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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7월 10일 (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7.10|조회수924 목록 댓글 0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Coming persecutions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보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며,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하시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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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와 잘못을 고백하면 분노를 푸시고 그들을 사랑해 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며, 박해를 받을 때 무엇을 말할지 아버지의 영이 일러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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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주님께서 드러내실 자비를 전해 준다. 그분의 분노는 풀리셨으며,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시고 사랑해 주실 것이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때에는 주님에게서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그들에 대한 박해를 각오하라고 이르신다. 끌려갈 때 그들은 무엇을 말할까 걱정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영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받을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한 결과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이요, 모든 이로부터의 미움, 그리고 형제들과 부모 자식 사이에서의 분열과 죽음임을 소개하시며, 그런 상황 안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말라고 이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에 익숙한 시대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이 평화롭기를, 가족이 서로 화합하고 안정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그와는 달리 혼란과 갈등을 체험할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상황을 마주한 이들이 신앙의 무익함을 외치며 교회를 떠나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반드시 장애물을 만납니다. 주일을 지키느라 때로는 가족들, 친구들과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혼자만 잘났냐는 질투를 사기도 하며, 누군가를 배려하느라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듯합니다. ‘슬퍼하지 마라. 복음 때문에 네 안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징들이니. 용기를 내어라. 절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니.’ 복음 때문에 어떠한 혼란과 다툼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누린다고 생각하는 안정과 평화가 그들이 받을 보상의 끝이기 때문입니다.(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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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뱀에 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뱀의 유혹에서 시작됩니다. 간교한 뱀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있는 욕망을 들추어내고 그들을 죄짓게 만듭니다. 비둘기는 창세기 8장의 노아의 홍수에 등장합니다. 비가 그치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비둘기는 마른 가지를 물고 옵니다. 이레가 지난 후 다시 날려 보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땅에서 물이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슬기롭다는 것은 분별력이 있고 치밀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뱀이 슬기롭다고 말씀하시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오늘 독서의 표현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순박하다는 것은 성실하고 단순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길을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것으로 들립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

분별하고 식별하는 것, 그리고 성실하고 단순한 것은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필요한 자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세상의 뜻인지, 무엇이 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불의한 것인지 분별하고 그 길을 묵묵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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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성장하지만, 지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인내하며 기다릴 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겪게 될 시련을 예고하십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리 떼 속의 양들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지식의 논리를 넘어 전혀 다른 결과를 이끌어 내는 믿음입니다. 이리 떼 속에서 양들이 고통을 겪게 될 텐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위로는 인간의 지식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뱀은 사탄의 표상처럼 이해되어 왔고, 비둘기는 성령의 표지로 자주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의회에 끌려가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언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시며, 뱀이 지닌 슬기로운 지식의 언어로 그들의 헛된 지식의 허상을 깨닫게 해 줄 지혜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제자들이 쌓은 지식이 아니라,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아버지의 영, 곧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성령의 거룩한 언어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누구나 살면서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답을 찾다 보면 또 다른 덫에 걸려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의 언어는 기도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성령의 지혜입니다. 참된 지혜는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라는 호세아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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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듯한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부모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외국어도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유학이나 이민을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마음일까요?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환경이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앞으로 그들에게 닥쳐올 고난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그 고난은 군대에서나 외국에서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고난이 아닙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회당에서 채찍질당하고, 총독들 앞에서 증언해야 할 뿐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 그리고 형제간에도 서로 싸우고 투쟁해야 하는 그런 장벽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부딪치신 장벽이고, 현재도 교회가 세상의 힘과 맞서고 있는 장벽입니다. 교회가 맡은 임무와 사명이 크면 클수록 이 장벽 또한 그만큼 높고 험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장벽은 세상이 던져 주는 달콤하고도 손쉬운 유혹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택하신 십자가의 길, 가난과 단순함과 겸손, 그리고 용기와 투명성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조롱과 모욕을 견뎌 내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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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발길이 닿아 베네딕토회에 속한 수도원에 들른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할 때 특히 이러한 수도원 기행의 기회가 많았는데, 지금도 그 시절에 입은 큰 복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관, 거룩한 전례, 고요한 성당, 차분하고 여유 있게 맞아 주셨던 문지기 수사님들, 그리고 산책과 기도의 단순한 일과 속에 지내면서 누렸던 몸과 마음의 진정한 휴식이 기억납니다. 수도원의 엄숙한 전례에 참여하고 도서관이나 일터, 정원에 머물며 고풍스러운 수도원에서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생각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수도원에 머물 때마다 비록 이국이라 할지라도 낯설음보다는 신앙의 고향에 온 것 같았습니다. 가톨릭 정신의 원류에 도달한 것 같은 감회를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느끼는 것은 괜한 감상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베네딕토 성인은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의 규범을 정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의 정신적 기풍을 든든히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회의 영역을 넘어 서구 사회의 정신문화의 근간을 세운 이로서 유럽 사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분이기도 합니다. 유럽이 고대 로마 사회에서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로 형성되는 변혁기의 한복판이던 6세기 무렵, 성인은 고대의 훌륭한 정신적 가치가 그리스도 신앙과 튼튼하게 결합될 수 있는 삶의 방식과 모범을 교회와 사회에 선사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을 생각하며 우리 교회의 오랜 과제인 신앙의 문화적 토착화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됩니다. 참된 토착화는 성인의 모범처럼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가치가 그 사회의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형성되도록 하는 데서 완성된다고 하겠습니다. 수도원을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집’이라고 한 성인의 정신을 배우며, 한국 교회가 이 나라에 그저 ‘덧붙여진’ 존재가 아니라 복음 정신이 우리 사회와 문화의 근본정신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찰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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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말 놀랍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이어서 더욱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사람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도 그렇거니와 그러한 말씀을 듣고도 파견을 따르는 제자들이 참으로 어리석게 보입니다. 고통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각오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탈리아의 명장인 가리발디 장군은 1849년 로마가 포위되었을 때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고 합니다. “장병들이여! 우세한 적에 대항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쓸모없었다.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배고픔과 목마름, 고통과 죽음뿐이다. 그러나 나는 조국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호소한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에게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애국심 하나로 모든 고역을 감수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에게 고통스러운 파견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믿으신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파견에 따른 두려움이 컸겠지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통스러운 파견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고통은 외면한 채 마음의 평안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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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동창 신부가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했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선교 생활의 어려움과 보람을 들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페루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 페루에 갔을 때에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온몸이 가려워서 한동안 잠도 못 잘 정도였답니다.

피부병의 원인은 벼룩처럼 생긴 벌레 때문이랍니다. 그 벌레는 개에 기생하는데, 아이들이 개와 함께 놀 때 아이들에게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는 아이들을 보면 반갑게 껴안곤 하였는데, 이때에 아이들에게 붙어 있던 벌레가 그 신부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벌레는 현지에 사는 사람들의 옷 속에 살아도 그들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 속에 벌레를 쫓는 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창 신부도 현지 주민이 먹는 음식에 적응하자 더 이상 벌레가 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러 또다시 떠나는 동창 신부를 보면서 그가 이리 떼가 아닌 벼룩 떼 가운데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익히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제자들을 박해와 어려움이 예상되는 곳으로도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의지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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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몸소 사도들을 뽑으시고, 함께하시며, 당신의 일터로 보내십니다. 그 일터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따를 수 있고, 그 길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는 온갖 유혹이 손길을 내미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언제나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주님께서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걱정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사도들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지 못할까 봐 하시는 걱정입니다. 그래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 믿고 의탁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세상으로 파견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이나 두려움이나 고통도 다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법정이나 형장이나 이방인들 앞에서 우리는 기쁘고 떳떳하게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충실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이신 성령께서 언제나 그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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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연일 살기 힘든 세상을 전해 줍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마음 졸이고 안달한다고 내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미래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저만치 내리는 비를 미리 뛰어가서 맞을 이유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의식주에 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걱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걱정의 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폭이 넓어진 만큼 걱정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러기에 능력 밖의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근심거리를 만나기도 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께 철저하게 맡기며 살라는 뜻입니다. 미리 대비한다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세상도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느껴야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걱정도 습관입니다. 습관이 굳어지면 작은 걱정이 어느새 큰 걱정으로 바뀝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처지로 몰렸기에 자유로웠습니다. 지금은 박해 시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순교의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맡기는 생활의 훈련입니다. 작은 걱정부터 맡기는 실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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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뱀은 지혜로운 동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지혜롭다 못해 간교한 동물로 표현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비둘기는 양순함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간곡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그런데 걱정입니다. 비둘기처럼 멍청하고 뱀처럼 교활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슬기롭지 못하면 몸이 고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미련하여 자기 몸이 고단한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안타깝게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고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혐오’입니다. 누군가를 또 어떤 집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물론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이 폭력적인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어떤 아이가 친구와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극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강도가 더 심할 때, ‘극혐’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더군요. 아마 ‘혐오’라는 말로도 부족했나 봅니다.

어린아이도 쓸 정도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대한 타협과 조율 없이 무조건 싫다면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별것 없습니다. 그냥 자기감정 표현으로 ‘극혐’이라고 말 한마디 하고는, 혐오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혐오의 생각이 ‘묻지마’ 공격으로 나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집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감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함께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향해서도 ‘극혐’이라고 외치지 않을까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제자들에게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런 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더 큰 은총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디서 기도하든지, 심지어 자신들이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믿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는 지켜 주신다고 하시지요.

분명히 박해의 고통은 죽음까지도 나아갈 수 있는 커다란 크기입니다. 그런 박해의 고통을 주셨다고 하느님을 혐오하면 과연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안에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 시대처럼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혹이 바로 우리의 박해자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혐오하고 반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이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그로 온전히 살게끔 하는 것이다(윌리엄 폴 영).


뒷모습

귀가 예쁘거든 귀만 보여 주시오

눈썹이 곱거든 눈썹만 보여 주시오

입술이 탐스럽거든 입술만 보여 주시오


하다못해 담배가치 끼운

손가락이 멋지다면

그거라도 보여 주시오


보여줄 것이 정히나 없거든

보여줄 것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시도

기다린 뒤에도 보여줄 것이 없거든

뒷모습을 보여 주시오


조심조심 사라져가는 그대 뒷모습을

보여주시오


나태주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의 화자에게는 어떤 모습도 다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습으로 다가오셨고, 우리 역시 이 모습으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각자 자신의 종말을 잘 준비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선교 일선에 나선 복음 선포자들의 하루하루는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나날이 아니었습니다. 적대자들로부터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특히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 동족들로부터 받았던 협박과 모욕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천벌 받을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이런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을 향해 건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0장 22절)


더불어 심한 협박이나 박해 앞에 너무 정면 대응하지 말고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구체적인 행동 강령까지 내려주셨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오 복음 10장 23절)


사실 이스라엘 국토의 면적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면적이 작은 나라에 속하는데, 우리보다 훨씬 소국입니다. 전라남북도 합한 정도입니다. 이 정도 면적이라면 도보로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겠습니다. 아주 천천히 돌아도 6개월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면 6개월 안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종말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복음서 안에는 유다 묵시문학의 흔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성행했던 묵시 문학은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시도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다가오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유다 묵시문학과 종말 신앙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거짓 목자들이 주로 애용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대희년같이 숫자상으로 ‘있어 보이는’ 순간만 되면 종말 임박 신앙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으로 솟아올랐습니다. 아마도 2050년 2100년이 되면 무수한 사이비 교주들이 또 다시 거짓 종말 임박 신앙으로 선량한 백성들을 현혹시킬 것입니다.


종말 임박 신앙이 위험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상적 삶을 깡그리 무시하고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에 세상이 끝난다는 데 직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때려치우고 임박한 종말을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한 인간 존재, 한 가정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악령들이 종말 임박 신앙을 가르치는 사이비 교주들인 것입니다.


종말 신앙 앞에서 우리가 취한 태도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가 끝나면 그 하루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느님께서 또 다시 은총의 선물로 이 하루를 주셨구나!’ 감사하며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지루해보이고 남루해보이는 우리네 일상사지만 그 안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으며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엮어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이나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각자 자신의 종말이 개인의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가 될 때 세상에서 뱀의 지혜를 발휘하게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양이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이리입니다. 이리들이 대다수인 세상에서 양들이 살아남으려면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여기서 뱀은 죄를 짓게 만드는 본성이나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기와 지혜를 갖추어 위험한 이리들의 덫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뱀처럼 슬기로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처럼 순박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일 수 있어야 사람들 앞에서 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비둘기이면 하느님 앞에서 뱀이 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 순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람들 앞에서 지혜롭습니다.


로마의 건국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 ‘퍼스트 킹’(2020)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로마는 늑대로부터 키워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형 로물루스는 신을 공경하는 인물이었고 동생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육체적으로는 약했고 동생은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는 매우 우애가 깊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내던질 정도였습니다.

기원전 753년, 두 형제는 그 지역의 가장 강력한 민족 알바롱가 인들에게 사로잡힙니다. 알바롱가 인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이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지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동생이 누군가와 싸움을 해야 했을 때 형은 자진해서 동생의 상대가 됩니다. 일부러 맞아주다가 죽은 척을 합니다. 죽은 척을 하다 일어난 로물루스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사제인 신녀가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를 인질로 잡고 나머지 포로들과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형 로물루스는 심한 상처를 입어 죽음 직전까지 다다릅니다. 신녀를 건드려서 자신들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커지자 동생 레무스는 목숨을 걸고 형을 지킵니다. 그 와중에 신처럼 강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된 레무스는 그 무리의 왕이 됩니다.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키워갑니다.

그러는 중에 신녀가 예언을 합니다. 두 형제가 한 형제를 죽이고 그 피의 힘으로 영원한 도시 로마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당연히 동생 덕에 간신히 생명만 부지하는 형이 동생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동생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런 예언을 한 신녀를 처형합니다. 자신이 신이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해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처형합니다.

반면 신녀를 처형했다는 말을 들은 형은 매우 마음 아파하며 신녀가 들고 다니는 불씨를 찾아 다시 살려냅니다. 백성은 몸은 약하지만 자비로운 로물루스의 편에 서고 오직 힘에 굴복한 이들만 레무스의 편에 섭니다. 형은 동생이 알바롱가 인들에게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생을 구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한다며 형에게 자신을 왕으로 섬기라며 덤비고 형은 쓰러진 척하다가 마지막에 동생을 찌릅니다. 이렇게 로마는 강력한 공포정치를 하려던 레무스가 아니라 신을 공경하던 형 로물루스에 의해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뱀처럼 슬기로우면 사람들에게 비둘기처럼 당합니다. 반면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가 되면 뱀과 같은 지혜를 주님께서 주십니다.


사람은 비둘기와 같은 마음과 뱀과 같은 마음을 동시에 지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서 어떠한 성격이 드러나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루카 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1코린 1,19)


또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1코린 3,18-19)


예수님의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에 집중합시다. 주님께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될 때라야 이 세상에서 진짜 뱀처럼 슬기롭게 됩니다. 자신이 슬기롭다고 믿는 사람은 그 꾀에 자신이 넘어갑니다. 자신을 믿지 맙시다. 이것이 뱀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읍시다. 이것이 비둘기의 단순함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경찰관이나 선생님, 의사가 젊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화제에 대해 잘 모른다. 허리를 숙이면 소리가 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전자기기들의 작동 방법을 잘 모르게 된다. 몸이 뻣뻣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오후에 낮잠을 자야 한다. 몸을 굽힐 때 신음소리가 나온다. 최신 음악 그룹의 이름을 모른다. 관절염이나 병에 대해 많이 얘기한다. 시끄러운 술집을 싫어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중년이라고 합니다. 제게도 해당 되는 점이 있는 걸 보니 저도 중년인가 봅니다.


공자는 40세에 세상의 일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60세에 마음이 유순해져서 무엇을 듣더라도 거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자가 생각하는 중년이라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일에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기보다는 나의 욕심과 욕망을 따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감언이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무엇을 더 채우려는 생각에서는 중년이지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면에서는 중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중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생각의 중년, 마음의 중년은 끊임없는 성찰과 수련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의 ‘중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간다고 합니다.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와 분별이 충만하여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복약 안내서’를 써주는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의사는 색다른 복약 안내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방된 약이 어떻게 몸을 바꾸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몸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스스로 몸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복약 안내서를 읽고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변화된 몸을 스스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는 그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는 한의사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제의 강론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안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본인이 변해야 남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표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머리에 좋은 약을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연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닫는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기쁘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슬프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기운차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움츠린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위로받는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고통받는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산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죽는다




<박해 때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금요일>(2020. 7. 10. 금)(마태 10,16-2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일은 싸우러 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러 가는 일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러 가는 일이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러 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이리 떼처럼 변하면 안 되고, 양의 본성과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박해자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지난 이천 여 년의 교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그 방식이 너무 힘들다고 해서 세속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면, 즉 세속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그 일은 실패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인내하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일하면, 그 일은 언젠가는 성공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이리 떼가 양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성령의 지혜와 예수님의 온유로써 일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17절 이하의 말씀이 이 질문의 답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7-20).”


박해를 받을 때, 그 박해를 오히려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뱀처럼 슬기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가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박해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시련은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때일수록 진짜 신앙인이 누구인지 잘 드러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박해를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 걱정에는 “내가 과연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딜 수 있을까?” 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도 포함됩니다. 어쩌면 “나는 박해를 겪어도 끄떡없다.” 라고 큰소리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도와달라고 기도하겠지만, 큰소리치는 사람은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쉽게 꺾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시자(마태 26,31), 제자들은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5).”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라는 말씀은, 박해 때에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요한 15,18-23).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믿음과 기도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1-23).”


가족의 박해를 받는 상황과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은 박해가 최고로 심해졌을 때의 상황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정말로 견디기 힘든 최악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은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신앙 여정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은, 무턱대고 목숨을 버리지 말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권고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는 짧고, 신앙을 지킨 이들이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하다.”, 또는 “잠깐 동안은 박해자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겠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예수님 쪽에 있다.”로 해석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해미 성지에 가게 되면 ‘여숫골’이라는 순교자 생매장 터가 있습니다. 그곳이 여숫골인 이유는 해미천 변에서 순교자들이 산 채로 매장을 당하면서도 하나같이 ‘예수-마리아’를 외쳤는데 당시 믿지 않는 백성들이 그 신앙의 절규를 들으면서도 그 연유를 모르고 순교자들이 분명 여수, 곧 여우에게 홀려서 ‘여수 머리’를 외치며 죽어갔다고 생각을 하고 그 곳의 이름을 여숫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또 예수 마리아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봅니다. 혹여나 우리는 다른 이들 앞에서 그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어색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반성해 봅니다.


