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인지!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다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성서를 발견하고 집어들었습니다. 그 때 "불행하다. 너 코라진아! 불행하다. 너 베싸이다야! 사실 너희 가운데서 행한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벌써 가루와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너 가파르나움아. 하늘에라도 오를 성싶으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이 제 가슴 한편에 송곳과 같이 예리하게 다가왔습니다. 


코아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 이 도시들은 왜 불행할 수밖에 없었는가! 예수님께서 다른 어느 도시에서보다 많은 기적을 보여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셨건만 자기 도취와 오만에 빠져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외면하였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단 말인가! 


사제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나는 사제직을 선택하였는가! 사람들로부터 예우를 받고자 이 길을 선택하였는가! 아니면 만민의 종,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고자 이 길을 선택하였는가! 세관에서 검사를 받았다는 것이, 사제의 신분을 알아봐 주지 못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인가! 그렇다면 세관 검사를 받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기 도취와 오만을 던져버리고 그 무엇을 위해 사제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금 생각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참으로 다양하고도 기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세관 조사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기 도취와 오만에 빠져 허우덕 거리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해 주셨습니다. 신분과 지위, 과거에 행했던 활동과 업적 이러한 것들이 구원을 보증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요, 오늘의 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얽메여 오늘을 살아간다면 성숙됨이 아닌 퇴보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모습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 나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주님! 종이 되기보다는 주인이 되고자 했던 저의 모습을 용서해주십시오. 자기 도취와 오만함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항상 첫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저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 회개해야 한다.

김병환 신부님

예수께서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 대해서 저주의 말씀을 하신다. 이 도시들은 지금은 없어져 그 위치 또한 분명하지 않지만 갈릴래아 호숫가 북쪽에 있었던 큰 도시로 전해진다. 이들 도시는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몹시 배척하였다.


코라진은 어떤 도시인가? 코라진은 가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4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으로 전해진다. 코라진은 그 페허가 큰 것으로 보아 당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이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베싸이다는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갈릴래아 호숫가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또한 베싸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고향이며 필립보의 고향(요한 1,44)이기도 하고 야고보와 요한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이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마르 1,29)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베싸이다는 분명 가파르나움 근처 어느 곳이라고 생각된다. 이곳 역시 예수께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숫가 북단에 있었던 도시로 복음서에서, 특히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도시의 하나였다. 가파르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이 있었으며 예수께서 참으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전해진다. 악령들린 사람과 중풍병자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마르 1,21-­34), 베싸이다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이곳으로 오셔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신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예수님 전도 중심지로 예수님의 고향과 같은 도시이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곳 도시에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여 하느님의 신성과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많은 기적을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들쓰고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결코 코라진과 베씨이다와 가파르나움과 같은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예수입니다.

강영구 신부님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멀리서 억새 소식과 단풍 소식도 들립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저를 생각하시듯이 나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반성합니다. 

예수님의 동체일신행(同體一身行)은 철저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분신(分身)이나 또 다른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제자인 우리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1요한3,16) 하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3,26)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의 말씀을 삶의 길잡이로 삼고, 

그분의 몸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요한6,53-57) 받아먹는 우리는 틀림없이 제2의 예수입니다. 

이웃과 형제들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어찌 우리가 경망스럽게 함부로 말하고 처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예수입니다.(一明)





하느님께서 여러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창조된 모습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새가 하느님을 찾아 왔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하느님, 불공평합니다. 뱀은 독이 있고, 사자는 이빨이 있고, 말에게는 말굽이 있어서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데, 우리 새들은 아무것도 없이 당하기만 합니다. 우리에게도 뭔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을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도 생각해보시니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그래서 새가 가지고 있었던 손을 날개로 만들어 주셨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새가 하느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새로 만들어주신 이 날개 때문에 너문 무거워서 전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고, 손으로 하던 일을 입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더 불편해졌습니다. 왜 날개를 만들어서 저희를 더 힘들게 하십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호통을 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리석은 새야! 너에게 준 날개는 지고 다니라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늘을 높이 날아올라 적으로부터 피하라고 준 것이다.”


새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날개의 사용법을 몰랐던 것이지요. 단순히 내게 주어진 하나의 짐으로만 생각했기에, 그 사용법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바로 지금 내게 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끔 했던 것들이 바로 내가 하늘을 날아오르도록 하는 날개가 아니었을까요?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 안에서 잘 살 수 있도록 ‘날개’를 만들어주셨는데, 우리들은 그 사용법을 잘 몰라서 불평과 불만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우리들의 잘못된 판단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질책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질책은 단 두 가지의 경우뿐입니다.

