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자신을 씻어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에게, 주님의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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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하느님 백성에게, 헛된 제물을 바치지 말고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라며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며 예수님의 제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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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백성의 거짓 경신례를 질타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번지르르한 제물이나 축제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우며,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은 이를 보살피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참된 경신례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집안 식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갈라서고 원수가 될 날이 올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과 그들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따라야 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칼’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삶’을 자르고, ‘자기 십자가를 피하는 삶’을 베어 내며,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삶’을 잘라 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께 충실한 데서 비롯하는 단호함이라는 ‘칼’을 필요로 합니다. 어설픈 제자에게 들린 ‘칼’이 떠오릅니다. 자기 실속을 위협하는 복음의 요구를 잘라 내고, 주님의 일을 베어 내며, 복음의 가치들을 쳐 내는 칼, 자신을 위하여 만든 ‘칼’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린 ‘칼’은 누구의 칼인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 삶을 통해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 평화의 중심에 그분 대신 ‘나 자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를 기억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보여 준 제자의 삶이 우리 안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합시다.(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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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놀랍고 두렵습니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며 속죄하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이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속죄하고 화해한 것을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그보다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화해입니다.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비슷한 의미로 들립니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입니다. 사람 간의 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나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관계를 무시하고 무조건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을 평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의인을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처럼,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하여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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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말로, 누군가의 편견 때문에, 그 누군가의 미움 때문에 칼로 베인 듯 심장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개 상대에게 앙심을 품고 보복하거나 무기력한 자괴감에 빠져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숨기고 싶은 자신의 실체를 바라보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 아버지를 선포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은폐되고, 왜곡되었으며, 부당하게 강요된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며 분노의 발톱을 감추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군더더기처럼 붙어 있는 욕망과 사심, 위선과 교만의 덩어리들을 칼로 잘라 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평화는 내 안이하고 무디어진 나태와 게으름에 칼을 대어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내 목숨 하나만 잘 챙기면 된다는 이기심에 갇히면 내가 정말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잊을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해 내지도 못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은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자신의 목숨을 잃더라도, 서로의 십자가를 짊어져 주는 것이 우리가 더 절실하게 청해야 하는 은사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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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성인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하느님만을 찾아 세상을 떠나서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3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한 성인은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위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방의 금욕 생활과 서방의 지혜들을 모아 공동체 규칙서를 만듭니다. 그분이 가르친 기도와 노동, 그리고 지적 활동은 단순함과 지혜, 용기와 부드러움, 자유와 순종을 조화시키는 서방의 수도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지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거요 기둥인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더 단호하고 근본적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분께 합당하려면 하느님만을 선택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우리를 온전히 봉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하고 소중하지만, 때로 그 사랑의 기준이 잘못 되었을 때 우리 삶을 흔드는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부부 사이를 이어 주는 위대한 사랑의 끈은 우리 삶의 가치를 지켜 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잘 지키려고 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그 사랑을 정화시키는 노력을 해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약간 가혹해 보이기도 하지만, 너무 명확한 우리 신앙의 지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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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탱고 음악 작곡가이자 연주가로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년)라는 꽤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민들이 주로 술집에서 연주하는 탱고 음악을 새롭게 하여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곧,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하여 탱고가 오늘날처럼 매력적인 현대 음악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밤에는 찻집이나 술집에서 탱고를 연주하면서도 클래식 작곡가로 성공하려는 야심에 차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음악의 중심지 파리로 가 최고의 작곡가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작곡가는 피아졸라가 작곡한 현대적인 클래식 기법의 악보를 보고서 좋은 작품이긴 하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평하였고, 이에 피아졸라는 크게 낙담했다고 합니다. 작곡가가 그를 위로하며 전에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지를 묻자, 피아졸라는 마지못해 탱고였다고 답했습니다. 작곡가는 그에게 탱고 음악 하나를 피아노로 연주해 보라고 했고, 그는 망설이다가 연주했는데 반응이 이랬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마디에서 그녀는 연주를 멈추게 하고는 그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거야말로 피아졸라야! 절대로 그만두지 말게!’ 후일 그는 자신의 딸에게 그 순간이 마치 계시 같았다고 기억한다. ‘그녀는 내가 나를 찾아내도록 도와주었다’”(『피아졸라: 위대한 탱고』에서).
피아졸라는 사람들의 통념에 타협하는 대신 자신의 고유하고 참된 길을 찾으라는 현명한 선생의 조언 덕분에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도 이러한 진정한 예술가의 길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시듯, 세상 사람들이 평화라고 말하는 시대의 풍조와 통념에 신앙의 본분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타협의 길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이 들려오는 주님의 소리를 굳게 믿고 꿋꿋이 걸어야 합니다. 설령 비난받고 세상사를 모르는 바보라는 비웃음을 들을지라도 결국은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인생의 참평화와 행복의 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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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은 꿋꿋하고 곧다는 뜻입니다. 내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고집이 세서 다른 사람과 타협할 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에게는 부드럽고 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검법(劍法)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려고 갈고 닦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신앙의 가치를 지키고 영적인 수련을 위해 필요한 내면의 칼입니다. 그 칼로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 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유혹이 된다면 거기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삶 속에서 안주하는 거짓 평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잘라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하셨습니다. 날카로운 양심으로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 영적 수련을 하지 않으면, 거짓 평화를 진짜 평화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찾을 때까지 우리를 휘감고 있는 거짓 평화와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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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과 잘 어울리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도 함께 가고 야외 행사 때도 가끔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우인 것은 확실한데 미사 참여는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모임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절에 다니는 관계로 잠시 쉬고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나올 것이라 했습니다. 전임 본당 신부님께는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시어머니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양보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런 ‘처지’를 십자가로 여기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양보하고 물러서면 훗날 자신의 며느리에게도 같은 조건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자매님은 시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해’ 서로 공존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회는 다양해졌습니다. 신앙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모멸하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평화가 아니라 ‘칼’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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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예전에는 종말이나 박해 시대를 염두에 둔 해석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경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이 듭니다.
두 사람이 길 하나를 가운데 두고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라이벌 관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그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다 들어주겠다. 대신 길 건너 상대방에겐 그 배를 주겠다. 말해 보라.”
한참을 생각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제 눈을 하나 뽑아 주십시오.” 자기 눈 하나를 뽑으면 상대방은 두 눈을 뽑히게 된다는 계산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식으로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유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거나 형제간에 원수가 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돈과 재물을 삶의 중심으로 여겼기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탐욕을 먼저 정화시켜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는 데 방해되는 일이라면 그 무슨 일도 한 발자국 물러나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복원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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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의 옛날 번역에는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되어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모질다고 여겨졌습니다. 훗날 이것은 히브리 말의 비교급으로, 부모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려면 그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여야 합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늘 좋은 일만 생겼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끔찍한 실패도 경험했고,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아픔도 있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수렁에서 헤맸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을 이겨냈기에 그들은 ‘성공’이라는 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성공’은 단순히 세상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정도의 가치가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가치의 결실이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의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적이에요.”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풀리는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계가 없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믿는 만큼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힘든 시간이 찾아와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기적을 사는 것이 됩니다.
기적을 살고 있습니까?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내 곁에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편안과 안락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때로는 세상의 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하기도 합니다.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해 보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에 커다란 종기가 났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이 종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종기를 가만히 두는 것이 평화일까요? 아니면 칼로 이 종기를 제거하는 것이 평화일까요? 내 몸을 불편하게 하는 종기를 제거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수 있는 칼을 주십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속된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위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선순위에 따라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늘 가슴 깊이 담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
사랑스러운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좋은 점을 보아라(오드리 햅번).
비교는 하지 마세요.
‘비교는 기쁨을 훔쳐 가는 도둑이다.’(테디 루즈벨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려 할 때, 그래서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려고 할 때 이 말을 떠올리려고 노력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남과 비교를 많이 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 운동 잘하는 아이,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 등등…. 저보다 더 나은 아이가 많았고 그러면서 남과 비교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 안의 기쁨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내가 비교해야 할 것은 과거의 나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뿐입니다. 그 외의 비교는 기쁨을 훔쳐 가고, 지금을 힘들게 만들 뿐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삶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삶의 의미가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는 죽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살아있어야 하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강동원 씨가 연기한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강동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맞아서 눈이 먼 동생과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엄마를 찾아가도 아빠에게 맞으니 그냥 고아원에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동생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자궁외임신이라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형과 도둑질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동원은 애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살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나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14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오빠는 결혼해서 잘만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딸의 탓을 합니다. 사촌 오빠가 밉고 엄마도 미워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수녀님인 이모의 소개로 사형수 강동원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이제 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 삶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신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언제부터 존재했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이유는 신의 존재와 함께합니다. 존재 이유가 없으면 존재의 의욕을 잃고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생존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를 모르고 살면 생존이고, 이유를 알고 살면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서로를 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 이유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다는 분을 만납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사랑해서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할 줄을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많게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컸는데도 부모가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살면 자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을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여기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존재이듯, 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 사회는 대부분의 물건이 우편으로 배달됩니다. 쇼셜넘버도, 운전면허증도, 신용카드도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선택사항인 경우가 많은데 미국은 우편으로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지역이 워낙 넓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택배가 미배달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은 현관에 쪽지를 남겨놓는데 이번에는 쪽지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택배의 송장번호를 우체국에 알려주니 택배를 찾아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지금 택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물건에는 송장번호나 바코드가 있어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한국에서 코로나19의 동선을 비교적 빨리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르스를 경험한 한국은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서 질병관리본부에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합니다.
가톨릭 교리에 ‘인호(印號)’가 있습니다. “‘주님의 인호’는 성령께서 ‘속량의 날’(에페 4,30)을 위하여 우리에게 찍어 놓으신 표지이다. 과연 세례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다. 끝까지 인호를 간직한, 곧 자신이 받은 세례가 요구하는 것에 충실한 신자는, 신앙의 보람을 지니고, 세례 때에 고백한 그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의 완성인 지복 직관(至福直觀)을 바라면서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가톨릭교리서 1274항) 군대는 매일 ‘암호’가 바뀝니다. 암호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표시가 되기에 꼭 암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암호를 알면 어둠 밤에도 걱정 없이 부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암호는 매일 바뀌지만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인호는 평생 바뀌지 않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호를 받은 사람이 성사를 통해 요구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신앙생활의 보람을 느끼며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면 주님으로부터 마지막 날에 환영받을 것입니다.
어릴 때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 특히 사제품을 받은 사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호가 이마에 새겨져있다고 하였습니다. 인호는 암행어사의 마패일 수도 있지만,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살아야할 책임과 사명의 표시라고 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중도에 포기한 사제는 직무의 사제직은 멈추었지만 인호의 사제직은 남아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겸손하게, 충실하게 이 세상에서 보속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하루 세례와 견진 때 주어진 인호를 생각하며 신앙인으로 더욱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호를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잘못을 벌하시기보다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집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도 들어오고, 전기도 들어와야 합니다. 냉방과 난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인호를 받은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조건이 아닙니다. 실천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하는 신앙의 기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신앙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귀함도, 건강도,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내 눈길 끄는 곳에
있는 이를 보는 거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내 마음 머무는 곳에
있는 이를 보는 거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내 손길 닿는 곳에
있는 이를 보는 거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내 발길 가는 곳에
있는 이를 보는 거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거든
나 온전히 내놓고픈 곳에
있는 이를 보는 거야
평화와 칼의 관계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사람 사는 곳이면 평화가 있다가도 서로 반목과 대립으로 변한다. 평화는 누리기도 힘들고 찾아 왔나 싶으면 깨져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평화가 있다가도 서로 불목하고 원수가 된다. 사소한 문제도 이해타산으로 서로가 자기 주장을 하며 날카롭게 대응한다. 가정도 이럴진대 나라 속 문제는 그 의견이 첨예하게 달라 서로의 주장에 날을 세운다. 에휴!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그 규모와 정도만 다를 뿐 여전히 이전투구로 으르렁댄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보수와 진보 사이에 이해타산으로 막무가내다. 평화가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참을 지내고 보면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있다. 천만다행이다. 평화와 칼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칼로 쓰면 칼로 망한다” 여기서 말하는 칼은 물리적 도구를 말하며 이를 생각없이 마구 사용하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패가망신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의미의 칼이 있다.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어 명오가 열려 원수에게 마음을 돌리게 하는 믿음의 칼이다. 계약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 믿음의 계약이 존속되려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사랑이 바탕해야 한다. ‘이는 이, 눈은 눈’의 방식으로 휘두른 칼이 아니라 날카로운 이성의 칼을 지닌 지혜를 지닌 사랑의 칼이어야 한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9,39)
오늘의 세상은 마치 이전투구의 장 같다. 평화는 사랑의 칼로 이전투구의 원수상황을 변화시켜야 찾아올 것이다. 계약 중 새 계약, 사랑의 법, 이 법을 통해 믿음으로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살아갈 때, 새 계약은 충실해지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여기서 ‘평화와 칼’의 관계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알아 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사이가 안 좋은 관계가 있다고 했을 때 사실 부딪히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보기에 평화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그냥 부딪히지 않는 무관심의 적막이 흐르는 단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그 관계에 있어서 용서라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속에서 다른 이들과 부딪힘 없이 혼자만의 안위와 자족의 평화를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함께 어우러지며 계속적인 용서의 결단과 사랑의 결단을 이루어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법진리 따라 사는 걸 보여주는 부모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한 집안이라도 하늘 법 진리 바른 길 어기면 개별적으로 영원징벌이죠,
하느님 가족으로 사는 세상 가족 살기라는 게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연법 하늘법 신법진리 따라 사는 걸 보여주는 부모라야 된다는 거죠.
연대장께 납품 잘 봐달라며 갈비 한 짝 보냈는데 화내며 돌려보냈대요.
자식에게 재물명품 지위상승의 뒷거래 같은 걸 보여주면 모범적일가요?
세상서 자녀에게 물려줄 최대 보물은 하늘 섬길 줄 아는 사상이랍니다.
하늘보다 땅 양심보다 몸 이성보다 감성을 더 따르면 망한 죽음이지요.
인간 살피는 하늘의 눈길을 의식하신다면 가톨릭에서 새로 태어납시다.
<버림과 따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2020. 7. 13. 월)(마태 10,34-11,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4-36).”
이 말씀에서 ‘집안 식구’는 실제 식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현세적인 것들, 또는 박해자들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나를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평화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참 평화’를 얻기를 바란다면 ‘거짓 평화’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평화’가 ‘참 평화’입니다. ‘거짓 평화’는, 영혼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몸만 편안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 등입니다.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은, “나는 ‘거짓 평화’를 물리치고 너희에게 ‘참 평화’를 주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지금 ‘거짓 평화’를 평화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 ‘거짓 평화’가 바로 ‘참 평화’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을 때(마태 8,19),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 나처럼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각오를 하고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설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즉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그것을 말리는 일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말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걱정되어서 ‘아끼는 마음으로’ 말리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것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애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가족’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현세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산상설교에 있는, ‘재물에 관한 가르침’과 같은 말씀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하느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해야 하는 일입니다(마태 22,37). 마음이 갈라져도 안 되고, 한눈을 팔아도 안 되고,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안 됩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도 있고, 쉬운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만일에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또 어려운 일은 피하고 쉬운 일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힘들 때나 편안할 때나, 또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쉬운 일을 만나거나,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왕들도 있고 왕비들도 있습니다. 부자들도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이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생애를 보면, 세속에서 누리던 부귀영화를 끝까지 누리면서 살다가 성인품에 오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누리던 것들과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앙생활만 충실하게 하다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분들은 ‘왕들과 왕비들’이 아니라 ‘왕과 왕비였지만 권력과 재물을 모두 버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이들’이고, ‘부자들’이 아니라 ‘부자였지만 가난해진 이들’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0-42).”
