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따름 노래 “성전 오른쪽에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3,9ㄴ-11.16-17
형제 여러분, 9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6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7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Laterano Basilica Rome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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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의 에제키엘은 기원전 597년 일어난 바빌론 1차 유배 때 끌려간 사제였습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성전과 그 성전에서 솟아나오는 물’이라는 환시를 봅니다.당시,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는 기혼이라는 샘이 있었습니다.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있는 이 샘 덕분에 예루살렘은 주변의 환경이 척박한데도 중요한 군사, 정치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기혼 샘의 물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물은 필수였기 때문입니다.이렇게 보면 새로운 성전과 그 성전에서 솟아나오는 물에 관한 환시는 옛 성전이 새롭게 복구되고 정화된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복구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강을 이루며 바다로 들어가서,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살려 내는, 곧 모든 생명, 온 세상을 위한 물이라는 것을 보면, 이 환시가 단순히 과거의 성전으로 되돌아갈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오늘 복음으로 봉독한 요한 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19장 34절은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바쳐지셨을 때, 그분의 몸, 곧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전합니다. 이 피와 물이 바로 에제키엘이 예언한 새로운 성전에서 솟아나온 물로,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해 줄 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마시고 생명을 얻게 된 이들입니다.우리 교회 공동체, 나아가 우리 각자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성전이 된 이들입니다(1코린 3,16 참조). 그렇다면 우리를 통해서도 다른 이들을 살릴 생명의 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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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성전 입구에서 돈벌이를 하던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요즘 같으면 상인들과 한바탕 싸움이 붙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이르시고, 사람들이 표징을 요구할 때 당신께서 죽음과 부활로 새롭게 이루실 새 성전을 약속하십니다. 이 성전은 제자들의 오순절 성령 강림 체험 이후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열정과 믿음으로 완성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였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 이후 2천 년 동안 교회는 숱한 역경의 시간을 보내 왔습니다. 이단과의 투쟁, 세속화의 유혹, 세속적 권력과의 담합,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타락과 부패, 무신론자들의 비난과 공격에 이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종교적 신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기도와 수행의 생활을 불편하게 여기고, ‘가톨릭’이라는 세계 종교에 몸담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어도 정작 신앙인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과 타협하고 이기적이고 편향된 교회 생활을 하는 우리 곁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환전상의 돈과 탁자를 뒤엎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민낯과 위선을 벗겨 버리시며 호통치지 않으실까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죽은 바다를 살리고, 땅을 비옥하게 하여 과일과 양식을 준다고 예언합니다. 실로 새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어 주신 살과 피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체와 성혈의 신비로 매일 미사 때마다 영적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우리도 성전이기에, 이제 내 주변의 환전상들을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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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에서 하느님을 이용하여 장사하는 오염된 신앙심을 꾸짖으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어 당신께서 성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 안에 다시 세우느냐고 반박하지요.
유다인들이 말한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뜻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전을 크게 짓고, 화려하게 꾸며도, 그 안에 하느님의 마음이 없으면 참된 성전이 아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몸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실현되었지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참된 중개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십니다. 다양한 신심 행사보다 미사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19-20). 내 몸이 성령의 성전이기에 내가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귀한 존재가 된 내 몸을 가꾸도록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를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 늘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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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과부는 울타리 노릇을 해 주는 가장을 잃었기에 고아와 더불어 사회적 약자로서 대개 자선에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신뢰로 놀라운 결단을 내리는 과부들을 만납니다.
사렙타 마을의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먹어야 할 마지막 끼니의 식량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엘리야 예언자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하였고, 복음의 과부도 자기의 그날 생활비를 모두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만, 엘리야 예언자도 그렇고 과부의 헌금을 받아 주시는 하느님 편에서도 그렇고, 얼핏 보면 하느님께서는 마치 가진 것 모두를 요구하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것을 요구하셨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를 몽땅 봉헌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죠. 복음에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율법 학자들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는데, 과연 하느님께서 가난한 과부에게 가진 것 모두를 요구하시겠습니까!
율법 학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하고 긴 겉옷을 입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 드는 이들은 제물도 많이 바쳤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도 그가 소나 양을 몇 마리나 바쳤는지가 중요합니다. 성금이나 후원금, 미사 예물을 봉헌할 때도, 많이 낸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량이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의미입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내놓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진심을 담아 내놓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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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해 주는 주님의 성전에 대한 장엄한 환시는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성전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그것을 온전히 누리는 곳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말씀과 성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이 우리를 되살리고 우리 각자가 세상에서 삶으로 그 생명력을 전할 때, 비로소 교회는 참된 성전이 되고,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는 하느님께 올리는 참된 예배가 됩니다.
부활 성야에 거행하는 ‘세례 서약 갱신’ 예절 때에 부르는 성가인 ‘성전 오른편에서’는 오늘 제1독서인 에제키엘서 47장의 내용을 가사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성전이란 외적인 건물이나 경신례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부활의 생명력을 통한 내면의 변화를 체험하는 거룩한 장소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장면을 묵상하면서 죽음의 바다인 사해와 불모의 상징인 메마른 강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스스로 가로막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은, 일상의 고단함, 욕망과 분노, 눈앞의 이익에 우리 자신을 내어 주고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독려입니다.
유혹이나 위험에 놓였을 때 우리를 치유하시고 새로운 앞날을 열어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열고자 결심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간구하며 주님의 성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교회는 하느님의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될 것이며, 삶에 지친 우리는 그 안에서 다시 영적인 생기를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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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황실 가족의 소유였던 라테라노 궁전은 4세기에 교황님의 공식 거처가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딸려 있던 대성당은 처음으로 로마의 주교좌성당이 되고, 거기에서는 특히 부활 성야에 세례식이 집전되었습니다. 후에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에게 봉헌되어 라테라노 성 요한 성당이라고 불리게 된 이 대성전은 로마 교회의 어머니 교회로 여겨지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로마의 교회에 결합되면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언급한 ‘사랑의 수위권’을 로마 교회에 인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교구에 있는 주교좌성당에도 교구의 모든 본당과 공동체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모든 성당에서 ‘구원의 신비’가 거행됩니다. 교회 건물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현존의 표지입니다. 거기에서 말씀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고, 그분께서는 스스로를 음식으로 내어 주시며, 기도 안에 모인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 계십니다.
신앙인들은 늘 성전을 지으며, 그 안에 하느님의 모습과 자신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어 계십니다. 교회의 형상인 성전은 공동체와 친교를 드러냅니다. 설계사와 건축사의 힘이 모여서 하나의 건축물이 단단하게 지어지듯이, 교회의 모든 구성원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진지하고 확고한 연대와 친교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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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임금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곳에 ‘계약 궤’를 모십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가 됩니다. 다윗은 이곳에 성전 건립을 추진하였고, 아들 솔로몬 임금이 기원전 957년에 완공시킵니다. 그리고 계약 궤를 안치해 둔 장소를 “지성소”라 불렀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올리브 나무로 만든 두 천사가 ‘계약 궤’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파괴됩니다. 그리고 백성은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50년의 유배 생활을 종식시킨 이는 페르시아의 임금 고레스였습니다. 그는 잡혀 왔던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고, 성전 재건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전은 복구되지만 초라하였습니다.
로마 시대가 되자 헤로데 임금은 성전을 화려하게 재건합니다. 이후 성전 광장은 집회 장소가 되었고,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유다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도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이 거세지자 로마는 성전을 파괴해 버립니다. 정신적 구심점을 제거한 셈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서쪽 벽(통곡의 벽)의 일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이시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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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당 안에서까지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다시 읽어 봐야 합니다. 기도의 순간에도 ‘걱정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면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 봐야 합니다. 성당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걱정’은 실제로 접어야 합니다.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는지요? 누구나 나름대로 문제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성당에서만은 걱정이 아니라 ‘감사’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삶의 ‘아홉’이 걱정이고 감사는 ‘하나’뿐이더라도, 그 하나를 붙잡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드리는 행위가 마음을 여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실제로 감사할 일이 생겨납니다. 걱정하면 걱정거리는 더 커 보입니다. 시각이 ‘삶을 바꾸는’ 것이지요. 찬양과 감사를 위해 성전이 존재하는 것이지, 두려움과 근심에 젖으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떠나지 않으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상상도 하지 않고’ 감실 앞에 앉아 있는 훈련을 해 보십시오. ‘무념무상’의 연습입니다. 생각을 비울 때 영혼은 비로소 소리를 냅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어디에 있든 고요한 몸이 됩니다. 마음이 어수선하면, 성전 안에서까지 짜증이 나고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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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습관을 몸에 익혀야만 합니다. 그러면 나쁜 습관은 저절로 고쳐집니다. 그러니 성당에선 언제나 선한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상상도 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성전은 이렇듯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장소입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에 엉뚱한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장사하지 말라고 해서 ‘좋은 목적으로 물건 파는 것’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에서까지 세상일과 세상 번뇌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채찍을 만드시어’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우리 역시 잘못된 습관은 과감히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도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당에서만큼은 착하고 선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지상 성전 건립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성전 건립은 더욱 중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다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16장에는 유다 3대 명절과 관련해 이런 권고가 적혀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번씩, 곧 무교절과 주간절과 초막절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곳에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저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에 따라, 제 능력껏 주님께 바쳐야 한다.”(신명기 16장 16~17절)
사실 이 권고는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되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 계명을 상기하게 되었고, 크게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파스카 축제에 이은 무교절은 범국민적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복구 운동과 성지 순례 운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퇴색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이 문제의 발단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애써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온 백성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성전으로 나아갔고, 주님 앞에 정성껏 예물을 봉헌했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봉헌은 점차 의무화 되어갔습니다.
고된 여행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한 것만 해도 벅찬 일인데,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구름처럼 몰려드는 백성들을 바라보며‘이 때다!’ 하고 성전세를 강제적으로 징수했습니다. 마치도 오늘날 국립 공원 입장하는데 전혀 무관한 사찰에서 입장료를 강제 징수하듯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 바칠 제물을 판매하는 일 역시 독점했습니다. 제물 관련 업무들은 사제들이 관리했고, 환전 관련 업무들은 산헤드린에서 관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예수님께서는 큰 충격을 받으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습니다.
성전 안팎은 수많은 환전상들과 소나 양, 비둘기 파는 상인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좌판에서는 흥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싸게 해드릴께요! 오늘 들어온 물건이라 싱싱합니다!”
짐승들은 울어대지, 악취는 진동하지, 경건하고 성스러워야 할 예루살렘 성전은 시장터를 방불케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은 순수했던 초심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업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성전을 잠식해버렸습니다.
유다인들의 신앙에서 사랑은 사라지고 제사만 남았습니다. 마음, 영혼, 진심이 담긴 제물 봉헌이나 진지한 예배는 사라지고, 형식과 율법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신 예수님께서 분노와 슬픔 가득한 얼굴로 성전 정화 작업을 실행하십니다. 동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 다른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거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복음 2장 16절, 19절)
눈에 보이는 유형의 지상 성전의 유한성과 한계, 초라함과 불완전성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조금은 과격할 정도로 성전 정화 작업을 실시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언젠가 무너지고 사라져버릴 외적 성전 건립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 교회 안에도 극단적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유다인들이 그리도 중요시여겼던 예루살렘 성전! 천년 만년 영원할 것 같았지만, 세월 앞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도 없이 파괴되고 방화되고, 재건되고 부서지고, 갖은 수난을 다 겪었습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지상 성전을 건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성전 건립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지상 교회 안에, 보다 견고하고 영원한 성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은 진정한 성전을 건립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내리막길에서만 보인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옛날 어떤 곳에 성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덕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그에게 내려 보내 상을 주도록 하셨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성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병을 다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은혜를 사양합니다.”
천사가 물었습니다.
“그럼 그대가 말만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성인은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감히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천사는 “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예,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제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그의 겸손에 감동하여 그의 그림자가 뒤로 비칠 때 그 그림자에 들어가는 모든 병자와 죄인들이 고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면서 그것이 기도라고 착각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서 행하던 기도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하는 집’이란 ‘자신이 봉헌되는 집’과 같습니다. 자신이 봉헌되어야 하느님께서 주인으로 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버린 유다인들을 질책하십니다. 채찍으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성전은 자신이 봉헌되고 있어야합니다.
부모님의 사진은 오래 되었어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사진은 사실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부모님의 모습이 새겨져있다는 것만으로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당신을 모신 성전이 된 사람을 버리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가져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느님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가져다니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이미지를 지워야합니다. 성전의 제대는 자신을 봉헌함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려오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 제대와 같은 곳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이익을 보려는 마음을 그 제대 위에서 바치고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는 내용이 모두 자기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장사꾼들을 쫓아냈던 예루살렘 성전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잘 나가던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돌보기 위해 작은 복지원의 원장으로 가기를 선택합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명성 있는 신학자 중의 하나이며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던 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저서 20여권은 모두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는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식사를 돕고 행동 교정을 하는 등의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 일상을 선택하였습니다. 모두들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신부님은 몇 개월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써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신동이라고 추앙되고 하버드교수에까지 올라왔습니다. 나의 저서 20여권은 뭇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박약아 아담 군을 만났을 때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신앙을 통하여도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성전 안에서는 무엇보다 ‘마음’이 바쳐져야합니다. 내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려는 마음만 남아야합니다. 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추구하면 다른 모든 봉헌은 결국 나의 이익을 위해 하는 위선적인 장사가 됩니다. 나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먼저 나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이 봉헌되고 있는지 항상 살펴야겠습니다. 내리막길을 통하여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생 때 배운 시조가 생각납니다. 길재(吉再)의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와 원천석((元天錫)의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입니다. 두 시조를 음미하면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국가도, 궁궐도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허망하게 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11년 전입니다. 대한민국 국보 1호인 남대문이 화재로 전소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였습니다. 남대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징이었습니다. 600년 넘게 대한민국의 문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당시 화재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은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당시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을 받았다면,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찬란했던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수메르,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앗시리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고고학적 발굴로 알 수 있습니다.
올해 4월입니다. 성주간 월요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가 있었습니다. 저도 몇 번 방문했었습니다. 유럽의 자존심이 느껴지는 성당입니다.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프랑스는 ‘교회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 불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성당이 불에 타고 있는 시간에 많은 사람이 성당 주변에서 성가를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당은 화재로 사라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시민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지만, 식어가는 신앙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건물은 복원할 수 있지만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와 같은 성당의 화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식어버린 신앙을 뉘우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술 한 잔을 마시던 한 형제님께서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거 알아? 우리 동창 ***가 글쎄 위암 판정을 받았다는군. 힘내라고 전화라도 해 주자. 그리고 다들 건강 잘 챙기고.”
이 말을 들은 다른 친구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번에 같이 식사한 적이 있는데, 짜게 먹고 너무 빠르게 먹더라고. 아마 그런 잘못된 식사 습관이 위암을 가져왔을 거야.”
다들 공감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픈 친구와 아주 친한 한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글쎄. 식사 습관이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 그런데 이 친구가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일해서 빠르게 식사할 수밖에 없었고, 또 짜게 먹을 수밖에 없었지. 이 사회 환경 때문인데 단순히 개인의 생활 습관만 탓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우리는 개인의 잘못이라면서 꾸짖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늘 상대방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남은 틀렸다는 관점을 가졌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개인의 죄에 대해서는 늘 너그러우셨습니다. 세리나 창녀 등 당시에 죄인이라고 평가받았던 사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단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채찍을 휘두르는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몇몇 장사꾼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곳이 되어있었으며, 이와 결탁한 종교지도자들 역시 많은 이익을 얻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집단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죄를 범하게 될 때는 가만히 있지 않으십니다.
집단이 한 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집단은 그 한 사람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집단의 이름으로 벌을 주고 단죄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집단은 더욱더 죄 자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집단에 묻혀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을 행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의 모습은 어떤 것 같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까요? 아니면 크게 혼날까요? 그리고 이 집단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나요?
높이 날 수 있다면 어두운 구름 위에 있는 눈 부신 태양을 볼 수 있다(신지수).
환자에게 관심과 사랑을....
큰 질병을 얻게 된 사람은 3가지의 빈곤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첫째, 시간 빈곤입니다. 즉, 시간을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내 몸의 통제권을 잃기 때문이지요.
둘째, 경제 빈곤입니다. 아파서 일할 수가 없지요. 그러다 보니 의료비, 생활비 등에서 부족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셋째, 관계 빈곤입니다. 체력의 한계로 사회적 관계를 맺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러한 빈곤 속에 있다 보니 질병 자체를 떠나서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환자를 위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카페가 아니라 기도하는 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오늘은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떼라노 대성전은 비단 라떼라노 대성전 그 하나가 아니라 모든 성전을 대표하는 성전이며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냄도 모든 성전이 라떼라노처럼 축성되고 봉헌되어야 함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한자어로 聖자가 들어가는 모든 말이 그렇듯 성전聖殿도 다른 집들과 달리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성전과 반대되는 말로 하느님이 아닌 마귀들이 들끓는 집이라는 뜻의 복마전伏魔殿을 얘기하고 있는데 마귀가 아니라 세례받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들끓어도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고 우리는 믿는데 하느님께서 안 계신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실제로 하느님이 안 계신 곳이 아니라 그 집에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집이 하느님이 계신 성전이 아니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전이란 첫째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이요, 둘째로 하느님께서 그 집에 머무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셋째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하느님과 만나고 기도하는 곳이고,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는 것도 우리의 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요한복음인데 같은 애기를 하는 다른 복음들 곧 공관복음에서는 "기도의 집"을 사람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시며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개신교를 가면 성전이 하느님의 집이 아니라 목사들끼리 사고팔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습하는 인간 소유의 부동산이 되고, 정치인이나 유력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사교장이 되었으며 우리 성당을 가면 성전이 기도하는 집, 곧 하느님을 만나는 집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는 만남의 집이 되어버렸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곳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까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주님처럼 성전정화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이던 곳을 이제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이는 곳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나 기도하러 성당에 가요.'라고 말할 분이 있을 겁니다.
물론 기도하러 가실 겁니다. 그러나 욕심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도 혼자 하느님과 만나는 기도가 아니라 같이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축복을 청하고 받는 기도가 아니라 축성되는 기도라고.
제가 자주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축복만 받고 축성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축복도 받아야지만 축복은 축성되기 위해서 받아야지 축성은 되려 하지 않고 내 욕심만 채우려는 축복은 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주님께서 머무는 성전이 되지 않고 건강하기만을 청한다면 이것이 축성되지 않고 축복만 청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집이 주님의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곳이 되기를 청하지 않고 재물이 가득한 부잣집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기도입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 되고, 우리 집이 성전이 되며, 우리 교회가 진정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성전이 되기를 다짐도 하고 기도도 하는 오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성전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가득해
하느님을 찾는 이가
편안하게 다가와
시름을 벗고 쉴 수 있는
그루터기 같은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도록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느님께 더 많은 자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이들이 편하게 쉬도록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벽을
미련 없이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경쟁의 늪에서 헤매던 이들이
함께하는 즐거움을 맛보도록
넉넉한 마음의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불신에 빠져 하느님을 원망하던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도록
사랑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누군가 물어올 때
겸손한 마음,
환한 웃음,
따스한 손길로 다가가
바로 여기라며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곽승룡 비오 신부님
성전 정화 사건은 성전의 종말과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드러내는 계시를 말한다.
사흘 안에 다시 세워질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분의 몸이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께서 바로 성전의 종말 곧 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사건을 통해서 건물의 성전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새로운 성전, 그분 몸의 시대가 도래 한다.
오늘의 성전, 과연 건물만의 모습일까? 아니면 예수님의 몸이 드러나는 모습일까? 곧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부활을 만나는 성전일까?
영혼 없다고 말하면 자신은 시체란 말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식물은 생혼(生魂)이, 동물은 각혼(覺魂)이, 사람은 영혼(靈魂)이 있지요.
만물을 이렇게 분류하며 사람은 핵 원자 분자도 영혼도 알아야 합니다.
몸의 목숨이 있는 한 물질계에 속하고 목숨 없으면 영혼만 고차원이죠.
영혼 있다 없다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게 삶의 방향 결정되는 순간이죠.
영혼 없다면 고등동물, 죽으면 흙먼지 광물 결과가 인생이란 거잖아요.
그러니 사람이 영혼 없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을 시체로 봐달란 뜻이죠.
영혼 있는 사람이라면 사는 기간만 영혼 변화 가능하다는 걸 알아야죠.
혼 있다는 사람이라면 경험 못한 영혼세계지만 믿어서 큰 덕 보자고요.
성전 정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로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모든 어머니요 으뜸’으로 볼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거의 천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각 지역의 모든 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성전이 상징하는 바 교회 일치의 중심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적인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 고백합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은 별개의 두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입니다. 성전이야 말로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참으로 마지막 궁극으로 갈 곳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뿐이며 마지막 만날 궁극의 분은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여 저는 요즘 수도원을 찾는 분들에게 우선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곳 하느님의 집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남으로 가장 아름다운 분이 되었으니 가장 행복한 분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고스란히 가시적 성전 사랑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느님이 그리워 하느님이 보고 싶어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 성전을 찾아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시편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도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거룩함의 마지막 영적 보루와도 같은, 세상을 성화시켜야 할 거룩한 성전이 타락하여 속화되는 것은 예수님께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과감히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불같은 아버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바로 우리의 성전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요 성전입니다. 가시적 성전이 성전일 수 있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사 전례가 없는 성전이라면 건물일뿐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미사은총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인 성전이 되고 우리 각자 역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성체후 기도가 이를 잘 요약합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순례중인 교회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인 우리의 일치도 굳건해 지고, ‘은총의 성전’인 우리 각자 역시 정화되고 성화되어 더욱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괴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4,16-17)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이 거룩한 교회의 성체성사의 은총은 '거룩한 성전'인 우리를 통해 세상 곳곳에 흘러가니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서가 이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난다.---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세상이 이렇게 살아 존재할 수 있음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제공되는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인 말씀과 성체요, 미사은총으로 정화되고 성화되어 세상에 ‘하느님의 성전’으로, ‘생명의 강’으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용현 알제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고,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습니다.
우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작년 2018년 3월 주일 삼종기도 메시지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드는 사고방식에 빠지면 참으로 볼썽사납습니다. 이런 말씀은 하느님 거처인 우리 영혼이 장터가 되는 위험을 거부하도록 도와줍니다. 관대하고 연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이익만 추구하려는 위험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항상 현재적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각 개인과 시민 공동체, 사회 모두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 교회가 진정 하느님의 집이요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에 대한 지적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황님께서는 우리의 영혼도 그분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성전인 우리 각자의 영혼도 수많은 욕심들로부터 깨끗이 정화될 수 있기를 촉구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의 열정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열정(사랑)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왕성한 동력이었다. 열정은 목적의 크기에 비례한다. 예수님은 그 동력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갔으며, 동력을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하느님의 집(성전)에 계셨다. 당신의 마음은 열정으로 가득찬 성전이시다.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은총의 샘이 되셨다.