하나는 위선을 일삼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질책하셨지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많은 은혜를 입고도 배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이번 경우는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베푸셨고 또한 그런 은혜를 받은 만큼 자신의 이웃을 위해서 그 사랑을 쏟아 부으라고 했건만, 갈릴래아의 유명한 도시인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세 도시는 랍비들의 종교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만과 자기도취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했던 것이지요. 즉, 날개를 달아주었으나 그들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요? 주님께 달아주신 날개를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나요?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주신 그 날개의 효과를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게 주어진 날개는 과연 무엇일까요? 찾아봅시다.


내 향기로운 삶을 위하여('좋은 글' 중에서)

커피처럼 들꽃처럼

향기로운 이야기를 아름답게 쓸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때묻지 않는

순수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혹은 남들이 바보 같다고 놀려도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듯 미소 지으며

삶에 여유를 가지고 살고싶다.


살아가면서

하루 하루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톱니바퀴에서

행여 튕겨 나갈까 맘졸이며

그렇게 사는건 싫다.


조금은 모자라도 욕심없이..

아무 욕심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속에서 언제나 음악이 흐르고

마음속에서 언제나 아름다운 언어가 흘러나오고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가진 것 넉넉하지 않아도

마음은 부자가 될 수 있을텐데..


버리며 살게 하소서..

무소유로 모든 집착을 놓게 하소서..




웰빙 신앙

조성풍 신부님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3D’와 연관된 직업이나, ‘3고’와 관련된 질병을 얻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럽고(Dirty), 위험하고(Dangerous), 어려운(Difficult) 직업은 피하고 싶어합니다. 

또 고혈압, 고지혈, 그리고 고혈당과 연관된 질병은 꺼려합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운동과 식생활을 하느냐에 높은 관심들이 쏠리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웰빙의 삶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웰빙의 삶은 무엇일까? 웰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앙생활의 웰빙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망애’ 삼 덕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10월 묵주기도 성월에는 웰빙의 신앙생활을 잘 가꾸신 성모님과 더불어 건강한 신앙생활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지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한 세상 살아오시면서 가장 큰 당혹감, 좌절, 슬픔, 배신감...등등을 느낄 때가 어떤 순간이었습니까?


믿었던 친구로부터 꽤 큰 ‘거금’을 떼였을 때, 그래서 가계가 휘청했을 때, 엄청 속상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또 마음 크게 먹으면서 천천히 넘겨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심사숙고 끝에 시작한 사업, 심혈을 기울여서 시작한 사업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난관에 부딪치고, 내리막길로 접어들 때,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려니, 값비싼 경험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한 교통사고, 그로 인한 장기간의 입원,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많이 아프겠지만, 세월과 더불어 치유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사별,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며 슬픔이겠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보십시오. 그가 떠나고 없는 이 세상, 당장 죽을 것만 같았는데, 숨도 못 쉴 것 만 같았는데, 다 지나갑니다. 고인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어느새 우리 삶은 자연스럽게도 원상 복귀됩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했던 사람, 그래서 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으로부터의 철저한 ‘배신’, ‘등 돌림’ ‘실연’,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정녕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 상처, 그 아픔은 평생 가슴에 맺혀 잊혀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잊기 위해, 새 출발하기 위해 일부로 씩씩해지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지만, 그 서글픔 그 배신감, 그 참담함은 쉽게 씻어지지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이란 도시를 향해 신랄한 어조로 질책하십니다. 도를 넘어설 정도로 악담을 퍼부으십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심하게 가파르나움을 몰아붙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이란 도시를 각별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진한 애정의 표현으로 자주 가파르나움에 들르셨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다른 도시에서보다 훨씬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을 애지중지하셨습니다. 애틋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도시 가파르나움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열렬한 사랑을 차가운 눈길로 외면했습니다. 그 간절한 사랑의 시선에 자신들의 눈길을 맞추지 않고 등을 돌렸습니다.

가장 풍성한 은총을 입은 가파르나움이었지만 감사와 찬미, 기쁨에 찬 응답을 한 것이 아니라 냉랭한 얼굴로 돌아섰습니다. 끝까지 그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철철 흘러넘치는 애절한 사랑과 은총을 끝끝내 거절하는 가파르나움이었기에 마침내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넘치도록 큰 은총을 끊임없이 보내주고 계십니다.

