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시작입니다. 1,1-9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42-5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집회 26,1-4.13-16)와 복음(루카 7,11-17)을 봉독할 수 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에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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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와 소스테네스가 코린토 교회에 인사하며,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두고 감사한다고 편지를 보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시며,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처럼 일하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죽음은 우리에게 불현듯 닥쳐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간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시간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명이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누릴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마치 집주인처럼 여기는 종은 예상치 못한 날에 주인의 처단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마침내 그것을 잃을 것입니다. 생명은 선물로 받은 것이기에 그것을 선물로 내줄 줄 아는 사람만이 생명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탐욕으로 가득한 주인의 태도를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생명을 놓고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은 이미 그 생명을 잃은 사람입니다. 창세기의 ‘첫 사람’은 하느님과 같아져서 하느님처럼 생명의 주인 행세를 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창세 3,5 참조). 사실 그의 생명은 그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생명을 형제들과 선물로 나누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형제가 아니고 그분의 자녀도 아닙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내놓고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시편 24[23],1).(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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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담화문’이라고 불리는 마태오 복음 23―25장은 흔히 ‘심판 설교’라고도 합니다. 좀 더 살펴본다면 23장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을 담은 유다교 심판 설교이고, 24―25장은 세상 마지막 때에 관한 종말 심판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종말이 언제 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종말 심판을 대비하여 늘 깨어 준비하도록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 그리고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 참조)를 언급하십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비유가 오늘의 복음입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이 맡기는 종들을 잘 관리하고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 종입니다. 이렇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는 주인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 여기고는 맡겨진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종은 불충실한 종입니다. 결국 주인은 그 종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도 못한 시간에 돌아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입니다.
비유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지만 불충실한 종에게 내리는 주인의 ‘처단’이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말에서 처단은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의 그리스어 ‘처단하다’는 고대 페르시아의 극형 방식인 ‘둘로 잘라 버리다’를 뜻하기에, 불충실한 종의 최후는 그만큼 비참하리라는 것입니다.
충실한 종이 되어 종말을 깨어 준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복음적 담화문인 산상 설교의 결론에서 답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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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의 비유와 충실한 종의 비유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첫째 비유에서 ‘깨어 있음’의 형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둘째 비유에서는 주인에게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충실한 종의 자발적인 깨어 있음을 다룹니다.
깨어 있음의 비유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은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은 확실한데 언제 오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깨어 있음의 핵심입니다.
사도 시대의 몇몇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이나 두 번째 오심을 열렬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다고(1코린 1,7-9 참조) 코린토인들을 격려합니다. 지나치게 윤리적, 개인적인 성향의 종말에 대한 과거의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최후 심판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걱정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어야 하는 목적도, 구성 요소도 아닙니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두려움의 이유가 아닌, 신뢰에 가득 찬 깨어 있음, 그분과 만남을 기다리며 느끼는 타오르는 염원과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인간 역사의 흐름은 주님의 날에 정점에 이릅니다. 그때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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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준비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은 “다음에 하지 뭐!” 하면서, 자꾸만 다음으로 미루는 자세가 아닙니까? 이렇게 미루기만 한다면, 언제 완전한 존재에 이르겠습니까? 하느님과 일치하려면 끊임없는 수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깨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변화될 자세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가장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입니까? 이웃입니까? 가족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변화되려면, 우선 자신이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자세를 지녀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시고, 불충한 종들은 벌 받는 곳으로 보내는 비유를 드시지 않습니까?
이를 위해 작은 일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일만 생각하지요. 하지만 모든 것은 작은 일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과가 썩기 시작하는 것은 작은 흠집에서부터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빗나감도 작은 것을 소홀히 하면서 시작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나태한 생각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도 작은 사랑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확산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매일매일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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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모니카 성녀의 기념일에 이어 오늘은 그녀가 ‘눈물로 키운 아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념일입니다. 두 분이 주님 안에서 깊은 일치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이 테베르 강 하구의 오스티아 바닷가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다다른 신비 체험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의 아홉 번째 책에서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자는 고단한 여행을 마치고 알제리의 고향 땅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기대어 서서 앞으로 주님께서 선사하실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마음은 영원한 존재이신 주님에 대한 갈망으로 타오릅니다. 하늘까지 올라 거닐며 대화하던 이들은 이마저 초월하여 주님께서 진리의 음식으로 이스라엘을 먹이시는, ‘다함없이 넘치는 그 풍성한 영역의 지혜’를 목말라하다가, 마침내 그 지혜와 접촉하는 ‘순간’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신비 체험을 한 두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자신들이 ‘한숨 쉬며 바라다가 체험한 그 순간의 경험’과 같은 내용이라면, 그들의 체험은 곧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는 초대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우리 모두 부활하고 변화할 그때’(1코린 15,51 참조)인지 서로 묻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날 세상 모든 즐거움이 하찮게 보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짐작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이 신비를 체험했을 때는 주님께서 모니카 성녀를 당신께로 부를 날이 가까웠습니다. 며칠 뒤 병을 얻은 그녀는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눈을 감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한테서 먼 것이란 없는 법이다. 세상이 마칠 때 나를 부활시키실 자리가 어딘지 모르실까 봐 걱정할 것은 조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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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은 충실하였고 다른 이는 불충실하였습니다. 무엇이 두 사람을 갈랐습니까? 기다림의 자세였습니다.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던 사람이 칭찬받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깨어 있는 삶’은 멀리 바라보며 준비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있을 자리에 정확하게 있어야 합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가야 합니다. 줄 것은 주고 내야 할 것은 미루지 않는 삶입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구분도 결코 한 번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이는 불충실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충실한 종은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였기에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축복에는 감사드리고, 시련에는 인내를 청해야 합니다. 결국은 그분께서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은 삶을 바꿉니다.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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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살아가게 해 주는 미덕입니다. 사람들은 늘 성실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성실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성실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커다란 상급을 준비해 두십니다.
하느님께서도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조기교육 탓이었는지 컴퓨터를 80년대 초반부터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가 점점 사람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던 90년대에 제게 문의를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컴퓨터 조립을 해달라는 사람도 많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 달라는 부탁도 많았지요. 그런데 컴퓨터 전원을 켜도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질문이 의외로 많은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이 모니터의 전원을 켜지 않았거나, 모니터와 컴퓨터를 연결하지 않아서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편리함과 재미를 주는 컴퓨터이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결국 아무런 역할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계만 사용법을 알아야 할까요? 우리 각자에 대한 사용법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복잡한 사용법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기초로 우리 자신을 이 세상 안에서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봐야 합니다. 이 사용설명서가 바로 기도, 묵상, 미사, 성경 읽기, 자선, 희생 등입니다.
나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지금 내 안에서 의미 있는 가치가 나오고 있지 못한다면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이 올 때 깨어서 일하고 있는 종이고, 불충실한 종은 주인이 오려면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주인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종입니다. 깨어 있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먼저 채우려고 합니다. 자기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나에 대한 올바른 사용은 세상 것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만족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잘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야말로 깨어 준비하는 자의 필수 요건입니다.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성경, 기도, 묵상, 미사, 자선, 희생 등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신 사용설명서를 잘 숙지해서 제대로 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종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생애 최대의 자랑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섰다는 것이다(골드스미스).
두 마리의 늑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멀고 먼 옛날, 어느 나라에 ‘흑백방리’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속에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며 살았지요. 하얀 늑대는 이해와 용서를 먹고 자랐고, 검은 늑대는 질투와 분노를 먹잇감으로 삼았습니다.
늑대들은 새끼들일 때에는 그럭저럭 잘 지냈으나 몸집이 커지면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독차지하기 위해 검은 늑대가 하얀 늑대를 공격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하얀 늑대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싸움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이 나곤 했습니다. 어느 쪽이 이겼을까요?
답은 더 많은 먹이를 먹고 자란 늑대였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마음에도 이 두 마리의 늑대가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늑대가 살아남았습니까? 내 마음의 힘센 늑대는 어떤 늑대입니까?
이해와 용서의 먹이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모니카 성녀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뭉클해지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태극기의 위엄과 가치가, 소위 '태극기 부대'라는 사람들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역만리 타국땅에서도 가슴 속에 태극기를 품고 다니시던 독립 운동가들이나 애국지사들이,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시며 통탄하실 것을 생각하니, 후손된 사람으로서 차마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신성하고 존엄한 태극기의 격을 심각하게 실추시키고 있는 그들을 향해, '태극기 부대' 라는 말 대신, '태극기 모독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의 정이 솟구치는 '엄마'라는 단어가, 일부 몰지각한 몇사람들, 소위 '엄마 부대' 라는 사람들 때문에 그 의미와 가치가 무참히 훼손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태는 다른 사람들이 부리는데 이 큰 부끄러움은 왜 우리들의 몫이어야 합니까? 세상의 수많은 위대한 엄마들을 웃프게 만드는 일당들을 '엄마 부대'라는 용어 대신 '엄마 모독 부대'라고 칭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대한 엄마이신 모니카 성녀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대학자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란 큰 인물 뒤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희생과 헌신, 불굴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절 아우구스티누스의 방황과 타락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다 다녔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니교 이단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충격에 사로잡힌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백방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때로 타일러도 보고, 때로 야단도 치고, 때로 눈물로 호소도 해보고, 밤 새워 기도도 해보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썼습니다.
아들 때문에 밤낮없이 울고 다니던 그녀에게 암브로시오 주교님은 이런 위로의 말씀을 건넸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문제 청소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와 타락 앞에 취한 어머니의 태도는 참으로 영웅적이었습니다. 달콤한 죄의 유혹에 깊이 빠져든 아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한 가지 전략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전(長期戰)’이었습니다. 아들의 변화를 위해서는 오랜 투자와 무한한 인내,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진 아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다 바친 기도, 지극한 정성이 담긴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새로운 삶을 지향하며 수시로 단식했으며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모니카가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방이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방황과 타락의 세월은 점점 길어지고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남편 역시 신앙심은 빵점이고 출세욕구나 야심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고 매일 울고 다니다보니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가족 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남편과 아들과 손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요 추앙받는 대 성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오늘 모니카 성녀가 우리 가정에, 또 교육자들에게 건네시는 메시지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존재 자체로 고통의 원천인 자녀나 가족 구성원으로 인해 혹독한 마음 고생을 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즉시 모니카 성녀를 바라보면 됩니다. 매일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가요? 일년 이년이 아니라 16년 동안,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절히 기도해오셨나요?
혹시라도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은 무시한 채 내 의지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를 위해 단기적인 전략뿐만 아니라 중장기적 전략도 세워놓고 계신가요?
나의 뜻은 수면제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있을 때와 잠자고 있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깨어있을 때는 있고, 잠잘 때는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식’입니다.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자각몽’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꿈을 꾸면서도 의식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꿈이네. 그럼 이쪽으로 날아볼까?’라고 하면서 꿈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깨어있으면서도 잠자는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리고 그 선악과를 아담이 받아먹을 때는 깨어있으면서도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잠을 자는 상태입니다. 깨어있어도 내 자기 뜻에 묶여있으면 잠자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뜻’입니다. 내가 내 뜻을 추구하고 있는지, 혹은 그 뜻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의식해야 합니다. 물건을 놓을 때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디 놓았는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나는 항상 내 뜻을 만들어 나를 잠들게 만듭니다.
'1408’(2007)은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은 한 작가가 겪은 무서운 일을 담은 영화입니다. ‘1408’은 한 호텔의 방 호수입니다. 그 방에 들어가면 1시간 내로 모두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사후세계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그 방에서 자보기로 합니다. 호텔 지배인은 말리지만 주인공의 고집이 너무 셉니다. 그래서 좋은 코냑 한 병을 선물로 주고는 허락합니다.
그 방에 들어간 주인공은 온갖 환상에 시달립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딸을 잃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해야만 한다는 죄책감과 딸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 방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하게 하고 죽은 딸이 살아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시체로 변하고 오랜만에 가슴에 안은 딸은 재가 되어 산산조각이 납니다. 기쁨만큼이나 고통이 큽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방에서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방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지배인이 준 코냑에 불을 붙여 방을 태워버립니다. 자신도 연기에 질식되어 갑니다. 감독판에서는 소방관에 의해 주인공은 가까스로 구조됩니다. 그리고 1408호에서도 자유로워지고 과거의 집착에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1408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를 깨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침착하게 자아를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아를 태워버릴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나도 함께 죽는 것 같아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습니다. 다만 자아의 욕구에 더는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아와 반대되는 새로운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보통 자아와 반대되는 의식적인 행동을 ‘오른쪽’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항상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깨어나게 됩니다.
미국 어느 지역에서 장애 아이들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50m 달리기 경주가 열렸고 한 소녀가 1등을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나 1등 했어!”
엄마와 아빠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너무 지나치게 감격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오늘 처음으로 말을 했어요.”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것을 해 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비로소 자신의 방에서 탈출하여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의 힘으로는 깨어날 수 없습니다. 나를 달리게 만드는 누군가의 뜻을 의식하고 그 뜻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의식하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뜻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나의 뜻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믿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다면 뱀의 뜻을 따라줄 수는 없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식솔들을 맡기고 제때 양식을 내주게 하고 떠났다면 주인이 없어도 마치 주인이 있는 것처럼 그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먹고 마시며 식솔들을 괴롭히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매 순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것이 지옥 같은 자아가 만든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를 깨어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주님의 뜻입니다.
자아의 욕구는 수면제이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와 같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변을 보면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외모까지 멋진 분들입니다. 노래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계획도 훌륭한 분입니다. 마음먹은 것은 꼭 이루려는 분들입니다. 대학원에 다녀서 자격증을 얻기도 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데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먼저 나오곤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신부님이 자신의 능력을 못 알아본다고 합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간 곳은 너무 작다고 이야기합니다. 주교님께서 잘 못 보냈다고 이야기합니다. 큰 본당에서는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좌 신부님을 만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몸이 아픈 것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능력도, 재능도, 외모도 불평과 불만을 만나면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도 없습니다.
주변을 보면 또 다른 분들이 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외모를 가진 분들입니다. 노래도 거의 자유롭게 부르고, 말도 평범하고, 주어진 대로 사는 분입니다. 욕심이 많지 않아서 굳이 다른 것을 새롭게 배우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웃고,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엄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배울 것이 많다고 합니다. 온유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사제생활이 기쁘다고 합니다. 작은 본당에서는 신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다고 좋아합니다. 신설 본당에서는 성전 건축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님이 없을 때는 할 일이 많아서 좋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님이 오시니 같이 식사를 해서 좋다고 합니다. 늘 감사의 씨를 뿌리니 감사의 꽃이 핍니다. 웃음의 씨를 뿌리니 웃음꽃이 핍니다. 성당을 3개나 신축했는데도 힘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말보다는 발이 더 빠른 분입니다. 성실함이 감사를 만나면 진흙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바오로 사도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선포)는 도그마(신학)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선포한 지역 교회는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려면 많았을 것입니다. 남을 탓할 수도 있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늘 기도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시련도, 갈등도, 분열도, 박해도, 칼도, 죽음까지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사의 씨를 뿌렸습니다. 기도의 씨를 뿌렸습니다. 기쁨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한 씨는 백배, 천배, 만배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씀해 주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영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면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때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그때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많은 위험과 도전, 그리고 기회를 안고 있는 우리 시대에 성덕의 소명이 다시 한번 울려 퍼지기를 바라시며, 모든 이가 각자의 일상생활에서 성덕의 소명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시고자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발표하셨습니다. 제5장 영적투쟁, 깨어있음, 식별의 158항에서 보면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우리에게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복음을 선포할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승리하실 때마다 기뻐할 수 있기에 이러한 투쟁은 달콤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많은 유혹들이 있어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이루어가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요즘 코로나와도 같은 바이러스나 병마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사회 속의 돈일 수도 있고, 메스미디어나 SNS 일수도 있고, 게임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악마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으로 빠져들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의 위협으로부터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성령의 이끄심과 말씀을 통한 가르침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깨어서 식별해 나갈 때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승리이자 우리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 승리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깨어 있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목요일>(2020. 8. 27. 목)(마태 24,42-51), (성녀 모니카 기념일)
복음서에 나오는 종말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2)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
3)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4)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서 오신다.
