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2-28
그 무렵 12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니엘이 그의 하느님께 기도와
간청을 올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13 그래서 그들은 임금에게 다가가서 금령과 관련하여 말하였다.
“임금님, 앞으로 서른 날 동안
임금님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진다는 금령에 서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임금이 “그것은 철회할 수 없는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법에 따라 확실하오.”
하고 대답하자, 14 그들이 다시 임금에게 말하였다.
“임금님, 유다에서 온 유배자들 가운데 하나인 다니엘이
임금님께 경의를 표하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서명하신 금령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은 채,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15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괴로웠다.
그는 다니엘을 살려 내기로 결심하고
해가 질 때까지 그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16 그러자 그 사람들이 임금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이 세운 금령과 법령은 무엇이든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법임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17 그리하여 임금이 분부를 내리자 사람들이 다니엘을 끌고 가서 사자 굴에 던졌다.
그때에 임금이 다니엘에게,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 내시기를 빈다.” 하고 말하였다.
18 사람들이 돌 하나를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아 놓자,
임금은 자기의 인장 반지와 대신들의 인장 반지로 그곳을 봉인한 다음,
다니엘에게 내린 어떠한 조치도 바꾸지 못하게 하였다.
19 그러고 나서 임금은 궁궐로 돌아가 단식하며 밤을 지냈다.
여자들도 자기 앞으로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20 새벽에 날이 밝자마자 임금은 일어나 서둘러 사자 굴로 갔다.
21 다니엘이 있는 굴에 가까이 이르러, 그는 슬픈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외쳤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사자들에게서 구해 내실 수 있었느냐?”
22 그러자 다니엘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23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24 임금은 몹시 기뻐하며 다니엘을 굴에서 끌어 올리라고 분부하니,
사람들이 그를 굴에서 끌어 올렸다.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25 임금은 분부를 내려, 악의로 다니엘을 고발한 그 사람들을 끌어다가,
자식들과 아내들과 함께 사자 굴 속으로 던지게 하였다.
그들이 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달려들어
그들의 뼈를 모조리 부수어 버렸다.
26 그때에 다리우스 임금은 온 세상에 사는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이 큰 평화를 누리기 바란다. 27 나는 칙령을 내린다.
내 나라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는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28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악의로 그를 고발한 이들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지지만, 하느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고발한 이들은 죽음을 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큰 권한을 지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바빌론이 무너졌다고 큰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하늘의 많은 이가,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당신 종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나 이는 속량의 날이 다가왔다는 뜻이므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격려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누워 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누운 채로 눈을 뜨지 못한다면 …….’ 대개 두려움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다른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찾아옵니다. 그 힘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내가 이루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소중했던 도시인 예루살렘의 멸망, 임신한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배 속의 아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젖먹이 아이 ……, 그 소중함을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두려움이 닥쳐옵니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온몸으로 맞이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이 행복했다고, 미안하다고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는 데 소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시는 그 전능한 힘에 온몸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모든 것을 잃게 하는 힘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힘임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소중함을 잊지 마십시오.(최종훈 토마스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날에 오실 사람의 아들, 곧 당신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예언서와 에제키엘 예언서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재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즐기시는데, 이번에는 당신의 재림에 관하여 언급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여러 징표들도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적군에게 포위된 뒤 황폐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큰 재난이, 하느님의 진노가 닥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입니다.사실, 이 장면은 에제키엘이 이미 기원전 6세기에 경험한 바빌론 유배 사건과 비슷한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이미지를 통하여 종말을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마는 그러한 심판의 날이 아닙니다. 그날은 하느님을 멀리하는 이들에게는 심판과 파멸의 날이지만, 주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속량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다리우스 임금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인물로, 이스라엘에 구원의 날을 가져다준 페르시아 임금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다리우스 임금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기에, 그가 이방인임에도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라고 여겼습니다(이사 45,1 참조). 그러나 그를 통하여 주어진 구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참된 메시아, 구원의 날을 가져다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
이번 주간 내내 우리는 독서와 복음에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묵상합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신 그리스도께서 틀림없이 다시 오시지만, 언제 어떻게 오실지 모르기에, 희망이 없어 보이는 박해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가 신앙 안에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당시 유행하던 묵시 문학적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장차 박해를 받게 될 것임을 예고하시며,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증언할 기회’라고 하면, 훌륭하게 증거를 보여 반대자들을 논박하고 어떤 주장이 옳다는 것을 납득시킬 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제자들의 경우는 박해자들의 손에 끌려가서 임금과 총독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증언해야 하는 것이기에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잡혀간 그들이 해야 할 말을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뛰어난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기에,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신앙의 시련을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인내’였습니다.
여기서 ‘증언할 기회’로 번역된 그리스 말 단어는 ‘마르튀리온’입니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마르튀리아’는 본디 ‘증언’을 가리켰지만 나중에는 ‘순교’라는 뜻도 포함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을 증언하는 것은 말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신앙을 위해 고통을 견디고 죽음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분명 위기는 기회입니다. 박해는 복음과 하느님을 증언할 기회가 된다는 점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의 최후와 세상 종말 사이에 ‘이방인의 시대’가 들어설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종말은 복음이 모든 백성에게 전해졌을 때 온다는 것이 복음서 전체의 관점입니다(마태 24,14; 마르 13,10 참조). 그저께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의 시대가 펼쳐질 것을 예수님께서 예고하셨음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종말은 모든 백성에게 복음이 전해져 예수님의 시대가 완성될 때에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시대가 완성되어 종말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 곧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교회 공동체는 끊임없이 박해받고, 세상은 혼란을 겪게 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인류는 끊임없는 혼란과 반목을 경험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은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말까지 3천7백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고 하며, 이는 전 세계 전쟁의 약 2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흑사병, 조류 독감 등 수많은 전염병이 각 시대마다 퍼집니다. 그러니 세계 역사는 전염병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인류는 홍수, 화산 폭발, 지진, 해일 등 수많은 자연재해를 겪어 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계사는 멸망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멸망의 역사를 다른 눈으로 보도록 이끄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곧 세상이 전쟁, 전염병, 자연재해 등을 늘 겪고 있지만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역사는 멸망의 역사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이며, 그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심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
싸늘한 이 늦가을 밤, 죽음과 종말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그저 무기력하게 지속되는 것만 같은 일상 속에서 생생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고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느껴질,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은 과연 언제 오는 것일까요?
근래에 나온 철학서들 가운데 미국의 유명한 두 철학자가 함께 쓴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룬 이 책은, 무기력과 탈진의 이 시대에 인생을 바꿀 거창한 계기를 헛되이 기다리거나 자괴감만 남길 자극적 쾌락에 탐닉하는 대신에, 자신의 일상을 감사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그런 눈을 가진 이들은 평범한 일상이 품은 ‘빛나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의 한 이야기가 깨우쳐 줍니다.
어느 지혜로운 스승이 자신의 두 제자를 하산시키며, ‘세상의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참으로 복될 것이라 이릅니다. 산에서 내려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났습니다. 한 제자는 동료에게 세상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으며 결국은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다른 제자는 행복한 모습의 얼굴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이 존재할 뿐이지.”
우리는 평범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며, 또한 그러한 존재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랑으로 완성하실 주님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기에 각자가 ‘빛나는 순간’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리 없이 가을이 사라져 가는 이 밤에, 사랑의 눈으로 모든 것이 빛나고 있는 장관을 가만히 바라보고 싶습니다.
☆☆☆☆☆☆☆☆☆☆☆☆☆☆☆☆☆☆☆☆☆☆☆☆☆☆☆☆☆☆☆☆☆☆☆☆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행정, 문화, 경제 등 모든 활동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끝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장소입니다. 그런 곳이 주님께 멸망의 선고를 받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70년경 로마에게 함락됩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몇 번이나 다녀가셨던 도시입니다. 그랬던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무참히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지만, 이스라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며,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인지 아닌지 저울질해 대는 상황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화약고는 바로 우리 한반도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입니다. 한반도는 이념 때문에, 중동은 종교 때문에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참평화이신 주님께서 복음 말씀처럼 다시 한 번 불행을 선언하신다면, 그것은 곧 한반도와 이스라엘의 몰락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가 그분의 백성답지 못하면, 새 도성 예루살렘도 무너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제외하고 새로운 당신의 예루살렘을 세우시겠지요?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지요. 실제로 기원후 70년 무렵에 로마의 폭정을 거슬러 유다인들의 항쟁이 일기 시작하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 군인들은 시내를 돌며 유다인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하던 순간의 가혹한 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 공동체는 이 순간을 역사적 종말의 때이며 심판과 구원의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심판과 구원의 때라고 보았는지요?
종말의 때는 인간성이 온전히 상실된 상태,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마저 없어지고 폭력과 증오만이 남은 전쟁과 같은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악의 세력, 죽음의 권세가 세상을 뒤덮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절망 상태가 바로 종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서도,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체험하며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태가 바로 종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온갖 재난 속에서 죽음과 절망만을 바라보지만, 주님을 믿는 이들은 주님의 구원 음성을 듣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고 삶의 질곡에서 해방을 체험합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은 멸망했지만, 당시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더 깊이 드러난 사건이 되었습니다. 전쟁과 질병으로 이어지는 종말의 체험은 이렇게 허망한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인간 내면의 믿음과 희망을 살게 하는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고 사라지는 종말이 계속되어도 역사의 중심에 놓인 믿음과 희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
유다 독립 전쟁은 기원후 66년에 일어나 70년에 끝납니다. 무모한 전쟁이 길어진 것은 68년 6월 ‘네로’ 황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로마 제국 수뇌부에 혼란이 생겼던 것이지요. 하지만 69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전쟁을 속개합니다. 70년 초에는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4개월의 전투 끝에 성벽을 뚫고 성전에 불을 지릅니다.
곧바로 ‘돌 위에 돌이 얹혀 있지 못할’ 정도의 파괴가 뒤따랐습니다. 불타는 성전을 바라보면서 유다인들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합니다. 성전 파괴와 함께 로마도 벌을 받아 망할 줄 믿습니다. 하지만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원하고 바란다고 오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종말은 삶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에게는 죽음이 곧 종말인 셈입니다. 따라서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 가는 작품일 뿐입니다. 누구나 결국은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미리부터 불안하게 산다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날을 위해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에 담긴 교훈입니다. 잘못된 ‘지식’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종말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람으로 ‘우사인 볼트’를 뽑을 것입니다. 그의 100m 기록은 9초 58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기록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웬만한 남자는 아무리 못 뛰어도 20초 이내면 충분히 100m를 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13초 이내였으니까, 저와는 불과 3~4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잘 뛰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도 10초 이내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10초라는 시간이 긴 시간입니까?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아침에 자녀를 깨우면 곧바로 벌떡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계속 깨우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10분만…….”
10초라는 시간이 길다면 “10분만”이 아니라 “10초만”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10분도 길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10초는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짧고 금세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이 짧은 시간도 중요하다는 것을 100m 달리기에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더 줄이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쯤이야’라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큰 실망과 함께 거부하고만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굳이 하셨을까요? 말씀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까?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표징들을 보면서 회개하고 하느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표징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장 하느님 뜻을 따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다가올 날입니다. 따라서 지금 해야 할 하느님의 뜻을 뒤로만 미룬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작은 사랑의 실천에도 충실할 수 있다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게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쿠베르탱).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3가지 경우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
둘째, 원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해야만 할 때.
셋째, 나이가 들었는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
그런데 이 스트레스의 강도는 첫 번째 경우가 가장 작고, 세 번째 경우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즉, 가장 큰 스트레스는 목적의식을 상실했을 때입니다.
사실 자신의 꿈이 없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요.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목적의식이 없으면 당연히 열정도 사라지면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의 마지막 꿈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해야 할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다시금 열정을 키워서 힘차게 지금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씩 해줘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직장생활을 할때 담당하던 업무가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도면을 보거나 그리던 일이었습니다. 그탓인지 구부정한 자세가 습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이 틈만 나면 제게 그랬습니다. “허리를 좀 쭉 펴세요! 고개도 꼿꼿이 쳐들고!”
요즘 와서 별것 아닌것 같지만, 허리를 쭉 펴는 것, 고개를 위로 쳐드는 것이 육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에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허리는 육체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허리를 쭉 펴줘야 신진대사도 원활해지고, 마음 자세도 당당해집니다. 고개를 위로 자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 역시, 육체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당신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21장 28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하란 말씀입니다. 그날이 다가오면 육체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라는 당부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하루 온종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엉뚱한 것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티비 화면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단 한치 눈앞의 이익이나 재미에 온 신경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끔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스트레칭을 해줘야겠습니다. 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씩 해줘야겠습니다.
주일미사만으로는 부족한 듯 합니다. 가끔씩 평일 미사에도 참석해줘야겠습니다. 가끔씩 하루 피정도 가줘야겠습니다. 가끔씩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영성서적을 손에 들어야겠습니다. 가끔씩 봉사 활동도 나가줘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의 키가 쑥쑥 자라나고, 주님 오시는 날에 합당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련 때 어디를 바라보느냐가 나의 존재를 확증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에서 한 거인이 탄생하였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간디의 별칭입니다.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로 크게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위대한 영혼으로 칭송받게 된 계기는 남아프리카에서 겪게 된 한 사건 때문입니다.
간디는 회사에서 끊어 준 일등실의 차표를 가지고 기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어느 승객이 간디를 보고는 역무원을 불렀습니다. 역무원은 간디를 보자 짐칸으로 가라고 내쫓았습니다. 일등실의 차표를 보여주었지만 역무원은 코웃음을 치며 일등실에는 백인 외에는 탈 수 없다며 잘라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일등실 차표가 있는데 왜 짐칸에 타야 합니까?”
역무원은 간디의 항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간디를 열차 밖 정거장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날은 몹시도 추운 날이었습니다. 간디는 대합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권리를 주장하며 싸워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인도로 돌아가야 하나?’
깊은 고민 끝에 간디는 결심을 합니다.
‘그렇다. 이 문제는 나 개인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인종차별이다!’
다음 날, 간디는 다시 열차에 탔습니다. 그러고는 일등실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나가지 않고 버텼습니다. 차장이 주먹으로 간디를 마구 때렸습니다. 하지만 간디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수모와 아픔을 꾹 참고 목적지까지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마찬가지로 비폭력주의로 부당함에 맞서 인도가 독립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시련이 닥칠 때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련에 굴복하여 두려움 속에서 살고 어떤 사람들은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각자에게 닥치는 시련은 그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판별하는 척도가 되어줍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오실 때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구원될 백성과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질 사람들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굳이 심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전 인류에게 무서운 시련이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러 오실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큰 재난이 닥쳐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머리를 들고 하늘의 표징을 보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땅을 보며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심판 때문에 두려워 까무러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들과 땅을 보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는 하느님의 표징이 나타나고 땅에는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종말에만 일어난다면 복음말씀이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각자에게 다 적용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와 같은 시련을 각자가 겪고 있다고 보아야합니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어차피 닥치게 되어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삶을 대하는 두 상반된 자세가 결국 지금도 우리를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10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측은 방송 말미 심현희 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습니다. 심현희 씨는 수술 후 재활치료를 받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머리에 부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두 살 때 녹내장을 앓던 심씨는 13세에 시력을 잃고, 피부와 중추신경계 이상으로 나타나는 신경섬유종으로 인해 눈코입의 형태를 거의 잃은 모습으로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무너져 내린 얼굴로 살아갔던 故 심현희씨가 남긴 메시지는 “절대 긍정, 절대 감사”였습니다. 방송이 나가고 후원이 빗발치자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방송 이후에 사랑의 손길로 저에게 작은 정성과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을 향한 넓은 시야로 씩씩하게 살겠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평생 그 고마운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살겠습니다.”
시련이 심현희씨가 하늘에 합당한 사람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심현희씨는 긍정적일 것이 하나도 없고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어보여도 절대 땅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긍정하고 감사했습니다. 이 짧은 모범적인 삶이 우리가 시련 속에서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심판받는 장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쓰나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 말인데,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해저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면 그 여파로 커다란 파도가 생깁니다. 미처 피할 수 없이 파도는 해안가의 마을을 덮치고,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쓰나미가 자연의 현상이라면, 우리의 삶에도 쓰나미와 같은 상황이 생기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갑작스럽게 헤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생깁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쓰나미를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1997년입니다. 한국 사회는 엄청난 쓰나미를 만나야 했습니다. ‘IMF’라고 기억하는 외환 위기로 인한 국가 부도 사태입니다. 굴지의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습니다. 평범한 서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외환 위기의 쓰나미를 바로 눈앞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22년 전의 일입니다. 금 모으기 운동,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외환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피해를 온몸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저도 쓰나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형님의 사업이 힘들어졌습니다. 저는 대출도 받았고, 부모님을 위해서 집을 얻어야 했습니다. 쓰나미는 분명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쓰나미는 가족들이 서로 위해주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풀잎 끝에 달린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풀잎 끝의 이슬방울,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새, 텅 빈 숲에 남은 나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풀잎의 이슬방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는 풀잎 끝의 이슬방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사람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놀란 사람들은 어쩌면 텅 빈 숲속의 외로운 나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닌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불안과 긴장을 평화와 일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멀고,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는 평화와 일치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해 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
곽승룡 비오 신부님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온 땅과 예루살렘 위에 재앙을 선포하였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도 같은 내용이다. 예언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예루살렘은 어디일까?
