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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19년 11월 24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작성자peater|작성시간19.11.24|조회수897 목록 댓글 0


제1독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5,1-3

그 무렵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12-20

형제 여러분, 12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빕니다.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35ㄴ-43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35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며 아버지께 감사드리라고 한다(제2독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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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이 임금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원로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이룬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찬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분이신지 소개한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서 온갖 충만함이 머무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시작이시요 마침이신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죄수 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신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자기 자신도 살리지 못하면서 임금 행세를 한다고 조롱하였지만,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는 예수님께 겸손하게 자비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한 해 동안 걸어온 여정을 돌아보며, 성찰에 필요한 실마리를 성경 말씀에서 찾습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이제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주시며 그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한편 제2독서의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입니다. 성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기에, 성자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해서 창조되었으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빈정대는 유다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는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며 그분을 모독하지만, 다른 이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의 후손, 메시아 임금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무력과 권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만물을 화해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웃과 화해하였습니까?(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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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심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선포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다윗이(제1독서) 당신의 조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기(제2독서)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그러한 만물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십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께서 아무것도 아닌 당신 백성에게 조롱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아주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왕권, 예수님의 통치는 세상의 왕권과는 무엇인가 다른 모습입니다.이와 관련하여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만물의 임금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물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신 것은, 오로지 당신 피로 모든 이의 죄를 대신 기워 갚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십자가는 바로 세상 창조 때부터 진행된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된 장소였습니다.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만물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써 참된 임금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오늘,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예수님의 왕직에 동참합시다. 곧,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하여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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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 영도자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보여 주듯이, 그분의 왕권은 십자가 주위에서 펼쳐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때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는 명패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팻말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예수님의 왕직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즉위식에는 늘 두 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루카 9,28-36), 예수님의 부활 사화에서는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증인으로 등장합니다(루카 24,4). 그러나 골고타의 즉위식에는 단지 천박한 강도 둘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시시한 즉위식에 오르실 왕은 끝까지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초라한 즉위식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적들과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는 직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권을 통해, 뉘우치는 강도를 아버지의 나라로 받아들이시고, 뉘우치지 않는 완강한 적들도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시며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봉사의 직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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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만물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너무나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왜 그러셔야만 했을까요?

우리말 가운데 곰곰이 새겨볼 만한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높’ 자입니다. ‘높’을 거꾸로 보면 ‘푹’이 됩니다. 곧 높아지는 사람은 푹 꺼지게 되고, 푹 아래로 내려간 사람은 높아집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그대로 간직하지 않으시고 ‘푹’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참다운 임금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왕관은 가시관이었으며, 그분의 어의는 알몸이었습니다. 그렇게 푹 내려오시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조물이 그분을 주님이라 외치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한자어 ‘왕’(王)은 본디 하늘(-)과 땅(_)을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신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해마다 전례력의 끝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였고 나치의 출현을 경험했던 터라,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고백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시대적인 과제였을 것입니다. 참된 통치는 무력이 아니라 사랑임을, 참된 권력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데에서 오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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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께서 죄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사람으로 오신 참하느님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한 줌의 먼지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순순히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사랑의 의미가 빛나는 순간입니다.

지도자들과 군사들이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며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사람들이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고 빈정거립니다. 지도자들이나 지식인들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데, 어찌하여 교회가 그 말씀을 어기느냐?”고 조롱합니다. 몇몇 힘 있는 신자들도 “교회는 교회답게 조용히 기도나 할 것이지.” 하면서 세상 편을 듭니다. 그래서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짊어져야 할 짐이 버겁습니다.

그렇지만 그 짐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살리는 생명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짐을 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빈정거림이나 조롱 따위는 들리지 않습니다. 왕이신 주님의 음성만이 들릴 뿐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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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합니다. 왕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역사에는 그런 왕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그러한 왕의 한 사람으로 기억하자는 것일까요? “이자가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라면 자신도 구해 보라지.” 반대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버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능력과 민중들의 추종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께서 아무런 저항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적의 힘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다니.’ 그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의 위대한 죽음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과 자신을 비웃던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니 인류 전체를 위하여 죽음의 길을 스스로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우리는 왕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니 그분을 따르려면 누군가를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살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묵상해야 할 과제입니다.



지난여름에도 여지없이 태풍이 불었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가을까지도 태풍이 올라와서 농가에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태풍이 몰고 오는 많은 비도 문제지만, 함께 불어오는 거센 바람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지난가을에 올라온 태풍 링링과 타파 때문에 제가 있는 성지에서도 꽤 피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나무가 잘려나가고 야외 벽면에 붙어 있던 ‘최후의 만찬’ 부조가 바람에 떨어져 나가서 누가 다칠 뻔하기도 했습니다.


뉴스를 보면 간판이 떨어지고, 담과 펜스가 넘어지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제주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돌담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난가을 태풍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제주도이지만, 이 돌담이 넘어진 곳은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냥 규칙적으로 쌓은 돌담 같은데 왜 그 강한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돌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돌 사이를 일부러 메우지 않았는데 이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에 세찬 바람에도 돌담이 통째로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한 사람보다는 부족한 듯 빈틈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미와 매력을 더 느끼게 됩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왜 완벽한 모습의 하느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향해 따끔한 채찍을 휘두르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정치 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이 세상의 임금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나약한 모습으로 죽음에 이르십니다. 이로써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세상의 눈으로 보면 패배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혁명을 일으키러 왔다가 십자가형을 당한 실패자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심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 주님을 세상의 눈으로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영적인 눈으로 우리에게 큰 사랑으로 임금이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낙원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조지 엘리엇).


하느님 체험.

사막의 교부들이 대단함을 성지순례 때 사막 체험을 하고 나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 주거지역에서 멀리 떨어져서 철저하게 외로울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왜 이러한 사막이나 광야로 떠났을까요? ‘범죄의 기회를 줄이려는 것.’이라고 어떤 사막의 교부가 적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을 기억하고, 지속해서 기도에 전념하게 되어 이 세상에서 가능한 천사의 생활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막의 교부들 글을 보면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묵상, 그 묵상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희생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종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분을 만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사막으로 떠나야 합니다. 단순히 중동지역의 사막으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의 기회를 줄일 수 있는 곳,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잠시 끊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도 없이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닐까요?




감사하면 가족이고 감사하지 않으면 남남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이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 실험이란 어떤 마을의 일정한 구역에 있는 각 집에 매일 100달러씩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누어 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현관에 100달러를 놓고 나오는 그를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 날에도 거의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직접 사용해 본 결과 진짜 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동네는 날마다 100달러씩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두 번째 주쯤 되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은 현관입구에까지 직접 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언제쯤 올 것인가 하고 평소에 그가 오던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또 이웃마을에까지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세 번째 주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넷째주가 되었을 때쯤은 매일 100달러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한이 끝나는 한 달의 맨 마지막 날에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 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현관까지 나와서 성난 목소리로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혹은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왜 오늘은 내 돈 100달러를 안 주는 겁니까?”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출처: ‘감사를 모르는 현대인’, bwkw0712님의 블로그]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만 원, 이만 원을 주다가 나중엔 수십만 원씩, 그 다음엔 수백만 원씩을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야 하는 것처럼 청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만 원에 감사하다가 나중엔 수십만 원을 주어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으면 마치 저의 탓을 할 것 같은 말투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계속 가진 것을 내어주어야 할까요? 아니면 관계를 조금 끊어보는 편이 나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응답은 만 원을 주어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는 조금 배고프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유익일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은 받다보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급기야 그것을 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잊게 됩니다.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하는 많은 경우가 자녀와 부모 사이입니다. 기껏 키워놨더니 해 준 것이 뭐냐며 부모를 대상으로 보험금을 타먹으려 일부로 상해를 입히는 자녀들도 뉴스에 나옵니다. 그런 자녀에게 부모는 돈이 있어도 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면 하느님은 우리를 보는 대신 아드님의 십자가를 보며 죄가 다 보속되었음을 되새기십니다.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죽이셨으면 주님은 할 것은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청하며 안 들어주면 기분나빠하려는 자세를 갖는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기도는 절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내 안에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가 드러 납니다. 무언가를 들어주시면 감사 하겠다는 사람은 그 청하는 대상에게 이전에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상대를 이미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남남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미리 남남으로 여기며 무엇을 청하니 그 청하는 것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청하는 사람이 부모라고 여기면 내가 지금 청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원망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받게 됩니다.


오늘은 하느님을 대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의 대표적인 두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이 말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말일까요? 메시아임을 십자가에서 이미 증명하고 있는데도 그는 자신을 구원해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겠다고 빈정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천만 원만 준다면 부모로 인정해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죄수 하나는 위 사람을 꾸짖으며 이렇게 청합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왜 하느님이 두려울까요? 이미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에 합당 하게 살지 못해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셔야 할 것을 다 해주셨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자체가 그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십자가에 달린 분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며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부모로, 혹은 좋은 임금으로 여기는 이들의 왕이 되어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치 증명이라도 해보라는 듯이 이것저것 청하는 이들을 당신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은 지내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일지 않는 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스스로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그분은 이제 우리의 믿음에 따라 심판하시는 ‘왕’으로 서 계실 것입니다. 그동안 나에게 부족하게 해 주어서 그분을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그분의 엄위 앞에서 통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분을 임금으로 미리 알아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부터 회복하도록 합시다. 그 방법은 그분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십자가를 묵상하면 됩니다. 십자가 바라보며 감사가 안 나오면 내가 먼저 그분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있음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반면 언제나 감사할 수 있다면 그분을 왕으로 영접한 이미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추사는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그림과 글은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다산은 ‘목민심서’와 같은 책을 남겨주었습니다. 그의 책은 지금 시대에도 삶의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추사와 다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유배’를 당했습니다. 유배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서 외롭게 지내는 생활입니다. 유배는 돌아올 기약이 없는 형벌입니다. 추사와 다산은 오랜 유배 생활을 통해서 원망과 분노를 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학문의 깊이를 더 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처음으로 이룩하였습니다. IMF의 경제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이루었고, 개성공단을 열었고,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였습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흑인과 백인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흑인을 억압한 백인은 용서를 청하였고, 상처받았던 흑인은 백인을 포용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감옥’에 있었습니다. 부당한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감옥은 두 사람의 몸은 가둘 수 있었지만, 감옥에서 두 사람은 책을 읽었고,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34주일이며,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나병 환자의 몸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고, 죽었던 소녀도 살리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면 한자리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광과 권능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올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에게 고난을 받아, 죽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걸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3번이나 넘어지는 고통을 참으셨고, 가시관에 피를 흘리셨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참된 행복을 느꼈고, 신분과 계급의 벽에 막혀서 답답하던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몸이 아픈 병자들도, 장애인으로 태어나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도,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된 것도, 멸시를 받던 것도,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삶이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라는 말, 친구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가주라는 말,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는 말,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은 바로 파격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생각합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신앙인들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지금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늬만 교회요, 겉모습만 신자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 이상 더 명확한 말도 없습니다.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므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해를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 한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드리는 ‘우도의 기도’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 우리의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임금이시다.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고 스승이시다. 당신께서 삶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당신의 신원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그 결정체가 성체성사이다. 매일미사에서 당신의 전 존재를 생명의 밥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비천한 존재를 품격높은 존재로 이끌어 드높여 주신 분, 잘 못 살 때라도 기다려 주시고 함께하시고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용서해 주시고 드높여 주시는 분, 오늘 그 예수님을 만난다.


언제나 사랑하신 분, 그런대도 제대로 살지 못한 미안함이지만 오늘 따라 당신께 고마움을 드리고 싶고 감사함으로 예를 표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나도 주님 닮아 산다고 다짐하고 세례받고 따라 나섰다. 그런데......오늘 십자가 위에서 맨 끝자락에선 사람 셋을 본다. 우리를 살리고자 오신 십자가의 예수님, 그리고 죄인으로 매달린 좌도와 우도가 나란히 매달려 있다. 강도짓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좌도가 죽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빈정거렸다. 그러나 우도는 달랐다. 자기 죄를 뉘우치며 “선생님의 나라에 저도 함께 들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어쩌면 이 대축일의 지내는 의미는 성체성사에 담아준 ‘왕직’의 고귀함을 제대로 살지 못한 부족함을 ‘우도의 기도’로 예수님께 드려야 하지 않을까?(루카23,35ㄴ-43참조)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당신의 삶에서 왕 또는 여왕으로 모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의 마음 문을 열게 할 ‘비밀단어’를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왕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당연히 금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있는 모습이겠지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힌 왕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지도자들 및 군사들 그리고 십자가에 함께 매달렸던 죄수조차도 사형선고를 받고, 굴욕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분의 처참한 모습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그분이 왕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34절)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말은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의 암호를 푸는 비밀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는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증명하십니다(마태 26,28 참조).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화해를 이루셨고 인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의 소통을 이미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다른 죄수의 경우처럼, 구원이 당신의 것이 되게 하려면 필요한 몇 가지 단계가 요구됩니다. 이 죄수는 아버지께 인간을 위해 중재하시는 그분의 모습과 사형집행인들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서 죄 없이 희생되신 것과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는“당신이 왕으로 오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42절 참조)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즉, 그의 구원이 이왕을 통해 곧바로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의 기쁜 소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용서를 통해 항상 언제 어디서나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보셨듯이(39-43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다 하는 순간까지 아무런 대가 없이 인류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구원이 당신 삶 속에서 현실화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1. 당신을 위한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당신이 그분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분명하게 그분께 필요한 것을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실행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당신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십자가에서 온누리의 왕이신 구원의 그리스도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암호를 푸는 비밀 문장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 당신이 왕으로 오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예수님, 당신이 왕으로 오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42절 참조). 아멘.




<주님이신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두 죄수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했고, 희망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선생님의 나라’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 죄수는 예수님의 죽음을 죽음으로만 보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로(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시는 일로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자신도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네가 청한 대로 내가 너를 하느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오늘’이라는 말은 ‘곧바로’ 라는 뜻입니다.

‘나와 함께’ 라는 말씀은 단순히 ‘동행’만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그 죄수가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음을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죄수를 하느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은, 당신의 권한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5-36).”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그 죄수가 하느님의 나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자격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고, 당신의 권한으로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그 자비와 권한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서 경축하는 것은, 만물의 주님이시며, 시간의 주님이신 분 앞에서 좀 더 겸손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시간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잘난 체 할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수명이 짧다고 해서 원망할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허락받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매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살기를 바라셔서 남은 시간을 안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에 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여기서 ‘도리어’는 ‘그러므로’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는 “주님 뜻에 합당하게”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해 주지 않으시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존재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 ‘허무’는 그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허무하게 끝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리고 가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착한 목자로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죽은 다음에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라는 용어 속에 들어 있는 ‘왕’이라는 말 때문에 세속 통치자들의 행태를 연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의 통치권은 세속 통치자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통치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27).

예수님의 통치권은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권력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본받아서 서로 섬기기를 바라셨습니다(요한 13,14).

신앙인의 공동체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는 공동체, 즉 모두가 형제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군림하고 권세를 부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주님의 나라로 들어갈 자격을 잃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26).

이 가르침은 교회 공동체 안에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온 세상 모든 곳에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세속의 권력과 권한도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권력은 허무하게 끝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탄핵 당하지 않으려면, 살아 있는 동안 진심으로 회개하고 참된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조롱받지 않으시려면 예수님가르침 제대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저주 조롱 모독 빈정댐 야유 비웃음 흉보기 등 나쁜 단어들 많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얼굴표정 떠올리면 흉측하게 찡그린 모습이죠.

예수님은 골고타 언덕 군중 앞에서 최고 왕따로 몰렸던 분이셨습니다.


하늘주인 창조주하느님의 말씀님을 군중이 놀려대던 십자가처형 현장!

지금은 세상에 엄청 널리 퍼져 생활에 깊이 파고든 평화의 십자가 뜻! 

지금은 십자가 보며 빈정대고 야유할 수 없는 사랑의 희생 승리의 뜻!


승리의 십자가 앞세우며 남용 우쭐 거리고 못된 짓하면 조롱해야지요.

십자가 몰라 조롱받지 않으시려면 예수님가르침 제대로 배워야합니다. 




그리스도 왕 축일(다해): 교회 달력으로 오늘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1독서(2사무 5,1-3)는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왕위계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 사울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친다는 명분으로 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온갖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1사무 13,1-16). 그러자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습니다.”(1사무 16,14) 급기야 아들인 요나탄까지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음을 알게 됩니다(1사무 10,10-31).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도 사울에게서 떠나 다윗으로 옮아갑니다.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2사무 3,6)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사울 집안에서 왕권을 거두어 다윗에게 주시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으로 세워주실 것(2사무 3,10)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추대되는 사람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어야 한다는 율법(신명 17,15)에 따라서 원로들은 자신들의 두 번째 임금이 될 다윗을 찾아가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다윗에게서 두려움을 느꼈지만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1사무 18,15-16).

