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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11월 6일 (녹)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11.06|조회수703 목록 댓글 0

제1독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Sayings on discipleshi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하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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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율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며,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라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도 단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시다니 다소 의아합니다.그러나 이 말씀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오해를 살 만한 표현을 조금 바꾸어, 가족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한 자격이 없다고 표현합니다(10,37-39 참조).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철저히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탑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려고 할 때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아야 하듯, 당신을 따르려면 그 경비를 철저히 계산해야 하는데, 당신을 따르는 데 필요한 경비는 자기 자신까지 철저히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만 명을 거느린 임금을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만약 맞설 수 없겠으면,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사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도, 그분의 마음에 들 수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호의가 필요하기에 먼저 우리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느님과 화해를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호의에 기대며 자신을 철저히 내어놓는 길뿐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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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첫 부분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부모를 비롯한 가족마저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일종의 과장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미워한다.’는 말씀은 ‘사랑을 적게 한다.’라는 뜻으로 쓰신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물론 예수님께서는 가족 관계를 무시하지 않으셨지요. 단지 가정의 일에 매달려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보아 이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우리 삶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자리에 모시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결단과 추종, 그리고 계획이 필요하지요. 이 점을 말씀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탑을 세우려는 사람과 수많은 적군과 전쟁을 해야 하는 임금에 관한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나의 전 존재가 달린, 영원한 생명을 향한 신앙생활에 아무런 준비와 계획이 없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겠습니까? 따라서 신앙의 여정을 잘 걷고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시간과 노력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계획을 실천하려면, 내가 포기해야 할 것과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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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세우려면 분명 공사에 들어가는 경비가 있는데, 그것은 계산하지 않고 무턱대고 작업을 시작해서는 안 되겠지요. 전쟁을 할 때에도 병력을 먼저 헤아려 보고, 승산이 없으면 전투를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세리와 창녀와도 어울리시면서 율법 학자들이 배척하던 이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고 그들을 받아 주시지만,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모두 받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자, 그는 따라나서지 못했고(루카 18,22-23 참조),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는 사람과,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이에게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제자로 받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결단은 물론 그분을 끝까지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 깊은 성찰도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되며, 세상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끊고,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재산을 포기해야 합니다. 곧 우리 삶에서 하느님이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주님을 따르는 데에도 계획이 꼭 필요합니다. 그분을 따르려고 세운 계획과 내린 결단은 무엇이며 이를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지요? 구원이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동의와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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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어려운 작업을 피하지 말라고 촉구하십니다. 도시 빈민들의 벗이요 형제로서 평생을 살았던 제정구 바오로 씨(1944-1999년)가 이 말씀을 묵상한 글을 뒤늦게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3일의 묵상에서 언급했던 ‘빈민 운동의 대부’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일한 그는,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양심으로 활동해 ‘깨끗하고 정직한 일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제정구 씨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것에 장애가 되는 것을 철저하게 버리는 길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찾고자 하는 묵상 중에도 세상살이에 대한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묵상에서든 실생활에서든 이런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자신을 내어놓도록 결심할 때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제정구 씨는 더 나아가 주님의 일을 하는 데 투신하는 사람도 그 일의 성공을 추구하며 사실은 ‘자아’를 만족시키는 차원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실 뿐 아니라 십자가가 ‘자기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묵상 글 일부를 옮겨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나’ 또는 나의 그 ‘무엇’)를 모두 버리지 않는 사람, 즉 가난을 받아들이고 가난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야 비로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져야 할 제 십자가의 의미가 밝혀진다. 즉 가난을 향해 자기 자신을 활짝 열 때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가난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제 십자가랍시고 짊어진 것은 ‘나의 그 무엇’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그 무엇이 없을 때 나에게 채워지는 것은 주님의 연민의 정이요, 이 연민의 정 때문에 질 수밖에 없는 모든 짐이 비로소 내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경향잡지』 1986년 9월 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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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누구를 따른다는 말에는 ‘순종’(順從)과 ‘순명’(順命)이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두 단어가 똑같은 뜻으로 쓰이긴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면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순종은 ‘좇아서 따르는 것’이고, 순명은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측면이 강하고, 순명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는 ‘순명’보다는 ‘순종’ 쪽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어린아이가 엄마나 아빠를 따르는 것과 같고, 순명은 종이 주인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명하기보다는 순종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그렇다고 순명이 나쁜 의미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따라나서려면, 스스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누구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유로우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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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황당한 말씀입니다. 마치 가족을 멀리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해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가족이 주는 십자가는 작아도 무겁습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뜻대로 따라 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십자가로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면 가족은 ‘서로에게 십자가’가 됩니다. 다투고 멀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뜻과 네 뜻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통분모를 ‘예수님의 뜻’에 일치시키려 애써야 합니다. 복음 말씀은 그렇게 하면서 살라는 당부입니다. 

누구나 가족에게 기대를 겁니다. 자녀들에게서 희망을 찾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즐거움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이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기대가 무너지고 희망이 꺾이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제는 그 안에 숨겨졌던 ‘주님의 뜻’을 찾아봐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의 반전’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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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오토 아이히만이라는 독일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벌어진 유다인 대학살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전쟁 뒤 숨어 지내던 그는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의 비밀경찰에게 체포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소환되어 15가지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습니다. 학살자의 얼굴에서 악마의 모습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소심한 아이히만을 보고 놀랍니다. 또한 재판을 받으면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시킨 게 아니니까요.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한 인간이며 관리였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는 반유다주의자도 아니었고, 가정에서는 무척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사랑스러운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일에도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문제점은 자신의 가정만을 위하여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우 리는 ‘착하게 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족을 잘 거두며,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좋은 직원’,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친구’로 남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과 가정보다도 더 크고 숭고한 가치를 우선시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아이히만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강의 때문에 지방에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식사를 간단하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습니다. 컵라면과 삼각김밥 하나가 식사로는 딱 맞거든요. 컵라면 1,300원 그리고 삼각김밥이 1,000원이었는데, 바로 옆에 있었던 삼각김밥이 할인해서 700원입니다.


저는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좋아하는 맛의 삼각김밥이 아니라 할인되는 삼각김밥을 선택했습니다. 더군다나 동전이 생기지 않는 딱 2,000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300원을 번 것 같기도 합니다.


식사 후에 자동차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글쎄 50,000원 이상 주유하면 세차가 무료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주유를 마치고 세차장에 가서 주유 영수증을 내밀었더니, 하부 세차는 3,000원이라고 하면서 기왕 세차하는 것 3,000원 내고서 하부까지 세차하라는 것입니다. 이 직원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도 깨끗하게 해야 차를 오래 쓸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300원을 벌고 세차를 무료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 별 이득이 없어 보입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삼각 김밥은 시간이 지나면 그냥 폐기처분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버릴 것에 700원을 쓴 것입니다. 또한,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하부 세차까지 해 주고 세차비로 2,000원 받습니다. 공짜라는 생각에 비가 약간씩 내리는데도 세차했는데 사실 돈 주고 괜히 세차한 것과 똑같습니다.


세상의 상술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만을 보고 듣는다면 과연 주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물론 우리를 매우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 관계되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되는 것에 충실히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나보다 더’라는 말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말씀과 정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그 어떤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는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헬렌켈러).


행복한 삶.

매주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 가서 주일미사를 가족들과 함께 봉헌합니다. 미사 후 다시 주차장에 가서 차를 타고 성지로 돌아오는데, 글쎄 운전석 쪽으로 다른 차가 너무 바싹 주차해서 문을 열고 도저히 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불편을 느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자동차 문이 봉고차처럼 슬라이드로 열린다면 훨씬 더 편할 텐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편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의 욕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 샤워하고 나서 물기가 너무 많아 욕실 바닥이 미끄러운 것.

- 면도할 때 깎은 수염이 세면대 위에 많이 떨어져 있는 것.

- 세면대 위 거울은 왜 이렇게 얼룩이 많은지….

그렇게 크지 않은 욕실만 봐도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안에는 얼마나 많은 불편함이 있을까요?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에 산다면 어떨까를 떠올려 보십시오. 훨씬 더 불편함의 숫자가 많을 것 같지 않습니까?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대가 적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금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요구사항과 불평불만이 많아진 것입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불평의 삶보다는 만족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얼굴을 찡그리는 일보다 웃는 일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요?




혹시라도 무늬만 제자,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며칠간 연이어 봉독된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 잔치 초대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상의 초대장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 지상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사실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직 초대에는 크게 망설입니다. 그 이유는? 소명에 응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6~27절)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 지파의 조상 레위는 자신의 부모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모릅니다.” 그는 형제들과 절대 만나지 않았으며, 자식들마저 모른체 했습니다. 하느님 성전에 봉사하기 위해 가족을 칼처럼 끊어버린 것입니다. 성전 봉사를 이유로 가족에 대한 모든 의무를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네번 째 계명을 폐기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셈족어의 표현으로, 어떤 사람,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2차적인 자리에 둔다거나 소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진의(眞意)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불효하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형제자매들과 등지라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세상의 모든 질서 체계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세상 만사 안에 첫째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인간들과 존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그분 존재는 모든 법중에서 가장 첫째가는 법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크심과 완전하심, 새로움 앞에, 이 세상 모든 존재나 대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은 최우선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계신가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찬미하는 기도생활, 영적생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는 그분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삶, 사랑의 실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혹시라도 일에 대한 욕심, 자리에 대한 욕심, 부차적인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예수님은 우리네 삶 속에서 첫번째 자리가 아니라, 가장 가장 자리로 밀려나가 계신 것은 아닌가요?


혹시라도 무늬만 제자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 중독 증세, 취미활동 중독에 푹 빠져,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에는 무관심한,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내가 가난해지기만을 기다리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베를린 뒷거리 한 모퉁이에서 거지 소녀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앞에는 골목의 꼬마들만 몇 명 모여서 구경할 뿐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녀는 기운이 빠져 힘없이 팔을 내려뜨렸습니다.

그때 어떤 젊은 신사가 소녀에게 다가가더니 바이올린을 받아 들고는 익숙한 솜씨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황홀한 멜로디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아낌없이 갈채를 보내며 돈을 던졌습니다. 젊은 신사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미소로 답례하고 돈과 바이올린을 소녀에게 건네주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젊은 신사는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미하엘 슈마허가 비행기 탑승시간이 늦었을 때 택시를 대신 운전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택시기사 정도면 그래도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지만 F1(세계 제1의 자동차 경주)의 황제에게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핸들대를 꼭 잡고 있다면 아무리 슈마허라도 대신 운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녀가 자기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겠다고 끝까지 우겼다면 아인슈타인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먼저 힘을 빼기를 원합니다. 힘주고 버티고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예수님 만나면 다 망한다고 하면 크게 놀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부자에게 가진 것을 다 팔고 따르라고 하셨고 자캐오도 괜히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당신을 따르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 만나 누구하나 잘 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칫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에서 더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나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예수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 다가오심을 명확히 알아야 신앙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소유욕을 끊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애정도 소유욕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소유욕을 끊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소유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봉헌하는 제단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탑을 세우기 전에 그 탑을 세울 경비가 충분한지 먼저 계산해보는 것처럼, 혹은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싸울 것인지 화평을 청할 것인지 계산해보는 것처럼, 그렇게 먼저 계산해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계산해야 할 것은 내가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입니다. 그 십자가는 결국 자기의 소유를 다 버릴 수 있는지, 없는지로 판결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엄청난 우환이 들이닥쳤다고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잘 되게 만들어주는 분으로 착각하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서 당신이 대신 핸들대를 잡아주시기 위함입니다. 대신 연주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세상에서 망하고 가난해져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힘이 빠졌을 때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분은 나의 소유를 모두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버릴 수 있는 만큼 그분은 나를 차지하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 상선벌악(賞善罰惡), 결자해지(結者解之),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에 맞는 말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회적인 합의에도 맞는 말입니다. 함무라비 법전, 십계명, 영국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세속 5계, 모든 헌법과 법률은 상선벌악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자해지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륜과 도덕을 보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만 살아도 존경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텍사스주의 댈러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여성 경찰관이 실수로 4층인 남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본인의 집은 3층이었습니다. 4층의 주인은 거실에서 편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경찰관은 자기 집에 누가 있다고 생각했고, 집에 있던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평범하고, 모범적이었던 사람은 본인의 집에서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재판에서 당연히 잘못한 여성 경찰관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남자의 동생이 재판정에 있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남동생은 판사에게 한마디 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남동생은 형의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경찰을 용서하겠다고 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형도 용서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판사에게 형을 죽인 경찰을 안아봐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판사는 허락했고, 동생은 경찰을 안아 주었습니다. 순간 엄숙한 재판정은 숙연해졌고, 가해자인 경찰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울었습니다.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 모두 울었으며, 증오와 심판의 재판정은 용서와 치유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의 재판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더 커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처벌과 심판은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있지만, 증오와 원망은 남습니다. 용서와 포용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재판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문제를 없애지 못합니다. 문제를 없애는 길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놓아버리는 겁니다. 용서와 포용은 쉽지 않습니다. 문제를 놓아버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리 법칙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질서와 규정을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 법칙을 넘어서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사회의 질서와 규정을 뛰어넘은 길을 말씀하십니다. 용서와 사랑의 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신앙은 꼭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은 이미 계시니까요.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외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길은

다른 길이 없어

외길인 것이 아니라


내게 손짓하는

수많은 곁길에서


실낱같은 눈길

솔깃한 마음 한 자락


거두고 거두어

오롯이 그 위에 서야


나를 부르는

내가 가야만 할

외길이 되어주는 거지

기꺼이 아낌없이




인류하나라는 하느님가족 느낌 실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요새 세상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님을 이해 못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죠.

예수님제자 되려면 부모아내 자녀형제 목숨까지 미워하라니 말입니다.

그리고 아주 싫어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뒤를 따르라는 말씀도 그쵸.


만물의 최초원인님이신 하느님의 말씀님을 세상지식으로 해석맙시다.

하느님 닮은 인간이라면서 세속닮고 악마닮아 변한 자신 깨달읍시다.

인간조직 세상차원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의 가족차원에로 올려봅시다.


하느님 찬미하는 미사 때 영성체를 하면서 하느님가족에 끼어듭시다.

외국서도 미사영성체하면 인류하나라는 하느님가족 느낌 실감납니다.




“...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루카 14,31)

곽승룡 비오 신부님

보다 나은 원의는 선보다 더 위대한 친구라는 말을 한다. 우리가 더 나은 행위를 하도록 힘쓰지 말아야 할까?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말하곤 했다. 제시된 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떤 한 가지 가능성을 선택해야 하는 원칙은 하느님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이다.


또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상적인 열정과 일상의 현실 여정이라는 어려운 간격과 그 틈새를 식별하였다. 그 현실은 모든 가능성과 힘에 적용하여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카시아노는 이집트 수도자들의 가르침을 요약하면서, 모든 덕은 식별과 함께 경작하지 않으면 결점과 악습으로 바뀐다고 말하였다.


한 여인이 묵주기도에 관한 영감 받은 담화를 미국의 어느 설교가에게 이야기하였단다. 그 순간 여인은 매일 기도드릴 것을 약속하였단다. 그런데 그 설교가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하고 기도를 시작하도록 지혜로운 충언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와 같은 시간과 함께 기도를 더욱 드리고 싶은 원의가 일어나는 듯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의 동력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엄마와 함께 히말라야 ABC를 올랐다. 오르는 동안 심한 고산증이 있었다. 그 부정적 기억이 자라나면서 크게 마음 속에 작용했다. 아이가 두번 다시 산을 오르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나는 그 어린이에게 말했다. 꺼내기 어려운 경험이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이루었다는 자신감, 어떤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개 되었다는 성취감을 기억 해야 한다.그래야 하말라야 트레킹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 주었다.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부정적 기억을 꺼내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기억을 꺼내 자기 주도적으로 목적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다.


어려운 일이라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 그래서 목적을 이룬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자유인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렇지 못하다. 목적을 향해 살 동력을 갖지 못해 이타심으로 기대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것이 충족되어야 겨우 움직이는 무기력의 사람이 있다. 홀로 서서 목적을 향해 기꺼이 달려가고야 마는 열정의 동력이 없다.


그 열정의 동력은 하느님 사랑이다. 열정의 동력의 근거가 부모나 형제나 자매, 아내나 자녀이지만 더 큰 열정의 동력의 근거는 하느님 사랑이다. 든든한 전대나 여행보따리, 삭량자루가 필요 하나 그것만 믿어서는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에 필요한 더 큰 동력을 가져야 한다. 어떤 기대나 열정은 모두 하느님 사랑 밑에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열정의 동력은 무한대로 커져간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 낼 수 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후카 14,27).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유명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곧 이 말은 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존재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되고자 노력하고, 또 무엇을 가지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마지막 죽음과 더불어 다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삶의 모든 시간 속에서 진정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갔을 때 그 모든 것은 마치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처럼 영원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행복이자 구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렇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비운 마음에 당신의 무한하신 은총을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곧 욕심의 부산물이 가득한 우리의 영혼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을 담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욕심의 부산물이 넘쳐날 때 그것들이 썩어서 결말은 죽음이 되지만 내 안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넘쳐날 때 결말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사랑이신 분을 만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루카 14,25)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저 우르르 뒤를 따라간다고 다 제자는 아닐 겁니다. 그 중에는 호기심으로 따라붙은 이도 있을 것이고 자기에게 득이 될지 아닐지 탐색하러 온 이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런 군중에게 몸을 돌려 제자의 길을 일러 주십니다.


