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6월 16일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6.16|조회수745 목록 댓글 0

제1독서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Love of enemies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을 내리시어,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한 아합의 죄를 물으시자, 아합은 단식에 들어가고 주님께서는 재앙을 늦추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복음).

☆☆☆☆☆☆☆☆☆☆☆☆☆☆☆☆☆☆☆☆☆☆☆☆☆☆☆☆☆☆☆☆☆☆☆☆

엘리야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아합과 이제벨에게 주님의 재앙을 전하는데, 아합이 자신을 낮추자 주님께서 재앙을 미루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이르신다(복음).

☆☆☆☆☆☆☆☆☆☆☆☆☆☆☆☆☆☆☆☆☆☆☆☆☆☆☆☆☆☆☆☆☆☆☆☆

주 하느님께서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을 뜻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구약의 말씀을 확장시키신다. 주님을 따르는 이라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떤 사람이 가시가 잔뜩 나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지금 손이 너무 아파.” 가시나무를 손에서 놓으면 그만일 텐데, 그 사람은 아프면 아플수록 더 힘을 주어 그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쥡니다. 이 사람이 아픈 이유는 가시나무 때문일까요, 가시나무를 쥐고 있기 때문일까요?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지?’, ‘네가 내 돈을 그렇게 떼먹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다 보면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마음에 큰 멍이 생긴 것처럼 아픔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마음의 병이 몸에도 영향을 주어 몸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또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원수 같은 그 사람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우리가 아픈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을 붙잡고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원수의 모진 말에만 시선을 두면 아픈 마음이 생기고, 원수의 단점에만 시선을 두면 증오심이 생깁니다. 또 상처가 된 사건들만 바라보면 우울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반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주었던 격려를 떠올리면 용기가 생기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장점에 시선을 두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또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감사함이 넘쳐흐릅니다. 요컨대 원수를 사랑하려면 나의 시선을 달리해야 합니다.

가시나무를 당장 손에서 놓는다고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를 낫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그 첫발을 떼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하느님의 정의는 무섭습니다. 나봇의 피를 흘리면서 포도밭을 차지한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에게 내린 하느님의 처벌은 ‘동태 복수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 임금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제벨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단식하는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녀들이 다다라야 할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은총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용서하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미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외면하고 피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사랑할 대상에게 한계와 조건을 설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처럼 절대적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습니까? 

자신의 약점과 죄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의 증오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면서 원수를 사랑하시는 표양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몸소 보여 주시니 우리가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원수들을 만납니다. 내 재산과 가족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희망마저 앗아간 원수가 있는가 하면, 치명적인 원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부와 가족 관계에서처럼 ‘운명 공동체’로 살면서 미움을 버릴 수 없게 하는 이른바 ‘웬수’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원수’를 사랑해도, ‘웬수’는 사랑할 수가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릅니다. 

‘원수’든 ‘웬수’든 내 마음의 병을 만든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내가 그를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그 미움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원수를 감옥에 가두고 싶고, 미운 상대를 저주한다고 상대가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더 불행해지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먼저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내가 세우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세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용서가 가능합니다. 혹시 진짜 원수는 용서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이 생로병사 속에서 갈망하는 영원함과 완전함, 선함과 올바름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뜻합니다. 나의 불완전함과 죄악을 직시할 때 이웃의 불완전함을 사랑으로 채워 주고,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거룩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윤리적 가르침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의무를 제외한, 하느님에 대한 경건함만을 이르는 거룩함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시된 사랑의 계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전히 깨달으려면 민족, 혈연, 친분에 사랑을 제한시키는 좁은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이것이 계명의 완성입니다. 

이 완성은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에게 속한 사람만이 '이웃'이라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명의 한계를 넘어서시며, 오히려 계명을 참되게 완성하십니다. 이러한 완성의 씨앗들은 사실 구약 성경 안에도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떠돌이를 환대하라는 가르침은, 사랑의 계명은 결코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것으로 제한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자신과 다르고, '우리'라 부르기를 꺼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는 자리에서 사랑의 계명은 완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상계에서 즐겨 쓰는 말로 하자면, '타자'(他者)를 받아들이는 곳에서 사랑의 계명이 온전한 의미를 찾습니다. 

이 러한 성경의 근본정신에서 폭력적이고 혼돈된 세계를 벗어날 길을 찾는 현대 사상은 다시금 희망의 빛을 찾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현대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입니다. 그는 '타인의 얼굴'을 대면하고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절대적 책임성에서 윤리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그의 이러한 철학에 영감을 준 것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계명이기도 합니다. 

회개 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의 의무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입니다.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고 책임감 있게 받아 안으려는 노력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 온전해지고 완전해지기를 갈망하며 끝끝내 멈추지 않는 발걸음입니다.

☆☆☆☆☆☆☆☆☆☆☆☆☆☆☆☆☆☆☆☆☆☆☆☆☆☆☆☆☆☆☆☆☆☆☆☆

장애인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이 삶을 나누는 국제적 공동체 ‘라르슈’(방주)를 설립한 장 바니에는 복음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많은 사람에게 평화와 공동선, 일치의 삶을 추구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은 이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캐나다 태생인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평화를 위하여 싸우려고 영국의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나 전쟁이 끝난 뒤 평화를 위한 또 다른 소명을 느끼고 제대하였습니다. 

장바니에는 사람들이 겪는 갈등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해결해 나가고자 했습니다. 1964년 라르슈 공동체의 설립이 그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평화와 용서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바니에는 2001년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9·11 테러’라는 끔찍한 사건을 바라보며 『정의 없는 평화 없고, 용서 없는 정의 없다』(Finding Peace)라는 책을 냈습니다. 여기서 그는 평화와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장애인들과 오랫동안 함께한 삶을 통하여 차분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는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길을 선택한 여러 사람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네덜란드의 유다인 여인 에티 힐섬의 일기 한 구절이 마음속 깊이 다가옵니다. “이 전쟁 이후 두 종류의 급류가 터져 세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나는 사랑과 친절의 급류이고, 다른 하나는 증오의 급류이다. 나는 이 증오와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닮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원수 같은 자들이 둘러싼 세상에서도 증오와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를 통한 평화의 길이 그것입니다. 이 여정은 참으로 길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길을 보여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제자답게 이 길이 참행복의 길임을 확신하며 꾸준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이라기보다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아주 강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그 원수가 나에게 해로운 인물로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원수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 해, 달, 별, 동식물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 가려는 자녀들의 목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실 때까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마침내 당신 부활에 초대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이웃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 서로 원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언제나 가능한 일입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고, 볼수록 미움이 쌓여 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자신과 눈높이를 낮추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통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성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미운 짓을 한 사람을 밉게 보지 말라는 말입니까? 미움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합니다. 남이 볼 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본인에게는 ‘마음의 문을 닫을 만큼’ 큰 상처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것인지요? 

미움은 한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미움이라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원인과 시간이 있습니다. 세월 속에서 미움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용서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만큼이 아니라면 ‘그 반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순간에 용서하려 듭니다. 마음먹으면 용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용서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러니 용서가 힘들 때에는 주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를 자녀로 생각하십니다. 그러니 용서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이에게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주어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

원수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정의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옛날이야기에는 산속에서 무술을 닦고 돌아와 하나하나 복수를 해야 하는 원수들이 나옵니다만 과연 자신에게 그렇게 죽여 없애야 할 원수들이 있는지 따져 보면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웬수’입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본디 친한 친구였거나, 사랑하던 애인이었거나, 또는 가까웠던 가족이나 친척들이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어느 날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웬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워하는 나 자신만 잃는 게 많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웬수’를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미움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상처로 친구가 원수가 되었다면, 그 원수는 사랑으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mL를 담을 수 있는 컵이 있습니다. 이 컵에 500mL의 물을 담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사랑만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크기가 200mL를 담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상 되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 사귀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어느 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이트 비용을 자기가 더 많이 내는 것 같고, 각종 기념일도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여자 친구에게 충실하기 위해 다른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는데, 여자 친구는 다른 친구 만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만나고는 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 크기가 작으면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 일어나면서 사랑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내게 피해를 주는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당연히 그 사랑을 받아들일 내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속 좁은 모습이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원수 사랑’이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상대가 친구든 원수든, 믿는 이든 믿지 않는 이든, 어려움에 부닥친 이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원수가 사랑을 받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야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쁜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 아무런 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게 되면 내 영혼에는 커다란 해가 가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줄어들어서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데만 머무르지 말고 기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시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사랑 크기가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의 크기가 커지는 사람이 당연히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마음의 크기를 키우십시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큰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 은은히 빛나는 모든 기쁨을 멈추라. 오! 그렇다해도 희망의 불빛은 밝혀두라(토마스 캠벨).


의미 있는 삶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서 직접 삶과 죽음을 함께 경험한 바를 기반으로 ‘로고 테라피’라는 정신이론을 만든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방향을 말합니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통해서.

둘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셋째, 삶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이 세 가지 방향을 목적으로 삼고 꾸준히 나아갈 때 삶의 의미가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행복, 돈, 지위, 명예와 같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를 보십시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틀어지고, 내 삶에 충실할 수 없기에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내 삶의 의미이며, 지금을 사는 힘이 됩니다.




할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문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스포츠카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 후 설명하세요.

당신은 위독한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00명의 경쟁을 제치고 1등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리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음란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화를 절대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면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0살을 갓 넘은 마리아 고레티 성녀도 자신을 죽어가면서 자신을 수십 차례 찌른 청년을 용서하고 같이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이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가 시카고에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어머니는 돈이 많지 않았기에 자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 저명한 의사를 초대한다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로렌스 박사는 산책하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그 소년의 집에 잠시 들러 쉬기를 청했습니다. 로렌스 박사인 줄 몰랐던 소년의 어머니가 냉대하며 거절하여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쫓아 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혼자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사제가 되어보니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한 것 같고 오히려 결혼해서 사는 것이 더 힘들어 보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길에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를 남깁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이 보이지만, 할 수 없다고 믿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맙니다. 


사막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멩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면, 당신은 내일 기쁘면서 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길에 떨어진 돌멩이 몇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주머니에 넣어 보니 그 돌멩이들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제의 그 목소리처럼 기쁘면서 후회스러웠습니다. 기쁜 것은 그 돌멩이들을 가져온 것이고, 후회스러운 것은 좀 더 많이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똑같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만큼 기쁠 것이고,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 거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어떠한 것들은 불가능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결자해지(結者解之),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지켜왔던 원칙이며, 질서입니다. 동양도, 서양도, 종교도 이런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야만 약한 사람도 존중 받을 수 있고, 강한 사람은 겸손 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에게는 결자해지를 이야기합니다. 공상과 망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필귀정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과 업보의 결과 다시 말해 인과응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천주교회에는 사대교리(四大敎理)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天主存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것(三位一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 다는 것(降生救贖) 그리고 선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賞善罰惡)입니다. 성서는 선을 행한 이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축복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자녀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노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욥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악을 행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에게 벌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만했던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 왕은 벌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상선벌악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자해지,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인류가 지켜왔던 삶의 원칙과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원칙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옳고 그름의 인연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들일까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완전한 사랑>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하고픈 상대를

고르지 않는 사랑


사랑하지 못할 까닭이

막을 수 없는 사랑


사랑에 대한 보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는 사랑


그리하여 다만 사랑

그리하여 오직 사랑


그러기에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렇지만 이루고픈 사랑

그럼에도 이루어야 할 사랑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 이야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할머니의 마음이 고약했다.

어머니를 음해하고 괴롭혔다. 시집살이가 심했다. 어머니는 어려움 중에도 반응하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용서를 청하셨다. “너 그렇게 똑똑하고 말을 잘하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니?’ 어머니는 할머니께 ‘세례를 받으셔요!’ 어머니의 권고를 받아드렸다. 세례를 받으셨다. “이래도 되니?”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가운데에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미울 때면 골탕을 먹이려고 툭하면 ‘쥐약 먹었다’고 소리를 높이셨고, 아버지로부터 동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럴 때면 늘 엄마편이 아니라 할머니 편이셨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난감해 하셨다. 그럴 때면 우리 육남매는 늘 엄마편이 되어 주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전자동으로 미워한 것은 뻔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그 음해를 받으면서도 할머니가 떠나시는 날까지 기도하시며 이를 견디어내셨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천국을 보내드렸다고 늘 기뻐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다. 어떻게 사랑한단 말인가? 맏며느리로 사시며 한 지붕 아래 할머니가 원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서 할머니를 사랑하셨다. 불목을 피하셨다. 언제나 신앙으로 고통을 넘으셨다.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우리 어머니 앞에서 자녀들을 모아놓고 진실을 말해주셨다. ‘너희 어머니는 언제나 원수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너희 할머니를 죄에서 구령하셨다. 어머니를 따라 너희도 신앙생활 잘하고 복받으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5,44-45).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달리게 된다면 조금은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될 때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수를 대하면서 미움과 증오에 갇혀있게 될 때 어쩌면 우리도 역시 죄의 어둠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어둠을 빠져나와 하느님 안에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죄의 어둠에서 빠져나오길 바라시며 당신 안에 참된 자유로 초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슬픔에 집착하지 말고 얻게 될 기쁨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과 증오 속에서 죄의 어둠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참된 자유로 나아갈 것인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화요일>(2020. 6. 16. 화)(마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을 ‘원수’로 생각했고, 또 구약성경의 전체 흐름이 우상 숭배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 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고방식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과 비슷한 율법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유대인들은 원수라고 해도 동족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이 율법대로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외면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고, 율법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1) 탈출기에서 말하는 ‘원수’는 원한 관계에 있는 개인의 사적인 원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간에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너희는 이웃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너의 이웃이고 형제이니 그를 사랑하여라.”)

종교와 신앙이 달라도, 우리 교회를 박해해도,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하여라.”는 “좋아하여라.”가 아니라,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기를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시키기 위해서 잘해 줄 수도 있고, 꾸짖거나 타이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에 속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3) 우리는 흔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는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은 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한 사람’일 뿐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4)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편 가르기를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참 사랑’에는 울타리도 없고, 편 가르기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울타리가 없는 ‘참 사랑’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관계였고, 서로 접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만 보았고, 도와주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전후 상황을 볼 때 강도당한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신 것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요즘에 ‘인종 차별’과 ‘민족 차별’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는데, 그런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같은 편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5)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뜻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고,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만일에 원수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편에 속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불완전한 사랑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모두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원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을 겁니다. 대개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게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상해를 입힌 사람을 가리키지요. 하지만 이념과 사상이 달라서 서로 맞서고 대적하는 이들을 원수의 범주에 넣기도 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1열왕 21,20)

제1독서에서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외칩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일로 분노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아합 임금 앞에 섰지요. 아합은 무장을 하지도 않고 폭력을 쓸 이유도 없는 엘리야를 왜 원수라 부를까요?

원수의 범위에는 사사건건 나를 공격하고 상처 입히는 이들은 물론,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내 생각이나 계획과 대립각을 세우고 엇나가는 이, 내 어둠과 죄악에 대해 직언을 하는 이, 결국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넓게 보면 적이고 원수일 수 있습니다.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1열왕 21,27).

나봇에게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상응하는 징벌을 내리시리라는 예언자의 전언에 아합은 당장 태도를 바꿉니다.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을 하는 것은 회개와 참회의 전형적 행동입니다. 바라 마지않던 포도원을 차지한 기개 따위는 눈씻고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습니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합 임금이 원수라 칭할 정도로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인 엘리야의 말을 들었다는 점이고,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원수라 여겼던 존재에게서 자기 성장의 단서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너무 거창할까요...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1열왕 21,29).

결국 하느님은 자신을 낮춘 아합 임금의 태도를 보시고 내리시려던 벌을 유예하십니다. 그 태도에서 통회의 마음을 보신 겁니다.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면 당장 두 쪽을 내어 처단해도 시원찮을 악인이지만, 아합 역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지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예수님의 자상한 당부입니다. 우리가 당장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에게 집착해 하느님 자녀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 실존을 잘 아시는 그분은 원수 사랑이 감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모르시지 않기에 우격다짐하듯 강요하지는 않으시지요. 그저 너희 아버지처럼, 너희가 사랑하고 또 너희를 사랑하는 그 아버지처럼 되어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구분하고 나눠서 일부분만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사랑입니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치우침 없는 사랑, 나를 낮추고 너를 높이는 사랑,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편애와 집착이고 자기애와 욕정, 애욕과 과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혹 원수로 여겨지는 이가 있습니까? 그이 때문에 힘드시죠? 그를 포함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뜨겁고 진실하게, 담백하고 순수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보려 애써 봅시다.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아버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아멘.




인류가 서로 인사 잘하면 상 준다하셨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아버지는 인류가 사랑스러운 자녀며 가족이길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비를 고루주시는 아버지는 인류가 서로 인사 잘하면 상 준다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


하늘 영원나라에 많은 친구들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상 받습니다.

어린 애기 땐 서로 어울려 함께 잘 놀다가도 어른이 되면서 달라지지요.

권력 재력이 가르고 지위 직업 고향 등 달라 가르며 원수까지 되잖아요.


서로가 옳다 갈라지고 욕심 때문에 죽이면서까지 갈라지니 살기 무섭죠.

죽어 하느님께 가 많은 친구들 만나려면 하느님가족정신 지금 가집시다.




하느님의 힘, 인간의 힘 - 성체성사의 실천 ⓶ 생명과 평화에 대한 봉사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에 보면, 희년법에 명시된 이스라엘의 파스카 정신을 짓밟고 나봇을 죽인 북이스라엘 왕국의 임금 아합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시켜 왕실 가문이 멸망하리라는 재앙을 예고하셨습니다. 아합을 충동질하여 아합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이세벨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시체를 뜯어 먹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방인 출신 왕비였던 이세벨은 자신의 모국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사조에 젖어 야만적으로 행사해 버릇했던 정치권력을 감히 이스라엘에 도입한 죄를 저질렀고, 아합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수호해야 할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고 아내의 충돌질에 넘어가 나봇의 목숨을 빼앗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그런 악이 하느님의 백성을 잘못 이끌고 함께 파멸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악에 대한 방어적인 차원에서 당신의 힘을 발휘하여 아합 가문과 이세벨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방식으로 응징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을 실현해야 하는 적극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고르고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고 비유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나타나는 하느님 사랑에 대하여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언제나 한결같이 나타나는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는 독서에서 확인하신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상숭배에서 나오는 사회적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당신의 힘을 엄정하게 행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힘은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나타나고 모든 때에 한결같이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힘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는 하느님과 그 백성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어긴 자들에 대한 복수와 응징은 하느님의 역할이고 이를 따르고 그 완전함을 본받는 일은 하느님 백성의 역할입니다. 고르고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은 생명을 기르고 평화를 유지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의 완전함을 본받기가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생명도 평화도 다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체성사로 삽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하고 말씀하시고 또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신 바, 교회는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그리고 성체성사의 정신에 따라 파스카 과업에 복무하면서 이를 위해 서로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마다 주님을 기억함은 물론 성령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성체성사의 은총은 파스카 신비를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인들이 이룩하는 변화와, 그들에 의해 역시 변화되어 가는 세상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께서 이 두 가지 변화를 이끌고 도와주시는 체험도 늘 새롭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도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라고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눈길은 언제나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향하며, 우리와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거룩한 변화로 파스카를 이끄시는 주님의 힘을 발견합니다. 그 힘은 고르고 한결같이 나타나는 생명과 평화의 힘이요 사랑의 힘입니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면, 이 생명과 평화의 힘은 적극적인 차원에서나 방어적인 차원에서 나타나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는 물론 한미관계와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생명과 평화의 힘을 발휘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에서 힘을 행사하도록 정부를 응원하는 한편 사회 여론에도 호소하는 역할을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르면서도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평화 실현을 위해 반영하는 역사가 이 땅에서 계속되어야 함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미국이 자신의 국내정세에 맞추어 남북문제를 이용하려 드는 경우, 또 미국과 조율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 만족하지 못한 북한이 평화관계를 깨뜨리고 대결자세로 나오는 경우, 그리고 남북분단에 책임이 가장 큰 일본이 여전히 군국주의적 향수에 젖어 남북대결을 부추기는 경우 또한 마지막으로 친일적인 정치세력과 가짜 보수언론이 여론을 조작하고자 이 세 가지 최악의 상황을 조장하는 경우에라면 하느님께서 평화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과오를 응징하시는 역할을 하시도록 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그런 조짐은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 요컨대, 하느님은 사랑과 평화의 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을 자신의 삶에 있어서나 겨레의 삶에 있어서나 그 어느 경우에도 잘 써야 합니다. 힘이 필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첫 본당에 있을 때 거기서 활동하던 한 청년에게 사정이 생겨서 그 친구가 기르던 고슴도치를 며칠간 제가 맡아 보살펴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고슴도치라는 동물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처음이라 참 신기했었고, 워낙 작고 약한 녀석이라 잘 돌봐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정성을 다했지요. 하루는 고슴도치 집에 깔아둔 톱밥이 많이 더러워져있길래 갈아줘야할거 같아서 조심스럽게 고슴도치를 꺼내 잠시 손바닥 위에 두었습니다. 그 상태로 톱밥을 치워주고 정리를 해주다가 저도 모르게 먼지가 코에 들어갔는지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고슴도치는 자기 몸을 힘껏 말아 가시를 세웠고, 그 가시에 손을 찔려 깜짝 놀란 저는 그만 손 위에 있던 그 녀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더 놀란 고슴도치는 장농 아래 어둠 속 깊은 곳에 숨어버렸고, 그 녀석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한참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씨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고슴도치가 저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일부러 가시로 찌른 것이 아니듯,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그 사람도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지요. 그저 겁이나서 두려웠을 뿐이고, 제 의도를 잘 몰라 오해했을 뿐이고,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지키고자 몸을 움츠렸을 뿐입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본의 아니게 내가 상처를 입게 된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상처를 입힌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비난하게 되면 그는 점점 더 위축될 것이고, 그럴수록 그가 세운 가시는 더 단단해져 나를 더 아프게 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와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원수가 되는 일은 없지요. 내 가까이에 있던 누군가, 나와 자주 마주치던 누군가가 한 순간 '원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 나를 향해 가시를 세우고 있는 원수들이 많으면 괴로운 것은 결국 나 자신입니다. 그 가시 같은 말과 행동에 내가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원수는 못 본척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는 어떻게 없애야 할까요? 원수는 내 마음에서 없애야 합니다. 그 과정은 내 손에 상처를 입힌 고슴도치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에서 시작됩니다. '나 때문에 깜짝 놀랐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니?' 그렇게 그의 마음에 공감하다보면 그를 미워하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집니다. 그렇게 사랑을 담아 꾸준히 고슴도치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 고슴도치는 비로소 주인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슴도치를 키우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핸들링'이라고 부르지요. 그렇게 되면 주인이 자기 몸을 쓰다듬어도 더 이상 가시를 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싸워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보호해주고 감싸주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시간이 좀 걸리고 힘들어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꾸준하게 그를 보듬어주고 감싸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사랑과 신뢰가 쌓이면 더 이상 나를 향해 가시를 세울 일도, 그래서 내가 다칠 일도, 그로 인해 그를 미워할 일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와 힘든 삶을 함께 하며 힘이 되어줄 소중한 동반자이자 친구가 한 명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그래도 팍팍한 세상살이인데 기왕이면 내 주변이 가시로 둘러싸인 채 불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좋은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온전한, 완전한, 원숙한 삶. -사랑밖엔 길이 없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


엊저녁 서편의 저녁 노을은 참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세상을 위무慰撫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곱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로 표현됨을 봅니다. 요즘 은은하고 그윽한 밤꽃 향기가 한창입니다. 흡사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참 평온해 집니다.


