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렘브란트,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라고 하신다. 양 떼를 먹이로 삼는 목자들에게서 양들을 구해 내어 보살펴 주시겠다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포도밭에 일할 일꾼들을 산 마음씨 후한 밭 임자에 하늘 나라를 비유하시어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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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그들은 불행하다고 질타한다. 양 떼를 먹이는 임무를 잊고 자기들만 양을 잡아 배불리 먹으며 양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께서 그들과 대적하시어 당신의 양 떼를 구해 내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한 포도밭 주인에 비유하신다. 주인은 각기 다른 시간에 일꾼들을 모아 일을 시킨 뒤 늦게 온 사람이든 일찍 온 사람이든 모두 똑같은 품삯을 준다. 이에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 불평하자 주인은 그에게 반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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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당신께서 직접 참된 목자가 되리라고 하신다. 못된 목자들은 양 떼인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군림하면서 원수들에게 팔아넘겼다. 이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새로운 목자가 되시어, 흩어진 양 떼를 찾아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주인과 일꾼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세상에서 주인과 일꾼이 맺는 계약과는 다르다. 세상의 계약에서는 일한 만큼 품삯을 계산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삯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고,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소외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일꾼들의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세상의 통념과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이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며 놀다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가 품값으로 지급되는 일을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주인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을 부르러 광장에 나갑니다. 수확에 매진하였던 그는 일꾼들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하여 적어도 네 번이나 더 집을 나섭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이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포도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낮’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 ‘저녁’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고자 줄을 세웁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들이 가장 먼저 불려 나가 품삯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각과 주인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맨 먼저 나와 열두 시간씩 일한 일꾼들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일한 일꾼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맨 처음 나와 일한 이들에게도 나중에 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에는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은 공로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행하시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종교, ‘보상’의 종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선행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 두고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공로에 따라 지불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은 수고하며 땀도 많이 흘렸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먼저 부름을 받고 응답한 이들은 맨 나중에 와서 품삯을 받은 이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간 인생이 최고의 보상이고 감사한 인생이 아닌가?’ 비유 속 포도밭 일꾼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 앞에서 의아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습니까?(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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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첫째 부분은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의 고용과 이에 해당하는 품삯에 대한 주인의 지시가, 둘째 부분은 온종일 일한 일꾼들의 품삯의 지급에 대한 불평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응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평의 주된 이유는 주인이 일이 끝날 무렵에 온 일꾼들과 온종일 일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에서,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주인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일꾼이 자신의 품삯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체제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게다가 권력과 부는 소수의 지배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차지였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뭐라 할 상황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 정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비유 속 주인은 원래의 계약대로 품삯을 계산하였기에 결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 정의를 깨뜨린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일어난 먼저 온 일꾼의 질투입니다. 주인의 정의, 곧 하늘 나라의 정의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자비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만이 아니라 구직을 걱정하며 장터에서 온종일 서 있던 이들의 정신적 고통의 대가도 고려하시는 자비입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도 고용의 기회를 주어 생계를 보장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받은 첫째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꼴찌가 되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돌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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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하여 선함으로 충만하신 하느님의 태도를 보여 주십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맨 처음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틀림없이 박식한 라삐들과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하느님 약속을 상속받은 이들인 모든 히브리 백성이었습니다. 반면에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예수님께서 찾으러 오셨고 당신 초대로 하늘 나라에서 구원을 차지한 죄인들입니다.
오늘 비유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감출 때 예상되는 불의나 종교적 무관심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주인도 일꾼들도 포도밭도 아니고, 다만 먼저 왔든 늦게 왔든 모두가 같은 액수로 하루에 받는 품삯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지지하는 상업 종교와 보상 윤리에 맞서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거저 주시는 구원과 용서 그리고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독단적인 행위나 부당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한 회개로 당신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만나러 가시는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행동입니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문을 닫는 바리사이적인 자기만족과 하느님의 구원을 우리의 선행에 ‘합당한 것’으로 바라보는 계약상 종교에서 출발해서는, 모든 인간적 정의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고 닮을 수도 없습니다.
이른 아침의 일꾼들, 곧 계명에 충실한 옛 그리스도인들과 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도록 포도밭에 일찍 불러 주셨음에 기뻐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맨 나중에 온 일꾼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시고 거저 주시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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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언뜻 보면 포도원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한 듯 보이지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모두 같은 품삯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대에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생활이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그날그날 벌어서 생활해야만 했기에, 이른 새벽부터 장터에 나와 일을 시킬 사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아무도 일을 주지 않기에 오후 늦게까지 장터에 서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주인이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똑같은 삯을 준 것은 공평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일할 의무가 있으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지요. 이런 이유로 주인은 모든 일꾼에게 품삯을 관대하게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봉사한 시간이나 결실보다 봉사의 동기와 정신이 더 중요합니다. 늦게 일하러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삯을 정하지 않았지요. 그저 자신들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인의 처분만 바랐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우리 역시 봉사를 한다고 주님께 그에 따른 대가를 바란다면 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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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오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기념합니다. 시토회 수도자였던 그는 중세의 사랑의 신비 신학의 정점을 이룹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그의 업적과 위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베르나르도는 수도회 신학을 최고 수준으로 고양시켰을 뿐 아니라, 인간의 개별성과 존엄성, 자기 성찰과 풍부한 감수성 등 12세기적 심성의 여러 요소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명상과 기도를 뒷받침하는 계기로 정립하였다”(클라우스 리젠후버, 『중세사상사』에서).
특 히 구약 성경의 ‘아가’에 대한 그의 해석과 통찰은 큰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는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오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초기 교부들의 우의적이면서도 신비적인 해석을 이어받아 꽃을 피웠고, 후대의 위대한 신비가들인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그리스도인이 열렬히 추구해야 하는 신적 사랑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 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다시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많은 지향과 감정과 정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피조물은 사랑을 통해서만 창조주께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신랑의 사랑은, 곧 사랑이신 신랑은 그 보답으로 단지 사랑과 성실을 찾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 보답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신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 자체께서 사랑받으시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사랑받는 존재로서 그 사랑의 원천으로 향하고, 그 사랑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사명임을 베르나르도 성인과 함께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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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구약 시대 때부터 줄곧 사람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계약을 맺으신 것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당신께 돌아와 자유롭게 행복을 누리길 바라시는 뜻에서였습니다.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처럼, 주님께서 맺으신 계약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고, 그 삯은 사람에게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두 당신 나라로 불러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이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쉽지 않으신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가 이루어 드려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은 거저 내리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끝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는 그저 감사를 드려야 할 따름입니다.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저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그분께 받고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빈부의 차이, 신분의 차이, 학력의 차이, 남녀노소의 차이란 있을 수 없으며, 차별 대우란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되게, 오늘도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 정성을 다하며,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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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굽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굽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면도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도로가 직선뿐이라면 얼마나 밋밋할는지요? 좋은 일만 생기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무미건조할는지요?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기쁨으로 바뀐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삶이라도 비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는 힘든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보람 있는 일이 남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실은 틈만 나면 남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눈치 보기를 피해 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생의 참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삶의 설계도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재산이든 명예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어느 정도의 몫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게 받았다는 생각은 느낌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뒤에 와서 잠깐 일한 사람이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주인은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양(量)을 따지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믿음의 참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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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일꾼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처사는 오늘날 경영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시대라면 퇴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우 친절하고 자상한 주인임에 틀림없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노동자에게도 그 가족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하루 품삯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8시간을 일한 그 노동자에게 포도밭 주인이 불의를 저지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약속한 대로 하루 품삯을 지불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불행과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서 불행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에 우리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포도밭 주인은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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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궁중의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개와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무엇이냐?” “귀신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이유를 묻자, 화가가 답했습니다. “개와 말은 사람들이 너무 잘 알기에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귀신의 모습은 잘 모르기에 그리기가 쉽습니다.”
개와 말은 흔한 동물이라 볼 기회가 많습니다. 화가가 아무리 잘 그려도 비슷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쉽게 시비를 겁니다. 하지만 귀신은 직접 볼 수 없기에 화가가 대충 그려도 사람들은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포도밭 일꾼들은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불평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주인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보면 많은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객관화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주관화하면, 언제나 ‘나만 고생하고’ ‘나만 억울한 것’ 같습니다. 살면서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삶’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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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꽃 속에 파묻힌 꿀벌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원을 그리며 날다가 꿀벌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역시 꽃 중의 꽃은 라일락이야. 가슴이 떨리도록 향기롭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비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장미꽃을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리고 저 들국화는 어떻고. 꿀벌아, 너는 정말 무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아니야. 라일락이 최고란 말이야.” 꿀벌은 결코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라일락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차라리 채송화가 더 낫겠다.” 나비의 이 말에 꿀벌은 속이 상해 입을 다물었습니다. 기고만장해진 나비가 꿀벌을 재촉하였습니다. “왜 아무 말도 못하니?”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니?” 꿀벌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비야, 꽃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라일락은 그윽한 향기를 만들어 내지만 잎을 씹어 보면 얼마나 쓴지 몰라. 쓴맛은 자신에게 남기고 향기는 남에게 주는 아름다운 꽃이 라일락이야.”
이 라일락의 우화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되새기게 합니다. 거름을 잘 준 화초가 꽃도 건강하고 열매도 많이 맺는 법입니다. 신앙생활의 거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선행입니다. 이는 또한 얼마나 많이 했는지가 아니라, 정성과 열정을 얼마나 기울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신학생 내내 가지고 있었던 고민은 ‘내가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부가 될 자격이 제게는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신부가 되면 교회에 큰 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신부님이 되고 싶었고 이렇게 매일 기도했습니다.
‘제가 크고 위대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세상에서 작은 빛을 비출 수 있는 존재라도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당신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동시에 나름으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저 자신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함 그 자체였지만 주님의 도움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지금의 제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신학생 때에 가졌던 순수하고 겸손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으로 착각에 빠지면서 이상한 마음이 제 안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비판의 마음입니다. 다른 신부의 모습을 비판하고, 신자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또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순수함과 겸손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고, 부정적인 모습만 가득히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보이지 않고, 내가 받지 못한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에 불린 일꾼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나중에 똑같은 임금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이른 아침에 나왔던 일꾼들은 투덜거립니다.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분명히 공정하지 않은 처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맨 처음부터 일했던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이었다면 어떨까요? 이 공정하지 않은 모습에 대해서 따질까요? 데모라도 해야 할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대접해준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까요?
처음에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했던 일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주인으로부터 “일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떠했을까요? 감사했을 것이고, 더 열심히 일해서 주인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 가졌던 순수함과 겸손함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순수함과 겸손함은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강조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열정은 노력의 어머니다. 어떠한 일도 열정 없이 성취된 것은 없다(랄프 월드 매머슨).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걸어서 성지순례를 하고 있었던 한 순례자가 길에서 마차를 만났습니다. 오랜 순례로 인해 다리가 너무 아팠던 그는 마부에게 태워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흔쾌히 허락하면서 마차에 태웠습니다. 얼른 마차에 탄 나그네는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멉니까?”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이 말의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순례자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하겠다고 생각하다가 피곤함에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마차의 덜컹거림에 놀라서 깬 순례자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30분 정도 온 것 같은데, 예루살렘 근처에도 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예루살렘은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지금 30분 지났잖아요.”
그러자 마부가 말합니다.
“이 마차는 예루살렘 반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즉, 우리 삶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해 가는 우리는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새기며 정확한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과 함께 모여 ‘원장 직무 수행’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원장 매뉴얼’이란 책을 통독하다보니, 원장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과중하던지, 합당한 원장 후보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0여년전 돈보스코가 청소년 구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살레시오회를 막 창립하던 초창기 무렵의 일입니다. 1863년 돈보스코가 48세 되던 해, 첫번째 사업체였던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가 넘쳐나는 아이들로 인해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돈보스코는 미라벨로라는 지역에 두번째 오라토리오를 만들었고, 그 오라토리오의 원장으로 애제자였던 미카엘 루아 신부를 임명했습니다. 당시 원장으로 임명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습니다.
돈보스코 입장에서 걱정이 많이 되었겠지요. 아직 젊고, 병약하며, 경험도 일천한 루아 신부의 어깨에 너무나 과중한 직무를 얹어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돈보스코는 그를 파견하면서, 친필 편지를 하나를 써서 건넸습니다. 원장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세하게 적었는데,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분노하지 마십시오.
☞ 원장의 고행은 부지런히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타인이 주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 경건하고 열성적이며, 주의를 집중하여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치십시오.
☞ 매일 아침 묵상과 성체조배를 빠뜨리지 마십시오.
☞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명령을 내리거나 훈계를 할 때는 늘 사랑과 인내로써 하십시오.
☞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언제나 잠깐이라도 하느님과 상의하십시오. 보고를 받을 때는, 끝까지 주의 깊게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기 전에는 잘 경청하고, 진위관계를 반드시 파악하십시오.
결국 원장은 명령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장은 첫째가 아니라 꼴찌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복음 말씀 말미에는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복음 20장 16절)
지금 이 세상에서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눈만 뜨면 거듭 성찰하는 노력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할때, 행동 하나를 할 때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행할 일입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유심히 돌아볼 일입니다. 지금 자신이 행하는 권위가 혹시라고 크게 변질되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권위중독증에 걸려있지는 않은지? 요즘 제일 조심해야 할 갑질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오늘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쥐꼬리만한 권위를 부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듣기 위해, 더 자주 자신을 개방하고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 거듭 성찰하지 않고, 부단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꼴찌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가장 부끄러운 꼴찌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태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를 가난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종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종은 아무리 가져도 부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방법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중에서도 나중에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습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 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지 못하고 적게 받고 있다고 불평한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려 한다면 어차피 갈 것, 꼴찌보다는 첫째가 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늦게 와서 가장 먼저 돈을 받고 간 이들이 가장 감사할 줄 알았기에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라면 어떻게 감사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일한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고 자신이 약속하여 받은 ‘한 데나리온’만 바라봐야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제 방에서 운동합니다. 절 운동과 팔벌려뛰기를 합니다. 처음 팔벌려뛰기를 할 때는 50번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0번씩 2세트를 합니다. 그래도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근육이 조금 붙어서 나아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운동하는 방향을 조금 틀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엔 벽을 보면서 했다면 지금은 ‘십자가’를 보면서 뜁니다. 100번쯤 뛰면 힘이 듭니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보면 ‘이것 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더 뛰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감사의 힘일 것입니다.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나를 똑같이 대우하는데, 왜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한 일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데나리온’을 바라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데나리온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성체, 성혈’입니다.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 주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주인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라고 사제가 말할 때, 그때만 보지 말고 우리 삶에서 그분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솟아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갑자기 불림을 받아 하루 일했는데 10조 원을 받았다면 누가 1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2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성체의 가치를 모르니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체가 없으면 지옥행이어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나는 ‘고맙습니다. 나는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하면 그냥 시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고정하면 됩니다. 내가 그분께 해 드리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순간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호수에서 오리 가족을 보는 것이 작은 즐거움입니다. 2달 전에 16마리의 새끼들과 오리가 호수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어미 오리가 앞에 있었습니다. 새끼들은 어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잠시 멀어졌다 싶으면 쏜살같이 어미 곁으로 달려왔습니다. 2달이 지난 지금 새끼들은 제법 컸습니다. 이제는 새끼들이 앞에 있고, 어미는 뒤에서 새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끼들을 믿고, 새끼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셨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새끼오리들처럼 예수님의 곁에서 보고, 듣고, 따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워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쳐주고,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고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강물은 흐르기 마련입니다. 뒤에 오는 강물에 자리를 내주고 더 깊은 바다로 가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오리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강물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를 탓하기보다는 다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것도 큰 지혜입니다.
코로나19로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처음 받은 것은 전 국민에게 주는 지원금이었습니다. 은행계좌로 1,200불이 왔습니다. 잘사는 사람도, 보통인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공평하게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재난지원금이 있었습니다. 은행계좌로 3,000불이 왔습니다. 직원 일인당 1,000불씩 주어졌습니다. 사장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세금을 내는 직원이 3명이라서 3,000불이 나왔습니다. 직원급여 지원금도 나왔습니다. 2달 동안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왔습니다. 25,500불이 은행계좌로 왔습니다. 코로나19로 홍보할 기회가 없었는데 정부의 재정지원 정책은 제가 일하는 신문사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도 정부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미국처럼은 아니지만 전 국민에게 일정액수의 지원금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기도 하고, 미국에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화살에 맞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화살의 종류가 아닙니다. 화살을 쏜 사람이 아닙니다. 화살에 맞은 이유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나중에 해결해도 되는 문제입니다. 코로나19는 세계 경제에 엄청나게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도 미국과 비슷하게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재정지원을 하였고, 앞으로도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 공급, 소비는 경제의 3가지 축입니다. 소비가 위축되는 시기에는 과감한 지원정책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정책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실행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일당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하루 생활에 필요한 금액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만큼은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은 오후에 와서 일한 사람이 같은 일당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일당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기준으로 일당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능력, 재능, 외모와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찍찍이(velcro)' 같은 것이어서 우리 신경계통에 즉각적으로 단단히 둘러붙는 반면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선하게 보는 것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테플론‘ 같은 것이어서 신경계에 잘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묘한 것은 우리가 이 긍정적인 감정들을 적어도 15초 이상 우리 생각 속에 붙들어 둘 때는 이 감정들이 신경계통에 더욱 단단하게 둘러붙는다고 합니다. 관상은 삶의 긍정적인 모습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포도밭 일꾼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의 요지는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또 아홉 시쯤, 열두시 쯤, 오후 세시 쯤, 마지막으로 다섯 시쯤에 나가서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일꾼들을 포도밭으로 불러 일을 시켰고 나중에 맨 나중에 온 이부터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같은 품삯을 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맨 먼저 온 이들이 자기들도 같은 품삯을 받고 투덜거렸고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먼저 우리는 인간의 계산법과 하느님의 계산법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대개 일한 만큼의 댓가를 받는 데에 익숙해 있지만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은 비를 내려주시듯이 계산 없이 언제나 많은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포도밭 주인이 보여주었던 모습처럼 하루종일 아무도 자기를 사지 않아 발을 동동거려야 했던 일꾼들의 마음까지도 해아려주시고 당신의 포도밭으로 초대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저 온 일꾼이나 마지막에 온 일꾼이나 그 포도밭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부르심 안에 그분의 사랑이 깃든 세상이라는 포도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그렇게 하느님의 자비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첫째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전에 이 예화를 읽으면서 무언가 불편한 마음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시대 멋진 지주들이 그리 했던 게 아니었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돈 벌 생각에 땡볕 시간, 돈 못 벌까봐 종일 불안한 사람 다 힘들었죠.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청한 건 사실입니다.