예루살렘 도시는 미래 세상의 이미지이다. 이스라엘을 통해 그려지는 교회이다. 그래서인지 재앙에 대한 예언 역시 우리에게 해당된다. 그 점에서 예루살렘의 재앙이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예언자들은 천리안 곧 선견지명을 지니고 있다. 통찰이다. 통찰이란 무엇일까? 그냥 딱 보면 아는 것이다. 그들은 그 시대 사람에게 말하는 자다. 그들의 예언은 명의 또는 스페셜 닥터들이 내리는 진단과 유사하다. 곧 살고자 한다면 이렇게 살고, 이것을 하고, 이런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죄는 재앙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곧 죄를 계속 지으며 살기를 원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은혜와 무관한 재앙의 비가 계속 내릴 것이다.
이 예언 안에서 역시,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면, 예고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회개하고 변화하라는 것이다.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간... 주님은 우리가 변화하고 회심하는 시기가 되기를 초대하신다.
영원존재 영혼 가꿔야 합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에 종말은 옵니다. 세상 안에는 생성과 소멸이 늘 함께 있습니다.
철학은 모든 물질은 변하게 되어있으므로 끝이 있게 마련이라 합니다.
신학도 철학을 바탕으로 물질은 끝나도 형상은 남는다고 설명 합니다.
우리는 육신이란 물질과 영혼이라는 주체로 이미 개별 종말 형입니다.
종말이 언제 오든 그건 물질조건이고 영혼 존재는 비 물질조건입니다.
그러니 변화 가능한 물질조건 세상에서 영원존재 영혼 가꿔야 합니다.
영원존재 영혼 가꾸기 위한 여러 안내들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안내 거부하면 영멸 길 뿐이니 가톨릭 교리 배우기로 결심 합시다.
<마지막 날의 재난과 심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0-24).”
예수님의 말씀을 ‘예루살렘’이라는 한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예루살렘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아서 ‘마지막 날의 재난’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이미 멸망했고, 그 일은 이천여 년이나 지난 옛날의 일입니다.
그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고, 큰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인류 전체에게 ‘마지막 날의 재난’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마지막 날의 재난은 사실상 ‘최후의 심판’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재난이 닥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것이 마지막 날의 재난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산으로 달아나라.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휩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죄를 짓는 것이 문제입니다. 직접 죄를 짓지 않더라도 죄에 물들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징벌의 날’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직접 징벌을 내리시는 날이라는 뜻인데, 이 말에는 그 재난이 최후의 심판과 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 재난이 얼마나 무서운 재난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이방 민족들에게 짓밟힌다는 표현은 그 재난이 전쟁처럼 무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포로가 되어서 끌려간다는 말이 세상의 종말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언급된 ‘모든 민족들’과 ‘다른 민족들’은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들은 하느님의 일꾼들인가?
또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꾼들이 아니고, 그들도 심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의 일꾼들처럼 보이고, 하느님을 대신해서 재난을 집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재난은 그들에게도 재난입니다. (침략을 하든지 침략을 당하든지 간에 전쟁은 인간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고, 전체 인류에게 재난이 되는 일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는, 표현으로는 “이방인들이,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들을 때까지”인데, 실제로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 말하는 재난이 최후의 심판의 일부라면, 그리고 예루살렘이 죄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짓밟히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든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그 재난은 대단히 무서운 일이라는 것과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서 태평스럽게 살다가 그 날이 닥치면, 그때는 이미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가 될 것입니다.
(그 재난의 무서움이 강조되어 있긴 하지만, 회개란, 재난과 징벌과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과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무서워서 하는 회개는 억지 회개이고,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5-28).”
이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표징들은, 마지막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들이 아니라, 그 날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날이 되면 전 우주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가 마지막 날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 날의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우주 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서 숨으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곳은 없습니다.)
여기서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라는 말씀과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죄인들이 겪게 될 공포를 나타낸 말씀 입니다.
그 공포는 구원받을 의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심판자로서 재림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볼 것이다.’ 라는 말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가 심판이 시작되는 때이고, 그 심판은 시작하자마자 끝나게 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은 속량된 사람의 자세, 즉 자유인의 자세입니다.
멸망을 당할 죄인들은 두려움으로 까무러치겠지만, 구원받을 의인들은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도 ‘지금’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구원받을 사람으로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사람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중국 조선족자치구 연길의 용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길에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들렀다. 학생들과 국어 교과서를 펼처 윤동주의 서시를 읽었다. 쏙쏙 머리 속에 들어왔다. ‘하늘’, ‘바람’, ‘별’을 온 몸으로 느껴가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던 서정시인을 만났다. 그때부터 <서시>를 좋아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작은 바람에도 괴로워 했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은 ‘간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만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윤동주 시인, 젊은이답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하고 살았다. 하느님을 닮았다.
오늘 독서(다니엘 6,12-28)의 예언자를 떠올려 본다. 그 어느 것도 땅에서 바라지 않고 오르지 하늘을 우러러 하느님께 성실한 예언자였다. 세상은 그에게 높은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이 있었지만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급기야 그는 사자굴에 먹이로 던져졌다. 하느님께서 아무런 성처의 흔적도 볼 수 없도록 다니엘을 지켜 주셨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 환호성이 터졌다. 대신 다니엘을 고발했던 사람들은 사자밥이 되어 사라졌다. 존재감이 전혀 없는 비굴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윤동주 시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학생들 마음에 새롭게 태어났다. 그 때를 기억한 학생들은 지금도 하느님을 크게 마음에 담았으리라.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31,27-28).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창조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땅의 주민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에 휩싸일 때부터 무서운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임신한 여인들이 불행한 것은 몸이 무거워 위험을 피해 달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4절)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도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아래 놓일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기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 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신다.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내시기를 빈다.”(다니6,17)
김혜선 아녜스
우리가 성실히 섬기고 있는
그 무엇이
우리 영혼의 주인이 된다네.
그리하여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지금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있는
그 무엇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 수도 있고
멸망의 길로 이끌 수도 있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종말의 표징들이 나타날 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하신 말씀은 거짓과 혼돈의 시간이 들이닥칠 때 늘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성령기도회 지도신부로 있을 때 청년들과 함께 메쥬고리예 세계청년축제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축제 막바지에 십자가 산에서 아침미사를 드리기 위해 동이 트기 전 야간산행을 하게 되었는데 정말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렌턴 불빛에 의지하며 한발 한발 올라갔었습니다. 정상에 올라 미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거의 동시에 일출이 이루어지면서 너무나도 벅찬 기쁨속에서 미사를 봉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 미사를 봉헌하면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길은 빛이신 하느님을 향해 오르는 야간산행과도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인내하며 한발 한발 빛을 향해 나아갔을 때 주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찬란한 광명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존재감을 어디서'(루카 21장 20~2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루살렘은 시대가 다 찰때까지 그 민족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살아 숨쉬는 한, 겪어야 할 일들이 많고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살만한 세상입니다.
짓밟히는 것이 무서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그들의 아픔이 느껴져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 이래서 ᆢ힘들어요.'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도와줄 친구나 이웃이 분명 있습니다.
수많은 악플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하늘로부터 평가단으로 인정받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존재감과 에너지를 남 괴롭히는데 쓰는 사람들, 자신을 먼저 평가하십시오!
엎질러 놓고 '무심코, 별 생각없이 했다' 라는 말로 넘어가려는 회피는 몹쓸짓입니다.
내뱉은 말이 상대를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며 이제라도 자신이 무슨짓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지 깨닫고 회심해야 합니다.
'짓밟는 자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때에 임금이 다니엘에게,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내시기를 빈다.' 하고 말하였다." (다니 6, 17)
(Then the king said to Daniel, “Your God, whom you always serve, he himself will free you.”)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이제 11월도 며칠 안 남았군요.
늦가을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을의 정취 더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다니 6, 12~28)는 다니엘 예언서가 나옵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페르시아 치하의 유대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 제1독서에서는 다니엘이 페르시아 임금이 내린 명을 어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진다는 금령을 실시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다니엘은 임금이 서명한 금령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은 채,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고발 당하였습니다. (다니 6, 14)
그런데 페르시아 대제국의 다리우스(Darius I, BC550~BC487)임금은 이 고발의 말을 듣고서 오히려 마음이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명을 어긴 다니엘을 어떻게든지 살려내고 싶어했고, 그를 구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임금에게 몰려가서, 임금이 세운 금령과 법령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다니엘을 처벌하도록 주청을 드렸지요. (다니 6, 15~16)
그래서 결국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쳐넣으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 주시기를 빈다." (다니 6, 17)
참으로 이상한 것은 임금이 명령한 법을 어긴 다니엘에게 동정의 마음을 갖고 그를 살려주기로 결심했던 다리우스 임금의 마음과 태도였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얼마나 성실한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그 임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만 종교적인 신념과 종교적인 예배 방식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그를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것이 임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으면서도 다니엘이 믿는 하느님께서 구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임금은 마음이 괴로워서 단식하며 밤을 지샜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벽에 날이 밝자마자 임금은 일어나서 서둘러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에게 슬픈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
"살아계신 하느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사자들에게서 구해 내실 수 있었느냐?" (다니 6, 21)
그러자 다니엘은 임금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임금님,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 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다니 6, 22~23)
이 말을 듣고 임금은 몹시 기뻐하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끌어올렸고, 오히려 다니엘을 악의로 고발했던 사람들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쳐넣었던 것이죠. 그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우스 임금은 온 세상에 조서를 내리면서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
"그대들이 큰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나는 칙령을 내린다. 내 나라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는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다니 6, 26~28)
이렇게 유다 신앙을 가진 다니엘의 성실한 삶과 믿음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다니엘을 돌보셨고, 그 시대의 최상의 군주였던 다리우스 왕을 통해, 우리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페르시아인들의 신앙은 조로아스터교라고 얘기하는데, 이 종교도 유일신을 신봉한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인들이 믿었던 유일신은 선신과 악신의 이중성으로 인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갖고 있는 야훼 하느님과 같은 그런 신앙을 유사하게 갖고 있음을 봅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구해 내신 주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유대 소년 성실한 다니엘을 아끼고 구해 주셨던 다리우스 임금은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 걸쳐서 다니엘이 믿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선포하셨다는 사실에서 감사드립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나라 전체가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니엘 소년처럼 믿음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김성 신부님
돌아보면
주님께서 나를 구해내시고
나를 구원해주셨다
심장이 찢어지고
존재가 부서진 날
울며 애원하던 날
그분이 함께하셨다
묵빛 어둠이 너무짙어
한걸음 더 디디면
천장 절벽에 떨어지는 순간
그분의 천사가 날 떠받고 있었다
사자처럼 으르렁대는
적의가 감쌀때
그분이 막아서며
날 지켜주셨다
찢긴 가슴 보듬어 주시는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꺽인 손 어루만지는
주님 찬양 받으소서
미소지으라 한결같이
따스해라 늘
흔쾌히 걸어가라
속삭여 주시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찬미찬양 받으소서.
당신의 다스림이 만방에
휘몰아쳐 휩쓸길
내 눈을 들어 내 손을 뻗어
협조.
하느님만 찾으며, -영적靈的혁명의 전사戰士로 삽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절박한 현실들입니다. 낙관적으로 보기에는 날로 심각해지는 내외적 현실입니다. 늘 말세라는 이야기가 나돌지만 요즘 상황은 심각합니다. 과연 지속가능한 세상인지 묻고 싶습니다. 무한한 욕망에 유한한 지구 자원의 현실입니다.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풍요로운 곳이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척박한 곳이다”라는 간디의 생태적 세계관에 공감합니다.
이젠 탈성장의 시대라 합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비관적 관점이 날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체 에너지를 말하지만 결국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로 귀결된 근대문명입니다. 참으로 절제, 극기, 자제, 자발적 가난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과연 답일까요? 과연 인간은 행복할 것이며 일자리도 잘 확보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이뤄질 것입니다만 이와 필히 함께 가야하는 것이 인간의 영적혁명, 내적혁명입니다. 참으로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는 인간의 본질같습니다. 과연 인간이 희망이 있는 존재인가 묻게 됩니다.
역시 답은 그리스도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철저한 회개입니다. 영적 삶, 내적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외적 성장, 경제 성장의 추구에서 영적 성장, 내적 성장에로의 전환입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기도해야 삽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어제 읽은 글의 마지막 결론같은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지구 앞날 전체가 위기다. 공익추구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지만 사익추구는 다다공멸多多共滅이다. 우리는 언제쯤 ‘돈과 경제성장의 신화’(물신주의)로부터 벗어나 인간해방을 이룰까?”
하여 철저한 하느님께로의 방향전환의 회개가 답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참 좋은 선물이 겸손과 지혜입니다. 그러니 물신주의의 악령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출구는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내적혁명뿐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하느님, 인간, 자연입니다. 하느님을 잊었기에 인간은 삶의 본질을, 의미를, 방향을 잊었고, 더불어 인간도, 자연도 날로 피폐해가고 망가져 가는 현실입니다. 아무리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진다해도 인간이, 자연이 병들고 파괴된 미래라면 그런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지금 현실을 보세요. 농촌의 붕괴와 더불어 부단한 개발과 착취로 자연도 사람도 병들어가는 현실이 아닙니까. 하느님 안에서 인간이 자연 및 온갖 피조물이 함께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입니다.
요즘 수도원에는 새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가볍게 더불어 날아다니는 새들이 주는 무공해, 무소유, 무집착의 가르침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많은 새들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수도원의 개들을 돌보는 자매들이 이런 새들을 배려해 비 가리개 우산 아래 설치해 놓은 모이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동식물과도 함께 공존공생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결국은 하느님만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사랑하여 찾을수록 필요도 점차 줄어져 최소한의 필요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영적성장이 관심사이기에 저절로 이탈의 초연한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이들은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삶이요 머무는 곳이 고향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다니엘이 그 영적인간의 전형적 모범입니다. 외적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하느님만을 향해 살기에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만을 피신처, 안식처로 삼기에 어디에서나 정주의 삶에 충실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온갖 재난의 현실의 와중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그분께 눈길을 두기에 안전합니다. 재난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시작임을 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끝은 시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만 찾는 이들은 늘 주님과 함께 새로운 구원의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을 보십시오. 사면초가의 유배지에서도 하느님만을 찾고 섬기는데 항구하고 충실하기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다리우스 임금도 찬송과 찬양의 사람, 다니엘을 한없이 신임하고 사랑하며 사자굴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출됐을 때 함께 기뻐하며 조서를 내리어 다니엘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섬길 것을 권합니다.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내셨다.”
다리우스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유배지에서도 다니엘은 한결같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하느님을 매일 새롭게 만납니다. 이런 하느님만이 우리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맛,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참 행복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절대적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하느님을 잊음이 불행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혁명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 회개의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 향한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말씀 공부와 실행, 끊임없는 회개가 뒤따를 때 영적혁명입니다.
평생 ‘영원한 현재 진행형’중인 끊임없는 내적초월의 영적혁명,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는 영적혁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김성민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 말씀은 때가 때이다 보니 그 내용을 보면 끝자락의 모습들, 곧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전쟁과 반란, 재난과 박해, 징벌과 멸망과 같은 반갑지 않은 내용들입니다.
오늘 복음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의 모습을 전합니다. 마치 마지막 때에는 모두가 멸망할 것과 같은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이 너와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근본 메시지는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수난과 죽음 뒤에 숨겨져 있었듯이. 종말의 때와 관련된 복음이 너와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죽음과 멸망이 아니라, 너와 나의 구원이요, 너와 나의 부활입니다.
그러니 장차 다가올 마지막 날은 죽음의 때요 멸망의 때가 아닌,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날입니다.
모두가 함께 이 은혜로운 때를 맞이해야 하고, 구원으로 초대 되어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너와 나의 모습을 잘 성찰해 보고, 늦기 전에 잘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너와 나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준비는 바로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이 믿음의 힘으로 사자의 굴 속에서 해방된 다니엘처럼 나도 지금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이 믿음의 힘으로 죄에서 해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나의 속량인 구원과 부활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도록 합시다!
"우리는 경청의 기술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듣는 것 이상입니다. 대화의 첫째 단계는 친밀함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 열기입니다. 친밀함이 없으면 참다운 영적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71항)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지혜없는 지식은 사실 무척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을 듯한 이들의 아름다운 지혜에 감동한 적이 있으리라 봅니다.
또한 이른바, 배웠다는 자들의 문자조합놀이가 빚어낸 상대적 소신이나 욕망이 만들어낸 역사의 상처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혜란 제대로 볼 수 있는 힘, 행동할 수 있는 힘, 사랑할 수 있는 힘, 용서할 수 있는 힘, 품을 수 있는 힘, 귀를 기울여 이해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가톨릭적으로 본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뜻하지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산다면 그것은 앎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택하는 것이겠지요.
상처 많은 세상입니다. 상채기가 상채기로 남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어쩌면 상처의 가장 긍정적인 의미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지 말라는 데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아름답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멸망을 보지 말고 속량을 보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살아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뜻일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은 예수는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죽지않으셨다거나 부활하셨다는 뜻이 되지만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은 불사불멸의 존재라는 뜻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살아 힘차게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뜻일 것이고,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추어 보면 세상은 종말이 와도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뜻일 겁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때 느끼는 것이 과연 하느님은 계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세상은 하느님 없이 굴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볼 때 그렇게 생각이 되고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왜냐면 하느님께서는 계시지만 무신론적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하느님이 아니 계신 듯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자주 얘기하는 바 세상과 세속의 차이이지요.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그 안에 분명 하느님이 계시지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 하느님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느님이 없는 세상이 바로 세속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세속적이지요.