이 말씀은,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곧 당신이 선포하신 복음과 같다고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고, 또 사도들이 당신의 대리인들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사도들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게 된 교회입니다. (사도들을 거치지 않고 다른 경로로 전해졌다면, 그 종파는 이단입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을 접대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접대하는 것입니다. 그 접대가 ‘물 한 잔’처럼 작은 일이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사랑과 선행은 모두 똑같이 고귀하고 위대한 일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러 갈래로 등장합니다. 그 안에서 오늘 그분이 우리에게 정말로, 정말로 바라시는 게 무엇일까 머무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마태 10,42).
이 말씀은 낯선 곳으로 파견 받아 떠나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아무리 건장한 장정이어도 볼모지로 떠나는 초보 복음 선포자에게는 어느 것도 녹록치 않을 테니까요. 제자들은 스승 곁을 떠나는 순간, 미지의 고장에서 누군가의 관심과 친절로 새 힘을 얻을 "작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선교지에서 만나게 될 이들 중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가난하고 약하고 움츠러든 "작은 이들"을 찾아 눈길을 주고 다가갈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에게서 보아온 대로 말입니다. "작은 이"가 되어본 제자가 "작은 이"를 알아 봅니다.
"받아들이는"(마태 10,40-41)
작은 이들과 물 한 잔이라도 나누는 것은 그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는 내가 베푼 친절에 상응하는 보상을 할 수조차 없는 처지일지 모르지만, 애초에 마음에 그런 계산 따위는 떠오르지조차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별 영양가 없어 보이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작은 이를 받아들이는 거라면 더 그렇지요. 그가 내 직계 가족이나 친족, 이해관계로 결속된 사람이 아닐 땐 더 그렇습니다.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5).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가정의 화목을 경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혈연 지연 등 세속 인연들 너머로 시선을 돌리라 하시는 겁니다. 가족, 친인척, 내 편의 울타리 안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고 생각이 바르더라도 울타리 밖의 작은 이들,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당신 속마음을 밑바닥까지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동안 잘 하느라고 올렸던 축제와 제사, 제물들을 "물렸다"고, "싫다"고, "견딜 수 없다"고, "지쳤다"고 솔직히 토로하십니다. 참다 참다 내뱉는 적나라한 표현 안에는 혐오감까지 그대로 묻어납니다. 신과 인간을 막론하고 마음 없는 예의의 위선이 상대를 얼마나 슬프고 아프고 괴롭게 하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7).
주님의 말씀이 인간의 위선에 대한 역겨움의 토로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으로 귀결되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적어도 그분이 왜 언짢아 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는지 깨달아 노력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주님께서 언급하신 "억압받는 이, 고아, 과부"는 고통 받는 약자들, 하느님 외에는 보호자가 없는 이들을 대변합니다. 복음 속 "작은 이들"과도 연결이 되지요. 그들은 세상에서 기댈 곳 없는, 온갖 특혜에서 제외된, 자기 인권과 행복권에 대해 실낱같은 목소리조차 잃어버린 이들이지만 주님의 제자들이고 그들 자신이 곧 주님의 현존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세속적 성공 보루를 갖지 못한 작은 이들은 물 한 잔에도 크게 감사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이 올리는 감사와 축복의 기도는 구름을 뚫고, 하느님 궛가를 적시어 그분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마태 10,42)이라고 힘주어 약속하십니다.
자,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예식 참여가 주님께서 진정 기뻐하실 예물이 되려면 작은 이들과 함께여야 한다는 진실을 배운 겁니다. 내가 속한 가족, 공동체, 이웃, 사회, 국가, 인류, 모든 피조물 안에서 누가 "작은 이"인지 우리 마음은 모르지 않지요. 그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 따뜻한 안부, 진심어린 격려 한 마디 건네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미리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렇게 쉽습니다. 그 하느님 만나시는 기쁨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납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사론’에서 (Nn. 8-11: SCh 25 bis, 158-160)
여러분은 성세소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물론 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만 본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시중들고 있는 레위들도 보고 질문하고 축성하는 주교도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다른 서간에서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던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하느님의 업적을 통하여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성세소에 주님의 신성이 현존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성사란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것을 믿는데 왜 그분의 현존을 믿지 않겠습니까? 현존이 앞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업적이 따르겠습니까?
이 성사는 참으로 긴 역사를 지니는 성사입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의 창조 때 예시되었습니다. 한 처음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을 때 “하느님의 영이 물위에 휘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물위에 휘돌고 있었다면 그 영은 물에다 역사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을 지어내시는 중에 그분의 영은 분명히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늘은 만들어졌고 만상도 당신 입김으로 만들어졌도다.” “하느님의 영이 물위에 휘돌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영은 물에다 역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언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영이 물위에 휘돌고 있었다.”고 말하고, 다윗은 하느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또 다른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모든 인간이 죄 때문에 타락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영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육신의 불결과 중한 죄가 영의 은총을 거부해 버린다는 점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주셨던 은총의 선물을 되찾아 주시고자 홍수를 보내시어 의인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홍수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노아는 먼저 까마귀 한 마리를 내보냈습니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비둘기 한 마리를 내보냈는데 그것은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물도 나오고 나무도 나오며 비둘기도 나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신비를 의심하겠습니까?
이 물은 사멸할 인간이 빠져들어 자신의 모든 죄를 씻는 물입니다. 이 물 속에 온갖 악은 묻혀 버리고 맙니다. 이 나무는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 당하실 때 못 박히신 나무입니다. 이 비둘기는 여러분이 신약 성서에서 배운 것처럼, 그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여러분에게 영혼의 평화와 마음의 평온을 불어넣어 주신 성령이십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것 저것 가리지 말고, 아무렴 어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내가 좋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네가 좋다고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나와 너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좋아야 좋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좋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좋은 것이어야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합니다. 나를 챙기고 나를 주장할 때, 너와는 멀어지게 되고 우리는 갈라지게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이 칼이 됩니다. 반면에 나를 버리고 너를 존중하고 너에게 배려할 때 우리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버리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희생제사는 우리를 살리고 하나 되게 하며 평화롭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이 내 삶의 기준이요 원동력으로 살아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세워나갑시다.
새 삶의 시작. -죽음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그에게 낙원의 문을 열어 주시고, 죽음이 없는 곳, 영원한 기쁨이 넘치는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입당송 후렴이 마음에 무한한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의 묘지 양쪽 입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가 죽는다’라는 뜻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와 비슷한 말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규칙에서 수도형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막수도자들 역시 금과옥조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던 금언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온갖 환상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삶을 삽니다.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삽니다. 바로 이렇게 사시며 우리 요셉 수도원 수사들의 전폭적 사랑과 신뢰를 받던 이 정우 바오로 수사님이 어제 만87세, 우리 나이 88세로 선종하셨습니다.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래뵈도 팔팔합니다.”
88세 나이와 겹치는 발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이들어 몸은 노쇠해도 마음은 여전히 젊어 하느님 찾는 열정과 순수의 수도자임을 반영하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에 짐이 되지 않고 건강하게 선물처럼 잘 사시다가 선물처럼 가셨습니다. 선종의 죽음보다 공동체와 이웃에 더 좋은 가르침도, 선물도 없습니다. 수사님의 빈자리가 텅 빈 허무가 아니라 텅 빈 충만의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갑작스런 죽음이지만 복된 선종의 죽음입니다. 성 베네딕도 대축일(7.11) 다음날 주일에 선종하셨으니 주님과 함께 영원한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수사님입니다. 지난 6.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에 영명축일 축하 인사를 받으며 환하게 웃던 수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마침 방안에 의정부 교구 이기헌 베드로 주교님과 환히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니 살아 계신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된 수사님입니다.
“천진도사天眞道士!”
언젠가 수도형제가 붙여준 별명이 참 잘 어울리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순수한 마음의 수도선배였습니다. 아주 예전 어느 깊어가는 늦 가을날 써놨던 ‘죽음’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바오로 수사님의 죽음에도 그대로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귀환歸還이다 해후邂逅다 화해和解다 구원救援이다
‘수고하였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음성’”-1998.11.10.
그렇습니다. 죽음은 허무虛無에로의 환원還元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목적지가 없는 무의미한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 여정입니다. 참으로 그림처럼, 시詩처럼 사시다가 고운 자취를 남기고 주님곁으로 가신 수사님입니다. 흡사 복음의 환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응답한 듯한 선종의 죽음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참 좋은 위로와 평화를, 힘을 줍니다. 우리 삶은 영적성장과 성숙의 여정이요 죽음도 마지막이 아닌 새 삶의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새삼 우리도 삶을 추스르며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날로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4,16-5,1)
그러니 믿는 이들에게 선종의 죽음은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은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고해苦海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축제祝祭입니다.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은 이 거룩한 위령미사를 통해 이 바오로 수사님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십자가의 신비로 저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성자의 파스카 성사로 저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하느님의 종 이 바오로 수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빛과 평화의 나라에서 성인들과 한 가족을 이루게 하소서.” 아멘.
우리가 찾는 참된 평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복음은 언제나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가치들을 가르칩니다. 가치란 내가 하려는 것이 지금 내 삶에 행복과 만족을 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는 내게 소중한 가족이나 목숨을 지키고,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곁에 두는 자기중심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치와 타협해서 얻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이 소중하다고 해서 혈연과 인정에 묶여 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거나, 자기 이익만 챙기다보면 타인의 인격과 생명의 가치를 폄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단점을 알려주고 올바른 길을 일러주는 내 주변의 예언자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고 자신을 숨기기에 급급한 옹졸한 모습도 생깁니다. 예수님은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 나의 헛된 욕망과 위선,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를 과감하게 끊어버릴 칼을 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지만 가족에게 매몰차야 할 때가 있고, 자기 목숨을 구걸하지 않으며, 옳지 않은 일에 타협하지 않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이토록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역설적 가치들을 통해 얻는 것이기에 가끔 신앙생활이 버겁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용기를 냅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이 역설의 진리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고, 부활로 희망의 보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드러내려면 칼이 필요하다. <마태 10, 34-11, 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몸에 칼을 대는 것은 고통이며 아픔이지만 칼이 없으면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정의와 진실이 살아나려면 칼이 있어야 하고, 정의와 진실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의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하심으로써 참 평화를 얻으려면 전쟁이 있고 저항과 희생이 따르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이 악으로 흐르고 악에 쌓여있을 때 무서운 칼을 사용하여 잘라내고, 도려내고, 악의 요인을 제거하시고, 바르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의 혼란으로 구약의 역사적 과정에서는 징벌이 우선이었습니다.
신약의 비유에도 작은아들이 온갖 죄를 짓고 아버지를 찾아온 것은 배고픈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적 악과 불의를 제거하는 데는 칼이 필요합니다. 물론 칼을 쓰는 사람은 그 칼로 희생이 되는 수가 있지만, 악을 악으로 남아 있지 못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칼로 도려내고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옷을 물속에 넣고 빨아서 옷을 깨끗하게 하듯이 혼란의 시기는 지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도구로써 악을 물리치고, 악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불의와 거짓, 사기, 당파, 불공정을 바르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은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하신 것같이 싸워서 죽으려는 사람은 살고, 싸우지 않고 살려는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내는 것은 세상의 가치입니다.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필요한 것은 남보다 높은 권력이 있어야 하고, 남보다 더 많은 재산이 있어야 하고, 남보다 더 명예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들이 우리를 평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칼이 필요합니다.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을 단칼에 자르지 않으면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며 기도하고 실천을 결심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손에 쥐고 사는 것입니다. 암은 우선 칼을 대고 암 부위를 잘라내야 암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암이 발생하지 않게 미리 손을 쓰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인애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본받고 사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인자하게 대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구하기 전에 알아서 주시는 분입니다. 불의하시지 않고, 정의로우며, 거짓이 없고, 진실하시며, 늘 우리 편에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아 어깨에 짊어지고 춤추시며 돌아오듯이 우리를 찾아 나섭니다. 주님을 피하지 않고, 늘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신 주님을 찾아 만나고, 손을 잡고 함께 할 때 평화가 우리 안에 늘 현존합니다. 칼 없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도록 늘 주님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살아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살려면 가난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는
자기성찰의
칼을
필요로합니다.
거짓된 자아를
죽이는 평화의
칼입니다.
평화와
성찰의 칼은
우리를
회심으로
이끕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사랑을 실천하는
칼입니다.
거짓과 갈라서는
결단의 칼이며
주님을 받아들이는
식별의 칼입니다.
하느님을
최고의
중심으로 두는
십자가의
칼입니다.
평화는 그래서
모두를 살게하는
말씀의 칼입니다.
평화는
집착이 아니라
모든 것을
깨어나게하는
감사의 칼입니다.
평화의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선
잘라내는 아픔의
칼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평화와 칼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비추어줍니다.
집착과 욕망을
잘라내는 참된
평화입니다.
평화는 그래서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할
주님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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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좋다’입니다. ‘틀리다’의 반대말은 ‘맞다’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르다’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같다’입니다. 이렇게 ‘싫다, 틀리다, 다르다’는 분명히 모두 다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을 싫어하고, 싫어하는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싫다, 틀리다, 다르다를 종종 한 덩어리로 묶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함께 하는데 힘든 상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세상 안에서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싫은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를 뿐인 것입니다. 혈육이라고 말하는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가족이 무조건 틀린 것일까요? 자신을 응원하거나 지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도 아니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가족 구성원들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다름을 틀린 것과 싫은 것의 동의어로 생각하면서 함께 할 수도 또 일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의 속 좁음이 결국 세상의 불일치를 가져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늘 스스로 지금 내 자신의 판단을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웃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비로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옛날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들과 다른 것을 ‘틀렸다’라고 하고, 그 다른 것을 ‘싫다’라면서 거부했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뜻과 일치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이웃을 향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작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행동을 해야지만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싫음과 틀림을 잘 구별하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지만 내 이웃을 받아들일 수가 있고, 이 모습의 결과는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한 내 마음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이웃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의 명언: 인생은 오묘해서 적이라고 여겼던 사람과 화합할 때가 오기도 하네. 마음을 넓게 가지면 생각지 못한 문들이 열리네(레이먼드 조).
쓸데없는 다툼
어느 연인이 있었습니다. 둘이 데이트를 하던 중에 술에 취한 한 무리의 남자들 중 한 명이 여자 친구에게 모욕감을 준 것입니다. 여자 친구는 무척 화가 났는데, 남자 친구는 위험하니 그냥 가자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 친구가 너무나 서운했고 동시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너는 배짱도 없어. 그냥 돌아가면 우리는 끝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남자는 마지못해 이 남자들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결국 무참히 얻어맞아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피하려 한다면 서운하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인정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여기에는 지혜로움도 필요합니다. 사실 패배를 인정한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다툼은 오히려 더 큰 패배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은 쓸데없는 다툼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꼭 치고 받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간의 다툼, 친구들과의 다툼, 이웃과의 다툼 등등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다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툼이 있기 전에 상대방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지혜로움이 있다면 세상의 그 많은 다툼의 숫자를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직 충실하신 주님께만 의탁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약성경 수많은 예언서들 가운데 첫번째로 등장하는 동시에, 가장 방대한 양(총 66장)을 자랑하는 이사야 예언서는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찬 보물 창고 같은 책입니다. 저자들의 필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 문학적으로도 수준이 높아,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온 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후, 회당에 들어가셔서 펼치셨던 책이 바로 이사야 예언서였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서 61장, 1~2절, 마태오 복음 4장 18~19절)
불멸의 베스트 셀러인 성경 가운데서도 베스트 셀러인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시면 즉시 알수 있게 되는 데, 저자는 주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과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감동적이고도 신선한 필치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의 언어는 장황하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사설이 길거나 불필요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들만 간결하고도 함축적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가 전하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집필된 집회서에 보면 이사야 예언자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위대한 영의 힘으로 마지막 때를 내다보고 시온에서 통곡하는 이들을 위로하였다. 그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었고 숨겨진 것들을 미리 알려주었다.”(집회서 48장 24~25절)
신비롭고 비범한 인물이었던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742년 젊은 나이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로서 그의 활동은 40여년간 전개됩니다. 그가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아자리야라고 불리기도 한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였습니다. 우찌야 임금의 통치 아래 유다는 오랜 세월 번영과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번영과 풍요의 시대 그 이면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이는가 봅니다. 토지들을 독점하는 지주 계급이 출현했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대한 억압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에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정의에 반대되는 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고발하고, 그에 대한 주님의 진노를 선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는 정치적인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으며 구체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기원전 716년 히즈키야 임금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약소국으로 살아남기 위해 당대 강대국이었던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꾀합니다.