일용할 양식에서 맛 멋 분위기 고급레스토랑 사치 등으로 변해 왔지요.
이제는 밭주인의 자비가 멋진 하느님을 표하는 게 맞다 고 공감합니다.
구직을 걱정하는 이들의 정신적 고통의 대가도 고려하시는 자비입니다.
세상첫째 아니라 하늘첫째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야 참 훌륭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관대한 포도밭 임자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밭 임자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하러 장터로 나갑니다. 그는 첫 새벽에 만난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내고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네 차례나 더 장터에 나갑니다. 거기에 일을 얻으려 기다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지요. 주인 중심이 아니라 일꾼의 바람를 우선하는 고용 방식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분명 밭 임자가 첫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보았는데도 그들이 불평합니다. 가장 먼저 선택되었던 기쁨은 사라지고, 노동은 고생이 되었으며, 일한 시간과 수고가 억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경쟁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에게 이 항변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공정과 평등의 기치 아래 상위 1%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데 익숙한 세상이니까요.
타인이 덜 받는 것에 함께 분노한다면 정의, 연대, 사랑이겠지만, 타인이 동등하게 받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질투이고 시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루 밥값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가슴 졸인 수고까지를 노동에 준하는 가치로 보아 주는 주인의 마음씀씀이와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마태 20,13)
주인이 그들에게 첫마음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합의를 뛰어넘는 허상을 품은 이는 첫 일꾼들인 셈이지요. 그들은 '조금만' 일한 이들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가장 먼저 선택되어 마음 놓았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온종일 뿌듯했던 노동의 보람을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맞바꾼 형국이니 주인은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됨됨이와 자격을 따져 사랑의 양을 제한하거나 계산하는 분이 아니시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될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주님 못마땅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 속 일꾼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닮아 관대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깃털 하나 꼽을 자리 없이 마음이 편협하고 옹졸해지니, 남이 무얼 더 받았는지를 살피기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더 주목하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주인 덕분에 우리는 무수한 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턱걸이로라도 포도밭 울타리에 아슬아슬 매달려,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목자들을 호되게 꾸짖는 주님의 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목자들도 그렇게 대해 주길 바라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그들 손에서 거두어 친히 보살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방식에 맡겨놓았더니 사랑이 숫자나 도식으로 대치되어, 온기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조건 아래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으로 양떼를 돌보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이건 어떤 몰골이건 더, 더,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더 더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으실 만큼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니 이미 우리는 과분하게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목자 앞에서 보상과 댓가의 양을 비교하고 따지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잘났건 못났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당신 포도밭으로 불러 함께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괜한 곁눈질은 마음만 흐트릴 뿐이지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갑시다. 관대한 주인이시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오직 하나의 관심사는 "나"뿐이랍니다. 주인의 이 눈먼 "내맘대로" 사랑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이 그토록 아끼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Caillau-Saint-Yves 2,92: PLS 2,441-442)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것은 책벌도 되고 우리 잘못을 고쳐 주는 권고도 됩니다. 성서마저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약속하지 않고 복음서도 우리에게 다가올 환난과 압박과 유혹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역시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해 줍니다. 첫 사람이 죽음의 선고를 받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 그 저주를 받은 후부터 이 세상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형제 여러분, 불평하지 맙시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하다가 살육의 천사의 손에 멸망을 당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 우리 인류가 당하고 있는 고통 중에 우리를 앞서간 선조들이 당하지 않은 무슨 특별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뿐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고통 가운데서 선조들이 당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고통들과 비교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옛날이 훨씬 더 좋았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이 시대를 불평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조상들의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때에도 똑같은 불평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과거 시대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게 되었으며 성서의 말씀으로 교훈 받아 온 사람들이 아담의 시대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겐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아담이 받은 저주를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다음의 성서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저주입니다. “너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이것이 바로 아담이 받은 몫이고 당한 고통이며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이 그에게 내린 책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거가 우리 시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첫 사람 아담 때부터 그의 후손들인 현재 우리 시대까지 사람들이 받은 몫이란 수고와 땀, 가시덤불과 엉겅퀴였습니다. 노아 때의 홍수가 우리에게 언제 있었습니까? 하느님을 거슬러 불평할 근거가 되는 역사책에 기록된 옛 시대의 기근과 무서운 전쟁이 우리 시대에 있었단 말입니까?
역사 책에 기록되어 있는 옛 시대의 형편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옛 시대의 그런 이야기들을 듣거나 읽을 때 치를 떨지 않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우리 시대를 볼 때 우리에겐 불평할 것보다 감사 드릴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후 다섯 시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일꾼이 되기를 바라던
소박한 꿈마저 허공에 날려버리고
자신의 주린 배를 움켜쥘 틈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른거려
더욱 서러운 시간
하루의 넉넉한 결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할 오후 다섯 시
수고로이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자신의 탓 없이 일하지 못해
스스로 무가치하다며 풀죽은 사람들
소중한 일꾼으로 모시고
다른 이들의 자그마한 노동마저도
고운 결실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고마운 선물로 받아들이며
‘일한 만큼’이라는 냉혹함 대신
‘사람답게 살만큼’이라는 따뜻함으로
넉넉히 나누어 함께 살고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일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애써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싶소.”
함승수 신부님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가운데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 아주 기막힌 반전을 이룬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우도’입니다. 그는 강도를 저지른 범죄자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의 오른편 십자가에 함께 매달렸다고 해서 ‘우도’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당시 ‘십자가형’이라는 처형방식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중범죄자들에게 주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는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맘 내키는대로 막 살았던 ‘인간 말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아보았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예수님께 한 가지 청을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너, 정말 뻔뻔하구나. 니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한번 생각해봐라.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고 사람들에게 뺏은 돈이 얼마야? 그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살아왔으면서 이제와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달라는건 너무하는거 아니니?”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도를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것은 우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은총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도를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보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 즉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꾼들을 대하는 포도밭 주인의 태도는 참으로 공정했습니다. 그들과 맺은 계약에 따라 정확히 하루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원리원칙만 내세우지 않고 각 사람들이 처한 입장과 상황을 고려해서 융통성 있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뿐 아니라 오후 늦게부터 일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하루치 품삯을 지급한 것입니다. 물론 아침부터 땡볕에서 고생하며 일한 일꾼들은 마음 속에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한 만큼 돈을 받아야 한다’는 인간사회의 경제논리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에게 불만을 토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포도밭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시장바닥에 멍하니 서서 먹고 살 걱정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야 했을 그들입니다. 그런 자신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뽑아주고 약속대로 일당을 지급해준 포도밭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먼저입니다.
‘일당’이란 ‘한 가정이 하루 동안 먹고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입니다. 그래서 일당을 벌었다는 것은 적어도 하루 동안은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기쁜 일입니다. 포도밭 주인이 한 시간을 일한 일꾼들에게도 똑같이 ‘일당’을 지급한 이유는 늦게부터 일한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기쁨을 누리게 해주고 싶은 자비로운 마음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자비로운 마음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일찍부터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이든, 뒤늦게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이든 차별 없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해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밭’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고생시키기 위해 당신 나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 나라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뒤늦게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이 나와 똑같이 구원을 누린다고해서 그들을 시기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온갖 고생을 하며 방황하다가 뒤늦게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참 행복을 알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보다 은총을 더 많이 받았나 적게 받았나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함께 하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제가 언젠가 한 번 “주님께서는 교회의 세례성사로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신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그러면 살아 생전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나서 마지막에 죽기 바로 전에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이른 아침과 아홉 시쯤에,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나가서 일꾼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저녁 때가 되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처음 데려올 때 약속한 대로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삭을 줍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부터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따집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그러자 주인은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3-15절)
어릴 때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의 분위기에서 올곧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이들도 있고, 다 자라서 세상 살이를 하다가 문득 새로운 시각을 얻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 삶을 살기 시작한 이들도 있으며, 그야말로 죽을 때 대세 받고 주님 곁으로 간 이들도 다 같이 구원이라는 품삯은 같습니다. 하지만 살아 생전에 주님의 뜻을 따를 때의 그 기쁨 그리고 그 기쁨들이 쌓여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서 받는 구원의 은총에 이은 천국에서의 완성된 기쁨의 깊이와 질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릴 때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참 그리스도인처럼 살지 못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나중에 세례를 받았지만 주님을 만난 깊은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회개에서 오는 새생명의 기쁨을 얻은 사람이 느끼는 신앙의 기쁨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 신앙과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의 깊이란 면에서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16절)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착한 목자 영성.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어제는 제 사랑하는 도반, 요셉 수도원의 착한 목자 원장 수사가 육체노동을 하고 있어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아 격려 멧시지를 보냈습니다.
“요셉 수도원 주보 성인 노동자 성 요셉의 후예! 화이팅!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사진 인물, 자연 배경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시간되면 일 끝나고 갈 때, 두유 한잔+비타민1, 잡숫고 가세요!”
아마 150편의 주옥같은 시편중 가장 사랑받는 시편은 오늘 미사중 화답송 시편 23장일 것입니다. 화답송 후렴 시편 23장 1절은 언제 들어도 감미롭고 영혼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아주 오래 전 묘비명을 청하는 이에게 지체없이 추천한 성구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는 말을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부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되뇌어 보기도 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있는 착한 목자 예수님 말씀입니다.
아주 예전 아빠스님 충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장상으로 생각지 말고 목자처럼 생각하라.’는 공동체 형제들을 ‘섬기고serve’ ‘보살피고care’ ‘떠받쳐주는support’ 일에 충실하라는 충고였습니다. 예전 교수 신부님의 ‘사제’나 ‘신부’ 명칭 보다는 개신교의 ‘목사’라는 명칭이 복음적이라는 언급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부단히 배워 닮아야 할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통상 임금을 백성의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는 임금만이 아니라 다른 수장까지 포함됩니다. 오늘날로 하면 사회든 교회든 공동체의 크고 작은 모든 책임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피를 토하는 듯한 말씀은 그대로 착한 목자 하느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돌보지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물론 각계 각층 모든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 목자의 진위를 가려내는 거울같은 말씀입니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떼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겠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계속 반복되는 ‘내 양떼’라는 말마디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 주님의 양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목자들은 주님의 양떼를 잠정적으로 위임맡은 이들이고 원래의 소유주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목자들이 평생 배워 닮아 가야할 착한 목자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제가 요즈음 동요 부르는 행복에 살고 있습니다. 동요에 보면 유독 엄마라는 말마디가 많이 나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의 마음에 가장 근접한 분이 엄마일 것입니다. 바로 ‘섬집아기’ 2절의 엄마의 마음은 그대로 착한 목자 주님의 마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동심으로 돌아가 착한 목자같은 엄마를 그리워 눈물짓게 하게 하는 동요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은 그대로 복음의 착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 또 곳곳에서 사목하는 착한 목자 주님의 종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착한 목자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임자와 같다.”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의 영성을 사는 목자를 지닌 공동체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짧은 말마디에 착한 목자 주님을 그대로 닮은 포도밭 주인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기본 소득제’의 원조가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기본소득제는 재산이나 소득의 유무,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 등과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인권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와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권리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정의요 자비입니다. 그대로 자녀들에 대한 자비롭고 착한 어머니의 마음도 이러할 것입니다.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이기에 일한 시간과 양과는 무관하게 맨처음부터 있었던 자들은 물론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시 모든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제공합니다. 모두에게 최저 하루 생계비 임금을 똑같이 제공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착한 목자 주님의 정의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중국 백장선사의 가르침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도 나옵니다. 일하고 싶어도 다양한 사유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일에 관계없이 이유불문하고 이들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 아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기만 함에 빗댄 좀 모욕적인 말마디인데 착한 목자 예수님에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죄스러운 말마디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포도원 주인의 품삯을 제공하는 순서도 맨 끝에 온자로부터 시작하여 품삯도 똑같습니다. 맨먼저 온 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합니다. 인간의 상식적 분배정의의 측면에서 볼 때 너무 불평등하고 불합리합니다. 투덜대는 모습이 흡사 루가복음 15장 돌아 온 탕자 작은 아우를 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불평하는 큰 아들을 닮았습니다.
“맨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참으로 편협한 시야요 옹졸한 마음은 그대로 우리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분명 외관상 충실한 당대의 기득권층들을 대변한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회개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일화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친구여,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참 멋지고 매력적인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주제넘게 편협하고 옹졸한 세상 정의의 잣대로 주님의 자비를 재단하는 어리석은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니가 뭔데, 니나 잘해’라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얼마나 섬세하고 자상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인지요.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모습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기에 착한 목자 주님을 롤모델로 삼는 이들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해야 할 것입니다. 비결은 단하나 형제자매들에 대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입니다.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입니다. 정말 가난한 이웃의 처지를 헤아렸다면 주님의 처사에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장의 일한 시간이나 양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총체적 딱한 내적 현실을 통찰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많은 식솔의 부양을 책임진 가장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착한 목자 영성을 지닌 이들이라면 모든 공동체 성원을 참으로 아끼고 돌볼 것이며 해고에도 신중에 신중을 다할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각계 각층 다양한 지도자들이 필히 배우고 실천해야 할 착한 목자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 모두가 존중받고 배려받고 사랑받아야 할,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소위 갑질이나 혐오와 차별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착한 목자 당신을 닮아 자비롭고 너그러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간혹 부모님들을 만나면 아이들의 성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주로, “내 아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면 성소의 꿈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등의 대화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주 간혹, “내 아이가 사제직에 관심이 있는데 부족한 것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우리 아이는 복사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유아세례를 받지 않아서 자격이 없어요” 라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만날 때 마다 제가 떠올리는 복음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르심의 시기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학교에 막 입학한 학생들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정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고 복사단 활동을 하며 성소의 꿈을 키워온 학생들도 있지만 중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았거나 오랜 시간 냉담을 하다가 부르심에 응답해 신학교에 오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입학 기준에는 세례성사를 받은 지 3년이 지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데, 이를 채우지 못해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다가 신학교에 입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늦게 받았다고 해서 사제가 된 뒤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세례나 견진을 늦게 받았을 지라도 신실하고 모범적인 사제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실 언제 하느님이 부르시든 그것에 응답하기만 하면 되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을 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오후 다섯 시에 일을 시작하지만 그들이 밭는 품삯은 모두 똑같습니다.
당연히 먼저 온 사람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을 한 시간과 양이 그만큼 차이가 나는데 동일한 값을 받는 다는 것은 불공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애초에 계약을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였으니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늦게 온 이들에게 그와 같은 값을 쳐 주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이며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을 늦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화는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지방에서 포도를 따는 때는 9월 말경이었는데, 10월이 되어 날씨가 선선해지기 전에 포도를 서둘러 따지 못하면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짧은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늦게 일을 하게 된 이들이 게으른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지방 장터는 노동자들의 대기소와 같은 곳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노동자들은 연장을 들고 장터에 나와 자신을 써줄 고용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고용이 되어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누군가는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도 빈번했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일을 하고 싶지만 고용되지 않아 초조하게 앉아있는 일꾼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날품팔이 노동자들, 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하층의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이들. 차라리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노예나 종들이라면 적어도 굶을 염려는 없었겠지만 이들은 일을 못하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누군가가 나타나 늦은 시간이지만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은총이었을 것이며 아주 감사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때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리 부름을 받은 그 누구도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을 멸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먼저 선택받았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도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하며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늦게라도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 그리고 뒤늦게나마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온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이른 시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있고 조금은 뒤늦게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이 성직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있고 평신도의 역할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가 더 낫다고도 부족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기에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며 각자의 역할은 하느님께 커다란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은총을 받을 것 조금 천천히 일하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스스로를 위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입당송이 이야기하듯, “주님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은 날”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러한 하느님의 균등한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께 기쁨이 되고자 채워나갈 것을 약속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지치지 않으시는 하느님, 누구에게나 같은 사랑과 은총을 보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자애로운 고용주이십니다.
재물에 대한 관점 바꾸기
양성일 시메온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당연히 억울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묵상 중에 이 ‘당연히’라는 생각을 왜 하게 되었을까?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 말씀에 다시 한 번 깊게 들어가볼까요.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아침부터 일을 했든 오후부터 일을 했든 우리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재물은 하느님의 셈법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재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 재물을 나눌 때 아깝다는 생각이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보다 순수하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마음 깊이 새길 수 있다면 정말 주님께서 보시고 많은 재물을 맡길 수 있는 충실한 신앙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차별을 두지 않으신다.<마태,20/1-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런 차별을 두시지 않고 모든 이를 공편하고 정의롭게 사랑하십니다. 차별을 두지 않은 다는 말은 평등하게 대하신다는 말씀이며 잘란 사람 못나나 사람 차별하시지 않고 먼저 나고 후에 난다고 차별하시지 않으시며 내편 네편이 없이 모든 이를 당신 품에 안으십니다. 저는 하느님이 사랑이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물으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다고만 말하지 않고 내가 느끼도록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를 살게 하는 표징입니다. 공편하면서 채험적 사랑을 내가 느낄 때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믿음 희망을 합쳐 진 것입니다.
오늘 일꾼들에게 아침 온 사람 저녁에온 사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불평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내 마음이다 하심 같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공평하고 정의롭게 창조하시였습니다.
우리는 차별 속에 살면서 시기 질투가 일어나지만 여기에 차별이 없으면 시기나 질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인이 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시는 부모님이 딸인 저를 하대하고 잘 챙겨주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나 열등의시 속에 늘 불만을 가지고 살아 지금 불면증, 정서적 안정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지금 것 남아 선호 사상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남녀 차별 두어 이를 해결하려고 남녀평등권을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권리를 평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히 또다른 법 차별 금지법을 국회에서 만든다는 이여기의 깊은 내용은 결혼은 남녀간의 것만 아니라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도 결혼하여 부부처럼 살수 있다는 이야기는 창조에 반하는 법이 아닌가? 신학적 성서학적 인간학적 반성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유의 개념을 올바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 편리한 삶을 살려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몸을 남자가 여자가 되고 만나기 쉽다고 동성애를 합리화 하는 법인 차별 법에 연길시키지 말고 관용의 정신으로 버려두는 것이 무난한 인간적 삶이라 생각합니다. 혹시 동물적 분능을 내세우면 개를 기르며 암캐 수캐를 기르니 색기 낳고 하는 것 귀찮아서 수캐만 기렸는데 결혼하거나 이상한짖 하는 것 보지 못하였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동생이 붙어 부부처럼 산다는 것은 천리 인리에 맞지 않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기본 권리는 살 권리 세상의 부를 누릴 권리 하느님의 창조물 공기 태양의 힘 땅을 이용하는 소출 공편하게 누리고 누구나 행복한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어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 거주 의 자유 온갖 자유를 누리고 살 자유가 공편하게 주어졌습니다.
