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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7월 23일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7.23|조회수599 목록 댓글 0

제1독서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1-3.7-8.12-1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3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

7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8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12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13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은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저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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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은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외치라고 하신다(제1독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자,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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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잘못을 두 가지 악행으로 요약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저버렸고, 자기 자신을 위해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판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이사야서의 예언을 들어 말씀하신다. 곧, 주님을 배척하는 자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 그들이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올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와 “저 사람들”이 대조적인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너희’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듣고 깨달으며 하느님 나라를 보고 이를 알아보는 이들이지만, ‘저 사람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인용된 이사야서의 말씀에 따르면, 이는 마음이 무디고 귀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입니다(6,9-10 참조).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은 그저 ‘쇠귀에 경 읽기’일 따름입니다. ‘선택적 집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죄로 양심이 무디어지고, 자신의 실속과 세상 것에만 눈과 귀를 발달시키면 영적인 눈과 귀는 점차 제 기능을 잃어 갑니다. 그런 “저 사람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보고 들을 수 있는 제자들의 눈과 귀를 두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영적 감각이 살아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에 참여하지 않을 때에도 신체 감각을 유지하고자 훈련을 하듯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훈련, 공동체와 세상을 위하여 좋은 일을 찾는 훈련,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키우는 훈련으로 영적인 감각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눈과 귀를 축복해 주시기를 청합시다.(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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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주로 비유를 통하여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려 주십니다. 비유는 전혀 모르는 것을, 때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하기에 좋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신비와 우리 인간에 대하여 모두 알고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둘을 모두 알지 못하면 비유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의 완고함에 대한 표현입니다(이사 6,9-10 참조). 성경에서 완고한 마음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애써 부인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듣지만 새기지 못하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지만 외면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귀와 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적인 눈과 귀에 대한 말씀이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업적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그저 ‘소리’에 불과합니다.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업적은 그저 ‘사건’일 뿐입니다. 완고한 마음에서 돌아서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주님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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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것들을 보고 듣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나를 회심하게 하고 성장시키며 감동하게 하는 것들도 있지만, 내 영을 어둡게 만들고, 남을 편견과 오해의 틀에 가두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들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많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지만, 그 비유들에 담긴 뜻을 모두가 올바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는 일은 언제나 수많은 거짓 정보와 오류, 편견과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올바르게 식별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 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비유의 뜻을 알아들었지만, 그들이 가졌던 세속적 권력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희망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광야에서 맺은 계약과 첫사랑을 잊고 땅의 축복을 약속하는 바알을 섬기며 하느님을 거역한 악행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는 말씀은, 사제와 율법 학자, 목자와 예언자들조차도 자기들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저버린 죄악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하느님의 영을 식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감각이 세속적인 욕망을 지향할 때, 나의 삶은 거룩함보다는 속된 것에 더 끌리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읽기, 기도하기, 묵상하기, 용서하기, 인내하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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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면 삶은 참으로 절벽 앞에 선 듯한 느낌입니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느 한편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양편 모두의 노력과 마음으로 가능한 것인데,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고 계속 반대만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커다란 실망감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마음이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단죄될 것인데,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도 없고,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을 힘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신비입니다. 아무에게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이들에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본은 바로 마음을 열고 주님과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내면의 깊이를 볼 수 있는 자세, 들리는 것을 넘어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열린 마음, 그리고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의탁할 줄 아는 가난의 정신이 바로 소통의 정신이고, 하늘 나라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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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를 원하셨고, 그 신비는 비유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기에 군중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마태 13,34-35 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왜 군중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는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주신 답은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그들이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사 6,9-10 참조)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비유는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시려고’ 감추시는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쟁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데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인식이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비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들으려면 겨우내 매화꽃이 피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꽃을 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조작해 낼 수도, 이용할 수도, 내키는 대로 재단하여 처분할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실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며 하느님 나라를 알아들으려면 이해력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주님에 대한 경외와 감사와 겸손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유의 말씀은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경구처럼 하느님 나라의 장관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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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든 포기는 답이 아닙니다. 엉망으로 사는 것 같아도 좋은 모습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어 있던 ‘좋은 모습’이 은총을 모셔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고 하셨습니다. 물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은총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좋은 길만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포장이 안 된 길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평생 그런 길만 걷는 것도 아닙니다. 걷다 보면 포장된 길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은총입니다. 

신앙생활은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는 일과 같습니다. 건강한 나무는 건강한 뿌리를 지녔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뿌리가 튼튼하면 그 나무는 시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시원찮으면 나무는 생기를 잃고 맙니다. 

기도 생활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 뿌리에 활력을 주는 일입니다. 매일 한 가지씩 선행을 베푸는 일이 나무에 물을 주는 행동입니다. 미사에 자주 참여하고 성체를 모신다면 믿음의 나무는 반드시 자라납니다. 삶이 꽉 닫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 안에 숨어 있는 ‘좋은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사막을 지나는 자만이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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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의 답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외국을 여행하거나 이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말이라 할지라도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설명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황우석 교수의 사건에서 몇 장의 잘못된 사진으로 그 사기가 들통 났습니다. 생물학의 문외한들은 그 사진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을 알아듣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귀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 없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눈에 띄었습니다. 책의 저자는 키도 크고 체중도 많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 저자가 자신의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니, 저한테 뭘 먹으셨길래 이렇게 커진 건가요? 살도 잘 찌는 체질이고…….”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태어나길 5.3kg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먹인 게 아니라 본인이 드신 거예요.”

아들은 자신의 뚱뚱한 모습이 어머니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기 탓을 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요. 태어날 때 5.3kg이면 우량아 중에서도 우량아입니다. 그러나 태어난 후에는 어머니가 억지로 먹인 것이 아닌 스스로 음식을 먹었기에 지금의 거대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책임 전가에 아주 익숙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점은 다른 이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내 안에서 그 문제의 시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 안에서 문제의 해결도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해 주시지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종종 강의하러 외부에 나가게 되면 저를 보지 않고 또 제 강의를 듣지 않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강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더 노력했지만, 어떤 노력으로도 안 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냥 포기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려면 관두라고 하지 뭐. 내가 손해인가? 자기 손해이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르십니다. 보지도 또 듣지도 못해서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을 위해 쉽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때, 삶 전체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주님의 사랑이 없는 곳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더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못된 버릇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하고 사랑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탁월한 인물의 특성 중 하나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기 자신, 즉 자신의 과거에 이룬 성취와 미래의 가능성 하고만 비교한다(브라이언 트레이시).


성당 종소리.

어렸을 때 들었던 소리 중에, 지금도 듣고 싶은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성당 종소리’입니다. 삼종기도 시간에 맞춰서 울리던 종소리가 정말로 그립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고 말았지요.

전에 본당신부로 있었던 본당에도 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옆의 빌라에서 미사 소리도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는데, 하루에 3번 종을 울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성당 문 앞에서 시위를 벌일 것입니다.

소리에 민감한 우리가 되어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는 이어폰으로 귀가 찢어질 정도로 듣지만, 남의 소리는 소음공해라며 항의합니다. 물론 생활에 피해를 주는 소음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소리는 많이 들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억은 장면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도 기억되고 소리도 기억됩니다. 그러나 이 소리를 너무나도 차단하는 요즘입니다. 남의 소리라고 차단하고 싶지만, 이 소리가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힘들까요?

성당 종소리가 듣고 싶네요.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은은한 그 종소리를….




오늘 우리는 어떤 줄을 붙들고 있습니까? 생명줄인가요? 아니면 썩은 동아줄인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철없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경고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수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의 귀까지 먹먹하게 할 정도입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잘 갈아놓은 쌍날칼처럼 날카롭기만 합니다.

사실 예레미야처럼 기구한 운명의 예언자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청소년의 나이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부담스러웠던 소년 예레미야는 이런 저런 핑게를 대며 거절했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예레미야서 1장 6절)

그러나 주님 역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극하시고 재촉하셨습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겠다. 부족한 것을 다 채워주겠다. 용기를 내라. 앞으로 나아가라!”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예언의 사명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또래 청소년들 적당히 모아놓고 교리 지도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가호호 방문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가라하십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장소로 가라합니다. 가서는? 외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요즘으로 치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회의 석상으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가서 대한민국의 멸망과 한국 천주교회의 파괴를 외치라고 한 것입니다.

듣도보도 못한 애송이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파괴니 멸망이니 엉뚱한 말을 해대니 원로들과 지도자들을 콧방귀를 뀌었을 것입니다. 다들 헛웃음을 터트렸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입장에서 두려움도 컸겠지만, 도무지 말발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사명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그는 주님을 원망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마저도 저주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 15장 10절)


초년병 시절 예레미야 예언자에게서는 위엄과 포스가 넘치는 파워풀한 예언자로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나약한 한 소년의 모습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이 너무나 벅차고 힘겨웠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때로 자신을 부르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멀리 도망가고도 싶었지만, 결국 우리 인간은 옹기장이이신 주님 손에 들린 옹기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예언자로서 거듭납니다.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를 통해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예언의 말씀은 다른 예언서에서도 자주 되풀이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각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총애하셨습니다.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딱 찍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간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처럼 챙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인도하고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주님의 사랑에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 충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반역을 거듭했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예레미야서 2장 12~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풍요와 다산으로 안내할 신이라 여기고 바알이라는 동아줄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줄은 썩은 동아줄이었습니다. 결과는 집단적 타락과 멸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죽기살기로 큼지막한 지하 물탱크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 퍼부어서 물탱크가 완성되었습니다. 크게 기뻐하면서 물탱크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아무리 물을 갖다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밑바닥에는 큰 틈이 있었고, 그리고 물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없이 오로지 우리 힘만 믿고 뭔가 하려고 할 때 드러나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주님 뜻을 반하는 일이라면 커다란 산 하나를 옮긴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과 등을 돌린 상태에서라면 아무리 큰 희생과 헌신이라 할지라도 헛고생일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줄을 붙들고 있는가요? 생명줄인가요? 아니면 썩은 동아줄인가요?




우리는 행복 지도를 가지고 있나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마을에 같은 물건을 파는 두 상인이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둘을 화해시키시기 위해 천사를 보냈습니다. 천사가 먼저 한 사람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청하는 것의 두 배를 그의 경쟁자에게 해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상인은 깊이 생각하다가 그 천사에게 자신의 한쪽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양쪽을 다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의 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현상만 보더라도 특별히 우리나라는 행복의 방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이나 유럽의 나이별 행복도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이에 따라 반대의 그래프를 그립니다. 즉, 외국은 어렸을 때 행복하고 중장년이 되면 힘들었다가 노년이 되면 다시 행복해지는 ‘∪’자 형태를 그립니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이 때의 행복을 되찾는 경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와 반대로 ‘∩’자의 형태입니다. 어렸을 때 행복하지 못했다가 중장년 때 행복하고 노년이 될수록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덜 행복해질까요? 그것은 어렸을 때 제대로 행복한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마치 보물 지도를 보고 보물섬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보물섬은 보물 지도 없이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보물 지도는 대부분 어렸을 때 주어집니다. ‘어린이 때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나?’를 생각하며 어렸을 때처럼 순결해지고 겸손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외국에서는 어린이와 같은 심성을 되찾으며 그때의 행복으로 돌아갑니다. 행복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이는 보물 지도를 갖지 못한 채 보물을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가져야 더 가질 수 있습니다. 보물 지도가 그런 힘을 가졌듯이, 이미 체험한 행복이 그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고난을 이겨낼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착한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갔더니 천사가 뭔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궁금해서 “천사님!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포장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행복을 포장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에게 전해 줄 행복이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니 그런데 포장을 왜 그렇게 단단하고 튼튼하게 하세요?”

천사는 “네,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면 멀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튼튼하게 포장하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포장지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나요?”

“네! 행복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는 고난이랍니다. 이것을 벗기지 않으면 행복이란 선물은 받을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선 천사는 바쁜 듯이 어디론가 가려 했습니다. 그 사람은 천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천사님! 그러면 그 고난이라는 단단하고 튼튼한 포장은 열 수가 없나요?”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고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으실 거예요.”

그 말을 남긴 채 천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린이들은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나중에 그 행복을 지도로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행복한 기억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행복까지 이르기 위한 고난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없더라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늦게나마 행복을 체험했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 한 번의 체험이 삶의 지도가 되어줍니다. 


딸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걱정이 많다던 한 엄마가 딸 아이의 일기를 보고 눈물이 나서 아이가 쓴 글을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며 아이가 비록 공부는 안 하고 노는 것을 좋아할망정 인생을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이는 보물 지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일기는 이렇습니다.

“맑은 하늘 맑은 웃음. 제목: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를 지켜주고 세상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에게. 좋은 공기를 줘서 감사합니다. 바람에게. 바람아 시원하게 해 줘서 고마워. 나무에게. 나무야 그늘이 되어 줘서 고마워. 구름. 하얀 구름 뭉게 구름에게. 구름아 비를 내려줘서 고마워.”

글자도 틀리고 어법도 틀리는 것을 조금 바로잡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엄마가 눈물 흘릴 만합니다. 자녀를 잘 교육하지 못한다는 자책감도 있었을 텐데, 자녀가 이런 행복을 느끼고 산다는 것에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행복으로 이르는 보물 지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행복 체험입니다. 그 행복 체험은 또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때 느끼는 그 행복의 체험을 가진 사람은 이미 가진 사람이고 앞으로 넉넉하게 더 가지는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꼭 가져야 하는 행복 지도는 어린이와 같은 행복 체험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은 확진자가 아직도 많이 나오지만 공동체 미사도 시작되었고, 야외에서는 식당도 문을 열었습니다. 사제들과 근교에 있는 산엘 다녀왔습니다. 호수를 걸었고, 맑은 공기를 마셨습니다. 예전에는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였는데, 지금은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지키며 말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치료제도 나오고, 백신도 나와서 예전처럼 친교와 나눔을 함께하는 공동체의 시간이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환한 모습으로 평화의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처음 가는 길도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주소나, 이름을 입력하면 도착예정 시간까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길을 잘못 들었어도 내비게이션은 새로운 길로 안내해 줍니다.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바로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는 겁니다. 목적지를 다르게 입력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아무리 교통법규를 지켜도, 차 안에서 기도를 해도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15년 전의 기억입니다. 사제연수가 있어서 양평의 한화콘도를 예약했습니다. 신부님 한분은 일이 있어서 나중에 온다고 하였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 저녁은 같이 먹기로 했습니다. 그날 신부님은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천에 있는 한화콘도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전화를 하였고, 양평의 한화콘도로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은 삶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은 것입니다.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데,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갈라진 저수 동굴일까요? ‘다음에 하지 머’라고 미루는 게으름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잘못하는데 머’라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나는 안 돼’라고 포기하는 열등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보아도 보지 못하고, 기쁜 소식을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영적인 눈이 멀었고, 영적인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생수의 원천일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믿음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나병환자는 믿음으로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도 믿음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는 희망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이면 결실을 맺는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누룩과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그 안에는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믿음과 희망이 꽃을 피우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공허하고, 사랑이 없는 희망은 거짓일 수 있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결국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에서 돌아서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주님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신비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눈과 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뜬 눈

감은 눈

보는 눈

보지 않는 눈

볼 수 있는 눈

볼 수 없는 눈

볼 수 없는데 보는 눈

볼 수 있는데 보지 않는 눈

내 눈은


연 귀

닫은 귀

듣는 귀

듣지 않는 귀

들을 수 있는 귀

들을 수 없는 귀

들을 수 없는데 듣는 귀

들을 수 있는데 듣지 않는 귀

내 귀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영화중에 ‘어거스트 러쉬’라는 외국 영화가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주인공 소년이 두 뮤지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뜻하지 않게 버려져 고아처럼 자라게 되고 나중에 기적적으로 부모를 만나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 소년이 바람이 부는 갈대밭에서 혼자 이렇게 독백을 하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들어봐 이 음악소리가 들려? 나는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어 바람 속에서도, 공기 속에서도, 빛 속에서도 어디에서나 우리 주위에 음악소리가 있어 우리는 마음을 열기만 하면 돼”


어쩌면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만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또한 당신 사랑의 음악을 들려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해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이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시고, 또한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십사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6주간 목요일>(2020. 7. 23. 목)(마태 13,10-17)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0-12)”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이라는 말씀은, “나의 가르침을 믿는(믿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비유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곧바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지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 구원의 진리 등을 뜻합니다.)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배워서 지식을 쌓는 학문에 속한 진리가 아니라, ‘깨닫고 믿고 실천해야 하는’ 신앙에 속한 진리입니다.(먼저 믿고 믿음을 통해서 나중에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고 나서 믿음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깨달음’은 아주 중요한 과정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는 생활이 아니라, 믿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이 쌓여서 완성된 믿음에 도달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허락되다.’ 라는 말은, ‘믿음’을 은총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고,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믿거나 안 믿는 것은 각자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일입니다. 믿는 사람은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은총이 허락된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받겠다고 거부함으로써 은총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더 못 알아듣게 되고, 구원의 은총에서 멀어지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믿으면 깨닫게 되지만, 안 믿으면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일과 깨닫는 일은 지능이나 지적 수준이나 학력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도 믿음으로 깨닫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학자라도 안 믿으려고 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에도 나옵니다(마태 25,29). ‘탈렌트의 비유’에서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받은 은총마저 잃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원래 비유는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믿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려고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을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유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 자체가 수수께끼가 되었고, 더욱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예들 들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비유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마태 19,25).

