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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10월 22일 (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10.22|조회수558 목록 댓글 0

제1독서

<한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2.15ㄴ.17-19.20ㄴ-21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5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Vigilant and Faithful Servants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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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며,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의 모습을 통하여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깨어 기다리다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상급을 받으리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불충한 종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만 종말의 근본적인 내용은 만남입니다.지금은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모든 것이 분명하리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그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가장 바라고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종말은 고통과 혼란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런 기쁨을 기다리며 그 희망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겁이 나거나 불안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자신을 축복해 주리라는 기쁨에 차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주인이 종의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머리로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하느님의 커다란 신비와 축복이 드러납니다. 이제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벗이 된 것입니다.이런 맥락에서 내일 복음에서 듣게 될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는 주님의 권고는, 어떤 위협이나 협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무한한 행복에 마음을 활짝 열고 희망 속에 살기를 바라시는 정감 가득한 말씀이며,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시고자 하는 사랑 가득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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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늘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유아기 때는 앞으로 커서 학교에 잘 다닐 수 있도록 부모님께서 우리를 키워 주시고, 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 스스로 어른이 되어서 훌륭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혼인을 하면서는 앞으로 가정을 잘 꾸미고 자녀를 낳아 잘 기를 수 있도록, 또 그 시기가 지나면 노년의 삶이 평안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고 하느님과 만나게 될 영원한 행복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늘 내일을 함께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 있는 삶의 마지막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허무의 대상인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내일의 희망이며, 또한 그날을 준비하여 오늘을 충실히 살아갈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극적입니다.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린 종에게 주인이 내리는 상급입니다. 

종 대신 오히려 띠를 매고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이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평생 동안 내일을 준비하며 날마다 열심히 살아왔고, 주님과 만날 날을 고대하며 열심히 달려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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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학교 1학년 신학원론 시간에 쪽지 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험 범위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한 부분이었고, 여러 문항 가운데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라고 말할 수 있다.”였습니다. 여러분도 맞혀 보세요! 정답은 ‘이면(裏面)’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원죄론과 로마서를 배우고 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출발점으로 하는 원죄 교리는, 인간 본성의 악함을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구원이 필요하고 예수님께서 그 구원을 넘치도록 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점이 바로 바오로 사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가 열렬한 바리사이였을 때에는 스스로 율법을 흠 없이 지키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을 찾지도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오로는 자신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잘 압니다(로마 7장, 금요일 독서 참조). 이 깨달음이 그와 하느님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나의 의로움을 당연히 갚아 주셔야 하는 분이 아니라, 거저 베푸시는 당신의 은총으로 나를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80년이라는 인간의 수명은 당신께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실 그분을 철저하게 신뢰하면서, 그분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받아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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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노예 제도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부유층이 적고 소작농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왕궁에서만 많은 노예를 거느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그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명망이 있으며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주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행복한 이유를 그다음에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정말 기막힌 반전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종을 시중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양반이 가장 낮은 종에게 시중을 듭니다. 가장 높은 이가 가장 낮은 이가 되고, 가장 낮은 이가 가장 높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위하여 시중하실 것을 믿고 희망하며 늘 깨어 기다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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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복음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동한 주인이 종을 챙겨 준다는 내용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삶이 그것일는지요? 

주인은 주님이시고, 종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깨어 있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인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내 뜻과 다를 경우, 내가 놓여 있는 ‘현실’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비탈에서도 잘 삽니다. 뿌리가 강한 탓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도 ‘소나무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바르게’ 살려는 이들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보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시련에서도 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삶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세상 역시 변덕이 심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소나무처럼 언제라도 ‘푸른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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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잠자지 않는다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젠가 하리라 마음먹고 있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언젠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다면 ‘지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와 어울리는 삶입니다. 

시간뿐 아니라 장소에도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몸은 성당에 있는데 마음은 집에 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곳에서는 기도해야 하고, 일하는 곳에서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들을 잡고서 정신은 엉뚱한 데 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앞날을 걱정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룹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장차 다가올 일도 미리 만날 수는 없습니다. 어제는 그랬더라도 오늘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은 현재에 충실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실천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를 향해 남편이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여보, 우리 어떻게? 글쎄 태양이 머지않아 크게 폭발해서 적색거성이 된다네. 그렇게 되면 지구는 전부 불타고 이후에 얼음으로 뒤덮이게 된데.”

아내는 깜짝 놀라면서, 정말로 큰 일이라며 언제 그런 일이 생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말합니다.

“응…. 50억 년 후에!”

이 대답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또 장난치면 태양보다 당신이 먼저 사라진다.”


우리 중에 혹시 50억 년 후를 걱정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100년도 못 사는데 50억 년 후를 걱정하고 있다면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은 멈추지 않으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쓸데없는 걱정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했었지요. 그러나 걱정의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가 쓸모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순간에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걱정을 줄여나가고 미래를 잘 준비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지요. 즉,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언제 어디서 이루어질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이 그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연중무휴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살 준비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육체노동을 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이들은 허리에 띠를 단단하게 맵니다(역도선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래야 자신의 온 힘을 쏟아부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깨어 있음을 의미하지요. 즉, 마음과 육체가 기운차게 깨어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언제나 깨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먼 훗날 힘이 떨어져서 이 세상 힘이 떨어질 때 할 것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이라고 하시지요. 우리가 젊든 늙었든, 누구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준비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붓고, 사랑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등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과 경쟁합니다. 내 목표는 마지막 공연의 성과를 능가하는 것입니다(셀린 디옹).


어느 온천에서...

어느 온천에 갔던 기억 하나가 생각납니다. 그곳의 온천수는 너무나도 유명했습니다. 철분과 무기질이 다량함유되어 있고 물이 나오고서 10분 정도 지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신비한 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특히 피부에 무척 좋아서 옛날부터 피부병 치료에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유명해서 신기한 마음에 방문했습니다. 소문대로 욕조에 받아 놓여 있는 물은 붉은색이었고, 많은 사람이 이 욕조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어떤 분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는 모두 욕조 밖으로 성급히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분의 피부가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이었지요. 피부병 환자로 보이는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니 다른 사람은 모두 인상을 쓰면서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피부병 환자는 입욕할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합니다. 아마 누군가가 직원에게 항의했겠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부병 치료에 좋은 곳이니 피부병 환자가 들어가는 것이 당연할텐데, 정상인인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난리입니다. 피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피부병에 좋은 곳을 이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참지 못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러지 않으셨습니다. 늘 그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셨다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행을 떠나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입니다! '그래 우리네 인생도 여행이로구나!'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걷다보면,때로 조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때로 결코 길지 않은 여행, 마치도 벗꽃 만개한 어느 봄날, 아스라한 하루밤 꿈과도 같은 짧은 여행 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총과 자비로 이 땅에 온 우리는,다들 각자 나름의 여행길을 걷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여행길이 아무리 길어보이고 고단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것입니다.무한 반복되지 않고 이 한번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 여행길의 종착점에는 그토록 우리가 그리워했던,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두 팔 크게 활짝 벌리고 미리 마중나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힘겹고, 때로 포기하고 싶어도,두발에 힘을 주고 기꺼이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왕 걷는 여행길 억지로,갖은 인상 다 쓰며 걷지말고,세상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순간순간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이 여행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강한 폭풍우를 만나거나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어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 마냥 우리를 험난한 비탈길로만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걷다보면 황홀한 일출 광경도 만날 것입니다. 절경 사이로 펼쳐진 평탄한 능선길도 걷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정원같은 꽃길도 만나게 될것입니다.


더욱 은혜로운 일 한 가지! 우리의 인생길은 결코 우리 혼자 걷지 않는다는 것! 때로 자주 잊어먹지만 우리의 여행길에는 인도자 성령께서,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들께서 우리와 함께 걷는다는것은 우리가 굳게 믿어야할 신앙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나혼자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외롭다고 울부짖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초목 우거진 멋진 수목원 산책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가야겠습니다.


내일은 또 어떤 길로 나를 안내하실까...흥미진진한 얼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왕 걷는 길,잘 꽃단장하고 걸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중충하고 심란한 모습이 아니라 허리에는 띠를 매고 등불을 켜서 손에 들라고 하십니다.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우리네 인생길 적당히 흥청망청 낭비하며 보내지말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더할나위없이 충만한 모습으로 엮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일 때 잠자고 있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제가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을 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신혼 때부터 이렇게 잔소리를 하면 갈수록 더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앞이 막막했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보좌신부일 때 꾼 꿈입니다. 눈을 떴을 때 주위를 둘러보고 사제관인 것을 알았습니다. 눈뜨자마자 감사기도를 그렇게 절실히 드려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주님, 제가 사제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종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이 힘들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혼은 나의 선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의 종이 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가기 싫은 직장도 억지로 가야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었을 때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임을 다시 알게 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다 보니 제가 꾸었던 꿈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꿈이었지만 많은 분들에겐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살지만 실제로는 사람에 휘둘리고 현실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삶은 깨어있지만 잠을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살지 말고 당신을 주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잠에서 깨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내 생명을 만든 적도 없고 내 존재가 생겨나게 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생명을 부모님이 만들어준 것도 아닙니다. 부모님은 나의 눈 하나도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내가 주인인 것처럼 살면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참 나의 창조자를 만나 창조자의 의도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반 대학교 다닐 때 이런 꿈도 꾸었습니다. 제가 사막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푹푹 빠지는 모래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래 언덕을 오르고 있었는데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저를 부축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 편안한 마음이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더니 아는 여자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이것은 분명 하느님의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사귀고 결혼하였습니다. 허망한 꿈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이 허망한 꿈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살면 안 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혼자 판단하고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류에 빠져 고생만 하며 살다가 하나도 남지 않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임을 믿게 될 때 참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자신이 주님의 종으로 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그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이런 깨어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여기며 산 이들에게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당신을 참 아버지요 주님으로 인정한 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며 살지 맙시다. 나는 나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주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여기고 오늘 하루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결심합시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입니다. 전광판이 있고, 기다리는 버스가 몇 분 후에 올지 알려줍니다. 집에서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원하는 교통수단의 출발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용한 프로그램은 열정을 가진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의 안내 서비스는 고등학생의 신선한 생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생활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맥가이버’처럼 도움을 주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서랍도 고쳐주고, 형광등의 안전기도 갈아주고, 고장 난 스위치도 바꿔주고, 막힌 배수구도 뚫어주고, 청소 도구함도 만들어 줍니다. 같은 손인데 형제님의 손은 만능입니다. 저와 신문사의 직원에게 형제님은 언제가 감사한 손님입니다. 땀을 흘리면서도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봉사하시는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주셨고, 태양을 만들어 주셨고, 들에는 많은 먹을 것들을 주셨습니다. 물과 공기가 있어서 우리는 마시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때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서로 싸우며 분열을 일으킬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한결같이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돌아와 바르고 참된 길을 가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많은 축복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살인하지 말며,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자 청년은 그런 것들은 이미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그런 계명들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 그러자 부자 청년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열정과 노력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사람도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허리에 띠 두르고 등불을 켜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정말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종들을 위해 시중을 든 단다.


꼴찌가 첫 찌가 되는 거란 느낌이 든다. 주인을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면 종이 주인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인데 우리 사회에서도 그럴까?


주인이 종을 섬기는 사회, 목자가 양들을 보살피는 교회, 정치인들이 국민을 섬기는 나라... 대통령이 백성을 위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였다.




현명한 사람이려면 신앙 가집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무서운 죽음을 혼인잔치서 귀가주인 기다림으로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주인 기다리는 종보다 하늘잔치에 데려가실 아버지 기다리는 걸로요.

세상점수 따려고 기다리는 종들보다 아버지의 하늘잔치초대 기다려요.


예수님은 알기쉽게 영원실화를 세상예화로 돌려 설명하신 멋쟁이예요.

죽음은 하늘로 불려가는 날로 아버지께 하늘잔치초대 받는 날 돼야죠.

허리에 진리 띠 매고 마음에 불 밝히고 살다 하늘가족 찾아 가야해요.


몸이 좋아하는 것만 찾는 와중에 믿음으로 보이는 하늘을 찾아갑시다.

하늘 좋아하는 그만큼 큰 사람이며 현명한 사람이려면 신앙 가집시다.




이기심과 욕망의 지옥

이종훈 신부님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첫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원죄교리를 현대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연좌제도 없어진 세상에 죄를 물려받았다는 교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뭔가에 홀린 듯 가짜를 진짜라고, 악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를 두고 한 신학자는 ‘원죄적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 공동체의 분위기가 각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나의 정의와 선도 이미 내가 속한 공동체의 분위기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사이비종교집단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인 행위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그것이 의로운 결정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공동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구성원이 바뀌면 공동체의 분위기도 바뀐다. 모두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거기는 천국이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지옥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거기를 지옥으로 만든다. 공동체가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의 마음 생각 행동이 공동체의 색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다. 하느님을 닮아 영적이고 사랑할 줄 안다. 세상이 이것을 잊어버리게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들어가려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기억한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를 벗어나야하는 이유라고 내세웠던 것은 하느님 예배였다. 모세는 수차례 파라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7,26).’”하고 말했다. 인간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려 공동체를 지옥으로 만든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따라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이기심과 욕망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한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주님, 제가 당신을 주님이라고 불렀으니 당신의 말씀을 따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기심과 욕망의 올가미가 저를 옭아매고 있어서 주님을 잘 따르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욕망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음을 기억하고 생명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인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잔치에 갔던 주인이 느닷없이, 예고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라도, 당장 아무 무리없이 맞이하여 여독을 풀 수 있게 섬길 수 있는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허리의 띠"는 치렁치렁한 복장이 노동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허리에 붙들어 매는 끈입니다. '당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는 마음을 옷 매무새로 표현한 셈이지요.


"등불"을 켜 놓은 상태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등불과 함께 제 영혼도 밝히고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깜깜한 밤, 저 멀리서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집 어딘가에 불이 켜져 있으면 마음이 설레고 위안이 되지요. 거창한 해후가 아닌 일상의 소소한 만남이어도, 모든 만남은 기다림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켜 놓은 등불은 그 기다림과 기대감을 더 밝고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되겠지요.


"그 주인은 띠를 매고 ...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이 주인을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보십시오! 주인은 이를 종의 당연한 의무라 치부하지 않습니다. 긴 잔치와 여독으로 지쳤을 법도 한데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스스로 허리에 띠를 맵니다. 그리고 종들을 앉힌 뒤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오늘의 복음 대목에서는 두 차례나 종의 행복을 외칩니다(루카 12,37.38 참조). 그런데 그 행간에는 주인의 행복이 들어 있지요. 얼마나 행복하면 주인이 자청해 종처럼 되어, 종의 종이 되어 종을 섬기겠습니까! 이 역할의 전복, 신분의 전복은 누가 억지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주인 스스로 기쁘고 행복에 겨워 자기 자리, 자기 신분을 잊고(초월하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유명한 죄와 은총의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로마 5,12).

성경은 원조의 불순종으로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죄로 '생명의 나무로 이르는 길은 불 칼로 차단되고'(창세 3,24 참조) 인간은 죽음을 운명으로 떠안게 되었지요. 하지만 인류의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18).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죄 없는 어린양의 순결한 피는 원조가 초래한 슬픈 결말을 뒤집습니다. 하느님께서 종이 되고 사형수가 되셔서 이루신 봉헌으로 인류는 구원의 보증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천 년 전에 이루어진 고귀한 희생 제사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 안에,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선과 진리를 가장하고 교묘히 스며들어와 있는 죄와 악과 어둠의 실체에게 우리는 번번이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용기를 잃어버리지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이 구원의 보증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비록 영육의 충돌과 모순이 우리를 끌어내릴지라도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는 이 모두를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완성될 하느님 나라, 흠도 티도 주름도 없이 완성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 거듭나기까지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을 쏟아주십니다. 그분은 단죄와 심판이 아니라, 억압과 박탈이 아니라 은총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분이십니다. "당신 구원을 열망"(화답송)한다면 그분은 결코 얼굴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행복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종이 로봇이 아닌 이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겠지요. 평소 주인이 종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인이 잔치에서 돌아온 이 순간, 주인은 종이 자신을 깨어 기다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동 받고 감격해서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내려갑니다.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저는 거기에 감히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인은 더 행복하다"라고요.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믿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그 생명과 행복과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제는 강론을 할 때마다 지옥과 연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강조하면서, 그 무서운 곳에 안 가려면 회개하라고, 마치 협박을 하듯이 강론을 합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벌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회개하면, 그 회개는 과연 진정한 회개일까?

그런 경우에는 고해성사를 보아도 기쁨이 없고, 귀찮은 숙제를 마쳤다는 정도의 안도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칠 것입니다.

또 그런 경우에는 기쁨 없이, 의무감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마다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낀다면, 그래서 주일을 지키는 일에서 아무런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주일은 괴로운 날로 변질될 것이고, 그러면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주신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하고,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미사 때마다 무시무시한 심판과 지옥 벌로 협박하는 것 같은 강론을 들어야 한다면, 주일미사도, 주일을 지키는 일도 모두 고통스러운 강제노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만일에 ‘복음’에서 ‘기쁨’을 빼버리면, 복음은 들으나마나 한 소식, 즉 들을 가치가 없는 소식이 됩니다.

어떤 성직자도, 어떤 수도자도, ‘기쁜 소식’에서 ‘기쁨’을 빼고 ‘무서운 소식’으로 바꿀 권한은 없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 경우에, 성당에서 항상 혼나기만 하고, 그래서 성당에 가는 것을 싫어하면 집에서 부모가 혼내고...