그런 정치적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목소리 높여 주님께 대한 충실성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이방인들과의 동맹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이스라엘이 살길임을 강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에게 있어 주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우상숭배나 이민족들, 이교도들과의 동맹을 원치 않으신다고 외칩니다. 동시에 거룩함의 극치이신 주님 앞에 우리 인간은 얼마나 속된 존재인지를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속된 모습들을 강력하게 고발하는 데, 가장 큰 속됨은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주님께 의탁하기보다 인간의 힘, 군사력, 폭력에 의지하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결국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선포하는데, 멸망의 원인으로 기득권자들이 축척한 막대한 부와 권력, 그에 따른 부익부빈익빈, 가난한 백성들의 슬픈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왕국의 멸망은 외적인 요인이라기 보다 내적인 요인임을 적시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들을 향한 고발입니다. 세상살이에 깊이 빠져 주님 현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권력과 돈, 세상의 좋은 것들에 잔뜩 취해 주님의 자리는 저 뒷전입니다. 주님 섭리하심에 대한 의탁없이, 주님과의 대화나 소통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이사야 예언자의 신랄한 고발 앞에, 다시 한번 삶을 바꿔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성령의 칼의 용도
전삼용 요셉 신부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국왕 샤를 4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사촌 형 필립 6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샤슬 4세의 조카였던 에드워드 3세가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란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에 시작된 전쟁이 거의 100년을 끌게 됩니다.
전세는 잉글랜드의 편이었습니다. 프랑스는 페스트, 농민 반란 등으로 마지막 보루인 오를레앙까지 몰리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16세 소녀, 그녀가 잔 다르크(1412-1431)입니다. 그녀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며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그녀의 말을 믿기 시작합니다.
“신의 계시를 받고 우리를 구하러 온 소녀가 참전하였다.”
“그녀는 목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났다.”
“프랑스 군은 하느님이 지켜주신다.”
프랑스는 마지막 보루였던 오를레앙에서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크게 승전을 거둡니다. 오를레앙에 이어 랭스지역까지 진군한 당시 샤를 왕세자는 랭스 성당에서 국왕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잔 다르크는 말합니다.
“폐하, 이제 프랑스를 다스리는 진정한 국왕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 군의 포로가 되고 잉글랜드 군대로 넘겨집니다. 샤를 7세 국왕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해 주었던 잔 다르크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자신보다 인기가 높았던 잔 다르크를 시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잉글랜드는 그녀를 군사재판이 아닌 일곱 번의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1431년 루앙의 마르셰 광장에서 성녀가 아닌 마녀로 낙인찍어 군중이 보는 앞에서 화형을 시킵니다.
영웅 소녀의 죽음 앞에 단결한 프랑스 사람들은 1453년 기나긴 백년전쟁을 자신들의 승리로 이끕니다. 잔 다르크의 출현으로 단결한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의 주인인 영주가 아니라 프랑스라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워 국가와 국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바탕이 되는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처: ‘백년전쟁과 잔 다르크’, 5분 사탐 세계사, EBS]
프랑스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함께 유럽 가톨릭의 명맥을 이어온 나라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백년전쟁 이후 헨리 8세가 교황청과 대립하며 영국 국교회를 설립합니다. 만약 잔 다르크의 활약이 없었다면 프랑스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프랑스도 개신교가 될 가능성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어린 소녀를 보내어 프랑스를 구해내셨습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국왕에게 선물된 성령의 칼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그 칼을 시기한 나머지 자신 안에 붙여진 성령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 안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은총을 받아도 금방 식어버리는 이유는 그 은총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는 화형 당한지 500여년이 지난 1920년 베네딕도 15세 교황에 의해 시성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칼로도 비유됩니다(에페 6,17 참조). 칼은 싸우고 자르는 용도로 쓰입니다.
무엇과 싸울까요? 죄와 싸웁니다. 무엇을 자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족을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당신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까지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사람도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 칼로 잘라야하는 것은 세상의 애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샤를 7세 국왕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애정과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버려야 했던 것은 은총으로 주어졌던 성령의 칼이었습니다.
성령을 청하면서 동시에 세상 것까지 함께 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은총을, 명예가 높아지는 은총을, 잘 먹고 잘 사는 은총을 청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끊는 것이 은총인데 그것을 함께 청하고 있으니 결국 그 사람 안에 성령의 은총이 들어와도 금방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자신까지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어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고 그래야 하늘나라 시민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은총의 칼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을 끊게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함께 사는 신부님께서 음식을 처방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제안하였고, 신부님이 받아들였습니다. 매일 음식이 배달됩니다. 신부님은 음식을 먹으면서 혈당을 검사합니다. 약을 처방하는 것도 좋지만 음식을 처방받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음식은 부작용도 없고, 좋아하는 음식보다는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기에 더욱 건강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4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한 첫 번째 이야기는 ‘경고’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회개’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평화’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평화를 아름답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리라.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는 ‘메시아’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시리라. 젊은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언젠가 구세주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합니다. 이런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 갈등과 분열도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양처럼 순수하지만,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인, 성녀들은 어디에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연일 무더운 날입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오늘은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주님의 말씀 실천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15주 월요일
복음: 마태 10,34-11,1: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에,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 많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런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서의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런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태어나게 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이 주어진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올레꾼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가 있듯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기도와 말씀이 있습니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작년에 올레 길을 5일정도 걸은 적이 있습니다.
선배 신부님 중에 한 분이 갔다 온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재밌을 것 같아서 저도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날씨도 좋고 그렇게 덥지도 않아서 좋았는데, 비수기라 올레길 중간 중간에 있을 법한 노점들이 다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없었던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어쨌든 올레 길에 들어서면서 신경 써서 본 것은 파란 화살표였습니다.
선배 신부님이 ‘설마 파란 화살표를 놓치고 길을 잃어버리겠어~’ 했는데, 두 번이나 길을 잃어버리셨다고 해서입니다.
그래서 화살표를 잘 보고 걸었는데 한두 시간 걷다보니까, 표시가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어버릴 것 까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약간 긴장을 늦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화살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맞는 길 같은데 화살표가 나오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더 가 보았습니다.
시간은 많이 지난 것 같은데 화살표가 나오지 않으니까 불안하기도 하고, ‘이렇게 오래 화살표가 안 나오는 경우도 있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지도상으로 그쪽 길이 맞는 것 같아 계속 걸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노점 비슷한 곳이 보여서 길을 물어보았더니, 제가 올레길 방향이 아니라 반대로 걷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올레길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1시간 정도 걸려 원점에 도착했을 때 다시 화살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이제는 다시 놓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놓치지 않았을까요?
그 이후에 사일 동안, 두 번이나 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인생 여정을 살다보면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보통 세상이 원하고, 또 세상이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려고 할 때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 길로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정말 원하는 그 무언가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 길로 가면 갈수록 내가 정말 원하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그 길과는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가 정말 원하는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화답송에 이런 시편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 말씀대로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화살표가 우리 신앙인에게는 기도와 말씀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 나아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또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기뻐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함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그 무언가를 얻어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말씀의 칼. -‘거짓 평화’에서 ‘참 평화’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요즈음 발견한 가장 신선한 말마디는 영어, ‘ever old, ever new(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늘 옛스럽기에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엣스러움이 없으면 새로움도 없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살아있는 현재적인 주님의 말씀들이요 성인들 같습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야 말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 우리 마음의 부패를 막아주고 늘 새롭게 합니다. 예전에 인용했던 다윗처럼 회개한 죄인은 성인이 될 수 있어도 솔로몬처럼 부패한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음의 부패가 문제입니다. 하여 늘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말씀으로 마음의 부패를 방지함이 회개의 지혜입니다.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아마 미사일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영원히 우리를 새롭게 하는 현재적인 미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회개가 마음의 부패를 막아주고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참 강렬한 느낌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충격적 말씀입니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싱가폴 북미회담 이후의 과정을 보십시오. 참 평화를 위한 기나긴 여정에 들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마음만 봐도 수긍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통한 긴 정화과정후에 주어지는 선물같은 참평화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칼이, 말씀의 빛 자체가 분열을 초래합니다.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참 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입니다.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말씀의 칼입니다. 이런 말씀의 칼 없이는 마음의 완고함과 부패는 필연입니다. 궁극에는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참으로, 불의에서 정의로, 불순에서 순수로, 즉 거짓평화에서 참 평화에 이르게 하는 말씀의 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이런 참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임이 분명합니다. 분도 성인의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성규4,25)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참평화에 앞선 말씀의 칼로 우리의 거짓평화를 도려내는 주님이십니다.
하여 강론 제목을 ‘말씀의 칼-‘거짓 평화’에서 ‘참 평화’로-’정했습니다. 녹슨 칼이 아니라 늘 반짝반짝 빛나는 진리의 칼, 생명의 칼, 사랑의 칼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의 부패를 도려내어 궁극엔 참평화를 주는 칼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에 값싼 거짓 평화를 주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을 몹시 불편케 하는 말씀의 칼입니다. 말씀의 칼임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한 것은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약2700년전 예언자의 말씀이 여전히 새롭게 들리는 ‘말씀의 칼’같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뿐 아니라 오늘의 종교지도자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의 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의 소제목은 ‘거짓 경신례와 참된 경신례’입니다. 참된 경신례의 거부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삶이 통째로 빠진 거짓 경신례에 대한 거부입니다. 삶과 전례는 함께 갑니다. 생활의 전례화, 전례의 생활화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도 문제이고 전례가 없는 삶도 문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의 칼로 공격하는 바, 바로 정의와 공정의 실천의 삶이 없는 공허한 전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는 권고에 이어 ‘무엇하러 나에게 이런 제물을 바치느냐?’ 말씀하신후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말씀을 쏟아 내십니다. 새삼 잘 듣는 것이 영성생활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분도 규칙 역시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됩니다. 왜관수도원 어느 도반의 방에 걸렸던 액자의 공경하여 듣는 다는 ‘경청敬聽’이란 한자도 생각납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사야서 1장3절부터 15절까지 하느님의 솔직한 마음이 여과없이 이사야의 입을 통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동사 부정적 말마디들이 말씀의 칼이 되어 노골적으로 우리 마음을 불편케 합니다. ‘물렸다.’, ‘싫다.’, ‘가져오지 마라.’ ‘역겹다.’. ‘견딜 수가 없다.’, ‘싫어한다.’, ‘지쳤다.’ ‘가려 버리리라.’. ‘주지 않으리라.’ 온통 부정적 말마디들입니다.
더불어 오늘 복음의 주님의 두 말씀의 칼도 꼭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누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두 말씀의 칼입니다. 참으로 주님이신 당신을 사랑의 첫 자리에 두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만이 진정 합당한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정의와 사랑의 삶이 빠진 위선적 헛된 제물, 헛된 전례, 헛된 삶을 얼마나 혐오하시는 하느님이신지 깨닫습니다. 역시 말씀의 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미사전례는 하루 삶의 실천으로 확산되고 하루 삶은 미사로 수렴될 때 참된 전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 결론으로 주님은 참된 전례가 되기 위한 참된 삶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런 실천의 삶이 전제되어야 참평화요 참전례입니다. 결코 값싼 평화, 거짓 평화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평화를 선물하시어 정의롭고 공정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시편50,23ㄴ).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칫하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과 같은 고통만을 주시러 오셨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면 '평화'로 위장된 세속적인 안락을 추구하는 삶을 벗어나 단호하게 하느님 안의 참된 행복의 삶을 선택할 것을 촉구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존의 세속적인 가치에서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칼에 베이는 듯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도 기존의 잘못된 세속적인 가치를 벗어나 참된 그리스도교적인 변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똑같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땅을 기어 다니다가 고치가 되고, 나중에 허물을 벗을 때 어쩌면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 그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평화로 위장된 세속적인 안위의 삶을 벗어나 참된 부활의 시간, 하느님 안의 참된 평화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주제를 이렇게 잡아봤습니다. 이렇게 주님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 신앙인은 사랑의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고, 그러기에 주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도 사랑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께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즘같이 부모를 버리는 불효막심한 자들이 많은 때, 그리고 자식마저 학대하고 버리는 자들이 많은 때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고도 남지요.
그렇지만 주님보다 부모와 자식을 더 사랑하면 주님께 합당치 않다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주님께 합당치 않음은 우리네 사랑과 마찬가지로 질투 때문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사랑하면 자존심 상해하시고 그 사랑은 값어치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제 첫 번째 조카딸이 시집을 갈 때 조카사위가 도둑놈 같았고, 그러니 부모에게는 얼마나 더 사위가 도둑놈 같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고, 제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 정작 그 부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저는 칙칙하고 그 부모는 Cool한 성격이었기 때문입니까?
그렇게 성격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부모와 삼촌의 차이입니다.
삼촌도 조카를 사랑하지만 부모만큼 사랑하지 않기에 내가 사랑하는 조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질투한 겁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정말로 자신을 생각지 않고 오직 자식의 행복한 미래만을 생각하기에 자식이 나 아닌 다른 사랑의 짝을 만난 것을 잘 됐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사위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니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우리의 부모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가 당신보다 부모를 더 사랑한다하여 싫어하거나 질투하실 리 없습니다.
욕심 때문에 당신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를 바라지는 않으시고, 우리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제일 사랑키를 바라실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해야 될 존재 중의 하나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가야할 진리의 길이시고,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생명의 길이이시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가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면 진리를 잃고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은 부모나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할 분이고 그래서 당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당신을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합당치 않다고까지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10, 34-11, 1(연중 15주 월)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칼을 주실까? 그것은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입니다.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특별히 “참 행복선언”인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 11. 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또한, 볼리비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본주의의 물신풍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성 바실리우스의 말을 빌려 “돈을 악마의 배설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라과이 방문길에서는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라고 질타하시면서 “인간 얼굴을 한 경제모델 세워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종의 연설을 두고 미국 가톨릭대의 스티븐 쉬넥 가톨릭연구소장은 "교종의 발언은 통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외치는 함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혁명을 위한 칼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칼은 이사악에게 내리친 순명과 결단의 칼이었고, 할례의 칼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칼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칼은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을 주었고(루카 2, 35), 성령의 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 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 12)
이처럼, “칼”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요,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와 이 세상에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저와 세상을 수술하소서!
병든 이 세상과 이 몸에
금은보석으로 치장한다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칼로 병을 도려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희를 살리소서! 아멘.
