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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1월 23일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1.23|조회수760 목록 댓글 0

제1독서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8,6-9: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초대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피신시키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제1독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그분께서는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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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사울을 설득하여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얻어 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고,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하는 오늘 복음은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오고 있음을 전합니다. “큰 무리”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며, 적어도 외적으로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활동이 성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무리는 “갈릴래아에서 ……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 곧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을 가리지 않고온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어제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애기로 모의한 모습과 대비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그분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를 고쳐 주셨기에, 누구나 그분께 손을 대려고 밀려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엎드려 소리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처음 나옵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신앙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외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을 통하여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도 십자가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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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여도 “조용히 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는 왠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살갑게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코 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예수님의 이 ‘거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어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영광과 기쁨 가득한 자리를 꿈꾸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몸과 현실적 축복을 갈망하였던 군중은 십자가와 하느님의 아드님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예수님과 군중과의 ‘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던지는 우리 욕망의 투사만큼 깊고 먼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1코린 1―2장;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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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과 질투심은 인간의 마음을 옹졸하게 만들고, 사리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병입니다.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이겨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준 다윗의 치적과 비교당한 사울의 마음에는,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다윗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인물로만 보입니다. 시기심에 눈이 어두워져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다행히 그의 아들 요나탄의 설득에 마음을 돌리지만 한번 생긴 마음의 병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들은 수많은 군중이 먼 지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병들고 지쳤으며 가난하고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오직 예수님의 치유만을 원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알아본 것은 역설적으로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쁨과 치유의 하느님이 아닌,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주변에서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본받고 싶어 하지만, ‘더러운 영’이 슬그머니 내 마음속에 들어와 상대방을 헐뜯고 폄하하려는 교만이 생깁니다. 세계 교회는 오늘부터 25일까지 역사 안에서 가톨릭 교회와 갈라진 형제들, 곧 정교회와 개신교인들과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보냅니다. 

지난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하나의 세례와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과거 역사의 상처로 생긴 오해와 편견의 벽을 허물고 복음의 기쁨 속에서 “하나가 되기를”(요한 17,21 참조) 기도합니다. 비록 종교 개혁이라는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고 되새기는 법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일치시키는 것이 훨씬 크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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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엉뚱한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곳에서 많은 이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 주실 때, 그분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치유받은 이들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입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말해서 치유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이적이지만,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병자들이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의 신원이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에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지만, 사람들보다 더 영특한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더러운 영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들의 처지는, 마치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물을 안 마시고 죽고 마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에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앎은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고, 그들은 ‘더러운 영’으로만 머물고 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신앙은 과연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나 우리도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외치고 다니면서도, 구원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 않은지 오늘 하루 조용히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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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데레사 수녀님(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 집 없음에서 오는 고통, 모든 질병에서 오는 고통, 그러나 이런 고통들은 물리적인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 옆에 아무도 없다는 소외감일 것입니다.” 수녀님의 말씀처럼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몹쓸 병은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저 멀리 그리스인들이 사는 곳까지 퍼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이 계신 곳에 몰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 악령을 몰아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외롭고 슬프게 사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몹쓸 병에서 사람들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도,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는 소외감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몹쓸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의 병을 고쳐 주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하루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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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인이 ‘술 빚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쌀 ‘한 말’과 누룩 ‘한 냥’에 물 ‘두 말’을 붓고 7일 동안 숙성시키면 됩니다.” 술집 주인은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노인은 돌아와, 물 ‘두 말’에 누룩 ‘한 냥’을 섞어 아랫목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7일 후에 맛을 봤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물이었습니다. 노인은 술집으로 가서 진짜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알려 드린 대로 하셨습니까?” “가르쳐 준 대로 물 ‘두 말’에 누룩 ‘한 냥’을 섞었다네.” 주인이 또 물었습니다. “쌀은 넣으셨습니까?” 노인이 생각하니, 쌀을 넣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 쌀 넣는 것을 잊은 것 같네.”

술의 근본은 쌀인데, 그것을 빠뜨린 것입니다. 그러고도 잘못 가르쳐 주었다고 원망했습니다. 쌀이 없으면 아무리 누룩과 물을 섞어도 술이 되지 않습니다. 근본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근본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믿음의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았기에 복음의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호숫가의 군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깨닫는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며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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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거룻배 한 척을 제자들에게 주문하십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려고 서로 밀치며 나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배 위로 옮겨 가시어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병이 낫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이 멀쩡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 몸에 손을 대면 무언가 강렬한 힘이 전해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 다투어 몰려들고 있기에 그분께서는 호숫가의 배 위로 옮겨 가신 겁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기적이 있었던 곳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기적이 있었다고 ‘소문만 나도’ 사람들은 찾아갑니다. 호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믿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간접 체험이라도 좋으니 ‘기적의 순간’에 동참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모습입니다. 한 번이라도 뜨거운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결국은 ‘그분의 뜨거움’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의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과 성경 속의 예수님은 같은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 복잡한 일이 제 앞에 펼쳐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힘들었고, 도저히 저의 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전 생애에 딱 한 번만 있겠습니까? 솔직히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만큼 저 자신은 그렇게 능력 많지 않은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더 열심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있었던 일도 생각납니다. 본당신부로 있을 때 아주 복잡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묵주기도 20단을 바치면서 기도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고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 문제에서 벗어나 더 좋은 방안을 따를 힘이 생겼습니다.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더욱더 가까워지면서,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해주시는 주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됩니다. 하시는 말씀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이었습니다. 특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서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했던 것은 예수님께 손을 대서 병을 낳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그리스도를 만진다고 해서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병의 치유만을 생각하면서 만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손을 대었던 또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을 때, 결박할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뺨을 때리며 모욕을 줬을 때,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만졌습니다. 이때 역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마음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고 있나요?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아니면 주님께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굳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사랑은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예에서부터 시작된다(무라카미 하루키).


좋은 기억 만들기

강의나 강론 때 사람들에게 초콜릿이나 사탕을 나눠줍니다. 그래서일까요? 내게도 자신의 초콜릿이나 사탕을 나눠주십니다. 고맙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초콜릿과 사탕 가격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받은 것을 다시 나눠줍니다. 이 모습을 본 어떤 분이 “신부님만 드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서 줬는데 손도 안 대고 다른 사람 주는 것이 서운하셨나 봅니다.

사실 저는 초콜릿, 사탕, 과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단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단것을 먹으면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단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 먹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설탕을 뿌린 토마토를 다 먹고 나서 그릇 아래로 모인 설탕 섞인 과즙을 들이마시면 정말로 행복합니다.

단 것을 싫어해도 토마토에 설탕 뿌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가끔 어머니께서는 토마토를 썰어 그사이에 설탕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기억에 지금 그렇게 싫어하는 단 것이지만 이 토마토는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억이 있느냐가 지금의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지금, 이 순간 좋은 기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좋은 기억을 만드세요.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은연중에 강한 시기·질투심이 바닥 깊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거룩해서 시기·질투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어딘가 피정에 다녀온 교우들께서 거기서 겪은 체험담들을 신명나게 털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모모 신부님 강의를 들었는데 완전 감동이었어요! 그분으로 인해 제 삶이 완전 바뀌었어요. 새 인생이 시작되었답니다. 예수님이 따로 없답니다. 인물도 얼마나 좋던지? 거기다 겸손의 덕까지! 머리털나고 그런 신부님 처음봤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같이 박수를 치고 호응을 하면서, 함께 기뻐해야 마땅한데, 즉시 해드리고 싶은 조언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랍니다. 그 분하고 사흘만 같이 지내보세요 그런 생각 싹 사라지고 말걸요. 정신을 차리세요. 정신을!’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도 그랬습니다. 사실 사울은 기름부어 세운 왕이었습니다. 왕을 뽑는데 아무나 왕으로 선택하지 않았겠지요. 사울은 탁월한 인품,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툭튀’ 다윗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직 볼이 빨간 청소년이었습니다. 체구도 왜소했고 가방끈은 아예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루 온종일 산과 들로 다니면서 양을 몰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어느날 보기만 봐도 겁에 질리는 어마무시한 골리앗 장군과의 일대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게임이 길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방의 돌팔매로 속전속결로 게임을 끝내버렸습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풍전등화 신세였던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개선길에 올랐습니다.

다윗과 함께 군대가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흥겹게 부르는 노랫가사 한 구절이 사울왕의 폐부 깊은 곳을 찔러버렸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그 노랫가사 한 구절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했습니다. 순식간에 기분이 잡쳤으며 시기·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제대로 한번 빡친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고 인자하던 사울의 마음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수시로 솟아 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 그때, 틈나는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 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 속에 가득 찬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 욱하는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 같은 경우 수도 공동체 내 동료 자매들로부터 엄청난 시기·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시기·질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상냥히 대했습니다. 더 기쁘게 냉대를 열심히 참아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동료 자매를 더 깊이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락 시간이면 일부러 가장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자매 곁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모기에게 피 빨리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어딘가 좀 이상합니다. 양쪽 눈의 색깔이 다릅니다. 한쪽 눈은 푸른색입니다. 자라면서 매우 폭력적이 됩니다. 마음에 안 들면 친구들을 심하게 때립니다. 잘 때 잠꼬대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합니다. 엄마는 그 잠꼬대를 녹음하여 전문가에게 의뢰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난 날과 그 시간에 다른 나라에서 연쇄 살인마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살인마의 눈 색이 푸른색임도 알게 됩니다. 그 살인마의 영혼이 그 아기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까지 거의 죽을 지경이 되게 만들어놓고 그때 죽이지 못한 한 여자를 찾아갑니다. 어머니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이 먼저 그 여자를 죽이면 자기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아이는 완전히 그 살인마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자신에게 이용당한 어머니까지 살해하고는 다른 집으로 입양됩니다. 영화 ‘프로디지’(2019)의 내용입니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답답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의 영혼이 살인마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이라는 연민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살인을 대신 해주려고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는 이런 경우가 없을까요? 자녀가 못된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자녀의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 휘둘린 적은 없나요?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씩 애정에 휘둘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끊어야 할 때는 끊어야합니다. 그것이 자신과 자녀를 위해 좋은 일입니다. 


유튜브 채널 ‘강형욱의 보듬 TV; 내 강아지의 공격성’에서 주인까지 무는 진돗개가 나옵니다. 마음씨 착한 노부부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진돗개를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그런데 쓰다듬어 주다가 물리고 마사지 해 주다가 물립니다. 상처투성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의 개에 대해 무척 큰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고 말하는 개 전문가인 강형욱씨는 노부부에게 개 다루는 법을 시범으로 보여줍니다. 개가 자신에게 허락도 없이 발을 감싸자 짧은 목줄을 강하게 당겨 하는 행위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 주위를 돌며 자신의 영역에 강형욱씨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하자 역시 목줄을 당겨 돌지 못하게 만듭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개인지 명확히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무섭던 개가 발에 땀까지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러며 노부부에게 개를 사랑하는 것은 알지만 개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간식을 주고 개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대었을 때 물린 이유는 개에게 애정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뽀뽀를 하려고 하다가 물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씨는 먼저 쓰다듬게 해 주면 간식을 주라고 합니다. 개가 지켜야 할 선을 인간이 무너뜨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여 그들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십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밀치거나 잡아당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군중 가운데는 마귀 들린 사람들도 있어서 예수님께 어떠한 해를 끼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휘둘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께서 완전히 사랑하는 사이시라도 그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거리를 이어줄 성령께서 필요하신 것입니다. 무조건 거리를 좁혀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직 모기의 수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기와 기생충이 생명체이기는 하나 그것들에게 무작정 피를 빨려주는 것이 곧 자비는 아닐 것입니다. 그 피의 의미를 깨닫고 변화될 수 있는 이들에게만 피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나쁜 사람처럼 보는 것도 문제지만 모두 천사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나를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 작은 지혜가 쓸데없이 소비될 수 있는 에너지를 아끼게 만들어 더 많은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하도록 이끕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평화신문 지사장으로 있고, 제게 필요한 일은 신문 구독을 홍보하는 겁니다. 저의 강론을 보시는 분들이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캘리포니아에 계시는 분도 이웃에게 신문 구독을 권유하셨고, 몇 분이 구독 신청을 하셨습니다. 토론토에 계시는 분도 이웃에게 신문 구독을 권유하셨고, 몇 분이 구독 신청을 하셨습니다. 마리아 성지가 있는 작은 공동체에 다녀왔습니다. 미사를 함께 하였고, 신문을 나눠드렸습니다. 미사 후 식사하는데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신문 홍보 안 하시나요?’ 저는 오늘은 그냥 방문 왔다고 했습니다. 고맙게도 몇 분이 신문 구독 신청을 해 주셨습니다. 신문사에 후원금을 보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게는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만 있습니다. 고마워하면 모든 일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2020년에는 감사하고, 고마운 일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이해하고 사랑할 일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평화는 이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건 예전에 보던 것과 다릅니다. 고통의 순간에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걸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걸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런 마음이 있었기에 고난의 순간에도 충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은 성변화입니다. 성변화의 핵심은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원망은 오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생깁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3,11)

곽승룡 비오 신부님

중동의 종교는 이중적이었다. 두개의 힘이 시작부터 세상에 존재한다. 선과 악의 신들이다. 사람들도 환경에 따라 선 또는 악을 선택하게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한 쪽 또는 다른 어느 쪽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선하게 또는 악하게 될 수 있다. 악이 그를 보복하지 않도록 늘 감시하며 머물러 있더라도, 선을 선택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성경은 이중적이지 않다. 성경은 선한 천사와 더러운 영들을 말하지만, 맑지 못한 영은 시작부터 악하지 않았다. 시간과 함께 변하게 되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가? 그들은 선과 악 사이에서 그 방향을 선택해 취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선을 취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악은 그들 곧 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강하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들이면, 악 때문에 드러나는 위험이 있게 마련이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는 아기 때부터 이런 체험을 했다. 도망가는 두개의 악마들을 대면하면 똑바로 주시하여 바라보곤 했다.

유치한 이미지인 듯 보이지만 다음과 같은 진리를 표현하는 듯하다. "맑은 영혼은 악을 이긴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7-1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병자들의 믿음이 어떤 수준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가엾은 처지만 보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당부만 하셨습니다.


2)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이 대부분 병을 고치는 것만을 원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에는 ‘말씀’을 듣기를 원한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 구원’보다는 ‘몸의 치유’를 더 원했고,‘말씀의 은총’보다는 ‘치유의 은총’을 더 간청했습니다.


3) 이 이야기는 마귀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귀들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방해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방해하기도 합니다.


1) 예수님께서 배에 타신 것은 군중에게서 조금 물러나기 위해서이고, 배를 설교대로 삼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병 고치는 일을 마치신 다음에 설교를 하셨는지, 아니면 설교를 먼저 하신 다음에 병을 고쳐 주셨는지,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은총’과 ‘치유의 은총’을 모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은총을 받았습니다.

소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조건도 없고, 제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 신앙인들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어떤 조건이나 제한도 없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신앙인들의 사랑 실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병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병자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건강을 함께 나누고......


2)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고, 병을 고쳐 주시기를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병 때문에 열두 해 동안이나 고통을 겪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여자처럼, 어쩌면 대부분의 병자들이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을 것입니다(마르 5,25-28).

병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 절박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이기심은 버려야 합니다.

복음 말씀에서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말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만지는 것만을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만지려고 서로 밀쳐 대면서, 몹시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밀려들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사람들의 무질서, 불친절, 이기심, 조급함 등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는 태도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도 부족하고, 질서 있게 자기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도 부족합니다.

그런 모습들이 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믿음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지려고 애쓴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그저 ‘예수님을 만지는 일’ 자체에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굳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백인대장은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기만 했는데(마태 8,8),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마태 8,10).

믿음이 부족하면 그 믿음은 미신으로 변질되기가 쉽습니다.(미신에 빠지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이야기 속의 군중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디선가 특별한 계시가 내렸다는 소문이 퍼지거나, 무슨 신기한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퍼지면, 교회에서 공적으로 확인해 주기도 전에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왜 그런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는 곳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장소나 어떤 신기한 사건 속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고,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는데, 왜 자꾸 다른 곳을 보는 것인가?


3)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와 신앙인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희망 대신에 포기를 말하고, 믿음 대신에 의심을 심어 놓고, 믿음의 힘은 깎아내리면서 인간의 과학과 의술을 신앙보다 위에 놓으려고 하고...

병에 걸렸을 때 병원과 약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의 목숨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마르 9,29).

일부 사이비 종파처럼 기도만 하면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데, 병원의 치료만 믿으면서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지에서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모든 가정이 행복하길 빕니다. 아빠, 엄마,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합니다. 어느 부분이 결손이 생기면 기울고 평형이 깨집니다. 평화가 유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이 모두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 일은 미성년이 할 일이 아니고 성년의 구성원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사제들은 가정의 이야기를 수시로 듣고 있습니다. 평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이야기 속에서 보게 됩니다.

가정의 이야기는 많은 경우 감추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제들에게 모아집니다. 어떻게 하면 깨져가는, 깨진 평형을 바로 잡을 수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걱정만하고 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십자가, 고통을 끌어 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수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들고 무리는 군중을 이룹니다. 용하다는 소문이 십자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좀 멀어지려 하는듯 거룻배에 올라 가시려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십자가와 고통이 예수님을 만짐으로 치유되고 부족함에 해결되길 바랍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고 혹시나 하는 요행수입니다. 거저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가벼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마르3,7-12참조)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마음은 모두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되길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십자가와 고통을 통해 우리를 대신 져 주려는 마음과 삶을 원하십니다.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가족 구성원의 합심으로 대속의 의미를 살기를 바라십니다. 십자가가 가정에 나타나면 먼저 돈 걱정부터 하게 됩니다. 가정에 치유를 끌어올 만큼의 모아진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기복과 요행만 커져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군중 속에 한 사람으로 거리를 떠돕니다. 하느님 아드님’이 대신 짊어질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환이 생겨날 때, 걱정부터 하고 내가 무엇을 도와줄까? 생각없이 생명과 무관하게 돌아갈 뿐입이다.

어째튼 결과가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우환으로 가족 구성원이 평형을 잃었지만 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사랑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어떤 결과이든 과정이 아름다워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가정에 평형을 되찾는 결과였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들, 예수님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그분의 십자가’가 연결되어 생명을 이루는 결과였으면 좋을텐데 사람들은 그것과 근처도 못간 상태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군중 사이의 거리인듯 합니다.

평형이 깨진 문제를 가지고 설 명절에 ‘하느님 아드님,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돈이 무서우면 마음이라도 모으고 기도라도 함께 했으면 합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우환이 있어도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났으면 합니다. 훨씬 편해질 것입니다.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를 질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엎드려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면서 마치 그 모습이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그러한 모습에는 결정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두려움만이 있었을 뿐 그분께 대한 경외심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제지간에 경우 학생이 선생님께 경외심을 갖는 경우 학생은 선생님께 존경과 믿음을 드리며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겸허하게 받아드리며 그 선생님을 통해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그저 선생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 학생은 선생님의 눈치를 보면서 그저 선생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귀의 경우는 예수님께 대해서 경외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두려워하면서 그분과의 만남을 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다가와 주님을 두려워하게 만들면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자꾸 멀어지게 만듭니다. 곧 마귀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고 흠숭과 믿음을 드리며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주면서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를 점점 깨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고 의지하며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늘 주님과 함께 참된 승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젠 예수님을 스승으로 정하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치유 받으려 몰리는 안전 불감증인 사람들 사고 미연방지하신 예수님.