가도 혼나고, 안 가도 혼나고... 그 어린이 입장에서는 성당은 무서운 곳이 되고, 예수님은 무서운 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영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기쁨의 생활’이 아니라 ‘괴로운 생활’이 된다면, 그것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일차 책임이 있습니다.(어떻든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은 아주 많이 부족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왜 하는지, 그 목적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옥과 연옥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이 말씀은 당신의 ‘재림의 날’은 결코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날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은 즉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지금 우리 곁에 안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림’은 떠나셨던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현존해 계셨던 주님께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차원의 존재로 변화되어서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과 “그 종들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원래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또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글자 그대로 ‘지금’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행복하고, 만나면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행복한 생활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행복하게 된다고 믿고, 희망하기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고, 행복하니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을 보는 ‘주님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신앙인들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기쁨’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기쁨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 누리고 있는 기쁨이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종말, 재림, 최후의 심판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모르니까 무서워합니다.

각 개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잘 모르니까 무서워하고, 그 뒤의 일도 모르니까 무서워합니다.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이 ‘무서움’을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해야 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혹시라도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회개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억지로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에게 부족한 믿음과 회개와 사랑이 완전해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준비된 사람'(루카 12장 35~3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어린시절 ~ 집에 혼자 있게 되었을때 나 혼자 있다는것이 좋아서 탄성을 지르며 기분 좋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오나 문 밖을 내다 보고 또 내다 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을 보내는것이 아까워 무엇을 할까? 하다가 엄마가 돌아왔을때 집안이 깨끗하면 기쁘실거라는 생각으로 청소를 했지요.

집에 오신다는 확신이 있기에 그때가 언제든 나는 내 할 것을 하며 기다림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때를 맞추는 것은 마치 도박과 같아서 요행을 바라다 큰 코 다칠 수 있고 나 몰라라 방치하다 후회할 수도 있죠.

엉망으로 지내다가 예수님 오실때를 놓칠 수 있으니 일상을 잘 관리하고 정돈하며 살다보면 굳이 때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한번에 힘쓰거나 당황할 필요없이 '오셨어요?' 하고 맞아들이면 됩니다.

'준비된 사람은 태연합니다'




<기다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내게 줄 기쁨 때문에

부질없는 희망에 애태우며

굳어버린 몸과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진 않겠습니다


힘겨웠던 값진 여정 끝에

나를 다시 찾은 당신에게

따스한 쉼과 작은 기쁨 되고자

설렘으로 당신을 맞겠습니다


오랜 기다림 후에

당신과의 가슴 아린 만남이

나의 기쁨이기보다

당신의 기쁨일 수 있다면

그만큼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행복이다.<루카, 12/35-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시간이 가야 기다리는 일이 닥아 온다. 출산을 기다린다. 졸업날을 기다린다. 결혼날을 기다린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나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기다림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오늘 복음에 주인이 오기를 깨어 기다리는 종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 기다리는 삶이란 바로 희망의 삶입니다. 주인과 종의 비유로 종속의 의미 보다 기다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깊이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빛 속에 눈을 뜨고 사는 삶입니다. 무엇을 의식하며 깨닫고 사는 사람 그 깨달음에서 행복이 옵니다.

모르든 것을 알기위해 밤낮으로 연구하거나 배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깊이 있고 진실 되게 믿음을 가져도 믿음의 깊이와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여야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겨으름없이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하고

필요 할 때 필요가 되어주고 준비란? 힘 능력 즉 무엇인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태한 삶은 그자체가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에도 순응하고 적응하고 성숙해 질 수있다면 행복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희망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이 닥쳐도 십자가의 고통을 극복하시고 새로운 삶을 보여주신 것 같이 죽음 뒤에 참 생명이 있듯이 어떤 절망 중에도 넘어지지 않고 서 있으려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기도의 영적지도 신부님이 나이도 많고 신학생 때부터 몸이 약하신 분이였는데 90이 가깝도록 살아계시며 “저는 희망기도를 하는한 죽음이 없습니다.” 하시며 병중에도 모임에 참석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같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카톡에 빙계점이란? 글을 보내주시어 어제 상담자와 이야기 중 큰 도음을 받아 잘 이용하였는데 100도에 끊은 물은 99에 1도더 모자라라면 물이 끊지 않은 것 처럼 우리는 보통 상식에서 초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만 고집하고 상식을 뛰어 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알지 못합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은 상식이지만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것은 상식을 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얻어 행복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식을 넘어 물질적 가치를 넘어 영적가치를 따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희망 하고 사랑하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눈앞에 일만 보지 말고 저 멀이 피안의 세계를 볼수 있는 눈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 들입니다. 모두 깨어 기다리며 행복 하세요.




한 사람이 중요하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를 통해서 볼 때 한 사람이 무척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쯤이야! 라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에 죄가 퍼지고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 나 하나라도 똑바로 살겠다는 사람과 그런 사람들로 인해 죄의 파급이 멈추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얘기로 시작됩니다.

아담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렇다면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리고 카인도 죄를 짓지 않았다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그 둘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자손 중에 그 누가 죄를 지어 세상에 죄는 들어왔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얘기하는 그 한 사람이란 꼭 아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 나이고 너와 나의 죄는 한 사람의 죄로 그치지 않고 세상에 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현상이 있습니다.

건널목에 신호등이 있고 빨간불이 켜져 있습니다.

모두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그냥 건너버리자 마치 둑이 터진 듯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법규를 위반하고 길을 건넙니다.


우리 안에 법을 어기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다들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이런 자유를 주신 겁니까?

자유를 자기 마음 대로 하는 것에 쓰는 것이 인간인데 왜?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욕심과 비교할 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주는 것이고 사랑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있기에 사랑하면서도 욕심만큼 내 욕심대로 되거나 해 주기를 상대에게 바라고 애착을 하고 얽어매려고 하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전혀 없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자유를 주시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로 우리가 당신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로 당신을 배반하고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그 자유의지로 당신을 선택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죄를 선택할 수도 있는, 이 위험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자유를 수성守城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한 사람은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고 인생을 막 살아버리는데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 한찮은 것에 개떡같이 쓰지 말고 소중히 써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거잖아요?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다시 말해서 이웃 사랑 때문에도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가장이 무너지면 한 가정이 무너지듯 내가 무너지면 나를 밑돌 삼아 서 있던 사람들까지 허물어질 것이고, 내가 버티고 있으면 나를 바탕 삼고 디딤돌 삼아 사랑의 탑/건물이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듭 얘기하지만 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고 생각지 말 것이고, 나 하나로 뭘 할 수 있겠어? 라고도 생각지 말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1,21-12,22: CSEL 44,63-64)

기도할 때 말이 필요한 것은 그 말로써 우리 자신을 자극시키고 우리가 청하는 것의 내용을 인식하기 위함이지 주님에게 무엇을 알려 드리거나 주님을 우리 의지에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은 항상 거룩하지만, 사람들도 그러한 것으로 여길 것을 즉 멸시치 말기를 욕구하도록 우리 자신을 자극시키는데, 이것은 하느님께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임하소서.” 할 때 그 나라가 우리에게와 우리가 거기에서 다스릴 수 있기를 청하면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곧 다가올 그 나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할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그 뜻을 이루게 하는 참된 순종을 그분께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할 때, “오늘”이라는 말로 이 현세를 뜻하고 “양식”이라는 말로 사람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 근본적인 것만을 표현하지만, 삶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청할 뿐만 아니라 현세의 행복이 아닌 영원의 행복을 얻기 위하여 믿는 이들이 현세에서 필요한 성사를 청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할 때, 우리가 청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할 때,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어 속아서 유혹에 응해 버리거나 고통을 받아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라고 우리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할 때, 우리가 아직도 온갖 악을 배제하는 그 완전한 선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우리 자신에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이 마지막 청원은 매우 광범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당하는 어떤 고통에서도 다른 기도의 형식을 찾을 필요 없이 그 청원만으로 자신의 애통을 드러내고 눈물을 쏟으며 그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하고 그것으로 계속해야 하며 그것으로 기도를 끝마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기도문에 나오는 말들로써 그들이 뜻하는 실재 자체들을 우리 기억에다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도할 때 마음의 열정에서 나오는 다른 말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들은 열정에서 흘러나올 때 그 열정을 명료화하고, 열정을 뒤따를 때 그것을 증대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를 정상적으로 또한 뜻을 파악하여 바친다면 그 열정에서 나오는 말들 가운데는 주님의 기도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가 만일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과 무관한 것을 청한다면 그것은 비합법적인 기도라 할 수는 없다 해도 육적인 기도라 하겠습니다. 사실 비합법적인 기도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은 항상 영에 따라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릴 때 숙제를 못 했다고 해서 죽을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과제라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지 못했을 때는 괜실히 마치 양심의 가책이라도 되는 듯이 우리 가슴을 졸이게 하고 부끄럽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7-38)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혹시 할 일이 생기면 그 즉시 처리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리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저 혼자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어서 어떤 것은 마음 한구석에 짐처럼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늘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제 미진한 부분을 은총으로 채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세례성사로 혼인잔치는 시작 되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의 혼인 잔치 주인공이시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있다. 혼인잔치는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마련 된 것임을 말이다. 그런데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혼인잔치의 본뜻을 모르거나, 알고 있어도 이를 망각한다. 현대 사회의 혼인잔치로 하느님의 본뜻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살아가며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축복 받기를 바라고 있다.


“혼인잔치를 벌려주신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 ‘깨어 있어라!’ 주인께서 오실 때 깨어 있는 종은 행복하다. 그들은 주인이 오셨을 때 곧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시중 들 것이다.”


혼인잔치에 깨어 있음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의 서약을 발했던 것처럼 살아가며 그 서약에 충실한 것이다. 그 서약에 충실했는지? 첫번째로 드러나는 일이 혼인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혼인을 준비해야 하는데, 오르지 인간계획에 의해 준비된 혼인이 너무나 많다. 여기서 축복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된 첫 자리가 된다.


서약에 충실했는지 두번째 알아보는 기회가 찾아 온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이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하느님 계획에 따른 삶이 무엇인가를 직접 부딪치고는 어찌해야할지 우왕좌왕 한다. 부끄럽기도 하고 잘못낀 단추를 다시 풀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보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자식이 부모가 펼친 혼인잔치의 결말도 그렇게 쓸쓸히 보내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후회를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례성사에서 하느님께 발한 서약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혼인잔치에 초대받고 있다. 살아가며 단계적으로 성사가 진행되며 혼인잔치는 펼쳐진다. 평소에도 끊임없이 서약에 깨어 있어야, 일생을 깨어 있는 것이 되고, 결정적일 때 하느님을 떳떳이 맞이할 수 있다. 진정한 혼인잔치의 완성은 끊임없이 여러 기회로 나에게 찾아 온다. 언제나 허느님의 충실한 종으로 살며 결정적으로 행복했으면 한다. 승자는 언제나 행복한 것이다.




내 몸이 나의 스승이다.

최민석 신부님

시민들의 촛불 혁명으로 시작된 정부여서 그런지 왠지 촛불이 친근하다. 촛불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옮겨 수많은 촛불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되면 가슴이 뛴다. 작은 촛불들이 모이고 모여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기쁨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촛불이 어둠의 세력들의 정체를 하나 둘 밝혀내는 환희가 아닌가 싶다.


벌들이 꽃에 앉아 꿀을 따간다고 그 꽃이 시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미소를 너의 입술에 옮겨준다고 나의 기쁨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빛은 나누어줄수록 더 밝아지고 꽃은 꿀을 내줄수록 결실을 맺어가고 미소는 번질수록 더 아름답다.


생명의 빛과 미소가 하늘 꽃이 되어 온다. 하늘이 따뜻하게 사랑의 기운 불어넣으면 나무에서 꽃이 피고 알에서 새들 깨어나듯 엄마 아빠를 닮은 귀여운 아가들이 태어나고 자란다. 나무는 굵어지고 숲은 넓어져 가지마다 새들 깃들여 온갖 소리로 노래하고 아가들은 예쁘고 슬기롭게 자라나 과학자가 되고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고요한 시간 생명의 숨결을 듣는다. 들숨 날숨 코 끝 바람 소리에 마음을 모은다. 다시 가슴 심장 소리 잘 들리지 않지만 귀를 기울여 본다. 어찌나 숨어서 소리 없이 일하는지 귀 기울이지 않으면 느껴지지도 않지만 그래도 애써 가만 들어 보면 두근두근 둥 둥 둥 소리가 난다.


내가 살아서 심장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심장이 살아서 내가 산다. 내가 죽어서 심장이 죽는 게 아니라 내 심장이 죽어야 내가 죽는다. 그러니 내게 있어 심장이 몸 보다 먼저다. 내 몸이 내 심장의 부분인가 보다. 심장의 소리를 내가 듣는다.


이렇게 은밀히 숨어서 만물이 잠든 고요한 밤에도 쉼 없이 처음 받은 한 가지 명령만 외곬으로 따르는 심장이 내 몸 속에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저렇게 숨어서 소리도 없이 빛도 없이 이름도 명예도 없이 일편단심 저 맡은 일만한다. 참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은 내 몸의 부분이면서 전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가 12, 35-38)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면 내 몸은 죄를 모른다. 내 몸은 시종일관 완벽하게 하느님의 명령 또는 법을 지키고 있다. 내 심장을 비롯한 몸이 하느님의 법도를 따르는 그만큼만이라도 하늘의 뜻에 순명하며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충실한 신앙생활이 없을 것이다.


몸이야말로 우리에게 하느님을 믿고 그 법도를 좇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나의 위대한 스승이다.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내 몸의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의 현존은 살아 있는 신비 자체요 경이로움과 놀람이다. 눈에 보이는 몸 소화기 내장에는 없는 게 여럿 있다. 지난 일 년 전 위암과 대장암 절제수술로 위도 없고 대장도 없다. 거기다가 콩팥도 하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들을 대신하여 소장뿐만 아니라 온 몸이 협력하여 지금 이렇게 살게 한다는 것이 기적 아닌가.


그 동안 소장이 말없이 소리 없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위장과 대장의 짐을 대신 져 준 것이다. 불편함이 없지 않지만 현존의 충만함으로 감사한다. 진심으로 소장과 다른 내장 그리고 온몸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말이나 관념 따위가 아니라 몸으로 하느님의 길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스승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내 몸은 내가 아니다. 그러나 내 몸 바깥 어디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보다 먼저 있는 나, 내 부모보다 먼저 있는 나, 나보다 나중에 있는 나, 내 자손보다 나중에 있는 나, 마침내 마음의 등불을 켜 놓고 깨어 현존하는 나를 만나 하나 되지 못한다면 시방 이렇게 먹고 입고 쓰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 모두가 무슨 허깨비 놀음이란 말인가.




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윤정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1978년 10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직을 시작하면서 오래도록 기억될 말을 온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2005년 4월 2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인은 아래 노래의 찬가를 온몸으로 사셨습니다. “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에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후렴)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증언, 세상의 길 위에 사랑의 순례자/ 세상을 위해 파견된 젊은이들의 아버지, 아침을 여는 길, 희망의 생생한 표징/ 삶으로 선포한 믿음의 증언, 시련 속에서 굳건하고 강하게 형제들을 일으키신 분/ 모든 이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가정을 사랑의 표징이라 가르치신 분/ 평화의 운반자 정의의 전령傳令, 사람들 사이 자비의 전달자/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힘을 드러내시고, 언제나 형제들을 사랑의 길로 이끄신 분/ 주님 어머니의 전구를 통한 은총의 힘으로써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 자비의 아버지, 우리 구원자 아드님, 사랑의 성령님, 삼위께 영원히 영광을. 아멘.”(‘요한 바오로 2세 찬가-그리스도께 문들을 여십시오’ 가사 전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 전구를 청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삶

김기현 신부님

말기암 환자가 올린 영상을 몇 가지 보았습니다. 제가 병에 걸려서 관련 정보를 얻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분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귀 기울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면서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가 암환자가 되면 스스로에게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여행도 가고, 평소 해 보고 싶었던 작은 일들도 시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의식 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쁜 일들이 있다면 아마 그런 생각은 일 뒤로 밀려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종 그런 생각들이 밀려오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몇 가지 적어 보았는데 이런 겁니다. ‘글을 쓰고 나서 조금 말이 된다고 생각할 때, 혼자 조용한 숲길을 걸을 때, 플롯으로 쉽지만 아는 노래를 불고 있을 때, 심고 거두며 흙을 만지고 일할 때, 책을 읽고 무언가를 알아가는 느낌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읽을 때, 운동하면서 작은 근육들이 생기는 것을 볼 때, 낯선 곳에 갔을 때, 기도 안에서 위로를 받을 때...’ 등등이 생각났었습니다.


그리고 ‘잘 하고 있나...’ 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어느 순간에는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해야 된다는 느낌의 것에 나도 모르게 사로 잡혀서 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그래서 매일 해 오던 것들을 조정하고 다시 살아가곤 하는데요.


오늘 복음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복음은 저에게 ‘종’임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주인이 아니라 섬겨야 할 주인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그 주인을 기다리는 마음과 삶의 모습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달 전에 조금 길게 피정을 했었습니다. 피정을 하면서 다시 마음이 주님을 향하고 나에게 진정한 안식과 쉼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고 평안함을 회복했던 적이 있는데요. 살다보면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주인을 맞이하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내 일을 이루고 싶어하는 교만한 모습으로, 그리고 영원을 위한 선택과 삶이 아니라 사라질 것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조금 헤매였다면, 그리고 중요한 것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애착을 버리고, 영혼구원을 위해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을 찾고 일하는 것.’ 이 아마 그 기본을 생각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행복은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중국 신부님, 수녀님, 식복사 분이랑

사제관에서 식사를 했다.