그런데 이런 세상이 영원할 수 없는 것이고, 이들의 불의한 작태도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간도 세상도 유한하기에 언젠가는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하느님께서 불의한 세상을 마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 이것도 또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실 요즘 트럼프니 아베니 시진핑이니 하는 자들의 패악질과 깡패짓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이것이 계속되고 영원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그들은 끝이 있으며 반대로 하느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끝을 내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그래서 그들의 끝이 날 때 하느님은 그들을 끝내시는 분으로 나타나 오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이에 대해 오늘 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권능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타이타닉에 탔던 사람들이 배와 함께 다 죽었듯이 사라져 없어질 이 세상에 우리가 있으면 우리도 공멸하겠지만 하느님 안에 있으면 우리도 영원에 몸을 싣는 것이 될 것이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역시 하느님 안입니다.
그리고 멸망의 때가 아니라 속량의 때이기에 롯의 아내처럼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지 말고 속량하러 오실 주님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바라보다 맞이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지 말고 주님을 보고, 멸망을 보지 말고 속량을 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오늘입니다.
완성을 향한 연습
김효석 요셉 신부님
저는 몇 년 동안 드럼이라는 악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내는 것도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모한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고 신납니다. 그런데 한 박자 한 박자 드럼을 칠 때마다 박자가 틀려지고 소리의 강도도 일정치 않았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기초 연습을 무한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소리를 낼 때까지, 제 몸이 그 방법을 체득해서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지루하고도 단순한 반복 동작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매년 늦가을을 맞이하며, 위령 성월과 전례주년의 마지막을 함께 음미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무섭고 섬뜩한 광경을 연상케 하는 표상들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종말에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찾아오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 모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생명을 다하고 떨어져 나가는 낙엽들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도 언젠가 끝이라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음을 돌이켜보는 일. 매년 반복되는 이 연습들이 체득되었을 때, 우리도 비로소 지극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 지루하거나 무감각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죽음이 우리를 완성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루카,21/20-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상 곳곳에 전쟁과 분쟁으로 애매한 백성만 이리자리 쪽겨 다니며 난민으로 고생합니다. 저도 시대를 잘 타고 나서인지 12살 때부터 원산에서 인천으로 38선을 넘어 월남 하느라 원산에서 철원까지 기차타고 철원에서 동두천까지 38선을 외 둘려 100리 길을 산과 강을 건너 왔고 인천에서 6,25를 만나 인천 상륙하기 전까지 시내에서 이리저리 도시를 떠나 시골로 피난생활 다시 1,4 후퇴로 인천에서 혼자서 16살에 배를 타고 제주도를 거처 부산으로 다시 서을이 수복되어 인천에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직장 찾아 와서 19살 까지 혼자서 살아가 가족을 부산으로 이주하고 공부를 시작하여 20살에 왜관 순심학교에서 22살에 수도원과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긴 여정에 주님이 계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고비 고비 마다 주님이 함께 계셔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주님은 적군에게 포위되면 도시를 도망쳐 피하라 하십니다. 얼마전 교황님이 나가시기 26인의 순교 성인 기념비 앞에 성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원자탄으로 완전 폐허가 된 도시 안에서 핵의 위험성을 강조하시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평화통일의 희망과 북쪽에 핵의 위험속에 고민하고 희망과 절망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핵을 어느 쪽이 사용하드라도 피해갈 길이 없고 모두가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생각에 그 때는 또 이 자유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면 피난길은 없고 죽음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피해가야 하는데 길은 주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주님 안에 자유 평화 기쁨을 만나 지금 것 공산주위를 피해 도망치던 길은 다 막혀 주님에게 가는 길밖에 없구나 생각하면서 아니 언제나 끝 날에 주님에게 가야 하지만 주님의 현존 안에 나의 살길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니 찬미 찬송 드립니다.
우리는 평상시에도 악과 죄에서 시달리고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하는 기도는 현실 안에 주님이 나의 보류며 살아남을 수 있는 피난처이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나에게로 오노라 너의 짐을 가볍게 해주시리라 하시며 겸손과 온유를 나에게서 배워라 하십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고,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 한다고 하십니다. 핵으로 악을 시도하는 사람은 오래 살려면 핵을 버리고 죄로 인하여 죽음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님 앞에 죄를 뉘우쳐 평화를 얻으라, 하십니다, 그 때 주님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그름을 타고 오느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심을 깊이 깨닫고 주님을 찾아 따라갑시다.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양처럼 되면 승리하고 늑대처럼 되면 패배당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마태오 복음에 대한 강론에서(Hom. 33,1. 2: PG 57,389-390)
우리가 양처럼 되면 승리하고 수만 마리 늑대의 무리로 둘러싸인다 해도 이겨냅니다. 그러나 늑대처럼 된다면 패배당하고 맙니다. 그때엔 목자의 도움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늑대를 기르지 않고 양들만 기르십니다. 당신은 목자께 그분의 능력을 보여 주기를 허락치 않기 때문에 목자께서는 당신을 떠나가 버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양이나 비둘기처럼 되라고 하면서 늑대의 무리 가운데에 보낸다고 해서 근심하지 말라. 내가 그 정반대의 말을 하여 너희가 양처럼 늑대의 밥이 되지 않게 하고 사자보다 더 힘세게 만들어 모든 고통을 피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의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그렇게 될 때 너희는 더욱 영광스럽게 되고 내 권능이 더욱 훌륭히 드러나게 된다. 나는 바오로에게도 이것을 말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내가 택한 길이 바로 이 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양처럼 보낸다.”고 하실 때 다음의 것을 암시하십니다. “절망하지 말라. 원수들이 많다 해도 그들이 너희를 무너뜨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다음으로 주님은 만사가 은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또 아무 까닭도 없이 월계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당신의 제자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숱한 위험 속에 우리의 슬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늑대들 가운데 있는 양이 지닌 슬기가 아무리 빼어나다 해도 그것만 가지고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비둘기가 아무리 양순하다 한들 수많은 매들이 포위할 때 그 양순함이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성 없는 동물에게는 물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여러분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떤 종류의 슬기를 요구하십니까? “뱀과 같은 슬기”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이것으로 뱀이 자기 머리를 구하기 위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몸뚱이까지 포기해 버리는 것처럼, 여러분도 신앙을 건지기 위해선 모든 것, 즉 재산, 몸, 그리고 목숨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신앙은 머리나 뿌리와 같습니다. 신앙을 보존하면 다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을 더 풍성히 돌려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양순하게만 또는 슬기롭게만, 어느 한 쪽만 되라고 명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덕이 되도록 두 가지 다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 뱀의 슬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모욕을 주거나 올가미를 놓는 이들에 대한 복수심에 떨어지지 않도록 양순함을 지녀야 합니다. 슬기는 양순함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는 무익합니다.
누구도 이 두 가지 명을 실천하기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보다 사물의 성격을 잘 아십니다. 그분은 폭력을 폭력으로써가 아니라 온유함으로 더 훌륭히 이긴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끝 앞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 앞에서
끝으로 이끌었던
수많은 걸음들 되새기며
끝을 넘을 또 한걸음
정성껏 준비할 수 있기를
끝 앞에서
끝이 옴을
아쉬워하기보다
새 시작을 기대하며
설렐 수 있기를
끝 앞에서
끝남의 아픔을
의연하게 품으며
새로 남의 기쁨에
온 몸 온 마음 던질 수 있기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구원과 징벌이 공존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종말의 날을 이어서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날이 곧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루카 21,22)이라 하십니다. 찬란하고 영화로운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이민족들에게 내어 주신 시간만큼 "짓밟힐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단어들이 두려움을 자아내지요. "포위, 황폐, 징벌, 불행, 재난, 진노, 칼날, 포로, 짓밟힘, 자지러짐, 공포, 두려운 예감, 까무러침..." 이 모두가 물밀듯이 바싹바싹 다가오는데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그런데, 다행히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자세는 자유인의 표상입니다. 종은 주인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가 초래한 모든 징벌을 능가할 해법을 가지고 오십니다. 바로 당신께서 모두를 속량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속량은 이집트 노예살이에서의 해방과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환 등 이스라엘 역사에 강한 족적을 남긴 사건들에서 드러나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 예수님께서 친히 몸값을 치르고 우리를 얻겠다고, 되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구의 노예나 식민지 백성은 아니지만, 더 잔인하고 집요한 죄악의 노예살이에서 끄집어내 주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징벌과 속량은 심판의 두 얼굴입니다.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혹 심판을 공포스런 단죄와 징벌로만 포장하거나, 반대로 무조건적인 자비로만 채색하는 것은 하느님 마음을 얕은 수준의 계몽 강령 정도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공포나 위로가 당장의 효과는 가져올지 모르지만, 심판자시기도 하고 구원자시기도 한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어렵게 만들 뿐이지요.
제1독서는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다니 6,24).
다니엘은 하느님을 성실히 섬긴 까닭에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그를 구하십니다. 극한 위기의 순간에도 믿는 이에게는 상처조차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판과 종말의 순간이 언제가 될지,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그 재난과 공포의 날에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세상이 뒤흔들리고 사자의 입과 적들의 칼날이 난무해도 다니엘처럼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 자신은 주님의 날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요? 속량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고 설레입니까? 징벌에 대한 믿음으로 두렵고 피하고 싶고 거북스럽습니까?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다니 6,28).
놀랍지 않습니까? 이방인 임금 다리우스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도 하느님을 이처럼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믿은 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자주 주님의 재림은 가능한 한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대표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것처럼, 두려움의 표지 아래에 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에 주목합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전례 주년의 마지막 날들에 우리가 들은 메시지의 핵심은 두려움이 아니라 미래의 속량에 대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우리 몸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다 함께 참여하게 되는, 주님과 더불어 충만한 생명에 도달하려는 완전히 그리스도인다운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 그분의 ‘파루시아’ 앞에 고통 중에 살지 맙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에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묵상합시다.
"신부가 어떻게 자신의 신랑을 무서워할 수 있겠습니까?"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세상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겁을 주는 듯합니다. 마지막 날이 인류의 종말이며, 큰 재앙과 환란이 닥칠 것이라는 부정적인 미래를 펼치고 겁을 줍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종말이 오니 어서 돈을 내게 가져와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도 말한답니다. 과연 돈을 가져오라는 그 사람에게도 종말은 닥칠 터인데, 그러면 돈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질 터인데, 왜 그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종말을 핑계로 돈을 벌어보려는 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종말이 곧 닥쳐오니 가진 것을 다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고 죽자고 하면 또 모를까!
오늘 예수님게서는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28)
오늘 복음은 종말의 시기를 구원의 시기로 잡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으로 알려줍니다. 복음의 전반부에 나오는 부정적이고 위협적인 종말의 상황은 아마도 현실을 탐욕스럽고 부끄럽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던져주는 경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현세에서 비록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상을 일러줍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부끄럽고 두려움으로 맞이하시렵니까? 아니면, 기쁨과 희망으로 맞이하시렵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종말과 재앙 그리고 영생과 희망을 선택하라고 제시하는 듯합니다. 주님 복음 말씀을 실현하면서 조금씩 조금식 마지막 날 우리가 맞이하게 될 구원의 길로 나아갑시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는 해가 있기에
떠오르는 해가
있습니다.
삶의 시간이란
잠깐 피었다
사그라지는 꽃들처럼
빠르고 빠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끝은 속량을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삶의 끝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끝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십니다.
우리의 모두의 끝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종말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삶의
귀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와같이 종말은
우리를 위한
사랑과 구원의
가장 알맞은
때입니다.
종말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로
몰고가는 우리들을
만나게됩니다.
종말은 우리를
결박하고 있던
집착과 욕망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는
때입니다.
하느님께로
가져가야 할 것은
하느님 말씀과
사랑뿐입니다.
안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량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심을
믿으십시오.
무너짐이
속량을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진실된 믿습니다.

![]()
어제는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 동창신부의 아버님께서 선종을 하셨는데 저희 동창신부 모두가 아버님의 빈소를 함께 지켜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시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연도와 미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만 했지요. 그러다보니 새벽 묵상 글을 도저히 올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번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강이 하나 잡혀 있었고, 라디오 방송 녹음도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정표를 보니 화요일과 수요일에 아무런 일정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어있는 이 두 날짜에 강의와 방송 준비를 하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래서 월요일에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지를 향해 운전을 하고 있던 중에 동창신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 것이지요.
저의 계획이 완전하게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여행지에서 빨리 돌아와야만 했고, 강의와 방송원고 준비를 하려고 했던 시간에는 빈소를 지키고 또 장지도 가야만 했습니다. 결국 마음도 급해지고 몸도 피곤해진 상태로 일정에 임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계셨던 동창신부의 아버지셨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의 계획도 이렇게 틀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눈앞의 일도 이렇게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을 과감하게 해버리고, 이에 따른 단죄도 쉽게 내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과연 우리는 떳떳한 마음으로 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던 우리들, 특히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에 대해 ‘나중에’만을 외치면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이웃들을 멀리하면서 과연 주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요?
화장터와 장지에 가서 죽음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인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죽음에 이르기 전에 미리미리 해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내게 있어 죽음은 항상 멀리에 있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그 준비를 게을리 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보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는 우리의 모든 사랑의 행위들이 주님을 맞이할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죽음은 나를 결코 피해서 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입니다.
우리가 터득해야 할 사랑의 기술 중 하나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생의 기쁨도, 아픔도 가까운 사람을 통해 다가온다. 우리를 쓰러뜨리는 사람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도 가까운 데 있다(강준민).
하느님과의 인터뷰
어떤 기자가 하느님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평소에게 묻고 싶었던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인간에게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러고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는 것. 그러곤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어떻습니까?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삶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시간이 많다는 생각 때문에 오류를 계속 범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보다 주님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러한 오류를 조금씩 줄여나갈 수가 있지 않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토요일입니다. 멀리 미국에서 한 청년이 한국으로 왔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서 멀리 태평양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불어, 스페인어를 잘하는 그 청년은 이제 한국말도 제법 배웠다고 합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영어학원 강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고, 예비 신학생들의 기숙사에 머물면서 한국말도 더 배우겠다고 합니다. 무엇이 시카고 대학을 나온 그 청년으로 하여금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청년에게 3가지를 당부했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라고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 기도를 많이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년의 앞길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은 동료 갈매기들과는 다른 꿈과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높이 날 수 있었고, 더욱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새로운 꿈을 이루려는 청년, 조나단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함께 세계여행을 떠난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심하지 않으면,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지켜 주셨던 하느님께서 그 부부의 여행길에도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입니다.땅만 보고 걸어서는 밝은 태양과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얼굴에 다가오는 차가운 바람을 느껴보시면 어떨는지요. 바람은 극복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꼭 10년 전 겨울에 저는 캐나다에 있었습니다. 추웠고, 외로웠고, 말을 배우는 것도 어려웠고,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봄도 맞이했고,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시스템을 이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알공킨 공원도 보았습니다. 친구와 함께 오타와,몬트리올, 퀘벡, 할리팩스까지 먼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잘한 결정이었고, 추억의 책장에 아름다운 기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의 모습으로, 우연인 것 같은 인연의 모습으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앞으로 10년은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품 대상자들의 교구장님과 면담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더 높은 꿈과 이상을 가지는 사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분명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조나단의 이야기에 잠시 웃었습니다. “신부님! 김밥 먹고 싶어요? 왜! 김밥 먹으면 천국 가니까요?’ 어렵게 배운 한국말로 ‘김밥천국’을 보았나 봅니다.
현혹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겨울의 문턱에서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관리에 마음을 써야하겠습니다. 건강한 것도 나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가 덜 한 봄을 맞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겨울에 휴식을 하며 새 생명을 준비합니다. 이처럼 인생여정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지만 그에 걸맞은 준비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간이 지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은총의 기회일 뿐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평범한 일상에의 충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이며 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내색함이 없이 평범하게 일상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라는 신문 칼럼이 마음에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저녁마다 철문으로 창문을 가린 카페에 모였다. 파리 테러 사건 그날 이후 무섭고 긴장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프랑스 친구들은 “이렇게 일상에 임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테러에 저항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하더라도 늘 그대로의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현자의 말도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의 ‘징벌의 날’에 대한 종말 전조의 표징들이 심히 두렵고 불안한 느낌을 줍니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물론 70년경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의 추억이 담긴 사후事後 예언이지만, 이런 종말 전조의 표징같은 사건은 어느 시대나 비일비재했습니다.
파리 테러 사건 역시 비슷한 맥락이고 앞으로는 획기적이고 종합적이며 장기적인 대책이 없이는 빈부의 양극화로 인한 끊임없는 폭력, 분쟁, 전쟁, 기후변화에 따른 크고 작은 사건들도 줄을 이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불길한 종말 표징을 상징합니다만, 이런 상황일수록 부화뇌동하지 말고 깨어 평범한 일상에 지극히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오시는 주님을 향해 눈길을 두고 마음의 평정平靜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불리하고 불편하고 불안한 온갖 주변 상황에 압도되지 말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그분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라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소 주님과는 물론 이웃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오늘 1독서의 다니엘이 위기를 타개해 가는 모습이 감동입니다.
악한 신하들의 다그침에 다리우스 임금은 어쩔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집니다만 다니엘과의 대화 내용을 보면 둘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각별한지 깨닫게 됩니다.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 내시기를 빈다.”
오히려 다니엘을 위해 기도하는 다리우스 왕입니다. 궁궐로 들어가 단식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임금은 새벽에 날이 밝자마지 서둘러 사자굴로 가서 슬픈 목소리로 외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사자들에게서 구해 내실수 있었느냐?”