어제는 거의 한달마다 고백성사차 오신 수녀님이 고목에 새 순이 돋은 분재를 선물했습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시를 사랑하고 쓰시는 분이라 선물도 시처럼 품격이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사랑을 숨쉬며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한마디 말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사람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것이요, 답은 사랑뿐이 없습니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각자 고유의 유일회적 인생입니다. 결국 영적 성장과 성숙도 사랑의 성장과 성숙을 뜻합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 사랑의 마음의 성장과 성숙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사랑할 때 예뻐집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인생 虛無와 무지無知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텅 빈 허무를 텅 빈 충만으로 바꾸는 사랑입니다. 제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표지 안쪽의 글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대로 옮깁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몸은 사랑하라고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함께 있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지금 읽어도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1.성내지 마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는 다섯가지 대당명제에 이은 마지막 6.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여섯 대당명제의 최종 결론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사랑이 익어 성숙成熟해 갈수록 둥글게 익어가는 가을 열매들처럼 원숙圓熟한 사람, 완전完全한 사람, 온전穩全한 사람이 됩니다. 과연 사랑으로 둥글게 익어가고 있는 원숙하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사랑의 절정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원수요 박해하는 자들이지 나름대로 까닭이 있을 것이며, 하느님 눈엔 사랑스런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무지로 인한 원수짓이요 박해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 휘말려 사는 어리석은 눈먼 중생衆生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미워할 것은 무지無知의 죄罪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뿐이 없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뿐이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다보면 원수를 닮아 괴물이 되고 내가 먼저 파괴됩니다. 내 본연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 길뿐이 없습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 무지의 죄의 전형적 인간이 탐욕에 눈먼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아합입니다. 무죄한 나봇을 살해한 아합의 죄의 결과는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지요. 엘리야 예언자들 통한 하느님의 준엄한 선고입니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에 이어 계속 전개되는 구체적 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지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우리에게 주는 충격적 가르침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청자聽者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죄는 순간의 쾌락을 줄지 몰라도 괴롭고 아픈 후유증은 평생입니다. 아합의 구체적 죄의 나열입니다. 순전히 하느님을 잊고 나를 잊은 무지로 인한 죄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라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역시 오늘날도 많은 무지의 죄인들을 통해 반복되는 악행들입니다. 주님 대신 우상을 따르며 역겨운 짓을 하지는 않는지 늘 ‘주님의 눈’을 의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무지의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이들을 하느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입니다. 무지를 무력화無力化하고 원수나 박해자들을 살리는, 또 내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사는 삶, 얼마나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그러니 하늘 우리 아버지를 부단히 닮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무차별의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우리 하늘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인종, 국적, 종교, 문화, 언어 모두를 초월하여 모두가 아버지 품안에 있는 자녀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유상종類類相從,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끼리끼리 패거리 사랑이라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우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 아버지를 닮아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너그럽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손, 겸허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숭고한 평생과제입니다.


참으로 한 번 참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주어진 참 고귀한 선물인생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무지와 허무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온전하고 완전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을 닮아 사랑으로 익어가는 원숙하고 온전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며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유일한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아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와 닮았음을 자주 확인하게 됩니다. 얼굴 생김새도 그렇고, 머리에 탈모 부위도 비슷합니다. 또 목소리나 성격, 심지어 식성까지도 많이 닮았습니다.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모양입니다. 한편, 모든 이에게는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지요. 그리고 놀랍도록 우리는 그분을 닮았습니다. 물론,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내 모습에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면, 용서 못할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당혹스럽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싶은 지향을 어김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들 사랑하기 싫고, 누군들 원수라고 끝까지 저주하고 미워하고 싶겠습니까? 바라는 대로 잘 안 되는 것뿐이지요. 내 안에 분명 사랑은 있는데, 그 사랑이 원수를 사랑할 만큼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만 하려 하지 말고, 은총을 청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선한 지향이 하느님의 은총과 만나, 용서와 사랑으로 열매 맺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나의 부족함은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되고, 우리는 자비로 드러나는 그분의 완전하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걸어가는 게 아니라 춤추는 것 같다.

최민석 신부님

20년 전 남북정상이 손을 잡았다. 잡은 손들이 입을 모아 6,15 남북공동선언을 했다. 외세에 의한 남북한 분단체제를 우리민족끼리 평화통일의 손을 잡아 평화와 협력 그리고 교류를 하자고 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더니 잡은 손이 다시 얼어붙어버려 안타깝다.

남북대결, 여야대결, 이런 방식은 늘 대화는 없고 대결만 있다. 이런 사회는 불안요소가 갈수록 많아지는 미성숙한 사회다. 성숙하지 못한 사회는 늘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대결구도가 많다. 서로를 진영으로 나누고 어느 쪽에 서느냐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런 풍토가 많다.

보수 진영이 보수적인 언론을 만드는 것은 진보 진영이 진보언론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이름으로 생산하는 사실왜곡이 너무 많다. 진보는 선이요 보수는 악이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그 반대의 생각도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다른 틀이 필요하다. 선악 대결구도로 가면 문제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부도덕하다는 것과 다른 차원의 얘기지만 난 스스로 도덕적 존재라는 확신은 안 한다. 도덕군자를 자청하는 이가 있다면 이런 자는 필시 누군가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도덕적 존재도 아니지만 부도덕한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가난한 사람은 못사는 이이고 부자는 잘사는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가난한 이는 가난하고 부자는 그저 부자일 뿐이다. 가난한 이 중 잘사는 이 또한 얼마든지 있고 부자로 사는 이들 중 잘 못 사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까 가난한 이는 가난할 뿐 못살거나 못살지 않고 부자 역시 부자일 뿐 잘살거나 못사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잘산다.’는 이 말이 쉽게 입에 붙어 나오는 것은 부자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것이 라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이가 도덕적이거나 부가 악한 것도 아니다. 있다면 악한 부자가 있을 뿐이다. 나는 부자도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노동을 싫어한다. 불가피해서 한다. 내 생각에는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을 노동이라 보는 것 같다. 그와 반대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하는 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 모든 일은 놀이가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노는 게 신성하다는 신념이 있다. 노동엔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다. 노동하면 인간이 깨진다는 거 놀아보면 안다.

나는 일할 때도 있었고 놀 때도 있었지만 놀 때 인간이 온전해지고 깊어지는 걸 느낀다. 억지로 일하는 노동은 사람을 망가지게 한다. 놀이 하듯이 그렇게 즐겁게 일하려면 열심히 일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하는 맛을 알게 되고 점차적으로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되어 일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노는 거, 그게 말이 쉽지 해보면 어렵다.

평생을 농사짓거나 고기 잡으며 보낸 사람들은 삶의 지혜가 있다. 이들의 노동 자체는 소외된 노동이 아니다. 돈은 안 되지만 인간과 친밀한 노동을 한평생 하니까 몸과 삶이 부딪치면서 소통의 지혜가 열리면서 놀이가 되는 것 같다. 도시 노동자들은 노동을 해도 그런 지혜에 도달하기 좀처럼 어렵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그리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통되는 부분이 있지만 안 되는 부분이 많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과 법질서, 이런 기본 프레임을 통한 소통밖에는 안 된다.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상대가 느끼는 바를 다 느낄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인 것 같다. 더욱이 나이가 들어 혼자 지내는 사회와 거리두기가 익숙할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 소외돼서 적막한 자리에 처박혀 있는 게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나이 먹는 건 바람 부는 거나 날 저무는 것 같은 자연 현상이다.

살아 있음, 숨 쉬고 먹고 마시고 걷고 눕고 앉고 서는 모든 것이 다 자연이다. 하늘과 땅 자연은 그 자체가 거대하고 세밀하고 세밀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질서다. 이 순서를 거꾸로 뒤집으면 생명이 살지 못한다. 먹고 마시고 숨 쉬며 서서 걷고 눕고 앉는 질서에 따라야 한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다. 세월은 결코 여름에서 봄으로 흐르지 않는다. 싹이 난 뒤에 줄기가 자라고 줄기가 자란 뒤에 꽃이 피고 꽃이 핀 뒤에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맺힌 뒤에 열매가 익는다. 그것이 ‘하늘나라’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에 따라 바뀌는 자연의 순서를 배우고 익혀 바야흐로 그 ‘철’이 몸과 하나로 되는 것을 “철든다.”고 한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자는 잘되고 순리를 어기면 무엇이든 변통이 생긴다.


하늘의 명 앞에서 ‘내 뜻’을 세워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 첫 사람 아담의 길이었다면 하늘의 명 앞에서 ‘내 뜻’을 내세우지 않고 순순히 하늘의 길을 따른 분이 예수님이시다. 아담의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의 길을 걸으면 걸어가는 게 아니라 춤추는 것 같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가끔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돌뿌리에 확 걸려서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좋은 마음만 들어야 할 터인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악마가 심어 놓는 나쁜 생각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3-47)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사람들이 멸시하고 증오하던 박해자들과 세리와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 놓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향한 완성을 갈망하며 거룩한 삶을 희망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더 완전하신 주 하느님을 그립니다.




원수 관계를 만들지 말자 <마태 5, 43-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원수 관계는 여러 이해타산으로 생깁니다. 욕심이 없으면 원수가 생기지 않고, 내가 없는 상태에 있으면 상대적 악한 관계가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를 앞세우고, 앞서려고 앞선 사람 시기 질투하고, 뒤떨진 사람 얕보고 무시하면 원수 관계가 생기고 서로 죽일 듯이 미워하고 복수에 복수를 가합니다. 불교 신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 아니 원수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원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본능적 욕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욕망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도 잘 관리를 못 해서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저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세상의 패권을 잡으려는 전쟁이라 생각합니다. 승리자가 되려고 서로 갖은 방법을 사용하다가 경쟁에서 벽이 생겨 원수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재물의 욕망도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는 욕망, 형제의 난, 노벨상까지 받은 아들의 추한 재산 싸움으로 원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 원수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가 됩니다.

작은아들의 비유에서 형은 돌아온 동생을 미운 눈으로 보고 자기 재산이 축날까봐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까지 하여 인간의 본능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명예에 대한 욕망은 시기 질투로 나타나 다른 이가 잘되는 꼴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가 손해 보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깎아내리고 비방하며 장점은 찾지 않고 약점만 찾아 소문을 내려고 합니다. 결국 이기심은 원수를 만드는 공장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란 존재를 먼저 생각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하는 한 자아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해결책은 주님은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에게 간청하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원수와 대화를 나누어 화해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매듭은 풀어주어야 합니다. 매듭을 풀려면 이리저리 실마리를 찾고, 찾은 실마리를 따라 이리저리 풀어나가야 풀리듯이 원수의 관계는 대화로 풀어야 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남북이 화해와 평화를 위해 “우리의 소원은 평화” 한다고 되지 않고, 기도 모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이상이나 이념을 놓고 역사적, 철학적, 인간학적, 민족학적으로 깊은 고찰과 사랑과 진실이 있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민족 통일도 오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힘으로 관계 개선은 불가능합니다. 화해를 위해 한쪽의 노력, 흡수 통일론이나 공산주의 일치나 75년의 한 맺힌 역사는 불가능합니다. 공산주의는 역사 안에서 실패가 입증되었고, 자본주의는 부패하여 빈부 격차로 서로 벽을 쌓고 살고 있으니 한 사상으로 통일은 불가능합니다.


너와 나의 관계도 이해타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내가 네가 되어도 네가 내가 되어도 불가능합니다. 너도 아닌 나도 아닌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 세상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진실에 충실한 자유, 세상을 초월하여 내 것, 네 것 없는 평화,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고 내 생명으로 네 생명을 살리는 정신으로 얻어진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한 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주님의 기도’에서 (Nn. 11-12: CSEL 3,274-275)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고 우리에 대한 주님의 인자와 은총은 얼마나 풍부합니까!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 면전에서 기도할 때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기도 중에 감히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또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기쁘게 모시듯이 그분도 우리를 당신 자녀로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행위가 영에 합당치 못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이고 천상적인 존재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직 영적이고 천상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도록 합시다. 주 하느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대하는 자는 소중히 여겨 주겠지만, 나를 멸시하는 자는 천대하리라.” 복된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다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기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지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누가 하느님을 거룩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 세례로 거룩하게 된 우리는 발 딛기 시작한 그 거룩함에 항구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매일매일 청합니다. 매일매일 거룩해지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죄를 짓게 되므로 끊임없이 거룩해짐으로써 죄를 씻어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으로 베푸시는 그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의화되었으며 거룩해졌습니다.” 바오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영으로 거룩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거룩함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판관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고쳐 주시어 살리신 사람에게 더 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은 거룩함과 새 생명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보호로써 보존되도록 우리는 밤낮 쉬지 않고 청하면서 기도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원수는

언제나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한때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조차

원수로 다가옵니다.


우리자신또한

누군가에게 분명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관계의

아픈 뒷모습을

보게됩니다.


원망과 원한에

허우적대는

우리들 삶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우리들또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어떤 순간도

사랑의 하느님을

밀어낼 순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삶안에 있습니다.


생생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들 삶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랑과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미움과 증오

분노와 분개에서

자유롭게 하길

기도드립니다.


원수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뿐임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듯이

원수를 이해하고

기도하는 예수 성심

성월의 부서지는

마음되십시오.



주님께서는 내게 늘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솔직히 사제가 되기 전에는 이를 믿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내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고 왜 내게 이렇게 부족한 부분을 많이 주셨냐면서 불평불만을 많이 하였던 것이지요. 다른 친구에게만 더 많은 능력과 재주를 주신 주님께 원망을 했던 적도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후 비로소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좋은 것만 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보다 더 너그러워집니다.


언젠가 외출을 했다가 성지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성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신호만 잘 받으면 10분 내에 도착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의 차가 차선을 계속해서 바꾸면서 차량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차로 인해서 신호를 받지 못했고 몇 분의 시간을 도로에서 소비해야만 했습니다.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기 때문에 짜증이 일었고 앞의 차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쏟아 붓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것도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상보다 조금 늦게 성지에 도착해서 차의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지에서 내려오는 어떤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예전에 알고 지냈던 교우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만약에 신호를 제대로 받아서 일찍 도착했으면 엇갈려서 만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저를 방해했던 차로 인해서 늦어져서 이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불평불만의 마음도 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보다 순간의 부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다보니 늘 힘듭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원수의 육신에 해를 입힐 수는 있겠지만 내 영혼에 더 큰 해를 입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 사랑의 주님께서 늘 좋은 것만을 주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이 명령을 따를 수가 잇습니다.

이 주님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을 주님께서 멍청하다고 하실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에게 분명히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은총과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순간순간 사랑하고, 순간순간 행복하세요. 그 순간들이 모여 당신의 인생이 됩니다(혜민 스님).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는 찾아온다(데일 카네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수많은 기회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라는 것을 모른 채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언제나 준비한 사람이 승리한다. 승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언제나 우연이라고 말하고 재수가 좋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연이나 재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찾아오지도 않는다. 매일 매 순간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집중하는 자세로 임한다면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인생에 있어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그러나 준비된 사람에게는 하루에도 세 번의 기회가 찾아 올 것이다. 그때는 그저 내 앞에 지나가는 기회를 한눈에 알아보고 꽉 잡을 수 있는 용기만 가지면 된다. 그러니 지금부터 잘 준비하자. 인생을 바꿀 기회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 매 순간 찾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을 뿐이다.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갑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와 달라도 철저하게 다른 그,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그, 존재 자체로 고통이요 십자가인 그, 웬수가 따로 없는 그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대대적으로, 혁신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시켜보고자 노력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고통과 십자가의 대상에서 ‘연구 대상’으로 바꿔보고자 노력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언행, 이쪽에서 원하지 않는 언행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는 그 앞에서 분노하고 좌절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서점에 가셔서 인간의 심리, 인간의 행동의 이해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양서를 한권 구입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연구해보시기 바랍니다.

  

관계의 대가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그를 바라볼 때, 나와 분리된 별개의 그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를 내 일부요 나와 하나인 우리라고 여겨보십시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도 어려운 관계로 인해 힘겨워하는 우리를 향해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오 복음 5장 44~45절)

  

요즘 개인적으로 참 난감한 문제 앞에서 많은 생각과 묵상들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용서하기 힘든 상황 앞에서, 결국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일이 어떻게 전개되든 상관없이 일단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자. 매일 아침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구원을 위한 지향을 두고 미사를 봉헌하자.”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님 시선의 폭은 좁디 좁은 우리들이 안목과는 정말이지 천지차이입니다.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인내롭고 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이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오 복음 5장 45~46절) 

 

사랑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참 요구가 많으신 분입니다. 때로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솔직히 원수가 내게 끼친 해악을 큰 마음 먹고 참는 일은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원수가 내게 안긴 상처를 털어버리는 일 역시 어렵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사랑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과 축복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정신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인간 세상 안에 악(惡)이 종식될수는 없지만 악은 누군가의 진정한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됩니다. 원수 사랑이 가능해진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말로만 겸손할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즘 겸손하게 살려고 조금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안 됩니다. 워낙 몸에 밴 것이 있고 또 신자들도 기본적으로 사제에게 너무 많은 공경을 주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신 분이 일어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는 앉아서 듣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저도 일어섰습니다. 이전엔 이런 것이 참 버릇없는 것임을 느끼지도 못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세속적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또 제 자신을 높은 지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옷을 가난하게 입기가 힘들고 검소하게 먹거나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신자들의 정성을 거부하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무조건 받으니 풍요가 하늘을 찌릅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 마냥 부럽습니다. 하지만 선뜻 그런 삶을 본받기가 어렵습니다.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겸손은 해야겠는데 몸으로는 하지 못하고 말로만 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몸이 불편해지지 않으면서도 겸손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자신의 왕비 이제벨을 잘 통제하지 못하여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 왕에게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어 나무라십니다. 그와 온 집안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재빠르게 회개합니다. 제 옷을 찢고 자루 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갑니다. 자루 옷을 입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닙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기분이 좋으신 듯 엘리야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자신을 낮추면 하느님께서 그를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인정해드려야 그분께서도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이런 면에서 겸손이 영성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자신을 낮추는 방식은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역시 겸손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육체가 교만인데 육체를 배불리면서 겸손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를 높이고 상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내 자신을 낮추고 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리 말로 겸손한 척 하더라도 위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겸손할수록 육체는 수고하고 있어야합니다.

