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쳤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4,36-37.52-59
그 무렵 36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산으로 올라갔다.
52 그들은 백사십팔년 아홉째 달,
곧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 아침 일찍 일어나,
53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54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
55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
56 그들은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다.
57 또 성전 앞면을 금관과 방패로 장식하고 대문을 새로 만들었으며,
방에도 모두 문을 달았다. 58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59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온 회중은 해마다 그때가 돌아오면,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부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 축일로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호세 2,16.17ㄷㄹ.21-22)와 복음(마태 25,1-13)을 봉독할 수 있다.>

Jesus Cleanses the Temple
말씀의 초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단을 다시 봉헌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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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그 형제들은 적을 무찌르고 성소를 정화하여,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그날, 새로 만든 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단 봉헌을 경축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마카베오와 형제들이 독립 전쟁을 치른 뒤 이민족들에게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여드레 동안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 축제’)를 지내는데,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며 빛을 밝히는 성전 봉헌 축제는 신약 성경, 특히 요한 복음에서도 이따금 언급되는 축제입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가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으로(마르 11,15-19; 마태 21,12-13; 요한 2,14-16 참조),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 자체를 정화하시거나 부수어 없애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고치고자 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무엇이 참으로 올바른 예배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보여 주던 행동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언자들은 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예배 행태를 비판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두 구절, 곧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7 참조)와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예레 7,11 참조)는 말씀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성전에서 이루어졌던 예수님의 예언자적 비판은 그분을 죽음으로 내모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제물 판매로 많은 수입을 얻고 있던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바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참된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이제 더 이상 성전에서 환전하고 물건을 사서 하느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 곧 예수님이라는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제물로 봉헌하는 참된 제사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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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0년경,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안티오코스는 유다교를 없애려고 갖은 박해를 가했습니다. 희생 제사를 금지하고, 백성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며, 이에 따르지 않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성전마저도 그리스의 신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마카베오라 불리는 유다를 중심으로 항쟁한 끝에 기원전 165년 성전을 되찾고는, 제1독서에서 보듯이 성전 제단을 다시 봉헌하며 제물을 바칩니다. 유다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으려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요. 그런데도 세월과 함께 점점 세속적이고 정치적으로 흐르면서 신앙심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들이 순례자들의 절박한 처지를 악용하여 온갖 폭리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이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도록,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꾸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순례자들의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을 담보로 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전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미는 이유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분위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말씀을 더욱 깨닫도록 도와주려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성전이 순수하게 기도하는 집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 되어 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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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떤 도시를 보고 울어 본 일이 있으신지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유배 이전 구약 예언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수십 년 전부터, 예언자들은 거듭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하느님을 잊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면서 회개를 호소하였지만, 예루살렘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멸망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워지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고 성전도 다시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루카 19,43은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여기서 말하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멸망을 향해 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예수님께서는 우십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도 예언자에게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평화의 길을 찾지 못하는 도시들은 멸망을 향해 치닫게 될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그러한 도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하신다는 점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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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 가운데 어디를 가장 많이 찾으실까요? 하느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르시는 곳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당신을 간절하게 찾는 곳’이 아닐는지요? 성당 안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을 찾는 간절함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길거리일지라도 그곳에 하느님을 절실히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장사하는 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집에 대한 용도를 왜곡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집에서 소외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더럽혀진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이스라엘은 많은 희생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지는 상황 속에서 엘아자르라는 율법 학자가 희생당했고,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 그들을 따르는 유다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전을 정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장사치들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시고 날마다 가르치시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기로 작정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요컨대, 오늘 말씀에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려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시 성전에서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장사치들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성전에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으시는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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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로서 성전, 신자들의 모임인 영적 성전, 그리고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몸을 일컫는 성전입니다(1코린 6,19 참조).
오늘날 건물로서 성전은 그 중앙에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제대가 있고 성체를 모셔 두는 감실이 있습니다. 이곳은 신자들이 기도하고, 자신을 깨끗이 하며, 주님께 위로를 받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드러내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영적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신자들이 만나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친교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과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되는 거룩한 만남이 성전입니다(로마 12,5 참조).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궁전으로서 우리 몸 또한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우리 몸은 성체를 받아 모시고 말씀을 품고 사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19)
신앙인에게 기도하는 공간도, 만남도, 한 개인의 삶도, 모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다니는 성당도 거룩한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하고, 이웃과 만남도 아름다워야 하며, 우리 몸도 거룩하고 깨끗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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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합니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없애려 듭니다. 놀랄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역사 안에서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율법과 성전이 예수님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술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절했고, 술맛도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팔리지가 않았습니다. 그가 이웃집 노인에게 원인을 묻자, 노인이 물었습니다. “혹시 사나운 개를 키우는 것은 아닌가?” 그가 대답합니다. “무서운 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술이 잘 팔리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을까요?” 노인이 다시 답합니다. “누구나 개를 두려워하지. 술을 사러 갔는데, 가게 앞에 사나운 개가 버티고 있다면 쉽게 들어가겠나? 그 개가 원인일세.” 중국의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길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서운 판관이 되어 ‘겁을 주고’ 있습니다. 성전 역시 편안한 곳입니다. 누구나 가서 위안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무서운’ 조건들입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을 사람이 막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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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을 애지중지 여기면서 보는 스타일입니다. 보는 책에 북 커버를 씌우고, 책에 밑줄은 물론이고 어떤 낙서도 하지 않습니다. 책을 접어서 표시한다는 것도 제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부분에는 북 클립으로 표시를 하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책에 직접 하지 않고 독서 노트를 책 옆에 두고서 메모합니다. 그래서인지 다 읽은 책이지만 완전히 새 책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은 책이 너무 새 책 같다면서 “신부님, 정말로 읽은 것 맞아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사실 책에 자기 생각을 남겨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어느 한 부분에 밑줄이 그어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밑줄에 눈이 가게 되었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왜 밑줄을 그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별 내용 아닌 것에 그어 있는 밑줄 때문에 괜히 시간 낭비만 했습니다.
책에 밑줄이나 메모를 할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 역시 그 밑줄이나 메모를 보게 되면 그냥 넘어갈 부분도 다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밑줄이나 메모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의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남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때가 참으로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소리를 키워서 힘차게 주장하는 것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행동을 하는 것 역시 은연중에 남들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남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신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입니다. 성전이란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 행위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행동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더 소외되고 하느님의 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사람들이 이렇게 장사하고 또 비리를 저지르는 행위를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도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쳤던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장사하는 곳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범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심을 내세우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과거의 탓, 남의 탓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인생은 호전된다(웨인 다이어).
감각이 예민한 사람(소심하거나 내성적인)을 위한 Tip
일자 샌드의 ‘샌서티브’라는 책을 보면 감각이 예민한 사람을 위한 팁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눈감기: 사람이 받는 자극의 80%는 시각을 통한 자극입니다. 그래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에서 자극을 받습니다. 따라서 감각이 예민해질 때 눈을 감아야 합니다.
2. 헤드폰: 청각 자극도 예민하므로 헤드폰으로 소리를 제한하면 좋습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5분 정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소리를 제한해 보십시오.
3. 설거지: 자신을 재정비하는 무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주 일상적인 활동, 예컨대 설거지하며 머리를 비우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닙니다.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몸을 다스려야 합니다.
참된 의미의 성전이란? 예수님 발치 아래 앉아,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 기간 내나 지속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거지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행동은, 가난하지만 착한 백성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십년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싹 내려가는 유쾌·통쾌·상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릴대로 구려터진 노회한 율법학자들과 이미 삯꾼으로 전락한 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야말로 쌍날칼이요 맵디매운 고추가루였습니다.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조용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퍼져야할 성전을, 장사꾼들과 사기꾼들, 야바위꾼들의 호객소리가 넘쳐나는 장터로 훼손시켜놓았습니다.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수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사제는 당시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린의 의장이었으니, 그 권한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상행위를 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검은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빼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속화될데로 속화된 성전 주변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모든 안타까운 현실을 당신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는 과격함과 뜨거움으로 타락한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루카 복음 19장 46절)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초강력 펀치 앞에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반면에 구린 속을 들켜버린 적대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다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고민하기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는 그들의 사악한 계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그분 주위에 뺑 둘러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파악할수가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말씀에 충실한 백성들! 그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성전인 것입니다.
성전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의 영적 공동체를 먼저 건설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공동체 안에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와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건물은 그 후의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영적 성전 건립, 그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이 건립된다 할지라도, 그안에 주님의 사랑과 희생, 헌신과 나눔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아닙니다.
작고 허름해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구성원들이 그분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 받을 아름다운 성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상거래는 하느님 집에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찬미하는 집, 무한하신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집, 형제적 친교를 나누는 집이어야 마땅합니다.
효도하는 자녀가 행복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똥파리’(2008)의 주인공은 용역소에서 일하는 깡패입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가슴 한편엔 온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픔이 시리도록 서려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한한 증오심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칼에 찔린 여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볼 때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의 가족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과 함께 그의 인간성도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아버지만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14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한없이 두들겨 팹니다. 그렇다고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 아버지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마음 안에서 그런 아버지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미워할 수 있는 가족이라도 있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김희아씨는 얼굴에 큰 모반이 있다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다 깎아내어 얼굴 모양까지 변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녀를 보면 사랑은 노력하면 발견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래도 자신을 뱃속에서 키워주시고 아픔을 감수하며 낳아주시고 다른 곳이 아닌 고아원에 버려주신 것을 감사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그런 감사할 거리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면 그녀는 똥파리의 주인공처럼 영혼 없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면 부모님은 나의 생명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 피 흘림을 묵상하면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도 감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모에게서 감사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증오하여 자신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행복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 감사를 찾아내고 못 찾아내고는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묵상하거나 그러기를 원치 않는 두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 지상의 부모가 자녀에게 생명을 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상의 부모는 그 생명을 전해주어 창조에 협조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어떠한 감정을 회복해야 할까요? ‘감사’입니다. 감사는 김희아씨처럼 노력해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감사 없이 불평만 하며 영혼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 당신에게 감사할 위대한 표징을 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피 흘림을 묵상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내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당신을 묵상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감사가 솟지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서 그 감사를 이끌어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이들이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마음에 감사가 솟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감사가 솟아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 자녀는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원치 않은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자신들을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느님 사랑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려 하지 않는 강도들의 소굴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사랑이 기도하는 집인 사람들에게 감사가 솟구치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예수님의 희생을 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감사하여 그분 뜻대로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는 기도하는 집이 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도들의 소굴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닌 기도하는 집이 된 이들만을 당신 가족으로 여겨주십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이 오시면 찾아가는 곳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도시를 좋아하면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구경을 하러 갑니다. 새로이 명소로 등장한 허드슨 야드의 ‘베셀(Vessel)’을 봅니다. 기하학적으로 참 아름다운 구조물입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도시의 전망도 봅니다. 성 패트릭 성당에서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배를 타고 강에서 시내를 봅니다. 저녁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봅니다. 뉴욕 시민들이 마음의 고향처럼 여기는 ‘센트럴파크’에서 도심 속의 숲을 걷습니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는데 손님이 오시니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면 차를 타고 근처의 ‘베어마운틴’을 갑니다. 아름다운 호수가 반겨줍니다.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등산하고 내려올 수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갑니다. 가는 길이 참 좋아서 조용히 묵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돌아올 때는 7개의 호수가 있는 길로 방향을 잡습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못내 아쉬워 가지에 붙어있는 늦은 단풍을 봅니다. 물가에 비추는 여울은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는데 손님이 오시니 때아닌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사과 몇 쪽과 커피는 산행의 즐거움을 더하는 덤입니다.
예전에 부르던 성가가 생각났습니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온 세상 만민이여 주님을 찬양하라.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 받들어라. 해와 달과 별들이여 주를 찬양하라. 그분이 영원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눈과 비와 우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엄위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바닷속의 고기들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전능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높은 산과 언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오묘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고, 자비하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중요한 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픈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배고픈 친구를 보면 나눠주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나보다 예쁜 친구를 보면 샘이 나기도 하고,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뺏고 싶기도 해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와 나쁜 마음을 주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자주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기에 이긴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뉴욕의 문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하면 아름다운 자연의 속삭임도 듣지 못합니다. 2019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곧 대림 시기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셨는지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성전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을 만나고
누구는 우상을 만난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을 드러내고
누구는 하느님을 밀쳐낸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께 무릎 꿇고
누구는 하느님을 무릎 꿇린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누구는 자신을 떠벌린다
성전에서
누구는 기도를 하고
누구는 혼잣말을 한다
성전에서
누구는 말없이 낮추고
누구는 요란하게 높인다
성전에서
누구는 한없이 비우고
누구는 한껏 채운다
성전에서
누구는 기꺼이 섬기고
누구는 섬김 받으려 한다
성전에서
누구는 모두를 살리고
누구는 자신만 살린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이 되고
누구는 우상이 된다.
인류사속의 위인감 인물들을 모집합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가톨릭 신앙인들의 몸은 예수님이 사시는 성전이며 예수님의 집입니다.
가톨릭 신앙인은 예수님의 성전인 자기 인생 예수님 뜻에 맞게 삽니다.
가톨릭 신앙인은 목숨과 자유와 존엄을 하느님 말씀따라 사는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가톨릭 신앙인들을 없애려고 공작들을 많이 합니다.
권력 재물 욕심의 감정들이 항상 세상 물질원리대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오거나 허무한 세상 인생무상을 느낄 때면 후회하면서도.
결단이라는 믿음의 칼이 필요하기에 예수님은 칼을 주러 오셨다 하셨죠.
순교하면서까지 하늘법 지켜온 인류사속의 위인감 인물들을 모집합니다.
하느님의 집
곽승룡 비오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어디서 기도할까? 교회일까? 또는 우리가 머무는 곳일까?
그러나 우리가 어디서든지 기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교회에 자주 가기 때문일까? 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묻곤 하였다.
예수께서 승천 하신 후, 사도들은 성전에 가서 계속 기도하곤 했다. 로마군이 점령해 성전이 파괴가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든 장소에서 하느님을 접촉하며 찾도록 초대된 표시로서 성전을 해석하였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영성가들 안에서 종종 회자되던 생각이다.
요한 금구 성인은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장소들을 선호하지 않다고, 요한 금구 성인이 기록하듯이, 하느님은 또한 우리로부터 오직 한 가지를 바라신다. 곧 이는 열렬하고 겸손한 영혼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의 작품에서 꽤 이런 본문들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로 반론을 펴기 때문이다. 다음 페이지에서 금구성인은 말한다.
집에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교회에서처럼 그렇게 똑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 역시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더욱 적합한 장소가 성전이라도... 어디서든지 기도해야한다.
우리에게 주님과 성인들과 함께 천사들과 같이 기도를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더욱 적합하며, 또한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이것이 하느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성전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가 함께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는 공간인 성당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우리의 몸도 주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거룩한 각자의 성전, 곧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같은 구조의 집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누가 쓰는가에 따라 집안이 완전히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집에 주인이 누군가에 따라 나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진정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면 나의 주인은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실 때 나는 진정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주인이 주님이 아니라 주님 이외의 다른 것이 될 때 나는 성전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욕심들의 공간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분들은 성당에 봉사하러 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열일 제치고 성당에 와서 봉사활동 하시는 분들을 뵈면 반갑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가운 일은 그러다가 어떤 분들은 일을 하다가 잘 안 풀리거나, 함께 일하시는 분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거나, 임기 등의 이유로 그만두게 되면 성당마저도 안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내 신앙을 더욱더 고양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지 나의 인격을 펼치는 활동을 하러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활동을 할 때에는 그 활동에 따른 은총이 주어져 어려운 것을 모르지만,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활동과 그 직책에서 오는 은총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을 인간의 눈으로 보게 되고, 가끔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공헌하게 되어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기 위해서나 성전세를 낼 수 있도록 환전해주며 장사하시는 분들도 성전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이었을 텐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쫓아내십니다. 아마도 그들이 신앙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상업으로만 접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보다 깊고 그윽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활동할 때 매일 미사와 더 많은 기도와 신심생활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높은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공동번역 신약성서에서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루카 12,48)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에만 기대어 자신의 신심과 신앙생활의 매일을 허비하지 말고, 주님의 은총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신심과 신앙을 함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봉사활동을 중단하거나 더 이상 하려고 하지 않거나, 성당을 더 이상 나오지 않으려고 하거나, 신앙을 잃는 등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나날이 더욱더 주님을 향한 갈망이 커지고,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더욱더 형제자매들에게 봉사하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 땅도 성전정화 중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쁜 짓을 하는 도둑이나 악한 따위의 무리가 활동의 본거지로 삼고 있는 곳울 ‘소굴’이라 한다. 또한 폭행이나 협박 따위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둑. 또는 그런 행위를 ‘강도’라 한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수석사제, 율법학자, 백성의 원로들이 강도들이다. 그들이 머물 성전은 소굴이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신다. 그들은 자기의 정체가 세상에 드러날까봐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없앨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루카19,45-48참조)
‘강도의 소굴’은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진화하고 있다. 강도들은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 보지만 죄상은 더욱 낫낫이 드러날 것이다. 강도는 진리를 없애려고 발악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진리는 더 잘 드러나게 되어있다. 평화는 분열을 일으키지만 언젠가는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제대로 자리 잡는 날 우리의 성전은 평화가 올 것이다.