그래서 원로들은 헤브론에 있던(2사무 3,2-5) 다윗을 찾아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어줄 것을 청하고, 다윗은 그 청원에 따라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원로들에 의해 기름이 부어져 이스라엘의 임금이 됩니다. 성경저자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지만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지 않고, 원로들과 맺었다고 하면서 왕권은 백성들에게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사무엘 하권의 저자는 중요한 숫자를 제시합니다. 다윗이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해 동안 다스렸는데,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서른 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합니다(2사무 5,4-5). 서른 살에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서른세 살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임금으로서의 삶을 미리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23,35ㄴ-43)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렸고, 예수님을 골고타로 끌고 와 십자가에 못을 박은 군인들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조롱하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조롱하는 명패를 붙여놓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 가운데 하나도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빈정대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을 갖고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루카 23,35ㄱ). 이들은 한결같이 아직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빈정대고 조롱하고 모독하는 내용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만 생각했는데 자기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의 궤 앞에서 절반은 그리짐 산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갈라섰을 때 여호수아가 축복과 저주에 관한 율법을 읽어주었던 것처럼(여호 8,33-34)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죄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엇갈린 운명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을 모독한 죄수를 꾸짖은 다른 죄인은 마치 이성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이성의 법을(로마 7,23), 그리스도와 육신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필리 1,23)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유다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모독한 죄수는 그 옛날 이스라엘 원로들이 사울 왕에게 기대했다가 다윗을 찾아갔듯이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정치적인 왕의 역할을 기대했었지만 그렇게 해주지 않았음에 “이 자”라고 부르면서 빈정대고, 조롱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벌여놓은 놀이판에서 예수님께서 춤을 춰주시기를 기대했었으나, 무기력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춤을 추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고 이스라엘 원로들이 다윗을 찾아간 것처럼 이들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이(바라빠)를 선택하려는(루카 23,18-19)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랬듯이, 예수님도 역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임금이십니다. 정치적인 왕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 나라의 임금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택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모독한 죄수를 꾸짖은 다른 죄수는 예수님을 옹호하면서 예수님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옹호하는 죄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가 아브라함 곁에 있었다고(루카 16,22) 하는 “낙원”(2코린 12,4; 묵시 2,7)이라는 말을 통하여 죽은 뒤에 자리하게 될 죄인과 의로운 이들 사이의 거리를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생명나무가 있는(창세 2,9) 기쁨과 즐거움의 동산(창세 2,15)으로 당신을 지지한 죄수를 초대하십니다. 이 말은 죽음 너머에 있는 행복한 삶을 연상케 하며, 비록 이 세상에서는 임금으로 죽으시지만, 예수님을 낙원을 지배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나드는 행복의 나라에 대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그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서는 행복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구원의 조건은 “죽음의 행실에서 돌아서는 회개”(히브 6,1)와 예수님을 “의로운 분”(루카 23,47)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콜로 1,12-20)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었음에 드리는 감사기도와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미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었음에 드리는 감사기도(12-14)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빼내시고, 구해내서, 거룩한 처소로 이끄셨다(탈출 6,6; 15,13)는 탈출기의 형식에 맞춰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어둠의 권세(죽음)에서 구해내셔서 빛(생명: 요한 8,12; 11,9)의 나라에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셨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시면서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기(에페 1,7) 때문에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두 번째 부분(15-17; 18-20)은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특성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된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모든 권력을 가지고 계신 임금이시고, 온갖 충만함을 지니고 계신 구세주이십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첫 사람이시고,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신 분이시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졌던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왕권을 훨씬 초월하여 모든 권한을 가지고 우주와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의 임금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3년 동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예루살렘에서 모든 이들의 임금으로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우주를 다스릴 힘을 가지고 계셨으나 권력과 권세로써가 아니라 인간들의 장난에 의해 드러나는 무기력함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왕권을 드러내시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반한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당신을 조롱하는 몇몇 인간들이 저지른 장난으로 말미암아 피를 흘리셨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충만함으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온갖 충만함에 머무르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일찍 깨달은 초기교회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당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빈정거림과 조롱과 모독을 다 견뎌내시고도 인간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으신,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임금이십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인간이시면서 인간을 초월하여 모든 권한을 가지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영원한 구원의 임금이십니다. 이런 분을 우리의 임금으로 모신다면 그분께서 나를 다스리시도록, 그분의 뜻대로 하시도록 나를 그분께 내드려야 하는데 거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우리가 어둠의 권세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곳인 빛의 나라로 옮겨 갈 수 있으려면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의 임금이신 주님과 같은 생각, 같은 행동, 그리고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다해) 루카 23,35ㄴ-43; ’19/11/24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미사의 영성 17 파견

그냥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하나 먹고 사는, 거기에 내 일생의 기쁨과 희망과 의미를 두려고, 아니 달리 말한다면 좀 더 나은 현세적인 삶을 위해 신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참여하라고 부르신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미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나를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따로 부르셔서 무슨 일을 맡기셨습니까? 그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을 받은 후 대담하고 열정적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은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로 하느님 오른 쪽에 앉아 계시며, 마지막 날 우리를 구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라고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복음을 믿고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 교회를 이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체제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기존 종교와 사상에서 정치적인 권위와 권력에 절대권을 부여하여 사회를 통치하고 질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체제유지를 위한 종교적 처신을 배척함으로써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사랑의 희생봉사를 함으로써,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와 시기를 사서 박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박해를 받아들여 순교하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교우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교하면 주님처럼 하늘나라에 올라 영생을 누리는 것이요, 부활하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꺼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을 붉은 순교자라고도 합니다. 한편 순교는 못했더라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관용령으로 종교 자유를 얻기까지 로마의 지하 무덤(카타꼼)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생애를 마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푸른 순교자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주님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박해시기가 끝나자 순교에 이르는 박해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젠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전보다 더 활발히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진지하고 철두철미하게 살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은 수도생활이라는 형태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수도자들을 흰 순교자라고도 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인류를 구원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교회에 순명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을 포기하시고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오신 주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또한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나라만을 순수히 택하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신 주님처럼 온전히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교회만을 택함으로써 정결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기보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사람들이 서로를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적대시하게 되어 결국은 전쟁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참으로 신자들을 세상에서 끌어내 교회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보다는, 사회자체를 복음의 하느님 나라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곧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이루며 사는 데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생활을 양심의 순교자, 말씀의 증거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이렇게 복음을 사는 양심의 순교자들이 마지막날 붉은 순교자도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103위 순교성인들과 124위 순교복자들의 후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 왔습니다. 그러한 피의 밭 위에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자라났고, 오늘 우리 사회 안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교회를 물려 줄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순교신앙을 오늘 우리의 삶 속으로 되살려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는 바와 어긋나고 반대되는 관습과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변화시키면서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심고 가꾸어 나가야겠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복음화를 현대 세계에 맞추어 재확인하는 ‘현대의 복음선교’ 17항에서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성사와 다른 성사들을 베푸는 것’을 복음화라고 규정하려 하였을 수 있습니다.”라고 밝히며, 이것이 복음화의 의미를 빈약하게 하고 나아가 왜곡할 위험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8항에서 복음화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화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내적 변화이며, 한마디로 표현하여, 교회가 복음화한다는 말은, 교회가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거룩한 힘을 통하여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의 활동, 그들의 삶과 구체적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복음화를 설명하는 가장 알맞은 표현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사전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것이요, 주님을 통해 생명을 얻고자 함이요.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복음을 우리가 머물러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선포하고 이루고자 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미사는 바로 이 파견을 위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시키도록 파견하기 위해! 그리고 그 파견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만들어 주신 그 행복과 구원의 모습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에 성체로 봉헌합니다.


미사의 각 부분을 성경에서 찾아 그 의미와 영성을 찾아본 이 강론을 마치며,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기리고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숨쉬실 수 있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드러나실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천상낙원'(루카 23장 35ㄴ~43)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주님 나라에 들어가실때 저를 기억 ᆢ'

모두가 나를 잊어도 주님께서 알아주시면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기억해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어쩔수 없이 맞이하는 죽음 앞에서 당당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지만 보통 인간은 죽음의 선고를 받으면 충격을 받고 상실- 반항- 원망의 단계를 거쳐 순응의 모습으로 주님 품에 안깁니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하는 사람의 죽음은 다릅니다.

저희 부모님은 매일 선종기도를 바치며 잘 죽고 싶다는 표현을 자주 하셨지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편히 눈 감으신 아버지!

세계 여행한 듯 행복하다고 하시며 주무시다 가신 어머니!'

주님만 바라고 기대어 살면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나를 부르시는 주님 음성 듣고 천상낙원으로 들어갑니다.

'주님! 저를 저를 기억해주소서.'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오직 하느님께만 무릎 꿇으시는

참된 겸손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즐기는 이들을 내치시고

마침내 죽음마저 파멸시킬

참된 생명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고

지친 이들을 쉬게 하시는

참된 섬김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헐벗은 이들을 입히시고

외로운 이들을 감싸 안는

참된 나눔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짓눌린 이들을 일으키시고

흩어진 이들을 모으시는

참된 화해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에게 먹히시고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참된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어

모든 피조물의 더불어함께 이루신

참된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강한 이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참된 정의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권력과 권능에는 당당하시고

여린 이들에게는 한없이 온유하신

참된 자비의 왕이십니다.




성경으로 감도된 신앙인 삶과 교회의 사명

황하철 안드레아 신부님

전례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예수님께서 온 누리의 참 임금이심을 이렇게 선포하며,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으려 합니다. 

그분께서는 군림하러 오신 왕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를 지고 봉사하신 겸손한 임금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이 그 일들을 기억하며 전하는 성경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기를 권하고자 이번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선포합니다.


성서 주간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사람(창세 1,26-27 참조)들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을 만나고, 그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 나라(天國)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성서 주간을 맞아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1테살 2,13 참조)을 전하는 “성경으로 감도된 신앙인 삶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요한 1,14 참조), 사람이 되신 그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 여전히 신앙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성경으로 감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태생 소경이 앞을 보고, 죽은 소녀가 되살아나고, 나병 환자의 몸이 깨끗이 나았듯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를 치유하시고 희망을 일깨워 주시어 주님 뜻에 맞갖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단순히 이해하려는 태도보다 그 말씀을 사랑하고 맞아들여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성경말씀은 머리만이 아니라 온 인격으로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체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조롱만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임을 전하며 끝을 맺습니다. 

곧,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조롱하기보다 회개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깨닫도록 안내하며,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만나는 십자가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 한 해 나는 어떤 예수님을 기다렸고 만났는지?’, 

‘그 가운데 내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성찰해 봅시다. 

십자가는 나의 내밀한 모습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으로 안내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나혜선 요셉피나(생활성가 가수, 금속공예가)

몇 해 전, 제 바닥이 어디인지 낱낱이 확인하게 되면서 인생 최대 위기를 겪고 있을 때, 강화도의 빼곡한 밤하늘별들 사이에서 지는 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나도 저렇게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으로 품어야 할 가족에게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내고, 함께하는 공동체에 뾰족하게 굴고 말았습니다. 굽이굽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골짜기에 갇혀 힘에 부치는 순간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때 자신이 가진 진짜 모습을 확인하게 되면서 무릎은 꺾이고 좌절하게 되는 듯싶습니다. 

그 순간에 제 삶의 방향에 대해 뒤돌아 볼 신앙의 깊이가 있었더라면, 하느님의 값진 초대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여전히 저는 그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 길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홀로 견딜힘이 부족할 때에는 복음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벗들을 만나게 해 주십사 청합니다. 

그렇게 저를 하느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점검해 나아가다 보면 간유리처럼 뿌옇더라도 그 방향만큼은 분명히 알게 됩니다. 

또한 제가 여러 시련을 겪는 동안 어떠한 순간에도 함께 있어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들을 통해 저와 함께 걸어주신 성령께서 제 안에 늘 뜨겁게 샘솟는 은총을 주셨음을 하느님께서는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누구든 고통스러운 무엇과 마주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별이라고 ‘루이사 피카레타’를 통해 하셨던 성모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제가 심어 놓은 하늘의 별들 중에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심어놓은 별은 몇 개쯤 될까요? 이 별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좋은 것들만 모여야 가능한 것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허투루 보낸 고통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사랑과 고통은 공존의 영역에 함께 있어야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 됩니다. 

저는 이제 하늘에 수많은 별을 올려다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헤아릴 수 없는 별들 중에 ‘내가 심어 놓은 고통은 몇 개쯤 될까, 

내가 심어 놓은 기쁨은 몇 개쯤 될까, 내가 심어 놓은 감사는 몇 개쯤 될까…?’


이 모든 것들 안에 놀랍도록 빛나는 하느님의 섭리는 그 무리 안에 제가 심어놓은 희로애락들도 함께 빛나게 해주고 계셨습니다.


오늘 저는 비어있는 별자리를 하나 발견합니다. 

그 자리에 새로 심길 누군가의 고통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치유되어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 사이에서 빛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길잡이 별’처럼, 그 자리에 심길 누군가의 ‘별’도 하느님께 다가서는 ‘길잡이 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오늘은 교회 달력으로 다해 연중 34주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세 부류의 인물들을 만난다. 지도자들, 군인들, 죄수들이다.


누가 자신을 반대하고 거부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혹시 있을 하느님의 축복일 수 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십자가상에 까지 반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발견할 수 있기를 여러분 모두를 초대한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지상에서 주님을 반대하는 마지막 유혹이다.


1. 지도자들: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루카 23, 35)


2. 군사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 37)


3. 죄수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루카 23, 39)


지도자와 군인들, 죄수가 말한 요구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과 우리를 구원할까?” 우리도 궁금하다! 주님은 자기 시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시간(kairos)에 의해서만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 그 지점’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주님께서 매달려 계신 십자가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된다. 나를 살리지 못할 때 상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구원의 원리가 쭉 시대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검증되고 실현 되 온 것이 하느님의 구세사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도 자신만을 구할 수 없지만, 아무리 망가진 사람이라도 상대방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둑에게 단순하게 말씀하신다. 곧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 주님은 자신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성찰한 다른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며 너, 나, 오늘, 이렇게 지금을 말씀한다. 다른 죄수는 ‘낙원에 들어가실 때, 자신을 기억“해달라며 그럴 수 있냐고 질문한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내가 질문하는 자신으로 살아가는 독립된 주체적인 신앙을 살아가도록 초대한다.


착한 죄수의 낙원 입성 태도는 다음의 두 가지 인듯 하다.


성찰: 곰곰이 생각하는 것, 참회: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만민의 왕 그리스도. -배움, 섬김, 비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도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입니다. 어제도 어느 본당의 예비자 교리 봉사자들이 수도원을 찾아 강의를 듣고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법을 배우며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연중 마지막 34주일이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참 명칭이 길지만 은혜롭습니다.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참 왕이란 고백입니다.


무신론과 세속주의가 만연하던 시기, 1925년 비오 11세에 제정되어 10월 마지막 주일에 지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전례를 개혁한 교회는 축일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1970년부터 마지막 주일로 옮겨 이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의 중심이고 시작이자 마침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 후렴의 고백은 얼마나 장엄하고 흥겨웠던지요!


-“주께서 다윗의 옥좌에 앉아 계시고, 그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시라.”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무엘기 하권의 다윗 임금의 등극시 말씀은,-“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장차 이뤄질 우리의 영원한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의 출현을 예시하고 있고 마침내 이루어져 우리는 다윗의 옥좌에 앉아 계신 착한 목자 그리스도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두편의 후렴 역시 은혜롭습니다.


-“예수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요, 모든 왕들이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에 영원히 있으소서”-


또 우리 수도자들은 초대송 후렴을 장엄하게 노래하면서 그리스도 왕 대축일 새날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더불어 한결같이 그리스도 왕을 섬기는 두 자매가 생각납니다. 1년 훨씬 넘어 매달 마지막 주말엔 꼭 수도원을 방문해 저를 통해 그리스도 왕께 큰 절을 올리며 감사드린후 고백성사를 보는 자매들입니다. 저 역시 주님을 대신해 맞절을 하며 이분들을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은 바로 오늘 감사송 고백에서 그 정체가 환히 드러납니다. 참 아름답고 깊어 마음 깊이 담아두고 싶은 내용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외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위에서, 티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고, 만물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나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바로 우리의 왕 그리스도는 이런 분이며 우리가 속한 하느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 빛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오늘 지금 여기 아드님의 나라, 빛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을 모신 우리는 얼마나 축복 받은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요, 우리 삶의 존재이유이자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행복기도에서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당신은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참으로 닮아야 할 영원한 삶의 모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여 예닮의 여정중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세 측면에 걸쳐 소개하고 권고합니다.


첫째, 배우는 삶입니다.

배움의 왕, 말씀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생학인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생명과 빛의 말씀은 그대로 주님의 현존입니다.


하여 연중 마지막 주간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라 선물처럼 주어진 성서주간입니다. 성서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의 식이자 약인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없이는 영성도 없습니다. 존엄하고 품위있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영적성장과 성숙도 불가능합니다.


오늘 제2독서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가 말씀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고 깊은지요.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수요일 저녁성무일도시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바로 이런 찬미가 말씀이 우리 영혼을 참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온 우주와 인류 역사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세상 지식에 정통해도 이런 주님을 모른다면 그것은 헛 공부요,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입니다.


둘째, 섬기는 삶입니다.

섬김의 왕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섬김의 사랑입니다. 섬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섬김의 배움터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또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섬김의 사랑 한가운데에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섬김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우리의 영도자가 되어 친히 우리를 섬기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평화와 화해를 선물하신 섬김의 왕이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비우는 삶입니다.

비움의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비움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예수님과의 일치도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움의 절정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역설적으로 비움의 왕,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모두가 그분을 모독합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그리스도 왕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로지 처형 당한 한 죄수만이 눈이 열려 주님을 고백하고 구원의 약속을 받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비움의 왕으로 고백하고 비움의 겸손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움은 충만이 되고 우리는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낙원에서 살 것입니다. 비움의 왕, 겸손하신 그리스도 왕은 고맙고 영예롭게도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다음 콜로사이 그리스도 찬가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또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맞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비움의 충만입니다. 텅 빈 허무가 아닌 텅 빈 충만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우리 삶은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입니다. 온갖 고통과 시련을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삼을 때 예수님을 닮아 비로소 비움은 충만이 되고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위로와 치유요, 내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참으로 온 몸과 온 맘으로 늘 평생 사랑해야할 온 누리의 임금이시며 우리의 참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1.배우십시오.

주님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는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2.섬기십시오.

주님과 이웃을 끊임없이 사랑으로 섬기는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3.비우십시오.

주님을 닮아 겸손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는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참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배움-섬김-비움의 여정을 잘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만민의 왕 그리스도 성가(73장) 마지막 절 노래로 강론을 마칩니다.


“만백성의 왕이신 예수님, 인류의 간구 들어주시어, 참 삶의 길로 인도하시고, 천국의 영광 주소서. 예수여 임하소서, 우린 주의 백성, 주 왕국 선포하리, 만민의 왕이여!” 아멘.




왕이신 그리스도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날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자주 왕으로 묘사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님이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헤로데를 찾았을 때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또 나타나엘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나, 세속의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분은 왕관을 쓰신 적도 없으며, 궁전도 군대도 영토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태어난 곳은 마구간이었고, 평생 떠돌아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나마 세상살이의 마지막 삼 년은 거의 죄인과 병자들 사이에서 지내셨으며,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슬픈 왕이셨습니다. 이러한 역설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참되다고 선택하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보다 더 크게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결단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일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그분의 진리를 선택하는 나의 의지적 행위입니다.

 



성경으로 감도된 신앙인의 삶과 교회의 사명.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김종수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1테살 2,13 참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태초의 말씀이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3.14).

태초의 창조의 말씀이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교회의 역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교회는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서 일으켜 주시는 감도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모든 학문과 과학의 지식들은 우리가 이해한 만큼 활용하지만, 말씀은 단순히 그러한 인식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활동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이해하려는 태도보다, 말씀을 사랑하고 맞아들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가짐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끌어 주시는 말씀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본당이나 교구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성경 공부 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필요하면서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교회 활동의 이 한 부분에서만 만나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씀이 교회 활동 전체를 감도하시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사 집전, 사회 복지 활동, 친교와 기도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말씀의 감도에 이끌려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성경 곧 말씀이 교회 활동의 전체를 감도하게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주님의 말씀」, 73항 참조).

참으로 우리가 말씀에 감도되려면 말씀 안에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지속적으로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라야 그분께 이끌려 생명의 말씀에 따라 살고 이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음식이 우리 몸을 살리고 자라게 하듯,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가 앞을 보고 죽은 소녀가 되살아나고 나병 환자의 몸이 깨끗이 나았듯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를 치유하시고 희망을 일깨워 주시어 주님 뜻에 맞갖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사도들을 친구요 형제라고 부르셨고 우리 모두를 그렇게 받아들이십니다. 우리 삶의 보람과 고통 그리고 교회의 모든 사목은 물론 우리 사회의 정의와 평화의 길에도 주님의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는 말씀의 감도가 있음을 믿고 바라보고 따라갑시다.