5) 심판 때에 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지금’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종말과 재림의 날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실감 나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 막연하게 언젠가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라고, 지금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방심과 자만심이 되고, 그런 생각 때문에 회개를 미루게 되고, ‘깨어 있지 않은’(전혀 준비되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오지 않은 종말이 정말로 올까?” 라고 의심하는 이들이 있는데, 지나간 시간이 많을수록 남아 있는 시간은 더욱 짧아집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의 종말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각 개인의 인생의 종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않은 채로,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9).”
‘하느님의 뜻’은 심판과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준비한 사람에게는 종말과 재림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과 처벌의 날이 될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
2) 그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갑자기 올 것이다.
3) 그러니 ‘항상(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어라.”는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고 있어라.”입니다. (어떤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됩니다.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은 벌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 아니라,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점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온다는 점입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이 오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을 도둑이 오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 자체는 특별한 뜻이 없고, 그날이 갑자기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으려고 오는 도둑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심판도 처벌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심판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 24,45-47).”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각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관리자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잘 살면 주님께서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 자체가 큰 상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4,48-51).”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교회를 망친 죄에 대해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이라는 말은, 앞의 23장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에서 거듭 반복되었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불성실한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고되었던 불행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불행’은 심판, 처벌, 멸망을 뜻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말씀을 각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하면, 이 말씀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인생을 막 산 사람은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라는 말씀은, ‘갑자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라는 뜻인데, 종말의 날과 시간은 인간이 예상할 수도 없고 미리 계산할 수도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끝까지 버티십시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원로사제가 새 신부의 첫 미사에서 들려준 짧은 강론 내용이다. 너무 간단해서 싱겁다 했는데 원로사목자가 되어보니 명 강론이었다. “깨어 있어라” 은퇴미사가 있던 날까지 끝까지 버텼더니 주인께서 오셔서 칭찬을 해 주셨다.
장상은 사제들의 모습을 꿰뚫어 보고 있다. ‘일거수 일투족’ 하나 하나의 동작과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주인은 언제 올지는 나는 모르나 그날이 오면 주인은 나에게 찾아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사이동 때 말이다. 깨어 있으며 끝까지 버티려면 주인이 올 때까지 파견자의 사명과 비전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오늘 성녀 모니카 축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이다. 아들을 회개시켜 복음을 만나게 한다음 아들에게 유언을 하신다. “내 몸뚱이사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들 말거라.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 다오.” 끝까지 신앙으로 버티고 깨어 있던 어머니, 비천한 아들을 주남께서 제단으로 영접해 주셨다.
태풍 ‘바비’가 잘 지나갔다.
태풍 ‘바비’가 잘 지나갔나 보다. 얼마나 다행인지, 사람이 오염시킨 육지가 더러워 긴장마로 대청소 했고, 바다가 오염되 태풍으로 뒤집고 청청하게 한다. 또 버리고 마구 오염시키고 그러질 말자.
기상청 예보가 빗나갔다고 하자. 잘 지나갔고 만반의 준비를 시켜주지 않았는가? 감사하면 되었지 또 토를 단다. 제발 그러질 말자. 아이들 있는 자리에서 나이 먹은 아이들 참 많이 본다. 비난하고 욕하고 깔아 뭉개고 인간의 마음이 점점 더 사악해진다. 주어진대로 또 희망하며 살자. 강한 비구름이 북한을 향하고 있다한다. 별 피해가 없길 기도한다. 기쁜 소식 전하고 격려하고 존중하며 살자.
하늘이 내리는 상이 풍작이고 평화이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주인과 종 옛 얘기 같아서 아예 죽음 후 심판할 자 얘기로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사는 모습과 죽음 후의 일을 자주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하늘이 심판 내린다는 말 인정 합니까 안합니까 부터 먼저 묻겠습니다.
인정한다면 됐고요 안한다면 아예 짐승들과 얘기 한다 생각하겠습니다.
하느님이란 말은 하늘의 힘님 에너지님이라 표현해도 맞는 설명입니다.
하늘 또는 지옥에너지가 사람이라는 단말기에서 질에 따라 반응하겠죠.
하늘이 내리는 벌이나 죽음후 내리는 벌이 있다면 상도 당연 있습니다.
하늘이 내리는 상이 풍작이고 평화이며 안녕이고 죽음 후 영복 맞지요.
가장 어려운일, 가까운 사람에게 선교하는 것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보좌신부로 활동할 때 모시던 주임 신부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예요.
어느 본당에서 봉사 활동에 열성이셨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그 할머니는 새벽미사에 빠진 적이 없고 하루종일 성당의 일에는 뭐든지 열심하셨어요, 그 성당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터줏대감(?)이셨죠. 선교에도 열심히셨죠. 수많은 예비자들을 성당에 데려와서 본인도 함께 교리반에 참석하고 자신이 대모가 되어 수십명의 대녀가 있었대요.
오랫동안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방문해서 식사준비, 설거지, 청소 등 집안 일을 도와 주기도 하셨어요. 뿐만 아니라 선종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밤중이나 새벽이라도 즉시 그 집으로 달려갔어요. 시신을 수습하고 염습한 사람들만해도 수백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당의 많은 교우들은 그 할머니를 무척 존경했어요.
본당을 거쳐간 신부님들도 그 할머니를 “살아있는 천사”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해주셨어요. 그러다 그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쉼없이 달려온 봉사활동도 이제 마치게 되었어요.
장례미사가 끝난후 주임신부님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큰며느리에게 말했대요.
“자매님, 이젠 성당에 다니셔야죠? 돌아가신 어머니도 자매님에게 그것을 가장 바라실 텐데요.”
그러자 그 며느리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 신부님! 저는 세례를 받지 않겠습니다.”
“ 아니 왜요?”
“내가 성당에 열심히 다니다 나이가 들어 죽으면 천국에 가는데 그건 싫습니다.”
“자매님! 천국을 가는 것이 싫습니까? 네~~죽어서 시어머님를 또 만날 텐데 그건 정말 죽어도 싫습니다.”
집밖의 봉사 활동에 열심이던 할머니였지만 같이 살았던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함께 살았던 며느리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실패했다는 거죠.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족에게 선교를 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어요. 가족은 서로의 삶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를 할 때 신자들의 삶은 대단히 중요한 증거의 역할을 하죠. 대부분 처음 믿음을 갖게 되는 동기는 아는 신자들의 삶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죠.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부모의 삶은 신앙 형성 과정에서도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실제로 부모님으로부터 믿음을 전수받고 신앙생활을 배우는 경우가 많죠. 어느 순간 자녀들의 삶안에 부모님의 믿음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웃에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주님의 고유한 명령이죠. 이 명령의 실천은 선택의 여지가 없죠.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실천해야 하는 지상 과제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선교를 한 방법은 어쩌면 간단했어요
“ 저 공동체가 사랑으로 흘러넘치니 나도 한번 들어가고 싶다”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이 어느새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방법이 된다는거죠.
선교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따듯한 말 한 마디, 사랑이 담긴 행동 한 번에서 시작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을 이웃에게 보여주기 때문이죠
영원한 지혜를 찾읍시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Lib. 9,10-11: CSEL 33,215-219)
그녀가 이승을 하직할 날 - 우리는 모르는 채 당신만이 아시던 그날 - 이 가까워 왔을 때, 정녕코 그것은 당신의 그윽한 손길로 마련된 줄 아옵니다만 우연히도 그와 나는 단 둘이서 창문에 기대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 맞은 쪽에 집안의 정원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 곳은 오스티아 티베리나! 지루하고 고달프던 여행 끝에 속간을 멀리한 우리는 거기서 배를 타려고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둘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즐겁기만 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잊고, 눈앞의 일에만 열중하고 우리는 진리이신 당신의 어전에서 더듬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성자들의 영생, “눈에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고,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은” 그 미래의 생활을 우리는 차라리 마음의 입을 벌리고 당신께 있는 생명의 샘, 그 샘물의 하늘스런 흐름을 목말라했사옵니다.
꼭 이 말 이대로는 아닐망정,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오나 주여, 당신은 아시나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던 그날, 말하는 동안 이 세상은 그 온 가지 쾌락과 더불어 하찮게만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 그랬더니 천주께선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이 말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지 닷새가 다 못 가서 아니, 더래야 얼마 못되어서 그는 열병으로 눕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앓던 어느 날, 실신하여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바삐 가서 보니 이내 정신을 회복하고는 나와 내 형이 곁에 있는 것을 익히 보더니 무엇을 묻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디 있었더라?” 그는 다시 눈을 들어 슬픔에 당황하는 우리를 보고 말했습니다. “어미를 여기다 묻어 다오.”
나는 말문이 막히고,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내 형은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차라리 고향에서 돌아가셔야 마음이 편하지, 남의 땅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찌푸린 얼굴로 나무란 다음, 나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보아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어서 또 우리 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몸뚱이사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들 말거라.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 다오.” 어미는 간신히 이런 말로 그 뜻을 전하다가 뚝 그치고, 치열해 오는 증세 때문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증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받은 것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한껏 활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권력이나 재산, 지혜를 지녔다면, 그것을 여러분의 동료 종들을 헤치는 데 이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파멸을 불러올 것입니다. 죄는 어리석음에서 오므로, 사람에게는 지혜와 성실함, 둘 다 필요합니다. 주님에게서 훔치지 않고, 목적이나 성과 없이 낭비하지도 않은 사람은 주님의 재산을 충실히 관리한 성실한 종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적절히 나누어 줍 줄 아는 사람은 슬기로운 종입니다.
실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충실함과 슬기가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맡은 것을 조심스레 사용함으로써 종의 직분을 올바르게 이행하도록 불렀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에게서 홉쳐서도 안됩니다. 이 기운데 하나를 제대로 못할 때, 다른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고 해도, 주님의 재산을 허투루 쓰고 우리가 받은 자원을 마음대로 써 버린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산을 적절한 곳에 잘 썼지만 때때로 그것을 훔쳐 자기 것으로 삼은 사람도 엄한 추궁을 받을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섬기는 이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출타 중인 주인을 맞이해야 하는 종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종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종이라면 그 "때"를 모르기에 항시 준비를 하는 한편, 또 모르기에 기대와 설레임도 품게 됩니다. 긴장과 희망은 "무지"의 양면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마태 24,45)
주님께서 우리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길 바라시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 그런 존재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대접 받고 편하려고 우리에게 부당하고 힘든 일을 요구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그분이 먼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십니다.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으신다."(시편 121,3)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지키시기 위해 졸음도 잠도 마다하고 백성 곁에 머무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하셨듯, 우리 삶이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동행하셨지요. 그분은 우리가 당신 현존을 알건 모르건 개의치 않으시고 묵묵히 당신의 사랑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동반자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머무르고 계시지요.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 당신을 희생제물로 대속하시면서까지 철저히 종처럼 되셨습니다.
께어 있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바람에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면서 아버지를 닮아갔으면 하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수행하시면서 기쁘고 행복했던 종의 깨어 있음과 기다림, 충실한 사랑을 우리도 맛보게 해 주고 싶으신 겁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서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성실하신 분이십니다."(1코린 1,9)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 역시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합니다.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은 신부인 백성의 배신과 냉담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충실함은 본래 하느님의 속성이지요.
"그분께서 ...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1코린 1,9)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의 목적을 "친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교는 '사귐'이고 '알아감'입니다. '나눔'이고 '서로를 주고받음'이지요. 마주한 두 존재가 차츰 서로 안에 스며들어가서 깃들다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일치'에 이르지요. '하나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일치하자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기시니 우리도 기꺼이 그분 곁자리로 내려가서 종이 되어야 주님과 일치가 가능하겠지요. 그분께서 성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충실히, 또 그분께서 지혜이신 것처럼 우리도 슬기롭게, 부족하나마 까치발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며 닮아보려 애쓰는 행복한 종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1코린 1,5)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종이 되었다고 해서 비굴해지거나 빈한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풍요를 누립니다. 종이면서 주인을 나누어 받았기에 그렇지요. 그분과 관계 맺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녀 모니카와 함께 행복한 종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님과 누리는 친교와 일치를 향해 오늘도 깨어 섬기고 기쁘게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 24,46)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함승수 신부님
유명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노력이 끊임없이 오래도록 계속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는 일 자체를 아끼고 즐기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공자가 했던 말을 살짝 각색한 것입니다. 《논어(論語)》 중 '옹야편'(雍也篇)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知之者(지지자)는 不如好之者(불여호지자)요, 好之者(호지자)는 不如樂之者(불여락지자)니라.
이 말은 우리말로 하면 이런 뜻입니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현대적으로 변형된 격언보다, 오히려 논어에 실려있는 이 원전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는데 보다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충실한 종과 그렇지 않은 못된 종의 모습을 비교해서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세상 종말의 순간에 우리의 구원여부를 결정할 핵심 포인트는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불시에 들이닥치신다고 하시니, 누군가는 이런 불만을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정말 열심히 잘 따르며 살다가 잠깐 한 눈 팔거나 실수할 수 있는거 아니냐고, 그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데, 평생을 제멋대로 살다가 정말 운 좋게 그 타이밍을 잘 맞춰서 하느님의 뜻을 한 번 실천한 사람은 구원받는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거 아니냐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모르기에 그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몇 년 몇 월 며칠 같이 정해진 어느 한 순간을 뜻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시간'은 운 좋게 타이밍을 잘 맞춘 누군가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릴 영적인 준비가 온전히 갖추어진 때를 '구원의 시간'으로 정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영적으로 깨어 준비된 사람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좋아하고 또 즐기는 사람에게 구원의 시간은 기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때에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구원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사람에게, 욕망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구원의 시간은 절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기에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의 때'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구원의 타이밍은 운좋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평소 사는 모습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희망은, 길은, 문은, 보물은 어디에? -주님이, 내가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미래를, 희망을, 길을, 문을, 보물을 찾듯이 요즘은 주변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좀체로 미래가 희망이 길이 문이 보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많은 분들이 마음에 드리운 어두움에 답답해하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많이들 불안해하고 두려워 합니다. 올해 1월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의 재난이 계속되고 있으며 수해로 인한 손실도 매우 큽니다.
미래는 희망은 길은 문은 보물은 어디에? 답을 찾았습니다. 주님이 내가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라는 결론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신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닮아갈 때 바로 우리 하나하나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주님처럼, 나 스스로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 되어 하루하루 성인聖人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식사후 산책할 때 동요를 부르는 재미로, 행복으로 살아 갑니다. 언제까지 일른지는 모릅니다만 시냇물이 마르고 물오리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계속되리란 예감입니다. ‘기찻길옆 오막살이’ 동요가 ‘새나라의 어린이’ ‘섬집아기’와 더불어 보물처럼 반갑고 힘이 납니다. 이 세곡은 산책때 마다 부르는 필수곡이기도 합니다.
-“기찻길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찻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지금 보니 보통 동요가 아닙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 꾿꾿이, 반듯하게 살아가는 보물같은 이들을 상징하는 ‘아기’요 ‘옥수수’입니다. 정말 힘이 나고 낙관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밝고 힘찬 참 좋은 동요입니다. 모름지기 동요는 노래는 시는 글은 이래야 합니다. 생명과 빛을,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어제 산책중 숨어 크게 자란 하우스 옆 그늘밑 호박이 숨겨진 보물처럼 반갑고 고마워 사진을 찍어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데레사! 요즘 힘들겠어요! 믿음의 힘 선물 받으시고 힘내시고 행복하세요!”
“요즘 많이 힘들었는데 선생님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어 눈물이 나네요. 매달린 호박처럼, 저도 주님께 매달려 선생님 강론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요즘은 눈물이 많아졌어요. 선생님!”-
“믿음의 힘을 선물받으니 기운이 납니다. 힘찬 하루를 살겠습니다.”
“어머, 신부님! 보기만해도 힘이나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호박 사진을 나누며 여러분의 답글을 보니 저도 힘이 났습니다. 이런 숨겨진 호박처럼 하느님께 매달려 믿음으로 살아가는 내가 바로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요 성인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충분한 은총을 주셨고 주시고 있고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이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모니카 성녀입니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큰 감동을 선사하는 지금도 곁에 살아있는 듯 느껴지는 1700년전 성녀입니다. 성녀에 관한 주옥같은 일화는 참으로 많습니다. 길다 싶지만 가능한 많이 인용합니다.