주님의 성전聖殿, -끊임없는 정화淨化와 성화聖化-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 묵상 중 문득 떠오른 아름다운 시편 135장이었습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에 성서의 시편들보다 더 좋은 시들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로 바치는 생명과 빛, 희망이 생동하는 시편들이 우리 모두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로 살게 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들하라
주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아, 우리 주님 궁 뜰에 시립한 자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
하느님 찬미 찬양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양이 울려 퍼지는 주님의 성전, 기도의 집입니다. 우리 삶의 가시적 중심인 주님의 집, 성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집, 성전에서 오늘 우리는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3세기 중엽 로마 제국시대, 정말 꽃다운 나이에 하느님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으로 순교한 동정 성녀 체칠리아입니다. 체칠리아는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칠리아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참행복을 누리는 성인성녀들입니다. 천사들은 물론 성인성녀들과 함께 이 거룩한 주님의 집, 성전에서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순교자 감사송 내용 그대로입니다.
“복된 순교자 체칠리아는 주님을 현양하려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피를 흘려 주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었나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을 증언할 강한 힘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고해인생을 찬미와 감사의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이 거룩한 주님의 집, 성전에서 거행되는 아름다운 미사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집 성전이 성전일 수 있음은 매일 거룩한 미사가 봉헌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성전 사랑으로, 미사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도대체 미사를 통한 하느님 맛이 없다면 이 삭막한 광야인생 무슨 맛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오늘 마카오베오기 상권에서 유다와 그 형제들이 적을 무찌른후 우선 착수한 것도 이민족들에게 더럽혀진 가시적 삶의 중심인 성전의 정화와 봉헌이었습니다. 온 백성은 자기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 친교제물, 감사제물을 드렸다 합니다. 바로 오늘날까지 유다인들이 지내는 하누카 축제의 기원입니다.
이런 거룩한 성전이,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와 같은 주님의 성전이 속화俗化되는 것보다 결정적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영혼의 고향, 영혼의 쉼터 같은 주님의 성전입니다. 하여 주님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여기 주님의 집 수도원 성전을 찾는 무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너무나 자연스런 사건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을 정화하신후 주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성전에서의 매일 미사를 통해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 은총이, 생명과 빛의 말씀 은총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은 물론 우리 각자의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이래야 우리 모두,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집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자작 좌우명 시 넷째 연이 이런 진리를 잘 표현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바로 끊임없이 거행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은총이, 기도와 말씀의 은총이 주님의 성전인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하여 우리 모두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성전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성전인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예수님과 한 집에'(루카 19장 45~4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
문을 열면 정돈되고 훈훈한 사랑이 느껴지는 집이 있고 어느 집은 어수선하고 냉기가 흐릅니다.
기도하는 집은 차분하면서도 환합니다.
나의 집은 어떤가요?
나의 맘은 어떤가요?
늘 정돈된 상태로 사는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있을 자리에 놓는 움직임이 기도화 되면 굳이 애써 힘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몸기도가 됩니다.
기도가 몸에 배이면 일상의 순간들이 기도로 가득차고 편안해집니다.
'예수님과 한 집에 사시죠? 당신에게서 그분 향기가~^^ 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함승수 신부님
‘워커홀릭’(workaholic)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work)과 ‘중독자’(holic)의 합성어로 미국의 경제학자 W. 오츠가 그의 저서 [워커홀릭]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오츠는 ‘가정이나 다른 것보다 일이 우선이어서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여 사는 사람’을 지칭하여 ‘워커홀릭’이라고 하는데, 이 ‘워커홀릭’들은 주일을 맞이해서 몇 시간 동안 낮잠을 곤히 자고 나면 괜히 기분이 찜찜해진다고 합니다. 일을 하기에도 모자랄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면 그런 ‘부실한 상태’로 월요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에 큰 걱정과 두려움에 빠진다고 합니다.
월요일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월요일에 일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증상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월요병이 단순한 ‘심리적 증상’이라면, ‘워커홀릭’들에게는 심하면 죽음에 이를수도 있는 ‘중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주일동안 시간을 허비했다는데서 오는 후회와 자괴감, 그러니 월요일에라도 부족했던 그 부분을 다 채워야 한다는 조급함이 더해져 평소보다 더 무리를 하다보니 심장병같은 급성질환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꽤 많은 것입니다.
이렇듯 일에만 파묻혀 사는 사람은 행복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물질적인 부와 높은 지위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역시 행복해지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 진정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 자아를 성장시키고 실현시켜주는 정말 중요한 것들을 채울 ‘빈 공간’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질책하십니다. 성전상인들은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기도의 집’, 즉 조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분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성전’을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하고 각종 부정과 비리가 판치는 세속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 역시 각자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그분과 친교를 나누며 그분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나의 마음을 욕심과 집착으로 가득 채우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공간을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나의 삶은 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강도’의 모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전은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다고 해서, 안과 밖을 아름답게 치장했다고 해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들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답게 만들어 주지도 않습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떨고, 여름에는 푹푹 찌는 비닐하우스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신자들이 모여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바친다면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며,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루카 19, 45-48)
김성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물과 성전세를 바쳐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성전 기득권 계층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였고, 이를 본 예수님은 큰 화를 내십니다.
당시 성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던 범죄는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파는 것과 돈을 바꾸는 환전과 관련되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제물을 바쳐야했고 이 제물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으며, 제사장이 적격 여부를 심사했습니다. 비록 흠 없는 제물이라도 멀리서 가져온 경우 제사장들은 쉽게 트집을 잡아 불합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성전에서 파는 제물은 쉽게 합격 받았기 때문에 선호되었고, 제사장 무리들은 이를 이용하여 몇 배의 폭리를 취해서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 또한 당시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던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매년 성전세 반세겔을 바쳐야 했습니다. 1세겔은 노동자 4일치의 품삯 그러니까 4데나리온으로 지금 환율로는 약 40만원, 성전세 반세겔이니 약 20만원이라는 높은 액수였고, 주화에 이방 군주나 우상의 그림이 없는 즉 로마 동전이 아니라 이스라엘 동전으로 순도 높은 은 주화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유월절 20일 전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환전소를 설치하고, 높은 환전 수수료를 챙겼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전 정화 보도는 모든 복음서에 보도되고 있고,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면서 주님께서는 이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제사장들과 관련자들을 꾸짖습니다.
성전이 어떠한 곳이어야 하는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기도하는 집’ 즉 하느님과 통교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얼마 전 라테나노 성전 축일에 성전 정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집이 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하신 일은 진로변경, 곧 방향전환이었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삶 안에서 종종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성령의 불이 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각자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최후의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 주님께서는 3일 밖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빛을 열어 주십니다. 악으로 상처 입었다 해도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에게서 영원히 분리된 형벌에 처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신비스럽지만 실제적 방식으로 우리 마음 안에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빛, 곧 진리, 선,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을 열어 주십니다. 가끔은 불신이나 적대감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불신과 적대감이 여러분을 가로막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당신의 아드님을 부활시키시기 위해 3일 밖에 필요하지 않다는 확신을 지키십시오."
교황님의 말씀처럼 성전 정화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 마음의 정화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바로 기도하는 집. 기도해야 하는 우리가 먼저 행해야 할 것은 주님과의 통교, 소통을 위하여 우리 고개를 돌려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지향이 이익과 욕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 즉 진리, 선,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성전인 우리 교회가 정말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또 내 마음이 주님께로 정향되도록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내가 성전을 찾는 이유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어제 오래 알고지내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흉허물없이 모든 얘기를 할 수 있는 분들인데 얘기를 하다보니 그분들 본당에 대한 얘기도 나왔지요.
본당을 짓는 과정에서 두 파로 갈렸다는 얘기인데 성당건축을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분들의 입김이 작용하여 신부님을 따르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갈렸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당에 왜 오나?
돈벌러 오나?
싸우러 오나?
주장질 하러 오나?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과 오늘 주님의 성전정화 얘기를 연관지으면서 다시 한 번 왜 성당에 오는지, 우리의 성당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정식으로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고 하느님 백성이 모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은 본당신부 중심이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고 신자중심이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며 그야말로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얘기를 왜 이렇게 하는가요?
그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실로 신부는 신부대로 자기가 주장이 되어 주장질을 하고,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신부가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고 반대하며, 그러는 가운데 신자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리고 어느새 하느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성당에서 실종이 되셨습니다.
이는 마치 형제들이 명절에 고향을 찾아 부모님 모셔놓고 식사들 하다
부모님은 완전히 제켜놓고 자기들끼리 재산 문제로 다투거나 정치 문제로 다투고 또 아이들 문제로 신경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에게 왔으면 부모님 말씀을 듣고 부모님 말씀에 대해 형제들이 서로 의논을 하고 나눔을 하는 것이 정상이듯 하느님 집에 왔으면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같이 찾으며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같이 실천할지 그것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성당에서 같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는 실패하고 혼자 하느님을 만나거나 같이 만날 경우에는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만나서 끼리끼리 좋아하거나 끼리끼리 싸웁니다.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것은 성당이 하느님 안에서 친교를 맺는 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교장이나 카페가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빼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은 성당이 사교장이나 카페만도 못한 격투기장이나 정치 싸움판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나누는 것은 성당이 거래를 하는 거래소나 상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성당에서 싸웁니까?
싸울 곳이 없어서 성당에 와서 싸우는 겁니까?
세상에서 내내 돈벌고 거래를 했는데 성당에 와서도 거래를 합니까?
밖에서는 주장질을 못하니까 성당에 와서라도 주장질을 해야겠다고, 그래서 성당에 오는 것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며 정화를 하시는데 우리도 성전 정화를 한다면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성전을 찾는 우리 개인의 더러운 의도들을 정화해야겠고 그런 다음에 나와 하느님이 진실하게 만나는 기도를 하고 그런 다음에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성전이 되게해야겠습니다.
주님께 멋진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Ps 32, sermo 1,7-8: CCL 38,253-254)
“비파로 주님께 감사 드리며, 십현금 맞추어 읊조리어라. 새로운 노래 불러 찬미하여라.” 새 노래를 알게 되었으니 낡은 것을 벗어 버리십시오. 새 사람, 새 계약, 새 노래. 새 노래는 낡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노래는 새 사람들만 즉 은총을 통해 낡은 것에서 새로워져 하늘 나라의 새 계약에 속하는 사람들만 배웁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은 이 하늘 나라를 갈망하고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입으로써가 아니라 생활로 부르도록 합시다.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멋진 가락을 읊으십시오.”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어떻게 하느님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부르십시오. 그러나 음에 맞지 않게 부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당신 귀에 거슬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형제들이여, 멋진 가락을 읊으십시오. 누가 당신보고 음악 전문가 앞에서 그이 마음에 들도록 노래하라고 한다면 음악 기교에 대해 별 준비가 없는 당신은 그 전문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노래할 때 벌벌 떨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음악 전문가는 잘 인식하고 비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음악 평론가이시고 만사를 일일이 살펴보시며 만사를 잘 들으시는 하느님 앞에 가서 훌륭히 노래부를 자신감을 지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도 완전한, 귀에 거슬리지 않는 멋진 노래를 부를 기교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다음 노래의 기교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가사 즉 당신의 내적인 정감을 알려 주는 듯한 그런 말들을 찾는 데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있어 훌륭히 노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을 언어로써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추수할 때나 포도를 거둘 때나 어떤 일을 열심히 할 때 노래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즐거움을 어떤 가사로써 표현하지만, 그 다음에는 감흥이 고조되면 말로써는 그 즐거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사 없는 가락으로 감흥을 털어 버립니다. 이것은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기쁨의 노랫가락은 마음이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출하게 하는 가락입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께가 아니라면 이 기쁨의 노랫가락은 누구에게 더 마땅히 읊을 수 있겠습니까? 실상 당신이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은 표현 불가능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말로써 표현은 못해도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면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때 마음은 말의 도움 없이 기쁨으로 펼쳐져 그 기쁨의 광대함은 말의 한계를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멋진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성전을 정화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쫓겨난 장사꾼들이 아니라,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입니다.
이것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바로 ‘강도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장사꾼들은 그 강도들의 하수인들이었을 뿐입니다.)
뒤의 20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일’, 그것이 곧 강도짓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법률 상담 등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냈습니다.
그것은 서민들을 착취하는 일이었고, 사실상 강도짓이었습니다.
사제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할 제물용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고, 그 수익금을 자기들이 차지했습니다.
하느님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채운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 라는 자들도 사제들, 율법학자들과 한통속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일 수가 없으니 허물어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전 건물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인들의 죄가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종교를 개혁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돈을 섬기는 타락한 종교는 허물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참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하는 일의 일차 책임은 사제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구약성경 미카서에 나오는 다음 예언에 연결됩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돈에 팔려 재판을 하고, 사제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라는 것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 하는구나! 시온이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 줄 알아라(미카 3,9-12.공동번역).”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성전이라고 해도, 그것이 종교라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옛날 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미카서의 예언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언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야 합니다.
(중세 때에 심각하게 타락하고 부패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모든 악의 뿌리인 돈을 밝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죄를 짓는 일이 되지만, 더 큰 죄의 원인이 됩니다.
만일에 교회가, 또는 사제가 돈을 밝히고, 돈에 매이면 큰 불행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 구원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걸림돌로 추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3).” 라고 지시하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열두 사도만 실천하면 되는 지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하는 지시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일은 ‘돈의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돈이 없을 때에는 조금 불편하고 힘든 생활을 했어도 위기 상황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심각한 위기 상황은 항상 돈이 많았을 때에 겪었습니다.
<돈과 재물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할 때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라고 말하면서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도 아니고,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말씀들도 아닙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생명의 말씀’입니다(요한 6,68).>
강도들의 소굴
김효석 요셉 신부님
‘강도들의 소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일단 강도는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사람이니, 그 소굴에는 남의 물건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은 채 혼돈과 무질서 자체일 거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강도에게는 요긴한 물건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넘쳐납니다. 이처럼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여기거나,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가지려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강도들의 소굴’입니다. 그곳에는 옳고 그름의 도덕적 가치가 없고, 폭력성의 정도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공포의 질서만이 남습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심은 사라지고, 두려움과 불안만이 강도들을 지배합니다. 반면 ‘기도의 집’은 어떻습니까? ‘기도의 집’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 은총의 힘으로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상을 소중히 살아가고 있음을 의식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여, 내가 누구에게 상처를 준 일은 없는지 돌아보고,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립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집에는 겸손과 배려가 넘쳐나고, 평화와 조화로움이 지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머무실 곳이, ‘강도들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의 집’이라고 하십니다.
틀을 깨야 새 삶이 온다. <루카 19, 45-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은 틀을 깨는 행위로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고 상을 뒤집어엎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하십니다. 모든 생명을 틀을 깨야만 살릴 수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틀을 깨지 않으면 그 안에서 죽고 말지만 스스로 주둥이로 껍데기 깨고 세상에 나와 삐악삐악 소리 지르며 모이를 먹기 시작하면서 생명을 살고 자랍니다. 모든 씨앗은 땅을 뚫고 나오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고, 줄기가 자라지 않고, 잎이 나지 못합니다. 땅이란 틀을 깨야 합니다. 사람도 어머니 배를 뚫고 나오지 못하면 일생 그 안에서 살 수 없습니다. 이같이 틀을 깨는 것이 새로운 삶, 희망의 삶을 살고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 모두가 새 땅, 새 하늘을 노래하며 보람찬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하느님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역사상 조선왕조 오백 년은 참으로 암울한 세상이었습니다. 10%의 양반이 90%의 종과 노예를 부리며 왕의 절대적 권력 앞에 모든 이는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반대의 말을 하면 역적이고 찬성의 말을 하면 충성이다.” 하면서 사회적 발전은 없고 봉건적 사회를 이루다가 이 틀을 깨시려고 하느님은 시련을 주셨습니다. 36년, 저도 나서 12살까지 그 밑에서 신음했지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니 한국의 틀을 깨는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노예로 잡혀가 70년의 노예 생활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었듯이 우리도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해방 후 이런 소리가 있었습니다.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고, 일본은 다시 일어난다.“ 그 결과 한쪽은 소련에 한쪽은 미국에 의해 우왕좌왕하다가 이 모양이 되어 70년이 지나도 “나는 우다. 나는 좌다.”하고 싸움질을 하니 나라는 두 쪽일 뿐만 아니라 국민이 두 쪽이 되고, 교회까지 두 쪽으로 갈라져 싸우니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죽어가고 있고 소련에 속아 빈곤하게 사는 사회주의 공산국가가 될까 모두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틀을 깨는 것, 좌도 우도 아니고 참으로 개방적이고 발전적이고 모두가 잘사는 나라로 어떤 제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는 나라에 살려면 미움, 의심, 반대, 복수심 등의 일치에 반대되는 틀에서 벗어나고 틀이 없는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저는 묵상과 반성의 기도 시간 “왜”라는 질문을 아무리 해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게 살려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너 벌 주고, 너 죽이고, 너의 폭망을 바라며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모든 틀을 깨버리고 새 나라 새 삶을 살기 바랍니다. 나는 부르짖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아멘. 아멘.”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종교가 하나 되어 아버지를 찾아 이 고통의 십자가에서 부활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무덤을 깨고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의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미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갈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궁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 독서의 내용들은 성전 정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루카 19,45).
성전 정화 대목은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루카 19,28-40),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신 내용(루카 19,41-44) 뒤에 이어집니다. 우리는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그분이 이 성전의 주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하셨음을 감지합니다. "쫓아내는" 행위는 그저 잠시 들른 객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건 주인으로서의 권한 행사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성전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만큼 성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분 자신이 곧 성전이시니까요.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 머무르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일치하는 장소입니다.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모든 존재도 성전임을 우리는 예수님의 계시(요한 2,19-21 참조)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1코린 3,16 참조)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루카 19,46).