첫째, "가장 가까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루카 14,26)해야 합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루카 14,27)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소유를 다 "(루카 14,33)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 조건을 말씀하시면서는 두 개의 비유를 곁들이십니다. 탑을 세우기 전 미리 앉아서 공사 경비를 꼼꼼이 계산하는 사람의 비유, 그리고 제 나라에 쳐들어 오는 임금과 싸울지 말지를 미리 앉아서 가늠해 보고 결정하는 임금에 대한 비유입니다.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루카 14,28)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루카 14,31)

공사와 전쟁에 앞두고는 이와 같이 철저한 사전 준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뒤를 따름, 그분의 제자가 됨, 그분을 닮아가는 길에도 역시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하신 세 가지 조건이 바로 사전 준비 작업이 될 것입니다.


아주 가까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은 감정적 증오나 배척이 아니라, 그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것은 본성적으로 유쾌하지 않은 결점과 장애와 방해 요인도, 그 모두를 허락하신 분과 함께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라는 말씀은 영적 갈망과 허기를 망각하게 만드는 물질, 장소, 사람, 기억의 금고를 비우고 그 모두의 주인이신 당신만을 소유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제자 됨의 준비조건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율법에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계명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거치면서 세부 항목이 점점 늘어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모두 기억하고 일일이 삶에 적용하는 일이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요.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백성의 더 돈독하고 깊은 사랑을 위해 마련된 율법이 오히려 하느님을 더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폐단을 직시하며, 율법을 지키는 가장 지혜로운 길은 제시합니다.


"그것들은(계명들은) 모두 이 한 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 13,9).

모든 계명의 골자이며 근본 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천명하신 예수님 말씀(루카 10,25-28 참조)을 잇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건조하고 냉정한 이성주의적 계명 준수 이상의 무엇이 요구됩니다. 바로 주님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분과 함께 있고 싶고, 닮고 싶고, 따라하고 싶어서 다 버리고 나서는 길이 제자의 길이니까요. 계산만 하고 앉아서는 영영 준비만 하다 근처도 못 가 볼 생생한 현실이지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얼마나 담대하고 명료한 말씀입니까! 율법을 주신 하느님이 사랑이시니(1요한 4,8) 사랑은 율법의 완성 맞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그 안에 깃든 모든 계명을 완수합니다. 사사롭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정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애착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인내하며 소유를 비우는 제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 길은 분명 사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 길이 곧 사랑입니다.




자신감이 아니라 믿음과 열정으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군중과 함께 길을 가시는 거로 시작합니다.

함께 길을 가지만 주님입장에서는 앞서 가시는 것이고, 군중들입장에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가는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그리고 느닷없이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군중들이 엄청 당황하였을 텐데 지금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는데 왜 나를 따라오느냐?

나를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끝까지 따르면 십자가 길을 가고,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갈 건데 거기까지도 따르겠느냐? 뭐 이런 뜻에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여러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오늘 저는 성숙의 차원에서 얘기할까 합니다.

제가 청원자들 양성을 할 때 성숙에 대해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얘기가 인생의 목적에 대한 얘깁니다.

성숙한 사람은 목적 또는 목적지가 있어서 방황치 않고 흔들림 없이 그 목적지를 향하여 꿋꿋이 가지요.

반면에 미성숙한 사람은 당연히 인생의 목적이 없고 그래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인생을 낭비하지요.

그리고 목적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목적이 잘못된 것도 문제지요.

그러므로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목적지가 옳아야 되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곳이 그 목적지요. 예수를 따라가면 그곳에 틀림없이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곳이 어디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느님 나라요, 진리와 생명과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예수께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확고히 믿는 사람들이고 그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확고히 믿고 따라나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숙한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따라나서서도 안 되기에 오늘 주님도 두 번이나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집짓는 비유와 전쟁하는 비유에서는 잘 따져보고 시작을 하라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따져보고 승산 없으면 시작도 마라는 식으로 들릴 수 있고, 그래서 겁이 많고 그러잖아도 주저하던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즉시 네 주제 파악하고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데 주님은 포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각오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정말로 안타까운 것이 수도원에 들어오라고 권하면 젊은 사람들은 수도생활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삶이기에 자기는 자신없다고 하고, 이걸 보고 어른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패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도생활이든 뭐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감으로 하는 것도, 패기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믿음으로 하는 것이고 열정/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감이 자기 자신감이라면 그 자신감으로 주님을 따를 수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말씀처럼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라면 그 어떤 고통도 무릅쓰고 따를 수 있지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셨는데 우리도 각오하고 따르면 주님께서 뭐든 무릅쓸 사랑의 성령을 주실 겁니다.




'소유의 끝'(루카 14장 25~33)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에게 오면서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자기 소유를 버린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택배를 받고 박스가 아까워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선한 지향이었죠.

언젠가는 쓸거라는 생각에 크고 작은것을 모으다보니 집의 모든 공간을 채우고도 모자라 누울 공간마져 줄어들었습니다.

가진다는것, 채운다는것은 좋은것입니다. ~

하지만 공간과 흐름을 방해하는 상태마져 감지하지 못하면 소유의 끝은 불행합니다.

사랑의 희생과 나눔은 율법을 완성하게 되지만 혼탁한 사랑은 파멸입니다.

'자기애가 강하면 눈을 뜨고 있어도 장님과 같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로마 13, 8)

(For whoever loves his neighbor has fulfilled the law.)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제1독서(로마 13, 8~10)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로마 13, 8) 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고 대부분 부정적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것은 곧 남에게 안 좋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가령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서는 안된다, 등 이런 부정적인 계명들은 결국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기에 해서는 않되면, 적극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가장 기본적으로는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어 세 번째 단계는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단계라고 보겠습니다. 결국 수많은 율법이 있지만 그것들은 결국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신체나 재산, 인간관계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다른 사람이 우선 자기 나름대로 해를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적극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기에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 10)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다른 사람 즉 이웃에 대하여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 나는 이웃의 어려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부활은 우리 삶의 목표요 목적이다. 우리는 죽기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최근 교황님 강론 중 인상적 주제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너 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우리의 평생 과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동시에 예수님의 전사이자 예수님의 학인이고 예수님의 형제도 됩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벗이기도 합니다. 정말 스승은 친구도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이 모두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며 목표이자 방향임을 깨닫습니다.


어제도 놀라운 자매들 여러분을 만나 고백성사를 드렸고 저는 지체없이 성녀들이라 격찬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옥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자신이 희망이 되어 결코 좌절함이 없이 수십년을 한결같이 천국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여제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 손색없는 분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여장군들이라 별을 달아도 몇은 달아야 할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평생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세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복음 중에 망대와 전쟁의 이중 비유가 이채롭습니다. 망대를 세우려면 미리 경비를 계산하고 전쟁을 하려면 미리 승산을 따져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려면 끝까지 따를 수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을 따라 나선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늘 성찰하면서 각오를 새로이 하자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늘 성찰하고 따라야 할 평생 숙제 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예외없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말그대로 친족이나 자신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친족들과 자신은 물론 세상 만물에 대한 집착없는 이탈의 순수한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역시 ‘누구든지’ 예외없이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각자 고유한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교할 것도, 부러워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이 용감하게 끝까지 지고 가야할 고유의 내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짊어질 수 있는 내 십자가입니다. 과연 내 십자가는 무엇인지요. 날마다 짊어지고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 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십자가는 선물이 되지만 예수님 사랑이 식어 버리면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3.“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가난이요, 소유욕의 점차적 포기입니다. 포기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참으로 무소유의 정신으로, 무욕의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날마다 평생 버리고 비우고 내려 놓고 겸손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버림의 여정, 비움의 여정, 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제자직의 조건을 자발적 기쁨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마음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사랑의 불입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에도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합니다.


맹목적 이기적 눈먼 사랑이 아니라 눈밝은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이타적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됨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공감하게 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이런 자발적인 자연스런 이타적 이웃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예수님 사랑에서 시작하여 이웃사랑으로 끝날 때 사랑의 완성이자 참 아름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 사랑의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 또한 예수님 사랑의 성체와 하나되어, 예수님의 사랑이 되어 하느님과 이웃을 한결같이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잘 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시편112,4-5). 아멘.




놓아야 할 것과 잡아야 할 것 <루카 14, 25-3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줄을 잡고 위로 오르려는 사람은 잡고만 있으면 위로 오르지 못하고 한 손은 잡고 한 손을 놓아야 합니다. 두 손을 잡고 있으면 높이 오르지 못하고 두 손을 다 놓으면 시작도 하지 못합니다. 버리고 취하는 것은 진실과 사랑에 의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선을 잡고 앞으로 나가야 하고 악을 버리고 앞으로 나가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악한 무리와 손을 잡지 말고, 선한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버려야 내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비우고 버리고 빈 깡통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고, 놓고 비운 손에 주님을 잡고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새로운 것을 계획하는 사람은 내려놓고, 버리고, 취하고, 간직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때가 되어 자기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놓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에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어서 악취가 나고, 암과 같은 병이 자라나고, 오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주저하거나, 앉거나, 좌절하는 때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원리대로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살고 하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선택에 따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모든 행복은 버려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슬픔을 알아야 기쁨을 알고, 배고픔을 알아야 배부름을 알고, 외로움을 알아야 위로가 필요한 줄 알고, 깨끗한 사람이라야 사물을 꿰뚫어 볼 줄 알고, 반대자를 알아야 자기편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이라 생각되는 것을 극복할 줄 알아야 행복을 알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생명을 놓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생명까지 미워해야 내 제자가 된다.”


자기 마음속에 미움, 저주, 분노, 섭섭함, 원망, 불만, 분열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불안, 초조, 안절부절, 방향조절과 분노 조절을 못 하게 됩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워서 이기려 하는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하루의 선물을 진정으로 감사하지 않고 하루를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으면 하루가 행복하지 못합니다.


오늘 하루도 진실과 사랑으로 주신 선물을 감사하며 시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잡고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갑시다.




하늘 땅 구름 그리고 나

최민석 신부님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나이 육십 가까워지니까 조금씩 내가 보인다. 나 아무 것도 아닌 빈털터리라는 게 보인다. 바닷가 백사장 모래알 하나 너른 대양의 물방울 하나처럼 작아도 티끌같이 작은 내 본래의 모습이 느껴진다.


그렇다. 내 어린 시절은 참으로 초라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뿐만 아니다. 돌이켜보면 한평생이 그대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가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부를 못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얼굴이 훤칠하게 미남형으로 생기지 못해서만도 아니었다.


요컨대 어렸을 적 내 모습은 어디 한구석 장래를 기대할 만한 싹이 보이지 않는 그런 평범한 시골 아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별로 달라진 바 없이 오늘 여기까지 이어져왔구나. 초라한 내 인생.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모습이 오히려 고맙고 대견하다.


나는 내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럴 건더기가 없다. 물론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금 과거를 회상하고 있지만 그것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내 잠재의식의 상태도 과연 그러한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현제 나로서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롭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하고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도 이 자유를 억지로 빼앗거나 구속할 수 없으시다. 나의 스승 예수님은 그 ‘자유’를 분명히 해 주시며 말씀 하신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8) 아무것도 잡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잡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 수명을 미리 정해놓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수명은 있지만 미리 그 길이를 정해놓고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때를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사람인가 하느님인가. 사람이 때를 당기거나 밀거나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도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오직 하느님만의 것인가.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하느님 같다.


사람이 때를 앞당기거나 미루거나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모르고 있지만 나를 두고 정하신 하느님의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난날을 돌아볼 때 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그분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더욱 그러하다.


나는 아쉬운 게 없다. 내 인생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끝없이 바뀌지만 끝내는 저마다 본래모습으로 돌아간다. 꽃으로 치면 이름 없는 들꽃 같고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 같은 끝없이 넓은 세상 속 작디작은 내 모습이 보인다. 늦은 감은 있지만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 하늘의 구름은 집 한 칸 없으면서도 평화롭고 여유 있어 보인다. 머무를 집이 없으니 너른 하늘을 쉼 없이 흘러 좋고 흘러 흘러서 가다가 고단하면 어디든 잠시 쉬었다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디에도 얽매임 없는 그저 자유의 영혼일 뿐이라서 영원토록 흐름 속에 있는 구름의 삶은 참 멋지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내가 늘 놀랍고 신기하다. 그저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것만 같다. 하느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 내가 할 일은 쓸데없는 걱정을 내보내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며 살며 삶의 질문을 바깥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게서 찾기 위해 마음 바탕에 고요를 심으면서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피는 일 등이 모두 다 내 몫이다.


나의 몸은 아주 작은 변화에도 반응하는 하느님의 악기다. 나는 미미한 습도에도 늘어나고 줄어드는 머리칼 한 올 당신에 닿아 아주 작은 진동에도 깨져 버리는 악기 같다. 나의 소리는 금새 음계를 벗어나 버리므로 나는 자주 조율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음차(音叉)에 나를 얹어 고요함에 몸을 맡긴다.


나는 침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하늘과 구름이 고요하듯 산과 나무도 고요하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고요함에 들면 말이 사라진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언젠가 한 번 “뒷담화만 안 해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같은 제목으로 책도 출간된 바 있습니다. 살면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과 감정들을 우리는 가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다 보면 좋은 감정도 나오지만 좋은 것보다는 나쁜 감정이 더 우리를 깊이 지배하게 되고 더 크게 입 밖으로 불평과 불만을 쏟아붓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나 스스로가 추해 보이고 허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시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5-26.33)


매일 마음에도 없는 좋은 말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보복과 복수의 악의에 찬 말만이라도 주고받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구원의 길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을 듯합니다. 자주 기도하고, 깊이 기도하면서 주님 사랑 안에 잠기도록 합시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고 잠겨 있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처받은 내 마음은 잘 삭아 스스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사랑 안에 자주 머물고 그 사랑 안에 더 깊이 잠기게 되면 아예 상처받는 기회와 정도마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온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되뇌게 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예수님의 자기소개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해 돌아서셨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분이 앞장서서 걷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이 장면만 놓고 볼 때에 제자는 ‘따르는 사람’입니다. 앞서가며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분과 동행한 이들은 많았지만, 끝까지 따른 사람의 수는 적었지요. 뽑힌 사람들 대부분도 따라가다 달아났습니다. 군중으로 남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적당히 따르는 사람이 있고, 치열하게 닮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군중을 둘러보시며 제자를 찾고 싶어 하셨습니다. 끝까지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제자 되는 조건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조건이란 곧 그분의 자기소개처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기만을 오직 원했습니다. 그래서 내 목숨까지 미워했습니다. 아버지의 뜻 이루는 것만을 양식으로 삼고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 길에서 넘어지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아닌 자리는 내게 무척 불편했습니다. 나는 나의 계획과 생각에서 가난했습니다. 나의 소유를 다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것을 원하고 그 길에서 충실하다면, 내 이름으로 가르쳐도 좋습니다.”




좋은 행동방식으로 습득 되어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격유형은 타고 난다. 변하지 않는다. 이는 기후와도 같아서 비교적 일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행동방식은 성격유형과 덜라 수시로 달라질 수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격유형이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윗자리에 있다보니 살아오면서 습득된 행동방식이 남을 얕보는 부정적 사고로 고정되고 고착되어 버렸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15,1) 이는 구원을 향한 행동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그 모습을 바라다 본다는 것 자체가 비위를 거스렸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15,2).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본래 투덜거릴 사람들이 아닌데 높은 자리에서 살아오다 보니 낮은 사람들에 관한 행동방식이 부정적으로 습득 되어버렸다. 그들 일상이 이랬다.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비난하고 설교하는데, 급기야 생명을 죽이는 선수가 된 것이다. 그렇게 습득된 행동방식은 생각부터가 삐딱했다. 수준이하의 사람들을 본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구원에 관해서는 자기들만 고고한 척 나머지 사람들의 구원은 그들 생각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어떤 행동을 꺼내겠는가?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수준이하 사람들을 털끝만큼도 존중해줄 의사가 없는 행동방식을 꺼내 들었다.


양 백마리, 그중에 잃어버린 양 한마리, 그들에게 한마리 정도는 의미없다고 단정한다.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 마음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나는 혹시 그 부류의 부정적 행동방식으로 고착된 사람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모두가 살아가며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행동방식을 닮았으면 한다.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영혼은 수하의 사람을 끊임없이 사랑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김기현 신부님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 말씀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는지 하는 겁니다. 보통 남에게 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다보면, 어느 순간 고갈되고 지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희생적인 사랑은 내 것을 내어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바닥나면 지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힘들고 메마르다고 생각되면, 마음 저장고에 사랑할 힘과 에너지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만약 바닥이 났다면 그 저장고를 채워줄 수 있는 일, 곧 스스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오전 미사 후에 걷는데요. 그 걷는 대부분의 시간이 저에게 큰 위로와 쉼을 줍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걸음을 시작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다..’ 라고 혼잣말을 했었습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러한 시간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마련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 일은 내 것을 내어주는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힘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요. 오늘 나누고 싶은 것은 예전에 예수회 신부님들의 체험담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예전에 예수회에서 나오는 회지를 여러 권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내용 가운데 여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의 체험담이 있었는데요. 비슷한 느낌의 체험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냐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알고, 완벽해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누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이 정도를 나눌 수 있을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을 미루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미루다보면 사랑의 일은 먼 미래에만 존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무 나눔도 아무 사랑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모습 그대로를 내어 줄 수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저도 부족하지만 강론도 하고, 중국 수녀님께 한국어를 가르쳐 드리기도 합니다. 아마 실력을 생각하면 영원히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 아무 나눔과 사랑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요. 부족한 모습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를 나누려고 할 때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아마도 주님을 따르는 일, 또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이 생각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때로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죠. 그럴 때 포기하면 쉬운데, 기도와 말씀 안에서 때로는 다가가라고 때로는 회복하라고 이야기 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을 대면하게 될 때 조금은 십자가를 마주하는 것처럼 부담스럽고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 번 말씀을 덮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그분에게서는 멀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죠? 아마도 그분의 길이 어려운 길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분이 가시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생각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사제관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내 말에 자동완성 기능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단어를 던지고 멈칫하면,

주변 신부님, 수녀님, 아주머니가

내 말을 완성해 주신다. ^^;




추구해야 할 가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대립하고 등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곰곰이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탑을 세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듯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식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식별의 결과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의 출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자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혹 남의 자녀가 출가하는 것은 환영하고 내 자녀의 출가는 막는 이가 있다면 그 집착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오히려 소유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 충만하길 빕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서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더 챙기고 더 채우는 준비가 아니라 더 내려놓고 더 비우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탈란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버림과 따름>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은, 실제로 가족과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1) 가족은 우리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가족과 함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서 이산가족이 될 수는 없습니다.

