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1-18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제1독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놀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시고 풍랑을 멈추신다(복음).
요한 사도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나다!”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신앙이 본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나다!”라는 예수님 한 말씀이면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체로 오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의 이웃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만나시는데 우리는 왜 이리 부족함을 느낄까요.호수의 맞바람을 이겨 내며 노를 젓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봅니다.
애를 씁니다.
땀이 납니다.
그만둘까 고민도 해 봅니다.
바람이 멎거나, 아니면 바람을 이겨 낼 초인적 힘이 주어지거나.
이러한 잡다한 생각들로 노 젓는 일이 더욱 힘겨워집니다.자기 삶에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껴진다면, 넋을 잃고 헤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줄곧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고수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을 예수님께 투사시켰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예수님을 보기보다 영광 속의 멋진 예수님을 그려 나갔던 제자들은 늘 넋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부족한 마음은 채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행복하려고, 성공하려고, 이런저런 자기 계발서들을 읽는 우리의 노력이 커질수록, 우리의 결핍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부족한 마음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이웃을 있는 그대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망상 때문입니다.
혼자 애쓰고 노력하고 다듬는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함께 나누고 보듬고 채우면 세상은 놀랍게도 풍요롭고 행복해진다는 사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묵상해 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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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제자들을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당신은 밤새 기도하신 뒤에 물 위를 걸어 그들을 쫓아가십니다. 제자들은 한 시간이면 건널 호수 중간에서 밤새도록 바람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걸어 자신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자, 마치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고 두려워합니다. 이들은 아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자신 안에 품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 주면, 자신도 사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려면 ‘두려움’을 이겨 내야 합니다. 하늘의 빵을 먼저 받아들여야 그 빵을 전해 줄 텐데, 하늘의 빵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처럼 두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먼저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몇 개 안 되는 빵과 물고기를 또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들이 나누어 주는 빵과 물고기가 두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벌써 끝나 버리면, 군중은 “지금 장난하느냐?”며 그들을 비웃고 화를 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물 위를 걷고 계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믿음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사제가 성체 성혈 기적을 이룰 때도 세상의 비웃음을 믿음으로 극복한다고 할 수 있고, 신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받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믿고 받아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풍랑이 멎습니다.(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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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출간하려고 24면 분량의 색인을 가나다순으로 맞추느라 하루 종일 애를 썼는데,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컴퓨터에 단번에 자동으로 정리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서 허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좀 물어보고 할 것을 …….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차이도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여럿은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 출신이어서, 실제로 예수님보다 호수와 배에 대해서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거나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은 매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잠이 드신 때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시면 제자들은 마치 노 젓기의 초보자인 듯 늘 허둥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부로 뼈가 굵어진 제자들처럼 배 젓는 일은 우리가 전문가이니, 예수님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좀 쉬시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일컫는 배는 고기잡이의 어선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일에서도 우리는 자주 같은 실수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잘 알고, 운전도 잘할 수 있고, 어떻게 처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도 뻔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배가 다 뒤집히는 풍랑을 한번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깨닫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려움을 겪고야 깨닫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돛대를 부러뜨리고 노를 잃어버리고,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입히는 일들을 봅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을 보면서, 처음부터 배를 예수님께 맡기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풍랑 때문에 배가 뒤집히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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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머니일까? 그냥 내 어머니이다. 가장 가깝고 죽음에 이르도록 갈라질 수 없는 혈연이다. 넘어지면 달려와 일으켜 주고, 끼니를 해결해 준다. 요술 부리듯 어딘가에서 간식도 꺼내 주고, 철 따라 옷 입히며 잠자리까지 보살펴 준다. 항상 내 곁에 있는 분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하고 불렀을 때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 시간에 밭에서 김매고 있을 모습이 떠오르지만 몰아치는 공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고 구마 순을 잔뜩 인 채 사립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엄마!” 하며 부를 때라야 마음이 놓인다. 어머니는 짐도 내려놓기 전에 말한다. “그래, 일찍 돌아왔구나!” 이 말을 다른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두려워하지 마! 엄마 여기 있다.”
하 느님도 그냥 하느님이시다. 주님이라는 믿음이 분명하다면 그냥 주님이시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했다. 악령을 추방하시고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는 능력을 가지셨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푸셨지만, 주님은 그런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분으로만 여겼다. 자기 경험 속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유령과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뭘 겁내고 그러느냐. 나다. 괜찮다.”로 읽는다. 하느님이 우리의 생각 안에 갇혀서는 유령이 되고 만다. 그것이 두려움의 실체다.
철부지 아이는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엄마를 알아보는데 제자들은 스승의 모습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이유를 복음서는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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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안에 머물러 기꺼워하기도 했고 또 생생하게 손에 잡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랑이 낯선 사람의 얼굴처럼 느껴지고, 처음 배우는 외국어처럼 제대로 된 사랑의 말이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두려움에 질려 버린 모습과도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그리 많이 듣고 체험하면서도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는 사랑에 신뢰하고 응답하기보다는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나를 보호하려 드는 유혹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사랑은, 사실은, 수수께끼나 모순이 아니라 신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명한 가톨릭 작가 체스터튼은 그의 추리 소설에서,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명탐정 브라운 신부의 입을 빌려 신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는 법이지요.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으니까요.”
사랑의 신비는 나에게 숨겨 있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억지로 장악하고 비밀을 밝혀낼 도전의 대상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완전한 사랑의 불가능에 대한 질문의 긴 시간을 졸업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마음을 열고, 두려움을 쫓아내는 사랑의 신비 앞에 조용히 머물며 그 사랑과 함께 숨 쉬고 싶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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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산다는 것이 힘이 듭니다. 몰아치는 폭풍우가 두렵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바람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노를 저어 보지만, 자꾸만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풍랑은 더욱 거세지고, 저의 시름은 깊어만 갑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하느님 앞에서 하소연하듯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함,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갑작스럽게 엄습해 온 질병 등, 어느 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폭풍 같은 일들이 우리 앞에 닥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캄캄한 터널 속에 갇힌 것처럼 모든 것이 답답하고 두려워집니다. 이렇게 우리 삶이 질식할 것 같은 어둠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을 인생의 ‘어둔 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의 핵심 말씀입니다. 어둠과 폭풍우는 시간과 함께 지나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우리 삶의 어둠과 폭풍우를 견디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말한 영성의 ‘어둔 밤’처럼 이런 시험기를 통하여 우리 삶은 정화되고 더 깊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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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가십니다. 이 모습에 제자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유령이 걸어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분께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힘을 받으면 누구나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의 힘을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야고보 씨는 술을 마시면 자주 필름이 끊어집니다. 그때마다 가족을 괴롭혔고, 이웃에게 창피를 당했습니다. 몇 번을 끊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클리닉’을 찾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침내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103위 성인 호칭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내심 끌렸습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을 정하고 103일을 기도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술을 끊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가족을 괴롭히지 않게 해 달라고 눈물로 청했습니다.
이제 그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마시고 싶을 때는 순교자들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힘’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못하는 일을 ‘은총’은 하게 합니다. 세상은 할 수 없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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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나 위험 속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던 일, 알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던 일. 이러한 일들을 가만히 돌아보면 모두가 기적이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인 줄 착각합니다. 스승의 능력을 망각한 것이지요. 우리 역시 행복할 때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관계가 꼬여 갈 때에는, 하늘에 불평하고 인연을 원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약한 마음을 아셨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화내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의식을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다시 일어서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물 위를 걷는 행위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잡아 주지 않으시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분의 힘을 얻어야만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행복의 근본은 믿음에 있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인생은 타이밍입니다. 소중한 타이밍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에 이어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시는 기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놀라운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호수 위를 걸으셨다는 보도는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들 통해 군중과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명료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해산시키신 후, 제자들만 따로 있는 장소,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그 계시를 더욱 심화시키십니다.
독자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맞바람에 죽을 지경인 제자들을 보시고 새벽녘 호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 곁은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절망할 위기에 내몰린 제자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려 하신다. 이는 제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외치는 일에 더 익숙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지나치려 하신 것입니다.”
머리 털나고 한번도 본적이 없는 기상천외한 일,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겁에 질려 혼비백산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지릅니다.
“유령이다!” 엄청 웃기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스승이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하니...
곧이어 제자들은 낯익은 스승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복음 6장 50절) 스승님의 그 음성에 제자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했을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 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마르코 복음 6장 51절)
당신의 현존으로 인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갈릴래아 호수 위의 경이로운 사건을 통해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직도 스승님의 신원과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특별한 일들 앞에 그저 경탄하고 있는 정도에만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스승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활짝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아직 마음이 완고해서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큰 희망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갖은 역경과 시련, 수시로 다가오는 인생의 역풍 앞에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 앞을 예수님께서는 스쳐 지나가실 것입니다.
인생은 타이밍입니다. 그 소중한 타이밍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자들처럼 유령이라고 외치지 말고,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지나쳐 가시려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즉시 우리가 탄 조각배 위로 올라오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올라오시면 그분 한 말씀으로 역풍은 잔잔해질 것입니다.
두려움을 놓아두면 용기가 잡아먹힌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나라의 궁궐엔 수천 명의 미인들이 왕을 위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왕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며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인들은 왕이 자신을 찾도록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왕이 혼자서 그렇게 많은 미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 줄 수는 없는지라 왕은 황실 화가로 하여금 후궁들의 모습을 그려 바치게 했습니다. 후궁들의 운명은 자연 화가의 붓 끝에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궁들은 앞을 다투어 화가에게 뇌물을 바쳐야했습니다. 돈 맛을 본 화가는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후궁들의 아름다움을 조작하였습니다.
어느 해의 일입니다. 한나라의 왕 원제는 외교상의 필요에 의하여 그 당시 걸핏하면 자기 나라 변경을 어지럽히는 흉노족의 왕 호한야 선우에게 후궁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물로 주기로 하였습니다. 왕은 화가가 그려준 그림을 토대로 가장 밉게 생긴 그림의 후궁을 골라서 흉노족의 왕에게 선물로 주기로 했습니다. 흉노족의 사신에게 그 후궁에 대해서 입이 마르도록 거짓 칭찬을 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러 인사차 들러 후궁을 보고는 왕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서고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바로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소문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수군이었습니다.
왕은 아깝고 절통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황제라는 체면과 이미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에 고스란히 주고 말았습니다. 뇌물을 받아먹고 사심의 마음으로 붓을 휘둘러 최고의 미인을 고의로 추녀로 그려낸 황실 화가가 무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화가 모연수는 그날 부로 목과 몸뚱이가 분리되는 참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책에 기록된 역사라고 합니다.
[출처: ‘화가 모연수의 거짓 그림’, Lectio Divina, https://lectio.tistory.com/603]
모연수는 돈에 집착하여 거짓 그림을 그렸습니다. 집착하면 그 집착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의 감정이 발동합니다. 사람은 두려움에 조종당합니다. 두려움에 조종당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면 하느님을 모실 공간이 사라집니다. 모연수는 집착에서 오는 두려움의 감정을 간파하고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어야합니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바람에 맞서 노를 젓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고 말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의 놀라고 두려운 반응을 부각시키며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란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나다!”라고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과자였던 장발장은 과거를 숨기기 위해 새로운 이름으로 어느 지방 도시의 시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한 노인이 수배 인물 장발장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가?’
그는 벽장 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심한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재판정에서 판사의 언도가 내려지려는 순간 장발장은 일어서며 당당히 소리칩니다.
‘내가 장발장이요!’
장발장은 자신을 대신하여 처벌을 받을 뻔한 노인을 위해 명예와 권세를 모두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집착이 없어야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사람이 두려움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방 싱크대의 수도꼭지와 샤워실의 샤워 꼭지를 교체했습니다. 수도꼭지는 잡아당기면 줄이 나오는 거로 바꾸었습니다. 설거지하고 난 후에 싱크대 정리가 편해졌습니다. 수압이 약해서 샤워하기 불편했는데 새 꼭지를 다니 수압이 좋아져서 샤워도 편해졌습니다. 작은 변화지만 관심을 가지면 보이고, 보이는 건 바꿀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보았지만 측은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축복하셨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나누었더니 배고픈 사람이 다 먹고도 넉넉하게 남았습니다. 기적과 표징은 관심과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순례하면서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건강입니다. 자신의 몸 상태는 본인이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평소에 먹는 약이 있다면 잘 챙겨 먹도록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시간입니다. 적어도 10분 전에는 약속된 장소에 나오도록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잘 지켜지는 순례는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소지품입니다. 매일 이동하기에 소지품 관리가 중요합니다. 여권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는 넉넉한 마음과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버스로 이동할 때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넉넉한 마음입니다. 숙소에 도착할 때 버스 안에 있는 짐을 내려 주는 건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이웃에 대한 배려는 순례를 풍요롭게 합니다.
순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내면서 순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이 보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가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보입니다. 엘리사벳과 만나는 마리아의 모습도 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을 받으시는 나자렛 예수님의 성가정도 보입니다.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던 언덕이 보입니다.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던 마을도 보입니다. 그물을 더 깊이 던지라고 하셨던 갈릴래아 호수도 보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의 수건도 보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라고 말씀하셨던 바위도 보입니다.
지난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하지만, 잘못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그런데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아직도 나를 기다려 주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자캐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와 그 가정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을 받아주시고,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성전 문에 있는 글은 순례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외에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착각이 우매함과 폭력을 낳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장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은 평생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책 한 권의 지식으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행하는 폭력이 이 세상에 만연되어있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되면 절대로 상대하지 못할 적으로 돌리고 있으며, 자신의 이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마치 원수 보듯이 여깁니다.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어렸을 때 한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떠올려 보면 별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그 친구가 틀린 것이고 그래서 당연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친구와 저를 선생님께서 발견했고, 저희는 선생님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화해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친구끼리 싸우면 어떻게? 서로 손 잡고 화해해.”
억울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악수하고 화해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얘가 잘못했는데 왜 화해해야 해요?”
저는 친구가, 그리고 친구는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어린이의 미성숙한 마음으로 지금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똑같은 사람이니까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으며, 그냥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안 될까요?
제자들은 밤새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풍랑과 맞바람으로 정상적으로 노를 저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목적지인 건너편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사실 제자들의 예전 직업 중에서 어부가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물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당황스러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자신의 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힘든 상황, 그래서 당황스러운 상황에 자주 빠지는 우리입니다. 그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본성이 어떤 것이든 그에 충실하라. 자신이 가진 재능의 끈을 놓아 버리지 마라. 본성이 이끄는 대로 따르면 성공할 것이다(시드니 스미스).
사랑이 보입니다.
어느 형제님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아내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자신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고, 이 사랑에 의해 자신은 이용당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남자가 그것도 이해 못 해줘?”라면서 화를 내면 할 말이 없어진답니다. 반박하면 “남자가~~”라고 시작하는 폭탄을 받게 됩니다. 왜 나만 사랑하고, 왜 나만 이해해야 하느냐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이런 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역시 많이 겪게 되는 일입니다.
나만 사랑하고 있고, 나만 이해해야 하는 현실이 싫다는 말인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배우자 역시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사랑은 동등하게 작용합니다. 처음에는 나만의 손해인 것 같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긴 시간을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동등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나만 이해해야 한다는 현실이 사랑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러나 손해 보는 것은 나만이 아니고, 상대방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면 무엇인가가 보이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신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2017년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는 한 목사가 신도들 앞에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준다고 하다가 강물에 빠지면서 악어에게 물려 죽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물 위를 걷는 기적 사건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초능력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전해주는 의미는 단순히 그런 초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께서는 물 위와도 같은 위태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늘 함께하시고 힘이 되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풍랑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고 전하고, 요한복음에서 보면 그들이 가려고 하는 곳에 배가 이미 다다랐다고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함께하실 때 세상의 어떤 풍파도 가라앉을 수 있고, 그분이 함께하실 때 우리가 가려고 하는 어떤 곳에도 당도하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이신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7-52).”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이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라는 증언입니다.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은 곧 ‘하느님’ 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욥기 9장 8절에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본 뒤에는 욥기의 이 구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을 멎게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저절로 바람이 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멎게 하셨습니다.)
이 일도 예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여기서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라는 말은, 오해하기가 쉬운 말인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도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나가다.’ 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탈출 33,19; 1열왕 19,11).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제자들의 상황과 그들의 모습입니다.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의 모습은,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고, 예수님 없이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그런 모습에서, 물고기를 잡으러 가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모습이 연상됩니다 (요한 21,3). 신앙인은 예수님과의 연결이 끊어져 있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특히 자기 스스로 떨어져 나가면 모든 위협에 대해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잘 유지하는 것, 그리고 항상 예수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과 떨어져 있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45절) 당신은 혼자 뭍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자들이 떨어져 간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시에 의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이 떨어져 있다고 해서 마음까지 멀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함께 있으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몸이 함께 있어도 마음이 멀어져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말은, 육안으로 보셨다는 뜻은 아닐 것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항상 제자들 (신앙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고, 제자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고, 제자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리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어떤 물체를 보았고, 그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유령이 다가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렸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인 줄을 모르고 유령 때문에 겁에 질렸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유령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을 크게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유령 따위를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긴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귀신이나 유령 같은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섭더라도 믿음으로 그 무서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그런 것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귀신이나 유령은 믿음이 강한 사람을 해치지 못합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 외에도 우리가 무서워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실감...... 그런 일들을 모두 포함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 등이
우리를 짓누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필요한 것이 ‘주님이신 분’에 대한 믿음이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그런 모든 것들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것들이라도 예수님께서는 ‘주님으로서’ 그것들을 지배하시고, 복종시키시는 분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모범이 되는 사람은 어떤 백인대장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마태 8,8-9).”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또 모든 일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뜻 모르면 살았어도 죽은 겁니다.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마르코 6,48~51)”
사람이 새벽에 물위를 걷는 걸 보면 겁 안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평범한 제자들이라서 저 대신 놀라셨다 생각하니 참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다는 걸 실제상황 세세히 알려주는 성경 좋아요.