 

평생을 흑인들을 위해 수고한 슈바이처 박사가 밀림에서 처음으로 병원을 지을 때 한 번은 옆에 서서 구경만 하는 흑인 청년에게 서 있지만 말고 같이 일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이 흑인 청년은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 일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학생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러나 공부를 더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하게 되었다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고생을 하려하지 않습니다.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은 낮은 사람의 몫이라고 여깁니다. 설익은 사람이고 덜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겸손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수고하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몸으로도 불편해져야합니다. 겸손하고 싶다면 말로만 겸손해지려 하지 말고 교만이 스며있는 우리 몸을 조금은 괴롭힐 줄 알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방송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내용은 성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가 많은 것은 어떤 이유인지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순교자들의 희생과 기도가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도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손자 중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유언을 하셨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염수정 추기경님, 최창무 대주교님, 손희송 주교님도 모두 교우촌 출신들이셨습니다. 성소의 증가는 가정, 본당, 교구가 삼위일체가 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한국교회도 성소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인데 어떤 이유인지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은 교회의 위기와 함께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교회에 자본과 물질의 파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있습니다. 교우촌이 사라지면서 가정에서의 기도가 사라졌습니다. 중산층화된 교회에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이 함께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세속화되면서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이라도 핵심교리를 꼭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제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이태석 신부, 오웅진 신부, 김수환 추기경님과 같은 사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보다는 가난을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까지도 감수해야 합니다. 꽃이 되기보다는 썩어서 묻히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학교의 양성과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질문하였습니다. 30년 전에는 제도가 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열정은 가득했습니다. 지금은 제도는 정착되었지만, 열정은 예전만 못합니다. 정하상 성인은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사제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멀리 프랑스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왔습니다. 교회는 제도와 열정이 함께 해야 합니다. 조직화한 양성 이전에 학생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관심과 사랑이 함께하는 양성이 되어야 합니다. 교황청에서는 사제양성 지침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한국교회도 한국 사제 양성지침을 만들고 있습니다. 변화된 양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것입니다. 인성, 지성, 영성, 사목이 조화를 이루는 틀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기자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는지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약은 약국에서 팔지만 중요한 약은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약국에서 약사가 쉽게 처방을 내리고 약을 팔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 진단하여 약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약을 오용하거나 남용할 수 있어서 부작용이 생기거나,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약의 효과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정부는 의약 분리 정책을 폈고 지금은 가벼운 증상의 약 이외에는 대부분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야만 약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방전을 주는 의사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메마르고, 타락하여 심한 병에 걸리곤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로 ‘당근과 채찍’으로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근이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는 회개와 반성이라는 약을 먹어야만 효과가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채찍이란 계속 반성과 회개라는 약을 먹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어제에 이어 ‘아합왕과 이자벨 왕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처방을 내렸습니다. 무서운 채찍입니다. 다행히 아합왕은 회개와 반성을 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용서와 자비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에 효과가 있는 처방전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만병통치약과 같아서 ‘분노, 욕심, 교만, 이기심, 시기, 질투’와 같은 심각한 병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오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코린 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자녀들이 되며, 그분의 새로운 창조물이요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녀로서의 권한을 받는다. 우리는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뜻하며,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 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기대수준. -하늘 아버지를 닮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갈수록 은총보다도 죄의 심각성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큰 죄만 짓지 않고 소박하게 살 수 있어도 큰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매일미사가 그렇게도 고맙습니다. 미사중 제가 주목하는 부분이 두 곳입니다. 


예전에는 미사 시작 예식과 더불어 인사후 잠시 그날 미사를 소개한 후 참회예식에 들어갔지만 얼마전부터는 일체 생략한 후 인사후 잠시 침묵한후 곧장 참회고백의 기도를 바친후 자비송에 이어 미사를 시작합니다. 미사은총에 앞서 철저한 죄의 참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곳은 영성체전 마지막으로 죄의 용서를 청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로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 날로 정화,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자주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교회의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어제의 제1독서에 이은 오늘 제2독서도 참으로 인상깊습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요. 어제 오늘 완전히 지옥같은 장면입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합니다. 다윗의 경우가 그렇고 오늘 아합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어제 제1독서 열왕기상권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던 이제벨과 아합의 천인공노할 완전범죄가 오늘 엘리야 예언자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며 죄의 결과에 대한 무자비한 심판이 선고됩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흡사 하느님은 세상 곳곳의 사람들의 모든 행적을 살피는 CCTV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오늘 열왕기상권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 전율했습니다.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 통절이 깨닫습니다. 서두부터 긴박감이 넘칩니다.


‘나봇이 죽은 뒤에 주님의 말씀이 티스벳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서두로부터 일사천리 아합과 이제벨의 악행에 대한 심판이 선고됩니다.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섭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아합은 즉각적인 참회로 일단 살아있는 동안 재앙의 심판은 유보됩니다만 그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예고하시며 사실 그대로 됩니다. 


다윗의 경우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지만 이어 집안의 불행과 파란만장한 수난이 보속처럼 뒤따르지만 다윗은 끝까지 하느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보속을 충실히 수행함으로 성인이 되었습니다. 


얼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중 ‘죄를 회개한 다윗은 성인이 되었지만 부패한 솔로몬은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라는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삶의 부패를 막아줍니다. 하여 우리는 그 유명한 다윗의 통회 시편 51장을 선물로 얻게 되었고 오늘 방금 화답송 시편을 기도로 바쳤습니다. 


죄의 결과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용감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보속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죄에 대한 최고의 보속이자 처방은 사랑뿐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 대한 답을 복음의 예수님이 줍니다. 수녀님들의 피정기간 동안 복음의 배열이 참 은혜롭습니다. 6월14일 복음중 한 대목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구체적인 실례 여섯을 들면서 이들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화해하여라, 2.극기하여라, 3.아내를 버리지 마라, 4.정직하여라, 5.폭력을 포기하여라, 그리고 오늘의 6.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결국 여섯 모두는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새삼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아니라 더 열렬히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최고 보속의 행위는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하느님 사랑을 닮은 일방적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 원수요 박해하는 자들이지 하느님 눈엔 분명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 다운 아가페 사랑으로 이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좋아서 친밀한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아가페 사랑으로 이들의 처신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심리적으로 좋아서, 친밀한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원수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미워하는 것은 죄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싫어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다운 사랑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아가페 사랑의 원조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바로 이런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집착함이 없어 이웃을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이 이렇듯 높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믿어 주시는 예수님이 고맙습니다. 하늘의 아버지와 같이 완전해 지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제시한 우리의 궁극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바로 이 말씀이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최종의 답이자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게, 온전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아가페 둥근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이기적 불순한 사랑을 정화하고 성화하여 당신의 아가페 사랑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 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구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5, 43-48(연중 11주 화)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대당명제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여 달리 대우하던 관행을 뒤엎고, 다 같이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 45)

 

사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dPtnsarp서는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14)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한 대상임도 깨우쳐주십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 60 참조),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참조) 말입니다.


오늘,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나요?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대체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나요? 지금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 8-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하오니,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너와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곁에는 언제나 수많은 ‘너’가 있습니다.

‘나’ 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너’입니다.

‘너’는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는 ‘너’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어떤 ‘너’는 ‘나’에게 선이요 기쁨입니다.

어떤 ‘너’는 ‘나’에게 악이요 슬픔입니다.

‘너’에게는 ‘나’와 무관하게 ‘너’만의

하느님께서 새기신 고운 모습이 있습니다.

‘너’가 ‘나’에게 무엇이든

‘너’를 ‘너’로 품는 것이 사랑입니다.

‘너’를 ‘나’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너’가 ‘너’가 되도록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너’가 온전히 ‘너’가 되어

‘너’ 안에 담긴 하느님 모습을 드러내도록.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벨기에 출신의 죠셉 까르댄 추기경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분의 어머니께서 늘 간식을 여러개 만들어 주면서, “나가서 놀다가 가난한 아이들과 나눠 먹어라. 그리고 네 아빠가 어렵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라고 했답니다. 어린아이인 죠셉 까르댄에겐 그 말씀이 혹시 기를 죽이거나 부담을 가져다주진 않았을까? 추기경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비록 어렵더라도 늘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라고 가르쳐오셨기 때문에, 늘 어려운 형제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집안이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대대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안도 가난하지만 더 가난한 집안이나 남모르게 드러낼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라는 부모님의 성정이 아들 죠셉 까르댄을 추기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까르댄 추기경님이 많은 공부를 하고, 능력이 많아서 추기경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늘 어렵고 힘겹게 현세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하려 하고, 그분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셨기 때문에 추기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6-48절) 라고 하신 주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습니다. 유다인들이 죄인이라고 지탄하는 세리들보다, 구원의 대열에 선택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다른 민족들보다 낳으려면 아버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뭐 모자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그 확고한 믿음과 그 주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구원해주시리라는 변치 않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어렵고 힘겨운 형제들과 함께하려고 하고, 되는 만큼 나누고자 사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른 생각이 바른 행동이 된다. <마태 5, 43-4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보고, 듣고, 느낌에 따라 생각하는 원천이 됩니다.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느낀다는 것은 바른 생각에서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느님이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신자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워서 믿음을 가지고 살겠나?” 또한, “하느님의 존재도 인정하기 어려운데 보지도 못한 하느님을 닮아 완전한 사람으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구약은 원수가 개에 물어 죽게 하였으면 그런 사람도 개에 물어 죽게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면 믿음이 헛되게 됩니다.

주의 기도문을 외우고 기도하면서 하느님 따라 산다는 것,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이 어렵다면 하느님이신 주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 체험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며 스스로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고, 아버지로 인해 생명을 보존하며 산다고 고백하며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본받고, 그 나라에 살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과 땅처럼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주의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를 하면서 생각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 나는 자비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왔고 생명을 구하기 위하기 위하여 오지 않고, 대속물로 생명을 내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완덕에 이르는 사람은 힘은 봉사를 위하여, 가진 것은 나누기 위하여, 생명은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완덕에 이르려는 사람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봉사, 나눔, 친교를 보편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인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나라에 살며 주를 찬미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번 휴가 중 제가 직접 미사를 드리지 않고 참례하면서 강론을 듣고, 신자들과 같이 기도하고, 노래 부르며 영성체 줄을 따라 성체를 모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복음을 전하시오.” 하는 말을 듣고, 하느님의 자비와 일치와 생명을 만나는 사람에게 나누며 살다가, 수도자들과 함께 저녁 기도를 하면서 ‘이 좋은 곳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삶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하느님으로 살며 하느님의 완전을 따라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중매인 우리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원수란 무엇이고, 누구인가?

나한테 어찌어찌 해서 나를 아프게 하고 무엇보다도 불행하게 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런 사람을 오늘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 하시니 이 때문에 저를 포함하여 우리 중에는 용서치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자기를 심히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원수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원수 아닌 사람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참 이것이 문제입니다. 원수인 사람이 원수가 아닌 사람으로 개과천선하고, 나에게 용서를 청해오면 용서해주고 사랑해줄 텐데 그 원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고 나만 속이 탑니다.

그러니 용서치 못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나라면 그가 변하기를 바라고 있을 수 없고 내가 변해야 합니다. 용서치 못하는 나에서 용서할 수 있는 나로 말입니다.

우선 내가 변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용서치 못하는 것이 실은 용서해주고 싶지 않고, 그래서 용서하려고 마음먹는 것에서부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불행하게 한 사람은 내가 징벌하든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시든 징벌을 받아야지 나의 원한이 풀리고 그래서 더 이상 원수가 되지 않지요.

나는 무척 아픈데 그는 전혀 아프지 않고 나는 불행한데 그는 행복한 것이 너무 억울하고 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가 잘못을 뉘우치지도 용서를 청하지도 않아도 용서할 수 있고, 그가 징벌을 받지도 불행해지지도 않아도 내가 용서할 수 있으려면 내가 그보다 월등하게 행복해야 하고 그 월등한 행복이 월등한 사랑으로 인해 주어졌을 경우입니다.


증오는 결국 사랑에 의해 치유된다는 얘기인데 이 세상의 증오는 하늘의 사랑에 의해 치유된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만이 이 세상의 증오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도 되는 거지요.

물론 증오의 치유는 꼭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인간의 사랑을 받고서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 인간의 사랑이 신적인 사랑이어서 이 인간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중매가 되고 마중물이 될 경우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사랑이 증오를 치유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사랑에 도달하는 데에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의 중매쟁이들이 되는 오늘이 되시길...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에

전문가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불완전한 사랑의

전문가들입니다.


사랑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기에 제자신을

아프게 돌아보게 합니다.


불완전한

제자신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제자신또한

누군가의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청합니다.


미움과 분노

적개심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가로막는

오만과 교만을

깨닫습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온전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불완전이 있기에

완전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낮아지시는

십자가의 여정을

다시 만납니다.


낮아지는 것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과정에 충실한 것이

사랑의 본래 모습임을

믿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봉헌합니다.



러시아가 지금의 모습이 아닌, 소련 공산국가로 있을 때입니다. 사유재산제도의 부정과 공유재산제도의 실현으로 빈부의 차를 없애려는 공산주의로 인해 모든 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지요. 사람보다 사상이, 또한 경제보다 정치가 더 우선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이 나눠 쓰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경제는 악화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흉년까지 계속되자 소련 공산국가는 1%의 사람들을 특별 선별해서 나쁜 박토를 주고 자유롭게 농사지어 먹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그들 1%의 농민이 생산한 농업 생산량이 전체 소련 농업 생산량의 27%나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감자는 62%, 우유와 쇠고기는 34%, 계란은 47%의 엄청난 생산량을 기록했지요. 그때 비로소 소련 당국자들은 집단농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수정주의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노력의 결실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자 사랑과 애정을 쏟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농사가 잘 되려면 분명히 사랑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모든 진짜 성공의 밑바탕에는 언제나 사랑과 애정이 필요했습니다. 공부를 잘 하려면 공부를 사랑해야 하고, 일을 잘 하려면 자신의 일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잘 가지려면 상대방을 사랑해야 하고, 뜨거운 신앙을 갖고 싶다면 주님을 철저히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종종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사랑이 가끔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세우는 사랑, 내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다는 조건 가득한 사랑입니다. 이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진짜 사랑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반대하는 원수를 사랑해서 하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즉,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워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원수로 인해서 지금의 육적인 삶도 힘들어 죽겠는데, 주님 곁으로 가서도 그 원수 때문에 이번에는 영적으로 또다시 고통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누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뿐 사실은 모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어떤 사랑을 간직해야 할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철저한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참된 삶은 모두 만남에서 온다. 너를 통해 내가 되어 가며, 내가 되어 갈 때 나는 너를 말한다(마르틴 부버).


침묵의 힘

어떤 부인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서 말합니다.

“선생님 더는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은 너무 신경질적이고 잔소리가 심해요.”

의사는 한참 고민하다가 처방을 내렸습니다.

“우리 병원 옆에 신비한 샘이 있습니다. 샘물을 한 통 길어서 집으로 가져가세요. 남편이 귀가하면 샘물을 한 모금 머금으세요. 그런데 머금기만 해야지 절대 삼키면 안 됩니다. 처방대로 하시면 금방 효과가 있을 겁니다.”

부인은 처방대로 샘물을 길어서 돌아갔습니다. 그 날도 밤늦게 귀가한 남편은 평소처럼 짜증과 잔소리를 아내에게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인도 맞받아쳐 싸웠을 테지만, 그 날은 처방대로 신비한 물을 입에 머금었습니다. 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꼭 다물었구요.

얼마가 지나자, 남편은 잠잠해졌습니다. 그 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이지요. 그 날 부터 남편이 잔소리를 시작하면 부인은 어김없이 신비의 샘물을 입에 머금었구요.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남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신경질이 줄고 아내를 함부로 대하던 행동도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신비한 효과에 깜짝 놀란 아내가 의사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신비한 샘물이 너무 좋더군요. 우리 남편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의사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분이 변한 것은 물이 아니라, 당신의 침묵 덕분입니다.”

침묵의 힘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침묵을 지키면 바보 같고, 또한 패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대화는 상대를 찍어 누르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말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은 아픔과 상처를 줄 뿐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말보다 침묵이 효과적임을 깨닫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상대 스스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돌아볼 여유를 주는 것이 바로 침묵인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온전한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5,44)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한걸음 더’의 사랑은 지금 하고 있는 사랑에 뭔가 조금 더 얹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온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내어줄 때에 순수해야 하고, 내어주는 데 있어 조건이 없어야 하며, 한계를 정해놓고 사랑하지 말 것이며, 사랑하는 대상에도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선과 사랑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지 않고는 스스로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사랑의 방식 가운데 가장 맹목적인 신념은 ‘나도 사랑하고 산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랑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잘 해주는 사람, 가족과 친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면서 그것을 참 사랑이라 여기고 만족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제한이 있고, 조건이 있으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런 사랑은 결코 참 사랑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은 모든 것을 언제 어디서나 품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본질과 온전한 사랑의 방식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참사랑, 온전한 사랑으로 가는 길, 곧 행복의 길은 원수와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친밀한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 하여도 사랑하지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분의 제자라면 달라야만 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늘 걸려넘어지는 원수 사랑,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 사회적 약자들과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미운짓만 골라서 하는 이들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사랑을 위해 의식화가 필요하고 늘 마음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 때문’이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5,45)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사랑은 이해와 인내의 바탕 위에서 생겨납니다. 인내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힘써야겠지요. 오늘도 조건 없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우리이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미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부터 벌렁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이 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저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미처 사랑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피아노를 시작한지 5년이 넘었습니다. 아직도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시간이 나면 좋아하는 곡을 피아노 반주로 부르곤 합니다. 제가 부르기에 음이 높으면 조를 낮게 바꾸어서 부르기도 합니다. 음이 낮으면 조를 높게 바꾸어서 부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들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음을 들으면 계명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노래의 음들도 일정한 패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수준은 걸음마 정도입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연주할 것입니다. 단순히 건반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적인 감성을 건반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둑도 어려서 아버님께 배웠습니다. 역시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수담’을 나눌 정도는 됩니다. 포석이 중요하다는 것,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행마는 경쾌해야 한다는 것, 끝내기가 중요하다는 것, 승리 할 때는 겸손해야 하고 패했을 때는 받아들여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바둑의 고수들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바둑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도 하고, 묘수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한수를 둘 때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 바둑은 하나의 예술이고, 삶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만 유혹이 생기면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갈밭에 뿌려져서 뿌리를 내리려 하지만 곧 말라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의 것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해의 순간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뿌리는 내리지만 가시덤불 때문에 신앙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옥한 땅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박지성 선수는 환상적인 골을 넣곤 했습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는 90분 경기에 9번 넘어졌습니다. 10분에 한번은 넘어졌고, 하지만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골을 넣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축구선수는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고, 앞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좌절과 슬픔, 고통과 외로움의 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그 장벽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순간을 사랑하며’라는 책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현재(Present)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최상의 선물(Present)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는 11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성묘를 다녀왔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합장된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두분을 위해 연도를 바쳤고, 내려오는 도중에 작은 어머님의 묘에 들려 잠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5년 전에 돌아가신 요셉 큰 형님의 묘소 앞에서 또 현충원에 모셔진 8년 전에 돌아가신 베네딕도 둘째 형님을 위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하루의 일정이었습니다. 모두가 주님 안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불연 듯 일어났고 어제 하루의 화두였습니다. 

어찌보면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말도 있듯이 삶과 죽음의 차이가 참으로 모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잠시 땅에 몸붙여 하루하루 살다가 언젠가는 모두 세상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그냥 생각없이 하루하루 산다면 실상 죽어있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는 말마디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 앞에서’ 깨어 사는 것입니다. 하여 제가 피정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이 늘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죽음을 늘 기억할 때 모든 환상은 걷히고 오늘 지금 여기를 참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감사하며 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 의식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의식 안에 있는 이는 진정 살아있는 자요,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이들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살아있다 하나 하느님도 자기도 모른 채 죽어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의 대조가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앞에 깨어있게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열왕기상권 21장이 끝납니다. 양일간 읽고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정의에 전율했습니다. 독서의 주제가 하느님의 정의라면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정의가 우리 내면의 죄악에 민감하게 하여 오늘 화답송 후렴의 자비송을 끊임없이 바치며 더욱 하느님 사랑에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51,3ㄱ).


어제 독서는 아합과 그의 아내 이제벨의 공모가 완전 범죄처럼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나봇을 죽게 만들었고 그의 포도밭도 차지했습니다. 이들의 악행에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악의 끝없는 심연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그물은 성긴 듯 해도 이 그물을 빠져 나갈 자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로 도망쳐도 하느님은 거기 계십니다. 

오늘 열왕기상 21장 후반부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임금에 대한 하느님의 준엄한 선고가 뒤따릅니다. 물론 회개한 아합은 생전에 벌은 유보되지만 그 자손들과 이제벨에 내린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이 우리를 참으로 회개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길은 회개뿐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생과제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참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예수성심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감상적인,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무리 원수라해도, 박해하는 자라도 잘 되기를 바라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원수도 박해하는 자도 필시 나름대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며 치명적 사랑의 상처나 결핍 중에 악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들을 사랑하고 기도할 때 보복의 악순환도 끊어질 것이며 우리의 원수나 박해자도 악의 수중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공평무사公平無私,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차별없는 연민의 사랑, 자비의 사랑, 아가페 사랑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악인이듯 선인이든, 의로운 이든 불의한 이든 하느님께는 모두가 불쌍한 연민의 대상인 당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평생과제는 단 하나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기대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하루하루 평생 이 목표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완전성을, 온전성을, 자비하심을 닮아갈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으며,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시네요.