중국 신부님이 유머를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중국 신부님이 “알아 들었어?”라고 해서

“못 알아 들었어요.”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이 나보고 웃으시면서,

“예전 신부도 불리하면 못 알아 들었다고 했어~”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고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을 청하도록 하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과

우리의 사랑은

깨어 있음으로

풍요롭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가지마다 가득

깨어 있는 빛깔로

불타는 단풍입니다.


우리 마음까지

물들입니다.


주님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이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모든 순간은 특별한

순간이 됩니다.


기다리는 주님 계셔

바라볼 주님이 계셔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는 삶이 실상

가장 큰 행복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살아 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주님이 오시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거리는 깨어 있음의

거리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법

믿는 법은

깨어 있음에서

비롯됩니다.


깨어 있음으로

주님의 것임을

알게됩니다.


단풍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깨어 있음의

오늘 되십시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자신의 엄마가 싫어하는 일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몇 가지나 적었을까요? 엄청나게 많이 적었다고 합니다. 줄줄이 적은 엄마가 싫어하는 일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몇 개나 적었을까요? 많은 아이들이 딱 하나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공부’였습니다.


중학교 학생 950명에게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 5가지를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이 중에서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2가지 이상 맞춘 아이는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너무나 충격적일지 모르겠습니다. 겨우 7명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의심스러운 분들은 집에 있는 자녀들에게 한 번 실험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일반 사람들 역시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잘 알아도 좋아하는 것은 모른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알고서 그 좋아하는 것을 행할 때 기쁨이 더 크게 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에 대해서 집중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랑 실천’에 대해서는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죄만 짓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해성사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저 죄 지은 것 없는데요?”

단순히 죄라는 것이 십계명을 어기는 것만 해당할까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고백을 하지만, 죄의 범위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 역시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 행할 때 주님과 진정어린 화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행복선언을 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주인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종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올 때에 문을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고, 주인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로 주인이 원하는, 주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종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상대방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행할 때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 그러한 감동을 전해드리는 우리가 되면 어떨까요?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고 그래서 늘 곁에 두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미 코끝에 와 닿아 있다. 때문에 우리는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미 발밑에 있다. 때문에 우린 단순하게 딛고 서 있는 것이다(차진배).


단순과 간소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인간은 흔히 무엇이든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 하지 않는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하루 한 시간은 조용히 앉아 있는 습관을 들이라. 푹신한 침대가 아닌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라.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잠들지 말고 조용히 명상을 하다가 잠들도록 하라. 간소하게 먹고 간편하게 입으라. 사람들하고는 될 수 있는 한 일찍 헤어지고 자연과 가까이 하라. 텔레비전과 신문을 무조건 멀리하라.

바쁘고 고단한 일상이지만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습관을 들인다면 하루하루의 삶에 탄력이 생길 것이다.

몸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너무 편하고 안락하면 게으름에 빠지기 쉽다. 잠들 때는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숙면이 되도록 무심해져야 한다. 당신은 어떤 생활의 규칙을 세워 지키고 있는가. 당신을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생활 습관이다.

인터넷에서 본 출처 미상의 글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는 글인 것 같아서 옮겨 보았습니다. 단순함과 감소함을 간직했을 때, 그것이 나의 좋은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관건은 정성이요 집중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거룩한 교회 전례를 거행할 때 마다 저 자신의 미흡하고 불성실한 자세를 자주 반성을 하게 됩니다. 성체성사나 고해성사, 다양한 신심행사나 공동 성무일도와 같은 우리 가톨릭 교회의 보물 들 앞에, 그에 맞갖은 준비와 정성, 자세와 태도가 요구되는데, 언제나 그에 못미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보물들 앞에 참으로 무성의한 모습, 마지 못해 앉아있는 모습, 최소한의 참여만 하는 모습, 입도 뻥긋하지 않는 모습, 전혀 동참하지 않는 모습, 정성이나 열성은 찾아볼 수 없고 타성과 습관에 젖은 모습, 결국 들러리 같은 모습을 제 안에서, 그리고 이웃들 안에서 발견합니다.

거룩한 전례 앞에 마치 강 건너 불 바라보듯, 소 닭 보듯이 심드렁한 소극적인 태도는 당연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교회의 소중한 보물들로터 얻을 수 있는 은총이나 기쁨, 영육의 에너지는 전무(全無)합니다. 마치 ‘좀비’처럼 몸만 와있지 마음이나 정신, 영혼이 빠져나가있으니, 결국 참석하나 마나 입니다. 괜한 시간낭비입니다.

한 신앙인에게 있어 하루의 태양이요, 삶의 중심인 성체성사, 하루 가운데 중요한 순간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성무일도인데, 그리도 불성실하고 불충실하게 거행하다보니, 하루 삶 전체도 흐리멍텅, 지지부진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관건은 정성이요 집중입니다. 마음과 영혼이 사라진 예배 안에 하느님께서 거처하실리 만무합니다. 이왕 바치는 기도,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집중하며, 할 때 잘 하면 좋겠습니다. 보다 깨어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복음 12장 37절)

‘깨어있음’과 관련해서 우리가 눈여겨볼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스페인 출신 위대한 선교사, 남미 쿠바의 영적 아버지이신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주교(1807~1870)이십니다.

열정하면 그를 추종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하루를 마치 천년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복음선포를 향한 그의 열정은 평생토록 그를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쿠바 선교사로 있으면서 글라렛 선교 수도회를 창립했습니다. 한편 부조리한 사회 개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동시에 이사벨라 2세 여왕의 영적지도를 전담했습니다. 200여권이나 되는 서적을 저술했으며, 이를 출판해서 보급시켰습니다

위대한 성인인 그를 있게 한 두 기둥은 성체성사와 원죄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각별했으면 그의 손에서는 단 한 순간도 묵주가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쿠바는 원래 부유한 나라였으나 거듭되는 주변 강대국들의 침입과 수탈로 서민경제가 바닥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국민들의 생활고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를 가슴아파하던 글라렛 주교는 온 몸으로 침입자들과 맞섰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셀수도 없이 많은 감금과 해외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를 향한 갖은 형태의 모함과 박해, 구타와 감금이 계속되자, 당시 사회 안에서 ‘글라렛’이라는 이름은 불행의 대명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모진 시련을 이겨내는 비결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와 성모님에 대한 열렬한 신심이었습니다.

“어떤 이에게 열성이 없다면 그것은 마음안에 사랑의 불이 커져 버렸다는 확실한 표시가 됩니다. 한편 열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의 사랑에 한계가 없는 만큼 가능한 온갖 수단을 써서 하느님이 현세와 후세에서 언제나 알려지시고 사랑받으시며 섬김 받으시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 록 힘씁니다.”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의 자녀는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이고 가는 곳마다 열기를 주는 사람이며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의 불로 타오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있는 수단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 중에 어떤 것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오늘 주님 말씀을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종이라면 누구나 주인을 위해 깨어있지, 깨어있지 않는 종도 있나?


저의 생각은 결국 종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 자기가 종이라는 신원의식을 자긴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니 그러면 은총이 더 충만히 내리도록 죄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는 안 되기에 결국 저의 생각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은총이 충만히 내리고 죄를 더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 은총체험을 크게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총이란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수고했기에 받는다면 그것은 대가이고, 내가 공로를 쌓았기에 받는다면 그것은 상이지 은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받는 사람은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거나 한 것이라고는 오히려 죄 짓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대가를 받은 것과 은총을 받은 것, 상을 받은 것과 은총을 받은 것, 이것은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행복입니까?

대가건 상이건 은총이건 다 하느님께 받는 것이고 다 행복을 주지만 대가나 상은 내가 성취한 것이고 그래서 그 행복은 기쁨입니다. 이에 비해 은총은 내가 성취한 것이 아니고 거저 받은 것이고 그것도 벌 받아야 할 사람이 은총을 받은 거기에 그 행복은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기쁨과 감사 중에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행복입니까?

제게는 감사가 더 행복이고 신앙인인 우리가 더 바라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왜냐구요?

감사는 인격적이고 사랑이 흐르잖아요?

그리고 사랑이 기쁨보다 더 충만합니다.

이에 비해 대가나 상과 같은 기쁨은 사랑은 없기 십상이고 하느님도 빠질 수 있고 자기도취이거나 교만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죄인인데도 벌주실 하느님이 은총을 주시면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하고 더 나아가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종인데도 마구 부려먹으실 주님이 오히려 식탁 봉사를 해주시면 그 사랑과 그 사랑의 겸손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앞서 얘기했듯이 대가나 상을 받는 기쁨은 교만하게 할 수도 있지만 무상의 은총에 대한 감사는 결코 교만하게 하지 않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은총에 감사를 하게 하는 우리의 조건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의식과 종이라는 자의식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10월 24일은 ‘공휴일’이었습니다. ‘UN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은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존엄함을 찾을 수 없는 야만과 폭력이 드러난 전쟁이었습니다. 핵무기로 무장한 지구촌에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인류는 공멸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유엔은 인류의 지성을 회복하고 평화를 이룩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교통수단이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류는 함께 연대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가난, 질병, 전쟁, 폭력, 난민, 범죄, 환경’의 문제를 어느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국제연합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고,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 국제연합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의 결정으로 연합군이 파견될 수 있었습니다. 반기문 씨가 유엔사총장으로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친숙한 조직이기도 합니다.

 

유엔의 힘과 권한이 모든 국가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은 인류 지성이 보여준 커다란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엔의 이름으로 많은 분쟁지역에 도움을 주었고,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에게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난민들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유엔은 지구촌이라는 생각으로 환경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엔의 날이 공휴일은 아니지만, 유엔의 정신과 유엔의 역할이 인류의 발전에 더욱 큰 힘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지은 죄로 죽음과 고통이 왔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에 인류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쟁, 폭력, 난민, 기아, 가난, 질병’의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죽음을 이겨내셨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간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일까요?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한 몸을 이룬다고 합니다. 내 몸의 지체들이 아프면 돌보듯이, 우리들의 이웃을 내 몸처럼 돌본다면 그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 올 것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가로막는 벽을 허물었습니다. ‘적개심, 편견, 차별, 분노, 원망, 불평, 시기심, 교만, 욕망, 걱정, 근심’은 우리를 분열시키기 마련입니다. 우리들을 가로막는 벽은 외부에서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들의 내부에서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청하면 주실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며, 구하면 주실 것입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로 오십시오. 내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물, 불, 바람, 흙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입니다. 이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제5원소가 바로 사랑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고통과 치욕의 상징인 십자가는 이제 우리를 하느님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걸림돌로 여겨지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있음’이 답이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 집무실 안 눈에 잘 띄는 곳에 붙혀 놓고 보는 경구가 바로 “늘 깨어 있어라!”입니다. 깨어 있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수행생활의 궁극 목표도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깨어있음'입니다. 깨어 있을 때 진정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12,35).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발목까지 늘어지는 겉옷 자락을 올려 띠로 묶는 것은, 즉시 일할 수 있는 자세를, 파스카 축제를 지낼 때에 취하는 여행자의 자세를,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세를 뜻합니다. 


기다림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다림의 기쁨,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기다림, 그리움 참 고운 말마디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운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을 기다리기에 깨어 있는 우리들입니다.


“깨어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있음은 빛입니다. 깨어있음은 투명함입니다. 깨어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있음은 그리움입니다. 깨어있음은 목마름입니다. 깨어있음은 아픔입니다. 깨어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있음은 들음입니다. 깨어있음은 순종입니다. 깨어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있음은 집중입니다. 깨어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있음은 일치입니다. 깨어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있음은 축복입니다. 깨어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깨어있음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깨어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있음은 준비입니다. 깨어있음은 회개입니다. 깨어있음은 모두입니다.”


마치 '깨어있음 예찬' 같습니다. 깨어있음은 한결같이 모두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이들은 새벽을 사랑합니다. 목말라 눈떴고 눈뜨면 목말랐던, 아픔으로 눈떴고 눈뜨면 아팠던 새벽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이럴 때면 본능적으로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기다리기에, 주님을 목말라하기에, 주님을 그리워하기에 늘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 되고 깨달음도 뒤따릅니다. 깨어있을 때 환상도, 유혹도 죄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깨어있을 때 내적일치로 마음의 평화와 안정입니다. 깨어있을 때 영육의 치유와 건강입니다. 깨어있을 때 죄도 짓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않고 영혼이 잠들어 있을 때 온갖 유혹이, 분심이, 죄가, 어둠이 스며들어 내적 분열을 일으킵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가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보기에 아담은 깨어있지 않은 잠들어 있는 영혼을 상징하고, 그리스도는 활짝 깨어있는 영혼을, 참으로 살아있는 영혼을 상징합니다. 깨어있는 이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5,18-19).


아담과 그리스도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우리의 두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있을 때 빛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깨어있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든 죄의 악순환에 허덕이는 아담이 될 수 있습니다.


저절로 깨어있음이 아닙니다. 새삼 깨어있음의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요즘 널리 행해지고 있는 집중적 영성훈련과도 같은 향심기도, 비움기도, 명상기도 등 온갖 종류의 기도 역시 깨어있는 삶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 수도형제들이 매일 평생 꾸준히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역시 깨어 살기위한 영성훈련이기도 합니다.


깨어있는 있는 영혼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깨어있을 때 허상이나 환상은 걷히고 걱정도 두려움도 불안도 사라집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단순투명한 삶을 삽니다. 주님은 복음 말미에서 다시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12,38).


주님은 깨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온갖 축복을 가득 내려 주십니다. 


“당신을 찾는 이는 모두, 당신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구원을 갈망하는 이는 언제나 외치게 하소서. ‘주님은 위대하시다.’”(시편40,17). 

아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10월도 저물어 갑니다. 가을도 저물어 갑니다. 이 때쯤 되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이 시는 우리가 ‘지금’, ‘깨어 있게’ 합니다.

이 시를 쓴 김준엽 시인이 중증뇌성마비로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펜을 입에 물고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시가 얼마나 절절한 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뇌성마비 스포츠 종목인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5년에는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회에서는 종합우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고, 2011년에 첫 시집 <그늘 아래서>를 출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는 종말에 관한 비유입니다. “깨어 있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깨어있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잠들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이가 “깨어있는 사람” 입니다.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그러니, 임을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임을 기다리고, 열망하고, 희망하고 있는가?

 

기다림이 있는 희망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임을 품고, 임의 뜻 안에서 깨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깨어있음”의 표시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곧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임을 반겨 들여 잘 섬기고 시중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임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비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빛을 맞이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깨어있음”의 의미입니다.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곧 빛 속에 있는 것, 그것이 곧 “깨어있음” 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깨어있는 이들 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등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께서 우리 안에서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 아니, 임이 우리에게 시중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임께선 이 순간에도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아멘.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유투브에서 재미있는 원숭이 실험을 보았습니다.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입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시켜 우리 안에 넣어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 원숭이는 돌을 받아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합니다. 조약돌을 주고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도 조약돌을 다시 놓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밖으로 집어던집니다.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버리고는 철창을 뜯고 흔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매우 화가 난 것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했는데 맹맹한 오이만 먹고 다른 원숭이는 계속 맛있는 포도를 먹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오이로도 만족했음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실험이었습니다. 사람이 왜 불행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부족해서 슬픈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제대국이 되었는데도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사실이 돈이 행복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여전히 돈에 치중하는 이유는 아직도 참 행복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처음 원숭이에게 오이 대신 포도, 그리고 더 맛있는 것을 준다면 그 옆에 원숭이가 포도를 집어 던질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는 절대로 마음의 평화도 사람들 간의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평화 때문에 분열 없이 ‘양쪽’ 모두 한 가족처럼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도 외국인도 모두가 구별 없이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한 건물의 부분처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결국 한 건물인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모퉁잇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들에겐 분열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가진 이들은 다 가진 이들이기에 서로 부족하여 시기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당신 생명입니다. 당신 생명을 구분 없이 주고 계셔서 그 생명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믿기만 한다면 더 이상 분열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인종이나 나라에 상관없이 똑같이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누구와 비교하여 질투를 느끼던가, 그래서 불행해진다면 사실 믿음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신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평화이고 기쁩니다. 그분 이외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야 마땅한데 무언가를 더 가지려고 하고 있다면 그분께서 주시는 피의 가치, 성령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성당에 들어서면 우측에 미켈란젤로의 수작 피에타 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모님이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 대리석 조각은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피에타 상은 유리로 막혀져 있습니다. 그것을 유리로 막은 이유는 어떤 조각가가 저것이 어떻게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냐며 올라가 망치로 때려 성모님의 손가락과 코 등이 파손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예술성을 잘 모르지만 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재능이 있는 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느님께 덜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가장 훌륭한 예술품에 흠집을 내고 자기 인생에도 흠집을 내게 된 것입니다.

 

질투는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신 성령은 이 세상의 모든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면 서로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는 바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내 영혼의 등불을 밝혀 깨어 기다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깨어 기다리는 종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혼인잔치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들은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12,38)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릴 뿐 아니라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어야 했지요(12,36). 


