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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8월 11일 (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8.11|조회수901 목록 댓글 0

제1독서

<그 두루마리를 내 입에 넣어 주시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8─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9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10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3,1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2 그래서 내가 입을 벌리자 그분께서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3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12-14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greatest in the kingdom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꿀처럼 입에 단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이스라엘 집안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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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입에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넣어 주시며 이스라엘 집안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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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가 자신의 소명을 전한다. 주님께서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힌 두루마리를 앞에 내놓으시며 그것을 받아먹으라고 하신다. 그것은 꿀처럼 달았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우시고 이렇게 가르치신다.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곧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썼다고 알려진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의 모세 오경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 설교(5,1─7,29 참조)를 필두로, 선교에 관한 말씀(10,1-42 참조), 비유로 전하신 말씀(13,1-52 참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18,1-35 참조),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관한 말씀(24,1─25,46 참조)으로, 이렇게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대응하려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 말씀의 첫 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맨 먼저 다룹니다. 말씀의 첫 부분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에는 세상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도 큰 사람,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제자들의 본능적인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 자리를 탐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은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면 모든 회개의 종착점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갓난아기처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믿는 이들의 겸손한 마음과 태도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이 우리를 참된 신자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비결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온갖 유혹을  떨쳐 내시며 하느님을 신뢰하신 원동력입니다. 이른바 ‘어른들’과 ‘주인들’만 가득한 공동체는 미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며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기를 주님께 청합시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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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는 복음서 전체의 구성을 천을 짜듯 치밀하게 다듬으면서, 독자들에게 올바른 그리스도의 모습을 일관성 있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모아 다섯 개의 담화문으로 정리합니다. 복음적 담화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 설교(5―7장), 제자들에 대한 파견 설교(10장), 하늘 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를 모아 놓은 설교(13장), 예수님께서 교회에 관하여 하신 말씀만 모아 놓은 교회 설교(18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담화문인 심판 설교(23―25장)입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설교 가운데 두 부분을 전해 줍니다. 곧 ‘겸손하여라.’로 시작하여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로 이어진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부르시어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잘난 신자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도 이르십니다.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되찾은 양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아무리 못난 신자라도 구원을 받도록 공동체 모두가 돌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1210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감동한 클라라 성녀는 2년 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속의 수도복’을 받아 입고 순명을 서약한 뒤, 복음적 가난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은 절대적 가난 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난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삶으로 밝혀 준 성녀야말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잘난 체하는 마음으로 작은 이들을 쉽게 업신여기는 우리에게 겸손의 참본보기가 됩니다. 클라라 성녀는 말합니다. “그대는 다른 이들이 바라보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 가고 있는가?” 답은 오늘 복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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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과 길 잃은 양의 비유는 겉보기에 연관성이 없어 보이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 곧 하느님 공동체에서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 라삐 학파들 안에서 자주 발생한 논쟁을 반영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혹스러웠고 그들을 실망에 빠뜨렸습니다. 

그분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따르면,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하늘 나라 공동체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자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린이처럼 되는 것과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어린이 같은 언행을 격려하시려고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이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어른 공동체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겸손한 존재입니다. 어린이는 가난한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다른 이들에게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있는 인간의 처지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늘 나라를 그저 받아들이는 태도와 단순함 그리고 겸손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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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은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며, 수난에 대처할 각오를 다지며 한 발 한 발 힘들게 걸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공동체 내의 서열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더 인정을 받느냐?’ ‘누가 실세냐?’ 이런 다툼입니다. 이토록 세상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당신이 떠나신 뒤를 염려하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확립하셔야만 했습니다. 사랑과 봉사가 밑바탕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바라면서 오늘 복음 첫머리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의 특징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때가 묻지 않았기에 주님 말씀을 그대로 들을 수 있지요. 또한, 약한 존재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 뜻을 진솔하게 따르는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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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퐁당.’”

일본의 대표적인 하이쿠(짧은 형식의 시) 시인 마쓰오 바쇼의 시 두 편입니다. 이 둘은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시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널리 사랑받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의 시는 어려운 사상이나 복잡한 심상 없이 찰나의 장면을 간결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는 그의 시는 감흥이 일게 하면서도 무척 편안하고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언젠가 친한 벗이 우리의 성경 묵상도 바쇼의 짧은 시처럼 담백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여름을 보내며 더위에 지쳐 때로는 묵상하는 것도 버거운 이 시기에는 그의 청량한 시가 더욱 반갑습니다. 그의 시는 쉽고 단순하지만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가 하찮은 매미와 개구리일지라도 자연의 실재에 온전히 집중한 가운데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편견을 비운 담담한 눈길로 자신에게 ‘다가온’ 대상에 화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말도 남겼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담담함이 오히려 깊은 통찰을 준다는 사실을 그의 짧은 시와 표현에서 실감할 수 있습니다.

여름의 더위와 습기는 우리가 묵상을 위한 또 다른 자세를 익히는 좋은 계기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철은 내 의지력과 지력으로 안달하거나 억지로 끄집어내는 묵상을 잠시 내려 두는 시기입니다. 그 대신에 주님의 말씀이 보여 주는 세계를 담담하게 바라본다면 짧지만 담백한 언어가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올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음미하는 짧은 경탄도 훌륭한 묵상입니다. 이제 저도 여름날 한낮에 성당에 가만히 앉아 매미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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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림으로 많이 표현됩니다. 그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 참으로 감동적이고 낭만적입니다.

신학생 때 목장 근처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장에는 양들이 많았는데, 막상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먼지투성이에다가 배설물이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몸무게도 대부분 100㎏ 전후라고 합니다. 그러니 길 잃은 양을 발견하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그림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다지 낭만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양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라면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길 잃은 양을 찾고는 화를 낼 것입니다. 자신이 무척 고생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다릅니다. 자신의 고생보다도 양을 찾은 기쁨을 더 크게 생각합니다.

우 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이 목자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힘겨운 삶으로 말미암아 양들처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온갖 죄로 얼룩져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를 찾아오시고, 또 바른길로 이끄시고자 온갖 수고를 감수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을 깨닫고 그분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기꺼이 따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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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어린이의 마음을 지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말씀까지 하십니다. 다 큰 어른이 어떻게 철부지 어린이로 되돌아갈 수 있을는지요?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4)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가 무안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린이의 마음이 되려면 어린이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순진하고 거짓 없고 착하다는 것만 연상합니다.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이라고 모두 순진한 것은 아닙니다. 영악한 아이들도 많습니다. 어린이일수록 질투심이 적나라하고, 쉽게 토라지고 쉽게 다툽니다. 이러한 특성을 닮으라는 말씀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의 가장 큰 특성은 ‘어머니가 없으면 불안해한다.’는 점입니다. 갓난아기일수록 어머니 없는 세상은 불안 그 자체입니다. 어른인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익혀야 할 어린이의 마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은 어머니 없는 어린이의 세상과 같다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생활화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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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다 자란 어른이 어떻게 어린이가 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른이 어린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말씀처럼, 어린이처럼 될 수는 있습니다. 어린이의 특성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당부는, 어린이처럼 우리도 하느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어린이가 편안하듯이 그러한 느낌과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살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너무 바쁘고 복잡합니다. 잘 사는 것과 바쁘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바쁜 사람이 반드시 잘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단순한 삶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절제하는 훈련을 꾸준히 반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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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늘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어울리는 행동은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용서의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닮으려면 자꾸만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는지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으로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숫자가 없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숫자에 매여 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일생 닦아야 할 용서의 덕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일지 모릅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순간에 생긴 미움이 아닙니다. 쌓이고 쌓인 미움입니다. 한순간에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욕심일 뿐이지요. 그러니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끝없는 용서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를 떠올려 봅니다. 땅따먹기, 천당 집기, 말까기(비석 치기), 얼음 땡, 오징어, 오징어(찜뽕), 축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숨바꼭질……. 정말로 많은 놀이를 했습니다. 한 친구가 “우리 이 놀이 할까?”라고 말하면, “그래, 재미있겠다.”라면서 그 놀이에 집중해서 놀았습니다. 그 누구도 “그거 재미없어.”라면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놀이에 상관없이 함께 노는 것 자체가 중요했었습니다.

성인이 되면서 이런 모습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뭐 할까?”라고 누가 말하면, “아무거나”라고 대답하지요. 그래서 한 명이 어떤 것을 하자고 제안하면, 재미없다며 또 관심이 없다면서 하지 않을 이유를 말합니다.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 교수인 존 크럼볼츠는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된 행동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호기심, 지속성, 낙관성, 유연성, 모험심을 갖고 “재미있겠는데?” 하는 자세로 모든 일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호기심을 성인이 되어서도 간직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린이를 상징하는 순수함과 호기심 등을 잃어버렸다면 얼른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정적인 마음은 벗어 던져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삶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순수한 어린이들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 없는 어린이처럼 되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부정적인 마음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주님 앞에서 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주님보다 더 큰 어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얼마나 많은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습니까? 때로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없다면서 주님께 협박과 공갈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순수함과 호기심을 잃어버리면서 주님 곁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는 이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양들을 위해서 길 잃은 양을 포기할 만도 한데, 힘들어하는 길 잃은 양의 아픔을 보시고 오늘도 길 잃은 양을 직접 찾아 나서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호기심을 다시금 키워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모여 아무것이 된다(윤정은).


여유 없이 살면 안 됩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업 실패로 힘들어하는 친구입니다. 술 마시다가 문득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하더군요. 힘들 때 기억나는 친구라는 사실에 감사했지만, 제가 먼저 나서서 위로해주지 못했음에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하고, 같이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눠야 했는데, 늘 내게 먼저 연락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한참을 통화하다가, “조만간 연락할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괜찮아. 너는 늘 바쁘잖아.”

남들이 보기에도 여유 없이 살았나 봅니다. 여유를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여유가 없으면 내 주변의 아픔을 감싸줄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랑할 수도 없으니까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일제강점기가 씻을 수 없는 수모요 아픔의 역사였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바빌로니아로부터의 침략과 멸망, 그리고 유배는 엄청난 수치요 슬픔의 역사였습니다.

휘황찬란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잘 나가던 다윗 왕조는 하루 아침에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볼모로, 포로로, 노예로 물설고 낳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1,500Km가 넘는 먼 타국 땅으로 끌려가서 유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바빌로니아 유배는 50년간 이어집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파괴와 멸망, 그리고 유배라는 혹독한 고초를 겪던 순간 유배지에서 소명을 받고 활동했던 사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597년 1차 바빌론 유배 때 포로로 끌려갔으며, 유배지에 정착한지 5년이 지난 기원전 593년 바빌로니아 크바르 강가에서 예언자로 불림받습니다.


에제키엘은 환시 중에 천상 어좌에 좌정하신 주님의 눈부신 영광을 목격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보이셨는데, 거기에는 주님의 비탄과 탄식과 한숨으로 가득한 말씀이 가득 적혀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에제키엘의 입에 넣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에제키엘 3장 1~3절)


주님 말씀 따라 두루마리를 낼름 받아먹고 난 에제키엘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이스라엘은 집단적 타락과 우상숭배와 거듭된 배신과 불충실의 결과 철저하게도 패망 당했으며, 유배까지 떠나는 등, 범국가적으로 역사상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그런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동족들에게 회개와 새생활을 외쳐야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에제키엘의 삶은 참으로 혹독하고 기구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자마자 언어장애인이 되어 가택연금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언어 장애는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6~7년간 지속됩니다.

예언자로서 선포하지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하니 이보다 더 큰 고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침묵 속에 다양한 상징 행위들을 통해 예언을 이어갔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주님께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을 에제키엘에게 건네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 마라.”(에제키엘 24장 16~17절)


이틑날 아침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 발생합니다, 에제키엘이 주님께서 건네주신 예언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날 저녁에 에제키엘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참으로 끔찍했던 에제키엘이었습니다. 때로 아무리 외쳐도 귀를 막아버리는 동족들이었습니다. 마치도 밑빠진 독의 물붓기 같았던 예언자로의 삶이었습니다.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던 에제키엘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때 마다 에제키엘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첫 순간의 달콤한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주님께서 입에 넣어주셨던 꿀처럼 달콤했던 두루마리의 맛을 떠올렸습니다. 늘어진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또 다시 기약없는 예언자로서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참혹한 상황 앞에서도 에제키엘이 건네는 메시지의 결론은 언제나 희망적이고 낙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거듭 외쳤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서기만 한다면, 새로움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새 하늘, 새 땅, 새 마음, 새 기운, 새 생명, 새 계약, 새로운 미래를 선물로 주실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의 처절한 고통과 쓰라린 절망 가운데서도 에제키엘은 새로움을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움은 물질적 의미의 새로움을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의 새로움입니다. 그 새로움은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 새로운 기운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존재로서의 새로움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완고하고 무딘 돌 심장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 심장이 뛰며 움직일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피가 순환되는 따뜻한 마음, 연민과 자비로 가득한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어른이 미각을 끊으면 어린이처럼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자신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은, ‘겸손’하여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낮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교만해지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좋아하지만, 겸손하면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응웬 차우 로안’은 ‘골형성부전증’이란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베트남 여성입니다. 이 병은 특별한 원인 없이도 뼈가 쉽게 부러지는 선천성 유전 질환입니다. 뼈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키가 매우 작고 허리가 굽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조롱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응웬 반 부옹’이란 청년이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겉모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보다 착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옹은 로안과 결혼을 하고 함께 평생을 기약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로안은 부옹에게 평생 짐이 될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4월 4일, 로안은 지인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대받아 휠체어를 이끌고 결혼식장으로 향했습니다. 결혼식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습니다. 이때 로안의 앞에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들이 등장했고, 소녀들은 로안을 결혼식장 한가운데로 이끌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로안을 환영했습니다. 로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신랑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바로 자신의 남자친구 부옹이었습니다. 이것은 부옹이 로안을 위한 깜짝 결혼식이었습니다. 상처가 많아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로안을 위해 부옹이 준비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실을 안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혼식 7개월 만에 부옹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로안도 병세가 악화하여 이듬해인 2015년에 남편을 따라 하늘나라로 향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쪽 얼굴에 붉은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다른 쪽 얼굴은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는 수술을 해야 했던 김희아씨를 사랑해 결혼한 남편이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이런 분들이 진정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여겨집니다. 받아들임이 곧 겸손입니다. 


왜 어린이와 같은 이들은 세속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린이들은 세속적인 ‘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예전에 청년이었다가 결혼하여 아기들을 데리고 나오는 신자들을 만납니다. 아기들은 식당 밥을 먹지 못합니다. 엄마가 미리 이유식을 준비해 오는데 저는 거저 줘도 안 먹을 전혀 간이 되지 않은 보기만 해도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입니다. 그러면서 어른이란 세상의 맛에 길든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에 길들었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고 그러면 예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눈은 잃습니다. 자신은 예쁜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은 사람을 받아들일 그릇을 좁힙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어린이처럼 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바로 세상의 맛을 끊으면 됩니다.

