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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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다(복음).
오늘의 묵상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입니다. ‘복’(福)이란 한자어는, 하느님[示]께서 각자[一]에게 필요한[口] 밭[田]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상통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은 재물과 건강, 부귀와 영화겠지만, 하느님 백성인 우리에게 참된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상속자들입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몫을 상속받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해 첫 날부터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의 인생 속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성모님께서는 목자들이 전해 준 믿기지 않을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화려하지만 사라져 버릴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놓으신 하느님의 영의 선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믿음의 복을 누린 분이셨습니다.
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서로 빌어 주는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을 어제와 별 다르지 않은 날로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처럼, 행복과 희망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심하는 능력입니다. 새해에 내가 결심하고 하느님께 청한 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지 성모님처럼 곰곰이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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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입니다. ‘복’(福)이란 한자어는, 하느님[示]께서 각자[一]에게 필요한[口] 밭[田]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상통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은 재물과 건강, 부귀와 영화겠지만, 하느님 백성인 우리에게 참된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상속자들입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몫을 상속받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해 첫 날부터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의 인생 속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성모님께서는 목자들이 전해 준 믿기지 않을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화려하지만 사라져 버릴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놓으신 하느님의 영의 선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믿음의 복을 누린 분이셨습니다.
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서로 빌어 주는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을 어제와 별 다르지 않은 날로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처럼, 행복과 희망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심하는 능력입니다. 새해에 내가 결심하고 하느님께 청한 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지 성모님처럼 곰곰이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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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경축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목동들의 이야기와 축하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변화를 마음속에 새기셨습니다. 새해 첫날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우리 안에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과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물고자 하시며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과 희망을 주고 계심을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성모님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종’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 사랑과 희망을 우리 마음 안에 잘 간직하여야 하겠습니다.
행복의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행복을 빕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평화를 빕니다.” 하고 기원하는 것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하느님에게서 오지만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견디어야 합니다. 성모님의 삶은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삶이었지만 아드님의 가시밭길을 함께 가신 삶이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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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을 여는 오늘, 우리는 여드레 동안 경축하던 성탄 팔일 축제를 마감하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복음 말씀대로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신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예수’(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라고 불리게 됩니다.
루카 복음 전체는 바로 이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예수님께서 유다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하여 오신 분, 곧 구세주이심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특히 여성의 권익을 위해 일생 투신하셨고, 그들의 진정한 친구이셨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도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들판의 평범하고 순박한 목자들이 제일 먼저 그분을 찾아가 뵙고 경배하였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이 점을 부각시킵니다.
또한 루카는 ‘경건함’을 역설합니다. 참된 경건함이란 바로 세상사와 인간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깊숙이 깨닫고 그분께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요셉과 마리아, 시메온과 안나 예언자가 경건한 분들입니다. 경건한 사람의 특징은 성령께서 그들의 삶 안에서 특별하게 활동하시거나, 그들이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점입니다. 특히 성모님의 일생이 바로 그러했지요.
오늘 복음의 순박한 목자들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순박할 때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처럼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한 해, 목자처럼 아주 단순하게 살아가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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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나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께서도 이렇게 어머니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가십니다. ‘레위기’의 명에 따라 할례 받으러 가신 것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평범한 ‘아기 엄마’로서의 삶입니다. 마리아께서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특별한 삶’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답게’ 사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나 위대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답게 살지 못하면 위대함은 반감됩니다. 때로는 지탄을 받습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참고 인내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어머니다운’ 모습입니다.
어머니의 삶이 건강하면 그 힘과 은총은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하늘의 기운이 그들에게 닿는 것이지요. 위대한 어머니는 이렇게 해서 등장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특별한 삶’을 사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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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러고는 천사가 일러 준 그대로임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천사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천사의 표정과 생김새까지 다 이야기했을 겁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 준 그 천사였음을 직감하십니다.
천사를 목격했으니 목자들은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 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성모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을 처음으로 만났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따뜻함을 안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는 마리아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그분을 진정으로 알려면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아니면 천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성모님을 알려 주는 천사는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성모님께 진심으로 매달림으로써 그분께서 주시는 기적을 체험해 본 사람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이십니다. 자식이 온몸으로 다가가는데 외면할 어머니는 없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을 만난 이들은 모두 천사가 됩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을 어머니로 부르면서 또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사랑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목자들처럼 성모님을 새롭게 만나고 천사가 되어 이 한 해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찬미 예수님!”이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허윤석 신부님은 평화방송 ‘성모 마리아는 누구의 어머니신가’란 제목으로 한 영성특강에서 당신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간추려봅니다.
허윤석 신부가 어렸을 때 동생이 성당에 복사를 서기 위해 가다가 무면허 운전기사가 모는 트럭에 다리를 깔려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허 신부의 어린 시절은 오락실과 가출한 아이들과 노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집이 비어있으니 가출한 아이들의 거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생 때 허 신부도 취객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고 생사의 길목에서 사경을 해매야 했습니다. 의식은 흐려지고 손발이 차가와지고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몰려와 분명 죽음에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주 작고 온화한 빛이 점차 커지더니 성모 마리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허 신부의 머리에 강복해 주시고 손을 잡아주셨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의 혼수상태 끝에 허 신부는 깨어났고 그때 성모님께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라 불렀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어머니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분이라 누구라도 성모 마리아를 만나면 어머니라 부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허 신부는 그때부터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고 어머니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기도하는 학생으로 변했습니다.
한 번은 새 어머니에게 매일 구타당하는 것이 싫어서 가출한 친구와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다음 날 자기 생일인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묘지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허 신부는 신자도 아닌 그에게 묵주를 쥐어주며 함께 묵주기도 하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땅 속에 묻혀 있는데 어디 또 어머니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천국에 계실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허 신부는 루르드 성모님의 메시지를 인용하며 누구도 회개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날 함께 자고 다음 날 학교에 갔습니다. 그 친구와 같은 반이었는데 점심시간에 갑자기 그 친구의 새 어머니가 교실로 들어와 아이의 뺨을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가출해서 새엄마 걱정을 끼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손에 어제 받은 묵주를 꼭 쥐고 “죄송해요. 다시는 가출 안 할게요. 그리고 다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을게요. 미워하면 엄마를 볼 수 없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새 어머니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나도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나도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하며 울었고 그 친구와 허 신부도 울고 담임선생님도 울었습니다. 새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매를 많이 맞으며 자라서 그러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허 신부의 친구는 성모 마리아를 사랑했던 제자의 이름인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고 새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사건 이후로 새 어머니를 어머니로 받아들여 행복한 가정이 되었고 지금은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새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친어머니 옆에 나란히 묻혀있고 그 중간엔 성모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성모 어머니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하느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또한 자비이고 용서이고 평화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평화를 전해준다면 그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낳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손님을 맞이합니다. 가난한 목자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이 낳으신 하느님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또한 목자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당신 아드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하느님의 자녀들로 새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허윤석 신부님도 성모 마리아와 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우선 가정 안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비뚤어질 수 있었는데도 성모 마리아를 통해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잉태된 자비와 용서를 친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자비와 용서가 아기 예수님입니다. 친구도 그 자비와 용서를 보고 믿고 새로 태어났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구는 또 자신의 새어머니를 새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낳은 자비와 용서로 새어머니의 성모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신자분은 자신의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사처럼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하여 1년에 30명 이상을 선교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찬미하는 예수님을 통해 또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게 하는 삶이 성모 마리아의 삶이고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우리도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잉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평생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사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먼저 찬미하고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모성을 닮는 길은 온 삶이 “찬미 예수님!”으로 집중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0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새해를 시작하는 모든 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저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모든 분의 소망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새해에는 만나는 모든 분에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성전의 문에 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If you enter here as a tourist, we are hoping that you would exit as a pilgrim. If you enter here as a pilgrim, we are hoping that you would exit as a holier one. (만일 여러분이 여행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3가지 유형의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결심은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싹을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씨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왔지만, 그 이유와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고통과 좌절 앞에 무너지는 사람입니다. 삶의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어렵게 뿌리를 내리지만 가시를 견디지 못하고 시드는 싹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온 이유와 목적은 알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물론 이웃의 십자가도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땅속에서 양분을 얻고, 햇빛을 받아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보다 가난을 택하기도 하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하고, 오래 살기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책에서 보았던 글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Life is no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Life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춤추는 걸 배우는 겁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2020년에도 시련의 폭풍우가 있을 겁니다. 좌절의 바람이 불 겁니다. 고독이 심하게 밀려올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포기하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찾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중하게 여기는 출애굽의 이야기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폭풍우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법을 배웠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는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데서 뛰어 내려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명예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권력의 단맛이 워낙 중독성이 강하기에 거부하기 힘든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0년 경자년을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주님 안에서 모두가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올해에도 참 많은 일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전 세계의 축제인 일본 도쿄 올림픽이 열리며, 국민을 대표하는 봉사자를 뽑는 중요한 선거인 제21대 국회의원선거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할 일이 많다고 올 2월은 윤달로 29일까지 있지요. 하루를 보너스로 더 받게 됩니다.
이런 새해 첫날, 우리는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기념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떠올리면서 새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몇 달 전에 양치하다가 어렸을 때 해 넣었던 치아 하나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니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말해서 이를 뽑았습니다. 이 하나 뽑는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저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더군요. 뽑고 난 뒤의 통증도 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발음이 새는 것 같아서 말하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말할 때 버벅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게 되더군요.
별것 아닐 수 있는 이 하나 뽑는 것도 이렇게 제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큰일, 특히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부터 일어난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가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영광이라며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의연하게 묵묵히 모두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오늘 복음에도 성모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한 해도 기쁘고 좋은 일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일들도 우리와 함께 공존할 것입니다. 그때 성모님의 모습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해보다도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랠프 월드 에머슨).
사랑은 내게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회사의 한 여직원이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재고 파악을 위해 냉동창고에 갔습니다. 그래야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지요. 한참을 재고 조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냉동창고의 문이 닫힌 것입니다. 이 문은 창고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라서 안에 있는 자신은 도저히 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없는지 창고 안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누구 하나 와서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영하 25도, 점점 추위를 참기가 힘들었고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냉동창고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회사의 경비아저씨가 문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극적으로 구출된 이 여직원은 경비 아저씨가 어떻게 자신이 여기에 있는 줄 알았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회사에서 저에게 출퇴근 시간에 유일하게 인사를 해주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분명 오늘 아침에 인사했는데, 저녁에 당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되어서 돌아보다가 냉동창고 안에 갇힌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받을 것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으로는 결정적 순간에 필요한 도움을 받기가 힘듭니다. 평상시에도 베푸는 사랑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십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2019년이 떠나고 2020년이 다가왔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이다.
축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데 바로 평화와 은총으로 내려주신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에게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 24. 26)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베틀레헴으로 서둘러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rhema)을 알려 주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족들은 목자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하지만 한국말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그리스말 성경은 다르다. “마리아는 이 말씀(rhemata)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그러면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것일까? 이 “말씀들(rhemata)”을 간직할 것일까? 일은 무엇이고 말씀은 또 어떤 건가?
영어 성경에서 rhema와 Logos는 말씀(Word)으로 번역한다. 복음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두 종류로 사용되는데, Logos이고 rhema이다. 그런데 가톨릭의 오늘 복음 성경은 ‘말씀’이 아니라 그저 ‘모든 일’이라고 번역을 하였다.
rhema는 말씀, 주장, 언변의 행동까지 담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리스말 성경의 원문은 마리아는 목자들이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rhema)을 마리아에게 알려 주었기에,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 관한 말씀(rhema)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복음은 전한다. 그렇다.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과 말씀을 간직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물론 틀린 의역은 아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마리아를 자세히 만나기 위해서는 정확한 번역이 요구된다. 마리아는 아들 구세주 예수에 관한 말씀(rhema)를 마음속에 품고 침묵하며 곰곰이 되새기는 성찰하는 기도를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마리아가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다면... 혹시 마르타와 같은 모습으로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 성모 마리아로서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 및 신자들이 닮아야 하는 모습은 “예수에 관한 말씀(rhema)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고요히 성찰하는 기도이다. 그 말씀(rhema)가 마리아 안에서 행위의 복음이 된 것처럼, 신앙인으로서 나도 말씀(rhema)을 깊이 수락할 때, 마리아 또는 예수님처럼 행위하는 말씀을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말씀을 동반하는 행동이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새해를 맞는 이 시간에 새로운 질서인 말씀 안으로 들어가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되새기는 성찰로 거듭나는 2020년이 되기를 기도한다.
<새해 첫날을 여는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을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나를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품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을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품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품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나를 품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닮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닮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닮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내가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나를 사랑하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축복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축복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벗이 축복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축복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축복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벗과 내가 축복이게 하소서
평생 하느님을 찬양하며 산 사람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16~20)”
목자들은 시골일반인이었지만 천사의 설명 듣고 확인했고 전했습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알렸고 동네사람들에게도 전했을 겁니다.
목자들은 평생 하느님을 찬양하며 산 사람이었겠다고 절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하늘 뜻이나 소식 이웃에 알리고 하느님 찬양하며 살았는지요.
아마 우리는 세상 상식들 배워 알리며 세상행복 받으라하진 않았는지.
예수님 탄생 2020년이니 우리는 목동들보다 2020배 키웠어야 됐겠죠.
새해 2020년간 퍼진 목동의 알림 따라 예수님 찾고 하늘 찬양합시다.
세상것들 많이 배웠어도 목동소식에 관심 더 두며 하늘나라 찾읍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찬미예수님 2020년 경자년(庚子年)의 새해 첫날 우리는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경자년(庚子年)은 쥐의 해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경자는 쥐들 중에서 우두머리인 흰 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쥐는 그 특성이 남달리 지혜롭고 부지런하며 인내성이 강한 동물이기에, 특별히 경자년 올 한해는 우리가 그러한 쥐의 좋은 점을 닮아 늘 하느님 안에 참된 지혜를 추구하고, 부지런하게 기도하면서, 인내함으로서 참된 결실을 이루어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 미사 중에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에서는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내고 경배를 드리는 대목의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여기서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천사들로부터 들은 말을 알려 주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성모님께서 아기에 관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인들 모두에게 참된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신앙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그렇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참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수 있도록 온전히 믿음을 드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을 때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셨고,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앞으로의 모든 시간도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이루어가는 참된 구원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2020 새해 아침,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다. 성모 마리아님이 천사로부터 받으신 인사말이 떠오른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태어날 아기의 이름은 예수라 불릴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마음에 이를 간직하고 곰곰이 헤아리며 그 인사말의 성취를 위해 믿음의 길을 가신다.
새해 아침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의 대축일을 지냄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가를 가르쳐 주신다. 나도 성모님처럼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고 주님과 함께 묵묵히 걸어가야겠다. 삶의 목적이 분명히 구체화되고 명료화 되는 한 해를 펼치고 싶다.
믿음의 삶은 기복이 아니다. 앉아서 건강과 평화를 바라는 기복이 아니라 하느님께 맡기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하느님을 향해 사람을 위해 도전하고 정진하는 삶이다. 새해 아침은 나에게 보다 새롭게 살라고 마련하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잘 살기 위해 어머니께 청하자.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죄인을 위해 빌어주소서’ 하고 날마다 이 청원의 기도를 성모님께 청해야겠다.
<희망>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16-21).”
여기서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은, 아기에 관해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한 말을 가리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 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천사가 한 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오늘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
2) 구유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가 메시아다.
3) 메시아께서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을(구원을) 주실 것이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찾아낸 다음에는 천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또는 자신들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안 믿고 있다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본 다음에야 비로소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었는데(루카 2,15), 그것은 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본 것은 “작고 약한 갓난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그 아기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메시아께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로 오셨다고 말했고,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기가 자라서 나중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게 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 일은 전적으로 ‘그냥 믿는’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말한 대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내고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구유에 누워 있는 그 아기가 자라서 나중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서 ‘희망’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이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망’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될지 안 될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내가 바라는 대로 되면 좋겠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내가 믿고 있는 그 일이, 믿는 그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은 사실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희망’은, 복권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그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당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당첨되면 정말 좋겠다.” 라는 불확실한 일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이미 당첨된, 그러나 아직 당첨금과 교환하지는 않은,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복권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우리는, 지금 내가 주님께 청하는 그것이, 또는 그 일이, 청하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런 희망과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빈말’입니다.)
여기서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라는 말씀은, 앞에서 말한, “희망이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이다.” 라는 말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희망’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주님께서는 구원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믿고 희망하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구원이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라는 말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구원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희망과 믿음에서 인내심이 생깁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라는 말은, 구원이 완성되면 희망의 역할이 끝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을 맞이해서 여러 가지를 희망하고, 계획합니다.
그 희망과 계획에 대해서, 신앙인은 다음 두 가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1) 지금 나의 희망과 계획은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인가?
2) 나의 희망은 믿음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가?
자기의 희망을 말씀드리는 기도를 주님께 바치면서도, 주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청한다면, 즉 허무하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소원만 빌고 있다면,그것은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는 ‘헛된 일’입니다.
또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희망하고 청하면서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면, 즉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확신도 없이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받을 준비를 안 해서 주시는 것도 못 받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새해 첫 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복음: 루가 2,16-21: 여드레 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평화는 마음의 질서가 잘 잡힌 조화로운 상태이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문란하면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이 질서가 올바로 정립되어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마음의 질서의 조화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夫要生者必死요 期死者得生하리라.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여(루가 1,38 참조) 당신 자신의 신적인 모성의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신적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 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바쳐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 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 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 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 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보다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하자.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말이 참 어렵습니다.
정제된 말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데 가끔 불쑥 튀어나오는 거친 말이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아프게 합니다.
신앙도 말로 이어져 온 역사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져 온 것이지요.
'내가 보았다. 내가 믿었다. 내가 깨달았다.'라고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과 마리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을 가져다주는 말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들은 보았고, 본 것을 외쳤고,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목자들이 전해주는 말은 사람들과 하느님을 연결합니다.
그런 목자들 곁에서 마라아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시지요.
침묵입니다.
단지 말이 없는 침묵이 아니라 말을 곰씹고, 느끼고, 깨닫는 침묵입니다.
목자는 말을 하고 마리아께서는 말을 묵상하십니다.
신앙은 말을 하고 듣는 순환적 관계 안에서 성장합니다.
서로 말하려는 가운데 서로 들으려는 노력이 균형을 맞출 때 신앙은 건강해집니다.
대개 배운 사람들의 못난 모습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남을 가르치려고 드는 자세입니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너무 알아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참으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말은 억눌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게끔 스스로 침묵으로 배려하는 겸손한 이들의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배우지 못하고 무능하고 죄인 취급받던 목자들의 외침으로 복음이 선포되었고, 마리아의 침묵으로 그 선포의 의미가 깊은 울림이 되었다는 사실을 복음은 집어냅니다.
한 해의 시작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이웃들이 어떻게 살고들 있는지 살펴보는 침묵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조차 꺼내기 힘든 거칠고 억눌린 삶을 살아가는 이들 안에 선포되는 하느님 복음의 의미를 깨달았으면 합니다.
'새 종이 그림'(루카 2장 16~2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그 이름 예수'
2020 새 날 새 아침!
깨끗한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지난해 마지막 밤 어둠을 안고 잠들었다 하더라도 과감히 버리시고 새로 그림을 그리도록 새 마음 주신 예수님과 그려 나갑시다.
틀릴까봐 너무 잘하려고 마음먹다가 시작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용기내서 시작하십시오.
틀리고 어그러진 것조차 아름답고 멋진 인생으로 가꾸어 주시는 그 이름 예수와 함께 굳건히 당당히 첫 장을 폅시다.
'인생의 무대에서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신은근 신부님
경주마는 늘씬한 몸매에 혈통도 당당하다. 체력도 대단해 시속 80키로까지 뛰는 말도 있다. 하지만 경주마는 지켜보지 않으면 쓰러질 때까지 먹는다고 한다.
채찍을 맞으면서 뛰고 또 뛰어야 하기 때문에 경기에 임할 때마다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해소하려 든다는 것이다.
화려한 경주마에게 이렇듯 비참한 구석이 있다. 의미없는 뜀박질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었다. 금년도 경주마 못잖게 뛰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쯤은 뛰는 이유를 들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소유의 유혹에, 중독의 늪에 빠져들게 한다. 먹기만 하려는 경주마가 되어가는 것이다.
동방박사 세 사람도 뛰는 사람들이었지만 삶의 의미를 갈구했다. 그러기에 별을 따라나섰다. 답을 주실분이 태어났다는 징조를 발견했기에 서둘러 떠났던 것이다.
그들은 온갖 망설임을 뒤로한 채 오직 열정만으로 뛰었기에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자마자 금방 구세주임을 알아챈다
준비된 만남이었다. 의미있는 뜀박질이었다.
만남은 신비다. 갈망으로 기다린 만남이라면 기적이 느껴진다.
그들은 예물을 바치며 뜨거운 가슴이 되었을 것이다. 별의 인도로 시작된 여정을 돌아봤을 것이다. 삶의 해답을 깨달았을 것이다. 은총의 체험이다.
그들은 유다 땅에 도착했을 때 헤로데 임금을 방문했다. 그리곤 구세주가 탄생한 곳을 물었다. 섭리였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 탄생은 공적사건이 된 것이다.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려면 그들처럼 떠나야 한다. 말씀을 향해, 기도를 향해, 선행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누구때문에 사는가?
주님을 향해 산다고, 기쁨을 향해 산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무는 태양을 향해 초점을 맞춘다. 빛을 받아야 싱싱함이 간직되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향하면 그분 힘을 받아 반드시 밝아진다. 매일의 기도와 선행으로 그분을 향하는 삶이 될 때 구세주를 찾아 나섰던 동박박사의 여행이 된다.
그들은 예물을 바쳤다. 우리의 예물은 마음과 시간을 바치는 일이다.
정성이 담긴 마음을 봉헌하는데 주님께서 모른 체하실까? 황금같은 시간을 바치는데 생활이 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동방박사는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별의 인도만으로 따라갔다. 계산도 이익도 따지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러기에 구세주를 만났고 사람이 바뀌어 돌아갔다.
그 용기를 묵상하며 올해도 당당하게 뛰어보자
축복 받은 우리들! -영광과 평화, 침묵과 관상, 찬미와 감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 받은 우리들입니다. 무지로 눈멀어 불행이지 눈만 열리면 어디나 하느님의 선물에 우리 모두 축복 받은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사랑하는 두 형제로부터 받은 두장의 축복 가득 받은 가족 사진 안의 모습들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축복 가득 받은 모습들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끝은 오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은 경자년庚子年 2020년 새해 첫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참 가슴 벅차게 축복 가득 받는 날입니다. 경자년은 ‘하얀 쥐의 해’입니다. 흰쥐는 쥐중에서도 가장 우두머리 쥐이자 매우 지혜로워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데 능숙하고 생존 적응력까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20년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새벽 성무일도시 다음 아름다운 화답송 후렴과 찬미가로 복된 하루를 열었습니다.
-“동정이신 모친 마리아를 공경하며, 그의 아들 주 그리스도께 조배 드리세.”-
-“1.이사이 뿌리에서 꽃이 피었고 그가지 보람되이 열매맺었네
동정녀 아기가져 아들났어도 언제나 동정으로 어머니로다
2.빛살을 지어내신 빛의 창조주 구유도 마다않고 누워계시네
일찍이 성부함께 하늘 내신분 아기로 모친품에 안겨 계셨네”-
올해 성탄절과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참 많이 보낸 수도원 왼쪽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조형물이었습니다. 벌것벗었던 예수님을 담요로 싼 모습이 참 따뜻하여 다시 찍어 또 여러 분들에게 다음 축하 메시지과 함께 전송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주님, 성가정의 축복 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기도 역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해마다 바치는 기도지만 부를 때 마다 늘 새롭습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여 주님은 오늘 제1독서 민수기 말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한분한분을 축복하십니다.
-“1.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3.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참으로 새해 첫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축복 가득 받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복덩어리 존재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당신 아드님의 영을 보내 주시어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요,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이, 죄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요 참 자유인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자유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감사의 응답입니다. 복음을 마리아와 목자들처럼 사는 것입니다.
첫째, 영광과 평화입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구유 주변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로 주님 성탄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평화!”
바로 탄생하신 예수님의 존재이유는 물론 우리의 존재이유를 말해 줍니다. 영광과 평화는 구원의 양면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위로 눈들어 하늘을 보면 우선 ‘영광’을 생각하고 아래로 땅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평화’부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받으소서”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진 분도수도자들의 모토도 생각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평화가 되어 살 때 하느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평화의 복을 충만히 내려주십니다.
둘째, 침묵과 관상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침묵과 관상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침묵이요 관상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잘 귀기울여 경청하기 위한 침묵이요 침묵에 이어 관상입니다. 참으로 침묵과 관상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너무나 내면 세계가 얕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깊이와 무게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격적 응답이 아닌 감정적 반응이 먼저 나옵니다. 담아 둘 수 있는 깊이와 넓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침묵과 관상의 모범이, 참으로 바다처럼 크고 깊고 넓고 고요한 내면을 지닌 분이 성모 마리아입니다. 모두가 놀라워 하며 피상적 반응을 보일 때 성모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관상의 모범이,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모범이 성모 마리아입니다. 무엇보다 성모님께 이 침묵과 들음, 관상의 덕을 배워야 합니다.
문득 에코백이 생각납니다. 제가 요즘 외출 때 들고 나가는 것은 가방이 아니라 에코백입니다. 참으로 내면은 에코백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든 이것 저것 다 들어가고 무엇이든 넣기 쉽고 찾아 꺼내기도 쉽습니다. 꼭 큰 보자기처럼, 얼마나 넉넉하고 편한지 모릅니다. 정해진 굳어진 틀이 없고 유연해서 그럴 것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군자는 그릇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릇이란 종지, 사발, 항아리처럼 용도가 정해져 있어 서로 통용될 수 없는 물건을 말합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의 내면이 이러합니다. 군자불기, 에코백처럼 참 넉넉하고 편안한 침묵과 관상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입니다.
셋째, 찬양과 찬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응답이 찬양과 찬미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이요 이에 대한 자연발생적 반응이, 사랑의 응답이 찬양과 찬미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찬미가 있어 겸손입니다. 겸손이야 말로 배우는 학인의 기본 자세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는 물로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사람입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사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맑고 밝은 순수한 기쁨의 찬미는 내적 활력의 원천입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아니 총체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부자였습니다.
정말 에코백같은 내면의 부자가 목자들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축복받은 목자들입니다. 모두가 잠든 밤, 맨처음 깨어있다가 예수님 탄생의 축복 소식을 들은 목자들이요, 다시 주님의 성가정을 방문해 예수 아기와 예수님의 양친 마리아, 요셉을 친견親見의 축복을 받은 목자들입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가 목자들의 기쁨을 압축 요약합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얼마나 아름다운 뒷모습인지요! 마침내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라는 이름의 구원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대로 우리의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대신하여 고백합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하여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큰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에코백이 상징하는 것처럼 내면은 참으로 넉넉하고 편안했으면, 너그럽고 자비로웠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강론을 통해 그 답을 주셨습니다. 바로 1.영광과 평화의 사람, 2.침묵과 관상의 사람, 3.찬미와 찬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새해 첫날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또랑또랑 새해를 맞는다.
최민석 신부님
한 해도 정말 꿈결처럼 흘러가고 새해가 되었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 ‘나’는 인생의 육십이다. 내 인생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겸손히 헤아리는 시간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삼백 예순 다섯 날 지금 이 순간에 초점을 맞추며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살기를 기원한다.
돌아보니 지나온 발자국 마다 모든 게 은총이요 은혜의 바다 한 가운데 살았다. 모든 것이 은혜인 줄 모르고 ‘나’라는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힌 날들이 많았다. 또한 불편한 몸 때문에 부모 형제 그리고 지인들의 걱정을 드린 날들이 스쳐간다. 그럼에도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과 격려를 보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린다.
지난 한해는 부끄러움과 회한 많다.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따뜻함을 전해 주기보다 더 많은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불을 개키듯 그 구겨진 기억들을 접어 버리고 싶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잠시라도 미운 마음을 품었던 이들에게 진심 어린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다.
노을빛으로 저물어 가는 지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내가 아직 살아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음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감사한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날마다 새로이 태양이 떠오르듯 오늘은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내 마음의 하늘에 환히 떠오르시는 분이 없는 듯 계셔서 나를 돌보아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고 계심을 믿는다.
2020년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장을 열어간다. 이 해는 60이라는 나이로 ‘나’를 초대 한다. 아하! 드디어 오는 구나. 그럼 그렇지. 그저 부모님의 나이로만 여겨지던 그 나이가 ‘나’에게도 온 것이다.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시간의 소리들은 쓸쓸하면서도 그립고 애틋한 여운을 남긴다.
아쉬움과 후회의 눈물 속에 초조하고 불안하게 서성이기보다는 소중한 옛 친구를 대하듯 담담하고 평화로운 미소로 떠나는 한 해와 악수하고 싶다. 새해 첫날의 다짐과 결심들이 많은 부분 퇴색해 버렸음을 인정하면서 부끄럽지만 살아있어 고마운 이 모습 이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이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 안부를 띄우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 욕심을 채우려 발버둥 쳤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며 새해에는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알고 가슴마다 웃음 가득하며 허황한 꿈을 접고 겸허하게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깨우치는 은혜로운 시간을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다가오는 해의 설레임이 교차되는 시간이다. 마음에서 욕심을 덜어내면 삶은 가벼워져야 하지만 인생에 나이 한 살을 더하니 그리 손해도 남는 것도 없는 생이다. 어제의 삶이 축복과 은혜와 감사이기에 오늘은 더더욱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시어 나날이 축복의 날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너와 나 우리 모두 하느님의 한 송이 꽃씨를 받아 이 세상의 하늘 꽃을 피우기 위해 왔으니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야 말로 나의 의심할 없는 참된 실상이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성사이다.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는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기에 나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다. 그렇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님의 사랑에서 떼어 낼 수 없다.
올해는 감사를 감사로 보지 못하고 은혜를 은혜로 알아듣지 못하여 감사와 은혜의 삶을 충분히 살지 못했다면 새해에는 하느님의 실상을 현존으로 살아가면서 희망의 불꽃으로 살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을 받아 은혜의 바다가 주는 충만함 늘 감사와 감동과 감격의 삶이 될 것이다. 나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또랑또랑 새해를 맞는다.
되새김
고준석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천사에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경배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사실 마리아는 누가 그 목자들을 불렀는지,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러한 모든 것, 즉 자신과 자신의 아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되새기는 것이지요.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깊고 깊은 하느님의 계획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굳은 믿음으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되새기고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한 삶의 기쁨, 행복뿐 아니라 아픔이나 고통 역시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일지라도 나를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통해 오히려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묵상한다면, 곧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하느님께서 지난 한 해 우리에게 넘치도록 축복을 주셨고 올 한 해에도 축복을 주시리라 믿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자 주님을 볼 수 있다<루카, 2/16-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가난한자로 오신 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첫 번째 가난한 목동들에게 보이시어 주님을 찬양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왕중의 왕으로 오셨고 대사제이시고 대예언자이신 하느님의 이들을 볼수 있는 사람은 고관대작이 아니라 미천하고 보잘 것 없고 이름도 없는 목동에게 먼저 보인 것은 그리스도적 삶의 연속이며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마태복음 진복팔단에 “ 마음이 가난한 사람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하고 “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말씀하신 것이 오늘까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권력자는 하느님을 찾지도 않고 볼 수 없습니다. 부자는 하느님을 보지않고 돈만 보입니다. 명예가 있는 사람도 하느님의 영광을 찾지 않고 저기 영광만 찾으니 주님을 아무 곳에서도 불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권력욕 재물 욕 명예욕에 눈이 가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앖습니다.