다리우스 임금과 다니엘과의 깊은 우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더불어 하느님과 다니엘의 깊은 우정 역시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아, 다니엘의 이런 수직적 차원의 하느님과의 우정과 수평적 차원의 다리우스 임금과의 우정이 사자 굴의 사지死地에서도 다니엘을 안전히 지켰음을 봅니다.
“임금님, 만수무강하기를 빕니다.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정말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인간상의 다니엘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은 물론 다리우스 임금간의 우정의 힘이, 사자 굴의 곤경 속에서도 평상심을 지니게 했음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서나 인간 앞에서 무죄無罪한 텅 빈 무아無我의 다니엘을 구한 것입니다. 다니엘을 구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격한 다리우스 임금의 신앙 고백이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입에서 구해 내셨다.”
그대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고 싶은 내용입니다. ‘사자들의 입’이 상징하는 바, 주변 곳곳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위협하는 것들입니다.
다니엘을 사자들의 입에서 구해 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사자들의 입 같은 위험에서 구해 내시고, 당신과의 우정을 깊게 하시며,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게 해 주십니다. 아멘.
두려워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최종 심판의 전조로 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이들은 빠져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21,21). 서기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무려 110만 명이 죽었으며 9만7천명이 로마군 총사령관 티투스의 포로가 되어 여러 지방에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입니다(21,24).
기근까지 확대되어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졌습니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사)
사실 성전 파괴는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인간의 힘에만 의존했던 유다인들 스스로가 부른 참혹한 결말이었습니다. 누구든 이런 파멸의 경고 앞에 공포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21,25-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21,28)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며”(21,9),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21,28)
성전 파괴와 갖가지 징벌로 표현되는 나 자신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과 내 의지, 선과 악, 육과 영,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갈등과 고통을 겪곤 합니다. 무게는 달라도 저마다의 십자가와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목숨을 바쳐 속량하시려고 우리 삶에 끼어드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선택하고 따름으로서 떠안게 되는 죄와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사랑의 촉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멈추어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 하느님의 그 눈길로 자신과 이 사회를 바라봄으로써 파멸의 징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21,20). 영혼의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가려면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가고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21,21 참조). 이기심과 탐욕, 증오와 폭력, 분노와 교만에서 벗어나 세상의 불의와 차별, 박해와 탄압,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오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21,28) 하고 말씀하십니다. 파멸과 영혼의 어둠 속으로 치닫는 그 상황은 또한 영광의 주님을 만나 뵈올 절호의 기회요 더 큰 은총으로 나아갈 전환점입니다.
육의 정신에 이끌려 주님을 거스르고 어둠과 괴로움을 맛보고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보는 아픔 속에서도 "허리를 펴" 주님의 영(靈)을 호흡하고, "머리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넘어져도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까닭은 주님만이 나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것보다 넘어졌을 때 일어나 다시 시작하지 않는 태도가 주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과 교회, 사회의 아픔과 어둠 가운데서도 희망이신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카이로스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하신지요?
실망스럽고 죄스럽고 우울하고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쳐다보는 그런 마음입니까?
오늘 복음은 그러지 말라고 하시네요.
고개 좀 쳐 들어라고.
하늘 좀 쳐다 보라고.
잘못 살았다고 찌질맞게 쭈그려 있지 말고 그런 우리지만 흐뭇해 하시며 자애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라네요.
그렇습니다.
오늘은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 봅시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속량해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가슴 벅찬 감사를 드립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멸망과 구원 사이
김정일 신부님
세상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섬뜩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사용하신 예수님의 단어를 보면 ‘황폐’ ‘징벌’ ‘불행’ ‘재난’ ‘진노’와 같이 온통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짓밟힐 것’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표징들에 민족들은 ‘공포에 휩싸이고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멸망 혹은 세상 끝 날이 보여 주는 표상은 가히 파괴적이라 부를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9절)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날이 ‘끝’이 아니라 다시 도래할 새 세상의 ‘시작’임을 암시해 주십니다.
세상은 무너지고 흔들려도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은 동시에 권능과 영광을 떨칠 수 있는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멸망으로 묘사되는 종말과 영광스런 종말은 지나치게 양극단입니다.
완전히 서로 다른 표상의 종말 사이 간격은 꽤나 멀어 보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은 결코 단박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걸음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멸하고 흥하기에 앞서 그 매개로써 어떤 행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그 매개적 행위란 바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입니다.
곧, 속죄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회심은 멸망의 그 날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다리를 놓아줄 것입니다.
싸움은 상대적이다.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요사이 내 귀에는 종말론적 소리가 들려온다. 자폭 테러 “나 죽고 너 죽이자.” “모든 것을 끝장내자.” “네가 없어야 내가 산다.” 강대국이 나라도 없는 극단적 종교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보복하려고 모여 의논하고 무차별 폭격으로 세상을 끝장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끝자락에 있으면서 선진국처럼 행세하고, 몇몇 재벌들의 횡포에 노동자가 억압받고 몸부림치고, 농민은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여 아우성치고, 일자리 없는 청년들은 한숨짓고 청소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들리는 소리는 비극적이고 올바른 정치 지도자 없는 시대에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예고하신 대로 황폐해져 가는 세상, 죽어가고, 억눌리고,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이 오염되고 선의를 가진 사람이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 시달리고 내적 갈망이 무너져 마음들이 황폐해지고 있으며 자유, 평화, 기쁨을 잊고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우리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 상대가 선하면 선하게 대하고 상대가 악하면 악하게 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불상사는 쌍방 과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의 기도를 바치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잘못된 것을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입니다.”라고 내 가슴을 칩니다.
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말고 나로 인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종말을 깨어서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존재 자체 즉,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음에 이르고 문제 안에 휘말리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살펴보면 대부분 쌍방 과실입니다. 우선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 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것, 서로 조심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내 차를 누가 받으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왜?"란 말 대신 서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가 더 큰 불행을 막게 됩니다.
저는 오늘 종말에 대한 준비로 자기 뜻을 정리하고 남의 탓을 하기 전 "내 탓이요."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이웃들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가장 멀리 있다
여기는 죽음이
실은 우리들 삶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 존재를
알게하는 죽음을 통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다시금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속량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속량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속량안에는
풍요로운 안식 또한
자리잡고 있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심을
십자가의 속량으로
뜨겁게 체험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바라보아야 할
십자가의 속량입니다.
십자가의 속량은
붙잡고 있는
이모든 것을
비워내게 합니다.
누구의 생명인지를
묻게 됩니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속량의 본질이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더 자주 머무르는
위령성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듯
죽음으로부터
속량이 드러났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올 한 해도
참으로 많은
아름다움을 만났습니다.
마음을 나누었던
아름다웠던 일들과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로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얼마나 자주
바라보았는지를
다시금 묻게 됩니다.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산다는 건
서로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일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땅 위에서 아름다움을
나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가장 큰 위안을
얻게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바라보면
허무속에서도
두려움과 공포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뜨거운 삶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속량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수고와 노력없이는
결코 그 어떤 마음의
예루살렘도 다시
아름다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가야 할 길은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기쁨과 희망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기 위해 다시금
주님께로 옮겨가는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모든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바라봅니다.

![]()
어제 미국에 사시는 교포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일이 미국은 추수감사절이라서 멀리 사는 식구들까지도 다들 모여요. 마치 한국의 추석 귀경과 같은 그래서 타국 사는 저희들을 위한 묵상 글을 부탁드릴 수 있나 해서요. 만약 그렇다면 정말 많은 분들이 더 행복하고 따뜻한 추수감사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 것도 몰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월 중에 보통 추수감사 미사를 봉헌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 추수감사절라고 합니다. 영국을 떠난 이민자들이 미국에 도착했지만 혹독한 겨울을 거치면서 먹을 것이 없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지요. 바로 그때 주변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옥수수를 비롯한 많은 작물들을 재배하게 되었고, 그 다음 해에 수확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추수감사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첫 이민자들이 첫 번째 추수를 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그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고향에서 지냈을 때와 비교했을 때 더 넉넉하지도 않았겠지요. 낯선 환경에서 또 낯선 작물을 제배하니 수확도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왜냐하면 첫 일 년 동안의 큰 고통을 통해서, 살고 있음 그 자체가 큰 감사의 이유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떠난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에서 살고 있지요. 결코 쉽지 않은 삶입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른 상황에서의 삶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려운 삶에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찾아야 살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사는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희망에 의지한다면 충분히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십니다. 겁나는 부분이지요. 징벌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종말을 모든 것이 끝나는 마지막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상황 그리고 이제는 어떠한 희망도 간직할 수 없는 순간인 것 같은데, 그 순간에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세상 종말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순간이라는 희망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삶 안에서 종종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드는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 너무나 큰 고통과 시련에 버거워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종말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대로 우리를 놔두지 않고 희망을 건네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이 희망을 간직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미국의 첫 이민자들이 행했던 추수감사절. 그들 역시 희망을 발견했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이 희망을 자신의 가슴 가득히 간직하면서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희망이 없는 곳은 없으니까요.
두려움은 스스로를 한정 짓는 일종의 감옥이다(로버트 그린).
감사하며 삽시다.
어제는 제가 사제서품을 받을 때의 출신 본당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미사가 있었거든요. 미사 전 성당 곳곳을 둘러보는데 예전과 똑같습니다. 벌써 15년이 넘었는데도 바뀐 것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성당도 사제관도 또 교육관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당 안에 들어가니 15년 전의 일들이 그대로 떠올려집니다.
‘이 자리에서 성무일도를 바쳤었는데.... 그때 복사를 서면서 이런 실수를 했었지... 아이들과 이곳에서 여름신앙학교를 하면서 재미있었지....’
그대로 떠올려지는 이유는 성당 안은 성당의 외부보다도 더 바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15년 전과 똑같으니, 그때의 일들이 그대로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저절로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이렇게 사제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들을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면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바뀌지 않다보니 옛 일을 생각하게 되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어떠합니까?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계발을 통한 끊임없는 발전만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불편함은 있겠지만, 그대로 두니 더 좋다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많은 계발로 인한 발전이 행복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과거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그래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매 순간 감사하며 산답니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 전례력으로 2013년도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습니다. 시기도 시기이니만큼 요즘 계속되는 복음 말씀은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자꾸 반복해서 듣게 되니 조금은 섬뜩하기도 하고 은근슬쩍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위령성월과 맞물려 언젠가 맞이하게 될 개인적인 종말인 ‘나의 죽음’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 연구의 대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여사는 연구를 위해 수많은 임종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아쉬워했던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상에서 보낸 금쪽같은 시간들 가운데 많은 시간들이 살아있었지만 사실 죽어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이란 것,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관건은 죽음에 대한 철저한 준비입니다. 죽음이 늘 지척에 있는 것임을 의식하며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이 필요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란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며 지금 이 순간 충만하고 행복한 내 삶을 영위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절대로 우울한 색조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샛노랗거나 연둣빛입니다. 온통 희망과 기쁨과 설렘의 분위기로 충만한 종말론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유한한 육체가 소멸되는 순간은 우리 삶이 끝장나는 순간이 아니라 무한하신 사랑의 하느님과 결합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죄스런 우리 삶이 용광로같이 뜨거운 하느님 사랑과 합일되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의 유한한 생명이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순간입니다. 결국 죽음은 희망의 종결이 아니라 희망이 지속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은총의 종말론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자세는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일입니다. 죽음 너머 우리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 이미지를 간직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반드시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죽고 부활하는 일을 계속해나가는 일입니다. 내 앞에 펼쳐지는 매 순간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로 여기고 의미 충만한 나날로 엮어가는 일입니다.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참 삶이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한번 보여줘야겠습니다. 죄와 부족함, 한계와 고통 속에서도 늘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 지속적으로 죽음을 극복해나가는 삶을 살아봐야겠습니다.
<'징벌의 날' 피하는 법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초등학교 때 동네 아이들과 함께 야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집에 사는 친구아이가 자꾸 저를 약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도 그 아이는 항상 제 약을 올렸고 자주 싸웠지만 제 생각에 저는 그 아이에게 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 번엔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따끔하게 혼내줘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 아이에게 달려가려고 하는데 저보다 3살 많은 저희 작은 형이 저를 말렸습니다. 저는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형을 뿌리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의 얼굴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갔는데 이미 힘이 빠져서인지 그 아이 앞에서 쉽게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보다 이 상황에 대해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는 제 위에 올라타서 저는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아이가 저를 때리지는 못한 것 같은데, 그러나 아이들 싸움에서는 누가 봐도 밑에 깔린 아이가 진 것입니다. 저는 다시 일어서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 작은 형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도와주지 마!”
저는 더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치욕적인 패배감을 안고 분노에 떨면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재미있게 노는데 저는 혼자 외롭게 집에서 분노를 삭여야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날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미리 아시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보호해 줄 분은 당신밖에 없는데 예루살렘은 교만하여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 했고 오히려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징벌의 날’, 그렇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자신 편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교만해진 예루살렘은 얼마 안 있어 징벌의 날을 맞이했고, 이방인들에게 2천 년 동안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 나라를 다시 찾았지만 그들의 성전자리에는 아직도 이슬람 성지 건물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매우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하며 무릎 꿇고 그리스도를 부를 때까지 이스라엘은 여전히 외롭고 혼자인 길을 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이 세상 마지막 때도 그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젠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버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이방인들도 누군가에게 시간이 다 찰 때까지 압박을 받을 것이고 그래도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그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내 자신도 하나의 예루살렘임을 알고 겸손한 삶을 살 줄 알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 개인적인 ‘징벌의 날’을 피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징벌의 날은 바로 나를 보호해 줄 분을 알지 목하고 교만하여져서 스스로 그분을 저버릴 때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짓밟히는 그런 날인 것입니다.
학위를 위해 공부를 할 때 저는 교수님께 완전히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국 학위는 실력이 아니라 관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옳은 것 같아도 ‘교수님을 위해 제 생각을 바꾸어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교수님은 마지막 논문발표 할 때도 저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든든한 보호자요 후원자가 있으니 떨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학위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신학생 때 성서학위를 하면서 담당 교수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경험이 좋은 교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생각을 굽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이 바꾸라고 하는 내용도 억지로 억지로 바꾸었고 교수님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마지막 논문을 제출할 때도 교수님과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습니다. 그 때 교수님의 한 마디가 이것이었습니다.
“디페사(논문방어) 때 보자!”
즉 ‘두고 보자’는 뜻이었습니다. 논문발표 날이 저의 징벌이 날이었던 것입니다. 교수님은 논문심사를 하는 다른 교수들에게 이 논문이 형편없고 남의 것을 베껴 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교정해 준 당신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날 보호해 줄 유일한 교수님을 무시해서 그렇게 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부모 없이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징벌의 날을 맞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실력이 좋아서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을 부모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당신들도 자녀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자세도 그러해야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면서도 그분만을 바로보고 있다면 골리앗조차 그 나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실 것이지만, 교만하면 아이에게도 짓밟히게 내버려 둘 것입니다. 징벌의 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나를 지켜주실 분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교만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됩시다. 부모가 보호해주는 이상 징벌은 날은 올 수 없습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이 춥습니다. 따뜻하길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했습니다. 겨울에 휴식을 하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합니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그리고 사람은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심판에 직면하여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재앙을 만들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냅니다. 사대강 사업을 보십시오.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아픔을 가져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일본원전 사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원전은 일시적인 안락함을 주었지만 그 후유증은 지금도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원전을 더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 와중에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불량부품, 기준에 부적합한 전선 등의 사용으로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비리원전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순리를 역행하면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처방을 하고 있으니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 용기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사랑합니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반성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미완성의 시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회개와 반성뿐입니다.
안으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반성은
용서의 시간이 되게 합니다.
반성과 용서는
삶 전체를 감사로
바꾸어 놓는 속량이 되게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종말의 교훈은 다시금
고개 숙여 감사할 일들을
헤아릴 수 있게 만듭니다.
은총은 언제나
반성의 기회를 통해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하루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종말은 분명
새로운 길을 향한
감사와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시작도 마침도
감사와 기쁨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믿습니다.
반성이 없는 신앙은
이렇듯 혼돈스러울 뿐입니다.
반성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에
감사하는 오늘 되십시오.
주님의 속량을 통해
모든 것에 감사하는
시간 되십시오.

![]()
어제 동네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4~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엄마는 집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안 돼’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편의점이 떠나갈 듯 사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엄마도 대단하지요.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안 돼!’라고만 말하더군요.
이제 아이는 편의점 바닥에 큰대 자로 누워서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떼를 씁니다. 그러자 결국 엄마가 졌습니다. “알았어. 빨리 일어나.”라고 말했으니까요.
이 아이를 보면서 ‘참, 밉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서 이 아이처럼 간절하게 노력했던 적이 있었는가 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온 힘을 다해 떼를 쓰고.... 그 결과 자신이 원한 것을 얻을 수 있었지요. 물론 어떤 이들은 아이 버릇 나빠진다고도 말하지만, 그 간절한 노력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저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야’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보니 간절한 노력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이 더 옳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정작 내게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때가 많습니다. 간절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주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보다는 미지근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다가서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일미사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내가 아닌 남의 일인 것처럼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봉사와 희생은 나의 입에서만 나오는 공허한 말이었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당연하다고 합리화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대재난의 모습, 즉 징벌의 날을 너무나도 생생히 보여주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재난의 날이 다가왔으니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대재난의 날, 큰 징벌의 날에 바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온다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대재난의 날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인에게는 큰 불행의 날이 되겠지만, 의인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큰 행복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과 같은 안일한 마음으로는 잘 준비할 수 없습니다. 앞서 나오는 그 아이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해야 제대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우리는 얼마나 잘 실천하면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잘하고 있었을까요? 주님을 만나는 날이 불행의 날이 되지 않도록, 주님의 뜻을 더욱 더 철저하게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실패라는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솔 벨로).