저는 차별금지법을 만들면서 차별을 주는 사람들 권리를 차별두고 재물에 차별을 주고 상하 잘란 사람 못난 사람 구별하면 벌을 주는 차별 금지법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도원 안에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독방을 주고 모두 같은 시설을 안에 사는 것 차람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자비로운 하느님이시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 가시듯이 차별 없이 모든 이를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 수도원은 오시는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차별 없이 대합니다. 차별금지법 이런 의미로만 찬송합니다. 평등의 원칙에서..... 하느님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서로 결합하여 자녀를 낳으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 위기의 환경 속에 기도합니다. 바른 정신 가지고 살자.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2020. 8. 19. 수)(마태 20,1-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 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앙 여정을 시작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 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그 나라에서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차별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한때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와 그 박해로 목숨을 잃었던 스테파노 순교자가 똑같은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함께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스테파노 순교자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9-12).”
‘맨 먼저 온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들이 더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맨 나중에 온 이들이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들에게 특별대우를 해 주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하고, ‘품삯’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1)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했으니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이들보다 품삯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 시간이 많으니 품삯도 많아야 한다는 그들의 말은, 비유의 내용 안에서는 ‘일리 있는’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신앙생활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온종일 고생한 사람들이 아니라 은총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총을 충만히 받았음을 깨닫는다면, 불평하거나 항의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감사드릴 것입니다.
만일에 실제로 신앙생활을 중노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기쁨도 사랑도 없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그의 그런 생활은 사실상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노동인가? 은총을 누리는 생활인가?”>
2) 사실 남들보다 먼저 복음을 전해 듣고, 남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감사드릴 일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왜 부모님 마음대로 나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종교와 신앙은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물려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게 한 것이고, 그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부모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는 자녀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아닙니다. 첫 영성체를 하고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되는 것은, 자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3-16).”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은 신앙 여정을 충실하게 마친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는 하느님 나라, 또 그 나라에서 받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밭 임자는 일꾼들과 맺은 ‘계약’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비유의 내용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는 하나뿐인 나라’ 라고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더 좋은 나라도 없고, 덜 좋은 나라도 없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보다 더 좋은(더 크고, 더 많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일도 없고, ‘덜 좋은 구원’과 ‘덜 좋은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합리하다, 불공평하다, 부당하다고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인데, 영원보다 더 긴 시간이 있을 수 없고, 영원보다 짧은 시간은 영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궁극의 목표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가치를 지닌, ‘완전한 삶’입니다. 만일에 덜 좋은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비유의 내용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포도밭에 늦게 온 것은 그들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놀다가 늦게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일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터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7절).
이것은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한 것과 신앙생활 기간이 짧은 것을 탓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하나뿐이고, 그 자격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서 누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똑같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재의 자격만 보시고 과거를 따지지 않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고, 마침내 그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과거의 삶’이 계속 발목을 붙잡는다면, 예수님께서 그토록 ‘회개’를 강조하신 일과 안 맞게 됩니다. 하느님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한 사람이라면 그의 과거는 보지 않으시고 회개한 현재 상태만 보시는 분입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사람의 판단 기준과 다르다.” 라는 뜻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 20,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감사를 잊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새날이
밝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날입니다.
자기만의
역사를 통해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저마다의
여정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만남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모든 여정의
기준점이 되시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한쪽 끝에도
반대쪽에도
그 가운데도
여정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살게하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새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삶의 공식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이 모든 시간이
분명 은총이
되게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여정을
끌어안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 되기 위해
주님께서는
저마다 오늘도
가장 알맞은 때를
위해 기다려주십니다.
은총과 기다림에
무관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에 머무는
여정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에
감사하는
여정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은총의
그 힘을 믿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은총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충실히
걸어갈 것입니다.

신부가 된 첫 해, 가족들과 함께 난생처음 동남아의 태국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를 느끼면서 4박 5일의 일정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쁜 일정도 쉽지 않았지만 더 힘든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어떤 것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동남아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가 저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습니다. 바로 상차이라고 불리는 ‘고수’ 때문이었습니다.
국수를 워낙 좋아하는데, ‘고수’가 들어간 쌀국수를 태국에서 처음 먹게 되었습니다. 심한 화장품 냄새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그냥 남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짐을 하게 되었지요. ‘이 고수를 다시는 절대 먹지 않겠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현재, 제가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한 가지는 바로 ‘쌀국수’입니다. 그런데 이 쌀국수를 주문하면서 반드시 이렇게 말합니다. “고수 많이 주세요.”
지금은 이 ‘고수’를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자극적인 향은 입맛을 돋우어주고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접할 때에는 기겁을 하면서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제가 이제는 이 ‘고수’의 열렬한 팬이 되어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수’를 통해서 어떤 음식도 모두 다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은 특별한 맛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지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신앙심이 그렇게 두텁지 않으신 분들은 세상 살아가는데 주님의 말씀이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고 하십니다. 특히 어떻게든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바보 같고,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 뒤처지는 멍청이 같아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공평하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에게 품삯을 주는데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에, 또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에, 마지막으로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습니다. 세상의 원칙으로는 너무나도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원칙은 언제 어디서나 충실한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똑같이 준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비로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잃어도 주님만은 절대로 잃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맛을 알게 된 후 비로소 ‘고수’의 열렬한 팬이 된 것처럼,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사람은 주님의 열렬한 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주님을 봐서는 안 됩니다. 대신 주님의 기준, 사랑의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안네소피 스웨친),
24 나바위 성지
나바위 성지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중국에서 사제가 되어 조국에 입국하여 첫발을 디딘 축복의 땅입니다. 1845년 10월 12일 밤, 김대건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 등과 함께 이곳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도착하셨습니다. 김 신부님으로서는 그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습니다.
나바위 성당이 바로 이곳에 세워졌는데, 베르모렐 신부가 성당을 세울 때는 김대건 신부님 일행을 기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인 곳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바위 성당의 건축 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 뒤 1916~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용마루 부분은 종탑을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 벽돌조로 붙여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는데, 건축양식의 특이함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보전 중입니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관습에 따라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는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성 김대건 신부님의 목뼈가 모셔져 있고, 성당 제대 주변에는 세례대와 성상 등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하여 성당 건축 때 들여온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전 예약을 하면 피정이나 식사가 가능합니다. 미사는 주일에는 오전 6시와 10시(단체 예약시 따로 미사가 가능합니다), 토요일은 오후 6시, 월요일은 오전 6시, 화요일과 목요일은 오후 7시 30분, 수요일과 금요일은 오전 10시 30분입니다. 주소는 전북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이고, 전화는 063-861-9210입니다.
봉사와 섬김의 여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母后) 기념일입니다. ‘모후’라는 말은 ‘왕의 어머니’, 또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충실히 협조하셨던 성모님의 머리위에 빛나는 왕관을 씌워드린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모후’라는 호칭은 단순하고 소박하신 성모님, 고향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성모님께 그리 잘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분,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시지요. 마니피캇 찬가의 내용처럼, 그분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부요한 자들을 빈손 돌려보내십니다. ‘나야 나!’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십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는 미천한 이들을 끌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리는 이들을 은혜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부족해서 안됩니다.’라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한사코 끌고 와서 축복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충실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셨던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께 큰 축복을 내리시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후요 여왕이기는 하시지만, 사치와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모후가 아니십니다. 대신 지극히 인간적인 여왕,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상처로 힘겨워하는 어린 양들을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굽어보시고, 살뜰하고 극진히 챙기시는 봉사와 모후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언제나 큰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하면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심초사하시는 위로와 격려의 여왕이십니다.
세상의 왕들은 백성들을 힘과 권력으로 다스리지만,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께서는 영원한 왕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과 인내, 섬김과 봉사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신 후에도, 한결같이 자애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봉사하고 계십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천국과 지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 인생의 가장 지옥 같았던 때를 회상해보라면 저는 주저함 없이 고등학교 시절이라 말하겠습니다. 추억의 학창시절?이 아니라 그냥 지옥이었습니다. 군대를 한 번 더 갔다 오라면 갔다 왔지 고등학교 시절을 다시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고등학교 시절이 고통이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목표와 경쟁’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하는 목표, 그리고 그것을 위해 경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 가장 완벽한 두 스트레스가 교차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만 했지만 성과는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고3병을 앓고 성적은 계속 떨어지고 급기야는 마지막 2달 동안은 신경정신과에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성적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경쟁은 지옥이다.’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도, 직장에 다녀도,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아도 그 경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지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원히 지옥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귀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누가 가장 인간에게 해를 끼치게 했는지에 대해 자랑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마귀는 음란으로, 어떤 마귀는 돈으로, 어떤 마귀는 술과 마약으로 사람을 절망에 빠뜨렸다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러자 마귀 중 가장 마귀 같은 마귀는 “나는 사람들이 게으름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정신없이 경쟁하며 살게 했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마귀들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 그곳이 지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은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아침, 점심, 오후, 저녁에 나가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저녁에 온 사람들부터 약속한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아침에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오히려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 받기로 하고 일을 했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는데 왜 불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비교’하는 데 있었습니다. 타인과 비교하니 자신은 덜 받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학교가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공부를 시킨다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데서 큰 기쁨을 찾는 천국이 되겠지만, 다른 사람을 넘어서는 경쟁의 장이 되면 학교는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가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 자살률이 1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잘 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나 질투와 불만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족이 있으면 자아는 그것으로 무언가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집착이 고통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려면 그 누군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주면 됩니다.
“옆집 남편은 돈도 잘 벌어오는데,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애들과도 잘 놀아주더라.”
이러면 남편을 지옥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자녀에게도 마찬가지고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고 경쟁하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의 고통에 빠집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경쟁의식을 느끼게 만들면 지옥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비교하는 지옥에서 벗어나려거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감사할 거리는 한 데나리온으로 똑같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감사의 마음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지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두 데나리온을 받는다면 행복할까요? 받을 때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엔 똑같아질 것이고 그 다음엔 하루 종일 일을 해서 한 데나리온 받아서 행복한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기대치를 자신이 그만큼 높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행복은 재물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냐에 달려있습니다. 옆집이 더 큰 집으로 이사해도 이것만 알면 크게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행복은 그것과 관계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집을 방문해보니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힘들게 사는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냥 지금의 처지에서 내 결심에 의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감사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포도밭에서 일하며 하루 종일 일하도록 써주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밖에 있다가 한 시간 남기고서야 간신히 고용이 되어 집에 한 데나리온을 가져갈 수 있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그리고 일찍 고용해 준 주인에게 감사해야합니다.
감사 일기를 쓰고 매 순간 감사할 거리를 찾아서 감사기도를 드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절대 누군가와 비교하거나 불만족에 빠질 일이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내가 지금 감사하느냐, 불평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불평하는 것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천국과 지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 인사이동으로 제주도 엠마오 연수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3개월 동안 강의를 들으면서 충전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시간이 나면 오름도 오르고, 올레길도 걸으려고 합니다. 청을 들어주신 교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자매님께서 연수 중에도 묵상 글은 계속 쓰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되면 좋겠습니다. 동창 신부님이 배려를 해 주어서 중앙동 성당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28일까지는 중앙동에서 명동으로 출퇴근을 하려고 합니다. 후임 신부님을 위해서 도배를 한다고 합니다. 사제관이 성당 안에 있었고, 명동에서도 사무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출퇴근하는 기회를 주셨으니, 기쁜 마음으로 다니려고 합니다.
성서를 보면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예언이란 무엇일까요? 사람과 세상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예언이란,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정의로운 일인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인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시와 같은 존재입니다. 불편한 존재입니다.
나단 예언자는 다윗 왕에게 예언하였습니다. 다윗 왕은 부하인 우리야를 죽게 하였고, 그의 아내 바쎄바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으면 예언자들에게는 견책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예언했습니다. 헤로데 왕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에게도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방송과 언론은 정부가 하는 일, 정치인들이 하는 일을 평가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론과 방송을 사회의 목탁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정부는 끊임없이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해 주도록 요청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부정과 부패의 늪에 빠지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추적 60분, PD수첩, 그것이 알고 싶다, 시사매거진 2580’과 같은 프로는 권력을 가진 사람,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야 사회는 더욱 정의로워지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자비를 만나야 꽃이 피고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는 사람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천국의 문을 열어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자비를 청한 십자가의 죄인에게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품삯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0주 수요일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에서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시에, 아홉시에, 열두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계명들이고, 이곳에서는 온갖 덕이 포도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즉 친절, 순결, 온유, 인내, 고결함 등이다.
교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그들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6절)라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들은 모두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였다.
저녁에, 즉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내주라고 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을 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라고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 보수, 노임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8. 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후 다섯 시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일꾼이 되기를 바라던
소박한 꿈마저 허공에 날려버리고
자신의 주린 배를 움켜쥘 틈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른거려
더욱 서러운 시간
하루의 넉넉한 결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할 오후 다섯 시
수고로이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자신의 탓 없이 일하지 못해
스스로 무가치하다며 풀죽은 사람들
소중한 일꾼으로 모시고
다른 이들의 자그마한 노동마저도
고운 결실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고마운 선물로 받아들이며
‘일한 만큼’이라는 냉혹함 대신
‘사람답게 살만큼’이라는 따뜻함으로
넉넉히 나누어 함께 살고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일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애써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복음은 연민과 사랑이 그 바탕입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2018년8월22일 수요일 복음묵상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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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많은 비유들 중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모순성,
혹은 이기심에 대해 이 보다 정확하게 말씀하신 비유는 없으리라 봅니다.
아울러 구원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도 이처럼 적절한 비유는 없을 듯합니다.
포도원 작업을 위해 포도원 주인은 일꾼들을 오전 아홉 시, 정오, 오후 세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질 무렵인 오후 다섯 시에 불려 모읍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약속을 지킵니다.
하지만 일찍 와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이들이 늦게 온 이들과 똑같이 받는 품삯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정서이자 상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옳다고 믿는 것이겠지요.
일한만큼만 먹으라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습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들의 불만을 듣고 말합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처음부터 받기로 한 돈을 받은 이들이 왜 화가 났을까요?
덜 받은 것도 아닌데 왜 화가 났을까요?
우리 모두는 이들이 왜 화가 났는지 잘 알고,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인 것이며, 정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는 우리의 모순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연민과 사랑이 그 바탕입니다.
오후 다섯 시쯤에 만난 사람들에게 포도밭 주인이 묻고 답을 듣습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이유로 빈과 부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가진 것에 의해 그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세상입니다.
상도덕 역시 손익분기점에 의해 결정되는 세상입니다.
자멸을 초래할 수 있는 자연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에도 순간의 이익이 우선되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위해 다른 모든 생명의 가치는 묵살되는 세상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세류에 편승하는 모습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품삯으로 받은 1데나리온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하늘 나라는 세상의 잣대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잣대로 재어지는 세상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조금이라도 포도밭 주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하늘 나라의 삶. -자비가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자비가 답입니다. 어제 ‘하느님이 답이다’와의 강론 제목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도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하늘 나라의 실현을 바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하늘 나라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가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새삼 깨달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바로 오늘 화답송도 오늘 말씀과 일치합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언젠가 지인의 부탁에 묘비명으로 추천한 성구입니다. 저는 이 시편을 노래할 때마다 ‘아쉬울 것 없어라’ 대신, ‘부러울 것 없어라, 두려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등 말마디를 넣어 흥얼 거리곤 합니다. 착한 목자 하느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오늘의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복음 서두 말씀부터 기분이 좋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임자와 같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모두를 배려 하는 착한 목자 주님을 비유하는 선한 포도밭 주인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 나라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자비하신 착한 목자 주님을 닮아갈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착한 목자 하느님은, 착한 목자 예수님은 바로 오늘 하늘 나라 비유의 선한 포도밭 주인같은 분이십니다. 한량없이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다릅니다. 주님 생각을 바꾸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는 자아초월의 회개를 통해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최선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주님을 닮아 정화되고 성화되면 주변도 저절로 정화되고 성화되기 마련입니다.
아침 일찍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집을 나선 포도밭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때 까지 하는 일 없이 장터에서 서 있는 실업자들을 당신 포도밭에 보냅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완전 고용이란 꿈이 실현된 하늘 나라 같습니다. 아침 일찍 온 사람부터 아홉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일없이 헤매는 만나는 사람마다 곧장 자신의 하늘 나라 포도밭 일터로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해질 무렵 오후 다섯 시까지 장터에서 하는 일 없이 서성이는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내는 주인입니다.
문제는 일당의 분배에서 발생합니다.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분배하는 방식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합니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주시오.”
맨 먼저 온 사람 순서대로가 아니라 맨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분배합니다. 일꾼들의 일한 양이 아니라 그들의 사기士氣 저하와 곤궁한 내적 현실을 배려했음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의 항의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어찌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이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일한 이들과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하루 품삯인지요!
하루 종일 일한 이의 항의에 대한 포도밭 주인의 답변에서 자비하신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항의하는 이가 흡사 루카복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 법칙, 은총의 법칙입니다. 하느님은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일한 양이 아니라 각자의 곤궁한 처지입니다. 바로 항의하는 일꾼은 그대로 편협하고 인색하고 옹졸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합리적 이기적 잣대로 잽니다. 참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 좋은 일 많이 해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자기 분수에 만족하는 겸손없이 하느님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주님이 보신 것은 일한 양이 아니라 일꾼의 속 사정입니다. 한 시간 일했다 해도 그에 딸린 식구들의 가장일 경우를 고려했음이 분명합니다. 마지막 늦게 와서 한 데나리온 받은 이가 우리라면 주님의 처사에 얼마나 감격하고 고마워했겠는지요. 정말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불쌍한 이들의 기뻐하는 마음을 생각한다면 주님과 이들의 기쁨에 동참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요즘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고 일부 시행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를 생각합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최소한의 기본생활비를 국가가 대주는 경우입니다. 하여 빈부 격차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는 가난한 자들 모두가 인간으로서 최소한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가 뜻하는 바와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기본소득제의 원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꿔야 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편협하고 옹졸하고 인색한 마음입니다. 한없이 자비하신 착한 목자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 자비공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참 목자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불의하고 무자비한 목자들에 대해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마치 오늘의 불의한 목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비단 착한 목자 자비의 영성은 사제만 아니라 모두가 배워야 할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착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선한 포도밭 주인의 하늘 나라 비유를 통해 우리 모두 착한 목자 당신을 닮아 자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아침 일찍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활짝 열려 있는 오늘 비유의 하늘 나라 포도밭처럼 우리 인생 마지막 까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하늘 나라입니다. 모두가 다 들어와야 닫히는 하늘 나라의 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착한 목자 당신을 닮아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시며, 우리를 끊임없이 당신 자비로 환대하시고 ‘환대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 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20, 1-16(연중 20주 수)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인다는 점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릅니다. 사실, 그는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입니다.