군중은 밀려들고 더러운 영들은 군중 더 부추기려는 사고대비 예수님.

만약 군중이 몰릴 때 고통의 십자가 죽음을 보여줬다면 다 도망갔겠죠.


지금 예수님께서 사람들 초대한다면 떼 지어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K POP이나 월드경기라면 모르죠. 광화문의 토요일저녁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모시자 외친다면 저는 꼭 나갈 겁니다.


복수정신에 불탄 운동권들은 전직대통령들을 다 감옥생활로 보복했죠.

무섭죠! 예수님을 우리 스승으로 정하고 봉사자대통령 뽑아야 겠어요. 




무신론적인 시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찌하면 좋습니까? 사울이 이제 다윗을 시기하여 그러잖아도 하느님께 밉보인 사울이 하느님께 더욱 밉보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울과 다윗을 보면 다윗을 편들기보다는 사울이 안쓰럽고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듭니다. 강자와 약자가 있으면 우리는 보통 약자에게 동정심이 가지요. 

아무튼 사울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비록 여인들의 칭송과 사랑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감정, 곧 시기심을 갖게 되었지만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의 가치와 판단의 기준은 여전히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이것을 놓고 볼 때 그는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으로 자기의 중심을 잡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고,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었다가도 다시 인간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에 휩싸이는 사람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동병상련의 정으로 동정심을 가지게 되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병상련을 한다 해도 이런 시기를 괜찮다 해서는 안 되지요. 어떤 이유로든 시기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가 시기란 너도나도 다 파괴하는 그러니까 사랑과 가장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시기란 단순히 인간적인 여러 감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신앙이 없고 하느님이 안 계신 표시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느님이야 계시지만 내게 죽어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랬던 그가 다윗을 나중에 다시 죽이려고 한 것은 결국 그때는 하느님께서 그의 안에서 살아계시지 않았기 때문인 거지요. 사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특히 하느님 사랑이 넘치면 우리 시선이 다른 인간에게 가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가 나보다 사랑을 더 받든 말든, 그가 나보다 더 성공하든 말든 상관치 않을 것이고, 시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다룬 영화라고 얘기 들었고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과 성공을 신기 질투한 것을 다룬 영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서 저는 역시 사울에게처럼 살리에르에게 연민을 느꼈는데 그것은 얼토당토않게도 제가 한때는 모차르트를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어찌 제가 모차르트와 저를 비교하며 음악적 열등감을 느끼고 그래서 제가 작곡했던 곡들을 다 없애버렸는지! 

그리고 한 5년을 작곡에 손대지 않고 있다가 달란트 비유의 복음을 깨닫고 나서야 다시 작곡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음악적 재능, 음악적 달란트는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각기 나눠주시는 것이기에 음악적 재능이 내게 없는 것이 내 탓이거나 창피할 일이 아니고 그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이 내게 잘나서가 아니고 그래서 자랑할 것도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선이 하느님의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모든 선이 나온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가난했던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시기에 대한 그의 독특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시기는 그저 인간적인 악감정 중의 하나가 아니라 무신론적인 시기이거나 하느님을 시기하는 것임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거리"가 보입니다.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예수님 주변으로 각지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각자 나름의 청원과 바람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단순히 호기심이 생겨서 온 사람부터 절박한 필요를 안고 온 이들까지, 지금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예수님입니다. 군중과 예수님은 지금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마르 3,9)

군중은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오려고 서로 밀쳐 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밀칠 지경이 되자 예수님께서 배를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배는 물에 띄워질 것이고, 군중은 호숫가에 남아 그분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많은 경우 다정한 접촉이 동반되기도 했지만, 실은 말씀이 중심이지요. 물리적 거리가 군중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걸맞는 해법임을 알겠습니다.


"그들(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밀려드는 군중으로 가뜩이나 복잡한데 더러운 영들까지 소리소리 지르며 한 몫을 보탭니다. 주님을 아는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외침이 진정한 증언은 되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앎이 아니기에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이럴 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치유와 기적 효과를 넘어,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메시아의 신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이들의 경솔하고 섣부른 폭로는 거룩한 이름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손상시킬 수 있기에 침묵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1사무 18,7).


승리에 도취된 여인들의 경박한 노래가 사달의 원인이 됩니다. 둘을 대놓고 비교하니 화 나고 속이 상한 사울이 다윗에게 시기심을 품게 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의 정화되지 않은 시각, 진실의 채로 거르지 않은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하느님까지도 죽음까지 몰아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1사무 19,5).

요나탄이 승리의 주인공는 사울도, 다윗도 아니고 주님이심을 일깨우며 지혜로이 부친 사울을 설득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각자 하느님과 두고 있는 "거리"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이에서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도구로 쓰시느냐가 관건이지, 누가 잘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고 먹이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느님의 일로 보지 않았기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것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도 "우리" 일이니 함께 기뻐하며 응원했어야 옳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들 안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욕망과 바람으로 무질서하고 난폭하게 예수님을 밀쳐 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있게 거르지 않은 섣부른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며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는지, 예수님을 태운 거룻배가 되어 그분과 밀착하는지...


어느 모습 안에 있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침묵'입니다. 앎이 무르익고 봉인이 해제될 때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때까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될 때까지 겸손히 침묵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도록 말입니다.




'움직이십시오.'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마르코 3장 7~12)

누군가 내 몸에 손을 대려고 하면 경계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뭐 묻어서 털어주려고 하나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생각과 행위는 상대가 요인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반응을 보이는 주체인 나에게서 긍정과 부정의 태도로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에 손을 대려는 사람을 보고 그가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시고 채워주십니다.

더러운 영을 지닌 자들은 그분을 알아보고 입으로는 아는체를 하지만 섬길 마음이 없습니다.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십시오.'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끔은

사람 숲에서 물러나

홀로 머물러


나를 둘러싼

환호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덮치는

비난의 물살로부터


나를 휘감는

온갖 뭇 눈길로부터


자유로운

나 하나 남겨


다른 이의 나가 아니라

오롯이 내가 되고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의 나가 되면


다시금 기쁘게

다시금 힘차게


다른 이들 곁으로

다가가리라


다른 이들 품으로

스며들리라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사람들은 후배들의 장점과 가능성을 발견하면 기꺼이 축하해주고 배려해주고 이끌어주려고 합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경계하고 밀쳐내고 차단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오늘 다윗이 팔리스티아 골리앗을 이기고 나자 백성들이 자신들의 왕 사울을 제쳐놓고 다윗을 칭송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 그런데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사울은 마음이 좁아서 그런지, 자신의 왕권이 위태롭다고 여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8절)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9절) 심지어는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1사무 19,1) 고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다윗의 역성을 듭니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4-5절)


다윗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요나탄과 일부러 친해지려고 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려울 때 이렇게까지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보다도 더 행복한 이유는 주 하느님께서 그 때까지만 해도 사울의 마음에서 이성을 온전히 빼앗아가지 않으신 덕분으로 사울이 요나탄의 말을 듣고 다윗을 해코질 하려는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말입니다.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6절) 그래서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7절) 고 합니다.


오늘 독서를 들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역성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런가? 반대로 나는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고, 그를 위해서 그를 오해하고 해코질 하려는 이에게 다가가 그를 위해 역성을 들어주는가? 또 내가 감정적인 속단과 고립된 사고에 빠져있을 때, 내 주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바른 말로 일깨워줄 사람이 있을런가?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치 구약의 고엘과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요나탄처럼 나를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역성을 들어주고 계심을 알기에 감사드립니다. 또 그렇게 알고 믿기에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성모님도 나를 위해 주님께 역성을 들어주고 계시니 늘 우리는 성모님께 전구기도를 바치며, 어머니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주보성인들과 천사들에게도 같은 감사와 전구를 드립니다. 이렇게 겹겹이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돌봐주시도록 안배해 주시고 섭리하시는 주 하느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올려드리며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아멘.




'제자리'와 '거리'를 지켜내는 일, -사랑과 지혜,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반가운 부부가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거의 30년동안 수도원과 함께 해온, 세상 한복판에서 은수자처럼 사는 부부입니다. 마침 모임을 만들어 그 명칭도 어느 수도형제의 조언에 따라, ‘예수성심형제회’라 정하니, 기존의 ‘예수성심자매회’와 쌍을 이루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참으로 세상 한 복판에서 제자리를, 거리를 잘 지키며 살아 낸 사랑과 지혜의 부부입니다. 사실 함께 가까이 살아 갈수록 서로간 제자리를, 거리를 존중함은 기본적 사랑이자 예의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예수성심회 회장 자매와 어제 사진을 보며 주고 나눈 카톡의 덕담도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어제 사진의 자매님들, 60대 전후의 나이들인데, 어쩜 소녀들처럼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하느님의 은총, 예수성심의 은총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신부님께서 함께 해주신 덕분입니다! 부부가 닮아 가듯 조금이라도 멘토를 닮아가려고 노력을 하니까요!”-


은총은 아름다움의 동의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모두가 사랑과 지혜로 제자리를, 거리를 잘 지켜냈기에 이런 예쁘고 사랑스런 모습일 것입니다. 참 사랑은 지혜입니다. 새삼 참 사랑은, 참 지혜는, 참 겸손은 한결같이 제자리를, 거리를 잘 지켜내는 침묵과 고독의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았던 글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 중에

순화純化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옛 하느님을 찾아 사막에 갔던 수도승들은 침묵과 고독중에 언제나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내면을 깊이했습니다. 이래야 세상의 빛이,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성화聖化하는 사랑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삶의 넓이에서가 아닌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토마스 머튼의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라 언급한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완전히 슈퍼 스타입니다. 참으로 분주한 예수님 하루 일상의 요약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치유와 구마활동으로 인기의 절정에 있으며 열광熱狂하는 군중들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바로 삶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이런 덧없는 인기나 열광에 현혹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내고 거리를 견뎌냅니다. 사람들이 경계도 없이 하두 몰려 드니 마침내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 이르시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제자리를 지켜내고 거리를 견뎌내는 예수님의 필사적 노력입니다.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사람들의 열광을 경계함이 잘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메시아 관이 오해되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꽃같은 영광만의 메시아를 추구하는 천박한 사람들이 필히 깨닫고 체험해야 할, 뿌리같은 깊이의 수난과 죽음의 메시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파스카 영성의 핵심입니다.


사무엘 상권에서 사울의 결정적 실패는 그가 제자리를, 거리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이나 그의 아들 요나단의 사랑과 지혜가 사울을 능가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한결같은 우정의 사랑도 감동입니다.


무엇보다 사울은 질투심의 극복을 통해 자기를 이김으로 제자리를 지켜내고 거리를 견뎌냈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켜냈어야 했습니다. 진짜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나입니다. 남한테는 져도 나한테는 이겨야 진짜 승자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누구나 사울의 처지라면 그 심정에 공감할 것입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사실 사울의 처지라면 누구나 인지상정 공감할 것입니다. 이런 미래 권력앞에 현재 권력은 늘 초조하고 쫓기는 심정이기 마련입니다. 하여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시작되는 사울과 다윗의 내적 불화와 갈등입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겸손과 지혜로 일단 위기는 벗어 났습니다만 사울은 끝내 이점을 넘어서 제자리를 지켜내지 못했고 거리를 견뎌내지 못함으로 자멸自滅에 이르게 됩니다.


참 사랑은, 참 지혜는, 참 겸손은 끝까지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켜내는 고독과 침묵의 능력입니다. 이 또한 은총입니다. 이래야 이런저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다양성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서로의 제자리와 거리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지혜

최민석 신부님

요즘 내가 사는 집은 적막강산이다. 완전히 침묵 속의 수도원인 것이다. 나는 새삼 적막함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이 적막을 받아들이는 자신을 겸허하게 바라보는 데 시간을 쓰고 있다. 이제는 모진 바람에도 흔들림 없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에 길들여진 내가 이 적막이 무섭기 까지 했다. 하지만 적막은 이제 세월 속에 받아들여야 할 연인처럼 다가온다.

적막이란 가슴에 새 소리가 쌓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가슴에 새 소리가 쌓인다는 말이 뜻하는 바를 잘 해독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말의 질감이 선연 떠오를 때가 있다. 아마도 적막을 직접 경험하고 느껴보면 알게 되는 말이다.

한때 산새와 바람과 나무와 풀꽃 다 품은 산 한 채 구름과 하늘을 이고 우뚝 서있다. 겨울 동안거에 든 적막은 입이 무겁다. 칼바람이 온종일 피리를 분다. 모진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산 전나무 위에 어미 청설모 한 마리 꼬리를 접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핀다. 저마다 두려운 눈빛으로 적막을 견디고 있다.

겨울 산 마른 나무들은 행복하다. 덜어내고 내려놓고 버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여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린 후 자유와 평화를 찾은 것이다. 너도 견디고 있구나. 메마른 나무들 의연히 서 있는 겨울 산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내 눈앞 세상이 바뀌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적막을 못 견뎌 했다. 그 적막한 침묵을 감당 못해 적막한 겨울이면 힘들고 무섭고 두려웠다. 인생의 봄이 돌이킬 수 없이 지나 버리고 머리 희어지는 이즈음 들어, 갈수록 적막한 겨울마저 아름답고 슬프고 새롭고 아쉽기만 하다.

적막한 침묵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뿐더러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되고 누군가의 호명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존재의 순수에 가 닿는 사랑, 그런 사랑을 꿈 꾼다.

상실과 고독에서 오는 침묵과 적막은 존재와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내려 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내면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 적막한 침묵으로 들어가려면 말하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잠들지도 말고, 그 속에 내연하는 소리를 듣는다. 마치 장님들이 소리 나지 않는 점자 음보를 연주하듯, 한 밤중 손가락들로만 사랑을 더듬어 찾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삶은 자연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연과 교감을 이루며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나무를 대개 유용성의 차원으로 바라본다. 저 나무는 빼어난 관상용이고 이 나무는 아주 좋은 유실수라는 식의 인간 중심적 사고로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 나무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의 교감은 가능하지 않다.


자연과 교감하는 북미 원주민의 이야기 속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이들 부족들은 젊은이들에게 자연과 교감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들을 숲 속으로 데려가 눈을 가리고 저마다 특정한 나무 옆에 앉게 한 뒤 다음과 같이 지식한다고 한다.

“우리가 다시 올 때까지 눈을 가리고 여기 앉아 있어라. 이 나무를 껴안고 옆에 서 보아라.” 그렇게 한 나절이 지난 뒤에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다시 마을로 데려와 눈가리개를 풀어 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가서 네 나무를 찾아보아라.” 젊은이들은 자신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나무들과 교감하는 법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어떤 한 그루의 나무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도록 감동을 준다. 생명의 존재들이 서로 교감한다. 한 생명의 존재는 그렇게 감응하고 공명하는 것으로 현존한다. 나도 이 생명의 그물에서 춤추고 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한 여정인 신앙

한민택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큰 군중과 그들을 피해 호숫가로 물러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분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일을 전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그들과 거리를 두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더러운 영들에게는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마술처럼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걸으며 겪는 내적 회개인 신앙과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즉각적인 답을 바라지 말고, 당신과 함께 길을 걷기를 바라십니다. 진정한 내적 자유와 사랑을 경험하며 우리 안에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신앙이 자라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삶에는 시련이 끊이지 않을 때,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외롭고 소외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외치기도 합니다. ‘주님, 왜 이런 시련이 내게 끊임없이 닥치는가요?’주님은 즉각적인 답 대신 손을 건네십니다. 함께 걷자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무한한 거리를 넘어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 또한 그분과 함께 무한한 거리를 건너 진정한 탈출을 이루도록 말입니다.




악마적 소리에 마음 주지 말라.< 마르코, 3/7-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은 악마의 소리를 잘 분별하시어 처리를 잘하셨습니다. 40일 광야에서 엄제하고 기도한 후 “ 네가 하느님 거든 이것저것을 하라 하셨지만 그말한 마디도 듣지 않으시고 사탄을 물리쳤습니다. 오늘 복음도 병자를 곤치고 치유를 행하는 자리에 외서 ”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수리를 지르며 모인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며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악마의 소리는 언제나 해를 기치고 하느님의 힘을 빼려 합니다. 조용하라 알리지 말라 하시며 악령을 제어하셨습니다.


우리도 악령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그 소리를 따르려고 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입학하고 주교님을 만나니 이런 말을 하십니다. 그 당시는 라디오 밖에 없는 시대인데 라디오에서 마귀소라 들아니 듣지 말고 하느님 소리만 듣고 살라고 하시였습니다. 조금 의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가금 메스콤은 거짓말 협박 극민을 위하는 척하는 소리를 듣게 하는데 판단력이 없으면 구별을 못하고 속아서 자기 행동에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성직자들이 양반 행세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였을까?

이는 처음 신자들이 선교사를 보고 당신은 우리나라의 양반과 같고 신자는 머슴과 같으니 하대해도 된다고 말하여 그 말을 분별력 없이 들어 신자를 하인 머슴 아랫사람 하며 갑질을 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이어옵니다. 바티칸 공의회는 편신도와 성직자와 다 같은 하느님의 백성이라 말하고 매사는 민주적으로 서로 협력해서 일 하라고 하시며 성직자 우월 주을 경고하였지만 아직도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령은 사람을 치켜세워 거나 우월감이 들게 하거나 거짓과 부정으로 권리를 얻고 명예를 얻어 교만과 자만심으로 죄로 유인합니다.

주님은 오로지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아시고 그 길로만 나가셨습니다. 최상의 권리와 재력가이시고 영광이 들어나신 분이시지만 드러내려 하시지 않고 감추시고 숨어 계시며 암하고 강한 모습을 감추시고 가장 엄한 자 무시와 경멸을 받으셨지만 그분은 우주 만물의 주인시고 강한 보호자 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자격을 가졌든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도 겸허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남아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 이길로 인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올지 주님의 뜻에 따라 이따에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일뿐입니다. 아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루스페의 성 풀젠시우스 주교의 편지에서(Epist. 14,36-37: CCL 91,429-431)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공적 기도를 마칠 때 우리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고 하지 “성령을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전례의 기도를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끝마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는 것은 성서에 나오는 그 신비 즉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시고” “멜기세덱의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가” 되신 그 신비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시고 인간이 하늘의 참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사도는 그분이 받은 사제직의 위엄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의 입으로 찬양합시다.” 하느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을 통하여 찬미와 제사와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우리의 제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바칠 때 그 기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는 말로 끝맺어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서가 사제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님의 육화 신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까? 이 육화 신비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즉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그 신성을 잃지 않으시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천사들보다 낮은 위치를 가지셨습니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시면서 이렇게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것은 사람과 같이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을 때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것은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는 것은 종의 신분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께도 아버지께 바치는 똑같은 제사를 바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사제가 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거룩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산 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성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참된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기도를 영원한 사제이신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친다고 확언할 때 그분 안에 우리의 인간 육신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대사제는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사제는 속죄를 위해서 예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기도를 마칠 때 우리는 또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천주 성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말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계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성부와 성령과 함께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성자와 우리를 위해서 사제직을 수행하시는 분이 같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희망을 걸

누군가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삶으로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아픈 이들의

치유와 억압의

마귀추방을 통해

우리들에게

희망을 다시

나누십니다.