행동이 가진 힘(‘행복한 동행’ 중에서)
한 잡지책에서 본 좋은 글을 함께 나눠 봅니다.
평소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회사 내 모든 상을 휩쓰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내놓는 아이디어는 신선할 뿐만 아니라 고객들의 요구에도 정확히 부합되는 것들이라 제품을 만드는 족족 크게 히트했다. 당연히 남자는 사장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남자의 마음속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회사는 파죽지세로 성장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미미한 포상금 정도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슬슬 돈에 욕심이 생겼다. 결국 자신이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하고 사표를 던졌다.
의기양양하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남자는 성공을 확신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의 사업은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끙끙 앓던 남자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사장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아이디어에 관한 온갖 자료를 펼쳐놓고 물었다.
“제 생각에는 이 회사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아요. 그런데 왜 고객들은 제 아이디어를 원하지 않는 거죠?”
그의 자료를 찬찬히 살펴보던 사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당신에게는 행동하는 시간이 없군요. 물론 이 아이디어는 당신이 생각한 거지만, 난 이 아이디어를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줬죠. 행동하는 시간을 늘리세요. 행동 안에는 마법의 힘이 들어 있으니까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 해도 실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만 만들어 내는 수만 개의 성공보다 발로 뛰는 하나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
만약 자신의 집에 불이 나서 딱 한 가지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면 무엇을 들고 나오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상상을 해보세요. 잘 걷지 못하는 내 갓난아기와 아주 비싼 렘브란트의 그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아기를 구하겠지요. 그렇다면 렘브란트의 그림과 동네 도둑고양이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에도 생명이 있는 고양이를 구하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렘브란트의 가치는 어마어마하고 반면에 도둑고양이는 나와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생명의 가치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이 세상의 어떤 물질적인 것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의 유명한 방송작가 겸 제작자인 다이앤 프롤로브(Diane Frolov)가 했던 말을 보고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불난 집에서 고양이와 렘브란트의 그림을 봤다면 고양이를 구해야 한다. 고양이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실제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에 항상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명을 지키기 보다는 돈을 지키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는 식의 말로써 스스로 위안을 삼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과연 무엇으로 평가받을까요? 많이 벌었던 돈으로 아니면 내가 움켜잡았던 높은 명예와 지위?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생명을 얼마나 지켰는지를 주님께서는 평가하시고 우리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루살렘 멸망의 장면을 우리들에게 소개하시는 것이지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제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날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기억해서 잘 실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우리들에게 필요한 준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덜렁대고 또 건망증이 심해서 자주 실수를 하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하도 실수를 많이 하다 보니 가족들이 항상 긴장을 하고 있었지요. 그날 역시 엄마는 또 하나의 실수를 했습니다. 글쎄 건망증으로 인해 냉장고에 휴대전화를 넣은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을 본 아들이 화가 나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도대체 엄마는 제대로 하는 것이 뭐가 있어요?”
그러자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지요.
“아들, 엄마가 제대로 한 일도 있어. 널 낳았잖아.”
그렇습니다. 이 엄마의 모든 실수, 그러나 아들을 낳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회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너무나도 많은 죄와 실수를 범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귀한 나를 받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생명을 가지고 있는 나의 이웃 역시 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종말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사랑이란 죽을 때까지 평생 사용할 수 있는 단단한 도장이다(크누트 함순).
고해성사
이제 다음 주부터 예수님의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실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판공성사를 보지요. 이 고해성사에 대한 어떤 신부님의 황당한 경험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이 자리를 통해 공개합니다(고해성사 비밀을 누설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고해를 하기 위해 고해소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작게 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자매님, 자매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죄를 들을 수가 없어요. 제가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크게 말씀해주시겠어요?”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에 자매님께서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신부님, 참 이상하네요? 왜 남의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을 갖고 계신 거죠?”
고해성사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요. 절대로 혼자의 독백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내가 죄를 솔직하게 주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고백한다면, 주님께서도 쿨(Cool)하게 나의 지저분한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절대로 사생활에 관심이 있어서 죄 고백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잊지 마세요~~~
고통의 신비
정희성 신부님
묵주기도 신비 중에, 고통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왜 이 고통을 신비라고 할까? 아프고 힘들고 어렵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고통이 어떻게 신비가 되며, 우리는 왜 이 고통을 묵상하고 있는 걸까? 고통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삶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올라옵니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 버린다면 그것은 신비가 아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신비인 이유는, 고통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제의 답변입니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열매를 맺기에, 고통을 신비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마지막 날에 대해 들려주시며,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라고 하실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날은 고통과 절망으로 끝나는 날이 아니라희망을 가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그 마지막 날-희망의 날을 고대합니다.
힘듦과 어려움이 그것으로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에게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땀흘려 일하는 농부 덕분에 곡식이 자랄 수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성실히 일하는 부모 덕분에 아이들은 꿈을 가지고 성장합니다.
그러한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의 힘듦을 또한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해방을 향한 첫 걸음
최인비 신부님
어릴 적 기억으로 ‘불 주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핵예방접종을 위해 양성과 음성을 확인하는 주사였는데, 그 당시에는 나라가 가난해서 그랬는지 주사바늘을 소독하기 위해 알코올램프로 가열하고 주사를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불에 달군 주사를 맞는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주사를 맞고 난 후 친구들 거의 모두가 덧나서 어깨에 흉이 남곤 했습니다. 지금에서야 그게 결핵예방접종의 방법이고 그로 인해 결핵에 대해 면역을 갖게 되는 것인지 알지만 당시에는 불 주사 맞는 날이 다가오는 게 너무 무서웠고 겁에 질렸습니다. 또 불 주사에 대한 무성한 소문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불 주사가 무서움과 고통도 있지만 결핵을 예방한다는 두 가지 면을 지닌 것처럼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멸망은 징벌과 더불어 속량 곧 해방의 때를 알려줍니다. 노예상태에 머물렀던 우리는 영광스럽게 오시는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옛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새 예루살렘(묵시 21,2)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아들이 주시는 속량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속량에 참여하는 길은 옛 예루살렘에 갇힌 자신으로부터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을 깨뜨리고,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이기심을 거두어들이고, 제자리에 안주하기보다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실천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변화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좋은 결심과 노력으로 실천 속에서 드러낸다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그만큼 가까워질 것입니다.
머리를 들고, 허리를 펴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황폐해질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빠져나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때의 예루살렘은 천상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인간이 세우고 인간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 사람의 아들은 아니 계십니다.
그러니 세속이고 속세입니다.
이 세속과 속세를 우리는 당연히 떠나야지요.
그런데 이 예루살렘이 황폐화될 때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그럴 겁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세속 예루살렘이 망할 때 두려움에 까무러칠 겁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거 아닙니다.
세속을 떠난 사람, 세속을 떠나려는 사람은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겁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멸망을 보지 않고 도래를 봅니다.
아니 멸망 그 안에서 도래를 봅니다.
끝에서 처음을 보고, 절망 그 안에서 희망을 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어둠 그 안에서 밝음을 보고. 죽음 그 안에서 부활을 보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 아예 빛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을 봅니다.
아직은 자비의 날이다.
김순중 수녀님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에 진노하시며 그곳에 닥칠 극심한 재난을 예고하신다. 주님께서 그 기간을 단축하시지 않으면 인류역사에 가장 심각한 환란이 닥치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유다의 전쟁’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루살렘의 굶주린 유다인들 가운데 베레아에서 온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자기 가슴에 안긴 아기를 잡아먹기 위해 살해해서 불에 구었다고 전한다. 닥쳐올 재난이 얼마나 가혹한가!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분의 창조물인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반란을 일으키고 소리칠 것이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각되는2000년 대희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제 삼천 년대를 위한 희망과 평화의 지평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바로 그21세기의 새벽인2001년9월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은 죽음과 고통의 심연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폭력 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레바논의 비극을 날마다 보고 있다. 또한 교통사고, 기아, 전염병, 어린이에 대한 이상성욕, 노예 수준의 노동, 방어할 능력이 없는 이에 대한 공격, 인간 생명의 시작과 마침의 신성함을 해치는 의학 실험을 위한 배아 이용, 낙태에 대한 합법화, 안락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직은 자비의 날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어김없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실 것이다.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님!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주님을 거슬러 자행되는 무례함과 방종함을 용서하소서.’
![]()
갑자기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시험 성적표를 받고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주위를 배회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 성적이 그리 좋지가 않았거든요. 이 시험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린 뒤에 도장을 받아와야 하는데, 형편없는 시험 성적 때문에 부모님께 혼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런 두려움 속에 마주하는 저의 부모님은 너무나도 무서운 부모님이었습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시험 성적으로 혼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성적이 떨어져서 분명히 혼내실 거야’라는 두려움이 부모님을 무서운 분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시험 성적이 좋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 만난 부모님은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사랑이 한없이 많아보이는 부모님이셨지요.
이렇게 내면의 상태에 따라 우리 마음이 바뀔 수 있으며,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생각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즉, 종말에 만나게 되는 예수님도 내가 준비한 내면의 정도에 따라서 때로는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때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주님을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바꾸어놓는 것이지요.
![]()
며칠 전, 해외에서 교포사목을 하는 신부님과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1년 만에 만난 것인데, 그 신부님의 체중이 너무 많이 빠진 것입니다. 올 1월에 출국할 때에는 살이 좀 많이 쪘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몸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체중이 줄었는지를 물으니 10Kg 이상 줄었다고 하더군요.
워낙 더운 지역이다 보니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고, 또한 낯선 지역의 음식이 입에 맞을 리가 없겠지요. 그리고 그 나라의 말을 알지도 못하니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교포들을 위한 미사가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해요.
‘내가 주교님께 잘못한 것이 있나?’
그러면서 주교님께 대해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을 하다 보니 이렇게 체중도 줄일 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어서 오히려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불평과 불만을 먼저 던지고 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렇게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과 시련을 디딤돌로 삼아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성전이 함락되어 완전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벗어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절망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더 주님 앞에 나아가는 힘을 얻으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도시가 멸망하고 무너지는 것을 주님께서는 종말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나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기억할 때,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종말을 가장 잘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에는 내일만 보이고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오늘만 보이며 사랑이 끝났을 때에는 어제만 보인다.(J.S.오테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삶(‘좋은 글’ 중에서)
"자신을 알려거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유심히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거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까닭입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그것이 왜 나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으로 자신에게 유익함을 주게 됩니다.
먼지가 없는 깨끗한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보여주지만 먼지가 가득 낀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희뿌옇게 보여주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신 또한 상대방의 거울인 까닭에 경거망동을 삼가고 바른 몸과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보다 더 아름답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살피고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서 자신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서 바로 잡아야 하고 어긋난 것이 있으면 제 위치로 돌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반듯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 이렇듯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적에게 나라가 망하는 때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우주가 크게 흔들리는 때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적에게 패망하는 때가 종말의 때이며 종말의 때가 주님 재림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실은 이 세상이 적에게 패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 종말을 이루시는 것이라는 뜻 같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 세상의 운명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좌우될 수 없습니다.
마치 악령이 욥에게 재앙을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악령을 이용하여 욥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처럼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은 다 하느님 것입니다.
저의 운명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 좌우될 수 없습니다.
불행하지도 않지만 제가 불행하다면 저의 불행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누가 불행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불행이라는 카드를 저에게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병적 조사 후 벌을 받게 된 다윗이 이왕 벌을 받을 바에는 주님의 자비에 맡기겠다고 한 것처럼 죽어도 하느님에 의해 죽지 악령에 의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불행해진다 해도 하느님에 의해 불행해지지 다른 누구에 의해 불행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죽음을 친구로 두고 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셨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가 죽기만을 바라다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기어이“이젠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죽고 싶은 이유는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해서겠지만, 정작 사랑만이 살아갈 참다운 이유를 주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죽고 싶다고 합니다. 어쩌면 진정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죽음을 직전에 두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죽음에 가까이 갑니다. 암벽을 등반한다든가 번지점프를 하면서 살아있는 쾌감을 느낍니다. 죽음 옆에서 삶을 더 느낄 수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대조되는 것 옆에 있으면 그것 때문에 자신을 더 잘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참으로 여자가 될 때는 남자와 가까워질 때이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될 때도 하느님과 가까워질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죽음과 함께 가야 합니다.
1986년1월, 6천만 미국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첼린져 호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5년이 지난 후 그 우주선의 비행사들이 남겼던 마지막 대화가 공개되었습니다.
남자: 무슨 일이지? 오, 맙소사. 안 돼. 오 안 돼.
여자: 오! 이런.(비명소리) 너무 뜨거워(신음 소리).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말하지마. 오 지금 하세요.
여자: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안 돼요.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남자: 당신의 팔이... 안 돼.
여자: 전 의식을 잃어가고 있어요.
남자: 우리는 아직은 죽지 않아.
남자: 할 수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신음소리)
남자: 그녀가... 그녀가... 죽...
남자: 공기가 없어
남/여자: (신음소리) 오 안 돼.
남자: 그녀가 의식을 잃었어.
남자: 그녀에게 행운이 있기를
남자: 오 하느님!우리가 죽어가고 있어요. (비명소리)
여자: 안녕(신음하면서) 사랑해요.
남자: 마음을 편하게 가져봐! 긴장을 풀라고!
남자: 어딘가에 비상 착륙을 할 수 있을 거야!
남자: 그래. 맞아.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남자: 비상 착륙을 시도해봐.
남자: 오, 그건 불가능해.
남자: 손을 내밀어봐.
남자: 거기에 있어? 깨어 있느냐고? 난... 난...
남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남자: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남자: 괜찮아?
남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내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인도하심이로다... 내가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 (침묵).
첼린져호 조종사들이 죽음 직전에 나누었던 대화는 죽음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우리를 살게 하는지 잘 느끼게 해 줍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찾고 사랑을 찾았습니다.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그 전에 이만큼 절실하게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참으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거의 매일 종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런 복음들을 읽다보면 종말이 매우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마음을 북돋아줍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종말은 그렇게 기다리던 우리의‘신랑’과 만나는 기쁜 날입니다. 죄인들만이 두려워 떨어야 하는 날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옆에 끼고 친구처럼 지내야합니다. 그래야 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무일도 끝기도에 항상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은 잠자리, 이것은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이름을 남기려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장 내일 죽게 된다면 적어도 이것은 하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삽시다. 진정으로 사는 맛을 느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낙화(落花)>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근 암환자들이나 그 가족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제목이"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라"입니다. 서울대 병원장을 지낸바 있는 한만청 교수가 저자이지요.
저자 자신이 실제로 회복 불가능한 간암에 걸렸었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요.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치료에 전념하여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결실을 얻었는데, 저자는 치유의 비결로"나에게 찾아온 암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지키고 치유하는 힘이 내 안에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날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지요. 요즘 계속 지겹도록 같은 주제의 복음을 되풀이해서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생각해봤을 때"죽음"과 친구가 되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다 죽음과 친숙하게 지내며 보다 자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묵상하라는 주님의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늙음, 죽음이란 단어들은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거부감을 지니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이 들어감, 늙음, 죽음 같은 단어처럼 친근한 단어가 또 없습니다. 죽음을 보다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지요.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꽃과 잎이 다시 뿌리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나무가 여름에 애를 쓴 이유는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떨어져 내릴 그 낙화의 순간을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은 인생곡선의 가장 하한선을 긋는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입니다.
나이 들수록, 주님의 날을 가까이 느낄수록 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보다 덜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소박하게 살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지닌 것이 많으면 그 지닌 것들에 신경을 쓰다가 한 세상 다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신속하게 그분을 맞으러 일어서야 할텐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이 무게를 줄이는 노력, 덜어내는 노력, 깎아내는 노력, 집착과 애증을 훌훌 털고 일어서는 노력입니다.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
프랑스의 여류 작가 ‘골래뜨’는 자신의 생애를 담은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보던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을 보니 무척 행복해 보이는군요.”
이에 골래뜨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그때는 그것을 몰랐을까요? 참 애석한 일이예요.”
향수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향수 냄새를 전혀 맡을 수가 없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는 좋은 냄새 가운데에서 생활했고, 자신의 몸에서도 그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시절을 행복한 줄 모르며 살고 있으며, 건강할 때는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면서 삽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요.
“태양과 물과 공기는 인간이 그 가치를 모른다. 단, 그것들이 없어져봐야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이 없어지는 순간 인간은 생존할 수 없고 결국 영원히 가치를 모른 채 살다 죽어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으면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면서 결국 후회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후회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과거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대신 지금이라는 시간에 더욱 더 최선을 다해 생활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함락되어 파괴가 되지요. 그리고 그때 백만 명 이상이 적군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며, 9천 7백 명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던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든 지키려했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로움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더군다나 하느님의 집인 만큼 하느님께서는 이 집을 적군에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피하라고 하시지요. 즉, 미련을 갖지 말고 끊을 것은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 그러다보니 지금이라는 현재에 내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지 못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 또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간직하는 것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최선을 다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종말에 대한 준비이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인 것입니다.
내가 받았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카드 한 장이 가져다 준 희망
미국 네브래스카 평원의 한 작은 마을에 조이스라는 소년이 살았다. 집안이 너무 가난했던 탓에 조이스는 아홉 살 때부터 레모네이드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았다. 열심히 일했지만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 무렵, 조이스는 캔자스시티라는 도시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짐 속에는 그림엽서가 들어 있었고, 가슴 속에는 우편 주문 방식으로 엽서를 팔아 성공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낯선 도시의 무료 숙소에서 그는 엽서를 백 장씩 묶어 중간상인들에게 우송했다. 하지만 그중 3분의 1은 돈을 받지 못했고, 3분의 1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되돌아왔다.