말도 안되는 소리거나 뭘 모르셔도 한참 모르시는 말씀이지요.

어찌 우리가 감히...

그런데 예수님이 완전하다고 하실 때의 논리를 곱씹어 보면 "아하~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내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안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이런 사람이든 저런 사람이든 다 알고보면 불쌍한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니 구별없이 사랑하면 된다네요.


인사를 하는데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된다네요.

"쉽죠~ 잉~"

완전하다는 것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끌어안는 전부를 뜻하는 말이네요.

그래서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내리신다구요.

오늘 사람을 차별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대함으로써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내게도 원수가 있었네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언제가 외롭고 지쳐있을 때

당신은 바쁘다고 지나쳐 버리더군요.

그 때 당신은 나에게 원수였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등 돌렸던

당신의 안타까운 입장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당신을 향한 미움 가득 했답니다. 


언젠가 내 자신이 기특해 당신께 자랑했더니

당신은 코웃음 치며 그냥 넘겨버리더군요.

그 때 당신은 나에게 원수였습니다.

나에게 겸손을 가르쳐준

당신의 깊은 뜻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당신을 향한 마음을 닫았답니다. 


언젠가 내 실수로 몸 둘 바를 모를 때

당신은 눈물이 날 정도로 질책하더군요.

그 때 당신은 나에게 원수였습니다.

다시는 실수하지 말라는

당신의 참 사랑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당신을 향한 비난 가득 했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가 있다면 사랑할 텐데

원수 없이 둥글둥글 사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가르침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결코 아니었네요.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속에서

수많은 원수들과 씨름하는 못난 나를 돌아보니

원수들을 이해하고 보듬기보다

내 마음대로 살리고 죽인 모진 나를 돌아보니 


원수를 사랑하여라! 


참으로 내게 주시는 예수님의

예리한 가르침임을 새삼 깨달으면서

마음속으로 다져봅니다. 


원수를 사랑할게요

 



숙명과 운명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운명은 바꿀 수 있어도 숙명은 바꿀 수 없다." 내 생각은 수시로 변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원수도 운명으로 만들어진 관계와 숙명으로 만들어진 관계로 구별됩니다. 남자로 태어난 사람을 용서한다고 여자가 되지 못하고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다른 사람의 부모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숙명으로 맺어진 관계는 온유함이나 겸손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한 빈 라덴을 끝까지 추적해서 살해하는 것, 금강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용서하지 못해 금강산에서 철수하고 용서를 못 하는 사건이나 남북이 숙명적인 대치 상태는 온유함이나 대화로 풀 수 없습니다.

구약을 보면 하느님의 힘으로 적을 죽임으로 해결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려면 주님이 용서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심 같이 죽음 같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라고 말을 하거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용서는 죽음보다 힘이 드는 일이구나.' 생각하면서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어떻게 알아듣고 실천해야 할까?

 

운명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해 바꿀 수 있지만, 숙명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바꿀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믿음으로 접근하면 하느님의 완전하심같이 완전한 자 됨으로써 그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죽어야 할 숙명에 놓인 인간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하느님의 완전하신 자비로 가능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미사에 자비송을 드리면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 주님!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비를 베푸심같이 오늘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내 원수와 오 내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열왕기 아합 왕의 말이 눈에 콕 들어옵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라는 말말입니다. 엘리아 예언자가 그에게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예언자라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인데 아합 왕에게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 원수이고, 다른 누구의 원수가 아니라 바로 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원수가 아닌데 왜 나에게는 원수가 되고, 왜 나는 그를 나의 원수로 만든 것입니까?

또 다르게 얘기하면 뭐 소유할 것이 없어서 원수를 나의 것으로 소유하였습니까? 우리는 돈을 좋아해서 내 돈, 내 돈 하는데 돈도 소유치 않고 원수를 내 원수로 소유하였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오, 내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원수’ 대신 ‘내 사랑’ 하는 사람은 얼마나 좋고, 원수 대신 사랑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행복할까요? ‘오, 내 사랑!’ 할 수 없을 거면 ‘이 내 원수’ 대신 ‘오, 내 돈!’이라고 함이 숫제 낫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굳이 원수를 내 것으로 소유합니다. 그런데 원수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을 터이니 싫은데도 소유하는 것이 원수일 터입니다.


그러면 왜 싫어하는데도 거절치 못하고 소유할까요?

말장난 같지만 거절하지 못하기에 소유하는 것이고,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가 싫어하기 때문이며, 싫어하는 이유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악인 선인이 따로 없고, 의로운 이와 불의한 이가 없을 겁니다.

오늘 아합 임금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는 것이며, 전에 말씀드렸듯이 불행한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오늘 주님 말씀 따라 큰 결심을 하는 겁니다.

욕심 대신 사랑을 가지고, 욕망 대신 열망을 지니자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사랑의 실천은

분명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빠져나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그 미움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하여 주시는

주님께 먼저 기도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믿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먼저 

만나게합니다.


분리될 수 없는

예수님과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원수까지도

돌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관계도

훼손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우리의

죄까지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또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마태오5,46)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이라도 제대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 복음 묵상의 화두로 건드려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던 상관없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랑다운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지금 각자가 하고 있는 사랑을 뒤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사랑을 합니다.

이기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자체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부모, 자식, 형제, 남편, 아내, 친구 등등, 수없이 많은 사랑의 범주에 넣어야 할 관계들.

그 중 어떤 사랑이던 정말 제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의 실패는 백 퍼센트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미움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실패하고 상처를 남기고 미움으로 이어졌다면, 그것은 원래부터 사랑이 아니었거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우리였음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진짜 사랑이라면 실패라는 말도 미움이라는 말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따라 사랑의 모양새도 달라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랑이던지 상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도록 허락하신 사람들, 그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대부분의 미움은 이해할 수 없기에, 납득할 수 없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5,48)

이 말씀을 우리는 본래 제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미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부터 벌렁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이 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저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합니다.  




하늘처럼 살라고 하시는 예수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부모님도 편애가 있더라고요.

자식이 단 둘인데도 차이를 두는 걸 보면 인간의 뇌구조 탓 같기도 합니다.

허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똑같이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생겨난 인생의 희비애락이 언제나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마음을 비우기란 정말 큰 도를 닦는 거지요.

하늘처럼 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좀 더 구체적으로 와 닿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5,44~45)”


 


만약 지옥에 있는 사람이 회개한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작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사채로 1000만원을 빌려 차를 구입하고 택시영업을 하던 24살의 김씨는 생각보다 수입이 높지 않아 원금은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매달 이자만 100만원씩 갚아야 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인터넷으로 가출청소년들을 고용해 전기충격기를 주며 자신의 집 부모님의 통장을 훔치고 통장번호를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성공하면 각자에게 1000만원씩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아버지가 뛰어나와 그들을 제압했고 그들은 도주했다가 2시간 만에 잡혔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아들이 꾸민 짓임을 알고 부모는 경찰들에게 대신 사죄를 했습니다. 공범들도 아들의 지시로 한 행동이니 잘못이 없다고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재판에서는 패륜적인 범행을 저지를 데에 엄중한 처벌이 요구되지만 아들을 용서하는 부모님에게 진정성이 있고 잘 교육하겠다는 의견을 수렴하여 김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했습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원수가 될 수 없나봅니다. 이렇게 인간의 사랑도 엄청난데 하느님의 사랑이야 그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셔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은 원수가 없으시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지옥에 있는 사람도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받아들이실까?’

하느님께는 원수가 없으십니다. 즉, 지옥에 가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미워하셔서 억지로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이라도 지금 당장 회개한다면 하느님은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은 절대 회개할 수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도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신하도록 놓아주십니다. 더 이상 당신의 영역에 있는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개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유다를 미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언제라도 돌아오면 반드시 다시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절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옥에서 그런 혹독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회개를 우리 힘으로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분의 성령의 힘이 우리를 끌어오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행동을 바로잡는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니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목자이고 세리와 죄인들이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그들이 죄인들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그들과 함께 머물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 양 한 마리가 회개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셔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을 돌려주시고 우리를 안아 안전한 길로 옮겨주시는 하느님의 행위가 주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을 보고 도망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즉,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를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인도하셨던 것처럼, 회개는 하느님의 힘, 더 구체적으로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가셔서 그를 당신께 대한 사랑으로 끌어오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하느님께서 그 마음 안에 머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전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지옥은 하늘과 가장 먼 ‘땅’의 맨 밑바닥입니다. 그 곳에는 하느님께서 가시지 않습니다. 그저 밟히기만 하고 더러워지기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이 지옥이고 그런 마음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성령께서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다가 지옥으로 갈 것을 알면서도 목을 매달아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으러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를 안아 하늘로 데려가도록 자신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우리가 누구도 거부하거나 내몰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저 사람과 있으면 힘만 들고 상처만 입어. 저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아야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모두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옥에 있는 사람이라도 회개할 수 있으면 당장 그를 안아주실 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누구를 밀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좋은 사람들과만 어울리려 해서도 안 됩니다. 마치 태양이 모두를 비추고 비가 모두에게 내리듯이 우리 사랑은 그렇게 모두에게로 향해야합니다.


  


둥근 사랑, 둥근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둥근 사랑, 둥근 삶, 둥근 마음입니다. 가을 익은 둥근 열매들처럼 우리 사랑도 익어갈수록 둥글어 집니다. 처음부터 둥근 사랑이 아니라 익어갈수록 점차 둥근 사랑, 둥근 삶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평생 과제를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를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여기서 완전함은 '완벽함(perfectness)'이 아닌 온전함(wholeness)을 뜻합니다. 완벽함은 웬지 모난 직선의 느낌이지만 온전함은 둥근 곡선의 느낌입니다. 사랑도 성장 성숙 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원숙(圓熟)한 둥근 곡선의 사랑이 됩니다. 봄, 여름, 가을, 온갖 시련을 겪어가며 익어가는 둥근 열매이듯 사랑도 그러합니다. 오늘 주님은 이런 사랑의 구체적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상징하는바 불편한, 불쾌한 경우에 해당되는 모든 이들입니다. 살다보면 무수히 겪는 체험입니다. 마음으로 좋아서 사랑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내 눈에 몰라서 원수지 하느님 눈에는 분명 그만의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판단이나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원수도 삽니다. 원수에 대한 보복심은 어찌보면 악마의 교활한 유혹일 수 있습니다. 원수 사랑에서 고귀한 품위의 모습도 서서히 형성되어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둘째,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노골적인 박해도 있겠지만 넓은 의미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이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방법은 기도뿐이 없습니다. 

박해하는 자들 또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박해하는 자들은 물론 나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래야 은총을 통한 변화로 나도 살고 박해하는 자들도 삽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셋째, 차별없는 공평무사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악인도 선인도, 의로운 이도 불의한 이도 다 똑같이 살 권리가 있고 하느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온갖 판단을 멈추고, 하느님 같은 공평무사한,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도 선인도, 의로운 이도 불의한 이도 우리의 불완전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알고 판단할 분은 하느님 한분 뿐입니다.

 

어제 나봇의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죽음도 충격이었지만 오늘 엘리야를 통한 아합에 대한 하느님의 선고 역시 충격입니다. 새삼 하느님은 온 세상을 바라보는 눈자체이자 온 세상의 말을 듣는 귀자체시요,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나봇과 아합의 사례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하느님 앞에서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다운 사랑에 항구할 수 있음 역시 은총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할 때 주님은 이런 사랑의 선물을 주십니다.

 

어제 읽은, 최근 출간된 오리게네스의 '원리론'(한국연구재단 총서567)에서 오리게네스의 아름다운 인품에 대한 한 대목을 나눕니다. 

-그는 매우 겸손하고 질투심이 없었으며 권력에도 부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친구와 반대자들에게서 부당한 억압을 받았지만 이를 불평없이 견뎌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었지만, 그는 진리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필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의에 차 있었으며 생활방식은 철저히 금욕적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늘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 애썼으며, 실제로 순교한 이 못지 않은 삶을 살았다(위의 책64-65쪽).-

 

어제 저는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 둘을 받았는데 하나는 이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받은 위의 책이며, 하나는 최빠코미오 원장님으로부터 받은 제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에 관한 행사 (2014.7.11. 오전 11시- 요셉수도원에서 축하미사 후 축하연 예정) 소식이었습니다. 새삼 이런 저런 무수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게 하시고 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달라는 자에게 주고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1909. 10.26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고 순국했던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 토마스)의 어록 중에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어보면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보물 제569-6)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외로운 한 청년은 알아주는 이 없는 감옥에서 한 삶을 마쳤지만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긍지와 사랑을 갖고 나라의 독립의 꿈을 간직했던 것입니다.

안중근의 글과 반대의 의미를 아합 왕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왕이면 아쉬울 것도 없을텐데 무엇을 더 갖겠다고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습니다.

나봇의 포도밭의 이야기를 보면 지도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게 됩니다.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가지고 있는 포도밭을 자신의 궁전을 짓는 터로 강제수용의 뜻을 가진 아합왕의 야욕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대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남에게 넘겨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임금이라도 자신의 포도밭을 내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합 왕의 부인 이제벨의 계략으로 불량배들의 허위증언으로 나봇을 죽게 만들고 그 밭을 자신의 남편 아합 왕에게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합왕이 보여주는 욕심의 삶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이신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넘어서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 옷까지’ 주고, ‘천 걸음을 강요하는 자에게 이 천 걸음’가 주는 것으로 원하는 이상으로 베풀라는 가르침이신 것입니다.

동태복수법은 손해 본 모습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법은 원하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베풀라는 말씀이시지요.

전자는 수동적인 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적극적인 법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대로라면 이득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 자본주의는 이익창출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이기주의로 치닫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 아니라 이익을 챙기는 기계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과제가 당연히 따라 오는 것이지요. 

손해를 본다는 것은 이익을 챙기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나봇의 포도밭에 대한 아합왕의 끝 없는 탐욕이 결국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듯이 우리의 목숨 또한 희생하려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탐욕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재물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아울러 빈 마음으로 베푸는 실천의 삶을 당부하십니다. 

사실 주님의 삶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이다. 어디에도 매이거나 갇히는 것이 없는 참다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이 말씀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불의한 이든 의로운 이든 간에 모두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차별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원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고 가족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원수 같은 사람'은 있습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또는 "이웃이 원수 같은 행동을 할 때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가 우리의 숙제입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점 귀신 들린 여자 하나가 날마다 바오로 사도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사도 16,16-17). 

그 여자가 하는 말 자체는 옳은 말인데, 그런 행동은 사실은 바오로 사도의 선교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괴로워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사도 16,18)."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악령'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여자에게서 악령을 쫓아낸 일은 선교활동을 하는 바오로 사도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그 여자에게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악령을 쫓아낸 일은 그 여자를 악령에서 해방시켜 준 일이고, 그 여자에게 사랑을 실천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수난과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을 말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하시면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6,23).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를 꾸짖으신 것은 사탄의 유혹에서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으신 일은 사랑입니다. 그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그냥 쫓아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베드로 사도의 행동은 원수와 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원수 같은 사람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꾸짖으셨고, 그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사람'은 모두 이웃이고 가족인데, 이처럼 사람이 아닌, 진짜 원수들이 있고, 그것들이 사람에게 작용해서 원수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사탄(악령), 나쁜 욕망, 우리를 유혹하는 세속'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죄 짓게 만들고,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원수들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사랑하면 안 되고, 무조건 쫓아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탄의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고, 그 사람을 사탄에게서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꾸짖거나 타일러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나쁜 욕망을 사랑하면 안 되고, 그것을 눌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서 죄를 짓고 있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고, 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죄 짓게 만드는 세속의 유혹을 사랑하면 안 되고, 또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항상 선(善)을 지향해야 하고, 선(善)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여라."입니다. ("박해를 더 잘하라고 기도하여라."도 아니고, "박해자들이 박해를 계속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하여라." 도 아닙니다.)

박해는 악(惡)이고, 회개는 선(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善)이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시고 꾸짖으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미워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선(善)의 실현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꾸짖으시되 귀여운 아들에게 매를 드는 아비처럼 하신다(잠언 3,12.공동번역)."

"자식이 미우면 매를 들지 않고, 자식이 귀여우면 채찍을 찾는다(잠언 13,24.공동번역)."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는 동안 우리는

계속 깨닫고 배워야 하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사랑만이 어렵고 억울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관계를

포용할 수 있는 기적이 됩니다.


사랑은 때론

혹독한 대가를 치러며

성장해 나가는 변화의

선물이 됩니다.


아프지 않고서는

변할 수 없습니다.

고통스럽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변덕스러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것또한

사랑의 놀라운 힘입니다.


행복의 시작도

사랑이듯

고통의 시작또한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살아있는 지금 이순간을

주님과 함께 맘껏

살기 위해서입니다.


뜻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작하면 주님께서

온전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사랑의 위대한 가치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시간과

불완전한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또한 고통과 아픔만을

받은 피해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고통을 주고있는

가해자들이기도 합니다.


고집스러운 실패의 연속을

다시 성장으로 바꾸는

현실적인 대안은

그들을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우게 하는

아픈 친구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판단은

원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건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깊은 산골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수사님께 사람들이 찾아와 묻습니다.

“수사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수사님의 믿음을 저희에게 보여주세요.”

이 말에 듣고 한참 동안 먼 산을 바라보던 수사님께서는 “제가 저기에 있는 산이 제게로 다가오게 하여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앉아서 기도를 하십니다. 사람들은 잔뜩 기대를 하면서 산이 움직이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던 수사님께서 산을 향해 소리칩니다.

“산아, 내게로 오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이 움직였을까요? 아닙니다. 저 멀리에 있는 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사님께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산아, 내게로 오라!”라고 외쳤지요. 한참을 이렇게 외치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산아,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가면 되지 뭐!”

그러면서 산을 향해 자기 자신이 떠났습니다.


이 수사님은 사기를 친 것일까요? 아닙니다. 수사님의 메시지는 무엇이든지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것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반대로 내가 그것을 향해 떠나라는 것이었지요. 믿음 역시 내게 저절로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믿음을 향해 적극적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상대방의 사랑이 내게 만족을 가져다주길 바라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사랑이 다가오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랑을 향해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힘든 말씀을 하시지요. 즉,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복수하지 말고 참아라.’ 정도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피해라.’ 정도 역시 노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스스로 완벽한 사랑을 해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즉, 우리가 그 사랑을 향해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비를 내리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판단내리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똑같은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판단 받지 않으며, 주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바꾸어야 할 사랑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벽한 사랑을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고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게 하기까지 8할이 ‘슬픔’이라는 거름이다(이정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자

성소후원회 특별회원 이상에게 그리고 교구 성소후원회 임원과 본당 성소후원회 회장님들께 복음말씀을 아침마다 발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원이 늘어나면서 문자메시지 발송 비용이 꽤 발생하더군요. 거의 한 달에 30만 원 정도의 문자메시지 발송비가 생깁니다. 그러던 중에 통신사에서 좋은 상품을 내놓은 것입니다. 글쎄 무제한 문자메시지 상품입니다. 곧바로 이 상품으로 바꾸었고 한 달에 30만 원 정도의 문자메시지 발송비를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회원들이 이 문자메시지가 좋다고 제게 보내달라고 청하십니다. 특히 본당에서 열심히 성소후원회 봉사를 하시는 본당임원들께서도 부탁을 하시더군요. 저는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문자 무제한이니까 본당임원들까지도 발송해드리자.’

그리고 어제 테스트 겸 해서 문자메시지를 처음 발송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통신사로부터 이러한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입니다.

‘약관에 의거 1일 5백건 문자 발신 시 추가발송 안되며 스팸발송 시 30일간 이용 정지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이러한 메시지와 함께 발송이 되지 않습니다.

‘고객님은 문자메시지 하루 최대 발송건수인 500건을 초과하여 전송이 불가합니다.’

약관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는데, 하루에 5백건 이상의 문자를 발송할 수가 없나 봅니다. 그러면서 걱정이 되었지요. 사람들에게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말이지요. 그 약관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지요.

주님의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마음의 새겨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박해하는 사람이나 박해받는 사람이나

우린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같은 사람으로서 누굴 위한 박해와

광기인지를 물게 됩니다. 


다시금 삶의 무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우리를 천박하게 만듭니까.

하느님조차 다가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삶에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확실한 도피처가 마치 신앙의 본질인양

마구 왜곡시켰어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어오신 이유를 묻고 또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온전한 기도입니다.

온전한 기도가 참된 사랑의 시작이 됩니다.

자신이 먼저 정화되지 않고서는 다른 이를 진정

사랑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종교적 건물 사이로 쓰러져있는

수많은 사람을 봅니다. 우리가 박해한 사람들입니다.

더이상 종교가 또다른 권력이 되어 사람을 박해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종교에 사랑과 기도가 빠져있다면

더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침묵속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처럼 길 잃은 한마리 양이 우리자신이라는 것을

새롭게 만납니다. 