‘은총은 무슨 은총?’하시겠지만, 우리의 눈과 귀가 좀 더 맑아지고 밝아질 때,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을 받고 살아왔는지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지나온 모든 세월은 한 마디로 은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었습니다. 고통도, 상처도, 아픔도, 눈물도, 십자가도 모두가 은총이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은총, 우리를 보다 큰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 그 은총을 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진지하게 한번 헤아려보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불행하여라(루가 10,13-16)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베싸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마치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의 회개를 위해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마치 부모가 매일 술이나 마시고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식에게 "이제 제발 정신차려라. 너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 말은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요, 안타까움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이듯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그 화를 끼친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 16-17)라고 말씀했지만 아담과 에와는 그 말을 듣지 과일을 따 먹었다. 그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고통을 겪고 죽어야 했다. 하느님은 이런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런 희생을 치루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담과 에와가 야훼 하느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행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나의 부모가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까지 불행해진다. 즉 고통을 겪게 된다. 한편 내가 회개하면 나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개로 받는 축복이 나만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내 주위에 있는 분들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복을 받는다.

다음 글은 지난번 서울 주보에 실린 신달자 시인의 글이다.

- "나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게 하자 학생들은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인데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는 기색도 보였지만 아버지라는 말에 긴장의 표정이 비치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가까우면서 멀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모르는 관계가 아버지일 것입니다. 시를 가르치는 저는 적어도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아들을 속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자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알아 가는 것은 문학의 출발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아버지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게 하는 일이 제 역할이어서 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솔하면서도 눈물겹게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좌절한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눈물 많은 아버지, 병든 아버지, 꿈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속 시원히 풀어 본 적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 직장에서 물러나 가족의 눈치만 살피는 비겁한 아버지, 그리고 50대에 기가 꺾여 열등감으로 불화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일으켜 주세요.' 하나같이 학생들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 하고 미워하면서도 깊은 애정으로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위엄을 지니고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과 가족을 압도하던 사나이는 어디 있는지... 아닙니다. 어느 때고 이 땅의 남자와 아버지는 고독하고 슬펐습니다. 중학생 때 저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고 더 그리울 게 없는 당당한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행복한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늘 아쉽게 기다리고 때때로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허약한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내 문학의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척추가 허물어진 이 땅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일으켜 주시기를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계속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의 길 거리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4번이나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즉 물리침으로써 정말 내가 불행해지는지 그리고 그 불행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되는지 어디 한 번 4 번 말씀을 물리쳐 보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책하시는 주님의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욥에게 우주만물의 세계와 인간의 이치,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지 묻습니다(욥기 38,12-21). 그러자 욥은 보잘것없는 자신이 대답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40,4). 욥은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겸손한 자세로 고백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줌에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향하여 불행하다고 선언하시며 질책하십니다(루카 10,13). 회개하지 않는 카파르나움 주민들에게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 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10,15).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질책하신 것은 멸망을 바라셔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셔서 안타까운 나머지 강한 ‘사랑의 경고’를 하신 것이지요. 겸손하게 회개하여 자비의 나라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초대인 셈입니다. 


서방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인 예로니모 성인은 탁월한 성서학자요 수덕가이며 영성상담가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저술가이도 합니다. 그는 늘 악과 불의와 거짓을 단호히 거부하고 선과 정의와 진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강하고 솔직했습니다. 빨리 화를 내는 성격이었지만 곧바로 후회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더 엄격함으로써 겸손하게 주님 앞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찾기도 전에 다가와 사랑으로 함께 하시고, 좋은 것을 끊임없이 주고 계시지요. 나의 생명, 건강, 재능, 시간, 가족과 공동체, 신앙, 하느님의 말씀, 아름다운 자연,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순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지 않은 채 무심코 지나쳐버리곤 합니다. 


문제는 무딘 마음, 중심성과 방향감각의 상실,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물질에 길들여지는 익숙함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의식과 양심,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면 주님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삶의 중심과 방향이 사랑이신 주님이 아닌 나 자신과 세상이 되어버릴 때, 무엇을 하든 내 인생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릴 것입니다. 물질세계와 감각세계에 익숙해져가면 갈수록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을 알아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가을의 모퉁이,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벤치에 앉아 지금껏 알게 모르게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돌과 같은 굳은 마음을 내려놓고 영의 감각, 깨어 있는 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면 합니다. 주인인양 착각하며 방향을 잃고 헤매던 나를 바라보며, 가을 잎새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 교향곡을 연주해보아야겠습니다. 일상의 익숙함에 젖어 본성을 따라가는 발걸음을 멈추어 창조의 새로움에 자신을 던져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당신 사랑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만의 길을 걷는 나를 향하여 안타까운 사랑의 질책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님을 끌어안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을 맞곤 하는 나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요, 주어지는 모든 것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임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선과 사랑과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기억하고, 마음을 열고 주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주님께 되돌아가는 기쁜 회개의 날이길 희망합니다. 