2019년 11월 24일




악인과 죄인 <루카 23, 25ㄴ-4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악인과 죄인을 구별하시는 묘한 장면을 남기셨습니다. 우도는 죄인으로 메시아인 주님의 구원을 받았고 좌도는 물리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제외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도에게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시며 함께 있다고 합니다. 좌도는 자기 죄를 뉘우치지 않았고 과일만 공짜로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죄는 누구나 짓고 쉽게 죄 안에 들게 됩니다.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무지해서 죄를 짓고,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죄인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죄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뉘우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악을 저지르는 것이 당연지사고 뉘우침이 없으며 더 기회를 노리고 더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사람입니다. 실수를 실수로 생각하지 않고 감추려 하고 더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유다와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사살하고 제거하는 행위의 죄는 용서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살인자라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살고, 뉘우치지 않으면 아무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세계 역사 안에서도 현실에 죄를 지으면서 악인이 되는 사람은 살려주지 않습니다. 히틀러 후세인 등, 왜 핵을 소유한 나라를 국제적으로 인정하면서 북한의 핵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국제 사회 통념에 인정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돈은 만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가 엉망이 되어 전 국민이 도탄에 빠지면 죄인 이상으로 악한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으신 하느님의 아들 주님을 만왕의 왕으로 우리가 찬미하고 찬양 드리는 것은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주는 왕이시며 자비와 사랑을 주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왕으로서 당신 생명을 내주시고, 섬기고, 봉사하는 왕이십니다. 그분의 신하인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사는 길은 봉헌과 헌신과 친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내며 두 손 들어 주님을 받아들이고 비록 죄인이라도 용서 청하고 주님을 품고 주님과 함께 낙원이 있도록 기도합니다.

악인은 되지 맙시다.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이 마지막 주일 전례는, 왕과 주권자로서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중심에 두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다음 주일부터 우리는 성탄절에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골고타에서 고뇌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우리 눈을 들어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를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자는 유대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는 표지가 있습니다. 끔찍한 고통을 겪고 얼굴이 그렇게도 일그러진 사람이 과연 왕입니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의 양쪽에 달려 처형된 둘 가운데 한 사람 착한 강도는 이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간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카 23,42)라고 탄원합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그에게 위로가 되었으며 확실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라고 고백합시다. 서양 언어로 “왕”(Rey)은 대문자로 왕입니다. 아무도 그분의 왕권보다 높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인 회개를 통해 들어가는 왕국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에서 생성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의 설교에서 첫째 주제였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모든 사람을 이 나라에 초대하셨습니다. 어느 날,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나라를 소유할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하게 이 나라를 살아가고, 믿음과 희망을 확증하는 애덕을 실천하면서 이 나라를 증거하도록 합시다.


사실, 십자가에서 실현된 사랑은 우리의 죽음과 희생과 매우 비슷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사랑의 힘이 십자가의 죽음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옥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 백성, 곧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스리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십자가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해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고 우리의 손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십자가에서 당신 아드님 예수님 안에서 계시되신 자비롭고 선하신 아버지께 기도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사랑, 생명, 거룩함, 은총,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시는 곳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나라가 현존할 것입니다.”

아멘.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우리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심을 다함께 고백하며 기립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십자가의 재물로 봉헌하시며 백성을 구하시는 진정한 메시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 말씀을 보면 우리의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계시는 장면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지도자들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그리고 군사들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그리고 예수님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죄수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그러나 다른 한편에 있었던 죄수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가지각색의 반응을 통해서 메시아에 대한 우리의 수많은 태도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지도자들, 그리고 군사들과 한 죄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세주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자신들의 구원의 가능성마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오른 쪽에 못 박혔던 죄수는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각자의 믿음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혹시나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주님으로부터 당장 드러나는 기적만을 바라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주님을 거부하지는 않았었는지, 그리고 혹시나 주님을 조롱했던 죄수의 모습처럼 끊임없이 주님을 시험하려 들지는 않았었는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시길 바랐던 죄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자신의 죄 값으로 죽게 된 상황 속에서 정말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주님께 희망을 겁니다. 비록 지금 죽을지언정 나중에라도 주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길 바라며 간절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전에 어느 회식 자리에서 어느 분이 건배 제의를 하시는 데 ‘이 멤버 리멤버’라고 건배사를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멤버 리멤버’ 곧 우리의 사랑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그 누군가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그 기억을 통해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곧 내가 주님께 기억된다는 것은 곧 내가 주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 죄수의 모습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기억해 주시길 바라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지극하신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난 시간 십자가의 죄수와도 같이 인간적인 나약함 속에서 끊임없이 헛된 욕심을 추구해왔었지만 진정 겸손하게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부디 기억해 주시길 바랄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시고 당신 안에 존재케 하시고 살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우리의 왕이지만 우리만의 왕이 아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그리스도 왕 축일인데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왕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세상의 왕은 아니고 우리의 왕이라는 뜻인지.


우리의 왕이라는 뜻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고 우리는 그분의 신하 또는 백성인데 여기에는 우리가 세상의 임금을 우리의 왕으로 받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옹립하고 받들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 시대를 배금주의 시대라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나 세속주의자로서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 그러니까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세속권력자를 왕으로 받들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받들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끊은 후 숲속길을 가는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그 돌발 상황에서 나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그는 답합니다.


거지같이 입은 프란치스코의 입에서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는 답이 나오자 강도들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눈구덩이에 처박고는 가는데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돌발상황에서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누군지 즉시 대답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는 정체성입니다.


내가 프란치스코 처럼 갑작스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인간 관계적인 정체성에서 누구의 엄마 아버지라고 답하거나 직업적이고 직위적인 정체성에서 교사 또는 사장이라 하지 않고 종교적 정체성에서 천주교 신자 또는 프란치스칸이라고 하거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답을 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왕의 신하라는 정체성을 가진 것은 좋은 일이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것은 옳은 일인데 그것이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이 아니고 우리들만의 왕이라는 뜻일가요?


사실 당신이 유다인의 왕이냐는 질문을 빌라도에게 받았을 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답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유다인의 왕이 아니고 우리의 왕이지만 우리만의 왕도 아닌 차원을 보게 됩니다.

오늘 축일 이름이 그리스도 왕 축일이지 예수 왕 축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시지만 이 세상에 속하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고 복음들이 말하고 오늘 독서 콜래새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노래합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오늘 미사 감사송은 "아버지께서 외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셨나이다."라고 노래하지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우리가 왕으로 옹립한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신 것이며 우리의 왕일뿐 아니라 온 누리의 왕으로 세우신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지만 우리만의 왕이 아니라 모두의 왕이어야 하고,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다른 백성으로 배제하지 않고 같은 백성으로 초대하고 대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우리만의 아버지로 소유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다른 자녀들 그러니까 일본사람이나 북한사람도 우리의 형제이고 해와 달과 별도 형제이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왕이시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모실 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왕의 같은 백성으로서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감사송의 노래처럼 그리고 천사들처럼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라고 노래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이 지상의 질서 속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의 원리를 추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순과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날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가 섬기는 임금,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1).


복음은 우리를 십자가 처형 장소로 데려갑니다. 세상 임금의 화려하고 영광스런 옥좌가 아닌 치욕과 수치의 자리가 그분의 왕좌입니다. 거기서 그분은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 판관의 입에서가 아니라 한 강도에 의해 무죄를 선언받습니다. 우리 임금님의 결백을 한 죄인이 알고 있습니다.


통상 세상의 임금은 판관의 자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단죄하지만 우리의 임금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입을 열지 않으신 채로(이사 53,7 참조)... 무죄를 주장한 이는 화려한 변호인단이 아니라, 같이 사형당하는 처지의 죄인과 이방인 백인대장 뿐이었습니다(루카 23,47 참조).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7).


이 말씀은 단순히 생각 없이 뱉는 조롱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원자, 메시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암시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나 지도자가 백성을 위해 받은 권한이 결국 그 자신을 위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도합니다. 의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고 권력의 속성상 깨어 거부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고 있기도 하지요.


우리가 권력자, 지도자들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자기 영달보다 백성을 우선하는 이가 희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백성은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이용하고 착취하는 수단이고 배경일 뿐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권력은 그래서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백성의 마음을 더 각박하게 만들고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해를 입히고 말지요.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러 오지 않은 이상한 구원자를 만났습니다. 그로써 통념이 뒤집힌 것이지요. 백성의 목숨으로 자기 영화를 구축해온 권력자의 세상은, 그분 존재를 통해 자기 생명을 바쳐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진정한 구원자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참 메시아와 거짓 메시아,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갈라놓는 잣대는 "자기 중심성"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십자가에 매달린 분께 와글와글 떠들어 대던 주변의 소음이 가라앉자, 우리의 임금님께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선고를 내리십니다. 유죄 무죄 선언을 뛰어 넘는, 위엄에 찬 구원의 선포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는 일은 오로지 그 나라의 주인이며 통치권자에게 있으니까요. 그 죄수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열릴 하늘 문을 통과하는 첫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다윗이 유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서 왕권을 인정받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5,3).


사실 다윗은 이미 목동이던 소년 시절에 주님께 선택되어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었지요(1사무 16,1-13 참조). 이후 선왕인 사울과의 관계에서 무수한 위기와 우여곡절을 거쳐 비로소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의해 임금으로 들어올려집니다.


하느님의 선택으로 시작된 일이 사람들의 손을 거쳐 세상 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세상 질서를 허용하시고 기다려 주신 덕분입니다 다윗의 왕권은 하느님의 뜻과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를 이룬 좋은 예라 보여집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가 아직은 바람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의 왕이실 수밖에 없는 근거를 유려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기술합니다. '그리스도 찬가'라 불리는 이 대목 안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이름, 영광이 단어들 마다에 속속들이 배어 있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임금님의 권능과 세력은 이렇듯 피 흘린 희생 제사로 발휘됩니다. 세상 권세와 극명한 차이지요. 그분이 아름다우신 건 강력한 힘과 세력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고, 부정한 우리의 죄를 떠안으신 비참한 몰골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기껏해야 자기 이익과 부합하는 이들의 지지와, 속 모를 한시적 찬사를 받을 뿐이지만, 피로 물든 예수님은 사랑을 받으십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세상 임금과 우리 임금님의 차이입니다. 그분의 약함과 자기를 버린 포기와 바보스런 선택은 배은망덕하고 냉담하고 무딘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지나 찬사 정도가 아니라 애끓는 사랑, 닮고 싶은 존경, 하나 되고픈 연정, 일치하려는 열망... 세상 누구도 받아보지 못했을 마음의 골수들이 피흘리시는 그분 발 아래 이렇게 쌓여갑니다.


종들의 종, 그 종의 종이 되신 우리의 임금님께 더 깊은 감사와 사랑과 경애를 드리는 축제의 날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오리게네스 사제의 ‘기도’에서 (Cap. 25: PG 11,495-499)

우리 구세주이신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가 임할 때 아무도 ‘보라,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으며 우리 입술과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이는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발전하여 열매를 맺고 완성에 이르게 하시기를 청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의 영혼 안에 군림하시고 또 성도들은 훌륭히 통치되는 도읍에서처럼 자신들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영신적 법에 복종합니다. “우리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에 따라 성도들의 영혼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또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께서도 군림하십니다.


우리가 항구히 믿고 나아간다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사도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즉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모든 이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께서 우리 안에서 감도하시는 정신으로 중단 없이 기도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아뢰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소서.”


하느님의 나라에 있어서 다음의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둠, 그리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서로 동반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도 죄의 나라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군림하시는 것을 우리가 원한다면 “이 죽을 몸에 죄가 군림하지 않도록” 땅에 속하는 우리 지체를 억제하고 영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하느님께서 영신적 낙원에서처럼 우리 안에 거처하실 것이고 그 홀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안에서 다스리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그 영적 권세의 오른편에 좌정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모든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되고, 모든 으뜸들과 권세들과 권력들이 우리 안에서 파괴될 때까지 좌정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각자 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마지막 원수인 죽음도 파멸되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있느냐?” 그때부터 우리 안에 썩어질 것들은 거룩함과 불멸로 옷 입게 되고 죽어야 할 것은 죽음을 파멸시켜 버려 아버지의 불사 불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군림하실 때 우리는 새 생명과 부활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가시관 쓰신 임금님

한민택 신부님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이때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에 대해 묻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 하면 사람들은 보통 강한 능력을 지닌 전지전능한 존재를 떠올립니다. 모든 것을 미리 알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 알며 어느 곳에든 존재할 수 있는 존재. 그러나 그러한 존재는 인간이 상상 속에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닐까요? 그렇기에 현실의 어려움이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응답하지 못하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실망하는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그들 자신의 생각에 매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들어주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우상이며, 성경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도 신앙은 그러한 우상숭배를 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놀라운 방식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놀랍고 새로운 모습은 특별히 구유와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연약하고 나약하며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아기로 오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고 모욕을 당하며 온몸에 상처를 입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구세주를 고백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연약한 아기로, 가시관을 쓰신 임금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음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난센스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기쁨이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저 먼 하늘 위에 홀로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오시어,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나누고 계신 사랑의 친교, 신적 생명으로 우리 인간을 초대하고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세주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어둡고 쓸쓸한 밤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불쌍하고 버림받은 인간을 보살피기 위해 그들과 어울리고 사귀셨으며 그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죽을 운명까지도 받아들이셨으며, 그 앞에서 고통스러운 번뇌의 순간도 경험하셨습니다. 그분이 지상 생을 마감하신 곳은 철저한 고독 속에 버려진 십자가, 인간이 가장 외롭고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곳이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구원하는가? 무엇이 인간을 진정 자유롭게 하며, 고통과 슬픔, 좌절과 절망, 죽음과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는가? 그리스도 신앙은 답합니다. 사랑으로 당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환난 중에도 살아갈 수 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삶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시며, 나를 위로해주시는 ‘누군가’ 곧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신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권세와 죽음을 이겨내신 승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분을 왕으로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 안에서, 죽음을 이기신 바로 그 사랑이 우리의 온 존재와 마음을 사로잡고 다스리실 수 있도록, 우리를 온전히 그분 사랑에 내어드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당신의 나라

김혜윤 수녀님

인간을 진정한 ‘화해’에 이르게 하는 것은 어느 한 편의 계산 없는 ‘내어줌’이고, 반대로 화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어이 이겨야 한다는 ‘강박’과 ‘탐욕’, ‘경쟁심’입니다. 교회력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기위해 반복되면서 이루어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여정의 최종 도착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력은 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마무리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들은, 최후까지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 화해를 이룩하시고(복음), 타인의 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 흘림을 통해 평화를 가져다주신(제2독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을 선포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함으로써 고난과 횡포에 당당해지고 강해지며, 그렇게 인간 본연의 존엄과 축복을 사는 것, 화해를 통해 구현된 하느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 죄인들과 함께한 왕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루카복음 역시 다른 공관복음과 함께, 예수님께서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셨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이는 이사 53,12의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라는 말씀과 연결되며, 십자가 죽음이 끝까지 죄인들과 함께 하신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극한의 순간에도 악의 유혹을 이겨내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사회 지도자들, 군사들, 심지어 옆에 있는 죄수로부터도 ‘남들은 다 구했으면서 자신은 구하지 못하나! 자신이나 구하라!’(35.37.39절 참조)라는 모욕을 받습니다. “자신이나 구하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자극적인 도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일관된 방향성 -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절대로 그 권한과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으셨던 - 을 단번에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들로부터 심판받으시는 상황을 그냥 그대로 두시는 방식으로 당신의 권위를 증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 나라의 왕권을 온전히 행사하신 모습은 본문의 마지막에서야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무죄함을 믿음으로 고백한 죄수가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42절)라고 청하자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비로소 당신의 권위와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첫 인간이라는 영예를 허락하심으로써 십자가상에서 왕으로서의 권한을 장엄히 행사하신 것입니다. 


■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은 왕

누군가의 인내와 내어줌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모습은 제1독서에도 소개됩니다. 그동안 분산되어 존재하던 12지파는 다윗을 통해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전체를 통솔하는 임금으로 등극하는데, 헤브론은 예루살렘이 수도로 세워지기 전, 행정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며 다윗의 정치활동 거점지가 된 곳입니다. 이러한 헤브론의 특성은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공유했던 친밀한 유대가 서려있는 곳이었음을 암시하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2사무 5,2)라고 고백하고, 자기들이 ‘다윗의 뼈요 살’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1절]), 이러한 직접적 연대와 유착이야말로 다윗의 왕권이 가지는 정당성의 단초가 되는데 사울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에도 이미 실질적인 리더는 다윗이었고, 이는 모든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를 왕으로 인식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사울은 다윗을 살해하려 하지만 다윗은 그 어떤 역모나 쿠데타도 계획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이 축성하신 왕이기에 그의 생명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내와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 백성들을 위한 헌신과 내어줌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느님이 진정으로 선택하신 왕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식별하게 합니다. 다윗의 왕국은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인내해온 기다림과 백성들 스스로의 자발적 요청으로 이루어진 화해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통치자와 나쁜 통치자의 차이는 ‘분열과 분리’를 조장하는지 ‘화해와 일치’를 이룩하는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집단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독재적 권위로 유지시키고 이를 사회 전반에 강압적으로 이식시키기 위해 차별과 거부, 소외를 정당화할 때 계급투쟁과 갈등, 대치는 양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증오와 분열, 혼란을 앞세워 뒤에서는 교묘히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부정부패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화해하다’는 그리스어 ‘카탈랏소’(조정하다, 조화시키다)에 ‘아포’라는 전치사가 합성된 ‘아포카탈랏소’라는 단어이며, 이는 ‘조정하고 조화시키는 화해’를 넘어서 ‘하느님과 좋은 관계에 있도록 조정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느님께서 좋게 보아주시는 조화와 조정은 쿠데타나 폭동이 아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사랑과 권위를 몸소 보여주심으로써 인류가 하느님과 좋은 관계에 있도록 조정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교회력의 마지막을 보내는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임금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왕직

최승정 신부님

오늘의 첫째 독서인 2사무 5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와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임금이 됩니다. 그 계약의 대목에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고 나 라를 지켜줄 것,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나 라를 다스려줄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요청은 오늘날의 국가 지도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 다. 그런데 (오늘의 독서에서는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구약에서 는 임금에게 부여되는 셋째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 적 역할입니다. 임금의 신학적 역할이란 이스라엘 백성들 이 하느님만을 섬기고, 다른 잡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도 록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 신학적 역할에 구약의 역사서는 매우 큰 비중을 할애하는데, 특히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다윗 이후의 임금들이 바로 그 신학적 역할에 충실하지 않 았기 때문이라고 역사서는 설명합니다. 둘째 독서는 콜로 1장입니다. 특히 콜로 1,15-20은 예 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창조론적으로 노래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그 찬가를 이끄는 12-14절에서 바오로는 “빛의 나라”와 “어둠의 권세”를 대비시키는데, 그에게 있어서 그 빛의 나라는 곧 “아드님의 나라(!)”입니 다. 그리고 뒤따르는 그리스도 찬가는 아드님의 권능에 대 해 노래합니다. 그 권능의 마지막 목적지는 ‘평화’와 ‘화해’ 입니다. 