되돌아온 엽서 뭉치를 보며, 조이스는 엽서보다는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때 봉투에 넣어서 우송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카드가 더 잘 팔릴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빚을 내어 창고를 얻은 뒤, 외상으로 카드를 구입해 쌓아 두었다. 그런데 카드가 조금씩 팔리기 시작할 무렵, 뜻밖의 화재로 창고가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소실된 창고에서 좌절한 채 울고 있는데, 불에 타다 남은 카드 한 장이 조이스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밧줄이 동나면 끄트머리에 매듭을 짓고 매달려라.’
조이스가 처한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로 인해 조이스는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고, 부도 위기에 처한 판화 회사를 인수했다. 그리고 형제들과 힘을 합쳐 조그마한 카드 회사를 설립했다. 그것이 바로 ‘홀마크 카드’의 시작이었다.
가난과 학력의 한계를 딛고 작은 카드 한 장으로 성공을 일구어 낸 홀마크의 창립자 조이스 클라이드 홀. 그가 세계적인 기업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성공에 대한 열정과 긍정의 힘이었다.
종말의 참된 의미
이승준 신부님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해 물어보면 먼저 무서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논리에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두려운 감정에 이끌려 그들의 말에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합리화하는 그들의 세계에 빠져드는 사람들 가운데는 의외로 똑똑하다고 불리는 사람들과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약하고 두렵게 만드는 말이 종말입니다.
하지만 종말의 다른 표현은 하느님의 재림이며,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 가운데 오시어 그분의 정의대로 선과 악을 구분해주신다는 의미이며,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서막입니다. 그렇기에 종말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선과 정의에 맞게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 더 행복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 하면 모르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수상이자 명정치가였습니다. 문학적 소질도 탁월하여 수많은 어록을 남겼으며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생존 당시 처칠 수상은 많은 의사들의 연구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아주 고령인 65세에 수상에 취임한 그는 당시 시국이 시국인 만큼(2차 세계대전)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는 술을 즐겼습니다. 즐길 정도가 아니라 도를 넘어섰습니다. 그 독한 스카치위스키를 밤이면 밤마다 물마시듯이 마셨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실에 바늘 가듯이 술 마시면 땡기는 것이 있지요. 담배인데, 그냥 담배가 아니라 제일 독한 시거를 늘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보고, 회의, 결재, 시찰...그에게는 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비만이었습니다.
이런 처칠 수상이었지만, 그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아주 건강했다고 합니다. 그런 건강을 바탕으로 90세 넘게까지 장수했습니다.
그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 특유의 유머, 불굴의 의지 등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길어져만 가는 전쟁으로 지쳐가는 국민들에게 한 짧은 연설은 그의 낙천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Never, never, never give up!)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과의 사이에서 오고갔던 ‘전설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둘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살았습니다. 당시 둘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 내용입니다.
“처칠, 당신은 제 안의 태양이예요!”
“클레멘타인,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생애 가장 큰 행운이라오. 당신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내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동산일까요? 은행계좌일까요? 유산일까요? 아파트일까요?
사랑,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사랑만이 전부입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했던 사랑의 몸짓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향해 바쳤던 사랑의 표현들, 바로 그것입니다.
왜들 그렇게 미워합니까? 왜들 그렇게 싸웁니까? 왜들 그렇게 아웅다웅합니까?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감사를 준비할 시간
원영배
11월 마지막 목요일인 오늘은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이다. 저녁식탁에 가족이 둘러앉아 하느님께 한 해를 감사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푸근함이 넘치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 추석에 조상을 기리듯 미국에 건너온 신앙의 선조들이 역경을 극복하고 뿌리내린 역사를 기념하는 의미가 각별하다. 신앙의 자유를 찾고 이상향을 건설할 꿈을 품은 청교도들은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다. 66일 동안 폭풍 때문에 배 밑창에 갇혀 지내며 그들은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로 용기를 북돋우며 견뎠다. 노아의 방주도40일 만에 항해를 마쳤다는데 신대륙으로 향한 뱃길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험난한 모험이었다. 아메리카에 가까스로 도착했으나 전염병과 가뭄으로 그들 중3분의1이 넘는44명이 첫해에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우호적인 원주민들이 식량을 나눠주고 새 농작물 재배법을 가르쳐 주어 이듬해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질병과 굶주림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의 고난에서 지켜주신 하느님께 첫 추수의 감격을 돌려드린 감사의 축제는 오늘도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자연재해는 지구온난화와 환경변화로 예측불허의 정도가 더욱 심각해지고 인재의 규모도 확대된다. 올해도 지진과 태풍, 전쟁과 대형사고가 숱한 생명을 앗아가고 많은 사람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 몸도 벅찬데 태아와 젖먹이를 돌볼 힘 없는 여인들은 처지가 어떠할까? 그들의 시련과 불행을 마음 아파하는 예수님께서 지금도 가장 그늘진 곳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르신다. 혼란스런 재앙 속에서 무서워 떨지 말고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신다. 구원의 때가 가까워진 징조를 보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볼 기대를 품는다면 두려움은 설레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채찍으로 몸을 찢는 고행보다 고난이 끝나감에 기뻐하고 감사를 준비할 시간이란 가르침은 종말에 대한 우리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 준다.
징벌의 날
장재봉 신부님
바빌론에 관한 예언은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에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예레미아 예언자 시절에도 거듭 선포된 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나라들 가운데 보배요 칼데아인들의 자랑스러운 영광인 바빌론은 하느님께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리라,”(이사13,19)고 말하였고,
예레미아 예언자는
“너희는 바빌론 한복판에서 도망쳐 저마다 제 목숨을 구하여라. 바빌론의 죄 때문에 함께 죽지 마라.”(예레51.9) 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에게 똑 같은 주님의 예언이 내렸습니다.
이는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멸망당할 악한 바빌론이 지금 이 세대에도 존재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노아시대의 물 심판 이후, 하느님의 심판은 계속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이 죄악이 너무나 무거울”때 (창세18,20참조) 그 고장과 나라를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그 고장에서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있을 때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18,3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빌론과 폼페이에서도 지금 이 시대에서 조차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온갖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오늘 주님께서 이르시는 멸망의 징조는 성경의 표현처럼 모든 자연계가 붕괴되는 바로 그 모습과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바빌론의 생각에 젖어 살고 있다면 어두운 바빌론의 행위를 버리지 못한 채 어영부영하고 있다면 곧 멸망당할 바빌론이라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맹렬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악을 애곡하고 세상의 죄에 통곡하며 세상의 상처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당부라 짚어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나타날 징조가 있는 바로 그 때 돌아서 회개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지러진 민족들의 공포에 휩싸일 그 시간에 홀로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매일 매 순간 그분의 자애에 의지하여 그분의 사랑을 품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의 굳은 바빌론성곽을 부수어낸 사람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그 사악함 때문에 벌하고 죄인들을 그 죄악 때문에 벌하리라.”하셨으며 “오만한 자들의 교만을 끝장내고 포악한 자들의 거만을 꺽으리라.”(이사13,11참조)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이사22,13)하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바빌론인 채로 주저앉아 삶을 회개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치지 않고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으로 녹아지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소리가 되어야 하며 그분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증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바빌론을 역행하는 복음을 살아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 ‘의인’에게는 징벌의 날도 결코 두렵지 않은 까닭입니다. 아멘
![]()
저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사실 저는 이 당시에 모범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술, 담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유흥가로 놀러다는 것이 가장 저에게 중요했습니다. 공부도 그리고 성당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모습을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즐겨합니다. 보통 일주일에 2~3권 정도는 읽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는 습관을 거의 20년 이상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책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하고 있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책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고등학교 때에는 노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 읽는 습관을 떠올려보니,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오랜 기간을 저와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단 기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힘들다고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한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주님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어 주님으로 나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간직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 세상 것들이 좋다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이 세상 것들 없이는 못살겠다면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을 첫째 자리에 놓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오래 갈까요? 과연 내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끔찍한 사건이고, 상상도 하기 싫은 세상 종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역시 전혀 다른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꺼리는 세상 종말이지만 오히려 구원의 시간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기다려야 할 시간은 세상 사람들이 피하는 세상 종말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순간에 내가 두어야 할 시선의 방향은 과연 어디일까요? 바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맞추어야 구원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어릴 때, 시험 성적표를 받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 저리 주위를 배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어머니는 너무도 무서운 어머니였지요. 하지만 제가 성적이라도 잘 받으면 주위를 배회하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지요. 그때의 어머니는 정말 사랑스런 어머니입니다. 종말에 만나게 되는 주님도 나의 준비 정도에 따라서 무서운 주님으로, 혹은 사랑의 주님으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멀리하면서 과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내 삶을 뒤돌아보는 하루 보내세요.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세요.
노력을 훔쳐라(‘좋은 글’ 중에서)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어렵게 산 그 사람은 이 진절머리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옆집 부자에게 찾아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부자는 아주 간단했지만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꾸준하게 도둑질을 했답니다. 도둑질을 시작한 지 얼마지 않아 충분하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한2년 정도 도둑질을 하니 어느 정도 저축까지 하게 되었고, 조금 더 열심히 도둑질을 하니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이런 부자가 되었답니다.”
의외의 간단한 비결에 그 가난한 사람은 쾌재를 불렀고 어떻게 도둑질을 하여야 하는지 그 방법은 묻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뒤 가난한 사람은 밤에 이웃 마을에 숨어들어 여러 집 물건을 이것저것 훔쳤습니다.
하지만 곧 잡혔고 사람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은 뒤 겨우 풀려났습니다.
그는 부자가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분을 참지 못하고 당장 찾아가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의 욕을 가만히 듣고 있던 부자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언제 내가 그런 도둑질을 말했소! 나는 하늘이 내게 내려 준 자연을, 바람과 비를, 그리고 들과 땅을 훔쳤단 말이오. 훔친 땅에다 바람과 비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짐승을 키워 이렇게 부자가 되었단 말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이 귀한 것들을 훔쳤다고 해서 하늘은 결코 내게 벌을 주지 않았다오. 하지만 당신은 훔치라는 것은 훔치지 않고 남의 노력을 훔치니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오.”
구원받을 때
서현승 신부님
시간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의미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란 연대기적인 시간의 의미로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란 시간은 비록 흘러가는 것이지만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마치 역사의 의미를 ‘히스토리에’(Historie: 조사나 탐구에 의해 기술된 순수역사)와 ‘게쉬크테’(Geschichte: 풀이역사)로 구분하듯, 시간의 두 가지 그리스적 개념은 ‘하느님의 시간, 섭리’를 이해할 때 참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적어도 성경에서 쓰이는 시간의 개념은 ‘카이로스’에 가깝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받을 때’는 2천 년 전에 선포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지금 다시금 ‘그 시간’이 재현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카이로스의 ‘때’일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언제고 이루어질 일이지만, 그 종말을 앞당겨서 미리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삶은 종말론적 희망에 가득찬 시간입니다. 한 개인의 내면 안에서도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기존의 삶의 가치가 붕괴되고 홀연히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에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은 지금도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머리를 들어라.
정애경 수녀님
우리는 오늘 복음을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며 동시에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곧 이미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예고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 이는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세례성사를 받은 후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오면서 가꾸어 왔던 각자의 성전이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일미사에만 참례하면서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만 말씀과 성체로 영적인 살을 찌우지 못하고 미움과 시기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느님께 대한 의혹과 불신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면 마치 예루살렘 성이 적들에게 포위되어 멸망하듯 어느 순간 우리의 신앙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열악한 상황과 한계로 인해 점점 나의 성전이 흔들리고 꿈과 이상이 무너져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이젠 끝이다’, ‘이젠 죽었다.’ 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신다. 당신을 향하라고 하신다. 바로 이때야말로 우리가 속량될 때라고 하신다.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셨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는 용기와 믿음, 구원의 때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청해야겠다.
행복한 수요일 저녁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주 수요일 저녁 시간 저희 집은 온통 시끌 시끌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떠나갈 듯한 아이들의 성가소리에 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식당으로 옮겨와 벌이는 삼겹살 파티에 또 정신이 없습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 한 조각을 정성껏 상추에 싸서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죽어 가는 병아리처럼 삐쩍 마르고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어 거칠거칠했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얼굴이 달덩이처럼 변한 아이를 보니 저는 밥 한술 안 떠도 배가 하나도 안고플 것 같았습니다.
삼겹살을 대충 구워먹은 아이들이 철판 비빔밥을 비빈다고 난리들이었습니다. 워낙 잘 먹는 녀석들이라 오늘은 밥이 다 부족했습니다.
너무나 영적으로 살아가는 저인지라(?) 식욕이 별로 없는 저는 대충 식사를 끝내고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었지요.
나날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은근히 샘솟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마지막 날의 우리 앞에 펼쳐질 현상이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 날이 우리 인생 최대의 날, 일생의 가장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이웃 앞에 보다 긍정적으로 성장하고 쇄신된 우리 자신을 보여주려는 노력 말입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보여 왔던 그저 그렇고 그런 삶, 지지부진한 삶,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삶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변화된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부단히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끝없이 변화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위선과 권위의식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언제나 새로운 복음적 가치관을 선택하는 사람들, 타성과 안주본능을 떨치고 끊임없이 일어서며 길 떠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손영배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의 복음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어제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의 박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참생명을 얻기 위해서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하라며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돌연 종말의 때와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때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는 무서운 재난과 하느님의 분노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복음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시대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기원후 70년 경 로마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예루살렘의 종말의 시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은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상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사형과 낙태, 인권유린과 인종차별을 낳았으며, 물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풍조는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과 환경파괴로 지구의 온난화를 낳았으며 그 결과로 각종 홍수와 태풍, 지진과 해일 및 기온 이상현상을 유발했습니다. 또한 나와 우리만을 강조하여 너와 너희에 대한 무관심과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적 세계관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 곧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 특히 약소국과 빈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때에 있을 이런 징조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종말의 시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음 말미의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때 그 시간이 심판과 징벌의 시간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구원의 시간임을 알려 주려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속량을, 우리의 구원을 강조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은 세상의 공포와 엄청난 하느님 분노의 표현이기 이전에 이러한 종말의 징조를 보거든, 마음을 재빨리 돌려 회개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 잡기를 바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어제 강론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세상의 논리에, 바알의 논리에, 물질만능의 논리에 수궁하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곧 그동안 세상이 원하는 방법으로 세상이 바라는 목적으로 우리가 나아가고 있었다면 발길을 돌리고 머리를 돌려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또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환경을 아끼고 보살피며,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루카 복음 25장 36절의 말씀처럼 “늘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실천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설사 실천할 수는 있어도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을 정해놓고 내가, 혹은 우리가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앉아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마음만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가, 우리가 정해놓은 장소와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아니라 하느님과 소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게 될 것이고, 또 마지막 날에 그분은 나를 살릴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계획을 잡아서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해서 앉읍시다. 성령께서 나를, 또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매번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오 마리아 수녀님
좀 오래된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가 있다. 여객선 포세이돈을 타고 여행을 하던 사람들은 배 안에서 화려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해저지진으로 배가 침몰, 승객들은 우왕좌왕 탈출구를 찾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한 신부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서지만 사람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최악의 상태에서 신부는 목숨을 던지고 6명만 살아남는 장면이 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이다. 문자 그대로 듣는다면 끔찍한 재앙만이 연상될 것이고 또 상징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시라는 것, 희망이 되신다는 것이다. 얼마 전 종말이 다가왔기 때문에 어서어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소리치던 종교집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마지막 시간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그분을 잘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처럼 서로 비슷한 사람들 가운데 과연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또 비슷한 일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다. 매번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주님을 바라보며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살아야 할 것이다.
증거
백광현 신부님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은 불안과 공포입니다. 국제 공동체에서 공부할 때 같은 수도회의 인도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마친 신부님은 본국에서 수련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마피아들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곧 그들의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끝까지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유서 아닌 유서를 보냈습니다.
어느 날 마피아들이 도착했을 때 오늘이 그 날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감지한 그는 다른 모든 형제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밖에 나가서 벗과 교회와 복음을 위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억압과 공포 앞에서 머리를 들고 하느님의 구원을 피로써 증거한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날이 참된 해방이 되는 것은 신앙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도정호 신부님
우리들이 사는 이 땅에 재난이 가까워지면 여러 징조들이 나타난다고 말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해와 달 그리고 별 등 천체가 흔들리게 되고, 무서운 재난이 닥쳐오고, 당연히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떨게 되겠지요. 만일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하나 여유 있게, 맘 편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모든 사람이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주님께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실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큰 재난이 다가올 것이라는 말에 두렵고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감사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방 책꽂이에 궤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 우주 비행사들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유영을 하고 있는 모습, 지구를 떠났다가 다시 귀환하는 여러 우주왕복선에 관한 기록들, 우주왕복선이 지구를 돌면서 수집한 여러 가지 실험 모습들에 관한 자료와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를 촬영한 사진 등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설명이 곁들여진 사진 책자입니다.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보여주고 있는 모든 행동들을 품고 있는 지구. 그 지구를 보면서 우주를 다녀온 한 우주비행사는 이렇게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파란 구슬 속에 들어 있더라.” 라고 말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를 쓰면서 싸우고, 때로는 죽이고, 험담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지구, 또 한쪽에서는 희생과 사랑을 펼치고, 생명의 주인을 찾고, 선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구, 남에게 얘기하기에 창피하고, 감추고 싶은 치부들, 어리석고 모자란 모습들까지도, 인간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지니고 있는 지구.