나는 학교에 있을 때, 말썽쟁이 학생들이지만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고통은 커갔지만 목적을 향할 열정을 자녔다.교사도 학부모도 학생도 모두가 열정을 지녔으며 목적을 이룰 마음의 성전이 있었다. 학교가 이런 마음의 성전을 공통분모로 지니고 있었기에 학교가 빠르게 꼴을 갖게 된 것이다. 힘들 때면 학교공동체는 핑게없이 하느님 집에 모였고 문제를 해결하려 기도를 했었다. 그 기도의 열정이 성전에서 하나로 모아졌고, 문제는 해결되어 다시 평온을 찾아갔다. 주님의 운총이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 그리고 하느님께서 머물 마음의 성전, 그 성전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열정이 우리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가득찼으면 한다. 장사하는 사람과 환전상들로 넘치는 성전, 마음의 성전도 따라서 망가졌다. 이를 지켜본 예수님은 그들의 무너진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쏟아버리고 엎어버리신다. 예수님의 열정으로 성전은 다시 불타 오르게 하셨다. 이를 바라본 제자들이 놀랐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2,17).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함승수 신부님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명절로, 이 기간에는 해외에 흩어져 사는 재외동포들을 포함한 모든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였습니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그날에 모이는 유다인들의 숫자만 해도 200만 명이 넘었고, 제물로 바쳐지는 양도 30만 마리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장사치들은 제물로 쓰일 가축의 값을 턱없이 올려 받아 폭리를 취했으며, 성전에 바쳐야 하는 세금도 외국 돈으로는 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돈을 세켈로 바꿔주는 환전상들의 횡포가 심했지요. 그럼에도 순례객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부당한 거래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보시고 너무나 마음 아프셨습니다.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의 불의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전에서 쫓겨나시는 것 같은 상황을 보고만 계실 수 없으시어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오 늘 복음을 보면 성전이 두 가지 의미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46년이나 걸려서 지었다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건물'로서의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과 일치되는 ‘존재’로서의 성전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처’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우리들 자신도 또 다른 의미에서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코린토 1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우리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한 집이고, 성전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성전,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시면서까지 지켜내신 소중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서 편하게 머무르실 수 있도록 잘 가꾸고 거룩하게 지켜나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할 우리들 안에 혹시 장사꾼 같은 모습이나 강도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나와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하는 모습,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모습,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자기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한 모습, 이런 '장사꾼'의 모습이 내 안에 있지는 않습니까? 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며 폭언을 일삼는 모습,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희생도 아랑곳 않는 ‘강도' 같은 모습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할 우리의 마음 속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 안에 설쳐대고 있는 '장사꾼'들과 '강도'들을 몰아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머무르셔야 할 성전을 쑥대밭처럼 피폐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없애야만 합니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그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버릴' 정도로 큰 희생과 변화가 필요할지라도 그 일은 절대 미루거나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편하게 머무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느님과 내가 깊은 일치를 이루어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전'(요한 2장 13~2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성전은 거룩한 집이요 거룩한 집에 걸맞는 것들이 아니면 과감히 쓸어버려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것은 그분 마음에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것 외에는 그 어느것에도 마음 두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한 집, 거룩한 몸, 거룩한 마음을 지니는데 방해되는 잡다한 것들을 싹 치워버립시다.
방치하면 마음이 쓰레기통으로 변합니다.
'치워야할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부터'
성령의 성전(1코린 6,19)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성전은 하느님 대신 돈을 섬기는 장사꾼과 환전상의 목소리가 뒤섞여 시장통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가 우리를 향합니다. 나의 내면에 하느님께 바가지 씌울 궁리나 하는 장사꾼이 자리 펴고 버티고 있지 않은가? 기도할 때에 하느님 뜻이 관건인가, 아니면 내 만족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는가? ‘조건 걸고 거래하려 드는 그 장사꾼 심보를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 할 것들을 무례하게 말씀드리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에게 무엇을 청해야 할 것인지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 깊게 오랫동안 들어야 합니다. ‘제가 당신께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여쭤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장사꾼들을 쫓아내시자 곧바로, 눈먼 이들과 절름거리는 이들이 나아와 치유를 받습니다(마태 21,14). 성전이 사고파는 마음을 떨치고, 믿음으로 나아와 고침 받는 곳임을 보여주신 겁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았지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저희끼리 의논하였기’(마태 21,25)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여쭤보는 일이 없었습니다.
세례로써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의 강론에서(Sermo 229,1-3: CCL 104,905-908)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즐거움과 기쁨 가운데 이 대성당의 축성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백성들은 거기에서 영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로 여겨지는 성전의 축일을 지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처음 태어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분노의 그릇이었지만 다시 태어날 때에 자비의 그릇이 될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 출생은 우리를 죽음에로 이끌고 두 번째 출생은 생명에로 되불러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세례받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마귀의 신전이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성전이나”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집에서 “거하지 않고” 특히 만물의 창조자께서 당신 손으로 또 당신의 유사성에 따라 지어내신 영혼 안에 거처하십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우리 마음에서 마귀를 쫓아내고 우리 안에 당신 성전을 마련해 주신 만큼, 우리의 이 성전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악행으로 인해 아무런 훼손도 입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 해를 입힙니다. 먼저 말씀 드린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전 우리는 마귀의 신전이었습니다. 그 후에 하느님의 집이 될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만들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 성당의 축성 기념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우리의 이 성전을 파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끔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전에 올 때마다 그 성전이 청결하기를 바라는 바대로 우리 영혼도 그처럼 청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성전의 청결을 보존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죄의 오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 성전이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 영혼에 암흑이 끼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 성전 안에 선한 행위의 광채가 빛나고 하늘에 계신 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대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가고 싶어하십니다. 주 친히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거처하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리라.”
내 안에 성전을 지어야 한다. <요한 2, 13-2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며 장사꾼과 온갖 비리가 넘치는 것을 보시고, “내 집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하시고, 기도하는 집이며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온갖 비리와 악으로 가득 찬 몸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새로운 집, 성전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현존이 없는 곳을 성전이라 말할 수 없듯이 내가 성전이 되지 않고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을 찾아 만나고 하느님과 함께 기도와 일을 하는 곳입니다. 건물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을 거룩하게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의 아니, 하느님의 영과 함께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돌로 지은 건물,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 권력과 재력과 예술의 상징이란 건물은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고, 이름답다 해도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성전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장사꾼의 집, 권력 투쟁의 집, 무질서와 악취가 나는 집, 가난한 이들의 지갑을 터는 집, “내 편, 네 편”하고 싸움으로 가득 찬 집은 허물어야 할 집입니다. 허물어 없애지 않으면 성전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성전은 자비와 하느님과 일치와 하느님의 생명으로 가득 찬 집이어야 합니다.
내 몸이 성전이 되려면 내 안에 내재한 영적 힘인 자유, 평화, 기쁨으로 꾸며져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주님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나야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오늘 주님은 성전을 정화하시려고 돈 상자를 뒤집어엎으신 것같이 우리가 주님의 성전으로 살기 위해서는 권력, 재력, 명예에 의해 살고자 하는 마음을 바꾸어 그런 것을 떠나 섬김과 순종의 삶, 이기심 없이 나누며 사는 삶, 교만 없이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살면서 기도하는 집으로 나를 꾸며야 합니다. 기도는 대화의 관계로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지 기도의 삶이 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집 성전에서 사는 사람은 하느님 말고 다른 것을 찾아서는 바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찾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사는 사람은 성전이며, 성전을 참 기도의 집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삶은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경제적 이익, 정치적 안정, 정치적 편견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성전답게 우리 안에 있고, 나를 성전으로 매일 꾸미고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세상의 이익을 위해 있지 않고 주님을 감사 찬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분열의 장소가 아니고 하느님을 찾아주는 일치의 본산입니다. 교회가 갈라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보고 교회 책임자들은 깊이 각성하여 기도를 통한 일치의 교회가 되도록 이끌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편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 성전 건물은 지난 1990년 5월 26일에 축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근 30년 된 건물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성전에서 주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모두 몰아내시며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라고 이르십니다. 실상 성전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제사를 봉헌하거나 성전세를 내기 위한 환전 등으로 재료와 필수부속물들이었는데도, 주님께서는 비단 그것들을 이용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넘어서 주 하느님께 직접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바치기를 원하셨는가 봅니다. 그러시면서 이어 주님의 그러한 노력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발하는 유다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나리라는 의미로서의 성전을 이야기하신 것임을 제자들이 회상하게 됩니다.
저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주 하느님께 성전을 짓고 기도한 솔로몬의 청원을 되새겨 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의 눈을 뜨시고 낮이나 밤이나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구를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누구든지 이웃에게 죄를 짓고 자신에게 저주를 씌우는 맹세를 하게 되어, 이 집에 있는 당신 제단 앞에 와서 맹세하면,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동하시어, 당신 종들에게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죄 있는 자에게는 그 죗값을 돌리시어 그의 행실에 따라 그 머리 위로 갚으시고, 의로운 이에게는 무죄 판결을 내리시어 그 의로움에 따라 그에게 갚아 주십시오.
그들이 당신께 죄를 지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이 땅에 기근이 들 때, 흑사병과 마름병과 깜부깃병이 돌거나 메뚜기 떼와 누리 떼가 설칠 때, 적이 성읍을 포위할 때, 온갖 환난과 온갖 질병이 번질 때,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개인으로나 전체로나 저마다 고통과 슬픔을 느끼며, 이 집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무엇이나 기도하고 간청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 모든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당신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그들은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 사는 동안 언제나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의 길을 따라 걸을 것입니다.
이제 저의 하느님, 당신의 눈을 뜨시고 이곳에서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2역대 6,20-23.26-31.40) 그 외에도 솔로몬은 이방인들이 청할 때나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유배살이를 할 때에도 주님의 집을 향해 청하는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면서, 성전이 주님의 기도를 전하는 하나의 통로와 주님 축복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오늘 성전에 이렇게 와서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우리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고, 주님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어 나와 어려운 이웃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희생 봉사하는 사랑의 삶을 살기로 다짐합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로
가는 길위에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성전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모든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든 성전의 중심이시며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좌표가 되는
성전을 통하여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깨닫게됩니다.
그러나 무너져
내리는 시간은
언제나 순식간입니다.
무너져 내려야 할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욕망입니다.
우리 자아가
무너져 내리지
않고서는 참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성전의 첫마음
처음으로 돌아가는
성체와 성혈의
삶입니다.
이 시대에
희망과 기쁨을
주는 성전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참된 기쁨과
참된 용서가
성전의 본질입니다.
가짜가 아닌
진정한 성전이
필요한 때입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말하는 상담사의 말에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십니까? 회사에서 이렇게 하라고 하니 억지로 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고객이 심한 말을 해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웃으면서 상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때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정 노동자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매스컴에서 자주 소개합니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깨지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저는 고등학교 때 감정이 완전히 깨졌습니다.”라는 표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깨진 감정으로 40년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 깨진 감정의 회복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이 분의 노력은 ‘원망’이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깨뜨린 상대를 향한 ‘원망’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깨진 감정을 회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부정적인 감정은 나의 모습을 인정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만듭니다. ‘나는 안 돼.’, ‘틀려 버렸어.’라는 말을 계속해서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과연 나를 인정할 수 있을까요? 또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감정이 깨졌다면 이를 회복하기 위한 긍정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세워졌을 때,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도 가능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은 성전을 정화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그 이유가 담겨 있지요. 아버지의 집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기도하는 곳, 사랑이 완성되는 곳, 그래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모두 배제되어 있었고, 대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판치는 곳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화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 역시 주님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일까요? 기도하는 곳이고, 사랑이 완성되는 곳이고, 주님을 만나는 곳이었을까요? 내 자신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훌륭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미움, 화, 다툼 등의 부정적인 마음들을 깨끗이 치우고, 대신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도록 성전 정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라는 성전이 바로 세워져 있을 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을 힘차게 전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오마르 워싱턴).
103 복자 김기량 순교현양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 함덕리 출신으로 소규모 무역상이었습니다. 그는 1857년 초 제주 근해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한 달 가량 표류하다가 중국 광동성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인도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뒤 1857년 5월 31일 제주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돌아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예비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육지에 자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에 여비마련을 위해 거제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통영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관아로 끌려간 김기량은 장살형과 곤장을 수없이 맞았으나 굳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김기량은 이듬해 1월에 51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신앙이 두려워 관헌들은 교수형을 당해 죽은 김기량이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기까지 했습니다.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제주교구는 그의 고향인 함덕리에 ‘순교 현양비’를 세워 그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자아실현이 아닌 자아제사가 드려져야 할 성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공작’(2018)은 대북공작원인 실제인물 ‘박채서’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의 핵심 내용은 박채서 씨가 흑금성이라는 안기부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할 당시 김대중 대통령 선거에 있을 뻔한 북풍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안기부에서는 그동안 선거가 있을 때마다 여당의 승리를 위해 간첩침투와 비무장지대 폭격 등의 조건으로 북에 돈을 지불해왔습니다. 남북관계가 긴장관계 모드가 되어야 보수여당의 지지율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수여당을 지지해 준 자신들도 안위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채서 씨가 야당의 김대중 씨가 빨갱이라고 하면서 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도록 북에 도움을 요청하는 안기부와 집권여당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던 박채서 씨는 ‘북한이 무력도발 등으로 김대중 씨의 당선을 반대 한다면 오히려 김대중 씨가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적합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김정일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이용해 김정일을 설득하여 폭격을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김정일은 그의 말을 듣고 폭격을 해 주려는 마음을 접습니다. 이에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고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흑금성 박채서 씨는 그 덕분으로 이중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
안기부라면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안기부가 자신들의 개인적 안위를 위해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원치 않아 오히려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하는 북쪽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내용은, 물론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무엇이 조직을 오염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조직은 그 조직의 정신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다면 오염된 것입니다.
어느 단체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단체는 본래의 정신을 잃습니다. 가족이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서로를 이용한다면 그 가족이 오래 유지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염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정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유가 이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성전은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전에서 오히려 자아실현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권력과 돈, 명예와 쾌락 등을 추구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이지 내 뜻이 실현되는 장소여서는 안 됩니다.
성전이 이렇게 오염되어 버렸다면 성전의 주인은 어때야할까요? 당연히 그 성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꾼들의 책상을 뒤엎고 그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도 작은 성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시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안위를 위하는 마음이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은 또 장사꾼들의 소굴에서 견디셔야합니다.
레위기에는 성전에서 어떤 제사가 봉헌되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제사는 총 다섯 가지, 번제-곡식제-친교제-속죄제-보상제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지금 우리 자신의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살라 바치는 봉헌의 제사이고, 곡식제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드리며 참 주인은 주님뿐이라는 신앙 고백이며, 그리고 친교제는 친교는 나눔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고, 속죄제는 자신의 죄를 위해 죄를 지은 장본인인 자기 자신을 바치고 더 나아가 그 보상으로 보상제까지 거행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제사가 성막을 지은 다음 당신 성막 안에서 드려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제사지내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 안에서 자아실현의 형태로 살아나려 한다면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사가 봉헌되지 않는 제단은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제단이 있고 그 제단에 자기 자신이 봉헌되어야 주님께서 머무십니다. 봉헌이 곧 순종입니다. 돌로 된 성전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주님께 봉헌되는 참된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이루려는 마음을 성령의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몰아내는 작업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두 곳에서 본당 신부로 지냈습니다. 두 곳 모두 성전이 신축된 후에 갔습니다. 전임 신부님들은 모두 성전 신축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본당으로 모금을 가기도 했고, 물건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교우들은 상가 건물에서 미사 참례를 했고, 좁은 공간이기에 텔레비전 화면으로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성전 신축을 위해서 몸과 마음고생을 하였던 전임 신부님들에게 감사드렸습니다.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성전 신축을 하셨던 교우들에게도 감사드렸습니다. 저는 이제 마음의 성전을 아름답게 만들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만일 당신이 관광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If you enter here as a tourist, you would exit as a pilgrim. If you enter here as a pilgrim, you would exit as a holier one.)’ 지금도 그 글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4개의 대성전이 있습니다. ‘성 마리아 대성전, 바오로 대성전, 베드로 대성전,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로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술적인 가치와 교회사적인 의미가 있는 4곳의 대성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의 4대 성당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명동 대성당, 중림동 성당, 혜화동 성당, 제기동 성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동 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 되었고,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기도 했습니다. 중림동 성당은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건축미입니다. 혜화동 성당은 근대 성당 건축물 중에서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곳입니다. 제기동 성당은 몇 남지 않은 고딕식 석조 건축물입니다.
성당은 예술적, 건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은 기본적으로 4가지의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성당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당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성당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의 기도를 하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셋째는 성당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미사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성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 성당은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 오는 사람들은 늘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친교를 나누는 사람, 서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마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될 것입니다.
성전 정화 -우리 삶의 중심인 성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천년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하여 오늘 봉헌 축일을 지냄으로 각 지역 교회는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이 삶의 중심임을 가시적으로 웅변하는 것이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는 이 성전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성전인 이곳에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우리 수도자의 하루 삶입니다.
우리의 평생 정주생활도 이 성전에서 거행되는 매일의 공동전례가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주기에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공동체 일치의 가시적 중심이 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살아갈수록 ‘갈 곳’은 주님의 집인 '성전'뿐이요, ‘찾아갈 분’은 성전에 계신 '주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 수도형제들과의 에버랜도 소풍 때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에버랜드, 말그대로 영원한 땅,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하지만, 진짜 에버랜드는 성전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수도원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하여 끊임없이 많은 이들이 순례자처럼 고향집을 찾듯이, 영혼의 쉼터 진짜 에버랜드 수도원의 성전을 찾습니다.
우스개 소리같지만 노년의 믿는 분들에게는 가까이에 세 장소를 갖춰야 한다고 합니다. 성당과 병원과 음식점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성당일 것입니다. 하여 많은 분들이 수도원이나 성당 근처로 거처를 정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성전 정화로 표출됩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세상을 성화聖化시켜야 할 성전이 세상에 속화俗化되어 타락 변질된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예수님의 열화熱火와 같은 분노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이 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저절로 성전을 사랑합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시편도 생각납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84,2-3).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을 절절히 체험합니다. 이어지는 화두같은 말씀이 성전의 심오한 비밀을 보여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참 성전임을 알려줍니다. 이 보이는 가시적 건물로서의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것은 매일 성체성사가 거행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산티야고 순례때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루의 순례가 끝나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하면 우선 물색한 것이 다음날 새벽 미사드릴 장소였습니다. 식당, 안내실, 휴게실, 숙소 밖 식탁 등 그 어디나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그 자리가 거룩한 성지요 성전임을 깨달았습니다. 가톨릭 교리서도 이를 분명히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4,24)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 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살아 있는 돌”(1베드2,5)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나오는 영적인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6,16)이다.-교리서1179항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과 더불어 가시적 건물로서의 성전도 그에 걸맞아야 함을 교리서는 언급합니다.
-“기도의 집은 성찬례가 거행되고, 성체가 보존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모이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단에서 봉헌되신 우리 구세주이신 하느님 아들의 현존을 공경하며 도움과 위로를 받는 곳이므로, 아름다워야 하고 기도와 장엄한 성사에 알맞아야 한다.”-교리서1181항.
이와 관련된 오늘 감사송중 아름다운 대목을 인용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 이어 우리 각자가 성전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 정화가 상징하는 바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할 각자의 성전입니다. 다음 성경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기에 각자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는 성전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세상을 살리는지 보여줍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이요 세상에 ‘살아 있는 성전’으로 파견되는 우리를 통한 은총을 상징합니다. 실감나는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의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미사를 통한 은총의 강물이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죽어가는 세상을 살립니다. 사실 이 미사 한 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원이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양식이 되고 약이 되어 우리를 치유하고 살리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입니다.
새삼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시고 성화하십니다. 아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성전은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 반포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후, 324년 황제가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성전은 가톨릭교회의 모교회로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주교좌성당 전체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첫째로 꼽히는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와 <화답송>의 <시편>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하느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강물’은 교회의 생명을 지탱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 은총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고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 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을 위해, 교회와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이 고귀함과 존귀함 앞에 겸허하게 경배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형제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전과 교회의 축복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축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주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소중한 성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국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에 참석했다가, 존경하는 글라렛 선교 수도회 관구장 김병진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최근 겪고 계시는 고초를 전해듣고, 마음이 참 ‘거시기’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현재 속초에서 춘천교구 산하 영북지구 무료급식소인 ‘작은 형제의 집’ 운영을 총괄하고 계십니다. 이 집은 수많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 봉사자들의 힘을 모아 23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집이기도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비가오나 눈이 오나 작은 형제의 집으로 출근하십니다. 수많은 노숙인 형제들과 독거노인들, 장애우 형제들에게 정성 가득한 밥 한상 차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소탈하고 서민적인 신부님께서는 사랑이 가득 담긴 한끼 식사를 차려내는데 필요한 굳은 일들을 묵묵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신부님께서 참으로 이해할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일방적 통지에 크게 가슴 아파하고 계십니다. 지난 10월 속초시는 갑작스레, 잘 운영되고 있던 작은 형제의 집에 대한 철거 요청 공문을 내려보낸 것입니다.
이에 춘천교구 영북지구 사제 모임과 작은 형제의 집 운영위원회는, 일방적이고 부당한 시의 조치에 대응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였고, 적극 대응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작은 형제의 집은 원래 속초시의 동의를 받고 시작한 사업입니다. 또한 속초시의 지적사항과는 달리 지극히 청결한 위생상태를 유지해왔으며, 웬만한 식당보다 나은 위생상태 속에 운영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간 작은 형제의 집은 국가나 지자체의 도움없이, 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운영되어 왔고, 최근 어려워진 서민 경제 분위기 속에,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들을 위해 사심없는 봉사를 계속해왔습니다.
이토록 의미있고 아름다운 사업에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할망정, 당장 철거를 요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처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바티칸 근처에서 기거하는 노숙인 형제들을 그 누구보다도 끔찍히 생각하고 챙기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소식을 들으셨다면, 분명 크게 개탄하시고 진노하실 일이 분명합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종탑아래,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대성전도 아름다운 성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극단적 소비주의와 개발주의 깃발 아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쓸쓸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소박하고 따뜻한 둥지인 작은 형제의 집 역시, 하느님 보시기에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분명합니다.
작고 소박한 작은 형제의 집 지척에는, 1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막 끝낸 속초시 문화회관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속초시는 발송하는 공문에 ‘시민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해 하는 속초’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시민도 엄연한 시민입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높은 벽 앞에 선 시민도 당연히 시민입니다. 병들고 소외되었지만 때로 부끄러움에, 때로 방법을 몰라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시민도 엄연한 시민입니다.
문화회관 리모델링도 좋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속초 시민들이 하루 단 한끼라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무료 급식 공간 하나! 마련해주시면 안될까요?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성전, 작은 형제의 집이 훼손되지 않도록,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설되도록 함께 기도하고,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노심초사하고 계시는 신부님을 위해 많은 지지와 격려를 보내드려야겠습니다.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중앙 문을 보면 문 상인방에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즉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들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복음: 요한 2,13-22: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시키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대로하신 것이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던 것이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이 성령을 모시는 궁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이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일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고 보존하도록 하자.
