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4,8-11.14-16ㄴ
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한 부유한 여자가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
9 그 여자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10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하나 꾸미고,
침상과 식탁과 의자와 등잔을 놓아 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11 어느 날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옥상 방에 들어 쉬게 되었다.
14 엘리사는 종에게 “저 부인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하고 물었다.
게하지가 “저 부인은 아들이 없는 데다가
남편은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엘리사는 “여자를 불러라.” 하고 일렀다.
종이 여자를 부르니 그 여자가 문간에 섰다.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4.8-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7-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수넴의 한 여인은 부유하며 경건한 부인으로 자기 집에 들른 예언자 엘리사를 친절하게 맞이하였고 그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여인은 엘리사 안에서 거룩한 예언자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작은 선행을 베푼 이 여인에게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자녀를 출생하게 해 주실 것을 예고한다. 이처럼 선행은 항상 좋은 열매와 하느님의 축복을 가져온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죄와 죽음 그리고 율법을 이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며, 그 죽음이 곧 세례로 이어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제2독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삶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투신의 삶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형제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늘에서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후배 신학생들이 한국 식료품을 소포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후배들에게 쓴 제 답장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대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도 한국 식료품을 살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어이 소포를 보내고야 마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12시간 넘게 걸리는 이곳에 소포를 보내면 고추장 용기가 깨질 수 있다는 사실보다, 이 사람이 고추장 한 숟가락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시험, 논문 등으로 바쁜 시기인데 귀한 시간 쪼개서 보답도 없는 소포를 보내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세상은 그대들처럼 그리 어리석지 않습니다. 받을 것 다 받고, 자기 앞가림부터 챙기고, 손익 계산에 재빨라야 살 만하다는 것을 그대들처럼 모르지 않습니다.
그대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저는 어리석은 또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어린 사제에게 털어놓았던 교우분들, 타지에서 고생한다며 봉투를 쥐어 주시던 선배 신부님들, 세상 좋은 것들을 마다하고 울타리 속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살겠다고 세속의 옷을 벗은 젊은 처자들 …….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렇게 어리석어 한평생 거지로 살았고, 가타리나 성녀도 긴 머리를 잘랐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도 자신의 젊은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죄없이 고통을 받고 돌아가시면서도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을 용서하시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달리시고야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이여, 그대들의 어리석음이 하느님께 큰 찬양이 되었으리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그대 자신들을 살릴 것이라 믿습니다. 어리석은 그대들에게 제 어리석은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함께 갑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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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모래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공사장에 쌓여 있는 모래 더미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래성을 쌓으며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한참 동안 쌓아 올린 모래성을 발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놀면 안 돼. 이곳은 위험하니 나가 놀아.”
같이 놀고 있던 친구와 그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우리는 이 아저씨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정성을 다해 쌓고 있는 모래성을 발로 부쉈다면서 말이지요.
어른이 된 지금, 아직도 그 무너진 모래성을 안타까워할까요? 이제는 별것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공사판에서 노는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아저씨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어떨까요? 부족함이 전혀 없는 만족으로 가득한 곳에서 지금의 아쉬움은 특히 별것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을 비롯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장차 갈 하느님 나라에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신 주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보다 가족 사랑을 앞에 두지 않도록, 즉 모든 관계에서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보다 하느님 사랑이 더 위에 있으며,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인간적인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신의 몸과 함께 죄스러운 버릇과 즐거움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하느님께 두는 사람에게 합당한 상이 주어집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힘듦이 사라지는 나라, 더는 억울하지도 않고 아까워할 것이 없는 나라, 커다란 기쁨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 이 나라를 향한 우리의 노력을 늘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삶입니다.
자신을 비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하느님이 채우실 방을 마련하는 것입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사람은 자신의 계획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없을 때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하고 화를 냅니다.
어떤 자매님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침기도는 성실하게 바칠 수 있는데, 저녁기도는 늘 빼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할 때는 가족들이 아직 깨어 있지 않아서 혼자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데, 저녁에는 가족들 식사를 비롯한 각종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냥 잠들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가족만 없어도 저녁기도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가족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마음 때문입니다. 이 마음으로 사소한 기회만 생겨도 뒤로 미루거나 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어야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제약, 예속 등의 이유를 들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나를 진정 사랑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이용하려 다가오는 사람도 사실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때도 있습니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다가오지만, 자신의 본성이 아직 저급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이 구분을 잘하지 못하면 모기에게 속아서 피를 빨리느라고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중에,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전에 다니던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하다가 저의 치아를 갈라지게 한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기세였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말하니까, 신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남편의 친구 중에 사제가 있다고 하며 문밖에 나갈 때까지 저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우선은 갈라진 치아를 임시로 붙여서 크라운을 씌웠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치아가 조금 아파서 같은 치과에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를 대하는 것도 이전과는 딴 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아가 갈라져 있으니 빨리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해 놓고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제 치아를 이렇게 갈라지게 한 분이 당신입니다.”라고 말하여 기억을 되살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그때 찾아왔던 신부입 ... .”
그분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 뽑고 가실래요?”
자신의 의도가 너무 앞서니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제 치아와 이별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며 그 치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 치과에 가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치아를 정상적으로 잘 쓰고 있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쓸 생각입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려면 나의 말을 경청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는 나의 말을 잘 들으려 합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거나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으면서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저는 몇 년 동안 제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나가는 것은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에 관심이 없으면 그 말하는 사람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관심이 생겨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일화라고 합니다. 버나드 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각가 로댕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귀한 로댕의 그림 스케치를 구했다고 하며 그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로댕을 좋아하는 그 친구들은 그 그림만 보며 예술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버나드 쇼가 “아, 미안합니다. 이 그림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이었네요.”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정적만이 흘렀다고 합니다.
[출처: ‘말의 품격’, 이기주, 유튜브 ‘책 읽는 다락방 J’]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싫게 들립니다. 모든 것이 싫게 들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을 바꾸어 잘 보이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지난 복권을 사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빨리 포기하고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 삶을 허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물론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참아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쫓아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으면 아버지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해 다가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파견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고, 교회가 하는 말과 가르침에 관심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신자들은 모이면 주로 누구에 대해 말을 많이 하나요? 아마 본당의 사제와 수녀님들에 대해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잘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그분들을 굳이 안 좋게 말하는 신자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주님께서 왕으로 뽑으셨다는 것 하나 때문에 끝까지 그를 공경하였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며 자신의 원수지만 용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파견하신 이도 사랑합니다. 그 인품에 상관이 없습니다. 인품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분이 파견하신 분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라도 공경한다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매번 인사이동 때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이들 앞에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유튜브는 다양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저는 주로 강의를 듣거나, 미국 뉴스를 듣기도 하고, 음악을 듣습니다. 동영상을 다 보면 유튜버들이 ‘좋아요와 구독’을 눌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눌러주신 좋아요와 구독은 더 좋은 영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저도 마음에 드는 영상물이 있으면 좋아요를 누르곤 합니다. 잠깐의 관심이 모이면 몇 백만, 몇 천만이 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으면 부정과 부패가 자라지 못합니다. 깨어있는 시민이 깨어있는 지도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그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방역 수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지키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의심증상이 있으면 즉시 검사를 받고, 자가 격리를 하는 것입니다. 정부의 방역 대책과 국민들의 참여가 함께하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고,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지난 예수 승천 대축일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날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로나19로 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신문 홍보를 하였고, 구독을 부탁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보내는 것이 귀찮을 수 있습니다. 구독료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신문구독을 신청해 주셨고, 후원금도 보내 주셨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신문사는 신협과 거래를 합니다. 가깝기도 하고, 광고주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협이기에 가능한 범위에서 편의를 봐주기도 합니다. 신협의 정신은 ‘일인은 만인을 위해서, 만인은 일인을 위해서’입니다.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신협의 정신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과 비슷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으로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인 성녀들의 전구와 우리들의 기도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참된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는 나이가 많은 부부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사는 부부가 원하는 것이 자녀의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내년에는 부부에게 자녀가 생길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고 합니다. 좋은 일을 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노부부의 선행은 그렇게 바라던 자녀의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와이에서 사는 젊은이가 사제관으로 먹을 것을 보내왔습니다. 이곳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은 하와이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을 위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를 보지 못했지만 좋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문 앞에 마스크를 놓고 가셨습니다. 어떤 분은 과일과 음식을 놓고 가셨습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우주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두운 우주를 비추는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나눔의 빛을, 희망의 빛을, 사랑의 빛을 비추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넘어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 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딸을 교통사고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십자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찾는 것도 아니고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삶 안에 받아들여 주님처럼 등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삶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록 시작은 작을지라도 가정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위한 나는
너를 위한 너를
만날 뿐이지만
너를 위한 나는
나를 위한 너를
만날 수 있지
나를 위한 나와
너를 위한 너는
나와 너로 갈리지만
너를 위한 나와
나를 위한 너는
나와 너를 뛰어넘지
나를 위한 나는
내 안에 갇혀
나와 함께 죽지만
너를 위한 나는
나를 넘어 너에게서
나 죽어도 살지
나를 위한 ‘나’들이
넘쳐나는 곳이
지옥이라면
너를 위한 ‘나’들이
빚어내는 세상이
천국이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대하면서 충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유교적인 문화 안에서 자라온 우리에게 있어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모를 사랑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부모와 가족도 존재하고, 그 하느님 사랑 안에서 부모와 가족도 함께 살아가며, 그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시작이 있고, 그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잊어버릴 때 모든 것의 존재의 의미조차도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셨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결정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진 모습은 바로 예수님을 가장 닮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십자가를 짊어진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의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 바로 십자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짓눌려서 주저앉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일어서서 나아갈 때 그 때 비로소 구원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표징이자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가야지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지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몸소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 역시도 우리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이 시대의 십자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가온 고통에 짓눌려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이러한 고통 중에도 늘 주님 안에 희망을 잃지 않고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도로서 늘 이웃들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사랑의 질투는 용납될까요?
예수님이 아마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아주 좋아...!!!"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질투를 느꼈거나 지금 질투 중이십니까? 어떤 상황이 당신의 질투를 자극합니까? 질투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 질투란 도의적인 면에서 보면 중립적 열정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질투를 자극하는 동기가 무엇인가에 달려있습니다. 또한, 고귀한 가치를 지닌 질투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분열)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하시고 이어서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4-35.37-38)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발언으로, 제 생각에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제자들을 잃어버리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사가는 '빵의 기적' 이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요한 6,66 참조)
그럼 예수님께,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당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려도 상관없다는 말씀입니까?”(마르코 3.21 참조)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표현이 왜 그토록 물의를 빚고 충격적이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미친 듯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 1코린 1,23 참조)
크게 3가지 그분의“미친 짓”이 있습니다.
1. 육화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까닭에 (탈출 33,20참조) 그분은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음에도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죽지 않고서도 당신의 사랑을 받도록 육체를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2. 수난과 죽음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칠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한없이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3. 부활과 승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다 이루시고 승천하실 때,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우리가 여러 성사들 안에서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 말씀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가난한 이웃 안에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실제로 함께 동행할 수 있는 독보적인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문한림주교강론, 주님 승천 대축일, 가해 2020년 참조)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의 미친 짓”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의 귀로에 서게 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 하느냐로 구분됩니다. 이 선택으로 인해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뉩니다. 이는 한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미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면, 왜 예수님께서는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시고 그분 안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기를 요구하시는지 우리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요구는 공평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랑을 받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질투'에서 비롯된 요구입니다. 이는 한 사람이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할 때, 마치 결혼한 사람들처럼, 독점적이고 거기에 걸맞은 상호보완적인 사랑을 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예수님 자신을 삶의 유일한 중심 축으로 삼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인생을 수레바퀴에 비유해 봅시다. 우선, 두 개의 중심 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식의 경우라도 사랑의 중심축은 하느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심축이 두 개가 되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이 하나뿐인 축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올바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선택한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고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그분의 요구는 주어진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몫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동행이며 특히,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사랑으로 품으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동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삶 전체가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다면,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숨을 얻는 것”입니다! (마태 10,39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기쁜 소식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의미한 강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을 온전한 행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랑에 보답하는 자연스러운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 때문에, ‘사랑에 미치신’ 주님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지난 월요일 사목협의회장단과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음식점 외벽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애완동물 병이나면 가축병원 달려가도
늙은부모 병이나면 그러려니 태연하고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귀찮스레 여겨지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아낌없이 쓰건만은
부모위해 쓰는돈은 하나둘씩 따져보네
자식들의 손을잡고 외식함도 잦건만은
늙은부모 위해서는 외출한번 못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은 표정이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잘한다고 손벽치며
부모님의 회심소리 듣기싫어 빈정대네
제자식의 오줌똥은 맨손으로 주므르나
부모님의 기침가래 불결하여 밥못먹네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근 사올줄은 모르도다”
아마도 그 음식점이 고깃집이어서 상품판매 전략으로 고기를 사들고 가라고 써 붙인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을 표현한 듯하여 씁쓸합니다. 요즘 어떤 세대들에게 ‘효’에 대해 이야기하면 ‘조선시대 꼴통 노친네’라는 소리를 듣기가 십상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야외행사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사무실에 전화불이 나지만, 노인대학 야외행사가 늦어져도 전화 한 통 없는 우리 세태를 볼 때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시각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자기 한 몸을 아끼고 다스리는 것과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애써 찾아 나서는 분야, 자기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이 유달리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잘 해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비호의적이거나 또 자신이 보기에 비호감적이어서 다소 꺼려지더라도 자신이 보호해야 하고 마땅히 예를 갖추어야 하는 관계라면, 자신의 감흥여부나 선익과 손해여부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간직해야 할 자세와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은 우리가 좋고 싫고, 멀고 가깝고를 떠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 패륜으로까지 여겨지는 관계를 소홀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실천적인 면에서 손은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부정이나 자신의 친지들과만의 그룹 이해를 위한 단합이나 부패 등의 집착과 타락을 방지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아울러 비단 가족 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눈에 띄게 해주시고, 자신의 귀에 들리게 해주심으로써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회적 관계인들에게도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살면서 지나온 궤적 속에 번번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떨쳐버리고 싶지만 떨쳐지지도 않고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키와 몸무게와 외모 등의 동물적인 외연과 아울러 어려서부터 마음에 새겨진 상처와 부정적인 감정들이 꽈리를 틀 듯 자리잡고 앉아 어느새 나의 부분을 차지하고 내가 되어버린 성격들과 습관들이 내 십자가마냥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고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는 가족과 친지들의 단점과 아픔들이 내 십자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숙제마냥, 주님께서 나니까 믿고 맡기신 나만의 능력인지도 모를 짐들이 내 십자가입니다. 그렇고 보면 비단 십자가는 내 단점이나 약점 또는 걸림돌이나 장애일 뿐만 아니라 장점이나 능력이며 소명일 수도 있겠다는 묵상을 해 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자기를 주장하면 할수록,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추진하면 할수록 동료들과 친구들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나를 버리면 너를 얻고, 나를 찾으면 너를 잊고 잃게 되는 관계 속에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왜 내가 너와 다르고, 나를 너와 다르게 만드신 주님께서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러기에 내가 잘못해서 너를 용서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주님께서 사랑하고 아끼시는 피조물 중의 하나이기에, 또한 주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기에 나를 버리고 너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일적인 면에서도 나와 너의 오늘 뿐만이 아니라, 주님이 세상 모든 이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꿈꾸고 이루시고자 하신 하느님 나라를 기억하며,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주님의 사도들과 거룩한 형제자매들을 기억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내가 잘나고 좋아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고, 함께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나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잘 압니다. 그리고 나와 내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소명과 사도직을 받아들이는 것임도 잘 압니다. 그렇게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교회를 통해 내게 주어진 사도직을 받아들이는 것임도 잘 압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과 관계를 통해, 주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셔야 하시기에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사람보다, 그 그림을 보고 감탄할 줄 알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의 마음이 더 아름답다.”고들 합니다. 그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대자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세상에서, 주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고 몸소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하고 깨우칠 수 있는 현명한 지혜와 복음의 시각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비록 나는 온전히 따르지 못하지만, 복음과 사랑의 업적을 몸소 이루려고 노력하고 마침내 이루고야 마는 성인들과 복음의 증거자들을 지지하며 사랑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2절)
오늘 이 시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신 사회적 약자들을 기억합니다. 어린이, 노인, 여성, 장애자, 환우, 상이군인, 농민, 어민, 도시 빈민,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이민자와 망명자 등 하루 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을 기억합니다.
아울러 매일 성전에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과 기도하는 수도자들, 희생 봉사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기억합니다. 문화적으로 척박하고 신앙의 적대적인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제들과 수도자들 평신도 선교사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기억합니다. 비록 성당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신이 받은 세례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나름 이 사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쉬는 교우들도 기억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는 아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추구하는 모습과 유사하게 살아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도 기억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주일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로서는 사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합당하지 않다면 나름 애쓰며 걸어온 신앙 여정이 다 헛것이었나 허탈해지지요.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보다 당신이 더 사랑받길 바라십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모든 사랑을 다 독점하시겠다는 욕심은 아니지요.
"받아들이는 이"(마태 10,40-41)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사도들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하시네요. 또 예언자와 의인을 받아들이는 이는 그들이 받은 보상까지 받는다고 하시니 과연 받아들임의 공로와 결과가 엄청나다는 걸 알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인간이 기울어지게 마련인 본능적 가족애를 넘어서라고 초대하십니다.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으로 시야를 확장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서, 역시 하느님의 귀한 피조물인 모든 사람을 편애와 애착, 차별 없이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권고지요.
이런 보편적 사랑에 눈을 뜨면 가족을 덜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과 대리 만족의 도구로 소유물처럼 이용 또는 집착하지 않고 온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로서 존중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재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일화를 다룹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2열왕 4,9).
여인은 엘리사에게서 하느님의 기운을 감지하고 먼저 청을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을 알아보는 그녀의 눈이 놀랍지요 그녀는 엘리사에게서 하느님과의 연결고리와 거룩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사심 없는 헌신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봉헌을 기억하시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사랑하는 벗님!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특별히 세례를 통해 죄에 죽고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 쉬고 살아갑니다. 저마다 드러나는 지향은 제각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본질은 하느님과 그분 나라지요.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나뿐 아니라 벗님도, 타인도 그런 사람입니다!
삶의 질곡을 헤치며 살아오느라 우리의 본성적 아름다움은 허물과 죄악, 가면과 변형으로 가리워지거나 일그러져 버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두꺼운 껍질을 뚫고 그 사람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 모상성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요.
그래도 우리는 믿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귀한 만큼 타인도 귀하고, 내가 거룩한 만큼 타인도 거룩함을 아니까요. 그래서 나를 둘러싼 이들을 하느님 사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셔들입니다. 게다가 예언자나 의인처럼 처절한 희생적 여정을 걷지 않고도, 그들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자체로 예언자와 의인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따르는 삶에서 절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좀 속된 표현입니다만, 밑지는 장사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주일,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거룩한 이가 누구인지 가슴 설레며 찾아보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에게 보내는 존경의 눈빛과 미소, 시원한 물 한 잔까지도 하느님께 올라가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까요. 아멘.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하나인 존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보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딸을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세상생명에 목숨 걸지말고 하느님의 말씀에 목숨 더 걸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을 인정하면 그를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하느님도 인정하십니다.
세상 십자가를 안지면서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님은 외면해버립니다.
세상을 하늘 뜻에 맞춰서 산다는 건 예수님과 함께 귀향길 가는 거죠.
독재자나 자기중심주의자들은 하늘 뜻 무시하니 죽어 갈 곳 없습니다.
사람이란 영혼과 육신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없고 둘이 하나입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하나인 존재라는 걸 믿고 살기만 해도 훌륭한 거죠.
십자가의 제자요 복음의 사도인 교황의 직무 - 교황직과 그 가르침 ⓵ 교황직과 한국 교회의 관계 역사
이기우 신부님
⒈ 교황 주일의 의미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 바로 내일인데, 한국 교회에서는 이 대축일과 가까운 주일에 교황 주일을 지내왔습니다. 다른 나라 교회에는 없는, 한국 교회만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교황은 누구이고 그 직무는 어떠한지를 한국 교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살펴보는 가운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역대 교황들은 하나같이 한국 교회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 교회가 선교사의 직접적인 선교활동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인데다가, 교황청에서 내린 제사금지령으로 말미암아 무지막지한 박해를 무려 백 년 동안이나 받아야 했는데도 만여 명이 넘는 치명자들을 내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한 교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도 교황청 직속의 파리외방전교회에게 조선 선교를 명령해서 박해받은 교회를 돕게 했으며, 그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선진국의 교회들이 침체일로를 걷는 데 반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신앙활동이 활발하고 성직자와 수도자 및 선교사 성소가 상대적으로 많이 늘어나고 있는 교회라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선교역사가 더 오랜 이웃 나라들의 교회, 즉 일본 교회나 중국 교회는 물론이고 유럽 대륙의 교회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서 21세기 복음화의 등대가 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여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두 번이나 방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아시아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두 교황 모두 시성식과 시복식을 로마 교황청에서 거행하던 관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한국 현지에서 거행해 주었습니다.