십자가 뒤의 참 평화 <마태 10, 34-11, 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평화와 자비의 하느님이 오셔서 평화를 주러 오지 않고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니 지금 우리 민족이 염원하는 평화 통일과도 배치되고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일반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세상은 분열된 상태에서 시시각각 자기 원하는 대로 세상이 되어 가기를 바라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편하고 안락한 삶을 원하고, 자기 집안에 들어가 안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한 가정이 참 평화를 얻으려고 하면 자기 관습을 버리고 서로 일치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불교 집안에 출가하면 천주교를 버리고 불교 신자가 되어야 하고 개신교 집안에 출가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내적 갈등은 없어지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평화를 잃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여기에 칼이 필요합니다. 고기를 잡아 그대로 먹지 못하고 예리한 칼로 각 부위를 잘라내고 가르고 난 다음 정돈된 음식으로 요리를 해서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게 됩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현실은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 혼돈의 세상이어서 무엇이 참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인지 분별 못 하고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만 마음 쓰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게 하셨지만, 칼을 가지고 계신 주님은 그 칼로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고 정리 정돈하여 진리와 사랑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죽음 없는 부활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며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게 합니다.
어떤 이는 “모든 삶을 적당히 해야지 지나치게 열 내서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앞에 있는 것 적당히 즐기고 재미있게 살면 되지 절제하고, 나누어주고, 희생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멋대로 편리한 대로 살려고 하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라고 하듯이 먹고 마시고 즐기다 보면 자기 일을 잊게 되는 것처럼 무사 안일한 생활을 하려고 하면 참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 북과 남은 서로 간에 양심적 해결책 없이는, 하나의 투쟁 없이는 평화와 번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북에 산재한 문제, 인권 문제, 독재 정권으로 저지른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평화 통일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 안에 왜 그 많은 전쟁이 있었을까? 전쟁을 통해 참 평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암 환자는 암을 제거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싸워 이겨야 합니다. 평양냉면 먹었다고, 악수했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이 서로 버릴 것 버리고, 양보하고 만나서 서로 뼈를 깎는 고통을 맛보는 시련을 넘어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도 칼도
함께 존재합니다.
깨어나야
평화입니다.
칼이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칼은 평화의
방향이 어디인지를
너무나 잘 알려줍니다.
칼의 탈출구는
평화이고
평화의 탈출구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흐지부지한 믿음엔
칼이 필요합니다.
우리모두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를 수 있는
칼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묶여 있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자르는 순간
평화는 시작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의 칼입니다.
결단의 칼은
식별의 칼날이 되어
주님을 향해 가게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라는 평화와
십자가라는 칼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걸어가야 할 길은
아는 것만이 아닌
올바른 실천의 길임을
기억합시다.
관계의 칼이
관계맺음의
일순위인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회개의 칼이 됨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우리 내면 깊이
받아들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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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저는 냄새를 맡지 못했습니다. 생활 안에서 불편한 점이 많아서 병원을 찾아갔더니 코 안쪽에 혹이 나 있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악성은 아니고 물혹이라서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지만, 이 물혹으로 인해서 심한 비염이 생길 수가 있고 또한 냄새를 잘 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물혹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지거나, 또는 약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잠시 약으로 인해 진행을 멈출 수는 있지만 완전한 치료는 수술을 통해 물혹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직 이 물혹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성지의 일과 제 개인적인 일정이 바빠서 도저히 며칠을 연속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러다보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혹시라도 염증이 생기지는 않을까, 또 전에처럼 냄새를 못 맡아서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제거해야 할 물혹을 계속하고 가지고 있다 보니 마음이 평화롭지 못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물혹을 과감하게 제거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때로는 제거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을 떠올려보십시오. 적군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분명히 평화가 깨집니다. 이 평화를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항복하면 될까요? 물론 적군이 스스로 물러나면 좋겠지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싸워 물리칠 때 비로소 평화를 되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라고 말씀하시지요. 평화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먼저 평화를 빌어주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평화의 주님이 아니라, 사실은 폭력의 주님이라는 말씀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바로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 제거해야 하는 것을 과감하게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평화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조금만 참으면 하는데 뭐...’라면서 꾹 참으면 이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롭게 살자.”면서 복잡한 상황을 피하는 것이 큰 미덕인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진정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것, 불의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참 평화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은 과연 평화로운지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일한 상태를 평화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늘의 명언: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너 자신뿐이다(에머슨).
질’과 ‘잘’(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국어에서 ‘질’이라는 낱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질’처럼 접미사로 사용될 경우, 명사, 의성어 또는 어근 뒤에 붙어서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는데요, 예를 들어 ‘싸움질’, ‘자랑질’처럼 좋지 않은 행위를 더욱더 비하하는 뜻으로 종종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질'이라는 낱말이 항상 나쁘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품질이 좋다', '질감이 좋다' 등과 같이 ‘사물의 속성, 가치의 총체’,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이루는 근본 바탕’ 등의 의미를 가지며 좋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모양과 발음의 차이 때문에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어느 가요의 가사처럼 '질'에 점 하나만 붙여서 ‘잘 한다’, ‘잘 산다’ 등과 같이 '잘'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부사가 됩니다.
이처럼 같은 말, 같은 내용이라도 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 좋은 표현이 될 수도 있고, 나쁜 표현이 될 수도 있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그렇지 않을까요? 자그마한 말 하나의 변화로도 세상을 바꿀 수가 있으며, 별 생각 없었던 행동 하나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과 행동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을까요?
참 평화를 위한 결단과 전적인 내어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의 초기 선포 활동과 오늘날에 사는 제자들의 생활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곧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을 제시하면서 그분을 추종하는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10,4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위하여 결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과 제자인 우리에 대하여 갈라지고 맞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와 정의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 인간들의 탐욕과 폭력이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을 따르려는 결단으로 친척들로부터 적대감을 사게 되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을 따르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0,37).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혈연관계나 다른 인간적인 관계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에게 필요한 일들에 정신을 쏟느라 하느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아버지와 결별을 선언하며 “이제부터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알몸으로 가겠습니다.”(1첼라노 12)라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삶의 중심과 방향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끝으로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10,38-39).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와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를 지니고 완전히 예수님께 속하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다운 사람이 되려면 그분께 헌신해야겠지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오염된 자신을 버리고 순수한 자신을 오롯이 봉헌하는 사람만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하여 그분을 위해, 온전히 자아를 포기하고 자신 전부를 헌신할 때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길은 생명을 내놓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한걸음씩 생명을 증가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는 몸짓을 통해서도 생명은 확산될 것입니다(10,42).
제자들의 길은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역설적인 삶입니다. 남이 싫어하는 궂은 일 나서서 하기, 고통과 시련을 피하기보다는 직면하기, 편리한 것들이 주어질 때도 그리스도의 가난을 생각하며 불편을 감수하는 것 등이 예수님의 참 제자다운 삶의 면모들이겠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결단을 통해 참 평화 가운데 머물며, 사랑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며, 그분 때문에 가장 소중한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건네는 ‘어리석은 역설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베네딕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구의 총대리이신 손희송 주교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1993년 용산 성당에서 주교님과는 본당신부와 보좌신부로 1년간 함께 지냈습니다. 벌써 2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교구청에서 주교님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두 번씩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주교님과 저와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늘 한결같으신 주교님께서 영, 육간에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교님께서 사목국장으로 계실 때, 제게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을 위한 강의를 맡겨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리스도론, 성사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매주 회합을 하고 있습니다. 활동과 기도로 모범을 보이는 사도직 단체입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함께 가기도 하시고, 성당 청소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시기도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면 레지오 단원들의 주회에 가서 강복을 주곤 했습니다. 매주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군대’라는 용어처럼 단원들에 대한 교육이 철저하고, 상위 조직에 대한 순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는 제자들을 교육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마음이, 생각이, 정신이 변하면 행동이 바뀌기 마련입니다. 한국교회가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제자교육’이 더욱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 소식을 전하시면서 함께 할 제자들을 선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전해 주시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때로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인지,기쁜 소식은 무엇인지,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례를 받았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지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진리의 빛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그곳은 멀리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말씀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이곳은 이미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세상의 기쁜 소식은 ‘돈, 명예, 권력’입니다. 그것을 얻으면 기쁨이고, 그것을 상실하면 괴로움과 고통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쁜 소식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진리를 아는 기쁨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생각했고, 예수님에게서도 ‘재물, 명예,권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기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지혜는 나누고 비움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우고, 쌓으면서 얻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나누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밀알 하나로 남지만 떨어져 썩으면 수많은 밀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참된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밭을 제대로 일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섬기는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자이신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을 주는 수도성인입니다. 성인의 규칙서는 불후의 영적 고전이 되었고,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는 성인의 거룩한 생애를 잘 전해 주고 있는 역시 불후의 영적 고전입니다.
오늘 복음에 앞선 부속가의 내용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성인의 면모에 대한 묘사에서 그분의 거룩한 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 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위에 열거된 모든 성인의 성덕을 합쳐 놓은 분과 같은 성 베네딕도라하니 성인께 대한 수도후배들의 흠모의 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참으로 완덕의 수도성인이었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성하면 떠오르는 것이 제 자작시 산과 강입니다.
“밖으로는 산/천년만년/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천년만년/임 향해 흐르는 강”
산이 상징하는 바 ‘정주서원’이요, 강이 상징하는 바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을 뜻하는 ‘수도승다운생활' 서원입니다. 바로 '산과 강'의 영성을 살았던 베네딕도 성인이자 그 후배수도승들입니다. 사실 성인은 몬테카시노 산에서의 수도생활중 거의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 집니다. 새삼 정주의 상징과도 같은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이 얼마나 복된지 깨닫습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의 비유가 재미있습니다. 강론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6세기의 성 베네딕도를 산같은 분이라면, 12세기의 성 프란치스코를 강같은 분으로 견주곤 합니다. 중용과 절제의 산같은 성 베네딕도라면 시인이자 신비가인 성 프란치스코는 강 같은 분입니다. 마치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이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두 분의 배치가 하느님의 절묘한 섭리처럼 생각됩니다.
산과 강의 영성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섬김의 삶입니다. 늘 그 자리의 정주의 삶을,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주옥같은 2독서 내용을 모두 포괄한 삶이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실로 거룩한 사람이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를 입은 사람입니다.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 평화의 사람, 감사의 사람이 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영성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직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이를 분명히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구절이 늘 신선한 충격이요 감동입니다. 바로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서 우리를 섬기는 분으로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 바로 섬김의 롤모델입니다. 평생을 하느님과 사람을 섬기는 삶에 정진하신 주님이 아닙니까?
섬김의 두 차원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전례를 통해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며 주님을 섬기듯 형제들을 섬깁니다. 둘은 구별될 지언정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섬김은 형제들을 섬김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형제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을 잘 섬기는 자가 형제들도 잘 섬기게 됩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공동체가 성 베네딕도의 비전이자 꿈이었습니다. 섬김의 공동체는 바로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베네딕도는 성규 머리말 끝부분에서 그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비단 베네딕도 공동체만 아니라 믿는 이들의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섬기는 학원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섬길 때 저절로 이웃 형제들을 섬기게 됩니다.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에는 졸업이 없으니, 평생 섬기기를 배워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고 섬길 때 더불어 깊어가는 섬김의 삶입니다. 오늘 1독서의 결론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슬기가 나온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혜이자 섬김입니다. 사랑이 지혜이듯 섬김service이 지혜wisdom입니다. 섬기는 삶에 충실할 때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는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믿을만한 영성의 잣대도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섬김, 순종의 섬김, 겸손의 섬김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 말씀과 성체로 우리 모두를 섬기시며 우리 또한 찬미와 감사로 주님을 섬기는 복되시간입니다.
우리가 섬김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칼을 주러 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불의에 찬 축제모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부님이 본당에서 하는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그러니 예습하는 차원에서 마르코복음 17장을 모두 읽어 오세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교사는 성경공부 참석자들에게 “지난주에 마르코복음 17장을 읽으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참 재미있군요. 마르코복음은 16장까지 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적절한 교훈을 배우게 되겠군요. 오늘은 예수님이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말씀하시는 첫 번째 경고는 위선적 예배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는 안중에도 없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기에 그런 거짓된 예배에 물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이란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고, 고아의 권리를 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신의 뜻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예배에 나와 위선적인 제물을 바치는 것을 오늘 독서는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손에는 이웃에게 해를 끼쳐 피가 가득한데 예배만 드리면 괜찮을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먼저 버리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예배도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당신 뜻을 이미 알려주셨는데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앉아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이웃이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데도 나부터 살고보자는 마음으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그런 예배에서 지금도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미사를 드리러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합당한 옷차림입니다. 미사 이전의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죄 있는 상태로 미사를 본다면 주님을 참으로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사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이고, 그 노력이 미사 때 드리는 참된 예물인 것입니다.
예전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남편이 몇 년 동안 고생하다가 귀국하는 날,어떤 부인들은 남편을 기쁘게 맞으러 가고 어떤 부인들은 자살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부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제비들이 있어서 남편이 번 돈을 다 날리는 부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 미사를 위해서도 위선적인 예배,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미사 끝나고 성당 문을 나갈 때부터 이미 다음 미사 때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기 위해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노력에 온 힘을 쏟으며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 10,4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것이 필요없나 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모세의 계명과 율법들을 하나하나 다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사랑의 몸짓 하나로도 히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충분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 한 번,
칭찬의 말 한 마디,
시원한 물 한 잔,
주모경 한 번이면 하느님 나라는 내 것입니다.
그 멋지기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를 마음껏 누리시는 오늘 되소서~~^^
힘들고 어려운 길< 서원 미사 강론 7/11> 사부분도 축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10여년의 긴 세월 오늘을 준비 하려고 익숙하지 않은 삶을 시작하여 종신서원의 시간을 맞이한 류 치프리아노 수사님에게 감사와 축하의 말을 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시고 잘 참으시고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저 하느님이 좋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찾아오고 이 길을 가려고 결심하신 수사님 눈물 콧물 많이 흘리고 이 길을 가야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수사님은 고개 마루 턱에 오르시어 야호! 하고 이 자리에 온갖 축복과 축하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금 여기는 하늘의 천사들과 성부 성자 성령이 합께 축복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올림픽 선수로 발탁 되어 오래기간 고된 훈련을 하고 올림픽 선수로 경기장에 나가는 사람은 영광의 금 매달을 목에 걸 때까지 경기장에서 피땀을 흘리며 자기 실력을 충실하고 진실 되게 경기에 임하는 것 같이 끝 까지 달릴 곳을 향하여 달려야합니다. 지금 것 열두 고개를 넘었으면 이제 20고개가 남았습니다. 이 고개는 지금 것 연습해오든 같은 내용을 실전에 공동체 안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리랑 연민의 정을 민요가 아니라 아 =나 리=이치아는 것 랑 = 기쁨
고개를 넘어 간다 사람은 고난을 격지 않고는 자기 지신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잃어버리면 십리 <와성> 못가서 발병난다. 더갈수 없다 중지된다.
이제부터 연습이 아니라 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처럼 살아가야합니다.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나고 지금 것 실수나 잘못을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감싸주고 염려할 사람이 없습니다.
순명의 길은 지금 것 쉬웠지만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어른 되었다는 생각에서 알지 못하는 고집도 더 성장하고 순명이 죽기보다 더 힘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명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순명의 긍정적 의미는 자신을 낮추어 공동체를 섬기는 사랑입니다.
청빈의 삶은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지난번 소풍을 함께 할 때 점심을 풍요로운 뷔페에 가니 수사님은 저를감동 시켰고 부끄럽게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떡복기나 김밥이 더 좋아요 그런데 살아보면 더 맛있는 것 먹고 싶고 더 좋은 것 가지고 싶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내것은 아무것도 없고 있는 것은 다른 이을 위한것입니다
정결의 서원도 시간이 갈수록 덕스러워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자신 주위를 맴돌고 강하게 닦아 옵니다.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싶어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워 질 때 자기 안에 행복을 찾아 스스로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너 안에 내가 죽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 마세요 여기 남아 있는 선배들은 그 보든 것을 극복하고 여기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수사님을 불순종으로 불청빈으로 불 정결로 유혹하겠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신 한 20고개를 넘어 생명이 다하도록 여기 공동체에 남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오늘 저 자리에 엎드려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서원한 같은 자리에 나무 코드 안에 들어가 누어 수사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에게 금메달을 받게 될것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가리키는
안내자는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수도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묻게됩니다.