2) 우리는 자기 목숨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가르치셨는데(마태 22,37-40),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이란, 가장 좋은 것만 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반대쪽으로 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온갖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 라는 말 때문에, 신앙생활을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는 생활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신앙생활은 그렇게 힘들거나 어려운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기쁨 가득한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신앙생활은 결코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길 끝에 부활과 생명이 있음을 믿고, 조금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만나기도 하지만, 어떻든 십자가가 주는 고통의 크기는 나중에 얻게 될 부활과 생명이 주는 기쁨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마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공사비가 중간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하나? (신앙생활을 계속할 만한 에너지가 다 떨어져 버렸다면 어떻게 하나?)

그럴 때에 해결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끝까지 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힘든 일을 겪을 수도 있고, 지칠 수도 있고, 어떤 이유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끝까지 갈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기도의 힘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나의 힘’으로만 하는 생활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1-33).”

예수님께서는 전쟁 상황으로 표현하셨지만, 이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예수님은 우리를 정복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싸우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과 한편이 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뜻에 따라서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메시아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지 한 번 헤아려 보아라. 메시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으니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에 빨리 메시아를 믿고, 회개하여라. 회개한다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종교와 신앙이 없어도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신론자가 아닌데도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생활보다는 세속의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 해당되든지 간에 사는 동안에 큰 어려움이 없다면, 예수님 없이도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찾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물론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쪽 세상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실제 상황을 보면,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임종 직전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자성사를 집전할 때마다, 또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때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힘을 능가한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Cat. 5, De fide et symbolo, 10-11: PG 33,518-519)

명칭으로 보아 믿음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교리에 관계되는 믿음으로서 어떤 진리에 대한 영혼의 인식과 동의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믿음은 영혼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아니하리라.” “아들을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 받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옛 의인들은 장구한 세월 동안 수고한 후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이 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땀 흘려 수고하며 하느님을 섬긴 후 얻은 것을 예수께서는 이제 단 한 시간만에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또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고 또 착한 강도를 천국의 집으로 인도하신 그분은 여러분들도 그 곳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고 망설여서는 안됩니다. 골고타의 거룩한 산에서 단 한 시간의 믿음을 가진 강도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도 믿는다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성서 어떤 곳에서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특별한 선물로 주시는 이 믿음은 교리와 관계되는 믿음뿐만이 아니고 인간의 온갖 힘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입니다.” 누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즉 마음 안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이렇게 되리라고 믿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면 그는 그 은혜를 받습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성서는 말해 줍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불같은 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자씨를 뿌리면 그것은 조그만 구멍에 들어가지만 점점 자라나 큰 가지들을 쳐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자리에서 보금자리를 찾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순간적으로 영혼 안에서 놀라운 효과를 거둡니다. 영혼은 믿음의 빛을 받을 때 하느님을 상상하고, 또 할 수 있는 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우주의 경계선들을 넘어서까지 미리 내다보고 만물의 종말이 오기 전 그 종말의 심판을 미리 보며 약속된 상급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그 첫 믿음을 갖도록 하십시오. 그 믿음은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둘째의 믿음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하신다.


‘나보다 더’라는 말을 덧붙이신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고 하시면서 어떤 마음 자세로 따라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박해 때에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였고, 평화를 누리는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신의 뜻을 철저하게 죽이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첫째로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하는 것과 같다. 완성하지 못하면 비웃음을 당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도 우선 충분한 열성을 쌓아 두어야 한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집회 2,1) 이런 다짐이 없다면 어떻게 목적지에 닿겠는가?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1절)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여기에 육정, 정욕, 재물욕 등도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뜻을 품었으면 결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 하나로는 탑을 완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계명 하나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일룰 수 없다.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1코린 3,12)을 지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다. 시편에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라고 하신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살기위해

버려야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리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버림으로

얻게되는

내적자유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신앙의 이 여정을

제대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십니다.


내것이라 착각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미련과 집착또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버려야 얻게되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버리지 못한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소유를 버려야

잃어버린 길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위령성월

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

내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버리는 이 여정을

먼저 걸어가셨음을

기억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았던 돈 5만원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잘 떠올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5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을 걷다가 주머니에서 흘렸는지 없어진 것입니다. 잃어버린 5만원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5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떠올려지게 됩니다. 맛있는 것 사 먹는 건데... 저녁 시간에 맛있는 치맥을 즐길 수도 있는데.... 잃어버릴 줄 알았으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나 줄걸...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비로소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후회를 갖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삶 전체에서 이러한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정말로 가진 것이 없을까요? 지금 있는 자리의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꽤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재산이나 명예가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가족과 친구 등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가지고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그냥 가지고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지요. 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 쓰지 못했는데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해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면서 이 세상에 남길 후회들을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이 세상 안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주님께 대한 사랑에 방해가 된다면 이 세상 안에서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통해서는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이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욕심과 이기심을 없앨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열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세우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일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후회할 일이 아닌, 후회하지 않을 일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이 행운아라고 여기는 만큼 행복해지는 게 인생이야(야마자키 마리).


행복하십시오.

요즘에 환절기라 그런지 감기에 걸리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를 보았는데, 행복한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감기에 걸릴 확률이 35퍼센트 낮다고 합니다. 이 행복한 사람은 독감 백신을 맞았을 때의 항체를 50퍼센트나 더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행복과 낙천성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한 사람은 심혈관계 질환, 고혈압, 감염의 위험이 낮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그리고 이 행복을 위해서 어떠한 생활을 하십니까? 사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행복한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행복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돈이나 명예 등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아니라고 합니다. 행복에 도움은 되겠지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또한 많이 웃으면서 기쁘게 살아가다보면 저절로 행복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결정적인 행복의 조건들을 쫓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행복의 조건만을 쫓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행복을 위해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래서 육체적으로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주일에는 삼각지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피정을 가셨고, 성소후원회가 새로이 조직되어서 방문을 하였습니다. 새벽미사와 교중미사를 함께하였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들만 미사를 하는데, 모처럼 본당에서 신자 분들과 함께 미사를 하니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역시 사제들은 신자 분들과 함께 미사를 해야 좋은 것 같습니다. 삼각지 성당은 교회와 출입로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성당과 교회가 이웃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오랜 시간 같은 출입구를 사용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이라는 말을 실천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림시기가 다가오면서 ‘특강’을 가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부평4동 성당, 복자 성당, 신당동 성당, 명동 성당’에서 특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하기도 하면서,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삶,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삶, 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삶에 함께 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저 역시도 이웃들을 기다려주고, 함께 하려고 합니다.

 

요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중요한 것 보다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들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고, 기적을 행하였으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나의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들 또한 언젠가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인생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뿐입니다.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라는 성가 61장이 생각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세상 명예 다 버렸네

 주 예수와 바꿀수는 없네/세상 어떤 것과도.”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 당신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한 세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철저한 자기포기와 위탁을, 추종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단호하고 엄중합니다. 말그대로 실행할 수 없다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약화시켜선 안 됩니다. 


오히려 제자로서의 내 삶을 부단히 점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각 단락마다 앞에 나오는 말마디가 ‘누구든지’입니다. 예외없이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려면 꼭 명심하여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응답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1.“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구약성경의 히브리말에는 “더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와 같은 비교급이 없어 부득이 ‘미워하다’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보다 가족 누구도,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더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가족은 물론 자신에 대한 집착 없는 순수한 사랑도 가능합니다. 세상과 사람 집착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뿐입니다.


2.“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둘째 조건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선물로 주어집니다.


3.“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위해 갖춰야 할 셋째 조건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항구하고도 한결같은 사랑이 있어 이런 자발적 자기 소유 포기와 예수님 추종입니다. 값싼 은총도 없듯이 값싼 예수 추종의 길도 없음을 봅니다. 이처럼 버림과 따름은 한 셋트를 이룹니다. 끊임없이 사랑으로 버리고 비워 자유로이 주님을 따라야 주님의 참 제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집착없는 순수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말그대로 무소유의 삶은 어려워도 무욕과 이탈의 정신으로 살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를 때 비로소 세상 모든 것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세상 무엇도 그를 매지 못하며 유혹하지도 못합니다. 사랑과 자유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진정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궁극 목표일까요? 아닙니다, 이웃사랑에의 투신이 궁극목표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로마서가 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무리 갚아도 사랑의 빚은 여전합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엔 영원한 초보자, 사랑의 빚쟁이입니다. 도저히 사랑의 빚에서 벗어날 길 없습니다. 이런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부단히 사랑에 투신하게 합니다. 바로 이런 이웃 사랑에 쓰라고 예수님 사랑의 추종으로 선물로 주어진 자유입니다. 


예수님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사랑과 하나로 연결됩니다. 구별할 수 있을 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두 사랑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우선순위는 예수님 사랑에 이어 이웃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웃사랑에 관한 모든 계명들은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끝없는 사랑, 멈출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은 모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영원히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요, 하여 우리는 영원히 사랑의 빚쟁이 일 수 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수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오늘 강론을 요약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사랑의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참 제자가 되어 당신과 이웃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날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나무도 멀게 느껴지는 것을 무엇일까? 마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케케묵은 말이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단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떨어진 것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종 권위가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권위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된 것일까? 혹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이윤추구가 차지한 까닭이 아닐까?

가치관이 변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대체 어떤 이를 스승을 모시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대체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는가?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편을 배우고자 하는가?

대체 무엇을 ‘앞세워’ 배우고자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제자가 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위의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4 개의 동사입니다. 동사는 행동하는 것을 표현해줍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 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그것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다’에서, ‘미워하다’는 동사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다’에서, ‘지고(βασταξω) 따르다’라는 동사와 ‘자기 소유를 다 버리다’에서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동사인 ‘미워하다’(μισει)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금지하실 리 만무합니다.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덜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사랑하다’는 말은 ‘더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에서,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를 미워했다.”(9,13)라는 표현이나, <루카복음>의 “어느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16,13)라는 표현이나,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다”(10,37)는 표현에서도 그렇습니다.

결국, 당신을 따름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당신의 뜻을 추종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의 일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더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무거운 삶의 십자가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기도 모임을 주재하러 갔다가, 모임에 참석하신 형제 자매님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표정들을 살펴보니 참으로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길 없었습니다. 다들 지고 계신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무척이나 힘겨운 모습들이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백번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사건, 난 데 없이 다가온 정말 원치 않은 불행, 도무지 수용하기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하느님을 향한 깊은 뿌리 내리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왕 다가온 십자가 너그럽고 기쁜 마음으로 지고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7절)

교회 역사 안에 영성의 대가들 가운데 특별한 분들이 계셨습니다. 어떤 성인들은 일부러 고통을 찾고 십자가를 짊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 같은 경우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해 얼마나 죄책감이 들었으면, 하루 해가 저물 때 마다 참회의 표시로, 주먹만한 돌맹이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답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같은 경우도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의 수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잠자리에서조차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기 위해, 침대요 밑에다가 돌맹이들을 깔고 잤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돈보스코는 사비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비오야, 성인이 되기 위한 다른 좋은 길도 많은데, 왜 하필 그리 고통스런 방법을 선택하느냐?” 그러면서 아주 쉬운 성인이 되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고통 속에서도 항상 기쁘게 지낼 것. 매일의 작은 의무에 최선을 다할 것. 교회 안의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에 충실할 것.

돈보스코의 조언을 들은 사비오는 성화의 방식을 바꾼 다음, 아주 쉽게 성덕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현대 영성 안에서는 더 이상 사서 고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열심히 매일 운동하고, 올바른 식습관으로 식사하고, 근심걱정 물리치고, 그래서 건강하게 이 세상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대신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나이를 조금씩 먹어 가다보면, 하나, 둘, 원치 않은 십자가들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은 드디어 평소 쌓아온 실력을 발휘할 때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십자가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영성의 핵심입니다.




사랑의 미명하에 악인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얼핏 보면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복음은 자신과 부모자식과 형제자매를 미워하라고 하는 반면 독서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도 이웃을 미워하라는 것도 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는 게 아니라면 사랑해야 할 사랑이 있고 미워해야 할 사랑이 있다는 얘기지요.


그러면 어떤 사랑은 사랑해야 할 사랑이고 어떤 사랑은 미워해야 할 사랑일까요?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참 사랑은 사랑해야 하고 거짓 사랑이나 잘못되게 하는 사랑은 미워해야 하지요.

사랑은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사랑하는 것이지만 요즘 와서 많은 사람이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그래서 잘못 사랑하고 있습니다.


감성적인 사랑을 사랑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희생 없는 사랑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사랑이란 싫고 좋은 감정에 따라 하기도 하고 않기도 하는 사랑, 다시 말해서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사랑이요,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랑인데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참 사랑이나 완전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런 사랑은 참 사랑이나 완전한 사랑이 아닐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과 반대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기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을 소유하려는 사랑일 경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착이고 소유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미워해야 할 사랑일 뿐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악이며 원수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미워해야 할 사랑입니다.


어제 성무일도 저녁기도 성경소구는 로마서 12장의 말씀인데 거기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지지요.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방해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사랑은 거짓 사랑이고 악이기에 우리는 악인 사랑을 미워하는 겁니다.

사랑의 미명하에 악인 사랑이 나에게 있고, 내 곁에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의 십자가, 나의 나약함

김명겸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란 우리 각자가 지닌 자신의 나약함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싶지만, 내 안에 그러한 나약함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신이 아닌 피조물인 이상, 그러한 나약함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렇게 각자의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 안에 그러한 나약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않고, 숨기고 감추곤 합니다. 내 안에서 나약한 모습을 본다는 것은 기분 좋지 않고, 더 나아가 괴로운 일이기에,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비록 그것이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일지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 거짓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고 감출수록, 자신도 모르게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게 진실함이 없이 진리이신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의 나약함을 바라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삶에 있어서 그 나약함을 보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분과 온전하 하나가 될 때까지 꾸준히 해 나가야 하는 작업이지, 어느 한 순간 이룰 수 있는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의 십자가, 나의 나약함은 무엇인지 볼 수 있고, 그 나약함을 조금 더 끌어 안을 수 있는 하루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참 제자됨의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길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좋아하고, 자기 목숨을 예수님보다 하찮게 여겨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을 따르는 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둘 뿐 아니라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사랑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7) 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와 악의 경향에 저항하는 싸움, 곧 영의 정신과 육의 정신의 헷갈림을 체험합니다. 이런 실존적 현실과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 상처 등이 바로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통을 의미 있는 것으로,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겠지요. 삶의 십자가를 받아들여 그 의미를 찾는 순간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고 고통의 상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거기에 평화의 자리가 마련되어 쉴 수 있으며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고통과 연약함을 끌어안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과 나의 모습, 바로 그 상태에서 사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 고통, 절망, 병고, 암담한 생활고 등을 품고 당신께로 오라고 손짓하십니다. 당신께로 다가가기만 하면 함께 아파하고 그 짐을 함께 져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고 사랑 실천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겠지요. 버려야 할 것이 어디 재물뿌일까요? ‘자신의 뜻’이나 사람, 명예나 자존심, 고집과 독선, 선입견과 편견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물 뿐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 성향들, 인간적 욕망들, 가치에 대한 강인한 충동, 명예욕, 탐욕, 이기심, 자애심 등도 버려야 합니다. 소유와 애착의 탯줄을 끊어버리고, 추측, 감정과 편견의 탯줄을 끊어버릴 때, 영의 눈으로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순수하게 보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23,9) 우리도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첫 자리에 두고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삶의 십자가를 사랑이신 주님과 더불어 기꺼이 감당하며,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행복한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 통속에 “청하기 전에 말하면 간섭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의 충고가 잘못하면 오히려 간섭이 된다는 말입니다. 애정을 쏟아 붓는 관계라고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고, 실패하며 방황하더라도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빼앗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어받아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 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는 말. 이 말이 우리 삶의 기준이자 비전입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나의 태도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해 봅시다. 상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 말과 다른 말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파토내려고 할 때, 내 마음 속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이 피어오르는지. 미움과 원망과 저주와 복수의 감정이 샘솟는지 아니면 연민과 자비와 배려의 마음이 피어오르는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김종오 신부님

더 많은 소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는 이데올로기는 산업화를 거치며 인간성 소외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것을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삶의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유만을 추구하는 경제 성장이 인간의 행복과 동일시 될 수 없고 오히려 비인간화 시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적인 삶은 결코 “최대 다수의 행복”을 이룰 수 없기에 효과적인 복지 분배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아직도 경제 성장으로 많이 가져야 행복하리라는 착각 속에 사는 우리입니다. ‘소유’만 집착한 급진적인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의 후유증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남편과 아내 그리고 중학생의 딸 가족이 동반 자살을 해도 분배를 통한 ‘존재’하는 삶보다‘소유’에 집착합니다.