⒉ 교황과 교황직 : 교황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후계자를 뜻합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드로 이후 제266대 교황으로서 선출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나머지 열한 사도들의 직무를 계승한 후계자들을 주교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교황을 교종이라, 주교를 감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황과 주교단이 합하여 서방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단을 이루고 있고, 주교들이 책임지고 있는 각 교구는 사제들의 보좌로 운영되는 교회법상 사목의 큰 단위입니다. 본당은 교구를 이루는 작은 단위이지요. 교황과 주교들로 구성된 교회의 조직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수호하는 교도권과 전례 거행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성화권, 그리고 신자 공동체를 돌보는 사목권을 신자들을 대표하여 행사합니다. 이는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사도직 활동을 보호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 구성의 뿌리와 뼈대를 예수님께서 시작하셨으며, 그 열매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교회의 성원들이 실천하는 사도직 활동을 통해 세상 안에서 맺게 될 것입니다.
⒊ 선교, 박해와 순교, 시복과 시성 : 자생적 교회 설립, 선교사 파견과 박해와 순교, 그리고 시복시성이 한국 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열쇠 말입니다.
교황청에서는 이미 1658년에 동양 선교를 전담할 수 있는 파리외방전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교회가 각각 국왕의 책임하에 외방선교를 맡고 있었지만, 선교 성과는 지지부진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에 자생적으로 천구교회가 생겨났을 무렵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었으므로 교황청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784년에 중국 북경에 있던 북당에서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진암 강학회에서 함께 천주교 교리를 공부했던 선비들에게 세례를 베푼 이후 천여 명으로까지 신자가 늘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가성직자단을 조직하여 성사를 베풀다가 문득 의문이 생겨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했던 그 무렵에 교황청에도 조선 천주교회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구베아 주교는 이미 중국 천주교회의 조상제사에 대해 교황청에서 내린 금지령을 조선 천주교회 대표들에게 전달했고, 이에 따라 1801년 진산 사건을 시작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백여 년에 걸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조상제사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교리가 성리학과 배치된다고 보았으므로 천주교 신자들의 씨를 말려서 조선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박해하고 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상제사 금지령의 배경에는, 당시 교황청에서는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조상제사에 조상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음을 우려했고, 구베아 주교는 이미 중국에서도 조상제사 금지령이 내려져 있기도 했거니와, 중국과 비슷하게 조상제사를 지내는 조선을 예외로 할 경우 조선 교회가 이단의 길로 걸어가지나 않을까 염려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로서는 제사금지령이 교황의 뜻이기도 해서 순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성리학에 따라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도 않고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조선 조정의 정책보다는 만민이 평등하며 남녀가 동등함을 가르치는 천주교 교리가 옳다고 믿었으므로 조상제사를 거부한 대가로 주어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치명할지언정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이 교우촌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신앙생활과 박해에 임하여 보여주는 용감한 치명 자세에 감명받아 교황 레오 12세는 조선 선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도 기꺼이 교우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치명하였으며, 또 그 뒤를 이어 후임 선교사들을 파리외방전교회에서도 계속해서 조선에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치명 기록을 번역하여 교황청에 보냈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바탕이 되어,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79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고, 1968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복자품에 오른 103위 순교자들이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습니다. 최근에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 광장에서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습니다. 시복시성식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순교자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아졌고, 이는 곧바로 폭발적인 입교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⒋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 역대 교황 가운데 한국을 찾은 첫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로서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나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역사적인 첫 방한은 1984년 5월이었습니다.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방한하여 서울에서는 시성미사, 대구와 광주 및 부산 등에서는 세례성사, 성품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전했으며, 노동자와 농어민, 한센병 환자 등을 두루 만났습니다. 이때 한국 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와 성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들 모두 103위의 성인을 탄생시키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또한 1989년에는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 대회를 주관하러 두 번째로 방한하였습니다. 이 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로서 교황이 직접 골라서 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이 바로 분단된 국가임을 의식한 배려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의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출신입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출신들이 교황직에 선출되었던 관례를 깨고 최초로 동유럽 출신으로 교황직에 올랐습니다. 과연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교회를 재임 중 10여 차례나 방문함으로써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습니다. 군사력을 경쟁하거나 경제 제재를 하는 등의 위협적인 방식을 통하지 않고, 신앙심에 바탕을 둔 용기와 연대를 강조함으로서 평화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대희년을 맞이하여 가톨릭교회가 지난 2천 년 동안 조장하거나 방조했던 각종 범죄 및 불미스런 사건들에 대해 참회하고 반성하는 문서를 발표하였으며, 십자군 전쟁 이후 관계가 악화된 채로 남아 있던 동방 정교회와 이슬람교와 화해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는 2005년 4월 2일 선종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2014년 4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요한 23세와 함께 요한 바오로 2세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 한국을 방문한 두 번째 교황은 프란치스코 현 교황입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이탈리아 출신 이민이어서 이탈리아 문화에 익숙한 편이었기 때문에 비유럽 출신이라는 데 대한 거부감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교세가 이미 유럽의 교세를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세계의 여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두 교황’이라는 영화에서도 소개되었다시피, 전임 교황이자 보수적인 베네딕토 16세가 자진해서 사임한 직후였고, 추기경 시절 진보적인 노선을 견지했으므로 세계의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1984년에 시성된 순교자들이 병오박해와 병인박해 당시에 치명했던 순교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데 비해,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비롯한 124위의 치명자들은 그 이전인 신유박해 이후의 초기 순교자들이었으며,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순교자들 중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이 10명이 포함되어 있었던 관계로 프랑스 교회가 주도했었지만, 이 2014년의 시복식 준비는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도맡아서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안에 해냈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식을 주례하는 한편, 세월호 유가족들도 만나 위로했으며, 솔뫼성지에서 열린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여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 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갈라진 민족의 화해를 기원하였습니다.
⒍ 교황의 메시지 : 베드로 사도가 최초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면,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에서 회심한 선교사로서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 주일인 오늘은 사도 베드로에 초점을 맞추어 교황직과 신앙의 관계를 우리 한국 교회와의 관련 역사 속에서 살펴보았으니, 내일부터 한 주간 동안에는 사도 바오로에 초점을 맞추어 교황의 가르침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기고 간 메시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체험은 만점이었어어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오늘 선생님들과 어린이 학생들이 함께 체험학습을 떠났다. 자연, 농장 돌아보기, 감자캐기, 양파수확, 그리고 농장에서 손수 마련한 꿀맛 같은 점심 식사, 두그릇씩 양껏 여러 음식을 챙겨드는 학생들의 식도락가를 보았다. ‘눈비산마을’ 농장 대표님은 우리와의 작별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수확한 감자며, 생산된 과자를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선물로 챙겨주고 있었다.
이제 만선의 기쁨하고 즐겁게 귀가할 시간이다. 그런데 뜻밖에 한 어린이가 어깃장을 놓았다. 갑자기 일행의 차를 타지 않겠다는 거였다. 선생님은 자기가 타고온 차량에 어란이가 탑승하도록 했지만 뭔가 심기가 불편했던지 아버지 핑게를 대며 탑승을 거부했다. 선생님과 아버지 사이에 휴대폰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귀가를 함께 서두르는 상황에 아이는 끝까지 혼자 이곳에 남겠다는 거였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아예 어린이는 휴대폰이 없었고, 아버지와 통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제로 어린이를 차량에 태울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어린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벌써 두시간 째 기다림이 이어졌다.
선발대가 도착하고 어렵게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다. 아버지가 아이를 농장에서 만난 시간이 그렇게 경과 되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버지가 아이를 만나 성급하게 야단칠까 봐 잘 타이르라 일렀고 상황은 이렇게 무사히 좋은 모습으로 종료되고 있었다.
선생님은 무던히도 인내하며 아이가 꼬인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만일 아이를 어른의 바람으로 강제하고 일을 쉽게 처리했다면 아이에게 상처가 남고 오늘의 체험학습은 영점 아래 마이너스로 돌아서 나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잘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선생님의 어린이와 함께함, 기다려줌, 어린이의 수준으로 문제를 해결했기에 어린이는 환하게 웃었고 선생님은 안도의 한 숨을 크게 내 쉴 수 있었던 하루였다.
선생님은 얼마나 어디까지 인내해야 할까? 선생님이 시험을 받았다. 우리는 인내를 쉽게 포기한다. 그러면 상황은 선생님도 아이도 부모도 파국이다. 문제는 더욱 꼬이고 복잡한 문제의 양상으로 심각하게 발전한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0,39)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두시간을 꼬박 참으며 어린이의 어깃장을 가다려주고 웃음으로 해결한 선생님이 고맙고 기쁘다. 오늘 체험학습은 모두가 다 만점을 받았다. 아무리 좋은 체험학습을 진행했어도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어린이를 선생님이 강제했다면 서로의 인간관계는 깨지고 깊운 상처로 얼룩져 오늘의 하루 결과는 평생을 괴롭히는 빵점일 것이다.
우리의 체험은 이렇게 훌륭하게 이어지고 있다. 나는 선생님께 감사를 드렸다. “선생님은 분명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나요?
배기선 영덕막달레나 수녀님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에서는 대규모 역학조사를 통해 열정적 사랑의 수명이 평균 18개월에서 30개월에 불과하다는 결과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정말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걸까요?
사랑에 빠지면 본능을 관장하는 중추신경이 활성화되면서 원초적 기쁨과 활력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또한 마약의 주성분과 동일한 계열의 신경전달물질 수치가 증가하여 이성이 마비되고 열정과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성으로 인해 우리 몸은 일상에서 벗어난 이러한 상태를 일종의 스트레스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내성을 길러 호르몬 변화에 적응하고 서서히 원래 상태를 회복하게 됩니다. 소위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이성의 기능을 회복하여 상대방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기까지의 기간이 길어도 3년이라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사랑의 지속성을 의심하는 이들, 사랑에 있어 무책임한 이들에게는 그럴싸한 핑계로 이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물타기(neutralization 중화 : 죄의식의 무효화를 일컫는 사회심리학 용어)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사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던 드라마 속 인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연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열정적 사랑의 시기가 지나면서 연인들 사이에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옥시토신(oxytocin)이 증가합니다. 이는 태아와 모태 사이에 작용하여 서로 애착을 형성하게 하는 호르몬입니다. 생면부지의 남녀가 하루아침에 깊은 애착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타오르는 열정의 시간은 그저 사그라지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든든함을 느끼면서,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 돌보고 싶다고 느끼는 마음, 정서적 친밀함과 신뢰감을 쌓는 데 필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많은 이가 열정이 사라지면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정은 사랑의 일면일 뿐, 본질적인 속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중략)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4-8 참조).
짧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삶에 스며든 사랑의 설렘은 계절과 함께 흘러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기대도 가슴 뛰는 순간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신의를 지켜온 긴 시간의 두터운 울타리는 결코 스러지지 않는 든든한 산이 되어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영원히 지켜줄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
방상만 신부의 내 생애의 도서
<천국의 열쇠>라는 책을 처음 읽은 것은 학생 때입니다. 주인공인 프랜시스 치점 신부의 삶의 여정은 ‘사제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케 합니다.
저자 A.J.크로닌은 1896년 스코틀랜드에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와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종교의 갈등을 뛰어넘은 조화와 평화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발행(1941년)된 그의 불후의 명작 ‘천국의 열쇠’를 통해, ‘종파나 인종, 국가의 구별없이 인류는 한 형제임을 깨달을 때 참사랑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35년이라는 오랜 세월 중국 선교를 마친 주인공 치점 신부의 회고담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관계를 비롯해서 참다운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신학생 시절부터 그가 지닌 성실성과 인간 양심에 반하지 않는 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충실하게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동급생이며 친구인 안셀모 밀리는 치점과는 달리 학교에서 반장 노릇을 하고 신부들의 신임을 독차지하면서 주도면밀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며 요령 있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명예’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사람으로 나중엔 주교의 지위에까지 오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부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는 오늘을 사는 사제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학교 학장신부인 러스티 맥은 ‘낚시’라는 취미에 빠져있긴 하나 학생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부학장인 타란트 신부는 ‘규정과 규칙’을 중요시하며 그 잣대로 학생들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치점 신부가 보좌였던 시절 본당 주임 신부인 키저 신부는, 치점 신부가 신자들의 신앙을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것도, 기도를 늦게까지 하는 것도, 젊은이들을 이끌고자 하는 노력도 못마땅하게 여기며 화를 냅니다.
신구교 간의 갈등 배격, 보수적인 교회의 운영에 대한 반발 등의 문제로 치점 신부는 결국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중국에서도 그는 돈을 미끼로 교세를 확장시키려는 것을 배격하면서, 자신이 바르다고 믿는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세 수녀와 함께 살면서 도도한 원장 수녀와의 관계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모습은 오히려 감동과 존경을 불러옵니다.
치점 신부의 입을 통한 말들을 우리 역시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옥이라는 곳은 말일세. 인간이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거라네.” “인간의 괴로움은 모두 회개의 행위이네.” 그리고 중국을 떠나기 전 무릎을 꿇고 한 기도, “제발 행위가 아니라 지향을 보아 제 생애를 심판하소서.”
과연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버림과 따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3주일>(2020. 6. 28.)(마태 10,37-42)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소홀히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표현이 아니라 뜻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라는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가족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예수님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가르침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이고, 신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또 가장 옆에 있는 영적 동반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2) 무조건 잘해 주고, 좋아하고, 아끼고, 보살피는 것,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선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고, 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입니다.
(선의 실현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집착일 뿐입니다.)
따라서 악을 물리치고 선만 지향하는 것,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떤 죄를 짓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죄 속에서 살면서 멸망을 향해서 갈 때, 가족을 따라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고, 선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3) 구원은 일차적으로 ‘내가’ 받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내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서’ 받고, ‘나 혼자서’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또 이웃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구원받으려고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얻은 구원은 구원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만 있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받아야 하고, 영원한 생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받아서, 가족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족을 맺어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구분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우리가 보기에 십자가처럼 보이는 고난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인내와 고행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다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날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십자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 십자가들이 무겁든지 가볍든지 간에, 또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신앙생활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십자가들이 싫어서 피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꼭 십자가가 필요한가?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십자가 없이 그냥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이 말은, “사람마다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정화하고 단련하기 위한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만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 말씀의 뜻은, “현세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집착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세의 삶과 현세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본성을 누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세상 극변까지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의 강론에서 (Hom. Manilae habita die 29 novembris 1970)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이 일을 하라고 나를 보내십니다. 나는 사도이고 증인입니다. 목표가 더 멀리 있으면 있을수록, 내 사명이 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을 하도록 나를 강요하는 사랑은 그만큼 더 시급합니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계시이시고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시며” 창조된 만물의 기초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스승이시고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역사와 세상의 중심이십니다. 우리를 알고,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우리 생활의 동반자이시고 벗이십니다. 고통받는 분이시고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젠가 오셔야 하실 분이시고 우리의 심판자 되실 분이시며 우리가 희망하는 것과 같이 우리 존재의 영원한 완성이시고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결코 끝내 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빛이시고 진리이시며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배고픔을 채워 주시는 빵이시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시는 생수의 원천이십니다. 우리의 목자, 우리의 인도자, 우리의 모범, 우리의 위로, 우리의 형제이십니다. 우리처럼 또 우리 이상으로 작은 자, 가난한 자, 수치를 당하신 자가 되셨습니다. 노동자가 되셨고 온갖 불행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새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한 자가 되고 평화가 공동 생활의 원리가 되며 마음이 깨끗한 이가 높여지고 애통하는 이가 위로를 받습니다. 또 이 나라에서는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을 느끼고 죄인은 죄 사함을 받아 모두가 형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은 그분에 대해 좋은 것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대부분은 이미 그분께 속하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께 나는 그분의 이름을 반복하고 모든 이들에게 그 이름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작이요 마침이며,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새 세상의 왕이시고 우리 인간 역사와 우리 운명의 숨겨진 최고의 근원이십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중재자이십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누구보다 온전한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여인 중에 복되신 마리아의 아들이십니다. 마리아는 육신으로 그분의 어머니이시고 그분의 신비체의 영에 참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명심하십시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전파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세세 대대 땅 극변까지 그분의 이름을 울려 퍼지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 사랑
이상섭 모이세 신부님
희생과 고통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연인을 사랑하는 것도, 더 나아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희생과 고통이 없이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합니다. 형제나 자식이나 부모님보다도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알아야 하고,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미천하고, 버림받고, 보잘것없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께 사랑을 실천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마태 25,31-45 참조)
강도를 맞은 사람을 치유하고 이웃이 되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이웃으로 우리가 살아가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희생과 고통이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사용하시는 하느님
윤태영 토마스(븍음화 활동가)
작년 이맘때쯤 The Message라는 제목의 제가 만든 랩 음악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몇 년 전 선교 프로그램 때문에 인도에서 3개월을 지내며, 하느님께서 지난 제 삶 안에 얼마나 크고 많은 일을 이루셨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는데요. 그 이야기와 제 마음을 고백하며 남긴 일기로 다른 이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길 바라며 곡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사실 저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었습니다. 부모님의 뜻에 의해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저는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다 보니 세상을 향한 막연한 분노와 원망이 많았고,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서 신의 존재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종교가 심신에 도움은 될지언정, 신 존재를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여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신을 믿지 말라고 설파하며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불만과 불신이 가득 찼던 청소년기에 힙합 음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빼먹고 친구들과 거리를 방황하다가 저녁때는 힙합 클럽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세상을 욕하며 분노를 쏟아냈지요. 고3 때는 그룹을 만들어 언더그라운드 음반까지 제작했습니다. 그런 어두웠던 제 삶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의 한없이 큰 사랑과 자비로, 저는 용서라는 선물을 얻어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전, 창작 생활성가 제에 입상했던 무대에서 저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하였습니다. 지하 클럽에서 마이크를 잡고 세상을 욕하며 노래하던 제가, 이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벅차게 감사해서 노래를 전혀 부르지 못하고 울다가 내려왔었지요.
저의 삶을 돌아보면,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아넘겼지만, 요셉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로 형제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지요. 인간의 죄악마저도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전능하신 하느님. 그분께서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몰래 들어오십니다.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하고 기적처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성실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시간을 통해 선을 창조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죄와 상처로 어두운 상황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눈앞에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제가 가진 힘과 능력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 50,20)
진정한 평화
-키엣 대주교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과 악마, 짧은 이 세상과 영원한 천국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며 그 선택은 전혀 다른 두 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압력으로 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지만 결국 그 강함은 약함을 감추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파라오의 행동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권력을 보호하고 부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두려운 존재였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더 가혹하게 다루었고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려 죽이라고 명령했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는 아주 도덕적인 모습으로 위장합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얼굴로 많은 예물을 바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지르고, 동족을 억압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이중성을 경고하였습니다.
위선자들의 보여지는 평화 뒤에는 편견과 억압, 갈등이 존재합니다. 사람을 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욕망은 언제나 두려움과 의심이 따르는 것이기에 절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반면 주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기에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욕망을 벗어난 자유는 깊은 평화를 줍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나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람은 다음 생에서는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심판과 벌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 나눔을 알고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자신을 마치 한 잔의 물처럼 생각하는 겸손함을 지니고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고 합당한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세계의 평화를 만드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평화이고 그것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주님의 제자와 자녀로서 주님의 관대한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기 위하여 오셨기에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지칠 줄 모르고 끝없이 주기만 하셨습니다.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용서를 위해 오셨고 인간의 구원과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풍요로움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넓은 마음과 포용, 관대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와 자녀로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작아져야만 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갖는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고도 “저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와 자녀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자녀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의 단절과 사사로움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저희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어떤 길을 선택하였습니까?
2. 주님의 자녀로서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하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두 교황'과 교황 주일
임상만 신부님
영화 ‘두 교황’은 은퇴를 결심하고 후임을 물색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교구장 은퇴 승인을 받기 위해 교황을 방문한 베르골리오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함께 지낸 이틀 동안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교회의 전통과 규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보수파 교황과 이제는 교회가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고 신자들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는 개혁파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만남을 다루면서, 우리 교회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또 동시에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교회가 매 순간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황의 말에, “오늘날 교회는 자비로 담을 부수고, 그 대신 다리를 지어야 한다”고 응수하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대화를 통해, 제도 안에서의 전통적 교회론과 신자들 삶의 현장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새로운 교회론이 충돌하지만 결국은 이 둘이 함께 공존해야 함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복음은 ‘시원한 물 한 잔’(마태 10,42)이라는 말로 교회의 원론적인 역할을 제시한다. 뜨거운 중동에서 ‘시원한 물 한 잔’은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물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나 우물 보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뚜껑을 닫고 열지 않아 더는 물을 마실 수 없다면 그 우물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 너무 방어적인 모습으로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므로 해서 삶의 현장과 유리된 면을 바로 잡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교회가 일상의 현장에서 세상 속의 작은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제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물 뚜껑을 열 때 정체성을 회복하고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라는 표현으로 삶의 현장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받기 쉬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중요한 것을 적극 나누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이는 ‘작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벼운 존재일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그들이 신앙적 실천 대상의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교회가 제도권에만 공고히 머무르기 위해 정작 삶의 현장에서 관심이 필요한 작은 이들을 놓치고 있지 않았는지에 대해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냥 ‘물 한 잔’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잔’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눔은 주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욱 필요한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나 신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부분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좀 더 신중하게 받는 사람의 입장까지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시원한 물 한 잔’을 기다리며 목말라 애타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방황하는 이들은 무시한 채, 화려한 종교적 행사 위주로 단지 양적 팽창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과감히 그 달음질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잃는 것 보다는 작은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헤아릴 수 있어야 “우리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우리는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활동하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좀 더 윤리적인 비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CAPP 연설 중에서)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김혜윤 수녀님
‘사람대접 못 받는’ 모욕의 순간은 우리가 정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혹은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그들이 판단했을 때) 발생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고 환대받지 못하며 그래서 존재가 부정되고 마는 비극은 우리의 일상 도처에 기생(寄生)하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환대’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인지를 설명해줍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서는 크게 5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복음은 그 두 번째 ‘파견 설교’에 속해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을 언급하시는데 첫 시작부터 가히 파격적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혹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27)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유대로 묶일 수밖에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을 부인하는 듯한 말씀이 억지스러운 위협과 심각한 독선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이러한 난처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본문을 복음서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큰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본문의 역설도 조금은 수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라’(10,16-25)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10,26-33)는 말씀 다음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가족’을 모티브로 한 단락에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듯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시며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설 것’이라고 예견하시고 급기야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10,34-36)라고 까지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 말씀 바로 다음에 오늘 복음의 첫 부분(“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서가 제작되던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이해 가능한 구절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완성되었는데, 당시 유다 내부사회는 계급간의 갈등과 부패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결국 로마군이 주둔하여 사태를 정리하는 계엄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저항하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파국적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의심과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 때문에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칼을 주러왔고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 때문에 감수해야했던 가족으로부터의 소외와 버림받음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입니다.