예수님께서 율법과 거룩함을 빙자하여 기득권층의 이익과 영리를 창출하는 통로로 전락해버린 성전의 모습을 이 한마디로 표현하십니다. 안타깝지만 정곡을 꿰찌르고 계시지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기도의 집"과 "강도들의 소굴"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섬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예식과 제물과 직위와 계급이 발생하고, 인간들이 너무 똑똑한 탓에 남용과 오용이 교묘히 횡행하다가 또 다른 제도로 고착되면서 이익집단의 사유화를 낳지요. 그러니 결국 "강도들의 소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정면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시커먼 속마음을 들켜버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몹시 분노합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니 약점이 제대로 건드려진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꿋꿋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뇌관을 건드린 탓에 당신께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 성전에서 날마다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십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루카 19,48).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권력에서도 소외된 소박한 민중이 예수님 곁을 지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흡수하는 스폰지처럼 온 존재로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을 먹는 듯, 그들은 귀로 말씀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혼이 배부르고 피어나고 생기를 되찾는 흡족한 시간입니다.
제1독서는 유다 마카베오를 선두로 한 마타티아스의 아들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교도들에게 더럽혀진 성전을 탈환한 뒤, 정화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성전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고 자긍심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이를 잘 아는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이 혐오하는 방식으로 부정하게 성전을 능멸해 그들의 기를 꺾는 동시에 힘의 구심점을 파괴했지요. 그러니 적은 수의 군대로 온전히 하느님 힘에만 의지해 되찾은 성소는 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보람을 안깁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1마카 4,55).
하느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거기에 머무르시다가, 모욕당하고 쫓겨나셨던 치욕이 말끔히 씻겨집니다. 백성은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며 새 희망으로 가득찹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단 봉헌 축일을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1마카 4,59)고 합니다.
하느님과 예배자의 관계성이 예식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형식과 의미가 적절히 잘 조화된 예식은 그래서 더 아름답고 진실한 감동을 남기지요. 주님과의 관계가 뜨겁고 친밀하고 열렬할수록 "주님" 하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하나에도 둘 사이에서 오가는 온갖 사랑의 자취가 담깁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요한 4,23 참조)하는 이는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의무란 사랑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하느님과 나누는 내적 관계와는 무관하게 의무와 규정에 꽂혀 그분과 건조하고 미지근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 주머니에만 관심을 갖는 이들은 형식과 제도, 예식을 치장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자기와 더 깊이 만나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의 갈증과 허기를 물질과 예식으로 보상하려 들지요. 그러다보니 성전과 예식이 화려하고 장황해져도 진정한 울림이 없습니다. 관계성 안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이 결여된 탓일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 머무르는 중에 마음과 영혼에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오갔습니다. 그래서 문득 멀리 갔다 싶으면 다시 되들아오길 반복하며 말씀하시는 주님 마음을 들으려 애써야 했지요. 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완벽히 깨끗하게 되면 그제야 사랑해 주시겠다는 결벽증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된 본연의 목적성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디 하느님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모습을 받은 존재니까요.
이 정화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일으키시는 은총입니다. 성전이 이미 일부분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면 내쫓고 뒤엎는 이 거룩한 손길이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지요. 완벽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기도의 집으로 가꾸며 지켜나가는 중이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나를 들쑤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께서 그것을 어떻게 쓸어내시는지 유심히 바라봅시다. 거기에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정화의 포인트가 숨겨 있을 테니까요. 내적 외적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공동체와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성전을 찾는 이유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어제 오래 알고지내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흉허물없이 모든 얘기를 할 수 있는 분들인데 얘기를 하다보니 그분들 본당에 대한 얘기도 나왔지요.
본당을 짓는 과정에서 두 파로 갈렸다는 얘기인데 성당건축을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분들의 입김이 작용하여 신부님을 따르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갈렸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당에 왜 오나?
돈벌러 오나?
싸우러 오나?
주장질 하러 오나?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과 오늘 주님의 성전정화 얘기를 연관지으면서 다시 한 번 왜 성당에 오는지, 우리의 성당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정식으로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고 하느님 백성이 모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은 본당신부 중심이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고 신자중심이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며 그야말로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얘기를 왜 이렇게 하는가요?
그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실로 신부는 신부대로 자기가 주장이 되어 주장질을 하고,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신부가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고 반대하며, 그러는 가운데 신자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리고 어느새 하느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성당에서 실종이 되셨습니다.
이는 마치 형제들이 명절에 고향을 찾아 부모님 모셔놓고 식사들 하다 부모님은 완전히 제켜놓고 자기들끼리 재산 문제로 다투거나 정치 문제로 다투고 또 아이들 문제로 신경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에게 왔으면 부모님 말씀을 듣고 부모님 말씀에 대해 형제들이 서로 의논을 하고 나눔을 하는 것이 정상이듯 하느님 집에 왔으면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같이 찾으며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같이 실천할지 그것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성당에서 같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는 실패하고 혼자 하느님을 만나거나 같이 만날 경우에는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만나서 끼리끼리 좋아하거나 끼리끼리 싸웁니다.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것은 성당이 하느님 안에서 친교를 맺는 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교장이나 카페가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빼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은 성당이 사교장이나 카페만도 못한 격투기장이나 정치 싸움판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나누는 것은 성당이 거래를 하는 거래소나 상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성당에서 싸웁니까?
싸울 곳이 없어서 성당에 와서 싸우는 겁니까?
세상에서 내내 돈벌고 거래를 했는데 성당에 와서도 거래를 합니까?
밖에서는 주장질을 못하니까 성당에 와서라도 주장질을 해야겠다고, 그래서 성당에 오는 것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며 정화를 하시는데 우리도 성전 정화를 한다면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성전을 찾는 우리 개인의 더러운 의도들을 정화해야겠고 그런 다음에 나와 하느님이 진실하게 만나는 기도를 하고 그런 다음에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성전이 되게해야겠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기도의 집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움이 있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뜨거움의
거처에서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기도가
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만남으로 잃어버린
기도의 집을 드디어
찾게 됩니다.
성녀 체칠리아는
최선을 다하여
기도를 끌어안습니다.
서로에게 스며드는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집에는
화해의 신비가
일어납니다.
모든 여정에
함께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집을
향하는 성녀
체칠리아의 삶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충실한 기도의
여정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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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라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저의 새벽 묵상 글을 읽어왔다고 하면서 이렇게 직접 보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신부님은 저의 멘토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멘토라고 하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 하나 생각나더군요.
‘아버지와 스승은 없고 멘토만 넘쳐난다.’
솔직히 누군가에게 큰 모범이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할 뿐인 것이지요. 사실 우리의 교육이 얼마나 깁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사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멘토를 찾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멘토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럴 생각은 별로 없고 멘토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렵게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를 그만두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서 병도 고쳐주고 더불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해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을 멘토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만 할 뿐 정작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태반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멘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제도 아닌데, 당시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권한이 있다고 저런 행동을 하는가 라는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성전에 있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힘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 스스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할 뿐 그렇게 살지 못했지요. 그래서 뒤에 숨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앨 것인가를 궁리만 할 뿐입니다.
내 자신의 말에 힘이 있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만 그렇게 살라고 책임을 떠넘겨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이 다른 이들의 멘토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듯이, 내 자신을 정화하는 오늘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정화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의 명언: 작은 경첩으로 큰 문이 움직이듯, 한 사람의 희생으로 공동체에 생명의 불이 지펴진다(래리 크랩).
관상은 심상만 못하고 심상은 덕상만 못하다(‘좋은 글’ 중에서)
相好不如身好(상호불여신호) 얼굴 좋은 것이 몸 건강한 것만 못하고
身好不如心好(신호불여심호) 몸 건강한 것이 마음 착한 것만 못하고
心好不如德好(심호불여덕) 마음 착한 것이 덕성 훌륭한 것만 못하다
위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마의선인’이 쓴 마의상서에 나오는 유명한 내용입니다.
‘마의선인’이 하루는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나무를 하러 가는 머슴의 관상을 보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의선인’은 머슴에게 “얼마 안가서 죽을 것 같으니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머슴은 그 말을 듣고 낙심하여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할 때 산 계곡물에 떠내려 오는 나무껍질 속에서 수많은 개미떼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머슴은 자신의 신세와 같은 개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나무껍질을 물에서 건져 개미떼들을 모두 살려 주었습니다.
며칠 후 마의선인은 그 머슴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부귀영화를 누릴 관상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마의선인은 그 젊은 머슴이 개미를 구해준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마의상서 마지막 장에 남긴 말이 바로 위의 글귀입니다.
마음이 곱고 심성이 착하고 남에게 배려하고 베풀어 덕성을 쌓으면 사람의 관상은 은은하게 편안하게 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하게 살면 해맑은 얼굴로 꽃피고 세상을 불편하게 살면 어두운 얼굴로 그늘이 집니다. 마음의 거울이 바로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주일 연기 되었던 수학능력 시험이 끝났습니다. 최선을 다했던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졌던 학생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진으로 인한 재난의 현장에서 시험을 보아야 했던 학생들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56명의 서품 대상자들의 면담이 끝났습니다. 23명은 부제품을 받을 예정이고, 33명은 사제품을 받을 예정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웃의 아픔과 함께하며, 진리를 위해서 헌신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면담을 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신학생을 만날 수 있었고, 내적인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려는 신학생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원에서 봉사하던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반팔만 입은 노숙자가 옷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친구는 옷을 주려고 하는데, 다른 봉사자가 말렸다고 합니다. “저 사람은 전에도 그랬습니다. 옷을 주면 팔아서 술을 마실 것입니다.” 친구는 봉사자의 말을 들으면서 망설였지만 잠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노숙자에게 주었습니다. 며칠 후 노숙자는 친구를 찾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선한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논문을 ‘아빠, 아버지’라는 주님의 호칭에 대해서 준비했던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부모님께서 모두 좋은 대학을 나오셨고, 능력이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평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채울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점점 말이 없어지고, 자신감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알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해도, 죄를 지었어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대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또 다른 재능이 있는 것도 알았고, 부모님과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56명 모두 거룩한 마음을 지닌 주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분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지친 삶에서 위로를 얻는다면, 이분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이분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성전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성전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 욕심과 분노가 있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주님께서 원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성전 정화, -끊임없이 정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주님의 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수도자들은 물론이요 믿는 이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계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요, '살기위해'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 존재자체가 너무나 자명한 살아계신 하느님 증명입니다.
하느님은 삶의 중심이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하느님의 집인 성전입니다. 하느님으로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우리의 하루 삶이요, 바로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이뤄집니다.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성전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듯 성전안에서 거행되는 공동전례기도를 사랑합니다. 시편은 신자들의 성전 사랑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타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84,2-3).
아름다운 주님의 집 성전에서 아름다운 미사전례를 통해 아름다운 주님을 만남으로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를 선물받아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하여 성전 근처에 집을 마련하여 사는 이들도 자주 눈에 띱니다. 또 나이들어 갈수록 그가 사는 집 주변에는 꼭 셋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바로 인간의 근본적 욕구와 관련되는 성전, 병원, 음식점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 안에서의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가 하루하루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해 줍니다. 이어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을 하느님 향해 새롭게 열어 주기에 정체성 뚜렷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집 성전이야말로 영혼의 보금자리이자 쉼터입니다. 수도원 설립 만 30 주년, 날마다 하루 24시간 내내 늘 신자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여기 수도원 성전입니다.
제1독서 마카베오상권의 유다와 그 형제들의 성전정화와 루카 복음의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유다와 그 형제들은 기원전 164년 12월14일, 안티코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위에서 제우스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기 시작한지 삼년째 되는 날, 성전정화후 제단을 다시 봉헌하며 온 백성과 함께 자기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합니다.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고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으며,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런 성전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봅니다. 어제 예루살렘의 타락상에 우시던 예수님은 곧장 성전정화에 돌입하십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매일미사은총으로 날마다 우리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집’은 이사56,7을 인용한 것이며 이사야처럼 예수님께도 이것이 성전의 원래 기능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7,11에 나오는 말마디로 예레미야의 동시대인들처럼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성전의 용도를 왜곡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노라고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전의 중심은 파스카의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당신의 사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새삼 성전은 ‘기도의 집’이자 ‘말씀의 집’임을 깨닫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에 이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들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확인되는 그리스도 중심의 한몸 공동체의 성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성전인 우리 모두를 정화하시고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매일의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정화淨化되고 성화聖化되는 당신의 몸이자 성전인 우리들입니다. 아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셨습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은 당신과 만나고 당신을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이요, 성전에 있다는 것은 당신 면전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전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에,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과 탐욕의 우상을 만나는 장소로 변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성당에 오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성당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시고 어떻게 하실까?
대체, 오늘 우리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인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강도의 소굴을 참 성전으로 바꾸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19,46).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하느님께 공경을 드리고 그분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요시아 개혁 이후에는 반드시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 성전은 기도하는 곳도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상인들은 이익금의 상당 부분을 사제들에게 세금처럼 바쳐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전뜰은 환전 차익과 부당한 이득을 얻으려는 상인들로 가득찼습니다. 그렇게 종교지도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치들을 내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수탈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성전 구조에서부터 드러나는 차별과 특정 계급만이 권력을 누리는 구조 자체를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을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데 악용함으로써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다시 세우시려고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요.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없앨 궁리만 합니다(19,47). 성전은 하느님이 계시는 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선과 평화가 넘치는 바로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내 마음과 우리 공동체와 사회는 성전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강도의 소굴인가요? 하느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는 삶, 불의와 차별, 불신과 무관심, 빈부격차, 생명경시, 생태파괴 등이 끊임없이 드러나는 삶의 현실은 성전이 아닌 강도의 소굴에 더 가깝다 할 수 있겠지요. 이제 나 자신은 물론 교회와 사회 모두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성전으로 바꿔가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따라서 성전이 더럽혀졌다면 기도와 회개를 통해 본래의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내 일에 몰두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며, 온갖 걱정 근심, 감정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로 내 영혼을 가득 채운다면 또다시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고”(필리 4,8) 살아내는 성전의 궁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전으로 살아가려면 성전이신 예수님께 돌아가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의 자비와 정의와 생명을 품을 때 나와 우리 안의 강도를 내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 더 나아가 온 지구가 주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연대해야겠습니다. 숨쉬는 곳 어디서나 자유와 평등, 인간존엄과 생명존중이 드러난다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성전이겠지요. 기도는 그렇게 삶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희생제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폭풍우 한 가운데서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순교자들에 대한 떼르뚤리아누스 교부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희망적입니다. “Sanguis matyrum, semen christianorum!” 라틴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신앙의 씨앗입니다!” 혹은 “순교자들의 피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의 말씀은 지금 순교자들의 나라 베트남에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가끔씩 살레시오회 국제 모임에 가서 접하게 되는 베트남 교회 소식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식민 통치, 종교 박해, 참혹한 전쟁, 공산주의 치하, 교황청과의 갈등 속에서도 가톨릭 교회는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베트남 교회는 참으로 활기차고 젊습니다. 성당마다 젊은이들로 넘쳐납니다. 교세도 급격히 성장해서 전체 가톨릭 신자 수는 70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만 해도 베트남 관구 전체 회원수가 400명이 넘습니다. 그 가운데 백여명이 해외 선교사로 활동 중입니다. 지원소, 수련소, 신학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젊은이들로 넘쳐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오랜 박해의 세월 속에서 탄생한 무수한 순교자들께서 흘린 피로 인한 결과입니다. 베트남은 1533년 최초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이래, 1625~1886년까지 총 53차례의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13만명 가량의 선교사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총 117분명의 순교자들이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격인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필두로 26명의 베트남 사제들, 59명의 평신도들, 8명의 외국인 주교들, 그리고 13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시성의 영광을 획득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던 1843년 목숨을 무릅쓰고 전교에 열중하던 바울로 레바오틴 신부님께서 모국에 있는 신학생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영웅적인 순교자들이었는지를 생생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묶여 있는 저 바울로가 날마다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알림은 여러분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 올라 저와 함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이 감옥은 영원한 지옥에 비길 만하니, 족쇄, 쇠사슬, 포승 등 온갖 종류의 잔인한 형벌과 더불어 미움, 복수, 비방, 폭언, 불평, 악행, 거짓 맹세, 저주와 궁핍과 근심 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옛적에 세 소년을 불가마에서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면서 나를 이 고난에서 구하시고, 이 고난을 달게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분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전적으로 지시고, 저에게는 겨우 한쪽 끝부분만 지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 싸움을 구경만 하시지 않고, 친히 싸우시고 승리하시며 모든 번민을 이기십니다. 그 까닭으로 그분은 머리에 승리의 관을 쓰셨으며, 그분의 지체들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고, 저를 구원하시며 붙들어 주시어, 제 연약함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행여나 제가 고난의 도정에서 비틀거려 원수들이 거만하게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저는 이 폭풍우 가운데서 제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옥좌에 희망의 닻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당당하게 싸우도록, 훌륭하게 싸우고 끝까지 싸우며 달릴 길을 다 달리도록 기도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할지라도, 후세에서는 흠 없는 어린양의 옥좌 앞에서 승리의 기쁨에 넘쳐, 한마음으로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하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아멘.”
