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3,12-15ㄱ.17-18
사랑하는 여러분,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15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8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고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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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의 구원 사업과 창조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니 주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적극 실천해야 한다(제1독서). 사람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로 예수님께 시비를 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간파하시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고 하신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결국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복음).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주시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들은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이 대답은 맞는 것이었을까요? 황제는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누가 황제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 아니십니까? 세상에 어찌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신앙적인 것은 종교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황제의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가 복음의 빛을 받아 각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된 정치 문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2246항 참조). 부조리와 불평등, 억압과 폭력으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모든 이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라고 선을 긋고 무심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쓰시는 만큼 교회는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태도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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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 말씀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입니다. 이것을 질문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세상의 다스림보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결탁하고 그분을 궁지에 빠지게 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하시면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사람이 되고, ‘황제를 섬기라.’고 하시면 하느님을 거역하는 예언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되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정치의 질서와 종교의 질서는 구분되는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다른 것이나, 속된 것 안에 거룩한 것이 존재하며, 거룩한 것 안에 속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지만 이 세상의 삶을 꾸려 나가려면 재물이 필요합니다. 종교가 이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지 않지만, 이 세상의 권력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권고하여야 합니다.
거룩한 질서와 속된 질서가 섞여 있는 이 현세에서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질서의 충돌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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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강조하던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노선이 다른 사람들로서 서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찾아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바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이는 곤란한 질문입니다.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이방인 황제에게 굴복하는, 이스라엘의 매국노가 됩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제국의 법을 거역하는 반역자로 고발당합니다. 이러한 난처한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그 질문을 되돌리십니다. 곧, 그들 스스로 판단해서 황제의 것이면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하심으로써 모든 것이 황제의 것이라고 믿었던 헤로데 당원들의 생각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하느님의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드러내셨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 드리십시오.” 하고 권고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화폐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지만,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만 얽매여 산다면 황제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잊고 재물에만 빠져 산다면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황제에게 무엇을 바치며, 하느님께는 무엇을 바치며 살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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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백성에 대한 세금 징수는 강대국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세금 납부를 거절했지만, 헤로데 당원들은 자진 납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통속이 되어 세금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다분히 정치적 속셈이 깔려 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하시면 백성 앞에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면 로마 황제를 모독하는 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지난 군부 독재 시절에 두루 요직을 차지했던 어떤 유명한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가 흔들리자, “성경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제대로 믿지도 않으면서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 같다.”고 하며 가톨릭 사제들을 향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백성의 고단한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세금보다는 하느님의 백성을 귀히 여기십니다. 금전은 황제의 것이지만, 백성은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세금은 공동선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불의한 세금 징수도 나쁘지만, 백성을 세금 걷는 대상으로만 삼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사람은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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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경에 등장한 로마의 군인입니다. 유럽 땅 대부분을 정복한 그는 최고 실력자가 되어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합니다. 그가 죽자 로마인들은 그를 신격화합니다. 이후 황제들은 카이사르처럼 살려고 했고, 신으로 대접받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질문합니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에서 그들은 우상 숭배의 흔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돈으로 적대 관계인 로마에 세금을 내야 했기에 질문 속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단순합니다. ‘돈의 주인이 황제라면 돈은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그러나 마음까지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신 까닭에 마음은 하느님께 돌려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돈과 물질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한 삶이 길어지면 영혼은 마비됩니다. 나중에는 돈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죽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과 물질도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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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있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의 재산, 나의 가족, 나의 건강,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생명……. 우리는 그렇게 많이 받은 것 가운데 얼마나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고 있습니까? 시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립니까? 주일 미사 한 시간도 힘들어 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재산은 어떻습니까? 어느새 늘 달라고 청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선심을 썼는데 감사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에 인색한 우리에게 그분께서는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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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때 사람들은 ‘행복’을 떠올립니다. 행복한 사람이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을 찾아 나서고 있는 우리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행복보다는 성공을 쫓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소한 일상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돈과 물질, 지위와 명예 등 세상의 성공 기준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다 보면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행복이 아니라 성공만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편안한 쉼의 시간을 가지면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에,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까,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입니다. 이 역시 행복이 아닌 세상에서 바라보는 성공을 쫓는 것입니다.
행복을 찾아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 순간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으로,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도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은 황제에게 세금 내는 문제를 질문하지요.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황제의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을 테고, 내라고 하면 매국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데나리온 한 닢에는 황제의 초상이 그려져 있지만, 우리 인간의 몸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초상을 찾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양심과 영혼을 세상의 것들로부터 지켜내어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행복이 아닌 성공만을 쫓으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초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변화는 규칙과 전례를 부수는 데서 온다. 오늘날 이루어진 모든 발전, 그러니까 정말 혁신적인 발전은 전례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데이빗 포크).
기도가 먼저입니다.
신학생 때, 그리고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기도의 힘을 잘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학사님, 기도해주세요.”, “신부님,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지만, 기도를 부탁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떠맡기려는 심보가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보다 적극적인 실천이 담긴 열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부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열정도 너무나 보잘것없음을 뼈저리게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정이 담긴 노력과 실천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필요하지만, 기도가 먼저였습니다.
솔직히 이제까지 기도보다 나의 열정만으로 밀어붙인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결과는 언제나 기도가 먼저였습니다. 그래야 나의 일에 하느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기에 더 깊이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와 열정.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먼저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을수록 사기당할 확률도 높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것으로 올가미를 씌우려고 시도합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기당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보좌 신부 때 사기를 당해 물건을 엄청나게 산 일이 있습니다. 추석 즈음에 한 백화점에서 영화를 보고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냉동탑차가 도로에서 제 차 옆으로 오더니 잠깐만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길가에 세웠더니 자신들도 그 백화점에 납품하는 사람들인데 물건이 남아서 싸게 팔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어놓은 물건은 제주 옥돔이었습니다. 얼음 위에 재워진 옥돔은 정말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백화점에서는 35만 원에 판매되는 것인데 4만 원에 사라고 했습니다. 자신들도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바빠서 내려갈 수 없어서 그렇게 남은 것들을 팔아 소주라도 한잔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면 여러 가정에 선물을 해야 해서 10박스를 샀습니다. 수녀원에도 주었는데 수녀님들이 옥돔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져갔더니 온통 얼음으로만 채워져 있고 위에 3마리 정도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몇 마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20마리 정도 있다고 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사제가 사기 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해버렸다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저는 돈이 넉넉하지 못한 보좌 때였기 때문에 사기를 더 당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애정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구가 더 크니까 그만큼 싸게 판다는 것에 대해 더 혹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싸게 사기 위해 사기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100원짜리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굳이 싸다고 돈을 쓰지 않습니다. 돈이 더 넉넉해졌는데도 사기당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 것입니다. 무엇이 넉넉할 때 덜 미혹됩니다. 친구가 많을 때 애정에 덜 미혹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기꾼들은 그 사람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만약 전화금융사기를 치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녀가 다쳤다고 해서 당황하게 만듭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당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민감한 것이 많은 이들은 많은 사기를 당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믿고 보증을 서주거나 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인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인간 애정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기를 쉽게 당하는 것뿐입니다. 재물이든 사람에 대한 애정이든 자신이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기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민감해지지 않는 방법은 넉넉하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만약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다인들에게 매국노처럼 취급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란세력으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이란 세상의 욕구입니다. 세상의 욕구는 세상에 돌려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모든 바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바라기 위한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을 욕망할수록 하느님 것을 덜 욕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 것을 욕망할수록 세상 것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에너지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는 무관심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쪽 편을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하느님 편을 들으셔서 그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면 부족한 것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있을 때 아이들이 세상 어떠한 유혹에도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것을 귀찮아해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면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못 받는 대신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그 아이는 엄마를 버리고 그 스마트폰을 내미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지면 자녀들은 그렇게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에 미혹되어 사기당하고 이용당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만을 믿는 아이라면 자신을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겁을 먹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미혹되는 일이 없는데 그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당하지도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길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전례, 기숙사 생활, 강의, 기도는 신학교 생활의 기본입니다. 신학교에는 학생들의 끼와 재능을 높일 수 있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의식과 지식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모임도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동아리입니다. 새내기 1학년인 제게 신학교는 새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와 글을 쓰고 발표하는 아람 동인회, 연극을 연습하고 발표하는 낙산 연극반, 농악을 배우고 농촌 봉사하는 민문연, 학교 내 폐지를 줍고 노동운동을 공부하는 밀알회, 설명이 필요 없는 신약반, 구약반이 있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철우회, 신학을 공부하는 신토연, 학교 매점을 운영하는 신협, 클래식 기타를 배우는 로고스 기타반, 주일 미사에 함께하는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연극반에서 3년 있었고, 신학교 매점에서 4년 있었습니다. 연극을 통해서 또 다른 나를 표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데미안, 크리스티나 여왕, 결혼’과 같은 작품을 함께 했습니다. 같이 무대를 만들고, 함께 연습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저녁식사 후에 잠시 문을 여는 매점 운영도 좋았습니다. 신학생을 위한 편지지와 노트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루에 30분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물론 매일 외출이 가능한 것도 좋았습니다. 신학교는 기도와 전례, 신학과 철학을 배우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내개 숨겨진 끼와 재능을 발휘하는 면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오래 전 신학교 생활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꽹과리, 북, 장구, 깃발을 들고 교정을 도는 농악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로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꿈속에서는 정말 신났습니다. 마음껏 뛰었고, 막걸리도 마시고, 동료들과 어깨춤을 추면서 땀을 흠뻑 흘리는 꿈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인식과 사고의 전환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식이 바뀌고 내 삶의 방식이 바뀌면 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두 달이 넘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자칫 지루하고 따분한 날들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나 바꾸면 멈출 수 있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날이 됩니다.
성서를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몇 번씩 시험하려 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을 데리고 와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지은 여인을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인식의 전환으로 사람들은 돌아갔고,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안식일의 주인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인식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웃이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주체는 내가 아니라, 지금 강도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인식의 전환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되었습니다.
황제에게 재물을 바쳐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커다란 황소도 고삐만 잡으면 어린애라도 쉽게 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 재물은 황소보다 훨씬 힘이 셉니다. 재물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황제의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잡을 수 있는 고삐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식의 전환으로 이 땅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냐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요즘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서 정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코로나의 어원이 바로 ‘크라운’(crown), 곧 왕들이 쓰는 ‘왕관’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왕관의 의미는 끊임없이 추구해온 우리 인간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내신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보면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서 공동의 집인 지구가 회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 뉴스에서 바이러스로 인해서 인간이 멈추니까 지구가 살아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삶이 바로 진정 ‘찬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모든 것을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갈취하는 삶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 하느님의 것임을 잊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며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자의 본질을 이루어가며 진정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며 그분 안에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시선을 매번 하느님께 돌려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린시절 형들은 동생들에게 싸움을 시켰다. 코피가 터지면 지는 것이고 싸움은 끝이났다. 위계가 생겼다. 지저분한 동물세계의 위계처럼 그랬다. 특히 어디서 이사라도 오면 가만히 바라보지 않았다. 이사 즉시 텃세가 시작된 것이다. 싸움에서 패한 날부터 승자는 기가 살아 패자에게 ‘자기 가방을 들고 가라’고 시켰다. 이를 거부하면 패자는 또래를 시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 순간 나는 바보가 되어 살 것인가? 정면 돌파를 시도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했어야 했다. 텃세를 뒤엎을 방도는 승자를 패자로 만드는 길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동안의 패자가 승자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가방은 네가 들고가라!’하자, 승자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승자에게 느닷없이 달려들어 사생결단으로 무자비하게 패버리는 거였다.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말이다. 그것도 1:1대결이다. 위계는 그때부터 역전이 되고 위계는 뒤바뀐다. 패자는 승자가 되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난다.
예수님을 놓고 종교지도자들이 ‘세금논쟁’을 벌렸다. 예수님께 올무를 씌워 존재감을 박살내기 위해 말이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시대의 터줏대감이 자신에게 음흉한 싸움을 걸어온 것임을 왜 예수님이 모르시겠는가, 이것은 1:1의 싸움이 아니다. 예수님과 엄청난 기존세력인 종교지도자들과의 싸움이며 악과의 싸움이다. 이는 직면하고 비켜갈 수없는 한판 싸움이 되었다. 그러나 말씀으로 논쟁을 끝내신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답하신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 이 말씀은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임을 예수님은 귀결시킨다. 식자들인 지도자들은 혀를 차며 논쟁의 끝을 감탄으로 맺는다. 그러나 그들의 텃세는 이번 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 이렇게 이어질 것이고 악의 올가미는 예수님을 옥죄며 십자가 앞에 세울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고는 승자가 되어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악의 간계는 주님의 부활로 패전이 기다릴 뿐이다. 오늘 복음의 세금논쟁(마르22,14-17)은 싸움의 시작일 뿐이다. 이 일은 교만한 내 안에서도 계속 될 것이다. 속적인 것은 계속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 시험할 것이다. 시선을 매번 하느님께 돌려라. 정확한 답이 있다. 깊이 묵상할 내용이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화요일>(2020. 6. 2. 화)(마르 12,13-17)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3-14)”
여기서 ‘올무를 씌우려고’는 ‘함정에 빠뜨리려고’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을 하시든지 간에 그 답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계획했습니다.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하시면 “예수는 민족의 배반자다.” 라고 선전했을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시면 반역자라고 로마 당국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은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사람을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라고 말한 것은, 진심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방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아첨한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들의 입으로 “스승님은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금에 관해서 어떻게 가르치시든지 간에 그 가르침을 ‘하느님의 길’로 받아들이겠다고 미리 다짐한 일과 같습니다. (물론 그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을 근거로 예수님을 고발한다면, ‘하느님의 길’을 고발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의 길’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세금에 관한 질문을 겉으로만 보면, 마치 황제가 이제 막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세금 징수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될 때부터 시행되었던 일이고, 유대인들은 이미 세금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고, 위선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저희가 지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는 일은 합당한 일입니까,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까? 세금을 계속 바쳐도 됩니까, 아니면 바치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까?”로 바꿨어야 합니다.
(그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제국의 하수인들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세금을 내고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양심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어떤 일이 양심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것도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5-17).”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린 데나리온 한 닢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고, 로마 제국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라는 말씀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한다면 세금을 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있고, 제국의 체제와 질서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낼 것인가, 안 낼 것인가, 라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그 일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황제의 권력, 황제의 목숨, 황제가 지배하고 있는 것들,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만일에 황제가 세금을 징수해서 악한 일에 사용한다면 그에게 세금을 내면 안 되지만, 그게 아니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세금을 안 낼 이유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임금에게는 주권자이므로 복종하고, 총독들에게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도록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므로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베드 2,13-15).”