오늘의 복음인 루카 23장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두 명의 죄수를 만납니다. 한 죄수는 예수님을 모독하지 만, 다른 한 죄수는 “선생님의 나라(!)”를 언급하면서 자신 을 기억해 줄 것을 청합니다. 여기서 “선생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아들 어야 합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을 장소적으로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 다. 그런데 오늘 이 독서와 복음은 그 하느님 나라를 그리 스도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 치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권 능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기에 가 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적 동일성은 하느님과 그리 스도의 다스림이 (지배의 권력이 아니라!) 섬김의 권능이라는 점 입니다(마르 10,45 참조).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리스도인 들도 세상 안에서 (지배가 아닌!) 섬김의 왕직(王職)을 수행합니 다. 하느님과의 일치 아래서,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세상의 화해와 하느님 창조계의 평화를 위해 땀 흘리는 수고로운 섬김의 삶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왕직(王職)입니다.


 


참된 정치, 참된 다스림

오경택 신부님-

얼마나 많은 신자분들이 그리스도교는 정치와 무관한 종교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정치와 종교가 서로 무관한 길을 걸으면, 정 치는 진리에서 멀어질 것이고, 종교는 세상과 동떨어진 밀교적 공동체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고, 성경 원문에서 ‘나라 (basileia)’라는 단어는 본디 ‘다스림’을 뜻합니다. 즉,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말에서 정치(정사 정/다스릴 치) 라는 말이 ‘다스림’을 주된 뜻으로 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다스림(나라)’ 을 선포하셨던 예수님 역시 정치(다스림)와 무관한 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분의 죽음은 정치적인 음모였고, 이는 우리가 사회 정치의 불의에 눈감지 말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다스림/정치)’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해 질 문하는 이교도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겸손 속에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다시 한번 더 묻는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겸손 속에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이 같은 질문을 아무리 많이 되풀이한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겸손이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 다스림(정치)의 핵심엔 낮아짐, 즉 겸손이 있습니다: 다스리려고 하는 자가 다스림을 받는 이보다 더 낮아지고, 왕 하시는 자가 한 명의 작은 백성보다 더 낮아지는 세상. 가르치는 자가 가르 침 받는 이보다 더 낮아지고, 사목하는 자가 교회 공동체 한 명 한 명보다 더 낮아지는 세상. 우뚝 솟 아오른 성당의 첨탑이 주변 이웃의 작은 지붕들보다 낮아져서, 작고 소박한 공동체를 이루며 감사하 고 섬기는 세상. 과연 예수님의 이러한 작고 겸손한 바람이 그렇게도 원대하고 그렇게도 꿈같은 것이었는지, 예수님 의 이러한 다스림(정치)이 정말 그렇게도 이상적이었던 것인지, 지금의 교회와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왕이 어떤 왕이신지, 지금의 교황님이 어떤 교황님이신지, 한국 천주교회가 기억하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분명 달라져야 만 할 것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그분의 다스림을 정말로 받고는 싶은 것인지,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에 정말로 들어 가고는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성경으로 감도된 신앙인 삶과 교외의 사명

황하철 신부님

 전례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 막 주일에 교회는 예수님께서 온 누리의 참 임금이심을 이렇게 선포하며, 왕이신 그 리스도 예수님을 닮으려 합니다. 그분께서는 군림하러 오신 왕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를 지고 봉사하신 겸손한 임금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 이 그 일들을 기억하며 전하는 성경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기를 권하고자 이번 주간 을 ‘성서 주간’으로 선포합니다.


  성서 주간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사람(창세 1,26-27 참조)들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을 만나 고, 그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 나라(天國)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성서 주간을 맞아 주교 회의 성서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1테살 2,13 참조)을 전하는  “성경으로 감도된 신앙인 삶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요한 1,14 참조), 사람이 되신 그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 여전 히 신앙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성경으로 감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태생 소경이 앞을 보고, 죽은 소녀가 되살아나고, 나병 환자의 몸이 깨끗이 나았듯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를 치유하시고 희망을 일깨워 주시어 주님 뜻에 맞갖 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단순히 이해하려는 태도보다 그 말씀을 사랑하고 맞아들여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은 머리만이 아니라 온 인격으로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체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조롱만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임을 전하며 끝을 맺습니다. 곧,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조롱하기보다 회개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깨닫도록 안내하며,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만나 는 십자가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 한 해 나는 어떤 예수님을 기다렸고 만났는지?’, ‘그 가운데 내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성찰해 봅시다. 십자가는 나의 내밀한 모습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으로 안내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 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예수 그리스도 왕권의 실현

권창현 신부님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진리, 정의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열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섬김과 봉사의 왕권이 이 땅에 확립되기를 염원하며 기도하는 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1925년 비오 11세 교황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강한 권력을 가진 왕과 왕비가 다스리는 전통적인 왕국들이 몰락하고, 그 대신에 나치정권과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가 유럽을 통치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비오 교황님은 이 새로운 ‘이념들’이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백성들이 누리는 자유와 존엄성을 유린할 수 있는 가공스러운 통치수단이 될 수 있음을 크게 우려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새롭게 부상하는 이들 왕국들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하시면서 우리 주 그리스도왕의 장엄축일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모든 이념들보다 예수님이 더위에 계심을 온 인류가 깨닫고,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의 임금이라는 진리가 시대를 초월해 이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고 다스리시면서 참된 자유와 진리, 정의와 공정이 정착되고 꽃피는 평화로운 세상이 건설되기를 염원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중국과 소련을 비롯한 북한의 독재 지도자들은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고, 푸틴은 올해 OECD 정상회의에서 ‘자유는 낡고 진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부정할 때에는 인간 존재와 생명의 원천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이 내적 힘을 잃고 공허해집니다.

인생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고통을 겪을 때에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본질, 인간 존재에 깊이 새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헤칠 수 있는 이념이나 사상이 우리 모두의 양심과 지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민족보다 국가가 더 우위에 있음을 인식하며 국가의 지도자들이 국가를 안전하게 수호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도록 외쳐야 합니다.

외부현실과 내면세계가 잘 소통되고 통합된 사람일수록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두 세계를 이용하여 정신적 성장, 사회의 발전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불행히도 두 세계가 크게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환상으로서의 사랑뿐 아니라, 환상 속의 인간관계, 환상의 세상을 꿈꿉니다.

어딘가에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으면서 검증되지 않은 미증유의 세계로 사회를 이끌어 혼돈 속에 빠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한 세력에 이끌리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왕이심을 목청을 높여 선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선포하지 않거나 침묵하게 되면, 우리 영혼이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 공산주의 정부가 총탄을 난사하며 홍콩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탈취하려는 폭압에 맞서 길거리에서 유혈투쟁을 벌이고 있는 760만 홍콩시민 중의 300만 시민들의 피와 눈물을 통해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을 재인식해야 합니다.

온 국민이 힘과 지혜를 모아 강력한 유비무환의 자세로 국가를 수호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와 정의의 왕권이 온누리에 충만하기를 기도드립시다.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최영인 사도요한 형제님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평생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처럼, 의인이었던 요셉처럼, 위대한 예언자 세례자 요한처럼.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죄인으로 살다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악마에 사로 잡혔던 한 청년처럼, 죄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회개한 우도처럼.


세상은 극단적인 의인과 극단적인 악인을 싫어합니다. 오직 평범한 사람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도둑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 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는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쓸모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강도들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못 받은 사람들 가운데 계신 구세주!

그분은 사람들에게 잘나고 유식한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회개 하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 쓸모없이 버림받은 두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양편에 있었던 두 강도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죽음 앞에 선 두 사람! 한 사람은 자기가 헛되게 살아온 지난날의 삶을 반성은 하지 않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빈정댑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만약 우도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낙원’의 주인공이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 21,31)


왜 그분은 당시 지도자들을 위선자와 독사의 족속들이라며 비난했을까요? 그러면서 왜 그분은 죄녀에게는 다정하게, 세리에게는 부드럽게, 십자가에 달린 우도에게는 어쩌면 그렇게도 정중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자기만족에 차 있는 사람보다는 죄인이 회개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자기를 비우고 인정하는 것만이 회개의 동기가 되고, 그것은 바로 자신의 ‘교만’을 깨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탕자도 모든 것을 잃고 배가 고플 때 비로소 회개 했습니다.


우도의 회개는 오늘날 세상의 회개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먼저 자기가 부족하고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귀머거리가 듣고 싶어 하고 절름발이가 걷고 싶어 할 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자기 죄를 치유해 줄 구원자를 필요로 할 때 인류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도는 악을 정복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불러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악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악을 부정하는 데 있습니다. 역사상 오늘날만큼 죄악이 많이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늘날만큼 죄악이 많은 것을 깨닫지 못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왜 죄를 짓고도 회개할 마음이 없고, 하느님과 화해할 생각을 갖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렇게들 답변합니다. “내가 하느님께 무슨 짓을 했습니까? 나는 하느님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는데 그분은 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문제를 걸어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도덕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법대로 살고 악을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합니다. 사람은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함을 더욱 모릅니다. 우리가 잠에서 깰 때까지는 자기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듯이 우리가 죄악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죄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병이 들어야 의사를 찾듯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에 구세주를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기 시작할 때, 우도와 같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병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료할 수 있듯이 우리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오늘, 우리가 얼마나 잘 살았는가를 자랑하지 말고, 우리의 허물이 무엇인지를 반성 해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가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착한지를 떠벌리지 말고 얼마나 많이 잘못했는가를 성찰해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를 살피지 말고 얼마나 많이 비웠는가를 물어봅시다.


우리가 나태한 생활로 바보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과거의 모든 어리석음을 깨달을 때에, 우도와 같이, 그리고 우리가 고해실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나의 범한 모든 죄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부님께 고백합니다.” 하고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여기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우도는 끝까지 도둑질을 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낙원’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낙원을 차지하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평생을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너무나도 힘듭니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회개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사는 것이 낙원을 향한 우리의 유일한 길은 아닐까요?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의 마지막

모습 또한

이와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로

귀결되고 완성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끝내 그리스도를

알게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구원자의 맑은

기억이 있습니다.


서로를 살리는

기억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시는 온 누리의

임금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더 낮아지시고

더 작아지시는

임금님이십니다.


삶의 완성이

사랑임을

보여주십니다.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생명이란

말씀과 함께

묵묵히 걸어가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구원은 이와같이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신비롭게

펼쳐지는 가득한

사랑의 기억입니다.


사랑으로 이 한 해를

떠나보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각 교구에서 ‘우리농’을 담당하는 신부님들 모임이 성지에 있어서 여러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묵상글을 오랫동안 쓰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는 식으로 묻는 것입니다.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16년째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기도와 묵상을 한 뒤에 글을 쓰고 있는 저를 이해하기 힘들다고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 역시 도저히 따라 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늦은 시간에 잠을 자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일찍 잠을 자는 것이거든요. 초저녁에 잠을 자는 저로써는 늦게까지 깨어있는 분을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저 역시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분이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누가 더 대단하고 덜 대단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싶습니다. 솔직히 살아가면서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갈등이 생기고, 때로는 미움과 단죄가 행해지기도 합니다. 결국 이 모든 갈등들이 별 것 아닌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약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다름을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판단과 단죄가 이어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도토리 키 재기’처럼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기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이신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자신들과 다른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실천이 먼저라면서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당시의 지도층을 인정하지 않고 ‘위선자’라며 날카로운 일침을 계속해서 던지는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다른 예수님을 그들은 틀렸다라고 규정을 했고, 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던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예수님을 향해 모독하며 말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지만 다른 죄수는 마지막 그 순간에 예수님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와 다르다는 것을 틀렸다고 규정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변하게 하는 것은 지혜와 경험이 아니다. 시간도 아니다. 오직 사랑이다(파울로 코엘료).


바버라 월터스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 1929 ~ )라는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의 여왕’이라는 별명까지 가질 정도로 뉴스 진행에 탁월했었지요. 그래서 당시에 남자들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뉴스 진행에서 성공한 최초의 여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방송 분야에서는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그녀였지만 결혼 생활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합니다. 세 차례나 이혼을 했거든요.

그녀는 결혼 생활 역시 성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재혼을 위해 남편 대상을 신중히 물색하면서 컴퓨터에 자기 적성을 비롯한 모든 자료를 넣고서 남편 후보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가장 좋은 남편 후보감을 보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글쎄 그 후보는 바로 전 남편이었던 것이지요.


가장 좋은 남편과 살았으면서 가장 나쁜 남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혼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과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아니까요?




참된 희망은 어디에?

주수욱 신부님

1. 희망을 찾는 불안한 인간

어느 날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태아로서 살해되기도 합니다. 갓 태어나서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 어떤 때는 생명이 위태롭기도 합니다. 지구라는 별에서 각종 조건에 적응하면서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랍 세계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은 각종 군사적 폭력 때문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태어나면 잘못하면 꽃제비가 되고 맙니다. 여러 나라에서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처럼 어려서부터 참다운 인간 교육은 외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전제로 한 엄청난 경쟁에 내몰리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려고 할 때부터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허둥거리면서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감당해야 하는 커져가는 책임감, 사회적 안전장치의 미흡함은 사람들을 생사의 기로에 서게 합니다.

인간 내면의 불안함, 자연과 인간의 충돌로 말미암은 비참함, 가정 안에서부터 인간관계의 불확실함과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벌어지는 긴장들은 오늘 현대인을 참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문제는 대책 없이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수무강한 고령자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세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죽음 앞에서 인간은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인간은 희망을 찾게 됩니다. 헛된 희망을 추구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도대체 인간은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특히 오늘 한국의 비참한 정치적 상황에서 국민은 어디서 근본적인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2.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신 진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인생의 신비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십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영원을 그리워합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능력을 발휘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서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 모양을 하고 있지만, 결코 동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 인간의 특징은 바로 자유입니다. 오늘 인간이 겪는 그 모든 고통과 모순의 원인은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자유를 행사해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처럼 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창세 3,5 참고). 그렇게 하느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인간은 비참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기에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살아 계시고 영원한 생명을 일궈내심을 보여 주십니다.


3. 하느님께서는 시작한 일을 완성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시작하신 창조 사업을 완수하십니다. 특히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셨는데, 인간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창조 사업을 중간에 팽개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자비하심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폭력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승리, 완성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인간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포기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4. 그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오늘도 하느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파스카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 성제를 올리면서 성체성사 안에서 그 파스카를 기억하고, 오늘 죽음에서 참 생명으로 넘어가고,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감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지금 닥치는 고난과 모순을 받아들이며 희망 속에서 용기를 갖고 나아갑니다. 




참된 임금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이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임금이라고 선포하는 이유는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을 창조하고 움직이시는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가 세상 만물의 임금이시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이야말로 아버지의 뜻 자체이심을, 아버지의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나라임을 고백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며,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말과 행적으로 온전히 드러내시기에 세상 만물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창조 때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만물의 임금이신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조롱당하는 모습을 전해 줍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당신 백성에게 기꺼이 조롱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아주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왕권, 예수님의 통치는 무엇인가 세상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만물의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물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단절된 세상이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께서 직접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그들의 죄를 대신 기워 갚으심으로써 온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느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이었고, 세상 창조 때부터 진행되었던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임금이신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되는 장소, 달리 이야기하면 하느님의 나라이며, 거기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만군의 임금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왕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 모두를 위해 철저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우리는 십자가에 기꺼이 매달리신 예수님이야말로 만군의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토록 높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셨음에 감사드리며, 나도 그분처럼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과 임금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는 교회 안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하느님, 재림 예수, 보혜사, 곧 성령이라고 자칭하며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임금처럼 살아가기까지 합니다. 자기 목숨마저 내어놓으며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자 하신 예수님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가르친다면 조금은 받아들여 볼 만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 임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아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참된 임금이심을 고백합시다. 그분 덕택에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보게 되었고, 세상이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동참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우리가 기억하고 다짐해야 할 내용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왕

심순보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그 실행을 구체화시키면서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케 하고, 그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신앙을 고백하게 합니다. 특히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선언하고 내 안에서 고백함으로써 전례적 의미를 더욱 깊게 합니다.

  우리가 왕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왕국은 어떤 왕국이며 예수님은 또 어떤 왕인가? 또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께서는“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 36)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분의 왕국은 세속적인 왕국과는 다를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왕국, 그러면서도 별개의 것이 아닌 왕국, 그 왕국은 하느님 나라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제대로 이해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의 고백은 그분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극적인 표현입니다.“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그리스도의 왕국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하느님의 힘으로 이해합니다.(1코린 1, 18 참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을 나의 왕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나의 주님”이라고 수없이 고백하면서 한 번이라도 내 영혼의 주인으로서 나의 왕으로서 고백한 적 있는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왕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다하여 나의 왕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 있어 예수님의 왕국은 어떤 왕국인가? 그것은 신자들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따라 복음적 삶을 살며 그분이 내 신앙의 주인이 될 때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내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신앙공동체를 이룰 때 그것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왕국일 것입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 시작되는 한 해를 준비하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자세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내 신앙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면서 그분과의 관계를 재정립해 봅니다. 그리고 그분께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십니다.”




남이 마셔야 하는 독주를 대신 나누어 마셔주자

박영식 신부님

어느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판사가 법정에서 노인에게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고도 염치없이 남의 제과점에 들어가 빵이나 훔쳐 먹었습니까?” 하고 비난했다. 노인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사흘을 굶었더니 눈에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판사가 한참 궁리하더니 “당신이 빵을 훔친 절도행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라고 판결을 내렸다. 방청석에서는 술렁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정이 얼마나 어려워 빵까지 훔쳐 먹었겠는가? 이것은 판사가 사면해줄 수도 있는 경범이 아닌가? 너무 하다.” 

그때 판사가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내며, 

“그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그 동안 맛좋은 음식을 실컷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오늘 이 어르신 앞에서 참회하고 그 벌금을 대신 내어드리겠습니다.” 

이어서 판사는 “이분은 법정에서 나가면 또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계시는 방청객 여러분도 맛있는 음식을 많이 잡수신 대가로 성의껏 기부금을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방청객들도 호응해 십시일반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았는데, 그 액수가 무려 47불이나 되었다.

 

그 판사는 이 재판으로 갑자기 유명해져 뉴욕시 시장이 되었다. 이분이 바로 ‘표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이다.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세 번이나 뉴욕시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뉴욕시장으로 재직 중에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뉴욕시청은 시내에서 가까운 허드슨 강 옆에 공항을 만들어 그 판사의 이름을 따와 ‘라과디아’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도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공항을 이용하며 그 판사의 선행을 기억한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 하나는 그분의 죽음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에 이끌려 회개하고 그분을 참된 임금님으로 알아 뵈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카 23,42-43)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어 우리가 영원히 행복의 극치 속에서 살게 해주시는 임금님이다. 예수님의 왕적인 권능과 권위는 당신을 한없이 낮추시는 데서 비롯된다. 그분은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그분께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다. 하느님의 품성은 당신을 비우시는 데서 드러난다. 비하와 순종은 사랑의 특성이요 하느님의 품성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자기를 낮추고 순종한다. 하느님이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하여 부자방망이 같은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완전한 품성은 비하와 순종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가장 완성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순종은 사람의 기본 품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쳐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당신이 참사람이심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아들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순종하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의 임금이 되셨다. 순종만이 명령권을 준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뜻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임금일 뿐만 아니라 개개인 사이나 민족과 민족 사이의 알력과 분쟁과 불의와 증오심과 온갖 사회악을 없애주는 정치지도자로서 온 세상의 임금이시기도 하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 교회,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변화시킴으로써 그분이 온 세상의 임금이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든지 자기가 임금이 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이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정하시는 임금으로 모시는 이들은 제2그리스도가 되어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 이기심과 이 세상의 죄를 이기는 임금으로 군림할 수 있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보다 더 행복해진다. 그들은 살인마도 품어주고 착한 사람도 안아주는 어머니 같은 이들이다.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은혜를 베풀고, 베푼 뒤에는 결코 후회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공동체나 직장이나 사회나 국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서서도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가족과 이웃과 동료직원과 백성을 위해 온갖 조롱과 모욕을 마다하지 않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이다.