저는 신자들에게 “ 하느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으면 “아니어 영이신데 어떻게 봅니까? 그러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수도원에 입회 시 하느님을 보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믿고 사랑하려 들어 왔다고 하였지만 하느님을 본 것은 제가 가장 가난하고 보질 것 없는 시절에 보게 되었습니다. 30에 사제가 되어 보좌신부로 본당신부에 순종하면서 한 달 동안 공소사목 하느라 공소에서 공소로 피공성사주고 살기도 하였지만 3년후 본당신부 되어 농촌에 적합힌 농촌운동으로 되지 닭 염소 토끼 야간 학교 소위 가톨릭 농민회를 창설 하여 농촌 사목에 적합한 사목 자 가장 가난한 사람과 살고자 하며 신자들의 신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M B W. 공의회 운동 M E 주말 운동, 시청각 운동, 그러다 인사이동으로 다른 본당에 가서 사제로써 절망감 좌절감 실망감이 일러나 사제직을 그만두려고 하다가 누가 피정을 권해서 피정을 시작하며 노트에 “ 주님 당신이 참으로 계시면 피정 중 보여 주세요. 아니면 옷을 벗고 교회를 떠나렵니다.” 피정 중 기도 중에 “ 너 나를 보고 싶으면 가진 것 다 버려라.” 생각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어 담배를 끊고 2들 지난 다음 아침에 거울을 보다 나도 아닌 존재가 빛이기에 “너는 누구냐?” 하니 “내가 하느님이다.” 그러나 그 영상은 나였기에 “어찌 당신이냐? 나지.” 하니 다시성경을 보라하기에 창세기부터 보다가 “ 내가 너를 만들 때 내 모습대로 만들었어 ” 하는 구절에 승복하고 내 모습 안에 하느님 계신 것을 깨닫고 내모든 모습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또한 하느님을 나 너 안에 보고 살아갑니다.
가난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함께 란 이사 말이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였으니 하느님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참 모습은 각자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 때입니다. 하느님을 자기모습 안에 보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편지에서(Epist. ad Epictetum, 5-9: PG 26,1058. 1062-1066)
사도의 말에 의하면 “말씀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시고자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하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셔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존재하게 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바치신 당신의 육신을 마리아에게서 취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말할 때 “마리아는 그를 포대기로 쌌다.”고 하고 또 그를 젖 먹인 젖가슴은 복되다고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전할 때 그것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외부로부터 마리아 안으로 주입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천사는 마리아에게 단순히 “당신 안에서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육신은 정말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천사는 “당신에게서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말씀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이 우리 인성을 취하시어 그것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 인성을 완전히 흡수하여 우리를 당신 신성으로 옷 입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의 단순한 가현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참으로 사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전인적인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원은 절대로 허구가 아니고 육신만의 구원도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 즉 육신과 영혼의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씀대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분은 참인간이셨고, 주님의 육신은 참 육신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이었으므로 참 육신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자매이십니다. 그분과 우리 모두 다 아담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는 요한의 말은 이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라는 바오로의 말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육신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통교와 결합을 통하여 큰 보화를 받았습니다. 즉 멸하고야 말 것은 불사 불멸의 것이 되었고 육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되었으며 땅에서 지음 받은 것은 천국 문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신 후에도 삼위 일체는 항상 삼위 일체이십니다. 그 안에 어떠한 첨가나 감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삼위 일체는 항상 완전하십니다.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말씀이신 성자의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을 전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님
말씀과 함께 새해를 엽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이 여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대히 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십니다.
제게는 축복이 가득한 새해 첫 날의 말씀들이 일제히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인 "기도"를 향하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마리아의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처음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천사의 "인삿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하셨지요.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속으로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품으셨습니다. 부산하게 말씀을 헤집거나 흩어버리지 않고 그저 침묵 가운데 곰곰이 머무르십니다.
<말씀에 머물러 되새기는 기도>는 말씀이신 분의 현존 안에 온전히 잠기는 기도입니다. 다가오신 말씀을 온 존재로 품다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머리가 아니라 영혼이 감지합니다.
말씀이신 분의 정감이 내게 스며들어 당신을 드러내시면, 이내 문자는 사라지고 문자 안에 감추어졌던 주님의 속성, 주님의 마음이 만져집니다. 그 주님과 하나되어 일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기도입니다. 이때는 무얼 바라거나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지도 않지요. 그저 그분과 사랑 안에 잠겨 사랑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다음은 <축복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백성을 위해 축복을 명하십니다. 타인을 축복하고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직무 사제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아니 하느님의 모상인 모든 사람의 권한이고 의무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하여 대화할 때 우리 시선이 자신의 욕망과 안위에만 고착되어 있지 않고 타인의 선과 유익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도 진심으로 염려하고 응원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참 흡족하시겠지요. 축복의 기도는 축복하는 이와 축복을 받는 이, 아버지를 동시에 행복하게 만듭니다.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성령께 내어맡기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신 성자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현존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성부 하느님을 향해 힘껏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그 영과 하나 된 우리도 함께 아버지를 부릅니다.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호의가 아니면 우리 힘으로 꿈꿀 수 없는 은총이지요.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사도 바오로는 성경 다른 곳에서도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어떻게 도와주시고 이끄시는지 알려 줍니다.
살다 보면 주님 앞에서 무얼 청해야 할지, 무슨 말씀은 드려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순간도 닥치게 됩니다. 이제껏 청한 내 간구가 과연 아버지의 뜻에 맞는 기도였는지 성찰하게 되면서 갑자기 길을 잃은 듯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내 안의 성령께 그냥 맡겨드리면 됩니다. 내 안의 성령께서는 내가 원하는 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정확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자유로이 기도하시도록 방해꾼인 내 자아와 욕망은 잠잠해져야 합니다.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루카 17,17).
매우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목자들의 말과 행동은 순박한 믿음에서 우러납니다. 소박하고 단순한 그들은 이 엄청난 신비의 증인으로 채택된 것에 대해 우쭐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들은 바를 보기 위해 서두릅니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기 위해서"(관상)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가늠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확인 차원이 되어서도 안 되고, 교만의 근거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기도는 그저 믿음이 지시하는 바를 보는 것입니다. 봄! 관상은 우리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게 기꺼이 열어보이시는 은총입니다.
"목자들은 ...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20).
목자들은 들었고, 찾아냈으며, 들은 말을 알려 줍니다. 선택된 증인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지요. 자기들의 몫을 다한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자기들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목자들이 돌아간 제자리는 이전과는 다른 목장, 목초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그곳에 찬미와 찬양이 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의 결과를 외부에서 찾다가 실망하기 일쑤지만, 실상 기도는 기도하는 이의 내면에서부터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바를 본 영혼은 더이상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기도 자체, 봄 자체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루카 2,21).
이 이름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가 각각 알려 준 바 있습니다(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는 "주님께서는 구원하신다"는 뜻의 히브리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천사의 전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성자의 소명이 그 이름 안에 각인된 것입니다. 기도는 비록 침묵이나 머무름처럼 정적이더라도 이루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품는 그 자체에 완성이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사 말씀들 곳곳에 묻혀 있는 기도의 보물들을 두서없이 꺼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또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올해 우리를 축복 가득한 기도의 곳간으로 이끄시는 듯합니다. 말씀이 기도로 이끄시니 그저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말씀사랑 벗님! 올 한해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신
분이십니다.
구원의 역사안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의 일이
펼쳐집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이여정을 기쁘게
걸어가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낳으시고 기르십니다.
사랑의 신비이며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의 이여정은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끝까지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말씀을 믿으셨기에
십자가 곁에서도
꿋꿋하게 계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의 말씀은
마리아를
순종의 여인이
되게하며 드디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가는
가장 행복한 새해이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말씀을 받아들인
마리아에게
탄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한 여인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하신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신 믿음의
어머니십니다.
교회는 그 길을
따라갑니다.
새 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너희들 지금은 공부할 때야. 어른이 되고나서는 공부할 시간도 없다.”
실제로 10대에는 대입을 위해 상당한 시간을 공부에 쏟아 붓습니다. 그리고 20대가 되어서는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공부를 합니다. 문제는 취업을 하고난 뒤입니다. 공부와 담을 쌓게 됩니다. 20년 넘게 한 공부에 지친 것일까요? 한 조사에 의하면 30대 이후의 40%가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발표했습니다. 하긴 예전에는 지하철을 타면 책을 읽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책보다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저의 학창시절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존경하는 선생님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공부는 한 순간에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그리고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책을 읽으면서 제 자신이 더 나아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세상이 더욱 더 새롭고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주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 역시 아는 만큼 그 사랑을 더욱 더 뜨겁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세상을 기쁘게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시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더욱 더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셨고, 그 결과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2019년 기해년 새해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이지만 올 해에는 특별히 주님을 알기위해 더욱 더 노력하는 해가 된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교회는 새해의 첫 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냅니다. 예년과 똑같은 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대신 더욱 더 새롭고 의미 있는 해가 될 수 있도록 성모님과 함께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쁜 습관을 바꾸고 좋은 습관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변화에 대한 믿음과 습관이 형성될 때까지의 반복 행동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시간은 보통 66일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따라서 나의 나쁜 습관을 벗어 버리고, 대신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습관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 주님이시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주님께서도 함께 하시면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를 이루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이 아닐까요?
또 다시 맞이하는 새해, 주님 안에서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어두운 시간은 해뜨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다(파울로 코엘료).
버터플라이 허그
1997년, 심리 상담사 루시나 아티가스는 멕시코의 허리케인 생존자들을 상담했습니다. 그러면서 안 좋은 기억으로 힘들 때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버터플라이 허그로, 양팔을 가슴에서 엑스자로 교차시킨 다음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토닥이는 행동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위로도 큰 힘이 되지만, 먼저 자기 자신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즉, 내 자신을 위해 펑펑 울고 토닥여주다 보면 위안을 얻게 됩니다.
자신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임경신 작가는 이런 말을 했지요.
“가만히 웅크리는 시간은 필요하다. 만약 혼자 조용히 풀어내는 힘이 없으면 마음의 연륜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다.”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도와 줄 사람만을 찾지 마시고 버터플라이 허그로 스스로를 안아주고 위로해보십시오. 이제까지 겪지 못했던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새해를 힘차게 시작해봅시다.
<어머니의 자격>
전삼용 요셉 신부님
더운 여름에 세계 곳곳에서 아이를 차에 방치해 두어 아이가 사망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에 우리나라 한 초등학생 아이가 그런 아이들이 불쌍해 한 앱을 개발하였습니다. 아이가 차에 그대로 있는 채 차 밖으로 나가면 핸드폰에 알람이 울리게 하여 아이가 차 안에 있음을 알려주는 어플리케이션인 것입니다. 그 아이가 이 일로 발명왕 상을 받은 후 정말로 이런 기능을 갖춘 차량들이 출시되었습니다.
물론 이 아이가 아니더라도 그런 장치가 장착된 차량들이 나올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자신과 같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런 장치들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 아이의 머리가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아이는 아이지만 엄마의 마음을 벌써부터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를 차에 방치해 두지만 어떤 아이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계를 발명합니다. 누가 더 어머니의 자격이 있을까요?
어머니의 자격 중 가장 중요한 자격은 모성애입니다. 남성은 밖에서 일을 하고 밖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어머니만큼 자녀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시도 자녀에게 눈을 떼지 않아야하도록 모성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성애가 있어야하는 이유는 아이가 어머니의 관심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주 약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한 시도 신경을 떼지 말도록 만드는 모성애가 어머니의 가장 큰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새해 첫 날 성모 마리아 축일로 지내는 것만큼 적당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그 자격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자격은 자녀의 존재를 잊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상 누구도 갖지 못했던 이 모성애를 성모 마리아만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매우 강력한 모습으로 거하시지 않고 그저 마구간의 힘없는 아기처럼 거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신경써주지 않으면 예수님은 내 안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고 그렇게 시간이 너무 흐른다면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모든 사람이 구원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신경써주지 않으면 돌아가실 수도 있는 매우 약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잘 지켜낼 수 있을 때 그분이 지닌 영원한 생명도 내 안에서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체를 영하더라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와 다른 점입니다. 한 순간도 그분의 현존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성모님처럼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덕분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분을 모실 자격을 갖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우리 노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강력해서가 아닙니다. 구세주께서 살아‘계심’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놀았습니다. 자신들에게 큰 보화를 줄 분이 오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자께서 한 인간 안에 잉태되어 ‘계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켜줄 수 있는 모성애가 있어야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분의 현존을 잊고 내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잘해줘 봐야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주님의 현존을 잊지 않기 위해 손에 묵주를 쥐고 다녔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축구를 할 때도 심지어 술집에 가도 묵주를 쥐고 있었습니다. 묵주 때문에 조금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주님의 현존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이후로는 교만해져서 그런지 그냥 그분의 현존을 느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주님의 현존을 잊고 사는 시간이 매우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다시 손에 자그마한 묵주를 쥐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에 맞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간을 통해 주님의 현존을 규칙적으로 되새길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위해 우리처럼 약한 사람들은 손에 그분의 현존을 알려주는 어플 하나 정도는 지니고 다닐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핸드폰이 있나 없나를 신경 쓰는 반 정도만 그분의 현존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해를 시작한다면 우리 성탄 때 만났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함께 살아가시며 나와 이웃들에게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처럼 친구 따라 미국에서 새해를 시작하였습니다. 2019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0년 전인 2009년에는 시흥 5동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20년 전인 1999년에는 적성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30년 전인 1989년에는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교에 복학하였습니다. 40년 전인 1979년에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50년 전인 1969년에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50년도 의미 있겠지만 저의 어머니에게 저의 50년은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늘 자식인 제가 자랑스럽고, 똑똑하고, 대견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80이 넘으신 어머니께서는 새해가 시작되는 오늘도 변함없이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는 미사 중에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새해의 첫날에 두 가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세계 평화의 날’로 정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된 신앙인이며,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위한 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몸에 10개월간 머물다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어머니의 몸이 우리의 세상이었고,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나와서도 어머니의 끊임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새해의 첫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막강한 군대의 힘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조직에 의해서 이끌어 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와 같은 무서운 법칙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법대로 살던 요셉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마음을 바꾸면서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골의 말구유에서 한 아이가 탄생하면서 구원의 문은 열렸던 것입니다. 양들을 지키던 목동들이 구원의 역사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이면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2019년이라는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 희망, 사랑, 나눔, 희생, 친절, 온유의 물감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때로 고통, 절망, 아픔이라는 얼룩이 질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그림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 분노, 미움, 시기, 질투, 편견이라는 물감으로 볼썽사나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가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축복받은 우리들 -“감사합니다Thanks!”; “예Yes!, 좋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2019년 새해 첫날,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를 통해 새해 첫날을 활짝 열어 주시고 평화의 축복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아침성무일도 다음 찬미가 두 연도 마음에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열계명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 스스로 당신 낮춰 인간되시어 인간이 지키도록 정해진 법에 당신이 자원으로 매이셨도다
이제야 빛과 구원 탄생하시니 어둔밤 사라지고 죽음없도다
마리아 낳은 아기 하느님일세 오너라 만민들아 그를믿어라”-
참 깊고 은혜로운 내용입니다. 자원하여 땅에 내려 오셔서 여인의 몸에서 태어 나시고 인간 율법의 할례에 매이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난과 겸손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구원자를 낳으신 마리아이기에 우리는 주저 없이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라 부르는 것입니다.
참 기분 좋은 예감이듭니다. 국운이 확 트이는 해가 될 것이며 국민들 살림살이도 좋아질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도 정착되어 남북한은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의 축복이 한반도에서 활짝 꽃 피울 것입니다. 2019년 1월1일 가톨릭 신문 1면 톱기사의 제목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희망의 빛, 한반도를 밝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겹고 간절하고 사랑스러운지요. 해마다 부를 때 마다 좋아했던 가사와 곡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끊임없는 노래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성탄 밤미사후 계속되는 참 좋은 축일 화답송 후렴도 더불어 생각납니다.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 오늘 탄생하셨도다”
“땅-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계속되는 성탄축제에 모두가 어울리는 아름답고 하느님 사랑이 가득 한 화답송 후렴들입니다. 새해 오늘 새벽의 새삼스런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굳이 사랑한다는 말이나 표현없어도 ‘아, 우리는 사랑 속에, 사랑을 숨쉬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느님 사랑을! 하느님 사랑이나 형제들의 사랑은 공기같고 물같고 햇빛같고 흙같구나! 이렇게 살아있음이 사랑이요 행복이고 축복이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너무 당연하여 잊고 지내는 햇빛, 공기, 물, 흙이 아닙니까? 이들이 없어 보십시오. 당장 죽어 갈 것입니다. 바로 사랑은 하느님과 형제들 사랑은 햇빛, 공기, 물, 흙같습니다. 내 잘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랑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제가 보기에 사랑, 사람, 삶은 같은 어원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사람입니다.
2019년 1월1일은 제52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계 영적 대통령 다운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도 참 시의적절했고 공감했고 감동했습니다. 주제와 더불어 주요 항목과 결론 부분을 꼭 나누고 싶습니다.
-좋은 정치는 평화에 봉사합니다-
1.“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2.좋은 정치를 위한 도전 과제
3.사랑과 인간적 덕행: 인권과 평화에 봉사하는 정치의 기본
4.정치적 악습
5.좋은 정치는 젊은이의 참여와 타인에 대한 신뢰를 증진합니다
6.전쟁과 공포 전략에 대한 단호한 반대
7.평화를 위한 위대한 계획
평화는 날마다 새롭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과업입니다. 평화는 마음과 영혼의 회개를 수반합니다. 내면의 평화와 공동체의 평화는 서로 뗄려야 뗄 수 없는 세 측면을 지닙니다.
-자기 자신과의 평화, 이는 아집과 분노와 조급함을 거부합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권고처럼, “남들에게 온유”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도 온유”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평화, 이는 곧 가족, 친구, 낯선 이들,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과의 평화로, 그들을 만나기를 꺼리지 않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피조물과의 평화, 이는 하느님 선물의 위대함을 재발견하고, 이 세상에 살면서 또 미래의 주역이자 시민이 될 우리 각자의 책임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정치는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알고 이를 기꺼이 집니다. 또한 평화의 정치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에서 언제나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온 인류의 이름으로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1.50-55). 교황 프란치스코-
세상의 평화에 정치인의 책임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막중한지 통감합니다. 또 저는 2019년 새벽 수도원 휴게실에 들렸다가 피정을 마치고 간 어느 자매의 참 반가운 감사글을 발견했습니다. 새해 첫 날 수도공동체에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여겨 전문을 인용합니다.
-평화의 집에 머무르니 평화롭고, 사랑방에 머무르니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일주일 피정이였습니다. 내 생애 처음 접하는 수도원 생활, 웅장한 불암산을 등지고 넓은 배밭으로 꾸며진 수도원 풍경이 하늘나라가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편안하고, 고요하고, 자유로운, 마치 군인들이 나라를 지켜주는 용사들이라면, 수도원의 수사님들의 기도가 이땅에 사랑을 싹트게 하는 씨앗의 매개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세속의 무거운 짐 모두 내려 놓을 수 있었고, 온전히 주님만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묵상하고, 만나는 시간들이 기쁨이고 행복이였습니다. 그래서 희망도 꿈꾸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 네 식구, 하느님 중심으로 매일미사책 읽고 묵상하고 나눔 하면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너무 행복한 성가정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요셉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건강하시고, 건강하세요. 기도합니다. 머무르는 동안 참 기쁨이었습니다. 2018.12.17.-
참 좋은 새해 첫날입니다. 하느님의 평화의 사랑이 온 누리에 가득한 날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아있음이 사랑이요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축복받은 존재들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축복받은 우리들”로 정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늘 사랑하고, 내 이웃 형제들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녀인 나부터 사랑하는 것입니다. 받은 사랑에 비하면 우리 사랑은 늘 부족할 뿐입니다. 또 오늘 복음의 목자처럼 가난과 겸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난과 겸손으로 깨어 있을 때 사랑의 눈이 열려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 아기를 발견합니다. 참으로 사랑의 눈이 열린 가난하고 겸손한 영혼들에게 발견되는 주님이십니다.
천주의 모친 어머니 마리아 역시 참으로 가난과 겸손을 사랑했던 순종의 어머니였습니다. 목자들의 말은 물론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당신 마음속에 간직하여 곰곰이 되새기며 생각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 참 깊고 넓습니다. 가난과 겸손으로 텅 비워진, 참으로 깊고 넓은 ‘텅 빈 충만’의 사랑의 마리아 어머니이십니다.
감사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감사입니다. 사랑에 당연한 응답이 감사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진정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바로 우리의 존엄한 품위의 근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존감 높은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도 없습니다. 감사의 우선적 대상은 하느님이고 다음은 이웃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 형제들을 통해 늘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목자들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전달 받았을 때 마리아는 하느님은 물론 목자들에게도 감사의 마음 넘쳤을 것입니다.
찬미입니다.
목자들은 가난했으나 깨어 있었고 또 찬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과 감사는 저절로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찬미, 감사의 찬미입니다. 이런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수도원 분위기가 늘 밝고 맑은 것은, 생명과 빛, 평화와 희망의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수도자들이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의 기도와 삶 덕분입니다. 허무와 절망, 무의미의 어둠을 말끔히 거둬내는 찬미의 기쁨입니다.
보십시오. 목자들의 찬양, 찬미의 응답을!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합니다. 여드레가 되어 할례를 베풀게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합니다.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사랑, 감사, 찬미의 구원자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참 좋은 새해 첫날, 주님의 사랑의 평화가, 평화의 축복이 가득한 날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다가 참 좋은 두 말마디를 발견했습니다. “감사와 예Thanks and Yes”였습니다. 지난 날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Thanks!”로 대답하고, 앞으로 올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예Yes, 좋습니다!”하고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여러분 하나하나를 축복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새해,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 가득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마리아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모님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개인적인 역사를 지닌 참 여인이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해진 ‘수태고지’란 엄청난 초대 앞에, 마리아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온 몸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꿈꾸던 단란한 신혼생활을 접어야 하는 데서 오는 서운함에,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나자렛의 한 처녀가 나름 계획하고 있었던 인생에 대한 소박한 기대와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의 ‘Fiat’에서부터 시작해, 영광스런 승천을 통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고달프고도 험난했을 것입니다.
소년 예수님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목격하게 된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성모님께서 느꼈던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때로 비수처럼 느껴지던 아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인간적인 상처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오 복음 12자 48절)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복음 2장 49절)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복음 2장 4절)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성모님의 신앙 여정은 약간의 힌트라든지, 사업계획서라든지, 로드맵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 것도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을 걷는 불확실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엄청난 도전 앞에 뒷걸음질치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초대였지만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회피하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기도하면서, 희망하면서 당당히 직면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지만, 주님께서 언젠가 내 눈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그렇게 성모님은 오로지 주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은 여행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생에 걸친 철저한 순명으로 당신의 뜻을 너그럽게 수용하시며,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에 충실하게 협조한 마리아를 ‘천주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모 신심과 관련해 우려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성모님, 성모님! 하고 외치다보면, 참 하느님이시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위치를 손상시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두려움입니다. 성모님 옆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성모님의 신비를 이해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성모님이 공경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성모님이 찬미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예가 됩니다. 두 분을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계십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사명과 운명을 공유하신 분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천주의 어머니는 교회의 모델이십니다.”(교회 헌장 63항)
오늘도 성모님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따집니다. “빨리 선택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마리아입니까?”
성모님은 인류 역사상 모든 신앙인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어서 우리는 그분을 공경합니다. 성모님은 오랜 교회 역사를 빛낸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첫째 가는 성녀요, 가장 빛나는 별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성모님은 몸소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을 칭송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셨음을 더욱 칭송합니다.
천주의 어머니이며 동시에 이 세상 모든 나그네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나몰라라 하지 않은 성모님께서, 올 한해 우리 나라와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를 보호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새해에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1. 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새해에는
이른 새벽 자리에서 일어나
맑고 깨끗한 공기 들이마시며
살아 사랑하고 희망할 수 있음에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하소서
새해에는
당신을 닮아 좀 더 착하게
당신을 닮아 좀 더 부드럽게
당신을 닮아 좀 더 따뜻하게
나를 비워 당신으로 채우게 하소서
새해에는
세상 모든 것을 빚으신
당신을 나날이 조금씩 닮음으로써
당신이 빚으신 모든 것과
더불어 함께 걷는 벗이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당신을 간절하게 찾는 벗들에게
당신의 축복과 평화를 전하는
성실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세상과 사람에 얽매여
스스로를 잃어버린 벗들에게
그가 오직 그임에 존엄함을
진솔하고 정답게 일깨우게 하소서
새해에는
비록 내 한 몸 돌볼 여력 없다 해도
외롭고 약하고 가난한 벗들에게
애써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따뜻한 품이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하루를 생의 첫날인 듯
가슴 벅찬 희망으로 열게 하시고
하루를 생의 마지막인 듯
정성껏 품어 마치게 하소서.
말씀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편지에서(Epist. ad Epictetum, 5-9: PG 26,1058. 1062-1066)
사도의 말에 의하면 “말씀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시고자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하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셔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존재하게 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바치신 당신의 육신을 마리아에게서 취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말할 때 “마리아는 그를 포대기로 쌌다.”고 하고 또 그를 젖 먹인 젖가슴은 복되다고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전할 때 그것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외부로부터 마리아 안으로 주입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천사는 마리아에게 단순히 “당신 안에서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육신은 정말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천사는 “당신에게서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말씀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이 우리 인성을 취하시어 그것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 인성을 완전히 흡수하여 우리를 당신 신성으로 옷 입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의 단순한 가현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참으로 사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전인적인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원은 절대로 허구가 아니고 육신만의 구원도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 즉 육신과 영혼의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씀대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분은 참인간이셨고, 주님의 육신은 참 육신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이었으므로 참 육신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자매이십니다. 그분과 우리 모두 다 아담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는 요한의 말은 이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라는 바오로의 말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육신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통교와 결합을 통하여 큰 보화를 받았습니다. 즉 멸하고야 말 것은 불사 불멸의 것이 되었고 육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되었으며 땅에서 지음 받은 것은 천국 문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신 후에도 삼위 일체는 항상 삼위 일체이십니다. 그 안에 어떠한 첨가나 감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삼위 일체는 항상 완전하십니다.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말씀이신 성자의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을 전합니다.
"그대를 지켜주고 복을 내리시리라"루카 2장 16~2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목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마리아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고 그 아기 이름이 예수임을 알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1970년부터 1월 1일을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는 천상의 어머니시며 평화와 복을 빌어주시는 분으로 칭하였습니다.
늘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어머니, 평화와 복을 빌어주시는 어머니가 계시니 새해 첫날부터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지요.
눈 뜨자 마자 일어나 앉아 성호경을 그으며 주님을 찬미하고 심장에 두 손을 대고 가만히 있으니 나에게 평화와 복을 빌어주시는 어머니 사랑이 느껴집니다.
이 어머니의 사랑이 그대에게도 평화와 복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며 행복한 미소를 보냅니다.
저는 새해 또 다른 좋은 결심을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평화와 복을 주시기 바라며 매일 새벽 묵주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작년 1월 1일 아침 묵상글을 시작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하면서 은총을 받았기에 오늘 첫 결심 새로운 시작이 설레입니다.
당신은 어떤 좋은 결심을 하시나요?
'있는것을 새롭게 할때 특별해집니다'
천주의 모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또한 2019년, 새해 첫 날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모든 날들의 어머니인 날입니다. 무엇에든지 어머니가 있다는 것,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는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있을 수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말입니다.
오늘 어머니를 통해 한 해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업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를 통해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하늘의 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옮겨 앉은 자리가 바로 어머니인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참 소중합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 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이를 두고 우리는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이 강생의 신비에는 신성이 인성을 취하신 지극한 사랑이 그득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강생을 담은 신비로운 그릇이 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낳았다고 해서,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일컫습니다. 참으로 당혹스런 일입니다.
대체, 이 당혹스런 신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이는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강생은 단지 인간을 하느님 되게 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더 놀라운 사실은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지요!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자기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하는 일을 하는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놀랍게도 ‘하느님의 어머니’인 셈인 것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 첫 번째가 되셨습니다. 하여, 우리도 ‘그리스도를 담은 신비의 그릇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인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되묻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1400년 전 마리아한테서 태어났을 뿐, 지금 내 인격, 내 문화, 내 시대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나에게서 그리스도는 태어나야 하고, 나는 그리스도를 품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을 마감하기 전,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대체, 성자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되다니, 대체 그 일은 무엇일까? 어쩌면 바로 이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인간이 하느님을 낳는 일!’, 곧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오늘,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날에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새로운 한해를 사는 진정한 길은 이처럼 “하느님을 낳는 일”일 것입니다. 이 특별한 날, 우리는 “하느님을 낳을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신비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에 깊이 뿌리내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바로 그 크신 자비, 당신이 하신 일을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되새기고,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품고 간직하고 내내 되새기며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새해에 축복을 빕니다. 특별히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드렸던 축복을 받으시길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루카 1,28 참조)
365일 매일매일 아기예수를 탄생하는 축복을 누리세요. 매일매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빕니다. 아멘.
초대받은 당신 <루카 2, 16-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저의 카톡 친구들 모두 서둘러 기다리지 않아도 2019년에 초대받아 거대한 지구 호를 타고 다시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서 2020년을 향하여 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목동들은 서둘러 새로 나신 주님을 뵈러 달려갔지만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초대장 받지 않아도 2019년 호를 타고 어딘가 달려가는 지구 호를 타고 있습니다. 분명 작년 같은 해는 아니지만, 변함없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듯 저도 태양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 2020년을 맞이하려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광활한 우주를 다시 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오늘 새해 새날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시간을 갖고 작년 저를 돌보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시고, 사랑해주신 주님을 찾아 만나려고 아침 일찍 성당에 가는 복도로 서둘러 가서 감실 앞에 앉아 “주님! 감사합니다. 어제저녁 머리가 조금 아파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렇게 일어나 당신 앞에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이끌어주시어 새날 새 아침을 허락하셨네요.”
오늘 아침 ‘무엇으로 하루를 묵상하면서 주님과 하나가 될까?’ 생각하면서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을 내는 삶을 살고 아버지의 나라에 자유, 평화, 기쁨을 만들어나가며 살아야지.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아니 내가 사는 곳에 이루어지도록 살아야지.’ 결심하면서 올해는 대영광송에 있듯이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안에 들어 마음의 참 평화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우쳐 준 어느 수녀님의 대림 특강. 특별히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어야 하고, 아버지가 주시는 십자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지고 아들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서 초대받은 새날 새해를 꾸며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게 초대받은 사람처럼 예복을 입고 준비된 지혜로운 사람처럼 살기를 기도하면서 새해 새 아침에 여러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교회는 성탄 후 제8일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낸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는데 유일한 도구가 되셨던 마리아를 이 기쁨의 시기에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생명의 탄생이란, 아기뿐 아니라, 아기에게 자기 생명을 전해준 어머니에게도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오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성탄 후 제8부 축일이며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이날, 예수님을 우리에게 낳아주심으로써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 마리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분의 전구에 힘입어 자녀들의 행복과 평화와 축복을 기도한다.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성모님께서는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리아의 모성애적인 전구와 돌보심에 맡김으로써 인생의 여정 중에 위험, 불안, 실망, 고통 등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복음: 루카 2,16-21: 목자들의 경배와 할례 받으신 예수.
오늘 복음에서는 목자들이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들은 후 급히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16-20절)
여기서 보면 주인공은 바로 그 ‘아기’이다. 목자들이 급히 달려간 것은(16절) 그 아기를 보기 위한 것이었고(17절) 천사들로부터 들은 그 모든 것도 그 아기에 대한 것이었으며(17절) 목자들이 돌아가면서 ‘듣고 본 모든 것’(20절) 말하는 내용들도 그 아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기쁨에 넘치면서도 깊은 생각에 잠기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19절) 이 표현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는 장면(루카 2,51 참조)에서도 나온다. 마리아는 당신 아들에 관계되는 어떤 사건에서 놀라고 계심을 암시한다. 마리아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 목자들을 그리로 보냈을까? 마리아는 여기서 무엇을 알아들었을까? 하느님께서는 이 아기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것에 잠기었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깊이 묵상하며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그 아드님 위에 펼쳐지는 하느님의 계획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깊이 새겨 마음에 간직하는 모습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한다. 이렇게 마리아는 서서히 어머니의 역할을 이루어 가시며 그 역할은 아드님의 성장과 더불어 무르익어 간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21절) 할례를 통해서 비로소 그 아기는 율법으로 선민이 되며(창세 17,2-17 참조) 계약에서 자신의 역할을 표현하는 이름을 받는다. 여기서 어머니인 마리아는 천사가 일러준 대로 이름을 지어준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이름은 그 사람의 역할을 말해준다. ‘예수’는 ‘여호수아’와 같으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이 이름이 천사가 알려준 것이며 그것은 그분의 사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어머니의 역할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중재자이며 해설자일 뿐이다. 여기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아들도 된다는 사실은 이미 깊은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마리아의 마음과 믿음이 그리스도를 잉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도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분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들어 높임은 바로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들어 높임이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하셨다.(1964년 11월 21일)
이렇게 보면 마리아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이 평화의 날, 제1독서는 사제가 모든 백성들에게 축복을 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24-26절)
여기서 평화는 우리를 하느님과 형제들과 올바른 관계에 있도록 해주는 모든 영적인 선으로부터 먹을 것, 입을 것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적인 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의 충만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는 절망적일만큼 평화가 깨어지고 있다. 즉 전쟁, 불의와 억압, 수많은 폭력과 테러 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화가 없이는 인간성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도 더 절감하고 있다. “인간성이 전쟁의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인간성의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J.F. 케네디)
이렇게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이 새해의 문턱에서 우리는 하느님만이 온 세상을 평화로 이끌어 가려 노력하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따뜻한 미소가 악마의 모습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서로가 한 형제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시지 않을까?