이렇게 주인을 기다렸다가 시중드는 종들에게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토록 늦게 돌아온 주인이 오히려 ‘허리에 띠를 매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주는 것입니다(12,37). 하늘 나라는 이처럼 혼인잔치에서 늦게 돌아온 주인이 피곤함에도 기다린 종에게 시중을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행복한 반전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기까지 낮춰 우리를 섬기러 오신 하느님의 사랑의 방법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문제는 그런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지요.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은 날마다 허리에 띠를 매고 곧바로 문을 열어주고 주인에게 봉사하듯이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욥과 세례자 요한처럼 마음 안에 그분을 모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모르는 주님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종들처럼 등불을 켜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등불을 켬으로써 밤과 낮의 구별을 없애고 살아가는 순간의 삶을 영원한 시간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내 영혼에서 어둠과 죄를 몰아내고 생명과 자비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의 등불을 밝혀 자신을 빛이신 분의 빛 가운데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 빛으로 하여금 나 자신의 어둠이 밝혀지고, 그래서 그분의 자비에 힘입어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 자체이신 분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것은 빛뿐이지요. 내 영혼의 어둠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빛이신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느님을 갈망하며 오시는 주님께 곧바로 문을 열어줄 수 있도록, 그분의 목소리 곧 말씀에 영혼의 귀를 열고 들어야겠습니다. 오시는 주님의 발자국을 알아차리려면 내 마음에 사랑을 채우는 수밖에 없겠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영혼의 등불을 밝히고 말씀을 들으려 깨어있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우리였으면 합니다(12,37). 


오늘 우리는 거짓, 부조리와 불평등, 차별과 소외, 돈의 우상화 속에 인간 존엄성이 상실되어 감을 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자신부터 영혼의 등불을 밝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시는(로마 8,28) 하느님을 간절히 기다려야겠습니다. 


오늘도 메시아를 맞이하는 사람답게 회개와 정의와 사랑의 등불을 밝히며 생명의 하느님, 선을 이루시고 정의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나의 몸짓으로 증거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어 한다.” 라고 합니다. 인정받으면 좋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인정받기를 갈망할까 의아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7-38)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께서 나를 다 알고 계시고, 내가 나 임을 내가 알고 있으며, 내가 하는 일이 내가 나임을 그 자체로 인정해 주고 있지 않은가! 작고하신 최민순 신부님께서 갈멜 수도회원들을 바라보며 지은 ‘두메꽃’ 시가 생각납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루카.12,36)

김종오 신부님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님을 생각만 해도 흐뭇해집니다. 그 님은 세상의 그 무엇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빈 마음을 채워주시고,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기쁘게 삽니다. 기다리는 만큼 커지는 그리움은 벅찬 환희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 환희는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훗날에 만나는 것도 좋지만 기다리는 동안 이미 마음으로 그분을 만나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만나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설렙니다. 설레는 마음은 기다림마저 즐겁게 해줍니다.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기다림입니다. 설레는 만큼 마음이 하늘에 있어서 이 땅에 살아도 하늘에 삽니다. 마음은 벌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마음은 희망을 품습니다. 삶의 고통 때문에 때로는 눈물을 흘려도 그 분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뵙게 되리라는 희망도 있지만, 기다리는 동안 품는 희망은 세상의 모든 시련을 이기게 도와줍니다.

행여 사랑하기에 기다리다가 때로 지치거나, 사랑하기에 그리워하다가 때로 가슴이 타고,만날 때가 있다지만 그 때가 너무 멀게 느껴지며, 당신만이 희망이지만 때로 다른 마음을 품으며 삶이 버겁게 될 때에는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다림에 지치고, 가슴이 타며, 힘겨워하는 동안 주님은 우리 곁에서 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박미라 도미틸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그렇게 늘 준비하고 깨어 있으면 언제 어느 때 불러 가시든지 “예!” 하고 기꺼이 따라 가야 하건만... 

오늘은 어릴 때부터 저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오라버니의 7주기가 되는 기일입니다.

 

14년 전!

오라버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시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는데, 사진을 찍어 본 결과 98%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 병원뿐만 아니라 청주 전체병원에 수술할 의사가 학회에 가 있어 대전성모병원으로 가서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서열의사와 다른 세 명의 의사의 집도로 수술을 받고 살아나시어 꼭 7년을 더 사시고, 7년 전인 2010년 10월 24일에 너무나도 편안히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수술 후 하루 만에 깨어나신 14년 전 오늘 복음묵상에서 제가 

‘주인이 언제 오시더라도 두 팔 벌리고 뛰어 나아 가 주인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더 잘하라고... 새로운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었네요.

 

오라버니께서는 수술 후 3주 만에 퇴원하시어 한 달 정도 요양하신 후 곧바로 본당으로 복귀하시어 2010년 1월 24일 은퇴하실 때까지 아픈 몸(페암)으로 사제생활 내내 그랬듯이 단 한 번도 미사를 거르는 일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사 30분 전에 꼭 고해소에 앉아 고해성사를 주셨답니다.

 

은퇴하는 날!

“나는 이제 그 시간에서 자유스러워졌다.” 고 하시고는 은퇴한 다음 날부터 자리에 누워 꼭 9개월이 되는 10월 24일에 주인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아마도 두 팔 벌리고 막 뛰어 가셨으리라... 

가시기 일 주일 전에 제게 “이제는 너 더 이상 돌봐 주지 않아도 되지?”하셔서 제가,

“네, 더 이상 돌봐 주지 않으셔도 되요.” 하니,

“그럼 이제 되었다.” 하시고는 그 다음날인가 “예수님께서 때가 되어 날 데려 가시겠다고 했다.” 고 이제 갈 것이라고 하시고는 그 말씀하신지 한 주도 안 되어 가셨답니다.

 

그분은 평생을 “순명”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품으시고 사셨습니다. 

신학교 때도 단 1분 1초도 어기지 않으려 애를 쓰고 살아 기상 종은 도맡아 치셨고, 광주 신학교에서 12년을 교수생활 하면서도 학장님이 다른 교수들에게 지시한 것이 지켜지지 않아 몇 명을 거쳐서 결국에 오라버니에게 와서야 끝을 냈다고 하네요. 

환갑이 되기 바로 전 해에 소임을 받고 집에 와 함께 식사하러 가서 어머니에게 아주 가까운 곳으로 소임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고 10분이 안되어 교구청에서 독일에 가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아무 망설임 없이 “예”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라버니도 환갑이 다 되었거니와 당신도 너무 늙어 이제 못 볼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 먼 타국에 갈 수 있느냐고 하셨지만, 오라버니께서는 “나는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고 순명으로 그곳에 가시었는데 결국 그곳에서 몸이 많이 상해 오셨지요. 

제자가 교구 주교님이 되어 오셨을 때에도 제일 먼저 “순명서약”을 하셨다합니다. 

제가 고3때! 4년 동안 하지 않았던 감곡성체대회를 다시 하게 되어 저희 학교에서 성가를 맡았는데, 오라버니께서 성가 지도하러 오셔서

- 그 아이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것이라고 -

“순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순명이란 ‘가’자를 쓰다가 ‘기”까지 썼을 때 종이 울리면 점을 찍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칠판에다 쓰면서 설명하시던 것이 생각이 나네요.

 

그분이 바로 제가 태어 날 때부터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저를 늘 돌보아 주셨고, 제가 “참행복의 길”을 걷는 내내 저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신 분”이십니다. 

제가 “참행복의 길” 중에 가장 힘든 일을 겪은 마지막이자 맨 밑바닥인 마귀가 들끓는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 할 때부터 나올 때까지의 7년 동안을 그렇게 힘겹게 제 곁을 지켜주시고 “그럼 이제 되었다.” 하시고 가셨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저는 "참행복의 길"을 걸을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고. 끝까지 걷지 못하였을 것이고, 이런 글을 쓸 엄두도 못 내었을 것입니다.

 

저도 오라버니(박기현 실베스텔 사제)처럼 주인이 돌아오실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잘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하여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주인의 식탁에 앉아 담소를 나눌 그 날을 생각하며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시기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종이 되어본 적이 없는

제자신을 반성합니다.


종들의 진실한 뜻과

행위는 깨어 있는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나 중심의 삶이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주님을 향하는

깨어 있음이

참된 행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인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행복을 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즐겁고 기쁜

깨어 있음이

깨어 있음의

핵심입니다.


깨어 있음이야말로

참된 우리의

실천입니다.


깨어 있음은

가르침을 주시는

주님께 언제나

머물러있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주님을 향해 있는

순간순간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들이

주님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깨어있음을 향한

진정한 감사와 찬미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행복은 주님을

향하는 모든 시간입니다.



전에 청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결혼 이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얼굴, 키, 몸매, 직업 등은 상관없습니다. 그저 저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다른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얼굴, 키, 몸매, 직업 등은 상관없습니다. 그저 제가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둘의 말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명은 자신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을, 다른 한 명은 자신이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하지요. 솔직히 자신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쉬울까요? 그 순간에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결혼해서 살다보면 나를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고 하지요. 반면에 자신이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의 노력을 계속해서 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 그만큼 상대방의 부족함까지도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지요. 


이는 부부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늘 상대방이 나를 잘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해해 주지 못함에 대해 얼마나 억울해하고 또 화를 낼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내가 먼저 이해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안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수월할 것입니다. 


이해받으려는 삶, 이해하려는 삶. 과연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해하려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상은 전혀 바라보지도 또 생각하지도 않으면서도 “난 너 이해해.”라고 말만 한다면 어떨까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의 모습이고, 결국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조건 주님께서 부족한 나를 이해해 주시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주님의 편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런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님께서는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며, 또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게 됨으로 인해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이해받기만을 바라는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한 이 세상 누구도 당신을 열등하다고 느끼게 할 수 없다(엘리너 루스벨트).


실수를 아끼지 마라

얼마 전 텔레비전의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뜻밖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바보(바라볼수록 보배인 것 같은 사람이라고는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만 순수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나라의 수도 맞추기, 사칙연산, 맞춤법, 쉬운 영어 단어 쓰기, 사자성어 맞추기 등의 문제를 내서 풀도록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자신의 무식함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 출연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가 잘 하는 것 하나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내가 잘 하는 것을 그들이 못한다고 해서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도를 못 맞췄다고, 사자성어가 틀렸다고, 엉뚱한 답변을 했다고 부끄러워해서 소극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에도 그저 당당합니다. ‘자신이 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최고’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제가 저 프로그램에 나가서 문제를 맞혀야 하는 상황이 돌아온다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몇 개는 틀렸습니다. 그런데 그 틀린 사실에 대해서 무척이나 부끄럽고 창피해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수를 아끼지 마라. 하나도 틀리지 않는 사람들보다 각광받는 사람은 자신감 있게 틀리는 사람이다. 실수를 피하지 마라.”


내가 자신 있어 하는 것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니까 틀리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틀렸으니까 다음에는 맞힐 수 있을 거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주일에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전 9시에는 안양 아론의 집에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오후 4시에는 서초동 성당에서 성체 분배자를 위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오후 6시에는 명동에서 중서울 지역 엠이 정기총회와 미사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루를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저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든 한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은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님은 레지오 프레시디움 단장을 하고 계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보이지 않지만 악보를 모두 외워서 성가를 연주 할 수 있었습니다. 번호만 알려 드리면 막힘없이 반주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강의록도 필요하다고 하셔서 드렸습니다. 아마도 저의 강의록을 모두 점자로 만드실 것 같습니다.

 

자매님은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의 눈, 믿음의 눈,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사랑이 없기에, 믿음이 없기에, 희망이 없기에 좌절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주셨고,태양을 만들어 주셨고, 들에는 많은 먹을 것들을 주셨습니다. 물과 공기가 있어서 우리는 마시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때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서로 싸우며 분열을 일으킬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우리들에게 한결같이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돌아와 바르고 참된 길을 가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많은 축복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만하면 됐다’ 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 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본당신부를 할 때에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 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 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안정리를 잘 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 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안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한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안 정리를 못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 안 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서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깨어 있는 자의 복

은성제 신부님

어느 선배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오전에 전화가 왔답니다.

자매님이신데 병자성사를 신청한 것입니다.

“신부님! 너무 죄송해요. 저희 시어머니가 어디 아프신 것도 아닌데… 자꾸 오늘 병자성사를 봐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시네요. 먼길 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집에 도착하자 며느리가 되는지 그 자매님은 연신 미안해했답니다.

일단 할머니를 만났는데 할머니는 목욕까지 하셨는지 아주 깨끗하셨고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계셨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해성사를 듣고 병자성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다음날 아침에 그 집 며느리에게 전화가 왔는데 할머니께서 새벽에 돌아가셨고 아침에 방에 들어와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장례를 치르고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는데 할머니께선 돌아가시기 전날 아침부터 방 청소를 유난히 깨끗이 하고, 자기를 부르더니 장에 있는 함을 하나 주면서 “이제는 이거 네가 가져라.” 했답니다.

그러고는 신부님을 불러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병자성사는 정말 신비로운 것이니 요청이 들어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가서 꼭 해야 한다고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지금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 할머니는 얼마나 행복한 분인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미리 다 하셨으니!


깨어 있는 자의 복을 저도 제 삶의 마지막에 누리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는 사람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현대인들이 많이 불행한 것은 깨어 있지 못한 탓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영혼이 잠들어 있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과연 깨어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영성생활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깨어 있을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지 못해 자기를 잊고, 잃고 환상 속에 영혼 없이 사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 인간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외로워서 사람이고, 그리워서 사람이고 기다려서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갈망하는 사람이요 이런 외로움이, 그리움이 누군가를 깨어 기다리게 합니다. 1969년 희곡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기다림’을 주제로 한 작품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을 때 외로움도, 그리움도 견뎌낼 수 있고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희망이, 꿈이, 비전이 실현되기를 기다릴 수도 있고, 사람하는 임이 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곳,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살 수 있는 것도 기다림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기다림의 기쁨이 있을 때 나이에 상관없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영원한 청춘을 살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기다림의 기쁨,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이런 기다림을 극명히 체험할 수 있는 계절이 바로 대림의 전례시기일 것입니다. 아니 대림뿐 아니라 우리는 늘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을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기쁨을, 설렘을 잘 드러내는 오늘 복음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살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권고말씀입니다. 매일 이런 자세로 전례기도에 참석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찾아갈 곳, 찾아 갈 분이 있어 행복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기다릴 분이 있어 행복합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꿈이자 비전이여 희망입니다. 우리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역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기다릴 때 주님은 오시고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을 기다렸다가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만남도 없고, 만남이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이런 기다림과 만남의 기도의 리듬이 우리를 깨어 살게 하는 원천입니다. 깨어 있음은 '텅 빈 빛의 충만'입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 뒤따르고 깨달음의 은총도 뒤따릅니다. 아름다운 영혼, 매력적인 영혼이 깨어 있는 영혼입니다. 깨어 있음의 빛에 온갖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은 사라지고 죄악의 유혹도 침입하지 못합니다. 하여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이요 수행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역시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입니다. 깨어 있음의 습관화, 생활화를 이루어 주는 끊임없는 기도의 수행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깨어 주님을 기다리다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전례의 궁극 목표도 살아있는 주님을 만나는 데 있습니다.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의 구원체험이요 정화와 성화의 내적변화입니다. 도대체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없이, 이 사막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 낼 수 있을런지요. 매일 깨어 주님을 기다리다가 사막의 오아시스 미사시간에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참 아름다운 오늘 복음의 대목입니다.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읽으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기다렸다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그대로 미사 장면 묘사 같습니다. 루카복음 22장 27절을 연상케 합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사람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식탁에 우리 모두 앉게 한 다음, 섬기는 분으로 우리 곁에서 시중들며 당신 말씀과 성체의 음식으로 우리를 환대하십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닮아 '새 사람'으로 변모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로마서에서의 바오로의 고백이 그대로 성취됩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한 분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는 충만한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미사시간이야 일정한 시간에 준비했다 주님을 만나지만 정작 주님이 언제 찾아 오실지는, 특히 마지막 주님이 찾아 오시는 죽음의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수행이, 미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늘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깨어 살게 합니다. 매일미사의 은총은 하루로 확산되고 하루의 삶은 미사로 수렴됩니다. 

아멘.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로마 5,18-1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내가 죄를 짓거나 법을 어기면 나 하나의 문제인 것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파생효과를 지닙니다.

우선 나 스스로 우울해지거나 화를 내게 되고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쁜 기운을 불어넣게 됩니다.

이렇게 죄는 사회성을 지니고 있답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은총을 받아누리게 되면 기쁨과 즐거움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나 뿐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마다 기쁨과 즐거움을 꽃피우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은총지위에 머물러 있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은총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려는 자세가 순종의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오늘 순종의 사람이 되어 은총지위를 누리고 그리하여 나와 나를 만나는 모든 이가 기쁨과 복락을 함께 누리도록 해보지 않으렵니까?




기다리는 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기다림이 있는 사람 희망에 사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시간입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 날짜를 기다리는 것은 가슴 벅찬 기다립니다. 뿐만 아니라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기다림은 더욱 기다림이 행복해 집니다.

신학교에서 시험기간이 되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데 어느 교수 신부님이 나는 학생 때 시험 기간이 제일 기다렸습니다.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할 기회인데 기다려지는 시간이라고 하시며 시험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하였습니다.