오늘 이 하루는 우리 자신이 참된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먼저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고통과 시련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왜 그렇지 못한가를 말하면서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세상에 일정하게 정해진 삶의 표준이나 기준이 있을까요? 즉, 행복과 불행이라는 구분을 정확하게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래서 내가 불행한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 나만 불행하고 이렇게 못 살까? 왜 나만 가진 돈도 그리고 재능도 없을까? 왜 나만 부모 복이 없고 자식 복이 없을까? 왜 나만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기준은 남에게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기준은 나에게서 시작되며,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불행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자처하면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기준을 쫓으려고 하기 보다는, 그 행복을 자기 자신 안에서 찾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길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으며, 또 몇몇은 당연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해주시는 길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반드시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길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의 길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올바른 길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할 때의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과연 편안하고 행복하셨습니까?


우리들 모두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한다고 우리들을 곧바로 벌하십니까?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완전한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그 완전한 사람이 될 때 완전한 행복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16일까지 덕적도로 신학생 하계MT를 다녀옵니다. 그래서 16일까지 새벽 묵상 글을 올릴 수 없다는 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하계MT 잘 다녀올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사랑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것(원태연).


안녕히 가세요.

어제 아침 인천교구 전교구장님이셨던 나굴리엘모 주교님께서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게 견진성사를 주셨고 또한 사제서품까지도 나굴리엘모 주교님으로부터 받았기에, 늘 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뵐 수 있을까 싶습니다. 주교님의 연세가 벌써 86세나 되시기에 장거리 여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상하신 주교님, 검소하신 주교님, 사랑 가득하신 주교님.

주교님의 이러한 모습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합니다.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기

한창현 신부님

여러분은 원수가 있습니까 ? 정말 미워하고 꼴보기 싫은 원수가 있습니까 ? 또 여러분한테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있습니까 ? 목숨까지 바칠 사랑하는 그 대상이 있습니까 ?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을 원수에게도 보낼 수 있는지요. 사랑의 최고점은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갑니다. 가는 길에 어떤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모래 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그들은 물을 마시기도 하고 목욕을 합니다. 뺨을 맞은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자 때린 친구가 구해 줍니다. 늪에서 빠져나온 친구가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돌에 새겼습니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다 !” 


친구가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 위에 적었는데, 너를 구해 주었을 땐 왜 돌에다 새겼니 ?” 글을 쓴 친구가 말했습니다. “누군가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하지 않을까 ?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 좋은 일을 해주었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새겨야 할 거야 !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


 



세계에서 가장 긴데 반해서 아주 간단한 러브레터는 무엇일까요? 좀 이상하지요? 가장 긴 러브레터인데 동시에 아주 간단하다는 것.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러브레터가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875년 프랑스의 마르셀 레쿠르르가 연인인 마르엔느에게 썼던 러브레터라고 하는데요. 글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의 ‘Je T'aime(주뗌므)’를 자그마치 1,805,000번 되풀이해서 적었답니다. 


어떻습니까? 가장 긴 러브레터인 동시에 아주 간단한 러브레터가 맞지요? 사실 이렇게 쉽게는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러브레터를 쓴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걸릴 것이고, 똑같은 글을 반복해서 적는다는 것은 웬만한 정성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셀 레쿠르르는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렇게 역사적으로 기록되는 러브레터를 정성을 다해 쓸 수 있었고, 그리고 실제로 연인 마르엔느로부터 사랑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을 하려면 이러한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야말로 상대방을 움직이게 만들고, 상대방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만의 기준에 맞춘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에 빠진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나만을 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 집착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랑도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세상의 사랑은 대부분 나만을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으로는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음을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완전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꼬마아이가 자기 동생을 자주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어린 동생을 그렇게 때리면 되겠니?”하면서 이 아이를 나무랐다고 합니다. 이에 이 아이는 “쟤가 내 말을 듣지 않았잖아요.”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엄마는 “그러면 네가 엄마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때린다면 좋겠니?”라고 물었지요. 

그제야 꼬마아이는 자기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동생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아서 때려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자기는 엄마 말을 더 듣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기를 때리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자기만의 기준에 맞춘 사랑도 또 세상의 기준에 맞춘 사랑도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앞세워 완전한 사람이 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마련하신 멋진 상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은 가능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더 나은 세상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아룬다티 로이).


우산을 접은 아이들(손일락, ‘꿈에 미친 청춘을 응원하라’ 중에서)

일본은 화산지대에 속한 나라인지라 유난히 온천이 많지. 특히 벳푸는 해마다 천오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는구나. 이런 벳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코스를 꼽는다면 바로 다쓰마키 지옥이라 불리는 곳이지.

아빠가 다쓰마키 간헐천을 구경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더구나. 아빠는 우산을 받쳐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중간쯤 왔을까, 문득 길 한편을 보니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걷고 있더구나. 차림새로 보아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이란 짐작이 들었다.

마침내 마쓰마키 지옥에 당도하니, 가이드가 마치 우주선 발사를 앞두고 카운트다운을 하듯 손나발로 분출 시각을 알려 주더구나. “3분가량 남았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들린 직후였다. 수학여행단의 교사처럼 보이는 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뭐라 외치자 학생들이 일제히 우산을 접는 게 아니겠니? 여전히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말이다. 잠시 후 간헐천은 무서운 기세로 뿜어져 나왔고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간헐천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어린 중학생들이 간헐천이 분출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놓칠까 봐 우산을 접는다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일까? 남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씨! 아빠는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글쎄 시험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는데 뜻밖에도 자기가 전혀 보지 않았던 부분에서 시험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그 시험문제는 ‘석탄으로 알코올을 얻는 방법을 쓰라’였습니다.


보기는 봤는데 도대체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짜내려고 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풀어내는 화학공식이나 부호가 도무지 떠오르지를 않아서 결국 이 학생은 아주 간단하게 답을 이렇게 썼습니다.


“석탄을 팔아서 알코올을 산다.”


학생은 교수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고 낙제까지 당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분명히 이것이 아닐 테니까요. 그런데 담당교수님께서는 이 학생을 불러서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너는 석탄으로 알코올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냈구나. 물론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너의 새로운 생각에 높은 점수를 주도록 하마. 그러나 다음부터는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원하는 답을 써야 된다. 알았지?”


교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에 이 학생은 홀딱 반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 뒤 교수님 과목은 더욱 더 열심히 들었고, 다음 시험에서는 교수님께서 원하는 답을 써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교수님과 학생의 모습이 우리와 주님과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내 뜻에 맞게만 행동하면서 죄로 기울어지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혼을 내실만도 한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다시 우리들을 받아주시고 토닥거려 주십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학생이 교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랑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 쉽지 않지요. 그러나 원수같이 말을 잘 듣지 않는 나를 그리고 예수님의 뜻에 정반대로 행동하는 나를 용서해주시고 또 크신 사랑으로써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베푸는 그 사랑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앞서 학생이 교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지요. 그런데 그 좋은 성적은 누구 것일까요? 교수님 성적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그 학생의 성적이고, 학생만이 혜택을 받은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베푸는 사랑도 하느님 나라에 쌓는 우리의 보물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나에게만 이로운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승자는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을 보면 존경심을 갖고 배울 점을 찾지만 패자는 질투심을 갖고 그의 갑옷에 구멍 난 곳이 없는지 찾아본다.(J. 하비스)


삶을 아름답게 하는 메시지

*첫 번째 메시지*

남자는 여자의 생일을 기억하되 나이는 기억하지 말고,

여자는 남자의 용기는 기억하되 실수는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메시지*

내가 남한테 주는 것은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내가 남한테 던지는 것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 번째 메시지*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네 번째 메시지*

먹이가 있는 곳엔 틀림없이 적이 있다.

영광이 있는 곳엔 틀림없이 상처가 있다.


*다섯 번째 메시지*

달릴 준비를 하는 마라톤 선수가 옷을 벗어던지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잡념을 벗어던져야 한다.


*여섯 번째 메시지*

두 도둑이 죽어 저승에 갔다.

한 도둑은 남의 재물을 훔쳐 지옥엘 갔고,

한 도둑은 남의 슬픔을 훔쳐 천당에 갔다.


*일곱 번째 메시지*

남을 좋은 쪽으로 이끄는 사람은 사다리와 같다.

자신의 두 발은 땅에 있지만 머리는 벌써 높은 곳에 있다.


*여덟 번째 메시지*

행복의 모습은 불행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죽음의 모습은 병든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홉 번째 메시지*

웃음 소리가 나는 집엔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 소리가 나는 집엔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


*열 번째 메시지*

황금의 빛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애욕의 불이 마음에 검은 그을음을 만든다.


*열한 번째 메시지*

어떤 이는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재물과 싸운다

가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재물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적다.


*열두 번째 메시지*

느낌 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 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 희생 없는 사랑 하나 마나.


*열세 번째 메시지*

마음이 원래부터 없는 이는 바보이고,

가진 마음을 버리는 이는 성인이다.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이는 똑똑한 사람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열네 번째 메시지*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열다섯 번째 메시지*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낮이 즐겁고,

육체로 결혼한 사람은 밤이 즐겁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은 밤낮이 즐겁다.


*마지막 메시지*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늘 기쁘게 사는 사람은 주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원수 사랑

김훈일 신부님

살아가면서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쁘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상처 주고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 상처 주고 미워하다가 죽기를 바라는 원수가 생기기도 합니다. 죽도록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이고 원수만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결코 원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용서했다고 또는 안 했다고 해서 원수에게는 어떤 이익이나 손해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수와 증오심으로 자신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죄악을 돌아보라는 말씀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죄악이 우리를 해치기 전에 주님이 내미신 용서의 손길을 잡고 이웃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용서할 때 우리의 삶은 진정 아름다워집니다. 용서가 가장 큰 승리입니다.




완벽주의, 잘못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완벽해야한다는 것과 완벽해지려하는 것은 비인간적이 된다는 시각 사이에서 갈등을 해 온 것 같습니다. 또 사회에서는 정말 완벽주의란 말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반대학 다닐 때 한 여자후배와 함께 걸을 때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는 빈틈이 없어.”

그래서 자신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에게 완벽주의가 있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쉽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라도 빈틈을 많이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본래 말도 안 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농담도 많이 하며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걸 원하는 건가?’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형은 혼자는 잘 살지만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하느님이, ‘왜 너 혼자 왔니? 쓰러져가는 네 형제들은 왜 함께 데려오지 않았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쓰러질 땐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먼저 완전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함께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형제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왜들 쓰러지고 그래?’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함께 쓰러져보기로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함께 울고 아파하고 싶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신부님은 답답하다느니, 인간미가 없다느니,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안 산다느니, 사는 것이 군인 같다느니, 자신은 완벽주의적인 사람은 싫다느니 하는 등의 참 많은 충고를 들었습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시선으로 보나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에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도 여러 번 그런 충고대로 되어보려고 했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저에게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넘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혹 옆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기대어 버틸 수 있도록 흔들림 없이 곧바로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위 사람을 위해서도 더 좋습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나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젠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 절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생각에 힘을 주는 가장 큰 말씀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연 불완전한 것이 인간적일까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스스로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인간답다는 의미는 완전한 인간을 두고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할 수 없어.”라고 하며 자신의 불완전을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불완전한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된다는 말은 ‘완전한 사랑’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완전하다는 의미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라고 풀이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똑같이 미워한다면 하느님나라에서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완벽주의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옳지 않은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습대로 더 완전하게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태양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닮도록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묵상>>

오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가리옷 유다를 끝까지 감싸주시고 사랑하셨고 또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모범에서 정말 원수를 사랑하시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 그것이 가능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책과 영화로 유명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사형수들의 어머니 조성애 수녀님이 대법원에서 사형제도의 합헌이 결정되자, 사형수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식’이라고 하였고, 그렇게 똑같이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범죄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영철에게 4대 독자인 아들, 아내, 그리고 어머니까지 무참히 살해당한 고정원씨가 유영철을 용서한다고 할 때 같이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물론 그 분의 딸까지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인간적인 감정을 넘어서지 않으면 하느님께 칭찬받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넘어선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들이 가식으로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씨앗이 따스한 햇살과 수분이 있는 흙 안에 있어야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새싹이 나올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자신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며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변화되면 될수록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그분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으로는 용서나 사랑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기도는 이미 감정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은총의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싫은 것입니다.

기도는 은총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그 초자연적 은총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저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술집 여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니 기적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재시작하는 가정을 보았고, 또 바람피우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니 남편이 밉기보다는 불쌍해 보여 가끔 집에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잘 대해준다는 자매님도 만났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사적으로 따를 줄 알아야겠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나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김기현 요한 신부님

학부 2학년 땐가 중세 철학사 시간이었습니다. 교수 신부님이 아오스딩의 어떤 이론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제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저희 반이 제출한 리포트 중에 제 것을 찾아 확인해 보셨습니다. 르네상스에 관해 쓰는 것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4~5장씩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장 썼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을 보더니, 공부도 안 하고 성실하지도 않다면서 저의 리포트를 찢어 버리고 ‘넌 재수강이야~’ 라고 말씀하시고 수업을 끝내셨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었지만,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래서 은밀한 장소(?)에 숨어서 많이 울었는데, 그 사이 동기 몇몇이 신부님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벌이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저에 대해 이것저것 좋은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후 늦게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신부님은 왜 공부를 안 하는지,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대답을 했고, 신부님은 다시 열심히 해 보라며 벌을 조금 낮춰서 재시험을 보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시험을 못 보신 다른 두 수사님과 재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셋 다 통과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3년간 휴학을 했고, 다시 3학년으로 복학했습니다. 그 때 다시 그 신부님 과목을 듣게 되었습니다. 형이상학이라는 과목이었는데, 마지막 철학 과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신을 못 차렸는지, 그 과목을 또 소홀히 했던 것 같습니다. 기말 시험을 봤는데, 결과는 재수강이었습니다. 4학년 때 그 수업을 다시 듣지는 않았지만, 신부님이 내 주신 과제를 해야 했고, 시험을 다시 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과제를 하고 시험을 다시 준비하면서 제 삶에 전체적으로 부족했던 ‘성실함’을 조금씩 배워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신부님이 나를 싫어하시나, 내가 찍혔나...’ 라는 생각과 함께 부정적인 마음도 많았지만, 그 때 신부님이 나의 불성실함을 강하게 지적해 주지 않으셨다면, 변화된 모습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합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느님의 길을 알려주는 엘리야가 없었더라면,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엘리야가 방문하자, 왕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 왔소?'

우상숭배와 죄와 교만함에 빠져있던 왕은 엘리야의 말이 듣기 싫었던 겁니다.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의 말이 하느님의 말이 아니라 원수의 말로 들렸던 겁니다. 그런 그가 오늘 독서에서야 엘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고, 그를 살려주십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아합 왕처럼 나의 잘못을 들춰내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야처럼 바른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끈기 있고 성실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의지, 원수 사랑의 마중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너무도 심오하기에 여러 각도에서 묵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원수 사랑과 기도의 차원에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이 눈에 뗬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요?

아무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도 원수가 원수인 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수란 사랑할 수 없고, 복수하고픈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지금 원수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까지 원수였지만 이제부터는 적어도 원수가 아닌, 나아가서는 사랑의 대상인 사람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굳이 지금 원수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저절로 우러나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의지로 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저절로 우러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의지로 바치는 기도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억지”이지요.

저는 고백성사를 주면서 이런 억지를 보속으로 요구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덧붙여 하는 말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에게 저주를 쏟는 내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내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빼면 원수 사랑의 의지는 억지이고 원수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억지, 곧 원수 사랑의 의지가 하느님 은총의 마중물입니다.


아, 그러나 이 말도 조심해서 이해해야겠습니다.

원수 사랑의 의지가 없으면 원수를 사랑케 하는 하느님의 은총도 없다는 뜻이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보다는 알량한 자기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을 받아 사랑해야 하는데 이 사랑의 의지가 하느님 사랑을 갈망하기에 하느님 은총의 마중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극복되어야 할 ‘끼리끼리’ 문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잠시라도 집단적인 따돌림을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공동체로부터 배척받고 울며 돌아선 적이 있으십니까? 그도 아니라면 어떤 장소에 갔었는데, 군중속의 철저한 고독을 맛본 적은 없으십니까? 그곳에 있는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가운데, 그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상황에서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탓에 저는 그런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마음 느긋하게 먹어보지만, 참으로 잊고 싶은 기억들입니다.

사실 인간사회에서 ‘끼리끼리’ 문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사람, 안면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만만하고 격의 없는 사람과 같은 식탁에 앉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지나치면 꼴불견이 되고 맙니다. 최근까지 학교 안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현상’ 그것처럼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집단 따돌림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몇몇 청소년들과 자녀들 못지않은 충격으로 괴로워하시는 부모님들을 만나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평생 가슴에 안고 가게 될 그 쓰라림, 그 악몽 같던 순간의 느낌, 그 상처가 떠올라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보다 폭넓은 사랑, 큰 사랑, 관대한 마음을 지닐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늘 열린 마음으로, 깨어있는 자세로, 큰마음으로 주변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그 누군가가 철저한 소외감에 피 눈물 흘리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그 누군가가 아무하고도 못 어울리고 혼자서 그 서먹서먹함을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기 위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지닌 사람입니다. 기꺼이 그런 사람에게 다가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겨우 16세의 나이에 노인들이 주로 걸리는 루게릭병(근육이 서서히 마비되어가는)에 걸려 절망 속에 살아가던 한 소년과 그를 끔찍이도 챙기는 천사 같은 친구의 아름다운 사연을 읽었습니다.

천사 같은 친구는 루게릭병으로 움직임이 불편한 친구의 손발이 되어주기 위해 학년 초만 되면 교무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제발 친구와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정말 착한 친구이지요. 피보다 진한 우정에 감동된 선생님들께서는 흔쾌히 청을 들어주어 둘은 3년간 단짝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3년 내내 화장실 출입은 물론 급식, 수업준비 등 모든 것을 도와준 친구의 모습에서 예수님 사랑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때로 너무 멀리 계신 듯 여겨지지만, 의외로 가까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이웃들 안에 계십니다. 특히 배우자 안에, 자녀들 안에, 친구들 안에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매 순간 처리해야할 지긋지긋한 일상의 일들 안에, 별 일도 아닌데 견디기 힘든 굴욕감을 주는 사소한 사건 안에, 원치도 않은 병치레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세상만사 안에, 가장 가까운 이웃들안에 현존해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어느 은행에 수수한 옷차림을 한 중년 남자가 들어섰습니다. 그는 창구의 여직원에게 다가가 새로운 사업을 벌이려고 하는데 은행 측과 의논할 일이 있다며 담당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남자에게 여직원은 친절하지 못했지요. 더군다나 그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터라 단순히 기다리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 

한 시간이 흘러도 담당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중년 남자는 여직원에게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은행 문을 나서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기억났는지 다시 창구 여직원에게 돌아와서 말합니다. 

“여기 주차권이 있는데 확인 도장을 좀 찍어주시겠습니까?”

이에 여직원은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선생님은 이곳에 와서 돈을 입금하거나 인출하신 일이 없으시잖아요. 안됐지만 주차 도장을 찍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곤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이었습니다. 무안을 당한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은행을 떠났지요. 

다음 날 아침, 은행에 근사한 양복을 갖춰 입은 신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어제 무안을 당했던 남자였지요. 그는 은행에 예금해 놓았던 수천만 달러를 모조리 인출해 다른 은행에 맡겼다고 합니다. 이 남자는 바로 IBM 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라네요. 


창구 여직원의 불친절로 그 은행은 초우량 고객을 놓치고 말았지요. 물론 여직원의 입장에서는 원칙대로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칙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원칙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 더 큰 것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실천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렇게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지요. 어떻게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세상의 원칙을 따르고 싶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이 율법의 말씀이 바로 이 세상의 원칙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원칙을 뛰어넘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바로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원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원칙보다 주님의 원칙에 우선순위를 둡시다.


꿈이란 평생 꾸는 것(‘좋은생각’ 중에서)

미국 스탠퍼드대에서는 교수들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이 3년째 소설 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 그는 항상 검은색 운동복 상의에 흰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는데, 항간에는 그가 전용 제트기를 타고 등교한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그는 바로 나이키의 공동 창업주인 필립 나이트이다.

성공한 경영인으로 꼽히는 그가 70세이 대학교에서 소설 창작 수업을 듣는 이유는 젊은 시절 소망하던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2004년 CEO에서 물러난 나이트는 자신이 나이키 CEO였다는 사실을 숨긴 채 무려 50년이나 젊은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들은 것이다.

나이트는 스탠퍼드대 영문학과 토비아스 울프 교수에게 소설 쓰는 방법을 물었고, “기초부터 시작하라.”는 교수의 말에 따라 소설 창작 초급 수업을 듣게 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이트는 20년 전 집필을 시작했다가 아직도 완결 짓지 못한 소설도 요즘 부지런히 쓰고 있다.