-‘성녀의 남편 파트리치우스는 난폭한 성격이었지만, 결코 성녀를 때린 적은 없었다. 신심깊고 순종하는 성녀를 존경했으며 날로 유순해져 세례까지 받았다. 까다로운 시어머니도 성녀 편이 되었다.’
‘매일 교회 전례에 참석하여 인내의 덕을 키웠고 힘든 결혼생활을 하는 여자들에게는 “네가 네 혀를 잘 다스린다면 너는 결코 남편에게 두드려 맞는 일도 없을 것이며 남편도 언젠가는 더 좋아질 것이다.”’
‘모니카는 주교에게 아들의 비행을 고쳐달라고 청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주교는 성녀에게 아들을 위해 계속 기도할 것을 당부하며 다음 같은 말로 격려했다. “이렇게 많은 눈물의 아들이 멸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어 ‘고백록’에서 성녀의 아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증언입니다.
-‘저 여종은 몸으로 저를 이 현세의 빛 속으로 빚어주고 마음으로는 제가 영원한 빛 속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하는 성녀의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아들아, 나로 말하면 이승살이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다 채워진 마당에 여기서 아직도 뭘해야 하는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이승살이에 조금이라도 머물고 싶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나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하느님께서 나한테 과분하게 베풀어 주셔서 네가 지상 행복을 멸시하고 그분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을 보게 해주셨구나. 그러니 여기서 내가 더 뭘하겠느냐?”
“이 몸이야 아무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오직 한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하느님께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그렇게 병석에 누운지 아흐레 되던 날, 그이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났습니다.-
성인축일은 성인을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각자 고유의 성인으로 살아가라 우리를 격려하고 분발케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미래가, 희망이, 길이, 문이, 보물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이미 거룩한 성도聖徒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진리 말씀이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총과 평화의 선물에 늘 감사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여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이 기다림의 기쁨이, 희망이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살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요 성인이 될 수 뿐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복음 말씀처럼 깨어 사는 것입니다. 막연한 깨어있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의 기쁨에 깨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해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약간 몇마디 빼고 첨가했습니다. 구원의 행복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주님을 기다리면서 오늘 지금 여기서 맡겨진 책임에 충실함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에 필요한 모든 은총을 주셨습니다. 미래는 희망은 길은 문은 보물은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오늘 나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미래로 희망으로 길로 문으로 보물로, 당신의 성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넘치는 당신 은혜를 기억하고 알리며, 당신 의로움에 환호하리이다.”(시편145,2.7).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녀 모니카 축일입니다. 모니카 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모니카 성녀는 내일 영명축일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라고, 오늘날 알제리의 수크아라스라는 지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신심 깊은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남다른 기도와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습니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으로서 많은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 24,42.44-47)
모니카 성녀는 우리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처럼 자식을 위해 노삼초사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한 성녀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님은 모니카 성녀에게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주 하느님께서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위로해 주셨다고 합니다.
주 하느님을 기다리는 종들의 마음은 긴장과 초조함이 깃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으로 그러한 기다림에는 희망도 들어있다고 봅니다. 매년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어린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여러분은 한국의 이 어린이집에서 졸업하지만, 여러분은 자라서 이다음에 이 세상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꿈을 크게 갖고 여러분의 미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품 안에 있고, 또 내 자식, 내 후배라고 여기던 이들이 내일 새로운 사회의 일꾼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 바칩시다. 무엇보다 돈 버는 법, 성공하는 법이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법, 거룩하게 되는 법을 체득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내 자녀, 내 후배로 말미암아 스스로 부끄러운 책임보다는 기쁨과 보람을 간직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주님 앞에 부끄럼이 없는 삶 <마태 24, 42-5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떤 이가 불의나 부정을 행하고 살면 “죽어서 당신 조상 만나기 부끄럽지 않은가?” 오늘 주님은 죽어서보다 살아 있으면서 깨어있지 못하고 주인이 없는 동안 종을 때리고, 혼자 잘 먹고 잘 지내고, 흥청망청 놀고, 잠이나 자면 주인이 오는 시간 울며 내쫓기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온 사람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고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 능력을 따라 자기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지도자 자리, 높은 자리, 권력을 가진 자리, 재력을 가진 자리, 명예가 높은 자리에 있으면 능력에 따라 책임도 따라옵니다. 요사이 국회의원이 되면 국민의 종이 아니라, 국민의 상전처럼 행동하고, 자기 이익이나 챙기고, 멋만 지키고, 국민을 깔보는 사람은 심판받을 죄인이 됩니다.
특별히 국민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인에게 맡겨진 일은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받은 것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 생명을 보존하려고 주신 자연의 모든 현상, 시간과 공간 무엇을 하든지 시간 안에 있고 무엇을 하든지 공간 안에 현존합니다. 시간을 아껴 쓰고, 해야 할 일을 그 시간에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고, 공간 사용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을 제시간에 못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아서 거짓, 사기, 속임으로 주인의 뜻과 반대되는 행위는 깨어있지 못한 사람의 행위입니다. 또한, 나태한 일꾼으로 낙인찍힌 사람으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아버지에게 보냄을 받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아보면, 양들을 사랑한 나머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세상 끝까지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자비를 펼치셔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하나인 것같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일치의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가진 것 모두 제자들에게 넘겨주시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미천한 저에게까지도 주셨으니 나는 주님이 사시던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원하시는 것은 “내가 자비로운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너희도 하나가 되어라.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서로 사랑하는 것같이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무엇을 더 잘하고 정확한 결산을 하려면 감시관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감시관은 하느님이시지만 중간 감시관은 각자의 양심입니다. 누가 크게 잘못하면 각자의 양심의 저울이 요동칩니다. 조용히 앉아 자신의 양심 성찰을 하면서 감시관의 말을 미리 듣고 주님 앞에 나가서 희망을 바치면 훨씬 쉽게 통과됩니다. 마지막 날 “착하고 충실한 종아,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나라에 영원히 머물러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자” 하십니다.
매일 매일 양심 성찰을 하면 마지막 날 두려움 없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졸지 않는다는 것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제가 좋아하는 시편을 떠올리게 합니다.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네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신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121,1-4) 늘 깨어 계시는 하느님, 그렇게 깨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하느님은 어린 젖먹이를 키우는 어머니와도 같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조그마한 기척에도 눈을 뜨는 어머니의 그 마음으로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분노하시어 갑작스레 내리시는 재앙에 대비하라는 경고나 협박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항상 깨어 계시듯, 우리도 그런 하느님의 사랑에 맞갖은 응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깨어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깨어 있는 것,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깨어 있어라."(마태 24,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앙 아니면
이겨낼 수 없는
성녀 모니카의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뜻을 비우고
또 비우는
사랑입니다.
서로의
바램과 뜻이
어긋나며
걸어가는
어머니와
자식의 아픈
관계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식을 믿고
안아주고
알아주었던
모니카의
사랑입니다.
근심을 기도로
바꾸었던 성녀
모니카의
여정입니다.
모든 길은
끝내
하느님께로
이어져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향한
뜨거운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어머니에게서
자식에게로
이어집니다.
슬픔을 밝혀주는
신앙을 끌어안고
우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시 성녀
모니카를 통해
그녀의 아드님
아우구스티노가
하느님 사랑을
알게됩니다.
서로를 살리는
신앙입니다.

미국의 기업가이며 애플 사(社)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를 잘 아실 것입니다. 아이폰, 아이패드 등으로 IT계의 혁신을 일으킨 인물이지요. 그가 한 대학의 졸업식 연설에서 ‘내 인생 최고의 결정’에 대해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행한 인생 최고의 결정은 무엇이었을까요?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든 것일까요? 아니면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린 아이폰을 만든 것일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는 손으로 쓴 아름답고 개성 있는 글자체인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배운 것이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훗날 매킨토시 활자체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처음 캘리그라피를 배울 당시에는 자신의 인생에서 실질적으로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인생 최고의 결정이 될 수 있었음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소중하고 최고의 결정으로 이끄는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해도 된다는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소홀히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남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전해 주냐면서,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유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서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늘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는 어떤 준비입니까? 바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입니다. 그 준비는 나중에 여유가 생겨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준비를 철저하게 한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 ‘내 인생 최고의 결정’에 대해 묻는다면 과연 무엇을 말할까를 생각해보세요.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했던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내 인생의 최고의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딱 일회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가 지금의 순간에 충실해야 비로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이미 끝난 일을 말하여 무엇하며, 이미 지나간 일을 비난하여 무엇하리(공자).
32 풍남문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순교한 곳입니다.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고 있던 1790년경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큰 시련이 닥쳐옵니다. 1790년 두 번째로 북경에 파견된 복자 윤유일 바오로는 조상 제사 금지라는 회신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1791년(신해년) 여름, 진산에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가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그는 외종형 복자 권상연 야고보와 상의해서,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전통 의식인 유식 장례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는데 이를 ‘진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전통 사상을 거스르는 이 행위는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고, 12월 8일 복자 윤지충과 복자 권상연이 참수,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었습니다.
복자 윤지충이 전라 관찰사에게 적어서 넘겼다는 ‘공술서’는 한국 교회사에서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공식 변론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견고한 신앙을 조목조목 정연하고 조리 깊게 적은 이 변론은 훗날 신도들의 영적 독서로 읽혔고,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로 기해박해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쓴 상재상서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입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불타버렸고, 영조 44년(1768)에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풍남문에서는 미사를 포함해서 전례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이고, 관할 성당은 전동성당으로 전화는 063-284-3222입니다.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미국판 무소유의 삶을 추구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생애가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소로의 생애는 거대한 집단주의에 맞서 홀로 투쟁한 외롭고 고독한 예언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무지막지한 자연 훼손과 개발, 물욕과 전쟁, 국가주의에 항거하며, 자연과 한 인간 개인의 소중함, 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전력질주한 고귀한 나날들이었습니다.
1845년 소로는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와 전쟁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콩코드 근처 월든 숲 호숫가 외딴 곳에, 작은 오두막을 하나 짓고 홀로 살았습니다.
소로는 평생토록 절망스런 삶으로 이끄는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며, 이런 명언(名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자 42~44절)
사막의 교부들 역시 깨어있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황량하고 깊은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어두운 동굴 깊숙히 들어가 기도와 노동에 전념했습니다. 홀로 고독 속에 단식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시메온 교부 같은 경우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37년 세월 동안 높은 기둥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 평생토록, 환한 얼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40년간 주방장 소임을 다한 가르멜 수도회 소속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역시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영성생활은 지극히 단순명료했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깨어 있을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거룩하게 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이 일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 저것 부탁하는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저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 처럼 깊은 고요 속에 하느님을 모십니다.”
다음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말씀은 세상 안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거룩함에 도달하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으시고, 그 일을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의 목적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인포시크 등 4개의 IT업체를 성공시킨 성공한 벤처기업가인 스티븐 케이시는, “내가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나는 MIT 공대에서 최고의 공학기술을 배웠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IT사업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좋은 인간관계라며 “요즘 나에게 공학기술과 인간관계 기술 가운데 한 가지만을 택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인간관계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카네기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정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 15%는 자신의 기술적 지식에 의한 것이며 85%는 인간관계 즉,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는 능력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15%의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 예를 들면 변호사라면 아주 뛰어난 법률 지식을 갖고 있어서, 회계사라면 회계에 관한 지식이 뛰어나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85%의 사람들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능력, 즉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잘 받아들여서 사람들과 함께 원만하게 지내는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이는 카네기연구소장 최염순씨의 글입니다.
최첨단 기술을 요하는 IT업체에서조차 인간관계가 성공을 좌우한다면 다른 직장들에서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이 말에 동의는 하지만, 일면 인간관계의 목적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처럼 인식될까 우려가 됩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며 자신의 행복을 키우기 위함이라면 그런 사람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기분은 썩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 이용당하며 기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겠다는 친구들이 찾아와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다”고 말하면 저는 이를 바로잡아줍니다.
그것은 참다운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결혼하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원망이 늘어나고 결국엔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성자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일까요?
그분은 인간이 없어도 삼위일체 사랑 안에서 충만히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관계는 내가 상대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맺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먼저 행복하여 그 행복을 전해준다는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해님, 달님 동화에 떡을 팔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호랑이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인간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람을 충분히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떡은 언젠가는 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떡이 무한대로 나오는 누군가를 찾아야만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의 떡의 원천은 하느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의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여야 합니다.
호랑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그리스도는 그 사람을 통해 무한한 떡을 제공하여 그 둘의 관계가 소진되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예수님과의 친교를 목적으로 불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빠진다면 조만간 누군가는 잡아먹혀 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친교는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친교가 목적이 되어야 나머지 관계도 오래 갑니다.
그 친교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밖에는 없습니다.
친교가 이루어진다는 증거는 시간이 갈수록 그리스도와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깊은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의 친밀함도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모든 관계가 참다운 친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 관계는 무조건 그리스도와의 친교로 향해야만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머무는 중앙동 성당은 2019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첫영성체를 했고, 견진성사를 받았고, 신학교에 입학했고, 사제서품을 받아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중앙동 성당은 제 신앙의 뿌리입니다. 이곳에서 만났던 주일학교 친구들을 아직도 만나고 있습니다. 성당은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미사 전에 50주년을 기념하는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억하는 사진과 기록물을 모으고 있습니다. 9월에는 50주년을 기념하며 성극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의 행사가 잘 치러지기를 바랍니다. 50년을 넘어 100년을 준비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모두가 쉬는 주말에 가끔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높은 분이 오신다던가, 부대 주변의 시설이 비바람에 무너졌을 때 청소를 하거나, 복구 작업을 해야 합니다. 사실 다들 쉬고 싶은 주말에 일하러 나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일직사관이 인원을 모집합니다. ‘참호 복구 작업 20명 나와라.’, ‘장마철 대비 하수도 정리 작업 10명 나와라.’ 그러면 대게는 계급순으로 밑에서부터 작업 인원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에 계급이 높은데도 지원을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후배들이 잘 따르는 친구입니다.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작업도 쉽게 하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힘든 일, 고된 일을 해도 언제나 밝고 환한 그런 친구들은 쉽게 볼 수는 없지만, 밤하늘을 비추는 별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해서 매주 식사를 준비하는 본당이 있습니다. 봉사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늦은 시간까지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가복지병원에는 많은 의사가 무료로 진료를 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재능을 이웃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달동네에서 공부방을 하는 대학생 친구들도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여름에 산으로, 들로 바다로 휴가를 가는데 달동네의 공부방으로 휴가를 가는 친구들입니다. 다들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작은 성당으로 자청해서 지원하는 신부님도 있고요. 주변을 보면 하늘의 별처럼 기쁨과 희망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 군대 생활을 할 때, 군종 신부님을 모시고 군 성당에서 일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서 용산으로 출장을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성당 정리 잘하고, 아직 계급이 낮으니 부대에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르게 들었습니다. 앞으로 신부님이 안 계시는 동안 마음껏 지내도 좋다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3일 동안 다녀온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신부님 없는 3일 동안 신나게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리도, 청소도 뒤로 미루고 신부님 오시는 날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료들과 놀고, 낮에도 쉬고 있었는데 신부님께서 오셨습니다. 출장이 취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 안 계셔도 충실하게 일을 해야 하는데 꾀를 부리다가, 야단만 맞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횃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키우는 ‘불쏘시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뒤로 숨기보다는 언제나 당당하게 앞서서 가셨던 주님처럼 선두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영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면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어라.” -충실하고 슬기로운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오늘 복음 서두 말씀입니다. 지체없이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참으로 깨어있는 주님의 종이 건강한 영혼, 행복한 사람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어제 강론 주제가 ‘주님의 전사’였는데, 주님의 전사의 우선적 자질이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어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말마디입니다. 수도원 성전의 뒷면 벽 양편의 올빼미의 두눈도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영성생활의 궁극 목표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도 궁극에는 깨어 있는 삶을 목표로 하는 영성훈련입니다. 온갖 환상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 앞에서 단순 투명한,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깨어 있어라.”
이 또한 우리의 노력이자 주님의 은총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깨어 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실 막연한 깨어 있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기다릴 때 항구히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있어라.”
밤하늘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처럼, 깨어 있을 때 진정 매력적인 아름다운 삶입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이어지는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깨끗한 마음-깨달음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행복선언의 다음 행복한 사람들은 그대로 깨어 있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깨어 있는 마음 가난한 이들과 마음 깨끗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 행복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주님으로, 종은 우리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러니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자 주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깨어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바로 대림의 기쁨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세상에 없습니다.