이 희망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몰려옵니다.


무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희망을 필요로

하는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쁘고

자유롭게 우리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워야합니다.


기적과 치유의

굴레 속에 갇힌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희망을

예수님에게서

만납시다.




알코올 중독자의 가정에 대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냅니다. 자녀를 비롯해서 그 가족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예상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의 가정에서 성장한 어른들 중에 본인 스스로 알코올 중독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부모를 따라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멋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은 굳은 결심으로 부모의 모습과 달라지기 위해 결심을 하고 그 태생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알코올 중독 때문에 내가 잘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더 잘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예는 무궁하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결국 부모 탓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불평과 원망만으로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이 행복한 삶으로 내 자신을 이끌어 줄까요?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던지는 사람이 과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어떠한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은 분명한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진실인데 왜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더러운 영에게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진실은 아무런 의미 없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진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 역시 똑같은 말을 했었지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똑같은 말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하시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시는 것일까요? 바로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습니다. 


불평과 원망만으로는 절대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말과 행동에는 주님께서는 칭찬과 함께 커다란 은총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까요? 사랑을 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존재가 통째로 섞이는 일입니다 폭풍이 휘몰아쳐 뿌리 뽑힌 자아 위에 생명 하나가 돋는 일이지요(김혜영). 


믿음으로 만지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중에서)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는 만지지 않고 손으로만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손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습니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오, 가톨릭교회여, 그대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지십시오. 제발 믿음으로 만지십시오. 그대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그대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같으신 주님이시라고 믿는다면, 그대는 그분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진 셈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올라가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인상 깊은 말씀입니다. 성인의 말씀처럼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만져야 할까요? 단순히 세상의 관점으로만 주님을 만지게 된다면 땅에서 만진 셈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으로 만지면 하늘에서 만지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거리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신학생 시절 유학을 처음 나와 언어 수업을 막 시작하였을 때입니다. 학원에서 소풍을 간다고 로마의 피라미드 역에서 반 학생들과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선글라스를 끼고 사진기를 든 관광객 룩을 하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조금 가다보니까 몇 명의 여자들이 제 주위로 모여들더니 몸으로 저를 짓눌렀습니다.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할 정도는 아니었고, 안 씻은 사람들 특유의 냄새로 보아 이들이 이태리어로는 ‘징가리’, 즉 로마에 거주하는 부랑인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머니 속으로 손이 들락날락 거리는데도 워낙 세게 둘러싸고 있어서 손을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돈을 털려버렸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5만원 정도였지만 신학생 때였기에 적지 않은 돈이라, 그 중 한 명의 손목을 세게 잡고 돈을 내놓으라 하였습니다. 물론 “my money, my money!”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뒤져보라는 듯이 옷을 펄럭이며 저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여섯 명 이상이 한 패거리였기 때문에 누가 돈을 가지고 있는지 찾아낼 길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비웃음에 열이 받은 저는 유일하게 외운 단어, ‘폴리지아’를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경찰’이란 뜻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 여자들은 겁을 먹었는지 지폐 한 뭉치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그것 봐, 땅에 떨어져 있잖아.”하며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돈을 집으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2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얼른 주머니에 집어놓고 계속 폴리지아를 외쳤습니다. 사람들도 저를 도와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돈들을 땅에 떨어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빼앗겼던 돈보다 더 주워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놓아주었습니다. 로마에 9년 동안 살면서 빼앗긴 돈을 되찾은 사람은 저밖에는 못 보았습니다. 어쨌건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로마에 사는 동안 그들을 보면 적지 않게 도와주었습니다.


또 한 번은 ‘뽀르따 뽀르떼제’라는 규모가 굉장히 큰 시장에서 아이들이 달라붙었습니다. 앞에서는 동냥을 하고 뒤에서 돈을 빼는 뻔한 수법을 쓰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저는 동냥하는 아이에게 돈을 주고 싶었는데 뒤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빼내어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그 손을 탁 치자 돈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주려고 하는데도 빼앗으려 하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아파, 이미 겁을 먹은 아이들에게 가벼운 꿀밤 한 대씩 주고, 그 돈을 그대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같은 돈이 없어지는 것이지만 내 자유로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무언가를 깨닫기를 바라며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 12년 동안 앓고 있던 하혈병이 나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당신의 옷깃을 만졌는지도 아시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으로부터 기적을 강탈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분 좋아하셨습니다. 당신에게 기적의 힘이 있다는 것을 믿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밀쳐드니 그 사람들이 밀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를 준비하시고 그들과의 간격을 둡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많은 치유의 기적들이 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이루어 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손만 대어서 병이 고쳐지는 것을 알아 손만 대려고 몰려들고 또 그래서 병이 고쳐졌다면 예수님의 의지보다도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병이 고쳐졌다고 자만해 할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에게로부터 당신의 자유를 지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과의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다가갈 때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오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마치 지구가 태양에 조금씩 가까이 가면 모두 타버리고, 혹은 조금씩 멀리 떨어지면 다 얼어 죽는 것과 같습니다.


철도의 두 선로처럼 항상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 주지 않으면 불타버리거나 냉랭해져 버립니다. 저는 이 거리가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거리라 생각됩니다.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면 이젠 너무 가까워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무관심해 지면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영화 댄싱퀸에서는 남자 주인공 황정민은 서울시장을 향해서, 그의 아내 엄정화는 가수로서의 길을 향해서 각자가 달립니다. 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의 꿈을 접기를 원했지만,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도 부부로서 함께일 수 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어느 누구에게나 상대의 귀한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거리까지는 침범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동시에 상대의 목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거리에 있도록 합시다. 그것이 사랑의 거리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사이동을 앞두고 주교님께서는 신부님들과 면담을 하십니다. 사제들은 순명서약을 했기 때문에 주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1999년 9월에 주교님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성 성당으로 가라는 주교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저는 순명서약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주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와 같이 인사이동을 하였던 동창들은 모두 서울의 본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순간 ‘왜 나만 경기도로 보내셨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실망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혈압이 높았는데 적성 성당에 있으면서 혈압이 정상이 되었습니다. 공기가 좋았고, 일의 부담이 적었고, 싱싱한 야채를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에 나왔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지나간 다음’입니다.

“어느날 나에게

큰 고난이 왔습니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며

한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고난이 지나간 다음

그때 비로소 나는 알았습니다.

 

나의 고난은

인생을 깨닫고

더욱 성숙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전에 백령도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 신부가 백령도 본당 신부였고, 동생 수녀가 백령도 본당에서 수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로 가는 뱃길이 멀고 험했습니다. 가는 날 파도가 심해서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를 하였습니다. 저도 속이 좋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도, 군인들도 힘들어했습니다. 백령도에 사는 주민들을 보니, 모두들 자리를 펴고 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파도가 심하면 자연스럽게 바닥에 눕는 법을 배웠던 모양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쥔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 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아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여일如一하라!” -시기, 질투의 치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여일하라!” 시기, 질투라는 마음의 병의 치유에 여일함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여일하라!-시기, 질투의 치유-’라 정했습니다. ‘여일하다’는 말마디는 ‘한결같다’는 뜻인데 한자 어감이 신선하고 뇌리에 깊이 남아있어 좋습니다. 얼마전 어떤 노년의 형제가 부인의 암투병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답변이 생각납니다.


“무엇인가 뜻이 있을 것이지만 모릅니다. 쉽게 단정져선 안 됩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흔들리지 말고 지금까지 해오시던대로 한결같이 지내시라는 것입니다. 여일하라! 답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치유는 물론이고 때가 되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결같은 여일함보다 온갖 병의 치유에, 특히 시기, 질투라는 병의 치유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바로 우리 수도승의 정주서원이 뜻하는 바도 여일함에 있습니다. 매일의 일과표의 시스템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초연함과 더불어 알게 모르게 치유되는 갖가지 병입니다. 대부분이 무질서에서 또 자기를 잊음에서 생기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여일如一하라’는 짧은 글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지나간다

한파寒波지나니/따사롭기가

봄날같다

현실에/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고 

여일如一하라-


얼마전의 한파와는 달리 입춘이 왔나 할 정도로 요즘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삶도 이와 같습니다.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여일함이 제일입니다. 참으로 여일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평화와 안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또 제1독서 다윗의 활동상을 보십시오. 두 분 다 여일합니다. 한결같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한결같고, 한결같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질투라는 병보다 치명적인 마음의 병도 없습니다. 눈멀게 하는 질투의 병입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세상에 질투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보호본능일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약할 때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다 싶을 때 일어나는 맹렬한 방어본능, 생존본능과 같은 시기, 질투입니다. 시기, 질투 빼놓으면 사실 남는 것도 없습니다.


참 무서운 것이 시기, 질투라는 병입니다. 상대를 파괴하기 전에 자신부터 파괴하게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약해 열등감이 많을수록 기승을 부리는 시기, 질투라는 병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그러했고, 다윗을 시기, 질투하는 제1독서의 사울이 그러합니다. 필리스티아 적들에 대승을 거두고 귀환했을 때 여인들의 다음 환호에 사울의 처지라면 시기, 질투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을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하면 내적으로 혼란하고 불안해 하며 그날부터 다윗을 시기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가 사울이 기도하여 주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을 만나 자기를 찾고 치유받아 일여함을 회복했더라면 장차의 불행도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질투는 감사로 변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에 상대방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결국 질투심이 사울을 파괴했고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사울입니다. 사울에 비해 다윗은 참으로 여일한 사람입니다.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사울의 아들 요나탄을 통해 위기에서 그가 구출되니 이 또한 자비하신 주님의 배려입니다. 참으로 여일한 삶을 살 때 주님은 그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복음을 보십시오. 사방에서 구름떼처럼 치유받고자 모여드는 병자들의 무리에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질투심과 더불어 심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시되 냉철히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처신이 참 지혜롭습니다. 이들은 추종자가 아니라 다만 치유받으러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없는 자비심으로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만 여일함을 견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만날 때 치유되는 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병고에 시달리던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듭니다. ‘그분께 손을 대려고to touch him’라는 영어 말마디가 반갑습니다. 주님을 텃치할 때 두려움과 불안도 사라지고 치유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로마에서 강의를 들을 때 어느 수사신부님이 수없이 강조하던 ‘하느님 접촉touching God’이란 말마디도 생생합니다. ‘사랑의 텃치’, ‘사랑의 스킨십’이 때로 심신의 치유는 물론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에게도 효과적임을 깨닫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들은 일화도 생각납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환자가 숨을 거둘 때 “손”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합니다. 입을 벌릴 기력조차 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에 한 번 더 가족의 체온體溫을 느끼고 싶어서 “손 좀 잡아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접촉할 때 회개와 더불어 위로받고 치유되는 대부분의 병입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며 달아나니 저절로 악령으로부터 치유되어 자유로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텃치한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치유해 주시며 여일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주님은 삶의 현실 안에 함께 하십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큰 무리가 몰려왔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삶의 무게를 덜어보겠다고 마지막 희망의 끈을 예수님께 두었습니다. 배불리 먹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 탓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겐 현실적인 위로와 희망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세상 속에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골치덩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속을 꿰뚫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 본래의 모습은 어디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밑바닥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고 후회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악령들은 아부하느라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들먹였지만 그 속을 알기에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결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덩어리 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기도하며 갈망하다 보면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받기 위해 매달리게 되면 참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만큼 어렵게 됩니다. 기도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고, 나와 거리를 두시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고 늘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면 삶의 현실 안에 함께하고 계신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발은 땅을 디디고 삽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대체 왜 일까?

 이상하게도,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고,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심지어는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대체 왜 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입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아직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어, 여전히 신앙의 눈이 열리지 않아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이유가 밝혀잘 것입니다. 그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때’ 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때가 아니면, “하느님의 아들”의 참된 모습이 올바르게 밝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곧 신앙의 눈이 열릴 때라야,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부수고서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상의 자기 자신을 허물어지고, 찢어지고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아드님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여기 수도원에 혹은 성당에 몰려와 있다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군중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를 못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외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십자가에서 매달려 찢어져 피 흘리지 않는다면, 그저 자신의 치유만을 위해 몰려와 있는 군중처럼, 혹은 믿음 없이 그냥 아는 바를 입술로 고백만 하고 있는 악령들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참되게 믿지 않고 외치기만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십자가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할 일입니다. 아멘.

 



시기에 질투까지 하게 되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시기와 질투는 분명 아주 나쁜 것이고 그래서 다윗을 시기한 사울이 잘 했다고 우리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사울을 너무 나무랄 수 없고 더 나아가서 왠지 이해하고 싶고 이해도 됩니다.

적어도 콩쥐팥쥐의 그 팥쥐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고, 사실 사울은 꽤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아들 요나탄이 사울에게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라고 충고하자 그 충고를 받아들일 정도는 되니 말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얘기 전체를 잘 뜯어보면 그리고 오늘 얘기를 보면 사울이 시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는 시기뿐 아니라 질투까지 섞여있습니다.

하필이면 다윗을 사울과 비교하여 칭송하는 것이 여자들입니다.

남자들이 다윗을 치켜세웠으면 시기만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기를 보면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며 자기에게서 돌아서셨기 때문에 다윗을 두려워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을 보면 하느님도 자기보다 다윗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사울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는 누가 나보다 뭘 잘 하거나 잘 될 때 생기는 악감정이고, 질투는 누가 나보다 더 사랑 받을 때 생기는 악감정인데 다윗이 자기보다 성공할 뿐 아니라 사람들 그것도 여자들로부터 더 사랑받고 하느님에게서도 더 사랑받는다는 생각이 드니 시기에 질투까지 더 하여 사울이 주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가 신앙이 깊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인간적으로만 머물면 시기에 질투까지 하게 되면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작동불능입니다.

사울도 아들 요나탄의 말을 듣고 한 때 마음을 돌렸지만 이내 다시 시기와 질투의 불이 타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도 요나탄이 한 말의 경지에 올라야 시기질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한 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사람들이 다윗을 칭송하고 여자들이 칭송을 해도 마치 유혹을 당하듯 거기에 마음이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승리한 것은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탄은 분명히 주님께서 승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그 승리를 다윗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그러니까 공동체에 주신 거라는 점입니다.

요나탄은 분명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승리는 주님의 승리이고 공동선을 위해서 주신 겁니다.

우리는 모든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한 사람의 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 

하느님은 편애를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

하느님은 선을 공동선을 위해 주신다는 것, 이 모든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부터 믿지 못하는 저를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영혼의 독소인 시기심에서 벗어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라는 말을 들은 사울은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해 다윗을 시기하게 됩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좋아하던 아들 요나탄의 개입으로 시기심의 덫에서 벗어나 다시 다윗과 함께 지냅니다. 


시기심은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고약한 마음입니다. 잘 되거나 잘 나가는 사람처럼 될 수 없어 그 사람을 헐뜯고 깍아내리고 망가뜨리려는 영혼의 독이 시기입니다. 시기는 증오의 다른 얼굴입니다. 시기심 때문에 상대방을 증오하고 나아가 죽이기도 하지요. 질투에는 상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들어가지요. 그러나 시기에는 사랑과 배려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강한 시기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것만 찾고 자기 일에만 몰두합니다. 인정받고 뭔가를 받는 것을 당연시 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시기와 질투는 다 소유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있는 것을 내것으로 만들지 못해 상대를 미워하고 해치려드는 것이지요. 


시기심은 상대방과의 비교에서 시작됩니다. 그저 만사만인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선과 은총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지면서 그 사람의 것을 소유하려들 때 시기심이 발동하게 됩니다. 시기심은 하느님의 것을 자기것으로 삼으려는 독소입니다. 시기심이 요동치면 분별력을 잃고 옹졸해지며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시기심은 집단 안에서 불평등과 불의를 조장하는 그릇된 경쟁심을 부추기기도 하지요. 그 결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앞지르려고 합니다. 시기심을 지닌 사람은 험담, 중상모략, 증오, 비난, 분노, 폭력, 살인과 같은 수단을 교묘히 드러내며 경쟁의 승리자가 되려 합니다. 어리석게도 하느님 위에 서려는 교만의 극치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시기심은 한 사람의 영혼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극도로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비참의 구렁텅이로 내몰고 맙니다. 시기의 독배를 마심으로써 하느님 위에 서려 하고 소유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유의 벌판을 가로질러 스스로를 구속하며 살 수밖에 없지요. 소유욕과 불필요한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 그리고 편견을 버리고 주님의 집으로 들어갈 때 시기심의 맹독에서 해독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주님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영적 권고 8) 우리 모두 시기의 더러운 영에 속아 하느님의 선과 은총을 소유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유로운 영혼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신명나는 교회 공동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생팬’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 배우, 모델 등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사생결단의 각오로 쫓아다니는 극성팬들을 말합니다. 그토록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니 당사자 입장에서 고맙기도 하지만, 때로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이 부분이 사회 문제로까지 부각되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행복한 고민이겠다’, 라는 생각도 들겠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가는 행선지를 귀신처럼 알아내서는 가는데 마다 나타나 있습니다. 언제나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맥주 한잔 마음 편히 마실 수 없습니다. 공공 화장실 하번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생팬들 때문에 많이 힘드셨던 흔적이 복음서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과 제자단의 신명나는 사목활동의 현장이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발길 닿는 곳 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엄청난 인파에 시달리셨던 예수님께서 너무나 피곤하셨던 나머지, 잠시라도 좀 쉬어 보려고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귀신처럼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던 사람들의 무리가 또 다시 따라 붙었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습니다. 특히 이런 저런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이 줄곧 그분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밀물처럼 쉴새없이 몰려드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의 무질서로 인해 큰 사고라도 나면 안되는데...’하는 걱정이었습ㄴ다. 고민 끝에 아이디어를 한가지 떠올리셨습니다. 거룻배 한 척을 구해 갈릴래아 호수 위에 띄웠습니다. 그 위에 올라타시니 밀려드는 군중과 분리된 상태에서 안전하게 치유활동을 계속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구성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기차고 신명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교회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그 옛날 초기교회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지친 성직자·수도자들은 상습피로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비명 속에 양떼들 사이에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세상 사람들은 남녀노소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시원한 구원의 청량음료를 원없이 마시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제는 갈릴래아에서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악마들도 “믿고 무서워 떱니다.”(야고 2,19)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시다.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깊어지는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몰려왔다 몰려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직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결코 서로를 

속이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큰 것만을 

가지려 하는

욕심에서 벗어날 때

마음을 건네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깊어져야

배를 띄울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앞에서

깊어져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나이다."




제가 있는 성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십니다. 그런데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성지순례를 오시는 분입니다. 11시에 미사를 포함해서 십자가의 길, 묵상 등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이런 분들은 집에 돌아가실 때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그냥 오신 분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성지가 있다고 해서 들어오신 분,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그냥 따라오신 분, 옆의 문화재인 갑곶돈대에 가려고 왔다가 성지로 잘못 오신 분 등입니다. 이분들은 성지에 머무는 시간도 아주 짧은 것도 물론이고, ‘볼 것도 없네.’라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또한 괜히 왔다는 표정을 짓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성지에 와서 주님을 만나는 분은 어떤 분들일까요? 당연히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분들은 믿음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주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냥 오신 분들은 어떠한 목적도 없기에 그냥 외관만 보고서 뒤돌아 갈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겠지요. 즉,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고 싶다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에게 주님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몸에 손을 댐으로 인해 은총을 얻고, 반면에 어떤 사람은 직접 손을 댔지만 오히려 주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지요. 그런데 손을 댄 모든 사람이 치유를 받았을까요? 수난을 당하셨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댔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을 때, 결박할 때, 십자가에 매달 때, 그리고 지나가는 예수님을 향해서 조롱하면서 손을 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은 은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적대하시면서 오히려 주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분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만진 셈이 될 것입니다. 그 옛날 병에 걸린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몸에 손을 대고서 은총을 얻었던 것처럼, 지금 역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님의 은총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반대하고, 의심한다면 당연히 은총을 얻을 수 없게 되어서 주님을 만지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점점 복잡해 가는 세상,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더욱 더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그 믿음이 부족하다면 주님께 그 믿음을 대신 채워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도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기적이다(베일리).

