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Jesus: A cause of division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며, 한 집안의 식구들이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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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라며,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고,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경 안에서 일반적으로 불은 더러움을 태워서 정화시키는 것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킵니다.또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불’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열망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는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미카 예언자는 구원의 때에 앞서 재난과 분쟁의 시기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가족들마저 신앙 때문에 갈라졌고,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분열과 불화가 마지막 때를 특징짓는 사건이 되고, 각각의 사람들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사건이 됩니다.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언제나 도전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을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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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무거워집니다. 당신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여 한데 모으러 오셨건만, 오히려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반대받는 표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당신의 직무를 회피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이 이 불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를 피해 가려고 거짓 평화를 앞세워 죽음을 피해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굳어 자신 안에 갇혀 버린 이 세상을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고난은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무관심한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삶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을 영화에 나오는 감상적이거나 비극적인 주인공처럼 만나고, 우리의 기도가 일상의 갈등과 고민들을 비껴간다면, 예수님께서는 더욱 우리의 삶에서 고립되고, 신앙은 우리의 삶과 유리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삶의 모든 고통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평화만을 찾기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이 아닌 ‘환상의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복음의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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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이단 종파에서도 즐겨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그릇된 맹신에 빠졌을 때,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만류하고 반대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이단자들은 이 말씀을 내세우며 가족의 박해에 맞서 싸우라고 가르칩니다. 심한 경우, 자해를 하겠다고 소동을 벌이면서 가족을 위협하는 방법까지 교육시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들처럼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하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도 복음의 가르침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은 복음의 말씀이 참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복음을 몰랐더라면 세상이 옳게 돌아가는지 아닌지 묻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으면서 혼자 적당히 편안하게 살 텐데,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려면 악인의 뜻과 죄인의 길에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화답송 참조). 이러한 거부와 과감한 결단 없이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크고 작은 갈등과 어려움은 물론, 많은 시련과 인내, 충돌과 좌절, 급기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힘과 마음을 넓혀 주시어 쉽고 편한 길만 선택하지 않고 외롭고 고독한 길도 마다하지 않을 은총과 용기를 주시도록, 오늘도 마음을 모아 기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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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대체로 다음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로 보이는 유아기입니다. 두 번째는 친구가 세상의 전부로 보이는 청소년기입니다. 세 번째는 애인이나 배우자가 세상의 전부로 보이는 청년기입니다. 네 번째는 자녀를 세상의 전부로 보게 되는 중년기입니다.
마 지막 단계는 완숙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자녀들의 독립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자녀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자기 인생은 그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시기에 바라보는 존재가 바로 절대자입니다. ‘나’의 인생을 시작하게 하시고, 이끌어 주시며, 그 인생을 마무리해 주시는 오직 단 하나의 존재, 곧 절대자에게 의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완숙기에 접어든 사람은 절대자를 통하여 세상을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오 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이 말씀은 마치 ‘인생의 다섯 단계’에 대한 가르침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주님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며 ‘상대자’가 아닌 ‘절대자’에 대한 의탁이 인생의 완성임을 깨우치게 됩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전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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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세계 한복판에 내려왔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저를 붙잡고 저를 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저는 그것을 그냥 바라만 보거나, 굳은 믿음으로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그 열기가 더욱 올라가게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를 수 있도록 한 축성에, 있는 힘을 다하여 한몫을 했다면, 이제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은 영성체에 동의하고, 그렇게 하여, 그 불길이 저를 삼키고 저를 살라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테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의 주옥같은 글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샤르댕 신부님은 성체는 뜨겁게 타는 불덩이 같다고 했지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순간은 이렇게 주님의 불길이 우리의 온 자아를 태우고 삼켜 버리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가 사랑의 불꽃이 되어 뜨겁게 우리 삶을 봉헌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붙이시는 불꽃은 온전히 당신을 바쳐 이루신 성체성사의 사랑입니다. 세상이 온통 당신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랑의 불길로 완성을 향하여 진화해 나아갑니다.
한순간이라도 불꽃처럼 살아 본 적이 있는지요?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쳐 본 적이 있는지요? 누군가를 위해서, 그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온전히 나를 내어 주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지요? 가슴이 아니라 눈에 불을 켜고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까요? 우리를 삼키는 하느님 사랑의 불꽃, 인생에서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런 불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지상에서 하느님과 하나 된 합일의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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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도 복잡해졌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회생활은 분명 예전 같지 않습니다. 모임과 단체가 많아지고 의무 사항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정말 해야 할 일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은 포장이 요란합니다. 알맹이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평화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권태와 불안에 휘말릴 뿐입니다. 감사와 편안함보다 허영과 낭비가 느껴진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어둡고 습한 길’을 걸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련과 ‘망설임’은 서서히 불에 태워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신뢰’에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행동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희망입니다. 필요한 모임이라도 ‘이 사실’을 방해한다면 접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람이라도 박해자로 등장한다면 달리 처신해야 합니다. 복음 말씀은 가족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변화입니다. 불꽃의 점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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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변화입니다. 그 불을 우리 각자 안에서 일으키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불은 서서히 타오르고, 작은 불이 결국은 거대한 산마저 태웁니다.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믿음이 나중에는 가족 모두가 입교하게 만듭니다. 박해를 받지만 결국은 박해를 하는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언제나 박해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입교한 뒤 가족의 반대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가족 모두를 입교시킨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면 반드시 보답이 주어집니다. 그 보답은 아무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집안을 변화시켜 새로운 집안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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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에 가면 여의도 4배 크기의 제철소가 있습니다. 순이익이 연간 2조가 된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제철소의 핵심은 철광석을 녹이는 ‘고로’라고 합니다. 이 고로에 한 번 불을 붙이면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24시간 끊임없이 계속 불을 붙여서 끄지 않습니다. 만약 불을 끄게 되면 고로 안의 녹아 있던 철광석이 굳어져서 폭탄으로도 처리가 되지 않을 지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시간 3교대로 계속 불을 붙여서 제철소의 모든 기능이 원활하게 움직이게 합니다. 큰 이익을 내는 제철소가 제 기능을 내기 위해서 이 불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에 큰불이 있어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열정으로 역사가 만들어지고 세상이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불이 꺼진 사람이 있습니다. 삶에 의욕이 없고 쉽고 편한 것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마음의 불을 다시 켜기가 쉬울까요? 본인 스스로 엄청난 노력이 있지 않고서는 그 불을 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에 큰 아픔이 있더라도 스스로 인내하면서 그 시간을 이겨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가장 큰 실수는 가만히 있는 실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은 바로 이런 유혹을 합니다. 도전을 못 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목을 자신의 등 껍데기 안에 집어넣을 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앞으로 나갈 때는 번쩍 고개를 들었을 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개를 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뜨거운 불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화재 사건이 많이 볼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방화범이 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 마음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오신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 안에서 분열이 생기기도 하고, 그 안에서 아픔과 상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세상의 뜻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순간의 만족과 조용한 평화를 위한다면서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주님의 일을 포기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아닙니다. 활활 타오는 불처럼 주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가짜 평화가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구원과 함께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재능을 갖고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조앤 졸링).
여행
요즘에는 시간이 없어서 여행을 갈 수 없지만, 이제 11월이 되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전국 지도도 한 장 사기도 했지요. 이런 계획을 말하니 어떤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누구랑 여행가게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혼자 가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혼자서 무슨 재미로 여행을 가요?”라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와 함께 여행 가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또 함께 간 적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함께 가기보다는 혼자만의 여행이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내가 기준이 됩니다. 또, 혼자의 여행은 남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서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침묵 속에서 주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더 겸손해집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서 주님을 만나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주님 체험도 뜨겁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향한 열정으로 충만해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몽생미셸(le Mont Saint Michel)이란 매력적인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해변, 작은 바위섬 위에 건립되고, 미카엘 대천사 성지로 명명된 이 곳은 오래전부터 순례객들로 붐볐더군요.
성지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708년 어느날 밤 오메르 주교님께서 잠을 자고 있는데, 미카엘 대천사가 꿈에 나타나, 저 건너 바위섬 위에 자신을 기념하는 성전을 지으라고 명했답니다.
두번이나 거듭 나타나 신신당부를 했건만 오메르 주교님은 개꿈이려니 생각하고 무시했답니다.
그러자 세번째로 나타난 미카엘 대천사는 주교님의 머리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대고 백만볼트 ㅋㅋㅋ 전류를 통과시켜 구멍이 나게 했답니다. 그제야 정신을 바짝 차린 주교님은 섬에다가 성전을 건립하기 시작하셨답니다.
우리나라 제부도처럼 조수 간만의 차가 엄청나서 밀물때는 엄청난 속도로 바닷물이 밀려들었다가 썰물때는 빠져나가는 신비스런 섬인데다, 풍광마저 환상적이어서 수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답니다.
때로 순식간에 너무 많은 순례객들이 몰려들어, 인파에 눌려 압사하는 경우, 썰물 때를 이용해,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을 통해 성지로 걸어가다가,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는 밀물에 휩쓸려 죽는 등,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한때 이런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들이 떠돌았답니다. "몽생미셸 성지 순례를 계획하는 사람은 출발하기 전, 유언서를 작성하고 떠나십시오!" 물론 요즘은 안전한 다리가 놓여 전혀 그럴 일이 없답니다.
'유언서 작성해 놓고 성지순례를 떠나라.'는 말이 오늘 하루 제 순례 여정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종신서원과 더불어 유언서를 작성합니다. 본인 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동산, 부동산, 저작권 등 제반 재산에 대해서는 수도회에 귀속시킵니다. 그 어떤 인위적인 연명치료를 거부합니다. 각막 및 장기는 기부합니다. 시신은 화장후 수목장을 원합니다. 등등.
유언서를 작성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고 비장해지더군요. 동시에 뜨거워지고 경건해집니다,
조만간 다가올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더 뜨겁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남아있는 하루하루를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더군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삶을 묵상하다보니 그녀의 생애 역시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24년 짧은 생애를 사신다는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아깝다고 느꼈던지,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열심히 충만히 사셨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열정으로 따지면, 소화 데레사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열혈 소녀였고, 열혈 수녀로 살다 가셨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언니가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은 갈멜 수녀원에를 얼마나 들어가고 싶었던지, 나이도 안된 소녀가 입회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원장수녀님의 대답은 노! 본당 주임 신부님? 뭐가 그리 급하냐? 조금만 기다리거라! 주교님! 허락해줄 수 없으니 기다리거라!"
상황이 그 정도면 그쯤에서 포기하고 기다려야 마땅한데,이 열혈소녀는 교황님을 찾아가 관면을 청합니다.
청원의 이유는 파리대학교 입학이 아니었습니다 수녀원 입회 때 적용되는 나이 제한에 대한 관면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생활과 영적생활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소화 데레사였습니다.
오늘 우리 내면과 정신,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열망은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도의 빈첸시오회 수도사제이자 유명한 피정 강사인 안토니오 사지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그분을 잉태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었습니다. 당시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사고 후 아기의 움직임이 사라졌습니다. 의사들은 사고 후에 아기가 죽었거나 혹시 태어나도 장애아로 태어날 것이기에 낙태를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게 해 주십시오. 장애아라도 좋습니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 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아기가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라 약 한 번 안 먹어보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이 때문에 지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제가 된 후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 위의 90%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의사들은 3개월 정도 살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미사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머니의 삶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 어머니께서 사시든 돌아가시든 오직 당신 뜻대로 해주소서!”
어머니는 수술 후 7일 만에 완전히 치유되셨고 몇 년이 지나서도 계속 건강하게 사십니다. 어머니는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너를 보호했었다. 이제는 네가 나의 치유자가 되었구나. 처음에는 내가 너의 치유자였다. 그런데 이제 네가 나의 치유자다.”
[출처: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사지, 바오로 딸]
만약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먼저 받지 못했다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은 만큼 할 수 있습니다. 불이 저절로 붙여지지 않는 것처럼 사랑도 받아야만 그것이 나를 태워 이웃을 따듯하게 합니다. 사랑은 그래서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사랑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그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불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깨어있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깨어있으려면 주인이 항상 함께 있는 것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불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불로 나 자신을 태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뜻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임을 알아도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미워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깁니다.
사랑은 피흘림입니다. 어머니의 피흘림이 자녀를 탄생시킵니다. 피흘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세례는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죽을 줄 알아야 새로 태어날 수 있기에 성령을 보내는 십자가의 죽음이 곧 세례인 것입니다. 죽을 줄 모르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배운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에 살 자격을 주십니다.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사랑을 가져야합니다. 이 사랑을 받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이는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기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동물들에게 키워진 아이들을 보여준 ‘서프라이즈: 모글리 현상’에서 아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아이들의 표정이 100이라 하면, 동물들에게 자란 아이들의 표정은 10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웃고 울고 화내는 표정조차도 누군가의 표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표정은 대부분 부모들이 넣어준 것입니다.
사람은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내어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사랑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해야 행복한 것을 안다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면 김이 납니다. 계속 끓이면 뚜껑이 움직이다 열리게 됩니다. 뚜껑을 다시 닫는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이 계속 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조치는 불을 줄이는 겁니다. 그리고 뚜껑을 닫으면 됩니다. 그러면 뚜껑은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뚜껑이 열리는 현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뚜껑이 열리는 원인이 중요합니다. 서양의학은 현상을 따라가면서 치료합니다. 장점은 효과가 빠른 점입니다. 그러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재발할 우려가 있습니다. 동양의학은 현상이 일어난 원인을 따라가면서 치료합니다. 장점은 부작용이 적은 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립니다. 본인의 노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동양의학은 ‘정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평소에 그렇지 않은데 저도 급한 성격에 ‘뚜껑’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수양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욕심이 많아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원인을 따져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뚜껑을 닫아 버릴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힘과 권위가 강하기 때문에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원망은 휴화산처럼 마음 안에서 살아있습니다. 뚜껑은 엉뚱한 데서 열리곤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원인을 생각하면 해결되곤 합니다. 제 마음 안에 있는 분노, 원망, 교만, 시기, 질투, 욕망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뚜껑은 언제나 열릴 준비가 돼 있음을 압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현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가족이 서로 갈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다투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 처지가 원망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죽음이 온 것은, 세상에 분열과 전쟁이 온 것은, 세상에 가난과 억압이 온 것은, 세상에 절망과 고통이 온 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산이 많은 형제가 더 많이 갖겠다고 소송하고, 싸우는 걸 봅니다. 부모님을 모시지 않고, 서로에게 짐을 지우려고 하는 걸 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을 따른다면 뚜껑이 열리는 현상은 사라질 겁니다. 가난한 형제들이지만 기쁘게 나누는 걸 봅니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픈 아이를 입양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로, 남미로 선교하러 가는 분이 있습니다. 충분히 수고했고, 이제는 편하게 쉬어도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힘차게 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뚜껑이 열리는 체험을 할 겁니다. 그런 분들도 원망과 아쉬움에 눈물 흘릴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에 곧 마음의 평정을 찾습니다. 중요한 건 ‘뚜껑’이라는 현상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습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불 지르러 오신 예수님을 119에 신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불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 119에 신고해요? 성경자유해석 큰 사고지요.
분열도 그렇죠. 짧은 소견으로 성경 읽으면 오류사고 쳐서 위험합니다.
전체 뜻은 하느님 구원 인류 사랑이란 불과 진리에 입각한 평화랍니다.
인간의 외모 재물 권력 조직 세상 사물지식 따라가는 데 너무 바쁘죠.
인간의 내면 심성 성품 인품 존엄성을 사랑해서 평화로워야 되겠는데.
세상이 인정하는 확신으로 밀고 가면 세상은 경쟁 전쟁터로 변합니다.
하늘이 인정하는 확신에 찬 진리대로 평화사회 이룩하며 살기로 해요.
세상 속에서도 참 사랑 참 평화 이루려는 참 신앙인 되기로 하셔야죠.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오셨습니다. 또 그분이 받아야 할 세례가 있습니다. 여기서 불과 세례는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즉 49절의 ‘불’과 50절의 ‘세례’는 동의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불’은 십자가 희생의 세례적 의미의 물과 통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물’ ‘불’ 안 가리십니다. 예수님 당신 수난과 죽음을 통한 정화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괴로움은 아직 이루지 못한 세례, 십자가상 죽음의 세례에 대한 괴로움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불과 세례는 종말론적인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예언서에서 불은 정화하고 완결할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징표입니다. 또 세례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것이고 생명이 충만하게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례를 하느님 백성의 탄생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맑게 정화되어 탄생하는 하느님 백성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믿는 이들의 응답과 긴장 사이에서 시간 안에는 있는 교회가 처하게 된 종말론적인 징표를 말씀하십니다. 그 종말론적인 징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족 사이의 분열입니다. 이 분열은 종말 때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역사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예고하는 징표입니다. 종말의 징표와 예수님 현존의 징표인 분열... 사실 예수님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마음의 갈등, 욕심과 성실의 갈등...
평화는 메시아적인 선물입니다. 그 평화는 복음의 요구를 실천할 때 비로소 옵니다. 분명한 것은 분열이 일어나면 끝이 옵니다.
우리는,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악한 것들을 멀리하는 갈등을 분열이라고 느끼나요? 아니면 그저 종말의 징표로서 그야말로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분리와 분열을 살아가나요? 오늘날에 참으로 필요한 예수님의 물과 불로써 이룬 평화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나라에서... 인간의 평가인 노벨 평화상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 말입니다.
분열과 평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평화는 많은 분열을 거치면서 여과되며통합되고 찾아온다. 분열을 격는 동안 평화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사람들에게 분열을 일으키신다. 평화의 주님께서 말이다.
평화의 주님께서 오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라져 싸운다. 선과 악의 싸움이다. 그 싸움은 지지부진하기도 하고 극렬하기도 하고 피를 흘리고 죽음에까지 이른다. 악은 평화의 주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죽인다.
세월이 제법 흘러 보면 평화의 주님께서 미움 당하고 배척 당하고 죽음에 이르지만 언제나 우리 가운데 평화로 계시며 생생하게 살아계신다. 평화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나 하느님께서는 이루신다. 우리나라도 끊임없이 분열을 계속한다. 분열은 생각조차 싫지만 시간을 요하며 살다 보면 어느덧 여과되고 정화됨을 본다. 분열은 평화의 주님께서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면면히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 평화는 우리 가운데 있다.
평화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믿고 따르고 희망하고 사랑하노라면 분열은 악을 물아내고 평화는 찾아와 제자리를 잡는다. 평화의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49-5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평화와 분열, 죄와 의로움, 죽음과 영원한 생명 등 상반되는 가치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집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성경에서는 불이란 표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대목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계약(창세 15,17)에서, 야훼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소명을 주신 불타는 떨기 대목(탈출 3,2)에서, 시나이 계약(탈출 20,18)에서,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일당의 대결(1열왕 18,38)에서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불은 음식을 익히고 단단한 금속도 부드럽게 변화시킵니다. 데워주고 온기를 유지해 줍니다. 또 닿는 존재를 태워 소멸시키기도 하고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불은 옮겨 붙은 대상과 둘로 가를 수 없는 한 덩이가 됩니다. 곧 타자를 불이 되게 합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50)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묵시 3,16) 세상에 당신 몸을 던져 불을 붙이시려는 겁니다. 세상 창조 이후 내내 뜨겁게 다가오셨던 성부 하느님과 열렬히 한 몸이 되지 못한 미지근하고 무심한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십니다. 당신 스스로 불이 되기로 하시는 겁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은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오셨습니다. 가족 안에서, 민족 안에서 서로 맞서고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 종교를 갖는 세태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진짜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분열은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던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를 통해 기존의 관념이 찢겨져 나가는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는 이들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이 불처럼 율법을 삼켜 사랑 안에 한 덩어리로 타오르는 광경에 경악할 것입니다.
가족, 민족,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끈이 온갖 불의와 탐욕, 배타적 우월주의, 이기심, 허영이라면 그 안의 누군가가 각성하고 회개하여 불이 되어야 합니다. 위장된 평화에 안주하거나 거기서 얻은 부정한 이득으로 배불리기보다 차라리 맞서고 갈라서고 찢겨나가야 합니다. 그 틈새로 새어든 불길이 모두를 소독하고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도록 내맡겨야 합니다.