현대세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지도자들 중 한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념과 당리당략과 민족주의와 종교적 우월주의와 교황이라는 자존심을 다 집어던지고 의인과 죄인을 다 포용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을 대신 짊어주기 때문에 전 인류의 지도자로 존경받는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면 영원한 죽음과 파멸밖에 없다. 오늘 대통령처럼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슬프게 하며 나라를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절도범이 내야 하는 벌금을 대신 내어준 라과디아 같은 사람들이 아쉽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고통과 병고와 슬픔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이 마셔야 하는 독주를 우리가 나누어 마셔주자.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랑에 미쳤지만 눈알이 맑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무리 바빠도 마음이 아픈 나를 기다리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내 기쁨을 위해 내보다 더 크게 웃어주는 사람, 나의 건강을 위해 내 술잔을 대신 마셔주는 사람, 내가 이렇게 무작정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유다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조롱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이것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승리감과 안도감을 담아서 그분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라고 조롱합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 알라는 조롱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명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총독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처형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대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분이 과연 메시아인가 상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인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당신을...데려다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당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6, 1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에 호응하지 않으셨고, 군중은 드디어 그분을 포기합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여 없애버리기로 작정하고, 사형을 집행할 권한을 가진 로마총독에게 그분을 고발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왕으로 와서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는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에서 해방시키고, 강대국으로 만들어서, 온 세상을 통치하게 한다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메시아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런 메시아사상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며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메시아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초기 신앙인들은 그분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그런 호칭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초기신앙인들은 그분을 메시아라 불렀습니다. 왕이라는 뜻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들이 그분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를 때, 그 뜻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인간이 율법준수를 잘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인간소원을 성취할 대상인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라, 당신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당신도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초기그리스도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 곧 새로운 질서의 나라를 열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의 생존을 최대 과제로 삼고, 노력하다가 죽어서 사라지는 우리의 세상에,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 곧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기본 질서가 된 나라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 기본질서인 나라입니다. 


그 지평에서는 지켜야 할 계명이나 바쳐야 할 제물이 절대적이 아닙니다. 그 지평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불쌍히 여기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 지평에서는 은혜로움이 살아 움직입니다. 은혜로움이 돋보이는 지평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의 나라를 새롭게 창시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고, 용서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질서, 곧 은혜로움을 기본으로 한 질서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듯이, 그분의 자녀 된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의 나라를 창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몸 잘 살고,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어가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으면서 죽어가셨습니다. 인간생명의 한계, 곧 죽음 앞에서도 그분은 하느님을 부르며 당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은 인간생명의 한계를 넘어서도 하느님은 그분과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 안에 읽을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배우고 실천하며 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도 그분이 열어 놓은 지평에서 그분이 창시한 나라의 질서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처형된 죄수 두 사람이 있었다고 알립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낙원은 의인이 죽어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은 새로운 지평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예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을 왕,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라고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고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면 내 하인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18, 36). 예수님이 창시하신 나라는 싸우고 정복하고 빼앗아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열어놓은 그 나라의 새로운 지평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빌면서, 은혜로움이 살아 움직이는 그 나라의 질서를 실천하며 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루카 23,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드디어

그리스도와

마주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조용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내려온 우리의

마지막 발걸음 또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첫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리스도 왕께서

이끌어주신

한 해의 삶을 통해

저가 배운 것이 있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처럼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우리들의 몫인지를

다시 깨닫게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존재이유를

다시 배웁니다.


서로를 짓밟고

짓이기는 욕망이

우리의 존재이유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사랑이

우리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우도처럼

이제는 변명을 멈추고

그리스도 왕께

의탁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그리스도 왕께서는

사랑하는 법을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되시어

사람을 섬기셨던

그리스도의 섬김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의 모든

길이 되어주셨던

그리스도 왕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정말로

애 쓰셨습니다.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왕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다시금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한 해의

뜻깊은 마무리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별다른 일 없는 하루였습니다. 오전에 있었던 ‘신앙의 해’ 폐막 미사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지요. 그래서 어제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미뤘던 책도 읽고, 강의를 위한 글도 쓰자.’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의 산책 외에는 계속해서 방에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썼을까요?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책을 꽤 읽었지만 글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편안해서일까요? 오히려 글이 써지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오히려 바쁘고 정신없었을 때 글을 더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글들이 간절함과 진실성이 더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사람들도 알아채는 것 같더군요. 제가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중에서 많이 팔린 인기 있었던 책들은 여유 있고 한가했을 때 썼던 책이 아닌 어렵고 힘들다면서 버거워하고 있을 때 썼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어렵고 힘든 시간이 나를 성장시키고 지금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이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면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간들은 선을 이끄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분명히 견디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그 왕의 모습은 우리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많이 달랐습니다. 즉,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지배하는 왕이 아닌, 오히려 우리와 똑같이 아니 우리보다도 더 밑바닥까지 내려가셔서 우리의 아픔에 함께 하는 겸손한 왕, 사랑 깊은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그 모습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왕 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신명기를 보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21,23)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빈정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신 것이지요.


바로 그때 양 옆에 있던 죄수의 반응이 다릅니다. 한 죄수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다른 죄수는 예수님께 굳은 믿음을 보입니다. 이 둘은 지나가는 행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노상강도로 알려져 있지요. 똑같은 죄를 짓고 똑같은 십자가형을 당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보였던 믿음을 통해 그 똑같은 상황이 역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왕답게 곧바로 판결을 내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굳은 믿음을 통해 오히려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요?


전 생애를 통틀어 오직 한마디로만 기도할 수 있다면,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에크하르트).


짜장면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정용섭)

재미있는 기도입니다. 쉽게 바칠 수 있는 기도. 그러나 항상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또 어떠한 시간에서도, 또 어떠한 장소에서도 주님께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주신 거지만

현실적으로는 북안면 입구에 있는 손짜장 집 주방장이

4,000원을 받고 만들어 준 거였습니다.

내 앞에 놓은 짜장면이 신비로워

젓가락을 쉽게 대기 힘들었습니다.


국수가 된 밀가루,

밀가루가 된 밀,

밀이 된 밀 이삭,

밀 이삭이 된 밀알,

감자와 돼지고기와 짜장,

요정처럼 그 사이를 헤집고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어떤 메커니즘, 또는 능력.


주님,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으나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짜장면을 먹지 못하는 일이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에는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짜장면을 배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많은 이들에게 먹는 즐거움과

생명을 살리는 손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지금 한국에 태어나셨다면 짜장면을 좋아하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신대원 신부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며, 전례력으로 한 해 마지막 주일에 서 있다. 그 끝날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복음말씀을 듣게 된다."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예수님께 청원한 내용이다. 이 청원은 사형선고 받은 죄수가, 함께 사형수로 십자나무에 매달린 임금님께 드리는 말씀이다. 이 청원을 들으신 임금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고 흔쾌히 약속해 주신다.


사형수의 청원을 받아들이신 사형수 임금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거룩한 만찬을 행하실 때,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분이시다. 죄인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시며 죄인들에게 당신의 거룩하신 몸을 맡기시면서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간곡하게 청원하시는 분,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눠 주시고 우리를 살게 해주시며 우리를 당신 나라에 불러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임금이신 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고 말씀하신다. 또 당신이 세상에 오신 까닭에 대해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고 분명하게 강조하신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신 그분은 당신 나라의 통치방법에 대해서도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4)고 설명하신다.


우리 임금이신 분은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으시는"(마태 18,10) 분이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루카 4,18) 분이시다. 또 그분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고"(요한 10,9)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으로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게"(요한 11,25-26) 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요한 13,1 이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요한 15,13-15)고 하신다. 그분은 또 세상창조 때부터 당신의 친구들을 위해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매우 분명한 어조로 밝히시면서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듯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처해 있는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굶주리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도 먹을 것을 나눠주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 든다.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행복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 그득한데도 그들에게 목을 축여 줄 물 한 모금 건네지 않는다. 나그네를 따듯이 맞아들이기는커녕 문전박대한다. 희망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점점 더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고 보면, 우리에게 오신 분을 임금으로 섬기는 신앙 공동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분명해진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신앙의 해'를 마감한다. 하지만 한 해의 마감은 또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것처럼, 신앙의 해를 보낸다는 것은 이제 신앙인으로서 새로운 출발 선상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참으로 왕이신 분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감히 청원을 드려왔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분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 몸을 맡기시고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당부하신 바로 그 청원을 우리는 지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살펴봐야 할 때다.


왕이신 분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감히 청원드릴 수 없었다면, 이제부터는 그분이 당신을 기억하고 행하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이 행하신 바를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할 때다. 그래야 그분에게 선택받은 백성, 충실한 종, 사랑스러운 자녀, 벗인 동시에 형제자매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임금이신 분께 "주님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마지막 날에 저희를 기억해 주십시오. 아멘!"이라고 그 사형수처럼 청원을 드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철민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우리는 오늘, 한 해 동안 예수님 안에서 살아온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베드로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온 우주의 ‘왕’ 이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특별히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었던 ‘신앙의 해’를 마무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이라고 고백한다.

                                                                                  

신앙의 해 동안 우리는 “신앙의 해는 구세주이신 주님을 향해 돌아서라는 부름”이라는 신앙의 해 기도를 바치며 주님 안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때로는 ‘나’라는 길을 걸으며 방황하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깨우치게 되었다.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하고 말씀하시며, 몸소 십자가 위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목숨을 잃으셨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신 분께서 당신을 한없이 비우고 낮춤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진 십자가를 부정하면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던 죄수처럼 행동하기보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했던 죄수처럼 행동했으면 한다. 우리가 비록 현실의 무수한 유혹에 너무도 쉽게 타협해 버리는 무디고 나약한 마음을 지녔다 할지라도,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구세주이신 주님을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날 것이다.

                                       

물론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왔고,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 그리고 그분이 보여주신 십자가를 지는 삶은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해 줄 가장 확실하고 가까운 길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한다. 그러니 언제나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으면 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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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성서를 열고 해당 복음말씀을 묵상한다.

초라하다 못해 비참해 보이는 삼라만상의 왕이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왕의 모습이 이런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세 가지의 부르심 즉 왕직, 사제직, 예언직에 참여해야 함을 배워왔다.

오늘은 물론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왕직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참된 그리스도교적 왕의 의미는 수없이 이야기 되어왔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자. 섬기는 일이다.

그분께서 그리도 강조하셨던 왕다운 모습이란 결국 섬기는 모습이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왠지 모르지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자꾸 눈에 들어오는 대상은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아니다.

함께 십자가에 죽음을 맞이한 두 죄인의 모습이다.

한 사람은 예수를 저주하고 조롱한다. 욕설을 퍼붓는다.

다른 한 사람은 저주를 퍼붓는 이를 나무라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한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은 두 사람이 강도라고 전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주일복음으로 대하고 있는 루카 복음서의 내용과는 달리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모욕하였다고 전한다. 물론 요한 복음서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사람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전승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보다는 루카 복음서를 선택한 느낌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두 사람 중 오른 쪽에 있었던 사람(右盜)이 회개한 사람이고 왼쪽에 있었던 사람(左盜)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저주한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도 있다. 사실 역사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보다 개연적일 것이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 그 양쪽에는 두 사람의 죄수들이 있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누가 보아도 처참한 마무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삶 모두 상처투성이가 아니었을까?

한 사람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을 맺는 것이고, 한 사람은 마지막에 상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을 입는다.

얼마나 고단한 삶들이었을까?

그들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죽음에 대한 명분이라도 그럴 듯 했으면 슬픔이 조금이라도 희석이라도 되었을 텐데…….

죽는 순간까지 이 두 사람의 몰골은 인간쓰레기로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 둔 세 인물의 거래는 십자가 위해서 진행된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저주하며 어둠으로 끝날 것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해방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에 대한 보증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몰골이 말이 아닌 예수라는 인물이 서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하나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이라는 유한성에 대해서이다.


먼저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두 사람의 삶이 비슷한 처지였을지 몰라도 마지막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이 이해한 각자의 삶에는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를 짐작해본다.

하루아침에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회개라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죄에 늘 넘어지는 삶이지만 이 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이 평상시 회개한 강도에게 있지 않았었을까?

반대로 예수님을 죽는 순간까지 모욕했던 강도는 자신이 걸어왔던 삶 자체가 어둠이었고, 그 어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저 상처에 머문 인생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고자 할 때는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를 잘 가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비록 허물투성이고 상처투성이의 모습이라도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늘 열려있을 것이고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선택은 늘 주어지는 것 같지마는 결국 마지막 선택이 존재한다.

삶 속에서 숱한 선택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의 선택은 어쩌면 마지막 선택을 위한 연습일지도 모른다.

루카가 전하는 십자가 위에서 두 강도와 예수님과의 거래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찰나적인 선택이었던가?

다시 첫 번째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이 된다.

마지막 선택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의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 이는 주사위 놀이가 아닌 분명 선택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희망하지 않는다.

마지막 선택을 위한 준비는 이 순간에도 이루어져야 함을 생각했으면 한다.

오늘 이야기는 쉽지가 않다.

글을 써내려 가면서도 제대로 전달이 될까 망설여진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잘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행운아, 우도

양승국 스케파노 신부님

우리의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은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꼭 좀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200주년 기념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오늘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정녕, 진실로, 이런 표현은 아무 때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99.9% 확실시 될 때, 거의 확정적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도에게 확실한 천국행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의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마땅하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나오는 ‘사랑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란 소제목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현수는 손이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오전 내내 방에만 누워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동안 일하던 공사현장을 찾았습니다. 현장 소장은 쏘아붙이듯 말했습니다.

“설마 그 손을 해가지고 일하러 온 건 아닐 테지?”

그는 무작정 길을 걸었습니다. 도시 곳의 궁전을 짓다가 다쳐버린 손, 그리고 그 안에서 안락하게 사는 사람들, 방세도 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 시골에 중풍으로 누워 자신의 돈을 기다리는 아버지.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소주 한 병을 샀습니다. 그리고 근처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구름다리 위에서 놀고 있는데 위태롭게 보여 달려갔습니다.

“조심해야지.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구.”

아이는 말없이 현수를 보며 웃었습니다. 현수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술을 다시 마시며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일할 시간인데도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는 화가 나 마시던 병을 던져버렸고 병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병 조각에 반사된 햇빛이 현수의 눈을 자극했습니다. 그 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현수는 아이에게 다시 다가가 물었습니다.

“엄마는 어딨니?”

“집에 있어요.”

“아빠는?”

“아침에 회사 갔어요.”

“너, 지금 아빠 보고 싶니?”

“네.”

“그럼 수진아, 우리 아빠한테 갈까? 아저씬 아빠 친구란다. 우리 아빠한테 가서 인형 사달라고 할까?”

“아저씨가 아빠 친구예요?”

아이는 붕대를 감은 그의 손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응. 아저씬 아빠 친구야. 그러니까 네 이름이 수진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수진이는 자신이 가지고 놀던 공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현수가 보았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몇 번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쳐다보았지만 얌전하게 현수를 따라왔습니다.

현수는 아이를 자신이 살고 있는 금호동 산동네로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아이가 아빠를 찾을까 봐 마음 졸였지만 아이는 이상하게도 아빠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집 번호까지 알아내고, 언제 전화해서 얼마를 요구할 것인지 또 어떤 방법으로 돈을 전달 받을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아이가 불안해하더니 급기야 울기 시작합니다.

“수진아, 울지 마. 아저씨가 나가서 아빠한테 전화도 하고 빵도 사올게. 아저씨 올 때까지 여기서 나가면 안 돼. 밖에 나가면 아저씨한테 혼나. 알았지?”

전화는 좀 더 어두워진 때 하기로 하고, 가게에 내려가 빵과 우유를 사고 아래 문방구에 내려가 만일을 대비해 끈과 비닐테이프를 샀습니다. 수진이는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왔고 오늘은 아저씨 집에서 자고 오라고 했다는 말을 믿지 않고 받은 빵을 던져버립니다.

“알았다. 알았어. 이따가 집에 데려다 줄게.”

그러자 마음이 놓였는지 그가 집어준 빵을 다시 받습니다.

“아저씨도 먹어요.”

아이는 빵 한 쪽을 손으로 떼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아냐, 아저씬 배고프지 않아.”

그 순간 그는 냉정해져야 한다고 다짐하며 손의 붕대를 단단히 고쳐 맸습니다.

“아저씨, 손 왜 다쳤어요?”

현수는 아이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끈과 비닐 테이프가 들어있는 손가방을 한 번 더 본 후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화장실에서 다시 나왔을 때 아이는 방에 없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약국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현수는 죽일 듯이 쏘아붙였습니다.

“엄마한테 데려다 준다고 했잖아. 왜 혼자 밖에 나갔어? 아저씨가 나가지 말랬지? 어서 바른대로 말해. 너 밖에 나가서 엄마한테 전화했지?”

아이는 겁을 먹었는지 울기만 할 뿐입니다. 방으로 데리고 와서 끈과 비닐 테이프를 꺼냈습니다. 그 때 아이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아저씨 손 다쳤잖아요.”

대일밴드였습니다.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낮에 현장 사무소에 갔을 때 소장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설마 그 손을 해 가지고 일하러 나온 건 아니지?’

현수는 재빨리 끈과 비닐 테이프를 등 뒤로 감췄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방을 나왔습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무렵이었습니다.

현수는 끝까지 아이를 속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진아, 저 있잖아. 아저씨는 아빠 친구가 아냐. 너한테 거짓말한 거야. 미안해.”

아이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빙긋이 웃었습니다.

“아빠 친구가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요. 우리 아빤 지금 하늘나라에 있거든요. 그런 것도 모르는 친구가 어디 있어요?”

아이의 말을 들은 현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근데, 낮에는 왜 아빠가 회사 갔다고 한 거야?”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럼, 아저씨가 아빠 친구가 아닌 줄 알면서 왜 아저씰 따라왔어?”

“아저씨가 불쌍해서...”

“아저씨가 왜 불쌍한데?”

“아저씬 손이 많이 아프잖아요. 아빠도 병원에서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었거든요. 엄마는 아빠가 불쌍하다고 만날 울었어요.”

현수는 목이 메어왔습니다.

“수진아,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아저씨 생각하지 마. 아저씨는 말야...”

“울지 마세요, 아저씨...”