 

깨어 준비된 사람은 희망에 살지만 잠자고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절망이 기다립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흐트러진 마음은 즉 긴장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허리에 띠를 풀고 있는 사람이며, 어둠속에 죄와 악과 어울러 사는 사람은 등불을 끄고 사는 사람입니다. 도무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기다람도 희망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앞에 놓고 준비 없이 사는 사람은 일 이 앞에 닥치면 당황하고 일을 잘못하고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행복한 시간은 준비된 사람의 것이고 준비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또한 준비 된 사람은 주인이 어느 때 오든지 관계없지만 준비가 안된 사람은 오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마구 살아갑니다.

 

준비 되어 기다린 사람은 주인의 사랑을 받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준비된 사람은 삶이 즐겁고 행복하지만 준비 되지 않은 사람은 삶이 불행하고 슬픈 삶을 살게 됩니다. 저는 주님을 맞이하는 마지막시간 오! 주님 당신이 오시기를 가다렸으며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이 마련한 영원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고 살려고 합니다.

 

저는 믿는 모든 이가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주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깨어있는 삶이란

비로소 주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는 삶이란

의로운 행위와

참된 순종으로

주님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깨어 기다릴 

주님이 계셔

진정 우리는 행복합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할 

주님이 오시기에

참으로 우리는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행복의 주체는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감사의 띠를 

허리에 매고

사랑의 등불을 

켜놓으면

주님이 만드신 아름다움을

주님과 함께

다시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에게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띠를 매고

우리를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주님 친히 우리에게

시중을 드십니다.


행복은 밤중이 되든

새벽이 되든

늘 언제나 주님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을 찾듯

우리의 등불은

주님을 향합니다.


행복은 주인을 향해

깨어 기다리는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라 하신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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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다는 것은 그저 눈을 뜨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깨어있다는 것은 그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깨어있다는 것은 그저 움직이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깨어있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똑바로 알고, 옳음을 지키기 위해 아픔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자신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실히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진실을 위해 모든 것으로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진실을 위해 꿈을 꾸는 사람들의 삶이다.

숨을 쉰다는 것이 단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닌, 주어진 소명을 위해 허락된 시간임을 아는 삶이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욕망이 아닌 희망을 위해 허락된 기회임을 아는 삶이다.


하루가 주어질지 백 년이 주어질지 모르는 삶이다.

짧게 느낄 수도 있고 길게 느낄 수도 있는 시간이다.

행복하다 여길 수도 있고 불행하다 여길 수도 있는 삶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어리석음이란 다름이 아니다.

좋음을 좋음으로 보지 못하고, 나쁨을 나쁨으로 보지 못하는 마음이다.


깨어있으라 하신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있으라 하신다.

죽음이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라 하신다. (마태오24,43)

손에 움켜쥐고 있는 마음이 그 마지막 날을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하라 하신다.


깨어 있으라 하신다.

진짜로 살아있으라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잘 살라 하신다.

사랑하라 하신다.

 



깨어있다는 것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돈보스코의 흔적과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물론 연로하신 회원들이 대부분인 노쇠한 공동체였지만 여기저기서, 특히 연로하신 살레시오 회원들에게서 아직도 돈보스코의 체취가 남아있었습니다. 

멀리서 온 살레시오 회원을 진심으로 환대하는 따뜻한 돈보스코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연세 드셨다고 조금도 티내지 않으셨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연로하신 분들이 식탁에 앉는 새파란 저희들을 위해 기쁜 얼굴로 식탁 봉사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상황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저희가 할 테니 앉아계시라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럽고 송구스런 순간이었지만 내심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돌아가면 저래야지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가르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오늘 비슷한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입국했을 때 펼쳐질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정말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 종이며 죄인인 우리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식탁 봉사를 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오면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잔치를 베푼 주인공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우리를 위한 서빙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며 너무나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 모를 상황이겠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입으로 명확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의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이런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이십니다. 바로 이런 종들에게 허락되는 은총입니다.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은 종들!” “주인이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면 즉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종들!”에게만 놀라운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한 마디로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영성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 생활은 한 마디로 영적 생활입니다. 영적 생활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혼의 우위성을 인정하고 매사에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생활입니다. 결국 지속적이고 충실한 기도생활이기도 합니다.

 

매일 매 순간 세상만사 안에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생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언젠가 우리에게 주어질 행복한 순간을 기대하며 기꺼이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깨어있는 삶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한상우 바오오 신부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있는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깨어있는 이들에겐

열쇠와 자물쇠는

불필요한 겉치레일 뿐입니다.


깨어있음 자체가

열려있는 영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음과

행복은 하나입니다.


믿지 않고서는

또한 깨어 기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깨어있는 행복한

시간들입니다.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 안에 깨어 있기에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기에

혼미스러운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날마다 우리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봉헌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알고 있는 종은

깨어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넘치는 주님 사랑에

가장 적극적이고

겸손한 화답은

깨어있는 사랑입니다.


제멋대로

사는 오늘이 아니라

깨어있는 오늘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깨어있음의 사랑뿐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의 주인을 모르는 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기다림과 깨어있음이라는
사랑과 감사의 관계입니다. 

서로를 향한 가득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은
바로 '깨어있음'이라는 행복입니다.
깨어있음을 통해
행복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이만이
행복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깨어있음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받아 들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음보다
기다리는 대상이 분명한 것도 없습니다.
주님 자체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종의 본질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종들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오늘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감사는 믿음으로 우리를 살려내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합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행복은
언제나 넘쳐나는 행복입니다. 

주님의 뜻을 가로막지 않고
깨어 감사하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행복의 시작은 언제나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가장 가까이 계시는
주님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하루 되십시오. 

행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변함 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시간이 아니라
깨어있는 행복입니다.



어떤 여자가 홍수로 물이 불어난 큰 개천을 건너려고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더랍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오른팔로 큼지막한 돌덩이 하나를 꼭 붙잡고 있었습니다.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봐, 그 돌을 버려!”

물소리가 커서 들리지 않는지 여자는 계속 돌을 붙잡고 허우적댑니다. 사람들이 더 크게 외쳤습니다.

“돌 내려놓으라고, 돌을!”

하지만 여자는 좀처럼 돌을 내려놓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보다 못한 젊은이 하나가 수영을 해서 여자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돌덩이를 놓지 않았고, 어이없게도 물밖에 나와서도 돌덩이를 놓지 않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이 다그쳐 물었습니다.

“당신, 제정신이야? 그 돌덩이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도대체 왜 돌덩이를 내려놓지 않는 거야?”

그 순간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 거란 말이에요!”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이 여자에게 이 돌덩이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들은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되는 것에 집착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저는 한 때 우표를 수집했었습니다. 우표가 새로 나오면 우체국 앞에서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었고, 또한 우표 한 장을 사기 위해서 적금을 부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공부할 참고서는 관두더라도 우표는 꼭 사야만 했었지요. 그리고 잘 스크랩되고 있는 우표를 바라보면서 흐뭇했습니다. 다른 것은 잊어 버려도 상관없었지만 우표는 작은 것 하나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어떨까요? 그때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모았던 우표는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장도 남아 있지 않거든요. 우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이 우표가 나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집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돈이면 참고서, 문제지도 사고... 그래서 공부도 더 잘했을 텐데요.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항상 깨어 있는 종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종이야말로 세상의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정말로 쓸데없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을 철저히 배제한 채 말이지요. 무엇이 중요한 지를 다시금 묵상하여 봅시다.


작은 주머니에는 큰 것을 넣을 수가 없다. 짧은 두레박줄로서는 깊은 우물의 물을 퍼 올릴 수가 없다. 이처럼 그릇이 작은 사람은 큰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자)


직업 선택의 10계명

다음은 자율학습, 눈높이수업 등을 통해 뛰어난 학습 성과를 내는 것으로 유명한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10계명’입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인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 그리고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우리가 흔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철저히 반대되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대의 조언을 따를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10계명을 쓴 사람 역시 정말로 이렇게 하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또한 남들처럼 살겠다는 획일적인 삶을 거부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 역시 어쩌면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과 비교하면서 남들처럼 살아가려는 획일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 믿음의 길... 이로써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희망의 길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삶임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올 여름 모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여름만 되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더위가 아니라 잠을 못 자게 만드는 모기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모기의 접근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각종 도구와 약을 모두 구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 여름에는 이러한 도구와 약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잘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모기가 없었던 것이지요.


지난 주일이었습니다. 저는 방의 환기를 위해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여름에는 모기 때문에 잘 열지 않았지만, 이제 10월의 중순이고 또한 모기가 올 여름 별로 없었으니 창문을 열어도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날 밤 저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여름날 모기에게 물릴 양을 이날 밤 저는 단 한 번에 다 물린 것 같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따뜻한 곳을 찾던 모기들이 낮에 활짝 열어 놓은 틈을 타서 제 방으로 들어왔고, 이날 밤 저는 그 모기들의 목표물이 되어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기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모기는 저의 방심을 틈타서 저를 밤새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조금의 방심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라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불쑥불쑥 찾아오거든요. 특히 조금이라도 안일한 마음을 품을 때,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할 때 죄는 그 잠시의 틈을 잊지 않고 찾아옵니다. 이를 통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어렵고 힘들게 이 세상을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우리 모두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안고 오늘 어떻게 해야 행복한 지를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깨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앞서 잠깐의 틈을 타서 모기가 저를 공격했던 것처럼, 죄의 유혹은 우리들 안에 조금의 틈만 있어도 내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행복보다는 불행하다며 어렵고 힘들어 합니다.


따라서 잠시의 틈도 주지 않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각종 도구와 약이 필요한 것처럼, 죄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각종 도구와 약들이 필요합니다. 즉, 기도와 묵상 등의 각종 영성생활을 통해 우리들은 죄의 유혹을 거뜬하게 물리칠 수가 있으며, 이 모습이 바로 깨어 생활하는 행복한 주님 종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행복을 바로 나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지금 당장 실천하도록 합시다. 행복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것입니다.


삶은 절망의 저편에서 시작된다(사르트르).


인생의 네 가지 처방전(리민, ‘이야기로 배우는 하버드의 지혜’ 중에서)

다양한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박사가 있었다. 그는 남보다 더 많은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결국 그는 한 심리학과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박사의 고민을 들은 후 말했다. “여기 네 가지 처방전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 가까운 바닷가로 떠나세요. 잡지나 신문을 읽지도 말고, 가족이나 일 생각도 잠시 접어 두세요. 9시, 12시, 15시, 17시. 시간에 맞춰 약봉지를 하나씩 열면 됩니다.”

다음 날, 박사는 의사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바닷가에 갔다. 9시, 그는 첫 번째 약봉지를 꺼냈다. 안에 든 것은 알약이 아니라 의사의 글씨가 적힌 쪽지였다. ‘귀를 기울여 들으세요.’ 박사는 조용한 곳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바람과 파도 소리가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켜 주는 듯했다.

12시, 그는 두 번째 약봉지를 꺼냈다. ‘추억’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는 앉은 채로 옛 기억을 더듬었다. 철없지만 순수하던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우정, 부모님의 사랑 등 그동안 잊고 살아온 것이 너무도 많았다.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꿈틀거렸다.

오후 3시, 그는 세 번째 약봉지를 꺼냈다. ‘초심을 회복하세요.’ 그는 젊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는 성공만 좇느라 다른 사람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후 5시, 그는 마지막 약봉지를 꺼냈다. “당신의 모든 근심을 모래에 쓰세요.” 그는 그동안의 걱정거리를 남김없이 적었다. 그러자 곧 파도가 밀려오더니 그의 근심을 깨끗하게 쓸어 가 버렸다.





얼마 전, 시국미사 참석을 위해서 명동에 갔다가 겪은 일입니다. 미사 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서 간단한 요기를 위해 근처 분식집에 두 분의 신부님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저희는 워낙 메뉴가 많아서 무엇을 시킬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김밥 두 줄과 만두 하나를 달라고 큰 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듣지 못했나 싶었지요. 그래서 다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여기 김밥 두 줄과 만두 하나 주세요.”

이 말에 주인이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저 귀먹지 않았어요. 뭘 그렇게 확인하듯이 또 말합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미사를 앞두고 해서는 안 될 행동 같았지요. 그래서 다른 소리 하지 않고 조용히 음식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뒤,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김밥 한 줄과 만두 하나가 나온 것입니다. 귀먹지 않았다고 왜 또 말하느냐고 구박을 주더니만, 주문한 것과 차이를 보입니다. 다시 말하기도 뭐해서 그냥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맘속으로 생각했지요. 

‘여기 다시는 못 오겠다.’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원합니다. 그러나 음식 맛만큼 중요한 것은 친절함입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회사의 인사이동 때, 각 부서에서 선호하는 일순위는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항상 밝고 인사 잘하고 싹싹한 사람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왜냐하면 처음에 직원을 채용할 때 그에 맞는 적재를 데려온 것이기 때문에 기본 능력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격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성과를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디에서나 이렇게 친절하고 성격 좋은 사람은 환영받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불친절하고 더러운 성격을 드러내는 사람을 더 좋아하실까요?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주님께서도 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행복한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있는 충실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큰 신뢰를 얻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친절하고 성격 좋은 사람의 모습. 그런데 그 모습을 우리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며, 우리는 이 모습을 만들기 위해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 자신도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아름다움에 눈을 가리고 흠만 보는 것은 마음을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최악은 아니다(‘좋은 글’ 중에서)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마당에 쓰러진 어느 날, 그의 처지를 비관한 삼촌이 “사람대접 못 받고 사느니 차라리 함께 죽자.”며 어린 그를 철로에 묶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던 그날의 악몽은 두고두고 소년에게 각인됐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그는 운 좋게 대형 제과점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걷어 차이고 배곯아 가며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지만, 빵을 만들 때면 희한하게 고단함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행복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스무 살 초입, 군대 소집 명령으로 그동안 쌓은 경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막노동판을 전전한 작가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기찻길로 뛰어들려다가, 순간 ‘내가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다.’라는 깨달음으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읽다 청년은 어린 시절 죽을 뻔한 기억을 떠올렸다.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수모를 겪지 않으리라 다짐한 어린 날의 기억이 나태한 자신을 꾸짖었다. 그가 바로 ‘빵의 황제’ ‘대한민국 제과제빵 명장 6호’의 칭호에 빛나는 김영모과자점 김영모 대표다. 그때 읽었던 책은 카네기 전집 ‘행복론’. 그는 책 속에서 발견한 ‘좌절을 딛고 일어선 공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작가는 그때 얻은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했어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개선하라. 나는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상황이 어렵다면 몇 가지 악조건을 보태 그보다 못한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더할 수 없는 최악이라면 우선 그대로를 인정하고 하나씩 개선하라. 상황은 전보다 나아지게 돼 있다.

 

 


깨어 있어라.

유경희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신비스러운 사건을 표현할 때 무덤에서 걸어 나오시는 장면을 묘사한다면 너무 직설적이고 주관적인 것은 아닐까 ? 


그러나 외젠 뷔르낭 (1850 ~ 1921) 의 유화 작품 ‘달려가는 제자들 : 베드로와 요한’ 을 보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 베드로 (그 후 선교와 순교로 성인이 되셨지만) 를 통해 그 사건의 놀라움과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 기쁨은 아직 나타나 있지 않은 듯하지만 말이다. 사실 그랬을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부활 사건에 대하여 누차 말씀하셨지만 진정으로 이해한 이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부활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는 어쩌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것을 어떻게 변명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재림을 뜻하시며, 특히 루카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재림 시기가 닥치기 전에 예수님의 지시를 성실히 따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 같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반을 두고 “예수 부활 아니시면 구속 사업 헛되도다.” (가톨릭 성가 134번) 라는 구절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주님께 다가가고 깨어 있는 방법의 하나가 성화를 보고 묵상하며 사람들과 대화하고 가르치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다. 지난 시절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다가 이 시점에는 생각지도 않은 교회의 한 분야에서 봉사하게 된 은혜에 감사하며 항상 깨어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기다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번은 환청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할 때였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래서 그 자매가 매일 거의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저에게 했었습니다.

전화가 올 시간이 되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정신은 온통 전화 벨 소리에 쏠려 있었습니다.

한 번은 땀을 흘려 샤워를 바로 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샤워를 했습니다. 그러나 물소리가 너무 커서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들려 거의 비누를 칠한 상태로 화장실을 나와 방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전화는 울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것이 기다리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환청까지도 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항상 깨어있으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혼인잔치는 언제 끝날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뜻은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더라도 죄 없는 상태에 있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살라는 뜻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기다리다 혹 잠이 들 수 있지만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바로 달려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데 그 주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종이 주인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릴 수 있을까요? 오히려 주인이 없으니 본인이 주인 노릇을 하느라 주인이 더디 오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님은 제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주인이 무서워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사랑하여 마치 신랑이 오는 것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거의 안달하며 그 분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해야 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잘 기다릴 수 있고 부모가 자녀를 잘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심판자로서 기다리기를 원하시지 않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맞이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정말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인이 아니라 마치 종처럼 사랑해 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그 얼마나 달콤합니까?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기다림이 행복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알면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은 설레임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소풍 가기 전 날 잠을 이루지 못한 것 등을 기억해보면 이것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소풍 가는 날보다 그 전 날이 더 기대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성탄절보다 성탄 이브가 더 즐거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만나는 날이 이 소풍 전날이나 성탄절 이브처럼 기다리는 날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 사제의 아버지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날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신 모습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는 날 주님께 가고 싶은 소망대로 그 날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한 인생을 주님께 바치며 사셨기 때문에 주님께 당당히 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산 사람들은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여 수고한 것을 반드시 갚아주실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월급날만 기다린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월급을 타시는 날이면 초코파이 한 박스를 사오셨습니다. 동네에 가게가 없을 때라 초코파이는 우리에게 가장 맛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을 아시기에 아버지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오던지 양에 상관없이 우리 형제들은 단숨에 끝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산 사람에게 올 것은 당신의 사랑과 보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서 이것을 느끼기 때문에 주님을 더 기다립니다. 어쩌면 죽음을 더 기다립니다.

