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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8월 30일 (녹) 연중 제22주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8.30|조회수1,803 목록 댓글 0

제1독서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7-9

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8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2,1-2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꾐에 넘어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을 받는다며,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불처럼 타올라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예고를 반박하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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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언자는 자신의 사명으로 말미암아 온갖 고초를 겪는다. 인간적 고뇌 속에서도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결코 멈출 수 없음을 고백한다(제1독서). 합당한 예배는 자신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현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을 더욱 새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만류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아직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나무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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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예언자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사람들이 비웃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다짐해도 주님의 말씀은 그를 떠나지 않는다(제1독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몸을 주님 앞에 제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현실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늘 주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제2독서).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말린다. 인간적 판단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복음).




오늘의 묵상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로 고백한 베드로 사도를 두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7-18).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단락인 오늘 복음에서는 베드로를 심하게 나무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두 단락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베드로에게 내려진 두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저승의 세력도 이겨 낼 교회의 반석으로 뽑힌 베드로였지만, 곧바로 사탄이요 예수님의 걸림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또 하느님의 계시로 예수님의 본모습을 알아보게 된 베드로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의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로 취급을 받습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아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운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가 기대하였던 메시아는 임금으로 위풍당당하게 오시며 큰 권능과 강한 힘으로 원수들을 제압하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예고처럼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쓰러져야만 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나약한 분이 어떻게 당신 백성을 구하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메시아 상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당황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구원 계획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메시아의 수난을 거부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가장 큰 적대자 ‘사탄’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정복당하심으로써, 그리고 그 십자가 운명에 순종하심으로써 당신 백성을 구하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명예와 권력, 영광과 승리를 좇는 데 익숙한 세상에서 우리는 이 역설적인 구원의 신비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보여 주듯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입니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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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천적인 말벌이 벌집을 습격하면, 일벌들은 도망을 가지만, 파수병 역할을 하는 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덤벼듭니다. 그래서 이런 파수병 꿀벌에게는 ‘각오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수많은 각오를 해야 할 때가 옵니다. 파수병 꿀벌처럼 정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의 일은 없다고 하여도 크고 작은 희생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파수병 꿀벌들의 각오 유전자를 빌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질문에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가 오늘 복음에서는 오히려 이 각오 유전자가 꼭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에 함구령을 내리신 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반석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 보면 믿는 이들의 버팀돌도 오히려 믿는 이들을 비틀거리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생각하다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시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쉽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를 밝혀 줍니다. 누군가의 발이 걸리게 만들어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바오로의 권고를 각오 유전자로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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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호함이 엿보입니다. 맺고 푸는 열쇠까지 받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적인 유혹과 욕망을 철저하게 단죄하는 예수님의 결연함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현실의 처지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조롱과 놀림을 받고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세상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뼛속’에 그 말씀을 가두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시면서 예언자의 길이 세상과 맞서는 험난한 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수차례 전도 여행에서 칭송과 존경보다는 반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의 전부로 여길 만큼 복음의 기쁨 속에 살았기에 역경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날마다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삶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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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 사도는 가장 근본적인 이 질문을 피하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리에 귀 기울여 올바른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려면 더욱 정화되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당신의 안락과 영광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장익 주교님의 『예수의 길』에서는 베드로가 그때 미처 헤아리지 못한 예수님의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리 삼 년, 예수는 설교를 하면서 줄곧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급기야 큰 시련에 부딪쳤습니다. 곧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이 그것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제관들로 이루어진 사두가이들은 예수를 없앨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고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는 것 외에 또 무슨 길이 있었겠습니까? ‘도피해서는 안 된다. 사명을 완수할 따름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중략)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는 것, 이것이 예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듭되는 물음입니다. 답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답을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되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누구이신지는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속에서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려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실제로 ‘따라 걸을 때’ 비로소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눈을 뜰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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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어머니 모니카와 대화를 합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말합니다. “현세의 것들은 모두 인간의 영혼에 맞지 않아. 그러기에 사람이 그런 것을 더 많이 추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비참해지고 곤궁해지게 마련이야.” 어머니의 이 말에 아우구스티노가 반박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만일 이 세상의 것들을 풍족히 소유한 데다 자기 욕심을 제어할 줄 알고 인생의 즐거움을 품위 있게 적당히 즐길 줄 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모니카가 대답합니다. “아니, 아니야! 이 세상 것은 절대로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가 없어!” 어머니의 이 말에 아우구스티노가 매우 기뻐하며 외칩니다. “얼마나 멋진 대답인가! 그렇다.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라져 버릴 것들을 초월해야 하며, 영원히 남을 것을, 설사 운명이 바뀌더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추구해야 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런 특질을 지니셨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레몬 크리스티아니, 『아들아, 내 치마폭에는 눈물과 기도가 담겨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화를 하고 있는지요? 우리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대답처럼, ‘적당히 절제할 줄 알고 품위 있게 즐기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우리 삶의 깊은 곳에 깃든 영혼까지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것이 아니면 참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며 말리고 있습니다. 적당히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이대로 살자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고 베드로를 모질게 나무라십니다. 베드로처럼 ‘적당한 것’, ‘좋은 게 좋은 것’에 머물고자 하는 생각들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지요. 영성 생활에서 정지된 상태란 없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 사탄이 오늘도 우리 안에서 ‘적당히 살라.’고 속삭입니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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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드러내던 베드로 사도가 혼이 나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베드로가 몰랐기로서니 “사탄”이란 표현은 너무 심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단호한 말씀 속에는 분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적 감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면서 베드로는 간섭하였습니다. 인간적 애정으로 스승님의 앞날에 참견하였습니다. 동기는 순수했지만 베드로가 나설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인간 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지, 주님께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은 단지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는 수단이라는 착각입니다. 점치고 굿하는 기복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인지요? 주님께서 중심이 되는 믿음인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믿음인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곧바로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습니다. 바로 등산입니다. 선배들을 쫓아서 다닌 등산을 하다 보니 그 재미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정상까지 힘드냐고 오르니?”라고 말하지만, 산 정상에서 느끼는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산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휴일이나 방학 때에는 계속해서 등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기간에 가장 싫어했던 것이 ‘산악 구보’였습니다. 산에 가는 것에 큰 기쁨을 얻었던 저였지만,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산에 가는 것은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일이라 생각하면 고된 노동이 되겠지만, 즐긴다고 생각하면 일도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 선수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어떤 상황이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하루에 책을 350페이지 정도를 읽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를 보고서 힘들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책 읽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다면 우선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분명히 즐길 수 있는 길이 있으며, 그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말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탄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목숨을 잃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단순히 고통 속에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이 세상 삶을 마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얻기 위해서 고통이나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나의 십자가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는 순간으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평화는 내게서 시작된다(이하레아카라 휴 렌).