요즘 좀비 영화가 한창입니다. 좀비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람을 먹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을 음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비는 인간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잃은 사람들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맛볼 무언가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실 선물을 바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하니 그 찾는 맛을 더는 발견할 수 없게 되면 곧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허기를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누구와도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사춘기가 시작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모님과 세상이 빨리 아이들을 성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만들까요? 바로 스마트폰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세상의 맛을 빨리도 맛보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투와 표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말투를 따라 합니다. 유아용 방송이라고 해서 세상의 맛이 없을까요? 교묘하게 숨겨진 유혹이 더 많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방송과 게임 등을 통해 세속-육신-마귀의 맛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깊이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까지도 미워하게 됩니다. 엄마도 이제 스마트폰이라는 맛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7살 이전에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쥐여준다는 것은 아기들을 빨리 어른으로 만들어 자신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렸을 때 맛 들인 것들을 끊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10분에 맛 들인 맛을 끊는 데 1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 나면 아직도 영화를 보는 게 낫지 따분한 활자들의 조합인 책을 읽으려 하지 못합니다. 억지로 노력하는데도 아직 잘 안 됩니다. ‘어렸을 때 TV를 보지 않고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함이란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 크기는 세상의 맛을 알수록 줄어듭니다. 겸손은 세상의 맛을 끊는 것과 하나입니다. 그 맛 때문에 사람을 있는 그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의 맛을 끊어가야 하는 이유이고,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염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우분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왜 염색 하지 않으세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염색 하지 않아도 미남이라서요.’ 현문우답(賢問愚答)이었습니다. 웃으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염색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변화(變化)’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변화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변화입니다. 염색을 하는 것도 변화입니다. 체중을 줄이는 것도 변화입니다. 점을 빼거나, 성형 수술을 하는 것도 변화입니다. 여성들의 화장도 변화의 한 모습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마이클 잭슨도 외적인 변화를 많이 추구했습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변화를 맞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타볼 산에서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외적인 변화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다른 하나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내적인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잘 알기 어렵습니다. 내적인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이기 때문에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적인 변화는 익숙했던 세상과의 단절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내적인 변화는 목숨을 바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변화는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을 열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처럼 표징을 보여주었고,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길 위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내적인 변화는 오랜 침묵과 수양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막이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수행하는 은수자들이 있었습니다. 은수자들은 단식, 극기, 묵상, 침묵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 하였습니다. 이런 은수자들을 통하여 수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전통이 교회의 영성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글라라 성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글라라’라는 말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빛은 어둠을 밝힐 수 있듯이, 글라라 성녀는 기도와 관상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글라라 성녀는 그녀의 기도와 관상으로 외로운 사람들에게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위로의 불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는 좌, 우의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날 수 있듯이, 자동차는 4바퀴가 균형을 이루어야 잘 달릴 수 있듯이 신앙인은 활동과 기도가 균형을 이루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면, 글라라 성녀는 그 활동이 잘 될 수 있도록 기도와 관상을 하였습니다. 마치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듯이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역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였습니다. 우리들 역시 활동과 기도라는 날개를 달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 돌보는 사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람, 가족과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내적인 변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꼭 해야만 할 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길 가지 않는 이에게

눈길 주는 것


그다지 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 하기도 너무나 어렵지만


참으로 사람이고 싶다면

꼭 해야만 할 일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지난 주일 날 사제관 마당에서 초등부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했었습니다. 사실 당일도 비가 계속 내리고 있고, 많은 곳에 수해를 입고 힘들어 하는 가운데 물놀이를 한다는 것이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그래도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얼굴보기도 힘들었던 아이들과의 약속이라 그 날 만큼은 아이들과 함께하겠다는 생각에 취소를 안 하고 강행을 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점심으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나서 사제관 마당에 임시로 마련된 수영장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면서 정말 느낀 것은 아이들은 그 순간만큼은 아무생각 없이 놀면서 행복해 할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은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함께하면서 매순간을 행복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유쾌하게 즐길 줄 알고, 행복해 할 줄 아는 모습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렇게 아이들처럼 하느님 안에 진정 행복을 찾는 이들의 것임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의 교육학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은 언제나 군중 속에 계셨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시고 살폈다. 그들 수준으로 내려가셨고 함께하고 성장하도록 아주 쉽게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고 성숙하도록 사랑으로 드높여 주셨다. 넉넉한 자유를 주셨고 충분히 기다리시며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100년, 50년 전이나 지금의 교육방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각종 기기의 발달에 비해 교육은 교실과 학원이란 틀 속에 더욱 크게 가두고 강제하며 시험과 성적으로 순위를 고정시켰다. 어떤 개인차의 가능성도 고려치 않는 고차원적 교육만 강요하고 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의 교육학, 유일한 스승이신 예수님의 교육방법을 채택하지 얺는 것인지? 패러다임의 변화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이다. “양 백마리가 있다. 착한목자 예수님께는 모두 소중하고 중요하다. 모두 하나 같이 대하신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양이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또는 네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은 내 자식이 아니면 그 누구도 관심없이 인간의 한계에 남겨둔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찾아 나선다. 험난한 과정이 있다. 찾으신다. 당신의 어깨에 멘다. 기뻐하시며 돌아오신다. 여기에 구원에 댜한 환희와 희열과 기쁨이 있다. 교육부활이고 인간 구원이다. 전통교육은 세뇌되고 경직되고 자유가 없고, 간섭으로 제품생산하듯 찍어냈다. 이제 인간교육 바뀌어야 한다. 요즘 정치검찰 모습이 전형적인 전통교육에서 만들어진 인간상이라 생각하니 교육이 비참하다.


오늘 복음(마태18,1-5.10.12-14)묵상을 하며 예수님의 교육학이 왜그리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유일한 참스승 예수님을 본받고 싶다. ‘놀체인 양업’ 사회적 협동조합을 펴는 실천적 이유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이태리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와 글라라 그 동생 아녜스 참 감동입니다.

지금도 이태리의 젊은이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준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어려 어린이지만 나이가 들어서 어린이가 되는 것 감동입니다.


회개하여 찾을 곳은 어린이 경지이며 그 경지가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춰 산 사람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세상의 복잡한 질병과 악에서 신자들을 구합니다.


어른들 눈 보면 속에 서려있는 세상 온갖 시련 고통 교만 무섭습니다.

가족끼리만 해도 눈 맞대기 어렵지 않듯 하느님가족끼린 더 편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작음의 신비로 초대합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이 질문은 당시 제자들의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의 산상수훈에서 하늘 나라가 누구의 것이며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 힘 주어 말씀하셨지만, 이미 그들 마음 깊숙히 심겨진 욕망의 뿌리가 그 가르침을 휘감아 덮어버린 것 같습니다.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마태 18,3)

예수님께서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큰 사람으로 대접받으려는 욕망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는 제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즉 길을 되돌려 인간됨의 진정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큰 사람이 되기는커녕 하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5)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명확히 답하십니다. 물론 그들이 예상하고 기대한 답은 아니었을 겁니다. 입만 열면 제 자랑에 골몰하는 세속 삶에서 겸손의 덕은 무시당하고 손해보기 일쑤니까요.

사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자기 비하에 빠져 허우적댈 뿐, 진정으로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건강한 자존감에서 나오니까요. 겸손을 선택할 줄 아는 이는 외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척"하는 겉꾸밈이나 위선, 허세를 부리지도 않지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래서 상대의 깊이를 통찰하기 전에 자기에게 이익이 될지 말지를 스캔하듯 정보화하는 세상은 작은 이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미소하고 가난하고 미약하고 침묵하는 작은 이들은 쉽게 업신여김 당하고 무시와 조롱에 노출되지만 자기 방어조차 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보호를 세상 권력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과 아버지께 의탁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애쓰라고 당부하십니다. 쉽게 간과되고 소외되고 무관심으로 지나치기 쉬운 그들이 사실 하늘에서 더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 실리와 권모술수에 밝은 귀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는 장면이 생생히 그려집니다.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에제 2,8)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에제 2,8)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에제 3,1)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에제 3,3)

"내 말을 전하여라."(에제 3,4)


예언자는 이런 존재여야 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고 이끄시는 대로 따릅니다. 그래야 예언자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것임이 드러나지요.

복음 속 "작은 이"란 예언자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따르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의 수동성은 무기력이나 회피가 아니라 의탁의 열매입니다. 그는 자의적 욕망보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합니다. 자기 욕망과 하느님 뜻이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는 이미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눈으로는 순박하다 못해 바보 같고 함부로 농락해도 되는, 쉬운 사람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의 도움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는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나 하느님 아버지께 맞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어떤 보호 장구나 인맥을 갖추지 못한 그의 힘센 후견인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녀 클라라 축일에 작음 안에 감춰진 하느님의 힘을 볼 수 있기를 청합니다. 자신의 작고 어리석음을 슬퍼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웃의 작음을 업신여기지 않는 지혜를 청합니다. 작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게 만들어 주는 축복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성녀 클라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보통 나이를 먹어갈수록,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다양한 경험들을 쌓고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을 극복함으로써 인품이 넉넉해지고 이해심도 많아질거라고 기대합니다. 저 또한 나이를 먹으면 주변 사람들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력과 포용력이 커져서 훨씬 더 따뜻하고 인자한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지요. 하지만 불혹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소한 일 하나에 울컥하는 것을 보면 저는 아직 한참 멀었나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잘 익은 과일처럼 멋지게 '성숙'해져가시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그런 분들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반면 편협하고 융통성 없으며 고집 세고 심술궂은 모습으로 보기 싫게 '늙어'가시는 분들의 모습은 자주 눈에 띄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 언젠가 나도 노년을 맞게 될 때 성숙한 모습으로 잘 익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스쿠루지'처럼 고집불통 심술쟁이 할아버지가 되어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지요.


왜 나이 들면 고집 세지고 융통성 없어지는 사람이 많을까요? 단순히 '성격 탓'이거나 '개인 차'가 있을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과학적 근거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뇌에서 이성적 사고를 관장하는 것은 '전두엽'인데 이 전두엽은 익숙한 것에 머무르려고 하는 충동을 억제하고 변화를 수용하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다른 신체기관들처럼 전두엽도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익숙한 것에 머무르려고 하는 경향은 강해지고 변화를 수용하려는 능력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 고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런 신체적 변화를 거슬러 부드러운 마음,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계시지요. 하나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세입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칠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즉 길 잃은 한 마리 양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며,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만드는 사람, 나에게 상처주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됩니다. 즉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서, 인격적으로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 큰 존중과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특별한 조건을 갖추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행복의 나라'가 아닙니다.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하느님을 닮아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마음으로 내 이웃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참된 행복의 상태'가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큰 것이다. < 마태,18/1-5,10,12-14>

이석진 그래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크고 위대하고 잘라고 멋지고 맛있는 것 높고 이름난 것을 좋아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모두가 올라가려고 하지 내려가려고 하지 않고 이름 있는 집안 학교 자리를 중요시 여깁니다. 주님은 복음에서 어린이 한 아이를 앞세워 “ 너릐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 하라” 하시며 100마리 양중에 한 마리 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세계는 일등 국민만 지구에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저 아프리카 오지에 굶주리고 할 벗는 아이들, 장애자로 태어난 어린이 버려진 어린이 교회는 전쟁터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공부 못한 어린이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고 수도원은 한국에 진출하면서 나환자를 돌보는 일에 힘을 쓰고 교육사업에도 관계합니다.


이 세상에는 서로 돌보지 읺으면 생명을 유지 못하는 작은 자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이번 홍수로 집을 잃고 목숨을 잃고 가재도구를 모두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모두 생각하여야 합니다. 나라에 돈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많은 사회단체는 양심적 모금 운동을 전개 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주도록해야 합니다. 우리 수도원에 한달에 돈만원만 후원회에 가입하면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희망이며 기쁨이 됩니다. 상담자 대부분에게 청해서 회원이 되도록 권고할 때 영적 삶과 육적 삶을 내가 혼돈할까 조심스럽게 청하지만 응답의 소리를 들으면 행복해지는 것 이 길이 작은 자들에게 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찍이 수도원 들어와서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많이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부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나이 들어 지인도 있고 도움주는 사람이 있어 손에 돈이 생기면 어려운 사람도 도웁고 후배들이 어려워 하는 것도 도움을 줍니다. 수도원은 밥 때 밥주고 일상생활의 필요한 것은 주지만 특별이 필요한 것은 주지 않아서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이것도 저것도 먹고 싶은 것이 있어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것을 나주어 줍니다.

성소에 힘들어 외롭게 고민하는 후배를 일부러 찾아가 상담도 합니다. 한사람도 성소를 잃지 않게 하려고 눈치 빠르게 행동합니다. 실패할 때가 많이 있지만 그래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나를 보고 어떤 이는 잘 속고 어리석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 나를 풍요롭게 합니다. 본당에 일을할 때 어떤이가 저녁을 먹지히고 어린이이들 데리고 저녁을 즐겁게 먹고 나니 돈 십만원 짜리 한 장 들고 신부님 저 재산이 이 수표 십만워 뿐입니다. 사업도 잘 안되어서 이것 먹고 전 가족이 죽으려합니다. 시업이 힘들 줄 알았지만 그정도인즐 몰았습니다. 내일 저에게 오세요 조금 도와주겠다고 하고 제가 기지고 있는 돈 900백 만원을 주고 사업을 다시 일으켜 새우라 하고 든을 주니 받아 간적이 있습니다. 받을 생각하지 않고 바보이지요.? 그러나 나의 무관심이 무능력이 만일 죽게 하였다면 억만금이 무엇이 유익합니까? 지금도 어리석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라면 서로 도웁고 살려합니다. 길거리에서 동냥을 청하는 사람 지나치지 말고 돈엽으면 기도라도 한마디하고 지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녀 클라라 영명축일입니다. 클라라 영명축일을 축하드립니다.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녀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우셨습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했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셨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셨습니다. 1253년 선종한 그녀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 비유를 제시해 주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3-5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어린아이를 제시하는 의미를 이렇게 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다 같이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평등하고 동등하게 다 같이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라믜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 덧붙여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드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2-14절) 두 복음을 따로따로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같이 연이어 읽다 보니 어린이같이 무시당하는 사람, 신경 써주지 않는 사람, 별 볼 일 없는 것같아 보이는 사람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아버지가 너무나 좋고 새로운 깨달음 속에서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배운다.

양승일 시메온 신부님

사제가 되기 위한 신학교 과정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신학, 철학, 교회사, 교리 등 최근에는 사회복지에 관한 부분까지 배운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많은 학습의 과정은 개인적인 신앙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사제가 된 후 신자 분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어떤 지식을 가르치는 일명 주입식 교육 프로그램을 굳이 교회 안에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비자 교리, 신자 재교육, 간간이 있는 특강들 안에서 온갖 어려운 전문용어를 가져다 아무리 이야기 해본들 ‘핫바지 방귀 빠져나가듯’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관점을 바꿔 보았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가 모두에게 배우는 것이라면? 어린이는 듣는 것, 보는 것, 느끼는 모든 것에서 배웁니다.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배운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갖게 될 때 누군가를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고, 회개에서 겸손으로 가는 과정을 밟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성녀 클라라가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Edit. I. Omaechevarria, Escritos de Santa Clara, Madrid 1970, pp.339-341)

전심으로 그리스도께 매달려 그 거룩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상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놓습니다. 그분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만족입니다. 그분의 감미로움은 우리를 가득 채워 넘쳐흐르게 하고 그분에 대한 기억을 감미로운 빛으로 빛나게 하며 그분의 향기는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분을 직접 보는 영광스러운 천상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들에게 행복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없는 거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여,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안팎으로 단장하고 여러 색깔의 꽃들로 치장하여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의 딸과 정결한 정배에게 있어야 하는 온갖 덕행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거울 전체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 거울에는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먼저 거울의 맨 밑에서부터 본다면 말 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누워 계신 분의 가난을 볼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여! 비할 수 없는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다음으로 거울의 중간을 본다면 그분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겪으신 무수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분께서 지니신 겸손과 복된 가난을 볼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거울의 맨 위를 본다면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신 이 거울께서 십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 계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겪던 고생 같은 고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외치고 울고 있는 그분께 한마음 한 목소리로 대답합시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내 마음 괴로워하겠나이다.” 천상 임금의 왕후이신 아녜스여, 당신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 안에 이 사랑의 불이 더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임금님의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부요와 끝없는 영예를 바라보시고 열렬한 갈망과 마음의 사랑으로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분께 이렇게 외치십시오. “오, 천상의 신랑이시여, 날 이끌어 당신을 뒤따르게 해주소서. 싱그럽기 그지없는 당신의 방향으로 줄달음쳐 가리이다.” “당신께서 나를, 술방으로 이 몸을 데리고 가실 때까지, 당신께서 왼손으로 내 머리 받치시고 당신 바른손으로 기쁘게 이 몸 안아 주시며 당신의 그 입술로 나에게 입맞춰 주실 때까지, 나는 지치지 않고 달려가리이다.”


사랑하는 아녜스여,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할 때 이 가련한 어머니를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 대한 기억은 내 마음 안에 굳게 새겨져 있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는

성녀 클라라의

삶이 있습니다.


성녀 클라라의

삶은 단순하기에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가난을 밟고

걸어갑니다.


자신을

낮추는 삶이

충만한

가난의 삶입니다.


많은 길을 걸어

당도하는 삶또한

가난의 삶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장 큰 기쁨은

이와같이

자신을 낮추는

낮아짐의

기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낮아짐이

회심의 삶입니다.


회심의 삶은

내적 가난을

추구합니다.


낮아지는 것이

진정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낮출 때만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셨습니다.


낮아지는 성숙이

참된 성숙입니다.


낮아지는 삶이

하느님과 하나되는

일치의 삶입니다.


낮아지면 기꺼이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성녀 클라라를

통해 가난하신

예수님을

보게됩니다.


깨어있는 삶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적

가난을 통해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저는 프로야구를 즐겨봅니다. 그런데 프로야구 선수들을 보면 누구는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고, 누구는 그렇게 많은 연봉을 받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연봉을 받는다고 항상 승리투수가 되고,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이나 안타를 쳐댈까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패전투수도 되고, 홈런이나 안타 대신에 삼진으로 허무하게 물러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승리투수가 될 확률이 조금 더 높고, 안타나 홈런을 칠 확률이 조금 더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과의 차이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별 차이가 없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간의 차이가 큰 존재로 반대로 작은 존재로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저는 많은 곳으로부터 강의 부탁을 받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제 강의가 훌륭해서 그럴까요? 언변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아주 깊이 있는 강의도 아닙니다. 그러나 강의를 위해 조금 더 노력하고 또 남들보다 한 번이라도 더 강의를 해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약간의 차이가 다른 사람들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인 것이지요.


지금의 내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별한 재능이 샘솟듯이 나와야 할까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많은 재산이 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더 변화하겠다고, 조금 더 성장하겠다고 마음먹고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큰 사람이니까 이 세상에서 정말로 대단한 사람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우고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 자신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것, 그래서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조금 더 변화되는 것, 조금 더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세우신 어린이는 죄를 짓지 않을까요? 역시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죄를 인정하고 곧바로 뉘우칩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죄를 짓지 않을까요? 죄를 또 다시 짓지만 그때마다 다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곧바로 뉘우칠 수 있는 조그마한 변화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변화되고 성장하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지례짐작으로 할 수 없다며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명언: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마음이 평온함을 뜻한다(시세로).


16 삽교 배나드리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 삽교천 가에 위치한 마을로 도리라고도 불렸다.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다녔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삽교에서 아주 가ㄲ운 곳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1816년 봄 경상도에서 발생한 박해의 영향이 배나드리에도 미쳤습니다. 내포 지방 출신 신자들이 경상도에 피신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1817년 10월 배나드리에서 20~30명 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중 민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1880년 초까지 신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니,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하고 철저하였나를 짐작하게 합니다.