(우리는 항상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선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선이 실현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라는 말씀을 “종교인들은 정치인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마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만일에 정치가 독재로 변질되고, 정치인들이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것을 막고 바로잡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신앙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악을 방관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정치권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세속 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인은 세속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면서도 세속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속 생활을 해야 합니다.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은 신앙생활과 세속 생활을 함께 해야 하는 신앙인들의 ‘삶의 원칙’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신앙인은 선행과 사랑 실천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만일에 세상을 향해서 담을 쌓고 선행도 사랑도 없이 배타적으로 살면서 미움 받을 짓만 한다면, 그래서 신앙인들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여쭙고 행동하는 인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일반인들 주제는 니꺼는 니꺼 내꺼는 내꺼 모두가 자기 꺼다.
독재욕심 주제는 니꺼는 내꺼 내꺼는 내꺼 모두가 내 것이다.
신앙인들 주제는 내꺼는 하늘 네꺼도 하늘 모두가 하늘 꺼다.
-오래전 불러라 불러라 노래 불러라는 게임송을 바꿔 부른 적 있었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창조의 영역안에 있는 한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인간의 ‘마음대로’라는 자유는 하느님 뜻과 달라도 좋다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인 계명(사랑의 계명) 내에서의 자유활동이란 걸 말합니다.
창조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다고하신 표현 멋져요.
하느님께 여쭙고 행동하는 인물 되시려면 가톨릭의 기도부터 배웁시다.
성령칠은을 통한 복음화 ⓶ 의견의 은사
이기우 신부님
성령칠은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 번째 은사는 의견의 은사입니다. 본시 이 은사는 하느님의 뜻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야 하는 경우에 과연 그 사람이 믿을 만한가, 혹은 믿을 만하지 못한가를 식별해 내는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세금 문제로 예수님께 함정 질문을 해 왔습니다. 매우 정치적인 이 질문은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해도 모두 다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는 올가미였습니다. 그들의 위선을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고 답변하셨습니다. 어차피 위선적 의도로 그럴싸하게 꾸민 함정 질문으로 도전받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이 도저히 반박할 수 없게끔 완벽한 형식논리와 상황윤리로 곤경을 모면하고자 하신 답변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정치에 관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가르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에 관한 본격적인 가르침이 나왔던 때는 이렇게 세금논쟁으로 판정패를 당했던 바리사이들이 재차 올가미를 던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 적대감을 품은 사두가이들은 사형집행권이 없었으므로 그분에게 신성모독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로마 빌라도 총독으로 하여금 사형 언도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독과 같은 종교적 혐의로는 로마 총독으로서도 로마법상 사형을 시킬 수가 없으므로 바리사이들은 사두가이들을 제치고 약삭빠르게 전면에 나섰습니다. 즉, 유다인의 왕이 되려 했다는 정치적 혐의를 그분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게 된 빌라도는 그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그분은 초연하셨습니다. 즉, 사형권과 사면권을 모두 쥐고 있는 총독 앞에서인데도 그분은 정치적 반란혐의를 인정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항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시다가, 이렇게 몇 마디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18,37).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19,11).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시면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과 다르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최고선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의 나라들과는 구분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평소에 공동선에 불충실한 정치권력을 비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섬김의 자세와 행실을 강조하시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입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이렇듯 예수님께서 평소에 몸소 솔선수범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처럼, 베드로 사도 역시 불의한 세속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무법한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가능한 한 그날을 앞당기도록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공동선에 관한 정치적 식별과 하느님의 날을 앞당기려는 노력, 이 두 가지가 가톨릭 정치윤리의 핵심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무법한 정치권력의 사악함을 알아보는 안목이 필수적인데, 이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사람의 속물성을 알아보는 안목으로 이어집니다. 이 안목이 바로 성령칠은 가운데에서 의견의 은사를 구성하는 기본적 요건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예언자적 직무로 나타납니다. 만일 의견의 은사를 받지 못하여 불의한 정치권력의 죄악성을 식별해내지 못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허울좋은 정교분리의 논리, 즉 종교는 현세의 정치질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하고 오로지 내세의 사정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형식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성령의 이끄심 대신에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는 정의구현 활동은 복음선포의 본질적 요소가 됩니다(‘세계 안의 정의’,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1971).
의견의 은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건전한 관계는, 정치와 종교가 내부질서에 있어서는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한편으로, 최고선에 있어서는 정치가 종교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공동선에 있어서는 종교가 정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공동선에 직결된 최고선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요 재화의 보편성과 배려의 전인성입니다. 정치권력이 이 가치에 충실하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협력해야 마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내내 솔선수범하셨고 사도 베드로도 강조하였듯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공동선에 봉사하는 실천으로 하느님의 날을 앞당겨야 합니다. 이는 의견의 은사의 본격적 요건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최고선의 진리를 선포하는 사제직과 이에 입각한 공동선을 실천하는 왕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됩니다.
돌려드림의 의미
김기환 베드로 수사님
T.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에게 올무를 씌워 음해할려고 하는 이들에게 말문을 막아놓기 위한 지혜로운 답변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잘알아들어야 할필요가 있습니다. 모든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천상의것도 하느님의 것이고 황제의것 즉, 세상적인것도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느님의것 따로, 황제의것 따로가 있는것이 아니라 모든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기에 모든것을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려야한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려드리지 않고 우리의것으로 삼는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하지는 않을것입니다. 세상적인것 즉, 돈이나 명예와 권력과 같은것들을 소유하고 읆매여도 의미있는 삶을 살기에 어려울수도 있지만 하느님의것 즉, 사랑과 자선 희생과 같은것들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읆매여도 이 또한 의미있는 삶 또한 아닐것입니다. 가령 자신이 그 누군가에게 자선을 베풀고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였다면, 그래서 그것을 기준과 잣대로 삼아서 자신이 한 만큼 좋은일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판하고 판단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행복하기 위해서 의미있는 삶을 살기위해서 실천해야할 사랑이 오히려 족쇄가되고 더불행하게 될수도 있습니다.자연도 우리에게 소유하지않고 돌려드리는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줍니다. 열매를 맺은 나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것을 나누어줌을 통하여 생명을 더욱더 풍요롭게 합니다. 그리고 씨를 맺은 민들레는 바람을 통해 날려 곳곳에 생명을 싹틔웁니다. 시냇물에서 강물로 강물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물은 생명의 원천이 되지만 흐르지않고 고인물은 썩게되어 생명이 살수없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아무리 좋고 영적인것이라 하더라도 소유욕과 읆매임이 있다면 우리는 고여진물처럼 썩게 될것입니다. 하느님의것도 세상의것도 모두다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할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느님의것들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합니다.
이백만 요셉 신부님
“오늘 미사 중에는 정치적 소명을 받은 남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사랑의 탁월한 형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 국가의 정당들이 코로나19 대유행의 어려운 시기에 자기 정당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 함께 국가의 선익을 추구하도록 기도합시다.”(4월 20일 산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한국에서는 4월 15일 21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고, 300명의 정치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4월 20일 아침 미사 강론에서 ‘정치적 소명을 받은 남녀’를 기도에 초대하셨습니다. 한국의 선량 300명을 위한 특별 기도처럼 들립니다.
●공동선을 위하여
“정치 참여는 그리스도인에게 의무입니다. 왜 정치가 타락하는가? ‘그들 탓’으로 돌리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2013년 6월 7일, 예수회 학교 간담회)
교황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를 권장하십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정치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종교인의 정치 참여!
정치 혐오증이 팽배한 한국에서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언사입니다. 교황님이 현대 사회의 정교분리 원칙을 모르는 바도 아닐 텐데, 왜 줄기차게 정치 참여를 언급하시는 걸까요. 코로나19 사태는 문자 그대로 미증유의 대재앙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대공황(1929년) 이후 맞닥뜨린 가장 큰 재앙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IMF 사태(1997년)에 버금가는 대재앙이라고 걱정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과장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경제 활동이 중지되어 버렸습니다. ‘경제 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멀쩡했던 기업들이 쓰러지고 있고, 실업자들이 대거 쏟아지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코로나19 사태 이후를 더 걱정하고 계십니다. 실업자 노약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부자들이 벌써 자선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천사 같은 분들입니다.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선은 가장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9)
그러나 부자들의 개인적이고 임의적인 시혜로 국가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 자선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가 전 재산을 기부한다 해도 그것은 ‘코끼리 비스킷’입니다. 국가의 구조적 문제는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자선을 국가 정책으로 제도화해야 합니다. 자선의 제도화, 바로 복지 정책입니다. 이것은 정치의 영역입니다.
정치인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황님이 강조하는 정치참여는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직업 정치인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 정치인들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당부입니다.
스웨덴의 알빈 한손 총리는 모든 국민을 자기 집 식구처럼 보살피는 ‘국민의 집’ 정책으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으로 무너진 국가 경제를 ‘뉴딜 정책’으로 재건했고 빨갱이 소리까지 들어가며 강력한 빈민구제사업을 벌였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IMF 사태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는 데 성공했고 사회안전망 강화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제2의 알빈 한손, 제2의 루스벨트, 제2의 김대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박수와 회초리
인류 역사에는 나쁜 정치인도 많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정신을 파괴하고 국민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렸습니다. 좋은 정치인에게는 박수를 쳐주고, 나쁜 정치인에게는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치인을 위한 기도의 참된 열매입니다. 정치인들을 위한 교황님의 기도 요청은 절절합니다.
“정치판이 썩었다고 불평만 하고 있지, 정작 우리 가운데 누가 정치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국회의원들을 위해 기도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됩니까?”(2019년 9월 16일 산타 마르타의 집 미사)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시기를 다시 시작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근원과 목적을 보여 줍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마르 12,14)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던 시절, 그때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임금이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찾아와 임금을 요구하고, 이를 언짢아 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 왕정을 허락하신 이야기를 소상히 전합니다(1사무 8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고 효력도 확실한 제도와 우두머리를 필요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손수 뽑으신 백성에게 배척당하신 것이지요(1사무 8,7).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그마저 무너져서 로마 제국 황제에게 지배를 받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이때 종교 지도자들이 눈엣가시같은 예수님께 정치적 올가미를 던지지요. 예수님의 선택지는 로마에 대항하는 선동가거나, 아니면 민족적 반역자, 둘 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예수님의 답변은 이스라엘 왕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다윗의 자손답게 순수하고 영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까마득히 잊고 있었거나, 종교 행사의 시공간 안으로 축소시켜 버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환기시켜 주시면서, 동시에 온건하지만 단호하게 어둠의 세력이 품은 흑심과 속셈을 드러나게 만드셨지요.
"황제의 것 ... 하느님의 것"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황제의 것이 존재할까요?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황제마저도 하느님 것이니까요. 또 그에게 생명과 권한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신데 감히 어느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을 주장할 수 있을지요!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하도록 신자들을 독려합니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자신이 하느님의 것임을 아는 이는 세상 재물과 허영에 목메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 곧 황제의 것들은 추구하고 차지할수록 더 욕망하게 되고 달려들게 만드는 마약과 같지요 마시면마실수록 더 목이 타서 계속 들이키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바닷물과도 같습니다. 이 상태에서 평화란 없습니다.
온 생애를 걸쳐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되돌려드리며 살다가 그 순간을 맞는 이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에 평화로이 들어섭니다. 하느님과 그 사이에 이미 주고 받음의 경계조차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것이 모두 그의 것이고 그의 것이 고스란히 그분 것인 차원에서는 소유나 욕망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집니다.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2베드 3,18).
베드로 사도는 그날이 올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고합니다. 우리가 간직하고 키워야 할 것은 바로 "은총"과 "앎"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은 분명 "받은" 것이지요.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사람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은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지요.
앎은 세속적이고 현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앎을 가리킵니다. 책과 학위와 상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사랑의 지식이지요. 깨끗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님은 당신에 대해서 열어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존재를 깨치고 들어온 앎이 사랑이 되어 존재를 차지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 살기 힘드시지요?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도 책임져야 하고 교회와 사회에 의무도 이행해야 하니 마냥 하느님의 것만 추구하며 살기는 어렵게 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등과 노고가 크십니까...
사실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은총으로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을 분별하는 눈이 존재합니다. 때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우리 영혼이 알고 양심이 알지요.
각자 자기 영혼의 저울을 바라봅시다.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 사이에 나의 추는 어디쯤 위치하는지요? 단번에 추를 옮기려다 저울 접시가 뒤집어질 수도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는 마시고, 우리 영혼이 아는 방향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도록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봅시다. 정답은 주님도 아시고 우리도 알지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화답송). 아멘.
<하느님을 믿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 것도 그럴 수 없이
하느님만이 스스로 계심을
믿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심을
알아듣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있는 모든 것에서
있게 하신 하느님을
느끼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있는 모든 것이
있게 하신 하느님의 것이라
말하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있는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느님께 돌려드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갖지 않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빚으신 모든 것을
온전히 품는 사람
순수한 마음 -천상 지혜의 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엊그제 써놓고 내심 만족하고 행복해 한 ‘당신은’ 이란 시를 나눕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바로 당신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바다임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선물이 선물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더 좋은 선물이예요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더 깊고 넓은 바다예요”-
이 또한 순수한 마음에서 솟아 난 성령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바티킨 뉴스 홈페이지가 참 고맙습니다. 참 많은 영적 자산을 제공합니다. 강론 준비에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순수한 마음, 순심純心이란 좀 촌스럽게 들리는 어감의 말마디에 왜관 수도원에 속한 순심학교가 생각납니다. 순심이란 말이 촌스럽다 하여 이름을 바꾼 자매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순수한 마음이요 여기서 샘솟는 천상 지혜입니다. 참 좋은 본보기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순수한 마음은 천상 지혜의 샘입니다. “아버지의 선교사(the Father’s Missionary),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선교” 교황님 말씀 제목이 참 신선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뿐 아니라 선교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선교사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누구입니까? 성령 강림 대축일, 교황님의 강론이 참 좋았습니다. 일부 소개합니다.
-“성령의 일치의 비밀은 바로 선물이다. 그분 자신이 선물이다. 하여 ‘하느님은 선물(God is Gift)임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은 가져가는 분이 아니라 주는 분이다. 만일 우리가 이를 깨닫는다면 우리 역시 우리 삶을 주기를 원할 것이다. 겸손한 사랑으로, 자유롭고 즐거운 섬김으로, 우리는 세상에 참 하느님의 모상을 제공할 것이다. 자기를 내어줌(self-giving)에 세 적은 자기도취(Narcissism)와 희생자의식(Victimhood), 염세주의(Pessimism)다. 희망의 기근(Famine of hope)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세 적을 치유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인 성령을 필요로 한다.”