할 일 없이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신뢰를 받는 것보다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자기 소임에 충실한 이들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실 이런 주님의 종들은 깨어 있음의 기쁨 자체가 큰 축복이니 더 이상 축복을 바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종들이야말로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된,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행복한 빛의 자녀들입니다. 시종일관始終一貫,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이들도 이런 사람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의 자세도 여기서 나옵니다. 진정 깨어 자기 소임에 시종여일始終如一, 충실한 이들이 바로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영원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맞갖는 삶이 바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이렇게 깨어 기다릴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참 좋은 만남의 선물이 은총과 평화입니다. 아니 주님의 은총과 평화의 선물이 전제되기에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과 평화를 생각할 때, 저절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깨달음을 통해 배우는 진리입니다. 그대로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코린토 신자들은 물론 주님 안에서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은혜로와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말에서나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줄 것입니다.”
깨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깊이 맺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좋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깨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주님의 자비로 치유를 받고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어 깨어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오늘의 아름다운 본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 마태, 24/42-5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현존과 사명은 완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숨을 내어놓고 라도 완수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저는 언제나 주님 당신은 세상에 보내지어 주어진 사명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수 하시어 오늘날 미사전례 안에 성체성사로 완수해 나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복음에 주인이 마긴 사명을 완수하는데 시간을 초월해서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명을 다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아니 행복한삶을 살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 시명을 다하고 잠자리에 들어 휴식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눈을 뜨면 할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나의 신체적 기능과 외적 조건을 조화있게 맞추어 나가야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을 완수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사명은 아버지도 되고 어머니 되고 아들도 되고 딸도 되고 가정의 구성원으로 가기 자기 위치에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도 각자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기업에는 사장 임원 사원 등 각자 자기 위치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나라도 그와 같이 위로부터 아래 국민 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격증을 받고 되어야 할 사람 된 사람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건국과 더불어 현법이 만들어져 각 사람이 자기위치에서 헌법을 지키며 나라를 번성시킬 의무 와 사명이 있습니다.
다 나아가 세를 받은 신자와 교회 안에 직무를 받은 사람은 그 직무에 따라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군인이 고백성사를 보려 왔는데 기도 못하고 전례참석 못하고 금육 제 지키지 못하고 하다가 성사를 끝기도를 하니 잠간 당신은 군인으로써 자기 사명을 다하였습니까? 조금 더 성찰하고 완전하게 성시를 보십시오. 신자로써 첫 사명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이 일원이 되었으니 교회 사랑도 실천해야 합니다. 사명을 완수한 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을 성실과 열정을 가지고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깊이 자리를 잡듯이 신앙을 뿌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든든한 기초위에 세워지고 열매를 맺는 신앙이여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맺는 삶,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깃든 삶을 살면서 항상 깨여 있는 종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바람>
상지종 베르나로도 신부님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날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밀어내기보다
오랜 설렘으로 기다린 반가운 벗처럼
한 걸음에 달려가 따뜻하게 안을 수 있기를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날을
하염없는 회한의 눈물로 적시기보다
늘 푸른 열정과 해맑은 웃음 가득한
찬란한 승리의 날로 맞이할 수 있기를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날에
사랑하지 못한 아쉬움이 헤어짐을 막기보다
나눌 것 더 이상 없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만남을 향한 기쁜 이별 인사 나눌 수 있기를..
깨어있는 삶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4,42-51: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는 사람들은 종말의 때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종말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분을 만나게 되고, 확실히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뵙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고 있었다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종말을 모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늘 노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죽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늘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43절)
우리의 삶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45절)의 모습이어야 한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지혜롭거나 영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충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야 ‘동료 종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는’ 일을 할 수 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기 위해서는 슬기가, 어려울 때 양식을 자기 혼자 차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이 받은 것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여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그러한 종에게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7절)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종에게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기실 것이다. 이 종이 하늘의 보물을 받는 것은 이 지상에서 책임 있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영예이다. 신앙인들은 그런 영예를 입은 것이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못된 종”(48절)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종은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심판을 전혀 생각지 않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여기에서 주님께 받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께 또 다른 직무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를 처단하여”(51절)라는 것은 영으로부터 자녀 됨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웃음거리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벌 때문에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온 마음을 바쳐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못 배기는 사람들이 되어, 더욱 더 충만한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한다.
깨어 있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어있는 삶이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의 관계 안에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늘 준비하고 삽니다. 사실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은 못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실행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 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깨어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속임수로 준비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24,42). 예수님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24,46). 깨어 있는 사람만이 참 구원의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잠든 사람이 있고, 깨어나는 사람이 있으며, 깨어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깨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24, 42-51(연중 21주 목)
오늘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비유 중에서, “도적의 비유”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로, “깨어있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마감하시기 사흘 전, 곧 최후만찬이 있던 날 낮에 올리브산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일반 군중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맡긴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도적의 비유”는 종말에 대해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때가 예측 불허할 뿐만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오리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아무런 준비 없이 있다가, 그 때를 돌발적으로 맞이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는 어떻게 깨어있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 속의 “종”은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종”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는 ‘충실함’이요, 다른 하나는 ‘슬기로움’입니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기 집안의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14, 45)
이는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깨어있음”의 표시임을 말해줍니다. 곧 어떤 사람이 깨어있는지 잠들어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표시는 그가 그의 사명에 충실하고 슬기로운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충실함’이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 집안 식솔들’(마태 24, 45)과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어주는 일’(마태 24, 45)에 대한 충실함으로 묘사됩니다. 곧 ‘충실함’은 우선 맡겨진 사람과 일에 충실함이 곧 주인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주님 집안의 식솔들, 곧 양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 충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종’에게는 바로 이러한 맡겨진 이들을 충실하게 돌보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졌습니다.
‘슬기로움’이란, 먼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맡겨진 이와 맡겨진 일을 주인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 양식이나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양식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맡겨진 양식’, 곧 당신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일 자체도 그분의 일이며, 그분이 맡긴 일입니다. 이 일을 맡은 “종”이 바로 제자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이처럼, “깨어있음”은 의식의 각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깨어있다”는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분께 대한 신뢰요, 그분의 뜻에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그러기에 ‘충실함’과 ‘슬기로움’은 일을 맡기신 ‘주인의 신뢰에 대한 깨달음’과 “깨어있음”에서 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종’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관계 맺어준 형제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소홀이 대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어떻게 하는 것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종의 신분은 주인의 뜻을 섬기고 주인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 노릇을 하거나 주인 앞에서는 순명하는 척하고 보이지 않을땐 대충 대충 살아간다면 결국 그 헛점이 주인에게 들키게 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자기 몫을 다하는 종, 보든 안 보든 충성을 다하는 종은 주인이 더 큰 일을 맡기게 됩니다.
주인의 신뢰를 받게 되는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신세를 한탄하며 사는 종과 작은것에도 감사하며 사는 종의 얼굴빛은 분명 다르고 일의 성과도 다를것입니다.
남의 일 참견이나 하고 자기가 할 일은 설렁설렁하면 자기 복을 차는 것이 됩니다.
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본분을 자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자연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을 받고 사는 나로서 응답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그분 마음에 들겠죠?
하나가 주어졌는데 성실히 하면 두개 세개 열개를 주십니다.
머리 쓰지 말고 마음 쓰는 사람은 복됩니다.
깨어 있어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24,46).
첫 본당 시절이었다. 신학교 총장 신부님의 암행방문이 있었다. 목적은 내 제자들이 사목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나? 고운 말, 존대말 사용, 사제다운 복장, 제자리 지키기, 전례시간 충실하기 등 등을 알아보려는 의도였으리라.
나의 신학교 시절, 영성강화 시간에 총장신부님은 제자들 사목지 암행방문소감을 종종 들려주곤 하셨다. 잘한 일은 칭찬하고 해괴한 사례도 듣곤 했었다. 이 다음 사제가 되었을 때, 나는 잘 살 수 있으리라는 다짐도 하곤 했었다. 드디어 그 일이 나에게도 찾아 온 것이다.
총장신부님의 방문이 나에게도 있었다. 때는 주말의 오후였다. 나는 정장차림이었고, 성당마당에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재미있게 놀고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나 보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총장 신부님이 내 앞에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갑게 신부님께 인사를 드렸었다. “총장님! 어떻게 이런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까?” “옆 본당에서 엊저녁에 특강을 했어요. 돌아가는 길에 잠시들렸어요.” 나는 즉시 신학교 때 종종 들려주신 암행방문기를 또 만들고 계시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은사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냉수 한컾 마시고는 사목 잘하라고 격려하시고는 성당에서 잠시 들러 잠깐 기도하신 후 떠나셨다. 사제관도 깨끗이 정리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좋은 기억으로 말이다. 그 때의 나의 느낌은 하늘을 나는듯 행복했었다. 나에 대한 좋은 생활단면을 자연스럽게 총장신부님께 보여드렸다는 뿌듯함 때문이다. 총장 신부님은 또 암행방문기를 나의 예를 들어 후배 신학생들에게 들려주실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속은 어느덧 뿌듯함으로 가득차 온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4,42)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나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그 이야기가 나를 만들어 주고 있음을 먼 훗날에야 알게 된다. 성실하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면 성실한 사람이 되어가고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먼 훗날에야 알게 된다. 내가 성실해서 큰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주변의 나의 사람들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보고 주인께 성실함을 이야기하고, 주인님은 나에게 큰 일을 맡겨주신 것이다.
오늘도 ‘깨어 있어라’ 나의 깨어 있는 모습을 사람들은 보게 될 것이고 나에 관하여 말할 것이다. 늘 깨어 있기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고 말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마태 24, 46)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요즘에는 한반도에 비가 너무 내려서 비 피해가 걱정됩니다. 비가 전혀 안 와도 걱정, 너무 와도 걱정, 적절히 와야 될 텐데 어쨌든 잘 대비를 해야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잘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마태 24, 46) 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우리는 종인가?
여기서 말하는 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인은 하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사는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에는 주인이신 하느님께 어떻게 살았는가 샘을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 하느님은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계신 분이시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삶을 충실히 살라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자기 직무에 충실한 사람, 그런 사람이 주인이 볼 때에 충직한 종이며, 또 그렇게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 주님께서는 그의 충실성을 보시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태 24, 47) 우리가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바로 하루하루를 그리고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삶이 잘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종말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적인 종말은 공 심판이 되겠지만, 개별적인 종말은 각자 각자가 맞이하는 죽음입니다. 죽음의 순간, 나는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내 삶의 샘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충실히 살았다면 하느님께서는 "너는 복되고 행복하다. 세상 태초부터 마련된 낙원을 차지하라" 마태 25, 34)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축복의 길에서 멀어질 것이지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못된 종"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동료들을 때리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그러한 나태함을 보이는 일들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들을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으로 처단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 48~51)
• 요즘 대기업 주인들이 종종 그 기업을 위해서 일하는 회사 직원들에게 못된 갑질을 하는 것으로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요. 자기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막말하고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못된 종"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 주님께서는,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하고 있는 종의 모습을 볼 때에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도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충실하고 슬기롭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까?
• 나는 주님께서 맡겨 주신 재화나 직분을 가지고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지금부터 근 40여 년 전 1977년에 영국의 석학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lbraith, 1908-2006)가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갈브레이스는 그 책에서 지금은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 원리와 지도자들이 사라진 불확실한 시대’ 라고 규정했습니다. 현대는 과거처럼 확신에 찬 철학자도 경제학자도 사회주의자도 없고, 우리가 지금까지 진리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증명되지 않는다고 의심하고 상대화하며, 이성과 과학적인 분석으로 습득된다고 하는 각종 체계들도 실제로는 증명되지 않게 됨으로써,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오히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더니즘 안에서 오히려 그동안 미신으로 취급해 왔던 신비주의나 환상 더 집착하고 매달리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은 그 때보다 한 단계 ‘높은 초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Hyper-Uncertainty) 또는 ‘신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Neo-Uncertainty)를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서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정된 삶을 흔들어 놓을지 모르는 세상과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만, 꾸준히 자기가 맡은 바를 충실히 해 나가면서 자기에게 닥쳐올 어둠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영육적인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해주시면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분께 의탁하고, 그분께서 펼쳐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 나가도록 합시다.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마태 24,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영혼의 아픈 시간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보람도 없이
의미도 없이
이리저리 밟히는
알코올의 시간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삶은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큰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기쁘게 마셔야 할 술이
오히려 우리를 가두는
족쇄가 됩니다.
다시금 주님이라는
빛을 찾게 됩니다.
짓눌려 있는 우리를
다시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께서 시간의 소중함을
엄중히 일깨워주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
준비하고 깨어있는
삶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사람과 술병 사이에도
주님을 생각하는
슬기롭고 충실한 삶의
중심이 필요합니다.
실수와 실패가
많으면 많을수록
지혜도 깊어지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종은
변명이 아니라
삶의 깊은 성찰을 통해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쓰디 쓴 충고가
우리를 살리는
은총임을 믿습니다.
다시금 주님의
마음에서 사람의
참된 길을 만납니다.
사람의 길은
절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30년 넘게 안경을 썼습니다. 사실 안경을 쓰지 않았던 초등학생 때에는 안경을 얼마나 쓰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더 잘 생겨 보이고, 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형 누나 몰래 안경을 쓰고는 거울을 쳐다볼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안경을 쓰고 있으니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제게 있어서 제일 불편한 것이 바로 안경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노안까지 와서 썼다 벗었다를 반복해서 그 불편함이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쓰고 있는 안경을 구박했던 적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안경이 제 거대한 몸에 눌려서 안경다리가 쫙 펴져 있더군요. 문득 이 안경이 주인을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의 몸에 눌려서 안경다리가 쫙 펴지는 고통을 겪게 되었고, 제대로 닦아주지 않아서 늘 뿌연 안경알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불만이 많았을까요? 그래서 안경을 깨끗이 목욕시켜 주었습니다. 비누로 깨끗하게 안경을 닦아 주고, 구석구석 까맣게 낀 때도 제거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목욕하면 기분이 좋은 것처럼, 안경도 기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끗하게 닦은 안경을 쓰는 순간, 세상이 너무나 깨끗하게 투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안경에게 수고했다고 했던 보상이었는데 혜택은 제가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 세상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을 위한 행동과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남을 위한 행동과 말이 나의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보지 못하고 그저 남만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힘들어하고 때로는 아파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이 모두 충실하고 동시에 슬기로운 종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죽을 날을 안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남은 시간을 잘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바로 항상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구원의 열매를 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노력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남을 위한 말과 행동을 통해서만이 구원으로 연결될 것이며, 이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이 바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주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모르지만, 지금의 내 말과 행동이 나의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무가 나무를 만나 숲을 이루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세상을 이룬다. 삶은 인연의 연속이다(장영섭).
처음처럼
‘처음’, ‘첫’이라는 단어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설마 ‘소주’가 생각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처음처럼’, ‘첫날’, ‘첫사랑’, ‘첫걸음’ 등의 단어를 떠올리면 설렘도 생기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누구나 ‘처음’, ‘첫’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말과 몸으로 느끼고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설렘을 가져다주면서 기분을 좋게 하는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 봅니다. 그래서 신입을 잘 뽑지 않는다고 하지요. 심지어 아르바이트도 경력자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인광고에 늘 이렇게 적혀 있지 않습니까?
‘경력자 우대’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툰 것이 당연한데, 그리고 이 처음을 겪어야 그 다음이 있을 텐데, 이 사회는 처음에 대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처음을 너그럽게 봐주고 응원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모습을 바로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깨어 영혼의 식솔을 충실히 돌보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태와 내분, 불신과 냉담한 생활 등 마태오 공동체가 겪고 있던 어려움과 상황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도둑의 비유는 “주인이 어느 날에 오실지 모르고”(24,42),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에”(24,44) 깨어 주님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느님 앞의 나의 소명은 무엇인지를 ‘지금 여기서’ 명확히 의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과 관념, 정서적인 역동과 감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과의 관계를 잊지 않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실제로 걷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향한 전인격적 집중을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 깨어 해야 하는 것은 준비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나 자신이 주님께서 머무실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을 비우고 낮춰야만 하겠지요. 그렇게 되려면 끊임없는 기도 안에서 주님을 내 영혼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또한 매순간 주님을 선택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합당한 준비입니다. 이런 준비는 내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사로잡아 변화시켜주시도록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란 순응과 변화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종의 비유는 교회 지도자들이 충실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24,45-51). 주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24,50) 종에게 집안 식솔들을 맡기고 떠났던 주인이 돌아왔을 때 불충실하고 포악한 종은 처단 받아 위선자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입니다(24,49).