 

제발 꼴찌 좀 합시다. 

1등을 한다면 어떨까요? 일등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지요. 하긴 예전에 어떤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 분야에서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세상은 일등을 기억하지, 이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일등이 다 좋은 것일까요? 솔직히 제발 꼴찌 좀 했으면 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50관왕을 차지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즉, 50개 분야에서 일등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 50개 분야의 일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살률 1위, 산업재해 사망률 1위, 가계부채 1위, 남녀 임금격차 1위, 노인 빈곤률 1위, 청소년 흡연율 1위, 성인 흡연율 1위, 가장 낮은 최저임금 1위,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 자동차 접촉 사고율 1위, 인도에서 교통사고율 1위, 보행자 교통 사망률 1위,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 1위, 노인 교통사고 비율 1위, 교통사고 사망률 높은 국가 1위 1위, 환경평가 뒤에서 1위, 어린이 행복지수 낮은 순위 1위, 청소년 행복지수 낮은 순위 1위, 이혼 증가율 1위, 결핵 환자 발생률 1위, 결핵 환자 사망률 1위, 당뇨 사망률 1위, 남성 간질환 사망률 1위, 대장암 사망률 증가율 1위, 심근경색 사망률 1위,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 1위, 노령화 지수 1위, 국가채무 증가율 1위, 자살 증가율 1위, 공공 사회복지 지출 비율 1위, 실업률 증가폭 1위, 대학교육 가계부담 1위, 낙태율 1위, 과학 흥미도 뒤에서 1위, 중년여성 사망률 1위, 사교육비 지출 1위, 15세 이상 술 소비량 1위, 독주 소비량 1위, 출산률 제일 낮은 국가 1위, 근무시간 많은 국가 1위, 세부담 증가속도 빠른 국가 1위, 국가부채 증가속도 1위, 식품 물가 증가율 1위, 양주 소비율 1위, 저출산 1위, 공교육비 민간 부담 1위, 사회안전망 가장 안 좋은 순위 1위, 정치적 비전이 안 좋은 순위 1위, 고등교육 국가가 지원해 주는 비율 뒤에서 1위.


어떻습니까? 50관왕을 차지했는데 자랑스럽습니까? 이런 것들은 제발 꼴찌 좀 했으면 좋겠는데, 과연 그날이 언제 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향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 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기에 향기가 있고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질투에 대한 치유(the cure for jealousy)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강론 제목은 ‘질투에 대한 치유(the cure for jealousy)’입니다. 마침 글을 읽다가 위 대목을 보고 소스라치게 깨달은 것이 질투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병이니까 치유를 언급한 것입니다. 질투해서 사람입니다.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 뿐 세상에 질투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 저도 질투심이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질투심이 솟아날 때는 얼마전 읽은 조언에 따라 우선 ‘천근의 무게로 나를 누름으로’ 진정시키곤 합니다.


질투 또한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욕이 사라지면, 죽으면 질투도 없습니다. 여자에게서 질투 빼면 아무것 도 없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남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단지 인내하고 절제할 뿐입니다. 자존감이 약해 열등감이 클수록 질투심 또한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죄인이자 병자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는데 죄와 병의 관계가 참 애매합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질투는 병이자 죄요 더 잘 들여다 보면 병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하여 마음의 병(illnesses of the heart)중 으뜸으로 치는 것이 바로 무지(ignorance)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무지의 병으로 인한 질투입니다. 아마 원죄의 결과가 상징하는바일 것입니다. 질투심이 없다면 이는 성인이거나 죽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을 질투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을 사랑하는 사울의 아들 요나탄의 순수한 우정은 참 경이롭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사무엘 상권의 독서에 나오는 사울과 다윗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사울이 지는 해라면 다윗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사울의 처지에 서 본다면 누구나 사울의 처지에 공감할 것입니다. 비난 보다는 동정과 연민을 지닐 것입니다. 역사상 권력투쟁은 얼마나 치열했는지요.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 하지 않습니까. 영조임금과 사도세자의 관계만 봐도 어렴풋이 짐작하는 바입니다. 하여 권력자는 이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에게 다윗은 계륵같이 참 껄끄러운 존재였을 것이고 질투심 또한 자연스런 일이 었겠습니다.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군대와 함께 입성할 때 여인들은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임금을 맞이하면서 노래를 주고 받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의 처지라면 이 말듣고 평정심을 유지할 자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음 사울의 반응이 정상적입니다.

“다윗에게는 수만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위기의식과 더불어 질투심은, 시기심은 더욱 끓어 올랐을 것입니다. 요나탄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혜로운 조언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사울은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작심하지만 사울은 끝내 자신의 고질병과도 같은 질투심에 파멸하고 맙니다. 만일 사울이 눈멀게 하는 질투심을 잘 치유하여 아름답게 왕위를 다윗에게 물려주고 떠났다면 얼마나 이상적이었겠는 지요.


오늘 복음 장면은 예수님의 전 삶을 요약합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모여드니 병고와 마귀들린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누구나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치유되었고, 더러운 영들은 스스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며 소리 지르며 달아 납니다. 참 통쾌하고 신바람나는 장면입니다. 바로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명성이 높아지면 흡사 빛에 그림자가 따르듯 선의의 추종자들이 있는가 하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열광적인 추종자들도 있고 질투심 가득한 적대적인 라이벌도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후자에 속하는 이들이 바로 기득권을 지닌 원로와 사제들,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권력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명성과 더불어 더욱 위기의식을 느꼈음이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3,12).


문제는 고질병과도 같은 마음의 질병, 질투심의 치유입니다. 자존감의 결여로 인한 열등감의 발로이자, 본능적인 두려움에 대한 자기 보호본능 같기도 한 질투심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선은 참아내는 것입니다. 천근의 무게로 나를 누른 후 곧 이어 성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시야를, 공동체의 시야를 지니는 것이요, 공동선에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평가나 자신의 평가에 초연하는 것입니다. 속히 제자리로 복귀하여 제대로 제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느님의 나라가,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질투심의 치유에 온 마음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보다, 또 찬미와 감사의 거룩한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보다 더 좋은 약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만이 치유할 수 있는 불치의 병과도 같은 질투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말씀과 성체의 사랑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 주시고 질투심도 치유해 주십니다. 평생 복용해야 할 상비 명약(常備 名藥)이자 영약 靈藥이 주님의 말씀과 성체,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시편56,12). 아멘.




질투의 화신 사울왕과 상남자 다윗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과 2대왕 다윗 사이의 복잡 미묘한 애증관계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사무엘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사무엘은 주님의 명에 따라 인물이 출중하고 다재다능한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그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잘 생겼으면 사무엘은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이를 보았소?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인물은 없소.”(사무엘기 상권 10장 24절) 아마도 사울은 요즘으로 치면 185cm의 꽃미남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주어진 부담스런 직책 앞에 사울은 꽤나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간택된 후 얼마나 적응하기가 힘들었으면 대중 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하고 짐짝 사이로 자신의 몸을 숨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점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과 의기투합한 뒤 전쟁터로 나가 큰 승리를 거둡니다. 용맹한 사울왕의 군사들이 암몬족을 초토화시키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사울왕은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왕권을 굳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울왕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던 사울왕은 무리수를 두게 되게 되면서 백성들의 신임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아들 요나탄 그리고 아들 못지않은 다윗과도 등을 돌리게 되고 결국 허망하게 권좌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기름부음까지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왕 자리까지 오른 사울왕의 몰락의 배경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그는 왕권 역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왕이지만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왕이 될 수 있음을 잊어버렸습니다. 왕권에 대한 사울왕의 과도한 집착이 몰락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집착은 또 다른 두려움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임기 내내 이 족속 저 부족과의 전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권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가장 측근인 아들 요나탄과의 갈등 상황까지 초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왕은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떠오르는 샛별 다윗을 향한 시기심은 하늘을 찔러 암살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완전 정복하고 금의환향하자 이스라엘의 수많은 여인들이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렸습니다. 악기에 맞춰 춤까지 추면서 이런 가사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사무엘기 상권 18장 7절)

 

마침내 주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왕으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붇도록 명령하십니다. 사울왕이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커져가자 하느님 두려운 줄 몰랐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위기 앞에 하느님을 찾지 않고 인간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신의 뜻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않은 결과가 비참한 쇠락이었습니다.

 

다윗을 암살하기로 계획한 사울왕은 증오의 칼을 품고 집요하게 다윗의 뒤를 쫒기 시작합니다. 서로 쫒고 쫒기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울왕과 다윗은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참으로 특별한 애증관계입니다. 사울왕의 시기질투로 인해 다윗은 야반도주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망명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도 사울왕을 향한 다윗의 마음은 일편단심입니다. 사울왕을 향한 다윗의 첫 마디는 항상 이랬습니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드디어 기회가 왔으니 사울을 치라는 신하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다윗은 늘 이렇게 그들을 타이르며 주군을 살려줬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사무엘기 상권 24장 7절)

 

마침내 사울왕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한판 싸움에서 대패합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알게 된 사울은 호위병에게 명령합니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렇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저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희롱할 것이다.”(사무엘기 상권 31잘 4절)

 

그러나 호위병 역시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찌르지 못합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자신의 칼을 바닥에 꽂았습니다. 사울왕은 그 칼 위로 엎어지며 자결을 합니다. 한때 주님으로부터 간택받았고 거룩하게 기름부음받은 사울왕이 더없이 비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을 묵상하며 인생만사 새옹지마임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지 않는 겸손의 덕임을 되새깁니다.

 

집요하게도 뒤꽁무니를 쫒으며 자신의의 인생에 고춧가루를 뿌리던 사울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보여준 태도는 정말 ‘상남자’답습니다. 사울왕과 요나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애통한 마음에 입고 있던 옷을 잡아 찢었습니다. 하루 내내 울며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활의 노래’라는 애가(哀歌)를 지어 불렀습니다.

 

사울왕과는 달리 다윗은 언제나 자신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울왕의 끝도 없는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천적 같은 사울왕을 언제나 용서했고 살려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성왕(聖王) 다윗이었습니다.




대상의 인식

김동원 신부님(서울대교구 대만선교)

질병은 현대 의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기도, 또 다른 여러 민간요법을 써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그 땅 그 시절에도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고 명의를 찾으려는 마음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더러운 영’들이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신분에 대해 함구하라 이르십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명백하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맺고 정의하는 관계의 모습을 비추어봅니다. 능력과 지위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그것이 내가 애를 써서 알고 싶은 사람의 면면이라면, 되돌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아무런 능력도 지위도 없이 세상에 난 것처럼 나와 타인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마저도 싫다면, 평생 예수님을 따르지만 결국 아기 생떼 쓰듯 기도한 것을 주지 않았다고 그분을 떠나서, 부활을 체험하지 못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한 삶으로 마감할 테니까요.

‘더러운 영’에게라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나에게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설정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하며,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십니다. 이에 대해 다양한 반응과 태도가 나타납니다. 이를 통하여 나 자신과 가족, 우리 사회와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숙고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뿐 아니라 헤로데 사람들과 결탁하여 처치할 모의를 합니다(3,6). 이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이권을 지키려 했고 그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악의와 살의를 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가르치기까지 했지만 실제는 하느님을 완전히 거부하고 죽이려들었던 것입니다. 


한편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구원과 해방의 선물을 받고 매우 놀라워하며 그 소식을 널리 퍼뜨립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을 피해 호숫가로 물러가셨는데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듭니다(3,7-8).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오는 군중을 피하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척을 준비하라고 명하십니다(3,9). 그분은 이 특별한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제자들과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인격과 일치되어 실제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삶을 통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한편 더러운 영은 탁월한 영적 감각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1,24)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3,11)을 알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더러운 영은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1,24) 하며 예수님과의 관계에 선을 긋습니다. 알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나 자신이나 가족, 우리 사회,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다양한 삶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활발히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교만형’, 현세적 이익을 찾으려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기복(祈福)형, 영적 직관력과 식별력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입으로 고백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몽사가형’ 등.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까? 말이 풍성하고 말씀마저도 넘치고 또 넘치는 ‘말씀의 홍수’ 시대에 하느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증거가 더욱 절실합니다. 우리는 말보다는 삶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머리로 깨닫고, 몸으로 체험하며, 입으로 고백하고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 제자일 것입니다. 


오늘도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온 몸과 마음과 머리와 혼을 다해 하느님의 사랑을 삶으로 노래하는 찬미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1사무 19,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카친이 몇명이나 되세요?

페이스북 친구는요? 라인 친구도 있고 트위터 친구 등 수많은 SNS 친구들이 있지요.

그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 오면서 친분을 맺어 온 친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친구 중에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욕을 먹을 때 내 편이 되어줄 친구는 과연 있을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비난해도 그 친구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끝까지 나를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줄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다윗같은 성왕에게도 요나탄 같은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다윗은 없었겠죠.

이렇게 좋은 친구는 애인보다 낫고 부모보다 낫습니다.

이런 친구 있나요?

그럼 여러분은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친구 없나요?

그럼 내가 누군가의 그런 친구가 되어야겠지요.


오늘 내 친구들을 떠 올려봅시다.

그런 친구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친구들을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줍시다.


친구야, 억수로 고맙데이~~^^  


 

 

<왜 물러나십니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달려드는 강도들도 아니고, 시비를 걸어오는 바리사이들도 아닌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무수한 사람들을 피하시려고 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들,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 더러운 영에 시달리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들을 피하시려고 하셨을까요? 이들이 귀찮아서 일까요? 더 이상 당신의 일을 계속하다가는 신변에 위험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일까요? 당신의 일에 대해 의문과 회의가 생겨서 일까요? 아니면 심신이 몹시 피곤하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보다 완전하고 참된 만남을 위해서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에게 그에 맞는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은 사람들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분명 이들은 예수님께 끌려서 왔지만, 자칫 예수님께서 행하신 외적인 일에만 현혹되어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로 인해 헛된 만남을 이룰 위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진실하게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지만 이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피신은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나 회피가 아니라, 참된 사랑의 배려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썼던 묵상 글 한 편을 벗님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물러섬▶ 

당신의 이름을 외치는 열광적인 군중의 함성 가운데에도,

당신으로 말미암아 새 삶을 찾은 이들의 칭송 가운데에도,

당신 때문에 욕망이 좌절된 어리석은 이들의 한탄 가운데에도,

당신은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이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 곳,

모든 이들이 앉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자리,

당신은 그 자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이를 죽여야 하는 모순 한 가운데에

생명이신 당신은 자리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옳다 외쳐대는 거짓투성이 한 가운데에

진리이신 당신은 자리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이기기 위해 서로를 짓밟는 아수라장 한 가운데에

십자가 넘어 부활의 월계관을 쓰신 당신은 자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소박한 작은 자리,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보이지 않는 자리,

하느님 모상인 사람이 온전히 새로이 태어나는 자리,

당신이 원하신 곳이었습니다.

 

당신을 연호하는 군중들의 함성 뒤로,

당신을 권좌로 초대하려는 군중들의 움직임 뒤로,

당신은 물러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당신의 자리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이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얻으려합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욕망을 채우려합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 세웁니다.

 

가슴 시리게 당신의 아름다운 물러섬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듯

헛된 것을 추구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당신 따라 아름답게 물러설 수 있기를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아무리 열심인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 가버리셨다는 불안한 체험을 하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순간이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과연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고 있는지, 예수님께로부터 원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성찰하라고,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모두, 주님의 등을 본 순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넓은 가슴을 떠올리며 잠시 등 돌린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매일 거듭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리향.<마르코,3/7-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꽃의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나무가 우리수도원 정원에 봄이면 향기를 내 풍기고 있어 향을 맛는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의 향기가 하늘을 찌를 듯 인기가 있어 주님을 밀쳐낼 만큼 군중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보다도 오늘 우리는 더 큰 기적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2000년이 지난 오늘 더 향기가 짖게 펴져 나가 온 세상 방방곡곡에 향기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베드로 대성전 앞에 모인 군중을 보면서 이 큰 무리는 어디서 모여오고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는 분명이 주님의 향기가 짖게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향기가 점점 약해지고 좋은 향을 맞을 수 없게 되어가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내 탓이요 내 탓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의 또 다른 희생과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근대에 와서 몇몇 교황님들의 언행 의 일치도 조금 낮아지고 있지만 더 많은 무리들의 냉랭한 신앙생활이나 각 지역의 교회의 일꾼들의 막힌 향기로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봄에 피어나 천리향을 풍기듯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세상에 풍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충실이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항상 기도하는 삶 아침에도 찬미 저녁에도 찬미 하며 주님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합니다.주님에게 향기를 전해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내 몸에서 추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반성의 사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어 주님 앞에 나가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서로 사랑하어라 이 사랑을 실천할 때 향기가 납니다. 벌이 꽃을 찾아 날아들 듯이 꽃향기를 풍기며 새로운 힘과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 날아오게 합시다.

 

주님 당신의 향기가 우리 몸에 배어 우리를 만나는 사람에게 주님의 향기를 전하는 사도되게 기도합니다.




소외된 이의 진정한 벗이 되길   

박윤식

인도의 데레사 수녀님(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다. 대부분 다 물리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 옆에 아무도 없다는 소외감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겪는 가장 몹쓸 병은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다.’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여러 지역에서 많은 이가 예수님을 만나러 갈릴래아 지역에 모였단다. 당시에는 이동 수단도 그리 없었는데 예수님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과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 왜 그러신 것일까?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께 몰려든 이 많은 군중의 믿음은 마치 모래 위의 집과도 같다. 그렇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찾고 있다. 어려움을 호소하고 그 어려움이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감수해야만 하는 단단한 반석 위의 집과 같은 믿음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예수님의 명성에 걸맞게 멀리서 많은 이가 몰려온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에게서 악령을 몰아내 주셨다. 외롭고 슬프게 사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리라. 가장 몹쓸 병에 걸린 이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셨다.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 중의 하나였던 지미 듀란테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쇼 기획자에게 자신의 스케줄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단 몇 분밖에 출연할 수 없다고 답했다. 따라서 그는 간단한 원맨쇼를 한 뒤에 곧바로 내려와도 된다면 기꺼이 출연하겠다고 응했다. 물론 쇼 기획자는 그렇게라도 그를 무대에 세운다면 대성공이었다. 공연이 있는 그날 무대 위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는 짤막한 원맨쇼를 끝내고는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지미 듀란테는 계속해서 쇼를 진행했다. 이 광경을 무대 뒤에서 바라보던 쇼 기획자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지만 한 편으로 지미의 마음이 변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그렇게 15분, 20분, 30분이 흘러갔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무대 뒤에서 쇼 기획자가 그에게 물었다. “듀란테씨, 난 당신이 몇 분만을 무대에 설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지미 듀란테가 대답했다. "나도 애초에도 그럴 계획이었지만, 쇼를 계속 진행한 데는 이유가 있소. 저기 무대 맨 앞줄에 앉은 사람들을 좀 보시오." 기획자는 무대 틈새로 지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무대 맨 앞에 두 명의 참전 용사가 가까이 앉아 있었는데, 둘 다 전쟁에서 팔 한 쪽씩을 잃은 전우 사이였다. 한 사람은 오른쪽 팔을 잃었고, 또 한 사람은 왼쪽 팔이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남은 한쪽 팔을 서로가 부딪쳐가면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 곁에도, 소외감으로 곁에는 아무도 없다면서 사랑받지 못하고 몹쓸 병을 앓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 유명한 미국의 연예인 지미가 박수는 꼭 두 팔이 없어도 칠 수 있는 현장에서 그의 일정을 바꾸도록 이끈 소외된 그들과 함께 한 그 흥겨운 시간을 되새기자. 지금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면 어떨까?