성령은 바로 마음을 순수하게 하는 천상 지혜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자기도취, 희생자의식, 염세주의가 치유될 때 비로소 순수한 마음이요 희망의 빛이신 하느님이 환히 드러납니다. 이의 참 좋은 본보기가 아버지의 선교사,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천상 지혜가 빛납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적수들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내라 해도 걸려들고 내지 말라 해도 걸려듭니다. 양자택일의 딜렘마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내어준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 한 닢을 들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적수들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역습이었을 것입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적수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감탄하여 말문을 잃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선교사,예수님의 하느님 중심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천상 지혜임이 분명합니다.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의 모상인 황제란 인간 또한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런 대원칙의 진리에 대한 자각에서 결정은 각자 알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내심은 분명 세금을 바치라고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진퇴양난의 처지입니다. 저 같아도 역시 세금을 바칠 것입니다. 세금을 바친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의 부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짧은 생각에 명분을 쫓는다 하여 세금을 내지 않을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이니 현명치 못한 결정이요 바로 적수들의 올가미에 걸려 든 형국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선교사, 예수님과 함께 선교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했던 수제자 베드로가 제1독서에서 순수한 마음을 위한 참 좋은 지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티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무법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하느님의 선교사이자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날로 그분에 대한 은총과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갈 때, 우리 역시 순수한 마음에 천상 지혜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로 순수해진 우리 모두에게 천상 지혜를, 분별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90,14).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1,17-18). 아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최민석 신부님
산길을 걷고 또 걷는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린다. 산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산에 들어가면서 세상을 등지지만 또 다른 세상을 본다.
여름 깊은 숲속 나무의 냄새는 향기롭다. 이 향기에는 습기가 섞여 있지 않다. 끈적거리지 않는 향기다. 나뭇잎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부낀다. 나무의 모든 잎들이 제가끔 반짝이며 흔들린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떨면서 하느님의 품에 빛과 더불어 잠든다.
나뭇잎들은 아침 햇살 속에서 나무의 빛은 튕기지만 저녁 햇살 속에서의 나무의 빛은 스민다. 튕기거나 스미거나 그 잎들은 언제나 흔들리고 있다. 숲속 나뭇잎은 빛의 찬란한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이룬다. 천국의 빛은 나뭇잎 사이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색깔을 보낸다. 그 모든 하늘빛이 나뭇잎 사이로 드러난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수석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대답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코 12,13-17)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아름답다. 살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생명이다. 모든 게 다 하느님의 은혜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열매를 주신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기쁨과 평화를 얻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어머니는 하느님이시다.
나무는 언제 어디서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책하며 살지 말고 자기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며 내게 늘 용기를 준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하고 부족함 속에 깃든 하느님의 조화와 지혜를 배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의 모습을 수용하고 받아들여 주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은 이미 완전하고 완벽하다. 뭔가 부족하다고 보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충실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완전하려고 하지 말고 이미 완전한 삶을 즐기며 살았는가 물어보아야 한다. 열심히 살았는가. 성실하게 살았는가 보다 오히려 삶을 잘 즐기며 감사 했는가 이런 게 훨씬 중요하다.
인간의 삶은 싹이 돋을 때도 아름답지만 나뭇잎을 다 잃을 때도 아름답다. 화려하게 꽃이 피고 가득한 열매로 풍성할 때도 아름답지만 죽어가는 고목이 될 때도 아름답다. 어느 날 죽어가는 고목에 새 잎이 나는 날도 있다. 나무는 나 없음으로 사는 도의 길을 걷고 있기에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내 책장에 꽂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침묵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산에 가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것과 같다. 산에 가는 일이 별식 같지 않다. 바람 불어도 산에 가고 싶고 가슴 뛰어도 산 올라가고 싶은 것은 산에 가는 것이 내 삶의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기쁨 돋을 때나 슬픔 잠길 때에도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산이 고프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산에 가는 것은 잠자고 밥 먹는 일과 닮아 있다.
울창한 숲은 온갖 향기로 치료하는 하느님이 차려 놓은 이 거대한 병원이다. 맑은 물과 바람, 새들의 노래 소리에 몸과 마음 구석구석 때를 씻어 낸다. 비쭉비쭉 치솟은 웅장한 산봉우리들은 산 같은 용기를 준다. 산에 들어서면 걱정 근심 시기 질투 미움 탐욕 세상 보따리 다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한다.
바람결에도 소스라치고 하늘 향해 반짝이는 잎 새들의 해맑은 표정은 상처 입은 마음과 지친 육신을 고치고 치료하는 오 보이지 않는 위대한 하느님의 손길이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함승수 신부님
모든 화폐에는 '일련번호'라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그 번호를 확인함으로써 그 화폐가 얼마짜리 권종의 화폐인지, 그리고 어느 발행기관에서 몇 번째로 찍어낸 화폐인지, 더 나아가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같은 정보들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이와 비슷합니다. 로마의 동전인 데나리온의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글귀가,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그 동전을 발행한 이가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이며, 그 황제는 단순히 세상의 왕일 뿐만 아니라, 신께 제사를 올리는 최고 성직자의 능력과 권한까지 지니고 있음을 그 동전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그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황제의 권한을 인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이 싫었다면 정치적 고립이나 경제적 불편을 각오하고서라도 이스라엘의 고유화폐인 ‘셰켈’만 사용했겠지만, 예수님께 따지듯 질문한 이들은 편리함과 이익을 위해 로마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 동전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서 통용되는 모든 것이 사실상 ‘황제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묻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정의로운 척을 하며 예수님을 닥달하듯 따져묻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먼저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과 재물, 그밖의 모든 것을 그에게 되돌려주고 나서 그에게 예속된 나의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재물과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스스로 그 ‘종’이 되어 살려고 하는 우리의 어리석고 약한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지어 만드신 그분의 ‘모상’이기에, 내 영혼 깊은 곳에는 하느님의 모습이,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품으셨던 선한 뜻이 새겨져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은 내 안에 당신의 모습을 새기신 주님께 나 자신을 내어드림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지어내실 때 이미 나를 위해 준비해두신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영적인 준비를 하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을 근거로 들며, ‘교회는 세상 일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들 스스로 “천주교인 모임”이라고 밝히는 이들이 그런 주장을 더 강하게 내세우며 세상의 부정과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이들에게 ‘빨갱이’라는,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고 단죄하려고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과 신앙을 구분지으려는 그들의 태도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분의 피조물들을 이용하며 살면서도, 정작 그분의 뜻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뜻과 욕심대로만 살려고 드는 교만이자 독선입니다. 또한 그 자체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죄가 되기도 합니다.
돈은 자신에게 새겨진 초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내 안에 새겨진 형상이 어느 분의 것인지를 잘 압니다. 돈은 그것을 만든 이의 손을 떠나 그것을 소유한 이의 것이 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것입니다. 돈에는 인간적인 것들이 새겨져 있기에 인간의 몫으로 돌아가지만,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에 나 자신을 하느님의 몫으로 내어 드려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것이라면, 나에게 속한 모모든 것들도 당연히 다 그분의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거짓된 평화
성 도로테우스 아빠스의 글에서(Doct. 13, De accusatione sui ipsius, 2-3: PG 88,1699)
자기 자신을 책하는 사람은 어떤 불편이건, 손해건, 모욕이건, 어떤 괴로운 일이건 자기에게 닥칠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 그런 것을 자기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 때문에 조금도 마음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보다 더 평화로운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어떤 이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어느 형제가 나를 괴롭히지만 내 자신을 돌이켜볼 때 그가 나를 그렇게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를 책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반성해 본다면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점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자신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태도로 그런 계기를 유발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현재 이 모든 점에서 자기 잘못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때에 그 똑같은 행동이나 또는 다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 형제를 괴롭혔거나 또는 다른 형제의 마음을 거의 틀림없이 상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잘못이나 다른 곳에서 저지른 다른 여러 가지 잘못들 때문에 응당히 자신을 책해야 합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내가 평화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데 한 형제가 다가와서는 기분 상하는 모욕적인 언사로써 내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왜 나를 책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그것을 참지 못하고 자기가 성내고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면서 그가 끼어들지 않았거나 말하지 않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스운 말이며 무게 없는 생각입니다. 그 형제가 그 말을 했다고 해서 마음속에 분노의 격정을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다만 그 말이 이미 그의 내부에 있던 격정을 드러나게 했다는 점입니다. 이때에 그가 원한다면 그것은 회개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덜 익은 밀알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싱싱하고 반짝이지만 바수어 트리면 내부의 더러운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듯 평화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격정을 내부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형제가 나타나 그에게 불쾌한 말을 한마디 던지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고름과 더러운 것을 토해 냅니다.
그가 자비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회개하여 자신을 정화시키고 좀 더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도 유익한 계기를 가져다 준 그 형제를 욕하는 것보다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앞으로 유혹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진보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쉽게 유혹을 맞을 수 있고, 영혼이 진보하면 좀 더 용맹하고 강해져 어떤 어려움에 봉착한다고 해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돌려드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마르코 12, 13-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소위 식자들이 주님께 와서 시험할 때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만 하면 유대인에게 몰리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군에게 몰리는 처지에서 주님은 지혜롭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교회에 헌금이나 교무금을 내는 것을 나라와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부족한 생각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황제의 명에 의해 이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 여기 살고 있습니다. 여기 사는 우리는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으로 살고 있습니다. 헌금이나 교무금은 교회 운영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은 내 생명의 전부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셔서 그 안에 생명을 살게 하시니 내가 살아있는 모든 조건이 하느님의 것이어서 내 생명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것을 들여야 합니다.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 물, 공기, 태양의 힘, 자연의 모든 형상 보고, 듣고, 말하는 능력,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자세가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생명만이 아니라 생존의 권리를 주셔서 사람답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의 인격체로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사람대접받아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사람대접받아야 합니다.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명예가 있거나 없거나 생존의 의미에 따라 사람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살려면 진, 선, 미의 법칙에 따라 진실하게, 참되게, 아름답게 살 의무가 있으며 이 모든 행위의 의미는 각 사람은 하느님으로 세상에 나왔으니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짓이나 속임수는 하느님의 품격을 거스르고 망치는 행위입니다. 죄를 지을 수는 있으나 죄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변화되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며칠 전 저에게 바나나 주겠다고 약속하고 보내왔습니다. 혼자서 다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몇 형제에게 나누어주니 빚을 갚은 사람처럼 개운합니다. 어떤 이가 돈을 주시기에 가난한 형제에게 30만 원, 수도 형제에게 30만 원, 코로나로 피정도 못 하고 힘들어하는 분원에 50만 원, 커피 사는데 약간의 돈 등등 나누고 나면 하느님에게 돌려드리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 뜻대로 사용하는 것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국민이 바치는 세금도 나라의 권력자는 진실하게, 정의롭게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받으신 것 다 돌려주시며 우리를 살리시고, 사람답게 살도록 하시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완전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감사와 찬미 드립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아마도 예수님 당대에도 사람들은 시민 불복종이나 세금 납부 반대운동을 했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보고 예수님을 세금납부 반대론자로 관청에 고발하고자 했었던가, 예수님을 핑계 대고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었던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4)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답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이 대답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황제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돈에 대해 여쭈십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16절) 이 질문에 이미 그 답이 포함되어 있는 듯보입니다. 먹고 사는 데 쓰는 돈, 성전에 내는 돈, 황제에게 세금으로 내는 돈. 이 세가지 돈을 혼용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처럼 명쾌한 답은 없어 보입니다. 돈은 필요에 의해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필요에 맞춰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내가 속했다고 여기는 곳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되새겨 봅니다. 그것이 돈이든 의무이든 역할이든 책임이든지 간에. 신앙과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신알 생활을 하는 사회인으로서 나는 어찌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으로서 간직해야 할 정신과 수행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정과 의무들이 서로 배치되지 않도록 안배하고, 교회의 복음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한 사회생활을 성실하고 충실히 채워나가도록 합시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사는 법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남산길을 걸었습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지만 기분은 상쾌해집니다. 도랑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에 발걸음은 리듬을 맞춥니다. 자연이 주는 기쁨에 절로 하느님을 찾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평범한 일상일 수 있지만 우린 이 소중함을 오랫동안 빼앗겼던 것 같습니다. 정부 지침에 따라 교회도 한동안 교우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습니다. 미사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처음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사를 외적으로 봉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삶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희생제사이며, 함께 나누는 일치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거룩하고 살아 계신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등지고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할 수 없는 법입니다. 세상의 아픔을 모른 척하고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만족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냐는 이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황제의 것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보다
커져버린
우리의 모순된
삶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반성하며
살아 가는
이 모든 순간이
우리 힘이
아님을 뼈저리게
인정합니다.
그래서 진정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기쁘게
겸손되이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이 모든 길또한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카이사이르조차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기꺼이
놓아 드려야 합니다.
놓아드리는
그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돌려 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내어 놓기
싫어하는 우리들
아집을 만납니다.
돌려 드리고
내어 놓아야
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우리가 잠시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돌려 드려야 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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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님의 남편이 명예퇴직으로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퇴직을 하게 되어서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에 용기도 주고 칭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집 안에만 있는 남편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무능해보였고 게으른 모습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존경심은 완전히 사라졌고 비난할 때가 많았지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자매님 역시 부정적인 생각과 비난의 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어하면서 삶은 더욱 더 힘들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신부님의 특강을 우연히 성당에서 듣게 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의 기대를 절대로 채워주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내 기대를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에 뒤통수를 누군가를 세게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자매님께서는 남편에게 기대를 했고 이를 채울 수 없으니 실망하고 좌절했던 것입니다. 나의 기대를 유일하게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나의 기대를 무조건 채워주지 않습니다.
저희 성지에는 본인의 기도를 종이에 적어서 끼워놓는 기도틀이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이분들의 기도 지향을 읽으면서 저 역시 같은 지향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종종 ‘로또복권 맞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들어주실까요? 저는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거액 복권에 당첨된 대다수가 불행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복권 맞게 해달라는 기도는 안 들어주실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나의 기대를 무조건 채워주시지 않고,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따라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내 안에 새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새겨야 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하는지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묻습니다. 내라고 하면 매국노라고 할 생각이었고, 내지 말라고 하면 반역자로 몰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 세상 것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 드리는데 집중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하느님이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랑의 실천 등이 바로 진정으로 하느님께 내 자신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느님께 집중하고 그분을 내 마음에 새겨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느님뿐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신은 모든 이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주는 데는 실패했지만 시간이라는 자원을 똑같이 나누어주는 데는 성공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공평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더 많이 사랑하시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하셨지요. 각자에 맞게 최고의 하느님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공평함을 바로 시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바로 공평함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최고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로지 우리가 기댈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이미 와 있지만, 현재 진행형인 하느님 나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종말론’에서 ‘하느님의 나라’ ‘주님의 날’과 관련해서 자주 강조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인 하느님 나라.’