■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대립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내용으로서는 가장 먼저 등장하는 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문장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문장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 위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가치가 없다.”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 “사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오’로서 누군가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끼고 애착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초성적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동사 ‘아가파오’에서 파생)와 구별되는 감정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애착의 위험성과 집착이 수반하는 속박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착할 때 발생하는 불안, 질투, 실망, 미움은 인간을 파괴하는 치명적 무기가 되며 집착에서 벗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인간은 훨씬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충만한 유기적 공존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을 접고, 대신 주변 이웃들을 ‘받아들임’과 그 결과로 ‘받게 되는’ 보상(40-41절)에 대해 언급합니다. “받아들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코마이’이며 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환대하고 존중하며, 그의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아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게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환대로 보상받게 되는데 특별히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42절)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작은이들”은 스스로 보상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 환대와 보상
이러한 환대와 보상의 상호성은 제1독서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 지역을 지날 때 마다 자기 집에 모셔 음식을 대접하고 환대합니다. 이는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2열왕 4,9)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사람을 환대한 것은 곧 하느님을 환대한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환대는, 나이 많은 남편과 자식 없이 살고 있던 여인의 임신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부인은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16절)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집착은 주변의 “작은이들”에게 다가가야 할 우리의 진심과 선의를 무기력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예수님 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은, 사실 부질없는 집착이나 애착을 넘어서는 넓은 사랑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렬하고 충실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 되고 맙니다. 폐쇄적이기에 치열하고, 치열할수록 맹목적인 가학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포기하거나 버림을 의미하지 않고 ‘믿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를 믿지 못할 때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런 놓을 수 없음이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 관대하며 유쾌하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결속과 연대의 미명아래 자행되는 배타적 집착에서 벗어나 다름과 낯섦을 인정하고 서로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존중하는 환대입니다.
제자됨의 길
-김상우 신부님-
2020년도 절반 이상이 지났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 염증으로 빼앗긴 우리의 일상, 그리고 정상적인 미사 참례 와 본당 활동이 아련하고 그리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저는 연중 제13주일 복음(마태 10,37-42)에서 실 마리를 찾아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특히 스승이신 예수 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 복음서는 독자들이 스승 예 수님의 제자됨의 길을 걷도록 초대합니다. 복음서 끝부분 에 따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 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 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라는 스승 예수님의 사명이 제자들에게 부여됩니 다. 이 같은 맥락에서 주일 복음 말씀을 읽어봅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길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더 명확하게 다가옵니 다. 37절에서 ‘사랑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하느 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동사와는 다릅니다. 37절의 표현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좋아하다’라는 의미로 부정적인 것을 가리키거나 멸시적인 어조(마태 6,5; 23,6)로 사 용되기까지 합니다. 이는 가족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 사랑 도 물론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하느님 사랑과 같은 범 주에 넣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신앙인으로서 예수 님의 제자됨의 길을 걸으며, 가족 사랑을 핑계로 하느님 사 랑을 소홀히 하면서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여기서 ‘목숨’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는 육체적 생명만을 가 리키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영적인 생명, 즉 영원한 생명 을 지향하는 전인적 생명, 존엄한 인격체로서의 생명을 뜻 합니다. 게다가 ‘목숨을 얻다’라는 표현에서 ‘얻다’라고 번 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발견하다’라는 일차적 의미가 있습 니다. 그래서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 인 격체로서의 전인적 생명을 스승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내 어놓고 잃을 각오마저 아끼지 않는 제자들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절망과 피로감, 실망과 무기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많은 것들이 상대화되고 부질없이 느껴지는 이 시기에, 스 승 예수님의 제자됨의 길을 여러분은 어떻게 걷고 계십니 까? 이 시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신앙인에게 변하지 않는 가치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곰 곰이 돌아보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최원석 신부님
6·25 한반도 전쟁 70주년을 지내고, 예수 성심 성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 다! 베드로 사도의 266대 후계자이신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건강과 평화를, 그리고 모든 양 떼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교황님의 뜻을 위해 열렬한 기도와 희생, 물질 적 지원을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주님은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인가요?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 몸을 지키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약자들을 보호한다면, 태권 도 정신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미용에 좋아서, 다이어트를 위해서,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서라 면, 그는 태권도 정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를 믿는 이유가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또는 사업의 번창을 위해 서라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신천지로 넘어가도, 사랑하는 자녀들이 냉 담 중이어도,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어도 그저 남의 일인 듯 구경만 한 다면 그런 신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부모나 자녀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예수님께 합당하 지 않습니다. 현세에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참 행복을 잃을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현세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천주께 영광이 되는지, 영혼들의 구원에 유 익한지, 그리고 성교회의 승리에 기여하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판단되면,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묵묵 히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이 될 것입니다!
자모이신 성 교회의 지극히 공경하올 교황성하께!
문봉한 신부님
먼저 프란치스코 형제를 교황님으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두 손 들어 감사의 찬양을 올립 니다. Viva PaPa! Viva Paco! 지상에서는 가장 위대한 부름을 받은 한 분만이 설 수 있는 그 엄중한 자리에서, 위대한 교황님이 나약 하게 모든 이의 기도를 청하면서 거룩한 직무를 시작하셨지요. 너무나 겸손하고 솔직해서 당신이 서신 발 코니가 마냥 높으신 분의 자리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랑의 위엄이 흘러내리는 천상의 층계 가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죄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가진 자든 없는 자든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로 청하 셨습니다. 그 모습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인 착하신 주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은 당신에게서 희망을 받아 안으며 한 마음으로 새 교황님을 위해 기꺼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 날 이후 온 인류가 마주한 위대하면서도 겸손한 친구인 당신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 다. 늘 고맙습니다. 저희보다 한 발 앞서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어려운 문 제를 푸는 열쇠는 자본과 권력을 이용한 계략이 아니라, 자신을 순수하게 내어주는 사랑임을 입증해 주셨 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격이 하느님의 사랑을 몰아낼 것처럼 이 땅에서 기승을 부리는 날, 비에 젖 은 성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홀로 인류를 위해 기도하시던 당신에게서, 또 다시 희망을 보았습니다. 희망 은 막연히 기대만 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성실히 준비하는 자의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내 리던 비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공포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의 예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늘 고통 속에서 함께하는 친구로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래 서 우리 모두가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사랑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자들을 찾으라고 하셨지요.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사랑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없는 사랑은 자신 을 내어 주지 않는 이기적인 변명에 불과함을 깨우쳐 주셨지요. 이렇듯 사랑의 산증인이신 당신과 함께함 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새삼 느낍니다. 오늘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짐해 봅니다. ‘변 명과 핑계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신속하게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친구이신 교황님 과 함께하며 행복하겠습니다. Viva PaPa! Viva Paco!
참 멋진 주님 제자의 삶 -사랑, 추종, 환대-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오늘 강론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참 멋진 주님 제자의 삶’입니다. 제 요즘 취미가 뭔지 아십니까? 휴대폰 사진찍기입니다. 하여 자칭 제 별명을 ‘사랑의 사진사’라 부릅니다. 참 멋진 사진을 찍으면 지인들과 나누곤 합니다. 어제도 멋진 청년이 가족과 함께 자동차 축복차 방문했기에 자동차 축복후 요셉상 앞에서 가족 사진을 찍은후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전송했습니다.
“모두 멋지고 평화로워 보이네요! 멋지고 평화롭게 사세요!”
‘멋지다’를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썩 훌륭하다 였고 우아하다와 비슷한 말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아름답다와 더불어 참 좋은 말마디로 요즘 제가 참 많이 쓰는 어휘이기도 합니다.
엊그제 저는 참 멋지게 산 분의 부음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대표 생태운동가, 회색문명, 녹색으로 맞선 생태적 인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별세’란 기사엔 감동적이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녹색평론은 제가 정기 구독해 보는 유일한 국내 격월간 나오는 잡지입니다. 전북 진안에서 생태마을 공동체를 운영하는 최종수 신부의 추모사에 나오는 두분의 우정도 멋졌습니다.
-“신부님, 힘드시죠. 우리 신부님이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농촌이 희망입니다. 생태적인 삶, 자급자족 생태공동체가 대안입니다. 흙과 함께 단순소박하게 사는 것이죠. 내가 도울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통장 번호 문자로 주이소.”
“아버님,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후원을 하셨어요. 녹색평론 발행도 쉽지 않는데요. 너무 큰 금액이라 손가락을 세 번이나 확인했어요. 아버님 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아버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이고 그리 많지 않아요. 생태마을 초창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나. 밑빠진 독에 물붓기 아닌가요. 종자돈 알지요. 힘내고 용기 내라고 보낸 겁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제 주변에는 참 멋진 삶을 살아가는 꽃같이 예쁜, 별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꽃을 선물할 때 저절로 나오는 싯귀입니다.
“꽃을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방금 부른 화답송은 얼마나 멋집니까? 제가 참 좋아하는 화답송으로 산책때 마다 노래로 되뇌이며 바치는 짧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누구나 ‘멋지다’라는 찬사를 받으면 좋아할 것이며 믿는 이들이라면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그 방법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려드립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이요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이자 중심이자 의미이신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비단 우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이들에 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세상과 이웃에 대해 집착에서 초연한, 눈밝은 사랑에 참 멋진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가족만을, 세상만을 사랑할 때 눈먼 맹목적 사랑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무엇이 참사랑입니까?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무사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이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수행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기도의 수행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을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시편공동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를 바칩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기도의 수행이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날로 증진시켜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며 참 멋진 제자의 삶을 형성합니다.
둘째, 추종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인생 여정입니다. 다 각자 고유의 인생여정이지만 함께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여정입니다. 길은 다 달라도 방향과 목표는 일치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영원한 방향이자 목표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무수한 정신질환도 여기 서 기인합니다. 아무리 빨리 가면 뭣합니까? 제대로 제방향으로 가야지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생각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주절주절 말할 수는 있어도 생각없이 글을 쓸수는 없습니다. 글쓰는 습관이 생각을 키우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주님을 생각없이 제 십자가 없이 추종할 때 말짱 헛일입니다. 비교하여 우열과 호오를 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누가 대신 져줄수도 없고 내려 놓을 수도 없는 십자가입니다. 참 사람됨의 표지가 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지고 가야합니다. 참으로 제 책임의, 제 운명의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 멋진 제자들입니다. 마지막 천국의 열쇠도 각자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추종도 원활해 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바오로의 말씀처럼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힘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바로 세례성사와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을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사랑의 샘,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을 항구히 추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역시 역설적 영적진리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어가는 삶같지만 오히려 목숨을 얻는 자기실현의 구원과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얻다’에서 얻다의 그리스어의 일차적 뜻은 '발견하다'라 합니다. 그러니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그래도 자기를 잃어가면서, 비워가면서 참 자기를 발견해가는 ‘발견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입니다. 환대의 반대는 냉대입니다. 참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냉대의 추억일 것입니다. 환대의 제자들, 참 멋진 주님 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분도회의 정주서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환대 영성임은 다음 고백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분도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환대의 영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을 받아들임에 대한 제53장 서두의 말씀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새삼 환대의 영성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와 제1독서 열왕기 하권 내용도 환대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웃을 환대함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또 환대에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을 확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환대의 사람치고 잘못되는 경우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바로 사람 환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환대 자체가 고귀한 덕이자 그 자체가 보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녹색평론의 편집인 고 김종철님이 꿈꿨던 세상이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였고,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교회가 꿈꾸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지극 정성 환대하는 수넴의 한 부유한 여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 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하며 마침내 한 아들을 안게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도 받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환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환대의 모범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과,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가 만나는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주일이기도 합니다. 참 멋진 제자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시대의 예언자,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신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주셨으니 바로 사랑과 추종, 환대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함승수 신부님
어느 여름, 한 아파트 주민이 베푼 선행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준 적이 있습니다. 더운 날씨에 고생하시는 모습이 안쓰럽다며 본인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경비실 다섯 군데에 한 대씩, 총 다섯 대의 에어컨을 자기 돈으로 설치해 준 것입니다. 그가 그런 통 큰 기부를 한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내와 사별한 슬픔으로 절망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고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경비원들이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관심을 표현하고, 식사를 준비하여 초대하는 등 마치 한 ‘가족’처럼 그를 돌봐준 것입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경비원들에게 보답을 했던 것이지요.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나 역시 상대방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고 하셨던 것이겠지요.
오늘의 제1독서에도 자신이 먼저 다른 이에게 적극적으로 자선을 실천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부유한 여인이 엘리사 예언자에게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간청까지 해 가며 몇 번에 걸쳐 꾸준히 음식을 대접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남편을 설득하여 엘리사가 그 동네를 지나갈 때 편안한 마음으로 그 집에 들러 머무르며 쉴 수 있도록 엘리사를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하기까지 하지요.
그녀는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대방에게 자선을 베풀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사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 천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삼위일체 하느님을 정성껏 대접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기 또한 하느님을 섬기고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어려운 이웃을 섬겼고, 그 결과 하느님으로부터 소중한 생명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여인처럼 하느님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봉헌하고, 그분을 위해 희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주일미사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헌금을 내고 나름의 봉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리라고 기대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을 내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분께서 주시는 영광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포한 ‘세례 서약’에는 주님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것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다짐과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과 영광은 마치 마트에서 파는 1+1 상품처럼 하나로 묶여 있기에 ‘좋은 몫’만 따로 챙길 수는 없습니다. 즉, 내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그 결과인 영광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삽니다. 이것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모순’이지만, 하느님의 기준에서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물질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나의 부족함과 아픔, 상처까지 그분께 모두 내어드림으로써 부족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멸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애벌레가 스스로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되어 ‘애벌레로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라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어야,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통스러운 십자가마저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분과 삶의 고행길을 함께 걸을 수 있어야,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 참된 영광을 얻는 그분의 ‘진짜 친구’가 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사는 ‘의로운 사람’이든 모두 신앙의 눈으로 보면 ‘좋은 사람’이니, ‘좋은 사람을 받아들이면 상을 받는다’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것’도,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상대방이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고, 정해진 기준에 충족되어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를 내 기준이나 가치관에 억지로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까지 내 안에 받아들이게 되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실 상을 나에게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가진 부정적인 모습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니, 거기에 “1+1”으로 묶인 좋은 몫까지 딸려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원수를 내 마음 ‘밖’에 방치하면 원수 그대로 남아있지만, 내 ‘안’에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 내가 하느님께 더 큰 상급을 받게 만드는 구원의 ‘보증수표’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해서 손해보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참된 사랑의 길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평소에 부모님께 잘하지 못하면서도 오늘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더러 부모와 자식을 버리고 신앙생활만 하는 광신도가 되라는 말씀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는 오랫동안 수도생활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를 떠나, 가진 것을 버리고 광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광야로 간 것은 세상의 복잡한 일을 피하고 혼자만의 마음의 평안을 얻으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자는 악마를 피하려고 광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악마를 만나기 위해 광야로 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옛 수도자들이 광야로 간 것은 주님을 더 가까이 만나고 참된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들어왔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해라. 이웃을 사랑해라. 착하게 살아라.’ 그러나 우리 안에는 늙은 부모님을 귀찮아하고, 배우자와 자식의 태도에 화가 나고, 남을 속여서라도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모나 자식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만나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부모도 자식도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타인을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초대하십니다. 분주함을 멈추고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나 가족들을 참되게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박희중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으되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신자들 위에 계시지만 오직 사랑으로 계시며, 전 세계 교회를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리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예전에 잘 알던 신학생의 이야길 하나 하겠습니다. 그 신학생은 공부도 잘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도 충실히 하고, 좀 부족한 다른 신학생들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신학생들로부터도 사랑을 받던 신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신학생의 방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신학생의 방에서 조금은 이상한 액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진틀에는 사진 대신 '나는 셋째'라는 글귀가 담겨있었습니다. 궁금해서 무슨 뜻이냐 하고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제 어머니께서 신학교 입학 기념으로 저 액자를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첫째는 하느님이다. 둘째는 네 이웃이다. 세 번째는 바로 너다."
그 이후부터는 항상 자신의 책상에 이 액자를 두고 기억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셋째'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 신학생의 길잡이가 되었듯이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길잡이가 되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연중 제 13주일,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신 말씀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또한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들이 진심으로 추구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첫째가 하느님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 어디에나 있고 또 언제나 찾아오는 십자가, 즉 고통과 슬픔, 패배와 절망, 사고와 질병 등의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나야 하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인가?"하고 분노합니다. 분노는 할수록 고통과 슬픔을 무겁게 만들고, 분노는 이웃에 조소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더 심해지면 타인을 증오하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위로의 말도 더 비참한 사람도 있다는 일깨움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바꾸어 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면서 간청했다고 합니다. 주님 제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다. 제게 맞는 십자가로 바꾸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묻힌 사람 수만큼의 십자가가 있는 공동묘지로 안내하고 그래 네게 맞는 십자가를 찾아보렴 했습니다. 십자가를 열심히 고르기 시작했지만 어떤 것은 너무 가볍고, 어떤 것은 더 무겁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동이 터 올 무렵 그는 자기에게 맞는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주님 이것입니다. 제게 꼭 맞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살겠습니다. 그래라 하고 예수님께서 허락해주신 그 십자가는 간밤에 자기가 벗어놓은 바로 그 십자가임을 깨달았을 때는 해가 떠오른 새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남편을 하느님 품으로 떠나보내는 장례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장례미사 끝에 고인의 자녀들의 요청으로,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어드리는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아빠 그곳은 참 좋은 곳인가요?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으신 거죠. 이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으면 좀더 아빠 계실 때 효도하고 착하게 지낼 것을 아빠! 이제는 누나들과 싸우지 않고 아빠대신 엄마를 위로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비록 아빠를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지만 하느님의 커다란 뜻을 따르고, 남아 있는 가족들끼리 열심히 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딸을 교통사고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저에게도 별로 원하지 않은 십자가가 저를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때마다 저의 십자가가 얼마나 힘든지 왜 내가 그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떠들곤 했었습니다.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지는 일이 저에게로 넘어온다고 생각이 들면, 일을 하면서도 가슴속에는 불평이 있던 적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길 여러 사람에게 부탁은 하면서도 정작 다른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인색하기도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복음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번 주간에는 자신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먼저 작은 사랑이라도 베푸는 노력을 하십시오. 그래서 하느님께 받을 상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우치는 사람 <마태 10, 37-4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서로의 사랑을 깨우치지 않고는 완전한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깨닫게 되면 목숨까지 내주고 따르게 됩니다.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믿어야 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믿음은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는 최상의 행위입니다. 수도자로 사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는 삶이며 확고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응답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남, 온갖 어려움, 참고 견뎌야 하는 일, 사랑의 용광로에 녹아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지금 여기 이 시간에 어떤 사랑을 받고 계심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 하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렇게 알려주고 깨닫게 합니다. 당신이 지금 숨을 쉬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살기 위해 주어지는 공기는 계속 공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일이며 사랑입니다. 지난날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믿음 전에 이루어진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오늘 복음 말씀을 쉽게 알아듣지 못합니다.
“가족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 목숨을 얻으려 하지 말고 잃을 생각을 하라.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알아듣고 믿기에 당연하게 믿고 삽니다. 저는 이 사랑을 어머니를 통해 듣고, 어머니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믿음을 지니고 살다가 18살 때 그 사랑이 참사랑임을 깨닫고 죽음을 무릅쓰고 이 어려운 길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사랑으로 주님만 따르고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은 나의 희망, 사랑이어서 믿음으로 죽기를 한하며 살아갑니다. 주님은 마리아와 요셉이 깨닫지 못함을 깨우쳐 주시려고 12살 때 잃었을 때 성전에서 찾은 어머니에게 “제가 아버지 집에 일을 줄 모르셨습니까?” 하시며 더 깊은 믿음으로 초대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하니 “내 어머니나 형제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믿음은 최상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계명을 바로 알고 지키려면 하느님 외의 사랑을 하느님 위에 놓아서는 믿음을 지키거나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은 내 앞에 있는 피조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작은 이들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한사람, 더 깊이 가면 그 한 사람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며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하느님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다.”라고 하면 내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랑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할 수 있으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믿음입니다.