그 당시에는 제자들도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말씀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에 관한 사고방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것은, “너희는 왜 들어도 믿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가?” 라고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알아듣기 쉽도록 쉬운 비유를 사용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듣지 않기 때문이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선천적으로 어떤 장애가 있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 구원, 하느님 나라 등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신앙생활보다는 세속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더 신경 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그들을 고쳐 주기를 바라는데 (구원하기를 바라는데) 그들이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믿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마치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되어버렸다.”입니다. (“그래도 성경이라는 책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라고 반박할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몇 천 년의 시간 간격이 있고, 지리적, 문화적 간격이 있고, 낯선 언어를 번역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서 성경이라는 책이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들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해해야 할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여서 살아야 하는 ‘삶’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나라 신비에 다가선 사람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하늘나라 설명을 씨뿌리고 난 다음 상태를 예로 드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길 사막 자갈밭 가시 넝쿨 같으면 뭐를 심어도 안 됩니다.

하느님 말씀이 씨앗이라면 우리 마음은 밭이라야 궁합이 맞는 겁니다.


많이 알고 잘났고 지위가 좀 높다는 사람들은 잘난 나머지 오만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세상 즉 하느님과 인류의 두 세계를 꿰뚫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멎진 예를 드셨는데 제자들은 이해가 잘 안됐나 봅니다.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 지닌 제자들처럼 소박하면 행복합니다.

소박하면 하늘나라 신비에 다가선 사람들이며 주님을 찾는 분들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한 거라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소위 말하는 세상의 똑똑하고 지혜롭고 힘과 재물까지 거머쥔 유력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추종해 삶의 기반까지 무모하게 던져버린 단순하고 소박한 "철부지"(복음 환호송)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보고 듣는 능력은 어디에서 올까요?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마태 13,12).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은 "허락된 것"입니다. 제자들 스스로 만들거나 꾸며낼 수 없고, 오로지 아버지께서 주시는 이만 받아 누릴 수 있는 선물인 것이지요. 허락의 주체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공정하시지 않은 걸까요? 누구는 보고 듣게 해 주시고 누구에게는 그럴 능력을 주시지 않으니까요. 모두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보고 들어 깨닫게 해 주시면 더 좋을 텐데 말입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

안타깝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보고 듣는 감각을 지배하는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하느님과 같은 방향으로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뜻보다 더 중요한, 다른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 백성이 저지른 두 가지 악행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도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예레 2,13).

백성의 첫째 악행은 하느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종종 생수의 원천, 샘으로 불리우시지요.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니 생수의 원천을 저버리는 것은 생명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헤어질 수 없고 분리될 수 없으며 갈라져서는 안 되는 관계의 훼손이지요.

백성의 두번째 악행은 제 자신을 위해 다른 물길을 판 것입니다. 하느님을 저버리고 다른 우상을 하느님 삼아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저수 동굴이란 것이 갈라져 물도 고이지 못한다고 하니 전혀 쓸모 없는 흉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제 자신을 위해" 우상을 섬깁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을 갈망하고 기다리기보다, 자기가 원하는 축복을 줄 우상을 찾고 세우고 위합니다. 하느님 섬기기를 그치고 자기를 섬기기 시작하면서 죄는 심화되고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는 얼그러지지요. 그들 마음이 서서히 닫혀가니, 귀도 막히고 눈도 감깁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과 다른 곳을 향하는 이방인이 되어갑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는 길이 세속적 부와 성공과 명예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묵묵히 신의를 다해 주님을 따르는 철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호의와 헌신이 오가는 소소한 사랑의 순간에 눈물이 핑~돌 줄 알고, 숨은 희생에 가슴 찡~ 할 줄도 알며, 스치듯 지나가는 주님 입김에 전율하는 영혼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부족하지만, 온 세상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주님 현존의 자취를 감지할 줄 알고, 그로 인해 감동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철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행복한 철부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온 세상에 이 행복이 널리널리 전파되면 참 좋겠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 당사자에게 하기를 참 어려워합니다. 더구나 해야 할 그 이야기가 부정적인 비판에 해당한다면 말꺼내기가 더 어려워지지요. 그러다보니 직접적인 비판이나 지적의 말은 최대한 피하면서 말을 뱅뱅 돌려서 하게 됩니다. 어떻게 말해야 저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지에 집중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뱅뱅 돌려가며 간접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가 겪는 불편을 최소화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단점이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해져서 상대방이 '말귀'를 못알아 들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남의 이야기를 잘 안듣는 고집 센 사람일 경우 이런 식의 화법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용하는 것이 "돌직구" 화법입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을 최대한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대화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듣는 사람이 큰 상처를 받는 경우가 생깁니다. 상대가 말하는 방식이 너무 아프게 느껴지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 자체를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더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역효과만 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듣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그가 처한 환경이나 말할 때의 상황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비유'라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신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어려운 내용을 설명할 때에는 '돌직구' 대신, 그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생활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에게 인정하기 어려운 내용을 얘기할 때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겪는 상황들에 빗대어 설명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말씀의 내용 뿐만 아니라, 말하는 방식과 과정에 있어서도 구체적이고 확실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느껴진다면, 내 삶의 '아픈 진리'를, 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땐 무작정 성경을 읽기보다, 자신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깊이있게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직접적인 가르침보다 비유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깊이'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럴 땐 쉽고 편한 이야기만 계속해서 찾기보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나에 관한 불편하고 힘든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성경을 통해서, 내 마음의 울림을 통해서, 내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올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담긴 '아픈 진리'와 '불편한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마음이 생겼다면, 주님께서 이 세상 곳곳에 숨겨두신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신비는 두 가지 차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첫째는 '감사'의 차원입니다. 내가 듣고 보는 '내용'에 연연하여 '호불호'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는 '관심'의 차원입니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이 겪는 슬픔과 괴로움에 관심을 가지며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곪고 썩은 부분을 관심있게 지켜보며 그것을 바로잡고 치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실 것이고,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에서 삶의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보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 <마태,13/10-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이 어떤 진실을 손에 찍어서 가르쳐도 못알아듣고 사실을 인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전에 지식을 가진 사람은 쉽게 일듣지만 아무런 지식이 없으면 못 알아듣습니다. 또한 인지능력이 부족한 어린이도 본 것을 비교 할 수 없으면 경험 부족으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보여주고 알려주어도 ”나는 모르겠는데요“ 합니다. 이런 경우는 피나는 노력으로 가능해 지지만 도무지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가진 품성이나 인격적 결함으로 보여 주어도 가르쳐 주어도 일지못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못하고 지독한 오해와 오해 속에 답답하게 살고 있습니다.


성품으로 말하면 자기 지식의 대한 집념 자기 경험에 대한 깅한 고집 때문에 같은 현실을 당대에 보고 있어도 말하는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고정된 태양을 지구 자전으로 24시간 돌면서 태양을 만나고 떠나 가는데 우리는 아침에 동쪽에서 밤새 숨어 있다가 해가 떠오르다고 합니다. 사실은 지구가 내가 있는 고정된 자리에서 만나려 가서 적확이 말하면 ” 내가 있는 곳에서 지구가 돌아 태양을 만나는 것이 아침이다.“ 해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도 연관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지구가 돌 듯이 우리의 마음을 돌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만나는 시간이 모든 일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하느님이 왜 나에게 오시지 않은가? 가가 아니라 언제나 찾기만 하면 나의 문앞에 계십니다.

성품 중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부요한 사람 있어 가난한 사람은 쉼게 순진하고 깨끗해서 알듣기 쉽지만 마음이 부여 한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서 장애물 때문에 못 알아듣습니다. 자만심 교만한 마음 거친 행동 소위 갑질을 하는사람 귀를 막고 알아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도 못 알아듣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서로 힘을 주고 받고 하여 성장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내 것은 내 것이다 로빈성 크로수처럼 살수 있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할수 없습니다.

내 생각이 정대적이다 하거나 나 혼자서도 다 할수있다고 하면 독선이고 엣날 독수자 삶이 오래 가지 못하고 회수 자 공동체 만들어져 지속되는 것은 서로 합심하여 신앙의 난관 삶의 난관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힘은 서로를 알아보고 교회는 교회 제도로만 지탱하지 않고 온 세계의 수도회의와 교회 제도가 협력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의견의 일치 즉 하나가 될 때 진리가 들어납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객관과 주관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고 듣는 사람의 일치가 개관적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삶도 혼자서 아니라 부부가 일치하고 온 가정이 일치하는 가운데 자라고 완선됩니다.

일치의 근원이신 성부성자 성령의 일치를 본받고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소서“ 요한 복음 17/ 20절 이하 참고 하세요. 결국 저는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여야 합니다. 시작과 마지막을 기도로 실천해야 보고 듣고 알게 됩니다. 성호경은 모든 일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빛으로 빛을 보게 하소서 아멘.




주목하는 눈과 귀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깨우쳐주고자 하셨던 하느님에 대한 메시지의 기본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 안에 거처를 마련하셨다.’(묵시 21,3)는 것입니다. 각자가 품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삶에 대한 태도에 분명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이렇게 삶이 공개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합니다. 조용히 숨어서 믿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일상에서 체험한 하느님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모두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 즉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삶의 여정에 가까이 동행하며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믿음을 키우는 비유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진지하게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주목하는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주어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 애를 씁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불립니다. 요청이 담긴 말씀으로 성경을 받들고 주목하는 우리에게 ‘너희는 행복하다.’ 라고 하십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매일 미사에 참례하시는 여러분을 보면.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미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념하고,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 드리며, 감사를 드리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미사는 가장 좋은 기도이고, 우리 신앙 생활의 정점입니다. 그런데 미사만 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을 다 안다고 하든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실천도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1-12)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께 더욱 더 다가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이게 되어 성경을 자주 읽게 되고, 그 성경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을 실현하게 됩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면서 더욱 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이해가 깊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할수록 실현하는 그만큼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앎을 그만큼 더 받아 넉넉해집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16-17절)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지고, 예수님과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더 많이 기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는 한가지 조건이랄까 수준이랄까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 남들의 눈에 ‘바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바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바보. 그러면 오늘 복음 환호송이 마음에 그득 차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 11,25 참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예례2,1-2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예례2,7-8).


주님의 말씀이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예례2,13).


배가 부르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는 눈과 말씀을 듣는 귀가 무뎌지기 시작하는가 보다. 그리고 영혼이 메마르고 세속적 인간이 되는가 보다. 자기도 모르게 초심을 잃고 속물이 되어 딴짓거리를 한다. 어느새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마귀가 그를 보고 박수를 쳤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13,17).




주여, 당신 얼굴의 빛이 우리 안에 빛나고 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Ps 43,89-90: CSEL 64,324-326)

“주여, 어찌하여 얼굴을 감추시나이까?”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어둠이 우리 마음에 몰려 들어와 우리 눈으로 진리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지성에 관여하시고 우리 마음을 찾아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를 어둠 속에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의 얼굴은 몸의 다른 부분들보다 더 밝게 빛납니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서 낯선 사람을 알게 되고 또 안면 있는 사람을 알아보게 됩니다. 자기 얼굴을 보여 주는 사람은 자신을 감추지 못합니다. 사람에게서 그렇다면 하느님의 얼굴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훨씬 더 많은 빛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참된 해설자이며 적절한 개념과 말로써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해주는 거룩한 사도 바오로는 이점에 대해 주목할 만한 것을 말해 줍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영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빛을 주시는지 잘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 주신 영혼들의 영원한 광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얼굴의 빛으로 우리를 비춰 주시어, 먼저 세상의 어둠 속에 빠져 있던 우리가 영원하고 천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리스도께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보고 “우리를 좀 보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앉은뱅이는 베드로를 바라보고 신앙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빛을 받았습니다. 그가 충실히 믿지 않았다면 치유의 선물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이렇게 큰 영광의 빛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캐오는 그리스도의 빛을 더 원했습니다. 그는 주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리워 주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캐오는 그리스도를 보고 빛을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남의 재산을 도둑질했던 그는 이제 그리스도를 보고 난 다음 자기 재산을 사람들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얼굴을 감추시나이까?” 그러나 당신은 우리에게서 얼굴을 감추시더라도 “당신 얼굴의 밝으신 빛은 우리 안에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이 당신 얼굴을 감추시면 살아 남을 자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에서

비 소식을

이 땅에

들려줍니다.


가장 큰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특별함과

함부로 사이에

우리의 갈망이

있고 우리의

실천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며

실천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입니다.


신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상안으로 기쁘게

들어 오셨습니다.


삶이란 삶을

살아가면서

깨닫게되는

특별한 상황에

따른 모든

선물입니다.


일상이 있기에

우리 삶은

신비롭습니다.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가장 큰 신비이며

비유입니다.


신비와 비유는

이미 예수님같이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기에

일상을 놓치며

살아갑니다.


비유는 놓치고 있는

일상을 다시

만나게 만듭니다.


우리가 가진

일상에서 다시

경이로움과 신비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뜨겁게 만납시다.



언젠가 후배신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남들 앞에서 많이 강의를 하는 저이기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민은 바로 강론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신부에 대한 평을 종종 듣는데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해서 내용이 너무나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자신의 강론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었지요.

하지만 고민은 신자들의 반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묵상하면서 준비한 강론인데 신자들 중에 몇 명은 졸거나 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때는 당황스러워서 말이 잘 나오지도 않고 강론을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강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강론 준비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책 많이 읽고 교육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이 신부에게는 굳이 이런 충고는 필요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모두가 다 졸고, 모두가 다 딴 짓 하니? 그래도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아냐? 몇 %는 집중해서 듣는 것 같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80% 이상은 자신에게 집중을 해준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잘한다고 지지해주는 그 80%는 보지 않고, 피곤하고 생각이 많아서 그 누가 강론을 해도 집중하지 못하는 20% 때문에 고민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들은 나쁜 것에 집중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지요. 좋은 것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쁜 것 몇 개를 가지고 삶 자체가 흔들렸던 적도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를 묻습니다. 이 물음에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은총이 주어지지 않음을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비유는 우리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 삶 안에 하늘나라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만 더 집중해서 삶을 바라본다면, 또한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주님의 의미를 이 세상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삶 안에서 충분히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나쁜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잘 생각해보면 좋은 것,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 안에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큰일을 하는 경우에서는 기회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눈앞의 기회를 잡도록 힘써야 한다(라 로슈푸코).