이와 관련해서 베드로 2서의 저자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베드로 2서 3장 12절)
베드로 2서 저자의 요점 정리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생활은 겸손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첫번째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권능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재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마지막 시대의 모든 양상과 의미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완전하거나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어둠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으며, 성경의 빛, 성령의 이끄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쪽 발은 주님 나라에, 다른 한쪽 발은 인간 세상에 딛고 서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생활, 티없고 흠없는 삶을 통해, 주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날, 마지막 날, 종말에 대한 베드로 2서의 가르침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쁨을 주는 표현은 ‘새로움’입니다. 주님의 날이 도래하면 그분 가르침에 충실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부여될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도성에 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그간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언약이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 티많고 흠많은 사람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 내면 가득 욕심과 분노로 가득한 사람은 거기 들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주님께서는 합당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우리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베드로 2서 3장 15절)
사실 90분 정규 시간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일분 일초가 소중한 추가 시간입니다. 더 이상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주님 나라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온전히 사용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는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워싱턴 D.C. 지하철 랑팡역,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청년이 낡은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주한 지 6분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들었고 43분 동안 일곱 명이 청년의 바이올린 연주를 1분 남짓 지켜보았습니다. 스물일곱 명이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었고 그렇게 모인 돈은 32달러 17센트였습니다.
다음날 신문을 펼친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지하철역에서 공연하던 청년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날 350만 달러(한화가치 30억 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43분 동안 멋진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오가던 1,070명은 단 1초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이 공연을 제안한 ‘워싱턴 포스트’는 현대인이 일상에 쫓겨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현대인의 문제를 꼬집고 싶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한 신자분과 대화 중 유토피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언젠가 건설될 하느님 나라. 그것이 유토피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고 결국 주님이 오실 때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대탕녀 바빌론처럼 영원한 바다의 심연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많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마지막 날에 이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2베드 3,12)
그렇다면 미래에 유토피아가 이 세상에 건설될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사실 미래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이들은 지금의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즘 선거철이라 그런지 운전하다보면 여러 후보자들의 공약이 걸린 현수막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자주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미래의 유토피아 이야기를 하는 공약들이 많습니다. 이런 공약들이 먹히는 이유는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상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리키는 곳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유토피아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지금 당장 기도하고 묵상하고 주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하는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동전 하나를 가져와보라고 하십니다. 그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돈에 집착하느냐고 하시며 황제에게 줘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나 집중하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돈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돈이 참 행복을 가져다줄 현실적인 대안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복은 여전히 미래에 돈을 충분히 벌게 되었을 그 때에 있습니다.
우리가 뽑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은 ‘지금’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 순간 마음만 바꾸어먹으면 만날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돈과 상관이 없습니다. 미래에 건설될 눈에 보이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으면 내 안에서 펼쳐집니다. 지금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나마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한 비전이 없으셨습니다. 노예제도를 그대로 인정하셨고 로마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로마에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거에 나가셨다면 아무도 찍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우리 옆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만 당부하셨습니다. 배부른 돼지를 만들어주겠다는 이들을 조심해야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부족한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심어주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줘 버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것인 우리 자신을 매일 주님의 것으로 봉헌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사람을 시켜 여쭈어보게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하신 뒤 그 돈에 새겨진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인지 물으셨고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자체도 하느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15장에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한 이야기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것이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더 없는 기쁨으로 여기며 그 자유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면서 살다가 결국 허망한 종말을 맞이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혹시나 내 모습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만을 소유하고 집착하는 모습은 아니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사람과 데나리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
유대인 지도자들이 묻습니다.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바치라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요
바치지 말라 하면 국사범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예수님께서 여기에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느님의 것을 황제에게 돌리지 마라.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것을 탐내지 마라.
로마 은화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존엄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황제가 새겨진 데나리온으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은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됩니다.
황제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초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이지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
세상 사람들이 묻습니다.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옳은가.
종교가 경제에 관여하는 것이 옳은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우리는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경제인에게
그러나
정치가 섬겨야 할 사람은
경제가 섬겨야 할 사람은
온전히 하느님께만.
그러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존엄한 사람을
정치와 경제의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정치와 경제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존엄한 사람을
오히려 섬기지 않고 착취함으로써
하느님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느님의 것: 인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교묘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예수님께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것이냐는 함정이 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절) 그들은 그분을 거슬러 교묘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15절) 하신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돈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황제’,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16-17절)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디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 하여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황제에게 바쳐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금고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의 은화이다. 우리 안에 새겨주신 당신의 초상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도 하느님의 모상을 가진, 즉 하느님의 초상이니 하느님께 속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그 깊은 뜻을 알아듣고 그 함정을 없애버리시는 주님의 지혜에 대하여 경탄하였던 것이다.
동전에는 통치자의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고 올바로 되돌려 드릴 수 있을 때 될 수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참된 예물로 이 제단에 봉헌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에는 전례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달력과는 시작도 다르고, 내용도 다릅니다. 세상의 달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날짜가 계산되지만, 교회의 달력은 예수님의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 시기를 지냈고, 지금은 연중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 달력의 시작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부터입니다. 성탄을 축하하면서 잠시 ‘연중 시기’를 지냅니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을 지내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를 지냅니다. 성 주간을 통해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면서 ‘부활 시기’를 지냅니다. 7주간의 부활 시기를 지내고 ‘성령강림 대축일’이 지나면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는 ‘연중 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려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전례 안에서 사는 것은 우리는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주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홀로 설 수 있는 제도와 복지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에 회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사장님은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잘 마련해 주었습니다. 직원식당은 값이 싸면서도 영양가가 높았고, 직원들은 하루 3끼를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체력 단련실을 마련해 언제든지 운동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의료시설이 있어서 의사와 상담할 수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명상할 수 있는 공간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장님은 회사의 목적은 이윤을 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회사의 목적은 직원들이 사명감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저는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그 회사는 더 많은 발전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천사, 선녀, 요정, 산신령, 도깨비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도 하고, 요정들이 숲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는 그런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교육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라는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은 땅에 사는 사람들과 가까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고착되었고, 사람들의 삶에서 악취가 풍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습니다. 우리의 교육과 사회제도는 계속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잘살아야 하고, 더 많이 소유해야 하고, 끊임없이 ‘더’라는 마법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나만 멈추면 도태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면 정말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늘의 구름도, 바람의 느낌도, 꽃의 색깔도, 새들의 노래도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려 하고, 증거를 찾으려 하고, 확신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멈추라고 합니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하느님의 것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세상은 기계론적인 자연법칙의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응보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그런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멈출 수 있었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경제민주화니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경제성장이니 하는 소리를 밤낮으로 한다고 해서 서민 경제가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편복지를 외쳐도 실제적으로 재원마련대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눈앞에 것만 보아서도 안 되고 기금을 이용해 먹어서도 안 됩니다.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을 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 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하여 “이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서로 다른 탈란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이는 말 그대로 하면, 은화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황재의 것이니 황제에게 돌려주고,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이 됩니다. 곧 돈은 황제에게 돌려주되, 우리는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가 자신의 초상을 요구하니,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초상을 요구하시니,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사실, 동전에는 흐리멍텅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곧 황제의 초상이 자신에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인간에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압니다. 곧 하느님의 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은화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의 황제에게 팔아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팔려 넘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소유,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우리 안에 진리가 다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자라야 할 일입니다. 진리가 자라게 하는 일, 그것은 진리를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 그것은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에 속한 이들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진리에 속해 있기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까닭에, 불의 앞에 눈감고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진리에 속하도록 빛을 밝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부터 결코 제한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자신에게 새겨진 초상을 알지 못하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형상을 압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것입니다. 돈에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제게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당신께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씀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빛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진리가 새겨져 있고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당신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저는 영원토록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분별력의 지혜,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비단 교회지도자들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이나 부모들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분도 성인도 규칙서 ‘제64장;아빠스를 세움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아빠스로 세워질 사람은, 비록 공동체의 차례에는 마지막 자리에 있더라도, 생활의 공덕과 지혜의 학식을 따라 선출되어야 한다.”
1500년 전 그 아득한 옛날의 글인데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이런 사고방식이 경이驚異롭습니다. 나이와 함께 가는 지혜가 아니니, 나이들어 간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 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길다 싶지만 깊이 새겨야 할 분별력의 지혜이기에 인용했습니다. 이런 분별력의 지혜의 결핍으로 파생되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분별력의 지혜는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 갈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열렬한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깨끗한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사랑이 바로 지혜의 샘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으로 깨끗해진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언제나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천상지혜에 감탄합니다.
악마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을 통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너무나 치밀하고 교묘한 공격의 올무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을 잔뜩 치켜세우신 다음 본격적 유혹의 질문입니다.
-유혹자들;“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유혹자들;“황제의 것입니다.”
예수님;“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세금을 내라하면 민족반역자로, 세금을 내지 말라하면 로마제국의 국사범으로 몰릴 양자택일의 절체절명의 순간 예수님을 구한 천상지혜입니다. 이런 천상적 지혜의 답변은 하느님의 선물임이 분명하지만, 예수님의 철저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반영합니다.
황제의 흉상이 박힌 ‘데나리온’처럼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이기에 황제뿐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철저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비로소 올바른 분별입니다. 이런 전제하에 세금을 내고 안내고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일이 시시콜콜 하느님이 개입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진의는 세금을 내는 데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명분’과 ‘실리’입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전 주전파의 명분론과 주화파의 실리론이 연상됩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명분을 택할 것인지, 세금을 내고 평화의 실리를 택할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면 실리를 택해 세금을 내는 것이 예수님의 진의라는 생각입니다. 결코 목숨을 걸 정도의 명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얄팍한 합리화가 아니라 현실적 지혜입니다.
예전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강의시 들었던 예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똑같이 하느님을 믿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중 각자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느님은 어떻게 응답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알아서 네 실력대로 하라.”
각자 알아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질문의 답변도 대동소이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이라면 세금을 바치든 안 바치든 그것은 네가 알아서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의는 세금을 내는 쪽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선사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바로 베드로 2서가 하느님 중심의 삶의 모범을 가르쳐 줍니다. 그대로 종말론적 삶의 자세입니다.
-1.우리는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2.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3.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4.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가십시오.-
시공을 초월하여 예나 이제나 하느님 중심의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금과옥조의 말씀이며 이대로 사는 자체가 지혜요 더불어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받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마디가 어제 강조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앎'을 더욱 키워가라는 것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더불어 ‘앎’도 깊어질 것이며 저절로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께 대한 사랑과 앎을 더욱 깊게 해주시며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처럼 주님을 궁극의 안식처, 정주처, 피난처로 삼아 그 사랑 안에 머물 때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치켜세우면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4)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면 로마의 앞잡이요 매국노라 할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반역자요 선동자라고 몰아세울 속셈을 읽으시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15절) 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16절) 하고 재차 물으십니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7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 당시에는 두 가지 종류의 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돈이고 또 하나는 성전에 바치는 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함정을 파는 그들의 질문에 일부러 세상에서 쓰는 돈인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 데나리온에 누가 새겨져 있는지를 물으시어, 그 데나리온이 어디에서 이용되는 것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게 하심으로써 함정을 허무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어느 것은 세상의 것이고 어느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사는 것이 먹고만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만 하면서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둘은 구분되지만 그 둘을 행하는 이는 한 몸인 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특별히 악마의 유혹이 생각납니다. 악마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단식하시어 배고픈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바꾸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라고 응수하십니다. 현세를 살아가면서도 현세에 속하지 않고, 주 예수님께 속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현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진실하고 순수한 말씀 <마르코 12, 13-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의 말은 주님에 대해 순수성은 없고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도 넘어지게 하려고 묘한 말로 질문을 던졌지만, 주님의 말씀은 시편 11장 “진실하고 순수한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닦인 말씀입니다.” 하듯이 진실하십니다. 말에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는 힘이 없는 말, 간사한 말, 아첨하는 말, 거짓된 말, 경멸하는 말, 생각 없이 하는 말 등으로 세상을 혼란하게 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불일치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은 사실에 입각한 말인지 깊이 생각하고 말하고 들어야 합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옛말이 많은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깊은 침묵 중에 말을 기도로 반복한 다음에 해야 할 말이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자처럼 반대를 위한 말, 남을 속이는 말, 부정적 말은 죽음으로 이끌어 갑니다.
생각 없이 한 말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가 일생을 간다면 얼마 비참합니까? 무심히 던진 돌이 애꿎은 개구리가 맞아 죽는 것같이 아무 죄도 없이 말로 인해 상처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쌍날 칼보다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더러운 말, 순수하지 않은 말, 거짓말로 분열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깨끗한 말, 겸손하고 온유한 말을 사용하며 오가는 말 속에 사랑이 넘쳐 민족이 하나 되고, 더 행복하게 살고,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두기를 기도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마르코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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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간혹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시비를 가리려 하거나, 딴죽을 거는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전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상했던 답과는 전혀 다른 답을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질문은 사실 질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상대를 넘어뜨리려는 미움이 그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미워했을까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두 가지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것들, 즉,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기조부터 흔들어 놓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흔들림에 의한 기득권에 대한 위기의식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증오심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사실 우리의 일상 관계 안에서도 수없이 경험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일차적인 반응은 파괴하려는 욕구입니다.
논리가 없어집니다.
그저 내 눈앞에 미움의 대상을 없어지게 하든지 아니면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서게 됩니다.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은 누구를 좋아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이 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감정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라는 것은 절대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러나온 것을 숨긴다고 해서 잊으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힘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좋은 힘 즉 누군가를 살리는 힘과, 나쁜 힘 즉 누군가를 죽이는 힘입니다.
좋은 힘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용서와 배려와 치유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나쁜 힘이라면 한마디로 미움입니다. 폭력과 이기와 파괴와 분열과 병을 가져옵니다.
이 두 종류의 힘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힘이 상대를 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 힘이 상대를 향하기 전에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를 미워할 때 일차적인 반응은 본인에게 미칩니다.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힘이 되고 맙니다.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틀린 말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 아닐까요?
드러난 감정을 다스리려는 노력보다는 그 감정의 밭을 착실하게 가꾸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여러분의 반응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일구어 놓은 밭에서 피는 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꽃을 보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꽃을 다듬으려는 노력보다는 좋은 밭을 만들어 좋은 꽃을 피우려는 노력이 우선적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로부터의 미움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이미 예견된 미움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삶은
시작도 마침도
봉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봉헌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봉헌도
매순간 영글어
가야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봉헌을 통해 더욱
뜨거워집니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봉헌이며 회개입니다.