배나드리 인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순교자는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입니다. 그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에서 태어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중하여 살다가 1797년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청주를 거쳐 해미로 이송되어 1800년 1월 9일 63세로 순교하였습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올봄 강의차 사이판에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강의 후 본당 신자들께서 친절하게 섬을 한 바퀴 안내해 주셨습니다. 사이판은 태평양전쟁 당시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자, 일본군의 최후 방어기지였던 관계로, 여기 저기 전쟁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더군요.

  

가장 가슴 아픈 장소는 전쟁 말기 대대적인 미군의 폭격 앞에,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일본군들은, 80미터 높이의 절벽위에서 단체로 뛰어내렸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틈에 우리 한국 청년들도 끼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는 그 절벽은 오늘날 ‘만세절벽’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생각만해도 분노로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희생된 우리 청년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입대한 청년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아니고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그들의 군복을 입고,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그리도 슬프게 죽어간 것입니다. 더 슬픈 것은 그들은 바로 우리들의 할아버지들이요 아버지들인데, 우리는 그들의 그런 기구한 삶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1947년 일본 대장성 문서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소속 한국인은 363,500명, 해외징용자 1,390,000명, 국내 강제근로동원인력이 약 600만 명에 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가슴아픈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일본군에게 끌려간 우리 꽃같은 소녀들의 숫자는, 워낙 닥치는 대로 끌고 갔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소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16세, 17세였습니다. 그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물설고 낯선 이국땅으로 끌고 갔고, 그렇게 그들의 꽃다운 청춘은 무참히도 짓밟혔습니다.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한 나라, 오랜 세월 동안 그 끔찍한 상처를 외면해온 나라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27년전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님(1924~1997)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처음으로 수면위로 떠올랐으며, 그들의 잔혹함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죽음과도 같은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마음에 품고 삭이면서 살아오신 할머님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참으로 이 나라가 부끄럽고, 제 자신도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우리들의 할머님들이 당하신 그 억울한 사연, 그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고, 가해자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 합당한 보상을 받아내는 것, 자녀요 후손으로서 수행해야할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존경하는 할머님들께서 한분 한분 우리 곁을 떠나가고 계십니다.단 한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그분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내려갈 수 있도록 우리 후손들이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말끔히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 평화롭게 사는 나라에 무기를 앞세워 침략한 것, 수탈한 것, 우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리따운 소녀들과 청년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넣은 것, 그것을 피해 당사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합당한 배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대일 졸속 외교의 극치를 보여준 몰지각한 정치인들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2015년 12월 28일 그 잘난 돈 몇푼 받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국내외에 공표했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아직도‘폭행이나 협박으로 소녀들을 납치했다는 사실은 증거로 입증된 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를 가진 증언은 없다'고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앞에 우리 천주교회도 열심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한일 합의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천주교전국행동’을 결성하였습니다. 천주교전국행동에는 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여러 천주교 시민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전국행동은 8월 14일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

일시: 2018년 8월 14일(화) 오후 4시 30분

장소: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층 성당

주례: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주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전국행동’




<하느님 앞에 서면 겸손해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며칠 전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작은 짐승이 튀어나와 급정거를 했지만 결국 그것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로드킬이라 기분도 좋지 않았지만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였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를 뒤로 빼서 가만히 살펴보니 고라니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부스럼이 났고 털이 다 빠진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불쌍해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차에게 더 밟히는 일이 없도록 길가에 던져주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혐오감을 주는 것들은 없애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뱀 일가족 3마리를 몰살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물론 그래야 용감하게 보였기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갇혀 있는 뱀을 죽이기보다는 다시 산에 풀어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벌레들도 잘 죽이지 않습니다. 혐오스런 다리가 많이 달린 소위 돈벌레나 나방 같은 것들이 방으로 들어와도 잘 잡아서 창문 밖으로 던져줍니다. 내가 그 생명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음을 반성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살이 하나도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날파리나 인간이나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어린이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와 과부는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부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어린이와 같이 낮아진다는 말은 어린이와 같이 낮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과 같음을 말씀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낮은 이들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물을 받아들이는 곳은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계곡입니다.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 마리의 가치가 구십구 분의 일이 아니라 나머지 구십구 마리만큼이나 소중하단 뜻입니다.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기고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겸손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초보 강도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는 집 주인에게 “꼼짝 마, 손들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강도가 “왜 손을 안 들어. 죽고 싶어?”라고 협박했더니 그 사람은 “제가 오십견이어서 손을 들 수가 없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집 주인의 말을 들은 강도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 오십견이세요? 저도 오십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오십견에 대한 정보를 주고는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아파봐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내가 작아져 봐야 작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처지입니다. 그런 처지이니 아이들은 자신처럼 불쌍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게 되면 자신처럼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은 게으르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판단합니다.

 

그러면 다시 어린이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린이가 어린이인 것을 알 때는 부모 앞에서입니다. 모든 것을 대 해주시는 부모 앞에서 비로소 작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없으면 부모 없는 어린이와 같은 운명입니다. 주님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아이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우려면 부모 없이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기도 안에서 하느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가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는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이는 요한 묵시록의 요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모시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는 엎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 앞에 서야만 우리가 아무런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린이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사는 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포용할 능력을 지닌 자가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반가운 분들이 명동으로 찾아왔습니다. 구역장으로 봉사하셨던 분, 사무장으로 함께 일하셨던 분, 사제관에서 일하셨던 분입니다. 만남이 반가운 것은 좋은 추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역장님과는 봉성체를 다녔습니다. 음식도 잘 만드셨고, 언제나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무장님은 입은 무거웠고, 언제나 친절한 모습이었습니다. 사제관에서 일하시던 분은 늘 깔끔하셨습니다. 보좌신부님들에게도 참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은 기억이 있으니, 만남은 반가움이 되었습니다. 그분들도 제게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떠난 지 6년이 넘었는데도 찾아오신 것이겠지요.

 

바람과 해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람이 거칠게 불었지만, 나그네는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해님이 따뜻하게 비추니 나그네는 옷을 벗었습니다. 옷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거친 바람으로는 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따뜻한 해님이 있어야 열리는 것입니다. 사목은 거친 바람처럼 해서는 좋은 기억을 남길 수 없습니다. 사목은 따뜻한 해님의 마음이 있어야 좋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자매님의 따뜻한 마음이 씨앗이 되어서 성전 입구에 성모상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구역장님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매주 점심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태풍 곤파스가 지나간 자리에 나무들이 뽑혔지만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넓은 정원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모여서 김장을 했고, 뒷동산에 김치 항아리를 묻을 수 있었습니다. 김치만 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정성, 사랑, 나눔이 함께 묻힌 것입니다. 긴 겨울 김치만 꺼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함께 꺼내서 나누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다른 이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그런 따뜻한 마음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들어오듯이 따뜻한 마음에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미움이 들어오곤 합니다. 그런 것들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불평과 불만이 자라게 됩니다. 그런 바람 속에서는 좋은 기억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학식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권력으로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 갈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나눌 수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말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죽고 난 후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8. 14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내가 죽고 난 후에

누구의 눈길조차 끌지 못하는

볼품없는 한 사람 찾아와

자신을 향한 나의 따뜻한 눈빛에서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았노라며

하얀 꽃 한 송이 바쳐주면 좋겠다

수만 송이 꽃향기보다

더욱 진실한 소박한 향내 맡으며

하늘나라 가볍게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죽고 난 후에

누구의 눈길조차 끌지 못하는

볼품없는 한 사람 찾아와

자신에게 건넨 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신의 숨죽인 삶을 깨웠노라며

맑은 눈물 한 방울 흘려주면 좋겠다

삶에 지쳐 스러진 몸과 마음

티 없는 눈물로 적셔 새 힘을 얻어

하늘나라 기쁘게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죽고 난 후에

누구의 눈길조차 끌지 못하는

볼품없는 한 사람 찾아와

자신의 차가운 손에 전해진 나의 온기가

자신의 식은 가슴을 데웠노라며

내 영정 곱게 쓰다듬어주면 좋겠다

차가워진 내 육신

다시 뜨겁게 보듬어

하늘나라 힘차게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죽고 난 후에

누구의 눈길조차 끌지 못하는

볼품없는 한 사람 찾아와

자신을 향한 나의 소박한 웃음이

자신의 힘겨운 순간에 달콤한 샘이었노라며

맘껏 웃으며 손뼉 쳐주면 좋겠다

사랑하는 벗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한 발 내딛기 주저함 없이

하늘나라 덩실 춤추며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아이들을 사랑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전에 ‘EBS 다큐 프라임’이라는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제목의 동영상을 둘러보다가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라는 동영상을 선택해서 몇 개 봤습니다.

대략의 구성이 교사 생활의 위기감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사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전문가들에게 문제점을 진단 받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을 해 보고, 몇 개월 뒤에 최종 평가를 하는 식인데요.

여러 선생님들이 지적 받은 문제점들이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수업 중에 정색하는 거, 소리 지르는 거, 아이에게 무안 주는 거, 관계보다 가르쳐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먼저 주입하려고 했던 거, 다가가고 다정하게 인사하지 않은 거... 등등 이었는데요.

아마도 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면 저도 선생님들처럼 부끄러운 감정과 제 잘못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거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을 눈 여겨 보았는데요.

선생님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주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들이었던 거 같습니다.

다가가고, 다정하게 인사하고, 눈 마주치고, 긍정적인 말을 쓰고, 화 내지 않고, 관심을 보이고.. 하는 것들인데요.

그 동안의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하나하나의 미션을 수행하는 게 쉽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열정이 있어서인지 열심히 하시더라고요.

그 결과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카메라에 담긴 교실의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수업 내내 무표정 하던 선생님의 얼굴에 웃음이 보이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차가웠던 선생님 주위에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변화를 신기하기 생각했고, 좋아했습니다.

한 초등학교 아이는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처음에 선생님 만나서 내 4학년 생활은 망쳤구나.. 했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요...’

선생님이 했던 일들은 그리 큰일들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이었고, 그 중요한 일을 위한 약간의 노력과 변화가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 스스로에게 작은 미션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못하고 있는 것들인데요.

먼저 다가가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 보는 거랑 전례 중에 실수를 했거나 버릇이 없다고 느껴질 때라도 정색하거나 화내지 않고 타이르면서 믿고 기다려주는 거, 그리고 신앙의 내용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먼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 보는 거.. 입니다.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일의 실천이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기 위한 작은 노력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오늘 하루, 나와 만나고 있는 아이들을 잘 돌보고 가르치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루이스의 아버지는 재치가 많으셨던 거 같다.

과거를 회상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예쁜 간호사가 아버지를 만만히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정말 비관적인 할아버지시네! 꼭 우리 아버지 같아.”

아버지(환자)가 대답했다.

“자네 같은 딸이 여럿이어서 그렇게 됐나 부지.”




어린이와 같은 마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12-14: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제자들은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동전으로 성전 세를 내는 것을 보고, 그것도 동등한 세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아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고, 자기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그렇게 물은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다. 그 어린이는 성령을 지닌 어린이이다. 성령을 지닌 그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이는 부모를 따르고 사랑한다. 이웃에게 해를 입힐 생각도 못하고, 재산에도 관심이 없다. 교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말만 믿고 진실이라고 들은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이 말씀은 바로 누구든지 당신을 본받고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면, 즉 당신이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당신을 낮추었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순결하시고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게 살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린이를 본보기로 세우셨다. 어린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는 원한을 품을 줄도 화를 낼 줄도 모른다. 악을 악으로 갚을 줄 모르며, 지저분한 생각을 할 줄도, 간음도 방화도 살인도 모른다. 어린이는 도둑질도 말다툼도 모르며, 죄로 이끄는 그 무엇도 모르며, 남을 비방할 줄도, 하느님을 모독할 줄도, 상처를 줄줄도,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른다.

 

어린 아이는 말을 들으면 믿는다. 무엇을 가르치면 따지지 않는다. 아이는 온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어린 아이가 타고난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죄 없는 어린이가 된 사람은 당연히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고 하셨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러한 작은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구원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삶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어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1941년 독일 나치 정권이 유태인들을 학살하던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도망자가 한명 생겼습니다. 그 도망자를 대신해 10명의 유태인을 아사감옥에 집어넣어 굶겨 죽이기로 했는데, 그 중에 뽑힌 한 사람이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다며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서서 자신은 딸린 가족이 없다며 대신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이십니다. 물과 음식을 먹지 않고 2주 동안 생존해 있자 독극물 주사가 투여 되어 1941년 8월14일에 선종하셨고,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랑의 순교자라고 칭하시며 시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잃어버린 양을 구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착한 목자 주님이십니다. 특별히 오늘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우리도 역시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는 참된 사랑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가장 큰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 하여라”(마태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니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사제는 하느님 안에서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의 여정. -들음, 회개,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답입니다. 진정한 회개뿐이 답이 없습니다. 기후변화의 재앙 역시 생태적 회개의 표징입니다. 산소는 생명을 낳고 탄소는 문명을 낳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에 따른 과도한 탄소의 배출이 지구온난화의 기후변화로 이끈 주범이라 합니다. 자발적 선택의 가난과 절제로 탄소의 배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법뿐이 없습니다. 온 인류의 생존을 위한 온 인류의 생태적 회개가 답입니다.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한 번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평생 회개해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구체적 실천뿐이 답이 없습니다. 하여 미사도 시작예식의 인사에 이어 참회와 자비송으로 시작됩니다.

 

대죄에는 크게 둘이 있습니다. 절망과 무시입니다. 절망은 급기야 자살에 이르고 무시는 타살에 이르게 합니다. 이 또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겸손의 회복이 답입니다. 정말 회개를 통해 겸손해져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둔, 하느님을 경외하는 영혼들은 절망도 무시도 않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진정 행복한 사람들은 회개를 통해 마음의 가난과 순수를 회복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이야 말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춘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작은 사람들이지만 하느님 눈에 진짜 큰 사람들입니다.

 

이런 겸손은 특정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에 주어진 평생과제이자 목표입니다. 물론 겸손안에는 자비, 지혜, 순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무지無知에서 해방된 자비로운 이가, 지혜로운 이가, 순수한 이가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주님 말씀은 늘 들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우리의 끈임없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이런 회개하여 자신을 낮춰 어린이처럼 된,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겸손한 사람은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삽니다. ‘사탄의 시스템’처럼 보이는 세상 한 복판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하늘 나라의 시스템’을 삽니다. 바로 저는 기도와 공부와 노동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수도원의 일과표를 ‘회개의 시스템’, ‘하늘 나라의 시스템’이라 일컫곤 합니다.

 

누가 회개한 겸손한 영혼들입니까? 누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입니까? 누가 자신을 낮춰 어린이처럼 된 사람입니까? 선입견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전적으로 열려있는 사람들입니다. 평생 배움에 열려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여정은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 배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비워 자신을 활짝 연 겸손한 사람이 배웁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배우지 못합니다. 평생배움의 평생학인의 기본 자세 역시 겸손입니다. 진정 주님의 평생 전사의 특징도 겸손에 있습니다. 어제 어느 본당 신부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주님의 겸손한 전사로 사세요! 주님은 늘 신부님을 사랑하시고 신뢰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수사님,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전사로 살 각오를 새롭게 하겠습니다.”-

 

막연한 회개의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회개에 앞선 경청의 들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바로 이런 경청의 들음은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제가 볼 때 이런 경청의 모범이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참으로 이런 들음의 경청은 곧장 회개로 직결됩니다. 이런 회개로 겸손해진 에제키엘에게 선사된 환시의 주님 신비체험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자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입니다. 사람이 문제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류의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하느님 망각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회개도 겸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에제키엘이 말씀의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우니 분명 ‘비탄과 탄식과 한숨’의 쓰디 쓴 내용의 말씀들인데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자기만족의 이기적 회개와 겸손이 아니라 이웃을 회개와 겸손으로 이끄는 말씀의 선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더불어의 구원이지 결코 혼자 구원은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들은 작은 이들을 결코 무시하도, 업신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들을 업신여김은 바로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대죄로 직결됩니다. 주님의 엄중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이어지는 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도 초점은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받은 작은 이들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노심초사, 자나깨나 걱정은 바로 이런 작은 이들에 있음을 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하느님의 관심의 초점은 잃은 양, 하나에 있음을 봅니다. 가톨릭 신문 8월 12일자 1면의 톱기사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사형, 절대 허용될 수 없다. 교황, 사형 전면 불허로 교리서 공식 수정”

 

바로 작은 이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깊이 깨달은 교황님의 결단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20세기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입니다. 특히 감동적인 장면은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사람을 대신하여 아우슈비츠 아사 감방에 자원한 것입니다.