유다인들, 특히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등 사회적 종교적 기득권층은 예수님께서 당신 친히 사랑의 불이 되어 이 세상에 지르신 불을 꺼버리고 싶어했지요. 유다교의 견고한 성역은 예수님에게서 촉발된 "새로운 길"(사도 9,2)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분노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신념 표출이니까요. 새로움은 늘 기존 질서를 진지하고 진정성 있게 지켜온 이들의 저항과 거부를 맞닥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건재합니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온 세상 곳곳으로 번져나가 태우고 뜨겁게 하고 정화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게 진리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 불 앞에서 거짓 평화는 검불처럼 타서 공중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악으로 결집된 관계도 무너지고, 선을 가장한 욕망도 형체 없이 녹아버릴 것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천 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피흘리고 박해받고 순교한 모든 증거자들 안에서 예수님은 짓눌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 한가운데서 제도와 고정관념과 물신주의로 탄압받는 가난한 이들, 의인들 안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짓눌리고 계십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란 순결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희생제사의 불길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신 그 순간에 시작되어 인류를 악의 손아귀에서 모두 다 빼내어 완전히 정화하시고 완전히 성화시키실 날,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고대하고 희망하는 날이지요. 비록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피조물 안에서 짓눌리고 계시더라도, 결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로 거짓 평화에는 분열을, 거짓 결속에는 새 질서를 선고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와 의로움에 대해, 죄의 결과인 죽음과 의로움의 열매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종으로 철저히 매여 살아온 이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의롭게 한다는 가르침이 낯설고 위험천만한 모험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게 하십시오"(로마 6,19).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성화에 이르는 방법으로 차가운 "율법서"를 제시하지 않고 뜨거운 믿음, 뜨거운 사랑으로 얻는 "의로움"을 제시합니다. 단죄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뜨거운 불 속으로 다가오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로마 6,23).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의 그 불에 정통으로 맞은 이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불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활활 타올라 흠도 티도 없이 순결해진 영혼은 그 자체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불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 불길을 통해 누리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먼 미래의 선물이 되기 전에 이미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선물입니다.
<싸우는 것도 힘이 있어야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밤새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런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성을 비관적이랄까 성악설적이랄까 아무튼 안 좋은 쪽으로 성찰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싸운다.
인간은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싸운다.
싸우지 않으면 죽을 때가 다 된 것이다.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인 것입니다.
실로 양로원에 가면 그렇게들 싸우시는데 돌아가실 때가 되면 싸우시지들 않습니다.
그래서 양로원 종사자들끼리는 농담반진담반으로 아직 힘이 있으시니 싸우신다고 좋게 얘기합니다.
저도 힘이 있으니까 싸운다는 면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 싸움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지만 하느님 중심적인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의나 공동선을 위해 싸운다고.
실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 이익과 관련해서는 조그만 손해가 와도 그렇게 사납게 싸우지만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사회정의나 하느님 나라의 의와 관련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자기에게 손해가 올까봐 몸을 사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와 상관없는 일,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나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일에는 힘을 조금도 쓰고 싶지 않은 것인데 다르게 얘기하면 남의 일로 내 평화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평화를 좋아하고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고요.
또 다른 차원에서 싸우는 것을 싫어하고 평화를 택하기도 합니다.
나하고 가까운 사람과 싸우기 싫어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와 자식 간에 또는 고부간에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싸우려 하지 않는데 사실은 거짓 평화입니다.
왜냐면 사실 자기가 싫은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때문에는 그렇게 잘도 싸우면서 사회정의나 하느님 나라의 의와 관련해서는 싸우려들지 않고 그런 것들로 관계가 깨지는 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거짓 평화일 뿐 사랑을 해서 싸우지 않는 것이어야 진짜 평화이고, 하느님 나라의 의와 부합해야 진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오늘 주님 말씀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희생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의를 위해서는 불처럼 일어나 싸울 수 있는 힘, 갈등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이런 힘이 신앙인에겐 있어야 하고, 이런 힘을 바탕으로 싸워 높은 차원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힘은 어떻게 얻을 수 있고, 어떻게 지닐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자기애를 넘어서는 참 사랑, 더 큰 사랑이 있어야만 되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바른 말을 잘하고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정의감이 대단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많은 경우 그들은 싸움꾼에 불과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의 사랑, 성령의 불에 의한 정의와 평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랑에 의하지 않으면 분열만 있지 분열을 이겨내고 넘어서는 일치와 평화는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일부 사람과 갈라서게 된 것이 바로 평화를 지향하지 않는 정의, 어쩌면 정의도 고작 불의를 고발하는 정의에 불과하기에 평화를 지향하는 프란치스칸으로서 같이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정의와 평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오늘 주님 말씀입니다.
내 마음 안의 무질서를 미워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 지리라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결국 각각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 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러 왔다.”, 또는 “나는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러 왔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주시는 분이고, 또 말로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이 ‘안타까움’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복음 선포 후에도, 그리고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어도, 크게 변한 것 없는 인간 세상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안타까움을 ‘무능력’으로 오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은 인간 세상의 회개와 복음화에는 소용이 없는 것인가?”
“정말로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인간 세상의 일에 개입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시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의 답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다.”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을 한 마리라도 잃으면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양을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루카 15,4).
목자의 기쁨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양이 자기 발로 스스로 목자를 떠났다면, 또 목자를 다시 만난 뒤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목자는 양을 억지로 붙잡아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 때문에 크게 슬퍼할 것입니다.
그때의 그 슬픔도 사랑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에도, 먼 고장에서 방종한 생활을 할 때에도,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일 때에도, 마침내 제정신이 들어서 뉘우치고 집을 향해서 걸어갈 때에도, 작은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한 일들은 모두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한 일들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부터 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내버려 둔 것은 무관심도 아니고 무능력도 아닙니다.
아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준 ‘사랑’입니다.
비유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내버려 둔 것은 아니고, 작은아들이 집을 떠날 때에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고, 타이르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할 때에도, 재산을 다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일 때에도, 그를 찾아가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타일렀을 것입니다.
만일에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억지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면 종들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작은아들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회개’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도 많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많은데, 그 말씀들은 모두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타이르는 것과 같은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이르는 말씀이고, 돌아가는 방법과 길을 알려주는 말씀이고, 회개하고 돌아가면 틀림없이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그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용서를 했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일은 이미 주어진 아버지의 용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신 일입니다.
(죗값을 대신 치르신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인류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회개는 죗값을 치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주어진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고해성사의 ‘보속’은 용서를 받은 다음에 하는 일입니다. 처음에 받는 세례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성사는 전에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고 깨끗해지는 성사이기도 한데, 우리가 세례를 받은 뒤에도 계속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용서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보속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라는 말씀은, 십자가 수난 때의 고통에 대한 말씀으로도 해석되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그 고통을 포함해서, 인류 구원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예수님이 겪게 될 고통과 슬픔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을 보는 고통과 슬픔......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은 아직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보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인류 구원 사업 전체를 생각하면, 또 영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고통과 슬픔을 겪고 계시고, 그런 뜻에서 십자가는 지금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도 십자고상을 벽에 걸어 놓고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슬픔만 드리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지금 나를 보시면서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나의 회개는 충분한가? 나의 신앙생활의 수준은 어떠한가?”)
'불편과 거북함'(루카 12장 49~53)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집안이 조용할때 두가지 기류가 있습니다.
말 안하고 참으며 냉기가 흐르는 집안과 물흐르듯 서로를 위한 배려로 편안한 집안!
내 마음 알아달라 소리치고픈 엄마, 더 더 입을 닫고 조용해지는 아빠, 게임에 빠져 시간을 잃어버린 아들, 미모에만 신경쓰고 자기방도 안 치우는 딸, 각자 마음에 불씨를 지니고 있어 누군가 툭~ 건드리면 불화산이 되고 맙니다.
표현을 해도 안되면 싸워야 알 수 있습니다.
속을 꺼낼 수 없기에 부딪치면서 깨우치고 아프면서 서로를 이해할 틈새가 생깁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위해 때때로 불편과 거북함을 견뎌내는 시간을 허락합시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함승수 신부님
인간은 기본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진실에 눈을 감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나 자신의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내 상황이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불편하고 듣기 싫습니다. 그래서 ‘괜히 소란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좋은 게 좋은거지 왜 굳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귀찮게 하느냐’고 비난합니다.
힘이 없어서, ‘빽’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집회를 하면, ‘시민’들은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묻기 전에 불편하다고 욕부터 합니다. 그들이 처한 문제가 해결되어야 나도 좋아진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억울함이 지금은 ‘그들의 문제’이지만, 지금 그것을 바로잡고 해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모릅니다. 그저 지금 당장 도로가 막히고 차가 밀리는 것이 불편하고 싫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 때문에 내가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억울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불편을 겪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정과 불의로 인해 피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내가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되찾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게 좋은거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틀린’ 생각임을 안다면, ‘잘못된 가치관’임을 깨달았다면 거기서부터 갈라져나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지금 당장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해서 그 종착역이 ‘멸망’인 열차에 머물러 있을 사람은 없겠지요. 당장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그 종착역이 ‘행복’인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분열’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조용한 평화’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누군가의 아픔과 눈물을 대가로 얻어진 ‘이기적인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한 나의 안일함을,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지금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좋은 게 좋은거지’라고 말하는 ‘강자의 편’에 동화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장 분열과 갈등을 감수하게 되더라도 ‘하느님의 편’에 서서 그분 뜻에 맞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참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도전입니다. 값 비싸고 화려한 세속적인 가치들 틈에서 더 귀하고 소중한 영적인 가치들을 선택하는 도전입니다. 내가 쌓아올린 세속적인 업적들이 사실 아무것도 아님을, 하느님께서는 미천한 나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들을 이루실 수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도전입니다. 내 머리에 채운 얕은 지식에 비해 전능하신 하느님의 지혜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깨닫는 도전입니다. 내 마음이 사랑의 불꽃으로 활활 타올라야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려는 단호한 마음을 지녀야만 그 도전에 성공하여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불과 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듭니다.
재는 죽음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죽음입니다.
불이 살라버린 재를 봅니다.
죽음만이 보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당장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선뜻 불을 지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십니다.
지금까지의 거짓의 어둠을 사르고
진리의 빛이 찬란히 타오르도록.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거짓 평화에 가려진
미움과 갈라섬을 고통스레 드러내어
사랑 화해 하나 됨이 넘쳐나는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거짓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한
약한 이들의 강요당한 침묵을 깨뜨려
약한 자 강한 자 모두가 한 아우성으로
참 평화를 노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불을 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갈라 세우십니다.
당신의 십자가를 재촉하는
고통스러운 죽음의 몸짓임을 알지만
온 세상 살리기 위한
단 하나의 생명의 몸짓임을 알기에.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 참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죽음을 기쁘게 맞아들이며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
정의와 평화와 진리 가득한
하느님 나라를 일구기 위해
억압과 착취, 탐욕과 위선으로
물든 세상을 사그리 태우는
예수님의 꺼지지 않는 불쏘시개가 되어야 합니다.
잘라 없애버리기 위한 분열이 아니라
진정으로 보듬어 안기 위한 갈라섬이기에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세상을 가르는
예수님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야 합니다.
썩은 것을 묻어버리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는 참 평화를 갈망하기에
썩은 것을 들춰내 새 살 돋우는
예수님의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은 은총의 원천이다.<루카, 12/49-5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평화를 주려 오시지 않고 분열을 주려 오셨다” 하십니다. 우리를 평화를 갈망 하는데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 아니신가.?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불같은 열정 참 진리를 알려면 “ 불가망 몇 번 달구어져야 단단한 쇠가 듯이 고통으로 달련되지 않은 현실은 작은 장벽도 뚫지 못하니다. 불로 달구어진 칼 단단한 것을 쉽게 짜르고 불속에 쓰레기를 처분해야 깨끗하게 되고 정화 되여 참 평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평화는 이같이 정화나 순수함으로 변화 시키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전쟁은 평화의 선행 조건입니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를 하나로 일치시켜 참 평화를 얻는 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전쟁이 없었으면 우리민족은 일본 사람밑에 노예처럼 설게 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톼역하면서 ” 나는 참군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참 평화를 바라고 살지만 평화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례하였습니다.“ 즉 전쟁 없이는 참 평화가 없다는 말압나다.
우리의 삶도 바르고 참돤 삶을 살려면 고통을 싸워서 극복하여야 합니다. 아니 고통이 없으면 행복이 없으며 고통을 통해서 자유 평화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세상의 참 지도자는 수 많은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의 업적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후 세계의 꼴찌 나라에서 세계 20대 나라로 들도록 발전하고
잘살게 된 것은 일제이 억압에서 6,25 란 전쟁이 고통에서 잘 살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올라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가 오늘 복음에 ”불을지르려 오신 이유,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주려오신 이유를 깨닫지 못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믿고 따르지못하고 자기어개에 질머진 십자가를 원망 절망에서 갈길을 찾지 못하여 행복도 평화도 눌지못하게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 없는 길을 가라고 하시지 않고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였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어 공소사목을 주로 했는데 60년대의 한국 농촌은 먹을 것 입을 것 생활의 숨을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곳에 가면 영양 실조 옷이 없어 몸을 숨기고 살며 땔감 부족 마시는 운물도 불결하고 비만오면 산이 무너지고 농토를 잃고 땅에서 지금처럼 일차산업도 어려 웠지만 그래도 이차 사업화와 더불어 농한기도 없고 지엠피더 오르고 살기 좋게 된 것은 바로 그고통ㄹ을 국복라려는 국민적 노력과 지도자의 지도 력이였습니다.
저는 오늘의 고통의 현상도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며 너 때문에가 아니라 나 때문에 라는 의식을 가지고 불붙이고 분열을 평화로 이끄려면 십자가에 희망을 가지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내가되여야 고통속에 은총을 충만이 받고 가난한자가 하늘 나라에 살고 우는 자가 웃게 되고 미움이 축복과 찬미로 바꾸어 되게 합니다.
고통중에 시달리는 사람 위하여 직접 상담하고 기도로써 함께 살라고 합니디.
저는 아침 마다 수도원 복도에 있는 십자가를 잡고 주님! 오늘십자가르피하게 하시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모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낱알이 땅에 들어가 썩지 않으면 죽어서 실날같은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에레미아서 31/10-14 안에 “ 나는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근심에 찼던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다”
사랑의 불, 식별의 잣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다가/보고 싶어
강이되어/바다에 갔다가/바다가 되어 돌아왔다
이제/위로는 하늘/안으로는 바다
밖으로는 산이 되어/살 수 있게 되었다
희망의 하늘이/사랑의 바다가
믿음의 산이 되어/살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침묵의 삼위일체 하느님이 되었다
이제 나는!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어제 동해 바다에 다녀왔습니다. 고승高僧은 움직임이 없다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 때 위로는 희망의 하늘, 안으로는 사랑의 바다, 밖으로는 믿음의 산이 되어 고승처럼 살 수 있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삶이 끝이 없다”, “삶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들 말하는 데 어제 바다에 갔다가 끝을 보고 왔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삼위일체 셋이 만나는 그 자리 하느님 계신 곳이 끝이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이 많이 보고 싶을 때 마다 바다에, 하늘과 바다와 땅이 만나는 바닷가를 가려 합니다.
위로는 하늘, 안으로는 바다, 밖으로는 산, 정중동靜中動의 삶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역동적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입니다. 사랑의 불인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 비로소 가능한 위로는 희망의 하늘, 안으로는 사랑의 바다, 밖으로는 믿음의 산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무기력한, 무감각한 우리 삶에 불을 붙이러 불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욕無慾, 무심無心, 무애無礙는 좋지만 무기력無氣力한 삶은, 무감각無感覺한 무의욕無意欲의 삶은 죽은 삶입니다. 이런 삶에 불을 붙여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고자 성령의 불, 말씀의 불이 되어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역시 세례의 죽음을 예견하는 내적긴장의 고뇌중에도 예수님은 끝까지 삶의 여정에 항구하시며 충실하십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위로는 희망의 하늘, 안으로는 사랑의 바다, 밖으로는 믿음의 산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오실 때 저절로 사랑에 불타는 삶이요 분열의 삶입니다. 새삼 예수님은 우리의 일치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삶의 중심에 영원한 사랑의 불로 자리 잡으실 때 타오르는 불이요, 저절로의 창조적 분열입니다.
빛이신 주님과 더불어 어둠이, 진리이신 주님과 더불어 거짓이, 생명의 주님과 더불어 죽음이 그대로 분열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창조적 분열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주님 안에서 참 평화를 위한 과정상의 창조적 분열입니다.
주님 없이는 무기력한, 무감각한, 무의욕의 죽음같은 삶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불로, 사랑의 불, 말씀의 불, 성령의 불로 오시어 끊임없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식별의 잣대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은총과 죄는 참 평화안에 내포된 분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이런 깊은 상호보완관계의 진리를 깨달을 때 참 평화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좌와 우, 역시 분열이 아니라 주님의 참평화안에 상호보완관계로 존재하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상호 존중과 사랑으로 공존할 때 역동적 참 평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은 영원한 불이자 참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죄의 종이 아닌 하느님의 종이 되어 성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끝은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에게 참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며 타오르는 사랑의 불로 성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희망의 하늘 아래, 안으로는 사랑의 바다, 밖으로는 믿음의 산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에서(Ep. 130,14,25-26: CSEL 44,68-71)
당신은 다음과 같이 물어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왜 사도는 ‘우리가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한 사도나 그것을 들은 신자들이 주님의 기도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데 사도는 자기 자신도 이런 모르는 상태에서 예외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가 자기가 받은 계시의 웅대함으로 말미암아 들뜨지 않도록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그를 줄곧 괴롭혀 온, 육신을 가시로 찌르는 병을 얻었을 때, 그는 자기가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 고통이 자기에게서 떠나게 해주십사고 세 번이나 간청한 것입니다. 이 점을 보아서 그 당시에 사도가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그는 왜 자기와 같은 위대한 사람이 청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이루어지는 것이 왜 합당치 않은 일인지를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에게는 내 은총으로 충분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는 이들 고통에서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은 언제나 무겁고 짜증스러우며 인간의 허약감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공통 심리에 따라 그것을 우리에게서 거두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 주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고통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신다 해도 그분이 우리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을 경건한 인내력으로 참아 낸다면 우리가 더 좋은 것을 얻으리라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위의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사람이 청하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을 애타게 청함으로써 자기 기도가 응답될 때 교만해지지 않게끔 하기 위함이고, 또 한편 실상 청하는 바를 얻게 된다면 더 지독한 고통이 초래되거나 또는 얻은 행운이 도리어 그를 타락으로 떨어뜨리게 할 수 있기에, 하느님께서 그 청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데, 그런 경우 큰 실망감에 젖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우리는 무엇을 응당히 청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청하는 것과 반대되는 어떤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내로이 견디고 만사에서 감사 드리면서 우리가 원했던 것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 우리에게 더 적합한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중재자께서는 우리에게 이에 대한 하나의 증거를 다음의 말씀에서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고 말씀하신 다음, 당신의 인성 안에 취하신 인간의 의지를 바꾸시고는 덧붙여 즉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바로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의 의롭게 된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1945년 10월 24일 설립된 ‘국제 연합일’ 또는 ‘유엔의 날’입니다. 1947년 9월 미국이 유엔 총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안건으로 제출하면서 우리나라와 유엔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 세계 시민들이 북한군의 침략에서 한국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참여했던 업적을 기념하는 의미가 큰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1986년 유엔개발계획, 유엔공업개발기구 등과 협력기금을 설치하여 개발도상국에 재정지원을 시작했고, 유엔아동기금의 집행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고, 소말리아, 동티모르, 레바논 등지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1991년 유엔의 161번째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6.25 전쟁시 한국전쟁에 전투부대로 참여한 나라는 우리 측에는 미국 480,000명, 영국 56,000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네덜란드 5,322명, 캐나다 25,687명, 프랑스 3,421명, 뉴질랜드 3,794명, 필리핀 7,420명, 터키 14,936명, 태국 6,326명, 남 아프리카 연방 826명, 그리스 왕국 4,992명, 벨기에 3498명, 룩셈부르크 83명,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콜롬비아 5,100명입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측에는 소련 26,000명과 중화인민공화국 1,350,000명입니다.
의료지원은 스웨덴 1,124명, 인도 627명, 덴마크 623명, 이탈리아 128명입니다. 북측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입니다.
물자 및 재정지원은 버마, 캄보디아, 코스타리카, 쿠바, 에콰도르, 헝가리,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자메이카, 라이베리아, 멕시코, 파키스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오스르리아, 온두라스, 인도네시아, 이란, 레바논, 중화민국, 사우디아라비아, 베트람 공화국, 칠레, 도미니카 공화국, 이집트, 엘살바도르, 콰테말라, 파나마, 스위스, 시리아, 아이티, 모나코,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서독, 리히텐슈타인, 바티칸 시국입니다.
지원의사 표명국은 니카라과와 볼리비아와 브라질 및 북측 지원의 몽골 인민공화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의 소리 한국어 사이트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독립과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했던 전쟁에 참여해서 이국만리 남의 나라에서 죽어간 젊은 병사들을 기억합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먼저 한국군 사망, 부상, 실종자 포함 609,000여 명, 북한군 사망, 부상, 실종자 포함 800,000명에, 유엔군 사망자 58,000여 명, 부상자 480,000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6,000여 명, 중공군 사망자 136,000여 명, 부상자 208,000여 명, 실종자와 포로, 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3,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오늘 유엔의 날, 6.25 전쟁 이전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고, 누구 하나 알지도 못하는 이역만리 우리나라에까지 와서 세계 평화 수호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했던 세계 모든 젊은이와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루를 보냅시다.