건너뛸 수 없는
봉헌의 이 여정입니다.
봉헌을 통해
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길은
봉헌의 길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언제나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봉헌으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성장시키는 봉헌의
매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 마음을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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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종합검진을 병원에서 받았는데, 검진을 받던 중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을 소개합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다가 심전도 검사를 할 때였습니다. 정확한 심전도 검사를 위해서 검사소까지 휠체어를 타고 가야 한다더군요. 그래서 저는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사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심전도 검사소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아는 교우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분께서 깜짝 놀라셨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튼튼한 저를 보았는데, 지금 병원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 말이지요. 아마도 몸이 좋지 않아서 걷지도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나 봅니다.
종합검진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그분께서는 좀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시더군요. 하긴 요즘에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서 쓰러지시는 분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보니 저 역시도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문득 ‘만약 내게 남은 생명이 앞으로 1년밖에 없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의사선생님으로부터 그런 선고를 받았든 혹은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든지 간에, 앞으로 내 자신이 1년밖에 못산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도 정신이 번쩍 들겠지요. 그러면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 것인지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왜 지금까지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냈는가?’, ‘왜 그렇게 쓸데없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었는가?’ 등등의 후회를 말이지요.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후회할 행동들을 줄여 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우선순위를 새롭게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의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세우기 위해서 세금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매국노인 동시에 우상숭배자(세금으로 내는 동전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가 될 것이지요.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어기는 반역자로 고발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스스로 판단해서 황제의 것이면 황제에게, 반대로 하느님의 것이라면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는 말씀인데요. 이는 모든 것이 황제의 것이라 생각했던 헤로데 당원의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것을 알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의 생각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매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가치관에 얽매어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나요?
잠시 머무르는 것,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은 시간을 버리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시간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삶을 즐길 더 유익한 시간을... (권미경)
버려지는 아이들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철저하게 자기 앞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어떤 기업에서는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비정한 광고까지 하지 않습니까? 사실 일류가 아닌 사람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고, 또한 당연히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일류가 아니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드는 이 세상은 과연 바른 것일까요? 이런 분위기 안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버림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힘없는 버려지는 아이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8,5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버려진다고 합니다(2010년). 이는 오늘 하루 동안 23명 정도의 아이들이 버려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로 미혼모와 이혼한 사람들이 아이를 버린다고 하지요. 물론 말 못할 사정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 못할 사정이 어떤 사정일까요? 자기 스스로 내세우는 사정일 뿐입니다. 즉, 자기 상황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힘없는 아이가 자신의 짐이고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약 아이를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 행동입니다.
힘없다는 이유 때문에 버려지는 일이 이제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모든 이가 차별 없이 소중하다는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아래에 누가 소중하고, 누구는 필요 없다는 식의 구별 자체가 의미 없는 것입니다. 대신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만이 우리 모두 소중한 사람, 우리 모두 행복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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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실 주일에 저는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요 며칠 계속 일이 있어서 하루 2시간씩밖에 자지 못했더니 정말로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낮 시간을 이용해서 잠을 좀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침대에 그냥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30분쯤 지났을까요? 인터폰 소리가 우렁차게 울립니다. 힘들게 전화를 받았지요. 구역장님이셨습니다. 오늘 성지순례를 갔다가 지금 돌아왔다고 시간이 되면 강복을 줄 수 있느냐고 하시더군요.
“당연히 드려야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한 뒤에 나가려고 하니, 혹시 낮잠으로 인해서 머리가 엉망이 된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살펴보았지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안심을 하고 밖에 나가서 “잘 다녀오셨지요? 제가 이제 강복 드릴께요.”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어떤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주무시다가 나오셨나봐요?”
잠자다가 나왔어도 티 내지 않으려고 분명히 머리카락도 살펴보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서 거울을 보았지요. 그런데 누가 봐도 제가 잠자다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겠더군요. 글쎄 침대에서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웠던 것이 아니라 엎어져서 자는 바람에 뻘겋게 눌린 자국이 얼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머리카락만 잘 정리하면 잠잤던 티를 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얼굴 역시도 살펴보아야 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눈에 가장 잘 띄는 이 세상의 돈과 물질적인 것만을 최고로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러나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먼저 살펴보아야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이 예수님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내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존경하고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도, 어려움을 빠지게 만들지요. 즉, 세금 문제입니다. 사실 세금을 내려면 로마 화폐를 내야 하는데 그 화폐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거든요. 따라서 이 화폐를 이용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한 이유로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 로마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을 하시지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돈이 황제의 것이라면 황제에게 돈을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온전히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돈과 물질적인 것들을 최고로 생각하면서 여기에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모두 담아서는 안 됩니다. 돈과 물질은 그대로 세상에 돌려주고, 우리들의 마음은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몸가짐을 단정하게 합시다.
좋은 마음이 고운 얼굴을 만든다(‘좋은 글’ 중에서)
남을 증오하는 감정은 얼굴의 주름살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은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변모시킨다.
감정은 늘
신체에 대해서 반사 운동을 일으킨다.
사랑의 감정은 신체 내에 조화된
따스한 빛을 흐르게 한다.
그리고 맥박이 고르며 보통 때보다
기운차게 움직인다.
또 사랑의 감정은 위장의 활동을 도와
소화를 잘시킨다.
이와 반대로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동시에
맥박을 급하게 하며,
더 나아가 위장의 운동이 정지되어,
음식을 받지 않으며
먹은 음식도 부패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은 무엇보다도
우선 건강에 좋은 것이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비교 대상이 아닌 황제와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몰려온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아주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좋은 건수 하나를 준비해왔기 때문입니다. 수석사제들, 율법학자들, 원로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는데,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이렇게 같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헤로데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백성들이 헤로데에게 세금을 바칠 것을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들은 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중요한 당론의 노선을 달리하고 있던 두 부류이 사람들이 오늘은 아주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우고 잡아들이기 위해 일시적인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던지는 질문도 기가 막힙니다. 잘 준비된, 그래서 그 누구도 걸려 넘어 들지 않을 수 없는 절묘한 질문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잘못 대답했을 경우 큰 타격을 입을 질문이었습니다. 반대의 입장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앞에 한쪽을 선택했을 경우, 다른 쪽 사람들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계략을 잘 파악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훨씬 절묘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참으로 대단한 답변을 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위에 의해 요구되는 의무와 도리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소득을 얻었으면 그에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의무, 납세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고 덧붙이십니다.
황제는 누구며, 하느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의 왕, 세상의 통치자들, 아무리 난다 긴다 할지라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으며, 큰 실수를 밥 먹듯이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결점과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며 언젠가 그 자리에서 물러서야 합니다. 잘 못 통치를 했을 경우 국민들로부터 혹독한 심판도 받습니다. 권좌에서 물러서고 나서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모습이 너무나 허전하고 쓸쓸합니다. 결국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한 나약한 인간이 황제며, 대통령이며 수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일국의 황제나 통치자와는 근본적으로 비교가 안 될 분이십니다.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분, 우주만물을 통솔하시는 분, 잠시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 세세대대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황제와 하느님은 애초부터 비교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 17절에 보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드릴려고 합니다.
먼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지역 시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내가 속한 회사 사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목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정에서 상대 배우자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문을 박차고 나가지 말라는 겁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한민국을 떠나 살 수 있겠습니까? 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회사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목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교회 공동체로 옮겨갈 수 있겠습니까?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새로운 배우자를 찾아 나설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와 권위 아래로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서 또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지금의 권위 아래 있으면서, 상황을 개선해 나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자신은 아기를 갖지 못하니까, 여종 하가르에게서 자손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가르와 잠자리에 들자, 하가르가 임신을 합니다. 임신한 하가르는 자신의 주인인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화가 난 사라는 하가르를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하가르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나 도망칩니다. 그렇게 광야를 지나 도망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 ...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권위 아래로 도망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권위 아래서 오는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어야 잘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계속 공동체를 옮겨 다니는 사람은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해서, 몇 십 년이 지나도 묘목 수준 크기 일 겁니다. 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편이 다섯이나 되고, 함께 하고 있는 남편도 남편이 아닐 만큼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거목이 되기 위해서, 또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공동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살리는 일이나 하느님께 경배하고 찬양을 드리는 일입니다. 만약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권위에 저항해야 합니다.
탈출기 1장을 보면, 히브리 산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왕의 권위에 저항한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이집트 임금이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라고 명령했을 때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임금의 말을 듣지 않고, 살인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아기들을 살려주었습니다.
또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이 유배를 갔을 때, 그 나라에는 임금이 아닌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진다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법을 알면서도 자기 집에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임금이 정한 법보다 하느님의 명령을 더 상위에 두었던 겁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한 저항이 필요할 때도 있음을 봅니다. 이 나라의 지도자나 공동체의 목자나 사장의 지시가 하느님의 뜻과 상충되는 것이라면, 저항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오늘 하루,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그 안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그리고 내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상충되는 일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지는않은지 반성해봅시다.
하느님의 길, 자유의 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주님께 한 질문입니다.
주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지만 알기는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진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분은 사람을 꺼리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신분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고 사람의 신분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의 길만을 찾기 때문이라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힘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그런 비굴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치도 봅니다.
덕분에 나는 그에게 매이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것이 안 됩니다.
아니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매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개가 묶인 목사리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더 조이고 빠져나오려 할수록 수렁에 더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눈치를 보지 않으려고 할 때마다 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보면서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눈치를 보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다른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길이란 것이 참으로 명쾌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렇게 자기의 것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될 때 나쁜 것도 소유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악행에 흥분하지도 않고 좋은 것도 소유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선에 질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더 진실은 가난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참행복
강우현 신부님
우리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한 생애를 행복하게 살아가길 염원하지만 그 행복을 찾는 길은 어렵기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대로 살면 ‘바보’가 되기 십상입니다. 불을 안고 기름 속에 뛰어드는 것으로 생각될 만큼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이 참된 행복이라는 사실을 인생의 뒤안길을 지난 후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덫을 놓으실 리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인생의 행복과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행복의 기준이 상이할 뿐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이 편안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뜻한다면, 예수님의 행복론은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온갖 모욕과 박해 그리고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낼 때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추구하는 행복은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그 길을 외면하고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꿈꾸는 행복이 예수님의 그 길과 다르다면 지금 이 순간 몸으로는 행복을 느끼고 영으로는 불행의 길을 거닐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 번 오늘의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로
김기곤 신부님
본디 소유권은 만든 자에게 있다. 책을 쓴 사람이 책의 주인이듯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기에 세상은 하느님 것이다. 우리 인생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소유권도 하느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리고 하느님 것이기에 모든 것은 당연히 하느님께 도로 바쳐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기보다 우리 것이라고 움켜쥔다. 하느님한테서 받은 시간과 재물과 아름다움과 자녀와 자연을 우리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 착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드러난다. 사람이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날 때 두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난다. ‘세상은 다 내 것이다.’ 는 자기 소유의 표시다. 이것을 보면 우리 안에 내 것이라고 하는 자기 착각이 얼마나 크게 자리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도 죽을 때가 되면 너나없이 두 손을 펴야 한다. 이는 내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표시다. 이렇게 죽음을 통해 사람은 진실한 자기로 돌아간다. 그래서 죽음은 은총이다. 하느님 것을 하느님 것이라고 인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풍습을 교묘하게 이용한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들에게 본래 소유권자에게 소유품을 돌려주는 것이 정의임을 밝혀 준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순간순간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기에 힘써야겠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주먹을 쥐는 삶 (자기 착각) 이 아니라 주먹을 펴는 삶 (자기 죽음) 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에 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 생활을 해야 하는 동안 감옥신세를 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살인을 하지 말라는 법을 주셨는데 사람을 살해하는 총을 들고 사람 죽이는 훈련을 하고 또 전쟁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법보다 하느님의 법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전쟁이 나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가톨릭교회 때에도 하느님의 법을 더 우선시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목숨을 바쳐야했습니다. 하느님만을 섬겨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지내며 죽은 이들에게 음식을 차려 바치고 절을 하는 등의 예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인으로 볼 때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는 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람이 만든 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위의 모습들이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고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로마에 세금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일제치하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일본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조선 사람으로서 당연히 바쳐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아마 매국노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억지로 나라를 빼앗고 그 나라가 세금까지 강요하는데 그 요구하는 대로 잘 따라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애국심이 발동하여 남의 나라를 침범한 로마에게 우리가 부당하게 책정하는 세금까지 꼬박꼬박 왜 내야하느냐고 대답하셨다면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그들이 데리고 온 헤로데 당원들에게 끌려가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에 걸려들지 않으시고, 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쳐라.’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대한 의무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말씀하셔서 당신의 대답을 흠잡을 수 없도록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옳게 해석하면 세금, 그런 것은 내라는 대로 내고 믿는 사람은 우선 하느님께 대한 의무에 더 충실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법이라고 하여 세상의 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권력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그 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노예도 도망치지 말고 주인에게 충실하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노예법이란 인간의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과는 반대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그 법까지 존중하라고 하는 것이고 예수님도 오늘 세상의 법에 저항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이들에겐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던 것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다 끝나고 나서야 제사를 허용하였습니다. 교회도 나중에서야 세상의 법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은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나라에 산다면 그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여 나라를 보호해야합니다.
이는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법입니다. 성자께서도 세상에서 사시기 위해서는 세상의 법을 따르셨습니다. 육체를 지니셨고 숨을 쉬셨고 당시의 옷과 음식을 입고 잡수셨고 당시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고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인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 세금도 내셨고 또 부당한 죽음에 항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사시기 위해서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도 당당히 받아들이시는 그 모습 안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계시가 드러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드립시다. 먼저 태어났다면 선배 대접을 해 주고 직장 상사에게는 순종하고 사회에서도 해야 할 의무를 다 합시다. 이는 이 사회에 머물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의 질서를 깨지 않기 위해서이고 우리나라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음을 더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짧은 묵상>>
세상을 살기 위해선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의무들이 있습니다. 작게는 아이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잘 따라야 하는 것에서부터 신호등을 지켜야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면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의무들이 더 많아집니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하고 돈을 벌면 세금을 내야하며 결혼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의무들이 더 생겨납니다.