매순간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삶이
수도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다양함을
함께사는
형제들 안에서
깨닫게됩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은
예수라는 칼을
형제들과 함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칼을
신뢰하게 될 때
우리를 정화시키시는
그분께 우리의
분노와 슬픔까지도
내어맡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본질적인 삶이
무언지를 알게
하여주십니다.
본질이란
그 무엇에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의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안에
수도생활이 있듯이
하느님 안에는
갈등과 대립
미움과 사랑
불신과 신뢰
이 모든 것들이
생명의 선물로
변화되게 됩니다.
점점 하느님을
신뢰하게 하는 것이
수도생활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음의 칼처럼
우리의 일상안에서
노동과 기도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나에게서
수도생활이란
다시 일어서는
십자가의 기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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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저의 커다란 유혹꺼리는 아마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비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이 자리를 이용해서 이제야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고백하고 싶네요. 물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고백을 이미 다 한 것이지만, 부모님께는 직접 말씀드린 적이 없었거든요.
사실 공부하러 도서관 간다고 해놓고 하루 종일 만화방에 있으면서 만화만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서, 문제지 산다고 말해놓고서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의 비용을 마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부모님 심부름 갔을 때, 약간의 돈을 빼돌렸던 적도 기억나네요.
아무튼 어렸을 때, 저의 이 유혹거리를 이겨내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 유혹 앞에서 항상 흔들렸고, 그 흔들림으로 인해서 마음에 평화가 오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흥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등으로 평화가 올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에 입장하면 마음이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제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어떨까요? 다시 평화로울까요? 죄 지었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한 가득입니다.
이런 순간적인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평화는 어떤 평화가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했는데, 그렇다면 이 평화는 어떤 것인가요? 분명히 천사들도 말했던 평화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실까요? 순간의 기쁨, 순간의 위로를 통해서는 참 평화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암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런데 마약 성분이 들은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고통을 동반하는 진통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오고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것이 참된 평화일까요? 아닙니다. 순간의 평화를 주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고통이기에 참된 평화라고 할 수 없지요. 여기서 참된 평화를 주는 것은 암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칼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간만 만족하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에, 이 참된 평화를 가로막는 것들을 싹둑 자를 수 있는 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짜 평화는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욕심,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이웃을 비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속 좁은 마음 등등입니다. 이 가짜 평화를 과감하게 잘라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라고 내어준 칼을 들고서 싹둑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평화 안에서 참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어떤 값어치가 있는 일을 성취시킨 적이 없다. 나의 여러 가지 발명 중에 그 어느 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없었다. 그것은 꾸준하고 성실히 일을 함으로써 이룩된 것이다(토머스 에디슨).
유혹에 맞서는 것은 누구? 바로 ‘나’.
어떤 수도승에게 한 사람이 와서 “저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잡념 때문에 위험을 느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승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저고리를 벌려 바람을 멈추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저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누가 바람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수도승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 덮쳐오는 생각들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맞서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유혹들을 인해서 우리 역시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유혹들을 누가 맞서야 할까요? 주님께서 알아서 맞서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맞서야 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중심과 책임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참 사람입니까?
사람이 되는 일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아마 평생 일이 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단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에서 찾아낸 것은 중심과 책임감입니다.
중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주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
그 누구보다도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주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중심 부재보다 더 큰 피해는 없습니다. 정체성의 부재와 직결되는 중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마라."(RB72장)
이번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지내신 왜관 수도원 김영호 요아킴 수사님의 상본에 적힌 성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신,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바로 허례허식을 싫어하시는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들어내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이사1,11-14).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마음을 알아 준다면 제발 이런 헛된 경신례는 집어 치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인 내가 싫어하는 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이 빠져버린, 내 뜻과 무관한 제멋대로의 경신례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해도 이런 상태에서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주님을 사랑하여 중심에 모신 이들임이 검증되는 것은 중심이신 주님을 따를 때입니다. 생각없이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진, 철저히 책임적 존재가 되어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제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이 제 십자가를 내려 놓고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책임적 존재가 되어 중심이신 주님을 항구히 따를 때 비로소 참 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제 십자가의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웃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 역시 참된 경신례의 정신을 사는 것이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이런 사랑과 정의의 삶이 채워질 때 비로소 참된 경신례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책임적 존재의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온다는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사실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환대합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 시편저자는 화답송 후렴을 통해 말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의 '중심'이신 주님과 각자의 '제 십자가'를 새롭게 확인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양다리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칼! 칼은 날이 서 있습니다. 날이 서 있기에 단칼에 무엇이든 둘로 자릅니다.
날이 서 있지 않은 칼은 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인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양다리는 그분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가족 구성원 하나 하나를 언급하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혈육보다 더 사랑해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칼같은 단호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양다리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결국 양다리는 주님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면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이, 물론 가족들도 포함해서 모든 이를 사랑하게 됩니다.
더 위대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주님의 편에 서는 사람은 혈연 혹은 지역이라는 좁을 틀을 넘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삽니다.
성령의 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거짓 평화와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눔과 봉사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목숨과 목숨사이에
하느님이 계시듯
사랑과 희생사이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시간이며
성장해야 할 생명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목숨은 사랑으로
존재합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사랑이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체성사처럼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에
주는 것이 받는 것이며
잃는 것이 얻는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이기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목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금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시는
밀알의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백 배, 천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시간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생명의 시간이기를 기도 드립니다.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생명의 벅찬 기쁨이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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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제가 직접 미사도구를 챙겨서 매주일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데 미사 가방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 커다란 초가 아닌 조그마한 티 라이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자주 미사를 해서 그런지 어느새 이 티 라이트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이를 구하기 위해 동네 문구점을 가보니 10개에 3,000원이더군요. 바로 그 순간에 인터넷 쇼핑몰이 더 싸지 않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100개에 9,900원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를 유혹하는 문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글쎄 25,000원 이상 구입하면 배송비 2,500원이 할인된다는 것이었지요.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냥 살 것인지, 아니면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서 다른 물건들도 함께 구입해야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해서 우선 100개들이 티 라이트를 2박스 구입하고 티 라이트를 담을 수 있는 홀더 역시 몇 개 구입해서 25,000원을 넘겨서 배송비를 할인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저에게 이득이 돌아온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티 라이트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또 홀더 역시 기존의 것을 쓰면 되었기 때문에 필요 없었거든요.
결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티 라이트 몇 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동네 문구점에서 3,000원 주고 살 것을 그랬습니다. 많은 것을 싸게 구입해서 커다란 이득을 본 것 같지만, 필요 없는 것을 구입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이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또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려야 커다란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 과연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적게 소유하고, 세상의 자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이 나눠야 할 것이고, 더 많이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융통성 없고 무책임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들이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나쁜 것은 나쁜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사람들의 배척을 당할 수도 있기에 서로 칼을 맞대는 것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주님께서 내세우는 기준을 따를 때, 이 세상 안에서 잘 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분명히 후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올바른 결정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잘못된 결정이며, 가장 나쁜 것은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 것이다(로저 엔리코).
하느님 일이 먼저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볼링이 너무나 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었지요.
첫째, 아침에 비가 와서 자전거를 탈 수 없어서 운동을 거의 못했습니다.
둘째, 그래서 온 몸이 뻐근합니다.
셋째, 한 주일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첫째, 며칠 전에 고장 난 컴퓨터를 고쳐야만 했습니다.
둘째, 집안 청소 및 정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셋째, 강의 준비와 원고 작성으로 인해 시간이 부족합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저녁 묵상을 하지 않았는데, 만약 볼링을 치고 오면 여유 있게 묵상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갈등했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은 볼링이 아니라 묵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성당에 올라가서 한 시간 가량 묵상을 하니, 복잡한 내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침묵 속에서 제 마음 속에 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해야 할 일들을 어느 정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세상 일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 일이 먼저라는 것을 말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칼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칼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오히려 칼과 같습니다.
무디어진 칼로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칼로 베는 듯 우리가 민감하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평화를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때론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도려내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평화가 있기에
이 평화를 이웃과 가족들과 나누고 쪼갤 수있는 칼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칼처럼 고정 되어 있지않습니다.
오히려 칼날처럼 식별과 분별을 요구합니다.
깨어있는 신앙의 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의 칼없이는 평화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 자신이 칼이 되시어 우리의 거짓된 모습을 깍아내십니다.
아프지만 주님이 주시는 칼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평화를 맛볼수 있습니다.
칼로 우리의 십자가를 벗겨내니 평화가 보입니다.
욕망을 정화시키는 칼은 분명 참된 신앙입니다.
주님의 칼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 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서로의 가슴에 탐욕의 칼이 아니라
신앙의 칼을 안겨주는 평화의 하루되십시오.
거짓된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평화는 늘 멀리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칼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칼
나명옥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시며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신 모습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던지십니다.
‘칼’ 하면 로마에서 공부할 때 가끔 방문한 성바오로 대성당 앞에 있는 대리석상의 바오로 사도가 들고 있는 쌍날칼과, 세종로에 근엄하게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오른손에 있는 ‘칼’ 이 겹쳐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쌍날칼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 12) 라는 말씀에 따른 표상이고, 이순신 장군의 칼은 직접 지은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는 시에서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을 생각하고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표상합니다.
자신의 삶 앞에 놓여 있는 유혹 앞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내면의 갈등이 없는 얼버무리기 식의 적당한 평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하느님과 사탄과의 평화를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해야할 날카로운 쌍날칼이 더없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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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연히 외제차를 한 번 몰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차였고, 아주 비싼 차였지요. 실제로 운전을 해보니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차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차를 끌고 도로를 주행하면서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혹시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서 차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까, 혹시 신호를 기다리는 이 차를 보지 못하고 뒤에 부딪히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차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제 차에 상처를 냈던 많은 운전수에게 단 한 번도 보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차의 지금 상태는 흠집투성이로 엉망진창이지요. 그러다보니 아주 편안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제차를 타고 운전할 때에는 영 불안합니다. 워낙 비싼 차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차면 무엇 합니까? 내가 운전하는데 불편한 마음을 없앨 수가 없다면, 내게 있어서 더 이상 차가 아닌 것이지요. 차는 차로서 기능을 할 때 가장 ‘차’다운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운전하는 차와 달리 맘 편하게 운전할 수 없고 걱정만 할 수밖에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인해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남들도 다 가지려는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더욱 더 드러내게 한다는 이유로, 우리들은 이 불편한 것들을 어떻게든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마련해주신 모든 것들은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들을 나를 위해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섬기면서 주님의 자리를 오히려 빼앗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의 시선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다보면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상황이 와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으로 살아야 한다고 힘있게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주님 안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진리이시며 참 평화를 주시는 주님의 시선을 간직하며 살아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인 것인 양 살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 제1독서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당장 실천하도록 합시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진리를 깨달음은 달이 물에 비치는 것과 같다. 달은 젖지 않고 물은 깨지지 않는다(도원).
달아날 곳이 없을 때(아잔 브라흐마,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중에서)
캐나다의 젊은 부부가 호주에서 계약직 근무를 했다. 부부는 계약 만료일을 앞두고 다른 부부와 원래 살던 토론토까지 요트를 타고 간다는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웠다.
여행 중반쯤 태평양 어딘가에 이르렀을 때다. 망망대해에서 요트 엔진이 고장났다. 두 남자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비좁고 무더운 엔진실로 내려가 엔진을 수리했다. 커다란 나사는 스패너로 아무리 돌려도 꼼짝하지 않고, 작지만 매우 중요한 나사 몇 개는 손 닿지 않는 구석으로 달아났다. 구멍에서는 기름이 계속 새어 나왔다. 절망은 짜증을 불러왔다. 처음에는 엔진, 그 다음에는 서로에 대해. 짜증은 금방 화로 변했다. 남자 중 하나가 연장을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이것으로 끝이야! 난 떠나겠어!”
그는 선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 여행 가방을 들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에 있던 두 여성은 그 모습을 보고 웃느라 요트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는 수평선 멀리까지 둘러본 뒤에야 갈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당황한 그는 얼른 몸을 돌려 선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고 엔진실로 갔다.
갈 곳이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달아나는 대신 문제와 마주한다. 문제 대부분은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엔진은 수리되었고, 두 남자는 가까운 친구로 남았다.
십자가
신효원
해마다 오월이면 학교 실습지가 있는 농장의 식구들이 죽전 공소의 나환우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갑니다. 그분들 중에 세상을 떠나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생기면서 참석 인원이 자꾸 줄어듭니다. 올해는 여덟 분이 오셨습니다. 할아버지 두 분은 한껏 멋을 냈고 할머니들도 곱게 단장을 했습니다. 고단했을 지난 세월의 흔적 없이 모두 밝았습니다. 오히려 시중 드는 우리들의 표정이 더 어두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소 회장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웃고 사는데 당신들이 무슨 걱정이 있어? 정 답답하면 예수님을 부르면 되잖아!”
십 년째 장기집권 하고 있는 다두 회장님은 여든이신데도 씩씩하고 분위기를 잘 띄우십니다. 술잔이 돌아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서넛은 춤을 추었습니다. 곁에 앉은 루시아 할머니도 즐거워했습니다. “처음 병을 알았을 때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어요. 남편을 붙잡고 며칠을 울었지요. 집 떠나 이곳에 온 지 삼십 년이 지났네요. 이제는 감사하지요. 이 병이 아니었더라면 좋으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사람마다 집집마다 걱정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태도에 따라 고통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 속에 깃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길이 됩니다. 하느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은총입니다. 십자가 없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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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제가 아는 분으로부터 E-Mail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메일 제목이 조금 이상합니다. 메일 제목이 글쎄 ‘기도하시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였습니다.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 안에는 첨부파일이 있었고, 그 첨부파일에는 저의 얼굴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습이 조금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진 속에 있는 저는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5일에는 인천교구에 새 사제 4명이 새롭게 탄생한 날이었습니다. 저 역시 새 사제들이 성인사제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이 서품미사에 참석했지요. 서품미사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예식이 진행되는데 너무나도 피곤한 것입니다. 전날에는 성서40주간 강의가 있었고, 5일 당일 오전에는 봉성체과 병자성사가 있었거든요. 더군다나 강화까지 직접 운전을 해서 오다보니 더욱 더 피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잠깐 졸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진에 찍힌 것이지요.
사실 그렇게 길게 졸았던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잠깐 나도 모르게 졸았고, ‘이러면 안 되지.’라는 마음을 먹고 그 다음에는 집중해서 정성을 다해 서품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졸았던 그 순간이 사진으로 남게 되면서, 서품식 내내 졸면서 참석한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이 사진을 받아보면서 갑자기 예수님 말씀이 떠올려지더군요. “항상 깨어있어라.”라는 말씀이 말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 깨어 있기 보다는, 세상의 일과 타협하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갈 때가 더 많지 않았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와 같은 모습을 보시고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예수님을 우리는 평화의 주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니요? 그러나 이 말은 악과 타협하지 않는 주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악과 타협하지 않고 싸우시기 때문에 그로 인해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마음도 주님의 일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타협의 말도 주님의 일에서는 없어져야 할 말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라는 비교의 말도 주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삶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평화가 아닌 하늘의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만이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늘 깨어 있으면서 하늘의 평화를 위해 주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원하는 진정한 의인입니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나 그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가장 부족한 자원, 즉 시간이다.(피터 드러커)
마음 길들이기(이원조, ‘마음속 길들이기’ 중에서)
사람의 참된 아름다움은 생명력에 있고, 그 마음 씀씀이에 있고, 그 생각의 깊이와 실천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맑고 고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은 맑고 아름답습니다. 깊은 생각과 자신의 분야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밝고 지혜로운 빛이 느껴집니다. 녹슬지 않은 반짝임이 그를 언제나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옳은 일이라면 묵묵히 하고야 마는 사람에게서는 큰 힘이 전해져 옵니다. 강한 실천력과 남을 헤아려 보살피는 따뜻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눈을 닮고 누구의 코를 닮은 얼굴보다 평범하거나 좀 못생겼다고 하더라도 어쩐지 맑고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만의 향기와 매력이 느껴지는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사람들일 것입니다.