세속 개인의 생각 수필 소설 등 많이 봐도 뉴스 다큐가 역시 좋더군요.
성경내용 보존에 많은 이들이 조사 연구 정리했구나 하며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며 뭘 가르쳤고 나와 무슨 관계인지 알려주거든요.
예수님의 가르침 모르면 한마디로 인생 잃어버린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추천도서가 아니라 생의 기본이며 그 뜻 모르면 살았어도 죽은 겁니다.
새사제의 탄생을 축하하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사제생활 내내 나는 ‘빵의 기적’(마르 6,34-44)을 체험했습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든 것 이루어짐을 보면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보며 살았습니다.
사제생활 내내 “물위를 걸었습니다.”(마르6,45-52 참조) 때로는 파도가 일고 격랑이 있었지만 아무 두려움 없이 물위를 걷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제생활 내내 자신있게 물위를 걸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임을 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빵의 기적’을 복음서에서나 보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기대고 사랑 했더니 ‘빵의 기적’은 언제나 우리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물 위를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들려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사는 나를 행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새사제의 탄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살면 언제나 ‘빵의 기적’이 있고, 혹 역경 중에도 물 위를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나는 원로가 되었고 이제 새사제는 시작입니다. 꼭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살면 ‘빵의 기적’도 보이고 물 위도 서슴없이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가 언제나 가득하길 바라며 새신부님들 오늘을 축하합니다.
모이는 교회는 나가는 교회를 통해 완성된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예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마르6,45-46)
겟네사렛 호수 ‘건너편 강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곰곰이 성찰을 해본다. 건너편은 다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떠나가는 지금의 강과 전혀 다른 곳이다. 그래서일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한다는 것” 곧 다른 삶의 자리인 저 건너 강 쪽으로 간다는 것은 “생명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비유이다.
반대편 강 쪽으로 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생에서 계속되는 모든 일상의 결정적인 삶의 모습, 곧 더 넓고 멀리 가는 일종의 새로운 곳으로 도전하는 삶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는 항상 이중적인 감정에 의해 동반된다.
하나는, 한쪽 편에서는 내게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새롭게 무엇인가를 기쁘게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익숙한 곳에서 편안함과 안전이 습관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움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둘, 또한 내가 디디고 있는 익숙한 땅에서는 늘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사람은 자기의 발아래 쪽은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새로움을 도전해 가는 삶, 곧 선을 행하려는 두려움과 의심을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절대적인 자유를 살아가신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선을 선택하는 책임을 스스로 자유롭게 지는 자인 듯싶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이는 교회에서 새롭게 "저편 건너서 나가는 교회," 곧 사랑을 실천하러 또 다른 사람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주님을 우리를 초대하신다.
삶의 중심中心 잡기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는 수도원에서 매월 첫주 화요일 모임을 갖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회원들의 만남이 있었던 날입니다. 새삼 매월 하루 피정중 기도하면서 삶의 중심을 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은총은 아름다움의 동의어랍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아 자매님들 모두가 참 아름답네요!”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나눈 덕담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이자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空虛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盲目입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기도해야 충만한 삶, 눈밝은 삶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시 주님 안에서 멈추어 기도하며 삶의 중심을 잡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잠시 멈추어 주님을 뵙고 말씀을 묵상하라고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눈멀게 하는 유혹들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무지, 탐욕, 질투, 분노, 슬픔, 두려움등 우리를 눈멀게 하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하여 주님 안에서 잠시 기도하며 머물러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눈이 열려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합니다. 참나를 발견합니다. 이래서 주님 안에 머무는 피정을 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어제 복음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입니다. 기적후 즉시 제자들을 떠나 보낸후 삶의 중심을 잡으며 자신을 추스르는 예수님의 신속한 대처가 참 지혜롭습니다. 자칫하면 군중들의 인기에 편승해 흥분하다보면 눈이 멀어 자기를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老子에 공을 이루면 거기 머물지 말고 과감히 떠나라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후 즉시 제자들과 작별하신 뒤에 기도하시려고 산에로 가셨습니다.
기도와 삶은 예수님께는 너무나 자연스런 삶의 리듬이셨습니다. 하루의 활동후에는 어김없이 외딴곳에서의 아버지와 일치의 관상기도시간이 뒤따랐습니다. 기도의 열매가 놀랍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히 아버지와 일치 되었기에 그 멀리서도 제자들의 위험에 직면한 곤궁한 처지를 알아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그들 곁을 지나시려 하십니다. 순간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겁에 질려 삶의 중심을 잃고 비명을 질렀고 이어지는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긴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오늘날 삶의 중심을 잃고 위기를 겪는 모든 분들에게 주시는 복음 말씀입니다. 그대로 수도원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나다(I AM)”,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I AM with us)’, ‘우리를 위한(I AM for us)’ 하느님이신 예수님이란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어 주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은 멈췄고 제자들은 여전히 놀라 넋을 잃고 있었다 합니다. 빵의 기적을 잃고 마음이 완고해졌던 탓에 두려움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처럼 깨어 기도하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다면 결코 이렇게 두려움에 눈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사랑의 일치만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삶의 중심을 잡고 안정과 평화의 삶을 살게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은 중심을 잃어 저절로 굳어져 완고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삶의 중심의 회복과 더불어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랑의 사도, 요한의 말씀이 참 적절하고 힘이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르십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사랑의 수행에 전념할 때 저절로 하느님과의 상호내주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 요한은 이런 주님과 일치의 사랑이 두려움에 대한 근원적 처방임을 천명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랑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모두 사랑의 초보자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사랑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처방의 답은 사랑뿐입니다. 기도는 테크닉, 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와 삶’의 리듬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 중심의 삶중에 주님과 우정의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이며 비로소 두려움의 무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짖궂으신 예수님'(마르코 6장 45~5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어둔밤에 호수 위를 걸어 오시는 모습만 생각해도 무서운데 나다 ~ 두려워말라 하시는 소리가 낯설기까지 하다면 뒤로 넘어가겠죠.
두려워말라 하시는 말씀 자체를 그대로 믿는다면 안심이 될것입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까~
그 음성 잊고 지낼까~
봐도 못 알아볼까~
주님 외에는 그 어느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불안때문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겁먹고 넘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말고 때론 짖궂으신 예수님처럼 상황을 흥미롭게 보는것도 필요'
인생의 맞바람
고준석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맞바람이 부는 호수에서 노를 젓느라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삶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고충을 아시고 제자들을 향해 물위를 걸어가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유령인 줄 생각하며 비명을 지릅니다.
맞바람이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의심과 두려움을 없애주시며 다시금 안도의 평안함을 선사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맞바람"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걱정과 고민거리를 안고 살아갑니다.
경제적인 문제, 자녀문제, 건강문제등등 삶이 너무도 괴롭고 힘들어서 피하거나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맞바람을 맞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50)
언제나 그렇듯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하루하루를 힘차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과 제자들과 군중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명나는 만찬을 마쳤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제는 서로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십니다.
피곤에 지친 제자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 정겨운 인사 나누며
무수히 많은 이들을 그들의 자리로 배웅하십니다.
홀로 남으신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십니다.
새 희망을 머금고 삶의 터전으로 떠난 군중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옆을 지켜주었던 제자들을
마음에 하나하나 새기며 이들을 위해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겠지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수많은 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내 것 네 것 가르지 않고
우리의 것으로 만든 사랑을 기적을 베푸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셨겠지요.
당신이 걸어오신 길, 당신이 걸어가셔야 할 길
당신이 이루신 일, 당신이 이루셔야 할 일
홀로 가슴 깊이 새기며
주저함 없이 흔들림 없이
아버지와 함께 하리라 다짐하셨겠지요.
고요한 평화의 시간도 잠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과
휴식을 위해 배에 오른 제자들 사이에
폭풍에 휩싸인 무서운 바다가 놓여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 중에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에 둘러싸여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보십니다.
죽음의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본 이상,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지체하실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 배를 구하고픈 마음도,
타고 갈 배를 구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기에도 위험한
거센 파도 위를 두려움 없이
맨발로 걸어가십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과 험한 파도도
결코 예수님을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벗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상황에 자신을 던지는
사랑의 위대한 힘을
세상 무엇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우리
나와 너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죽음의 악한 세력을 굴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기적은
곧 사랑의 기적입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는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조건 없이 다가감으로써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기적을
몸소 행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 초대에 삶으로써 응답할 때
비로소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우리 삶 안에서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 하시면서
위험에 빠진 제자들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기도 안에서
힘겨움에 지친 이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을 구하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지체하지 말고 이웃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기도의 완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 앞날이 캄캄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 중에는 탈서울이 아니라 탈한국을 이야기하고들 있다고도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계산할 때, 우리 앞길은 막막해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장밋빛 미래보다 암울한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경제사회적인 관점에서, 특별히 통계수치를 좌표로 바라보면 우울해집니다. 그것은 비단 이 시대의 숙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우리가 바라본 세상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와 오늘의 존재적 삶을 바라볼 때 꼭 미래가 암울한 것만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맞아 헤매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의 경제사회적인 상승과 안전을 보장해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오늘과 내일에 함께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기뻐해 주시며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우리의 경제적 삶 이외에도 인간적, 문화적 삶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는 듯합니다.
길을 만들어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 <마르코 6, 45-5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무리 좋은 차가 있어도 길이 없으면 목적지에 갈 수 없고, 길 잃은 나그네는 갈 길을 찾아 헤맵니다. 오늘 주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가려다 홍해가 막혀 더 가지 못하는 백성에게 바닷길을 열어 주셔서 생명으로 이끈 것과 같습니다.
구약에 홍수로 다 죽게 된 사람들은 노아의 배로 물 위에 배를 만들어 살아있는 생명을 구하게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뭍에 계시고 제자들은 바다에 있다가 풍랑을 만나 노를 저을 수 없을 때 주님은 시달리는 제자들의 배에 접근하시려고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 복음을 읽을 때 물은 우리 생명에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만 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을 잘 관리하면 살고, 잘못 관리하면 죽음이 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들로 모두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생명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같은 물이지만 폭풍우, 홍수, 바다에서 풍랑을 맞으면 물로 인하여 물속에서 죽습니다.
베드로는 풍랑 속에 걸으시는 주님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물 위를 걸었지만 믿음이 부족해서 물에 빠져 주님의 손을 잡고 물에서 살아났습니다.
길을 만들지 않고 아무 길이나 가면 절벽에 떨어지기도 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지쳐서 산속에서 죽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심으로써 “나를 따라 사는 사람은 생명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길이신 주님을 따라 살면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길을 찾아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란 내비게이션을 하나씩 주셔서 바른길로 나가도록 이끄셨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산과 들, 물 너머 있었지만 주님을 만나서 따라가면서 양의 무리로 갈 수 있듯이 길 잃은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 아버지를 찾아간 것같이 우리도 길을 잃은 것은 권력, 재력, 명예에 눈이 가려져 빛이 없어 길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 이리저리 흔들려 길을 가지 못하는 것같이 절벽을 만나고 풍랑 속에 갈 바를 모르지만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을 때 주님은 길을 찾아주시고, 높은 산에 터널을 뚫어 길을 만들고, 배를 만들어 바닷길을 만들어 생명을 얻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서로 돌과 철로 꽉 막힌 마음을 뚫어내어 서로 소통을 이루려면 주님께 겸손과 온유를 배우라고 하신 것같이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주님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들에게 길을 알려줄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물의 축성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프로클루스 주교의 강론에서(Oratio 7 in sancta Theophania 1-3: PG 65,758-759)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나타나시고 무질서한 세상을 꾸미시어 그것을 비옥하고 찬란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어 그의 원수를 내던지셨습니다. 샘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기적들을 한층 더 큰 기적들로 둘러싸셨습니다.
오늘, 땅도 바다도 모두 구세주의 은혜에 참여하고 기쁨이 온 세상으로 두루 퍼져 나갑니다. 오늘의 축일은 전번에 기념했던 축일보다 한층 더 크고 많은 기적들을 드러내 보입니다. 지난번 축일은 구세주 탄생의 축일이었습니다. 그때 온 땅은 말구유에 누워 계신 주님을 보고 기뻐 뛰놀았습니다. 오늘은 공현 축일 즉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축일입니다. 오늘, 바다는 요르단강 한가운데서 성화의 축복을 받아 극도의 기쁨으로 용약하며 춤춥니다.
성탄 축일에는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증거하시려고 연약한 아기로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이 축일에는 성장한 사람으로 드러내시어 완전한 분이신 당신께서는 완전한 분으로부터 발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성탄 축일에는 임금님은 자줏빛 옷으로 몸을 두르고 계셨지만 오늘 이 축일에 샘은 강을 둘러싸 마치 옷을 입히는 듯합니다.
자, 와서 새롭고도 놀라운 이 기적들을 보십시오. 정의의 태양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시고 불은 물속에 잠기어 인간의 집전으로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되십니다.
오늘 모든 창조물은 울려 퍼지는 찬미가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언제나 오시는 분은 찬미 받으십니다. 그분은 이번에 처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이십니까? 복된 다윗이여, 분명히 알려 주십시오. 다윗은 말합니다. “이분은 주 하느님, 우리를 비추어 주시는 하느님이로다.” 다윗 예언자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도 다윗의 말에 동감하여 다음 말로써 그분을 증언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그 은총은 우리를 교훈했습니다.” 그분은 이 구원의 은총을 몇몇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세례는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똑같이 구원을 주고 모든 이에게 공통된 축복을 내려 줍니다.
자, 와서 노아 시대의 것보다 더 웅대하고 더 뛰어나며 기묘하고도 새로운 홍수를 보십시오. 노아 시대의 홍수의 물은 인류를 멸망에 빠지게 하였지만, 세례의 물은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주님의 힘으로 죽은 자를 생명으로 다시 일으킵니다. 그때 부리에다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던 비둘기는 주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기름의 향기를 표시했습니다. 오늘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오시는 성령께서는 자비로우신 주님을 드러내 주십니다.
김성민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50)
예수님께서 맞바람이 불어오는 호수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런 모습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또한 지금 너에게,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두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나의 나약함인 죄에 대한 두려움, 등등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왜 나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올까?
그것은 나의 믿음과 희망이 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비로우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고, 영원한 삶과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약하기 때문에.
오늘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4,11.18)
하느님께서 우리를(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이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 만이 오늘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로 들려옵니다.
나의 삶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맞바람'은 늘 존재합니다.
그런 맞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굳건한 믿음과 희망의 힘으로 맞바람인 두려움을 뛰어넘어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사람을 위한 양식이나 '품위 있는 생계'의 보장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복지와 번영'도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192항)
사랑의 성숙과 그 완성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어제 요한의 서간에서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봤고, 그러므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랑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 사랑의 씨를 지니고 있는데 그러나 그 씨는 우리 안에서 성장해 완성돼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미성숙에서부터 성숙을 향해 가는 것이며 그러므로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사랑의 완성이란 완전한 성숙의 줄임말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 미성숙에서부터 차츰 완전한 성숙에로 나아가 그런 것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서간은 완성된 사랑을 두 가지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먼저 두려움이 없는 사랑을 보겠습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그 자체로 사랑이 없다는 표시인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좋고 싫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좋아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기에 싫어하는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사랑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기애에 갇힙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 문 걸어 잠그듯 싫어하는 사람이 내 사랑 안에 들어올까 두려워 사랑의 문을 잠그기 때문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을 하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자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로 하여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다음으로 이런 두려움의 사랑은 아니지만 욕망의 사랑을 하는 것도 두려움의 사랑 못지않게 미성숙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욕망이란 것이 본래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기에 애정결핍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에는 늘 욕망의 그늘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사랑하는 것이기에 사랑의 동기가 불순할 뿐 아니라 그래서 결과도 원하는 만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결핍이 늘 있거나 집착적 사랑으로 인해 결국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다음으로 서로 사랑을 하지만 서로만 사랑하는 사랑도 미성숙합니다.
서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배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의 공동체는 공부도 하고 수도원회의도 했는데 공부 중에 공동체 안에서 조심해야 할 특별한 사랑에 대해 나눔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끼리끼리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더 잘 통하는 형제들끼리 영적인 나눔을 하는 것이 더 큰 사랑에로 발전하고 확장되는 것에 이바지한다면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좋은 거지만 다른 사랑을 배제하고 더 나아가 자기들끼리 힘을 형성하는 사랑은 미성숙한 사랑 정도를 넘어 해로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런 사랑에는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남녀가 처음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빠지면 부모도 보이지 않듯이 서로만 사랑하기에 하느님도 배제하고 하느님 사랑도 배제하지요.
그러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서로의 사랑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면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는 사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Deus Meus, Omnia!', 곧 나의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4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고 없이
찾아 오는
풍랑의 시간입니다.
견디어 낼 수
있는 만큼의
풍랑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파도처럼
부딪히며
깨닫게되는
우리들 삶입니다.
지나가야 할
풍랑의 시간입니다.
풍랑을 통해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잊고 산 우리들을
보게됩니다.
용기를 주시는
믿음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풍랑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어찌할 수 없는
풍랑의 시간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믿음으로
데려가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풍랑속에서도
용기 있게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어렸을 때 저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워낙 뻣뻣해서 머리를 감고 나서 조금 지나면 옆머리가 붕 뜹니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머리카락은 저에게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결혼하면 머리카락 힘이 없어지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평생 결혼할 수 없는 저로써는 언제 차분한 머리카락을 소유할까 싶었지요. 미장원에 가면 미용사가 인상을 쓰면서 “손님 머리카락 때문에 가위 날이 다 버렸어요.”라고 말하고, 한 번은 “손님 머리카락이 제 손등에 박혔어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손등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저의 스트레스는 더욱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머리카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머리카락의 힘이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뻣뻣합니다. 그렇다면 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요? 요즘에는 사람들이 제 머리카락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탈모 걱정 없이 이렇게 튼튼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말씀하십니다.