사진을 통해서 새롭게 다시 보게 된 그 파란 구슬이 ‘우리 인간들의 추하고 나쁜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을 저 아름다운 지구가 덮어주고 있었구나! 인간의 온갖 것들, 진?선?미도 저 속에 함께 있고, 인간이 저지른 죄악과 어두운 모습들까지도 모두 가려주고, 덮어주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이끌어주고, 도와주고, 기다려주시는 분이 저기에 함께 계시구나!’ 그렇게 묵상을 하면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이 아침, 오늘 복음은 징벌의 날을 보여주면서 다소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지만, 무작정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께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날이 오기 전까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더 많이 기회를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정화되도록 기다려주신 후에 영광을 떨치면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이웃을 사랑하면서 친절을 베풀면서 감사 드리면서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구원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강영구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는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고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허리케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진이, 동남아에서는 쓰나미와 해일이 밀어닥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으로 죽어가고 있고, 언제 조류독감이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습니다.
창세(創世) 이래 전쟁과 천재지변(天災地變), 기상이변(氣象異變)과 각종 염병(染病)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사실상 이런 일들은 일상적(日常的)입니다.
이런 사건과 징조를 보고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세로군!’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말세(末世)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日常)은 말세(末世) 즉 종말(終末)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은 ‘종말(終末)의 시간’입니다.
‘종말(終末)의 시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말(終末)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디에 설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빛의 편에 선다면 그의 지금은 구원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종말의 시간’이 계속될 뿐 내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탕진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욕망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사는 사람에게 지금은 심판이 시간입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一明)
![]()
어제는 하루 종일 몸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온 몸이 으스스 춥기도 하고, 약간의 두통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하루를 보내면서 그렇게 편하지가 않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몸 상태가 안 좋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답니다.
어젯밤 1시, 너무 더워서 잠에서 깼습니다. 방바닥에 손을 대기가 힘들 정도로 뜨거웠거든요. 사실 저는 잠자기 전에 보일러 온도를 20도까지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 숫자를 잘못 보고 3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놓았던 것이지요. 그러니 방이 그렇게 더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저는 잠결에 이 방을 빨리 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방의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지요. 시원했습니다. 이제 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창문을 이렇게 활짝 열어 둔 채 다시 잠이 들었지요.
잠시 뒤, 저는 다시 잠에서 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추워서 깼지요. 그리고 제가 얼마나 멍청한 지를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방이 더우면 보일러 온도를 낮추면 될 것을 덥다고 잠결에 창문을 열어 둔 것이지요. 그 결과 어제 하루 종일 감기 기운을 몸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답니다.
어떠한 일이든 올바른 해결책은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에 제대로 다가서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특히 즉흥적인 판단과 내 자신만을 위한 판단으로 인해서 올바른 길로 가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그래서 더 쉽게 절망하고 더 힘들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끔찍한 사건이고, 상상도 하기 싫은 세상 종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다가서기 힘든 시간인 종말을 말씀하시면서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꺼리고 피하고 싶은 세상 종말이지만, 그 시간이 오히려 구원의 시간이라는 예수님의 말씀. 어쩌면 정말로 기다려야 할 시간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세상 종말의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 안에서 어렵고 힘든 고통의 순간도 주님과 함께 하려는 깊은 마음만 간직한다면 오히려 은총의 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들, 그래서 포기해 버리는 약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들을 그냥 내치시지 않습니다.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희망을 일구어 내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오늘도 기쁨을 간직하시는 은총의 날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한번 크게 웃고 일을 시작합시다.
원수는 물에, 은혜는 돌에 새기라(퍼온 글)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최후와 예언의 성취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루가복음이 기원후 80-90년, 즉 예루살렘이 실제로 멸망한 70년 8월 29일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마르코복음(13,14-20)의 같은 대목과 비교함으로써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상종말 직전의 징조로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루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역사적 사건으로 열거하여 평가하고 있으며, 이를 확대하여 세상종말에 대입시키고 있다. 루가는 또한 세상종말의 징조로 우주적 파국을 제시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종말의 목적은 완성이요, 인자의 재림이다. 인자의 재림은 곧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낸 사람들이 구원받는 때이다.(28절)
예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모으듯 예루살렘을 품으려 했으나(루가 13,34),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들을 향한 당신의 비통한 눈물조차도(루가 19,41)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자신의 구원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되도록 먼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하고, 성도에 있는 자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며, 시골에 있는 자는 성도에 들어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21절) 상황이 이쯤 되면 거동이 불편한 임부(姙婦)나 젖먹이를 가진 산부(産婦)가 불행한 것은 뻔한 일이다.(22절)
기원후 70년 2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당도하였고,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성도를 포위하여 일전일퇴를 거듭하면서 8월 29일 성을 함락시킨 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버티던 960여명이 최후의 죽음을 맞이한 그날까지 이스라엘은 매일 세상의 종말을 눈으로 보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유대장군으로서 로마군에 항거하여 싸우다 굴복한 후, 이름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로 개명(改名)한 ‘요셉 벤 마티아스’(37-100년경)가 직접 기술한 유대전쟁사(Bellum Judaicum)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유대전쟁사는 75년부터 79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이후의 유대 역사를 기술하고 기원후 66-70년의 유대반란, 70-73년 로마군의 침략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 체로 씌어진 이 전쟁사에는 유대의 애국주의자들에 대한 저자(著者)의 반감이 드러나 있으며, 로마의 군사전략과 병법을 높이 평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5개월간 예루살렘이 고립되자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고 다녔으며,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급기야 자식까지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로마군에게 투항해 오던 자는 산채로 배가 갈리고, 수많은 자들이 체포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소리쳤던 그들 스스로가 매일 400-500명씩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끝내 항복을 거절한 독립당원들 때문에 성전은 불타고, 예루살렘은 송두리째 폐허가 되어버렸고, 투항한 자들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 세계에 팔려 나갔으니, 그야말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다.”(유대전쟁사)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그때가 바로 성서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22절)이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귀담아 들어야 할지를 깨우쳐 준다. 다음 구약성서의 구절을 묵상하면서 교회 전례력 마지막 주간이며 성서주간을 더욱 열심히 지내도록 하자.
“그러나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성심껏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중략) 마침내 너희를 쓸어버리시리니, 너희는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너희를 원수에게 패하게 하실 것이다. (중략) 저주가 너희를 덮쳐 사로잡는 날, 너희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그가 지시하신 계명과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너희는 마침내 굶주리고 목이 타며, 헐벗은 몸으로 아무 것도 없이 야훼께서 보내신 원수를 섬겨야 하리라. (중략) 너희 원수가 이렇게 너를 포위하고 몰아치면 너희는 자기 뱃속에서 나온 소생,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아들과 딸을 먹게 될 것이다. (중략) 자기가 먹는 자식의 고기를 아무에게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쳐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아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궁한 나머지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탯줄 째 몰래 먹어 치울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치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 땅에 있는 만백성 가운데 너희를 흩으실 것이다.”(신명 28,15-64)
황폐해질 때(루가 21,20-28)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 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 때가 바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도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말씀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다니엘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너는 똑똑히 알아라. 너희가 돌아 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 기름부어 세운 영도자가 오기까지는 칠 주간이 흐를 것이다. 그 뒤에 육십 이 주간 어려운 시대가 계속되겠지만, 그 동안에 성을 쌓고 재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육십 이 주간이 지난 다음, 기름부어 세운 이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암살당하며, 도읍과 성소는 한 장군이 이끄는 침략군에게 헐릴 것이다.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종말이 홍수처럼 닥쳐 올 것이다. ”(다니엘9,25-27)
왜 예루살렘이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인가? 그 이유를 다니엘의 기도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다니엘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크고 두려우신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계약을 어김없이 지키시는 하느님, 우리는 못된 일만 하였으며 비뚤어진 짓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겼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저버렸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이처럼 얼굴을 들 수 없이 되었습니다마는 주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유다 사람이나 예루살렘 주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 주변에 사는 사람이나 멀리 온 세상에 흩어진 사람들이 모두가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배신하여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야훼여, 우리는 임금들이나 고관들이나 조상들까지 모두가 주께 죄를 얻어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애처로운 이 모양이 가엾어 용서해 주셨지만, 우리는 주께 반항만 하였습니다.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 우리 앞에 법을 펴시고 그대로 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온 이스라엘이 주의 법을 어기고 말씀을 듣지 않아, 죄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내리시겠다고 하신 저주를 하느님의 종 모세의 법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우리와 우리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큰 재앙을 그대로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천하에 다시 없을 재앙을 예루살렘에 내리셨습니다.”(다니엘9, 4-12)
결국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내리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그런 재앙에서 구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러면 그런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내가 지금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즉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빨리 산으로 달아나라는 말은 하느님께로 돌아 오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죄를 짓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는 말은 악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말씀이요,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는 것은 죄짓는 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죄의 상징, 온갖 악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악의 구렁텅이를 상징한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 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는 말은 예루살렘 도시가 온갖 악으로 가득차 있음을 말한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방탕과 악의 소굴로 포위되어 있으면 곧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빨리 그곳을 즉 죄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빨리 나와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못하는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왜그런가?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임신한 여자들이란 마치 여인이 아이를 임신한 것처럼 죄로 가득찬 사람들 즉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가리키며,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이란 여인이 젖먹이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데리고 다녀야 하듯이 그렇게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 도저히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옛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이 건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살기 위해 옛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복음의 말씀을 살아야할 때이다.
지방에서 강의를 하고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너무나도 배가 고팠습니다. 저녁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해서 그런지 무척 시장하더군요. 그래서 주변의 식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켜져 있는 아주 커다란 식당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안에 딱 들어가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손님이 하나도 없고, 그래서 이제 막 끝내려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들어갔는데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자리에 앉았지요. 종업원의 표정이 영 아닙니다. ‘끝나야 하는데 왜 들어와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야?’라고 제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불편하게 식사를 마치고 얼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날도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역시 배가 너무나도 고팠습니다. 그리고 불이 켜져 있는 조그마한 식당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늦은 시각이라 손님이 하나도 없었고,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만 계시더군요. 그런데 해장국 하나를 시켰는데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맛도 좋았지만, 서비스가 만점이었거든요. 제 근처에 계시면서 반찬 떨어지면 얼른 갖다 주시고, 자신이 드시던 간식거리까지도 제게 주시면서 모든 친절을 베풀어 주십니다.
똑같이 밤에 찾아간 식당이었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요? 바로 주인의식의 차이입니다. 가게 주인과 종업원의 차이는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서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삶을 최선을 다해 살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인의식보다는 종업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고 마지못해 살아가는 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도 불편함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께도 커다란 불편함을 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시지요. 이는 종말이 올 것이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언제 올지 모를 그 날을 위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라는 의미가 더 강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오실 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고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면 신날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신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제 올지 모를 그 날을 준비하는 모습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꽃은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낼 수 없지만 선하고 어진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바람을 거역하여 사방으로 번지게 된다.(법구경)
영예는 장난감 같은 것(‘좋은생각’ 중에서)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퀴리 부인. 그는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과학자 중,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칭송했을 만큼 돈과 명예보다 과학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학자였다. 그런 퀴리 부인의 성품을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친구가 퀴리 부인을 찾아왔다. 친구는 그에게 영국 왕립아카데미로부터 받은 금메달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어린 딸을 가리켰다. 친구가 자세히 보니 그의 딸이 금메달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금메달을 소중히 보관해 두었을 거라고 생각한 친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영국 왕립아카데미로부터 금메달을 받은 게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데, 아이가 가지고 놀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그러자 퀴리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영예라는 것은 장난감처럼 잠깐 가지고 놀 수 있을 뿐, 그것을 손에 움켜 쥐려고 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그 사실을 일찍부터 딸아이에게 깨우쳐 주고 싶어서야.”
그날 퀴리 부인은 자신의 연구가 한낱 영예를 위해서가 아님을 몸소 보여 주었다.
“한 사람이 이룬 과학의 발견은 세계 모든 사람의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가 가난에 쫓기면서도 돈이나 명예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이유는 오로지 인류와 과학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고귀한 마음 때문이리라.
속량
오민환
예루살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 자체로 종말입니다. 더는 하느님을 경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던 예루살렘이70년에 완전히 멸망합니다. 성전 중심의 종교적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붕괴된 것입니다. 복음서가 쓰였던 당시는 이미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 벌어진 사건 속에 예언의 의미를 담아내는 ‘사후예언’의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종말론적 상황을 설명할 때 주로 쓰이는 문학적 기법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주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선언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고난과 박해는 시작되었고 세상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언되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그때’ 당당히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주님만이 희망이고 구원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더 용감하고 담담하게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기다립니다.
나의 적 (敵)은 ?
사도 바오로는‘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 이고‘이 성전을 거룩하게 지켜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 이며 그 힘은 바로‘하느님의 지혜’ 라고 말합니다. (1코린3, 16 – 19 참조)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우리 각자가 자신의 성전을 지켜 내지 못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멸망은 자신을 무너뜨릴 적이 옆에 있었음에도 보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해 방어하지 못했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 자신을 지켜 내지 못하게 하는 적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 (知彼知己) 면 백전백승 (百戰百勝)’ 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 자신과 삶을 성찰해 봅니다. 내가 가진 작은 재능과 능력만 믿고 일하며 살아가려는 교만, 나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이중 잣대,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라는 나태함, 하느님의 자리를 비교할 수도 없는 하찮은 것들과 바꾸어 놓으려는 어리석음, 복음적 가난을 말하면서 세상의 부유함을 추구하려는 탐욕 등. 이러한 교만과 이중 잣대, 나태와 어리석음과 탐욕이 오늘 나의 거룩한 성전이 더렵혀지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지요 !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정확하게 알고 늘 깨어 있는 것,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지혜가 아닐까요 ? 그리고 그 지혜가 하느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켜주며‘사람의 아들’ 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고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란 어떤 일들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 큰 재난이 닥쳐 사람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다른 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가 그들에게 짓밟히며, 하늘과 땅에 표징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보통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고 닥쳐올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치게 되는데 주님의 제자들은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그때 주님이 큰 권능을 떨치며 오실 것이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속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지금 우리 상황을 성찰해봤습니다.
이번 연평도 피폭 사건으로 사람들은 지금 많이 당황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 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저는 오히려 침착하고 차분해집니다.
사건들을 보고 사람들을 보면 저도 이러저러한 생각들로 매우 어수선하고 두려운 감정이 들지만 하느님을 보면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이 모든 것들이 하찮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그러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쟁과 천재지변에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 떨어도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담담합니다.
그 어떤 것도 대단치 않고 그렇다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하느님께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떤 젊은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부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기를 갖게 되었답니다. 아기를 처음부터 원했지만 이상하게 아기가 생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도 가보고 약도 꽤 많이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드디어 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요즘에 이 부부는 그토록 기다렸던 아기였기 때문에 아기 용품 사는데 모든 관심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 아기 옷, 아기 신발, 아기 장난감 등등.... 그리고 아기를 보기 위해 왜 열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지 그 시간이 정말로 길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에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본당신부를 하고 있는 후배 신부님과 대화를 하다가 본당의 어떤 꼬마 아이가 교통사고로 인해 주님 곁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그것도 허망한 죽음에 아이의 부모가 얼마나 큰 슬퍼하는지 장례 미사를 하면서 자신도 무척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두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태어나기 전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최소한 열 달을 준비하게 하지만, 죽을 때에는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성인성녀들께서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말씀하셨지요. 죽음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삶 전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갓난아기를 맞이하기 위해 10달을 잘 준비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 설 그날을 위해서 우리는 내 삶 전체를 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사람들이 표징들을 보면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준비를 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속량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은 허둥대며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할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 사실은 너무나도 먼 일로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잘 생각한다면 그리 먼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시간으로 치면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올 한 해만 생각해봐도 이런 느낌은 분명합니다. 엊그제 2014년 새해를 맞이했던 것 같은데, 이제 2014년의 마무리에 서 있습니다.
죽음은 먼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의 삶이 죽음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치유는 과거를 흔적 없이 잊거나 고통을 완전히 삭제해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함께 사는 법을 아는 것이다(정목).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가?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왕이 종에게 물고기를 사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종은 물고기를 사왔는데 글쎄 악취가 나는 썩은 물고기인 것입니다. 왕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지요.
“세 가지 벌 중에 하나를 받아라. 만일 안 받겠다면, 네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악취가 나는 썩은 물고기를 먹든지, 곤장 100대를 맞든지, 물고기 값을 물어내든지 이 중 한 가지를 택하라.”
종은 물고기를 먹겠다고 했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돈도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은 물고기를 먹다가 포기했습니다. 구역질이 나서 계속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곤장을 맞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곤장 50대 정도 맞고 나니 더 이상 맞다가는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이 또한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물고기 값을 내겠습니다.”
처음부터 물고기 값을 내겠다고 결정하면 썩은 물고기를 억지로 먹는 일도, 또 몸의 아픔도 겪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물질적인 손해만을 생각하다보니 결국은 썩은 물고기도 먹고 곤장도 맞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어리석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계시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실천하는 것, 결국 이것이 바로 죽음을 위한 우리의 가장 큰 준비가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에서 자서전을 쓴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노라고 합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였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하느님 없는 개인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자서전을 쓴 최초의 사람은 루소라고 합니다. 루소는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정리했습니다. 누구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함으로 인해 세상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래된 본당은 본당의 역사를 기록하곤 합니다. 본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역대 사목자들은 누구였는지, 신앙 공동체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기록합니다. 지나온 날들을 감사드리고,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과 공간에서는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삶의 씨줄과 날줄을 돌아보면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과 욕망으로 채워진 날들, 회개의 반성으로 그려진 날들,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 날들, 나를 영적으로 자라게 해 준 소중한 인연들이 있을 것입니다.