우리가 진정 천주교인이라고 한다면 늘 기도의 시작과 끝에 바치는 성호경에서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완성되길 바라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분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이름으로 인해 그분의 나라에 함께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 순교자들을 배출한 신앙의 터전, 교우촌 ⓺ 경계인이 된 신앙 선조들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우상을 숭배하는 죗값을 치루어야 하니 조만간 멸망하리라는 예상을 전제로 깔고서, 백성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우상숭배가 만연한 사회 현실 안에서 회개를 결심한 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런 예언으로 지혜와 분별력을 발휘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이 예언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지혜로운 성찰과 분별 있는 사회적 선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을 백성들이 사는 현장 곳곳에로 파견하시면서, 이 지혜로운 성찰과 분별 있는 사회적 선택에 대해서 이런 말씀으로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이 말씀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러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사람의 일에 대한 의견의 은사와 상황과 일에 대한 지식의 은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배려해 주신 염려와 당부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으레 겪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구나 평범한 세상살이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활동으로서 복음을 선포하다 보면, 다양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 사람들과 수도 없이 많은 일로 엮이게 되다 보면 지혜와 분별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를 종종 만납니다. 슬기롭고 순박하게 되기가 자기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도 사람이든 일이든, 복음선포를 주관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염두에 두어야하지요. 이 성령께서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는 의견의 은사와 일과 관련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의 은사를 주셔서 슬기롭고도 순박하게, 지혜롭고도 분별력있게 처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도 시복시성이 되신 순교자와 무명 순교자, 그리고 살아남아서 신앙을 전해 준 교우촌의 일반 교우들로만 단순하게 구분될 수 없는, 이른바 경계선 상에서 살아간 인물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후대의 신앙인들이 존경을 보내야 하는 삶을 살아가신 분들인데 기존의 종교적이고 제도적인 잣대로는 쉽게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한 사례가 있는 것입니다. 2011년에 서울대교구 시복시성 준비위원회가 개최했던 심포지엄은 바로 이 분들의 생애와 신앙을 지혜와 분별로 식별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 주인공들은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1975~1801), 초대 조선 대목구장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안중근 토마스(1879~1910), 그리고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자가 된 성직자와 평신도들입니다. 이 식별 작업은 그분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판단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후대의 교회와 신앙인들로 하여금 현재와 미래에 과연 어떠한 가치관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사회적 선택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분들의 생애와 신앙이 시복시성의 논란거리가 되는 그 자체가 가치에 대한 판단의 어려움을 말해주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오늘날 교우촌이라는 역사 현상을 해석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재해석하고 계승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자세를 스스로 평가하고 심판하는 일이기도 하다. 반역의 혐의를 쓰고 있는 황사영은 잘못된 정책을 펴고 있는 조정의 민족주의적 입장과 대립하는 ‘대박 요청’과 제국주의적 외세를 끌여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으나 잘못된 쇄국정책으로 조선 조정이 일으킨 천주교 박해의 부당함을 교황청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알린 공로가 있고, 병사한 초대 교구장 브리귀에르 주교는 북경 교구의 방해와 조선 신자들의 도움 없이 입국을 시도하다가 병사했으나 조선 교회에 교구 설정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공로가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함으로써 제5계명을 어겼다는 혐의가 있으나 민족 사회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에 천주교가 존중하는 가치들 특히 하느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일치와 정의로운 저항이라는 가치를 드높였다는 공로가 있는가 하면, 6 25 전쟁 전후해서 공산세력의 박해로 행방불명된 신자들은 생의 최후가 순교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으나 그분들 역시 신앙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조정으로부터의 박해에 희생된 치명자들과 다를 바 없으므로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 현양대상으로 올려야 한다는 요청과 함께 민족 통일을 앞두고 공산무신론 세력과 화해와 일치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고려사항이 있습니다.


결과는 더 두고 보아야 할 일이겠으나 관건은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의 숙고된 성찰에 의한 여론이 결정해 줄 것입니다. 이와는 별도로, 그분들의 생애와 사회적 선택이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고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우리의 묵상거리가 됩니다. 특히 황사영은 아무리 우리 정부라 하더라도 분명히 잘못된 정책으로 무고한 인명을 빼앗는 경우에 마땅한 항의를 했다는 점, 또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계제도 설정에 대한 공로와 함께 치명 이상의 고통과 수고를 무릅쓰고 희생되었다는 점, 그리고 안중근은 이미 민족 사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살인 혐의를 정당방위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족적 위기에 훌륭한 사표로서 추앙되고 있다는 점, 아울러 한국전쟁 중 죽어간 행방불명자들은 무신론을 신봉하며 가톨릭교회를 적대시하던 공산세력의 죄악으로 희생된 이들이고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서도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사례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가족으로 살아야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전공은 인간구원이며 그 누구도 반박 못할 완벽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초능력자 분이셨다고 성경을 보며 늘 놀라 감탄합니다.

사람들을 양과 이리로 보셨고 슬기롭고 순박하게 살라고 하신 예수님!


하느님 가족이 되면 하느님말씀 늘 듣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주십니다.

이렇게 대단한 예수님을 믿게 된 것만 해도 태어난 보람 있다 봅니다.

먹고 싸고 생각하고 말하는 동물인간인한 모두 같은 존재 확실합니다.


‘나’라는 인간주체는 인간구원 전문가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야 당당연!

영원히 살 건데 하느님가족으로 살아야지 그 외에 딴 길 망한 겁니다.




선교사의 파견과 하느님의 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양성한 제자들은 그 파견지를 하느님 나라가 설 장소로 변하게 할 것이다. 율법적 전통은 많은 사람을 잃었다. 이런 세상을 두고만 볼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새 계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전통이 지닌 한계를 넘으려고 사도들을 파견하신다. 사도들은 양들이며 양의 본질을 살아야 한다. 양이 이리 떼 가운데 간다 해도 언제나 양들이어야 한다. 양이 이리를 만날 때, 이리와 함께 물어 뜯고 싸우면 안 된다. 사도들은 언제나 양이 되어 이리들 가운데 사랑으로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10,16)하고 이르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접목이 전투의 방법이 아닌 사랑의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 방법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선교사들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끊임없이 직면하며 사랑으로 대하며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 전통은 선교사들을 잡아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하고, 총독과 임금들 앞에서 중언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절정이 이를 때,가장 혹독한 십자가 이지만 승리를 가져온다. 이때가 선교의 절정이고 복음이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10,19-20).


박해의 시간이 지나고 순교의 역사가 생겨나면 역사는 새 계명의 승리였음을 증언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지닌 선교사의 태도는 언제나 사랑을 바탕한 접근이 복음을 접목시켰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드러날 때, 승리로 밝혀지고 있다. 고통은 잠시지만 승리는 영원하다는 진리를 만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10,2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분별을 촉구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예수님께서 사도들 파견에 앞서 솔직한 심경을 표현하십니다. 이리떼 속으로 가는 양이라니요, 얼마나 무서운 상황입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의회에 넘겨짐, 채찍질, 미움, 박해 등등 사도들 앞길에 지뢰처럼 묻혀 있을 난관과 어려움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십니다. 아무래도 복음 선포의 길이 장밋빛만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 주시지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성경에서는 뱀이 그다지 긍정적 이미지는 아닙니다만, 적어도 지력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 머리를 타인을 유혹하고 속이는 잔꾀로 쓸 때는 형벌 감이지만,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슬기로 작동한다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겠지요. 실제로 광야의 구리뱀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민수 21,9).

비둘기는 노아에게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어다 주어 세상에 물이 빠졌음을 알려준 새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께서는 제게 아가의 비둘기를 떠올려 주셨습니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아가 2,14)


아가에서 비둘기는 연인(주님)이 사랑하는 여인을 불러낼 때 부르는 애칭입니다. 비둘기라 불리운 그 여인은 불타는 사랑으로 연인(주님)을 갈망하다가, 또 사랑이 주는 두려움에 움츠리며 바위틈에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사랑의 두려움과 열정 사이에서 연인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이는 비둘기는 순수와 정결을 상징하지요.

복음 속 사도들에게 요구되는 뱀의 슬기와 비둘기의 순박함은, 첫째, 아버지의 영께 의탁하고 걱정하지 말 것(마태 10,19-20 참조), 둘째, 끝까지 견디어 구원을 받을 것(마태 10,22), 셋째, 박해하는 이에게 맞서거나 보복하지 말고 피할 것(마태 10,23 참조)입니다.

구원은 온전히 아버지의 일이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미움이나 분쟁에도 휘말리지 말고, 인내와 의탁으로 복음 선포의 소명을 수행하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제1독서는 호세아 예언서의 끝부분으로 본문 안에 내내 토해지던 격렬하고 뜨거운 사랑과 분노의 언어들이 질서를 찾으며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당신뿐이십니다"(호세 14,4).

주님 사랑에 등 돌리던 이스라엘이 긴 배반의 시간을 끝내고 주님 앞에 돌아와 뉘우치며 고백합니다. 그들은 먼저 "황소가 아니라 입술을 바치겠다"고, 형식이 아닌 마음으로 제사를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어 주님 대신 믿고 의지했던 "아시리아"가 자기들을 구원할 수 없음을 비로소 인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손으로 만든 것" 즉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하지요.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이에 주님은 기다리셨다는 듯, 성경을 읽는 이들도 놀랄 만큼 다정하고 따사로운 어조로 당장 사랑의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나리꽃, 아름다움, 올리브 나무, 레바논의 향기, 곡식 농사, 포도나무, 포도주, 방백나무, 열매... 주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축복의 단어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고 자애로운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

사랑의 배신과 진노, 경고와 징벌, 회개와 회복, 그리고 다시 사랑.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백성 사이에서 이 모든 현실들이 숨가쁘게 오가고 난 뒤, 주님께서 지혜와 분별을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사랑의 굴곡을 거친 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지혜란, 우리의 구원이 사람의 힘이나 우상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달렸음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요. 또 사랑의 대상을 정확히 분별해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순박함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벗님! 지혜와 분별 안에서, 슬기롭고 순박하게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섬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구원이시고 사랑이시며 전부이십니다. 아멘.




우리는 사랑의 화목 가운데 하느님의 계명을 지킨다면 참으로 복됩니다.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Nn. 50,1-51,3; 54,1-4: Funk 1,125-127. 129)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랑은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것입니까! 사랑의 완전성을 아무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지닐 능력을 베풀어 주신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랑 안에 거처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온갖 인간적 편애에서 벗어나 깨끗하여지고 참된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간청합시다. 아담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대는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완성에 이른 이들은 의인의 지위를 얻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타날 것입니다. 성서에 “내 백성아, 어서 너의 골방으로 들어가거라. 나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잠깐 숨어 있어라.”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리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화목 가운데 하느님의 계명을 지킨다면 참으로 복됩니다. 그때에 우리 잘못은 사랑을 통하여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복되다, 그 죄 사하여지고 그 허물 씻어진 이여, 주께서 탓을 아니 돌리시고,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이여, 복되도다.” 이 성서 말씀이 복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세세 대대 영광이 있으소서. 아멘.


우리가 우리 원수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한 일이 있다면 모든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합시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항과 분열을 조장시켜 온 이들은 우리의 공동 희망을 생각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고 우리가 이어받은 아름답고 올바른 화목을 깨기보다는 욕먹는 것을 더 원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마음을 굳게 다지기보다는 자기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관대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충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반항과 불화와 분열이 생긴 것이 나 때문이라면 나는 물러나 공동체가 원하는 데에 가서 공동체가 결정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양떼는 뽑히운 원로들과 함께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영광을 얻고 어느 곳에서 나 영접받을 것입니다. “땅이며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은 이렇게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심해야할 인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의 지침을 주신 주님께서 오늘은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을 말씀하시면서 주의도 주시고,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제자들은 양들이고 찾아가는 곳은 이리 떼가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하시고, 그러니 그들을 조심은 하되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걱정치는 말라시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도 하시는데 도대체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것은 어떤 것인지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은 의심을 하라는 뜻인가요?

보통 순박한 사람은 남을 잘 믿고 그래서 잘 속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도 순박한 사람은 잘 믿고 잘 속는 사람인데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더 순박하고 그래서 더 잘 속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순박하더라도 사람을 너무 잘 믿음으로써 쉽게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고, 그래서 조심하라는 말씀도 의심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언이란 달콤한 말이고 이설이란 이롭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약장수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듣기 좋은 말로 아주 그럴듯하게 꾀는 것과 같은 말인데 이런 말에 속지 말고, 이런 사람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점쟁이들이 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겁주는 말이나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이 아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속이는 말을 잘 믿고 그래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니까 감언이설이건 보이스피싱이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순박한 양을 잡아먹는 이리들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잘 믿고 잘 속는 분들에게 사람을 믿지 말라고 충고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 신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고 놀라는 분들이 있는데 저의 말은 많은 경우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경우는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조심해야 할 이리들이란 어떤 사람을 말함일까요? 복음 선포를 좌절시키려는 사람, 복음의 박해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에 대한 확신을 흔드는 사람, 복음 선포의 의지를 꺾는 사람, 복음 선포의 길을 떠나는 나를 붙잡거나 안주케 하는 사람 등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주님 말씀이 박해자들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걱정말라는 것을 보면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좌절시키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을 피하라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직면하되 감언이설이나 겁박에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그들을 믿거나 반대로 두려워하는 나를 조심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니 하느님만 믿고 걱정말라는 거지요.


비유하자면 힘이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만 믿어'라고 해도 우리는 인간적으로 든든하고 그래서 걱정을 하지 않게 되는데 하물며 더 힘세시고 더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면 걱정할 수 없고 그러므로 걱정한다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함승수 신부님

환승객이 가장 많은 지하철역은 어디일까요? 바로 2호선 <신도림>역입니다. 그런데 이 역의 승강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바쁜 출퇴근 시간에 종종 이런 안내방송이 들립니다.

“다음 열차를 이용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내방송의 내용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다음 열차를 이용한다는 것은 지금 탈 수 있는 열차를 그냥 보내고 시간상 나중에 오는 열차를 탄다는 것인데 그 열차를 이용하면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뒤따라오는 열차가 먼저 출발한 앞 열차를 추월하는 것 뿐인데, 보통은 선로가 하나인 지하철 구조상 그런 일은 곧 대형 사고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안내방송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 정확한 측정과 과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대에는 사람이 많이 몰리다보니 이미 승객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열차 안에 무리하게 승차하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다들 시간에 쫓겨 마음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리한 승차시도로 인해 열차는 짧게는 수십 초에서 길게는 수 분 정도 늦게 출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번 지연된 열차는 역을 지날 때마다 지연시간이 늘어나 정차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그렇게 열 다섯개 정도의 역을 지나면 최대 7분까지 시간이 늦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뒤따라오는 열차들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유발하여 그 뒤에 오는 열차들도 다 지연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승객들이 혼잡한 열차를 빨리 보내고 다음 차량을 이용하면 열차의 평균 운행간격인 2분 정도만 늦을 뿐입니다. 무리하게 열차에 올라탔다가 숨도 쉬기 어려운 ‘콩나물시루’ 안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7분이나 더 보내야 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 7분이라는 고통의 시간은 그만큼의 ‘지각’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 결과 또 다른 고통을 유발하게 되겠지요.

<신도림>역에서는 이런 과학적 분석에 근거하여 다음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목적지에 더 빨리 가는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적인 욕심을 따르는 삶은 남들에게 ‘민폐’를 끼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고생을 더 많이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모두를 생각하며 양보하는 삶은 남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여러 모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의 ‘간사’하고 ‘사악’한 면을 본받아 살다보면 세상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만큼 내 욕심을 더 많이 채울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이익 하나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소중한 ‘사람’을, ‘하느님’을, ‘마음’을 잃게 됩니다. 그런 모습은 비둘기의 ‘멍청함’을 닮는 길이지요.


그러나 뱀의 ‘슬기로움’을 본받아 살다보면, 눈 앞의 이익을 쫓거나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 않고 남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배려하며 희생하는 모습으로 살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그런 선하고 순박한 모습을 어여삐 보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채워주시리라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사는 지혜 <마태 10, 16-2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 말씀으로 우리의 말은 지혜롭지 못하여 모든 지혜는 아버지의 영으로부터 내려옴을 믿고 의지하여 어떤 어려움 속에도 지혜롭게 말하도록 이끌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며 일의 어려움을 풀어나갑니다.

지혜롭지 못한 말로 사실과 다르게 고통을 겪고 죄인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보통 대화도 지혜롭지 못하면 오해와 박해를 받게 됩니다.

말의 지혜로움은 하느님의 영으로 나오지만, 말하는 사람의 성품으로 말의 의미를 품고 바르게 말하게 됩니다.

말이란 의사를 통하는데 편리한 도구이지만, 서로 불통으로 만드는데도 역할을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이 지혜로우면 원수가 친구가 되고, 지혜롭지 못하면 친구가 원수가 됩니다. 말을 잘하면 무거운 죄도 가벼워지고 말을 잘못하면 가벼운 죄도 무겁게 됩니다.


지혜로운 말은 어디서 나올까요? 하느님 영의 말씀이라도 말하는 도구인 사람의 마음이 잘못되면 지혜로운 말이 나오지 않고, 거칠고 막말을 하게 되고, 행동까지도 거칠고, 자해를 가하거나 남을 해치는 결과가 됩니다.

마음 안에 복수심, 질투심, 시기심, 이기심, 거짓과 사기 치려는 마음, 정의와 공의를 벗어나는 마음을 깊이 갖고 있으면 지혜롭지 못한 말과 행위가 나옵니다.

이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첫째,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진실과 사랑의 마음 자세입니다.

거짓을 놓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말하고자 하는 사실에 진실과 참이 있는지를 알고 청해야 합니다. 저도 묵상 글을 쓰다 혹시 조금 과장된 말을 하려고 하면 글 자체가 사라집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써야 합니다. 진실이 아니면 표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마음의 진실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잘 보이려고, 반드시 이기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이야기하면 지혜가 저절로 나옵니다.


말은 서로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부부간 대화도 이기려 하고 자기 생각을 각인시키려 하면 본질에서 벗어난 말이 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 나옵니다.

사랑의 본질은 서로 생명을 지니는 것이며 “나는 없고 너만 있는 것입니다.” 너를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이 말을 할까 말까’ 하며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내가 참고 또 기다리다 보면, 마치 주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마냥 그 문제가 스스로 풀어지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선교하러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중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박해를 받을 때,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내가 생각해 보기에도 정말 그럴싸해 보이지만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각이나,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데올로기적 명분을 내걸며 강요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기과시와 자신의 이해관계에 억눌리거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물질적이고 현세에 유익한 것처럼 보이도록 악마가 유혹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늘 주 예수님께서 심어주시고 마침내 이루시고야 마는 좋은 생각들이 우리의 영을 일깨우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지혜의 영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님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부지불식不知不識’간은 내가 알지도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한 것들로서, 인간의 ‘인식’에 관련된 표현입니다. 즉 내가 인식하고 이해할 겨를조차 없이 발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 ‘나도 모르게’ 발설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이 아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식론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식의 앎’을 초월하는 ‘지혜의 영’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어느 순간 ‘깨우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은 알지 못하면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깨우치면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깨닫게 해줍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내가 모르는 내용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우리는 모두 지혜의 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뱀처럼 슬기로운’ 사람은 ‘지혜의 영’을 가진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조 두레박 신부님

모(矛 창모) 순(盾, 방패 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순이라는 뜻은 “창과 방패라는 말로, 말이나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예)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창과 방패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 창은 아주 날카로워서 어떤 방패라도 다 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패는 너무 튼튼해서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합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어떤 사람이 “그렇다면 자네의 창으로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은 아무런 대답을 못 합니다. 도무지 앞, 뒤가 안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순”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당신께 철저하게 맡기며 살라.”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이 세상에서 당신을 믿고 살아가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분명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뱀과 비둘기가 어울립니까?

참 모순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뱀과 비둘기, 이 둘을 닮아라.”라고 하십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뱀은 지혜롭기에 잔머리를 쓰는 신앙인을 말합니다.