자비만을 청할 수밖에 없는 존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워싱턴 주 클라이드 힐 마을에서는 동전 던지기를 통해 시장을 선출한 적이 있습니다. 선거 결과 두 후보의 표가 모두 576표씩 똑같이 나오자 선거관리 위원회는 동전을 던져 결정을 내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유권자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항의를 해왔습니다. 그때 선거관리 위원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한 사람, 단 한사람만 더 투표에 참가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전부의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동전던지기를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려주기 위해 욥이 등장한 것입니다. 욥은 하느님 앞에 그보다 더 온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의인입니다. 그렇지만 그도 자녀와 재물, 자신의 건강과 명예까지 모두 잃게 되니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또 자신에게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지만,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도대체 왜”라고 하느님께 따지듯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욥에게 따지듯이 물으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고, 바다의 심연을 살펴본 적이 있느냐고, 빛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대화상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오늘 독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왜’라는 질문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욥도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전에 시골에 살 때 개를 목욕시키려고 하는데 목욕을 거부하며 몸을 털어서 온 비눗물이 몸에 튄 적이 있었습니다. 개들은 사람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매번 무언가를 해야 할 때 왜 그래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와 사람의 관계보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를 만들 수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만큼 능력의 차이도 크고 생각의 차이도 큽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이 나에게 왜 이러시느냐고 따질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강길웅 신부님이 평화방송에서 한 강연내용을 옮겨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어떤 방송 인터뷰를 하셨어요. 평화방송인가? 그때 마지막으로 기자가 물었어요.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습니까?" 그러니까 김수환 추기경님이 당신은 ”하느님의 자비 밖에 청할 것이 없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 그때 좀 제가 대답이 싱겁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민주화를 위해서, 또 우리 교회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하셨는데 왜 대답이 그것 밖에 없을까?

그런데 제가 어느 날 소나무를 옮겨 심으면서 그분 말씀의 뜻을 깨달았어요. 피정 집에 있을 때 소나무 세 그루를 이렇게 옮겨 심는데, 큰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제 포그레인이 산에서 떠 가지고 오는데 전선을 피하기 위해서 들고는 못 오고, 그냥 길로 다 던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흙이 다 떨어졌죠. 그 소나무 흙 붙여도 살리기 어려운데 세 나무가 다 흙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버리라고 그래요. 안 산다고 이래요.

그런데 저는 포크레인 값도 있잖아요. 억울하죠. 산 임자한테 허락을 받고 얻었는데, 그래 나도 모르게 “하느님, 저 소나무 좀 살려주세요!” 하는데 하느님이 아 그때 그러시는 거예요. “니가 잘 한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대 봐라. 내가 그걸 보고 살려주겠다. 얼른 말해!” 이러시는 데, ... 없어요. 정말. 얼른 말하라고 하는데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밖에 청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추기경님이 하신 것을 내가 알고 이해하게 됐는데, 소나무는 3년이 넘은 지금까지 잘 살고 있어요.


성전에서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드릴 말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뒤에 숨어서 머리도 못 들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한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영성이 깊어지면 주님 앞에서 할 말이 줄어듭니다. 내가 한 모든 일들이 주님은 먼지로도 그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해 내실 수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느님의 크심을 깨달아 그분의 자비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을 되뇌는 기도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명까지도 오늘 가져가신다고 해도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그분의 자비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서 강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기차표를 예매했지만, 철도 노조의 파업으로 예매한 기차가 운행을 정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고속버스를 예매하였습니다. 명동에서 고속터미널로 가는 길에 지하철을 한참 기다렸습니다. 전역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고, 문제가 해결되는 동안 20분 정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버스 출발 전에 도착해서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철도, 금용, 의료’ 분야에서 파업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과 연봉제’가 도입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과를 내는 사람은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연봉이 삭감될 수도 있는 제도인 것 같습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제도 일 것입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고 이윤을 많이 창출하는 직원에게 더 많은 급여를 주고, 이윤을 내지 못하는 직원은 급여를 적게 주거나, 해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성과에 대한 압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 편법과 불법을 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 급급하면 먼 미래를 향한 투자나, 연구가 퇴보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에 해고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에는 ‘두개의 깃발’이라는 묵상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탐욕, 욕망,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명예, 권력, 재물이라는 바벨탑을 높이 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양심을 팔아버리고, 친구를 속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화려한 것 같지만 위험한 깃발입니다. 모래 위에 세운 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과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깃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을 택하기도 하고, 아픈 것도 받아들이고,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들과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재물을 쌓으려 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뉴턴의 물리학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위에 현대의 산업, 자본, 문화가 꽃을 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뉴턴의 물리학으로 규정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관찰자의 생각에 따라서 관찰대상이 변한다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뉴턴의 물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현상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윤과 성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섬김과 나눔’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생각하면서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고 싶습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 같지가 않습니다. 즉,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나와 다른 말과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면서 도저히 이 세상을 같이 살 수 없다면서 멀리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피하게 되면 또 다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전의 사람보다 더 심한 사람을 만나서 더 큰 고생을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나와 다른 사람 천지니까요.