행복을 위한 11가지 활동

어느 책에서 보고서 메모를 해놓았는데 출처를 적어놓지는 않았네요. 그래도 행복을 위해 내 자신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점검해볼 수가 있는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잘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반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1. 명상하기(기도와 묵상).

2. 운동하기.

3. 친절 베풀기.

4. 자신에게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기.

5. 감사를 표현하기. 

6. 낙관적인 마음을 갖기.

7.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8.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9.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 

10. 스트레스를 이기는 효과적인 전략들을 사용하기. 

11.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인생은 원래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라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까마득히 높은 산중턱 큰 바위 아래 위치한 수도원에서 홀로 기도에 정진하고 있던 한 구도자가, 잠시 마실을 내려오셨다가, 다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홀로가 아니라 제자가 되기 위해 초심자 한명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높은 계곡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길고 허술한 출렁다리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앞서 가시던 스승님이 중간쯤에 이르러, 갑자기 크게 제자리 뜀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다리는 큰 폭으로 출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안그래도 어마어마한 높이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뒤따르던 제자는 혼비백산하며 비명까지 질렀습니다.

다리를 다 건너온 스승은 호탕한 웃음을 껄껄 웃으면서, 사색이 된 제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인생은 원래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라네. 그래야 인생이 재미있지. 

주님께서는 재미있게 살라고, 한번씩 우리네 인생을 흔들기도 하시고, 뒤집기도 하신다네.”


사실 하늘 나라 신비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안에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하늘 나라 신비는 철저하게도 우리 삶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첫째 가는 과제 하나는 바로 그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 신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눈을 크게 떠야 하고, 자세를 바짝 낮춰야만 합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3장 11~15절)


세속에 잔뜩 찌든 사람들, 영적인 것에 눈이 먼 사람들, 하느님의 일은 철저하게도 뒷전인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눈이 맑은 사람들,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 겸손하고 주님께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파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갑작스레, 난데없이, 잘못 한 것 하나도 없는데, 다가온 고통, 그 앞에서 하늘 나라의 신비를 맛 본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고통 앞에서도 세상 다 끝난 것 처럼 난리를 칩니다. 

그 현실을 도저히 용납 못하고, 그 누군가를 원망하고 저주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 지상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고 체험한 사람들은 웬만한 고통 앞에서 눈 하나 끔쩍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와도, ‘원래 인생은 출렁거리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억울하고 분할 텐데도, ‘주님께서 또 한 번 흔드시네!’ 하고 웃어넘깁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고통과 십자가라도 하느님 신비 안에 바라봅니다. 

십자가로부터 도망가기보다 더 꼭 십자가를 끌어안습니다. 

십자가 뒤에 아로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인내로이 주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비유 해석의 비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떠한 ‘진리’를 알게 되자 인생이 반전됩니다. 그 진리란 자신을 다시 보는 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14살 때 아버지와 놀자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고 심한 비난을 했습니다. 이후 그는 노동으로 돈을 벌어 17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그 돈을 버는 방법은 노동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자신을 꾸려나갔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한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돈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구만,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을 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어떤 분이 자신은 흙수저로 태어나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다시 그 나락 속으로 떨어질까 봐 두렵다는 말을 했습니다. 법륜 스님은 당신도 가난하게 살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삶의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도 굶어 보았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했던 것이 장애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해석의 차이’입니다. 그 ‘해석의 기준’의 차이가 다른 것입니다. 그 해석의 차이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인생의 경험을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데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발전시키는 데 사용합니다. 갑자가 앞이 안 보이게 되면 앞으로 나타나게 될 모든 상황이 두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건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하나의 이야기인데 또 다른 속뜻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는 이 비유말씀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비유말씀을 깨닫고 어떤 이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 비유말씀을 해석해주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품고 있으면 비유말씀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비유를 알아들을 수 있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가져야하는 것이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눈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비유를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또한 비유말씀입니다. 각 사건들마다 무언가 나에게 알려주시려는 하느님의 속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사건 자체에만 연연한다면 이는 그들 자신 안에 진리가 들어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유는 속뜻이 밝혀졌다면 버려도 됩니다. 만약 일어난 일에만 연연한다면 뜻은 모르고 비유만 기억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좋던 나쁘던 모든 일에서 ‘감사’가 우러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일어나게 해 주시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한 선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내가 먼저 믿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바꾸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락 토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상관하지 않고, 내가 나를 어떻게 부를지 고민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나 자신을 바로 해석 수 있는 눈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올바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진리로 자신을 발전시킵니다. 그렇게 가진 자는 점점 더 가지게 됩니다. 비유를 들어도 그 뜻을 해석할 능력이 없으면 허사인 것처럼, 세상을 살아도 그 안에서 보물을 찾아낼 눈이 없으면 영원히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무더운 여름입니다. 용광로에서 철을 다루는 분들을 생각합니다. 길에서 교통정리를 하시는 분들을 생각합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분들을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운 여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인류가 뜨거운 사막을 건너서 지구촌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체력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강한 체력이라도 사막을 건너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사막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조 알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물을 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타조 알을 묻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땅에 묻어 두었던 타조 알을 꺼내서 물을 마실 수 있었고, 드디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에 이름을 정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상상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인류의 상상력은 예술, 문학, 과학, 역사, 종교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마시는 물은 다시 목이 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 코끼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식은 하느님을 온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상력을 키워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상상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자만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현재의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고, 더 높은 곳으로 날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을에 철새는 겨울이 오기 전에 멀리 따뜻한 남쪽으로 긴 여행을 떠납니다. 지금 남아 있는 들판의 먹을 것에 만족하고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면 겨울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상상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였고,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상상력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리를 향한 갈망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회당장 야이로, 하혈하던 여인, 세리 자캐오, 자비를 청했던 실로암의 소경이 있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보았던 성인과 성녀들이 있습니다.

 

시각과 청각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지금 내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얼마나 큰 기쁨인지,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것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별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문제 해결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행복의 시작은 아닙니다. 행복은 감사할 때, 기뻐할 때, 고마워할 때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부제서품을 받으면, 사제서품을 받으면 고민은 없어질 것 같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면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교구청에 있으니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무엇이 되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 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면, 아주 작은 것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부족하기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은인들을 보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많은 결점과 잘못이 있음에도 나를 믿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작은 힘이지만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귀로 들으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한,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삶의 기준이 되는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을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미사에 참례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시나이산’으로 매일 오르는 것입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에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도 저마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 다르고 판단의 기준과 경험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음악을 듣는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곡의 선율을 중심으로 듣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곡의 가사와 의미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악기를 중심으로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보컬을 중심으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을 통해 경험과 추억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도 각자가 선호하는 음악은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장점과 단점이 있다고 했을 때 어느 누구는 그 사람의 장점만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 어느 누구는 그 사람의 단점만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좋지 않게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는 잘 지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과는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문제는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마음은 바로 사랑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식들이 여럿이 있다면 사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옛말처럼 대개는 미우나 고우나 그 자식들을 다 사랑합니다. 결국 사랑만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사랑입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까지도 마지막에 아버지 하느님께 용서해주시길 청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참 어렵다’ 노래 제목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참 인간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힘도 하느님이 허락해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 부족한 저에게 당신의 사랑의 영을 보내주시어 저의 옹졸하고 편협한 마음과 닫힌 눈과 귀를 열어주소서. 그래서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저도 역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의 비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7. 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돌아보니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주님의 비유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 어디든지

사람이 하는 일 무엇이든지

주님의 비유는 넘쳐납니다.

굶주린 아이의 그렁그렁 맺힌 눈물은

일용한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는데 머물지 말고

밥이 되어주고 밥 나누는 세상 이루라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서로 남이 되어 버린 갈라진 가정의 아픔은

제 가족 보듬기에 정성 다할 뿐만 아니라

사랑 가득한 더 큰 가정 안에 갈라진 이들 품으라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따돌림과 억눌림에 주눅 든 작은이의 떨림은

힘센 이들의 편에 서서 안전을 도모하지 말고

오히려 약한 이와 고통 받는 이와 함께 하라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치열한 경쟁 이겨낸 승자의 불안한 눈빛은

살기 위해 다른 이 밀쳐내지 말고

서로 보듬어 더불어 사는 세상 이루라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일터로 보내달라는 해고자의 울부짖음은

아직 일자리 있음에 초조하게 안도하기보다

돈보다 사람이 소중하다 한목소리로 외치라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불의로 권력을 탐하는 이들의 곧 쓰러질 질주는

이들과 벗하여 헛된 탐욕 채우지 말고

정의로운 소박한 세상 이루려 헌신하라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산과 강 바다와 공기 스며드는 죽음의 기운은

무질서한 끝없는 인간 탐욕으로 모두 죽기 전에

창조 세상에 깃든 태초의 생명을 북돋우라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주님의 비유를

보고 듣고 깨닫는 이는 행복합니다.

주님은 삶의 매순간순간

우리를 행복에로 초대하십니다.

이제 나와 당신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차례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마태 13, 10-17)

김성 신부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찬미 예수님!

화창한 봄날 애기를 업은 아줌마가 버스에 탔습니다.

버스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애기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참 원숭이같이 생겼군요."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애기엄마는 버스회사 사장인 최불암에게 따지러 갔습니다. 모든 일의 진상을 알아차린 최불암은 정중하게 애기 엄마에게 사과했습니다. 최불암의 친절함에 아기 엄마는 감동을 받고 나가려는 찰나에 최불암이 업혀있는 애기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

.

.

"그런데, 그 애완 원숭이 참 귀엽게 생겼네요."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칫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 그 신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로 들립니다. 성경 주석가들은 이를 이스라엘의 신비주의와 연관시켜서 종종 해석하곤 합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무나 이해할 수 없고, 선택받은 이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신앙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다음의 말씀으로 명확히 이해됩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곡해와 예수님을 모함한 일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으로 모함하고, 또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고 율법을 어긴 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기에 그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미운 놈 고운데 없고, 고운 놈 미운 데 없다’는 옛 속담처럼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들 종교 율법의 근간을 흔드는 이단자요, 신성모독자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삶을 살고자 지향하지만, 용서하고 화해하고 따스하게 나누며 살고자 갈망하지만, 불현 듯 고개를 쳐드는 미움과 화는 잘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내가 준 것보다 작다고 느끼면 언제나 서운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무표정과 냉랭함 또 불쑥 뱉어내는 가시 돋친 나의 말투에서 내 마음을 헤아려 나에게 사과하거나 다시 따뜻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은 거의 내 마음과는 영 딴판이라는 점입니다. 그 사람은 또 그 사람대로 오해를 하고, 전혀 다른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 곳, 우리가 편히 쉴 곳은 이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노래한 칼릴 지브란의 시처럼, 우리는 나 중심에서 너 중심, 우리 중심으로 옮겨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포인트, 핵심은 바로 내 마음가짐과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 기도이고, 그러한 마음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 진정한 청원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을 성 요아킴과 안나 기념일입니다. 이분들에 대한 기록은 전승을 통해서만 내려오지만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가짐과 삶에서 이분들의 성덕과 의로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오롯한 신심과 인내, 그리고 깊은 침묵과 따름의 삶은 그들 부모의 삶을 긍정해주고, 설명해주는 최고의 지표인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 안에서 증명되고 깨닫게 됩니다. 역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늘 나라는 손에 잡히고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은총에서 시작되고, 우리의 지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신비는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10절)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11절)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하늘 나라를 원하고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 신비를 알아듣는 것이 허락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맞이할 마음도 없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절) 이 말씀은 열정과 열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넉넉히 주시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며, 그러기에 그것이 없어져도 없어진 것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하느님께 아무 것도 바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여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세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그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했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하는데, 보면서도 보지 않고 들으면서도 듣지 않았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14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더 악해지고 당신과 멀어지려는 그들이라도 회개하면 치유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원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라고 하셨다.


신앙은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아본다. 우리가 어떤 일에 빠져있으면 앞으로 나아가게 되며, 더욱 풍요해 진다. 그러나 관심 없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에 무관심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 신앙마저도 빼앗기게 되고 빼앗긴 줄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믿지 않고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싸움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였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기 때문에, 또 그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가지지도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는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면,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게 된다. 주님께 가까이 가면서 신비체험의 기쁨을 갖도록 하자.




친절하고 너그럽게 행동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어제 인천에 나갔었습니다. 몇 가지 볼일이 있어서 나갔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약을 사 먹는 거였습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편도선이 부어서 침을 삼킬 때마다 통증이 있었거든요. ‘약을 먹으면 낫겠지..’ 하는 생각에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었습니다. 점심 저녁 두 번 약을 먹었는데 항생제로는 날 정도가 아니었나 봅니다. 동기네 본당에서 잠을 잤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더 아팠습니다. 안되겠다는 생각에 본당 근처에 있는 동네 병원을 찾아 갔는데요. 의사 선생님 빼고 몇몇 직원분들을 보면서 오랜만에 불친절함을 느꼈던 거 같습니다.

제 외모가 시골스러워서 무시를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카운터에 가서 인사를 하고 접수를 하려고 하니까 이름을 물어봅니다. 처음이라고 하니까 카운터에 있는 접수 종이를 탁탁 치면서 적으라고 합니다. 적어서 주니까 앉아 있으랍니다. 조금 뒤에 진료를 받고 나오니까 다른 분이 카운터에 앉아 계십니다. 친구와 전화를 하느라 바빠 보이셨는데요. 업무처리를 눈짓으로 다 하십니다. 사인하는 것도 눈짓으로 지시하고, 약국이 어디냐고 물어봐도 눈짓으로 아래층에 있다고 하십니다. 병원을 나서는 내내 뒤 쪽에서는 수다 떠는 소리가 들립니다.

‘손님이 오든 가든 별 관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1층에 있는 약국에 들어갔습니다. 접수 받으시는 분이 두 분이 계시길래 약간 어리버리하게 망설이고 있었더니 한 분이 처방전을 이쪽으로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잠시 뒤에 약을 주시면서 듣던지 말던지의 말투로 짧게 복용방법과 시간을 알려주시면서 약을 줍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보통 안녕히 계세요~ 하면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응답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가던지 말던지 관심이 없는 듯 옆에 직원과 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분들의 행동이 그 병원의 이미지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아니면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저에게는 낮추는 결과를 가져온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저런 불친절한 병원엔 다시는 가지 말아야겠다...’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아마 병원을 찾는 다른 분들도 직원 분들의 태도에 영향을 받을 겁니다. 직원 분들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병원을 다시 방문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좀 더 친절했는지, 불친절했는지..

또 너그러웠는지 너그럽지 않았는지에 따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결정이 달라질 겁니다.

아마도 믿지 않는 이들은 나의 친절한 행동을 보고 그의 하느님도 친절할 거라 생각할 겁니다.

또 나의 자비로운 행동을 보고 그의 하느님도 자비로울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우리의 행동이 다음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과 같다면 어떨까요?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을 구걸하러 나선 한 흑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에 있는 한 저택의 벨을 눌렀습니다.

그는 “뒷문 쪽으로 와 보라.”는 말을 들었고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택의 주인 남자가 뒷문 현관에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식사 기도부터 하시오.

자, 나를 따라 말해 보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굶주린 그가 따라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틀렸어요.” 집주인이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나 흑인 남자는 완강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지친 나머지 집주인이 물었습니다.