이런 신앙인들은 간사하게 절대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손해 보는 일은 안 합니다. 이런 신앙인은 하느님의 축복을 못 받겠지요.

반대로 비둘기는 순박하지만, 지혜가 없는 신앙인입니다.

착하기만 해서 세상을 살아가기도 어렵지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한마디로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만만치 않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살게 해주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악해도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겨낼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 한국의 순교자들은 박해자들 앞에 끌려갔을 때,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의 입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붙들고 손에 묵주를 들고 외쳐 부릅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리고 “박해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신앙인들에게도 포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하느님, 더는 못합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은 영적 포기의 순간입니다. 그때 고운님들이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이르는 고통을 겪으시는 길마다 마귀의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포기해, 그만둬! 이런 고통당할 필요가 없잖아!”

예수님의 영혼도 못이 손과 발을 뚫고 지나고, 그리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포기하겠다.”라고 말하려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영혼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으로, 그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어려움을 넘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견디셨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영혼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인내로 기도하면서 견뎌내야 합니다.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입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말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 아멘.


먼저 하느님을 만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어떤 두려움도 깨뜨리는 용기가 있는 복된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두레박도 이사야서 41장 10절에 말씀을 담고,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간호하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 고운님들에게 시작도 어려웠고 끝내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있는 일(질병, 코로나 19 포함)이 있어서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두렵기까지 하겠지만, 자비의 하느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고 치유와 회복의 평화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무더위

속에서도

꽃은 피어납니다.


삶을 살지만

아직도 삶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슬기와 순박은

이와같이

삶 안에서 함께

이어져 있으며

삶 안에서

함께 걸어갑니다.


어려움의 반복이

우리 삶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지혜와 슬기

정직과 투명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삶을

끝까지 끈기있게

견디게 하는 것은

우리의 길을

가게하는 오롯한

믿음입니다.


오롯한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하느님 안에서

제대로

보게합니다.


삶의 문제 해결은

어떻게, 무엇을

해야할지를

가르쳐주시는

믿음의 주체이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뱀같은 슬기를

비둘기같은 순박을

배웁니다.


고통 없는

지혜가 없고

고통 없는

순수가 없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슬기롭게 견디는

기도의

삶입니다.


꽃을 피우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많은 국내의 문제들과 국제 문제들이 있습니다. 종교, 경제, 인권, 평화의 문제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을 갖는 것 역시 이 세상 안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치를 한다는 정치인들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구내식당의 식사 메뉴를 가지고 서로 싸운다면 어떨까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는다면서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들 개개인을 보면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에 참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집에서 다투었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반찬투정으로 싸우는 경우도 참 많다고 하더군요. 옷 문제, 청소 문제 등등의 별 것도 아닌 문제들 안에서 생기는 갈등으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는 말도 서슴지 않게 말하기도 합니다. 크고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우리는 작은 것에 연연하고 걱정하면서 쓸데없는 힘을 쏟고 있습니다.


넓은 마음, 그리고 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 시선을 얻기 위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나오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갈등과 다툼을 줄여나가면서 아픔과 상처를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제자들이지요. 그런데 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걱정이 많아 보였나 봅니다. 하긴 이 제자들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언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세상의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여기에 주님께 대한 굳고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부족함 그 자체였고 제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불안의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자신의 부족함은 사실 주님 앞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우리들의 부족함을 거뜬하게 채우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신경을 쓰고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걱정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사랑을 전하면 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계속됩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걱정하는 우리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한탄을 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저 믿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주님의 크심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말라. 고개를 치켜들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라(헬렌 켈러).


다음 지하철을 타라?(김광희, ‘창의력에 미쳐라’ 중에서)

환승객이 가장 많은 지하철역은 어디일까? 이곳 승강장에선 종종 이런 안내 방송이 들린다. “다음 열차를 이용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바로 2호선 신도림역이다.

왜 하필 바쁜 출퇴근 시간대에 모순되는 방송을 할까? 뒤따라오는 열차가 어떻게 앞서가는 열차보다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이 방송은 나름의 까닭이 있다.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 모습을 떠올려 보자. 승객이 가득 차서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지하철에 무리하게 올라타려는 사람이 제법 있다. 다들 시간에 쫓기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지하철은 짧게는 수십 초에서 길게는 수 분 늦게 출발하는 일이 다반사다.

한국 철도 연구원이 측정한 ‘출퇴근 시간 지하철이 어떤 과정으로 지연되지는지’에 대한 조사 결과를 짚어 보자. 한 번 지연된 지하철은 역마다 지연 시간이 늘어나 정차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열다섯 개 역을 지나면 최대 7분까지 늦어질 수 있다. 그 여파는 뒤따라오는 지하철에 영향을 미친다. 도미노 현상처럼 말이다.

승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정차 구간에서 혼잡한 지하철을 빨리 보내고 다음 차량을 이용하면 운행 간격인 2분만 늦을 뿐이다. 하지만 무리하게 지하철에 올라탄 승객은 숨도 쉬기 어려운 콩나물시루 안에서 힘들어하다 직장과 학교에 7분이나 늦게 도착한다.

알고 보니 서둘러 타는 것이 결코 빨리 가는 길이 아니었다 붐비는 출퇴근 길,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다음 열차를 이용해 보지 않겠는가?




경쟁력 있고 전문성 있는 그리스도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 주신 가르침은 너무나 강력하고 혁신적인 것이어서, 때로 수용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누가 오른 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까지 대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거던 십리를 가주어라.” 


그로 인해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갈등과 방황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선해야만 하고, 세상의 불의 앞에서도 그저 참아야만 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야만 하고, 결국 한 걸음 뒤쳐져야만하는가? 늘 손해봐야 하고 바보처럼 살아야만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어느 한쪽에 지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이웃들 앞에서 순수하고 순박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험하고 악한 세상, 이리떼들과 늑대떼들이 우굴거리는 위험한 세상 안에서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오 복음 10장 16절)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적락하고 말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제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바웃 타임’(2013)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하는가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팀’은 성인이 되는 날 아버지 ‘빌’로부터 그 집안은 대대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말해줍니다. 실제로 그 방법대로 해 보니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후로 팀은 실수하거나 놓친 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실수를 바로잡고 사랑하는 여인과도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릴 수는 없습니다. 팀이 과거로 돌아가 남의 여자를 가로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면서 시간을 되돌려 무언가를 얻게 되면 대신 잃게 되는 것도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시간이 지나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을 깨달아갈 때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깨달은 시간을 돌리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일상을 한 번 더 살아보는 것입니다. 팀은 변호사인데 재판이 있는 날은 긴장하여 출근하고 재판에 간신히 이겨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루를 한 번 더 살아보니 처음 살 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건을 살 때 친절하게 인사하는 점원의 얼굴에 자신도 미소가 띄워지고 법원 건물이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몰랐다며 감탄해하고 재판 때에도 동료와 장난을 칠 정도입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돌아오니 아내까지도 고생한 남편을 기쁘게 맞아줍니다. 같은 하루인데도 마음가짐에 따라 피곤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깨닫습니다.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매 순간을 이미 살아본 것처럼 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걱정 근심 속에 똑 같은 하루를 힘들게 살지만 어떤 사람은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현재를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시간여행으로 얻은 교훈은 어차피 내가 노력해봐야 바뀌는 게 없기 때문에 현재를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지배해보고 나서 깨닫는 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예고하십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재판정에 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이란 그냥 현재를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받을 박해를 피하려고도 하지 말고 어차피 주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 대신 말해 줄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담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옷매무새부터 시작하여 온갖 잡다한 것에 신경을 쓰고 만나서는 끊임없이 무슨 말로 이어가야하나 부담을 갖습니다. 만남이 끝나고 나면 실제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허무함을 느낍니다. 

박해가 오면 받고 할 말은 주님이 해 주실 테니 아무 생각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이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내가 해서 더 잘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고 그 결과는 그것이 어떻든 받아들이기만 할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다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안 좋은 일은 내가 현재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자가 큰 스님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도 없자 스님에게 따졌습니다. 스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미 다 알려주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따지냐고 말합니다. 밥 차려주면 먹어주었고 인사하면 받아주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때 동자스님이 골똘한 생각에 빠지자 주지스님은 크게 노하며, “이놈아, 생각을 하면 어떡해. 그럼 다 망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동자는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빠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불법(佛法)이고 도(道)라는 것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하고 계획하는 것은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놈이 좋은 결과를 내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 하루를 망치게 합니다.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참다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러시아 월드컵을 보면서 늦게 잠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주로 생방송을 보지 않고 하이라이트를 보는 편입니다. 주로 골을 넣는 장면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늦은 시간이라도 생방송으로 볼 것입니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공부하기보다는 요점정리가 된 것들을 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절약되기도 하고, 다른 것들에 시간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볼 것입니다. 그래야만 전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영광의 모습인 예수님을 제단에 모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의 예수님을 제단에 모실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적대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은 요점정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은 죽는 고통을 겪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만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가는 길에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때로 박해와 죽음도 있을 것이다. 가족과 헤어질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결혼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해도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이제 배우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을 구해도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승진도 해야 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야 하고, 주어지는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은 계속해서 급여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는 가정의 희망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탁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행복에 이르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슴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몰래 저에게 지혜를 주시나이다. 우슬초로 정화수를 뿌리소서. 제가 깨끗하여 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다.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이제 다음 달이면 교구의 인사이동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신부님이 새로운 곳을 향해서 떠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떠나야 하는 곳에서는 박수를 치면서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합니다. 도착해야 하는 곳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새로이 오시는 신부님을 환영할 것입니다. 사제의 인사이동이 기쁨과 박수를 받는 축제의 자리일 수도 있지만, 사제의 인사이동은 조금은 더 절박한 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다짐으로, 주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항구한 기다림의 인내가 답이다. -인내의 믿음과 희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도 계속 피고 지는 꽃들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오랜 전 써놓은 자작시입니다. 


-“꽃같은 만남보다/더 좋은 만남 있으랴

 꼬박 일년 기다려/피어 난 꽃이다

 꼭 일년만의 만남이다

 능소화, 백합,---/모든 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 되려면/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7 


항구한 기다림의 인내가 답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승리합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희망, 인내의 사랑입니다. 인내의 뿌리에는 신망애, 믿음, 희망,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지혜이자 믿음입니다. 봄꽃이 폈다하여 먹는 열매가 아니라 가을의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익어 따 먹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들의 정주 서원 역시 항구한 인내의 믿음을 뜻합니다. 은총의 깨달음 역시 부단한 인내의 열매입니다. 며칠전 읽은 분도회 어느 고승과의 마지막 인터뷰 내용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혹시 당신은 베네딕도 규칙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지, 혹시 모토로 삼고 있는 구절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성규72,5), 바로 이 구절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이래야 평화 공존의 공동생활입니다.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했지 교정하라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 스스로 깨달아 개선할 때까지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이 믿음이자 지혜입니다. 참으로 넉넉하고 헐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끝가지 인내하며 기다리면 언젠가 때가 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아니 문제의 해결解決이기 보다는 문제의 해소解消입니다. 

무엇이든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지극히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필수입니다. 고백성사때 용서가 안된다는 점을 호소할 때는 다음과 같은 충고도 드립니다.


“우선 용서하려는 지향으로 충분합니다. 시험볼 때도 어려운 문제는 제쳐놓고 쉬운 문제부터 풀어가지 않습니까? 우선 쉬운 것부터 용서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면 언젠가 때가 되면 힘든 문제도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요셉수도원 초창기 분원장 직을 맡았던 선배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문답도 생각납니다. 


-“수사님은 수도생활에서 어느 덕이 가장 필요하다 생각하십니까?”

제가 ‘사랑’이라 말하자 선배 수도형제는 ‘인내’라 대답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항구한 인내가 답입니다. 주님은 온갖 힘든 상황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구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ㄴ). 


참으로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을 지닌 자에게 주님은 슬기로움과 순박함의 은총도 주시어, 이리 떼 세상 가운데서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럼으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들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슬기로움과 순박함은 하나입니다. 실로 초연한 믿음의 순박한 무사無邪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슬기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때에 맞게 적절히 말함으로 위기를 통과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니 영원토록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막연한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적극적인 인내에 희망은 필수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지극한 인내의 믿음도 가능합니다. 다음 시편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3).

바로 제1독서 희망의 예언자 호세아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해피엔드로 끝나는 호세아서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호세아의 감동적인 강론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부단한 회개로 당신께 돌아 온 인내의 믿음을 지닌 겸손한 자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내가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말씀이 시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희망뿐 아니라 사랑의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시인인 호세아입니다. 항구한 인내의 믿음이 얼마나 내적으로 역동적인지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내적 회개와 겸손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둔 슬기롭고 순박한 영혼들만이 바로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의인들입니다. 호세아의 결론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인내의 믿음을 지닌 지혜롭고 분별있는 의인들만이 주님의 올곧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희망을 둔 우리 모두에게 항구한 인내의 믿음과 더불어 슬기롭고 순박한 마음을 선물하시어 주님의 올곧은 길을 잘 걸어 가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아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10, 16-23(연중 14주 금)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 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에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 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 12)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나는 누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곁에 두고 함께 하고픈 사람인가

멀리 두고 조심해야 할 사람인가

양 같은 순박한 사람인가

이리 같은 사나운 사람인가

삶의 지혜를 찾는 슬기로운 사람인가

값싼 지식에 게걸들린 어리석은 사람인가

따뜻하게 보듬는 사람인가

힘으로 짓누르는 사람인가

용맹하게 앞서가는 사람인가

두려움에 움츠린 사람인가

당당하게 진실을 외치는 사람인가

비굴하게 침묵하는 사람인가

사랑하기에 미움 받는 사람인가

사랑보다 미움을 즐기는 사람인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인가

지레 겁먹고 주저앉는 사람인가

살리기 위해서 죽는 사람인가

살기 위해서 죽이는 사람인가

나는 누구이어야 하는가




슬기롭고 순박한 삶 <마태 10, 16-2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미련하고 교활한 사람들 속에 살아가노라면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순진하지 않으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하듯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튀어나오고, 거칠고 막돼먹은 사람은 오래 자리를 보존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선택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누구를 선택할까?’ 등 하고자 하는 바를 선택해야 합니다. 마구잡이로 할 수 없고, 아무렇게나 할 수 없으며 여기에 지혜와 순진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진실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현실과 직면하게 됩니다. 현실은 희망과 다릅니다. 

희망 사항을 현실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삶은 나를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하거나 자유를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덮어놓고 선택하거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사람이 경솔하고 진실과 사랑이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참여하여 자기 길을 찾지 못하고 낭패를 보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을 조심하라”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겪는 재난 중에 가장 큰 재난은 사람에게서 오는 재난입니다. 한 사람의 욕망 때문에 수천 명이 죽임을 당하고, 시행착오로 수백 명이 굶어 죽고,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런 불행의 시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욕심, 시기, 질투, 칠죄종이라 할 수 있지만 더 근본적 원인은 급히 서두르고 생각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희망은 현실이 아닙니다. 희망을 현실화하려면 그 목표를 따라 점차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말하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그분에게 의지하여 기도와 깊은 명상 중에 해답을 구하고, 성경 말씀 한마디에서도 우리가 찾는 진실과 사랑을 얻어 지혜롭고 순진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도하심에 따라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아버지 나라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수색 예수 성심 성당 박재성 부제님 강론

독서 : 호세 14,2-10

복음 : 마태 10,16-23

찬미 예수님,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호세아서를 읽고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호세아의 결혼생활, 화요일에는 그가 살았던 북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상황, 수요일에는 호세아를 읽는 방법인 구조, 목요일에는 호세아서를 자세히 보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호세아서를 읽는 그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은 호세아서를 어떻게 내 삶에 가져올 것인가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제 눈에 들어온 독서의 주된 내용은 회개에 대한 요청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삶입니다. 호세아서는 구조적으로 사람들의 죄, 벌에 대한 하느님의 선언, 관계 회복으로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3장의 결혼생활도 그렇고, 어제 읽은 독서도 그러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구조적으로는 세 번째 단계인 관계 회복에 대한 내용이 주된 내용입니다. 다음의 문장들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호세 14,1.5.8)


저는 오늘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시 불러 주시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에 저는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켠에서는 힘없음, 무력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희망을 말하기에 ‘세상의 노력은 아직 미진하지 않나’생각이 들고, 희망을 말하고픈 제 눈에는 ‘매년 베이비 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수백 명에 이르고, 고독사하는 사람이 천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자료가 보입니다. 통계자료들은 참 힘 빠지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금 하느님의 돌아오라는 요청을 떠올려봅니다. 그럼 가슴속에서 작은 힘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우울한 기분에 빠져나와 머릿속에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이렇게 성경을 제 삶으로 가져갑니다.


호세아가 살던 시대는 우상숭배가 넘쳐나는 시대였고, 정작 호세아 예언자 자신은 신전창녀와 사랑에 빠지는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삶으로 하느님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만난 하느님은 사랑해주고, 죄를 지어도 기다려주며 되돌아오라고 말하는 분임을 체험하고, 직접 하느님의 그러한 모습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하느님은 저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제자들의 새로운 싸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14주 금요일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양들”과 “이리떼”의 의미를 보면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육에 따른 악한 것이 그 안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에 선할 때는 양이라고 하지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양과 같다고 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리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대하라고 하신다. 뱀은 지혜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23절)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를 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다른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올바로 살지 않으면 그 자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박해를 당하면 당장 위험에 뛰어들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죽게 되면 그들에게 배워 은혜를 누리게 될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씀 안에 확고히 뿌리를 박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자꾸 사람의 일로 돌아가려는 나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삶이며, 우리는 이 시대에서 순교정신을 살 수 있다. 지금의 순교는 바로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먹이를 삼키는 

뱀처럼 말씀을

받아 삼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이

벗어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바닥을 기듯이

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

회개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구멍을 빠져 나오듯

악습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

거듭 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목숨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지혜입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순박한 기도의 삶이

자연스러운 지혜입니다.


순박한 집중 사이로

기어가는 겸손한

마음이 있습니다.


기도는 슬기롭고

기도는 순박합니다.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분의 나이는 이제 마흔 다섯. 취업하려고도 해도 나이 때문에 받아주는 곳도 없고, 새로운 공부를 하려고 해도 너무나 나이가 많아서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이제 힘도 떨어져서 금방 지친다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마흔 다섯이라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너무 늦은 것일까요? 요즘 사람의 수명이 많이 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의 인생을 ‘아흔’으로 잡으면, 축구경기로 따졌을 때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난 것입니다. 축구경기를 하고 있는데 전반전까지 지고 있다고 아예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엄청난 점수 차이가 나고 있다 해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후반전이 있으니까요. 즉, 작전을 제대로 세워서 공격을 잘만 한다면 분명히 만회할 시간과 기회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포기하지 않을 때, 통쾌한 후반전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늦은 경우는 없습니다. 단지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발표했을 때의 나이가 60세라고 하지요. 스릴러 영화의 선구자인 히치콕 감독은 61세에 필생의 역작 ‘사이코’를 완성했습니다. 한국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로 뽑는 박완서 선생님은 40세에 등단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늦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에 시작을 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언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작품을 발표했느냐 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방향만 제대로 가고 있다면 걱정할 것 없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방향만 잡는다면 정말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라는 핑계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상에 파견되는 사도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었을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능력과 재주도 그리 대단하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뿔뿔이 흩어질 정도로 아직도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기에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세상에 주님 없이 파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걱정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지금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께로 방향을 잡는다면 분명히 이 모든 걱정과 불안을 떨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께서 알아서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일 분 전만큼 먼 시간은 없다(짐 비숍).