소설가 슈워즈 차일드는 소설 쓰는 법을 겸손하게 배우는 나이트의 모습은 일반 대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작년 포브스지가 선정한 미국 최고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나이트.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백만장자지만 그에게도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꿈을 꾸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크기는 물론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 준 나이트를 보며 그가 왜 세계적인 경영인이 될 수 있었는지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희 성당 옆에는 가톨릭대학교 종교미술학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가 내년 6월에 송도신도시로 이전을 한다고 해서, 이 학교 건물을 간석4동 성당에서 매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매입을 위해서 모든 신자들이 신립 및 봉헌 그리고 물건 판매 등으로 노력하고 있지요. 아무튼 열심한 본당 신자들 덕분에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액수가 크기 때문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군요.


이제 날씨가 더워져서 지난주부터는 구역분과에서 미사 후 냉커피를 판다고 홍보를 잘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저는 미사 후 공지사항 시간에 이렇게 말했지요.


“여러분, 제가 커피 무지 많이 좋아하는 것 아시죠? 그런데 구역분과에서 우리 성당 부지 마련을 위해서 냉커피를 1,000원씩 판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 역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여러분이 저 커피 사주시는 데로 다 마실 테니 많이만 사주십시오.”


말실수했습니다. 정말로 많은 교우들이 커피를 사가지고 저한테 오는데요. 처음에 몇 잔은 마시겠는데, 5잔이 넘어가니까(냉커피니 양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속도 쓰리고 배도 부르고 해서 도저히 입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더군요. 결국 교우 몰래 신학생들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커피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커피를 10잔 이상을 마시는데요. 아무리 좋아한다고 한들 한꺼번에 5잔 이상을 마시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즉,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 한들 과하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해도 몸에 전혀 이상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래서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의 실천. 이것은 아무리 과한들 전혀 이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주저할 때가 많지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은 과할 정도로 가지려고 하면서, 반면에 아무리 과해도 상관없다고 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적당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남들만큼’만을 주장하면서, ‘나는 그래도 많이 실천하는 것’이라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곤 하지요. 이렇게 안일하고 이기적인 우리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안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아무리 실천을 해도 과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한 완전한 사랑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에서 있어서 주저하지 마십시오.


항상 신중하라(루화난, ‘인생의 교과서’ 중에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한 학생이 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아 대충 훑어보니 맨 윗줄에 ‘먼저 마지막 문제까지 모두 읽은 후에 답하시오.’라고 쓰여 있는 것만 빼면 아주 평범한 문제들이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30분도 안 돼 모두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2분쯤 지났을까. 학생 한 명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시험지를 제출하는 것이 아닌가.

이 똑똑한 학생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백지 답안지를 내는군.”

그런데 5분이 지나자 7-8명의 학생들이 또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이 아닌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을 봐서는 백지 답안지를 제출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20문제밖에 풀지 못했던 이 학생은 긴장하며 더욱 속도를 내서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드디어 마지막 76번 문제를 풀려는 찰나, 그 학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 시험지는 풀지 않아도 됩니다. 이름만 쓰면 만점을 받겠지만 문제를 푼다면 한 문제를 풀 때마다 1점씩 깎이게 됩니다.”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학생이 황급히 손을 들고 시험 감독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려 할 때, 다른 몇몇 학생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시험지의 맨 위에 있는 ‘먼저 마지막 문제까지 모두 읽은 후에 답하시오.’라는 한 마디를 보며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살면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잘난 체하며 남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아주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다. 똑똑하다고 자만하여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국 손해는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특히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내면을 비우고 겸허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장 먼저 익혀야 한다.

이끼가 가득 낀 마음속 잔의 물을 모두 쏟아 내야 깨끗한 물을 새로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마음속의 잔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지혜를 담을 수 있는 넓은 저수지가 필요하다.

잔 속에 담긴 물을 수시로 그 저수지에 쏟아 붓고 마음속의 잔을 늘 빈 상태로 유지시켜야 언제든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저는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습니다. 만 3년이 넘게 금연을 해 온 저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신부님은 이제 완전히 금연을 하셨네요.”

그런데 아직도 완전히 금연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행에서 저는 신부님 2분과 함께 했습니다. 이 두 신부님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담배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잠시 머무는 시간만 되면 입에 담배를 물고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 역시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이기에 그분들 곁에서 함께 머무르고 있었지요. 즉, 담배 연기를 맡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그 냄새가 그렇게 좋지 않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 냄새가 얼마나 좋던 지요. 나도 한 대만 딱 피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또한 각종 타협의 소리가 이렇게 울려 퍼집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도 술 마실 때는 한 대씩 피우더라.’

‘딱 한 대 피우는 것인데 어때?’


결국 이 유혹을 못 이기고서, 여행 중에 가졌던 술자리에서 담배를 입에 물게 되었지요.

한 모금…….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이 맛있는 것을 내가 3년 동안 끊고 있었다는 것이 억울하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두 모금……. 약간의 후회가 생깁니다. 10년 이상을 피우다가 얼마나 힘들게 끊은 것인데... ‘그래도 입에 물은 담배, 마저 피우자.’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 모금……. 이 세 모금째 들어서려는 순간, 이 순간까지 넘어서면 이제 다시 예전의 모습, 즉 골초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세 모금째를 들이키지 않고 과감하게 옆에 사람에게 건넸습니다. 커다란 아쉬움과 함께…….


3년 동안 피우지 않다가 남들이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이 어쩌면 세상의 모든 유혹과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유혹은 계속 이어 집니다. 내가 주의 하지 않으면……. 특히 죄의 유혹은 더 그렇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넘어가는 죄의 유혹에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일들도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좋았던 사이도 금방 멀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인간사가 아닌가 싶네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완전한 사람, 즉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그래서 죄의 유혹을 쉽게 이겨내는 주님의 제자가 되길 바랍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칩시다.


마음과 행동의 일치(한태완, '새벽이슬처럼' 중에서)

친구 세 사람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은밀한 장소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돈을 훔쳐 갔습니다. 며칠 후 세 친구는 솔로몬 왕을 찾아가 누가 범인인가를 판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문제를 낼테니 답을 하라고 했습니다.

"부자 처녀가 어떤 청년에게 시집가기로 약속했는데 그 처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네. 그래서 처녀는 약혼한 청년을 찾아가 위자료를 줄테니 파혼해 달라고 하자 청년은 위자료 따위는 필요없다면서 파혼에 동의해 주었다네.

그 후 처녀는 어떤 노인에게 유괴되었다네. 돈을 내놓으면 보내주겠다고 위협하는 노인에게 그녀는 '내가 약혼한 남자에게 파혼을 요구했을 때 그는 위자료도 받지 않고 나를 놓아주었는데, 당신도 똑같이 나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자 노인은 즉석에서 처녀를 보내주었다네. 이 가운데 누가 제일 칭찬받아야 할 사람인가?"

첫 번째 사람은 청년이, 두 번째 사람은 처녀가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이 얘기는 뒤죽박죽이어서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은 세 번째 사람을 가리키며 "네가 범인이다. 너는 오로지 돈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과 말로 나타나게 됩니다.



 

원수와 기도

김선오 신부님

상식적으로는 원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 하는 불평 또한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런 고민에 빠져 있으면 세상은 무척 어둡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왜 이런 시련을 저에게 주십니까? 혹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여쭈어볼 때 그분께서는 언제나 답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방법 또한 ‘기도’입니다. 

‘신앙의 힘’을 빌어서 우리는 원수를 내가 먼저 친구로 대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호의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과 원수는 상호적입니다. 사랑을 먼저 주면 사랑으로 돌아오고, 원수를 갚으면 또 다시 원수를 갚으러 돌아오는 법입니다. 

누군가 먼저 원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비로운 나라의 역설적 사랑

박혜원

그리스 메테오라에서 산상 미사를 드린 적이 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나의 삿된 욕망과 집착이 사라지길 바라며 하느님의 위엄과 영광만을 생각했다. 막 미사를 시작하려는데 스테파노 수도원에서 수녀님 두 분이 오셨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신성한 산, 메테오라에서는 그리스 정교식 미사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 정교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마지막 산상 미사를 드린 셈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로서는 400여 년간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수도사들의 역할이 컸던 호국 그리스 정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왠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 인간 사회는 자기 집단에 대한 사랑은 고취시키면서 외부인한테는 폐쇄적이다.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구별을 없애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인간적 차원에서는 미워하는 사람에게조차 똑같은 해가 뜨고 비가 내린다는 사실이 용납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란 아무리 종교적으로 자신을 승화시키려 노력해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때론 내가 미워하는 사람조차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이율배반적 감정에 빠지게 하지만, 하늘나라는 우리를 초월하는,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나라일 것이다. 또한 그 믿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사랑 단상(II)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그렇게 쩨쩨하게 굴거니?'

‘제가 무슨 쩨쩨한 짓을?’하고 여쭈면 ‘너는 그렇게 꼭 너에게 잘 해준 사람에게만 잘 해 줄거니?

그것은 셈이 밝은 세리들도 하고, 아니 세리들이나 하는 짓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거 다 그런 것 아닌가요?’하고 다시 여쭈면 ‘다 그런다고 내 제자가 될 너도 그럴래?

내가 아버지 닮아 완전한 것처럼 너도 아버지 닮아 완전해야지. 당장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전은 해야지.’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완전한 것입니까?’하고 다시 여쭈면 

‘선하거나 악하거나 똑 같이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주님을 닮아 원수까지 사랑해야지.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도전을 해야지 나의 제자지.’하고 말씀하십니다.


불완전할 때 우리는 우리는 조건에 의해 사랑합니다.

훌륭하면 더 사랑하고 잘 해주면 더 사랑하고 예쁘면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거지같은 작자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조건을 초월합니다.

그가 어떠하건 그가 나에게 어떠했건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지요.

자기 사랑의 원리와 자기 사랑의 원의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지요.

사랑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사랑하면 그것은 셈이 밝은 세리나 하는 것입니다.



   

<독서> :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억울한 죽음과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저지른 죄를 보셨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아합에게 전하도록 하신다.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아합은 죽어 그 피를 개가 핥을 것이며, 이즈르엘 성 밖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찢을 것이며, 그의 후손들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고 예언한다. 


아합의 죄로 인하여 그 가문에까지 벌이 내릴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에 아합은 자신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아합이 그처럼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 하느님께서는 그에 대한 벌을 늦추셨다. 


하느님께서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모른체하지 않으신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죄인일지라도 당신께 의탁하는 이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창세기 4장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은 친형제로서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다. 형제는 각각 자신의 소출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들이셨다. 


그러자 카인은 화가 나서 아벨을 죽였다. 이에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나타나시어 그 죄를 물으신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0-12) 하고 카인을 벌하신다. 


이에 카인이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세 4,14) 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아뢰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만들지 않으셨지만 죄를 짓는 사람을 만드셨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사람,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신 사람을 너무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당신을 거스르고 떠나간 사람까지도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돌아오너라! 극악한 반역자들아,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이사 31,6)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 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이사 55,7) 하고 부르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 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 버리리라.”(이사 43,25)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이사 65,17)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려 하신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의 죄까지도 덮어두시고 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그처럼 사랑이 크시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지닌 자유의지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사랑을 거부하는 자유의지까지도 하느님은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받을 수가 없다. 


아합은 무고한 나봇을 죽여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무고한 죽음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합의 뉘우침을 거절하지도 않으셨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사랑과 자비가 크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항상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신앙인,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라는 신앙인, 

죄에 빠졌을 때라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돌아서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세 

윤용선 신부님

우리는 오늘 ‘참된 행복의 선언’으로 시작한 마태오 복음 5장의 마지막 부분을 듣게 됩니다.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꾸며진 5장의 말씀은 오늘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교훈이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악인과 의롭지 못한 이들에게는 해를 비추지 마시고 비도 내리지 마셔야 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미 우리들을 이용해 덕 볼 것 다 본 사람들 아닙니까?’ 이렇게 불평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와 분노로 내 마음조차 가누지 못하는데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시다니...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계속 명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만도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갇히지 않는, 막히지 않는 사랑을, 그러한 완전한 사랑을 나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 주변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성격이 고상하고 정직한 사람은 원수에게도 인간적인 이해심을 가지면서 부드럽게 관용을 베풀고 신사답게 불화를 씻을 줄도 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도량이 매우 큰 자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기도 실상 대단히 힘이 들텐데, 오늘의 복음말씀은 더욱 철저하고 무제한적인 마음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것, 즉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자세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외의 것은 ‘이방인들도’ 행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감상적인 감동 같은 사랑이 아니라 진지한 박애정신에서 비롯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지극한 사랑을 먼저 자신의 지상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받는 극심한 반대를 받으셨고 갖은 수단과 온갖 잔인한 파괴 방법을 다 이용하는 적의와 증오에 찬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의 행위를 통해 원수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악이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증오의 힘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스승께서는 우리에게 모범을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볼 때만 얻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옳고 그름이 일방적인 편견을 떠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투쟁의 대상이 되던 중대한 사물들이 이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정신은 나 인간의 정신과는 격차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나의 정신이 하느님의 정신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신 안에서 우리가 자라고,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함으로 나아가며,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심에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 바로 나의 원수를 내가 사랑하는 일 또한 실현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김웅태 신부님

우리는 성질이 까다롭고 마음이 편하지 못한 이는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부르는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누구나 대할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사랑" 하면 : 상대가 누구냐?를 생각하게 되는데, 1) 부모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고, 2) 남녀간의 사랑도 3) 혈연 관계를 떠나 서로가 친한 사이에 온후하고 부드러운 애정이 깃든 사랑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4) 그러나 오늘 복음이 가르키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가페적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란? : 자신의 희생이 깃든,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심이 깃든, 착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하다 보면 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고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정에서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정의 문제를 넘어서 의지에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자 결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기 희생이 동반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연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우리 중에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 믿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 26의 말씀대로 : ..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 함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용서하시며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을 계속 미워하면서 기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정황래 신부님

아이들이 넓은 성당 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가끔은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야들아, 너거 와 싸우노?’ 

그러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씩씩대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자가 먼저 그랬다 아잉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모든 범죄들은 자연스러운 창조 질서와 관계들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분명히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깨어지고,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들은 불완전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화요일 대부분의 분들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나된 목소리로 응원을 하며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분들이 기분 좋게 모여서 술자리도 더불어 가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기분 좋게 건배를 하다가 그만 유리컵이 부딪쳐서 깨져 버렸다고 합시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깨진 유리를 빨리 치우고 그 기분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진 유리를 치울 생각은 않고, ‘니가 잘못해서 깼니, 원래 깨져 있었니, 주인아줌마가 컵을 잘못 갖다 줬니,’하며 계속해서 따지기만 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더 화가 나서 유리컵을 하나 더 깨뜨리게 될 것이고, 그것을 누가 지나가다가 밟기라도 하면 다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악순환이 그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기 될 것입니다. 


어제 이 시간을 통해서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누가 먼저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깨진 유리로 인해 일그러진 그 얼굴을 펴기 위해 먼저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 번의 죄로 인해서 그 죄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함께 하기 위해서 모인 그 시간의 의미가 이 깨진 유리로 인해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부터 누구든지 깨진 유리를 먼저 치우고 다른 컵을 가져와서 함께하는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용서’를 통해 ‘완전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평화 방송 청취자 여러분, 깨진 컵, 우리가 먼저 치웠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하는 이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활짝 펴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거룩한 몸으로 우리를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아 받아 모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두 기둥인 기도와 미사

이봉하 수사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즐겨봅니다. 

대초원에서 사는 동물들을 다룬 내용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우리와 또 다른 동물들의 세계를 통해서 지구는 결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동물들의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면, 그들 안에도 낮은 단계의 공동체가 있고 사랑도 슬픔도 있는가 하면 ‘왕따’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사람만이 가지는 고차원적인 감정과 지각이 없기에 창조 이래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만약 유전자의 변형으로 네 발로 기는 동물에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지각, 언어 등이 주어진다면 동물과 사람 간에 서로 우위와 지배를 위해 싸우며 지구촌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다행히도 하느님께서는 아직까지 사람 외에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람과 같은 은총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사람이나 원수를 두고 ‘금수보다 못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사실 금수보다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 있을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일상 안에서 회개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김지영 신부님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는 어미새 펠리칸이 등장한다. 어미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새는 단 한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만다. 여행에 지친 어미새 펠리칸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 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떼들은 어미새에게 몰려간다. 그러자 어미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한다. 다음 순간 어미새는 해변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는다. 어미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새는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또 하나의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주신 한없는 사랑. 그래서 성 토마스는 ‘성체찬미’에서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라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도 포용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에게 원수는 누구이며, 이방인은 누구인가?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나날인데 어리석게도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에 내 힘을 전부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들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오늘 내 사랑이 비록 작고 초라할지라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저희 수도원에서는 한 평생 겸손했던 한 평수사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오현교 타대오 수사님, 형제들에게 위문편지나 축일 축하 편지를 쓰실 때면 늘 오소인(小人)이라고 즐겨 쓰시던 분,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멤버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 내 굳은 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정녕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 것 미사 도구며 준비물을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등치가 산만한 후배들의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한 평생에 걸친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5년 전 위암이 발병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일을 해오셨으면서, 그만하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도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면서 수사님은 열심히 투병생활에 임하셨습니다.


항암제 기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호전되면 어떻게 해서든 수도회에 도움이 되어보겠다고 이런 일, 저런 일에 뛰어드시던 수사님은 정말 저희 후배들의 귀감이셨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드러눕기도 앉아있기도 힘겨워서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수그리고 계시던 수사님, 그 와중에도 미사나 기도를 꼭꼭 챙기시던 수사님, 그 고통 속에서도 수도회의 일치를 위해 눈물로 호소하시던 수사님이셨습니다.


어젯밤 그런 수사님의 영정 앞에 백여 명의 저희 후배들이 모였습니다. 한 목소리로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이, 양 신부, 잘 되고 있어? 별 일 없고? 몸은 괜찮냐? 쉬어가며 천천히 해!”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특히 수사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분들, 수녀님...많은 분들이 마치 사랑하는 삼촌이라도 여읜 듯 슬픔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수사님께서는 온화한 성품과 친화력, 들을 줄 아는 ‘큰 귀’를 바탕으로 공동체나 사업체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불화의 조짐이 보일 때, 그로 인해 공동체 일치가 흐트러질 기미가 보이면 백방으로 뛰어다니시면서 중재를 서시곤 하셨지요. 부드러움, 편안함,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떠나신 수사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보통 사람’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들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통념적인 사랑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지요.


예쁜 아이들, 귀여워해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성적 좋은 아이들,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게 인사 잘 하는 사람, 내 비유를 잘 맞춰주는 사람, 내게 뭔가 하나라도 챙겨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환대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그런 사랑을 뛰어넘어서야만 합니다. 갈 때 까지 간 아이들, 반평균 점수 다 깎아먹는 아이들, 마구잡이로 대드는 아이들조차도 품에 안아줄 줄 아는 사랑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왠지 밉상인 사람, 그저 보기만 봐도 껄끄러운 사람조차도 그러려니 하고 함께 걸어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우리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높은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 사랑이 계속 성장해서 언젠가 당신이 지니셨던 그 큰 사랑 가까이 따라오도록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사랑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꾸준히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큰 사랑, 완전한 사람은 힘들지라도, 좀 더 큰 사랑,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강영구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제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적대적(敵對的) 공생관계(共生關係)’에 있으면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원수가 있어야 비로소 적개심으로 가득 찬 나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대적 공생관계는 썩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지옥을 만들고 공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원수니 벗이니 하는 구별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 눈에 원수니 벗이니, 악한 사람이니 선한 사람이니, 옳은 사람이니 옳지 않은 사람 따위의 구별이 있을까요? 

원수와 벗,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 따위의 구별은 옹졸한 인간들이 편 가르기 하려고 만들어 놓은 구별입니다. 편을 갈라야 자신들의 권력욕과 탐욕을 충족시킬 수 있고 이득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존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랑스러운 자녀일 뿐입니다. 


당신 가슴에서 미움과 증오, 적개심을 버리십시오. 

사랑과 자비와 용서만 남겨 놓으십시오. 

당신의 머리에서 원수니 적이니 하는 말 자체를 지워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일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오늘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기양 신부님

제1독서 : 1열왕 21,17-29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복 음 :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말씀이지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인 이유는 단지 말씀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말씀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자 비신자나 할 것 없이 기억하고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5,43)하시면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4-45) 

신자들은 비신자들과는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어서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6-47)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자기와 친한 사람과는 인사를 하며 지냅니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다면 신자로서 비신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여기에 머무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좋아하고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지요. 세리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대상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는 말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율법 해석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할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왔다면 어렵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지요. 미움은 모래에 새겨서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고 은혜는 돌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다치고 힘겨워지는 사람은 미움을 새겨 놓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프란시스 베인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수할 때 인간은 그 원수와 같은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는 그 원수보다 위에 서 있다.' 

더 큰 사람은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며 결국 악순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 우리 신자들의 삶이어야 하며,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좀 다른 사람도 기꺼이 인사하고 받아들이며 친교를 맺고 미움은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오늘의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이로써 여섯 가지 대당명제가 모두 선포되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선포된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라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오히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반명제를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마태오가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물음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義)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따르면, 우리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원수로 규정하고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잘 지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상(償)도 더 나음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나 원수에게 똑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45절)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따라 빚어졌기 때문이다.(창세 1,26) 어떤 원수라도 그가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어떤 원수도 없다. 