현수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아이에게 엄마에게 전화를 하라고 하고 길 건너편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엄마가 한참동안 수진이를 끌어안는 것을 보고, 또 수진이가 자신이 준 보라색 우산을 들고 자신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따라가는 것을 보며 세상엔 아직도 사랑이 있으며 사랑이 있기에 살만한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975년 신안앞바다에서 한 척의 보물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안의 보물은 도자기와 화폐 등인데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보물선은 약 700년 전 중국 원나라 때 일본으로 가던 고급 상선이 어찌된 일인지 그대로 가라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물선이 발견되게 된 발단이 재미있습니다. 신안앞바다에는 가끔씩 파도에 밀려 도자기들이 떠내려 왔습니다. 한 어부는 그것을 주워 개 밥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온 친척이 그 도자기를 감정해 보겠다고 가져갔던 것입니다. 당시 감정가가 4억 5천이었습니다. 강남 아파트 한 채가 7천만 원 할 때였다고 합니다.


현수는 자신의 가치를 세상의 아무 쓸모없는 버려진 인생 낙오자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수진이는 현수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사랑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손이 다쳐 아무 쓸모없이 내쳐졌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누군가의 사랑, 그것이 현수에게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오른 쪽에 못 박혀있는 강도에게 수진이와 같은 분이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사랑을 발견할 수 없었던 강도. 그 분노로 자신도 망가지고 세상도 망가뜨리려고 했던 외톨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어떤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을지라도 당신만은 이렇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해 주시는 분. 그래서 우도는 오늘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현수가 같은 세상에 살면서 증오의 세상이 따듯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을 수진이라는 한 아이를 통해 경험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나라는 장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날 장소적으로는 ‘저승’에 내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랍어로 ‘파라다이스’라고 표현된 하느님나라는 내 안에 사랑이 들어왔을 때 만들어지는 행복한 세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오늘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참 행복의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치를 온전히 증명해 줄 사랑을 지니신 분은 오직 그분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느님도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왜 이 세상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든 지옥이기 때문에 덜 힘든 자살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의 행복을 관계를 통해 느끼게 하셨습니다. 늑대를 부모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늑대수준의 행복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늑대는 나를 인간으로 느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의 온전한 가치를 부여해 줄 한 분만 있으면 됩니다. 한 사람과 혼인한 사람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이사람 저사람 쫓아다니는 카사노바와 같은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사실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과 아주 깊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정처 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그 ‘수준’이 매우 높아져있기 때문에 그 높은 수준으로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그 사랑 하나로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그 수준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 자존감을 지닌 사람이 사는 세상이 파라다이스인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인간이시기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 가치를 아십니다. 우리 가치가 당신 생명을 바칠 만큼 소중하다고 오늘도 십자가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나의 왕, 나의 행복,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입시다. 우리도 오늘 당장 내 가치를 다시 느끼게 되며 파라다이스에 들어가 그분과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김기현 요한 신부님

며칠 전에 공소에 갔다 와서 ‘여전히 문제인 것이 문제로 남아있고,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하면서 무력감을 느꼈던 거 같은데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고집과 교만,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길 원하고 도우려 하셨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주님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하였는데요. 지도자들과 군사들과 예수님과 함께 달린 죄수들이 ‘당신이나 구원해 보시지...’ 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력한 모습이 아니라 영웅적인 능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능력있는 신부’ 라고 하면 이런 걸 떠올릴 때가 있죠. 어떤 신부님처럼 말씀을 잘해서 신자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나, 어떤 본당의 신부님처럼 수억이나 되는 빚을 빠른 시간 안에 갚아내는 것, 그리고 큰 성당을 짓고 성지를 조성해 내는 것들을 떠올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걸 하지 못하는 신부는 능력이 없는 신부로 생각되어질지도 모르겠는데요. 


그와 비슷한 시선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지도자와 군중들과 함께 매달린 죄수에게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런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두려움이나 신기함으로 반짝 자신을 따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믿음을 두고 끝까지 순종하며 살아가길 바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순종하시며 ‘그 길이 생명을 얻는 길이다..’ 하고 가르쳐 주시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비참하고 무력한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함께 매달린 두 죄수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리 본당 신자들이 나에게 와서 ‘신부님 기도해 주십시오. 강복해 주십시오. 안수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름엔가 동물들 밥을 주고 올라오는데 도시에서 나들이 온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레지오 단체였던 거 같은데 간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꽃밭에 물을 주고 호수를 정리하고 있는데 작업복 차림인 나에게 와서 한 자매님이 ‘신부님 저희에게 강복 좀 주세요~’ 하고 청하셨습니다. 그 시간 일하는 이가 아니라 신부임을 느꼈던 거 같은데요. 


아마 예수님도 비참하고 무력한 모습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아 준 그 강도의 말과 행동에서 작은 기쁨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우리에게 바라던 모습과 대답을 그에게서 들으셨기 때문일 텐데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합니까? 


대부분은 그렇다고 대답할 거 같은데요. 그럼 그분께서 당신 제자들과 교회에 맡기신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살아계심을 믿고 계신가요? 고해소에서 듣게 되는 용서의 말씀을 하느님의 용서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복음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허투루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계신가요? 형제들의 얼굴에서 그분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가요? 


그렇지 않다면 이천년 전에 그분을 알아 뵙지 못했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미사 안에 하느님이? 그게 빵이지 어떻게 예수님의 몸이야.. 용서가 느껴지지 않는데.. 말씀, 매일 듣는 지루한 것일 뿐이야..’ 한다면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 안에 하느님을 가둬놓고 평범하고 소박함 가운데 머무르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 같은데요. 내 생각이 아니라 그분의 생각과 지혜와 사랑을 알고자 한다면 믿고 깨닫는 바가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교회의 성사 안에서, 그리고 일상의 소박한 일들 안에서 그분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식사 후에 배추꽃 심는 작업을 했는데, 아까 내려가신다고 한 자매님이 내려가지 않으시고 성당에서 전례 관련 된 일을 하고 나오셨다.

그것을 보고 같이 꽃을 심던 자매님이 ‘아까 내려간다고 했는데 안 내려갔네..’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한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뭐라는 거야~ 내 욕한 거 아냐~”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한 해를

떠나보내며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시 묻고 배우려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쁘고 따뜻하고

아름답게 사셨던

사랑의 길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가장 소중한 삶의 여정입니다.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나 진실한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결코 십자가를

탓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내로써

성숙해지는 생명임을

예수님의 삶에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삶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미움과 절망까지

사랑으로 씻어 주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고통과 절망이 깊을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매순간 삶의 절실한 희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한 해를 주님께 봉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의 왕이신 그리스도'라

불러 봅니다.


희망은 언제나

새로운 오늘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마지막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여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말씀으로

성화되고

정화되는 길은

멀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을

생명에 담고 살아가는

은총의 '성서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홍승모 신부님

전례력 마지막 날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 여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묵상의 답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답은'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교회가 소멸돼가는 것 같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교회가 썩지 않을 생명의 씨를 키우고 있다'는 신학자 본 회퍼의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고민을 짊어졌다는 뜻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짊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분이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면서 묵상을 한 이런 글이 떠오릅니다.

"배추가 김치가 되려면 우선 소금간이 배추 속으로 들어가 뻣뻣한 배추의 원래 모습이 사라져야 합니다. 배추의 숨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추 속으로 들어가는 양념도 입장은 매한가지입니다. 배추 속으로 들어가야 배추가 비로소 김치 맛을 냅니다. 그 다음에 김칫독은 양념을 품고 있는 배추를 끝까지 보듬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만약 참지 못하고 김칫독을 열면 김치가 아주 이상한 맛이 됩니다."


만일 소금이 주님 십자가 여정이라면 소금인 주님의 십자가 삶이 우리 몸에 배어 있어야만 뻣뻣한 육신의 숨결이 비로소 죽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뻣뻣한 우리 이기적인 모습이 죽어야만 인간 본래의 맛이 향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칫독이 배추를 품듯이 주님이 우리를 품을 수 있도록 주님께 자신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이 죽지 않으면 늘 김칫독을 열어 확인하고 싶은 의심과 불안과 유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여정에 대한 의심과 불안, 유혹에서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죽이는 삶을 선택하십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공생활이 시작되기 전에 주님이 광야에서 받으셨던 세 가지 유혹이 십자가에서 더 구체적인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악마가 주님을 시험했듯이 이제 사람들은"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23,37)하고 빈정거리며 주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사랑의 종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의 다스리는 방식은 세상과는 다릅니다. 주님의 다스림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과 자비를 계시하는 삶이며, 죽는 순간까지 사랑으로 증거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곁에 있던 죄수는 우리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죄인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매달리신 십자가의 원수처럼 살아가곤 합니다(필립3,18).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23,39)하고 부르짖는 그 내면에는 자신의 실제 모습은 숨기고 세상 영광만을 찾으려는 이기적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또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다른 죄수를 죄인이라 부르지 않고'다른 하나'(루카23,40)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우리에게는"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간청할 줄 하는 새로운 인간적 내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삶과는 아주 다른 방식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움을 분노로 갚지 않고 화해하고 형제처럼 사는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사람값에도 못 미치고 바닥 인생이라고 좌절했던 한 사람이 그런 자신을 거둬주시는 주님 사랑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만 자신의 내면에는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주님 마음에로 향하게 하지 않는다면, 불행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완전한 성취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지를 갖고 기도하는 삶, 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의탁할 때 주님이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을 우리는 신앙하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주님 고통과 사랑이 교차되는 십자가에서 나오는 그 마음에 일치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가장 심오한 의미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분이 참 임금

손용환 신부님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플랑드르에서 가장 명성을 누렸던 바로크시대 화가입니다. 그는 미술에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탁월했습니다. 특히 그의 그림은 과거에도 사랑받았고, 지금도 명작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가 그린 ‘두 강도 사이에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루카복음 23장33∼43절과 요한복음19장16∼37절이 그 배경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성경말씀을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하다 보니, 다소 어수선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나 루벤스는 열악한 여건을 재해석하여 하나로 완성했습니다.


성경말씀처럼 이 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윗부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시는 장면과 아랫부분의 군사들이 창으로 찌르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림의 위와 아래를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창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의 부제목이‘창’입니다.


먼저 윗부분 그분의 오른쪽에는 나쁜 강도가 예수님을 모독하며 절규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23,39) 그의 절규에는 믿음이 없고, 단지 죽음에 대한 분노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왼쪽의 선한 강도는 그를 꾸짖고 나서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그의 애원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그의 마지막 희망을 반영하듯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 패가 붙어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다섯 상처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어 있지만 근육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강도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 그분은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죄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분이 세상의 참 임금 아닐까요?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죽는 순간에 그분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나쁜 강도처럼 분노와 저주로 대하겠습니까? 아니면 착한 강도처럼 회개와 희망으로 대하겠습니까?


이제 아랫부분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세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숨지신 것을 확인하고 그분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는 군인과 처형자들이 한 부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애도하는 마리아와 추종자들이 다른 한 부류입니다. 또 그분의 죽음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터번을 쓴 지도자와 구경꾼이 마지막 한 부류입니다.


구경꾼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그들의 말투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께 대한 조롱과 빈정거림만 있을 뿐입니다.


추종자들은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성모님은 검은 상복을 입고 예수님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며 기도합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성모님의 간구 또한 죄인들의 구원 아닐까요? 사도요한은 성모님께 기대어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사랑하는 분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상기된 얼굴로 나타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발에서 흐르는 선혈을 보고 두 팔을 들고 있습니다.


처형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23,37) 그들의 말투에는 희망이 없고, 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에 대한 절망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봅니까? 처형자입니까? 추종자입니까? 아니면 구경꾼입니까?




나폴레옹 황제냐? 십자가의왕이냐?

양해룡 신부님

프랑스의유명한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일 때 스페인을 점령한 일이 있었습니다. 17세기 초엽, 스페인의 왕인 카를로스4세와이왕위를 찬탈하려는 왕자 페르난도와의 싸움에 나폴레옹이 개입되어, 스페인을 정복하려야욕을 드러냈습니다. 특히1808년 5월 2일과 3일에 강제로 스페인 왕가를 “바욘”이라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으로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바로 그 때 시위대와 프랑스 군대가 부딪쳤는데, 수 많은 시위대가 이틀에 걸쳐 색출되어 죽어갔습니다. 이 긴장감 넘치는 작은 충돌을 그림으로 그린것이 그 유명한 프란시스코데고야의 “1808년 5월 2일”과“1808년 5월 3일”입니다.

이 사태로 나폴레옹은 스페인 정복에 발판을 얻어, 자신의 형을 조제프1세라는 이름으로 스페인왕으로 세웠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쟁의 명목은 프랑스대혁명의 자유주의를 스페인에 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봉건주의적 특혜를 폐지하고, 전체교회의 3분의1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복은 영국의 개입과 스페인 민중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게 되고, 결국 나폴레옹은 1815년 이 전쟁의 패배로 왕위에서 물러나 성헬레나 섬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역사에서 수 많은 왕들은 자신의 지배욕과 명목으로 수 많은 인명을 사살하면서 이웃나라를 정복하려다, 실패와 쓸쓸한 죽음을 맞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사에서 보인 그런 왕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로마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메시아, 구약의 오랜 예언속에 나타날 “왕”은 결국 십자가의 처절함으로 백성들에게 나타납니다. 제국을 지배한 위세당당한 황제 나폴레옹 같은 위용을 보고 싶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고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함께 달린 죄수에게도 모독을 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사람들을 위해 보여 주신 모든 기적과 표징이 무의미한 상태로 끝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분의 말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이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습니다. 군중들은 그들이 믿었던 왕,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이라면 자신도 구원해보라지.”라고 빈정거립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는 왕은 어떤왕입니까? 세상 모든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처럼 내세우면서, 지배자의 위풍당당한 나폴레옹 같은 왕, 아니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어가시는 왕, 어느왕을 바라며 살아갑니까? 세상왕의 종말은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아니 그 왕들은 단지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남아 있는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당신의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 백성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활의 영광속에, 이 세상을 초월해서 영원히 신앙인들과 함께 그분의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베풀어 주신 모든 표징이 그의미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메시아시라는, 진정한 이세상의 왕이라는 사건,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는 한낱 영웅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를 사랑의 법칙으로 다스릴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왕께 경배하도록 초대하고, 그들을 진정한 왕의 나라로 인도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왕께 경배드리세! 아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의 모상이며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새로운 창조물’?로 태어나게 하소서.


독서

십자가 아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자유의지로 두 가지 길, 두 가지 운명, 두 가지 태도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루카복음은 예수님 십자가 옆에 나란히 못 박혀 있던 두 죄수의 인생의 마지막 선택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두 사람은 단순한‘죄수’가 아니라 악한 일을 저지른 범죄자들입니다. 먼저 예수님 옆에 매달린 죄수 하나가“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23,39)라고 조롱합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메시아”(2절) “유다인들의 임금”(3절, 38절)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는 것을 바라보고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지도자들과 군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35절, 37절)고 조롱 합니다. 그러나 이 죄수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면“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39절)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죄수는‘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지금이라도 구름을 타고 기적처럼 등장하여 자신을‘고통’에서 구해 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21,27.28 참조)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시며 오직 하느님에게서 구원이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자기 묵숨을 잃음으로써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논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9,24) 예수님은 힘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로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다른 범죄자는‘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이 사람은 다른 죄수처럼 행동하지 않을까요? 핵심은 그가 다른 죄수처럼 십자가 아래의‘사람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계신‘예수님만을 바라보기’를 선택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태도는‘좋은 몫’을 택했다고 예수님이 칭찬한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와 같습니다.(루카10,38-42 참조)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영혼을 방해하는 온갖 외적인 소란을 차단해 버립니다. 그 철저한 집중 때문에 그는 자신의 손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절대적인 고통의 순간에도 바로 옆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23,33-34)라는 기도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순간, 갑작스럽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존재 전체를 흔들어 놓아“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라고 다른 죄수를 나무라기까지 합니다.(40절) 십자가 옆에 있는 순간은 그에게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순간입니다. 성경과 유다이즘에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야훼 앞에서 인간이 갖는 진정한 종교적인 자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진정한 지식의 뿌리이자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갈라놓는 기준선이기도 합니다.(잠언1,7) 이 죄수는 십자가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찬란한 사랑의 계시를 보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신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예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만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이 지상의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제1독서) 진리와 생명, 거룩함과 은총, 의로움과 사랑의 왕국임을 알아봅니다.(미사감사송)

예수님은 미래의 구원에 대한 요청에 낙원에‘나와 함께 갈 것이다.’가 아니라‘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를 약속하십니다. 낙원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기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누리는 친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필리1,23)을 의미합니다. ‘낙원’이라는 말은 또한 창세기에서 첫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누리던 복된 장소입니다. 이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당신에 대한 믿음 안에서‘새로운 창조물’?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활한 그리스도와 누리는 친교 안에서, 아담으로 인해 상실된 그 하느님 체험을 다시 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성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유일한 말씀(43절)은 본문의 주인공이 두 명의 죄수가 아니라‘오늘’, 십자가 앞에서‘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갖는 사람들을 낙원으로 데려가시는 그리스도임을 알게 합니다. 그분은“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신”(콜로1,?20) 하느님의 아들, 만물의 왕이십니다.


기도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가끔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를 접하다보면 조금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하면서 “**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성형사실을 고백했다.”라는 기사가 종종 인터넷 뉴스를 뜨겁게 달굽니다. 그리고 성형 전의 사진을 비교해주기도 하지요. 그런데 과연 성형하는 것이 떳떳하고 당당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렇게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조상님께서 물려주신 본바탕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성형한 후에 떳떳하고 당당해졌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살다보면 혼란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담배가 맛있어요?”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담배 맛이 얼마나 좋은데요. 그래서 이 담배를 못 끊는다니까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담배를 처음 배울 때에도 그렇게 맛 좋은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처음 담배를 배울 때에는 눈물 콧물 다 나올 정도로 맵고, 입 안도 텁텁한 것이 도대체 맛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입맛이 바뀐 것일까요?


이밖에도 많은 착각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그런 착각이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을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우리가 비난하지만, 그들이 예수님께서 진정한 구세주이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은 예수님은 자기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아가 분명히 아니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해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면서 빈정거렸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옆에서 함께 매달린 죄수까지도 예수님을 모독하지요.


하지만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옆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변호했던 또 다른 죄수였습니다. 모두가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남의 탓을 외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보았고, 그래서 회개할 수 있었고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흐름 속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항상 내 자신의 잘못을 먼저 깊이 뉘우치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은혜로운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의 왕이신 주님을 어떻게 따르고 있는 지를 묵상하면서,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을 잘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에게만 진리의 가르침이 보인다(탈무드).


초심을 위하여(‘행복한 동행’ 중에서)

미국의 합참의장을 지내고 지난 2007년 전역한 피터 페이스 장군. 그는 전역식이 끝나자 워싱턴에 있는 베트남전 참전 기념비를 찾았다. 그리고 카드를 꺼내 전사자 명부 앞에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 해병대 하사 파리나로에게. 이 계급장은 내 것이 아니라, 자네 것이네.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소대장 페이스.”

1968년 당시 22세의 청년 장교였던 그는 베트남전에서 수색에 나섰다가 적의 총탄에 부하를 잃고 말았다. 희생자는 19세였던 파리나로 병장으로 피터페이스 장군이 처음으로 잃은 병사였다.

