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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3월 5일 (자)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3.05|조회수853 목록 댓글 0

제1독서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 에스테르기의 말씀입니다. 4,17(12).17(14)-17(16).17(23)-17(25)

그 무렵 17(12)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였다.

17(14)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17(15)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17(16) 저는 날 때부터 저의 가문에서 들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모든 조상들 가운데에서 저희 선조들을 영원한 재산으로 받아들이시고

약속하신 바를 채워 주셨음을 들었습니다.

17(23)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신들의 임금님, 모든 권세의 지배자시여!

17(24)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17(25)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7-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는 기도를 바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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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의 주님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와 달라며 기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됩니다. 또한 “누구든지” 그렇게 청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청하는 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것을 청하고 유익한 것을 청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청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악한 것이라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에서 잘 알려진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은 당시 유명한 라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해석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청하는 이의 자세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행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복음이 전하는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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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실 것이고, 찾는 것을 내어 주실 것이며, 두드리는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 간청하는 에스테르 왕비도 하느님께 의탁하며 구원을 청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사실,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없고,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은 없습니다. 하물며 세상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빵이 아니라 돌을, 생선이 아니라 뱀을 청하곤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을 청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내어 주실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채워 주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 잘못된 청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차라리 우리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침묵 속에 계신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실 뿐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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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대 유다교에서는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마라.’라는 계명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더 적극적인 형태로 이끄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기존 계명은 ‘악을 소극적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지요. 반면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악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남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은 나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법이 요구하는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는 대로, 내가 먼저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닙니까?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사랑의 계명, 황금률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용서받고 싶은 만큼 용서해 주고, 다른 이의 칭찬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칭찬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바라는 대로 남을 돕고, 남으로부터 이해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오해를 겪겠습니까? 사랑을 실천할 힘과 방법을 주시도록 주님께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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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시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구히 기도하라고 권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청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훌륭한 믿음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하느님께 이런저런 청원을 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길을 떠나기 전에, 가끔씩 “운전자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소서.”라는 식의 기도를 하다 보면, ‘문제는 사람들이지!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언제나 그들이 안전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신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어떤 것을 청하고 구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선물임을 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또는 내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께 청원하는 기도는 감사하는 기도와 일맥상통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선의 근원이 오직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선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아버지의 선하심을 믿으며,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을 주실 때에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를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는 “주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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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나라 아기의 7.3%가 선천성 기형아로 태어나는데, 이는 6년 전에 비해 2.4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일곱 살까지 본다면 아토피와 자폐,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 다운 증후군, 틱, 저능 등은 전체 30%에 육박한다. 아동들의 생리가 점점 빨라지고 키도 커진다. 신혼부부 열 쌍 중 한 쌍꼴로 불임을 호소하고 있다. 몸의 재앙이다.

고기와 빵, 과자와 콜라 같은 탄산음료까지 모든 식품을 추적하면 놀랍게도 옥수수, 콩, 밀 3대 작물이 원료임을 알게 된다. 농부 한 명이 수십만 평의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제초제를 견뎌 내는 ‘유전자 변형 작물’(GMO) 콩과 옥수수 개량종을 만들었다. 그것이 식용유 따위의 식자재로 방부제가 첨가되어 유통되며, 축산 사료가 되어 성장 촉진제와 항생제와 함께 소·돼지·닭 고기, 우유로 전 세계에 공급된다. 학교 급식에는 늘 튀김이 오르고, 과자와 음료를 입에 달고 살며, 치킨과 맥주를 이른바 ‘치맥’이라 부르며 신이 내린 음식이라 한다. ‘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를 주기보다는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하는 것이 덜 해로울 것이다.’ 

전자레인지 또한 분자 구조를 충돌케 하는 원리로서 아주 나쁜 도구다. 여러 번의 변조 과정으로 식탁에 오른 음식은 체내에 ‘환경 호르몬’(내분비 교란 물질)으로 작용하는 것이니, 암과 기형성 질환이 없을 수 없다. 지난 6월의 국제 연합(유엔) 총회의 기조연설에서는 ‘정크 푸드’(즉석식품)도 담배처럼 규제하자고 했다. 결혼을 앞둔 이들은 몸의 섭생 정화 기간을 가질 일이다. 아기가 무슨 죄가 있는가? 부모가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어떻게 독이 든 음식을 주고 전갈과 뱀을 먹으라고 할 수 있는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전에 깨끗한 음식부터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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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를 시작한 지도 이레가 지났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다짐한 결심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때가 되었습니다.

'회개'라는 사순 시기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성찰해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히 사순 시기와 대림 시기에 회개에 대하여 자주 듣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회개의 다짐을 정례적이고 뻔한 일처럼, 또는 습관적인 잘못을 고치려는 순차적인 노력의 반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꼭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면 회개의 참뜻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회개의 실천은 아닌 게 아니라 평온한 일상에서 행하는 평범한 일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회개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절박함의 인식과 삶의 전환에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의 동포들을 구하려는 에스테르 왕비의 간절한 기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쉬지 않고 끈질기고 절박하게 주님께 청하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회개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그리스 말 '메타노이아'(metanoia)는 생각을 철저하게 바꾸고 돌아선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식의 전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식은 시작일 뿐, 삶의 방식이, 더 나아가 인격이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유다인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그의 책 『인간의 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돌아섬이란 언제나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이기심의 미궁에 빠졌던 사람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 즉 바로 그 사람이 하기로 하느님이 결정하셨던 독특한 그 일을 성취하는 길을 찾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양심을 깨우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기에 온전한 삶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회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더없는 절박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도 삶을 변화시키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를 실천할 것을 거듭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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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는 쉽게 이러한 생각을 떠올릴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러나 오늘 복음은 ‘기도를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생각하라는 데에 주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꼬마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용돈을 받을 마음으로 심부름할 때마다 그것을 공책에 꼬박꼬박 적어 두었습니다. “구두닦이 천 원, 설거지 천 원, 청소 2천 원 …….” 그렇게 하고서 나중에 엄마에게 이른바 청구서를 내놓았습니다. 엄마는 그것을 보고서 빙긋이 미소 띠며 방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 엄마는 메모지 하나를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너를 내 배 속에서 열 달 간 배고 있었을 때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 백만 원, 너를 낳을 때 들어갔던 출산비 오십만 원, 지금까지 너를 먹이고 키우는 데 들어간 돈 3천만 원 …….” 이런 식으로 열거되면서 맨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합계는 0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기도를 늘 들어주신다.’ 또는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앞의 아이의 계산법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며 자식을 키우듯,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 깊고 높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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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동양 고전인 『논어』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제자인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을 한마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공자는 “너의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과 같게 하여라(其恕乎). 곧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대답합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내 마음을 헤아리듯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황금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적이며 포괄적인 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도 하고 싶어 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은 그도 하기 싫어합니다. 그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배려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가끔 지하철을 탈 때 자리 때문에 다투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비극입니다.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 그도 나에게 그렇게 합니다. 배려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 주고 세상을 살맛나게 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날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그를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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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가 된 동갑내기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보다 젊은 여자와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하느님께 서른 살쯤 어린 여자와 살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정말로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부인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인이 젊어진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흔 살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돈 나와라, 뚝딱!” 하면 돈이 나오는 요술 방망이가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를 하지 않던 신자들도 어떤 간절한 바람이 생기거나 갑자기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리다가 금방 응답이 없으면 이내 실망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은 설령 기도의 응답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하더라도, 마치 사탕을 받아 든 아이와 같은 유아적 신앙 태도를 보입니다.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성숙한 기도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오늘 복음 말씀을 ‘주님께서 너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가 주님께 해 드려라.’고 바꾸면 됩니다. 참된 기도는 이렇게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에,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주님께 드리는 청원 기도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내어 맡기는 기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럴 때 기도는 평화롭고 행복한 느낌을 줍니다. 기도가 어렵고 힘든 이유는 어린아이처럼 달라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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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수없이 들어 온 말씀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닫힌 문’은 너무나 많습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입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관계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 될는지요? 주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부모님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그런 자세가 문을 두드리는 ‘첫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빠, 빵 좀 주세요!” 하는데, “빵 좋아하네, 돌이나 받아라.” 이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애정의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외면하실 주님은 아니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초’에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수도자가 성체 조배 차례가 되어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앞 조의 수사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수사는 감실을 향해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자고 있는 이 형제를 용서하소서!” 그러자, 감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좀, 조용히 해라. 네가 나까지 깨우는구나. 나도 자고 있단다.”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좋게 봅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걸 아는 자녀는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간섭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늘 좋게 보십니다.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또 ‘문을 두드리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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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아들을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고생하며 재산을 모았건만 아들은 일을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께 말합니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재산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답합니다. “자기 힘으로 돈을 벌기 전에는 재산을 주지 않을 작정이오.”

어머니는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께는 ‘일해서 번 돈’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며칠 후 아들이 나타납니다. “아버지,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없이 화로 속에 던져 버립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깜짝 놀랐지만 말을 못합니다. 

얼마 뒤 아들은 어머니의 돈으로 또다시 말합니다. “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불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남편을 이해하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네 힘으로 돈을 벌어 오너라. 미안하구나.”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아들은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고는 험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아들은 어렵게 번 돈을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또다시 화로 속에 던져 버립니다. 아들은 깜짝 놀라며 뜨거운 화로 속에 손을 넣어 돈을 꺼냅니다.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이 돈을 버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아들의 눈물에 아버지는 손을 잡고 말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 내 아들을 찾은 것 같구나!”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을 갖추면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니 언제나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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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계시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잘되기만을 바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필요한 것과 구하는 것을 결코 모른 체하지 않으시며, 자녀들이 미처 구하지 못하는 은총도 내려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아무리 미천한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한이 없는데, 하물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모른 척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거나 하느님께서 고통만 안겨 주실 뿐 돌보아 주지 않으신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웃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의 손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배우자, 자식 그리고 부모님 또 친한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황금률,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자매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최고의 선물이 그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시는 자매님을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자신을 향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엄마는 다 가식적이야!!”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자녀를 위한 사랑, 남편을 향한 사랑, 또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 남들보다 적극적으로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식’이라는 딸의 비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딸의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모든 행동이 가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즉,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얼굴에 드러납니다. 기쁘지 않으니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가식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행복하게 또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아무리 나를 위해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도 얼굴에 싫은 표정이 드러난다면 상대방은 불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기쁘게 행동하면서 상대를 위해 신경 써준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행복하고 기쁘게 만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먼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다가가는 이에게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바로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자신이 먼저임을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마음으로도 기쁘게 상대를 향해 최고의 선물인 사랑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지금 나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다(공자, 논어 중에서)

 

'나'에게서 벗어나기.

어느 마을에 한 형제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말았습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일을 할 수 없었고 식사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형제님마저 무슨 일을 겪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마을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형제님을 위로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고 영혼은 영원하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형제님은 이 지혜로운 사람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이 지혜로운 사람이 큰 슬픔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이 키우던 개가 죽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앞서 아들을 잃었던 형제님이 지혜롭다는 이 사람을 찾아가 말합니다.

“제게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고 영혼은 영원하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렇게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지혜로운 사람은 말합니다.

“그 죽음과 이 죽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죽은 아들은 당신 아들이지만, 이 개는 제 개이거든요.”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것은 늘 ‘나’입니다. 이 ‘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고통에서도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웃에게 주려는 마음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소원을 한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다 보니 여행을 못 했는데 세계 일주를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네요.”

그러자 천사가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아봤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천사는 당황하며 “그동안 두 분이 열심히 살아서 드리는 혜택인데, 소원을 안 들어드릴 수도 없고…. 아무튼, 그렇게 원하신다면 이루어 드려야겠지만…. 그러나 참 이상한 소원도 다 있네요.”라면서 남편을 향해 날개를 폈습니다.

그런데 젊고 예쁜 여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폭삭 늙어 90세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청할 수도 있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고 청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함께 여행 갈 것을 청했는데 남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청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청하는 것이 저주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고 임언기 신부가 간암 말기로 임종이 임박한 오랜 냉담 신자에게 종부성사를 주러 갔을 때, 그 환자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 죄 없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냥 죄 없는 것 같아도 용서만 청하면 사제가 알아서 다 해 주는데도 끝까지 청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평소에 남에게 무언가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여겨야 무언가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복음 바로 위에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이미 남에게 아무 것도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받을 자세가 안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는 말로 끝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며 미운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성체와 같은 거룩한 것을 주어도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주지 않는 편이 낫다는 뜻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마귀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왜 청하면 바로 용서받고 구원받는데도 아무것도 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옥에서까지 양심이 그 가책으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양심은 “너도 안 주면서, 뭘 청하냐?”라고 말합니다. 청하면 다 받을 수 있는데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양심상 청하지 못하고 그러다 지옥까지 가면서도 구원을 바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시다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황금률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청하라고 하시며 남에게 해 주라고 결론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하기 위해서는 나도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 이웃에게 나의 것을 주려는 마음을 성장시키지 않으면 지옥문 앞에서 구원을 청할 수조차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음식점에 가면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옵니다. 메뉴를 보면서 가격도 보고, 음식의 종류도 보고, 함께 한 사람과 메뉴를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꼼꼼하게 메뉴를 보고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격을 먼저 생각하고 음식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이 정하는 음식을 따라서 정합니다. 저는 꼼꼼하게 메뉴를 보고 결정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정한 걸 따라서 정하곤 합니다. 생각보다 맛있는 경우도 있고,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일하면서 평화신문이 영적인 메뉴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꼼꼼하게 읽으면서 신앙에 도움을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관심 있는 부분만 읽으면서 신앙에 도움을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바쁘기 때문에 평화신문이라는 영적인 메뉴는 보지만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좀 더 좋은 메뉴를 준비해서 많은 분들에게 영적인 기쁨을 주고 싶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따끈따끈한 신문이 나옵니다. 2시간 정도면 신문의 모든 내용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목체험, 강론, 독자투고,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교황님 소식, 교회 소식, 영성 등 다양한 메뉴가 있습니다.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읽는 메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입니다. 4월에 사도행전의 무대인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뉴욕에서 가브리엘 행전을 쓰고 싶어서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한 곳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이교도에게 끌려가기도 했고,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곳곳에서 천사들을 만났고, 협조자를 만났습니다. 이창훈 소장님의 사도행전 이야기를 읽으면서 2000년 전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입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저의 집안의 이야기였습니다. 순교자들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뎌진 저의 신앙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형제가 순교하기도 했고, 아버지와 아들이 순교하기도 했고, 부부가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스스로 체포되기도 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도행전 이야기와 순교자들의 약전은 제게 용기를 주었고, 제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고, 하루를 닫는 자물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황금율을 살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아침에 일어나 아침기도를 한다. 하루를 살도록 선물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시작한다. 청원의 기도를 드리며 오늘을 떠올린다. 무슨 기도가 더 필요한가?

아침기도가 끝나면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지향이다. 세계와 나라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나라의 지도자와 애쓰는 이들을 기억하며 안녕을 청한다. 사람들의 필요한 은혜를 청하고 교회와 가정을 위해 지향을 둔다. 특별히 병고의 환우들을 위해 기도한다. 세상을 떠난이도 기억한다.

나는 오늘 드린 미사의 은혜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 누구도 내가 비난하지 않고 올바름을 살며 내가 남에게 바라듯 나도 이웃이 나에게 바라는대로 살겠다는 소박한 마음의 다짐을 한다. 이 다짐은 하느님을 향한 다짐이고 이웃을 위한 다짐이 될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밤이 찾아오면 저녁기도를 드린다. 하느님께 감사함을 드리고 만났던 모든이를 떠올리며 기도를 한다. 오늘 아침에 나는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두드렸다. 저녁에 하루를 마감하고 돌아본다. 모든 것을 내가 받고 얻고 열린 하루가 되었음을 보고 놀란다. 행복하게 살았구나! 하루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저녁 산책 길에 성당 터에서 멈춰서 기도를 드렸다. 그림은 초등 주일학생들이 신축성당을 꿈꾸며 그린 작품이라고 본당신부님이 말해 주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나에게 어느 누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청하면 주고 찾으면 얻게 도와주고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과 나의 관계는 엄청난 신뢰와 믿음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관계 안에서 그 정도의 관계가 되려고 한다면 나도 어느 누구에게 조금이라도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간관계 안에서도 어느 누가 주는 것도 없이 받기만을 바랄 때 더 이상 주고 싶지 않아집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 지극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분께 대한 믿음도 없이 주셔도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저 욕심만을 채우려고 할 때는 상황 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남이 바라는 것을 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선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사람답고 평등하게 살려면 하늘원천을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불쌍하고 약한 이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자유주의가 탄생.

링컨미국대통령의 of- by- for the people 연설에서 민주주의가 정립.

예수님의 지도자상은 하늘 봉사자이고 링컨의 지도자상은 지상 봉사자.


예수님의 하늘봉사 뜻을 링컨이 지상봉사자에게 맞게 적용했다봅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는 하늘과 지상의 봉사정신으로 살자는 방침입니다.

독재주의나 사회주의 공산주의들은 현세적 권력이라 절대 반대합니다.


인류가 사람답고 평등하게 살려면 그 조직 운영의 원천은 하늘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라 느끼신다면 참 훌륭한 분이죠.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목요일>(2020. 3. 5. 목)(마태 7,7-12)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고 찾는 그것을 반드시 주실 것이고, 너희가 두드리는 그 문을 반드시 열어주실 것이다.” 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것을 받으려면 청하고, 찾아라. 또 아버지께서 열어주시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문을 두드려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다.”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앞의 말씀과 이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그것을 청하여라. 청하는 사람만 그것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그것을 찾아라. 찾는 사람만 그것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열어주시는 그 문을 두드려라. 문을 두드리는 사람만 그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청하지 않으면 주시는 것도 못 받게 됩니다.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일이 ‘먼저’이고 아버지 께서 주시는 일이 ‘나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이 ‘먼저’이고, 우리가 청해서 받는 일이 ‘나중’입니다. 영성체가 좋은 예입니다. 사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성체를 들고 제단에서 내려갑니다. 그 성체를 받아먹으려면 사제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성체를 주는 일이 ‘먼저’이고, 성체를 받는 일이 ‘나중’입니다. 만일에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그것은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렇게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몸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라면 사제가 찾아가서 성체를 줍니다. 그 경우에도 영성체를 하겠다는 능동적인 의사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문’의 경우에는, 아버지께서는 이미 하늘나라 문의 자물쇠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잠긴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잠금 장치가 풀려 있는 그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예수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고, 어떻든 ‘좁은 문’이라고 해도 ‘이미 열려 있는 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 받고 있는가?

청하지 않아서 못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꾸준히 성실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혹시 혼자 있을 때는 기도하지 않고,

성당에서 미사 참례할 때만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심으로 하는 말과 습관적으로 하는 말은 분명히 다르고, 듣는 쪽에서 그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때와 습관적으로 할 때의 차이, 또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때와 습관적으로 할 때의 차이......

우리는 자신이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마태 7,9-11)”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아버지께 청하려면 ‘가장 좋은 것’을 청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이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 이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도 하느님의 응답의 한 방식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을 못 받을 때, 침묵만 지키시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의 간청이 올바른지를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때’가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 받기를 바라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가 가장 좋은 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법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이 “내가 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받고 싶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1) 우리는 ‘나에게만’ 좋은 것을 하느님께 청하면 안 되고, ‘모두에게’ 좋은 것을 청해야 합니다.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을 청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드러내는 일이고, ‘죄’입니다.


2)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남에게 베푸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하나만을 위한 생활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생활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믿음’ 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는 것이 곧 사랑을 받는 것이다.” 라는 말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 9)

곽승룡 비오 신부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기도는 우리를 땅에서 하느님의 삶으로 인도하며,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청하도록 초대하신다. 곧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좋고 완전하며 거룩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그것을 먼저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에 그렇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지만 구체적으로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청해야 한다. 청원기도의 ABC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중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의로움 곧 그분의 뜻을 청하면 된다는 의미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3)

신비가 안젤로 실레시오는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너무나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누구도 아버지 하느님께 청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청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난처해하고, 주저하고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신다.




주님의 사람, 기도의 전사戰士 -간절한, 항구한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밤에 일어나 가장 먼저 일별해보는 인터넷 뉴스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요즘은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함으로 본연의 인성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종파를 뛰어넘어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의 사람, 기도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성인 교황들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미 시성이 된 성인이고 제가 볼 때 살아 계신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성인입니다. 성인 교황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기도의 사람, 기도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성염 대사의 서울신문 인터뷰 기사중 일부를 나눕니다.


-“3인3색, 매력을 지닌 교황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연극인이다. 연설이나 표정이 연극인다운 제스처가 있다. 베네딕도 16세는 원칙주의적 학자다. 교황청내 검찰청격인 신앙교리성에서 수십년간 근무해온 분이라 표정이 딱딱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신부이자 교구장으로서 계속 사람을 상대하고 사귀어 온 분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눈을 쳐다 보면 경청하고 공감하는 공감능력자였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참 매력적이고 위대한 각자 고유의 향기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주님의 사람, 기도의 전사 성인 교황들입니다. 참으로 기도할수록 주님을 닮아 주님의 마음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몇가지 감동적인 일화를 더 소개합니다.


-“교황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다. ‘폰티’는 ‘다리’, ‘펙스’는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교황은 즉위 직후 바티칸 주재 외교관들을 만나 ‘제가 하는 일은 다리를 놓는 일이다. 사람을 만나게 하고 화해하게 하고 격려하게 하는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면 제가 한다.’고 했다.”-


얼마나 고귀한 의미의 폰티펙스 교황인지요. 하느님과 인간의 다리를 놓은 예수님이요 기도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은 물론 이웃과도 다리를 놓는 평화와 화해의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인 비서가 들려준 일화다. 교황이 즉위한지 3일후 이 비서가 교황에게 구두를 닦아 주겠다며 달라고 하자 교황은 ‘평생 내 손으로 구두를 닦았는데, 평생 해온 내 직업을 뺏는 게 말이 되는가?’라며 윗트있게 거부했다고 한다.”-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상-하원 의장의 만찬 초대에 선약이 있다고 불참한 뒤 현지 교회에서 마련한 노숙자와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교황과의 만찬을 기대했던 정-재계 인사들은 ‘있는 놈들도 천국 가자’라고 비아냥댔지만, 교황은 ‘가난한 사람을 만져 보면 그리스도의 살결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모두가 기도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주님을 닮아 주님의 마음을 지닙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교황청 피정 첫날 주제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세, 하느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모범-기도의 모델’, 말그대로 기도의 사람, 주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환경위기는 우리 인간의 공통적 뿌리, ‘3a’즉 1.arrogance(교만), 2.apathy(무감각), 2.avarice(탐욕)에 닿아있다 합니다. ‘무지(無知;ignorance)’에 뿌리를 둔 이 세 악에 대한 답은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종파를 불문하고 사람됨에 필수 의무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기도의 사람, 바로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하지 않아 악마가, 괴물이, 흉물이, 야수가,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처럼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참으로 한결같아야 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런 이가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입니다. 참으로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있어 참 좋은 영적 감수성도, 영적 탄력도, 탄력 좋은 믿음의 삶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는지요!


물론 내 원하는 대로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해야 합니다. 기도에 간절하고 항구하다 보면 결국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하게 됩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모범은 제1독서의 에스텔입니다. 죽음의 위기가 임박했을 때 기도는 더욱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선종시 마지막 임종어의 기도는 무엇이겠는지요? 언젠가 갑자기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이 아니라 평상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할수 뿐이 없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에스텔의 기도가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위해, 영혼이 살기위해, 참사람으로 살기위해 숨쉬듯이, 밥먹듯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깨끗한 마음이요 깨어 있는 삶에 깨달음입니다. 작금의 모두가 괴물들이 되어가는 혼란의 시대, 광기의 시대, 분열의 시대는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답도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이래야 자랑스런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로 살 수 있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평생 영적전투에 ‘영원한 현역’의 영적 전사, 기도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간절하고 항구한 당신의 사람, 기도의 전사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청하는 것을 나누고 청하여라< 마탸, 7/7-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을 창해도 이미 하느님이 주시지 않셨으면 아무것도 청하여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태초부터 하늘과 땅을 만들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마시고 생각을 표현하게 하고 멀리 있는 것을 가지려갈 수 있도록 발을 주시고 손으로 취하고 만들어 내는 능력을 주셨기에 각자 앞에 이런 자료로 만드는 능력을 주셨으니 청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출애 급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에짚트를 떠날 때 피스카 제를 각집에서 준비하면서 가족의수가 적으면 또 다른 가정과 합하여 색이 양을 버치고 나누어 먹으라 하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나 메추리를 보내시며 나누어 먹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나에게 아니고 저희라 하셨습니다.

인류가 굶어 죽는 것은 식양이 모자라서 어니고 관리를 잘 못해서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대구지역이 5000명이상 확진 자 나오면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지만 타 지역에서 도우면 가능합니다. 이런 말 경기도 도지사가 우리도 어려운데 대구는 못 도와준 다는 말듣고 우리 민족은 아직도 필요한 것을 청하면서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며 사는 습성이 없든지 미련해서 역병이 대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 문제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같이 우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손을 놓고 있는 한 주님에게 아무리 청해도 받지 못합니다. 청하는 손과 받는 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손과 나누는 손이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자기 주머니 체우려고 마스크를 매점매석 하면서 주님 마스크를 주세요 기도해도 완고한 사람들 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김 연아가 세계 올림픽에서 금매 달을 받는 날 시작할 때 성호경을 놓으면서 경기를 하였지만 그가 이미 받은 정신력 눈과 귀 몸 동작 하나하나 습득하지 못하였으면 기도만 가지고 얻을 수 없는 영광입니다.