종종 본당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너무나 이상하다면서 어쩌면 이럴 수 있냐고 흥분하십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미사도 엉터리라면서 참석하기 싫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어떤 본당에 신부님께서 강론이 너무 긴 것 때문에 신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계속해서 건의를 했고 심지어 교구청에 투서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강론을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서 강론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것이었지요. 다음 정기 인사이동 때 새로운 신부님께서 부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강론이 5분을 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좋아했지요. 하지만 얼마 뒤에는 신부님이 강론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론이 짧다며 불만이 가득합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으면 엉터리 미사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제의 강론 역시 헛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사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미사를 집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맞지 않다면서 엉터리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이 틀렸고, 주님이 엉터리라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곧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말 역시 듣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서품을 받은 사제의 미사와 강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사제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종종 봅니다. 사제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 그런 판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또 다른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해하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돕고, 도우면 모두가 산다(로렌스 베인즈).


낙서 소동(‘좋은 생각’ 중에서)

2005년 다보스 세계 경제 포럼 회의에서 생긴 일이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앉았던 자리에서 낙서 한 장이 발견되었다. 동그라미, 삼각형, 사각형 등 도형에 부채탕감, 말라리아, G(지)8 같은 단어가 어지럽게 적혔다.

영국 조간신문 ‘데일리 미러’ 기자는 이 종이를 심리학자에게 가져갔다. 그는 “삼각형을 겹쳐 그린 것은 블레어 총리가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는 증거다. D(디)를 P(피)처럼 늘여 쓴 것은 반대파의 비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공격적 성향이 드러난다.”라고 분석했다. 영국 언론은 총리가 토론 중에 딴생각을 했다며 연일 기사를 냈다.

이에 질세라 ‘인디펜던트’는 특별 연구 팀을 고용했다. 그런 뒤 “동그라미 끝이 완벽히 맞물리지 않은 것을 보아 그는 신앙심이 얕고 타고난 지도자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후, 낙서는 블레어 총리 옆에 앉았던 빌 게이츠 것임이 밝혀졌다. 블레어 총리 대변인은 “총리의 글씨가 맞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집중을 못한다거나 지도자감이 아니라는 분석 결과를 빌 게이츠에겐 어떻게 적용할지 즐겁게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빌 게이츠의 필적이 맞다고 확인했으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성공한 기업인이자 컴퓨터 천재를 난타한 영국 언론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남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모습으로 비판받게 되기 때문이지요.




말씀과 회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이, 기도가, 미사가 없으면 ‘살 수 없기에’, 우리는 ‘살기위하여’ 매일, 날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말씀과 회개’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입니다. 


바로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란 말과 직결됩니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교황 대 그레고리오와 함께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예로니모 성인입니다. 4대 교부의 공통적 특징도 모두 ‘말씀의 대가’라는 것이며, 모두 4-6세기에 걸쳐 하느님이 교회에 보내주신 위대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그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말씀에 대해 그처럼 박학다식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입니다. 네 분 다 평생 말씀을 공부한 것만 아니라 말씀을 가르쳤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 수 뿐이 없었습니다. 특히 오늘 축일을 지내는 예로니모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성인도 없을 것입니다. 유난히 심술궂고,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성격도 참으로 까칠하고 괴팍했던 분이라 적들도 많았고 생전 미사 한 번 봉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하느님 사랑과 평생 동안 성서 연구는 아우구스티노를 제외한 어느 누구의 추종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새삼 성덕의 잣대는 착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평생 말씀을 공부하고 살았던 평생 말씀의 학인들인 위 성인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말씀 사랑으로 이어지고 말씀은 회개를 촉발시키기 마련입니다. 새삼 말씀과 회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욥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욥 또한 말씀의 대가였음을 그를 방문한 친구들과의 주고받는 문답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가 혹독한 시련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말씀과 믿음의 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과연 욥은 하느님의 자부심이자 우리의 자부심이라 할 만합니다. 끝까지 자기와의 싸움을, 믿음의 싸움을 훌륭히 수행한 진짜 사람 욥입니다. 저는 감히 ‘하느님과 맞장을 뜬 사나이’ 믿음의 사람, 욥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정말 자랑스런 욥입니다. 끝까지 혹독한 시련에 무너지지 않고 말씀과 믿음으로 직면하면서 시련을 통과한, 제자리를 지켜낸 위대한 욥입니다.