단점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습니다. 사실 단점이라는 것도 자신이 단점이라고 단정 짓기 때문에 단점이 된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가 단점들을 만들어서 위축되어 자신감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지어 우리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늘 용기를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맞바람으로 인해 배를 젓는데 힘들어 합니다. 저녁부터 새벽녘까지 배를 젓느라 고생을 하고 있지요. 분명히 힘든 상황이고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습니다. 커다란 스트레스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이 그들에게 결코 나쁜 순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호수 위를 걸으시는 주님의 신성을 직접 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거리가 있습니까?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인해서 피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늘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힘차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이지요.
오늘의 명언: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작자 미상).
얼마나 쉽게 조난당할 수 있는가?(프루덴티우스, ‘심마쿠스 반박’ 중에서)
제가 달고 다니는 말 많은 혀로 말미암아
침묵의 천국에서 떨어져 나와
알지 못하는 파멸과 어둠 속에 빠졌습니다.
저는 덕행과 믿음이 탄탄한 참된 제자 베드로가 아니라,
무수한 죄로 출렁이는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팔을 내밀어 주시지 않는다면
항해술을 배우지도 못한 저는
얼마나 쉽게 조난당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을 계속해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팔을 내밀어 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에 뉴스를 검색하면서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삶이란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있는 장소와 상황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삶이 폭풍우에 갇혀서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소와 상황을 통해서 의미를 배운다면 삶은 폭풍우 넘어 있는 밝은 태양을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댈러스라는 상황은 1달이 지나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이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워간다면 앞으로 주어진 1달은 저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한 자루의 연필, 색색의 물감은 화가를 만나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화가는 연필과 물감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그림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작은 것들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 기쁨을 주는 일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꽃동네’는 아픈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 장애인들, 외로운 노인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비상구’가 되었습니다. ‘꽃동네’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시작은 아주 작았습니다. 제가 제기동에 있을 때였습니다. 경동시장 입구에 ‘무료급식소’가 있었습니다. 본당의 교우들께서 매일 무료급식소에 가서 설거지도 하고, 봉사를 하였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음식 재료가 떨어질 때가 되면 누군가가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 식당을 하시는 분, 지나가는 사람들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당시 무료급식소는 배고픈 이들에게 희망의 집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런 일들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가진 사람들,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 명예와 권력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을 하려는 사람들,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려는 사람들,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려는 사람들, 자기를 버리고 줌으로써 영생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 위에서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나눔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던 예수님께서는 폭풍의 한 가운데로 걸어오셨습니다.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곁으로 당당하게 가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구원의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2019년 우리의 삶에도 많은 파도가 밀려 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고, 때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남편이 별 이유 없이 성당에 나가지 않을 때고 있고, 성당에는 가지 않으면서 결혼은 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파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물속에서 파도를 즐기는 물고기처럼 이왕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 속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신앙에도 때로 폭풍이 불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고통과 아픔이 다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위에 적은 글을 한번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상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두려움을 쫓아내는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난 밤,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사진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 10여년 동안 음악을 공부하고 귀국해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다 식당일에 종사하다가 직접 자그마한 식당을 혼자 4개월째 운영하는 자매님입니다. 맏딸로서 장남의 역할을 하는 참 책임감이 강하고 사랑이 깊은 분입니다.
하루 음식점을 찾는 분은 하루 15명쯤 되는 데, 식당에 들어오면 식당 메뉴판 벽을 그윽한 눈길로 한참 바라본다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에 메뉴판 벽을 찍어 보내달라 했고 그 사진을 보내준 것입니다.
정말 가난하고 소박하나 사랑이 넘치는 훈훈한 분위기였습니다. 자매님 역시 후하게 음식을 차려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큰 욕심없이 말없이 묵묵히 “서로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을 실천하는 너그럽고 인정 많은 자매님입니다. 이렇게 팔아야 고작 하루 15만원 정도라니 참 가난한 식당입니다.
살아있는 성녀처럼 생각되는 참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매님입니다. 메뉴판 벽 사진을 받아보니 정말 풍부했고 책장에는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제 책도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즉시 답장했고 또 답을 받았습니다.
-“정말 자꾸 눈길이 가요!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아요! 자매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겼어요! 참 좋은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입니다! 음식도 맛있을 것 같아요! 언제 가서 먹고 싶어요! 어떤 손님이 많이 오나요?”
“청년층이요! 주로 혼자사는 사람들요. 오늘은 수험생들이 왔구요. 노동하는 아저씨 한분이 감을 한봉지 사다주셨어요.---오늘은 이만 일찍 들어가려구요. 새벽미사가 아니면 성당에 갈 틈이 안나서 일찍 자려구요. 신부님도 좋은 꿈, 명랑한 꿈 꾸세요! 신부님과 수사님들이 가까이 계셔서 참 감사해요!”-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큰 욕심 없이 묵묵히 온몸과 온맘으로 소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정직한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거룩한 지요! 저에게 이 또한 살아있는 사랑공부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 물위를 걸으시다”이고 제1독서 요한1서의 주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그대로 입증하는 제자들을 향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입증하는 삶일 것입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요한1서의 중심 말마디는 “사랑”으로 무려 12회 나옵니다.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요한1서 서두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듯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사랑의 의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듯 우리를 서로 사랑하셨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이런 사랑을 보고 배워 실천하라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아드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서, 형제들을 통해서 이런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사랑공부, 하느님 공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이렇게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 수 있고 심판 날에도 확신을 지니게 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거친 풍랑의 호수 위 배안에 있는 제자들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제자들을 태운 배는 바로 거친 세상 풍파 속을 항해하는 개인이나 가정공동체 또는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하시려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제자들의 위기상황을 알아채시고 즉시 개입하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자 제자들은 유령인줄로 착각하여 비명을 질렀고 즉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의 핵심말씀입니다. “나다I AM” 바로 하느님 이름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두려움을 쫓아내는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멎었고 주변도 제자들도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모실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비로소 안정과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달리 제자들은 주님 사랑을 잊었기에 너무 두렵고 놀라 넋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빵의 기적을, 주님 사랑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 베풀어 주신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잊고 지내기에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두려움을 쫓아내는 유일한 처방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 앞에 자취없이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사랑의 빛으로 우리 안팎의 두려움의 어둠을 말끔히 쫓아내 주시고 안정과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사랑은 천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경배의 대상이신 하느님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평생토록 ‘대체 하느님은 누구신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파악해보려고 발버둥을 쳐왔지만,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요한 1서는 거듭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결국 관건은 ‘사랑’이군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면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 그분께서 베푸신 크고 뜨거운 사랑을 온 몸으로 맛보지 못한 사람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랑에 대해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한 존재에 대한 소유와 집착을 사랑으로 여깁니다. 자연스레 감시와 통제가 뒤따릅니다. 그렇게 될때 사랑은 그 맛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그 때부터 사랑이 아니라 끔찍한 고통으로 변해갑니다.
가끔씩 인간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랑 가운데, 불행한 사랑, 참혹한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착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쪽에서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여기지만, 상대방에서는 죽음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처럼 천편일률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천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꼭 끌어 안기도 하지만, 아쉽지만 떠나보내기도 하는 사랑입니다. 때로 한없이 인내하고 용서하기도 하지만, 강한 채찍질도 서슴치 않는 사랑입니다. 때로 그 사랑은 용광로처럼 뜨겁기도 하지만, 한 겨울 칼바람처럼 냉혹하기도 합니다.
언제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하느님의 그 큰 사랑, 그 한없이 감미로운 사랑, 그 뜨거운 사랑을 한번 체험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랑의 맛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냅니다.”(요한 1서 4장 18절)
한 성지에 들렀을 때, 존경하는 노 수도자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덕담 한 마디가 늘 귓전에서 맴돕니다.
“하느님께서 형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언젠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대는 너무 기뻐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을 그대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때, 너무나 깜짝 놀란 나머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임종을 맞이하는 환우들을 바라보며, 자주 하느님 사랑을 대리 체험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잔뜩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면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화사한 표정을 짓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 이미 맛본 진한 하느님 체험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평생토록 믿고 바랐던 그 사랑의 하느님을 곧 만난다는 기쁨에, 마음조차 설레입니다. 기쁘고 행복한 얼굴, 품위있고 편안한 얼굴로 그렇게 하느님을 향해 걸어들 가셨습니다.
오늘도 사랑의 결핍 때문에, 사랑에 대한 무지(無知) 때문에, 떠나가는 사랑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양한 고통과 십자가 때문에, 힘겨워하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나지막히 외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복음 6장 50절)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 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섬김의 삶에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공현 후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신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면서,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은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올리베따노 수도회라는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건너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해를 해야 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 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셨다. 낯선 사람처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시니까,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고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바로 주님께서는 도와주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치려 하신 것이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바로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또한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의 모습에서 그들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하겠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이어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먼저 호수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고 있을 때 뒤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고,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셨는데 바람이 멎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호수의 바람이 멎었다는 부분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함께하셨을 때와 함께 하시지 않았을 때 그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제 복음에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에서도 그 기적을 주관하신 분은 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하시면서 주님의 능하심 안에 그 많은 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풍랑 속에서도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고 목적지를 향해 무사히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던 분이 주님이시며 그분이 바로 기적과 구원의 주관자이십니다.
곧 우리가 주님의 사도로서 살아가지만 주님이 없이는 우리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존재하고,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힘을 얻고 주님의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때로는 종종 내 인간적인 사랑과 힘과 능력만으로 가능할 것처럼 착각을 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없이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늘 주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시몬 부제님 강론
독서 : 1요한 4,11-18 / 복음 : 마르 6,45-52
+찬미 예수님
어제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를 배불릴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세상에서 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내 옆에서 같이 사는 사람도 사랑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사랑을 하려는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응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려는 이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 할 때, 몸소 찾아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제자들을 먼저 호수 건너로 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호수 위에서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저는 제자들이 어떤 심경을 느꼈을지 생각해 봅니다. 자신이 지금껏 보지 못한 현상을 내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예수님이 오시는데도 예수님으로 안 보이고, 유령으로 보입니다. 저는 풍랑 위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제자들의 상황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행동을 봅니다. 그것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나와 예수님의 연결 고리는 튼튼하지 않기에 나는 예수님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 자신을 위한 선택과 가끔은 예수님처럼 남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는 안개와 같은 기쁨과 같습니다. 안개는 없는 건 아니지만, 잡으려 하면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잡지 못하는 것을 잡으려 하니 잡히는 것은 없고, 이 굴레 속에서 점차 나는 지쳐갑니다. 그 때 제자들이 만난 유령처럼 무섭고 두려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 기회는 무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막연하게 타인을 위한 예수님이 아닌, 나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이 기회는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가라는 명령을 들은 제자들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있는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이 말씀을 통해 바람은 사라지고, 안정을 되찾습니다. 예수님과 떨어지면 불안과 방황이 다가오지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면 우리 가슴 속에 평화와 기쁨이 샘솟고 자리 잡게 됩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나는 사랑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같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제가 그렇습니다. 전 내 행동이 사랑인지 아닌지 매일 고민고민하고,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분명히 오십니다. 오늘 독서의 요한 사도의 말이 우리를 감싸안아 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우리가 두려움 없이 사랑하게 되는 그날까지 분명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안정시키시고 사랑하려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마라”(마르6,50)
고통 안에 현존하시는 분 <마르코 6, 45-5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 풍랑 속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제자들을 도우려고 물 위를 걸으며 제자들 가까이 가셨지만,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고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특별히 고통을 당할 때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이런 고통 중에 있을 때 주님을 찾아 구원을 구해야 하는데, 오히려 주님을 원망하고 주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 줄 알고 있으면 주님을 찾고 구원을 소리 높여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우주를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했지만, 주님은 물 위뿐 아니라 하늘을 날아오르는 능력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창조주이신 주님을 믿는다면 고통 중에 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평화와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고통 중에 나를 믿고, 내 생각에 의지하고, 고통 중에 헤매지 말고, 주님의 손을 찾아 잡고 함께 길을 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의 기도문을 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해 입으로만 기도하면서 기도문에 담긴 뜻을 따라 살지 않아 쉽게 하느님의 믿음과 사랑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부르는 우리는 주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내 생명의 주인이신 아버지십니다. 그분은 거룩한 분, 진, 선, 미의 근원이시며, 자비와 사랑의 근본이시며, 아버지의 나라를 만들어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한자로 성자를 풀이하면 귀로 듣고 들은 바를 말하는 입“구”자와 “왕”자가 섞여 있으면서 들은 바를 말하고, 말한 것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은 생명에 필요한 것을 다 주시고, 잘하여 생긴 결과도 씻어주시고, 악마의 유혹과 악마의 전술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우리의 믿음은 가장 힘 있고 불가능 없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주님을 부르는 사람은 만사형통입니다. 하느님은 못 하시는 것이 없고 기도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믿음 속에 사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삶과 죽음이 한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죽음도 삶도 모두 주님의 것이며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고요한 세계.
최민석 신부님
나는 침묵의 세계를 동경한다. 요즘 들어 더 그렇다. 글은 말에서 나오고 말은 침묵에서 나온다. 침묵이야말로 진리 또는 진실이 마음 놓고 머무는 곳이다. 말이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침묵은 존재의 바탕(뿌리)이다. 고요와 침묵 가운데 머무는 행복한 시간이 더 없이 좋다.
나는 스승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게 된 것 자체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다. 그런데 당신 입으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라고 말씀하신다. 이 육신 숨을 거두기 전에 한 순간만이라도 그런 경지에 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이 눈앞에 보인다.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 하지만 나의 허물을 들여다보는 순간 부끄러움이 참 많다. 이른바 ‘신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30년 세월 어른도 아닌 게 어른 행세를 하고 스승도 아닌 게 스승 행각을 했으니 말이다.
에고 참 많이 부끄럽다. 거 참, 뭐가 그리 잘났다고 깝죽거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며 살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만 받고 살아왔으니 참 복도 많은 놈이다.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턱없이 부족하고 미미 하였으나, 나에 대한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나를 살린 것이다. 그나마 나의 부끄러운 허물을 알아차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1, 13,2)
이제 겨우 눈치를 채게 되었거니와, 신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일인가.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신부님’으로 치켜세우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꺼들먹거린 적이 종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30대 어린 신부가 되어 ‘신부님’이라는 칭호를 얻어 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어른 행세를 하며 살아 왔던 날을 되새겨 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13,1-12)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하여는 아마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많다. “이것이 부끄러운 나의 실체다.”라고 분명히 말할 무엇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가장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거의 모른다고 해야겠다.
‘신부님’하면 ‘나’요, ‘나’하면 ‘신부’였다. 신부와 나, 나와 신부, 이 둘이 얼마나 단단하게 붙어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얼마나 찰싹 붙어 있는지 도데체가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내 골수까지 박혀있는 이름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럴 법도 하겠다. 그렇다고 알아차리며 살기로 마음먹으니 또 별일 아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 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하느님을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또한 하느님을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깥으로만 향하던 눈길을 돌이켜 ‘안’을 들여다볼 때, 거기 숨어 계신 그분,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 그로써 하느님을 드러내어 마침내 온 세상에 두루 미치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늘 은총에 죽어 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침묵의 세계는 죽어야 하는 세계다. 침묵이야말로 진리 또는 진실이 마음 놓고 머무는 곳이다. 스승 예수님의 말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나를 위하여 죽는 자는 산다.”(누가 17,33)라고 말씀을 침묵에서 배운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 6, 50)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연일 추운 날씨 속에서도 주님의 축복 담뿍 받으십시오.
오늘 복음(마르 6, 45~52)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 6, 5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얼마나 당신께 대한 신뢰를 주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라는 존재만 생각해도, 두려움이 없어지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분, 바로 그런 분으로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뢰를 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거친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뭍으로 배를 데려고 해도 계속 풍랑 속에 있게 되었고, 점점 거세게 부는 바람으로 인해서 두려워지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디선가 허연 물체가 호수 위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물론 예수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이었다면 누구든지 혼비백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체는 점점 배 가까이 접근해 오다가 지나쳐 가려고 했을 때, 얼마나 무섭웠겠습니까?
제자들은 두려워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들인데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바로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시 배쪽으로 다가서면서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용기를 내어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그렇게 거셌던 바람도 멎고 잠잠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다" 라는 말씀은 바로 "주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말로 ego eimi 에고 에이미는 "나다" 즉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라고 모세에게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던 "야훼" "나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이 말과 같은 뜻으로 "나는 나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 그 자체이다" 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나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누구인지 너희는 알고 있지 않느냐?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잠정만도 5천 명이나 배불리 먹게 했던 바로 나다" 라는 뜻이 담겨 있는 안심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나다" 라고 하는 분, 바로 존재하는 그 자체이신 분을 우리는 믿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무엇으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안정되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또 그분을 위해서 그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험난한 인생 풍랑 속에서도 "나다"라고 하는 분과 같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서 주님께 가까이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바다를 한 척의 조그만 배로 항해한다고 생각했을 때, 인생길에서 만나는 험난한 바람과 거친 풍랑 속에서도 "나다"라고 하는 예수님이 계시며, 또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 활력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거칠고 힘든 어려움들 속에서 "나다" 라고 하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거친 풍랑을 해치고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을 계속 할 수 있겠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성당 밖 구유의 ‘이기 예수님’ 실종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한 성당을 찾았다. 구유경배를 하러 성당 밖 구유를 찾았다.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없어졌다. 누가 밤에 찾아 와서 아기 예수님을 가져간 것일까? 궁굼해서 본당 신부님에게 물어 보았다. “‘아기 예수님’이 보이지 않네요” 하자 “안에 잘 모셔 두었습니다.” “왜요?”