경제 성장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고 많이 배워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OECD국가 중1위 입니다. 경제적 성장을 통하여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우리가 가지는 재물이나 관계를 맺는 사람은 우리의‘소유’가 아니라 관리하거나 돌보아야 하는 대상입니다. 무엇이든지 ‘소유’하려고 하면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관리하고 돌보기보다 착취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을 가져 옵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주어진 재물을 주님의 뜻에 맞게 관리하지만 ‘소유’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돌보지만 ‘소유’는 하지 않습니다.

위령의 달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빈손으로 되돌아간 하늘의 영혼들이 ‘버리는 만큼’ 이 땅에서 하늘의 행복을 누린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낌없이 버리기에

더더욱 아름다운

단풍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언제나 내려놓고

버리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이라

착각한 이 모든 것을

믿음 안에서

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버리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버리는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느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휘둘리고 얽매이길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옛 삶을 버리라 하십니다.


버리는 것이

따르는 것이며

따르는 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한 여행객이 남미를 여행하다가 안데스 산맥의 오솔길에서 노새를 타고 오는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의 뒤에는 그의 아내가 노새 없이 그냥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의 아내는 노새를 타고 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농부는 “저도 아내가 그냥 걸어오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탈 노새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자기만 편하게 노새를 타고 가는 것을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새가 한 마리밖에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못된 남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이 농부와 같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우선 나의 만족을 먼저 채우고 여유가 있을 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있어야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너무 많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차고 넘친 뒤에 베푸는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 형제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 나의 희생이 감수해서라도 베풀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자기 소유를 다 버리더라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을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 주님께서는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 역시 제1독서를 통해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이웃을 동정하기는 하지만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진 것 이상을 요구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꾹 움켜잡고서 베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시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즉, 자기가 가진 것만큼 베풀 수 있는 사랑 가득한 우리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것 이상을 넘어서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속 좁은 나의 뜻일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적당한 합리화를 말하면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말하는 뻔뻔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사랑에는 세상의 합리적인 사고가 통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합리화가 아니라, 그냥 무작정 실천하는 사랑의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2015년도 겨우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이 없다고 아쉬워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뜻깊은 2015년이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절망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도록 행동을 취하는 것(제인 구달).


한 가지 더 헤아리는 마음(‘좋은생각’ 중에서)

어느 날, 한 소년이 등굣길에 풀 한 포기를 발견했다. 그는 풀을 꺾어 스승에게 가져가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다. 한참을 살피던 스승은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다고 했다. 

“네 아버지가 식물학 박사이지 않느냐? 가서 물어보렴.”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아버지에게 풀을 보이며 말했다. 

“아버지, 이 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스승님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풀을 살펴본 뒤 이렇게 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내일 알아본 뒤 가르쳐 줄게.”

소년은 놀랐다. 아버지는 어떤 식물이든 다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소년이 학교에서 수업 준비를 할 때였다. 스승이 다가와 물었다. “어제 보여 준 풀의 이름을 알아냈느냐?” 소년이 아버지가 알려 주지 않았다고 답하자 스승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소년은 전날 스승에게 실망해 그를 비웃었던 걸 진심으로 뉘우쳤다. 

풀의 이름도 모르던 스승이 어떻게 갑자기 설명할 수 있었을까? 사실 소년의 아버지는 그 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얘기하면 아들이 행여 스승을 소홀히 생각할까 염려되어 스승에게 전화해 풀에 대한 정보를 주었던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솔직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모른 척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모른 척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위해서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배려를 통해서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도록 만들어 주지요.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지만, 조금만 더 크게 생각한다면 어떠한 마음으로 행동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아침이었습니다. 교구청 식당에서 카드를 하나씩 뽑았습니다. 카드 안에는 참된 행복이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뽑은 카드는 ‘행복하여라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였습니다. 저는 내용이 부담이 되어서 내려놓고 다른 카드를 뽑았습니다. 새로 뽑은 카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였습니다. 아무래도 박해를 받는 것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날 저의 행동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내년에는 ‘행복하여라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를 뽑더라도 바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을 만 번 정도 되풀이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오랫동안 연습했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악보를 보지 않아도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이 기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있습니다. 다른 노래도 좀 더 쉽게 연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들이 긴 대사를 외우고, 노래하는 것도 같은 이치인 것 같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제자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고, 기적을 행하였으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가진 것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들 또한 언젠가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자유는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자유롭고 자유로울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과 자유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사랑하여 자유로울수록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제자직의 우선적 출발점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버리고 비우는 삶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직에 대한 요구가 철저하고 비타협적이라 충격입니다. 


첫째, 주님의 제자는 모두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도 항구한 우선적 사랑이 성소의 잣대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에 대한,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수 있습니다. 주님도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실제 그대로 미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보다 누구도 더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 때 저절로 모든 사람에 대한 무집착의 사랑입니다. 역설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 아가페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바로 1독서 로마서가 말하는 이웃 사랑도 이런 주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검증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런 이웃에 대한 순수한 아가페의 사랑은 순전히 주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저절로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은 근절되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절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이가 주님의 제자이며, 그 무엇도 주님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않을 때 이런 순수한 이웃 사랑도 가능합니다.


분도 성인의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갈림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따를 수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입니다.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누구와 비교할 수도 없는 제 고유의 십자가를 자발적 기쁨으로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 말고는 참 사람의 내가 되는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비워갈수록 주님은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저는 산티야고 2000리길 배낭을 메고 순례하면서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나게 깨닫기도 했습니다. 최소한의 필수품과 매일미사를 위한 미사도구를 배낭에 넣어 등에 지고 걸을 때는 흡사 십자가의 주님을 등에 업고 걷는 듯 샘솟는 힘도 느꼈습니다. 


셋째, 주님의 제자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무소유와 무집착의 정신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포기에 이은 물질의 포기입니다.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 물질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로운 사랑의 투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집착, 물질에 대한 집착은 모두가 본능적 근원적 욕구들이기에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결코 값싼 낭만이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이요 희생과 아픔이 따르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라는 말마디에서 보다시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자유로운 제자직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는 누구든지 실행해야 할 조건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자주 우리의 삶을 점검해 봐야 할 세가지 필수 사항입니다.

1.모두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2.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까?

3.안팎으로 부단히 비우고 버리면서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 모든 해결의 지름길은 주님께 대한 항구하고도 열렬한 사랑에 있습니다. 좋으신 주님은 매일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께 대한 샘솟는 사랑의 힘으로 제 십자가를 잘 지고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시며 날로 당신과의 우정을 깊게 해주십니다.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잘 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시편112,4-5). 아멘.

 



예수 추종의 세 가지 조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치열한 경쟁 시대에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스펙’(specification)을 중요시합니다. 사회 분위기도 성공하고 잘 살려면 그런 것들이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남보다 잘 살고 행복하려면 무엇이든 갖추고 지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돈과 힘과 자격을 얻는데 집중하고 그것을 위해 시간과 정력을 쓰며 살아갑니다. 이런 가치관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 당신을 추종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제자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고(14,26),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하며(14,27), 자기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14,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두 자기포기와 희생을 강조하면서 그 길을 통해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가족은 물론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14,26). 예수님께서는 효도를 강조하시면서도(마르 7,10-12),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을 혈연관계보다 더 중요시하셨습니다(9,57-60). 주님을 따르는 일을 첫 자리에 두고, 자기 목숨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거르치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간하고 덜 중요한 것들은 과감히 포기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14,27)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각자가 져야 할 자신의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 죄, 상처, 어두움, 성격적 특성, 무지, 내적 외적 고통과 결함, 신앙심의 부족 등 매우 다양한 나의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누가 대신 져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온전히 나의 몫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쉽지 않기에 끝까지 따르기 위한 준비와 각오가 필요합니다(14,28). 


끝으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14,33) 곧 예수님을 따르려면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고 사랑 실천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소유한 바를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내놓지 않고, 자신을 버리지 않으며, 소유에서 해방되지 않은 채 예수님을 따라 사랑의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물에 대한 탐욕뿐 아니라 자신의 명예욕, 자애심과 이기심, 고집과 독선, 선입견과 편견, 고질적인 습관 등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추종하려면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애착과 인간적 집착,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자애심의 탯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어렵지만 그 길이 아니고서는 참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행복의 길은 자기포기와 희생의 길입니다. 버리고 낮추고 작아지는 몸짓을 통해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낸 편지 29절) 이 가을에 행복으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애착과 집착, 소유와 탐욕, 자기애와 독선, 왜곡되고 고착된 시각과 생각 등의 낙엽을 태워버리고 기쁘게 주님을 따라가는 행복한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마음

신희준 신부님

외삼촌이 비오 4세 교황일 정도로 명문 집안 출신이던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보로메오 가家의 수장 직책을 포기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부패하고 분열되었던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쏟으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개혁의 기초가 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를 주도하였고, 그 공의회의 성과물인 교리교육, 미사 전례 및 성무일도의 개혁이 제자리를 잡도록 노력했습니다.

 

또한 개혁이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몸소 자신이 교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밀라노 대교구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개혁하는 일이 누구한테서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한번은 자객의 칼에 상처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인은 교회를 올바르게 개혁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성인의 삶을 되짚어보고 복음말씀을 되새기면서 그 의미를 새롭게 살펴봅니다.

우리도 교회가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약자의 편에 서 있는지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판은 교회가 올바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비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의 발전을 위해 나 자신부터 기득권이나 선입견 등을 내려놓고, 자신을 온전히 투신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 일로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진다 해도, 그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로마 13,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빚이 많나요?

집을 얻는다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시집장가 보낸다고 이런저런 빚이 조금씩은 있겠지요?

자본주의 사회는 빚더미 사회입니다.

빚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지혜롭게 살 수 있다네요.

국가도 빚쟁이 기업들도 빚쟁이 가정들도 빚쟁이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빚지지 말라고 하시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모르고 하는 말이니 빚 조금 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사랑의 빚쟁이임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아무리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빚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영원한 사랑의 빚쟁이일 수밖에 없답니다.


오늘도 사랑의 빚을 지고 그 빚을 최선을 다해 갚아나가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 앞에 셈바쳐야 할 것은 내가 갚아야 할 돈이 얼마냐가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을 나는 얼마나 갚으려 노력했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자, 오늘도 우리가 받은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나도 다른 사람에게 나의 작은 사랑을 나눔으로써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 나가도록 합시다.

사랑의 빚은 일시불이 아니라 매일 죽을 때까지 장기저리로 갚아야하는 하느님 나라의 금융상품이랍니다.

  


 

자신을 버리는 사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자신이 되고 싶고 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몸과 마음이 애착을 느끼는 것에서 자유스러우려면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싶으면, 내 것을 버려야 전체를 얻을 수 있다. 비우는 사람만이 내 마음에 새로운 것 신선한 것이 채워집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듯이 이사람 저 사람 다 챙기고 이끌고 갈려면 가야할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나라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나라를 관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족을 챙기다보면 부정 부조리를 낳게 되어 퇴출 되거나 신용을 잃게 됩니다.

주님은 “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 심지어 자기지신 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고 하십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욕망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면 자기 그릇만 채우려하면 남을 생각할 기회가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 적이어서 진, 선, 미이신 주님을 따라 살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생각, 말, 행동에도 버려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이 많다, 나는 이런 역사적 인물이다. 내가 한 업적을 들추어내어 자랑만 하려는 사람은 자기기만에 빠져 남을 돌보지 못합니다. 참으로 자신의 업적이 빛나는 것은 죽은 다음에 들어나고 평가를 받게 됩니다.

 

저는 모든 짐을 지고 자기를 끓어 안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사는 이들에게 자기를 벗어나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소유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소유하지 않을 때

우리의 부족함조차

기쁨이 될 수 있음을

십자가의 신비에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미움도 사랑도

자기 소유로 여기는 데서

우리의 고통은 시작됩니다.


삶이란 탑은

맡기고 버리는 것에서

온전해 질 수 있음을

떠나보내면서

깨닫게 됩니다.


내 것이 아님을 알기에

하느님의 것임을 알기에

십자가마저도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삶의 시작과 마침은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하려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어드려야 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소유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평화로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평화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믿는 평화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걸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아름다운 하느님의 숲을

이 계절에 다시 만납니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소유할 수 없는

우리네 삶입니다.


소유는 서로를 죽이지만

나눔은 서로를 살립니다.


소유는 자아를 향하지만

무소유는 하느님을 향합니다.


소유라는

욕망을 버릴 때

가까워지게 되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분명 사랑에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 여기는

한없이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건

소유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소유는 결코 우리를

겸손한 믿음으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내어주는 사랑에

있습니다.


주님과의 충실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임을

잊지않고 실천하는

나눔과 따름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소유를 버리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성공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 성공은 세상의 것에 기준을 두고 있지요. 돈을 많이 버는 회사의 CEO나 부자, 세상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대통령, 과학자, 예술가, 연예인 등등이 될 때 성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정말로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이루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삭막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행복할 것 같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어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세상 안에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의 기준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 경쟁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저 사람을 누르고 내가 올라가야 한다는 성공, 이런 성공을 해서 과연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세상의 경쟁과 다툼이 아닌, 사랑과 일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일치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마을에 두 강아지가 있었지요. 이 두 강아지 중의 한 마리가 마을 안에 천 개의 거울이 있는 집에 호기심에 들어갔습니다. 들어서자 천 마리의 강아지가 자신을 보고 반기는 것입니다. 이 강아지는 너무나 신나서 “정말로 멋진 집이구나. 앞으로 자주 와야지.”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자기 친구 강아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이말을 들은 다른 강아지 역시 그 천개의 거울이 있는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천 마리의 강아지들이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것입니다. 그는 얼른 집을 나서면서 이렇게 생각했지요. 

“우와! 정말 무서운 곳이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누구에게는 가장 멋진 곳이고, 또 누구에게는 가장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다른 곳일까요? 아닙니다. 똑같은 곳이지만,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가장 좋은 곳이 될 수도, 또 가장 무서운 곳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에 갇혀 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이고, 반대로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그래서 사랑하며 산다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가지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세상의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해야지만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강조하듯이,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께 기준을 맞추는 삶, 주님을 무조건 따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한 삶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받는 자로 만드는 사람은 더욱 아름답다(무라카미 하루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

어떤 책에서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감옥과 수도원 모두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똑같은 상황에서, 감옥은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불만을 터뜨리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는 감사할 일들을 계속해서 찾습니다. 하루라는 소중한 시간을 주심에, 또한 하루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심에... 그러다보니 감옥과 달리 행복을 쉽게 찾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시 하나의 감옥을 만들 수도 있고 수도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불평불만 속에 산다면 반드시 나가야 할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이고, 반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기뻐한다면 수도원에서 행복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골탕 먹으라고 보낸 감옥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행복하라고 보낸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곳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진실을 선택하는 것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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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젊은 친구들이 사랑 문제로 상담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그 중,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부모들이 반대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상담 내용도 제법 많다.

부모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상대의 경제적 능력, 학벌, 자라온 환경, 가족사항, 연령 등등 그 가지 수가 헤아릴 수 없다.

늘 자기 자식이 아깝기 마련인가보다.

이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다룰 기회가 주어지리라 본다.


상담을 청하는 젊은이에게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 사랑의 결과가 어떻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결심이 섰는가?”

보통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저하기보다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또 질문을 던진다.

“부모님을 사랑하는가?”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면 나의 답이 이어진다.

“부 모는 자식의 행복을 바란다. 그저 다 퍼주고 싶은 것이 부모다. 그러기에 자식에 대한 욕심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반대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너의 선택이 옳을 수도 있고, 너의 예상이 빗나갈 확률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는 너의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다.

행복할 자신이 있다면 밀고 나가라.

아니,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선택한 사랑에 책임을 지고 행복하게 살려 노력할 자신이 있다면 결혼을 해라.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는 자식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당장은 부모에게 상처나 배신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부모 역시 행복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간 선남선녀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축복 속에 결혼을 한 이들도, 그렇지 못한 결혼을 한 이들도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은 똑같이 열려있다.

그만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함께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둘 사이에 넘기 힘든 난관에 부딪히는 상황이 오더라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두 사람 각자가 옳음에 의지하려는 마음이다.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시작해도 사랑으로 끝을 내기 힘든 것이 한계 많은 우리네 사랑살이다.

하물며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는 부부의 연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예로 들어봤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진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당신께서 맺어주신 가장 큰 인연을 버려야 한다는 무정한 하느님이 아니시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행복해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많은 죄를 지어온 세상이다.

사랑은 제대로 해야 사랑이다.


서로가 아름답게 살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진실을 기억하자.

부모든, 자식이든 행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한 것이다.