오늘은 욥기의 마지막 부분은 ‘하느님과 욥의 대결’입니다. 마침내 시련의 끝자락에서 평생 경외해왔던 하느님을 만나는 감격적 순간입니다. 일방적으로 계속적으로 욥을 추궁하면서 싸우는 하느님이 재미있습니다. 욥과 싸우는 하느님이 유치해 보이지만 참 귀엽고(?) 매력적이고 호감이 갑니다. 그토록 하느님은 욥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시작하여,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네가 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마지막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친히 말씀수업을 단단히 받는 욥입니다. 마침내 폭포수 처럼 쏟아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회개한 욥은 무조건 백기를 들고 겸손히 항복합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겸손한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를 촉발시킨 하느님 말씀의 위력입니다. 말씀에 대한 회개의 응답입니다. 오늘 화답송,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에 이어지는 시편은 그대로 하느님의 엄위함을 체험한 욥의 겸손한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욥에 대한 주석이 깊고 아름다워 인용합니다.


“우리 주변이나 세상에는 욥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장구한 세월 동안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대부분 신비로 남아있다. 우리는 왜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계속되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지혜를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답은 그분은 진리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이라는 확신뿐이다. 무질서와 혼돈, 폭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상은 진리Truth와 사랑Love과 아름다움Beauty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 홉킨스는 말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위대함으로 가득차 있다. 사물의 밑바닥에는 가장 깊은 새로움이 있다.’ 주님, 우리도 볼 수 있게 하소서.”


요즘 가을 수확되는 배열매들 역시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노력의 산물입니다. 수사님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의 비율을 물었더니 70%대 30%라 했습니다. 제 강론 역시 70%는 은총, 30%는 노력으로 하느님과 저의 합동 노력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한 이런 깨달음입니다.


오늘 복음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처럼 많은 말씀선포와 기적을 통해 공을 들였는데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우리의 일상 모두를 통해서 들려오는 말씀들은 모두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의 말씀이자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천사의 양식’인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 모두 회개하여 천사와 같은 삶을, 바로 하느님 찬미의 삶, 하느님 심부름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불행하여라!

권혁주 주교님

의정부교구가 교구 설정 10주년을 앞두고 ‘신자들의 신앙의식과 신앙생활’ 실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조사 결과는 의정부교구뿐 아니라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기에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묻는 물음에 ‘건강’을 꼽은 신자가 43.5퍼센트로, ‘종교’라고 응답한 신자(15.6퍼센트)의 세 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법이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겠는가?’라는 물음에 신자 네 명 중 한 명꼴인 25.3퍼센트의 신자만이 ‘전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것이다.’라고 응답해 복음과는 유리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현재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세대가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향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왜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보고 불행하다고 선언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거기서 무슨 기적들을 행하셨기에 티로와 시돈에서 그런 기적들을 행하셨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접근성이 좋아 많은 사람이 자주 왕래했으며 경제적으로도 흥성했기에, 당연히 예수님도 자주 이곳을 찾으셨으며 복음도 직접 전하셨고 수많은 기적도 베푸셨습니다. 이방인의 도시 티로와 시돈이 받지 못한 혜택을 그들은 너무나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집중해서 직접 복음을 전한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득권과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와 지식과 명예에 눈이 가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불행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선언은 단순한 저주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행을 면하려거든 회개하여 ‘어서 돌아오라.’는 깊은 탄식의 말씀입니다. “어서 돌아오라, 너 코라진아! 어서 돌아오라, 너 벳사이다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 말씀의 뜻은,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제자들이 전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이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이 멸망당하지 않도록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제대로(자기가 받은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서 나온 의견을 덧붙여도 안 되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삭제해도 안 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묵시 22,18-19)."