<둘째>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준다는 점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먼저 온 품꾼에게 먼저 주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늦게 온 이들부터 품삯을 주는 것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꼴찌”가 먼저 자비를 입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셋째>는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형평에 맞게 셈쳐주지를 않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던 것입니다.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던 것입니다. 사실, 주인은 품삯을 셈 해줌에 있어서,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이유’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온 이든 나중에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은 이들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 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할 일입니다. 우리의 가멸은 처지를 슬밉다 하지 않으시고, 비천한 신세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에 있어 첫째가 되어야할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느님의 포도밭에 와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행복수업을 일찍 받은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의 비유를 요즘 일터에 그대로 적용하면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일지라도 부당하고 그래서 당장 반박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요즘 건설현장에서 막일을 하고 있는데 오늘 주님 말씀처럼 5시에 나와 7시부터 일을 하는 사람과 오후 두세 시에 나온 사람이 똑같이 일당을 받는다면 난리가 나고, 특히 이번 여름처럼 고생이 막심할 때는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받기로 한 것만 받으면 다른 사람이 많이 받건 적게 받건 그만이어야 하는데 절대로 그만일 수 없습니다.
나만 고생한 것이 억울하고, 나의 성실함이 바보스러움이 되는 것은 더 억울하며, 반대로 게으른 사람이 똑같이 받으면 화가 나기까지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하느님께서 인간 모두를 사랑하시고 똑같이 사랑하셔도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분노하게 되어있습니다.
나도 사랑하고 그도 사랑하지만 그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공정하지 않음에 분노하고 사랑이 더 큰 것에 대해서는 시기질투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비유에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요?”
그런데 오늘 비유를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면 하느님께서 공정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거나 공정의 문제에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포도밭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포도밭이고 이스라엘이었지요.
그러니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중노동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가꾸는 일이지요.
저나 저처럼 수도원에 일찍 들어온 형제들이 수도생활 초기에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 일찍 들어온 것에 대한 억울함입니다.
친구나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은 젊음을 만끽하며 연애도 하고 맘껏 즐기는데 나는 수도원에 처박혀 온갖 고뇌와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젊음을 허비하고 희생한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들어오더라도 밖에서 남들 하는 것 다 하고 늦게 들어올 걸 괜히 일찍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미숙한 생각이었고, 행복하지 않았을 때의 어수룩한 생각이었지요.
다른 사람들 놀 때 내가 인생에 대한 고뇌를 하고 즐거움을 희생한 것 사실이지만 그것은 괜한 고생이 아니라 행복수업을 남들보다 일찍 받은 것이었지요.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제가 수도원에서 행복한 것이 미안하였습니다.
제 또래의 사람들이 왜 사는지도 모르며 살고, 먹고사느라 그리고 가족 부양하느라 참으로 힘들게 사는 것을 보면 행복한 저의 삶이 감사하면서도 미안한 것이고 게다가 친구들은 건강이 안 좋은데 저만 건강까지 좋으니 그 미안함이 더 크지요.
주님 포도밭에 일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일찍 신자가 되고 교회 봉사하는 것이 억울한 사람 있습니까?
‘남들처럼 젊었을 때 죄의식 없이 돈 많이 벌고 온갖 쾌락 다 누리며 하고 싶은 것 다 하다가 죽을 때 세례를 받을 걸!’ 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거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복음에서 가르치신 것이 행복의 비결인데 하루라도 일찍 깨쳤으면 더 일찍부터 행복했을 텐데 늦게야 복음의 맛을 안 것이 아쉬어야 신앙생활을 잘 그리고 복되게 하는 것임을 우리는 오늘 깨달아야겠습니다.
차별, 차등, 계급적 사회와 평등한 사회 <마태 20, 1-1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파와 좌파의 이념적 차이와, 기득권을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과의 차이가 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윗자리, 안정된 자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어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도 차별이 있고 인정받는 자리가 있습니다.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권력을 누리느냐, 어느 편이 권력이나 재력의 우위에 있어서 남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사느냐?” 하는 경쟁의식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별하지 않고 평등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요즘처럼 차별이 없다고 하면서 차별이 심한 시대도 없습니다. 그래서 권력에 기생하고 재력에 붙고 명예에 목을 매게 됩니다.
어떤 사회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세상이고, 어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겠습니까? 이념에 쏠려 화합의 정신이 없으면 비록 뛰어난 이념이라도 오류가 발생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진보적 사상에 젖어 공산화의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서 차별 없고, 차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찬성해야 할 부류는 가난한 사람이나 지식이나 기득권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통계를 보면 지식인과 기득권자들이 문재인 정권의 좌 편향을 30%나 따른다고 합니다. 반대는 가난한 사람, 아무런 기득권이 없는 사람. 그래서 지금의 공산당 형태처럼 몇 사람의 지도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행세하고, 재물을 취득하여 자기 이익에 관한 보상을 받고, 국가 예산을 낭비하고, 경제를 밑바닥으로 떨어트립니다. 자신의 명예심으로 그 자랑스러운 자리를 유지하려고 거짓과 위장술을 쓰며 차별과 차등과 차이를 더 깊이 만들어 갑니다.
이런 모순된 세상에 살지 않으려면 가정교육에서부터 차별이나 차등 교육을 없애야 합니다. 큰아들, 남녀차별이 없이 오로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교회 안에서도 계급사회가 되지 않고, 직무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거나 선후배 사이의 차별도 없어야 합니다. 누구나 기득권을 내세워 특별대우를 받으려고 하면 가난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평등의 사회는 힘 있는 자, 가진 자, 능력 있는 자 안에 평등성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가장 꼴찌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권고하고 우리는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 길은 오로지 사랑의 길입니다.
까미노, 몸과 영의 순례길(2018년 6월 계간지 『분도』 여름호 기고글)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관광객으로 까미노를 시작한 사람일지라도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자신도 모르게 순례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까미노 위에서 살면서 많이 듣는 말입니다. 산티아고 까미노 길에 들어서면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 사람이 누구든 모두 순례자가 됩니다. 까미노는 영적 순례입니다. 영적인 순례는 몸을 통해서 시작합니다. 순례의 영적 차원은 이 땅을 매일 걷고 있는 몸의 차원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몸의 까미노』를 거쳐 『영의 까미노』로 건너갑니다.
이곳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에게 강조합니다. “까미노는 『날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요리할 수 없는 『날것』 그 자체입니다. 날것이기 때문에 까미노는 거칩니다. 요즘 길이 많이 정비되어 편해졌다고 하지만 거칠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봐주지 않습니다. 비가 세차게 내리쳐도 피하지 않고 걸어야만 합니다. 눈이 쏟아져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햇살이 강해도, 돌길이라도 내딛어야 합니다.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통하지 않습니다.
순례자 숙소(알베르게)에서도 까미노는 날것으로 다가옵니다. 코고는 사람, 잠꼬대 하는 사람, 늦게까지 소곤대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들든 아니든, 그 사람들을 내가 선택하지 못합니다. 같은 길을 가는 순례자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알베르게 시설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래서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더라도 그 또한 부질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안에서 『나 자신』도 날것으로 만납니다. 사실 우리는 나 자신을 직업, 학력, 재산 등, 곧 나 아닌 다른 것으로 멋지게 포장합니다. 그것이 나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나 아닌 것들을 다 벗어버린 날것으로 나 자신을 직면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계를 지닌 존재』로 우리 몸을 대면합니다.
산티아고 순례할 때가 생각납니다. 최소한으로 가장 필요한 짐만 지고 갔습니다. 까미노를 준비하며 숙고에 숙고를 했습니다. 이게 꼭 필요한 것인가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습니다. 막상 까미노를 시작하니 필요 없는 것들을 들고 가는 나를 보았습니다. 까미노에서는 그 사실을 즉시 깨닫습니다. 당장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압니다. 많은 순례자가 겪는 것이지만, 발에 잡힌 작은 물집에도 온 몸이 힘들어 합니다. 물집 때문에 등산화 대신 슬리퍼를 신고 걸을 수밖에 없는 순례자는 카톡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슬리퍼 신고 산티아고, 소박하지만 진실되게 빛나는 삶!”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요.
날것인 나 자신 앞에 지금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은 『욕심』과 『위선』임을 깨닫습니다. 배낭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꺼내 내려놓고 나눕니다. 순례길에 참으로 필요한 것만 짊어집니다. 내려놓아야만 걸을 수 있습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다른 순례자와 나누는 작은 행위는 지금까지 우리를 옭아매었던 욕심과 위선에서 벗어나 내적 자유의 길로 한 걸음 내딛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까미노는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날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걷기 시작합니다. 걷다가 지치면 잠깐 쉬고, 배고프면 먹고, 또 걷습니다. 다음 숙소에 도착하면 씻고 밥 먹고 잡니다. 다음날 해가 뜨면 똑같은 것을 되풀이 합니다. 순례 여정은 단순합니다. 『단순함의 연속』입니다. 순례자는 단순함을 몸으로 견디면서 걷는 사람입니다.
날것이기에 까미노는 정직하고 투명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도 정직하고 투명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깨달음이 옵니다. 순례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순례는 『신앙의 순명』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계획하신 것을 온전히 믿고 걷습니다. 온전히 수용해야 합니다.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은 소용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뜻에 날것인 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가거라”는 하느님 명령을 들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는 곧바로 순명합니다. 앞으로 어느 길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떠납니다. 더구나 몇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의 모범입니다.
작년 어느 날 저녁기도 후 만난 이탈리아인 중년 부인이 생각납니다. 내 앞에 앉자마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우십니까?”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신부님, 저는 남편과 함께 순례하고 있습니다. 정말 간절히 바랐던 산티아고 순례였습니다. 순례 처음에는 남편과 함께 잘 걸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제 다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할 정도로 두 다리에 통증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는 택시나 버스로 남편이 가는 곳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의 순례는 엉망입니다. 올바른 순례를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이 원망스럽고 순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 부인에게 강하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왜 교만하십니까? 왜 겸손하지 못하십니까?” 내 말에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찬찬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순례는 내 의지대로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일 뿐이예요. 참된 순례란 온전히 내어 맡기고 또 온전히 받아들이는 행위지요. 먼저 자매님의 인간적 한계, 육체의 나약함마저도 주님께 내어 맡기고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자매님은 순례를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순례를 잘 하고 있는 것이니, 차를 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산티아고까지 가세요.” 부인의 얼굴에는 눈물이 그치고 환한 웃음이 피어났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수도 규칙서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생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머리말 48-49). 그렇습니다, 날것인 까미노 안에서도 이 길이 바로 사랑과 생명의 길임을 체험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비가 내립니다. 작년 이맘때는 가뭄으로 목이 탔는데 올해는 비가 많이 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만 마음 한켠으로는 걱정이 앞섭니다. 순례자들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순례길이 더 힘듭니다. 거칠고 힘든 길이지만 사람들은 계속 옵니다. 오늘도 순례자를 만납니다. 시편의 노래가 그들의 발걸음 안에서 울려 퍼집니다. “나의 모든 샘이 네 안에 있네.”(시편 87,7). 순례길 까미노 안에 생명의 샘이 있음을 알기에 오늘도 사람들은 『영의 순례자』로 걷습니다. 아니, 달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까미노, 곧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순례에서도 꼭 필요한 것만 짊어지고 포기하지 말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꾸준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사실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우리는 빈털터리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는 영으로 참된 부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8/22 수요일
우리는 대개 얼마나 일한 시간과 양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계산 방법은 조금 다릅니다. 처음 일한 시간과 금액을 약속한 대로 주시기는 하지만, 조금 일한 사람에게 마치 덤처럼 더 주시는 방식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 정도는 주어야 먹고 살지 않을까 하고 여기시는 듯합니다. 아마도 최저생계비의 원류인지는 몰라도, 많이 일한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가 조금 적게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3-15)’
그런데 바로 이어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16절)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는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평생이라는 임금을 주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몇 살을 살던지 그저 한 생을 살다가는 것. 생애의 길고 짧은 기한이나 생애의 질의 높낮이와 관계없이 그저 한 생을 주시는가 보다. 그 방식이 총량제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한 생을 사는 동안 함께해주시고 그 살아있는 만큼 함께하시면서 축복해주시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신 듯합니다. 우리의 생애가 얼마가 되던 주어진 시간만큼 각자의 처지에서 주님과 가족과 형제자매들에게 가능하면 충실하고 선하게 살아갑시다.
김연희마리아 수녀님
마태오 20장 1~16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하여 시기하는 것이오?"
포도밭의 주인은 수확할 때가 되면 일손이 부족하여 여기저기 사람을 구하느라 애를 먹습니다.
오전 9시에 나가서 일꾼을 데리고 왔는데도 일꾼이 부족해서 12시에도 데리고 오고 그것도 모자라서 오후 3시, 5시에도 일할 사람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면 애써 가꾼 포도를 제때에 수확하지 못하게 되고 잘 익은 포도의 상품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제 값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노동의 가치를 아는 주인은
늦은 시간에 만나게 된 사람조차 일꾼으로 쓸 수 있다는 기쁨에 품삯을 쳐준 것입니다.
일꾼의 입장에서 보면,
차등의 금액을 지불했다면 불평이 없었을텐데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즈음 와서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자기가 받을 몫을 받아놓고도 늦게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준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마구 쏟아집니다.
누구는 국그릇, 누구는 밥그릇,
누구는 컵, 누구는 냄비, 누구는 ᆢ ᆢ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은 차고 넘치게 됩니다.
그 만큼의 은총과 축복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노동의 가치로 주어졌다면 우리가 살아가는데에 충분히 주셨다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눈 뜨게 된 하루, 그 소중함을 24시간 느끼며 산다면 좋겠지만 ~
한 시간이라도, 아니 십분이라도 내려주신 축복에 감사할 줄 안다면 기쁘게 살겠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충분히 먹고 살고 나눠주기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금액입니다.
내 그릇에 맞게 충분히 주셨고, 또한, 충분히 주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비교하고 시샘하고 질투하며 스스로 불행을 자처하는 사람으로 산다면 슬픈일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살을 나 혼자 받고 싶습니까?
남도 그 햇살을 똑같이 받고 있는 것이 싫습니까?
그러면 당신이 불행합니다.
놓으십시오! 충분히 주셨습니다.
감사하십시오! 함께 기뻐하십시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마태 20, 4)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솔릭이라는 태풍이 한반도로 올라온다고 하는데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성모승천 이후에 오는 다음 주일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느님의 모후로 천상 영광을 받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집을 나선 밭임자에 비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5시 이렇게 다섯 차례나 길을 나서서 일꾼들을 불러 모아서 포도밭으로 가서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포도밭으로 보낼 때는 항상 정당한 삯을 주겠다고 정했는데, 그것은 1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초대받아서 일하러 간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을 했고, 나중에 오후 5시쯤에 초대 받아서 일을 한 사람은 1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끝나서 품삯을 지불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지불하는데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러자 맨 먼저 온 사람은 자기는 좀 오랫동안 일을 했으니까 더 많이 받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만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맨 먼저 온 사람들은 항의를 좀 했지요.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1시간만 일했고, 자기들은 하루종일 일했는데 똑같은 품삯을 준다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그 밭주인은 "나는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요.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고?" (마태 20, 13)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자기 몫을 받고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밭 주인은 "내가 후하게 처분하는 것을 당신들이 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태 20, 15) 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결론으로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 20, 16)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이나 맨 나중에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어떻게 똑같은 품삯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 인간들의 생각으로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한테 더 많이 줘야 된다고 생각을 하겠지요.
•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 저는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이해가 됩니다. 포도밭 임자는 어쨌든 다섯 번이나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했겠지요. "이제는 하루 품삯을 얻게 되었다" 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오후 3시나 5시쯤 되어서야 일 할 기회를 얻게 된 사람들은 하루종일 기다리다가 겨우 일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하루 종일 기다리면서 얼마나 초조하게 그 시간들을 보내겠습니까? 하느님의 마음은 바로 이 점을 측은히 여기시어 하루 품삯을 주시는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불평은 사람들이 좀 잘났거나 좀 남보다 일을 많이 했거나, 좀 더 배운 것이 있다고 해서, 그 보다 못한 사람이 받은 행운을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너그러우신 분임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일찍 안 사람이나 늦게 안 사람이나 다 똑같이 구원이라는 열차를 탑승했다는 것을 생각하고, 다같이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 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폭넓은, 그리고 해방된, 아량이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내가 이른 아침에 포도밭에 일하도록 초대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 내가 오후 5시에 초대받아 포도밭에서 일할 수 있는 행운을 받았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한 데나리온의 품삯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청년실업의 실마리를 찾기가 무척 어려운가 보다. 고학력자들의 일자리가 더 심각하다 들었다. 어제는 서울대 출신, 미국 유학파 젊은 부부가 40이 훌적 넘어 교원대와 서울대에 교수로 각각 임용되었다며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임용 되기까지 대학 졸업 후 길고 긴 수학과 교수 응시에서의 여러번 고배를 마신 후 였다. 혼인도 대학시절부터 교제했지만 최근에야 혼인를 했다. 빨리 아이를 가졌으면 하는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취업이라는 문제는 해결 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직도 혼인여행을 가져보지 못했다며 이제야 정신이 살아옴을 느낀다고 했다. 공부하느라 세상물정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며 그래도 안착했다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일자리가 구원이다. 일자리는 삶의 질을 높인다. 일자리가 없어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어가고 사회망이 형성되지 않아 자신을 자기 안에 가둔다. 청년실업의 실마리를 찾아주는 노력이 시급하다.
오늘 복음(마태20,1-16)은 청년실업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구원문제가 비유말씀에 담겨 있는 듯 하다. 일감이 없어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성이며 구직을 바라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포도원 주인은 일감이 넘쳐났다. 그런데 실업자들로 넘쳐나일꾼으로 초대하기는 식은죽 먹기로 아주 쉬운 상황이다. 주인은 종에게 나가서 일꾼을 데려오라 이른다. 일꾼에게 품삯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했다. 선택된 일꾼들의 기분은 하늘을 날았을 것이다. 아침 9시, 12시, 오후3시, 일 종료 한 시간 전인 5시까지 일꾼을 초대했다.