-우리의 성전 정화-
김기환 수사님
T.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에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갖가지 물건들을 내놓고 팔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내놓은 물건들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필요한 봉헌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속죄하기 위한 봉헌 제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다 뒤엎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엎으신것들은 환전상들의 돈과 속죄 제물에 사용되는 갖가지 동물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고 예배드리기보다 앞서 제물들을 이용해 이익을 얻고 돈을 벌고자 했던 그들의 세속적이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과 탐욕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속죄 제물에 필요한 갖가지 짐승들을 팔았던 행위는 전혀 잘못된 행위들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속죄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당연이 정당했고 그들이 성전에서 팔았던 행위는 잘못된 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알고 계셨던 유다인이셨기에 그 점에 대해서 모르고 계실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가 잘못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뒤엎으신 이유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진심으로 예배하는 마음이 있기보다 앞서 재물을 사고 팔아서 세속적인 이익과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엎으신것은 환전상들의 돈과 짐승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팔아서 얻고자 했던 그들의 탐욕과 욕심, 세속적인 이익이었었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정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인으로서의 의무, 가정생활의 의무, 신앙인으로서의 의무, 그리고 사제로서의 의무, 수도자로서의 의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지키고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고 칭찬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의무들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누가 봐도 잘못된 점은 없고 정당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이용해 세속적인 탐욕과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부터 정화되어야 하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높은 신학적 지식을 쌓은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훌륭하고 정당하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높이고 남들로 부터 환영을 받기를 원하고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자 한다면 반듯이 정화되어야할 성전이 됩니다. 어떠한 수도자가 늘 기도와 묵상속에
서 살아가고 경건하게 살아간다면 그 누가봐도 훌륭하고 정당하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높이거나 자만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한다면 반듯이 정화되어야 할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한 신자가 매일 미사에 나오고 묵주기도 거르지 않고 바치고 성경 매일 묵상하고 봉사활동도 빠지지 않고 한다면 당연이 그 누가 봐도 훌륭하고 흠잡힐때가 없겠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정당화 시키며 그렇게 하지 못해 보이는 이들을 비판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며, 스스로 자만해 진다면 이 역시 반듯이 정화되어야 할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신앙생활도 사회생활에서도 그 어떤 누가 봐도 잘못된 것이 전혀 없는 정당한 행위에서도 그것을 통해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이익을 탐한다면 우리의 성전,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우리 마음의 성전을 향해 꾸짖으실 것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지금 우리의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성전은 정화되어야 할 성전입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성전입니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의 성전을 되돌아 보고 살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일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사실 이 성전정화 사건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그분의 자녀된 거룩한 지위를 갖게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자신들의 인간적인 욕심을 통해 그 거룩한 지위를 스스로 저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언제나 주님의 영이 함께하시며 그 거룩함의 지위를 잃지 않고 참된 생명을 살아가는 성전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자비를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 십여 일 전 쯤, 아마 자비를 구하는 소경 바르티메오의 얘기를 들은 날, 그날도 일 나가기 전 혼자 새벽미사를 봉헌하며 영성체 후 묵상을 하는데 문득 ‘내 안에 주님을 이렇게 모시고 있는데 뭣 하러 자비를 밖에서 구하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자비를 밖에서 구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내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고 뭡니까?
그러면서 내 밖에 나와 멀리 떨어져 계신 하느님을 부르며 어서 빨리 오시어 저를 구하여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 줄 모르고 밖의 주님을 찾는 것인가요? 아니면 내 안의 주님을 밖으로 몰아내고선 다시 밖에서 주님을 찾는 건가요?
저와 같이 이런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인지 그래서 오늘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계시는 것이 사실이면 이제 내가 성전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늘 의식하며 성전답게 살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녀 클라라는 아주 뜻 깊은 얘기를 합니다.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태중인 작은 봉쇄 안에 그분을 모셨고, 처녀의 품으로 안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통찰입니까?
클라라는 수도원이 봉쇄 공간이 되기를 바랐고 거기서 자매들과 함께 공동의 정배인 주님과 사랑을 나누려고도 하였지만 자신의 태가 봉쇄 공간이 되기를 바랐고 거기서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홀로 아들 예수와 밀애를 나누고자 했지요.
우리의 성전 축일도 이러해야 합니다.
내 안의 성전을 놔두고 밖의 성전만 정화하고, 내 안의 성전을 축하하지 않고 밖의 성전만 축하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성전건립을 축하하기 전에 먼저 성전을 정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축성된 성전이시기에 정화가 필요치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성전은 성전이로되 정화가 필요한 성전이니 먼저 정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화 역시 클라라가 얘기하는 정화가 더 탁월합니다.
죄와 욕망의 자신을 씻으려는 정화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정화이고 주님을 수태하는 인격적 정화를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지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
내가 깨끗한 것이 우리의 정화와 정결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모셔 들이고 일치하는 것이 정화와 정결의 목적이지요.
사랑치 않고 일치치 않는 정화와 정결은 결벽증처럼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이제 자기를 정화한 우리는 밖의 성전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것도 건물 성전이 아니라 사람 성전들의 정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도 더러운데 어찌 남 더럽다고 하느냐고 발뺌하지 말고 우리 같이 주님의 성전이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밖에서 구하지 않아도 생명을 안에서 누리는 우리가 되고 오늘 에제키엘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성전에서 나오는 물, 곧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죄와 욕심으로 더럽혀진 성전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이 가득하고 넘치는 성전이 되자고 같이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성전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가득해
하느님을 찾는 이가
편안하게 다가와
시름을 벗고 쉴 수 있는
그루터기 같은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도록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느님께 더 많은 자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이들이 편하게 쉬도록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벽을
미련 없이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경쟁의 늪에서 헤매던 이들이
함께하는 즐거움을 맛보도록
넉넉한 마음의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불신에 빠져 하느님을 원망하던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도록
사랑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누군가 물어올 때
겸손한 마음,
환한 웃음,
따스한 손길로 다가가
바로 여기라며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카다콤바와 베드로 대성전.<요한 ,2/13-2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로마에는 카다콤바와 베드로 대성전이 비교될 만금 하느님의 성전으로 현존하고 로마에 통 세 번 성지순례 갔었지만 성전 안에는 한번만 들어가 보고 성전 주위에 바라보며 쉬고 있었습니다. 로마에는 배드로 대성전 말고 바오로 대성당 , 성모설치 성당 외 큰 성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집 보다 관광, 구경하는 성당이며 되고 한바귀 돌고 나오게 됩니다. 저는 카다콤바 동굴에서 미사 드렸지만 베드로 상딩에서 미사를 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세 번째 갔을 때 저는 일부로 대성전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외면을 보면서 이런 상념에 빠졌습니다. 문제를 만들면서 저렇게 크고 웅장한 성전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배 들이는데 필요한가? 가난하고 소박하고 깨끗함으로 거룩함을 들어내고 사는 것이 바른 일이 아닌가? 우리나리의 대형건물 대형교회 무엇이 잘못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저는 사목하면서 큰 교회는 짖지 못하고 시골에 공소는 지어보았습니다. 신자들이 모임을 위하여 필요에 의해 성당을 지으려고 하니 신자들의 경제사정을 잘 알고는 돈이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 생각만 10년 하다가 떠나 온지 25년이 지난 지금 모금 하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한다고 하는데 지금도 어렵다고 합니다. 보통 성전을 지우면 불협화음만 야기되기도 합니다. 이는 각 지역의 문제이고 참 성전은 각자 안에 현존하시는 마음입니다. 각자 마음속에 성전이 없으면 어디를 가나 어디에 있으나 어느 때나 하느님의 현존에 살지 못합니다.
마음의 선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나기고 유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살기를 바랍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보지 말고 그 속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참으로 가난한가? 마음이 깨끗한가? 마음이 바르고 진실하고 참 사랑을 알고 실천하고 있는가?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나 지나침 욕심으로 이기적 아닌가? 이렇게 눈을 뜨고 검사한 다음 선택하였으면 그 다음은 눈감고 귀 막고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 되였고 하느님의 거룩하심 완전하심 깨끗한 사랑의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집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 16)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종식하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4년에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서 교회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성전은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이며,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의 바티칸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 1,000여년 동안, 교황의 거주지였고, 또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 16)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지요. 성전에서 장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당에 가보면 가끔 무엇인가 판매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성당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좀 팔아달라는 뜻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당에서 판매되는 것들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거나 성전 건축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물건을 파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모두 다 좋은 취지이며 당연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 버렸습니다. 그것도 채찍을 만들어서 휘두르면서 어서 나가라고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채찍을 드신 것은 성전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예배하고 공경하는데 정신은 없고 오직 물건만을 파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성전을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에서 판매되는 많은 물품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성전을 건립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취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본래의 근본적인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거두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물건을 팔아서 성전을 짓는데 쓴다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일차적인 목적이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 중요한 목표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 후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그 다음 순서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성당에 기도하러 가야 되겠습니다. 성당에서 하느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에 관심이 없이, 그저 사람을 만나기 위한 것이거나, 성당에 나가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거나 어떤 인간관계만을 위해서 성전을 이용한다면, 그것도 넓은 의미의 성전을 통해서 장사(business)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성전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성당에 무슨 목적으로 가고 있습니까 ?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라테나노 대성전 봉헌 축일(요한 2, 13-22)
김성 세례자 요한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찬미 예수님!
라테나노 대성전은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서기까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모든 성당들의 어머니였던 이곳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요 로마의 주교좌 성당(Catedrale)이기도 하며 로마의 4대 성전 중 하나입니다.
성당은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해 공인되자
교황 멜키아데가 교회를 일으키고 또한 교황들의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근처의 병영과 풀라우지 라테라노(평민 가문으로서 집정관을 지냈으며 이 일대의 소유지를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기증함)의 소유지인 이곳을 기증했습니다.
<라테란 성당>이라는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음은 물론입니다.
특기할 것은 이곳에서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Boniface VIII, 1235-1303. 재위 1294-1303)에 의해 사상 처음으로 성년의 선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또 신, 구교 일치를 위한 라테라노 공의회가 1123, 1139, 1179, 1215년과 1512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습니다.
이곳에는 1851년에 복구된 교황의 권좌가 있으며, 위에는 최후의 만찬 때 사용 된 것으로 전해지는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이 사용했던 낡은 나무 제대가 보존돼 있습니다. 라테라노 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즉 제물을 파는 이들 그리고 환전상들을 쫓아내고 탁자를 엎어 버리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은 현재로 친다면 명동 성당에 가서 헌금함을 엎어버리고 관리자들을 쫓아버리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당시의 분위기로 본다면 이는 몇 배는 더 불경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유다인들이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라고 따지고 물은 것입니다. 성전 모독, 불경에 해당하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자격이 있는가? 따져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전에서, 제물로 폭리를 취하고 환전으로 몇 배의 이득을 내는 상인들과 그와 결탁한 사제 계급, 기득권에 분노한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 사랑의 하느님을 홍보하고서는 부정과 죄를 논하는 것에 주님은 화가 난 것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아들, 참 하느님이신 분이 있는데 이를 몰라보고 세상의 논리로, 부정한 방법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준엄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어떠합니까? 지금도 사실 이러한 일들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성당 재건축은 수십 억 원 이상이 소요됩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신자들의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복지보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보다 성전을 카페로, 예식장으로 활용하여 이익의 수단으로, 운영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몰두하는 것은 참 생각해볼 여지가 많습니다.
장소가 주는 거룩함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요 매개일 뿐입니다. 천막 성당이라도, 허름한 건물일지라도 그곳에서 진정 복음이 낭독되고 복음이 실천되는 곳이라면 하느님이 거할 것이요, 아무리 대리석과 파이프 오르간, 온갖 장엄한 치장으로 도배된 곳이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사명으로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님을 말씀을 깊게 묵상해 볼 때입니다.
우리의 희생과 우리의 선행을 그분은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재물을 눈여겨보시지 않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살아 있는 성전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은, 단순히 로마에 있는 하나의 오래된 교회 건물이 아니라, 로마 교회와 전 세계 교회들의 내적 일치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성전은 모든 교회의 으뜸이며 어머니로 불립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참된 장소, 유일한 참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 아버지의 집을 정화하는 충만한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당신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이것을 기억시킵니다. 곧 모든 사람들은 거룩하고 하느님이 그 안에 거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물건이나 도구처럼 더럽힐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거두어들여야 할 때를
아는 자연이 단풍을
이제 거두어들입니다.
성전의 역할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심을
고취하는 곳이
참된 성전입니다.
좌절과 성숙이
반복하듯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만나게됩니다.
성전의 중심점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봉헌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성전은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하느님의 거룩한
몸입니다.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성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의 힘은 우리의
진실된 실천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삶과
거룩한 성전이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길 기도드립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실천이 진정한
성전의 길임을
잊지맙시다.

한때 남들보다 신제품을 빨리 구입해서 사용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비자 군을 일컫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소리를 들었던 저였습니다. 특히 컴퓨터, 카메라, 스마트폰 등에 관심이 컸고 또 이를 누구보다도 먼저 사용해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들보다 앞서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새 것을 구입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그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합니다. 새로운 기능을 익히고 능숙하게 사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비되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지금 익숙한 것을 더 잘 활용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지요. 새 것이 좋아 보이지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특별한 기능이 많은 것이 좋아 보이고 필요할 것 같지만, 익숙한 기능을 더욱 더 잘 활용한다면 효과가 더 크게 될 것입니다.
문득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새 영세자로부터 세례를 받았음에도 뭐 특별한 것이 없다는 불평 비슷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새 영세자만이 하는 말이 아니라, 많은 신앙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갈등이기도 합니다. 깜짝 놀랄만한 특별한 일, 그리고 지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들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 끊임없이 특별하고 새로운 표징을 청했던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 현재의 우리 모습인 것입니다.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얻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없느니만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면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의 삶 안에서 주님을 느끼고 주님과 함께 할 때 큰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라면서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청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특별하고 새로운 것만을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당신 자신이 성전임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어떤 특별함도 또 새로움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삶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어떨까요? 늘 특별함과 새로움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 늘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평가되는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을 더 잘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실수할 가능성과 맞서는 것을 말한다(이윤기).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어느 시골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입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를 보고서 말이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나는 크고 힘이 세서 무거운 짐을 도맡아 나르고 있지. 그래서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옆에 있던 암소도 말합니다.
“아마 내가 더 사랑을 많이 받을 걸? 내 젖으로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먹지. 먹는 것이 최고지. 그래서 날 가장 사랑한다고.”
이번에는 양이 말합니다.
“다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주인님이 매일 밤 덮고 자는 이불은 모두 내 털로 만든 거라고. 나를 매일 덮고 자는 걸 보면 주인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암탉은 매일 알을 낳기 때문에, 고양이는 비위생적인 쥐를 잡기 때문에 주인이 자기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이 집에 함께 살게 된 강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도 주인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도무지 잘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바로 그때 늙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말합니다.
“강아지야. 저 친구들의 말이 다 맞지만,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서 울고 앉아 있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사실 너는 꼬리를 쳐서 주인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단다.”
주인이 일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강아지는 쪼르르 주인 앞으로 달려가서 꼬리를 치면서 맞이했지요. 그러자 주인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너를 보니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는구나. 네가 어떤 동물보다도 최고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능력이 많아서? 내가 재주가 많아서?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은 바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치면서 주인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역시 이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체로 건강한 편이지만 2번 정도 크게 아팠습니다. 한번은 1991년 9월 9일입니다. 나중에 유행성 출혈 열이라고 알았지만 열이 40도 정도 되었고, 중환자실에서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는데 20일 정도 걸렸습니다. 그 뒤로는 저의 삶을 하느님께서 주신 ‘덤’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한번은 2012년 11월 17일입니다. 다리가 골절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한동안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하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다시 걷기까지 3달 정도 걸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한쪽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신앙은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새로 세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서울교구에는 232개 본당이 있습니다. 어떤 본당은 시설이 노후하여서 리모델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본당은 새로 신설되어서 많은 조직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떤 본당은 재개발 지역이어서 부득이하게 이사를 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본당은 많은 본당을 새로이 분가시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본당은 지역의 환경문제를 함께 연대하면서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를 모으면서 해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란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 할 것입니다. 지나친 음주 때문에 공동체에 어려움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로 단체에 어려움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일의 진행을 어렵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공동체에 부임하는 사제들입니다. 신자 분들은 새로이 오신 사제와 전임 사제를 비교하게 됩니다.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는 사제, 강론을 길게 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신자 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늘 웃는 모습으로 대하는 사제, 신자 분들의 의견을 잘 듣지 않고, 화난 모습을 보여 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본당의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사제, 재정의 흐름을 불투명하게 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충실한 강론을 하는 사제,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강론을 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한 교우 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교구는 본당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교님께서 암행어사와 같은 분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하듯이 인격적인 문제가 있다면,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신앙인으로 충실하게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은 예술적, 건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기본적으로 4가지의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성당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의 기도를 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셋째,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미사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성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 성전은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늘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전, 기도하는 성전, 친교를 나누는 성전, 서로 섬기는 성전은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성전도 바로 그런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성전 정화 -성체성사의 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수도원에 피정 오시는 분들에게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축복받으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곳 주님의 집에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이제부터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났으니 주님을 닮아 아름답게 사셔야 합니다.”
수도원은 흔히 주님의 집이라 부릅니다. 고향집을 찾듯이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영혼의 보금자리, 영혼의 고향집 같은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을 찾는 많은 자매들이 이구동성의 말들은 친정집에 온 듯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산티아고 순례시, 늘 끊임없이 흥겹게 노래했던 시편 짧은 기도입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성가정 축일 미사때 화답송 후렴 역시 자주 노래하는 시편구절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나이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84장 참조).
주님의 집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구구절절 잘 표현된, 역시 제가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의 집인 성전을, 성전안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미사전례를 사랑합니다. 믿는 이들 삶의 가시적 중심이 성전이자 미사전례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집인 성전을 통해, 주님의 미사전례를 통해 사랑하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또 이런 주님을 만나야 살 수 있고, 비로소 영혼의 위로와 치유, 정화와 성화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에 기록된 말을 상기합니다.
성전정화사건에 이은 유다인들의 항의에 대한 주님의 다음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주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고 부활후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이를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이뤄지는 주님의 몸인 성전입니다. 미사가 거행됨으로 우리가 주님의 한 몸을 이루기에 보이는 성전도 비로소 주님의 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사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미사의 은총으로 보이는 가시적 성전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더불어 각자 성전인 우리도 정화되고 성화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의 말씀대로 세상 역시 하느님의 은총, 미사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미사은총이 흡사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은총의 강’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47,9)
이런 하느님 은총, 미사 은총으로 세상은 살아나고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도, 더불어 주님의 성전인 우리 각자도 끊임없이 정화되고 성화되며, 성장하고 성숙되어 갑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 모두 각자가 주님의 성전임을 환기시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세상을 살리시고 당신의 성전인 우리를 정화하시고 성화하십니다. 바로 오늘 에제키엘서 마지막 아름다운 말씀이 주님의 미사은혜의 풍부함을 상징합니다. 흡사 잃었던 에덴동산을 찾은 듯 합니다. 아니 한층 업그레이드 된,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인 복락원復樂園 에덴 동산을 보는 듯 합니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에제47,12)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고 약이 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아멘.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많은 성당에도 성물방이 있고, 쉼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례자들이 기도를 잘 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맙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정돈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 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성전은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 반포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후, 324년 황제가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성전은 가톨릭교회의 모교회로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주교좌성당 전체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첫째로 꼽히는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와 <화답송>의 <시편>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하느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강물’은 교회의 생명을 지탱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 은총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고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을 위해, 교회와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이 고귀함과 존귀함 앞에 겸허하게 경배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형제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전과 교회의 축복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축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사랑이 숨쉬는 성전으로 살아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머리”로 불립니다. 이 대성전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천여 년 동안 교황청 역할을 했으며, 다섯 차례의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고, 성 프란치스코가 수도규칙을 승인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에 우리는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일치되어 있음을 깨닫고, 각자의 성화 소명에 충실하여야 함을 상기해야겠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자매들을 거룩하게 대해야 함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집이요,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의 태도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느님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표지가 되기보다는 세속 가치를 좇아가는 현상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지 않는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입니다. 인간의 삶과 인간의 문제를 배제시키거나 무관심한 교회는 성전이 아닌 공동묘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거룩한 곳이며, 하늘나라가 실현되는 곳으로서 사랑과 생명이 숨쉬는 곳이어야겠지요.
성전은 하느님께서 몸소 축성하시어 당신의 거처로 삼으신 곳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회상하고 보존하며 살아내는 교회의 세포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친교와 사랑과 평화와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차별 없이 존중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사랑으로 선택하여 함께 하며,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웃어주는 ‘공감과 연민’이 현저히 드러나는 곳이 참 성전입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전이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온마음으로 따름으로써 오늘의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주님 보시기에 좋은 참 성전이라 할 수 있을까요? 부유한 이들과 힘있는 이들 중심으로 흘러가는 교회,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관심한 교회는 주님을 분노케 하는 장사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워진 성전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우리 인격을 거짓과 무관심, 차별과 불평등으로 채우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 자매들을 소중하게 대해야겠습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존중하며 소중히 대하는 마음과 삶의 태도야말로 성전을 참 성전이게 할 것입니다. 사실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은 웅장함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들의 거룩함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아가 세계의 지역교회와 보편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길은 각자가 애덕 실천을 통하여 살아있는 성전이 될 때 가능한 일임을 기억해야겠지요.
사랑은 요구가 아니라 전염이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을 지내는 이유가 뭔가?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는 복음을 읽는데 라떼라노 대성전과 같은 성전을 많이 짓자는 건가 허물자는 건가?
이런 성찰의 끝에 도달하는 답은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성전이면 세우고 복마전이면 허물어라!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세워야 할 성전은 어떤 거고 허물어야 할 복마전은 어떤 건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해서 정리하면 이런 것일 겁니다.
첫째로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정신, 곧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세우는 방식은 성령을 모시는 것이고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허물어야 할 복마전이 뭔지도 자연스럽게 답이 나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정신, 곧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욕심이 가들하고 성령 대신 악령과 더러운 영이 머물고, 우리의 정신을 기도와 헌신의 영이 아니라 육의 영이 차지하고 있으면 그것이 복마전이니 허물어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냐 하면 가난으로 욕심의 복마전을 허물고, 회개로 썩어빠진 정신과 육의 영을 몰아내는 겁니다.
이렇게 성전의 정화와 파괴가 이루어진 다음 재건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 밖의 성전이 아니라 나를 성전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성전정화와 재건이 이루어진 다음에 해야 할 것이 우리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듯이 수신修身의 차원 다음에는 제가濟家의 차원이겠지요.
사실 공동체 구성원이 각기 모두 수신이 잘 되어 있으면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각자가 다 성전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고, 그리고 나름대로 성전이 되었음에도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거짓 성스러움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는 것만으로, 사랑의 친교 없이 성체조배를 많이 하는 것만으로, 다른 이의 성화 없이 자기만 성화하는 것만으로 성화되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는 게 바로 그거지요.
실로 우리 가운데는 거룩한 외로운 자가 많습니다.
진짜 거룩한데 다른 사람이 따돌려서 그런 외로움도 있지만 사랑이 없어 외로운 거짓 거룩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 없는 거룩함은 거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저도 사랑 없는 거룩함에 자주 속습니다.
이것이 공동체가 성전이 되는 것을 우리가 가로 막는 것인데 우리는 또 다르게 속기도 합니다.
거짓 사랑에 속아서 거룩함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을 모심으로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 사랑인데 하느님도 거룩함도 없이 서로 눈감아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속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로 성전이 되는 것, 사랑의 성전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공동체로 성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요구가 아니라 전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룩함도 사랑도 훈계나 요구가 아니라 전염이 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 가는 길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머리숙여
기도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모든 곳을
봉헌하는 곳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선택하는
곳입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들을
내려놓는 곳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정화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몸인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성전과 우리또한
하나의 몸입니다.
함께 순례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목숨바쳐 사랑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성전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하고 기도하는
주님의 작은 성전이길
기도드립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텔레비전에서 건강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 프로그램을 보시던 할아버지께서 점점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는 며느리가 물었지요.