내면을 가꾸십시오.
거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내 마음의 샘물은 얼마나 맑고 고요한지, 내 지혜의 달은 얼마나 둥그렇게 솟아 내 삶을 비추고 있는지, 내 손길 닿는 곳, 발길 머무는 곳에 어떤 은혜로움이 피어나고 있는지, 내 음성이 메아리치는 곳에, 내 마음이 향하는 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있는지...
받아들이는 대로 받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저는 인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는 저에게 와서 남의 흉을 보는 분보다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얘기하거나 어려움을 전해주는 분이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저도 한 몫을 합니다.
저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데 다른 사람과의 안 좋은 점을 얘기하면서 저도 같이 나쁘다고 얘기해주길 바라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저는 동조하지 않거나, 오히려 상대편을 이해하라고 하거나 당신도 문제 있다고 하기도하고 미숙하게도 불쾌한 표정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으려던 마음이 오히려 상처를 받고, 웬만하면 정말 문제가 있어도 제게 얘기하지 않아 문제가 곪아 터진 뒤에야 제가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저는 바뀐 것이 별로 없습니다.
곤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괴롭기도 하지만 인정에 끌려 옳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쉽지 않은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비록 평화가 깨지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예언을 하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감수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우리를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예언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받는 것이 달라지고,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받느냐 못 받느냐가 달라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처음부터 지니고 살았던 인생의 모토는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야 하는 등의 조건들과 함께 생각했던 것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심하게 미워하면서 느낀 것은 누가 미워지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두려움만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유학 생활하다가 치료차 한국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는 것은 세 달로도 모자랐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니 인사를 못 드리고 와서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이도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는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욕먹지 않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어렸을 때 가졌던 행복을 위한 선입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결국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나를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고 아무리 못해도 좋아할 사람은 좋아해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산다는 것이 나의 약함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누구의 미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중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 명확합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사람과의 분열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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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장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상점도 없이 초라하게 앉아서는 오이 몇 개만을 놓고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는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지요. 이 모습을 본 어떤 한 손님이 “할머니, 이 오이 하나에 얼마에요?”라고 묻습니다. 할머니는 “오백 원입니다.”라고 답을 했지요. 손님은 가격이 싸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묻습니다.
“그러면 두 개에는 얼마에요?”
“천 원입니다.”
“그러면 세 개 사면요?”
“천오백 원이지. 그것도 계산이 안 돼?”
“에이, 많이 사면 싸게 해 주는 줄 알았죠. 할머니, 그럼 여기 있는 오이를 다 사면 좀 싸게 해주시겠죠?”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전부는 절대로 팔지 않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상점 없이 하루 종일 쪼그려 있다가도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따라서 기회가 될 때 다 파는 것은 할머니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계속 말씀을 잇습니다.
“돈도 좋지만, 나는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일하는 것이 좋아. 열심히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을 봐서 좋고, 또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고, 또한 오후에 따스하게 시장 바닥을 내려 쬐는 햇볕을 너무나도 사랑하지. 그런데 이 오이를 다 사겠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일과 사람들과 나의 하루를 당신이 몽땅 빼앗아 가는 것이잖아. 그래서 결코 전부를 팔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러다보니 중요한 사랑의 가치는 뒤로 밀린 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실천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평화를 빌어주셨으면서, 평화가 아닌 폭력을 상징하는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뒷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할 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예수님께 이 칼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이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기억하세요.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강시원, ‘생각 한줌, 글 한줌’ 中에서)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은
베품을 미덕으로 여기며
순간의 손해가 올지라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욕심을 부릴 줄 모르고
비움이 곧 차오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은
덕을 베풀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일에 대한 보상과 이득을
따지지 않는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남의 잘못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가슴이 따뜻하고 예쁜 사람은
차 한잔을 마시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을 욕심없이 바라보는,
마음의 눈과 맑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아랫목처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조성숙 수녀님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 앞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예수님 제자의 길은 분명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가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원수처럼 여기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조건은 달랐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열정은 막상 수도 공동체에 살기 시작하면 곧 시들해져버립니다.
사랑은 이상적인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이 따라오는 의지의 차원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구체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자기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자기 성취’인 이 시대에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죽기 싫어서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합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죽으면 살 수 있나요?”
꽃자리
기정희 수녀님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구상, <꽃자리>)
구상 시인이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찾은 이들에게 건네신 이 시는 가끔씩 허덕이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를 멈추게 한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질 때 나는 ‘네 자리가 꽃자리니라.’는 시인의 말씀을 떠올린다.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의 경륜을 실어 가슴으로 말하는 언어는 얼마나 절절한 울림으로 들리는가!
젊은 시절, 열정과 사랑으로 첫발을 내디딘 수도 생활 초기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런 이의 없이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복병처럼 숨어 있는 십자가를 대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비켜 가길 바라며 마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무게가 전부인 양 허덕이며 숨차했다. 아직 인생의 마지막에는 다다르지 않았지만 훌쩍 세월을 뛰어넘어 나이가 들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그 의미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 십자가는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에 단 하나의 의미로 나를 내셨다. 그 의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비슷해 보여도 내 십자가는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제 것이 아닌 십자가를 부러워한다면 진정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리라.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를 명확히 방향 짓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도 제시하셨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그 무엇도 주님보다 우선일 수 없음을, 자기 자신마저 부정하는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임을 알려주신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믿어주신다. 십자가가 버겁다고 투정을 부려도,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어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것이라고 믿어주신다. 나무는 그 키만한 뿌리를 가졌다고 한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의 깊이는 우리 삶으로 드러난다. 그분을 따르는 데 피할 수 없는 모든 십자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며 앉은 그 자리가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꽃자리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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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서로 바라는 말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선 아내에게 있어서는 ‘사랑해’라는 말이 1위를 차지했고, 남편에게는 ‘나한테 당신이 전부예요’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을 차지하는 것으로는 ‘고생했어. 여보’가 2위, ‘정말 고마워.’가 3위, ‘당신이 최고야’가 4위, 마지막 5위는 ‘당신이 더 예쁜데’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설문조사는 이런 설문도 함께 했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나를 화나게 했던 말은 무엇인가?”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을 해보시지요. 생각하셨습니까? 그럼 그 순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아내를 화나게 했던 말 1위는 ‘당신 집안은 왜 그 모양이야?’, 2위는 ‘우리 집(시댁)에 좀 잘해.’, 3위는 ‘당신은 몰라도 돼.’, 4위는 ‘당신도 아줌마 됐어.’, 그리고 마지막 5위는 ‘또 아파?’ 였습니다.
공감이 가십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남편을 화나게 했던 말도 들어보시지요. 1위는 ‘옆집 남편은 안 그렇던데...’, 2위는 ‘우린 아파트 언제 사죠?’ 등의 순서였다고 합니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의 표현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자기 생각에만 있는 말을 뱉어버린다면 어떨까요? 내가 배우자를 확실히 사랑한다고 생각은 할지라도, 그 배우자는 ‘어떻게 내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저 사람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까?’라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부부가 서로에게 원하는 말을 한다는 것, 결혼해본 적이 없는 저이지만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그렇게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또한 이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서 지금 내 자신은 어떤 말을 쓰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가장 가깝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격려와 사랑의 언어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언어를 쓰고 있는데, 하물며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처럼 진심어린 사랑의 언어를 쓰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부부가 서로에게 격려와 사랑의 말을 해나감으로써 더욱 더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안에도 이런 격려와 사랑의 말이 넘쳐나갈 때, 주님께서 약속하셨고 이미 우리 곁에 온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두면서 살겠다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주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그래서 격려와 사랑의 말을 끊임없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나한테는 당신이 전부입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많이 해보시면 어떨까요? 상대방이 그토록 원하는 말이며, 그 말을 주님께서도 듣고 싶어하시니까요.
“나한테 당신이 전부입니다.”라는 말을 최소한 한 명한테는 말합시다.
행복과 가난(김호영)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
불행 하다고 생각 하신다구요?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현재의 삶 자체가 여러분은 행복하신 삶을 살고 계신겁니다.
내가 이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살아 숨쉬고 있는 그 자체가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내 이웃과 마주할 수 있는 그 자체가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지나간 일에 대하여 뒤돌아 볼 수 있는 그 여유만으로도 행복 하다는 이유입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고 이것은 곧 욕심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세요.
욕심을 버리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가난이라는 단어도 없어집니다.
내가 가난 하다고 생각 한다는것은 현재를 불만족하게 느끼는 욕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성균 신부님
성경에 담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해주고 삶의 방향을 일러 주는 보고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 주는 것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작성되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환경이 과거와 같지 않고 예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개별적인 고민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답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빚어냅니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존속하는 가치들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긴 해도 오늘의 복음은 가치를 달리하고 싶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용하신 적이 있듯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어 이루는 가정과 그 구성원인 가족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바람직한 덕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현합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돌보며 이해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우리도 변함없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엇나가는 말씀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정파괴범이라고 부를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관계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만 사랑해야 한다는 미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임의적으로, 또 쉽사리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은 가족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을 때나 종교로 인해 갈등이 있을 때, 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변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초창기에 복음 선포의 길에 나선 제자들의 경험담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몰이해가 안겨준 상처를 보듬고 복음을 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알뜰히 보살펴야할 가족들을 뒤로 하고 못내 길을 나서야 했을 이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이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적인 삶을 유지해 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덕에 오늘 복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떠나고 가족과 갈라서며 삶을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함을 넘어서 경계해야할 위험한 주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처럼 구체적인 고난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희생적인 삶을 주님과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 생애를 바쳐 증언하고 전해준 복음적 기쁨을 가족들 사이에 펼치는 일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퍼낼 줄 아는 인간이 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서 각별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새로운 모범이 되십시오.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 선포의 길입니다.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그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더 힘찬 선교가 됩니다.
반대의 불을 질러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平和,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염원하는 것입니다.
不和,
이것은 우리가 잘 해결하지 못하지만 참으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염원하지만 잘 살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한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러 오셨다 하십니다.
이 무슨 어깃장인가?
그리고 다른 데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하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이런 평화를 어찌 이해해야 하나?
갈라짐,
다툼,
갈등,
이런 것이 없는 것이 평화라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자기 잇속을 차리기보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으며 남을 받아들이는 주님의 사랑은 평화의 왕도입니다.
自己中心性의 탈피, 이것으로 우리는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불화를 각오해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는 좋은 것이 좋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인간끼리 좋은 것이 좋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끼리 짬짜미가 맞아 하느님을 따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헌 신발짝 버리듯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추종을 방해하는 그를 버려야 하고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그와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해도 주님 추종은 버리고 따르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야 하고 사랑하는 애인과 갈라서야 합니다.
수도원 입회를 결정할 때가 되면 부모의 반대가 너무도 극렬한 성소자가 꼭 있습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성소 담당 신부에게 하소연도하고 폭언도 퍼붓고 심지어 수도원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을 때 성소자 본인 뜻만 확고하다면 그대로 받으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자식 사랑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기에 자식이 이 생활로 진정 행복하기만 하면 언젠가 마음이 바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충고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반대와 불화를 무릅쓰고 주님을 선택해야지만 주님 따름의 의지가 확고해지고 주님 따름의 열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작으면 작은 반대와 만류에 그 의지와 열망이 꺾이지만 그 의지와 열망이 크면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잡아당기는 힘이 크면 클수록 더 강하게 뿌리치고 더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독서> : 육신의 제사가 아닌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제사를 봉헌하자.
경규봉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부패를 뒤쫓아 행하는 예루살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유다 백성은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제사가 아니라 제사를 봉헌하는 마음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를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신다. 악행을 버리지 않고, 정결하지 못하며, 착하고 올바르게 살지 못하면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듣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면서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수많은 제사를 봉헌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느님께 제사만 드리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이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제사에 물렸고 지치셨다고 말씀하신다. 제물 타는 냄새에 구역질이 나고, 제물의 피는 보기도 싫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그들이 봉헌했던 수많은 제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하느님을 역겹게만 한 것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곧 악행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억눌린 자들을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돌보며 그들을 감싸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과 질서인 사랑을 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하느님의 마음인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다만 인간의 욕심이며 이기심일 따름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이 봉헌하는 제물을 가져가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제물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가져가실 뿐이다. 그런데 제물 속에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만 담겨져 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아주시겠는가!
사도 바울로는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1-3) 하고 말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을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주시기를 청하자. 하느님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기도하자. 우리가 매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듯이, 내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제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하자. 오늘 육신의 제사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봉헌하는 제사가 되고, 하느님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복음의 요구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
이기양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로서의 참된 삶의 자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슬러 복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신앙적인 결단과 선택 속에, 모든 것에 앞서 항상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우겠다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복음적 가치와 신앙의 진리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과 같은 가족과 혈육까지도 주님 때문에 포기하고 뒤로 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더라도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살아서는 안 되며, 어떤 것도 주님보다 낫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시는데, 칼은 무엇을 자르는 도구로서, 잘라서 서로 갈라놓으면 갈라진 둘이 서로 분명히 구분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칼’이라는 이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과 선택에 대한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보통으로 결단력이 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맺고 끊는 선이 분명한 사람을 보고, ‘칼’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과 나 자신의 유익을 챙기고, 자신의 감정의 요구에 따르는 일에는 조그마한 손해와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칼같이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면서도, 복음의 요구를 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믿음 없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를 자주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는 바보처럼 너그럽고 착하게 살고 주님의 일을 행하고 복음의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칼처럼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칼로도 끊을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혈육의 정과 유대조차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소중한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신앙으로 꿋꿋하게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함으로써, 주님의 크심과 좋으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은총 속에서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행하던 일 중의 하나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 누구의 심부름으로 자기에게 왔을 때, 그 심부름꾼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보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즉 친구가 보낸 사람을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은 보낸 그 친구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웃어른이 보낸 사람을 존경으로 영접하는 것은 바로 그 어른께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과 생활 방식은 하느님의 진리를 전달하고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유대 스승들은 가르치기를 "현자를 대접하는 자는 자기의 수확에서 난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박식한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하느님께 인사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비단 예언자, 의인,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예언자이며, 의를 행하는 자들이고, 성직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대접할 때, 그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는 탁월한 하느님의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목숨 바쳐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의인을 필요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뒷받침해 주는 평범한 봉사에 대해서 그들의 업적과 똑같은 상급으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마찬 가지이지만,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되어 있다. 인간 사회는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며, 이러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며, 나의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충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웃을 통하여 이웃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웃이 보잘 것 없는 사람 같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겠다.