새똥

새똥이 내 눈에 들어갔다

평생 처음

내 눈을 새똥으로 맑게 씻었다

이제야 보고 싶었으나

보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풍경을 보지 않게 되었다

고맙다.


정호승 시인의 ‘새똥’이라는 시입니다. 새똥이 눈에 들어가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정호승 시인의 표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보기 싫은 인간의 풍경들이 많습니까? ‘지긋지긋하다’라고 할 정도로 보기 싫은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내 눈을 감고 살 수 는 없는 법, 우연인지 필연인지 갑작스럽게 날아온 새똥의 공격으로라도 보지 않게 되어서 고맙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기 싫은 모습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보기 좋은 모습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은 것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은총의 선물로 받은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족들이나 친지들, 고향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음껏 대놓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을텐데, 입을 다물고 있느라고 고생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놀랄 정도로 날이 잔뜩 서 있습니다. 거의 독설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간 공들여 쌓아올린 높은 탑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복음 16장 23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인재 양성의 대가였습니다. 제대로 된 제자 하나, 그것도 수제자를 키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특별 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화롭게 섞어가며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때로 큰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지만, 절대 우쭐해지거나 기고만장하지 마라고 강력한 철퇴와 자극도 동시에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수제자가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이요 걸림돌이라는 강력한 질책을 듣게된 가장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달콤함만 추구했던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희생과 헌신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세속적인 성공만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들의 후계자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분신이요, 그분의 기쁨이고 영광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기보다는, 그분의 걸림돌로서 사탄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생명수와도 같은 복음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민폐요 진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께서 그토록 혐오하시는 이 시대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대대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엄중하게 베드로 사도를 질책하셨고, 삶의 근본적인 태도나 노선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요 오른팔이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요 사탄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가? 아닌가? 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 어깨 위에 얹혀진 십자가, 때로 포기하고 싶고, 즉시 내려놓고 싶은 생각 간절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길에 참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매일의 십자가를 짊어져야겠습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 되지 않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코로나 재확산에 관련하여 YTN 뉴스에서는 ‘5월 이후 집단 감염 사례’를 말하며, “교회 관련 1,681명, 사찰 관련 92명, 이슬람 종교행사 관련 6명, 성당 관련 0명(7월 원당 성당 사례는 ‘방문 판매 관련’으로 분류)’로 나왔습니다.