이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대당명제의 깊은 의도와 의중이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는 것 안에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라지며 그 마음 또한 조석(朝夕)으로 변한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하루가 그 마감시간에는 깨지고 흩어진 마음을 주워 모아야 하는 아픔으로 반복된다. 속으로는 한결같은 마음을 먹지만 마주 대하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배우고 익히도록 요구된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은 그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이 수행하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의 방법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곧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적어도 왜 하느님께서 선인(善人)에게 바로 상(償)을 주지 않으시고, 악인(惡人)에게 바로 벌(罰)을 내리지 않으시냐고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침묵(沈默)만 하고 계신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에서 우러나는 창조적이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면, 너희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차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구나 다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는 것일 것이요, 운동 선수는 세계 챔피온이 되는 것이요, 기업인은 세계 일류가 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많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도대체 수도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사제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러나 얼른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해답은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을 한참 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럼 그 해답이 무엇일까?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내 삶의 목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나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요,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의 목표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을 "완덕(完德)"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길", "완덕의 생활"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의회 이후부터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왜 그랬는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늘의 아버지를 닮으라는 말이다.

왜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가? 하늘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레위 11,44-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둘째는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는 법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래서 성 바오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데살 전 4, 3. 7)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성덕(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 "성화 되는 길"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목표는 또 모든 신앙인의 목표는 聖人이 되는 것이다. 나라 대통령도 아니요, 재벌가도 아닌 성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의 성소(聖召)이다. 이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화 성소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조금 더 이 부분에 대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인용하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성직계에 속하는 사람이나 성직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다 성화(聖化)의 성소를 받는 것이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이 신도들 안에서 맺어주시는 은총의 열매로써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며 또 나타나야 할 것이다.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께서 친히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시요, 완성자로서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생활의 성화를 요구하시며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5, 48)하시었다....

따라서 신분과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이 성덕은 현세 사회에 있어서도 보다 인간다운 생활 양식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의 뜻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해야 하겠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성덕은 교회사에 있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생활이 빛나는 증거를 보여 준 것처럼 풍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계시 헌장 5장 39.40항 참조)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신다.(요한1,4,16)"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첫째 은혜는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써 우리는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영혼 안에서 좋은 씨같이 자라서 결실하기 위해서는 각 신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느님의 듯을 행동으로 채워 드릴 것이며,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거룩한 전례 행위에 자주 참여할 것이며, 기도와 자아 포기와 행동으로서의 형제적 봉사와 모든 덕행 실천에 항구할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모든 성화 수단을 지배하고 힘있게 하며 목적을 달성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성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산상수훈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주님께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산상수훈은 주님이 우리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1.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 “천부”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집중적으로 사용된 성서의 다른 본문은 없습니다. 산상수훈 전체에서 18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세 번(16,45,48절) 그리고 6장은 무려 13번(1,4,6,6 8,9,13,14,15,18,18,26,32절) 그리고 7장에는 두 번(26,32절)이 나옵니다.


반면에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5장에서 5번(8,9,34,35,45), 6장에서 3번(8,24,30절)만 나올 뿐입니다. 더욱이 6,8의 하느님은 “너희 아버지”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호칭은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에 대하여 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아무한테나 사용할 수 없으며 아무에게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할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때 그 관계는 사랑과 신뢰이듯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특히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까? 이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올바른 자식이 되어 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까? 가출 또는 미아가 되어 아버지 품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자연스레 “아버지”로 불려질 수 있기를..........


2. 누가 아들다운 사람입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 아들다운 삶일까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내용을 매우 중요하게 그리고 비중있게 다루셨습니다.

5,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5,43-45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6,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위 3개의 성귀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전제는 5,9의 평화와 5,43-45의 사랑과 6,14의 용서입니다. 이런 기본전제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이 평화와 사랑 그리고 용서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복음에는 세리와 이방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과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문안하는 사람에게만 문안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도 즉, 세리와 이방인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원수라고 사랑해야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도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들이 될 수 있는 속성(품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이런 품성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분명히 우리 삶에 하느님을 닮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48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다시말하면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닮은 아들다운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3. 아들이 받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태 6,9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에서 보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둘째, 마태 7,7-11입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에서 보듯이 아들과 아버지를 비유로 사용하시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야말로 아들 됨의 특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기도는 자녀 된 사람들의 가장 큰 특권입니다. 자녀이기에 아버지에게 때로는 무리한 요구도 합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구할 특권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기도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시어 말씀을 주시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의미는 이 땅의 아버지와의 차별화입니다. 땅의 아버지, 즉 육신의 아버지가 안 계셔 외로운 사람에게도 하늘의 아버지는 계시며 땅의 아버지가 무능력하여 모든 것을 만족하게 못해주더라도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책임지실 수 있습니다. 군대 보내면 옆에 있을 수 없고 출가시킨 후 아무리 사랑하는 아버지도 옆에 늘 붙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그 자녀 되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모든 것에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마태 6,8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또 6,32에서는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는 기도로 하겠습니다.


이 땅에 아버지 된 분들, 아버지 될 분들이여,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 좋은 느낌이 들게 합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든든하고 기뿐 좋은 느낌을 심어주므로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이런 좋은 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이 되도록 허락해 주시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며 아버지의 아들된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아멘)

[두올묵상팀]



언젠가 공사현장을 지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공사장 외벽 펜스의 한 부분에 서서는 무엇인가를 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 앞을 가보니 그 외벽 펜스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 위에 누가 장난삼아 쓴 듯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더군요. 


“들여다보지 마시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저 역시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일까요? 더군다나 제 앞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바라보던 이 구멍을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지요. 물론 그 구멍 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공사 현장 외에는 특별한 장면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선만 실천하고 악을 피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이미 알고 계시기에 그 많은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뜻에 맞게 살려는 노력과 이해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주님의 생각과 같아질 수 있도록 내 몸으로 체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영이나 자전거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냥 저절로 잘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선 배워야 하고 또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되고 곧 이해를 넘어 내 몸이 체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수영이나 자전거를 타는데 어색함 없이 내게 너무나도 편안하고 쉬운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절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묵상 등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연습해야 어느 순간 주님을 이해하게 되고 체득하게 되어, 주님과 참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지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실천하기 쉬운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내게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 사랑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내게 원수 같은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를 통해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보고 배워서 끊임없이 연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이해를 하게 되고, 이해를 넘어 주님을 내 몸으로 체득할 수 있어 완전하신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배우고 연습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십자가를 다시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니체).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올해 60세인 형제님께서 등산을 갔다가 어느 연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의 물이 갑자기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연못 주변인데, 연못의 물이 움직이니 너무나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 순간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루살렘의 ‘벳자타 연못’이 출렁거릴 때, 첫 번째로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모두 뛰어넘어 직접 소원을 들어주셨지요). 그래서 얼른 연못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서는 “소원을 말하시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생 최대의 기회이니 서둘러 자신의 소원을 생각했지요. 순간 젊은 여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보다 서른 살 적은 여성과 함께 살게 해주세요.”

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글쎄 60세였던 형제님께서 90세 노인으로 변했다고 하네요.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을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함께 하는 삶, 특히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이며 행복의 길입니다.

 



우리는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5,48)

---

결론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조차 어불성설입니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이에게나 있을 법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하셨을까요?


두 가지 방향으로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첫째,

우리가 제대로 살아서 그분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의 완전성에 한 부분으로 흡수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비록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삶 안에서는 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하라 하심은, 우리의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철저하게 그분께 의탁하면서,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두 가지 모두, 살아 있는 동안 옳은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완전해지고자 하는 마음도 교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완전하신 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따르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완전하심에 의탁해야만 합니다.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있기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의 어린 소녀 순교자 마리아 고레띠 이야기입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앙코나 부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 일을 도와야했습니다. 네뚜노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셨고 마리아는 어머니까지 위로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해 내야했습니다.

마리아는 10개월이 넘게 첫영성체 교리를 틈틈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일해 주는 주인집 가족의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지닌 20살 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단순한 욕정으로 마리아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기회를 노려 마리아가 혼자 남게 되자 그녀를 껴안았고 마리아는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일을 어머니에게 말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무섭게 협박하고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며칠이 지난 그녀의 마지막 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은 못하고 어머니께 함께 있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결국 마리아를 집에 혼자 남겨놓고 일을 보러 나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을 들고 마리아를 주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안돼, 안돼! 하느님이 원치 않아요,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요!” 하고 외쳤고 화가 치민 알렉산더는 거부하며 쳐든 손바닥을 시작으로 마리아의 온 몸에 14번을 찔렀습니다. 마리아는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은 고레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 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고 모범적으로 살다가 풀려나와서는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 정원사로 나머지 생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1950년 마리아 고레띠가 바티칸 광장에서 성녀로 시성될 때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를 찔렀던 알렉산더도 눈물을 흘리며 함께 있었습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그와 함께 낙원에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고 그 사람도 함께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가장 큰 원수인 가리옷 유다를 당신 사도로 뽑으시고 함께 있으려고 했고 그를 구원하여 하늘나라로 이끄시려고 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 고레띠가 알렉산더가 자신을 그렇게 아프게 한 사람임을 명확히 알면서도 그를 용서하였듯이,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가 당신의 원수임을 명확히 아셨습니다. 그래야 그분의 포용력이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 지기 위해서는 무작정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임을 알면서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함은 죄를 짓지 않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완전함은 사랑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고정원씨는 이 완전함에 매우 가까이 가신 분입니다. 그는 당신 가족을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인 유영철을 당신 양자로 삼고 그의 두 자녀들까지도 키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범죄자 자녀들을 위해 3천만 원의 장학금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어떤 죄를 범하든지, 어쩌면 가리옷 유다처럼 당신을 배반하여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당신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무한한 사랑이 바로 ‘완전함’입니다. 어쩌면 우리 힘만으로는 완전해 질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사신 분들이 있으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합시다. 그러다보면 원수까지도 행복해지기를 원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현재 제가 성소국장으로 있다 보니, 신학생들이 찾아와서 밥 사달라고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러 나가며 신학생들에게 “뭐 먹고 싶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거나요.”

이 말처럼 애매한 대답이 있을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애매한 대답을 안고 삽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술집의 메뉴판을 보니까, 그 안에 ‘아무거나’라는 안주도 있더군요. 그리고 주방장이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섞여서 나옵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섞여있는 애매한 대답인 ‘아무거나’를 습관처럼 쓰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인데도 우리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그 누군가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을까요? 

사실 다른 그 누군가는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어제 만났던 친구가 입었던 옷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또 그 친구가 했던 말이 모두 생각나십니까? 아마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그 친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나만큼 관심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뤄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떳떳하게 자신의 일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몫을 스스로 행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세상인데도,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해야 함을 명령하시지요.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지요. 심지어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실천하기 쉬운 말씀입니까? 고해소에 있다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신부님, 이 사람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이러한 사랑은 실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오직 완벽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신 주님만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만의 몫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행해야 할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을 실천할 때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미 성공한 사람에 대해 칭찬의 말을 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에 대해 비난의 말만 한다(나폴레온 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그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태오 복음 5장-7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산상설교로 이루어져있는데, 5장에서는 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건네시는 행동지침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니 참으로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오늘 하시는 말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은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원수는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원수라고 합니까?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결국 원수는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트린 사람, 잘 나가던 내 인생을 끝장나게 만든 사람, 내 가정을 산산조각 나게 만든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의 양보, 너그러운 관용, 신사다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적극적인 천상적 사랑, 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라는 말씀,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자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가능합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적당히 한걸음이 아니라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넘어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극복하고 신성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원해보이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우리의 시야가 좀 더 광대해지고, 우리 안에서 신성이 점점 성장해가는 어느 순간, 불가능해보이던 예수님의 권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 인간은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성향에서 이타적 성향으로, 인간적 사랑에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꺼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우리 삶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미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

신헌문 신부님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도 힘든 판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까지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랑에도 단계가 있는 듯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만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에 입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입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 입회한 서른 먹은 ‘늦깍이 지원자’였는데 저와 같은 늦깍이가 또 한 명 있었습니다. 

서른이 되어 입회를 하였으니 서로 생각도 많이 달랐고, 살아 온 환경도 많이 달라서 서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 형제의 이러저러한 면을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참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형제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바라보는 내 시각이 달라진 겁니다.

그 형제의 존재는 변함이 없는데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로 평온을 되찾았던 기도 체험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저도 자신 있게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기도에 담겨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이웃, 내 친구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한 걸음씩

김태완 신부님

예수님께서 너무 무리한 요구를 우리한테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그렇게 해야 하는 줄은 알겠는데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하고 참아도 저 사람만은 못하겠습니다. 용서도 한 번, 두 번이지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입니까? 맞고, 또 맞고 가슴에 남은 상처 한없이 깊어 메워질지 모르겠는데, 더는 못하겠습니다.’

‘내 할 만큼 했는데, 좀 봐주시면 안됩니까? 얼마나 더 하란 말씀입니까? 이 정도 노력한 것도 장하다, 훌륭하다, 애썼다, 칭찬해 주시면 안 됩니까? 저도 인간인지라 제 마음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 어떡합니까?’


이쯤 되면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께 대한 푸념이 됩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못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고통과 어려움이 지극히 작은 먼지와 같더라도 제삼자의 처지가 아닌 당사자의 처지라면, 먼지가 아니라 내 삶을 가로막는 벽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투정과 푸념이 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이기에 우리한테 한 가지 목표를 정해 주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과 같아지라니…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아시면서도 이러한 목표를 세워주심은 ‘당장이 아니어도 좋다. 기다려 주시겠다.’는 우리를 위한 배려로 느껴집니다. 실패할 수도, 늦어질 수도, 어려울 수도 있으나 조급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어봅니다.   

 



원수 기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제가 기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저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러시는 분이 많겠지만 그러나 제가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가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저의 기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릴 때 저의 기분은 묘하고 심정이 복잡다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오늘 말씀,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진심인지, 아닌지.

억지인지, 아닌지.


그럼에도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되 먼저 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지금은 그를 미워하는 저이지만 그가 밉지 않은 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미운 그가 예쁜 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밉게 보는 제가 곱게 보는 저로 바뀌고, 그래서 원수가 은인으로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여 그를 밉게 보던 낮은 사랑이 곱게 보는 높은 사랑으로 성장하여 원수까지 사랑하고,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하는 하느님 사랑의 경지까지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밉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그가 밉거나 그의 죄가 미운 것이지 그가 미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기를 저는 바라지 않고, 그가 죽게 되면 안타까워하며 저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가 그 죄에서 또는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겁니다.


사실 지금도 제가 한 걸음 물러나 여유를 가지고 보면 미움보다는 연민이 더 크고, 분노보다는 염려가 더 큽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기도를 원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수 기도를 통해 사랑에 있어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처럼 완전한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흑과 백 너머에

양미강 목사

흑과 백은 분명한 색이다. 서로 섞이기 어렵다. 젊었을 때는 생각이 분명해서 흑과 백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칼’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세상은 흑백으로 구분될 수 없는 수많은 중간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한일 간 과거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일 과거사 문제해결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은 피해국, 일본은 가해국이라고 분명하게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해와 피해라는 분명한 도식이 성립될 수 없는 회색 지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일본 강점기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일본 관동군 출신이었던 일본인 이케다 고이치 씨와 조선인 BC급 전범인 이학래 씨를 만나면서 내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 모두 80을 훌쩍 넘겨 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백발의 노신사들이다. 한 사람은 일본 강점기 전쟁을 수행한 일본군으로 종전이 되자 하루아침에 구 소련군에 의해 하루 10여 시간 이상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전쟁 피해자다. 또 한 사람, 조선 사람인 그는 일본군으로 자원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 업무를 했다는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몰려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조국에서는 죄인, 일본에서는 외국인으로 차별당한 피해자였다. 


이 두 사람은 바로 흑과 백 너머에 서 있다. 이제 그들은 적이 아니라 동지다. 한일 과거사를 해결하는 데 국가를 뛰어넘어 함께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 원수 되게 하는지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긴 사랑에 빠지는데 필요한 시간은 1초면 된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사랑에 관계되는 것인데요, “사랑했다는 이유로 서로 60년 넘게 살아줘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사랑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하긴 많은 사람들이 연애할 때는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많은 다툼과 분쟁이 생기게 되지요. 처음 가졌던 사랑을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사랑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 될 수 있도록,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섣부른 생각과 판단으로 완전한 사랑보다는 나 위주의 작은 사랑을 만들면서 애인의 관계를 원수로 만들 때도 참 많습니다. 즉, 그 작은 사랑마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랑이 없어지려는 위기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전세 경비행기 한 대가 공중을 날고 있을 때였습니다. 조종사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곧 추락할 것입니다. 이 비행기에는 저를 포함하여 5명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낙하산은 4개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그가 먼저 낙하산을 타고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 앞 다투어 탈출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어떤 청년과 신부님뿐이었지요. 하지만 세 명이 탈출했으니 낙하산은 하나만 남았다고 신부님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청년에게 낙하산을 양보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청년이 이렇게 말해요. 

“신부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낙하산은 두 개 남았습니다. 방금 탈출한 사업가는 낙하산 대신에 제 배낭을 메고 뛰었습니다.”

사랑을 버리려는 사람은 낙하산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던 사업가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보고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완전한 사랑으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용서 못해.’, ‘저 사람 다신 안 만나면 되지 뭐.’, ‘저 사람을 다시 보면 내가 성을 간다.’ 식의 섣부른 판단은 이제 하지 말도록 합시다.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주님과 나의 간격은 더욱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다. 고통의 숨결 속에서 영혼이 발육된다(바흐).




사랑의 신비

고계영 신부님

하느님은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사랑이시며, 이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좋고, 가장 참된 사랑입니다. 흠도 티도 없는 이 사랑은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며 찬란한 신비입니다. 사랑 자체이며 신비 자체이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아름답게 빛나는 당신의 이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을 영원히 관상하십니다. 성자께서는 사랑의 원천이신 성부의 사랑을 관상하시고 성부께서는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적인 사랑을 관상하십니다. 성부로부터 나와 성자와 완전히 일치하시며, 성자로부터 나와 성부와 완전하게 일치하시는 사랑은 성령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완전한 감미로움이신 이 사랑을 서로 영원히 절대적으로 관상하는 관상의 하느님이십니다.

삼위께서는 당신의 아름다움과 감미로움과 빛을 서로 관상하는 이 영원한 사랑의 신비에 인간이 온전히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이 바라심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완전성입니다. 완전해지지 않으면 완전한 세계에 결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전성의 요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인간이 흠없이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최고의 배려이시고 완전한 사랑 고백이십니다.




완벽 연기, 완벽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어 성서중에는 Jerusalem Bibl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오늘 복음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n this way you will be sons of your Father in heaven."

우리 공동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녀가 어떻게 되는지 얘기하는데, “in this way”, 즉 “이런 식(방법)으로”라고 얘기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방법이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선인과 악인, 의인과 불의한 이를 가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구약의 사랑 법을 초월합니다.

하느님 자녀 되려면 구식으로는 안 되고 신식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방법은 또한 세리나 이방인의 사랑 법도 훨씬 초월합니다.


자만심.

자존심.

자부심.

자긍심.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우리는 이 차이를 잘 압니다.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자존심 내지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자부심이나 자긍심입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 이상의 사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미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미국에 있을 때 Salt Lake City를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집을 찾다가 우리 실수로 접촉사고가 냈는데 경찰이 우리의 상대편에게 원만한 해결을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신자들이 좋게 해결해줘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사람이 말도 잘 못하고 낯 선 곳에서 쩔쩔 매는 것이 불쌍하기도 했겠지만 유타 주는 대부분이 몰몬 교 신자들이기에 신자라면 이런 때 잘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자부심에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이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과 똑같이 미워하고, 쌍욕을 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쌍욕을 한다면 어찌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말하듯 진흙탕에서 같이 뒹구는 꼴이고 어른이 애들하고 싸우는 꼴이겠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려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우승을 했다는데 다른 사람과 똑같이 연기했으면 우승을 할 수 없었지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무결점, 완벽 연기로 우승을 한 것처럼 우리도 무결점, 완벽 사랑으로 하느님께 도전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을 아는 걸로 하느님께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만은 무결점, 완벽의 사랑으로 하느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사람들은 사형 금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위선자라고 합니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면 사형을 금지시키자는 말은 못 할 것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는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의 힘으로는 나를 험담한 사람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을 빌리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앙코나 부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 일을 도와야했습니다. 네뚜노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셨고 마리아는 어머니까지 위로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해 내야했습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께 겸손하게 순종하였고 매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신심이 강해지면서 정결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리아는 10개월이 넘게 첫영성체 교리를 틈틈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일해 주는 집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지닌 20살 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단순한 욕정으로 마리아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기회를 노려 마리아가 혼자 남게 되자 그녀를 껴안았고 마리아는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어머니에게 말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무섭게 협박하고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은 못하고 어머니께 함께 있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결국 마리아를 집에 혼자 남겨놓습니다. 이미 알렉산더는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을 들고 마리아를 주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안돼, 안돼! 하느님이 원치 않아요,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요!” 하고 외쳤고 화가 치민 알렉산더는 거부하며 쳐든 손바닥을 시작으로 마리아의 온 몸에 십 수 번을 찔렀습니다. 마리아는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은 고레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 아름다운 부인이 서계신 것이 보여요.”하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 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고 모범적으로 살다가 풀려나와서는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의 정원사로 조용히 나머지 생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그릇된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청합니다. 나처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게으름에서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이웃은 우리 자신들의 거울입니다. 상대가 미워지는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이 미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모님은 누구도 미워하실 수 없었고 당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결국 용서하는 것이 첫 번째로는 나를 위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김연아 선수의 완벽한 연기를 보고 감동하고 또 자신도 모르게 흘린 그녀의 눈물에 우리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경기가 끝나고 눈물을 흘리는 김연아 선수의 사진을 메인 화면으로 깔았습니다. 다 끝났다는 안도의 눈물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과 겹쳐졌습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수고했어!”라고 하는 눈물일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에게도 저 정도의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똑 같은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금메달을 거저 따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은총을 거저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위해 저렇게 노력하듯, 우리도 영생의 메달을 위해 조금이나마 더 힘을 낼 결심을 합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세상에 꼭 하나뿐이 너를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에 꼭 하나뿐인 너를 위해"(명로진, 사회평론)란 책을 고마운 분으로부터 선물 받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삶에 지치고 몸이 고단해서, 또는 어색해서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대신한 저자가 아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들을 25통의 감동적인 편지글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빠 엄마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면, 네 주변의 사람들에게 해주어라.