'알몸'의 상징적 의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시황 때에 조고란 자는 황제의 시종을 하는 일개 환관(내시)에 불과했으나 황제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나중에는 정치에까지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고조는 성격이 교활하고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뒤에 시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거짓조서를 꾸며 영리한 태자인 부소를 죽인 다음에 우매한 차자인 호해를 세워 천자로 추대하였습니다. 이 새 황제는 자기가 즉위한 것은 오로지 조고의 공이라 인정받게 하고 조고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으니 그의 세력은 날로 높아갔으며 또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한낱 허수아비고 문무 백관은 황제의 분부보다 조고의 말을 두려워했으며 복종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쪽지방에서 노루 한 마리를 조정에 보내왔습니다. 조고는 슬그머니 자기의 위세가 얼마나 당당 하나를 시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노루를 이끌고 어전에 나아가 “이것은 서부지방에서 나는 말이 온데 하도 진귀하기에 헌상하나이다.”라고 조고는 아뢰었습니다. 황제는 웃으면서 “아니야 이것은 말이 아니고 노루이다. 아마 경이 잘 못 본 모양이요.”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조고는 말이라고 우기고 또 황제는 노루라고 고집하시어 급기야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정직하게 노루라고 대답한 신하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신하들은 조고의 뜻을 거스르기가 두려워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황제도 중과부적으로 말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에 노루라고 정직히 대답한 신하는 쫓겨나서 진리는 불의 하게 구축을 당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마록(馬鹿)이란 말이 생기었습니다.

 

거짓말은 ‘힘’과 연관이 있습니다. 조고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힘 때문에 자신의 것을 잃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각자가 지키고 싶은 평판이나 소유가 있는데 그것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부터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화와에게 뱀이 말합니다.

“이 선과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과 같이 된다.”

하와은 반박합니다.

“하느님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뱀은 끝까지 거짓말을 합니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네가 하느님처럼 될까봐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하와는 뱀의 말을 따릅니다. 즉 뱀에게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힘을 주고 하느님의 말씀에선 힘을 빼내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짓말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이 나무 뒤로 숨고, 또 그들의 몸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곧 그들이 죄를 지었음을 알았습니다. 몸을 가리는 것도 그만큼 숨기는 것이 많다는 것인데 숨기는 이유는 그것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자신들이 지닌 입지가 깨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가진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거짓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더 리더>라는 영화에서 한 사춘기 아이는 한 여자에게 책을 읽어주며 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8년 후 아이였던 마이클은 법대생이 되었고 나치 전범들을 재판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때 만난 한나도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나는 그 때 유태인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지만, 다른 범인들은 이 모든 보고서를 써 올린 가장 큰 책임자가 한나라고 몰아세웁니다. 판사가 글씨체를 보기 위해 글을 써 보라고 하지만 문맹이었던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것이 만천하에 들어나는 것이 두려워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20년 형을 받게 됩니다.

20년 동안 마이클은 한나에게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를 감옥으로 보내줍니다. 그리고 이제는 중견 변호사가 된 마이클은 한나가 유태인 아이들을 교회에 가두어 모두가 타 죽게 만든 일을 뉘우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동안 감옥에서 뭘 깨우치셨는지 모르겠네요.”

한나가 대답합니다.

“뭘 깨우쳤냐고? 글을 깨우쳤지.”

절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만 지키려는 한나에게 실망하여 돌아섭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반응을 보고 한나는 그날 목을 매어 자살하게 됩니다.

 

모든 관계는 나의 것을 잃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깨어지게 됩니다. 그런 자존심은 거짓을 만들고 거짓으로 자신을 감추려합니다.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상대가 나에게 더 깊이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끼리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도 관계를 맺는 것인데 내가 나의 힘을 챙기려한다면 그만큼 그분과 가까워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 벌거벗겨진 상태로 그리스도와 대면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그분과 멀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벌거벗음은 진실함을 의미하고 무소유를 의미하고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시 위선의 옷을 벗어야합니다. 고해소까지 들어와 자신의 잘못을 다 고백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사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의 모습을 회복해야합니다.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아무 것도 걸친 것이 없는 벌거숭이가 됩시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유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게 하는

낙엽의 계절입니다.


소유할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자연의 빛깔입니다.


이와같이 자연은

버리고 비우기에

온전히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소유와 집착은

언제나 삶에 대한

상실과 분노로 되돌아옵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유와 집착에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반성과 감사로

우리의 생명은 풍요로워집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입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인생의 끝모습은

언제나 무소유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게 됩니다.


소유를 버렸기에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 이하루는

우리가 버리고 비워내야 할

집착과 소유를

기쁘게 주님께 봉헌하는

무집착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버리고 놓아주어야

모두 제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노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행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노래를 해서 행복해진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노래를 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즉, 저절로 행복이라는 것이 내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내 자신의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행복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마 열이면 열이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위한 행동을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고, 그 행복이 저절로 내게 다가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행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행복해져야 주님을 믿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주님을 믿기 때문에 행복한 것인데 말이지요.


미사를 봉헌하다보면 시계만을 계속 바라보는 사람들이 계십니다. 미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가시는 분들도 봅니다. 일주일에 한번 주일미사 참석하는 것도 큰 인심 쓴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성당 안에서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밖에서는 심지어 식사전후 기도도 바치지 않습니다. 봉사와 희생은 시간 많은 사람이 해야 할 몫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항상 시간이 없다고만 말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나에 대한 사랑에만 온 힘을 쏟습니다. 이해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불평불만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 주님을 믿겠다고 생각하는 너무 많은 예가 있습니다. 그러한 예들만을 철저하게 쫓고 있었던 나는 아니었을까요? 과거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이 먼저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참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위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단순히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래서 가족까지도 미워하라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참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행복해지고 싶은 여러분. 나는 이제까지 무엇이 먼저였는가를 그리고 이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묵상해보십시오.


오늘을 잡아라! 그리고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으로 믿어라(호레이스).


병원에서...

몇 달 전, 종합검진 결과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다고 간단한 검사니까 다시 검사를 하라고 하더군요. 검사를 마치고 다시 의사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종합병원이라 그런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긴 줄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할 일도 많은데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잠시 뒤, 저는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기실에서 가장 온전한 몸으로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서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들 안 좋은 안색을 보이고 있었고, 너무나 힘들어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디 한 군데 아픈데 없으면서 내 차례가 빨리 오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던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는 불평불만들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말이지요.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은데, 불평불만으로 인해 감사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것들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통해서 행복도 내게 조금씩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인천교구 답동성당에서는 장례미사가 있습니다. 인천교구의 한 젊은 사제의 장례미사이지요. 이제 서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신부, 그런데 아쉽게도 주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신부와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릅니다. 제가 보좌신부 때 신학생으로 함께 캠프 갔던 일, 수영장 다니던 일, 청년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일들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얼마 전, 신부가 직접 로스팅해서 내린 커피를 함께 마셨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면서 후회도 참 많이 듭니다. 그때 내가 왜 더 따뜻한 말을 못해줬을까? 그때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등등……. 후회되는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어제 아침 답동성당에서 문상을 하고 미사를 봉헌하는데, 주례와 강론을 해주신 원로 신부님께서 죽은 그 신부를 향해 “이 못된 놈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원로 신부님이 바로 죽은 신부가 신학교 들어갈 때 추천서를 써주신 아버지 신부님이거든요.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아들이라 못된 놈이고, 한 명의 사제를 만들기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데 본전도 뽑지 못한 채 죽었다고 못된 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주님께서 필요하시니 부르신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주님께서 필요하시니 부르셨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후회하게 됩니다.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음을,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를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그 후회할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겉으로 보이는 단순히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사랑과 희생이 바로 십자가의 본래 모습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에 사랑과 희생을 간직하면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이 길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후회할 일을 줄여나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가득 찬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 삶으로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외면하였던 사람,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아니 줄여라도 나가겠다고 주님께 다짐하여 봅니다. 


주님, 사제 유시명(도미니코)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비록 상대가 어리석다 하더라도 그의 말속에서 무엇을 듣고자 하는 이가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다.(존 러스킨)


뚝딱뚝딱, 망치 소리로 남은 사람(‘좋은생각’ 중에서)

1935년 미국 몽고메리의 극빈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은 백만장자를 꿈꿨다. 여섯 살 때 통통하게 잘 키운 돼지 한 마리를 11달러에 판 것을 시작으로 대학에 입학해서는 친구와 유통회사를 차려 연간 1만 5천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뒤에도 돈 버는 재미에 빠져 휴일도, 가족도 잊은 채 일에 매진했다. 스물아홉, 드디어 그는 백만장자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서른이 되던 해 아내가 결별을 선언했다. 돈만 쫓는 무의미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호화 저택, 최고급 승용차, 근사한 별장, 사랑스런 두 아이까지……. 모든 걸 갖췄지만 행복하지 않은 삶,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아내와 진지한 대화 끝에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로 하고, 살 집을 뺀 전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즈음 유년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한 노부부의 허름한 오두막을 고쳐 주고 뿌듯해하던 아버지, 그리고 말끔히 고쳐진 오두막을 보고 환하게 웃던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그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비가 새는 낡은 판잣집에서 사는 사람들, 다리 밑에서 생을 이어 가는 노숙자, 쇠똥으로 지은 집에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 등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을……. 그리고 1976년 ‘보금자리’란 뜻의 해비타트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펼쳤다.

백만장자의 삶을 버리고 사랑의 보금자리 백만 채를 짓는 아름다운 꿈에 도전한 사람, 그는 바로 밀러드 풀러다. 그는 직접 망치를 들고 15평 남짓의 작은 집을 지어 집이 필요한 이들에게 선물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터전 삼아 무너진 가정을 세우고, 그들 역시 이웃의 집을 짓는데 참여해 수백 시간씩 땀을 흘렸다. 그렇게 국적, 종교, 인종을 뛰어넘어 집짓기 운동에 동참했고 개인과 기업 등이 후원하는 가운데 지난 30여 년간 해비타트 이름으로 95개국에 무려 30만 채에 이르는 집이 세워졌다.

2005년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루이지애나에서 어린 두 딸과 사는 엄마에게 집을 지어 주고 그는 말했다. “이 소녀들이 훗날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금자리가 생겼으니 그들의 생은 보다 나은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파괴와 분열의 상징일 수도 있는 ‘망치’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집 짓고 모든 경계를 허무는 사랑의 도구로 바꾼 풀러. 지난 2월,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짓기 시작한 사랑의 집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24분마다 한 채씩 서고 있다. 뚝딱뚝딱, 그 망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제자 되기

장동현 신부님

예수님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덜 사랑하다’를 ‘미워하다’로 표현한 사례가 잦습니다. 그러니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에 움찔했던 분들은 마음을 놓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며 효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었던 모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루카 11,?28)

또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제자가 되겠다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나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혈연관계보다 ‘따름’을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의 사도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생과 봉사만 남기고 다 버린 삶은 참으로 힘에 겨운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 희생과 봉사, 제자 되기, 사도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더 힘듭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경우도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힘겨운 나날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자가 되지 않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딛고 가족을 떠난 제자들에게 종말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30)[200주년 신약성서주해(분도출판사) 참조]


 


제자는 아무나 되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가 양성을 하면서 성소 책임도 잠시 겸할 때입니다.

수도원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는 수도원에 들어오겠다는 것이 반갑고 그를 덥석 받아들이고 싶지만 오히려 담금질을 합니다.

들어오려는 너의 의도는 순수하냐?

네가 들어와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 하냐?

네가 이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 하냐?

이렇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얘기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입회를 유보시킵니다.


전술상 그렇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는 사실 저희의 삶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뽑으신 사람만이 하는 것이며, 그에 합당한 준비와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 즉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격은 명문 대학을 나오면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저러한 자격증을 많이 가진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자격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성취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참으로 많은 제자들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사제, 수도자가 되는 이유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름이 아니라 영광과 환호를 받으려는 것이고,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은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시기 위함인데 제자들은 영광스런 왼 자리와 오른 자리를 차지하려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자격은 주님을 따르려는 목적의 순수성과 십자가를 지려는 자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닌 예수님 그분 자신이 따르는 이유의 전부가 되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이런 것이고 그 목적이 이런 것이라면 이제 복음에서 주님이 비유를 드신 것처럼 먼저 앉아서 잘 계산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세가 제대로 된 자세인지 따져야 함은 물론이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 해도 정말 나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지, 정말 그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는지, 어떻게 그 십자가를 질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시자 마실 수 있다고 대답을 하지만 결국은 도망친 그런 제자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발목 잡는 집착,,

전삼용 요셉 신부님

원숭이가 많은 지역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단단히 매여 있는 둥근 통에 원숭이의 손이 들어가 먹이를 하나 간신히 꺼낼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통 안에는 원숭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를 많이 넣어둔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둥근 통 가까이 와서 먹이 냄새를 맡고 구멍 안에 가득 들어있는 맛있는 먹이를 보고는 그 통 주변을 한없이 뱅뱅 돈다고 합니다. 다른 데는 볼 겨를도 없이 뱅뱅 돕니다. 그러다가 손을 그 구멍으로 넣어 적은 부스러기 먹이 하나를 꺼내서 입에 넣어 보고는 그만 환장을 합니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손을 깊숙이 넣어 손을 가지고 잡을 수 있는 만큼 먹이를 잡습니다. 그리고 손을 빼려니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왜 손이 통에서 빠지지 않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원숭이는 손을 먹이통에 넣은 채 뱅글뱅글 돕니다. 덫을 놓았던 사람이 이것을 보고 걸렸다 생각하고 좇아오면 원숭이는 도망을 쳐야겠는데 손이 걸려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 원숭이가 도망칠 수 있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손에 잡고 있는 먹이를 포기하면 쉽게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는 그것을 하지 못해서 뱅뱅 돌다가 눈이 말똥말똥한 채로 잡히고 만다고 합니다. 결국 집착이 발목을 잡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전파를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몸이 가벼워야 합니다. 한 달 이상 성지순례를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엔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많이 챙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걷다가보면 아주 작은 무게도 크게 지장을 받기 때문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하나하나 버려나가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짐이 많이 준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 순례를 끝마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 무게 때문에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있으면서 또 사제가 되어서 성소의 길을 포기하는 많은 경우를 접했습니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성소의 길에 들어설 때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지니고 있었던 것들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자신이 가정을 살려야겠다고 옷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족에 대한 애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그것이 결국 발목을 잡게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머니께서 찾아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

결국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랐던 것처럼 어떤 집착에도 매이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것 중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사람의 애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워하라!’고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함께 나와 공부하는 어떤 신부님들은 어머니께서 홀로 한국에 계십니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한국에 들어가 효도를 하고 싶지만 한국에도 못 들어가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여기서 사는 것도 힘들고 한국에 계신 어머니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온전히 버린다면 주님께서 어머니를 대신 잘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사랑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큼 성모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성모님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분들은 다만 아버지의 뜻을 위해 애정에 매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분들의 사랑을 끊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발목을 잡지 않으셨기 때문에 두 분은 하느님도 갖고 애정도 잃지 않게 되신 것입니다.

독수리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발에 실을 묶어 놓기만 하면 날 수 없습니다. 집착이 이런 것입니다. 무엇에 집착하면 그것도 가질 수 없지만 집착을 끊으면 모든 것을 갖게 됩니다. 사실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집착들이 끌려오는 것입니다. 결국 갖지 못하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버려 주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얻도록 해야겠습니다.




<짜장면 곱빼기와 짬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중국 음식점에 들어설 때마다 늘 느끼는 갈등이 한가지 있습니다. 쫄깃쫄깃한 짜장면 곱빼기를 시킬 것인가? 아니면 국물이 얼큰한 짬뽕을 시킬 것인가? 하는 갈등입니다.


이런 갈등은 저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들어간 한 아이는 홀서빙하는 분이 오셔서 주문 받는 그 짧은 순간(1분도 채 안 되는)에도 마음이 서너 번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창피하게 한 사람이 한꺼번에 짜장면 곱빼기와 짬뽕 두 그릇을 모두 시켜 먹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쉽지만 한 가지를 선택하면 다른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세상사는 기본 이치인 듯합니다. 이번에 짜장면 특유의 쫄깃쫄깃하고 구수한 맛을 보고 싶다면 짬뽕은 포기를 해야 하지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지극히 충만하신 분,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당신 자비로 채워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전체를 원하시는 분,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갈라져서 이쪽에 몇%, 저쪽에 몇%, 하느님께 몇% 같은 신앙, 당신이 아닌 다른 대상에 더욱 마음이 쏠리는 신앙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매사에 확실하신 분,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적당 주의를 원치 않으십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탐탁지 않게 여기십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원하십니다. 적당함이 아닌 확실함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살 전체를 당신께 투자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 한 구절을 통해서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기억하십시오! 크게 버리면 반드시 크게 얻을 것입니다. 전부를 걸면 전부를 얻을 것입니다. 크게 비우면 크게 느낄 것입니다. 크게 포기하면 크게 채워질 것입니다.

세상의 달콤한 맛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입니다. 한번에 짜장면 곱빼기와 짬뽕을 다 먹겠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큰 가치관이자, 보다 우선적 대상인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세상의 쾌락과 유희-에 대한 포기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포기도 적당한 포기, 잔머리 굴리며 하는 포기가 아니라 완전한 포기, 100% 포기가 중요합니다.

크게 포기한 만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급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입니다. 크게 비운만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선물은 더욱 값진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미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 하느님의 맛을 안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보십시오. 이 세상 그 어떤 달콤한 쾌락도 그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한 외팔이가 있었습니다. 평생토록 외팔이라고 놀림 받았던 그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고 바닷가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양팔이 없는 사람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갑자기 궁금해진 그가 춤을 추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아니, 팔이 하나밖에 없는 나도 괴로워서 죽고 싶은데, 당신은 양팔이 없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춤을 추고 있습니까?”

그러자 양팔이 없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너도 똥꼬 한번 간지러워봐라. 임마.”