“밤이면 고양이가 ‘아기 예수님’ 위에 올라가 자고 있어요. 그 꼴을 볼 수가 없어 ‘아기 예수님’을 성당 안에 잘 모셨어요” 나는 의견을 달리 했다. “고양이가 밤이 되면 엄동의 ‘아기 예수님’을 보호해 드리려고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덮은 포대기가 허술해 고양이는 자신의 온기로 ‘아기 예수님’을 감싸주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었다. 신부님은 “아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사람보다 동물이 나은 거지요.” 고양이가 영물이라 한다. 구유의 가축들, 그 가축들 속에 고양이가 ‘아기 예수님’ 위에 올라가 경거망동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기로 품고 있던 것으로 해석을 해 보았다.
언젠가 성당 밖 구유 전체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이불로 덮어 놓는 일이 있었다. 누가 이런 경거망동한 일을 했을까? 나는 깜짝놀라 원상복구를 해 놓고는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구유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그 어린이가 나를 보더니 “신부님, 구유에 이불 덮어드린거 왜 벗겼어요.” 하고 나에게 말했었다. “다시 덮어 주시면 안 되요” 나는 어린이가 그랬음을 알고는 속 마음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이를 품어 안으며 칭찬을 해 주었다. “아기 예수님’이 너무 추우셔서 덮어드렸구나” 어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설명해 주고 이해를 도왔다. 어린이가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빵의 기적’을 이루시고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고 기도 하신다. 제자들은 배에 올라 노를 저어간다. 풍랑이 일고 배가 위기에 처한다. 두려움이 일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배에 오르시며 제자들을 향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시자 바람이 멎었다.(마르6,45-52참조)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믿음과 신뢰에 대한 관계형성이 엉성했다. 방금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어찌할고? 사랑의 관계가 엉성한 제자들 마음의 완고함(마르6,52)이 큰 우를 범했다.
‘아기 예수님 위에 고양이가 올라 앉음’ ‘어린이가 두터운 이불을 가져와 구유 전체를 덮어주었다’ 나는 이 일을 보면서 나와 예수님 사이 관계성이 살아났다. 관계성을 지난 사랑이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내 안에 사랑의 관계성을 갖지 못한 마음의 완고함이 그 일을 경거망동이라고 여기며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고 있었다.
'예수님 계산기'(마르코 6장 45~5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해질녘에는 조용히 홀로 계시는 시간을 가지시며 하느님 사랑안에 자주 머무르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친몸에 생기를 얻으신 후, 제자들 곁으로 가시려고 호수위를 걷자 유령이 나타났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겁많고 연약한 인간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능력의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도 그동안의 감동과 뜨거운 체험은 말짱 도루묵이 되버리는 우리들 모습을 예수님은 못 본척 하시고 또 다시 용기내라고 응원하십니다.
그러니 약함에 빠졌다가도 일어서면 됩니다.
'예수님 계산기는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 4,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실 그 어떤 열심한 신앙인도 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을 잘 안다고 여깁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내가 사랑하면 할수록,
내가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희생하면 할수록,
그만큼 사랑이신 하느님을,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을 점점 더 깨닫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니 어찌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어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사랑 때문에 울고웃는 그런 날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치 중국 무협지에서 나오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처럼 도통한 사람임을 드러내려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럼 무얼 말하려는 걸까요?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서 맞바람을 만나 위기를 겪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풍파 가운데 살아가며 때론 맞닥뜨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이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도와주시고자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의 벗들을 사랑하시기에 위기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처럼, 그렇게 예수님은 사랑하는 당신 제자들을 위기에서 구하시기 위해 발이 땅(물)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달려 오십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은 예수님의 이적이 아니라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렇게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조차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쫓아내도록 격려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그리고 배에 올라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마치 두려움에 떨다가 엄마가 와서 안아주고 함께하니 아기가 울음을 뚝 그치고 금새 평화를 되찾듯이, 풍랑도 잔잔해지고 제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조그만 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 나라에 도착하기까지 가끔은 풍파에 시달리게 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두려워 떠는 우리 앞에 그분이 홀연히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겁니다. 그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을 믿고 우리도 사랑 안에 더 성장하는 것밖에 다른 할 일이 없습니다.
사랑은 풍랑마저 잠재웁니다. 아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사는 곳에는
용기와 두려움이
함께 존재합니다.
믿음의 현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 이곳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가시듯
우리의 두려움 위를
걸어가십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믿음에 도달하는 길은
맞바람의 길이기도 합니다.
시련없이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시련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시련속에서도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역경의
맞바람조차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용기라는 믿음을
얻게하는 은총임을
믿습니다.
맞바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삶의 맞바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적이 늘 하위권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생김새도 독특하고 여기에 말까지 더듬어서 주위의 친구들은 이 학생을 ‘바보’라고 놀리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함께 다니는 친구가 없는 외톨이였지요. 이렇게 무엇 하나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은 이 아이를 보면서 사람들은 항상 커서 뭐가 될까 하면서 혀를 차곤 했습니다. 이 아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 아이는 커서 상대성이론을 만든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노력과 지적욕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어머니의 힘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남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아들의 창의력을 인정해준 어머니의 용기 가득한 이 말이 아인슈타인을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마디로 아인슈타인이 자극을 받고서 변화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단 한 순간도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믿어주고 용기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에 커다란 힘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말이지요. 즉, 이 말로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될 수도 있고, 병든 마음을 난도질 하는 살인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사가 아닌 살인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설 때가 너무나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용기를 주는 말, 힘을 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물 위를 걸으신 주님을 배에 모시자 그때 바람이 멎었다라고 성경 저자는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매순간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용기를 불러 일으켜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믿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내어 다시금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가능한 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남과 분명히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믿으십시오.
오늘의 명언: 남의 말을 열심히 듣는 사람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진실한 벗이 되는 법이다.(플라톤)
힘과 용기의 차이(데이비드 그리피스)
강해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져 주기 위해서는 용기가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힘이/ 의문을 갖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전체의 뜻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힘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용기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힘이 필요하다는 착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능력과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그러한 힘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그 용기를 주님께 청하시길 바랍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다를 좋아하다보니 어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고초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부들을 힘겹게 하는 몇 가지 자연현상들이 있더군요.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짙은 안개, 강한 맞바람, 그리고 심한 조류 현상입니다.
가끔씩 짙은 안개나 해무가 끼는 날이 있는데...몇 미터 앞도 잘 안 보이는 그런 날은 아예 조업을 안 나가는 게 상책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암초에 부딪치거나 길을 잃기 십상이거든요. 어쩔 수 없이 운항을 할 때에는 속도를 최소한으로 낮추거나 자주 뱃고동을 울려야 합니다.
안개 못지않게 위험한 요소가 강한 맞바람입니다. 특별히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기류는 변화무쌍했습니다. 헤르몬 산에서 내려오는 찬 기류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기류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강풍이 불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높은 파도가 일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라고 하지 않고 바다라고까지 칭할 정도였습니다.
안개 못지않게 위험한 요소가 조류 현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서해안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조류가 세기나 조수간만의 차가 높기로 유명합니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서해안에 조류를 이용한 조력발전소까지 건설될 정도입니다. 조류가 심할 때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도 생각과는 반대로 먼 바다로 떠내려갈 뿐입니다.
언젠가 형제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뗏목 하나를 만들어 바다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물살이 멈추는 정조 상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갑자기 썰물이 시작되면서 저희가 탄 뗏목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육지는 점점 까마득해지고 저희는 점점 큰 바다로 흘러가 몇 시간 동안이나 표류를 계속했습니다. 이러다 죽는가보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순간 작은 어선 한척이 저희를 발견했습니다.
구릿빛 젊은 선장은 우선 저희를 안심시키더군요. “이젠 됐슈. 아무 걱정들 마유.” 그러면서 작은 어선의 꼬리에 저희가 탄 뗏목을 묶어 안전하게 항구에 내려줬습니다. 그 젊은 선장의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멋있던지 마치 예수님을 뵙는 듯 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중에 강한 맞바람을 만납니다. 하필 날까지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속에 죽을 고생을 다했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새벽녘까지 노를 저었지만 배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전문직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었지만 탈진한 상태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그 순간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혼비백산해서 비명까지 질러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제자들의 배 위로 예수님께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건네시는 한 말씀은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복음 6장 50절)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당신의 메시아성을 백성들 앞에 확연히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의 초인간적 위대성, 당신의 신적 본질의 신비를 드러내는 현현(顯現)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킵니다.
인간,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쉼 없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은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에 당신 안에 쉬기까지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결국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근심하지 않기 위해서 정답은 하나 뿐입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선장인 교회란 배에 승선하는 일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교 다닐 때의 기억입니다. 반 대항 체육대회가 있습니다. 친구들 중의 한명은 앞으로 나서서 ‘응원’을 주도합니다. 박수를 유도하고, 춤을 추고, 현란한 몸동작으로 반의 응원 열기를 한껏 드높입니다. 소풍 때도 그렇습니다. 보물찾기가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모이면 장기자랑이 있기 마련입니다. 학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줄반장도 못해보았기 때문에 아이들 앞에 나서서 무엇을 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울렁증’같은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저에게 ‘두려움’을 없애 주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생물’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이름을 자주 불러 주셨고, 책을 읽으라고 하기도 하셨고, 칠판에 적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가 생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과목에서 인정을 받으니, 다른 과목들도 조금씩 자신이 생겼습니다. 저를 둘러싼 ‘울렁증’도 어느덧 사라졌습니다. 소풍 때,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자신 있게 강론을 할 수 있는 것은 중학생 때의 체험이 있기에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진화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의 몸은 ‘두려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압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 사나운 동물, 독이 있는 벌레,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식물, 추위, 배고픔, 병, 폭력,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피하기 위해서 인간은 두려움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인간의 지혜와 협력으로 하나둘씩 해결되어 왔습니다. 지금, 진화의 피라미드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걱정, 근심, 불안, 초초’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未得先愁失(미득선수실) 當歡己作悲(당환기작비)’ 근심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기쁜 마음이 벌써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몸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이것은 뉴턴의 물리학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빛이 상황에 따라서 파동과 입자로 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걱정, 근심, 두려움,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차면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졌어도, 많은 배움이 있어도 그것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 희망, 믿음, 온유함과 친절로 가득차면 나의 몸 또한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비록 건강하지 못해도, 많은 배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빵공장을 세우고, 수상 스키를 타라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2013년으로 기억합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브라질 국민들은 퇴임하는 그에게 87%의 지지율을 보냈습니다. 세계 각국은 그의 퇴임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브라질을 세계8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 올렸고 좌우를 모두 끌어안는 포용의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2014년에 다시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 다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퇴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룰라 대통령의 ‘포용의 정치와 아름다운 퇴장’의 모습이 우리나라에는 언제나 올 것인가?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뒷모습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정치인들이 선거구획정을 놓고 줄달리기 하는 모습이 이제는 제 밥그릇 챙기기로 보여 집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뒤에 오실 분을 소개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요한3,29)하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자기의 소명, 분수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 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오늘 복음을 읽는 순간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로 택했습니다. 두려워서 사람입니다. 외로워서 사람입니다. 그리워서 사람입니다. 바로 약한 인간존재임을 입증하는 고유한 우리 말마디가 두려움, 외로움, 그리움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이, “나다.”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나다(I AM)’는 바로 모세(탈출3,14)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두려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구약성서를 통해 수없이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다음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주님 말씀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마지막에서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말씀하시며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이보다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도 없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써드리는 고백성사시 보속의 처방전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우리 요셉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이 말씀 선정 과정이 의미가 있어 다시 나눕니다. 당시 수도형제들의 의견을 공모하여 투표한 결과 두 성구가 남았습니다. 하나는 제가 제시한 부활하신 주님의 일성인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고, 하나는 도미니코 형제가 제시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제시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성구는 양팔을 벌려 환대하는 예수부활상에도 어울리고 수도원 정문 입구의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말마디에도 어울린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시 천사들의 찬미에서도 영광과 평화가 한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그러나 마음에 직접 와닿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이 선정됐고, 수도원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과 더불어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가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현재도 두려움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는 세상에서 실존적 불안과 두려움 앞서 생존生存의 불안과 두려움속에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풍랑중에 혼란과 두려움에 휩싸인 배안의 제자들은 바로 오늘날 세상 바다 항해중에 있는 믿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개인일 수도 있고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개인이, 공동체가 세상바다 항해 도중 난파되거나 조난당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지요. 바로 주님은 인생 항해 중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과 더불어 제자들이 탄 공동체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주님을 모실 때 비로소 도래하는 참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저절로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1독서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에 대한 근본적 해답은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룰 때 평화의 도래와 더불어 저절로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몰아내시고 당신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 눈을 멀게 하는 두려움과 무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신(6,45)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시어 기도하십니다(6,46).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습니다.”(6,47)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세상 한복판에 있는 제자들의 처지로 내려오시어 그들 곁에서 눈여겨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6,48)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자신들의 힘에만 의존하여 풍랑을 헤쳐가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십니다(6,4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장 제자들에게 가지 않으시고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십니다(6,48). 그것은 누가 진정한 빵으로 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한 채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6,49).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50) 하시며 그들의 두려움을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고(6,51), 이를 본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영의 눈을 뜨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잘못 알아본 원인이었던 두려움과 마음의 무딤은 우리 영성생활에서도 늘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두려움은 불안을 부르고 그 결과 마음의 문을 닫게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자신에게 몰두함으로써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근심 걱정은 '지금 여기'가 아닌 과거와 미래에 집중함으로써 지금 주어지는 은총과 행복을 알아채지 못하게 합니다. 제자들의 눈을 가린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과 사랑 밖에 없습니다.
‘영적 무딤’이란 어떤 일이나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감각에만 의존하여 피상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았기에 예수님을 유령이라 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무뎌지면 생각과 감정뿐 아니라 영적 감각도 굳어집니다. 그러니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한 채 편견과 고정관념, 선입견과 왜곡된 신념에 사로잡히고 다른 이들의 말도 듣지 않는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사랑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무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험한 세상에서도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뵙는 영의 눈을 떠야겠습니다.
나아가 믿는 이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빛이요 선이며 사랑이신 주님의 눈으로 겉모습과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에 있는 고귀한 신앙과 행복을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거룩하고 사랑 가득한 눈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 빛으로 오신 주님을 보는 영의 눈을 지녔으면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이정은 신부님(살레시오회) -
저는 사실 물에 대한 약간의 공포증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고 물에 관한 특별히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수영장이나 바닷물에 들어간다고 해서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거나 정신적으로 힘들어 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공포증’이라기보다는 물에 들어가는것을 너무 싫어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복음에 나온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었다는 표현이 너무도 피부에 와 닿습니다. 호수 한가운데 배가 있고 맞바람이 불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 그리고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그때
두려워 말라며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 앞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결코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진심어린 믿음으로 그분께 손을 내민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아픔과 고통은 치유가 됩니다. 주님께서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데서 위안을 받으려고 한 적은 없으신가요?
■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박윤식-
우리는 수도 없는 주님의 기적을 누린다. 이 이른 아침 여명의 새벽을 보는 것도 그분 깨움이 없다면 불가능할 게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범한 삶에서 그분의 존재를 모르고 산다. 그래서 더 큰 가시적인 그 무엇을 보여 달라고 기를 쓴다. 그분 은총의 손길로 지금을 사는 이 일상적인 기적을 모르고 단지 기적도 아닌 기적 같은 것을 보이라며 생트집이다. 영생을 향해 살아가는 이 위대한 기적을 우리는 간과한다.
저녁때 예수님은 산 위에 그대로 계셨는데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뭍에서 멀리 떨어져 맞바람 속에 파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큰 맞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이는 물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라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어부인 그는 얼마 전의 일인 예수님과 함께 뱃길 여행에서 그분께서 성난 풍랑을 잠재워 준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 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라!’라며 그 죽을 지경의 위험에서 그들을 살려 준 사실을.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베드로는 물결이 높게 일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에게 여쭈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심을 한다. 그리고 그분을 시험도 한다. 주님이 계신다면 이것만은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가끔은 기적도 보여 달란다. 그래서 그분을 향해 가끔은 시험을 하는 것이다.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보이게 보여 주십시오.’ ‘주님이시거든 한번 해 봐 주십시오.’ 지금 이렇게 나의 위치를 있게 해 주는 게 그분의 은총 없인 불가능인 줄 잘 알면서도.
사실 베드로는 그 어둠의 밤을 맞바람과 싸우면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더는 호수를 건널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주님과 함께라면 이 어려운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도 하였을 거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요청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임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너라.”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동료에게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시범의 길로 물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며 꾸짖으셨다. 그러고는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었다.
그렇지만 위험에 처했을 때 베드로도 인간적인 모습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자리를 굳혀 가는 그도, 그 거센 바람에는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손을 내민다. 하느님은 우리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라도 들어주신다. 아니 청하기도 전에 그분은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우리는 의심을 버리고 그분과 함께하는 보람된 삶을 누려야 한다. 그분이 함께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한 길 앞도 나아갈 수가 없다.
지금도 여러 맞바람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여러 맞바람이 일 때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그분은 우리 손을 잡으시면서, ‘의심을 버리고 나를 믿어라. 언제라도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면서 우리를 안으신다. 의심을 버리고 그분을 믿으면서 그분이 주신 순풍의 돛을 올리자. 그분은 물 위를 따라 걸으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게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주님이시거든 저더러’라는 의심을 버리자. 이 폭풍이 끝나면 그분은 맑은 햇살이 되어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 4,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하느님을 뵌 적이 있으신가요?