어떤 이가 저에게 “신부님 필요한 것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해들이고 싶어서요.” 하지만 저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러나 상담자에게 사막한 수도원에 오시어 필요한 것 작은 것이라도 주고 싶지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받으면 공동체에 내어주면 모두가 행복해합니다. 청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더 풍요로워 집니다. 오늘 복음은 열절이 간구하여 받으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구하는 사람에게 주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필요한 만금 이웃에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해결사가 되어주도록 기도합니다.




<청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만을 바랍니다

오직 당신으로 말미암아

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게

아무 것도 주지 마소서


당신께서 주신 것에

마음이 홀려

당신을 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허나

당신께서 제게

주고픈 것이 있다면

마음껏 주소서


다만

제 안에 쌓여 썩지 않고

저를 통해서

벗들에게 나눠지도록

저를 나날이 허무소서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청원 기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는 에스터르의 기도 일부분입니다. 성경 속 아름다운 기도들 중 하나로 꼽히지요. 당시 유다인들이 재상 하만의 음모로 모두 몰살될 위험에 처합니다. 유다인 혈통을 밝히지 않은 채 왕비 자리에 발탁된 에스테르는 양부 모르도카이의 요구로 목숨을 걸고 크세르크세스 임금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이 기도는 임금의 허락 없이 어전에 드는 모험을 감행하기 전에 드린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 4,17-25).


사람은 때때로,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이고 더군다나 신앙 안에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 조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에스 4,17-14).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25).


독실한 유다 처녀로 교육받으며 성장한 덕에, 유배지에서 이방인 임금의 왕비로 살아가면서도 에스테르의 신관은 이스라엘 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일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그러한 "당신 자신을 알리시라고"(에스 4,17-23 참조) 요청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청하는 자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마태 7,7).


우리는 이처럼 적극적으로 아버지께 다가가야 합니다. 하지만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 전에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파악해야겠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그것을 주시려는 하느님과 우리의 주파수가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좋은 것을 더 많이"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우리의 행복이기에 무얼 더 챙겨 주고 도와주어야 할지 늘 살피십니다. 우리 자신보다 더 잘 보고 아시지요.


문제는 우리가 그분이 주신 "좋은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줄곧 졸라대지요. 우리가 이기적이고 시야가 좁은데다 성급해서 그렇습니다. 유일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고작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자기 영광이나 청한다면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준비하고 계신 그분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에서 배웁시다. 그녀의 기도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절박함에서 나왔습니다. 기도는 나와 이웃이 서로 별개의 섬이 아니라 함께 연결된 유기체임을 아는 데서 더 절실해지고 진정성 넘칩니다.


청하는 내용의 수혜자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할 때 하느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내게 좋은 것들은 이미 주님의 선물 보따리 속에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가 자기를 잊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주님 앞에 데려갈 적마다 아버지의 흡족한 축복과 함께 풀려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축복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축복해 주는 건 어떨까요? 그들과 함께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겁니다. 신앙, 성장, 건강, 행복, 평화, 일치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위해 빌어 주면 좋겠지요. 그들과 더불어 받을 겁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바가 주님 마음과 한결 가까워져 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위한 바람에 묻혀버린 나의 바람을 용케 아시는 분이십니다.


벗님이 잘 하고 계시듯 서로를 위한 기도가 더욱 절실한 요즘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위해 더 열렬히 주님께 달아드는 하루를 엮어갑시다.




그것이 정말 당신의 바람인가요?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님

아들이 아무리 청해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바라는 그대로 해주려니 아버지로서 차마 해줄 수 없는 것이 있을 테니까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는 먼저 그 바람이 진정 자신의 내면 깊은 데서 오는 것인지, 또 그 바람은 선한 것인지, 최소한 악하지는 않은지 의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온전히 진실한 자신으로 서 있기란 간단치 않아 보입니다. 진짜 ‘나’를, 그리고 나의 바람을 발견하고,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까지 헛갈리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거짓 뉴스들이 넘쳐납니다.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사람이 하느님을, 사람이 다른 생명을 진실하게 대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그 안에서도 선하고도 진실한 바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요즘 매일 코로나19로 사망한 분들의 영혼과 코로나19로 투병하는 이들, 코로나19 퇴치를 위해 수고하는 의료진과 봉사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 문득 음압병실에서 치료받으시는 분들이 떠올랐고, 그 안에서 혹시라도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과 그저 누워있어야 하는 답답함 등으로 얼마나 힘겨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분들이라는 느낌에 기도의 지향과 깊이를 더해 봅니다.


오늘 독서에서 에스테르 왕비는 자기 민족의 집단 살해 위협에 대한 급박하고 절박한 마음을 싣어 주님께 간구합니다.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저는 날 때부터 저의 가문에서 들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모든 조상들 가운데에서 저희 선조들을 영원한 재산으로 받아들이시고 약속하신 바를 채워 주셨음을 들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신들의 임금님, 모든 권세의 지배자시여!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12].17[14]-17[16].17[23]-17[25])


내일이면 자신과 자신의 민족들이 이민족들에 의해 살해당해 몰살당할 위기에 놓인 에스테르 왕비의 간절한 기도가 오늘 음압격리병실에서 신음하는 환우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의료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기도할 수 밖에 없는 환우들의 처지를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청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11) 모두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도록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대구대교구가 한티 피정의 집을 대구시민들에게 생활치료센터로 제공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함께하고 나누면서 오늘의 이 위기를 함께 이겨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모두가 주님이시다.

최민석 신부님

그날그날 일기 쓰듯이 맘속에 떠오른 영성일기를 적은 것이 햇수로 3년쯤 되어 지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언제나 사랑의 끈으로 나를 붙잡아 주시고 지금껏 살게 해 주셨다고 나는 믿는다.


“주님, 저로 하여금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이게 내가 평상시에 자주 드리는 기도다. 깨어나서 보니 나는 이미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게 해달라고 한 기도이니 이 얼마나 철없는 기도인가. 두 발로 땅을 걷는 참된 은총 가운데 살면서 물 위로 걷기를 꿈꾸었던 게 나다.

밤중에 깨어나지 않고 잠자는 것, 목이 말라 물마시고,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는 것, 때가 되어 배설하는 것, 아침 햇살의 손짓을 알아듣고 산책하는 것, 새벽 성경 읽으면서 밝아 오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 이 모두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었음을 비로소 짐작한다. 고맙고 놀라운 기적이다.


오늘 산책하면서 ‘모두가 주님이시다’는 깨달음이 내게 왔다. 자연과 내가 관념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로, 하나인 몸이라는 알아차림으로 온 것이다. 주님 때문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 주님 당신 때문인 것이다. 당신이 한 분이신데, 내가 어찌 하나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냥 이것이다. 그렇다. 이 모두가 주님이시다.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막힘이 곧 통함이라는 것을 터득하는 학습 과정이다. 다음 한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할지 몰라 허둥댈 때 당신은 뜻밖의 길을 열어 주시고,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 당신은 생각도 못한 곳으로 데려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하시어 새로운 일을 풀어 가신 것이다.

아아, 주님! 제가 저에게 ‘아니’라고 ‘여기까지’라고, ‘그만’이라고 말할 때마다 당신은 ‘그렇다’고 ‘이제부터’라고, ‘다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주님은 나를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으셨고, 그때마다 그런 게 거기 있을 줄도 몰랐던 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내 발로 궁지를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거기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 건 더욱 아니었다. 길이 막힌 것도 주님이 하신 일이요 문이 열린 것도 주님이시다. 내가 한 것은 실상 아무것도 없으니 당신이 내 안에서 이루신 것이다.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없다. 실상을 알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족하다는 것은 생각일 뿐이다. 무엇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 하나라고 빠졌다면 그렇게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부족함이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으로 괜한 괴로움을 만들어 보태지 말라는 얘기다. 모든 것은 아름답다. 전체가 아름다운데 아름답지 않는 부분이 있겠는가. 지금 이것이다. 더 갈 곳이 없는 종점이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지금 서 있는 그 곳이 부분이며 전체다.

바야흐로 비로소 숨바꼭질이 끝났다. 여태껏, 나는 밖에 계신 당신을 찾다가 이제 비로소 안에 계신 당신을 만난 것이다. 지금까지, 나 아닌 당신을 만났다. 거짓은 아니었다. 이제 비로소 나인 당신을 모시니 모두가 주님이시다. 눈에 보이는 형상들 속에서 은밀하게 일하시는 당신이 보인다.

먼 길 걸고 또 걸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까지 왔다. 세상에 당신 아닌 다른 당신 없다. 천상천하 오직 당신 홀로 존귀하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저 나무와 꽃과 산과 들, 저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이 모두 주님이시다.

그 동안 내가 내 맘대로 그린 당신의 고결한 초상에 눈이 가려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거다. 복음서에 새겨진 당신 발자국 들여다보느라고 내 곁에 나란히 서 계신 당신 손을 잡아드리지 못했다. 모두가 당신이시다. 그리고 나 또한 어김없는 당신의 아들이다.




'도리'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오 7장 7~12)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얻을것이라는 말씀에 그동안 얼마나 청하기만 했나요?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사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겁니다.

받는데는 익숙하고 베푸는데는 인색한 마음이라면 그 마음 고쳐야 축복이 들어 옵니다.

재난이 닦쳐서 모두 힘든때 이웃의 아픔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안전만 위해 사들이기에 급급하다면 하늘을 앞당겨 사는 사람이 보통 사람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더 어려운 이에게 선뜻 내줄 용기'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문을 두드리고, 청하고 찾는 것은 바로 위의 말씀을 깨닫아 행동으로 옳길 때까지 하라는 말씀이다. 바로 남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매일 매일 아침에 한 시간씩 하는 기도가 바로 이런 여정이다. 계속 나를 쳐다 보면서 끈기 있게 하는 것이다. 이제 나를 조금 편하게 쳐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계속 매일 아침 두드리면 남이 바라는 대로 해 줄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희망한다.

언제가는 그런 은총이 하늘에서 내려 올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혹시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 브루스 놀란은 평범한 방송국 리포터로, 입담도 좋고 보도를 재미있게 잘 해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익살스런 리포터 역할보다는 뉴스의 앵커맨 자리를 동경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루스는 큰 사건을 보도할 기회를 잡는데, 갑자기 자신의 라이벌인 에반 백스터가 등장해 그 대신 앵커 자리를 꿰차게 되고, 이에 격분한 그는 생방송 도중 수많은 시청자들 앞에서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 일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된 그는 집에 가던 길에 건달들에게 몰매를 맞고, 차가 엉망이 되는 등 온갖 불행한 일을 다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연이어 닥쳐온 불행들에 절망한 브루스는 '이게 모두 하느님이 나를 싫어하는 탓'이라며 하늘에 마구 삿대질을 해대던 중 하느님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기가 휴가를 가야 한다면서 브루스에게 모든 권능을 주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는 졸지에 전지전능(All-Mighty)한 존재가 되어 일주일간 하느님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된 것입니다. 그 일주일 간의 체험을 통해 그는 세상 모든 이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해 주어야 하는 하느님의 업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이 청하는 모든 기도를 그들이 원하는대로 다 들어주었다가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복권 1등에 당첨되게 해 달라는 수만명의 사람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었더니 정작 당첨금액이 만원도 되지 않는 헤프닝이 벌어졌고, 이에 화가 난 사람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지켜본 브루스는 왜 하느님께서 그동안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셨는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참 많은 것들을 청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게 해 달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게 해 달라고, 내 남편이 다른 사람을 제치고 진급하게 해 달라고, 내 자녀가 다른 애들보다 공부를 더 잘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하느님께 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면 저 사람은 피해를 입어야 하고, 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면 이 사람이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바치는 청원기도 중에 많은 것들이 이렇게 하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청원을 절대 외면하지 않고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욕심과 바램을 다 그대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청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를 달라고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라고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살아갑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누군가는 그 무엇을 잃어야 하고,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면 누군가는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 바라는 우리들 각자의 청원이 각자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서로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기게 되고,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간절히 원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을 난처하게 하는 기도,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기도보다는 하느님께 기뻐하실 기도, '나' 자신의 개인적 욕심보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없이는

우리모두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뜨거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이시간입니다.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기도는 생활의

실천이며 생명의

풍요로운

깊이입니다.


기도 안에서

생명의

길을 찾습니다.


넘치게 주시는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

기도의 길이

됩니다.


살아계신 그분을

보게 됩니다.


우리자신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자신이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신앙인들은

우리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로

이 어려움을

잘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우리모두 기도합시다.


시작도 마침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모임에 갔는데 갑작스럽게 강의를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며칠 뒤가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지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 할 수 없다고 말을 하자, “신부님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시고 또 글도 많이 쓰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겠어요? 이제는 저절로 말이 나오지 않나요?”라는 것입니다.


20년 가까이 글을 쓰고 또 강의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유명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멈추지 않고 하루 6시간씩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95세의 나이인데도 하루 6시간씩 연습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파블로 카잘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죠.”


언젠가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파블로 카잘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한 노년의 형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강사인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받는 교육은 주로 3~40대의 직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분은 60대가 훨씬 넘었거든요.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분 역시 저처럼 교육을 받으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열심히 필기를 하면서 교육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지금 미국에서 몇 개의 리조트를 가지고 있는 회장님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매년 한국에 와서 교육에 참석하신다는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솔직히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서면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생각을 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그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계속해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하다면서 포기해서는 안 되며, 어렵고 힘들다면서 불평불만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내 안에서 하느님께서 늘 살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를 짓는 순간, 그 하느님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계속해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내 안에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이 세상 곳곳에 흘러 넘쳤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탁월한 리더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고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샘 월튼).


겨울은 따뜻하거든요

어느 자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겨울이 좋아요. 겨울은 따뜻하거든요.”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겨울이 과연 따뜻합니까? 아마 이상한 사람이다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께서는 겨울에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장갑 속이나 포근한 이불, 코트의 따뜻함. 이 느낌은 다른 계절에서는 느낄 수가 없잖아요.”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겨울은 ‘춥다’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 춥다는 계절에서만이 ‘따뜻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에서도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 그 반대의 감정은 더욱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지요. 겨울에는 ‘춥다’라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기쁨과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7~8절)라는 말씀은, 생각하기에 따라 오해의 소지라 많은 말씀이라 신중한 해석이 요구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에 굳은 확신을 갖고, 목숨을 다하여 간청했습니다. 십 년, 이십 년, 평생에 걸쳐 청했지만, 그러나 그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한 채, 실망하며 빈손으로 떠나갔는지 모릅니다.


특히 너무나 절박한 상황 앞에서, 극도의 가난 앞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간절히 청하고 또 청했지만, 끝내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불치병으로 앓던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안전한 귀향을 바랐던 남편은 전사했습니다. 결혼은 파국으로 마무리되었고, 정든 집과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기도하던 백성들은 박해를 당했고 교회는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토록 무자비한 현실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대치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웃들이 겪는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께 청할 것, 그리고 그분께서 주실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보다 폭넓고 보편적인 기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꽃같은 시절이 있었다면, 꽃이 지는 시절도 있는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이 있는가 하면,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 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서,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의 큰 흐름 안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께 청할 것,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실 것은 세상에서의 복락이나 승승장구가 아니라 오직‘성령’이십니다. 간절히 청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댓가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이 뒤따릅니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현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억울한 사건들도 수용하게 됩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 고통과 십자가, 죽음마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십니다.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원하는 것을 너무 오래 청하지 말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과월절을 앞두고 한 유태인이 랍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랍비님, 저는 너무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없는 것이 많아 골머리가 아픕니다. 못 살겠습니다.”

랍비는 무슨 근심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과월절이 다가오는데 무교절 빵을 살 돈도 없고 포도주, 자기 옷, 아내 옷, 자녀 옷은 물론 고기도 살 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물었습니다. “무교절 빵은 얼마요?” “5000원입니다.” “포도주는 얼마요?” “1만원이요.” “자네 옷은?” “5만원이요.” “아내 옷은?” “10만원이요.” “자녀 옷은?” “3만원이요.” “과월절 고기값은?” “2만원이요.”

이 말을 들고 랍비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자네는 돌아가서 너무 많은 걱정을 하지 말고 한 가지 걱정만 하게. 21만5000원 걱정 하나만 하게. 그리고 하느님께 한 가지만 기도하게. 21만5000원을 달라고 말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청하면 반드시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얻나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 끝에 나오는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에 주의를 덜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왜 청하면 반드시 받을 수 있다는 말씀 끝에 다시 내어주라는 말씀을 덧붙이신 것일까요? 청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줄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주님께 무언가를 청할 때도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청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게 됩니다. 받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은 이미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믿고 청해야 다 받게 됩니다. 믿는데 왜 걱정이 있어야할까요? 그러니 받은 것을 다 내어줄 줄 아는 마음으로 청하라는 뜻입니다.

내어주려는 마음이 믿는 마음입니다. 또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봉헌하는 마음이 믿는 마음인 것과 같습니다. 봉헌하면 다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봉헌한 밀떡과 포도주는 주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로 되돌려주십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청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청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말은 아예 신경을 끄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게 되던 받게 되지 않던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청하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면 다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 잘 되게 해 주십니다. 그런 믿음 안에서 불안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불안하지 않아야 주님께서 나를 통해 좋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에서도 ‘위이불시’ 즉 ‘행하되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걱정 많은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항상 걱정하는 일만 생깁니다. 그 걱정하는 것을 받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런 분임을 믿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청할 때 그것을 진정으로 얻고 싶다면 “짧게” 청하십시오. 원하는 것을 너무 오래 청하면 그 청하는 것이 근심거리가 됩니다. 받는다는 것보다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짧게 청하고 그 다음부터는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맡기고 하루를 평안히 사십시오. 잔잔한 호수라야 하늘을 비출 수 있듯 평안한 마음이라야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복음서에서 항상 ‘주님의 기도’ 다음에 무언가를 청하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만 열심히 바치면 됩니다. 그리고 짧게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만 가지면 다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유일한 것은 내 마음을 넘어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뿐입니다.




좋은 것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마태 7,11).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신다고 분명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란 ‘하느님의 눈에’서 좋은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왜곡되어 좋게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은 하느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간구하는 것은 분명 이루어집니다. 선하신 하느님이시기에 당신 자녀인 우리에게 선한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를 다시 외웁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분 뜻에 나의 뜻을 내어맡기는 하루이길 청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독서를 보면 에스테르 왕비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날 때부터 저의 가문에서 들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모든 조상들 가운데에서 저희 선조들을 영원한 재산으로 받아들이시고 약속하신 바를 채워 주셨음을 들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신들의 임금님, 모든 권세의 지배자시여!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테르 4,17[16.23.25]) 에스테르 왕비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주 하느님께서 자신의 민족을 어떻게 구해주셨고 이끌어오셨는지 그리고 구원의 약속을 해주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들어왔고 믿어왔던 그 기억과 믿음에 근거하여 지금 자기가 바라는 기대에 가득 차서 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민족의 몰살 위기 앞에 풍전등화같은 처지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가 절절히 가슴 깊이 저며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결국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민족에게 몰살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11) 주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경험과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주 하느님의 은총 체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주 하느님께 청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러시고는 혹시라도 우리의 기도와 청원이 나 개인의 이기주의적 탐욕이거나 자기합리화가 되지 않도록 타이르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요즘 어려운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마저 힘겹게 받아들이고 방황하며 멘붕과 공포와도 같은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금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마저 마땅치 않아 방황하며 마치 버려지고 나동그라진 세대처럼 밀려난 사람들의 처지와 아픔을 기억합니다. 특별히 환우들이 그것도 쉽게 완쾌되지 않을 것만 같은 환우들이 갑자기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부모와 가족은 얼마나 애가 타서 간절하게 기도를 바치고 있을지 충분히 공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처지와 상황을 모두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아뢰며,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소외되어 어렵고,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한 분 한 분을 주님께서 헤아려주십사 기도하며 함께 그 고통을 나누기로 합시다.




청원기도

곽승룡 비오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 7)


기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이 물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라면, 우리가 필요한 것도 모두 알고 계실 텐데, 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해야 할까? 그냥 다 주실 것이지...”


청원기도는 교육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말씀하신다. 곧 첫째는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는가를 배우고, 둘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알차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떻게 질문시간이 학생들에게 주어질까? 우문현답 같지만, 내가 여러 학술회의나 세미나에서 느낀 바, 좋은 질문이 대화의 내용을 훨씬 잘 알아듣도록 해주고, 글을 발표한 사람도 그 질문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리는 청원기도 역시 하느님께 우리가 필요한 것을 더 잘 이해하시고 선물로 내려주실 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귀머거리?

우리가 주일 미사 때 드리는 보편지향기도나 전례 또는 단체, 개인이 기도를 드릴 때,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청원기도를 한다.

왜 그럴까? 주님께서 귀머거리이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 기도는 주님께 우리가 필요한 것과 내가 처한 상황을 알아달라는 것이고, 우리의 바람과 원의를 주님께 물으면서 마음과 느낌이 더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도의 목적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얻거나, 포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접촉’이다.

이를 위해서 기도학교를 가야한다. 하느님과 함께 참 대화를 배우기 위해서 체계적인 기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나는 오래 전 성령쇄신봉사회의 지도신부를 하면서 기도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신자들을 위해 기도학교, 영성학교를 개설한 바 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무척 좋아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 9)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기도는 우리를 땅에서 하느님의 삶으로 인도하며,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청하도록 초대하신다. 곧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가장 좋고 완전하며 거룩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청해야 할까?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것 바로 그것을 먼저 우리가 청해야 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3)


신비가 안젤로 살레시오는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너무나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누구도 아버지 하느님께 청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청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난처해하고, 주저하고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청해야 할 것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 대한 생생한 깨달음

나를 이루어가는 정진

남을 먼저 헤아리는 배려

약한 이를 품는 부드러움

상대방의 마음을 듣는 경청

버려진 이들에 대한 관심

기꺼이 상대방이 되는 공감

불의에 맞서는 두려움 없는 저항

거짓에 현혹되지 않는 지혜

고통에 움츠러들지 않는 용기

흥겨운 살맛 돋우는 웃음

뭇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강함

지금여기에 충실한 소박함

자유로워지기 위한 비움

갈라진 틈을 메우는 보잘것없음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언행

주님을 따르려는 열정

후회 없는 착한 삶

아름답고 가슴 벅찬 죽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가능과 불가능 속에서 가늠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는 불가능도 가능이 되리라는 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것을 주시고자 늘 애를 쓰시는 사랑 지극하신 분이시라는 것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굳은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형태의 모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우리가 바라는 좋은 것과 분명히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 에스테르기의 말씀에서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청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언제나 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당신의 평화로 이끌어 주시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모범을 본받읍시다.

아마세아의 성 아스테리우스 주교의 강론에서(Hom. 13: PG 40,355-358. 362)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여러분들이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그분을 본받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그 이름으로만 해도 사랑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으십시오.


그리스도의 자비의 풍요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오시려고 할 때, 당신 앞에 회개의 전달자요 안내자인 요한을 보내셨으며, 요한 이전에 사람들이 생활 자세를 바꾸고 제 길로 돌아와 더 보람 있는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모든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시어 당신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그리고 당신의 이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그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마음을 괴롭히는 모든 근심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즉 말씀께서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굳세게 하셨으며 또 옛사람을 물 속에 묻어 버리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어 은총이 꽃피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원수였던 사람은 벗이 되었고 의인이었던 사람은 자녀가 되었으며 세속적이었던 사람은 성스럽고 경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이 모범을 본받읍시다. 복음서를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그 열성과 자비의 모범을 보고 배우도록 합시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 중에 일백 마리의 양을 가진 목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일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떠나 헤맬 때 목자는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과 같이 있지 않고 그를 찾으러 나가 골짜기와 숲을 지나서 크고 험준한 산에 올라가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힘을 다하여 여기저기 외딴 곳을 다니며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다가 발견하면 때리면서 무리가 있는 곳으로 몰아대지 않고, 어깨에 메고 쓰다듬으면서 무리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다른 양들보다 찾은 이 양을 보고 기뻐합니다.


이 비유가 지니고 있는 숨은 뜻을 생각해 봅시다. 이 양은 실제로 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이 목자도 실제의 목자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 속에는 성스러운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건 버림받은 자로 또는 희망이 없는 자로 생각하지 말고, 위험 중에 있는 이들에게 쉽게 실망하거나 또는 그들을 도와주는 데 게을러서는 안되며, 그들이 덕행의 길을 떠나 헤맬 때 되돌아오게 하며 돌아올 때 기뻐하고, 그들이 선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의 무리에 들어가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 비유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처럼 성당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귀국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위해서 성실하게 살았던 친구들의 중후한 멋이 느껴졌습니다. 나이테가 있어서 나무는 높이 자랄 수 있듯이, 친구들도 저마다 삶의 나이테가 있었습니다. 즐거울 때가 많았지만 때로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대화의 단절, 일방적인 희생, 갑자기 찾아온 건강 이상,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퇴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믿고 함께하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딸바보인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판단하고, 따져보고, 고민하지만 딸의 이야기는 조건 없이 들어주게 된다.’ 다른 친구들도 그 말에는 동의했습니다. ‘최고의 우선순위는 자식이지!’ 제 삶의 나이테는 어떻게 생겼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최고의 우선순위는 무엇이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머니, 동생, 형님이 있습니다. 제게 필요한 분도 있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분도 있습니다. 


미세먼지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미세먼지의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편서풍을 타고 외부로부터 날아온 미세먼지가 많았습니다. 국내에서 발생한 미세먼지도 있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입니다. 미세먼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미세먼지를 숨 쉬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몰랐고, 우리의 욕심 때문에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미세먼지에 대한 대책입니다. 외출을 자제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자주 씻는 것입니다.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것들의 사용을 자제하고, 이웃 나라와 협력하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 외출을 자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자연과 환경을 보존하려는 연대와 협력입니다. 인간이 만든 미세먼지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나무, 꽃, 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마스크라도 착용하지만, 그들은 마스크도 없기 때문입니다.