종의 비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마태오는 주님과 공동체와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주인은 종들의 행동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충실하고 슬기롭게 하느님께 인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 공동체의 책임자들은 불충실과 무분별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의 책임자들은 맡겨진 양떼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그들을 위한 사랑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내적 평화나 개인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맡겨진 양떼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지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다음 세 가지를 명심했으면 합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나를 당신 도구로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 교회 구성원,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영혼의 식솔들’임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일,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자신을 기꺼이 내주며 언제든 충실히 사랑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흩어진 관심사를 주님께로 모으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며 깨어 있도록 힘쓰고, 나에게 맡겨진 ‘영혼의 식솔’들을 사랑으로 충실히 돌보는데 온 마음과 넋을 다하는 영적 몰입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깨어있어라.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깨어있어라”입니다. 우리 문도미니꼬 수사의 종신서원 상본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수도원 성전 뒷벽의 양쪽 큰 눈은 부엉이의 눈이자 깨어있는 수도자의 눈을 상징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영성생활의 궁극목표도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 깨어있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그 자리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깨어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있음은 빛입니다.
깨어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있음은 들음입니다.
깨어있음은 봄입니다.
깨어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있음은 집중입니다.
깨어있음은 마음의 순수입니다.
깨어있음은 텅 빈 충만입니다.
결국 깨어있음의 궁극적 대상도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있음을 봅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텅 빈 허무가 아니라 텅 빈 충만의 깨어있음입니다. 하여 깨어 살기위해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많은 이들의 향심기도 수행도 결국은 깨어있음의 훈련입니다.
하루 중 온전히 깨어있는 삶은 얼마나 될까요? 깨어있지 못해 낭비되는 시간도 참 많을 것입니다. 온갖 유혹도, 병도 깨어있지 않을 때 스며 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서에 ‘집주인’으로 되어있는 것을 ‘너희의 주인’으로 바꿉니다. 비유를 더욱 명백한 어조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적용시킵니다. 개인이 아니 공동체적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여 규칙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끊임없이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는 공동체의 깨어있는 삶의 일상화를 위해 필수적 수행임을 깨닫게 됩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막연히 깨어있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며 각자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에 충실한 삶입니다. 우리 분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 라는 모토대로 사는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는 우선 교회지도자들에 해당되지만 믿는 모든 이들에 해당됩니다. 모두가 공동체내에서 각자 고유의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책임에 깨어 충실할 때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기다리는 주님이 계시기에 깨어 준비하는 삶입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은 물론이고 공동체의 형제들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실 우리 수도형제들은 수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는 모토에 충실하여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니 말그대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들입니다. 이래야 정주는 안주가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기도와 일의 리듬따라 주님을 향해 나아가기에 내적으로 깨어있는 정주의 삶입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진정 깨어있는 삶의 모범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삶을 깨어있게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평화와 은총을 생각하며 늘 우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이나 어떠한 지식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우리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잡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생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니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은 우리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잡았습니다. 하여 깨어있는 정주의 삶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당신의 날에 흠 잡을 데 없이 해주실 것입니다.
깨어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매일이 흠 잡을 데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친교를 맺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주님, 날마다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시편145.1). 아멘.
깨어 있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늘 준비하고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 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바보는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제가 그렇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 실패는 사실 실패가 아닙니다. 성공의 과정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아무리 큰 은총이 주어진다 해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담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수녀님께서 당신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너무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놀랐습니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기뻐하다니? 수녀님께서는 집안 식구들에게도 울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천국을 가셨는데 울긴 왜 우냐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정말 신앙이 있으신 분이시네요.' 천국을 향한 삶의 여정에 매순간 충실했을 때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상에서의 이별이 슬프기도 하겠지만 희망의 완성이라면 오히려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어라....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합시다”(1테살5,5-6). 베드로 전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 그러므로 깨어있도록 합시다. 지금 여기서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합시다. 어떤 어려움이나 불이익이 있더라도 복음의 가치를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마태 24,4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무슨 일이든 그 일을 잘 수행하였다면 물론 그 일을 수행할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준비과정이 얼마나 잘 되어있었나가 사실 그 일의 완성도를 결정한답니다.
대박난 음식점들을 보면 신선한 재료와 독특한 양념과 비법 등 철저한 준비가 숨어있음을 늘 보게 됩니다.
올림픽에 메달을 딴 선수들도 그 만큼 열심히 철저히 준비한 결과임을 하나같이 고백하더군요.
우리 신앙생활에도 왕도는 없는 듯합니다.
철저한 기도와 헌신의 삶을 통해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자만이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도 영광의 결과만 빨리 얻으려 조급해 하지 말고 묵묵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영광을 준비하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작은 바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날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밀어내기보다
오랜 설렘으로 기다린 반가운 벗처럼
한 걸음에 달려가 따뜻하게 안을 수 있기를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날을
하염없는 회한의 눈물로 적시기보다
늘 푸른 열정과 해맑은 웃음 가득한
찬란한 승리의 날로 맞이할 수 있기를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날에
사랑하지 못한 아쉬움이 헤어짐을 막기보다
나눌 것 더 이상 없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만남을 향한 기쁜 이별 인사 나눌 수 있기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참으로 중요한
가치들을
많이 놓치며
살고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삶의 진정한 의미를
묻게됩니다.
성실하고
충실한 삶이란
깨어있고 준비하는
겸손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은
우리를
깨어있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에게서
순종과 겸손을
배우게됩니다.
내려주시는
은총에 감사하지
못하는 건
언제나 우리의
불충실함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기도할 수밖에 없으며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 말씀에
귀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순종하며
준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통해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종이
가장 행복한
종입니다.
게으른 종을
기다려주시는
주인의 마음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릇된 삶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마태 24, 42)
깨어있는 삶이란
지금 우리자신의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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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나지?”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할 때, 그리고 원하지 않는 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 말이지요.
제가 신학생 때, 학교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 그때에는 남 앞에 서는 것을 제일 싫어했었거든요.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저는 남들 앞에 서면 다리는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고, 가슴은 터질 듯이 쿵쾅쿵쾅 뛰었으며, 목소리도 저절로 바이브레이션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제가 스스로 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리가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한 친구는 딱 한 명밖에 없었고, 선배님들이 무조건 3명 이상을 채우라는 말(강압적인)에 반회의를 통해 2명의 후보를 뽑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저였지요. 아마도 저를 후보로 내세운 것은 나가봐야 100%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때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 5명밖에 되지 않았던 인천교구생,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저를 보면 당연히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앞에 나가서 정견발표도 해야 하고 선거 운동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습니다. 동창들이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들이 다 도와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정말로 싫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주님께 던졌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그러던 어느 날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께 “왜 하필이면 접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이러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면 왜 안 되는데?’
받아들이지를 못해서 힘들었는데, ‘그래, 나는 왜 안 되는데?’라는 질문을 던져보니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체험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선물이었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우리에게 역경이 찾아올 때 힘든 이유는 이것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움의 시간이며, 주님의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에는 여기에 복잡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단지 그냥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 올지 모를 주인을 위해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고 하십니다. 깨어 준비하는 모습은 바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하면서 부정하고 뒤로 미루는 모습이 아니라, ‘나는 왜 안 되는데?’라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모습이 깨어 준비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우리에게 자주 찾아오지요. 이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자기가 얼마나 자주 타인을 오해하는가를 자각하고 있다면 누구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괴테).
소년의 한 마디(‘좋은생각’ 중에서)
론과 리사, 그리고 여섯 살배기 아들 셰인은 ‘벨커’라는 개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그런데 벨커가 암에 걸리자 수의사는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라며 안락사를 제안했다.
결국 론과 리사는 안락사를 결정했고 셰인이 수술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셰인이 그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거라 생각했다.
수술 당일, 셰인은 마지막 인사라는 걸 아는 것처럼 차분하게 벨커를 쓰다듬었다. 몇 분 뒤, 벨커는 평화롭게 잠들었다. 그리고 수의사와 부모는 왜 동물이 사람보다 수명이 짧은지 모르겠다는 말을 나눴다. 그러자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셰인이 말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 수 있는지 배우려고 태어나잖아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지를 배우려고요. 그렇죠? 그런데 개들은 원래 다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처럼 오래 머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참된 풍요로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태국의 공익광고 CF입니다. 한 남자가 길을 걷다가 물벼락을 맞습니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그 물이 떨어지는 곳에 화분을 놓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는 중 리어카 끌기가 힘들어 보이는 아주머니를 도와줍니다. 음식을 먹는데 낯선 개가 배가 고픈 표정으로 이 남자를 바라봅니다. 이 남자는 본인 먹을거리의 반을 내어줍니다. 식당 가게 주인은 이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젓습니다. 그 남자가 다시 길을 가는데 가난한 어머니와 딸이 ‘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라는 푯말을 놓고 구걸을 합니다. 남자는 지갑을 꺼내보지만 돈이 많지 않습니다. 비록 적지만 소중한 돈을 두 모녀에게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웃집 할머니의 집 앞에 바나나를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같은 친절을 베풉니다.
광고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매일매일 이런 친절을 베풀고 이 남자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주위 사람들은 그런 친절을 베풀며 자신은 가난하게 사는 이 남자를 탐탁지 않게 쳐다봅니다.
광고는 가난한 식탁에 앉아 혼자 외롭게 밥을 먹는 이 남자를 비춰주며 이런 결론을 내어줍니다.
“그거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더 부자가 되지도 않을 거다. TV에 나와 유명해지지도 않는다.”
그는 리어카를 밀어주며 아주머니와 한 바탕 웃습니다. 힘들지만 같이 웃을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갈 때는 친구처럼 개가 따라와 줍니다. 구걸하던 어린 소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소녀는 교복을 입고 서서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어느새 이 가난한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릅니다.
광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며 끝납니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이러한 감정들입니다. 행복을 보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사랑을 느낍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얻습니다. 마음으로 느낀 개는 남자를 따르고, 놓아둔 화분에서 꽃이 피어나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소녀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리어카상인 아주머니는 그런 온정으로 활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당신은 무엇을 열망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열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무엇을 열망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오늘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풍요로움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 인사를 쓰기를 좋아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즉, 바오로가 생각하는 풍요로움이란 바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은총과 그 열매인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상태를 말해줍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이 충만함을 하느님 나라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예수님께서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마태 6,33; 루카 12,31)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풍요로움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항상 부족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합니다. 그 사랑의 기쁨으로 부족함이 없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도 배가 고픕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으로는 우리가 충만하게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풍요로움은 바로 성령님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풍요로워야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사람들 위로 성령이 내린 일도 있었습니다.(사도 10,44)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을 더 듣고 배우기 위해, 또 성체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나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풍요롭고 부족함 없이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시간을 우선적으로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 앉기 위해 할애해야만 할 것입니다.
각성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깨어 있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와 사상에서 ‘깨어있음’은 매우 중요한 기본 원칙입니다.
각성(覺醒)은 깨어나 정신을 차려 주의깊게 살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깊이 보는 것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깨어있을 때만 우린 종말을 살 수 있습니다.
늘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심을 온 몸으로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마지막에 오실 분은 이미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강박증이나 신경과민적으로 전전긍긍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능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마구 살지 않고 참다운 가치를 위해 깊이 삽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노인 복지관 관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일부 예산의 지원을 받으며 복지관을 운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에서 ‘지도점검’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지도점검’ 날짜를 사전에 예고합니다. 예고를 하지 않고 할 수 있는데 구지 ‘사전예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고를 하면 긴장감을 갖고 준비하게 됩니다. 게으름을 피워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기회를 주는데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물론 언제 어느 때 하든 상관없이 늘 준비하고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의 삶은 참으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미리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에게서나 가능한 얘기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순례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는 미리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 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기쁘게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 태24,42)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합시다”(1테살5,5-6).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
오늘 기억하는 성 아우구스티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 3세기경에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입니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바빌로니아 원시 신앙 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니교의 교리는 세계를 선과 악, 광명과 암흑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이 뒤섞인 세계에서 광명과 암흑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사자로서 마니가 왔다는 것입니다)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간절한 기도와 희생,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 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또 말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과거가 중요하지 않고 새 삶을 시작 한 날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앞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주어진 오늘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오24,42)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이틀 전,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암 때문에 큰 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기도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격려와 용기의 말을 전하고 미사 중에 기억하겠다고 했지만 무거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통화가 끝날 무렵, 친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지난 시간들을 살아왔다면, 이렇게 두렵지 않았을 텐데……”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친구의 음성이었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최소한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한 우리는 분명 시간을 느끼면서 그 안에 살아갑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분이 있고, 각각의 시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현재만을 살아갑니다.
늘 사라져버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지요.
시간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것이 시간이기도 하지요.
부지불식간 찾아올 그 마지막 시간을 잘 맞이해야 합니다.
늘 준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하여 떠나는 그날 그리워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은 만큼 행복했다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약속된 영원한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준비할 것 중 제일 중대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데도 아는 게 많다고 잘났다고들 합니다. 고작해야 극히 작은 진행의 질서를 보고 예상할 따름인데도 말입니다. 일기예보 미리 진단 종합건진 보험 등은 예상하여 준비하자는 거지요.
그래도 엄청난 각종 사고들은 매일 세상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상 못해 괴로운 것 중 제일가는 건 역시 자신의 목숨문제 아닐까요? 죽음준비 이거야말로 사람이 준비할 것 중 제일 중대사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마태오 24,43)”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정한 삶의 기쁨을
뜨겁게 일깨워 준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입니다.
삶이란 말로 논쟁하고
말씨름 하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고 아파하며
통과하는 절실한
은총의 여정입니다.
과거의 마디마디
모두가 은총이 되게 하시는
주님 사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과거는
지워버려야 할
과거가 아니라
주님께로 이어주는
찬미와 감사가 됩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이
기쁨이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하나의 길을
만나기 위해
낭비와 방탕이라는
형편없는 길 또한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는지를
일깨워주었던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버려야 할 시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시간입니다.
길은 벗어나도
길은 존재하듯
가심덤불에 찔려보았기에
모든 것은 은총이 되고
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죄 없는 길이 아니라
죄 속에서도 주님께로
돌아서는 회심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개의 기쁨이
자유가 되고
흔들렸던 시간들조차
아름다운 중심이 되게 하시는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지나온 시간 모두
주님께로 더욱 가까워지게
만드는 자유의 시간임을
뜨겁게 믿습니다.
주님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과거와
모든 역사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는 은총의 하루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이틀 전, 우리나라에 몰아친 태풍 볼라벤 때문에 우리들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이 태풍으로 많은 집의 창문이 깨지고, 간판을 비롯하여 구조물들이 부서지고 떨어져서 다친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요. 또 농작물과 양식장 피해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많은 이 태풍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게 되면서 자연의 힘을 크게 느낍니다.
사실 이번 태풍에 대해 며칠 전부터 모든 언론에서 앞 다투어 예고를 했었습니다. 즉, 과학의 발달로 인해 태풍의 진로, 태풍의 크기 등을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방송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대비는 역부족이었지요. 매년 맞이하는 태풍에 대해서 그렇게 준비를 했음에도 매년 똑같이 많은 피해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인간의 큰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지금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고 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동시에 더욱 더 철저히 피해를 입지 않도록 잘 준비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시어 구원의 길을 미리 예고해주셨지요. 다시 말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고서 우리는 얼마나 완벽하게 잘 준비를 하고 있을까요?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항상 뒤로 미루게 되지요. 이 준비는 바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들은 세상의 일이 먼저라는 생각에 사랑의 실천을 뒤로 미루고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야 할 몫이라고,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가 할 것이라는 생각에 역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인간의 한계 때문이라면서 당연한 것으로 포기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말이지요.
주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깨어 준비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태풍 피해를 막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해도 완벽한 피해를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깨어 준비를 해도 우리의 한계 때문에 완벽한 구원의 길로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삶을 뒤로 미뤄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이며, 단 일회적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울며 이를 가는 후회 속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잘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길이든 정답 오답 나누어 정답인 것이 아니라, 다 받아들이면 그대로 정답인 것입니다(법정).