“어째서 ‘우리 아버지’ 라고 하라는데도 계속해서 ‘당신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게요?”

그러자 흑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우리 아버지’ 라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형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빵 한 조각을 주겠다고 형제를 뒷문으로 오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동일한 분일 리가 없으니까요.”

주인의 불친절한 행동이 그와 하느님을 동시에 깍아 내린 거 같은데요.


하느님은 그렇게 불친절한 분이 아니시죠. 오늘 독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나의 행동이 그분을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또 나와 그분을 동시에 높이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처럼 너그럽고 친절한 행동을 보이는 거겠죠.

오늘 하루,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와 그분을 동시에 높이고 그분을 드러낼 수 있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행동을 보여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공소에 있는 냉장고가 고장났다.

그래서 한 자매님이 준비하신 음식이 상해서 버리게 되었다.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웠는지

닭을 키우는 형제님에게 사료로 쓰라고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거 닭 주고 난 알 줘~”




깨달음의 여정旅庭.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깨달음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강론 제목은 ‘섬김의 여정’이었고, 오늘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입니다. 어제는 공동체 하루 휴가날이었습니다. 오전에는 시내에서 86세 고령의 수도형제와 함께 모두 아홉 수도형제들이 ‘미션 임파서블’ 영화를 봤고 오후에는 ‘수상한 흥신소’란 연극도 봤습니다. 


내용보다도 하루 긴장을 풀고 모두를 공동체에 맡기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함께 지낸 자체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코스모스cosmo의 질서’의 삶에 때로는 ‘카오스chaos의 혼돈’도 필요한 것이 인간 삶의 현실이자 리듬이자 지혜입니다.


저는 정장하고 책가방을 들고 ‘고전적classic’(?) 스타일로 함께 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책은 보든 안보든 늘 책가방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몸에 밴 탓입니다. 좀 무거워도 들고 다녀야 마음도 편합니다. 새삼 공동체는 ‘최고의 치유제’이자 ‘깨달음의 학교’임을 발견했습니다. 얼마전 수도원에서 머물다간 어느 평신도 신학자의 깨달음도 신선했습니다.


-“수도원에서 깨달은 점

1.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2.모지랖은 넓히지 말고 줄여야 한다.

3.하고픈 말보다 해서 안될 말을 먼저 분간하자.

4.할 수 있는 일도 다 하지 말고 줄여야 한다.

5.중요한 일에도 순서가 있다.

6.시간 관심 아껴 공부하자.”-


새삼 수도공동체가 깨달음의 학교임을 입증하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부단한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너를 알아가면서 내외적으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는 삶입니다. ‘아, 그렇구나!’, ‘아, 그럴수 있구나!’, ‘아, 그게 현실이구나!’ 부단히 깨닫고 배우고 알아가면서 서로간 이해와 수용도 깊어지고 자유로워지는 공동체 삶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은 ‘앎의 여정’이자 ‘자유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삶은 얼마나 축복된 은총인지요! 이런 깨달음의 여정과 더불어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깨달음보다 더 좋은 약도 없습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때 저절로 치유되어가는 무지의 병입니다. 새삼 무지의 병의 치유도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여정이란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바로 복음에서 인용된 이사야서 내용은 무지한 사람이 그 대상입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도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바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의 사람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보고 깨달아 알라 있는 눈이요, 듣고 깨달아 알라 있는 귀입니다. 바로 무디어진 마음이 문제입니다.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선사되는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마음따라 보는 눈이요 마음따라 듣는 귀입니다. 마음의 겸손과 순수가 우선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할 때 은총처럼 주어지는 마음의 겸손이요 순수란 선물입니다. 바로 겸손과 순수는 수행의 궁극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에서 샘솟는 깨달음이요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무지의 치유에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이런 깨달은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을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참행복입니다. 정말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의 발견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행복을 옆에 놔두고 눈이 가려 보지 못보고 불행하게 사는 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청할바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행복입니다.


무지는 만악의, 만병의 근원입니다. 옛 교부들이 말하는 여덟가지 악한 생각들, 즉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 모두도 무지의 산물이요, 불가에서 말하는 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 역시 무지의 산물입니다.


바로 이런 무지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 깨달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깨달음입니다. 회개의 은총,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하여 회개를 그리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여정은 바로 ‘회개의 여정’임을 봅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역시 예루삼렘의 회개를, 깨달음을 촉구합니다. 첫사랑의 순수를 회복하라 외치며 생수의 원천을 찾으라 외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자기를 잊은 무지에서 파생된 재앙임을 밝힙니다.


“가서 예루살렘에 듣도록 외쳐라.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오늘도 여전히 무지로 인해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파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무지로 인해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무지로 인해 모래위에 집짓는 인생들이요, 밑빠진 독에 물붓듯 하는 참 어리석은 인생들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와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깨달음의 은총과 더불어 마음의 겸손과 순수도 선물하십니다.


“주님,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당신을 아는 이들에게 자애를 베푸시고, 마음 바른 이들에게 정의를 펼치소서.”(시편36,10-11). 아멘.




"가진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13, 10-17(연중 16주 목)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이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것을 땅에서 가르치셨으니,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이나 상황으로 예를 들어 쉽게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 34)라고 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 10)하고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그 대답을 하시기 전에 먼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 11)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의 신비”가 모두에게 가려져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곧 제자들,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아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반면에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하기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 12)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차별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보여주시지만,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탤런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마태 25, 28-29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 14-15; 이사 6, 9-10)

 

그런데, 위의 두 번째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어가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스스로 그것을 원하지 않고 거부한 완고함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 5)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 16)

 

이는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믿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가진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 것에 눈이 밝으면 영적인 것을 놓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영원히 귀한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중복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겔러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육을 넘어 영혼의 맑은 눈과 귀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영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때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상처 받고 아파할 사람은 그만큼 관계의 형성이 덜 되었으니 비유가 편할 것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에게는 직접얘기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많은 사고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외에는 다른 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에게 비유로 말씀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에게는 바로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듣느냐?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느냐는 분명 다릅니다. 분명 믿는 이들은 속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과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자로(子路)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冉有)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論語-先進)”. 비유를 통해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먹고 싶은 것만 먹음으로써 병을 만듭니다. 마음이 무디고 건성으로 보고 듣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유는 넘치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찾고자 하면 발견되는 것이고 찾을 의도가 없으면 감추어진 채로 있게 됩니다. 능력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과 그 사랑을 가진 자는 날이 갈수록 더 넉넉해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것을 가진 이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함께야). 속뜻을 알았으면 뜻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듣기 싫어, 그만해라!' 하는 완고함으로는 하늘 나라 신비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입만 살아가지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자들은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 눈을 가지고 있는데도 어떤 눈은 보고 어떤 눈은 못 보며, 어찌 귀를 가지고 있는데도 어떤 귀는 듣고 어떤 귀는 못 듣는 걸까요?

우선 욕망과 욕심의 눈은 못 보고 가난의 눈은 보이는 대로 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것들을 멸시하고 천상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정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욕심이란 마음이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고, 그래서 욕망 때문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이며 그래서 그런 마음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말에도 눈이 있지만 돈에 눈이 멀고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하지요.

돈만 보고 돈 밖에 못 보는 것인데 돈만 보기에 돈 밖에 있는 것은 있어도 아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욕망을 빼내 가난해지면 이는 마치 안경의 때를 닦으면 깨끗해지듯이 마음의 눈이 깨끗해져 하느님도 볼 수 있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의 눈은 보지 못하고 겸손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새벽 4시 30분에 행진을 출발하였습니다.

강론을 묵상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준비하여 떠나려니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금세 따라갈 테니 먼저 출발하라 하고 20분 뒤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빛이 하나도 없어서 깊은 산 속에서 한 걸음 떼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 5분 적응한 뒤에야 조심조심 걸어서 따라 잡았는데 이때 다시 깨달은 것이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는 거고, 빛이 없으면 아무리 당당하게 걸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는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노래하듯 우리는 주님의 조명을 받아야 하고, 이렇게 겸손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눈이 있으니 내가 눈을 감지만 않으면 볼 수 있으려니 교만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말에도 있듯이 교만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깊은 산속에 혼자 있고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니 정말 무섭고 두려웠으며 주님이 옆에 계시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주님이 나의 빛이시고 나의 길 비추심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에 대해서도 보겠습니다.

그런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이 귀가 있기는 하되 들을 귀는 없기 때문이고, 들을 귀가 없는 것은 입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입만 살아가지고!’라고 비꼬는 말이 있습니다.

입만 살고 다른 것은 다 죽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입만 살면 다른 것은 다 죽게 됩니다.

입만 살아있고, 눈, 코, 귀 모두 죽는 겁니다.

자기 말이 많은 사람은 말을 해야 하니 들으라고만 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한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저 내 얘기, 내 요청만 늘어놓고 하느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을 수 없는 기도를 하고서는 하느님께서 아무 말씀 않으신다고도 하지요.

이럴 경우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이어야겠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에 가서, 윌리엄 폴 영 원작 ‘오두막’(Shack)을 스튜어트 하젤딘 감독이 제작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대사 중에 “자기 고통에 빠져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내 옆에 계셔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빠져 있으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이사 6,9-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과 눈앞에 닥친 고통에 몰두할 때, 오히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안타까워하시면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주 예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갈구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11절)기를 간구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오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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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세상이라 하십니다.

어쩌면 시대와 상관없이 늘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고, 무엇을 듣지 못하고, 무엇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당연히 옳고 그름에 대한 진실일 것입니다.

편견을 갖지 말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은 반드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것은 편견이요!"라고 외친다고 할 때, 우리의 그 외침 속에도 또 다른 편견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옳고 그름에 대한 진실을 식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며, 옳은 쪽을 선택하고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논리는 사실 언제든지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산다는 것은 진실로부터 엇나가는 횟수를 줄이는 싸움입니다.

결국 체험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체험이란 그저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마음을 흔들어놓아야 그것이 체험이 됩니다.

깨닫지 못하기에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여기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옳음을 보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비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인 옳음이 진실이라면 반드시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나타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폭격할 미사일 앞에서 팔레스타인의 전멸을 기도하는 이스라엘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세상이 얼마나 쉽게 악으로 물들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 두렵기조차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악마의 잔악성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악으로 무너지지 않은 세상, 복음의 비유로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세상을 꿈꿔봅니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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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안나님과 요아킴님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보고 들어도 알지 못함 <마태 13, 10-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알기 위해서 보고 듣고 알지만 보아도 들어도 모르는 사람은 보는 바, 듣는 바가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알고 깨닫기 위해 그 사실에 대한 희망과, 알고자 하는 마음과, 알고 실천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알아듣게 됩니다. 주님과 거리가 있고 생각이 다른 사람은 주님의 직설법에 따른 말씀을 들어도 모르고, 손에 쥐여 주어도 모르니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무디고,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같은 시간에 같이 있어도 어떤 이는 말하는 이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만 어떤 이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말을 귓등으로 듣거나 선입견을 품고 있으면 귀를 닫고 들을 생각도 하지 않으려면 한마디도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는 사람 듣는 사람이 같은 내용을 듣고 깨닫는 것이 서로 다른 이유는 어떤 관점에서 보고 듣는가에 따라 이해되거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고, 듣고, 알려고 하는 사람은 보여주고 말하는 사람 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되지만 반대편에 서 있으면 독이 됩니다.

저는 아침에 성호를 놓으며 일어나는 날과 아닌 날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겠습니다.”하고 일어나는 날과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는 날은 다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은 누구나 참 주님을 알고 믿고 따르려면 주님의 편에 서 있고,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없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아직도 유대인은 주님을 모르고 자기들 고집스러운 생각에 눈 감고 귀를 닫고 있습니다.

오늘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나 주어진 일 속에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아는 바를 실천하도록 기도합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마태 13,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꽃은 그냥 

피지 않습니다.


시간이라는 정성과

사랑이라는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평범한 것은

없습니다.


소중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부모가 되시는

요아킴과 안나의


그 믿음이라는 

뜨거운 눈물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비이며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신비입니다.


아름다운 신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가장 귀중한 

관계로 번져갑니다.


가장 귀중한 관계는

기도의 신비를

걷게 합니다.


기도로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의 마음이

부모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하늘의 마음이 됩니다.


소중한 선물은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눈물의 시간과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

드디어 재가 되는

인고의 시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참된 선물이 됩니다.


꽃은 눈물같은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어느 대학에서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혼자서 카메라를 보며 자기를 스스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소개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단 10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를 소개한 영상을 보고서 호감이 가는 사람을 고르는 실험이었지요. 과연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스스로 소개하는 시간 자체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당연히 생김새나 옷차림, 말투, 인상 등이 호감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바로 삶의 의미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호감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10초라는 시간밖에 없어서 자신이 직접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 적이 없어도 말이지요. 


그러면서 이 실험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를 합니다. 삶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직접 표현을 한 적이 없더라도, 삶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 실험의 결과를 보면서 가끔 내 자신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이 있나요? 다른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을까요? 과연 나는 책임감과 의지를 가지고 있을까요? 일에 대한 의욕이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본능적으로 끌리는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성을 거슬러서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으려고 합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합당한 자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은총을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에 끌리도록 만드셨지만, 이 본능을 따르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청하지 않고, 하늘 나라를 맞아들일 준비를 갖추려 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의 잘못인 것입니다. 


내 안의 삶의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서 만들어낸 삶의 의미가 아닌, 우리가 본능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사랑이 가득 담긴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면서 노력할 때 비로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시간을 쉽게 써버리는 사람은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찰스 다윈).


‘나’에 집중하라.

어렸을 때 친구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피게 되었다고 말하는 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때 자신에게 강요했던 친구들 때문에 30년째 담배를 끊지 못해 건강도 챙기지 못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정말로 제3자인 친구 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년이 되어 있는 이 분은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도 학창시절처럼 친구들이 강요해서 억지로 담배를 피우는 것일까요? 이제 어디에서도 그런 압력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반대인 담배를 끊으라는 압력만 있습니다. 

분명히 담배를 피우라는 친구들의 강요에 의해 피우게 되었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왜 담배를 끊으라는 많은 사람들의 강요의 말은 따르지 않을까요? 

친구들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나’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의지를 세워 행동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 누구 때문에 또 주변의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남을 탓하고 주변에서 원인을 찾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나’의 모습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찾아가는 행복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13,11)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들과 의인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허락을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하늘 나라의 신비를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었으니(13,12)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군중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 절대다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지요. 


하늘 나라의 신비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 평생 헌신하며 살아갈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표지요 축복입니다. 복음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신앙으로 모실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렇듯 행복의 길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으니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축복 안에 머물려면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하려는 열린 마음과 이러한 길을 알아 볼 수 있는 눈과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며 자기 착각에 빠지고 자신을 스스로 우상화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믿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집중하고 몰두합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려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저버린 채”(예레 2,13) 엉뚱한 데서 행복을 찾으려 하니 한마디로 헛된 인생을 사는 셈입니다. 


주님을 저버리고 ‘나’라는 우상, 메마른 땅에 불과한 우상을 따른 결과는 삶을 비참하게 할 뿐입니다. 일시적인 달콤함과 성취감은 진리와도 같게 여겨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쓰디쓴 느낌만이 남지요. 자신을 신뢰하는 이는 언젠가 자신으로 인해 망한다는 변함없는 진리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행복도 진리도 결코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 마음을 열고 눈과 귀를 그분께 집중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알려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린다 해도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세상 것에 눈이 멀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간다면 동료 형제자매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외면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입니다. 


혹시 나는 돈과 명예, 먹는 것과 사치품, 편리함과 개인적 만족에 눈이 멀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이롭고 달콤한 소리에 익숙해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차별과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신음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자기에게 영원한 행복과 진리가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과 완고한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마음과 눈과 귀를 집중하고 헌신하며 사랑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깨달음에로의 초대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어서 빨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라고 계속해서 초대장을 보내주십니다.