“아버님, 왜 그러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기서 얘기하는 병의 증세가 요즘 내가 느끼는 증세와 너무 똑같구나. 아무래도 내가 저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
그래서 며느리도 할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는데, 방송을 마치면서 아나운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자궁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할아버지의 걱정대로 자궁암에 걸린 것일까요? 남자인 할아버지가 자궁암에 걸릴 리가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걱정은 잘못된 걱정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걱정과 불안 속에 살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어떤 분이 복어 독을 먹고서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이 복어 독을 먹은 것입니다. 복어 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절대로 이 복어 독을 먹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 분은 복어 내장의 독을 먹으면 몸에 좋다면서 복어 내장을 볶아 먹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생긴 안타까운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스스로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은 물론 남들 역시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올바른 지식과 함께 함께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정관념과 선입견으로 인해서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 시대에 성전은 시장처럼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물론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 거룩한 장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장소가 되면 좋을 텐데, 그것이 아니라 성전에 봉헌할 동물을 사고팔고 또한 화폐를 교환하는 환전상들로 가득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비리였습니다. 거룩한 제물을 봉헌해야 하는데, 좋은 동물이 아니라 형편없이 나쁜 동물을 깨끗하게 정화된 것이라면서 이를 비싼 값에 팔아서 봉헌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사용되는 화폐가 따로 있어서 환전상에게 웃돈을 주고서 교환을 해야만 했지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곳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돈을 쏟는 등의 과격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많은 이들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판단은 이렇게 하느님의 뜻과 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올바른 판단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전 그 자체이신 주님을 만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이끌려고 하면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자신이 유능해서 관리자가 되었다고 믿는 순간 부하들은 당신 없이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테리 켈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혜민스님의 글 중에서)
인생길에 내 마음 꼭 맞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 난들 누구 마음에 그리 꼭 맞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게만 들리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세상이 어찌 내 마음을 꼭 맞추어 주랴? 마땅찮은 일 있어도 세상은 다 그런 거려니 하고 살자.
사노라면 다정했던 사람 멀어져 갈 수도 있지 않으랴? 온 것처럼 가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안 되는 일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잘 되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사는 것이 좋지만,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을 피하신 적도 있으셨다.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마음 쓰고 아파하지 말자. 세상은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비난했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 하지 말자. 부족한데도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다고 너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인생은 결국 가는 것. 무엇이 영원한 것이 있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컴컴한 겨울 날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자. 더러는 좋은 햇살 보여 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그래, 우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마음을 내려놓는 겸손한 마음으로만 ‘그러려니’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토요일에는 가정방문을 하였습니다. 지난여름에 혼배 주례를 하였고, 신혼부부가 초대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부의 가족들과 함께 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본당 신부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에게 엄격했던 신부님, 신자들에게 자상했던 신부님, 약주를 좋아하시던 신부님, 아예 술을 못 드시던 신부님, 매사에 열정적인 신부님, 늘 조용하셨던 신부님, 강론이 길었던 신부님, 강론이 재미있었던 신부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우들에게 성당은 건물일수도 있지만, 성당은 사제가 있는 곳인 것 같았습니다.
사제에게 성당은 어떤 곳일까요? 상가를 얻어서 사목을 하던 신부님, 가건물을 지어서 사목을 하던 신부님,새로 신축한 성당에서 사목을 하던 신부님, 모든 조직과 반듯한 성당이 갖추어진 곳에서 사목을 하던 신부님이 있을 것입니다. 사제에게도 성당은 미사를 집전하고, 교우들이 모이는 건물과 장소일 수도 있지만 성당은 교우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허허 벌판이었어도, 시장 속의 작은 공간이었어도,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이었어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성당입니다.
신랑의 장모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구역 미사를 하실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장소를 제공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자매님께서는 구역장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서 하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오셔서 미사를 하시면 저의 집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자매님에게는 집에서 하는 구역미사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구역미사를 통해서 집이 성전이 되는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많은 성당을 보았습니다. ‘예술적, 문화적, 역사적, 종교적’인 가치를 지닌 성당을 보았습니다. 웅장한 모습의 성당도 보았습니다. 그래도 성당은 미사가 집전 될 때,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서 찬미를 드릴 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 정화淨化 -천상낙원의 실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소주제대로 강론 제목은 ‘성전정화’로 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성전정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성전정화이기 때문입니다.
천상비전이, 꿈이,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천상비전은 관상觀想만이 아니라 실현實現하라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천상비전을 현실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내야 하는 것이고 바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매일의 미사가 성전정화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의 성전정화 사건이 참 인상적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가시적 표지가 건물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성화聖化시켜야 할 성전이 속화俗化되어 오염되어가는 현실에 분노하여 즉각 성전정화라는 상징적 행위를 실천하십니다. 모두를 쫓아낸 후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만은 조용히 타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 말씀(시편69,10)을 상기했다 합니다. 열화와 같은 주님의 분노를 통해 예수님의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저절로 하느님의 집인 성전 사랑으로, 성전에서 거행되는 이 거룩한 미사로 표현될 수 뿐이 없습니다.
예전 수도형제들과 에버랜드 봄소풍을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영원한 땅, 낙원을 상징하는 에버랜드 말 그대로 참 눈부시게 화려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이었습니다. 뭔가 허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에 귀원한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이 진정 에버랜드임을 깨달았습니다. 천상낙원의 꿈에서 태동胎動한 수도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창세기의 천상낙원 에덴동산 에버랜드의 꿈은 에제키엘로 이어집니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천상낙원의 환시를 보는 에제키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의 ‘성전에서 흐르는 생명수’의 천상낙원의 비전은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 지요.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 살아난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얼마나 신나는 천상낙원의 비전인지요. 잃었던 에덴동산의 천상낙원의 비전을 선물 받은 에제키엘입니다. 에제키엘의 천상낙원의 꿈은 예수님께로 이어지고 우리는 매일 미사를 통한 성전정화 후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천상낙원의 비전을 선사 받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런 천상낙원의 비전이 자신을 통해 실현됨을 내다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몸이 영원한 성전이라는 언급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 바로 은총의 샘이며 에제키엘이 예언한 천상낙원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실현되는 천상낙원의 비전입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세상을 살렸듯이 성체성사를 통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은총의 강물’들이 세상을 살리고 성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1179항에서도 형제들이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가 진정한 성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 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살아있는 돌’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 나오는 영적인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교리서의 진술이 참 명쾌하고 은혜롭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차원의 성전을 보게 됩니다. 가시적 건물로서의 성전, 불가시적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하나하나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니 매일의 이 세차원의 성전이 하나되는 미사보다 더 좋은 성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천상낙원의 실현을 향해 가는 우리 교회의 순례여정입니다. 묵시록에서 보여주는 언젠가 그날의 천상낙원 비전입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요한묵시22,1-2)
에제키엘의 천상낙원의 꿈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은혜롭게도 매일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을 통해 이런 천상낙원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하루하루 천상낙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성전, 은총의 성전입니다. 관상觀想만하라 있는 천상낙원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實現하고 이웃과 나누라 있는 천상낙원의 꿈입니다.
주님은 당신 생명나무의 열매인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참 성전이 되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어떤 건물 유리창이 하나도 깨지지 않았다면 그 건물에 돌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죄책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한두 장 깨어져있다면 죄책감이 줄어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쉽게 창문을 깬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루 영성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고해성사를 보아서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는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조심하지만, 한 번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짓는 것은 처음보다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좋은 의미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단 자신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내면 자신도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은 큰 두려움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의 옆구리를 깨뜨려 그 안에서 축복의 선물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들도 두려움이 줄어들어 그분처럼 우리 옆구리를 깨뜨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로마의 성 라테라노 성전 봉헌축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바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이렇게 대듭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결론지어줍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에제키엘서 47장의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전 우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있는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물은 성령을 의미하고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도 성전입니다. 우리에게서도 피와 물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생명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 때 어떻게 하면 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해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이웃에게 어떤 열매를 주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분께 붙어있기만 하면 나를 통해 그 은총의 열매가 이웃에게 가는 것입니다. 성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것은 그분께 붙어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 즉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를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쪽은 해가 뜨는 방향이기 때문에 주님을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성전은 항상 주님을 향하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해 성막을 제작하라고 하십니다. 그 성막은 세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바깥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입니다.
바깥뜰에서는 짐승들이 살라 바쳐지는데 이는 주님을 향하기 위해 내 자신의 동물적인 본성, 즉 육체적 욕망을 살라 바쳐야 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엔 가지가 일곱 개인 등잔대가 있고 오른쪽엔 빵이 있으며 그 정면엔 향이 피워지고 있습니다. 일곱 등잔은 일곱 은사를 주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 성령의 비추임이 영혼 안에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빵은 바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빵 만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도 양식으로 매일 먹어야하는 것입니다. 그 정면의 타고 있는 향은 자신의 생각까지 봉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가 주님과의 대화라면 자신과의 대화가 생각입니다. 주님 앞에서 생각을 봉헌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닌 분심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깊은 곳, 즉 사람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영이라고도 하는 이 곳에는 계약의 궤가 있습니다. 그 궤위에 주님께서 내려오시니 우리 자신의 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대 안에는 주님의 계명이 들어있습니다. 그 마음이 다른 것이 아닌 유일하게 주님의 뜻이 실현되기만을 바라고 있어야 참 성전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만드는 것을 동편의 주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한 선배 신부님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다른 선배 신부님들이 술 좀 마시라고 하는데 그 신부님은 끝까지 마시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술을 좋아하셨지만 지금은 술을 끊은 지가 이십 년이 된다고 합니다. 저도 술을 끊고 싶기는 한데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배님을 보고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옆구리를 뚫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도 그것을 보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웃을 살리는 참 성전이 먼저 되기를 결심해봅시다.
♣ 친교와 사랑으로 짓는 내 삶의 성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는 이 대성전은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교황들이 거주하였고, 다섯 차례의 공의회가 열렸으며,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 인준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일치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성화 성소에 대해서도 새겨보아야겠습니다.
성전은 축복과 생명을 가져오는 물이 흐르는 곳이요,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입니다(에제 47,8-9. 12). 성전은 거룩함이 반향되고 하늘나라가 실현되는 상징적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이 장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성의 샘이요 세상의 성화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성전이라 하시며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라 하십니다(루카 2,21). 성전은 인간을 재생시키는 생명의 물이 나오는 곳이며, 이 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이며, 모든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전은 하느님 사랑의 일치를 드러내는 교회의 상징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그 소명과 사명에서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환경 속에 뿌리를 내린다면 세상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외적 모습과 표현을 띠게 될 것입니다. 각자가 애덕 실천을 통하여 살아있는 성전이 될 때 세계의 모든 성당이 하나로 일치되고, 지역교회와 보편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성전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의 삶을 회상하고 보존하며 살아내는 곳입니다. 우리는 성전에 누구든 차별없이 존중받고 사랑하며,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사랑으로 선택하여 함께 하며,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웃어주는 ‘공감과 연민’을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 따라서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 자매들을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존중하며 소중히 대하는 마음과 삶의 태도야말로 성전을 참 성전이게 하는 우리다운 모습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성전다운 거룩함의 향기를 풍길 때 구원의 샘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세계 모든 교회가 로마 교회와 일치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을 실현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되어 이 세상을 사랑 가득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의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한복판에서 구원의 신비, 사랑의 신비를 선포하고 거행할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실현 되겠지요. 그 순간 세상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과 교회의 머릿돌로서 늘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랑의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내 모든 것을 바치며 투신했으면 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기억의 정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했던 것들, 그중에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고 기억하기조차 싫은 것들, 우리 마음 속 깊이 상처로 남아있는 것들이 가끔은 우리 일상의 선택을 좌우하기도 하고 신앙생활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순수하고 겸허하고 온전히 충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아픈 경험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경험세계에서 한계라고 느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초월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무한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도록 해주십시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2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나라만큼 교회 십자가 불빛이 많은 나라가 없다지요?
시골 구석구석까지 교회가 없는 곳이 없고 도시에는 한동네에도 몇 개씩 크고 작은 교회들이 즐비합니다.
성당도 많고 절도 많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많은데도 왜 세상은 더욱 추해지기만 할까요?
아마도 수많은 성전들은 진짜 성전이 아니라 추한 인간 마음들을 감추기 위한 가짜 모형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불편한 진실을 감추기 위한 가장 고상하고 그럴듯한 피난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와 성당, 사찰이 많아지고 크고 화려해지는 것은 자랑스러워하고 영광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참 성전인 우리 인간의 마음이 사악하고 추함을 부끄러워할 일입니다.
그 크고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다시 성전을 짓고 싶다 외치신 예수님의 고뇌를 생각해 보는 오늘입니다.
온갖 추한 모습으로 갈갈이 찢어진 민주주의의 허물만 나부끼는 대한민국을 허물고 새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참 성전인 아름다운 마음들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참 성전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마음을 새 성전 건설에 일조하는 귀한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시길 축원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이영근 신부-
로마의 주교좌성당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입니다.
오늘은 이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성전은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 반포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후, 324년 황제가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성전은 가톨릭교회의 모교회로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주교좌성당 전체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첫째로 꼽히는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와 <화답송>의 <시편>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하느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강물’은 교회의 생명을 지탱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 은총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고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최후만찬에서도 십자가에서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갈랐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을 위해, 교회와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이 고귀함과 존귀함 앞에 겸허하게 경배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형제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전과 교회의 축복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축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성전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가득해
하느님을 찾는 이가
편안하게 다가와
시름을 벗고 쉴 수 있는
그루터기 같은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도록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느님께 더 많은 자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이들이 편하게 쉬도록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벽을
미련 없이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경쟁의 늪에서 헤매던 이들이
함께하는 즐거움을 맛보도록
넉넉한 마음의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불신에 빠져 하느님을 원망하던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도록
사랑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누군가 물어올 때
겸손한 마음,
환한 웃음,
따스한 손길로 다가가
바로 여기라며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이 거룩해야 성전이다. <요한 2, 13-2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성전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도 그 안에 거처하는 사람이 거룩하지 않으면 성전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의 기도문을 드리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는데 거룩하신 아버지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크고 아름다운 성전이 아니고 그 성전 안에 사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살아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집니다.
나라가 혼란하고 무질서가 난무하는데 이는 한 사람의 문제만 아니라 전 국민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의 욕망을 무질서하게 얻으려 함으로써 일어난 일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자기 능력으로 살지 않고 권력자에게 의지하여 부정으로 사는 사람들은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립니다.
수도원을 거룩한 집이라 말하려면 그 안에 생활하는 수도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산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으로 망가지지만, 한 사람이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아담의 죄로 온 인류가 죄의 늪에 빠졌지만, 주님의 오심으로 온 인류는 구원의 빛을 받아 구원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거부할 수 있지만, 나라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지은 죄는 부정 할 수 있지만 죄지은 사람을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할 수 없습니다. 죄지은 지도자는 거부할 수 있지만, 국민이 주권자인 대한민국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나라가 민주 공화국으로 지구 상에 살아남기를 기도합니다. 월남처럼 되지 않고 자유 대한민국으로 살아남기를 기도합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이 성전을 사랑하신 나머지 양아치 무리를 쫓아내듯이 나라를 망치는 이들은 물러나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요한 2,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분주한 가운데서도
계절은 계절이
흘러가야 할
올바른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또한
삶의 방향이
올바르기를
기도드립니다.
성전정화는
삶의 정화이며
인격의 정화입니다.
길을 잃었다면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뜻안에서
길을 찾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은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십자가와 함께
세워져야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고귀한 가치는
실추된 우리의 인격을
바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라테라노 성전을
봉헌하듯
우리의 인격을
봉헌하는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올바른 정화는
참된 봉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봉헌에서
우리들은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의
이유를 명확히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인격다운
인격을 위한
인격체들의 모임인
우리 교회가
우리시대의 등불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전 봉헌은
끝이 아니라
정화의 또 다른
시작임을 명심하는
내적 여정되십시오.
언젠가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거의 모두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계속해서 휴대전화에 손이 가고 눈이 가고 있으니 어떻게 대화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게임 하나를 제안했지요. 휴대전화를 자신의 앞에 놓고서는 자기 전화를 눈으로 보거나 또 손을 직접 대는 사람은 벌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받기 위해서는 손을 대야 할 것이고, 각종 메시지를 보고 응답하기 위해서도 손을 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살펴볼 때도 많지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벌금을 내자고 제안을 했고 모두가 동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비로소 대화에 집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리고, SNS 알림 메시지가 울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쳐다봐도 벌금을 내야 하니까요) 이제는 휴대전화가 오히려 우리 모임의 방해꾼 정도로 취급되었지요.
이 게임은 실제로 있습니다. 폰 스택 게임(Phone Stack Game)이라는 것으로, 휴대폰을 테이블 한가운데 쌓아놓고 먼저 폰에 손을 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게임이지요. 이를 직접 응용해서 한 번 해보니 휴대전화가 우리 삶의 필수품이 되어있는 요즘, 대화에 있어서는 정말로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내 휴대전화로 오는 전화는 다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지요. 그래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휴대전화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전화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과의 진정한 대화가 아닐까요? 기계에 얽매이는 우리가 아닌, 사람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에 집중할 수 있을 때 배려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동참하는 참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양들과 소들을 쫓아내심으로써 성전이 시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과연 지금의 성당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도 주님의 성전이지만,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의 성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도둑과 강도, 세상 잇속만을 챙기는 장사꾼 같은 마음 모두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장사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면서, 정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당신의 새로운 몸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성전들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주님을 통해서만 새롭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님과 함께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데 노력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뜻인 사랑을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들만을 간직하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성전은 내 안에서 절대로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이 아닌 이웃에 대한 사랑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멋진 성전을 내 안에 세우시길 바랍니다.
행복이란 손안에 있을 때는 언제나 작아 보이지만, 일단 잃어버리고 나면 이내 그것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막심 고리키).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탈출기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탈출 14,15)
지켜주던 하느님의 천사와 구름기둥 뒤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움직이자 모세는 그제야 바다 위로 손을 뻗지요. 그리고 홍해는 갈라집니다.
이 성경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길을 갈 용기 있는 자에게만 길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께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라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는 자에게만 하느님께서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포기하고 싶은 일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보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주 수요일에 성소후원회 회원들과 함께 ‘나바위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성지에는 100년이 넘는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이 성지가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합니다. 1845년 사제서품을 받으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3분의 성직자와 10분의 교우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제물포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1주일이면 도착할 거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는 거센 태풍을 만나서 표류하였고 제주도까지 떠밀려갔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배를 정비하고, 다시금 제물포를 향하던 배는 또 다시 태풍을 만났고, 결국 도착한 곳이 나바위 근처였다고 합니다. 태풍을 만나지 못했다면 배는 제물포에 도착하였겠지만 당시에 제물포에는 포졸들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 성직자들은 쉽게 잡혔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나바위는 외진 곳이고, 포졸들이 없었기 때문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3분의 성직자는 무사히 조선 땅에 입국하였고, 복음을 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센 태풍도 하느님이 섭리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신앙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나바위에 성당이 세워졌고, 3000명이 넘는 큰 성당으로 발전했지만 그곳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임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경이나, 군산에 성당을 세우지 않고, 나바위에 성당을 세운 것 또한 하느님의 섭리인 것 같습니다. 다른 많은 곳들은 개발과 발전의 과정에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데, 나바위 성당만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순교자들께서 나바위 성당을 지켜주신 것만 같았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만일 당신이 관광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If you enter here as a tourist, you would exit as a pilgrim. If you enter here as a pilgrim, you would exit as a holier one.)’ 지금도 그 글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나바위 성지에서 성소후원회 회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렸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십자가의 길 기도였습니다. 저는 4처를 묵상하면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부끄러움에 죄송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주교님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10년 만에 어머니를 잠시 보았는데, 이번에 포졸에게 잡혔고 다시는 어머니를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저는 건강하고, 시간도 많은데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4개의 대성전이 있습니다. ‘성 마리아 대성전, 바오로 대성전, 베드로 대성전,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전’입니다.저는 이탈리아 로마로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술적인 가치와 교회사적인 의미가 있는 4곳의 대성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당은 예술적, 건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은 기본적으로 4가지의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성당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당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성당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의 기도를 하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셋째는 성당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미사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성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 성당은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 오는 사람들은 늘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친교를 나누는 사람, 서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정돈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 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의 집 -은총의 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천년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의 각 지역교회가 로마의 모교회를 중심으로 일치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이 축일을 지냅니다.
일치의 중심이 주님이요 주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의 본향 같은 주님의 집입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고향집을 찾듯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성당을 찾습니다. 세계 어디서든 성전에 가면 마치 영혼의 고향집을 찾은 듯 평안함을 느끼는 것은 영혼의 집이자 쉼터인 주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산티아고 대성전을 향한 2000리 800km의 순례중, 끊임없는 기도로 바쳤던 시편성구도 생각이 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이 시편을 노래하며 신들린 듯이 걸었던 순례길이었고, 최종 목적지인 주님의 집,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도 빨라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갈 곳’인 주님의 집이 있고 ‘찾아 뵐 분’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위로요 힘인지요.
주님께 대한 사랑은 저절로 주님의 집인 성전 사랑에, 성전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미사와 성무일도 사랑에 쏟아지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표현을 찾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은 결국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며 특히 끊임없는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표현합니다. 하여 이 둘은 '하느님의 일'이자 우리의 '영적 주식主食'이 됩니다.
오늘 예루살렘 성전 정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의 집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성전정화사건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예수님은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열화와 같은 분노를 발하십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마지막 영적보루인 성전이 속화俗化되는 것에 대한 주님의 열화와 같은 의노義怒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모습에서 즉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 말씀을 상기했다 합니다. 얼마나 주님을, 주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하신 예수님인지 깨닫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유다인들의 문제 제기에 예수님은 서슴없이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새로 세우겠다.”
참 수수께끼 같은 화두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에서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성전으로의 전환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안에서 미사를 봉헌함으로 두 차원의 성전은 온전한 일치를 이룹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이요,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며,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의 강물이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며 살립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함락되고 성전이 불타 없어진 시기에 에제키엘 예언자에 계시된 참 놀랍고 신비로운 비전입니다. 바로 이런 황홀한 주님의 집에 대한 비전이 에제키엘 예언자의 위로와 희망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 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그대로 주님의 몸인 성전에서 흘러나가는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몸만이 성전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우리 자신도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다음 강가의 온갖 과일나무들이 상징하는바 주님의 성전인 우리 모두입니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바로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주님의 성전이 되어 살아갈 때 이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운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바로 은총의 양식을, 은총의 약을 독점하는 것이 아닌 이웃과 나누는 자비의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주님의 집인 이 성전과 우리 모두를 정화하고 성화해주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 집을 선택하여 성별하고, 이곳에 내 이름을 영원히 있게 하리라.”(2역대7,16참조)
바로 이 집이 가리키는바 주님의 집(성전)인 우리 모두입니다.
아멘.