품삯 합의는 한 데나리온 이다. 오후 6시 셈을 할 시간이 왔다. 아침에 온 일꾼이나 오후 5시에 온 일꾼의 품삯은 똑 같이 한 데라리온 씩을 받았다. 알꾼은 수입이 생겨 먹고 살 구원을 받았고 합의된 품삯을 받게 되었다. 주인과 일꾼 사이의 셈은 끝나고 감사로 끝을 맺어야 했다. 그런데 일꾼둘은 그들 사이에 일량이 서로 달랐음을 알고 있었고 품삯 인상, 차등지급을 바랬다. 이것은 인간적인 셈법이다. 결코 임금이 합의 되었다 해서 그냥 자나칠 일이 아니다. 이런 시간제에서 밥그릇 크기 싸움은 당연하다.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 포도밭의 일꾼으로 초대한다. 구원이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 했으면 하느님의 셈에 대해 이의가 없어야 한다. 오르지 자기구원과 남의 구원을 함께 생각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까지 맏음의 사람들 사이에 시비를 걸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믿음의 사람들이 어디 그런가? 교회 내에서 우열을 따지고, 시차를 따지고 시기, 질투하고 더 누리고 가지려고 물욕과 과시욕이 하늘을 짜르지 않는가?
어렵게 취업을 했다. 부른 사람의 의도를 알아 충실하고 재화를 얻어 욕심부리지 말고 행복을 위해 서로 돕고 살았으면 한다. 청년실업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게 하고 있다. 일감의 마당에 당도한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을 잡아 먹을 생각을 하는 것이 세상 일이 되었다. 자기를 불러준 ‘구원의 주님’을 잃어버리고 감사는 커녕 자기만의 물욕을 채우려 아우성이다.
구원 받고 마음속에만 자리잡고 표현하지 못했던 말, 하느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입으로 표현했으면 한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는 마음씨 후한 밭 임자와 같다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비유 안에서 보면 맨 먼저 온 이들이 자기들은 일한 시간 만큼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자 주인에게 따졌고,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한 것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이 한 이야기 중에 마지막 말이 이렇습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요즘의 자본주의 셈법으로 따지게 되면 오늘 복음의 포도밭 주인은 불공정한 거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꾼들에게 시간에 따른 차등지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인은 먼저 온 사람에게나 나중에 온 사람에게나 각기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이미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맨 먼저 온 사람은 자신이 받는 액수가 나중에 온 사람과 같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손해 보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무도 자신을 일꾼으로 쓰지 않아서 심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도 그런 일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경우 당장에 수입이 없는 현실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다행스럽게도 이미 일꾼으로 고용이 되면서 그에 따른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난 시간 하느님의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고 이미 그분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누리고 있는 그 행복에 대해서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자신이 받은 은총에 감사하기는커녕 남이 받는 은총에 대해서 시기하고 더 많은 은총에 대한 욕심을 부리곤 합니다. 어쩌면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거기서 드러나게 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라고 이야기 하는 주인의 말에서 하루 종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일꾼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 역시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당신의 사람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거저 받는 것
김효석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화는 예수님 시대에 종종 있던 일입니다. 그 지방에서 포도를 따는 시기는 9월 말경인데, 날씨가 선선해지기 전에 포도를 서둘러 따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손이 급할 때는 단 한 시간이라도 일할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느지막이 일하러 간 사람도 장터에 모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던 게으름뱅이는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장터로 나왔을 것입니다. 결국 다 늦은 저녁이 될 때까지도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사람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렇게 남의 일을 해주던 사람에게 일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이런 상황과 처지를 생각해보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의 태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오후 늦게 일하러 온 사람에게 적은 노임을 줄 수도 있었지만, 일한 시간 이상의 삯을 쳐줍니다. 주인은 그 사람이 일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애태웠던 마음을 헤아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셈법과 다른 하느님의 계산법입니다. 사람은 노임을 바라지만, 하느님은 사람을 생각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내 노력의 대가나 노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하느님의 인자하심으로 더 넉넉히 주어질 때가 참 많습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때가
필요한 삶의
순간순간입니다.
어제의 가시밭길이
오늘에는 꽃길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가장 좋은 사랑을
저마다에게 주십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넘치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가장 좋은 일은
우리의 처지를
주님께서 먼저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때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하나에게
가장 좋은
한 데나리온을
공평하게 주십니다.
우리의 일상을
성찰해보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에 숨결을
불어 넣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저마다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인간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뜨거운
생명입니다.
사실은 주시는 분도
부르시는 분도
올리시는 분도
채워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버드대 심릭학 엘렌 랭어 교수에 따르면, 우리는 기대한대로 늙는다고 합니다. 즉, 나이가 들기 때문에 눈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늙을수록 눈이 나빠질 것이다’라는 기대가 실제로 우리의 시력 감퇴를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계 거꾸로 돌리기’라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이 실험은 70대 노인들을 20년 전의 생활환경에서 20년 전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20년 전의 생활환경에서 20년 전처럼 행동하니, 실제로 50대와 같은 체력 향상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지레 맞춰놓은 인생의 시계대로 움직이려고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쉽게 인생의 시계를 말하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내 모습이었지요. 그보다는 새로운 나를 기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그만큼 후회할 것들을 내 삶에서 없앨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유명 잡지 ‘뉴월드 라이브러리’의 창업자인 마크 앨런은 매일 아침, 5년 주기로 더 발전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5년 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5년 후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5년 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실제 5년 후에 그 상상이 현실로 된 것입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향을 두고 적극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 못했던 것은 내 생각에서 나온 부정적인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이상한 포도밭 주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 열두 시와 세 시부터 일한 사람, 마지막으로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어떻습니까? 똑같이 주었으니 공평하다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한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딱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불평불만을 던질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딱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어떻습니까? 그 포도밭 주인이 참으로 공평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에 처사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지금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 때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부정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긍정적인 것인가요? 생각의 차이가 바로 나의 5년 뒤를 바꿉니다.
현재를 놓치면 현재의 달콤함은 다시 맛볼 수 없다(에밀리 디킨슨).
삶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좋은글연구회의 "좋은 글 대사전"에서)
가장 낭비하는 시간은 방황하는 시간이고, 가장 교만한 시간은 남을 깔보는 시간이며
가장 자유로운 시간은 규칙적인 시간이고, 가장 통쾌한 시간은 승리하는 시간이며
가장 지루한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이고, 가장 서운한 시간은 이별하는 시간이며
가장 겸손한 시간은 자기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시간이고, 가장 비굴한 시간은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시간이며
가장 불쌍한 시간은 구걸하는 시간이고,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최선을 다한 시간이며
가장 현명한 시간은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시간이고, 가장 분한 시간은 모욕을 당한 시간이며
가장 뿌듯한 시간은 성공한 시간이고, 가장 달콤한 시간은 일한 뒤 휴식 시간이며
가장 즐거운 시간은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어떤 시간입니까?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자기들만 먹는 목자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 데요.”
목자는 자기 양들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출처] 양을 아는 목자 / 예화 |작성자 천리향
양들이 목자를 알아보는 이유는, 아기가 사람을 잘 알아보는 이유와 같습니다.
전에 보조교사로 아이들 풀장 물놀이 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아기가 허리밖에 안 차는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난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일어서면 되는 데 말입니다. 그때 유치원 교사가 물로 뛰어들더니 아이를 집어 올렸습니다. 아기는 물을 먹어서인지 마구 울어댔습니다. 아기들은 자기들 허리밖에 차지 않는 물에서도 익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마 진짜 교사와 보조 교사와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위주로 생각했고, 교사는 아기들 위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를 따라오지 않습니다. 가장 완전한 관상가들은 아기들이라고 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가장 약할 때 누구를 믿어야하는지 가장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에제키엘 예언자가 활동할 때 이스라엘의 목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자기 배를 불리고 양들을 본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목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자신의 배부름을 먼저 생각하면 타인의 배고픔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 할 때부터 스위스 치즈 마니아가 되어 지금도 막대한 양을 수입하여 먹는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들은 굶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덕분에 그렇게 살이 찌는 것이란 소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정은만 배부른 게 아닙니다. 사제인 저도 몸무게가 많이 나갑니다. 굶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저를 목자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먹여야하는데 자신 먼저 먹는 목자들! 우리가 북한 주민을 보는데도 그렇게 가슴이 아픈데 하느님이라면 제 때에 음식을 받지 못하는 양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북한 사람들은 누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면서도 그 지도자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 더 가슴 아픕니다. 어쩌면 어떤 신자들이 사제들을 바라볼 때도 마음이 탐탁지 않지만 그런 모습으로 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런 목자에게 목숨을 걸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서 양떼들이 더 이상 먹이가 되지 않도록 구해내어 그들을 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저희 논문 지도 교수님은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데려와 함께 사셨습니다. 옷은 주워 입으셨고 매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때는 ‘한국 들어가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며 결심했었지만 정작 너무 풍족하게 살고 있어서 항상 죄책감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목자의 모습은 자기 배만 불리는 김정은의 모습이 아니고, 그렇게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양을 배불려서 자신은 말라 있는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목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그런 모습으로 갈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애송하시던 시가 있습니다. ‘눈 내린 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김구 선생님은 좋은 말씀을 많이 남겨 주셨습니다. ‘얼굴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커다란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한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진 내 마음이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대부분의 본당에는 교구장님, 주교님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사목을 하였던 본당신부님들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두 곳의 본당에 저의 사진이 걸려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의정부교구가 된 ‘적성성당’과 ‘시흥5동 성당’입니다. 김구 선생님께서 좌우명으로 삼았던 시처럼 올바른 길을 걸었는지 늘 부끄럽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살고자 했던 것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는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었는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는지, 저에게 주어진 길을 충실히 걸어갔는지 부끄럽습니다.
내일은 ‘사제평의회’가 있습니다. 교구는 ‘인사이동’을 발표할 것입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길 것입니다. 신부님들께서 지나간 자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참된 목자의 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천길 물길은 알아도 한길이 안 되는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와 재물로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신앙은 길이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마음으로 평가 받는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하느님을 알았는지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평가하고, 비난하기 전에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먼저 충실하게 이행하여야 합니다. 평가와 비난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두어도 괜찮습니다
착한 목자.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주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화답송 후렴은 언제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전 어느 분이 묘비명을 청했을 때 지체없이 추천한 성구입니다. 착한 목자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현현인 예수님 역시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착한목자로 한평생을 사셨습니다. 예전 수도장상의 조언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장상은 언제나 사목적 입장에서 수사님들을 돌봐야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 못됐다 해도 자식을 내보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장상도 부모와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착한목자 하느님을 닮은 부모같은 마음으로 수사님들을 대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사실 예로부터 왕의 이상은 착한목자였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착한목자 영성은 누구나 추구해야 할 영성입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착한목자 하느님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데려 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오늘 날 곳곳에서 목격되는 현실이 아닙니까?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마침내 개입을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바로 이 예언의 실현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선한 포도밭 주인은 그대로 착한목자 하느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보셨습니다. 하나하나의 사정에 정통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관심은 포도밭에 일찍 일하러 온 사람들보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임자와 같다.’
얼마나 부지런한 주님을 상징하는 밭 임자인지요. 아침 일찍부터 일꾼들을 사서 포도밭으로 보낸 밭주인은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쯤에도 나가 일거리가 없어 서성이는 이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냅니다. 끝까지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내시어 그 삶의 자리로 보내시는 착한목자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일당의 지급에서 발생했습니다. 누구나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했기 때문입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의 불평이 타당해 보입니다. 일꾼과 주인과의 대화가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일꾼;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대로 루가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 나오는 큰 아들이 연상됩니다. 착한목자 주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대로 자신만 생각하는 옹졸하고 편협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주인;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바로 이것이 착한목자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의 잣대로 잴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착한목자로 상징되는 자비로운 포도밭 주인은 ‘일한 시간과 양’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이의 ‘딱한 처지’를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실뿐 아니라, 잃은 양을 끝까지 기다리시는 착한목자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소망은 모든 이들의 구원입니다. 늘 스물 네 시간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집인 교회나 수도원은 늘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착한목자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매사에 감사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 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얼마나’가 아니라‘어떻게’가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초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고 집을 나서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데려와 일을 시킵니다(20,1-2). 그는 그 뒤로도 네 차례나 아무도 써주는 사람이 없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이들에게 정당한 삯을 주기로 하고 자기 포도밭에 가서 일하도록 해주었습니다(20,3-7).
저녁때가 되어 종일 일한 사람이나 몇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 모두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사람들은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말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4-15)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비유는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기시던 당신을 비난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들도 공덕과 보상만 생각하지 말고 천민들을 반겨 마땅함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의 분배정의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하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지요.
포도밭 주인이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품삯을 주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기 위하여’ 하루 중 무려 다섯 번이나 나갑니다. 그렇게 초대하시는 목적은 포도밭 일 때문이 아니라 영혼 구원 때문이었고, 결코 세상의 잣대로 저울질할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마음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율법 준수와 수고, 나의 선행의 대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불러주시는 것도 품삯을 주시는 것도 온전히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어떤 선물을 주실지 따지거나 다른 이들이 받은 선물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도밭은 주님의 집이요, 포도밭 일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집주인인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시는 일은 그 자체로 가장 고귀한 소명이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음이 바로 비할 데 없는 구원의 선물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의 선물을 옹졸한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주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좌우되고 물량적 계산에 익숙해져 있는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처신은 그와는 전혀 다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선업이나 공덕에 비례하여 보상하시기도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은혜를 베푸시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뜻대로 처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아무도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서로를 주님 포도밭으로 초대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이기적인 잣대로 저울질하지 말고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탐욕 때문에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처사에 대해 불평하고 다른 이들이 받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 시기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자유와 사랑, 선과 정의의 포도밭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날이길 기도합니다.
네게 선한 것이 내게 악이라는 시기질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요?”
비슷하게 쓰이는 그래서 붙여 같이 쓰기도 하고 서로 혼동하기도 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이고, 보통 시기질투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둘이 상대에 대한 악감정이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악감정의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질투가 사랑과 관련한 악감정이라면 시기는 성공과 관련한 악감정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보다 더 사랑을 받으면 그를 질투하고, 누가 나보다 더 성공을 하면 그를 시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비교적 더 질투를 하는 반면 남자는 비교적 시기를 더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질투는 사랑을 누가 더 받느냐의 문제이기에 반드시 누구의 사랑을 놓고 경쟁을 하고 질투를 하는 거지만 시기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듯이 그저 경쟁자가 잘 되면 싫은 겁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의 형제들 경우처럼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요셉에게만 땅을 사준 것이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질투를 하고 형들이 못 가진 땅을 동생이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시기를 하게 되지요.
이처럼 시기와 질투는 경쟁자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악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모든 사랑을 받으면 누구도 질투하지 않고, 만약 질투한다면 질투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어쩌면 시기는 질투보다 더 경쟁적인 것입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관계처럼 경쟁자가 잘 되는 것이 내게는 악이기에 그가 잘 되는 것이 싫기에 잘못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가 잘못 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합니다.
그러니 어떤 후궁이 왕의 굄을 받아서 아이까지 왕세자가 되면 아이를 못 낳아 굄도 받지 못하고 왕세자도 없는 왕비나 다른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토록 경쟁의 관계에서는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되고, 경쟁자가 잘 되게 해주는 것은 나를 못되게 하는 것이며 경쟁자에게 해주는 선은 내게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비유에서 하느님이 나 아닌 남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가 경쟁자일 경우 내게는 악이 되고 그래서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개신교 번역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더 친절하게 풀이하면 이런 뜻이 되는 거지요.
내가 네 경쟁자에게 선한 것이 너에게는 악이 된다고 보느냐는 뜻이지요.
우리는 그래서 불행합니다.
나도 충분히 하느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내게 많은 것을 주셨어도 불행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도 불행하고, 특히 치열한 경쟁으로 모든 사람을 내모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소수만 행복하고 대부분, 아니 모두가 불행합니다.
카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에덴 동쪽의 그 불행을 우리는 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네요.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마태 20,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 인간의 셈법과 하느님의 셈법은 좀 다릅니다.
우리는 1시간을 일한 사람과 8시간을 일한 사람이 똑같은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8시간 일한 사람이 8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1시간 일한 사람이 1만원을 받으면 8시간 일한 사람은 8만원을 받아야 정상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셈법은 이렇습니다.
그래 맞어. 나는 8시간 일한 사람에게 8만원을 준다고.
그렇지만 1시간 일한 사람, 4시간 일한 사람도 똑같이 8만원을 주고싶다고...
왜냐구?
내 맘이야.
누구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면 그 양을 따지지 않고 그냥 다 주고싶다구...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짬밥을 따집니다.
누가 먼저 세례를 받았고 누가 먼저 서약을 하였으며 누가 먼저 서품을 받았느냐를 따집니다.
영적생활의 완성은 얼마나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서원생활을 하였느냐에 결코 비례하지 않습니다.
언제 시작하였든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하느님 나라를 얼마나 그리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똑같이 하느님의 예쁜 아들딸입니다.
쓸데없이 도토리키재기 하며 니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지말고 서로에게 배우며 겸손하게 사랑의 경쟁자가 됩시다.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후 다섯 시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일꾼이 되기를 바라던
소박한 꿈마저 허공에 날려버리고
자신의 주린 배를 움켜쥘 틈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른거려
더욱 서러운 시간
하루의 넉넉한 결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할 오후 다섯 시
수고로이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자신의 탓 없이 일하지 못해
스스로 무가치하다며 풀죽은 사람들
소중한 일꾼으로 모시고
다른 이들의 자그마한 노동마저도
고운 결실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고마운 선물로 받아들이며
‘일한 만큼’이라는 냉혹함 대신
‘사람답게 살만큼’이라는 따뜻함으로
넉넉히 나누어 함께 살고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일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애써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일자리 구하는 사람<마태, 20/1-1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도시 여러 곳에 인력시장이 현성되어 하루 일거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모여 들고 각 기술이나 일용 일을 하려 합니다. 일거리가 없으면 생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가는 사람 히루 일거리를 찾아 일터로 가는 사람 희비가 어그러집니다.