떠나지 마시고, 버리지 마시고, “언제나 함께”라는 말과 같이 서로 함께 사랑합시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는 합당하지 않다."(마태 10,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더 사랑하기위해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해야 할
우리들 사랑입니다.
우선순위를
새롭게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오늘도
십자가를 질
힘을 얻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너무나 잘
가르쳐줍니다.
사랑없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십자가와
사람의 길은
모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뒤바뀐
사랑의 순서를
바로잡는
사랑의 멋진
주일되십시오.
교황님을 기억하며
김귀웅 신부님
오늘은 교황주일이기도 합니다. 지난 4월 3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돌아가시고, 4월 20일 베네딕토 16세 새 교황께서 선출되셨습니다.
새로운 교황님을 통해서 또 어떤 변화가 이 세상과 우리 교회에 찾아올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이번 교황주일에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난 1984년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찾으셨을 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친구(親口)하셨을 때 그것은 외국 어느 나라를 방문한 것이 아니라 바로 꿈에 그리던 모국을 찾았다는 느낌을 주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외국인이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시작하신 인사말 역시 감격적이었습니다. 한국을 찾은 어느 국가 원수도 방문한 적이 없는 5·18의 땅 광주를 찾은 것 역시 그분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마음속에 담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어 소록도를 방문하시고 또 시성 미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말로 하셨을 때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교황님의 모습에서 마치 예수님을 뵌 듯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예수님 곁에 계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교황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제 저녁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성무일도를 펴 들었는데, 문득 ‘핸드폰이 어디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핸드폰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니, 성지에다 두고서 온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러한 갈등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하고서 갈까? 아니면 핸드폰을 찾아오고서 기도를 할까?’
저는 핸드폰을 먼저 찾아오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중요한 전화도 오거든요. 그래서 기도는 핸드폰을 찾아온 뒤에 하기로 하고 성지로 갔고, 핸드폰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핸드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액정 화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전화도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즉, 고장이 난 것이지요. 저는 곧바로 강화도에 있는 어느 대리점을 찾아갔습니다. 그 대리점 직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이것은 간단한 고장입니다. 부품 하나면 교환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저희는 수리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맡기고 가시면, 음....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화요일쯤 찾으러 오시면 되겠습니다.”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제가 직접 A/S 센터로 곧바로 가겠다고 하고 그 대리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김포에 있는 A/S 센터로 향했지요.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업이 끝난 뒤였습니다. 결국 저는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가서 쇼핑만 하고서 올 수밖에 없었지요.
쇼핑을 마친 뒤, 집에 돌아왔습니다. 무엇인가를 빼 먹은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씻고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이 새벽, 제가 빼 먹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어제 저녁 기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를 하려는 순간에 가졌던 핸드폰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핸드폰 수리를 위한 저의 노력들, 그리고 그에 따른 기타의 행동들로 인해서 중요한 저녁 기도를 잊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께 얼마나 죄송한 마음이든지요. 물론 이 새벽에 어제 못한 저녁 기도도 함께 했지만, 신부라고 하면서 주님보다도 이 세상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 것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그래서 피곤함을 가져다주거든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요구사항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네 유교윤리에서는 부모 형제가 모든 생활의 첫째 자리에 오며 효가 모든 덕행의 으뜸 자리에 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이 바로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불효도 무릅쓰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남겨 놓아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저처럼 이 세상 것을 더 먼저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지 마시고, 항상 주님의 십자가가 먼저가 되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해야 할 기도는 꼭 합시다.
욕심을 버리자
중국 월나라 사람 오자는 염료의 원료가 되는 나무의 껍질을 벗기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오나라에는 이 나무가 없어 염료가 무척 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자는 염료를 가지고 오나라로 향했다. 곧 품질 좋은 원료를 사려고 많은 장사꾼이 몰려들었다. 가지고 온 염료를 모두 팔 수 있을 것 같자, 그는 욕심이 나서 장사꾼들을 일단 돌려보냈다. 그리고 늦은 밤 염료를 다른 액체와 섞어 묽게 하고 용량을 늘렸다.
이튿날 다시 장사꾼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염료가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열흘 뒤에 와서 사겠다"며 돌아갔다.
열흘 뒤 장사꾼들이 오기 전에 오자가 염료 통을 열어 보니 염료는 하나같이 변질되어 있었다. 결국 염료를 하나도 팔지 못해 빈털터리가 된 그는 집으로 돌아갈 노자가 없어 오나라를 떠돌다 병들어 죽고 말았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
강영구 신부님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그대에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습니다.”(히브리13,2)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은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25,40)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가까이에서 만나는 형제자매가 모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 자체가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면서 어떤 보상(報償)이나 대가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은근히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를 대접한다면 그는 이미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마태6,2)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예언자 엘리야를 대접한 덕분으로 3년 동안의 기근 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1열왕17,8-24). 수넴의 여인은 예언자 엘리사를 잘 대접하여 아들을 얻습니다.(2열왕4,8-16) 그들은 조건 없이 예언자들을 대접했지만, 자신들이 베푼 것보다 몇 갑절로 받게 됩니다. 베푸는 것이 바로 은총이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오늘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
안상일 요셉 신부님
어쩌다 초대 교회사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가슴이 조여 옵니다. 십자가형이 그렇게도 가혹하고 비참했던가를 지금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십자가 형벌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형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십자가’란 곧 피와 땀과 고통을 대신하는 말로 알아듣게 됩니다. 확실히 십자가는 우리의 온갖 고통과 가시밭길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곧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바로 고통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십자가야말로 피하거나 등질 것이 아니며 스스로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강조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프랑스의 문학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십자가의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면 행복도 원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십자가만이 하느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느끼며 겸손되이 하느님께 의탁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체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 속에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의 십자가는 결코 하느님의 저주가 아니라 당신께로 부르시는 신비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고통 중에 버려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 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쉽게 십자가를 내던지거나 외면한 채 고통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희망과 행복의 포기이며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주시되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은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갈 충분한 힘과 용기가 주어 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십자가를 몸소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려움들을 예수님 안에서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고통은 피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심해지며, 십자가는 억지로 지고 갈수록 더욱 무거워 집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
허 성 신부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오늘의 복음말씀 요지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스승과 제자를 결합시키는 관계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지적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주 단순하게 『나를 따르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에 나오는 「따르다」라는 동사는 단지 예수님의 인격에 귀의하는 것을 표현한다(마태 8, 19 이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과거와의 절연을 의미하며, 따라서 참된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행동 양식을 따르고, 그분의 교훈을 경청하며, 구세주의 삶에 자기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마르 8, 34~35; 마태 19, 21; 루가 18, 22).
유다교 학자의 제자들은 일단 율법에 규정된 교육을 끝낸 다음에는 스승을 떠나 독자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과는 달리 하나의 가르침에 매이지 않고 그분의 인격에 매여있기 때문에, 자기 부모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스승을 떠날 수 없었다(마태 10, 37; 루가 14, 25~26).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의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불리움을 받았다. 즉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마르 8, 34; 마태 16, 24; 루가 9, 23), 그분의 잔을 마시며(마르 10, 38~40), 마침내 그분께로부터 왕국을 받기로(마태 19, 28~29; 루가 22, 28~30; 요한 14, 3) 불리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가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물 한잔만이라도 주는 이는 누구나 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나(마태 18, 6; 마르 9, 41) 반대로 이 미소한 형제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단죄될 것이다(마르 9, 42; 마태 18, 6; 루가 17, 2).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다교의 제자들과 구별된다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당신 독생 성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유다교의 스승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무효화할 위험이 있는 인간적 전승만을 가르칠 따름이나(마르 7, 1~3),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그들 영혼의 안식을 약속하시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지혜이시다(마태 11, 29).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며,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요한 6, 45).
예수께서 강생하신 목적은 인류 구원이지만 구원에로 이르는 길은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이기에 우리의 심신을 무겁게 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무디게 하는 제물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직책이건 사람이건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집착하지 말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엘리아는 자기를 따르려는 엘리사에게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먼저 하러 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치르고 따르겠다는 요청마저도 거절하시고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까지 가혹한 요구를 하셨다.
또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온 부자 청년에게는 그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며 돌아간 후에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 청년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사도들은 에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즉시 가족과 재산과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과거의 많은 성인 성녀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이나 동굴로 주님을 찾아갔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보다 더 완전하고 안전하게 주님을 따르고자 복음 삼덕의 길을 택하여 자신의 순결을 봉헌하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직분에 대한 집착과 소유권을 봉헌하고, 자신의 자유 의지마저 봉헌하여 완전히 빈 껍데기가 되어 홀가분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빈 껍데기가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빈 공간을 당신 자신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그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착하고 충실한 길잡이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도 현재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 드리고 우리는 단지 관리자의 위치로 내려와 주님의 충실한 청지기로 최선을 다하여 삶음으로써 주님의 성실한 제자들이 되자.
하느님 만나는 기회, 장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 의 모습을 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회’요 ‘장소’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전교사명을 통해 특별히 존재하는 사람들 즉 ‘예언자’나 ‘옳 은 사람’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제1독서 : 2열왕 4,8-11. 14-16a : 엘리사와 수넴의 여인
수넴의 여인은 그 지방을 지나다녔던 예언자 엘리사를 극진히 환대 하고 남편에게도 그것을 설득한다(9-10절). 하느님께서는 이 여인의 열성을 엘리사를 통해 갚아 주신다. 즉 그 여인은 아들이 없었고 남편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가 없는 나이였는데도 아 들을 갖게 되리라고 예언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14-17절). 나그네를 대접 한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지닌 행위이다. 그것은 ‘생존여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나그네 대접을 받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 의 행위이며,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고 계시다.
제1독서의 ‘나그네 대접’에는 인간적 차원 외에 ‘거룩한’ 차원이 내 포되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확언하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 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9절). 이제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 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 이다.
복음 : 마태 10,37-42 : 너희를 맞아들 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 를 ‘따르는 것’이 박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복음선포 사명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선 택할 수 있는 결단력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보다 더 가 치 있는 것은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37-39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 르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면 끊어버려야 할 인간관계의 범위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신앙 안에서 심리학적 측면이나 광신적 행위의 차원 에서가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 여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절).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단순한 가정이 아닌 분명한 현실로서의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던,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역시 이렇게 살 아야 한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 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 은 하느님 말씀의 힘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 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수께서는 당시 전 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합법적인 ‘대리권’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 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물론 파견 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르다. 선교사명에 있어 서도 주관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명 자체에는 ‘연속성’이 있다. 이 ‘대리권’외에 다 른 원리는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 을 상을 받을 것이며.... ...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41-42절).
여기서 ‘맞아들이다’는 말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맞아들이기’ 즉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의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물질적 의미 외에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 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로 사명을 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것없 는 사람들’(41-42절)은 모두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연계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 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선포 사명이다. 자신은 죽음을 당한다 해 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우리들에 게 요구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이다.
제2독서 : 로마 6,3-4. 8-11 : 세례를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해서 세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례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활’에 참여케 해준다.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3- 4.11절).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11절).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윤리적 행위의 개념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동시적(同時的)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한다. 이 렇게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끝없는 투쟁을 벌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의 십자가를 안겨 준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루가 9,23).
우리는 모두 우리 의 십자가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함으로 써, 그들이 더욱 복음을 선포하는데 잘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됨을 잊어서 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선포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도, 이 사회도 아름답게 변화되어 걸 것이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면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심야에 병자성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죄송한데요, 지금 위독하신데, 신부님을 모실 수가 없어서요." 사제들에게는 담당구역이 확실하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병자성사는 관할 본당 신부님들이나 원목신부님들께 부탁하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정 상황이 안 될 때는 사제 양심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장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데…. 신속히 가방을 챙기고, 재빨리 시동을 겁니다. 신호도 어깁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러 부랴부랴 집중치료실에 도착해보니 한 형제분께서 거의 임종 직전에 도달해 계셨습니다. 온 몸은 응급조치를 위한 각종 호스며 전선들로 복잡했습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연신 숨을 가삐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숨이 너무도 가쁜 나머지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환자분을 바라보는 가족들 역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발 저 답답한 호흡곤란 증세를 완화시켜 주셔서 마지막 가시는 길,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계신 형제님,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형제님 얼굴에 예수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도 지독한 호흡곤란 증세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꽝꽝' 대못이 박힌 손과 발의 통증도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고통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체중이 아래로 쏠리는 현상으로 인한 심장 압박, 그로 인한 호흡곤란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호흡이 곤란했던 예수님께서는 그때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힘을 다해 온 몸을 위로 뻗으셨습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호흡곤란 증세가 완화됐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다시 내리누르는 체중 압박으로 되풀이되는 호흡곤란…. 십자가 위에서 몇 시간은 정녕 혹독한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세상이 통곡하던 그 성 금요일로 되돌아가 봅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셔서 호흡곤란에 헐떡이시는 예수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전지전능하셨던 분, 죽은 사람마저도 다시 살리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적 죽음, 피하고자 마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그 고독한 길, 죽음과도 같은 형극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십니다. 그 치욕의 십자가 위에 자진해서 매달리십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을 단 한치 오차도 없이 실천하신 예수님, 그분의 순명으로 세상 구원이 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자기희생을 동반한 십자가 외에 천국으로 향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한세상 살다 보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십자가들, 절대로 바라지 않았던 십자가들이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어떤 십자가는 지독하게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를 휘감습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가 지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물론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자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의 길 그 도상 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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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음이 짠해져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한세상 살다 보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십자가들, 절대로 바라지 않았던 십자가들이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어떤 십자가는 지독하게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를 휘감습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가 지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기운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저를 찾아온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도 딱했습니다. 얼굴을 뵙기조차 송구스러웠습니다. 마음이 짠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고작 마흔 밖에 안 된 딸이 먼저 세상을 뜬 것입니다. 이틀 전에 장례식을 치루셨답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건강도 여의치 않다는데, 앞으로 어머님이 지고 갈 십자가를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자식 먼저 앞세운 부모님들, 참으로 그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한 평생 죄인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십니다. 가장 힘든 것이 자식을 저리 황망히 세상을 떠났는데...숟가락 들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지요.
아직 어리지만 기구한 인생여정 끝에 저희 집에 입소한 형제가 있습니다. 두 아이가 지금까지 겪어온 사연들을 듣고 있노라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소설도 그런 소설이 없습니다. 둘만이라도 헤어지지 말고 꼭 붙어 다니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서로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는지 그 동안 둘 사이는 꽤 껄끄러운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조금 철이 든 형이 동생에게 사랑의 공개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듣고 있노라니 눈시울이 다 뜨거워졌습니다.
“사랑하는 동생 **에게. **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에게 쓰는 편지다. 어색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써야 할 지 모르겠다. 형이 너한테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형으로써 안 좋은 모습만 보인 것이 정말 후회가 된다. 생각과 마음으로는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었다. 불편한 너의 손발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럽다. 정말 미안해. 늦었지만 이제 내가 너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 **야, 힘내고, 너의 입가에 미소가 계속 번질 수 있으면 좋겠어. **야, 그리고 사랑한다. 이런 말을 이제야 하게 되니 정말 미안하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에게 형이.”
참으로 가슴 흐뭇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슴 미어지는 사연입니다. 부모가 잘 뒷바라지해줘도 제 몫을 하기가 어려운 세상인데, 부모 없이 홀로 서기 위해 한평생 죽을 고생을 겪어야 할 아이들의 십자가가 너무도 커보였습니다.
때로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수용하기 힘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라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십자가는 난 데 없이 다가오는 것입니까? 피할 방도는 없습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까?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자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의 길 그 도상 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힘에 겨운 십자가를 지고 휘청휘청, 비틀비틀 걸어가는 이웃들을 바라봅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들을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생각해봅니다.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그들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그들이 십자가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할 지 생각합니다.
완전한 추종
묵상길잡이 :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않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 34,14). 그렇다 하느님은 갈림 없는 마음의 완전한 추종을 요구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완전한 추종에는 곧 십자가가 따른다.
1.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불교 신자인 아주머니가 성당에 다니는 딸을 시집보내면서 신자 사위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성당에 가서 혼배미사를 보게 되었다. 혼배미사를 하고 온 아주머니가 딸에게 성당에 처음 가 본 소감을 틀어놓았다.
"애야 내가 오늘 성당에 가서 네가 믿는 예수님을 보니까 섬뜩하기만 하더라. 남자가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려 온 몸이 피투성이 이고, 자기 몸도 하나 제대로 못 가누고 비참하게 축 - 늘어져 죽었는데 거기다 빌어서 뭘 얻겠다고 성당에 가나? 절에 한번 가봐라. 부처님은 평온한 표정에 번쩍이는 금빛에 얼마나 의젖하고 복스럽게 생겼는가!"
참으로 성당과 법당의 분위기를 느낀 대로 생생하게 대조시켜 보여주는 말이다. 사실이지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형수이고, 석가모니는 왕자였다. 십자 고상(苦像)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사형수를 주님으로 믿는 종교이다.
2. 예수를 따름과 십자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갈림 없는 마음으로 당신만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않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 34,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7) 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지독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남김없이 완전히 따르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다. 온 생애를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하는 자세로 사신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셨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고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필수적으로 십자가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일 뿐 아니라, 어둠은 항상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따랐고, 아브라함은 당신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도록 내놓았다. 여러 사도들은 생명을 바쳤고, 순교자들도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야 했던 것이다. 많은 우리의 선조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 때문에 집안과 가문에서 추방당해야만 하지 않았던가? 요즘에도 수도자나 성직자의 길을 택할 때 이를 이해 못하는 가족들과 육정을 끊어야 할 때도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되는 길은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인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사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교가 인류 문화사에 특이하게 기여한 점은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고통과 죽음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인간에게 고통과 십자가를 구원의 원천으로, 죽음을 부활에 이르는 문으로 보게 한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당하는 모든 고통은 묵은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아픔임을 알기에 기쁘게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를 전환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물에 잠기고 다시 올라오는 세례예식은 그 자체로 우가 바로 그리스도처럼 영원히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을 시작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 준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7)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닮아 그분이 들어가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분처럼 끊임없이 죽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마태 10,38). 성당에 다니며 열심히 기도하는 신자는 많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가? 그들 대부분은 아들의 합격을 위해, 남편의 진급과 사업을 위해 또 누구의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다가 효과가 없으면 무당에게도 예사로 찾아간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통도, 십자가도 기꺼이 지겠다는 성숙한 신앙인은 드물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바로 구원임을 깨달아야 한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1고린 1,29) 하신 사도 바오로의 이 단언은 곧 우리의 깨달음이 되어야 한다..........◆
최우선적 선택을 요구받는 신앙인
안병철 베드로 신부님
보잘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신앙인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절대 가치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점을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시면서까지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자기로부터 탈출해서 다른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공간으로부터 과감하게 이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랑의 깊이와 의미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라는 이기적인 틀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절대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혈연관계까지도 포함해서 그 어떤 인간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 우리를 사랑할 수는 없기에,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라는 작은 인격 안에 그리고 얄팍한 우리의 논리나 사고 속에 매몰되어 있는 한, 폐쇄적인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당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과감하게 열어젖히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그분의 모습 앞에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개방해야만 참으로 기쁨을 만끽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음을 밝혀 주십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땅을 뚫고 나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이 우리의 이기심이나 욕심의 두터운 벽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 씨앗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고 심오하게 해 줍니다. 우리 모두가 한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고 산다는 공통의 인식을 갖게 될 때, 형제적 사랑을 나누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의 이름으로 파견되거나 그분을 증거하는 형제들을, 바로 주님을 맞아들이듯 맞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시고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그가 누구이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바로 주님을 향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우리 안에 녹아 내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을 표현해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하느님 중심적인 신앙생활
서공석 신부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예수님의 제자는 부모도 자녀도 외면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복음서는 2천 년 전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면 표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를 외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부모, 또는 하느님과 자녀를 대립시켜 놓고,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나 자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우리는 천륜(天倫)이라 부릅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사실을 전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모와 자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인연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시선에서 새롭게 생각할 것을 권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비로소 부모와 자녀의 천륜이라는 관계가 올바르게 이해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넓은 인연의 세계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셨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봉양(奉養)하는 것도,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모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에 대한 우리의 효성도, 자녀를 위한 우리의 사랑도 맹목적 애착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질 때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주로 생각합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자녀에 대해서도,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체면을 위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생각에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 안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으로 열리는 넓은 시야에서 부모도, 자녀도 새롭게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좁은 시야가 원하는 바를 포기하는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목숨을 잃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이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존재도, 자기를 감싸고 있는 주변도, 모두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사람의 병을 고친 다음,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했소”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느님은 생명을 베풀고 살리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자기도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이 살리시는 분이라서 자기도 살리는 노력을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실천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인간 윤리의 요구에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앙의 강력한 동기가 첨가됩니다.