오늘 새해 첫날이며 세계평화의 날 미사를 바치면서, 진정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결심하고 언제나 깨어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에겐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가 계셔
우리 삶은 아직
희망의 연속입니다.
어머니는 끝까지
자식들과 함께 하십니다.
진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삶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잃어버린 모성을
되찾아주십니다.
어머니의 손길에서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자녀들의
관계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이곳에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마리아는 믿는 것을
삶으로 실천합니다.
사람의 삶이란
믿음의 삶임을
보여주십니다.
믿음의 길을
되새기고 되새기며
걸어가십니다.
믿음의 길은
순명의 길이었습니다.
순명의 길은
구원을 탄생시키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처럼 하느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은총 가득한
나날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매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입니다.
-서공석 신부님-
새해 2018년의 첫 날입니다. 새해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한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도 하느님이 축복하실 것을 빕니다. 새해에도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현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에페소 공의회가 결의한 것입니다.
그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신앙인에 불과합니다.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급이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하느님을 낳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곧 5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님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하였던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 14)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루가복음서」가 알립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 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이룩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는 분이라 우리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루가복음서」(7, 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시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졌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의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 앞에 펼쳐진 또 한 해의 세월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
2018년 무술(戊戌)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큰 선물로 다가온 올 새해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이렇게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언젠가 어떤 분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새해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왜 이렇게 새해라고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지나갈 하루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장사치들의 상술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똑같은 날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해가 바뀌는 오늘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더욱 더 열심히 하루를 보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으로 큰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도 다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을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자. 그만큼 기쁘고 힘차게 살 수 있지 않은가?’
삶의 부정적인 측면을 더 많이 생각하는 한해가 아닌, 기쁜 일을 비롯한 긍정적인 측면을 더 많이 생각하는 한해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낭비란 비싼 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비싼 칼을 사서 칼집 속에 그냥 넣어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은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그 의미를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민수 6,24)고 전해주면서, 우리가 늘 좋은 것만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올 한해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닌, 가장 잘 활용하는 축복의 한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복음은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그 순간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떠올리면 큰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면 불평불만부터 나오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지요. 하지만 성모님께서 그 어떤 불평불만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참조)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이라고 응답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새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순명과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신 그 모습을 통해 우리들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며, 이로써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들이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이 모습을 배우고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더 이상 불평불만 속에서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이기면 일등이 되고, 나를 이기면 일류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겨서 일등이 되는 삶보다 먼저 부정적인 나를 이겨서 진정한 주님의 자녀가 되는 한해가 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일류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속마음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당신의 속마음으로 들어오게 하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가장 아름다운 만남(‘따뜻한 하루’ 중에서)
정채봉 작가의 에세이 '만남'에 다음과 같은 만남의 종류가 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기며 만나면 만날수록 비린내가 나는 만남입니다. - 생선 같은 만남 -
풀은 쉬 마르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오래가지 못합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려지는 만남입니다. - 꽃송이 같은 만남 -
반갑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지만, 만남의 의미가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는 시간이 아까운 만남입니다. - 지우개 같은 만남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처럼 힘이 있을 때는 지키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리는 가장 비천한 만남입니다. - 건전지와 같은 만남 -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 손수건과 같은 만남 -
2018년을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 어떤 만남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만남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축복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장재봉 신부님-
새해 첫날, 해마다 똑같은 독서와 복음이 선포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자녀의 긍지를 지니고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더욱 사제에게는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말씀이 마음에 쏙 담깁니다. 사제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복을 청하면 언제나 응답해주시겠다는 복된 약속에 마음이 벅차, 새로운 각오를 여미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마침내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인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축복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죄 때문에 영생의 축복을 잃은 인간을 위해서 몸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고 들려주는데요. 바오로 사도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힘이 얼마나 세고 강한지, 실감하게 하는데요.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이 변화되고 하느님의 자녀로의 신분상승이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는 하느님의 가족이 된 것은 모두 믿음 덕분이니, 정말 믿음이 고맙습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를 헤아려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에 당신의 뜻을 세우시고 그 뜻에 따라 인간의 역사 가운데에 섭리하신다는 걸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성모님을 엄마 어머니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고백이 그득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특히 루카 복음이 선택된 사실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루카 복음이 타 복음서에 비해서 유난히 가난한 사람에게 주목한다는 점에 마음이 쏠렸습니다. 루카 사도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훨씬 잘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는데요.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비화에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마태오 복음과 달리 가난한 목동들의 이야기로 꾸려가니까요. 밤을 새워 일해야 했던 목동들을 찾아온 천사, 그 말을 듣고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던 가난한 이들의 설레는 걸음은 생각만 해도 감동적입니다. 그 날 목동들은 구세주가 태어날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했을 겁니다. 당연히 우왕좌왕했겠지요. 이 부분을 루카 사도는 “찾아냈다”는 어휘를 사용해서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그러고 보면 천사들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라고 일러준 것 또한 목동들이 너무 지치지 않도록 깜짝 힌트를 준 것이라 싶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뿐만 아니죠. 루카 사도는 요셉이 방을 구하려 애쓴 흔적을 남김으로써 그 날. 만삭의 몸으로 방을 구해 헤매느라 지쳤을 마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도록 이끌어 주는데요. 그날 밤 가난한 목동들의 방문과 그들이 전해준 말이 마리아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짐작하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일화는 너무나 초라해서 처연한 생각을 치우기 힘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그토록 초라하고 볼품없는 행색으로 모셔야 했던 마리아와 요셉의 아픔이 전이되어 옵니다. 그날 두 분은 하느님의 아들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죄송하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차가운 땅바닥보다는 조금 나을 듯하여 동물의 밥그릇인 구유에 아기를 누이며 정말 안쓰럽고 송구하지 않았을까요? ‘만약에’ 그분들이 세상처럼 ‘높이’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면, 더 높아지고 훨씬 높아져야만 대단하고 훌륭한 삶이라고 여겼더라면, 그랬더라면 결코 그날의 초라함을 견디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아찔한 일입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하느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을 게 뻔하니까요. 때문에 낮아짐에 기죽지 않고 최선을 다했던 두 분의 정성이 고맙고 고맙습니다. 그 소박한 믿음의 행위가 바로 하느님의 협조자가 된 비결임을 깊이 새기게 됩니다.
새해 첫날, 우리는 축복의 길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온 삶을 내어드린 어머니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무엇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내어 준 지극한 모성을 공경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관심이 세상의 ‘높이’에 쏠려 있다면 ‘더 높아지고’ 훨씬 ‘높아져서’ 대단하고 훌륭해져서 멋져야만 행복할 것이라는 망상에 젖어 있다면, 누추한 곳에 계신 주님을 경배하는 겸손을 지닐 수 없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구유에 누운 작은 아기의 모습이 성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돌봐드려야 하는 그 연약함이 싫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낮은 곳에 계신 그분을 만나지도 못하고 모시지도 못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찬미가 높으신 분께로만 향하여 낮게 계신 그분을 외면하지 않도록, 우리의 기도가 높아지는 일에 급급하여 낮아지신 그분께 낯설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낮은 생각과 깊은 믿음으로 아빠 하느님과 엄마 성모님께 귀한 자녀로 성장해야겠습니다.
새해의 첫날, 언제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도록 섭리하신 “아빠, 아버지”께서는 우리 모두가 선물해주신 엄마 성모님을 빼닮기 원하십니다. 곰곰이 은혜를 새기며 순박한 목동들처럼 서둘러, 추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주님과 하나 되신 분, 하느님의 뜻을 고스란히 따르셨던 분, 착하고 고우신 우리 엄마 성모님께서 모든 교우 분들을 하느님의 뜻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보듬어 주시길…. 주님께서 허락하신 사제의 권한으로 청합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무술년 개의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 가장 기억에 남는 개띠는 58년생입니다. 저의 형님이 58년 개띠입니다. 개는 인류와 함께 지낸 친숙한 가축입니다. 예전에 주일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목자이고, 본당 신자들은 양이라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보좌 신부님은 양들 옆에 있는 개인가요?” 당시에 보좌신부였던 저는 본의 아이게 개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반려견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개는 집을 지키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와 같은 동물이 되었습니다. 충무로에는 애견센터가 많습니다. 며칠 전 그 길을 걸으면서 창가에 있는 강아지들을 보았습니다. 어찌나 귀엽던지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면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동양화를 감상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첫째 원근이 잘 나타났는가?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 높이 있는 달과, 눈앞에 있는 나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원근이 잘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둘째 구도가 잘 잡혀있는가? 산과 강, 나무와 배, 꽃과 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 선이 뚜렷하게 보이는가? 강과 산의 경계, 하늘과 산의 경계, 땅과 물의 경계가 뚜렷해야 한다고 합니다.
넷째 명암이 잘 드러나는가?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꽃은 더 아름답게 드러날 것입니다. 달밤은 더욱 운치 있게 표현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여백이 있는가? 한 폭의 그림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합니다. 마음에는 여유가 있어야 하듯이, 그림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 잘된 그림이지만 작품은 아니라고 합니다.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아, 묘, 신’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는 선비 아인데 그림에 품격이 있어야 하고, 묘는 그림에 평범함을 넘어서는 묘함이 있어야 하고, 신은 그림에 신비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3가지가 있으면 비로소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잠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째, 구원은 하느님 약속의 실현입니다. 창세기 3장, 미가서 5장, 이사야서 7장에 예언된 하느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사건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둘째, 연약한 처녀의 응답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의 응답을 기다려 주십니다.
셋째, 역사의 기준이 됩니다. 기원전, 기원후라는 표현은 주님의 탄생전과 주님이 탄생한 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구원의 역사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명암이 드러납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며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시고,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평범한 시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여백을 남긴 체 탄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2018년이라는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 희망, 사랑, 나눔, 희생, 친절, 온유의 물감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때로 고통, 절망, 아픔이라는 얼룩이 질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그림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 분노, 미움, 시기, 질투, 편견이라는 물감으로 볼썽사나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가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세계 평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총과 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창한 행사나 사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짐'이 아닌 '선물', '축복된 존재'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
오늘 2018년 1월1일 새해 첫날은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제51차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모친 마리아께서 2018년 평화의 문을 활짝 열으셨습니다. 새해 첫 날 저절로 나온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말마디였습니다.
답은 ‘짐이 아닌 선물, 축복된 존재로’였습니다. 정말 올 한 해뿐 아니라 남은 생애는 짐이 아닌 선물로, 이웃에게 평화의 선물, 축복된 존재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2018 새해 첫날을 여는 새벽성무일도 초대송을 비롯한 찬미가와 아침기도 후렴도 줄줄이 은혜로와 소개합니다.
“동정이신 모친 마리아를 공경하며, 그의 아들 주 그리스도께 조배드리세.”(초대송).
“빛살을 지어내신 빛의 창조주/구유도 마다않고 누워계시며
일찍이 성부함께 하늘내신분/아기로 모친품에 안기셨도다”(찬미가2절)
“이제야 빛과구원 탄생하시니/어둔밤 사라지고 죽음없도다
마리아 낳은아기 하느님일세/오너라 만민들아 그를믿어라”(찬미가4절)
모두가 깊은 묵상 자료입니다. 이어지는 아침기도 첫 후렴도 은혜로웠습니다. 요즘 전례기도시 가사와 곡의 아름다움에 자주 마음이 끌리곤 합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 아름다움의 반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옛세의 뿌리에서 순이 돋아나며, 야곱에게서 샛별이 떠올랐도다. 동정녀가 구세주를 낳으셨으니,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아침기도 1후렴)
모두가 탄생하신 구세주 탄생을 기리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대축일 미사 화답송은 얼마나 흥겨운지요. 그대로 오늘 강론 주제에도 잘 들어맞는 하느님께 축복을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하느님 친히 새해 첫 날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바로 제1독서 민수기의 사제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당신 사제를 통한 참 좋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참 좋아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복주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있음이 하느님 축복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욕망덩어리’도 ‘짐’도 아닌 ‘축복덩어리’ ‘선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짐이 아닌 선물, 축복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니고 존엄한 품위의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한국인의 미美를 요약한 이 말씀처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겠나? 바로 그 삶의 비결을 소개해 드립니다.
하느님의 축복받아 하느님을 닮아갈 때 바로 이렇게 됩니다. 하느님을 닮아감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마침 어느 동방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동방정교의 요체는 하느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을 통하여 인간을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양을 본 따서 만들어진 존재라 했습니다. 하여 내재하는 신성을 갈고 닦으면 성화에 이를 수 있습니다. 동방정교는 인간 한명, 한명이 자기 내면에 품고 있는 하느님 모습을 잊지 말고 잃지 말면서, 하느님과 영적으로 교감하여 신에 더 가까운 인간, 더 더욱 인간다운 인간으로 고양되는 것을 중시합니다.”
바로 끊임없이 주어지는 주님의 축복이 우리를 이처럼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주님의 축복으로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축복받은 존재로 살면 됩니다.
첫째, 받은 축복을 부단히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축복하면서 우리도 축복을 받습니다. 하여 저는 면담고백성사시 사죄경과 더불어 가능한 강복도 드립니다. 사람뿐 아니라 하늘 땅 자연에도 자주 강복을 줍니다. 십자 성호와 함께 드리는 강복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하여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의 복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형제는 아들이 청할 때 마다 강복을 준다 했습니다. 아주 예전에 미국 수도원에서 만난 나이 60 노령에 사제서품을 받았던 노 사제도 열형제의 맏이였는데 어릴 때 아버지는 열형제 모두에게 날마다 성수를 찍어 이마에 축복해 줬다는 일화도 전해 주었습니다. 제1독서 민수기의 사제의 축복을 마음 속으로 되뇌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바로 우리의 고귀한 신원입니다. 가장 큰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있는 우리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의 자녀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여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이기에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셋째, 사랑의 관상가로 사는 것입니다.
늘 하느님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활동의 넓이가 아니 관상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목자들이 예수 아기에 관하여 들을 말을 알려 주었을 때 성모 마리아의 반응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바로 이 모습이 관상가 성모 마리아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마음에 담아두고 곰곰이 되새기는 일이 참 중요한 관상가의 수행입니다. 시편 1장도 이런 관상가의 축복을 전해 줍니다.
“행복하여라.---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넷째, 복음 선포자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가난한 목자들이 그 모범입니다. 외관상 가난해도 실로 내적으로 부요한 자들입니다. 기쁨과 찬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축복받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니 바로 복음 선포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남이 축복이며 성화가 뒤따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주님을 만남으로 축복받아 찬양과 찬미의 사람으로 변한 목자들입니다. 하느님 찬양과 찬미의 삶 자체가 참 좋은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축복받은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축복받은 존재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 때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1.받은 축복을 부단히 나누십시오.
2.하느님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3.사랑의 관상가로 사십시오.
4.찬양과 찬미의 복음 선포자로 사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축복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다.”(히브13,8).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입니다.
2018년을 여는 새해의 첫 날이며, 또한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새해의 첫날,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건네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시작이요, 비롯됨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곧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난 한 해의 종이를 덮어버리고, 앞에 놓인 나날의 새로운 백지 위에 무엇인가 새롭게 색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곧 맏배, 첫 자녀, 첫 수확, 첫 봉헌 등 첫 번째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 새해의 이 첫 번째 날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첫 번째 날을 통해 1년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칩니다.
우리는 이 한 해의 첫 날에 ‘천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원, 곧 구원 생명의 시원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다름 아닌 구원자를 낳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시고,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곧 복된 은총의 하늘 문을 여신 성모님을 통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빛을 건네주신 빛의 문이 되셨습니다. 곧 하와가 잠갔던 낙원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듯, 오늘 제 안에서도 그분이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곧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구원한 신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크신 자비, 당신이 하신 일을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되새기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품고 간직하고 내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새해 첫날에, 천주의 모친 축일을 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임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살아가라는 희망의 호소요, 외침이라 할 것입니다.
새해의 첫 번째 날,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웃에게 축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소명을 거듭거듭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축복을 빌어주면, 그렇게 축복을 베풀어주시리라는 약속도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새해 인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복을 빌어주면, 복이 흘러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새해인사는 성사적인 의식이 될 수 있습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시화하는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더더욱 많은 축복을 빌어주고, 믿음으로 빌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이 새해 첫 아침!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어둠을 가르고 첫 새벽을 달려와 구세주를 찬양하였듯이, 기쁨과 희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쁨과 희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축복을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새 아침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 다시 새해입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시로 주님께서 새해 아침을 선물로 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넘치는 은총과 자비에 크게 감사하면서 기쁘게 이 한해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은 눈물겹도록 은혜로운 날입니다. 우리 안에서 낡은 것과 새 것이 교대하는 날,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자비가 교차하는 날, 빛나는 얼굴의 내가 죄에 물든 나와 작별하는 날, 분노와 질투의 화신이었떤 내가 사랑과 자비의 사도로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날, 우리 가톨릭 교회는 한해 동안 본받고 살아갈 모델 한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분은 나약한 인간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무한한 성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온 몸으로 증거하신 분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분,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영예를 얻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비결은 바로 지극히 겸손한 순명이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별 것도 아닌 인간 존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첨단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착각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인간 측의 가장 큰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군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의 겸손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성모님은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신 분입니다.
장차 구세주의 어머니로 살아가며 누리게 될 세속적 영예나 특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란 타이틀이 성모님의 신앙 여정에 마이너스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셨기에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오직 메시아를 담아내기 위한 질그릇 같은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았던 성모님의 겸손, 여기에 그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 성모님,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예수님 뒤에서 조용히 서 계시던 성모님,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성모님,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이토록 겸손하셨던 성모님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인류의 어머니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겸손의 덕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덕행이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으뜸가는 덕행입니다. 참된 겸손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감을 고백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을 떠나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나는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과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함에서 시작합니다.
축복만이 아니라 축성도 받는 올해가 되시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민수기의 주님은 오늘 모세를 통해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그리고 이어지는 축복은 <주께서-주시리라.>의 반복입니다.
아시다시피 감사는 지난 은총이나 은혜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에 비해 축복은 미래의 은총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은 이미 주신 은총 주실 은총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새 해 첫날인 오늘 민수기의 축복을 새해의 축복으로 바꾸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복 주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얼굴을 비추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런데 저는 <올해도>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도 주셨는데 올해도 주시리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작년의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올해의 은총도 믿고 축복도 감사하게 받을 것이기에 저나 여러분이나 올해도 축복을 감사하게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받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겁니까?
제 생각에 감사하게 받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입니다.
하나는 청원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차원입니다.
청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그래서 갈망의 사람입니다.
없으니까 달라는 것이고 필요하니까 달라는 것이기에 가난하면 할수록 필요하면 할수록 그 청하는 것이 주어졌을 때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축복도 겸허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반면 배부른 사람은 축복을 청하지 않고 주셔도 감사하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하려 하지 않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자기 힘으로 이뤄 행복하려는 사람과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축복을 감사하게 받는 두 번째 차원은 믿음의 차원입니다.
저는 자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다면 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느님께나 사람에게 뭣을 청한다는 것은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확고하면 그럴수록 청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안 주시기에 청하고 자비를 베푸시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자비롭지 않은 분이 어찌 자비를 달란다고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얘기는 갈망의 표시로 청하는 것은 좋지만 믿음의 차원에서는 청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그저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면 됩니다.
이것이 5천명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실 때 주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미리 바치고 빵을 나누어주신 것의 뜻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받고 난 뒤에야 다시 말해서 내 통장에 입금이 된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감사를 하지만 주님은 주실 것을 믿으시기에 청하지 않고 미리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을 우리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믿으셨기에 복된 분이라고 엘리사벳은 칭송하는데 마리아가 뭘 믿으셨다는 것입니까?
건강이나 재물과 성공과 같은 것을 주시리라 믿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신 것인데 축복을 받는 마리아가 아니라 축성을 받은 마리아가 되는 겁니다
'머물러 있음'
-김명겸 신부님-
목자들이 아기 예수에 관하여 전하는 말에 다른 사람들은 놀라워하지만, 마리아는 그것을 넘어 그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전한 말은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주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천사의 방문을 받고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를 받고 마리아는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겪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그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하는 행동 중의 하나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해서 몰이해에서 오는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잊어버리는 것이 답은 아닙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언젠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시 머리에 떠오르고, 우리는 다시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복음이 주는 메시지는 '머물러 있음'입니다.
시간이 지나야 과일이 익듯이,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모습이 드러나고 점점 더 이해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옳고 그름으로 한단하려는 마음,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를 끼치지는 않는지 판단하려는 마음을 잠시 멈추고, 그 답답함 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답답함이 고통을 주고, 그 답답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답답함 속에 머무를 때 조금씩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또 기꺼이 그 답답함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우리말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달던 쓰던 그것을 입에 물고 있을 때, 또 다른 맛,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더 좋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주님의 축복 속에 내딛는 희망의 발걸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새해를 맞으며 평화와 자비의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가난한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각 개인도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보다 더 인간다운 사회를 이루는데 헌신함으로써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제1독서는 다음과 같은 ‘아론의 축복’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의 노예살이로 자유롭지 못했고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인간적인 습속이 온 존재에 새겨지고, 육체적인 피로와 고통을 쌓여가며,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힌 반항과 배신은 그들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충실함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이집트 탈출에 동의함으로써 자유의 길로 나아갑니다.
아론의 축복은 백성에게 충실하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찬양입니다. 주님의 축복은 두려움과 탐욕, 집착과 반항 속에 어두운 나날을 지낼 우리 인생길에 대한 주님의 영원한 보증이기도 합니다. 행복의 근원이요 선 자체이며 평화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심이 바로 축복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며 그분 안에 머물기만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님 축복의 선물은 악으로부터의 보호, 죄의 용서인 자비, 평화 셋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저 받을 수 있는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주러(요한 14,27) 오신 ‘하느님의 축복’ 자체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시어 인간의 법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어 구원을 얻게 하신(갈라 4,4-6)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새해에는 자비요 선이며 평화이신 주님을 더 갈망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삶으로써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물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주님의 복된 사람이 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간적인 나약함과 삶의 고통과 도전 앞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헌신해야겠습니다. 말구유에 나신 가난한 하느님을 알아본 목자들의 깨끗한 눈으로 내 삶의 역사와 세상과 다른 이들을 바라봐야겠지요.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축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겠지요. 주님의 축복을 공유하려면, 성모님처럼 주님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루카 2,19), 목자들처럼 적극적으로 평화의 주님을 찾아내 찬미를 드리도록(2,16-18)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네 삶이 비록 변변찮고 고통과 시련이 많아도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최고의 선과 사랑과 평화를 주고자 하시는 주님의 축복을 회상합시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축복받은 사람들임을 기억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합시다. 평화의 주님께서 새로이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을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루카 2, 16-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일반 상식으로 하느님은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으로 계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에게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특별히 개신교에서는 우리 가톨릭을 마리아 교회라고 칭하며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 되신다는 것을 너무나 부당하다고 하며 비난의 목소리가 큽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 어머니를 대통령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시고 마리아를 통해 사람이 되셨으니 당연히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고 그에 합당한 공경과 사랑으로 의탁하는 삶은 우리 믿음에 큰 은총이며 마리아를 통해 전달하는 기도는 더 효과적이며 그 힘에 따라 믿음이 성장합니다.
"마리아여! 우리의 바람을 빌어 주소서." 기도의 효과는 말할 수 없고 역사 안의 마리아 역할은 큰 힘이 됩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도 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하느님에게 전달해주십니다. 마리아는 자연을 변형시키는 능력은 없어도 자연의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갖추신 하느님의 마음이 기적을 행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가나안 잔칫집에 술이 떨어졌을 때 물이 술이 되도록 주님께 청하여 기적의 술을 만드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 은총의 전달자이시며, 우리의 필요함에 자비를 베푸시도록 전달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지 하느님처럼 흠숭의 대상이 아닙니다. "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이 우리의 마리아에 대한 기대이며 희망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편 우리와 같은 피조물로서 인간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시고 변호해주십니다.
올해 한 해 믿는 모든 이들이 성모님의 은총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새해 새날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루카.2,21)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신부님
‘주님의 해’(A.D: Anno Domini)가 시작된 지 2018년을 시작하는 오늘 우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인류 역사의 기원인 주님의 이름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의 이름이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인 ‘예수’님의 이름을 먼저 부릅니다.
거룩함이 탄생된 후 여드레가 되는 새해 첫날인 오늘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날입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만큼 우리에게는 새로운 해가 됩니다. 자신의 이름이나 다른 헛된 이름보다 참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만큼 우리의 오늘은 새롭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찾는 만큼 우리의 해는 항상 새롭게 됩니다.
낡은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떴습니다. 어제를 보내고 맞이하는 이 순간에 새로움이 피어오릅니다. 새롭게 밝은 오늘은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가 부르는 만큼 2018년의 지금 여기는 거룩하게 됩니다.
‘주님의 해’가 세상에 선포된 지 2018년을 맞이하지만, 아직도 ‘주님 오시기 전’(B.C: Before Christ)처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밝은 해가 이미 떴지만 새로운 해를 보지 못합니다. 해는 이미 떠서 세상을 비추지만 우리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밝음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분노는 열정으로, 그리고 두려움은 경외심으로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늘은 우리 마음의 눈을 뜨는 시간입니다. 예수님, 당신 이름을 부르며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축복의 빛이 되어 오소서.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만남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 신부님
어제는 지인들과 함께 승용차로 3시간 30분 걸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다녀왔다. 2017년 마지막 날 미사를 성 야고보 사도 무덤 위에서 봉헌하러 갔다. 은혜로운 미사였다. 마침 향로 미사를 했다. 엄청 큰 향로에 내 손으로 직접 향을 넣고 기도했다. 향로가 하늘로 솟구치면서 대성당에 향 연기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향로의 그 커다란 움직임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향의 연기는 우리의 기도, 우리의 감사, 우리의 찬미였다.
향로 연기와 함께 작년 한해 내가 만났던 순례자들을 기억했다.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이 향연기와 함께 주님께 기도가 되어 올라갔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얼굴도 선명히 떠올랐다. 또 2018년 새해에 만날 모든 사람들을 미리 기억했다. 누굴 만날 지 누가 스쳐지나갈지 모르지만 축복을 빌어주었다.
오늘 새해 첫날 지인이 이런 글을 보내왔다.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성가족,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예수님이 목자들을 만난다. 목자들은 일찍이 천사들을 만났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이 아기의 탄생을 전해주었다. 이 사람들도 ‘만남’ 안에서 서로를 알아봤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리아의 태도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그렇다, 만남이란 당장 그 뜻을 알기 어렵다. 마리아처럼 기도 안에 담아야 한다. 그것도 천천히, 그득히,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 만남을 기도 안에 새겨야 하리라.
마음으로 간직한다는 것은 만남을 축복한다는, 만남을 성화한다는, 만남을 넘어 거룩함을 나눈다는 것을 뜻한다. 곧, 만남 안에서 서로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서로 본다. 이것이 축복이다.
스페인 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2,40)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성가정 축일이다.
성가정에 대한 표면적인 해석은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두가 세례를 받아 신자대장에 그 이름이 올랐다고 하는 것이 성가정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결국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이 따르지 않는 가정이라 한다면 세례를 받은 것이 오히려 족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것이 일반적인 성가정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성가정의 의미를 생각보고자 한다.
문제 없는 가정은 없다.
아픔을 안고 살지 않는 가정은 없다.
노력과는 상관없이, 해결해야 할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는 가정은 없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모든 장애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아픔도 상처도 가정에서 처음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따라서,
성가정이란 문제 없는 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가정이란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들 속에 늘 그리스도를 한가운데 모시는 가족을 말한다.
결국 부모의 기도가 있고 자식들의 기도가 있어 그 안에서 답을 찾는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함을 명심해야 한다.
가족은 하느님이 주신 가장 고귀하고 그 어떤 힘으로도 끊어서도 안되고, 끊을 수도 없는 선물이다.
오늘 모두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릴 수 있는 하루였으면 한다.
-정연정 신부님-
오늘은 2017년 새해 첫날이며, 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아울러 ‘세계 평화의 날’을 지냅니다. 올 한 해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닮아 살면서 주님의 평화가 온 누리에 충만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5년 전에 이미 한 차례 암에 걸렸던 자매님이 다른 곳에 암이 재발하여 입원하게 되었다고 병자성사를 청하셨습니다. 제 눈에 들어온 그분은 깡말라진 몸에, 머리는 빡빡 깎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병하기 전에 그분은 아들 셋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유치원 버스 기사도 마다치 않았던 강인한 엄마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분의 눈에 고인 눈물에서 아이를 낳은 모성(母性)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신비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베들레헴)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루카 2,6) 예수님을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지녔던 모성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모성도 사신 분이십니다.
2.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
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갈라 4,4)는 구세경륜(救世徑輪)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이 선포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게 됐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아울러 마리아께서 지니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적 모성(神的母性)에 대한 믿음을 자연스럽게 고백하게 된 단초(端初)를 제공합니다.
그리하여 에페소 공의회(431년) 교부들은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당신의 동정 품 안에 잉태를 하시어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4항 참조)
3.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
벨기에의 쉬넨스(L.J.Suenens) 추기경은 “마리아의 존재에 관하여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합니다. 즉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한 분의 어머니가 계시고, 그 이름은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고 밝혀주면서, 성모님의 모습과 품성에 대하여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마리아께서 이미 처음부터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에 대해 ‘완전히 개방된’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습니다.(「구세주의 어머니」 39항 참조)
4.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 : ‘앞서는’ 믿음
몇 년 전에 한 신자로부터 받은 편지의 일부입니다. “요즘 저는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며 세상의 경이(驚異)를 체험하는 것만 같은 심정입니다. 바라고 희구하고 매달리는 기도에서 벗어나 내 안에, 우리 안에 깃든 주님의 뜻을 살피고 기다리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마리아의 영웅적인 믿음은 교회의 사도적 증언에 ‘앞서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구세주의 어머니」 27항 참조) 여기서 ‘앞서는’ 믿음이 바로 우리가 성모 마리아로부터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성모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큰 것을 이루려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자비’(루카 2,54 참조)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길이 성모님께 하느님의 역사와 섭리를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 길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었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 더욱더 주님께 의탁하여 평화와 사랑의 길에서 충만하게 되시길 빕니다. 아멘.
온전한 하느님의 어머니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나셨다”는 말을 듣다 보면 예수님이 신성은 하느님에게서, 인성은 성모님에게서 각각 분리해서 받은 반신반인의 존재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느님이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모님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도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성모님을 인간 예수의 어머니라고만 부른다면,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이 서로 나누어지는 반신반인의 존재가 되기 때문에 교회는 성모님을 온전한 예수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분이 낳으신 예수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지 않는 온전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 될 것을 굳이 성모님에게까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때 어떤 의미, 어떤 느낌이 떠오르는지 묵상해 봅니다.
먼저,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때, 진흙으로 빚어진 비천한 인간이 하느님을 나을 수 있었음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성모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면서도 하느님께 철저히 순명하심으로써 하느님을 낳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비천한 몸을 지닌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면 성모님처럼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성모님처럼 하느님 뜻에 순종한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며, 하느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고, 오직 성모님만이 그분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우리 희망을 표현하는 호칭을 넘어서 성모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칭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셨던 성모님 덕분에 성자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고, 우리 모두 그분을 보게 되었음에 감사드리며 성모님을 칭송하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이런 성모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 안에서 성모님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십사 전구를 청합니다. 성모님의 전구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를 우리들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음에 기뻐하며 오늘 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오늘 교회는 특별히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오늘도 여전히 종족, 종교, 이념 등의 대립으로 서로 싸우고 다투며, 죽고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를 기도하며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열과 다툼이 사라지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이런 우리의 기도와 노력이 성모님의 전구와 합쳐질 때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참된 평화가 가득한 하늘 나라를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예수’- 하느님의 이름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
새해 첫날은 우선 주님 성탄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로써 아기 구세주께서 태어난 지 여드레인 바로 오늘, 할례(레위 12, 3 참조)를 받았고,‘예수’라는 이름도 받았다.‘예수’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던 순간 천사가 알려주었던 이름이며, 파혼을 작정한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꿈 속에서 일러주어 마음을 움직였던 이름이다.“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진‘예수’는 하느님 스스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이름이다. 이제는 누구든지 이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이 이름을 받들어 부름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며,(로마 10, 13 참조) 이 이름 앞에 만물이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필리 2, 10 참조)
새해 첫날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축성되었다. 하느님이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그 육을 취하려는 사랑의 간청에 마리아는 완전한 자유의지로 순명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협조하여 말씀이신 성자 하느님께 사람의 모습을 선사함으로써‘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이 호칭은 이미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공적으로 승인되었다.