미세먼지에 대한 책임입니다. 계절이 변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미세먼지가 날아오는 바람에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미세먼지를 만드는 나라에 책임을 묻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람까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회는 미세먼지 발생 방지에 대한 법안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강력한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이웃 나라와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드리면 열릴 것이고, 구하면 얻을 것이고, 청하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원하는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차고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미세먼지를 없애 달라고 청하면 될까요? 우리나라로 오는 미세먼지를 오지 말라고 청하면 될까요?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청을 알고 계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요와 발전이라는 바벨탑에서 내려온다면 맑은 공기, 깨끗한 물, 파란 하늘은 곧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여러분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기도와 삶의 자세 -청하라, 찾아라, 두드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올해 처음으로 안 봄꽃 이름이 영춘화입니다. 개나리과에 속한 색깔도 모습도 개나리 꽃 비슷한 봄맞이 꽃이라 이름도 예쁜 영춘화(迎春化)입니다. 20년만에 영춘화를 알았다는 어느 자매의 소감입니다.


“매년 봄을 알리던 이 예쁜 노란꽃을 개나리로 생각하고 무려 20년을 살아왔네요. 제 인생길에 이런 무지와 착각은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또 어제 수도형제의 소개로 수도원 본관 ‘자비의 집’ 뜰에 심겨진 올괴불 꽃나무를 보았습니다. 역시 올해 처음으로 안 꽃나무입니다. 오래전 강원도에서 갖다 심은 나무라 하는데 어제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언뜻 봐서 작고 평범하고 나무 색깔과 비슷하고 아래로 향한 꽃이기에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꽃송이들입니다.


형제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내내 모르고 지냈을 꽃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시詩처럼 소개된 내용이 아름다웠습니다.


“빨랫줄에 천사들의 속눈썹이 떨어져 걸린 듯한 올괴불 꽃나무 앞을 지나치며 자꾸자꾸 중얼거려 보네. 산에 사네, 산에 사네, 산에 사네, 올괴불나무, 인동과의 낙엽관목.”


참 겸허한 산나무꽃입니다. 강원도 산나무가 자비의 집 뜰앞에 있습니다. 순간 다양한 꽃나무처럼 사람 역시 다양한 꽃나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각자 고유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의 꽃처럼 사람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꽃나무의 초연함이, 겸허함이, 자유로움이 참 새롭게 마음이 와 닿았습니다.


정말 꽃도 사람도 비교의 대상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꽃나무 없듯이 똑같은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하나가 소중한 보물같은 사람입니다. 각자 고유의 모습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함을, 또 고유의 모습대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올괴불 꽃나무를 생전 처음 만나며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어제 수선화에 대해 쓴 시중 한 구절, ‘하늘만 보면 된다.’가 빠져 다시 넣어 나눕니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자리잡아 뿌리내리면

거기가 자리다/하늘만 보면 된다

감사하다/늘 거기 그 자리/봄되면 해마다

새롭게 피어나는/수선화/샛노란 하늘 사랑 가득 담았다-


하늘만 보면 됩니다. 하늘만 보면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위로 눈들어 기도하라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내 고유의 모습대로 자존감 높은 삶을 살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오늘 복음을 기도와 삶에 대한 자세를 말해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도와 삶의 자세입니다. 참 자비로우시고 좋으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아버지를 향한 기도와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청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는 자포자기 절망이 대죄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죽는 그날까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탄력좋은 항구하고 간절하고 절실한 자세로 기도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항구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다 보면 정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청해야 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이미 다 받았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무지로 인해 엉뚱한 것을 청하기에 참으로 필요한 것을 청하지 않기에 받지 못하는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기다리며 좋은 것을 주시려 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주셨는데 우리가 모르는 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미사중 감사기도 3양식중 떠오르는 다음 대목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시나이다.”


다시 나누고 싶은 행복기도 중 일부입니다. 정말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린다면 이미 받은 선물에 저절로 감사와 찬미뿐일 것입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기쁨/평화/감사/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립니다. 항구하고 간절히, 절실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문득 하도 살려 달라 닫힌 문을 두드리다 손톱이 빠지고 손이 망가졌다는 세월호 참사 어린 희생자들의 모습이 아프게 떠오릅니다. 참으로 주변에서 간절히 절실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형제자매들은 없는지 아버지의 마음으로 깨어 살펴 보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스테르가 그 기도의 모범입니다. 평소 기도와 삶의 모습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항구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저의 주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 주소서.---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당신 손으로 저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하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온통 보는 눈이요 듣는 귀입니다. 한 눈에 환히 보시고 한 귀로 다 들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당신 고유의 방식으로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십니다. 아멘.




은혜와 자비로의 응답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살아가며 어려움이 닥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때, 나는 기도를 한다. 병약해서 사경을 헤매던 어린시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부모님의 그 모습, 나도 함께 어린 마음에 기도를 했다. 주님께서 응답하셨다.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면 내가 용케도 살아있었구나 하며 찬미노래를 부른다. 나는 기도부탁을 받을 때면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그 사람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마음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하게 된다. 

‘은혜’는 누릴 수 없는 것인게 거져 입은 은총이다. 그 은혜의 보답으로 이웃의 기도를 이루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자비’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나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에 힘입고 생명이 되어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나는 주님의 은총에 힘 입고, 자비에 생명을 누리고 사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제가 부르짖던날, 저를 당당히 세워졌음을, 제 영혼이 힘이 솟아났음을 나는 기억하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그 마음으로 상대를 위해 기도를 한다. 황금률(마태7,12)인 오늘의 말씀을 다시 새기게 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도와주세요 당신밖에 없습니다'(마태오 7장 7~12)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청하여라,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저는 예수님께 저를 도와줄 이 주님 밖에 없으니 매달리고 두드립니다.

어디 기댈 곳이 없기에 주님만 바라고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도무지 할 수 없기에 상대의 마음을 깊이 터치하기 위해 주님 마음을 두드립니다.

제가 사는 이곳이 거룩한 땅, 

끊임없이 기도하는 곳이 되도록 루르드 성모님을 모시렵니다.

땅을 고르고 새들이 깃들어 매일매일 기도 송이가 피어나는 곳, 지친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눈물 닦아주며 치유가 이루어지길 주님께 마음과 눈을 들어 두드립니다.

간절히 청합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을 위해 두드릴 힘이 없어 지칠때 잠시 쉬었다가 수녀님들 기도 송이에 힘입어 이제 함께 두드립니다.

열릴것이라 믿으며 ~

도와주세요.

당신밖에 없습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의 키 포인트는 마지막 부분이라고 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두드린다. 그런데 대답이 없다. 왜 그런 것인가? 하느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을 그냥 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악의 세력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목숨을 내어 놓았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문이 열린다는 말씀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선뜻 마음으로 삶으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바로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뜻 자신을 내어 놓기 위해 고뇌하시는 순간들과 침묵의 시간들에 우리는 동참하면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미세먼지가 없는 파란 하늘과 세상을 나 자신의 삶안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페르시아 제국의 왕 아하수에루스(크세르크세스 1세 기원전 485-465)치하에 재상 하아만의 음모로 인해 유대인들을 학살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이스라엘 동족을 위해 에스테르 왕비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녀는 동족 이스라엘을 학살하려는 음모 앞에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며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실망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바칩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25>)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양부 모르도카이는 영광스럽게 되고 그의 정적 하만은 몰락하게 됩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끊임 없이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7,7)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지요.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은 바로 부모에게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을 들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7,11)

그리고 마태오는 종합적으로 복음의 참 정신에 대해서 전합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7,12)

그래서 이 법을 ‘황금률(黃金律)’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주고 또 그 법정신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잣대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이 짧고 명료한 율법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한다는 것은 글자그대로 쉬울 것 같지만 우리가 살아오면서 깨닫는 것은 사실 힘들고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 만큼 우리는 ‘자아’라는 울타리에 갇혀 이웃의 고통과 바램을 있는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내 좋을 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상대가 어떻든 ‘주입식의 사랑’, ‘추론적인 사랑’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선택하는 대상, 내의 방식대로 사랑을 실천한다고 생각할 때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상에 관계없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 좋을 대로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면 많은 경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기우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주님의 다음 말씀을 이어서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7,13-14)


그만큼 복음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좁고 험한 길을 가는 것과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표현하시듯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지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는 나한테 마치 맡겨놓은 것이 있는 것처럼 달라는 소리를 어찌 그리 쉽게 하느냐고 타박하는 어머니들을 많이 봅니다. 사실 저는 어머니들의 이런 타박의 심정에 백분 동감합니다. 요즘 사람들 어찌 그리 달라는 소리를 잘하는지 당당합니다. 

저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달라는 소리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어도 제가 알아서 끊었고 등록금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 마감 시간이 될 때에야 겨우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저였으니 요즘 사람들 달라는 소리 너무 잘하고 돈 없어 주지 못하면 오히려 신경질부리고 부모가 되어 부모노릇도 못하느냐는 투입니다. 

이런 요즘 사람들이 얄밉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면서도 부럽기도 합니다. 그렇게 줄 부모가 있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부모를 믿고 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렇게 믿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렇게 믿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자녀가 청하는 것 그리고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하느님께서는 이런 부모보다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실 거라 믿고 청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부모만큼 믿지 못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그렇긴 하지만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또 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인간에게 청할 것은 부모/인간에게 청하고 하느님께 청할 것은 하느님께 청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청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곳에서부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때는 부모건 남편이건 다른 사람에게 청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니 다른 사람에게 청하고 인간의 힘으로 안 되니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 것을 믿는 다른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 넉넉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도 그러다가 절박한 상황이 닥치면 다 하느님께 올 것이니.


오늘 에스텔의 경우가 바로 그렇지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이 망한 후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었지만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음모에 의해 자신을 비롯해 유대인 모두가 몰살당하게 되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에스텔 주변에 왜 사람이 없습니까? 왕의 대신이자 삼촌 모르도카이도 있고 수많은 유대인이 있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과 유대인을 구해줄 분은 하느님뿐인 거지요. 

우리도 주변에 수없이 사람이 많아도 나와 하느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박함과 외로움이 하느님을 만나는 지점입니다. 절박하지만 아무도 없는 이 때가 하느님의 때이고 구원의 때입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그러나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도 에스텔처럼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도록 하십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순절 동안 특별한 관심으로 묵상해야할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덕목이 바로 단식과 기도와 자선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니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하시며, 우리가 꼭 청해야 하는 내용이 담긴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마태 6,7-13 참조).


그리고나서 이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자세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 ..."(마태 7,7). 이 말씀은 적극적으로, 순박한 열성을 가지고, 신뢰를 다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께서는 사실 우리가 청하는 것, 찾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또 어느 문을 열어주어야 할지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세속적 욕망과 지나친 자기애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걸 청하지 않고, 그저 남 보기 그럴듯하고 때깔 곱고 폼 나는 걸 청할 확률이 몹시 크지요.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 헛걸음을 하기도 하고요.


예수님께서 인간적 부성애에 기대어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10)고 하셨지만, 어쩌면 우리는 빵과 생선을 준비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돌이나 뱀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악할 망정 자녀에게 좋고 유용하고 긴요한 걸 줄 줄 알거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마태 7,11)을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우리 좁은 소견과 조급한 욕망을 즉각 해소시켜주지 않아 당장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서운함을 느낄 수는 있어도, 진정 "좋은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선포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이렇게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과연 나는 그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는지, 또 그대로 해줘도 되는지 말입니다. 이 필터로 거른다면 우리는 더이상 하느님께 허황되고 헛되며 소모적인 욕망을 졸라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독서에서는 민족적 말살의 음모에 처한 에스테르 왕비의 절박한 기도가 나옵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


에스테르 왕비는 당시 임금의 간택을 받아 왕궁에서 호화롭게 지내는 신분이었지만, 민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하고 임금 앞에 나가기 전 이 기도를 바칩니다. 왕비의 신분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두려움에 떠는 약하디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 기도에서 그녀는 당신(하느님)께서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홀로 구원을 가져오실 분이십니다. 또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는 고백에는 인간에게서 오는 구원의 헛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적대자 앞에서 정의와 공정을 펴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는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라는 말에는 모든 인간의 실존이 녹아 있습니다. 아무리 가족이 많고 지인이 넘쳐나도 인간은 결국 하느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 엄마나 누구 아들이 아닌, 참 존재자와 독대하는 관계성 안에서 인간 본연의 자기인식과 겸손이 시작되니까요.


이제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 유일하시고 모든 걸 아시는 하느님 외에는 달리 기댈 곳 없이 외로운 존재임을 겸손되이 자각한 이는, 자신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더 잘 이루어 주시리라 믿기에, 내용은 그저 하느님께 맡기고 자신은 더 적극적으로, 순박한 열성을 가지고, 신뢰를 다해 기도합니다. 우리 작은 머리로 아무리 궁리를 한들, 하느님 뜻, 계획, 섭리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럴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바치되, 정말 적극적으로 청하고, 열성을 다하여 찾고, 신뢰를 다해 두드려 봅시다. 그때 나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꼭 그리되실 겁니다. 아멘.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 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름다운

봄꽃을 열게하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기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뀔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생명의

길을 찾게됩니다.


비로소 우리 안에서

열리는 자유의 

기쁨입니다.


많은 문들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관계라는 門입니다.


기도로 말씀을

읽게 되고 말씀을 

듣게 됩니다.


기도의 주인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향해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닫힌 문을

열어주십니다.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선물이 됩니다.


기도의 방식은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랑의 방식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감사입니다.


문을 두드렸을 뿐인데

언제나 더 많은 은총을

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열려야 할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직은 꽤 쌀쌀하지만 이제 곧 새순이 나고 꽃이 피는 따뜻한 봄이 오겠지요. 갑곶성지를 구석구석 둘러보면서 이번 봄에 해야 할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올 봄에는 잔디도 사다가 심어야 할 것 같고, 또한 각종 꽃나무도 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좀 더 아름다운 성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생각들을 하던 중에 10년 전 제가 이곳에서 직접 심었던 나무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갑곶성지의 땅은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돌이 너무 많고 또한 단단하고 푸석푸석한 땅이기 때문에 나무 한 그루 심기도 쉽지가 않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힘들게 땅을 파고 나무를 심는 제게 어떤 형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큰 흙덩어리들을 잘게 부순 뒤에 물을 부어보세요. 부서진 흙에 물이 잘 스며들어야 나무들이 잘 자랍니다.”

이 분의 말씀 덕분에 너무나 서툰 제가 심은 나무들도 잘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큰 흙덩어리는 물이 잘 스며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서진 흙은 물이 잘 스며들 수 있어서 나무가 잘 자라고 또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에는 어떠한 꽃도 피울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잘게 부서져서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에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이 잘 스며드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잘게 부서질 수 있는 마음, 다른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 아니라 겸손한 부드러운 마음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즉,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것이었지요.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과연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고 있을까요?

솔직히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을 뿐, 남에게 해 주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자신이 받지 못한 것에만 주목하면서, 시기와 질투로 남과 비교하고 또 손해와 상처를 입었다며 이웃들을 향해서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아닙니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의 주인공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잘게 부서진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게오르크 헤겔).


Listen carefully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연애할 시간도 없고, 취미활동을 즐길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낙이 없다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그냥 힘들게 살아갈 뿐이랍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이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 바로 먹는 것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얻으려고 한다더군요(사람들이 인터넷에 음식 사진을 많이 올리는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데에도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고칼로리라 엄청 살이 찔 텐데...’라고 말입니다.
무엇 하나 즐겁게 할 수 없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 속에 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시간이 없다’라고 단정을 짓기 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본다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늘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오랜 상담 후에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리셨지요.
“지금 안정이 필요하니 조용한 산에서 며칠 쉬세요. 그리고 산에서 이 편지를 꼭 뜯어 읽어보세요.”
그가 산에 가서 편지를 뜯어보자 편지 안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Listen carefully(신중히 들어보시오).”
이 처방대로 신중히 들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처음에 듣지 못했던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심지어 나뭇가지 흔들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리더랍니다.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졌고, 결국 자신의 병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 세상의 온갖 걱정을 다 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Listen carefully(신중히 들어보시오).”
내 삶 안에서 나는 모든 소리에 집중하게 될 때, 분명히 평화와 안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 자체가 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종속과목강문계’ 생물시간에 배운 생명의 뿌리입니다.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이 있습니다. 균류, 식물, 동물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과학과 인식의 차원에서 이렇게 다양한 생명이 있는 별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파스칼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는 이 모든 생명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진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힘이 시간과 우연의 결과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힘이 하느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제를 이야기는 사람, 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지구는 이 생명들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파란 하늘, 푸른 바다, 넓은 평원, 높은 산, 시원한 계곡, 스치는 바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과 재난을 극복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재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다음 세대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문자,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손,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을 주셨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왔을 때, 이어령 교수가 기고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바다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늘 보던 파란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뛰놀던 여름바다의 눈부신 모래밭이 아니라 산처럼 무너지는 검은 파도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쉽게 휩쓸어버리는 허망한 동영상은 우리가 뽐내던 그 컴퓨터 CG가 아니었습니다. 규모 9의 지진과 함께 일본을 강타한 쓰나미였습니다.

 

앞으로 일본은 국가의 시스템 전체를 새롭게 바꾸지 않고서는 이 재난의 여진을 극복하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일본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번 지진은 지구의 축도 2.5㎝나 기울게 했다고 합니다. 인간 문명 전체의 한계와 그 임계점을 드러낸 것이지요. 인간의 문명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검은 파도가 덮칠 때 정쟁을 멈추는 일본인들을 보았습니다. 도쿄전력이 전후 처음으로 제한 송전을 하게 되자 피해 지역에 우선적으로 송전하도록 시민들은 일제히 자기 집 전선 플러그를 뽑았습니다. 남을 헐뜯던 인터넷은 사람을 찾고 돕는 생존의 게시판으로 바뀌고 트위터는 중얼대는 잡담에서 이재민을 돕는 생명의 소리로 변했습니다. 일본은 어느 나라보다도 지진에 대비하는 기술이 앞선 나라입니다.

 

일본 국민은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재난에 대비한 훈련과 질서의식을 갖춘 모범적인 국민입니다. 이번에도 지진이 일어난 슈퍼마켓의 현장에서 물건을 훔쳐가기는커녕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 값을 치르기 위해서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외국인들은 감탄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아무리 그런 일본인들도 이웃나라 없이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듭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일본보다 가난한 나라들도, 일본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나라들도, 멀리 떨어져 무관하게 바라보던 나라들도 일본인을 돕고 위로하기 위해서 가슴을 열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은 경제대국이지만 친구가 없는 나라라고 스스로 비판해온 일본인들입니다. 그러나 주변에 함께 울고 함께 상처를 씻어줄 착한 이웃들이 있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그 재난 속에서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비유처럼 목숨을 구해주는 것이 바로 내 이웃임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바이오필리아(biophilia·생명애)야말로 부국강병의 이념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난 자연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인간의 왜소함과 나약함만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해관계로 얽혀 살고 정실로 손을 잡아 끼리끼리 살다가도 생명을 위협받을 때에는 하나로 뭉치는 힘을 자연의 재난을 통해 배우고 실천합니다. 독도 분규로 등을 돌렸던 한국인들도, 센카쿠열도로 총구를 맞댔던 중국인들도 지진이 일본인의 생명을 흔들 때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도움을 주기 위해 재난의 땅을 향해 마음과 발길을 돌릴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을 향해 달려갑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고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새로운 문명은 독립(INDEPENDENCE)도 예속된 의존(DEPENDENCE) 관계도 아닌 상호의존관계(INTERDEPENDENCE)의 생명공동체적 시스템에서 탄생할 것입니다. 일본을 강타한 지진이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 쓰나미의 위험을 불렀듯이 그에 대응하는 생명 역시 공감과 협력의 지혜에 의해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와 세계인들이 대비해야 할 문제는 어떤 선진 문명으로도 대응하기 힘든 환경의 쓰나미, 금융의 쓰나미, 정보의 쓰나미, 테러의 쓰나미입니다. 그리고 현대 문명의 임계점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일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처럼 생명의 구제입니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와 정쟁과 그 많은 갈등이 생명 앞에서는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고 바이오필리아(생명애), 토포필리아(topophilia·장소애), 그리고 네오필리아(neophilia·창조애)와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요 자본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했던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생명을 자본으로 한 진정한 글로벌리즘이 무엇인지를 세계에 알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검은 파도를 이기는 우리의 블루 오션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들려준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애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  -청하시오, 찾으시오, 문을 두드리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와 삶의 자세에 대해 말해 줍니다. 기도와 삶은 항구하고 간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은 기도의 전제 조건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 아버지께 대하여 전적 신뢰와 사랑을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그에게 돌을 주겠습니까? 또는 생선을 청하는데 그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사실 여러분은 악하면서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마태7,9-11).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좋은 분이십니다. 추상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결국은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하늘 아버지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와 사랑이 우선입니다. 이런 신뢰와 사랑이 우리에게 깊은 안정과 평화를 줍니다.

하느님은 한결같이 신실하시고 좋으신 분입니다. 날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은 좋으신 하느님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사람들에게 결코 좌절하지 않으시고 매일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우리에 앞서,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대변하는 기분좋은 말마디 같아 자주 되뇌이곤 합니다. 이런 건강한 자부심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존감 높은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결코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충성스런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은 무엇입니까?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어 주실 것입니다.”(마태7,7-8).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 기도와 삶의 원리입니다. 기도든 삶이든 항구하고 간절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에스텔이 이런 기도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자의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 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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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백절불굴의 자세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영적탄력이라 칭하곤 합니다. 믿음의 탄력, 희망의 탄력, 사랑의 탄력입니다. 기도든 삶이든 참으로 마음의 탄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점은 청하는 사람의 조건이나 청원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청하는 우리에게 또 청원 내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청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하느님의 무응답이 응답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잘못된 것들을 청하기에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된 것들에 대해 응답해 주실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아무리 칼을 달라해도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다칠까 두려워서입니다. 좋은 부모라면 그 순간 실제 필요한 것으로 그 아이를 만족시키려 노력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들을 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기 위해서 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원의願意도 정화淨化되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내 뜻대로 기도가 아니라 결국은 하느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기도할 때는, ‘주님, 이것을 간절히 청합니다. 그러나 제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느님뜻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이뤄지면 하느님의 뜻이라 좋고 이뤄지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대로 된 것이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게 되니 모든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황금률도 바로 기도와 연결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여러분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주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마태7,12).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해주기를 바란다면, 분명 우리도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똑같이 친절하고 관대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의 기도를 하느님은 들어 주십니다. 사실 항구히 간절히 하느님의 뜻을 찾아 청하는 이들은 저절로 하늘 아버지를 닮아 친절하고 관대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모두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6,33). 아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틀 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입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희망하고 열망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몸으로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몸을 바쳐 ‘찾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부터 수도승의 다른 이름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 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가슴으로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를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자도, 열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희망하는 바를 희망하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소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 이처럼,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좋은 것을 한없이 받을 수 있는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7-8) 무엇이든 청하는 것을 다 주실 뿐 아니라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7,11). 


얼마나 희망적이고 든든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청하기만 하면 누구에게 다 좋은 것을 한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행을 저지르고, 제멋대로 살다가 하느님을 찾으면서 필요한 것을 달라고 청하면 다 주실까요? 오직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실까요?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주시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른 조건이지요. 그 조건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는 것‘(7,12)입니다. 철저히 이타적이며 되돌리는 사랑이 그 조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사랑을 위해 사랑을 청할 때 한없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위해 선을 청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무제한으로 주신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성령을 청해야 하고, 주님의 사랑과 선을 청하며,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기심이나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사랑과 선이 메마르고 대인관계에서 생겨난 상처가 있다면 먼저 하느님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선과 의를 위해 필요한 것을 청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하며,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자기에게 닥친 죽음의 위험을 느끼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기도를 드렸던 에스테르 왕비처럼 말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청하는 것이니, 내 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움직이려들지 말아야겠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원하는 때에 이루어주셔야만 한다는 생각은 하느님을 도구화하는 엄청난 착각이요 교만입니다. 언제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겸손한 자세로 청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청하기에 앞서 사랑에 몰두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태도가 아닐까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깊이 깨닫고,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며 청할 때, 주님께서는 청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며, 청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시는(7,11) 주님을 믿고, 더 열심히 다른 이들과 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거룩한 성취의 날이길 기도합니다.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강우현 요아킴 신부님

우리의 기도는 저마다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느님께 바쳐집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신분고하를 떠나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을 하소연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런 우리의 실존의 고통을 어떻게 하느님께 아뢰어야 하는지 들려줍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인생의 위기에서는 절대자인 하느님의 도움을 애타게 청합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함도 잠시 위기를 넘기면 언제 내가 그랬냐는 듯이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찾던 갈망은 이내 사라지고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자신의 오만함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만남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기도를 통하여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라면 더욱 애타게 하느님의 마음을 두드리고 매달립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신앙 태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하고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면, 우리가 조급하게 기도의 응답에만 매달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빼버린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하고, 기도가 이루어 졌다고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입으로 발설되기 이전부터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불러 주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기도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올바른 지향과 태도를 지니고 믿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 나라를 항구하게 구하고,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를 찾으며, 하느님 나라의 문을 쉬지 않고 두드릴 수 있는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남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기도할 때, 자신의 것을 먼저 구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기를 청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찾고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여는 힘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체험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바리사이파의 기도보다는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루가18, 13)라는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서 당신을 내놓으셨듯이,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웃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생활을 통하여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항구한 믿음과 기도의 생활이 내가 이웃에게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먼저 해줄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켜가는 힘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으로 들어내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간단히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기도 바구니와 감사 바구니

윤경재 요셉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7~12)

  

하느님께서 하루는 천사 둘을 부르시고는 바구니 두 개를 내 놓으셨습니다. 두 천사 중 하나는 기도 바구니를 들고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소리를 가득 담아오고, 하나는 감사 바구니를 들고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소리를 가득 담아 오라고 하면서 먼저 가득 담아 오는 천사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천사는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만물 가운데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기에 감사의 목소리가 간구하는 목소리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서로 감사 바구니를 들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제비를 뽑아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감사 바구니를 뽑은 천사는 기쁜 마음으로 세상으로 내려가고, 기도 바구니를 든 천사는 풀이 죽은 채 세상으로 내려갔습니다.