팔이 하나뿐인 남자는 그 순간 번쩍 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제 한 팔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한 팔이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면 언제나 찡그릴 수밖에 없지만,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우리는 언제나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두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두다보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욕심도 대단하겠지요. 즉, 많은 이들이 자기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욕심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따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 3가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첫째,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항상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 미워하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워하다’라는 말의 본래 뜻은 ‘어떤 것을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 소홀하게 여긴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항상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결국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자기 소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던 경우가 기억나실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소유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정말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인 성녀께서 이 길을 걸으셨고,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역시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결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욕심을 버리는 용기와 결단만이 참 행복의 길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엄마는 강하다(‘좋은 생각’ 중에서)

2002년, 제36회 세계체조선수권대회 여자 뜀틀 경기에서 동메달을 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옥사나 추소비티나. 한데 그는 아들에게 꼭 금메달을 선물하고 싶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10대 선수들이 메달을 휩쓸어 가는 체조에서 스물일곱 살은 고령으로 통한다. 그럼에도 옥사나는 놀라운 실력을 뽐내며 많은 이의 우려를 단번에 깼다. 하지만 아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그의 아들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완치하는 데 드는 치료비가 무려 1억 원. 가난한 나라의 체조 선수에게 그 돈은 너무 큰 금액이었다.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상금이 우리 돈으로 약 3백만 원. 그나마 금메달을 따서 광고 모델이라도 한다면 조금 더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국내외 체조 경기에 나가며 금메달을 목표로 삼았다.

날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체조 연습을 한 끝에 이번 베이징올림픽 여자 체조 도마 결승에서 당당히 은메달을 딴 옥사나. 1992년 바로셀로나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올림픽에서는 두 번째 메달이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 도마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를 획득해 역대 여자 선수 중 한 종목 최다 메달 기록을 갖고 있다.

비록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조 선수로서는 많은 서른세 살이란 나이에도 여전히 선수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들이 있었기에 더욱 뛰어난 체조 선수로 거듭날 수 있었다.

 

 


가난 부인

이재성 수사님

참으로 버려야 할 나의 소유란 무엇일까요? 물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명예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의 이웃 사람이나 주변 상황에 대한 나의 불만과 평가와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 주변 상황이나 이웃에게 늘 못마땅하다는 말은 곧 그들에게 끊임없이 어떤 바람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만일 끊임없이 바라던 것이 개선되어 드디어 이루어졌다 합시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또다시 부족함과 함께 또 다른 바람이 생길 것입니다. 바람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평화가 머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번 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내려놓으면 허리가 펴지는 편안함이 느껴질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하는 ‘가난 부인’입니다. 그러나 정말 버리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바람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들을 통해 이루려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자녀들을 자신의 손에서 내려놓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나선 길에서는 자신의 가장 큰 욕심을 버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며, ‘가난 부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빈 무덤

김은배 수녀님

제가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를 선택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살고자 했던 것은 그 당시 본당 사목이 아닌 임종자들을 돌보는 특수 사도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소임지가 본당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던지 못 가겠다고 감히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본당에 갔습니다.

그곳은 저를 자꾸만 작게 만들었습니다. 실수는 일상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운 마음에 또 너무 잘하려다 보니 미사 준비를 해도 막상 미사 때는 빠진 것이 생각나 얼굴은 빨개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떄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늘 긴장과 실수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은 저를 압박했고 결국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잘 견디며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본당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건강을 이유로 수련소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그렇게 고생한 저를 질책하고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침저녁으로 짐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중에 저를 잘 아시는 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빈 무덤에서 무얼 찾고 있느냐?"고 하시며 자신을 잘 들여다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씁니다.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며칠을 성당에서 울고불고 매일 성체조배를 하면서 제 자신을 내려놓는것이 이렇게 힘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첫 서원만 하면 나의 삶이 아닌 예수님의 삶으로 변화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첫 서원을 하고 사도직에 나갔을 때 제 모습은 하나도 변화된 것이 없고 오히려 제 안에 수도자의 상을 탑처럼 쌓아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제 안에 들어 앉아 있던 수도자 상이 무너지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기까지 모든 이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은 그분의 사랑이 가느다란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저의 작은 욕심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면서 저는 비어 있던 제 무덤을 조금씩 채우고 있습니다.




사랑의 의지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내가 나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았던 바로 그때이다.

가장 불행한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함부로 하는 얘긴지 모르지만 자기 인생을 사랑할 줄 모르고 자포자기한 인생이 아닐까?


우리는 자기를 집착하고 고집하는 나는 포기해야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 나, 이웃을 사랑할 나, 모든 것을 유의미케 할 나는 사랑해야 하고 나의 삶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살까지 가지는 않아도  삶의 의지를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내가 너무 싫어서. 나의 삶이 너무 구차해서.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새롭게 사랑하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의 사랑이 보입니다.

큰 것을 욕심내서 의지를 꺾지 않고 작은 것도 사랑하며 그 것을 실천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합니다.

실패가 끝인 사람과 실패가 새로운 시작인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실패하는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일어서도록 늘 사랑의 의지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 방에 놀러갔다가 노래 한 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노래를 틀어주면서 가사를 한번 귀담아서 잘 들어보라고 당부했지요. 저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서 가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죽이지. 가사가 정말로 끝내주지 않니?”

그런데 저는 솔직히 가사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었고,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께서는 약간 오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도한 표현까지 쓰면서 이 노래의 가사가 너무나 좋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칭찬하고 있는 신부님께 “그 노래 형편없는데?”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동조를 했지요. 

“와~~ 정말로 좋은 노래네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노래를 어떻게 아시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사실 ** 신부님 알지? 그 신부님 방에 가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인데 정말로 좋더라고. 그래서 음반을 사서 이렇게 들어보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선배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신부님은 많은 후배신부들이 존경하는 신부님으로 선배 신부님께서도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지요. 이렇게 좋아하고 존경하다보니 신부님께서 듣는 노래도 듣기 좋은 것이고, 그 신부님을 연상하면서 듣다보니 그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저도 그 신부님을 연상하면서 들으니 그 노래가 좋아지더군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나 역시도 좋아지지요. 심지어 그 사람의 단점과 부정적인 모습까지도 장점과 긍정적으로 바꿔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고백한다면 주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좋아야 할 텐데, 과연 그런가요? 주님께 대한 갖은 불평과 불만들. 이 모습이 과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조금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미워한다’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극단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 소홀히 여긴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든 것보다도 먼저 즉,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첫째 자리에 모시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있었지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주님의 활동에 대한 불평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데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은 이제 그만~~


공부를 하는 까닭(‘좋은 생각’ 중에서)

자로가 하루는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왜 힘든 공부를 해야 하나요?”

공자가 대답했다. “공부는 태평할 때 군인이 칼을 가는 것과 같다. 태평할 때 칼을 갈아 두지 않으면 갑자기 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당할 수 없다. 공부도 앞으로 닥칠 세상살이에 미리 슬기롭게 대처하자는 것이다.”

공자는 말을 이었다. “공부는 농부가 농사철이 닥치기 전에 우물을 파고 둑을 쌓고 농기구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한가한 겨울철에 우물을 파 놓으면 가물어도 논밭에 물을 대고 짐승도 먹일 수 있다. 또 강가에 둑을 튼튼히 쌓으면 장마가 닥쳐도 걱정이 없다. 농기구를 미리 준비하면 봄에 삽과 괭이로 논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호미로 김을 매고 낫으로 곡식을 거두어 큰 풍작을 맞을 수 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어릴 때 기회를 놓치면 돌이키기 어렵다.”


흔히 아이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부모는 많지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부모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처럼 공부란 앞으로 살날을 미리 준비하는 과정이며 그것이 우리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 본질이다. 공자는 “소년은 늙기는 쉽지만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한 치의 시간도 가벼이 하지 말라. 연못가 봄풀의 꿈이 깨기 전에 뜰 앞 오동잎이 가을을 알린다.”라고 말하며 어릴 적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보다 공자의 가르침을 마음속애 새겨 주는 것이 어떨까?




제자됨의 시작

서현승 신부님

불가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하지요.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수고로움임을 삶의 깊은 체험에서 통찰한 표현입니다. 고통에 대한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수많은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행복과 기쁨을?누구나 원하지만 그것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마땅히 그에 따르는 수고가 있을 것이고, 노력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련이나 아픔 자체가 행복을 자동적으로 가져다주는 담보는 더 더욱 될 수 없을 테고요. 그런데 고통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에서 따라오는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고통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고통이나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때 겪게 될 고통 또한 틀림없이 있습니다. 이왕이면 아픔 없는 기쁨을 원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적인 바람일 테지만 참된 행복이나 평화, 기쁨을 맛보기까지는 가망 없어 보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해볼 수 있는 용기가?필요합니다. 

그것이 참된 가치를 위한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십자가요 고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됨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상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십자가에서부터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지고 가려 하는 십자가에까지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모아질 수 있습니다.




냉정(?)하신 예수님

김광태 신부님

예수께서 가족을 대하시는 모습은 유별났다. 어머니를 가리켜 ‘여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에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마르 3,33) 하고 반문하시며 마치 혈육을 부정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또 당신을 따르는 조건의 첫 번째가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마르 10,29)를 버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태도는 가족에게만이 아니다. 베드로한테는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씀을 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어찌 이리 냉정하실까?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어머니를 ‘여인’으로 부르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카나의 혼인잔치(2,1­12)에서 성모님이 하느님의 뜻을 앞질러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스도의 때를 앞당기도록 요청할 때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혼인잔치의 기쁨이 사라지고 신랑 신부는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것을 염려한 성모님의 모성이 예수님의 때를 앞당기신 것이고 예수님은 그 요청을 따르셨다. 두 번째는 십자가 아래서다. 예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성모님을 당신의 어머니로만 남겨두지 않으신다. 당신의 어머니를 인류의 어머니로 세상에 내어 주며 ‘㈏科?繭箚?부르신다(9,25-­27).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할까? 신앙인으로야 놓아드리는 게 도리겠지만,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가 그분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붙드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가차 없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베드로에 대한 꾸지람인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행복이란 세상의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느님의 이끄심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순교를 예견했다. 그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립비 교우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열정에 가득하여 필립비 교우들의 믿음을 북돋운다. 참 행복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곧 구원받는 것이므로,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도록 권고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느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을 하던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므로, 악하고 타락한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간직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날(재림)에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는 기꺼이 순교할 것이며, 오히려 이를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순교가 필립비 교우들에게 슬픔과 좌절을 안기기보다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항상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마태 17,1-13),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를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하고 말씀드린다.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얼마나 컸으면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는 높은 산, 사람이 살기 어려운 높은 산에서 지내기를 원할까? 그만큼 주님 체험은 기쁨과 환희, 행복을 가져다준다. 주님 체험을 통해 얻는 행복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이 크고 소중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때문에 그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도 주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주님을 체험한 다음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장애물로 여겼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겼다.”(필립 3,7-8참조) 그만큼 그의 주님 체험은 컸다. 그는 주님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루었고, 그래서 그의 삶은 온전히 바뀌어졌다. 그는 주님 체험을 통해 참 행복을 알았기에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구원에 힘쓰며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한다. 


오늘, 주님만이 참 행복의 근원이시며, 주님만이 행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자.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얻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자.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상윤 신부님

오늘 복음인 루카 14장 25절의 앞부분인 14장 전반부에 ‘예수님께서는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의 일이다(Lk 14, 1).’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식사에 초대받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여러 비유를 통하여 함께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Lk 14, 15).’라고 까지 말합니다. 그러한 감동의 자리가 오늘 복음에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자리에서 나오셔서 많은 군중과 함께 길을 가면서 또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Lk 14, 26).’ 


입으로는 주님, 주님 외치는 분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기꺼이 그 자리에서 바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 나아가면서 자신의 가족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온전히 놓아버리고 따른다는 것이 무척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알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Lk 14, 27).’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제일 크다고 여기듯이’라는 생활성가 가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체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면 그 십자가를 짊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하는 십자가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 바로 그 십자가를 찾아야합니다. 이 십자가를 찾아 우리도 기꺼이 그분의 뒤를 따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고통의 상징으로만 시련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십자가의 사랑과 영광을 느껴야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인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를 상기하며 이 말씀을 내 삶으로 초대하여 살아내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삶이 자신의 것을 온전히 버리며 주님의 참제자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루가 14,25-33]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많은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고 있는 중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향해 가시고 있는 길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내다보고 걸으시는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걷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메시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가는 것으로 여겼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그들에게 하신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즉, 가능한한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고자 하고, 현세에서 예수를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귀한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와 당신이 지시고자 하시는 십자가를 지는 수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사랑해야 할 부모나 처자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말마디대로 미워하라고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육정으로 맺어진 것들과의 사랑까지도 희생하며, 예수를 따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보다 큰 영원을 위하여 다른 것을 희생한다는 것은 의례히 요구되는 일이라 하겠다. 한 예로 전쟁에서 적과 싸우고자하는 병사가 따뜻한 방에서 동시에 안락하게 지낼 수 없겠고, 유흥을 즐기면서 영예의 합격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온전히 좀더 가까이 따르는 생활을 하자면, 의례히 현세적인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또한 그러한 생활은 준비없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포도원을 지키는 망대를 짓기 전에 계획과 설계, 비용 등을 사전에 계산할 줄 알듯이, 우리 각자는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천국의 집을 건설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준비를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천국을 위해 자신을 바친 이들은 복음삼덕인 정결, 청빈, 순명을 지키는 수도자의 삶안에서 나타난다. 


정결은 사랑 중에 최대의 사랑으로서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청빈은 최대의 부요함으로서 하느님의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가난한 마음이다.


순명은 최대의 자유로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자녀로서의 자유이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최대의 자유와, 최고의 영적인 부요함과 최대의 사랑으로 살아나가는 모습으로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

이성원 신부님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을 위한 사목을 할 때입니다. “신부님, 오늘은 재수 더럽게 없는 날입니다. 요새처럼 불경기에 팔면 얼마나 남는다고 물건 가져갈 때는 금방 돈 부쳐준다고 해놓고선 그냥 날라버렸습니다.” 그분은 그냥 술이나 한잔하러 가겠다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맘이 많이 상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수고한 값을 못 받았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살이에서 이처럼 값을 치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영적 독서도 하고, 기도도 하며 정성된 마음과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잃는 것이 있어야 얻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살이입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의자 위에 올라가 뛰고 소리를 지르자 어르신 한 분이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왜 남의 아이 기죽이세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엄마에게서 남에 대한 배려는 제대로 배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같은 예로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 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아이가 “후지산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야단치고 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전철 안의 사람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이 엄마라고 자기 아이가 예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즐거움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산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오늘 성서를 보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되려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값을 치르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한 번쯤, 아니 자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영적 풍요를 위해, 더불어 살기 위해.




“이끌어 주시기에 오늘도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갑니다”

홍성만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시면서 말씀을 이으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첫째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워해야만 한다'는 구절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너무하시다 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언어권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부모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내 제자가 죌 수 없다.'는 어구(語句)를 '부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지를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온전한 포기를 요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포기할 수 있는지? 나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지만, 자신이 없고 무력함만 느낍니다.

이토록,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나약하고 무력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에 좀더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드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끝없이 의지하고 맡기면서 있는 힘을 다할 뿐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며 힘을 다하는 저를 이끌어 주시기에, 오늘도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갑니다.




평화 협정

장재봉 신부님

어제 대장이신 예수님을 소개했더니 마침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함께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이익인지 손해인지 따지는 것조차 시간 낭비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에든 무조건 순명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오로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아가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이르지 못하면 실격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이라고 밝혀주신 그 자격이 나에게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내가 가진 능력도, 힘도, 자신감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그분께 항복의 백기를 높이 들고 나아갑시다.

주님께 항복하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백기는 자만, 사악, 오만, 거짓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탁으로만, 그분으로부터 오는 힘으로만 단단해집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전부를 따갑게 뜯어내고, 내 안의 것을 몽땅 비워내고, 그분께 평화 협정을 청하도록 합시다. 

진정한 그분의 군사로 거듭날 때 우리의 삶은 하늘을 비추는 별처럼 빛이 날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확실한 이익입니다.




약혼자보다 반지?

김희자 수녀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 자기 소유를 버릴 것을 강조하신다. 바로 예수님이 참된 보물이시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들에게 약혼자보다 반지를 더 좋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재물과 그분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려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한쪽으로 접어두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사시면서 자신의 목숨을 놓아버리셨다. 당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활동적으로 일하시면서도 그분은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림은 곧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수도자들은 수도생활을 선택하는 순간 지금까지 익숙했던 곳을 떠난다. 이 떠남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에서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에게 안전을 제공하고 의미를 주었던 모든 곳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가족·고향·관계·재산·명예,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나의 삶에 의미와 힘을 주고 나의 약함을 보호해 주며 안전을 보장해 주던 것들로부터도 떠나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수도자들은 이 여정을 선택한다.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내어 놓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눌 수 있는 것이 내 안에도 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고 나누어준다면 그곳에서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순금(純金)을 집었으니 18K는 내려놓으시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추종을 위해 부모나 형제자매를 미워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잘 새겨서 들으셔야 할 말씀 같습니다.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오류가 성경에 대한 편협된 접근방식으로 인한 오류이지요.

오늘 우리 손에 들려있는 성경의 시대적 배경은 우리 시대와 수 천 년이나 되는 격차가 있습니다. 문화도 다릅니다. 가치관도 다릅니다. 표현법도 다릅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구체적인 환경이나 상황도 다릅니다. 청중도 다릅니다.