그분을 만나뵙고 싶으신가요?
유사이래 사실 그분을 만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누구는 하느님을 봤다던데...?
하느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써가 아니면 뵈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영이 되던가 그분이 우리처럼 육신을 취하시던가 둘중의 하나밖에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영이 되는 경우는 죽어서만 가능하기에 살아있는 동안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경축하는 성탄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기에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이심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으니 이 사랑은 내려감의 신비이고 겸손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올라가려 하지 않고 내려가려 합니다.
교만 떨지 않고 겸손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 신비를 오늘도 살아감으로써 나를 만나러 오신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은총을 입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과 제자들과 군중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명나는 만찬을 마쳤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제는 서로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십니다.
피곤에 지친 제자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 정겨운 인사 나누며
무수히 많은 이들을 그들의 자리로 배웅하십니다.
홀로 남으신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십니다.
새 희망을 머금고 삶의 터전으로 떠난 군중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옆을 지켜주었던 제자들을
마음에 하나하나 새기며 이들을 위해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겠지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수많은 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내 것 네 것 가르지 않고
우리의 것으로 만든 사랑을 기적을 베푸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셨겠지요.
당신이 걸어오신 길, 당신이 걸어가셔야 할 길
당신이 이루신 일, 당신이 이루셔야 할 일
홀로 가슴 깊이 새기며
주저함 없이 흔들림 없이
아버지와 함께 하리라 다짐하셨겠지요.
고요한 평화의 시간도 잠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과
휴식을 위해 배에 오른 제자들 사이에
폭풍에 휩싸인 무서운 바다가 놓여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 중에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에 둘러싸여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보십니다.
죽음의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본 이상,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지체하실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 배를 구하고픈 마음도,
타고 갈 배를 구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기에도 위험한
거센 파도 위를 두려움 없이
맨발로 걸어가십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과 험한 파도도
결코 예수님을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벗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상황에 자신을 던지는
사랑의 위대한 힘을
세상 무엇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우리
나와 너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죽음의 악한 세력을 굴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기적은
곧 사랑의 기적입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는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조건 없이 다가감으로써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기적을
몸소 행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 초대에 삶으로써 응답할 때
비로소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우리 삶 안에서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 하시면서
위험에 빠진 제자들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기도 안에서
힘겨움에 지친 이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을 구하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지체하지 말고 이웃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기도의 완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역풍 <맞바람>< 마르코 6, 45-5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배를 탄 사람이 앞으로 가려면 순풍을 만나야 목적지로 갈 수 있는데 역풍을 만나면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맞바람을 만난 제자들이 애를 먹고 있을 때 주님이 참으로 바람처럼 나타나시어 배에 오르니 바람이 멎었다 합니다.
공동체도 순탄하게 앞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이거나 준비가 부족한 탓으로 역풍을 만나 성장과 성숙한 공동체와 거리가 생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가정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 역풍을 만나 고통에 시달리고 갈 길을 잃고 슬픔과 괴로움에 빠질 때가 있고, 수도 공동체도 지도자 결핍으로 수도 생활이 어렵게 되는 경우도 있고 밖으로부터 오는 역풍으로 축소되고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새 아빠스님이 취임하시며 하느님에게 새로운 노래를 부르자 하시며 변화된 새로운 수도원 삶을 지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허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20세기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역풍을 만나 교회 쇄신과 적응의 기회를 가지고 새로운 교회 상을 지향하려고 공의회도 열고 수많은 결정문을 만들어 냈지만 실천하는데 열성을 내지 않아서 참 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풍을 막아줄 분은 역시 주님뿐이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역풍을 만나 갈피를 못 잡게 됩니다.
주님을 떠난 사람은 작은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분노하고 울부짖고 세상을 원망하고 "너 때문에, 너만 없으면." 하게 됩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 그 바람 타고 오시어 제자들을 구하신 것같이 풍파를 타고 물 위를 걸으셨다는 말씀은 사람은 역풍에 쓰러지지만, 주님은 역풍을 이용하여 물 위를 걸으시며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주님이 주님이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며, 오늘 하루를 살도록 기도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에게
똑같은 날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흔들어놓는 풍랑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보여주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풍랑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관계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께서 심란한 우리 마음을
고요하게 하십니다.
풍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풍랑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은
풍랑이라는
생동감의 선물입니다.
풍랑을 탓한다고
풍랑은 사라지지 않듯이
풍랑을 통해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용기를 통해 우리는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기적이야기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우리 삶의 이야기입니다.
풍랑과 성체성사는
우리 삶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또 다른 차원으로
부르시는 가장 큰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속에
현존해 계시는 주님을
맞바람속에서도 만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빵의 기적은
풍랑속에서도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의 사랑임을
굳게 믿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고통과 시련이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물론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제발 내게만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할까요? 이러한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네요. 바로 무덤 안에 있는 사람들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감동적인 어떤 부부의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부유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큰 빚을 떠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증을 잘못 서서 얻은 결과였지요.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이 부부는 너무나도 어려운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빚을 갚기 위해서 어떠한 궂은일을 마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자매님께서는 힘든 일로 인해 손가락이 휘어져 제대로 활동하기 힘들게도 되었지요. 병원에서도 도저히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매일 미사에 참석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 가서 벌초하다가 그만 벌에 물린 것입니다. 너무 아파서 얼른 병원에 갔다가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는 휘어진 손가락이 펴진 것이었지요. 현재는 빚도 다 갚고 아픈 손가락도 고친 것에 감사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 부부에게 다가온 고통과 시련이 과연 필요 없는 것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비록 어렵고 힘들었지만 가족애도 더욱 더 두터워졌고, 소홀히 했었던 주님께 대한 사랑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도 시련이 나오지요. 그런데 이를 피해야 할 것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를 주님의 시험이라고 말하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 없이 편안한 길만을 원한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믿음과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안 계신 배 안에서 맞바람에 힘들어 합니다. 믿고 따르던 예수님께서 안 계신 자리, 그래서 더욱 더 불안하고 큰 일이 날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힘든데 여기에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즉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오시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의 따뜻한 말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을 배에 모시자 그대로 바람이 멎었습니다.
위험에서 줄곧 보호받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튼튼하게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처럼 도와달라는 청을 주님께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일, 고통과 시련은 오히려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셨을 때 고통과 시련은 내게 걸림돌이 아닌, 주님께로 나아가는 디딤돌임을 깨닫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은 멋진 것이다(톨스토이).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2014년 11월 16일 삼종기도 강론 중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은총을 금고 속에 보관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다른 이들의 선익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선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럴 때 더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자, 나의 자비와 나의 사랑, 나의 용서가 여기 있다. 이것을 널리 사용하여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업그레이드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사람은 머리로 머리(뇌 작용)를 생각하면서 그 이상엔 관심 안 둡니다. 고작해야 마음과 감정이 뇌 작용에 개입한다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상상력 추리력은 있어도 이상을 접하면 무섭고 두려워 넋을 잃지요.
이유는 영(靈)과 신(神) 같은 비 물질계의 영역에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업그레이드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을 믿는 건데 그렇게 믿으려들지 않으니 한심 답답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코 6,51~52)”
< 학습의 비밀, 메타인지와 하브루타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강론을 하면서 끊임없이 신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들이 틀린 대답을 말하도록 일부러 유도합니다. 그러면 처음엔 잘 대답하다가도 나중에 자꾸 틀리니까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예 입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모두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로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그런 다음 또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함정이 섞인 질문들을 합니다. 이렇게 강의를 들으면 물론 틀린다는 스트레스를 받기는 하지만 그냥 반복해서 듣는 것보다 두 배 가까운 학습효과를 보게 됩니다.
요즘 학습능력을 평가하는데 절대적으로 사용되는 기준은 더 이상 I.Q.가 아닙니다. 만약 아이큐가 학습능력을 결정한다면 세계 3위의 아이큐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해에 한두 명은 노벨상을 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아이큐가 떨어지는 유태인들이 노벨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메타인지’를 잘 이용하는 법을 조상들로부터 전수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하는 친구를 좀 살펴본 적이 있는데, 그 아이 책상이 항상 지우개 똥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들으면 그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이 필기했던 것들을 지우고 자기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여 새롭게 필기를 합니다. 자기의 것을 표현할 때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글을 쓰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면 형편없는 것을 스스로 보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착각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좋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트레스 받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가장 큰 힘은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3자가 되어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메타인지’라고 합니다. 동물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메타인지 능력이 학업성적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전교 1등 하는 아이들은 반드시 필기한 것을 지우개로 지우고 자신의 언어로 시험을 치듯이 다시 기억해 내어 재필기하는 자기를 시험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래야 모르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게 되고 그것을 더 확실히 알기 위해 무엇을 더 공부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EBS 특별기획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라는 프로그램 제5부 ‘말문을 터라’에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8명의 대학생들을 칸막이가 쳐 진 도서관에서 역사공부를 3시간 동안 하고 시험을 쳐 보도록 하였습니다. 또 다른 8명의 학생은 칸막이가 없는 교실에서 같은 내용을 이야기를 하며 공부하고 같은 시험을 치게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당연히 이야기를 하며 공부를 한 아이들이 시험 성적이 좋았습니다. 조용한 공부방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평균은 48점, 서로 말을 하면서 공부한 학생들은 76점을 받았습니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차이를 보인 것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표현할 때 더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메타인지의 힘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려고 했던 것도 결국엔 그것일 것입니다.
“네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라.”
이것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모르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메타인지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받아온 민족이 유태인들입니다. 유태인이 세계 인구의 0.2%밖에 되지 않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22%가 유태인이고 2013년에는 12명 중 6명, 즉 50%가 유태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독특한 공부방법이 있습니다. ‘하브루타’라고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인데, 공부할 때 항상 파트너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도서관은 그래서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토론식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교실도 마찬가지고 예배를 보는 회당도 결코 정숙하지만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문화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언가 질문을 할 때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는 자신의 몸을 가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높이 있는 사람이 남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낮아지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자존심이고 교만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만들고 그래서 우리 자신을 가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틀리는 생각을 평생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아 줄 수 있겠습니까? 자신 안에만 가두어 놓으면 어떻게 객관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말하고 표현하고 가르쳐야 비로소 그것이 객관화 되고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면에서 매일 이런 글을 쓰는 것을 저 자신을 위해서도 참으로 감사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틀려도 좋습니다. 부끄럽지 않습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빠져나갈 굴을 다 파 놓고 다른 죄수들에게 노래를 틀어주던 그 주인공처럼 더 이상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육도 그렇게 틀려도 되고 꼴찌가 돼도 되고 그렇지만 자신의 의견을 자신 있게 표현하고 함께 갈 수 있는 그런 교육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누가 성인인가? -사랑, 기도, 기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이든 글이든 긍정적일수록 좋습니다. 생명과 빛, 희망을 줘야 합니다. 제가 성경의 시편을 사랑하는 것도 이래서입니다. 시편을 맛들이다 보니 세상 시들은 맛이 없어졌습니다. 책들도 많지만 성경이 제일이고 다음으로는 성인들의 전기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한 긍정적이고 사실적이고 진정성 넘치는 글들이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신부님은 연세가 있으신데도 산에서 갓 내려온 동자 스님같이 천진(天眞)한 모습입니다.“(미주평화신문2014.12.21. 5면).
제 강의를 듣고 보리수 자매회의 일원인 백영희 자매님이 쓴 칼럼 중 위 글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긍정적 칭찬의 힘은 놀랍습니다. 긴 글중 이 한 구절만 생각납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천진함에 있습니다. 때로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하기 까지 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본래의 천진함이요 나이 들어도 이 천진함은 결코 잃어선 안됩니다. 얼마전 제 강론을 애독하는 자매님이 웃으며 전화상 한 말도 생각납니다.
"신부님 강론을 읽으면 뉴튼수도원 수사님들은 다 성인 같아요.“
"예, 사실 성인 수사님들입니다.“
잠시 덕담을 나누며 유쾌하게 웃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잘 들여다 보면 모두 천진한 성인같은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요즘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 사실은 성인들의 천진함입니다. 진정 위대한 신학자나 성인일수록 천진함도 함께 갑니다. 바로 열렬한 주님 사랑이,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이 천진함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의 임종어는 늘 읽어도 감동입니다.
"내 하느님, 내 당신을 사랑합니다(My God, I love you)!“
임종전 손에 십자가의 주님을 꼭 잡고 그윽히 바라보며 고백한 성녀의 감동적 임종어입니다. 성녀의 아름다운 평생 삶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는 고백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임종 얼마전 주님과 대화한 것을 문틈으로 엿들은 수사님의 증언도 신선한 감동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성인에게 다정히 묻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설명해 왔다. 내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토마스가 주님께 드린 대답입니다.
"아, 주님! 당신만으로 족합니다(Nothing but yourself, Lord!)!“
오직 주님 당신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입니다. 짧은 말마디 안에 토마스의 전 삶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참 거룩한 욕심입니다. 주님을 통째로 소유하는 것 하나만 원한다는 성인의 고백입니다. 사실 이보다 큰 행복도 부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내 고유의 모습인 성인입니다. 거룩함은 세례성사의 은총에 가장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할 때 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성화(聖化)합니다. 사실 인생 일대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것 하나뿐이고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누가 성인입니까?
첫째, '사랑의 사람'이 성인입니다.
요즘 미사 중 독서와 복음의 배치가 절묘합니다. 독서의 주인공은 주님의 애제자, 사랑의 사도 요한이고 복음의 주인공은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전수 받은 애제자 요한의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사랑'이 무려 12회 나옵니다. 사랑 빼놓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우리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은 모두 '사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사람, 성인이 됩니다. 저절로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 냅니다. 이런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심판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감동적인 강론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 원하는 대로 하라. 침묵한다면 사랑으로 침묵하고, 말한다면 사랑으로 말하고, 형제의 잘못을 교정하려면 사랑으로 교정하고, 용서하려면 사랑으로 용서하라. 네 안에 사랑이 뿌리 내리도록 하라. 그 뿌리에서 선(善)은 자라난다.“
새삼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우선적 특징은 사랑입니다.
둘째, '기도의 사람'이 성인입니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아니 사랑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사랑 하나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소통은 생명이자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 없으면 영혼은 식물인간이 됩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해' 사랑이요 기도입니다. 숨쉬듯 기도하며 하느님 사랑을 호흡해야 영혼이 삽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군중과 제자들을 떠나 보내신 다음 불야불야 발 걸음을 재촉하여 하느님을 만나 기도하러 산에 가시지 않습니까?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만나는 이런 외딴곳의 기도처,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와 시간을 마련해야 삽니다. 그래야 샘솟는 사랑, 초연한 사랑의 건강한 영혼으로 살 수 있습니다.
셋째, '기적의 사람'이 성인입니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기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마술 같은 괴이한 기적이 아니라 사랑의 기적, 기도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기적의 모범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바로 그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과 기도에 응답하여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바로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도대체 성체성사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랑의 기적 후에 하느님 안에 쉬시면서 충전시킨 후 맞바람으로 인해 호수 한 가운데에서 곤궁 중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랑의 기적을 베푸시어 이들을 살려내십니다. 기적과 기적 사이에 사랑의 기도가 자리 잡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습니다. 이런 비상한 사랑의 기적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지금 살고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온통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삶은 기적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사랑의 기도를 통해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이보다 고결하고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성인이 되는 원리는 아주 단순 명료합니다.
1.사랑의 사람이 되십시오.
2.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3.기적의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성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여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아름다운 마무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몇 년 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브라질 국민들은 퇴임하는 그에게 87%의 지지율을 보냈습니다. 세계 각국은 그의 퇴임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브라질을 세계8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 올렸고 좌우를 모두 끌어안는 포용의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 다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퇴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퇴임은 어떻습니까? 바닥을 치고 불행하게 떠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뒷모습이 그립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신분으로 국정운영의 청사진과 새 정부의 골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민생정부'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국민 신뢰를 통해 '정치 불신'을 없애고 선진국 진입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었습니다. 2년이 지난지금 ‘신뢰’는 사라지고 ‘불통’만 고착화 되고 ‘공안정치’가 강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말만 늘어놓기'보다는 확실한 실천과 행동으로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고 신뢰와 소통을 더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뒤에 오실 분을 소개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요한3,29).하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국민을 섬기는 정치가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이 올 6월에 치러질 자치단체장, 의회의원 선거를 겨냥한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도 그들을 현명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뽑은 사람을 잘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예수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 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 주님께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란 싫어하는 것, 그것도 너무도 싫은 것이 닥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음을 알 수 있지요. 좋은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러므로 두려움이란 싫은 것을 경험할 때의 감정, 그러니까 극심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맞지만 실은 고통 밖에 아무 것도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고통은 견딜 만 하거나 외려 사랑의 기쁨을 북돋는 것일 뿐, 전혀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독과 고립을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며 특히 수도자들은 절대고독은 살 수 있어야 하지만 고립의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수도자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수도자란 무소의 외뿔처럼 절대고독 속에서 홀로 가는 존재다.”
그런데 이 말에서 절대고독이란 상대적인 고독이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옆에 사람이 많았는데 늙으니 사람이 없는 그런 고독, 다른 사람에게는 사람이 끓는데 내게는 사람이 없는 그런 고독이 아니지요.
사람이 많이 있건 없건 인간은 근본적으로 홀로 가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 고독을 행복하게 사는 존재가 수도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수도자만 그렇겠습니까?