급진적이라는 비판
윤정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우리가 자주 바치는 ‘마리아의 노래’를 깊이 들여다보면 얼마나 급진적인 내용인지 알게 됩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마리아는 하느님께 두 손을 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불붙는 열정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드님 역시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는 급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사이를 가르는 악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향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더 나아가 잘 돌아가는 세상을 두고 새롭게 창조하겠다(이사 65,17 참조)는 하느님의 말씀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이들에게 급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쇄신을 이루고자 앞장서는 이들에게 ‘급진적’이라는 비판은 항상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쇄신은 이것을 없애고 저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질만 지니고 부수적인 것은 버리는 것”(교황 베네딕도 16세)입니다. 마리아,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본질은, 오랫동안 해왔던 것이라며 오히려 부수적인 것을 고집하는 신앙 공동체로부터 언제나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불이 가지는 특성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불은 다른 것을 타게해서 그것을 소멸시킵니다. 그리고 불은 빛을 밝혀서 주위를 비춰줍니다. 그리고 불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줍니다.
불은 그렇게 인류역사 안에서 인간과 함께하면서 많은 이로움을 주었고 만약 불이 없다면 인간도 존재하기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에 마트에 가면 식품포장광고에 '불맛'이라는 단어가 써 있는 제품들이 인기입니다. 아마도 불은 그렇게 맛을 내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게 불맛으로 맛있게 되는 음식처럼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불, 곧 성령의 불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도 그 성령의 불을 통해 살맛이 나는 삶이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마도 그 참된 살맛이 영원한 생명의 전조일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는 혼자서 살아온 게 아니다.
최민석 신부님
언젠가 산골짜기 흐르는 개울을 보다가 저 개울이 강물로 이어지고 바다와 머리카락만큼의 간격도 없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문득 발견했다. 따져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 ‘사실’이 나에게 준 충격은 자못 컸다.
본래 하나로 이어져 있음으로 해서 개울을 바다와 한 몸이었다. 둘이 만나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개울과 바다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이다. 개울이 바다요 바다가 개울이었다. 모든 인간, 모든 생물, 심지어 무기물까지도 하나의 우주적 그물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협동하여 공진화하는 생명이다.
그 순간 나의 눈에는 산이 물로 보이더니 드디어 물로 흐르기 시작했고 그 흐름 속에 내가 있었다. 내가 나를 향하여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흐름은 마침내 하느님이 나요 내가 하느님이라는 소름끼치는 진실로 나를 이끌어 갔다.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이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께 수렴되는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모든 생명은 하늘 가득히 가지를 뻗고 있는 하느님이라는 큰 나무에 연결된 가지, 줄기 뿌리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나무에서 단절되면 그 생명을 잃고 만다. 우주생명인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자기 안에 합일시키고 키워나간다. 인간은 무궁히 자라나는 우주라는 생명나무의 한 가지 끝에 맺힌 작은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바다가 골짜기 위로 기어 올라와 저마다 다른 얼굴로 바다를 향해 흐르는구나. 우리도 이와 같아서 저마다 다른 얼굴이지만 제가 마침내 저한테로 걸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바다가 아니다. 개울은 개울이요, 강은 강이다. 그렇다 내가 바다가 아니듯이 나는 아직 하느님이 아니다.
나의 생명은 근원이신 하느님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 그럼으로 하느님과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나는 하느님 생명이라는 큰 나무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생명이면서 동시에 보다 작은 생명들을 통합하고 있는 큰 하느님의 생명이다. 하느님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본래모습이며 나의 본래자리다.
이 비밀을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필립 3,12)
하느님은 ‘이미’ 나인데 ‘아직 ’ 하느님이 아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먼, 나는 고단한 순례자요 외로운 나그네일 뿐이다. 그분은 이미 나를 사로잡았으나 나는 아직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지 못했다. 사도 바오로처럼 나 또한 그분께 잡힌 몸으로 그분을 잡으려고 이렇게 달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다가 바다로 흐르듯 내가 나에게로 흐르는 것이더라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12, 49-51)
이미 하늘 생명이 세상에 왔고 비로소 나로 인하여 왔다. 나의 생명이 이렇게 흘러왔다. 흘러와서 보니 내가 흐른 게 아니라 그분이 스스로 흘러 왔더라는 사실까지 조금 알겠다. ‘바다’로 가까이 갈수록 ‘개울’이 사라지듯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사라지고 오직 하느님이 전부가 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럴 수밖에, 하느님은 한 분이니까.
하느님을 지금 여기 나에게서 찾지 않고 저기 밖에서 찾거나 나 아닌 너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 아닌 밖에서 찾으면 찾을수록 나한테서 멀어진다. 나 이제 홀로 가매 곳곳 어디든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믿음의 세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그림의 떡은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먹을 수 없다. 완벽한 이론도 실생활과 무관하면 그것 또한 그림의 떡 같은 것이다. 믿을 교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들의 모음이라면 그 또한 그렇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살아계신 하느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분은 여전히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것 같다.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한다면 배고플 때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주고, 힘겨울 때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해도 옆에서 함께 울어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과연 그렇게 해주시나? 당신이 직접 그렇게 해주실 수 없으니 그 대신 배고프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신다. 하느님보다는 친구들이 더 가까우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믿으라고 요구하셨고, 믿음은 주관적인 결단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주님께 대한 믿음은 그런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천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선하고 거룩한 결심을 수백 수천 번 하지 않았나?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그 이상이다.
믿음에서 우리의 몫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드림이다. 그 다음부터는 하느님의 몫이다. 문밖에 서성이시는 예수님을 내 집 안으로 모셔 들인다. 거기까지다, 우리의 몫은.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그분의 손도 잡고, 그분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 주님은 당신 친구들을 보내주시고, 그 친구들은 대화도, 어깨를 두드림도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 아주 은밀하게 주님을 만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알아듣고, 느낄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사랑하며 사랑받고, 비우며 채워지며, 내 의지를 포기해서 하느님의 것이 된다.
예수님, 잘 아시다시피 이 육체를 갖고 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먹고 입고 일하고 쉬고 위로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것들을 일일이 다 해주시는 대신에 그런 욕구들이 모두 복종하는 곳으로 저를 이끄십니다. 그렇게 귀한 일에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느끼지 못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주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신다. 이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지르시는 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이 불로 채워주시도록 청하도록 하자.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한다고 한다(로마 12,11 참조). 또한 이 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동반자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배운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다니며 속된 것,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것을 단련시킨다. 사랑은 그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다. 그래서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다. 사랑은 환해졌고 정의는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셨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는 피와 순교로 이루어지는 세례인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다. 이 세례는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는 숭고하고도 복된 세례이다. 즉 당신 육신의 죽음을 말한다. 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이 고통을 겪고 수난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공경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신앙을 가지면 가족과 불화하라고 하신 것일까? 만일 가정을 깨뜨려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지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면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자기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를 저주하신 분이(신명 27,16) 부모를 버리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고 그 다음이 사람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더 잘 공경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는가?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어찌 부모는 알아보겠는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되면 나의 이웃도 올바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서 올바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 이 둘의 싸움을 말한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뜨거운 불처럼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영원한 사랑을
지향하는
예수님의
삶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타오르는
사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영혼도
예수님의 삶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타올라야 세상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우리의 차가움과
어둠을 먼저
밝힙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타오르는
복음의 불을
보아야합니다.
타오르는 불로
우리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불로
흐지부지한
그리고
뜨뜻미지근한
우리 삶에
해답을 주십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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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사용했던 고엽제를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던 분들의 심각한 고엽제 피해가 있다고 방송에 자주 나와서 아마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엽제가 나무를 고사하기 위해 살포했던 제초제이지만, 사람에게 있어도 아주 치명적이라고 하지요. 심각한 피부질환을 앓게 됨은 물론 임신 여성의 경우는 기형아를 출산하게 하고, 10년이 넘은 이후에도 증상이 쉽게 가시지 않고 그대로 정신적인 고통과 후유증을 앓게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고엽제 안에 있는 ‘다이옥신’ 때문입니다.
다이옥신은 내분비 교란 물질 중의 하나로 소량만 섭취해도 아주 치명적인 무색의 발암물질입니다. 1g만으로도 몸무게 50Kg인 사람 2만 명을 죽일 수 있으며, 청산가리보다 1만 배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류가 만들어 낸 독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가장 큰 치명적인 이유는 이 다이옥신이 체내에 들어오면 인체에 축적되어서 신체의 대사나 배설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성이 계속 쌓여지면 각종 질병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이끕니다.
이 다이옥신이라는 물질을 생각하면서 문득 우리가 행하는 죄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마음과 정신에 ‘죄’라는 것이 계속 축적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순간 죄에 대한 죄책감 자체가 사라지면서 점점 더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즉, 영적 죽음에 이르는 단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인체에서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다이옥신과 달리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죄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뜻에 철저하게 따르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분명히 영적 죽음으로 이끄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상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따르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으로 시작하시면서,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실 정도로 평화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러한 분이 평화가 아닌 분열이라니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영적 죽음에서 우리를 끌어내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과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양심이 자신을 고발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압바 아가톤).
울기는 쉽지(루이스 휘른베르크)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야 날아서 달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기는 어려운 것
찢어지는 가슴속에 웃음을 짓고 이를 꽉 악물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끝없이 넘쳐 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 짓고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그리고 남을 믿으면 주위에서 지옥은 사라진다.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너무나 어려운 것이지만 오늘 하루 많이 웃기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꼭 1년 전입니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작은 촛불이 모이니 커다란 폭풍이 되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시켰습니다. 헌법 재판소는 국회의 탄핵 결의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지난 5월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국정농단, 적폐청산’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국민은 물과 같다.’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국민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면 잔잔한 물이 되어서 권력이라는 배를 띄우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국민을 기만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한다면 거센 풍랑이 되어서 권력이라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새로운 정부도 국민을 위한 정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국민을 무시한다면 국민은 또다시 촛불을 들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 마다 모두 잘 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지금부터 38년 전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때는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려고 보급소엘 갔습니다. 신문 150부를 들고 배달을 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그래서 신당동 떡볶이 집엘 자주 갔습니다. 요즘은 신문도 다들 오토바이로 배달하지만 그때만 해도 오토바이 배달은 없었습니다. 신당동의 떡볶이 집에는 음악이 있었고, 맛있는 떡볶이가 있었고 우리들만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레이프 가렛의 "다함께 춤을 춰여"라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진, 나훈아와는 전혀 다른 음악을 보여준 산울림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산울림의 음악을 좋아했고, 저도 물론 좋아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신문을 배달하려는데 '호외'가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유고라고 했다가, 서거라고 했다가 결국은 대통령이 죽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였습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은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셨고, 민족의 근대화를 위해서 산업현장을 뛰어다니셨고,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을 위해서 불철주야 땀을 흘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그분의 앞모습만 보았습니다. 신문과 방송도 그분의 앞모습만 저에게 보여주었으니까요.
그 뒤 저는 그분의 뒷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리하게 삼선개헌을 하였습니다. 긴급조치를 남용했습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측근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세운 업적이나 그의 앞모습만으로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평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은 드러날 뒷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성인품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했어도, 그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어도 그렇습니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있었어도 그렇습니다. 죽은 다음에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성인품에 올릴 수 있는지 조사를 합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이 비록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어느덧 나는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뒤에 감추고 있을 때가 많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실한 사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기에 세상에 평화가 없고, 분열과 불신이 가득한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따뜻함이, 우리들의 진실함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면,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 땅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참 사랑의 불, 참 평화의 길,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주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께 적극적으로 항구히 한결같이 협조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구원의 살 길입니다. 주님과 운명공동체를 이루는 믿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짧은 주님 말씀이 주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사랑의 응답을 촉구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이 은연중 밝혀집니다.
1.“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루카12,49).
주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려 오셨고, 오시고 있고, 오실 것입니다. 무슨 불입니까? 하느님 현존의 불, 말씀의 불, 사랑의 불, 기쁨의 불입니다. 진정 이런 불로써 끊임없이 타오르는 열정의 삶일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산불같은 불이 아니라 햇볕같은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는 생명과 빛의 불이요, 가을 햇볕에 온통 아름답게 타오르는 가을 산에 가을 단풍같은 사랑의 불입니다. 과연 이런 사랑으로 타오르고 있습니까? 한 때의 사랑이 아니라 항구히 평생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붙여주신 사랑이 불이 꺼질 때 허무와 무의미, 냉담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 무겁고 어둡게 합니다. 기쁨도, 평화도, 믿음, 희망도, 사랑도 사라집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붙었다 하여 평생 타오르는 불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 사랑의 불에 붙어야 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또 말씀과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 영혼에 사랑의 불을 붙혀 주십니다.
2.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
예수님께서 수난 곧 구세주로서 수행하셔야 할 사명의 완수를 생각하시며 마음 졸이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올 죽음을 예감하고 예고하시면서 그 초조해하시는 인간적인 마음이 심금을 울립니다. 값싼 구원 은총은 없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온갖 고통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다 생각하며 용기백배하시기 바랍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로 완성하시는 파스카의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주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서 끊임없이 사랑의 불을 놓으실뿐 아니라 고통중인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내적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하여 고통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3.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2)
참평화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거짓 평화, 값싼 평화에 대한 거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분열은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참평화에 이르는 과정중 창조적 분열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진리가 오면 거짓이. 정의가 오면 불의가, 선이 오면 악이, 생명이 오면 죽음이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며 여기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분열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어둠, 거짓, 불의, 악은 저절로 탄로되고 이들의 저항으로 분열입니다만 결국은 참평화에 이르는 정화과정일뿐입니다.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열의 과정을 통해 참평화에 이릅니다. 항구한 인내와 내적싸움의 열매가 참평화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이런 창조적 분열을 통하지 않은 참평화는 없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사랑의 불을, 말씀의 불을, 기쁨의 불을 붙혀주십니다. 끊임없이 고통중인 우리에게 당신 세례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합류하시길 원하십니다. 하여 마침내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누리시길 바라십니다. 외적 분열 현상에 좌절하지 않고 참평화의 일꾼으로서 항구히 노력할 것을 바라십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영적싸움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죄에서 해방되었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은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바로 성화은총이 우리를 온갖 어둠과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줍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만 20년전에 써놓은 ‘사랑’이란 자작시를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당신/언제나/거기 있음에서 오는/행복
세월 지나면서/색깔을/바랜다지만
당신향한/내사랑/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안으로/끊임없이 타오르는/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계속/새로워지고/좋아지고/깊어지는
당신 사랑이면 좋겠습니다.”-1997.3.
아멘.
평화를 갈망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좌우합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는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5-1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24절 15절에는“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여호24,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이 선택의 삶입니다. 물론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족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갈라진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입장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눈앞에 주어졌지만 선택은 자기 고유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시고자 하지만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으니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제각각 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8,6). 그리고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로마8,8). 그럼에도 누구는 생명을, 누구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지 마!"라는 말이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 '아니오'의 선택은 참으로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2,14). 그러나 그 평화를 얻기까지 일상의 삶 안에서 끊임없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해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 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콜로3,15). 아멘.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세상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했던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시며, 열절한 마음으로 저희에게 불을 지피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어둠이 들통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일수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카 12,50)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물세례로 전도활동을 시작하시어, 십자가에서 피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라고 하시며, 저희에게 피의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과 우리가 받아야 할 이 피의 세례는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도전입니다.
결코 양 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불에 어둠과 거짓을 사르고, 자신을 분열시켜야 하는 일입니다.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진실 되게 마주하고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입니다.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의 분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일치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일치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히 분열을 회피하려 하지만, 분열은 회피하고 덮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벌어지는 분열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우리 주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분열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거짓된 평화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열은 어둠으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빛으로부터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오스 위에 머무르는 영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에게 매일 건네시는 예수님 말씀은 참으로 풍요롭고 다채롭습니다. 마치 각 나라별 산해진미가 다 갖춰진 최고급 뷔페 식당과도 비슷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매일 예수님께서 차려주시는 풍성하고 영양가 있는 말씀의 식탁에서, 그저 이것 저것 골고루 섭취하면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접할 때 마다 느끼는바지만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한 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인데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도 다채롭고 깊이가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극과 극을 오가는지? 이천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어찌 그리도 생생하고 감동적인지?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가하면, 때로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때로 꿀처럼 감미로운가 하면, 때로 천둥소리 보다 더 충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용광로 처럼 뜨겁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복음 12장 49절)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 이 뜻밖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은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이 차갑고 냉담한 세상, 이 비정하고 사랑없는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불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불길이 될 것입니다. 시대가 바뀐지가 언제인데, 끝까지 주제 파악하지 못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땅의 사악한 무리들을 향한 뜨거운 불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하늘을 찌르는 안하무인과 몰상식함과 위선을 활활 불살라버리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함몰되어 이 땅위의 약자들, 장애우들, 뒤쳐진 이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저 야수같은 무리들의 비인간성을 활활 불살라버릴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 안에도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내 안의 권위주의와 폭력성, 미성숙과 몰상식, 반복음적 증거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릴 뜨거운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롭게 지내지만 같지는 않다는 뜻이고, 평화를 위해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의견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영성도 다르고, 그야말로 많은 면에서 달라도 평화롭게 지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화롭지만 같지 않고, 다르지만 평화로울 수 있기 위해서 전 단계가 있고, 이런 단계들을 거쳐야 합니다.
다름과 화해和解하는 단계와, 다름과 조화調和를 이루는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단계를 거쳐야 다른 것과도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종종 다르다는 것 때문에 싸우고, 다르다는 것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고,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불화와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지마저 포기하기 쉬운데 그러지 않고, 너와 다른 내가 존중받고 싶듯이 나와 다른 너를 사랑으로 존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저 다른 것일 뿐이라면 우리는 평화로우면서도 다르고, 다르더라도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떤 무엇이 그저 다른 것이 아니고 틀린 것이거나 옳지 않는 것일 경우에도 평화로워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 안에서 평화로운 것이어야지 거짓과 불의와도 평화로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요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좋은 것이 좋지’라고 생각하고 거짓과 불의를 거슬러 싸우는 의지를 꺾거나 접습니다.
싸우는 것이 귀찮고, 버겁고,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내게 불이익이 닥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정의,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해 내가 힘들고, 고통당하고, 손해 볼 필요가 뭐 있어 하며 세상의 거짓과 불의와 적당히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과 불의와 싸우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비겁하게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힘과 사랑의 힘이 내게 부족하기에 싸우지 않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내게도 거짓과 불의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고치려는 회개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며, 나와 공동체를 하느님 뜻에 맞게 고치려는 더 큰 사랑과 진정한 사랑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며 우리의 이 약한 사랑의 불이 당신이 지르시는 불로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이 불을 붙이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타오겠습니까?
그래서 클라라 성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붙입니다. 님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님의 어지심은 우리의 만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을 붙여도 붙지 않고 열을 가해도 뜨거워지지 않는 그런 불연 존재가 아니라 가연성可燃性의 존재들, 곧 불을 지르면 불이 붙는 존재여야겠습니다.
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불꽃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때’가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겪으실 고난의 사건 앞에서 괴로움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셨지요.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덮치는 심판을 언급하면서 당신 자신에게도 영향을 줄 심판을 말씀하십니다(12,5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51) 분열을 일으키는 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불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세상이 겪을 세말 심판을 뜻합니다(12,49).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12,50)란 그분의 고난을 말하며, 고난의 잔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불세례(12,49)를 받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12,51)는 말은 가족의 조화를 많이 강조하는 유다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12,51-53).
아무튼 불을 질러 분열을 일으키시겠다는 예수님의 마음과 뜻은 오직 하나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불은 예수님의 사랑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좋은 계절에 우리도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다시 불태워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느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지기를 열망하시기 때문입니다(12,49).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과 복음을 선택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불은 영혼의 어둠을 밝히고, 불필요한 것을 태워 없애고 빛을 밝힘으로써 우리가 주님 편에 서도록 해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모든 것을 태워 사랑으로 변화시키지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열정과 책임있는 선택이 없음이 바로 죽음의 표지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지펴야 할 불은 무엇이며, 불에 태워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지 숙고해봐야겠습니다. 지펴야 할 불은 사랑의 불, 평화의 불, 선과 의로움의 불, 성령의 불, 분별과 지혜의 불일 것입니다. 또 태워버려야 할 것은 하느님과 나를 갈라놓는 생각, 이기심과 탐욕, 잘못된 습성, 죄로 기우는 경향 등이겠지요.
나아가 우리는 주님 사랑의 불과 성령의 불로 이 사회에 불의와 부정, 불공평, 기만, 가난, 구조적 모순, 빈부격차 등을 조장하는 악의 실체들을 태워버려야겠습니다. 너와 나 안에 있는 옳지 못하고 좋지 않은 것들을 태워버릴 때 우리 자신이 바로 사랑의 불꽃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의 불을 지펴 선악을 가르는 표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구원을 위한 사랑의 불이 필요합니다. 정의의 불씨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불을 온 세상에 지펴 사람들 마음속에 구원을 향한 불길이 타오르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끌 수 없는 사랑의 불을 우리 모두의 가슴 깊숙이에 지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 사랑의 불로 우리 마음속의 애착과 편견과 악습을 한 줌 재로 바꿔주소서. 당신께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자만심과 위선과 세속적인 야망을 성령의 불꽃으로 정화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아름다움에 묻어있는 한자락 당신을 향한 사랑과 평화의 불꽃을 보게 하소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12,49)
김종오 신부님
우리 마음에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주님의 불씨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그 불씨를 지피는 날입니다.