링겔만 효과(소천, ‘이리 찬란해도 되는 겁니까?’ 중에서)

링겔만은 줄다리기로 실험을 했다. 집단 전체가 줄을 당길 때의 힘과 개인이 혼자 줄을 당길 때의 힘을 비교해 보았다.

1:1에는 100%, 2:2에는 200%, 3:3에는 300%의 힘이 나왔을까? 그렇지 않았다. 1:1로 줄다리기를 하면 100%의 힘을 쏟지만 2:2에는 93%, 3:3에는 85%, 8:8에는 49%의 힘만 쏟았다.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개인의 힘은 떨어졌다. 이를 링겔만 효과라고 한다.

왜 그럴까요?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생각은 ‘나 하나부터’입니다.




제자직의 본질인 고통의 수용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 시련, 고통, 재판,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10,21). 이러한 일은 사람들이 ‘올곧지 않아’(미카 7,6)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정의와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기쁠 때보다는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암담한 미래의 벽 앞에 좌절하는 젊은이들, 기본적인 생계유지마저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들, 늘어만 가는 가계 부채 앞에 한숨 쉬는 수많은 서민들, 고독사를 택하는 노인층 등 고통과 시련은 그렇게 호흡처럼 우리들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 때문에 더한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된다니 참 힘든 삶입니다. 


어떻게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라야 할까요? 먼저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은 힘을 모아 저항하고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콜로 1,24)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고통 앞에 무조건 인내해야 한다거나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한다거나 정화의 과정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막연히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에는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지려는 의지와 마음이며, 구체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삶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수용하지 않은 채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피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끝까지 참아내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나눌 때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박해 상황을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순박함과 지혜로움, 신뢰와 인내, 곧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10,16). 


고통은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이요, 고통의 수용은 예수님의 제자직의 본질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갖은 박해와 멸시를 받으시고 고통 중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의 이 무거운 짐’을 그분께로 가지고 갑시다.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고귀한 예수를 따르는 삶에 힘과 용기를 모아 앞만 보며 그분께로 달려갑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우리를 영원 생명에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냅시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우리 모두 삶이 고달프고 나를 속일지라도 주님 안에 머물고 그분만 차지할 수 있다면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일상에서 하느님의 선과 정의를 위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겪어내는 고통의 씨앗에 숨겨져 있는 참 행복의 보화를 알아보는 기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영원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7.7일 새벽에는 뮌스터쉬발작 수도원 피정집에서 어제 7.6일 하루를 회상하며 내일 7.8일 강론을 씁니다. 어제는 마지막으로 가톨릭의 고도 밤베르크를 순례했습니다.    


가톨릭 고도의 순례는 그대로 영원의 체험이요, 하여 오늘 강론은 ‘영원한 삶’으로 정했습니다. 바이에른의 북쪽 끝 프랑켄 알프에 위치한 밤베르크는 프랑켄의 로마로 불립니다. 밤베르크는 1007년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2세 황제에 의해 이곳에 밤부르크 교구가 설정되었고, 13세기 중엽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주교가 다스리는 도시였습니다. 1802년 국유화 과정 속에서 주교령이 폐지되었지만, 1817년 다시 대교구가 설정되어 이 일대에서 유일한 가톨릭 1000년 도시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천년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된 아름다운 도시로 도시 전체가 흡사 박물관 같습니다. 특히 밤베르크의 중심가에 위치한 밤베르크 대성당은 네 개의 첨탑과 이중 내진 구조가 특징으로 1004년 하인리히 2세때 시작하여 1012년 완공되었고 그후 화재로 인해 일부 전소되었지만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는 1000년 역사를 지닌 대성당입니다. 도시 전체가 그대로 중세 모습 그대로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도시같았습니다. 언덕에 위치한 지금은 비어 있다는 옛 베네딕도 수도원 건물도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은 1403년에 세워진 도미니꼬 수도회 식당 건물에서 밤베르크 특유의 훈연맥주를 곁들여 했습니다. 역시 관광객들로 가득한 천년고도였습니다. 이어 다시 뮌스터쉬발작 수도원에 도착하여 수도원 경내를 돌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고 마지막 저녁기도에 참석했습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특징은 따뜻하고 친절한 환대입니다. 오틸리엔 수도원에서는 물론 여기 수도원의 수도승들 환대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순례객들도 끊임없이 찾아옴으로 공동전례 때는 성당 안이 늘 가득했습니다. 환대의 원천은 공동전례입니다. 미사와 성무일도를 정성스레 거행함으로 하느님을 환대하고 또 하느님의 환대를 체험함으로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는 수도승들입니다. 여기 수도원은 올 가을철에 수도원 시작 1200주년 행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800년대에 수도원이 시작된 자리에 현재의 뮌스터쉬발작 수도원이 19세기부터 뒤를 이음으로 지금까지 도합 약1200년을 수도원 역사로 잡고 있음을 봅니다.


이 수도원의 특기할 인물은 전임 피델리스 아빠스님과 안셀름 그륀 영성가입니다. 사임하여 ‘아빠스’ 호칭도 내려 놓고 ‘신부’라는 호칭에 자리도 서원 순서 자리로 내려오셨다 합니다. 스타시오에 이어 입장할 때 보니 18째줄에 서계시니 서원 순서로 약 36번째 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베네딕도 수도회 역사상 처음으로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셀름 그륀 신부님 역시 공동체에 속해 성무일도 전례시 칸톨을 하며 평범한 수도승으로서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공동전례의 은총이 수도자를 겸손하게 만들고 영원을 체험하게 합니다. 개인의 목소리는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의 화음을 이룸으로 모두는 공동체와 일치되니 드러나는 것은 공동체의 소리이자 주님의 소리 하나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겸손의 체험이자 영원의 체험입니다.   


개인은 세상을 떠나 가도 공동체의 찬미는 영원할 것이니 바로 이것이 영원의 체험입니다. 이런 영원의 체험이 생사의 두려움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현재를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영원의 체험이 하느님 체험이요 이보다 더 큰 내적 힘은 없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셋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 걱정하지 말라는 것, 끝까지 견뎌내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리 떼 세상 한가운데에서 순수한 양들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인데 영원의 체험이 사람을 조심할 수 있는 분별력을 선사합니다. 아버지의 영이 대신 말씀해 주심으로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되니 이 또한 영원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또 끝까지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는 것 역시 영원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니 호세아 예언자의 회개의 호소는 늘 공감이 갑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께 돌아와 영원하신 하느님을 체험할 때 늘 내적으로 새로워지는 삶입니다. 다음 주님께 돌아왔을 때의 은총은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영원하신 당신을 깊이 체험함으로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사람, 분별 있는 사람이 되어 당신의 올곧은 길을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이들에게 사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까요, 아니면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까요? 사랑은 믿는 것이라 당연히 믿도록 가르쳐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어떤 특정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세상에서 만나게 될 보통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섭니다. 꼬마는 평생 처음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 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또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 한 번 호되게 밀쳐내 버립니다. 이는 아빠로서도 매우 고통스러운 교육입니다. 자녀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린 아들에게 아빠는 사랑의 대상이요 다정한 친구요 자신의 삶은 몽땅 송두리째 책임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아이에게만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아빠와 아이가 동시에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는 아이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가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다정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오직 믿을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새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떠합니까? 부모님이 자녀들의 성공으로 동시 만족을 얻으려고 자녀들을 어렸을 때부터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결국 자녀들로부터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쩔쩔 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그렇게 자신들을 고생시키는 부모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절대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명예나 세상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그런 것들은 다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그 사람이 부모라 할지라도 우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를 시켜 “주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외치는 내용이 바로 세상 피조물 중 어떤 것에도 믿음을 두지 말고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부모에게서까지 버림받은 고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아들은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아란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어떤 것에도 믿음을 줄 곳이 없는 이들을 나타냅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그러나 요즘은 얼마나 믿을 것이 많은 때입니까? 성당에 열심히 나오다가도 성공하면 그것을 믿고 신앙은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실패시키고 좌절시키고 배신당하게 하시는 이유가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을 두지 말라고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손을 왜 드릴라의 유혹에 빠져 눈이 뽑히게 하셨을까요? 오로지 당신만을 믿게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배신당함은 반드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지만, 다른 것을 믿으면 주님께 대한 믿음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이나 명예를 획득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 당신께 의지할 수 있는 고아가 되어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바라십니다. 나는 진정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 남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 사랑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16)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녀나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낯선 땅에 가거나 고생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곳으로 떠나보내는 마음은 안타까움과 걱정스러움이겠지요?


저는 어머니가 제가 수도원에 입회하기 위해 하직인사를 드리던 날 그렇게 안타까워하시며 우시던 모습을 37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한답니다.

자식이 가야하는 길이기에 붙잡을 수는 없지만 애써 손을 놓아야 하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버스 차창에 기대어 한참을 눈물지었더랬습니다.


오늘 제자들을 세상에 떠나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런 심정 같네요.

가면 밥 잘 챙겨 먹고 전화 자주하고 차 조심, 사람 조심. 조심 또 조심... 알았제?

힘든 일이 많을거다.

그때마다 쫄지 마라.

성령께서 함께 하실테니...


어머니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제자들은 힘든 선교여정이지만 꿋꿋이 기쁘게 걸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냥 늘 내 품안에 두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겠지만 떠나 보내야만 성장하여 더 멋진 자식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아파하며 눈물을 감추며 이별하게 되겠지요.


오늘 멀리 떠나 살고 있는, 특히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중에서 살고 있을 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를 기억합시다.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어 환난중에 더욱 굳세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사랑의 입김을 호~ 하고 한번 불어 줍시다.


성령의 선물 받아라~~~~~


 


슬기와 순진<마태,10/16-2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슬기로운 사람은 물과 불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미련한 사람은 불과 물의 위험을 모르고 불속에 뛰어들고 물속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순진한 사람은 불과 물이 위험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불과 물 가까이 접근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사람이고 미련한 사람은 악과 선을 구별 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고 선을 피하는 사람입니다.

순진한 사람은 선과 악을 구별 못하나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순리대로 살려는 사람입니다. 


우리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위험요소가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로막고 길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유혹, 박해, 악으로 유도하는 사람,관행이란 이유를 들어 불법을 행하는 사람으로 넘쳐흐르는 세상입니다. 엣 날에 눈을 감으면 코를 베가는 세상이라 하였지만 눈을 뜨고도 코뿐 아니라 눈까지도 빼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일수록 슬기로운 사람으로 살아 가야합니다. 약사 빠른 사람이나 꾀쟁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순진 진실과 사랑을 지키며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라 알면서 양보하고 충돌하지 않고 살아야합니다. 


악하고 맞서지 말고 칼을 든 사람에게 덤비지 말고 피해야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악하고 맞서다가 악과 같이 구렁덩이로 빠지고 칼든 사람에게 덤비다가 칼을 맞게 됩니다. 


성현들은 언제나 위험한 사람을 피하고 그들의 비난에 화를 내지 않고 온화한 마음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대처하였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순진한 사람에게도 웃음이 가득합니다. 


저는 오늘 웃음으로 하루를 사는 슬기롭고 순진한 삶을 살도록 모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의 영이

우리의 관계안에

들어오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워내야합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 주시는 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아버지의 영은

살아있는 말씀을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살게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의 현존을 믿기에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항구하게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성령의 새로운 방식은

믿고 맡기는 

믿음의 방식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방식으로

나누게하십니다.


소통의 본질이

되시는 성령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불편한 관계일지라도

성령님을 통해

성령님과 함께

찾아가 나누는

만남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소통의 기쁨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다니다보면 청중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과연 하고 있는 이 강의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지 또 그렇지 않은지를 청중들의 얼굴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항상 강의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강의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을 자주 더듬는 것입니다. 또 강의록 내용이 강의 도중에 생각나지 않아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었지요. 그런 와중에 강의가 잘 되지 않고 있음을 한 형제님의 얼굴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팔짱을 낀 채 딱딱한 자세로 앉아서는 제가 어떤 농담을 해도 웃지 않았고 이해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단 한 번도 끄덕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니 입으로는 계속해서 강의를 하면서도 머리로는 속이 뒤집어질 만큼 괴로웠지요. 

강의를 모두 끝내고 성당의 뒤편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 제게 다가오는 것이 보입니다. 두려워졌습니다. 제게 다가와서 강의가 형편없다는 비판을 쏟아 부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를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형제님께서는 제게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신부님 말씀이 제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어요. 멋진 강의였습니다.”

이 형제님 얼굴을 보고서 실패한 강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틀렸다고 또 실패했다는 생각은 바로 저만의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내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생각에 모든 것을 걸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지례짐작으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닌 주님께 기준을 맞췄을 때,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적이고 나약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 한 가지가 발견됩니다. 제자들을 박해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거나 저항하라고 가르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즉 어떤 부당한 대우와 남들이 가하는 벌을 당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만 하십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방법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고 때로는 나의 반대자를 과감하게 물리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나 만의 생각, 세상의 생각에 머물러 있어서는 절대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 가득한 주님의 뜻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혹시라도 내가 머물고 있었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마음들을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법정). 


주님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 사이에서 나의 선택은?

게티 오일의 창립자이자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인 J.폴 게티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입니다. 충분히 가졌다는 생각이 드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많은 가졌다고 해서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더 많은 것을 욕구를 버리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요? 어쩌면 세상의 법칙 테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 한 가지만 보죠. 텔레비전 방송 광고를 생각해보세요. 광고에서는 끊임없이 세상의 법칙을 우리들에게 주입시킵니다. ‘많을수록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물건을 구입하지 못하면 비참한 상황에 빠질 듯이, 또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요.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세상의 법칙을 꼭 따른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영원함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법칙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찾기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오늘은 우리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가장 큰 날입니다. 정말 큰 잔칫날입니다.

베 네딕도 성인을 한 마디로 소개한다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Querere Deum, To Seek God)는 것은 성인 일생의 중심 과제였습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찾고자 온 삶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열망하는 노력하는 사람 안에서만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만이 우리 인간 삶의 본질을 드러내고 증거하고 직접 몸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우리 존재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여정 중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임을 깨달은 사람은 진정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또 이런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과연 우리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아닌 허된 것에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당신의 온 삶을 통해서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전부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항상 참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예수님이시라면?)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용수철을 누르듯이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신앙의 가치관을 확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주님께서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찌 십자가를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순간에 주님 앞에 성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은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상황이 변화되길 바란다면“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하고 마음속으로 묻기를 바랍니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성공한 인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과 여러분의 사랑 덕분에 마침내 제가 요셉수도원에서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의 기적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여러분께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여러분께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은 제 25년 동안의 수도여정이었습니다.

오늘 7월11일은 유럽의 수호자이신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사부 성 베네딕도회 아빠스 대축일입니다.

바로 제가 1989년7월11일 서품 받은 날입니다.

그날 오전엔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으나 오후부터는 날씨가 활짝 개어 상쾌한 분위기에서 서품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만 25년이 되는 오늘 저는 영광스럽게도 서품 은경축 감사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서품식때의 날씨는 제 삶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올해 저희 요셉수도원은 자치수도원이 되었고 저는 참으로 오랜만에 원장직을 내려놓고 안식년을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활짝 갠 아름다운 안식년의 선물을 마련해 준 사랑하는 빠코미오 원장님과 수도공동체 형제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안식년은 주로 국내외 성지순례를 통한 내외적 영장성장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25년이란 숫자가 요즘 저에겐 아주 상징적입니다.

2011년에 저는 수도서원 25주년을 맞이했고, 2012년에 요셉수도원은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감사제도 성공리에 마쳤고, 2013년은 제가 요셉수도원에 부임한지 25년 째가 되는 해였으며, 마침내 릴레이 경주에서 처럼 빠코미오 원장께 바톤 텃치를 성공적으로 마친 해인 2014년 오늘은 제가 25년 은경축을 맞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여기 수도원에 올 때 마다 전의(戰意)가 새로워지고 새 힘이 샘솟음을 통해 새삼 요셉수도원은 저의 운명이자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성공적인 제 수도여정임을 자찬(自讚)하고 싶고 지인이 보내 준 카톡메시지에서도 이를 확인했습니다.

얼마 전 33년 만에, 제 마지막 제자들 10명이 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함께 찍은 사진을 여러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13세 였던 제자들이 지금은 46세의 장년이 되었습니다. 


-다들 훌륭히 됐을 것 같은 모습들이 좋네요.

  신부님은 선생님으로도 성공하신 분이란 증인들인 제자들입니다.-

-신부님, 폐북에 올라온 신부님 사진보니 젊어지는 청춘 느껴져요.

  사도 바오로처럼 내 자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겸손, 믿음, 실행이 있어야만 가능해요.

  신부님은 이미 성공한 인생이지요.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런 분을 안다는 거가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서품 25주년 은경축에 참 좋은 격려와 위로가 되는 선물 말씀입니다.

성공한 인생, 누구나 원하는 바입니다.

깨달으면 늦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보물들인 성인들은 물론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베네딕도는 성공한 인생을 사신 분들입니다.

각자 고유의 성인인 '참 나(眞我)'가 되는 것, 바로 이게 성공한 인생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바탕으로 성공한 인생을 위한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을 언제나 삶의 중심에 두십시오.

삶에 중심을 잡는 것은 삶의 우선적 필수 요건입니다.

이 중심이 없어,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중심이신 주님을 잃어버리면 동시에 '참 나'도 잃어 영혼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보다 큰 불행도 없습니다.

주님께 늘 중심을 두고 살 때 균형과 조화, 안정과 평화, 단순과 진실의 성공적 인생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에서 착안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섬기는 사람, 시중드는 분으로, 심부름꾼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는 이번 은경축 상본에 두 말할 것 없이 다음 바오로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바로 주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이자 전부임에 대한 고백입니다. 


둘째, 언제나 지혜를 추구하십시오.

지식은 넘치지만 지혜가 궁핍한 시절입니다.

옛 구도자들이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것은 바로 삶의 지식이 아닌 지혜를 찾아서 였습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말은 그대로 지혜를 찾는 다는 말과 통합니다.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시고 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혜이시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저자 역시 우리 모두 숨겨진 보물인 지혜를 찾을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그래,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리라(잠언2,2-5).-


간절히, 절실히 지혜를 찾을 때 선사되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모르는 자 같으나 실상 아는 자 였고, 무식한 자 같으나 실상 유식한 자였던, 놀라운 분별력의 지혜를 소유했던 성 베네딕도가 현자의 모범입니다. 


셋째, 사랑에 항구하십시오.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이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이런 사랑 밖에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실종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의미충만한 삶을 만듭니다.

오늘 2독서와 복음은 온통 사랑 이야기입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랑, 인내하는 사랑, 섬기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사랑을 옷 입듯이 입으라는 표현이 참 실감납니다.

주님은 이에다 섬기는 사랑을 덧붙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순수와 섬김의 사랑 실천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사랑 자체이신 당신 성체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 해 썼던, 공동체적 고백이자 제 좌우명 같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시가 바로 성공적 인생을 보장합니다.