석가모니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곧 하늘 위, 하늘 아래에 나 홀로 존귀하다고 말씀하신 것 처럼 나는 누구 때문에 존귀해지지도, 누구 때문에 비천해지지도 않으며, 누구 때문에 행복하지도, 누구 때문에 불행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지요. 나는 누구 때문에 존귀하지도 비천하지 않고 나는 나로서 존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고독을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는 고립을 산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인격체로 보다 완전한 사랑을 살 수 있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성숙하게 홀로서기를 못하기 때문이고, 고통이 너무도 두렵고 조그만 상처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침범자, 상처 주는 자로 생각하기에 자기 안에 갇힙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절대고독 속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침입자로 생각지 않는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애착하는 사람이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다 맞바람으로 고생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란 것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음을, 세상 풍파로 난파의 위험을 겪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는 거지요.
살다보면 우리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리 애써도 아무런 진전이 없으며 절망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어도 그야말로 아무런 도움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우리의 주님께서 등장하는 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네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나요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공현 대축일 이후 이번 주간 내내 복음에서는 계속 다양한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주님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소개합니다. “힘 내시오. 나요. 겁내지 마시오!” 거센 바람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첫 말씀입니다. 물 위를 걸어 자신들에게 오신 주님의 현존 앞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제자들은 넋을 잃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바람과 물은 복종합니다. 우주의 그 어떠한 피조물도 그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요”라는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라고 장엄하게 선언할 수 있는 분은 우주 안에서 하느님밖에는 없습니다. 요한 복음 첫 말씀이 떠오릅니다.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공현의 신비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센 풍랑에 허덕이는 제자들처럼, 우리가 가장 힘들 때 어려움에 처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주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주님은 함께 계셨다고.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 아래에서 함께 성장합니다.
영적 감수성의 회복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현대를 감성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일찌기 바오로 6세 교종은 '현대인의 가장 큰 죄는 무감각'이라고 갈파하셨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한 영적 감수성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다(6,45). 왜 그토록 서둘러 제자들을 보내셨을까? 그것은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그분을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정치적 해방자로서 왕으로 떠받들려 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제자들이 말리게 되면 반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소요에 휩싸이지 않도록 제자들을 군중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예수께서 홀로 남아 군중을 헤쳐 보내신 것이다.
제자들을 세상 한가운데로 파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시어 ‘우리가 찾기도 전에’, ‘구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다(6,46).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6,47)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저녁' 곧 예수님과 무관하게 욕망과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찬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시어 바로 곁에서 눈여겨 보신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제자들은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6,48)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하느님 밖에서' 자신들의 힘에만 의존하여 풍랑을 헤쳐가려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셨다(6,48).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6,48).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생각할 여백을 주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6,49). 빵의 기적을 보며 늘어난 빵의 양에 놀랐던 그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현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감각이 없는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50) 하고 격려하시고 두려움의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워주신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6,51). 이를 본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여기서 제자들이 넋을 잃은 것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알아뵙는 영적 감수성을 회복함에서 온 '사랑의 경탄'이었으리라.
제자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 까닭은 ‘마음이 무디어서’였다. 포로우(πορ?ω)란 말은 ‘무디어서’라는 뜻 외에도 ‘느낌이 없어서’, ‘이해할 힘을 잃어버려서’란 뜻이 있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영적인 느낌이 없어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힘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도록 파견되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미 그분이 주신 ‘은총의 배’를 타고 있다. 우리네 삶은 세상적인 힘겨루기가 아니며 어떤 일도 결코 나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 손안의 연장’일 뿐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일과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영적 감수성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던 것은 순전히 외적으로 늘리는 빵의 수와 일처리만을 보았지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감수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제자들의 눈을 가려버렸던 것이다. ‘완고함’이란 어떤 일을 통하여 사건과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이해할 능력을 스스로 상실해버린 상태를 말한다. 우리 모두 어떤 처지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를 ‘은총의 배’에 태워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느낌을 회복하도록 하자. 완고함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온유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체 앞에
머무를때면, 때론
고요히 머물지 못하게하는
내면의 맞바람이 우리를
두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두려움이라는 맞바람을
고요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호수위의 맞바람은
다시금 주님의 말씀을
듣게하는 회개의 시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호수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보게하는
성찰의 거울이 되어
주었습니다.
맞바람이 불어대는
호수처럼 우리의 삶또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은총을 주님께서는
맛보게 하십니다.
변화의 시간은
나약한 우리자신을 만나고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고갈되는 시간이 아니라
호수처럼 풍요로이
주님과 소통하는
시간이 되어 줍니다.
잔잔한 호수의 시간도
일렁이는 파도의 시간도
모두 맛보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어떤 시간도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길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맞바람속에 감추어져있는
고통의 신비를 신앙안에서
만나기를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용기는
주님의 도움없이는
한걸음조차 내딛기
힘든 우리들임을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주님과 함께하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주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인생의 역풍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서해안 먼 바다에 끝에 위치한 작은 섬 본당에 사목을 도와드리러 간적이 있었습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출발해서 한참을 달렸습니다. 갑작스런 기상의 변화로 먼 바다로 나가니 파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꽤 큰 연안여객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실거리는 큰 바도 앞에 우리가 탄 배는 마치 한 장의 가랑잎 같았습니다. 산더미 같은 큰 파도를 맞이할 때마다 배는 크게 요동을 쳤습니다. 큰 바다의 맛을 제대로 봤습니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큰 바다 한 가운데서 잠시나마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큰 역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겪었던 갈릴래아 호수는 얼마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당시 사람들은 ‘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평상시 갈릴래아 호수는 잠잠했지만 때로 중동 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과 헤르몬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찬바람이 만나 심한 기류의 이동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 갈릴래아 호수는 높은 파도가 일어 마치 바다를 연상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릴래아 호수의 깊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평균 수심이 26미터에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50미터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이 깊은 호수 한 가운데서 역풍에 시달리던 순간의 공포는 꽤나 컸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맞바람을 제대로 만나 몇 시간째 제자리를 뱅뱅 맴돌고 있었습니다. 초저녁에 출발한 제자들이어서 한 두 시간이면 벳사이다에 도착했어야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이 다가올 때 까지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전직 어부였다 할지라도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기진맥진 거의 초죽음상태에 도달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했던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다들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법석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당신의 메시아성을 백성들 앞에 확연히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의 초인간적 위대성, 당신의 신적 본질의 신비를 드러내는 현현(顯現)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건네신 말씀은 간단한 말씀이었지만 모든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의 낯익은 목소리에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위엄 있는 계시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험난한 이 세상에서 제자들을 보호하고 축복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죽음의 정복자, 생명의 부여자로 다가가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킬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역경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낙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의 위엄 있는 한 말씀으로 모든 인생의 역풍을 잠잠하게 만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어제 사제서품식은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제가 성소국장이 되어 여름서품식까지 포함해서 벌써 6번의 사제서품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제처럼 긴장되고 많이 기도했던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 한 분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시거든요. 희귀병을 앓고 있어서 과연 서품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제가 되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어제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서품식 직전 점심식사 때, 이 신부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신부님, 제가 이렇게 사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꿈같고 기적이에요. 그래서 제 첫 미사 때에 저와 같은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초대했어요. 이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무릎을 꿇는 것도 또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열심히 노력했던 그 모습에 주님께서도 기쁘게 당신의 대리자로 받아주신 것이 아닐까요? 아마 큰 아픔을 안고 사시는 만큼, 신부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착한 목자가 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나의 아픔과 시련이 가장 큰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그 아픔과 시련의 크기를 재어 보려고 노력하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것이 큰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이 큰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과 시련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우리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호수 위에서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밝은 대낮이 아닌 새벽녘이었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즉, 주님을 받아들이자 모든 고통과 시련이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때 내가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아픔과 상처들을 극복해서 참 기쁨의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저기 다치고 멍들지만 전보다 윤이 나고 값지게 되기 때문이다(엘리사베스 퀴블러 로스).
어제 서품 받은 사제의 서품성구 설명
오늘 새벽 묵상 글에 썼던 새 사제가 쓴 서품성구의 설명입니다. 이 사제가 원하는 대로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십시오.
신학교에 입학해서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지만 몸이 점점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병원을 가도 원인도 알 수 없었고 마음은 답답했습니다. 2-3년 동안 병원을 옮겨가며 진찰을 한 끝에 저의 몸 상태가 남들과는 다른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난 후에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현대 의학으로는 없다는 사실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 피정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예수님께 물어보았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죽은 사람들까지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저 또한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학을 보내고 새 학기를 맞이할 때마다 몸 상태가 더욱 악화 되었습니다. 매일 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성무일도의 끝기도 때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는 말을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아침 기도 때 ‘하느님 절 구하소서.’를 외치며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끝기도의 마침기도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께서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시어 우리에게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어주시니’ 라는 말을 묵상하며 서품성구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로 정했습니다.
두렵지 않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김대열 F. 사베리오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코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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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보면 참 많은 두려움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 두려움들 속에는 사실 허상에 대한 두려움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대상에 대해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각자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 .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고, 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불확실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두려움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나 확실에 접근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에 대한 준비가 신앙인의 삶이다.
“당신은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 너무 쉽게 “예” 라고 답하지 말라.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확신이어야 한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용기를 내라 하신다.
용기가 있다는 것은 겁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섭고 떨리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떨리는 마음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참된 용기의 의미이다.
모두가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다.
힘이 들고 두렵지만, 그래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다. (2013.01.09)
< 우리도 매일 물 위를 걷는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탄길 3’에 소개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란 사연을 간추려봅니다.
오늘은 진호 생일입니다. 진호는 문방구에서 로봇을 사 달라고 엄마에게 조릅니다. 그러나 엄마는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호 동생이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호는 엄마가 동생만 사랑해 준다고 섭섭해 합니다.
“엄마는 맨날 태호만 좋아해. 나는 하나도 안 좋아하고.”
정희씨는 진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냐, 진호야. 엄마가 우리 진호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럼 빨리 로봇 사 줘. 내가 어제 문방구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그 로봇이 하나밖에 안 남았대. 다른 사람이 먼저 사 가면 어떻게 해. 빨리 사 줘.”
정희씨는 무작정 보채는 진호를 달래보려 했지만 진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생일날 아이한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호를 잠자는 동생 곁에 두고 가자니 진호가 원하는 로봇이 어느 것인지를 정희씨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진호 손에 큰 돈을 들려 문방구에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정희씨는 하는 수 없이 거실에서 잠자는 태호를 혼자 남겨두고 진호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십 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린데, 그 사이에 깊이 잠든 태호가 깨지는 않을 거라고 정희씨는 생각했습니다.
로봇을 손에 들고 문방구를 나오는 진호는 큰 기쁨에 콧구멍까지 벌쭉 벌어졌습니다. 너무 좋아 쿡쿡 웃고 있는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정희씨 얼굴에도 활짝 봄꽃이 피어났습니다.
정희씨는 진호 손을 꼭 잡고 연립주택 골목을 털레털레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정희씨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정희씨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의 3층 창문 밖에 이제 다섯 살 된 태호가 매달려 울고 있던 거였습니다. 정희씨는 당장이라도 그 자기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태호는 베란다 밖으로 나와 있는 화분 받침대의 쇠파이프를 양손으로 간신히 붙들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쇠파이프를 두 손으로 꼭 붙든 태호는 창문 아랫 벽에 나 있는 작은 틈 사이로 발 한 쪽을 가까스로 끼우고 힘겹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태호의 울음소리는 두려움에 덜리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마음을 수습하고 3층 계단을 헐레벌떡 단숨에 뛰어 올라가 대문에 열쇠를 끼우는 정희씨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을 때, 창 밖 화분대에 매달려 겁에 질려 울고 있는 태호의 머리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베란다에는 태호가 딛고 올라선 식탁 의자가 보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태호가 창밖으로 엄마가 오는 걸 보려고 거실에 있던 식탁 의자를 베란다까지 끌고 나갔던 거였습니다.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선 정희씨는 석고상처럼 몸이 굳는 것 같았습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온몸을 엄습해 왔습니다. 정희씨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미소를 지으며 태호 쪽으로 양팔을 내밀었습니다.
“태호야, 엄마가 가서 안아줄게. 꼭 붙들고 있어, 알았지?”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태호는 떠나갈 듯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정희씨는 한 걸음 한 걸음 태호가 매달려 있는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거의 다가가 태호의 손을 낚아채려는 순간 태호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창 밖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태호의 비명 소리에 정희씨는 아주 잠깐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터질 듯한 울음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습니다. 119구조대의 모습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태호야... 태호야...”
정희씨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태호 이름을 부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3층에서 떨어진 태호는 구조대원의 품에 안겨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습니다. 태호는 얼굴 한쪽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오른쪽 팔을 잘 가누지 못했습니다. 정희씨는 태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리 태호, 괜찮아? 우리 태호 정말 괜찮은 거지?”
그때 가까이에서 울고 있던 진호가 고개를 푹 떨군 채 정희씨에게 다가왔습니다. 진호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엄마,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진호야. 괜찮아...”
잠시 후, 정희씨는 태호를 데리고 119구급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태호는 오른쪽 팔꿈치에 금이 갔을 뿐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팔에 깁스를 하고 병원에서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하면 좋아질 거라고 담당 의사는 말했습니다. 정희씨는 그제야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후회와 안도감으로 목이 꺽꺽 막혀왔습니다.
그토록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태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동네 아주머니들과 진호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진호는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위아래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들을 모두 다 불러냈습니다. 아주머니들은 저마다 장롱 속에 있는 두터운 솜이불을 몇 개씩 가지고 나왔습니다. 태호가 떨어진 땅바닥 위에는 열개도 훨씬 넘는 솜이불이 아주 두텁게 쌓여 있었습니다. 천만 다행히도 태호는 그 솜이불 위에 다리부터 떨어져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십니다. 사람이 살아있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서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으면 물을 먹고 가라앉고 맙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에너지가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끌어 다니는 중력과 삼켜버리는 물결 위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공기 중에 떠 있으려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에너지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늘을 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온전한 인간의 모델로서 이 세상의 끌어당김을 이길 수 있는 에너지, 즉 죄를 이길 수 있는 에너지를 아버지로부터 얻는다는 것을 오늘 보여주십니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도 에너지를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할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면, 흙에서 온 우리들이야 이 세상의 어두운 유혹 위에 서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시간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죄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으면 상관없겠지만, 이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으면 시간 나는 대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발아래 놓고 살고 싶다면 예수님의 모범대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진호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어른들을 불러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이 기도하는 시간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고만 있었다면 진호는 동생을 잃고 평생 죄책감에 살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도움을 청하러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 덕에 중력의 공포로부터 동생을 구할 수 있었고 가정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이렇게 절박하게 기도의 중요성을 안다고 한다면 기도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오전에 시간이 남아 기도를 뒤로 미루고 조금 게으름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러 성당에 갔는데 갑자기 아침부터 손님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녁이 될 때까지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당장 물 위를 걸어야 하는데 기도하지 않았다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기도하지 않으면 내 동생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누가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내 가족이 난간에 매달려 있다면 지금 당장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루를 살기 이전에 그 하루를 살기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이런 절박감만 조금 있더라도 아침기도를 거르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밥은 안 먹어도 기도는 하고 하루를 시작할 것입니다. 항상 내 앞에 건너야 할 바다가 있음을 생각하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어제 신자 분들과 서품식에 갔었습니다. 서품식은 오후였는데 오전에 나가서 병원에 계신 할머님을 방문하고, 서품식이 있는 부천실내체육관으로 이동했는데요. 도착하고 보니 시간이 많이 남았었습니다. 점심시간이기도 해서 신자 분들과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는데요. 이미 와 계신 신부님과 신자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우리 자리를 잡아 식사를 시작했는데요.
제 앞에 계신 자매님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기 옆 테이블에 있는 신부님 주위에 자매님들은 젊은데, 우리 신부님 옆에는 나이 많은 사람만 있네요~” 아마도 자매님은 ‘신부님 주위에 우리 같은 늙은이보다는 젊은 자매들이 있어야 신부님도 좋아하시겠지..’ 하는 생각이 있으셨던 거 같은데요. 그런 생각 전혀 들지 않았었습니다. 정말 1%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처음에 본당에 왔을 때는 전에 있던 본당과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왔었죠.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 거나, 전례를 하면서 여러 가지 실수를 하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모습들이나, 체계가 잡혀 있지 않고, 저처럼 고집이 세신 모습들, 그리고 평일 미사 인원수가 얼마 되지 않는 모습들이 걸렸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거 같습니다. 어르신들이라 글자가 잘 안 보여서 읽으시면서 종종 틀리기도 하시고, 준비하면서 몇 가지를 빠뜨리기도 하시고, 보통 평일 미사에는 이 정도 나오시는구나..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산책을 하는데 제 마음속에서 제목도 모르고 다른 가사도 모르는데 한 소절 노래가 튀어나왔었습니다. ‘다 줄거야~ 내 남은 모든 사랑을...’ 하는 가사였는데요. 그 마음이 지금 신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제 마음인 거 같습니다. 그분들이 늙었든 젊었든, 고집이 세든 그렇지 않든, 나와 생각이 같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제 마음은 다 주고 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늙었으니 신부님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한다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걸 텐데요.