저는 15살부터 하루라도 가정을 위하여 돈을 벌어야 먹거리를 구하게 되어 상점에서 건설 현장, 세관의 급사, 인천에서 부두노동,부산에서 부두노동, 미군 쓰레기 조합, 미군 부대 목공소에서 19살이 될 때 까지 일을 하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몇푼의 돈을 손에 쥐고 돌아오는 길 쌀가게에서 한 대 쌀을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19살에 고등학교 공부 시작과 수도원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어 지금 까지 무슨 일이든지 하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마련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일터를 찾아 나서는 삶이 자기 성장과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쉬운일 손쉽게 큰돈을 버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눈을 비비고 일자리를 찾아도 일자리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저녁 늦게 까지 하루 온 종일 일자리를 기다리며 길거리에서 찾아 헤매던 사람은 드디어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일자리를 찾고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1965년 구미 농촌 지역 본당 신부가 되면서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할 일 없이 방황하고 시간을 놓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농촌인구 60%이상 이여서 농한기 번들거리고 노는 청년들과 돈이 없어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어 그 해결책을 찾아 본당 안에 호수천사 학교라는 중학교 과정의 야학교와 농한기도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본당 안에 닭장과 부화장 까지 만들어 각 가정에서 닭을 기르며 경제에 도움을 주고, 돼지, 염소, 기우며 염소 젖을 팔고 영양에 도움을 주려하였고, 그 당시 1200만원 연9%의 농협빛을 지며 양송이 농장을 하면서 청년들의 일자리를 장만해 주었습니다. 협업농장으로 특수 장물 재배 생산으로 성당 앞 밖으로 100명의 사람이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1966년에 분도 신협을 만들면서 전국 농촌 신용조합을 창설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추산으로 50여 군데 만들어 졌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이 이런 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이 현대는 더 좋은 조건으로 일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조금만한 경제 발전이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사회지도층 정부 지도자들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말만이 아니라 적은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마음을 쓰도록 기도합니다. 저의의 일용할 약식을 위하여 기도와 실천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후하신
하느님 사랑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후하신
하느님 사랑안에
다시금 놀라는
우리들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환영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모든 시간에
감사할 뿐입니다.
빠르고 더딘
시간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남다운 만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저마다의 삶에
가장 알맞은 때에
개입하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끌어 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언제나 후하신
주님임을 기억합니다.
후하신
주님의 힘을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사랑만이
우리가 믿고 의지할
우리의 마지막
힘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백설 공주’라는 동화가 생각납니다. 백설 공주의 새엄마인 왕비는 매일 신비의 거울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
이 질문에 대해서 항상 왕비를 지목했던 거울은 어느 날 갑자기 “얼마 전까지는 당신이 제일 예뻤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백설 공주가 훨씬 더 예쁜 걸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에 심한 질투심을 느낀 왕비는 백설 공주를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다시 세상에서 제일 예쁠 수가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 사람만 없다면 내가 행복해질 텐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유한하고 순간적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에서 볼 때, 우리 인간 세상에서의 시간은 얼마나 짧고 별 볼 일 없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더 큰 가치를 버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그러한 점들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먼저 주인이 포도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런데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 일꾼들을 불러서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일이 끝난 뒤, 그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지요. 맨 나중에 와서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공평한 처사일까요?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의 시간과 다른 시간 안에 사시는 분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똑같이 배려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관대함에 대해서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백설 공주의 왕비처럼 질투심과 편견에 빠져 불평하고 그 결과 악으로 기울이지는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래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 하느님의 관대함과 자비함을 잊어버리고 불공평한 하느님만을 내 마음 속에 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의 계획안에서 우리들 역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받으며 삽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많은 것을 받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없다고 착각하는 그 한 가지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입장, 하느님의 시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정말로 공평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일을 하라(아빌라의 성 데레사).
똑같은 문제(왕중추, 주신위에, ‘페펙트 워크’ 중에서)
한 회사에서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심사를 했다. 1차 시험이 끝나고 ‘장화’는 99점으로 1등을 했고 2등은 97점을 받은 ‘리리’에게 돌아갔다. 2차 시험이 시작됐는데 시험지를 펼쳐 본 응시생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2차 시험 문제가 1차 시험과 똑같았던 것이다. 장화는 1차 시험에서 써낸 답안을 그대로 적었고 30분도 안 돼 답안지를 제출했다.
마지막 3차 시험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에도 시험 문제가 똑같았다. 시험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곳곳에서 빈자리가 속출했다. 오직 리리만이 종료 시간이 돼서야 답안지를 냈다. 드디어 합격자가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세 차례의 시험에서 1등 한 장화가 합격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합격자는 장화가 아니라 리리였다. 장화는 채용 담당자를 찾아가 따졌다.
“저는 세 번의 시험에서 매번 99점을 받아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합격한 겁니까?”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본사에서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을 뽑는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점수는 그저 올바른 인재를 뽑기 위한 하나의 잣대일 뿐 유일한 합격 기준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 번에 걸친 시험에서 항상 같은 내용의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한 가지 생각에 얽매여 더 나아질 줄 몰랐지요. 본사에서 절실하게 찾는 인재는 현재보다 더 나은 결과를,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직원이 있어야 회사도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우리가 움직일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했던 꿈결같이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제 다 지나갔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황님께서는 잘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강력한 펀치 하나를 날리고 가셨습니다. 죽음의 문화에서 깨어나라고, 천박한 물질만능주의로부터 탈출하라고, 극단적 이기주의로부터 일어나라고...
그분 은 이제 비행기를 타고 떠나셨는데, 언제까지 우리가 그분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그분께서 날려 보내신 강력한 사랑의 주파수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호응할 순간입니다. 그분께서 퍼뜨리신 지극한 겸손과 한없는 온유의 이미지를 이제 우리 삶 안에서 구체화할 순간입니다.
정말이지 우리 모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까? 그분께서 보여주신 몸짓 하나 하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에. 이제 감탄과 도취의 순간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좋은 분위기, 이 특별한 흐름을 삶으로 이어갈 순간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아는 것처럼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발밑은 언제나 지저분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 땅의 사목자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 지도자들을 향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목이 쉬도록 외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양떼 옆에 서 있어달라고. 양떼와 동고동락해달라고. 결국 양냄새 나는 목자로 살아달라고.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사람이 순식간에 변하지 않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따로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에제키엘 예언서 34장 2~5절)
이 제 정말이지 우리가 변해야 할 순간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등장으로 새로운 영적 쇄신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아름다운 대세를 거슬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황님께서 일으키신 쇄신의 바람을 타기 위해 교회는 자신을 비우고 가볍게 할 순간입니다. 작고 청빈한 교회, 겸손하고 따뜻한 목자,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먼저 다가서는 개방된 우리 교회,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原)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악한 사람이건 선한 사람이건, 상처가 곪아터진 사람이건, 깨지고 다친 사람이건, 그 어떤 사람이건 적극적으로 초대해서 넉넉하고 관대하게 품어 안는 그런 참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목자들에게서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생선을 담았던 그릇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날 것입니다. 꽃을 담았던 그릇에서는 꽃향기가 날 것입니다. 4박 5일 동안 한국에 머무르셨던 교황님께는 어떤 향기와 냄새가 났을까요? 가는 곳 마다 어린아이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이 교황님과 함께 했을 것입니다. 장애인들, 아픈 사람, 노숙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마음이 교황님과 함께 했을 것입니다. 세월호의 유족들, 밀양의 어르신들, 강정의 주민들,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억울한 이들, 외로운 이들,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교황님을 만났던 분들은 한결같이 위로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정말 그분에게서 목자의 향기가 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00여명의 예비 신학생들이 있습니다. 50여명의 6학년 신학생들이 있습니다. 400여명의 성소후원회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1000여명의 복음화 학교 공동체 회원들이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함께 일을 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그런 분들에게 어떤 냄새가 나는 사제인지 돌아봅니다. 정의와 공정을 말하는 사제인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는 사제인지, 첫째가 되려하기 보다는 꼴째가 되는 것에도 만족하는 사제인지, 불평과 불만보다는 이해와 관용을 말하는 사제인지, 편견과 아집보다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사제인지 고민을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 억울한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삶 안에서 그분들과 함께 있다면 분명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여름날 성당을 지나다가 창문을 닫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던 신자. 남몰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던 신자, 본당신부가 휴가를 가면 매일 성당에 와서 시설물을 돌보던 신자, 본당에서 실시하는 피정, 교육, 봉사에는 언제나 앞장서는 신자,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헌금을 봉헌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본당 재정에 관심을 가지는 신자들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직책과 권위에 의해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를,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를,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께서,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3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합시다. 마음을 열어!
참 목자, 참 예언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목자가, 참 예언자가 목마른 시대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느님이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 참 목자요 참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났습니다. 종파를 초월해 모두의 가슴 안에 희망과 기쁨 가득 안겨 주신 교황님입니다.
1독서 에제키엘의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이런 참 목자요 예언자를 지닌 우리는 행복합니다.
저는 이런 선물에다 산티야고 순례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여 오늘부터 시작하여 10.8일 귀국으로 끝나게 됩니다.
산티야고 여행이 아니라 순례요 기도입니다. 회개와 보속, 정화와 성화의 순례길입니다.
걸음 걸음 마다, 세계는 물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교회와 수도회, 모든 고통 중인 분들, 고마운 분들 등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례할 것입니다.
매일미사와 강론을 위해 미사도구와 아이패드도 준비해 갑니다.무엇보다 저 자신 참 목자와 예언자의 수도사제가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교황님은 진정 참 목자요 예언자의 모범입니다. 말씀 모두가 진정성 넘치는 통찰 가득한 교훈이 되는 잠언 같습니다.
신앙과 삶이 하나로 응축된 말씀입니다. 혹자는 이 땅에 머문 닷새 동안 그분이 떨구고 간 선물 꾸러미를 다섯으로 요약했습니다.
-울렸다. 안았다. 웃겼다. 깨웠다. 남겼다-(한국8.19일 1면).
참 목자와 예언자의 자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교황님입니다. 특히 다음 두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길입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12개 종단 지도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새삼 삶은 함께하는 순례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기자회견 중 고백하신 말씀입니다."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수는 없다.'고 말했다."
교황님의 용기와 자비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자비롭고 정의로워 참 목자요 예언자입니다.
바로 오늘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잘 드러납니다. 맨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 일했는데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지불한 것, 바로 이게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자비와 정의입니다. 한 시간 일한 자의 가정사정을 배려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요즘 회자되고 있는 '기본 소득제'의 원조임을 깨닫습니다. 모두를 살게 하는 게 바로 하느님의 자비요 정의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지닌 우리의 자랑스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우리의 참 목자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로 하시고 격려하시며,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아멘.
사람들이 불평해도 따라줄 리 없는 다른 크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의 마음은 옹졸하기도 답답하기도 한심하기도 한 좀 그런 거지요. 부모라도 자녀들 중 편애도 하고 허약해서 별난 사랑도 더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엔 기준이 애매합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한다고들 그러지요.
사람의 좁은 마음으로 대자연의 원리나 하늘의 뜻을 어찌 다 헤아립니까. 자연은 조건대로 하늘은 운행대로 움직이는 그 이유나 원리가 있겠지요. 구름 비 바람 지진은 사람들이 불평해도 따라줄 리 없는 다른 크기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오 20,15~16)”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살았던 우리에게
포도밭에서 일 할
소중한기회와
시간까지 주시며
더구나 품삯까지
아울러 곁들여 주십니다.
늘 빈손이었던 우리에게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쥐어주십니다.
우리에게는 포도밭의
자비로운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사랑의 참뜻은
언제나 한결같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을 언제나
놓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품삯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후하신 주님 사랑때문에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바라보지 않고
더 많은 품삯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 늘 한결같으심을
한 데나리온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모든 의미와
모든 가치는 다시금
주님께 대한 고마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우리를 생명의 포도밭으로
불러주셨다는 사랑만으로도
주님은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신앙은 고마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삶이란 고마운 마음없이는
풍요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밭도 포도밭 마당도
포도밭 푸대도 포도밭 흙도
포도밭 일꾼들도
참 고맙습니다.

어떤 고등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 학생이 불만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저를 이렇게 조그맣게 만드셨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제 가족들 다 크거든요. 그런데 저만 이렇게 조그매요.”
키가 크지 않는다는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의 키는 174Cm로, 현재 우리나라 20세 남성의 평균 키입니다. 딱 중간인 것입니다. 자신보다 키 작은 사람이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되는데도, 스스로 작다고 고정을 시켜버린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만을 먼저 보려는 경향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합니다. 남의 것만을 그리고 남의 행복만을 보려고 하고 있으니 정작 자신의 것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불평불만이 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짐을 나르게 되었는데, 이때도 “내 짐이 제일 무거워.”라면서 불평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어느 낯선 동네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서 짐을 쌓아둔 곳으로 가서 짐의 무게를 재보면서 제일 가벼운 짐에 표시를 했습니다. 그래야 다음 날, 제일 가벼운 짐을 짊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다음 날 아침, 그는 얼른 자신이 표시를 해 둔 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을 하면서 지고 온 짐인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했던 짐이 오히려 가장 가벼운 짐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남의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불평불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런 불평불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렇게 일꾼들을 부리는 주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나,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일꾼 모두가 똑같은 임금을 받는데 어떻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라는 불평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말이고 생각입니다. 그들은 불공정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횡재한 다른 일꾼을 아니꼽게 보아서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가진 것에 대한 불평불만들, 이것이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조건 주시기 위해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있는지 그래서 감사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됨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따라야 할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면서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정의. 이 하느님의 정의와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길을 잃어버린 까닭은 당신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박노해).
Do Nothing
2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트(donothingfor2minutes.com)가 있습니다. 주소를 클릭하면 황혼이 지는 바다 사진과 총 네 줄의 문구를 만나지요.
첫 줄은 제목입니다. “do nothing for 2 minutes”
두 번째 줄은 시간이 카운트다운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와 넷째 줄에서는 자그마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Just relax and listen to the waves. Don’t touch your mouse or keyboard”
만약 이 2분을 참지 못하고 마우스나 키보드를 건드리면 “Fail”라는 화면이 뜹니다. 그러나 2분을 잘 참으면, “well done”이라는 메시지가 나오게 됩니다.
솔직히 이 사이트를 체험하면서 2분도 생각보다 긴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단 2분 동안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평온한 마음의 여유를 주님 안에서 갖는 오늘을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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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성소후원회 야외 행사를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사실 이 행사의 준비를 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많은 항의 때문에 걱정이 계속 늘었습니다. 사람들의 항의는 이러했습니다.
“왜 이렇게 더운 여름날 행사를 하는 거예요? 요즘 특히 더운데 과연 사람들이 모이겠어요?”
그런데 더위에 대한 걱정은 오히려 엉뚱한데서 터지더군요. 바로 월요일부터 오게 된 많은 비로 인해 더 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즉, 야외행사를 하기로 했던 신학교의 운동장에서 도저히 진행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운동장 잔디는 완전히 젖었고, 또한 미사 후에 있을 한마음 잔치를 위해 준비했던 모든 야외 공동체 게임의 진행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 상태에서 새벽에 성당에 앉아 묵상을 하는데, 오히려 감사의 마음이 들더군요. 그래도 폭염보다는 비가 오는 것이 나은 것 같고, 신학교 건물이 있어서 비를 피해 프로그램을 진행할 실내 공간도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 말을 듣고 따라주는 헌신적인 신학생들이 있으며, 성소자들을 사랑하는 많은 성소후원회 회원들이 계신다는 사실에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외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외적인 것만을 바라보면 만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날씨 때문에, 돈 때문에, 능력 때문에, 지위 때문에 등등의 외적인 조건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불평불만이 사라질 리가 없습니다. 외적인 조건들을 뛰어 넘어야 불평불만이 아닌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어제만도 그렇지요. 한 1,700명 정도의 성소후원회 회원들이 오셨는데 그분들이 만약 외적인 것만을 보시려 했다면 어제의 모임에 오셨을까요? 또한 오셔도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소자들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과 함께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에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는 상황에서도 많은 분들이 신학교를 방문하셔서 신학생들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에 성모님을 떠올려봅니다. 성모님도 외적인 조건들만을 보려했다면 불평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져야 했고, 예수님을 낳자마자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또한 고향에 돌아와서도 침묵하며 살아야 했으며, 나중에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놓이십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외적 조건만을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내적인 조건들인 주님께 대한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셨지요. 그래서 불평불만을 던지지 않고, 평생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면서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외적인 조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내적인 조건들을 바라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순명의 마음을 갖추어야 불평불만이 아닌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에 대하여는 깊이 책망하고, 남에 대하여는 가볍게 책망하면 원망을 멀리 할 수 있다.(공자)
가장 위대한 것(‘좋은생각’ 중에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남자가 있었다. 평소 가난한 형편 탓에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던 그는 온갖 귀중품을 사들여 집 안을 장식했다. 대리석 바닥에, 번쩍이는 도자기, 유명한 화가의 미술품 등 집 안은 값나가는 물건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에게 집을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났을 때다. 마침 먼 여행길에 오른 듯한 수행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자는 수행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날이 저물었는데, 묵을 곳은 찾으셨습니까?”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우리 집에 가지 않으시렵니까? 집이 넓어 빈방이 많습니다.”
“그러지요.”
신이 난 부자는 예술품과 보물이 가득한 방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수행자에게 물었다.
“허허, 제가 보여 드린 것 중 가장 인상 깊은 물건은 무엇입니까?”
부자는 호화찬란한 물건 중 하나를 말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수행자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렇게나 육중한 건물의 무게를 견디다니, 역시 대지가 가장 위대하군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시간의 주인또한 하느님이십니다.
꽃 피는 시간이 따로 있고
열매 맺는 시간이 따로 있습니다.
시간의 짧고 김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 하느님께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야합니다.
함께 성장하는 생명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이 우리자신의 시간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앞에 다시금 꺼내어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봅니다.
주님의 후한 사랑을 잊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내가 살기위해 남을 쓰러뜨려야하는
죽음의 시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합니다.
모두를 살리시는 하느님을
오늘 복음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워 질 수 있는 변화의 시간을
우리가 빼앗았어는 안됩니다.
삶의 포도밭에서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우리자신이 늘 문제입니다.