사랑의 성전이 되어 걸어가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축일에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일치되어 있고,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깨닫고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또 각자의 성화 소명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함을 상기해야겠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집이요, 기도하는 집’인 성전으로 살아가는 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시고, 환전꾼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그들이 성전을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2,16).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정의이신 하느님이 드러나고,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 부패하고 더렵혀진 것을 지나칠 수 없으셨습니다. 나아가 그분은 형식적인 예배나 종교의식을 거부하시고 고정된 건물에 매이지 않고 성전과 회당의 안과 밖, 집안과 길거리, 호숫가, 바리사이의 집 등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2,21). 이는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회상하고 보존하며 살아내야만 참 성전이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며,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웃어주는 ‘공감과 연민’이 현저히 드러날 때 비로소 성전다운 성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께 전 인격을 봉헌하고 축성된 삶을 살아가는 나는 과연 사랑이 되어 걸어가는 참 하느님의 성전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며(2코린 6,14),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입니다(1코린 6,19). 따라서 하느님의 성전인 내 삶은 사랑이 넘치고 영(靈)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나의 말과 행동과 표정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고 탐욕과 집착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 근심 걱정과 자기애로 차 있다면 성당에서 무릎 꿇고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신을 드러내려고 성전 건립을 위해 많은 돈을 내는 것보다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 이 세상에서 사랑의 성전을 짓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인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다른 이를 존중하고 겸손하게 대하며, 사회정의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 또한 가난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세상의 한복판에서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마저 교회 발전과 복음선포라는 이름 아래 자본의 힘에 의지하고 상업화하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교회의 상업화는 이제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병원, 학교, 요양원, 양로원, 장애인시설 등이 거대화하고 기업화하는 모습이 참 성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으로 세워지고 사랑이 실천되며 사랑이 쌓여가는 곳은 어디나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을 인간의 문제와 고통에 무관심한 채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공동묘지로 바꿔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축일을 지내며 나 자신과 세상 모든 교회가 사랑과 정의, 공감과 공생, 연민으로 가득한 참 성전이 되기로 다짐합시다. 오늘도 '사랑의 성전'이 되어 걸어가는 행복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한 교회
-신희준 신부님-
하느님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괜스레 뜨끔해집니다.
본당에서 많은 것을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달걀, 김, 토마토, 옥수수 등은 물론 커피와 차도 판매해서 본당의 청소년들 간식도 마련하고 소공동체 모임도 지원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약간의 도움도 주고자 하지만, 성당에서 뭔 장사를 이렇게 많이 하냐는 비판에 대해 반박할 거리가 딱히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본당의 활성화를 위해 약간의 장사를 하는 것을 두고 화를 내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교회가 권력이나 재력 앞에 굴복해서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는 강자들의 불의에 침묵하거나 눈을 감아버린다면, 그것이 교회를 팔아먹는 행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교회 자신이 가진 자로 군림하면서 온갖 이윤을 위해 학교, 병원, 양로원, 고아원, 장애인 시설 등을 운영하기도 하는데, 이런 거야말로 예수님처럼 분노하면서 엎어버려야 할 ‘장사하는 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회가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해버리는 가장 큰 원인은 불의에 눈을 감고 진실을 왜곡하는 데에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할 때에 교회는 비로소 ‘거룩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2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현재의 바티칸이 있기 전에 천년간 교황청 역할을 했던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전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기원한다는 의미랍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성전이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성전은 화려한 건물과 보물과 장식으로 거룩한 분이 계심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건축물로서 성당이 화려하고 멋지더라도 그 안에서 예배와 찬송을 드리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그 성당은 더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이 곧 성전이라 하시네요.
사도들도 "우리의 몸이 성령의 궁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물건이 거룩한 것을 담고 있다면 성물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멋져 보여도 쌍스럽고 추악한 것을 담고 있으면 그건 더이상 성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기도 하고 마귀의 소굴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주 하느님을 모시면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고 우리 안에 마귀와 마귀의 온갖 유혹을 들이게 되면 우리 몸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악의 소굴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핍시다.
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선이 들어오게 합시다.
미움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사랑이 가득차게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영이 거하시는 아름다운 궁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성령의 궁전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성전은 하느님이 거처하는 집이며 성스러움 거룩함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서양의 그 많은 성전을 순례하다보면 그 시대적 상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금빛 빛나는 성전을 보면서 어디에 눈을 두고 보아야 하는지 얼떨떨 하게보고 나오다가 우리 한국의 성당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데 그런 것이 역사적 의미는 있는 가하면 현실적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그 성전이 관광용 자나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라면 오늘 성전을 보시고 장사꾼들의 편리한 장소일 뿐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성전의 의미는 오늘날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 거처하는 사람들로 결정 됩니다. 수도원의 성당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에 의하여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합니다.
그 기도하는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성령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더욱 성전의 의미가 드러 납니다.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모임은 오합지졸 무질서 하고 각자 자기 성품이나 자기 뜻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모임이면 거룩하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전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하는 수도자의 모습에서 평화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성령의 궁전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궁전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며 하느님을 사는 삶이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산다는 말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심 같이 자비롭고 하느님이 완전하심 같이 자신이나 공동체 안에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느님이 사랑이심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삶을 하느님을 산다고 합니다.
자신의 안에 세속적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온갖 유혹을 극복한 삶을 살 때 성령의 거룩한 궁전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자신이 거룩한 성령의 궁전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고 자신을 거룩하고 성스럽게 성장 시키고 성숙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이웃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씻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약자들을 안아주고
받아들이는 고향처럼
따뜻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이
하느님께 있음을
알려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더이상 팔아버리지 않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가난해지고
점점 가벼워지는
기쁨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처럼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회개하지 않는
우리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비겁하지 않습니다.
다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통해
다시 세워지는
사랑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참 의미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로마에는 4곳의 대성전이 있습니다. 가장 크고 화려한 베드로 대성전, 역대 교황님들의 초상이 걸려 있는 바오로 대성전, 성모님께서 발현하시고 8월에 눈이 오는 기적이 일어났던 성모 마리아 대성전, 그리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베드로 대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는 교황님이 거처하는 성전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교황께 선물로 봉헌한 성전입니다.
저는 주님의 은총으로 라테라노 대성전을 몇 번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작은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경당에는 성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고 그 아래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성화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이제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이분을 잘 모십시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이제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교회는 이렇게 세상의 나그네인 사람들을 돌보는 곳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사랑이, 자비가, 나눔이, 용서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광장 건너편에 ‘동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동료들의 동상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생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였습니다. 대성전 앞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화려하고 커다란 건축물일 수도 있지만, 교회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을 먼저 도와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성당은 예술적, 건축적인 아름다움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당은 기본적으로 4가지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첫째, 성당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성당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성당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의 기도를 하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셋째, 성당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미사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단체가 성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 성당은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 오는 사람들은 늘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당, 기도하는 성당, 친교를 나누는 성당, 서로 섬기는 성당은 어느 곳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당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로 흘러갔습니다. 바다는 생물이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있는 곳마다, 아름다운 숲이 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성전은 이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일곱 성사는 모두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영적인 아픔과 잘못은 고해성사로 치유되고,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의 양식을 줍니다. 몸이 아픈 병자에게 성체를 모셔다 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병자성사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받는 축복은 견진성사로 이루어집니다. 가정은 혼인성사를 통해서 성화되며,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성품성사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성전은 바로 일곱 성사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일곱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거룩하게 됩니다.
성당도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성체 조배실, 소성전, 성물방, 만남의 방, 교리실, 성가 연습실, 대성전, 성모 동산, 주차장, 사무실, 주방 등이 있습니다. 각 공간에서 교우들의 만남과 친교가 이루어지고, 교리실에서는 학생들이 신앙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기능은 바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 집을 선택하여 성별하고, 이곳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두리라.”
제2독서는 이제 성전의 의미를 확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건축물로서의 성전도 있지만,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주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이 하느님을 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벽 미사 마치고, 장례 미사를 기다리며 성체조배를 하시는 할머니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교우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 분들이 있기에, 우리는 위로를 얻고, 희망을 갖습니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성전 뜰에는 성전에 제물로 바쳐야 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환전상은 외국의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로 바꾸어 주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물들을 내어 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고, 그들의 상을 둘러엎으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전 뜰의 상인들은 성전의 사제들과 결탁한 자들입니다. 사제들은 그 시대 유대 사회의 실세였고, 성전 뜰의 상인들은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상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런 행패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숫자적으로도 우세합니다. 열두 제자들이 가세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런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와 양을 내어 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아 버리는데, 그들이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그 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세 개의 복음서들은 그 사건이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에 있었던 것으로 보도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을 환영하던 군중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군중이 성전에까지 가서 상인들과 충돌한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 사제들이 중심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교기득권층은 예수님을 더 이상 살려 둘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체포되고,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이야기는 예수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이야기를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성전에서 일어난 소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씌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11,17). ‘기도의 집’과 ‘강도의 소굴’은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이사 56,7; 예레 7,11) 안에 있는 표현입니다. 복음서들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예수님이 정화하여 성전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살려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요한복음서가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 공생활의 시초에 옮겨다 놓은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유대교 성전 원래의 의미, 곧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되찾는 데에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한 분이신 야훼, 하나인 이스라엘, 하나인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인 성전이라는 뜻으로 지방에는 회당만 두고,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에 두었습니다. 그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하였고, 유대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의 권위와 우월감도 높아졌습니다.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의미는 희석되고, 사제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그들이 잇속을 챙기는 성전이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 과시하며, 자기의 잇속을 챙깁니다. 사람이 돋보이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의미를 왜곡한 유대교를 비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팔아서 사람들이 행세하고, 이권을 챙기는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돋보이고, 인간이 권위를 지니는 곳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의 사제들이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수입을 올리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는 헌신(獻身)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단어는 그분이 부활하신 후, 신앙인들이 성찬을 거행하면서 즐겨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이제 예루살렘의 성전건물 안에 계시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거행하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성사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신앙을 쇄신하였습니다. 그분의 노력은 십자가의 실패로 끝났지만, 그 후 교회 안에 나타난 성체성사와 그 성사를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신앙인들의 삶 안에 그 쇄신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하느님을 빙자하여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성체성사는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몸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사람이 되라는 성사(聖事)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배운 것은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재물을 많이 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와 불행을 예사로 보며, 그들의 불행을 딛고서라도 우리 자신은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그런 우리의 통념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방식,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그분의 삶을 배워 그분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하느님의 삶을 충실히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유대교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발족한 것도 예수님의 방식을 배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 곧 내어주고 쏟는 실천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장소
-최성욱 신부님-
추억의 시계는 신학교 4학년을 마친 후 떠났던 군 복무 시절로 돌아갑니다. 아름다운 성전이 있는 신학교에서는 솔직히 소홀했던, 그러나 성전이 없는 전방의 막사에서 더 간절하게 다가왔던 것이 기도였습니다. 당시 이등병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재래식 화장실에서의 5분 간이였습니다. 저는 그곳을“화장실 3사로(射路)1)의 공소!”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는 누추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장소에 대한 묵상을 남겨주었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나에게 성전은 어떤 곳일까?”를 물어봅니다.
첫째, 성전은 하느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두고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 21 참조) 우리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성전에서 자신의‘정체성’을 확인하는 거룩한 시간을 가집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결국 성전은 하느님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누리는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잔칫집’입니다.“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까닭은 주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생명수가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니다.(에제 47, 12 참조) 하느님 자녀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생기를 되찾고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잔칫상을 차려주신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성전에서 부릅니다.(시편 23편 참조)
이번 주간에는 특히,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묵상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거룩한 시간, 기도의 시간을 잘 관리하고 있습니까? 저에게 화장실 3사로는 신학생으로서‘정체성’을 유지시켜주던 추억의 장소였다면, 하느님 자녀로서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성전, 거룩한 장소에 여러분들은 자주 머물고 있습니까? 하느님 백성의 최종 목적지인 천상 예루살렘의‘잔칫집’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1)
사로(射路) : 사격훈련을 하는 통로를 뜻하는 군대용어로 사병들이 재래식 화장실을 빗대어 표현한 말.
-신정목 신부님-
러시아의 문호 솔제니친의 수필속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중앙 러시아를 여행해 보세요. 시골 마을을 지나가면 평화롭게 펼쳐지는 언덕, 그 위에 서 있는 작은 성당들을 보게 됩니다. 마치 하얀 옷, 빨간 옷을 입은 왕녀들처럼… 종탑과 나지막한 강가의 담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숙입니다.
초원을 지날 때는 민가가 옹기종기 앉아 있고 이방인 나그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깁니다. 그러다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실망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성당 내 전면에는 있어야 할 십자가가 뜯겨나갔고 지붕 틈새 사이론 잡초가 무성합니다. 제대나 벽화는 할퀴고 찍히어 온갖 낙서들로 가득합니다. 짐을 잔뜩 실은 트랙터가 성당 안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짐을 풀어놓습니다.
또 어떤 성당은 온갖 잡동사니 공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다른 곳은 보드카를 마시는 호프집으로 변해있고 성당 입구는 “오늘 오후 6시 영화 상영, 8시에 댄스파티!”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남긴 쓸쓸한 종교유산입니다.
과거의 화려했던 성당들은 이미 돈 많은 재력가에게 팔려나갔습니다. 유흥업소로 개조 중입니다. 젊은이들은 하느님 대신에 록음악이나 재즈를 종교적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유명 가수들의 원초적인 춤은 현대에 또 다른 원시종교의 탄생을 알립니다.
“K-POP”이니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다국적 문화의 수입품이며 재생 출품이 아닐까요?
독일은 2차 대전 패배 후 라인 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유감스럽게도 부모들은 종일 일한다고 자식들의 종교 교육을 소홀히 했습니다. 따라서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대물림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신자 가정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가운데 다음 세대에 신앙을 대물림하지 못했을까요? 본당에서 활동하는 간부들의 자녀들도 냉담 중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단체와 교육과 행사가 참 많습니다. 사실 하지 않아도 될 행사, 줄여도 될 단체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행사 이전에 좀 더 시간을 내어 공을 들여야 할 곳은 가정이 아닐까요?
가정에서 젊은 부모들이 자식들과 함께 신앙으로 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신앙을 살고 신앙을 가정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정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이들 학교 숙제는 대신해 주고, 학원까지 차를 태워주지만, 성당에는 데려가지 않습니다.
첫 영성체 일정이 다가오면 아이들 화관 씌우고 하얀 옷 입고 사진 찍는 데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큰 이벤트이기 때문입니다. 교리기간만이라도 기도를 같이 하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요? 가정이 교회요, 성전인데 말입니다.
로마에 가면 베드로 대성전 입구에서 종종 문지기와 관광객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인식시키려는 문지기와 성전을 관광장소, 구경거리로 보는 관광객 사이의 불화 때문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 가까이 가자, 주 하느님께서 “모세야, 모세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발을 벗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가서 먼저 무엇을 합니까? “하느님 저 왔습니다. 저 베드로 왔습니다. 저 마리아 왔습니다.” 하고 인사는 제대로 합니까?
< 몸이 성전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 건강검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을 먹어야 하는 수준의 고지혈증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술과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제 몸을 그렇게 성의 없이 대했던 것에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 모델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계셨던 그 모습, 성전의 모델인 것입니다. 성전이 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에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어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수명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말할 때 흔히 ‘벽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벽돌로 지은 건물은 성전이 아닐까요? 혹은 ‘내 마음의 성전’이라고 하면서 육체는 조금 소홀히 대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분이시니까 내 자신을 영적으로만 깨끗하게 보존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죄를 짓고도 고해성사를 보아 마음이 깨끗해지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전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성체 안에는 보이지 않는 영의 모습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는 밀떡의 모양으로도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밀떡을 무시한다면 그 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도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몸도 보이지 않는 영적 성전과 하나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에서 술과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몸 또한 그리스도의 성전으로서 소중히 여긴다는 것에서는 일면 일리기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의사를 하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맨 손으로 길거리 아이들을 주어다 키우며 살아가는 박보영 목사님이 거지 아이들에게 하는 의식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을 보면 몇 년 동안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아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의 옷을 벗기고 그 옷을 비닐봉지에 봉해 보관합니다. 그런 다음 아이의 몸을 씻기고 이발을 해 주고 새 옷을 입히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함께 삽니다.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아이에게 자신이 전에 입었던 옷을 꺼내주면서 다시 입어보라고 합니다. 입지 않으려고 해도 억지로 입힙니다. 그러면 그들은 역겨워하며 빨리 입었다가 다시 벗고는 그 옷을 가져다 버리고 다시 들어가 샤워를 합니다. 이것이 예식입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였다면 속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겉도 몸도 행위도 깨끗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이 아직은 참다운 성전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온 몸을 씻어주셨고 마지막으로 발까지 씻어주신 것입니다. 겉옷은 성경에서 자신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피도 생명을 의미하고 전부를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물이 아닌 당신의 피로써 제자들의 발을 씻어 정결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마음만 씻어주신 것이 아니라 육체도 실제로 씻겨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음의 성전이나 육체의 성전이나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성전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그분을 내적인 성전에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한석봉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서예 능력이 있었으나 가난한 어머니는 한석봉에게 종이와 먹을 사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숭늉을 마시고 배부르다 하시며 떡을 팔아 아들에게 먹과 종이를 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조금씩 말라갔습니다. 한석봉은 항아리 위에 물로 글을 썼는데 이는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사다 준 종이와 먹이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한석봉을 나무랐습니다. 한석봉은 다시 먹과 종이를 사용하여 열심히 연습한 끝에 명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도 한석봉에게 어머니가 다가간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한석봉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고생하시는 것은 아무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의 고생으로 우리가 변화되기만을 원하십니다. 속만 변화되었다고 변화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참 성전이 진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그저 믿는다고 하고 미사를 나오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참으로 그분을 모시는 성전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성체를 여러 번 영해도 그분은 내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판 단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판단을 하고 꾸어달라면 반드시 꾸어주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돈이 없다며 등을 돌리고 가장 작은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는데 옆에서 죽어가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칩니다. 그분의 뜻을 받아들여 몸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아직 그분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라테라노 성전은 매우 웅장합니다. 그 옛날에 어떻게 저렇게 크고 아름답게 지었는지 저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그 곳에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거지차림으로 들어옵니다.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코를 막습니다. 교황님도 거지로 지내는 그런 수도회는 인정을 할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교회는 부와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기에 그렇게 거지처럼 사는 수도회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해 주기 때문에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밤에 이노첸시오 3세 교황님은 꿈을 꿉니다. 자신이 머무는 그 웅장한 라테라노 성전이 허물어져 가는데 한 거지가 그 기둥을 어깨로 받치고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교황은 다음날 긴급히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수도회를 승인하게 됩니다.
성전을 참으로 성전으로 만드는 것은 그 성전의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와 권력에 취해있던 무너져가는 성전인 교회를 프란치스코란 뜻을 보내시어 받아들이게 하셨던 것입니다.
병원에 관련된 드라마들을 보면 의사가 수술을 하러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지 잘 나옵니다. 머리카락이나 몸에 난 털이 날리면 안 되니 평상시에 항상 몸을 깨끗하게 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하고 있다가 수술을 하기 전에는 눈만 남겨놓고 다 가립니다. 그리고 수술실 앞에서 손을 닦는데 손톱 밑에까지 깨끗이 솔로 닦습니다. 그 이후에는 손으로 아무 것도 만지지 않습니다. 문고리에도 세균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발로 문아래 스위치를 탁 차면 손을 대지 않고도 문이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배 의사들이 무균장갑을 끼워줍니다. 그때서야 날카로운 수술 도구들을 달라고 말하면 옆에서 도와주는 후배 의사들은 재빠르게 그 말에 따라 손 위에 메스와 같은 도구들을 쥐어줍니다. 이런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규정들을 무시한다면 위에서 보고 있다가 그 합당하지 않은 의사를 밖으로 끌어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채찍으로 성전의 상인들과 더러운 것들을 쫓아냅니다. 왜냐하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당신을 집어삼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집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에서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한 성전은 바로 당신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사흘 만에 육체적으로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이 바로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짓는 모든 죄들도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을 참으로 그분의 성전으로 여긴다면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그분을 우리 성전에 받아들였다면 합당하게 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헨델에게 사랑을 포기하게 만든 여자
-박영식 신부님-
조지 프리드릭 헨델(J. F. Händel)은 1741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총독 데번셔 공작에게서 더블린 자선기관을 위한 음악을 작곡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 제안은 헨델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 역사상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는 창작에 몰두하여 8월 22일부터 9월 14일 사이에 기념비라 할 수 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초고를 완성했다. 이 곡은 헨델이 작곡한 많은 오라토리오 중 최고의 명곡이자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특히 중간 마지막에 나오는 합창곡 할렐루야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멜로디다. 헨델은 이 곡을 작곡하여 파산상태에서 벗어나서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처럼 그가 이 곡을 가장 귀중하게 여긴 것은 당연하고도 남는다.
헨델은 73세에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지만 여자를 사랑한 적은 있었다. 어느 이발사의 딸을 사랑하여 그 유명한 ‘메시아’ 곡의 사본을 그녀에게 바쳤다. 어느 날 그 당시 높은 신분과 부의 상징인 가발을 하러 그 여자의 아버지 이발소에 갔다. 그가 어느 소년이 면도한 수염을 닦으려고 헨델의 메시아 곡이 적힌 종이를 조금 찢는 것이 아닌가? 헨델은 그것을 본 순간 그녀를 향한 사랑이 얼음처럼 식어버리고 말았다. 상대방의 중요함을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다. 내가 이웃을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면 그도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한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진리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중요한 분으로 섬기신다. 아버지의 뜻을 생명과 죽음, 구원과 파멸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신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다. 하느님은 당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가장 온전하고 가장 완전하게 현존하신다.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이 곧 성전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참되고 새롭고 영적인 성전으로 만드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당신을 닮고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섬겨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하느님을 모신 작은 성전이 된다. 특히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 된다. 우리는 생각, 말, 처신을 통해 하느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살아계심을 보여줄 사명을 받았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쳐흐르면 불가능이란 없다.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흐를 때,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며, 복종이나 덕이 따를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해낸다.”(F. 니체)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온 사람만이 많은 씨앗을 심는다. 어떤 씨는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당신도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누군가의 마음속에 의미 있는 씨앗을 심어 놓았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도 많은 씨앗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누가 심어준 씨앗인지 몰라도 고마워할 따름이다.
“꽃의 향기는 십 리를 가고, 말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나눔과 베풂의 향기는 만 리나 가고, 인격의 향기는 영원하다.”
내가 온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이나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내 마음속에 품고 살면 이미 제2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이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마음을 품게 해 주신 것을 최상 은혜로 여기며 고마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심신의 피로를 풀며 재생의 힘과 희망을 받을 수 있으면 내 존재이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귀한 우리의 품위를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처럼 이기심과 물욕과 세속의 온갖 허영으로 더럽히지는 않는가? 하느님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는데도 우리가 이 엄청난 선물을 업신여긴다면 ‘메시아’ 곡 사본을 찢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귀중한 분으로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 하느님께도 귀중한 존재로 대우를 받는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
“사랑이란, 매 15분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J. 레논) 하느님께도, 이웃에게도 늘 사랑을 고백하자.
◆ 그런데 성전은 예수님의 몸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만화영화를 보면서 재미있어 하는 걸 보면 그런 비현실적 끼가 있나 봐요.
그런 끼란 현실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힘에 대한 매력을 가졌다는 거지요.
이런 끼는 우리에게 이미 박혀진? 숙달된? 습득된? 고향이란 거 아닐까요?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어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항상 초월적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제자들이 하시니 한층 의미가 깊어지네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어제 제 방의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서 그랬을까요? 꼬았던 다리를 펴서 똑바로 앉으려는 순간 갑자기 다리가 심하게 저린 것입니다. 왜 다리가 저렸을까요? 잘못된 자세로 피가 통하지 않다가 다시 피가 그쪽으로 흐르면서 더러운 노폐물이 씻기면서 생기는 잠깐의 고통입니다. 아마 이런 체험을 누구나 해 보셨을 텐데요, 바로 이때 어떻게 하십니까? 왜 이런 고통이 내게 오느냐고 화를 내고 절망에 빠지십니까? 아니면 ‘나는 틀렸어.’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십니까?