 

세상에 당도하고 보니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 바구니를 든 천사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면서 감사의 목소리를 찾아다니게 되었고, 기도 바구니를 든 천사는 하느님께 간구하는 목소리가 하도 많아서 얼마 되지 않아 기도 바구니를 가득 채웠습니다. 천사는 기도 바구니 무게로 끙끙거리면서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왠지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간신히 감사 바구니를 채우고 돌아온 천사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하느님께 귀환 보고를 하였습니다. 내심 기대가 컸었는데 인간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고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마침 먼저 도착한 천사도 우쭐한 마음으로 서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두 천사가 가져온 기도 바구니와 감사 바구니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문은 아무리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 두드리고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두드리고 구함을 그쳐서는 아니 된다. 세속적인 몸으로는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어야 천국에서 살 수 있다.”

 

“변화의 고통과 어리둥절함을 겪고 감내한 사람만이 경이로운 체험을 맛볼 수 있다. 경이로움을 체험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보라. 외아들 예수도 내게 이렇게 기도하였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주소서.’ 예수는 이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 까닭은 육신을 입은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을 탄단다. 예수도 그런 기도를 통해 아빠와의 관계를 한순간이라도 잊지 않으려 한 것이다.”

 

“기도 바구니가 가득 찬 것은 나와의 관계를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증거이며, 감사 바구니가 더디 찬 것은 자기 왕국을 바르게 다스릴 지혜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생명으로 이끌어줄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수고한 두 천사 모두에게 큰 상을 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는 소박함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이 얼마나 거창하겠습니까?

 

집안에서 두 아이가 장난치다가 귀한 물건을 깼습니다. 한 아이는 엄마에게 용서해달라고 품에 달려들었고 한 아이는 용서를 청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어머니는 귀한 물건이 깨진 것보다 자식이 용서를 청하지 않아 더욱 서운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녀가 계속 부모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혼자 다 해결하려 든다면 그처럼 부모에게 속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남으로 살자는 의미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참으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많이 청하는 사람이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 때문에 기도에 응답이 없더라도 꾸준히 청하고 다른 것까지 청합니다. 내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머리카락 개수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데 그럼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세세히 아시겠지. 굳이 주저리주저리 청원하며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왠지 낯간지럽고 나약한 모습만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한계 뒤에 숨으려는 비겁한 행동은 아닐까? 내가 청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을까, 맞지 않을까?


이렇게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자녀들은 그저 청할 뿐입니다.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그 편이 더 낫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넘기면 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런 소극적인 생각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서먹서먹하고 멀어지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기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멀어지지 않으려면 청원기도든 감사기도든 가리지 않고 아버지 곁에 머무는 시간을 오래 자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모델, 에스테르 왕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에스테르 왕비가 곤경 중에 바쳤던 기도는 참 기도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하느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에스테르기 4장 17절)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 안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담겨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녀가 올리는 기도의 분위기를 보십시오. 정말이지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지극히 겸손한 태도가 돋보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기꺼이 들어주실 참 기도의 전형이고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 찬 기도,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는 풍성한 영적 결실을 맺게 합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주님을 향한 절박한 외침을 거듭하는 가운데 기도자는 기도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이 바치는 기도에 대한 주님 측의 즉각적인 응답 유무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참 기도는 한 인간과 주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솔직한 대화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꿈꿉니다. 오늘 내가 감내하기 힘든 이 참혹한 현실이 내가 바치는 기도를 통해 순식간에 변화되기를 말입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무지막지한 고통이 단 3초 만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적을 꿈꿉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기도는 아직 갈 길이 먼 기도입니다. 참된 기도는 동전을 넣는 즉시 원하는 물건이 ‘투둥’하고 내 눈앞에 떨어지는 자동판매기가 절대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유년기 시절 자주 머릿속에 그렸던 요술방망이처럼 바닥에 한번 내리치면 꿈에 그리던 우리의 소원이 순식간에 성취되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긴 여정입니다. 참된 기도는 마음 내킬 때 오랜만에 한번 길게 바치고 나서 한 달 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할 때나 병들 때나 상관없이 꾸준히 계속되어야 할 소통이요 대화입니다. 주님과 인간 사이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요 바라봄, 경청이요 하소연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 옛날 에스테르 왕비가 보여준 모범입니다. 심심하니 소일꺼리 삼아 적당히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바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삶 전체를 바쳐 지극정성으로 바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지금 내 눈앞에라도 현존하시는 것처럼 생생하고 솔직하게 바치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지금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감사하다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지금 너무 고통스러우면 너무 괴롭다고 주님 앞에 외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모두가 떠나가고 나 홀로 남았을 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너무 외롭다고, 결국 주님 당신 밖에 없다고, 그러니 끝까지 나와 함께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당신 앞에 서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을 향한 나의 눈빛을 바라볼 수 있기를 


나 … 당신의 귀가 되어

당신께 건네는 나의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나 … 당신의 입이 되어

당신의 마음을 나에게 속삭일 수 있기를 


나 … 당신의 마음이 되어

나를 품에 안은 당신을 헤아릴 수 있기를 


나 … 당신이 되어

당신이 곧 또 하나의 나임을 알 수 있기를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바빌론 크세르크세스 왕의 통치시절, 와스티 왕비가 폐위되고(에스 1,10-22), 유다출신 에스테르고 새 왕비로 뽑힙니다.(2,17)

‘하다싸’라는 이름을 가진 에스테르는(2,7)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바빌론으로 유배 온 벤야민 지파 출신, 아비하일의 딸로 부모가 죽은 뒤 수사 성읍의 왕국에 봉직하는 삼촌 모르도카이의 양녀가 됩니다.

당시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다스리던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통치 시절이었다. 사촌오빠 모르도카이의 후원으로 에스테르는 왕비가 되어 왕의 측근이 됩니다.

그런데 우연히 임금의 내시 둘이 불만을 품고 임금을 해치려는 음모를 에스테르에게 알려서 왕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각 사람 하만이 재상이 되면서 모르도카이와 갈등을 빚게 되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3,1-5참조).

그는 자국의 위협이 되는 유다인들 말살 계획을 세워 계략을 꾸며 왕에게 상소합니다.(3,8-9)

그는 유다라고 언급하지 않고 ‘어떤 민족’이라고 하고 왕의 법을 지키지 않는 민족으로 음해했던 것입니다.

왕은 이것이 유다와 왕비, 그리고 모르도카이를 제거하려는 하만의 음모인 줄도 모르고 발끈하여 하만의 상소에 허락을 내립니다.

이제 왕의 허락이라는 것을 내세워 시행령만 남아서 유다민족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모르도카이는 왕비 에스테르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이미 왕의 허락이 내린 터, 시간은 늦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왕비는 삼일 간 단식을 하며 하느님께 이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17⑭-17⑮)

하느님께서 왕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만의 음모’가 폭로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에스테르 왕비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하만의 술책을 폭로합니다. 이에 상황이 역전되어 하만은 제거되고 유다인들은 위험에서 구출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에스테르의 모습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마태오는 성실하게 또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 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설교(5-7장)는 참 행복(5,3-12)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켜야 할 교훈의 독립된 말씀들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말씀들이 마무리 되는 단계에서 ‘황금률(黃金律)’의 말씀도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루카 6,31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라면 구약의 토빗의 말씀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버지 토빗이 아들 토비야에게 전해주는 유언에서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마라.”(토빗 4,15)

그런데 놀랍게도 동양의 공자님의 가르침에서도 구약과 연결되는 내용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23편에 이러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인데 풀어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라는 교훈 말씀입니다.

또한 대학의 마지막 장인 제10장 첫 머리에서 “혈구지도(絜 矩 之 道)’라는 가르침의 말씀이 있는데 풀어보면 ‘내 마음을 살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언해서 그 뜻을 전체의 문장에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위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 것이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도록 하지 말 것이다. 앞에서 싫어하는 것을 뒷사람의 앞에 놓지 말고, 뒤에서 싫어하는 것인데도 앞사람을 따르도록 하지 말 것이다. 오른쪽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왼쪽과 사귀지 말 것이며, 왼쪽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오른 쪽과 사귀지 말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일러 혈구지도라 한다.” 

나를 살펴 남을 배려하는 뜻으로 풀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때로는 실망하더라도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에스테르 왕비가 사면초가의 처지에서도 간절히 하느님께 청하더라도 우리도 끊임 없이 하느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을 원하듯이 우리도 남에게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대로 살라는 ’황금률‘의 가르침을 새기며 매일의 생활에 또한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외로움의 기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외로운 이의 기도만이 진실한 기도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너무 심한 말이라면 외로운 이의 기도가 더 진실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제는 일어나자마자 이유 없이 마음이 어둡고 한동안 불안이 이어졌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무시해버릴까 하다가 왜 그럴까 정식으로 꺼내어 성찰을 해보았습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어둠이 있으면 죄나 잘못이 있을 경우이고, 특별한 죄나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뭔가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 욕심이 있을까 성찰해보니 큰 욕심은 아니지만 역시 욕심이 제 마음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이렇게 마음을 어둡고 불안하게 했구나, 욕심이 기도도 안 되게 했구나 하고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내려놓으니 마음도 개운해지고 기도도 되었습니다. 

만일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상기도를 하지 않은 채 억지로라도 기도를 했다면 아마 욕심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정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욕심은커녕 너무도 곤궁하고 아무도 도울 이 없습니다. 언젠가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자는 영상을 봤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축 늘어져있는데 파리가 코와 눈가를 기어 다녀도 그것을 쫓을 힘도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식욕이나 식탐으로 먹기를 바라겠습니까?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먹을 것을 줄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고 구해줄 누가 나타나길 바라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 이 간절함과 이 외로움이 저절로 기도를 하게 할 뿐 아니라 가장 진실한 기도, 가장 진실한 청원기도를 하게 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시선을 잡아끄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에게 기쁨을 주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를 즐겁게 하는 사람과 일이 있다면 그만큼 하느님을 진실하고 충실하게 대면하지 않을 것이고 절실하지 않기에 그만큼 절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늙는 만큼 더 진실하게 기도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처량하지만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되고, 냄새나는데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주는 제가 되면 차츰 저를 찾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저를 피하겠지요. 

그때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왜 찾아오지 않느냐고 불만하지 않고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언제나 오나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고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외로움의 기도를 저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황금률>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과 모든 계명과 모든 율법의 근본정신이고, 그래서 황금처럼 귀하다는 뜻으로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율법학자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과 황금률은 어떤 관계일까?

황금률은 두 계명을 하나로 압축한 것일 수도 있고, 표현을 조금 다르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사랑을 주시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하느님께 사랑을 드려라. 이웃이 너희를 자신처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황금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주어라.”인데, 우리는 이 말을 “먼저 주어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는 ‘먼저’ 라는 말이 없지만, 뜻을 생각하면 당연히 ‘먼저’ 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받았다면 그대로 돌려주어라.”가 결코 아니고, “받기 전에 먼저 주어라.”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러나 “나중에 받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먼저 주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먼저 주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떻게 받게 되든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내가 주는 사랑에만 집중하는 것, 그것이 황금률의 정신입니다. 또 “내가 먼저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주어라.” 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내가 준 것으로만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만 부르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일이고, 준 대로 돌려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고,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는 짓입니다(마태 5,46-47).

즉 ‘참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보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너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뜻인데, 이 경우에도 자기를 의인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사랑 실천’이 아니라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천한 사랑과 선행을 하느님께서 알아주시기를 희망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겸손하게 낮춰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이 말씀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여라.” 라는 가르침인데, 아무거나 청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청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만을 청해야 하고, 올바른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 마치 맡겨 놓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기도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기도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마태 6,8), 그것을 가장 좋은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을, “이미 너희에게 주셨으니 청해서 받아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안 주려고 하시는 하느님을 압박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우리가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원하는 것을 받기 전까지는 “이미 주셨다.” 라는 말을 실감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실감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 실감할 수 없어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을 황금률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잘 드리고 있는가?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은 만물의 주님이시니,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도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드려야 할 믿음과 사랑을 원하시는 분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분입니다.

다윗이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어 드리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거절하셨습니다(2사무 7,7).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우리가 하느님(예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중요한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만일에 사랑 없이 이기적으로 청하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떻게

기도해야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체험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나눌수록

풍요로워집니다.


기도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기도는 사랑을

채워주고 사랑은

기도를 살아있게

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매순간

기도를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하게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마음을 

열어 보여드리는

기도의 사순시기

되시길 바랍니다.


생명과 기도로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어제 모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각 계층의 인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애장도서를 취재하고 있는데, 저에게도 애장도서를 말해달라는 것이었죠. 이제까지 이 신문사에서 취재한 분들을 보니 유명하고 대단한 분들이셨습니다. 제가 감히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러면서 문득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글 쓰는 것을 너무나 못해서 시작했던 책 읽기였지요. 워낙 독서를 하지 않았기에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렇게 거의 25년을 보낸 지금, 저는 매일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으며 책도 7권이나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처럼 애장도서를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광(?)까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 책을 읽을 때 지금의 제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남들 정도만 글을 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과연 그 정도의 수준까지 오를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 저였는데 이제는 책을 추천하는 자리까지 서게 된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구절 하나가 생각납니다.

“지금 실패했다고 큰 나무가 아니라고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더 큰 나무가 되기 위해 뿌리를 깊게 내리는 중일 것입니다.”(심준모, ‘어떤 하루’ 중에서)


지금의 자기 자리에 대해 좌절하고 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큰 나무가 되기 위해 뿌리를 깊게 내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큰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살 수 없고, 또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은 지금이라는 현재일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연연하며 사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신 지금이라는 시간들이 더해져서 미래를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에 충실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물론 미래의 시간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을 청하고 찾으며 또 열어야 합니다. 바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충실한 삶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믿음과 용기를 갖고 힘차게 생활해야 합니다. 그 믿음의 마음에 주님께서는 실망을 가져다주시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주변의 시선을 자주 의식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이다(김현철).

 

작은 것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한 자매님께서 요즘 너무나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가족 문제, 여기에 건강까지 문제가 생겨서 도대체 해결책이 어디에 있을까를 염려할 뿐이었지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용기를 내라면서 꽃 한 다발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받은 꽃을 집에 있는 꽃병에 꽂으려는 순간 꽃병이 너무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꽃병을 먼저 깨끗이 닦기 시작했지요. 이제 꽃을 꽂으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꽃병이 놓인 책상도 더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책상을 닦습니다. 책상이 깨끗해지자 방안이 너무 지저분한 것입니다. 집안 곳곳을 다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그러자 마음까지 깨끗해진 기분인 것입니다. 각종 문제들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주변 정리를 이렇게 하다 보니 그 모든 문제들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친구가 준 꽃 한 다발이 이 자매님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것으로도 충분히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데, 우리들은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당장 작은 것이라도 실천해보았으면 합니다. 충분히 바꿀 수 있습니다.




항구하고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  -기도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기도는 간결담백해야 합니다. 간절할 때 간결담백합니다. 기도는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삶과 기도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완전히 습관화되어 제2천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여 예로부터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끊임없는 기도를 권장했습니다. 하여 인생광야순례여정이란 주제로 강의하다 보면 결론은 기도로 모아지고 더욱 기도를 강조하게 됩니다.


모두가 살아가야 할 광야여정이요, ‘살기위하여’ 기도는 필수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기도는 생명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중심에 뿌리내림입니다. 뿌리내림과 더불어 깊어지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 안정과 평화가 뒤따릅니다. 기도는 소통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해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말 그대로 기도는 우리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불가사의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이것이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참으로 사람이 되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그냥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란 존재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여 베네딕도회의 모토중의 하나가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말해 줍니다. 활동에 앞선 관상이요, 활동에 앞서 주님 앞에 머물러 말씀을 경청하는 존재임을 주님 환대시 마리아가 본을 보여줬습니다. 예수님 역시 날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외딴곳에서 기도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기도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제멋대로 기도가 아니라 성서 말씀을 통해 배워야 하는 기도입니다. 사랑 공부처럼 말씀공부도 기도 공부도 끝이 없습니다. 평생 말씀을 배워 깨달아 알아가면서 더불어 기도의 성장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대로 기도의 자세이자 믿음의 자세이고 삶의 자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백절불굴, 좌절이나 절망을 모르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1독서의 에스테르가 이런 기도의 모범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 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쳤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에스테르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어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주셨습니다. 기도에 왕도는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비약이나 도약도 없습니다. 하루 아침에 부쩍 크는 나무가 아니듯 기도의 성장도 그러합니다.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기도의 수행뿐입니다. 감정이나 기분, 마음에 따른 기도가 아니라 좋든 싫든, 일과에 따라 의무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은 이렇게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렇게 항구히 한결같이 기도하면서 우리의 기도도 정화되어 점차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다보면 언젠가는 ‘아, 이미 다 받았네, 모두가 은총이고 감사이네. 더 청할 것이 없구나. 남은 것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이구나!’ 깨달음의 때도 올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아가는 성경 공부와 기도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면서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점차 아버지의 마음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좋으신 아버지는 좋은 것들의 선물로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이 복음 말씀에 근거한 미사경문 성찬전례사 감사송 3양식 대영광송 전의 기도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시나이다.”

한 후 성반과 성작을 들어 받들어 올리고 소 대영광송을 바칠 때는 늘 감격스럽습니다. 진정 기도하여 마음의 눈이 열릴 때 이미 받은 좋은 많은 것에 놀랄 것이고, 하느님은 이런 겸손과 감사와 기도의 사람들에게 계속 좋은 것을 내려 주십니다. 또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닮아 관대해질 때, 이웃의 필요에 민감해져 먼저 상대방을 배려함으로 복음 말미의 황금률도 저절로 생활화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런 관대한 사랑의 황금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도의 열매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성체성사의 기도입니다. 세상에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귀하고 은혜로운 기도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광야여정중인 우리 모두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한 본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신뢰 

류지인 신부님

청하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다고 합니다. 찾고 두드리고 청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를 믿을 수 있는 계약으로 확정하려면 몇 가지 의문사항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언제’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주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먼 훗날주시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좋은 것에 대한 기준도 모호합니다. 더 좋은 것을 많이 주시겠다는 선별 기준이 주시는 분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받는 사람 시각에서 좋은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치 않은 약속을 단언하시는 배경에는 당신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굳은 신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언약은 우리가 청할 자격을 이미 갖추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할 줄 알고,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찾을 줄 알며, 터무니없는 요청을 하지 않을 줄 주님께서는 믿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곤 마지막 문장을 덧붙여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같은 신뢰를 품으라는 요청입니다. 청을 드리되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도록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습니다. 

그리하면 욕심이 사라진 빈자리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좋은 것들이 가득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되는 기도를 합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러나 받고 얻고 열리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지 안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게 될 것입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으니만큼 믿음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때로는 구한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이 더 큰 은총입니다. '하는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우리의 청이 헛된 수고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닫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혹 받지 못한다고 생각들 때는 욕정을 채우기 위해 청하고 있지 않은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반드시 마련해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혹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청한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며 넘치도록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한두 번 청하고 두드리다가 그만두지 말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 14-15).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모두의 청을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주십니다. 따라서 청할 필요도 없이 주시는 대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7,8)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뜻을 이루고 뭔가를 얻으려고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는 찾고 구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정한 때나 방식에 매이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주십니다. 


무엇을 어떤 지향으로 청하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현세 삶에 필요한 것들을 청합니다. 그러나 먼저 청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할 때 그분 친히 나의 모든 것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입니다.”(성 프란치스코) 

다음으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청해야 합니다. 에스테르 왕비는 그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과 유다 민족에게 닥친 죽음의 위협에서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아가 청하는 기도를 통해 두려움을 이겨내고 백성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현세 삶에 필요한 것을 청해서는 안 될까요? 무엇을 청하든 중요한 것은 지향입니다. 현세 삶에 필요한 것이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든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려는 거룩한 지향을 지니고 청해야 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더 잘 응답하고 더 좋은 사랑의 도구가 되려는 지향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어떤 자세로 청하는 것이 좋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내 뜻대로 움직여주시길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게 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며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기도를 들어주시든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선행에 대한 대가를 청하는 것은 주님을 거래 대상으로 여기는 그릇된 처사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십니다(7,11). 따라서 무엇을 청하든 하느님의 ‘사랑의 관대함’을 공유하고 나눌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고,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두드려 여는 기도가 절실할 때입니다. 


오늘도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과 ‘주님의 영’을 갈망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을 끈기있게 청하는 거룩한 청원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언제 많이 속상하세요.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내가 바라는 대로 하지 않고 다르게 할 때가 아닐까요?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어찌 저렇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오면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나 때문에 속상해 할 때가 많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처럼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야 하겠지요.

남이 내가 바라는 대로 안 해 준다고 속상해하기보다는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줌으로써 서로 행복하고 서로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무엇을 청할 것인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시리라는 희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간절한 희망을 담아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우리가 간절히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작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의 진리보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많은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막무가내로 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주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는, 아니 주님께서 들어주시면 안 되는 청을 드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나만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재물을 청한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참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값진 가난을 주실 것입니다.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능력과 권력을 청한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히려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으며, 어디로 들어가기 위하여 문을 두드립니까? 우리 자신의 부유한 삶이나 안정적인 지위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기적인 탐욕을 충족시키려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우리가 모두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주고자 하시며, 우리가 바로 이러한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나’와 ‘너’를 갈라 세우지 않으며, ‘우리’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바라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와 ‘너’를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는 두 가지 잣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잣대와 ‘너, 곧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잣대 말이지요. 그리고 이 두 가지 잣대는 내게 이로운 데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잣대를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하나의 잣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입니다. 모든 사람은 우리 자신의 평가 기준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눈에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사람들을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이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나’와 ‘너’라는 구별을 넘어서 참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갈라진 사람들이 하나 되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구하고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내려주신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탐욕에 물든 이기심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커다란 문을 허물어 주시기를 희망하며 끊임없이 이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들 모두 오늘 하루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주님께 청하며, 그러한 세상을 가꾸는 데에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것<마태,7/7-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청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이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오고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며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 하드라도 내것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주어라.”

지금 내가 가진 바를 누리는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것입니다. 숨을 쉬고 생명을 이어 가는 것도 공짜로 주어진 공기와 물을 마시고 갈증을 푸는 것도 하늘과 땅에 하느님이 준비한 것입니다.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관리의 책임을 지고 있는 그 자리도 하느님의 주신 것입니다. 다만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이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강력한 지도력으로 이끌던 자리도 그 지리를 떠나면 내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에 그 자리에 있으면서 책임감 있게 일을 하던 이가 오늘은 수도원 지하성당에 영정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도 원장으로 살지만 그 자리를 떠나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이 그 자리를 주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이끄십니다. 제가 10년이나 사목하던 본당에 가면 그 본당의 일에 손끝 하나 건들이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자리는 없고 비올 때 빌려쓴 우신같이 돌려 드리는 것처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너를 위한 것이여야 합니다.

어제 성주에 전원주택을 구경삼아 보러 갔다가 돌아왔는데 내가 사는 수도원만큼 크고 편리하고 안락한 집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방이 있고 내 침실이 있어도 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가 주님이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면서 청원기도는 나를 위한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어야합니다. 하느님이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의 청을 거절하시지 않은 것같이 우리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주님의 것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나를 믿지 못하기에 하느님을 믿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좋은 것을 달라는데 나쁜 것을 줄 아비 없고, 나쁜 것을 달라는데 나쁜 것을 줄 아비 없다. 나쁜 것을 달라 해도 아비는 좋은 것을 준다. 

인간 애비가 이렇다면 하느님 아버지는 더 그러하시다. 그러니 좋은 것을 청하기만 하면 다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청한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내가 나쁜 것을 청했거나 적어도 지금은 들어주실 때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제가 평소에 늘 갖고 있는 생각이고, 그래서 오늘 복음을 읽자마자 한 달음에 써내려간 단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좋게 믿는가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안 좋은 쪽으로 믿습니다. 며칠 전 한 형제가 생각 없이 말을 했습니다. 이 말에 저도 이런 생각이 우선 탁 드는 것이었습니다. 툭 튀어나온 말이니 평소 내게 반감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어!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보고 머리를 흔들며 ‘평소 나답지 않게 왜 이렇게 생각을 하지?’ 하며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려고 했지만 그런데도 계속 그런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는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옛날의 저는 그러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꽤 오래 전 청원장을 할 때 청원기 형제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그때 군중심리에다 감정이 격해지다보니 ‘원장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입니다!’라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얘기하자고 돌려보낸 다음, 제가 각개격파를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나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러나 나는 형제들이 나를 믿기에 이렇게 얘기하는 거라고 얘기했고, 그러므로 저는 형제들이 저를 믿고 있음을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믿지 못할 사람으로 저를 생각했다면 뒤에서는 얘기해도 면전에서 대놓고 얘기하지 못했을 것이고, 면전에서 얘기하더라도 이렇게 심한 표현까지는 하지 못했을 겁니다. 

자식이 엄마한테 막말을 하고 온갖 신경질을 다 부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해도 엄마는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적어도 이것 때문에 사랑을 거두지는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이랬던 제가 왜 안 좋은 쪽으로 믿을까, 악마의 유혹일까 생각되었는데 나이를 먹으면 서운한 일이 많아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이라는 것이 있지요. 나이 먹어 약해지고, 열등해지고, 초라해질 때 자격지심이 생기고, 자격지심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안 좋게 받아들이며 그래서 서운해 하고, 노여워하곤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힘이 없을 때 자신감이 없고, 자신감이 없을 때 다른 사람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의 인간의 경우는 자신의 힘이 자신감의 근원이고, 자신감이 다른 사람을 좋게 믿을 수 있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이와 같은 것일까요? 