제 장례미사 때 이 시를 읽어달라 할 것이며, 제 묘비명에도 이 시를 써달라 부탁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과 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깊이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25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25년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기도하고 일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끊임없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모두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봉헌한 베네딕토

성인의 삶을 만납니다.


언제나 봉헌은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공동체의 가치는

하느님과 우리자신들이

맺고있는 관계의 가치로

드러납니다.


사랑의 관계는

언제나 지속적인

지혜의 기쁨과

순박함의 기쁨을 동반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뱀처럼 슬기로운 지혜와

비둘기처럼 순박한 친교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노력과 인내는

한계를 드러내지만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과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큰 은총과 변화가 됩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은총이 가장 큰 지혜입니다.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장 순박한 믿음과

일맥상통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순간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성스러움을 만나셨던

베네딕토 아빠스처럼

사랑으로 사랑을 만나는

봉헌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봉헌의 여정이

영적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인내와 침묵이 함께하지 않는 말은 언제나 서로를 아프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매순간 믿음을 중심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신 우리의 평화또한 너무나 쉽게 깨뜨려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와같이 하느님 말씀과 우리 삶의 연결부위는

우리의 수많은 걱정처럼 언제나 약하고 부실합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의 나약한 믿음뿐입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걱정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아야 할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사랑과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 말씀으로 정화되고 완성되는

신비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인내의 영으로 알맞은 때를 택하여

당신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며 위로하십니다.


온전한 열매는 참고 견디는 인내없이 맺어질 수는 없습니다.

매순간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인내를 일깨워줍니다.


인내없는 지혜또한 믿음이라는 중심에 뿌리를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하느님 자녀들이 될 수있도록

무엇보다 하느님 말씀을 나누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하느님 말씀 위를 걸어가는 말씀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증언할 때

강신모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박해 상황에서 당신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 


좀 더 넓게 이해하자면 ‘박해란 신앙을 버리게 강요하는 모든 상황’ 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한테도 여전히 박해 상황은 존재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성실히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했는데 덜커덕 큰 병에 걸렸을 때, 또는 부도가 났을 때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좋으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게 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냉담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권고를 해도 아들은 바쁘다는 핑계만 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긴 아버지는 의식이 회복되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곁에 있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제발 성당 다시 나가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아버지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생활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아들은 성당에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가고, 건강도 잃어가고, 명예와 자존심도 잃어갑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좋으신 하느님’ 께 대한 믿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미국에 가면 자수성가한 재미교포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엄청나게 성공해서 베버리힐즈나 팔로스 버디스에 수백만 불짜리 집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이런 집들은 근사한 수영장까지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집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공한 재미교포들은 이 수영장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하네요. 즉, 돈 버느라 바빠서 수영장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사한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쎄 멕시코에서 온 가정부들이라고 합니다. 집안일은 대충하고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마시면서 수영장에서 선탠을 하며 그 집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다 누리고 있다고 하네요. 반면 백만장자인 재미교포 주인들은 한밤중에 들어와 소파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대충 쓰러져 잔답니다.

이 중에서 누가 진짜 주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자기 소유는 아니지만, 자기가 있는 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기쁘고 즐겁게 사는 멕시코에서 온 가정부가 진짜 주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진짜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모습 역시 진짜 주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 안에서 진짜 주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걱정을 멈추지 못하고 있어요. 이것도 걱정이고, 저것도 걱정입니다. 돈 벌어야 한다는 걱정이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걱정을 합니다. 자녀의 교육 문제가 걱정이고, 집안 문제 역시 온통 걱정입니다. 어쩌면 삶 전체가 걱정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걱정 속에서 과연 주님께서 주신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앞서 자기 집의 편의 시설을 주인은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세상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걱정보다는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이 세상 안에서 진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울려 퍼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지시하시는 은총의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걱정 없이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또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래서 그 모든 걱정을 주님께 맡긴다면, 이 세상 안에서 걱정을 줄여가며 진짜 주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신은 운명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지어 줄 뿐이다(아사다 지로).


뛰어내리려는 이유(‘좋은생각’ 중에서)

진심 어린 경청은 섣부른 오해와 의심을 막지만, 사람들은 이를 종종 잊어버린다.

미국의 유명 앵커 링클레이터가 한 프로그램에서 어린 소년을 취재했을 때의 일이다. 링클레이터는 소년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니?”

그러자 소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는 멋진 비행기 조종사가 될 거예요!”

“하하, 그래? 만약 비행기가 바다 한가운데서 고장 나면 어떻게 할 거니?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의외의 질문을 받은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승객들에게 안전띠를 잘 매라고 하고요. 저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릴 거예요.”

링클레이터는 실소를 터뜨리며 소년에게서 마이크를 거두었고, 주위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요즘 아이들이 저렇게 영악하다니까.”

“세상에, 부모가 어떻게 가르쳤기에...”

링클레이터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소년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게 아닌가. 링클레이터는 아차 싶어 소년에게 다가가 몸을 기울이고 물었다.

“얘야,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려는 이유가 뭐지?”

그러자 소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을 구할 연료를 가져와야 하니까요.”




주님이 보여 주시는 길로 갑시다.

김기현 신부님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했을 때, 그 안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이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 무거운 방화복과 소방장비를 든 소방관들이었다. 이들은 붕괴되는 건물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고 불을 끄려고 뛰어들었다. 이들 중 많은 소방관이 붕괴된 건물과 함께 산화했다.

동료를 잃은 소방관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쉬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허리가 휘는 고통과 싸우며 한 사람이라도 생존자를 찾고자 또 시신을 찾고자 필사적 투쟁을 벌였다.

소방관들의 희생적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인터뷰할 때였다. 기자들이 소방관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해 인터뷰할 때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참조)


미국의 소방관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뛰어들어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며 구조를 지체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그런 정체성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충분한 고민과 신념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주저하고 휩쓸리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사회 사목국에 계신 신부님이 오셔서 강의를 해 주셨는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억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았을 때,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즉시 도와줘야 합니다.’

즉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앙인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또 주님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고 다짐한 이들일 겁니다. 반대로 그러한 결심과 다짐이 없는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이나 소외된 이들을 보았을 때 도와주기를 망설이고 지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모습이 오늘 독서에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길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사랑하는 길이고 생명을 지키는 일이고 믿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갈팡질팡하고 비틀거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주님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일 겁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자니 손해가 있을 것 같고 몸과 마음이 고생할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고 다른 길을 부러워하며 주님의 길이 아닌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일 겁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또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지뢰밭을 가로질러 가는 상상을 해 봅시다. 우리 앞에는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을 탐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향해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쪽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할 때, 누군가 그 사람을 향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오. 나는 강요당하는 것이 싫소.’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지시를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하고 집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인도한 길을 한 발자국도 어긋남 없이 따라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인도하는 길만이 우리의 목숨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의 길, 용서의 길, 그리고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대로 성실히 걷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교회는 담대하고 자유로운가?

이준석 신부님

며칠 동안 우리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하신 말씀은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안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후대의 교회를 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분란에 휩싸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즉 그분의 인격과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내용들이 세상의 가치와 가르침에 반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견된 이들이 걷는 사명의 길이란 고통과 박해와 논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길임을 예수님께서 미리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언제나 반대와 논쟁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을 결정적으로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적어도 교회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경과 논쟁 속에서 교회는 성령의 힘을 받아 담대하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가치들을 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그 어떤 권력이나 세태에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유로운 교회입니까? 이는 오늘 하루 깊이 묵상하며 성찰해 볼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 말씀은 이렇게 저에게 이해됩니다.

“너의 일을 말하고 너의 주장을 필 때는 네가 말하라. 그러나 나의 일을 말하고 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네가 떠들지 마라.”

이 말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어디에서건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어떤 때 우리는 얘기할 수 있는 자리이고 해야 하는 자리인데도 쑥스러워 또는 두려워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복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성호경과 함께 식사기도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누구를 돕고 싶어도 남이 볼까 봐 돕지 못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더구나 반대자들 앞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리떼 가운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지 말라십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머리 굴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기는 그러한 지혜와 순박함이어야 합니다.

미련스럽게도 하느님의 일을 제가 할 수 있는 것처럼 덤비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려고 그악해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나의 일로 가로채고 하느님께서 하실 것을 내가 하겠다고 설치는, 그런 주제넘고 미련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중용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의 동기신부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본 의사선생님은 그 신부에게 왜 젊은 사람이 몸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느냐며 버럭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라면 몇 년밖에 살 수 없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겁이 난 그 신부는 여러 다른 병원에서 같은 검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결과는 거의 같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의사 선생님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은 맞지만 열심히만 치료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는 낼 모래 죽는다는 의사 선생님보다 희망과 위로를 주는 의사 선생님께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무서운 사제보다는 자비롭고 온유한 사제가 되어야 신자들이 편하게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가 여동생의 옷을 사주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갔습니다. 한 옷가게에 갔더니 판매원이 그 신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은 상체보다 하체가 짧기 때문에 칠보바지는 피하시고 짧은 반바지나 다리를 길게 보이게 하는 바지를 입으셔야겠습니다."

그 친구는 허리에 철심을 박았기 때문에 상체가 더 깁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분이 나빠 다른 가게로 옮겼습니다.

그곳 판매원은 정반대였습니다. 지나치게 친절했고 모든 것에 있어서 칭찬만 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자신이 고른 옷을 입고 나오자 또 매우 잘 어울린다며 마치 동생을 위해 만든 옷 같다고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빠가 볼 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그 판매원이 무조건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오빠는 좀 전의 냉철하게 판단해 주었던 판매원이 있는 가게로 가서 옷을 사기로 결심했고 그 판매원의 조언에 따라 옷을 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좋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하나의 성격의 두드러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다 지니되 중도를 지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콘을 보면 어떤 이콘은 예수님의 양쪽 얼굴을 다르게 그려놓은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왼쪽은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고 오른쪽은 무섭고 정의로운 모습을 지니게 그린 것입니다. 이는 작가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한 얼굴에 자비와 정의를 일부러 그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에겐 반대로 보이는 두 성격, 즉 자비와 정의가 공존합니다. 용서와 심판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비와 사랑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오리게네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빠졌던 것과 같이, 마지막 날엔 지옥이 사라지고 마귀들까지도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오류에 빠지게 되고, 정의만을 강조하게 되면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만을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이 두 극단을 조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수님을 만든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이면서도 어머니셨습니다. 이렇게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이 공존하기에 성모님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도 서로 상반되는 성격이 공존하는데 두 성격을 공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인 것입니다.


제가 이명치료를 할 때 느낀 것인데, 한방에서는 양방에서 이명을 치료할 수 없는 이유를 양방에선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만을 보려고 해서 그렇다며 자신들은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 기능에서 오는 이유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치료함으로써 이명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턱과 목과 척추까지 틀어져서 턱 밑의 긴장된 근육이 신경을 눌러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다며 전신 척추의 사진을 찍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양방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달라고 했더니 귀가 안 좋은데 왜 척추를 찍느냐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식으로 한방의 의술을 좋지 않게 말했습니다.

한방에서는 양방의 기술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양방은 한방을 이해할 수 없다고만 하는 모습을 보며, 둘이 합쳐지면 더 완전한 치료가 이루어질 것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한 쪽만 옳다고 믿는 것은 다른 쪽의 좋은 점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격이 더 좋고 저 성격이 더 나쁘고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이 옳다고 느끼고 상반되는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할 때 잘못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부부가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가졌을 때 더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뱀과 같은 면과 비둘기와 같은 면을 동시에 지닐 것을 명령하십니다. 뱀처럼 슬기로우면서도 비둘기처럼 온순하고, 또 비둘기처럼 온순하지만 말고 뱀처럼 슬기로우라고 하십니다. 뱀과 비둘기가 한 우리에 함께 있다면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겠지만, 실제로는 그 두 상반되는 성격을 한 우리 안에 넣는 능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이 균형은 바로 나와 상반되는 성격을 인정하고 그것 안에서 장점을 찾아내어 나에게 적용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세 명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성격이 상반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은 원래 이래!’라고 단정 짓는 것보다 ‘나는 이런 성격도 저런 성격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라고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무를 심을 때 기름진 땅에 심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척박한 땅에 심는 것이 옳을까요? 당연히 기름진 땅에 심는 것이 좋은 나무를 만드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갑곶순교성지에 있으면서 몇 천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볼 때 좋은 땅에 심은 나무들이 훨씬 잘 자랐던 것 같습니다. 척박한 땅에 심어진 나무 중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죽어 버린 것도 참 많았지요. 

그러나 태풍이 왔을 때 저는 아주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름진 좋은 땅에 심어진 나무보다 척박한 땅에서 힘들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거센 바람을 거뜬히 이겨내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는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 일부러 척박한 땅에 포도나무를 심는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토질이 좋은 땅에 심은 포도나무는 쉽게 자라서 탐스런 포도송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땅 표면의 영양분으로도 충분하기에 굳이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토질이 좋은 땅에 심은 포도나무는 병충해도 많고 기온의 변화에도 민감하며 자연재해에도 약하여 결국 포도의 품질이 떨어지게 된답니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 심으면 자라는 속도는 더디고 열매도 늦게 맺히지만, 생존욕구에 의해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답니다. 따라서 포도 맛도 더 깊고 자연의 변화에 따른 그 품질의 변화도 거의 없다고 하지요. 

이 포도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쉬운 일과 쉬운 돈벌이를 찾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척박한 땅으로 상징되는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이 나를 더욱 더 성장시켜주는 것인데, 항상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려서 편하게 지내기만을 원하는 나는 아니었던 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말씀하시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일부러 고통의 바다 속에 빠져들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깊이 내려 품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이러한 희망도 전해 주시지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마음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를 주님의 진정한 자녀로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지혜롭지만 꾸밈없는 순박한 마음을 주님께 청해 봅니다. 

고통과 시련이라는 척박한 땅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기를 내뿜다(이정우, ‘새벽향기’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힘들 때 포기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힘들 때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딱 들어맞는 것은 열쇠와 자물쇠밖에 없다.

서로 조금씩 맞추며 사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무거운 짐이다.


악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살아서 선을 볼 수 없다.


성난 말에 성난 말로 대꾸하지 마라.

말다툼은 언제나 두 번째의 성난 말에서 비롯된다.


의인이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을 뿜는 사람이다.





어제 오후에는 가정방문을 다녀왔습니다. 사람들은 가정방문 다니는 저에게 “힘드시죠?”라면서 위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사실 힘듭니다. 그런데 가정방문 하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고 다른 이유 때문에 무척 힘듭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에 힘들까요? 바로 제가 방문했다고 주시는 음료수와 각종 간식 때문입니다.


제가 방문하는 가정에서는 신부가 오랜만에 방문을 하니까 음료수 하나라도 대접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제가 방문하는 집이 몇 군데겠습니까? 한 두 집도 아니고 하루에 보통 3~40집을 방문하는데 집집마다 음료수 한 잔씩만 마셔도 그 양이 얼마나 많겠어요? 물론 그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다른 데에서는 드시지 마시고 여기서만 한 잔 드세요.”


그 집에서만 한 잔 마시고 다른 곳에서는 안마시면 상관이 없겠지요. 그런데 이 집에서는 마시고, 다른 곳에서는 안 마실 수도 없습니다. 서운해 하시니까요. 더군다나 이렇게 음료수를 많이 마시다보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방문하는 집에 가자마자 먼저 화장실부터 들리는 것도 예의에 맞는 것 같지 않아서 음료수 마시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저를 위한다고 하시는 행동들이 사실은 저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행동이지요. 그런데 저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저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실상은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행동과 생각은 불완전한 ‘나’라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즉, 세상에 나가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지혜로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뱀을 예로 들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뱀은 창세기에도 언급되듯이 가장 간교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뱀은 동시에 땅을 기어 다니면서 자기 갈 곳을 알고 위험을 미리 피한다고 하네요. 이처럼 사태 파악을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주님을 향한 순수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내 생각과 뜻대로 행동하면서 주님의 길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지혜롭지도 않고, 또한 순수함도 잃어버린 나의 모습은 아닐까요?


자신의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큰 아픔과 상처도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보다 더 겸손한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의 말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혜롭고 순수한 마음으로 나의 이웃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세상에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사십시오.


어린아이의 약속(홍성중 엮음, '행복을 나르는 배달부'중에서)

성탄절 아침, 한 아이가 성당의 말구유 속에 모셔진 예수님 형상을 세발자전거에 싣고 마당 안을 내닫고 있었다. 이 광경에 놀란 신부가 달려가 아이를 붙잡고 예수님의 형상을 거두어 오려고 했다. 그러자 아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무어라고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왜 빈손으로 오느냐고 묻자 신부가 말했다.

"자기에게 자전거를 주면 아기 예수님을 첫 손님으로 태워주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다는군요. 어젯밤, 성탄절 선물로 부모님에게서 자전거를 받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키는 중이랍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약속 위반을 하고 사는지 세어본 적이 있습니까? 또 그 많은 약속 위반에 대해 당신은 얼마만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요?




끝까지 참고 견디면

기정희 수녀님

3년 전 방인수도회 차원에서 일본 수녀님들과 문화 교류를 통한 일치를 모색하며 서로의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지였다. 거창하게 꾸미기는커녕 폐허 그대로 둔 성지가 초라해 보였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로 성당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열두 사도의 성상은 부수어져 있었는데, 복원하지 않은 잔해들이 어제 일인 듯 처참한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보존하면서 그 사건에 담긴 의미를 신앙으로 알아듣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뼈아픈 유배를 잊지 않고 그때를 대대로 되새기는 것과 같은 마음을 보았다. 일본의 박해는 우리나라보다 더 잔인했다는 사실과 긴 역사의 공백에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신앙의 역사에 대해 들으며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성 베네딕토 축일인 오늘, 복음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기 위해서 현재의 내가 누구이고 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진 박해에도 우리 삶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일 때 끝까지 견딜 힘이 생긴다. 검증할 수 없는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결단을 요구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삶을 보여주신 분들이 성인들이다. 아버지의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 한 이들. 성 베네딕토는 그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기 위해 ‘기도하고 일하라.’고 수도자들에게 권고했다. 창조의 삶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또 다른 창조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일상을 비범화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끈기도 인내도 부족하다. 하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받으리라는 확답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식별할 때 그분은 분명 참고 인내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성인들처럼 내밀한 자아 안에서 만난 하느님 체험만이 끝까지 참고 견디며 완성에 이르는 힘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그분께서 내 뒤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서품이나 종신서원을 하고 첫 사목지로 파견되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지난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오랜 양성 기간을 끝내고 드디어 파견되는 첫 소임지입니다. 그 어려운 신학공부,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일단락 짓고 새 출발하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기대감에 밤잠도 설칩니다. 만나게 될 아이들 생각에 가슴도 설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두려움도 큽니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사람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


짧게나마 예수님으로부터 ‘특별 제자교육’을 받고 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심정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기쁨, 가슴 설렘, 기대감도 컸겠지만, 갖은 걱정, 불안감, 당혹감도 교차했을 것입니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나는 체력이 약한데’ ‘나는 남들 앞에 서면 완전히 쫄아드는데’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목조목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무엇보다도 모든 근심을 아버지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무능력, 소심함을 걱정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인데 미리 앞서서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불볕더위 가운데 하늘은 장관입니다. 휴식시간에 잠깐 평상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강렬한 햇볕과 쪽빛 하늘, 뭉게구름의 조화가 환상입니다.