존경하는 이현주 목사님께서 쓰신 기도 모음집 가운데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생활성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봐도 기도가 시작되는 참 좋은 책입니다. 힘들다 해도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습니다.

돌아보니 나 홀로 걸어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 돌아보니 언제나 주님께서 내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건네주신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비록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더 영원한 것, 더 가치 있는 것, 더 의미 있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언젠가 육의 눈이 닫히고 영의 눈이 열리면 지금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진실한 것, 보다 영원한 것, 죽음을 넘어서는 것, 영원한 생명, 불멸의 하느님 나라가 존재함을 가르치십니다.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세상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하는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다는 아니할지라도 ‘살짝’ 천국의 맛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네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못 바꿀 신앙의 진리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우리도 이웃들에게 열어주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놓치고 불행하게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육적인 삶, 자기중심적 삶을 깨트리고 하느님 중심적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해줘야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행복한 새 세상을 만나게 해줘야겠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영적인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알려줘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부터 먼저 확실한 하느님 체험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감미로운 만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한없는 자비, 애틋한 마음을 우리도 지녀야겠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가 남긴 한 마디 말을 접하고 저는 정말이지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주어졌습니다. 나에게 어떤 것들이 없는지 생각하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녀는 그 큰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초긍정 마인드를 지니려고 노력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긍정화 작업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반성을 많이 해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들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찾아낼 생각은 않고 늘 내게 없는 것에 대해 폭포수처럼 불평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늘 남과 나를 비교하며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목숨 다하는 날까지 깨달음의 향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묻지 않는 백성이 눈을 감은 백성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전에 보좌신부 할 때 주임신부님이 신자들 대상으로 성경강의를 해 보라고 하셔서 준비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본당 신자 대상이니 무료로 하고 지하 강당에서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임 신부님은 가뜩이나 특강을 해도 인원이 적은데 돈을 내면 더 안 올 것이라고 했지만 제가 강력히 주장하여 삼만 원씩 받기로 했습니다. 저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의지가 있는 분들만 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원하고 원하지 않는 분들을 가르는 방법이 바로 그 삼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백 명가량이 신청을 하여 저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열다섯 번을 하는 동안 끝까지 함께 하여 처음과 끝의 인원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구 영성관에 와서 강의에 대한 걱정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때보다 오히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리가 멀어서 신자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고, 가격이 너무 비싸 인원이 차지 않을까 걱정이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만 말씀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아리송한 대답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눈을 감아버렸고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말씀을 깨닫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시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말씀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셔야 정상이실 텐데 참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야곱이 자신의 양떼를 챙기기 위해 장인 라반의 가축이 교미를 할 때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를 세워놓고 줄무늬와 점박이가 태어나게 할 때에도, 약한 양이나 염소가 오면 그 나뭇가지를 치워버렸습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나뭇가지는 그분의 모범을 상징하며 그 모범대로 보고 깨달아서 살아가는 이들은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것들은 구원의 기회조차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처음부터 약한 이들은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는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비유말씀의 깊은 의미까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은 제외시키기 위해 비유말씀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섭리를 오늘 독서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나무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주님에게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하고 묻지 않습니다. “묻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구원이 있는데도 그분에 대해 알려고 하는 시간보다 쓸모없는 저수 동굴을 파는 데 시간을 허비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비유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묻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이해가 안 되면 물어야하는데 그냥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하지 않으면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원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주십니다. 눈을 감아버린 이들에게는 비유말씀을 들려주셔도 더 이상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비유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주님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이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주님께서 만나의 비유가 당신의 살과 피임을 말씀하실 때 모두 떠나갔습니다. 비유의 의미를 알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원받는 교회를 대표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결국 진리를 알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해 예수님께서도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지 원하지도 않고 의지도 없는 이들에겐 에너지를 아끼셨습니다. 제가 그때 삼만 원을 걷자고 한 것이 바로 합당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비유말씀과 같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저도 그 원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걱정하기 보다는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보려고도 하지 않고 물으려고도 하지 않는 백성이 아니라, 그분에 관한 것이라면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지닌 주님께로부터 친히 배우는 구원받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완고함 마음은 절망을 가져 온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때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상처 받고 아파할 사람은 그만큼 관계의 형성이 덜 되었으니 비유가 편할 것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에게는 직접얘기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많은 사고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외에는 다른 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에게 비유로 말씀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에게는 바로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듣느냐?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느냐는 분명 다릅니다. 분명 믿는 이들은 속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과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기록된 얘기입니다. “자로(子路)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有)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論語-先進)” 비유를 통해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완고함이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처럼 견고하니 거꾸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비유를 알아듣고 하느님께 돌아간 사람은 누구나 치유를 받게 된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먹고 싶은 것만 먹음으로써 병을 만듭니다. 마음이 무디고 건성으로 보고 듣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들리는 소리보다 더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는 것 너머의 더 깊은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전원신부).

비유는 넘치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능력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진정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속뜻을 알았으면 뜻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려 시대 시인이었던 정지상의 ‘송인’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자꾸만 읽고, 쓰니까 그 뜻이 더욱 깊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소리는 듣고, 그림은 보고, 사랑은 느낀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느 경지에 이르면 소리를 보고, 그림을 느끼고, 사랑을 듣기도 합니다.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雨歇長提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개인 긴 언덕에는 풀잎이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시를 읽으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온 후, 더욱 푸르게 보이는 언덕이 그리움으로 남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추억을 가득 담고 흘러가는 대동강의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야 하는 애절함이 느껴집니다. 10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한 편의 시는 여전히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목안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입니다. 신호등을 보고 길을 건너는 것도 목안입니다. 옷에 묻은 흙을 보고 털어내는 것도 목안입니다.

지식으로 보는 것은 지안입니다. 경제의 흐름을 보는 것은 지안입니다. 시의 의미를 보는 것도 지안입니다. 판단, 분별, 식별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심안입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심안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도 심안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도 심안입니다. 옳고 그름을 모두 놓아 버릴 수 있는 비움도 심안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보는 것은 혜안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 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미안 성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시각과 청각 장애자였던 ‘헬렌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지금 내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얼마나 큰 기쁨인지,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것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별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문제 해결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행복의 시작은 아닌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할 때, 기뻐할 때, 고마워 할 때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될 줄 알았습니다. 부제서품을 받으면, 사제서품을 받으면 고민은 없어질 것 같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면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교구청에 있으니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무엇이 되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 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면, 아주 작은 것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부족하기에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은인들을 보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많은 결점과 잘못이 있음에도 나를 믿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작은 힘이지만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귀로 들으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생수生水의 원천源泉인 주님. -첫순정, 첫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영원한 청춘이십니다. 늘 첫순정, 첫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주님을 닮아 늘 젊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바로 우리들입니다.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어렵고 힘들었어도 광야시절 당신 백성과의 첫순정을, 첫사랑을 잊지 못해 당신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첫순정, 첫사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오염되거나 무뎌진 마음이 아닌 한결같은 첫사랑의 설레는, 떨리는 마음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첫순정을, 첫사랑을 잃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세상 우상들의 유혹에 빠져 생명의 하느님을 잊은 업보입니다. 그대로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세상 맛에, 세상 재미에, 세상 걱정에 빠져 주님과의 첫순정을, 첫사랑을 잃고 지내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다 잃어도 끝까지 지니고 살아야 할 하느님 향한 첫순정, 첫사랑입니다. 사제들은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고, 율법을 다루는 이들도 주님을 몰라보고, 목자들도 주님께 반역하였으며,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며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것들을 따랐다니 얼마나 혼란한 암흑의 세상이었는지요. 이런 와중에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동굴을 팠다.”

그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 요법의 하느님 사랑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늘 첫순정, 첫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와 만남으로 우리의 첫순정을,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망각의 동물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님과 이런 사랑의 추억들을 생생히 기억했더라면 결코 세상 우상들에 빠져 첫순정도, 첫사랑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표현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와 미사로 주님 사랑을 고백하며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 생수의 원천은 오직 하나 영원한 첫순정이자 첫사랑인 주님뿐입니다.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소개한 구절을 나눕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기쁨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나이다.”(시편36,9ㄴ).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편36,10).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55,1ㄱ).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4,14).`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8,37-38)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져 주겠다.”(요한 묵21,6).

얼마나 은혜로운 구절들인지요. 이런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찾아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일거에 해갈시켜 주시며, 우리 눈을 열어 당신의 신비를 보게 하시고, 우리 귀를 열어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13,16-17).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 안에 ‘인사이더(insiders)’로 살 때 영원한 행복입니다. 아멘. 




하늘나라 신비 학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에게는 하늘나라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오늘 하늘나라 신비를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 나라 신비를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 탓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됩니까?

하늘나라를 알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면 하느님 나라를 알게 하기 위해 비유를 써야 하는데 모르게 하기 위해 비유를 쓴다고 하시니 말이 되고, 차별이 없어야 할 분이 차별을 하시니 말이 됩니까?   

하느님도 그렇고 주님도 그렇고 차별을 하여 누구는 하늘나라 신비를 알게 하고 누구는 모르게 하지 않으십니다.

똑같이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하느님이시고, 그래서 하늘나라 신비도 똑같이 드러내 보이시지만 눈이 있는 사람은 보고, 없는 사람은 못 보는 거고,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들려줘도 귀가 있는 사람은 듣고, 없는 사람은 못 듣는 거지요.

그런데 정확히 얘기하면 들을 귀와 볼 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건데 귀는 있지만 들을 귀가 없고, 눈이 있지만 볼 눈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런 말도 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귀와 보지 못하는 눈도 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어떤 귀와 어떤 눈이 이런 귀이고 이런 눈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탐욕의 귀와 눈, 교만의 귀와 눈입니다.

실상 우리는 사랑으로만 보지요.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시들하고 무관심하여 눈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잖아요? 

그런데 사랑 대신에 욕심과 교만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욕심은 욕심내는 것에 집착하여 다른 것은 무관심하게 되고, 교만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관심하고 깔보게 되지요.   

그러므로 하늘나라 신비를 아는 것의 허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차별로 배제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하늘나라 신비 학교가 있는데 입학조건이 있습니다.

하늘나라 신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입학이 허가됩니다.

하늘나라 신비를 조금이라도 알고픈 사람에게만 허락이 되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보다 신비를 더 사랑하는 이에게만 허락됩니다.   

당연히 하늘나라 신비를 개떡같이 여기는 사람은 허락이 되지 않고, 세상 욕심 때문에 하늘나라 신비가 눈에 들어오지 사람도 자격미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은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충족시킬 수 있는 거지요.

그러기에 아주 마땅한 조건이기도 하고요.   

신학교나 수도원이 바로 이 신비의 학교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이 신비의 학교라 할 수 있는데 하늘나라보다는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는 안 되겠지요.

하늘나라 신비를 배우기보다는 신부라는 직업이 좋아서 신학교 입학하려고 하면 안 되겠지요.

하늘나라 신비를 배우려하기보다는 신학이나 배우려는 사람도 안 되겠고요.

   

우리 모두 하늘나라 신비 학교에 입학하여 거기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행복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예레 2,1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의 뿌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매일 뉴스 보기가 겁날 정도로 온 세상에 악행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 뿌리가 다음 두 가지에 있다네요.

하나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저버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인간의 탐욕 때문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 탐욕 앞에 하느님은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아니 오히려.불편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참 생명으로 받드느냐

내 욕심대로 살아 죽음의 길을 걷느냐

이것이 우리 인류의 궁극적인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온전한 생명과 평화를 누리고 있나요?

그렇지 못하다구요?

그렇다면 나의 탐욕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내 욕심 내려 놓는 것이 죽음과 고통이 아니라 참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임을 다시 확신하며 나의 쓰잘데 없는 욕심 하나 내려놓는 날 되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참 생수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무더운 여름 잘 이기시길 축원합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마태,13/10-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가 들리지 않은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에 따른 조건이 맞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사야서를 이용하여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한고....... 마음이 무디고, 귀로도 제대로 듣지 못하며,” 말씀하십니다. 진, 선, 미의 근원이신 주님의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하는 사람은 첫째 마음의 문제입니다. 듣지 않으려고 하면 응 응 하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 하고 바른 말을 반대로 알아 들으려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몰라도 아는 척 하는 사람, 자기편이라고 이해 못해도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체면 때문에 알아들은 것처럼 하는 사람도 진 ,선, 미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다 알아 듣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관례적으로 알아듣고 신자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아무것도 모르거나 알아들은 말이 하나도 없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들어야 할 말을 듣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묵상 하면서 과연 나는 주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고 사는가? 아니면 알아들은 것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병자가 약을 먹어야 사는 것을 알지만 아무약이나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병에 적합한 약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알고 먹어야 하듯이 저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모든 이에게 얼마나 유익하지를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내편이니까 참 말이고 내편이 아니니까 거짓말이라고 말을 들으면 역시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들었다 티비에서 보았다 하지만 언론이 언론의 역할을 진실과 사랑에 기인하지 않고 편견과 이기적 야심에서 말하는 언론은 바른 것을 알아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말보다는 사실을 중요시 합니다. 예를 들어 “죽어야 산다.”란 말이 진실하려면 실지로 주님과 같이 죽음 뒤에 부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말을 바로 듣고 바로 전하려면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진실을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진실보다 거짓 헛된 소리를 합니다.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아 집니다.

겉으로는 않 되였다. 하지만 속으로 고소하다. 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로 함께 울어주는 사람과는 구별됩니다.

저는 가난한 마음과 온유하고 사랑이 깃든 마음으로 서로 알아듣고 함께 사는 정직한 세싱 믿음이 있는 세상 기쁨과 행복이 있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묻게됩니다.


사랑보다 더 깊은

신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지금 이순간은 

신비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를 통해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신비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신비로 가는 길은

십자가 길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성체성사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는 허락된

이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신비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우리 삶을 바쳐야

할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새롭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하늘나라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오늘되십시오. 



만약 천사가 나타나서 “당신이 세 가지 소원을 청하면 그것을 다 이루어주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것도 청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소원을 말해 보시오.”라고 말한다면 어떤 소원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사실 어렸을 때, 이러한 상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알라딘과 요술램프’라는 동화책을 읽고서는, 길거리에서 주전자만 봐도 괜히 문질러 보았던 기억도 있네요. 

아무튼 이런 상황이 혹시라도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떤 소원을 빌 것인가를 어릴 적부터 쭉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말해야 할지,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일까요? 지금 현재 그 당시에 가졌던 소원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것을 소망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런데 올바른 것을 소망했던 성경 속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솔로몬 왕입니다(1열왕 3,5-13).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이 청한 이 한 가지 소원이 하느님 눈에는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해주겠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솔로몬이 청했던 ‘듣는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사실 듣지 않는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하지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부부가 헤어지고 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자녀가 부모의 집을 떠납니까? 듣지 않기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들음이 사랑이며 지혜이며, 또 세상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는 하느님께서 성당 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심을 압니다. 거기에 규칙적으로 머무는 인간은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경청 속에 잠심하게 되고, 그 결과 침묵하는 듣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행복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있으며,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현존하시면서 당신의 모습과 말씀을 교회를 통해 또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닫힌 마음으로 인해 보지도 또 듣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솔로몬 왕과 같이 잘 ‘듣는 마음’을 청하면 어떨까요? 분명히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대답이며, 그래야 우리 역시 전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인간 비참함의 원인은 홀로 방안에서 견디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파스칼).  


주님께 집중합시다.