1964년 저는 태어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371번지입니다. 저는 오래된 교우 촌에서 신앙의 씨앗을 품고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1974년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한국사회는 10월 유신의 격변기에 있었습니다. 가족계획의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밥장사를 하였고, 저는 어머니를 도와서 배달을 했습니다. 성당엘 다녔고, 동화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년중앙, 어깨동무와 같은 잡지도 읽었습니다. 5학년 어린이는 주체적으로 나는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1984년 저는 신학과 3학년이었습니다. 신학은 실천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는 늘 쇄신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인 선택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외쳤습니다. 교황님의 방한이 있었고, 2014년처럼 제게 큰 울림은 주지 않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청춘의 시기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영혼을 보기 보다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94년 저는 사제생활 4년차였습니다. 사제 생활의 중심은 동창 신부였습니다. 매주 만났고, 함께 휴가도 다녔습니다. 사목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청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면서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씀이 부족했던 시기였습니다. 영혼의 샘이 깊지 않아서 늘 갈증이 났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동료들이 없었다면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2004년 저는 교구 사목국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늘 혼자 하던 사목에서 함께 연대하는 사목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본당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교구라는 자리에서 보다 큰 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시노드’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못자리에서 나온 사제들도 서로의 입장, 성격, 생각이 무척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도 함께 해서 즐거웠고, 보람 있었습니다. 사제로서 가장 열정적인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4년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일은 성소를 보존하고, 키워가는 일입니다. 예비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성소후원회를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일은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의 일이었습니다. 새천년 복음화 사도회의 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두 번째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성향은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우기 보다는 외부의 일을 통해서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4년 좀 더 영적인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이렇게 전체를 돌아보면 하느님께서 늘 저와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의 모습으로, 우연인 것 같은 인연의 모습으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앞으로 10년은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미 공동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벽 독서기도 후 계응송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말씀에 의탁하나이다.“
"내 영혼이 주님께 희망을 두나이다.“
영혼과 주님이 한 세트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과 일치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아름다운 영혼에 기쁨입니다. 주님과 영혼의 일치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찬미기도 시간입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수도자들입니다. 특히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들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1독서의 묵시록 찬미가가 참 좋습니다.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이고,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공정하시도다,"'(묵시19,2).
오늘 위 찬미에 이어 계속되는 찬미가(묵시19,3-7)는 매주 주일 제2저녁 성무일도 때마다 수도공동체가 우렁차게 바치는 찬미기도입니다. 성서와 전례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지, 새삼 전례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 역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노래합니다. 하늘에 있는 천상성인공동체와 함께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이런 찬미공동전례의 은총이 온갖 일상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내며,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기쁨을 확산시키며 깨어 있게 합니다.
'그래서' 찬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고 또 지나갑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 만이 영원하십니다. 바로 찬미의 은총이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이런 하느님의 섭리를 보게 하며 시련과 역경을 이겨낼 힘을 줍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의 삶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습니다.
"내 마음은 주님 안에 기뻐 춤추며, 나의 힘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높혀 지는도다."(사무상2,1)“
하느님의 힘을 끌어 들이는, 또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찬미의 은총입니다.
결국 하느님 찬미의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 찬미입니다. '찬미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이는(루카21,25)' 위태한 상황에서도 찬미의 사람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승리를 믿기에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묘사 그대로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7-28).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오늘 묵시록의 마지막 구절은 그대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두고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록19,9ㄴ). 아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겨울엔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합니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희망하는 만큼 뿌리고 가꾸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수고와 땀이 큰 만큼 결실도 풍요롭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이라는 추수를 거쳐 약속된 새 삶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성장의 과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면 그만큼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는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마지막에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삶과 세상에 매여 산 삶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생명과 죽음은 하느님의 심판 이전에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 심판을 맞이하지만 믿는 이들은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맡기는 행복한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갖 생명체들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되돌리며 생명을 이어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적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정복하리라는 아주 끔찍한 사실들을 선포하신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1,24-25) 실제로 성전 파괴의 결과 무려 110만 명이 죽고 9만 7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근이 널리 확대되어 모든 집과 식구들에게 덮쳤다.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졌다. 이들을 땅에 묻으려 해도 병자에게는 힘이 없고 튼튼한 사람들은 시체가 너무 많아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들 역시 죽을지 몰랐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략) 로마 군인이 집들을 약탈하기 위해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전 가족이 다 죽어 있고 다락에는 죽은 시체가 가득 차 있는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떤 물건에도 손을 대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우리는 이런 파멸의 경고 앞에 두려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주의깊게 보면 이는 예수님의 사랑의 배려임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징벌이 내려졌을까? 그토록 사랑받고 중요했던 성전이 파괴된 것은 유대인들의 마음자세 때문이었다.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유다인들은 인간의 힘에 의존한 결과 미움, 분노, 증오, 교만, 거짓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처참한 파멸을 불렀던 것이다.
성전 파괴와 갖가지 징벌은 내 밖에서 나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육과 영의 긴장과 갈등, 선과 악의 선택, 세상 삶과 신앙생활 사이에서,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고 괴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 갈림길에서 하느님의 길을 걷지 않고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할 때 일어나는 불편함, 혼란, 수치심, 후회, 다른 이들과의 관계 단절, 거짓, 폐쇄와 같은 것들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인 나의 파멸의 표지이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선택하고 따를 때 오는 것은 자기파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간절한 사랑으로 우리가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경고 앞에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먼저 파멸의 징후나 빌미가 될 만한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21,20). 이 ‘알아차림’은 멈추어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그 눈길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가능해진다. 현대인은 어쩌면 이런 알아차림이 무디어질 대로 무뎌져 있는 것 같다. 자기 일에 바쁘고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또한 파멸이 아닌 삶의 길로 가려면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가고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21,21 참조). 곧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증오와 폭력, 분노, 교만, 애착이 난무하는 그곳은 이미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아니기에 피해야 한다.
나는 어떤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고 양심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아니오’라 말하지 못하고, 불의와 부조리가 저질러지는 그 현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묵인하며 있을 때는 없었는가? 바로 그런 상황은 하느님의 성전 예루살렘인 자신을 파멸로 내모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오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21,28) 하고 말씀하신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은 얼굴을 하느님께로 돌리라는 것, 곧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다. 회개란 나를 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내 힘의 원천에로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다. 오늘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물며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와 자비에 감사하며,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여 기쁘게 살아가는 예루살렘이 되도록 하자!
◆ 신앙의 길로요.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음양설 이원론 극과 극의 특성인 물질계가 곧 지구상의 세상입니다. 선과 악, 최저와 최고, 발전과 퇴보, 성장과 멸망 같은 현상들 말입니다.
이런 게 있어 세상이고 세상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겁니다.
적극 면에선 기쁨, 부정 면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강도 따라 더 합니다. 공개적으로는 적극과 부정이 공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부정 면에 말려들지 않게 노력해야지요. 신앙의 길로요.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옛 것과 새 것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무너져야 할 것은 무너져야 합니다. 견고한 것일수록 한번 무너지면 손쓸 틈도 없이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사람이 만든 견고한 성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옛 예루살렘이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세운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느님이 세우신 새 예루살렘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천상 에루살렘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계신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과 영광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권능과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옛 예루살렘은 매일 무너져야 하고 새 예루살렘은 매일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 주님이 진정 우리의 왕으로 계실 때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세우는 일꾼이 됩니다. 나의 하루가 새 도성을 세우는 벽돌 한 장이 됩니다. 오늘 하루가 옛 것은 무너지고 새 것이 세워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루카21,26)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연일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 구절로 선택되고 있습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매일 읽다 보면 지치게 됩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대림 시기를 전후로 종말에 관한 내용을 복음 구절로서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종말에 관한 바른 인식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더없이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며, 종말에 관한 메시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개인의 죽음이 아닌, 세상 종말이라는 관점에서 간단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사이비 종교는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집단 대부분이 외치는 것이 종말론(終末論) 혹은 세말론(世末論)이었지요.
즉, 세상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하는 말을 따라서 세말로부터 구원되어야 한다는 논조를 가지고 떠들어댑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구원이 아닌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요즘도 어렵지 않게 이런 사이비 집단들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쩌면 현재를 포함한 인류의 역사는 안정된 세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늘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갈 것이라는 것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늘 어수선했다는 말이 되겠지요.
종말에 대한 복음적 이해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 언제 어떻게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정해진 날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에 의해서 그 날이 당겨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둘째,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종교적 교리나 사회규범을 떠나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성이 존중되고 유지되고 있느냐의 여부로 따져보는 삶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적어도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바른 길을 알고 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소명을 다할 때만이 세상의 죄가 상쇄되고 아름답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죄가 만연하면 죄가 죄로서 보여지지 않습니다.
죄가 거듭되면 죄에 대한 반응은 무디어집니다.
종말이란 분명 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없이 우리의 죄가 커졌을 때,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이 우리의 죄로 인해 더 이상 닿지 않게 되었을 때, 즉, 악마가 원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을 때,
그때가 바로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 온난화, 지진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새롭게 창궐하는 역병들, 부당한 권력과 독재, 잔악한 범죄들, 전쟁들, 모두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죄의 결과라는 것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열심히 보속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선을 만들고 악과 싸워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답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세세손손 이 아름다운 지구를 물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만일 종말의 조짐이 보인다면, 교회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줄 것입니다.
즉,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없는 한, 어느 누구의 말에도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대탕녀 바빌론이 무엇인가? >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75년 신안앞바다에서 보물선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신안앞바다로 밀려오는 도자기 그릇들을 그 동네 어부들이 개밥그릇 등으로 사용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이 그 중 4개를 가져가 감정해 본 결과 하나에 4억 5천만 원의 감정가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바다를 이 잡듯이 뒤져 가라앉아 있던 보물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발견된 보물들은 박물관에 잘 보관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하다고 판단이 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 당신 나라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저 바다 속에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존재이지만 우리 가치를 안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어 우리 가치를 높여주셔서 우리가 지옥불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맷돌처럼 바다에 던져져 영원히 수장되어버릴 ‘큰 도성 바빌론’이 등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멸망의 땅이요 대탕녀로 상징되는 바빌론이 무엇일까 연구를 하였습니다. 미래의 타락한 나라일 것이다, 어떤 커다란 종교일 것이다, 혹은 경제를 휘어잡을 집단이나 군사정권일 것이다라는 식의 해석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우리는 그 속에 속하지 않아야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바빌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개념을 잡지 못한다면 혹시 그 속에 속해있으면서도 알지 못한 채 영원한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 독서에서 바빌론과 대조되는 도시가 등장합니다. 아직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조금만 더 읽어 가면 그 도시가 ‘천상 예루살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렸을 때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빌론으로 유배가게 되었습니다. 바빌론은 어쨌건 하느님을 모시지 않는 죄를 상징하고 그 죄의 결과로 묶이게 된 사람들의 집단이나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어떤 것인지 먼저 안다면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있지 않고 천상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빌론의 파멸을 계속 말하다가, 완전히 분위기를 바꾸어 예루살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이제 앞으로 나오게 되겠지만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어린양의 신부’로서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마치 그리스도 덕분으로 바다 속으로 빠져들지 않는 노아의 방주 속에 머물렀던 노아의 가족들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이들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바빌론이 조금은 명확해집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모든 백성들, 그리스도와 혼인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 즉 파멸로 향하고 있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지금 가라앉는 배처럼 심해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이 세상과 함께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마치 천사의 말을 듣고 소돔을 빠져나온 이들만 살고 그 세상에 머물러 있었던 모든 이들이 유황불로 멸망을 당했듯이 이 세상은 어차피 모두 멸망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자캐오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그분을 받아들이면 그분의 영향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 세상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박해받고 가난해지고 멸시받고 순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을 미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또한 돈과 권력과 쾌락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참으로 교회에 속한 이들이 아닙니다. 몸만 성당에 다닌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면 아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완전히 변화됩니다. 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인이 남편을 얻으면 또한 이전에 살던 대로 절대 살 수 없게 됩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상대의 영향을 받아 완전히 변화됨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한 이들도 그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온전히 따르고 있다면 천상 예루살렘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원수를 사랑하고 낮아지기를 원하며 남을 위해 희생을 즐기는 이들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에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빌론은 이 세상입니다. 교회는 그 반대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어느 세상에 속해 사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원은 이 세상과 반대방향으로 향해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멸망으로 가고 있는 대탕녀 바빌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잠잠하다가도 획을 긋는 연도만 되면 들고 일어나는 사이비 교주들이 있습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종말 이단에 빠진 한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종말 이단에 빠져 가정은 완전 뒷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가족들의 생계비마저 사이비 교주에게 다 갖다 바쳐 가정경제가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아이가 취학할 나이인데도 ‘지금 이 절박한 순간에 학교가 무슨 소용이냐?’며 아이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우중충한 교회로 출석시켰습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종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종말과 관련해서 우선적으로 기억할 진리 한 가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그날이 온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종말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이 세상 종말은 무시무시한 끝입니다. 사실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직면한 현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한 국가의 미래는 ‘출산율’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녀 각각 따로 따로 결혼해서 적어도 두 명의 자녀는 출산해야 현재의 추세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출산율이 거의 1에 가까우니 둘이 만나 결과는 한명의 자녀뿐입니다. 노령화와 더불어 진행되는 젊은 층 인구의 감소로 인해 우리나라의 미래가 참으로 어둡습니다. 국력과 국가 경쟁력의 급격한 쇠퇴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이런 면에서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이고 칭송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 딸린 여자들이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로 인해 감내해야할 고통이 너무나 극심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기원후 66년에서 70년 사이에 벌어진 유대 전쟁을 통해서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이 전쟁 중에 백만 명도 넘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구만칠천명이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화려하던 성전은 흔적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정복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해서 드디어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메시아를 십자가형에 처한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제대로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경직되고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살처럼 부드러운 따뜻한 마음인 것입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한 예수님의 성심 같은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 두려운 것이지만 사실 그것은 오직 원수들에게만 두려운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주님 오심을 기도와 자선으로 준비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종말을 기쁨의 날이자 해방의 날이며 결국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닥쳐오고 이러저러한 징표가 일어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은 달릴 길을 열심히 달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희의 날, 기쁨과 감사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날이 되겠지만 잘 준비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날이 다시없는 축복과 은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꼭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두려움뿐이지만 그분과 함께라면 언제나 희망과 기쁨,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올 한 해도
참으로 많은
아름다움을 만났습니다.
마음을 나누었던
아름다웠던 일들과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로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얼마나 자주
바라보았는지를
다시금 묻게 됩니다.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산다는 건
서로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일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땅 위에서 아름다움을
나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가장 큰 위안을
얻게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바라보면
허무속에서도
두려움과 공포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뜨거운 삶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속량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수고와 노력없이는
결코 그 어떤 마음의
예루살렘도 다시
아름다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가야 할 길은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기쁨과 희망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기 위해 다시금
주님께로 옮겨가는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모든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바라봅니다.
<종말, 재림, 심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이 말씀에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종말과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무서운 일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에 압도당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벌을 받을까봐 무서워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은 종말과 심판의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예감'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확실하게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는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하게 된다는 뜻인데, 종말이 오면 일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 세상의 모든 활동이 정지될 것입니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는 전우주적인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날이 되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모든 질서와 관계가 다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다 무너져버리면 속세에서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이 없게 됩니다.
(영화에서 흔히 묘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될 것입니다. 전기, 전화, 수도가 끊어지고, 모든 제도와 체제와 질서가 무너지고, 정부 기능이 정지되고, 관공서와 은행 등의 업무가 정지되고, 모든 교통수단이 멈추게 되고... 어딘가로 달아날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28)."
그날이 되면,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여기서 '볼 것이다.' 라는 말은, 마치 남의 일처럼 구경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은 '나'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을 만나게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 심판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종, 민족, 종교, 신분, 직업 등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심판 대상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날이 되면, 그때서야 고해성사를 보려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제들도 심판을 받아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라는 말씀은 "믿음과 희망을 가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재림'과 '심판'은 '처벌'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신다는 말에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판'은 구원받을 사람과 처벌받을 사람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완성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처벌과 멸망의 시작이 됩니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는 "너희의 해방과 구원이 완성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을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종말, 재림,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원래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잘 읽어보면 "여러 가지 무서운 일이 일어나겠지만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보통 '잔치'에 참석하는 일로 표현됩니다.
잔치에 참석하는 일은 '기쁜 일'입니다.
종말은 그 잔치가 시작되는 날이고, 재림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잔치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오시는 일이고, 심판은 그 잔치에 참석하게 될 사람들의 자격을 확인해 주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나 묵시록에 있는 종말과 심판에 관한 내용들에는 왜 그렇게 무서운 상황 묘사가 많은 것일까?
그것은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내용들 때문에 종말을 인류의 멸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종말은 모든 사람이, 즉 인류 전체가 멸망하는 날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 '회개하는 사람'의 종말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처벌 받을 사람과 잔치에 참석할 사람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종말과 심판이 누구에게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운 일이 일어나도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지금 믿음과 희망 속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반가워서 달려가 맞이하게 될 것인지, 예수님이 무서워서 숨게 될 것인지...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