열심히 삽시다. 주님께서 무서운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띠를 매고 우리에게 시중들 준비를 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극한 섬김을 받는 행복한 종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종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보통 생각은 주인이 행복하지 종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고 그래서 무엇이든 자기 좋을 대로 할 수 있는 주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종은 불행합니다.

더욱이 조금만 주인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두들겨 패고 아무 잘못 없어도 화풀이와 분풀이를 종에게 하는 주인의 종이라면 더더욱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종이 행복하다고 할 때 그 주인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주인들과는 다른 주인입니다.

폭력적이고 변덕쟁이가 아님은 물론 주인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도 않습니다.

Very nice한 주인입니다.

아니 Very good 주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띠를 매고 종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종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드는 그런 주인입니다.

보통은 종이 주인 곁에 Stand by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인이 종 곁에 Stand by한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렇게 행복한 종이 우리이고 그렇게 좋은 주인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님은 어째서 그리 좋으신 분입니까?


우리의 주인님은 사랑이 당신의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선이 그 본질이고 겸손이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아, 이렇게 본질적이신 하느님!


그런데 행복한 종의 조건이 있습니다.

주인님께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의 단 하나의 조건은 주인님께 깨어있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의 주인님은 본질적인 분이시니 본질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고 다른 것에 홀려서는 안 되고 다른 힘에 이끌려 다른 것을 섬겨서는 안 되고, 주인님의 좋으심에 홀딱 반해 거기에 온전히 머묾이요, 주인님의 그 겸손하심에 감동하여 온 마음을 다 하는 것이요, 주인님의 그 사랑에 황홀하여 그 사랑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이 행복으로 만족하는 것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대리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눈을 감고 상상해보시라.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분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고 세심한 배려를 받는 상황을.

 

 

 

<내 등의 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미사를 도와주러 오신 한 자매님께서 식사가 끝나자마자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고 일어나셨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면 좋을텐데...무슨 일이냐?"고 여쭸더니 "집에 영감님이 계셔서, 점심 준비를 해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세가 꽤 지긋하신 분이셨기에 제가 농담조로 "영감님한테 전화하셔서 오늘 점심은 짜장면 시켜 드시라.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자매님은 펄쩍 뛰시면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발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영감님 점심준비를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시는 자매님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아 보였습니다.  

그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준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루 온종일 직장에서 시달릴 남편을 생각하며 정성껏 그리고 진지한 모습으로 맛갈진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처럼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유아용품들을 목록에 따라 차근차근 준비하는 산모의 모습은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키워드는 "준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준비되어있다는 말처럼 가슴 흐뭇하고 뿌듯한 일은 다시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매사에 충실하다는 것, 그래서 삶에 여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끔씩 한 선배 신부님의 충고가 생각납니다. "여러분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소년들 앞에 서지 마십시오." 

가끔씩 저도 삶에 쫓기다보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음으로 인한 결과는 대체로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횡설수설, 우왕좌왕, 좌충우돌을 반복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수도자로서 가장 좋은 준비, 준비중의 준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봅니다.  

그 준비는 다름 아닌 영적인 준비이겠지요. 또한 영적인 준비의 핵심은 "깨우침"이겠습니다.  

"돌아보니 삶의 모든 국면이 다 은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깨우침",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십자가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것이었음을 자각하는 깨우침"이 우리 삶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좋은 글"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읽은 "내 등의 짐"이란 글을 읽고 큰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과 함께 또 다른 깨우침을 위한 여정을 새 출발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내 등의 짐>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동은 라디오를 타고..

노우진 신부님

아침 일찍 청주로 출발해서 하루를 그곳에서 보냈다.

부탁받은 미사와 강의를 끝내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어느 방송인지는 모르지만 결혼 1년 6개월된 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이들은 오랫만에 남편의 직장 앞에서 만나 집으로 같이 들어가기도 약속했다.

시간 11시 30분경 늦은 시간에 만난 이들은 남편의 자가용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부인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하더란다. 

지하철 역에서 추위에 떨며 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는 보았는데 그냥 지나쳐온 것이 마음이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그 이야기를 듣고 차를 돌려 지하철 역으로 향했고 3천원에 남은 것을 다 살 수 있음에도 1만원을 드리고 남은 나물을 모두 사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뿌듯했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아내를 만나게 된 것에 감사드리며 남편은 운전하는 동안 부인의 손을 꼭잡아주었다는 얘기다.

 

아나운서는 감동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치며 그 아내의 마음도 아름답고 아내의 말을 듣고 지하철 역까지 차를 몰고 간 남편의 마음도 너무도 아름답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 방송을 듣는 내내 마음이 큰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한 사람의 친절과 사랑이 이토록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구나!' 하는 생각을 깊이 하게되었다.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부부의 순수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가는 순간 그 방송을 듣는 많는 사람들이 받았을 감동을 생각하면 작은 힘이지만 그 영향으로 인해 거대한 힘이 되는 사랑의 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순종할 때 우린 어쩌면 너무도 큰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다리는 이의 기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저에게 오십니다.

말씀으로, 옆에 있는 벗으로, 크고 작은 사건으로 오십니다. 

하느님은 오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제 자리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제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됩니다.

오시는 분이기에 제게 하느님이십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제 어깨를 두드려주시기 위해 꺾인 제 다리를 주물러 곧추 세워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저에게 오십니다.

오셔서 제 종이 되신답니다.

주님이신 분이 종이 되신답니다. 

종이 되시려는 당신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꼭 오시는 분이시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함께 생활하는 벗들을 통해서 오시는 주님을 제게 주어진 일들과 제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마음의 불을 밝히고 믿음의 눈을 떠 깨어 있으면 됩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요.

주님께서 저의 종이 되어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소개로 만나게 된 남자와 여자,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남자: 혹시…, 담배 피우나요?

여자: (호들갑)어머~, 저 그런 거 못 피워요~!

남자: 그럼, 술은?

여자: 어머~, 저 그런 건 입에도 못 대요~!

남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연애는?

여자: 연애요~? 전 아직까지 남자의 ‘남’자도 모르고 살았는걸요?

남자: 정말 순진하시군요! 전 솔직히 반갑긴 하지만 무슨 낙으로 사시는지? 

그러자 여자는 환한 미소를 띠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자: 호호호~~~,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아요! 


거짓말하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는 이 여자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여기에 자유롭지 않은 것 같네요. 바로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에,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는 마음에 거짓말이라는 옷을 입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결국 드러날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말함으로 인해서 난처하게 될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진실되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한 표정을 지으실지 상상하여 보면 얼굴 들기가 힘들어 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행복한 사람은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거짓말 등으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벌을 당할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말이 생각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 곁에 있는 그 행복을 우리는 왜 찾지 못할까요? 바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거짓된 자기를 만들게 되고,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아닌 주님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은 진실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 앞에 다가올 미래는 항상 밝을 것 같습니다. 즉,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미래만 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코 밝은 미래는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조그만 있다가’, ‘내일 하지 뭐…….’라는 말은 절대로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사랑하고, 지금 당장 봉사하고, 지금 당장 희생하면서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가오는 미래는 분명히 밝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습관 되어요.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좋은 글’ 중에서)

첫째,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움켜 쥐어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거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이 가장 큰 후회랍니다.

둘째,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며 또한 이러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고 합니다.

 


 

“주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은 위로와 평화로 든든합니다”

홍성만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시던 유다 지방 사람들은 의복을 길게 늘어뜨려 입었기 때문에 일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일할 때는 허리에 띠를 매어 옷을 걷어 올렸습니다. 또한 등잔은 배 모양의 접시에다 무명으로 심지를 만들어 담은 것이었는데, 그 심지는 언제나 깔끔이 손질되어 있어야 불을 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늘 준비된 상태에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깨어 준비된 상태에서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시중을 듭니다.

우리는 체험을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은 위로와 평화로 든든합니다.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담담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봉사하시며 나를 섬기시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 22장 27절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맞습니다. 어린 자녀를 부모가 돌보듯 주님은 나를 돌보십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깨어 있어 그때그때마다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십니다.


삶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깨어있어 주님을 맞아하면 됩니다.

그 주님께서는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섬기십니다.


중요한 것은 늘 깨어 있어, 나를 한없이 품어주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현역(現役)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현역’은 수도자인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의 병사’인 수도자들에게 영적 전쟁은 죽어야 끝이기에 수도자들은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긴장을 풀 수 없는 게 수도자들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비단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영원한 현역’입니다. 그런데 마치 제대나 한 것처럼 세상 것들에 빠져 긴장을 풀고 냉담한 많은 이들을 보면 얼마나 위태해보이는지요.

마치 전쟁터의 병사들이 군기가 빠져 무기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훈련도 소홀히 하는 경우와 흡사합니다. 이러면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결코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훌륭한 병사는 사기충천하여 깨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체력을 단련하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병사요, 평상시 무기 점검도 철저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병사인 신앙인의 삶도 이와 흡사합니다. 

과연 하느님의 병사로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무기는 충분한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는 종처럼 늘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준비된 만남

노미화

초등학교 교사도 오래하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나름대로 고정된 틀이 있어 거기에 맞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초임 때처럼 아이들 앞에서 떨지는 않지만 오히려 뻔뻔해진 것 같아 이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다. 

나는 하루 종일 교실에만 앉아서 수업하는 것이 힘들다. 그런 날이 이삼 일 지속되면 견딜 수 없다. 머리가 아프고 답답해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게 된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새로 돋아난 풀이며 꽃을 발견한 아이들이 소리칠 때 비로소 살맛이 난다. 즐겁게 노래하고 땀 나도록 뛰고 난 뒤 수돗가에 몰려가 세수하고 교실로 돌아오면 비로소 가슴이 시원해지고, 아이들도 나도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런데 우리 반이 늘 소란하고 시끄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여섯 학급 작은 학교에 아이들도 열댓 명 적은 숫자이니 그 아이들이 뛰고 떠들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그런데도 이것이 윗분들 보기엔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올해도 몇 번이나 교장실에 불려갔다. 그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곤 한다. 학급 담임 중에 나이도 제일 많은데 아이들이 떠든다고 불려 다니니 참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이들 앞에 섰을 때다. 이런 날은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진다. 언제까지 더 교단에 서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수업까지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닐까! 


 


우리가 기다리는 그 대상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이윤벽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은 항상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잘 쳐서 빨리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기다림, 처녀 총각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는 기다림, 가장은 직장의 승진을 기다리고, 우리 재래시장 상인들은 빨리 시장경기가 풀려서 장사가 잘 되기를 기다리겠죠. 특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편안한 죽음과 그 이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기다릴 겁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우리를 동물과 달리 인간으로 특징짓게 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고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고을의 포악한 사또는 백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기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기에 그 백성들은 비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전혀 희망을 찾을 수 없고 힘든 날을 살아가야 하는 고을 사람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희망의 메시지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언젠가 고을 사람들 중에 힘센 장수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장수가 고을 사또 무리들을 물리치고 그 고을에 평화를 가져오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힘센 장수가 될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소식에 모든 고을 사람들은 기뻐 날뛰며 장수가 될 아기의 부모에게 축하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부모는 하루하루가 지나 갈수록 불안해지고 초조해졌습니다. 우리아기가 커서 그 힘세고 포악한 사또 무리와 싸운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싸움에 패배한다면 온 집안사람들이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날 저녁 아기의 부모는 결정합니다. 고운 모습으로 자고 있는 아기 얼굴에 베개를 덮어 누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기야, 아기야, 이쁜 아기야! 다음에 세상에 태어나걸랑 이런 험한 세상이 아니라, 좋은 세상에 태어나거라.”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을 두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대상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거짓된 기다림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실현할 때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한마디로 “우리의 사심”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이재영 신부님

1992년 10월 10월 28일 신문이나 방송을 크게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날 세상 종말이 와서 예수님께서 공중으로부터 재림하게 되고 성도들은 하늘로 산채로 들려 올라가는 ‘휴거’가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다미선교회 목사를 비롯하여 그 휴거설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함께 모여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세상 종말은 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또 다시 사이비 종교 운운 하면서 잠시 흥분하다가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1994년 다시 한번 휴거설이 방송이나 신문을 장식한 일이 있었고 그 날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말세론자의 종말론에 쉽게 빠져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 어느 곳에도 정해진 날짜에 사람들이 공중으로 빨려 올라가고 예수님이 재림한다든지 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 전반을 통해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종말이 언제 어디에서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게다가 당신 자신 뿐 아니라 천사들도 모르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 자신도 언제 어디서 종말이 오는지 거기에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지금 여기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요 종말을 잘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언제 어디서 종말이 오든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지연되는 재림의 상황에 적용시켰습니다. 문지기의 비유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비유는 문지기의 막중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들은 도로로부터 떨어져 높은 담으로 분리되었고, 집 대문으로부터 떨어져 다른 주거지들과 함께 위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입구에 문지기의 집이 세워져 몇 세대의 집들을 지켰습니다. 문지기의 보수는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세대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 담장 안에 사는 세대들의 재산과 안전은 문지기의 성실성에 달려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주로 야근을 하고 낮에는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일할 때인 밤에 깨어 있지 않고 잠자는 것은 문지기의 존재이유의 상실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양 우리의 문지기로 비유하시기도 했었습니다. 문지기가 깨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들고 서서 완전한 준비를 갖추어 인내하며 주인을 고대하고 기다리듯,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세상의 것들에 유혹되어 정신이 다른 데에 붙잡혀 잠든 상태가 되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어 깨어서 주님의 오심을 설레는 가슴으로 준비하여 기쁘게 주님을 영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불확실성으로 감싸여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주셨기에 확실한 시간이지만, 내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나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큰 창고를 짓고 넘치는 풍요를 내일부터 즐기자고 있으나, 그 날 밤이 그 부자의 마지막 종말이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도 오늘이 나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깨어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어 문을 두드리는 주님을 위해 즉시 일어나 빗장을 벗기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오히려 주님은 당신이 띠를 띠고 우리를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나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반성해보도록 합시다. 충실한 문지기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님이 늦게 오시겠지 하며 꽤를 부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충실한 문지기로서의 삶을 잘 살았기에 빨리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며 살아갔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주님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마라나타’ 하고 크게 외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멘.


 


기도는 기다림...

이호자 수녀님

하느님의 축복은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이사악이 야곱에게 준 축복을 에사오에게는 나누어줄 수 없었던 것처럼.(창세 27,'37) 그러고 보면 세상만사는 평형저울의 원리란 말인가? 승자의 영광 뒤에는 반드시 패자의 눈물이 있듯이.


얼마 전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한 젊은 엄마의 치유를 위해 여기저기 기도를 청한 일이 있다. 공교롭게도 기도 부탁을 받은 할머니 한 분은 그 다음날로 발가락에 금이 가서 꼼짝도 못하고 깁스를 하고 있다면서 전화로 환자의 병세부터 묻는 게 아닌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환자는 조금 차도가 있어 산책까지 하고 왔다는 소식이다. 그렇구나,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구나. 


인간에게는 귀소본능이나 절대의존 감정 외에도 수평유지 본능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부를 누릴 때 다른 누군가는 굶주려야 하며, 많이 배운 사람이 있으면 못 배운 한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으며, 누군가의 웃음 뒤에 누군가의 슬픔이 있으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그 누군가는 불행을 짊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는 게 필연이듯이.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한 이는 병약한 이를 위해, 부유한 이는 빈한한 이를 위해, 명예를 누리는 이는 무력한 이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고 유식한 자가 무능한 자를 배척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오히려 그들을 존경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게 순리인 것 같다. 


누구든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더욱더 청할 것이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은혜를 구해야겠다. 


미사 때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언젠가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어떻게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의 선물

이선희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줄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일에서부터 그리운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짧게는 전철을 기다리는 일까지, 그 정도가 어떠하든 기다리는 일은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언제나 팽팽한 긴장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만 사는 어떤 소나무는 몇십 년을 씨앗의 형태로 땅속에 있다가 산불이 나면 그 열을 받아 종자의 껍질이 벌어지면서 발아가 된다고 합니다. 산불이 나서 토양은 비옥해지고 경쟁이 될 만한 다른 식물들이 없는 땅의 주인이 되고자 기약 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땅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그 소나무의 기다림은 정말 상상이 안 됩니다. 


또 참나무 중에는 땅 위에서는 분명 나무로 크고 있는데, 땅속에는 굵은 뿌리의 형태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답니다. 참나무의 전생치수(前生稚樹)라고 한다네요.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도 크게 자랄 수 없는 조건이라면 위로 자랄 것을 포기하고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뿌리에 살아 있던 눈에서 이듬해 다시 싹을 올리고 다시 실패하고, 다시 싹을 올리고 다시 포기하고,이를 몇십 번 반복한 결과랍니다.땅속에서 얼만큼의 세월을 견뎌내야 그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큰 그늘을 만들며 빛나게 살아가는 걸까요? 당장 결과를 보지 않으면 이내 지쳐버려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는 저의 조급함에 경종을 울리는 참나무 얘기입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의 가장 좋은 행위는 묵상하고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들에 대한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려고 해보십시오.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미처 눈여겨보지 못하고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친밀함은 진부함과 맹목적 권태를 낳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치는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새롭게 볼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해보십시오. 먼저 그들에게 당신이 싫어하는 어떤 점이 있는지 관찰하고, 공명정대하고 초연하게 그들의 결점을 연구하십시오. 