 

“나는 가톨릭 사제다. 나는 그 사람 대신 죽기를 원한다. 나는 늙었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콜베 사제를 통해 살아난 그는 콜베 사제 순교후 53년을 살다가 1995.3.13.일 95세로 선종했다 합니다. 반면 콜베 사제는 만 47세로 순교의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는,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로 겸손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회개와 겸손의 삶을 요약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18, 1-5. 10. 12-14(연중 19주 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관심은 ‘큰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 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 3)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품이 어린이다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을 말합니다.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린이처럼 어머니께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4)

 

 자신의 무력함으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 자신이 미천하기에 다른 이들을 우러르고 존경하는 이가 바로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 5)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 곧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일,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 바로 그것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은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 18, 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고 사랑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제 성모자애드림힐에 가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수녀님들이 집이 하도 오래되서 고치기도 힘들고 고생고생하다가 큰 결단을 내려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모아 집을 새로 지었답니다. 그랬더니 후원회원들이 와서는 “아, 이제는 좋아져서 안 도와줘도 되겠다.” 라고 하면서 오지 않더랍니다. 고아들은 계속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과 불편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도와주는 것인지. 부모 잃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그저 남의 집일뿐이고, 아무리 좋아도 나쁜 부모 밑에 사는 것보다는 못하기 나름이고, 정작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인데 고아원을 현대식으로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떨어져 나가는 후원자들의 모습이 이해는 가지만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5,8-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유야 어쨌든 부모 없이 수녀님들의 품에 안겨 살아나가야 하는 어린이들의 상처입고 결핍된 삶을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주시며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감시 카메라의 발전 <마태 18, 1-5. 10, 12-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요사이 길을 걸어 자기 가고 싶은 곳에 가려고 해도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자신의 겉모습이 찍히고 어떤 문제가 생기면 CCTV에 행동거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길을 걸어도 하루에 몇 차례 모습이 찍혀 매사에 움직임이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중국에서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주민을 감시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그가 정부를 비난하는 계획을 세웠는지도 알아보는 정보 카메라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의 시작은 하느님이 먼저 행하셨습니다. 미소한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분은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하느님은 참새 한 마리도 주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다 알고 계시니 “꼼짝 마라” 입니다. 땅을 속일 수 있어도 하늘을 속일 수 없습니다.

100 마리 중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비유 말씀은 우리 중에 미소한 이, 보잘것없는 이, 소외된 이 모두가 주님의 감시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중국에서는 사람의 생각까지 알아보는 감시 카메라를 개발하여 자신의 통치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하고,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린이로 남아 있어야 하늘나라에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유, 평화, 기쁨이 있는 나라인데 그 나라에 CCTV로 가득 차고 자유스러운 행동을 못 하게 하면 감옥과 같은 부자유스럽고 위축된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욕심만 부리고 자기만이 통치자로, 법도 없이 무법천지가 되면 국민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욕심 없이 나누는 어린아이들처럼 내 것을 내주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지 말아야 참 평화의 나라에 살게 됩니다. 감정이 경직되어 있으면 친구는 친구가 아니고 원수입니다. 감정이 순화되어 어떤 사람하고도 소통이 가능할 때 그 나라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 살면 어린이같이 순진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 살려는 사람은 어린이가 되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도록 기도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처럼 웃으며 살아갑시다.

이런 나라는 그래도 수도원입니다. 오늘 수도 체험 학교에 오신 분들 모두가 하느님 나라 체험하고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따르는 듯 따르지 않는 나는 아닌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제자들은 주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지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즉답을 피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는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따지는데 하늘나라에서는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따지지 않으며 굳이 따진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큰 사람이며 어린이 같은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니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겁니다.

제 생각에 하늘나라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하느님의 자녀 곧 아이일 뿐입니다.

천국에서 큰 성인, 작은 성인이 있고 계급이 있겠습니까?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프란치스코를 위대한 성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본받는 면에서 위대한 것이지 천국에서 더 위대한 것이 아니고 제가 만일 천국에 간다면 프란치스코나 저나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요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어린이들이 되는 것인데 그런데 천국으로 가는 이 길에서 목자인 당신을 따르지 않아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서라도 찾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따르라고, 당신을 따라 당신과 함께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자고 초대하시는데 우리는 그 초대에 응하지 않고 나의 길/My Way을 가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헤매고 다니는 길 잃은 양이 되곤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길 잃은 양이 된다면 나를 ‘그깟 한 마리!’하며 버리지 않고 아흔아홉을 놔두고서라도 나를 찾으시는 주님이 고맙지만 반대로 나를 놔두고 다른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주님도 고맙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우리는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를 놔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한 마리 때문에 다른 아흔아홉 마리를 희생시킨다는 뜻이 아니고, 아흔아홉이라는 많은 수 때문에 한 마리를 희생시키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누가 길 잃은 양이고 누가 주님을 잘 따르는 아흔아홉 마리입니까?

비유에서는 아흔아홉이 주님을 잘 따르고 한 마리가 길을 잃었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주님을 잘 따르는 양은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고 오히려 한두 마리인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럼에도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얼마나 됩니까?

반대로 나는 착한 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얼마나 됩니까?

내가 길 잃은 바로 그 양 한 마리라고 생각한다면 회개할 것이고 주님 말씀대로 어린이가 될 것이고 어린이처럼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지난 클라라 성녀 축일에 저는 클라라 수녀원에 가서 미사를 드리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묾에 대해서 강론을 하였는데 그때 어린이는 자기의 목적지를 따로 가지지 않고 어머니가 목적지이고, 그래서 어머니가 가는 곳이 자기가 가는 곳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르는 듯 따르지 않으며, 따르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사는 그런 양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반대로 우리 주변에 길을 잃었건 제 좋을 대로 사느라 길을 이탈하였건 길 잃은 양이 있으면 한 마리라고 무시하는 그런 사람도 되지 말아야겠지요.

우리는 주님을 잘 따르는 회개한 한 마리 양처럼 되어야 하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무시하지 않고 찾아 헤매는 주님처럼 되어야 함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당신의 사랑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어야 할 

이웃의 목숨을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의 목숨을 구합니다.


깊이 아파한 사람이

깊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살아 있는 복음은

언제나 살아있는 

실천에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명의 문이 열립니다.


생명은 

어떤 장소에 있든

소중한 생명입니다.


사랑은

어떤 시간에 있든

소중한 사랑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진정 사랑하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랑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그냥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희망적인

소식이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있기에

아직 우리 모두는

희망입니다.


희망의 빛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길과 잃어버린 

우리자신을 찾는

기쁜 날 되십시오.


스스로 자신을

낮춘 이를 주님께서

들어 높여주십니다.


어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부족한 우리들임을

고백합니다.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낮출 수밖에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저는 제 차를 가지고 있고 또 운전을 하지만 자동차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운전을 한 지가 거의 20년이 가까웠지만, 솔직히 자동차에 대해 몰라도 별 불편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비소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제가 단골로 가는 집이 있는데 그곳의 사장님께서는 아주 친절하게 정비를 해주시고 자동차 부품의 적당한 교체시기까지 미리미리 알려 주셔서 어떤 곤란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운전 역시 마찬가지지요.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인해 예전처럼 지도를 일일이 살펴볼 필요 없이 초행길이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단지 저는 운전만 하고 기름이 떨어졌다고 표시를 하면 주유소에 가서 주유하면 그만입니다. 

 

약간의 노력으로도 자동차 운전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정비소나 주요소에 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비게이션 등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운전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평판을 받는 분들을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고, 내 이웃들의 도움으로 인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작은 노력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정작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이웃들의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말입니다. 

 

어제 복음은 성전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좀 의아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차별하시는 모습입니다. 공평하신 주님이 아니십니까? 하지만 어제 복음 말씀을 보면 조금 불공평해보입니다. 글쎄 함께 다녔던 제자들도 여럿 있었는데 그들을 배제하고, 단 한 명인 베드로의 성전세만을 지불할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을 감독하는 지위를 받았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도 주어졌으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질문을 했던 것이지요. 즉, 주님께서 베드로의 세금을 내주셨다는 사실에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베드로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주님의 뜻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순수한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낮춰서 주님의 뜻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주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세상의 기준으로 주님을 판단하려고 할까요?  

오늘의 명언: 무지함을 두려워 말라. 거짓 지식을 두려워하라(파스칼). 


질문의 차이(최규상, ‘긍정력 사진’ 중에서)  

한마을에 죽을 파는 두 개의 가게가 있었다, 두 죽 가게는 맛도 가격도, 손님도 비슷했지만 늘 한 가게의 매출이 높았다. 그래서 컨설턴트가 두 가게를 지켜보면서 고객과의 대화를 분석했다. 오른쪽 가게의 종업원은 죽을 내오면서 "계란을 넣을까요? 말까요?"라고 손님에게 물었고, 왼쪽 가게의 종업원은 이렇게 물었다.  

"신선한 계란을 하나 넣을까요? 두 개 넣을까요?"  

질문의 차이가 계란 판매 매출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하면 세계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을까?"라는 작은 질문이 큰 결과를 만들어냈다.  

긍정적인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질문들을 해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부정적인 생각들을 밀어내고 대신 긍정적인 생각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이르는 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생각만 해도 존경심이 저절로 솟아나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사막의 교부들이십니다. 사막의 교부들이란 3~5세기 사이에 걸쳐 이집트 사막에서 목숨을 건 수도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으며 동시에 큰 영적 진보를 이룬 초세기 수도자들을 말합니다. 이분들은 철학자도 아니었고 신학자도 아니었지만 그들이 남긴 금언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큰 영적 깨달음을 이룬 분들로 교회 영성사와 수도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이 대단한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아래 머물기 위해 손에 쥐고 있었던 ‘금수저’를 부러트리고 자진해서 ‘흙수저’를 손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도시 문명과 세상의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혈혈단신으로 깊은 사막을 찾아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산해진미나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단절되고 결핍된 철저한 고행생활이 그들의 삶 전체였습니다.

사막이라는 곳, 가보신 분 잘 아시겠지만 가도 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황폐한 대지와 모래 언덕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물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의 아름다움이나 일출 무렵의 장엄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거친 모래 바람과 매일 싸워야했습니다.

사막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품위마저 포기하겠다는 표시입니다. 극단적 결핍과 무소유의 삶,그 결과 생기는 모든 육적·영적 에너지들을 하느님을 찾는데만 사용하겠다는 결심이 교부들을 사막으로 이끈 것입니다.

그들이 사막에서 평생토록 추구한 것은 두발은 땅에 딛고 살아가지만 이 땅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가올 천국을 미리 앞당겨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매일 되풀이 한 작업은 천국으로 오르는 사다리를 한 단계 한 단계 밟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두 계단 올라갔다가 세 계단 내려오기를 수십 수백 번도 더 반복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 의미 없어 보이는 작업을 평생토록 계속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완덕의 계단, 성덕의 정상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가장 첫 번째 발판에 자리 잡고 있는 덕행이 있었으니 바로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덕행 중의 가장 기본이 되는 덕행, 이 덕행을 갖추지 않고서는 절대로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첫 번째 덕행이 곧 겸손의 덕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덕행이기에 당시 사막의 교부들은 앞 다투어 이 덕을 쌓기 위해 경쟁을 벌였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어디에 겸손의 경지에 도달한 수도자가 있더라!’는 소문을 듣게 되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가르침을 받고자 노력했습니다.

겸손의 덕을 쌓아나가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실체와 현실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 나의 원천은 티끌이요 먼지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노력 말입니다. 더불어 그에 비해 하느님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지? 그분 없이 나는 단 한순간도 홀로 설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지도자들 역시 가장 기본적으로 쌓아야 할 덕이 곧 겸손의 덕입니다. 몸에 배어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에게 겸손의 덕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독버섯 같은 교만이 한도 끝도 없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과대망상, 자가당착, 기고만장, 자화자찬, 과대포장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웃기고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진지를 말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이르는 문입니다. 겸손과 하느님을 경외함이야말로 모든 덕행을 합친 것보다 더 높은 덕행입니다. 수도자는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이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교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에 의해 무너집니다. 겸손 외에는 아무도 악마를 정복하지 못합니다.”(사막의 교부들)




그 두루마리를 내 입에 넣어 주시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14세기경 한 성직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사랑에 대해 설교를 하겠다면서 성당에 나올 것을 알렸습니다. 그 주일, 마을 사람들이 성당에 나와 한참 기다려도 신부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지쳤을 즈음, 신부님은 촛불을 들고 나타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을 비추었습니다.

처음엔 창에 찔린 옆구리, 그 다음은 못 박힌 양손, 가시관을 쓴 머리, 그리고 눈물 흐르는 자신의 얼굴을 비춘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으면서 자신이 전해야 하는 두루마리로 된 하느님의 말씀을 집어삼키게 됩니다. 자신이 받아 삼킨 말씀을 전해야지 자신의 뜻을 전하면 거짓 예언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는 앞뒤로 말씀이 쓰여 있었는데, 그 내용이 온통 “비탄과 탄식과 한숨”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복음이기 기쁜 소식인데 어째서 그 내용은 비탄과 탄식과 한숨뿐일까요? 성당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도 그런 기쁨을 찾으러 나왔다가 사순절의 우울한 분위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주님의 마음이고 사랑임을 성숙한 신앙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고통이 우리에겐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기쁘게 하는 말씀은 예수님의 상처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자매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 방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결혼도 했지만 부부가 동반으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우연찮게 찾아간 반모임에서 예수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 자매가 읽고 있었던 구절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내용 중, “그들이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였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원망하며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당신의 딸을 비탄과 탄식과 한숨으로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사랑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의 내용은 항상 “비탄과 탄식과 한숨”입니다. 그것이 싫다고 성경읽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먹으면 그 사랑으로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배가 아파질 것입니다. 다시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내 속으로부터 솟아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 안에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말씀을 먹고 배를 채우게 되면 다시 쓰라림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는지, 또 그 사랑을 맛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주님을 등지는 이들을 바라보며 혼자만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단맛 때문에 말씀으로 행복해야하고 그것 때문에 비탄과 탄식과 한숨으로 이웃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 받을 때 예언자직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한 삶의 태도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자들 사이의 서열 다툼 문제는 공관복음에서 다섯 번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서열시비를 언급하기보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다룹니다. 오늘 복음은 큰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작은 자는 쫓겨난다는 결론에 따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해줍니다. 


제자들이 누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18,3)고 하십니다. 당시 어린이들은 가난한 이들처럼 대접을 잘 받지 못했고 주장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린이의 순진함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겸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써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곧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 가난한 자 되어, 새로운 눈으로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에서는 어린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 하십니다(18,4). ‘낮춘다’는 것은 비굴하고 수동적인 복종이나 거짓 겸손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을 그분의 피조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비워 낮추지 않고 하느님을 뵐 수 없고 영적 성숙에 이를 도리는 없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은 내적 만족을 위한 폐쇄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낮추는 까닭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과의 거룩한 관계를 더 깊이 더 폭넓게 맺기 위해서입니다. 서둘러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미소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다운 모습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18,5) 자신 전체를 하느님으로 채우고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한 사람이 곧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런 자세와 마음의 지향을 지님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 형제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겠지요. 


우리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는 하늘 나라를 지향하고 하느님의 선을 추구하며 그분의 자비를 주고받으며 살아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공동체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우선선택해야 합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8,14). 


하늘 나라를 반영해야 할 신앙 공동체에서도 가장 큰 사람의 기준은 신분이나 지위, 재물 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힘없는 이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 받아들이는 소명을 충실히 사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과 겸손이 많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인 셈입니다. 


우리도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먼저 남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회개하고 새로워져야겠지요. 그리고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낮추어, 그 누구도 멸시하지 말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야 할 복음의 지침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이 원하시는 것, 세가지. -회개, 자비,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읽은 특별한 기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전 삶에 걸친 회개의 실천이 살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속 가능한 지구 만들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국제환경단체 지구생태발자국네트워크(GFN)’은 어제 8월8일을 올해의 ‘지구용량 초과의 날’(Earth Overshoot Day)로 선포했습니다.

전세계인이 지금처럼 소비하면 지구가 1.6개 필요하고, 전세계인이 지금 한국인처럼 소비하면 지구가 3.3개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생태자원을 지속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8.8배 큰 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인당 생태용 인류의 생태자원 소비가 지구의 용량을 초과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에 들어서라고 합니다. 보고서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완전히 뜯어 고쳐야만 하며 각 나라와 도시, 개인들이 신속하고 과감한 행동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바야흐로 ‘생태적 회개悔改와 연대連帶’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느낍니다.


하느님은 인류뿐 아니라 지구와 지구안에 사는 모든 것들의 착한목자이십니다. 우리의 전적인 회개와 각성, 그리고 연대의 실천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선 요구되는 것이 회개의 실천입니다. 정말 살기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실천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여기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순진무구함이 아닌 자만심이나 자부심이 없는, 이웃에 활짝 열린 편견이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목표하는 바, 바로 이런 어린이같이 낮아 진 가난하고 겸손한 작은 이들입니다. 


회개는 자비와 직결됩니다. 회개로 각성覺醒하여 눈이 열릴 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닮아가면서 비로소 작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으로 향하게 됩니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 작은 피조물에 대한 관심도 각별해 집니다. 사실 인간의 자연과 동식물에 대한 횡포와 폭력, 착취도 도를 넘었습니다. 지구에 암적 존재가 된 이기적 인간들의 회개의 실천이 참으로 절박한 시대입니다. 제 눈에는 자연을 끊임없이 잠식해 가는 곳곳의 아파트 단지 들이 계속 커가는 몸의 암덩어리처럼 보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바로 이것이 착한목자 주님의 자비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강조하실 때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는 어투로 못을 박듯이 말씀하십니다. 비단 작은 사람들뿐 아니라 작은 피조물들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의 자비의 폭도 계속 넓어져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람을 넘어 온 지구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까지 확산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더 기뻐하는 착한목자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과 일치되어 살 때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삶의 전개입니다. 바로 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 답을 줍니다. 제1독서 에제키엘서 서두의 말씀은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참 흥미로운 것이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주님께서 에제키엘의 입에 넣어주시자 그것이 꿀처럼 달았다는 것입니다.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도 있듯이, 말씀과 일치되어 살 때 삶의 모든 슬픔, 괴로움, 아픔, 절망도 결국은 영혼에 좋은 꿀맛같은 삶의 맛으로 바꿔준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말씀과 일치되어 살 때 비로소 지속적인 회개와 자비의 삶이 펼쳐집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의 두루마리를 우리 모두의 입에 넣어 주심으로 쓴맛나는 고해인생을 꿀맛나는 축제인생으로 바꿔주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시편119.103). 아멘. 