햇볕이 강하니 온갖 초목들도 제 색깔을 되찾습니다. 완연한 초록입니다.


마찬가지겠지요. 하느님 은총이 강하니 부족한 우리들도 저마다 제 빛깔을 되찾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무한한 은총으로 인해 우리의 나약함이 강건함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모든 걱정들이 평화로 변화됩니다. 우리 내면의 모든 두려움들이 담대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든든한 동반자, 강력한 협조자,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 내 뒤에 그분께서 받쳐주고 계신다는 생각, 그분께서 지속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자가 지녀야할 최우선적인 마음자세입니다




조심하여라, 그러나 두려워하진 마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제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심하라 그러나 두려워할 것까지는 없다.


남자는 늑대, 여자는 여우.

남자는 다 도둑놈.

통념적으로 형성된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쓰는 속뜻은 아무리 양의 탈을 쓰고 있어도 정체는 늑대임을 알라는 것이고, 그러니 믿지 말고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주님께서도 그 파견이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걱정하십니다.

이것은 처음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는 부모마음과 똑같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들 보호아래만 있던 자식이, 그래서 지금까지 보호를 떠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식이 처음 보호를 떠나는 것이 우선 걱정이고 보호 없이 맞닥뜨려야 할 사람들이 당신들과는 달리 자식들을 잡아먹으려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두 번째 걱정입니다.


그러나 걱정의 본질은 자식에 대한 걱정입니다.

아직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보호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람들이 다 부모와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리와 같은 사람을 그렇게 믿었다가 잡혀먹는 것은 아닐까?

좋은 사람이지만 부모와 같을 것이라 믿었다가 실망하고 좋은 사람을 잃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아직 믿음이 가지 않고 걱정이 되지만 세상에 아니 내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 보내면서 단단히 타이르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만날 사람들은 이리들이고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그러니 조심하여라.


그런데 조심만 해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각오를 해야 합니다.

걱정하고 조심해도 결국 닥칠 것은 닥치기 때문입니다.

각오 없이 조심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다 맞닥뜨리면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당황하게 될 것이고 끝내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각오하고 준비하면 차분히 맞이할 것이며 해야 할 것을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그 각오가 죽을 각오라면 두려울 것도 없고 못 이룰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최악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이리 같은 사람이 이리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각오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와 부모와 자식이 이리 같은 짓을 할 것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복음 선포를 하는 경우에는 주님 때문에 부모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을 각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비둘기처럼 닥칠 모든 것을 순박하게 받아들일 용기를 주시고 뱀처럼 해야 할 말을 잘 할 수 있는 지혜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왜 나에게!’,

‘왜 이런 것이 나에게!’,

‘왜 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짓을!’을 하고 거칠게 따지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차분히 해야 할 것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거부하고 따지고 흥분하다 해야 할 일 하나도 못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손길 안에

홍영선 신부님

미사가 끝난 후 내리쬐는 햇빛이 참 곱다고 쳐다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간 이식 수술을 하고 늘 마스크를 하고 미사에 왔는데 오늘은 환한 얼굴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하자 사실은 지난주에 몹시 앓았다고 했습니다. 


상태가 악화되어 재이식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진정이 되어 왔다면서 옆에 서 있던 부인은 눈물을 글썽입니다. 20퍼센트의 실패율이 있다고 하면 다섯 명 중 하나에, 30퍼센트의 재발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세 명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한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나니 오히려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더 살게 해주시면 더 살고, 일찍 데려가시면 그대로 맡기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한 마음도 있었지만 사람이 자랑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 교우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풀잎과 같이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지요. 인도하시는 목자의 뒤를 따라 걷고, 어려운 때를 만나면 그분께 의지하며 견뎌나가는 인생이지요. 왜냐하면 인생은 막막한 우주 공간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싸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복음 전파를 떠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 생각되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이라는 한계가 바로 이 세상 이리떼에게 우리가 먹혀버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죽음이기도 하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살기위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복음 전파의 길이 어떻게 될지 그 어려움과 위험을 직접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할 때 겪게 될 일들입니다.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사랑을 해도 죄가 되고, 사랑을 하기에 고문과 위협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도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오히려 봉사와 희생으로 일관한 삶이 의심을 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음 전파. 그 삶이 그렇게 불가능한 현실을 넘어, 이런 엄청난 결과까지 내 다 볼 수밖에 없다면 그 길을 우리가 과연 걸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계속 될수록 자꾸만 불가능으로 굳어져 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길을 누가 걸어가려 하겠습니까? 피해가자, 돌아 가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길이 아니라고 이리떼 속에 한 무리가 되는 길이라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에게 살아남는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맘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험의 상황은 현실이 되며,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랑에 반하여 화를 내거나 악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억울함이라 하더라도 흥분하여 화를 내면 자신이 알려왔던 모든 하느님의 사랑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자녀인 자신도 허물어져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다면, 어떤 상황을 만나도 흥분하거나 겁먹지 말고, 우리의 사랑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물어보고, 그런 그들의 잘못을 오히려 드러낼 수 있도록 냉정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에서조차 주님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일은 어차피 시작부터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상황에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라 하시는 겁니다. 사랑을 전합시다. 그러면 고난은 분명히 옵니다. 그러나 각오했다면 그 상황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우리에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자신들을 위해 이용하려 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형제끼리, 부모자식끼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을 위한 사랑으로 싸우는 모습을 목격할 것입니다. 그들 안에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얼마나 좋은 먹이거리입니까? 


그러나 끝까지 그 싸움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다 빼앗겨도 그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을 돌려놓게 하는 일. 그것이 복음 전파의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책임지시니. 단호한 각오로 하루를 살아갑시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게 말입니다.




박재현 신부님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떠나 보내시는 예수님의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 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슬기와 양순함이 닥쳐올 어려움을 이겨내는 열쇠입니다.

비둘기처럼 양순하여라. 200주년 성서는 "순박하여라"로 번역합니다.

악한 것에 물들지 않는 것, 흠잡을 데 없이 순결한 것, 이것이 양순함의 의미입니다.

죄 없이 순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은 닥쳐올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순결함, 양순함, 깨끗함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슬기로움은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서는 현명함을 이렇게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마태 2, 24)

2.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마태 24, 46)

3. 신랑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잔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슬기입니다. (마태 25, 2 + ) 

순결함, 깨끗함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실행하고 깨어 준비하고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어려움과 위험을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고린 4, 10)

그리스도를 믿음이 슬기며 현명함입니다.




현대의 박해의 의미는?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모략하여 선전한 데서 오는 것 이었다. 


1.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세우신 성체 교리에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받아 마셔라. 이는 내 피다" 하신 말씀을 악용해서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고 했던 것이다. 


2. 신자들을 비도덕적인 무리들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신자들이 집회를 가지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축성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었는데, 이 아가페, 즉 사랑의 잔치라는 것을 불미스러운 행위라고 모략했다. 


3. 신자들을 방화범이라고 비난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람들은 세상 끝날에 불로 망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방화범이라고 했다.


4. 신자들을 가정생활을 파괴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면 남편이 아내를 떠나고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하고 등등의 말이 나오는데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중상 모략하여 박해했던 것이다. 


5. 신자들을 당시 사회제도를 파괴하는 자라고 박해했다.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노예문제였다. 당시 로마제국 안에는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로마인들은 이 노예들이 일어나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를 인간으로 평등하게 한 형제, 자매로 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노예 해방이나 노예제도를 비난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교회 안에서 노예를 똑같은 사람으로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제도에 대한 큰 도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박해의 큰 원인은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면서 그의 석상 앞에서 분향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당시 전 유럽을 일인 통치하에 두고 세력확장을 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권위있는 신적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런 인물로 로마황제를 세웠던 것이다. 로마는 어디를 가나 평화, 신뢰를 받는 정치, 시민의 질서를 꾀하고 해적, 산적, 불량배를 소탕하여 정의로운 혜택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 황제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고 1년에 1번은 향을 드리라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주"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국가 시책에 위배 된다는 이유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이러한 요인으로 희생되었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떠한가? 지금의 박해를 우리는 어떻게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살펴보자. 현대에는 이러한 양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체면을 내세워서,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서, 그리고 여러 가지로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게끔 유인하는 요인들을 통해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이것들을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이기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대한 은총을 구하자.




최요섭 신부님

세상을 살아가면서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가족의 건강과 생계를 위한 걱정을 하게 되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남편과 자식들의 대한 걱정으로 애를 태우게 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애들이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자녀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몸소 체험하면서 걱정거리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특별히 입시라는 관문을 앞두고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을 오고가야 하는 이 땅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걱정과 근심은 말이 아닙니다. 이렇듯 모든 이가 저마다의 관심과 걱정거리가 있듯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걱정과 관심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여벌 옷이나 신발, 지팡이 그리고 돈주머니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복음 선포자로서의 몸가짐과 행동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복음 선포자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될 고통과 박해 앞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성령께 맏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걱정은 모든 근심과 슬픔 그리고 고통의 근원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미리 걱정을 한다 해서 그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해서 하루하루가 바늘방석 같고 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일 것입니다. 따라서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내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에 용기를 가지고 걱정과 근심 그리고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잃은 사람에게 맹자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이절 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외롭다는 것은 사람이 걸어가야 될 길을 말한다. 그 길을 버리고 걸어가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고 찾을 줄 모른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사람은 닭이나 개를 놓치면 찾을 줄 알면서도 마음을 놓치면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은 그 놓친 마음을 찾는 데 있을 뿐이다.” 기원전 3~4세기의 맹자님과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렇듯 마음을 찾는 일에 몰두했듯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역시 잃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되찾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 담긴 메시지도 결국 인간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 신앙인이든 신앙인이 아니든 누구에게나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하루도 만나는 사람마다 하시는 일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걱정과 근심보다는 기쁨과 즐거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나만의 감실 하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베네딕토 성인께서 살아가셨던 시대는 전쟁과 혼란, 그로 인한 민족들의 대이동 시대였습니다. 힘겹게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봐야 허사였습니다. 약탈이 수시로 반복되었습니다.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불안정했습니다.


이러한 시대 베네딕토 성인은 정주(定住) 수도회를 설립함으로써 시대의 요구에 응답합니다. 높은 산 위에 견고하고 웅장한 수도원을 설립합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이 이곳 저 곳 떠돌아다니지 않고 고요하게 정진(精進)할 수 있는 관상 수도회의 기틀을 닦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수도회를 건립하고, 수많은 수도자들의 참된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기까지는 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때로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 한 동굴 안에서 3년간이나 홀로 생활했습니다. 그 외로운 나날을 통해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베네딕토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과 대면합니다. 어둠의 세력과 맞붙어 힘겹게 싸워나갑니다. 철저한 고독과도 투쟁합니다.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베네딕토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점차 확장시켜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베네딕토의 삶에 매료된 입회자들이 점점 늘어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리원칙주의자였던 베네딕토를 견디다 못한 수도자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워낙 대쪽 같던 베네딕토였기에 아직 그들의 나약함과 미성숙함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베네딕토의 열성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던지 그를 따라가지 못했던 수도자들은 독살(毒殺)까지 시도합니다. 이처럼 베네딕토 역시 흔들렸습니다. 난관 앞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런 험난한 여정을 거치면서 베네딕토는 서서히 내공을 쌓아나가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자신의 내면 깊숙이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자리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영혼의 바탕을 마련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그 누구도 점령할 수 없는 견고한 성채 하나를 건설합니다. 거룩한 감실 하나를 준비합니다.


이제 베네딕토는 그 어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도 동요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평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감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만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참 지도자, 참 스승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안에 참 평화를 확립한 베네딕토에게 있어 주변 환경은 점점 밝고 풍요롭게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역시 평화롭게 되었고, 내적, 외적 사슬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확고하게 마련한 베네딕토에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은총을 입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몰입이 가능해진 베네딕토는 그간 자신을 덮고 있던 막 하나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을 통해 세상과도 하나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존재와 쉽게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니 용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 체험은 산더미처럼 쌓인 우리들의 문제와 고통들을 하느님 자비의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게 합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하느님 체험을 거친 베네딕토였기에 만년에 다가온 죽음조차도 친구로,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쳤습니다. 선채로 열렬히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 품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죽음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돌이켜보니 수시로 흔들리는 나약한 우리들입니다. 지나가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심각한 상처를 받습니다. 난 데 없이 다가온 돌 하나에 죽느니 사느니 난리입니다. 외부 환경적 요인에 너무나 민감합니다. 삶이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짜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베네딕토처럼 우리 내면 안에 우리만의 자리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 그분만을 모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그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시는 한, 그 어떤 세상 풍파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짖궃은 질문을 종종합니다. 아마 이런 질문을 어렸을 때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때 얼마나 난처했습니까? 엄마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반대로 아빠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 질문에 대해서 세가지 반응을 볼 수 있다고 하네요. 다음 이야기를 한번 보세요.

이모가 와서 가만히 아이에게 물어 봅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러면 아이는 아주 오랜 끝에, 이모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데요. 

첫째. 순진한 아이: "아빠가 좋은데, 엄마는 더 좋아.. 그런데 이모! 비밀인 것 알지?"

바로 이때 삼촌이 아주 큰 장난감을 사들고 와서 누가 더 좋으냐고 묻습니다.

둘째. 영악한 아이: "삼촌이 더 좋아~~"

엄마, 아빠가 바로 옆에 계신데, 고모가 들어와서는 묻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셋째. 발칙한 아이: 아주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둘 다 그저 그래."

순진한 아이, 영악한 아이, 발칙한 아이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한 글이었지요? 


사실 우리들 안에는 이 3가지 모습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진한 모습을 할 때도 있고, 영악한 모습을 취할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발칙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도 순진한 모습과 영악한 모습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발칙한 모습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즉, 세상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처리하는데 지혜로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이 세상의 발칙한 모습을 취할 때가 많지 않나요? 그리고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옹호하곤 합니다. 

"나는 너무 주관이 뚜렷해서 그래. 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 나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나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또한 내가 남을 배려하지 않는데, 남에게서 배려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커다란 욕심일 뿐이지요.

발칙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보다는 지혜롭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하여 봅니다. 즉, 우리 모두가 나만을 드러내고 나만을 합리화시키려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을 순수한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취할 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주님 앞에서 발칙한 아이가 되지 맙시다.


버스기사의 선택(‘좋은 글’에서)

이 얘기는 스웨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는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고,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버스는 횡단보도에 이르렀는데, 버스기사는 그때서야 브레이크가 고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미 때는 늦은 거죠. 그때 마침 조그만 유치원생 아이가 손을 들고 길을 건너는 것이 운전기사의 눈에 띄었고, 운전기사는 핸들을 잡고 절망적인 기분으로 고민을 했죠. 저 작은 아이를 피해 핸들을 꺾는다면 이 버스 안의 사람들은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 그러나...

저 아이의 희생으로 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버스 운전기사는 곧바로 아이를 향해 차를 몰았고 그 버스에 부딪힌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죠.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운전기사를 향해 욕지거리를 하며 몰아세웠죠.

승객들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라고 욕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죠. 버스 운전기사는 조용히 버스에서 내려 죽은 아이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미안하다... 아들아..."





많은 분들이 저를 두고서 ‘신부님은 상당히 부지런하세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제가 일찍 일어난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본 저의 모습은 너무나 게으릅니다. 특히 정리 정돈을 잘 못하고 방 청소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사를 한 뒤에 설거지를 뒤로 미루는 저의 행동은 제가 얼마나 게으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모습들입니다.


하긴 주부들도 설거지가 제일 귀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식사 준비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설거지하기는 전혀 재미있지도 않고 누군가가 그 부분을 담당해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하네요(맞지요?).


저 역시 갑곶성지로 인사이동이 된 뒤, 제가 직접 식사를 해 먹기 때문에 주부들의 이 마음이 이해되더군요. 즉, 식사를 한 뒤에 설거지를 곧바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짜증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식사를 하고 난 뒤, 설거지 꺼리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조금만 쉬었다가 설거지 하자.’


이렇게 뒤로 미루면 다음 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설거지 꺼리가 싱크대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 식사 준비를 포기하고 밖에 나가 음식을 사먹는 경우도 많았지요.


사실 설거지는 그때그때 하지 않으면 이렇게 귀찮아지는 것은 물론, 그릇에 음식물이 붙어버려서 잘 닦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귀찮다는 이유 때문에, 또 바쁘다는 이유로 뒤로 미루면서 다음 식사를 포기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 순간에 귀찮아도 식사 후 곧바로 설거지를 하고 나면, 다음 식사 준비를 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식사 준비를 하게 되지요.


이러한 저의 게으른 모습을 보면서, 제대로 된 준비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잘 마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잘 마무리하는 모습이 새로운 일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잘 마무리를 하지 못하지요. 시작은 정말로 멋지지만, 흐지부지하게 끝맺음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렇게 형편없는 마무리가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걱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래서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도 말씀하시지요. 그러면서 아주 자세히 어떤 식으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지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지금 이 현재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준비시켜주십니다. 성서를 통해서 각종 영적 말씀들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완성을 위한 노력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요? 혹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처음만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한 뒤, 얼마 가지 못해서 흐지부지 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 스스로 타협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해.’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걱정하셨던 이유는 이렇게 당신의 그 준비를 완성시키지 못하는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설거지를 미루지 맙시다.


결혼식 주례사 중에서...

음식에 양념이 없다면 맛이 없을 것입니다. 김치에 소금과 고춧가루가 없다면 그 맛이 제대로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음식처럼 당신의 결혼 생활에서도 양념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결혼 생활을 위한 양념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불고기를 만들 때 맛있게 하기 위해 양념을 뿌리는데 때로는 키위를 사용합니다. 키위(kiwi)는 고기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결혼 생활에서도 이렇게 추가 양념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오래 참는 기본 양념에 온유한 양념, 투기하지 않는 양념, 교만하지 않는 양념이 들어간다면 결혼 생활은 더욱 달콤할 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이런 양념을 넣지 않기 때문에 밋밋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치에 양념을 넣지 않으면 얼마나 싱겁겠습니까. 얼마나 그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결혼 생활도 양념이 없기 때문에 맛나지 않습니다. 이제 양념을 칠 때가 됐습니다.




파견된 제자의 덕목 - 슬기롭고 순박하게

여성국 신부님

얼마 전 미사 때 성체를 분배하다가 성체 가격(?)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체 값을 낸 그 자매는 약간의 정신 지체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미사 때마다 성체를 영하러 나오는 그 자세가 너무 불량했습니다. 어느 날 미사 시작 전에 시간이 남아서 이 자매에게 영성체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미사 때 성체 값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주는 겁니다. 성체를 분배하는 도중이라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내심 사제품을 받은 후 받았던 선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였기에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슬기로움’과 ‘순박함’의 덕목을 갖출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미사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파견받은 제자로서 우리 또한 슬기롭고, 순박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순박함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영악스러울 정도로 슬기롭지(?) 않습니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백남국 신부님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시면서 가족 안에서까지도 서로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을 철저히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주님께서는 또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 하시며 무조건 맞서기보다는 조금 더 지혜롭게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뚜렷이 드러나는 박해는 없을지라도 지금 역시 수많은 어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슬기롭고 무엇에 순박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우리의 적으로 돌리지 않는 슬기로움이 아닐까요? 또한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믿음으로 온유하게 박해자들 앞에 맞설 수 있는 여유로움이 아닐까요? 믿는 구석이 있으면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 앞에서 온유해질 수가 있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부끄러운 기억이 많이 떠오릅니다. 온유해야 할 상황에서 얼마나 자주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렸는지요. 그만큼 자신감이 없었다는 뜻이겠죠. 또 슬기롭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시점에 얼마나 무식하게 몰아세우며 그들에게 주님께 대한 반감을 심어주었는지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슬기로움과 순박함보다 더 효과있는 무기가 있을까요?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말씀처럼 저의 삶이 슬기롭고 순박하게 성령 안에서 신앙을 잘 증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천국에 이르는 꽃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 도로에서 저희 수도원까지 올라오는 진입로가 있습니다. 산을 마주보며 걷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언덕길이지요.  