새해 첫날은 또,‘세계 평화의 날’로 축성되었다.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도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참담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교황 바오로 6세는 1968년 새해 첫날을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로 제정하였다.
지난해는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허물과 아픔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다고 해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일이면 틀림없이 그저께처럼 전국이 들썩거릴 것이다. 물론 그런데 익숙한 우리들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첫날처럼 살아보자. 소망은 살찌우되 욕심은 버리고, 겉모양은 단정히 하되 허례허식은 버리고 참된 가치를 좇아 살아가자. 파고드는 아픔을 남에게 떠맡기지 말고 온몸으로 받아들여 마음껏 아파하며 극복하자. 어떤 경우에도 불법과 편법은 거절하자. 거짓과 부정은 없는 이들을 더 슬프고 아프게 만들뿐 아니라 희망을 앗아가는 죄악이다.
주님! 올 한 해도 저희를 말씀으로 키워주시고 사랑으로 보살펴주소서. 저희로 하여금 매일의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힘을 얻어 세상을 향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시며, 언제나 신앙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오늘, 주님의 축복이 온 누리에 가득하나이다. 아멘.
-서공석 신부님-
새해 2017년의 첫 날입니다. 새해는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2017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입니다.
그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분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신앙인에 불과합니다.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급이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곧 5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하였던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 14)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가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 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는 분이라 우리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 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시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베풀어진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의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 앞에 펼쳐진 또 한 해의 세월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
2017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늘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오늘 제1독서에서 해주십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주님과 함께 하는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올 2017년이 되셨으면 합니다.
우울증을 앓고 계신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자신의 우울증 원인을 어머니에게서 찾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당하게 대우를 받았고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즉, 다른 형제와 달리 자기만 외할머니 집에 살았는데, 그때 받은 상처는 나이 50이 넘은 지금에도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어머니 때문입니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졌지요. 그러나 이 형제님께서는 “그렇다니까요.”라고 대답하면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형제님과 거의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해서 잘 지내는 분들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어머니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행동했던 어머니를 둔 다른 분들 역시 우울증을 앓으면서 힘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커다란 착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종종 만납니다. 자신이 이렇게 큰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 가만히 계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로 하느님 때문일까요?
자신보다 더 큰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분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자신에게 응답 없는 주님께 원망보다는 또 다른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시는 분들이 역시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은 아닐까요?
성모님에 대해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전해줍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을 던지기보다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길 뿐이었지요.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어떻게 이 뜻을 따를 수 있는지를 관찰하고 묵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관찰하고, 그 활동의 의미를 발견해 내고, 또 그와 같은 모양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이러한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바뤼흐 스피노자).
내 가치를 인정하기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음식이 있습니다. 특히 외국에 나가면 ‘이런 것을 어떻게 먹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남미에 갔다가 봤던 ‘꾸이’라는 음식은 ‘기니피그’라는 쥐과의 동물입니다. 중국에 갔다가 본 ‘비둘기’ 구이나 곤충 요리 역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내가 싫다고 해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제게만 징그럽고 혐오스러울 뿐 그 지역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좋아하면서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이렇게 싫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싫은 사람이 곧 나쁜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면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다를 뿐이지, 내가 가치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내 가치 자체에 집중한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스타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힘겨웠던 지난 한해였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정말이지 납득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마음고생들이 많으셨습니까?
부디 새해에는 대단하다든지 특별한 해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한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평범하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크게 성공하거나 크게 기뻐하지 않지만 크게 실망하거나 크게 좌절하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하루하루 너무 비참해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그럭저럭 하루를 넘기고 일상 안의 작은 것에서 소소한 기쁨을 찾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특히 새해에는 ‘특권층’ ‘고위층’ ‘금수저’ ‘갑질’ ‘특별대우’ ‘청탁’ 같은 단어들로 인해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위 ‘특권층’, ‘고위층’ ‘금수저’라고 불리는 분들의 대오각성이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랜 세월 정경유착, 뇌물 제공, 대가성 훈방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들, 서민들의 땀과 눈물로 천문학적 재물을 하늘높이 쌓아올린 분들 크게 가슴을 치며 지금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을 위해 활짝 곳간을 여시기 바랍니다.
직무상 저도 ‘특별대우’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일반인들과 따로 떨어진 곳에 이른바 ‘내빈석’에 앉아 행사에 참여하거나 식사를 할 때가 있는데, 세상에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밥맛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딜 가든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주최 측에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면 제가 단골로 쓰는 멘트가 있습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만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아신다면 저 쫓겨납니다.”
이런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별대우 거부 운동의 최 일선에 서 계십니다. 얼마 전 교황님께서 신발을 사러 로마 시내 한 신발가게에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경호를 맡은 분들은 엄청 당혹스러워했겠지만, 그리고 신발가게에서 교황님을 만난 사람들은 경이로운 시선을 보냈겠지만, 교황님께서는 ‘내가 신을 신발 내가 사는 게 뭐 대단한 거냐?’며 아무 거리낌이 없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교황님께서는 어딜 가시든 특별대우를 그렇게 싫어하십니다. 해외 순방 시 묵으실 숙소로 엄청 넓고 으리으리한 침실로 안내하면 정색을 하시며 거절하십니다.
저는 이런 교황님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은 너무나 편안하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봉헌생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당신께서 몸소 잘 보여주고 계신다. 사제생활 잘 하고 싶은가? 수도자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저 교황님 일거수일투족만 바라보고 그대로 따라하면 되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이런 면에서 교황님의 스타일은 ‘성모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특권의식이 조금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시각으로 볼 때 성모님은 엄청난 분이셨습니다. 메시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잉태하신 분이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모님이었다면 엄청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앞에 엄청 자랑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특별대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겸손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만 추구하셨습니다. 손톱만큼도 특별대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만일 제가 성모님이었다면 만삭의 몸이었기에 호적등록 작업에 대한 연기 신청서를 제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한평생 음지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며 외양상으로는 한 평범한 유다여인으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올 한해는 그간 우리 모두를 괴롭혀왔던 특권의식, 특별대우, 예외적용, 이런 것들을 추방하는데 함께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재산 좀 있다고, 잠시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리 없이 꾸준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서민들, 평범한 사람들이 대우받고 존경받는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특권의식이 없는 사람을 우리의 지도자로 뽑아야겠습니다. 서민들이 흘리는 눈물과 그들이 하루하루 겪는 애환에 깊이 공감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을 우리의 인도자로 뽑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입니다. 오늘 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고, 평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복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은총에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성모님께서 복되신 이유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찬미하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겸손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미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가난한 이들을 따뜻하게 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을 받으라고 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의 축복, 건강, 승진, 소원성취, 자녀의 축복,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새해에 그러한 축복을 바라는 것도 의미 있고, 그런 축복을 빌어 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복’은 또 다른 의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골자기를 간다고 해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복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부족해도, 아파 신음을 할 때라도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복되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기도 힘든데, 장애아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애인인 아들을 위해서 함께 뛰는 분이 있습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 생각으로 ‘꽃동네’를 일구어낸 분이 있습니다. 버려진 이들, 병든 이들, 장애인들 속에서 작은 예수를 보았고, 그들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화려한 꽃이 되기보다는 썩어 양분이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총과 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창한 행사나 사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축복받은 사람들 -행복의 발견, 행복의 노력-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2017년 정유년(丁酉) 닭띠 해,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축복받은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십니까? 행복의 발견, 행복의 노력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한 번뿐이 없는 인생, 행복하지 못하다면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지금 마침 보고 있는 책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삶’입니다. 교부의 결론같은 한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행복하다.”
오늘 새해 첫날은 천주의 모친 성모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 사랑하올 천주의 모친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의 평화의 축복을 넘치게 받는 날입니다. 엊그제 성가정 축일의 화답송 후렴에 이은 오늘의 화답송 후렴도 수십년 미사를 드려오면서 가장 즐겨 부르는 곡중 하나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새삼 우리 축복의 원천은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좌우간 오늘은 여러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국민행복지수 1위입니다. 덴마크에서는 편안함, 아늑함, 따뜻함의 행복한 느낌을 ‘휘게’라고 부릅니다. ‘휘게 라이프’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조명은 좀 어둡게;천장 등을 끄고 스탠드 등만 켠다.
2.현재에 충실하자;스마트폰을 끄고 앞사람을 보자.
3.달콤한 음식;살찐다고 고민하지 말자.
4.평등;나 혼자 말고 여럿이 함께하자.
5.감사;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이다.
6.조화;세상에 경쟁만 있는 건 아니다.
7.편안함;두 발 뻗고 누워라.
8.휴전;괜한 정치 이야기로 싸우지 마라.
9.화목;“거기 기억나?”추억을 이야기하자.
10.보금자리; 집은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다.-
도대체 이 십계명중 몇이나 갖추고 있는지요. 너무 불행한 우리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행복의 궁극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쏙 빠졌다는 것입니다. 웬지 불완전한 느낌을 주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노력입니다. 이 둘은 함께 갑니다. 행복을 발견할 때 감사하며 더욱 노력하게 되고 또 발견되는 행복입니다.
행복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 진리입니다. 행복의 발견과 노력과 더불어 점점 행복의 부자가 됩니다. 두가지 행복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얼마전 어느 분이 예쁜 성탄카드를 정성껏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그 정성이 고마워 드릴 것을 찾았지만 없어, 덥석 안으며
-“주님의 평화, 제가 드릴 것은 이것뿐입니다.”-
가난한 이의 선물치고는 참 기막히게 좋은 선물이라 당자도 감격했고 저도 감격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며칠전 수도가족과의 공동휴게시의 행복했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약간 늦게 들어갔을 때 모두 인터넷 탐사보도에 집중하고 있었고 가장 좋은 자리에 우리 젊은 원장신부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긴의자에 걸터 앉아 보려 하자 원장은 즉시 일어나 제 곁에 와서 그 자리에 앉으라 간곡히 권했지만 사양했습니다.
그 따뜻한 마음이 내내 저를 행복하게 했기에 지금 생각나 강론에 인용합니다.
어제 2016년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날 저는 하루 내내 기뻤습니다. 사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기쁩니다.
어제 저녁은 더 까닭없이 기쁘기에 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발견했습니다. 주님 뵈올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군대시절에 제대 날자를 기다릴 때의 기다림의 농도 보다는 옅지만 그래도 주님을 뵈올날이 가까워진다는 기쁨임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허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이기에, 하루하루의 삶은 귀가준비가 됩니다.
산티야고 순례 때의 가장 행복했던 때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모든 준비가 끝난후 배낭을 메고 6시 떠나 새벽길을 걸을 때의 기쁨과 행복감입니다. 매일 ‘떠남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만남의 기쁨’만 있는게 아니라 떠남의 기쁨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디에 머물든 하루 이상은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 미지의 곳을,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기쁨입니다. 지금도 매일 새벽 일어나 떠남의 기쁨으로 하루의 내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산티야고의 순례여정은 지금도 일상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 수도생활중 위의 새벽의 떠날 때에 이어 또 행복한 시간은 하루의 여정을, 하루의 영적전쟁을 끝내고 주님 안에서 잠자리에 들 때입니다. 이 또한 행복한 죽음을 간접적으로 앞당긴 체험과도 흡사합니다. 하루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평화속에 잠드는 시간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자의 공통적 행복한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새벽 하루 내적여정의 ‘떠날 때’의 행복과 하루의 끝에 도착하여 ‘잠자리에 들때’의 행복 둘이 가장 깊고 고결한 행복의 체험시간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축복받은 존재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파견받은 우리들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첫째, 우리 믿는 이들은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제가 즐겨 드리는 것이 아마 강복일 것입니다. 미사때는 물론이고 고백성사를 보는 분들 에게도 시간되면 사죄경에 이어 강복을 드립니다. 카톡을 통해 좋은 사진을 보낼 때도 주님의 축복을 담아 보내 드립니다.
주님의 축복보다 영육에 좋은 보약도 치유제도 예방제도 없습니다. 모든 탐욕, 무지, 교만, 질투, 미움, 불만 등 온갖 부정적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데 주님의 축복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이 주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 주님의 축복은 얼마나 풍성한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중 사제를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하느님의 유일한 기쁨은 우리 사람들에게 복주시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음이 주님의 축복이요, 우리 모두가 주님의 복덩어리 사람들입니다.
둘째, 인간으로 태어났음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진정 축복은 하느님을,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된 축복입니다. 바로 제2독서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가 우리를 대표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게 된 행복을 우리를 대표하여 고백합니다.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사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되어 성령의 선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축복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예수님을 몰라서 옆에 축복을 놔두고 불행하게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셋째, 축복에 대한 참 좋은 응답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하느님 관상입니다.
이런 응답과 더불어 하느님의 축복을 더 잘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온통 비어 있었던 마음 가난하고 순수한 목자들이 주님을 만나 축복을 받았고 이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 하느님께 찬미, 찬양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축복받은 목자들입니다. 찬미와 함께 가는 축복입니다. 아니 찬미 찬양하는 삶자체가 이미 큰 축복입니다. 어제 읽은 로마인들의 속담인 라틴어 글귀가 생각납니다.
“배가 차면 공부하기가 힘들다(plenus venter non studet libenter).”
읽고 웃으며 공감했습니다. 배가 차면 공부뿐 아니라 기도하기도 힘듭니다. 배를, 욕심을 비워야 순수한 빈 마음에서 찬미와 감사의 기도도 샘솟고 비로소 행복한 축복의 삶입니다.
관상가의 행복, 신비가의 행복 역시 최상의 행복입니다. 바로 오늘 성모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누구보다 큰 시련과 고난을 겪으셨지만 누구보다 관상의 행복을 누린 성모님이셨습니다. 평화의 샘, 관상의 샘같은 성모님의 마음은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이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이렇게 매사 깊이 관조, 관상할 때 주님의 축복을 깨달아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시편 저자 역시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이라 하며 관상가의 행복을 고백합니다.
이런 관상의 열매가 바로 평화입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자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온 세계에 평화의 축복을 가득 내려주십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새해의 첫날입니다.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첫날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에게 축복주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바로 주님의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창조되어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축복으로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겼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입니다.
2017년을 여는 새해의 첫 날이며, 또한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새해의 첫날,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건네줍니다.왜냐하면, 모든 것의 시작이요, 비롯됨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곧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난 한 해의 종이를 덮어버리고, 앞에 놓인 나날의 새로운 백지 위에 무엇인가 새롭게 색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곧 맏배, 첫 자녀, 첫 수확, 첫 봉헌 등 첫 번째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 새해의 이 첫 번째 날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첫 번째 날을 통해 1년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칩니다.
우리는 이 한 해의 첫 날에 ‘천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원, 곧 구원 생명의 시원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다름 아닌 구원자를 낳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시고,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곧 복된 은총의 하늘 문을 여신 성모님을 통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빛을 건네주신 빛의 문이 되셨습니다. 곧 하와가 잠갔던 낙원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듯, 오늘 제 안에서도 그분이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곧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구원한 신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크신 자비, 당신이 하신 일을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되새기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품고 간직하고 내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새해 첫날에, 천주의 모친 축일을 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임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살아가라는 희망의 호소요, 외침이라 할 것입니다.
새해의 첫 번째 날,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웃에게 축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소명을 거듭거듭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축복을 빌어주면, 그렇게 축복을 베풀어주시리라는 약속도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새해 인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복을 빌어주면, 복이 흘러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새해인사는 성사적인 의식이 될 수 있습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시화하는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더더욱 많은 축복을 빌어주고, 믿음으로 빌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이 새해 첫 아침!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어둠을 가르고 첫 새벽을 달려와 구세주를 찬양하였듯이, 기쁨과 희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쁨과 희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축복을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 윤경재 요셉 -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루카2,16~21)
2017년 닭의 해가 밝았습니다. 새벽닭이 울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정했던 베드로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듯이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국정 혼란이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아 부끄러운 눈물이 저절로 흐릅니다.
우리나라 백성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하나같이 우상의 굴레에 빠져 헤맨 한 해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모두 권력의 우상, 돈의 우상, 헛된 명예의 우상에 빠졌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치인, 언론인, 경제계, 노동단체, 학계, 종교계 누구하나 책임지려하지 않고 서로 네 탓만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어리석은 대통령을 뽑은 국민도 책임이 큰데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반성하기보다 한풀이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여전히 권력의 우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번일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하며 자기들은 다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네도 똑같이 어떤 우상 숭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 상태로는 언제 어떻게 이와 같은 전철을 밟을지 모릅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라고 자신하던 베드로도 스승 예수께서 도망가지 않고 카야파 일당에게 붙잡히자 그만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여태껏 지켜온 스승께 대한 믿음을 한순간에 져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이 무서워 자신 안에 예수께서 뿌려주신 씨앗이 터져 막 자라나던 신의 속성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입니다. 무력하게 권력의 우상에 무릎을 꿇은 셈입니다.
평소 견원지간 같았던 바리사이와 카야파 일당은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예수가 자신들 입맛에 맞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예수를 처단하자는 데 한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인간은 늘 그랬습니다. 말로는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막상 메시아가 나타나면 거부했습니다. 자기들이 잡고 있던 우상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손에서 놔야 새로운 것을 잡을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온통 우상 천국입니다. 청소년들은 이이돌이라는 우상을 바라보며 자라고 학부모는 성적과 대학이라는 학벌, 직장인은 돈과 재벌이라는 우상에 놀아납니다. 언론인과 학계도 명예와 말발이라는 우상에 빠졌고 정치인은 권력의 단물에 젖어 헤어날 줄 모릅니다. 있는 자는 자기가 쥔 것을 잃기 싫어서, 없는 자는 안일함에 빠져 우상이 우상인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평화의 땅, 안식의 땅, 자유의 땅에서 “이리로 오너라.”고 손짓하는 예수를 향해 우리도 베드로처럼 그저 손만 내젓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나는 그 땅을 모르오. 나는 신의 속성을 모르오.”라고 소리치면서 말입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는 요즘 말로 철저한 흙수저로 오셨습니다. 자칫하면 애비 없는 자식이 될 뻔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삶도 철저하게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줄 알았습니다. 남이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주라는 삶의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우상 숭배로 유혹했어도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 선물은 구유라는 겸손이었으며 두 번째 선물은 우정이라는 사랑이었으며 마지막 선물은 십자가였습니다.
겸손과 사랑과 십자가는 우리에게 참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가난해도 행복감을 느끼며, 부자라도 돈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권력이 있어도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모든 이의 종이 되고자 합니다. 적게 갖고 많이 가진 것이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는 상태가 평화입니다. 한 달란트를 쓸 능력이 되는 자와 열 달란트를 운용할 능력이 되는 자 모두 아버지의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이 바로 평화입니다.
눈물은 인간을 정화하는 힘이 담겼습니다. 베드로가 첫 새벽닭이 울자 자신의 언행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듯이 우리도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우리가 붙잡고 있었던 우상들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구유를 떠올리며 희망의 새해를 맞이 합시다.
자유의 어머니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구약의 예수님이라고 하면 단연 파라오로부터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의 탄생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헤로데의 질투로 죽임을 당할 뻔 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때는 헤로데의 눈을 피해 달아난 곳이 이집트였지만 모세는 이집트 안에서의 어떤 누군가의 도움만이 절실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 어떤 누구도 어디 다른 곳으로 달아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집트 공주가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멸망과도 같은 피해를 줄 누군가가 태어났는데 이집트의 공주가 그를 구해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자 아기는 모두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을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도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명령에 역행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세상과 싸워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또한 이집트 공주처럼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힘에 짓눌려 세상을 이기시고 그 종살이에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습니다. 누가 원수의 자식을 낳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성모님만이 이미 그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신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누가 원수인지 명확히 아시고 계셨습니다.
‘위플래쉬’란 위대한 드러머의 꿈꾸는 한 청년과 또 한 명의 미치광이 지휘자에 관한 내용의 영화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라고 말하며 손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데도 다그치기만 하는 폭군 선생이 천재 드러머를 탄생시키는 내용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선생은 그냥 폭군입니다. 그 선생보다 더 미친 학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선생 또한 그 학생의 공연을 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선생은 본래 자기만 아는 사람이고 마치 파라오처럼 변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학생은 유명한 드러머가 꼭 되어야한다는 꿈을 안고 미국의 유명한 음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플렛처란 유명한 지휘자의 눈에 들게 됩니다. 그런데 플렛처가 지휘하는 밴드는 그야말로 무한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드러머도 세 명씩이나 되어 미친 듯이 노력하지 않으면 악보나 넘겨주어야하는 보조로 바로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인공 앤드류는 여자 친구까지 버려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미쳐야만 잔류가 가능한 그 밴드를 위해 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치 못할 사고가 생겨 공연에 늦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앤드류를 이해하지 않고 그를 잘라버립니다. 애인과 심지어는 가족, 친구들까지 포기하고 그 선생의 말만 따라 손이 터져라 드럼을 두드렸는데 결과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동안의 노예생활 고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망해버린 앤드류는 그 선생의 폭력적 가르침에 의해 자살을 한 한 학생의 조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 선생의 모든 강압을 토로합니다. 그렇게 플렛처는 학교에서 잘리고 맙니다.
시간이 흘러 앤드류가 우연히 들린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플렛처를 만나게 되고 플렛처는 한계 이상으로 학생들을 끌어올리려던 것뿐이라며 미안하다고 앤드류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앤드류가 다 외우는 위플래쉬란 곡으로 자신이 이끄는 밴드로 경연에 참가해보자고 제의합니다. 앤드류는 다시 음악을 할 수 있어 기뻤지만 공연 시작 바로 전에 표정이 바뀐 플렛처는 “네가 나한테 한 거 다 알고 있어”라고 하며 연주곡을 위플래쉬가 아닌 앤드류가 모르는 곡으로 시작합니다. 미래 연주자를 찾으려 몰려든 전문가들 앞에서 그의 연주가 형편없게 만들어 그가 영원히 음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앤드류는 아직도 자신이 플렛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에 한탄하며 무대를 내려옵니다. 그러나 다시 올라가 혼자 미친 듯이 드럼을 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위플레쉬. 어차피 망쳐버린 인생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이에 함께 있던 단원들도 그의 드럼에 맞춰 위플래쉬를 연주합니다. 관객이 지켜보고 모든 밴드 단원이 엄청난 몰입도로 연주하는 위플래쉬를 끊었다가는 자신의 커리어가 위험해지는 상황. 플렛처는 결국 드럼에 맞춰 지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볼 수 없었던 위대한 연주가 완성된다는 내용입니다.
앤드류는 플렛처라는 선생에게 먼저 인정을 받고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생은 아이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완전한 밴드를 만들어 명성을 유지하는 것뿐, 그들에 대한 참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너희들을 위한 거야”라고 하며 다그칩니다. 그의 노예가 되어있는 많은 이들 중에 나중에 완전히 미쳐버린 앤드류만이 대들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플렛처를 따르는 게 아니라 플렛처가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자유로운 영혼을 통해서 진정한 한계를 뛰어넘는 음악을 사람들이 듣게 된 것입니다. 그의 체제 안에서는 그저 세상에서 잘 한다는 정도였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니 무아지경의 음악이 솟구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아의 압제로부터 고생하며 죄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오직 성모님만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돌에 맞아죽던 간음한 여자라 불리던 아무 상관 안 하는 분이셨습니다. 가장 약해보였지만 가장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그분의 발밑에 잠잠히 밟혀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처지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뱀이란 세상 교만이나 명예, 쾌락이나 편안함, 돈이나 영화 등을 원하는 이들을 유혹하여 노예로 삼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을 전혀 바라지 않는 성모님과 같은 분에게는 그저 지렁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이처럼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바로 세상에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잃을 것이 있으면 그것에 얽매여 하느님의 아드님을 받아들을 자유를 잃게 됩니다.
저와 함께 일하고 계신 관리장님이 하느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한 15년 전 기적과 같은 일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분은 농사를 짓고 계셨고 논에 불을 질러 태우신 다음 다 꺼진 것을 확인하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뒤를 돌아보더니 산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분명 자신의 밭에서 옮아 붙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관리장님은 위로 뛰어올라가서 옷에 불이 옮아 붙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불을 껐고 아내는 소방서에 전화하러 뛰어 내려갔습니다. 불은 바람을 타고 나무에서 나무로 옮아 붙었기 때문에 그 훨훨 타고 있는 화마와 혼자의 힘으로 싸우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다 포기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람이 산 밑으로 불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눈을 들어 동네 사람들이 뛰어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들이 이상하게 불이 다 꺼졌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바람은 정말 위에서 아래로 불고 있었고 그렇게 훨훨 타던 불이 순식간에 꺼져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듯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께 맡겨야만 하는 처지까지 사람을 끌어내리십니다. 그래야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잃을 것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 온전히 매달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노예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가 없다면 예수님을 세상에서 구해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세상의 원수를 드러나게 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불이 나서 온 산이 아주 멀리까지 다 타버린 때가 있었는데 그때 며칠 동안 자신의 돈으로 밥을 사 먹으면서까지 불을 끄러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의 고마운 생각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그때 타 버렸을 그 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좋아하게 만드는 자아에 사로잡혀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모님처럼 자유롭게 당신께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 당신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감사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에 좋은 것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목숨을 잃어도 감사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세상에 구원을 낳으실 수 있으셨고 하느님의 어머니까지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성모님을 닮으려면 잃어가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연습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공유하는 평화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새로운 한해의 문을 열며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를 주시고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평화가 온 세상에 스며들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조금은 더 의롭고 살만한 삶의 지평이 열리길 희망합니다. 우리 함께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자신과 이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시길 기도해야겠습니다.
새해 첫날 우리는 제1독서에서 그 유명한 ‘아론의 축복’을 듣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주님의 축복이란 한마디로 우리가 행복의 근원이요 선 자체이신 주님과 함께하며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축복의 결과는 악으로부터의 보호, 죄의 용서인 자비, 평화 셋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 안에 머물기만 한다면 우리 이 모든 것을 거저 받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새해 첫날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하면서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모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나누어야겠지요. 축복은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사제도 사실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중개자일 뿐이지요.
우리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의 축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평화이신 주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해주시기를 빌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란 하느님이 계시는 상태로서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요.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인데 이는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다’는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주러(요한 14,27)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축복’(사도 3,26 참조) 자체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찼을 때’ 세상에 오시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시어 인간의 법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갈라 4,4-6). 우리는 그분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어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새해에도 여전히 시련과 고통,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우리 사회도 기대한 만큼 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성사적 축복’ 속에서 고통을 이겨나갈 힘을 받게 되고 서서히 행복을 향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험한 세상 한 가운데서도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가난한 하느님을 알아본 목자들의 맑은 영의 눈으로 내 삶의 역사와 이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공유하려면, 성모님처럼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루카 2,19) ‘거룩한 수동의 자세’와, 주님을 찾아내 찬미를 드린 목자들처럼(2,16-18) 적극적으로 평화를 실천하고 나누는 ‘거룩한 능동의 몸짓’이 필요하겠지요.
평화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과 세상을 축복하는 첫 걸음을 시작하는 복된 새해 첫날이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만이 성모님을 사랑한다(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박영식 야고보 신부님
루카복음 2,16-21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메시아로 등극하면서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로 주셨다(요한 19,26-27). 이 제자는 예수님 어머니를 얻음으로써 예수님의 형제가 된다. 그는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는 성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받들어 모시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제자는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한다. 성모 마리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가 되는 특혜를 받으셨다는 뜻이다. 이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덕분에 구원 받으신 데서 비롯된 은혜이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라는 말은 여신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성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가르침을 온 교회의 신앙유산으로 선포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들로 이루어지는 영적인 가정을 만들고(루카 8,19-21) 당신의 어머니를 이 가정의 어머니로 주셨다. 동정의 몸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은 역시 동정의 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낳는 은혜를 받으셨다. 성모님은 그들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과 구원을 제자들에게 증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성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고통 속에서 성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아 예수님과 일치하여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게 된다.
성모님의 모태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세례를 받는 이들 마음속에 잉태되신다.
“그러나 사는 이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살고 계시는 분은 오히려 그리스도이십니다.”(갈라 2,20)
성모님은 당신의 영적인 자녀들인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작아지고 예수님이 더욱더 커지실 있게 우리에게 믿음의 눈을 뜨라고 이르신다. 성모님의 간절한 ㅎ희망은 우리가 제2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녀들과 함께 날마다 성모님께 하느님을 더욱더 강렬하게 체험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 자녀들이 그렇게 되고, 자기들도 어머니를 본받는다. 이 전통이 3대까지 간다고 한다. 어머니가 성모님을 사랑하면 자녀들도 어머니를 본받는다. 어머니는 어린이의 최초의 스승이다. 어린이는 어머니를 모방함으로써 인생을 배우고, 도덕을 배우고, 사랑을 배운다. 인생에서 배워야 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배우는 일이다. 그것이 인간의 행복과 사회존립의 근원이다. 이런 뜻에서 어머니는 가정을 구원하는 사람이다.
<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자세 >
여운동 바오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하느님! 감사합니다.
새해 새날을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한 해도 당신의 보살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2017년이 시작되는 새해 첫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기억하면서 성모님의 신앙을 깊이 되새기는 날이 바로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날을 보내면서 성모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자세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잉태소식에 성모님은 “피앗-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받아들이는 순종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순종의 자세로 인해 성모님은 천주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이런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의 자세는 성모님 전 생애의 기본 바탕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십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무슨 뜻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자세로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신앙의 자세와 믿음의 자세, 순종의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 모두는 성모님의 이런 믿음과 순종의 자세를 본받으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검증 가능한 것들만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런 이 시대 풍조에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자세,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기쁜 삶인가를 보여주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아 우리들도 믿음과 순종의 자세로 이 한 해를 살아야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기쁠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듬뿍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듬뿍 받아 기쁘게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최원석 님
세해가 밝았습니다. 어제 잠은 잘주무셨는지요 ? 어제 밤에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종의 타종을 텔레비젼을 통하여서 보았습니다. 보고 한편으로는 새해에는 우선은 다니고 있는 학교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요 그리고 우리 식구들 건강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지도하는 교수님의 건강을 기원하였으며 학교 마치기까지 교수님과 잘 마무리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보니 무엇인가 허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허전하게 만들었을까 ? 그것은 성덕에 이르는 것을 주님께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신앙안에서 주님을 내 중심으로 모시고 그분을 향해서 나의 성덕으로 완전에 이르는 길을 우선은 아뢰는 것을 빼먹었다는 것이지요 일번이 성덕이요 두번째도 성덕이지요 ..항시 주님의 성덕으로 이끌어 달라는 기도를 하여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이 아기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목자들에게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주십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어찌 이렇게 평범한 모습의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방식과 다른 것 같습니다. 주님은 모든이가 만날수있도록 문턱을 낮추셔서 누구나가 만날수 있도록 하신것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살을 맞대고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스스로 부딛히면서 우리 인간사를 격어보신것이지요..주님은 당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주도권을 내려 놓고 인간과 똑 같은 모습으로 격으시지요 그리고 인간의 사고 방식을 먼저 익히시고 우리와 같이 할수 있는 방법을 몸으로 익히십니다. 그것도 인간과 똑같이 넘어지기도 하고 사소한 것 가지고 싸우기도 하시고 그러면서 우리 인간의 삶을 익히시고 우리를 이해하시기 시작하신것 같습니다. 인간들 안에서 인간이 원하는 것을 알고 같이 아픔을 나누신것 같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주님은 극히 겸손하셨구나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당신을 나의 중심으로 맞는 것의 시작이 겸손이라는 것을 .. 세상속으로 녹아 들어서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 받들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낳는 내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기도해 봅니다. 아멘
성모님을 닮자!^^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병신년을 잘 보내고 정유년을 잘 맞이하셨나요?
병신년에 병신 같이 살았던 것들을 다 보내버리고 새해엔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하지만, 저는 형제 자매님께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시고 그 복을 이웃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복의 통로가 되세요!"라고 새해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복의 통로가 된다면 세상은 조금은 더 밝아지고 희망의 메시지가 조금은 더 크질 테니까요.