가장 큰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 하여라”(마태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니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리’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습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화 되면서 풍요로워지고, 깨끗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추억과 그리움이 남는 정겨운 소리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쉬움입니다.

 

동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려서 재미있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다방구, 술래잡기, 딱지치기, 구술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땅 따먹기도 하였습니다.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고, 친해졌습니다.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녁이면 메밀묵과 찹쌀떡을 사라는 소리도 들리곤 했습니다. 새벽에는 두부를 사라는 소리도 들었고, 청소차에서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엿장수의 가위소리도 정겨웠습니다.

 

이웃과 정을 나누는 정겨운 모습도 있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기도 했고, 일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장례가 나면 이웃들이 함께 슬퍼하였습니다. 미풍양속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삼강오륜의 전통입니다. 나라와 백성,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의 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정의, 신의, 질서, 사랑, 효도와 같은 전통입니다.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물질 만능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릴 적 기억입니다.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촌수가 높아서 ‘이모’였던 분이 있었습니다. 이모할머니 댁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모가 말을 했습니다. ‘밤이 늦었기 때문 이모가 데려다 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남자이고, 나이는 많았기 때문에 집에 도착해서 다시 이모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2번 정도 서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은 저 혼자 왔던 기억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가 생각납니다.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형제들은 서로 생각합니다. 형님은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린 동생에게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논에서 볏단을 동생의 논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동생도 형님은 아이들도 많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형님의 논으로 볏단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던 어느 달 밝은 밤에 형과 동생은 함께 만나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확인한 형제는 서로 깊은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깁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 18,10)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면도 많지만 아주 추한 모습도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자기보다 힘세고 능력있는 자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고 자기보다 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자에게는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모습이 가장 비참해 보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바로 이런 인간의 추한 내면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힘쓰는 사람이 아닐까요?

스스로 열심한 신앙인이라 자처하면서도 내면의 이런 추함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서 작은 자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네요.


오늘 아무리 보잘것 없어 보이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더라도 그들을 절대로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도록 합시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느님을 뵙고 있답니다.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천사를 볼 줄 아는 사람은 결코 그들을 업신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천사들  많이 만나 뵈어 행복하고 기쁜 날 만드소서.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정신적인 성숙이

필요한 우리들

관계입니다.


정신적인 성숙은

관계맺음을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관계맺음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전 인격적 차원의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내적인 성숙없이는

이웃들과의 관계또한

힘겨울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자신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

건강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허약함을

업신여기지 않을 때

원만한 관계로

나갈 수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업신여긴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시며

작은 이들로 하여금

당신께 다가올 수 있는

용기와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업신여겼던

그 부분들을 통해

비로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큰 사람과

작은 이들이

있는 것은 우리의

허약함과 결핍된

요소를 서로 보완하는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됩니다.


건강한 신앙인의

밑거름에는 언제나

자기성찰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실은 가장 자유롭고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다가 이런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을 향해 교황은 평소 ‘고약한 노총각과 고약한 노처녀가 되면 곤란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사제와 수녀 모두 결혼을 할 수 없으니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총각, 노처녀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 앞에 붙는 수식어가 ‘고약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충분히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에 대해서도 인상을 쓰면서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으며, 때로는 날이 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집도 세지고, 말도 많아지고, 화도 많이 내는 것. 고약한 노총각과 고약한 노처녀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모습을 닮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는 내 자신의 나약함에 한숨만 짓게 됩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교황님께서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강해지는 것은 고집뿐이라고 말했던 어떤 분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틀린 것인 줄을 알면서도 억지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던 지요. 나를 지키고 내세우기 위한 고집이 결국 진리를 외면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한 어린이를 앞에 내세우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직 많은 점에서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잘 알기에 때로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도 어른에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런 어린이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낮출 수 있는 마음, 하느님께 철저히 의탁할 수 있는 마음, 하느님의 명령에 철저히 따르는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어린이의 모습이고, 곧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려 하고, 내 것만을 챙기려는 ‘고약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신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인정을 받으며,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태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도, 지기 마련이다(페르디난트 레이먼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복 십계명

워싱턴포스트는 1일(현지시각)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한 교황의 ‘열 가지 행복의 비결’을 소개했다. 요약하면 독립적인 삶과 열린 마음, 여유를 갖고 살라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르헨티나 비바 지의 페드로 칼보 기자와의 인터뷰를 인용했다. 바티칸 뉴스 네트워크와 카톨릭 뉴스 서비스에도 교황의 ‘행복 십계명’이 공개된 바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삶을 인정하라. 이른바 공존공영주의다. 옛 로마에도 ‘서로 자신의 방식대로 살게 하라(Campa e lascia campa)’는 속담이 있다.

둘째, 타인에게 관대해져라.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셋째,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라. 

넷째, 여가를 즐겨라. 아이들과 많이 놀아주되, 소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라.

다섯째,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라. 가족과 식사를 할 때는 TV도 잠시 꺼두자. 

여섯째, 젊은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라. 25세 이하 7500만 명의 젊은이가 실직 사태에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그들이 숙련된 기술을 갖추도록 해 ‘노동의 보람’을 느끼게 하자.

일곱째, 환경을 보존하라. 환경 파괴는 인류가 가장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인간의 무분별한 파괴 행위는 곧 ‘자살행위’다.

여 덟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특히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말라.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꼴 밖에 안 된다. “자신이 대우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하라(Treat others as you wish to be treated)”는 성경의 황금률도 있잖은가. 

아홉째, 타인을 개종시키려 하지 말고 그들의 믿음을 존중하라. 교회는 개종이 아닌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성장한다.

열째, 평화를 위해 힘써라. 평화는 단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상태가 아니라 세상을 주도하는 것이다.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평화를 향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

이 말씀에 잠시 머물러봅니다.


회개와 어린이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참된 회개가 이루어진다면 어린이처럼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회개란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늘 용서받으며 오늘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랑 안에 자신의 작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는 체험입니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처럼,

회개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조금씩 조금씩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게 만듭니다.


하늘나라는 정말 들어가기 어려운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자아(自我)가 분명히 존재하는 한,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욕구나 희망을 만족시킬 무엇을 찾을 것이고,

그 무엇이 선한 것이 아닌 악한 것이라면 우리는 하느님과 더욱 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강요가 아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그 요구에 대한 응답도 철저히 우리 마음에 맡기십니다.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 삶의 가장 필요한, 그리고 우선적인 은총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 청하십시오.




하느님 나라 VIP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직업학교며 교육센터에서 신입생들을 모집하는 데 있어 다른 곳과는 크게 차별화되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을 선발할 때 주로 성적순으로 뽑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다른 경쟁자들보다 뭔가 나은 신입생들을 선발합니다.

 

그러나 저희의 기준은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누가 가장 가난한가? 누가 지금 이 순간 가장 도움이 필요한가? 누가 가장 뒤쳐져 있고, 누가 가장 꼴찌인가? 그 순서로 신입생들을 선발합니다. 이 선발 기준은 바로 저희 수도회의 창립자이자 가난한 청소년들의 스승이요 아버지였던 돈보스코께서 선호하신 기준입니다. 동시에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안하신 기준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영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항상 노력하지만 늘 변두리에 머무는 우리들, 젖 먹던 힘을 다 써보지만 늘 죄인이며 뒷자리에, 또 제자리에 맴도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의 계산법은 우리 인간 세상의 계산법과는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될 VIP 손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길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어린 양입니다. 그들은 바로 가장 뒤쳐진 꼴찌들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홀대받는 사람들, 이 세상의 천덕꾸러기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들입니다.

 

천만다행으로 하느님 나라의 VIP들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지상에서 천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보스코가 그랬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랬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그랬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까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남에서 20년째 수백 명의 노숙인 형제들에게 따뜻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계시는 이방인 신부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인천에서 자그마한 국수집을 운영하면서 노숙인 형제들에게 손수 국수를 말아주시는 형제가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면 가장 큰 VIP 손님으로 맞이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높이높이 올라간 사람?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 ‘내가 누군줄 알아?’ 외치며 다니는 사람?

 

절대 아니겠지요. 하느님의 VIP 고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들, 이 세상에서 죽을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지지리도 복 없고 재수 없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분께서 추구하는 복음적 가치관, 그분의 진심, 그분의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배려심이 그 어떤 부류의 사람들로 인해 훼손될까, 그분 방문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을 아닐까 걱정이 참으로 큽니다. 그분의 한국에서의 행보가 모든 이에게 선익이 되고,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원래 교황직은 ‘종들의 종’이란 칭호에 걸맞게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리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랬고 초세기 교회 교황님들이 실제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좌는 점점 높은 데로 끝도 없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2천년 만에 다시 한 번 교황좌를 원래의 가장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분이 등장하시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청빈과 겸손, 단순함과 친근함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감사하면서 기도하면서 그분을 맞이할 순간입니다.




한 사람이 소중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신문은 ‘1년 만에 세상을 바꾼 사람이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2013. 3. 13일 취임한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말합니다 교황께서는 취임이후 어렵고 힘든 이웃과 함께하는 소탈한 사랑의 실천에 종교와 종파를 떠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웃사랑 실천은 미국 타임지가 '2013년 올 해의 인물'로 뽑았으며, 또 미국의 포춘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선정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황께서는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적인 개혁을 이끌어 가면서 미국과 유럽국가들이 앞 다투어 교황을 칭송하는 등 가히 교황 신드롬이 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곧 한국을 방문하시는데 경차를 타시겠다고 하셨고,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을 위해 방탄차를 거부하시면서 ‘이 나이에 잃을 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하신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옮기려 애쓰시는 교황님께서는 더욱더 낮은 데로 내려가심으로써 크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 하여라”(마태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 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순수와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수하고 겸손하여 '참 사람(眞人)'입니다. 오늘 복음 중 하늘나라의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순수와 겸손의 사람입니다. 

나이와 관계 없이 순수와 겸손의 사람이 진정 어린이 같은 사람입니다. 어제의 감동적인 체험을 나눕니다. 

 

나이는 저보다 위인 70에 가까운 지인의 도반(道伴)이지만 맑고 순수하기는 어린이와 같습니다. 저녁 식사 대접을 받은 후 격려금과 더불어 진정성 가득 담긴 귀한 친필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편지 봉투 겉면엔 '산티야고 순례길 건강히 다녀오십시오.' 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신부님, 그동안 수도원을 이끌어 오시느라 노고가 참 많으셨습니다. 

수도원에 닥친 몇 번의 위기도 지혜롭게 잘 해결하시고 

오늘날 요셉수도원으로 승격하는 터전을 굳건히 닦아 놓으셨지요. 

이제 하느님께서 수도원 일에 묶여있지 말고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신부님의 영성과 능력을 쓰시라고 무거운 책임에서 풀어주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산티야고 순례길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신부님의 발길 닿는 데마다 함께 하시길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다녀 오신 후 신부님의 빛나는 영성이 가득 담긴 순례기를 만나는 기쁨을 기대하겠습니다.

2014.8.11.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편지라기 보다는 흡사 기도문 같습니다. 형제님의 친필 서한은 액자에 넣어 길이 보존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참 순수하고 겸손한, 복음 말씀 그대로 어린이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확인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18,3).

 

아니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순수한 이들은 이미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립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 끊임없는 회개가 뒤따라야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들을 향한 주님의 다음 행복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이어 주님은 마음의 겸손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

 

스스로 자신을 알아 낮추는 겸손한 이가 역시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가장 작은 이 같으나 실상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런 겸손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첫 번째 행복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가리키는 바, 바로 겸손한 이들입니다. 이런 순수하고 겸손한 이들을 대하면 마음도 밝고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순수와 겸손을 지닐 수 있을까요?  

말씀과 하나되어 살 때 가능합니다. 말씀은 하느님의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말씀 복용이 마음을 순화(純化)하고 성화(聖化)하여 순수와 겸손에 이르게 합니다. 바로 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기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에제3,3-4)-

 

진정 순수와 겸손의 예언자 에제키엘입니다. 순수와 겸손할 때 비로소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절로 순수와 겸손의 어린이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말씀의 끊임없는 복용의 효과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허기'는 말씀의 밥만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으로 주님과 일치되어 순수와 겸손에 이른 이들이 작은 이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사랑, 하느님의 마음을 지닙니다. 결국 작은 이들에 대한 태도에서 그의 순수와 겸손이 검증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18,10).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뜻이 아니다.“(18,14).

 

작은 이들 하나하나가 천부의 인권을 지닌 하늘 아버지의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이런 작은 이들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진정 이런 작은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을 닮은 순수하고 겸손한, 어린이 같은 참 사람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곧 한국 땅을 밟게 되실 우리의 파파,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회개한 우리 모두를 순수하고 겸손한 참 사람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시편119,103).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과 방송에서 교황님의 방한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길가의 전광판에서도 교황 방한에 따른 교통 통제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틀 후면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십니다. 어제 남대문 시장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자가 아닌 분들이지만 교황님의 방한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들으니 교황님께서 겸손하다고 이야길 합니다. 교황님께서 권위가 있지만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신다고 이야길 합니다. 교황님께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늘 함께 한다고 이야길 합니다. 교황님께서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니셨다고 이야길 합니다. 옆에서 들으면서 제가 술값이라도 내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황님의 한국 방문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의미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해석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황님의 한국방문은 분명히 사목적인 방문이고,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복음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사목적인 측면에서 교황님께서는 한국 교회에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이제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아시아는 물론 세계 교회를 향해서 일어나 비추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이번 교황님 방한의 주제는 ‘일어나 비추어라’입니다. 한국교회의 열정, 영성, 신앙을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선교사를 파견 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한국 교회가 나눔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복음적인 사명을 실천하셨고, 복음적인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도 복음적인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장과 숫자위주의 사목에서 나눔과 봉사의 사목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 돌보는 사람, 아낌없이 자신 것을 내어주는 사람, 가족과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어린이 미사 책에 나오는 성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아주 쉽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돈 갖고도 못가요. 하느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느님 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하느님 나라. 지식 갖고도 못가요. 하느님 나라. 얼굴만 예뻐도 못가요. 하느님 나라. 욕심 갖고 못가요. 하느님 나라. 마음 착하면 가는 나라 하느님 나라. 기도하면 가는 나라 하느님 나라.’

 

 


성경이 꿀처럼 달기 위해서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복음화국에 있는 관계로 요즘 부탁을 받아 안상홍 씨가 만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신천지에 이어 가톨릭 신자들이 그 곳으로도 많이 빠져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서적으로 그들의 오류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교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안상홍은 자신이 그리스도라 합니다. 다윗이 40년을 지배했듯이 그리스도도 40년을 지배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공생활이 3년이고 그 모자라는 37년을 자신이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에 자신이 성령도 된다는 양태론적 이단에 빠져있습니다. 전에는 파라클리토스(개신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라 불렸지만 지금은 안상홍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성령도 되니 하느님 아버지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인 부인이라고 말하는 장길자 씨를 ‘하나님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물론 첫 부인은 아닙니다. 영적인 첫 부인, 엄수인 씨는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신부’라 하며 갈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안상홍은 죽기 전 장길자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신부’ 교리는 어린양과 혼인하는 천상예루살렘을 그렇게 갔다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바오로가 여자는 머릿수건을 써야 한다고 해서 가톨릭처럼 미사수건을 씁니다. 이것 때문에 아마도 카톨릭 신자들이 덜 불편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유월절’(카톨릭은 ‘과월절’이라 함)을 꼭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과월절(닛산달 14일)과 연계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초봄(4월)에 태어났다고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세우신 과월절을 빵과 포도주로써 꼭 닛산달 14일에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며 유태인들처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12월 25일은 로마 태양신을 탄생일을 가톨릭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따라서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물론이요 십자가까지도 우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든 사이비들이 다 그렇지만 종말 임박설을 주장하며 매번 종말의 날짜를 세우고 그 날짜가 지나면 다음으로 넘기는 수법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성서해석이나 교리들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예수님은 당신 양 떼는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왠지 이런 교리를 듣기가 매우 거북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목소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왜일까요? 그들이 성경을 모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교리나 성경을 믿지 않는 것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교회론에 관한 문제이지 성경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이단들의 성서 해석의 오류를 찾아내라는 것 자체가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장엄한 현시를 체험하고 얼굴을 땅에 대개 엎드려있는 에제키엘에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주십니다. 두루마리는 말씀이 쓰여 있는 ‘성경’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위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슬픔과 애처로움과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들어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책을 받아먹을 때는 입에 ‘꿀’처럼 달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믿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 꿀처럼 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멋지게 보이지만 사랑이 줄어든다면 아무리 멋진 말을 해도 좋게 들리지 않게 나중에는 숨소리도 듣기 싫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존재가 먼저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거북하게 여겨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떠나가도록 내버려둡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빵을 배불리 먹었을 뿐이지 그 빵을 주시는 분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말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열두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도 떠나가겠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들은, “당신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신데 저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리고 듣기에 거북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 또한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말씀을 읽다보면 신앙이 강해져서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것을 주시는 분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말씀이 거북하게 되어 오래 읽어 내려갈 수가 없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통독하려고 하지만 초반에 다 포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맛이 없는 이유는 그 성경을 제공해주는 교회, 또 그 성경말씀을 해 주신 분,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은 처음부터 성경을 읽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에제케엘 예언자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먼저 보여주신 다음 두루마리를 내미신 것처럼, 교회에 들어오면 먼저 교리를 통해 하느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파견한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부터 가르치고, 그 믿음이 생겼을 때 비로소 성경을 읽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증명해 줄 성경 말씀들이 이해되기 때문에 성경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유태인이 읽으면 유태인의 믿음대로, 개신교인이 읽으면 개신교인의 믿음대로, 가톨릭 신자가 읽으면 또 가톨릭 신자가 배운 교리대로 해석하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성체를 보면서 오직 가톨릭 신자만이 그것을 성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믿음이 생겨야 말씀이 이해가 되고 잘 받아들여집니다. 성경 이전에 교리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리가 바탕이 안 되었는데도 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바오로는 성경을 다 외우다시피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해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의 가르침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도 교회를 박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니아스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자 비로소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였음을 알고 나니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로, 물이 성령으로, 그 물이 뿜어져 나오는 바위가 그리스도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찌 재미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성경을 자기 식대로 꿰어 맞추는 것을 보면 혹해서 그것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면 그런 것들은 그저 말놀음에 불과함을 알게 되어 결코 그런 이단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성경 이전에 교회의 가르침이 먼저입니다. 교부들께서 성전과 성경을 통하여 세워 놓은 교리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자기식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교회가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일 수 있는 이유는 그 가르침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가톨릭의 기초가 아니라 교부들이 세워놓은 교리가 기초입니다. 우리 교리를 먼저 확실히 안다면 다른 이단들에서 무엇이라 하던 그들 말이 들리지 않고 오히려 거부감이 들어 그들로부터 피하게 됩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우리는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모양은 그저 밀떡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교회를 대표해서 교회 안에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믿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때 신자들은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몸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고백인 ‘아멘!’을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믿으면 그것이 성체가 되지만, 교회를 믿지 않으면 영원히 밀떡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내밀고 있는 교회를 먼지 믿어야지 그 성경말씀에만 집중하면 그저 문자로밖에 보이지 않고 그것만 분석하며 각자의 다른 의견밖에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가 바로 성경을 해석하여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믿으면 됩니다. 먼저 교회를 믿어야만 그 문자가 영적인 것이 되어 나에게 생명을 주는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의미가 있어져 성경이 마치 성체처럼 입에 꿀처럼 달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회개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하느님이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로부터

멀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회개입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은

작은 하나라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회개는 작은 것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을 향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린아이같은

이러한 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낮아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두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늘나라의

필수조건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이미 우리는

하늘 나라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 안에

이미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열대어를 파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대어가 너무나도 예쁜 것입니다. 이 열대어를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가격이 물어보니 생각보다 너무나 비쌉니다. 그래서 딱 한 마리만 달라고 했지요.