가끔은 이런 무게들이 너무 버거워서 군대 면제 받기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하고 결혼의 끈을 끊고 이혼하여 홀로 살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의무들을 지키지 않으려면 홀로 살면 그만입니다. 만약 세상의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면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무 없이 혼자 살기보다는 무거운 의무를 수행하며 사회에 속해 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혼자서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의무들이 나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데 쓰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합니다. 세상의 의무들을 충실히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우려면 하느님을 안 믿고 살아가면 됩니다. 굳이 교무금이나 주일미사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 머물러 살려고 갖은 의무들을 다 하면서, 사실은 하느님께 대한 의무는 하기 싫어서 영적으로 홀로 떨어져 사는 사람이 의무를 다 하는 사람보도 항상 더 많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또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세상에서 그 많은 의무를 수행하지만 자신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는 작은 의무도 마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이 필요하여 당신께 대한 의무를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모든 것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려 돌아가신 것이 다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 감사의 의무를 다해야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영혼구원을 위해 여러 가지 의무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 내 자신을 봉헌하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해서 살았다면 그 순간만이 가치 있는 삶으로 남게 됩니다. 빵과 포도주가 봉헌 될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듯이 우리 자신도 봉헌되는 순간만이 영원한 가치를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 그 의무는 바로 우리 썩어 없어질 육체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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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람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친구 면회를 갔습니다. 지옥이니까 당연히 고생을 많이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친구였는데 보기와는 달리 너무나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진수성찬에, 신나는 오락에, 호화판 술 파티까지, 천국에 있는 자기보다도 더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다보니 천국 생활이 나빠 보이고, 대신 지옥의 친구가 부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재미없는 천국보다 지옥이 좋으니 지옥으로 보내 달라고 매일같이 하느님께 졸랐습니다. 그리고 결국 지옥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자마자 전에 보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대신 고문과 바늘 위를 걷는 고통의 연속이 아니겠어요? 그는 지옥을 지키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보았던 지옥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거에요?”
그러자 지옥을 지키는 사람이 웃으며 말합니다.
“그때 그 코스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홍보용 관광코스였다.”
물론 우스갯소리이겠지요. 그런데 그냥 웃어 넘길만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 안에는 이렇게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보기에 즐겁고, 먹을 때 맛있고, 시간가는 줄 모를 만큼 신나는 놀이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요? 그래서 ‘그것들을 누리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외치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것들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까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현혹하는 홍보용 관광코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을 거부했고, 이에 반해서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경멸하는 사이였지요.
그런데 이 둘이 힘을 모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곤란한 질문을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이렇게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가 될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들지요.
서로 경멸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반대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함께 간계를 꾸밉니다. 즉,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지요. ‘예수님만 없다면…….’ 이것이 그들의 바램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앞서 이야기했던 ‘홍보용 관광코스’에 현혹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홍보용 관광코스’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을 떠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홍보용은 그냥 홍보용일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홍보용 광고만 보고서 충동구매 하지 맙시다. 광고는 광고일뿐입니다.
전보 한 장('좋은 생각' 중에서)
명탐정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추리 소설가 코난 도일은 기발한 장난을 치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사회적으로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몇 명의 친구를 골라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띄웠다.
"이런 내용의 전보를 받으면 누구든지 깜짝 놀랄 테지."
코난 도일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부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보, 혼자 뭘 그리 중얼거리고 있어요?"
"그게 말이오. 사람들은 흔히 자기는 전혀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행동하거든. 그래서 정말 죄짓지 ㅇ낳고 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내가 전보를 띄웠다오."
"전보를 뭐라고 띄우셨는데요?"
"'탄로 났으니 어서 도망치시오.'라고 써서 평소 가장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친구들에게 보냈다오. 결과가 너무나도 궁금하군."
다음 날 코난 도일은 전보를 띄운 친구 집을 차례차레 방문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집에 있는 사람이 없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한숨을 쉬며 부인에게 말했다.
"여보, 내 친구들은 모두 죄를 지었나 봐."
"모두 숨고 없던가요?"
"모두 어제부터 나가서 안 들어온다지 뭐요. 그래서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가족들도 모른다는 거야. 그 정도면 알 만하지."
코난 도일은 한 마디를 적은 전보 한 장으로 친구들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이봉하 수사님
과거와는 달리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때때로 한적한 곳이나 외진 곳에 가서 며칠 동안 여행 삼아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오히려 무기력과 답답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시골 사람들도 도시로 나들이를 오게 될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도시생활과 시골생활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여유가 있고 좋을까요? 두 곳의 생활을 비교한다는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경제와 문화의 차이를 떠나 도시생활은 도시생활대로, 시골생활은 시골생활 그 자체로 각자 다른 삶의 모습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답답하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해서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년에 며칠을 시골에서 지내보면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힘을 다한다 하여도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여유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유가 많다고 해서 많은 시간과 돈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쁜 와중에서도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일상 안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은 엉뚱한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박경수 신부님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황제의 것’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인간 자체가 바로 하느님께 속해 있으니 황제에게 속한 모든 것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셨지만 이 말씀이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을 자본(물질)에 종속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이해되기 어려울 듯합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 원리’(교황 요한 바오로2세 회칙 ‘노동하는 인간’ 12항)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려 합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추구하는 이윤 극대화의 욕구와 물질만능주의는 임금을 이윤을 잠식하는 부정적 요인으로 취급하여 가능한 한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곧 인간의 노동을 단지 자본증식을 위한 생산수단의 하나로 전락시키는 경제주의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땅을 지배해야 한다는 성경의 첫 장을 읽을 때 우리는 이 말씀에서 자연자원이 바로 노동(지배)을 통해서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인간 노동은 경제적인 생산과정 전체를 통해서 모든 이 세상의 부와 자원을 발굴해 내는 것일 뿐 창조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원시적인 단계에서부터 초현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현 기술 수준에서 최고도로 완벽한 ‘도구’를 이루는 모든 생산 수단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이며, 이들 생산 수단은 바로 노동에 기여하기 위한 노동의 결과물입니다.
자본의 개념은 인간이 쓸 수 있는 자연자원만이 아니라 이를 자기의 필요에 따라 변형·발전시킨 모든 생산수단의 총체를 포함하며, 이 모든 수단은 인간의 노동이 이룬 역사적 유산의 결과라는 점에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곧 인간은 단순한 생산요소가 아니라 경제활동의 주체이며 목적입니다.
한편 현실 경제질서에서 노동은 자본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결코 자본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기에 ‘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다’(교황 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 14항)는 가르침은 노동과 자본이 적대적 관계가 아닌 경제활동의 동반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복음서를 쭉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만 한번 추려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유형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말씀들을 하셨더군요. 수많은 비유들, 제자들의 특별 교육용 일화들, 정신 못 차리던 제자들 혼내시던 말씀들, 잘 알아듣지 못하던 군중들을 위한 재미난 이야기들,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셨던 대화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들, 그 많은 위로의 말씀들, 희망의 말씀들...
예수님의 말씀을 유형별로 정리하다가 느낀 바입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상황 상황에 너무도 적절했고, 기지로 넘치는 말씀이어서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특히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떠보려고 할 때, 예수님을 올가미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계책을 마련해서 다가왔을 때, 그래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때,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지혜로 흘러넘쳤습니다.
적대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언변은 더욱 빛을 발했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용감하게도 홀로 맞서셨습니다.
적대자들은 논리 정연한 예수님의 말씀, 순금과도 같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말씀, 어쩔 수 없이 승복해야하는 진리 앞에서 언제나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뺍니다. 그리고 치를 떨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눈앞에 놓여있던 먹잇감을 놓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 강경하게 맞서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약자들이 상처받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지혜의 말씀으로 궁지에 몰린 약자들을 셀 수도 없이 구해내셨습니다. 박해자, 위선자, 이교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우셨지만, 길 잃고 방황하던 양떼들에게 그분의 말씀은 한없이 감미로운 생명수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랜만에 좋은 건수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잡아넣을 수 있겠구나, 드디어 소원성취 하는구나, 하면서 희희낙락,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고발되어 구속될 상황이었습니다.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면, 그 인간들 분명히 예수님을 유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이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나온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의 대답은 난감한 상황을 적당히 넘기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장황하게 이것 저것 설명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단 한마디 강력한 말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황제의 권위도 존중해주시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우위성, 하느님의 우선권에 대한 강조도 놓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 가득 찬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찌 그리 힘이 있는지요? 어찌 그리 지혜로운지요? 어찌 그리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지요? 어찌 그리 감동적인지요? 그 배경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오랜 기간 나자렛에서의 깊이 있는 수행생활 탓도 컸을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침묵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진리를 깨쳐나가셨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일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벽한 일치상태에 계셨는데,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길은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난감하고 절박한 상황 앞에 설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단 하루만에도 엉뚱한 말, 허황된 말, 거짓말, 일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돌아서면 후회할 말, 이웃들에게 상처 주는 말, 그래서 이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들을 셀 수도 없이 내뱉는 우리들의 언어생활 앞에서 예수님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건네주셨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그렇게 어렵지 않군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늘 여유를 찾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심사숙고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버지의 도움, 하느님의 견해를 구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시라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런 경우 아버지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늘 고민하셨습니다. 그 결과 단 한마디도 버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이기양 신부님
제 1독서 : 2베드 3,12-15ㄱ.17-18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음 : 마르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미움에 끌려 다니게 되지요. 미움이라는 놈이 나를 마구 흔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잘못되었을 때 더 기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직위가 높거나 나이가 먹었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요 신앙인이라고 해서 초월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미움을 털어 버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 역시 이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묻는 목적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ꡒ말로 올무를 씌우려는 것ꡓ(마르12,13)이었지요.
서기 6년 로마의 황제, 즉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민세를 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주민세는 어린이와 노인과 노예를 제외한 백성의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로마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헤로데 당을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유다교의 장상들인 원로들과 수석 사제 및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작정으로 몇몇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과 함께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므로 납세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사이들은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고대하면서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두려워 겉으로는 세금을 착실히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라고 묻는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 관헌에 고발할 혐의를 찾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헤로데 당원들은 실망할 것이고, 심지어는 군중들을 종용하여 예수와 결별을 선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마르12,16)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그들이 "황제의 것"(마르12,17)이라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을까요? 예수님보다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능력도 백성들의 존경도 훨씬 높고 많이 받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대로 순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종교적 관습이나 권력자들의 잘못을 들쳐내고 비판하셨지요. 우리가 하듯이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알면서 넘어가고 모르면서도 지나는 거지. 너무 따지며 살지마. 너만 피곤해져.’하는 투의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려 하셨기에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그를 따르게 되자 더 이상 두었다가는 그들의 권위가 도전 받을 것 같고, 또한 시기심에 예수님의 언행이 용납되지 않자 트집을 잡아서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집권자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시자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들에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잘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무조건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이름을 써가며 간교한 올가미를 놓게 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지나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신앙인이지만 최소한 양심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까지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마치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못 박았던 것처럼 하느님까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미움이 있다면 빨리 털어버리십시오. 미움의 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온 몸을 조정하여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새로운 삶과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 카이사르의 것(2004-06-01)
강영구 신부님
“선생님은 진실하시며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시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12,14.17)
얕은 꾀가 지혜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는 아무 것도 가지 않았지만 푸르고 늠름하고 싱싱합니다. 그 가지에 온갖 새들이 날아와 날개를 접고 그 풍성함을 노래하고 즐깁니다. 오가는 사람들도 느티나무 그늘에서 피곤한 발걸음을 쉬어갑니다. 느티나무는 세금 한 푼 내지 않지만 풍성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 많은 재벌財閥도 저 느티나무만큼 푸르고 풍성하지 못합니다. 세금을 적게 내려고 온갖 잔머리를 굴리는 그들은 초라하고 치사합니다.
담장에 기대선 장미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웁니다. 보는 사람은 누구나 장미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에 감탄합니다. 장미는 세금 한 푼 내지 않고도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도 장미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했습니다(마태6,29).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급 명품으로 치장하고 값비싼 화장품으로 떡칠한 미인도 장미꽃만큼 아름답지 않습니다.
권력과 지위, 학식과 명예, 사치스러운 장식품과 고급 장신구로 자신을 겉꾸미고 돈과 재물을 쌓아 자신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낸다 해도 하느님 앞에 저 느티나무나 장미만큼 푸르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세금을 말합니다.
존재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말합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편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롭게 존재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 저도 당신처럼 맑고 밝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하느님의 소유가 되기를 원합니다.(一明)
모든 소유의 진정한 주인은?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어제 월요일부터 우리는 다시금 연중시기를 맞이하였다. 성령강림대축일로 부활시기가 막을 내렸고, 사순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로 중단되었던 연중시기가 계속된 것이다. 연중시기는 편의상 연중시기 제1기와 제2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성탄시기를 마무리하는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재의 수요일 직전 화요일까지를 말한다. 제2기는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한해의 전례력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 직전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를 말한다. 연중시기 제1기와 제2기의 구별은 정확하지 않다. 즉, 전체 연중시기는 34주간으로 구성되는데 어느 주간에서 정확히 중단되었다가 어느 주간부터 재계되는지가 정확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매년 달라지는 부활대축일(춘분이 지난 후 보름 다음에 오는 일요일) 때문이다. 매년 부활대축일이 정해지면 부활절 50일, 사순절 40일에 따라 연중시기 제1기가 8주간, 또는 9주간을 중단되었다가 제2기가 9주간, 또는 10주간으로 다시 계속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연중시기 한 주간 정도가 생략되기도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연중시기는 연중 제34주간으로 마쳐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연중시기 평일미사에 봉독되는 복음을 살펴보자. 연중시기에는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이 차례로 사용되는데, 마르코복음은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9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마르 1,14에서 마르 12,44까지가 봉독된다.(마르 1,14-12,44) 마태오복음은 그 다음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마태 5,1에서 마태 25,30까지가 봉독된다.(마태 5,1-25,30) 루가복음은 그 다음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시기의 마지막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루가 4,16에서 루가 20,40까지가 봉독된다.(루가 4,16-20,40) 물론 중간에 생략되는 부분도 많다.