오늘 이 하루는 시기와 비방, 판단에서 벗어나
사랑을 위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루의 시간, 일생의 시간
그 어떤 시간도 소중하지 않는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을 통해 꺼내어 놓아야 할 품삯은
언제나 감사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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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이 공평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대부분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지요. 잘난 사람도 있고 또 반대로 못난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가 있고 또 반대로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능력 많은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잘생기고 멋진 사람이 있는 반면 못생기고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공평한 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창조하셨을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즉, 공평과 불공평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종일 어린아이를 돌보는 전업주부는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아이와 놀아주어야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루 종일 회사에서 힘들게 일했으니 집에 와서는 쉬어야 공평하다고 생각하지요.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부부 안에서도 공평, 불공평의 기준이 다릅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과 불공평의 기준이 하느님과도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즉, 우리는 A가 공평한 것이고 B는 불공평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께서는 A는 불공평한 것이고 B는 공평한 것이라고 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더군다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감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이 다름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깊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밭 임자가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고용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있었고, 9시에 계약을 맺어 일한 사람이 있었고, 또 12시, 3시에 계약을 맺고 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시에 계약을 맺고 일한 사람이 있었지요. 이제 저녁때가 되어서 품삯을 주는데,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나와 잠깐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주더라는 것입니다. 불공평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밭 임자는 판단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일일 노동자의 임금으로 그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용입니다. 그렇다면 한 시간 분의 임금만을 받았을때 과연 그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비록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똑같이 하루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밭 임자는 똑같은 임금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외적인 부분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다가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복음에 등장하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처럼, 감히 나를 만드신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던지면서 동시에 나의 이웃을 시샘하기에 바빴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 나만의 판단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판단을, 즉 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드러날 수 있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팔고 사지는 못하지만 줄 수 있는 재산이다(루실 하퍼).
감사를 먹고 자란 제품(‘행복한 동행’ 중에서)
일본 다케다제과의 다케다 사장은 남다른 경영방침으로 과자 브랜드 ‘다마고 보로’의 성공을 일궈냈다.
우선은 재료의 차별화였다. 다른 경쟁사들이 저렴한 달걀로 과자를 만들 때 다케다제과는 일반 달걀보다 3배 비싼 북해도산 유정란만을 고집하며 최고의 품질에 주력했다. 그러자 제품에 대한 신뢰는 고객의 구매로 이어졌고, 다마고 보로의 시장점유율은 어느새 60%를 넘어섰다.
다마고 보로의 두 번째 재료는 감사였다. 과자를 만들 때 이곳의 직원들은 과자를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외친다. 다케다 사장의 감사 전략은 한 실험 연구결과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사람이 화를 낼 때 내뱉은 숨을 봉지에 담고 그 안에 모기를 넣으면 몇 분 안에 죽지만, 반대로 웃을 때 뱉은 숨에서는 훨씬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감사를 느낀다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만드는 사람의 행복도를 따지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만드는 사람의 심리적 파동이 물건으로 이동하기 때문이죠.”
공장의 생산시간 내내 “감사합니다.”라고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 놓는 까닭에, 다케다제과의 제품은 출하될 때까지 100만 번의 ‘감사’를 들으며 만들어진다고 한다. 폭발적인 매출 속에 다케다 사장은 말한다.
“하루에 3천 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해 보세요. 인생이 바뀔테니까요.”
인간의 경제를 허물고 하느님의 경제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사람은 노동으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며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과 상관없이 노동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며, 존엄한 사람을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여기는 것이 인간의 경제라면, 할 일이 없어 서서히 죽어가는 이들을 노동의 축제 마당으로 조건 없이 초대하는 것이 하느님의 경제입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일자리에 주린 이들은 제 살 깎아 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아무 일이나 하려 합니다. 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악용하여 생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삶의 질에는 무심한 채 일한 만큼만 보수를 지불하는 것이 인간 경제의 정의라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넉넉히 삯을 쳐 주는 것이 하느님 경제의 정의입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점점 더 대량 실업과 저임금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요즈음, 무자비한 인간의 경제를 허물고, 삶의 기운이 넘치는 하느님의 경제를 세우는 것이 너무나도 절실합니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정의와 자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가운데 아주 특별하고 드라마틱한 생애, 마지막 순간에 기가 막힌 반전을 성공한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셨던 골고타 언덕에 예수님 오른편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무고한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웬만해서는 십자가형에 처해지지 않았을텐데, 그는 그간 살아오면서 죄란 죄는 다 지었습니다. 갈 때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자포자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막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말종이었습니다.
이런 우도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30분전, 혹은 10분전쯤이었을까요. 대뜸 예수님을 향해 한 가지 청을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순간 예수님께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답변을 하십니다.
“너, 참 간땡이가 부었구나. 너 지금까지 살아온 것 좀 생각해봐라. 너 지금까지 등쳐먹은 돈 얼마야? 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 괴롭히며 살아왔어? 그런 네를 기억해달라고, 정말 뻔뻔스럽다!”
그 순간 저 같았으면 위와 같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완전 막가파였던 우도에게 천국 낙원을 확증하십니다. 우도 입장에서 봤을 때 참으로 큰 반전이며, 정말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우도 사건을 묵상하노라면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포도밭 주인으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처신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처사는 정말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정의롭고 공평무사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전 9시부터 일한 사람들에게 그들과 맺은 근로계약서에 따라 정확히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의만, 원칙만, 법만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정의의 하느님이신 동시에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연민과 측은지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큰 마음으로 똑같은 임금을 지불하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열심히 신앙 생활해 나가는 사람들, 계명에 충실한 사람들, 충만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정도를 걷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크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인생이 꼬이고 꼬인 사람들, 나름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기를 썼지만 잘 안 풀리는 사람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당신 사랑의 손길을 계속 펼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처신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웃들과의 만남과 관계 안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줘야 할 정답입니다.
정의와 자비가 함께 가야 합니다. 원칙과 관용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그 한 가지를 선택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 신부님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죽게 되었는데, 그가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는 아들이 마침 그의 곁에 없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그냥 죽어버릴 경우 모든 재산을 종이 다 훔쳐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다지 충성스럽지 않은 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면서도 머리를 써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부자는 종에게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이 모든 재산을 너에게 주겠다.”
종은 매우 놀랐습니다. 주인은 계속 말했습니다.
“단, 조건이 있다. 내 아들도 살아야 하니까, 내 재산 중 한 가지만은 내 아들에게 주도록 하라.”
종이 신이 나서 모든 사람을 불러다놓고 이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내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주인님이 한 가지를 주라 하셨으니 한 가지를 선택하십시오.”
아들은 아버지가 이 충성스럽지 못한 종에게 재산을 물려준 데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아들은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아들은 종에게 이런말을 합니다.
“나는 너를 갖겠다.”】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선택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아들이 지혜롭지 못해서 비싼 물건 한 가지를 선택했다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풍요롭게 살지는 못했겠죠.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되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에게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오늘 화답송에서 읽혀지는 시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말씀대로 주님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아쉬움이 남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시고, 그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에 나아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 곧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미사를 봉헌하는 자리를선택하여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 남자에게 고민이 있었다.
방귀를 뀌면 이상하게도 소리만 날 뿐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남자는 의사를 찾아갔다.
“선생님, 저는 방귀를 뀌면 냄새가 안 나요.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럼 방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시간이 좀 흐르자 큰 소리와 함께 방귀가 나왔다.
그러자 얼굴이 누렇게 변한 의사가 말했다.
“당장 코 수술부터 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
안소근 수녀님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는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듣습니다. 그러나 꼴찌라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이 첫째가 될 때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하느님 모습은 인간적인 논리를 넘어섭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그가 언젠가는 그 갚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 그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곧 구원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은 쉽게 잊고 맙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라는 구절을, 200주년 성경에서는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집니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데, 선하지 못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눈길이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받아주고 인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꼴찌였던 사람에게 선하신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그는 첫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였던 사람이 이런 하느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의 눈길이 악해진다면, 그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랐던 세리와 창녀들을 무시했던 바리사이들과 똑같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예리한 칼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실제 삶을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우리의 삶과 타협시키고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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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차림을 한 신사가 은행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은행 측과 투자에 대해 의논하려고 찾아온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담당자가 없어서 만나지를 못했지요. 그래도 꼭 만나고 가야겠다 싶어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여전히 담당자가 오지 않아 결국 내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은행 문을 나섰습니다.
잠시 후 이 신사는 다시 돌아와 은행 직원에게 주차권 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도장이 없으면 주차료를 물어야만 되니까요. 그런데 직원은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기서 저축을 하거나 인출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행 방침에 따라서 도장을 찍어줄 수 없습니다.”
청바지 신사는 “담당자가 없어서 한 시간 씩이나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도장을 찍어주십시오.”라고 강력하게 말했지요. 그러나 직원은 역시 단호하게 “안 됩니다.”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척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은행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이른 아침, 그 은행에 예금해 놓았던 수백만 달러를 모조리 찾아서 다른 은행으로 가져가버렸다고 하네요.
이 사람은 IBM 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였습니다.
은행 직원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최선의 행동이 자기 은행의 최고 고객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행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기의 판단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틀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에게 일당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모습이 나오지요. 그런데 약간 특이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홉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공평한 주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일한 시간이 다르다면 차등을 두고서 일당을 줘야 공평한 것이지, 어떻게 모두 똑같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판단은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주는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적인 기준을 뛰어넘는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에서만 판단합니다. 만약 내가 다섯 시부터 일한 일꾼이었다면 이와 같은 처사를 체험하면서 공평하고 사랑가득한 분이라고 말했겠지요. 반대로 내가 아홉 시부터 일했다면 그분의 사랑을 보려 하지 않고 아마 악덕 기업주로 몰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아닌, 주님의 판단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즉, 사랑이 가득한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이 세상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을 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 그리고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괴테)
로메로 주교님의 기도
가끔 뒤로 물러서서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노력으로 세워지지 않는 나라일 뿐 아니라
우리 눈길로 가서 닿을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하시는 거대한 사업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평생토록 감당할 따름이지요.
우리가 하는 일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손길이 미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습니다.
어느 선언문도 말해야 할 내용을 모두 밝히지 못하고
어느 기도문도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담지 못합니다.
어느 고백문도 옹근 전체를 싣지 못하고
어느 방문도 돌봐야 할 사람을 모두 돌보지 못합니다.
어느 계획도 교회의 선교를 완수 못하고
어느 목표도 모든 것에 닿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어느 날 싹틀 씨를 우리는 심습니다.
그것들이 가져다줄 미래의 약속을 생각하며,
우리는 뿌려진 씨들 위에 물을 주지요.
그 위에 벽돌들이 쌓여지고 기둥들이 세워질
내일의 건물에 기초를 놓고,
우리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효과를 내다보며
반죽에 누룩을 섞습니다.
우리는 만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때
거기에서 해방감을 느낄 따름이에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합니다.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것이 시작이요
하느님 은총을 세상에 임하도록 하는 걸음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끝내 결과를 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건축가와 목수들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건축가가 아니라 목수들입니다.
메시아가 아니라 사제들이에요.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들입니다. 아멘.
법대로 할까요?
윤원진 신부님
예비신자 교리를 하다보면 입교식을 마치고도 한참 후에 교리반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당은 1년 동안 교리를 하는데, 세례식을 2-3개월 앞두고 교리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어떻게 결정할지 참으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법대로 따져서 안 된다고 거절할까, 내년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니 기다렸다가 신청하라고 할까, 일찍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 다른 예비신자와의 형평성을 따져서 당신들에게만 혜택을 줄 수 없다고 말해줄까 …. 그러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정신’은 어떠한 법보다도 앞선 모양입니다. 형평성과 공정함 앞에서 복음은 모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럴 때에 법과 복음은 서로 다른 듯이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모든 사람을 한 가지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려함’, 곧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도 나에게 ‘법대로’ 하시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몹시 두려워집니다. 다만 나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정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청년들을 만났는데 한 자매가 “저는 사람들을 죽이고 평생 못된 짓만 하다가 죽기 전에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생각으로는 이해 가지만 정말 내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이라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한 사형수를 기억합니다. 제 대자 중 한 명의 형님이었는데 청부 살인을 하고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사형 선고를 받고 하느님을 알게 되어 믿는 마음으로 누구보다도 영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도 이해가 가는 것이 평생 그리스도의 규범 안에서 착하게만 살다가 힘겹게 구원을 받는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여 극적인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오래 된 신자건 얼마 안 된 신자건 같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한 자매는 그러나 현재 냉담중입니다. 제가 있을 때는 주일학교 교감까지 하면서 매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새 냉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은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이 구원받을 상태에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하시며 평생 낙태와 성감별 등을 하시며 살아오신 70이 훨씬 넘어 회개하신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황혼에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 받은 지 1년 반 만에 신구약 필사를 하였고 매일 기도로 회개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비록 질문을 했던 그 자매가 성당에서 봉사도 훨씬 많이 하였지만 지금 당장의 모습으로는 구원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은 그 할머니나 제가 알던 사형수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 이렇게 벌어질 상황에 대해 미리 아시고 비유를 통해서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포도원 주인에게 오히려 꾸지람까지 듣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은 제일 먼저 합당한 임금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즐길 것 다 즐기다가 늦게 세례를 받고 마지막에 불타는 마음으로 잠깐 살다가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일까요?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을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너무나 고생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고생일까요? 세상눈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매일 미사하고 기도하고 쉽게 넘겨버릴 잘못도 양심상 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힘들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힘든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죄를 지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행복이었다면 오히려 늦게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늦게나마 참 행복을 알게 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남들은 일하고 있는데 일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어서 포도원 밖에서 하루 종일 빈둥대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이들은 일용직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내일 아이들이 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 속에서 일을 못하고 포도원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쉬울까요, 아니면 포도원 안에서 비록 고생은 하지만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일하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그러나 오늘 포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마음이 악하여 행복으로 불러주셨음에도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고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셨더라도 그분의 참 뜻을 깨닫고 주님 안에서 자신의 행복과 감사를 늘려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똑같은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일랜드에서 영어 학원을 다닐 때 제가 있던 반에서 그래도 제가 다른 한국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특별히 외국 말을 오래 한 저로서는 다른 한국 사람들보다는 영어단어도 더 많이 알고 말도 더 잘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뻐기고 있을 때 한 한국 자매가 들어왔습니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영어 교사를 하는데 잠깐 발음을 배우러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것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먼저 불러주었으니 빨리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늦게 불러주신 사람들은 그들이 덜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 나름대로 그들을 훈련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일이 없도록 믿고 구원받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완전해 질 수 있도록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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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저는 새벽 6시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청취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새벽을 기도로 시작하자는 의도로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이 방송 중에 EVENT 행사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한 문제씩 맞추기 Event입니다. 즉, 하루에 제가 한 문제씩을 내는데, 그 문제들의 정답을 적어서 월요일에 제게 E-Mail로 보내주시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점자가 나올 것을 대비해서, 새벽에 대화방 참석 점수, 그리고 게시물 작성 점수를 만들어 1등과 12등(행운의 등수)에게 상품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대단한 상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이 Event에 참석하셔서 더욱 더 활기찬 카페의 모습을 갖추게 되더군요. 특히 상품에 욕심내지 않고 Event 문제의 답을 서로 상의하면서 푸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는 분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인사를 올리는 모습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도 이곳 카페입니다.
사실 이 사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지요. 어떻게든 1등을 하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이 사회 안에서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 아래 모인 이 카페 안에서는 이 사회 안에서의 1등 증후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이 카페를 방문하시고, 이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얼마 전부터 성지 안에서의 봉헌 초를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께서 방문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초 홀더가 예뻐서 많이 없어지겠다.”
초를 담는 홀더가 조그맣고 예뻐서 사람들이 그냥 집어 갈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신부님의 걱정과 달리, 지금까지 단 하나의 분실도 없었습니다. 사회 안이라면, 이렇게 분실 없이 쓸 수 없겠지요. 어쩌면 남아나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담겨 있는 성지이기에 그런 분실이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주님 아래에서는 1등도 없고, 내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 가득한 소유욕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 세상의 법칙과는 다르게 활동하시는 주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그렇지요.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에 일한 사람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는 것.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래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서 더 사랑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즉, 그 안에서는 자기의 수고와 노력도 남과 함께 나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복음에서의 그 소작인들도 처음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일거리를 준 포도원 주인에게 너무나 감사했지요. 그 주인이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을 떠나려 할 때, 그들은 욕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투덜거립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곁을 떠나려 할 때, 바로 이런 세속적인 욕심과 원망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맘에는 어떤 마음이 있나요? 사랑과 나눔의 마음이 있나요? 아니면 이 세상의 미움과 욕심이 자리 잡고 있나요? 내 마음을 통해서 내가 지금 어디 밑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맙시다. 주님 아래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승리할 수 있는 이유('행복한 동행' 중에서)
1967년 도쿄 도지사 선거 때의 일이다. 한 신문 기자가 선거 운동에 나선 입후보자에게 물었다.
"도쿄의 세 가지 자랑거리를 꼽아 주시겠습니까?"
첫번째 사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황궁, 지하철, 고속도로"라고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두번째 후보였던 미노베료키치는 "한조몽 부근의 시냇물, 메밀과 뱀장어, 젊고 예쁜 여성"하고 대답했다. 이 간단한 대답에는 도쿄의 풍경과 맛, 아름다움까지 담겨 있었다.
미노베료키치는 이 일을 통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타를 날렸고, 결국 도지사에 당선되었다.
하느님의 자비는
임문철 신부님
예전에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저런 죄를 짓고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아 구원받은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에도 등급이 있어서 순교자들처럼 영광스런 구원이 있고, 간신히 구원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가족 중에 망인 혼자만 세례를 못 받고 죽었는데, 그 유족들이 성당묘지에 묻기를 원할 때 허락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사제회의에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묘지이기에 교회에 속하지 않은 비신자는 교회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가능성에 관한 신학적 이론일뿐 정작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비상세례(대세)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믿음도 없이 교회묘지에 묻히려고 비상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구원일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떠난 이나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자비의 승리요 영광스런 구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투덜대는 마음이었는데
한명수 시인
일을 하다 보면 서로가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더군다나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 차에서 오는 소외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회의를 하면서 제안하는 여러 일 중에는 구성원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제안자는 쉽게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일을 자꾸만 요구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전,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며 회의를 할 때였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내가 아이디어가 많고 주일학교 경험도 있으니 일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감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이 매번 회의 때마다 기발한 제안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일은 한명수 선생님이 하시면 딱 제격인데요.”라고 했다. 제안만 하면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해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다시 모였다. 며칠 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교사 회장이 “앞으로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약한 자의 편에서 생각하고 결정을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제안을 하였다.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어려움을 안겨주었고, 새벽부터 일을 하고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했다며 투덜대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따뜻한 배려를 제안했던 그 교사 회장은 주위의 기대감을 살 만큼의 아이디어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녔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당 40만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처음에는 별것도 아니려니 생각하고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합병증세로 병세가 위중해져서 돌아가신 분이 계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단 하루 전날, 한 교우가 방문해서 대세를 드렸습니다. 병세가 워낙 급진전되었고, 또 워낙 위급했기에 아주 간단하게 대세를 드렸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교리만을 설명해드렸고, 물로 세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대세를 드린 교우는 교육받은 대로 본당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이름, 세례명, 대세 장소, 시간, 대세 준 사람… 간단히 적어서 사무실에 보고했습니다. 사무실에서는 본당 연령회장님께 연락을 취하였고, 연령회장님은 주임신부님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 앞에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유가족들에게 본당공동체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관대하게도 유가족들에게 본당 영안실 사용 및 본당 장례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연령회장님을 비롯한 회원들께서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이 장례절차 일체를 책임지셨습니다. 연도가 생겼다는 공지에 많은 신자들이 영안실을 찾아와 열심히 연도를 드렸습니다.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많은 신자들이 장례미사에 참석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장지까지 따라오셨습니다.