김종근 신부님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분과 통화를 했다.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대접을 해야 할 처지여서 음식점을 내가 정했다. 뭘 드시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신부님 좋아하시는 걸로 아무거나 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그분에게 음식 신세를 많이 졌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는 집을 잘도 찾아내어 내 입맛 수준을 높여놓았다. 그래서 시원한 대구탕을 비롯하여 산나물 비빔밥·아구찜·옛날식 비지찌개 등을 먹으러 식사자리를 여러 번 함께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분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둘이 모두 보신탕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10년 이상 알고 지냈고, 우스갯소리, 섭섭한 소리도 주고받을 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대접받기에만 익숙한 나의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사랑에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주고자 하는 속성이 반드시 있을진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나는 입만 벌리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사랑’ 한번 여태껏 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 나는 바리사이 같은 신부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승일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부활하신 당신의 평화를 주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시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선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평화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얻게 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말씀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아들과 아버지가 맞서고, 또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되는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칼은 전쟁이나 분열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전쟁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거짓 즉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의 세력과 싸워 투쟁해서 얻게 되는 그런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빌어주는 너희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평화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사람,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뻐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화의 큰 적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는 삶을 살려 하기 보다는 우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순전히 인간적인 도움이나 잔재주에만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옹고집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마음을 확 풀고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의 품안에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리고 무수한 독신 남녀들(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 외에 어떠한 사랑도 맛보려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그 분을 사랑한 나머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남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는 가족들과도 불화를 맛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칼”을 맞게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로인해서 맛보게 되는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진정으로 평화로우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오십시오. 평화의 주님에게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빨리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평화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진호 신부님
얼마 전에 불량만두 사건으로 온 나라가 소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량만두냐? 우량만두냐? 하는 판단근거는 만두 속입니다. 속재료가 우량하면 그 만두는 우량만두이고, 속재료가 불량하면 그 만두는 불량 만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겉모양이 화려하고 그럴듯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만두는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마침내 법적인 처벌과 제재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량인격자냐? 불량인격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따라 결정됩니다. 속이 바르고 참되면 우량인격자가 되는 것이고, 속이 거짓과 위선이면 불량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모나 외적 조건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량인격자가 되려면, 우량한 속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을 우량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불량하면 그 행위는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리라.” 따라서 우리가 일체의 인간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정신이 없는 제물은 형식에 불과하고,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모든 것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다릅니다. 신앙생활도 달라야 합니다. “ 나는 칼을 주러 왔다 ”
하느님처럼 살고 싶으면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언자처럼 살고 싶으면 예언자적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선인처럼 살고 싶으면 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도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불량만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속”입니다. “소~~~ 옥!!”
속이 튼튼하면 몸은 저절로 튼튼해집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 아멘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로렌 헨리 뒤킨 저)란 글을 읽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따뜻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야 정상인데,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봐야 정상인데, 와 닿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교회로부터 크나큰 상처가 입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몰라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의 원인 발생은 교회가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이상은 매우 높지만 현실은 교회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해하고 부인하며 배반하는 제자들, 당신께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을 때 잠을 자고, 붙잡혀 가실 때 도망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의 때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란 말을 자주 씁니다. 돌아보니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도 집요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지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겨워질수록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십자가 위에서 계신 예수님,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르면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끝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십자가가 무거워질수록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와 나란히 서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의 칼
장재봉 신부님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제물을 받지도 않고 분향도 거절하시며 그들의 팔 벌린 기도를 듣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시니까요. 하느님께 혼쭐나게 야단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우리에게 이르신 당부는 얼마나 훈훈하고 따뜻하신지요?
많은 말씀 중에 특별히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까지도 상을 주실 것이라 하신 걸보면서, 정말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 일은 쉽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말씀이 좀 걸립니다.
묵상
주님께서 주신 칼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칼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어디에?
무엇에?
쓰고 계신지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예리한 칼입니다.
그 말씀의 칼은
자신의 혈연에만 연연한 마음을 잘라내게 합니다.
자기 가족만 위해서
자기 자식만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마음을 잘라내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 이기심, 자존심,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심을 잘라내는 일에도 사용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곧잘 그 칼의 용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습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
말씀을 들먹이며 판단하는 일
남의 티를 잘라주는 일,
남의 잘못을 후벼주는 일,
날카로운 칼 날 같은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뽀족하게 날 선 눈길로 상대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곤 하니까요.
‘무엇하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는 질책을 들을 일이 아니겠는지요? ‘분향 연기도 역겹다’고 역정을 들을 일이 아닌지요?
오늘 우리 모두가 말씀의 칼날을 자신 안에 자신의 행위에만 들이대는 축복을 얻기 바랍니다. 말씀의 칼로 내 잘못된 심사와 생각과 행위를 잘라내는 고통의 하루이기를 원합니다. 해서 우리가 모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걷는 이가 되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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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간지방에만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설었지요. 어느 날, 이 임금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아주 멋진 새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다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 우아해 보였고 심지어 고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새는 흔한 바다갈매기였지만 산간지방에서만 살았던 그에게는 처음 보는 새였던 것이지요. 이 임금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 새는 진귀한 새가 분명하다. 저 새를 우리의 조상신으로 모셔야겠다.”
그는 그 새를 잡아서 자기 조상의 사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소와 양, 돼지를 잡아서 성대한 잔치를 벌였지요. 잔치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악사들도 초대되어 축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새는 음식에 전혀 입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슬프고 씁쓸한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다에 살던 새가 육지에 사는 인간의 음식과 음악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하겠지요. 하지만 임금은 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역시 진귀한 새의 근엄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 그리고 열흘이 지나도록 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임금은 더욱 좋은 음식과 술을 새에게 바쳤지요. 그러나 열하루 째가 되던 날, 새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한탄하며 말했지요.
“고귀한 새여, 제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모셨건만 왜 저를 거부하셨습니까?”
바로 그때 그 옆을 지나가던 현자가 혀를 차며 말합니다.
“쯧쯧, 왕이 아닌 새로 대접했다면 그 새가 굶어죽었겠소? 그 배고픈 새에게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더구나 인간들이나 듣는 궁중 음악까지…….”
그렇지요. 만약 그 임금이 그 새를 새 자체로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새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었다면 결코 굶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신이라는 엉뚱한 모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를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 역시 커다란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들도 실천하라고 십자가를 직접 지셨습니다. 즉,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데, 단순히 보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보기만 하기 때문에 주님께 커다란 실망을 간직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보기만 하는 십자가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들은 나에게 주어지는 그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하나의 액세서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는 짊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방귀와 귀의 차이점(웃긴 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에 가스가 차더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음악 듣던 이어폰을 빼고 몰래 방귀를 뀌었다. (방귀낄 때 소리 나면 대략 낭패다 싶어서)
한참 뒤에도 배가 살살 아파 다시 이어폰을 빼고 방귀를 뀌었다.
이렇게 몇 번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이번에도 이어폰을 빼고 방귀를 뀌려고 하는데 옆자리 짝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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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어폰 빼지마! 귀에서 열라 냄새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백남국 신부님
같은 교구에서 사목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 신부가 있는데 사회 갈등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동료 사제들과도 맞서게 되고 신자들과도 맞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저같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동안은 제가 군종으로, 교포사목으로 교구 밖에 있어서 함께 지낼 일이 없어 괜찮았는데 이제 가까운 데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동생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확신도 있고 또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자기 주장이 강해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참 피곤할 텐데 그냥 조용히 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피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그만큼 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며 편안한 삶이 아니라 세상과 부딪치며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 면에서 늘 맞서기를 포기하고 편한 길만을 찾는 저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부딪치고 맞설 수 있는 자가 살아 있는 것이고 활기를 지닌 삶이겠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주님의 제자답게 맞설 수 있는 열정을 지닌 동생의 삶이 훨씬 더 주님의 제자다운 것 같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왜 우리를 맞서게 하였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이기양 신부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우리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㰡“(마태10,34-36)
처음으로 성당에 나온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놀라서 금방 돌아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에 그리 마음 편한 말씀이 아니지요. 오랜 신앙 생활을 해 왔던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대하면 어떤 의도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㰡평화㰡‘이고 집안 식구들과의 㰡화목㰡‘인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으며 집안 식구들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오늘 복음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미카 예언자의 예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풍전등화의 신세였던 남 유다 역시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에 망하게 되는데 이때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미카7,5-6)
모든 관계에 정의와 질서가 다 무너지고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이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간에, 또 부모 자식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신과 분열, 악이 끼어드는 이러한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미카 예언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악은 끝까지 승리하지 않으며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아의 승리를 미카 예언서는 예고하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악이 감히 끼어들 것 같지 않은 인간 관계에도 악이 끼어드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시지요.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온다는 말이 있듯이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 승리하는 것은 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듯이 거기에서도 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안에 부활의 희망과 승리의 시점이 내재해 있다는 말씀이지요. 미카 예언자는 말합니다.
"내 원수야,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주님께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신다.“(미카7,8)
오늘 복음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부부 간이나 형제지간일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의 직업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지요.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싸워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칼을 주러 왔다는 것은 그러한 불의한 것에 대항하여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싸워서라도 도둑질을 못하게 하고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㰡칼을 주러㰡‘왔으며 㰡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㰡‘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어서 도저히 악이 끼어 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의 말씀같이 들려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지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이라는 승리가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작은 이익 때문에 연연해 하거나 불의와 거짓을 알면서도 작은 유혹 앞에 묵인하고 덮어버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타협하지 말고, 문제는 지혜롭게 밝혀서 정의롭게 해결하는 용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또 해야될 일과 해서 안 되는 일을 놓고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㰡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㰡‘하며 덮어둔 채로 슬금슬금 살아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싸워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야 참 평화가 올 수 있지요. 정의와 하느님의 일이 승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어려워도 타협하지 말고 꿋꿋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석희 신부님
계속되는 많은 비와 높은 습도로 우리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뭄 때문에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청한 간절함을 기억한다면 감수 할 수 있는 시간이며, 자연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순응하는 지혜로움을 갖게 만들기도합니다.
오늘의 복음에따라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묵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한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썪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 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려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칼을 주러 오신 예수
강영구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그대에게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결단(決斷)과 선택(選擇)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복(福)과 화(禍),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하느님 앞에 중립지대(中立地帶)나 회색지대(灰色地帶)는 없습니다.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저주를 받겠느냐?”(신명11,26-28)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어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6,24)
우리 삶은 언제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정쩡한 양다리 걸침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
하느님과 악마, 성령과 악령,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하늘의 소리(天命)와 욕망의 소리 등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단과 선택에 따라서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시퍼렇게 날 선 예리한 칼(劍)을 주십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칼로 일도양단(一刀兩斷)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당신은 오늘도 끊임없이 결단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劍)을 사용하십시오.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평화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 하느님 말씀의 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하면 평화와 사랑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당연히 평화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평안해지고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와 사랑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을 통한 평화의 복이란 복음의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갈등과 아픔은 무시하고 복음의 결과만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이는 농부가 봄에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씨를 뿌렸던 과정은 무시하고 오직 추수 때 알곡의 기쁨만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
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지 말라
사람들의 세상에사에는 평화와 분쟁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쟁보다는 평화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평화가 아닌 분쟁이란 말입니까? 이 말씀에 앞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적대하게 만든 사탄의 권세를 무찌르고 인간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둠의 세력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는 우리 인간에게 참 평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참 평화는 전쟁에서 이겨야만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지난날 정부에서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조폭집단과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만을 제안한다면 과연 이 땅에 폭력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의 대화와 타협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렇지 않는 악질적 속성을 지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될 그런 불가피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
오늘복음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땅에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의 내용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칼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말씀합니다.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 또한 히브리서 4,12에도 말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고 잘라내는 수술하는 살아있는 수술 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들이 의롭게 소생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즉 미사나 기도시간에 우리의 심령은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조성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에 나와서 좋은 말씀 한 구절을 듣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거나, 일단 교회 문밖을 나가고 가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칼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재창조의 원리
제철공장에 가면 용광로에서 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불물 위에 다시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그 불물은 엄청난 강도를 지닌 강철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찌들고 병든 인간의 이기심과 야욕을 녹여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하느님의 피조물로 재창조해 내는 불구덩이(용광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비유하면, 하느님은 마치 숙련된 조각가가 크고 단단한 바위덩어리를 수십만번 쪼개고 다듬어 자기가 원하는 조작작품으로 만들어 내듯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쪼개고 다듬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쪼개고 다듬는 책무에 소홀합니다. 특히 신앙에 관련한 믿음, 마음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하고 쉽고 편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당장에 하늘이 갈라지고 복이 쏟아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얻어맞을 때는 얻어맞고 회개할 때는 회개하는 것이 복 받을 자가 되면 복을 받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형상이 되기까지는 수천, 수만 번을 끊임없이 말씀의 칼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2장 34-35절에는 시므온이 갓난 예수를 품에 안고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 때문에 넘어질 자들이 누구이고, 일으킬 자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즉 여기에서 넘어질 자, 즉 패할 자들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으킬 자, 즉 흥하는 자들이란 비록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죄의 드러남을 받고 회개한 겸손한 마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질 권리이고 다른 하나는 버릴 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지 좀처럼 버릴 줄을 모릅니다. 내 뜻과 고집만 주장하지 하느님의 큰 뜻을 받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말씀을 깨닫는 자마다 예수님의 말씀의 칼 앞에 겸손히 엎드려 과연 내 마음가운데 하느님의 큰 뜻을 반역하고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끄집어 내어 회개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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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는 답동 교구청 근처에는 커다란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시장이니까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장을 지나가면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줄을 서서 먹는 닭강정, 다양한 색깔의 찐빵,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만두, 떡볶이, 김밥 등의 먹거리, 그리고 좌판에 물건을 내다놓고 파시는 할머니들의 모습까지 옛날 어렸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래시장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대형할인마트가 우후죽순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형할인마트를 가면 편하기는 합니다. 없는 물건도 없고, 또 가격도 싸고, 또한 쇼핑하기에 적당한 온도까지 유지하기 때문에 땀 흘리며 재래시장을 갈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단 돈 100원이라도 깎기 위해 흥정하는 소리, 덤으로 한바가지를 더 퍼주는 아주머니의 따뜻함을 대형할인마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더 커다란 것들만을 쫓을까요? 이렇게 큰 것들만을 만들고 찾다 보니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외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곳에서도 함께 하시는 분이며, 어쩌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이러한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안 되면 가슴이 아프고,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머리가 아프다.’
사랑은 어떻게든 아픔을 가져다주는가 봅니다. 그런데 아픔을 주기는 하지만, 이 뒤에는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작은 곳에서도 계시는 분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큰 아픔을 얻을 것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행복의 길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아주 의외인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칼에 베이는듯한 아픔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선택함으로 인해 가족 간의 분열도 생길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 인해 진정한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말이지요.
아주 작은 일상 안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비록 이를 통해 큰 아픔을 얻을 수는 있지만, 곧 더 큰 선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고정된 이정표다(셰익스피어).
역으로 생각하라.
저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에게 물고기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면 보통은 도망치려고 낚싯줄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데, 그럴수록 낚싯바늘은 더욱 깊이 박힐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영리한 물고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이 영리한 물고기는 오히려 낚시꾼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헤엄침으로써 줄을 팽팽하게 만들지 않고 낚싯바늘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지요.
이 영리한 물고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들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떻게든 도망치려고만 합니다. 즉, 낚싯줄의 반대방향으로만 움직이면서 바늘이 더 깊이 박히는 아픔을 당하는 어리석은 물고기의 모습을 취하는 우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으로 생각해서 오리혀 고통과 시련에 대해 정면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실제로 많은 위인들은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정면에서 마주하면서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고통과 시련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문입니다.