성경을 바라볼 때는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본문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주석서나 참고서도 곁들어 읽으면 금상첨화입니다.

가장 중요한 성경 봉독의 지침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신구약 모든 성경의 최종적인 요약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프리즘을 통해 성경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다양한 하느님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느님이 묘사되고 있는가 하면 분노로 이글거리는 진노하시는 하느님의 얼굴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로 과격한 언행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때로 너무 지나친 요구로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우리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자식이 멸망의 길을 향해 가고 있다면, 부모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말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혼도 내기도 하고, 언성도 높이고, 눈물로 하소연하기도 하고 마침내 강제력도 동원할 것입니다.

뛰어난 머리와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자녀, 그래서 장밋빛 미래가 눈에 선한 자녀가 노력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허송세월하고 있다면 부모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갈 것입니다. 욕도 할 것입니다. 극단적인 표현도 자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엄청 높은 목표를 정해 자녀들에게 부담을 안겨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던지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으로 부담스런 권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길을 나선 사람들, 안 그래도 힘들어죽겠는데, 점점 더 코너로 몰고 가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 추종을 위해 부모님을 미워하라고요? 형제나 자매와도 원수처럼 지내라고요?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부모형제는 걸림돌이라는 말씀인가요? 이웃사랑도 하느님 사랑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셔놓고, 당신을 따르기 위해 가족들을 미워하라니 모순되는 말씀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작은 물줄기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보다 큰 보물을 발견했으니, 작은 보물들을 손에서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순금을 집었으니 18K는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최우선적 가치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성직에 접어든 사람들, 수도생활에 투신한 사람들, 비록 물리적으로 부모형제를 떠난 사람들이지만, 영적으로는 주님 안에 더욱 굳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항상 이루어지는 사람에게 있어 부모를 향한 사랑, 형제간의 우애가 예수님 추종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재주가 많아서 죽은 사람

이찬홍 신부님

복음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현대의 위기 중 가장 심각한 위기가 가정의 파괴라 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복음 말씀대로 정말 부모님과 아내와 자녀, 형제자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는 말씀일까요? 


단연코 아닙니다. 

십계명중, 이웃사랑의 첫째인 4계명에서 알려주듯이,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형제에게 미친 놈 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성가정을 본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스승을 배신했지만, 배신한 그 죄보다도 스승을 배신했다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죄책감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유다에게 “그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형제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은 미워하라고...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의미를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 나설 뿐입니다. 


좋은 가르침을 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두 시간 넘게 ‘검색’창을 휘집고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나름대로 ‘재주가 많아서 죽은 사람’ 이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곰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남 보다 많은 재주가 있어 그 재주를 뽐내며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은 유일한 재주가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길을 가다가, 곰을 만납니다. 

재주가 없는 사람은 ‘이크 곰이다. 빨리 나무위로 올라가야지...’ 라며 나무위로 올라가 곰을 피합니다. 

그러나, 재주가 많은 사람은 ‘아.. 내가 곰을 피하기 위한 많은 방법을 알고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저 곰을 피할까? 죽은 적을 할까? 나무위로 올라갈까? 벽을 탈까?...’ 등 자신의 재주를 생각하다가, 결국 곰을 피하지 못하고 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단순한 예화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꺼리를 남겨 줍니다. 

곰에게 생명을 건진 사람은 할줄 아는 것이 많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고는 나무에 올라가는 것뿐인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위험이 닥쳐오자 자신이 할 줄 아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위험을 모면합니다. 

그러나, 가진 재능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까? 어떤 방법을 쓸까?’ 생각만 하다가 곰에게 생명을 잃게 됩니다. 

어쩌면 생각해야할 문제가 좀 좁혀진 것 같습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곧 부모와 아내, 자녀 형제자매, 자기 자신 이모든 것이 자신에게 있는 여러 재능,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실제 그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교만함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사람들은 참되게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겸손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집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로다.’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주님께 매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 속에서 참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삶을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냥 대충 하지 뭐.’ 식의 표현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교만함과 거만한, 다른 것으로 기울어지는 욕망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문제, 잘못에 있어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많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 이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욕망과 욕심대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기 보다는, 자꾸 주위를 둘러보고 뒤를 돌아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욕망, 거만함 등을 버리라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만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많은 재능이 있다는 거만함에 스스로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이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많은 위험들을 피하며 구원에 길로 나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이런 노력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아멘.





요즘 갑자기 일이 많아졌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들이,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제게 다가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바쁘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제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니까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바쁘면 바쁘다고 불평이고, 한가하면 또 일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요즘에는 E-Mail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E-Mail을 많은 분들이 보내주셨는데,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늦게라도 꼭 답장해 드릴게요.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그러다보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다가오면 괜히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네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원어치의 고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이 사람에게 고철을 가지고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물론 그 기술을 배우는 값은 공짜입니다. 기술을 배우겠다는 열정과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람은 바늘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이 기술만 배우면 만원어치의 고철을 십만 원의 가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시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이 기술로는 만원어치의 고철을 백만 원의 가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컴퓨터의 중요 칩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이 기술로는 만원어치의 고철을 1억의 가치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술을 배우겠어요? 물어 볼 필요도 없겠지요? 당연히 최고의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컴퓨터의 중요 칩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배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소중한 것보다도 최고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 가치를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실 바쁘다고 하는 것도 내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바쁨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나에게만 왜 이렇게 고통과 시련을 주고 있느냐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최선의 노력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바쁘다고 말을 합니다.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많다보니, 해야 할 일도 많은 법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활하는 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온 E-Mail에 대한 답장을 합시다.


우리 배낭에 든 재미난 것은('좋은 글' 중에서)

게리 스콧이라는 유명한 등산가이드가 있습니다. 알래스카의 최고봉 맥킨리를 18시간 30분만에 단독 등정한 세계 기록 보유자입니다. 이 분이 산에 처음 오르는 사람들을 눈여겨 봤더니 너나없이 엄청난 짐을 챙겨오더랍니다.

"언제 어떻게 필요할 지 모르잖아? 일단 짊어지고 가자."

결국 이들은 산행 내내 짐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보따리를 수백번 풀었다 다시 싸는 수고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짐이 많을 수록 정상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몸이 안좋아서, 잠을 잘 못자서, 폭풍우 때문에... 핑계는 많지만 진짜 이유는 너무 무거운 짐 때문이라고 합니다. 짐을 줄이는 대신 힘과 기술을 키우면 됩니다.

게리의 짐 챙기는 비법을 소개합니다. 일단 짐을 모두 펼쳐놓습니다. 앞으로의 등반 과정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그때 확실히 쓸 것들을 한쪽으로 모아놓습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생명과 관련된 것, 즉 안전에 필요한 장비들은 가장 먼저 챙겨야 합니다. 펼쳐놓은 짐의 절반만 챙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때 한가지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10g짜리 약병조차 들었다 놓았다 고민하지만 마지막으로 눈 질끈 감고 챙기는 게 있습니다. 즐길 것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답니다. 조그만 게임기나 소설책 한권만 있으면 눈보라치는 무서운 밤에도 긴장과 스트레스를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목표와 과정이 분명하면 짐을 크게 덜 수 있고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짐에 의존하지 말고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가장 먼저 챙길 것은 생명, 즉 안전과 건강입니다. 그리고 인생이나 등산이나 재미가 있어야겠지요.


당신의 인생 배낭 속에는 어떤 재미난 것이 들어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기양 신부님

입시철이 다가온 모양입니다. 성당 마당의 성모님 앞 촛불이 연일 빈틈 없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들의 모습도 자주 뵙게 됩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입시철이 되면 부모들은 자녀가 최선을 다해서 능력 이상의 결실을 맺기를 기도하고 좋은 점수를 얻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기를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6-27)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우리는 즉시 이렇게 반응할지 모릅니다. 

“아이고, 주님, 버릴 수 없습니다. 좋은 점수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원하는 대학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하십니까?” 


아마 예수님의 말씀이 아예 귀에 안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조바심을 내고 또 수많은 희비가 교차됩니다. 시험을 잘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에 따라 감정의 폭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어렵고 힘든 중에도 하느님을 믿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많은 희로애락, 또 번뇌와 희비는 대부분 내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는 고난의 길을 향해 가고 계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향해 묵묵히 가고 계시는데 그 옆에서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나는 이 자리를 차지하고, 베드로는 제일 높은 자리를, 또 누구는 둘째, 셋째 자리를…하면서 완전히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코앞에 닥친 십자가의 고통에 말없이 힘들어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따라오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야단치시지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말씀하실 뿐입니다. 

“나를 따르고자 하면 세상의 모든 명예와 영광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으면 안 되며, 부모와 처자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제인 저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면서 진정 풍요로운 축복을 원한다면 나의 뜻은 접어야 합니다. 내 뜻을 접지 않으면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 끝없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그 욕구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까지도 힘들게 할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뜻을 꺾는 것인데 우리는 오히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고집하며 항상 그 수준에 머물러서 스스로 갈등을 만들어내고 힘들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접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나의 뜻을 접는 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항상 더 완전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실패는 전혀 없이 성공만 계속되고 좋은 일만 이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게 이어질 수가 없지요. 최선을 다했는데도 생각보다 못한 결실, 빈약한 결실이 맺어졌을 때 자녀들은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이런 어려움이 닥칠 때 삶의 경험이 풍부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참다운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앞에서 더 화를 내며 실망하는 부모가 되지 말고, 더욱 노력하여 시련을 극복했을 때 보다 더 성장할 수 있고 더 크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드시 어려움과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나 실패를 맞고 겪으며 어떻게 그것을 이겨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게 됩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시몬 베드로 역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외면하고 도망쳤습니다. 똑같이 배반의 길을 간 것이지요. 그러나 후에 시몬 베드로는 모든 것을 뉘우치고 다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수제자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배반이라는 시련을 놓고 다시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결말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바탕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욕심과 내 뜻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다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론은 항상 나락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좋은 결과를 맺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럴 때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자녀들의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자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학생이 교리 시간에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사람이 죽는 준비를 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 그거야 몇 분이면 되겠지 뭐...”하고 선생님께 대답하셨습니다.

“그럼 천당 가는 준비를 하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도 몇 분이면 되겠지. 예수님 곁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잠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러자 그 학생은 “그렇다면 괜찮겠군요.”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해요.

“선생님. 저는 이제부터 즐기다가 마지막에 가서 예수님 믿을래요.”

그리고는 교리수업을 받는 그 자리를 뜨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학생을 불러 앉히고는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한 마디만 물어볼게. 너는 네가 언제 죽을 지 알고 있니?”

“그야 모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야. 천당 가는 준비는 사실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내가 언제 죽을 지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란다. 그런데도 지금부터 놀겠다고?”


그렇지요? 분명히 천당을 가는데 있어서는 약간의 준비만 있어도 될 듯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언제 천당으로 가느냐는 것이지요. 그 누구도 그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준비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시간을 스스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직도 멀었겠지?’하면서 그 준비를 계속 뒤로 미루고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사는 것, 자기 편한 데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이기적으로만 살아가는 것,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이 세상의 물질을 섬기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를 뒤로만 미루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아직 그 때를 모르고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나 아쉬워하실까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서 당신을 찾아서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나는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었는지요? 혹시 아직도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이 세상 일에만 집중함으로써 주님을 슬프게 했던 것은 아니었나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바로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위한 것이며,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성찰을 30분 이상 합시다.


서로 가슴을 줘라(이정하,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중에서)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마라.

그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했네

추위에 떠는 상태를 보다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 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서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사랑은 그처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다.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하는데서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무들을 보라

그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너무 가깝게 서 있지 않을것~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늘을 입히지 않는것.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랑이 오래 간다.




동행(同行)의 의미와 추종(追從)의 의미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루가 14,1-24)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정에 오르셨다.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를 동행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기쁨과 보람, 고통과 슬픔, 수고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과연 예수를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과의 동행’의 의미를 밝혀주신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골고타에서 자기 생애의 최후를 십자가 죽음으로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어떤 동행자도 예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동행자들 중에서 당신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추종자들을 얻으려 하시는 것이다. 동행(同行)의 사전적 의미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 길을 함께 간다고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추종(追從)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뒤나 그 뜻을 쫓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종은 길을 함께 가는 동행의 뜻을 가지면서 선행자(先行者)의 뜻을 끝까지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끝까지 가는 것이며, 예수제자 됨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종은 동행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어려운지는 복음의 말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추종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자기부정이다.(26절) 자기부정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데, 이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 친구까지 미워하는 것으로 비약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27절)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자기 십자가’이다. 다른 누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육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즉 수능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 쳐야할 과목을 크게 일반 공통과목과 특수 선택과목으로 나누듯이, 예수추종(제자 됨)의 조건에도 공통(共通)과 선택(選擇)이 있다. 공통에 해당하는 것이 첫 번째 추종조건인 자기부정이다. 선택에 해당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라는 말은 같지만 그 십자가의 내용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누구에게나 같은 방법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그만한 비용이 있는가를 곰곰이 따지거나, 일 만의 군사로 이 만의 군사와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이 승산(勝算)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각 상대방 임금에게 화평(和平)을 청하듯이(28-32절), 예수추종의 기본정신은 자기부정이지만, 추종의 방법은 다양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강조하듯이 추종의 기본정신인 자기부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것’(33절)으로 요약된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해서 버릴 것을 그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을 버려야할 지를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명예와 권력,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착취, 취미와 재미 등, 때로는 정말 재물과 재산, 내가 가장 아끼는 소유물,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달고 예수추종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탄과 악습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자유롭게, 그리고 각자 나름의 십자가를 지고 진정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다. 나는 누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가? 많은 군중 속에 나도 끼여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마르 3, 14) 위함이었기 때문甄?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늘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1,17)하신 이유가 바로 늘 당신과 함께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로마에서 공부할 때였다. 친구인 갈멜 신부와 만나서 이야기 하는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내가 버스를 탈을 때 버스표 두 장을 내었다."고 한다. 그래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자기와 예수님의 것과 함께 내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도 어쩌다 그 친구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멋 적게 웃는다. 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의식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곧 관상생활이요, 예수님의 현존 속에 지내는 것이다.

과연 나는 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오늘 내가 걸어가야할 길이시고 내가 알아야할 진리이시고 내가 먹어야할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걸어가지 않으면 아버지께 가는 길이 아닌 길을 그리고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닌 길을 걷고 있는 것이오, 진리이신 예수님한테 배우지 않으면 아버지께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지 못하고 헤메이게 될 것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지 않으면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어둠 속에 헤메이지 않고 빛으로 나올 수 있으며 죽음의 길을 걷지 생명의 길을 걷을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야할 길을 걷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미워하다."는 말은 정말 미워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느데 장애가 된다면 미워하라는 말이다. 사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형제 자매 라고 하더라도 그 분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따라 가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내가 따라 가야할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갈려고 나섰다면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분도 따라 가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분도 어떤 것도 예수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따라가야 할 분이시다. 내가 따라가야 할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가야 하는 길이다. 자기 십자가를 남에게 대신 지워지게 하고 나 혼자 홀가분하게 가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십자가가 없는 쉽고 편한 길이 아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는 길이다."(루가 9,58)

왜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가? 십자가는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코전 1,18. 22) 라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는 지혜이며 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바로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구원의 수단인 나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지 않는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한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그냥 덜렁 덜렁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나의 십자가는 나 몰라라 내팽개쳐 놓고 나만 잘 살겠다고 따라 나서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죄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이제는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어야하고 아울러서 나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몫까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 세 번 사용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고 갖추어야할 조건이 있고 입어야할 예복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과 늘 함께 길을 가는 것이요,

둘째, 예수님 이외에 그 누구도 따라 가면 안 된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반드시 지고 따라가야 한다. 

넷째,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 사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의 것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은 버려야 한다.

누구든지 이 네 가지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이 네 가지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혼인 예식에 참석하는 예복을 입은 것이 아니다. 나는 과연 이 네 가지 조건 중 몇 가지나 실천하고 있는가? 이 네 가지 조건 중 어느 한가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네 가지 중 한 가지만이라도 빠진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보듯이 또는 이만 명을 거느리고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듯이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아닌가를 생각해보자.

 



<버림과 따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충돌하는 것은, 또 신앙생활과 세속 생활이 충돌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무척 힘든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오면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입니다.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족이 어떤 죄를 지을 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가족이기 때문에) 그 죄를 옹호하거나, 죄를 함께 짓는다면, 그것은 가족에 대해서 세속적으로 집착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 집착을 버리는 것이 바로 가족을 미워한다는 말의 참 뜻입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고,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그러니 미워해도 안 되고, 버려도 안 됩니다.

끝까지, 즉 하느님 나라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막아야 하고, 가족과 함께 구원을 향해서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 속에 있는, 가족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의 진짜 뜻은, "가족을 '참으로'(제대로)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반어법을 사용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목숨'이라는 말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목숨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지상에서의 모든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세속의 인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세속을 초월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세속 생활과 신앙생활을 갈등 없이 잘 조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세속 생활을 인생의 중심에 놓는다면, 그러면서 쉽게 할 수 있을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신앙생활은 취미생활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을 인생의 중심에 놓는다면, 아마도 세속의 박해를 받거나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하려면 제대로 하고, 하다가 그만 두려면 처음부터 하지 마라."라는 뜻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하지도 마라." 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다가 중간에 멈추면 처음부터 가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말고 전력을 다해서 노력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들어가도 그만, 안 들어가도 그만인 나라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얻어도 그만, 얻지 못해도 그만인 생명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고 근처 어디쯤에서 멈추면, 그것은 그냥 못 들어간 것이 될 뿐입니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밖'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충분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하여라."가 아니라, "어떻게든 공사를 마쳐야 한다."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재능이 많다고 해서, 여건과 환경이 좋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남들보다 더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님이라고 해서 신앙생활이 남들보다 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끝까지 전력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1-33)."