시기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사울이 물리치지 못한 골리앗을 다윗이 물리치자 사람들은 사울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고 그로 인해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남의 얘기이기에 사울을 좀생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내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사울보다 더 시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영적으로 더 성숙하지 않으면 분명 더 시기하고 질투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의 영적인 미성숙함을 솔직히 고백하면 저도 간혹 저희 수도원보다 다른 수도원에 더 많은 성소자가 입회하고 더 훌륭한 성소자가 입회를 하면 시기심이 생기고, 저희 수도회보다 다른 수도회가 더 훌륭한 일을 하고 더 잘하면 시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내 어느 수도회든지 잘하면 하느님과 교회 전체적으로 유익이니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려 하지만 부끄럽게도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시기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합니다. 하나는 하느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성에 대한 성찰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사랑 결핍증상에 대한 성찰입니다.


첫째는 시기와 자기중심성의 관계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시기는 자기중심성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기하지 않기 위해 너 중심적이면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나 중심도 너 중심도 아닌 하느님중심이어야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선은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하시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하도록 되어있는 것이기에 모든 선은 너든 나든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닌, 곧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둘째는 시기와 하느님 사랑 결핍 증상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얘기하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선행을 시기하는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한 사람이라면 시기하지 않을 겁니다. 내 배가 충분히 부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많이 먹건 맛있는 것을 먹건 시기하지도 않고 시비 걸지도 않듯이 우리도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시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기한다면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지 못하거나 하느님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하다가도 하느님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는 것을 보는 순간 하느님 사랑을 뺏긴 것처럼 느끼고 그만큼 결핍을 느낄 때 시기하는 겁니다.


혼자 사랑받던 아이가 동생을 보는 순간 사랑의 상실감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이렇듯 독점적인 사랑의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다른 것은 다 나눠줘도 사랑만은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않으려는 그 독점욕을 비워야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무나 짧았던 

성녀 아녜스의 삶이

오히려 강한 깨우침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짧았지만 너무나

강렬한 신앙고백을

삶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이 무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 여인이 가장 강한

여인이며 가장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녜스 성녀는

순교의 삶으로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향하는 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길입니다.


저마다의 삶 자체가

아버지 하느님께 

이모든 것을 맡기는

한편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꿈꾸었던 

작은 소녀가

엄청난 신앙의 힘으로

하느님을 증거했듯이


우리또한 신앙의 힘으로

인내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다시금 인내와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주는 가장 큰 좌표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내를 통해

더더욱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신앙고백에는

언제나 인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성녀 아녜스를 통해

다시금 배우는 

소중한 시간 되십시오.



어제 책을 읽는데 너무 재미없는 것입니다. 한 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내용이고, 왠지 시간 낭비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한 줄이라도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거의 한 시간 넘게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의 바람과는 달리 한 줄도 마음에 와 닿지 않더군요. 결국 저는 다른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책을 통해 보상을 받기 위해서이지요. 


이러한 보상 심리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더 많습니다. 즉,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줘야 한다는 생각들이 관계 안에서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보상 심리를 생각하다보니 문득 군대에 있을 때가 생각납니다. 졸병일 때에는 고참들 등쌀에 참 힘들고 어려웠지요. 그런데 고참이 되고 나서는 졸병일 때가 생각나면서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보상심리이지요.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 보상심리를 전혀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즉,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것으로만 착각합니다. 돈도, 명예도, 그리고 각종 세상의 물질적인 혜택을 남도 아닌 바로 ‘나’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떤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지요. 


사실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공수포를 남발하는 우리입니다.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말 들로 말이지요. 그러나 정작 해결되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우리이기도 합니다. 보상심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대신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면서 조금이라도 나 역시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감사한 일 100가지 적어보기’라는 구절을 보고서 실제로 적어봤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감사한 것이 없는 것 같았는데, 생각하다보니 너무나 많았습니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두 눈이 있다는 것, 양 손이 있다는 것,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등등... 감사한 일들은 생각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그만큼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고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무조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이듯이,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다 고쳐주시고 위로해주십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치지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공연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이지요. 이처럼 더러운 영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받기만을 원하고 다른 이들이 받는 것에 방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안에도 그러한 더러운 영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며 살아야 할 때입니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던가!(파울로 코엘료)


홀가분해지기(‘좋은 생각’ 중에서)

정신과 전문의 페넬로프 러시아노프는 행복 지수를 낮추는 습관을 살폈다. 우선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우주 중심 증후군’은 “왜 나에게만!”이라고 불평하게 만들뿐더라 상대의 입장에 서 보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전화해 테니스를 치자고 했을 때, 그가 우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이때 ‘우주 중심 증후군’에 빠졌다면 친구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테니스 칠 만한 상대가 못 된다고 여긴다.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 거절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오로지 자신을 중심에 두고 타인과의 관계를 해석하니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볼 여유는 갖지 못한다. 


둘째로 결점 탐지기를 갖고 다니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칭찬 같은데 진짜 속셈은 뭘까?” “사과가 먹음직스럽네요. 그래도 자세히 보면 벌레 먹은 곳이 있을 거예요.” 하는 식이다. 결점 탐지기는 빈틈없이 돌아간다. 이 탐지기는 특별히 불행에만 더 많은 점수를 준다. 하루에 열 가지 일이 잘되면 각각 1점씩 더하지만,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되면 10점을 빼는 것이다. 


셋째로 답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왜’ 또는 ‘만약에’처럼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면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빠진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왜 태어난 걸까?‘처럼 답 없는 질문에 머리를 싸매기 전에 내일을 바꿀 수 있는 오늘에 집중하는 게 더 낫다. 


무엇보다 이런 부정적인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경직 지수’를 낮추라고 러시아노프는 조언한다. “변화할 수 없다.”가 아니라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점 역시 “나는 그녀에게 차였다.”가 아닌 “그녀는 나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라고 상대에게 주도권을 맡김으로써 홀가분해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매달 보고 있는 잡지의 내용입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이렇게 나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홀가분해질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됩니까?




우리의 어떤 약함도 그분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코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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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용상 조금은 신학적인 용어나 문체가 나옵니다.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이적을 행하신 후에는 이상할 정도로 그 수혜자에게 함구령을 내리신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치유를 받은 많은 이들에게 당신에 관해 말하지 말라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성서 학자들이나 그리고 그리스도론을 전공한 이들의 여러 의견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 본인 말고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개연적인 해석이나 추측일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나오는 추측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고도의 심리전략이었다는 것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마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더욱 크게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일부로 함구령을 내리셨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값싼 추측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설득력 있다고 보는 내용을 나의 생각과 함께 정리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 사람들과 끝까지 관계를 맺고자 하셨다.

철저하게 무능한 모습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알리는 것보다 구원의 선포가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사람들이 해야 할 참된 회개와 하늘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취해야 할 생각과 생활태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체험해야 할 모든 아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사이로 당신을 던지셨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 할 때, 성서 전반에 나오는 예수님의 함구령을 이해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그것은 육신의 치유가 아니라 변하지 않을 영혼의 치유였다.

즉 영원한 삶을 위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절규가 어느 대목에서도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분께서 보여주신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에서가 아닐까 싶다.

그분께서 단지 하느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면,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철저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었기에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 희망으로서 주어진다고 믿는다.


슈퍼맨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똑 같은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주어진 어려움을 이겨내는 인간 예수의 모습에서 말 그대로, 복음을 복음으로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께서는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셨고, 사람들이 치유된 힘의 원천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려는 우리의 마음과 믿음으로부터 가능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라 본다.


우리의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잘 살아야만 한다.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품고 그 안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그분께서 보여주신 우리의 삶이다. 




예수님의 신비주의인가, 예수님의 신비인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공관복음, 특히 마르코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더러운 영들에게 엄하게 이르십니다. 그렇지만 치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린 사람의 경우(7,36)는 오히려 더 널리 알립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당신이 하신 놀라운 기적을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진심일까, 아니면 고차원적인 전술일까 생각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 말로는 자신을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더 많이 알려지기를 원하기도 하고, 자신의 매력을 더 극대화하고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게 만들려고 사람들에게 신비주의 작전을 쓰는 사람도 있지요.

예수님도 이런 신비주의 작전을 쓰시는 것이 아닐까요? 단연코 아니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당신이 알려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가 알려지는 것, 사람들이 당신에게 오지 않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로 가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진정 원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진심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악령과 마주하게 되고, 악령은 예수님을 세 번, 세 가지 형태로 유혹을 하는데 그 중 두 번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의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악령이 예수님을 진짜로 유혹한 것은 식욕이나 권세욕을 채우라는 유혹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고픈 유혹을 두 번 다 물리치십니다. 그러자 악령은 마지막으로 세상의 나라와 영화를 주겠다고 유혹하는데 예수님은 이에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일갈하시며 물리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천사들의 떠받들음과 세상의 나라와 영화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에 데려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드러나서 사람들이 당신을 보느라 하느님은 보지 않고, 당신께 몰려와서는 하느님께로 가지 않으며, 이 세상에 세워질 당신의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다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니 주님께서는 지난한 과업을 수행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을 당신에게 오게 하면서도 다른 한 편, 당신에게서 떠나 하느님께로 가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와 하늘나라에 대한 당신의 복음 선포는 듣게 해야지만 들은 뒤에는 더 이상 당신께 머물지 말고 하늘나라로 떠나게 해야 합니다. 하여 세례자 요한이 자신에게 온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온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로 가는 중간 이정표이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로 가는 중간 이정표였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광야의 최초의 유혹에서 실패한 악령은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는데 마지막 때 다시 나타나서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더러운 영들은 이런 악령의 아류인 셈입니다. 자기들이 이 세상 자기 영역을 차지하고 계속 활동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활동본거지에서 쫓아내시니 예수님의 최대 약점인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예수님께서 숨기시는 것은 예수님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신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치유되어야 할 것이

무언지를 우리부터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무지한 우리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을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일깨워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삶의 방향을

잡아주기에 진실된 치유입니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진실된 기도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속이는 많은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기도가 필요한

우리의 영혼입니다.


이렇듯 기도는 성찰이며

치유입니다.


진실된 기도는

기도로 견딜 힘을 얻습니다.


성찰없는 기도는

결코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란한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침묵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치유는 치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이켜보는

사랑의 관계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쏟아내는

많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만나고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침묵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로와 사랑이 더욱 필요합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을 살다보면

분명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실망하고 절망한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안에서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나의 자존심과 나의 뜻을

조금만 더 낮추면

작은 거룻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넘쳐나는 군중을 배려하기위해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마련하십니다.

거룻배란 돛이 없는 작은 배입니다. 


이 작은 배 안에서

소외와 단절의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들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다시금 힘차게 선포하십니다. 


삶의 변화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고집스러운 우리의 자아입니다.

절망의 다른 한 곳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거룻배가 있습니다. 


작은 거룻배도 호수에 바로 서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오늘 이 소중한 하루는

우유부단해서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하루가 아니라 


작지만 거룻배같은 기도와 사랑으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성숙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삶의 해답은 거룻배를 타는 용기입니다



언젠가부터 동안(童顔)이란 말이 최고의 유행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더 어려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으며, 심지어 방송에서도 동안대회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번은 우연히 동안대회를 보게 되었는데, 아들을 스튜디오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20세인 아들이 40대의 엄마보다 더 늙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 엄마에게 대단하다고 하면서 피부 관리의 비법 등을 묻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 나이대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분이 어려 보이는 얼굴과 피부 관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지 또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얼마나 많았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동안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인 ‘늙음’에 대한 자기 방어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늙음은 곧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는데, 이 세상 안에서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자랑거리가 죽음 앞에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26세부터 늙어가며, 또 여자는 24세부터 늙어가기 시작한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넉넉하게 잡아 10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내 인생의 4분의 3이 바로 죽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죽음을 두려워하며, 또 늙음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따라서 겉으로 젊어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젊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모습이 더욱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지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전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받은 주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겉으로 보이는 인기만을 추구하셨다면 굳이 함구령을 내리실 필요가 없지요. 어쩌면 더욱 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널리 알리라고 선전해야 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인 부분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뜻에 맞게 스스로 행동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피부 관리를 잘하는 것보다는, 내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사랑을 많이 실천해서 주님의 곁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보이지는 않지만 따뜻한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채우려는 욕심보다, 주님의 사랑이 늘 부족한 내 마음이 참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내 마음에서 희망이 사라질 때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낙심시키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낙심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이해인).


작게 시작하라

어느 잡지에서 인상 깊은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실어 봅니다.

한 할머니가 칠십 대에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젊은이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낸 할머니를 취재하기 위해 세계 각자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할머니에게 물었다.

“어떻게 대륙을 가로지를 생각을 했습니까?”

“오래전부터 그런 꿈을 품었습니까?”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죠?”

할머니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부터 대륙을 횡단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성한 듯해요.”

“무슨 뜻입니까?” 하고 되묻자 할머니는 말했다.

“손자가 코 묻은 돈을 모아 제게 운동화를 선물했습니다. 친구에게 운동화를 자랑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기쁜 맘으로 새 운동화를 신고 다른 주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친구에게 손자 자랑을 한 뒤 생각했지요. ‘이번에는 저쪽 주에 사는 친구에게 가 보자. 걷다가 무릎이 아프면 택시 타고 돌아오면 되지.’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대륙을 횡단했더군요. 대륙을 가로지르겠다는 남다른 각오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시작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어떨까요?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이 큰일에도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작은 시작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시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창하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기보다, 작은 것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 모습을 통해 또 하나의 역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답변을 어느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토대로 말씀드리지요. 

“행복이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지요. 그러나 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아서, 기존에 있던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하는 욕심을 부립니다. 


저는 아침마다 운동을 합니다. 특별히 근력운동을 위해 아령을 가지고 운동을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안에서 값싼 아령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1+1” 행사입니다. 문득 욕심이 생기더군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조금 무겁다는 생각과 함께 조금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이 아령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현재 예전의 가지고 있었던 아령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롭게 구비한 아령을 가지고 편하게 운동을 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벼워서 그런지 운동이 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새로운 것을 얻었지만, 처음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약간의 편함만 있을 뿐, 운동의 효과도 그렇게 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후회를 하게 되네요. “괜히 샀다.”고…….


행복은 이렇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질 때,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필요한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했지요. 

“하나가 필요할 때에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마귀는 또 한 가지를 얻어야 한다는 유혹을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 즉 마귀는 쫓겨나며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거짓말인가요?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이며, 정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마귀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왜 그럴까요? 마귀의 의도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 자체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이것보다 하나 더 진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어 더 큰 욕심을 갖게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큰 욕심을 갖고 예수님을 쫓아다닐 것입니다. 즉, 더 큰 기적을 보려 하고, 그 체험의 당사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주님께서 행동하시는 본 뜻을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 더’라는 욕심이 생길 때,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혹시 마귀가 내 안에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지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이 안에서는 어떤 욕심도 나올 수 없습니다. 


증오심이 커지는 것은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보다 더 하찮은 사람으로 전락되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인생의 길이와 가치(토드 홉킨스 · 레이 힐버트, ‘청소부 밥’ 중에서)

의미 있는 내용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사람은 몇 년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일세.”

“하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하잖아요.”

로저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우린 인생의 길이가 그 가치와 비례한다고 배워왔거든. 하지만 길든 짧던 인간은 자신에게 정해진 시간을 사는 거야.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지. 로저, 묘지에 가면 뭐가 있나?”(중략)

“한번 들어보게. 지금 우리가 제임스 씨의 묘비를 보고 있다고만 생각해봐. 1939나 1987이라는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숫자보다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1987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삶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무엇인지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2천 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중요한 건 그 기간이 아니라네.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기간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일 지내기

김수환 신부님

박 과장은 주말이면 늘 친구들과 모여 늦게까지 술을 마십니다. 그래서 새벽에 집에 들어가 주일 아침 내내 자다가 일어나 정신을 차리면 오후입니다. 이런 까닭에 박 과장은 언제나 주일 저녁미사에 참여합니다. 김 씨 부부는 낚시에 취미를 붙이면서 밤낚시를 다니게 되었는데 토요일 특전미사에 참여하고 낚시를 떠나면 다음 날 주일 오후까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어 요즘 특전미사에만 나옵니다. 이 씨 아저씨는 아침 7시 미사에만 옵니다. 아침 첫 미사에는 신자들이 적고 성가대가 따로 없어서 미사가 보통 사십 분이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도 위와 비슷한 이유로 미사를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당 공동체란 한 가족이기에 주일에 신자 모두가 함께 같은 미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자 수, 성당 좌석 수, 신자들의 서로 다른 직업과 생활양식을 고려하여 여러 대의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토요 특전미사 역시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내기 어려운 신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많은 신자들이 편리에 따라 미사시간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펴 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주일을 지내며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과 육신을 치유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 미사로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다면, 안식일에 보여 주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 조차 율법 위반이라며 예수님을 해칠 모의를 시작한 바리사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신비

한상갑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볼 요량으로 밀려듭니다. 치유의 기적은 예나 지금이나 매력이 있고 상품가치가 큽니다. 사도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치유기적에 매혹되어 신자가 된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받게 하는 권능을 돈으로 사자고 덤빕니다.(사도 8장)

아흔네 살이신 제 어머니, 지금은 ‘철모르는 딸’이십니다. 언제나 자리에 누워 계시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지십니다. 그러다 보니 밥 먹자고 말씀드리면 늘 아침이냐고 물으십니다. 이처럼 때를 모르시니 ‘철’ 모르는 딸이 되신 겁니다.

주방이나 화장실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십니다. 하루에 한 번쯤은 침실에서 식사하십니다. 머리맡에 좌변기가 놓여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보니 곧잘 넘어지십니다. 그래서 옆구리 통증으로 고생하십니다. 빨리 가고 싶다 하십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다섯 살배기 증손녀한테는 일 분에도 서너 차례씩 몇 살이냐고 물으시다가 핀잔을 듣기도 하십니다. 그러다가도 제가 외출한다고 인사드리면 땅이 고르지 못할 테니 단장(短杖, 지팡이)을 짚고 나가라고 이르십니다. 이런 걸 지켜보는 일이 제게는 속이 상하고 힘이 듭니다. 