무사히 베트남전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온 피터 페이스 장군은 그 이후 집무실 책상 오른쪽 유리 밑에 파리나로의 사진을 놓아 두고 일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목숨을 잃은 파리나로 병장의 얼굴을 보며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동료에 대한 책임감으로 한평생 신중하게 살았던 피터 페이스 장군. 우리 인생에서도 느슨한 일상을 꼭 잡아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면 어떨까. 금세 흩어지고 마는 초심을 위해서라도.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막판뒤집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축구시합을 할 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주 극적인 경우를 봅니다. 막판 뒤집기입니다. 경기가 거의 다 끝나가는 순간입니다. 후반전 남은 시간은1분, 스코어는1:0 우리가 지고 있습니다. 우리 팀의 패배가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나 가끔 기적 같은 일이 생기지요. 막판에 젖 먹던 힘을 다합니다. 정규 시간이 끝나는 순간 우리 편이 한 골을 넣고 동점을 만듭니다. 그리고 심판이 준 추가시간이2분, 한골 넣은 여세를 몰아 종료직전 한골을 더 넣습니다. 극적인 역전승이지요.

그 순간의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입니다. 선수고 코칭스텝이건 다들 너무 좋아 얼싸안고 그라운드 위에 쓰러집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극적인 ‘막판뒤집기’ ‘인생 역전’이 오늘 복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우도였습니다. 

그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이제 정규 게임은 끝나고 후반전 인저리 타임에 막판뒤집기를 성공시킵니다.  

그는 너무나 죄스러웠고 송구스러워, 차마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아룁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런 그는 누구였습니까? 좌도에게 자신의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형 중에 가장 극형으로 손꼽히는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형은 예수님처럼 무죄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과오로 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나라에서도 몇 번 기회를 줬겠지요. 그러나 번번이 그는 그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이런 그였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막판에 용기를 냈기에, 늦었지만 예수님 안에 긷든 하느님의 신성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명확히 신앙을 고백했기에 이런 정말 놀라운 상급을 선물로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도 사건’을 묵상할 때 마다 저는 우리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확인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의 대열에 합류한 우도의 신앙을 묵상할 때 마다 저는 크나큰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얻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문을 열어놓고 계시는 인자하신 아버지, 그분의 사랑 앞에 감격할 뿐입니다. 행복할 뿐입니다.

적대자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 그 이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철저하게도 수동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셨습니다.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포박당하십니다. 헤로데 앞으로, 빌라도 앞으로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십니다.

이제 더 이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메시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엄과 지혜로 가득 찬 영광의 왕으로서의 모습도 더 이상 없습니다.

무기력한 메시아, 한갓 말단 군인으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왕인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 이상 놀라운 기적도, 가슴 뛰게 하는 치유활동도, 감동적인 강론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을 느낀 군중들도 떠나갑니다. 


정녕 모든 것이 끝나버린 걸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상 위에 높이높이 매달리신 예수님, 무거운 십자가를 저 밑에서도 부터 골고타 언덕 끝까지 지고 오시느라 체력도 다 고갈되신 예수님, 무수한 채찍과 못 박힘으로 인한 출혈로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예수님,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이셨지만, 그 절박하고 고통스런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당신이 행하셔야 할 마지막 사도직을 또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 사도직은 바로 회개하는 우도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사도직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 가시면서도 한 인간의 구원, 그것도 가장 ‘몹쓸’ 인간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시는 하느님께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

오민환

유다의 지도자들과 로마 군사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멀리서 모욕적인 죽음을 감수하는 한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떻게 도울 길도 없어 보입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온 예수님의 모습 또한 백성들은 그렇게 지켜보았습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으로 통곡하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그저“서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던 완고한 지도자들이 빈정거리며 말하듯이,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 예수님은 로마 군인에게까지 모욕을 당합니다.

그들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유다인들의 임금아,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면서 조롱합니다.

이 모든 광경을 예수님 양옆에 매달린 죄수들도 다 보았습니다. 이 둘 중 한 명은 예수님을 조롱하지만,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의 무죄를 고백하며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참회하는 죄수에게 주님이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날도 아닌, 바로‘오늘’ 낙원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근처에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악함이 전형적으로 다 드러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 그리고 스승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의 나약함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인간을 보게 됩니다.


심각한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의 시대도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금으로 자처하신 적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금 대접을 받은 적이 있는가?


이것이 이 축일을 맞이하며 드는 생각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임금으로 자처하신 적이 없습니다.

빌라도가 집요하게 임금이냐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얘기했다’는 식으로 비켜 가시고 당신의 나라가 있다면 이 세상 나라가 아니고 진리의 나라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임금이 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를 빠져나가셨지요.


예수님께서는 또한 임금님 대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한 때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고 말씀과 행적으로 사람들이 열광한 적도 있으며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영광을 받으셨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듯 온갖 조롱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내는 뜻은 우리의 주님께서 임금이 되길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조롱받으신 주님을 우리가 임금으로 받들겠다는 뜻이고 우리는 그분의 충성스런 신하가 되고 백성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의 대통령들처럼 고작 한 줌 밖에 안 되는 이 세상의 임금이 되고자 하셨겠습니까?

그런 임금이시라면 저는 그분의 신하가 되지 않으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금님은 힘을 마구 휘두르는 임금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힘을 주시는 임금이십니다.

그래서 신하인 우리도 그분의 힘을 받아 힘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줍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지 할 말만 하고 어떤 얘기도 듣지 않는 그런 일방통행의 임금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우리의 소리를 즐겨 들으시고 그분을 통하면 萬事亨通이신 임금님이십니다.

그래서 신하인 우리도 즐겨 이웃의 하소연을 듣고 이웃의 아픔을 임금님께 아룁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자기 배 부르려고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 임금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아쉬울 것 없도록 상을 차려주시고 무엇보다 말씀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신하인 우리도 굶주리는 이들의 일용할 양식을 같이 걱정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따듯한 위로를 건넵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빈부로 갈라지고 동서로 갈라지게 하여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는 임금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공평과 정의로 평화롭게 하시고 생명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신하인 우리도 세상이 평화롭도록 평화의 사도가 됩니다.





 작년 5월 초였습니다. 그때에는 제가 성지에 있을 때였지요. 그리고 성지에 순례객이 많은 달로 무척이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순례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편찮으세요?”

저는 아픈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저는 누구보다도 건강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순례객이 제게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상당히 안 좋아 보여요.”

이번에도 저는 자신 있게 말했지요.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요. 하지만 저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또 얼마 뒤, 어떤 분이 제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얼굴도 검어지고 굉장히 안 좋아 보입니다. 어디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혀 아픈 곳이 없었는데 괜히 어디가 아픈 것 같더군요. 그리고 실제로 며칠 뒤에 자전거를 타다가 양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다른데 아팠던 곳은 없었지만, ‘아파 보인다. 아픈 것 같다.’등의 말을 듣다 보니 정말로 아픈 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이렇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좌절하게 하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고, 또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즉, 크게 나눈다면 힘이 되어주는 말과 힘을 빼앗는 말로 나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어떤 말인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해서, 오늘 복음은 우리의 왕으로 다가오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우리 스스로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를 반성하게끔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말을 합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자.”


군사들도 조롱의 말을 던집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까지도 모독의 말을 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과연 힘이 나셨을까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져야만 하는 십자가인데, 고마워하기는 커녕 조롱과 모독의 말만 건네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힘이 빠졌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힘을 빼고 있는데, 단 한 명 즉, 예수님의 우측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야 당연히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면서 예수님께 힘이 되는 말을 던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보답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말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나의 말은 내 이웃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인지, 아니면 조롱과 모독이 섞인 힘을 빼는 말인지……. 주님께서는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 곁에서 함께 하십니다.


힘이 되어 주는 말을 합시다.


감사의 기적(‘좋은 글’ 중에서)

“Think and Thank!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치가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일본의 현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불평과 불만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지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후치다는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하루에 1만 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감사의 마음이 당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는 병석에서 매일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감 두 개를 건네주었습니다. 가와가미 기이치는 손을 내밀어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질병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항상 ‘감사’가 풍성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수고하십니다.”라고 말하며 살아가면 우리의 환경은 행복해질 것입니다.



 

가시관의 왕

서현승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두 죄수 중의 한 사람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입을 통해 구원의 소식을 듣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참회하는 죄수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조건없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놀랍고 신기한 기적사화 때문에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빵과 물고기를 생산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풍랑을 잠재우는 신통력을 가졌다고 해서 예수를 왕으로 또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궁극적이고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고 깨우쳐주기 위한 삶을 사셨고 몸소 그 가치와 하나가 되었던 참된 분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의 구원자이자 왕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덧없는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는 예수님 옆 두 죄수의 삶 사이를 방황하지 않나 싶습니다.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생활과 참회를 반복하는 우리의 십자가는 아마도 두 죄수 사이의 한 지점에 있을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에, 우리의 죄짓는 생활 한가운데에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진리와 정의의 왕, 사랑과 평화의 왕, 봉사와 희생의 왕, 섬김과 겸손의 왕, 봉사와 희생의 왕으로 화려한 금관 대신 가시관을 쓰신 그분을 우리 삶의 참된 왕으로 고백합시다. 




사랑으로 다스리는 왕

배광하 신부님

실패한 왕 그리스도

희생의 왕

문득 예전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오봉선사’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오봉선사는 중국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 뒤 타이완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합니다. 그의 희생과 실천의 삶에 매료된 타이완 원주민들은 그를 왕 이상으로 떠받들고 그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리하여 타이완은 오랜 병폐적인 전통들을 고치게 됩니다.

그런데 오봉선사가 아무리 충고하여도 원주민들이 고치지 않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마다 새해에는 백성의 안녕과 평화, 풍년을 기원하며 산 사람을 죽여 신에게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그 무서운 악습이 고쳐지지 않자, 오봉선사는 어느 해 백성들에게 새해의 제물로 쓸 산 사람을 자신이 직접 마련해 보겠다고 제안합니다. 늘 산 사람의 제물 마련이 어려웠던 백성들은 선사의 배려에 크게 기뻐합니다.

오봉선사는 백성에게 어느 어느 날 어느 곳에 빨간 보자기를 눌러 쓰고 앉아 있는 이가 있으니 절대 보자기를 벗기지 말고 그의 목을 쳐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제사를 드리는 날 백성들은 선사의 말대로 그를 잡아 목을 친 뒤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빨간 보자기를 벗겨보니 제물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봉선사였습니다. 백성들은 통곡을 합니다. 이후 타이완 섬에서는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무섭고 끔찍한 풍습이 없어지고 해마다 오봉선사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은 날을 기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벌써 십 수년이 지난 이야기인데,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 까닭은, 오봉선사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꼭 빼어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실패한 삶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다른 이들을 행복에로 이끌어 주었던 경우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반면,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고 영웅시하며 치켜세우는 삶을 살았던 이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슬픈 죽음과 그 뒤에 아픈 희생이 따랐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삶은 분명 세상의 눈에는 실패한 것으로 비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2천 년이 넘도록 예수님의 지상 삶을 실패로 단정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전 존재를 바치시어 인간 사랑으로 사셨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세속적인 성공의 왕이 아니라 희생과 사랑의 왕이신 분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은 <성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 자네가 이곳에 살다 간 덕분에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풍요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이라네”.

예수님의 지상 삶은 단 한 사람의 행복과 풍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기를 두고 세상 종말이 오는 그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참다운 온 세상 사랑의 왕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게 마련입니다. 그 단적인 예를 보여 주는 것이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곁에 있는 두 죄수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다른 한 명은 부정합니다.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비아냥거립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 39).

그러나 다른 죄수는 진정한 뉘우침 속에 예수님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간절한 청을 드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온 우주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판단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세속 권력의 왕이신 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신 천상의 왕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가엾은 인간을 위해 오늘 당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끊임없이 인간 사랑에 눈물을 흘리시는 사랑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구원이요, 희망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의 주님으로 인정한 죄수는 예수님께 최초로 구원의 확답을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사랑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이 지상에서 그 낙원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낙원을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낙원으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바쳐 세상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참된 왕의 참된 신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은 오직 한분이십니다.

이기양 신부님

"신부님, 십자가 위에 붙어 있는 'I.N.R.I'가 무슨 뜻입니까?"

어느 날 예비신자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I.N.R.I'는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의 약자로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말씀일까요? 또 교회는 왜 오늘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시다.


복음을 보면 두 사람의 왕이 나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왕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입니다. 두 번째 왕은 조롱의 의미로 유다인의 왕이라 불리운 나자렛 예수입니다. 이 두 왕, 빌라도라는 유다인의 왕과 우리 신앙의 왕 예수님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 때 유대의 제5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권력과 명예와 부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자기를 가로막는 것은 칼과 창으로 가차 없이 베어버리고 마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세상의 왕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다의 가난한 시골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딱 한번 칼을 사용한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몸소 보이시며 십자가상에서 처형되신 '왕'이 우리가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조롱거리가 되어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어디서나 주님으로 흠숭 받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막강한 무력을 행사했던 빌라도왕은 예수님에 의해서 기억되는 존재일 뿐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 모든 곳은 성지가 되어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 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한 성경은 출간된 이래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기록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랑의 왕이지요.


우리는 이 두 왕을 비교하며 어떤 왕을 섬겨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빌라도와 같은 인생길에서 돌아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의 생활은 빌라도의 권력을 흠모하고 빌라도의 삶을 흉내 내고 있지나 않은 지요?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1997년 9월 5일 87살로 선종할 당시 사랑의 선교회는 전 세계에서 거의 4000 명에 달하는 수녀들이 600여 개의 고아원과 무료급식소, 노숙자들을 위한 거주지, 병원을 운영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의 하루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정신없는 중노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루는 시간에 쫓긴 한 자매가 데레사 수녀를 찾아와 하소연하였습니다.

"수녀님, 일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모두가 피곤에 지쳐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기도 시간을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데레사 수녀의 답은 참으로 간단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기도 시간을 두 배로 늘리십시오."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신자답게 살 수 있는 힘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회생활은 조화를 이뤄야 하며 그 중심은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삶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남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결국 그 길이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을 2000년 역사의 그리스도교가 확인시켜 줍니다.


신앙생활의 첫 걸음에서 고백한대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분 말씀을 내 삶 안에서 살아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홍금표 신부님

“핍박과 조롱 각오하고 왕직 수행해야”

행복을 주는 요소들이 많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마지막」 즉, 끝이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끝이 있기에 우리는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과 현재의 행복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란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4년간 연재했던 「복음 생각」을 마무리하면서 약간의 아쉬움도 있습니다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행복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기쁨과 어려움이 교차하는 과정 속에서 몇 번 포기하고픈 순간도 있었습니다만 어떻든 4년여의 시간을 썼다는 사실 때문이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제는 원고를 써야 되는 주일을 강박 관념없이 기쁜 주님의 날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어떻든 그 동안 부족한 제 글을 아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하나마 쓸 수 있었던 것은 몇몇 독자님들의 열정적인 격려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동안 부족한 제 글이 마음에 차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면 필자의 능력으로 이해해주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복음 묵상을 시작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제34주일을 지내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기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게 됩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됨을 기념하면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따라 새롭게 되도록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오늘 우리는 복음을 보면 약간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왕하면 뭔가 모르지만 호화로운 궁전과 권력, 엄위와 힘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기대하는 것은 막연하게나마 화려함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러한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만이 보여집니다.


단지 『유다인의 왕』이라는 조롱 섞인 죄목만이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 있을 뿐, 예수님의 엄위로운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환호와 박수 화려한 왕관과 왕좌는 고사하고 조롱과 모욕, 가시관과 십자가만이 오늘의 주인공이요 왕이신 예수님을 묘사하는 도구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우리가 이해하는 왕의 개념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왕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의 왕직을 수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심판과 조롱 멸시마저도 각오하면서 걸어가신 길, 가난과 봉사의 왕직이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가 하면 바로 오늘의 우리들이 수행해야할 기본사명인 왕직(봉사직)이 바로 예수님의 이 모습 안에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가난과 핍박, 희생과 봉사뿐 아니라 조롱과 멸시마저도 각오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태도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는 그 분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 모범적인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한 죄수의 모습입니다. 「윤리적인 죄를 넘어서는 신앙」, 「자신(의 죄)을 앎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 그리고 「멸시와 조롱 앞에서 예수님께 매달리는 신앙」.


이것이 바로 그분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자세임을 보여주면서 구원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예수님을 신앙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삶은 외적인 무엇이 아니라 내적이고 정신적인 자각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모욕과 멸시 천대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죄인의 몸으로 구원의 길로 나아간 한 죄수의 모습! 이 한주 우리가 살아야 또 하나의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전례의 주기를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오늘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 모아 ‘새롭게 하시는’ 분이기에 ‘온 천하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시며 결국은 당신의 왕권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제1독서: 2사무 5,1-3: 이스라엘의 영도자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을 단지 유다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는다(1-2절). 그러나 다윗 왕권과 그리스도의 왕권은 차원이 서로 다르다. 다윗의 왕권은 구원적 차원에 간여되어있긴 하나, 지상적 왕권이며, 그리스도의 왕권은 신적인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마음에서 죄악을 멀리할 때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다윗과 그리스도 사이에 ‘예언적’ 형상의 상호관계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연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구약에 대한 신약의 ‘우위성’(계시 15항)을 강조할 수도 있다.


복음: 루카 23,35-43: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며 서로 대립적인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십자가 형장에서 예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군인들에게 조롱과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보아라”(35.37절).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예수가 정말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다 해도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35절), 즉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목으로 달린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38절)이라는 명패도 사형에 처하게 된 이유보다는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즉 사랑하고,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며, 회개하는 강도에게 은총으로 구원을 베풀고, 사람들 앞에 절대 자유를 누리며, 죽음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사실은 두 강도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 중 하나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40-42절).


이것은 예수께 대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도이다. 구약의 많은 기도들이 이러한 형태이다(시편 104,8; 120,5 참조). 그러기에 그 강도 편에서 볼 때, 예수께서는 이미 신적인 분이시며, 그분이 맞이하는 죽음은 오직 참되고 유일한 ‘왕국’ 즉 하느님의 ‘통치권’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종말론적 왕국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즉시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43절).


구원이 바로 그 순간 보장되었다. 바로 그분의 죽음의 ‘오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첫 번째로 회개한 한 살인자가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하늘나라가 오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로 그 ‘선물’이다.


제2독서: 골로 1,12-20: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2독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나게 해주신”(1,13-14)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아들의 나라’는 ‘흑암의 권세’(13절) 즉 사탄의 나라와 정반대의 나라로 이해되고 있다. ‘아들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참된 ‘자유’를 얻음을 말하고 있다.


나머지는 그리스도의 찬가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만물이 그분을 통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성부의 완전한 ‘형상’이듯이 세상만물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형상’이다. 15-17절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만물의 시작이실 뿐만 아니라, 끝이시기도 하다.


즉 그분은 만물을 존속케 하시며 모든 창조물의 마지막 목적지이신 당신께로 향하게 하신다. 즉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16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또한 그분께로 ‘돌아가야’한다. 그런데 그 피조물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 맡겨져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분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도정에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역할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절대통치권’은 모든 만물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며 교회라는 공간을 통해 그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실체를 통해 드러나는 생명력을 뜻한다. 즉 그분의 풍부한 생명력이 교회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절대 통치권이다.