형제 자매님,
새해 새아침에 드리는 미사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라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요 우리가 닮아야 할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그러니 새해 첫날에 모델이신 성모님을 새롭게 기억하면서 그 모범을 따르고자 결심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우리가 성모님의 어떤 면을 닮아야 하겠습니까?
사실 성모님은 어머니의 모범이시고, 아내의 모범이시며, 과부의 모범이시고, 동정녀의 모범 등등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닮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천주의 성모이신 마리아” 즉, 예수님을 낳아주신 구세주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오늘 날의 어둡고 실망에 젖어있는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지금 우리는 큰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탄핵에 까지 이르게 된 최순실 국정농단이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어디까지 파내야 해결될 것인지, 그리고 나라의 경제는 점점 얼어붙고 있고, 북한의 핵문제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고,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 역시 악화일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새롭게 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나라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은 모두가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자신은 욕먹지 않으려고 모르는 것처럼 넘어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자신의 몫을 챙겨보려고 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 것이겠죠?
뿐만 아니라 올바로 선택하지 못한 국민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이 기회에 모두가 정직해 지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다면 우리는 훨씬 더 발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수가 있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니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 각자가 마리아처럼 사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삶은 참으로 단순했습니다.
마리아는 “네”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만을 살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든 요구에 대해서는 즉시 “네”라고 대답하셨으며,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시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지향은 완전히 무로 돌리셨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낳아주셨고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매일 복음말씀을 묵상하고 듣게 된 말씀에 대해서 “네”라고,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면서 그것을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낳아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의지가 이성의 지배를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서 구실을 찾아냅니다.
우리의 실천을 어렵게 만드는 그 사람이 나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언제나 “네” 그리고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를 살 수가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참으로 우리 모두가 마리아를 닮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새로운 우리가 되어 새해를 열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초라한 마구간에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가 있습니다. 거칠고 냉혹한 세상의 검은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새하얀 아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가축의 여물통 속 건초더미 위에 아기의 세상 첫 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삶에 지쳐 쓰러진 부모의 숨죽인 한탄소리가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새벽어둠 속으로 퍼져갑니다. 가난한 시골 어느 구석 작은 마구간을 서둘러 찾아온, 가축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하느님 닮은 모습마저 빼앗기고 매서운 밤 추위와 온 몸으로 맞서야만 하는 목자들의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가 합쳐집니다.
기쁨과 희망 그리고 평화 가득하기를 바라는 새해 첫날은 이렇게 열렸습니다. 새해를 맞아 하루 사이에 기적적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분열과 다툼이 평화로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시던 2000년 전의 그날이 오늘도 그대로 이어지는 아픈 현실은 우리의 자그마한 꿈을 허락하지 않는 듯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 첫 날인 오늘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기쁨의 노래, 희망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지독한 가난, 만삭의 몸마저 등 돌렸던 뭇사람들의 냉혹함에 무릎 꿇지 않고 가난하고 초라한 몰골의 목자들이 전해준 믿기 어려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정성껏 마음에 새겼던 성모 마리아처럼, 쉽사리 바뀔 수 없는 고통스런 현실을 탓하지 않고 예수 아기,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가난함 안에서 오히려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희망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렸던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뜻을 서로 나누고 곱게 담음으로써 고요하고 거룩한 평화를 이루었던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목자들처럼 다시 한 걸음 내딛고 싶습니다.
아니 새해 첫 날인 오늘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기쁨, 희망, 평화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고, 내딛어야 합니다. 기쁨, 희망, 평화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뜻밖의 손님이 아니라, 보잘것없고 가난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미미하기 그지없는 우리를 모든 것을 착하고 정의롭게 이루시는 하느님께 오롯이 맡김으로써 이루어야 할 고귀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탐욕과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의 슬픔을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의 기쁨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나눔의 삶을 산다면, 나로부터 시작한 미미한 아름다운 변화의 물결이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나 홀로 빼앗긴 이들의 남은 것마저 빼앗으려는 절망적인 세상을 억압과 차별 없는 살 맛 나는 희망으로 색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섬김의 삶을 산다면, 나는 언젠가 온 세상을 환히 밝힐 희망의 작은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나 홀로 서로를 향해 비난의 총부리를 겨누는 죽음 같은 분열의 사슬을 끊고 ‘너’와 ‘나’가 갈림 없이 하나 되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공감과 공존,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산다면, 나로부터 뻗쳐나간 평화의 끈은 하나 둘 벗들을 엮어 모든 이에게 이어질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이지만,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오늘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여기, 물리적인 시공간은 우리 힘으로 크게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오늘의 우리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오늘 새해 첫 날, ‘어제의 우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오늘의 우리’가 됩시다. 이기심과 탐욕의 종이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우리에게 비춰주신 기쁨, 희망, 평화라는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의 너그러운 마음 씀씀이와 정의롭고 착한 몸짓을 통해 가족들로부터 이웃, 형제자매, 그리고 모든 이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가난하고 짓눌리고 쫓겨난 벗들에게 아낌없이 나눕시다.
새해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워진 우리가 한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올 한해가, 주님께서 선물하신 새해 첫 날을 함께 연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향했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탄생을
드러내십니다.
이끄심의
모든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하느님의
가난함입니다.
가난함이란
이 모든 삶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모든 탄생에는
사랑과 보호라는
맡김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하느님께서
오히려 연약한 마리아를
당신의 보호자가
되게하십니다.
은총의 모든 길은
가난한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시고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시고
성장하십니다.
모든 시간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마리아의 삶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지게 하는
순명의 삶이었습니다.
순명의 삶은
나자렛 마리아를
어머니의 삶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지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생생한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세계가
활짝 우리에게
열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셨기에
모든 것은 신비가 되고
사랑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처럼
맨처음과 맨마지막또한
사랑의 하느님이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017년의 모든
시간은 예수님의
탄생속에서
그리스도의 기쁨을
나누셨던 성모님처럼
사랑안에서 살아가는
은총의 모든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다시 사랑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6년 올 한 해도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은혜로운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드디어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사실 새해가 되면 그 해의 마지막 날이 참으로 멀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올해도 참 빠르게 지나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새해 첫 날부터 힘차게 그리고 후회를 최대한 줄여나가면서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후회를 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번 2016년을 많은 기대와 걱정 속에서 맞이합니다. 일 년 간의 안식년을 무사히 마치고, 제게 새롭게 주어진 소임을 시작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16년을 헛되게 보내지 않으면서 의미 있는 시간,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더욱 더 증거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이러한 다짐을 시작하는 새해의 첫 날,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목자들의 아야기를 전해줍니다.
양 떼를 기르던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본 후, 아기에 관하여 천사로부터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지요. 최초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면서 자신이 사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보고 마음속에만 담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이 기쁜 소식을 전했고 동시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했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양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은 들판에 내버려두고 대신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서는 열심히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합니다. 자신의 주 임무라고 할 수 있는 양 치는 것보다 주님에 더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가 기뻐할 일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를 내세우는 데에는 열심 하지만,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목자들처럼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분명히 기쁜 일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힘을 북돋아 주신다는 사실 역시 기뻐할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세상 안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 역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왜 그다지도 인색할까요?
2016년은 세상 안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분명히 큰 기쁨 속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양면의 감정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은희경).
새해의 결심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결심을 새롭게 합니다. 그런데 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예 결심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쓸데없는 결심을 해서 좌절하기보다는 그냥 열심히 살겠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어떤 연구에 따라면 목표를 세워 놓고 새해를 시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목표를 달성하는 비율이 열 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심을 한 사람 중에서 50퍼센트는 6개월 안에 목표를 완전히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심조차 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지요. 가능성이 높은 데에 투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런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루라도 결심한 것을 실천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결심을 세워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는 이 새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결심이 좋은 결실을 가져올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시길 저 역시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6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0년 전인 2006년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지냈습니다. 20년 전인 1996년에는 세검정 지냈습니다. 30년 전인 1986년에는 군대에 있었습니다. 40년 전인 1976년에는 중학생이었습니다. 50년 전인 1966년에는 제가 태어난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50년도 의미 있겠지만 저의 어머니에게 저의 50년은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늘 자식인 제가 자랑스럽고, 똑똑하고, 대견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80이 넘으신 어머니께서는 새해가 시작되는 오늘도 변함없이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는 미사 중에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신문에서는 새해에 새롭게 바뀌는 것들에 대해서 보도를 하곤 합니다. 새해에는 자녀들의 학비를 정부에서 지원해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규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남과 북의 긴장과 갈등이 풀리고 자유로운 왕래의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웃는 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감사드리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부터 저는 매일미사 책을 좀 더 큰 규격으로 바꾸었습니다. 작은 책은 글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책으로 글을 읽으니 잘 보이고, 좋습니다. 오늘 하루가 모이니 지난 50년이 되었습니다. 새해의 첫날 감사와 찬미로 시작하면 앞으로의 시간들도 감사와 찬미가 쌓일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새해의 첫날을 맞이하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례는 새해의 첫날에 두 가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세계 평화의 날’로 정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된 신앙인이며,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위한 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몸에 10개월간 머물다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어머니의 몸이 우리의 세상이었고,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나와서도 어머니의 끊임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새해의 첫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며,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고, 가난한 이를 배불리시는 주님께 찬양을 드렸던’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들 모두가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돌아보면 2015년도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사건과 사고, 우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희망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희망은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매일이 첫날이자 새날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매일이 첫날이자 새날입니다. 매일이 축복이자 구원이요 영원입니다. 오늘은 ‘자비의 희년’에 맞이하는 2016 새해 첫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2016년 새해 첫날, 자비의 문, 평화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십시오.’라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전 세계가 ‘무관심의 세계화’에 빠졌다고 지적하고, 개인과 공동체, 국가가 회심을 통해 무관심에서 벗어나 연대와 자비, 연민으로 평화를 맺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겐 매일이 하느님의 선물인 첫날이자 새날이요, 축복과 구원의 날입니다. 하느님은 매일, 특히 새해 첫날 오늘 민수기의 말씀(민수6,24-26)대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1.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3.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복중의 복이 하느님의 자녀됨의 복입니다.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바로 축복받은 우리 모두의 삶입니다. 아름답고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대축일을 맞이한 천주의 성모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다음 대목이 축복 받은 성모님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2,19)
바로 이 모습이 고결한 영혼들의 특징입니다. 성모님의 심원한 내면을 보여줍니다. 성모님같은 신비가는 결코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깊고 고요한 침묵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런 성모님을 묵상하던 중 아주 오래 전에 바닷가를 지나며 써놓은 ‘바위섬’이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바위섬을 배우라 대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지키지도 않는다
비, 바람, 파도에 고스란히 내어 맡겨, 고스란히 받아들여, 깎이고 닦여
자기완성에 이르지 않았는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기 완성에!-1997.11.10.
그대로 성모님은 물론 성인들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시간따라 흐르는 인생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는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에 정주의 바위처럼 머물러 있고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강물입니다. 내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대로 있고 시간의 강물만이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내일은 오늘에 이어 어제로 계속 흘러갑니다. 하느님은 시간의 강물로 우리를 조각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묵상중 깨달음처럼 떠오른 시요 생각입니다. 바로 이런 이런 이들이 주님 안에 정주한 축복 받은 자들이요 세가지 삶의 특징을 지닙니다.
1.생명과 빛이 충만한 삶입니다.
2.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삶입니다.
3.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삶입니다.
텅 빈 허무가 아니라 이런 텅 빈 충만은 그대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제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겸손과 순종의 회심의 삶에 항구할 때 이런 충만한 축복의 삶입니다. 그대로 정주의 축복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안에 정주한 우리 모두를 당신의 생명과 빛, 은총과 진리,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오늘 미사중 화답송 가사와 곡이 참 흥겹고 아름다웠습니다. 다음 화답송 노래(손상오 곡)를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면서 행복한 하루, 아니 행복한 일년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아멘.
♣ 웃는 얼굴로 인자하게 시작하는 새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해 첫날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시간이 아니라 창세기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은총의 때’(카이로스)입니다. 따라서 이 첫날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올 한해에도 주님 친히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희망이 되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어떻게 새로운 한해를 살 것인지 성찰해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시며 인자롭게 바라보시고, 호의를 베푸시어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민수 6,25-26 참조). 주님께서는 나와 따뜻하고 좋은 관계를 맺으시어 나에게 선(善)을 발생시키시고, 의미가 되어주시며 긍정의 의식과 시각을 깨우쳐주십니다.
새해를 사는 으뜸가는 태도는 바로 주님의 인자하신 얼굴, 웃는 얼굴을 기억하고, 악을 거슬러 선(善)을 행하며, 절망적이고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으며, 긍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곧 하느님을 반사하는 빛으로서의 삶이며, 그분의 혼을 지니고 살아가는 복된 삶입니다.
나아가 새해를 시작하며 되새길 점은 모든 축복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모든 이를 축복해 주시고 지켜주시며, 은혜와 평화를 베풀어주십니다(6,24-26). 이 근본을 망각할 때 하느님을 자신 아래 두는 교만의 늪에 빠지게 되고, 감사하는 마음도 식어버리며 충만한 행복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나 자신과 존재하는 모든 것, 시간과 만남과 하는 일을 축복해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고(갈라 4,5),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4,6). 새해에는 우리와 함께하도록 보내주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철저히 살아냄으로써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물 수 있어야겠습니다.
목자들의 태도에도 주목해 봅시다. 그들은 ‘베틀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고,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을 말을 알려주었으며, 자신들이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합니다(루카 2,16-18). 새해에는 우리도 목자들처럼 단순하고 소박하며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알아보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갔으면 합니다.
또한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내서’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전쟁과 기아, 폭력과 탄압, 배척과 차별, 비인간적인 냉정함을 사랑의 불로 태워버렸으면 합니다. 올해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와 함께 웃는 얼굴로 인자하게 주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한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
--박윤식 님--
한 해의 시작을 성모님의 대축일과 함께 시작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새해 아침이 밝았다. 만나는 이 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 복을 기원하는 것은 모든 이의 염원이리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복음에 귀 기울이자. 순박한 목자들이 기쁨에 겨워 아기를 경배하러 달려오고 돌아가는 움직임 한가운데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린다. 그분께서는 목자들이 전해 준 이야기를 곰곰이 새기고 계신다. 이제 예수님을 동반하시는 성모님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믿는 이에게는 과연 어떤 게 복 받은 삶일까?
아브라함의 삶은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 준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 하셨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거의 죽음이다. 그러나 그는 그분께서 일러 준대로 고향을 떠났다. 그런데 그분 뜻에 따른 그 길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련과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걸 겪으면서 그 안에서 그분을 깊이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알게 된다. 어떤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믿는 걸 깨닫는 게 그분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그렇게 됨을 믿는 삶이 믿는 이에겐 복중의 큰 복이리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의 일화다. 그는 예수님을 잘 드러낼 것 같은 19세의 젊은이 ‘피에트로 반디네리’를 그분의 모델로 그렸다. 그 뒤 6년 동안 11명의 제자를 그렸고, 마지막으로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특징을 잘 담을 수 있는 모델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 찬 어느 부랑자에게서 유다를 느꼈고, 그를 모델로 배반자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그런데 그자가 바로 그 옛날 예수님의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세월은 이렇게 죄인을 성인으로, 성인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새해를 맞이해 주어진 새 365일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낼지를 내심 그려보자. 지나가는 날들을 그냥 보내지만 말자. 예수님의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던 성모님처럼 우리의 시간들을 주님 안에서 하나하나 되씹으며 의미를 지닌 삶을 살도록 하자. 지나간 세월이 모여 평화만이 드러나는 삶이 되도록 하자.
‘그때에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6-19)
이렇게 새해 첫 복음은 예수님 탄생을 가장 잘 기억하고 계실 성모님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되새겼던’ 이야기이다.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남편 요셉의 거친 목수의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곳은 누추한 구유였다.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맨 먼저 드린 이는 그 지방 밤을 지새우던 지극히 가난한 목동이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 축일을 지낸다. 그분을 두고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한다. 성모님은 언제나 그분 말씀대로 사셨고 그분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으셨기 때문이리라. 하느님께서 또 새로운 한 해를 그저 주셨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그분의 축복을 가득 받는 해가 되길 진심으로 빌자. 온 인류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기자.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이 우리 구원을 그분께 전구하도록 늘 기도드리자.
하느님 안에서 늘 새롭게
-이정은 신부님-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하루 2015년을 살아왔던 시간을 되돌아보며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해 미련과 아쉬움을가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좀 더 잘할 걸’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할 걸’ ‘아껴 쓰고 절약할 걸’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실 여느 때와 달리 평범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시간상의 느낌 때문에 내 삶의 모든 것이 달라 보이고 어제의 일은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오늘은 2016년이라는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이지만 생각을 살짝 바꾸면 일상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러니 미완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 된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상 안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한다면 내 생활도 그만큼 알차게 채워질 것입니다.
또한 내 일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충실히 살아간다면 매일의 삶 안에서 펼쳐질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를지라도 내가 거쳐온 시간들을 찬찬히 묵상하면 분명 삶 안에서 울려퍼지는 깨달음의 향기를 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 앞에 펼쳐지는 하느님이 뜻이 무엇인지 늘 곰곰이 생각하셨던 성모님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민수 6,2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 가족 여러분께 문안과 축복의 인사 올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아멘.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그대를 향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네요.
이 축복의 말씀을 감사히 받아 안으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이 축복의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올 한 해 매일의 삶이 이런 축복을 받아 안고 그 축복을 나누는 나날 되시길 두 손 모읍니다.
<관상과 투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루카 2,19-20)
때로는 다른 이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때로는 끝 모를 나의 깊숙한 속까지 들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
더 나은 나로 가꾸고 싶습니다.
때로는 당신의 벗이 되어 당신을 보듬고
때로는 당신이 되어 당신 깊은 곳에 머물며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보고 느껴
당신과 나를 우리로 만들고 싶습니다.
때로는 한걸음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고
때로는 세상 가장 깊은 곳에 몸을 던지며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아름다운 세상 가꾸는 자그마한 도구가 되고 싶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마음이 되어 세상을 향해 외치고
때로는 세상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간구하며
하느님과 갈림 없는 세상을 일구기 위한
거룩하고 선한 변혁에 열정으로 몸담고 싶습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주신 날.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새날 새 아침에 떠오르는 저 찬란한 태양은 나를 위하여 떠오르듯이 주님은 나를 위하여 새해 새날을 주시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그러나 찾오신 주님에게 문을 열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태양이 뜨는 곳으로 몰려가는 인파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복을 비는 사람들 우리는 어두운 성당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기도를 들이면서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른 우리수도원은 전원이 참석하여 아침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서 재롱쟁이 원숭이처럼 모두가 주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찬미예수,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 인사가 각자의 마음속에 주님의 현존을 인정하고 각자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이해 마지막 날 우리는 잘 살았노라 멋진 삶을 살았노라 하며 병신년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도록 주님과 함께 모든 분들에게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은총 충만이 받으시고 행복하게 새해를 맞이하세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낡은 달력을 내려놓고
새 달력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을
갈라놓을 수 없듯이
하느님과 우리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믿음의 힘은
가난한 마음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내려놓는 기쁨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지금 이대로도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시작은 늘
성모 마리아처럼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축복은 고요와 침묵으로
더욱 밝아져옵니다.
새로이 시작하는 시간은
성모 마리아처럼
내면 깊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 사랑을
의심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뜨거운 심장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뜨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정화시키는 건
하느님과 우리의
뜨거운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의 여정처럼
신앙의 여정은 우리또한
어머니로 초대받는
어머니가 되는
어머니의 여정입니다.
어머니의 여정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기도의 출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을 봉헌하는
희망찬 기쁨의 시간입니다.
봉헌의 또 다른 이름은
분명 하느님을 향한
희망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2014 새벽을 열며’라는 파일을 열어서 묵상 글을 썼지만, 오늘은 워드 프로그램을 클릭 한 뒤에 ‘새 문서’ 하나를 띄운 뒤에 새롭게 저장했습니다. ‘2015 새벽을 열며’라는 파일명으로 말이지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2015년. 을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5년의 첫 번째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작성하기 위해 ‘새 문서’를 띄워서 아무것도 써지지 않은 곳을 보면서 주님께서 ‘이번에도 새 노트를 하나 주셨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새 노트 줬으니까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라. 조금 잘 좀 살아보자.”
2014 년 12월 31일까지의 과거라는 시간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부터이지요. 그리고 그 지금부터라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음을 기억하면서 개척해야 할 미래를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체중이 130Kg이나 나가게 되자 걱정이 되어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분에게 물었지요.
“지금 130Kg이나 되시는데, 그러면 체중이 제일 적게 나갔을 때는 얼마였죠?”
그러자 이분은 자신 있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3Kg이요.”
하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의 체중이니까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물은 시간은 먼 과거의 시간인 태어날 때가 아니라 바로 최근의 일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다름 아닌 ‘지금’입니다. 먼 옛날의 일도 아니고, 먼 훗날의 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느끼고 함께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새해인 오늘은 교회력으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즉,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이 한 해를 봉헌하는 마음을 갖는 날이지요. 그래서 올 한 해 잘 돌보아 주시길, 보다 더 주님의 뜻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달라고 청하는 날인 것입니다.
성모님께 전구하면서 과거의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닌, 현재라는 시간에 충실하면서 2015년 을미년이라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 노트’를 잘 작성하시길 바랍니다. 천주의 어머니이시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어머니이시기도 한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한창훈).
실패의 벽(‘좋은생각’ 중에서)
미국 신용 보증 회사 던&브래드스트리트에는 ‘실패의 벽’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있다. 이 벽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1. 실패한 순간을 자세히 기록하세요.
2.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쓰세요.
3.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실패의 벽이 만들어진 계기가 있다. 회사 창업자인 제프 스티벨은 어느 밤 사무실로 돌아와 벽에 자신의 실패담을 적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부끄럽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었다.
그러자 직원들도 실패담을 벽에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언제 실수했는지, 실수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쓰고 그 밑에 이름을 적었다.
이 벽은 어느새 직원들의 실패담으로 빼곡하게 채워졌고 ‘실패의 벽’으로 불렸다. 또한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과거의 실패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지요.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 그 자체보다는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내 닫힌 마음이 문제인 것이지요. 2015년 을미년 새해는 열린 마음으로 힘차게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실패는 단지 과거의 한 사건일 뿐임을 기억하면서, 내가 더 많은 새로움이 열려 있음에 감사하고 기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다짐의 큰 기류가 2015번째 반복되니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새해는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2015년 되는 해라는 것이 감탄스럽습니다.
나의 생일도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19XX년 1월21일이라고 반복해 봅니다.
세계인들 거의가 이 해를 기원으로 쓴다는 게 문화적 기적 같게도 보입니다
. 태어난 모두가 예수님과 같은 인간으로 살자는 문화적 의미도 맞지 않나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들은 매해 예수님의 뜻을 대신 펴려 해야겠지요 .
그런 다짐의 큰 기류가 2015번째 반복되니 늦었지만 금년엔 더 펴 봅시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21)”
<성모님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없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님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의 삶을 시작하였듯이, 우리 또한 성모님의 대축일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것 같습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머니’라는 말을 들으면 어머니의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까? 나를 잉태하고 계실 때의 모습이나 나를 낳아 주실 때의 모습이 떠오릅니까? 그런 건 사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의 어머니’라 하면 나를 키워주시면서 해 주셨던 그 많은 희생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셔서 어머니이신 것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어머니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마치 동물에게 키워진 사람처럼 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자녀 또한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시기에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고 감사해 하지는 못합니다. 가끔은 “엄마가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 어머니로서 해 주신 희생과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참으로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에 다른 어떤 관계도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남자들은 특별히 군대에 가서 인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창옥 강사의 소탈한 어머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지 못해 글도 못 읽고 나이 어려 청각장애가 있는 남편을 만나 고생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막내인 김창옥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힘들게 하는 개구쟁이였습니다. 못 배운 엄마를 이용해 영어사전 사 달라, 영한사전 사 달라, 한영사전 사 달라, 프라임 사전 사 달라, 에이스 사전 사 달라고 하며 돈을 뜯어내 다른 곳에 쓰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나이키 신발을 안 사줘서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방에 틀어박혀 어머니를 속 썩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글을 모르신다는 이유로 김창옥은 성적표를 위조하기 일쑤였고 그렇게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공부를 못 해 공고에 갔고 그래도 대학에 가고 싶어 시험을 쳤지만 매 번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다른 집 엄마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 창옥이는 돌 머리여!”라고 하는 것을 듣고는 자살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까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무시해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일 것입니다. 제주도 탑동 바닷가에서 자살을 생각할 때 어떤 여인이 물에 뛰어드는 환시를 보고서는 겁이 나서 죽겠다는 생각을 접고 해병대에 들어갔습니다.
군대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민지원을 나갔을 때 한 집에 홍시가 유난히도 많이 달린 나무가 보이더랍니다. 어머니가 치아가 안 좋으셔서 홍시를 좋아하시는데 문득 감나무를 보니 어머니가 생각이 났습니다. 선임 병들 몰래 전화부탁을 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마당의 수백 개의 감이 모두 자기가 군대 들어오기 전까지 어머니에게 잘못 했던 일들로 보이더랍니다. 어머니는 말을 못하고 훌쩍이는 창옥이를 단번에 알아보고 먼저 말을 꺼내셨습니다. 왜 말을 안 하느냐고 물을 때 김창옥은 울면서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마 홍시 좋아하잖아... 흑흑...”
그리고는 첫 월급을 모조리 봉투에 넣어 감을 사 드시라고 어머니께 보냈습니다. 제대하고 언젠가 서랍을 열다가 자신의 편지들이 가지런히 정열 되어 있고 돈도 봉투마다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내어주실 수 있어도 자녀가 힘들게 번 돈은 차마 쓰지 못하고 나중을 대비해서 모아두시는 분인 것입니다.
보통은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부모의 사랑은 크고 깊기 때문에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면 그 깊이를 재어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마음을 알게 될 때에야 참으로 자녀가 되는 것 또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참으로 부모님으로 여기게 될 때에야 참으로 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듣고 성령으로 가득차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인사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주님의 어머니’라 했다면 그 말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성모님이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의인은 될 지언 정 ‘하느님의 어머니’와 같이 칭송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어머니’와 ‘하느님의 어머니’가 그렇게 큰 차이일까요? 어머니라고 했다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육체적으로 낳아주기만 했다고 해서 성령께서 엘리사벳의 입을 빌려 성모님을 ‘내 주님의 어머니!’라 부르게 하였겠습니까? ‘어머니’란 단어는 낳아주고 길러주고 생명을 주어 자녀를 성장시키는 총체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무어라 다른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어 그냥 어머니라고밖에는 쓸 수 없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라고 하실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을 다 포함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신 것처럼, 어머니라 함은 우리가 믿는 어머니의 모든 면을 포함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께서 당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당신이 그리스도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소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주님의 어머니”로 불리셨다면 그만큼 큰 역할을 해 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존중받아 마땅하신 분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 하느님은 사랑과 같은 분이란 뜻일까요, 아니면 진짜 사랑이시란 뜻일까요?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라 할 때 어머니와 같은 분이란 뜻일까요, 아니면 진짜 어머니란 뜻일까요? 성모님이 어머니라 했다면 진정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것이고 그 어머니로서 해야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 그 어머니를 참으로 당신의 어머니로 여기지 않으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아버지의 아드님이 되시기 위해서 그분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면, 당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도 그러한 자세를 보이지 않으셨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성령을 통하여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했다고 적혀있는 성경의 말씀을 스스로 위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라고 하시는 분을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로 고백한다면, 그분께서 어머니로 여기시는 분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고백하고 공경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서로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양 키워놓고 발생된 상황을 그렸습니다. 낳기만 했다고 아버지가 아니고 키운 정도 무시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아이와 함께 있어준 시간, 그 시간이 낳아 놓기만 하였다고 부모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 또한 그리스도를 낳아놓기만 했다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불리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당신의 영혼이 동시에 칼로 찔리는 아픔을 겪어 내셔야만 비로소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너무나 힘든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과연 성모님 아니라면 누가 그 일을 겪어 낼 수 있겠습니까? 아드님이 아니면 그 일을 겪어 낼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아드님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어머니의 역할을 성모님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라면 자녀가 살아있는 한 끝까지 어머니입니다. 그렇다면 자녀의 아픔을 똑같이 겪으셨습니다. 그 고통을 함께 겪으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성모 마리아이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성모님의 자녀입니다. 교회의 일원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도 함께 하시고 영원히 우리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드님으로 두실만큼 완전한 어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합당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 또한 자녀로서의 소명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창옥씨처럼 우리가 얼마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는지 깨닫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또한 좋은 자녀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참으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실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들의 자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자녀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성모님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있을 수 없고, 성모님이 없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미사”가 있습니다. 교우 분들이 미사에 참례하실 때 가지고 다니는 책입니다. 그날의 독서와 복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매일미사의 묵상 글을 읽고 있습니다. 함께 교구에서 일을 하셨던 신부님의 글도 있었고, 연천에서 국화 축제를 열었던 지금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으실 신부님의 글도 있었고, 지난 1년은 문학과 신학을 접목 시켜서 좋은 묵상 글을 써주신 신부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제 2015년에는 ‘산위의 마을’에 사시는 신부님의 묵상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영적인 비타민을 얻을 것 같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작년 1년 평화신문에 주일 강론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매일 묵상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2015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으로 서로를 감싸주면 좋겠습니다. 비난과 비판보다는 이해와 관용을 먼저 보여 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내가 먼저 해 주면 좋겠습니다.
어제 오후 사무실에서 잠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잠시의 통화에도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이제 80이 되신 어머니이십니다. 새해에는 좀 더 자주 전화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단한 업적이나 능력을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작은 것들이지만 세상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휴지통으로 옮겨 놓으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그만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뜰아래 작은 꽃 한 송이를 심어도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할게요. 미안합니다.’라는 말들은 세상을 그렇게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막강한 군대의 힘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조직에 의해서 이끌어 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와 같은 무서운 법칙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법대로 살던 요셉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마음을 바꾸면서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골의 말구유에서 한 아이가 탄생하면서 구원의 문은 열렸던 것입니다. 양들을 지키던 목동들이 구원의 역사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이면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2015년이라는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 희망, 사랑, 나눔, 희생, 친절, 온유의 물감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때로 고통, 절망, 아픔이라는 얼룩이 질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그림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 분노, 미움, 시기, 질투, 편견이라는 물감으로 볼썽사나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가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총과 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창한 행사나 사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만복(萬福)의 근원이신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기쁨은 피조물에게, 특히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복을 받고 있기에 존재하는 세상 만물입니다.
사람들 역시 종교의 유무에 상관 없이 복을 좋아합니다. 하여 촌스런 이름이지만 '만복(萬福)', '복자(福子)'는 물론이고 '복(福)'자가 들어가는 이름도 무수합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카톡으로 무수히 성탄 카드를 전송했고 또 새해를 맞이하여 새해 축하카드도 받았습니다.
"돌아오는 2015년 을미년 福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2015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천재설소 만복운흥(千災雪消 萬福雲興; 천가지 재난, 눈녹듯 사라지고, 만가지 복, 구름 일 듯 일어난다)"
형제자매들을 통해 예쁜 카드 그림과 함께 전송되온 '하느님의 복'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올 한해 당신이 있어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이런 문구는 올 한해 제가 꼭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고백입니다.
"허허, 요셉수도원 수도자들은 강복을 참 좋아해“
예전 시몬 아빠스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수도원을 방문하셨을 때나 떠나실 때는 예외 없이 형제들이 강복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주교님이 방문했을 때는 난데 없이 나타나 무릎을 꿇고 강복을 받는 마르꼬 수사의 모습은 신선한 아름다움이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강복 주기를 좋아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게 또 자연에 강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요셉수도원 26년 머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산책 중 불암산과 수도원을 강복했고, 여기 뉴튼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역시 매일 산책 때 마다 강복합니다.