철을 가늠하지 못하시는 제 어머님은 다행스럽게도(?) 투덜거리고 짜증내는 저의 불효를 금방 잊으시고는 제 걱정을 하십니다. 그래서 힘들기는 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지냅니다. 이게 바로 고통의 신비인가요?



 

지치지 않고 일을 하는 법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연말연시, 저희 형제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정을 합니다.

한 해를 같이 돌아보고, 한 해를 같이 시작하는 것인데 이때 매년 말씀 사탕 뽑기를 합니다.

새 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어떤 말씀을 내리시는지 보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 같이 할 수 없기에 저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제 어머니께서 대신 뽑으시는데 올해는 이런 말씀이 제게 내렸습니다.

“그분께서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어 지칠 줄 모른다.”(이사 40,29)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에겐 새 힘이 솟습니다. 날개 치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습니다.”(이사 40,31)


세 번 뽑기 중 두 번이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었을 때 저는 움찔했습니다.

작년 저는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고 너무 힘들고 지쳐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지칩니까?

너무 많은 힘을 쏟았을 때이고 새로운 힘은 얻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힘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 힘을 전혀 소모하지 않을 수 있다면 모르지만 무엇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곧 지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힘을 얻는 법을 알고 그리고 열심히 무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힘을 얻는 몇 가지 법이 있습니다.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억지로 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시키는 건 하지 않고 늘 자기 하고픈 건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미숙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은 시킨 걸 자기가 다시 선택합니다.

적어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자세로 무얼 합니다.

다음으로는 보람되게 일을 하는 겁니다.

죽도록 일을 했는데 아무 보람이 없으면 힘이 쑥 빠지죠.

이에 비해 보람감은 우리 안에서 힘을 재생산합니다.

그러니 보람되게 일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늘 일의 보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고 실패로 끝날 수 있고, 칭찬이 아닌 비판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두려워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비판이 염려되는 것은 피하고 최소한의 것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미숙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 보람의 구조를 가집니다.

일을 하게 된 그 좋은 의도로 이미 만족하고 결과는 집착치 않으며 누구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이미 충만한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이렇게 결과와 평가에 가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것도 샘이 마르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물줄기를 마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의 샘에 대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와도, 그래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지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다 보람됩니다.


이것이 자기 보람의 구조입니다.




얼마 전 전철을 타고 어디를 가고 있는데 제 바로 앞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앳된 모습을 띄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면서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마디에 끊임없이 욕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 말들이 마치 평상시의 말인 것처럼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많은 욕을 섞어 말을 했습니다.

이 학생들이 쓰는 욕은 겉으로 보이는 앳된 모습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앳된 모습에서는 깨끗한 말, 사랑 가득한 말이 나와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저의 예상과는 달리 입에 담기에 더러운 말, 싸움을 지금 당장 해야만 할 것 같은 말이 나와서 정말 보기가 싫더군요.

하긴 저 역시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학창 시절이 잠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는 왠지 욕을 해야지만 멋있어 보이고, 친구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지요. 그렇게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자신이 추해 지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추한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던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의 입에서 추한 말만 계속 나온다면 그때에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 즉 아름답고 깨끗하고 사랑 가득한 말을 해야 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앞에 패배를 인정하는 소리이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비밀을 폭로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확실한 예수님의 신원이었고 우리 모두도 해야 할 고백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 인간들이 말하고 있지 않고,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고쳐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은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더러운 영을 통해서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의 말을 막아버리고 대신 우리 인간들의 올바른 고백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주님을 찬미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하나 되어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아리스토텔레스)

웃으며 출근하세요(‘좋은생각’ 중에서)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아침 출근길의 파리 지하철, 어두운 터널을 달리던 지하철이 갑자기 멈췄다. 당황한 시민들 머리 위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까뜨린느의 날이에요. 프랑스에서는 오늘 전통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다 아시죠? 스물다섯 살 이상의 미혼 여성은 얼른 손을 드세요. 창피해하지 마시고요. 자, 이제 멋진 미혼 남성분들은 손을 들고 계신 여자 분 옆으로 가서 연락처를 물어본 뒤 약속을 받아내세요. 모두 하셨습니까? 그럼 이제 사랑의 열차는 다시 출발합니다.”
갑작스런 정차로 짜증나고 답답했던 지하철 안이 예상치 못한 안내 방송에 웃음바다가 됐다. 매일 아침, 무료한 지하철 안을 즐거운 안내 방송으로 유쾌하게 만드는 주인공은 바로 파리 지하철 기관사 방센. 21년째 기관사로 일하는 그가 아침마다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은 지하철을 탈 때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듯 답답해하는 아내 때문이었다.
그는 날마다 그날그날의 기념일을 확인한다. 기념일에 맞추어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은 곧 파리 시민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이미 프랑스에서 유명 인사가 된 그는 동료 기관사들과 ‘지하철 2호선의 웃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도 한다.
그는 오늘도 활기차게 말한다. “성 니꼴라의 날이 밝았군요. 제 이름은 방센이지만 오늘 하루는 니꼴라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리실 때 저한테 오시면 사탕을 나눠 드립니다. 받으러 오실 거죠?”



 

진정한 사랑이라면

강인봉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마음입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고 그 사람의 손 한번 잡아보는 것이 무한한 행복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온갖 나쁜 병을 고쳐주고 어쩌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으로 가까이 가려 애를 쓰게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을 밀쳐내기도 하고 소중히 모셔야 할 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연예인을 보면 무척 피곤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 휴식도 취해야 하고 다음 일정을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한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대중을 무시할 수도 없고 또 그들이 있기에 자신의 위치가 지속됨을 잘 알기에 때로는 내키지 않아도 팬들을 위해 웃음을 짓곤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이 편하고 행복해지도록 배려하는 일일 겁니다.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하셔서 그들이 자신을 밀쳐내지 않도록, 어느 한 사람에게 편중되지 않은 공평한 가르침을 주시려 애쓰십니다. 받기보다 주는 사랑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닐지요?


얼마 전에 참석한 결혼식 주례사가 떠오릅니다. "서로 덕 보려 하지 말고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숨겨진 이기심은 없는지 잘 헤아려 볼 일입니다.

 

 



얼마 전 대형 할인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고 아주 한산하더군요. 저는 필요한 물건을 들고서 계산대에 섰습니다. 그런데 계산대 직원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워 보였습니다. 아마 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많이 힘든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늦은 시간까지 일을 참 열심히 하시네요. 정말 보기 좋아요.”

그러자 그 직원의 얼굴이 금세 화색이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웃으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 직원은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계산만 하고 그곳을 지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기분이 별로 안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 한 마디 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것을 얻게 되었지요. 물론 시간이 낭비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감사의 응답을 들었던 것은 물론, 나의 한 마디로 직원의 표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큰 기쁨도 얻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데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잘 한 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잣대로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우리들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들의 창조 목적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기 보다는 힘을 빼앗는 존재가 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여기서 힘이 되어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힘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분명히 힘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전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꿋꿋하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면서 함구령을 어기지요.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이 주님을 만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끄는 우리, 그래서 참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작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올바른 것을 찾기 전에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라도 설사 몇 번의 시도를 해야 할지라도 용기만은 잃지 말라. 실망을 맞아들일 준비는 하되 원하는 것을 포기하진 말라.(알버트 슈바이처)


승리자의 말, 실패자의 말

1. 승리자의 말

‘하면 되는 거야.’

‘나는 내 능력을 알고 있어. 무엇을 해야 되는지도 알아.’

‘내가 정말 자랑스러워.’

‘오늘은 정말 잘되었어. 내일은 좀더 잘될 거야.’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나는 결심했어.’


2. 실패자의 말

‘어떻게 되겠지, 뭐.’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야. 애써 보았자 헛일이라구.’

‘아나,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나는 잘될 턱이 없어. 언제나 마찬가지야.’

‘배워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어. 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까.’

‘난 아무 계획이 없어.’


욕심      

지금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저의 홈페이지에는 하루 평균 천 명에서 천오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원 수는 현재 8천 명을 넘어 9천 명을 향하고 있지요. 사실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했을 때는 정말로 인원이 조촐했습니다. 방문하는 이들이 몇 명 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문득 그 당시가 더 재미있었고 따뜻함을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원 수가 많아질수록 말도 많아지고 충돌도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외적인 번창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대신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홈페이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우리들이 되길 원하셨던 것은 아닐까 싶네요. 놀라운 행적과 말씀으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명예와 재물을 갖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사실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아셨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그 욕심들을 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욕심은 주님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2시도 안 되어 잠이 깼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회의를 하여 몸이 피곤한 때문인지 바로 일어나지지 않아 얼마간 잠자리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제가 보이고 제가 가엾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

어제 머리를 많이 쓰는 회의를 한 뒤의 건조함과 공허감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자기 전에 읽고 잔 오늘 복음 때문일까?

내 마음이 더 따듯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이 더 생동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느낌을 갖고 일어나 오늘 복음을 마주 하니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수도원에 매일같이 미사 드리러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강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그 새벽에 미사 드리러 오셨습니다.

저는 우리 집에서 미사를 드리니 찾아 갈 필요가 없었지요.

찾아 가는 것, 

몸이 가지만

몸이 가기 전 마음이 찾습니다.

그러니 찾아 감에는 몸과 마음의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몸이 찾아 갈 필요가 없으니 마음의 찾음이 그리 열렬하지 않습니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이 그리 뜨겁게 찾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간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강사를 찾아 가시는 신자들을 보고 좋은 강의를 들으러 가는 우리 형제들을 봐도 나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고 와서 그 느낌을 얘기하고 우리 카페에 그 영화 감상이 올라와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 영화 괜찮은 영화일 거라 생각이 들어도 굳이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작년 “워낭 소리”처럼 누가 표까지 사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가고, 또 가서 보면 감동을 받겠지만 아직까지 갈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작년 “워낭 소리”를 보고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聖事的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위대한 침묵”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튼 수도원 성당에 성체가 모셔져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찾아 어디 갈 생각이 없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축복인 것 틀림없지만 微動도 않으니 感動도 없는 것은 아닌가, 몸으로 찾지 않으니 주님을 찾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하게 되는 새벽입니다.




사랑의 거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흔히 사랑하면 가까워지고 사랑이 식으면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더 사랑하는 것일까요? 오늘 예수님은 사랑의 거리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주락적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생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 기생이 군수를 너무 사랑했던 터라 오로지 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군수에게 촛불을 주며 자신의 온 몸에 화상을 입히도록 합니다. 또 그 군수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누구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미국에서 한 때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책이 40주간 이상 베스트셀러로 올라있었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너무 사랑 (too much loving) 증후군’을 다루었던 책입니다. ‘너무 사랑 증후군’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너무 불안해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대상을 잡아두기를 원하는 증세입니다.

알코올 중독증이나 마약 중독증 환자 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합니다.

저도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손과 발을 잘라 못 움직이게 하고 집에 가두어놓는 끔찍한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랑 병은 결손가정과 혹은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불목한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 사랑이 모자랐던 사람은 커서 만끽하는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따라서 사랑하면서도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착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사랑과 집착은 거리에서 차이가 납니다. 집착은 두 사람이 꼭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고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말씀도 선포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또 옷에 손만 대면 모든 병이 고쳐지는 것을 알고 누구나 예수님을 건들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그들이 당신께 덮쳐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이기를 원치 않으시고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이 위에서 말한 사랑 병, 혹은 집착과의 차이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마치 부활한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당신을 만지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당신에게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는 있어도 이위일체는 없습니다. 즉,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둘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를 연결해 주시는 성령님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영원히 메워지지 못할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리를 성령님께서 다리로 연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떠나가지 않게 잡아놓고 둘을 하나로 엮어줍니다.

저는 사랑을 생각할 때 항상 기찻길을 생각합니다. 기찻길은 서로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만나지는 않습니다. 서로 조금씩 좁아지거나 벌어진다면 그 길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 기찻길 위에 서서 목적지를 바라보면 사실 둘은 만나지 않지만 멀리 볼수록 둘은 하나가 됩니다.

어떠한 관계든 같은 하느님을 지향하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려하지 않고 단 둘만이 서로 하나가 되려한다면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병이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둘만 서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돌려 함께 가야할 목적지를 바라봅시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서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어드립시다. 둘은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삼위로 한 몸을 이루고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의 거리는 손을 댈 수는 없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떴다 신부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절정인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 몇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신부님들이 "떴다" 하면 일대 소동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신부님들이 미사 집전이나 서품식, 서원식 같은 때 등장하면 그분들을 아는 신자들의 표정에는 즉시 설레임과 행복함이 묻어납니다. 예식이 끝나기가 바쁘게 신부님들은 인파에 둘러싸입니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 안부를 여쭙기 위해, 얼굴 한번 뵙기 위해, 손 한번 잡아보기 위해, 안수 한번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힙니다.

그런 신부님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희 같은 신참들, 찬밥들, 개털(너무 심한 표현인가요?)들은 "도대체 비결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1. 신부님들에게서는 온화한 성품, 따뜻한 마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품에 안는 부드러운 가슴, 기도와 수행, 연륜과 세월이 선물로 준 삶의 향기, 고향과도 같은 넉넉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 신부님들은 언제나 먼전 다가서셨습니다. 기다리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이름을 부르고, 먼저 안부를 묻는 예수님의 겸손함이 몸에 배어있었습니다. 

3. 신부님들의 사랑은 저희와는 달리 사심 없는 사랑, 공평한 사랑, 부담 없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폭넓은 사랑,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점점 세상에 알려지면서(특히 치유와 구마와 기적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명성) 예수님은 일약 당대의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너무도 많은 인파가 순식간에 몰려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파로 인한 대형사고의 위험을 감지하십니다. 그래서 일단 피하시기 위해 나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실 정도였습니다. 

공생활 이후 예수님의 삶은 하루하루가 무척 팍팍했던 삶으로 추정됩니다. 매일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 끊임없는 만남과 활동, 제자 교육,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은 분위기 좋은데서 향기 좋은 커피한잔 시켜놓고 만나는 기분 좋은 만남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뭔가 한가지씩 골치 아픈 "민원"을 손에 들고 해결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다가오는 영업상의 만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해결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며 사람들은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가슴아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가 귀족이든 천민이든 상관없습니다. 후원금을 많이 낼 수 있는 부자인가 아닌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내 고향 사람인가 이방인인가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한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연민의 마음,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만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스타 중에 스타인 것입니다. 




 이창걸(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나는 암을 치료하는 의사인데 명성이 높아서 많은 환자가 몰려오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암환자를 치료할 때 암 자체만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환자들은 암을 진단받는 순간부터 충격의 연속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불안·우울·두려움 때로는 분노에 아파한다. 

이런 환자들과 관계를 잘 맺으려면 환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환자가 어디에 사는지(치료를 매일 한 달 넘게 다녀야 하므로 가까운지 확인), 자녀는 몇인지, 누구와 살고 있는지, 그리고 직업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술이나 담배를 많이 했는지, 살면서 스트레스는 많지 않았는지, 그리고 종교는 무엇인지 물어본다. 이 정도면 환자의 주변 환경에 대해 대략 알 수 있다. 


이 사적인 정보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필수적이어서 어떻게 접근할지 또 치료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집이 멀거나 지방이면 병원에서 입원하거나 가까운 협력병원에 입원하도록 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경우라면 가능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사회사업실을 연결하기도 한다.

암으로 인한 불안이나 우울증이 있으면 정신과 도움을 받도록 하고, 영적으로 지쳐 있다면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성직자와 연결하거나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래서 초진 환자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방사선 치료만 하면 되지 무슨 호구조사를 꼼꼼히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다음부터는 환자와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물론 방사선 치료에 대한 설명과 검사한 사진을 일일이 보여주며 설명하다 보니 환자들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느덧 초진 환자 뒤에 기다리는 환자들이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진료실 밖 복도에 환자들이 밀려 장사진을 이룬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소리도 없고 환자들은 진료 후 나갈 때는 행복해한다. 많이 기다렸지만 자신도 충분히 설명을 듣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진료는 9시 이전에 시작해 오후 1시가 넘어 끝났다. 많은 환자를 본 것 같지만 실은 25명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2008년 1월 한 신문사에서 전국의 암환자 동호회 회원을 대상으로 친절한 암전문의를 선정한 바 있는데 전국 방사선 종양학과에서 내가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무슨 상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들이 나를 평가했다는 데서 무엇보다 큰 상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유명세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제가 담당하고 있는 ‘우리성서모임’의 연간 계획에 외부강사의 특강을 넣습니다. 3년의 교육기간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공부하면서 정해진 말씀봉사자의 강의에서 벗어나 좀 더 폭넓게 성경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강생들뿐만이 아니라 교구 신자들에게도 문을 열어놓고 특강의 기회를 공유하게 합니다. 강사가 국내에서 잘 알려진 이라면 각 본당의 여러 행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참석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게 바로 유명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리가 꽉 찹니다. 인터넷이나 광고가 없던 그 시대에, 입과 입으로 전해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파다했습니다. 그 유명세로 큰 무리가 사방에서 그분께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점점 늘어나서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치유를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에 관한 참된 이해에 이르지 못한 군중을 봅니다. 

오직 더러운 영들만이 두려움에서 터져나오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에게 침묵을 명하시는 예수님의 엄하신 명령을 귀담아들으면서 주님께서 가시는 십자가 길과 벗을 위한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성당에 처음 나온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전에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려고 구름같이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계속하지 않으시나요? 그 기적들이 지금도 계속된다면 이 성당에 발 들여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요.”

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매일같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것들을 바라볼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서 그들의 길 위에 심어놓은 꽃 한 송이, 그들에게 뿌려주는 비 한 방울조차 눈치 채지 못하더군요. 그것이 바로 기적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기적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창한 기적만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기적이며 행복인데도 우리들은 대단한 기적만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보여주었던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서 쫓아왔던 것이지요. 예수님만 따른다면 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더 이상 배고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들에게 왜 함구령을 내리실까요? 바로 사람들이 당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행하는 분,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도록 하는 분, 그래서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분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정답을 말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더러운 영이 말하는 정답에 속아서 주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보이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느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더러운 영의 말에 속지 않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광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생각하고, 그러한 친구들이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하노라.(W.B.예이츠)

세 가지의 눈(‘좋은 글’ 중에서)
우리에게는 세 가지 눈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를 보는 눈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을 보는 눈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알고,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나갈 때 건강한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나는 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는 눈입니다.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가 성장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성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보고, 그 다음 다른 사람들을 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속한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기를 수 있으며 이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거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주락적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생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 기생이 군수를 너무 사랑했던 터라 오로지 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군수에게 촛불을 주며 자신의 온 몸에 화상을 입히도록 합니다. 또 그 군수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누구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미국에서 한 때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책이 40주간 이상 베스트셀러로 올라있었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너무 사랑 (too much loving) 증후군’을 다루었던 책입니다. ‘너무 사랑 증후군’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너무 불안해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대상을 잡아두기를 원하는 증세입니다.

알코올 중독증이나 마약 중독증 환자 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합니다.