급하게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식사를 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급한 상황이었지요. 한참 동안 머리를 써서 그런지 너무나도 시장했습니다. 그러나 원고를 마무리 짓지도 않고 나가서 식사를 할 수는 없었지요. 그런데 마침 방에 빵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빵을 먹으면서 원고를 썼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원고를 다 썼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이메일로 발송하고 나니 시장이 확 몰려옵니다. 저는 아까 먹고 있었던 빵을 찾았지요. 하지만 빵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빵을 다 먹은 기억은 없지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도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빵을 다 먹었나 봅니다. 

빵을 먹은 기억도 없는데 빵을 다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원고를 다 쓰고 나서 천천히 빵을 먹었다면 아주 맛있게 먹었겠지요. 그러나 바쁘고 정신없는 가운데 먹다보니 먹은 줄도 모릅니다. 

이것도 저것도 하다보면 분명히 놓치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딱 하나에 집중할 때 효과를 더욱더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 오히려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부차적인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오로지 집중하고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오13,13)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세상이라 하십니다....

어쩌면 시대와 상관없이 늘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고, 무엇을 듣지 못하고, 무엇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당연히 옳고 그름에 대한 진실일 것입니다.


편견을 갖지 말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은 반드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것은 편견이요!"라고 외친다고 할 때, 우리의 그 외침 속에도 또 다른 편견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옳고 그름에 대한 진실을 식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며, 옳은 쪽을 선택하고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논리는 사실 언제든지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산다는 것은 진실로부터 엇나가는 횟수를 줄이는 싸움입니다.


결국 체험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체험이란 그저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마음을 흔들어놓아야 그것이 체험이 됩니다.


깨닫지 못하기에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여기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옳음을 보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비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인 옳음이 진실이라면 반드시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나타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폭격할 미사일 앞에서 팔레스타인의 전멸을 기도하는 이스라엘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세상이 얼마나 쉽게 악으로 물들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 두렵기조차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악마의 잔악성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악으로 무너지지 않은 세상, 복음의 비유로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세상을 꿈꿔봅니다.




속 뜻을 헤아리는 지혜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 것에 눈이 밝으면 영적인 것을 놓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영원히 귀한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중복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겔러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육을 넘어 영혼의 맑은 눈과 귀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영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때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상처 받고 아파할 사람은 그만큼 관계의 형성이 덜 되었으니 비유가 편할 것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에게는 직접얘기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많은 사고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외에는 다른 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에게 비유로 말씀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에게는 바로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듣느냐?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느냐는 분명 다릅니다. 분명 믿는 이들은 속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과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자로(子路)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有)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論語-先進)” 비유를 통해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먹고 싶은 것만 먹음으로써 병을 만듭니다. 마음이 무디고 건성으로 보고 듣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유는 넘치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능력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진정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속뜻을 알았으면 뜻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제 곧 방학을 할 것입니다. 방학을 하면 아이들은 물놀이를 갈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학교에 가라면 늦잠을 자는 아이들이, 성당에 가라면 게으름을 피우는 아이들이 , 여름 수련회를 간다고 하면 새벽부터 성당으로 왔습니다. 물놀이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어른들은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올 여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먼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땅의 축복’이었습니다. 더 많은 가축을 기를 수 있고, 가족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땅을 소유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며, 구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더 많은 가축과 더 많은 땅을 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믿음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자유와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자녀 중에 아들은 태어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비록 이집트 땅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자유와 해방이 없는 삶은 굴욕과 굴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말씀해 주십니다. 자유와 해방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셨고, 드디어 근심의 바다, 두려움의 바다, 허무의 바다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정의의 실현’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막에 물이 솟아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어노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묶인 이들이 자유를 얻고, 눈먼 이들은 눈을 뜨고, 굶주린 이들은 배불리 먹게 되는 세상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보다 앞서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을 높여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다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말씀과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과 풍요로움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통해서 우리를 ‘죄, 악, 죽음’에서 자유롭게 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땅의 축복, 자유와 해방, 정의의 실현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넘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과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여러분은 깨어서 기다리십시오. ‘하느님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더라도 결코 그들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하느님나라는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귀로 들으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신비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라져가기에 신비이며

소중하기에 신비입니다.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내면을 만나는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

신비의 시간임을 알게 됩니다.


단 한순간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으로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알아 볼 수 없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을

주님께서는 아프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신비와 비유는

욕망을 뛰어넘는

참된 사랑의 선물입니다.


참된 사랑은

낮음과 높음에 관계없이

사랑입니다.


신비한 언어는

언제나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지금 이순간이

오늘의 이 하루가

주님께서 주신

신비의 시간이며

감사의 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쁨의 눈물없이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신비를

일깨워 주십니다.


욕심이 아니라

감사라는 것을

사랑의 신비로

가르쳐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은총이며

신비입니다.



지난 여행 중에 페루의 한인천주교회에서 짧게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신앙인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살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의 그 큰 능력으로 이렇게 머리도 나쁘고 부족한 저를 크게 써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또한 주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신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순간 사람들이 많이 공감하시는 분위기여서 저 역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미사 후 자녀들이 자기 엄마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신부님께서 머리가 아주 나쁜데도 신부님이 되었다면서? 나도 이제 공부하지 않아도 되겠다.”


사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부족한 사람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지만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함 역시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부족함에 머무는 것이 아닌, 주님의 영광에 의해 크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말했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었던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신의 관점에서만 받아들이니 그 비유가 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설명할 때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바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으니 우리와 함께 하려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요즘 사회가 어수선해서인지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립니다. 이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도 성서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그들의 해석 방법이지요. 결국 그들이 이해하는 예수님은 어떨까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아닌, 자기 안에 만들어 놓은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인 것입니다.


사실 이천년 전에도 바리사이와 그 밖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거부하고 자신의 잣대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다보니 엉뚱한 트집을 잡으면서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 안에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란 우리가 처음처럼 살아가는 여름일 테죠. ‘두 번 다시’란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여름(김연수).


부자되세요.

몇 년 전, 사람들 사이에서의 새해 인사가 “부자되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곧바로 표정이 밝아졌지요. 그러나 정말로 부자 되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요? 물론 부자가 되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된 후에 어떻게 나누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부와 나누지 않는 부는 내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족쇄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난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요. 또한 죽을 때 역시 아무 것도 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앤드류 카네기는 말했습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잘 쓰고 떠나야 한다.”

주님의 삶은 철저한 나눔의 삶이었는데,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주님과 달리 철저히 소유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새벽 반성하여 봅니다.





몇 년 전 스위스 인터라켄에 위치하고 있는 융프라우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만년설이 있는 곳이지요. 워낙 많은 여행객들의 칭송이 자자한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안고 융프라우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유럽에서 가장 높은 역(3,454m)인 융프라우 역까지 기차로 이동하더군요.


드디어 융프라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귀가 멍해집니다. 그리고 무척 어지럽더군요. 빈혈이 있는 사람만 조금 힘들다고 했는데, 건강을 자랑하는 저 조차 약간의 어지러움으로 순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기차가 왜 그렇게 느리게 가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3,000m가 넘는 지역이기에 고산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체내의 산소를 저장하는 곳을 만들기 위해 혈압 내의 적혈구 수를 늘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번에 늘어날 수 없기 때문에 몸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지요.


고산증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일을 못한다고 꾸짖는 상사는 없습니다.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공부를 하는데 모른다고 혼부터 내는 선생님도 없습니다. 배움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이 하느님 나라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모르냐고 혼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게 가르쳐주십니다. 그것도 어려운 말을 쓰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항상 비유를 통해 쉽게 말씀해주십니다. 즉,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구원의 길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쉬운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큰 사랑을 가지고 쉽게 다가오시는 주님이신데, 문제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산증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듯이 또한 일이나 공부를 할 때에도 적응의 시간의 필요하듯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도 적응의 시간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내 자신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적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죽으면 그냥 적응이 될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알아서 우리들의 머릿속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주실까요?


적응하는 것은 다른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몫인 것입니다.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속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하느님 나라까지만 데리고 가시지 그 나라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동분서주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우리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도전하지 않는 것은 일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일이 힘든 것은 우리가 감히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세네카).


재능이 오히려 더 큰 결함이 될 수도 있다.

지난주에는 참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비가 멈춘 것입니다. 하도 외출을 하지 않다보니 몸이 찌뿌듯해서 너무 힘들었기에, 산책 겸 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혹시 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우산을 챙기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잠시 뒤,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급히 이동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산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비를 피하기 위해 빨리 이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였기 때문에 우산이 필요 없더군요. 우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산이 없어서 아예 비 피할 곳을 찾아서 얼른 들어가신 분들은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자신의 결함 때문에 넘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어 의심치 않던 재능에 의지하다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아닐까요? 우산이 비로부터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이 구절이 떠올려집니다.

‘결함은 수시로 우리를 일깨워주지만, 재능은 우리를 방심하게 만든다.’


재능이 많다고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결함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에 희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러니까 보좌신부 때 운전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서 얼마나 운전을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직접 운전을 해서 어디를 놀러가는 것이 저의 꿈이었거든요. 하지만 보좌신부라 차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때는 보좌신부가 운전을 하기에는 눈치가 많이 보일 때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운전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제 동창 신부 중 한 명이 주임신부님의 배려로 차를 가지고 있었고, 이 신부의 휴가 기간 동안 제가 차를 빌리기로 했던 것이지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빌린 첫 날, 설레임과 두려움을 갖고 저는 시동을 걸어 차를 운전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조금 운전을 해보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조금 멀리 나가보려고 우선 동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운 뒤 출발했습니다. 물론 차 뒤에는 이런 글씨를 붙여 놓았지요.


“왕초보”


어느 정도 가고 있는데 차 안에서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납니다. 분명 정비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리고 기름도 가득 채웠는데……. 처음 운전하는 저로써는 이 냄새의 원인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차는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데 반해 무엇인가 타는 냄새는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이었던 저는 두려움에 결국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야 그 냄새의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핸드 브레이크’가 내내 채워져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저는 핸드 브레이크가 채워져 있으면 차가 안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도 차는 움직이더군요.


많은 성인 성녀들은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마치 핸드 브레이크를 채우듯이, 내 마음을 채우면 주님 앞에 나아가기 힘든 것입니다. 물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혹시 내 마음이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미움, 다툼, 질투, 욕심, 분노,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자물쇠로 마음을 채우면 그만큼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는 힘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지요.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으로써 배려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 가득한 배려를 기억하면서 이제는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만 참 행복이 있기에…….


생각하는 여유를 가져라. 그것이 힘의 원천이다. 노는 시간을 가져라. 그것이 영원한 젊음의 비결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이다. 남에게 주는 시간을 만들어라. 자기 중심적이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다(아일랜드격언).


수고하지 않고 얻는 기쁨이란 없습니다(‘좋은 글’ 중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두기 위한 것으로만

열매가 맺지는 않습니다.


길쌈과 각종 수고가 있을 때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평안의 가치는

전쟁의 비참함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죽음이 우리 곁에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장마는 햇볕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가뭄의 목마름은

단비의 소중함을 잊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미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불청객들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달콤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장과 성실한 일상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고단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도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압니다.


기쁨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우리 자신의 수고는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오늘 발걸음이 가벼울 것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하느님 나라의 출세

나승구 신부님

출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 흔히들 성공신화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갖고 있었으며, 어떤 곤경에 처했었고,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것을 누리고 있는가를 소개합니다. 사람의 이야기가 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 그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두가 신이 되고자 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그 자리를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이 신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당신의 이야기로 만들면서 말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신의 자리, 그것이 안 되면 그 옆자리라도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의 옆자리를 취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시는 일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라며 자신의 일, 곧 신이 사람이 되는 일에 더욱 집중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더욱 낮아지는 길이라고, 종이 되는 길이라고 분명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출세를 원하는 우리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보는 눈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사제, 수도자의 발령을 영전과 좌천의 눈으로 보는 눈부터 바꿔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팎의 자리에 대한 명예로움과 수치스러움의 눈부터 바꿔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낮은 자들에 의한, 낮은 자들을 위한, 낮은 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신 예수님의 눈으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화원에 진열되어 있는 예쁜 꽃을 보게 되었지요. 그는 돈을 치르고는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너무나도 예쁘고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꽃이었기에 매일 매일 물을 주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서 가꾸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꽃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화분 안의 꽃은 완전히 사라져 죽고 말았지요. 이 사람은 화가 나서 화원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꽃을 팔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온갖 정성을 기울였지만, 점점 시들더니만 이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화원 주인은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이 꽃나무는 물을 일주일에 한 번씩 조금씩만 주면 아무런 문제없이 잘 자라거든요.”라고 말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사람은 알았지요. 이 꽃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도 아주 조금의 물만 줘야 하는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자신은 정성을 기울인다고 매일 매일 물을 듬뿍듬뿍 주어서 꽃나무의 뿌리가 썩고 만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사랑의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을 알아야 그리고 이웃을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알 수 있도록 쉽게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쉽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쉽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쉽게 다가오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알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무성의함에 주님과 나의 관계가 더욱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저는 당신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사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지금 나와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해보세요. 그 친구와 친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친구와 대화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친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친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한 바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 혹시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하세요. 지금은 주님을 알기 위해 기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분명한 것과 희미한 것(‘좋은 글’ 중에서)

분명히 아는 것과 희미하게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아는 것은 내 것이지만,

희미하게 아는 것은 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랑하는 것과 희미하게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분명히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희미하게 사랑하는 것은 추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믿는 것과 희미하게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믿으면 신뢰받지만,

희미하게 믿으면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떠나는 것과 희미하게 떠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떠나면 새로운 것을 얻게 되지만,

희미하게 떠나면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바라는 것과 희미하게 바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만,

희미하게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는 것과 희미하게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하는 말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희미하게 하는 말은 나를 뒤로 물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좋은 생각과 희미한 좋은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한 좋은 생각은 나를 자유롭게 하지만,

희미한 좋은 생각은 나를 얽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군대에 갔다가 휴가 나온 신학생이 귀대를 한다고 제게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저는 차비라도 주겠다면서 지갑을 꺼냈지요.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글쎄 지갑 안에는 천 원짜리 한 장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사무장님도 출근을 하지 않았지요. 따라서 누구에게도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신학생에게 성당 앞 은행의 현금 인출기에서 뽑아서 주겠다면서 함께 그곳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현금 인출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침 8시 30분부터 밤 10시까지만 인출이 된답니다. 따라서 그때 시간이 8시쯤 되었으니, 현금을 인출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까를 생각했습니다.


‘현금 인출할 수 있는 8시 30분까지 여기에 함께 앉아서 기다릴까?’


그러나 이 방법도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금 궁상맞아 보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신학생에게 다른 은행에 가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10분쯤 걸어서 다른 은행에 도착했을 때, 저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아침 8시부터 현금인출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뻤고 이 은행에 감사했습니다. 사실 감사할 이유가 없지요. 왜냐하면 제가 저금한 돈을 찾는 것뿐이니까요. 그러나 이 절박한 순간에 그리고 망신당할 순간에 구해 준 이 은행이 어떻게 안 고맙겠습니까?


문득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내가 저축한 돈을 찾아가는 데에도 이렇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데,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함의 표시를 하고 있었을까요? 감사함보다는 오히려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던 적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요?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편에 서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조금 더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감사의 인사보다는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으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 각자를 특별하게 사랑하시기에 비유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쉽게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오늘은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면 어떨까요? 그때 우리들 역시 하늘나라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생각하라 그리고 행동하라('행복한 동행'중에서)

어느 날, 한 사람이 영국의 시인자 저명한 사상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를 찾아와 물었다.

"위대한 사상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많이 생각하십시오."

그는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듯 집으로 돌아와 하루종일 움직이지도 않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만 했다. 한 달 뒤, 그의 부인이 울상을 지으며 블레이크를 찾아왔다.