고백성사 때 역시 사죄경 후에는 강복까지 얹어 드립니다. 강복을 통해 저 역시 하느님의 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은 딱 둘입니다. 복주시는 일과 용서하시는 일입니다. 사실 이 두 일을 빼면 하느님이 하실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은 특히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여 쌓아 놓았던 복을 일거에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선 강론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에게 오늘 1독서 민수기 주님 말씀으로 강복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길 빕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길 빕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길 빕니다.“
분명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형제자매들에게 강복하면 주님은 복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받은 복덩어리 존재들, '복자(福者)'들입니다. 주님께 넘치는 복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복입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받은 아드님의 영 덕분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하고 외칠 수 있음은 또 얼마나 큰 복인지요.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오늘은 복자(福者)로 살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가난에 감사하고 선택된 가난을 살면 더욱 좋습니다. 돈 많아서 망한 수도원은 있어도 돈 없어 가난해 망한 수도원은 없습니다. 부(富)가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고 가난(貧)하다 하여 다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일성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선언입니다. 가난할 때 단순함, 순수함, 겸손함이 줄줄이 따라옵니다. 주님은 예외 없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탄생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은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낸 이는 밤새 깨어 눈이 열려 있었던 가난한 목자들뿐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역시 가난한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오셨고 바오로도 증언합니다.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친히 우리를 위해 평생 가난하게 사셨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가난의 모범을, 가난이 축복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늘 말씀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에게 말씀은 숨쉬는 공기와 같았습니다. 하여 항구한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을 권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말 그대로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이자 참 관상가입니다. 학식이 많아 렉시오 디비나도 관상도 아닙니다. 열렬한 하느님 사랑에 순수한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 몸이 정결하여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여 마음의 순수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도 이런 순수한 사랑, 순수한 믿음입니다. 목자들이 전한 말에 모두가 충격을 받고 놀라워하는 동안 성모 마리아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진정 지혜로운 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과연 위대하고 고결한 영혼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영혼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바로 이렇게 곰곰이 말씀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이렇게 깊이 말씀을 묵상해야 비로소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닌 진심에서 울어난 인격적 '응답(respondonce)'입니다.
셋째, 찬미와 감사가 입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미사시 영어 화답송 후렴이 아름다웠습니다.
"Let the heavens rejoice and the earth be glad(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계속되는 우주적 성탄 축제 시기가 참 감사합니다. 새삼 찬미하는 기쁨으로 사는 수도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Let no tongue to be silent(혀도 침묵하지 못하게 하라)" 영어 성가 한 구절도 재미있었습니다. 찬미하면 저절로 혀도 풀려 소리내어 노래하기 마련입니다. 그 무엇도 찬미하는 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축복을 체험할 때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응답이요, 찬미와 감사로 응답할 때 또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찬미의 샘입니다. '축복과 찬미'의 영적 삶의 싸이클 속에 깊어가는 우리의 영성입니다. 바로 수도자들이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미사와 성무일도가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요, 우리 모두 영적 부요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보다 참 기쁨, 참 행복을 주는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가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위로하고 치유하며 복된 운명으로 바꿔줍니다. '그래서' 찬미와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감사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최상, 최고의 영적무기는 하느님 찬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불평스러울수록 최고의 보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바치는 찬미와 감사뿐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온통 찬미할 것과 감사할 것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가난한 목자들이 찬미의 모범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가난한 목자에서 내적 부요의 '찬미의 사람'으로 바뀐 목자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이젠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가 된 목자들입니다. 주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통해 세계 평화의 날인 오늘 새해 첫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고, 차고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요셉수도원의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가 미국 뉴튼수도원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
복을 나눕시다.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저 멀리 동편 산너머에서 어제와 똑같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살이 맑습니다. 어제는, 아니 작년 마지막 날은 길 위에서 거의 보냈습니다. 수도 형제의 모친 백 안나 님(97세)이 돌아가셔서 눈이 오는 궂은 날씨에도 경기도 김포시까지 가서, 장례미사를 주례하고 밤늦게 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네비게이션이 혼잡한 길을 피해 우회길을 안내해서 막히는 데 없이 잘 왔지요. 마지막 날을 장례미사로 마무리하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하늘 길 가시는 분의 마지막 길을 잘 가시게 조금이나마 도와드렸다는 생각에 몸은 약간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참 따뜻하고 기쁨이 그득했습니다. 장례미사 강론 때 앞에 앉아있던 초등학생 증손자에게 질문했습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꿈이 뭐였지?” 이 질문에 아이는 망설임 없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정답이었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늘로 가신 분에게 이제 늘 새 날일 것입니다. 지지않는 빛 자체이신 분과 늘 함께 계시기 때문이지요.
오늘 새해 첫날 우리는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탄 팔일 축제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베들레헴 목자들의 방문과 그들이 아기 예수에 관하여 전하는 놀라운 말을 듣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마음의 여인이셨습니다. 이 마음 안에는 오로지 한분 예수님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모이었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습니다. 마음에 저녁이 없는 빛이신 분을 간직하고 늘 되새기는 사람이 참 제자입니다. 주님은 올해에도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제자로서 늘 주님을 마음 깊이 간직할 때 우리에게 매일의 삶이 새로운 날, 새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의 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면 참 은혜롭겠지요. 새해 복 많이 나눠주세요!!!
새해 첫날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과 가정, 이웃,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길 마음 모아 빕니다. "새양말" 새해가 밝아 양이 오고 말이 간다' 말많은 말해가 가고, 양순함이 넘치는 양해를 기대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 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제 오늘,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함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복을 전달하는 연장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 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 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 의 첫째편지 2장 17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은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 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해는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천상에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복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건강한 몸을 가지는 복과 두 번째로, 서로 아끼면서 지내는 배우자를 가지는 복, 세 번째로 자식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지는 복. 네 번째로, 생활의 리듬과 삶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적당한 일거리를 갖는 복. 다섯 번째로는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가지는 복을 현대판 신(新)오복(五福)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세에 국한된 것입니다. 천상의 복과 연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세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누리는 복은 천상을 차지하는 복입니다.“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1,3).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영원생명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한 해 동안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고 했지만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준적도 있고, 돌이켜 보면 내 방식의 사랑으로 부담을 준적도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크신 은총을 허락하셨고 한없는 사랑과 자비로 감싸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덕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너무 큽니다.
그래도 주님의 크신 은혜에 다시 감사를 드리며 ‘사랑에 사랑을 더해도’ 부족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 2015년은 “더 큰 사랑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기억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을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만큼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을 이웃을 통해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두가 주님 안에서 형제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워 더 큰 복을 받으려니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기 바랍 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주어져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새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축복해주라고 하십니다.
저주를 퍼붓지 않음은 물론 축복을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해주려고 하는데도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상태라면 정말 불쌍하고 비참합니다.
얼마 전 길을 가다가 저는 기절초풍 할 뻔하였습니다.
예쁘게 생긴 여학생의 입에서 쌍욕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남자 친구를 “야! XX놈아!”라고 하며 부르는데, 저도 순간 ‘무슨 저런 X이 다 있어!’라고 하려다가 나도 똑같이 욕하면 안 되지 하며 움찔 욕을 삼켰습니다.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화나 불만 같은 것들이 꽉 차 있으면 말끝마나 욕을 토해낼까?
그리고 그때 또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욕하는 게 낫지, 말끝마다 저주를 퍼부어대는 것보다 낫고말고.
욕은 화나 불만과 같은 감정을 대상 없이도 토해낼 수 있는 것인데 반해 저주는 안 좋은 감정 토로 이상의 불행한 사람의 자기 불행의 토로이고, 자신의 불행 때문에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라고 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불행이 가득 차 넘치면 저주를 퍼붓겠습니까?
그러니 축복을 해주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불행하니 너도 불행하라고 하는 것이 저주라면 축복은 내가 행복하니 너도 행복하라고 하는 것이며, 불행이 넘치는 사람이 남에게 저주를 하듯 행복이 넘치는 사람만이 남을 축복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올해 축복을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는데, 그러나 그렇긴 해도 축복을 해주기 위해서 먼저 내가 행복해야 하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아야 합니다.
희망 제작소나 행복 제작소와 같은 비영리 단체가 있지요.
처음 이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이전에 그 이름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망과 행복을 만들어 주는 곳이니 얼마나 멋진 곳입니까?
저는 저와 저의 수도원이 올해 이런 행복 제작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행복 제작소가 될 수 있을까요?
욕심이 없어야 하고, 소통을 잘해야 하고, 서로 사랑을 해야 하고 등등의 인간적인 방법들을 찾을 수 있겠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가장 완전하고 근원적인 방법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을 오늘 제 2 독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신앙적인 방법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기>이고, <하느님의 복덩이 되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일거에 우리는 가장 완전하게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께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드님의 영을 지니게 됨으로써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이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는 우리에게도 어머니가 되시어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저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올 한 해, 성모님의 전구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그 복을 나누는, 하느님의 복덩이들이 되기로 다짐하며 오늘 그 은총을 청합시다.
-서공석 신부님-
새해 2015년의 첫 날입니다. 2015년은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라는 말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곧 5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필요하였던 표현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세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14)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가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는 분이라 우리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시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베풀어진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 앞에 펼쳐진 또 한 행의 세월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추운 겨울속에서
2015년을 맞이합니다.
연약한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던
성모 마리아처럼
서로의 연약함까지
선물로 받아들이는
은총의 새 해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새 해또한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처럼 쉽게
자를 수 없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머니처럼 어김없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들임을
다시 고백해 봅니다.
모두가 행복한
한 해가 되길
원합니다.
어떤 내용의 시간을
살것인지를 곰곰이
되새겨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기도로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서
나잇값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새 해를 맞이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는 건
하느님 없이는 결코
단 한순간도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믿음으로 곰곰이 되새기신
성모 마리아처럼
믿음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말씀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와같이 어머니의 길은
기도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또한 2015년은
가족과 이웃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어머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는
새 해 되십시오.
사람과 기도는
하나이며
기도 없이는
평화를 체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2’에 ‘송이의 노란 우산’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사연입니다.
송이 엄마는 시장 좌판에 앉아 나물을 팔았다. 일곱살 송이는 아침밥을 먹고 늘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갔다. 어른들만 있는 시장에서 송이의 유일한 친구는 까만 때로 얼룩진 인형뿐이었다. 머리카락까지 듬성듬성 빠져버린 인형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 저 할아버지 너무 무서워. 할아버지 옆에 가면 이상한 냄새가 나."
송이는 멀지 않은 곳에 힘없이 서 있는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칠십이 넘은 할아버지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서 채소장소를 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할아버지는 슬픔으로 온종일 술만 마시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잤다. 할머니 병원비로 할아버지는 산동네 집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시장 사람들은 말했다. 할아버지가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잊지 못해서라고...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대낮에도 방앗간 옆 땅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시장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예전처럼 대해 주지 않았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비틀 거리는 할아버지에게 막말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장입구에는 가게를 지으려고 파헤쳐 놓은 길이 있었다.
어느 날 송이는 그 앞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송이가 넘어지는 순간 들고 있던 인형이 깊이 파헤쳐진 웅덩이로 떨어져 버렸다. 인형이 떨어진 곳엔 썩은 물이 고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더러운 물에 빠져서 다리만 간신히 내민 인형을 바라보던 송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송이는 훌쩍거리며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가 손가락으로 인형을 가리켰다. 떠름한 낯빛으로 지나칠 뿐, 더러운 물로 들어가 인형을 꺼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닭집 아저씨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왜 울어, 송이야."
"아저씨....."
송이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저건 안 돼, 송이야. 더러운 물 만지면 병 걸려. 엄마한테 인형 사주라고 아저씨가 말해줄게."
송이는 억지로 팔을 끄는 닭집 아저씨를 따라갔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송이의 눈은 금세 휘둥그레졌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몸을 비틀거리며 인형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신발을 신은 채 냄새는 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인형을 주웠다. 할아버지는 인형에 묻어 있는 더러운 물을 때 절은 옷소매로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다치지는 않았냐?"
"네.."
송이의 서먹한 대답에도 할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도깨비 뿔처럼 마구 헝클어진 하얀 머리가 송이는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저녁부터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송이는 노란 우산을 받쳐 들고 어둑해진 시장 길을 바쁘게 걸었다. 비를 맞고 누워 있을 할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방앗간 뒤쪽 처마 밑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는 비바람으로 얼굴까지 온통 젖어 있었다. 송이는 자기가 쓰고 있던 노란 우산으로 잠든 할아버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에 얹은 채, 멀리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송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람에 날아가 버린 노란 우산이 할아버지 옆에 벌렁 누워서 동그란 얼굴을 땅에 비비고 있었다. 송이는 서둘러 할아버지에게로 다시 달려갔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노란 우산이 날아갈까 봐, 송이는 할아버지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노란 우산 밖으로 나와 있는 할아버지의 새까만 팔을 노란 우산 안으로 끌어당기며 송이는 말했다.
"할아버지, 비와요.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송이는 여귀꽃처럼 가는 팔로 비에 젖은 할아버지 다리를 처마 밑으로 힘껏 당겼다. 할아버지의 때 묻은 손을 송이는 꼭 잡고 있었다. 때 절은 손이지만 더러운 물에 빠진 송이 인형을 꺼내준 고마운 손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할아버지의 눈가로 따스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젖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송이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멀리 엄마가 있는 곳에서 조그만 불빛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송이는 엄마 옆에서 때 절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때 닭집 아저씨가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송이에게로 다가왔다.
"송이야, 선물이다."
"아, 예뻐라..."
예쁜 인형을 받아 든 송이 눈가엔 어느새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송이야, 저기 봐,. 이 인형, 할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사주신거야."
닭집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킨 곳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개나리꽃처럼 활짝 피어있는 노란 우산을 흔들며 송이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가 끌고 있는 낡은 손수레에는 펼쳐진 종이 상자들이 가득히 쌓여있었다. 그날 이후로 시장 사람들은 못 쓰는 종이 상자를 하나하나 모아 할아버지에게 주었다. 할아버지도 더 이상 술에 취해 비틀거리지 않았고, 길 위에 쓰러져 있지도 않았다.
더럽고 냄새난다며 모두 할아버지를 멀리 할 때, 어린 송이는 말없이 다가가 할아버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송이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가장 더럽고 역겨운 곳까지 내려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아니 ‘가장 멸시받는 모습으로 나무위에 달려 높이 올려지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의 모욕과 멸시를 받는 그런 치욕적인 아들을 두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위의 이야기에서 송이의 더러운 인형을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구덩이에서 꺼내주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 때 그 사랑을 이해하는 한 ‘보잘 것 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눈에는 가난하고 가녀리고 힘도 없는 작은 시골 처녀에 불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 사랑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상관없으니 하느님의 뜻만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시도록 ‘아멘!’하셨습니다. 하늘도 인간 가운데 그런 사랑이 있음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역겹기만 하던 인간이 예전처럼 거북스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나마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의 뜻을 위하여 가장 더러운 곳까지 함께 가실 줄 아는 사랑을 보여준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어머니를 위해서도 천상영광의 관을 씌워주시고 그 어머니의 사랑을 닮은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마치 송이가 할아버지가 걱정돼 노란 우산을 들고 와 할아버지를 덮어드린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온 인간을 다시 사랑하시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 분을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새해 첫 날 이 신비를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같은 동료선수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초기에 박찬호 선수는 자신과 같은 소속 식구들에게도 왕따였습니다. 그리고 한 선수는 자신이 씹던 껌을 뱉어서 박찬호 선수에게 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박찬호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선수와 맞붙어 싸웠는데 말을 할 줄 모르는 자신만 징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밥은 잘 먹고 다니냐, 힘들면 돌아와라, 보고 싶다는 등의 어머니면 다 하시는 그런 질문들을 쏟아내셨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비록 멀리 있지만 어머니의 그 사랑을 다시 느끼며, 이런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통역 없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How are you?’라고 인사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말은 모르기 때문에 그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음식은 다 버리고 치즈와 미국 음식만을 먹었습니다. 느끼해서 토할 정도가 되었지만 참아냈습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 몸에서 나는 마늘 냄새였다는 것을. 그들은 박찬호 선수 몸에서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치즈 냄새가 나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동료들과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고 좋은 성적을 거둬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철환 작가는 ‘자식은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연탄길 2, 177)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도 혼자서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 머물러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루카 2,52)
그분이 몸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자랐다면 그분이 자라도록 누가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당신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려 눈물을 흘리신 분은 성모님이 아니고 누구시겠습니까? 또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그리고 당신 구원의 가시밭길을 가시며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실 때마다 당신과 항상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려주시는 어머니 때문에라도 힘을 얻지 않으셨겠습니까? 낳으신 것뿐만 아니라 기르시고 함께 해 주신 것에서도 성모님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 날입니다. 그리고 그 첫 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그분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을 낳으시고 기르셨듯이 당신의 자녀가 되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시어 우리도 보호해 주시고 길러주시기를 먼저 배워야 함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도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몸도 지혜도 날로 자라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도 작은 예수님으로 키워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013 년과 2014년. 결국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왠지 완전히 다른 날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저만의 특별한 느낌일까요? 사실 12월 31일만 특별한 날이 아닐 텐데 매년 이 날에 괜히 의미를 붙여서 밤새워 놀 생각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월 1일은 늘 깨어서 시작을 해야만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생각했지요. 그래서 어제는 정말로 평소와는 달리 특별한 날로 만들기 위해 일찍 한 9시쯤 잠들었습니다. 2013년이 아쉽다고 잠 못 이루는 것보다는, 보다 더 맑은 정신으로 누구보다 일찍 2014년을 맞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긴 이 새벽에 일어나(2시에 일어났습니다. ㅋㅋ) 휴대전화를 보니, 예전의 저와 같은 모습으로 새해를 시작하신 분이 많더군요. 1월 1일 00시를 기해서 저한테 얼마나 많은 분들이 새해 인사 문자와 메시지, 메일을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예년과 달리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답니다.
이 새벽,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새벽을 열면서,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하시는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을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올해에도 열심히 새벽을 열면서 살 것을 약속드립니다.”
분명 2013년에도 아쉬운 것들이 많았으며,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묵상하면서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려 보니 너무나 많은 부분에 있어 참으로 감사했던 한 해였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매 순간 함께 하셨고, 주님의 그 사랑으로 인해 이웃들과도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 수 있었던 기쁨의 시간들이었으니까요. 이러한 시간들을 기억해보니, 2014년에도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많이 받는 한 해가 분명히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년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지요. 어떠한 순간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명하시면서 희망을 놓지 않으셨던 성모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새해의 첫 날을 열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되라고 성모님 대축일을 새해 첫 날로 잡은 것이 아닐까요?
올해에도 좋아하는 일만 내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일만 생기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내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때 좋아하는 일만 그리고 내 욕심만을 찾는다면 그 사랑은 절대로 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대신 주님께 기준을 맞춘다면, 분명히 가장 멋진 2014년을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2014년을 멋지게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멀리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항상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을 가져오십시오. 이곳이야말로 우리 서로를 위한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니까요(마더 데레사).
멋진 2014년을 만들어 갑시다.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살면 참 좋겠지요. 어떤 어르신에게 “8899가 아니라, 9988이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고 하네요.
“88세까지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기를 원한다.”
이렇게 아프지 않고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산 결과 생기는 병은 어쩌겠습니까? 오히려 나이 들어 몸에 찾아드는 신체적인 고통은 좀 고약한 친구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픈 것을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얻은 결과라는 쓸데없는 생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픔을 가져다주는 병은 훈장도 아니고,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가야 할 삶이 조건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나빠지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2014년에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고통 속에 놓여 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고통 자체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해 보십시오. 분명히 커다란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는 가장 멋진 2014년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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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한 해가 또 시작되었습니다.
늘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운 어제와 희망의 내일을 만들어가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후회의 어제와 두려움의 내일이 아니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아주 많이 행복하세요.
저 역시 행복해지고자 최선을 다하렵니다.
올 한 해,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결과 상관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일년 후의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 교회가 성모님 대축일로 한 해를 시작하게 한 것에는 커다란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늘 그랬듯이 이 세상은 엄마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엄마, 어머니라는 이름은 모든 인간의 고향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더욱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 떠난 자식이 잘 지내기를 바라며, 이른 새벽 우물물 길어 사발에 담아놓고,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빌던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촛불 빛으로 아른거리는 그림자 만들며 자식들을 위해 눈물과 함께 묵주 기도 드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절실히 그리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엄마를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고와집니다.
올 한 해, 반목과 불신이 어머니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가 정말 옳게 살 수 있는 힘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불의가 정당화되고, 정의가 꼬리를 내리는 세상이 아니라, 옳은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는 세상이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서공석 신부님-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2014년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2014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2014년을 시작하는 정월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뜻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미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참다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는 데에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431년에 에페소 공의회가 결의하여 선포한 표현을 가져와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우리가 알아들으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가 2,14)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가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기에 이웃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체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며, 세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
경하드립니다, 어머니
-장재봉 신부님-
순명·겸손·사랑·믿음의 삶
새해 첫날, 하늘에서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위한 잔치가 한창이겠지요. 천국 가족들께 세배를 올린다 생각하니, 새삼 삶의 매무새를 살피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명절마다 봉독되는 특별한 성경 구절입니다. 요점은 대사제 ‘아론과 그의 아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축복해 주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복을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분의 사제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상대에게 복을 빌어주는 행위가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며 원하고 바라는 일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라 싶은데요. 아론의 사제직을 이어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야말로 세상을 지키는 힘이며 은혜를 부르는 통로이며 그분 사랑을 전하는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제2독서를 읽는 마음이 울적해집니다. 아론 사제의 축복으로 한껏 고무된 우리에게 한 술 더 떠서 듬뿍, 축복을 보태주고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당시 갈라티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고 교우들을 ‘교란시켜’ ‘복음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답답하고 애가 타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렸을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니, 낼름 받아넘기기가 쑥스러웠습니다. 우리 안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을 또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은총 안에서 불러주신 분’을 ‘그토록 빨리 버리고’ 돌아서는 우리 모습에 마음이 뜨끔했기 때문입니다(갈라 1,6-7 참조).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그분의 것을 외면하고 그분 길을 따르지 않는 천방지축인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자녀의 긍지’를 추스르도록 ‘하느님 상속자의 자존감’을 되살리도록 호소하는 그분 사랑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이 좋은 날, 그분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되레 근심덩어리가 되어 있는 우리를 향한 딱한 시선이 따갑더라는 얘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 그저 교회 주위를 어슬렁대는 군중의 모습으로 지낼 뿐이라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 아드님의 영’을 아프게 할 뿐이라는 질책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생각으로 주님 말씀의 주변에서 서성댈 뿐이라면 그분의 자녀가 아니라는 따끔한 일깨움입니다. 말씀이며 생명이며 빛이며 은혜이며 진리이신 그분을 믿는다면서 그분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아픈 외침을 깊이 새깁니다.
우리는 그날 외양간으로 찾아갔던 목자들처럼 특별한 일을 목격하고 놀라워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뜻을 찬양하고 찬미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풍요와 성공에 매달려 땅의 생각과 가치관을 털어내지 못합니다. 너무나 쉬이, 바르지 않아도 빠른 길을 택합니다. 눈앞의 이익이 있는 것만을 그분의 축복인양 오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공을 위해서 가장 빠르고 잽싼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디어도 그분께서 이르신 바른 길을 고집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여 헛되고 헛된 세상의 방법에 흔들리지 않고 응하지 않는 배포가 있습니다.
세상의 가장 약한 존재,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후에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단 한 말씀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분의 약하고 낮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길을 묵묵히 따르신 성모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당부하셨을 뿐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이렇듯 높고 영광스런 칭호를 얻으신 이유는 바로, 아무도 몰라주던 그분 심정을 오직 믿음으로 동행하며 꿋꿋하게 살아 준 마리아의 진심에 감격하신 결과라 믿습니다. 시골 처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등극되신 엄청난 신분상승은 그분을 낳은 혈연 덕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그분의 뜻을 겸손과 순명과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 산 삶의 결실임을 믿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느님의 부탁을 기억하고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새기며 살아가는 단순한 삶이야말로 완덕에 이르는 첩경임을 일깨움 받습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지내는 삶이야말로 주님께 바치는 최고의 경배이며 봉헌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께 ‘신앙이 많이 자랐구나’라는 덕담을 듣고 ‘믿음이 몰라보게 컸구나’라는 성모님의 칭찬을 듣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축원해 드립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님-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새해 모든 나날을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말씀을 읽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성탄절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1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묵상하고 새해 첫날인 오늘은 “하느님이셨던 말씀”(1,1)이신 존귀한 아기를 낳으신 어머니를 바라보도록 초대받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천사가 아기에 대해 한 말을 전하자 모두 놀랍니다. 특히 이 지상에서 “구원자, 주 그리스도”(루카 2,11)인 이 아기의 부모가 되도록 선택된 요셉과 마리아는 더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이 아기 때문에 몇 차례나 더 놀라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2,33.48) 루카는 홀로 마리아만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19절)고 전하며 우리가 마리아에 대해 무엇인가 배우기를 강조합니다. 마리아가 마음에 간직한 ‘이 모든 일’은 지금 포대기에 싸인 채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장래에 대한 계시입니다.(1,38; 2,17)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이 탄생했을 때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랬듯이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돌보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1,66)
‘간직하다’라는 말의 그리스어 시제는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한 번 간직한 것이 아니라 되풀이하여 간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달리 말하면 늘 간직하는 것이니 ‘기억하다’라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은 이 세상의 모든 선한 어머니들처럼 마리아의 생애 내내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기억은 아들에 대한 기도를 낳습니다. 2장 51절에 되풀이되는 ‘마음에 간직하다’라는 표현은 이 말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이 구절에서는 다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데, 마리아가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는 아들에 대한 일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음의 보물처럼 소중하고 견고하게 간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구약에서 ‘마음에 간직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꿈이나 천사를 통해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또는 ‘당황하거나 놀라워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전형적 자세이기도 합니다.(창세 37,11; 다니 7,28)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목동들이 전한 성탄 메시지를 놀라워하면서도 그 일들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언젠가는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마리아의 자세는 사촌 엘리사벳이 그녀에게 바친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간직’했는지는 바로 이어지는 말 ‘곰곰이 생각하다.’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함께’라는 말과 ‘연결하다’라는 말을 합한 것인데 마리아가 아들에 대해 듣고, 보고, 기억한 모든 일을 서로 연결하면서 마음에 간직했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아기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곧 호구조사, 베들레헴으로의 여행, 목자들에게 천사가 아기를 알아보도록 알려준 표징(2,12.16) 등을 그분이 가진 신앙의 안목으로 서로 연결하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과 아이를 위해 최선의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리아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스런 말과 사건 앞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신앙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런 자세로 말씀에 귀 기울이라고 제자들한테도 당부하십니다.(8,1115)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는 ‘몸 안에’ 예수님을 담고 다녔지만 태어난 후에는 ‘마음 안에’ 평생 아들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면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단테)
묵상(Meditatio)
오늘 복음 말씀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기도를 동반하는 하느님 말씀 읽기라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께 귀 기울이며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라면 렉시오 디비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 본질적인 일이 있을까요? 교회는 렉시오 디비나의 모든 단계가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들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며 그것을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연결할 줄 알았던 말씀의 해석자 마리아 안에 들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축복의 원천이신 하느님, 새해에는 더욱더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마리아의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 하루하루가 은총의 나날이 되게 하소서.
기도(Oratio)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시편 67,2)
되돌아봄과 바라봄
-고준석 신부님-
항상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때 괜스레 가슴이 떨리고 설렘과 더불어 어떤 희망이 자리 잡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쉽고 못다이룬 꿈이 남아 있는 지난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첫날이기에,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되돌아봄과 바라봄, 이 두 가지가 얽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를 보내고 2012년,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를 기쁘게 하고 나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올 한 해 동안 내 가슴 속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슬픔이 많은 사람보다 아쉬움이 많은 사람의 삶이 더 힘들고 괴롭다.” 진정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아쉬움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지나고 나서 우리가 늘 후회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들은 특별한 실패나 부족함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물질이나 능력이나 지위나 명예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크게 마음 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고, 겸손하지 못한 데서 생긴 후회나 아쉬움은 오래갑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늘 우리를 우울하게하고 가슴을 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목자들이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들은 후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경배합니다. 한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사실 마리아는 누가 그 목자들을 불렀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은 그 아기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는지 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묵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신비를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하면서 하느님의 길을 발견하려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미약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체험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닙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경험일지라도 우리를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도 새롭게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마음 속에 곰곰이 간직하고 묵상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지난 한 해에 복을 주셨고 올 한 해에도 축복을 리라는 사실을 믿게 될 것입니다.
가장 멀게 느껴지면서도 가장 가까운 날은 언제일까요?
정답을 말씀드리면 12월 31일과 1월 1일입니다. 실제로는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해가 바뀌어 2011년에서 2012년이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먼 시간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위 환경이 확 바뀐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변한 것이지요. 새해를 맞이해서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가짐. 더 의미 있는 해를 만들겠다는 다짐들이 2011년 12월 31일과는 다른 2012년 1월 1일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힘차게 살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새 도화지 같은 2012년 새해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올해는 실수하지 않고 멋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항상 주님께 의지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쁘게 행복을 일구어가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어렸을 때 저는 자주 넘어졌던 기억이 떠올려집니다. 바지가 엉망이 되어 어머니께 혼나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넘어지면서 무릎 등에 상처 나서 아픈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땅이 모두 푹신푹신한 스펀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요. 그리고 실제로 성당에 가서 어린 마음에 ‘예수님, 이 세상의 모든 땅이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스펀지로 만들어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저의 이 기도를 만약 주님께서 들어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테고 꽃이나 나무도 자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자동차는 어떻게 다닐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의 저처럼 고통과 시련이 없는 스펀지 같은 세상을 원합니다. 하지만 스펀지가 아닌 세상에 살고 있음이 오히려 큰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좌절도 또 불평불만도 하지 않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뜻에 맞추어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새해의 첫날 우리들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신비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 다가왔던 모든 신비들은 사실 커다란 고통과 시련의 모습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예수님을 낳았을 때까지, 1년간의 모든 일들이 어린 성모님께서 견디어 내기에는 너무나 큰 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주님 뜻에 맞게 생활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모님을 기억하면서 올해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리고 항상 지금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당신을 따르는 사람과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주를 감추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커다란 기술이다.(라 로슈푸코)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곰곰이 되새겼다.”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의 말씀이나 태도, 하느님을 향한 자세를 보십시오.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침묵, 기도, 철저한 겸손, 앞 뒤 따지지 않는 순명,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구세주 잉태 예고 앞에 성모님의 말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장 38절)
아기 예수의 탄생 앞에: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장 19절)
예루살렘 순례 길에 소년 예수를 겨우 되찾고 난 후 이해할 수 없는 언행 앞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장 51절)
그 외에도 성모님께서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태도(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엄청 서운할 말씀):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골고타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저 함께 눈물 흘리시며, 함께 아파하시며, 함께 기도하시며 마냥 서계셨던 성모님...
성모님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도 드믈 것입니다. 그녀의 생애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 불가사의한 일들, 어쩌면 억울하고 속 터지는 일들로 가득 찬 파란만장하고 특별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단 한번도 No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불평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서 힘들다, 괴롭다, 못살겠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의 다양한 국면, 이런 저런 기묘한 초대, 모든 이해 못할 일들 앞에서 성모님은 한결같이 Yes였습니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해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앞뒤 따지지 않은 무조건적인 순명, 하느님 계획에 대한 전적인 믿음, 단순한 Yes가 결국 이 세상 구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인류의 어머니, 결국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출중한 외모, 뛰어난 학식, 타고난 재능, 내놓으라하는 가문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지극한 겸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 어린이 같은 단순성으로 인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올 한해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는 다양한 삶의 국면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것 못지않게 여러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 기가 막힌 일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여겨질 일들도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슬퍼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럴 때 성모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하느님의 초대 앞에 앞뒤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그저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우리의 응답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소통(疏通)의 비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비가 많이 내리던 날 한 자매님이 비에 젖어 성당으로 들어와 저와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 안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자신 안에 있는 마귀가 이 성당에 들어가 보좌신부와 상담을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사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 마귀와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교만과 육욕과 세상 것에 집착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석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나 마귀와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 예상대로 그 자매는 보험 설계사를 하면서 경쟁을 하여 남들 위에 서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마귀와 밤에 관계를 한다고 하며 실제로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임을 자신도 인정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 사는지 다시 궁금해져서 “서울 목동 사신다고 했나요?” 라고 물었더니, 목소리가 목이 쉰 남자 목소리로 변하며, 저를 무섭게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목동이라고 했어요? 마포라고 했지.”
비도 오고 작은 방에 둘이 있는데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러나 겁먹은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기에 오히려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자매님은 한 번 들은 걸 다 기억하세요?”
그랬더니 다시 수그러들었습니다.
역시 이런 분은 자아가 너무 강하여 남이 실수하는 것을 못 받아줍니다. 또 남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화의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외로워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기도 해 주고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게 됩니다. 사회적 동물이란 이유는 혼자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란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끝까지 남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신이 남자임을 알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여자가 됩니다.