저도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손과 발을 잘라 못 움직이게 하고 집에 가두어놓는 끔찍한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랑병은 결손가정과 혹은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불목한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 사랑이 모자랐던 사람은 커서 만끽하는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따라서 사랑하면서도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착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사랑과 집착은 거리에서 차이가 납니다. 집착은 두 사람이 꼭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고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말씀도 선포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또 옷에 손만 대면 모든 병이 고쳐지는 것을 알고 누구나 예수님을 건들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그들이 당신께 덮쳐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이기를 원치 않으시고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이 위에서 말한 사랑병, 혹은 집착과의 차이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있어도 이위일체는 없습니다. 즉,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둘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녀 두 사람이 춤을 춘다고 합시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춤을 출 수 있을 때는 음악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둘은 각자의 춤을 추다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그러다가 서로 떨어져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떠나가지 않게 잡아놓고 둘을 하나로 엮어줍니다.

저는 사랑을 생각할 때 항상 기찻길을 생각합니다. 기찻길은 서로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만나지 않고 평행을 이룹니다.서로 조금씩 좁아지거나 벌어진다면 그 길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 기찻길 위에 서서 목적지를 바라보면 사실 둘은 만나지 않지만 멀리 볼수록 둘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기차가 그 위로 지나가면서 기차를 통하여 둘은 정말 한 몸이 됩니다.

어떠한 관계든 같은 하느님을 지향하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려하지 않고 단 둘만이 서로 하나가 되려한다면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병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둘만 서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돌려 함께 가야할 목적지를 바라봅시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서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어드립시다. 둘은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삼위로 한 몸을 이루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직장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혼자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드문드문 자리 잡고 앉아있던 ‘꾼’들이 그날따라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서둘러 낚싯대를 두 대 드리웠습니다. 수시로 떡밥을 갈아주며 ‘대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때마침 호수 건너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로 새떼들이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훈훈한 봄바람에는 그윽한 야생화 향기가 묻어있었습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홀로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그림 같은’ 오후였습니다.

 

호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강이나 바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호수 특유의 맛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갈릴래아 호수 역시 그랬습니다. 언젠가 직접 제 눈으로 확인했던 갈릴래아 호수,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랜 여독이 눈 녹듯이 풀릴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시나 광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초원이며,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같은 호수며, 여러 종류의 야생화며, 대추야자 나무...마음속이 다 환해졌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태와도 같은 장소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신 장소도 갈릴래아 호숫가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회했던 만남의 장소도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당연히 거룻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래아 이 지방 저 지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호숫가에 묶여있던 배에 올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군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때로 너무나 많은 인파에 피곤해지셨던 예수님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피해가셨습니다. 

언젠가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걷는 시범도 보여주셨습니다.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골란 고원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과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면 심한 기류의 이동으로 금방이라도 잡아 삼킬 듯한 큰 파도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큰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위해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셨지요.

 

오늘 마음으로나마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로 여행을 떠나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금 갈릴래아 호숫가, 푸른 풀밭 위에 앉아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오전입니다. 내 주변에는 키 작은 꽃들이 지천입니다. 때마침 호수로부터 미풍이 불어옵니다. 멀리 배 위에는 예수님께서 서계십니다. 산들 바람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들아.” 

“너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사랑, 내 귀염둥이들이란다.” 

“안심하거라. 평안하거라. 너희는 구원 받았단다” 

“이제 그만 내려놓거라. 이제 그만 떠나보내거라.”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왕은 못된 불한당을 석방해버리면 어쩌나,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 또 어쩌나 싶어 밤낮으로 걱정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집무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와 한탄했지요. 

“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로 그 순간 악마가 나타나서 이러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나로 말씀드리자면 당신한테 그런 특권을 주기는 식은 죽 먹기지.”

“딴 데 가서 알아보시구려. 악마의 속셈이라면 나도 잘 알아요. 악마는 교환 조건 없이는 아무것도 거저 내주지 않는 법이죠.”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댁한테는 정말로 특별히 예외로 해줄게.”

“왜 나한테 그런 선심을 쓴단 말이오?”

“그냥 재미삼아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난 어디까지나 악마인 만큼 순전히 심술이라고나 할 까? 그렇지만 안심하라고. 교환 조건으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원한다면 서약서를 써줄 수도 있어.”

왕은 이튿날 나랏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신하의 재판을 앞두고 있었지요. 유죄인지 무죄인지, 그 신하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에게 서약서를 받고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의 그 신하가 유죄인 것은 물론이고 들키지는 않았다뿐이지 죄 지은 신하들이 수두룩했으며, 자기가 아끼고 믿었던 측근들조차 질투와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면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왕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능력이 과연 왕을 행복하게 해주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지릅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내가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누구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베드로에게는 칭찬의 말을 하실까요?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아직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는 놀라운 능력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말들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가 행복의 길로 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숨기기도 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주시지 않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몫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이 최선이며 바로 나를 위한 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뒤에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진정한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남의 능력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내 능력만으로도 행복하기에 충분합니다.


아내가 집을 비운 5일(임소천, ‘좋은생각’ 중에서)

지난 7월에 자식들이 회갑 기념으로 제주도에 다녀오라며 여행비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딸이 시집가고 나면 모녀가 오붓하게 여행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아내와 딸을 여행 보내기로 했다. 나는 5일 동안 아내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된다며 “자유다!”하고 외쳤다.

그런데 아내가 떠난 날 밤, 골목에 들어서 우리 집을 보니 주변이 깜깜했다. 평상시 같으면 아내가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며 마당에 불을 밝혀 놨을 텐데……. 부엌에 들어가 아내가 만들어 놓고 간 삼계탕을 먹으려니 제 맛이 안 났다. 아마도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하는 아내의 잔소리가 빠져서 그런 듯했다. 잠자리에 들려고 안방에 들어서니 방이 텅 빈 듯 했다. 아내가 집에 있다면 잠자리를 보아 놓고 자리끼까지 떠다 놓았을 텐데…….

4일 뒤 날마다 벗어 놓은 옷들이 방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어 그 많은 빨래를 다 하고 나니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었다. 그날 잠자리에 누워 깨달았다. 그간 내가 집에서 해 온 일라고는 먹고 자는 일밖에 없었다. 내가 편하게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의 손길이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내 온몸을 다독거렸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 돈 벌어 온다고 목에 힘주고 큰소리만 쳤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내를 안 본 지 며칠 안 됐는데, 긴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아내가 돌아오는 날 저녁, 전철에서 내려 집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참으로 아내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거듭 드는 5일이었다.

 

 


맛과 서비스     

구경국 신부님

음식집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다른 집들은 파리를 날리는데 유독 어느 한 집만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입소문을 탄 덕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입소문을 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교통이나 통신 상황을 감안한다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기 위해 몰려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입소문이 났다 해도 일시적인 문전성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것에 걸맞은 음식 맛과 서비스가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인기도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르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가르침이라는 음식이 맛깔스럽고, 병자들까지 척척 고쳐주시는 서비스가 확실히 뒤따르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한때는 입소문을 타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모여드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이 줄어든 것을 보니 음식 맛과 서비스 중 하나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음식이 예수님의 시대와는 달리 요즈음의 세태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워봅니다만 아무래도 서비스의 부족, 다시 말해서 교회의 모든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삶이 그다지 복음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악령에 대한 나의 생각

김현숙 수녀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악령이 소리 질렀다. 악령의 속셈은 무엇일까?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복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당연하다고, 그분을 기능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을 사랑하고 희생해야 하고, 선생이니까 당연히 학생을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삶이 그렇게 당연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철든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이다.


때로는 미사를 소홀히 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강론으로 신자들을 야단치려는 사제도 있고, 수업 준비는 제대로 하지 않고 학생들의 잘못만 들추며 적당히 수업 시간을 넘기려는 교사도 있다.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자녀의 성질만 나쁘게 버려놓는 부모도 있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는 돈벌이 의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역할을 순간순간 성실하게 잘해 내는 것만큼 큰 성인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닐까!


철들면서 부모님이 힘겨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주신 것이 감사하고, 나의 자매들이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수도생활의 완덕을 지향하며 도반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고맙고,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매일매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동료 교사들이 고맙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신앙의 절대적 가치와 권위를 지켜나가며 세속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신영성의 도전 앞에서 서로 고뇌하면서 일치하려는 사제들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하는 세상을 거슬러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상을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있어 감사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마다하지 않았듯이 수많은 악령의 잡다한 외침에 흔들림 없이 묵묵히 예수님만을 바라볼 줄 아는 하느님의 아들딸이 있음에 감사드린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돈보스코의 이상향, 프란치스코 드 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저희 수도회의 주보성인이신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일명: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던 제 자신을 깊이 반성하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앙리 코위아니에 저, 안응렬 역, 돈보스코미디어, 2001)를 서고에서 꺼내들었습니다.


책을 펴드는 순간,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의 분량에 기가 많이 꺾였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돈보스코 성인께서 왜 그리도 이 성인을 존경했었고, 또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주보성인으로까지 모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던 저는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생애 각 단계마다 널려있었던 숱한 걸림돌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더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좌절과 낙담의 순간에도 꾸준히 희망했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그의 낙천성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낙천성은 돈보스코에 이르러 예방교육의 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의 온유와 겸손, 성공적인 사도직, 그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그의 낙천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비록 고통스럽고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잘 되어 나가리라고 믿는 그의 낙천성은 후에 돈보스코의 생애 안에 철저히 재현됩니다.


1593년, 26세 되던 해 프란치스코 드 살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네시의 사제로 서품됩니다. 안네시의 수석사제로 열심히 활동하던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오는데, 샤블레 지방의 선교책임자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샤블레 지방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칼빈 교도들의 땅이 된 곳이었습니다.

샤블레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드 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오래 전 이 지역은 칼빈 교도들에 의해 접수되었고, 전체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 수는 백 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일부 개신교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 사이에 나타난 그를 우상숭배자나 거짓 예언자로 몰아세우곤 했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첫 번째 강론은 어느 예배당에서 개신교 목사가 일차로 설교를 마치고 나간 뒤에 시작되었는데, 잔뜩 겁을 집어먹어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던 몇 명의 천주교 신자들뿐이었고, 그 뒤로 호기심에 찬 몇 명의 칼빈교도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모두 합해서 10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한겨울에도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선교를 위해 눈이 내린 시골길을 끝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동상에 걸린 그의 발은 자주 부어터지곤 했었는데, 그로 인한 통증이 너무 심해 어떤 날은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귀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서 돈보스코 낙천주의의 뿌리를 읽습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피로감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냉대와 급진적인 개신교도들의 위협으로 가득 찬 그 험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희망을 않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샤블레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불가능은 없다고 여기며, 언젠가 자신의 노력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알찬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있어 낙관주의는 곤란한 상황 앞에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지’하고 포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윽고 8년 후에는 샤블레 지역 주민 거의 모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한 뒤, 그 이후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는 것, 그것이 프란치스코  드 살의 낙관주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도 낙천적인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막중한 삶의 십자가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그 이면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을 읽고자 노력합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처럼.


인간이기에 매일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시련이나 좌절, 실패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꾸준히 나아갑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처럼.  


  


이동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이 몰려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등 당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중풍병자, 나병환자, 마귀 들린 자 등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이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다니고 또 고쳐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과 어울려 다니시고 먹고 마시는 등의 당시 사회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헐벗고 굶주린 자를 보살피시고,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해 주시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또 자주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갈 것을 약속하고 다짐하였습니다. 모두를 사랑으로 보살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이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보살피고 살아갑니다. 또한 어디에서건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힘들 때 치유자이시며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탁합시다.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예수께 믿음으로 의탁합시다. 주님은 언제나 지치고 쓰러진 우리를 위로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그분을 향해 눈을 돌려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김상조 신부님

오늘복음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 왔다고 합니다. 요르단강 건너편 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넘어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나를 넘어 서야 하고, 내가 정해놓은 경계를 허물어야 하고 나의 원칙을 허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경계를 허물지 않고서는 경계선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요르단강 건너편 사람들까지도 예수님께 몰려드는 상황은 좋은 징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안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라도 한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셨다”그리고 악령들까지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모두 잘못된 혹은 왜곡된 추종의 모습들입니다. 병이 고쳐지지 않으면 언제라도 예수님을 욕하면서 떠날 사람들이고, 악령들도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해 줌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높은 신분과 그에 걸맞는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라는 유혹을 건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저런 사정 때문에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보호하시고 일정한 거리를 두시면서, 악령들린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아주 엄중하게 타이르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몰려오는 군중들을 피하는 모습은 아주 이례적이고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고, 그래서 어떤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그분처럼 사는 것이 비록 힘들지라도 참된 가치가 있고 그것만이 바른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까?


그분처럼 산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 처럼 대중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가치있고 바른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병을 고치고 또 배고픔을 해결하고, 그래서 복음서 어딘가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거절하시고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울 때,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의 응답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잘못된 혹은 지나친 과욕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청이든지 하느님이 못들어 줄 청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비록 기도하고 청하는 나에게는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려면 덩달아서 변해야 할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 하느님도 전혀 손쓸 여지가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악령들처럼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실제 그 속마음은 그러니 당신의 그 능력을 가지고 나를 위해 봉사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추종, 거짓된 진실, 그래서 수고의 삶을 거부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의 반듯한 제자, 반듯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도 그분처럼 인간적인 인기나 인간적인 위로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갑곶성지에서 지금 있는 간석4동 성당으로 옮긴 지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었습니다. 한 달 넘는 시간, 본당에 적응하느라 정말로 정신없이 보낸 것 같습니다. 그 좋아하는 자전거도 동네에서만 잠깐 탈 뿐, 먼 거리를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어제 오후에는 여유가 좀 생기더군요. 그래서 우리 성당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습니다. 소강당, 교리실, 주방, 그리고 화장실…….

화장실을 보는 순간, 너무나 조그맣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 화장실은 소변기 두 개와 대변기 하나, 여자 화장실은 대변기 두 개. 신자 수 오천 명이 넘는 곳의 화장실이 이렇게 작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누구도 화장실이 적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가 전에 있었던 갑곶성지의 남자 화장실은 소변기 한 개와 대변기 하나, 여자 화장실은 대변기 세 개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갑곶성지에는 소속되어 있는 신자도 없습니다. 단지 성지순례 오는 순례객들뿐입니다. 그렇다고 많이 오지도 않습니다. 하루에 많이 와봐야 500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제게 항상 건의합니다.

“화장실이 너무 적어요.”

그래서 나중에 여자 화장실 세 개와 남자 화장실 하나를 더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더군요. 그때 제가 가졌던 생각은 화장실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봐야 이 불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욕구는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제가 있는 성당은 화장실을 만들 공간 자체가 없습니다. 250평밖에 되지 않는 공간 중에서 어디에 화장실을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실을 아시는 교우들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만족하면서 살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욕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적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항상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과 말씀으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많이 늘었지요. 이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까지 합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높은 명예와 온갖 재물을 준다고 하는데도 이를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저 공짜로 준다는데 말이지요. 저 같으면 마지못한 척 하면서 받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오히려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아셨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시지요.

욕심은 우리에게 완벽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이것만 채워지면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주님께서 매순간 주시는 행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한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주님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만큼은 돈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좋은 글' 중에서)
용서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라 합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참 된 사랑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복은 보복을 낳는 법입니다.

확실히 상대방을 보복하는 방법은
그를 용서하는 겁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처지가 되어 살아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 속 아니 꿈속에까지
들어 가봐야 할겁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설령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실수를 용서해주세요.

나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자상한 마음

이철구 신부님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으시고, 하시는 일마다 신비롭게 보였기 때문에 많은 군중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래서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군중을 일일이 다 만나주시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한마디 말씀이라도 전해주기 위해 제자들을 시켜 배 한 척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찾아 온 군중을 만나시려는 예수님의 따스하고 자상한 마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의 사목생활은 예수님처럼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찾아오는 신자들을 피하기도 했고, 교우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준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진정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자상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유 루시아 수녀님

예수님의 명성이 알려져서 군중이 많이 모여듭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기적의 사목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려고, 또 그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옵니다. 명성이 절정에 달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계속 당신의 일을 하셨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시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던 장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은총을 계속 받습니다.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나는 스무 살이 넘어 세례와 견진을 받았고 은총을 계속 받으며 늘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최의정 신부님

여러분도 ‘물부족국가’란 말을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국제연합 국제인구행동연구소(PAI)에서는, 전세계 국가를 조사해 물이 부족한 나라를 분류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물부족 국가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연간 강수량이 세계 평균 강수량보다 조금 많은 편이긴 하지만, 국토의 70%가 급경사로 된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게다가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되어 있어서 한철에 집중적으로 내린 비가 그대로 바다로 흘러가는 한편,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1인당 강수량은 세계 평균의 12%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물부족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물이 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돈을 물쓰듯 쓴다’는 말도 이제는 옛날 말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돈을 주고 물을 사서 마신다는 말이 옛날에는 우스개 소리같았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듯이, 돈을 주고 공기를 사서 마신다는 말도, 지금은 우스개 소리같겠지만, 현실이 될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물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 몸의 70%를 구성할 만큼, 물은 중요한 존재이고, 사람이 출생할 때에도, 어머니 태 속의 양수에 들어 있다가 출생합니다. 

또한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를 살펴보면, 모두 물이 풍부한 강을 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은 건강과 생명, 풍요로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말씀에도 물은 생명과 풍요로움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47장에는 성전에서 샘솟는 물이 강(江)이 되어 흘러내리면,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치고, 

짠 사해(死海)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에제 47, 8-9)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서 그 장면을 상상해본다면, 예수님께로 몰려든 군중이 여러지방에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를 기점으로 해서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는 남쪽 지방입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은 동쪽 지방입니다. 그리고 띠로와 시돈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그야말로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갈릴래아에서도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또한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死海)의 차이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살아있는 호수이고, 주변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반면, 사해(死海)는 문자 그대로 죽은 호수이고,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사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생명의 호수 갈릴래아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호숫가로 가시어 거룻배 한 척을 띄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병고에 시달리다 못해 사방에서 몰려와서, 생명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주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입니다. 

생명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간절히 찾던 군중들처럼, 한때, 우리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로써 새 생명을 주셨고,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러한 생명을 나눠야겠습니다. 

성전에서 샘솟는 물이 흘러 흘러 강을 이루고 사해의 물마저 단물로 바꾸듯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흘러들어가야 할 생명수가 되는 일. 바로 세례성사로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의 몫이요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는 교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바리사이들과의 쓸 데 없는 논쟁에 예수님께서는 신물이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를 떠나십니다. 회당을 떠나 한적한 갈릴래아 호숫가로 물러나십니다.


제자들 생각에 ‘이제 좀 쉴 수 가 있겠구나, 여유가 생기는 구나’ 했었는데, 웬걸, 도시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호숫가로 밀려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호숫가 주변은 거의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라(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옛 유다왕국),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 이두매아 사람들,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 북서쪽에 위치한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군중의 특징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의 은혜를 입고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밀고 난리였습니다. 그러다보면 ‘상주 참사’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자 일행은 무척 당황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전장치 겸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십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척을 구해보라고 이르십니다. 거룻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밀어 육지에서 약간 떨어트려놓으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 가라앉힌 상태에서 차분하게 치유활동을 재개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 차 성당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길 바랍니다.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영하 20도 가까이 되는 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 문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운 날씨에도, 그 신 새벽에 집을 나서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참 구도자의 얼굴을 만납니다.


발걸음 옮기기조차 힘겨운 분들, 100미터 걷기 위해 10분 이상 걸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당 한번 왔다 가면 진이 다 빠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찾아오십니다.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제들과 수도자들, 봉사자들은 그 옛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사람들이 원 없이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마셔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길 바랍니다.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말끔히 치유 받고 춤을 추며 떠나가던 사람들처럼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영혼 역시 깨끗이 치유되어 기쁜 얼굴로 교회를 나서기를 바랍니다.