종종 신자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신부님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하느님은 나 같이 모난 사람보다는 문안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을 좋아하실 거야.. 이런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하느님 앞에 나아가겠나.. 하느님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그런데 하느님은 어떠신가요? 죄인이나 의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주시고, 모든 사람을 값지고 소중하게 보아주십니다.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잘난 사람들이 있었나요? 그 분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이었고, 죄인들과 병자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들을 내치신 것이 아니라 치유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보듬어 안아주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분께 나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주시는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겠죠. ‘너는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다.. 나는 너를 조건 없이 사랑한단다..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단다..’ 라는 목소리를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드러내 보이는 것, 곧 그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웃들을 바라보고, 그분이 나를 대하시는 사랑으로 이웃들을 대하는 것이 오늘 독서 서두에 나오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그분이 들려주시는 진리와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주위에서 신부님은 왜 섬에서 섬으로 가세요~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우리 신자들은 ‘다리 있는 섬으로 가니 승진하셨다.’고 하신다.^^;
어제 사제서품식이 잘 끝났습니다. 인천교구 사제 10명 그리고 부제 8명이 새롭게 탄생 했지요. 저도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서품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저의 지금까지의 사제생활을 반성하고 다시금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서품식 준비하는데 있어서 많은 분들이 수고하셨습니다. 성소후원회, 신학생, 사제, 인천대신학교, 전례꽃꽂이, 인천교구 합창단, 그 밖의 많은 관계자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어제와 같은 큰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서품식이 끝나고 나서 많은 분들이 제게 와서 정말로 수고했다고, 서품식이 너무 잘 진행되었다는 칭찬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총진행자이기는 하지만, 저 혼자서 이 큰 행사를 어떻게 치룰 수 있었겠습니까? 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솔직히 제가 처음 성소국장으로 와서 서품식을 진행하는데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거의 6,000명의 신자들이 참석하는 이 서품식을 과연 잘 진행시킬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성소국장으로 네 번째 서품식과 크고 작은 많은 행사들을 진행하다보니 이제 두려움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행사들을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주시는 많은 분들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이 안에 함께 해주시면서 가장 거룩한 전례, 가장 아름다운 전례를 만들어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만 사라진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도 내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으로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떨려서 제대로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믿음이란 이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제는 이 믿음을 사람 안에서, 이 세상 안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세상 안에서 굳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가장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믿음을 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기적, 즉 빵의 기적을 목격한 상태였기에, 이 정도의 기적쯤이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바라보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인간적인 판단, 세속적인 판단 없이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두려움 없이 온전히 주님과 함께 모든 어려움과 시련들을 잘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말고, 오늘을 힘차게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운은 우리 바깥이 아닌 우리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줄리우스 그로스).
하느님을 좋아하십니까?
예전에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한 6년 정도 키웠던 것 같습니다. 강아지를 키우는데 돈이 꽤 들더군요. 사람이 아파서 병원에 가도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의료보험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강아지는 아파서 병원에 데리고 가면 상당히 비싼 값을 치러야 합니다. 또 왜 이렇게 예방접종 시킬 것들도 많은지요. 여기에 사료를 사다가 먹이는 것은 물론, 이 강아지를 위해서 간식도 종종 구입하게 됩니다.
사람에게도 쓰지 않는 많은 돈을 이 강아지에게 쏟아 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강아지를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말썽도 많이 치고 있지만, 제가 들어올 때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맞이해주고 그리고 제 옆을 떠나지 않는 모습, 즉 이 강아지가 저를 좋아한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그렇게 많은 애정을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좋아한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사랑을 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느님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라는 거창한 마음보다 더 먼저가 되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 보고서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인데, 이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직후의 일입니다.
먼저 바라볼 것은 빵의 기적이 일어난 후의 사건 현장 모습 내지 분위기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 기적 사건의 여향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모습, 제자들의 모습, 예수님의 모습 등을 잘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을 떠나보내시고 군중도 돌려보내시는 모습을 본 후, 혼자 기도하려고 산에 가신 모습을 뒤쫓아가 봅니다.예수님 모습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예수님의 심장소리가 들려오는지, 깊은 내면의 고요 속에 머물며 미세한 진동들을 감지해 봤으면 합니다.
그러곤 맞바람에 노를 젓느라 애먹고 있는 제자들 모습 내지 분위기와 호수 위를 걸어 그쪽으로 가시는 예수님 모습을 대조적으로 바라봅니다. 새벽녘 호수 분위기도 더불어 살펴봤으면 합니다. 이때도 다른 여타 복음관상과 마찬가지입니다만, 그저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 한 장면 보듯 바라봐선 부족합니다. 깊은 관심과 사랑 속에 흠뻑 젖어든 채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의 모습도 살펴보십시오.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고 했는데, 성경에 이처럼 한두 마디로 정리되어 있는 듯해 보인다 해서 너무 거기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기도 중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대로 맡겨둔 채 깨어 있으면서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를 각자의 상황에 맞게 이끄시면서, 신선하면서도 힘에 넘친 물 한 잔 먹여 주실 터입니다.
그저께 정말로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칠 지를 모르고 한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저는 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기도 했지요. 그러나 2003년과 2004년 겨울에 눈길에서 차가 미끄러져 사고가 난 뒤로는 눈만 오면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눈 쓰는 것은 왜 이렇게 귀찮은지요. 따라서 제게 있어서 눈이란 낭만을 떠올리기보다는 위험과 귀찮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저인데 어제 운전을 해야만 했습니다. 구반장 신년하례미사가 있었는데, 우리 성당의 구반장님들 응원을 위해서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지요. 그래서 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예전의 사고가 떠올리면서, 괜히 차를 몰고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차 안에는 본당 수녀님과 보좌신부도 타고 있었거든요. 간신히 신년미사를 봉헌하는 본당에 도착했습니다. 도착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또 눈이 내립니다. 미사 내내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집에는 어떻게 가나? 눈이 내리면 가뜩이나 녹지 않은 눈으로 미끄러운 도로가 더 미끄러워지지 않을까?’
이러한 분심으로 미사에 집중되지 않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걱정을 하는 것일까?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일 뿐인데, 걱정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사실 우리들은 걱정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그 걱정으로 우리는 약해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때도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깊이 와 닿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들이 타고 있던 배에 예수님께서 오르셨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멎게 되지요.
어떠한 순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려 하십니다. 시련과 고통으로 상징되는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급하게 물 위를 걸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배 바깥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게 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오늘 제1독서는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 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내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지요.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두려움을 없애고 용기를 낼 수 있으며, 결국 예수님을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레온 J. 쉬넨스).
기적의 값(‘좋은생각’ 중에서)
어느 날, 여덟 살짜리 테스는 우연히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동생 앤드류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빠는 울먹이는 엄마에게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앤드류는 기적이 아니면 살릴 수 없소.”
테스는 그 말을 듣고 방으로 돌아와 숨겨 둔 저금통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 안에 든 돈을 세어 보았다. 모두 1달러 11센트. 테스는 저금통을 들고 약국으로 향했다.
약사는 먼저 온 손님과 대화 중이었다.
“무슨 일로 왔니? 난 지금 중요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단다.”
“동생이 너무 아파요. 기적이 아니면 사릴 수 없대요. 그래서 기적을 사러 왔어요.”
“뭐? 미안하지만 널 도와줄 수 없겠구나. 기적은 팔지 않는단다.”
그때 약사와 대화를 나누던 손님이 테스에게 물었다.
“얘야, 어떤 기적이 필요하니?”
“동생이 아픈데 아빠는 돈이 없어서 동생을 낫게 할 수 없대요. 그래서 제 돈으로 기적을 사려고요.”
“그래, 얼마를 가져왔니?”
“1달러 11센트요.”
그러자 손님이 웃으며 말했다.
“잘됐구나. 마침 내가 팔려는 기적이 1달러 11센트거든.”
손님은 한 손에 저금통을 받아 들고 테스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앤드류의 상태를 유심히 살핀 뒤 돌아갔다. 그는 바로 세계적인 신경 전문의 칼톤 암스트롱. 그로부터 얼마 뒤 엄마가 테스에게 말했다.
“앤드류의 수술은 기적 같았단다. 이 기적의 값이 얼마인 줄 아니? 1달러 11센트란다.”
테스는 약국에서 만난 손님을 떠올리며 밝게 미소 지었다.
예수님의 ‘일의 중단’
-정찬호-
예수님께서는 홀로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는 그분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호수 한가운데에서 곤경에 처한 제자들의 모습이 그분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 시간은 끝났습니다. 당장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한걸음에 호수 위로 달려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제자들을 위해 당신 본연의 일까지도 중단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의 중단’, 그리고 그 ‘일의 중단’마저 기쁨으로 받아들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복음서는 여러 차례 증거하고 있습니다(마르 1,35-37; 2,3-4; 5,24-26; 10,46-48).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러한 ‘일의 중단’을 “우리를 새롭게 빚는 중단의 순간들”로 해석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독서를 중단시킬 때,궂은 날씨로 휴가가 취소될 때, 병으로 인해 잘 짜놓은 계획을 실행할 수 없을 때…. 이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방해물들이 우리 마음속에 노여움, 좌절, 복수심을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만약 이러한 방해의 순간들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존재의 완성으로 이끌 수 있는 내면의 응답을 촉구하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운명은 기회가 되고, 상처의 아픔은 경고의 음성이 되며, 무기력은 생명력의 근원을 찾아 나서게 하는 초대가 되는 것이다.”
‘일의 중단과 방해’는 당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귀한 기회입니다.
공현의 때, 갈망의 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저는 선교사로 파견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기에 이분들을 생각하며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파견을 받으신 것처럼 선교사도 하느님의 파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선교사도 집을 떠나 세상 한 가운데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아버지를 이 세상에 널리 드러내셨듯이 선교사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널리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공현 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공현 하셨듯이 선교사도 자신의 능력으로 선교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공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는 하느님 사랑을 널리 드러내는 사람들.
그런데, 하느님 사랑을 공현 하려면 자신이 먼저 하느님 사랑을 체험해야 하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려면 하느님 사랑을 갈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갈망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공현 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사랑을 절실히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 그 갈망이 가장 절실해집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그 때는 밤을 꼬박 새운 새벽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고, 그러니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부지런히 노를 젓지만 풍랑에 그저 그 자리에서 맴돌고, 결국 氣盡脈盡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있는 힘을 다 쏟아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을 때,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때,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없을 때, 그래서 마침내 하느님께
‘잡아먹든 삶아먹든 알아서 하슈!’하게 될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영의 때입니다.
갈망만 있고 자기가 없는 때, 갈망만 있고 그 부산한 이지작용이 멈춘 때, 갈망만 있고 자기 의지가 없는 때, 갈망만 있고 아무런 힘이 없는 때, 갈망만 있고 다른 아무 것도 누릴 것이 없는 때, 이때가 영의 때이고 갈망하는 그것이 등장하는 때입니다.
바로 이 갈망의 때에, 바로 이 영의 때에 어둠 가운데 예수님께서 홀연히 제자들에게 나타나듯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떠오고우리의 눈이 열려 구원을 보게 됩니다.
선교를 나가게 되면 누구나 다 이런 때를 거치게 될 것입니다.
아무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아무 위로도 없고, 그래서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과 같은, 너무도 컴컴한 어둔 밤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인도로 예수님께서도 악마의 유혹과 시련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광야의 고독을 견디셨듯이 선교사들도 이 고독의 밤을 지나야 하는데 이 성령의 때는 무조건 견뎌야 합니다.
그것이 3년일지 4년일지 모르지만 견디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기에 무조건 견뎌야 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학교에서 담력이 좋기로 유명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빨간 동자’라는 아기 귀신을 보고 성소를 포기 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는데 그 선배는 빨간 동자가 나온다는 지하 체육관에 밤에 내려가 혼자 운동을 하고 올라오는 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도 지하에 내려가 운동을 하고 올라오다가 예전처럼 반 지하 성체조배실에 잠깐 들렀습니다.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뒤에서 거친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겁이 없던 선배도 무척 겁이 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방엔 자신 혼자밖에 없었는데 뒤에서 남자의 거친 호흡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뒤를 돌아보는데 한 3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선배는 겁에 질려 빨리 그 자리를 떴고 나중에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 밑에 내려가 운동을 하거나 혼자 성체조배하기가 겁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뒤 제가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 뒤에서도 그 거친 남자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과 혼동할 수 없는 틀림없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귀 뒤에서 들렸습니다. 온 신경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는 선배가 전에 한 말이 생각났고 아마도 마귀의 짓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앞을 보며 묵상을 하려니 이번엔 더 가까이에서 호흡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장난이란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지자 오히려 겁이 없어지고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 놈이 마귀이면, 나를 무섭게 해서 기도를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겠구나!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그래서 계속 숨소리가 뒤에서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해놓은 기도시간을 채웠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 거칠고 기분 나쁜 숨소리는 귓가에 계속 들렸습니다.
당시 공동 침실을 쓰고 있었는데, 저는 먼저 혼자 방으로 내려가 자리에 누웠습니다. 자리에 누워도 역시 귀 옆에서 계속 그런 숨소리가 났습니다. 방까지 마귀가 따라왔다는 생각에 겁도 났지만, 마귀가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다만 겁을 주려고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그냥 무시하고 자버렸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소리는 들린 적이 없습니다.
마귀는 내가 원하지 않으면 나에게 들어 올 수도 없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니 그 분 허락 없이는 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없습니다.저는 조금이나마 이 사실을 알았기에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라고 하며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 깨닫고 있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실 정도로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믿었다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그렇게 겁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든 미래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 처음 마주치게 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하기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유령처럼 물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면 됩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모른다면 우리를 그렇게나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결국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혹은 어떤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믿음이 없거나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만큼 알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도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조금씩이라도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거나 자존심에 손상이 입을 것 같은 두려움, 혼자 남겨질 것 같은 두려움, 하는 일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바로 진실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그 두려움들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어느 부자의 집 앞에서 거지 한 명이 벽에 등을 비비고 있었어요. 집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 주인인 부자가 나와서 보고 “아니, 왜 제 집 담에 등을 비비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거지는 “등이 가려워서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부자는 거지를 측은하게 여겨서 집으로 들어오게 한 뒤, 욕실에서 목욕을 하도록 하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입게 해주고, 배부르게 한 상 잘 차려준 다음, 이것저것 먹을 것까지 싸서 가게 했어요. 정말 오랜만에 호강을 한 거지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고, 부자가 나눠준 음식을 가지고 친구 거지들에게 돌아갔지요. 그리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오늘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고요.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한 거지 부부는 자기들도 이러한 호강을 받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곧바로 그 집에 가서 둘이 나란히 담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지요. 그때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오던 부자는 자기 담에 등을 비비는 거지 부부를 보고 또 물어보았어요.
“아니, 당신들은 왜 제 담에 나란히 서서 등을 비빕니까?”
이에 남편 거지가 “등이 가려워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지요. 이 말을 듣자마자 부자는 갑자기 안색이 나빠지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서 몽둥이를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이 부부를 때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부부는 대접해 주기는커녕 몽둥이찜질을 하는 부자에게 억울하다고 항의를 했죠.
“아니, 제 친구가 와서 비빌 때는 밥도 주고 옷도 주고 하더니, 왜 저희한테는 몽둥이찜질입니까?”
그러자 부자는 말했어요.
“저번 거지는 혼자였으니 등이 가려우면 담에 비빌 수밖에 없지 않소. 그러나 당신들은 둘이 아닙니까?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고요. 그러니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주면 될 것을 뭣 때문에 남의 집 담에다 등을 비비느냐 말이오?”
혼자는 못해도 서로 도우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린 채 힘들다고만 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의심하면서 믿음의 길에서 멀어만 갈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인 제자들의 믿음이 어쩌면 우리들의 믿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하신다는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으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유령인줄 알고 비명을 지릅니다.
제자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삶 안에서 이렇게 믿음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니까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도록 더욱 더 노력하십시오. 주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큰 일에는 진지하게 대하지만 작은 일에는 손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몰락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된다.(헤르만 헤세)
열정이 변화의 엔진이다.
월남전 당시 미국의 윌리엄 웨스트멀랜드 장군이 특수부대를 사열할 때의 일이다. 장군은 사병들에게 낙하산 훈련을 받을 때의 느낌이 어떤지 일일이 물었다.
맨 처음 질문을 받은 사병은 “저는 낙하산 타기를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했다.
둘째 사병은 “낙하산 훈련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입니다.”라고 말했다.
장군은 사병들의 사기가 높다는 생각에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세 번째 사병은 “저는 낙하산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갑자기 경색되자 장군이 “그러면 왜 낙하산 훈련을 자원했는가?”라고 물었다.
“저는 낙하산 타기를 정말로 좋아하는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류충희 신부님-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려고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십니다. 때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습니다. 욥기 9장 8절에서는 하느님 한 분만이 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호수 위를 걸어가시니 그분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목격하고서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렸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인간의 보편적 생의 상황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이 우리 인간의 삶입니다. 세상은 어둠에 싸여 있고 풍파는 점점 거세져갑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두려움에 떨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극한 상황을 맞아 하소연해도 아니 계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은 언제고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시각도 그렇고 오늘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에 대한 시각도 그렇고 마르코 복음은 다른 복음에 비해 객관적이고 냉정합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보다는 좀 더 예수님의 입장에서 기술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다 아시고 제자들의 능력을 다 아시고 제자들의 처지를 다 아시고 제자들의 미래까지 다 아시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딴청을 피우시고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한 마디 찔러도 보고 환난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을 먹일 능력이 제자들에게 없음을 다 아시고 그래서 당신이 기적으로 먹일 계획을 갖고 계시면서도 어떤 태도를 보이나 보기 위해 너희가 먹이라고 한 번 떠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벌어질 일을 다 알고 계셨지만 그 밤에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리고 맞바람에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도 그냥 계시다가 새벽녘에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는 없는 표현,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님께서는 고생하는 제자들을 분명 보셨지만 바로 떠나지 않으시고 새벽녘에야 떠나시어 제자들에게로 가십니다.
그 다음이 또 문제입니다.
가시긴 가셨는데 짐짓 못 본 체 지나치려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이것도 다른 복음에는 없습니다.
어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 오늘 제자들에게는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어둔 밤에 떠나게 하시고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일부러 늦게 오시고 못 보고 지나쳐 가는 척하시는 그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살이에는 반드시 어둔 밤을 지나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어둔 밤이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가 보이지 않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수단이 보이지 않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다른 방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인데 빛이신 주님께서 아니 계시니 제자들은 어둔 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둠으로 내모십니다.