세상의 그 누구도 다리가 저리다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피가 다시 흐르면서 다리에 있는 더러운 노폐물이 씻기면서 몸이 깨끗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이고, 또 하나는 분명히 조금만 참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고통임을, 둘째, 이 고통은 잠깐이고 이 잠깐의 시간을 이겨내면 아무 일도 없이 지금의 생활을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을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리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순간에 충실한 우리들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러 장사꾼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이 장사꾼들은 이제까지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행동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 이렇게 폭력을 써서 우리를 힘들게 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
바로 성전 안에 있는 노폐물들을 제거하시는 것이지요. 깨끗한 성전을 만들어 진실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 바칠 수 있는 곳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볼 때, 눈에 보이는 성전만이 아닌 우리의 몸과 마음도 정화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게 하는 도둑과 강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와 채찍을 휘두르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물론 그 순간 고통처럼 생각되지만 이 정화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진실로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안에 정화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내게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면, 또 과거에 기억나는 고통과 시련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분명히 그 안에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삶은 첫 번째 선물이요, 사랑은 두 번째요, 서로 이해함을 세 번째이니라(마지 피어시).
Life is a sorrow, overcome it...(복자 마더 데레사)
Life is an opportunity, benefit from it(인생은 기회입니다. 거기서 이익을 얻으세요)
Life is beauty, admire it.(인생은 미입니다. 그것에 감탄하세요.)
Life is a dream, realize it.(인생은 꿈(몽상)입니다. 깨달으세요)
Life is a challenge, meet it.(인생은 도전입니다. 부딪히세요)
Life is a duty, complete it.(인생은 의무입니다. 완성하세요.)
Life is a game, play it.(인생은 게임입니다. 즐기세요)
Life is a promise, fullfill it.(인생은 약속입니다. 지키세요.)
Life is a sorrow, overcome it.(인생은 슬픔입니다. 극복하세요)
Life is a song, sing it.(인생은 노래입니다. 노래하세요)
Life is a struggle, accept it.(인생은 고투입니다. 받아들이세요)
Life is a tragedy, confront it.(인생은 비극입니다. 대면하세요)
Life is an adventure, dare it.(인생은 모험입니다. 인생을 도전하세요)
Life is luck, make it.(인생은 행운입니다. 행운을 만드세요)
Life is too precious, do not destroy it.(인생은 너무 귀중합니다.그걸 파괴하지마세요)
Life is life, fight for it.(인생은 인생입니다. 그걸위해 싸우세요)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느 수도사제가 수도원에 있든 외출하든 늘 수도복을 입기로 했다는 말에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
"잘 한 것입니다. 수도복이 속과 겉이 같은 수도자를 만듭니다. 입었다 벗었다 하는 신앙이 아니듯 입었다 벗었다 하는 수도생활이 아닐 것입니다. 늘 수도복 입고 있다는 자체가 늘 기도요, 깨어있음이요, 사람들에게는 늘 하느님 향한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아, 나이 먹은 신부들이야 참말 꿈쩍도 없지! 천주 없이 지내도록 신중이 우리를 살금살금 길들여 간다면, 신중이야 말로 가장 좋지 못한 경솔일세. 형편없는 노인신부들이 있는 걸세."
'신부들'대신 '수도자들' '신자들'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형편없는 노인신부들이, 노인수도자들이, 노인신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선 늘 하느님 앞에 깨어 사는 길뿐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살다보면 '너무 오래 쓰고 있어서 진짜 얼굴이 되어 버린 가면(류시화)'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 지요. '하느님의 사람'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들'의 거처인 '하느님의 집' 성전 역시 참 좋은 삶의 이정표입니다. 오늘은 생명의 집인, 하느님의 성전에 대한 묵상을 세요소를 중심으로 나눕니다.
첫째, 집입니다. 생명의 집입니다.
집이 있어야 삽니다. 생명의 집인 하느님의 성전은 영혼의 고향이요 세상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가면을 벗고 제 얼굴을 찾을 수 있는 곳도 아버지의 집 성전뿐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분노와 성전정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영혼의 고향이자 쉼터인 하느님의 집이 속화될 때 영혼은 질식합니다. 부단히 거룩하고 깨끗히 정화되어야 할 성전이요 매일의 미사은총입니다.
둘째, 몸입니다. 생명의 몸입니다.
가시적 건물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몸도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주님은 당신 몸을 두고 성전이라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통해, 또 미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된 우리도, 우리 몸도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바오로를 통한 주님 말씀이 참 고무적이고 엄중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을 함부로 대함이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야 하는 우리의 몸과 맘의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물입니다. 생명의 물입니다.
옛 사막수도자들이 집을 정할 때 우선 살핀 것이 생명의 우물이었습니다. 집 없이도, 몸 없이도 못 살지만 물 없이는 더욱 못 삽니다. 하여 모든 도시가 생명의 강을 끼고 있습니다. 물이 있어야 육신이 살듯 하느님 은총의 물이 있어야 영혼이 삽니다. 하여 하느님 은총을 목말라하는 영혼들입니다. 1독서 에제키엘이 말하는 강물이 상징하는바 바로 은총의 물입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마치 '미사의 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세상 곳곳을 향해 흘러가는 은총의 강물입니다. 한국어가 참 신기합니다. 집, 몸, 물은 물론 일, 돈, 불, 빛, 해, 달 등 중요한 단어는 모두 한 글자입니다. 생명의 집, 생명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부단히 정화되고 성화되어야 할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이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해 주시며, 세상을 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밥이 되고 약이 되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입니다.
아멘.
마음짱, 하느님의 얼굴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오늘은 아침 햇살이 참 좋습니다. 깨알같은 햇살이 창밖 대나무 잎에 대롱대롱 매달려 잔잔히 부는 바람 따라 알알이 떨어지고 있네요. 눈이 참 편합니다. 마음도 편해집니다. 이처럼 자연은 그 자체로 창조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자연 그 자체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오래 전 로마에 처음으로 세워진 하느님의 성전을 기억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성당 가운데 성당이며 모든 성전의 어머니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성전을 온갖 정성을 들여 아름답게 꾸밉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거룩함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성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이 성전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지요. 얼굴과 피부가 고아야 미인이란 말이 있지요. 얼짱, 몸짱이란 말은 있는데, ‘마음짱’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네요. 마음은 우리의 감정, 생각, 의지의 자리, 생명의 중심, 삶의 힘이 솟아나는 우리의 근원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성령이 사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악이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싸움을 야기시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영적 투쟁의 장소이기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몰아내시고 성전의 참된 얼굴을 회복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매일 끊임없이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에 성령이 계시면 우리 존재는 하느님의 얼굴, 하느님의 성전으로 변모해 갑니다.
오늘 하루 시편 말씀을 되새깁니다. “주님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하여라. 너희는 주님과 그 권능을 찾아 나서라. 그분의 얼굴을 언제나 찾아라”(시편 105,3-4)
요즘 들어 제 곁에 어깨가 아프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다친 적도 없는데 어깨가 아파서 팔 올리는 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이걸 무슨 병이라고 하나요? 맞습니다. 어깨 관절이 굳어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주로 50대 이후에 잘 걸린다고 해서 ‘오십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정확한 의학 용어로 ‘유착성 관절낭염’이라는 병입니다.
그런데 이 병의 치료법은 조금 무식하다고 싶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는데, 강제로라도 움직여서 운동하는 것이 치료법이라고 하네요. 만약 아프다고 움직이지 않으면 관절이 더 굳어지는 것은 물론 가지고 있던 통증도 서서히 더 악화됩니다. 따라서 죽을 것 같이 아파도 억지로라도 움직여 운동할 때 굳었던 것이 풀리면서 통증도 점차 줄어들고 더 잘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프다고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당연히 잠깐의 아픔을 참고 운동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득 우리가 사는 삶 역시 이와 비슷한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이의 불의를 보고도 상처를 입을 것 같아서 참고 그냥 지나치는 행동, 다른 사람들도 한다는 합리화를 통해 거짓이나 잘못도 서슴지 않는 행동, 바쁘고 할 일이 많다면서 지금 해야 할 선행을 하지 않는 모습, 조그마한 이익도 돌아올 것 같지 않다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하지 않는 모습들...
이렇게 내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데, ‘나와 상관없어.’라는 말로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통증이 점점 내게 다가옵니다. 이웃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멀어짐으로 내게 다가오는 통증이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특히 정신적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 많이 풍부해진 세상이지만, 정신적으로 아픔이 더 많아지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오늘 레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장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고 폭력을 휘둘렀던 부분입니다. 사랑을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던 예수님이지요. 심지어 죄인이라고 평가를 받던 세리, 창녀, 병자들에게도 그 큰 사랑을 던져 주신 예수님께서 왜 채찍을 드셨을까요?
그냥 놔두면 그 통증이 더 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로와 치유를 받아야 할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오히려 아픔과 상처가 커지는 불의의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순간의 아픔을 선택하셔서 채찍을 휘두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채찍을 휘두르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움직여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나눔과 봉사를 통한 사랑의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랑의 움직임을 통해 내 마음으로 다가오는 통증들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넘어서기 힘든 한계는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 한계도, 극복도 있습니다(신지애).
1승 9패(‘좋은 생각’ 중에서)
우헤하라 다카시는 일본의 한 회사에서 신입 사원 채용 매니저로 일했다. 그는 해마다 겨울이면 북쪽 지방 아오모리 체육관에서 비행 청소년들과 생활하며 상담해 주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아이들과 지내면서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사회 초년생을 위한 책을 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누구나 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류 전형에서, 면접에서, 때론 최종 면접에서 떨어집니다. 많이 떨어지고 실패합니다. 하지만 뭐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니까요. 아직 사회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간단히 합격할 만큼 취업 활동이 쉽지는 않거든요. 누구나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면 됩니다. 잘 될 사람은 ‘떨어졌다.’라는 과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점에서 기분 전환하는 방법을 잘 압니다. 떨어지면 괴롭고, 후회되고, 화나겠지요. 하지만 슬금슬금 뒷걸음치면 안 됩니다. 떨어진 경험을 다음 기회에 활용해야 합니다. 취업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사실이 있습니다. 무조건 10승 0패로 끝내려고 전력투구합니다. 즉, 10승 완승을 목표로 삼지요. 그렇지만 한번쯤 생각해 볼까요? 열 군데에 합격해도 갈 수 있는 회사는 오직 한 곳뿐입니다. 그러니 필요한 건 열 군데의 합격 통지서가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은 한 군데 회사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1승 9패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1승 9패면 충분한데, 왜 10승 완승만을 요구했을까요? 단 1승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루카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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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화를 내신다.
그분의 화난 모습은 사실 지금껏 보여주셨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늘 우리의 상식을 넘는 사랑을 외치던 분이셨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왼 뼘을 때리면 오른 뼘을 내밀라는, 오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주라는 그분의 말씀은 무저항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라는 적극적인 사랑이었다.
그러던 분이 예상치 못한 분노를 터뜨리고 계신다.
성전을 시장 터로 만든 이들에게 폭력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채찍을 휘두르신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기야 분노를 폭발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오히려 우리의 상식과 근사치를 이루는 듯 해서 그 인간적인 모습에 속이 다 시원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가르침과는 좀 동떨어진 모습이 아닌가?
왜 그렇게 화를 내셨을까?
그렇게 관대하셨던 분을 무엇이 그토록 화를 내게 만들었을까?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하시던 그분께서 왜 이토록 화를 내시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절대로 넘어서서는 안 되는 선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셨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하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거스르는 죄는 그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그분의 분노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사랑하는 인간에 대한 절규였다.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들, 죽음을 담보로 내맡길 정도로 사랑하는 인간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져버리는 그 아픔을 모르는 척 하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분의 분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선상에서 이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어처구니 없이 그러한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고발했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신다. 하느님의 몸을 모신다. 이로써 우리 역시 하나의 성전이 된다.
생각해보자.
자신을 하느님의 또 다른 성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인가?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을 찾는 삶인가?
스스로를 주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합당한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삶인가?
그렇다 할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당연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해야 한다.
나는 나의 소유물이기 전에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의식해야만 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언젠가 그분께 온전히 돌려 드려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보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사랑은 타인에 대한 올바른 사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성전들이 장사치들에 의해 범해지고 있다.
그 성전 마당들에는 울분을 터뜨리시는 예수님의 분노가 있다.
먼저 나에게 주어진 작은 성전, 작은 마음부터 가꾸어야 한다.
기도가 호흡처럼 살아 움직이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기억하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확신한다.
<분심과 맞서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1800년대 일본의 대표적 화가 후쿠사이에 대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후쿠사이의 친한 친구가 그를 찾아와 수탉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탉을 그려본 적이 없는 후쿠사이는 친구에게 1주일 후에 오라고 했습니다. 1주일 후에 친구가 찾아오자 약속을 미뤘습니다. 한 달, 두 달, 6개월…. 그런 식으로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친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후쿠사이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후쿠사이는 말없이 종이와 물감을 가지고 오더니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주었습니다. 완성된 그림이 얼마나 생동감이 있던지 마치 살아있는 수탉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림을 본 친구는 기뻐하기보다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친구를 자신의 화실로 데려갔습니다. 커다란 화실 사방에는 3년 동안 밤낮으로 연습한 수탉의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후쿠사이는 수탉을 잘 그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영원한 패배자로 남습니다. 또 누군가가 수탉을 그려달라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왜 나는 수탉을 못 그릴까?’하는 자괴감에 빠져 살아야합니다. 후쿠사이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분심거리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노력해서 해결하였고, 앞으로는 누가 수탉을 그려달라고 하더라도 자신 있게 그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때 분심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일단 성인들도 분심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분심을 한다고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심을 분심으로 평생 간직하며 산다면 그건 아마도 죄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분심도 기도의 재료입니다.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채찍으로 내쫓아 다시는 얼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분심 중 가장 많은 것이 아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그 사건이 자주 떠오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을 자꾸 안 하려고 해야 할까요? 절대 그렇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는 우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면 그 사람을 보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회피도 나쁜 방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해결방법은 아닙니다. 그런 시간동안 마음을 정리해서 조금씩 그 미워지는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위해 조금씩 기도하기도 하고, 그 사람을 조금씩 이해하려고 힘쓰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성령의 힘을 청해야합니다. 저는 그 성령의 힘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휘두르셨던 성령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움이 없으면 아무리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고정원씨는 아마도 기도할 때이면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이 가장 많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면 평생 그 분심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채찍을 만들이 이 미움을 쓸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분심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내 마음 안에서 미움이 조금씩 내쫓아졌기 때문입니다. 분심도 기도의 소재입니다. 회피하지 말고 정화합시다. 회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미워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지나치게 집착하며 좋아하고 있거나, 어떤 명예나 재물에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면 이것들이 우리가 정화해야 할 잡상인들과 환전상들입니다.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성전 입구에서 이미 성전에 기도하러 온 모든 이들의 마음의 평화를 빼앗는 것들입니다. 양 한 마리 살 돈을 가져왔는데 환전하고 났더니 비둘기 한 마리 값밖에 안 되고, 비둘기를 샀더니 다리가 한 짝이 없는 놈이었다면, 그것으로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를 받은 이들이 오자 그 자리를 슬그머니 떠서, 바오로에게 된통 혼이 납니다. 먼저 바오로처럼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과 식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게 정리가 되었어야 이런 분심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쫓아오는 사냥꾼을 보지 않기 위해서 머리만 처박는 꿩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그 사냥꾼은 그 모습을 보면 더 달려들 것입니다. 우리 또한 분심을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채찍으로 맞서고 정화하여 더 이상 분심거리들이 내 마음에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건설해야할 교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의무화된 과월절 축제에 참석한 유다인들로 인해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인산인해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성전 마당을 지나가시는데, 거기 펼쳐진 상황이 예수님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습니다.
통상 유다인들의 성전 입구에는 ‘이방인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하급광장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까지만 들어갈 수 있어서 ‘이방인의 광장’이라고 불렸습니다.
비록 이방인의 광장이라고 불렸지만 성전 입구이므로 통상 정숙이 유지되어야 하는 경건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습니다.
과월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순례를 온 유다인들은 모두 성전에 제물을 바치곤 했습니다. 부자의 경우 소나 양 한 마리를 바쳤습니다. 가난한 서민들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거기다 성전세로 반 세겔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과월절 축제만 되면 자연스럽게 성전 마당에서 엄청난 상거래가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성전 마당은 순례객들을 호객하는 소나 양을 파는 사람들, 환전꾼들, 성물이나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 자릿세를 떼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거래를 통제해야할 사제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제들 역시 파스카란 명절 대목 특수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마당에서 상거래를 허락하는 명목으로 엄청난 자릿세를 받았겠지요.
이러한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던 당시 한 신심 깊은 율법학자는 이런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놓았습니다.
“성전 마당의 상거래를 총괄하는 책임자는 사제의 아들이었습니다. 성전 마당에서 판매되는 물품들의 품질을 검사하는 검사관은 사제의 사위였습니다. 성전 마당의 질서를 잡는 사람들은 사제의 하인들이었습니다.”
이토록 불경스런 상황 앞에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 당신 성전을 향한 열정이 마침내 폭발한 것입니다. 깜짝 놀랄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소와 양들을 성전 마당에서 몰아내셨습니다. 가만히 서있던 소와 양들이 놀라서 한꺼번에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가니 순식간에 일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빼곡이 진을 치고 앉아있던 환전상들의 탁자를 엎어버렸습니다. 여기 저기 만 원 짜리, 5만 원짜리 지폐들이 날아다녔습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대 소란이 잠잠해지자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 “이것들은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오늘날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이 땅에 오셨으면 어떤 얼굴을 하셨을까, 어떤 행동을 취하셨을까, 궁금해집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대로 우리 교회가 절대로 장사하는 집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나치게 돈을 강조하고 돈을 밝히는 집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누구라도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는 따뜻한 집 같은 교회, 가난한 사람들도 서슴없이 들어올 수 있는 내 집 같은 교회,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하는 교회, 나눔과 섬김, 봉사와 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귤 1박스를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 다 먹기에는 분명 많아서 나누어 먹으려고 했는데, 마침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다. 나누는 것을 뒤로 미루고 저는 저에게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받은 귤은 그대로 부엌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부엌에 갔다가 몇 개의 귤이 물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더 급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약간 추운 창고에 박스를 옮겨놓았습니다. 이렇게 추운 곳에 두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며칠 뒤, 저는 단 한 개의 귤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곰팡이가 가득 피어서 그대로 버려야만 했지요.
물러버린 몇 개의 귤이 전체의 귤에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저의 안일한 마음, 게으른 마음이 맛있는 귤을 아깝게 모두 버리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인간 사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은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칩니까?
몇 마리의 작은 감기 바이러스가 나의 하루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200원짜리의 물이 백만 원 이상을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노트북 위에 엎지르면 가능합니다.
이처럼 별 것 아닌 작은 것들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몇 몇 사람을 통해서 전체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즉, 나쁜 영향으로 세상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으로 이 세상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대사제와 교회 원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만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온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있었지요. 우선 희생제물을 바칠 동물들을 팔았고, 그 동물을 파는 사람들에게 자릿세를 받아냈습니다. 또한 이 동물을 사기 위해서는 화폐를 지불해야 하는데, 성전 안이라는 이유로 이방인의 화폐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전을 통해서도 막대한 부를 모았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요?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폭력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폭력은 정의를 세우기 위한 폭력이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얼마 뒤, 예수님께 폭력을 휘두르지요. 그러나 이들의 폭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의한 폭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불의가 넘치는 성전이라면, 그래서 찬양을 드리지 못하고 기도할 수 없는 곳이라면 당장 허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까요? 내 욕심 채우기에 급급함으로 인해 주님을 제대로 모실 수 없는 곳을 내 안에 만들고 있다면 지금 당장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혼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리석음 때문에 하늘 자체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호라티우스).
참된 성전 봉헌
-정희완 신부님-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모든 생명이 자라는 곳, 모든 것을 살게 하는 기쁨과 평화의 자리입니다. 생명의 물이 넘치는 곳,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성전을 봉헌한다는 것은 건축물을 지어 주님께 바치는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재물을 바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전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그 모든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 머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란 저마다의 성전을 지어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헛된 욕망을 던져 버리고 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 안에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과 작은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은 내 마음 안에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서로에 대한 신뢰를 싹트게 하는 일은 관계의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나와 그 사이에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흐르게 하는 일은 참된 연인의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따뜻함과 나눔의 정이 흐르게 하는 일은 진정한 공동체의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깨끗한 마음 안에, 따뜻한 연민의 실천 안에, 배려와 신뢰의 태도 안에, 속 깊은 이해와 사랑의 관계 안에, 희생과 섬김의 공동체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
- 황영준 신부님-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당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미사만 끝나면 5분도 안 되어 사람 하나 없는 빈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단체 회합과 봉사 때문에 교리실과 회합실은 사람이 바글바글거리는 데도 성당은 비어 있습니다. 때로는 성전신축기금 마련이다 뭐다 하면서 마당에서 물건을 파는데, 장사하는 재미에 미사도 빼먹고 장사에만 올인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탄제 준비한다, 캠프 준비한다.’ 하면서 교사들과 청년들이 하루 종일 성당에 머물러 있지만 정작 중요한 미사 시간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지. 어느 성당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 평일 낮엔 이용객 ( ?)이 없어 문을 걸어 잠근 성당도 많습니다. 가끔 성당 안의 예수님께서 우울증에 걸리시지 않을까 하는 장난 섞인 생각도 해봅니다.
성당은 아름답지만 우리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그토록 많은데 미사만 끝나면 성당은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심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도 적습니다. 신자는 많지만 오로지 기도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반대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늘 성당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 내가 몸담고 있는 성당이 아름다운 성당이 되려면 먼저 내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온 정성과 열정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다면 그곳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성당입니다. 성당 주변에서만 분주하고 열심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조용한 성당 안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고 찾아가는 성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로부터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분의 집이 성당 건물로 알고 폐허가 된 성당들을 다미아노 성당서부터 시작해 셋이나 고쳤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집이 건물로서의 성당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것임을 깨달았지만 성당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성당(교회)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주셨기에 다음과 같은 말로 단순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는 전 세계에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래서 어디서건 성당이 보이면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으며 늘 빗자루를 갖고 다니며 더러운 성당이 있으면 청소를 했습니다.
그에겐 성당이 다른 어느 곳보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성당에서만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계신 곳이 어디든지 계신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범신론자로 여길 정도로 모든 것 안에 깃드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바위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바위를 조심조심 걸었고, 구더기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밟히지 않도록 길 가운데 있는 구더기를 길가로 옮겨놓았으며, 종이쪼가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종이쪼가리를 쓰레기로 방치하지 않고 고이 모셨습니다.
이런 피조물이 주님의 성전이 되었으니 우리 인간은 더더욱 주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선 자기가 성전이 되도록 자기 안에 성전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가슴에 성전을 마련하였다고 전기는 얘기합니다.
이는 성녀 글라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봉쇄를 동정녀의 봉쇄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영성에 따른 것이지요.
신부인 동정녀들은 신랑만을 위한 봉쇄구역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거기서 신랑과만 만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라라는 이런 봉쇄를 부정하지 않지만 봉쇄를 어머니의 봉쇄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자궁이라는 작은 봉쇄 안에 주님을 모심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는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자궁이 주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님의 성전이기에 그 어떤 속화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하나는 성전 정화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 파괴입니다.
우리에게도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주님을 만나는 안팎의 두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성당이 사교장이 되거나 장터가 되지 않도록 잡스런 것들을 다 치워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과 자궁이 하느님을 위한 성전이 되도록 하느님 아닌 것들을 품지 말아야 하고 있다면 치워야 합니다.