"제 남편이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온 뒤부터 식사도 거르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오로지 명상만 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제 남편 좀 말려 주세요."

블레이크가 그 집을 방문해 보니 부인의 말처럼 남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블레이크를 보고 그는 가까스로 일어나 말했다.

"선생님, 그동안 저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가 되려면 얼마나 더 생각해야 하나요?"

"매일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는 않았군요.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했습니까?"

"머리에 더 이상 담아둘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제가 깜빡 잊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군요. 행동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은 쓰레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사다리와 같죠.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기만 하는 사람은 영원히 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

허영업 신부님

한동안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누가 부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무 잔인하고 무섭게 들립니다. 그리고 쉽게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한편 깊이 생각해보면 인생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법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람들은 보통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인생을 해치는 헛된 욕심, 쓸데없는 욕심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욕심은 더 부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은 욕심은 더 부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느님의 은총을 보다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은총을 더 받아 넉넉해지고 부유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에서 재물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 이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여상훈(도서출판 시유시)

예언자와 의인이 보려 했으나 보지 못하고 듣고 싶어했으나 듣지 못한 것을 제자들은 보고 들을 수 있었다니,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예언자와 의인의 경지를 넘어 진리의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성경대로라면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나서서 제자단 대표라도 했음직한 베드로 사도가 어부였으니 말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돕는 관료도 아니었고, 그들과 권력을 나누던 학식 높은 종교 지도자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던 누군가는 날 따르려거든 네가 가진 것 다 팔고 오라는 예수님 말씀에 질려 도망가고 말았으니, 돈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속의 눈에는 어쩌면 오합지졸로 보였을지 모를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찬사는 한없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분이 세우시는 기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다니던 성당에 이발소 집 아들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아버님은 한 달에 한 번쯤 저를 부르셔서 머리를 깎아주셨습니다. 금성 라디오에서 늘 가요가 흘러나오는 그 변두리 이발소는 동네 명물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열댓 명씩 공짜 손님으로 붐비는 곳이었거든요. 돈을 내는 사람이건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건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얼굴로 이발을 해주시는 그분한테는 늘 향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전쟁 통에 초등학교 3학년으로 중퇴한 그분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허락하신 사람들에 속하는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예언자와 의인의 마음가짐과 얼굴 표정이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딱 제 모습입니다. 논쟁에 지는 걸 참지 못하고, 독한 말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의기양양해하며, 나누는 데는 인색하고, 남을 돕는 일에는 몸이 따라가 주지 않습니다. 오만이 눈을 가리고 위선이 귀를 막았으니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늘 오락가락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예언자, 의인들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옵니다.

친구네 이발소에는 당연히 물레방아와 호수와 작은 집이 그려진 ‘이발소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이 제게는 이상향이었습니다. 그 위에 친구 어머님이 직접 수를 놓아 만드신 ‘저를 받아주십시오.’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겸손한 기도가 바로 그분에게 진리를 들을 귀를 주었으리란 걸 알기엔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렸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의 몸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일손을 놓고 잠깐 휴식을 취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다들 온몸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한 형제 달려가더니 큰 물병에 얼음까지 동동 띄운 시원한 물을 떠 왔습니다. 얼마나 시원하고 달콤하던지 더위와 피로가 한 순간에 가시는 느낌이었습니다.

한잔씩 돌리고 난 그 형제는 엄청 부지런했습니다. 남은 물병을 들고 부리나케 어디론가 다녀왔습니다.

형제들이 한 목소리로 “어디를 그렇게 다녀 오냐?”고 물었더니, “삼식이와 신디도 엄청 목마를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삼식이’와 ‘신디’는 저희 집 식구 가운데 제일 막내인 1살, 3살짜리 잡종견들입니다.

저는 전혀 못 챙기고 있는 것을 챙기는 형제의 마음이 참으로 갸륵했습니다. 저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형제의 눈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백성들의 눈, 들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의 귀, 굳을 대로 굳은 완고한 마음 앞에 크게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디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는지 파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사건사고나 일상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 고통 받고 있는지, 누가 눈물 흘리고 있는지, 누가 목말라 하고 있는지, 누가 죽어가고 있는지, 누가 지금 이 순간 내게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이신지 발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창설하신 ‘사랑의 선교회’에 갓 입회한 한 새내기 수녀님께서 세 시간 정도 ‘임종자의 집’으로 일하러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새내기 수녀님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 방으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저는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의 몸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새내기 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임종자의 집에서 어떤 일을 했나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다, 사람들은 벌레가 들끓는 한 남자를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남자를 하수구에서 꺼내 올렸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세 시간이나 어루만졌습니다. 나는 그가 예수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볼 줄 아는 눈’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요. 잘 보게 될 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눈이 제대로 뜨이게 될 때, 세상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선물이요, 이 세상 둘도 없는 보물입니다.




신비와 비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옛날 저에게 선생님은 신비하였습니다.

화장실도 안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여 선생님이 화장실서 나오시는 것을 보고 신비감이 깨지며 너무 실망하였습니다.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존경심도 반으로 동강났습니다.

이처럼 신비란 우리의 모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아는 순간, 그래서 비밀이 없어지는 순간 신비는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신비를 이어가려면 모르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도 신비입니다.

누군가 하느님 나라, 천국에 대해서 물으면 난감합니다.

죽어본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데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하느님 나라를 보고와도 다 알았다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다 알았다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의 앎 안에 다 들어오는 하느님, 그래서 우리 손바닥 안의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비밀로 감추셔서 신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앎을 넘어서는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사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다 안다고 해도 우리 인간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 

그것은 신비에 대한 인간식의 이해 방법입니다.

이렇게 밖에는 이해할 수 없던지, 가장 잘 하느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이해 방식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겠답니다.





제가 대학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에요. 

“이제 너도 대학원생이 되었으니, 이번 돌아오는 주일에 신자들 앞에서 강론을 해보렴.”

“강론이라뇨. 저는 이제 대학원 1학년일 뿐인데요?”

“그러니까 해보라니까. 아마 좋은 경험이 될 거다.”

한 주일 내내 걱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동안 성당을 계속 다니면서 그렇게 많은 강론을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론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도대체 모르겠더군요. 머릿속에서는 아무 것도 떠올려지지 않고, 시간만 계속 흘러갈 뿐이었지요. 이제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었던 저는 급한 마음에 성서를 설명하는 주석서만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좋은 내용이라는 것들만을 정리했지요. 

드디어 첫 번째 강론을 하는 날, 너무나 긴장을 해서 어떻게 강론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이렇게 시작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뻔한 구조, 그리고 신자들의 관심을 딱 끊어버리기 좋은 구조로 말을 하고 있었지요. 아무튼 첫 번째 강론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스타일이 바로 저의 강론 스타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부가 되어서도 이 모습은 변하지 않았지요. 복음 해설 중심의 강론. 그리고 딱딱한 강론, 원고에서 절대로 눈을 떼지 않는 모습. 그런데 저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전에 새벽 묵상 글에서 한번 썼던 것 같은데요. 


글쎄, 제가 강론을 마치고 “잠시 묵상하겠습니다.”하고 뒤를 도는 순간, 어떤 형제님께서 갑자기 손을 드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십시오.”


그때서야 제 강론의 문제점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렵고 딱딱한 강론, 그래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강론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천 년 전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제가 주석서를 보면서 강론을 했던 것처럼, 율법 해설서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딱딱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알아듣기 쉬운 비유말씀을 통해서 접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욱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려고 쉬운 비유 말씀을 하셨던 것이었지요.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또 어렵지도 않습니다. 일상의 비유를 통해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이야기를 해야 자신이 더욱 더 똑똑하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더욱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모르지요. 자신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저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이 배웠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어렵게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깊은 묵상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저의 교만이고,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 신비는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닌데……. 

지금도 종종 이런 착각과 교만 속에 빠져들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의 첫째 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주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낮은 자세의 겸손한 모습. 그 모습만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어렵게 말하지 맙시다.


시련에 감사하는 마음(박성철, '누구나 한번쯤은 잊지 못할 사랑을 한다' 중에서)

두 사람에게 똑같은 씨앗이 한 톨씩 주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정원에서 가장 토양이 좋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다른 한 사람은 거친 토양의 산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자신의 정원에 씨앗을 심은 사람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면 나무가 흔들리지 않게 담장에 묶어두고, 비가 많이 오면 그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위에 천막을 쳐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산에 그 씨앗을 심은 사람은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도 나무가 그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번씩 산에 올라갈 때면 그 나무를 쓰다듬어주며 『잘 자라다오. 나무야』라고 속삭여 자신이 그 나무를 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 일깨워 주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정원에 있는 나무는 꽃을 피우기는 했지만 지극히 작고 병약했고, 산에서 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들 중에서 가장 크고 푸른 빛을 띤 튼튼한 나무로 자라나 있었습니다.

시련과 혼란, 아픔과 갈등 없이 좋은 성과를 바라지 마십시오.

산에서 자란 나무는 비바람과 폭풍우라는 시련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한 대가로 그렇게 웅장한 모습으로 산을 빛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과 실패 없이 거둔 성공은 손 안에 쥔 모래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에 감사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그대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행복의 씨앗입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원순 신부님

예수께서 군중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무디어져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이었다. 

무딘 마음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은 어디서 올까?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교만함이다. 나는 신자들의 초대로 강의를 하러 가기도 하지만 가끔은 내가 관심있는 주제에 대하여 강의를 들으러 간다. 그때마다 강의 내용이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때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인데 나중에 책을 사서 다시 한번 읽지’ 하면서 그리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강의에 참석은 했지만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중에 책을 구입해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의를 들어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결국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교만함은 배우는 데 ‘암’과 같은 존재다. 무딘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자신을 잘 아는 것이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미사에 참례하면서 미사 시간에 집중하기보다는 주보를 보거나 휴대전화를 여닫거나 옆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자. 무뎌진 마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이영창 신부님

저는 성서를 보면서 가끔씩 궁금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같이 마이크도 없는 시대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성서에 사람들이 모이면 수많은 군중, 혹은 5천명 이상이 모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많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다고 해도 5천명이 다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은 중간 중간 사람들의 입을 빌려서 뒷사람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잡하고 어려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금방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쉬운 토막말이나 그 당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예수님의 가르침 방식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처럼 비유란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소재를 통하여 어떤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를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며, 말하는 이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숙고하고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익혀 들어왔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홀히 지나칠 수 있고, 짤막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딴전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말마디에 충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들려주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깊은 의미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단지 짤막한 이야기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말입니다.

왜 그들은 보고 듣고 체험했으면서도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기쁜 소식을 전해도 그들의 마음의 문이 닫혀있었기에 그 참뜻을 알 수가 없었지요.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보고 듣고 체험하지 않았기에 그 깊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았느냐 닫지 않았느냐, 서로 간에 깊이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진정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야만, 어려운 나의 모습, 부끄러운 나의 모습, 심지어 나무라는 말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는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가지 않고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과는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고운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믿어주느냐 믿어주는 않는냐의 차이는 큰 결과를 낳습니다. 사실 처음 제가 시장 사목에 발령받고 왔을 때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시장 상인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욕만 앞섰다고 해야 할까요?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시장 상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집 한 집 상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아는 신자분도 있었고, 새로운 신자분도 있었고, 냉담하시는 신자분도 많았습니다. 반겨주는 신자분도 있었고, 냉냉한 신자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불신의 눈으로, 무엇인가 요구하러 온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전박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답답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얼굴을 익히고 신뢰를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1번,2번,3번,4번,5번... 10번,20번30번 40번,50번... 그 분들을 계속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문전박대 하던 상인들이 차츰 차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찾아오는 사제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신은 볼 것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을 것도 듣지 못하게 막습니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는 숨어 있는 것도 그대로 보게 하고, 어려운 내용도 들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신뢰와 믿음을 먼저 선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서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안 들리던 것들도 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에 초대된 우리 

이기양 신부님

제 1독서 : 예레 2,1-3.7-8.12-13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복 음 : 마태 13,10-17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행색이 수수한 어느 노부부가 미국의 하버드 대학 총장 찰스 엘리엇을 찾아갔습니다. 

"전장에서 죽은 아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 학교에 기부금을 내고 싶습니다.“ 

노부부는 이렇게 찾아온 뜻을 전했지요. 그런데 부유함이나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노부부의 수수한 행색을 본 총장은 '내봐야 얼마나 내겠는가‘생각하고 일부러 바쁜 척을 하는가 하면 빨리 갔으면 하는 기색을 드러냈습니다. 총장의 무례함을 본 이 노부부는 이런 대학에는 재산을 기부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노부부는 철도사업으로 아주 큰돈을 번 부자로 남편은 캘리포니아주에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릴랜드 스탠포드였습니다. 이들은 아들에 대한 추억을 가슴에 품고 캘리포니아 남부로 가서 그곳에 전 재산을 투자해서 대학을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바로 서부의 하버드로 널리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볼 줄 아는 눈이 중요하지요. 볼 줄 아는 눈이 없으면 말 그대로 굴러 들어오는 복도 걷어차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13,13)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제자들에게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고 말씀하십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원인을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라고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전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13,14-15) 


사람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잘 보고 더 잘 듣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내가 그것에 관심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길을 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내가 만나기로 한 그 한 사람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하느님께 관심이 있으면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요. 그러나 세상과 재물이나 건강에만 관심이 있으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고 있는데도 왜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신자들이 있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관심이 하느님께 있지 않고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점점 하느님께 나아가지요. 그러나 세상에 관심이 있고 나의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점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참으로 맞는 말씀이지요.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13,12)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람들의 관심이 결코 행복을 줄 수 없는 것들에 쏠려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돈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지요. 부모 자녀 간에도 사랑과 효보다는 돈이 우선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중심이 되면 그 관계는 반드시 의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지간이나 부부 간에도 우애나 사랑보다 돈이 중심이 되면 그 관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람들은 돈을 쫓지요. 그런데 그렇게 돈을 추구해서 행복해졌는가 하면 답은 부정적입니다. 우리의 삶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불행해지기만 하였고 일상의 조그마한 행복마저도 빼앗기게 되었지요. 부모 자녀 간에 사랑과 효가 있고 형제지간에 우애가 있는 행복한 가정은 근본적으로 돈보다도 가족 간의 사랑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얼마든지 서로 편하게 왕래할 수 있는 여건이 다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사람들이 외롭고 힘들게 사는 이유는 정작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데 있어서 그렇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는 현대인들은 풍요 속의 빈곤, 또 대중 속의 고독한 삶을 더욱 더 깊게 체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 사람 중심으로 바뀌어야 모든 것이 다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은 더 갖게 되어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의 어려움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볼 줄 알아야 하고 또 볼 줄 알면 실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답답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보여주려고 애쓰셨지만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놀라운 체험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상에서 외면당한 사람들, 과부, 고아, 병자들은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하여 많은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신앙 생활을 하는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다른데 중심을 두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요. 선택은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13,11-12)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영탁 신부님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의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이 시는 “장애를 통해 남이 깨닫지 못한 진리를 알게 됐고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니 하느님은 ‘공평하시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며 자신의 장애를 축복으로 받아들인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님의 ‘나’라는 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까닭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말씀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어 하시는 그 분의 마음을, 하늘나라로 가고픈 마음이 모두에게 생기기를 바라는 그 분의 마음을, 그 누구도 소외됨 없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그 분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공평한 사랑을 주십니다.