가톨릭과 관련하여 집단 감염이 나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만났습니다. 만남 전날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가 모두 발언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회 등 종교시설을 사업장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시민이 교회를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식한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면 일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반 이상이 개척교회와 같은 어려운 현실이기에 대면 예배를 금지하면 현실적으로 유지가 힘든 교회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대면 예배를 강행하려고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에 집에서 조용히 예배드리는 것이 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것도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걱정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 걱정으로 본분을 잊고 자칫 사회와 하느님께 폐를 끼치는 일까지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도, 한 종교도 몇몇에 의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망하게 만드는 그 몇몇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다 보면 종교도 자기를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백설 공주』의 이야기를 봅시다.

옛날 어느 왕국에 예쁜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를 낳은 어머니가 곧 죽게 되어 질투심이 강한 왕비가 들어옵니다.

왕비는 요술 거울에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라고 물었습니다.

거울은 “백설 공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질투심에 가득 찬 왕비는 노파를 시켜 백설 공주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거울은 백설 공주라고 대답합니다. 왕비는 울부짖습니다.

“백설 공주는 내가 죽였어.”

거울은 백설 공주는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백설 공주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왕비님의 질투심입니다. 왕비님 자신이 나이 들고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백설 공주님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나, 세상 걱정을 없애려고 본래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교황이 되지도 않는 싸움을 위해 십자군을 징집하여 수많은 이교인들을 죽이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수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로마 한복판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조건으로 풀려나기는 했으나 많이 고생해야 했습니다.

프랑스 국왕은 자신들을 영국으로부터 지켜낸 영웅 잔 다르크를 영국인들에게 잡혀 죽게 했습니다. 죄목은 하느님 계시를 사제를 통해 받아야만 하는데 직접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세상 걱정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력으로 자신의 걱정을 해결하려다 보니 역사에 길이 남을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항을 깊이 우려하셨습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가 당신을 위하는 교회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자신을 죽이는 길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짐짓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죽기 싫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를 꾸중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자기 자신의 안위’와 같은 말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결국 세상과 교회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실 때, 이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방법까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돈 생각, 먹고 마실 생각, 남을 판단하는 생각 등을 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주님께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세속, 육신, 마귀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 생각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관한 관심’입니다.

주님 뜻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다 망치게 됩니다. 


세계적인 외줄 타기 곡예사 칼 왈렌다는 평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줄을 타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인생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기다림일 뿐입니다.”

그는 외줄 타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위험한 곡예를 성공시켜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왈렌다는 1978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외줄 타기를 선보이다가 75m 상공에서 추락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에 그의 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곡예에서 남편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석 달 전부터 그이가 ‘이번에는 어쩌면 떨어질지도 몰라.’라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또 ‘만약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질문을 자주 했고요.”

어쩌면 그가 목숨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왕비와 같아집니다.