다른 인간은 나와 마찬가지로 믿을 수 있는 만큼 좋은 존재가 아니기에 자신감만큼, 곧 자신을 믿는 만큼 다른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달리 지상선至上善이기에 믿을 수 있는 분이시고, 우리가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하느님을 믿는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겠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황금률, 기도>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에서 '율법과 예언서'는 구약성경이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구약성경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가르침)'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이 두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입니다(마태 22,37-39). 따라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황금률에서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이고, '내가 남에게 해 주어야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황금률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사랑을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가 남에게 먼저 사랑을 주어라."

또는,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에는 '먼저' 라는 말이 없지만, 뜻을 생각하면 '먼저' 실천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황금률에서 '남'은 하느님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예수님 말씀을 생각하면, 이웃에게 베푸는 것은 곧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에 관한 말씀도 황금률을 기준으로 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황금률을 기준으로 해서 이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이웃에게 먼저 베푼 다음에 하느님께 청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웃에게 먼저 문을 열어 준 다음에 하느님의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가 됩니다. ("이웃에게 베풀지는 않고 하느님께 청하기만 한다면 얻지 못할 것이다. 이웃에게 문을 열어 주지는 않고 하느님의 문을 두드리기만 한다면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아무리 간절하게 청해도, 자기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그 청을 들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청하고 찾기만 하면 '무조건' 얻을 것이라는 약속도 아니고,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무조건' 열릴 것이라는 약속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왜, 어떻게 청하는지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또 어떤 문을, 왜, 어떻게 두드리는지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면 받지 못합니다. 물론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청하면 안 되는지를 판단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판단 기준은 '선'과 '사랑'입니다.


악한 것을 청하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악한 것인데도 그런 것을 청했을 때 얻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준 것입니다.)

또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을 청하면 안 된다는 것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농부들이 가뭄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때 본당 행사만 생각하면서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본당 행사를 취소하고 농부들을 지원하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이 되는 것만, 또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되는 것만 청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청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개인적인 소원을 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기에게만 좋은 일로 그치면 안 되고,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병에 걸려서 '건강의 은총'을 청하는 경우, 그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병자들은 그냥 죽든지 말든지 자기만 건강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또 은총을 받아서 건강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이 회복되어서 죄나 짓게 된다면 차라리 그냥 아픈 채로 누워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문을 두드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문이나 다 두드린다고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두드려야 할 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 (세속적인 출세와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문만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문은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문이 아닙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말에서 '열 처녀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5,10-12)."

'어리석은 처녀들'이 간절하게 문을 두드리면서 애원했지만 그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문은 준비가 잘 되어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즉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신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그 부모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부모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자식들의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살다보면 자기 자신을 희생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접을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그 바탕에는 깊은 사랑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사랑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막에서 배회하고 실망한 연후에야 더 깊은 내면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처지에서 하느님께 더욱 매달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부모가 사랑을 하듯 큰 사랑으로 사람의 청을 외면하지 못하지 못하십니다. 페르시아의 재상 하만의 흉계에 의해서 유대민족을 말살하려는 칙서가 발표됩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에스텔르 왕비는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동포를 위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에스 4,17⑫.7⑭) 


그래서 그녀는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⑭-⑮절)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스라엘 동포를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인자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갖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마태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11절) 


그리고 마태오는 신앙인의 삶에서 중요한 기초가 되는 주님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젊었을 때에는 타인의 입장보다는 자기의 색깔을 더 짙게 가지기 쉽습니다. 자기주장, 목소리까지도 클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은 시행착오도 겪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면서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는 지혜를 말해준다.’라는 말이 있나봅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되면 더더욱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알게 되지요. 대게 갈등과 의견차는 베풀지 못하고 내 입장만을 고집하는 데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삶의 조화를 주시는 처방인 것입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타인의 원하는 입장’을 배려할 수 있다면 사실 나 자신도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본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치지 않고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지요. 

그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이 지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정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받고싶은 사랑을

상대방에게 먼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름아닌

상대의 마음을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헤아려주는 것

기쁨입니다.


너를 위한 것이

실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이

무언지를 

예수님의 마음에서

다시금 배우게됩니다.


서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진심어린 배려였습니다.


사랑과 소통이

매번 어긋나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며 서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아는 이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생명을 바쳤는지를

묵상하게됩니다.


우리자신을

매번 죽이는 것은

서로를 위한 길을

우리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맛나는 삶이란

남이 아니라 내가 먼저

기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기쁘게 변화되어야 할 

우리의 삶이란

너와 나의 관계가

기도와 침묵으로

진심어린 배려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서로를

끌어안아 주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참다운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혹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으십니까?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군대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벌써 군대 제대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니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더군요. 군 입대 후 훈련소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겠지만 당시만 해도 구타도 어느 정도 있었고 심한 기합도 있었을 때였지요. 따라서 어떤 실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날의 유격 훈련을 모두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가는데 바지춤이 헐렁한 느낌이었습니다. 바지를 바라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혁대를 죄어 고정하는 버클(buckle)이 없어진 것입니다. 가뜩이나 긴장되어있는데 이제 끔찍한 마음에 울고 싶었습니다. 


그 뒤에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교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버클이 없는 상태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땅 바닥만 쳐다보았습니다. 혹시라도 떨어진 버클이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이틀을 땅 바닥만 쳐다보면서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흙속에 파묻혀 있었던 버클을 찾았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지요. 


이틀 동안 저의 머릿속에서는 잃어버린 버클에 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훈련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문제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주변 상황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집중이 결국 버클을 찾게 하였습니다. 


정말로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관심 밖의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여 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단순히 청하는 기도를 하고, 단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한 내가 필요한 것을 얻게 해달라고 문을 살그머니 두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하고 열정적인 마음, 정말로 한 가지 오로지 집중하는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마음보다는 알아서 해 주기를 원하는 듯이 살아갑니다. 또한 몇 번의 기도만으로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문을 당장 열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앞에 기다려서 문이 열리도록 힘차게 두드려야 안에 계신 분이 열어주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언젠가는 열리겠지 라는 마음으로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문이 열렸어도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열정을 가지고 청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문은 우리의 열정 가득한 마음을 통해서 환하게 열릴 것입니다.  


사과 속에 있는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에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켄 키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하루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목구멍에 가시가 돋는다고 생각하는 술꾼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존경하는 은사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밤을 새워 그 책을 모두 읽었다. 그 책에는 술이 인체에 얼마나 해로운 극약인가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단단히 결심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겠노라고....”

은사님께서 책을 선물로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술을 좋아하는 제자가 술을 끊고 새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제자는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술의 해악을 말해주는 책을 보면서, 아예 모르는 것이 낫다면서 책을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지요. 

술을 끊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말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구원의 길을 전해 주시지요. 그런데 혹시 자기를 구속한다면서 주님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지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매스컴은 좋다고 사건들을 먹이고 부모들은 좋다고 재물을 먹이네요. 친구들은 좋다고 술 고기 먹이고 학교에선 좋다고 지식만 먹이고요. 태어나 클 때까지 좋다고 먹고 나선 인생건강 해치고 운명건강 잃더군요. 


 대자연은 우리에게 신선한 환경을 주지만 고마움을 모르고 한눈만 팝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지만 입 다물라 대항하며 귀 막아버립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지만 귀 막고 돌아서서 엉뚱한 길 따르지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마태오 7,11)” 




간절(懇切)하고 항구(恒久)한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믿음의 표현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며,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웬만한 병은 '하느님'이름으로 다 고쳤다 합니다. 저 또한 불편한 몸 부위가 있으면 '예수님'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손을 대곤 합니다. 

얼마전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 감실 옆에서 찍은 사진 역시 일종의 기도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몸과 맘의 기도를 통해 늘 주님 가까이 머물게 됩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몸의 건강에 선행하는 마음의 건강입니다.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이 참 큰 병입니다. 동방수도승을 찾는 구도자가 그 스승과의 나눈 대화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 수도승이든, 은수자든, 세상 누구에나 해당된다. 우선 깨어 일어나면 그날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일어나는 순간부터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움으로 출발하는 훈련에 충실할 때, 그의 날은 기도 안에 있게 될 것이고 어떤 내적평화가 자리잡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화강석(granite) 같은 마음을 깨기 시작하는 길입니까?“

-그렇다. 첫 단계다. 바위같이 완고한 마음을 깨기 위해서는 큰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기도를 통해 마음을 부숴 달라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다윗 임금의 '하느님은 부숴지고 낮춰진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라는 시편 한 구절 처럼 말이다. 바로 이것이 성인들이 기도한 방법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그들의 마음을 부숴달라(crush)고 간청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내적자세를 가르쳐 주시며 1독서의 에스텔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참으로 백절불굴의 겸손한 기도의 자세,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래야 영적탄력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는지요.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조언을 청한다면 역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간다하면 말리진 않겠다. 그러나 가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체력이나 정신력보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간절한 원의다."


도저히 나이나 체력으로보나 어렵게 생각되는 분들의 완주를 보고 깨달은 결론입니다.

위기에 처한 에스텔의 간절한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순시기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수련에 참으로 적절한 은총의 시기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전례기도를 통해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부숴뜨려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마음의 치유에 저절로 따라오는 몸의 치유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시편138,3ㄱ참조). 아멘.




가장 강력한 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알거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오7,11)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했을 때, 결과적으로 안 들어주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라며 반문하는 분도 계시리라 봅니다.

물론, 나 역시 결과를 보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그분의 마음에 속이 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내 예상과는 빗나간 결과였다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려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청합니다. 

그리고 반응 없으신 그분께 실망하고 곧 포기를 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청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신데, 내가 청하는 내용이 나를 망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들어주실 리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들 때, 우선 나의 지향이, 나의 바람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옳지 않은 것이 옳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욕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하느님께 따지듯이, 강요하듯이 기도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좋은 길로 내가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아시며,


내가 그 길로 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신다는 것입니다.(130221)




죽음을 두려워하면 삶도 두려워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프랑스의 어느 백만장자 구두쇠가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큰 부자였던지 자기 재물에 연연하여 날마다 그 재물에 기뻐하였습니다. 자기재물을 완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자기 집의 포도주 저장실을 깊이 파고 그 저장실에 다시 깊은 굴을 파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거기에다가 황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부자가 행방불명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살던 집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매각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매입한 사람이 지하실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니 그 속에서 먼저 살던 주인이 황금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 들어갈 때는 그 문이 자동으로 닫힌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자들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돈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돈에 집착하는 것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삶이 행복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 세상에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지녔던 이들은 대부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하고, 진나라의 시 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죽지 않으려고 경호원을 동원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 먹습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삶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세상에서 성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삶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삶과 반대말로 여깁니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이지 삶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죽음이 삶의 맨 끝자락에 있기는 하지만 삶의 일부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에스테르 왕비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함하여 모두 죽이려는 함만의 계략에 정면대응하기로 합니다. 임금 앞에 당당히 나서 억울함을 토로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임금 앞에 나서면 왕비라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왕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이 죽음의 시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하는 왕비에게서는 전혀 두려움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어쩌면 왕은 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에스테르에게 반했는지도 모릅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민족을 구하려는 왕비의 청을 들어주고 함만을 처형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을 거둡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내어놓으니 많은 이들의 생명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삶 안에서도 많은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내가 죽음을 재난처럼 여긴다면 지금 삶도 재난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에스테르 왕비처럼 삶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행복이 아닐까요?

에스테르 왕비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자신은 평생 두려움에서 살고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죽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믿음을 방해하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끊어내고 오로지 주님 섭리에 맡기십시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참으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복음화 학교는 지난 25년 동안 같은 건물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건물 주인이 올해 10월까지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작년부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복음화 학교로 사용될 장소를 청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남산 쪽에 건물이 하나 나왔습니다. 명동에서는 조금 멀어지지만 그 건물을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매하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건물을 매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가톨릭 회관에 강의실과 사무실을 임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화빌딩의 시대를 넘어서 복음화 학교 설립 25년을 맞이해서 새로이 명동 가톨릭회관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열심히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봉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물의 결정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변한다고 합니다. 사랑해, 고마워, 감사해, 잘 될 거야, 너를 믿는다, 너를 지켜 줄께‘라는 말을 하면 물의 결정이 아름답게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워, 죽일 거야, 나쁜 놈, 싫어, 넌 왜 그러니‘와 같은 말을 하면 물의 결정이 심하게 찌그러진다고 합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물의 결정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 못 하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제1독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우제’를 드릴 때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동의 어느 공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소회장님은 그 마을에 신부님이 오시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우연히 주교님께서 그 마을에 오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새벽에 일어나 신부님이 오시기를 청하는 공소회장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교구청으로 돌아가셔서 다음 인사이동 때 그 공소에 신부님을 파견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이제는 공소회장이 다른 기도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소회장이 이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 공소에 신부님께서 오셨으니 예쁜 성당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또 몇 년을 기도하는데 서울의 독지가들이 기금을 마련해 주셔서 예쁘고 아담한 성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공소회장님의 기도 방법도 인디언들의 기도와 같았습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고, 하루를 닫는 자물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연인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때때로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저 있는 것처럼 삽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결정하려고 전전긍긍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십자가 앞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두려움에 얼어붙기도 합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자상히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계심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요 나의 아버지이신 분이 계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시는, 우리 육신의 부모에 비할 수 없이 더 자비하신 하느님이 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하느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무한히 우리를 초월하시면서도 무한히 내 안에 내재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나의 아버지이시고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누구도 이 사랑의 관계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우리의 연인입니다. 아가에서 보듯이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아가 6,3)이니, 지금 당장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연인이신 하느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의 모든 갈망과 원의는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청할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청하십시오.

분명히 주실 겁니다.

그런데 잠깐!

내가 무엇을, 왜 청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나서 청하십시오.

아버지는 자식에게 좋고 유익한 것만 주시지 나쁘고 해가 되는 것은 주시지 않을테니까요.

찾을 것이 있으면 찾으십시오.

분명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 때문에 찾고자 하시는지요?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열릴 것입니다.

자다가 남의 봉창문을 두드리진 말고 어려운 이웃의 문을 두드리고 구원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무엇보다 나에게 청하고 나에게서 구하고 나의 문을 두드리는 이웃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는만큼 나도 받게 될 테니까요.


오늘 여러분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일이 풍성한 축복으로 그대로 이루어지길 빕니다. 아멘.




외로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묵상 주제를 외로움이라고 붙이면서 거룩한 외로움이라고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다 여기저기 다 거룩함을 갖다 붙이면 식상할까도 싶고 뭐든 거룩한 것만 얘기하면 인간적인 외로움은 발 디딜 곳도 없다싶어 오늘은 그냥 외로움을 맘껏, 거룩한 외로움은 조금 얘기키로 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저는 노년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의 대비야 다른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준비인데 그것이 바로 외로움에 대한 대비입니다.

늙어갈수록 저는 분명 외로울 것입니다. 수도원에 형제들이 많은데 무슨 외로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늙어갈수록 분명 제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없고 정이 없는 것입니다. 간호해줄 사람이 있는 거지 말동무, 친구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고 돈도 없고, 건강도 없습니다. 기력도 없고, 목표도 없고, 그래서 성취의 기쁨도 없습니다. 이빨도 없고, 입맛도 없고, 그래서 먹는 즐거움도 없습니다.

맛만 없는 것이 아니라 멋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멋도 아름다음도 없으니 자아 도취케 할 나도 없으며 쭈그러들고 비틀거리는 제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외로움은 없는 것입니다. 있었던 것들이 없는 것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없으며 다 없고 없는 나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움은 가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행복도 없는 겁니까? 그래도 행복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되면 됩니다. 다 없어도 오직 하느님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에스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외로움이 거룩한 외로움이겠지요?

그래서 외로움은 가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행복도 없는 겁니까? 그래도 행복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되면 됩니다. 다 없어도 오직 하느님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에스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외로움이 거룩한 외로움이겠지요?

그래서 외로움은 가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행복도 없는 겁니까? 그래도 행복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되면 됩니다. 다 없어도 오직 하느님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에스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외로움이 거룩한 외로움이겠지요?




주님과 흥정하지 말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지녀 아쉬울 것이 없어지는 걸 행복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청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거나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청을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먼지에 불과한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 친히 연약한 우리에게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제1독서에서 왕비인 에스테르는 자기에게 닥친 죽음의 위험을 느끼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기도를 드린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6,9-13)에서처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한다. 참된 청원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먼저 청해야 할 핵심적인 것은 오직 하나 성령뿐이고, 삶의 유일한 의미는 예수의 영의 얼굴을 찾는 일임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한다. “무엇보다 먼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수도규칙10,8-9) 그러나 이기심이나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물질, 건강, 영적인 것들 할 것 없이 청할 수 있고 청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자세로 청하는 것이 좋을까? 참된 청원기도는 내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여주시길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의를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기도이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하느님 앞에서’ 청원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청원기도의 주요 목적은 요청하는 것을 성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청원하는 이가 선이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고 청함으로써 그분의 영과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있으며 그보다 더 우선 챙겨야 할 것이 있을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셔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도구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믿는 마음으로 청하되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기는 것”이 바로 참된 청원기도의 자세다.


자기 것을 얻으려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심을 들먹거리며 흥정하듯 청하거나, 선행을 내세워 그 대가를 바라는 조건부적인 기도는 잘못이다. 청원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깊이 깨닫고,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여야 한다. 청원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희생과 고통을 피하고 애덕은 베풀지 않으면서, 거저 주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은 착각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신다(7,11). 청원기도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 생각하고 내가 청하는 것만을 얻기 위한 기도는 결코 순수한 기도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의 혼인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헤아리시고 청하는 것보다 넘치도록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관대함’을 고유하고 나누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청원기도의 사회적 차원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청할 때도 청이 받아들여질 때도 주변을 둘러보고 모두가 행복해지고 하느님의 정의 안에 머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7,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람에게 남에게 청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염치도 없다는 소리부터 ‘낯 두껍고 뻔뻔하다.’까지 들어야 합니다. 남편이 천직으로 알던 사업이 기울어져 그 부인이 쳐진 남편의 어깨를 보다 친정으로 시댁으로 손을 벌리러 다녔습니다. 평소에 다정하던 친정아버지도 ‘야 너도 우리 사정 다 알면서도 염치없는 소리를 다하는구나!’하는 매정한 소리로 딱 끊으며 뒤로 돌아서는 것이지요. 그 자매는 찬바람 이는 친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때에는 눈물을 바가지로 흘려야 했습니다. 글쎄요? 한 세 네 번이면 사람들은 대게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끊임없이 청하라는 말씀이시지요. 아무리 몰인정해도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악해도 자녀가 청할 때에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하지요. 주님께서 이 아버지의 사랑에 빗대로 하느님께서 자녀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11절) 


바빌론 유배시절 수사 성읍에 사는 유대인들을 몰살하려는 재상 하만의 음모와 크세르크스 입금의 명령 앞에 에스테르 왕비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에스 4,17(15.16) 


에스테르의 기도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십니다. 에스테르의 기치로 하만의 계교가 밝혀져 그는 몰락하고 맙니다. 에스테르는 간절하게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간절하게 하도록 당부하십니다. 한 번의 청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또 한 번의 찾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또 한번의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청하고 또 청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할 때가 있어서 기도를 하여도 엉거주춤하거나 전적인 신뢰를 갖지 못하고 청할 때가 있지요. 주님께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시면서 황금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듯이 내 이웃도 하느님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듯 우리도 내 이웃의 바램을 살피며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남의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사실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내 뜻보다 내 이웃의 뜻과 바램을 따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비울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내 바람도 소중하지만 내 이웃의 소망도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내 욕심을 비우고 내 뜻을 비우면 내 이웃이 바라는 대로 해줄 수 있겠지요. 




<황금률>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기본 정신에 관한 가르침이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의 대원칙이어서 황금처럼 귀하다는 뜻으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하느님께 해 드려라."

하느님께 뭔가를 달라는 말만 하지 말고, 하느님께 뭔가를 드리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칠 줄은 모르고, 하느님으로부터 받기만을 바라는 신앙은 이기적이고 미신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뭔가를 드린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더 부유해지시는 것도 아니고, 안 드린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궁핍해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뭔가를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더 잘 받기 위한 노력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바로 솔로몬이 성전 건축 후에 바친 기도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이 완공된 다음에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이스라엘 왕국과 백성들을 보살펴 달라는 기도를 바칩니다(1열왕 8장).

솔로몬의 기도는, 성전 건축은 겉으로는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린 일이지만, 사실은 인간들을 위한 집을 지은 일이었음을 잘 나타내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뭔가를 달라는 말만 하지 말고 하느님께 뭔가를 드리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더 잘 받으려면 먼저 잘 바쳐야 한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 "하느님은 우리가 바치는 것을 보시고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내리시는 분이다." 로 오해해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뭔가를 바치는 것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채'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뭔가를 바치지 못해도, 또는 바치기도 전에 우리에게 넘치도록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황금률'을 하느님 쪽에서 생각하면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당신께 해 주기를 바라시는 그대로 이미 너희에게 해 주셨다."


우리는 하느님께 뭔가를 청하기 전에, 이미 주신 은총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청원 기도를 바치기 전에 먼저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그대로 '이웃 사랑'에도 적용됩니다. '이웃 사랑'에 적용하는 경우에 '황금률'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네가 받기를 바라는 그것을 이웃이 너에게 해 주지 않더라도 너는 그대로 이웃에게 '먼저' 해 주어라."


'황금률'은 이웃에게서 받아내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웃에게 주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너에게 사랑을 주었는데 너는 왜 나에게 사랑을 안 주는가?" 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또는 "내가 너에게 이만큼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 주어야 한다."고 요구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조건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주는 것입니다. 준만큼 받아내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황금률'의 '바라는 그대로' 라는 말은 준만큼 그대로 받기를 원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고, 내놓으라고 요구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런데 베풀지는 않고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실제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다가 지칠 때도 있고, 실망할 때도 있고, 서운한 감정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을 베푸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어서 받을 줄만 알고 보답할 줄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마음 밭에 '사랑'이라는 씨를 심는 심정으로 그에게 사랑을 주면 됩니다.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됩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 탓입니다. (아예 씨를 안 뿌린다면, 그것은 뿌리지 않은 우리 탓이고.)

또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뭔가를 베푼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대신 보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

주는 입장이 아니라 받는 입장에서 '황금률'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이 너에게 사랑을 주었으니 적어도 그만큼은 너도 그대로 이웃에게 주어라.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줄 수 있다면 더 좋고."


나에게 사랑을 준 이웃과 내가 사랑을 주는 이웃이 같은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사랑이 좀 더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이 가면 됩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베푸는 일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자기가 받은(받고 있는)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황금률'의 실천이 시작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순시기는 

예수님 사랑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허약한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정스레 찾아드시는

가장 좋으신

예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우리는

감춰진 우리 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예외 없이

예수님 사랑을

체험하게 이끕니다.


기도는 자기방어의

수단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다시 일깨워주는

율법과 예언서의

본질적 정신인 사랑또한

기도의 실천을 통해

더욱 구체화됩니다.


참된 실천이란

서로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남이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마음을 하나로 묶어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건

기도와 실천입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또한 없을 것입니다.


생각만 바꾸면

기도와 실천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기도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즘 사람들의 발걸음이 성당보다는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점점 신앙인들이 줄어드는 것, 그만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 사실을 늘 안타까워하던 신부님께서 어느 날 미사 강론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전해도 듣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체험해야 주님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다음 주 미사 전에 저기 보이는 산을 이리로 옮기는 기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 와서 보시고,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산이 옮겨진다는 말에 사람들은 “저 신부, 미친 것 아냐?”라고 부정적인 생각을 말하면서도, 너무나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서 “정말로 혹시 산이 옮겨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약속했던 시간에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산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산을 이리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산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신부님께서는 “주님! 산을 이리로 옮겨주십시오.”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또 다시 “주님! 산을 이리로 옮겨주십시오.”라고 말했지만, 산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사람들은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지요. 바로 그 순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해도 산은 꼼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산이 옮겨져서 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것과 제가 산을 향해 가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제가 산을 향해 가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종종 불평불만을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만 내게 다가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대로 여러분이 주님께 다가간다면 문제의 해결은 더욱 더 쉬워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게 직접 다가오시길, 즉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해주시는 주님을 청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반대로 내가 주님께로 다가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주도권을 주님께 철저하게 맡기는 겸손함과 자기 낮춤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내가 청하는 대로 받았습니까? 또 내가 찾는 대로 얻었고, 문을 두드리는 대로 활짝 열렸습니까? 아마 많은 이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청해도 응답이 없다면서 주님 곁을 떠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주님께 주도권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즉 주님이 무조건 내 곁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주도권을 모두 맡겨서 내가 직접 그분 곁으로 다가간다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주도권을 맡기는 삶. 우리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미지의 것을 발견한 것만이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똑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것도 훌륭한 삶의 재발견이다(구본형).


성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성소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줄 것을, 마음이 오로지 그분께로 향하여 허황된 우상이나 부(富)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제들과 수녀님들을 보내 주시도록 청하셨습니다. 그 전문을 올립니다.