이런 본당공동체의 모습 앞에 비신자였던 유가족들은 진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고두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삼우미사가 끝나자마자 유가족 전원이 예비자 교리 반에 등록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당황해하고 있을 때,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내일처럼 달려드는 연령회원들의 봉사활동,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너무나 큰 몫을 해내고 계십니다.
한평생 비신자로 지내다가 단 하루 전에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분이 본당 공동체 안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분들은 은근히 심기가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친정아버님께서는 유아세례를 받으시고 한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오셨는데, 70평생 단 한 번도 주일미사 궐한 적 없으며, 노년에 접어들면서는 단 하루도 매일미사를 거르신 적이 없으셨는데, 본당 내 봉사활동이란 봉사활동은 혼자 다 하셨는데…
이런 친정아버님의 장례와 단 하루 전에 대세받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가 별반 차이가 없다니…‘이럴 수가!’ 하고 속상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와도 일맥상통합니다.
포도밭 주인의 임금 지급 방법은 참으로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장장 8시간이나 열심히 일한 사람이나, 실컷 늦잠자다가 한낮이 다되어 일어나서는 어슬렁거리다가 오후 5시부터 단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일당 5만원을 지급했습니다.
단 1시간만 일한 사람들부터 일당이 지급되었는데, 놀랍게도 5만원이었습니다. 일당은 받은 일꾼들은 입이 ‘짝’ 벌어졌습니다. ‘이게 왠 떡이냐?’며 싱글벙글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아침 일찍부터 일한-은 속으로 이런 기대를 했겠지요.
“단 1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5만원을 주네. 그렇다면 나는 8시간을 일했으니, 가만있어보자 ‘오팔이 40’ 그럼 40만원이네. 야, 이거 오늘 운수대통이네!”
그러나 정작 주인이 건네준 일당을 받아보니, 왠걸, 1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은 액수인 5만원이었습니다.
잔뜩 기대했다가, 기대가 물거품이 되자 일꾼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따집니다.
“막판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일꾼들이 따지는 것이 당연해보이나, 보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들이 화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과 일꾼들은 처음부터 이후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분명히 정했습니다. 주인은 그들과의 계약을 정확하게 이행했기에 근로기준법에 어긋남이 조금도 없습니다. 고용주는 아무런 결격사유도 약점도 없습니다. 정의롭게 처신했습니다.
따라서 일꾼들은 더 이상 요구할 권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은근히 화가 나지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그리고 마침내 주인은 자신의 계획을 밝힙니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분이기에 정의롭게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그대로 이행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분이기에 약자와 죄인들, 실수한 사람들, 게으름뱅이들에게도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한평생 의롭게 살아온 의인들, 일찌감치 입교하여 한 평생 성실하게 신자생활을 해 오신 부지런하고 근면하신 분들, 혹시라도 은근히 속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 구석구석,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널리 미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한 평생 악인으로 살다가 세상 떠나기 단 몇 분 전에 회개한 우도에게도 천국을 허락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함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김광태 신부님
포도원 주인은 마치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왕 쓰는 김에 하루 종일 고생한 사람들에게 몇 푼 더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후한 주인이 자기를 위해 수고한 이들에게는 오히려인색한 것 같아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비유 내용을 아무리 읽어 봐도, 주인은 농사에 관심이 있어서 일꾼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그 일꾼들이 아침부터 서 있는 것을 보았단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는 일꾼의 대답은 옳습니다. 오후 5시까지 일꾼을 찾아야 할 정도로 손이 모자랐다면 일찌감치 그 일꾼들을 데려다 썼을 것입니다. 결국 일을 시키는 이유도 꼭 일손이 모자라서가 아니었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는 이유도 수고를 보상하려는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부족함 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은총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물론 감사해야 하지만, 많은 수고를 한 사람 역시 감사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일찌감치 품삯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는 행복을 누렸지 않습니까? 못하겠다고 손사래 치지 않고, 봉사를 부탁할 때 기쁘게 응답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김보경 수녀님
어머니는 피난 내려와 행상으로 여섯 식구의 생계를 도맡으셨다. 어느날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 끝에 “휴우, 너희 4명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쪼르르 학교 다닐 때엔 밤에 ‘내일은 또 어떻게 애들을 먹일 수 있으려나!’ 싶어 가슴이 활랑활랑하여 잠 못 이룬 적이 많았지” 하셨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살이의 면모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아르바이트 한번 하지 않고 4년제 사립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랑하는 님을 따라간다며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생해서 대학공부까지 시켰으니 벌어서 갚고 들어가라 하시기는커녕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해야지” 하시며 허락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이른 아침에 선택되어 일터로 간 행운의 일꾼들은 오후 5시가 되도록 아무도 자신을 일꾼으로 뽑아가지 않아 ‘내 자식들을 어떻게 먹일꼬!’ 하며 애간장을 태우던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전자는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하되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확실한 희망을 갖고 있었으나 후자는 가진 것도, 체력도, 재주도 없어 뽑히지 못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에 싸여 희망 없이 지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 곧 하느님 아버지는 그 점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20,13) 정의를 세우셨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처럼 가족과 함께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고 추위를 가릴 옷과 집이 필요하다.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의 후한 처사를 시기함으로써 스스로 꼴찌의 자리에 선 것은 아니었을까?
목자(牧者)의 영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전 아빠스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장상은 형제들을 섬기고 돌보는 목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범한 말이지만 새롭게 와 닿은 ‘목자’라는 말, 얼마나 잘 잊고 지내는 지요?
‘신부’나 ‘사제’라는 말은 자주 사용하지만, ‘목자’라는 말은 거의 잊고 지내는 느낌입니다.
예전 신학교 교수님의 비판적인 따끔한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神父)가 뭡니까? 말 뜻 그대로라면 귀신 아버지가 아닙니까? 이보다는 개신교의 목사(牧師)라는 말이 훨씬 성서적입니다.”
목자와 양떼의 관계를 망각하고 의식 없이 살아간다면, 사목(司牧)은 본의 아니게 방목(放牧)이 되어 목자 따로 양떼 따로 놀 수 있겠습니다.
목자의 영성, 비단 사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 지도자 및 평신도들이 지녀야 할 보편적 영성이니,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 친히 보여주신 삶의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 에제케엘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양떼를 전혀 돌보지 않고 제 이익만 챙기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질책합니다.
마침내 속이 탄,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주님 한 분 뿐이십니다.
화답송 후렴대로,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습니다.
주님은 닮을수록 선한 목자의 영성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을 상징하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선한 목자 의 영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식으로 볼 때, 오전 9시, 낮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부터 시작한 자들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일찍부터 일한 자의 불평은 당연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하는 군요.”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불평입니다만, 이 겉 똑똑한 일꾼은 주인의 깊은 심중을 몰랐습니다.
하느님 판단의 잣대는 합리성이 아니라 자비임을 몰랐고, 사람은 업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 받는 진리를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은총을 인간 상식이나 합리의 잣대로 재려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가지고 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하느님의 영역을 존중하여 월권(越權)하지 말고 제 분수를 지키는 게 겸손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배워 따르는 것이 선한 목자 영성을 지니는 지름길입니다.
상대방 하나하나에 대한 깊고 자상한 배려의 사랑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아빠스의 우선적 자질로 선한 목자의 자세를 꼽습니다.
길다 싶지만 내용이 좋아 인용합니다.
“아빠스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순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벌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권고해 주어야 한다. 또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 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나가고 사라질 지상 사물에 대해 지나치게 마음을 쓰느라고,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구원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가벼이 보아 넘기지 말아야 하며, 자기가 영혼들을 다스리도록 책임 맡았으므로 그들에 대해 헴 바침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베규2,31-34).”
형제들이 아빠스에게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목자인 아빠스가 모든 형제들에게 맞춰야 하며, 아빠스는 물질적인 것들로 인해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구원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목자의 영성, 자비와 지혜의 영성으로 교회와 수도회의 모든 장상들과 부모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영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며 선한 목자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아멘.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강영구 신부님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그대에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과 형제들이 잘 되는 꼴을 보아주지 못하는 심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도 배가 아픕니다.
공평과 정의의 잣대를 고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마저 불평하게 됩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나와서 일한 사람은 해거름에 나와서 일한 동료가 주인으로부터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며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혼자서 많이 차지하고 누리는 곳에는 하늘나라가 없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를 잘 아시지요.
부자가 한 방울의 물이 아쉬운 지옥(地獄)에 떨어진 것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호의호식하며 자기 삶을 즐길 줄만 알았지,
대문간에 누워있는 거지 라자로의 불행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거기에 지옥(地獄)이 있었고 지옥을 살았던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늘나라(天國)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하늘나라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권(主權)을 행사하시어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자비(大慈悲)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정의가 꽃피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꽃피는 나라입니다.(一明)
하느님의 이상한 계산법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또 다른 하늘 나라의 비유를 듣습니다. 오늘의 비유를 묵상하면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과 하느님의 자비, 인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가 서로 부딪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아침 9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일꾼을 부릅니다. 날이 저물어 하루 일한 품삯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대충 이 시간을 오후 6시 정도라고 생각해봅시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일한 시간을 따져보면 오후 3시에 온 사람은 세 데나리온을 받아야 하고, 아침 9시 온 사람은 아홉 데나리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 대충 오전 8시 쯤이라고 하면, 이 시간에 온 사람은 열 데나리온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람들의 공정한 계산 방식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 정의입니다. 사람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인간들의 물질적인 경제 정의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정의가 항상 지켜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가 정당한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는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일꾼들은 자신의 정당한 주장, 적어도 인간의 정의로는 타당한 주장을 포도원 주인에게 합니다. 이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보면, 이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은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일한 시간만큼만 계산하면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 본 계산을 역으로 하면 되죠. 아침 아홉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9 데나리온을,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3데나리온을, 그리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1 데나리온을 주면 되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주었다면 일찍부터 나와 하루 종일 일한 사람으로부터 항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자신과 가정을 꾸려가야 할 일꾼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루종일 초조한 마음을 졸이며 막막한 생계를 걱정했을 오후 5시에 온 일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싶었던 것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산 방식이고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일보다 사람을 먼저 봄으로써만 가능한 생명력있는 삶의 경제 정의이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상황을 이것 저것 조목조목 따져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도 오늘 포도원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따져서 거기에 맞게 품삯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바로 온전한 한 사람 자체이고, 이 사람의 삶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따지지 않고 하루 생활할 수 있는 품삯, 즉 한 데나리온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후 5시에 불려온 일꾼이라면 주인에게 항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로움에 감사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른 아침에 불려온 일꾼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주인의 처사가 못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처사가 몰상식한 것이라고 불평하겠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일을 돕기 위한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곧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불릴 수도 있고, 나중에 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언제부터 언제까지 한 것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품삯을 치러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고 주님께서 치러주실 삶의 열매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품삯을 치러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이재희 신부님
1년 전 쯤에 제가 타던 차를 판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때 누가 저에게 말해주기를 차에 세차도하고 광도내고 타이어엔 약품을 뿌려서 더 새것처럼, 때깔좋게해서 팔아야 돈도 많이 받고 잘 팔린다고 했습니다.
중고상에도 차 팔 때 다 그렇게 겉만 보기 좋게 해서 돈 많이 받고 판다고 했습니다.
차를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차의 성능보단 겉모습으로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높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외부의 형태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품을 자꾸 대형화시키고 자꾸 비싼 값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값도 싸고 소비자에게 유익한 물건은 이윤이 적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선택의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본래의 모습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화장하고 겉만 치장하려 합니다.
겉을 바꾸기 보다는 삶을 바꾸고 내면을 변화시키려는 풍토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에 온 사람 순으로 임금을 주었습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많이 받겠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모든 일꾼들은 똑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아침에 일찍 온 사람에게나 오후 늦게 온 사람에게나 임금을 똑같이 주는 것은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한사람, 시간적으로 오래 한사람이 보상을 많이 받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하고 그렇지 않고, 또 내가 본당에서 직책은 무엇을 맡고 있고, 영세를 일찍 받고 늦게 받고 그것이 은총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때 더 귀한 일이 있고, 덜 귀한 일이 있고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덜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날 일의 실적이나 단순히 쓰여진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내가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제까지 너무 못살았다는 실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느냐, 그렇다면 지금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다면 현재의 변화된 모습과 일하고 있는 그것만으로 하느님의 은총은 풍성하게 내려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나라이며, 하느님께서 활짝 열어 놓으셨기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품삯을 주는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과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는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립니다.
신앙인의 삶에서 변화가 지금 시작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시작된 변화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뒤늦게 후회하고 회개한 사람이 구원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언제나 후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한편, 겉으로는 일을 잘하고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잔꾀를 부린다거나 심성이 악한 사람에게 은총이 풍성히 내려진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현대에는 포도원에 일하러 오라고 부르는 포도원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 일이 많은데도, 본당에서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도 봉사에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
이철희 신부님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 자유이지만, 그 말을 할 때 갖는 생각은 세상의 것이라면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는 가능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야기에, 예수님은 우리더러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검가나 희게 만들지 못하면서 맹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을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는데서 나옵니다. 신앙의 표현으로는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인 오만함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한다면 ‘나보다 더 힘이 강한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자신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정말 필요할 때는 두려움을 갖기 마련입니다.
신앙인으로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켜 ‘두려워 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특히 견진성사를 이야기할 때에 그런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서 나오는 존경심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올바로 돌아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태어나는 일도 내 맘대로 못했고, 세상을 다 마치는 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그 둘 사이의 인생의 시간을 우리는 함부로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백성들의 목자를 향하여 징벌의 소리를 선언하십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는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 각자의 마음이기는 해도 그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한 주인의 처사에 항의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던 포도원 주인의 말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양(量)과 질(質)의 차이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해주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이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지난 월, 화요일의 복음이었던 ‘부자청년의 추종거부 이야기’(19,16-22)와 ‘부자의 구원불가능에 대한 단언’(19,23-26)과 ‘예수추종의 보상에 관한 대담’(19,27-30)에 이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마태오가 앞서간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뜻으로 오늘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19,30)는 역설적인 말을 오늘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하는 비유의 끝(20,16)에 되풀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나라가 완성되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약간의 서열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변화, 즉 처음과 끝이 뒤바뀌는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초기 교회 안에 상당히 짙게 깔려있던 생각이었다. 이는 마치 유행어와도 같은 것이었다.(마르 9,35; 10,31; 마태 19,30; 20,16; 루가 13,30) 그러나 이러한 처음과 끝의 뒤바뀜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예수께서 친히 이 말씀을 발설(發說)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것과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비교적 사회의 피지배계층과 소외계층이 예수를 추종하였기에 그 추종의 대가로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생각의 참뜻은 오늘 비유에 담겨있다.
오늘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隱喩法)이기는 하지만 비유 자체로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된다. 포도원은 하늘나라요, 장터로 일꾼을 찾아나가시는 분은 포도원의 주인인 하느님이시다. 포도원에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 받고 일하는 일꾼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마태오가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시간을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로 구분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태오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구분이다. 각 시간대(時間帶)의 순서는 곧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들, 즉 백성의 원로들과 지도자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일반 서민들, 그리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들, 즉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소외 받은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의 순서로 볼 수 있다. 이같이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하느님나라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비유 속에서 보듯이 포도원 주인의 후한 처사에 대하여 처음부터 일하던 일꾼들의 불평은 당연하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품삯이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중에 온 일꾼이 일찍 온 자기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배 아프다 못해 신경질 나는 일이다. 사람의 계산법은 그렇다. 적게 일하고도 많이 일한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적게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재수나 횡재 같이 보이고, 많이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억울하고 불공평하며,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하느님의 계산법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상식(常識) 완전히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비유자체의 내용에 머물지 말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중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비유는 두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았으며,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꼴찌로 초대받은 세리와 창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처사에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의 심기(心氣)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산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대접이라고 해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그곳에 두 번째 교훈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같은 대접이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품삯의 양(量)은 같지만 그 질(質)은 다르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의 한 데나리온 속에는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정성이 베어있다는 것이다. 늦게 왔는데도 같이 주어진 품삯의 가치는 처음 것과 다르다는 말이다. 많은 수고 없이 주어진 품삯은 같은 액수라 할지라도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양만 많으면 좋아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같은 양이라 할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내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 1-16)
유광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예수님께 채용된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포도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채용된 예수님의 일꾼들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의 첫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일을 하던지, 가정에서 가정 주부로서 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을 하던지, 또는 병원에서 일을 하던지, 크리스챤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직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양로원 등을 가보면 운영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사업체의 운영에 또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복음전파의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가정의 가장들이나 주부들도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된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저의 매일 복음 묵상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이 내용만이라도 가족들과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포도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사야서에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서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1-7)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복지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살펴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도 않았고 야훼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로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이었다. 이제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새로 만든 포도밭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가 송이송이 맺게 해야 한다. 포도송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포도밭은(장소는)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 직장 등은 포도송이를 맺어야할 포도밭이다. 포도송이를 맺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집안이든 아니면 직장이든 그곳은 나의 포도밭이 아니라 주님의 포도밭이다.
따라서 우리는 채용된 일꾼답게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포도송이를 맺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노는 사람, 자기가 관리해야할 포도밭은 팽개쳐 놓고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그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노는 사람 등은 자기 몫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주님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한 사람들이다.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일한 노동의 대가의 비용이다. 즉 우리가 하루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노동의 대가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 데나리온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잘나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이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리며 기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루 일한 대가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노동을 하는 것이요 일종의 노예로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일한 대가에 목적을 두고 일을 한다면 즉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복음 전파를 할 수 없고 다만 마지못해서 시키는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복음전파가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대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일하도록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일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김으로서 일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따라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이는 일 자체에서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너스로 받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를 더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말고 오직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나 5년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이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일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