제 역할을 못 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전광훈 목사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생각을 끊고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는 7가지 외에 최대한 생각을 끊읍시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시작은 생각을 못 박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묵상하며 자주 바치면 나 자신을 위한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기도 하고,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서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에 만족하셨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나는 너를 베드로(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답변을 하였기에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답변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사탄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천국의 열쇠를 가졌다고 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도 무너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에는 한인 공동체가 4곳 있습니다. 퀸즈, 베이사이드, 우드사이드,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입니다. 4곳에서 판공성사를 도와주기도 했고, 미사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퀸즈 성당은 오랜 역사가 있고, 한인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큰 형님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베이사이드 성당은 성전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의방도 넓고, 제대도 화려합니다. 우드사이드 성당은 미국 성당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더욱 가족 같은 공동체입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도 미국 성당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으로 휴가를 가셨고, 요즘은 제가 주일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따뜻한 신앙공동체입니다. 본당 재정의 규모와 신자의 숫자로 비교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큰 의미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바로 그곳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전이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고, 순교하였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고, 가진 것을 빼앗겼고,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굳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고, 그분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교회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모두 다락방에 숨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세상의 뜻을 따른 이야기도 숨김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교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밀고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에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여 다른 종교와 문화를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은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늘 마음에 담고 살면 좋겠습니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학생 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는 고통보다는 재미있게 놀고 편한 것이 더 좋아서 도저히 이 말씀을 지킬 자신이 없어서 영성 면담 때 신부님께 "신부님, 저는 솔직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살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주님의 말씀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제 힘이나 의지가 그 말씀을 따라 살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스도교 신자만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과 육신을 찌르는 가시를 달고 살아갑니다. 누가 모든 종류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세상 편하게 살겠다고 마음 먹고 살겠다고 해서 그가 자기만 아는 고통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헛된 욕망이나 무절제한 탐욕이 주는 무의미한 고통이 아닌, 진리에 따라 사는 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아픔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영혼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사는 것은 때로 괴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가장 잘 대접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9-30)

땅 위에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인생에 따라붙는 멍에를 메고 살아야 한다면, 저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겠습니다. 오직 이 멍에만이 제 삶에 "의미"와 "구원"을 가져다 주기에, 이 멍에는 다른 어떤 멍에보다 가볍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기꺼운 멍에입니다.




청소년에게 다가온 중독

하종은 테오도시오(카프성모병원 병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코헬 11,9).

인간의 뇌는 20대 초반까지 성장하며, 특히 이성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은 마지막에 자리 잡습니다. 이 시기에 중독에 노출되면 조절 능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합니다. 한국 청소년 중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는 청소년은 75%이고, 월 1회 이상 술을 마시는 청소년도 25%나 된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면 더 충동적으로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인격 자체가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또한, 청소년기에 술에 노출된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이 될 확률이 5배 정도 높습니다. 게임, 인터넷 중독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청소년이 이에 과몰입 상태에 빠져서 강박적일 정도로 사용합니다. 게다가 이 와중에 아이들은 도박에도 빠지고 있습니다. 2018년 청소년 도박문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재학 중 청소년의 6.4%가 도박 위험집단으로 분류됐습니다. 대략 14만5천 명의 청소년이 도박 중독에 빠질 우려가 있거나, 이미 도박으로 심각한 폐해를 겪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해야 하는 시절을 술, 게임, 도박으로 채우고 있는 아이들. 우리는 어떠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청소년 교육시간 1위, 불행지수 1위, 자살률 1위 국가라고 합니다. 교육은 성공을 위한 경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른들은 학벌, 돈, 성공만을 강조하며, 아직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도 않은 청소년 중 태반을 낙오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누구도 청소년들에게 삶의 의미, 참된 소통과 관계, 건강한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경쟁에 내몰리고 위로는 받지 못하니 청소년이 중독에 빠지는 것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독은 결코 삶을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 세 명 중 하나는 결국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게 됩니다. 한 가지에 중독되면 다른 중독에 연이어 빠질 확률도 현저히 늘어납니다. 한 번 중독에 빠지면 평생 우울하고 공허한 삶을 살면서 헛된 것만 좇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기에 향유하는 건강한 즐거움과 추억은 평생을 통해 삶을 지탱하는 토양이 됩니다. 술, 게임, 도박하지 말라고 다그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 기댈 필요가 없게 해주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이 중독 대신 참된 격려와 지지를 받고, 위로를 얻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철구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마태 16,23)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사탄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에게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마태 16,11) 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베드로 사도에게 지금의 현실은 매우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악의 세력도 이기지 못할 힘을 얻었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의 미래는 탄탄대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의 만족스러움이 생기면 그것으로 인해 갈등과 미움, 때로는 분노의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든, 정서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든, 자신의 이해관계와 안위에 방해가 되는 것이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별력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식별’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화단이 언덕 위에 있습니다. 이 화단에 물을 주기 위해서 언덕 아래 냇가로 가 물을 길어왔습니다. 힘들지만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위안을 얻습니다. 하지만 화단 가까이에 우물이 있으면 한결 수고를 덜 것 같아 우물을 팠습니다. 물 주는 것도 쉬워졌고 꽃들도 더 잘 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물에 관을 연결해서 물을 주니 수고는 없어지고 여유롭게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이 동산의 꽃들에게 더 좋은 것은 자신의 노력과 수고(=사람의 일)가 전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때 알맞은 양의 비를 내려 주시는 것(=하느님의 일) 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영적인 성장, 신앙의 성숙을 막는 큰 걸림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올바르게 식별하지 못하고 악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디딤돌과 걸림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와 함께 나처럼