우리 가슴에는 식지 않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뜨거움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뜨거운 사랑을 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그 뜨거움을 쏟아내야 합니다.
우리 어깨에는 접힌 날개가 있습니다. 그 날개는 천사의 날개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천사가 되어 기쁜 소식을 전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그 날개를 펼쳐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피우지 못한 꽃이 있습니다. 그 꽃봉오리는 피지 않은 주님의 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나비되어 꽃을 피우는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나비가 되어 날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 태양은 어두움을 물리치는 주님의 빛입니다. 오늘은 어두운 영혼을 비추는 날입니다. 지금 그 빛이 우리 영혼을 비춥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예수님의 꿈입니다. 오늘은 그 꿈을 이루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지금 그 꿈이 우리 삶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는 묻혀있는 보물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인 우리 자신의 현주소를 보고 참된 나를 재발견하는 날입니다. 재발견한 나를 불사르는 날입니다.
선물인 자신을 불태워 우리는 세상이 주님의 불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게으름 그리고 연약함마저 모두 주님의 제단에 바쳐 자신을 산 재물로 바쳐야 합니다.
자신을 재물로 바친 사람은 마음으로 갈망하는 주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해 일합니다. 그 때에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서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박미라 도미틸라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를 전하라고 하시며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시더니 오늘은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니요.
그런데 왠지 그 말씀이 제게는 너무나 좋게만 들립니다.
저도 그 불이 빨리 타오르기를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서로 가깝다고 느껴지는 관계가 아무것도 아닌 대립의 관계가 되고, 반대로 서로 멀다고 생각되어지는 관계가 오히려 가까운 사이가 되는 일!
당신께서 그토록 열망하셨던 그런 일들이 이제로부터 영원히 틀림없이 일어날 것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평화로운 줄 알고 아무런 갈등 없이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그토록 고난을 당하시기를 갈망하시며 애타하셨고, 마침내 많은 사람 앞에서 사형수가 되시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산을 오르셨습니다.
우리 각자가 당신처럼 자신이 당해야할 고난의 세례를 갈망하기를 -
애타하며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는 주님!
남에게 좋게 보이고픈
편하게 살고픈, 안주하고픈
자신 안의 모든 원의와 맞서고 싸워서
타오르는 당신의 그 불 속에 잠기게 하여 주소서.
그 불 속에서
더러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
빛이신 당신과 하나 되게 하여 주소서.
그래서 마침내
우리 모두가 손에 손잡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불의 여정과
칼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뜨거움으로
달구어져야
아름다울 수 있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활활 타오르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없습니다.
타올라야
하느님만이
남습니다.
우리의 하루도
단풍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타올라야
허상과 거짓을
내려놓는 십자가의
세례를 받게됩니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연의 순리처럼
불과 칼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다시 이끕니다.
하느님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우리의 자아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불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의 봉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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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신심 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정말로 사랑하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어디를 다녀오는 동안 끔찍한 사고로 아들이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이 고통을 신앙으로 이겨냈지요. 하지만 문제는 남편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신앙심이 깊기는 하지만 심장이 좋지 않아서 이 비보를 들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이런 말을 하지요.
“당신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전에 친구가 제게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석 두 개를 맡겼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안 계실 때 그 친구가 와서는 그 보석을 돌려달라는 것이에요. 저는 너무나 아까워서 못 주겠더라고요. 어쩌면 좋을까요?”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당신은 허영심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고는 그 보석들을 돌려주자고 설득합니다. 그제야 아내는 말하지요.
“여보, 보석들은 돌려주었어요. 실은 이미 여기에 없답니다. 그 두 개의 귀중한 보물은 우리 두 아들이에요. 당신이 없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우리 품에서 아이들을 데려가셨어요.”
우리가 놓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다시 가져가시겠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꼭 움켜잡으려고만 하지요.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잃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갖는 착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늘 사랑을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뜻밖의 이야기를 하시지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 혈연으로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가족 관계까지도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윗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가족 안에서 분열을 가져오더라도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 소유를 잃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있을 수 있고, 또한 어떤 물질적인 손해를 가져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사람은 그 순간에 하느님께 대한 원망보다는 괴로워도 내어 맡길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 이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둘 수 있은 마음, 그래서 하느님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믿음. 그러한 믿음을 청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마음이 죽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것은 쉬지 않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다.
많은 능력을 받은 나
어제 공항을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가시는 신부님께서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 다녀왔지요. 신부님들의 짐을 싣고서 공항으로 가고 있는 중에 한 신부님께서 제 차 앞 유리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더니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공해 차량이네요. 그러면 주차요금이 절반이죠?”
사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습니다. 솔직히 차량을 구입할 때 저공해 차량 등록을 해주신다고 했는데 그 혜택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주차요금 50%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공항에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한 번도 그 혜택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몰랐기 때문이지요.
5년 넘게 타고 다닌 저의 차이지만 이러한 혜택을 가지고 있는 차인지를 몰랐습니다. 문득 우리 자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깨닫지 못해서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조치를 해놓았는데,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고서 그저 힘들게만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무책임하게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이 아님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는 2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한분은 여행을 다녀오셔서 ‘과자’를 선물해 주셨습니다.다른 한분은 정성껏 담근 ‘매실’그리고 맛있는 ‘감’과‘사탕’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선물이었습니다. 비록 신학적으로 깊이 아시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신학의 근본, 영성의 근본을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아무런 조건 없이, 이유도 없이, 따지지도 않고 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소유하려하고, 더 가지려하고, 그러면서 남을 속이고, 마음의 평화를 깨버리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서있는 작은 아이처럼 ‘사랑의 본질’을 실천하는 것이 힘겹고 어려워 보이기도 합니다. ‘시대정신’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화폐 체제 기반 사회’라고 진단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돈이 있고, 이 돈을 벌기위해서 노동을 하고, 이 돈을 소유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화폐 체제 기반 사회의 핵심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한정되어있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가 소유할 수 없고,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화폐체제의 가장 큰 가치는 이윤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은 나중에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토마스 베리 신부님의 ‘우주 이야기’와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두 책의 이야기는 인간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생태 중심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의 등장은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1년 단위로 계산을 한다면 인간의 등장은 12월 31일 밤 11시 59분 57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머니인 지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고 합니다. 공기, 물, 땅을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황폐화 시켰습니다. 인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생명들이 살아남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에서 5번의 커다란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엄청난 자연 재해였습니다. 소행성의 충돌, 빙하기, 대규모의 지각 변동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지구는 오직 인간의 출현과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생명의 대규모 멸종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다른 생명들의 멸종은 인간의 삶에도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주 이야기와 무탄트 메시지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새로운 가치와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나눔이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주님 말씀은 여전히 도전이자 회개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죄의 종으로 살 것이냐 하느님의 종으로 살 것이냐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예언자적 면모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솔직히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안주를, 도피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타성에서 벗어나 회개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은 시메온이 마리아를 향한 예언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4-35)
참으로 암울한 경고이자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 앞에서 둘로 갈라지고, 마리아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뿐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요 인류가 존속하는한 계속 반복하여 일어날 현실입니다. 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며 피에타의 성모님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마리아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으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는지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세 말씀도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해 결단을 촉구합니다.
1,“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과연 주님 사랑의 열정의 불은 여전히 잘 타오르고 있는지요. 여전히 초발심의 자세로 살고 있는지 묻습니다. 말씀의 불은, 회개의 불은, 사랑의 불은 여저히 타오르고 있는지 묻습니다. 여전히 주님은 우리에게 불을 붙이려 오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십니다. 어제 단풍으로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수도원 주변의 경관을 보며 써놓은 시가 생각이 납니다.
-가을되니/이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뭇잎들/풀잎들/모두가 이쁘다
만추의/햇빛 사랑에 갖가지 색깔로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만추의 단풍이 상징하는바, 하느님 사랑에 불타오르는 영혼들의 아름다움입니다.
2.“내가 받아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의 깊은 고뇌가 함축된 말씀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양상이나 정도의 차이일뿐 누구에게나 운명과도 같은 피할 수 없는 받아야 할 세례가, 또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있는 법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짓눌리며 살아가는지요. 하루하루 연명하며 믿음으로 사는 이들을 보면 그대로 주님의 수난에 함께 하는듯한 생각도 듭니다. 누구보다 아드님으로 인해 성모님의 짓눌렸던 마음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어느 자매의 주님께 올리는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편지글 일부를 나눕니다.
-주님, 당신 품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든 이들이 알면 참 좋겠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웃을 수 있으니까요. 제 주위에서는 웃음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요. 모두가 지쳐서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서민 대출이 있어서 신청을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요. 꼭 환경을 바꾸고 싶어요. 지하에 있으니 햇빛도 바람도 그리워요. 사람 구실하고 살고 싶어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사업들을 하다보니 형편들이 몹시 어려워요.당신은 우리를 내셨고 천상의사이시니 내적상처도 모두 고쳐주세요. 저는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 이런 모습의 저를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이 많이 그립습니다. 이 눈물을 당신은 아시지요.-
끊임없이 짓눌리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과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기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자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 믿음의 끈을 꼭 붙잡고 살아가는지요.
3.“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주님은 거짓 평화를 깨고 참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값싼 은총이 없듯이 값싼 평화도 없습니다. 얼마나 값싼 거짓 평화가 만연된 세상인지요. 주님은 이런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심으로 거짓 평화를 탄로시키고 참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이런 내외적 분열의 아픔을 통해 정화되어 보석같은 참 평화의 선물입니다.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평화입니다. 분열의 시련과 고통을 통해 얻은 참 평화의 열매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런 참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로마서의 바오로역시 우리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죄의 종이 아닌 하느님의 종이 되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끝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은 소득은 성화聖化로 이끌어 주며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하여 현실의 짓눌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행복을 선택하여 자유롭고 기쁘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갈라진 마음을 태우는 불꽃을 피우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다문화, 다종교, 융복합화의 시대에는 복음의 가치나 종교의 신성성이 더 이상 절대성을 지닌 실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신앙공동체나 수도공동체에서조차 신앙의 진리, 살아내야 할 삶의 본질 등이 각자의 생각이나 취향에 맡겨지는 현상은 이제는 일반화되어가는 듯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세속화가 가속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말씀과 종말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결정적 과업인 심판, 그리고 성령, 하느님의 보호하심, 그리스도, 박해와 환난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불’처럼 널리 퍼지기를 열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하느님의 심판을 부르는 도전으로 다가오며 그에 대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12,51)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하신 예수님께서 왜 평화를 주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의 의도인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거짓 예언자들이 꿈꾸던(예레 6,14; 에제 13,10) 물질적이고 손쉬운 평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는 현세 질서를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갈등과 분열을 가져다줍니다. 하늘나라의 선포는 혈연에 따라 사는 가정에 충돌을 가져다주고,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질서에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 사랑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선물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심판이 되고 분열의 계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속을 인간이 알 수 없고 영이 아니고서는 영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12,50)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덮치는 심판을 언급하시면서 당신 자신에게도 영향을 줄 심판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 세례는 물로써 이루어지는 세례가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되돌리는 십자가상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구세주로서 완수하셔야 할 사명인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미리 아시고 초조해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도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는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곧,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앞세워 교만에 빠졌거나 아니면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누리는 진정한 평화 상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늘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고통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매순간 우리는 이런 분열과 갈등의 고통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는 중립 지대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분열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손길 앞에서 행복의 길로 가는 선택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랑이신 그분을 품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불꽃이 내 안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육(肉)의 정신이 아닌 주님의 영(靈)에 따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나의 이기심과 탐욕, 애착, 분노, 편견과 왜곡된 사고의 틀을 태워 사랑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주님, 제 영혼과 이 사회에 당신 사랑의 불꽃을 피우시어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품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아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용기
이종경 신부님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요.
그래서 불을 생각하면 사고 또는 재앙으로 인한 좌절감이 떠오릅니다.
그러니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이 무척 당황스럽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마음의 평화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맞서게 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불과 분열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존의 건물 터에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완전히 부수어서 평탄한 땅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울어진 땅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땅을 고르게 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땅의 수직으로 건물을 올린다고 한다면, 열심히 높이 지을수록 그 집은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스스로 넘어질 것입니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과감한 용단이 필요합니다.
적절히 타협해가며 이뤄내는 삶의 개선이란 용두사미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은 당신들의 삶으로 이 가르침을 보여주었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바라봅니다.
저마다의 색깔을 하고 있지만 하나같이 그리 예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저런 색깔을 만들며 세상을 떠날 수 있어야 하는데.
...
녀석들은 참 행복합니다.
녀석들의 세상에는 죄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욕심이 없으니 유혹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쁜 색을 쏟아내며 끝을 맞이할 수 있나 봅니다.
사람의 주검을 봅니다.
예쁜 얼굴을 하며 잠든 얼굴보다는 그렇지 못한 얼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름다운 색을 하며 마감을 준비하는 나뭇잎들이 속삭입니다.
예쁘고 아름다운 마감을 위해서는 힘을 다해 죄를 피하고, 힘을 다해 예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2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하기 전에 이런 환시를 봅니다.
"프란치스코야, 너는 종을 섬기길 원하느냐 주인을 섬기길 원하느냐?"
프란치스코는 대답합니다.
"당연히 주인을 섬겨야지요."
그러자 이런 말씀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종을 섬기려하고 있느냐?"
그제서야 프란치스코는 깨닫습니다.
"아, 내가 주인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종을 섬기고 있었구나!"
프란치스코는 기사가 되려는 열망에 어느 장군의 부하가 되려고 전장에 나가는 길이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의로움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죄의 노예(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사람을 섬기기보다 하느님을 섬기고 죄의 종이 되기보다 의로움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오늘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를 섬기고 있고 무엇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까?
오늘 곰곰이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치할 수 없는 사람도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나 되어 함께 가야 하지만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같이 일치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려고 왔다.” 이 말씀은 "참으로 어찌하려고 오셨습니까?" 하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 대답은 주님이 오심으로 선과 악의 본질이 분명해졌고 진리와 거짓이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영과 육이 하나인 사람도 영에 치우치는 사람과 육에 치우치는 사람으로 서로 갈라지기 마련입니다. 화합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만 가는 방향이 서로 다르면 일치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빈부의 차이가 나무나 벌어져 하나가 되려면 너무나 많은 희생이 요구됩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살려는 약한 사람과 힘 있는 사람을 배척하며 살려는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배신자, 등을 돌리는 사람과 하나가 되려면 용서란 말이 있지만 쫓아가며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가오는 사람, 뉘우치는 사람 즉, 회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과의 일치도 가능합니다.
자기 생각이 변하지 않는 사람과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일치하려는 사람은 물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샘물이 나오는 구멍이 서로 달라도 밑으로 흐르면서 모이고 모여 내가 되고 강이 되어 흐르면서 아무리 큰 절벽을 만나 폭포처럼 밑으로 흐르며 갈라지고 큰 소리 내도 평지에 오면 다시 모여 잔잔한 물로 변화되어 흐르고 큰 바위를 만나 갈라져 흘러도 바위를 돌아 다시 하나가 되어 흐릅니다.
출생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다 해도 하나가 되는 길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듯이 주님을 참으로 바로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신 사람들은 하나가 되려 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일치할 수 있습니다.
서독과 동독이 하나 되어 통일된 것은 그 밑바닥에 그리스도 정신이 숨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가 모두 하나 되게 하시려고 자신을 낮추시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미련하고 바보처럼 보였지만 그 길이 일치의 길이라고 가르쳐 주셨기에 우리에게는 불가능했던 일치가 가능해졌습니다. 분열을 가져오셨지만 가시면서 우리가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넘지 못한 강을 넘게 하시고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을 섞으셨으며 죽음과 생의 간격을 없이하려 부활의 신비에 살게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일치의 근본이신 하느님의 믿음으로 모두 하나 되어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세상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타올라야 할 때를
놓치지 않는
가을 숲의 단풍을
만나게 됩니다.
빨갛게 타오르며
주님을 드러내고
만나는 시간을
이 가을은 우리들에게
겸손히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생명의 의미를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 생각들 속에만 빠져있는
우리들입니다.
제 생각들속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친히
참된 평화를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평화는 우리가 사는
가장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합니다.
거짓된 일치가 아니라
훤히 드러내는 분열과
마주하는 것에서
평화는 잉태됩니다.
갈라서고 맞서는
아픔의 시간없이
평화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온 평화는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참된 평화입니다.
평화를 통해
우리 믿음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허약하고
부실하기에 우리가 만든
평화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튼튼히 하며
믿음 안에서 활활
타오르게 합니다.
타올라야 할 믿음은
바로 우리자신의
믿음입니다.
갈라서고 맞서는
우리들을 평화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우리가 진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불이
뜨거운 평화로
타올라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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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정말로 맛있게 식사를 했던 식당이 기억납니다. 가격은 약간 비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반 다른 집과는 다르게 대접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해서 식당을 나오면서도 너무나도 기분 좋았던 식당이었지요.
맛있는 것은 기본이고 우선 반찬 그릇부터 다른 곳과 달랐습니다. 가벼운 플라스틱그릇이 아닌, 무거운 사기그릇을 사용하더군요. 사실 일하는 사람들이 무거운 그릇을 나르기에 너무 힘들다고 일반적으로 가벼운 그릇을 사용하지요. 하지만 이 식당에서는 일하는 종업원의 숫자를 늘리고 대신 무거운 그릇을 사용해서 손님들이 대접받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점은 너무나도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갖다달라는 반찬을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계속해서 주는 것은 물론이고 항상 웃는 모습으로 편안하게 대해주십니다. 심지어 김치 위에 고명 올리듯이 자그마한 파 조각을 올려서 주셨는데, 더 달라는 김치에 이 파 조각을 바빠서 올리지 못했다고 미안해하실 정도로 손님 중심으로 일하시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런 집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식당이 불친절하고, 성의 없는 집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인이 편한 운영 방식을 따라서 불친절하게 보이고 성의 없어 보인다면 결코 장사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대신 손님이 편함을 느낄 수 있는 운영 방식을 쫓을 때에 성공하는 가게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지요.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평화가 아닌 분열이라는 말씀을 쓰시다니요. 그런데 앞선 식당의 예를 생각해보니 이해가 됩니다. 즉, 자기 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쫓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과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인 것이지요.
바로 이 순간 평화를 위한다는 이유로 주님의 일을 포기하고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면 어떨까요? 이것은 주님께서 좋아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즉, 주님의 일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고, 심지어 분열이 일어날지언정 어떻게든 주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조용한 평화를 원한다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커다란 분열을 겪을지는 몰라도, 주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는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만 세상이 주는 가짜 평화가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구원과 함께 얻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모든 것과 화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지 않고서는 그 상처에 남겨진 흉터를 지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과제는 ‘자신의 상처를 진주로 바꾸는 것’입니다(안젤름 그륀).
색다른 인생(‘좋은 생각’ 중에서)
공감이 가는 말이라 그대로 적어 봅니다. 여러분도 색다른 인생을 한 번 살아보시죠?
심리 분석학자 마크 스타인은 일상의 지루함을 타할 실험을 했다.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여러 가지 맛의 사탕을 맛보게 했다. 이때 한 그룹에는 먹은 사탕의 개수만 세라고 했다. 다른 그룹에는 체리 맛, 오렌지 맛, 키위 맛 등 각자 먹은 사탕이 어떤 맛인지 평가하게 했다. 그 결과 맛을 구별하여 먹은 그룹이 개수만 센 그룹보다 더 기분 좋은 달콤함을 느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맛의 차이에 집중한 사람들은 사탕 먹는 것을 ‘반복’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개수만 센 사람들은 맛이 달라도 그저 ‘하나의 사탕’에 불과하다고 여겨 금세 지루함을 느꼈다.
이 처럼 세분화함으로써 지루함을 덜 수 있다. 가령 정원을 가꿀 때 일정표에 ‘오후 3~6시: 정원 가꾸기’라고 메모하지 말자. 그 대신 ‘오후 3~4시: 장미 가지치기, 오후 4시~4시 30분: 잔디 깎기, 오후 4시 30분~6시: 화원에 가서 화분 고르기’라고 계획을 세우면 정원을 보다 즐겁게 가꿀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일에 흥미를 떨어뜨리고 싶다면? 예를 들어 살을 빼고 싶다면 식사 때 뭘 먹을지 군침을 삼키며 메뉴를 고르지 말자. “무얼 먹어도 다 똑같아.”라며 시큰둥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식욕을 가라앉히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세밀하게 나눌수록 흥미는 배가 되고, 하나로 뭉뚱그릴수록 지루해진다. 그러니 색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면 하루를 세분화해 소소한 일상의 결을 만끽해 보자.
식별의 지혜를 청해야 한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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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생각과 취향을 가지고, 각자의 상처와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의 다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섞여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세상이다.
또한 어디를 보아도 욕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는 세상이다.
자연스럽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분명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 던져진 삶을 살고 있다.
인류가 기억하는 역사라는 시간의 시작부터 온갖 종류의 갈등은 항상 자연스럽게 존재해왔다.