묵시록에 나오는 이 말은 묵시록의 내용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에도 적용되는 대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백 퍼센트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바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주신 것처럼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 1,7)."

이 말씀에는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나 말하면 안 된다."라는 뜻도 들어 있는데, 예언뿐만 아니라 복음 선포에도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누가 전하든지 똑같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7-9)."

천사가 복음을 왜곡하는 일은 실제로는 없겠지만, 바오로 사도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복음에 대한 권한은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천사라고 해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에는 이미 저주를 받은 존재인 사탄이 복음을 왜곡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는 암시가 들어 있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왜곡되는 경우를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복음을 전할 때 '말'로 왜곡하는 경우. 이것은 원래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보통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2) 복음 해석을 잘못하는 경우.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복음 자체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수히 많은 종파로 분열된 주요 원인입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과 '삶'이 다른 경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은 잘했는데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 23,3).

'말'과 '삶'이 다르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말'을 거짓말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 정신대로 살아야 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4)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도 복음을 왜곡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믿음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악(惡)에 대해서 '그것은 악이다.' 라고 말하는 것도 복음 선포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이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죄입니다.




하늘까지 오를 것처럼

이명호 신부님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마을이었습니다. 더욱이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던 고장(마태 9,1)으로 예수님 활동의 집중 무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으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놀라운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고장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에 따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항구도시로 많은 문물이 오가며 물질적 풍요를 누렸고 발달된 문화로 번창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속성장하는 경제와 문화가 ‘하늘까지 오를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의 성장 뒤편에 있는 세리와 창녀와 가난한 이들의 신음이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경제성장률은 떨어지고 실업률은 올라가며 살림살이는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가요? 중상위 계층의 사람들은 별다른 어려움없이 여전히 쓸건 다 쓰고, 놀건 다 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경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는 서민’이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서민의 살림살이가 전체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뒤편에 있는 세리와 창녀와 가난한 이들이 먼저 회개하고 있음을 늘 주목하십니다. 그들과 무관한 삶을 살다가는 우리에게도 저주와 같은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릅니다.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하느님의 자녀>

송영진 모세 신부님

10월 5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마을들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마을들인데,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지역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도 많았고,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할 기회도 많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세 곳만 특별히 따로 선별해서 꾸짖으셨다고 보기는 어렵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전체, 또는 유대인 전체를 꾸짖으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도시인 예루살렘을 꾸짖으시면 될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예루살렘을 여러 번 꾸짖으시면서 멸망을 예고하십니다(루카 13,34-35 ; 19,41-44 ; 21,20-24).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현재 상황에서 갈릴래아를 대표하는 마을들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언급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10월 5일의 복음 말씀을 '더 많은 은총을 받았으니 더 많이 회개해야 한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차별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베풀어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은 받은 은총을 모르고 있고, 하느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받은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 당연히 받은 은총에 대해 응답을 해야 하는데,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 바로 회개입니다.

또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다른 곳보다 더 예뻐했는데 그들이 더 속을 썩여서 예수님께서 서운해 하신 것으로(삐치신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특정 지역을 편애하신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무슨 대가를 바라고 복음을 전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정은 '서운함'이 아니라 '안타까움'입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

이 구절에서 '너의 자녀들'은 예루살렘의 자녀들, 즉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자녀답게 살지 않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듯, 당신의 자녀들을 모으려고(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회개'란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 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녀답게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면서도 자녀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녀 자격을 잃었고, 하느님을 모르고(안 믿고) 자기들이 자녀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알게 되었고, 회개하게 되었고,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가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자녀들의 빵을 먹으려면 먼저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강아지'는 하느님을 안 믿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회개는 스스로 강아지에서 자녀로 변화하려는 노력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원래는 다 하느님의 자녀였고, 강아지가 아니었는데, 하느님을 안 믿고 우상을 섬김으로써 스스로 강아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원래의 자녀 지위로 회복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자녀라는 것을 망각하고 스스로 강아지가 되어버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는 자녀의 빵을 먹을 수 없습니다.

자녀의 빵을 먹을 수 없다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경고는 이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꾸준히 성실하게 자녀로 살다가 자녀인 채로 생을 마쳐야 진짜 자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다양한 하느님 사랑의 얼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하느님의 사랑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님들의 사랑, 생각해보십시오. 눈물겹습니다. 무모합니다. 일방적입니다. 상처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강도나 크기는 하느님 사랑과 비교하면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입니다.