복음은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을 여쭙던 부자 청년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계명들을 지켜온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이상을 원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더욱 나아가게 인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말씀에 그는 얼굴을 떨구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예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서 그분을 따르도록 성령께서 그를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는 그것을 비워낼 용기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는 선택을 했습니다. 재물을 택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재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강도나 범죄자는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니지요! 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누구도 속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그의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갇혀 있었고, 재물에 집착하였으므로 선택의 자유(여지)가 부족했습니다. 재물이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는 이 소명을 느끼고, 그것에 열정을 가질까요. 그들은 그분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따르고자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어떤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그 마음을 비워낼 용기가 부족하면, 그들은 등을 돌리게 되고 그들의 기쁨은 슬픔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성소를 지닌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때로는 그들을 가로막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젊은이들의 마음이 비워지도록, 다른 관심거리들과 다른 감정들을 비워내도록,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유로워지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소를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 수녀님들과 사제들을 보내주소서, 그들을 우상으로부터, 허영의 우상, 자만의 우상, 권력의 우상, 재물의 우상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 우리의 이 기도가 이들의 마음을 준비하게 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더 가까이 따를 수 있게 합시다. 복음에서 묘사된 이 청년은 참으로 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슬펐습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이 젊은이들을 도우시어 그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되게 하시어, 그들의 마음이 오로지 당신께만 향하도록, 그리하여 주님의 부르심이 그들에게 이르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소서.'


이 것이 성소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만 합니다. 성소를 받은 이들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성장하도록,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시어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 형용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을 주시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 우리가 믿어야 할 것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하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오7,8)

...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했을 때, 결과적으로 안 들어주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 라며 반문하는 이도 있으리라.

물론, 나 역시 결과를 보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그분의 마음에 속이 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비록 내 예상과는 빗나간 결과였다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려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그분께 청한다.

그리고 반응 없으신 그분께 실망하고 곧 포기를 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청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신데, 내가 청하는 내용이 나를 망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들어주실 리 없다.

따라서 우리의 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들 때, 우선 나의 지향이, 나의 바람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한다.


때로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옳지 않은 것이 옳게 보일 때도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욕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하느님께 따지듯이, 강요하듯이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좋은 길로 내가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아시며, 내가 그 길로 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신다는 것이다.


[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7,12)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본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아니 인간이라면 모두가 타인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나 아닌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존중해주 것이 아닐까?


그래. 간단한 이야기다.

우리 인격이 파괴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고 우리의 인격이 더욱 가치 있게 커질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존중 받고 존중하는 관계 안에 사는 것이다.


유명한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 깊은 뜻이야 말씀을 하신 그 스님만 알겠지만, 사람은 사람으로서, 물질은 물질로서, 자연은 자연으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왜 아프냐?”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라,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그 아픔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존중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간직해 본다.




"누구든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좋은 교사 운동본부에서 서울의 초, 중, 고생들을 바탕으로 선생님의 어떤 행동에 고마움과 미움을 느끼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아직 어린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체벌할 때의 선생님이 가장 싫고 수업을 재밌게 하는 선생님이 가장 좋다고 응답했습니다.

하지만 중고생의 경우에는 선생님이 차별할 때가 가장 싫으며 관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대해줄 때 가장 좋다고 응답했습니다. 유의할 것은 이들이 말하는 차별이란 매우 작은 행동들에 대한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언제나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만 “시험 잘 봤니?”라고 얘기하는 경우, 성적이 좋으면 품행이 좀 안 좋아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 수업을 상위권 아이들과만 소통하며 진행하는 것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아주 작고 소소한 부분이지만 학생들은 그것들을 가장 큰 불만으로 여겼습니다.

초등생의 경우도 단순한 체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잘못했을 때 혼자만 혼내는 경우라든가 자신이 무엇 때문에 혼나야 하는지 뚜렷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당하는 차별이 밑바탕에 깔린 체벌을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조: 햇볕 같은 이야기, 체벌보다 나쁜 차별/ 김장환 큐티365, 나침반출판사] 


세종대왕이 위대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 해 줄 수 없다면 아무에게도 해 주지 마라.’

즉 편애와 차별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편애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본당에서 항상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교구청에 들어와서는 조금 바뀌었습니다. 제가 교구청으로 들어와 좋은 것 중의 하나가 그나마 본당에 있을 때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퇴근시간도 있고 휴일도 있어서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조금 쉬는 맛을 알다보니 한 가지 나쁜 마음이 생겨났는데 여기저기서 청해오는 강의부탁이 조금씩 귀찮게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교구청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시간도 더 여유로운데도 본당 차원이나 아니면 밤늦게 하는 강의들은 거절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쳐 주어서 학위를 딴 것이고 하느님께서 좋은 능력을 주셔서 당신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셨는데 이제는 가려가며 강의를 하려는 저의 모습을 보며, ‘참 교만해졌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별이나 편애는 교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청하여라.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누구든지’란 말은 아무나 쓸 수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달라면 다 줄게. 누구든지 용서해 달라면 다 용서해 줄게. 누구든지 재워달라면 다 재워줄게. 누구든지 만나달라면 다 만나줄게...”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가 헤아릴 길 없는 것 같습니다. 죄인이건 선인이건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청하는 대로 다 들어주시겠다는 말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부족하면 편애을 하거나 아니면 다 똑같이 못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누구든지’ 다 사랑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말은 또 얼마나 큰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단어입니까? 가려가면서 주고 가려가면서 문을 열어주는 삶이 두려움 때문에 부자유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주고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주시겠다는 그 사랑은 또한, 참 사랑만이 참 자유를 선사할 수 있음도 깨닫게 해 줍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누구든지’란 말을 쓸 경우는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만큼 무한한 능력과 사랑을 지니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나에게 청하면 누구든지 다 도와줄게.”라는 정도의 사랑과 자유로움은 가지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구든지 청하면 다 들어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고 다시 다짐해 봅니다.




외로울 때 우리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중적二重的이라는 말이 있고, 어떤 사람을 보고 이중적이라고 하면 그리 좋은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중적이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자기중심적 이중성을 띱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그런 사람들은 없으면 좋겠다고 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는 힘과 위로가 될 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까?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살아갈 때는 이와 정 반대의 경우가 태반입니다. 살다보면 내 주변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고, 내 가는 길에 거치적거리고 방해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으며,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는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이때 우리가 기도를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싹 쓸어버려주시고 좋은 사람만 내 주변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면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실까요? 어림없는 말이지요.

그리고 살다보면 옆에 누가 있어줬으면 할 때 아무도 없습니다. 개똥도 쓸려고 하면 없다고 나를 그렇게 성가시게 하던 사람들, 그 많던 사람들이 정작 필요로 하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면 달려들지만 아무런 이익이 안 되면 돌아서지요. 그러니 오히려 고통을 주거나 손해가 된다면 누가 다가올 것이며, 같이 죽자면 어께동무하며 같이 죽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가 그 사람들 아무리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 이때 우리가 더 이상 어리석지 않으려면 깨달아야 하고, 생각을 고쳐먹어야 하고 우리의 지향을 돌려야 합니다. 


힌두교의 우파니샤드가 얘기하듯 우리 인간은 무소의 외뿔처럼 절대고독 속에서 홀로 가는 존재이니 에스델 왕비처럼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진정 우리가 지향을 두고, 마음을 두고, 위로와 힘을 얻을 곳은 세상도 아니고 세상 사람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은 그러하지 않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삶의 궁지에 몰려 자살을 한 세 모녀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 모녀의 자살을 놓고 우리의 무관심과 사회 안전망의 부실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세상의 입장에서는 원인을 이렇게 꼽고 반성을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다른 성찰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도와주고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 곳이 없다고 해도 셋 다 어른이고,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인데 왜 하느님 생각을 못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럴 때 신앙인인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반성케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반성을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나도 삶의 막다른 궁지에 몰릴 때 하느님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에게서 구원의 손길을 찾는 것은 아닌지.

반대로 우리 주변에 세 모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터인데 사랑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들이 고통의 때 하느님을 찾도록 하느님을 알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데 등한한 것은 아닌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이 말씀은 원래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만'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인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하느님께 좋은 것만 바쳐야 한다.", 또는 "이웃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조건 청하기만 하는 존재, 하느님은 무조건 주시기만 하는 분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께 와서 귀한 예물을 바쳤던 동방박사들은 돌아갈 때에는 (물질적으로만 본다면) '빈 손'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이웃에게 받는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주고 나서 생색을 내거나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에게서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면, 또 받은 것보다 덜 좋은 것만 준다면 언젠가는 아예 받지 못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은 사랑을 실천할 때의 대원칙이면서, 동시에 신앙생활의 대원칙이기 때문에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황금률에는 "받기를 바라지만 말고 먼저 주어라." 라는 뜻도 들어 있고,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말고 주어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가 바라는 그대로 받지 못하더라도'를 덧붙여서 읽는 것이 옳습니다.

뭔가를 받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황금률의 본래 의도와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라는 말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 희망, 사랑, 선, 정의, 평화, 구원, 생명...' 등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복을 바라면서 물질적인 것을 바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고 상품을 뽑아가는 것과 같은 거래입니다.


그런 거래에는 사랑도 없고, 희생도 없고, 인내도 없습니다. 돈만 먹고 상품을 내놓지 않는 자판기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볼 때가 많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을 그런 자판기로 생각하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느님께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판기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판단과 결정은 자녀가 아니라 아버지가 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이 말씀을 "하느님은 자판기 같은 분이어서 청하면 주실 것이다." 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청하여라."는 "좋은 것만(구원과 생명에 유익한 것만) 청하여라."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쁜 것은 청하지 마라."입니다.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그것이 정말로 너희의 구원에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면 당연히 주실 것이다."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필요하지도 않고, 좋은 것도 아니라면 안 주신다."입니다.


"문을 두드려라."는 "구원과 생명의 문만 두드려라."입니다. 그 문은 '하느님 나라의 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이 아닌 다른 문을 두드리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 현실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아닌 '다른 문'이 열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 문을 열어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열어 준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탄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간다면 사탄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가 청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자기에게 좋은 것인지...

구원, 생명 등과는 상관없는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아닌지...

또 이기적인 욕심으로 청하는 것은 아닌지... 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좋은 것 같아도 만일에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것이 진짜로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형과 자기 사이에 생긴 유산 분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루카 12,13).

겉으로 보기에는 정의 실현을 위한 요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탐욕을 꿰뚫어 보셨고,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루카 12,15).

그 사람은 겉으로는 정의로운 분배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탐욕과 이기심이 그의 속마음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라는 말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사랑의 원조(?)하고 할까요? 부모의 사랑은 남다른 것이지요. 자녀들에게는 잔소리는 말로 일축할 수 있지만 어쨌든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또 올바른 사람으로 교육하는 교사이며 사랑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정 환경과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우선 부모의 사랑은 헌신적인 것이 특징이지요.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을 보호하고 키우는 부모의 역할을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당신 대신 부모를 보내셨다.’라는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부모님을 통하여, 특히 어머니를 통하여 세상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배우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사랑을 부모와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사람이 철 들면서 부모의 사랑을 깨닫듯이 하느님 사랑도 점점 신앙의 성숙이 깊어지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세상이 험하다, 각박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부모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이 사막에서 오아시스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태양을 오래 못 보듯이 하느님 사랑을 정면으로 다 이해하고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순간에도 늘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끊임없이 청해야 한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


오늘 하루를 지내며 주님의 법인 ‘황금률’을 묵상하며 또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두고두고 생각하고 묵상해도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2절)


살면서 ‘져주는 것’ ‘양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되었을 것을...’하며 뒤늦게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들어보면 정도 차이지 시작은 바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부터’라는 사실을 훨씬 후에서야 알아 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라는 말이요. 내가 변할 생각은 않고 상대가 변하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러지 저러니 불평을 하고 심지어는 말을 퍼트립니다. 그래서 남들도 부부가 사이가 안좋은 것을 알아채고 또 말을 퍼트리지요.


달래 황금율이겠어요? 우리의 삶에 새기고 또 새기라는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남을 배려하는 것이 힘드기도 하지만 또 중요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지내며 한순간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마음에 안드는 사람, 속상한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그러한 나 자신을 생각하며 오늘 황금률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또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상황에서 간절한 에스테르의 기도를 묵상합시다.

그리고요 이왕이면 멋진 하루 되세요 !




마음을 비우고 열고 마주보며 대화하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평등한 사회, 공평한 판정, 공정한 분배 이런 말들의 근원은 어디일까요.

대자연과 우주의 질서와 운행이 우리 마음에 심은 씨앗이라 봅니다.

인류 선조들의 얼과 오늘까지 잘 사신 분들의 삶이 영글어낸 열매겠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나 소속 집단의 이기주의로 그 열매를 부패시킵니다.

마음을 비우고 열고 마주보며 대화하여 마음의 씨앗 싹틔워야지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 표현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오 7,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순시기는

신앙과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신앙과 삶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꾸준한 기도뿐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하느님을 향해 청하는

기도는 하나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을 버릴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향이 되게 합니다.


기도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합니다.


기도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이며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남을 바꾸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사랑과 인내를

배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남이 우리에게

사랑과 인정을 바라는 그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아직도 달콤한 사탕만을 원하십니까?

김경진 신부님

본당에 있을 때 아이들한테 사탕과 초콜릿을 건네며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손에 꼭 쥐고 있을 때는 아무리 그것을 달라고 해도 쉽게 주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이의 손에서 사탕을 순순히 받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 아이한테 더 좋은 것을 주며 사탕을 달라고 하면 그 사탕을 놓아버리고 더 좋은 것을 움켜쥡니다. 제가 실험을 해보니 맞더군요. 물론 영특하거나 욕심이 많은 아이들은 둘 다 갖습니다.(웃음)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께 달라고 청해도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정작 내 손에 아직 덜 중요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기준과 인간인 내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치도 치아가 썩은 자식에게 좋아하는 사탕을 주지 않는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요?


순간적으로 나한테 달콤함을 주는 사탕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미 내가 청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 법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청할 것만 청할 수 있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두드리러 가야겠습니다. 그럼 언젠간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한테도 믿음 · 희망 · 사랑의 열매를 주시겠지요.




 

얼마 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한 가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가수는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팀으로 나와 정말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그 과정 안에서 암 말기라는 사연을 듣고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수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것은 암이라는 병보다도 다른 것에 있었답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의 악의가 담긴 인터넷 댓글이었지요.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기 보다는 우승을 하기 위해 일부러 쑈 한 것 아니냐는 말, 더군다나 결혼까지 해서 아이까지 않았다니 이제까지의 모습은 다 거짓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몇몇 사람들의 “아직도 죽지 않았냐?”는 저급한 표현의 글에 큰 아픔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다른 이로부터 나쁜 말 듣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꾸짖는 나쁜 말만 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떻게든 좋은 평가를 받고, 긍정적인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남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또한 자신의 이러한 비판의 말, 부정적인 말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켜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내던져가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 그러나 역으로 내가 비난받는다면 어떨까요? 


저 역시 지난해에 어마어마한 인터넷 악성 댓글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지요. 솔직히 ‘내가 떳떳하니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뭐.’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군요. 전후 관계에 대한 어떠한 고민도 없이 쓴 글, 또한 그 글에 대해서 동의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글은 저를 화나게 만들었고, 왜 이러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급의 사람들에게 원색적인 욕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치욕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예인들이 악성 댓글에 큰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할 수가 있었지요. 


별다른 의미 없이 행하는 오늘의 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게 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 역시 다른 이들로부터 똑같은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황금률이 크게 와 닿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내가 원하는 대로 먼저 내가 남에게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두가 살아갈 때, 더 이상 상처를 주는 세상이 아닌 힘과 용기를 더해 주는 세상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는데 더 이상 열광하지 맙시다. 이제 비난하기보다는 칭찬하고 사랑하는데 더 열광하는 우리들이 되면 어떨까요? 


최고의 장애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 희망은 바로 뒤에 있지만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할 뿐이다(닉 부이치치).


주님이 우리 관심의 큰 축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 어느 본당에서 사순특강을 했습니다. 원래 저녁 시간을 이용한 특강을 부탁했지만, 제가 시간이 없어 오전 낮 미사 중 강론을 이용해서 사순특강을 하기로 했지요. 시간 맞춰서 제의방에 들어갔습니다. 복사들이 4명 있더군요. 다음은 저와 복사들의 대화입니다.

“오늘 강론시간 무척이나 긴데 괜찮니?”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곧바로 터져 나오는 말.

“왜 길어요?” “사순특강으로 강론을 하는 것이거든.”

“짧게 하면 안 돼요?” “안 되지. 특별히 사순절을 맞이해서 특강을 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한 20분 정도 하실 거죠?” “아니지. 특강이니까 1시간 정도는 해하지.”

“미사 포함해서요?” “아니. 미사 빼고 특강만…….”

복사들이 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앞이 캄캄한가 봅니다. 사실 특강 한 시간이면 정말로 짧은 것입니다. 보통 제게 3시간 정도를 부탁하거든요. 따라서 이번 특강은 무척 짧은 것인데, 이 복사들은 길어서 어떻게 하냐고 걱정에 빠진 것입니다.

미사와 특강을 마치고 어른들은 너무 짧았다고 이야기하시는데, 복사들은 너무 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부터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처음부터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길고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어떠합니까? 혹시 주님을 지루한 분, 내 관심 밖의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럴 경우, 성당 나가는 자체가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가겠다고 말하고, 조금이라도 이유가 되면 성당을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주님이 내 관심의 큰 축을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모든 일에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합시다.

김기현 신부님

오늘 오전에 형제님들과 새끼 돼지를 사러 양곡 시장에 갔었습니다. 예전에 거기서 돼지도 팔고 닭도 팔았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갔는데요. 지금은 없는 거 같습니다. 조금 늦게 닭 파는 사람만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수소문해서 양돈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 보았는데요. 전화를 안 받는데도 있었고, 전화를 받는 데서는 ‘1~2마리는 구할 수 없을 거에요...’ 하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안 되겠다..‘ 하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작업할 재료를 사러 인천 공구 상가에 갔었습니다.

제대에 까는 카페트도 사고, 수도 모타 수리도 하고, 시설물 사용의 편의를 위한 몇몇 제품들도 사고나서 아는 신자분이 하시는 고물상에 갔었습니다. 폐업한 식당같은데서 물건을 사다가 파시는 분이었는데요. 그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서 머리 속에 이러저런 생각들이 막 번쩍였습니다. ‘저번에 이런 수납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거를 거기다 놓으면 참 좋겠다.. 공소 신자들이 탁자 두 개정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 탁자 갖다 놓으면 딱 좋겠다...’

그 고물상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의자나 라디에이터나 십자가와 같은 것들을 어디서 봤을 때 신자분이 그런 거 필요해요.. 하는 이야기가 번뜩생각납니다. 그러면 주실 수 있느냐고 때로는 준다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오곤 했는데요. 만약 신자들이 이러저러한 거 필요하다.. 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요? 예를 들어 실외 부엌에 온수가 필요하다는 거.. 말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말한 뒤에는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언제가 필요한 사람과 방법을 만나게 되면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그와 같은 일이 성경에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두 자매는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그에게로 가시지 않죠. 칠일이 지난 뒤에야 그를 찾아가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소식을 듣고 칠일 뒤에 움직이셨지만, 들은 그 순간부터 타이머는 작동을 시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예수님은 전해들은 그 일을 해결해 주십니다. 만약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살았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말을 전했다면 일단은 안심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타이머가 작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언제 그 말씀의 성취를 보게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뢰고 청한다면 언제가 적당한 시기와 장소에서 일의 성취를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해봐야 뭐해.. 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청하고 아뢰어 봅시다. 언제가 기도의 열매를 보게 되실 겁니다.




청소년들이 달라지길 바라는 대로 어른들이 먼저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눈 감으면 코 베먹는다는 옛이야기 지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사기꾼 절도 강도 폭행 살인 뉴스를 볼 때마다 단골로 나오는 메뉴지요.

이젠 남을 보면 일단 의심부터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남은 물론 친척 심지어는 자식도 돈 앞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이런 사회를 만들어낸 것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이라는 생각 절대 안 듭니다.

깊이 살피고 마음 아파하고 뉘우쳐야 할 자들은 어른들임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오 7,12)




정성을 다하는 기도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바빌론 유배기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임금 왕 때에 내시는 유대인 모르도카이였는데 그를 견제하며 갈등을 빚게 하는 사람은 바로 재상 하만이었습니다. 그는 임금 측근으로 항상 모르도카이와 함께 그곳의 유다인들을 언제나 견제하며 괴롭히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크세르크세스의 부인 와스티가 폐위되고 새로 뽑인 여인이 바로 유대인이며 모르도카이의 양녀인 에스테르였습니다. 하만은 유대인들을 거슬러 음모를 꾸며서 임금에게 이스라엘 인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에스테르는 너무 위급한 마음에 동포를 위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에스 4,15)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모르드카이와 이스라엘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 구해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하느님께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하라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 7,7-8)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보통 부모의 자식 사랑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작은 티끌이나 눈섶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아픈데, 자식을 넣으면 그 아픔이 오죽하겠어요? 물론 너무 커서 눈에 들어 갈 수도 없지요. 그것은 지극한 부모의 사랑을 빗대어서 표현하는 것으로 세상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부모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10) 


부모는 당신은 굶어도 자식을 살리려 하고 자신은 못배워도 자식은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고생을 자식에게 대물림 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께서 이런 부모의 사랑에 비교하며 그 보다도 더 사랑이 크신 하느님과 비교를 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누구이든 청하는 것을 안들어 주실 리가 있겠느냐?’는 뜻으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그리고 주님께서 결론으로 황금률(黃金律 the golden rule)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사람에게도 ‘바라는 대로 해주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더 말할 나위없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결론은 하느님께 기도를 하되 정성을 다해서 하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자신이 당면한

가장 정직한 상황을

아버지 하느님과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장황한 미사여구나

어엿한 공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확신이 필요할 뿐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알맞은 때에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 확신말입니다. 


가장 절실한 것을

하느님께 확신을 갖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고 사는 삶이

바로 깨어있는 기도의 삶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것답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느님 생명의 선물이 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아버지 하느님의 차고 넘치는

배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좋은 뜻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저 기쁘게 받아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우리의 뜻을 비우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는

헛된 희망과 환상, 기대를

벗겨내는 일입니다. 


언제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제 때에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삶 한복판에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이 계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기대하며

기쁘게 기도하는 사순시기되십시오. 


거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이는

믿음의 하루되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기도의 삶을 원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를 원합니다.


 


 

얼마 전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글쎄 불과 4~50년 전, 과학자들은 인간의 심폐기능을 분석한 결과 42.195Km를 2시간 10분 이내로 뛰면 심장이 파열할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을 모든 마라토너들이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마라토너들은 이 말을 믿었고, 30년 넘게 신기록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1년 호주의 데릭 클레이튼이 최초로 2시간 10분대 벽을 허문 이후, 2011년 현재 마라톤 세계 신기록은 2시간 3분대이고 10분 이내에 들어온 선수들이 300명도 넘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힘이 과학의 선을 넘어 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힘은 과학과 상식의 선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한계점을 그어놓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저 사람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미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는 것일까요? 자기 스스로 한계점을 그어놓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점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특히 이 한계점이 인간적인 기준일 때,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셨지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나의 한계점으로 남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기준을 통해서 남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이 바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을 언젠가 다시 돌려받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내가 받아야 할 것을 맡겨 놓은 것뿐입니다.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내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행할 때, 진정한 사랑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주님께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의 한계점에 얽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그 넓은 사랑의 마음 안에서 큰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들이 원하는 더 큰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새와 같은 것이다. 날아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실러).


당신은(‘좋은 생각’ 중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꿈을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을 이웃을 돕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가정을 꾸미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지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웃을 보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누군가의 행복한 동행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내가 지금 만나는 당신은 위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당신을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황금률> (마태오 7,7-12)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 말씀은 황금률입니다. 황금처럼 귀하다고 해서 황금률이고, 가장 기준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해서 황금률입니다. 여기서 ‘남’은 이웃을 가리키기도 하고, 하느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황금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압축한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바라는 그대로 하느님께 해 드리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에게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해 주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여기에 더 덧붙일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황금률대로 살면 만사가 다 잘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에게 ‘좋은 것, 선한 것, 이로운 것’을 바라지 않고, ‘나쁜 것, 악한 것, 해로운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니 ‘남’에게 같은 것을 해주려고 합니다.(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알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빵을 주시려고 하는데, 빵을 청하지 않고, 돌을 달라고 청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는 빵보다 돌을 더 좋아한다고 우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바라는 그대로’ 해 주라는 황금률을 반대로 실천하기도 합니다. 바라는 그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받은 대로 갚아 주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대로 은혜로 갚는 일이야 좋은 일이지만, 고통과 불행을 받은 그대로 미움과 원한으로 되갚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남이 나에게 먼저 해 주기를 기다리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가 남에게 ‘먼저’ 해 주어라,라고 ‘먼저’ 라는 말을 집어넣고 읽어야 올바른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먼저’가 아니라 ‘남이 먼저’로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황금률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황금률대로 살면 된다는 말만 하고서 강론을 끝내면, 그건 너무나도 상투적인, 그리고 피상적인 강론이 됩니다. 실제 신앙생활 모습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먼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자고 흔히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된 기도, 성숙한 기도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

그것도 사람 나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바라는 것을 기준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바라는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건 하느님 보시기에도 옳고, 좋은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버립니다.

결정은 인간이 하고 하느님은 그 결정에 동의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마리아가 비싼 나르드 향유를 몽땅 예수님 발에 부었을 때(요한 12,3), 유다가 그것을 비난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

유다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유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성전 신축 헌금으로 봉헌하겠다.”

그런데 제가 과문한 탓인지 복권에 당첨된 돈을 전액 봉헌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그런 지향을 어여삐 여기셔서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실제로 복권에 당첨되는 일이 있었는데도 당첨된 후에 변심한 경우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바라는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정말 ‘좋은 것’인가?