아빠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면 그 돈으로 유니세프에 기증을 해라. 그럼 지구상의 굶주린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 쓰일 것이다.

아빠에게 돈을 주고 싶다면, 그 돈으로 홀트아동복지회에 기부를 해라. 그럼 해외로 입양되어 가는 수많은 한국 아이들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아빠를 위해 시간을 내고 싶다면, 병원에 가서 자원봉사를 해라. 너의 건강한 몸이 병들고 힘겨운 사람들을 위해 쓰일 것이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 여유가 있다면, 신문의 국제면을 봐라.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아빠를 위해 기도할 마음이 있다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종교분쟁을 위해 기도해라.

네가 행복하면 아빠는 행복하고, 네가 살아있는 한 아빠는 살아있다."

위 편지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자녀교육관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한 가지 던져주고 계십니다.

신앙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윤리적인 기준은 이방인들이나 보통사람들과는 달라도 확연히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세상 사람들의 삶의 기준은 상식적인 수준입니다. 자녀들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에게 당연히 효도해야지요. 우리에게 호감을 지니고 도움을 베푼 사람들에게 당연히 호감을 지니고 은혜를 갚습니다. 우리에게 인사를 깍듯이 잘 하는 사람에게 우리 역시 깍듯이 인사를 건넵니다.

착하고 예쁜 아이들,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칭찬하며 귀여워 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처신을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에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예절교육만 이수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은 "조금 더"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를 요구합니다.

남들이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사랑, 그런 처신, 그런 선행이 아니라 조금 더 진한 사랑, 조금 더 폭넓은 사랑, 조금 더 깊은 사랑, 조금 더 사심 없는 사랑, 조금 더 큰 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겠습니다. 내가 낳았으니 내 자녀이고 내 소유라는 생각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 공동체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보다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관대한 인식이 필요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작은 울타리 안에 머물러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역시 나만, 내 가족만, 우리 공동체만 생각하는 지역이기주의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깊은 사랑, 보다 순수한 사랑으로 성장해나가길 기원합니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납니다. 깜짝 놀랐지요.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다른 곳도 아닌 컴퓨터 본체 안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였습니다. 저는 컴퓨터를 종료하고서 본체 케이스를 열어서 내부를 보았습니다. 소리가 나는 부분은 컴퓨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CPU(중앙처리장치, central processing unit)의 열을 식혀주는 팬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 먼지가 많이 끼었고, 팬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에 시끄러운 소리를 냈던 것입니다. 강력 먼지제거제를 이용해서 먼지를 다 제거하고 나니 지금 현재 너무나도 조용하게 컴퓨터가 작동합니다. 


사실 컴퓨터의 외관을 보면 무척이나 깨끗합니다. 먼지하나 묻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컴퓨터 본체의 내부는 먼지투성이 그 자체였지요.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먼지가 나중에 커다란 소리를 내는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하긴 보이는 곳은 열심히 청소하는 우리들입니다. 혹시 몸의 겉에 때를 시커멓게 뭍이고 다니는 분이 계실까요? 아니지요. 남들에게 보이는 부분은 최대한 깨끗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나 몸 안에 있는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질 등은 어때요? 그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술, 담배도 많이 하고, 불규칙인 식사 그리고 인스턴트식품 등 몸에 안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 즐깁니까? 


내 몸 안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은 어떠한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마음은 과연 깨끗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을까요? 혹시 각종 욕심으로, 또한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점점 지저분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더불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할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겉만이 아니라 속도 깨끗한 진짜로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지저분한 내 몸의 때를 다 밀고 나면 얼마나 개운합니까? 하지만 그것 아세요? 내 마음의 때를 다 밀고 나면 더 개운하다는 것을……. 


이 사순시기. 이렇게 내 마음의 때를 완전히 없애는 은혜로운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공은 능력보다 열정에 의해서 좌우된다. 승리자는 자신의 일에 몸과 영혼을 다 바친 사람이다(찰스 북스톤).




원수를 사랑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어린 소녀 순교자 마리아 고레띠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성녀만큼 이 말씀을 잘 실천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앙코나 부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 일을 도와야했습니다. 네뚜노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셨고 마리아는 어머니까지 위로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해 내야했습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께 겸손하게 순종하였고 매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신심이 강해지면서 정결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리아는 10개월이 넘게 첫영성체 교리를 틈틈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일해 주는 가정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지닌 20살 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단순한 욕정으로 마리아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기회를 노려 마리아가 혼자 남게 되자 그녀를 껴안았고 마리아는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어머니에게 말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무섭게 협박하고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은 못하고 어머니께 함께 있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결국 마리아를 집에 혼자 남겨놓습니다. 이미 알렉산더는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을 들고 마리아를 주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안돼, 안돼! 하느님이 원치 않아요,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요!” 하고 외쳤고 화가 치민 알렉산더는 거부하며 쳐든 손바닥을 시작으로 마리아의 온 몸에 십 수 번을 찔렀습니다. 마리아는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은 고레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 아름다운 부인이 서계신 것이 보여요.”하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 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고 모범적으로 살다가 풀려나와서는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 정원사로 나머지 생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그릇된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청합니다. 나처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게으름에서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원수까지도 성인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어쩌면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에게 작은 잘못을 하는 사람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이웃은 우리 자신들의 거울입니다. 상대가 미워지는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이 미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모님은 누구도 미워하실 수 없었고 당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원수 사랑

류충희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대립명제’(마태5,21-48) 중 여섯 번째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끼리끼리 사랑하고 잘해주는 것은 어느 집단에서고 볼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죄인들조차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베풉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들에게나 불의한 이들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들 역시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답다는 칭송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가르침을 지키기 어렵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으로 나날이 성장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원대한 목표에 도달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의 단계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때 저를 매우 헷갈리고 곤혹스럽게 했던 말씀입니다.

10대, 20대 때는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인 내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저는 이 말씀대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에 무결점의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나중에야 이 말씀은 결점이 없는 초능력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 하느님처럼 되라는,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사랑”

수도생활 쇄신과 적응에 관한 교령, “Perfectae Caritatis(완전한 사랑)"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 이것을 수도생활의 목적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수도자만의 것이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입니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나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올해 한 해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인사이동 후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구체적인 사랑의 목표를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모 형제를 사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형제는 저의 기도가 제일 많이 필요한 형제는 아닙니다.

이 형제는 제가 사랑하기 힘들어 하는, 그래서 제가 극복해야 할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저는 사랑에 있어서 한 단계 올라가는 것입니다.


건물의 가장 꼭대기까지 가는데 계단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데도 단계가 있습니다. 

저의 일을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저의 일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그저 흐뭇이 봐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좋게 보진 않지만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반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훼방놓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저의 일을 완전히 망쳐놓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일이 아니라 저를 망가뜨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단계들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단계를 밟아 올라가 마침내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원수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저는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높은 계단일수록 그만큼 오르기 더 힘든 것처럼 제가 사랑하기 힘든 형제일수록 저를 사랑의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게 할 고마운 형제인 것입니다.


제가 한꺼번에 사랑의 정상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하여 저는 성녀 소화 데레사처럼 사랑에 있어서도 가난하고 겸손하게 작은 사랑부터 차츰 차츰 큰 사랑으로 낮은 사랑부터 차츰 차츰 높은 사랑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완전한 사람

배미애 수녀님

초대교회사 문헌을 보면, 결혼생활을 법률이나 관습 등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당시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부부애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 가정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혼인에 대한 순수한 신뢰를 지키며 새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도록 지키고 보호한다. 이교도들은 이를 조롱하고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면서도, 한편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처럼 혼인 생활이 보호받고 남편에게 존경받으며 품위 있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무엇으로 가톨릭 신자임을 보여주며 살아 있는 표징이 될 수 있을까? 대중식당에서 성호를 긋고 식사하는 것인가? 주일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인가?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토록 조롱을 받으며 굳세게 지켰던 신앙은 모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버림받고, 살인자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으며, 모든 죄인을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믿음을 실천했기에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들로 드러났던 것이다. 


오늘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복음 말씀은 계속된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완전해지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뛰어넘어야 할 두려움은 무엇인가?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의 초월정신을 닮고자 하는 열망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게, 쓰러져 가는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 




"평생과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직장 잡기도 힘들고 직장 일도 매우 힘들다 합니다.

인원 감축으로 강도 높은 일에다가 생존과 직결된 일터이기에 일에 올인하다 보면 저절로 일중독이 되어버린다 합니다.

일이 삶의 일부가 아닌 삶의 전부가 된다는 사실이, 일의 노예 되어 일 속에 빠져 자기를 잃게 된다는 사실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사순 시기 성무일도 아침 찬미가 1연입니다.


“이윽고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에 넘치는 때 빛나는 도다.

절제의 약으로써 병든 세상을

치료해 주시고자 정한 시기네.”


사순 시기는 하느님을 찾고 또 본래의 참 나를 찾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나는 나일뿐 그 누구, 무엇도 나를 대치할 수 없습니다.

성무일도 시 유달리 눈에 띤 계약, 계명, 법이라는 단어가 든 시편구절이었습니다.


“내 계약을 네 자손이 지켜나가고, 내 계명을 따르기만 한다면, 그들의 자손들도 영원토록 네 왕좌에 앉으리라 하셨나이다.”

(시편132,12).


“당신의 법을 아니 잊었사오니, 이 고생을 보시고 구하여 주옵소서.”

(시편119,153).


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생각이나 마음만으로 막연히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계약을, 계명을, 규정을, 법을 지켜야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위기는 법대로가 아닌 욕심대로 산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적게 알아도 몸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나 수도규칙의 말씀, 온통 행하라는, 하여 수행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명사(名詞)를 많이 알아도 동사(動詞)가 되지 않으면 그런 명사들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제1독서 모세의 서두 말씀의 강조점도 똑같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wholeheartedly)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이래야 그분 소유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뭇 민족들에게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된다 하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화답송 후렴도 평범한 진리의 재확인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은 행복하여라.”(시편119,1ㄴ).


몰라서 못사는 게 아니라 알아도 명심하여 실행하지 않아 못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모세의 명령을 구체화시켜 우리 모두에게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이게 사람으로 태어난 긍지이자 하느님께서 주신 평생책임이자 숙제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매일 미사 때 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참 어려운 그러나 할 수 있는 평생숙제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의인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차별 없고 편애 없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패거리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간곡한 권고 말씀, 역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하늘의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하느님 수준에 까지 올려보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욕심입니다.

우리 삶의 거룩함은 하느님의 온전함(wholeness)을 보여줘야 합니다.

평생 차별 없고, 편애 없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은 점차 거룩하고 온전해 질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점차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운동을 가기 위해서 자전거 복장을 갖추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곧바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맞습니다. 비가 오고 있었거든요. 물론 비를 맞으면서도 자전거를 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비까지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순간 괜히 짜증이 나네요. 

‘아니,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않더니만, 내가 자전거를 타려고 하니까 비가 오네?’

9시. 봉성체가 있습니다. 저는 성체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비가 아직도 옵니다. 

‘열다섯 집이나 방문을 해야 하는데, 구질구질하게 비는 왜 오는 거야?’

봉성체가 끝나고 신학교 입학식에 참여하기 위해 강화로 출발했습니다. 빗줄기가 더욱 더 굵어집니다. 저는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을 하지는 않았지만, 차를 몰고 외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날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러한 마음이 생깁니다. 

‘비 좀 이제 그치지…….’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대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단 한 순간도 이 비가 좋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요. 짜증이 났고, 비 오는 탓을 했고, 비가 좀 그쳤으면 하는 마음을 간직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을 간직했을까요? 아닙니다. 요즘에 날씨가 가물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그 분들이 보기에 어제의 날씨는 어떨까요? 아마도 주님께서 특별히 배려해주신 아주 좋은 날씨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최악의 날씨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최선의 날씨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최악’이라는 마음을 ‘최선’의 마음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나를 낮춘다면, 즉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철저히 살아간다면 어떠한 순간에도 ‘최선’의 삶으로 멋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래서 놀라운 기적을 팍팍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전한 사람이란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 놓으신 그 완전한 사랑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처럼 낮아져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최선의 마음은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최선’의 마음입니다. 이 ‘최선’의 마음이 항상 나의 마음에 가득하는 사순시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남의 탓을 하지 맙시다. 


  


원수를 사랑하라.

허찬란 신부님

주일학교 1학년 때부터 교리 선생님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 마치 가능한 일처럼 자연스럽게 고정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잘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완전하신 아버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인간인 우리가 원수마저 사랑할 수 있는 성덕을 갖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전국 성직자, 수도자 성령세미나에 참석하였을 때 지도를 해주셨던 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제 죄,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한계를 오늘도 당신의 십자가에 맡기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제로서 숱하게 많은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던지며 살아온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원수에 대한 증오와 그 무게를 다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왔을까요?




원수, 또 다른 나

이동훈 신부님

농사를 짓는 데 잡초와 해충은 농작물의 양분을 빼앗아 가며, 성장을 방해하여 소출을 적게 하는 원수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농사는 해충, 잡초와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류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량의 화학 살상 무기(농약)를 개발하여 광범위하게 사용해 왔다. 인간이 사용한 무기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인간이 잡초에게 승리를 거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살포된 농약은 해충과 잡초만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물길을 따라 다른 생명까지도 위협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봄이면 찾아와 노래하던 새들도, 들판을 뛰놀던 짐승들도 사라져 버렸다. 봄이 왔지만 자연이 들려주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은 1962년 「침묵의 봄」을 발표하여 만능으로 여기며 사용했던 농약의 해악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농약이 해충과 잡초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파괴해 결국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인간에게도 치명적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소출을 조금 덜 내는 대신에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유기농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조상들의 농사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상들의 농사방식은 자연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생태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해서 원수로 대하고 그것을 멸종시키려 하다가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조상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수는 처치하여 그 존재를 없앰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암이라는 질병도 결국 자신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대체의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수술하여 종양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암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암세포가 차지하는 공간을 허락하고, 암세포가 아닌 공간이 더 많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암세포도 결국은 자신의 일부이므로 암세포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암세포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최현욱 신부님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원수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원수처럼 생각되는 사람이 없다면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떠올려 보십시오.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 떠올려지는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은 분명히 여러분에게 어떤 큰 피해를 가져다주었거나 상처를 안겨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한다면 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사실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도 항상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미워하는 사람, 원수로 여기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라,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라.”라는 제 말을 듣고 오히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렇게 하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 “당신은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반문하실 분 있습니까? 아마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원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 당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저는 죽어도 그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많은 고통을 주고 상처를 가져다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무조건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어떻게 나만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도저히 질 수 없는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를 참으로 은총의 시기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김훈일 신부님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이들을 보거나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많은 경우에 그들은 대부분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거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도 멀리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 삶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멀리서 던지는 비수는 옆구리를 스치지만 가까이에서 던지는 비수는 가슴을 찌른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가를 생각해 보면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오래 가고 치유하기 힘이 듭니다. 대부분의 원수는 사랑해야 했거나 사랑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집니다. 즉 사랑의 실패가 원수를 낳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없애는 길은 다시 사랑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입니다. 다시 원수를 사랑하려면 우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계속 개발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의 힘도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다음 원수의 악한 행동 즉 우리에게 상처를 준 행동이 결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의 인품은 두 마리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쌍두마차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죄는 있지만 악인은 없습니다.




본성을 거슬러

강희수 수사님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용서와 마찬가지로 너무 어려운 말씀입니다. 내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당신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분명 저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끊임없이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드러낼 은총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한 이런저런 결심이 벌써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다 지킬 수 있다고, 다 지키겠노라 큰소리쳤는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자신감은 무너져 갑니다. 이런 저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너도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완전함이란 단어에서 쉽게 알 수 있듯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매번 철저하게 용서를 하는 저를 바라시는 것이라면 저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곤 하지만 주님 역시 매번 말씀하십니다. “너는 할 수 있다.” 

사순시기는 제가 얼마나 의지가 약한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약한 의지로 혼자서 해보겠다고 애써 봐야 남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실망뿐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내 의지로 뭔가를 할 때 무너지기만 하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저를 봅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함께해 주실 때 비로소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가 해보려고 하기보다는 주님께 내어드릴 때 제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당신을 찾습니다. 그것은 제 의지를 꺾고 당신께 의지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사실은 나의 실패, 실망이 아니라 당신이 필요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임을.




†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게 하는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 †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된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6개의 대당명제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면,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이들 대당명제는 예수님 특유의 '너희는 들었다'는 기본명제(基本命題)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반명제(反命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명제로 훈시된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곧 '더 옳게' 사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나마 '옳게' 산다고 하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더 옳게' 살기를 실천하기는 분명히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사는 방법과 이론은 배웠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보다 더 엄청난 요구가 제시된다. 예수께서 우리더러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48절)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걸음마도 채 배우기 전에 달리기를 하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주저 않지는 말자. 


어제 복음과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첫 번째 대당명제를 통하여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우쳐 주셨다. '살인하지 못한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3; 21,12-17)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옳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방법은 살인은 물론이며, 형제에게 폭언도 욕도 성도 내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 마음속으로 원한도 품지 않는 것이며, 원한이 있다면 즉각 화해를 청하는 것이었다. 어떤가? 이만큼 하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좀 소극적이지 않는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더 옳게' 사는 방법이 결국은 소극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는 소극적인 행동을 넘어선 적극적인 행동에 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살펴보자.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고,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마태오가 반명제를 만들기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야 어찌 되었던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44절)는 반명제를 선포하신다.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지 않는 행위는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고, 화해를 청하는 일은 다소 적극적이기 하나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타협하는 일종의 중립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어떠한가? 이는 정히 적극적인 행동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의 악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벌(罰)하시고, 착한 사람의 선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상(償)을 내리신다면, 이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추구하는 '옳게' 사는 것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악인(惡人)이나 선인(善人)을 보시고도 당장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신다면,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더 옳게' 사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면(45절), 이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행위로서 그분의 '아가페 사랑'에 일치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하느님의 완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거룩함'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니 너희도 완전하게 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 11,44-45; 1베드 1,13-21 참조)는 하느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간단한 표현이나 동정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를 통하여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나아가는 길은 머리통에 가시가 박히고 두 손과 두 발이 못으로 뚫리는 엄청난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는 길이다.




공평하신 하느님, 원수 사랑의 가능성

정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좋고 옳기만 하지만 때론 우리와 너무 달라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는 신과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차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찾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바램은 항상 사람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오늘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사랑의 최고점이라고 불리는 원수사랑. 도대체 그것이 가능한지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그리고 이내 무리한 요구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며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원수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단호한 입장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 역시 변할 리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예수님은 그리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두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고집에서 도대체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좀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다른 말씀 또한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해야 함은 단순히 원수를 대상으로 그들을 사랑해주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것임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후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기준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이른바 ‘공평하신 하느님’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공평하신 하느님이 원수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제 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 던지시는 질문으로 변화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느님께서 공평하시듯 우리도 공평하게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은 원수 사랑의 다른 부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싫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관심을 두고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만 간주하지만 예수님이 공평하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것은 원수 사랑이란 원수를 구분 짓는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별 의미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다, 아님 내 편이다라는 식의 구분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그것은 자신의 욕심이 사람에게 표현된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 사랑이란 하느님께서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사람의 모습과 내용에 상관 없이 모두 살 권리와 터전을 허락하시듯 우리 역시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런 맘으로 다가서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아니 나에게 원수와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행동이 곧 나의 악함으로 번지지 않도록 그에게도 같은 사랑을 베풀고 기도하기를 하느님은 바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가리지 않은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원수 사랑의 진실이요,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맺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원수 사랑을 해야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수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든 이를 향한 사랑이 결국 우리를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는 첫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혹 우리를 힘겹게 하고, 혼동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분이 바라시는 사랑의 모습은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 사랑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원수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이유일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이룹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