살리기 위해 죽을 때

그대는 나에게 디딤돌입니다


나에게 기대어

그대 살길만을 찾을 때

그대는 나에게 걸림돌입니다


나와 함께 나처럼

모든 벗들을 섬길 때

그대는 나에게 디딤돌입니다


나를 들먹이며

그대 섬김을 받고자 할 때

그대는 나에게 걸림돌입니다


나와 함께 나처럼

자신을 버릴 때

그대는 나에게 디딤돌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의 배를 채울 때

그대는 나에게 걸림돌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시자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단순하게 하느님의 일은 종교 활동을 의미하고 사람의 일은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곧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일상 속에서의 모든 활동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장소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광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곧 영광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구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 영광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에서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와 같이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제일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코로나19 사태가 더욱 심각한 단계에 이르면서 많은 이들이 병에 걸리고 힘들어 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가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대혼란을 겪고 있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하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소중한 가치들입니다. 

우리가 그 소중한 가치들을 간직하고 있을 때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동물들도 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개들의 경우 자기 밥그릇을 건드리면 으르렁댑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게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 증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그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하느님의 가르침이고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그 중요한 가르침이자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 투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의 가치를 위해서 투신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그 보답으로 은총을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영광을 또한 되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를 포기하고 자학하고 없애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이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시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구원의 길과 십자가 길

윤가훈 미카엘 신부님

떨어지는 나뭇잎 묵상

우리는 흔히 “아휴, 이게 십자가죠?”, “그게 제 십자갑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말들  안에서 십자가라는 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죠.

맞습니다. 우리 흔히 십자가를 진다는 건 버거운 일,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겨울이 가까이 오면 나뭇잎이 떨어지는데, 문득 어떻게 때를 알고 나뭇잎이 저렇게 떨어질까 신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알아보니, 나무와 나뭇잎 사이에 있는 세포들이 죽음으로써 자연스레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포토시스 현상이라는 어려운 말이었지만, 어쨌든 모든 세포는 살아있기 위해, 생명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세포 스스로 죽음으로써 나무를 살린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만약 겨울이 가까워 오는데 나뭇잎이 그대로 붙어있다면, 추운 겨울에 많은 에너지를 쓰게 돼서 나무는 죽게 될 겁니다. 


‘죽어야, 살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는 사람 있습니까? 

십자가는 무겁고, 힘겹고, 아픈 것인데 누가 지려고 할까 싶어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베드로의 말이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특히나 요즘 사회처럼 편하고, 좋은 것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세상에서 ‘십자가’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죠. ‘죽어야 살릴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요.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그저 치워야 하는 것, 없었으면 하는 것이 아닌 ‘구원의 표지’고 우리를 진정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십자가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이끌어낸 결과지요.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겠죠. 

겨울에 앞서 수많은 나뭇잎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나무가 생명을 얻듯이, 오늘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찌 보면 나뭇잎을 놓으라는, 나뭇잎의 죽음을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하느님께 필요한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가족이 주님이자 성모님이었던 어머니

신동진 루도비코(아나운서)

10년 전, 가을 어느 날 회사 가톨릭 교우회 모임에서 남양주에 있는 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저도 세례를 받은 직후였던 터라 어머니를 모시고 동행했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사내 교우회 형제님들과 인근 식당에 갔습니다.