각자 스스로 반성할 일입니다. 빵을 돌로 착각하는 사람은 계속 돌을 달라고 조를 것이고, 황금률을 실천한다면서 하느님께도 빵이 아니라 돌을 드릴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원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깊이 있게 묵상하고 그 진의(眞意)를 명확하게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작정 글자 그대로 믿고 죽기 살기로 청원기도에만 전념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실망과 좌절을 맛보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청원기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권고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제댈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떼쓰고 어거지 쓰고, 떼써봤지만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나 효험도 없이 지쳐나가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들이 아버지께 간절히 청한 것은 시시한 것, 가벼운 것, 들어주셔도 좋고 안 들어주셔도 좋은 그런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들, 때로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잠까지 설쳐가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끝까지 붙들어보려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매달렸으며, 청하여라, 주실 것이라는 청원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목숨을 다해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자비하다 못해 참담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며, 하느님이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시라며 어찌 이리 끔찍한 현실에 맞닥트리게 하시는지, 정말이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사실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기적의 요술방망이를 지닌 마술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닌 끝도 없는 이기적 욕구들을 끝없이 채워주시는 해결사도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청하는 참으로 사소한 바램들도 즐겨 들어주시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그릇들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신앙을 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한도 끝도 없는 이기적인 기도들을 들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들이 청하는 것이 위험하고 해로운 것,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간절히 청할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인 성령을 청할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안에 벌어지는 모든 희로애락, 흥망성쇠를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공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패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건강과 젊음에 행복해하지만 언젠가 주실 병고와 죽음도 기꺼이 수용합니다. 


오늘 내가 진정으로 청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기도의 대상이 너무 허무맹랑하거나 얼토당토않은 것, 이 지상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면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보다는 불완전한 이 지상에 완전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더 큰 선을 위해, 더 아름다운 세상의 건설을 위해, 더 참된 가치의 추구와 실현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이타적인 삶, 좀 더 내어주는 삶, 좀 더 인내하며 함께 가는 삶을 살도록 청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보다 큰 기도, 보다 성숙한 기도, 보다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덤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수많은 작은 청들도 곁들여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여든다섯 살 된 할머니께서 전기 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면서 화를 내고 계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옆집 자매님께서 할머니에게 말했지요.

“에이, 할머니. 할머니는 언제나 전기 히터를 켜놓고 있잖아요. 그리고 방안에 불을 켜놓은 채로 주무실 때도 많이 있잖아요. 따라서 전기 요금 많이 나왔다고 하실 수 없죠.”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 전기회사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라도 걸릴까봐 내가 밤에는 언제나 커튼을 친단 말이야.”

밤에 커튼을 친다고 해서 쓰고 있는 전기를 안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기계량기를 통해 전기를 쓰고 있다는 기록이 남게 되어 있으니까요. 따라서 앞선 이야기의 할머니와 같은 억지는 이 사회에서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볼 때, 우리도 이러한 억지를 자주 부렸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순간이 왔을 때, 우리들은 주님께 억지를 많이 부립니다.

‘주님,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주십니까?’

또한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을 때도 우리의 억지는 계속되지요.

‘주님, 제가 이 정도 했으면 보상을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사람은 엉망으로 사는데도 저렇게 잘 살도록 해주시다니요.’

우리의 억지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를 묵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혹시 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에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아닐까요?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을 듣고 계시며,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까지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기준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뿐, 주님의 기준으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청하는 것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청하는 데에는 원칙이 하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즉,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원칙을 따를 때, 주님께도 합당하게 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억지만을 부려서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먼저 남에게 사랑을 철저하게 베풀 때만이 주님으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할 줄 아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 오늘부터 내일까지 교구 성소후원회 임원과 지구장 연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일 새벽 묵상 글이 없음을 공지합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를 심어 열의 수확이 있는 것은 나무고, 하나를 심어 백의 수확이 있는 것은 사람이다(관자).


119보다 빠른 이웃(서정홍, ‘부끄럽지 않은 밥상’ 중에서)

산골 마을에서는 이웃보다 소중한 사람이 없습니다. 팽기 할아버지 집 아궁이 옆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났을 때 얼른 달려가 불을 끈 사람도, 갑자기 가을비 내릴 때 길 위에 여기저기 널어 놓은 나락을 함께 덮은 사람도, 혼자 사는 인동 할머니가 살아 계신지 틈만 나면 들여다보는 사람도, 사슴 농장 아주머니가 화상 입었을 때 아침마다 보건소에 모시고 간 사람도, 설매실 어르신이 경운기 사고로 피흘리며 쓰러졌을 때 병원에 모시고 간 사람도, 새터 할머니가 날이 갈수록 정신이 없어 가스레인지 불을 켜 놓고 산밭으로 나갔을 때 그 불을 끈 사람도 모두 가까운 이웃입니다.

경운기가 논두렁에 처박히면 자기 일처럼 끌어 올려 주는 사람도, 먹는 물이 나오지 않으면 연장을 들고 물탱크로 달려가는 사람도, 밤새 눈이 내리면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도, 이웃집 자녀가 혼인하면 며칠 내내 음식 준비를 같이 하는 사람도, 산밭에 일손이 필요할 때 아무 조건 없이 달려와 주는 사람도, 농산물 값이 폭락해 마음 둘 곳 없을 때 그 설움을 달래며 막걸리 한잔 나눌 수 있는 사람도, 발을 헛디뎌 다리가 부러졌을 때 가장 빨리 달려와 주는 사람도 모두 가까운 이웃입니다. 피붙이가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이웃만큼 소중하지는 않습니다. 119구조대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이웃만큼 빠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산골 마을에서는 이웃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황금률

신헌문 신부님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금방 잊히는 사람도 있지요. 오늘은 제 기억 속에 오래 남는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수도원의 왕고참이셨던 수사님입니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지금도 저희 수도원 안에서는 그분을 회상하고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형제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오늘 복음말씀의 ‘황금률’을 가장 잘 실천하셨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웃는 얼굴에 시원시원한 말투 그러나 늘 그 말 속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묻어 있었고 깊은 배려와 사려가 담겨 있어서 ‘모든 형제들이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그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사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수사님, 정말 후배들이 그렇게 좋으세요? 왜 그렇게 항상 관대하게 베풀기만 하세요? 불만 없으세요?” “왜 없겠어요… 하하, 당연히 있지요. 그래도 내가 후배들에게 이렇게 하는 건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는 뜻이지요…하하.” 수사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예수님의 황금률을 그대로 실천하셨으니 참으로 복 되십니다.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자신의 노력 이상으로 보상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좋은 기도, 나쁜 기도

김태완 신부님

학생 두 명이 수업시간에 장난을 칩니다. 장난이 심해지면서 둘은 다투게 됩니다. “니, 좀 있다 쉬는 시간에 보자.” 둘은 싸늘하게 돌아섭니다. 그러고는 각자의 책을 봅니다.

한 학생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놈 한 방만 때려주이소.” 학생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께서 갑자기 저놈(?)의 뒤통수를 한 방 때립니다. “선생님 말씀하시는데 졸기나 하고….”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나 봅니다. 감사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신나서 어쩔 줄 모릅니다. 만세라도 부를 지경입니다. 이런 잡생각에 사로잡혀 수업에 집중을 못하니 선생님께 혼이 납니다. 뒤통수 두 방에 머리는 얼얼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고소하고 감사한 마음에 아픈 줄 모르겠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까 다툰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저놈(?)한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야! 하느님은 내 기도를 정말 잘 들어주신데이. 아까 내가 하느님께 니 한 방 때려 달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들어주셨다 아이가.” 그러자 저놈(?)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은총 충만입니다. 저놈(?)은 저한테 말합니다. “야! 나는 니 두 방 때려 달라고 기도했다 아이가~”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마음껏 청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청해야 할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내 두 방 맞아도 괜찮으니, 남 한 방만이라도 때려주이소.”라고 기도할 것인지, “남 한 방 때리느니 내 두 방 때려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청하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에스델은 주님밖에 아무도 없다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에스델을 보면서 저를 봅니다.

제 주변에는 저를 사랑해주는 분이 아주 많습니다. 당연히 저를 도와주는 분도 아주 많습니다.

에스델의 기도를 보면서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니 헷갈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에스델처럼 주님밖에 아무도 없어야 하는 건가? 주님밖에 아무도 없도록 나를 사랑해주는 모든 분들에게 절교를 선언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아하,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니 저에게 달렸습니다.

무작정, 아니 무조건 절교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분들을 제가 당신 사랑의 현현顯現으로 생각한다면 절교할 게 아니라 오히려 감사와 맞갖은 사랑으로 응답해야 할 겁니다.

문제는 그분들이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 아니라 하느님을 가리고 대신하는 우상일 때입니다. 물론 그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저에게 보내신 분들이지만 저라는 인간이 하느님은 제켜놓고 그분들 사랑에 안주할 때, 그분들 때문이 아니라 저의 잘못으로 그분들은 우상이 되는 거고, 이럴 때는 그분들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우상을 파괴해야 합니다.

실상 우리는 많은 분들을 이렇게 파괴해야 할 우상으로 만듭니다. 하느님께 위로를 받기보다 인간에게 위로를 받으려 하기에, 하느님의 도움을 받기보다 인간의 도움을 받으려 하기에 그리합니다. 심지어는 하느님께 길을 묻기보다 점쟁이에게 길을 묻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이런 하느님을 두고 누구한테 가느냐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는 마치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알고,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사랑하는데 다른 누가 자기를 제일 잘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하며 사기꾼 같은 사람을 찾아가는 자식, 이 한심한 자식을 보고 부모가 한탄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 혻시 하느님 아닌 다른 누구를 찾아갔다면 이제 돌아와,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들이 찾고 두드리는 방식

양미강 목사

워싱턴 디시에 있는 세이비어 교회는 미국의 유명한 수정 교회나 새들백 교회처럼 건물이 웅장하지 않다. 그러나 세이비어 교회는 미국을 움직이는 몇 안 되는 교회의 하나다. 교인을 다해야 150여 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가 큰 교회도 하기 힘든 노숙자와 알코올의존증자, 저소득 계층을 위한 아파트 임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40여 개의 네트워크와 10개 교회로 구성되어 활동하는 이들은 세이비어 교회라는 단일한 우산 속에 들어 있는 지부가 아니다. 10개 교회는 때로는 주일, 때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들이 드리는 예배는 목사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 훈련된 교인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읽고 삶을 나눈다. 그들의 예배는 큰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한 편의 질 높은 공연을 특급석에 앉아 관람하는 것 같은 고품질 예배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정리된 예배 속에서 하느님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살아 있는 예배다. 그들에게 예배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미션과 삶을 함께 나누는 장이다.


이 교회를 방문한 후 내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이 공동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이들이 구하고 두드리는 방식은 세상과 담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데 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 훈련, 묵상 훈련, 성경 연구 등 강력한 영적 성장을 위한 훈련이 바로 그들의 방식이다. 바로 이 점이 세이비어 교회가 균형감과 건강성을 갖는 이유다. 이것이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이 찾고 두드리는 방식이다.



 

 

남자 두 명이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꽃을 주는 사람이 행복할까? 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그러나 서로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다 보니 결론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근처의 꽃집에 갔습니다. 꽃집 주인은 꽃을 많이 팔아보았으니 꽃을 주는 사람이 행복한지 아니면 꽃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꽃집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꽃을 판 사람이 제일 행복합니다.”


사실 꽃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그리고 파는 사람 모두 예외 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꽃이라는 매개체가 그렇게 행복하게끔 만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청하는 대로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통해서 행복을 얻은 우리는 이제 내가 받은 만큼 남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명하시지요. 왜냐하면 받는 행복과 주는 행복이 함께 이루어질 때 진정으로 완전한 하나의 행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지만 우리들은 받는 것에 익숙할 뿐 주는 것에는 너무나도 어색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받는 행복에만 익숙한 반쪽짜리 행복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받을 수 있는 우리, 그리고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우리가 될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디 까지 만을 원하며 살고 있었을까요? 혹시 받는 것까지만 원하고, 주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조건을 걸어서 거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건망증이 아주 많은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님께서 택시를 타셨지요.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 형제님께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시 기사님께 여쭤보았지요.

“기사님, 제가 지금 어디 간다고 말씀드렸죠?”

그러자 택시 기사님이 깜짝 놀라며 “아이고 깜짝이야. 그런데 언제 타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님뿐만 아니라 택시 기사님 역시 건망증이 심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렇게 건망증이 심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목적지가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요?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다시 정신을 차려서 받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말고, 주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도록 합시다. 이 둘이 모두 내 안에서 이루어질 때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토마스 칼라일).


한 사람의 죽음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증세가 심했든지 의사들마저도 환자를 만지기만 하면 죽게 되므로, 병의 원인 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기용이라는 한 의사가 매우 심각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을 무렵이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을 해부한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의사들은 환자를 만져본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하고서는 의아해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기용 의사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밤이 깊도록 주님께 기도를 하고는 한 죽은 환자를 내어놓고 하나하나 해부를 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무서운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있었으며 그리고 병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된 바로 그 순간 이 의사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두드리시는 성령

고계영 신부님

작년 12월 김장할 즈음의 일입니다. 수도원 현관에서 근무하는 이가 쉬는 날이라 오후 내내 현관에서 전화를 받으며 봉사를 했습니다. 4시쯤이었을까요? 

수도원의 경리 소임을 하는 형제가 김장거리를 잔뜩 싣고 와서 부탁하기를, 수도원에 있는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 식당으로 옮겨달라는 것입니다. 방에 있는 형제들에게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고 함께 그 배추를 나르려고 나서는데 ‘혹시 전화가 올지 모르니, 현관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하나?’ 하는 갈등이 스쳤습니다. 사실 경리 형제가 ‘신경 쓰지 말고 현관을 보라’는 터였습니다. 

그러나 부추기는 유혹을 뒤로하고 배추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형제들이 내려와서 일은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무 몇 단이 남았을까, ‘이제 몇 개 안 남았으니, 이 정도 도와주었으면 되었다’는 생각이 또 스쳤습니다. 

기회만 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끈질기고도 날렵한 이 유혹! 

그러나 현관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와 남은 무 단을 들었습니다. 순간 그윽한 평화가 마음에 잦아들었습니다. 나를 유혹한 것은, 내 마음을 두드린 것은, 나약한 유혹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향해 두드리기도 전에 성령께서 먼저 내 마음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문이 열리며 도란도란 속삭이며 들어오는 신비의 광채들! 여기가 바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고향입니다.

 



악한 선과 선한 악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만 된다면 못할 것이 무엇일까?


그러나 청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찾기 위해서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두드리기 위해서는 앞의 겸손과 열망에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과 열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절실함입니다.

곤궁에서 도움이 절실할 때 우리는 청하는 겸손이 생기고 찾는 열망이 생기고 두드리는 용기가 생깁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의 에스테르 왕비가 이런 경우입니다.

죽게 되었을 때 아무에게도 청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 편에서 이런 절실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이것도 무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두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선이시다는 것과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실 선을 가지신 분이시고 그 선을 주실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너희가 악해도”하고 주님은 먼저 말씀하십니다.

인간도 선이지요.

선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으니 선이지만 결핍이 있는 선이고 그래서 최고선이신 하느님께 비하면 악입니다.

줄 수 있는 선이 하느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에 인간은 자기 자식한테 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깡패도 자기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은 착하기를 바라고 남에게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줍니다.

심지어 자기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숨깁니다.

이것이 아비 된 자의 마음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이고 사랑의 마음인 것이지요.


인간 아비가 이러하니 하늘 아비는 이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눈에 선이 아니라 악이 주어진 것 같아도 내가 몰라보는 것이지 사실은 선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에스테르는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에 무엇이 더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십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무지하여 악한 선을 달라고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선한 악을 주시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담배를 좋아하여 담배를 달라는 자식에게 아비는 절대로 담배를 주지 않고 싫다는 빵을 주십니다.

당장은 좋으니 담배가 선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나쁜 것, 악이지요.

당장은 싫으니 빵이 악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좋은 것, 선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어련히 알아서 주시는 이 선한 악에 맛들이게 하소서.




바라는 그대로 해 주어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서는 “너희가 청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청하는 대로 다 들어주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정말 재미있고 감사하게 보았습니다. 특별히 문명과 떨어져 사는 원시 ‘조에’부족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턱을 뚫어 뽀뚜루라는 나무를 끼고 다니고 옷을 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사냥해서 나누어먹습니다. 사냥을 위한 도구 정도를 제외하고는 개인소유도 없고 그래서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을 촬영했던 사람들은 문명에 접해가며 원시부족들이 점차 웃음을 잃어가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이들의 삶은 문명이 오히려 우리의 웃음을 빼앗아 갈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조에 부족 역사상 살인사건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총을 소지하고 있는 미국 등지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사고와는 다르게, 이들도 활과 칼을 지니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명과 접했던 다른 부족들과는 다르게 외지인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그 곳에 다녀온 PD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아무도 누구를 해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도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아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시험하기 위해, “당신의 모습은 꼭 돼지와 같소!”하자, 무학대사는 “임금님은 부처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에 놀란 이성계에게 무학대사는 한 마디 더 보탭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두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판단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험담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내가 하는 대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조에족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선만 알고 악을 모르기에 남들이 자신에게 악을 끼칠 줄도 모르고 그래서 두려움 없이 마냥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을 접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때는 이들도 움츠려들고 공격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왜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하느님께 그만큼 돌려드릴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에 하느님도 그런 분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병자들에게 안수 기도를 해 주며 이들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그러면서 속에서는 “나 같은 죄인에게 하느님이 청을 들어주실 리가 없어.”라고 스스로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 청하는 모든 것을 얻어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사랑으로 볼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의 청을 의심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느님도 당연히 그렇게 나에게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내가 남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할 사람이기에 하느님께로부터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주실 분임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도 남이 청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느님도 자비로운 분으로 보이고 그래서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청하기 전에 내가 정말 그 청을 하면서 남의 청은 들어주지 않는 인색한 사람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와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란 말마디 그대로 우리의 실존적 고백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찾은 에스텔, 우리 궁극의 피신처 역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께 피신하는 자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시고 주님은 당신의 오른 팔로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대수도원 본원의 원장 소임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은 압니다. 마침 본원장 신부님의 영명축일을 맞이하여 수고 많다며 축하인사를 전할 때, 본원장 신부님의 차분하면서도 짤막한 답변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삽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사는 것,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온통 자기 힘으로 하려기에 무거운 짐이자 스트레스입니다. 하여 세례 받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맡길 분(곳)이 있어 좋고 편안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삽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신앙고백입니다. 말이나 글, 기도나 삶이 간절하고 절실할 때 감동을 줍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에 간절하고 절실한 삶이요,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에 간절하고 절실한 삶이니,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하여 기도를 보면 삶을 알 수 있고, 삶을 보면 기도를 알 수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씀,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와 삶이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말입니다. 진인사대천명,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런 자세로 기도하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의 자세, 삶의 자세를 말해 줍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다 죽을지언정,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기도와 삶의 자세가 사람은 물론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몸과 마음도 다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하느님은 말 그대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간절히, 절실히, 항구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 하느님은 우리 방식대로가 아닌 당신 최상의 방식대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모범이 1독서의 에스텔입니다.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이런 간절하고 절실한 신앙고백과 기도가 역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저의 주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손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곤경 중에 있는 누구나 자신의 기도로 삼아 바쳐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이런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를 바치는 이들 결코 하느님의 자비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적절한 때에 당신 최상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매일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맞갖은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시편138,3ㄱ). 아멘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다급해지다보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한 몇 일 아이들을 위해 집중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사는 게 기도지", 그게 아니면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기도지"하면서 기도를 소홀히 했었는데, 다급해지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가장 원시적인 청원기도를 하게 됩니다. 

"꼭 돌아오게 해주세요.", "하느님 이 부탁은 꼭 들어주셔야만 하겠습니다." 등등 어린애가 떼를 쓰듯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 참으로 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 제 성취를 위한 기도,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는 제대로 먹혀 들어간 적이 거의 없었는데, 타인을 위한 기도, 특히 방황하는 아이들이나 절박한 이웃을 위한 기도는 거의 90% 이상 OK되는 특별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늘 흔들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기에 앞서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를 식별하는 일은 기도에 못지 않게 더 중요한 일인 듯 싶습니다. 

적어도 너무 터무니없는 청원기도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을 한 장 샀으면 그저 한번 추첨시간의 그 짜릿함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야지, 꼭 1등에 당첨되도록 기도하기 위해서 산다면 너무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겠지요. 

하느님을 마치 무당 대하듯이 대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어느 쪽 땅이 빨리 그린벨트가 풀릴 것인지 하느님, 족집게로 집듯이 알려주십시오"와 같은 기도를 드린다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처신하기 곤란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누구 말은 들어주고 누구 말은 외면하는 편애의 하느님이 절대로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보다 보편적인 기도, 보다 이타적인 기도, 보다 폭넓은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의 유익이나 내 가족의 안녕도 중요한 기도거리겠지만, 중동의 평화를 위한 기도, 아프리카의 난민들을 위한 기도, 이 땅의 모든 고통받는 청소년들을 위한 기도, 아직도 사망여부조차 확인 받지 못해 애태우고 있는 대구 참사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기도 등, 세상과의 연대를 위한 기도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우리의 기도이면 좋겠습니다.



 

 

철학과의 두 학생이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아 곧잘 다투던 두 사람이었지요.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었는데 철학과 학생답게 특이한 문제로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은행나무의 가지가 흔들리자 그 중 한 학생이 말했어요.

“바람이 세차게 부니까 나뭇가지가 움직이는구나.”

이때다 싶어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반박을 했습니다.

“넌 그것도 모르니?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바람이 움직이는 거라고.”

“무슨 소리! 그건 바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거야, 이 바보야.”

양보 없이 서로가 옳다고 우겨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같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던 다른 친구들까지도 그 논쟁에 가세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까?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일까요? 아니면 바람이 움직이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말다툼으로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지나가던 교수님께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두 학생은 서로가 옳다면서 시비를 가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뭇가지가 움직이건 바람이 움직이건 그건 살아가는데 별 중요한 일이 아니야. 삶에 있어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자네들처럼 자신만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마음의 움직임이야. 그 바람이 너무 세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십상이지.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신들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가 헤아려 보는 일이지.”


교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함께 어울려 살기보다는 자기의 뜻만을 주장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상대방의 뜻대로 행동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 깊이 반성해 볼 문제입니다. 

 

설사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배신하는 행동을 해도 당신은 친구의 욕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의 우정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싱)


소심한 정치가(‘행복한 동행’ 중에서)

어떤 호텔에 한 세일즈맨이 들어왔다. 그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지배인이 말했다.

“손님, 빈 방이 딱 하나 있기는 하지만 내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이유가 뭐요? 왜 방이 있는데 줄 수가 없다는 거요?” 지배인은 말했다.

“바로 밑의 방에 거물급 정치가가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경이 아주 예민해서 작은 소리에도 화를 낸답니다. 만약 손님이 그 방에서 어떤 소리라도 낸다면 그는 법석을 떨 겁니다. 그러니 다른 호텔을 찾아보세요.”

“다른 곳을 모두 둘러봤지만 빈 방이 없어요. 나는 하루 종일 시내에 나갔다가 밤에나 돌아와 잠만 자고 바로 떠날 테니 걱정할 것 없소. 아무 소리도 안 내겠다고 약속하지요.”

그는 간신히 방을 얻었다. 그리고 시내에 나가 일을 보고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녹초가 된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한쪽 신발을 벗다가 그만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신발은 ‘텅!’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을 울렸다. 순간 그는 아래층에 있는 정치가에게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 조심스럽게 나머지 신발을 벗어 바닥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방문을 여니 그 거물급 정치가가 몹시 화가 나서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당황해서 물었다.

“제가 잠결에 무슨 소리라도 질렀나요?” 그러자 정치가는 말했다.

“그게 아니라, 도대체 한쪽 신발은 어떻게 된 거요? 나머지 한쪽 신발이 떨어져야 잠을 잘 거 아니오? 나는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소리를 기다렸소!”

정치가의 말에 세일즈맨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쯧쯧, 이 정치가에 비하면 마음 놓고 푹 잠들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곧 떨어질 거요.”

 



선하신 하느님

류충희 신부님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말씀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모두 같은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청하는 사람의 자세와 청원 내용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이나 청해서는 안 되고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하느님의 뜻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항상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빵을 달라는 아들에게 돌을 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도 없습니다. 세상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야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새 한 마리의 운명도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참새 

한 마리까지도 보호하시는 하느님께서 참새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을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라고 했습니다.




너의 간절한 만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4년 전 결핵환자들과 자활촌을 하겠다고 하던 때 30여 명의 결핵환자들과 원주 근교의 한 폐교를 사 갔습니다.

폐병쟁이들이 온다고 첫날부터 시작된 동네 사람들의 시위는 얼마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더 심해져갔습니다.

강에서 경운기로 돌을 실어 날라 학교 둘레에 쌓아놓고는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돌로 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감옥살이, 겨우 식수밖에 없는 물 부족 상황, 환우들의 동요 등 그야말로 內憂外患의 그 어려운 상황에서의 기도는 이전의 그 어느 기도보다도 절실하여 전에는 지나치던 시편의 탄원하는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대로 저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이때의 저의 체험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청원의 내용이 그토록 진실하였던 적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토록 진실하게 주님을 마주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은 뒷전이고 주인 손에 들려있는 고기만 보던 개가 차츰 고기와 상관없이 주인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청원이 가납되기를 바라는 절실함에서 시작된 기도가 이제 청원의 가납은 뒷전이 되어버리고  하느님과 진실하게 대면하는 기도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절실함이 진실함을 낳고 진실함이 성실함을 낳고 성실함이 주님의 성실함과 자애로움에 대한 믿음을 낳았습니다.

외로운 에스테르 왕비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과 독대할 때도 바로 이러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간절히 청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청하는 만큼 주실 뿐 아니라 더 많이 주시고 청하는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세상의 아비보다 더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에서는 오늘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성숙한 요청과 나눔

배미애 수녀님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일까?” 내가 어느 모임에서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참석자들은 대개 서로에게 인정과 신뢰를, 또 관심과 이해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오늘 복음에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는 말씀도 각 사람 안에 있는 존엄성, 거룩함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담은 시선과 태도를 의미한다. 