자녀 교육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위한다고 하면서 흔히는 우리의 욕구와 욕심을 충족시키려 합니다. 자기가 하지 못했던 것, 혹은 자기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녀에게 강요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키우지 못하게 합니다. 경쟁하면서 많은 것을 외우는 아이들만 키우고 있습니다. 학교로, 학원으로 다니면서 지식이라는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이웃과 경쟁하는 아이들입니다.
이웃을 이해하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보면서 이웃에게 양보하는 인간의 마음은 점점 그들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점수, 좋은 학교, 많은 재물, 높은 자리를 위해 계속 경쟁해야 합니다. 아이의 머리가 따라 주지 않으면, 치맛바람도 좋고 촌지 봉투라도 좋습니다. 하여튼 내 자식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야수가 그 새끼를 키우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에서 자녀를 보는 눈은 다릅니다. 이 넓은 인연 안에서 자녀를 보는 신앙인에게 자녀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특별히 맡겨주신 생명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욕구 충족을 위한 존재도 아니고, 부모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수단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삼가 키워야 하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라, 우리의 자녀도 그분의 살리는 힘을 연장하여 실천하며 살도록 키워야 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최대의 보람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키워야 합니다.
이런 노력에는 십자가가 따릅니다.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고 자녀를 사람답게 키우려면,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이어서 복음은 또 말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좁은 시야에 보이는 자기의 현세적 삶 하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 매진하면, 부모도, 자녀도, 세상도 모두 그 참된 의미를 잃는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주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넓은 인연의 세계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세계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당신의 삶을 내어줌과 쏟음이라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그 내어줌과 쏟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인연의 세계 안에 보이는 생명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내어주고 쏟으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입니다. 나 한 사람의 목숨이 가장 소중한 이기적 인연의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부모도 자녀도 자기 자신을 성취하기에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중심이신 넓은 세계 안에서 부모도 자녀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오직 충실하신 주님께만 의탁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약성경 수많은 예언서들 가운데 첫번째로 등장하는 동시에, 가장 방대한 양(총 66장)을 자랑하는 이사야 예언서는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찬 보물 창고 같은 책입니다. 저자들의 필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 문학적으로도 수준이 높아,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온 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후, 회당에 들어가셔서 펼치셨던 책이 바로 이사야 예언서였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서 61장, 1~2절, 마태오 복음 4장 18~19절)
불멸의 베스트 셀러인 성경 가운데서도 베스트 셀러인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시면 즉시 알수 있게 되는 데, 저자는 주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과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감동적이고도 신선한 필치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의 언어는 장황하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사설이 길거나 불필요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들만 간결하고도 함축적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가 전하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집필된 집회서에 보면 이사야 예언자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위대한 영의 힘으로 마지막 때를 내다보고 시온에서 통곡하는 이들을 위로하였다. 그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었고 숨겨진 것들을 미리 알려주었다.”(집회서 48장 24~25절)
신비롭고 비범한 인물이었던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742년 젊은 나이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로서 그의 활동은 40여년간 전개됩니다. 그가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아자리야라고 불리기도 한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였습니다. 우찌야 임금의 통치 아래 유다는 오랜 세월 번영과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번영과 풍요의 시대 그 이면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이는가 봅니다. 토지들을 독점하는 지주 계급이 출현했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대한 억압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에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정의에 반대되는 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고발하고, 그에 대한 주님의 진노를 선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는 정치적인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으며 구체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기원전 716년 히즈키야 임금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약소국으로 살아남기 위해 당대 강대국이었던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꾀합니다.
그런 정치적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목소리 높여 주님께 대한 충실성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이방인들과의 동맹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이스라엘이 살길임을 강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에게 있어 주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우상숭배나 이민족들, 이교도들과의 동맹을 원치 않으신다고 외칩니다. 동시에 거룩함의 극치이신 주님 앞에 우리 인간은 얼마나 속된 존재인지를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속된 모습들을 강력하게 고발하는 데, 가장 큰 속됨은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주님께 의탁하기보다 인간의 힘, 군사력, 폭력에 의지하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결국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선포하는데, 멸망의 원인으로 기득권자들이 축척한 막대한 부와 권력, 그에 따른 부익부빈익빈, 가난한 백성들의 슬픈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왕국의 멸망은 외적인 요인이라기 보다 내적인 요인임을 적시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들을 향한 고발입니다. 세상살이에 깊이 빠져 주님 현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권력과 돈, 세상의 좋은 것들에 잔뜩 취해 주님의 자리는 저 뒷전입니다. 주님 섭리하심에 대한 의탁없이, 주님과의 대화나 소통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이사야 예언자의 신랄한 고발 앞에, 다시 한번 삶을 바꿔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성령의 칼의 용도>
전삼용 요셉 신부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국왕 샤를 4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사촌 형 필립 6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샤슬 4세의 조카였던 에드워드 3세가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란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에 시작된 전쟁이 거의 100년을 끌게 됩니다.
전세는 잉글랜드의 편이었습니다. 프랑스는 페스트, 농민 반란 등으로 마지막 보루인 오를레앙까지 몰리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16세 소녀, 그녀가 잔 다르크(1412-1431)입니다. 그녀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며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그녀의 말을 믿기 시작합니다.
“신의 계시를 받고 우리를 구하러 온 소녀가 참전하였다.”
“그녀는 목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났다.”
“프랑스 군은 하느님이 지켜주신다.”
프랑스는 마지막 보루였던 오를레앙에서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크게 승전을 거둡니다. 오를레앙에 이어 랭스지역까지 진군한 당시 샤를 왕세자는 랭스 성당에서 국왕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잔 다르크는 말합니다.
“폐하, 이제 프랑스를 다스리는 진정한 국왕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 군의 포로가 되고 잉글랜드 군대로 넘겨집니다. 샤를 7세 국왕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해 주었던 잔 다르크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자신보다 인기가 높았던 잔 다르크를 시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잉글랜드는 그녀를 군사재판이 아닌 일곱 번의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1431년 루앙의 마르셰 광장에서 성녀가 아닌 마녀로 낙인찍어 군중이 보는 앞에서 화형을 시킵니다.
영웅 소녀의 죽음 앞에 단결한 프랑스 사람들은 1453년 기나긴 백년전쟁을 자신들의 승리로 이끕니다. 잔 다르크의 출현으로 단결한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의 주인인 영주가 아니라 프랑스라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워 국가와 국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바탕이 되는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처: ‘백년전쟁과 잔 다르크’, 5분 사탐 세계사, EBS]
프랑스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함께 유럽 가톨릭의 명맥을 이어온 나라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백년전쟁 이후 헨리 8세가 교황청과 대립하며 영국 국교회를 설립합니다. 만약 잔 다르크의 활약이 없었다면 프랑스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프랑스도 개신교가 될 가능성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어린 소녀를 보내어 프랑스를 구해내셨습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국왕에게 선물된 성령의 칼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그 칼을 시기한 나머지 자신 안에 붙여진 성령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 안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은총을 받아도 금방 식어버리는 이유는 그 은총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는 화형 당한지 500여년이 지난 1920년 베네딕도 15세 교황에 의해 시성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칼로도 비유됩니다(에페 6,17 참조). 칼은 싸우고 자르는 용도로 쓰입니다.
무엇과 싸울까요? 죄와 싸웁니다. 무엇을 자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족을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당신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까지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사람도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 칼로 잘라야하는 것은 세상의 애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샤를 7세 국왕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애정과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버려야 했던 것은 은총으로 주어졌던 성령의 칼이었습니다.
성령을 청하면서 동시에 세상 것까지 함께 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은총을, 명예가 높아지는 은총을, 잘 먹고 잘 사는 은총을 청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끊는 것이 은총인데 그것을 함께 청하고 있으니 결국 그 사람 안에 성령의 은총이 들어와도 금방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자신까지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어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고 그래야 하늘나라 시민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은총의 칼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을 끊게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함께 사는 신부님께서 음식을 처방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제안하였고, 신부님이 받아들였습니다. 매일 음식이 배달됩니다. 신부님은 음식을 먹으면서 혈당을 검사합니다. 약을 처방하는 것도 좋지만 음식을 처방받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음식은 부작용도 없고, 좋아하는 음식보다는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기에 더욱 건강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4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한 첫 번째 이야기는 ‘경고’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회개’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평화’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평화를 아름답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리라.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는 ‘메시아’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시리라. 젊은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언젠가 구세주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합니다. 이런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 갈등과 분열도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양처럼 순수하지만,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인, 성녀들은 어디에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연일 무더운 날입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오늘은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싫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좋다’입니다. ‘틀리다’의 반대말은 ‘맞다’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르다’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같다’입니다. 이렇게 ‘싫다, 틀리다, 다르다’는 분명히 모두 다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을 싫어하고, 싫어하는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싫다, 틀리다, 다르다를 종종 한 덩어리로 묶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함께 하는데 힘든 상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세상 안에서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싫은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를 뿐인 것입니다. 혈육이라고 말하는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가족이 무조건 틀린 것일까요? 자신을 응원하거나 지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도 아니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가족 구성원들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다름을 틀린 것과 싫은 것의 동의어로 생각하면서 함께 할 수도 또 일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의 속 좁음이 결국 세상의 불일치를 가져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늘 스스로 지금 내 자신의 판단을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웃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비로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옛날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들과 다른 것을 ‘틀렸다’라고 하고, 그 다른 것을 ‘싫다’라면서 거부했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뜻과 일치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이웃을 향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작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행동을 해야지만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싫음과 틀림을 잘 구별하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지만 내 이웃을 받아들일 수가 있고, 이 모습의 결과는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한 내 마음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이웃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의 명언: 인생은 오묘해서 적이라고 여겼던 사람과 화합할 때가 오기도 하네. 마음을 넓게 가지면 생각지 못한 문들이 열리네(레이먼드 조).
쓸데없는 다툼
어느 연인이 있었습니다. 둘이 데이트를 하던 중에 술에 취한 한 무리의 남자들 중 한 명이 여자 친구에게 모욕감을 준 것입니다. 여자 친구는 무척 화가 났는데, 남자 친구는 위험하니 그냥 가자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 친구가 너무나 서운했고 동시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너는 배짱도 없어. 그냥 돌아가면 우리는 끝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남자는 마지못해 이 남자들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결국 무참히 얻어맞아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피하려 한다면 서운하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인정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여기에는 지혜로움도 필요합니다. 사실 패배를 인정한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다툼은 오히려 더 큰 패배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은 쓸데없는 다툼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꼭 치고 받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간의 다툼, 친구들과의 다툼, 이웃과의 다툼 등등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다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툼이 있기 전에 상대방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지혜로움이 있다면 세상의 그 많은 다툼의 숫자를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 실천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34-11,1: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에,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 많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런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서의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런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태어나게 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이 주어진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올레꾼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가 있듯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기도와 말씀이 있습니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작년에 올레 길을 5일정도 걸은 적이 있습니다.
선배 신부님 중에 한 분이 갔다 온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재밌을 것 같아서 저도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날씨도 좋고 그렇게 덥지도 않아서 좋았는데, 비수기라 올레길 중간 중간에 있을 법한 노점들이 다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없었던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어쨌든 올레 길에 들어서면서 신경 써서 본 것은 파란 화살표였습니다.
선배 신부님이 ‘설마 파란 화살표를 놓치고 길을 잃어버리겠어~’ 했는데, 두 번이나 길을 잃어버리셨다고 해서입니다.
그래서 화살표를 잘 보고 걸었는데 한두 시간 걷다보니까, 표시가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어버릴 것 까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약간 긴장을 늦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화살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맞는 길 같은데 화살표가 나오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더 가 보았습니다.
시간은 많이 지난 것 같은데 화살표가 나오지 않으니까 불안하기도 하고, ‘이렇게 오래 화살표가 안 나오는 경우도 있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지도상으로 그쪽 길이 맞는 것 같아 계속 걸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노점 비슷한 곳이 보여서 길을 물어보았더니, 제가 올레길 방향이 아니라 반대로 걷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올레길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1시간 정도 걸려 원점에 도착했을 때 다시 화살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이제는 다시 놓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놓치지 않았을까요?
그 이후에 사일 동안, 두 번이나 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인생 여정을 살다보면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보통 세상이 원하고, 또 세상이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려고 할 때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 길로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정말 원하는 그 무언가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 길로 가면 갈수록 내가 정말 원하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그 길과는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가 정말 원하는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화답송에 이런 시편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 말씀대로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화살표가 우리 신앙인에게는 기도와 말씀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 나아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또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기뻐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함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그 무언가를 얻어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말씀의 칼 -‘거짓 평화’에서 ‘참 평화’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요즈음 발견한 가장 신선한 말마디는 영어, ‘ever old, ever new(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늘 옛스럽기에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엣스러움이 없으면 새로움도 없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살아있는 현재적인 주님의 말씀들이요 성인들 같습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야 말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우리 마음의 부패를 막아주고 늘 새롭게 합니다. 예전에 인용했던 다윗처럼 회개한 죄인은 성인이 될 수 있어도 솔로몬처럼 부패한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음의 부패가 문제입니다. 하여 늘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말씀으로 마음의 부패를 방지함이 회개의 지혜입니다.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아마 미사일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영원히 우리를 새롭게 하는 현재적인 미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회개가 마음의 부패를 막아주고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참 강렬한 느낌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충격적 말씀입니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싱가폴 북미회담 이후의 과정을 보십시오. 참 평화를 위한 기나긴 여정에 들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마음만 봐도 수긍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통한 긴 정화과정후에 주어지는 선물같은 참평화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칼이, 말씀의 빛 자체가 분열을 초래합니다.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참 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입니다.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말씀의 칼입니다. 이런 말씀의 칼 없이는 마음의 완고함과 부패는 필연입니다. 궁극에는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참으로, 불의에서 정의로, 불순에서 순수로, 즉 거짓평화에서 참 평화에 이르게 하는 말씀의 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이런 참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임이 분명합니다. 분도 성인의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성규4,25)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참평화에 앞선 말씀의 칼로 우리의 거짓평화를 도려내는 주님이십니다.
하여 강론 제목을 ‘말씀의 칼-‘거짓 평화’에서 ‘참 평화’로-’정했습니다. 녹슨 칼이 아니라 늘 반짝반짝 빛나는 진리의 칼, 생명의 칼, 사랑의 칼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의 부패를 도려내어 궁극엔 참평화를 주는 칼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에 값싼 거짓 평화를 주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을 몹시 불편케 하는 말씀의 칼입니다. 말씀의 칼임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한 것은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약2700년전 예언자의 말씀이 여전히 새롭게 들리는 ‘말씀의 칼’같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뿐 아니라 오늘의 종교지도자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의 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의 소제목은 ‘거짓 경신례와 참된 경신례’입니다. 참된 경신례의 거부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삶이 통째로 빠진 거짓 경신례에 대한 거부입니다. 삶과 전례는 함께 갑니다. 생활의 전례화, 전례의 생활화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도 문제이고 전례가 없는 삶도 문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의 칼로 공격하는 바, 바로 정의와 공정의 실천의 삶이 없는 공허한 전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는 권고에 이어 ‘무엇하러 나에게 이런 제물을 바치느냐?’ 말씀하신후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말씀을 쏟아 내십니다. 새삼 잘 듣는 것이 영성생활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분도 규칙 역시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됩니다. 왜관수도원 어느 도반의 방에 걸렸던 액자의 공경하여 듣는 다는 ‘경청敬聽’이란 한자도 생각납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사야서 1장3절부터 15절까지 하느님의 솔직한 마음이 여과없이 이사야의 입을 통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동사 부정적 말마디들이 말씀의 칼이 되어 노골적으로 우리 마음을 불편케 합니다. ‘물렸다.’, ‘싫다.’, ‘가져오지 마라.’ ‘역겹다.’. ‘견딜 수가 없다.’, ‘싫어한다.’, ‘지쳤다.’ ‘가려 버리리라.’. ‘주지 않으리라.’ 온통 부정적 말마디들입니다.
더불어 오늘 복음의 주님의 두 말씀의 칼도 꼭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누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두 말씀의 칼입니다. 참으로 주님이신 당신을 사랑의 첫 자리에 두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만이 진정 합당한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정의와 사랑의 삶이 빠진 위선적 헛된 제물, 헛된 전례, 헛된 삶을 얼마나 혐오하시는 하느님이신지 깨닫습니다. 역시 말씀의 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미사전례는 하루 삶의 실천으로 확산되고 하루 삶은 미사로 수렴될 때 참된 전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 결론으로 주님은 참된 전례가 되기 위한 참된 삶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런 실천의 삶이 전제되어야 참평화요 참전례입니다. 결코 값싼 평화, 거짓 평화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평화를 선물하시어 정의롭고 공정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시편50,23ㄴ).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칫하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과 같은 고통만을 주시러 오셨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면 '평화'로 위장된 세속적인 안락을 추구하는 삶을 벗어나 단호하게 하느님 안의 참된 행복의 삶을 선택할 것을 촉구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존의 세속적인 가치에서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칼에 베이는 듯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도 기존의 잘못된 세속적인 가치를 벗어나 참된 그리스도교적인 변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똑같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땅을 기어 다니다가 고치가 되고, 나중에 허물을 벗을 때 어쩌면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 그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평화로 위장된 세속적인 안위의 삶을 벗어나 참된 부활의 시간, 하느님 안의 참된 평화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주제를 이렇게 잡아봤습니다.
이렇게 주님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 신앙인은 사랑의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고, 그러기에 주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도 사랑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께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즘같이 부모를 버리는 불효막심한 자들이 많은 때, 그리고 자식마저 학대하고 버리는 자들이 많은 때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고도 남지요.
그렇지만 주님보다 부모와 자식을 더 사랑하면 주님께 합당치 않다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주님께 합당치 않음은 우리네 사랑과 마찬가지로 질투 때문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사랑하면 자존심 상해하시고 그 사랑은 값어치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제 첫 번째 조카딸이 시집을 갈 때 조카사위가 도둑놈 같았고, 그러니 부모에게는 얼마나 더 사위가 도둑놈 같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고, 제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 정작 그 부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저는 칙칙하고 그 부모는 Coo한 성격이었기 때문입니까?
그렇게 성격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부모와 삼촌의 차이입니다.
삼촌도 조카를 사랑하지만 부모만큼 사랑하지 않기에 내가 사랑하는 조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질투한 겁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정말로 자신을 생각지 않고 오직 자식의 행복한 미래만을 생각하기에 자식이 나 아닌 다른 사랑의 짝을 만난 것을 잘 됐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사위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니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우리의 부모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가 당신보다 부모를 더 사랑한다하여 싫어하거나 질투하실 리 없습니다.
욕심 때문에 당신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를 바라지는 않으시고, 우리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제일 사랑키를 바라실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해야 될 존재 중의 하나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가야할 진리의 길이시고,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생명의 길이이시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가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면 진리를 잃고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은 부모나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할 분이고 그래서 당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당신을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합당치 않다고까지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10, 34-11, 1(연중 15주 월)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칼을 주실까? 그것은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입니다.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특별히 “참 행복선언”인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 11. 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또한, 볼리비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본주의의 물신풍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성 바실리우스의 말을 빌려 “돈을 악마의 배설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라과이 방문길에서는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라고 질타하시면서 “인간 얼굴을 한 경제모델 세워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종의 연설을 두고 미국 가톨릭대의 스티븐 쉬넥 가톨릭연구소장은 "교종의 발언은 통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외치는 함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혁명을 위한 칼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칼은 이사악에게 내리친 순명과 결단의 칼이었고, 할례의 칼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칼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칼은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을 주었고(루카 2, 35), 성령의 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 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 12)
이처럼, “칼”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요,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와 이 세상에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저와 세상을 수술하소서!
병든 이 세상과 이 몸에
금은보석으로 치장한다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칼로 병을 도려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희를 살리소서! 아멘.
십자가 뒤의 참 평화 <마태 10, 34-11, 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평화와 자비의 하느님이 오셔서 평화를 주러 오지 않고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니 지금 우리 민족이 염원하는 평화 통일과도 배치되고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일반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세상은 분열된 상태에서 시시각각 자기 원하는 대로 세상이 되어 가기를 바라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편하고 안락한 삶을 원하고, 자기 집안에 들어가 안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한 가정이 참 평화를 얻으려고 하면 자기 관습을 버리고 서로 일치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불교 집안에 출가하면 천주교를 버리고 불교 신자가 되어야 하고 개신교 집안에 출가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내적 갈등은 없어지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평화를 잃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여기에 칼이 필요합니다. 고기를 잡아 그대로 먹지 못하고 예리한 칼로 각 부위를 잘라내고 가르고 난 다음 정돈된 음식으로 요리를 해서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게 됩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현실은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 혼돈의 세상이어서 무엇이 참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인지 분별 못 하고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만 마음 쓰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게 하셨지만, 칼을 가지고 계신 주님은 그 칼로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고 정리 정돈하여 진리와 사랑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죽음 없는 부활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며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게 합니다.