최근 문대통령께서도 잠깐 언급하신 바처럼, 우리나라는 베트남 국민들에게 진 빚이 참으로 많습니다. 베트남 참전, 한국 기업의 진출, 그 후 파생된 베트남-한인 2세 문제들...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이 베트남 땅에 남긴 유쾌하지 않은 흔적들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도 그곳 살레시안들을 만날 때 마다 송구한 마음이 앞섭니다. 오늘 베트남과 베트남 교회를 위해 각별히 기도하는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김종오 신부님
주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어디에나 다 계시는 주님이시지만, 성전은 특별히 주님의 현존을 우리가 더욱 잘 의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우리가 주님을 가장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거룩한 공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몸은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의 거룩하신 입김인 영을 품고 있는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을 들숨으로 마시고, 욕망으로 거칠고 더럽혀진 재단을 날숨으로 씻어야 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몰아내신 주님처럼, 날숨으로 우리의 욕망을 몰아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기도로써 주님과 통교를 이루며, ’강도의 소굴‘이 되어 황폐해진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길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기도뿐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더럽힌 성전을 정화시켜줍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경계선을 지켜줍니다. 열정적인 기도는 성전인 자신의 몸을 지키고 보호하여야 줍니다. 기도를 심화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성전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성전을 정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려는 열정으로 ‘강도의 소굴’이 된 우리 마음의 성전을 기도의 집으로 새롭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귀를 열어 주님의 노래를 듣고 믿으며 따르는 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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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89년에 서울 혜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에 선배들은 이렇게 놀리곤 했지요.
“이제 신학교 입학했으니 언제 신부가 되니? 1999년? 그날이 올까?”
당시에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떠돌 때였기에 더욱 더 사제가 되는 길은 멀기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오지 않을 것 같았던 1999년을 지나고도 한 참 지난 2015년을 지금 살고 있으며,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시간이 참으로 빠릅니다. 신학교 입학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26년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시간은 또 얼마나 빠를까를 떠올리게 됩니다. 지난 26년을 생각하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사제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세속적인 유혹에 흔들렸던 적도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렇게 사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유혹에 단호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있겠지만, 주변의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신학교 일 년 선배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전의 신학교 때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지금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지요. 그러면서 가진 생각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보면 공부도 잘하고, 능력도 특출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 사제가 되었고, 능력 있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른 길을 선택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는 많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랑의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가능한 삶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늘 겸손한 자세로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과격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이렇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실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을 쫓아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됩니다. 즉,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사실 성전의 본래 용도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갈등과 분쟁의 장소가 되어, 본뜻과는 다른 악이 조장되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악을 쫓아내기 위해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악은 어떻게든 쫓아내야 합니다. 사랑으로 악을 감싸 안는다고 악을 행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부족한 우리의 모습으로는 이겨낼 수 없기에 주님과 함께 해야 하며, 우리 사랑의 대상인 이웃들과도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바위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빵처럼 늘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어슬러 K. 르귄).
당신의 콤플렉스는 무엇입니까?
4살 때부터 몸속 멜라닌 세포가 파괴되어 백색 반점이 점차 커지는 백반 증(세계적인 팝 가수 마이클 잭슨도 이 병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지요)을 앓고 있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피부질환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온갖 놀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절망하지 않았고, 세계적인 슈퍼모델이라는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남들은 그런 피부로 무슨 슈퍼모델이냐고 놀렸지만, 이 아이는 세계적인 패션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는 위니 할로우(Winnie Halrow)입니다. 위니 할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고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저는 단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검은 피부, 하얀 피부 하나만 가지라는 법이 있나요? 두 피부 다 가지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생각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면 당당하게 살 수 있으며, 자신의 열정도 키울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입성하시는 길목마다 길게 줄지어 섰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흥분한 사람들은 손에 들려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큰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정말이지 열광적인 환영의 분위기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존경과 환영의 표시로 자신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땅바닥에 펼쳐놓았습니다. 마치도 꿈에 그리던 대통령 당선자를 맞이하는 당사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태도는 사뭇 의아합니다.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의 처신과는 크게 차별화됩니다. 당시 제한적이었지만 세속의 권력자였던 헤로데 왕궁을 찾아가지도 않으십니다. 빌라도 총독과의 면담 스케줄도 잡지 않으십니다.
가장 먼저 보여주신 행동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소요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의 장소였던 성전은 당시 완전히 본질을 망각한 채 크게 타락해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세속화의 극치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막대한 권리금을 상인들로부터 받고 성전 마당에서 이런 저런 물건들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상인들은 성전 마당에 가판대를 쭉 늘어놓고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환전상들도 이에 뒤질세라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되는 시세로 돈을 바꿔주고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해야할 성전은 시끌벅적, 티격태격, 옥신각신, 바글바글...마치도 재래시장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우스꽝스런 성전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평소와는 다르게 크게 진노하십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그저 분노에 그치지 않습니다. 밧줄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죽치고 있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리치시며 밖으로 쫒아내십니다. 이어서 던지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들려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복음 19장 46절)
오늘 우리 교회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호된 채찍질을 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오늘 우리 교회 역시 크게 한번 정화와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저는 하느님 크신 자비 없이 단 한순간도 홀로 설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기서 나 보다 더 잘 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쳐대는 교만이 판을 치는 교회는 심각한 쇄신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애지중지하셨던 중죄인들, 극빈자들, 상처 입은 자들, 중환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문턱이 높은 교회는 지금 당장 정화가 필요한 교회입니다.
구성원간의 격의 없고 활발한 소통의 문화가 사라진 교회, 일방통행식, 일인독재식의 전근대적인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는 낡은 교회는 빨리 무너져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고통스런 절규에 귀를 막고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하면서 우리끼리 높디높은 담벼락을 쌓고 그 안에서 화사하게 웃으면서 지내는 무늬만 성전인 그런 교회는 첫 번째 정화의 대상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며 슬피 우십니다. 그분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한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화요일에는 성소후원회 지구장님들과 ‘북촌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명동에서 걸어서15분 거리에 아름다운 동네가 있었습니다. 창덕궁이 앞뜰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옥들이 그리움을 불러왔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의 가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북촌의 중심에 있는 ‘가회동 성당’이었습니다. 해설하시는 자매님께서 가회동 성당의 모습을 ‘단아한 조선의 선비와 어께동무를 하는 벽안의 사제’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1층에는 소박한 전시관이 있었고, 2층에는 기도할 수 있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옥상에는 북촌과 서울을 바라볼 수 있는 정원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들렸던 정독 도서관의 단풍도 아름다웠습니다. 따뜻한 날씨는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잠시 멈출 수만 있다면, 소중한 것들을 먼저 생각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북촌의 아름다운 모습을 해설해 주시는 자매님이 참 고마웠습니다. 오랫동안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는 자매님은 북촌을 알리는 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동네를 돌아보니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올해가 가기 전에 북촌 나들이 한번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북촌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고유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들을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성전 정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오늘 강론 주제와 관련되어 성전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한 날입니다. 참 오랜만에 교회의 큰 축제에 참여한 날입니다.
때로 공동체가 함께 하는 큰 축제의 이벤트도 필요함을 새삼 절감한 날입니다. 8차 연피정이 끝나면서 인보성체수도회의 창립60주년 기념미사겸 종신서원미사가 거행된 날입니다.
수도원 성전은 무려 30-40명 사제들과 400여명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로 가득했습니다. 모두가 시름이 없는 사람들처럼 기쁨으로 가득 피어난 꽃같은 얼굴들이었습니다. 함께 이렇게 축제에 서로 만나니 기쁜 것입니다.
성전안에서의 이런 성대한 전례가 삶은 축제임을 웅변합니다. 새삼 성전은 공동체의 중심이자, 이런 성전축제가 성전을 정화하고 공동체의 일치를 촉진해줌을 깨닫습니다.
전주교구 이병호 주교님도 다리부상으로 기브스를 한 채 휠체어를 타고 미사를 집전하시니 흡사 영적전투에 부상을 당한 모습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기쁘게 미사를 봉헌하시니 성전안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여 오후 늦게야, 수도원을 떠난지 10일 만에 피정지도후 귀원하였고 지금 새벽에 강론을 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새벽에 집무실 앞 단풍나무를 보는 순간 마음 깊이 와닿은 진리입니다. 그 비운 날동안 황홀찬란했던 단풍잎들은 거의 다 지고 영롱한 별들이 나뭇가지마다 달린 듯 했습니다. 집무실 오르는 계단에는 낙엽들이 소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지만 하느님만은 영원합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에 있는 성전은 하느님의 영원을 상징합니다. 하여 저절로 우리는 하느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인 성전을 찾습니다.
이래야 삶의 허무와 무의미의 덫에 빠지지 않습니다.
‘살기위하여’ 제가 자주 사용하는 단골 용어입니다. 영혼이 살기위하여 성전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빛으로 우리를 정화하고 충전시키기위해 성전을 찾습니다. 예수님 또한 살기위해 매일 성전을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며 쏟아내신 말씀은 여전히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알게모르게 강도의 소굴로 변한 성전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세상을 성화해야 할 성전이 세상에 속화된다면 성전정화는 필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바로 이런 수행이 실제적으로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 평생 끊임없이 성전 안에서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1.건물로서의 성전은 물론
2.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란 성전과
3.우리 각자의 몸인 성전이 동시에 정화되고 성화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1독서의 주제 역시 성전정화입니다. 성전축제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우선순위가 성전정화임을 절절히 깨달은 유다와 그 형제들입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을 찬양했고, 무려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제물과 감사제물을 드렸다 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성탄팔부 축제와 부활팔부 축제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전안에서의 미사축제로 당신 성전인 우리 모두를 정화, 성화시켜 주시고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 주십니다. 아멘.
이 땅에서 성전으로 살아가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19,46).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심으로써 성전 구조에서부터 드러나는 분리와 차별로 가득찬 종교생활 체제와 특정 계급만이 권력을 누리는 구조 자체를 비판하십니다.
또한 이익금의 상당 부분을 사제들에게 세금처럼 바치는 그들을 내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수탈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성전 흉내만 내는 유령 같은 건물을 허무시려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으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없앨 궁리를 합니다(19,47). 성전은 그렇게 하느님과 우상, 정의와 불의, 사랑과 무관심이 부딪치는 우리의 실존적 현실입니다.
교회, 국가, 기업, 가정 또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자살, 안전불감증, 실업, 빈부격차의 심화 등이 잘 말해주듯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고 생명을 경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회갈등지수 5위의 불명예스런 딱지를 붙이고도 한쪽을 불순세력으로 모는 우리 사회는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권력가들과 탐욕적인 자본가들과 사회 지도자들에게 정의의 채찍을 들어 벌하실 것입니다. 나아가 정치권력에 기대고, 가난한 이의 편에 서는데는 소극적이면서도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상업화,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따른 교회운영에 더 힘쓰는 교회 지도자들 또한 성전 밖으로 내쫓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나도 주님의 성전입니다. 따라서 내 일에 몰두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며, 온갖 걱정 근심, 감정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로 내 영혼을 가득 채운다면 버려진 창고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인 우리는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고”(필리 4,8) 살아내야 합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내가 죄와 어듬 속에 머물 때에도 함께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靈)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 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권고 5)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영(靈)을 품은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나약하고 죄에 기우는 성향과 육의 정신에 휘말려 어둠 속을 걷는다 해도 찾아오시어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존재가 되어 그분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전으로 살아가려면 예루살렘이 아니라 성전이신 예수님께 돌아가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정의와 평화가 꽃피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도록 연대하며,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사랑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참 성전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성전과 장사
김영욱 신부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기겁을 하십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장사치들이 돈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장터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성전 마당 가운데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 구역’이 있는데 여기에서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 밖도 아니고 성전 안에서 날강도 같은 짓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분개할 만도 하십니다.
성전과 장사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성전은 희생제물을 드리며 기도하는 곳이고, 장사는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성전은 희생이요, 장사는 이윤’입니다.
오늘날 성당에서도 카페, 성물, 우리농산물, 바자회 등 많은 장사를 합니다.
봉사자들의 희생으로 이윤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이윤은 정당한 것인지?
혹시라도 억지로 강요된 것은 아닌지?
더 나아가 성전 밖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감히 장사하며 이윤을 챙기고 있는 집단은 없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또다시 정화하시기 전에 스스로 정화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세속화되는 것을 혐오하셨고 나누고 섬기며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로마를 방문중에 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들은 관광객들로 넘쳐 납니다.
더이상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구경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몇몇 소수의 성당들은 그야말로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당 뿐만 아니라 예배당들도 그렇고 사찰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거룩한 곳이 거룩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그곳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의 교회 나의 성당 나의 절은 어떤 곳인가요?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을 기도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오늘 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성전이 되게 하고 내가 가는 곳곳이 하느님을 모시고 가는 장소가 되게 함으로써 성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성령의 살아있는 궁전인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가는 곳이 참으로 성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것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자기 것이라고 할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우리 것이다. 오틸리안 수도원에 뒤뜰에 수도자 무덤을 찾아 갔다가 한 무덤에 여러 표말을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다 생각하였으나 깊이 생각하면서 무덤도 한 사람의 무덤이 아니라 우리 무덤이다.
어제 까지 내 본당이 다음날 내 본당이 아니라 다른 본당 신부의 것이 되어 손님으로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의 집을 자기 이익을 위한 집으로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는 이들에게 분노 하시며 “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하시면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하시며 성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시였다고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한 특정한 사람 성직자나 돈 많은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안입니다. 국가도 내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의 것입니다. 지도자는 관리인뿐이고 정당은 관리를 잘 하도록 도와주고 전체적 발전을 도모하고 쟁취의 도구가 아닙니다.
국민은 자기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입니다. 나라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전체 국민이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말고, 말로 자기 의사를 정의롭고 민주적 절차를 밟아 의사를 표현하고 서로 협력하여야 합니다.
독제를 무지르겠다고 하면서 독재적 방법은 또 다른 독재 국가를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모두 내 생각, 내 말, 내 것이라고 주장 하는 한 또 다른 사람이 내 생각, 내 말, 내 것을 주장하고 나서는 한 충돌이 일어나 생각이 말로 행동으로 옮겨져 폭력과 폭력진압으로 새우싸움에 고래 등이 터치는 격이 됩니다.
한 가정 안에도 내 것 내 것으로 갈라져 싸우면 네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면 접시가 깨지고 주먹이 날아가고 마침내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을 죽이는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이 모든 불행은 자기 것을 찾고, 차지 하려는 욕망에서 비롯하고 우리 것이라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하고, 오늘 복음에 지도자들이 주님을 없앨 마음을 먹게 된 것도 성전은 자기 것처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생각하여야 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쉽게 갈등과 투쟁으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원망 비난 반대 모두 부정적 삶만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내 것을 찾기보다 우리 것을 찾아 일치와 평화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전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속의 방식을 멈추고
사랑의 삶을
배우는 곳이
성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기도와 사랑입니다.
우리 일생안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 이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 주님의
성전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거
더는 낯선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만나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세속의 욕심을
끌어안고 들어오는
성전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정화하는 것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하는 곳이 우리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파란만장한 저마다의 삶을
어루만져 주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이상
살해하지 않는
약자들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희망, 사랑을
다시 깨우는 성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성전의 불빛이
세상을 일깨워주는
온전한 불빛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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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홀릭(workaholic)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work)과 중독자(holic)의 합성어로 미국의 경제학자 W. 오츠가 그의 저서 ‘워커홀릭’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즉, 가정이나 다른 것보다 일이 우선이어서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여 사는 사람을 지칭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어쩌다 주일을 맞이해서 곤한 낮잠을 자고 나면 기분이 찝찝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해도 되는가 걱정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는 주일을 헛되게 보냈다는 생각으로 큰 후회를 합니다.
그래서 월요병이란 새로운 병이 생긴 것이지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는 기쁨보다는 주일을 헛되이 보냈다는 후회를 통해 새롭게 맞이할 월요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월요병이 단순히 심리적인 병일까요? 학자들은 이 월요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하는 경우가 이 월요일에 제일 높기 때문이지요.
결국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각종 물질과 세상의 지위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 역시 행복하지 않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지 않고, 또 세상의 지위 역시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면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항상 무엇인가를 채울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새로운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일과 물질 그리고 세상 지위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니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과연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의 장소만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이라고 하셨지요. 바로 우리 각자의 몸 자체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몸을 기도의 집으로 만들고 있나요? 아니면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나요? 만약 일에 파묻혀 살면서 물질 그리고 세상 지위에 대한 욕심으로 내 마음을 채운다면 그 모습이 바로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늘 주님께 겸손되이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거룩한 기도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인 자신의 몸을 기도의 집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행복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지금의 나를 향해 주님께서는 ‘기도의 집’이라며 칭찬하실까요? 아니면 ‘강도들의 소굴’이라며 채찍을 드실까요?
잘 보낸 하루는 편안한 잠을 이루게 하고, 잘 지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다빈치).
간단한 방법
어떤 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회사를 알리기 위해 홍보용 전단지를 인쇄했는데, 글쎄 가장 중요한 메일 주소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회사 사람들은 이 문제 때문에 여러 방법을 강구했지요. 일일이 수정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시간 없으니 얼른 수정해서 다시 찍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입 사원이 지켜보다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 틀린 메일 주소로 메일 계정을 새롭게 만들면 되잖아요.”