결혼한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고, 또 젖을 먹이는데, 그런 모든 경험들은 관계 맺지 않으면 알 수도 또 체험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는 서로를 알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한 사람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대충 이름과 나이까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아픈 상처는 없는지, 주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종교관은 무엇인지를 대화를 통해 알아갑니다. 이렇게 서로 알아가면서 서로는 서로의 심장 속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문제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소통의 문제에 대해 장자는 이러한 비유를 듭니다.
노나라 시절입니다. 창가를 보고 있던 임금 앞에 바닷새 한마리가 날아들어 왔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임금은 그 바닷새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바닷새를 위해 매일 잔지를 열었고 귀한 음식과 술을 주고 풍악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그 바닷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사흘 뒤에 죽고 맙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기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바닷새를 자기 식으로만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관계 맺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나서 상대 안으로 들어가 상대의 언어를 배워야합니다. 따라서 자아가 강한 사람은 항상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자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상대를 보려고 하는 폭력적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로 비유합니다.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가 저 멀리 넓은 동해에서 온 자라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무너진 우물이 좋아. 밖으로 나가면 난간 위에서 뛰어놀고, 안으로 들어오면 벽돌 빠진 구멍 속에서 쉴 수 도 있어.
겨드랑이까지 물이 차오르게 하고, 턱을 받치고 놀지. 진흙을 차고 놀 때는 발등까지 흙에 묻히고 말이야. 장구벌레, 게, 올챙이 모두 나를 부러워하지. 웅덩이 물을 독차지해서 마음대로 노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몰라. 자네도 들어와 보겠나?”
동해에서 온 자라는 왼발을 미처 우물에 넣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자 뒤로 물러나 개구리에게 동해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놀던 바다는 천리 거리로도 그 크기를 말할 수 없고, 천리 길이로도 그 깊이를 말할 수 없다네, 우(禹)임금 때 10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지만 그 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탕(湯)임금 때는 8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몹시 가물었지만 바닷물이 줄지 않았어. 시간이 길거나 짧다고 변하지도 않고, 비가 많거나 적다고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일도 없는 것. 이것이 동해의 큰 즐거움일세.”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발췌>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 우물 안 개구리가 자기가 아는 전부로 상대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는 소통도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거북이의 말을 믿고 우물을 빠져 나와 바다로 향하면 관계는 시작되고, 그렇지 않으면 또 혼자 자신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통(疏: 트일 소, 通: 통할 통)이란 말 그대로 막힌 것이 트여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상대 쪽으로 가지 않으면 소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를 떠나 상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인간 안으로 들어오셨고, 지금도 말씀과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줄 아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도 유학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싫기도 했지만 새롭게 언어를 배우고 알지 못하는 곳에 적응해야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떠났더니 더 풍요로운 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다른 언어나 문화, 신학까지 익히고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통하면 이렇게 상대가 내 일부분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떠나기까지가 얼마나 힘든지요.
우리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당신을 떠나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셔도 우리가 계속 우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 분과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만이 흠도 티도 없이 순결한 까닭에 자신을 온전히 떠나 그 분 나라로 들어갔고 그 분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또 하느님도 자신을 떠나 성모님 안으로 들어와 사람이라는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고, 인간은 하느님이 됩니다. 온전히 자신을 떠날 줄 아셨던 마리아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신 하느님은 성모님으로부터 사람이 되는 모든 것을 받고 배우셨기에, 하느님이시면서도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십니다.
오늘 갑자기 부탁을 받아서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한 부부에게 관면혼배를 해 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7살짜리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매일 지나다니며 보던 저희 성당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중학교 때부터 냉담하던 아버지가 냉담을 풀고 신앙이 없는 어머니는 교리 반에 들기로 하였습니다. 그 꼬마 아이는 매일 다니던 그 길옆에 있는 성당에 들어와 보고 싶었던 것이고 지난주에 부모님을 데리고 성탄 미사에 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준 어린이는 이미 누구와도 소통할 준비가 되어있는 깨끗한 영혼인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런 어린이의 영혼처럼 가장 먼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 하느님을 만났고 또 우리도 함께 들어가 그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동해에서 온 거북이만이 바다의 넓고 깊음을 알듯이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소통한 성모님만이 그 넓고 깊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 넓고 깊은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이 가져온 사랑의 증표인 그리스도를 보며 우리도 바다로 나오라고 손짓하고 계신 것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한 해
- 김귀웅 신부님-
며칠 전, 94세 되신 할머니 한 분이 서울에서 서귀포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 신자셨는데, 저에게 꼭 하고픈 말씀이 있다고 노구를 이끌고 오신 것입니다. 옛날 대갓집 마나님처럼 언제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신 단아한 모습으로 새벽미사를 빠지지 않고 참여하시며, 늘 기도 속에서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자녀들도 다 훌륭히 키워 자랑스러워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하느님 곁으로 갈 때가 다 되어 그러는지 요즘 옛날 생각으로 몹시 괴롭다고 하셨습니다. 결혼하면서부터 여러 해 동안 시어머니로부터 정말 힘겨운 시집살이를 했고, 남편은 그런 시어머니에게서 아무런 바람막이가 되어 주지 않았던 여러 사건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면서 분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어서 두 분을 만나면 왜 나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했는지 따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아 무척이나 힘겹다고,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60년, 70년 전의 일들이 100세가 다 되신 할머니를 괴롭힌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새해 첫 날은 ‘평화의 날’로 지냅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내가 만드는 모든 일들, 남들에게 만들어 주는 모든 기억들이 그에게 두고두고 행복과 감사,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찬미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이가 평화로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마리아처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저는 오늘 한 해를 시작하면서 교회는 왜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낼까 생각해봤습니다.
생각을 해보니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한 해를 시작하고, 마리아와 함께 한 해를 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어머니하고 같이 산다면 나는 자식으로 사는 것이고, 자식 중에서도 어린 자식으로 사는 것이 연상됩니다.
크면서 또는 커서 한 때는 어머니가 성가시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인간에게 어머니는 마음으로라도 늘 함께 계셔야 할 존재입니다.
아기들이 무엇을 가지고 놀 때 보면 엄마가 없어도 되는 것처럼 자기 놀이에 열중하지만 어느 순간 엄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장난감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울며 엄마를 찾아갑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힘이 없지만 힘없는 엄마가 이처럼 우리의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힘입니다.
아버지는 전능의 하느님이신데 비해 어머니는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아버지의 힘은 역경과 위험에서 우리를 구출해내는 외적인 힘인데 비해 어머니의 힘은 역경과 위험을 이겨내게 하는 내적인 힘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외적 힘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이든 하게 하는 내적 힘인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 육신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사랑의 하느님 또는 어머니 하느님이기도 한 영적인 어머니이십니다.
올 한 해 이 어머니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이 어머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새 해 첫날 지내는 두 번째 이유는 새 해에는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늘의 주님을 세상에 낳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주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청취하는 겁니다.
수없이 떠도는 쓸 데 없는 다른 말들은 쫓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만 늘 그리고 잘 청취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우리의 주파수를 마리아처럼 하늘에 맞추고 그런 다음에는 채널 고정을 하는 겁니다.
올 한 해 말씀 필사를 다시 한 번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말씀의 청취로 말씀이신 하느님을 잉태하였으면 이제 마리아처럼 말씀의 묵상으로 하느님을 자라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출산을 하려면 아기를 수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0달 동안 태 안에서 그 아기가 자라게 하듯 우리는 들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새기는 묵상을 늘 해야 합니다.
올 한 해 말씀 묵상의 시간을 미사 전후에 가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말씀 묵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크게 자랐다면 이제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세상에 낳아줘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사랑한다 해도 자기 태 안에 계속 가둬서는 안 되고 말씀 실천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一日一善하기로 우리가 결심하듯 올 한 해 매일 읽고 묵상한 말씀 중 어느 한 하나를 실천에 옮기기로 작정을 하고 매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이렇게 우리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 수태하고, 임신하고, 출산하는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들이 됩시다.
2011년 신묘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토끼는 예로부터 성장과 풍요의 상징이라고 하더군요. 새벽님들 모두가 토끼띠를 맞이하여 좀 더 주님 뜻에 맞게 성장하고 영적으로도 더욱 더 풍요로운 한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풍요로운 한 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묵상하여 봅니다. 사실 올해에는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지만 그 중에서 세 가지 정도는 꼭 하고 싶습니다.
우선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쓴 지가 만 10년이 되는 해이기에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피정의 시간을 가지는 등 영적 성숙의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두 번째는 제가 몸담고 있는 곳이 성소국이기에 올해에는 더 많은 예비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음을 반성하면서, 올해에는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끼 하나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나무를 패기 위해 자루에서 도끼를 꺼내는데 도끼날은 없고 도끼자루만 있는 것입니다. 도끼자루만으로는 도저히 나무를 팰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는 도끼날을 찾기 위해 그 주위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도끼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친 그는 더 이상 나무꾼 노릇을 할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도끼자루만으로는 나무를 벨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미련을 완전히 버리기 위해 도끼자루를 강에 버린 뒤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글쎄 그렇게 찾던 도끼날이 집 안 장작더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서 도끼날을 집어 들었지만 이제 도끼자루가 없습니다. 도끼날이 없다고 도끼자루를 강에 버렸으니까요.
도끼날이 없어졌다고 도끼자루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처럼 내가 포기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수단을 던져 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이렇게 전하지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어렵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도 그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기억하면서 올해에는 우리 역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리고 항상 지금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당신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미워하는 것은 생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집 전체를 태워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해리 에머슨 호스딕)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롤모델 성모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그냥 편하게 하느님으로 계시지 않고 때로 질퍽질퍽한 진흙탕 같고, 때로 악다구니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같이 소란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 인간의 유한성을 깨트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성인 ‘무한성’을 버리시고 유한성을 취하신 결과가 육화강생이 아닐까요? 끝도 없이 깊은 바닥을 헤매 다니는 우리를 더 이상 놔두기 안타까워 밑바닥으로 내려오신 것이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끝도 없는 노력, 정말이지 감지덕지한 노력에 우리도 조금은 응답해야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노력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셨는데, 우리도 그분을 향해 조금이라도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발돋움 말입니다.
그런 노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화’요 ‘영성생활’이 될 것입니다. 성화의 길이란 하느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여정입니다. 성화의 길이란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여행길입니다. 참 영성생활이란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우리지만, 그 그릇 내면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채우는 일입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우리 인간 존재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날 우리 모두를 위한 제대로 된 ‘롤모델’입니다. 그녀의 삶을 묵상하다보면 성화의 길이 무엇인지, 참 영성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지만 절대로 우쭐한 법이 없었습니다. 구세주 탄생이란 하느님의 큰 사업에 가장 큰 협조자로서 뭔가 기대할 만도 한데 결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한평생 자신 앞에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진의를 찾아나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별 것도 아닌 인간 존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첨단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착각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인간 측의 가장 큰 문제는 겸덕의 결핍이군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겸손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성모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신 분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충분히 그랬을 겁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이 몸으로 메시아를 낳은 사람이라구. 우리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구!”
그러나 성모님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초지일관 겸손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쓰시겠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인생 전체를 다 내어드렸습니다. 자신의 한 몸 희생하여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조그만 기여라도 한다면 참으로 영광이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성모님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머리 위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끝없이 밑으로 내려서는 성모님을 하느님께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
- 최견우 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지난해 시간을 거두어 주시고 또 다른 희망의 한 해를 주심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을 고르라 하신다면 ‘사랑’ 이라는 말을 제일 처음으로 고르고 싶고, 그 다음에 ‘어머니’ 라는 말을 주저 없이 선택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들이 이 말을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쁠지 모릅니다. 그토록 제 마음에 들면서도 저 역시 한없이 부르고 싶은 말이 바로 ‘어머니’ 입니다.
석가모니가 군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가는 길에 아무렇게나 드러난 한 무더기의 뼈를 보았다고 합니다. 석가모니께서는 그 마른 뼈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수제자인 아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우리라.”
그러자 아난이 어떻게 남녀의 뼈를 구분하느냐고 하자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법문도 듣고 염불도 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뼈는 희고 무거우리라. 그러나 여인은 한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서 말 서 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아기는 어미의 흰 젖을 여덟 섬 너 말이나 먹느니라. 그런 까닭에 여인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가슴이 저며 옵니다. 성모님의 생애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지켜보시면서 성모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 그분의 뼈도 그렇게 검고 가벼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위대합니다. 어머니 중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그저 제 마음을 기대고 싶습니다. 제가 감히 성모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해도 될까요 ?
평화를 염원하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묘년 새 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 해는 어떤 해이기를 바라십니까?
이 새 해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오늘이 세계 평화의 날이니 올 해는 평화로운 해가 되기를 바라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니 올해는 한 번 천주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작년 한 해 평화가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 보았고, 한 번 깨진 평화를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달았으며, 하여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올 해는 정말 평화로운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平和란 어떤 것입니까?
“平”과 “和”가 합친 말입니다.
“平”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한 부분은 특별한 일이 없는 平安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좋은 일은 평안을 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안 좋은 일이 평안을 깨기에 평안은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올해는 아무 사고가 없는 것입니다.
올해도 중병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올해도 실직되는 불상사가 없는 것입니다.
올해는 천암함이나 연평도 포격과 같은 사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아무런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는 일이라도 일어나겠지요.
그까짓 것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기 한 마리 때문에 평안이 깨질 수도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은 아무 일이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오히려 올해도 많은 일이 터질 것을 각오하는 평안이고, 많은 일이 벌어져도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목장의 그림 그리기 대회 얘기 말입니다.
주제가 평화였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목장의 평화로운 풍경을 담았고 최종 결선에 올라온 그림 중 하나도 목장의 평화로운 풍경을 담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의 그림은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위험천만한 까까절벽의 옴폭 패인 둥지에 어미 품에 안긴 새끼 새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새끼 새는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치고 위험한 상황이어도 어미 새만 있으면 평안합니다.
새끼 새의 불안은 어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 평화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和”의 측면에서 평화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和”란 벼禾와 입口가 합쳐진 말이니 벼와 입의 관계처럼 관계가 좋을 때 오는 평화, 곧 화목한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관계, 화목한 평화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투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선은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투지 않기 위해서 시비를 걸지 않고 굴복시키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투지 않는 것도 평화의 길이지만 그런 소극적인 평화로는 참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투지 않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고 다투지 않기 위해 무관계로 일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평화는 사랑으로 얻게 되는 적극적인 평화이고 그것도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오늘 축일의 의미와 연결시킨다면 천주의 모친 마리아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을 품은 자만 이룰 수 있는 평화입니다.
힘의 균형을 이루는 아버지의 평화가 아니라 천주의 어머니의 사랑으로 이루는 평화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낳아주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을 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낳아주는 것입니다.
잉태한 자만이 출산을 할 수 있듯이 마리아처럼 사랑의 하느님을 잉태한 사람만이 다른 이에게 하느님 사랑을 낳아줌으로써 평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또한 평화는 염원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 우리는 평화를 염원할 뿐 아니라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행동을 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 저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선교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떤 분이 찾아오셨는데 만나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냥 돌아가시려고 하였지만 사무 보는 자매님께서 붙잡아 저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2년여 전 우리가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세우고 축복식을 했을 때 그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 이분은 올해가 가기 전에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는 저희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전화번호를 알아서 찾아오셨고 한 해의 맨 마지막 날, 그것도 사무실이 문 닫으려 하는 그 시간에 큰돈을 기탁하셨습니다.
요즘처럼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새 해에는 더 적극적으로 남북의 평화를 선포하는 참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격려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이런 분이 많아지기를 염원합니다.
빛과 어둠 어우르는 가정, 사랑과 용서"
-홍승모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예수ㆍ마리아ㆍ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기념합니다. 성가정이란 말 그대로 나자렛의 거룩한 정신과 성덕으로 살아가는 가정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지닌 성가정 축일 복음으로는 색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복음 내용을 보면,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걸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이 없어진 줄 알고 사흘 동안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성전에서 찾게 됩니다.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당연한 질문을 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마리아는 예수님의 행동에 질책 보다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지평을 넓히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말이 바로 "네 아버지와 내가"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보다는 남편인 요셉을 더 우선시 하는 배려는 자녀에게도 해당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이며 사랑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안타까운 마음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이 말씀은 신앙을 깊이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성전뿐 아니라, 사랑의 움직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현존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가정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그 생명이 성장하는 울타리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삶을 통해 이뤄지는 교육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곳입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대응하는 방식, 판단하는 방식, 올바로 살아가는 방식을 함께 익히게 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삶의 강생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빛과 어둠의 양극이 극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통합되기도 하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마리아의 아픔은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 삶의 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 품에 안고만 살 수 없고 독립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달리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오는 고통, 이 모든 고통과 갈등을 체험하게 합니다.
가정에서도 구성원 사이에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본당 공동체에서도, 특수사목 공동체에서도, 교구 공동체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이때 누가 아버지 요셉의 역할을 하며, 누가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을 해야 합니까? 누가 책임을 갖고 잘잘못을 교육하고, 누가 사랑의 마음으로 보듬어 주어야 합니까? 빛과 어둠의 양극을 누가 통합해야 합니까?
채근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집안사람들이 눈에 거슬리는 허물이 있다고 하여도 몹시 성내지 말 것이며, 또 가볍게 버리지 말 것이니, 봄바람이 얼었던 땅을 풀고 생명을 돋아나게 하듯, 부드러움과 인내심을 갖고 가정의 냉기를 녹이라. 이것이 가정의 규범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콜로 3,13-15).
이 말씀은 가정 구성원들을 화해하고 일치시키는 용서와 사랑과 내적 평화가 누구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이 주시는 용서와 사랑과 내적인 평화의 삶으로 빛과 어둠을 통합합니다.
그렇기에 나자렛 성가정은 세상을 위한 주님 사랑의 표지이며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자녀로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님에게 속하며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충만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것을 깨닫고 실현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마음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주님을 향한 여정의 동반자로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놓으십시오
-손용환 신부님-
어머니의 품이 그립습니다.
성화(聖畵) 중에서 단일 주제로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은 무엇일까요? 성모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신 모습을 그린 ‘성모자’(聖母子)입니다.
신심 있는 화가라면 성모자를 그리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왜 화가들은 성모자를 그토록 많이 그렸을까요? 그것은 성모자가 가장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품이 가장 평화롭고 하늘나라를 가장 많이 닮았으니까요.
성모자 중에서 가장 우아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라파엘로입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는 부드럽고 우아해서 그 매력이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 중에서 최고로 인상적인 작품은 무엇일까요? 이탈리아 피렌체 피티 궁전 미술관에 있는 「의자의 성모」입니다.
「의자의 성모」는 톤도 양식으로 그려진 최고의 성모자 그림입니다. 둥근 액자 안에 세 명의 인물을 집어넣기 위해 라파엘로는 완벽한 구도의 묘미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아기예수님의 몸을 옆으로 틀어 좁은 공간에서 다소 여유 있는 동적인 배치를 시도한 것입니다.
또 이 그림은 완벽에 가까운 색채의 조화를 이룹니다. 그림에 사용된 청색, 황색, 적색, 녹색, 흑색은 5대륙의 화합을 의미하는 오륜기의 색과 같으며, 이국적인 머리장식과 어깨를 감싸고 있는 초록색 천은 그림의 다른 부분들과 어우러져 동서양의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은 전쟁과 갈등을 일삼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림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코와 팔꿈치와 왼쪽 다리는 구성의 수직적인 축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토실토실한 다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합니다. 이는 아기예수님의 기분 좋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꼭 안아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당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아기예수를 품에 안으신 성모님은 참으로 복된 여인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가 복된 이유는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 가능하니까요.
민수기에 나오는 축복에 대한 정의도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축복은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이요, 그럴 때 평화도 옵니다. 그러니 새해에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성모님 품에 안긴 예수님은 아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라파엘로는 8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품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기억 속에 가장 편안했던 어머니의 품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아기예수님이 아니라 조금 자란 어린 예수님입니다.
화가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품은 하느님의 품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평화로운 곳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은 두 손 모아 예수님을 품에 안은 성모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간 목자들도 마리아와 아기를 보고 나서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십니다. 그분의 응시가 너무나 강렬해 우리를 최면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그분은 아기예수님과 함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놓으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품어 안듯 세상을 품어 안으세요. 그래야 세상에 평화가 옵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이 말씀이 성모님의 덕담이랍니다.
2010년 경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렇게 새해 인사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누구도 “내게 복 많이 주세요.”라고 새해 인사를 하지 않거든요. 대신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복을 주는 데에 더욱 더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이란 예전부터 나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함께 받는 것이며, 함께 나누는 것이 복입니다. 성경에서도 복이란 주는 데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요.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창세기 12,3)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복이 더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만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복은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참된 복이 아니라, 순간의 쾌락만을 가져오는 악의 유혹일 뿐입니다. 참된 복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와야 하며, 이렇게 받은 복은 함께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010년 1월 1일. 2009년 12월 31일과 하루 차이에 불과한데도 뭔가 다른 날처럼 느껴집니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새 아침 새 날 새 하루라는 생각과 함께 사뭇 다른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르다는 느낌만을 간직할 것이 아니라, 올해는 나의 복을 나누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목자들이 나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그밖에 많은 유다인들은 이들 목자를 사회와 격리시켜서 거의 짐승 취급했었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목자들은 사회와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이 내려집니다. 바로 이 땅을 구원하실 아기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구세주께서 자기들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토록 멸시와 무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은 복을 간직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전해서 모든 이들이 복을 나누어 받아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자신이 받은 아픔과 상처를 생각하며 이제 그들을 무시하며 살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복수하고 싶다고, 아니 가능하다면 복수하겠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인 ‘예수’를 예수님께 붙이면서,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갔었는지요?
목자들과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도록, 올 한 해 복을 간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빛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스와미 웨다 바라티).
아기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으로
- 이영선 신부님-
교회는 오늘 두 번째 새해를 맞이합니다. 지난해인 어제 세상을 달리한 이들이 그토록 그리워한 새해를 맞이한 우리는 또 다른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해의 첫날인 오늘 저는 우주의 조화로움으로 또한 우리의 작은 손길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보살핌을 모든 이가 알아차리며 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돕는 일을 목자의 일이라 여기며 세상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드러내는 우리 노안성당의 올해 사목 방침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첫째, 가톨릭농민회 분회 한 공동체 이상 만들기
100여 명이 모이는 우리 본당 식구들은 본당 사제 둘을 포함해 모두가 농사꾼입니다. 그러니 함께 모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오랫동안 땅과 바람과 햇볕과 어둠을 삶의 근본, 곧 섭리로 알고 살아온 삶의 지혜를 나누는 모임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방식이면 좋을까 생각한 끝에 가톨릭농민회 분회를 울타리로 모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죽을 때까지 모임을 계속합시다.
둘째, 하루에 세 번 이상 거울 보고 웃기
우리 교우들, 검게 그을리고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이지만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지만 인류를 먹여 살린 하느님의 손입니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지만 하느님의 빛깔입니다. 기역자로 굽은 허리지만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왕자이고 공주입니다.
비록 텔레비전에 나오는 얼굴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살다 하느님 품에 안기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갖는 바람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느님
-정찬호 님-
새해의 첫날이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새날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리고 여러분 모두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댁도 평안하시고, 댁의 집안도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댁의 모든 소유도 아무 탈 없기를 빕니다.”(1사무 25,6)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라” 하신 말씀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하느님 안에서 올 한 해 잘 설계하시고 그에 합당한 결실 맺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복음 선포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세관원 등과 함께 ‘사기詐欺 직종’으로 낙인찍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조차 박탈되었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신분의 목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처음으로 주어진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 증언 능력이 없는 목자들의 말 값을 낮추어 보지 않으시고, 곰곰이 새겨들으셨던 성모님의 열린 마음도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비참한 곳(구유)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생애의 끝도 그러하였습니다. 비참한 곳(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죄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오늘도 비참한 곳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한 처음의 어머니처럼
-김찬선 신부님-
어제 한 해를 마감하면서 “한 처음”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한 처음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처음”과 “하느님”은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한 처음”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 계십니까?
“한 처음”의 어머니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도 없습니다.
마치 太極에서 모든 것이 나왔지만 태극이 無極인 것처럼 “한 처음”의 어머니는 없음이고 “하느님”의 어머니도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없음이 모든 있음의 어머니요, 없음이 모든 것이신 하느님의 어머니입니다.
無性이 어머니性인 것입니다.
오늘 한 해를 시작하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한 처음,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념합니다.
至極한 無 또는 無의 極端인 無極이 太極이고 지극한 무 안에서 태극이 모든 것을 낳듯이 존재와 자기가 지극히 무가 될 때 하느님은 거기서 모든 것을 생성하십니다.
하느님은 “ex Nililo”, “없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體現된 그리스도가 예수인 것처럼 體現된 어머니가 마리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느님의 어머니를 깊이 묵상하고 새로운 한 해를 어머니로 살기로 새 해 첫 날 다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로 산다는 것은 지극한 무를 사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온 국민을 패배자로 만드는 지독한 승리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힘을 지독히도 숭배하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모든 조직을 쥐락펴락하며 국민을 초라하게 만드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자기 법을 만들어내며 그걸 어기는 국민을 범법자로 만드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승자의 편에 서지는 못하는 대다수를 패배자, 낙오자로 만드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아니고 어머니다운 힘이 아닙니다.
남을 죽이는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남을 패배자로 만드는 승리자는 진정한 승리자가 아닙니다.
모두를 살리는 힘이 진정한 힘이고 모두가 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되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내가 낮아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Sustineo해야 합니다.
밑에서 바치고, 참고, 견디고, 바라고 희망하고, 북돋움으로써 마침내 모두를 살리는 그 Sustineo를 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제가 형제들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Sustineo를 잘 할 수 있을지 겸허히 살피고 그렇게 살기로 겸허히 다짐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겸허히 은총을 청하며 새 해 첫 날을 시작합니다.
한 몸이 되는 사랑의 신비
-전삼용 요셉 신부님-
폴란드에서의 일입니다. 에릭이라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 바사 공작이라는 사람이 반역죄를 저질러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겐 카타리나 지겔로라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습니다. 바사공작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늘 부인을 생각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카타리나는 왕을 찾아가 자신도 남편의 형기를 함께 복역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부인, 종신형의 뜻을 모르오? 한 번 감옥에 갇히면 다시는 빛나는 햇빛도 아름다운 하늘도 볼 수 없음을 의미하오. 그리고 부인의 남편은 더 이상 공작이 아니오, 그는 반역 죄인이며 평범한 평민일 뿐이오. 그런데도 내게 부탁을 하는 것이오?”
에릭 왕은 깜짝 놀라며 카타리나에게 물었습니다.
“알고 있답니다. 폐하, 하지만 유죄든 무죄든 공작이든 죄수이든 그는 언제까지나 제 남편이랍니다.” 카타리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더 이상 부부의 인연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 않소, 누구도 당신에게 죄를 물을 사람은 없소, 남편은 죄인이지만 당신은 자유요, 그것을 포기하겠단 말이요?”
에릭은 어떻게 하든지 이 아름다운 부인을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꺼내 왕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리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반지에는 라틴어로 두 마디가 새겨져 있답니다. Mors sola (단지 죽음만이), 이 말이 뜻하는 것처럼 우린 죽을 때까지 한 몸입니다.”
왕은 하는 수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줄기 빛도 스며들지 않는 지하 감옥으로 그녀를 내려 보내며 왕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지만 남편을 향한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에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을 따라 스스로의 자유와 영화를 포기할 만큼 그녀의 사랑은 진실 되고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17년 후 에릭 왕이 죽자, 카타리나는 남편과 함께 석방되어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부부는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부부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한 몸이 된 것은 영원히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는 제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창세 2,24). 또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으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한 몸으로 이어 준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물론 결혼해서 사는 분들은 혹, ‘한 몸이 되는 게 그렇게 쉬운지, 너도 한 번 결혼해서 살아봐라.’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의 신비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신비를 이해하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역시 그 신비로 한 몸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미사 봉헌 예식 때 사제는 성작에 담긴 포도주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해 주소서!”
포도주에 물방울 하나 떨어뜨리면 그 포도주는 무엇이 됩니까? 역시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한 번 떨어져 포도주가 되어버린 물방울은 다시 분리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가 되는 신비입니다. 성령님이 그 신비의 주인공이신데 녹여서 모두 하나로 만드는 역할을 하십니다.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불붙은 떨기나무의 형태로 나타나셨던 것은 또 어떻습니까? 그 불은 나무를 태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사 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신성을 의미합니다. 나무는 물론 땅에서 자라남으로 인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불붙은 떨기나무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인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곳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신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땅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자라난 나무, 바로 성모님의 몸에서 얻은 육체를 의미하고 불은 그 육체와 결합된 신성을 의미합니다.
십계명 판은 또 어떻습니까? 십계명 판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자와 땅에서 나는 돌과 결합된 것입니다. 말씀은 신성, 돌은 인성을 나타내고 한 번 결합된 것은 숯불과 같이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치 숯불에서 나무와 불을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느님의 신성과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인성이 결합되어 분리되지 않게 한 몸을 이룹니다.
이런 한 몸이 되는 부부의 일치가, 바로 가장 원천적으로는 성부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한 몸을 이루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그렇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그렇고, 또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또한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님 대축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천주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고 개신교에서는 이 교리를 믿지 않지만, 사실 이 교리를 믿지 않는 것은 성모님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 비록 육체만을 주셔서 육체의 어머니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합일체가 되셨기 때문에 육체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영혼의 어머니도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성만의 어머니, 신성만의 어머니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이 한 몸이 된,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자는 한 번 육체를 취해 사람이 되셨을 때 숯불과 같이 또 다른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새로운 무엇이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이란 말이 떨어질 수 없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른다면 동시에 사람의 어머니도 포함하는 것이고 사람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만 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 안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상으로만 취하셨든지 혹은 떼었다 붙였다 하듯이 겉으로만 취하셔서 완전히 사람이 되신 것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육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입니다(2요한 1,7).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큰 사랑고백이라고 한다면 역시 사람을 당신의 어머니까지 되게 하신 이 신비도 끝없이 인간을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어머니로 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척 든든합니다. 예수님께 청하기 힘든 것은 그 어머니께 청하면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에게 청할 것이고 당신의 아들은 부모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들어주지 말아야 할 것까지 들어주십니다. 가나의 첫 번째 기적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성모님의 부탁으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한 번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것처럼, 한 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영원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의 인사를 받고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모님을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이 거짓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인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지체이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동시에 우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 해의 첫 시작을 이 심오하고 핵심적인 혼인의 신비로 시작함은 바로 성모님께서 당신의 겸손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자 마지막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사다난했던 2008년 무자년도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고, 2009년 기축년 새해가 환히 밝았습니다. 작년에는 참으로 아픔이 많았지요. 나라에도 많은 혼란들이 있었고……. 그러나 소띠 해인 올 해에는 소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즐길 수 있는 해가 되길, 그래서 각 가정에 좋은 일만 가득한 멋진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2008년 새벽을 열며’ 한글 파일을 열어보니, 한 해 동안 A4용지로 총 731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더군요. 스스로 감탄을 하게 됩니다. 물론 글의 내용과 질은 형편없지만, 이렇게 많은 글을 썼다는 자체만으로도 괜히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금 ‘2009년 새벽을 열며’ 한글 파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즉,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작이 올해를 마칠 때쯤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시 700페이지가 넘는 글로써 바뀌어 질 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그 시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2001년 처음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시작할 때, 이 글을 쓰는 저 역시도 이렇게 오랜 기간을 그리고 이렇게 많은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사실 처음에는 2001년까지만 쓰고서 멈추려고 했었답니다. 글재주도 없고, 쓸 말도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를 통해서 하느님 당신께서 직접 활동하고 있음을 드러내시려는지 벌써 햇수로 9년째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에 연연할 필요도 또한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요. 나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즉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그만이지요.
오늘 우리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금년 한 해도 성모님께서 함께 해주시길 바라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과거에 연연하지도 또한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지요.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면서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잉태소식도 아무런 걱정 없이 받아들이시고, 잉태 전 천사가 일러준 이름을 받아들여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십니다. 또한 그밖에도 천사의 말해준 바를 듣고는 곧바로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십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피해야 할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대신 성모님의 모습을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새해입니다. 올해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시련은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 했을 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는 열두 달 만에 한 번 찾아온다.(스코틀랜드 속담)
첫날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축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소의 해가 밝았다는 뜻이네요.
우습지 않습니까?