어떤 이는 “모든 삶을 적당히 해야지 지나치게 열 내서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앞에 있는 것 적당히 즐기고 재미있게 살면 되지 절제하고, 나누어주고, 희생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멋대로 편리한 대로 살려고 하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라고 하듯이 먹고 마시고 즐기다 보면 자기 일을 잊게 되는 것처럼 무사 안일한 생활을 하려고 하면 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 북과 남은 서로 간에 양심적 해결책 없이는, 하나의 투쟁 없이는 평화와 번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북에 산재한 문제, 인권 문제, 독재 정권으로 저지른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평화 통일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 안에 왜 그 많은 전쟁이 있었을까? 전쟁을 통해 참 평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암 환자는 암을 제거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싸워 이겨야 합니다. 평양냉면 먹었다고, 악수했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이 서로 버릴 것 버리고, 양보하고 만나서 서로 뼈를 깎는 고통을 맛보는 시련을 넘어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도 칼도
함께 존재합니다.
깨어나야
평화입니다.
칼이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칼은 평화의
방향이 어디인지를
너무나 잘 알려줍니다.
칼의 탈출구는
평화이고
평화의 탈출구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흐지부지한 믿음엔
칼이 필요합니다.
우리모두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를 수 있는
칼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묶여 있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자르는 순간
평화는 시작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의 칼입니다.
결단의 칼은
식별의 칼날이 되어
주님을 향해 가게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라는 평화와
십자가라는 칼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걸어가야 할 길은
아는 것만이 아닌
올바른 실천의 길임을
기억합시다.
관계의 칼이
관계맺음의
일순위인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회개의 칼이 됨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우리 내면 깊이
받아들입시다.
♣ 참 평화를 위한 결단과 전적인 내어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의 초기 선포 활동과 오늘날에 사는 제자들의 생활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곧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을 제시하면서 그분을 추종하는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10,4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위하여 결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과 제자인 우리에 대하여 갈라지고 맞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와 정의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 인간들의 탐욕과 폭력이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을 따르려는 결단으로 친척들로부터 적대감을 사게 되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을 따르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0,37).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혈연관계나 다른 인간적인 관계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에게 필요한 일들에 정신을 쏟느라 하느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아버지와 결별을 선언하며 “이제부터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알몸으로 가겠습니다.”(1첼라노 12)라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삶의 중심과 방향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끝으로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10,38-39).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와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를 지니고 완전히 예수님께 속하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다운 사람이 되려면 그분께 헌신해야겠지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오염된 자신을 버리고 순수한 자신을 오롯이 봉헌하는 사람만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하여 그분을 위해, 온전히 자아를 포기하고 자신 전부를 헌신할 때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길은 생명을 내놓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한걸음씩 생명을 증가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는 몸짓을 통해서도 생명은 확산될 것입니다(10,42).
제자들의 길은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역설적인 삶입니다. 남이 싫어하는 궂은 일 나서서 하기, 고통과 시련을 피하기보다는 직면하기, 편리한 것들이 주어질 때도 그리스도의 가난을 생각하며 불편을 감수하는 것 등이 예수님의 참 제자다운 삶의 면모들이겠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결단을 통해 참 평화 가운데 머물며, 사랑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며, 그분 때문에 가장 소중한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건네는 ‘어리석은 역설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몇 달 전에 저는 냄새를 맡지 못했습니다. 생활 안에서 불편한 점이 많아서 병원을 찾아갔더니 코 안쪽에 혹이 나 있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악성은 아니고 물혹이라서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지만, 이 물혹으로 인해서 심한 비염이 생길 수가 있고 또한 냄새를 잘 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물혹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지거나, 또는 약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잠시 약으로 인해 진행을 멈출 수는 있지만 완전한 치료는 수술을 통해 물혹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직 이 물혹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성지의 일과 제 개인적인 일정이 바빠서 도저히 며칠을 연속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러다보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혹시라도 염증이 생기지는 않을까, 또 전에처럼 냄새를 못 맡아서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제거해야 할 물혹을 계속하고 가지고 있다 보니 마음이 평화롭지 못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물혹을 과감하게 제거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때로는 제거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을 떠올려보십시오. 적군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분명히 평화가 깨집니다. 이 평화를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항복하면 될까요? 물론 적군이 스스로 물러나면 좋겠지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싸워 물리칠 때 비로소 평화를 되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라고 말씀하시지요. 평화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먼저 평화를 빌어주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평화의 주님이 아니라, 사실은 폭력의 주님이라는 말씀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바로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 제거해야 하는 것을 과감하게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평화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조금만 참으면 하는데 뭐...’라면서 꾹 참으면 이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롭게 살자.”면서 복잡한 상황을 피하는 것이 큰 미덕인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진정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것, 불의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참 평화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은 과연 평화로운지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일한 상태를 평화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늘의 명언: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너 자신뿐이다(에머슨).
질’과 ‘잘’(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국어에서 ‘질’이라는 낱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질’처럼 접미사로 사용될 경우, 명사, 의성어 또는 어근 뒤에 붙어서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는데요, 예를 들어 ‘싸움질’, ‘자랑질’처럼 좋지 않은 행위를 더욱더 비하하는 뜻으로 종종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질'이라는 낱말이 항상 나쁘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품질이 좋다', '질감이 좋다' 등과 같이 ‘사물의 속성, 가치의 총체’,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이루는 근본 바탕’ 등의 의미를 가지며 좋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모양과 발음의 차이 때문에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어느 가요의 가사처럼 '질'에 점 하나만 붙여서 ‘잘 한다’, ‘잘 산다’ 등과 같이 '잘'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부사가 됩니다.
이처럼 같은 말, 같은 내용이라도 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 좋은 표현이 될 수도 있고, 나쁜 표현이 될 수도 있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그렇지 않을까요? 자그마한 말 하나의 변화로도 세상을 바꿀 수가 있으며, 별 생각 없었던 행동 하나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과 행동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베네딕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구의 총대리이신 손희송 주교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1993년 용산 성당에서 주교님과는 본당신부와 보좌신부로 1년간 함께 지냈습니다. 벌써 2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교구청에서 주교님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두 번씩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주교님과 저와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늘 한결같으신 주교님께서 영, 육간에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교님께서 사목국장으로 계실 때, 제게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을 위한 강의를 맡겨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리스도론, 성사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매주 회합을 하고 있습니다. 활동과 기도로 모범을 보이는 사도직 단체입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함께 가기도 하시고, 성당 청소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시기도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면 레지오 단원들의 주회에 가서 강복을 주곤 했습니다. 매주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군대’라는 용어처럼 단원들에 대한 교육이 철저하고, 상위 조직에 대한 순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는 제자들을 교육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마음이, 생각이, 정신이 변하면 행동이 바뀌기 마련입니다. 한국교회가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제자교육’이 더욱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 소식을 전하시면서 함께 할 제자들을 선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전해 주시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때로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인지,기쁜 소식은 무엇인지,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례를 받았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지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진리의 빛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그곳은 멀리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말씀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이곳은 이미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세상의 기쁜 소식은 ‘돈, 명예, 권력’입니다. 그것을 얻으면 기쁨이고, 그것을 상실하면 괴로움과 고통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쁜 소식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진리를 아는 기쁨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생각했고, 예수님에게서도 ‘재물, 명예,권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기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지혜는 나누고 비움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우고, 쌓으면서 얻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나누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밀알 하나로 남지만 떨어져 썩으면 수많은 밀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참된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밭을 제대로 일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섬기는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자이신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을 주는 수도성인입니다. 성인의 규칙서는 불후의 영적 고전이 되었고,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는 성인의 거룩한 생애를 잘 전해 주고 있는 역시 불후의 영적 고전입니다.
오늘 복음에 앞선 부속가의 내용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성인의 면모에 대한 묘사에서 그분의 거룩한 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 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위에 열거된 모든 성인의 성덕을 합쳐 놓은 분과 같은 성 베네딕도라하니 성인께 대한 수도후배들의 흠모의 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참으로 완덕의 수도성인이었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성하면 떠오르는 것이 제 자작시 산과 강입니다.
“밖으로는 산/천년만년/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천년만년/임 향해 흐르는 강”
산이 상징하는 바 ‘정주서원’이요, 강이 상징하는 바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을 뜻하는 ‘수도승다운생활' 서원입니다. 바로 '산과 강'의 영성을 살았던 베네딕도 성인이자 그 후배수도승들입니다. 사실 성인은 몬테카시노 산에서의 수도생활중 거의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 집니다. 새삼 정주의 상징과도 같은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이 얼마나 복된지 깨닫습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의 비유가 재미있습니다. 강론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6세기의 성 베네딕도를 산같은 분이라면, 12세기의 성 프란치스코를 강같은 분으로 견주곤 합니다. 중용과 절제의 산같은 성 베네딕도라면 시인이자 신비가인 성 프란치스코는 강 같은 분입니다. 마치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이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두 분의 배치가 하느님의 절묘한 섭리처럼 생각됩니다.
산과 강의 영성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섬김의 삶입니다. 늘 그 자리의 정주의 삶을,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주옥같은 2독서 내용을 모두 포괄한 삶이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실로 거룩한 사람이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를 입은 사람입니다.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 평화의 사람, 감사의 사람이 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영성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직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이를 분명히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구절이 늘 신선한 충격이요 감동입니다. 바로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서 우리를 섬기는 분으로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 바로 섬김의 롤모델입니다. 평생을 하느님과 사람을 섬기는 삶에 정진하신 주님이 아닙니까?
섬김의 두 차원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전례를 통해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며 주님을 섬기듯 형제들을 섬깁니다. 둘은 구별될 지언정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섬김은 형제들을 섬김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형제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을 잘 섬기는 자가 형제들도 잘 섬기게 됩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공동체가 성 베네딕도의 비전이자 꿈이었습니다. 섬김의 공동체는 바로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베네딕도는 성규 머리말 끝부분에서 그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비단 베네딕도 공동체만 아니라 믿는 이들의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섬기는 학원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섬길 때 저절로 이웃 형제들을 섬기게 됩니다.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에는 졸업이 없으니, 평생 섬기기를 배워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고 섬길 때 더불어 깊어가는 섬김의 삶입니다.
오늘 1독서의 결론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슬기가 나온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혜이자 섬김입니다. 사랑이 지혜이듯 섬김service이 지혜wisdom입니다. 섬기는 삶에 충실할 때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는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믿을만한 영성의 잣대도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섬김, 순종의 섬김, 겸손의 섬김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 말씀과 성체로 우리 모두를 섬기시며 우리 또한 찬미와 감사로 주님을 섬기는 복되시간입니다. 우리가 섬김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칼을 주러 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 “불의에 찬 축제모임”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부님이 본당에서 하는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그러니 예습하는 차원에서 마르코복음 17장을 모두 읽어 오세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교사는 성경공부 참석자들에게 “지난주에 마르코복음 17장을 읽으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참 재미있군요. 마르코복음은 16장까지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적절한 교훈을 배우게 되겠군요. 오늘은 예수님이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말씀하시는 첫 번째 경고는 위선적 예배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는 안중에도 없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기에 그런 거짓된 예배에 물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이란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고, 고아의 권리를 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신의 뜻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예배에 나와 위선적인 제물을 바치는 것을 오늘 독서는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손에는 이웃에게 해를 끼쳐 피가 가득한데 예배만 드리면 괜찮을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먼저 버리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예배도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당신 뜻을 이미 알려주셨는데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앉아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이웃이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데도 나부터 살고보자는 마음으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그런 예배에서 지금도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미사를 드리러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합당한 옷차림입니다. 미사 이전의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죄 있는 상태로 미사를 본다면 주님을 참으로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사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이고, 그 노력이 미사 때 드리는 참된 예물인 것입니다.
예전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남편이 몇 년 동안 고생하다가 귀국하는 날,어떤 부인들은 남편을 기쁘게 맞으러 가고 어떤 부인들은 자살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부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제비들이 있어서 남편이 번 돈을 다 날리는 부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 미사를 위해서도 위선적인 예배,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미사 끝나고 성당 문을 나갈 때부터 이미 다음 미사 때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기 위해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노력에 온 힘을 쏟으며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 10,4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것이 필요없나 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모세의 계명과 율법들을 하나하나 다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사랑의 몸짓 하나로도 히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충분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 한 번,
칭찬의 말 한 마디,
시원한 물 한 잔,
주모경 한 번이면 하느님 나라는 내 것입니다.
그 멋지기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를 마음껏 누리시는 오늘 되소서~~^^
힘들고 어려운 길< 서원 미사 강론 7/11> 사부분도 축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10여년의 긴 세월 오늘을 준비 하려고 익숙하지 않은 삶을 시작하여 종신서원의 시간을 맞이한 류 치프리아노 수사님에게 감사와 축하의 말을 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시고 잘 참으시고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저 하느님이 좋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찾아오고 이 길을 가려고 결심하신 수사님 눈물 콧물 많이 흘리고 이 길을 가야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수사님은 고개 마루 턱에 오르시어 야호! 하고 이 자리에 온갖 축복과 축하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금 여기는 하늘의 천사들과 성부 성자 성령이 합께 축복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올림픽 선수로 발탁 되어 오래기간 고된 훈련을 하고 올림픽 선수로 경기장에 나가는 사람은 영광의 금 매달을 목에 걸 때까지 경기장에서 피땀을 흘리며 자기 실력을 충실하고 진실 되게 경기에 임하는 것 같이 끝 까지 달릴 곳을 향하여 달려야합니다. 지금 것 열두 고개를 넘었으면 이제 20고개가 남았습니다. 이 고개는 지금 것 연습해오든 같은 내용을 실전에 공동체 안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리랑 연민의 정을 민요가 아니라 아 =나 리=이치아는 것 랑 = 기쁨
고개를 넘어 간다 사람은 고난을 격지 않고는 자기 지신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잃어버리면 십리 <와성> 못가서 발병난다. 더갈수 없다 중지된다.
이제부터 연습이 아니라 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처럼 살아가야합니다.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나고 지금 것 실수나 잘못을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감싸주고 염려할 사람이 없습니다.
순명의 길은 지금 것 쉬웠지만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어른 되었다는 생각에서 알지 못하는 고집도 더 성장하고 순명이 죽기보다 더 힘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명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순명의 긍정적 의미는 자신을 낮추어 공동체를 섬기는 사랑입니다.
청빈의 삶은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지난번 소풍을 함께 할 때 점심을 풍요로운 뷔페에 가니 수사님은 저를감동 시켰고 부끄럽게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떡복기나 김밥이 더 좋아요 그런데 살아보면 더 맛있는 것 먹고 싶고 더 좋은 것 가지고 싶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내것은 아무것도 없고 있는 것은 다른 이을 위한것입니다
정결의 서원도 시간이 갈수록 덕스러워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자신 주위를 맴돌고 강하게 닦아 옵니다.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싶어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워 질 때 자기 안에 행복을 찾아 스스로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너 안에 내가 죽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 마세요 여기 남아 있는 선배들은 그 보든 것을 극복하고 여기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수사님을 불순종으로 불청빈으로 불 정결로 유혹하겠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신 한 20고개를 넘어 생명이 다하도록 여기 공동체에 남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오늘 저 자리에 엎드려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서원한 같은 자리에 나무 코드 안에 들어가 누어 수사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에게 금메달을 받게 될것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가리키는
안내자는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수도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묻게됩니다.
매순간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삶이
수도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다양함을
함께사는
형제들 안에서
깨닫게됩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은
예수라는 칼을
형제들과 함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칼을
신뢰하게 될 때
우리를 정화시키시는
그분께 우리의
분노와 슬픔까지도
내어맡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본질적인 삶이
무언지를 알게
하여주십니다.
본질이란
그 무엇에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의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안에
수도생활이 있듯이
하느님 안에는
갈등과 대립
미움과 사랑
불신과 신뢰
이 모든 것들이
생명의 선물로
변화되게 됩니다.
점점 하느님을
신뢰하게 하는 것이
수도생활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음의 칼처럼
우리의 일상안에서
노동과 기도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나에게서
수도생활이란
다시 일어서는
십자가의 기쁨에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의 커다란 유혹꺼리는 아마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비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이 자리를 이용해서 이제야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고백하고 싶네요. 물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고백을 이미 다 한 것이지만, 부모님께는 직접 말씀드린 적이 없었거든요.
사실 공부하러 도서관 간다고 해놓고 하루 종일 만화방에 있으면서 만화만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서, 문제지 산다고 말해놓고서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의 비용을 마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부모님 심부름 갔을 때, 약간의 돈을 빼돌렸던 적도 기억나네요.
아무튼 어렸을 때, 저의 이 유혹거리를 이겨내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 유혹 앞에서 항상 흔들렸고, 그 흔들림으로 인해서 마음에 평화가 오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흥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등으로 평화가 올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에 입장하면 마음이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제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어떨까요? 다시 평화로울까요? 죄 지었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한 가득입니다.
이런 순간적인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평화는 어떤 평화가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했는데, 그렇다면 이 평화는 어떤 것인가요? 분명히 천사들도 말했던 평화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실까요? 순간의 기쁨, 순간의 위로를 통해서는 참 평화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암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런데 마약 성분이 들은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고통을 동반하는 진통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오고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것이 참된 평화일까요? 아닙니다. 순간의 평화를 주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고통이기에 참된 평화라고 할 수 없지요. 여기서 참된 평화를 주는 것은 암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칼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간만 만족하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에, 이 참된 평화를 가로막는 것들을 싹둑 자를 수 있는 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짜 평화는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욕심,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이웃을 비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속 좁은 마음 등등입니다. 이 가짜 평화를 과감하게 잘라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라고 내어준 칼을 들고서 싹둑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평화 안에서 참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어떤 값어치가 있는 일을 성취시킨 적이 없다. 나의 여러 가지 발명 중에 그 어느 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없었다. 그것은 꾸준하고 성실히 일을 함으로써 이룩된 것이다(토머스 에디슨).
유혹에 맞서는 것은 누구? 바로 ‘나’.
어떤 수도승에게 한 사람이 와서 “저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잡념 때문에 위험을 느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승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저고리를 벌려 바람을 멈추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저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누가 바람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수도승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 덮쳐오는 생각들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맞서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유혹들을 인해서 우리 역시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유혹들을 누가 맞서야 할까요? 주님께서 알아서 맞서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맞서야 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중심과 책임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참 사람입니까?
사람이 되는 일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아마 평생 일이 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단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에서 찾아낸 것은 중심과 책임감입니다.
중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주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
그 누구보다도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주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중심 부재보다 더 큰 피해는 없습니다.
정체성의 부재와 직결되는 중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마라."(RB72장)
이번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지내신 왜관 수도원 김영호 요아킴 수사님의 상본에 적힌 성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신,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바로 허례허식을 싫어하시는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들어내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이사1,11-14).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마음을 알아 준다면 제발 이런 헛된 경신례는 집어 치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인 내가 싫어하는 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이 빠져버린, 내 뜻과 무관한 제멋대로의 경신례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해도 이런 상태에서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주님을 사랑하여 중심에 모신 이들임이 검증되는 것은 중심이신 주님을 따를 때입니다.
생각없이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진, 철저히 책임적 존재가 되어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제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이 제 십자가를 내려 놓고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책임적 존재가 되어 중심이신 주님을 항구히 따를 때 비로소 참 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제 십자가의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웃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 역시 참된 경신례의 정신을 사는 것이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이런 사랑과 정의의 삶이 채워질 때 비로소 참된 경신례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책임적 존재의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온다는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사실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환대합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 시편저자는 화답송 후렴을 통해 말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의 '중심'이신 주님과 각자의 '제 십자가'를 새롭게 확인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양다리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칼! 칼은 날이 서 있습니다. 날이 서 있기에 단칼에 무엇이든 둘로 자릅니다.
날이 서 있지 않은 칼은 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인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양다리는 그분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가족 구성원 하나 하나를 언급하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혈육보다 더 사랑해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칼같은 단호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양다리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결국 양다리는 주님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면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이, 물론 가족들도 포함해서 모든 이를 사랑하게 됩니다.
더 위대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주님의 편에 서는 사람은 혈연 혹은 지역이라는 좁을 틀을 넘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삽니다.
성령의 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거짓 평화와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칼
나명옥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시며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신 모습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던지십니다.
‘칼’ 하면 로마에서 공부할 때 가끔 방문한 성바오로 대성당 앞에 있는 대리석상의 바오로 사도가 들고 있는 쌍날칼과, 세종로에 근엄하게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오른손에 있는 ‘칼’ 이 겹쳐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쌍날칼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 12) 라는 말씀에 따른 표상이고, 이순신 장군의 칼은 직접 지은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는 시에서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을 생각하고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표상합니다.
자신의 삶 앞에 놓여 있는 유혹 앞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내면의 갈등이 없는 얼버무리기 식의 적당한 평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하느님과 사탄과의 평화를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해야할 날카로운 쌍날칼이 더없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외제차를 한 번 몰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차였고, 아주 비싼 차였지요. 실제로 운전을 해보니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차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차를 끌고 도로를 주행하면서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혹시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서 차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까, 혹시 신호를 기다리는 이 차를 보지 못하고 뒤에 부딪히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차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제 차에 상처를 냈던 많은 운전수에게 단 한 번도 보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차의 지금 상태는 흠집투성이로 엉망진창이지요. 그러다보니 아주 편안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제차를 타고 운전할 때에는 영 불안합니다. 워낙 비싼 차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차면 무엇 합니까? 내가 운전하는데 불편한 마음을 없앨 수가 없다면, 내게 있어서 더 이상 차가 아닌 것이지요. 차는 차로서 기능을 할 때 가장 ‘차’다운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운전하는 차와 달리 맘 편하게 운전할 수 없고 걱정만 할 수밖에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인해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남들도 다 가지려는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더욱 더 드러내게 한다는 이유로, 우리들은 이 불편한 것들을 어떻게든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마련해주신 모든 것들은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들을 나를 위해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섬기면서 주님의 자리를 오히려 빼앗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의 시선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다보면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상황이 와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으로 살아야 한다고 힘있게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주님 안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진리이시며 참 평화를 주시는 주님의 시선을 간직하며 살아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인 것인 양 살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 제1독서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당장 실천하도록 합시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진리를 깨달음은 달이 물에 비치는 것과 같다. 달은 젖지 않고 물은 깨지지 않는다(도원).