새롭게 메일 주소를 만들어서 사용하면, 굳이 홍보용 전단지를 수정할 필요도 또 다시 인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기에 새로운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위해 많이 공부하고, 또 많은 일을 합니다. 돈과 지위에 대한 욕심을 채워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합니까? 채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비워 두면 행복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작가인 버나드 맬러머드는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여백을 두면 더 많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방법인데,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그 방법을 쉽게 선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기준 삼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멸의 성녀, 체칠리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로마 시와 로마 근교는 거의 모든 곳이 유적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상뿐 아니라 지하 여기저기서도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기에 지하를 개발하기가 어렵습니다. 로마에 가서 서울지하철처럼 쾌적한 지하철을 기대하면 큰 실망입니다. 아주 소란스럽고 노선도 짧고 노후화된 지하철에 깜짝 놀랍니다.
로마 근처 지하에서 현재까지 약 여개의 카타콤바가 발견되었는데, 카타콤바란 초세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공동묘지를 지칭합니다.
그중 순례객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카타콤바가 산갈리스토 카타콤바입니다. 순교자이자 교황이었던 성 갈리스토(217~222)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카타콤바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큽니다. 현재 지하 층까지만 개발되어 있는데, 잠깐 한 눈 팔다가는 길 잃어버릴 정도로 길고 복잡한 미로로 가득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의 관리를 저희 살레시오회에 위탁하셔서 현재 살레시오 회원들이 거주하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가시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한 곳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체칠리아 성녀의 조각상이 있는 장소입니다. 한때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안장되어 있던 체칠리아 성녀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난 다음 이 조각상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그녀의 무덤은 지금까지 딱 두 번 공개가 되었는데 년이 지난 년, 그리고 년. 이장을 위해 그녀의 무덤이 공개되었을 때 성녀의 시신은 순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고, 이에 감동 받은 스폰드라도 추기경은 스물 셋의 젊은 작가 스테파노 마데르노에게 이 모습 그대로를 조각할 것을 요청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조각상이 남게 된 것입니다.
성녀는 얼굴을 땅에 묻고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옆으로 누워 있는데 마치 잠을 자듯이 편안한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녀의 목에 칼자국이 보입니다. 참수 당할 당시 목에 칼을 세 번 맞고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두 손을 보면 왼손은 세 손가락을 펴고 있고, 오른손은 검지 하나만 펴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임종 마지막 순간까지 증거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무척이나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성녀가 체칠리아 성녀지만 솔직히 그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합니다. 오직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들을 통해 그녀의 삶과 신앙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체칠리아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딸이었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해 동정으로 살고자 마음먹었지만 부모는 발레리아누스란 전도양양한 청년과 혼사를 밀어붙입니다.
하느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했던 체칠리아였기에 자신의 계획을 남편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설득에 성공한 체칠리아는 비록 결혼한 몸이었지만 자신이 꿈꾸어오던 봉헌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 체칠리아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교도였던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킵니다. 시댁 식구들도 차례로 개종시킵니다. 남편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나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을 철저히 시켰으면 남편은 체칠리아에 앞서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체칠리아 역시 체포당하여 법정에 소환됩니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노라고 외칩니다.
구전에 따르면 체칠리아는 언제나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루 중 기도를 드리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개인적인 종신서원도 발했답니다. 부모가 강제로 밀어붙인 결혼식 날 체칠리아는 아름다운 금실로 장식된 예복을 입었지만 속에는 거친 삼베옷을 입었답니다.
체칠리아의 깊은 신앙에 감화를 받은 남편 발레리아노는 자신은 물론 동생까지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남편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순교자들에게는 무덤을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하여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그 가녀린 목에 세 번씩이나 칼을 맞고도 일 동안 목숨이 붙어있었던 체칠리아는 임종 직전 우르바노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느님께 일을 기도했습니다.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무석 교수의 책 ‘자존감’에 나오는 ‘아내를 살해한 CEO’란 사례를 옮겨봅니다.
30대 후반의 한 CEO가 아내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에 빠졌습니다. 법원은 정신감정을 위해 그를 이무석 교수에게 보냈습니다. 입원시켜 행동을 관찰했고 가족들 인터뷰도 했습니다.
그는 유능한 사업가였습니다. 20대에 선배와 함께 사업을 했고 사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10년 만에 국내 굴지의 기업이 되었고 지적이고 미인인 아내와 비싼 외제 차와 아파트 등을 지닌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한 젊은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동업하던 선배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선배의 부인과 처남이 순식간에 기업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모든 노력을 해 보았지만 소송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선배의 부인은 그를 몰아냈고 그는 모두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습니다. 그는 앞서가는 자동차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지면 못 사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열등감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모든 업적을 잃어버린 실망과 분노로 잠도 안 오고 동창회도 못 나가고 체중도 쭉쭉 빠지고 우울증도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당뇨가 발견되었습니다. 정밀검사를 위해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울증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 못 살고 곧 죽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당뇨 검사를 위해 입원해 있을 때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간호하던 아내는 그의 침대 발치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죽는데 아내 혼자 살게 할 수는 없다.’
결국 잠자던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은 기억상실증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후에 기억을 되찾기는 했는데,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충격을 받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이는 “실직과 우울증이 낳은 비극이었다. 당시에 소변에서 당이 나온 것을 당뇨병이라고 믿고 절망하는 그를 곧 정신과에 의뢰했더라면 이런 비극을 예방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까지 되어가고 있는데 누구 하나에게도 자신의 심리적 상황을 털어놓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오기와 자존심으로 끝까지 스스로의 힘만으로 자신을 경영하려 했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삶은 마치 운전하면서 길을 물어보면 자존심이 상해서 누구에게도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헤매기만 하는 심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란 정의를 내려주십니다. 기도하는 집은 ‘하느님을 만나는 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만나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대화’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성전은 돌로 지은 집도 성전이지만 작게는 우리 자신도 성전이요 크게는 온 우주 만물도 성전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하느님이 사시는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나라에 사는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살지 않는 사람은 세상 어떤 것과도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박민스터 풀러는 대학에 다니던 중 퇴학을 당했고 이후 사업을 할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풀러가 32세 때였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밤 그는 미시간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려다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과 맑은 하늘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하느님의 창조의 신비에 강한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자연의 존재가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네 생명도 스스로 없앨 권리가 너에게는 없다’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바로 자연을 통해 하느님과 처음으로 대화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열정을 가지고 노력해 발명가와 기술자, 수학자 그리고 건축가, 시인 및 천문학자로 명성을 얻게 됐습니다. 12개 분야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지구를 57회나 돌면서 수백만 명에게 강연했습니다.
내 마음뿐 아니라, 성당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온 우주만물 안에 하느님이 사십니다. 사람에게 말할 용기가 없으면 성당에 와서 한탄이라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만이라도 하십시오. 하느님은 낮엔 구름을 통해서라도 밤엔 불기둥을 통해서라도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의 길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십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하십시오. 자존심이 나를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힘든 것은 힘든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내 자존심에 묶여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부자유스러움과 절망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는 평소에 나를 가리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겸손함을 가지도록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결국 내가 대화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 말씀은
사랑과 용서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집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 말씀이 서로를
비추어주고 기쁨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이 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근심과 슬픔마저
하느님께 내어드릴 때
얻게 되는 강렬한 우리의 체험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삶은 결코 변화 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집에서는
'숫자'에 집착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자체이지
더 높고 더 웅장한
성전의 숫자 표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작아지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새로운 행복과
새로운 기쁨이
탄생되는 기도의 집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힘이
넘쳐 흐를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랑과
신앙의 목적 의식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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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바지를 갈아입으려고 옷장을 살펴보다가 옛날 옷들을 발견했습니다. 좋은 옷들이지만 오랫동안 입지 못했던 옷이지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제 몸에 딱 맞았지만, 지금은 몸이 불어서 도저히 맞지 않는 옷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긴 20년 전과 비교할 때, 20Kg 정도 차이를 보이니 어떻게 맞겠습니까?
혹시나 해서 꺼내 입었습니다. 역시나 옷이 맞지 않네요. 바지는 완전히 쫄바지가 되어 있고, 윗도리는 목 부분의 단추가 채워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불편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옷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젠가는 살을 빼서 이 옷을 입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옷장 안에만 있어야만 했습니다. 만약 과거의 제 모습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 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옷들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물론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버려야 할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지금이라는 현재를 더욱 더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연연해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거의 명예, 과거의 재능과 능력, 과거의 호화로움, 과거의 행동과 습관.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시간일 따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에 맞게 최선을 다해 생활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니까요. 그리고 사고파는 가운데 이권이 작용하게 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소외와 차별을 겪게 되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사실 성전에서 장사가 이루어진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전에서는 상거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즉,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바꾸기 위해 환전상이 필요했고, 성전에 봉헌할 재물을 구입하기 위한 장사꾼들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오래되었지만 잘못된 전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올바른 모습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대신 지금이라는 시간에 가장 올바른 일들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내가 정화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묵상해보셨으면 합니다.
과거의 짐을 지고 가지 마라. 미래에 살지 마라.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현재를 진실하게, 온전히 사는 것이다. 지금의 삶이 어떠하든, 지금 이 순간 전력을 기울여 살아라.(찬치)
오늘을 산다(장장식, ‘행복한 동행’ 중에서)
잡지에서 읽은 좋은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살아가는 데 우선순위가 돈과 명예보다 ‘오늘’에 있다면 믿을까. 내일을 위해 뛰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오늘을 버린 채 내일을 쫓기에는 인생이 짧다. 젊었을 때는 행복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오늘이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의 행복이 무엇이며, 오늘의 고통을 어찌 감내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곤 했다. 게다가 오늘 흘린 땀이 내일의 열매로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수정했다.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다는 나름의 철학으로 말이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듣고 하루살이 인생관이나 소비적 향락주의라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행복을 찾는 것은 하루살이의 행복이나 향락주의와 분명 다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 아니던가.
우리 인생에 과연 내일이 있을까. 누가 행복한 내일을 장담할 수 있을까. 다만 그럴 것이라는 낭만적 믿음이 낳은 허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난 오늘에 집중한다. 오늘 행ㅂ고하기 위해 최선의 하루를 살고, 오늘 기쁘기 위해 순간을 노래한다. 옛 사람이 하루의 근검으로 오늘의 삶을 강조한 것처럼 오늘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백수가 과로사할 만큼 바쁜 현대에 웬만한 것은 버린다.
유니세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동료는 “좀 더 넉넉해지면 돕겠다.”라고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작은 나눔은 가진 것 없는 이의 호사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넉넉한 내일이 되어야 돕겠다는 것은 허망한 약속이다. 내일이면 더 넉넉한 내일이 그리워지니까.” 오늘 행복하기 위해 오늘의 빈 주머리를 털어 행복을 나눠야 한다.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 명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포가 망설이고 있을 때 스승 우그웨이가 한 말이다. “어제는 역사(History)이고, 내일은 수수께끼(Mystery)이며, 오늘은 선물(Present)이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역설해 주는 말이다.
몽골 경찰청 앞에 붙은 표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고,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를 새삼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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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게트(baguette) 빵을 아십니까? 프랑스빵의 일종으로 길고 딱딱한 원통형의 하드 타입 빵입니다. 고소한 맛에 사람들이 즐겨 먹는 빵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그렇게 즐겨 먹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빵을 먹다가 입천장이 벗겨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빵을 먹는 방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딱딱한 부분은 혓바닥 쪽으로, 그리고 부드러운 부분은 입천장 쪽으로 두고 먹으면 입천장이 다치지도 않으면서 빵의 본래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냥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먹으면서 ‘입천장을 다치게 하는 질기고 딱딱한 이 빵을 도대체 왜 먹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동시에 이제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평과 불만이 다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렇게 빵 하나도 먹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방법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요? 방법도 모르면서 또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불평불만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런 행동을 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고 또한 예수님을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군인신학생이 휴가를 나왔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년 사이에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의젓해지고 말 하는 것도 많이 자신감이 생긴 것 같더군요. 이렇게 1년 사이에 바뀐 이 군인신학생을 보며, 저는 과연 1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그 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었고, 그럼으로 인해 내 자신을 얼마나 변화시켰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성전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을 가리키시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평불만만을 일삼으며 사는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 끊임없이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러셀).
내가 니꺼잖아
아내: 여보세요? 자기야?
남편: 응, 왜?
아내: 있잖아. 궁금해서 물어 보는 건데.
남편: 뭔데, 물어봐.
아내: 우리집 누구 이름으로 돼 있어?
남편: 내 이름.
아내: 우리 차는?
남편: 내 이름이지.
아내: 머야, 내껀 하나도 없잖아?
남편: 내가 니꺼잖아.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고 하지요. 특히 부부 간에는 더욱 더 그렇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가 될 때, 행복 역시 함께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
안승태 신부님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시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그러한 성전에서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 마음에 흡족한 제물을 바쳐드려야 한다는 여러 율법 규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과 동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로 성전 마당은 여느 시장을 연상하게 되는 풍경이었을 것이고, 세속적인 속임수도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장사치들의 거짓됨을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시기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매주 또는 매일 미사를 드리는 성당에만 머물러 계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어 주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성전은 외적인 건물이 아닌 내적인 우리 마음, 우리의 일상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예수님의 꾸짖음을 들었던 예루살렘 성전처럼 우리 마음의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거처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욕정과 탐욕이 가득한 마음이라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려는 침묵의 태도 안에 주님의 성전은 아름답게 우리 안에서 지어질 것입니다
문명의 전환
이대훈
하느님의 정의가 실종될 때 강도의 소굴과 똑같아진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그 소굴은 종종 정의로운 곳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문명’이라는 착각도 마찬가지다.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현대 문명과 세계체제가 근본적인 벽에 부딪혔다고 말한다. 정의를 가로막는 것은 이제 가부장제와 성차별, 인종차별, 인권 경시, 빈부 격차 뿐만 아니라 군비경쟁과 군수 무역, 불공정 무역, 거대 기업의 독점과 횡포다. 또 속도와 팽창만을 앞세우는 경제성장과 행복관이 강도의 소굴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더 잘 보게 된다. 특히 비서구세계에서 이러한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
평화를 정의의 열매라고 말씀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열매가 우리의 일상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국제체제를 정의롭게 개조해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세계와 문명의 전환은 오늘날 지구촌 정의 구현의 첫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 힘든 여정의 첫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까? 아픔을 아는 사람들, 고통의 현장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통의 공유가 정의구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통해 연대를 이끌어내는 원천이 바로 슬픔이다. 슬퍼하는 마음 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연대할 수 없다. 서로 깊이 연관된 세계에서 나 자신이 진정 홀로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면, 이 세계의 슬픔은 끊임없이 나와 우리를 만들어 내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슬퍼하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고통은 나눌수록 줄기도 하지만 나눌수록 힘과 자유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귐은 적고 일이 너무 많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셨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바뀌었다고 분노하시며 정화를 하십니다.
그리고선 성전을 차지하시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주님을 없애려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뭐가 뒤바뀌어도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수석사제들은 없애야 할 잡동사니들은 놔두고 오히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주객을 뒤바꿔놓는 것은 백성의 지도자와 수석사제들만이 아니라 저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선물 받은 꽃다발을 제 방에 갖다 놓으려다 제 방이 아니라 성당에 갖다놓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성당 제대 앞에 꽃다발을 갖다놓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갸륵하다는 생각이 한 편 들면서도 다른 한 편 뭔가 더 중요한 것을 빠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뭘까 생각해보니 꽃은 성당에 갖다놓고 저는 성당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꽃을 봉헌한 것 분명 저의 기도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성전에 주님과 꽃만 있고 제가 성전에 없다니, 그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저는 꽃을 갖다놓은 것으로 기도를 다했다고 하고는 꽃에게 ‘이제 네가 내 대신 주님을 모셔라.’고 하는 듯하였습니다.
성전에 물론 주님이 계시고 꽃도 있어야지만 저도 꼭 있어야 하지요.
그래도 이것은 낫습니다.
어떤 때 제 마음성전은 이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제 마음성전에 주님이 아니 계십니다.
주님 대신 잡동사니들이 있으며, 어떤 때는 기도와 헌신의 영은 없고 온갖 계획들과 근심 걱정들만이 가득합니다.
기도와 헌신의 영이 없기에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 대신 성전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잡동사니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니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은 밀어내고 잡동사니를 끌어들인 겁니다.
주님과의 만남이나 사귐은 적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 마음속 성전
김수만 신부님
가끔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냇물은 흐르기 때문에 큰 강이 되고 큰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담아내고 또 비워낼 줄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쉽게 안주하려 합니까! 또 얼마나 쉽게 나태함과 교만에 빠지게 됩니까! 잠깐 쉬어갈 수 있지만,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희망을 되새기면서, 계속해 그 큰 바다로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강물을 닮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십니다. 왜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렸을까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이익에 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예수님은 볼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되게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가 오늘 우리의 마음 안에도 일어났으면 합니다.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어떤 영양분이 더 좋은지가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군가를 위해 내 몸은 과연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그리고 머리에게 물어봅니다. 아파트 평수, 통장의 돈, 자동차 배기량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자신의 가슴에게 물어봅니다. 세상의 것을 얼마나 품고 살아가는지가 아니라 어떤 감동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깃들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이 ‘현재 진행형’인지 아니면 ‘현재 완료형’인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내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하느님을 마음과 중심에 두고 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집착·이기심·명예·탐욕 등은 그분께 맡겨드리고, 당신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마카베오 항전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성전 재건과 수호를 통해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주님이 머무시는 성전과 우리 마음의 성전에 큰 사랑과 노력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가 내 마음의 성전에 하느님 사랑이 가득 들어찬, 기쁘고 즐거운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능동적인 신자
안문기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성전에서의 상행위와 환전행위 등을 비판하셨습니다. 당시 제관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합법적인 권한이었는데 그 안에서 비리와 부정부패가 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행위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성전인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관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청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 사람은 우선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당에서 드리는 최고의 찬미와 감사제는 미사입니다. 성경을 알고, 능동적으로 미사 전례에 참례하면 비록 성당에서 지상의 전례에 참례하고 있지만 천상의 전례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몰아내야 할 것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는 성가를 즐겨 부르고 부를 때 가사를 많이 음미하며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가사들에 대해 가끔 시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사의 그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나의 생명 드리니 모두 받아주소서.”하는 가사에 대해 생명이 과연 나의 것인가 하고 시비를 걸고, “내 마음은 주님이 지어내신 작은 궁전”이라는 가사에 대해서는 “주님이 계시면 다 큰 궁전이지 작은 궁전이 어디 있어!” 하고 시비를 겁니다.