24시간(지그 지글라, ‘성공을 정복하는 방법’ 중에서)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라 그대로 옮겨 봅니다. 오늘도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한 시간은 60분이요, 일분은 60초이다. 아무도 더 많은 시간은 얻을 수 없다. 아무도 그보다 적은 시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당신이 군인이라 할지라도 싸워서 더 많은 시간을 얻을 수는 없다. 당신이 ‘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에게 일분은 남들에게도 일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는 진실로 공평하다. 그러기에 모든 상품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시간이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시간은 가장 파괴적이고 협상이 불가능한 재산이다. 그러나 단 일초라도 생산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에게 돈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은행에 찾아가서 돈을 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공장에서 우리가 상품을 많이 생산한다면, 우리는 그 상품들을 창고에 보관해 둘 수 있다. 거기에 대해 이따금씩 재고조사를 벌일 수도 있다. 차후에 꺼내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아이디어가 생긴다면, 우리는 자신을 포기한다면,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시간은 위조할 수도 없고 훔칠 수도 없고 창고에 보관할 수도 없는 유일한 상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자라도 그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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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부터 다시 아침운동으로 자전거를 타기 위해, 어제 저녁 자전거 정비를 했습니다. 지난주의 제주도 자전거 일주 후 한 번도 정비를 하지 않았거든요. 사실 별다른 정비가 필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제주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비를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우선 비행기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을 했는데, 너트가 제대로 조여져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퀴의 타이어 바람도 많이 빠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기름칠을 하지 않아서 듣기 싫은 소리가 계속해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젯밤 시간을 내서 조이고 칠하고 닦으면서 정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했기 때문에, 이제 잠시 후 날이 밝으면 곧바로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입니다.
“행운은 준비된 자가 기회를 만날 때 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준비를 한 사람과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준비의 시간보다는 스스로 즐기고 노는 쾌락적인 시간을 보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바라는 행운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7월과 8월은 저에게 있어 무척이나 한가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도 별로 없으며, 성소국의 몇 가지 업무 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달입니다. 그러나 7월과 8월은 저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9월부터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즉 7월과 8월은 이 강의의 준비를 위한 소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강의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강의하는 시간의 몇 배를 준비해야 겨우 그 강의 시간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일에 대한 준비만 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곳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 역시 조금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이 하느님 나라는 언제 갈지 모르는 나라입니다. 또한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지도 알 수 없는 나라입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이러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미국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법이 아닌 미국 법을 들먹이면서 미국 법대로 하자면 어떨까요? 아마도 너희 나라가서 너희 법대로 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법을 따라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랑의 말씀과 행적들. 그 모습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왜 세상의 법을 하느님 앞에서 내세우려고만 할까요?
이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조금만 준비해도 된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할 때 우리들이 꿈꿨던 영원한 생명은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몸으로 잡아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당신의 장래를 상상으로 꿈꾸어 봐야 그것이 당신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미키이)
쉬는 것도 훌륭한 준비이다.
지금이야 말하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지만, 신학생 때만 해도 말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남들 앞에만 서면 얼마나 가슴이 쿵탕거리고 떨리는지 모릅니다. 특히 남들 앞에서 독서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을 간직하며 며칠을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글씨를 읽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남들 앞에서 글만 읽으려 하면 정말로 힘들었거든요. 말을 하는 것은 약간 더듬거려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지만, 그냥 책을 읽는 것도 더듬거리면 거의 바보 취급을 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생 때 했던 방법은 책에 사선으로 쉬는 곳을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쉬는 곳을 표시해두면 비록 느리게는 읽어도 떠는 것을 줄이고 또박또박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쉼표라고 하지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쉼은 매우 중요합니다. 힘찬 도약을 위한 잠시의 자기 점검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쉼표 없이 무작정 빨리 달리기만 하는 사람의 인생은 숨이 차서 오래 달리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쉼은 또 하나의 훌륭한 준비입니다.
깨어있는 삶
김사욱
서울 등 대도시 버스 정류장에서는 미리 도착 버스에 대해 전광판에 문자안내를 합니다. 그러나 문자판이 있어도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기가 타고 갈 버스가 올 때가 되면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그러다가 타야 할 버스번호가 보이면 놓칠까 봐 냅다 버스 쪽으로 뛰어갑니다. 버스에 올라서도 딴생각에 골몰하거나 졸다 보면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방심하다 내릴 곳을 놓치면 엉뚱한 곳에 내려서 다시 반대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졸다가도 내려야 할 곳이 다가오는지 확인하려고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창밖을 내다보곤 합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면 안심하고 또다시 졸다가 깨어서 어디쯤 왔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내릴 때를 알기 위해 깨어있으려 노력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기 위해, 아니면 타야 할 버스를 확인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과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이 언제 오시는지보다 직장생활에서 당장 나에게 맡겨진 업무처리나 진급문제가, 또 가정에서 아이들 교육문제가 더 현실적이고 다급한 문제라서 그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정작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면 우리 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잘 알고 깨어있을 것입니다.
<종말, 재림, 심판>
송영진 모세 신부님
8월 30일의 복음 말씀은 종말, 재림, 심판에 관한 가르침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종말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종말과 재림과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보면, 대단한 극기고행이나 특별한 신심행위를 하라고 지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평소에 늘 성실하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종말과 재림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도 평소에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종말의 시간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큰 은총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일주일 뒤에, 또는 한 달 뒤에 심판을 하겠다고 예고하신다면, 그리고 절대로 취소하는 일 없이 예정대로 틀림없이 진행하겠다고 예고하신다면?
지구는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사람들처럼 단식기도를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딘가로 도망가서 숨을 것입니다(묵시 6,15).
(하느님의 심판이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도망가서 숨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라 모르겠다.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나 실컷 하자.'라고 하면서 더 방탕하게 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살하려고 할 것입니다.
농부들은 농사를 안 지을 것이고, 어부들은 고기를 안 잡을 것이고, 모든 저축과 투자가 중단될 것이고 .... (인간의 경제활동이 모두 중단될 것이고), 학생들은 공부를 안 할 것이고 ... 기타 등등...
(종말이라는 사건이 재앙이 아니라 그 종말을 맞이하는 인간들의 태도 자체가 큰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종말의 시간을 모른다는 것이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묘목을 구하러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고, 이미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뭔가를 특별히 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그것입니다.
종말이 갑자기 닥친다고 해도 평소에 준비가 잘 되어 있어서 특별히 뭔가를(회개나 단식기도나 극기고행 같은 것을) 따로 더 할 필요가 없는 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24,45)"
이 말씀에서 종이 해야 할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일상적인 일을 성실하게 하는 종입니다.
성인 성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흔히 그분들의 뛰어난 성덕이나 업적 등을 이야기할 때가 많은데, 사실 모든 성인 성녀의 성덕은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평소에는 대충 살다가 어떤 특별한 기회에 갑자기 뛰어난 성덕이 나타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순교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의 성덕과 신앙생활이 순교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복음 말씀에 등장하는 '불충실하고 못된 종'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날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생활하는 종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 못된 종이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종말이 오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닐 것이라고, 아마도 먼 훗날에나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8월 31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종말의 시간을 계산해서 종말이 바로 코앞에 와있다고 호들갑을 떠는 인간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종말의 시간을 계산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지 하느님의 시간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종말의 시간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권한을 제한하거나 규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마태 24,36)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이 언제인지 알아내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바로 지금'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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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와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물었지요.
“왜 그렇게 일찍 나오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부족한거에요?”
이에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아니요. 업무 외에 앞으로 도움이 될 것 같은 일을 찾아서 미리 하는 것입니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이나 문제를 그날그날 해결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하지만 한 발짝 나아가 앞으로 쓸 만한 정보를 찾아본다든지, 앞으로 도움이 될 것 같은 목록을 작성해둔다든지, 있으면 더 편리해질 도구를 만들어둔다든지, 앞으로의 일들을 아침 일찍 와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앞으로의 일들을 미리 행해 놓는다면 어떨까요? 미래의 시간에는 훨씬 더 많은 여유 시간을 누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즉, 현재의 시간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인데, 우리들은 그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똑같이 24시간이라는 하루가 주어지지만, 그 시간의 질에 커다란 차이가 있지요. 어떤 이는 미래를 잘 준비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반면, 어떤 이는 미래로 이어지는 행동이 아닌 과거에 얽매이는 행동으로 쓸모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내일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걱정만 하는 사람들은 내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불행이라는 단어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주인이 언제 오든지 상관없이 항상 성실하고 충실하게 생활하는 종은 주인이 왔을 때 커다란 상을 받는 반면, 주인이 늦어진다면서 불성실하고 불충실하게 생활하는 종은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 각자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우리들에게 오실까요? 아니 반대로 우리들은 언제 주님 앞으로 가게 될까요? 그 시간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있으며,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그 날도 언제일지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언제인지를 모르는 그 시간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몫은 무엇일까요?
늘 깨어 준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늘 깨어 성실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그때가 되었을 때, 칭찬을 받고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충실하지 못했다며 먼 미래에 울며 이를 가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열심히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소신을 보지 말고 그가 자신의 소신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보아라(리히텐베르크).
봄비처럼 쑥쑥 키워 주는 말들(작자 미상, ‘하면 할수록 좋은 말 열 가지’ 중에서)
마음을 넓고 깊게 해주는 말, “미안해”
겸손한 인격의 탑을 쌓는 말, “고마워”
날마다 새롭고 감미로운 말, “사랑해”
사람을 사람답게 자리잡아 주는 말, “잘했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말, “내가 잘못했어”
모든 걸 덮어 하나 되게 해주는 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로운 말, “친구여”
봄비처럼 사람을 쑥쑥 키워 주는 말, “네 생각은 어때?”
언제이든 모든 날들을 새로워지게 하는 말, “첫 마음으로 살아가자”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말, “너를 위해 기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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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자주 공원을 산책하면서 묵주기도를 합니다. 걸으니까 운동도 되고, 이 시간에 묵주기도도 하니까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린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공원의 산책로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충분한 폭이지만, 한가운데로 걸으면 맡은 편 사람과는 부딪힐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따라서 이런 산책로를 걷다보면 종종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활갯짓을 하면서 막무가내 식으로 거침없이 걸어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들은 정면을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결국 제가 옆으로 비켜 줍니다. 그러면서 ‘꼭 내가 비켜줘야 하나? 저 사람이 비키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또 저런 사람을 만나면 절대로 내가 먼저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잠시 뒤, 또 앞 편에서 소위 파워워킹을 하면서 걷는 어떤 형제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랑 비슷한 연배나 아니면 밑일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갈등했지요.
‘내가 또 비켜 주어야 할까? 아니면 나도 눈 딱 감고 걸어서, 저 사람이 먼저 피하도록 해야 할까?’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저의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서 피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지요.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고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힘껏 걸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행히 부딪히지는 않았습니다. 상대방은 피해주면서 저한테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바로 이 순간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살짝 몸을 트는 것이 뭐가 힘들다고, 오히려 저렇게 인사를 먼저 나누었으면 내가 더 떳떳했을 텐데……. 저는 부딪히더라도 제 자존심만을 내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딪히면 누가 손해일까요? 나만 손해인데…….
우리들은 쓸데없는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쓸데없는 것들을 준비하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대신 정말로 중요한 것,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소중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이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위해서 애쓰지 말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위해서 항상 깨어 준비하라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동료를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지 말 것을 이야기하시지요. 대신 주인의 모든 재산을 잘 간수하는 늘 깨어 준비하는 종이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주인의 재산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주님의 재산을 잘 관리하고 그 재산을 더 많이 불리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늘 깨어 준비하는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 나는 주님의 종으로써 무엇을 하고 있나요? 혹시 쓸데없는 자존심 내세우는데 바빠서 다투고 먹고 마시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람은 함께 웃을 때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레오 버스카글리아)
겸손의 지혜(‘좋은생각’ 중에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에 맹지반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용맹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당시 노나라와 이웃한 제나라는 자주 싸웠는데, 한번은 노나라의 전세가 불리해져 노나라 군사가 모두 후퇴하게 되었다.
맨 앞에서 용감하게 적군을 무찌르던 맹지반은 후퇴할 때가 되자 노나라 군사의 맨 끝에 섰다. 쫓아오는 적으로부터 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맹지반은 자기 목숨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아군이 안전한 장소로 후퇴할 때까지 맨 뒤에서 적군과 싸웠다.
가까스로 노나라 군사가 성에 도착하고, 성문이 거의 닫히려는 찰나 맹지반은 말의 엉덩이를 세차게 내리치며 맨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말했다.
“내가 감히 후방을 지키려고 뒤에 남은 게 아니라 내 말이 지쳐서 달리지 못했기 때문에 뒤처지게 되었소.”
이를 두고 공자는 ‘맹지반불벌’, 즉 “맹지반은 자신의 공을 자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라며 두고두고 맹지반의 겸손을 칭찬했다. 병력이 약화되고 사기까지 떨어진 군대를 이끌고 적군의 공격을 막아 내며 후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 그럼에도 맹지반은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그 공을 떠벌리기는커녕 오히려 감추었다.
우리는 때때로 작은 공을 크게 자랑해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공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되, 성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깨어 있는 신앙인
김민수 신부님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십니다. 깨어 있는 삶은 우선 자신을 아는 행위입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실상 어려운 일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원래 그가 한 말이 아니라 어떤 신전 입구에 적힌 말이라고 합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은 교만하게도 신에게 도전하기 때문에 신들이 인간들을 향해 “너 자신을 알라.”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에 불과할 뿐이지 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인간학적으로 전환하여 인간관계에 적용시킨 것입니다. 신앙인은 항상 깨어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이 주는 온갖 달콤한 유혹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을 깊이 깨닫고 이를 확고하게 지켜야 합니다. 정체성 인식에는 반드시 성찰과 반성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듯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반성적 행위입니다.
우리 주변에 깨어 있는 사람들이 종종 무지와 무관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칩니다. 깨어 있는 이들은 자연과 환경이 멍들고 황폐화되는 현실을 아파하며 하느님의 창조질서 회복을 외칩니다. 깨어 있는 자만이 현재와 미래의 희망을 일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됩시다.
김기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구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은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은 영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싸울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고 합시다. 나중에 보니 상대는 기관총을 들고 섰는데, 이 사람은 물총을 들고 나왔습니다. 물총을 준비하고 준비 끝났다고 한 것입니다. 물총을 쏘면서, “차갑지? 차갑지? 옷 젖었다!” 라고 좋아하는 것은 그야말로 실소할 일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함 없이 세상과 싸우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세상과 경쟁하기 보다는 우리의 강점으로 싸워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싸워야 합니다.】(‘강점으로 일하라.’ 참조)
세상과 비교했을 때 교회의 재정이나 기술이나 시스템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에 나아갑시다. 그 능력과 힘으로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선포합시다.
두 번째로 제 자리를 지키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은 다음의 상황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학교에 갔다 왔는데, 어머니는 안 계시고 ‘밥은 밥통에서 퍼먹고 반찬은 냉장고에서 꺼내먹어.’ 라는 메모만 달랑 붙어 있습니다. 또 아버지가 직장에 안 나가시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습니다. 또 군인들이 훈련은 안 하고 술집에만 있습니다. 이처럼 제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제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 몸 안에 있는 것들도 각자의 자리에 있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콧물은 코 안에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할 때 유익하지만, 코 밖으로 나오면 불결하다는 소리만 듣게 됩니다. 침은 입 안에 있을 때 소화효소 기능을 하지만, 입 밖에 나오면 오물입니다. 피도 혈관 속에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때 좋은 것이지, 몸 밖으로 흐르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따라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자기의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하늘을 감동시킨...’ 참조)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다 아시는 것처럼 기도 하는 자리, 말씀을 읽는 자리,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는 자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리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각자의 삶의 자리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난 사람은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 하루,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되기 위해, 위로부터의 능력을 구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영국의 한 방속국에서 퀴즈를 냈다.
퀴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많은 대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
‘배를 타고 가는 것’
기차를 타고 가는 것‘
‘고속도로로 차를 타고 가는 것’
그 중 최고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 이었다.
<독서> :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사도 바울로 시대에 고린토는 번창한 상업 도시였다. 해상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여러 종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을 하는 도중에 고린토에 와서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교회는 그 도시 안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점점 성장하였다.