이 말씀은,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지 마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무신론자들과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맞서서 싸우면 백 퍼센트 멸망입니다.

그러니 믿고, 회개하고, 믿음을 실천하고, 구원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아직 멀리 있을 때'는 '너무 늦기 전에'이고, 이 말은 '바로 지금'을 뜻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지상의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학생들이 장래 남편감에 대해 내세우는 조건은 이렇다고 합니다. 

나만 사랑하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남자, 신체 건강하고 머리 좋은 남자, 돈을 많이 버는 남자, 유머 감각이 풍부한 남자, 가사 일을 즐겨 하는 남자, 두말없이 우리 부모님을 부양하는 남자, 내가 야단칠 때 말없이 앉아 있는 남자, 내 독립적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남자, 애 잘 키우는 남자, 퇴근 후에 집에 와서 요리하고 집 안을 치우는 남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만들어 침대로 가져다주는 남자, 내 잘못을 이해해 주는 남자, 더러운 버릇이 없는 남자, 나의 사교 생활을 이해해 주는 남자, 예쁜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 여자 화장실 앞에서 내 핸드백 들고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


이밖에도 장래 남편감에 대한 조건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조건들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이 조건에 합당한지를 따져보았습니다. 저는 조건 이하의 남성이더군요. 그렇다면 반대로 남자들은 어떨까요? 무조건 사랑만 하면 장래 아내로 합당하다고 그럴까요? 남자들 역시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면상의 한계 때문에 남자들의 조건들은 여기서 빼도록 하겠습니다(솔직히 저도 남자지만 이렇게 까다로울까 싶습니다). 하긴 전에 어떤 자매님의 이러한 푸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저희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달랐던 것 같아요.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제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이 사람과 계속해서 함께 살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나의 기대만을 채워주길 원해서 결혼한다면, 굳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나의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줄 하인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비록 내가 싫어하는 것을 상대방이 하더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사랑의 관계는 더욱 더 두터워집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떠올리면서 주님과의 관계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과 두터운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무조건 다 해달라고 청하고, 주님께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던지면 과연 사랑의 관계가 과연 형성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앞서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처럼 나를 주님 앞에 낮추고 대신 주님을 들어 올릴 때 비로소 주님과 나의 사랑의 관계가 두텁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을 낮추는 사랑.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들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어 주님과 함께 진정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과 기쁨이 있는 곳에는 탐욕도 인색함도 없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인생찬가(H.K.롱펠로우)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영혼은 죽는 게

아니고 잠드는 것이니 만물의 본체는 외양대로만은 아니란다.


인생이란 실재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우리의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본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인생이니라.


예술은 길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나니, 우리 가슴이

설령 튼튼하고 용감하더라도, 마치 천으로 감싸진 북과 같이

둔탁하게 무덤을 향한 장송곡을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지 안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억척같이 싸워 이기는 영웅이 되라.


미래를 믿지 말라, 비록 그것이 즐거울지라도!

죽은 과거는 죽은 채로 묻어두라!

행동하라, 살고 있는 현재에서 행동하라!

가슴속에는 용기를, 머리위에는 신을!


위인들의 모든 생애는 말해 주나니,

우리도 위대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이 세상 떠날 때는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음을.


아마도 후일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다가 외롭게 난파한

그 어떤 형제가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 그런 발자국을,


자, 우리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자.

그 어떠한 운명도 헤쳐 나갈 정신으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추구하면서 일하고 기다리기를 함께 배우자.




결단을 요청하는 신앙

정희완 신부님

돌아보면 우리의 인생 안에 아픔과 기쁨이 늘 함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생 그 자체가 고통이면서 동시에 축복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 안에 언제나 슬픔과 기쁨, 고통과 행복이 동시에 교차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 안에도 축복과 고통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양면을 지니듯이, 우리의 신앙도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신앙은 우리에게 욕심을 포기하고 희생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기쁨이며 동시에 어떤 결단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신앙의 고통은 역설적으로 신앙의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슬픔이 기쁨에게 말을 건네듯이, 신앙의 고통은 언제나 신앙의 기쁨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신앙 덕분에 참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결단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조용히 성찰해 볼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는 오늘 복음 말씀은 무엇보다, 신앙의 결단에 게으른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질책입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성경에 ‘버림과 따름’ 이라는 소제목을 붙여 놓았는데 이는 예수님 가르침의 내용을 압축한 표현입니다. 이처럼 가르침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을 때는 복음관상을 할 것이 아니라 묵상을 할 일입니다.


먼저 당신의 제자가 될 사람의 자격으로서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각자 처한 상황에서 깊이 알아들어야 합니다. 당장 걸려 들어오는 것이, 부모 형제를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고 계속 교육을 받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표면상으로는 정면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를 비롯해 자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좀 더 깊은 차원의 이해로 이끌고 계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대목을 묵상할 때 특히 각자가 평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뒤집어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교육 받은 것이 정말 참되고 올바르고 좋은 것인가 ? 이 의문이 우리를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의미도 더 깊이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고통이나 십자가가 지닌 긍정적 의미 내지 창조적 의미를 읽어 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하나 깊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현실 감각에 대한 구체적 인식의 필요성입니다. 공사비를 계산해 보고 병력을 따져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저 천진난만한 낭만적 소년 소녀로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훨씬 더 성숙한 모습으로 지혜로운 현자로서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신 것이 아닌지요.




가장 애착하는 것과 가장 싫어하는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자라고 하면서 스승을 따르지 않는 제자가 있습니까?

스승을 따를 생각도 없이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도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뒤 따르지는 않으면서 제자 되려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문제는 뒤 따르는 것의 이해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제자가 생각하는 뒤따름과 스승이 생각하는 뒤따름의 차이.

제자는 스승을 소풍가듯 뒤따르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스승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버리고 대신 제 십자가를 지고 뒤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건물을 짓기 전에 다 지을 수 있을지 따지듯,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길 수 있는 전쟁인지 미리 따지듯 잘 따져보고 제자의 길을 나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따름의 조건은 다 버림과 자기 십자가 짊어짊 두 가지입니다.

다 버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 버려야 합니다.

다 버리고 한 가지를 못 버려도 안 됩니다.

못 버리는 한 가지가 사실은 내가 가장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마지막 부제 반 수업 중에 선배 신부님의 사목 체험 강의가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납니다.

연세 드시어 친구 사제의 죽음들을 보면서 신부가 노욕을 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그래서 그 길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와서 보니 책상 위에 담배 한 보루가 있었답니다.

이 까짓 것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니 그대로 놔두자고 하였는데 가만히 보니 그것이 자기가 가장 애착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더 문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것이 쉽고,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좋아하는 것은 다 포기하였는데도 마지막으로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나환자만은 피해 다녔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피할 수 없도록 외길에서 마주치게 하셨고 기도와 더불어 용기를 내어 그 나환자를 껴안았을 때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껴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결정적인 회개의 은총으로 회고합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가 가장 애착하는 것은 버려야 하고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껴안아야 합니다.

오늘,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가장 애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독서> : 참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행복이란 세상의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느님의 이끄심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순교를 예견했다. 그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립비 교우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열정에 가득하여 필립비 교우들의 믿음을 북돋운다. 참 행복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곧 구원받는 것이므로,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도록 권고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느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을 하던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므로, 악하고 타락한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간직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날(재림)에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는 기꺼이 순교할 것이며, 오히려 이를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순교가 필립비 교우들에게 슬픔과 좌절을 안기기보다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항상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마태 17,1-13),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를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하고 말씀드린다.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얼마나 컸으면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는 높은 산, 사람이 살기 어려운 높은 산에서 지내기를 원할까? 그만큼 주님 체험은 기쁨과 환희, 행복을 가져다준다. 주님 체험을 통해 얻는 행복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이 크고 소중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때문에 그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도 주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주님을 체험한 다음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장애물로 여겼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겼다.”(필립 3,7-8참조) 그만큼 그의 주님 체험은 컸다. 그는 주님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루었고, 그래서 그의 삶은 온전히 바뀌어졌다. 그는 주님 체험을 통해 참 행복을 알았기에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구원에 힘쓰며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한다. 


오늘, 주님만이 참 행복의 근원이시며, 주님만이 행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자.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얻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자.





죽음을 정복한 사나이’라고 매스컴을 통해서 알려진 스턴트맨이 있습니다. 왜 그런 애칭이 붙었느냐면 글쎄 54미터 높이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떨어져 내려 살았기 때문이지요. 이 스턴트맨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어떻게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글쎄 뉴욕 시내를 걷다가 한 꼬마가 먹다 버린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강철 같은 사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역시 연약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의 자기 상황에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대신 하느님의 보호 없이는 절대로 이 세상을 살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 제35대 대통령인 존 에프 케네디는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 다음과 같은 4가지 역사적인 질문을 받게 된다고 말했지요. 

첫째, 당신은 진정 용감하게 살았는가? 

둘째, 당신은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살았는가?

셋째, 당신은 매일 매일 성실하게 살았는가?

넷째, 당신은 무엇에 당신 자신을 헌신했는가?


죽음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내게 위의 네 가지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죽음 앞에 서면 이 세상에서 내가 욕심을 부려서 모으려고 했던 모든 부귀영화가 다 필요 없음을 깨닫습니다.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와 권력 등은 주님 앞에서는 모두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 과정 안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상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크기에 세상의 가치를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용기와 결단을 통해 주님과 함께 참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둘을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홉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브라운).  


할 수 없어! 할 수 있어!!

요즘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 중입니다. 프로야구를 보면서 예전 초등학생 시절에 1년 정도 야구선수를 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 제대로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종종 최고 학년인 6학년 형들이 공을 던지고 이제 막 들어온 3학년인 저희들이 타석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2~3년 이상을 야구한 형들의 공을 어떻게 신입인 저희들이 칠 수 있었겠습니까? 공이 너무 빨라서 그 공에 맞으면 어떻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눈을 감고 무작정 배트를 휘둘렀던 기억이 있네요. 그때 감독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들은 ‘6학년이 던지니까 나는 저 공을 칠 수 없어!’라고 생각을 해서 치지 못한 거야. 만약 같은 학년 친구가 던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들어섰다면 분명히 근사한 안타를 만들어냈을 거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너희들의 의욕을 꺾어놓은 것이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하고 싶다’는 의욕을 만들어 놓는다.”


그때의 감독님 말씀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요즘에도 생생히 생각납니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부러움, 부끄러움, 간절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는 이들의 삶은 평범한 듯하나 비범한 삶입니다. '평범의 비범'이라 함이 맞을 겁니다. 며칠 전 어느 시인의 신문 칼럼 일부입니다.


-나이 마흔쯤 되니 좋은 것은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한 시야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나의 과거이자 미래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것. 이런 안목은 나이 들지 않고는 가질 수 없는 시간의 선물이니 시간 속으로 전진하는 몸과 마음에 축복있으라.-


평범한듯하나 비범한 삶입니다. 이런 삶을 대할 때는 부러움과 더불어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나이 마흔까지 깨어 치열한 전사(戰士)의 삶을 살고 있는 분임이 분명합니다. 나이 예순이 넘어도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마침 신문 같은 면, '생각줍기' 란의 글귀와 삽화가 어울렸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기에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그리움과 기다림까지 더한 바람의 최대값이다.-


이런 간절함이, 간절한 사랑이 있어 치열한 전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도 참 간절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범한, 간절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로 내 믿음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1.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일체의 감상과 낭만이 배제된 치열하고 간절한 제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내 '사랑'과 '십자가', '버림'은 어느 상태에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1독서에서 바오로의 충고 역시 간절합니다.

1.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2.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3.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4.기뻐하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우리의 삶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그러나 간절한 원의를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중 다음 대목도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범용(凡庸)한 신부는 추하다. 

나쁜 신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도 나쁜 신부는 범용한 신부다. 

나쁜 신부는 괴물이다. 

기형(畸形)은 공동척도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것이다. 

괴물에 대한 천주의 계획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괴물은 무엇에 소용되는가? 

그렇게도 놀랄만한 실총(失寵)의 초자연적 의미는 무엇인가? 

범용한 신부는 슬프게도 거개가 감상가(感傷家)다.-


비단 신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위의 주님의 충고를, 바오로의 충고를 거울삼아 간절히 사는 길뿐입니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간절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당신 향한 간절한 사랑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당신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다."(시편42,3;27,1ㄱ).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교과서에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동네에 마당이 넓은 집을 가진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아저씨의 집에서 놀곤 하였습니다. 아저씨는 아이들이 마당에서 노는 것을 싫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담장을 높게 쌓았습니다. 아이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저씨의 집은 늘 추운 겨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동네 아이가 담을 넘어 와서 놀았고, 그 아이가 놀던 곳은 따뜻한 기운이 남았습니다. 아저씨는 담장을 헐었고, 아이들이 다시금 마당에서 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의 집은 다시 봄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늘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엘리베이터의 층을 눌렀는데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당황하였는데 옆에 있던 외국인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방 카드를 엘리베이터에 대야만 층수를 누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곳은 제 방과 식당 그리고 일층 로비였습니다. 다른 층은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보안 때문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새로 지은 교구청 건물도 6층 이상은 출입증이 있어야 합니다. 출입증이 없는 내방객은 2층에서 출입증을 받아야 합니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교구청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2층에서 출입증을 받으셨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의 화두는 ‘소통’이라고 합니다. ‘계층, 지역, 이념, 학벌, 세대’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벽을 허무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먼저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런 벽을 허물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소통이었습니다. 죄인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장애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이들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세상의 법에 순응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더 순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순종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나의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들 또한 언젠가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야 하겠습니다.




포기하라는 겁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입대하려면 개인 사복이나 사물을 모두 포기하고 얼마간 지내야 합니다. 회사에 취직하면 자신의 시간이나 다른 하던 일을 전부 포기해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비 그리스도 적인 과거의 생활은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새로운 환경으로 가려면 거기에 걸맞게 정리를 해야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가는 문턱인 죽음 앞에서 버릴 게 뭔지 절로 압니다. 오직 육신만을 위해 산다면 영원세상에서 살 영혼위한 준비는 언제하나요.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13)”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북한과 중국 선교로 널리 알려진 이사악 목사님의 간증 동영상에 북한에서 순교한 신앙인들에 대한 이런 증언이 나옵니다. 1972년 김일성의 명으로 도로를 신축하던 중 산을 깎는 과정에서 구멍이 하나 발견되었고 그 안에 숨어살던 수십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들은 무려 19년 동안 한 명의 목사님과 함께 굴속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며 몰래 살아왔던 것입니다.

당시 그런 불법 집회를 하면 즉결 처분을 할 수 있어서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아이들부터 부모가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때 간수가 아이가 밟고 있던 의자를 건드려 아이는 목에 걸린 줄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손이 아직 묶이지 않은 상태여서 손으로 목의 줄을 잡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며 울부짖자 어머니는 “예수님 만나러 가는 거야, 괜찮아”라며 소리 질렀습니다. 그리고 “간수 아저씨 용서해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손으로 목에 걸린 줄을 잡고 있던 아이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조용히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처형해야 했는데 그냥 죽이면 안 된다고 하며 길에 눕혀놓고 길바닥을 다지는 둥근 쇠바퀴가 달린 차로 발서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밀어서 죽였다고 합니다. 무릎까지 바퀴가 지나갈 때는 매우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는데 무릎 위를 넘어서자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고통을 덜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세상 많은 곳에서는 믿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수많은 참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모든 신자들이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라면 그 제물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물을 바칠 때 그 위에 포도주나 물이나 기름 등을 붓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제물을 더욱 값있게 하기 위한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제물 중 가장 값진 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입니다. 바오로는 그렇게 바쳐지는 제물들 위해 자신이 포도주가 되어 부어지기를 바라고 그것을 기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사실 누군가의 희생이 없다면 우리 안에 믿음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을 키워주는 씨는 그리스도의 피이고 또 증거자들의 피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우리 믿음도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가 참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위에 반드시 누군가의 피가 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그렇게 순교하신 분들도 한 목사님의 그 피에 의해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한 분의 피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까지 믿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들을 키우는 사제의 역할은 신자들 위에 자신의 피를 쏟아서 그 피를 거름삼아 믿음이 자라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도 자신들의 피로 믿음이 없는 이 세상의 거름이 되어야합니다. 피는 자기희생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는 선교는 누구에게도 좋은 것을 꽃피게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으신 것처럼 우리 자신 안에 아무 것도 남겨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부자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만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피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면 이젠 우리의 피로 누군가를 우리가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 올 수 있어야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걸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아름다운 하느님의 숲을 이 계절에 다시 만납니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소유할 수 없는 우리네 삶입니다.

소유는 서로를 죽이지만 나눔은 서로를 살립니다.

소유는 자아를 향하지만 무소유는 하느님을 향합니다.

소유라는 욕망을 버릴 때 가까워지게 되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분명 사랑에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 여기는 한없이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건 소유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소유는 결코 우리를 겸손한 믿음으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내어주는 사랑에 있습니다.

주님과의 충실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임을 잊지않고 실천하는 나눔과 따름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소유를 버리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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