빛이 없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빛이 없으면 고통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기 위함이고 무엇보다도 빛을 갈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빛을 더욱 갈망하게 하기 위하여 새벽녘에야 나타나십니다.
새벽은 빛이 떠오르기 전이지만 사실은 어둠이 가장 깊을 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진맥진, 힘이 다 빠져 있을 때입니다.
내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허사가 된 때입니다.
내 힘은 다 빠지고 일은 허사가 되었을 때, 이때가 진정 갈망의 때이고, 갈망만이 있는 때입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것도 이지 작용이 없고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 작용도 없고 이랬으면 좋겠다는 다른 사치스런 감상도 바람도 없고 오직 구원자만을 갈망하는 갈망의 때입니다.
이 갈망의 때에 빛의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한 배를 타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건복 신부님-
어느 날 제가 있는 성지의 발전을 위해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는 형제님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친구가 집을 새로 지었는데 밤마다 헛것을 보며 힘들어 한다며 집을 축복해 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주 멋있게 잘 지은 집이었고 세속적으로도 좋은 집터라고 합니다. 마음이 넉넉한 집주인이었지만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인지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물론 신자가 아니기에 오해하지 않도록 가톨릭에서 하는 집 축복 예식에 대한 내용을 설명한 뒤 간략하게 집 축복을 해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함께 사십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믿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후에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안부를 물어보았더니, 이제는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받았습니다. 아직 그분한테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앙이 있다거나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 신앙의 힘으로 편안해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제가 자신의 집을 방문해 기도했다는 생각에 용기는 얻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꿈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뛰어넘어 살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편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보다 더 큰 용기를 주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은 우리를 항상 평화롭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정연동 신부님
티베트의 어느 노인은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에 대해서 “…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정신없이 헉헉대며 살아갑니다. 뭔가 하나라도 더 갖추기 위해서 참으로 바쁘게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의 입에서마저 바쁘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삶이라는 풍랑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노라 자기가 살 길을 찾기에 바빴지, 차분히 주위를 돌아다볼 여유는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실되이 내 모습도 못 보고, 또한 가감 없이 너의 모습도 못 보고. 더불어 하느님도 못 보고 ……. 그저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만 바빴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유령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 것에만 머물러 있으면 상대방의 모습은 잊혀지기 때문입니다.
여럿이 함께 나눌 때, 삶의 가쁜 호흡은 편안하고 잔잔한 긴 호흡으로 바뀝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여유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바쁠수록, 힘들수록 옆을 보고 뒤를 돌아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풍랑 위로 걸어오고 계십니다. 유령으로 보입니까?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새벽 4시에도 달려오는 사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의 배경을 "바다"라고 썼지만 사실 갈릴래아 호수였습니다. 호수를 횡단하는 여객선을 타고가다 보면 바다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규모가 방대한 호수이지요.
예수님 시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될 정도로 다양한 개체의 수자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 다른 강으로부터 물이 계속 유입되는가 하면 요르단 강을 통해 물을 흘려보내다보니 수질 역시 양호했습니다.
이렇게 큰 호수다보니 강풍이라도 불어오면 큰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궂은 날씨에 역풍이라도 만나게 되면 작은 고깃배를 타고 작업하던 어부들은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곤 했습니다.
해가 떨어진 상태에서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를 지나가던 제자들은 거센 역풍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돌려가며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마침 육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배는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했습니다.
몇몇 제자들은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두려움마저 생겨 조마조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역풍을 만나 우왕좌왕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깜짝 놀라 "유령이다"며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지릅니다.
참으로 한심한 제자들입니다.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다가오시는 스승 예수님을 보고 기뻐서 소리를 질러야하는데, 정반대로 두려움에 휩싸여 "유령이다"며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던 제자들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대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기쁨의 대상, 행복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비명까지 질러가며 두려워했던 웃기는 상황이 전개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제자들은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스승이 아닌 전지전능하신 구세주, 아버지와의 일치 안에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혹시라도 공포의 대상,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감시하는 두려움의 대상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새벽 4시에도 달려와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세파에 지친 우리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수시로 다가오는 다양한 스트레스, 두려움, 번민, 절박한 상황 앞에서 고통을 느끼실 때 마다 이토록 감미로운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며칠 전 메일함을 열어 보는데, 제 동창 신부가 보낸 메일이 있더군요. 평소에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않은 동창이 왜 저한테 메일을 보냈나하고서 열어보는 순간 ‘아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종 상대방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컴퓨터 안에 있는 메일 주소로 바이러스를 첨부하여 무작위로 발송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도 저는 제 컴퓨터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평소에 이럴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여러 겹으로 바이러스에 침투되지 않도록 장치를 해 놓았거든요. 대신 그 동창 신부의 집에 가서 그 컴퓨터에 들어 있는 바이러스를 다 잡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컴퓨터를 켰는데 이상하게도 제 컴퓨터가 많이 느립니다. 맞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들이 실행되지 않습니다. 당장 오늘 새벽에 있을 인터넷 방송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한 새벽 묵상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걱정입니다. 시계를 보니 미사 시작 전 30분. 저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깨끗하게 지우고 윈도우즈부터 다시 깔자.”
전문적인 용어로 포맷(Format)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처음 컴퓨터를 구매했을 때의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용했던 프로그램들을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귀찮음 때문에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심각한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지요.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성당에 들어가기 전으로,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서 포맷(Format)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화가 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 컴퓨터에는 데이터 파일이 많아서 하드디스크를 몇 개 붙여서 쓰고 있는데, 실수로 중요한 파일들이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를 포맷한 것입니다. 그 결과 새벽 묵상 글에서 성우들이 읽어주는 성경자료를 모두 잃어버렸으며, 이제까지 찍었던 사진자료들, 그밖에 중요한 데이터 파일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텐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서두르다보니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저처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깜짝 놀라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요.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지요. 그들은 유령인 줄로 생각하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바로 어제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만해도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았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귀신이다’를 외칩니다.
성경은 이러한 제자를 향해 이렇게 설명해주지요.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바로 스승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으며, 이런 일은 유령이나 할 수 있다고 섣부르게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섣부르게 판단하고,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릴 때면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일이 꼬이거나 고통과 시련이 커지면 커질수록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이 커집니다.
어렵고 힘들 때, 조금만 더 주님을 자세히 보려고 해보십시오. 바로 이때는 주님께서 안 계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빨리 오시기 위해서 물 위로 걷고 계신 것이며, 이를 보고서 ‘유령이다’라고 말하며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말기.
넓은 안목으로 정상에 서라(왕진링 외, ‘회사가 아끼는 사람들’ 중에서)
하버드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잭과 모어는 페바 그룹 국제 무역부에 입사했다. 그들은 세계 유수의 대기업에 입사한 데 대해 자부심을 가졌고 둘 다 국제 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열의를 다했다.
고된 반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상사는 칭찬은커녕 꾸중만 일삼았다. 참다못한 잭이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는 하버드를 나왔어. 그런데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내일 당장 보란 듯이 사표를 던질 거야!”
모어가 말했다. “그 사람은 국제 무역의 전문가야. 무역 기술, 비즈니스 문서, 회사 조직 등등 배워야 할 게 산더미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배운 다음에 그만둬도 늦지 않아.”
잭은 “어쨌든 난 그 자식 낯짝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당장 떠날 거야.”라고 대꾸했다.
잭은 정말로 사표를 던졌고, 모어는 자신의 안목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회사에 남아 회사의 운영 시스템 전반을 차근차근 공부해 나갔다.
1년 뒤, 잭이 모어를 찾아왔다. “어때, 그만둘 준비는 된 거야?”
“아니, 난 그만둘 생각 없어. 요 반년 사이에 부쩍 상사한테 인정받고 있거든. 중요한 일은 다 나한테 맡기고 있어. 승진도 하고 월급도 많이 올랐지. 앞으로 발전할 기회도 많고, 학교 다닐 때 CEO가 꿈이었는데 여기서도 가능할 것 같아.”
잭은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 마이크로소프트에 사표를 던지고 오는 길이야. 하나같이 눈 뜬 장님들뿐이야. 나 같은 인재도 못 알아보잖아, 멍청이들!”
모어는 잭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전에 상사가 우리를 무시했던 건 우리 능력이 부족하고 안목이 짧아서였다는 걸 알게 됐지. 네가 나간 다음 난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했어. 상사도 내 능력이 향상되는 걸 보면서 점점 더 인정해 주더라고.”
3년 뒤, 모어는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대기업의 CEO가 되었다. 재능은 있는데 운이 없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잭은 지금까지도 하버드 출신한테 맞는 일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
잭처럼 당장 불리하다고 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모어처럼 긴 안목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모어 같은 사람은 언제나 정상에 서서 미래를 내다본다.
참다운 카리스마
-이중섭 신부님-
예수님이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정치적으로 큰 사건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과 카이사리아, 갈릴래아에 주둔한 로마군인은 약 3,500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정권을 잡으려 했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속권력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관행은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하며 팀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즈음 신자들은 권위적인 성직자보다는 친절하고 꾸밈이 없는 성직자를 더 좋아합니다. 진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마태 20,28 참조) 그 말씀 그대로 사신 분입니다. 내 능력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면 집착이 되고 죄가 됩니다. 내 능력과 재능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카리스마입니다. 그것을 주님과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데 써야 합니다.
완고한 마음
-주영길 신부님-
가끔 이런 성찰을 해본다. ‘나는 과연 누구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진지하게 고려하며 사는가?’ 타인의 마음에 대한 고려란 흔히 말하는 타협이 아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를 배려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그럴 마음이 없다. 이제껏 혼자만의 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무엇을 먹을까? 당연히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다. 어떻게 처리할까? 내가 이미 결정한 대로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방을 어찌할까? 거룩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된다. 암덩이가 커가듯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완고함’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나이와 함께 고집만 남는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다. 이미 자기의 세계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좋게 표현하면 인생철학이 뚜렷한 것이다. 일생을 살아온 ‘노하우’라 할까? 몸의 노화가 시작되면 눈이 침침해진다. 그만큼 시야가 좁아진다는 증거다. 또 귀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껏 자신이 생각해 온 바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완고한 마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전한다.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유령이라 생각하고 아우성을 쳤다. 이제 모두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보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6,52)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청소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기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작동이 더디니 설명하다 말고 ‘어찌 이 간단한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세요?’ 하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남 얘기할 때가 아니다. 나도 내가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여러 기능을 소화하지 못해 단순히 통화만 하거나 짧은 문자만 보낼 뿐이다. 타인의 완고함은 허물처럼 보이고, 왜 내 완고함은 당연하게 생각할까?
당신과 함께라면...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오늘 복음은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저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누렸던 제자들의 행복과 예수님과 떨어져 있을 때의 혼란과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 그분과 함께 할 때면 때론 알아듣기 힘들고 너무도 우리 힘에 벅찬 것을 요구하신다고 여겨지는 버거움은 있지만 그래도 늘 행복하고 안전하였습니다.
오늘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수많은 병자들과 말씀에 주린 사람들을 돌보아주고나서 피로에 지친 듯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에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먼저 가게 하고 당신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피곤해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통해 일을 해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깊이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일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신바람이 났을 지도 모릅니다.
얼씨구나 좋다고 했는데 사실 주님과 함께 있지 않는 상황은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풍랑의 어려움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이 세상살이는 거친 풍파와도 같이 우리를 엄습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오직 주님만 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고 요청만 하시면 언제나 달려오셔서 <나다, 힘을 내어라, 두려워할 것 없다!>고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가 우리의 낙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수많은 유혹으로 우리를 낚아채려 해도 그것이 화려해 보여도 결국 그 속에는 수많은 올가미가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거친 풍파는 주님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만 한다면 그리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 풍파가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입니다.
내 삶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때 다시 한번 나의 주님을 불러봅시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만 하신다면 이 삶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당신 집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오이다.
당신 함께 하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낙이로소이다. 아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머리맡에 향기로운 꽃 한 묶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다보면 가끔씩 칠흑 같은 첩첩산중의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도 모르는 채, 목적지도 없이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도 가엾습니다. 스산한 바람마저 불어오면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되지요.
그 안쓰러운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정히 이야기합니다.
"애야,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이젠 안심하거라. 내가 있잖니?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께."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군" 하며 안심할 것입니다.
홀로 혹독한 병고를 겪으며 뼛속까지 스며드는 외로움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옆에 누가 항상 있어줘도 괴로운 판국에 물 한잔 떠다줄 사람조차 한 명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서서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마음도 수 백 번 먹어보지요.
그 순간 머리맡에 향기 그윽한 꽃 한 묶음 놓아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마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위로의 인사를 던집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힘내세요. 금방 좋아질 거예요."
환자는 "이분 성의를 봐서라도 좀 더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파에 지친 제자들을 향해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십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얼마나 다정다감한 말씀인지요.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인지요. 얼마나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인지요.
발표 된지 꽤 오래된 노래 가운데 변진섭이란 가수가 부른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란 노래가 있습니다. 노랫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대 어깨 위에 놓인 짐이 너무 힘에 겨워서
길을 걷다 멈춰진 그 길가에서 마냥 울고 싶어질 때
아주 작고 약한 힘이지만 나의 손을 잡아요.
따뜻함을 느끼게 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줄 께요.
때론 내가 혼자뿐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죠.
생각하면 그 어느 순간에서도 하늘만은 같이 있죠
아주 작고 약한 힘이라도 내겐 큰 힘 되지요
내가 울 때 그대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주님 공현 후 수요일
- 김창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뭍에 계실 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있는 동안 겪는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제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어려움의 상황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즉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고 예수님은 육지에 계셨습니다. 즉 이것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느끼는 외로움의 상태입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데다가 마침 맞바람까지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두 번째 어려움은 맞바람 때문에 주님께 가려고 해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는데 제자들이 만난 ‘맞바람’은 성령과 반대되는 바람으로서 악령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맞바람을 만났다는 것은 악령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여러 유혹과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령은 제자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후수 저편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입니다. 악령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방해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혼자 버려 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복음은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위험에 처해있는 제자들을 혼자 버려 두지 않으시고 늘 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주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라도 그리고 모두가 나를 버렸다고 느낄 때라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제자들을 위해서 나타나시듯이 우리에게도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자들이 맞바람을 맞고 호수 한 가운데에서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가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손을 내미셨듯이 우리의 삶 안에서도 힘들고 고통을 겪을 때 주님께 기도로써 청하십시오. 우리가 청하지 않아서 그분의 은총을 체험하지 못할 뿐이지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을 살아가자.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십자가상에 못 박혀 죽도록 하실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신앙인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행하는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머무르신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될 수 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누구나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며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머무르신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다(3,1-2). 참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함께 계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심판 날에 두려움이 전혀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죄는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은 누구든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지 못하였으며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배운 대로 산다. 아는 대로, 깨닫는 대로, 느낀 대로 살아간다. 알거나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살아갈 수는 없다. 앎, 깨달음, 체험은 삶에 있어서 대단히 소중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참선을 하고 면벽수련을 하며 수도를 하는 것도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통해 깊은 체험을 함으로써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함이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을 실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를 통해 드러났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온전히 드러났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며 사셨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계셨고,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셨다(요한 10,38).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셨으며(필립 2,8)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요한 10,37).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하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느님과 일치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계셨기에 지상에서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하느님을 살아가신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며,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시편 23,4)고 노래한 시인처럼 두려움도 걱정도 없다. 그는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 5,22)로 살아간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또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살아가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감으로써 두려움과 걱정을 벗어던지고,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자..................◆
기도와 말씀의 놀라움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 있었다. 한 끼의 식사를 이렇게 성대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가득 찼을까?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군중은 또 어떠했을까?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에 대한 어떤 반응이나 효과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다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예수를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로 믿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산으로 피해 가셨다고 한다.(요한 6,14-15) 그런 다음에 요한복음도 마르코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요한 6,17-21)
마르코복음은 요한복음과 달리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 다른 어떤 효과가 개입되기 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호수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셨고, 모여 있던 군중을 흩어 돌려보내셨다. 우리가 복음서 전체에서 늘 볼 수 있는 장면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기적을 입은 사람들을 그 현장에 두지 않고 바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다. 게다가 자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태 9,22; 15,28; 마르 5,34; 10,52; 루가 7,50; 8,48; 17,19; 18,42 등)고 하시면서 기적의 원인을 예수님 자신보다 사람 편에 두셨다. 이런 점들은 기적의 성취가 예수님 편에서 행하시는 일방적인 행위라기보다 <생산자와 소비자>, 또는 <발신자와 수신자>간의 쌍방적인 행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즉, 기적만이 능사가 아니라 기적(奇蹟)과 일상(日常)의 조화를 의도하고 계신 것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기적을 놓고 이를 체험한 측이나 이를 베푼 측에 똑같이 있을 수 있는 감정은 만족감과 달콤함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쾌감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일상(日常)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적의 주도권을 잡은 예수에게도, 기적을 체험하는 인간에게도 같은 비중으로 적용된다. 그래서 기적(奇蹟)은 상식을 벗어난 일상이탈로 소개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흩어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다음 선교지로 서둘러 보내시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꽤하시는 것이다. 기적과 일상을 특히 잘 조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그 요소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로 발견된다.
첫째는 기도(祈禱)이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제자들을 보내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신 것은 기적을 베푼 스스로의 성취감과 달콤함에서 벗어나 기적을 가능하게 하신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해서이다. 즉 기도의 일상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둘째는 말씀이다. 곧 "나다,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50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역풍을 만나 일상의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을 향한 말씀이다. "나다"(에고 에이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기계시적 말씀이며(출애 3,14), 하느님 현존의 방식이다.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나다"라는 하느님 현존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되며, 기적 속에서 일상의 평정을 찾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고 "나다"는 말씀의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없이는 아무도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바랄 수 없으며, 이를 체험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