‘머리’는 ‘몸’의 모든 생명의 활동을 통합 조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 모두가 임금이신 그분의 ‘통치’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 모든 사람들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끔 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생활로써 체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예수는 나의 왕인가?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왕’이라는 말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요즘 귀에 거슬리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분은 참으로 당신을 우리 죄인들을 위한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왕이 시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왕인가?

오늘은 전례적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 왕 주일이다. ‘왕’이란 단어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요즘 전제군주적인 냄새가 많이 나기에 거부감을 갖게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왕’이란 요즘의 ‘대통령’처럼 우리가 뽑아서 일꾼으로 삼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왕’은 나라의 주인이요, 백성도, 땅도, 산천(山川)도 심지어 들짐승과 산짐승까지도 ‘나라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이란 바로 ‘주님’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 왕’,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왕권을 확립하셨는가?


2. 예수님은 악(惡)과 죽음을 이긴 왕이시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 써 붙인 죄명(罪名)은 ‘유대인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력에 뜻을 둔 적이 결코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정치범으로 몰려 죽으셨다. 당신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가장 비인간화시키는 죄(罪)와, 인간을 짓누르는 제일 두려운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셨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진정한 왕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아무도 건널 수 없었던 죽음의 심연을 뛰어넘어 ‘부활하는’ 결정적 승리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그분의 생애를 보자.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8-49) 아들은 모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은 예수님이 12세 때부터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알고 있었음을 내 비치는 말이다. 예수님은 세례 때부터 ‘고통 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소명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인간적인 갈등을 겪으셔야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12,27)하셨다.


수난을 목전에 둔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제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22,42)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가셔야 할 그 길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기에 인간적으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고통의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항상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빌며 그 길을 묵묵히 가셨다.


끝내 예수님은 큰 쇠못이 당신의 손발을 뚫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보라지!”(루카23,35).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23,37)하며 야유를 퍼부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도 못하고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이 순간은, 완전한 패배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일생동안 따라다니던 끈질긴 유혹을 끝내 물리치고 당신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킨 진정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십자가와 떨어질 수 없게 된 이 순간은,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고 죄인들을 위한 숭고한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사랑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 ‘다 이루어졌다’ 하셨고,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19,30)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아담의) 불순종이 엮어 낸 모든 죄업(罪業)을 말끔히 씻으셨다. 이로써 인간성과 인류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골로1,14)하고 고백한다. 드디어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우주의 왕’이 되셨던 것이다.


3. 예수는 내 안에서 ‘왕 노릇’하시는가?

나는 나를 얼마나 다스릴 수 있는가? 나 자신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자신을 얼마나 이겼는가에 달려있다.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명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 놓는 사랑으로 된 것이었다. 참된 해방,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있음을 깨닫자. 이 깨달음이 없이는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에게 있어 예수는 누구인가?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은 얼마나 함께하고 있는가? 나의 모든 삶이 예수 중심의 삶이 되어 예수님이 나에게 왕 노릇 할 때, 그 때 나에게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그리고 내가 사랑과 봉사로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의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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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의 중요성 : 설교자들이 어떻게 살며, 설교를 통해 어떤 그리스도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교회는 세상 구원에 ‘희망의 불기둥’이 될 수도,‘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설교자의 고뇌 : ▷“신(神)은 죽었다”고 외치는 이런 시대에, 또 그렇게 믿고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과 영원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가? 여기에 설교자의 고뇌가 있다.


▷ 모든 사목자들이 하나같이 느끼는 딜렘마는 쉴 새 없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진리를 설교하면서도 말하는 바를 그대로 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등일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강론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설교자의 자세 ;▷사제생활에 있어 말씀의 선포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사제에게 있어 강론 준비를 위해 바치는 시간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사제에게 있어서 강론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보다 더 큰 직무유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 “ 미국의 어떤 잡지에서 한 기고가는 “현대 자유 문명국에 사는 인류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매주일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왕직은 봉사직

허영엽 신부님

 몇년 전 본당에서 가정방문을 할 때였다. 그 가정에는 할머니 한 분이 홀로 살고 계셨다. 그 할머니께서 동행한 구역장 자매를 가르치며 말씀하셨다. “신부님! 저는 밤중에라도 갑자기 몸이 아프면 우리 구역장님한테 전화를 해요. 그러면 언제든지 저에게 달려와 기꺼이 도와 준답니다. 그리고 아프지 않아도 일주일 몇 번씩 잠깐이라도 들려서 이 노인네랑 말벗이 되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에게 우리 구역장님은 하느님이 보내 주신 수호천사네요”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맞아요, 맞아요. 천사예요”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 때부터 내가 그 구역장을 보면 “천사 구역장”이라고 별명을 붙여 불렀다. 그러면 그 구역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수줍어하시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며 그리스도 왕의 명령을 따라 살겠다는 결의를 재다짐하는 날이다. 요즘 세상에 무슨 왕인가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왕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일반적인 왕의 개념과는 한참 다르다. 특히 고통과 조롱 속에서 죽어 간 그분의 모습은 왕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욕하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을 강제로 지배해서는 안 되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 왕권의 모습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원리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왕직이란 바로 봉사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왕, 진정한 지도자는 모두 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남을 섬기고 남의 종이 되어 주기는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봉사하면서 교만과 허세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세상을 통치하고 사회를 다스리는 힘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과 가정을 평화의 낙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몸소 알려 주셨다.


“주님, 우리도 주님을 따라 겸손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저희를 기억해 주십시오.”


 


고통의 왕, 순명의 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해 부근에서」(엔도 슈사크 저, 성바오로 출판사)란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저자는 이스라엘에서 성서공부를 하고 있는 옛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예수님 주요 활동반경이었던 갈릴래아와 사해 부근 지방을 여행하면서 예수님 발자취를 추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삶을 깊이있게 재조명합니다.


저자는 기적과 치유로 환영받는 초능력의 예수님보다는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충실한 봉사를 실천하시는 사랑과 연민, 희생과 자비의 예수님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합니다. '마구간 탄생'의 그 겸손과 소박함이 예수님 일생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해결사의 면모를 지닌 메시아보다는 겸손하게 봉사하고 순명하는 메시아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고열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서 물수건을 올려주던 사랑의 예수님,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와 함께 울어주던 연민의 예수님을 부각시킵니다.


초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갖춘 현실적 메시아를 고대하던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실망과 조롱의 눈초리로 쳐다보지만, 예수님은 단지 고통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합니다.


저 역시 너무나 이기적이며 편협된 메시아관을 지니고 살아왔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인류 전체를 구원하셔야 할 크신 메시아를 제 현실적 기대나 사리사욕만을 채워주시는 작은 메시아로 축소시켜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만의 현실적 성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메시아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자녀만을 대학입학 시험에 합격시켜 주고, 내 고질병만을 치유시켜 주고, 내 사업만을 번창시켜 주는 작은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책 말미에 이런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다니던 예수님께서 한없이 지치고 슬픈 얼굴로 몇명 남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를 위해 울어주는 것,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 나 자신의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것들이 다윗 성전보다 과월절 제사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정치가가 아님을 명백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앉히려고 애를 씁니다. 특히 예수님을 등에 업고 한가락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 귓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선생님,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선생님께서 나서실 때입니다. 제가 힘이 돼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이 왕이 되시는 날 저를 꼭 기억해주십시오."


예수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축소시키고 격하시켰습니다.


오늘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사람들에게 조롱 받으시는 예수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축복과 안녕이 보장된 세속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어디가나 백성들에게서 갈채받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최고 인물이 아니셨습니다.


그보다는 쓰디쓴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셔야 했던 인내의 왕이셨습니다. 냄새나는 죄인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그 처참했던 형극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으셨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해 묵묵히 죽어 가신 순명의 왕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소원성취입니까? 건강입니까? 혹 끝없는 부귀영화입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 십자가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 그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는 역설의 신비를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입니다.


"가장 훌륭한 묵상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감사와 칭찬이 주는 치유

이인주 신부님

나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다. 하느님께 감사, 아버지께 감사, 어머니에게 감사,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하며 산다. 그 감사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죄인이었기에 그렇게 감사를 해야 한다. 용서를 해줄 사람보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많기에 감사해야한다. 사실 용서를 받는 것은 용서를 해주는 것 보다 쉬운지 모른다. 물론 용서해 줄 사람이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참 어렵겠지만 말이다. 죄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더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칭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인인 시절엔 내 자신이 어둠 속에 있었기에 뭘 어떻게 할 줄 몰랐다. 내가 어둡고 두려운데 어떻게 칭찬을 할 수 있나?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장가를 안 간 것은 참 다행이었다. 아니 하느님의 안배였으리라. 만에 하나 칭찬할 줄 모르는 내가 가장이었다면, 말 그대로 오 마이 갓이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화하니까. 아니 그분께서 변화시키시니까.


감사와 칭찬은 목이 다 달토록 해도 좋은 것이다. 일주일 한 달 아니 일 년 백년을 해도 좋은 것이 감사와 칭찬이다. 칭찬을 못 먹고 산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어둡다. 그리고 왜 내가 어두운가를 느낄 땐 이미 가슴 속이 까맣게 그을려 있다. 그래도 좋다. 그래도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으면, 그 검은 잿더미 속에서 싹이 나온다. 재는 좋은 거름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래 그 싹이란 연약하다. 그래도 순수하기에 강하다. 훅 불면 날아가고, 톡 치면 죽어 없어질 것 같지만 사랑을 먹고 칭찬을 듣는 연초록의 싹은 결코 어리지 않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걸 알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남자만 보면 경끼를 하는 여자들을 만난다. 폭행을 당했거나, 아빠나 오빠 아니면 가까운 남자들로부터 사랑과 칭찬 대신 학대나 외면에 상처를 받아서일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엔 쉽게 상처를 입는다. 물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남성들의 무식, 무지에서 오는 것들이다. ‘돈 벌어다 줬으면 됐지, 뭔 잔소리가 그리 많아........ 난 뭐 어디서 그냥 이 돈을 가져오는지 알아?’ 물론 서로가 화가 나서 하는 대화이다. 서로 따뜻하게 대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러나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하지 않는 이상, 같은 이불 속에 한 솥에 밥을 지어먹어도 그걸 모른다. 그런데 아픔이 찾아오고, ‘아! 저 사람이, 아! 우리 아빠가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건장한 그 체구에 뿜어 나오는 그 호랑이 울음보다 더 크던 호탕은 어디를 갔는가 하는 순간, 하느님 아버지 한다.’


그러나 이때는 많이 늦었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부터라도 사랑한다 하고 칭찬을 많이 하면 되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꼭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그런 싸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상처를 주고 싶어 준 것이 아니기에 괜찮다. 무뚝뚝하고 표현 못한 남성의 둔함 땜일 것이다. 그냥 한 마디 하라. ‘고생했습니다. 아니오. 미안했소. 속으론 늘 사랑했는데, 그걸 표현 못하고, 그냥 투정을 먼저 했구료.’


그래 그런지는 몰라도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수만 톤의 가시는 벌 한 마리 불러 모으지 못하지만, 한 방울의 꿀은 수많은 벌떼를 불러 모은다.” 한 방울의 꿀이 벌을 불러 모으는 것은 그 안에 향기가 있기 때문이고, 그 향기는 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을 기쁘고 생기 차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 꿀의 향기와 달콤함은 사람에 있어 사랑이고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계신 교회에 왜 사람들이 모이는가? 거기엔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빵으로의 양식이 있는가 하면 영적양식이 동시에 있기에 꿀에 벌과 나비가 모이듯 하느님의 교회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 속에 사랑과 생명이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은 칭찬으로 우릴 위로하고 계시기에 사람들은 교회와 성서 안에서 그분을 만나고 위로와 사랑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다 치유 받기에 이렇게 이렇게 모여드는 것이다.


그럼으로 꿀이 벌 나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듯이, 우리에겐 하느님의 위로와 사랑과 칭찬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상처받은 영혼이라도 그분의 위로와 사랑 앞에 오면 다 녹는다. 상처 받은 영혼들이여 주저하지 말고 그냥 그분께로 오라. 그럼 그 안에 따스함이 스며들 것이고 그로 인해 다 얻어진다. 그리고 치유 받은 사람들이여, 이젠 더 이상 인색하지 마라. 그냥 끌어 앉아주라. 그리고 칭찬하라.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님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나무에게 말하였으나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하며 거절했습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임금이 되어줄 것을 청하자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버리리라.”고 하였습니다(판관 9,8-­15 참조).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면서, 또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판관기의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후보자들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겠습니다.’ 하며 여러 가지 공약을 앞세우고, 자신이 이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국민을 설득하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지도자들은 ‘빈정’거리고, 군인들은 ‘조롱’하고, 죄수는 ‘모독’하쨉?십자가의 예수님은 침묵만 하십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 기름부음받은자는―구약에서 예언자·사제·왕의 즉위식 때 기름을 부어 성별하였다―다윗 왕과 같이 정치·경제·군사·종교적으로 영향력 있는 왕이여야 했습니다.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시는’(이사 9,3) 사람을 기대했는데, 십자가에서 맥없이 죽어가는 예수는 분명 거짓 메시아라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남은 구했으면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메시아일 수 없다면 ‘남을 구하면서 자신도 구하는 사람’이 메시아란 논리도 이상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구할 필요가 없는 생명 그 자체여야 메시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에 애써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고 ‘남은 구하면서도 자신은 구하지 않는’ 살신성인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조롱의 표시로 ‘이자는 유다인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온 우주의 왕이 되셨습니다.

본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은 ‘하느님’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시고 먹여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어떤 아쉬움도 없게 해주시는 피난처요 산성이요 구원자요 방패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무엘에게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주십시오.”(1사무 8,5) 하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언짢아진 사무엘에게 주님은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통치받기를 선택하면서 임금을 세울 때 감수해야 하는 온갖 것에 대해서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1사무 8,19)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첫 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왕정제도를 허락하셨지만 왕과 백성은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기름부음받은 왕의 임무는 하느님께서 하셨듯이 자기 백성을 물질적·영적으로 잘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고 세 번이나 당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은 대부분 이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참된 임금, 메시아는 겸손하여 평화를 이루시고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고 예언자들이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가?”(이사 53,6ㄴ-8ㄱ)

예수님은 당신 백성들을 먹여주고 치유해 주고 발을 씻어주면서까지 그들을 섬겼으나 배반당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은 바보같이 착한 왕, 그의 왕관은 가시관이요, 반지는 못이요, 옷은 벌거벗김이고, 침상은 십자가였습니다. 그야말로 ‘다른 이들은 구하면서도 자신은 구하지 않는 왕’,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말씀을 끝까지 실천하며 두 죄인 사이에서 죽어간 왕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대답을 들은 죄수는 꼴찌였는데 첫째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얻었습니다. 이 왕은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생명의 왕이면서도 우리의 음식이 된 사랑의 왕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지상 목표였습니다.

경제성장이 아니라 서로 나눔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개발과 편리한 삶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무한경쟁이 아니라 각자 받은 선물을 꽃피우게 함으로써 서로를 즐기고, 생명을 조작하는 행위를 절대 묵인하지 않으며, 평화를 위한 구실로 전쟁을 하는 일이 없으며, 특별히 작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의 소리에 민감하고, 힘의 논리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으며, 언행이 일치하는 정의롭고 당당한 왕. 이런 왕을 섬기는 이는 진정 복된 사람입니다. 시편은 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듣거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이라. 네 겨레와 아비 집을 잊어버리라. 이에 임금이 네 미모에 사로잡히시리라.”(44,11-­12ㄱ: 최민순 역) 세상의 온갖 것을 뒤로하고 주님께 몰두하는 그것이 미모요, 임금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미모에 사로잡히십니다.




한 사람의 강도만이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34주일로서 한 해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오늘 축일을 정확히 말하면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축일’(Domini Nostri Jesu Christi, Regis Universorum Solemnitas)이다. 오늘 축일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가 회칙 ‘과스 프리마스’(Quas primas)를 통하여 제정하였다. 1925년은 325년 가톨릭교회의 첫 공의회로서 ‘니체아 신경’을 선포한 니체아공의회 개최 1,600주년의 해였다.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무참하게 파괴된 참담한 세계상을 니체아 신경을 바탕으로 다시 세우고자 했다. 교황은 우주와 세상의 참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질서란 오직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절대적인 통치권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선포하려했던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현세적으로만 생각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 대축일은 제정할 당시에는 10월 마지막 주일에 지냈으나, 1969년부터 오늘과 같이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기념함으로써 우주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길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중개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대략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예루살렘 북쪽 성벽 밖에 자리 잡은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를 보도하는 대목이다. 반나체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 온 몸은 채찍질과 상처와 피투성이고, 가시관을 쓰다 못해 머릿속에 박고 있는 몰골하며, 신의 모습도 인간의 모습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참담한 광경이다. 백성의 지도자들인 대제관들과 바리사이 율사들을 물론 형을 집행하는 로마 군인들에다 같이 달려있는 강도까지 십자가의 예수를 향하여 맘껏 조롱과 희롱과 모욕을 퍼붓고 있다.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목이 적힌 명패도 한 몫 거들고 있다. 하필이면 왜 이 대목을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복음으로 택한 것인가? 오늘 대축일의 의미에 잘 부합하는 자료가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기적사화를 놔두고라도, 풍랑을 꾸짖어 잠재운 기막힌 기적(루카 8,22-25)도 있고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도 있는데, 왜 예수 생애의 가장 비참한 이 대목을 복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 찾아보자.

루카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15,22-32)을 참조하면서, 마르코가 아주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 양편의 두 강도(27절, 32c절)에 관한 이야기를 크게 확대하여 편집하였다.(39-43절) 이 대목이 바로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루카는 두 강도를 갈라,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모욕하는 편에 세웠으며, 다른 하나는 그 동료강도의 무례함을 꾸짖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참회자로 세웠다. 바로 그가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하고 간청하였다는 것이다. 참회자의 간청은 헛되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 순간이었다 할지라도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는다는 것은 루카복음의 한결같은 주제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하고 뉘우치며 간청하는 강도에게 용서와 자비를, 그리고 구원을 한꺼번에 베푸셨다.

갖은 모욕과 조롱이 난무하는 가운데, 단지 이 강도 한 사람만은 예수님이 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였다. 이 강도 한 사람만이 ‘사형을 당하여 죽어가는 왕’, 그리스도를 알아본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오늘 죽어가는 예수님을 생명의 임금이요 왕으로 고백하는 이유로 충분한 대목이 아닌가?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오직 이 죄인인 강도만이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오늘이 가기 전에 그리스도의 왕국에 든다면 예수님은 진정 그 나라의 왕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진리와 사랑의 왕, 정의와 평화의 왕, 봉사와 희생의 왕, 섬김과 겸손의 왕, 용서와 자비의 왕, 금관대신 가시관을 쓰신 왕이다. 자신을 낮출 대로 낮추어 신하를 오히려 섬기는 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저 강도를 낙원으로 초대하는 왕이시라면, 나에게도 진정한 왕이시다. 나 또한 저 강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에 즈음하여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를 만나고 그분께 용서와 자비를 빌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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