이토록 충만하고 풍요로운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훨씬 편안해질 것입니다. 한결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 신앙은 한 차원 성숙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개의 얼굴, 만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격려와 지지, 우정과 자비의 얼굴로, 때로 분노와 원망, 질책과 매의 형태로, 때로 재앙과 혼동, 분노와 죽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위로보다는 질책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그런 순간, 하느님의 질책은 무섭도록 신랄합니다. 그러나 꾸짖으시는 하느님은 ‘고생 좀 해봐라!' 하시며 책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 흘리시며 분노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시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코라진과 베싸이다, 카파르나움에게 던지시는 예수님의 독설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번민과 고통과 십자가가 우리 삶에 밀려올 때 마다 놀라지도 마십시오. 낙담하지도 마십시오. 설레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십시오.

단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세상 그 어떤 아버지라도 자기 자녀들의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 일부러 자녀들에게 고통을 받게 합니다. 자녀들에게 아픔을 겪게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녀의 일탈, 자녀의 그릇된 악습, 자녀의 부족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한 단계 성장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가끔씩 우리 인생 역사 안에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십자가를 보내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고통과 십자가 앞에서 도망 다닙니다. 기를 쓰고 회피합니다. 고개를 흔듭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 어떤 고통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은총임을 압니다. 지금 비록 고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분명히 사랑의 표현임을 확신합니다.


고통 앞에서 큰 위안이 되는 진리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도 고통 중에 있는 자녀나 번민하는 자녀를 더욱 아끼며 섬세하게 보살펴줍니다. 세상의 아버지들도 그러한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떠하겠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위로와 더불어 울고 있는 우리,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그의 영광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제 손을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군에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그때 인사계들이 있었는데 계급은 상사였고 대부분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고 어렸을 때 군대에 들어와 제대하지 않고 군대말로 말뚝을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이는 저희 아버지뻘 되었지만 아버지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조금은 다혈질이고 또 조금은 무식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전방 철책 순찰을 하다가 아직 따지 않은 두릅이 많이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자연산 숫두릅은 맛있고 영양도 좋아 값도 비쌌습니다. 인사계와 저는 차를 세우고 그 곳으로 뛰어 내려가 두릅을 열심히 채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한 사병이 우리가 있는 곳이 지뢰밭이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인사계도 그랬습니다. 인사계는 칼을 꺼내더니 땅을 조심스럽게 찌르며 자신이 밟은 곳만 밟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인사계는 칼로 찌르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만을 밟으며 안전한 곳으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저는 인사계의 발만 보며 다른 곳을 밟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를 따랐습니다.

   

사제가 되어 상당히 다양한 성격의 신자들을 만납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동의하지 못하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이 중요하지 사제나 교회가 말하는 것에 굳이 순종할 필요는 없다고도 말합니다.

군대에서는 한 달 먼저 들어와도 그 차이가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밖에서 무엇을 했던 상관없습니다. 군대라면 군대에서 생활했던 경험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일류대를 나와도 고등학교만 나온 선임에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런 경험을 무시하고 자신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한 반박문을 내걸었음에도 교회는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교회가 자신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그 전통적 가르침과 수많은 교회지도자들보다도 더 현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저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오랫동안 믿어왔다면 저들이 내 개인의 생각보다 옳지 않을까?’하는 마음을 가져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교만이란 것이 믿지 못하게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욥기인데 욥의 갈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욥만큼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이 없지만 욥은 자신의 모든 자녀들과 재산과 건강과 아내의 존경, 친구의 우정까지 잃어버립니다. 남은 것이라곤 끈질기게 붙어있는 생명뿐입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합니다. 욥의 아내는 차라리 하느님을 원망하라고 합니다. 욥도 차마 입으로 그 원망을 쏟아놓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느님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욥에게 그렇게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욥의 믿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세상에도 욥을 통해서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도 고통을 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려는 의도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인 우리들은 조금만 안 좋은 일이 벌어져도 하느님의 생각이 우리보다 짧은 것인 양 불평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오늘 욥에게 물어보았던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도 물어보실 것입니다.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는지, 땅을 뒤흔들 수 있는지,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는지,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는지, 죽음의 대문에 가 본 적이 있는지, 빛과 어두움의 자리가 어디인지 등을 말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드셨다면 이런 것들이 대해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 앞에서 욥이 대답한 이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은총임을 믿으며 다만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을 수 없다면 하느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교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모든 교회를 거쳐 간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욥이 하느님께 승복하였듯이 하느님의 섭리에 또 교회의 가르침에 승복할 수 있는 겸손함을 지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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