언젠가 사목활동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밤늦은 시간, 기온도 뚝 떨어져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산도 없이 그 길을 걸어 올라오자니, 얼마나 멀던지, 얼마나 짜증나던지, 얼마나 또 무섭던지...  


반면에 꽃 잔치가 계속되던 4월 말경, 그 길을 올라오는데, 정말 천국이 따로 없더군요. 진입로 왼쪽 언덕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했습니다. 오른쪽에는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꽃잎들이 흩날렸습니다. 그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배경으로 보이는 뒷산은 온통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습니다. 황홀경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 길을 올라오자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같은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똑같은 길인데, 어찌 그리 느낌이 달랐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네 인생길 마찬가지겠지요. 나 혼자 걷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외로울 뿐입니다. 두렵습니다. 지루합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내 바로 옆에 동행하신다고 생각할 때, 주님께서 내 앞길을 인도하고 계신다고 확신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날이면 날마다 천국으로 향하는 꽃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 아무리 악천후의 날씨라 할지라도 찬미의 노래가 우리의 입술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위해 길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특별 정신 교육을 실시하십니다. 걱정이 많이 되셨기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특별 당부를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힘을 주시는 한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을 용기를 얻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여정을 걸어가면서 절대로 두려워할 일 없습니다. 아버지의 영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손을 꽉 잡고 계십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그분께서 대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하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하라.

강영구 신부님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그대에게

세상은 살벌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의 장(場)입니다. 

어떤 형태의 힘이든 힘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 곳입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지위, 명예와 지식, 

하다못해 완력(腕力)이나 폭력이라도 지녀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뛰어다는 이유도 이런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마태10,9-10)고 명령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재력이나 권력이나 학력 따위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벌한 세상 한가운데 보냄 받은 비무장(非武裝) 무소유(無所有)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를 내어줌이거나 잡아먹힘입니다. 

사실 하늘나라(天國)는 내어줌과 잡아먹힘으로 도래(到來)합니다.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잡아먹겠다고 서로 덤벼들면 그때부터 지옥(地獄)이 시작됩니다.

이리 떼 가운데 보냄 받은 양이 살아남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이리 떼에게 자신을 비둘기처럼 양순한 모습으로 내어주는 것이 슬기이자 지혜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빵(요한 6,48)으로 이 땅에 오신 스승 예수님을 닮아서 이리들의 밥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오늘은 송두리째 자신을 내어주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행복할 것이며, 당신을 잡아먹는 사람도 행복할 것입니다.(一明)




장재봉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예수님 께서 손수 뽑아주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갖고 오신 그 능력을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우리들이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하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예수님께 아주 요긴하고 필요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모인 우리 교회는 즐기기 위한 사교모 임일 수 없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해관계로 모인 단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참된 삶 의 공동체란 그분께서 사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를 중심으로 모여 이룬 이 공동체는 순수한 사랑의 집단이며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잠겨있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당 연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바는 세상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어리석다 하면 틀림없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에서 잘나지 않았다 면 더욱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더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이 겁먹을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뽑으실 때에도 밤새워 기도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는 것 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넓히시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힘 을 쏟아 주고 계심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힘을 믿는 것만으로 “의인”이라 불러 주시 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 드리고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영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이기에”, “예수님이기에”, “내 이웃이기에” 비록 나에 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랑하는 것. 참 자유입니다. 

예수 님이 누렸던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이 용서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뜻을 꺾어 바치면서 그 수를 헤아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얼마 만큼의 잔 꽃송이를 드렸는지 계산해 보도록 합시다. 

못난 내 마 음을 꺾어 그분의 부드러움을 접목시킨 그 자리마다 고운 꽃 한 송이 피어 있을 것입니다. 

잠들기 전 그 분 앞에 그 꽃다발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로 자유로운 복된 자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마태 10,17-22)

유광수 신부님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나 때문에" 즉 예수님 때문에 받는 축복도 많고 기쁨도 크지만 또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많고 또 해야할 일도 많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삶의 방법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반드시 증언할 것이 있고 해야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말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성령 즉 아버지의 영이 일러 주시는 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 앞에 끌려 나가 모욕을 받는다든지 어떤 손해를 입는다든지 아니면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무슨 말을 하게 되는가?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될까? 아니면 기쁘다는 말을 하게 될까? 대개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거나 피해를 입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쉽게 나오는 말은 결코 고운 말이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욕이나 맞고소 또는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악랄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복수할까를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험담을 늘어 놓게 되기 쉽다. 우선 분노로 상대방에게 결코 복음 적인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좋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할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게 되고 갈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누군가가 자기 비위를 거스리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게 되면 즉시 말 다툼을 하거나 원수까지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로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이 아니다. 그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16,13-14)라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할 때 그 때에 할 말은 내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하면 된다. 그런데 평소에 이것이 잘 안된다. 왜 그럴까? 평소에 복음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생활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저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이요,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쉽게 내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기 쉽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욕도 하게 되고 심하면 싸움까지도 하게 된다.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잘 판단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에 더욱 기도를 해야한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할려고 하던 것을 절제하고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는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해답을 찾고 그리고 나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복음을 생활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이다. 어떤 특별한 때에만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생활하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에 어떻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더라도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할까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러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데 어떻게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을 듣겠는가?


성인들이 또는 순교자들이 박해 때에도 꿋꿋하게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늘 기도하면서 말씀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비슷하다."(마태 13,5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가 자신도 모르게 그 때 그 때마다 꼭 필요한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법이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하이터치

김권일 신부님

지금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거나 통치자들 앞에 끌려 나가 증언해야 할 일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돈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절대적 가치나 신적 존재를 부인하는 상대주의와 세속주의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스러움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그리고 복음적 가치들을 외면하게 한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현실 속으로 나를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고도로 기술문명이 발달한 현대를 하이테크 시대라 칭한다. 존 나이스비트는 하이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하이터치’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기술문명이 제공해 주는 편리함과 빠른 속도에 열광하고 있지만, 그칠 줄 모르는 경쟁과 속도감에 지친 사람들은 그 내면에서 느린 삶의 형태가 가져다줄 수 있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갈망하고 있다. 복음서를 보면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러한 손길을 현대인들은 원한다. 현대인들의 갈망을 고려한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오늘 복음은 말한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체화되어 온유하고 따뜻한 태도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바로 현대인들을 위한 복음 전파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덕경에서는 “최고의 선은 물처럼 부드럽다.”라고 말한다. 무한 경쟁 구도에서 현대인들은 지쳐 있고 마음이 병들어 있다.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가 그들을 섬기고자 할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얼마 전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사진 한 뭉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정리하겠다고 모아 두었다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책장에 처박아 두었던 사진들이었지요. 사진들을 꺼내서 보니, 그 안에 신학교 시절의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스물 한 두 살 때의 제가 웃으면서 사십대 중반에 들어서고 있는 저를 바라보고 있네요. 그때의 모습을 보면서 ‘피부도 탱탱했고……. 이때가 좋았는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를 떠올려 봅니다. 그때의 저는 너무나도 걱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외모에 대해서도,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늘 자신 없어 했지요. 사진을 보니 지금보다 훨씬 멋있었던 이십대였는데 부족함만을 바라보면서 항상 소극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문득 육십 대가 되어 사십 대 때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저를 상상해 봅니다. 과연 사진 속의 저를 바라보면서 어떤 말과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지금의 저처럼 ‘왜 이렇게 살았니?’라면서 또 후회를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이 가장 젊을 때이며, 지금이 가장 최고의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일 역시 가장 최고의 때인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함을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러한 선교 사명을 잊습니다. 특히 세상 일이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서 주님의 명령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할 시간도 없다면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을 만드는 것이며, 후회할 일을 또 하나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을 늘 기억하라고, 또한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어렵고 힘든 일들을 끝까지 견딜 때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예수님께서는 전해 주십니다.

세상일도 어렵고 힘든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의 일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다고 포기해버린다면 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후회를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후회를 줄여나가고 지금에 최선을 다할 때, 먼 훗날 지금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때는 참 열심히 살았다.’

하느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옳게 사는 법은 자기 주변 것을 다 버리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가진 것을 다 버려도 너 자신만은 버리지 마라.(피천득) 


똑같은 하루는 없다

요즘에 저는 이문열 씨가 평역한 삼국지를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에 다른 작가가 번역한 삼국지를 이미 읽었기에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며, 그 결말 역시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 번역을 했느냐에 따라서 그 관점이 바뀌어 질 수 있음을 요즘 이 삼국지를 읽으며 깨닫게 되었지요. 

결과가 뻔하면 재미가 없다고 하지요. 예를 들어서 영화를 보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미리 그 영화를 보고서 내 옆에 앉아 영화의 내용을 계속해서 말한다면 어떨까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즉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뻔 한 결과를 알고 있어도 재미있을 수 있음을 이번에 삼국지를 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매일 매일이 똑같아서 지겹다고 말을 하십니다. 그러나 똑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똑같은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리석은 내 자신이 문제일 뿐인 것입니다. 

항상 새로운 지금이라는 시간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멋진 과거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고난의 행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올바른 종교는 인간을 소유가 아니라 이탈을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평생토록 지녀야할 일관된 자세 하나가 필요합니다. 부단히 ‘작은 나’를 극복하고 ‘크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작은 울타리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가는 동료들에게 더 큰 세상, 더 큰 선, 더 큰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대체로 꺼려하는 고난과 시련, 가난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가장 가까이 두고 지내야 할 ‘절친’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주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몰두할수록 무병장수, 현세축복, 만사형통이 따라올 것이라는 가르침이 울려 퍼지는 교회라면 심각한 반성과 자기 진단이 필요합니다.


제한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인생의 시련과 우여곡절은 필수입니다. 출생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화사한 봄날을 즐겼다면 혹독한 추위도 견뎌야 합니다. 꽃 같은 청춘시절을 만끽했다면 외로운 노년기도 맞이해야 합니다.


인생의 상승 곡선을 그렸다면 언젠가 반드시 하강곡선도 타고 내려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지속적인 현세의 축복과 성공의 보증수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제자교육을 마친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은 현세적인 성공이나 물질적 축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 당신을 선택함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의 반대와 고소, 채찍질과 법정 증언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주의를 건네셨습니다. 미움과 박해, 분열과 상처가 뒤따를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길이 ‘고난의 행군’이 될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스승이었기에 걱정도 많이 되셨겠지요. 얼마나 걱정이 컸던지 이렇게 주의를 주고 계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그러나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길이 마냥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지만은 않을 것임을 동시에 확증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제자들의 여행길에 항상 동반하실 것이기에 안심하라고 격려해주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더불어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향한 여행길이 힘겹고 고달프겠지만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라고 강하게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늘 하루 우리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고 구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 곰곰이 묵상해봐야겠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파견하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어려움을 생각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뱀의 슬기, 그리고 비둘기의 순박함.

등장하는 뱀이나 비둘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슬기롭다는 말과 순박하다는 말이다.

우리 말 성서에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라틴어 성서를 찾아보니 “뱀처럼 빈틈이 없고 비둘기처럼 단순하게 되어라.”("Estote ergo 'prudentes' sicut sepentes et 'simplices' sicut columbae.")로 되어있다.

‘빈틈이 없다’는 말과 ‘단순하다’는 말은 분명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말들이다.

아니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닌 단어로 보여진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리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모습을 제자들이 지녀야 한다고 하셨을까?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상충되는 듯한 복음적 단어들은 제법 많이 있다.

정의와 사랑, 인내와 열정, 선포와 침묵, 평화와 불(火) 등등.

그렇다. 이들은 서로 상충되는 단어들이 아니다.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은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희망에 대한 열정 없이는 인내할 수 없다.

침묵 안에서 그분께 귀를 기울지 않으면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자신을 불태우지 않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늘 깨어 있으라 하신다. 그리고 어린이처럼 단순해져야 한다고도 하신다.

깨어 있다는 말은 슬기롭다는 말이다.

옳은 것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순박하고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이 없다면,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깨어서 신랑을 기다릴 수 없다.

순박하고 단순한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옳음을 위해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없다.

결국,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은 악의 유혹이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해서 믿음을 갖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리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김기현 신부님

보통 새벽미사 강론은 나오는 신자 분들이 많지 않아서 신자들 각자가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읽고 나눔을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한 자매님이 오늘 복음 중간의 내용을 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그리고 대략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엄마가 저녁에 교리 공부를 하시고 돌아가는 길에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냐.. 고 물어보셔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하고 설명을 드렸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그 순간에 필요한 얘기를 알려주신 거 같다...’ 고 하셨는데요. 그거는 하느님이 불어넣어주신 생각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분께서 해야 할 말을 알려주신다는 것은 아마도 ‘내 안에 담겨진 생각들 가운데 해야 할 말을 선택하게 해 주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 사도들도 전혀 백지 상태에서 어떤 말을 내뱉은 건 아닐 거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가르침을 듣고 마음에 담았겠죠.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삶으로 체험되고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서, 상황과 시기에 맞는 적절한 말씀들이 톡톡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도 평소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지만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강론 할 때인데요. 아무 준비도 없이 강론대에 올라가면 어떨까요? 지난번에 한 자매님이 ‘요점이 뭐야..’ 하며 서로 얘기를 하셨다고 하는데, 대략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준비하는 과정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 기도하고 묵상하고 삶으로 살아가 보는 것인 거 같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해야 할 말을 만들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체험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일상의 소박한 이야기를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또 머리와 마음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모아서 말이 되는 흐름과 조합을 반짝 보여주시기도 하고, 어떤 주제가 번뜩이게도 해 주시는데요. 그렇게 엮어주시고, 숙성되게 해 주시고, 해야 할 말을 선택하여 주시는 것이.. 그분께서 해야 할 말을 알려주신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베드로처럼 해야 할 말을 하느님께서 직접 넣어주셔서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신앙고백을 하기도 하고, 성모 발현을 목격한 이들이 전혀 배워보지 못한 교리들을 입에 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문 일일 거 같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이 마주하는 상황은 그분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고 치열하게 닮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얻어지는 결실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 어떤 교수 신부님이 그런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몇 날 며칠 책을 읽고 고민하며 논문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자고 있었나 자리를 비웠나 그랬는데, 들어와 보니 아마도 자기를 잘 아는 교수님이 그러셨던 거 같은데, 문제의 해결이 보일만한 실마리가 될 만한 책을 두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 책을 보고 ‘아하~’ 하고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법도 그와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는 치열함 속에서 어떤 결실로 도약할 수 있도록 어떤 도움을 주시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 봅시다. 언젠가 해야 할 말을 톡톡 내 뱉을 수 있도록 그분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요즘은 공부 못하는 애가 효자라고 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공부 잘 하면

학원 보내랴 유학 보내랴

교육비 때문에 힘든데,

공부 못하는 애는 그런 걱정을 시키지 않는다는 거다




맞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것이란 어떤 겁니까? 


이어지는 주님 말씀에 세 가지 명령어가 나옵니다.

“조심하여라.”

“걱정하지 마라.”

“피하여라.”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면서 조심할 것은 조심하고, 걱정하지 말 것은 걱정하지 말며, 피할 것은 피하며 사는 것이 슬기롭고 순박하게 사는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조심하고 피하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조심하여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고로 머리가 검은 동물은 조심하라.’는 말처럼 인간은 누구든 조심하라는 그런 뜻입니까?

제 생각에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란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을 사람들, 곧 박해자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을 조심하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모순처럼 들리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 박해자들이 우리를 의회에 넘기고 죽게 할 텐데 그런 상황이 되면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도 말고 그런 상황이 닥치면 견디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박해의 상황이 올 것을 조심하고 피하라고 하시면서 또 동시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데 서로 모순이 되는 거 아닌가요?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이지만 박해자들을 조심하고 피하되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야 될지 걱정하지도 말고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인 거고, 이렇게 하는 것이 슬기롭고 순박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나는 순교할 거야!”하면서 조심하지 않고 무대포로 덤비는 것은 순교의 열정 면에서는 순박하지만 슬기롭지는 않다는 말씀이지요.

우리 삶 가운데서도 맞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목숨 걸 듯이 덤비지 말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똥고집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주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고 그것을 위협하는 사람과는 끝까지 맞서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슬기로운데 우리는 종종 정 반대로 합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데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목숨까지 거는 걸 보면 그 사람에게는 그게 사소한 게 아닌 게지요.

그러니까 슬기롭지 못한 사람은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이 뒤바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소하고 무엇이 중요합니까?

내겐 무엇이 사소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내겐 무엇이 사소하고 무엇이 중요해야 하는지 성찰하는 하루 되게 합시다.


중세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입니다.

소년 마리오와 안셀모는 아주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마리오가 수도원에 들어가자 안셀모는 친구에게 말하였습니다. “위대한 설교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할게.” 그 뒤로 안셀모는 마리오를 위하여 정성을 다해 기도하다가 결국 마리오가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매일 마리오를 보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안셀모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마리오는 사제가 되어 첫 설교를 하였습니다. 안셀모는 떨리는 가슴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마리오 역시 군중 속의 안셀모를 보는 순간 용기가 솟았습니다. 수도원이 생긴 이래 최고의 설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청중은 감동했고, 마리오는 단박에 위대한 설교가로 떠올랐습니다. 여러 곳에서 설교 요청이 들어왔고,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안셀모 수사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리오는 명성이 자자한 주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안셀모 수사를 우연히 만났으나 너무 바쁜 나머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오 주교는 안셀모를 조금씩 잊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리오 주교는 여느 때처럼 설교를 시작했는데 어쩐 일인지 불안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공허해졌습니다. 지난날의 습관처럼 안셀모 수사를 찾았으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안셀모가 몹쓸 병을 얻어 바로 전날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는 운명하면서도 마리오 주교가 걱정할까 봐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뒤로 마리오 주교의 설교는 번번이 청중에게 별 감동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청중의 실망스러운 눈빛에 마리오 주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예전처럼 영혼을 휘어잡는 강렬한 설교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오 주교는 ‘안셀모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서 말씀의 주체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임을 깨달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내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아마 모든 사람들이 찾고 싶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즉, 내가 가진 것만을 바라보고,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면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해하며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가진 것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달렸다.’

사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열하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조금만 주의 깊게 자신을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지를 깨달을 수 있지요. 내가 가진 물질적인 것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들을 빼고서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푸른 하늘, 외롭고 힘들 때 내게 큰 위로를 건네주는 친구들, 나를 웃음 짓게 만드는 잊지 못할 추억들, 대중매체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즐겁고 감동적인 말과 노래 등등……. 