하지만 자꾸 남과 나를 비교하게 되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게 되는 것은, 공평함의 기준이 내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남이 나보다 외적인 소유가 더 많은 것을 나의 불행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공평하십니다. 모두에게 같은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사랑을 공평하다고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공평한 말씀을 듣고자 하신다면,

그분의 공평사랑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그분의 공평한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시다면,

우리의 무딘 마음과 닫힌 귀와 눈을 열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귀와 눈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향한 내 마음이 새롭게 열린다면,

그 세상을 향한 내 귀가 새롭게 뚫린다면,

그 세상을 향한 내 눈이 새롭게 보인다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 속에 녹아 있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공평한 사랑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볼 수 있게 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강영구 신부님

+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그대에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視角)이나 시야(視野)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보입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로 보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모두를 사랑스럽게 봅니다.

세상과 사물을 예수님처럼 보고 서로 사랑을 나누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따로 없습니다. 


탐욕을 가슴 가득 담고 사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입니다.

미움과 증오로 이글거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밉게 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채울 길 없는 욕망(慾望)의 늪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훔치고 빼앗고 사기치고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망과 원한을 쌓고 

다투고 싸우고 죽이며 지옥(地獄)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이 멀었고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당신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당신은 행복합니다. 

부디 당신의 열린 눈과 가슴을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으로 흐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一明)




유광수 신부님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 그런데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 열매를 맺었다. 왜 그럴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와 열매를 맺는 씨의 차이는 무엇일까?

씨는 같은 씨이다. 즉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다 같은 씨이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고 못 맺고 하는 것은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떨어진 장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아무리 좋은 씨이라도 즉 열매를 낼 수 있는 씨이라도 그 씨가 뿌려진 장소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이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그 씨란 무엇인가? 그 씨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요 길, 돌밭, 가시덤불 속, 좋은 땅이라고 표현된 장소는 바로 우리 마음 즉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는 이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가 길,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은 자세로 들었기 때문이고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사람은 좋은 땅처럼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을 때에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영적으로 성숙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지성, 활동이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늘 나라에 고나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뿌리가 없으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면 결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직 좋은 땅 즉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지름길이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결코 활동에, 아니면 막연한 신심에. 미사 참례나 겨우 왔다 갔다는 하는 신앙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에 대해 눈이 뜨인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의 소리가 들린다. 깨달아야 죽었던 내 영혼이 다시 부활한다. 깨달아야 병들었던 내 영혼이 치유 된다. 깨달음이 있어야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깨달아야 영적인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깨어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우리가 매일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수 있고 웃으면서 봉사할 수 있다.

깨달아야 이 세상의 것에 얽메이지 않고 어떤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 초조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초연할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고 가슴 벅찬 충만함이 밖으로 베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올바르게 도와 줄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입에서 하느님의 소리가 나오고 하느님의 글이 나오고 하느님의 말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무디어진 나의 마음이 깨어지고 새 살이 돋아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래야 사람들은 내 안에 맺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 깨달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장 취약점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깨달음이 없이 듣는다는 것이다.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식 없이 듣는다. 아니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봉사한다고 나서고, 기도한다고 앉아있고, 바쁘다고 여기 저기 다닌다.

내가 시골에서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때 한 형제가 아침 식사 때에 와서 "신부님, 밭이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였다. "무슨 밭이 없어져?"라고 물으니까 "봄에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 밭이 없어졌어요."라는 것이다. "그럼 그 밭이 어디갔느냐?" 라고 물으니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는 하나도 자라지 않고 풀만 무성하게 자랐어요."하는 것이다. 고구마를 심어 놓고 공부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돌아보지도 않았으니 고구마 싹이 나오기도 전에 풀이 자라서 고구마 밭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밭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씨가 지금 내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신비를 보고 듣는 눈과 귀

박상대 신부님

마태오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비유설교 집성문(13장)은 총 7개의 비유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3-9절), ② 가라지의 비유(24-30절), ③ 겨자씨의 비유(31-32절),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44절), ⑥ 진주의 비유(45-46절), ⑦ 그물의 비유(47-50절)이다. 비유말씀의 대상은 보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13장(정확히 13,1-53) 전체를 분석하여 보면 비유말씀 사이에 비유에 대한 설명과 주변말씀이 들어있다. 


이 부분은 모두 예수께서 군중이 아닌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으로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7절),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설명"(18-23절),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34-35절), "가라지 비유의 설명"(36-43절), 그리고 "비유의 결론"(52-53절)에 관한 내용들이다. 따라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이 서있는 자세로 배에 앉아 가르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오직 전반부 4개의 비유말씀(파종, 가라지, 겨자씨, 누룩비유)뿐이다. 


왜 4개의 비유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은 군중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주신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1-13절)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오복음사가의 편집의도와 함께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오복음공동체의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복음공동체는 왜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 다수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냐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분명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외면은 하느님의 계획과 예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때마다 이사야 예언서(6,9-10)를 인용하곤 하였던 것이다.(마르 4,12; 마태 13,14-15; 요한 12,39-40; 사도 28,26-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밝혀주심으로써 제자들은 점점 더 깊이 알아듣게 되고 대다수의 이스라엘은 점점 더 못 알아듣게 됨으로써 가지고 있는 지식까지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는 소명과 선택의 신비도 포함된다. 소명과 선택은 동시에 인간이 가진 신비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잘못과 고의로 이 선물을 거부한다면 하느님께로 되돌아 가 버린다.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마태오복음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하느님 존재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도구(道具, instrument)요, 상징(象徵, symbol)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직접 보는 눈과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우리도 일상(日常)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고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우연히 발견한 성서구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자들이 예수님을 추종함으로 인해서 얻게 된 특권은 두둑한 월급이나 상여금, 물 좋은 자리나 안정된 기반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얻게 된 가장 큰 특권은 지복직관(至福直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지니게 된 특권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던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침식을 같이 하며 동고동락한 사건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너무도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그 크신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식탁에 앉는 일, 구세주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일, 참으로 놀랍고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은 존재 그 자체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진정 꿈결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었기에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을 뵙는 일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사도시대도 아니고, 여간해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거나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매일의 살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찾는 일입니다. 특히 함께 이 세상을 동행하는 이웃들 안에 천(千)개의 얼굴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일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행적들이 성서란 보물상자 안에 고스란히 잘 보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성서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얼굴을 명료하게 찾아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교과서입니다. 성서야말로 예수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입니다.

매일 어찌 그리도 성서말씀은 달고도 단지요. 매번 어찌 그리도 성서말씀은 새롭고도 새로운지요.

성서를 펼 때마다 모든 페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힘을 내고 새 출발하라고 성서의 모든 페이지는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연히 발견한 성서 구절은 제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오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 펼치는 성서 구절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를 위한 선물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고린토 전서 6장 19-20절-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복된 눈과 귀

사람은 누구나 눈과 귀가 있습니다. 눈과 귀는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중요한 지체로서 시각과 청각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눈으로는 모든 사물을 보고 분별하며 귀로는 모든 소리를 듣고 판단합니다. 눈이 사물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귀가 소리를 잘 분별할 수 없다면 살아가는데 많은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눈이나 귀보다 더 중요한 기관이 없을 것입니다. 마태 6,22-23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시각 장애인들이 많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서 말씀하는 장애는 지체장애가 어니라 영적인 장애를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한 6,26절과 36절에서 "너희는 영적인 일들 곧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행위를 보고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으니 복이 있지만... 저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있었으나 이를 분별할 총명도 없고, 그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분간해서 들을 줄도 또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잘 볼 수 있는 눈과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눈과 귀를 소유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육의 눈과 귀로만 사는 사람들이 있고, 영의 눈과 귀를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눈과 귀에는 

첫째, 육신의 눈과 귀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신의 눈과 귀를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고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과 귀도 어두우면 눈먼 장님과 귀먹은 벙어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의 눈과 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눈과 귀를 밝게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지성적인 눈과 귀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귀는 밝지만 지성적인 눈과 귀가 어두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뉴턴은 과일 나무에서 과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에디슨은 하늘에서 번개 치는 것을 보고 전기를 발명했으며, 스티븐슨은 주전자의 끓는 물을 보고 증기기관을 냈습니다. 지성적인 눈이 밝으려면 지식을 많이 함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영적인 눈과 귀가 있습니다. 

에페 1,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영화로운 그 옥좌를 볼 수 있습니다. 영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영의 귀가 밝아야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영원을 바라 볼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2. 신자들의 눈은 어떤 눈이여야 하겠습니까? 

눈은 몸의 등불(마태 6,22)이라 했습니다. 마태 6,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첫째, 깨끗한 눈이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자의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비둘기의 눈에는 늘 눈물이 고여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한 눈물이 고여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로 조국을 사랑하는 눈물이 늘 고여 있었습니다. 이사 33,15절에 "악한 일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과 같이 악을 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창세 9,21-27절에 에서는 노아와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고 누웠을 때에 그의 둘째 아들 함이 그것을 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보도록 소문을 내고 흉을 보았으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남도 보지 못하도록 가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지만 허물을 보고서 흉보았던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감아 악을 보지 말아야 하고 악한 일을 생각지도 말아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마태 5,29절에서 예수님은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들의 눈은 깨끗한 눈으로 주님을 뵙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자들의 눈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라야 합니다. 

골로 3,1절에서는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고 했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항상 그늘이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이사 40,31절의 말씀과 같이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시편 121,1-2절에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믿음의 눈과 영적인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에 눈이 가리워진 사람은 물질만이 보이고,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돈으로 눈이 가리워져 있는 사람은 돈만 보일 뿐, 형제도, 부모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게끔 돈이 눈과 귀를 막게 됩니다. 여자에게 눈이 먼 사람은 여자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하느님은 공평하시다. 사람에게 눈을 주시든지 돈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눈을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이제는 우리의 눈에 우리의 귀에 영역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영안으로만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음성도 영적인 귀로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헬렌켈러는 육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육의 귀로 듣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영의 눈과 귀가 열려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승리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영안이 활짝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신자들의 눈은 자비를 베푸는 눈이라야 합니다. 

예리고로 가는 도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사제나 레위인은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구출해 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눈이었었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대가 점점 악해지고 포악해 질 때일수록 신자들의 마음은 자비를 여기는 마음의 눈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의 눈은 교만한 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미워서 흘기는 눈도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기와 질투의 눈도 아닙니다. 사랑의 눈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자들의 눈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2-10절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어떤 사람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가버렸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라고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스런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우리들의 따뜻한 손길의 눈을 기다리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때 우리 신자들의 눈이 자비를 베풀 여유와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여 줄 때 우리들의 정은 두 배로 커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앙드레 지드라는 분은 말하기를 "돈 가진 자들의 멸시의 눈초리는 견디기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불행한 눈초리는 나의 마음 속을 깊이 찌른다"고 했습니다. 


넷째, 영적인 추수의 밭을 바라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 4,35절에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자연계의 법칙에도 봄을 지나 가을에 와서 추수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도 추수가 있다는 것을 영의 눈을 떠서 바라 볼 줄 아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이 교만하고 거만한 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음란한 눈을 갖지 맙시다. 조롱하는 눈짓을 하지 맙시다. 분노의 눈을 갖지 맙시다. 질투의 눈꼬리를 갖지 맙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눈은 깨끗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눈을 가집시다.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십시다. 인심 좋은 눈을 가지십시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십시다. 영적인 일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십시다. 생명을 주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복된 눈을 가집시다. "눈은 영혼의 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사람들의 마음은 대개는 눈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마음도, 반면에 미움과 질투의 마음도, 먼저 눈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예레 5,21)이 있고, 보기는 보아도 겉만 보는 눈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눈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요, 겉만 보는 눈이란 하와가 선악과의 겉만 보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워 보여 속은 못보고 껍데기만 보는 눈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눈이 다 이러합니다. 사람을 보아도 겉만 보고 속은 못 보며, 만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지나쳐버립니다. 예수님이 갈바리아 산상에서 십자가를 질 때 좌편우편에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한편의 강도는 말하기를 네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소경도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며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면서 네 신세는 어찌해서 강도의 신세와 똑같으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에서 내려와 보라. 너도 살고 나도 살자하고 그 강도는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바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여덟가지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눈이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일까?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 중 열 사람은 부정적인 눈으로 판단하였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긍정적이고 확신있는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의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불신의 눈을 가졌던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긍정적인 복된 눈의 소유자는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서 속에 승리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겉만 보지 않고 사건과 사람과 역사의 속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으며 삼손은 데릴라가 자기 눈을 빼내어 갈 여인임을 보지 못했으며 아간은 물질이 자기와 가족을 멸망시키는 것인줄 볼 줄 모르는 눈을 가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속을 바라보며 사건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택한 자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의 소유자들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눈, 노아처럼 120년이나 참으며 멀리 바라보는 눈, 요셉처럼 꿈을 믿고 장래는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는 눈, 성서상의 위대한 인물들은 참으로 멀리 바라보는 복된 눈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눈은 가능성을 찾는 눈이며,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전능자 하느님을 찾는 눈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지금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들에 눈을 너무 굴리면서 혹사를 하여, 눈이 너무 피로합니다. 영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먼 헛된 욕심에 혈안이 되어 눈이 아파 올 땐 어찌해야 합니까? 그럴 때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해야합니다. 


웬만한 것쯤은 다 용서하고 다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소서 

너무 가까이만 보고 멀리는 못 보는 근시안도 아닌 

너무 멀리만 보고 가까이는 못 보는 원시안도 아닌 

사물의 중심을 바로 못 보는 난시안도 아닌 

밝고 맑은 시력을 주소서, 


주여!

편견과 독선의 색안경을 끼기보다 기도의 투명한 안경을 끼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기 전에 나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먼저 보게 하여 주소서 

결점투성이의 나를 보고 절망하기 전에 다시 한번 당신의 사랑을 바라보게 하소서 

다시 한번 당신께의 믿음으로 눈을 뜨게 하소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과 분별력을 주소서. 

살아서 눈을 뜨고 사는 고마움으로 언제나 당신 안에 보게 하소서 

오늘도 샅샅이 나를 살피시는 눈이 크신 주님....! 





어떤 선비가 좀 배웠다고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상스러운 말보다는 고상한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상스러운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늘 고상한 말만을 하는 자신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지요.


어느 날, 이 선비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던 중에 강을 건너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지고 만 것이에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 선비는 허우적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사람 살려”라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내가 이런 상스러운 말을 부끄럽게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죽더라도 이렇게 상스러운 말은 할 수 없지.’


그러면서는 그는 “사람 살려”라는 말보다는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인간 구제! 인간 구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서 이 선비를 구하러 왔을까요? 가까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 구제’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한 사람도 달려오지 않았답니다. 결국 이 교만한 선비는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선비가 그냥 쉽게 “사람 살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농부들이 즉각 와서 구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상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끝까지 교만하게 “인간 구제”라는 어려운 말을 고집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이 체면이라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는 듯한 말은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라면 자신을 낮추는 말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것, 그것 역시 커다란 용기가 아닐까 싶네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처럼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늘 어려운 말로써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지요. 이러한 차이 때문에 제자들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알아듣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려운 말로써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지요.


앞서 그 선비가 고상한 말만을 하다가 결국 망해버렸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다가는 이렇게 쫄딱 망할 수 있습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어 나갈 때, 우리들은 주님께 더 큰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합시다.


미워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최효섭, '사랑밭 편지' 중에서)

미국 역사에 특이한 인물이 있다. 로버트 리(Robert Lee)이다. 그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군의 사령관이었으나 북군과 남군이 모두 좋아했고 남부인과 북부인에게 모두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역사가인 로퍼(Roper)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장군의 편지, 일기, 연설, 성명서, 기타 작은 노트까지 면밀히 조사했는데 그는 북군이나 북부인을 향하여 적(enemy)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는 미워하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이 점이 미국인들이 오늘날까지 그를 존경하는 이유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흑과 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편에 서기를 요구합니다.

판단은 각자가 할 일이지만 마음의 미움이나 판단으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진리에 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미움이 사라질 때 판단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쉽지 않는 일이나 하루에 한번씩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충분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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