상대적 소신은 다른 시각의 소신을 죽이고자 했고, 각자의 욕망은 성취를 위해 또 다른 욕망을 제압해야만 했다.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없는 체질의 두 세계이다.
그런 선과 악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세상이고 우리의 삶이다.
악은 철저하게 악의 방법을 고수한다.
쉽게 세상을 손에 넣고자 다양한 분열을 통해 하나의 악이라는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악의 방법이란 단순한 물리적인 폭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때로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흔들어놓으려 한다.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헤어나지를 못하게 만들려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었을 때 주저함 없이 철저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선은 선이라는 이름 때문에 선한 모습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만일 선이 악의 방법과 똑같이 대응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늘 두들겨 맞고, 빼앗기고, 멍 투성이의 바보의 얼굴을 보일 때가 많다.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에 가장 가슴 아파하셨을 이는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셨을 것이다.
이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바보의 모습으로 살다가 돌아가시게 만든다.
철저한 바보였던 그 외아들은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마저 내어주라 하신다.
겉옷을 빼앗으려 한다면 속옷까지 빼앗기라 하신다.
일곱 번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다.
원수마저 사랑하라 하신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니까 영원한 것에 희망을 걸라고 하신다.
그런 분께서 당신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라 오셨다 한다.
무엇에 대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분열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용서의 대상에 관한 착각이다.
중요한 식별이 요구된다.
악은 결코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악은 용납할 수 없는 소멸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악의 방법이 아닌 선의 방법이다.
악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용서하라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우리 모두에게 선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만이 악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어 있는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선과 악에 대한 식별로 시작되는 갈라짐이다.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증오, 정의와 불의, 강함과 약함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 생겨나는 갈라짐이다.
식별의 지혜를 청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6,22-23)
세상에 불을 지르는 사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전태일 열사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일의 나이 살이 되던 년, 그는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합니다. 학생복 맞춤집인 이곳에 시다로 첫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삼일사에서 미싱보조로 미싱일을 배운 태일은 년 가을에 통일사에 미싱사로 전직을 합니다. 이제 태일은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자신도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지 년여 동안 태일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처음 그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 평화시장.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여공,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것은 바로 태일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통일사에서 미싱사로 일하면서 태일은 어렴풋이나마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루 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월급은 거의 평상 임금 정도에 불과한 것이 공장 주인의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졌지만 이 원시적인 감정이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린 직관이었고 머지않아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열 두세 살의 어린 소녀들이 일당 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태일의 가슴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태일은 자신이 놓인 환경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태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평화시장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내부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에 대한 자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최저임금과 노동법의 개정을 요구하며 분신합니다. 전태일이 산화한 년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아 년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고 년에 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힘차게 불타올라 년대는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투쟁이 타올랐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에 약 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년 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동일방직,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민주노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습니다.
[출처: http://kin.naver.com/browse/db...]
전태일은 자살을 한 것일까요, 순교를 한 것일까요? 며칠 전 신학생들에게 수업을 하는데, 한 학생이 마카베오 하권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다인들에게 의로움을 베풀다 모함에 휘말려 직무를 명예롭게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독약을 먹고 영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에 대해 말하면서, 성경에서 이렇게 영예로운 자살도 좋게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자살과 순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어왔습니다.
제 생각으론, 자살은 어떤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 힘들어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고, 순교는 생명도 귀하게 여기고 살고 싶기도 하지만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고귀한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갇혀 빠져나갈 수도 있었지만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 때문에 독약을 마시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이었다면 이것은 자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생명도 소중히 생각하고 살고 싶기도 했지만, 그에겐 더 큰 가치, 즉 정의가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자살은 사는 것 대신 죽음을 택한 것이지만,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로 밟고 지나가면 그들의 생명은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삶과 죽음을 갈등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죽음의 가치를 놓고 갈등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죽음보다 소중하다고 여겼기에 신앙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아 생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이런 갈등이 없었다면 굳이 목숨을 끊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과 순교를 나눌 수 있는 더 확실한 표징은 자살은 힘이 없지만 순교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자라난 교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야 함을 아시면서도 당당하게 그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자살일까요, 순교일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계셨을까요? 바로 당신의 죽음으로 열리게 될 수많은 열매를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엄청난 힘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로 활활 타며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자살은 그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만, 순교는 그 죽음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 맺히게 하는 ‘힘’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르고 ‘불’이라고도 부르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불을 놓아 세상을 태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자살 아니면 순교, 둘 중의 한 길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목숨은 이 세상에 불을 지필 불소시게입니다. 나에게 불을 붙이면 자신이 소진됩니다. 그러나 그 불을 붙이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불을 붙여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불을 붙이기 위한 소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피가 불이고 생명이고 성령입니다. 가치 있는 죽음이란 - 물론 이 죽음이 바로 삶의 길이지만 - 내 자신을 성령의 불로 활활 태워 이 세상의 복음전파를 위한 불소시게가 되는 길입니다. 사랑은 불이고 내 안에 사랑이 들어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잇는 세상의 작은 불소시게가 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 자신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묵주기도 성월을 통해
다시 한 번 깊이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의
"나는" 이라는 주어가
제 마음을 울립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눈물 방울이
불이 되어 활활
우리를 타오르게 합니다.
뜨거운 주님 사랑을
받으며 살아도
그 사랑을 모른 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활활 타올라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불은
언제나 우리들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도
타올라야 하고
우리의 시간도
타올라야 합니다.
이미 타오를 수 있는
우리의 삶이였다면
굳이 십자가의 불인
세례의 여정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타오르는 고통이
반드시 동반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세례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십자가의
불길입니다.
식어버린 우리의
시간을 성찰케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차가운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의지가
불타오릅니다.
우리또한 불타오르는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십자가는 뜨겁게
우리자신을 태우는
가장 빛나는 평화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일치를 이룰 수 없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일입니다.
세례는 우리의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기쁨입니다.
불을 받아들이듯
인내와 정화의 시간을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은 정화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물질은 분열을 일으키지만
평화는 생명의 가치를 다시 만나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서로를 맞서고 갈라지게 하는
우리의 거짓 이기심을 보게 하십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리의 거짓을
바라잡아 주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하시며
거짓이 모두 다 태워져야
검게 변한 숯처럼
불순물을 정화시킬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하십니다.
분열은 참회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기적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깊히 반성하게 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세례는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세례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세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정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의 온갖 모순과
이기심을 정화해 주시는
생명의 불입니다.
다시금 세례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평화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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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말로만 들어봤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입니다. 더군다나 여행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조금 오랜 시간을 두고서 다녀오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일정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강의만 하고서 곧바로 다시 돌아와야 할 수밖에 없더군요. 아무튼 놀러 가는 것 아니니까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제가 있는 교구청에는 닭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혼자서 치킨 한 마리를 거뜬하게 해치울 정도로 닭을 좋아하시지요. 그런데 이 신부님께서 꼭 배달을 시키는 치킨 집이 있습니다. 다 똑같다고 생각되는데 그렇지가 않다고 하더군요. 즉, 닭을 튀기는데 있어서 얼마나 좋은 기름을 사용하느냐, 또 좋은 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다고 하지요. 값싼 중국산 닭보다는 우리나라 닭이 훨씬 맛있으며, 튀기는 기름을 자주 갈아주어야 바삭하고 맛있는 치킨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중국산 닭을 사용한다면 그리고 튀기는 기름을 바꾸지 않고 그냥 계속 사용한다면 주인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집은 사람들이 찾아가지 않지요. 그래서 오히려 경제적인 이득이 없어 보이지만 최고의 맛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 사람들이 더 잘 찾아 가기에 경제적인 이득도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순간의 이득이 영원한 이득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순간의 이득은 순간에만 머물 뿐입니다.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많은 이들이 지금 한 순간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순간의 이득만을 주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이는 곧 잊혀질 것이며,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께 영원한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청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순간의 이득’과는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분열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시지요.
이러한 분열을 가져오더라도 우리는 영원한 이득을 주는 영원한 생명을 쫓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함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과감하게 현실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끊으면서 말이지요. 지금 내가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 내가 쫓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가치를 구하면, 그것은 그의 가치일 뿐이다(웨인 다이어).
나의 기준을 낮춰라
시인 윌리엄 스태퍼드는 50년 동안 약 22,000편의 시를 썼다고 합니다. 정말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루는 젊은 시인이 물었지요.
“저는 몇 주 동안 온 힘을 쏟아 시 한 편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 많은 시를 쓰셨죠?”
이 질문에 스태퍼드는 대답했습니다.
“자네의 기준을 낮추게나.”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기준을 낮추기 때문에 시 한 편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시 한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못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남의 눈치를 바라보면서 부끄러워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런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인터넷에 2001년부터 써왔으니 글을 써 온지가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솔직히 스스로 글을 잘 못쓴다고 생각했기에 글을 올리는 것이 처음에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꾸준히 쓰다 보니 글 쓰는 실력도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중요한 것은 나의 기준을 낮추고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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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유럽 여행 중에 독일의 쾰른 대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엄청나게 큰 고딕 양식의 성당이었지요. 600여년에 걸쳐서 성당을 지었으며, 건물의 높이는 거의 15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저와 저희 일행은 이곳의 첨탑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첨탑을 오르기 위해 값을 치루고 있었지만, 신부라는 이유로 ‘성직자 신분증’만 있으면 공짜로 올라갈 수 있다는 말에 어마어마한 높이이지만 올라가기로 결정했지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첨탑의 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도시의 맨 꼭대기에 서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쾰른 대성당보다 더 높은 곳은 없었으니까요. 상쾌한 기분을 안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낙서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이 한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한글로 된 낙서는 더욱 더 부끄럽게 만들더군요.
쾰른 대성당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인데, 이곳에 낙서가 웬 말입니까? 그냥 한글로만 적었으면 잘 모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사이에 친절하게도 ‘KOREA’라고 적어 놓았으니 한국 망신을 제대로 시키고 있더군요.
이곳에 낙서를 할 때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렇게 높은 곳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뿌듯함? 하긴 그곳에는 한글 말고도 다른 언어의 낙서가 가득 있었지요. 그래서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러한 몰상식한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시키는 생각을 했겠지요. 또한 이곳에 흔적을 남겼다는 기쁨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이렇게 몰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나를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에, 쓸데없는 용기를 내세워서 이러한 몰상식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몰상식적인 행동을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합리화시키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또한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는 모습이라면 절대 합리화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세상의 평화는 전쟁과 총칼로 평정한 평화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힘으로 유지하는 평화를 합리화시키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제시하는 평화는 힘으로 만드는 평화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드는 평화이기에 사람들의 반대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고, 그래서 철저하게 사랑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 모습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박해를 받아 큰 아픔을 경험할 수 있지만,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에 따를 때에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우리가 따라야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일로 생활을 유지하고 나눔으로 삶을 만들어 간다(윈스턴 처칠).
천국은 어떻게 생겼다고 자신 있게 말하실 수 있나요?
자녀들이 묻습니다.
“엄마! 아빠! 천국은 어떻게 생겼어!”
그러자 부부가 동시에 자녀에게 웃으며 말합니다.
“그것도 몰라! 우리 집과 같은 곳이 바로 천국이야!”
지금 내 자녀에게 하느님 나라가 바로 우리 가정이라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 가정 안에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넘쳐 난다면 정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가정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매일이 축제요, 매 순간이 구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이 세상의 년도를 센다는 것,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예수님 탄생 시점을 인류의 새로운 기원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탄생을 통해 이 세상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탄생 이전의 세월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탄생을 기점으로 이 세상은 새로운 국면, 새로운 전환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역사,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이 구세주 메시아를 고대하던 기다림의 세월이었다면 탄생 이후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축제를 만끽하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의 날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던 노예 상태이었다면 탄생 이후의 날들은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은총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다른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 탄생 이후에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존재 자체로 인해 완전 무상으로 구원에로 초대되고 있습니다. 매일이 축제요, 매 순간 구원을 맛보여,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단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그리스도로 받아들임으로 인해, 그분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따지지 않고 믿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탄생은 그 자체로 인류의 많은 고민들을 단번에 해결해주었습니다.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하던 상황을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해주었습니다. 갈 길 몰라 방황하며 우왕좌왕하던 백성들에게 너무도 명백히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예수님 탄생으로 인해 그 방법은 너무나 쉬워졌습니다.
이것 저 것 따지거나 앞뒤 재지 않고 그저 단순히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구세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에는 선과 악의 기준이 있었지만 때로 모호했고, 때로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이제 선을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 사랑의 계명을 나 몰라라 한다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이요, 죄요,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 처음에는 참으로 모호하고 애매했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찬찬히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니 그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인류는 항상 두 패로 구분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예수님 편에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예수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이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주어지는군요.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자는 예수님처럼 활활 타오른 불이 되어, 예수님 편에 서있지 못한 사람들을 예수님 편으로 안내하는 일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이웃들을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하는 일입니다.
평화와 분열
이연수
이 성경 구절을 대할 때면 언제나 의구심을 듭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라 알고 있는데, 정작 당신은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서로 갈라지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특이한 점은 주님께서 평화를 주시리라는 말씀이 루카 복음서 머리말(1,1-4)을 제외한 1-2장에 걸쳐 언급된다는 것입니다(1,79; 2,14.29).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복음은 자르고 가르는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배척하느냐에 따라 분열이 일어납니다.
가족 간에 분열을 일으키면서까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어쩌면 제 가족과 혈족과의 갈등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떠나 당신을 따른 제자들에게 종말 축복을 약속하십니다(마르 10,29-30). 이처럼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평화를 얻지만(루카 7,50; 8,48; 10,5-6), 예언자의 복음을 거부할 때는 서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평화를 이룰 것인지 거부하여 분열을 초래할지는 순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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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저는 자존심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서 하면 했지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때이면 그 망설임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할 때, 특히 저는 자존심이 상해서 친구들에게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기보다는 아예 시도도 하지 않았지요.
이렇게 시도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 나의 자존심을 살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못하는 것들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농구, 축구, 수영, 볼링……. 기타 등등 배우려 하지 않으니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니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못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했고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들을 해야만 했습니다. 운동 시간이 있어서 못해도 함께 해야 했으며, 외출 날에는 친구들이 억지로 끌고 가 가르쳐줘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못한다고 소극적이었지만, 이제는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가 되자 모든 것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큰 기쁨과 커다란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성당에 나오면서 많은 분들이 어색하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더 쑥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마치 이방인 같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면 어떨까요?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없어서 편할 것 같지만 오히려 마음의 커다란 평화를 잃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적극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 때에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나 편한 대로 산다고 해서,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산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시하신 길이 나와 세상의 기준과 많이 다르기에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주님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세상의 기준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되어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열을 통해서 내가 불행해질까요? 아닙니다. 앞서 적극적으로 임할 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그로인해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실천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주님의 기준을 따를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걷지 않고 달린다. 아이가 밟을 인생의 길을 평탄하게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진 힐).
화가 날 때(‘좋은 생각’ 중에서)
중국에 에디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남과 시비가 붙으면 집 주위를 세 바퀴 돌았다. 그런 다음 밭에 앉아 숨을 골랐다.
“왜 화가 나면 집 주위를 도는 거죠?”
사람들이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에디바는 나이가 들고 집도, 땅도 넓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화가 나면 지팡이를 짚고 땅을 돌았다.
그 모습을 본 손자가 물었다.
“연세도 많으신데 계속 땅을 도는 이유가 뭐예요?”
“젊었을 때부터 다툼이 나거나 시비가 생기면 땅을 돌면서 자책했단다. 내 땅이 이렇게 작은데 남한테 화내고 싸울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말이야. 그러면 이내 화가 가라앉고, 온 열정을 일하는 데 쏟아 부을 수 있었지.”
손자가 또 물었다.
“지금은 부자가 되셨잖아요. 이 부근에서 할아버지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진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왜 계속 집 주위를 도세요?”
에디바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화날 때가 있단다. 화가 나면 땅을 돌면서 생각하지. 내 집이 이렇게 크고 땅도 많은데 남들과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고 말이야. 그러면 화가 가라앉는단다.”
거듭나는 고통을 통해 부활함
오일환
우리는 사회적 역할이나 가족관계에 비친 모습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한집안의 다섯 식구조차도 다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그 자리, 곧 ‘하느님 앞의 단독자’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누에고치처럼 자신이 쌓아놓은 ‘껍데기’에 안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성령의 불이 없으면 ‘자기’라는 이름의 또 다른 껍데기일 수밖에 없음을 일러줍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한테는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 쌓여갑니다. 몇십 년 엎드려 있느라 등판에 이끼가 겹겹이 쌓인 거북이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굳어져 가는 ‘나’를 깨는 것은 그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어서 때론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오래된 곳에 ‘불을 지르러’오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진정 내가 죽고 대신 하느님이 사시는 길이라면 목젖까지 치밀고 온 그것을 꿀꺽 삼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그것 없이는 못살 거라고 믿었던, 그 속박의 사슬이 한순간에 스르르 풀리면서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고, 새로운 내가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고통 어린 기도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리를 이루어내셨음을 기억하면서, 오늘은 이제까지 모르던 나의 틀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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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전철을 타고서 어디를 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을까요? 이 날은 다 저를 위해 시간이 맞춰진 것만 같았습니다. 글쎄 제가 횡단보도 앞에 서니 신호가 보행신호로 바뀌고, 전철 플랫폼에 도착하면 곧바로 전철이 와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지요. 전철 안에 들어가서도 빈자리가 나서 편하게 앉아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딱딱 맞아 떨어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 역시 저를 위해서 모든 것이 마련된 것처럼 딱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그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전철역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전날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더군요. 횡단보도 앞에 서자마자 적색신호로 바뀌어서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또 전철 플랫폼까지 힘들게 뛰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떠나는 전철을 봐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운이 없을 수 있을까요? 간발의 차이로 전철을 못타고, 간발의 차이로 신호가 바뀌어서 건너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오늘은 다 꼬일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꼬인 일정은 돌아올 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날이 더 좋은 날이었을까요? 아마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진 날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운이 없어 보이는 그 날이 오히려 저한테는 더 좋은 날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진 날에는 이동하면서 묵주기도를 15단밖에 못했는데, 모든 것이 꼬여서 운이 없어 보이는 그 날은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서 묵주기도를 25단 바칠 수 있었거든요.
분명히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딱딱 맞아 떨어지는 날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기도하는 데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던 운이 없어 보이는 날이 더 좋더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나쁜 것도 될 수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의 판단이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섣부른 판단이 아닌, 하느님의 올바른 판단을 바로 나의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기준을 제시해주시지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마음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대신 확실한 선택을 하라는 것이지요. 즉,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편에 서는 판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선택으로 인해서, 악한 사람들과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선택하면 평화가 아닌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 편에 서서 어떤 판단을 하려고 하나요?
인간은 현재의 중요성을 모른다. 막연하게 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하거나 헛된 과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괴테)
악플로 성공한 사람
2005년에 데뷔한 2인조 남성 밴드 노라조를 아는가. 조빈과 이혁으로 구성된 이 팀은 뛰어난 가창력에도 불구하고 양다리를 들썩이는 우스꽝스러운 안무와 원색의 의상, 삼각 김밥을 연상시키는 머리 모양 탓에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계속되는 대중의 뭇매에 이들이 생존법으로 택한 것은 바로 유머였다. 먼저 인터넷에 수없이 달린 악성 댓글 중 대표적인 것들을 몇 개 추린 뒤 재미있는 답변을 단 동영상을 제작해 올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립싱크할 거면 때려치워!”
“네, 저희끼리도 입을 못 맞춰 립싱크를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느끼하다!”
“아침 공복에 들기름 한 잔씩 하는데 그 때문은 아닌지, 담백해지겠습니다.”
“한심하다.”
“맞습니다! 저희 가문에서도 저희를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십시오.”
“표절한 거 아니야?”
“저희도 들으면 들을수록 헷갈리고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 같습니다. 그러나 표절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노력, 또 노력하겠습니다.”
노라조의 이런 ‘창의적’인 답변은 수만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네티즌의 환호를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노라조의 팬이 되었다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뒤집어 성공의 디딤돌로 삼은 노라조. 이들이 보인 무한 긍정 파워야말로 히말라야 토끼보다 잡기 어렵다는 대한민국 네티즌을 움직이게 한 힘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신앙
신한열 수사님
오랜 유교 전통을 간직한 경상도 양반 집안의 며느리인 어머니가 세례 받으신 지 3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다. 누나가 수녀원에 가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딸이 그 길을 가는데 내가 어떻게 더 이상 교회 밖에 머물 수 있겠느냐.” 는 말씀과 함께. 지극히 현실적이고 비종교적이셨던 아버지가 스스로 입교를 결심하신 것은 지금도 나에게 놀랍게 느껴진다.