이것은 그들에게 ‘우쭐거린다, 이기적이다, 거만하다’ 등의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어떤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 에 이런 일은 정신적인 나태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을 독특한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로 보는 것은 어렵고 도전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태도는 사랑과 용서로 바뀔 것입니다. 

결점에 대한 연구가 끝나면 이제 당신이 싫어했기 때문에 전에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보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에게 일어나는 태도의 변화나 느낌을 관찰하십시오. 그들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봉사의 행위보다도 무한한 사랑의 선물이 됩니다. 

이제 당신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기묘한 사랑의 태도로 말미암아 당신이 당신의 자아를 향해 변화되고 있다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 잠자고 있다는 것, 자기성찰     

이성우

‘깨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깨어 있다는 것은 잠자지 않는다는 말이겠지요. 깨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다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이 행동의 근본 동기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살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나에게 유익하고 옳은 길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나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이 길을 가겠는가? 지금 내가 행하고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나의 소망과 일치하는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영혼이 간절히 바라는 나의 깊은 소망인가? 아니면 나의 얄팍한 욕구인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의식하고 곱씹으며 가고 있다면, 나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나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자고 있는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다가오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 감고 자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알아보겠습니까? 

깨어서 가는 길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길이지만 충분한 대가가 주어지는 길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꼭 필요한 출발점인 것입니다.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최명숙 목사

요즘처럼 먹을거리가 흔하지 않던 어린 시절, 어느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이웃집에서 이사를 왔다며 커다란 접시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붉은 팥고물 찰떡을 먹음직스럽게 담아가지고 왔습니다. 순간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시장에 가시고 안 계신 때였습니다. 나는 먹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공부하던 책상 위에 떡 접시를 올려놓고 신문지를 펴서 떡에 닿지 않도록 살짝 덮어놓고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먹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 먹다 남은 떡 접시를 보여드리기 싫었습니다. 

어머니는 떡 접시에 김이 다 가시고 식어갈 즈음 돌아오셨습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기대감으로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나는 옆집에서 이사를 왔다며 가져왔노라는 보고와 함께 보란 듯이 말짱한 떡 접시를 곱게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기다린 것에 감동을 받으셨고, 나는 어머니의 칭찬과 함께 고물이 약간 식어서 말라가는 떡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며 인내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기대감에 부풀어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때 어머니를 기다렸던 것처럼 속히 오시기를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늘 드리는 신앙고백처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고백이 진심이라면, 그렇게 그분의 오심을 참으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깊은 숲 속에 나무와 호랑이가 함께 살았습니다. 바로 옆에는 마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호랑이가 무서워 숲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호랑이는 자유롭게 숲을 거닐며 왕 노릇을 하고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는 갑자기 이 호랑이가 얄미워졌습니다. 자기가 있는 이 숲에서 왕 노릇 하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인데, 글쎄 나무 아래에 대소변을 뭉텅뭉텅 쏟아놓기까지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지요.

‘저 예의 없는 호랑이를 이 숲에서 쫓아버려야지.’

나무는 이렇게 마음먹고 어두운 밤,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자기 쪽으로 올 때, 흉악한 모습으로 호랑이를 덮쳤습니다. 너무 놀란 호랑이는 그 길로 다른 숲으로 달아났고, 무서워서 다시는 이 나무가 사는 숲으로는 오지 않았습니다.

나무는 속이 후련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며칠이 지나자 숲 근처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 이 숲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숲에 더 이상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낫이며 톱을 들고 와서 나무들을 마구 베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짓느라, 땔감을 마련하느라 너나없이 달려온 것이지요. 그제야 나무는 깨달았습니다. 호랑이는 자기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돕고 있었다는 것을…….


나하고는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만 없으면 나는 정말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와 반대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선 나무와 호랑이의 관계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도를 깨닫고 주님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방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 사람 때문에 얻는 행복을, 즉 주님께서 나에게 마련해 주신 행복을 걷어차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자신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방법은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비교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경쟁하는 것보다, 먼저 자신을 반성하는 자세와 그 반성을 통해서 작은 변화를 약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렇게 자기반성을 통해서 끊임없이 작은 변화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께서 펼쳐주신 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위해서 지속적인 아침 운동 어때요?


자서전(임영조, '행복한 동행' 중에서)

1943년 10월 19일 밤

하나의 물음표(?)로 시작된

나의 인생은

몇 개의 느낌표(!)와

몇 개의 물줄임표(.......)와

몇 개의 묶음표(<>)와

찍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만둔 몇 개의 쉼표(,)와

아직도 제자리를 못 찾아 보류된

하나의 종지부(.)로 요약된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있을 때 좀 더 잘할 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 인사이동 때 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입니다.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둥지를 틀기 위해 떠나던 아침이었습니다.


형들한테 맨 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던 녀석, 못 얻어먹어서 삐쩍 마른 강아지 같던 한 꼬맹이가 계속 저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왜 그러냐고 하니, 자기도 저랑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원망과 아쉬움 섞인 아이들의 눈동자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후회가 막심했는지 모릅니다. 계속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한 생각은 ‘있을 때 좀 더 잘 할 걸’이었습니다. 같이 살 때, 한번이라도 더 품에 안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눈길 주고, 한번이라도 더 용서해주고, 조금 더 뛰어다니고...그렇게 살 걸,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고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장 기대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마도 평생을 하루처럼, 하루를 평생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을 마지막처럼, 오늘이 내 일생의 전부인양, 그렇게 진지하게, 철저하게, 심혈을 기울여,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웃을 바라볼 때도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못 볼 사람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 오늘 배당된 일을 시작하면서 내게 주어진 마지막 업무로 여기는 모습이 아닐까요?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회의 차 긴 배 여행을 다녀오셨답니다. 기나긴 여행이었기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비마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초라한 부두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서니 뜻밖에도 한 할머님이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본당 내에서 가장 가난한 할머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신부님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외쳐대는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신부님이 안계시니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벌써 사흘 전부터 부두에 나와 있었다. 배가 도착하는 시간만 되면 비까지 맞아가면서 목이 빠져라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님은 신부님 앞으로 봉지 하나를 내밀었는데, 풀어보니 거기에는 손때가 묻을 만큼 묻어있는 이상하게 생긴 큰 떡이 여섯 개나 들어있었는데, 보아하니 불상 앞에 놓아둔 떡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할머님을 바라보며 신부님은 이런 진리 하나를 깨달으셨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쁜 일중에 기쁜 일 한 가지는 ‘한 인간이 적어도 다른 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시없는 귀한 존재’로 여기지는 것입니다(A. J. 크로닌, ‘천국의 열쇠’, 바오로 딸 참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아마도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실 삶의 모습은 위의 신부님과 할머님 사이 같은 그런 그림 같은 모습의 삶이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삶의 기쁨이며 희망인 그런 관계, 한 며칠 못 보면 허전하고 쓸쓸해서 못 견딜 정도의 그런 관계... 


 


'기다리는 사람'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이다.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왜 이토록 기다리는가?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모든 만물을 다 주었지만 거둘 짝이 없는 것을 보시고 아담에게서 갈비대를 뽑아 거둘 짝을 만들어 주셨다. 그랬더니 아담은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하고 행복해 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혼자서는 행복하지 못하고 거둘 짝을 만날 때에서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아무튼 인간은 늘 기다리는 존재이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채워줄 대상을 기다린다. 


인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기다린다. 아침을 먹었으면 점심을 기다리고 점심을 먹었으면 저녁을 기다린다. 봄이 왔으면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 오면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기다린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기다리는 것을 받게 되고 얻게 된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회사에 처음으로 입사를 하였으면 승진을 기다린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신부가 되기를 기다리고 수도원이 입회하였으면 서원 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다리지만 완전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것을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인간을 완전히 채워 줄 수 있는 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그분과 행복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분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은 하느님뿐이시다. 인간이 기다리는 분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왜 하느님을 기다리는가?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신랑이시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은 기쁨이다. 신부가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큼 더 간절한 것은 없다.

 

신부는 오직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살고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안고 살아간다. 신랑이 몇 시에 올는지 모르지만 낮이든 한 밤중이든  늘 신랑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신부의 삶이고 존재 이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신랑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간절히 기다려야할 신랑이시다. 신부의 행복은 기다리던 신랑이 와서 그분을 시중 드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기다림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날게 될 때까지 항상 기다림의 생활이 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모든 기다림은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생은 쓰다가 마는 편지, 부르다 마는 노래일 것이다.  


 


준비와 기다림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준비와 기다림. 이 둘은 형제지간 쯤 된다. 준비는 미리 마련하여 갖추는 것이고, 기다림은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을 미리 마련하여 잘 갖추고 있으면서 무엇이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안성맞춤이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면 수험생들은 사전에 그만한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고, 내일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면 계획에 따른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할 것이다.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일이 세상의 종말이라 치자. 그렇다면 종말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종말을 잘 맞이할 것인가? 오늘 복음이 마침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내용을 들려준다. 복음은 우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3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보도하고, 이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마태 24,43-51; 마르 13,34-36) 여기서 준비와 기다림이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가 집필되기 전에 모든 복음공동체에 확실하게 퍼져있었던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와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오실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오심의 시각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급하게 닥쳐와야 할 재림사건이 자꾸 지체하자 초기 교회공동체 안에 초조함과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적절한 입장표명이 4복음서 저자 모두의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과 원전(原典)을 토대로 제각기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맞추어 세상의 종말과 재림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24,1-44; 마르 13,1-37; 루가 21,5-36; 요한 14,1-3; 16,16) 


루가가 집필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1,6)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1,7) 하고 대답하신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왕국창건과 세상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날과 그 시각은 한밤중이 될지 새벽녘이 될지(38절)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림의 날과 시각이 아니라,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믿는 이의 태도는 준비와 기다림뿐이다. 교회는 그 동안 2,000년의 긴 세월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고, 최종적인 그 날과 그 시각을 향하여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세월동안 사라져간 사람들 안에서 그 날과 그 시각을 보았다. 이 말은 한 인간의 죽음이 바로 그 날과 그 시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죽음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산다는 비유의 뜻은 항상 근면하게 일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등불을 켜 놓고 산다는 비유는 자신 안에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게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뜻한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생(生)을 마감할 때,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그를 기쁨과 평화의 식탁에 초대하여 도리어 그에게 봉사해 주실 것이다.




깨어있으면 보이는 것들

박경선

얼마 전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참혹한 현실과 맞닥뜨려 대단한 용기로 자기의 믿음을, 그 믿음을 함께하는 동지들과의 형제적 삶을 지켜낸 순교자들을 기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분들의 단호한 선택과 뒤따르는 과감한 실천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 묵상하고 따를 수 있게 되었음을 압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면서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 늘 경고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하셨지만, 그 고난에서 우리를 피난시키시는 대신 앞서 그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격려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완성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라면 우리는 아직도 그곳을 위하여 아주 먼 길을 가야 하고, 그 길에는 어느 때 못지않게 거친 장애물들이 우리 발목을 잡고, 우리를 주저앉게 할 것입니다. 

늘 적과 나의 경계가 분명하다면 싸움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조금씩 옅어지는 그 경계에 우리가 무뎌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와 세상 가운데 택일이라는 노골적 선택을 강요받지는 않지만, 단란한 성가정으로 꾸려낼 내 가족의 안정된 삶을 위해 이웃의 눈물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장차 성직자로 키우고 싶은 내 아이의 뒷바라지에 헌신하느라 버려진 아이들의 복지정책에 눈을 감거나, 성실한 신앙인으로서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멀리 제주에서 벌어지는 분쟁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 전기요금 아끼기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도, 그 알량한 전기 때문에 밀양과 청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도 복음의 기쁨은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이 세상에 도전받는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때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중에서) 앞에 우리는 순교자들이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요구를 듣습니다. “깨어 있어라.”




<재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10월 21일의 복음 말씀인 루카복음 12장 35절-38절, '깨어 있어라.'의 내용과 루카복음 17장 7절-10절, '겸손하게 섬겨라.'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너무나도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12장 35절-38절에서는 종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고 있는데, 17장 7절-10절에서는 주인이 종을 기다리고 있고, 돌아온 종이 주인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두 내용 모두 '주인'은 '주님'을 뜻하고, '종'은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17장 7절-10절의 내용은 현실 세계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면서 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내용이고, 12장 35절-38절의 내용은 주님의 재림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종이 얻게 될 행복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두 내용을 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종'은 주인이 밖에 있든 집에 있든, 언제 어떤 상황이든 주인을 위해서 시중을 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는 밖에 있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새도록 기다렸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종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주님)은 그렇게 충실하게 일하는 종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시중을 들게 됩니다.

밖에서 종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든지, 집에서 종을 기다렸든지 간에 주인은 충성스러운 종에게 최상의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17장 9절의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말은, 주인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주인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내용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인의 태도가 아니라 종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주인처럼 섬기는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주님과 신앙인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벗의 관계입니다.

(연인 사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은 사실상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어린 시절에 혼자서 집을 지키면서 엄마가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알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사랑하는 분이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몽룡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성춘향의 심정?)

그래서 신앙인들이 종말과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한 일을 심판받기 위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 전의 무서운 재앙들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 또는 지상에서의 수명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더 연기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재림하신 주님의 심판이 무서운 일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분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온각 억울하고 서러운 일들을 주님께서 바로잡아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일이 바로 '종말의 심판'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요한 묵시록을 마치면서 묵시록 저자는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외칩니다(묵시 22,20).

바오로 사도도 "마라나 타!" 라고 외쳤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 라는 뜻인데, 주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로만 생각한다면, 재림하시는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마라나타'를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다면, 자기가 왜 그분을 무서워하고 그날을 무서워하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해서 엄마의 칭찬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아이와 뭔가 잘못한 일을 해서 엄마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고 있는 아이의 차이...




하느님을 만날 날

유정원

깨어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복음 말씀에 딴지를 걸고 싶습니다. 혼인을 하면서부터 12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저는 술잔치에서 돌아오는 남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아내로서 결코 행복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새벽 2시든, 4시든 술에 취해 제 흥에 겨워 휘청거리며 들어오는 남편은 얼마나 행복할는지 모르겠지만, 집안 구석에 소외되어 육아와 가사에 지친 저는 눈을 치뜨고 악에 받쳐 남편을 기다리든, 아니면 잠이 들었다가 남편의 기척에 놀라 깨든 결코 행복한 기분과 너그러운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필이면 왜 주인이 밤중과 새벽을 분별함 없이 들이닥치시고, 종들은 분명 낮 시간 동안 일을 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 저는 이런 복음 말씀을 읽으면 솔직히 미간이 찌푸려집니다.

3년 전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어버리셨습니다. 병상을 지키면서 저는 분명 어머니의 체질을 절반쯤 닮았으리라 짐작하며, 그 후부터 언제 찾아올지 모를 병과 건강에 예민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겠지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일상습관 같은 남편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것과 달리 불현듯 별다른 예고도 없이 찾아드는 병과 죽음처럼, 하느님을 만날 날은 갑자기 우리 눈앞에 닥쳐오겠지요.

 



기다리는 행복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 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저승사자를 기다린다든지 심판관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겠지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주 행복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비교하여,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입니까?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자기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사람은 정말 불행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사람은 사람은 없고 일만 있으며, 사랑이 없이 일 더미 속에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역시 만남이 있을 때 행복한 것이고, 그럴 때 Happy ending이 되지요.

기다리고 기다려도 님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슬픔이고 불행입니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다림은 몸은 비록 지금 떨어져 있어도 마음 안에 그 존재가 충만하게 현재하고 마음 설레게 하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는 기다림은 부재의 확인이요  그래서 크나큰 슬픔입니다.

만남의 기쁨만큼 못 만나는 슬픔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만남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요 보람을 주는데,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인은 기다리는 종의 그 충성스러움과 노고를 너무도 잘 알아주시고 고마운 마음이 넘쳐서 성찬을 마련하시고 시중까지 드십니다.

주인이 기다리는 종에 대하여 이토록 고마워하시고 성찬까지 마련하고 시중까지 들어주심은 역설적이게도 주인님을 기다리는 종들이 많지 않다는 역설이겠지요.


멀리 갈 것 없이 저를 보면 알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그렇게 기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도 얘기한 것 같은데, 이미 주님이 와 계신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무튼 저조차도 주님 오심을 그리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 비유를 통해서 볼 때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기다림을 기다리시고, 기다리는 우리의 그 사랑과 노고를 너무도 잘 알아주시며, 우리의 기다림을 너무도 고마워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의 주님은 정말로 우리가 기다릴 만한 분이십니다.

 



평화를 생각하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평화를 생각합니다.

평화를 생각하며 평화를 깨뜨리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

다른 이념.

다른 체제.

다른 민족.

다른 지방.

다른 주장.

다른 생각.

다른 성격.


다름으로 인해 하나 되지 못합니다.

다름으로 인해 다툽니다.

다름으로 인해 갈라집니다.

다르면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름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봐야 합니다.

다르기에 하나 될 수 없고 다르기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기에 다름을 미워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틀린 경우도 있지만 나와 다른 것 자체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틀렸으니 고칠 것을 요구하고 그래서 다툽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라고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가르는 적개심을 허무셨다고 얘기합니다.