신앙인인 우리가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느님께서 주신 새 해가 밝았다 함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소의 해, 닭의 해가 아니고 늘 언제나 하느님의 해입니다.
이 하느님의 해에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까요?
사뭇 궁금하지 않습니까?
올 한 해가 어떤 한 해가 될지 저는 사뭇 궁금합니다.
설레지 않습니까?
전에는 새해가 되어도 담담했는데 올해는 담담하면서도 왠지 설렘도 있습니다.
예견되는 올해의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무엇보다도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힘의 정치로 계속 가면 정치적으로도 올 봄 큰 저항이 다시 일어날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보수와 진보 사이에 갈등도 심해질 것 같습니다.
관구회의 후 새로운 소임과 새로운 환경도 결코 녹녹치 않을 것입니다.
올해는 또 어떤 형제와 살지 모르지만 힘든 형제도 있을 것입니다.
예견되는 외적 상황이 이처럼 모두 비관적인데 새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할 것은 무엇이며 설렌다는 것은 더더욱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도전하는 자의 설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자의 설렘입니다.
요즘 와서 저는 등산 중독, 마라톤 중독에 빠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많이 하지는 못하고, 마라톤의 경우 지난 해 한 번밖에 뛰지 못했지만 올해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42,195Km를 완주하고 싶습니다.
마라톤을 뛸 때 보면 출발을 앞두고 몸을 풀 때 모두 약간은 들뜨고 설레는 표정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끔찍하게 힘든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앉아서 죽지 않고 나가서 맞이한다는 설렘이고 그 어려움과 고통을 마침내는 이겨낼 것이라는 설렘입니다.
결국 승리하는 자의 기쁨에 대한 설렘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나의 승리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하느님을 믿고 나에게 닥칠 그 무엇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도전적 의지를 가질 뿐입니다.
승리의 나머지 몫은 하느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힘든 것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참혹한 고통을 감수할 사랑을 주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모든 걸림돌들을 디딤돌로 바꾸실 것입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묵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지 않고 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힘들지 않고 힘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고통 없이 사랑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걸림돌이라고 치어버리면 디딤돌도 없습니다.
치어버리지 말고 딛고 올라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해야 할 것은 힘들다고 치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드니 힘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오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세워야 할 계획
- 이건복 신부님-
10년 전 신설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아 가정방문을 할 때 한동안 냉담했던 젊은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매님은 아이를 업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례명이 뭐냐고 물었더니, 자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직 세례 받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아이가 커서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선택하게 배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잠시 저도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가 커서 종교를 선택하도록 한다면 아이가 다른 종교를 선택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이 어머니의 신앙은 뭐란 말인가? 누구나 부모라면 자식이 잘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과 인생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자녀에게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인생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기교육을 생각하지 못하는 부모라면 앞으로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입니다.
새로운 한 해의 첫날, 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 대축일로 지냅니다. 신앙의 모범이시며 구원의 중재자이신 어머니와 함께 한 해를, 일평생을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시고, 앞으로 그 아들이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을 곰곰이 생각하시며 모든 뒷바라지를 하고자 결심하십니다. 우리도 새해 첫날 수많은 계획을 세우는데,그중에 자녀의 구원을 위해 한 해 동안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워야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새해의 빛나는 이 아침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새해의 빛나는 아침을 다시금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중에 하나가 매일 주어지는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또 다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자비의 표시로 새해 새 아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한해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침묵하면서, 감사하면서, 그렇게 엮어 가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릴 때, 문득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혹시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누군가가 계십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사람, 떠올리기만 해도 감사한 사람, 존재 자체로 행복을 주는 사람, 오늘 같은 새해 첫날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늘 송구스러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분들은 삶이 훨씬 풍요롭습니다. 삶이 한결 여유롭습니다.
고맙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는 신자가 됨과 동시에 그런 고마운 분이 자동으로 한분 생깁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분,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와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 평생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또 다른 아들들인 가슴 아픈 우리들,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탄식하는 우리들의 따뜻한 위로자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언제나 조용히 예수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분,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쓸쓸하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아들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은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도 신비로운 세계, 하늘나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조용히 간직하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인생여정은 칠흑과도 같은 암흑을 홀로 걷는 것과도 같은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인생 안에 펼쳐진 수많은 사건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겪었던 셀 수 없는 고초들을 거의 예견하지 못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삶이 전개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수많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으시고 그저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꾸준히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낳은 아이,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애지중지 키웠던 소년 예수를 향한 인간적 사랑이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인간적 생각이 스며들 때마다 성모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말끔히 비워야만 했습니다. 아쉽고도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자신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따뜻한 인간 세계 둥지를 떠나 거칠고도 황량한 신앙의 사막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 한해,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한 해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인 새해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새해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여백, 성모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존경하는 존 포웰 신부님의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가톨릭출판사)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여러 감동적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지요. 그 중 '실크 잠옷 한 벌'이라는 이야기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신학교 근처 한 교회 병원에 다재다능하고 친절한,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극찬하는 수녀님 한 분이 근무하고 계셨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병원에서 활동하기 3년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형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어른 수녀님께 '이 수녀님은 남은 생을 이 침대에서 보내야 할 것 같다'고 알렸습니다.
수녀님은 병상에 누운 채, 모든 희망을 잃은 듯한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의 정신 이상은 한 가지 특이한 증상을 보였는데 침대보를 모두 벗겨내고 자신이 입고 있던 환자복마저도 벗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전문의에 따르면 수녀님은 자신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지긋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밝은 분홍색 실크 잠옷 한 벌을 들고 수녀님 입원실에 들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딸을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수녀님에게 말했습니다.
"이걸 입으면 아주 예쁠 거예요."
그 수녀님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두 손으로 제 뺨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순간, 저는 정신분열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저는 제 뺨을 어루만지던 그분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습니다. 그 순간, 정말로 사랑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수녀님은 그 '따뜻한 체험'을 자기 인생의 화두로 삼게 됐습니다. 수녀님은 요즘 자신이 도우미 아주머니로부터 받았던 그 '따뜻한 느낌'을 또 다른 환자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계신답니다.
어떻습니까? 위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얼굴이 없습니까?
인생의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릴 때, 문득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누구입니까?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분,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와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 저는 개인적으로 성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 평생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또 다른 아들들인 가슴 아픈 우리들,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탄식하는 우리들의 따뜻한 위로자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언제나 조용히 예수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분,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쓸쓸하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아들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은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도 신비로운 세계, 하늘나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조용히 간직하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낳은 아이,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애지중지 키웠던 소년 예수를 향한 인간적 사랑이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인간적 생각이 스며들 때마다 성모님은 다시 한번 자신을 말끔히 비워야만 했습니다. 아쉽고도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자신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따뜻한 인간 세계 둥지를 떠나 거칠고도 황량한 신앙의 사막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모두 또 다시 새로운 한 해 앞에 서있습니다. 늘 걸어도 두렵고 떨리는, 때로 혹독한 세월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인 새해,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새해'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한 해
-이중섭 신부님-
한 소년이 떨리는 입술로 내 책상에 왔네. 수업이 끝났을 때.
“저에게 새 도화지를 주시겠어요? 선생님, 이것은 망쳤거든요.”
나는 그의 도화지를 받았네. 온통 때 묻고 얼룩진.
그리고 그에게 새 것을 주었네. 하나도 때 묻지 않은.
그 다음에 그의 지친 마음에 나는 웃음 지었네.
“이번에는 더 잘 해보렴. 내 아이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옥좌에 갔다네. 한 해가 끝났을 때.
“저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시겠습니까? 이번 한 해는 망쳐버렸거든요.”
그분은 나의 한 해를 받으셨네. 온통 때 묻고 얼룩진.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셨네. 하나도 때 묻지 않은.
그런 다음 나의 지친 마음에 그분은 웃음 지었네.
“이번에는 더 잘 해보렴! 내 아이야!”
2007년이 지나가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주님은 지난 한 해를 축복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주십니다. 새해에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 하느님의 말씀에 맛 들이는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 2008년 말에는 올해도 한 해를 망쳤구나라고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구
-주영길 신부님-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예수님의 탄생 예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 곧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1,76-77)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리라. 시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도 ‘주님의 도구’라는 것을 복음사가는 암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첫 선포자와 그들의 역할을 전하고 있다. 그 영광을 차지한 이들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목자들’이다. 앞서 복음은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이들이라 묘사한다(2,8 참조). 이 대목은 목자들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막중한 성탄의 선포를 보잘것없는 이들한테 맡기신 것이다. 예수님 역시 공생활에 앞서 당신의 제자로 어부들을 선택하신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들, 갈릴래아 호수에 의지한 채 하늘이 주는 대로 거두는 순박한 이들을 뽑으신 것이다.
본당에서 연초가 되면 참으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임기가 끝난 단체장으로 누구를 새로이 임명할 것인가? 며칠씩 고심한 본당 신부의 부탁을 들어주기나 할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점점 바쁘게 돌아가며 먹고사느라 빠듯한 이들에게 섣부른 부탁을 하는 것 같아 말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거절하면서 가장 흔히 듣는 구실은 ‘아는 게 없어서’ 또는 ‘능력이 안 돼서’이다. 이런 걸 굳이 겸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도구’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능력이 있거나 우리 자신이 뽑아주십사 간청해서 쓰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예’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정말 교우들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여러모로 부족합니다만,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니 성심껏 해보겠습니다.” 하는 말이다.
모든 것을 간직하시는 성모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시절부터 남편과 결혼생활이 무척 '팍팍'했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팍팍'한 정도를 넘어 할머니 젊은 시절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바깥으로만 맴돌던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년에 몇 번씩 얼굴을 비치더니 급기야 소식조차 알 길이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과부가 된 부인은 일찍부터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자식 교육도, 늙으신 시부모님 봉양도 혼자 몫이었습니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생활력이 강했던 부인은 그 오랜 고난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자식들은 잘 성장했고,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마련하게 됐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게 됐고, 한평생 홀로 갖은 고萱?다해온 어머니께 극진한 효심을 표했습니다. 평생 고생한 끝에 할머니는 이제야 겨우 여유있고 편안한 노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상 떴으려니 생각했던 남편이 나타난 것입니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건장한 체격, 준수한 용모는 어디가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볼품없고 꾸부정한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서성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며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러나 착한 심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계속 문 밖에 떨고 서있는 할아버지를 일단 안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천천히 할아버지는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할머니였습니다. 일단 불쌍해서 받아들였지만 아직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너무 괴로웠습니다. 용서하자고 수천번 다짐해도 일단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습니다. '이러다 내가 죽지'하면서 마음을 바꿔먹어도 그 때뿐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웠던 할머니는 친구 할머니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친구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영감님이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늙고 병든 예수님, 추위에 떨고 있는 배고픈 아기 예수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해봐요!"
그 한마디 말씀이 할머니 가슴에 전광석화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보석같은 한 말씀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할머니는 그날로 '할아버지=아기 예수님' 등식을 만들어가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늙고 병들어서야 찾아온 할아버지를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하시는 할머니 모습에서 온몸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산골 소녀 마리아의 향기를 느낍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예수 잉태라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과 이후 계속된 가슴 철렁 내려앉는 '별의 별' 상황 앞에서 오직 "예!"라고 순명할 줄밖에 몰랐던 마리아, 지극히 단순하고 겸손했던 마리아가 하느님 어머니가 되시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는 전 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자신 안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 잉태 이후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던 이해하지 못할 일들, 아들 예수로 인해 속끓이던 일들,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일들 앞에서 마리아는 철저하게 간직하십니다. 침묵 가운데 지속적 묵상에 전념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때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 시신을 품에 안던 순간까지 성모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침묵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 뜻을 찾아갑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가장 탁월한 신앙인이 되셨고 마침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난데없는 고통과 십자가들,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 의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겠지요. 그 순간 성모님 일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8).
지금은 비록 무엇이 진정한 하느님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혼란스럽지만 하느님 계획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굳건히 우리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이 한해,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고통 속에서도 활짝 웃는 한해, 십자가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기도'합시다
-배광하 신부님-
새해’입니다.
묵은 해니 새해니 따지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면
해 바뀐 듯 하지만
보라고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학명 스님의 글입니다. 먼저 새해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새해에는 정말 모든 아픔과 슬픔을 뒤로 하고 기쁘고 평화로운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코헬렛의 저자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 9)”고 하였지만 분명 묵은 해가 있고 새해가 있는 법입니다. 새날, 새달, 새해가 없다면 인생이 너무 무미건조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새해가 있어야 지난해의 묵은 찌꺼기인 불화, 불목, 여러 상처들을 다시금 씻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새로운 설계를 새해 참신한 기분으로 새롭게 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새롭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정말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욕심과 이기심, 알량하고 쉽게 상처 받던 내 마음의 얼룩이 사라지기를, 새해 새 빛을 받으며 그 광채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도록, 주님과 멀어졌던 나의 이탈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만이 내 생의 모두라는 사실에 더 크게 눈뜰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뜬 눈을 지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은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보일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에 진정 눈뜰 수 있어야 합니다.
새해에는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직도 분단된 국가의, 민족의 백성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세상은 전쟁의 살육이, 그 포성이 멈추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았는데 나 홀로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는 이기심에는 결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음에 깨달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는 진정 새해의 밝은 태양이 떠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빛을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을 빕니다.
새해의 참된 기원과 그에 따른 실천이 있었을 때 민수기의 축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 24~26)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복, 그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 고달픈 인생길에 참 동행자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의 축복이며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갈라 4, 7)
때문에 우리에게는 넘치는 희망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축복이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얼굴’은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파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파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걸작 품인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뒤,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 31)하신 인간이 너무나 타락하여 끝내는 벌하시려는 하느님의 탄성, 그래도 당신께서 만드신 당신의 자녀인 인간이 가여워 다시금 인간을 향하여 당신 자비와 사랑, 용서와 자애의 얼굴을 보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얼굴에서 나온 단어라고 합니다.
‘파님’의 얼굴을 인간을 향하여 보이신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때문에 죄의 유혹 속에 더는 헤어 나올 수 없던 연약한 우리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영광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새해에는 그 같은 진실한 복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복이 모든 이에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평화가 모든 가정에, 나라에 가득하길 빕니다. 그 같은 복을 받은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 행복은 그 행복을 진정 느끼며 사는 이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이들은 진정 그 행복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감사가 있을 때 다른 이들에게도 그 복을 내릴 수 있으며, 복을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노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었던 복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분명 돌고 돌아오는 은총인 것입니다. 새해에는 그 같은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사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 신앙인의 복(福)
-김영수 신부님 -
“부~자 되세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무렵이 되면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복을 빌어주는 메시지들이 종종 배달됩니다. 대부분 “부~자 되세요!”라고 기원하는 메시지들을 보면서 한 해를 새로 시작하며 서로에게 감사하고 복을 빌어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빌어주어야 할 진정한 복(福)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 날 우리가 묵상하는 민수기(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빌어주라고 하신 복이 무엇인지를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빌어주라고 하신 세 가지의 축복은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빌어주어야 할 복(福)입니다.
첫째 ‘야훼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영적진실을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에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믿는 사람은 이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희망을 안고 살아갈 힘과 여유를 축복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훼께서 웃으시며 우리를 어여삐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영적진실에 대한 믿음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헛된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자유를 줍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자신의 욕심을 채움으로써,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가짐으로써 유지되는 힘의 불균형일 뿐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위의 성과 같은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교회는 새해의 첫날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며 평화의 날로 지냅니다. 목자들이 달려간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는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는 세상에 참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 누추한 곳에 누워계신 가난한 아이의 모습 속에서 평화를 축복으로 받은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자들은 이 초라한 마구간에서 그들이 바라던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이 아기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갔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이 모든 사실을 듣고서도 그저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평화를 진심으로 갈망하면서도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애타게 바라는 평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또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호기심과 욕심으로 뒤범벅된 갈망은 인간을 거짓 평화를 찾아 헤매고 방황하게 합니다.
“마리아는 그 일들을 모두 당신 마음속에 간직하여 곰곰이 생각하였다” 고 전합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구세주의 탄생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야 했던 성모 마리아가 ‘모든 일’들 앞에서 고요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모습은 참 평화를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추구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평화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인은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자 애씁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찾기 전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며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그 때를 알아 볼 줄 아는 신앙인의 복(福)입니다.
새로운 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한 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바람’과 ‘지향’이 들어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겠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처럼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 줄 알고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고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도록 성령께 청하며 새해를 시작합니다.
새해 아침
-서공석 신부님-
2006년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행복한 한 해를 빕니다. 우리 모두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으실 것을 기도드립시다. 하느님이 베푸신 또 한 해의 세월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로운 한 해가 되어서 시편의 기도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입니다”(시편 117,23)라는 기도가 우리의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한 해가 될 것을 빕니다.
오늘은 2006년을 여는 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 시대 교회 안에는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는 한 인간에 불과하였지만, 그분 생애의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는 순수 인간에 불과 했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마리아를 ‘사람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431년의 공의회는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만일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참다운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의 생명을 보는 것은 그리도 신앙의 근본입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예수님 안에 참으로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선포의 목적은 성모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분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이 말씀을 긍정하는 ‘천주의 모친’이라는 오늘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채택된 역사적 상황을 모르면, ‘천주의 모친 마리아’라는 말을 마리아가 하느님보다 먼저 계셨다는 뜻으로 오해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축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확실히 본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재천명하는 축일입니다.
오늘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한 것은 1967년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평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평화는 통치자가 주는 것이었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면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한 것은 교회가 세계 평화는 이제 모든 사람이 함께 찾아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세계의 평화는 모든 사람이 함께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찾아야 하는 평화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평화입니다.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성탄날 밤에 들은 루가복음서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입을 빌려 복음서는 선포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2,14). 마태오복음서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5,9)라고 선언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온 인류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땅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에게 평화”라고 루가복음서는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그 한계를 보면서 가엾이 여길 때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 위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이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서의 이런 말씀들은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아성을 탈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은 자기 자신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다양함을 뿌리셨습니다. 그 다양함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양함을 은혜로운 것으로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숨결을 불어넣으시면...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104,30).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땅의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게 되어 땅의 모습이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인류가 서로 위해 주면 평화를 누리는 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서로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합니다. 축복받은 한 해가 되라고 비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는 모세에게 하느님이 하신 말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오늘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이웃 위에 하느님이 복을 내리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이웃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한 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해의 세월을 베푸셨습니다. 은혜로운 한 해를 기쁘게 시작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또 해야 하는 일에 온 정력을 쏟아서 정직하게 능률을 올리는 것도 이웃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한 것은 우리 삶에서 한 해의 세월이 또 줄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에 그만큼 다가갔다는 말입니다. ‘사람만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들은 자기의 종말을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지만, 인간만이 자기의 종말을 내다보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세월을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셔서 태어났고, 하느님이 축복하셔서 살아가고, 세월이 흐르면 하느님에게로 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이웃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힘쓰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오늘 새해의 아침입니다.
생명을 보호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
새해 첫 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제1독서: 신명 6,22-27
24: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얼굴을 빛내시며-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26: 야훼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얼굴을 들어-너희에게 평화를, 즉 구원과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영신적 성장뿐만 아니라 단순한 인간적 성장까지도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축복은 365일 계속되어야 한다.
복음: 루가 2,16-21: 여드레 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일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느님의 1주간이 꽉 찬 것이다. 이것은 주일로부터 주일로 부활주일로 완성된 모습이다. 이 8일이 된 날 할례를 통하여 아기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된 날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예수“Jeshua'-Jah, 야훼는 구원이시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어제이며, 우리의 오늘이고, 또한 영원히 같은 분이시여라”라고 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신 분”으로 항상, 그리고 오늘 여기서 주어지는 분이다. 단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찬을 모시고, 마음의 할례 즉 회개를 할 때, 그분은 우리를 복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제2독서: 갈라 4,4-7: “압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히브리인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다.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에 속하게 하시고, 구 율법을 완성하게 하셨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은 외아들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그 성령을 통해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우리들을 위한 전달자이시다. 이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은 종의 모습이 아닌, 참 자녀의 모습이다. 참 자녀는 상속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평화는 마음의 질서가 잘 잡힌 조화로운 상태이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문란하면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이 질서가 올바로 정립되어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마음의 질서의 조화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여(루가 1,38 참조) 당신 자신의 신적인 모성의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신적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 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 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 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 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 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보다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하자. 아멘!
하느님의 어머니
-구요비 욥 신부님-
전례력으로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내 안에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탄생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오늘 교회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송하고 공경하는 신앙교의는 에크하르트가 말한 질문에 빛이 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4,43)라고 한 인사말에서 유래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칭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리아께서 여신(女神)이라든가, 신성(神性)을 지녔다던가, 그리스도의 신성이 마리아에게서 유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위격 안에 하느님의 신성과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간직하고 계시기에 마리아가 낳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계시기에 우리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신앙고백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과 동경인 ‘하느님 됨’(神化)을 채워 주고 있습니다.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는 우리 민족설화 중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분을 뛰어 넘는 애틋한 사랑이야기이지만, 인간은 다 평등하며 또한 고귀한 존재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차원은 이보다 더 깊고 넓고 높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함으로써(갈라 4,6 참조) 우리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표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데”(갈라 2,20) 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서(루카 1,38 참조) 예수님을 잉태하고,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고 키우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고(故) 바오로 6세 교황은 철학자 ‘장 기통’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나눈 대화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를 “사람이 말씀이 되셨다”로 바꾼다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심오한 정의가 아닐까요?”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늘 깨어 듣고 묵상하며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 때(루카 2,19참조), 주님은 늘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모되어 갈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는 방법
-이기양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너도 나도 복을 빌어주는 이 아름다운 새해 아침에 문득 생각해봅니다.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그렇습니다. 성모 마리아이시지요.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나자렛이라는 작은 동네에 살고 있던 한 소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엄청난 은총을 받고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공경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어떻게 가장 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운이 좋아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기도 모르게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 복은 언제나 하느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고 하느님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복이었습니다.
새해 첫날이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오늘, 저는 여러분들께 하느님 안에서, 또 세상을 살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을 한 가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사십시오.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의 경상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또 바다도 하나가 있는데 그 이름이 '사해'(死海)입니다. 곧 죽음의 바다(The Dead Sea)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사해가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해 주는 요르단 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는 극과 극을 이룹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물이 맑고, 고기도 많으며, 강가엔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노래하는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풍요로운 생명이 넘실거리는 호수이지요.
이에 비해서 사해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더러운 사해는 그 물에 어찌나 염분이 많은지 사람이 들어가면 둥둥 뜰 정도입니다. 해서 이곳에는 고기도 살 수 없고 먹이가 없으니 당연히 새들도 깃들이지 않으며 사람 또한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나라에 생명이 넘쳐나며 누구나 좋아하는 풍요로운 호수가 있는가 하면, 아무도 살지 않고 찾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있을까요? 이토록 극단적인 호수와 바다가 함께 공존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을 다시 요르단 강을 통하여 내보내기에 항상 물이 새롭고 깨끗하여 생명이 넘쳐납니다. 반면에 사해는 갈릴래아 호수보다도 낮은 까닭에 물이 흘러 들어와도 계속해서 가두기만 할 뿐 밖으로 내보낼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연 죽은 물이 될 수밖에 없지요. 받은 만큼 나누는 곳에는 생명이 꽃 피고, 움켜쥔 채로 나누지 않은 곳에는 죽음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그 사람에게 가면 왠지 다시 힘을 얻을 것만 같고 찾아가 아무 말 안 해도 푹 쉬고 온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못 챙길 정도로 나누는 것이 몸에 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늘 솟아나는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쓸쓸한 마당에서 친구들을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그를 고약하게 여길 뿐 가까이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가 움켜쥐기만 할 뿐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움켜쥐면 풍요롭게 될 것 같지만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결국 생명과 죽음, 축복과 박복은 내 것을 얼마나 나누면서 사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일생을 봉헌하시고 내어 주는 삶을 통하여 가장 복된 여인이 되었듯이 나눔의 삶을 통한 축복의 한 해를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인가?
-유영봉 몬시뇰 -
초 점: 마리아의 지위는 예수님의 지위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은 교회는 서슴없이 예수를 낳고 기르신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구원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특별한 위치와 기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인가?
우리 주변의 프로테스탄 신자들이 가끔 천주교를 비난할 때, "천주교는 예수님을 믿는 교가 아니라 마리아를 믿는 교회이다."고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어느 성당이나 성모마리아 상(像)이 모셔져 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을 마리아의 축일로 지낼 뿐만 아니라, 그 축일의 이름도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 축일'이다. 한 인간을 '하느님의 모친'이라니 얼마나 엄청난 호칭인가? 더구나 한국 교회는 이 축일을 주일이 아니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축일'로 지낸다. 그리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성모성월로 지낸다. 어디 그 뿐인가? 다른 기도는 몰라도 성모송을 계속 바치는 '묵주의 기도'를 모르는 신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성모님께 대한 교회의 애정과 정성이 남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모님께 바치는 이러한 공경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성탄의 기쁨을 경축하는 8일 동안의 축제가 오늘로 마감된다. 어떤 분의 탄생을 축하한다면 그분의 어머님을 그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아침을 여는 1월 1일이다.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한해에 있어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 날을 성모님께 바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가?
구약은 신약에로 인도하는 빛이며, 구약의 모든 계시와 예언이 신약에서 완성된다. 구약은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구약은 메시아의 오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의 탄생은 신.구약을 가르는 분기점이 아닌가? 마리아는 그 극적인 사건, 즉 메시아의 탄생 사건의 핵심에 자리하고 계신 분이시다. 마리아를 통해서 신약의 새 빛이 비춰오기 시작했기에 새해 첫날에 마리아의 축일을 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2. 마리아는 언제부터 '천주의 모친'으로 불리었는가?
한 여인을 '하느님의 어머니' 즉 '천주의 모친'으로 부르는 것은 합당한가? 교회는 왜 이 엄청난 호칭을 마리아에게 드렸는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하며 경탄하였다.
교회가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란 이름을 드린 것은, 서기 431년 에페소 공의회 때의 일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는 뛰어난 인간일 뿐이지 결코 신(神)이 아니다."하며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 파'의 주장이 있었다. 서기 325년 니케나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이단(異端)이라고 단죄하였다. 그 후 서기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두 위격이 있다고 주장한 '네스또리우스'의 주장을 또한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位格)안에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예수님이 바로 제2위 성자임을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예수가 바로 하느님 제 2위 성자이시기에 당연히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역적(逆賊)을 낳은 여자는 역적의 모친이 되고, 성군(聖君)을 낳은 여자는 성군의 모후(母后)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마리아의 위상(位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학이나 신심의 발전을 보더라도 마리아론(論)은 항상 그리스도론(論)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마리아께 대한 공경과 신심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고 기르신 분이 아니라면 교회가 마리아를 공경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깨닫고 믿었기에, 일찍부터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라는 엄청난 '호칭'을 드렸던 거이다.
3. 마리아는 그저 운 좋은 여자인가?
마리아는 '운 좋게'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되어, 뭇 사람들의 공경과 사랑을 받게된 스타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한 그 순간부터 그의 생애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그 길을 가는 예수는 이해하기 힘든 아들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불어닥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은 갖가지 시련을 안겨주었다. 불가사의한 출산, 피난, 아들의 엉뚱한 언행, 아들의 가출, 방랑 설교가가 된 아들, 사형수 어머니 등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나를 어디로 내몰고 계시는가?" 마리아는 이런 의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했다. 그러나 한번도 하느님의 원망하기보다는 줄곧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fiat)"를 반복하는 삶이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때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오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며 그분께 온전히 우리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겠다. 오늘 본기도의 말씀대로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 성자를 맞아들이게 되었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는 또한 우리의 전구임을 깨닫게 하소서." 하며 정성되이 기도하자.
-김정훈 신부님-
오늘 우리는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는 복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를 천주(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가르쳐 준다.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만왕의 왕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신 분의 탄생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천사들의 경배나 천상 군대의 찬미소리는 물론 값진 예물을 들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도(王都)가 아닌 시골이며, 왕궁이 아닌 마구간이다. 또한 세상의 빛이신 분께서 모든 것이 고요하게 잠든 한밤중에 태어나셨다는 사실도 천상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찬란한 광채와 함께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습과 매우 다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들(작은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루카 17,2 참조)이시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의 탄생지로 누추한 시골 마구간을 택하신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이세벨에게 쫓겨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엘리야에게 새로운 힘과 사명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발현하셨을 때의 일이다. 엘리야가 체험한 하느님은 강한 바람,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다.(1열왕 19,11-12)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요란하고 현란한 방식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한밤중 시골 마구간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어 보잘것없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낸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면 언제나 중앙에는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그 양편에는 요셉과 마리아를, 나머지 둘레에는 목동들을, 마지막으로 가장자리에는 가축들을 배치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렇게 모든 눈이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삶만이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목자들은 들에서 천사들을 만난 일과 천사들이 들려준 말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한다.(루카 2,17) 여기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벌써 널리 퍼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전한다.(루카 2,18)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이 신앙으로 발전했다는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 또는 “거참, 신기하네!” 하고 말할 정도의 일로 여겨진 듯하다. 우리도 가끔 매스컴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대한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때만 신기해할 뿐이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태어나신 분이 누구신지, 그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찾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났고 천상 군대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기 위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존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께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사람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마리아는 놀라움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는 데 몰입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신비는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하느님께서 직?밝혀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마리아의 태도는 소박하고 고요하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탄생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하느님의 신비를 단숨에 알아듣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다.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깨닫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수동적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도움 안에서 그분의 신비한 뜻을 깨달으려 최선을 다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면서 그분 지혜의 비추심을 갈망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기다림을 토대로 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 분명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고요하게 기다린다. 분명 마리아는 이러한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의 눈에는 미친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먼저 보낸 불쌍한 인생 여정을 걸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를 누린 행복한 여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는’ 마리아의 신앙을 거울삼아 우리 신앙을 비춰보고 바로 세워야 한다.
“주님,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저도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세속적 사랑과 행복을 찾아 당신을 떠나 헤매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약하고 부족한 저희에게 당신과 함께하는 삶만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 유혹(돈, 쾌락, 지위, 과도한 취미생활 등)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 저희 삶을 자주 깊이 성찰하면서 당신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묵상과 기도
▷예수님을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신앙에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신앙과 나의 신앙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정동수 신부님 -
훈련소에 들어가서 낯선 군복을 받고, 입고 있던 옷을 싸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보충대를 떠나 교육대에 가서는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며 정신적인 충격 속에 한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감성적이어서는 안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조교들도 “너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마라. 개나 소 같은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훈련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말했습니다. 힘든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서 저는 스스로의 마음을 메마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편지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머니께 편지를 쓰려 했는데, ‘어머니’라는 글자만 쓰려 해도 눈물이 났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되는데...’ 생각했지만, 편지지는 하염없이 젖어만 갔습니다. 다음날 다시 써보려고 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놈의 눈물이 마르면 편지를 쓰리라” 생각하고 매일 편지지를 꺼내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눈물 말리기 작전을 포기하고 눈물 젖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훈련 초기에는 힘들어서 인간미를 포기하려 했었는데, 어머니로 인해서 사람다운 따스함을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떠올림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어머니는 나를 메마른 인간에서 따뜻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작음, 겸손함, 따스함, 포근함, 침묵으로 항상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는 이유는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그분의 덕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을 나의 따뜻함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 안아 주어야 합니다.
말씀의 어머니
-이종민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주의 성모”,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요 참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은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런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수많은 여인 중에 왜 하필이면, 나자렛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성경에서 한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앞에 한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여라”라고 인사 하였을 때, 마리아의 반응은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또 성전에서 아직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는 대답을 듣고,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된 이유일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은 사람을 영적으로 민감하게 만듭니다. 마리아가 영적으로 무딘 사람이었다면, 당황스러워하고 거부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그냥 흘려버렸을 것입니다. 또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들려 왔음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으로 인해 영적으로 예민해 질 수 있었고, 차분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영적 예민함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 왔을 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당황스러워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겸손하게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7년의 마지막 날, 어제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아들”, 곧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성모님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품어 안음으로써 구세주를 세상에 보여 주셨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 자신의 아들이 하는 일을 그 때에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우선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말씀은 어느 기간 동안 성모님의 마음속에 간직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성모님은 항상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사건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마음속에 품은 작은 순종과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 안에 품는 일은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말씀은 계속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서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주위 형제들과 이웃들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기억해 봅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간직하고 있다면, 시간이 흘러 때가 찼을 때 그런 의문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가져 구세주를 세상에 보여 주듯,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들려오는 말씀을 놓쳐버리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게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008년 새해에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을 누리고, 또다른 성모님으로서 이웃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