명절날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정치와 종교 얘기는 피하라고들 한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언제부터인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또 하나의 분열 요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신앙을 가지면 당연히 불신자와 반목하게 된다.’ 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면 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갈라지고 반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라 진정 복음을 살고 헌신하는 사람은 반대와 오해와 불신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두루뭉술, 좋은 게 좋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신앙인, 현실에 그냥 동조하는 타협주의자들을 향한 경고다.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으러 오신 예수님은 그것이 이미 활활 타오르기를 바라시고 그렇게 되기까지 고통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당신이 주시는 평화와 일치는 십자가와 죽음을 거쳐 완성될 것이다. 분열과 오해는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인이 때때로 주위에서 겪는 현실이다. 이웃을 비난하거나 탓하기보다 일치와 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리라.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입교하신 어머니는 세례 받고 얼마 뒤에 아버지의 이해 부족으로 한동안 교회에 다니지 못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에게 엄청난 슬픔과 고통이었다) 가정의 평화를 우선하고 문중 대소사를 외면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 다시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신앙을 가정불화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사랑과 인내로 이겨내셨다. 덕분에 나중에 태어난 나는 신앙이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거룩한 분열, 맞불을 질러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평화의 주님께서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 저를 당황하게 합니다.
저는 종교가 달라 남편과 시집과 갈등을 겪는 자매들에게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종교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리고 성당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면 신앙을 간직하되 사랑의 순종으로 성당에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저의 충고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불의한 평화는 당신의 평화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야합적인 일치는 당신의 일치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스러운 관대함은 당신의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경우 오히려 정의로운 분열, 거룩한 분열, 참 사랑의 분열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에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그렇다면 반대하는 경우 성당에 가지 말라는 충고는 무엇입니까?
반대와 분열이 두려워 나의 신앙이나 무엇을 접는 것이라면 저는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에 대한 반대로 맞불을 질러야 합니다.
불의에 대한 정의의 불을 질러야 합니다.
억압에 대한 자유의 불을 질러야 합니다.
독재에 대한 민주의 불을 질러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불의보다 정의를 더 사랑하고 정의보다 평화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불의에 대한 반대도, 정의와 평화의 실현도 사랑 안에서 열매 맺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성당에 가지 말라 함은 사랑의 승리를 위한 전술적인 후퇴이고 양보를 하라는 것입니다.
불의에 굴복하고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가 승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져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남편과 맞서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시부모의 뜻을 거슬러야 합니다.
야합적 일치와 평화보다는 정의롭고 거룩한 분열이 낫습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서 제가 첫 번째로 추천서를 써 주어 지금 수련중인 예비 수녀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 자매는 제가 보좌 신부로 있던 성당에서 교리교사를 하던 자매였습니다. 매주 다른 교사들보다 일찍 나오고 모든 일에 열심이었고 기도와 교육에 참여하는 것도 남달랐습니다. 저는 ‘저렇게 신앙심이 깊은 것을 보니, 수녀원에 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말도 해 보았는데, 사실 놀랍게도 그 자매는 세례를 받은 것이 일 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수녀원에 들어가려면 세례 받은 지 삼년은 지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직장을 다니면서 계속 성소 모임에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다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기에 본당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있으면서 수도회에 추천서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첫 딸이 된 셈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 자매에게 불을 놓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타오르다 말 줄 알았더니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성령의 불을 놓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신 성령의 불은 당신의 수난공로의 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바로 예수님 심장에서 나오는 사랑의 불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놓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셔야 하는지를 미리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께서 짓눌려져서 당신 안에 있는 사랑의 불을 세상에 쏟아 부으셨지만 사실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키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위의 자매가 갑자기 성당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당연히 비신자들입니다. 성당 다니자마자 교사를 한다고 해서 거의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이젠 수녀가 된다고 하니 가족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형제 중에 반대를 하지 않는 형제도 있었지만 부모님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그 결정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딸을 보려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매도 아버지에게 그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집에서 쫓겨날 각오도 하였었습니다. 다행이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가정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분열일까요? 또 평화가 다 좋은 것일까요?
그 자매 가정엔 분열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엔 평화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도 거부했다면 가정엔 평화가 있었겠지만 그 사람 마음엔 평생 주님의 뜻을 어겼다는 생각에 분열이 있었을 것입니다.
평화와 일치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귀 두목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유다 지도자들이 모함을 하자, 한 나라도 서로 갈라져 싸우면 망하게 되는 법이라고 하면서 마귀들도 서로 단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들이 하느님을 미워하고 인간들을 미워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고 한 마음으로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는 것이 참다운 일치이고 평화일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분열은 외적인 것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가족들도 모두 주님께로 오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경우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을 아버지께 제일 마지막에 말씀드렸습니다. 화를 내시고 반대하실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안 이상 육적인 부모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맞서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불타고 있다면 가정의 분열은 큰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지금은 아버지께서도 제가 사제가 된 것을 기뻐하시고 성당에 열심히 다니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필요도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분열을 이길 힘도 얻게 되는 것인데 자칫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님에게 성당에 다니시는 것을 남편이 매우 싫어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참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도 그리 강한 믿음을 지니시지는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은 남편과 갈라지면 안 되니까 미사를 나오지 못하더라도 잠시 동안은 남편의 뜻에 따라주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에 남편의 모든 박해를 참아 받을 수 있을 만큼 성령의 불이 타오른다면 그 때는 마음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뜻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 처음엔 힘이 듭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이들을 당신 안에서 일치시키려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당분간 힘든 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진통과 피를 흘려야합니다. 고통 없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영혼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진통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진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그 진통 뒤에는 그 진통을 충분히 잊고도 남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기쁨이 온다는 것을 믿는 굳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도 물론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확고한 믿음만 있다면 더 이상 신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교도 두렵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가정 안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혹 믿음 때문에 가정이 분열 됩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는 더 큰 일치를 위한 진통입니다. 나의 고통을 통해 온 가족이 주님 안에서 일치하면 그 이전의 고통은 기쁨으로 남을 것입니다.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예비자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 신자가 되려는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여러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서 불안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완벽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 그 사이 선택의 기로에서 늘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때로 편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양심을 따르고 정도(正道)를 걸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려다보면 왠지 손해보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벌써 주말마다 갈등 상황 앞에 놓이게 됩니다. 남들은 단풍놀이다 가을낚시다 아무런 부담 없이 신이 나서 떠나는데, 신자가 된 후로 꼭 주일미사가 마음에 걸립니다. 남들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잘도 승진하고 잘도 임용되는데, FM대로 살려다보니 평생 말단이요, 응시하는 족족 낙방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 하소연까지 하십니다.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하소연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신자가 됨으로 인해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손해본다는 느낌"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은 어떤 말입니다. "먼저 용서하라", "네가 좀 참아라", "크게 양보하라",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가 희생해야 한다" 등등 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라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우리가 얻게되는 기쁨이나 행복도 큰 것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스트레스 역시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 진정한 회개, 하느님과의 합일, 부활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체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여정은 고되고 험난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삶으로 인해 우리가 누렸던 기쁨은 얼마나 충만한 것이었습니까?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알게됨으로 인한 우리의 행복은 또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십자가 역시 기꺼이 져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함으로 인한 슬픔이나 고통 역시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이기에 기꺼이 수용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 마음 안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을 태워버리는 불, 극단적인 이기심을 살라버리는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삼라만상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려는 열정의 불, 세상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강한 의지의 불을 지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그 예수님의 불이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불사르리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불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듭니다.
재는 죽음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죽음입니다.
죽음만이 보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당장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선뜻 불을 지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십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거짓과 어둠을 살라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가리워진 증오와 상처를 드러내 아물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죽음을 기쁘게 맞아들이며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섬김과 나눔, 정의와 평화와 진리 가득한 하느님 나라를 일구기 위해 억압과 착취, 탐욕과 위선으로 물든 세상을 사그리 태우는 예수님의 불쏘시개가 되렵니다.
잘라 없애버리기 위한 분열이 아니라 진정으로 보듬어 안기 위한 갈라섬이기에 예수님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세상을 가르렵니다.
썩은 것을 묻어버리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는 참 평화를 갈망하기에 썩은 것을 들춰내는 예수님의 평화의 사도가 되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사랑의 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커다란 방의 어둠도 작은 등불 하나가 환히 밝힙니다. 불빛이 아닌 그 무엇도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이런 등불이 사라지면 방은 다시 캄캄해집니다.
역시 불이 피워내는 열이 아닌 그 무엇도 방안을 따뜻하게 할 수 없습니다.
불이 꺼지면 방은 냉방이 됩니다. 불이 아닌 그 무엇도 온갖 쓰레기를 말끔히 태울 수가 없습니다. 그냥 쌓여가는 쓰레기에 속수무책입니다.
영적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이 사랑의 불입니다. 마음에 사랑의 불이 꺼지면 곧이어 몸도 마음도 어두워지고 차가워집니다. 사랑의 불이 있어야 밝은 마음이 되고 따뜻한 마음이 됩니다. 냉담자들이 마음과 몸이 어둡고 차가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속 죄악의 쓰레기들을 말끔히 태우는 것도 이 사랑의 불입니다.
영혼을 단련시켜 순수하게 만드는 사랑의 불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과 얼굴은 밝고 따뜻합니까, 혹은 어둡고 차갑습니까?
사랑의 불을 끊임없이 붙여야 합니다. 한 번 사랑의 불이 붙었다고 영원히 타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가 소홀하면 곧 타다 꺼져버립니다.
매일 미사나 성무일도의 수행이 이래서 좋습니다. 이런 전례기도를 통해 매일 끊임없이 사랑의 하느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붙여주시기 때?都求?
샛길로 간 동무들
노미화
몇 해 전 존경하던 선생님의 병환이 깊어지자 가까운 제자들이 모여 그분이 사시는 시골집 옆에 사무실을 하나 냈다. 거동이 힘드신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담아듣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정말 온몸으로 일하는 그들이 나는 더 놀라웠다. 매달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대여섯 시간씩 걸리는 곳까지 와서 밤새워 편집회의를 하고 문장 하나 토씨 하나라도 틀릴세라 조심하며 회지를 만들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 한 스승을 모신 제자들의 그 진한 애정에 나는 감탄하면서 5년을 함께했다.
한데 선생님이 돌아가실 무렵이 되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우린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했지만 장례식 때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형제처럼 여겼던 그들이 이상한 글을 인터넷에 올려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다. 5년 전에 무슨 일로 사무실을 옮겼네, 어찌어찌해서 선생님을 돌아가시게 만들었네 하면서 5년 동안 먼 길 마다 않고 선생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매도하여 샛길로 가는 무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슬픔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판에 이런 공격을 어찌 감당할까? 우리는 모든 걸 놓아두고 조용히 떠났다. 우리는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는데`…. 차마 선생님 영전에서 싸울 수 없어서 조용히 떠난 것이 밖에서 보면 분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 두 달 동안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린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이들도 저마다 아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동무들 맘에도 평화가 찾아들고 있다. 평화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부활의 기쁨을 얻기 전에 예수께서는 온갖 비난을 한몸에 받으며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의 길을 걸으셔야 했다.
눈물의 힘일까?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 나약하기 짝이 없던 내 안에 무엇이든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
이경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으며,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인 하느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의 반대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우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질러야 하며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가장 가까운 가족의 반대까지도 극복해야 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 꿈에도 그리는 그 영원한 행복이란 바로 부활의 생명이다. 그런데 그 부활의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통과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부활의 생명의 씨앗을 받는다. 그 생명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이기심에서 죽고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삶은 한마디로 십자가다. 이기심에 죽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삶이기에 매일 겪는 죽음과 부활의 체험인 것이다.
주님은 이 부활의 생명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과하도록 마련하셨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하고 공포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의 힘 앞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은 무너진다. 그때야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정신을 차린다. 지금까지 쌓아온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기 시작한다. 그때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믿기 시작하며 주님은 죽음 안에서 사랑의 폭발을 일으키시어 우리의 모든 죄와 잘못을 정화하고 부활을 완성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 모든 것은 자비로우신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다!
돛대에 나를 묶고서
최영균 신부님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오랜 방랑 끝에 가정과 왕국을 되찾습니다. 전쟁과 신들의 재앙과 여러 가지 험난한 여정을 지치지 않고 지략과 용기로 정면 대결합니다. 특히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선원들의 귓구멍을 밀랍으로 막아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위험을 벗어났으나, 그 자신이 혹시나 유혹에 빠져 배를 엉뚱하게 몰지 못하도록 자기의 몸을 돛대에 묶게 하고서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영원한 구원과 평화를 상징하는 고향으로의 귀환을 위해서 그는 스스로 수인(囚人)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무질서와 어둠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바로 질서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서 온 것이라니 정말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얻고자 하는 것은 구원과 행복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추구하는 것뿐입니다. 오히려 삶의 온갖 유혹과 위험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결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 문학작품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처럼, 평화가 아닌 죄와 불의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지 않고, 이 어둔 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북돋아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손태성 신부님
사람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안정과 평화는 좋은 것입니다. 대체로 인간은 그 삶의 목표가 안정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노력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습니까? 편하고 안정된 삶을 한번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왜 예수님은 안정과 평화를 깨고 불을 지르며 분열을 일으키고 가족들을 갈기갈기 갈라놓는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물론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를 원하시며 그 평화를 우리가 누리길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와 안정을 깨고 분열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안정이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트리는 것을 우리는 매우 싫어합니다. 평화란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분열과 대립이 서로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평화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대체로 평화롭고 안정되기 위해 진리를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안정되면 남에 관한 일들이 귀찮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노동사목을 하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약하고 억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집회를 하면 시민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불편하다고 욕부터 합니다. 그들이 처한 문제가 해결되어야 나도 좋아진다는 것을 모릅니다. 남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임을 모르는 것이지요. 도로가 잠시 막혀 차가 밀리는 것보다 그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구체적으로 한쪽으로 편드는 일을 안정된 사람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남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겠지만 정작 남의 일이라면 좀처럼 나서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이해하는 것보다 안정된 삶이 더 우선적인 가치로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분열을 말씀하셨을까요? 아마도 우리의 그런 태도를 질타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안정이란 것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이 잘못된 탓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분열을 원하시는데 우리는 안정을 원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만 스승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우리가 묵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참된 안정이 아니라면 분열되어야 마땅하고 불타서 없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내가 만든 안정된 세상, 내가 만든 안정된 사고방식, 내가 만든 안정된 공간 그것들이 예수의 제자직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들이 걸림돌이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갈라놓아야 하고 불태워 없애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과격한 표현은 그만큼 우리 안에서 과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약한 본성으로 인해 좀처럼 과격할 줄 모르는 나를 향해 예수님은 불같은 말씀을 오늘 던져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결단
이기양 신부님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1)
세상에 불은 지르러 오셨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로 느껴지고 낯설기조차 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당신께서 오신 이제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예견하십니다.
가족 간의 유대를 바라고 평화를 원하며, 갈라져서 다투기보다는 화합하여 잘 살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이며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되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평화를 원하고 화합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와는 많이 다르지요. 참 평화를 위해서는 분열을 각오해야하고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다툼은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뇌물을 받고 문제를 일으킨 공무원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가 세계 40위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살아가는 정도에 비해서 부패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관행처럼 굳어진 우리 사회의 부패 고리를 안타깝게 이야기합니다. 교묘히 뇌물을 요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서 인허가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 몇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런 안타까운 모습들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왜 자꾸 문제거리를 들추어내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느냐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말하며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슬그머니 넘어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부패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 모두가 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은 시끄럽고 불편해도 부패와 부정의 고리는 들춰내어 끊어야 합니다. 끊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큰 비극이 만들어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이런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갈라지고 딸과 어머니가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때에야 참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가장의 직업이 “도둑”인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수많은 도둑이 활개치고 다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그런 가정도 많을 것입니다. 그 가정의 어머니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대충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른 척하고 있으면 그 집안은 불화와 갈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큰 소리를 내며 싸우더라도 가장이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것, 잠깐의 불화를 겪더라도 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 가라는 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꿈꾸고 화합을 원하며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불의와 부정이 가득한 사회 구조에서는 결코 이룰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이 사회 구조를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구조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얻기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서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세상에 가 있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서 조금 더 빨리 진급하기 위해서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평화가 존재하겠습니까? 아마도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릴 것입니다. 누군가 뇌물 수수로 적발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는 우리 언행도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생각 없이 한 말 한마디로 남의 가슴에 상처를 내놓고 본인은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지요.
참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며 바르게 행동하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평화는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기도하면서 평화를 줄 수 없는 것들, 돈이나 건강이나 세상의 명예 따위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결코 평화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부쩍 “웰빙”을 얘기하면서 운동을 하고 외모를 가꾸면서 오히려 끊임없이 건강을 걱정하는 건강 염려증에 시달립니다. 변하는 곳에서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주름살이 생기고 신체는 위축이 되기 마련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옛날 수도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비유 중에 “마음의 문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선하고 정의로우며 선한 생각이고 남을 위한 생각이라면 스스로 받아들이고, 반대로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비판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라면 마음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나 스스로가 먼저 닫아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면서 살수 있기 때문이지요. 정말 참 평화를 원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지, 주변 환경은 어떠한지 등을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바르게 생각하지도, 바르게 말하지도, 바르게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참 평화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오로지 세상과 육신에만 관심이 있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평화를 얻을 수는 없지요.
우리 시대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안타깝게도 너무나 어리석기만 합니다. 평화를 줄 수 없는 곳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나 육신, 세상의 성공들은 우리에게 결코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불안과 갈증만을 줄뿐입니다. 참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들 안에서, 또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은총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바르게 말하면서 바른 곳에 관심을 가질 때 참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불의 정화, 분열, 하느님의 사람
이성우
50절은 십자가상에서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피하고 싶은 고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예수님의 고뇌가 엿보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정을 거치며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씨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불은 처음에는 뜨겁고 아프고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금이 불에 단련되어야 금으로 완성되듯이, 인간 역시 하느님 사랑의 불씨가 들어와 정화과정을 거쳐야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람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것이 ‘분열’이고 ‘맞섬’이고 ‘갈라짐’입니다(12,52).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고통을 통해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고, 갈증을 통해 물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힘든 정화과정 중에 있다면, 나 자신에게 말해주십시오.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정화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토록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훌륭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아픔을 거듭 거치고 나서 생기는 진주와도 같습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최명숙 목사
바람은 그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나무를 둥치째 쓰러뜨리는가 하면 집을 무너뜨리고, 해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에게 나는 바람을 비유로 들어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부서지는 신비를 이야기해 줍니다.
이러한 바람처럼 불 역시 눈에 잡히는 실체가 없으면서도 놀라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모든 것이 타버리고 변화됩니다. 음식물은 삶아지고 구워지면서 먹을 수 있게 되고, 어둠을 몰아내 사물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오신 성령은 불처럼 임함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사르고, 용기와 확신과 담력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연약하기만 한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달라진 가치관·인생관·인간관·생사관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 세계를 보게 하고, 생각과 행동이 확연히 달라지게 합니다. 기쁨의 이유와 생의 목적이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과 염려, 불만과 원망, 시기, 미움이 사라졌습니까? 사랑과 확신과 소망과 능력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보지 못하던 영적 세계를 보고 있습니까? 그 신비로운 세계를 지금 살고 있습니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님 앞에 깨갱>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출만 했다하면 빈집이나 가게, 차 등에 불을 지르던 아이가 기억납니다. ‘방화범’인 경우 피해의 심각성이 크기 때문에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여성청소년계’가 아니라 ‘강력계’에서 수사를 담당하지요. 수사도 엄중합니다.
상습적으로 불을 지르는 아이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아이 내면에는 그냥 있으면 미칠 것 같은 주체하지 못할 에너지로 가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에너지는 굉장히 부정적인 에너지, 무척이도 파괴적인 에너지, 그래서 정말 위험한 에너지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온 상처와 소외에 대한 반발, 사회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방화로 발산된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내면도 조금 더 참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력한 에너지로 충만해있습니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표현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에 가득 찬 에너지는 철저하게도 생산적인 에너지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는 세상을 파괴하는 에너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에너지가 아니라 다분히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녕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 사랑, 사랑이 아닌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참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불신과 냉랭함, 상호비방과 다툼만이 활개를 치는 이 세상에 연민의 눈물, 그 소중함을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폭력과 분열, 전쟁과 무고한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참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난데없이 “예수님으로 인해 식구들이 분열될 것이라”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까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제대로 된 사랑을 주시는 분, 평생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참 평화 그 자체이신 분, 그간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따뜻한 위로를 베푸시는 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이제 다른 모든 것들은 한 마디로 ‘깨갱’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세상만물은 새로운 질서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시어머니...등등의 존재가 이제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이 아닙니다. 멀쩡한 그들을 갑자기 원수 보듯 대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우리 삶의 제1순위로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대상도 예수님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말입니다.
열정
서인덕 신부님
저의 집은 제가 중학교 때까지 아궁이에 연탄을 피워 방을 데웠습니다.
뜨끈한 아랫목은 참으로 좋았지만 자다 일어나 불구멍을 막아야 했고, 연탄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번거로움은 연탄이 저의 가족에게 주는 따뜻함과 훈훈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예수님께서 무슨 불을 어디에 지르실까 묵상해봅니다. 왜 불을 지르실까?