또한 복음 말씀 중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는 구절은 하느님을 우리가 간절히 원해야만 주시는 혹독한 아버지로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아버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임을 잘 보여준다. 그분은 자녀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거저 주시면서 우리를 어린이로 취급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필요한 것만 채우고 다른 이들을 모른 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으신다. 


경험에 비춰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선물을 기쁘게 나누었을 때 나도 성장하고 공동체도 더욱 풍요로워진다. 나눔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남들이 나에게 해주면 좋겠다고 바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방식은 나를 어린이 취급하지 않고,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 내가 간절히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마치 빵과 생선이 주어지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구하거나 찾지도 않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데 주는 것도 아니고, 빵과 생선을 달라는데 돌과 뱀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도의 응답 이전에 오는 위로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에 제가 아는 한 분이 진로 문제로 걱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걱정한다고 바뀌는 것이 없는 것도 알지만 저절로 걱정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보내온 메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키아라 루빅의 묵상을 읽고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걱정하는 것보다는 기도하는 편이 낫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있기 이전에 벌써 좋은 효과를 얻습니다. 그 이유는 청하면서 이미 주님께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면서 이미 혼자가 아님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까지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주소서.”

예수님은 이 기도가 안 들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주님의 뜻을 실현하려 세상에 오셨고 바로 그 순간이 그 일의 종지부를 찍기 직전인데 하느님께서 그 계획을 변경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마셔야 하고 마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기도를 하시는 이유는 그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이미 위로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비록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기도를 드림으로써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가능한 것까지 청할 수 있는 관계임을 스스로 느끼며 위로를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것을 마구 청할 수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것 하나 청하기가 꺼려집니다.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청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래서 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을까, 맞지 않을까?’

이것은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그저 청하고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안 주시는 편이 낫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라고 위로하며 넘기면 됩니다.


자녀가 둘이 있는데 둘이 장난치다가 귀한 것을 깼습니다. 한 자녀는 부모에게 용서해달라고 달려들고 한 자녀는 용서를 청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귀한 것이 깨진 것보다 자녀가 용서를 청하지 않는 것에 더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또 그 자녀가 계속 부모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혼자 다 해결하며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부모에게 속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남으로 살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참으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많이 청하는 사람이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의 응답이 없더라도 꾸준히 청하고 다른 것까지 청합니다. 좋은 것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우리가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청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주님께서도 부모에게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 자녀를 두신 것처럼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지 청하도록 합시다. 많이 청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믿고 청하면서부터 응답에 관계없이 이미 우리에게 사랑과 위로가 오게 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어떤 공장에서 청년들과 한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어서 직장인들이 살기 어려워졌다고 불평하였고, 노인은 각자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의 형식이었으나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서로 큰소리를 지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청년 중의 한 명이 소리쳤습니다. 

“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깐요! 영감님은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부리고 그러세요.”

“아니긴 뭐가 아녀! 다 자기 할 탓이지, 누가 나대신 인생을 살아주나?”

이렇게 한참을 서로 떠들고 나더니, 갑자기 청년 서너 명이 노인의 팔다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려서는 공장 옆에 있는 커다란 물통 속으로 던져 넣어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공장장은 노인이 걱정되어 불러서 말합니다. 

“좀 참으시지, 속상하시죠? 그래도 일하러는 나오셔야 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뭐, 젊은 것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하하하!”

호탕하게 웃고 난 노인은 다시 나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후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노인을 집어던진 청년들은 노인 앞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노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굽실거리며 눈치를 살치는 하인들이 되고 말았지요.

노인을 물통에 집어던질 때까지만 해도 청년들은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지요.

물론 다른 사람이 내게 서운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픔을 주고 실수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그 순간에 ‘그럴 수도 있지! 하하하!’라고 웃어넘길 수 있다면 오히려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바로 남이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즉, 나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더 큰 불편함과 힘듦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남에게 해주는’ 실천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3월 1일. 다시 새로운 달의 시작입니다. 이 날에 나는 얼마나 남을 위해서 남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남을 위해서 그리고 남이 원하는 바를 실천할 때, 나의 마음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편안한 행복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남이 원하는 데로 남에게 해주십시오.


주님께 띄우는 엽서 기도(최문식)

주님!

내 영혼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더럽고 추한 죄를 짓고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몇 번을 다짐을 하면서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허물많은 영혼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내 영혼

죄많은 세상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도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무능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주님보다 죄를 더 가까이 하고 있는

어리석고 미련한 영혼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하며

주님만을 온 맘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도

부족한 영혼인 것을

내 영혼 온 맘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용서하옵소서.


내 영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내게서 떠나가지 마시옵소서.

내 영혼에 대한 부르심을 한탄하시며

사울처럼 버리지 마시옵소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내 영혼 아무것도 아닌

참으로 별볼일 없는 존재랍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의 눈으로 불쌍히 여기사

허물많고 어리석은 내 영혼 용서하여 주옵시고

날마다 무릎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부르짖을 때에

내 영혼에 귀기울이시사 받아주시고

당신의 품안에 안기게 하소서.


주님이 내 영혼 위에 함께 하실 때

내 영혼 겸손한 모습으로 작아지고 낮아져서

내 영혼을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영혼이게 하옵소서.


죄를 미워하고 죄에게서 떠나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있는

영혼이게 하옵소서.

아멘.




서로의 처지가 되는 날

허찬란 신부님

 교구 신부님 가운데 미카엘 신부님이라는 분은 항상 제게 모범적인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이 젊은 사제였을 때, 한번은 각 종교간 대화와 만남을 위한 행사 준비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으셨답니다. 신부님은 당시 외국인 교구장님을 모시고 함께 가셨는데, 모임이 한창 진행될 무렵, 당신의 생각을 피력해야겠다 싶은 순간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군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한 분 한 분을 보면서, 솔직히 제가 보기에 스님은 스님으로만 보이고, 목사님은 목사님으로만 보이는데 혹시 제가 스님이나 목사님들 눈에 신부가 아닌 여러분과 같은 신분으로 보이는 분이 계십니까? 모임도 좋고 만남도 좋지만 서로가 서로의 처지가 되어준다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종교인들이 서로 입장을 바꾸고 서로의 처지가 되어서 서로를 존경하는 날이 올 때 즈음해서야 이 모임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줄로 믿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상대방의 입장이 되고 서로의 처지가 되어줘야 한다는 이 말씀을 깊이 공감하며 오늘 복음을 묵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기도와 실천

이동훈 신부님

 많은 신앙인들이 기도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것을 자주 본다. 도깨비 방망이를 내리치듯이 하느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기만 하면 다 들어주시는 분으로 믿는다. 이런 이들에게 오늘 예수님 말씀은 그러한 기도에 대해 확신을 가지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로 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찾고 두드리는 우리의 적극적인 행위 또한 요구하신다. 그 행위란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12절)는 황금률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야고 3,17) 것이다. 기도와 실천, 이 둘은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도생활에만 전념한다고 실천을 소홀히 하거나, 실천을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완전한 신앙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의 거룩한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무를 의식하게 된다. 에스텔의 기도(1독서)는 그녀의 용기있는 행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은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옷을 입힌만큼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최현욱 신부님

세탁소를 하는 사람과 농부가 기도하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참 머리가 아픕니다. 세탁소를 하는 사람은 제발 비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농부는 비가 오지 않으면 농작물이 말라죽기 때문에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할 수 없이 하느님께서는 세탁소를 하는 사람과 농부에게 잘 합의해서 언제 비를 내려주면 좋을 지 의논해 보라고 했습니다. 주일은 함께 교회에 가야 하니까 비가 오면 너무 불편하고, 월요일은 얘들이 학교에 가야하고, 화요일은 농부도 빨래를 해야 하고, 수요일은 뭐 때문에 비가 오면 안 되고, 목요일, 금요일...... 등등. 아무리 논의를 해봐도 비오는 날을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렇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하느님께 맡기기로 합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비를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동 경기를 앞두고 양 팀 선수들이 서로 자기 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실력이나 노력은 둘째 치고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느 팀의 기도를 들어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느 팀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입시철이 되면 너도나도 개신교회에서, 절에서, 성당에서 자기 자녀가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점수가 많이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이런 기도를 들으실 때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들도 참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게 해 달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게 해 달라고,

내 남편이 다른 사람을 제치고 진급하게 해 달라고,

내 자녀가 다른 얘들보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이러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자기 기도를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 기도를 들어주면 저 사람은 피해를 입어야 하고, 저 사람 기도를 들어주면 이 사람이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저보고 이러한 하느님을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만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아마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거나, 다 빠져서 대머리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골치가 아플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바치는 청원기도 중에 많은 것들이 이렇게 하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노력은 없으면서 좋은 결과만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된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는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을 난처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기도보다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기도를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이회진 신부님

그리스 신화에서 에오스는 새벽의 여신입니다.(로마신화에서 에오스는 아우로라Aurora(오로라)라고 불립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인간인 티토누스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에게 어떤 선물을 줄 것인가에 대해 물었고, 에오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히 인간인 티토누스가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습니다.

티토누스가 영원히 사는 것뿐만 아니라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게 해 달라는 것은 잊은 것이죠.

티토누스는 서서히 나이가 들었고, 늙어 갔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제우스신으로부터 받았기에 계속해서 늙어 갔고, 또 늙어 갔습니다.

그는 죽을 수가 없었기에,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은총)이 이제는 자신에게 저주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응답은 언제나 같은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지금 당장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고 죽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른 것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아이가 되었을 때 바라는 것과 어른이 되었을 때 바라는 것이 같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성장과 변화 속에서 더 멀리 더 깊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들어주시길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진정 하느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청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제 1 독서에 나타나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는 문을 두드리며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에게 기도의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고난 받을 때 하느님 당신을 알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고, 당신에게서 전해지는 마음과 지혜로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스테르의 기도는 지금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니 꼭 이것을 들어달라고 청하는 우리의 기도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이 대화는 일방적인 청원과 말의 나열이 아니라 마음의 대화 즉,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고 서로를 이해하고 알게 되는 영혼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하고, 하느님이 또한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마음을 기울여야합니다. 

“하느님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하느님께 해 주어라.”(마태 7,12)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 본다면 우리 기도의 뜻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마음을 청하십시오. 

“주님, 오늘 당신의 마음을 저에게 알려주소서. 아멘.”  




황금률

김훈일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하고, 칭찬받기를 원하고, 선물 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얼마나 받을지를 염려하지 말고, 얼마나 줄 수 있는지를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 사람의 처지에 서라는 것이 황금률입니다. 그들의 고충과, 그들의 실망과,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황금률입니다.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 그리고 자신과 그들의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한 다음, 자신이 그들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라. 바로 이것이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은총을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빚을 진 처지에 있다는 것도 황금률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장 14절에서 그리스인이나 비그리스인이나 지혜로운 이들이나 어리석은 이들이나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죄와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재산이 많아서 안락한 생활을 살고 있다면,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황금률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청할까

강희수 수사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랑을 가지고 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늘 성실히 하느님 아버지께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제가 원하는 방법대로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들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우리를 살리시는 은총의 방법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당신의 외아들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 고통과 아픔도 기꺼이 허락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과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는 말씀 사이에 있습니다.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청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듯합니다. 하느님께 청할 때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청하라는 의미겠지요. 남을 심판하는 능력이 아니라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는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청하고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이든 청할 때 예수님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의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헷갈려 행동이 불안정합니다.”(야고 1,5-­8) 




받고, 얻고, 들어선 이의 할 일 

정호 신부님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언제 들어도 든든한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이 말씀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좋으신 말씀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청을 말합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얻고자 하는, 그리고 바라는 것을 얻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동이 있으면 분명 보답이 있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곧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그 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적인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청을 드릴 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복음의 첫 머리는 기억하면서도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너무 처음 말씀이 인상에 깊어서일까요? 너무 좋아서일까요. 예수님은 복음의 끝을 이상한 말씀으로 끝맺으십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너무 좋은 말씀인데, 이어지니까 말이 잘 안됩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라고 실컷 이야기하시고는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내용을 그대로 우리의 몫으로 돌리고 계십니다. 곧 우리가 해야 할 일, 곧 우리가 스스로 구하는 이에게 주고, 찾는 이에게 찾아주며,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일까요? 아님 서로 너무 다른 이 두 말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푸는 열쇠는 중간에 설명하지 않고 지나친 주님의 말씀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그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 하시면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다른 복음을 찾아보면 그 더 좋은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의 원리요, 생명, 숨, 얼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 혹은 성령의 흐름을 안고 사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하느님께서 내리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하느님께 바랄 것 보다는 그가 바라던 것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으로 당신의 일을 다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그 청을 스스로 실천하고 남에게 베풀어서 하느님을 닮은 그 소중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오늘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면서도 나에게 무엇을 애타게 구하는 이를 찾아보고,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을 찾으면서도 그와 같은 것을 우리에게서 찾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찾아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문을 두드리듯 우리 맘을 두드리는 이에게 우리의 문을 열어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 사실 알고 보면 바로 그 일들이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하는가?

박상대 신부님

모든 기도의 모범이요, 기도 중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6,9-15)를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는 인내와 끈기가 있는 기도에는 필히 아버지 하느님의 가납(嘉納)이 있음을 약속해 주신다. 오늘 복음에서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7절)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듯 간청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에 담겨 있는 한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시기(6,8)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 안에 담겨 있는 7가지 청원은 우리처럼 지상의 삶을 직접 사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께 바친 기도이기도 했다. 따라서 간절히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간구와 간청을 '주님의 기도' 안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으로 많다. 거기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도 있지만, 남을 위해 내가 바라는 것도 많다. 그래서인지 예수께서는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서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8,19-20)라고 하셨고, 또 요한복음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14,14)고 말씀하셨다. 


필요한 것을 마음 모아 구하고 청하면 무엇이든 다 가납하여 주신다고 했지만, 실제로 받는 경우보다는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더 많다. 구하는 대로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청한 것을 받지 못했을 때 점검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혼자서는 안 된다. 간구하는 사람이 둘 이상이어야 하며, 마음을 모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을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왜 마태오 복음사가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청원기도를 황금률(12절)과 함께 엮어놓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내가 청하는 것은 내가 남으로부터 바라는 것으로서 내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청하는 것은 결국 '나와 너' 서로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청하는 사람은 둘 이상이 되는 셈이다. 


우리가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이렇게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인 '황금률', 즉, 내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정신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께 구하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니 들어주실 것이 없다. 악한 세대의 아버지들도 자기 자녀들이 구하는 것이며 다 들어줄 것이다. 자녀가 빵을 달라는데 빵처럼 생긴 돌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유다인의 규정으로 금지된 뱀장어(레위 11,12)를 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아버지들이 비록 악하다해도 자녀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결코 주지 않는 마음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청하여라(마태 7,7-11)

유광수 신부님

기도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자녀로서 청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무엇을 주시고자 하시는지를 알고 그것을 나도 청하는 것이고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억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도록 하느님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자세를 갖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내가 청해야 하는 것은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고 나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청하고 바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에페3, 20)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청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말은 명령어이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가 18,1)고 말씀하셨듯이 계속해서 청해야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각자 가지가 청한 것만큰 은혜를 받을 것이다. 청한다는 것은 우리의 원의를 넓힌다는 것이요, 하느님의 원의가 나의 원의가 되게 하는 것이요, 영성생활은 하느님의 원의를 나의 원의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청해야하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원의를 막거나 꺼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의 원의가 무한대로 넓어지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된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선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청함으로서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느님께 청할 것이고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왜 우리는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청하고 두드리고 찾는다"라는 것은 내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완전한 존재라면 굳이 청할 것도 없고 찾을 것도 없으며 두드릴 것도 없다. 나는 늘 무엇인지 모르지만 부족함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인정하는 이는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매일 청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청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청하는 것을 얻기 위해 찾지 않을 수 없고 주실 수 있는 분에게 달라고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다.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리라"는 것은 하느님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으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즉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릴 때 그런 모습으로 발전하고 변화되기 때문이다. 투수는 세계의 최고의 투수가 되기 위해서 매일 땀을 흘리며 투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린다. 그런 노력과 훈련을 하지 않으면 경쟁사회에서 남아있을 수 없고 자기가 바라는 세계최고의 투수가 될 수 없다. 누구든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많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지만이 가능한 것이지 하느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청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으면 절대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루워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이지 하느님이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 사이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청해야하는지 그리고 왜 청해야하는 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때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청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께 청한다 하더라도 남을 심판하는 그런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했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좋은 것이란 "성령"이시다.

성령이란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서 서로 화해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마태 18,15참조), 서로 마음이 갈라졌을 때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는 것이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마태18,22)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할 때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청하고 노력할 때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가 가져야할 유일한 자세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할 수 있도록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 것을 청해야하고 원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청하고 찾아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청할 때 결코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만일 여러분 중에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의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헷갈려 행동이 불안정합니다."(야고보 1, 5-8)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신뢰심을 가지고 겸손되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청한다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열려도 그만, 안 열려도 그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고 강조하시는 예수님께 하실 말씀 많은 분들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주실 것이다, 얻을 것이다, 열릴 것이다, 하시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습니까? 아무리 청하고 찾고, 죽으라고 두드려도 안 되는데, 이것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대가 너무 냉혹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팍팍해서 그런가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방법이 없는 이웃들, 사방이 완전히 높은 벽으로 가로 막혀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웃들이 너무 많은 요즘입니다. 

지금 이 시대, 너무나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가 착한 사람, 너그러운 사람, 남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살기 힘든 시대라는 것입니다.  

하면 된다는 개발독재 체제 하에서, 어떻게 해서든 나부터 살고보자는 무한 경쟁체제 안에서, 극단적 줄 세우기 문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한, 평범한, 진국인 이웃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인간적 한계 앞에 서 계신 분들, 그 끔찍한 도전을 또 한 번 시작해야 하나 갈등하시는 분들, 삶의 막다른 골목 앞에서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말 하시는 예수님 아니시기에, 한 번 더 노력해보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노력했다 여겨지더라도 한 걸음 뒤로 크게 물러서서 좀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어떤 것인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두드릴 대로 두드렸다고 생각하는 분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더 두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알량한 자존심, 불필요한 수치심 모두 등 뒤로 멀리 내던지고 한 번 더 용감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조금만 더 가면 그토록 우리가 학수고대했던 ‘열린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우리의 딱한 처지, 우리의 절박한 상태를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분입니다.  

주면 좋고 안 줘도 그만이고, 열리면 좋고 안 열려도 어쩔 수 없고가 아니라, 죽기 살기로, 혼신의 힘을 다해, 삶의 모든 것을 걸고 한번 청해보고, 찾고, 두드려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떤 보석 가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가게에는 손님들이 항상 들끓었는데요, 특별히 손님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싸고 품질이 좋은 터키옥을 많이 구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가게에서는 값싸고 품질 좋은 터키옥을 상점의 가장 중심부에 배치해서 손님의 관심을 끌도록 했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터키옥은 전혀 팔리지 않는 것입니다.

온 종업원이 매달려서 터키옥을 팔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업무 관계로 출장을 가기 전날 밤, 손해를 보더라도 재고품을 모두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간단하게 흘려 쓴 메모를 지배인에게 남겼습니다.

“진열되어 있는 터키옥을 모두 1/2배 값에 처분하세요.”

며칠 후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지시했던 대로 터키옥의 재고는 모두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배인은 그녀의 흘려 쓴 글씨를 잘못 읽어서 1/2배 값에 판매하라는 지시를 2배의 가격에 팔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기존보다 2배나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팔리지 않던 터키옥이 3일 만에 모두 팔려버린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은 우리들이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처럼 정반대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대로만 흘러가야 한다는 착각 속에 헤어나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남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은 당연하고, 나는 남이 원하는 것을 전혀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이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얼마나 당연한 말씀인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이 황금률에 역행하면서 삽니다. 이는 이웃과의 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즉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나만 원하는 것만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피정 강의 중에서 인상 깊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몇 자 적어 봅니다. 피정을 지도해주시는 이형우 아빠스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해주셨습니다.


1) 부르심의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다.

2) 부르심은 권고가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이다.


이 사실을 자주 잊는 ‘나’였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내 삶의 주체는 바로 하느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늘 내가 주체라고 생각했고 내 뜻대로만 그리고 나 하고 싶은 것만을 쫓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이웃들이 원하는 것도 행하지 못하는 철저히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과 이웃이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너 많은 은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십시오.


세월의 나이에 슬퍼하지 말자(‘좋은 글’ 중에서)

사람의 마음은

두 곳에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젊게 살고 싶어도

나이가 들어 몸이 따라 주지 않아

할 수 없을 때 그 마음은

움추러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높은 산에

무서움을 모르고 올라 갔었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몸으로 인하여

엄두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지배를 받고 그 마음에 그대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은 무상하고

슬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혼의 지배를 받으세요.

이치의 무상함을 따라 사는 인생들에게

신은 영혼이라는 선물을 주어

쓸쓸하고 슬퍼지는 인생들의 마음을

영혼에서 공급 받는 힘으로 세월의 나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체는

그 몸이 쇠하여 마음에 슬픔을 가져다 주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혼은

그 마음에 늘 새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세월을 초월하기 때문에

비록 육체가 쇠하여 할 수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더 멀리 더 높이 여행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청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성공을 다짐하면서, 성당에 가서 하느님께 평생 동안 자신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매달 자신의 수입에서 무조건 1/10을 떼어서 성당에 봉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입이 워낙 별 볼 일이 없어서 수입의 1/10은 아주 적은 액수였지요.

시간이 지나서 두 청년 중의 한 사람이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청년 역시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지내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이 둘은 자신들이 약속했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성공한 청년에게 고민거리가 생겼어요.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말합니다.

“여보게 친구, 사실 내가 젊은 시절에 자네와 함께 맺은 약속을 이제는 취소하고 싶네. 내가 내 수입의 1/10인 10만원을 성당에 봉헌할 때는 조금도 아깝지가 않았는데, 이제는 그 1/10이 몇 억씩 되다보니 얼마나 아까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이 행동을 그렇게 오랫동안 했으니 이제는 그만 둬도 되지 않을까?”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이 친구가 수십억씩 버는 것이 이제 싫은가 봅니다. 도로 10만원씩 봉헌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들은 주님께 ‘주님, 이것만 해결한다면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식의 다짐을 얼마나 많이 했었던가요? 그런데 내가 안정되어 가면서 그 다짐을 취소하려 하고, 또 실제로 그 다짐을 취소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들 때, 우리들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힘들었을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 욕심으로 가득 찬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너희 역시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배우라고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시듯이, 우리 역시 남이 내게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베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즉 황금률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비해서 우리들이 베푸는 사랑은 얼마나 작고 미약한지요? 오히려 나만 사랑 받으면 그만이고, 남들은 나 몰라라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졌던 적이 더 많지 않았습니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말씀이 바로 나를 통해 실천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십시오.


리더의 생명력(이영무)

태풍 ‘매미’로 엄청난 피해를 당했지만 울산의 한 어장은 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태풍이 예보됐을 때 공무원 손모씨가 추석휴가를 포기하고 담당지역을 돌면서 주민들을 설득,선박들을 육지로 끌어올린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어민과 선주들이 “밧줄을 몇 번 더 감아두면 되지 크레인까지 동원해서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반발했지만 지난해의 아픔을 기억하는 손씨는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해서 200여척의 어선을 대피시켰습니다.

손씨는 다가오는 위험을 정확하게 분석했고 주민들을 설득해서 위기를 피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봅니다.

아무리 좋은 계획도 믿고 따라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리더는 믿음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설득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처럼 혼란한 시대에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방향을 제시하고 백성을 이끌어가는 믿음직한 리더를 보고 싶습니다.




 

미국의 역대 퍼스트레이디들 중에 가장 호감 가는 여성으로 손꼽히는 사람은 엘리너 루즈벨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얼굴 표정은 항상 '매우 맑음'이었다고 하네요.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이제까지 살면서 굴곡이 없는 아주 평탄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열 살 때 고아가 되었으며,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 혹독한 노동을 해야 하는 아주 힘든 생활을 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생활을 했던 그녀가 항상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비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녀의 여섯 자녀 중 한 아이가 사망했을 때도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다섯이나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인생의 말년에 남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관절염으로 '휠체어 인생'이 되었습니다. 휠체어의 루즈벨트가 엘리너에게 농담을 던집니다.

“몸이 불편한 나를 아직도 사랑하오?”

그러자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하네요.

“내가 당신의 다리를 사랑한 것은 아니잖아요.”

이러한 낙관적인 인생관, 즉 긍정적인 사고가 바로 항상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 준 것은 물론 결국 만족한 삶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삶을 영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청하는 사람의 조건이나 청원의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씀.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들로 얼마나 많은 걱정을 했으며, 그 걱정으로 인해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요?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조건과 내 청원의 내용에 상관없이 우리들의 굳은 믿음과 멈추지 않는 노력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제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엘리너 루즈벨트의 밝은 미소를 우리들도 간직했으면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웃고 봅시다.


봄(박정자)

봄이 내게로 왔다.

마법의 빗자루를 타고

마법의 꽃가루를 뿌리며

나에게로 왔다.


나는 마법에 걸렸다.

사랑의 마법에 걸리고 말았다.

풀리고 싶지 않은 마법에

내가 걸려 들고 말았다.


봄은 마법사다.

사랑의 꽃 가루를

쉴새없이 뿌려주는 봄은

사랑의 마법사다.


봄은 시인이다

새들도 봄을 노래하고

나무도 꽃도 들플도

바람따라 노래한다.


봄은 심술쟁이다

내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내 눈을 졸립게도 만드는

봄은 귀여운 심술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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