 



박종주 신부님

혹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고향에 가셔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하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명절이면 기차를 타고 부모님의 고향에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린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를 드리면서 저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를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은 제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누구 아들입니다’라고 말을 하면 그제야 사람들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면 ‘아이구 고놈 속 빼닮았네’라는 정감어린 시골말투와 함께 제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던, 어쩌면 오늘날은 잊어져가는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처음에는 저를 모르셨지만 저의 부모님의 이름을 통하여 제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누구라는 것이 부모님의 이름을 통하여 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 오늘 복음을 보면 악령들이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소개 됩니다. 마치 우리가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듯이, 오늘 예수께서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불림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아들이라는 단어는 직계관계만을 뜻하지 않고 어떤 집단에 예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아들’, ‘바빌로니아의 아들(에제 23,17)’, ‘시온의 아들(시편 149,2)’, ‘예언자들의 아들(2열왕 2,5)’, ‘사람의 아들(에제 2,1)’ 등과 같은 표현을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아들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평화의 아들(루까 10,6)’, ‘빛의 아들(루까 16,8)’ 등과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지요. 이처럼 오늘 복음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특성과 그분께 속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칭호는 예수님에게만 붙여진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왕들도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하였고, 로마의 아우구스티노 황제 이후에는 모든 황제들의 비문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붙여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들이 사용한 칭호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즉 오늘 예수님께 붙여진 칭호는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 당신이 물리쳐야 할 적으로부터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적대 세력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본질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적대세력을 통하여 인정 받으셨기에 우리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드러냅니다. 일상 속에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잊지 말며 우리도 주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모습을 본받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 합시다. 아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 !!!

이찬홍 신부님

복음에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며 띠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많이 몰려왔다”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가르침과 여러 가지 놀라운 행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연중 1. 2주간을 살펴보아도,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시고, 가나안 여인을 낫게 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참된 회개를 불러일으키시고, 나자렛 회당에서는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이외에도, 베싸이다의 소경, 성전에서의 앉은뱅이, 회당에서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는가 하면, “에파타”라는 말로 귀머거리를 치유해 주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치유의 기적들과 가르침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로 몰려왔습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과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요약하고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의 전체적인 삶을...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은 많고, 실제로 그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인 마르 3, 7-12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 이 복음 말씀을 연상케 하는 사건은 오늘날 여러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루르드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발현 이후 오늘날 년 간 400만 명이 방문합니다.

루르드라는 그 촌구석에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타고 오고, 또다시 기차타고 오는 것입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1882년부터 1905년까지 총 2,000여 건의 기적적인 치유가 발생했으며 그 이후로도 현재까지 기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의,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의 놀라운 손길과 그에 따른 변화를 목격하기 위해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의 핵심은 후반부 곧, 함구령을 내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고 거기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면서도 그것을 당신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드러내는 광고 효과는 엄청날 텐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슴 속에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러하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칫 소문만 무성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의 변화, 치유에만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모든 효과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에서 오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얻어 누리는 결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행렬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매 시간 마다 이곳저곳에서 미사가 이어집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 순간, 미사가 있고, 그 미사에서 이루어지는 말씀과 성체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그 말씀과 성체라는 두 양식으로 우리는 양육되고 하느님께 나아가기에 기적과 치유가 바로 이곳,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놀라운 신비에... 말로 다 표현 못할 은총과 사랑의 나눔에 함께 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기적, 상처받은 마음의 반응     

이중섭 신부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많은 기적을 행하여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야 했던 상황은 인간적인 가능성이 고갈된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신앙을 고백할 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처럼 기적 이야기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상대방에게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은 비로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곧바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나? 이 사람이 기적의 은혜를 입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만일 이 사람을 고쳐주면 이 사람이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당신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놔둘 수 없는 그분의 상처받은 마음의 즉각적 반응이었고, 아울러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건의 표징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인기를 끌기 위한 것도 아니요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하느님의 나라가 이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행복` 없인 못살아요

-문화순 수녀님(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오늘날 현대인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어디 재계발 지역은 없는지, 몸짱을 만드는 곳은 없는지, 넘쳐나는 찜질방과 온천장·헬스 클럽·게임방 등이 현대인들이 모여드는 실상을 잘 말해준다. 

작은 본당에서 잠시 도와주던 때다. 매일 성체조배 오시는 한 자매님이 하루는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그 자매님은 글자를 깨칠 수 없는 장애인이라고 했다. 친정에서는 불편 없이 지냈지만 시집가서 얼마 후 글자를 모르는 것이 들통나 남편의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중에 첫아이를 낳았는데 뇌성마비 장애아였다. 그러자 시집 식구들도 대놓고 구박하기 시작했다. 자매님은 갈 곳이 없어 성당을 찾았고 세례를 받았는데 성당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데 둘째, 셋째, 넷째까지도 뇌성마비 아이를 낳았고 냉대는 더욱 심해져 결국 집에서 쫓겨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수녀님, 저는 첫아이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얻었고, 둘째아이 때문에 사랑의 열매를 얻었고, 셋째아이 때문에 겸손의 열매를 얻었고, 넷째아이 때문에 인내의 열매를 얻어 너무 기뻐요”라고 했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장애 아이 넷을 파출부하면서 키웠는데 아이들이 일고여덟 살이 되면 그냥 천당으로 갔단다. “수녀님, 제가 키울 능력이 없으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더군요” 하면서 그뒤로 딸 셋을 더 두었는데 착한 딸들이라고 얼굴이 환해진다. 막내를 가졌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낙태시키라고 했지만 숨어숨어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낳았다면서 “지금 그 아이 없으면 저는 못살아요” 한다. 재롱을 얼마나 떠는지 ‘행복’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자매님은 “수녀님, 저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 너무 좋아요” 한다. 만약 하느님이 보였다면 돈 있고 힘있고 잘난 사람들이 먼저 성당을 다 메워서 자기같이 글자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사람은 성당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란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니 늘 성당이 비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가 가고 싶은 때 성당에 들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었다.

어느 곳이나 성당이 텅텅 비어 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비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인가? 그 옛날 예수님 주위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도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병을 고치고 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군중들은 “우리가 식인종인가?” 하며 모두 떠나갔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가? 진정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살아 계신 그분 곁으로 가는가, 아니면 이익이 생기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생명과 거리가 먼 곳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

1. 오늘의 루가 복음은 불쌍한 병자와 마귀들린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고 전해 줍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신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엘리트층들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이들은 죄인, 창녀,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쿰란 공동체 수도자들의 회칙도 보면 그 당시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대했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 미친 자, 무지한 자, 마음이 헷갈리는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귀머거리, 철부지 등 이러한 자들은 그 누구도 공동체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인간들, 곧 죄인, 창녀, 세리,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고,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이들이 당신께로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를 위한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신은 예수님이 당신이 자라난 나자렛 마을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다음의 대목을 펴서 읽으신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2. 특히 예수님은 죄인들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것을 원하십니다. 

예1)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오점은 영구히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을 다시 찾아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자의 마음(루가 15,4-7), 잃었던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주인의 마음(루가 15,8-10),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루가 15,11-32)은 주님께서 우리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3. 이러한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복음을 전해들은 군중들은 앞 다투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복음을 전해도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뭘까요?

예2) 윌리엄 바클레이(영국의 성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 곧 교리에 설복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는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누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미 영세를 받은 교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랑의 표양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또 교우가 아닌 여러분도 비록 이미 영세 받은 교우들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더라도 어차피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처음부터 죄인들의 공동체였음을 이해하시어 주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이회진 신부님-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온갖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칭찬을 받아 자신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죠.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상황은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예수님 곁으로 몰려듭니다.

그래서 그분을 서로 밀쳐댈려고 하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서로 예수님께 은총과 축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명성에 이용하려고도, 어떤 이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어떤 이는 육체적, 물질적 이득을 취하는데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이리저리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발견됩니다.

성당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수도자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제라는 이름으로 신앙인의 삶을 흔들어 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서 떨어져 서 계십니다.

그들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당신을 흔드는 것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 그들로부터 떨어져 당신의 삶이 오직 하느님의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군중 속의 고독이 아버지 하느님 앞에 겸손하신 그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흔들어 대고 올려주고 추겨주면 자신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잊고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어 착각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주님은 당신의 말없는 겸손으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것이고, 나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이며, 나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 되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 이름이 아니라면 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저의 부끄러운 교만을 살피시고 용서하소서. 아멘”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 이기양 신부님-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에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고,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이며,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옵니다. 더러운 악령들까지도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피하시고, 악령들에게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3,12)고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알리지 말라는 명령은 여기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후 병자들에게 자기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마르1,34) 


또 마르코 1장 40절 이하에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보이도록 하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왜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하려 하시고 또 악령들에게는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 온 나라에 소문이 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알리지 말 것을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싶은 병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지려고 들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많은 군중들이 찾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 


또 수없는 기적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하시고는 그들을 떠나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백성들이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빵에만 매달릴 것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이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여러 기적을 목격했지만 기적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기대로 시작한 접근은 끝까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요. 구름같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결국 예수님은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망하여 흩어져 버립니다. 이러한 한계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극복되고, 성령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성당을 처음 찾을 때는 하느님을 알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호기심과 막연한 기대심으로 출발해서 차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적인 호기심과 기대는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것에 실망하거나 게을러져서 냉담을 하게 되지요. 


때로 믿음보다 인간적인 것만을 좇아 바리사이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군중들보다도 더 무섭게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서려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인간적인 것보다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사이들이나 어리석은 유다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함구령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기대나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분은 본당 신부도, 수녀도, 사목위원도 아니고 또 직책이나 재력, 신분도 아닌 오로지 하느님 한 분뿐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강영구 신부님(2003-01-23)-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을 때에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에돔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이며 띠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몰려왔다. ..더러운 악령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소리질렀다.(마르 3,7-8.11)


온 세상을 두루 밝히는 큰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이 갈릴래아, 유다, 예루살렘, 에돔과 요르단강 건너편, 띠로와 시돈까지 방방곡곡에 두루 비치고 있다. 

생명의 빛, 자비의 빛, 희망의 빛, 진리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추자 수많은 사람들이 빛을 향해 나왔다. 그리고 그 따뜻함과 밝음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은 치유를 받아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생명의 불이 꺼져가던 사람들은 새 생명의 씨앗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살던 사람들도 희망을 불꽃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로 인해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빛의 근원이 어디일까? 예수 자신에게서 그 빛이 나오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의 빛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한 사람 예수, 그의 존재의 근거는 하느님에게 있다. 하느님이 아니면 예수는 없다. 

온전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으로 충만한 예수,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예수는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다. 

태양이 있어서 밤 하늘에 밝게 떠오르는 달처럼, 하느님의 빛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고자 하는 사람이다. 스승 예수와 같이 자신을 비워 하느님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그래서 예수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一明)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 왔다>(마르3,7-12)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띠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7-8절)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는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몰려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 모여든 지방을 보면 모두 7개지방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는 남쪽 지방이고 요르단 건너편은 동쪽 지방이며 띠로와 시돈 근처는 북쪽이며 갈리래아 지방은 남쪽 지방이다. 7개 지역은 완전한 숫자이며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지역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몰려 온 사람들은 어느 한 지방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온 사람들이며 이들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이 왜 몰려왔을까? 그냥 몰려 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많이 몰려왔다.”고 하였다. 무엇을 보았는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

 

 예수님의 존재는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활동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런 예수님의 활기찬 활동을 보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새로운 비젼을 보았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존재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시다. 예수님의 활동은 희망을 주고 생명력을 불러 일으키고 당신께로 몰려 오게 하는 동기를 유발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만이 모든 이에게 똑같은 희망과 느낌을 주고 삶에 자극을 준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 오는가? 인간은 누구나 병자들이거나 더러운 영이 들린 존재익 때문이다. 자신이 병자가 아니고 더러운 영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니 그것은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중풍병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누구나 병자이고 더러운 영이 들렸기 때문에 그것을 치유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하신 예수님께 몰려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주 작은 공동체이다. 마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존재이다. 그 공동체에 비해 그분께 몰려 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작은 공동체는 병든 이들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하고 필요한 공동체이다. 그 어디에서도 고쳐줄 수 없는 병을 고쳐주어야 한다. 

 

 이 작은 공동의 한 중앙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앞으로 건설될 하느님의 나라의 모퉁이 돌이시다. 그 위에 작은 공동체가 건설될 것이며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는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켜주어야 할 공동체이고  그것이 그들의 일이고 사명이다.

 

 오늘날 이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병든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어야 하고 또 그 사람들을 고쳐주는 곳이어야 한다. 과연 오늘 우리 교회는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오게 하는 능력 있고 매력적인 교회인가? 병든 이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이 교회에 와서 치유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병들고 더러운 영이 들린 이 세상 한 가운데에 존재하지만 아무러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병든 이들이 치유 받기 위해 왔다가 아무런 치유의 능력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가고 왔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돌린다.

 

 오늘 날 얼마나 교회에 나오는가? 보통 3분의 1정도이다. 그러니까 1000명 신자라면 300명 정도 나온다. 그것도 수도권이니까 그렇지 시골 본당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도 나이 드신 분들이고 젊은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가 이런 사정인데도 뚜렷한 대책이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고 특별한 대책도 없다.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병든 이들은 다른 곳을 찾아가고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로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기본적인 인간의 모습을 상실한 병든 이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에 대한 책임은 교회에도 있다.

 

과연 오늘 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가?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가? 과연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몰려올 만큼 매력적인 힘을 갖고 있는가? 오늘 사람들의 하느님은 교회가 전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아파트나 증권 또는 부동산에 만들어내는 하느님이 그들의 하느님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리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가기 때문이다. 

나의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나는 어디로 몰려가야 하는가?     

 

교회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커다란 비젼은 가지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또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양떼를 인도해야할 사제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할 교회의 생명이라고 하는 수도자들조차도 자신의 사명을 다 하고 있지 못하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자들은 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하는데 복음을 읽지 않는다.


 오늘 우리 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지도 못하고 보여주지 못하고 인도해주지도 못하는 교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순절 특강이다 대림절 특강이다 하고 장을 마련해놓으면 신자들이 얼마나 올까 하는 것부터 걱정해야할 처지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배부른지 모른다.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하는 이나 말을 듣는 이가 힘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가야할 곳은 다시 예수님께로 몰려 가야 한다.

 

 그분에게서 치유받고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고 희망을 발견해야한다. 즉 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어느 기업에서 신입 사원을 뽑는 시험을 치렀습니다.

면접이 있는 날, 면접관들은 다른 회사에서 보통 묻는 질문을 한 뒤 그들에게 상자를 하나씩 주었지요. 그 상자는 단단한 끈을 사용해 수십 개의 매듭으로 묶여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상자를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은 이 회사에 입사할 수 없습니다.”

지원자들은 열심히 매듭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지요. 워낙 단단히 묶어 있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주일 뒤 두 명의 합격자가 발표되었고, 합격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어떻게 매듭을 풀었는지를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어요.

“저는 도저히 시간 안에 풀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상자를 부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상자 안에 ‘당신은 합격입니다’라고 쓰인 카드가 있더군요.”

나머지 한 사람도 말했습니다.

“끝까지 노력했지만 시간 안에 매듭을 풀지 못했어요. 그래서 면접은 떨어져도 좋으니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만 가르쳐 달라고 했지요. 그러자 상자를 가져가라고 주더군요. 집에 돌아와서 열어보니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다가가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끈기와 인내를 갖춘 두 사람만이 이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 안에서 개인의 재능과 운만을 바라볼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더불어 운이 남들보다 좋아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 안에서의 일반적인 목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요?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앞선 회사에서 요구하는 사람처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끈기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을 쫓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당신의 능력이라면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쉽게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는 그들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낮은 자리로 갈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대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믿고 당신을 따른다면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성인성녀들이 그분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따랐던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요? 이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님까지도 깜짝 놀랄만한 끈기와 인내로 그분께 다가설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시지 않을까요?


“축하합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합격하셨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맙시다.


유도창시자 지고로 가노의 평생학습 자세('태도를 바꾸면 성공이 보인다' 중에서)

가노는 배우고자 하는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82년 그는 그때까지 거의 소멸해 버린 유술이라는 무도를 찾아내어 좋은 것만 택하고 위험한 것은 배제시켰습니다. 그는 여기에다 새로운 기술을 첨가함으로써 정신 수양과 육체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유도를 완성했습니다.

유도는 오늘날 일본 경찰의 기본본 무술이 되었으며 동양 무술로는 국제 올림픽 대회의 정식 종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학생들이 스승의 유언을 듣기위해 모여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묻을 때 내 몸에 검은 띠를 매지 마라. 반드시 하얀 띠를 매어 묻어야 한다."

무도에서 하얀 띠는 초보자, 곧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 견습생의 상징입니다. 가노는 이처럼 계속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세로 그의 생을 일관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저의 홈페이지는 2002년 7월부터 시작한 두 번째 형태의 홈페이지입니다. 첫 번째 홈페이지는 저의 없는 디자인 감각으로 아주 이상한 형태로 만들었는데요, 그래도 참 재미있는 시간들을 홈페이지에서 보낼 수 있었지요. 물론 회원 숫자도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던 중에 지금의 홈페이지를 제공해주는 업체를 알게 되었고, 2002년 7월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형태로 쭉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늘어난 회원수가 4천명을 넘어 이제 5천명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네요.


그런데 이렇게 회원 수가 많아질수록 저는 부담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처음에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원했던 사랑이 가득한 홈페이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홈페이지라는 지향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서운했던 것은 제가 처음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만났던 분들을 이제는 만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분들의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 홈페이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한 따뜻함도 줄었기 때문에 한분씩 떠났던 것은 아니었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홈페이지를 통해서 Daum 카페로의 이전을 공고했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카페에 이런 식의 글을 남기시네요.


“신부님, 더욱 더 번성해서, Daum 카페 중에서 제1의 카페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말도 많아지고 싸움도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그렇게 외적인 번창은 욕심도 가져오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적인 성장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공동체,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를 원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그러한 우리들이 되길 원했던 것은 아닐까 싶네요.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과 말씀으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명예와 재물을 갖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사실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아셨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그 욕심들을 버리도록 하기 위함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욕심이 있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만큼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누려도 되지만 딱 하나만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 딱 하나까지도 취하려는 욕심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딱 하나만하지 말아라.”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들의 원조인 아담과 하와처럼 그 하나마저도 취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저 역시 이제 홈페이지에 대한 욕심, 제1의 홈페이지가 되겠다는 욕심을 접습니다. 대신 작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홈페이지를 지향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해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지지 말아야 할 “딱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아보시고, 그것을 갖지 말도록 합시다.


여유를 만드는 방법(‘빙점’, 미우라아야꼬 여사의 젊은 시절 이야기)

어떤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동네에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정직하고 친절하게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점점 많아졌고, 물건이 달리게 되어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놓으며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하여 바쁘게 장사를 하고 있는 부인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이제 손님이 거의 없대. 저 건너의 가게는 아예 곧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더군.”

이 말을 듣고 그 부인은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줄여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물건은 건너편 가게 가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장사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많아진 부인은 좋아하던 독서에 빠질 수 있었고,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욕심을 부리면 여유로워 질 수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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