지금 제 안에 있는 열정에 대한 물음이라고 묵상해봅니다. 제가 가졌던 첫 마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제 안에 있는 열정이 뜨거운지 식었는지 돌아볼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나의 들숨과 날숨으로 드나드시는 성령께 이 시간 청해봅니다. ‘나의 들숨으로 들어오셔서 저의 열정을 다시 불태워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날숨으로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을 빼내어주십시오.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첫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순수하고, 뜨거웠던 첫 발걸음을 떠올려봅니다. 다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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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전체가 정말로 바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모든 분야에서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름길 찾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아요. 매체들의 광고들을 조금만 유심히 보십시오. 일주일에 20킬로그램 감량을 보장한다는 기적의 다이어트 약품, 지금 당장 놀라운 효과를 낸다고 말하는 가전제품, 주말이 지나기 전에 꿈에 그리던 이상향을 만나 결혼에 골인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결혼 정보 업체, 얼마 안가서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 같은 금융상품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며칠 내에 이룰 수 있게 해주겠다는 광고들을 얼마나 쉽게 접할 수 있습니까? 또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전 세계의 위기가 단 몇 분 혹은 몇 시간 만에 해결되면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모두가 지름길 찾기에 점점 중독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 지름길만 찾으면 편하고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요. 그러나 그 지름길이란 정말로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말했던 명언이 문득 떠올려집니다.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에는 지름길 같은 것은 없다.”
하루아침에 성공을 한 것 같은 사람들, 이 사람들은 지름길을 발견하고 편한 삶을 누리는 것 같지만 이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이란 없었습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힘들고 어렵던 과정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하루아침에 성공을 이룬 것처럼 앞 다투어 말하지요.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성공이 아닌, 하루아침에 발견한 성공이 아닐까요? 즉, 오래전부터 그 성공에 걸맞은 수준으로 노력을 했기에 소위 성공이라는 가치를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성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때, 지금 이 순간에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앞서도 말씀드린 지름길만을 찾는 사람들, 편한 길만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태반인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꾸준히 늘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반발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해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세상 사람들의 모습처럼 편한 지름길만 찾다보면 불의와 타협해야만 합니다. 그러다보면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타협하는 불의와 반대의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과는 평화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과의 분리를 가져오겠지요.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에는 지름길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꾸준히 지금 이 순간을 그리고 지금 이 자리를 주님의 뜻에 맞게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큰 소리 내어 읽어 봅시다.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에는 지름길 같은 것은 없다.”
‘NO’를 사랑하라(보 피버디, ‘아주 단순한 성공 법칙’ 중에서)
내가 ‘노(NO)’라는 단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때는 대학 입학 원서를 낼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윌리엄스 대학에 지원했다. 얼마 뒤 대학 측으로부터 우편물이 도착했다. 그 안에는 합격 통지가 아닌 좋은 글귀들이 적혀 있었는데,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노’였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계획을 세워야 했다. 대담하고, 직접적이며,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우선 코넬리우스 레이포드라는 이름을 가진 입학 심사 담당자의 연락처를 알아낸 뒤 전화를 걸었다.
“제 이름은 보 피버디입니다. 저는 귀 대학의 입학 거부를 거부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외람된 말씀이지만, 입학 심사 위원회에서 실수를 하신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과 함께 그 실수를 바로잡고 싶습니다. 저는 윌리엄스 대학에 꼭 입학할 겁니다. 내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요. 윌리엄스 대학에서 받아줄 때까지 매년 입학원서를 낼 작정입니다.”
나는 코넬리우스가 나를 도와주거나 경찰서에 장난 전화 신고를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대답했다.
“이런 전화는 처음인 것 같군요. 자,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코넬리우스는 기꺼이 나의 조언자이자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그와 함께 나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연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윌리엄스 대학에 재도전했고 특차로 합격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거부 의사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성공의 문은 결코 한두 번의 노크로 열리지 않ㅅ는다. 상대방이 ‘노’라고 얘기했을 때 기회의 문을 닫아 버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노’라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노’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바로 상대방의 마음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승리가 눈앞에 온 순간,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때가 바로 ‘예스(Yes)’를 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내 마음에 타올랐던 불길
김인옥 수녀님
수도 성소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입회를 준비하던 시절, 신자가 아닌 가족의 반대에 부딪힌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언니와 나만 성당을 다니던 때였다. 온 가족은 나를 회두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반대는 가장 크고 강력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직장으로 찾아온 둘째 오빠는 “네가 나를 설득하면 어머니는 내가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나를 꼬마라고 불렀던 둘째 오빠는 나에게 설득당하지 않을 마음 자세가 확고(?)했다. 아니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너 하나만 마음을 제대로 잡으면 우리 가족이 모두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뜻을 굽히지 않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결국 앓아누우시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웃음을 잃었다. 내 마음에 타오르는 불길이 가족에겐 빛이 되지 못했다. 그 당시 누구의 반대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언니의 반대였다. 식구들 중 유일하게 가톨릭 신앙을 가졌던 언니는 나에게 “네가 수녀원에 가면 그날로 나는 냉담할 거다.” 하고 말했다.
이웃에게 전교도 못하고 있는 마당에 신자인 언니마저 냉담자로 만들면서 내가 가고자 하는 이 길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가족의 마음에 이렇게 큰 고통을 안겨주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 꼭 이 길뿐이란 말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처럼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한번은 “내가 죽고 나서 가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다.”라고 하시던 연로하신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 순교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는 내가 수녀원에 입회한 후 그 어려운 기도문을 하나하나 외우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으셨고, 냉담하겠다던 언니는 구역장에 복사단 자모회장까지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 마음에 타올랐던 불길이 가족한테도 불길이 되어 번져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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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 아세요? 잘하는 사람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속담이지요. 제가 그저께 이 속담에 해당하는 모습을 갖추었답니다. 그저께는 어제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말씀드렸듯이, 졸업연주회를 다녀왔지요. 그런데 조금 일찍 가서 그 주위를 자전거로 돌면서 구경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자전거를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리고 제 동창신부와 함께 그 대학교 주위를 자전거로 돌면서 구경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도 세게 넘어졌는지 글쎄 제가 입은 셔츠의 앞단추 3개가 투두둑 떨어지더군요. 떨어진 앞단추를 주워들고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곧바로 음악연주회에 들어가야 하는데, 앞단추가 떨어진 불량한 차림으로 입장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곧바로 가게에 가서 반짇고리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동창신부에게 근처의 커피숍에 가서 단추를 달겠다고 말했지요. 동창신부는 제게 묻더군요.
“창피하지 않을까?”
저는 이 말에 곧바로 응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다시 올 것도 아닌데 뭐가 창피해?”
한번 상상해 보세요. 대학교 앞이라 얼마나 사람이 많습니까? 더군다나 그곳은 여대이기 때문에,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특히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옷을 벗고서 커피숍에 앉아 바느질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로 부끄럽고 창피해야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어요. 왜 그럴까요? 빨리 단추를 달아야 음악발표회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창피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들을 떠올리면서 문득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창피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 체면이 깎인다는 생각 때문에, 남의 시선에 신경을 더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내 체면도 남의 시선도 아닌, 바로 주님의 시선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 그러한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 되게 하소서.’라면서 기도하셨던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성경 속의 모습들을 묵상하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남들의 이목과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불의와 타협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생활을 하셨기에 불의의 반대편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편에 서고 있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임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불의와 타협하면서 그들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편에만 설 것을 다짐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맙시다.
닫힌 문을 열어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중국의 화웨이 사는 십여 년 동안 2가지의 신기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첫째는 회사의 영업부서에 영업부장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비밀의 사무실에 관한 것이었다. 런정페이 회장은 회사 직원들에게 8층에 있는 ‘비밀의 방’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규칙을 사규에 넣었다. 회사가 문을 연 이래, 많은 직원들이 그 방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지만 문제의 그 방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신입 사원들이 들어왔고, 런정페이 회장은 이와 같은 사규를 다시 한 번 말했다. 신입 사원 중에 왕스라는 청년이 호기심에 못 이겨, 그 잠겨 있지는 않지만 닫혀 있는 8층 ‘비밀의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중앙에 탁자 하나와 그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종이에는 ‘런정페이 회장에게 가서 이 종이를 보여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스는 종이를 가지고 회장을 찾아갔다. 이 종이를 본 회장은 아주 기뻐하면서 말했다.
“내가 몇십 년을 기다렸는지 아나? 이제야 용감하게 금지 구역을 들어간 사람이 나타났군. 오늘 부로 자네를 영업부 부장으로 임명하겠네.”
런정페이 회장은 전 직원 회의 때, 왕스의 이야기를 했다.
“왕스는 호기심과 용기 모두를 갖췄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다이아몬드를 찾아낼 것이고, 인생의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할 것입니다.”
몇 년 후에 왕스는 런정페이 회장의 격려 덕분이었는지 정말로 오늘날 중국 최대의 부동산 회사 완커를 차렸고, 중국의 100대 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구원의 불길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49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불이라고 하는 것은 빛과 열을 통하여 지금의 상태를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불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내 편의, 내 고집, 그리고 모든 것을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단지 내가 그 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 불이 되어, 그 말씀이 떨어지는 곳마다 그로 인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구원을 향한 불길이 붙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불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몰라도 오신 이상 그분의 말씀은 사람들 마음속에 떨어져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 들이느냐 하는 선택의 가부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자기 나름대로 살아 온 상태를 그대로 갖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변화시키고 마는 불 속에 잠겨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갈등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불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을 위한 선택의 갈림길에 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최선을 선택하기 위해서 차선을 끊어버린다는 것을 다시 이해할 수 있다. 그 차선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끊임없는 싸움이 있게되고 이 싸움에서 이겨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이라고 하였다. 아마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불로 표현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온 세상을 태우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불이 더 크게 타오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전교주일을 지내며 생각해 보았 듯이 하느님을 확신시키는 것이 전교라고 하였다면, 오늘 복음의 불을 훨훨 타오르게 하는 것이 바로 전교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이 세상에 하느님을, 하느님의 사랑을 확산시키는 그것이다. 하느님을 먼저 나 자신 안에 현존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의 불을 태워 죄와 허물을 살라버리고 하느님 말씀으로 빛과 열을 내는 믿음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각자를 보시며 네 마음의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시고 계시다. 우리의 마음 안의 갈등을 모두 이겨내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지고 가는 나 자신이라고 하는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가능하다. 언제나 나를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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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업사원이 저녁 무렵에 한 기업의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사장은 허락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퇴짜를 놓은 사람이 열 명이나 되거든요.”
그러자 그 영업사원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열 명이 모두 저였으니까요.”
만약 이 영업사원이 한 번의 거절로 인해서 쉽게 포기를 했다면 어떨까요? 아니 두세 번의 거절로 인해서 이 회사에서는 도저히 팔 수 없다고 단정을 지었다면 어떠했을까요?
한 번 더 노력하는 모습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쉽게 포기하는 것은 물론, 도저히 될 수 없다고 단정을 지을 때도 너무나 많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은 별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것도 꽤 많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복권에 당첨되어 생각하지도 않았던 돈이 생길 때, 별로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을 때, 거의 포기하면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더 좋은 성과를 얻었을 때……
바로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많아서 그럴까요? 우리들은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곳에서 쉽게 포기하면서 좌절합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난 운이 정말 없어.”
노력 없이 얻는 것은 그만큼 쉽게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것은 물론, 그 노력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는 법인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불을 지르고 싶으셨을까요? 그 불은 바로 사랑의 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만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성당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이 사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들 모습이 다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즉, 성당에서는 아주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사회에서는 다른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불을 이 세상에 지르러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똑 같은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우직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그 모습이 다른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기 때문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이 이 세상에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나를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한 번 더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성당에서나 이 사회 안에서나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혹시 똑같이 나쁜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니겠죠?
마음 하나 등불 하나 ('좋은글' 중에서)
우리들의 마음에,하나씩
등불을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욕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여
마음이,영혼이 어두워집니다.
사랑의 등불 용서의 등불
화해의 등불
이해와 포용의 등불
베풀 수 있는 여유의 등불까지....
우리들의 마음에
모두 하나씩
밝고 고운 등불을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그 등불 숨기지 말고
머리 위에 높이 들어
주변을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그 불빛 주변을 밝혀
남들에게 밝음을 줄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어두움을 몰아내어
행복의 불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강영구 신부님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왔다.
그대에게
오늘 아침에는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것 끼리 모여서 편을 가르는 것을 말합니다.
편을 가르는 이유는 세(勢)를 불려 힘자랑을 하거나 이득을 얻기 위함이지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편을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李)씨, 김(金)씨, 박(朴)씨, 강(姜)씨 따위로 성씨나 혈연(血緣)을 기준으로, 혹은 영남(嶺南), 호남(湖南), 수도권, 남한, 북한 따위로 출신 지방이나 지연(地緣)을 기준으로, 서울대, 고대, 연대, 경북대 따위로 출신 학교나 학연(學緣)을 기준으로 편을 가릅니다. 종교나 종파를 기준으로 편을 가르기도 합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 따위로 편을 가릅니다. 혹은 이념과 사상을 기준을 편을 가르기도 하는데 요즘 한국 정치판이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편을 가르면 싸우고 다툴 일만 생깁니다.
예수님도 편을 가르려 오셨습니다. 애증(愛憎), 선악(善惡), 명암(明暗), 미추(美醜), 진위(眞僞)가 뒤섞인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혈연, 지연, 학연, 종교나 종파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민족과 혈통, 신분과 지위, 자신의 종교 따위를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 앞에 회색(灰色)지대는 없습니다. 천사(天使)라 할지라도 악(惡)의 편에 서면 지옥으로 내쫓기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한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되는 이유는 종교나 종파 때문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랑과 증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와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편에 설 것인지 세상의 편에 설 것인지, 선의 편에 설 것인지 악의 편에 설 것인지, 사랑하며 살 것인지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 것인지 결단을 요구합니다. 결단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도 결정됩니다.(一明)
태우지 않는 불꽃처럼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십계’(十戒, The Ten Commandments)라는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십계’는 구약성서 출애굽기 전반부(1-20장)의 내용을 소재로 삼아 1956년 세실 감독과 율 브리너와 찰튼 헤스턴 출연으로 제작된 불후의 명작이다. 필자는 중학교를 다니던 1973년쯤에 단체관람으로 이 영화를 보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십계’를 생각하면 스릴 만점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 중에서 오늘 복음의 주제가 될만한 ‘불’과 관련된 장면은 ‘불타는 가시덤불’(3,2), ‘구름기둥과 불기둥’(13,22), 그리고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불 속으로 내려오신 야훼’(19,18) 등의 모습이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던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게 된다. 그 때 하느님 야훼의 말씀이 불덩이가 되어 암벽에다 계명을 하나씩 새기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불덩이가 나의 가슴속에 계명을 하나씩 새기는 것과도 같아 온 몸이 섬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불’은 구약과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하느님의 현존과 세상의 심판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49절)라고 하심은 정의로운 하느님에 의한 세상 심판이 임박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고 계시며,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이미 보고 계신다. 어쩌면 그 날과 그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의 불이 타오르기 전에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셔야 한다. 예수님의 세례(洗禮)는 수난과 고통의 바다에 침례(浸禮)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과 세례는 심판과 속죄, 정화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불과 예수님의 세례, 하느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속죄, 그리고 하느님의 정화와 예수님의 구원의 시간이 다가와 눈앞에 펼쳐진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젠 결단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떠한가? 마치 한 가정의 식구들이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반대하여 갈라져 있듯이, 예수님을 두고 세상은 온통 갈등과 혼란에 빠져 있다. 허나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그분을 반대하여 등을 돌릴 것인지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림이나 무관심이나 중립은 통하지 않는다. 요한도 묵시록에서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하고 말한다.
예수 편에 서기로 결정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예수를 선택한 것은 곧 불과 세례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원하시는 불이 자기 안에 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이 불이 타오르고 있다면 이는 예수님께 기쁨이다. 그렇다고 이 불이 자신을 태워버려서는 안 된다. 이 불은 자신을 태우기 위한 불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출애 3,2)와도 같은 것이다. 자신을 태우지 않고서 남을 위해 불꽃처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불과 예수님의 세례를 향하여 준비와 기다림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다시금 기쁨과 즐거움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성녀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던 분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불에 의해 자신과 세상을 향한 크나큰 열의와 불타는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횃불이 된 이들이다. 이제는 우리가 내심의 불타는 사랑과 열의와 격정으로 인류의 횃불이 되어야 할 차례이다.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 12,49- )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어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지르러 오신 불은 어떤 불인가? 그 불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요, 그 하느님의 나라는 곧 예수님이시고 그 불은 오늘 우리에게는 복음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하셨듯이 죽으셨다.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불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 번져 나가야 한다. 그럼 이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고 하셨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회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느님의 나라에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란 바로 복음이다. 내 안에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오로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필립 3, 6-11)라고 말한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럼 왜 내 안에 이 불이 타오르지 않는가? 그것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한 준비는 회개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한 우리 안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복음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내 안에 이 불이 타오를 수 없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던 바로 그날 "네 고향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1) 이와 똑같이 우리 각자도 저마다가 회개한 그날 마치 아브라함 앞에 약속의 땅을 숨긴 거대한 지평선이 펼쳐졌듯이 그렇게 자기 앞에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우리 역시 약속의 땅을 정찰하던 선조들처럼 성경을 정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유목민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순례자처럼 의미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면 복음의 불이 내 안에서 타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사랑의 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프리카에 호랑이를 기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산에서 주워온 것으로, 새끼일 때부터 집에서 기르다보니 호랑이의 사나운 성질을 찾아볼 수 없고, 마치 고양이처럼 길이 잘 들여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호랑이를 곁에 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자던 중 갑작스런 통증에 잠이 깼는데 눈을 떠보니 호랑이가 자신의 손목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호랑이를 밀치려 했으나, 이미 호랑이는 이전의 호랑이가 아니었습니다. 호랑이는 두 눈에 빨간 불을 켜고 주인을 통째로 삼키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한 손을 호랑이에게 내어준 채로 옆에 있던 총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호랑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결국 호랑이는 죽었습니다.
그는 호랑이가 왜 갑자기 돌변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유를 찾아본 결과 그가 잠든 사이 호랑이는 상처 난 그의 손을 핥다가 흘러나온 피를 맛 보고는 호랑이의 본성을 드러내어 그의 손뿐이 아니라 온몸을 삼키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순간 우리는 얼어있는 것만 같았던 대지 속에서 생명이 여기저기 파릇파릇하게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보이지 않는 저 속에 처음부터 엄청난 생명력이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생명력은 너무도 강력하여 죽어있는 것만 같았던 온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고 꽃으로 장식합니다. 자연은 그 조용히 용솟음치는 내적 에너지를 잡아만 둘 힘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수풀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며 겨울이면 잠시 죽은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여지없이 이전의 모습을 다시 찾습니다. 닭이 독수리가 되겠다고 노력하지도 않고 사과나무가 혹시 자기에게서 배가 열리지 않을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은 그저 강요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신이 받은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본성은 강요해서 드러나는 무엇이 아닙니다. 개는 개의 본성대로 살고 감나무는 감나무의 본성대로 감을 열매로 맺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대로 사는 자연의 힘은 그 얼마나 강력합니다. 세상 어떤 힘도 아침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하느님의 본성대로 살지 못합니다. 혹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더라도 매우 인위적이라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을 우리는 위선이라 부릅니다.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였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나온 행위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무언가를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한 행위이기 때문에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런 척만 한 것입니다. 돌고래를 억지로 춤추게 하고 원숭이를 길들여 억지로 쇼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쇼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짐승 우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반면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그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느님이 자녀이고 그리스도와 한 본성을 소유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오로는 이 구원의 신비를 에페소인들에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인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시게 되면 성령으로 사랑의 에너지를 용솟음치게 하시어 더 이상 미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억지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이고 그 본성이 ‘자연적’으로 용솟음쳐 인간의 힘으로는 그 사랑을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의 에너지가 우리 내적 인간 안에서 용솟음칠 때 우리 안에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그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 안에 뿌리내린 그리스도로부터 용솟음치는 사랑의 힘이 충만하기를 빈다고 말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솟아날 수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품게 된다면 얼마나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온 세상에 사랑의 불씨를 지피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겪으실 고난의 사건 앞에서 괴로워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51) 하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며 타오르길 바라시는 불은 무엇일까요? ‘불’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세상이 겪을 세말 심판을 뜻합니다(12,49).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 괴로워하시며 심판을 언급하시는 것은 간절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회개의 촉구입니다.
우리에게서 타올라야 할 불꽃은 한마디로 사랑이요 사랑의 열정입니다. 나에게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감성과 쾌락, 정치권력과 거대 자본의 힘에 끌려가는 이 사회는 희미한 불빛만이 새어나오는 듯합니다.
국회 입법조사처 분석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12년 기준으로 전체 국민 소득의 44.9%를 상위 10%가 차지하는 전세계에서 최악의 소득 양극화 국가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회원국들 가운데 저출산, 고령화 추세가 가장 심각하고, 노인빈곤율은 49%로 가장 높으며,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지출은 가장 뒤떨어지고, 자살률은 여전히 1위입니다.