연중시기에 사제는 녹색 제의와 영대를 착용하고 미사를 봉헌한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을 주며, 희망·겸손·인내·차분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연중시기는 한해의 전례력 중 대림·성탄·사순·부활시기 같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드러난 특수한 신비를 고려하지 않고 이를 포괄적으로 기념하며 지내는 시기이다. 한 마디로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따라잡기"의 시기인 것이다. 마르코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에서 시작된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비록 강제로 중단된 것이지만 이로 인해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절대절명의 언명(言明) 속에 간단명료하게 선포되었다. 이 복음은 세상창조 때 이미 계획되고 약속된 것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림을 거쳐 예수님과 함께 성취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은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스스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뜻한다.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세상이 취할 태도는 회개(悔改)와 믿음이다. 회개는 죄악의 세계에 빠진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회개는 여태껏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고 전환하여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질서 지우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복음을 수락하고, 수락하였다는 표시를 보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즉, 기쁜 소식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은 추종(追從)이다. 모든 믿음이 다 적극적인 추종일 수는 없지만, "나를 따라오너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인 추종이 필요하다. 성소(聖召)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추종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뚜렷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 복음선포의 길에 초대받은 자들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복음이 말하는 가르침을 자신이 먼저 받아들이고 삶의 지침으로 행(行)해야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주는 가르침을 누구보다 먼저 배워 익혀야 하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요지의 오늘 복음은 앞서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르 12,1-12) 말씀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포도원을 그 주인의 종들과 아들까지 살해하고 가로채려는 욕심 많은 소작인들의 말로(末路)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최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비유 속에 암시되었다. 이에 격심한 그들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실 유다인들 모두가 그들의 주인을 상징하는 로마황제(카이사르)에게 주민세를 내고 있었으므로 백성의 지도자들은 속으로 적지 않은 갈등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황제를 통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민세를 내자니 유일신 야훼 하느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격이 되고, 내지 말자니 황제를 부정하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국사범으로 몰릴 진퇴양난의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의 가슴앓이를 예수의 것이 된 셈이다.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신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다. "왜 나의 속을 떠보는 거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다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15-17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여 뒤로 나자빠질 대답이었다. 사실 "황제의 흉상과 글자가 박힌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라"는 말씀으로 끝맺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에 예수님의 의도가 실려있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은(창세 1,27) 과연 누구의 것인가? 황제가 주조한 화폐는 황제에게 돌리면 끝나지만, 우리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모든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힘이다. 나아가 인간의 모든 것이 행하는 일과, 이 일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의 것이라는 모두가 잠시의 소유에 불과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영원한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200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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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을 많이 봅니다. 아무리 바빠도 책을 조금이라도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바쁘고 힘든 일이 주어질 때에는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감동도 줄어듭니다. 하지만 약간의 여유를 갖고서 책을 읽을 때에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자주 깨닫습니다. 여유가 있다 보니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주변을 바라보면서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를 삶에 접목해 보기도 합니다.
세상은 바쁘게 흘러갑니다. 그러다보니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사유의 발전은 여유로움에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바쁨 안에 몸을 내맡기면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보낼 뿐이지만, 여유로움 안에서 생활하면 많은 생각 속에서 그만큼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쁨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잠 잘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럴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루에 단 5분도 여유로움을 가질 수가 없을까요? 이 여유로움을 주님과 만나는 시간인 기도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기도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기도를 해치워야 할 하나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보니 그만큼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를 맡기는 모습보다는 하느님께 내 자신을 맡기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이 합당한지를 묻습니다. 세금은 당연히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다인들에게는 조금 다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동전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우상숭배를 따르는 것으로 하느님께 대한 커다란 불충이 되는 것이어서 세금 내는 것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순히 세금 문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인 우리들의 마음이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한 닢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기에 로마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누구에게 돌려 드려야 할까요? 바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용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즉,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우리 자신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바쁨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온전히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주 변해야 한다(공자).
함께한다는 것.
종종 사업은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긴 형제지간, 부자지간에도 같이 사업하다가 싸우고 고소하는 일이 흔히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업은 무조건 혼자 해야 성공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IT 계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둘을 뽑으라고 하면 아마 애플의 스티븐 잡스(Steven Paul Jobs)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일 것입니다. 이 둘의 천재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천재성으로 혼자 창업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티븐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애플을 공동 창업했고,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천재성을 가지고도 왜 함께 했을까요? 후대의 사람들은 이 둘이 다른 사람과 함께 창업하고 협동하지 않고 혼자서 나아갔다면 지금까지 이룬 업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팀워크, 파트너십, 집단지성을 추구하면서 함께 했기에 놀라운 업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몇 배 세상에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할까요? 단지 이견의 차이를 인정하기 싫어서, 그래서 싸우기 싫어서? 어쩌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숨겨진 놀라움을 꺼내지 못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이로 인해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세상에 나옵니다.
불행을 겪을수록 더욱 하느님께 의지했던 토빗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토빗기는 파란만장한 몇몇 인간의 생애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아주 재미있는 성경입니다.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충실했지만 눈이 머는 고초를 겪은 토빗과 그의 아들 토비아, 7번이나 결혼했지만 첫날밤에 남편과 사별해야 했던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불행을 겪을수록 더욱 주님께 의지하고 간청했던 그들의 기도를 그분께서 나 몰라라하지 않으셨습니다. 라파엘 천사를 보내시어 기적적으로 토빗의 아들 토비아와 사라의 결혼을 성사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눈먼 토빗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의인들이 겪어야하는 고통을 크겠지만, 주님께서는 적당한 순간에 개입하시어, 그들의 노고에 대한 응답으로 풍성한 축복을 내리신다는 것이 토빗기의 주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그냥 흘려듣지 않으시고, 고달픈 인생 여정에 늘 가까이 동행해 주신다는 것, 그러니 언젠가 실현될 귀향의 날을 희망하며,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의롭게 살고, 자선을 베풀며 기쁘게 살아가야 한다고 토빗기는 외치고 있습니다.
토빗의 인간 됨됨이는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이 불행한 꼴을 결코 못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인이었던지는 본인 스스로가 당당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토빗 1장 3절)
비록 유배지 생활이었지만 토빗은 가산이 넉넉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인정이 많았던지 잔치를 벌일 때 식솔들끼리만 즐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동포들 가운데 제일 가난한 사람들을 늘 잔치 상에 앉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불행을 늘 자신의 불행으로 여겼습니다. 율법까지 어겨가면서 타향에서 객사한 동포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토록 주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충실했던 의인 토빗이었지만 그에게도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습니다. 오순절 밤, 죽은 동포를 매장하고 나서 피곤에 지친 그가 마당에서 잠을 자던 중 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뜨거운 참새 똥이 그의 두 눈에 명중하고 맙니다. 그 길로 그는 시력을 잃고 4년여 동안 암흑 속에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내 안나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만했습니다. 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품팔이, 남의 집 가사일, 허드렛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앞 못 보는 남편을 봉양했습니다.
그런 토빗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크게 비웃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해도 뭐 특별한 것 없구먼!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저 모양이군!”
뿐만 아니라 밖에서는 성인군자, 안에서는 무능한 남편인 토빗을 향해 아내 안나도 드디어 분노가 폭발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당시 토빗이 느꼈을 참담했던 심정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빗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삶이 힘겹다고 절대로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느님만 생각하며 정도(正道)를 걸어갔습니다.
이런 토빗의 충실함을 눈여겨보신 하느님께서 마침내 백배, 천배로 갚아주셨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고, 대대손손 큰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개입과 축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필요한 인간 측의 노력은 흔들림 없는 신앙과 간절한 기도, 사심 없는 자선임을 토빗기는 밝히고 있습니다. 변덕쟁이이고 불충실하며 이웃들의 고통에 별 관심도 없는 오늘 우리들에게 토빗의 삶은 큰 귀감으로 다가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새로운 정부에서도 ‘종교인 과세’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미 세금을 내고 있는 천주교회는 찬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유예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인은 ‘성직자, 목회자, 스님’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을 가진 분들은 당연히 세금을 충실하게 납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 교회, 사찰의 운영을 위해서도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입니다. 수입은 대부분 헌금과 교무금 그리고 감사헌금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성당은 성물 방을 운영하기도 하고, 카페를 운영하기도 하고, 물품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부채가 있는 성당이었기 때문에 매년 일정부분의 부채를 상환하였고, 교구에 내는 납부금도 냈습니다. 사무장, 관리인, 주방 근무자를 위한 급여가 있었고, 주일학교 운영비, 단체 보조금, 각종 공과금과 가스요금이 있었습니다. 교구에서는 본당 예산의 10%는 자선과 찬조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지침을 주었습니다. 지역에 계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기도 했고, 형편이 어려운 본당을 도와 드리기도 했습니다.
국민으로서 종교인들도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납부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세금을 낼 정도의 소득이 되지는 않지만, 소득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한 세금을 내야 할 것입니다. 종교인들도 군 복무를 하듯이, 종교인들도 투표를 하듯이, 종교인들도 국민으로서 책임과 권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토빗의 아내 안나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선행을 베풀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충실하게 살아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뉴턴이나, 데카르트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그분들은 근대 과학과 철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요즘 양자물리학은 그분들의 과학과 철학의 ‘틀’을 깨고 있습니다. 세상은 기계론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우리의 교육과 사회제도는 계속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잘살아야 하고, 더 많이 소유해야하고, 끊임없이 ‘더’라는 마법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다 앞서 가는데 나만 멈추면 도태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면 정말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늘의 구름도, 바람의 느낌도, 꽃의 색깔도, 새들의 노래도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려하고, 증거를 찾으려하고, 확신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멈추라고 합니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하느님의 것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세상은 기계론적인 자연법칙의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응보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그런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멈출 수 있었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누가 정말 좋은 사람인가? -토빗보다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정말 좋은 사람일까요? 사람보다 알기 어려운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물길 열속은 알아도 사람 한속은 모른다’ 는 말도 있습니다. 느티나무나가 보기는 얼마나 좋은지요. 그러나 느티나무밑에서는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해 반질반질합니다. 밖에서 보기는 참 좋은데 실제 살기는 참 어려운 사람을 지칭한 비유입니다. 토요일 3시경 기도때 마다 늘 듣는 성경소구도 생각납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나 주님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솟까지 환히 들여다 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예레17,9-10).
정말 알기 힘든 것이 사람입니다. 나도 모르는데 남을 어떻게 압니까? 하여 삶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발견하여 알아가는, 더불어 나를 발견하여 알아가는 과정이라 합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참 좋은 사람이 집에서는 폭군같이 행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말 사람은 함께 살아봐야 압니다. 함께 살아야 정말 좋은 사람인지 검증될 수 있습니다.
면담성사시 자매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이런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밖에서는 참 좋게 평가받는 남편인데 집에서는 정말 살기 힘든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도 모르고 자기만 나쁘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영어 주석을 읽으면서도 재미있는 글귀를 보았습니다. ‘거리천사street angel’가 ‘집악마house devil’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위의 남편이 이런 경우에 속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천사와 악마는 사람의 양면일 수 있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인가는 함께 사는 이들이 제일 잘 압니다. 함께 사는 아내나 자식들, 공동체의 형제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정말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제자들과 늘 함께 잘 사셨던 예수님이나 부처님, 공자님같은 성인들은 정말 좋은 분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오늘 토빗서의 주인공 토빗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제 토빗의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당당한 고백으로 시작된 어제 독서가 생각납니다. 정말 성인다운 삶을 살았던 토빗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뜻밖의 사건으로 불행이 시작된 토빗입니다.
죽은 이들을 묻어주는 선행을 하고 난후 잠시 밖에서 눈을 붙인 사이에 뜨거운 새똥이 떨어져 눈이 멀은 사건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은 물론이고 사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하여 믿음의 시련과 유혹을 겪게 됩니다.
무엇보다 토빗 아내인 안나가 겪는 고통이 참 큽니다. 아내인 안나가 주변의 선의의 도움으로 새끼 염소 한 마리 얻은 것을 믿지 못해 아내를 다그치는 모습이 정말 심하다 싶습니다. 토빗이 일종의 강박관념에 매인 결벽증 환자처럼 보입니다. 토빗은 품삯 외에 선물로 받았다고 해명하는 아내를 믿지 못해 훔친 새끼 염소를 주인에게 돌려 주라고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동안 토빗과 살면서 토빗 아내가 겪은 마음 고생도 참 컸겠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래서 ‘성인밑에 순교자 난다’는 우스개 말도 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해 폭발한 안나의 말이 토빗은 물론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화두같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말그대로 토빗의 믿음의 시련이자 유혹입니다.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을 때 답도 밝혀 질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시련이자 유혹을 통과해가면서 정화되는 믿음입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과해가면서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이제부터 토빗의 믿음이 정화되어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래야 토빗도 겸손해져서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 수 있을 것이며 안나를 대하는 모습도 달라질 것입니다.
정말 탓할 것은 우리의 믿음 부족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바로 이것이 참 신앙의 요체이며 삶의 목표이자 분별의 잣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되어 사셨기에 참으로 무엇에도 매임이 없는 자유인이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오늘 예수님의 답변이 천상지혜 같지만 예수님께는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이들의 질문이 참으로 교묘하여 이 올무를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올무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 하면 민족반역자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하면 로마당국의 범법자가 됩니다. 데나리온 한 잎을 건네 받는 예수님과 이들의 대화입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천하의 명답입니다. 모든 것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며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원이기 때문입니다. 세금을 내고 안내는 것은 각자의 주체적 판단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단 판단의 대원칙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실 황제도 하느님의 것인데 황제의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시야에서 각자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국가에 예속되어 있는 현실이기에 세속의 법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리지 않는다면 국민의 의무인 세금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편협한 사고로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함으로 적게 얻고 크게 잃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서 사랑이요 샘솟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1독서의 토빗도 복음의 예수님께 배워야 함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중심의 삶을 사는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고 좋은 사랑과 분별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참조). 아멘
빚을 지고 사는 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더 나은 복지혜택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금을 덜 내고도 일자리가 많이 늘어난다면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을 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 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하여 “이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서로 다른 탈란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이는 말 그대로 하면, 은화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황재의 것이니 황제에게 돌려주고,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이 됩니다. 곧 돈은 황제에게 돌려주되, 우리는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가 자신의 초상을 요구하니,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초상을 요구하시니,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사실, 동전에는 흐리멍텅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곧 황제의 초상이 자신에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인간에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압니다. 곧 하느님의 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은화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의 황제에게 팔아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팔려 넘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소유,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우리 안에 진리가 다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자라야 할 일입니다. 진리가 자라게 하는 일, 그것은 진리를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 그것은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에 속한 이들이 됩니다.