십자가
-신효원-
해마다 오월이면 학교 실습지가 있는 농장의 식구들이 죽전 공소의 나환우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갑니다. 그분들 중에 세상을 떠나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생기면서 참석 인원이 자꾸 줄어듭니다. 올해는 여덟 분이 오셨습니다. 할아버지 두 분은 한껏 멋을 냈고 할머니들도 곱게 단장을 했습니다. 고단했을 지난 세월의 흔적 없이 모두 밝았습니다. 오히려 시중 드는 우리들의 표정이 더 어두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소 회장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웃고 사는데 당신들이 무슨 걱정이 있어? 정 답답하면 예수님을 부르면 되잖아!”
십 년째 장기집권 하고 있는 다두 회장님은 여든이신데도 씩씩하고 분위기를 잘 띄우십니다. 술잔이 돌아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서넛은 춤을 추었습니다. 곁에 앉은 루시아 할머니도 즐거워했습니다. “처음 병을 알았을 때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어요. 남편을 붙잡고 며칠을 울었지요. 집 떠나 이곳에 온 지 삼십 년이 지났네요. 이제는 감사하지요. 이 병이 아니었더라면 좋으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사람마다 집집마다 걱정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태도에 따라 고통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 속에 깃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길이 됩니다. 하느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은총입니다. 십자가 없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받아들이는 대로 받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저는 인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는 저에게 와서 남의 흉을 보는 분보다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얘기하거나 어려움을 전해주는 분이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저도 한 몫을 합니다.
저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데 다른 사람과의 안 좋은 점을 얘기하면서 저도 같이 나쁘다고 얘기해주길 바라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저는 동조하지 않거나, 오히려 상대편을 이해하라고 하거나 당신도 문제 있다고 하기도하고 미숙하게도 불쾌한 표정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으려던 마음이 오히려 상처를 받고, 웬만하면 정말 문제가 있어도 제게 얘기하지 않아 문제가 곪아 터진 뒤에야 제가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저는 바뀐 것이 별로 없습니다.
곤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괴롭기도 하지만 인정에 끌려 옳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쉽지 않은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비록 평화가 깨지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예언을 하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감수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우리를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예언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받는 것이 달라지고,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받느냐 못 받느냐가 달라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처음부터 지니고 살았던 인생의 모토는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야 하는 등의 조건들과 함께 생각했던 것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심하게 미워하면서 느낀 것은 누가 미워지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두려움만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유학 생활하다가 치료차 한국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는 것은 세 달로도 모자랐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니 인사를 못 드리고 와서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이도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는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욕먹지 않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어렸을 때 가졌던 행복을 위한 선입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결국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나를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고 아무리 못해도 좋아할 사람은 좋아해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산다는 것이 나의 약함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누구의 미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중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 명확합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사람과의 분열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제가 있는 답동 교구청 근처에는 커다란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시장이니까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장을 지나가면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줄을 서서 먹는 닭강정, 다양한 색깔의 찐빵,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만두, 떡볶이, 김밥 등의 먹거리, 그리고 좌판에 물건을 내다놓고 파시는 할머니들의 모습까지 옛날 어렸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래시장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대형할인마트가 우후죽순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형할인마트를 가면 편하기는 합니다. 없는 물건도 없고, 또 가격도 싸고, 또한 쇼핑하기에 적당한 온도까지 유지하기 때문에 땀 흘리며 재래시장을 갈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단 돈 100원이라도 깎기 위해 흥정하는 소리, 덤으로 한바가지를 더 퍼주는 아주머니의 따뜻함을 대형할인마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더 커다란 것들만을 쫓을까요? 이렇게 큰 것들만을 만들고 찾다 보니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외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곳에서도 함께 하시는 분이며, 어쩌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이러한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안 되면 가슴이 아프고,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머리가 아프다.’
사랑은 어떻게든 아픔을 가져다주는가 봅니다. 그런데 아픔을 주기는 하지만, 이 뒤에는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작은 곳에서도 계시는 분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큰 아픔을 얻을 것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행복의 길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아주 의외인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칼에 베이는듯한 아픔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선택함으로 인해 가족 간의 분열도 생길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 인해 진정한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말이지요.
아주 작은 일상 안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비록 이를 통해 큰 아픔을 얻을 수는 있지만, 곧 더 큰 선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고정된 이정표다(셰익스피어).
가고 싶지 않은 주님의 길
이영춘 신부님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세상의 길과 하느님의 길은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향은 나를 드러내 놓아야 하는,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우라는 그런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길은 비움이요 희생이며 나를 죽이는 그런 길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고 자꾸만 욕망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기에만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울 뿐, 먹고 나면 영혼이 죽어가는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누구든지 피하고 싶은 길이지만 생명을 주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육신을 딛고 동시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살기 때문에 이 두 길은 내 안에서 격렬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욕망 깊숙이 들어와 거세게 후벼팝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에 의한 상처는 쉬이 아물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무엇이 세속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를….
하지만 두려워 맙시다.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며,
태화산을 오르며
신재용 신부님
이른 새벽, 영월 태화산에 혼자서 올랐습니다. 어쩌다가 바쁜 일상을 벗어버리려고 한 번씩 찾기 시작했던 산이 이제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정상 달성을 목표로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체력이 약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오르는 시간의 두 배는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혼자 걷는 산길은 한가해서 여유롭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지나간 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겸손하지 못한 제 마음 하나씩 비우며 그렇게 올랐는데, 오늘은 머릿속이 무척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성경공부며 교리신학원이며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려고 그랬는지, 긴 한숨을 쉬며 복잡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다른 때보다 더 힘이 듭니다. 잠시 앉아 쉬면서 멀리 아름다운 남한강을 바라보며 긴 묵상에 잠겨봅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덕지덕지 붙여서 무거워진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가는 두루미들처럼 살과 뼈를 깎아버리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함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이 따라주질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버리고 비워내어 참된 목적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의 참된 모범이신 예수님께서 사신 삶을 본받아 내 삶이 곧 그리스도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채워가는 과정,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수행이자 신앙이 성숙해 가는 과정임을 나는 이 늦깎이 나이에 깨닫습니다.
칼을 받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역사상 제일 불효한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를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모든 재산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옷을 홀라당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물론 그의 불효는 패륜아의 불효와는 다르지요.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아버지를 온전히 따르는 것을 육신의 아버지가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앙이 깊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자식을 자기 것으로 묶어두고 좀처럼 하느님께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이지만 자식도 나에게 묶고 나도 자식에게 묶이는 그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진리를 따르도록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고, 부부 사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며,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사랑할수록 자유롭게 놔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당할 것이고, 서로 속박하고 얽어매는 관계는 파산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관계는 칼을 받는 것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천국의 예고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점점 연세 들어가시는 분들, 지상생활을 조금씩 마무리 지으셔야 될 분들, 점점 큰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지옥은 또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그곳에서의 생활은 또 어떻겠습니까?
한 형제가 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 들어가 보니 정말 깜짝 놀랄 일 세 가지가 있더랍니다. 너무나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 했다는군요.
첫 번째 놀랄 일은 그간 긴가민가했는데, 그간 이렇게 부당하고 죄 많은 내가 과연 천국이란 곳을 들어갈 수 있을까, 엄청 걱정 많이 했는데, 내가 딱 천국에 와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먼저 놀란답니다.
두 번째 놀랄 일은, 천국이 좋은 곳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신부님 수녀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왔는데,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아름답고, 더 좋은 곳이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놀랄 일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온 것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천국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 얼굴을 찬찬히 보니 절대로 여기(천국)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와 있어서 또 놀란다는군요. 날 그렇게 괴롭히셨던 시어머님도 와계시고,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숱하게도 뺑뺑이를 돌리며 날 사람취급도 안했던 군대생활 직속상관이었던 김 병장도 와계시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목숨보다 소중한 겟돈 떼먹고 달아난 자매님도 와계시고...
그만큼 천국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풍성하게 내리는지, 진홍빛 같은 우리 죄들이 눈 녹듯이 씻겨 내리는 곳이라는 것이겠지요.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젠가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예고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 세상 구석구석에는 천국의 조각들이 숱하게 널려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곳 저 곳에는 지옥이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일찍부터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하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지옥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동료들의 하루도 지옥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한 형제가 꼭두새벽부터 싱글벙글 함박웃음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라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천국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천국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 동료들의 하루도 천국으로 변합니다.
결국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는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천국에서 생활하는가, 지옥불의 고통을 겪느냐 역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옥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나가는 것,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끌어안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참으로 묘해서 떨치려고 기를 쓰면 더 큰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십자가, 참으로 큰 괴로움의 원천입니다만, 그 십자가에 의미를 부여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다 못해 주저앉아버림으로써 극도의 고통만 체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잘 끌어안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그 누구든 빼놓지 않고 십자가를 보내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발걸음을 하느님 당신께로 돌리라는 신호입니다. 하느님 당신과 1대 1로 대면하자는 외침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라는 요청입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호의적으로,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축복의 도구입니다.생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입니다. 새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매일 매 순간이 천국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미학
이훈 신부님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전쟁의 역사를 살아온 인류는 칼을 향해서 죽음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칼은 생명의 칼, 진리의 칼, 믿음의 칼, 신앙의 칼입니다.
복음은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족이 내 신앙의 걸림돌이며, 나 또한 가족들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탓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할 때입니다.
원조의 죄를 사랑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담이 지은 죄는 하느님보다도 하와를 더 사랑한 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또한 하느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지상목표였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떠나가고 계십니다. 복음은 무엇인가요. 기쁨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사람은 기뻐야 하고, 복음을 사는 사람은 애착이나 집착이 아닌 하느님을 향해 열린 자유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로 대접하기
임원지 수녀님
서로 사랑하라 하시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 하시고서, 사랑하라고 내 지금과 내 여기를 주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미워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사랑이 참으로 맹목적일 수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웃 사랑은 쉬운가. 십자가가 따로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잘들 지내 시나요?” “네, 잘들 지내지요, 개와 고양이처럼.” 개와 고양이가 만나 함께 살고 있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취향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견뎌내기만도 고역이다. 평생을 해로하는 부부들은 얼마나 훌륭한가. 주님께 합당하
려면 우선 나를 참아주는 이들의 노력부터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리라.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주신다 하신다. 지학순 주교님이 북한에도 사람이 살더라 하시던 말씀이 충격적인 시절이 있었다. 월드컵이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김연아의 경기 때는 하나가 되다가도 정치나 사상, 이념이 개입되면 이 작은 나라가 4분 5열 되니 부끄럽다.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수시로 기도로 정화되어야 하는가. 수하든 장상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남이든 북이든, 서로 갈리지 말고 형제로 자매로 대접하면 그 상을 주신단다.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고 미사 때마다 가슴 치는 일이 그냥 형식에 그치고 있음을 자주 나에게서 남에게서 빤히 드러나 보인다. 내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내 이웃을 내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보라시던 어느 신부님 말씀은 사실 무섭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국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오늘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성당에 앉아 일주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내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로마에 있을 때보다 기도를 더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워낙 산골 구석에 있어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것과 더불어 여러 약속을 쫓아다니다보니 정해놓은 기도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 분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가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관례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도 되고 그래서 힘도 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나중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돌아보니 이런 미움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쉬지도 못하면서 먼저 인사드려야 할 분들부터 분주하게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니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내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라는 것이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아직도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일이 우선인지 건강이 우선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성격 때문인지 저는 모든 일을 마치고나서야 시간이 남으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서 몸이 안 좋아 진 것이라고 합니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이 있어야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신앙 다음에 건강을 놓으라고 합니다.
그분들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시간을 줄어들게 한다면 사람 만나는 일은 조금 뒤로 미루어야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정한 기도 시간도 빼앗겨가면서 인사를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마음이 상한다면 그것은 제가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기 위해 그 정도는 겪어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거짓 평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누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해서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 스스로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싫어하는 말을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싫어하는 것을 하여 괜히 긴장과 갈등을 살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좋게 넘어가려 하면 이제는 마음 다른 편에서 저항이 올라와 마음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고, 그것은 거짓 평화이며, 그것은 사랑의 유기라고 계속 쑤석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자니 내 안에서의 갈등이 괴롭고 마음의 갈등을 피하자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어 한 동안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싫어하는 말을 하되 겸손과 사랑으로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야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갈등이 좋고 평화가 나쁜 것이기에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이지요.
하느님을 따르려는데 반대와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이 부모라면 부모를,
그것이 자식이라면 자식을,
그것이 재물이라면 재물을,
그것이 자신이라면 자신을 과감히 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조금 다른 충고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을 갖지 않은 집안에 누가 시집을 갈 경우 저는 전술적으로 물러서라고 말해 주기도 합니다.
시집 식구들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불화를 무릅쓰고 신앙을 고집하지 말고 나는 신앙을 버릴 수 없지만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성당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가족들이 같이 성당에 나가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는 신앙인답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이렇게 충고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하느님과 신앙을 빙자하여 Power Game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고 자기와 가족 모두를 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가족을 사랑하기에 자기를 죽일 때 사랑을 기초한 이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가족들이 모두 깨닫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아주며 일으켜 줄 때,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어깨 두드리며 '힘 내'라고 말 건넬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의 위로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외로움을 환한 웃음으로 달랠 때,
주님의 넉넉함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가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 모두가 곧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사제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제복"과 관련한 기억이 생생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주임 신부님이 피정을 떠나셔서 한 본당 주일미사를 대신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미사가 끝나고 본당 원장 수녀님과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 찾았더니 주임 신부님을 대신해서 돌아가는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수녀님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제가 옆에서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셨습니다. 모든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한편, 근황을 묻기도 하고 바쁘셨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저는 어정쩡한 자세로 수녀님 바로 옆에 서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제가 사제복을 입지 않고 우중충한 잠바를 입고 있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어깨를 툭 쳤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 아래에서 위까지 쫙 때깔나게 차려입은 신사 한 분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아! 자네구먼, 수녀님이 소개하겠다는 사람이. 고생이 되더라도 힘내야지!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테니 열심히 한번 해보라구."
순간판단력이 부족한 저였기에 그 당시 저는 그분 말씀이 제대로 접수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아∼예! 그러죠.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신사는 본당 사목회 간부였는데, 수녀님께서 실직한 교우 한 명의 일자리를 부탁해서 그날 성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형제님이 미사 시간 내내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습니다.
저 역시 가끔 실직자들을 만납니다. 한번은 힘없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찾아온 한 실직자 형제를 만났습니다. 물론 그분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최대한 조용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확실한 도움,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도 속이 상했습니다. 실직자 형제들이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만일 제가 실직으로 인해 당장 끼니걱정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형제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해(苦海)입니다. 비록 오늘 고통스러우시겠지만 희망을 가지십시오. 고통 가운데서도 활짝 웃는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을 했다면 그분들은 "공자님 말씀하고 있네. 날씨가 더워지니 맛이 갔구먼"하고 빈정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다 구체성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친교는 말이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뭔가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①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②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형제를 내 일부로 생각하기에 그들과 구체적으로 기쁨과 슬픔, 고통을 나누며 우정을 맺습니다. ③이웃들을 내 형제로 받아들이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받아들임
남상근 신부님
어릴 적 그리도 좋던 친구들,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나한테 한 그 친구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친구이기 때문에 웃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별 싱거운 녀석 같으니’ 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라도 불러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 쉬운 듯 어렵습니다. 친구임에도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저런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에 끼어든 그 많은 ‘친구’답지 못한 것들이 우리들 사이를 어렵게 만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상을 주시겠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주십시오. 나도 받아들여집니다.
내게도 주어집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손해나는 일이기에 마다한 일이 혹시 있지 않은지요? 억울해하며 억지로 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 한 잔에도 댓가가 있을 것이며, 환한 미소 한 모금에도 반드시 상이 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하여 그 어떤 것도 손해가 아닙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신다니 모든 착한 일은 그냥 흩어지지 않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노성호 신부님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간혹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시선이 고정되는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주몽’이 그 중 하나였다. 여러 명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주몽과 비류의 군장 송양이 만나는 부분이다.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도모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몽이 송양을 찾아갔다. 송양은 주몽에게 독배와 술잔을 내놓으며, 이 둘을 가려내야만 졸본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주몽은 자신의 안위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두 잔 술을 모두 마셔버린다. 만일 주몽이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든지 다른 이유를 대면서 주저했더라면 결코 송양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졸본의 통합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천하대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수고나 노력, 희생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얻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의미도 없을 것이고, 얻으려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모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역설적인 등식이 성립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아집·집착·욕심·시기·질투·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자신을 버리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야 한다. ‘과거의 나’가 가지고 있던 목숨을 버리면 ‘새로운 나’는 새 생명을 간직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무모해 보이면서도 과감했던 행동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버림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자기 희생이 세상 사람한테는 의미 없는 죽음처럼 여겨지지만 우리한테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된다.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의 힘을 빼고 긴장을 풀면서 쉬어야 한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남을우-
요사이 세상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요지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비위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 보면 목청 큰 사람이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니 어느 편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인터넷에 뜨고 지는 네티즌들의 언어가 점점 메마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함까지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념에 젖어봅니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몰이해적인 반응은 일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칼은 옳고 그름의 바른 잣대를 상징하지요. 정의가 바로 설 때 진리가 살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태초적인 가르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언어, 생명이 담긴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현실에서 펼쳐야 할 우리의 소중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 되는 길
김만수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자기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 상식으로는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같이 생각됩니다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마저, 즉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103위 성인 가운데 겨우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 베드로 성인은 배교를 강권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즉 저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님의 계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고 상냥하게 어머니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청에서 유대철(베드로)을 배교시키기 위해 14세의 어린나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혹형과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은 신앙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순교한 이 어린 성인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잃었으며 또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주님을 위해 부모가 주신 육신 생명은 잃었으나 대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마음이 편치 못한 우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세상의 그 어느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부모와 아내나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마저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잃어야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삼주전 우리 중앙 본당 800여명의 교우님들이 배론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성지이지만, 그곳은 1801년 황사영과 그 동료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첩첩 산중에 자리 잡은 교우 촌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신자들이 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해 오던 곳이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이 그 해 2월에 서울을 떠나 이곳 배론으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도 이곳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이 이들에게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9월 29일에 황사영과 김한빈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됨으로써 결국 배론 교우촌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황사영이 쓴 <백서>의 몇 줄만 읽어봐도 그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사영은 말하기를: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황사영이 쓴 이 <백서>는 차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당시 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데로 자신들의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사랑하는 가족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나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를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으며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한 참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한다면 모름지기 주님의 뜻을 따라 부모와 자녀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잃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어떠한 욕망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 위하여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고 비우고 버리는 아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그러한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끔 이러한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신부님, 정말로 미남이세요. 신부님, 목소리가 성우 같아요. 신부님, 너무나 멋져요.”
그렇다면 제가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눈이 이상하게 아래로 쳐졌어요. 신부님은 말이 너무 빨라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말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진리라 할지라도 듣기 싫은 말 그리고 상처가 되는 말이 되는 말이 있는 반면에, 거짓이라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 그리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실을 이야기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직접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결국은 당사자의 귀로도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람과 당사자의 관계가 좋을 수가 있을까요? 절대로 좋은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싹트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정반대인 ‘미움’입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도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임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바로 세상의 원칙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온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원칙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보다도 하늘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세상의 원칙을 내세워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진실이라는 단어를 포장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함부로 진실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원칙이 이 세상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오늘은 ‘예뻐요. 멋져요. 사랑해요.’ 등등의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세요.
어느 시장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상점도 없이 초라하게 앉아서는 오이 몇 개만을 놓고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는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지요. 이 모습을 본 어떤 한 손님이 “할머니, 이 오이 하나에 얼마에요?”라고 묻습니다. 할머니는 “오백 원입니다.”라고 답을 했지요. 손님은 가격이 싸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묻습니다.
“그러면 두 개에는 얼마에요?”
“천 원입니다.”
“그러면 세 개 사면요?”
“천오백 원이지. 그것도 계산이 안 돼?”
“에이, 많이 사면 싸게 해 주는 줄 알았죠. 할머니, 그럼 여기 있는 오이를 다 사면 좀 싸게 해주시겠죠?”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전부는 절대로 팔지 않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상점 없이 하루 종일 쪼그려 있다가도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따라서 기회가 될 때 다 파는 것은 할머니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계속 말씀을 잇습니다.