문제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남들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가진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없는 것들만을 따지고 있기에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차원에서 행복은 이미 나에게 와 있음을 깨닫습니다. 단지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나의 욕심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이 욕심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나를 힘들게 만들었으며,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길로 인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러한 용기를 건네줍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아버지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하시지요.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지혜로움을 간직함과 동시에,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을 간직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생기는 나의 욕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아마 욕심을 하나 줄일 때마다 나의 걱정거리도 하나씩 줄어들 것입니다.


걱정이 아니라 행복이 인생의 위험을 몰아낸다(괴테).


자기계발서

저는 요즘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40Km씩 탔으며, 저녁에도 헬스 자전거를 탔지요. 그러다보니 몸도 많이 가벼워진 것 같고, 그렇게 많이 나왔던 뱃살도 조금이나마 줄어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멀리했던 체중계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살이 많이 빠졌으리라 생각하면서요.

체중계에 올라서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몸무게 중에서 가장 많이 나가는 몸무게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물만 먹어도 살찌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만, 바로 제가 그런가 봅니다. 특히 이 체중계는 체지방까지 측정되는데, 이를 통해 저의 상태는 ‘고도비만’이더군요.

순간 우울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빠질 살도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체중이 많이 들었다는 것은 그동안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잘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만약 살이 찌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운동할 생각을 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해보니, 살 찐 것도 내게 여러 가지 이득을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운동하러 나가야겠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모든 것을 단순화 시키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기에 앞서 일장훈시하시는 예수님 분위기는 엄숙하고 비장하다 못해 강경하기까지 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강도 높은 수련을 마치고 서원을 하는 발하는 형제들에게, 오랜 신학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사제로 서품되는 형제들에게, 그 모습이 못내 불안하고, 무척이나 안쓰럽고, 그래서 이런 저런 잔소리에 또 잔소리, 그것도 모자라, 마무리 정신교육,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며 또 한 소리... 


그것이 제자들을 바라보는 세상 모든 스승들의 심정이겠지요. 부디 잘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나같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때로 타이르고, 때로 호통치고, 때로 섬뜩한 경고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니 예수님의 ‘잔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사도들이어서 그랬는지 이런 저런 일장연설이 끝도 없습니다. 


“너희들을 세상으로 파견하려니 내가 너무 걱정 되서 밤잠이 안 온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란다. 세상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절대 속아 넘어 가지 마라.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 날카로운 발톱을 몰래 숨기고 있는 사람들을 조심해라. 부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혹시라도 적대자들 앞으로 끌려가더라도 겁먹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더라도 부디 끝까지 견뎌라.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맞서 싸우지 말고 다른 고을로 피해가라.”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예수님의 당부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성덕이란 삶을 단순화시키며, 그 삶을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이란 하느님 외, 복음 선포 외, 옆으로 새어나가는 에너지들을 부단히 차단하고 한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정렬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을 충만하고 거룩한 성인(聖人)의 삶으로 만들고 싶습니까?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을 성공적인 삶, 일생일대의 걸작으로 만들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앞에 펼쳐진 하루를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을 단순화시키고, 마음을 단순화시키고, 삶을 단순화시켜보십시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여러 과제들, 대상들 앞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대상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선택한 대상에 대해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너무나도 당연히 하느님이며,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께서 남겨주신 복음이며, 또 다른 예수님이신 내 이웃들, 내 가족들이 아닐까요? 


성인의 삶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고간다할지라도 끝임 없이 세상을 용서하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내 성화된 삶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켜나가는 그 삶이야말로 성인(聖人)으로서의 충만한 하루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 선포자로서 세상 속으로 투신하며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결코 세상에 물드는 법 없이 세상에 하느님을 선물하는, 세상에 하느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말씀의 봉사자

안융 신부님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형제들이 잠시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수년 만에 돌아온 그들은 검게 그을린 피부와 긴 여행으로 인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생기가 돌고, 무척이나 밝아 보였습니다. ‘무엇이 이 형제들을 이토록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분명 낯선 이웃, 다른 문화,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텐데 그들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기쁨의 원천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말씀’이 되어 오신 ‘주님’ 바로 그분 때문이리라 자문자답해 봅니다.

흔히들 선교사의 삶은 제2의 성소라고 합니다.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삶으로의 입문이 첫 번째 성소라고 한다면, 고국과 친지를 떠나 말씀의 전파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더 어렵고 힘들어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의 전파자, 곧 선교사로서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그들 앞에 펼쳐질 탄탄대로가 아닌 그들이 겪게 될 박해와 시련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으리라.’ 약속하십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부여된 복음 전파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주님께만 희망을 두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나의 자리

김동엽 신부님

오늘날 많은 사람이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 또한 무대공포증이 좀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저한테 심한 스트레스를 준 것은 독서직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제직은 저의 꿈이면서도 언제나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독서를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엄숙한 전례 분위기에서 교수 신부님들이 뒤에 앉아 계시는 가운데 마침내 저는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이제는 신부가 되어 미사 강론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 제가 특별히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노력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자리,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끔 모임에 가면 ‘한말씀’ 을 부탁받기도 합니다. 이것도 저한테 큰 짐입니다. 그런데 미리 준비를 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는 시키지 않고, 아무런 준비가 없을 때 꼭 이런 청이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문득 생각나는 것을 차근차근, 겸손하게 전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신자들에게 더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앞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 제자들을 파견하는 주님의 마음은 어떻게든 우리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려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상황에 맞춰 준비하고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 한 일이 다른 누군가한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한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통해 당신 일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 일을 하시도록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

 




지금 제 책상 위에는 저와 20년을 함께 했던 문구용품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교 들어갈 때부터 쓰던 물건이니 얼마나 오래된 물건입니까? 

이 물건은 스테이플러(stapler), 우리가 흔히 호치키스라고 부르는 문구용품입니다. 20년전 제 물건 하나하나에 저의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그때 적어놓은 많은 물건들은 다 사라져버리고 이 스테이플러 하나만 달랑 남고 말았네요. 

사실 어떤 물건을 오랫동안 쓰게 되면 싫증이 날만도 하지요. 이것 역시 처음에 약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을 넘어가니 이제는 꼭 있어야 할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힘들게 리포트 작성을 마치고서 마지막으로 스테이플러로 철침을 박았던 기억, 반성문 쓰고서 스테이플러로 철침 박았던 기억, 동아리 자료집을 만들고 이 스테이플러로 스크랩했던 기억도 납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기억들을 갖게 하는 이 스테이플러는 이제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20년 전에는 내게 소중한 물건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하찮은 물건이었고, 그래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 현재 그 가치는 더욱 더 커지고 소중한 것이 되는군요.

어떤 현인이 이러한 말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까이 있다.”

스테이플러가 어느 순간 소중한 것이 되었던 것처럼, 내 근처에 있는 한 사람이 또는 한 물건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을, 그리고 내가 접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지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박해에 대한 말씀이지요. 그래서 지금과 맞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도 끝까지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끝까지 노력하며 견디는 사람은 결국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소외받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대하고 있었는지, 점점 파괴되고 오염되는 이 자연을 얼마나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었는지,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여 말씀하신 사랑을 지키기 위한 나의 노력은 어떠했는지요? 

이것들을 소홀히 했다면 이 세상의 흐름에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즉, 구원에 대한 약속을 하신 주님 말씀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세속에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구원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항상 신선하다. 사랑은 인생의 영원한 음악으로 청년에게는 빛을 주고 노인에게는 후광을 준다.(사무엘 스마일즈)


축복받는 사람(이창훈,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중에서)

첫째, 당신은 개인적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당장 부르면 올 수 있는 친구가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둘째, 당신은 사전에 알리지 않고 불쑥 찾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셋째, 당신은 함께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넷째, 당신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뜻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당신의 인간관계 역시 부정적인 관계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걱정

홍금표 신부님

걱정하지 말고 박해를 견디라! 한동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지능지수(IQ)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감성지수가 관심의 대상이 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지능이나 감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지수와 고통을 견디는 능력들이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교육현장에서 도덕지수(MQ)란 용어가 사용되고 유행처럼 번졌던 극기훈련도 이러한 이론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구원도 같은 이치입니다. 박해라는 고통스런 상황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구원의 열쇠가 거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은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걱정이란 말은 해야 할 일이나 사명을 위하여 기울이는 적극적인 관심을 말합니다. ‘한 가지 필요한 것(하늘 나라)’을 위해 현세에 대한 모든 걱정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걱정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의 요지는 성령에 대한 믿음 안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관심으로 마음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과 함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 나에게 부여한 중요한 사명, 즉 복음 선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강석진 신부님

대체로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참된 사랑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또는 ‘잘살고 싶은 마음’에서 신앙을 갖는다고 합니다. 유한 (有限)한 세상에서 무한 (無限)을 꿈꿀 수 있는 신앙의 가치, 모든 것이 다 변한다 할지라도 절대자인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온전한 의탁 등은 신앙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이기에 그러한 생각을 할수록 마음 한편에 잔잔한 기쁨이 젖어드는 듯합니다. 


바로 그때,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심각한 박해 상황에 대한 긴박한 묘사와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현실을 한마디로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순교 역사가 지나가고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 시점에서 이 말씀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나온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짓 (?) 을 오히려 더 충실히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물질만능이 팽배한 세상에서 비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삶임을 보여줄 때, 성적인 문란과 인간 생명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배우자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성가정이 누리는 행복, 그리고 인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무엇보다 우선적 가치가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에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이들에게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게 해주며,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금 의연히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줄 때! 


세상의 사고와 판단에 맞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건강한 양심과 아름다운 가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미움 받을 짓 (?) 이 어쩌면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며,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세상임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문득 세상의 미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내가 내 가족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런 미움, 매일 매일 받아도 좋겠네.


 


뱀과 비둘기의 조화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몸이 안 좋은 저의 동기신부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본 의사선생님은 동기신부에게 왜 젊은 사람이 몸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느냐며 버럭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라면 몇 년밖에 살 수 없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겁이 난 그 신부는 여러 다른 병원에서 같은 검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결과는 거의 같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 선생님은 그 신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며 열심히만 치료하면 큰 문제 없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낼 모래 죽는다는 의사 선생님보다 희망과 위로를 주는 의사 선생님께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무서운 사제보다는 자비롭고 온유한 사제가 되어야 신자들이 편하게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가 여동생의 옷을 사주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갔습니다. 한 매장에 갔더니 판매원이 그 신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은 상체보다 하체가 짧기 때문에 칠보바지는 피하시고 짧은 반바지나 다리를 길게 보이게 하는 바지를 입으셔야겠습니다."

그 친구는 허리에 철심을 박았기 때문에 상체가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 고르는 척 하다가 다른 가게로 옮겼습니다.

그곳 판매원은 정반대였습니다. 친절 그 자체였고 모든 것에 있어서 칭찬만 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옷을 입고 나오자 또 완전 잘 어울린다며 마치 동생을 위해 만든 옷 같다고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빠가 볼 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결국 오빠는 이전의 냉철하게 판단해 주었던 판매원이 있는 가게로 가서 옷을 사기로 했고 그 사람의 조언에 따라 옷을 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좋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하나의 성격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다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콘을 보면 어떤 이콘은 예수님의 양쪽 얼굴을 다르게 그려놓은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왼쪽은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고 오른쪽은 무섭고 정의로운 모습을 지니게 그린 것입니다. 이는 작가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한 얼굴에 자비와 정의를 일부러 그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에겐 자비와 정의가 공존합니다. 마치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반된 성격의 것이지만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두 성격을 완전히 소화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비와 사랑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오리게네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빠졌던 것과 같이 마지막 날엔 지옥이 사라지고 마귀들까지도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정의만을 강조하게 되면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만을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저도 한방과 양방의 병원을 오가면서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데 한방에서는 양방에서 치료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부분만을 보려고 해서 그렇다며 자신들은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 기능에서 오는 이유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치료함으로써 이명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턱과 목과 척추까지 틀어져서 턱 밑의 긴장된 근육이 신경을 눌러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다며 전신 척추의 사진을 찍어오라고 하였습니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달라고 했더니 귀가 안 좋은데 척추는 왜 찍느냐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식으로 한방의 의술을 좋지 않게 말했습니다.

제가 볼 때는 한방과 양방이 각자의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둘이 합쳐지면 서로 보완해 주면서 더 완전한 치료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성격이 더 좋고 저 성격이 더 나쁘고 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지날 칠 때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뱀과 같은 면과 비둘기와 같은 면을 동시에 지닐 것을 명령하십니다. 뱀처럼 슬기로우면서도 비둘기처럼 온순한 면을 모두 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이 균형은 바로 나와 상반되는 성격을 인정하고 그것 안에서 장점을 찾아내어 나에게 적용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세 명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모난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도 지나친 것은 버리고 모자란 것은 채워나가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 나갑시다.


 


영리하되 영악치 말아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며 하시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니 제가 군대 갈 때 서양 철학 교수님의 충고 말씀이 생각납니다.

군대 가는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하신 말씀인지 제가 그렇게 보여 저에게만 하신 말씀인지 모르지만 평소 선생님의 인품에 비추어볼 때 너무 뜻밖의 말씀을 충고로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인 즉, 군대에 가면 요령도 배우고 영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령 피우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 분이 요령을 배워야 하고 영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좀 의아스러웠지만 선생님 말씀이니 무슨 뜻이 있겠지 많이 생각했습니다.


영악하고 요령만 피우면 안 되겠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신학생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려면 세상도 알아야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도 알아야 하고 영리하게 처신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그것을 배우는 좋은 기회로 군대를 삼으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한 동안 우리 사회에서 회자된 말이 바보입니다.

바보 김 수환.

바보 노 무현.

모두가 똑똑하고 영리한 것을 추구하는데 반대로 바보를 추구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들의 위대함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바보스러움이 칭송의 대상이 된 것은 똑똑하고 영리한 것을 추구한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라기보다 영악한 것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리함과 영악함은 사실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다릅니다.

요령을 아는 것과 요령을 피우는 것이 다르듯 영리함은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영악함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리하되 영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되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이 이 말씀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 때 형제간에 그리고 부자간에 서로 거스르는 일을 당할 때 어느 마을에서 박해를 받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데 괜히 자기 힘으로 하려고 힘으로 하려하지 말고 하느님을 위해 순교해야 하는데 고작 인간에 의해 상처 받지 말고 내가 한 번 져주어 다른 곳으로 슬쩍 피하면 되는데 끝까지 어느 곳을 고집하며 맞서 싸우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그러고 보니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함은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으로 채우고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무장한 사람의 경지인 것 같습니다.

 



나를 싫어하게 하라

남상근 신부님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꺼리지 않는다면 수상한 것입니다. 마냥 좋기만 한 평가를 받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일치하지만은 않는 법입니다. 독불장군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새겨보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미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내 삶에서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 더러 미움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꽉 막혔어’ 내지는 ‘융통성이라곤 도무지 없네’, ‘혼자서만 거룩한 척하네’,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튀게 살아.’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삶이 복음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모두로부터 받는 인정을 구할 것이 아니라, 미움받을 것을 불사하고라도 마냥 좋은 사람이 되려는 환상에서 벗어나 주님 보시기에 충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청합니다.




주님은 언변의 마술사

노성호 신부님

말주변도 없고,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부터 붉어지는 인물의 전형이 바로 나다. 왜 그리 멋쩍고 창피하던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발표할라치면 원고를 준비하고 충분히 연습한 끝에 시도하는데, 그래도 그 시간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학창시절에는 ‘어떻게 이다음에 사제가 되어 강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내심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부제가 된 이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제품을 받고 처음 강론하던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원고를 준비하고 강론대에 섰는데 긴장한 탓에 신자석에 앉은 교우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강론 원고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작정 입을 열었다. 시작 부분은 좀 얼버무리고 주제에서 어긋나는가 싶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점점 교우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원고 없이도 강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웠다. 

사제가 된 후에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는 때는 강론할 때인 것 같다. 강론 준비를 잘하는 날도 있지만 때로는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다가 그만 준비도 못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는데, 요즘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일러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을 빌미로 강론 준비를 게을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며 당신 일을 하실 때 나를 당신 도구로 쓰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깊은 확신이 생겼다.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의기소침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끝까지 견디는 이한테는 구원이 따를 것이고, 주님은 우리의 커다란 힘이 되어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대신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전열 신부님

1.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에 맞는 처세술이 있습니다. 이 모든 처세술은 결국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이처럼 치열한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몹시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처세술을 가르쳐 주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뱀은 교활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비둘기는 솔직함과 소박함의 상징이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예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데 뱀같이 슬기로와야 합니다. 즉, 슬기로움으로 미움을 사거나 원망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비둘기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함과 소박한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같은 이치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사명을 받아 우상 가득한 세상에 파견된 양입니다. 우상은 신앙인을 유혹합니다. 자신을 따르라고, 그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동원하면서 유혹합니다. 돈, 자본, 권력, 지위 등등 온갖 우상들이 날뛰면서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라고 달려듭니다. 자신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댑니다.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상들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냐? 아니면 은근 슬쩍 우상에게 자기 몸을 맡기면서 적당히 살아갈 것이냐? 우상을 거부하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이 판치는 세상의 변두리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쫓겨남으로써 참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감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들이 우상에 몸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면서, 한술 더 떠 우상의 선전부대가 되어 '우상'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박해’가 아니겠습니까!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심정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상의 늪에 허우적대고 때때로 우상과 함께 놀아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실 예수님의 상처받은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느님의 성령이 너를 지켜주지 않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간절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이 이리가 될 수 없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결코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음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독서> :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앞길을 준비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이스라엘은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이주하던 도중에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재삼 확인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야곱의 조상들을 지켜주시고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이심을 밝히시며 이집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큰 위험에 빠질 뻔한 일이 있었고(12,14-20), 아버지 이삭에게는 이집트로 이주하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26,2) 야곱은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를 지켜주실 것이고, 이스라엘을 강대국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이리하여 야곱은 두려움을 모두 벗어버리고 가족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이때 야곱의 나이는 130세였다(47,9). 


야곱은 고센 땅에 이르러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과 상봉하게 되고, 야곱은 고센 땅에서 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뽑으시어 그가 살던 도시 하란에서 떠나도록 하시고, 새로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그에게 바로 그 땅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은 사람들이 곧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합당한 자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먼저 하느님의 약속만을 믿고 자신이 발 붙여 살던 땅을 떠나야 한다. 우상숭배로 얼룩진 땅, 죄로 물든 땅, 안락함과 편안함의 땅,게으름의 땅을 떠나야 한다. 그 땅을 떠나서 오직 하느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계속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리고 순례하는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야만 한다.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자신 안에 뿌리내린 세속적인 요소가 깨끗이 정화되고 오직 하느님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당신이 뽑으신 백성을 순례의 길로 인도하시며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며 지켜보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정화시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을 미리 보여주셨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생이란 순례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 안에 뿌리내린 여러 가지 죄와 악이 정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세를 갖출 때까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여러 가지 고난을 겪도록 하신 다음 당신 나라로 받아들이신다.


가나안 땅에 내린 극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야곱 일족은 이집트로 내려가 고센 땅에서 살게 된다. 그들은 이제부터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어 400년 후에 커다란 민족이 되도록 하시어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실 것이고, 미구에 약속하신 땅을 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준비해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고난과 역경에 부딪힐 때, 그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이를 극복할 방법을 미리 다 준비해주셨음을 굳게 믿고 헤쳐 나가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그 날까지 계속하여 자신을 정화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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