사실 궁전이 궁전인 것은 외양이 크고 재질이 고급이어서 궁전인 것이 아니라 임금님이 머무시기에 궁전인 것입니다.
궁전의 본질이 임금님이라면 성전의 본질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껍데기는 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런 면에서 너무도 과격하셔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이 산이다, 예루살렘이다’ 하고 예배드릴 때 어느 특정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고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영적으로 어디든지 자유로이 계시니 어디서고 영적으로 예배를 드리면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주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과 사람들에 대해 오늘 왜 그렇게 분노하시며 치워버리셨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런 생각과 태도에 대해 주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신 것이지 예루살렘 성전이 필요 없다고 부정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 장소로 삼지 않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성전이 아닌 곳에서도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드려야 한다면 성전에서는 더더욱 영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성전의 본질이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영적으로 예배드리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다 허접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성전에 하느님은 아니 계시고 허접스런 다른 것들이 성전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불교에서 경전이 집착하게 하면 경전을 태워버리듯 하느님보다 더 집착하게 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가린다면 그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성화와 성상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꽃 장식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성전에서 촛대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도 치워버리니 성전을 복마전으로 만드는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전에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패거리 짓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성전을 사교장으로 만드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성전을 자기 활동 무대로 만드는 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성전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탐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근심걱정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허영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수없이 많은 계획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What else?
마음을 깨끗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대전교구 유 라자로 주교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대학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 동정 부부 순교자인 유정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두 성인은 서로 명문가와 부잣집에서 태어나 첫 영성체를 하며 그 깨끗한 마음을 오롯이 그리스도께만 드리기로 서원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 것을 처음부터 결심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문가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수치였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님께서 혼인을 주례하시고 두 사람은 서로 오누이로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10번 가량 동정을 잃을 위기가 닥쳤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서원을 지킬 수 있었고 서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이 두 분은 동정의 순결함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함과 동시에 부부로서의 인간적인 사랑 또한 지니고 살았던 보기 드문 케이스의 분들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박해 상황이 아니니 이런 혼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 참다운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임을 삶으로 보이신 분들입니다. 이순이 루갈다 성녀는 14세 때 첫영성체를 하고 정결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으며, 20살에 순교하였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의 옥중 편지는 항상 어머니와 누이들을 걱정하는 말들뿐이었습니다. 휘광이가 그녀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스스로 옷을 벗고 칼을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든 것들이 영원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주교님은 단순한 교리만 배웠지만 이러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던 한국의 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보면 많은 신학을 배웠으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시는 당신 자신이 부끄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 곳에 함께 참석하였던 신학을 배우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순교자들은 단순한 교리만 가지고도 그렇게 큰 믿음을 지닐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많이 듣지만 이유는 바로 땅에 있을 것입니다. 씨는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그 열매는 서로 다르게 맺혀집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풀 위에 내린 똑 같은 아침 이슬이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이단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인들이 잡으려 하였지만 군중들 때문에 잡지 못하였고 당신이 사랑하시던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배반함으로써 잡히시게 되었습니다. 그 유다도 배우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뱀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만 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의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우리 각 개인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사시고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이 안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운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안다고 교만해진다면 공부를 포기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배우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올바른 의도를 지녔다면 다시 시작해도 됩니다. 그러나 무작정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공부만 한다면 영리한 악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중요한 손님이 오실 때 안 쓰던 커다란 상을 꺼냅니다. 잘 보관해 놓아서 먼지도 없는 것 같은데 음식 그릇을 놓기 전에 먼저 행주로 상을 닦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면 정말 더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세한 먼지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릇을 놓은 다음에 닦는 것은 더 어렵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미사 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미리 죄의 고백을 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닦아야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기도 해야 합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성전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구나" 하고 나무라시는 예수님의 질타를 묵상하면서 참된 성전이란 과연 어떤 성전이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대성전은 기본이고 몇 개나 되는 부속성전, 친교의 공간, 휴식공간, 기타 서비스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진 성전 역시 좋은 성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짱짱한 음향설비는 물론이고, 사방이 휘황찬란한 고가 예술품으로 장식된 품위 있고 고상한 성전 역시 기도하는 분위기가 나는 좋은 성전이겠습니다.
매주 수 만 명이나 되는 미사참례자들이 줄을 잇고, 매주 수 천 만원의 거액이 오고가는 초대형 본당 역시 좋은 성전입니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조건들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한 성전이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 각자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거나 열악할지라도 기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진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참된 성전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 복음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복음을 몸으로 직접 살려는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한 봉사와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곳, 구성원간의 상호 원활한 의사소통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복음 정신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나눔이, 이웃과의 사심 없는 빵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참된 성전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편적인 인류애가 구현되는 공동체, 인간 중심의 육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영적인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자신의 욕구나 의지대로만 살지 않고 이웃의 의지,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생활 전체를 맡기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들의 존재 자체, 삶 자체로 선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구성원 각자 각자가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로 서고자 염원하는 공동체가 참된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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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과 함께 야유회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꽤 유쾌한 시간이었고 아울러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야유회를 다녀오고 얼마 뒤, 함께 다녀왔던 자매님 중 한 분이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이번 야유회가 재미없었나 봐요.”
“네? 아닌데요? 정말로 재미있었어요. 왜 제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신 거죠?”
“야유회 때 찍은 사진을 인화했는데, 신부님께서 하나같이 인상을 쓰셨더라고요. 재미없어서 그렇게 인상을 쓰셨나 싶어서요.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제가 왜 이렇게 인상을 썼나 싶었습니다. 정말로 이 분 말씀처럼 야유회에 대한 불만이 있었나?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유회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전날 과음을 해서 속이 많이 불편했던 것 뿐, 단지 저의 개인적인 문제만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인상 쓰고 있는 제 사진을 보고는 상당히 안 좋은 야유회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내가 바꿔봐야 뭘 바꾸겠어!”라는 생각을 간직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직간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나로 인하여 세상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며 말씀하시지요.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이들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는 물론 장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조금만 더 넓게 생각한다면 바로 주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따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거룩한 곳이지요. 따라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하느님의 뜻이 완벽하게 펼쳐지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세상보다는 각종 이기심과 욕심이 판치는 세상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즉, 기도하는 집인 거룩한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더 중요하게 간주되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님과 함께 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적은 의심과 두려움이다. 스스로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든 성취할 수 있다(윌리엄 리글리 2세).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뉴욕의 신체장애자 회관에 적혀 있는 시)
난 부탁했다.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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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온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그러자 환자가 온몸을 찌르며 대답합니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아무래도 제가 죽을병에 걸린 것 같아요.”
한참 이것저것 검진하던 의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손가락 끝이 약간 삐었을 뿐입니다.”
아픈 손가락을 건드리면 온몸이 아픈 듯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즉,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삐딱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온통 삐딱하게 보이고, 또 반대로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세상으로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바라보는 것이 당연히 내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숫자만 봐도 잘 알 수가 있지요. 그 숫자가 1만 3천여 명에 달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거의 3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혹시 이 순간에도 자살을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은 아니겠죠?). 이런 현상은 우리 마음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말씀에 가슴이 아파옵니다. 주님의 성전이 되어야 할 내 마음을 정화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 또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기도하는 집, 즉 주님을 소중히 모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모실 때, 행복도 역시 함께 우리 마음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군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렇게 거대한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음... 저렇게 크니 절대 빗맞을 일은 없겠다.” 긍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마세요.
내적 성전 관리
이승준 신부님
하느님께 찬미와 경배를 드려야 하는 성전이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는 요한 복음에서는 그분의 행동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에 따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요한 2, 17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성전이 본래 가져야 하는 신성함과 경외심을 가지기보다 자신만의 이익과 안위를 얻으려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과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 19) 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작은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얼마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잃으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예수님의 질책을 받게 되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쁜 세상을 살면서도 주님을 잊고 나만의 안위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께 의탁하는 삶, 짧지만 진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이들
원영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나라를 가나 중세 이래 건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문화유산의 풍요로움을 실감할 수 있다. 관광객다운 호기심 충족보다 성지를 순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경외심을 새롭게 하는 은혜로운 경험을 한다. 열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는 그림 같은 마을에 십자가 첨탑을 높이 세운 교회가 긴 세월 동안 이정표이며 구심점이었음을 본다. 큰 도시의 대성당은 너른 광장을 앞에 펼치고 우뚝 솟아 시민들의 자긍심을 북돋우며 위용을 자랑한다. 성화와 조각상 등 예술 작품을 품은 다양한 양식의 건축이 날렵한 현대식 건물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어우러져 있다. 그 고풍스런 자태 속에 위대한 신심 표현이 이어진다.
그런데 막상 육중한 성당에 들어서면 미사시간에도 신자들보다 두리번거리는 관광객이 더 많아 주객이 뒤바뀐다. 성당이 개신교 예배당으로 바뀐 건 그럴 수 있다 싶지만 대부분 도서관이나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현실이다. 심지어 성당 내부를 개조해 나이트클럽으로 탈바꿈한다니 서구 사회의 세속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벗어나고 있는 오늘의 유럽에서는 지난날 찬란하게 꽃피웠던 신심이 역사를 등지고 쇠락하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랄한 꾸짖음을 듣는 유다인들의 폭력적 위선은 이 시대 서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신심의 황폐화보다 증상이 더 심각한 듯하다. 하늘의 선택받은 백성이란 자부심을 가진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팽개치다 못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니! 성전이 거룩하다는 것은 건물의 웅장함이나 장식의 아름다움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 말씀과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모인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등한시하는 세속화의 현장이 될 유혹에서 과연 자유로운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몰아내고 세상 권력으로 지배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칼날 같은 틈을 엿보고 있다. 마음을 열어 예수께 집중하는 일만이 우리가 그분을 지켜드릴 수 있는 길이다. 성전을 가리켜 ‘기도하는 집’이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장소는 어디나 성전이 될 수 있다.
유럽 여행 도중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심성당(Sacre Coeur)을 밤늦게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아름다운 성당 안에서 은은한 촛불 빛을 받으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영혼을 들어 올려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 된 듯 깊이 빠져 있는 모습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참된 기도의 힘으로 성전을 밝히는 신앙인들이 있는 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구원의 사명을 다하게 되리란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쇠약해가는 서방 교회는 외적인 모습일 뿐, 그 너머에 성전을 지키는 이들의 믿음을 하느님은 보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날마다 날마다
장재봉 신부님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그른 길을 그르다고 선포하며 속지 말 것을 당부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그리고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날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었음을 밝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마음에 감동을 받는 무리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도리어 역행하는 무리가 있는 이 아이러니의 소용돌이는 지금 세상에서도 여전합니다.
과연 자신의 자리는 어느 쪽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구성정보가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단답형의 답을 알려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근본이 인간이 느끼는 절망적인 삶의 문제에 있는 까닭이라 싶습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답은 하나 일 수 있다는 뜻이라 짚어봅니다.
모세가 홍해를 만났을 때에는 물이 많아서 문제였지만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는 오히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삶의 들쑥날쑥한 문제이며 고민이 아니겠는지요?
인생이 겪는 숱한 난관들이 미궁처럼 혼미하고 미로처럼 복잡할 수 있지만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고 참을 알고 따를 수 있는 ‘가치의 확신’이 필요한 이유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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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하늘의 천사에게 받아먹은 말씀은 입에서 꿀같이 달콤했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일이 너무 너무 행복하고 달콤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쓰고 아프고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날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주님께서는 쓰고 아프고 괴로운 처지야말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위대한 과정이라 이르십니다.
당시 기득권층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 응징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날마다 날마다 ‘속지 마라’고 이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듣느라고 날마다 날마다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는 우리들이 세상을 지킵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아멘
기도는 곧 성전 정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 저의 말씀 나누기에서 오류가 있었음을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대목이 한 곳 뿐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도 눈물을 흘리셨지요.
정정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론하는 것이 그래서 겁나고 더욱이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참으로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지식상의 오류를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그릇되는 것이겠지요.
성전이어야 할 내가 복마전이 된다면 그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성전(聖殿)과 복마전(伏魔殿).
이것이 갈리는 것은 껍데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속 내용에 의해서입니다.
건물의 재료를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건물의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주님께서는 그 돌들이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 예언하십니다(루카 21,5-7).
재료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써 성전을 잘 지었어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으로 성전이 가득 차 있다면 파괴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성전 청소를 하지 않으면 성전 파괴는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은 성전 청소를 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잡다한 물건들은 깨끗이 치어지고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집,
머무시는 분과 데이트가 이루어지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성전의 정화입니다.
그런 다음 깨끗해진 성전에 주님을 모셔 들임입니다.
날숨, 들숨과 같습니다.
날숨으로 내 안의 모든 악령적인 것을 토해내고 들숨으로 내 안에 성령을 들이키는 것, 이렇게 하느님을 숨 쉬는 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성전정화 사건
홍금표 신부님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중 하나가 선거입니다. 그러나 과거 비자금 정국을 보면 선거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좀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의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가지는 많은 문제가 선거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돈 문제만이 아니라, 결과를 우선하는 가치관의 혼란, 법과 규정 보다는 집단의 힘과 큰 목소리가 우선하는 모든 것들이 선거와 무관치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차단된 상태에서의 선거란 좋은 이상이겠습니다만,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때 우리가 좀 더 발전된 사회를 위해서는 뭔가는 모르지만 이러한 부정적 모습을 차단하면서 선거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대중 투표가 아닌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제도 보완을 검토해야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정화 사건을 전해 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만 들어가는 이스라엘 마당과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방인 마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고 환전상들이 있던 장소는 이방인의 마당이었습니다.
여기서 상인들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환전을 해주었는데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한 점이 있는 제도였습니다.
첫 번째 편리한 점은 순례자들이 먼 곳에서부터 살아있는 제물을 가져 올 필요가 없이 가까운 곳에서 제물을 구입하여 봉헌할 수 있기에 이는 경제적 시간적으로도 매우 편리한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환전도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당시 통용되던 로마은전과 그리스 은전에는 인물상과 황제 숭배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성전세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은전인 세겔로만 성전세를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유일신 신앙을 지켜 갔고, 이러한 결과가 환전이 필요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전과 상행위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두 가지 모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행위와 환전 자체에서 오는 어두움입니다. 환전과 상행위의 이면에는 이익창출이라는 마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익창출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요, 인간 삶의 필수 불가결한 무엇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익이라는 면만이 강조되고 여기에 자제되지 않은 인간의 욕심이 가세할 때 너무나 많은 폐해가 발생합니다. 이익만을 탐하는 자리에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과 신심이 차지할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검은 관계입니다. 성전에서 장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허가받은 자들의 몫입니다.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임대차와 관계하여 검은 돈들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오가게 되고, 또 사제들과 성전관리자들은 성전시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구입한 예물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적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전 시장의 독점을 가져오게 만들고, 검은 공생관계에서 얻어지는 이득은 검은 거래의 당사자들이 나누어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전과 성전시장은 편리와 실용이라는 그럴싸한 포장 뒤에 인간의 물욕과 검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부정부패의 장소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질타하고(마태 21, 13)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배경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상행위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이기심과 간사함에 대한 경고요 동시에 인간이 가지는 끝없는 욕심으로부터 성전을 정화하여 성전이 가지는 첫 의미의 회복,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구원을 체험하는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전의 본 의미를 회복하고 싶은 당신 열정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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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손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자가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를 부릅니다.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손자에게 조용히 말씀하세요.
“얘야,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먹어야 한단다. 밥 먹을 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복이 달아는 거야.”
그리고는 계속해서 조용히 식사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손자도 할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했지요. 식사 후 할머니가 묻습니다.
“그래. 아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이니?”
손자는 아깝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합니다.
“이미 늦었어요. 할머니 국에 파리가 빠졌는데 이미 할머니 뱃속으로 들어갔어요.”
어른은 아이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요. 그러다보니 아이들 앞에서는 항상 자신의 지혜로움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처럼 항상 어린이보다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어른도 한 명의 인간으로 실수할 수 있고, 어리석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지혜가 느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고집만 느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허락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에 흠집이 났지요. 또 한 가지는 장사를 허락함으로써 거둬들였던 물질적인 이익을 더 이상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이 무서워서 차마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없앨 방법만 함께 모여 찾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없앨 방법만 찾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선 이야기처럼 참된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고집만을 내세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와 고집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들지요.
우리 역시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즉, 사람들에게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위와 고집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달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현대에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입니다.