허물기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발생하지 않으면서 겉치레만 화려한 눈에 보이는 성당 건물은 헐어버리고 내 안에 성전을 세움으로 나를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우고, 나를 걸어가고 찾아가는 성전으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어느 의대에서 서로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두 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학생이 병원의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며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모습을 본 한 학생이 말합니다.
“분명히 류마티스 관절염이야!”
그러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저으며 말합니다.
“아니야. 저런 자세가 나오는 것을 보니 디스크가 틀림없어!”
그리고 둘은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는다고 주장하면서 옥신각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싸우고 있는 이 두 사람에게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힘겹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저기……. 화장실이 어디죠?”
이 남자가 불편한 자세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이유는 속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두 명의 학생은 서로 자기의 의견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부족함을 늘 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러한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에서는 희생제물의 봉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희생동물들이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성전에 몰려있었지요. 따라서 하느님의 집이라는 성전이 얼마나 지저분했을까요? 완전히 동물시장 그 자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환전상까지 끼어서 각종 이권이 개입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러한 모습이 옳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하며 따지고 있지요. 이렇게 장터로 만들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성전 정화의 이유가 충분한데, 그들의 어리석음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전은 눈으로 보이는 외적인 성전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마음의 성전 역시 우리가 정화해야 할 대상입니다. 내 마음에 오신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내 마음을 받아들이실 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깨끗한 주님의 집이라고 하실지, 아니면 각종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강조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굴이라고 하실지…….
이제는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 몸이 거룩한 성전, 주님의 거룩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살아온 날이 아니라 살아온 날의 추억이다.
<교회=비틀거리는 공동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저희 수도회에서 자주 강조되고 있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통합’, ‘조화’ 같은 단어들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통합,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의 통합, 정신과 물질의 조화, 기도와 활동의 조화, 신앙과 삶의 조화...
오늘 날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참으로 불행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만 중요시합니다. 그들의 삶 안에는 빼어난 외모만 있습니다. 조각 같은 육체만 있습니다. 탁월한 지적 능력만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너무나 부실합니다. 맑은 영혼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올곧은 정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비심, 배려심, 측은지심, 양보, 희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조화와 통합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모는 왕자요 공주 같지만 알맹이가 쏙 빠졌기에 허깨비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조화요 통합의 삶입니다.
과대망상이란 증세가 있습니다. 이 증세는 자신의 지위, 재산, 능력, 용모, 혈통 등을 과장하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 증상입니다. 예를 들어 전혀 아닌데 자신이 너무 잘생겼다고 믿는 증세입니다. 혹은 자신이 탁월한 영적 능력, 투시 능력, 예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증세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이비 교주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즘 이러한 증세의 대표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누구라고 직접 거명하지 않아도 잘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반대의 증세가 있습니다. 자기혐오 혹은 자기비하증, 자기 자신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증세입니다. 자신의 강점, 경쟁력, 긍정적인 측면은 완전히 뒷전이고, 오로지 자신의 약점,부적절함, 한계, 어두움, 취약점에만 매달리는,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며 우울하게 살아가는 스타일입니다. 인생이 정말 괴롭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자기낮춤과 겸손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덕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혐오와는 엄연히 구별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 머무름으로 인해 완전해집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큰 죄인이지만 교회 안의 성사로 인해 거룩해집니다. 우리는 정녕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인해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아 ‘교회’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진정한 교회는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순교자 로메로 대주교님은 “여러분 각자가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친교의 공동체’로 규정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모자라고 나약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비틀거리는 공동체(community of struggling), 그러나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예수님의 몸과 피가 나눠지는 곳, 예수님의 정신과 영성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결국 매일 예수님 말씀이 육화되고 살아계신 예수님의 몸인 성체가 영해지는 곳, 우리 각자가 성전입니다.
인간, 참으로 불완전하고 망가지기 쉬운 흙부스러기 같은 존재이지만 뜨거운 하느님 사랑으로 인해 성화의 길로 나아가며 하느님의 지체, 곧 성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인간, 때로 갖은 죄와 과오로 시궁창처럼 더럽혀지고 방황을 거듭하지만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힘입어 순결한 교회로 거듭납니다.
인간, 너무나 유한하고 나약한 상처투성이뿐인 존재이지만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섬으로 인해 아름다운 교회로 건설됩니다.
거룩한 성전
- 장동현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탁자를 엎어버리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진정으로 거룩한 성전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이 갈망한 거룩한 성전은 모든 더러움에서 늘 정화되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온 마음과 진실로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하느님 현존이 지속되는 지성소였습니다.
율법 공부의 중심지였고 구원이 풍요롭게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 거룩한 성전에서 주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드러나기를 꿈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꿈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성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신이 그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합니다.(1코린 3, 16)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거룩한 성전이 파괴되지 않도록 성전을 잘 보존하라고 권고합니다.
내가 그리고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가 다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안에서 끊임없는 정화가 일어나고 하느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현존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의 무리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축성하고 그 장소를 거룩하게 합니다.
이것이 실현되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 22) 셀 수 없이 많은 뽑힌 이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영원히 노래할 것입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점심을 먹고 방에 올라와서 잠깐 묵상을 한답시고 창문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습니다. 창문 밖은 훤히 트여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 비가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빗물은 창문에도 튀겨 조금씩 시야를 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점차로 먼 곳이 아니라 물이 튀긴 창문에 머물기 시작하였습니다. 억지로 먼 곳을 바라보려 해도 창문의 물방울이 시선을 더 잡아끌었고 더 이상은 먼 곳의 경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그쳐있었고 창문은 말라있었습니다. 밖에는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진리이지만 사람은 눈앞에 있는 것 먼저 보게 되나봅니다. 내 앞에 있는 창문을 깨끗이 닦지 않으면 밖은 볼 수 없고 창문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 운전을 하는 경우라면 더 위험하겠지요. 군대에서 운전병을 했는데 한 번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눈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와이퍼를 작동시켜 보았지만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돌아가야 했기에 조금 운전하고 가다가 눈이 차 유리에 쌓여 앞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면 차를 멈추고 내려서 유리를 닦고 또 다시 운전하고 가다가 또 멈추고 하는 것을 수 없이 반복하며 부대에 복귀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이 이유가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입니다. 당시 성전도 기도하는 집이었고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장사꾼과 속임수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위기에서 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먼 곳에서부터 제물로 봉헌할 소나 양을 끌어 올 수 없어서 그것을 팔아 돈으로 가져왔는데 성전에 오니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고작 다리 한 짝이 불구인 비둘기 한 마리라면 그것을 바치면서 어떻게 기도에 집중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사기 쳐서 얻은 수익의 얼마는 그 곳에서 장사를 하도록 허락한 성전 사제들에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렇게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정화되면 사라졌던 표징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몸이 죽어서 땅에 묻혀 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 부활하리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 바로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전이 정화되지 않으면, 즉 그들 마음의 성전을 깨끗이 닦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셔도 그것은 더 이상 그들에게 표징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세상 것들로 더럽혀져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라떼라노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떼라노 성전은 베드로 성전이 증축되기 전까지 천년 넘게 교황님이 계시던 성당입니다. 그 앞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크게 서 있습니다. 교회는 너무 크고 부자였고 프란치스코는 거지였습니다. 처음엔 프란치스코를 이해하고 알아보지 못했지만 프란치스코가 이 허물어져가는 라떼란 성당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꿈을 꾸신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헌을 받아들이고 인준하여 줍니다.
우리 각자도 작은 성전들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사시고 또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눈을 빼앗긴다면 예수님의 채찍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했듯이 성전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전이 세상의 어떤 것들로 더럽혀져서 하느님의 집이라기보다는 정화가 필요한 집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보고 항상 우리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정화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전에 대한 성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서울 지역 프란치스칸 모든 가족은 프란치스코 회칙 인준 800 주년을 기념하여 11월 한 달, 매주 금요일을 프란치스코 요일로 정하고말씀의 전례 안에서 프란치스코 영화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폐허가 된 산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는 장면입니다.
쓰레기와 먼지에 파 묻혀 있던 십자가를 발견하고는 십자가에 덮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자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폐허가 되었어도 주님은 거기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성당을 수리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프란치스코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주님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하기에 그 성당에서 떠났고 그래서 성당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폐허에서도 주님을 발견하고는 쓰레기 하치장을 다시 성당으로 바꿉니다.
여기서 저는 몇 가지 성찰을 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하고 고린토 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비록 온갖 쓰레기로 가득하다 해도, 그래도 나는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자의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의식을 버리는 순간, 나는 성전이 아니라 쓰레기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나는 쓰레기를 안고 사는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며칠 전, 미사를 드릴 때 심사가 편치 않았습니다.
전날 들은 얘기가 계속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미사 중에 그까짓 하찮고 부정적인 상념이 하느님 대신 저를 계속 차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이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니 신통하게도 그렇게 저를 어지럽게 하던 상념이 사라지고 내적 평화가 다시 왔습니다.
이렇게 제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과 같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해야 합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저희 회헌을 보면 공동체는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라고 얘기합니다.
비록 저를 비롯하여 형제들이 프란치스칸 이상에 훨씬 못 미치고 매우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실망하거나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과 포기는 악마가 가장 노리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 실망은 사랑이 없는 교만한 욕심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공동체와 형제를 사랑한다면 실망이란 없고 포기란 더 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워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사이에서 자취를 감추시고, 반대로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그 보잘 것 없는 형제와 공동체를 사랑하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면 거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거룩하다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하느님이 거기 아니 계시고 따라서 주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반대로 죄 많고 허물투성이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그 죄와 허물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하느님은 계시고 그 공동체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가신 저희 아이들의 부모님들을 위한 연미사를 드리기 위해 명단을 좀 적어내라고 했습니다. 제대 위에 놓여진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편부 또는 편모 슬하에서 갖은 설움을 겪으며 살아온 아이들이 불쌍해서 혼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시대 교회의 역할, 저의 수도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더욱 뚜렷하게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고통 당하는 이들의 상처를 조용히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손길",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부여받은 첫 번째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의 정의에 대해서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는 지상의 나그네들의 공동체",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 "거룩함을 지향하지만 정화의 여정이 필요한 죄인들의 모임."
오늘날 우리 교회가, 또 수도회가 힘겹게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앞에 "희망의 징표"가 되고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진정 부끄러움만 앞섭니다. 양적인 팽창만을 위해서, 지독하게도 돈만 밝히면서 가장 소중한 손님인 가난하고, 천대받고, 죽어 가는 하느님 백성들은 철저하게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본당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우리 사제, 수도자들을 통해서 하느님 위로의 손길을 느낍니까?
진정으로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매일 기득권과 허세와 과감히 결별하고 보다 가난한 이웃을 향해 기꺼이 내려가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욕과 가식, 허례허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성전을 철저하게도 뒤집어놓으십니다.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들이 하루 종일 번 돈을 쏟아버리십니다.
하느님과의 깊이 있는 내적인 만남은 뒷전인 교회, 허례허식이 판을 치는 교회,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겨우 마지못해 최소한의 신앙의 의무만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교회에 신물이 난 예수님께서 그릇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진정 하느님의 뜻에 따라 늘 순례하는 공동체인지,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겸손하게 봉사하고, 그릇된 과거와 과감하게 결별하는 가난한 공동체인지 시시각각으로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쉐드 헴스테더는 “사람은 하루에 5~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생각이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생각 중 85퍼센트가 부정적인 것이며 단 15퍼센트만이 행복하고 긍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력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결론은 부정적인 쪽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결국 사람은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행복해지기 위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불행해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노인이 길을 가는데 한 청년이 울고 있습니다. 노인은 이 청년에게 묻습니다.
“이보게, 청년. 왜 우시오?”
“제가 이 언덕에서 넘어졌는데 팻말을 보니 여기서 한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산다고 적혀 있으니 기가 막혀 그럽니다. 제가 3년밖에 못 산다니요……. 엉엉엉.”
이 말을 들은 노인이 껄껄껄 웃으며 위로합니다.
“그까짓 거 뭘 그리 고민하시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30번만 더 넘어지면 되잖소?”
1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사니, 30번 넘어지면 90년밖에 못 산다는 이야기겠지요.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해결책이 아닐까요?
세상에는 불리하고 유리한 상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고습관’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면 모든 것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선 심리학자의 말처럼 부정적인 생각만을 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더욱 더 안 좋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에 대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장사꾼과 환전상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도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을 갖고서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예수님께서는 사흘 안에 다시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러나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해 바로 당신 자신이 살아있는 성전임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 동안 그렇게 놀라운 말씀과 행적으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으셨던 예수님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 안에 예수님을 가두어 놓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갇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놀라운 손길 또한 내 생각에 갇혀서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음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나의 긍정적인 생각만이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체험하게 만듭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억지로라도 가져 보세요.
사랑·기도로 지은 하느님의 집
-배광하 신부님-
하느님 집에 대한 열정
육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에 대한 수식어는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 ‘로마의 4대 성전의 하나’, ‘모든 교황님들의 착좌식이 있었던 성전’ 등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00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 되었던 로마 제국의 박해가 끝나고 세워진 성전이라는 의미는 감격 그 자체입니다. 끔찍하고도 잔인했던 로마 제국의 박해는 서기313년 밀라노 관용령에 의해 끝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280?~337)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310~314년 재임)에게 자신의 라테라노 궁전을 선물로 주며 함께 성전까지 지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이 같은 성전이 324년 ‘실베스테르 1세’(314~335년 재임) 교황에 의해 봉헌되었을 때, 그 현장에 있던 수많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313년 밀라노 관용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지 불과 11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역사가 우리 한국 땅에도 있었습니다. 1784년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의 세월 동안 길고 모진 박해 끝에 한국천주교회 첫 신앙의 모태인 명동(당시 명례방)에 명동 대성전이 봉헌된 것입니다.
1898년 명동 대성전이 봉헌되었으니, 신앙의 자유를 찾고 12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전국의 모든 신자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대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따지고 보면 라테라노 대성전이나, 명동 대성전만 그러한 감격을 누렸겠습니까. 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성전들이 모두 그 같은 기쁨과 감격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통하여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뀔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라 하십니다. 그것은 성전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처음 건립할 때에는 마음가짐이 분명 달랐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성전 건립 기도> 중에는 이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온갖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주님의 뜻을 소홀히 했나이다.”
처음 성전을 건립할 때엔 욕심과 오만이 없었습니다. 이는 영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립 후에는 다툼과 오만, 분열과 욕망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육의 성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허물라 하신 것입니다.
영의 성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을 보시며 불같이 역정을 내시고 성전을 허물라 하셨을 당시 유다인과 제자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아가 허물어진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 하셨을 때는 더더욱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예수님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자주 우리에게 육의 성전이 아닌 영의 성전, 마음의 성전을 강조합니다. 이를 사도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우리말에 ‘더럽다’라는 말은 ‘덜없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비워진 상태로 있어야 하는데, 무엇인가가 남아 있을 때, 그 상태가 더럽다는 뜻이 됩니다. 깨끗이 설거지를 하였는데 설거지통에 오물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우리는 더럽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 안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미련과 욕망의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그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마음 역시 더러운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 안에 영의 성전, 하느님의 성전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시 성전 건립 기도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저희가 힘을 모아 주님을 예배할 새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룩하여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고자 하오니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소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이며,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전은 소중하고 귀한 하느님의 집입니다. 성전 건립 때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 같은 성전이 건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나눔과 눈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그 고귀한 성전에 걸맞는 영의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탐욕과 착취의 장사꾼집이 아닌,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생명의 영혼들이 모이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6)
“성전에서 흐르는 생명수 "
-이기양 신부님-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며 이상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인 성녀 축일은 지내도 성당이나 건물 축일은 잘 지내지 않습니다. 도대체 라테라노 대성전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 규모이며 어떤 의미가 담긴 건물이길래 해마다 이렇게 축일을 지내는지 의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큰 목소리로 전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교는 차차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에까지 들어가게 된 그리스도교는 그곳에서 호된 박해를 받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황제 숭배 사상이 팽배했기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대대적 박해가 계속 이어졌는데 그 박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로마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내고 희망을 주기 위해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대대적 박해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교황께 자신의 별궁을 선물했고, 324년 11월 9일에 축성식을 했기에 오늘을 축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교황은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라테라노 대성전에 머무르셨고, 이 성전은 전 세계 교회 일치의 상징이 됐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인 오늘, 독서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모두 성전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장사꾼 소굴로 만드는 이들을 호되게 야단치시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몸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의미가 건물에서 사람의 몸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며 사람 자체가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교회를 건물이 아닌 신자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성당'하면 건물만을 생각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 모임, 믿는 이들 모임 자체도 교회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전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전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이 오늘 제1독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 물은 흘러나오면서 점점 그 양이 많아지는데,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움터나고 숲이 번창하며 온갖 생명들이 번성합니다. 심지어 이 물은 사해의 죽은 물마저 단물로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예수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변화됩니다. 이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물이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물을 지닌 나를 통해 집에 생명이 움터 나오고, 나를 만나는 이웃을 통해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지며, 내가 나가는 회사가 나를 통해 빛과 정의의 집단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수로 변화한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몸을 모신 신자들 공동체가, 화려하게 치장한 성전보다도 주님의 현존을 더 강렬하게 드러내는 빛과 소금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
요한은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가지 표징을 사용해 보여주는데, 카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 사건이 이에 해당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도 전하지만 거기엔 예수님의 수난이 임박한 시기이고, 여기서는 공생활의 시작, 곧 복음서 맨 앞쪽에 배치되어 있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는 더 정확한 편이지만 요한복음은 나름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표지로 이 사건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2,13) 예수님께서 참된 파스카의 표지를 보여주시리라는 것을 넌지시 비춥니다. 이스라엘 삼대 순례 축제인 과월절(파스카)·오순절·초막절이면 열세 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를 세 번 맞이합니다. 세 해에 걸쳐 공생활을 보내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 마당은 이스라엘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로 나뉘는데 이스라엘인의 뜰에는 선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십니다.(14절) 성전이 장사치들로 들썩이는 시장바닥 같습니다.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에는 유다인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새겨 있어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세켈로 바꿔야 했습니다. 환전꾼들은 여기서 약간의 이익을 챙기고 동전을 교환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염소와 양은 시끄럽게 울어대고 비둘기들은 정신없이 파닥거리며, 사세요 파세요 하는 흥정과 돈 바꾸는 소리가 성전 뜰에 가득합니다.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은 소와 양을 파는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꾼들이 벌려놓은 상을 뒤엎으십니다.(15절)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셨나 봅니다. 이렇게 화내시는 예수님 모습이 낯설기만 합니다. 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셨는데…. 예수님께 성전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시편 69,10) 분노하실 만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말로만 명령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비둘기는 가난한 이들의 제물입니다.즈카르야의 예언을 실현하십니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1) 예수님은 모든 것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시장 바닥은 좁고 시끄럽고 더럽고 무질서한 것이 어울리는 곳이지만, 성전은 넓고 고요하고 편안하고 경건한 곳이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놀라 반문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18절) 유다인들은 합당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한 요구에 예수님이 꼭 응답하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뒷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표징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전 정화 사건을 계기로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논쟁 대목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으로 요한 특유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염두에 둡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재건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 대왕이 사십육 년이나 걸려 증축한 것입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20절) 유다인들이 생각한 성전과 예수님이 생각한 성전은 서로 다릅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사흘’ 안에 보여주시겠다고 장담하십니다. 그들이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21절)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죽음으로‘파괴되었다가’ 부활로 ‘다시 세워질’ 예수님 자신의 몸이 곧 성전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말씀을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겠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22절)
성전은 하느님이 계시고 나타나시는 곳입니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곧 성전이십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그분을 통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며 그분을 통해 구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성전 정화 이야기는 구원의 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성전 정화 사건이 인간의 내면에서 실현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의 주제는 정화입니다. 시장 바닥 같은 성전은 한편으론 인간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제물의 피로 성전을 정화하듯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 육신과 내면의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특히 인간 존재를 기만하는 온갖 것에서 우리를 정화하셨습니다. 인간 내면에 뿌리내린 죄와 충동과 욕심 등 나쁜 모든 것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내적 무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육신도 내면도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됩니다.
바다가재는 밀물 때 해변으로 밀려오면 바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다시 돌아와 자신을 데리고 가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해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든 바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자기를 데리고 갈 바닷물만을 기다리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하지만 우리 역시 이 바다가재의 모습을 취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내 운명 속에서 그리고 내 고통 속에 자신을 그저 내 맡기는 바다가재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처지를 그저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행한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큰 은총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갈 수 있도록 환경만을 지정할 뿐, 알맹이를 아름답게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성전에 사랑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즉, 사랑을 채워야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느님의 몫인양 아무것도 안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은 포기하고, 세속적인 부분만을 신경 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보실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예수님의 평소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이지요.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까지 하실까요?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당신 자신이 성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들의 몸 또한 성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매일의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모시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들의 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어떤 재물과 명예만 쫓는 성전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으로 가득 찬 성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또 다른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혹시 사랑이 아닌 다른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이 모습은 내가 세운 성전이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채찍을 들고 나타나시지는 않을까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합시다.
가는 정 오는 정
-서현승 신부님-
수련기 때 어느 신부님과의 면담 중에 ‘조건 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기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사랑….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저로서는 체험 속에서 쉽게 실감할 수 없는 사랑의 개념이었습니다. 적어도, 세상의 수많은 관계 안에서 ‘거래’의 개념에 익숙한 사람이 하느님의 그런 사랑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따금 농담처럼, 어렸을 때부터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에게는 거래의 개념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고, 나아가 가는 정 오는 정의 미덕도 한국 사람이면 다 가진 기본 심성 아니냐는 얘기도 하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거래의 관계는 의외로 참 많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루는 기도 안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이따금 발견하곤 하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모습은 아마도 그러한 무조건적인, 그야말로 선물로서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체험해가는 과정에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한 사랑에 그나마 가장 닮아 있는 사랑이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서의 장사치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들 마음 안의 성전, 하느님께서 거처하실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서의 성전을 꿈꿔봅니다
한 사람의 힘
-김광태 신부님-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결법에 따라 거룩한 돈인 옛 히브리 화폐로 성전세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환전이 필요했고, ‘이방인의 뜰’ 앞에서 바꾸어 주니 성전의 거룩함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상인들 역시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제물로 바칠 동물을 구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성전의 고상한 사제단이나 상인들이나 순례자 모두에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예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의 탁자를 엎어버리셨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어졌을까? 이 일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결국 로마의 침공으로 성전이 없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둘 수 없으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으셔야 했다. 그러나 이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것이었다. 결국 이 일로 제거된 것은 성전 상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성전이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분 혼자서 시작하신 일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영화 <파워 오브 원>에서도 그랬듯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 일은 늘 한 사람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당신 몸을 성전에 비유하신다. 우리의 몸도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라면, 이 속에 은근슬쩍 잡상인들이 끼어들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것들을 몰아내는 일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하고 슬그머니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여전히 한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 김종규 신부님-
오늘은 성 베드로 성당, 성 바오로 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더불어 로마 4대 대성전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라테라노 대성전, 정확한 명칭은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입니다. 라테라노 대 성전은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요 머리”라 일컫는 데, 그 연유는 이러합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의 자유 칙령을 반포하고 나서 당신 교황이었던 멜키아데스에게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스타와 자신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살고 있던 궁전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 궁전의 일부를 성당으로 개조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라테라노 대성전의 모태가 됩니다.