사실, 이미 진리에 속해 있기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까닭에, 불의 앞에 눈감고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진리에 속하도록 빛을 밝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부터 결코 제한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자신에게 새겨진 초상을 알지 못하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형상을 압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저는 제 안 에 새겨진 당신의 것입니다. 돈에는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제게는 당신의 형상이 새 겨져 있어 당신께 돌아갑니다.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씀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빛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새겨져 있고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당신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저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복된 사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논쟁했으나 실패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그분께 보내어 올가미를 씌우려 합니다(12,13).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지 여쭙습니다(12,14).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2,17)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심으로써 그들의 계략에서 벗어나십니다. 나아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과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을 구별하시어 그 차이를 알려주십니다. 황제에게는 그의 흉상이 박힌 은화를 돌려주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들, 권력과 명예와 인간이 이루어낸 성과 등은 세상에 돌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얼과 형상을 지닌 인간은(창세 1,27)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내 전부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하느님께는 나의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12,30). 나의 시간과 재능과 하느님께서 주신 온갖 은총의 선물을 기꺼이, 그리고 남김없이 되돌려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은 세상적인 것이지만,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입니다. 따라서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나,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있다가도 사라져버리지만,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에게 속한 세상의 일과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일을 분별하라 하십니다. 양자를 구별하여 일시적이고 세상적이며, 영혼 구원과 무관한 것들에 대해 애착을 두지 말라 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되돌려야 하는 것은 일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 존재와 인격 전부, 내가 받은 모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횡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을 복됩니다.”(영적 권고 11,4) 여기서 성찰해야 할 점은 ‘소유없이’(sine proprio)의 삶입니다. 세상의 것이든 하느님께 속한 것이든 모든 것을 다 되돌리는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되돌릴 줄 아는 가난한 사람은 좋은 대우, 인정과 배려, 존경에 대한 기대를 버릴 줄 압니다. 그것이 자기 소유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기대심 뿐 아니라 자존심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조차도 남겨두지 않기에, 모욕과 멸시를 받을 때에도 겸손합니다. 나를 찾아오고, 나에게 주어지는 내적, 외적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당신 뜻대로 나에게 주기기도 하고 앗아 가실 수도 있습니다. 주시는 것도 주님의 뜻이요, 되돌림으로써 나를 떠나가는 것도 주님의 뜻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마음 쓸 일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리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풍요 안에 머물기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방향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유에 초점을 맞추고 몰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때, 나 자신은 물론 교회와 우리 한국사회도 변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소중합니다.
보살펴 주시는
주님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연중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허황된
논쟁으로 퇴색시키는
아쉽고도 아쉬운
우리의 시간입니다.
부정직한 허세와
과시욕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어야합니다.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물음을
던지는 우리의
오만함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의 것은 결코
우리의 뻔뻔함으로
훼손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위선과
변명을 보게 됩니다.
늘 우리 식대로
우리 편한대로
되풀이되는
가식적인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올바른 삶이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진실되이
돌려드리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더이상 예수님과의
만남이 위선과
자기기만이라는
오만함이 아닌
겸손된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믿음또한
하느님의 것을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행동하는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것을
더이상
나의 방식으로
축소시키지 맙시다.
황제의 초상과 글자에
견줄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성聖 속俗의 분별
김석영 수사님
몇 달 전 신문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우리나라 국방부에서 군종신부를 뽑을 때, 지원자들은 면접관에게 ‘천안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은 북한이 저지른 일방적 잘못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또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보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유도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군종신부 지원자들은 민족의 평화통일과 자연환경의 보존을 생각하는 교회의 공식적인 관점에 따라 각자의 소신대로 대답한 결과 모두 탈락되었다고 한다. 그 기사에서 국방부는 군종신부가 군인이기 전에 먼저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며 사목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내에서 내로라할 만큼 열심한 신자들 중에서도,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한국 주교회의에서 잘못된 정부시책에 교회가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는 성경 구절을 언급하며 교회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고 교회가 할 일이나 잘하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을 가진 국민이고, 자치단체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황제, 곧 세상의 것은 그의 초상이 새겨진 화폐만이 아니다. 권력, 명예, 부귀영화, 인기, 대우받고 사는 삶 등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출세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겠지만, 특히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이것을 지상 최고의 목표로 삼고 밤낮없이 고군분투하면서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진실, 정의, 사랑, 평등, 자유, 평화, 일치, 공동선과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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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감염질병으로 병원에 반드시 가야 하는 질병은 무엇일까요? 감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더 많이 그리고 반드시 병원에 가야만 하는 질병은 ‘충치’라고 합니다. 이 충치 예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칫솔과 치약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칫솔과 치약만 사용하면 충치 없는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싼 치약과 칫솔을 구입하는 것은 그렇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충치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계적으로 철저하게 칫솔질을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음식 찌꺼기들이 치아 뒷면 구석에 조금이라도 붙어 있으면 충치 박테리아들은 밤새 신나는 파티를 벌일 것입니다. 평소에 아무리 비싼 치약과 칫솔을 사용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이지요.
이러한 예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지식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책을 많이 구입하고, 좋은 과외 선생을 구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열심히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쉽고 편한 길만을 선택하지요. 매일 칫솔질을 하는 것보다는 그냥 약간의 돈을 주고서 좋은 칫솔과 치약을 구입하는 것이 쉽지요. 또한 책 읽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냥 책만 구입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쉬운 것들은 순간의 만족만 가져다 줄뿐 정말로 중요한 것을 주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세례만 받음으로 인해서 주님과 가까워질까요? 또 주일 미사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릴까요?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또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주님은 너무나도 먼 분으로만 느끼게 되고 구원의 길에서도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편하고 쉽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세상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으로부터는 모든 것을 쉽게 얻으려고만 할까요? 잠깐의 기도만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고 하고, 잠깐의 희생으로 가장 올바른 의인인 티를 내려고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손을 잡습니다. 사실 이 둘은 절대로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헤로데 당원들은 철저히 당시 지배층인 로마의 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우기 위해서라면 악이라 할지라도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만을 열심히 지키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 이러한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무조건 틀렸다는 생각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악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편리한 생각들.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주님을 거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기준이 아닌, 주님이 기준이 되는 삶.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주님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히려 비 맞을 각오하고 빗속으로 들어가 전진하면 어느새 먹구름은 내 뒤로 사라져 간다. 정말이지 변화는 기다림이 아니라 행동이다(정진홍).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학생들을 무작위로 골라 그룹을 만든 다음 그들에게 “너희가 최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학기가 끝날 때쯤 그 학생들의 지능 지수는 몰라보게 향상된 것입니다. 이를 최초로 발견한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로버트 로젠탈’로 그의 이름을 따서,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로젠탈 효과’라고 불립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도 있듯이,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갖는지 실생활에서 얼마나 많이 느끼게 됩니까?
문제는 위와 같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이 ‘오늘의 운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 당신은 부상을 당할 염려가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었지요. 이 오늘의 운세를 신봉하며 살았던 형제님이라 더욱 더 조심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생활했지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정말로 부상을 당했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운세가 딱 맞는 것일까요?
사실 이러한 운세를 믿는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고 하지요. 앞선 이 형제님은 부상이 두려운 나머지 일상생활에 집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허둥대다가 발을 헛디뎌 어딘가에 충돌해서 부상을 입은 것이지요. 즉, 자신의 생각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들을 해보면 어떨까요?
“나는 오늘 좋은 사람들만 만날 거야.”
“나에게 오늘은 최고의 날로 예정된 날이야.”
“나는 진정으로 행복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멋진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미움을 버리십시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마르코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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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간혹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시비를 가리려 하거나, 딴죽을 거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전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상했던 답과는 전혀 다른 답을 제시하신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질문은 사실 질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상대를 넘어뜨리려는 미움이 그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미워하였던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가?
두 가지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것들, 즉,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기조부터 흔들어 놓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흔들림에 의한 기득권에 대한 위기의식이었다.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증오심에 이르렀을 것이다.
충분히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사실 우리의 일상 관계 안에서도 수없이 경험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미움의 일차적인 반응은 파괴하려는 욕구이다.
논리가 없어진다.
그저 내 눈앞에 미움의 대상을 없어지게 하든지 아니면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선다.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은 누구를 좋아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이 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러한 감정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라는 것은 절대로 우리가 통제할 수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우러나온 것을 숨긴다고 해서 잊으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힘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좋은 힘 즉 누군가를 살리는 힘과 나쁜 힘 즉 누군가를 죽이는 힘이다.
좋은 힘은 사랑이다. 그러기에 용서와 배려와 치유의 열매를 맺게 한다.
나쁜 힘이라면 한마디로 미움이다. 폭력과 이기와 파괴와 분열과 병을 가져온다.
이 두 종류의 힘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 힘이 상대를 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 힘이 상대를 향하기 전에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누구를 미워할 때 일차적인 반응은 본인에게 미친다.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힘이 되고 만다.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쩌면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마음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 아닐까?
드러난 감정을 다스리려는 노력보다는 그 감정의 밭을 착실하게 가꾸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여러분의 반응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일구어놓은 밭에서 피는 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좋은 꽃을 보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꽃을 다듬으려는 노력보다는 좋은 밭을 만들어 좋은 꽃을 피우려는 노력이 우선적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로부터의 미움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이미 예견된 미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고통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전혀 예상치 못했던 크나큰 시련이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고통 앞에 힘겨워하고 방황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인물들이 계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신앙의 선조들, 특히 엄청난 인생의 좌절과 쓴맛을 맛본 선배들의 삶과 신앙입니다.
토빗은 쓰나미처럼 밀어닥치는 연이은 시련 앞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고통의 강도가 세기로는 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욥기 2, 13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주야로 땅에 앉아 욥을 바라다볼 뿐 입을 열 수 조차 없었다. 그의 고통당하는 모습이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왕의 아내 이제벨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에 만연된 바알 우상 숭배를 타파하였지만 그로 인해서 이세벨의 미움을 사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광야를 방황하다 지칠 대로 지쳐 하느님께 자기를 제발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
얼마나 감당해야할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목숨까지 거두어달라고 하느님께 청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고통의 무의미성 앞에서 자기의 생을 저주하고 죽음을 갈망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만은 저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토빗, 욥 그 누구도 자기들이 태어난 날은 저주하지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하느님께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았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런 사건들을 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이나 다가온 고통을 피하지 말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우리가 그 고통과 직접 대면할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고통이란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겪어야 하는 가의 문제라고 합니다. 즉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주어진 고통을 잘 참아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로 고통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고통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꺾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죽음이나 고통을 제거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오신 것이 아니고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입니다. 그분은 당신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러 오신 것입니다”(클로텔).
예수님께서는 비록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우리 삶에서 눈물을 없애지는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십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고통을 양산할 뿐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고통이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도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고통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고통이 좀 가벼워졌을 때 이웃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통으로 인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한다면 그 고통을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힘겨울 때는 그 누구보다도 고통을 보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살리시려고 또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하시며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에만 집착하기보다는 고통 그 이면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의도,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들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묵시 3,19-20)
오염된 봉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신학교 들어갈 때 저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지쳐갔습니다. 내가 결혼하는 것도, 나의 꿈도, 지금까지 내가 해 온 것들도 모두 포기하고 하느님만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는데 행복하기는커녕 힘들기만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낸 것은 바로 성체를 영하면서였습니다. 성체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나의 생명을 준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준 것은 아직까지는 또 실제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준다고 생각했는데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음에도 그 보답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나갈 때도 저는 여전히 제 자신을 예수님을 위해서 봉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것이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포기한다고 생각할 때 가장 힘이 들었었습니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도 “내가 너한테 해 준 게 얼만데!”라고 하며 배우자나 자녀, 혹은 이웃에게 서운함을 표시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준다고 생각하면 그 해 준 것은 해 준 것이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는 모든 것들에는 ‘나’의 형상이 찍혀있기 때문입니다.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자유로이 사용할 수가 있어야하는데 ‘내’가 찍혀있는 것은 여전히 나의 것이지 그 사람의 것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준다는 것은 주는 것에서 ‘나’를 지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는 사람도 전혀 무언가를 받았다고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저 준다고 착각하는 사람만 보답이 없다며 이유 없이 지쳐가기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전에 카이사르의 얼굴이 찍혀있는 경우입니다. 그런 것은 하느님께 드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것을 드려봐야 오염된 봉헌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카이사르의 얼굴이 찍혀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카이사르의 것이지 하느님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의 얼굴이 찍혀있는 봉헌은 그냥 카이사르에게 던져버리란 뜻입니다.
어쩌면 이런 오염된 봉헌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서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가끔은 봉헌하면서 내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봉헌은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 것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면 내 얼굴이 내가 드리는 것에 새겨져 있기에 오염이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제단을 만들 때도 자연 그대로의 돌을 쓰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거기에다 정을 대고 인위적인 모양을 가미하면 그것은 이제 하느님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을 하느님의 것인 양 드리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내려오시기에 가장 합당했던 제대가 바로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하셨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본래 주님의 것이니 주님 뜻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직자 수도자들도 우리 자신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내 것을 무언가 드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우리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금속에 아무리 카이사르의 얼굴을 찍어도 실상은 카이사르의 것이 아닙니다. 카이사르는 그 금속을 만들어 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셨지만, 세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자신들의 형상을 새겨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산에 올라서도, 남극을 정복하고도, 달에 도달해서도 먼저 자신의 깃발을 꽂습니다.
어떤 연극에서 아기 예수님 탄생일에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 비단 이불로 감싸며 각자의 소망을 비는 경우가 나옵니다. 내가 이렇게 금관을 씌워드리니 나의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든가, 이런 비단옷을 입혀 드리니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식의 기도입니다. 이런 봉헌은 하느님이 즐겨 받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 봉헌은 그 사람들 각자의 이기적인 바람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나의 것은 그냥 내가 가지고 있고, 만약 봉헌하고 싶다면 하느님 본래의 것을 봉헌합시다. 우리는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종으로서 당신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 오염되지 않은 봉헌임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떠나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세상의 문제를 놓고 종교와 정치는 늘 어떤 긴장 내지 갈등이 있어왔습니다.
제정祭政일치와 분리, 신정神政일치와 분리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고, 과거 유신독재시대 사회문제에 교회가 교회의 목소리를 낼 때 어느 정치인이 주님의 오늘 말씀을 인용하며 교회가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교회가 현실문제에 대한 교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정치 문제에 교회가 끼어드는 것이 아니고, 아니어야 합니다.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사실, 정치도 종교도 다 세상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정치도 종교도 세상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일 세상의 현재 문제를 떠나 내세의 천국만을 가르친다면 과거 칼 마르크스가 나와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면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했던 그런 일이 또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레오 13세 교황이 Rerum Novarum이라는 사회회칙을 처음 내셨고, 그때 이후 교회가 몇 차례 더 사회회칙을 내었을 뿐 아니라 그때, 그때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해왔습니다.
사실 정치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세상을 위해 봉사를 한다면 교회가 그들과 다른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는 끊임없이 이 세상이 하느님과 무관한 듯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 욕심대로 세상을 끌어가면서 교회가 이에 대해 입장을 밝히면 개입하지 말라고 선을 긋고, 신자들 중에도 어떤 신자들은 같은 소리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을 떠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교회는 세속을 떠나야지 세상을 떠나면 아니 됩니다.
제정분리는 종교가 세상의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교회가 정치집단과 마찬가지로 권력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교회가 권력집단이 되었던 적이 있었고 지금도 있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정말 오늘 주님 말씀처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야 합니다.
세속의 정신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도 해야 하고, 교회가 세속적으로 세상 권력을 행사해서도 아니 됩니다.
그러나 세상 끝 날까지 교회는 세상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 애착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 비난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이 세상이 하느님과 무관하게 굴러가는 것이 아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