주인이 말합니다. 열대어들은 무리를 지어 살기 때문에 한 마리만 사면 안 된다고 말이지요. 이 사람은 주인이 상술을 내세워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정성을 다하면 분명히 잘 살 것이라 확신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로 딱 한 마리를 구입해서 집의 어항 속에 넣고 정성을 다해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게 주인의 말대로 이 열대어는 얼마 못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원래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던 열대어이기에 혼자 있으면 적의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불안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여 죽게 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양 역시 무리를 지으며 사는 동물입니다. 혼자 있으면 불안해지고 스트레스가 생기게 되지요. 또한 양의 특징 중에 한 가지 더 말한다면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산에서 방목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무리를 지으면서 사는 양, 또한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양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착한 목자의 안타까움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착한 목자는 백 마리의 양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그 양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이 양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요. 그런데 이 양이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는 곳으로 갔을까요? 당황하면 더욱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착한 목자는 이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위해 높은 산도 마다 않고 올라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마리 양의 마음을 알고 그 양을 찾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셨지요.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높고 험한 곳으로 숨는다고 해도 짜증내고 힘들어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끝까지 찾으려고 애써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사랑으로 함께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얼마나 기억하십니까? 우리 인간들은 쉽게 포기를 하지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어쩔 수 없어’라는 말로서 포기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주 험한 산꼭대기로 숨는다 해도 또 우리가 사람들 곁을 떠나서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울고 있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내십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품에 안겨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십 년 걸렸다.(김수환)


주님의 곁을 떠나도록 만드는 유혹들...

냉담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꼭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신부님, 언젠가는 꼭 나갈 것입니다.”

사실 매 주마다 성당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런데 꼭 그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날은 비가 오는 것이에요. 바로 그때는 이런 마음이 생겼지요.

‘성당에 가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야.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오잖아. 굳이 비를 맞고 구질구질하게 성당에 가는 것보다는 다음 주에 맑은 날에 가는 것이 기분도 좋고 더 낫지 않을까? 비 오는 날 돌아다니면 피곤하기만 하니까,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어.’

우리들이 주님의 곁을 피해서 산으로 골방으로 숨는 유혹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품을 떠나게 만드는 유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는 어떻게든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 우리를 찾는 주님의 수고를 덜어 드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품이 얼마나 좋은지를,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한 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삶이란 이찌보면

놓침과 잃어버림의

반복입니다. 


우리의 사랑이란 어찌보면

초라함과 작음조차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여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반복의 여정을 통해

참 좋으신 당신 사랑을 펼쳐 나가십니다. 


길을 잃어버렸기에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떠날 수 있는 사람만이

더 큰 하느님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우리자신입니다.

내팽개친 우리자신의 십자가를 다시

껴안을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들을

다시 되찾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 주시는 주님 마음처럼

우리의 마음 또한 집착이 아닌 신앙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하루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묵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시는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린이처럼 된 사람

정상호 신부님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황권은 왕권 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구현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어른들의 논리로 돌아가는 교회였지 예수님이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유하고 강한 교회였지만, 복음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당시 교회는 위기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분이 우리가 잘 아는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교황께 자신들의 공동체를 정식 수도회로 인정해 줄 것을 청하러 로마로 떠납니다. 프란치스코가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님 뵙기를 청했지만 거지꼴을 한 사람이 교황님을 뵈러 왔다고 하니 문지기들은 들여보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교황님은 프란치스코를 들여보내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던 교황님이 전날 밤 어떤 거지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떠받들고 있는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계단 위에 화려한 옷을 입은 교황님이 계시고 두 줄로 나열한 수많은 추기경의 무리, 그 가운데를 걸어 들어가는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예수님밖에 없는 초라한 이가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로 치장된 교회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극명한 대조를 통해 하느님은 교황님과 추기경들께 무엇을 보여주시려 했는지 확실히 드러납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과 청빈 정신에 목마른 사람들은 교황청에서 인가한 프란치스코의 작은형제회로 몰려들었고, 수도회 형제들은 점차 많아져 중세 교회를 지탱해 주는 큰 기둥이 되었습니다. 위기의 교회 안에서 해결책을 간구하던 교황께 하느님이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12세기에 하느님께서 교회를 쇄신하는 방법으로 택하신 것은 부유함도,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누더기를 걸친 초라한 20대의 젊은 수도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현 교황께서 자신의 새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지은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사건을 염두해 둔 것이며, 과연 그 이름대로 교회를 이끌고 계십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부와 명예, 세속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을 따르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 바로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정화하는 빛과 소금이며, 하늘나라의 가장 큰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되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교회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교황'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다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이 말씀은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라는 문제로 다투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가장 낮은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교황은 교회에서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루카복음의 상황과는 다르게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에는 세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1)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서 어린이처럼 되어라.

2)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낮추어라.

3) 나를 받아들이듯이 어린이를 받아들여라.

그런데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과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면'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또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것'(3절)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4절)도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춘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가 다 높은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신분, 계급, 지위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린이' 라는 말은 뒤의 10절에 나오는 '작은이들'을 가리킵니다.

"너희는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작은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들, 즉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 같은 사람들이 바로 '작은이들'입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 라는 말은, '작은이들'의 수호천사들이 항상 '작은이들'의 상황을 하느님께 직접 보고 드린다는 뜻인데, 이 말은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항상 작은이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켜보신다는 것은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작은이들을 업신여기면 안 되는데, 그것 말고도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작은이들에 대한 태도를 당신에 대한 태도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작은이들을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런데 우리는 '작은이들'을 '그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입니다.

'그들'은 곧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작은 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말은 어린이(작은 이)를 흉내 내라는 뜻이 아니라, 진짜로 어린이(작은 이)가 되라는 뜻입니다.

흉내 내는 것은 거짓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의식 자체가 없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어떻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높아지고 싶어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낮추고 싶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쁜 욕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라고 하신 것은 그런 나쁜 욕망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낮추지 않고(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높아지는 방법입니다(루카 18,14).

하느님 앞에서 높아지고 싶어 하는 것은 좋은 소망이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한다면 이 소망도 나쁜 욕망으로 변질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존중과 존경과 대우를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바로 그 만족감이 사탄의 함정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하면서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이라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사탄에게 굴복하는 일이 됩니다.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오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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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로 이루어진 두 단어, 존경(尊敬)과 존중(尊重)의 차이를 우리는 안다.

이 단어들은 같은 의미로 한국, 일본, 중국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

가끔 외국선교사들에게 존경과 존중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진땀을 빼기도 한다.

왜냐하면 존경이나 존중 두 단어 모두를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언어들은 한 단어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존중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다.


존경과 존중의 차이에 대해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대로 간단히 정리해보련다.


존경은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의 삶이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은 모범을 보이고 있을 때,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닮고 싶게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존중은 누구에게나 쓸 수 있고 써야만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의 조건이나 행동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서 그 인격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자세를 말한다.


오늘 묵상하고 싶은 내용은 존중(尊重)이다.


개인적으로 영향을 크게 받은 존경하는 신부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을 생각하면 항상 ‘한결같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 신부님은 내로라하는 정치적 힘이나 부의 힘을 가졌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허기져 먹을 것을 청해 한 밤 중에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는 이들에게도 한결같은 마음과 태도를 보였다.

그 마음은 바로 존중하는 마음이었다.


우리는 참 많은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상대를 눈 아래로 보려 하고, 상대가 나를 눈 아래로 보려 할 때 만들어진다.

스스로도 의식 못하는 이러한 태도에 의해 골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 받는다.


존중이란 내 앞에 있는 이 사람 안에도 하느님의 계획과 뜻과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주어지는 마음이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군가의 아들 딸로서, 완전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폭력이 가능하겠는가?


관계의 열매는 높고 낮음이나 가지고 못 가짐의 구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할 때 주어지는 결과이다.

무조건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사람의 옳지 못한 행동을 존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귀함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오18,10)


존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허락될 때,

약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투신하는 삶까지도 가능해짐을 믿는다.




누구도 업신여기지 마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가 동경에 보고한 정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진주만에 거하는 미해군 전함의 동태가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비밀 내용을 탐지한 연방수사국(FBI)은 정부 당국에 긴급히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진주만 근처를 배회하는 일본 어선들은 스파이선이므로 경계 요함.’

그러나 정부 당국은 이 긴급 보고서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냥 흘려버렸습니다.

또한 당시 동양에 선교사로 갔다가 막 돌아온 월터 저드 박사도 일본이 전쟁 준비에 광분해 있다고 되풀이하여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한낱 선교사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12월 7일 월터 저드 박사는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설교할 때 또 한 번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일본이 선전 포고도 없이 하와이 진주만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진주만 폭격에 대한 많은 보고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미국은 그것들을 무시했습니다. 일본이 감히 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커보이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어른이 되어 방문해보면 매우 작아 보이는 이유는, 운동장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단하다고 느낄 때 남을 판단하게 되지만 어린이처럼 겸손해지만 모든 이를 존중하게 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 우주보다 크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실 때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하나의 세포로부터 출발하셨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또한 지금도 성당에서는 가장 좁은 곳에 가장 작은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도 알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남을 무시하는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게 되신 그리스도가 가장 큰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교회의 수장으로써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작게 보는 교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큰 죄를 저지르고 나서는 누구도 자신보다 작게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예수님은 이런 어린이와 같은 시선을 지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옛날 산골,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는 배가고파 온 종일 우는 게 일이었지요. 아기의 부모는 우는 아이에게 회초리로 울음을 멎게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매를 맞을 수밖에.

그날도 부모는 우는 아이에게 매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집 앞을 지나던 노스님이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연 무슨 생각이 난 듯 집으로 들어와서 매를 맞고 있는 아이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습니다.

이에 놀란 부모는 스님에게 연유를 묻습니다.

“스님! 어찌하여 하찮은 아이에게 큰절을 하는 것입니까?”

“예... 이 아이는 나중에 정승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곱고 귀하게 키우셔야 합니다.”라고 답하고 스님은 홀연히 자리를 떴습니다.

그 후로 아이의 부모는 매를 들지 않고 공을 들여 아이를 키웠습니다. 훗날 아이는 정말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스님의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감사의 말씀도 전할 겸 그 신기한 예지에 대해 물어보고자 스님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스님을 찾은 부모는 웃음을 띠며 감사의 말을 건네고 바로 궁금했던 점을 묻습니다.

“스님, 스님은 어찌 그리도 용하신지요. 스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우리 아이가 정승이 되리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빙그레 미소를 띠던 노승은 차를 한 잔씩 권하며 말문을 엽니다.

“이 돌중이 어찌 미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하나이지요. 모든 사물을 귀하게 보면 한없이 귀하지만 하찮게 보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지요. 마찬가지로 아이를 정승같이 귀하게 키우면 정승이 되지만, 머슴처럼 키우면 머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머니와 스님의 시선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무시했고, 스님은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스님처럼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이에게도 넙죽 절할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나는 커지고 있는가, 작아지고 있는가?’를 두고 혼자 고민할 때 해답을 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처음엔 고해성사 주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왜 저런 죄를 짓지?’, 혹은 ‘왜 저렇게 살지?’하며 판단을 하니까, 고해를 몇 명만 들어도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저 처지였다면 더 큰 죄를 지었을 수도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쉽고 고해를 듣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조금씩 어린이가 되어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면 내가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 있어서 그런 상태로 죽으면 하늘나라에서 결코 큰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새벽,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날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많은 차들이 거리에 일찍 나와 있더군요. 어느 도로에서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떄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굵은 목소리로 심하게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화물차 운전기사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지요. 화물차가 비보호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앞에 직진을 하려는 어떤 택시가 가로막고 있어서 우회전을 할 수 없다고 화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비보호 우회전을 하는 그 마지막 차선이 직진도 가능한 차선이라는 것이지요. 즉, 화물차 운전기사는 자신이 옳다고 큰소리를 치며 화를 내고 있었지만, 사실은 화를 내고 있는 이 운전기사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택시운전기사와 화물차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서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분이 싸우는 바람에 도로의 교통상태는 아주 나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지요. 분명히 잘못했음에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시간도 또한 남의 시간까지도 빼앗게 된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한다면 간단하게 끝낼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남 앞에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이들의 다툼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긴 거의 모든 어른들이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저 역시 남 앞에 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여러 체험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러나 가장 빨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재빨리 사과하는 것입니다. 


어른과 다른 어린이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어린이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때론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 거짓말이 들통하면 곧바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합니다. 


이러한 어린이의 모습을 어른들은 어느 순간에 잃어버립니다. 말하는 법만 늘어서 각종 핑계를 대는 데에 급급한 것은 물론, 먼저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인지 듣기 싫은 욕과 함께 큰소리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하긴 어른들의 이런 모습은 먼 옛날, 예수님 시대에도 똑같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숙하지 않은 어린이가 더 잘못과 실수를 많이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 곧바로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때때로 갈림길과 마주치게 됩니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갈 때,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순수한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평범한 일을 매일 평범한 마음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비범한 것이다.(앙드레 지드)


허수아비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어려워서, 내게 왜 이러한 순간이 찾아오냐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위 사진에 있는 허수아비처럼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그냥 들판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냥 서 있기만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해보세요. 내가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불행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보다는 내가 다가서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실천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에도 더욱 더 그 앞으로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1500년경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매우 신비스러운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이 도시에서 꽤 이름난 화가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건넸지요.

“그림 값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 초상화를 그려주시겠습니까?”

여인을 본 화가는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나는 너무 바빠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저기 길 건너 초라한 곳에 가면 일거리가 필요한 화가가 있소. 그 사람에게 가보시오.”

초라한 곳에서 일거리를 필요로 했던 화가는 누구였을까요? 그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습니다. 그리고 신비로운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은 모나리자였지요.


이 일화를 통해, 교만한 화가에게서는 아름다운 것이 나오지 않고 겸손한 화가로부터 유명한 명작이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쓰시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겸손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겸손하기 위해서 무슨 용기가 필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겸손보다는 교만을 선택하는 것을 볼 때 겸손하기 위해서는 상상하기 힘든 용기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그 겸손의 모범을 어린이들에게서 발견하라고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으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굳어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어린이를 따라 한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즉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긴 참 스승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공자도 자신을 포함하여 세 사람이 모이면 두 사람은 스승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왼쪽에 있는 나쁜 사람을 보고 따라하지 않으면 그가 스승이요, 오른쪽에 있는 좋은 사람을 보고 따라할 수 있으면 그도 스승이라고 했지요. 결국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세상 도처에 있는 위대한 스승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우리들이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지는 것임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버이에게 늘 좋은 것 드릴 생각을 하고, 드릴 것이 없으면 하루에 두세 번 웃는 얼굴로 대하라(니치렌).


생각도 연습이 필요하다(‘좋은 생각’ 중에서)

“골프공 표면의 구멍은 몇 개일까?”

어느 회사의 면접 때 응시자들이 받은 질문이다. 응시자 대부분은 “공을 반으로 자르면 중간에 구멍이 제일 많고 하나씩 줄어드니 200개 정도 될 것 같아요.” “집에 골프공이 있는데 구멍이 300개 정도 되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 응시자의 대답은 달랐다.