곧 라테라노 대성전은 이 세상에서의 첫 번째 공식적인 교회로 박해 이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것입니다. 324년에 실베스테르 교황이 성전을 봉헌하여 로마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아직 이 안에는 로마 교구 교구청이 있습니다. 이 성당에는 특별한 곳이 하나있는 데, 이른 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유의 세례당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세례를 받기 위해 만든 곳으로, 황제가 세례를 받기 전에 그만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에 전염을 두려워한 황제는 몰래 산에 숨어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황제를 찾을 길이 없던 실베스테르 교황에게 꿈에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나타나 황제의 거처를 알려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곧 바로 교황은 황제를 찾아가 겨우 데리고 와서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놀랍게도 세례를 받자마자 황제의 나병이 깨끗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유의 세례당’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라테라노 대성전에는 12사도들의 대리석상과 여러개의 소성당이 있고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분명 라테란 대성전은 최초의 교황의 거처이며 첫 봉헌된 성전이기에 그 역사적인 의미는 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라테라노 대성전의 축일을 기념하는 까닭은 오래된 무수한 역사의 산물인 대성전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 참된 믿음이 많은 시련과 우연곡절 끝이라도 굳건히 지켜졌고 또한 우리에게 이어져 온 그러한 정신과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뜻과 맞지 않고 오히려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을 몸소 정화하시자 이에 반대하는 무리가 외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이에 예수님께서는 수 백 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새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놀라우신 힘으로 그들에게 또 다른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성전에 하느님을 가두어 놓고 하느님의 뜻에는 눈을 감고 오히려 악을 일삼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머무시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인 체사리우스 주교께서는 오늘의 축일을 지내면서 강론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세례 받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마귀의 신전이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 성전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화려한 성전에만 계시거나 거기에 갇힌 분이 아니라, 온전히 자유로우신 분으로 그 마음이 거룩하고 깨끗한 한 이들의 영혼과 마음 속에 머무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오늘 겉으론 화려할 지라도 하느님께서 안 계신 그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그들 앞에서 당당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의 영혼, 곧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성전을 더욱 순결하고 거룩해 지도록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참 성전이 되도록 우리를 온전히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오늘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당신의 영으로 채워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참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정화해 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경규봉 신부님-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전으로 교회에서 가장 역사 깊은 성전이다. 이 성전은 320년경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건립하여 교회에 기증하였으며, 324년에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이 되었다. 1843년 이후 교회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교황성하께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이 성전에서 집전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시는 듯하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두르실 정도이므로 예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복음 안에 예수님께서 폭력을 행사하시는 대목은 이 대목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성전은 곧 하느님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집이다. 성전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하며,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장사꾼들이나 환전상은 순례자들을 부당하게 속이거나 폭리를 취함으로써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둑과 강도, 사기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켰다. 그래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성전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성전을 가꾸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성체가 모셔진 성전이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는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말씀하셨다(21절). 사도 바울로도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3,16-17)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분명히 했다. 더욱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1고린 6,19-20)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서 주님의 값진 피로 사신 것이다. 당신의 성전으로 쓰시기 위해 사신 것이다. 하느님의 성전에는 하느님만이 어울리며, 하느님만을 모셔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에 그 어떤 우상도 모실 수 없고 모셔서도 안 된다.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2고린 6,16)
오늘 성전은 하느님을 보여주고 만나는 하느님의 집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성전이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줌으로써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성전이 되도록 하자.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사신 하느님의 성전임을 생각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자. 재물, 지식, 힘 이외에 그 어떤 우상도 내 안에 둘 수 없음을 생각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모시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자.
새로운 성전이 되신 예수님
- 안병철 신부님 -
예수께서는 성전정화 사건을 계기로 성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십니다(요한 2,13-25).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삶의 중심이요, 구심점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날마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봉헌했을 뿐만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바쳤습니다(사도 3,1). 삼대 축제인 오순절, 과월절, 초막절에는 온 백성이 성지순례를 하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는데, 최소한 일 년에 한 번 곧 과월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의무였습니다(루가 2,41). 성전에서 과월절을 지낼 때 어린양을 제물로 바쳐야 했고, 그 때 봉헌된 어린양은 가정에서 과월절 의식을 거행하면서 먹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행하던 의식들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다만 성전에서 거행되던 종교의식을 세속적으로 오염시키는 형식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단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격분하시어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성전이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의 상거래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성전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가 결코 퇴색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본질적인 곳을 향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 2,21)라는 복음서 저자의 해석은 예수께서 성전정화 사건을 당신 자신을 계시하는 기회로 삼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짐으로써 성전은 그 때부터 성역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마태 27,51). 새로운 경신례를 거행하게 되는 예수님의 부활 때에, 예수님의 몸이 곧 성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상업주의에 물든 인간들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되며, 성전이 지니고 있는 의미 자체도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성전을 예고하시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구체적인 만남의 장소로서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표명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출애 20,3) 하신 시나이 산에서의 계시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각자의 이해관계나 상황에 따라 만든 신을 섬기려는 인간적 경향을 과감하게 떨쳐 버려야 합니다.
나약한 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쉬운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 없이는 우리 역시 형식주의 또는 상업주의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창일 신부님-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더러는 로마에도 자리잡게 된다. 로마 제국에서는 250여년 동안 박해가 계속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4년 라테라노 대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은 처음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궁전이었으나 그는 ‘구세주 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교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세르지오 3세 교황이 그 자리에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세례자 요한에게 다시 봉헌하였다. 이후 이 성전은 로마 교구의 주교요, 전세계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머무는 교황좌 성당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라테라노 대성전 입구에는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곧 ‘로마와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저 멀리 로마에 있고, 보지도 못한 이 성당을 기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성당이 성 베드로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 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치 각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그 교구 중심이 되는 것처럼 라테라노 대성전은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성전 중심에 있는 성전이다. 그러나 단순히 한 성당 건물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새기는 데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성전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수님 말씀이 선포되고, 그분 삶이 재현된다. 그리고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을 기억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전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인다 할지라도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자리잡지 않는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단순한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한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 실망하며 떠나가고 냉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를 비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교회이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각자는 세상 앞에 하느님이 거처하시고 현존하시는 성전이며 감실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변자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인 성전이 거룩할 때 교회 공동체도 하느님의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그분을 따라 부활하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고 보존하도록 하자. ●
하느님이 머무시는 성전
-백광현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거룩해야 할 성전이 장사가 성행하는 시장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십니다. 성전은 사제들의 봉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예식이 행해지는 곳이 아니라 사제 계층을 배부르게 하는 사리사욕의 장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의도로 이루어진 성전 봉사가 부와 권력의 도구로 이용될 때 악의 소굴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더러워진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을 더럽힌 인간을 채찍으로 치지 않으시고 인간을 유혹에 빠뜨리는 본질적인 장애를 없애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채찍까지 사용하시지만 인간을 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짓게 하는 근본적인 유혹의 구조를 제거하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거룩한 예수님의 몸을 모심으로써 우리 몸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이 거룩한 성전을 늘 깨끗한 모습으로 보존하면서 모든 부정한 것들, 특히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애착을 끊어 버리고 늘 정화된 상태로 보존할 때 하느님께서 기쁘게 머무시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
-윤지종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중의 하나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세워 봉헌한 것으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2년이나 먼저 세워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입니다.
이렇게 의미 깊은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맞아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유명한 성전 정화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매년 과월절이 되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월절 축제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든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나 양, 황소나 암소와 같은 동물들과 이들을 파는 상인들도 함께 성전에 몰려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쳐야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주위는 이러한 희생동물들을 파는 장사꾼들로 북적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제물용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에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까지도 들끓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기 위한 성전이 완전히 시장터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돈벌이 하는 장터로 전락시킨 데에는 성전을 관리하는 종교지도자들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상거래를 묵인하거나 허용함으로써, 많은 이익들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광경을 보시고 굉장히 분노하십니다.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울화통을 터뜨리십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성전을 사랑하셨고 아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시는 자리이자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셨던 성전은 단순히 하느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라고 만들어 놓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들어가는 성당 건물만이 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더 소중히 여기시고 더 사랑하신 성전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그 어떤 아름다운 성전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 안에 머무르시고, 하느님과의 만남 역시 그 어떤 장소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우리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집, 곧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집이고, 성전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성전, 당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시면서 지켜내신 성전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거룩한 집답게 단장을 하고 기도하는 집인 성전답게 지켜나가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안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혹 장사꾼 같은 모습이나 강도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입을 함부로 놀려 남을 험담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서슴없이 해대고, 자기 욕심 채우기에 급급해 하고 있는 장사꾼 같은 모습이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내고 불평해대며, 폭언을 일삼고, 남을 못살게 구는 강도 같은 모습이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설쳐대고 있는 장사꾼들을 있는 힘을 다해 몰아내십시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머무르는 성전인 여러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강도들을 채찍을 들어서라도 내쫓아버리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죽을 각오를 하고,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는 온갖 잡상인들과 싸우십시오.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강도들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단단히 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이 보시고 분노하시고 울화통을 터뜨리는 그런 성전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흡족한 아름다운 성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은 성전다워야 합니다. 시장터나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안에 남아있는 잡상인들과 강도들을 하루빨리 몰아내십시오.
그리하여,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성전의 모습을 되찾으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성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의 집으로!
-김희자 수녀님-
로마에 있을 때 틈틈이 성당을 순례한 추억이 떠오른다. 시험이 끝나고 혼자 하는 도보 성지순례의 맛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감미롭고 행복했다. 성 클레멘스 성당,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당, 성 마리아 대성당,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당 등은 마음의 고향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성당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에는 영성이 풍부하게 담겨 있고 많은 조물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어 생명의 주인이시고 온갖 피조물과 함께 계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관상하게 한다. 참된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은 삶을 충만하게 하는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몇 년 전 수도서원 25주년이 되어 동기들과 함께했던 이집트·이스라엘·터키·그리스 성지순례는 모든 순례의 절정이었다. 하느님의 집에 간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일인가! 시편 122편에도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이미 우리 발이 서 있구나!”라고 하느님의 성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건물이다. 성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소다. 교회 지체들이 모여 함께 어떤 선물이나 은총을 구하면 그분은 귀담아들으시고 우리의 요청에 응하신다.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의 집이 기도의 집이 되기를 바라신다. 아기로 태어나 성전에 봉헌되셨고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를 만나셨으며 아버지에 대해 사람들과 대화하셨고 기도 안에서 아버지를 점점 닮아가셨다. 나는 기도하러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관상하고 그분을 닮아갈 수 있기를 빈다. 그리고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리라”는 시편 137편을 나의 노래로 삼고 싶다.
너희는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어라
이기양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며 이상한 생각이 들지는 않으시는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인 성녀의 축일은 지내도 성당 축일이라든지 건물 축일은 잘 지내지 않지요. 도대체 이 라테라노 성당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의 규모이며 어떤 의미가 담긴 건물이길래 해마다 이렇게 축일을 지내는지 의아해지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큰 목소리로 전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교는 차차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에까지 들어가게 된 그리스도는 그 곳에서 호된 박해를 받습니다. 로마에는 황제 숭배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대적인 박해가 계속 이어졌는데 그 박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로마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내고 희망을 주기 위하여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대대적인 박해는 313년까지 약 250년 이상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선언되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교황님께 왕궁을 선물하였고, 그 때 처음으로 지어진 성당이 바로 이 라테라노 대성당인 것이지요. 라테라노에 교황좌가 있는 아주 큰 성당이 세워진 것입니다.
교황님은 대부분이 라테라노 대성전에 머무르셨고 나중에는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기셨는데 베드로좌가 있었던 성전이 바로 이 라테라노 대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전 세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324년에 지어졌고 11월 9일에 축성식을 하였기 때문에 오늘을 축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인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모두 성전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성전의 의미가 단지 건물의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성경은 우리의 몸 자체가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탁자를 둘러엎으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화가 나신 것일까요? 탁자를 둘러엎고 채찍을 들어 후려치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예수님을 화나게 한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 또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의문이 생깁니다. 성당을 지으면서 우리는 장사를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요? 장사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의 시대 배경을 좀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사건이 벌어진 곳은 과월절이 가까워진 때의 예루살렘 성전 마당입니다. 과월절이 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다인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과월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다인 성인 남자의 의무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에 2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 유다인 중 19세 이상 되는 사람은 일년에 한번씩은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반 세겔 정도의 액수인데 이것은 성인이 2~3일간 일해서 받는 임금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이 성전세를 낼 때는 절대 다른 나라 돈으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외국 돈에는 그 나라 황제의 흉상이나 섬기는 우상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므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낼 때는 반드시 이스라엘 화폐인 세겔로 바꾸어서 봉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둘러엎으신 것이 이 환전상들의 가게였지요. 환전상들은 상권을 독점하고 부정과 착취를 밥먹듯이 하고 있었습니다. 환율에 따라서 환금 수수료를 적당히 받아야 하는데 엄청난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세금을 놓고 그렇게 부정을 저질렀던 것이지요.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환전상들의 탁자를 둘러엎으시며 그토록 화를 내신 것입니다.
또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 등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봉헌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간편하게 헌금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이렇게 현물로 봉헌을 하였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소나 양, 비둘기를 잡아 바쳤고 그 예물은 전혀 흠이 없고 티가 없는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받기 전에 검사를 하는 검사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또 몹시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 짐승들을 파는 상점들이 운영이 되었는데 이 운영권을 대사제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물건의 값은 터무니없이 비쌌고 자기네 가게의 짐승들만 합격을 시키는 부정과 비리가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뒤집어엎으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신 것이지 가난한 사람들 위해서 성당 앞마당에서 장사하고 있는 것을 나무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폭리와 비리에 물든 장사를 금하시고 부정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이 마구 대듭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요한2,20)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몸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의미가 건물에서 사람의 몸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건물 자체는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물 자체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거룩한 곳으로 건물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코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 자체가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그 뿐만 아니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교회를 건물이 아닌 신자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성당'하면 건물만을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임, 믿는 이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전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사는 자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과 일치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내가 바로 주님의 성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성전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이 오늘 제 1독서 에제키엘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 물은 흘러나오면서 점점 그 양이 많아지는데,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움터나고 숲이 번창하며 온갖 생명들이 번성해 갑니다. 심지어 이 물은 사해의 죽은 물 마저 단물로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성당에서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이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물, 생명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집에서 생명이 움터 나오고,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지며, 내가 나가는 회사가 어둠과 오류의 집단이 아니라 빛과 정의의 집단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수인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성전인 우리 신자들이 살아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 이상윤 신부님-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흔히 개혁가로 시대의 반항아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을 때 생기는 억측들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Jn 2, 13).’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상황에 무조건적인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신 분이십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 동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지만, 그곳 성전에서 행해지는 갖가지 추잡스런 행위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사전적 의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성전은 거룩한 곳이라는 개념이 이미 사람들의 인식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거룩한 곳이 아니라 성전을 등에 업고 상행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이미 그러한 행위가 통용되고 자리 잡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성당을 주님께 대한 신앙심으로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성당을 자신의 처세에 관련하여 성당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의 존재보다 자신의 존재를 더 크게 바라보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애청자 여러분들도 공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사람을 내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안으려 노력합니다. 그러하기에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욱 풍성하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소위 성전 정화사건을 바라 보면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외적 행위보다 내적 자세가 중요함을 알려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제물의 수와 종류 그 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롯이 되돌려 드리는 것이 중요함을 피력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을 ‘이곳은 기도하는 곳입니다’라고만 말을 한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저 사람은 뭘 모르는구만’하고 응대하실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이 성전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관점에서 보셨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그 자리의 사람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라고 반문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살고 계시고, 예배를 받으시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아버지의 집’이 바로 성전이고 그 성전이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코린토 전서 6장 19절의 말씀처럼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내 이웃의 모든 사람을 주님 모시듯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의 핵심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겠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제 오후 익산에서는 원불교 최고 지도자의 이취임식이 있었습니다. 타 종단들이 최고지도자의 이취임 때 마다 눈꼴사나운 종권다툼으로 인해 사분오열되고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것에 비해, 이분들의 이취임식은 너무나 아름다웠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간 전임자의 아름다운 퇴장에 이은 후임자의 겸손한 등장.
이번에 새로 취임하신 원불교 최고 지도자 장응철 종법사님께서 취임 직후 신도들과 국민들을 향해 던진 법담이 제 마음에 크게 다가왔습니다.
“마음 편히 하세요. 안심하는 것이 바로 극락입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생각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한 가지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교회는 방황하고 흔들리는 신자들, 세파에 지쳐 힘겨워하고 있는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신자들에게 과연 어느 정도 천국을 맛보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그 누구도 주지 못할 평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를 어느 정도 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자신의 존재나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교회 안에 깨어있는 분들께서 그토록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교회가 분수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의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영적생활, 순례성, 청빈, 형제적 친교,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나눔과 섬김...이런 측면들에 대한 투신은 뒷전인 채 외형적인 성장, 화려한 치장, 세속과의 지나친 결탁에 몰두하다보니 그렇게 고민하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로마 시내 4대 성전 가운데 하나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로마 성지 순례객들이 꼭 빠지지 않고 들르게 되는 단골코스 대성당입니다. 바티칸 대성당 못지않게 볼거리도 많을 뿐 아니라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역대 많은 교황님들께서 이곳에 안치되셨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 오염되고 타락한 유다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확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행동 역시 과격하십니다. 채찍질을 하시며 양과 소, 환전꾼들과 장사꾼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외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본질상 기도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들, 세상에 닳아빠진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정화될 수 있는 회개의 분위기가 꾸며져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은 어쩌면 우리 각자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머무시는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오늘 하루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님의 강론이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우리의 이 성전(우리 각자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전의 청결을 보존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죄의 오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 성전이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 영혼에 암흑이 끼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대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내맘의 정화작업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성전이란 바로 당신 몸이라고 하신다.
우리 몸은 바로 성령의 궁전이라고 하였던가?
언제나 성령의 궁전이 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몸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인 이유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는 구원과 생명과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원적 권능이 살아 움직일 때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또한 먼저 죽어야 한다.
죽어야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예수님처럼 그 구원의 샘물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
그 형제에게 구원의 샘물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상처만 더 남겨주었던 나의 몸은 결코 성전이 아니었던 셈이 아닐까?
또 그렇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죽기 싫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냥 하소연을 듣기만 하면서 그리스도 그분께서 친히 치유시켜 주시길 기도해야 옳지 않았을까?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마다하지 않으실 정도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내가 지니지 않고 있으면서 그 형제를 섣불리 훈계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성전이신 주님처럼 우리 몸도 성전이 되어야 할텐데 자칫 성령이 거하는 궁전이 아니라 악령이 거하는 사탄의 소굴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흠짓 놀라게 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도 분노하시면서 다시 성전 정화 작업을 우리 안에서 벌이셔야 하리라 생각된다.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집으로 대표되는 악령의 집이 될 수도 있기에 오히려 우리 스스로 주님께 이런 잡상인들을 쫓아내어 주시면서 정화시켜 주시도록 청해야 하지 않을까?
조용히
가슴 아프게 훌쩍 떠나버린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해 본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그리고 그 형제 안에 있는 정화되어야 할 마음 구석을 주님께서 깨끗이 청소해 주십사 청해 본다.
아름다운 성전
-강영구 신부님-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대에게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3,16-17)
성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대리석이나 금은보화가 아닙니다.
대리석으로 지어 금은으로 장식한 성전일지라도 강도들이 드나들면 ‘강도의 소굴’(마태21,13)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성전을 만듭니다.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돈과 재물, 지위와 명예, 지식과 학식 따위가 아닙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명품과 고급 화장품 그리고 귀금속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한 사람이 드나드는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 아닙니다.
맑고 밝은 가난한 마음,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돌로 지은 건물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드나드는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 됩니다.
예수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一明)
기도 없는 성전은 건물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념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324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274-337) 황제가 세웠고, 실베스터 1세 교황이 축성하여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성당으로 삼았다. 대성전에 인접한 라테라노 궁전에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역대 교황들이 거주하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그 후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 라는 명칭으로 베드로좌에 대한 전세계 교회의 존경과 일치의 표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세기부터는 세례자 요한의 대성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수세기를 걸쳐 화재, 지진, 약탈로 말미암아 훼손된 부분을 복구하였고,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가장 거룩한 구세주 예수"께 성전을 봉헌하고, 11월 9일을 봉헌축일로 확정하였다. 오늘날 교황은 성목요일 주님 만찬미사를 이곳 대성전에서 집전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한 성전이다. 우리고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낸다고 해서 대성전의 건축물을 놓고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성당을 중심으로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일치를 기원하고 기념하는 축일이다. 오늘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 신비체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축일인 셈이다. 이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에 관한 복음을 듣게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이 이를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던 간에 그 내용은 같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성전정화의 의미가 공생활 시작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의로(義怒)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 안에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選民)과 구원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상징은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商魂)에 가려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으리라.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역(使役)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이는 유다교를 말끔히 청소하기 위함이다. 구약(舊約)을 폐기하고 신약(新約)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무슨 권한으로 정화행위를 하느냐(18절)는 유다인들의 비난에 맞서,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임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세우시기 위하여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는 것은 유다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도 나중에 가서야 알게된다.
신약의 참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 바치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 신약의 성전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자신들의 몸이다. 물론 신앙의 공동체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성당 또한 하느님의 성전이다.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곳이다. 성전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곳이다. 기도가 없는 성당은 성전이기보다 하나의 건물이 되고 만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에서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쫓아내시면서,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라고 말씀하십니다.
공관복음에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1,13; 마르 11,17; 루카 19,46).
'채찍'으로 장사꾼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은(요한 2,15), '온유함'과는 거리가 먼, 대단히 과격하고 폭력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분노'로 보이기도 하는데,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이라고 기록했습니다(요한 2,17).
'열정'이라면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라고 생각됩니다.
죄인들에 대한 '화'가 아니라,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
당시에 성전에서 이루어지던 장사는, 하느님께 바칠 제물용 짐승을 팔거나 헌금용 돈을 환전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사람들의 예배를 도와주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사꾼들이 사제들과 결탁해서 엄청난 폭리를 취했고, 수익금을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장사꾼들과 사제들이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의 예배를 도와주기 위한 일, 즉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내세우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은 강도짓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사제들이나 장사꾼들은 자기들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성전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과격한 모습과 말씀은 그런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기 위한 충격 요법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도 아시는 일이고, 베드로 사도 자신도 아는 일이고, 다른 사도들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면서 꾸짖으신 것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그를 바로잡아 주시기 위한 충격 요법입니다.
성전의 사제들과 장사꾼들이 진짜로 강도가 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그들의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으려면 "너희는 강도들 같은 자들이다." 라고 꾸짖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한 장사꾼들과 그들과 결탁했던 사제들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명령은 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옛날의 유대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항상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과 다른가? 같은가?
모든 사람이 와서 기도하는 집인가? 강도들의 소굴인가?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가?
예수님께서는 항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은(종교는) 없애라는 명령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냥 이익 집단일 뿐입니다.
그러니 종교라는 간판을 내려야 합니다.
(만일에 기복신앙에 빠져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복만 빌고 있고, 그러면서 복을 받는 대가로 헌금을 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이고,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곳은 종교가 아니라 장터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새로운 성전을(종교를) 세우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명령이 됩니다.
지금 이 내용을 11월 8일의 복음 말씀이었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것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는데(마르 12,44), 사제들과 장사꾼들은 그런 과부들을 등쳐먹는다면(마르 12,40), 그리고 그런 일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그런 성전은 당연히 없애야 합니다.
성전은 누구나,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아무런 부담 없이 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신앙생활 자체가 부담스럽게 되거나,
공동체에서 소외당하거나, 차별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대우가 아니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성전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형제자매만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