또한 국민 스스로 느끼는 건강도도 가장 나쁜 나라로 꼽혔고, 삶의 만족도는 최하위 수준이며, 특히 50대의 사회적 고립감은 가장 위험한 상태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노인자살률 또한 가장 높습니다. 정부신뢰도 또한 최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한국은 최악의 위험사회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실상을 ‘헬조선’ 곧 살기 힘든 지옥같은 세상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러한 시대의 표징을 읽어내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예언자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러한 표지들은 사랑의 결핍이요, 정의의 실종이며 인간 스스로 인간을 도구화하고 핍박함으로써 예수님을 추방해버리는 악과 불의의 표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향한 열정, 사랑의 모닥불을 다시 지펴야겠습니다. 무관심을 태워버리고 애정 어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하느님과 나를 갈라놓는 나의 못된 성향과 이기심을 태워버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억울하게 핍박받고 정의를 위해 싸우다 갇힌 이들을 향한 연대의 정신을 가져야겠습니다. 차별을 없애는 사랑의 다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고, 냉정한 심장을 녹이며, 다른 이들의 한숨소리를 듣는 귀를 열어주고 집단적 이기주의와 구조악에 불의에 맞설 용기를 심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그렇게 모든 것을 태워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애타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의 불을 지펴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온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의 불꽃, 정의의 불꽃, 평화의 불꽃이 피어나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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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형제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우연한 만남에서 첫 눈에 반해버린 여자였습니다. 밝은 미소와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배려에 이 사람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계속해서 구애를 했습니다. 이 자매 역시 이 남자가 싫지 않았습니다. 성실한 모습과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이 남자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상대방의 모습 중에서 싫은 것은 무엇일까요? 싫은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 것이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된 사람 역시 좋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자매의 부모님을 뵙고서는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네 부모님이 좀 이상해. 성격이 특이하셔서 도대체 나하고 맞지가 않네. 나는 당신 부모님을 이제 보지 않을 거야.”
이 자매에게는 사랑한다면서 이 자매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인지를 의심해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와 연관된 것들은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언젠가 그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이유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한 집안이 서로 갈라질 것이라고 하시지요. 가까운 친척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서로 등지라는 말씀일까요? 주님께서 가족과 불화할 것을 명하신 것일까요?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나 되게 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첫째는 하느님 사랑이고 그 다음이 사람 사랑임을 안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습니까? 부모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을 만드신 분을 몰라본다면 부모님께도 제대로 된 공경을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완성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 당신은 용서한다는 것의 행복감을 알게 될 것이다(톨스토이).
위험한 무관심
중국의 한나라가 통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략이 뛰어난 참모를 둔 왕이 적국에 쳐들어가려고 첩자를 적국으로 보내서 동정을 살피게 했습니다.
첩자가 돌아와서 “지금이 적을 치기에 적기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의 원성이 보통 높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참모는 “아닙니다. 아직 3개월은 기다려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기다리라고 조언했습니다.
3개월이 지나자 다시 왕은 첩자를 보내 그 나라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첩자가 돌아와 “이젠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떠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참모는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3개월만 더 기다려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다시 3개월이 지나자, 왕은 다시 첩자를 적국으로 보냈습니다. 첩자가 돌아와서 “이상하게도 그 나라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멍하니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참모는 왕에게 고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고, 결국 힘 안 들이고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 역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무관심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이 완전히 없는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나라의 모든 일에 관심이 없게 된 것이고, 그 결과 다른 나라의 침략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유혹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마음을 키워나가는데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귀에게 손쉽게 내 마음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내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어떤 마귀도 침범하지 못할 굳건함을 갖춰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의 계란이 깨지면 다른 계란들도 깨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4곳에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한곳에만 보관했다면 전쟁, 화재와 같은 재난의 위험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도 일정표를 몇 곳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무실, 숙소, 핸드폰에 일정을 기록해 놓습니다.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도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가 있습니다. 어느 한 부서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장치입니다. 3권의 분립이 잘 이루어져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입법부가 행정부의 뜻을 따르는 거수기로 전락하면, 사법부가 권력의 눈치를 보는 종으로 전락하면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기 마련입니다. 올바른 견제와 균형은 부패와 부정을 막을 수 있는 합리적인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가정도, 이웃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정도, 친구도, 이웃도 갈라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갈라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장애인인 자녀를,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모른 척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욕망과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세례를 받은 신앙 공동체이지만 때로 분열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이 ‘새롭게 부임하는 본당에서는 적어도 6개월은 그냥 지켜보아야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6개월만 지켜보면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재물, 명예, 욕심’이 앞서면 가족이라 해도, 친구라 해도, 이웃이라 해도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아무리 성격이 달라도, 오랜 갈등이 있었다 해도, 원한과 미움이 가득했다 해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영신수련을 하면 ‘두개의 깃발’을 묵상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끝은 허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은 낡고 허름해 보이지만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느 깃발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느 깃발아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습관 중에 좋은 것은 계속 이어가고,나쁜 것들은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언자 예수님의 고뇌, -하늘 나라 비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과 바오로의 처지가 참 흡사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예언자적 고뇌가 물씬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도 의미심장합니다. 복음 앞 단락은 ‘깨어 있으라’는 주제였고, 복음 뒷 단락은 ‘시대를 알아보라’는 주제로 회개의 절박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깨어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짙은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해서 태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짙은 구름 사이 새어 나오는 태양빛 하느님의 희망을 보는 예언자 예수님의 눈입니다. 절망중에서도 하느님의 빛을, 하늘 나라 비전을 보는 예수님의 눈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현실에 매몰되어 비관하지 않고 낙관하면서 난국亂局의 현실을 지혜롭게 타개打開해 나가십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의 상황도 예수님과 흡사합니다. 고립무원의 짙은 어둠속같은 감옥안에서 쓴 편지가 바오로의 에페소 서간입니다. 오늘 바오로의 ‘교회를 위한 기도(에페3,14-21)’는 앞서 ‘신자들을 위한 기도(에페1,15-1,23)’처럼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기도를 통해 찬연히 빛나는 바오로의 영적비전이 바로 절망스런 상황중에도 내적자유와 기쁨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평생 화두가 하늘나라였습니다. 하늘나라를 선포했을뿐 아니라 이미 임박한 하늘나라를 사셨습니다. 하늘나라의 비전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절망스럽고 비관적 상황중에도 늘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셨습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비유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예언자적 말씀을 통해 그 깊은 고뇌가 그대로 마음에 전달됩니다. 세가지 내용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봅니다.
1.“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산불같은 불이 아니라 모세의 떨기나무를 밝혔던 불처럼 불타면서도 태워버리지 않는 사랑의 불, 성령의 불, 말씀의 불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불입니다. 정말 오늘 같은 죄악이 만연된 어둠의 세상에 환히 타오르는 하느님의 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오셔도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답은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말고 사랑의 불, 성령의 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으로 예수님처럼 하늘나라 비전을 지니고 하루하루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하느님의 불’로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2.“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의 분열은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참평화를 위한 창조적 분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짓예언자들의 거짓평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참 평화를 갈망하지만 세상은 거짓평화만 난무합니다. 온통 파괴적 분열 천지의 세상같습니다. 정말 하늘나라 비전이 없다면 이런 파괴적 분열들에 좌초할 것입니다. 늘 말씀드렸다시피 하느님은 우리의 비전이자 미래입니다. 이런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이 분열의 세상에 주님의 참평화의 선물로,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회개와 겸손으로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비전을 실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3.“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내다 보시고 고뇌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나라 비전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에 이어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셨기에 끝까지 사랑의 불로 하늘나라 비전을 살아내셨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느님을, 하늘나라 비전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잊어선 안됩니다. 이런 망각이 영혼의 치명적 병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회개와 겸손이 하늘나라 비전을 생생히 살아있게 합니다. 하여 바오로의 교회를 위한 기도가 그대로 우리를 통해 실현됩니다. 실현된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내적인간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힘으로 굳세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안에 사시게 됨으로 우리는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됩니다. 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는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풍요로운 축복인지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 모두 삭막한 세상에 사랑의 불로, 참평화의 일꾼으로 살 수 있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이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하느님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에페3,20-21).
<평화>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 말씀을 예수님의 본래 의도에 맞게 다시 풀어서 쓰면,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 그러면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졌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이 일어났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인데, 그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분열을 일으키러 온 것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주시는 평화를 받지 않는 사람들(루카 10,6) 탓입니다.
이 내용을 '만나'와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굶주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려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만나'를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만나'를 지겨워했습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봤으면. 에집트에서는 공짜로 먹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이 눈앞에 선한데, 지금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 죽는구나.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이 만나밖에 없다니(민수 11,4-6. 공동번역)."
날마다 '만나'가 내리는데도 먹을 것이 없어 죽는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만나'가 지겨워서 안 먹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을 먹이려고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결과적으로 백성들을 굶긴 것처럼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탓이 아닙니다.
천상의 음식을 주어도 안 먹는 백성들 자신들의 탓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왜 처음부터 백성들이 바라는 대로 온갖 채소와 향신료와 고기를 풍성하게 내려주시지 않았을까?
만일에, 미사가 지루하다고 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미사 중에 성가 대신에 최신 유행곡을 부르고, 지루한 강론 대신에 신나는 댄스파티를 하고, 맛없는 성체 대신에 달콤한 과자를 준다면?
아무리 청소년들이 바란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진짜 좋은 의사는 환자가 싫어해도 주사를 놓고, 수술을 하고, 쓴 약을 먹입니다.
만일에 환자가 달라는 대로 마약이나 주고 끝낸다면, 그는 의사가 아닙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첫째, 하고 싶은 일들을 참아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평화라고 착각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방종한 생활을 하고 싶어서 집을 떠났습니다.
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는 그 생활을 평화라고 착각했을 텐데, 나중에 죄를 뉘우치고 나서야 그게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큰아들도 친구들과 놀고 싶어 했는데(루카 15,29),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해서 불만이 가득 쌓였고,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평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진짜 평화라는 것을 큰아들이 나중에라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죄가 되는 일이라면 참아야 진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가 되는 일인데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평화라고 착각한다면, 그것은 마약을 보약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하기 싫은 일들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누리려면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고, 십자가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런 일들이 싫다고 거부한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8,22).
그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주는 일은 그가 하기 싫어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슬퍼하면서 떠났다는 것은 평화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희생하고, 양보하는 일들이 손해만 보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억울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런 일들을 실천하게 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평화를 얻게 됩니다.
지옥이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전혀 하지 않는 곳입니다.
왜 그런 곳이 지옥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파트 층간 소음 같은 문제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면 지옥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게 되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분열은 생명의 힘입니다.
박경선
무언가가 상식이다, 으레 그럴 것이다,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가치기준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그 시대의 흐름을 알고 있고, 그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을 떼어놓고 보면 내가 쥐고 있는 것, 내가 속해 있는 것을 절대적이라고 믿고 싶고, 모두가 그렇게 인정해 주기만을 바라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것이 상대적이고, 이제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 스스로가 품고 있는 경우, 이런 모습들은 더욱 커집니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회당 안에 갇혀있던 하느님의 말씀을 거리로 끌어내셨고 사람들 사이의 벽을 걷어내고 치유하고 위로해 주시면서 다시 소통의 방법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풀어주고 고쳐주시면서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법들을 알려주고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시 묶고, 가두고, 배척하면서 그 소통의 방법을 소수의 특권 계층의 손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아주 더운 어느 여름날, 가족과 함께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라 유아실에서 친정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성체를 모시러 나가는 내 뒤로 친정 어머니가 뛰어나와 머리에 미사포를 씌워주셨습니다. 신부님은 미사포를 쓰지 않으면 성체를 안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아이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왔다고 성체도 모시지 못하고 쫓겨나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맨머리에 맨발이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신부님의 대답이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아직도 한창인 ‘미사포 논쟁’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그 분열의 아주 작은 단면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주방 안에도 하느님께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장 39~40절)
신앙생활을 이벤트처럼 해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일만 신자’인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분위기 좋은 성탄 때만 신자인 분들도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바짝 열심히 하고 나서 푹 쉬는 그런 이벤트가 절대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자세가 있는데 바로 지속성이며 일상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때로 힘들어도, 때로 악천후라 할지라도 꾸준히 걸어가는 용감한 행위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큰 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듯 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저녁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 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 그 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자매님이 자신은 항상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데 매일 우울하고 세상에 화가 나기도 하며 사는 즐거움이 없고 힘들기만 하다고 해서 제가 어떻게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위로가 되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따끔한 말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믿음은 곧 행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신 생명 때문에 지옥에 갈 영원한 형벌을 면하고 하늘나라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하면 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겐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오늘 독서에도 말하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그럴만한 수준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주님의 도우심”으로,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뜨겁게 체험하지 못하면 결코 그 지식이 나의 살과 피가 되지 못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교리교육이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적으로는 많이 가르쳐주지만 그분을 만나는 뜨거운 체험을 주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만나면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만남의 체험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부모가 되어 자녀를 낳아서 그 부모심정을 느껴보기 전까지는 부모의 고마움을 가슴깊이 느끼지는 못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수없이 들어서 알았지만 지금만큼은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으로 느껴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리 배워 알아도 내가 부모가 되기 전에는 그 심정을 공감할 수 없으리만큼 심오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사랑이야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매순간 느끼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 자매님께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사랑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해 드렸습니다. 그분께 대한 고마움, 또 그래서 세상에서 더 필요한 것이 없으니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 등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그 자매는 눈물을 글썽이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인생은 고통뿐이라고 문자가 왔습니다. 저를 만난 후 며칠은 마음이 편안하고 가벼웠는데 다시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상했던 반응입니다. 한 번에 완전히 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오로도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고는 몇 년 동안 자신을 성장시키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저는 ‘돈오점수(頓悟漸修)’란 한 문자만 보내주었습니다. 돈오점수란 불교용어입니다. ‘돈오’는 순간적인 깨우침을 의미하며, ‘점수’는 쉼 없는 수행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열심히 수행하면 깨우침에 다다르는지 알지만 사실 깨우치고 나서도 끊임없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겨울에 얼음이 얼었음에도 한 순간 그 호수 전체가 물임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물이 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비추임으로 조금씩 녹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얼음이 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돈오이고 태양의 따사로움으로 그 얼음이 녹는 것이 점수입니다.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아주 어두울 때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번개가 번쩍 쳐서 한 순간 길이 보였다가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억하고 조금씩 어두움을 벗어나는 노력이 남은 것입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우치고 눈물을 흘리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잃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나쁜 성향들이 다시 올라와서 그런 기쁨을 잃고 우울해지고 결국 아예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번개가 번쩍 칠 때 보였던 길을 기억하고 그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었는지를 기억하며 다시 그 기억을 좇아 나의 나쁜 성향을 없애며 조금씩 그 기억에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저 또한 행복했던 기억과 힘들어졌던 기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어떻게 하면 힘들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안다고 해서 행복한 선택만을 하면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길을 벗어나 헛디디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 한 순간 보았던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한 것이었음을 더욱더 믿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믿으면 그래서 다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믿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자.
강길웅 신부님
기원 전 586년경에 유다왕 시드키야는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정세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바빌론의 포위를 받고 있었는데 에집트의 파라오 왕이 이에 맞서서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자 바빌론군이 일시 포위를 풀고 후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유다의 왕과 대신들이 손뼉을 치며 상황은 이제 끝났다고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부패와 부정이 판을 쳤으며 정치와 사회는 물론 종교까지도 속속들이 썩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대국들의 침공은 이를테면 하느님의 경고요 회초리였습니다. 바로 이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나타나서 왕에게, 절대로 형세를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차라리 바빌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충고했습니다.
나라가 바빌론의 위험에서 풀렸는데 퇴각한 바빌론을 쫓아가서 항복을 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그것은 바보요 미친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과 대신들이 볼 때 예레미야는 국가 반역자요 또는 국가 전복의 기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왕을 설득하여 예레미야를 죽이기 위해 깊은 구덩이에 내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을 끝까지 거부하던 유다는 크게 망했으며 왕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왕도 눈알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 갔다가 거기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사필귀정이었습니다. 썩으면 스스로 망하게 되어 있고 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 예언자는 실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말하자면, 독재 국가에서는 양심 있는 목소리를 싫어하며 썩은 사회일수록 진리와 정의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예언자는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간주됩니다. 그놈들(?)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고 그놈들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시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복음과도 연결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평화를 위해 오셨으며 또 평화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평화를 뒤집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다릅니다. 아주 다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대단히 거북하고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아주 달콤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너무 쉽고 또 편안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화는 결국 인생과 세상을 파괴시키는 거짓되고 환상적인 평화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을 구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비롯하여 자유당 독재, 군사 독재 정권시대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라가 썩거나 말거나, 망하거나 말거나 자기 몸만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처신을 합니다. 아부도 하고 굴욕적인 삶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거짓 평화입니다. 언젠가 신문 보도를 보니까 깡패 두 명이 대로상에서 대낮에 흉기를 휘두르며 여인의 가방을 강탈해 가는데 지나가는 행인들이 멀건히 쳐다만 보고 아무도 손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남자만도 수십 명이 있었다는데, 여차하면 자기들도 다칠지 모르니까 모두가 외면하는 바람에 강도들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평화입니다.
우리가 비록 손해를 본다 해도 그가 진정 정의와 진리를 위해 투쟁을 했으며 악과 싸우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했다면 그는 평생 떳떳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 어려운 때에 자신만의 이익과 신변의 안전만을 위해서 불의에 눈감고 악과 타협하려 했다면 그는 평생 비굴하고 떳떳지 못한 인생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 평화를 알아야 하며 참 평화를 위해서 거짓 평화를 과감하게 깨뜨릴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거저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을 받으셔야 했듯이 우리도 부서지고 깨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걸어간 길은 가시밭길이지만 그러나 그가 걸어간 길은 꽃길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거짓 평화를 부수고 깨뜨려서 불질러 버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참 평화를 위해 노력합시다. 썩은 평화는 모두 끄집어내어 불살라 버리고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비가 쏟아져도 떠내려가지 않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참 평화를 구하도록 합시다.
불과 칼은 성령님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박근혜 대선후보가 대선후보로 당선된 후 야권의 상징적인 장소를 방문했다가 혼이 나며 돌아온 장소가 있는데 바로 전태일의 동상이 새겨진 분신장소입니다. 잠시 전태일 열사로 불리는 사람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된 전태일은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를 하며 집 살림에 보탬이 됩니다.
태일의 나이 17살이 되던 1965년, 그는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합니다. 학생복 맞춤집인 이곳에 시다로 첫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미싱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태일은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직급이 높아지고 월급도 3천원으로 대폭 올랐습니다.
삼일사에서 미싱보조로 미싱일을 배운 태일은 1966년 가을에 통일사에 미싱사로 전직을 합니다. 이제 태일은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자신도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지 1년여 동안 태일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처음 그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 평화시장.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여공,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것은 바로 태일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통일사에서 미싱사로 일하면서 태일은 어렴풋이나마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월급은 거의 평상 임금 정도에 불과한 것이 공장 주인의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졌지만 이 원시적인 감정이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린 직관이었고 머지않아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열 두세 살의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태일의 가슴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열악한 환경,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일방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이들 어린 여공들이야말로 지금까지 그늘에서 그늘로 전전했던 태일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태일은 자신이 놓인 환경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태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평화시장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내부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에 대한 자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최저임금과 노동법의 개정을 요구하며 분신합니다. 전태일이 산화한 1970년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아 71년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고 72년에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힘차게 불타올라 70년대는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투쟁이 타올랐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에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동일방직,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민주노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습니다.
[출처: http://kin.naver.com/browse/db...]
물론 분신을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 질러 수많은 노동자들의 비참함을 대변하였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세상에 성령의 불을 붙이기 위한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불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사실 성령 강림 때 그 불이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던 사도들의 집단에 붙여졌고 그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출발이 됩니다. 또 베드로의 성령에 찬 설교를 듣고는 이내 그 불이 수천 명에게 붙게 되고 바로 세례를 받고 됩니다. 그들은 이제 성령의 불로 세상과 나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불이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는 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받은 이들은 이제 세상과 갈라지게 됩니다. 불이 붙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거나 끝까지 거부하여 세상에 남거나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아니라 칼과 분열을 주러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잉태하신 후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찼고 그 태중의 아들이 기뻐 뛰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모님을 불타게 한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앞길을 닦아줄 태중의 요한에게까지도 성령의 불을 옮겨 붙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엘리사벳을 찾아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는 않지만 마리아를 통해, 즉 교회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불의 세례를 줍니다.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하는 것이 우리 안에 성령의 불덩어리를 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이 붙은 누구나 이제 다른 이에게 불을 붙여줘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내게 붙여진 성령을 불을 전해 주는 것이 선교입니다.
불과 칼의 특성은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불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닌 자세는 칼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특성은 불과 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불과 칼을 주시기 위해 죽음과 부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의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을 짜내기 위해 마치 포도가 짓밟히듯 당신도 짓밟혀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 성령을 주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전해주기에 짓눌리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수난 공로로 교회 안에서 매일 새롭게 성령의 불을 붙이며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세상에 불을 놓아야 하는 작은 불쏘시개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