즉,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하나가 된다고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유다인이나 이민족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몸을 주심으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적개심을 허무셨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 한 가족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한낱 유다인 예수에 불과하고 우리의 평화가 되실 수 없습니다.




<독서강론> : 주님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유다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율법이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의존하여 살았다. 율법은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이며, 삶의 원칙이며 기준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과 똑같았다. 아무도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 죄이다. 


의인과 죄인의 구분은 율법을 지키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율법에 얽매여서 율법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보거나 알지도 못했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서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용서와 은총의 하느님이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가 지극하신 하느님이시며, 용서와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의 희생 제물로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이 지극하신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는 표이다. 


율법이 비록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이었지만, 사람은 결코 율법을 충실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율법을 대신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외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은총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사도 바울로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깊이 체험했다. 그리하여 그는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에페 2,8) 하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알고 구원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셨고(로마 5,10; 2고린 5,18-20), 유대인과 이방인도 화해하도록 하셨다. 이제 율법은 그 힘을 잃어버려 사람을 단죄할 수도 없고(갈라 3,13-14; 골로 2,14 참조),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거나 구분할 수도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 모두를 하느님과 화해시켰고, 그들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과 적대감도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새 아담이 탄생했으니, 이는 곧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같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함께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로 창조된 하느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 


교회 공동체가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모퉁이돌이고(이사 28,16; 1베드 2,4-6),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건물의 기초이다(마태 16,18; 1고린 3,10-11 참조). 교회라는 건물은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세워지고 연결되어서 자라나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된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1이모 2,5)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인종, 성별, 노소의 구분도 없어지고 모두가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하느님의 성전을 이룬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이웃과 일치를 이루는 삶,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삶이다. 


오늘 당신 외아들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끼며 감사드리자.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됨으로써 하느님의 참된 성전을 이루자.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사랑과 존경의 또 다른 이름, 준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큰 손님’이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보통 조금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하루 전에 전화를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워낙 큰 어르신이고, 워낙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손님을 맞이하는 저희는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쓸고 닦고, 지지고 볶고, 사람들 초대하고, 장식하고, 프로그램 짜고, 그렇게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환한 얼굴로, 설레는 마음으로 그렇게 손님맞이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준비’입니다. 그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잘 준비한다는 것은 존경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일이며 예의를 갖추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허리에 띠를 매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허리에 띠를 맵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봉사할 준비가 잘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오시는 분을 향해 사랑을 실천할 만반의 자세가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들은 부모를 위해, 우리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잘 준비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복음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큰 준비보다는 작지만 정성이 담긴 준비, 사랑과 마음이 담긴 준비에 전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준비 중의 준비, 하느님 맞을 준비에 가장 우선권을 두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잘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사이에 기꺼이 서있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보다 밝은 미래로 인도하기 위해 늘 연구하고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군가를 바라보며 한숨 쉬는 분들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 어디로부터 다가올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절절한 하느님 체험은 한 사람을 완전히 뒤바꿔놓습니다. 그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노력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보다 깊은 하느님 현존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배경입니다




깨어 기다리는 이의 자세

김원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단순히 “깨어 있어라.” 하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자세는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신속하게 움직일 채비’ 또는 ‘봉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는 신약 성경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므로 허리에 띠를 매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종처럼 항상 예수님을 맞이할 마음가짐을 지니고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우리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섬길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자세는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입니다. 등불은 환한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우리의 잠을 쫓아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마음속에 세상 어둠을 밝힐 등불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나오듯 필요한 기름을 함께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름을 스스로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름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풂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겸손의 띠를 매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으로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기다리는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며 기다리셨습니까? 내가 편한 방법대로 주인을 기다리기보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준비하며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주인이 시중을 들 것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에서 바로 연상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3)."

이 장면은 참으로 따뜻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장면인데,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암시하는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대접하고, 우리가 시중을 드는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식탁에 앉히고 대접해 주시는 잔치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잔치가 바로 그런 잔치입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데(루카 15,24), 아마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식탁에 앉히고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집어 주면서 많이 먹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기뻐하면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서 방탕하게 사는 모습은 '취해 있는' 상태이고, 죄를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정신을 차려서 깨어 있는 상태를 회복한 모습이 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겉으로만 보면 늘 깨어 있는 상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동생을 용서할 줄 모르는 큰아들의 모습은 이기심, 교만, 율법주의 등에 사로잡혀서 취해 있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함께 즐기고 기뻐하자고 큰아들을 타이릅니다(루카 15,32).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잔치에 참석할 것인지, 아니면 거부하고 밖에 있을 것인지, 그것은 큰아들이 선택할 일입니다.

이것은 루카복음 14장의 '혼인 잔치의 비유'와 바로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는데(루카 14,16),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샀다고, 어떤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다고 하면서잔치에 가지 않습니다(루카 14,18-20).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초대한 것과 같습니다. 그 초대를 받아들여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 그 '응답'이 바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속세의 일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속세의 일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할 일입니다.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22장의 '혼인 잔치의 비유'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더 들어 있습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마태 22,11-13).

잔치에 참석하려면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예복을 잘 갖춰 입는 것도 '깨어 있는 것'입니다. "뭐가 이렇게 까다롭냐?"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최고 수준의 성덕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면서 착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사실 신앙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좁은 문'에 관한 말씀이나 '낙타와 바늘구멍의 비유'를 예로 들면서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좁은 문'에 관한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 문을 좁게 만드셔서 사람들이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좁다고 생각해서 안 들어가고, 넓은 문으로만 가려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태 7,13-14).

'낙타와 바늘구멍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하느님께서 일부러 바늘구멍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낙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것이고,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일을 어렵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제들이 미사 전 정식 제의를 입을 때는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칩니다. 하나 하나 걸칠 때 마다 그 순간에 합당한 기도도 바칩니다. 제일 먼저 착용하는 것은 표현이 좀 특별한데 개두포입니다. 어깨 위로 하얀 보자기를 걸친 후 끈으로 묶습니다. 이때 바치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내 머리에 투구를 씌우시어 마귀의 공격을 막게 하소서.”

 

이어서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면서 또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조찰함의 띠로 저를 잡아매시고, 또 제 안에 사욕을 없이 하시어 욕망을 절제하며 정결의 덕이 있게 하소서!”

 

이윽고 마지막 단계 제의를 입으면서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사제의 기도는 이미 제의방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예식을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해 사제는 허리에 띠를 매면서 준비를 시작합니다.

 

사제서품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장엄한 입당성가와 함께 입장행렬이 시작됩니다. 저희는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고 왼쪽 손에는 제의를, 오른 손에는 큰 초를 하나 들고 입장을 초긴장 상태로 입장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손에 켜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몸과 마음이 흐트러질 때 마다 그때 당시의 가슴 설레고 떨리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언제까지나 사제품 때의 긴장과 설렘의 마음으로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장 35~36절)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 등불을 켜놓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오늘날 신발 끈을 동여매는 것, 손전등을 챙기는 것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한다는 것, 머나먼 밤길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스카 축제일마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이집트를 탈출하던 기억을 되살리는 파스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때 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매었습니다. 이유는 약속의 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응답하겠다는 의미에서의 행동이었습니다.

 

요즘 미사 전 제의를 갖춰 입을 때 허리에 띠를 맬 때 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 선배 살레시안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주님, 지금 제가 봉헌하려는 이 미사가 제 생애 마지막 미사인 듯 봉헌하게 하십시오.”

 

매일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짧은 화살기도를 되풀이해야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하루가 제 생애 마지막 날인 듯 살게 하소서. 만나는 모든 인연을 마지막 만남인 듯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지상에서 완수하는 마지막 임무인 듯 정성껏 임하게 하소서. 오늘 매 순간 주님 은총 안에 깨어있는 하루를 살게 하소서.”




설레는 마음으로 깨어있기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새벽미사를 마치고 오후에 있을 강의준비를 하였습니다. 월요일이지만 쉬지도 못하고 강의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약간은 귀찮기도 했지만, 어차피 하기로 한 것이니 열심히 준비하였습니다. 준비를 다 마쳤을 때는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며 너무 만족하여 피곤함도 잊었습니다. 이제 점심 먹고 한 시간 쉬고 한 시간 성체조배 하고 신학교로 가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마지막 순간에 너무 정신없게 저장하다보니 잘못 눌러서 지금까지 해 놓은 파워포인트가 영구 삭제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보통 무엇을 만들어놓으면 여러 군데 저장해 놓는데 이것은 어디에도 저장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해 놓은 것이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순간 하느님께 대한 불만이 갑자기 끓어올랐습니다. 당신 위해서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수업준비 한 것까지 날아가게 만드시는 분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지금 바로 다시 수업준비를 한다고 하면 점심도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수업 갈 때까지 피곤함을 무릅쓰고 다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그냥 대충 준비를 해서 대충 강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가까스로 다시 파워포인트를 만들어 차를 타고 신학교로 가는데 약간은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일을 하지만 즐기지는 못하는구나!’

강론을 들어줄 사람들을 만나기를 설레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는 말을 해 주어야 하는 부담감을 극복하기 위해 하루하루 강론을 써온 것 같고, 강의도 그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니 힘들지만 억지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가르치면서 얻는 만족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위한다는 스스로의 위로였지 마음에서 저절로 솟구치는 그 기쁨과 평화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엔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매우 무섭거나, 혹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무엇 때문에 매일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많이 사랑해서일까요, 아니면 무서워서일까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해야 해서 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그렇게도 많이 사랑해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지금 죽어도 좋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좀 쉬고 싶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쁘게 살더라도 제대로 바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며 깨어 기다리는데 힘겹게 기다리기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라면 주인이 종의 시중을 들어준다고 하는데 주인을 사랑하여 충실히 산 것이 아니었다면 그 분의 시중을 받으며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주인이 하인의 시중을 들어줄 정도이면 주인이 하인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인도 주인을 사랑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마음으로 깨어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월급날만 기다린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월급을 타시는 날이면 초코파이 한 박스를 사오셨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을 아시기에 아버지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즐거운 기다림이었습니다.

어떤 여인을 사랑하고 있을 때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환청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너무나 기다리면 전화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이런 기다림도 설레는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힘들게 일하며 살아가지만 마지막 우리가 죽는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오셔서 너무 고마워서 앞치마를 두르고 우리 시중을 들어주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시는 아버지나, 혹은 애인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가장 잘 깨어 기다리는 방법은 그 분을 더 사랑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 기다리게 되고 그 기다림 자체가 설레고 행복한 기다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사랑을 더 배우고 나의 부당함을 더 깊이 깨달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하루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설레는 마음으로 그 분을 깨어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시험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고등학교 때 엉뚱한 상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즉, 머리가 좋아지는 약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상상을 했었지요. 이 약만 먹으면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시험만 보았다하면 항상 100점입니다. 괜히 밤에 자지 않으면서 공부할 필요도 없고, 연습장을 빼꼭하게 채우면서 단어를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내일 시험이면 약 하나 먹고서 책 한 번 읽으면 100점이라면 얼마나 생산적입니까? 


아마 이 약이 나오면 공부에 대해 억압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나 그 학부모들이 무척 행복해 할 것입니다. 시험 보면 무조건 다 맞으니, 학교에서는 굳이 시험을 볼 필요가 없겠지요. 당연히 수능은 없어질 테고, 각종 시험 역시 필요 없다고 판단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만민이 모두 평등한 이상향이 아닐까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머리 좋아지는 약이 나올 법 한데, 아직까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약이 나오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우등생이 되면, 굳이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겠지요. 그래서 공장은 돌아가지 않을 테고, 논과 밭에도 잡초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마다 이렇게 차별화 정책(각자마다 서로 다른 탈렌트를 주신 것)을 쓰신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한데 어울려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받은 탈렌트를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불공평하다고 원망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이라는 시간에 충실하지 못하기에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실한 사람만이 주님의 인정을 받아 주님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코 공부를 잘 하는 사람, 특별한 재주가 많은 사람들만이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주님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생활하는 것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이 더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많이 받은 것 같고 그래서 그들이 더 행복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사람은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전 바이러스를 다운로드 하라(강헌구, ‘가슴 뛰는 삶’ 중에서)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열린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에서 미국 육상 선수 찰리 패덕은 10.8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명해진 그는 클리블랜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됐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중에 예전에 내가 꾸던 꿈, 즉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가 그 꿈을 위해 내가 한 만큼의 열정을 쏟는다면, 그가 나와 똑같은 금메달리스트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강연을 마친 찰리 패덕이 강당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한 소년이 그에게 달려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지금부터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꿈을 품는다면, 선생님처럼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찰리 패덕이 소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악수를 하면서 격려했다.

“물론이다. 얘야, 너는 할 수 있단다. 이렇게 나에게 와서 말을 할 만큼 용기가 있다면 너는 분명히 해내고 말 사람이다.”

소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찰리 패덕의 기록을 0.5초 단축하며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고 육상 부문 4관왕에 올랐다. 그가 바로 올림픽 영웅 제시 오웬스다. 그런데 그 제시 오웬스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에도 어떤 소년이 그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아저씨가 이룬 꿈을 저도 이루고 싶어요. 제가 감히 그런 꿈을 품어도 될까요?”

제시 오웬스는 자신이 찰리 패덕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이다. 그렇게 하렴. 그 꿈을 위해 네게 있는 모든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면 너는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야.”

결국 그 소년, 해리슨 딜라드도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신도 제시 오웬스나 찰리 패덕처럼 꿈을 이루고 싶은가? 그렇다면 비전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라. 그리고 악수하고 질문도 던져 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아 두어라. 그들로부터 비전의 바이러스를 다운로드 하라. 먼 훗날 당신도 누군가에게 비전의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불 관리 

서인덕 신부님

저는 여행을 할 때면 꼭 한 번씩 먹는 식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을 피워 석쇠에 삼겹살을 올려 구워 먹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을 피우는 일이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신문지나 종이에 불을 붙이고 얇은 나뭇가지를 넣고 그 다음엔 두꺼운 나무를 넣어 불을 크게 합니다. 실제로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숯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숯에 고기를 익혀 먹습니다. 이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불의 세기가 너무 세면 뭉쳐 있는 숯을 분산시키고, 불이 약해지면 분산되어 있던 숯을 다시 모아야 합니다.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고기가 순식간에 타버리거나 숯이 꺼져버릴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을 잘 써야 합니다. 불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등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름을 채워넣어야 할 것이고, 불을 보고 모여드는 벌레와의 전쟁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또 오랜 시간 가열된 뜨거운 등불을 조심스럽게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등불, 얼마나 밝고 뜨겁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부채질을 시작해보시지요.

 



첫 마음으로 깨어있어라.

김인옥 수녀님(사랑의 씨튼 수녀회)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열어주는 것은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루카복음 17장 7­-10절에는 그 시대의 종의 처지가 분명하게 나와 있다. 주인은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고 지시한다. 이어서 그 종이 분부받은 대로 해도 주인은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인은 다르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해 깨어 있었다는 것만으로 주인은 종을 식탁에 앉히고 그의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누구나 주인한테 시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주인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밤중’과 ‘새벽’은 깨어 있기 힘든 시간이다. 졸음이 몰려와 방심하는 시간이다. 

수도회 입회 후 지원기와 청원기를 지나 수련기에 들어가면 정식 수도복을 입는다. 착복식 날 선배 수녀님들의 축하 카드 속에는 ‘수련기는 은총의 시간’이라는 말이 후렴구처럼 쓰여 있다. 과연 수련소는 깨어 있음을 배우는 학교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안에서 배려하는 것을 배운다. 때로는 말귀에 어둡고 사리분별이 안 되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하지만 순간순간의 사건과 상황 안에서 깨어 있었는지를 성찰하며 지낸다. 

수련기를 마치고 첫서원을 하고, 종신서원을 하면 수도 생활의 연륜으로 이러한 배려에 더욱 깨어있을 것 같지만 이 복음을 묵상하며 되돌아보는 나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깨어있음의 결과는 분명 ‘배려’인데 배려의 옷을 입은 ‘강요’가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의 수련장 수녀님이 옆에 계셨다면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셨을 것이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 나는 그 시절 무엇을 배웠던가? 




마지막 순간에 대한 준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 하느님께서 어느 날, 어느 시각에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실 지, 우리가 죽어서 어떠한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설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느 시각에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하느님 앞에 기쁘게 설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유대 지방 사람들은 의복을 길게 늘어뜨려 입었기 때문에 일하는데 방해가 되므로 일할 때는 허리에 띠를 띠어 옷을 걷어 올렸다. 등잔은 배 모양의 접시에다 면으로 심지를 만들어 담았는데 그 심지는 언제나 깔끔히 손질되어 있어야 불을 켤 수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주인이 집에 돌아올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을 준비해 두었다가 주인에게 즉시 문을 열어주고 불을 밝히는 하인처럼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 주님 앞에 서게 되더라도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라는 말씀은 바로 근면하게 일하는 자세이며, 타인에게 봉사하는 자세이며, "등불을 켜놓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안의 죄와 실의라는 어둠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누구에게도 어느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밝게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문을 열어주는 자세`는 바로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의 마음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시도록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잡한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무엇을 앞에 놓고 무엇을 뒤에 미루어야 할 지를 잘 분간하는 지혜를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러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언제라도 맞을 수 있는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신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는 바로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고 세상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인간을 즉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당신 대신에 이 세상에 살게 하시고 당신 대신 자연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즉 자연을 인간에게 관리하도록 맡기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은 실제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이며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에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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