바울로는 제 3차 전도여행 도중 에페소에 장기간 체류하는 동안에(사도 19장) 고린도 교회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편지를 보낸다. 바울로는 편지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주지시킨다.
고린토 전서의 첫 부분에서 바울로는 먼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교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부르셔서 당신 백성으로 삼고 구원의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진실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하셨다.
삶은 은총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거저 태어났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공짜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육적, 영적으로 성장한 것도 자신의 힘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양육되고 성장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성장할 수도,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도움을 받으며 살고, 이 모든 도움의 뒤에 하느님께서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고 살도록 하셨다. 하느님은 도움의 하느님,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살도록 하신 하느님께서는 죽어 없어지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 죄를 대신 기워 갚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1디모 2,5)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하신 주님이시다. 우리를 살도록 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죽도록 버려두시겠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다. 우리 죄를 대신 갚으시고 우리를 살도록 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니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느님은 진실하시니, 믿음으로 살아가자.
사도 바울로는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은총의 하느님이시며,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선포했다. 삶은 은총이며, 우리는 은총 안에서, 은총으로 살아간다. 우리에게 끝없이 베푸시는 은총의 하느님이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충실한 종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희 어머니는 처음부터 저를 사제로 키우시기를 원하셨지만 저는 사제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반 대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 시험을 치는데 2교시 수학 시험을 망쳤습니다. 저는 재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정문 앞에서 묵주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여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대학에 붙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좀 달랐습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어머니는 제가 대학에 떨어지기를 원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험 보러 가는 날, 일부러 미역국과 계란을 해 주셨습니다. 미끄러운 음식이라 그런 걸 먹으면 미끄러져 떨어진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어머니께서 시험 당일 날 묵주기도를 하신 이유는 제가 붙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라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머니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군대 가 있을 때 집을 성당 바로 밑으로 옮기셨습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도 있듯이 어머니는 저를 주님께 바치기를 포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등록금을 다 벌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돈 때문은 아니셨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사제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처음부터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바람은 제가 26살이 되어서야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한 명의 사제가 되기를 원하고 기도 해 주신 어머니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는 많이 배웠다는 부모님들이 아이의 영혼은 뒷전으로 한 채 세상에서 돈 많이 버는 똑똑한 악마로 자녀들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어머니가 비록 못 배우셨지만 그 분들보다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계셨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모니카 성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니카 성녀는 이교집안에 시집와서 난폭한 남편과 시어머니를 회개시켜 세례를 받게 하고 망나니 아우구스티누스를 마니교에서 구해내어 위대한 성인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 분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기도한 증거는 무릎에 1센티나 되게 박힌 굳은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상에서는 성공했을지라도 신앙으로는 구원받지 못할 운명이기에 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 성인의 강론을 듣고 회개하여 이교를 버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니카 성녀는 모든 가족이 주님의 자녀가 된 모습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항구에서 기력이 소진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왜 모니카 성녀는 결혼하여 남편을 위해서, 시어머니를 위해서, 철없는 장남을 위해 그렇게까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며 기도하고 주님께로 이끌려고 했을까요?
한 기도 단체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실로 그 단체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일이 다 들으니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본인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신앙심 깊은 신앙인들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안엔 미움과 질투와 시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한 자매님이 가족은 등한시하고 그 단체에 너무 투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아내로서 한 어머니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도 하지 않으면서 그 단체에서 하는 일로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족과 그 단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물었더니, 그 자매님은 당연히 주님께서 맺어주신 그 단체가 더 소중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럼 가족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것이 아닌가요?
가족은 ‘성사’로 맺어져 끊어질 수 없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관계는 또한 ‘의무’를 포함합니다. 가족은 나에게 기도하도록 맡겨진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때 오신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을 잘 돌보라고 하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때 오신다고 하는 말씀은 현재를 마지막 순간처럼 여기며 살라는 뜻입니다.
모니카 성녀는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오늘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절실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눈물로 바치는 어머니의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말이 있듯이 모니카 성녀의 기도는 온 가족을 구원하였고 망나니 아들을 성인까지 만드시고 당신 자신도 성녀가 되셨습니다.
물건을 빌려주면, 그 빌려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빌린 물건을 조심히 사용하여 돌려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남의 것이니까!’하는 생각으로 마구 사용하여 고장 내기도 하고 흠집을 내어 돌려주기도 합니다. 즉, 나에게 맡겨진 것을 어떻게 여기느냐가 그것을 맡겨준 사람에 대한 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니카 성녀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하여 최선을 다하는 충실한 종으로서 그 사람들을 맡겨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겐 맡겨주신 이들이 있습니다. 성당의 사목회 위원들도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지 주일학교나 신앙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들을 왜 맡겨주셨는지 그 첫 번째 이유를 먼저 깨닫고 모니카 성녀의 모범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나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밤 성당 마당에서 내일 장례미사 때 사용할 운구용 수레를 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청년 벗들에게 한 마디 건넸습니다.
"이것 보면 뭐 생각나는 거 없니?"
"장례 미사 때 관을 실어나르는거 잖아요."
"나도 언젠가는 여기에 눕겠지."
다른 친구들은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따라 왠지 이 수레를 보면서 내가 누워있는 것이 떠올려집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여기에 눕겠지요.
함께 했던 사람들의 눈물의 전송을 받으면서 홀로 외롭게 떠나겠지요.
아직은 그렇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내가 수레 위에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누어 있는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질 가장 확실한 현실이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너무나도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행복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주님 앞에 부족할 뿐이겠지만, 그 날 나의 지난한 삶의 몸짓이 주님께는 아름답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해도 다할 수 없는 것이 벗들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 날 나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내일 한 형제를 주님께 떠나보내면서, 오늘 내가 떠나 갈 그 날을 생각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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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가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여 높은 파도와 싸우다가 겨우 어떤 무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배는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뒤여서 할 수 없이 승객들은 이 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무인도에서 몇 달 동안 살 수 있는 식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땅은 비옥해서 씨앗을 심기만 하면 몇 달 후에는 풍성한 식량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땅에 황금 덩어리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다른 곳에도 황금이 있는가 해서 동분서주했습니다.
몇 달 후에 황금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 그들의 식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밭에 나가 땅을 일구어 씨를 뿌렸지만 이미 때가 늦었지요. 파종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을 바라보며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집을 사서 이사 갈 준비는 잘 하면서도 우리 인생의 마지막 이사지인 하늘 나라에 대한 준비는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지금의 쾌락만을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내일이 모든 내 것인 양 살아가고 있지요. 내일은 분명 우리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의 시간인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잘 준비하는 것일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우리 국수 끓여 먹자”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국시지 국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둘이는 국수라는 둥 국시라는 둥 말다툼하다가 이장에게 어느 것이 옳은지 묻기로 하였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국수와 국시는 재료가 다릅니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이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부가 물었습니다.
“밀가루와 밀가리는 어떻게 다릅니까?”
“밀가루는 봉투에 넣어져 있는 것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 있습니다.”
또 이 말을 들은 부부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봉투와 봉다리는 어떻게 다릅니까?”
“봉투는 기계로 찍은 것이고 봉다리는 손으로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너무 세세히 따질 필요가 없는 법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 세세한 것을 따지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주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가 아닐까요?
쫀쫀하게 세세한 것을 따지지 맙시다.
면도하고 기다린 사람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히틀러의 그릇된 생각이 600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몰고 갔습니다. 모두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한 유태인 의사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고민을 깊이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리조각 하나를 줍게 되었습니다.
매일 그는 그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면서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나치는 매시간마다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매번 새파랗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활기찬 젊은 의사를 끌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가스실행이 하루 이틀 이렇게 미뤄지다가 드디어 독일이 패망했고 젊은 의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도움을 늦추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느님이 도와주실 때까지 참지 못할 뿐이다."
이 젊은 의사의 말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고 참고 견디는 사람,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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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동창신부모임에서 한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명연이가 저렇게 변한 것이 너무나 신기해. 나는 명연이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과 담배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저의 지금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신학생 때에는 전혀 없었던, 그러니까 신부가 되어서야 갖게 된 또 하나의 제 모습인 것이지요. 하루에 담배를 3갑 가량 피고, 아침에는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를 않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일쑤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서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으니, 제가 생각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거의 부족한 내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위축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저는 사람들이 좋은 제 모습만을 기억해주길 원하지, 나빴던 제 모습을 기억하는 것을 원하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현재의 좋은 모습이란 과거의 나빴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완벽하게 잘 하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준비 단계에서부터 완벽하게 잘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준비단계에서는 늘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것이지요.
특히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지요. 그래서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십니다. 또한 쫀쫀하게 과거의 잘못에 대한 벌을 주려고 대기하고 계신 분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현재라는 시간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누구보다도 충실할 것을 원하는 마음에서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과거를 떠올리면서 위축이 되고, 미래를 떠올리며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사 선생님께서 자신의 몸을 진단한 결과, 이제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는 은퇴를 하고서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퇴를 하고 나니 특별히 할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곧바로 ‘나는 곧 죽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포기했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죽음만을 기다렸던 이 의사 선생님.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의사 선생님이 60세에 은퇴를 했는데, 92세가 되어서야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든 10년 동안 최선을 다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의사 선생님은 자그마치 3개의 분야의 또 다른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살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30년을 낭비했던 것이지요.
나는 얼마나 주님께서 주신 현재라는 삶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나요? 혹시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삶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심장의 움직임이 멈추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시도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시도도 하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아주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과거의 내 모습에 위축되지 맙시다.
개척 정신을 고수하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올해로 개원 15주년을 맞은 제주 '생각하는 정원(구 분재예술원)'은 중국 장쩌민 주석 방문 이후 10여 년간 중국 고위 인사 5천여 명이 다녀가는 단골 코스가 되었다. 1995년 장쩌민 주석은 잠시 구경삼아 들렀다 갈 요량으로 '생각하는 정원'에 갔다 큰 충격을 받는다.
장쩌민 주석이 받은 충격은 한 농부의 '개척 정신'이다. 농부는 정부의 지원 없이 홀로 정원을 가꾸어 세계적인 분재 예술품을 탄생시켰다. 분재에 대한 열정이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불고 있는 한국 배우기에 대한 열풍과 함께 새바람을 일으켰다. 최근 15주년 기념식에도 중국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정도로 '생각하는 정원'은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장쩌민 주석은 또 다른 것에도 충격을 받았다. 바로 150-200년 된 감나무 분재 이야기다.
감나무는 3-5년마다 뿌리를 잘라 주는 분갈이를 하지 않으면 뿌리가 썩는다. 뿌리를 잘라 주게 되면 감나무는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뿌리를 뻗는 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즉, 필생의 마음으로 뿌리를 내리려는 개척 정신을 지속하지 않으면, 나무의 근간인 뿌리가 썩는 것처럼 조직이나 사람도 마찬가지라 썩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 범상한 진리를 감나무가 가르친 것이다. 그렇게 분재된 감나무가 150-200년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늘 깨어 있어라.
김정임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먹을 수 있다.’는 유행어가 돌면서 세상사람 모두가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열풍이 불었다. ‘저녁형 인간-야간형 인간’이었던 나에게 달콤한 아침잠을 포기하고 일찍 일어나라고 꼬드기는 것은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늦게까지 잘 수 있는 주일 아침은 참으로 소중한 나의 위안(?)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출근을 해야 하니 정해진 시간에 꼭 일어나야 했고, 비몽사몽간에 세수를 하고 아침밥도 포기한 채 직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요즘은 토요 휴업일이 한 달에 두 번이나 있어 달콤한 아침잠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주일 아침의 그 달콤한 위안을 반납하며 살고 있다. 성당에서 한 형제님의 유혹에 빠져 주일 아침 9시에 있는 ‘소년 레지오 마리애’ 단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회합 준비를 하기 위해서 9시 전에 성당에 가야 한다. 레지오 마리애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때 그 형제님이 ‘주일 아침에 잠깐만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돼!’라는, 그 ‘잠깐만’에 의해 주일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일에도 평소 출근하던 시간과 비슷하게 집을 나서야만 한다.
처음엔 마음속으로 소년 레지오 마리애를 하게 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형제님을 많이 미워했다. 주일 아침마다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고문을 당하며 성당에 갔다. 그러나 차츰 아이들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으면 이런 마음이 들었다. ‘
아! 일찍 일어나 성당에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형제님의 꼬드김이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늘 깨어 있지는 못하지만, 주일 아침만이라도 깨어 주님께 봉헌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늘 깨어 준비하는 마음’을 닦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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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친구들과 놀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빛을 내는 보석 하나를 주웠어요. 날이 저물어 탄광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자 소년은 자랑스럽게 보석을 내밀었지요.
“아빠, 이것 보세요. 예쁘죠? 놀다가 주웠어요. 난 이런 보석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늘 이렇게 반짝이는 보석 같은 어른 말이에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참 동안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창가에 걸려 있는 호롱불 쪽으로 걸어가 성냥으로 불을 밝혔습니다. 어두웠던 방이 환해졌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소년에게 호롱불을 보여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보석 같은 사람보다 이런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소년은 바람만 불면 훅 꺼져 버리는 보잘것없는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아들아, 보석은 태양 아래서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단다. 태양의 힘을 빌려 빛을 내는 건 참된 빛이 아니야. 너는 이 호롱불처럼 세상이 어두울 때 제 몸을 태워 세상과 사람들의 가슴을 환하게 밝혀 주는 사람이 되어라.”
이 아버지의 지혜가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석이 훨씬 아름답고 가치가 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태워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 주는 호롱불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 소년처럼 호롱불보다는 자신만을 뽐내려고 노력하는 보석과 같은 삶만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깨어 있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동료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 역시 깨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예상치 못한 날에 주인이 돌아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깨어 있다는 것은 앞선 아버지의 말씀처럼 호롱불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세상에 빛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보석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호롱불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주제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아니지요. 왜냐하면 행복은 앎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잊지 못할 쇼를 연출해보세요.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진 사람('좋은 글'에서)
한 사람이 밤에 동네 어귀를 돌아 집으로 가다 넘어졌습니다. 아래를 보니 땅 속에는 깊숙이 박힌 돌멩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투덜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귀가 시간에 쫓겨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던 그 사람은 다시 넘어졌습니다. 어제 그 자리, 그 돌멩이 때문에.
그날 이후로 그 사람은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자리, 그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는 두 번의 경험으로 인해 그 길은 돌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한다거나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실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살아가면서 저지르게 되는 실수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도 어떤 사람은 그 실수를 통해서 가르침을 얻게 되며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온통 관심을 실수를 저지른 자신을 미워하고 책망하는데 집중시키고 있는 탓에 더더욱 위축되어 가기만 합니다.
실수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실수 이후에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더 나쁜 것입니다. 때론 지나치게 완벽한 사람보다는 가끔은 실수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더욱 인간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졸음이 밀려올 때
김광태 신부님
졸면 죽는다.’ 군대의 초소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 문구는 우리의 신앙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긴 한데, 한편으로 늘 깨어 있기란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설문 결과에 따르면 열심히 활동하는 구역장 반장들 중에서도 냉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사람들의 비율이 상당했습니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신자들의 불평을 흔히 듣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다가 주변의 협조도 없는 가운데 너무 오랫동안 어떤 직책을 수행하다 보면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운전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아무리 노력해도 정신을 가다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땐 휴게소에 차를 대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힘들고 지칠 때 역시 ‘십자가를 져야 구원 받는다’는 당위성만 강조해가지고는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쉬어야 합니다. 단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 얼굴이 변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일상의 삶에서 훌쩍 떠나 하느님의 기운이 머무시는 장소를 찾아가 봅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하게 체험하고 나면 더 이상 인내력으로 버티지 않아도 됩니다.
돌보는 이의 행복
김보경 수녀님
13년 전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집에 가서 잠시 몸을 맡길 양으로 가족을 생각하는데, 제일 먼저 언니의 얼굴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평소 어머니께서 나를 두고 ‘딸 셋 중에서 제일 예뻐하는 딸을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고 말씀하셨고, 나 역시 어머니의 희로애락에 나의 희로애락을 동일시하였기에 당연히 어머니가 떠오를 줄 알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내면작업을 하고 나의 무의식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2년 8개월 위인 언니는 아홉 살 때부터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았다.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아침을 먹이고 일을 나가시면 씻기고 옷 입히고 점심 저녁을 해먹이고 집안을 치우고 심지어 목욕탕에 데려가 때를 밀어준 이도 언니였다. 언니가 야간 고교를 가자 저녁밥 짓는 일이 내 몫이 되면서 언니가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살뜰히 씻기고 먹이며 돌보아 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양식과 교육비를 대었지만 나를 돌본 이는 언니였기에 마음 편히 쉬며 몸을 맡기고 싶을 때 언니가 떠올랐던 것이다.