내가 드러내려고 하는 권위와 고집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제는 그 권위와 고집은 조용히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세우고 있는 권위와 고집은 무엇입니까? 조용히 내려놓으세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1986년 미국 최대의 부동산 중개 회사인 웨이처트 부동산에 중개인으로 입사, 1993년 1천만 달러 이상의 계약액을 달성한 신디 로즈메이즐. 그녀는 웨이처트 부동산의 8천여 명의 중개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의 실적을 이뤘다. 그녀의 성공 비결은 바로 자신과 인연을 맺은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아본 사람은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한다.
그녀의 서비스는 고객에게 집을 팔고 난 뒤에 시작된다. 낯선 곳에 이사를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을 위해 그녀는 근처의 병원, 치과, 세탁소 등을 소개해 준다. 아기 봐 줄 사람까지 찾아서 알려줄 만큼 그녀의 서비스는 구체적이며 정확하다. 이런 서비스 덕분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은 곤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그녀를 찾는다. 고객을 단순한 고객 이상의 친구로 만들어 버린 그녀의 서비스에 친구가 된 고객은 또 다른 고객을 앞다퉈 그녀에게 소개한다.
또한 그녀는 매년 성탄절 연휴에 성대한 파티를 열어 고객을 초대해 자신을 기억해 줄 작지만 성의 있는 선물을 준비한다. 그녀 나름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방법인 셈이다.
상품을 파는 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갖고 끊임없이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 역시 최고의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
하느님과의 소통
서현승 신부님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고 할 때, 그?소통 안에는 입으로 하는 말뿐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몸짓, 분위기 등이 포함되곤 합니다. 실상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상대는 말 없는 것 자체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대화를 하지만 서로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머무는 경우도 있을 테고, 혹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상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심전심의 소통 또한 있을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모든 소통의 관계 안에는 서로간의 마음이 열려 있느냐 없느냐에 있겠죠. 하느님과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를 향해 열려 계신 하느님의 마음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도이겠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십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온갖 거래와 모략들을 일거에 제거하시는 예수님의 분노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얼마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기도할 때는 사실 내 청을 아뢰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성전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을 열고 내 삶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럼으로써 알아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그분의 ‘표현’들을 하나씩 내 삶 안에서 깨우쳐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삶의 성전인 것입니다
나의 집
정애경 수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 치시는 모습을 전해 준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는 동안 제물로 바칠 짐승한테 상처가 생기면 상처 나지 않은 짐승과 교환하기 위해, 또는 미처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로마 돈을 성전화폐로 바꾸어야 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환전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익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성소를 지배하게 되었고 성전에서 물건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사장과 짜고 물건을 파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제사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장사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좋은 마음과 선한 동기로 시작한 일을 이해관계로 그르친 적은 없는지, 탐욕에 눈이 멀어 더 큰 욕심을 부린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내 마음의 성전은 어떠한가? 나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사는가? 혹시 내 마음 안에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이기심, 명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이제는 주님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도록 자리바꿈해야겠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신 후 백성들을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며, 악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ㄴ)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성전
최금자
나는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서 구절을 읽으면서 두 성전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나는 바티칸 교황청이 있는 널따란 베드로 광장을 지나 처음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웅장함과 경건함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대리석으로 지은 성전은 긴 세월에도 변함없이 웅장한 자태를 지니며 기나긴 교회사의 사건을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성전 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 예수를 가슴에 안고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피에타 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그리고 성전 여기저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순례객들을 보면서 이곳이야말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최근에 읽은 「나가사키의 노래」에 등장하는 우라카미 성당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방사선과 의사이며 그 자신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백혈병에 걸린 나가이 다카시는 성전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우라카미 성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삼종기도를 바치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원폭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는데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믿음을 지녔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사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성전이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격려하십니다.
교회의 희망
백광현 신부님
1998년 여름 파리 세계 청소년 대회 때 어떤 신문 기자가 한 젊은이에게 “당신은 왜 파리에 갑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젊은이는 “교황님을 만나러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는 “당신의 교황은 저렇게 늙고 지치고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매력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갑니까?” 하고 묻자, 젊은이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갑니다. 교회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를 만나기 위해서 파리에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속화된 세상은 교회를 없애 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내놓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교회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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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저께 저녁부터 어제 낮까지 눈앞에 뵈는 것 없이 살았습니다. ‘눈앞에 뵈는 것이 없다’고 하니까 조금 이상하죠? ‘이 신부가 막무가내로 살았다는건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정말로 눈앞에 뵈는 것이 없었습니다. 글쎄 안경을 이틀 동안 쓸 수가 없었거든요.
이틀 전, 강화지구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눈앞이 너무나 흐리다는 생각이 들었고, 휴지로 안경알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안경 코받침 중의 하나가 똑 하고 부러진 것입니다. 이 코받침이 없다고 해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그냥 썼습니다. 하지만 코받침 없이 안경을 쓰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코가 눌려 아프다보니 잘 보이지 않더라도 안경을 쓰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안경점가서 수리를 했던 어제 저녁때까지 불편한 상태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한쪽의 안경 코받침이 없었을 뿐인데, 너무나도 불편한 생활이었습니다. 안경에서 앞을 보게 하는 렌즈와 귀에 걸을 수 있는 안경다리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가장 작은 부분처럼 보이는 코받침도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네요.
생각해보니 나도 이렇지 않을까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재능과 능력.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능력과 재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장면을 보여줍니다.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을 듣던 당시의 기득권자들이었던 수석 사제, 율법학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이 사람들이 성전에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허락을 했기 때문에 바로 자신들에게 ‘강도’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 말에 기분 좋았을 리가 없겠지요. 이제까지 누구나 다 자신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데,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싫은 소리만을 계속해서 퍼 부으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예뻐 보였을까요? 사랑스럽고, 그런 말씀을 해주는 예수님이 감사했을까요? 아니지요. 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았습니까? 물론 나중에는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방법을 찾았지만, 이 순간에는 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 구절에서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재력과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가장 소외된 사람들만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예수님을 없애지 못하도록 지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을 축소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하지만 나의 이 부족함도 주님을 지키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안경 코받침도 생활하는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설마 나의 이 몸뚱이가 코받침보다는 못한 것은 아니겠지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요? 귀하게 창조된 나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판단력(조용헌)
세계 역사상 대단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던 인물은 로마 천년의 스타였던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가 내렸던 판단의 황금률은 이것이다. “나(카이사르)에게 유리하면서도 로마에도 유리한 일을 나는 결정한다.” 보통 일을 하다 보면 자기에게 유리한 일은 전체에 해가 되기 쉽고, 반대로 전체에 유리한 일은 자기에게 불리한 쪽으로 작용하기 쉽다. 카이사르는 이 두 토끼를 모두 잡았다.
내가 만나본 기업가들 중에서 교보문고를 창립한 대산(大山) 신용호(愼鏞虎·1917~2003)도 두 토끼를 잡는 판단을 내린 사람이다. 신용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독학(獨學)이 그의 학력의 전부였다. 오로지 책이 그의 선생이었다. 고독한 독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정규교육 과정을 대신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게 할 수 있을까? 그의 염원은 책이었다.
1981년 서울시 한복판에 23층의 교보빌딩이 완공되었을 때, 금싸라기 땅인 지하매장에 과연 어떤 점포를 입주시킬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산은 그 자리에 서점을 내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사무실 임대료 수입에 비해 서점을 낸다는 것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대산은 책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으므로 눈앞의 타산을 뛰어넘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눈앞의 구체적인 이익을 포기하고 미래의 추상적인 선(善)을 선택하는 결정은 어려운 판단이다.
그 판단 덕택에 오늘날 광화문 교보문고는 세계적인 서점이 되었다. 대산의 이 결단은 ‘자리이타’(自利利他·자신에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롭다)의 모범을 보여준 판단이었다.
이세형 신부님
형제자매 여러분, 불굴의 의지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제가 인사말에서 불굴의 의지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가슴에 불덩어리를 지니고 사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불덩어리와 인간을 사랑하는 불덩어리입니다. 저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저를 구원하시는 주님인 동시에, 제가 본받으며 살아가야 할 인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소망을 헛되게 만든 영적인 눈멂으로 고생하였습니다. 이미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아 예언자에게 하셨던 말씀이 마음을 두드립니다. “너는 나를 우습게 여겼다..... 너는 등을 돌리고 나를 떠나갔다가 내 손에 맞아 죽게 되었다. 너를 불쌍히 보아 주는 것도 나는 이제 싫증이 났다.”(예레 15,6)
예수님은 곧장 성전으로 들어가셨는데, 성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목적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누리는 특권의 모든 것은 시온산 위에 있는 성전 덕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십니다. 요한복음은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합니다.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쫒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꾸짖으셨다.”(요한 2,15-17)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거래상들과 이 거래를 허용하고 그럼으로써 이익을 챙기는 유대 당국자들은 성전을 “도둑의 소굴”(예레 7,11)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써뿐 아니라 특히 행위로써 예언자들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 날이 오면 다시는 만군의 야훼의 전에 장사꾼이 있지 못하리라.”(즈가 14,21)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그 올바른 자리로 되돌려지고 재물을 섬기는 일이 배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로 인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하느님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 중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신 분이 있습니다. 윤지충(바오로)입니다.
윤지충(바오로)은 당시 전라도 진산군(현재 : 충남 금산군 진산면) 출신의 유학자로서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과는 외사촌 사이였습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였다는 죄로 그의 먼 일가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사형을 받게 되면서 당시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고 조선후기의 역사에, 그리고 한국천주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상의 제사를 금한다는 것은 초기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엄청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유교적인 윤리와 관행을 끊는다는 것은 효도를 가장 기본적인 윤리로 강조하던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대부분 신자들은 제사를 포기하기보다는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대로 윤지충(바오로)에게도 선택을 강요하였습니다. 그에게 신앙을 권유하였던 외사촌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도 이미 교회를 떠났으며, 이승훈과 그 외의 중심인물들도 그러했습니다. 윤지충(바오로)으로서도 천주교 신앙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그도 커다란 갈등에 빠졌었겠지만 그래도 윤지충(바오로)은 신앙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명령대로 부모님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처럼 그가 제사를 폐하고 신앙을 선택한 행위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의 행위였으며, 부모에의 효성을 나라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하였던 당시에는 반역의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윤지충(바오로)는 1791년 음력 10월경에 체포됩니다.
유림에서는 그를 사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파격적 행위가 국가적으로 큰 물의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그들은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있었지만, 정작 윤지충은 조금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윤지충(바오로)는 전라 감사 정민시의 문초에 응하여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천주를 공경하고 높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사대부 집안의 나무로 만든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죽을죄를 얻을지라도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 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사대부가 아닌 서민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도 엄히 금하는 일이 없으며, 가난한 선비가 제사를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물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이며 나라의 금법도 어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윤지충(바오로)이 전통적인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로서도 무척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으로 그가 사형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가족과 친지들과 이웃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하였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 결정 하나로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도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신앙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윤지충(바오로)은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상 세상의 법과 천주의 법이 정면에서 상충될 때 천주의 법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증거자였으며, 그 대가로 그는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제사문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의 가르침 가운데 그 어떤 요인들이 윤지충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을까?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땅에서 만큼은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쉽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해서 윤지충(바오로)처럼 극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기로 결단을 내렸으면서도, 이전의 나와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런 신앙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제사문제가 일단락되었지만, 그 대신 지금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서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과의 결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예로 돈, 명예, 자존심, 이기심, 안락함,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는 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부정한 짓도 서슴지 않는 태도 등을 청산하라고 신앙이 요구한다면 그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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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성지에서 차를 타고서 한 10분 정도 가면 성지 소유의 예쁜 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새벽 묵상 글에서도 썼었던 사제관으로 사용했던 집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 옆집도 얼마 전 성지에서 구입을 했습니다. 앞으로 순례객들의 숙소 및 피정 장소로 사용할 예정이거든요. 그런데 전에 사제관으로 사용했었던 그 집은 일 년 중에서 단 며칠만 사람들이 묵었고 대부분 비워 있었답니다. 반면에 이번에 매입한 옆집은 일 년 내내 어떤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집이 더 낡았을까요?
분명히 사람이 계속 살고 있었으니까 더 낡을 것 같지요? 하지만 우리들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더군요. 글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이 더 낡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의 마당에는 풀도 무성하게 자라고, 화단도 무너지고, 건물의 외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반면에, 그동안 쭉 사람이 살았던 그 집은 모든 것이 다 새 집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똑같은 사람이 이 두 집을 함께 지었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요? 딱 한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는 사람이 살았고, 또 하나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똑같은 집 두 채 중에서 하나는 사람이 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렇지요. 사람이 살아야 집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개가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요. 개집입니다. 그럼 닭이 살면? 닭장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야 할 때, 개집이나 닭장이 아닌 진정한 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제발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인을 내쫓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동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전이 이들 때문에 진정한 효과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장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거룩한 장소가 바로 성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의 장사 덕분(?)에 불의가 넘치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살아야지만 집이 망가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계시는 교회에도 사람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냐 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이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교회 내에 가득해질수록 이 교회는 망가지지 않고,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닌 강도가 들어올 때, 교회 역시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이 교회를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요? 진정한 교회를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집을 잘 가꿉시다.
소중한 오늘을 위하여(박성철, '소중한 오늘을 위하여' 중에서)
세상은 좋은 일을 했다고
꼭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일을 했다고
꼭 나쁜 결과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노력을 했음에도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우리의 삶은 상처 입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전부는 아닙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가 노력한 만큼
꼭 그만큼의
눈에 보이는 결과는 주지 않을지라도
항상 우리에게
그에 합당하는 많은 것들을 줍니다.
세상은
항상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꼭 노력한 그만큼의 성장을
우리에게 약속해 줍니다.
세상이 주는 시련과 실패는 우리를
부유하게는 만들지 않지만
인내와 지혜를 선물합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노력한 그만큼 세상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를 준다고..
만일 오늘을 우리가 성실히 돌본다면
세상은 우리의 내일을 돌볼 것이라고..
신앙인의 정화
이재화 신부님
교구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한 해에 예닐곱 개의 크고 작은 성전을 신축하고 있습니다. 성전 신축을 하려면 예산문제·설계·건축 등 많은 것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지만 담당 신부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가장 필요한 것은 신자들의 신앙과 일치입니다. 곧 건물을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건물을 사용할 교우들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몇몇 본당에서는 성전을 지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갈라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름다운 건물은 훌륭한 건축사와 시공사가 지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건물을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명동성당에서 예비신자들을 담당할 때의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분들께 이 성전이 아름다운 진정한 이유는 100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 기도하고 위로받고 회심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성전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키면서 성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건물의 정화가 아닌 ‘신앙인의 정화’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기준에 맞추어 정화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
강영구 신부님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그대에게
옥봉성당은 근대문화재 15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80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성당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이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꾸며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큰 나무, 사철 피는 꽃들이 성당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온갖 인생풍랑을 겪으면서 자신을 깎고 다듬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른 어르신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분들은 젊거나 싱싱하지는 않지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압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다소곳이 기도하는 어르신들에게서 은총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저는 생기발랄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우리 성당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금은보화보다 고귀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우리 성당의 꽃이자 보배입니다.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고, 강도의 소굴이 기도하는 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강도의 소굴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높이 치켜세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일지라도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욕망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드나들면 그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초라한 천막이지만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드나들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당신이 당신의 성당을 아름다운 성전으로 만듭니다.(一明)
너희가 곧 성전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상혼(商魂)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 바, 요한복음은 성전정화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당일(當日)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 있듯이 루가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원전(原典)에 비해 대폭 축소하여 보도하면서,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서에 없는 ‘성전 안에서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날마다 가르치셨다.’(46a절)고 한다. 루가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의 활동 사건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오셨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옆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베레아, 유다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장도(長途)의 목적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당일(當日), 곧바로 상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루가 2,49)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 집에 예수께서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성화(聖化)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은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웅장한 벽돌과 아름다운 치장으로만 하느님의 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 수십억의 돈을 들여야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살면서도 웅장한 성전건립을 위해 기금을 내고 약정을 한다. 성당이 분가되어 겨울에 떨고 여름에 찌는 비닐하우스나 군대막사 같은 가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신자들이 모이면 그곳은 성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려 모여든 공동체가 곧 하느님의 집이며,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고린 3,1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성전은 우리 공동체가 거룩해질 때 함께 거룩해지는 것이다.
달콤 쌉싸름한 말씀 두루마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한 영화 제목인데, 남녀 간의 사랑이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있기 때문에 흔히 사랑과 음식이 비교될 때 ‘달콤 쌉싸름하다’라는 표현이 많이 쓰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초콜릿을 위한 물처럼(Como agua para chocolate)’이란 소설인데, 초콜릿을 탈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멕시코 시골의 명문 가문 데 라 가르사 집안에는 전통이 하나 있는데, 막내딸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돌보며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의 세 딸 중 막내딸인 티타는 페드로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어머니 엘레나는 이 전통을 내세워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페드로에게 큰딸 로사우라와 결혼하기를 강요합니다. 오로지 막내 딸 티타 곁에 있고 싶어 로사우라와 결혼한 페드로의 마음을 이내 티타도 알게 되지만, 처제와 형부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둘의 관계 때문에 티타는 자신의 마음을 오직 요리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티타는 부글부글 끓는 슬픔 마음을 요리로 표현하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그 티타의 마음처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둘의 관계를 눈치 챈 어머니가 페드로의 가족을 다른 도시로 보내버립니다. 그때 충격을 받은 티타를 의사인 존 브라운이 사랑으로 보살피고 이내 티타의 마음은 존에게 기웁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페드로 가족이 돌아오자 티타는 다시 페드로와 사랑에 빠집니다. 몇 년 후 언니 로사우라가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티타와 페드로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듯 했지만 결국 행복도 잠시, 페드로 또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곧이어 티타는 성냥을 하나씩 씹어 삼키기 시작하고, 티타의 몸에서 타오른 불길에 집과 목장이 전부 타버립니다. 이 화재에서 남은 것은 오직 티타의 요리책뿐이었습니다.