가고 싶지 않은 주님의 길
이영춘 신부님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세상의 길과 하느님의 길은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향은 나를 드러내 놓아야 하는,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우라는 그런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길은 비움이요 희생이며 나를 죽이는 그런 길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고 자꾸만 욕망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기에만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울 뿐, 먹고 나면 영혼이 죽어가는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누구든지 피하고 싶은 길이지만 생명을 주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육신을 딛고 동시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살기 때문에 이 두 길은 내 안에서 격렬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욕망 깊숙이 들어와 거세게 후벼팝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에 의한 상처는 쉬이 아물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무엇이 세속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를….
하지만 두려워 맙시다.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며,
태화산을 오르며
신재용 신부님
이른 새벽, 영월 태화산에 혼자서 올랐습니다. 어쩌다가 바쁜 일상을 벗어버리려고 한 번씩 찾기 시작했던 산이 이제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정상 달성을 목표로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체력이 약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오르는 시간의 두 배는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혼자 걷는 산길은 한가해서 여유롭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지나간 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겸손하지 못한 제 마음 하나씩 비우며 그렇게 올랐는데, 오늘은 머릿속이 무척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성경공부며 교리신학원이며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려고 그랬는지, 긴 한숨을 쉬며 복잡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다른 때보다 더 힘이 듭니다. 잠시 앉아 쉬면서 멀리 아름다운 남한강을 바라보며 긴 묵상에 잠겨봅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덕지덕지 붙여서 무거워진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가는 두루미들처럼 살과 뼈를 깎아버리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함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이 따라주질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버리고 비워내어 참된 목적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의 참된 모범이신 예수님께서 사신 삶을 본받아 내 삶이 곧 그리스도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채워가는 과정,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수행이자 신앙이 성숙해 가는 과정임을 나는 이 늦깎이 나이에 깨닫습니다.
칼을 받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역사상 제일 불효한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를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모든 재산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옷을 홀라당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물론 그의 불효는 패륜아의 불효와는 다르지요.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아버지를 온전히 따르는 것을 육신의 아버지가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앙이 깊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자식을 자기 것으로 묶어두고 좀처럼 하느님께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이지만 자식도 나에게 묶고 나도 자식에게 묶이는 그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진리를 따르도록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고, 부부 사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며,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사랑할수록 자유롭게 놔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당할 것이고, 서로 속박하고 얽어매는 관계는 파산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관계는 칼을 받는 것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천국의 예고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점점 연세 들어가시는 분들, 지상생활을 조금씩 마무리 지으셔야 될 분들, 점점 큰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지옥은 또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그곳에서의 생활은 또 어떻겠습니까?
한 형제가 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 들어가 보니 정말 깜짝 놀랄 일 세 가지가 있더랍니다. 너무나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 했다는군요.
첫 번째 놀랄 일은 그간 긴가민가했는데, 그간 이렇게 부당하고 죄 많은 내가 과연 천국이란 곳을 들어갈 수 있을까, 엄청 걱정 많이 했는데, 내가 딱 천국에 와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먼저 놀란답니다.
두 번째 놀랄 일은, 천국이 좋은 곳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신부님 수녀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왔는데,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아름답고, 더 좋은 곳이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놀랄 일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온 것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천국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 얼굴을 찬찬히 보니 절대로 여기(천국)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와 있어서 또 놀란다는군요. 날 그렇게 괴롭히셨던 시어머님도 와계시고,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숱하게도 뺑뺑이를 돌리며 날 사람취급도 안했던 군대생활 직속상관이었던 김 병장도 와계시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목숨보다 소중한 겟돈 떼먹고 달아난 자매님도 와계시고...
그만큼 천국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풍성하게 내리는지, 진홍빛 같은 우리 죄들이 눈 녹듯이 씻겨 내리는 곳이라는 것이겠지요.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젠가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예고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 세상 구석구석에는 천국의 조각들이 숱하게 널려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곳 저 곳에는 지옥이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일찍부터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하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지옥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동료들의 하루도 지옥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한 형제가 꼭두새벽부터 싱글벙글 함박웃음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라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천국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천국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 동료들의 하루도 천국으로 변합니다.
결국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는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천국에서 생활하는가, 지옥불의 고통을 겪느냐 역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옥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나가는 것,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끌어안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참으로 묘해서 떨치려고 기를 쓰면 더 큰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십자가, 참으로 큰 괴로움의 원천입니다만, 그 십자가에 의미를 부여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다 못해 주저앉아버림으로써 극도의 고통만 체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잘 끌어안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그 누구든 빼놓지 않고 십자가를 보내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발걸음을 하느님 당신께로 돌리라는 신호입니다. 하느님 당신과 1대 1로 대면하자는 외침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라는 요청입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호의적으로,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축복의 도구입니다.생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입니다. 새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매일 매 순간이 천국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미학
이훈 신부님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전쟁의 역사를 살아온 인류는 칼을 향해서 죽음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칼은 생명의 칼, 진리의 칼, 믿음의 칼, 신앙의 칼입니다.
복음은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족이 내 신앙의 걸림돌이며, 나 또한 가족들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탓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할 때입니다.
원조의 죄를 사랑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담이 지은 죄는 하느님보다도 하와를 더 사랑한 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또한 하느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지상목표였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떠나가고 계십니다. 복음은 무엇인가요. 기쁨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사람은 기뻐야 하고, 복음을 사는 사람은 애착이나 집착이 아닌 하느님을 향해 열린 자유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로 대접하기
임원지 수녀님
서로 사랑하라 하시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 하시고서, 사랑하라고 내 지금과 내 여기를 주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미워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사랑이 참으로 맹목적일 수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웃 사랑은 쉬운가. 십자가가 따로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잘들 지내 시나요?” “네, 잘들 지내지요, 개와 고양이처럼.” 개와 고양이가 만나 함께 살고 있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취향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견뎌내기만도 고역이다. 평생을 해로하는 부부들은 얼마나 훌륭한가. 주님께 합당하
려면 우선 나를 참아주는 이들의 노력부터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리라.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주신다 하신다. 지학순 주교님이 북한에도 사람이 살더라 하시던 말씀이 충격적인 시절이 있었다. 월드컵이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김연아의 경기 때는 하나가 되다가도 정치나 사상, 이념이 개입되면 이 작은 나라가 4분 5열 되니 부끄럽다.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수시로 기도로 정화되어야 하는가. 수하든 장상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남이든 북이든, 서로 갈리지 말고 형제로 자매로 대접하면 그 상을 주신단다.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고 미사 때마다 가슴 치는 일이 그냥 형식에 그치고 있음을 자주 나에게서 남에게서 빤히 드러나 보인다. 내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내 이웃을 내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보라시던 어느 신부님 말씀은 사실 무섭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국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오늘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성당에 앉아 일주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내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로마에 있을 때보다 기도를 더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워낙 산골 구석에 있어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것과 더불어 여러 약속을 쫓아다니다보니 정해놓은 기도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 분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가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관례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도 되고 그래서 힘도 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나중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돌아보니 이런 미움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쉬지도 못하면서 먼저 인사드려야 할 분들부터 분주하게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니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내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라는 것이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아직도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일이 우선인지 건강이 우선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성격 때문인지 저는 모든 일을 마치고나서야 시간이 남으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서 몸이 안 좋아 진 것이라고 합니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이 있어야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신앙 다음에 건강을 놓으라고 합니다.
그분들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시간을 줄어들게 한다면 사람 만나는 일은 조금 뒤로 미루어야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정한 기도 시간도 빼앗겨가면서 인사를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마음이 상한다면 그것은 제가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기 위해 그 정도는 겪어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거짓 평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누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해서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 스스로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싫어하는 말을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싫어하는 것을 하여 괜히 긴장과 갈등을 살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좋게 넘어가려 하면 이제는 마음 다른 편에서 저항이 올라와 마음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고, 그것은 거짓 평화이며, 그것은 사랑의 유기라고 계속 쑤석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자니 내 안에서의 갈등이 괴롭고 마음의 갈등을 피하자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어 한 동안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싫어하는 말을 하되 겸손과 사랑으로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야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갈등이 좋고 평화가 나쁜 것이기에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이지요.
하느님을 따르려는데 반대와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이 부모라면 부모를,
그것이 자식이라면 자식을,
그것이 재물이라면 재물을,
그것이 자신이라면 자신을 과감히 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조금 다른 충고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을 갖지 않은 집안에 누가 시집을 갈 경우 저는 전술적으로 물러서라고 말해 주기도 합니다.
시집 식구들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불화를 무릅쓰고 신앙을 고집하지 말고 나는 신앙을 버릴 수 없지만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성당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가족들이 같이 성당에 나가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는 신앙인답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이렇게 충고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하느님과 신앙을 빙자하여 Power Game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고 자기와 가족 모두를 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가족을 사랑하기에 자기를 죽일 때 사랑을 기초한 이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가족들이 모두 깨닫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아주며 일으켜 줄 때,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어깨 두드리며 '힘 내'라고 말 건넬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의 위로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외로움을 환한 웃음으로 달랠 때,
주님의 넉넉함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가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 모두가 곧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사제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제복"과 관련한 기억이 생생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주임 신부님이 피정을 떠나셔서 한 본당 주일미사를 대신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미사가 끝나고 본당 원장 수녀님과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 찾았더니 주임 신부님을 대신해서 돌아가는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수녀님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제가 옆에서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셨습니다. 모든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한편, 근황을 묻기도 하고 바쁘셨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저는 어정쩡한 자세로 수녀님 바로 옆에 서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제가 사제복을 입지 않고 우중충한 잠바를 입고 있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어깨를 툭 쳤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 아래에서 위까지 쫙 때깔나게 차려입은 신사 한 분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아! 자네구먼, 수녀님이 소개하겠다는 사람이. 고생이 되더라도 힘내야지!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테니 열심히 한번 해보라구."
순간판단력이 부족한 저였기에 그 당시 저는 그분 말씀이 제대로 접수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아∼예! 그러죠.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신사는 본당 사목회 간부였는데, 수녀님께서 실직한 교우 한 명의 일자리를 부탁해서 그날 성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형제님이 미사 시간 내내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습니다.
저 역시 가끔 실직자들을 만납니다. 한번은 힘없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찾아온 한 실직자 형제를 만났습니다. 물론 그분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최대한 조용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확실한 도움,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도 속이 상했습니다. 실직자 형제들이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만일 제가 실직으로 인해 당장 끼니걱정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형제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해(苦海)입니다. 비록 오늘 고통스러우시겠지만 희망을 가지십시오. 고통 가운데서도 활짝 웃는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을 했다면 그분들은 "공자님 말씀하고 있네. 날씨가 더워지니 맛이 갔구먼"하고 빈정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다 구체성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친교는 말이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뭔가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①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②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형제를 내 일부로 생각하기에 그들과 구체적으로 기쁨과 슬픔, 고통을 나누며 우정을 맺습니다. ③이웃들을 내 형제로 받아들이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받아들임
남상근 신부님
어릴 적 그리도 좋던 친구들,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나한테 한 그 친구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친구이기 때문에 웃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별 싱거운 녀석 같으니’ 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라도 불러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 쉬운 듯 어렵습니다. 친구임에도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저런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에 끼어든 그 많은 ‘친구’답지 못한 것들이 우리들 사이를 어렵게 만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상을 주시겠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주십시오. 나도 받아들여집니다.
내게도 주어집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손해나는 일이기에 마다한 일이 혹시 있지 않은지요? 억울해하며 억지로 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 한 잔에도 댓가가 있을 것이며, 환한 미소 한 모금에도 반드시 상이 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하여 그 어떤 것도 손해가 아닙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신다니 모든 착한 일은 그냥 흩어지지 않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노성호 신부님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간혹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시선이 고정되는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주몽’이 그 중 하나였다. 여러 명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주몽과 비류의 군장 송양이 만나는 부분이다.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도모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몽이 송양을 찾아갔다. 송양은 주몽에게 독배와 술잔을 내놓으며, 이 둘을 가려내야만 졸본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주몽은 자신의 안위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두 잔 술을 모두 마셔버린다. 만일 주몽이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든지 다른 이유를 대면서 주저했더라면 결코 송양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졸본의 통합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천하대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수고나 노력, 희생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얻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의미도 없을 것이고, 얻으려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모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역설적인 등식이 성립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아집·집착·욕심·시기·질투·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자신을 버리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야 한다. ‘과거의 나’가 가지고 있던 목숨을 버리면 ‘새로운 나’는 새 생명을 간직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무모해 보이면서도 과감했던 행동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버림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자기 희생이 세상 사람한테는 의미 없는 죽음처럼 여겨지지만 우리한테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된다.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의 힘을 빼고 긴장을 풀면서 쉬어야 한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남을우
요사이 세상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요지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비위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 보면 목청 큰 사람이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니 어느 편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인터넷에 뜨고 지는 네티즌들의 언어가 점점 메마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함까지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념에 젖어봅니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몰이해적인 반응은 일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칼은 옳고 그름의 바른 잣대를 상징하지요. 정의가 바로 설 때 진리가 살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태초적인 가르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언어, 생명이 담긴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현실에서 펼쳐야 할 우리의 소중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 되는 길
김만수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자기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 상식으로는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같이 생각됩니다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마저, 즉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103위 성인 가운데 겨우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 베드로 성인은 배교를 강권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즉 저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님의 계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고 상냥하게 어머니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청에서 유대철(베드로)을 배교시키기 위해 14세의 어린나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혹형과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은 신앙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순교한 이 어린 성인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잃었으며 또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주님을 위해 부모가 주신 육신 생명은 잃었으나 대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마음이 편치 못한 우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세상의 그 어느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부모와 아내나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마저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잃어야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삼주전 우리 중앙 본당 800여명의 교우님들이 배론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성지이지만, 그곳은 1801년 황사영과 그 동료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첩첩 산중에 자리 잡은 교우 촌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신자들이 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해 오던 곳이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이 그 해 2월에 서울을 떠나 이곳 배론으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도 이곳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이 이들에게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9월 29일에 황사영과 김한빈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됨으로써 결국 배론 교우촌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황사영이 쓴 <백서>의 몇 줄만 읽어봐도 그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사영은 말하기를: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황사영이 쓴 이 <백서>는 차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당시 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데로 자신들의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사랑하는 가족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나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를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으며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한 참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한다면 모름지기 주님의 뜻을 따라 부모와 자녀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잃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어떠한 욕망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 위하여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고 비우고 버리는 아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그러한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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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이러한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신부님, 정말로 미남이세요. 신부님, 목소리가 성우 같아요. 신부님, 너무나 멋져요.”
그렇다면 제가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눈이 이상하게 아래로 쳐졌어요. 신부님은 말이 너무 빨라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말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진리라 할지라도 듣기 싫은 말 그리고 상처가 되는 말이 되는 말이 있는 반면에, 거짓이라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 그리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실을 이야기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직접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결국은 당사자의 귀로도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람과 당사자의 관계가 좋을 수가 있을까요? 절대로 좋은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싹트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정반대인 ‘미움’입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도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임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바로 세상의 원칙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온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원칙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보다도 하늘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세상의 원칙을 내세워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진실이라는 단어를 포장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함부로 진실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원칙이 이 세상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오늘은 ‘예뻐요. 멋져요. 사랑해요.’ 등등의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세요.
금보다 귀한 것(홍성중 엮음, '행복을 나르는 배달부'중에서)
시골 마을에 돈 많은 구두쇠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급한 병으로 중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내는 매일같이 남편을 간호하러 병원을 드나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인을 만날 때마다 걱정하면서 남편의 병세를 물었다. 그날도 병원에서 돌아오던 부인에게 마을 사람들이 물었다. 그러자 부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드디어 남편이 의식을 회복했답니다. 제가 남편에게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그런 줄 아세요? 글쎄 마을의 우물에서 길은 시원한 물 한 잔이 마시고 싶다잖아요."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집안에 쌓아둔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 한 잔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별로 가치도 없는 것에 너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투자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