“돈도 좋지만, 나는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일하는 것이 좋아. 열심히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을 봐서 좋고, 또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고, 또한 오후에 따스하게 시장 바닥을 내려 쬐는 햇볕을 너무나도 사랑하지. 그런데 이 오이를 다 사겠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일과 사람들과 나의 하루를 당신이 몽땅 빼앗아 가는 것이잖아. 그래서 결코 전부를 팔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러다보니 중요한 사랑의 가치는 뒤로 밀린 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실천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평화를 빌어주셨으면서, 평화가 아닌 폭력을 상징하는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뒷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할 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예수님께 이 칼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이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기억하세요.
죽으면 살리라
조성숙 수녀님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 앞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예수님 제자의 길은 분명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가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원수처럼 여기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조건은 달랐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열정은 막상 수도 공동체에 살기 시작하면 곧 시들해져버립니다.
사랑은 이상적인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이 따라오는 의지의 차원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구체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자기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자기 성취’인 이 시대에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죽기 싫어서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합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죽으면 살 수 있나요?”
꽃자리
기정희 수녀님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구상, <꽃자리>)
구상 시인이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찾은 이들에게 건네신 이 시는 가끔씩 허덕이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를 멈추게 한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질 때 나는 ‘네 자리가 꽃자리니라.’는 시인의 말씀을 떠올린다.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의 경륜을 실어 가슴으로 말하는 언어는 얼마나 절절한 울림으로 들리는가!
젊은 시절, 열정과 사랑으로 첫발을 내디딘 수도 생활 초기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런 이의 없이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복병처럼 숨어 있는 십자가를 대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비켜 가길 바라며 마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무게가 전부인 양 허덕이며 숨차했다. 아직 인생의 마지막에는 다다르지 않았지만 훌쩍 세월을 뛰어넘어 나이가 들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그 의미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 십자가는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에 단 하나의 의미로 나를 내셨다. 그 의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비슷해 보여도 내 십자가는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제 것이 아닌 십자가를 부러워한다면 진정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리라.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를 명확히 방향 짓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도 제시하셨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그 무엇도 주님보다 우선일 수 없음을, 자기 자신마저 부정하는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임을 알려주신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믿어주신다. 십자가가 버겁다고 투정을 부려도,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어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것이라고 믿어주신다. 나무는 그 키만한 뿌리를 가졌다고 한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의 깊이는 우리 삶으로 드러난다. 그분을 따르는 데 피할 수 없는 모든 십자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며 앉은 그 자리가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꽃자리임을 잊지 말자.
이성균 신부님
성경에 담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해주고 삶의 방향을 일러 주는 보고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 주는 것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작성되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환경이 과거와 같지 않고 예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개별적인 고민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답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빚어냅니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존속하는 가치들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긴 해도 오늘의 복음은 가치를 달리하고 싶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용하신 적이 있듯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어 이루는 가정과 그 구성원인 가족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바람직한 덕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현합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돌보며 이해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우리도 변함없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엇나가는 말씀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정파괴범이라고 부를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관계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만 사랑해야 한다는 미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임의적으로, 또 쉽사리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은 가족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을 때나 종교로 인해 갈등이 있을 때, 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변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초창기에 복음 선포의 길에 나선 제자들의 경험담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몰이해가 안겨준 상처를 보듬고 복음을 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알뜰히 보살펴야할 가족들을 뒤로 하고 못내 길을 나서야 했을 이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이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적인 삶을 유지해 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덕에 오늘 복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떠나고 가족과 갈라서며 삶을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함을 넘어서 경계해야할 위험한 주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처럼 구체적인 고난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희생적인 삶을 주님과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 생애를 바쳐 증언하고 전해준 복음적 기쁨을 가족들 사이에 펼치는 일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퍼낼 줄 아는 인간이 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서 각별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새로운 모범이 되십시오.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 선포의 길입니다.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그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더 힘찬 선교가 됩니다.
반대의 불을 질러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平和,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염원하는 것입니다.
不和,
이것은 우리가 잘 해결하지 못하지만 참으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염원하지만 잘 살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한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러 오셨다 하십니다.
이 무슨 어깃장인가?
그리고 다른 데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하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이런 평화를 어찌 이해해야 하나?
갈라짐,
다툼,
갈등,
이런 것이 없는 것이 평화라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자기 잇속을 차리기보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으며 남을 받아들이는 주님의 사랑은 평화의 왕도입니다.
自己中心性의 탈피, 이것으로 우리는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불화를 각오해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는 좋은 것이 좋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인간끼리 좋은 것이 좋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끼리 짬짜미가 맞아 하느님을 따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헌 신발짝 버리듯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추종을 방해하는 그를 버려야 하고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그와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해도 주님 추종은 버리고 따르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야 하고 사랑하는 애인과 갈라서야 합니다.
수도원 입회를 결정할 때가 되면 부모의 반대가 너무도 극렬한 성소자가 꼭 있습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성소 담당 신부에게 하소연도하고 폭언도 퍼붓고 심지어 수도원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을 때 성소자 본인 뜻만 확고하다면 그대로 받으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자식 사랑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기에 자식이 이 생활로 진정 행복하기만 하면 언젠가 마음이 바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충고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반대와 불화를 무릅쓰고 주님을 선택해야지만
주님 따름의 의지가 확고해지고 주님 따름의 열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작으면 작은 반대와 만류에 그 의지와 열망이 꺾이지만 그 의지와 열망이 크면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잡아당기는 힘이 크면 클수록 더 강하게 뿌리치고 더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독서> : 육신의 제사가 아닌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제사를 봉헌하자.
경규봉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부패를 뒤쫓아 행하는 예루살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유다 백성은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제사가 아니라 제사를 봉헌하는 마음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를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신다. 악행을 버리지 않고, 정결하지 못하며, 착하고 올바르게 살지 못하면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듣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면서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수많은 제사를 봉헌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느님께 제사만 드리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이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제사에 물렸고 지치셨다고 말씀하신다. 제물 타는 냄새에 구역질이 나고, 제물의 피는 보기도 싫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그들이 봉헌했던 수많은 제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하느님을 역겹게만 한 것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곧 악행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억눌린 자들을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돌보며 그들을 감싸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과 질서인 사랑을 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하느님의 마음인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다만 인간의 욕심이며 이기심일 따름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이 봉헌하는 제물을 가져가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제물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가져가실 뿐이다. 그런데 제물 속에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만 담겨져 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아주시겠는가!
사도 바울로는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1-3) 하고 말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을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주시기를 청하자. 하느님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기도하자. 우리가 매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듯이, 내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제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하자. 오늘 육신의 제사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봉헌하는 제사가 되고, 하느님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복음의 요구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로서의 참된 삶의 자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슬러 복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신앙적인 결단과 선택 속에, 모든 것에 앞서 항상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우겠다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복음적 가치와 신앙의 진리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과 같은 가족과 혈육까지도 주님 때문에 포기하고 뒤로 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더라도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살아서는 안 되며, 어떤 것도 주님보다 낫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시는데, 칼은 무엇을 자르는 도구로서, 잘라서 서로 갈라놓으면 갈라진 둘이 서로 분명히 구분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칼’이라는 이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과 선택에 대한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보통으로 결단력이 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맺고 끊는 선이 분명한 사람을 보고, ‘칼’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과 나 자신의 유익을 챙기고, 자신의 감정의 요구에 따르는 일에는 조그마한 손해와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칼같이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면서도, 복음의 요구를 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믿음 없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를 자주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는 바보처럼 너그럽고 착하게 살고 주님의 일을 행하고 복음의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칼처럼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칼로도 끊을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혈육의 정과 유대조차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소중한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신앙으로 꿋꿋하게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함으로써, 주님의 크심과 좋으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은총 속에서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행하던 일 중의 하나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 누구의 심부름으로 자기에게 왔을 때, 그 심부름꾼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보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즉 친구가 보낸 사람을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은 보낸 그 친구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웃어른이 보낸 사람을 존경으로 영접하는 것은 바로 그 어른께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과 생활 방식은 하느님의 진리를 전달하고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유대 스승들은 가르치기를 "현자를 대접하는 자는 자기의 수확에서 난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박식한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하느님께 인사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비단 예언자, 의인,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예언자이며, 의를 행하는 자들이고, 성직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대접할 때, 그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는 탁월한 하느님의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목숨 바쳐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의인을 필요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뒷받침해 주는 평범한 봉사에 대해서 그들의 업적과 똑같은 상급으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마찬 가지이지만,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되어 있다. 인간 사회는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며, 이러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며, 나의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충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웃을 통하여 이웃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웃이 보잘 것 없는 사람 같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겠다.
김종근 신부님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분과 통화를 했다.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대접을 해야 할 처지여서 음식점을 내가 정했다. 뭘 드시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신부님 좋아하시는 걸로 아무거나 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그분에게 음식 신세를 많이 졌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는 집을 잘도 찾아내어 내 입맛 수준을 높여놓았다. 그래서 시원한 대구탕을 비롯하여 산나물 비빔밥·아구찜·옛날식 비지찌개 등을 먹으러 식사자리를 여러 번 함께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분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둘이 모두 보신탕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10년 이상 알고 지냈고, 우스갯소리, 섭섭한 소리도 주고받을 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대접받기에만 익숙한 나의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사랑에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주고자 하는 속성이 반드시 있을진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나는 입만 벌리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사랑’ 한번 여태껏 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 나는 바리사이 같은 신부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승일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부활하신 당신의 평화를 주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시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선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평화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얻게 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말씀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아들과 아버지가 맞서고, 또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되는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칼은 전쟁이나 분열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전쟁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거짓 즉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의 세력과 싸워 투쟁해서 얻게 되는 그런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빌어주는 너희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평화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사람,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뻐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화의 큰 적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는 삶을 살려 하기 보다는 우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순전히 인간적인 도움이나 잔재주에만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옹고집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마음을 확 풀고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의 품안에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리고 무수한 독신 남녀들(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 외에 어떠한 사랑도 맛보려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그 분을 사랑한 나머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남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는 가족들과도 불화를 맛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칼”을 맞게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로인해서 맛보게 되는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진정으로 평화로우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오십시오. 평화의 주님에게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빨리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평화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진호 신부님
얼마 전에 불량만두 사건으로 온 나라가 소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량만두냐? 우량만두냐? 하는 판단근거는 만두 속입니다. 속재료가 우량하면 그 만두는 우량만두이고, 속재료가 불량하면 그 만두는 불량 만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겉모양이 화려하고 그럴듯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만두는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마침내 법적인 처벌과 제재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량인격자냐? 불량인격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따라 결정됩니다. 속이 바르고 참되면 우량인격자가 되는 것이고, 속이 거짓과 위선이면 불량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모나 외적 조건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량인격자가 되려면, 우량한 속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을 우량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불량하면 그 행위는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리라.” 따라서 우리가 일체의 인간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정신이 없는 제물은 형식에 불과하고,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모든 것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다릅니다. 신앙생활도 달라야 합니다. “ 나는 칼을 주러 왔다 ”
하느님처럼 살고 싶으면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언자처럼 살고 싶으면 예언자적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선인처럼 살고 싶으면 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도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불량만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속”입니다. “소~~~ 옥!!”
속이 튼튼하면 몸은 저절로 튼튼해집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 아멘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로렌 헨리 뒤킨 저)란 글을 읽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따뜻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야 정상인데,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봐야 정상인데, 와 닿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교회로부터 크나큰 상처가 입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몰라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의 원인 발생은 교회가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이상은 매우 높지만 현실은 교회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해하고 부인하며 배반하는 제자들, 당신께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을 때 잠을 자고, 붙잡혀 가실 때 도망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의 때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란 말을 자주 씁니다. 돌아보니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도 집요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지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겨워질수록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십자가 위에서 계신 예수님,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르면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끝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십자가가 무거워질수록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와 나란히 서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의 칼
장재봉 신부님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제물을 받지도 않고 분향도 거절하시며 그들의 팔 벌린 기도를 듣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시니까요. 하느님께 혼쭐나게 야단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우리에게 이르신 당부는 얼마나 훈훈하고 따뜻하신지요?
많은 말씀 중에 특별히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까지도 상을 주실 것이라 하신 걸보면서, 정말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 일은 쉽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말씀이 좀 걸립니다.
묵상
주님께서 주신 칼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칼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어디에?
무엇에?
쓰고 계신지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예리한 칼입니다.
그 말씀의 칼은
자신의 혈연에만 연연한 마음을 잘라내게 합니다.
자기 가족만 위해서
자기 자식만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마음을 잘라내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 이기심, 자존심,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심을 잘라내는 일에도 사용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곧잘 그 칼의 용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습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
말씀을 들먹이며 판단하는 일
남의 티를 잘라주는 일,
남의 잘못을 후벼주는 일,
날카로운 칼 날 같은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뽀족하게 날 선 눈길로 상대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곤 하니까요.
‘무엇하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는 질책을 들을 일이 아니겠는지요? ‘분향 연기도 역겹다’고 역정을 들을 일이 아닌지요?
오늘 우리 모두가 말씀의 칼날을 자신 안에 자신의 행위에만 들이대는 축복을 얻기 바랍니다. 말씀의 칼로 내 잘못된 심사와 생각과 행위를 잘라내는 고통의 하루이기를 원합니다. 해서 우리가 모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걷는 이가 되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산간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간지방에만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설었지요. 어느 날, 이 임금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아주 멋진 새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다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 우아해 보였고 심지어 고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새는 흔한 바다갈매기였지만 산간지방에서만 살았던 그에게는 처음 보는 새였던 것이지요. 이 임금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 새는 진귀한 새가 분명하다. 저 새를 우리의 조상신으로 모셔야겠다.”
그는 그 새를 잡아서 자기 조상의 사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소와 양, 돼지를 잡아서 성대한 잔치를 벌였지요. 잔치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악사들도 초대되어 축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새는 음식에 전혀 입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슬프고 씁쓸한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다에 살던 새가 육지에 사는 인간의 음식과 음악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하겠지요. 하지만 임금은 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역시 진귀한 새의 근엄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 그리고 열흘이 지나도록 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임금은 더욱 좋은 음식과 술을 새에게 바쳤지요. 그러나 열하루 째가 되던 날, 새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한탄하며 말했지요.
“고귀한 새여, 제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모셨건만 왜 저를 거부하셨습니까?”
바로 그때 그 옆을 지나가던 현자가 혀를 차며 말합니다.
“쯧쯧, 왕이 아닌 새로 대접했다면 그 새가 굶어죽었겠소? 그 배고픈 새에게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더구나 인간들이나 듣는 궁중 음악까지…….”
그렇지요. 만약 그 임금이 그 새를 새 자체로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새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었다면 결코 굶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신이라는 엉뚱한 모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를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 역시 커다란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들도 실천하라고 십자가를 직접 지셨습니다. 즉,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데, 단순히 보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보기만 하기 때문에 주님께 커다란 실망을 간직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보기만 하는 십자가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들은 나에게 주어지는 그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하나의 액세서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는 짊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백남국 신부님
◆같은 교구에서 사목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 신부가 있는데 사회 갈등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동료 사제들과도 맞서게 되고 신자들과도 맞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저같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동안은 제가 군종으로, 교포사목으로 교구 밖에 있어서 함께 지낼 일이 없어 괜찮았는데 이제 가까운 데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동생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확신도 있고 또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자기 주장이 강해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참 피곤할 텐데 그냥 조용히 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피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그만큼 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며 편안한 삶이 아니라 세상과 부딪치며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 면에서 늘 맞서기를 포기하고 편한 길만을 찾는 저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부딪치고 맞설 수 있는 자가 살아 있는 것이고 활기를 지닌 삶이겠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주님의 제자답게 맞설 수 있는 열정을 지닌 동생의 삶이 훨씬 더 주님의 제자다운 것 같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왜 우리를 맞서게 하였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이기양 신부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우리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㰡“(마태10,34-36)
처음으로 성당에 나온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놀라서 금방 돌아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에 그리 마음 편한 말씀이 아니지요. 오랜 신앙 생활을 해 왔던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대하면 어떤 의도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㰡평화㰡‘이고 집안 식구들과의 㰡화목㰡‘인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으며 집안 식구들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오늘 복음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미카 예언자의 예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풍전등화의 신세였던 남 유다 역시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에 망하게 되는데 이때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미카7,5-6)
모든 관계에 정의와 질서가 다 무너지고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이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간에, 또 부모 자식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신과 분열, 악이 끼어드는 이러한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미카 예언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악은 끝까지 승리하지 않으며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아의 승리를 미카 예언서는 예고하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악이 감히 끼어들 것 같지 않은 인간 관계에도 악이 끼어드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시지요.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온다는 말이 있듯이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 승리하는 것은 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듯이 거기에서도 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안에 부활의 희망과 승리의 시점이 내재해 있다는 말씀이지요. 미카 예언자는 말합니다.
"내 원수야,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주님께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신다.“(미카7,8)
오늘 복음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부부 간이나 형제지간일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의 직업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지요.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싸워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칼을 주러 왔다는 것은 그러한 불의한 것에 대항하여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싸워서라도 도둑질을 못하게 하고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㰡칼을 주러㰡‘왔으며 㰡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㰡‘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어서 도저히 악이 끼어 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의 말씀같이 들려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지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이라는 승리가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작은 이익 때문에 연연해 하거나 불의와 거짓을 알면서도 작은 유혹 앞에 묵인하고 덮어버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타협하지 말고, 문제는 지혜롭게 밝혀서 정의롭게 해결하는 용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또 해야될 일과 해서 안 되는 일을 놓고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㰡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㰡‘하며 덮어둔 채로 슬금슬금 살아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싸워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야 참 평화가 올 수 있지요. 정의와 하느님의 일이 승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어려워도 타협하지 말고 꿋꿋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석희 신부님
계속되는 많은 비와 높은 습도로 우리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뭄 때문에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청한 간절함을 기억한다면 감수 할 수 있는 시간이며, 자연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순응하는 지혜로움을 갖게 만들기도합니다.
오늘의 복음에따라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묵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한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썪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 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려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칼을 주러 오신 예수
강영구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그대에게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결단(決斷)과 선택(選擇)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복(福)과 화(禍),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하느님 앞에 중립지대(中立地帶)나 회색지대(灰色地帶)는 없습니다.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저주를 받겠느냐?”(신명11,26-28)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어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6,24)
우리 삶은 언제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정쩡한 양다리 걸침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
하느님과 악마, 성령과 악령,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하늘의 소리(天命)와 욕망의 소리 등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단과 선택에 따라서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시퍼렇게 날 선 예리한 칼(劍)을 주십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칼로 일도양단(一刀兩斷)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당신은 오늘도 끊임없이 결단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劍)을 사용하십시오.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평화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 하느님 말씀의 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하면 평화와 사랑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당연히 평화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평안해지고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와 사랑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을 통한 평화의 복이란 복음의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갈등과 아픔은 무시하고 복음의 결과만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이는 농부가 봄에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씨를 뿌렸던 과정은 무시하고 오직 추수 때 알곡의 기쁨만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
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지 말라
사람들의 세상에사에는 평화와 분쟁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쟁보다는 평화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평화가 아닌 분쟁이란 말입니까? 이 말씀에 앞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적대하게 만든 사탄의 권세를 무찌르고 인간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둠의 세력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는 우리 인간에게 참 평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참 평화는 전쟁에서 이겨야만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지난날 정부에서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조폭집단과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만을 제안한다면 과연 이 땅에 폭력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의 대화와 타협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렇지 않는 악질적 속성을 지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될 그런 불가피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
오늘복음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땅에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의 내용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칼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말씀합니다.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 또한 히브리서 4,12에도 말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고 잘라내는 수술하는 살아있는 수술 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들이 의롭게 소생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즉 미사나 기도시간에 우리의 심령은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조성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에 나와서 좋은 말씀 한 구절을 듣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거나, 일단 교회 문밖을 나가고 가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칼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재창조의 원리
제철공장에 가면 용광로에서 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불물 위에 다시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그 불물은 엄청난 강도를 지닌 강철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찌들고 병든 인간의 이기심과 야욕을 녹여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하느님의 피조물로 재창조해 내는 불구덩이(용광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비유하면, 하느님은 마치 숙련된 조각가가 크고 단단한 바위덩어리를 수십만번 쪼개고 다듬어 자기가 원하는 조작작품으로 만들어 내듯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쪼개고 다듬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쪼개고 다듬는 책무에 소홀합니다. 특히 신앙에 관련한 믿음, 마음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하고 쉽고 편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당장에 하늘이 갈라지고 복이 쏟아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얻어맞을 때는 얻어맞고 회개할 때는 회개하는 것이 복 받을 자가 되면 복을 받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형상이 되기까지는 수천, 수만 번을 끊임없이 말씀의 칼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2장 34-35절에는 시므온이 갓난 예수를 품에 안고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 때문에 넘어질 자들이 누구이고, 일으킬 자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즉 여기에서 넘어질 자, 즉 패할 자들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으킬 자, 즉 흥하는 자들이란 비록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죄의 드러남을 받고 회개한 겸손한 마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질 권리이고 다른 하나는 버릴 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지 좀처럼 버릴 줄을 모릅니다. 내 뜻과 고집만 주장하지 하느님의 큰 뜻을 받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말씀을 깨닫는 자마다 예수님의 말씀의 칼 앞에 겸손히 엎드려 과연 내 마음가운데 하느님의 큰 뜻을 반역하고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끄집어 내어 회개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