“골프공 둘레가 4~5Cm, 구멍의 둘레가 2~3mm 된다고 했을 때 가장 큰 둘레의 구멍은 대충 25개일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개씩 줄어들어 결국 백 몇 개가 될 것 같습니다.”

이후 그는 회사에 당당히 합격했다.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잘 피력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즉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답을 요구할 경우, 그 과정이 복잡한 수학적 사고를 필요로 할 수 있는데, 이때 완벽한 답보다 어떻게 실타래를 풀어 가는지를 보려는 게 질문의 핵심인 것이다.

이렇게 답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를 ‘페르미 추정’이라 한다. 노벨상을 받은 이탈리아 물리학자 페르미가 학생들의 사고력을 시험하던 문제에서 유래했다. 이 문제들은 대개 정답이 없다. 지식으로 풀라는 게 아니라 생각의 힘을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하루 동안 소비되는 피자는 몇 개인가?” 같은 문제가 이에 해당된다.

정답은 없지만 답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고하는 과정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준다. 아주 사소하거나 당연한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각의 문을 열어 보자. 늘 걷던 길이 새로운 길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철없던 젊은 시절 ‘내가 누군데’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정말 부끄럽게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경험도 일천하고 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폼만 ‘디따’ 잡았으니 사람들 눈에 얼마나 한심스럽게 보였겠습니까?

이쪽에서 뻣뻣하게 나가니 저쪽에선들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좌충우돌, 갈팡질팡 하면서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는 게 늘 진흙탕 속이었습니다.

이제야 가슴 치며 뉘우치는 것 한 가지는 인생을 그렇게 팍팍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피를 말리는 경쟁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좋은 세상, 이 금쪽같은 시간들, 사랑하며 살기에도 바쁘고 아까운데, 아옹다옹, 티격태격하느라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꽤나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조금이나마 깨닫고 보니 삶이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모릅니다.

나만 그런 아픈 체험을 했나 생각했더니, 여러 선배 신부님들도 저와 똑같은 체험을 먼저 하셨더라구요. 한 신부님 표현에 따르면, 서품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습니다. 사제가 되니 기분이 마치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더랍니다. 갑자기 햇가닥해 버리셨답니다. 우쭐한 기분에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습니다. 우쭐할 대로 우쭐해져서 동네방네 다니면서 ‘내가 신부야 신부’, 하고 외치고 다녔더니 사람들이 ‘저건 신부도 아니야’라며 자신을 신부 취급도 하지 않더라더군요.

세월이 좀 흘러 나이가 들었고, 동시에 인생의 단맛 쓴맛 다보고난 어느 날,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큰 부끄러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나 같은 건 사제 자격도 없다’고 외치기 시작했더니, 그제야 사람들은 당신보고 신부님, 신부님 하더랍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자신의 근원, 근본을 망각한 채 내가 누군데, 하는 순간 하느님은 물론이고 인간까지 우리를 떠나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필요한 노력이 절대 내가 누군데,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높은 사람, 큰 인물,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높이 올라가면 서서히 내려올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꼴불견 중의 꼴불견은 별것도 없으면서 목에 잔뜩 힘주고 다니면서 ‘내가 누군데’, 하고 뻐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 됐든 상관없이 어떻게 하면 윗자리 차지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입니다. 든 것도 없으면서 엄청 자신을 부풀리고 과대 포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위선자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거품을 빼내야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중성과 위선, 형식주의를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회개의 첫걸음이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한 바탕입니다.




순수함

박진형 신부님

매년 석가탄신일이 되면 언론매체를 통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동자승입니다. 동자승들은 하나같이 귀엽고 천진난만하며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미소는 언제 보아도 너무나 해맑습니다. 물론 동자승들뿐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어린이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로 나약하지만 아직 때 묻지 않은 존재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과 웃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는가 하면 세상을 이해타산에 맞춰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세나 세상에 대한 걱정보다는 부모님께 모든 걸 의탁하며 자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죄를 짓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순수함은 하느님의 영이기에 이를 보존하며 간직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와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곧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이들은 모든 사물이나 대상을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순수 그 자체는 우리를 광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자

임창현 신부님

초등학생인 영철이에게 미술시간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글자와 씨름을 하지 않아도 되고 숫자들과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날 미술 시간은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나름 예쁘게 그림을 그리고 발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짝꿍이 발표를 하러 나가면서 팔레트를 엎질렀다. 검정색 물감이 도화지 한쪽 구석에 묻어 번져버렸다. 다음 발표는 영철이인데 검정색 물감 때문에 너무나 속이 상했다. 그래도 발표를 해야 했다. 영철이는 고민 고민 끝에 검정색 물감이 묻은 부분을 손으로 가린 채 발표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인생이라는 커다란 도화지 가운데 조그맣게 검정색 물감으로 얼룩져 있는 곳이 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어떻게 하면 잘 가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또는 나에게 들키지 않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비록 얼룩진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분열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온전한 그림은 도화지 한 장 전체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알려주신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구하러 왔기 때문이다.”(마태 18,10­11)

어두운 부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통로다. 이 사실을 알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내 인생에 그려진 온전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을 품는 낮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이 말씀은 조금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낮춤”이 어린이다움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낮추는 것은 높이려는 것의 반작용이니 어린이가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낮추고 높이는 것이 무엇인지 어린이가 벌써 알 뿐 아니라 어른들처럼 자신을 높이려든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되바라진 아이가 아니라면 어린이는 높일 줄 모르고, 그러니 낮추지도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살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의 참 뜻은 높이려는 것의 반작용으로서의 낮춤이 아니라 도무지 높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높이려 들지도 않기에 낮은 곳에 있는 낮춤입니다.

높이려는 사람들 천지인 가운데 홀로 높이지 않으니 홀로 낮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이 큰 것은 낮은 곳에 있어도 낮은 것이 전혀 불쾌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아 높다는 이들이 하대를 해도 다 받아들이고, 높다는 이들이 모욕을 해도 다 받아들이고, 높다는 이들이 비난을 해도 다 받아들이니 그 그릇이 큰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의 하대와 모욕과 비난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은 산은 모든 물을 흘려버리지만 가장 낮은 바다는 모든 물을 담습니다.

가장 낮은 바다가 가장 큰 이치입니다.


가장 낮은 사람이 하늘나라를 품고 있고 하늘나라를 품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낮출 수 있습니다.





남편이 연락도 하지 않고 귀가하지 않아 아내는 온갖 걱정이 휩싸입니다. 그러면서 꼬박 밤을 새었지요. 그런데 이 남편이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한 잔을 했는데, 너무 마셔서 친구 집에서 자고 왔답니다. 이 말에 아내는 곧바로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 10명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참 이상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글쎄 이들 중 8명이 남편이 자기 집에서 자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2명은 그가 아직도 자기 집에서 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몸은 하나일 텐데 10명의 집에서 잤으며, 아직도 2명의 집에 남편 몸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당연히 거짓말이지요. 친구에 대한 우정을 이유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오히려 남편을 더욱 더 곤란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지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짓말이라고요.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거짓말을 통해서 평화가 더 깨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거짓말이 해답이 아니라, 진실이 해답인 것입니다. 거짓말은 순간의 안녕을 도모하지만, 진실은 영원한 안녕을 가져옵니다. 또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되지만, 진실은 언제나 진실한 나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처럼 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는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얼굴에 금방 티가 나지요. 그래서 어린이는 결국 울먹울먹 이면서 죄를 고백하고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런 어린이와 같은 모습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갖고 회개할 수 있는 우리, 거짓이 아닌 진실을 간직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타이핑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 ‘행’이라는 단어가 한글전환이 되지 않아 영문으로 쓰여 있는 것입니다. 즉, ‘god’라는 글씨가 적혀 있더군요. ‘god’의 뜻이 무엇인가요? 유명 인기 가수 그룹명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하느님’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행’이라는 글씨가 들어가는 단어들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 불행, 행운, 행동, 행실, 요행, 다행 등등……. 이를 보며 들은 생각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거짓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진실한 삶만이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당신에게는 무엇이든 이뤄 주는 요술 방망이가 있다. 땀과 수고다(캐롤라인 아담스 밀러).


초상화

어떤 화가에게 한 정치인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초상화가 나왔고 이에 대한 가격 500불을 지불해달라고 화가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치인은 문득 500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초상화를 본 정치인은 자신과 닮지 않았다며 약속한 500달러를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화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림이 선생님과 닮지 않았다는 것에 서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정치인은 다른 사람에게 더 싸게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서명을 했지요.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미술관을 찾은 정치인은 기절할 뻔 했습니다. 그곳에는 자신의 얼굴이 그려있는 초상화가 있었는데, 그 초상화의 제목이 이러한 것입니다.

‘어느 도둑놈의 초상’

돈이 아까워서 지불하지 않았던 자신의 초상화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밑에 ‘도둑놈’이라고 적혀 있으니, 그 도둑놈은 과연 누구를 가리킬까요? 결국 이 정치인은 그 그림을 원래 가격의 열 배를 주고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것에 기준을 두고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으니까요.



 


두 명의 정신병자가 병원에서의 탈주를 시도했습니다. 우선 시트를 찢어서 길게 묶어 창밖으로 늘어뜨렸지요. 그리고 한 명이 길게 늘어뜨린 시트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다시 올라와서는 말합니다. 

“안되겠어. 너무 짧아.”

다시 그들은 심지어 속옷까지 동원하는 등 뭐든 눈에 뛰는 건 다 꺼내 묶었습니다. 다시 그 남자가 줄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시 올라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시 안 되겠어. 이번엔 너무 길어.”

분명히 1층까지 내려가려면 그 줄이 바닥까지의 높이보다 길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짧아서 안 된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긴 것까지도 너무 길어서 안 된다면서 다시 올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우리들도 이러한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나보다 훨씬 크시고 나의 생각을 뛰어넘는 크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주님의 그 크심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에게 주님을 맞추려고 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 대한 원망도 많습니다. 


왜 저에게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주시냐는 원망들, 나에게는 왜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를 주시지 않느냐는 원망들, 내게 재주와 능력이 없음을 탓하는 원망들……. 이밖에 많은 원망을 주님께 표현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 원망을 드리고 있다는 것은 나한테 주님을 맞추려는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요? 그 반대로 나를 주님께 맞춰야 하는 것이 옳은 길인데 말이지요. 


주님은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분입니다. 바로 그 점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인구분포를 봤을 때도 어린이의 인구분포는 우리나라에서 10%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니겠지요. 주님께서는 100%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격이 어른처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어른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른의 마음으로 하늘 나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어른의 마음을 버리고 어린이의 마음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주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를 맞추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 나를 맞춥시다.


마케팅을 가르친 할아버지(댄 J 샌더슨, ‘섬기는 기업 문화가 경쟁력이다’ 중에서)

어느 날 오후 할아버지께서 나를 밭으로 데려가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그만 돌멩이들을 모두 주워 담아라.”

날이 몹시 더웠을 뿐더러, 내겐 그런 일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이 수백 가지는 더 있었다. 그래도 별 수 없이 낡은 양동이 하나를 집어 들고 돌멩이를 줍기 시작했다. 꽤나 오래 일을 했다 싶을 무렵이 되자 나는 지루함을 참기 힘들었다.

“별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 같구나, 얘야.”

“지겨워요. 전 돌을 줍는 거 안 좋아해요.”

“그래? 그럼 네가 좋아하는 일은 뭐니?”

“운동이요.”

할아버지가 다시 물으셨다. “혹시 농구 좋아하니?”

“엄청 좋아하죠!”

“여기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양동이가 농구 골대고 돌멩이들이 농구공이라면 어떨까? 30분 동안에 양동이를 몇 개나 채울 수 있을 것 같니?”

나는 조그만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고 가벼운 점프 슛을 날려 보았다. 돌멩이는 양동이 한가운데로 쏙 들어갔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밭의 돌멩이들은 점점 사라졌고, 나는 상상 속의 농구 게임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나는 기업의 리더들에게 광고와 마케팅의 차이에 대해 교육할 때 이 교훈을 종종 써먹곤 한다. 할아버지께서 내게 텃밭의 돌멩이들을 주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거기 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저 ‘광고’ 하신 것뿐이다. 그러나 양동이가 농구 골대고 돌들이 농구공이라는 말로 나를 설득하셨을 때 할아버지께서 하신 것은 바로 ‘마케팅’이었다. 그 일에 대한 할아버지의 관점을 내가 수용한 결과, 자갈은 메디슨스퀘어 가든(뉴욕의 대표적인 명소)이 되고, 나는 뉴욕 닉스 팀의 스타급 포워드가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 기운 빠지고 고문 같기만 하던 순간이 갑자기 가장 즐거운 여름날의 기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 중심의 문화가 바로 이러하다. 그런 문화에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마케팅’해야 한다.




뉘우침

김호균 신부님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힘든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학업문제였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였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다가왔습니다. 너무 힘겨워 공동 공부시간에 규칙을 어기고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나갈까? 말까?’ 고민을 하며 엎드려 있다가 그만 설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취침종이 울리고 동기들이 들어와 불쌍하게 엎드려 자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는 요를 깔아 저를 눕히고는 모기장까지 쳐주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설잠을 자고 있는 제 귓속으로 이런 말이 들려왔습니다. 

“요즘 할매(제 별명) 힘들어하는데 우리가 도와줘야 해. 모기 안 물리고 푹 자게 우리가 잠자리를 봐주자.” 그 말을 들으며 때때로

“저 녀석만 없으면 신부되는 것은 일도 아닌데”라며 미워했던 속 좁은 마음은 이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날 밤 저는 신학교 들어온 이후 가장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하늘 나라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느낌을 가지면서 말입니다.




사랑으로 인하여

남궁영미 수녀님

누구나 한 번쯤 ‘회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워지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회개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의 하나는 그것이 행동의 잘잘못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고해소에서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사실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고해성사에서 이렇게 표면적인 행동에만 초점을 두어 잘못을 고백하게 될 때 ‘회개’한다는 것은 다소 의무적이고 불편한 과정이 되어버리지 않을까요? 회개한다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회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J. 플랜바흐는 ‘죄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근본적인 죄에 대한 이런 인식은 그동안 부단히 우리 자신을 힘들게 했던 많은 의무와 행위에 대한 자책에서 우리를 더욱 자유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할 일이란 그 사랑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변화·성장시키시도록 아무런 방어 없이 우리를 열고 그분께 내놓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는 데 어른보다 훨씬 용감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이해받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이 자신의 행위를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고,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아이들의 믿음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실수나 잘못을 통해 배울 수 있고, 그렇게 배운 것을 삶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때로 깊은 감동을 줍니다. 

사랑은 이렇듯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약한 우리의 인간성에 또는 죄로 상처 받은 이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진실한 회개를 하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신뢰하는 것, 결코 쉽지 않은 그 회개의 삶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미사에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막대사탕 하나씩을 꼭 줍니다. 그 막대사탕은 일반가게에서 팔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격이 비싼 것으로, 처음에 이것을 나누어주었을 때 아이들은 너도나도 받으려고 안달이 났습니다. 사실 막대사탕 중에서도 가격이 싼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근처의 학교에서 싸구려 막대사탕을 먹다가 한 어린이가 사고 난 적이 있다고 해서 기왕이면 가장 비싼 것(우리나라 제품이 아닙니다)으로 주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이렇게 막대사탕을 계속 주니까, 어른들이 아이들 주라면서 막대사탕을 몇 봉지씩 사다 주시곤 합니다. 물론 제가 주로 주는 사탕이 아닌, 다른 상표의 사탕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새로운 막대사탕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오는 막대사탕이 훨씬 비싼데도 말이지요. 하긴 제가 주려는 사탕을 보고서는 어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빨 썩어요. 살쪄요.”


어른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비싼 것,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가격에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합니다. 즉,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이들이 제 앞에 쪼르르 오더니만 학교 앞 문구점에서 뽑기를 했는데 이것을 뽑았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저는 무엇인가 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지우개였습니다. 생긴 것도 조잡한 것이, 제게 돈을 준다고 해도 갖지 않을 형편없는 지우개였습니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요. 이런 것을 하느니, 차라리 먹을 것을 사먹으라고…….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100원을 넣고 직접 뽑은 것으로, 다른 아이들이 없는 자신만 가지고 있는 귀한 지우개라는 것이지요. 


어른들은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의심해보고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의심하지 않고 지금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어린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다 자란 어른이 어떻게 다시 어린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마음으로는 그 어린이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특성인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항상 새롭게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내 마음 안에 간직하려 한다면 또한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을 따르려고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어렸을 때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이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이유가 왜 일까요? 비록 실수를 많이 하는 어린이지만, 그 순수한 모습이 더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마음인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며 산다면 지금 당장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어린이처럼 되라고…….”


어린이의 특성을 내 마음 안에 간직해보세요.


사랑법(이철환, ‘반성문’ 중에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그래야 햇볕 때문에, 양분과 수분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는다.


산속에 서면 산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을 하면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날들은 길지 않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다.

먼 길을 가야 할 사람은 가로등을 보지 않는다.

먼 길을 가야 할 사람은 달빛을 보며 걷는다.


사랑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사랑보다 두 걸음 뒤에서 걸어간다.

사랑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달빛을 보며 걸어간다.