언니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몇 달 고생하다가 며칠 전부터 제천에 있는 용하다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전에 발이 아팠다는 것을 기억하고 제천에 데려가 진료받게 하고 싶다고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전화를 한 것이다. 이미 중년이 된 동생을 여전히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돌보려 하는 언니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의 정을 느꼈다. “주님, 당신께서 식솔을 맡기시고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던 종이 그렇게 하였을 때에 축복하였듯이, 당신께서 맡기신 두 동생을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성심껏 충실하게 돌본 언니에게 ‘행복하여라,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이라 칭찬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소서.”
누군가가 참으로 어려워서 몸을 의탁하고 싶을 때 절로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된 이여! 행복하여라.
“깨어 있어라.”
<은총의 순간이 다가오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보내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청소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닷가 캠프장에 와서 그들이 사용했던 담요를 빨고 있습니다. 물기를 뺀 담요들은 대 강당 양철 지붕위에 널어 말립니다.
휴식시간 동안 높다란 지붕 꼭대기에 홀로 앉아있었는데, 그 기분이 이만저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도 산 정상에 올라온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 제 발아래입니다. 멀리 점점이 떠있는 고깃배들 하며, 무인도들이 그림처럼 제 아래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해도 지붕 위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졸다가는 바로 응급실로 직행입니다. 오늘 예수님 권고 말씀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형제들과 단체로 움직일 기회가 많기에 저희는 주로 승합차를 이용합니다. 운전석 옆에 앉은 형제들이 가끔씩 꼬박꼬박 졸기 시작하면, 운전하는 저까지 졸음이 오기 때문에 저희끼리 농담 삼아 몇 가지 ‘선탑자 수칙’을 만들었습니다.
1. 선탑자는 만일의 돌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다.
2. 선탑자는 언제나 전방을 예의주시한다.
3. 선탑자는 운전자가 졸고 있는지 여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한다.
4. 선탑자는 운전자가 늘 깨어있게 도와주기 위해서 최신 버전 농담을 3개 이상 준비한다.
깨어있다는 것, 생각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운전할 때 선탑자가 정신없이 졸고 있다면 정말 운전할 맛 안 납니다.
강사로 초빙되어 갔는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침을 흘려가면서까지 졸고 있다면 그것처럼 맥 빠지는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 있는데, 단 둘이 마주한 술자리에서 한 사람은 신나게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펼쳐놓고 있는데,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술을 못 이겨 잠을 잡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많이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들께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예의바르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경건하다는 것, 단정하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들이 세상모르게 다 잠들어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홀로 깨어있는 체험을 해보는 것, 정말 좋은 일입니다. 더욱 금상첨화인 것은 홀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홀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홀로입니다. 그분과 나 둘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은총의 날들이 흘렀습니다. 정녕 감사해야겠습니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또 다시 자비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때가 되었구나. 나랑 같이 길을 떠날 순간이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순간이 올 때 지체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을 내다보는 사람
이기양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2-44)
준비가 없는 삶은 재난을 초래한다는 것을 경고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부르시더라도 충실한 종의 모습으로 따를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늘 깨어 준비하는 모습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탈리아 예수회 알로이시오 성인이 신학교를 다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교장신부님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어린 신학생들을 불러 세우고 물었습니다.
“5분 후에 이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며 종말을 준비하겠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종말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알로이시오 성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대로 운동장에서 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수선을 떨며 허둥대는 것이 아니지요. 평소와 다름없이 성실하고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여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고 또 허황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 이것이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말하지요.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매 순간 종말을 맞듯이 순간 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매 순간은 종말이지요. 그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을 예로 들어 설명하시지요. 여기에서 충실한 종은 주인이 맡긴 일에 최선을 다하여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상급을 받게 되지요.
반면에 불충한 종은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하다가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돌아온 주인에게 발각이 되어 위선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의 대조적인 두 모습을 제시하시면서 늘 깨어 준비하는 성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지요.
또한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잊지 말고 짚고 가야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모든 재산의 권리는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으스대며 다른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한 불충한 종은 결국 주인에 의해 벌받는 곳으로 보내지고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 신자나 불교 신자나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을 표현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위탁한 것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관리하는 것뿐이지요. 그리고는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서 성실한 관리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우리 삶의 본분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갖추고 누리는 모든 것을 내 것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내 것으로 착각하는 그 도를 넘어서 재물을 마치 주인처럼 섬기며 살아가기도 하지요. 우리는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이는 신자나 비신자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임을 안다면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때, 짐작도 못한 시간에 다가옵니다. 우리는 죽음을 만날 때마다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죽는 우리의 삶이 재산 관리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되지요. 주인에게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관리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인이 맡긴 재산이 자기 것인 양 흥청망청 살거나 또는 필요 이상으로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성실한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4,48-51)
우리는 언제든지 주인이 부르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는 순서가 없지요. 아직 젊다거나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에게는 해당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응답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이 있지요.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한 바로 그 내일이다.“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성실한 종의 모습이며, 깨어 준비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의 실천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의 관계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관계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관계가 잘 될 때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관계가 잘 안될 때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니 어서와 조배드리세.”
늘 하는 평범한 독서기도 시 초대송 후렴이지만, 주님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람 간의 보이는 수평적 관계만 있고,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수직적 관계가 빈약하다면 그 내적 삶은 얼마나 천박(淺薄)하겠는지요.
가끔, 마치 친구 같은 장성한 딸과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모녀들을 보면 그 친밀한 관계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흐뭇하게 느껴집니다.
한 집에 살아도 다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살아도 고립 단절되면 남남일 수 있듯이, 한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살아도 하느님과 무관하게 남남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남남으로 살다 이혼하는 부부이듯이, 주님과도 남남으로 살다가 수도원을 떠날 수 있습니다.
새삼 관계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드리는 미사와 기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함입니다.
그냥 타성적으로 바치는 전례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전례요, 이 전례를 통해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이래서 깨어 의식적으로 미사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깊어지는 관계는 저절로 온유와 겸손의 열매로 들어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도 이런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가 명료히 드러납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늘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성실한 삶의 자세, 바로 주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표현입니다.
이런 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기대의 기쁨으로 빛날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님과의 깊은 친교와 더불어 하느님과의 관계도 깊어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 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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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렇게 ‘새벽을 열며’가 늦게 발송이 되네요. 그 이유가 있답니다. 글쎄 어제 경기도 부천에서 신부님들 모임이 있었어요. 지금 유학 중인 신부님이 계신데, 그 신부님도 오셨으니 한 번 모여서 식사나 한번 하자는 원로 신부님의 제안에 모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모임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겠지요? 바로 술입니다.
저 역시 이 술을 마시면서 결국은 이렇게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늦게 발송하는 것은 물론, 새벽 방송도 하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가져오고 말았네요. 더군다나 못 마시는 술을 마셔서 지금도 머리가 뽀개지는듯한 두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괜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왜 술을 마셔가지고.... 이게 뭐야. 새벽에 해야 할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잖아.’
그러면서 억지로 술을 마신 제 자신이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술을 마심으로써 다른 신부님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약 저 혼자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고서, 그리고 한참 대화가 오가는 그 시간에 “저 집에 가겠습니다.”하면 누가 좋아할까요?
생각해보니 인간인 우리가 하는 일에는 항상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보청기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이 더욱 더 하찮게 생각되고 어쩌면 별로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족이라고는 홀어머니 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어머니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어머니는 보청기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는 아주 정성껏 보청기를 만들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일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전해 주고 있는지를…….
맞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일을 너무나 의미 없는 일이라면서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 매순간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깨닫고, 더욱 더 열심히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며 명령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깨어 있다는 것, 그리고 준비한다는 것은 후에 있을 영광스러운 결과를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일은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최고의 준비입니다.
어떤 일이든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감사하는 삶('좋은글' 중에서)
내 작은 세상에
빛으로 찾아오신
부드러운 응시 하나
그 응시로 내 삶 환해졌네
행복하였고
행복하였네
이해할 수 있는 마음
아름다울 수 있는 마음
공감하여
아프면 아픈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기쁘면 기쁜대로
마음길 만들어 동행함에
굳이
뭐라 규명할 필요도 없음은
늘상 행복하기로
분분한 마음 조각 이을 필요가 없었다네
깨어있는 사람과 잠 자는 사람
강영구 신부님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께서는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깨어있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침대에 누워 잠으로서 보냅니다.
8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25년은 침대 위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잠으로 보내는 25년이 깨어있는 55년을 좌우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에 적어도 7시간은 잠을 자게 됩니다.
7시간 동안 깊이 그리고 평화롭게 잠을 자는 사람은 깨어있는 17시간을 알차게 보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밤을 새워 일을 하거나
온갖 근심 걱정거리와 갖가지 망상으로 뒤척거리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
깨어있는 시간을 졸음으로 망쳐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깨어있기는 하지만 잠자는 사람이 됩니다.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귀의(歸依)하여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하늘의 뜻(天命)을 따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깨어있기 위해서 하느님 품안에서 잘 자는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김윤태 신부님
무엇이던지 목적하는 바에 맞추어 준비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느냐에 따라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행동이나 습관은 무엇을 지향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는 말이 됩니다. 운동하러 가는지, 식사하러 가는지, 아님 어떤 일을 하러 가는지, 아님 쉬러 가는지, 여행 가는지, 하느님께 가는지 아님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행동양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각자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의 모든 행동들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습니까?
동물 중에 기린이란 동물 아시죠. 아주 키도 크고 목도 긴 동물 말입니다. 글쎄 이 기린은 아주 겁이 많답니다. 그래서 항상 맹수들이 오는지 주위를 살피면서 평생을 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초식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비슷하겠지만 유독 기린은 더 조심하며 생활합니다. 그래서 기린은 대부분 선 채로 눈을 꾸벅 꾸벅 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안전하다 싶으면 땅에 앉아 잠을 자기도 한답니다. 그것도 땅에 앉아서 그 긴 목을 구부려서 잠을 잡니다. 잠을 자다가도 무슨 소리가 나면 금방 머리를 들어서 경계를 합니다. 그런 이유로 기린이 깊은 잠을 자는 것은 하루에 5분도 안된다고 합니다. 이런 기린의 습성과 긴 목과 다리를 가진 모양 때문에 다른 초식동물들도 기린의 행동을 많이 참고해서 자신들을 보호하기도 한답니다. 아마 기린 자신의 생존본능이 다른 동물에게는 좋은 파수꾼이 되나 봅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마 기린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나의 삶이 중단되거나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우리의 삶의 발걸음이 하느님 에게로가 아니라 세상으로 대변되는 재물과 권력 등에로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로 다른 곳에 가 있게 되며, 이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이웃까지도 함께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성경은 우리에게 늘 깨어 준비하고 나아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을 잃거나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느냐고 질책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는 우리들의 소중한 신앙을 잘 지켜 “흠 없는 사람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되기를 빈다.”고 하시며 늘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아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라.”라는 말을 잊지 말라 하십니다. 자칫 어리석은 부자처럼 잘 준비하다가 가장 소중한 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이 부자는 어느 해 소출이 많이 나자 이렇게 외쳤지요. “내영혼아 기뻐하여라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제 몇 해 동안은 걱정이 없다 큰 곡식창고를 지어 놓아서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때 하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 너의 영혼이 너를 떠나가리라.”고 말입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동안 주춤하는 동안 다른데 관심을 갖는 동안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전부 깡그리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리면 방심한 기린이나 어리석은 부자나 악한 종처럼 되어 행복할거라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 오히려 불행에로 이끌고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이 아니라 벌 받는 자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가슴 치며 통곡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늘 준비하며 행복한자 될 것인지 잠깐의 재미와 기쁨을 위해서 자신과 이웃을 구렁텅이로 이끄는 방심한 기린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늘 우리 앞에는 도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늘 후회하지 않는 선택으로 좋은 하루 되세요.
김기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기준은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혹은 없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기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충성스런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충성스런 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용기 있는 신앙생활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것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겠습니까? 혹은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죽겠습니까? 돈, 명예,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가지고 죽지도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전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고 가지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그림자를 가지고 태어나고 죽을 때 그림자를 가지고 죽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을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 볼 때 하느님 아버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곧,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태어나시고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는 내가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렇게 봉사를 하였는데 무엇을 주셨는가?' 라고 하면서 떠나는 이들이 많은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마는 않은 것같습니다. 어린 아기를 가지신 부모님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작은 꼬마 아이가 칭얼거리면 부모님은 들어주십니다. 우리 역시 간절히 청할 때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용기 있는 신앙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충성스런 종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픈데 부모가 춤바람이 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픕니다. 자식이 슬프면 부모도 슬픕니다. 자식이 기쁘면 부모도 기뻐하십니다. 또한 자식이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지면 부모는 일으켜주기보다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넘어진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납니다. 그러할 때 부모는 매우 기뻐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내가 힘들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힘들어하십니다. 내가 어려울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어려워하십니다. 내가 기쁠 때 하느님 아버지는 기뻐하십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넘어지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일으켜주시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용기 내기를 바라면서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씩이나 넘어지십니다. 첫 번째 넘어지실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온갖 어려움에 짓눌려 있는 모습, 온갖 고통에 싸여 있는 모습, 온갖 아픔에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넘어지시면 또 다시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십니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시고 일어나십니다. 세 번 넘어지시고 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싶습니다.
가장 충성스러운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닮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히브리서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랍시다.' 라고 우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용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용기가 있는 자는 성실한 종이 될 것입니다.
† 나의 죽음 - 세상의 종말
박상대 신부님
우리는 지난 며칠동안 마태오복음 23장을 통하여 예수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내뱉은 신랄한 비난과 7번의 불행선언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마태오는 23장을 마무리하면서 유대교 신앙의 상징인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대교의 총체적인 멸망을 예고하였다.(23,34-39)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테마를 근거로 인류역사의 종말을 제고한다. 인류역사의 종말은 마태오가 엮은 예수님의 종말설교(24-25장) 안에서 논리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에 이어 마지막으로 종말설교(24-25장)를 논리적으로 엮었다. 마태오의 종말설교는 대략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복음 13장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나, 한층 포괄적이고 조직적이다.
마태오의 종말설교는 크게 7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예루살렘 성전파괴 예고(24,1-3), ② 종말예고의 전조들 / 재난의 시작(24,4-14), ③ 종말직전의 전조들 / 가장 큰 재난 발생(24,15-28), ④ 종말사건들 / 인자의 내림(24,29-31), ⑤ 무화과나무의 비유(24,32-35), ⑥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24,36-44), ⑦ 종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이다.
종말에 관한 네 편의 비유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이다. 이 마지막 최후심판의 비유로서 사실상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앞둔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은 끝난다.
오늘 복음은 종말설교의 ⑥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의 마지막 단락(24,42-44)과 ⑦ 종말에 관한 4편의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를 매끄럽게 연결시켜 들려준다.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4절)는 첫 단락의 말씀이 종말에 관한 비유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특징과 요구사항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24,36)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들이닥칠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더디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다림의 마음은 초조하기 마련이다. 곧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의 종말과 인자의 재림이 늦어지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해 볼만하다.
이와 같이 ‘재림지체현상’은 종말의 시기와 모양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말설교에 담겨있는 4편의 종말비유를 묵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이 오리라고 생각했던 시점에서 2,0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언제 종말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인간이 삶을 다하고 죽는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든 필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아 있도록 허락하신 기간 동안에는 누구든 삶에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의무가 있고 동시에 권리도 있다. 그러나 삶이 곧 죽음의 준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한다면 그 준비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준비가 헛되지 않도록 분명히 다시 오실 주님께서 점검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을 준비시킬 책임을 맡은 종의 임무가 한층 돋보이는 것이다.
책임이 크면 압박감도 크지만 그에 대한 즐거움과 보람도 크기 마련이다. 행복하여라, 마지막 날을 향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잘 준비시키는 데 밤낮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