티타는 가문의 전통 안에 살아갑니다. 그 전통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 전통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오로지 불살라버리는 고통을 이겨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또한 우리가 당신 나라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 우리 모든 욕망을 살라 바치는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땅과 바다를 디디고 있는 한 천사의 손에 놓여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그런데 그 천사의 말대로 그것을 삼키니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참으로 ‘말씀’을 먹으면 입에는 달고 큰 깨우침으로 기쁨이 솟아나지만, 정작 속으로 들어가면 그 말씀이 나를 괴롭혀 삶을 변화시키게 만들고 복음적 삶으로써 그 진리를 증거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 그 말씀을 깨달아 참 구원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맞기야 하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나를 괴롭혀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다면 실상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령의 힘으로 일곱 봉인을 떼어낸 참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면 나는 내 뜻대로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 내 안엔 오로지 말씀만이 남게 만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을 잉태하셨을 때도 마니피캇을 부르시며 참으로 기뻐하셨지만 결국 당신 영혼이 예리한 칼에 꿰뚫리는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이제 당신을 지배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뜻에 의해 당신이 십자가에서 성령으로 불살라지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이 남겨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자캐오도 예수님을 받아들여 기쁘기는 하였지만 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남게 되었고,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말씀은 마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그 맛으로 그것을 먹는 사람을 불살라 아프게 만들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봉사팀을 만났는데 그 팀의 리더가 “저는 저희 팀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에게 같은 것을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이 주시는 그 은총으로 쓰라린 삶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생명의 두루마리를 먹어야 합니다. 삶의 쓰라림은 내 삶을 차지할 말씀이 주실 약속된 행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콤 쌉싸름한 말씀 두루마리를 먹은 요한은 모든 인간이 어떻게 말씀으로 구원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나 봅니다. 상사에게 찍히지 말아야 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지 말아야 하고, 여러모로 주위의 시세에 따라야 하는가 봅니다.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그대로 따르자니 어딘지 모르게 손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밀려나는 것 같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기도 하는 등등의 부담이 나를 주님보다는 세상에 물들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우리 믿는 이의 몸이 ‘성령의 성전’(1코린 6,19) 이라면, 기도와 사랑의 사람이어야 할 터인데, 우리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주 하느님의 말씀과 주님을 향한 열정 이외에도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이 오늘 아침 우리를 촉구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우리 시대 성전(聖殿) 정화(淨化)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간 한 교우가 직접 체험한 사건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교적을 옮기려고 가까운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사무실에 들러 일을 마치고 성당 온 김에 성체조배나 하고 가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이 너무 추워 이빨이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왜 이리 추울까, 주변을 살펴보니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유리창문마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단 몇 분도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성당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가 작업복 차림에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한 채 열심히 성당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엄동설한에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시는 초라한 아저씨의 모습을 뵈니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홀로 성당 바닥을 박박 닦던 그분은 바로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우가 약 2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토요일, ‘혹시나 오늘도 그 신부님께서 홀로 청소를 하고 계시면 도와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성당을 찾았는데, 그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 아니 주임 신부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에서 지극정성으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는 그 모습이 그리도 성(聖)스러워 보이더랍니다. 마치도 그 신부님이 성전 마당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장사꾼들 사이에서 홀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처럼 보이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마치 시장 한 복판처럼 시끌벅적한 성전 마당을 둘러보시며 통탄하십니다. 조용하고 경건해야 할 성전 마당이 장사꾼들과 환전꾼들, 고리대금업자들로 빼곡했습니다. 제단에 바쳐질 동물들의 울음소리, 물건을 사고 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크게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질타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으십니다. 갖은 물건들이 쭉 놓여있던 진열대를 둘러엎으십니다. 과격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당신 성전을 정화(淨化)시키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 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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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대학 수학능력평가가 있었습니다. 수능을 치르느라 고생했을 수험생들, 그리고 그 수험생들 못지않게 많은 기도와 염려와 함께 했을 그 가족들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마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기를 수험생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바랄 것입니다. 높은 점수를 맡기를, 점수가 그리 높지 않아도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붙었으면 하는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기쁨이 내게 꼭 필요한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분은 지금의 수능과 달리 수시가 없었던 예전 학력고사 세대입니다. 즉, 학력고사 결과로 대학을 진학하던 시기였지요. 아무튼 학력고사를 보았는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도저히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재수를 결심하고서는 떨어진다는 마음으로 그냥 지원을 했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대학이라고 하는 서울대를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글쎄 미달로 합격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어떠했을까요? 그 분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기뻤지요.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결국 1년을 못 채우고 학교를 스스로 그만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꼭 나를 절망으로 만들 수도, 또 기쁨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늘 좋은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는 믿음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 한 순간을 바라보고서 미래까지도 스스로 결정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로 기울어지게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그러하셨을까요?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장사하는 곳이 되었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면서 하느님의 뜻과는 먼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기도하는 곳에서 장사를 했고, 그것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생활했을까요?
지금의 만족만을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고 있다면 절대로 죄로 기울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한 순간의 만족과 편함을 생각했기 때문에 남을 속이고 등쳐먹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생활이 옳지 못하다면서 막는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없으면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해서 지금의 악한 상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죄로 기울어질 때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내 마음 안에 주님을 없애고, 지금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늘 내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고, 한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보이지 않는 눈이 갑작스레 보이게 되었다는 건 기적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불행 속에서 그 불행을 이겨내고도 남을 만큼의 축복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 진짜 기적이다(소노 아야코).
진짜, 가짜
위조지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쇄술이 너무나 발달해서 위폐를 구별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위폐감별사는 어떻게 위폐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첫 번째 원칙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화려해 보이는 것은 무조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하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이 진짜 지폐는 자연스럽습니다.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진짜 신앙인들은 어떨까요? 절대로 앞에 서서 신앙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낮은 자세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에 반해서 가짜 신앙인들은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데 집중을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사는 모습에 진짜 신앙인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억지로 꾸민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진짜 신앙인일까요? 가짜 신앙인일까요?
독선과 차별과 불의의 벽을 허물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신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처럼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성전은 하느님 백성의 삶의 중심지이지요.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마자 성전 자체이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집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 한 이스라엘의 사회구조 전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로 나뉘어 서로를 분리하고 출입에 제한을 두는 분리와 차별의 장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권위와 신분이 우선시 되어 평등한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힘 있는 사람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경제생활과 정치생활을 좌우하고 있었으며 그 모든 부당한 일을 종교의 가면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성전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 전반이 탐욕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19,46).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거짓된 종교관과 독선과 배타심과 탐욕이 낳은 뒤틀린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바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성전인데도 여전히 성전은 건물과 장소에 국한하여 바라보는 시각이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요 성령의 궁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의 한복판이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성전이지요.
따라서 성전 정화는 건물 청소에 한정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일만은 아니겠지요. 성전정화는 개인 차원, 교회 차원, 사회 차원에서 하느님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있는 차별, 배타심, 독선과 탐욕, 이기심과 같은 벽을 허물어버려야겠지요. 인간이 만들어놓은 신분제도, 계층적 분리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성전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안겨 줄 정의로운 정치적 또는 경제적 구조를 산출하는 자유로운 종교를 생활화 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폐쇄적 태도를 버리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성전이 되어야겠지요.
주님의 성전인 우리도 미움, 분노, 교만, 이기심, 세상재물에 대한 애착과 탐욕, 허영, 사치, 무관심과 냉대, 차별 등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일체의 것들을 청산함으로써 스스로 정화해야겠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지나친 이상 추구, 과거 감정에 대한 집착, 독선 등에서 벗어나야겠지요.
오늘도 나 자신과 이 사회가 독선과 차별을 버리고 사랑으로 서로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성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거짓 권력의 횡포와 부패,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불의와 핍박에 과감히 맞서는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이 참으로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성전정화, -기도와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후 맨먼저 하신 일은 성전정화였습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중심’인 성전이 세상에 속화俗化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전 사제들이 늘 염두에 둬야 할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며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신후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합니다. ‘날마다’란 말마디 또한 ‘오늘’처럼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두가지 예가 생각이 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ㄴ).
“날마다 저희에게 일요할 양식을 주시고,”(루카11,3).
기도와 말씀의 수행은 하루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의 평생 과제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기도의 집이자 말씀의 집입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더불어 보이는 가시적 성전의 정화는 물론 주님의 성전인 우리 역시 정화됩니다. 날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정화와 성화 은총보다 더 고마운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정화를 실행하시는 예수님은 그대로 예언자의 모습이십니다. 이런 성전정화의 용기는 바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천사는 말씀의 두루마리를 요한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천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 사도가 받아 삼켰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라렸다 합니다. 그대로 주님과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 중,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구절과 일맥상통합니다. ‘말씀의 맛’과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의 맛’이요 바로 이것이 참맛이고 이런 참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어 요한에게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음선포의 예언직입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우리를 요한처럼 예언자적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빛과 어둠, 꿀맛과 쓴맛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빛에 어둠이 따르듯 꿀맛같은 삶만 있는게 아니라 쓴맛의 삶도 함께합니다. 쓴맛의 삶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어둠의 영역은 하느님께 맡기고 용기를 내어 복음선포의 예언자적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을 보십시오. 그대로 빛과 어둠이, 꿀맛과 쓴맛이 공존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온 백성은 그분의 꿀맛같은 말씀을 듣느라고 그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빛 속에서 주님의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모습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모습같습니다.
반면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주님의 꿀맛같은 말씀을 듣는 빛의 백성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쓴맛같은 어둠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모든 예언자들이 이런 쓴맛의 어둠의 세력에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진리와 사랑, 정의에 따라 복음선포의 예언자적 삶에 충실하고 항구하였습니다. 사실 이들 어둠의 세력들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에 속합니다. 우리가 복음선포의 예언자적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하느님께서 친히 이 나머지 어둠의 세력들을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의 수행에 충실할 때 저절로 정화되어 깨끗해지고 거룩해 지는 성전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성전인 우리를 정화해 주시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말씀과 성체의 두루마리를 받아 모심으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성전聖殿뿐 아니라 온 세상世上을 끊임없이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기도의 집
윤경재 요셉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5~46)
천주교 교우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스스로 기도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이냐 반문하면, 조리 있고 능숙하게 말하며 듣는 이들에게 공감을 주는 내용이 나와야 훌륭한 기도라 생각한다고 답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오 복음 6장 5~7절에 올바른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요약하면 ‘1,숨어 계신 아버지께 직접 개인적으로 기도하라. 2,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3,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4,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네 가지 원칙에 맞는 기도법이 천주교에서 전해오는데 바로 관상기도입니다. 관상기도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 단계에서 수동적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영적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구송(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네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를 점차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어줍니다. 첫번째 단계인 영적독서는 주님을 만나러 내 생활에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마련하는 단계입니다. 묵상은 우리와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계신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해 오신 육화를 떠올리며, 복음 말씀을 상상하고 추리하는 단계입니다.구송은 하느님을 향한 단순한 열망이 응축된 뒤 솟아난 마음속 울림을 표현합니다. 마지막 관상 단계는 <하느님 안에서 쉬는>단계이고, <애정 어린 응시>, <황홀한 주의>, <앎을 넘어선 앎>의 단계가 됩니다.
종교개혁 이후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 아래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고 하여 개신교 쪽에서 배척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신교 교인들이 드리는 기도는 어느새 말을 유창하게 하고 열정과 감동을 주는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영향이 알 게 모르 게 천주교에도 미쳤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도 귀중한 자료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 8,26~27)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는 바오로 사도의 이 가르침은 참된 기도가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기도에 임하여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성령의 움직임을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지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중죄인이었다고 고백하게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고백할 때 기도의 위력은 성령을 통해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주님을 향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막다른 절벽으로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생기게 합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하느님께 매달릴 힘을 줍니다.
용기는 인간의 성숙에 반드시 필요한 원동력입니다. 용기를 품는 순간 인간이 자기로부터 빠져나가는 출구를 발견하게 되고,용기가 있어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공언하게 하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실존을 변모시켜주는 출발점입니다.
기도를 잊어버릴 때 우리 안에 에고의 우상을 만들게 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무슨 일을 저지르더라도 알량한 죄의식마저 허물어집니다. 그러니 강도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기도의 집은 하느님을 만나러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생긴 필요적 공간입니다. 처음엔 건물을 유지하고 필요한 인원을 거느리고자 헌금을 받았습니다. 속죄와 간구를 바치기 위하여 몰려든 유다인들이 봉헌금과 여행 경비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수적으로 장사꾼이 생겨났습니다. 신앙이 외적 형식으로 기울 때쯤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인간 집단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질병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태가 처음부터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강력한 경고를 성전 정화라는 퍼포먼스를 통하여 교회에게 미리 내려주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제부터인가 저의 이름은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저의 이름인 ‘조재형’은 거의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자분들은 제가 ‘사제’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가지고 저를 ‘사제’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하게 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섬기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 아픈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어제는 수학능력 시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며, 수학능력 시험은 무엇을 평가하는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12년을 배웁니다. 대학교에서도 배우기 때문에 16년을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배우면서 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오직 지식을 배우는 것에 치중해 있습니다. 그것도 수학, 영어, 국어와 같은 주요과목의 비중이 절대적입니다. 역사, 사회, 문화, 음악, 미술, 윤리, 철학과 같은 과목은 배우는 시간도 짧고, 학생들도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식만 배워서는 학원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봉사와 희생, 인내와 절제와 같은 가치를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하고,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난 사람은 똑똑한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 운동을 잘 하는 사람, 음악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난 사람도 중요합니다. 든 사람은 지식을 많이 가진 전문가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들이 이끌어 가고 있기에 든 사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된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그 말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이번에 시험을 본 학생들이 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든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번에 시험을 본 학생들 중에서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성전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가진 능력을 더욱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덧 우리의 마음에는 ‘욕심,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것들이 들어오곤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정화시켜야 하겠습니다.
강도의 소굴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나의 집은 기도 하는 집이라 불릴~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가신 곳과 맨 먼저 하신 일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어 맨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 때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은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성전이 당신과 만나고 당신을 대면하고 마주하는‘기도의 집’이요, 성전에 있다는 것은 당신 면전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전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에,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과 탐욕의 우상을 만나는 장소로 변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이러한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인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성전, 교회, 종교>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 공간에 관한 훈계가 아니라, 당시의 유대교 전반에 대한 비판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성전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사제들과 장사꾼들은 공모해서 성전에서 장사를 하면서 폭리를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해야 할 수익금을 자신들이 가짐으로써 사리사욕을 채웠는데, 그것은 종교를 사유화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느님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폭리, 착취, 사유화, 모독 등이 바로 강도짓입니다.
강도짓을 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성전이라면 그곳은 강도들의 소굴입니다.
물론 다 그랬던 것은 아니고, 착하고 순수한 사제들과 신자들도 있었지만, 당시의 사제들이 대체로 그랬고, 그들이 성전을 그렇게 운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신 일은(루카 19,45) 사실상 종교개혁이었는데, 당시의 사제들과 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개혁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일 방법만 찾았고(루카 19,47), 결국 죽였습니다.
'성전'을 각 개인으로(또는 각 개인의 몸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1코린 3,16 ; 6,19), 그렇더라도 종교의 문제와 각 개인의 문제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 모인 종교라면 그것은 돈만 밝히는 집단이 될 것이고, 돈만 밝히는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 함께 휩쓸린다면 역시 돈만 밝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말씀은 당시의 유대교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에도 심각한 경고가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 사건은 정말로 아름답고 좋았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첫 번째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이었는데, 그 사건은 돈에 대한 탐욕이 원인이었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리스계 유대인들이 매일 받는 양식의 배급이 불공평하다고 히브리계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는 일이 생겼습니다(사도 6,1).
그 일도 역시 초대교회 공동체의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개인의 삶이든 교회 운영에 관한 일이든 간에, 또 돈이든 양식이든 간에 물질적인 것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 저절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죄가 늘어나게 됩니다.
사탄이 주로 하는 일은 사람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죄를 짓도록 사람들을 유혹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것에 마성(魔性)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 자체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니고, 돈에 사탄의 속성이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느냐, 돈의 주인이 되느냐, 는 돈을 사용하는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ㅡ '재물을 섬기지 마라.' ㅡ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재물(돈)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은 사용하지도 말라는 뜻이 아니라, 사용하되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이라든지 교육관 같은 건물들을 신축하거나 수리하거나 증축해야 할 때도 있고, 또 하느님을 위해서 어떤 행사나 사업을 해야 할 때도 있고......
교회를 운영하다 보면 하느님을 위해서 할 일은 많은데 돈은 모자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함정에 빠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도 돈 걱정만 하다가 하느님보다 돈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걷는 입장에 있든지 헌금을 하는 입장에 있든지 간에 헌금에 대한 압박감에 눌려 있다면,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못할 정도로 압박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사탄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2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운영에도 적용됩니다.
사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하면 됩니다.
교회의 일은 하느님의 일이니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은 하느님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의 집'이라는 말을 '아버지께 사랑을 드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집'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성전에서(교회에서, 또는 종교에서) 사랑을 주고받지 않고 돈만 주고받는다면, 그곳을 성전이라고(교회라고, 또는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