 



작은 이여, 나에게로 오라”

임문철 신부님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제가 가장 탄복하게 되는 것은 수난도 아니고,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도 아니라, 바로 한 여인의 몸에서 한 점보다도 작은 세포 하나로 잉태되시어 점점 태아로 자라나는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신 주님이시지만 제게는 그 잉태의 순간과 태중의 모습이 더욱 경외롭게 다가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도 자신을 작게 하실 수 있는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도 당신 자신을 무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묵상할 때마다 저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기가 가장 어렵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 무언가를 위해서 작위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저절로 낮아지는 삶, 그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빈 마음

전의이 수녀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네 관심사는 누가 더 큰사람인가를 따지는 데 있는가 보다. 예수께서 그토록 작은 자의 길을 가르쳐 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들 중에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살던 마을 뒤편에 산등성이가 있었다. 밥만 먹으면 동네 코흘리개들이 산등성이에 몰려와 데굴데굴 구르며 놀았다. 나지막한 산소가 작은 우리의 눈에는 커다란 성처럼 느껴졌고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는 이 세상 끝인 것 같았다. 매일매일 올라타던 마을 어귀 느티나무는 발만 대도 주르륵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훌쩍 커버린 모습으로 그 산등성이를 찾았을 때 마음 안에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 크고 광활하던 산등성이를 겨우 두 폭 걸음으로 오르다니. 거인이 된 그날 내 눈에 비쳐진 세상은 너무나 작게만 보였다.

그런 비대해진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현기증이 나 쓰러지고 말았다. 세상의 온갖 잡다함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소중하고 경이롭게 보이던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비대해진 내 마음은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나보다 더 큰 이를 동경하고 또 그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느새 거인처럼 커져버린 내 마음 안에는 더 이상 주님이 머무실 공간이 없었다. 주님께서 내게 심어주셨던 하느님 나라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한 현기증에 시달릴 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주님은 작고 어린 자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다시금 큰소리가 들려왔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쉽다.” 오늘 우리 세대는 마이크로 시대다. 아마 주님은 오늘의 세대를 위해 미리 이 단어를 쓰셨나 보다. ‘작은 자’는 그리스어로 ‘미크로스(mikxnltv")’로, 이 말에서 ‘마이크로(micro)’가 나왔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렇게 ‘작은 자’ 곧 영적으로 가난한 비움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황태웅 신부님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농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나 어떠냐?”하셨답니다. 부활하셨으니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뵙는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는 주님을 더 가까이 모실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앞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12명 중에서 누가 제일 큰사람입니까? 베드로였습니다. 그 나머지 사도들의 서열은 어떻습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군대에는 계급 순이고 또 다른 모임에는 나이순이던 직위 순이던 간에 어떤 서열이 정해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서는 이것이 아주 뚜렷했고, 성전 내에서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대우를 받기를 좋아했고 모임이나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에 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거기가면 무엇으로 서열을 정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조건부터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하고 어린이와 같이 되는 일”을 예수님께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입니까? 생각이나 행동의, 한마디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다인들이 추구해왔던 것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살아가던 삶의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그 방향을 돌리라는 말입니까? 그 대답은 확실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중에도 착한 어린이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아니한 어린이도 있고, 또 어린이들도 다투고 속이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신체적 어린이를 말씀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냥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하지 않으시고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어른들 가운데 한 어린이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뽑아놓고 가까이 하시던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이름도 없고 몸집도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택되고, 내노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던 신체적으로 또 어떤 면으로 보나 보잘것없는 어린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성숙한 남자들 가운데 서 있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도 없고 자신만만하지도 않는 작은 어린이, 이런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장한 사람이 다시 유아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신체적인 어린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어린이입니다. 이러한 어린이가 되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야 누가 현명하고, 뛰어나고, 자신만만하고, 성숙된 사람으로 자처하겠습니까. 보잘 것 없고 도움이 필요하고 보호를 받아야 할 자신을 잘 알면서 높은 자리다툼을 하고, 큰사람 작은 사람 따지겠습니까?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그 도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해 질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의지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 도우심을 잘 받아들입니다. 오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항상 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여럿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중에서 “누가 더 큰사람이냐”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데 앞선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 29) 하시면서 스스로 겸손한 분, 어린이와 같은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또 병들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 받고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이 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법칙으로 주신 “작은 사람이 큰사람이 되고, 큰사람이 작은 사람이 되는 법칙”은 세상 종말에도 적용이 됩니다. 또 결코 지키기 쉬운 법칙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고 또 저기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서 꼭 지켜야만 합니다.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권오광

우리 부부는 큰아이 하나만 낳고 그만 낳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큰애가 다섯 살이 되면서 동생을 낳아 달라고 조르다가 성모상만 보면 성당에서나 집에서나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집에서 기도를 가르치며 “기도할 때는 두 손을 앞으로 곱게 모으고 기도하는 거란다”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딸아이의 얼굴이 환해지자 “무슨 기도를 했냐?”라고 물었습니다. “동생 낳아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손을 주셔서 감사하다고요”라고 대답하기에 “어째서 손을 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하니?” 하고 묻자 “손이 없으면 기도를 할 수 없잖아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도는 손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섯 살 어린아이가 자기 ‘소원을 빌기 위해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할 수 있다’는 감사를 드리는 이 순수한 마음과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주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이 바라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나약하고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권능 앞에 모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나 스스로가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교만과 아집, 경험에 입각한 고정된 관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겸손은 신앙의 열쇠

오남주 신부님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가면서 끊임없이 갖게 되는 것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를 통해 상대방이 나에게 인상 깊게 풍겨주는 장점을 말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장점 중에 장점은 겸손의 덕목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성품을 가진 사람치고 누구에게나 호감과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주위에 적이 없고 모든 사람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겸손과 신앙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앞에서 들은 성경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 가봅시다. 예수님은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남을 속이지도 않고 앞뒤를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순수함의 상태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하느님 앞에서 겸손을 이런 어린아이에게만 있는 순진무구함에다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 원죄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느님에 대한 교만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 짓는 여러 종류의 죄는 모두 교만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교만심을 거두어내지 않으면 절대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마태오 11,25에 기도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역시 마음이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을 바꾸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만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이런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부하군인 백 명을 거느린 로마군 장교 백인대장의 얘기가 그 한 예입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집안의 종이 중풍에 걸려 신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직접 뵙고 자기 종의 치유를 간청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식민지 이스라엘을 통치하러 온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신분상의 우월감이나 사회적인 특권의식도 없이,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 위신이나 체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기 종의 병치유를 위해, 예수님 앞에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란 말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의 이런 겸손의 마음은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이와 같은 그의 신앙은 예수님을 가장 인격적으로 만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백인대장에게 있어서 그의 겸손은 예수님께로 가는 신앙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백인대장과는 반대로 평소 돈독한 신앙인으로 자부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칭 열심하다는 신앙심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언제나 교만심과 쓸데없는 아집에 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가장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내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흔히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된다는 뜻으로 통합니다. 현세에 대한 가치욕망으로 그 마음이 꽉 차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머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은 이 마음속에 꽉 찬 세상 가치들을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즉 겸손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울 수 있는 것과 통하지요. 


돈과 과학기술이 하느님 대신으로 우상화 되어 있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렵겠지만 누구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첫 관문을 따주는 내 안의 열쇠와도 같은 겸손지덕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충귀 신부님

수력발전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생기는 낙차를 이용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낙차가 크면 클수록 전력은 더욱 세어진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높은 곳의 하느님 능력이 사람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해서 낮추면 낮출수록 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람과 사회의 논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더 높은 곳에 있고 대접받으며 잘 사는 것처럼 보이고 더 적게 가지고 더 적게 배운 사람이 낮은 곳에 있으며 잘 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나 그 자녀들에게 더 많이 가지는 방법, 더 많이 아는 것에 대해 살아가는 모든 정신을 집중합니다. 

참인간으로서의 삶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남에게 뒤쳐지지 않고,더 많이 가지고,더 많이 배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그것만이 사람이 살아가는 유일한 것인양 너무 바쁘게 바쁘게들 삽니다. 

정작 우리가 추구하며 우리가 가져야 할 인간성을 잊어버린채,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깐 나도 내 자식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뒤쳐지지 않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이들은 적당히 무시하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한 이들과 더 배우지 못한 이들도 그들의 탓으로 돌리거나 무관심하게 함께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의 이러한 삶의 논리와는 다르게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며, 당신을 따라 사는 이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 누구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저는 지금 나의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금 살아가는 곳에서 바라보는 눈높이를 낮추는 것, 세상에 대한 기대치와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세상의 눈높이를 낮추어야 그 낮아진만큼 나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눈높이가 낮아져야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고, 하느님을 느끼고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며, 그들도 나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낮추어진 나를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높이를 낮출줄 알고 자신의 기대치를 낮출줄 안다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이 더 이상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아님을 알게 되며 그들도 똑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숨울 쉬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녀 데레사에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합니다. 

“눈 앞에 있는 이 높은 환난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성녀 데레사가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뛰어 넘을 수 없으면 밑으로 빠져 나가세요”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주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가장 하찮고 낮은 종 같이 되심으로써 가장 부유하고 가장 귀하며 가장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기대치와 눈높이를 우리 삶의 목표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런 나를 통해 높은 곳의 그분께서 당신의 그 놀라운 능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시면서 여러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눈높이를 하느님께로 맞추어 보시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기대치를 하느님의 기대치로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이 마음을, 이 상황을, 이 느낌을 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하루의 걸음걸음들이 그분의 나라를 걷는 삶 되시길 미약하나마 기도로써 함께 합니다.





세계적인 지휘자로 유명한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번스타인은 의외의 대답을 했답니다.

“제2바이올린입니다. 제1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과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플루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연주자는 많지만 그와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줄 제2연주자는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아무도 제2연주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름다운 음악이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늘 1등만을 원했지요. 그래서 주연만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고, 반대로 조연이 무시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다보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주연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주연을 향해서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으며, ‘나는 안돼’라는 부정적인 언어로서 스스로 삶의 실패자라고 각인을 시키는 경우도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영화로 예를 들어보지요. 만약 영화에 조연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주연이라면 어떨까요? 가능할까요? 모두가 주연이 되도록 각본을 쓰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렇게 모두를 주연처럼 만들었다가는 모두가 조연이 되고 말껄요? 그리고 영화의 재미도 반감되겠지요. 물론 영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연들의 얼굴만을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주연이라는 것은 조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연의 역할에 충실할수록 주연이 더욱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일상 삶에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뛰어난 능력과 재주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 주위에서 조연의 모습으로 그를 돕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사람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는 주연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바로 이 조연의 역할, 즉 주연을 드러나게 해야 할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연을 유일하게 드러내게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삶의 주연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조연입니다. 즉, 주님이 이 세상 안에서 환히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인 것입니다. 특히 주연이신 주님께서는 조연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까지도 살피시는 사랑 가득한 주연이심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의 조연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지요? 혹시 주님을 조연으로 만들고, 스스로 주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착각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조연의 역할에 자부심을 가집시다.


나는 약속합니다('가슴에 남는 좋은 느낌'에서)

나는 나의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연이 아름답고 사람들이 아름답고

그들과 함께하는 나의 하루도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날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내가 발전하며

또 나의 건강과 마음 아픔을

그분들이 염려한다는 것을 고마워 하면서

그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나는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음지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도울 것이며

그분들의

생활이, 아픔이 나아지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그중에 특별히 몇 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스승등 몇 분을 특별히 사랑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서로 질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감사와 기쁨을 가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기쁨을 찾고 또

내가 기쁨의 원천이 됨으로

다른 이들도 기뻐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좋은 생각을 많이할 것입니다.

어느 땐 나쁜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때는 머리를 흔들어 그것을 털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

적극적인 생각,아름다운 생각만을 하면서

내 이름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할 것입니다.

 



작은 것들의 하늘나라(天國)

강영구 신부님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대에게

저는 요즘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김민수 목사가 펴낸 ‘내게로 다가온 꽃들’(한얼미디어)이라는 책입니다.

무심히 지나치거나 밟고 다니는 작은 풀꽃들을 관찰하고, 

꽃의 생태와 꽃 말, 꽃에 얽힌 신화와 전설 그리고 이야기들을 사진과 함께 수필 형식으로 담아놓은 책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작은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니던 길섶의 작은 꽃들이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 

가꾸지 않아도,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심지어 짓밟혀도 

때가 되면 강인한 생명력으로 피어나는 풀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실에서 가꾼 진한 향기와 매혹적인 모습을 가진 꽃들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길섶의 풀꽃은 꽃이 아니라 잡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크고 많고 화려하고 높고 대단한 것에 중독된 나머지 작은 것들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작은 것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눈을 뜬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크고 많고 화려하고 높은 것을 차지하려면 

탐욕스러운 가슴으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경쟁하고 싸우고 빼앗아야 합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얻으려면 맑고 가난한 마음으로 손만 벌리면 됩니다. 


당신도 작은 꽃이 되어보시겠습니까. 

당신도 어린이가 되십시오. 행복할 것입니다.(一明)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오늘 극심한 고통 중에 살아가시는 분들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육원, 상담소, 쉼터, 그룹홈...갈 수 있는 거의 모든 시설을 두루 섭렵한 한 아이, 그래서 더 이상 아무도 데려가기를 원치 않는 아이, 더 이상 보낼 곳이 없는 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저 곳 다 다녔기에 각 시설의 특징이나 장단점, 취약점 등을 귀신같이 꿰고 있었습니다. 우선 더 편안한 곳, 우선 지내기 쉬운 곳, 우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만 찾다보니 거의 모든 시설을 다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각 시설 담당자들과 통화하면서 그 아이 때문에 사람들 속이 어지간히도 상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제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맛이 간’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속상하고, 배신감 느끼고, 열불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겠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틈만 나면 귀에 못이 박히게 형제들에 이런 강조합니다.


“착하고, 말 잘 듣고, 예의바르고, 고분고분한 아이, 우리가 제시한 노선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따르는 아이들은 사실 어디 가든 잘 견뎌낼 것입니다.


예쁘고, 귀엽고, 품에 ‘착’ 안기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시다. 우리의 선택은 보다 다루기 힘들고, 보다 ‘맛이 간’ 아이들, 결국 그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는 한 마리 길 잃은 어린 양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건강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길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는 기쁨을 삶의 최고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착한 목자임을 역설하십니다.


여러분들께서 세 아들을 두셨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걸리고, 밥숟가락 들 때 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아들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는 일마다 잘 풀려서 제 갈 길을 보란 듯이 걷고 있는 장남을 생각하면 걱정보다는 뿌듯한 마음에 안심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시작한 외국생활에 익숙해져서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고, 광활하며 청정한 주변 환경 속에 살아가는 차남 역시 생각만 하면 마음이 흐뭇해질 것입니다.


반면에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 결혼도 못하고,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해 전국산천을 떠도는 막내,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은 없는 막내아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옵니다. 눈물이 앞섭니다.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모든 자녀들이 다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더 마음이 가는 자녀, 더 기도하게 되는 자녀는 잘 안 풀리는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골고루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우선적 선택’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사에 잘 풀리는 사람들도 사랑하시지만 우선 눈길이 가는 대상은 길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어린 양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입니다. 좌절과 혼동 속에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끝도 없는 병고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 너무도 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세속에서의 복락은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시는 애틋한 눈길, 각별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저 역시 제 몫을 잘 해내는 아이들, 이제 걱정 없는 아이들보다 덜 떨어진 아이들, 매일 형들에게 ‘치이고’ 부대끼는 꼬맹이들, 어릴 때 못 먹어서 삐쩍 말라빠진 ‘인간 덜 된’ 녀석들에게 훨씬 마음이 갑니다. 한번이라도 더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오늘 극심한 고통 중에 살아가는 분들, 지금 이 순간 다시 못 올 길을 걷고 있는 분들, 끔찍한 외로움에 눈물 흘리시는 분들, 십자가가 너무 커서 어쩔 줄 모르는 분들,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하느님께서 한없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짠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받지 못할 각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 옵션(option)이 아니라 기본(Basics) 

박상대 신부님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 "종말설교"(25장)로 엮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 밝혀두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공동체설교의 첫 부분이다. 공동체설교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간에 지켜져야 할 규범을 담고 있어 "교회규범"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작은 교회로 통하는 가정교회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으로 시작되는 공동체설교는 당장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에게 향하기보다는 마태오복음공동체를 포함한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의 편집의도가 많이 첨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설교는 세 가지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것"(1-5절)이고, 둘째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10절)이며, 셋째는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는 것이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제외된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는 규범도 있다. 


첫 번째 규범의 도입부에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하고 물었다고 하지만, 마르코는 제자들이 도상(途上)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고, 루가는 제자들이 서열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마르 9,33-34; 루가 9,46)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온정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예수 어록집에서 따온 것이다. 루가는 이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을 한데 모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루가 15장)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교회공동체 안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사이에 권위주의와 서열다툼이 팽배하고, 형제적 사랑이 부족하여 후임자가 전임자를 마구 흠집 내는 일도 많다. "미사예물 단가가 비싸서 미사봉헌 한번 제대로 못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신자들은 소외 받고, 혼인법상 조당(阻 )에 처한 신자들을 마치 중죄인 취급하며, 조그만 잘못도 부풀려 입에 담아 회자(膾炙)하고, 나서서 단죄(斷罪)하기를 즐겨하는 신자들도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 만들고, 스스로도 죄지을 기회를 피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일도 있다. 오늘 예수께서 내리시는 공동체 내규(內規)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여러 개를 놓고 여건(與件)을 고려하여 마음가는 대로 고르는 선택사향이 아니라, 기본(basics)에 속한다는 것이다. 기본은 곧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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