식사 중 한 분이 어머니에게 “어머니, 신동진 루도비코도 교우회 합창단에 들어오라고 얘기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는데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으셨습니다. 

저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표현이셨던 건데요,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는 모습이 재밌다 는 듯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나 다신 거기 안 갈래.” 하셨습니다.

“왜요, 불편하셨어요?”

“불편했어.”

어머니는 아프고 쇠해지시면서 간단하고 직설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길게 얘기할 에너지가 없으셨던 겁니다.

우리 집 식구 중 가장 사교적이고 유연했으며 말씀을 즐기던 분이라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기 추모 음악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습니다. 

퇴근 무렵 회사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와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객석은 관객들로 꽉 찼고 좌석이 좁게만 느껴졌습니다. 

두 시간 넘는 공연이라 어머니를 모시고 중간에 나가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공연 내내 어머니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물었습니다.


“어머니, 힘들지 않으셨어요?”

“아니 하나도….”

표현이 직설적으로 변해가던 어머니였지만 가족은 여전히 주님이었고, 마찬가지로 주님과 성모님, 김수환 추기경님까지도 어머니에게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이 좁고, 익숙지 않은 음악이 길게 흘러나와도, 보청기와 음량이 맞지 않아도 힘들다고 할 수가 없으셨던 겁니다.


어머니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을 본 건 돌아가시기 20일전이었던 그해 1월 1일,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간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떡국과 명절에 저희 집에서 늘 먹던 LA갈비, 물김치 등을 차리시고, 손수 안방에서 큰 상도 들고 오셔선 직접 펴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평소 안 하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널 내가 낳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

어머니의 신체 기능들이 떨어지던 무렵,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는 질문을 무심코 해봤습니다.

“어머니는 이 세상 다시 태어나고 싶으세요?”

“너를 아들로 만난다면 또 태어나고 싶지.”

어머니, 우리 주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간구해 봅니다.


주님, 가정을 위해 저희 가족을 오로지 주님처럼 성심으로 섬겼던 어머니 요안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지난 주일과 오늘 독서들의 내용은 아주 대조적이다. 지난 주일에 ‘메시아’로 고백된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마태 16,21) 존재로 당신을 제시하시고, 베드로는 자신의 고백으로 교회의 주춧돌이 된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걸림돌’로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 같다. 이러한 대립적인 서술은 그리스도 신비 자체 안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대립적 실체가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처럼 펄쩍 뛸 수도 있는 것이다.


제1독서: 예레 20,7-9: 주님의 말씀에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십자가 위의 죽음’이란 체험은 모든 신앙인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오늘 전례에 나타나는 예레미아는 그리스도의 예형처럼 나타나고 있다. 그는 비탄에 잠긴 고백을 통하여 하느님께 표현하고 있다. 그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무나 강하신 분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불’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복음: 마태 16,21-27: 자기 자신을 끊어버려라

오늘 복음은 곧 다가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그에 대한 베드로의 민감한 반응(마태 16,21-23)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당신을 따라야 할’ 제자들의 의무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24-27절).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인간적인 베드로의 행동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이 넘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행위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십자가와는 무관한 영광과 권세로 가득 찬 현세적 ‘메시아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세의 인간적 체계에 꿰맞추어 나름대로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신앙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그 신앙은 더 이상 하느님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고 하신 것은 공생활 시작할 때, 예수를 현세적 메시아로 변질시키려 한 유혹사화(마태 4,1-10)의 사탄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당하실 모든 것을 운명이나 숙명적 상황에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뜻임을 인식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메시아의 수난과 미래의 영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당할 어려움도 예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떼어놓으려 했던 베드로가 이제 스승을 따라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면 베드로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미구에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으로만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스승을 따름으로써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지만, 이제는 또한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수난당하는 종’으로서도 고백해야하며, 또한 이 고백은 자신 역시 스승의 고통스러운 운명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이 지워진 메시아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아직은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베드로에게는 참으로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권고의 내용은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이웃에게 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 밖에 관심을 두셨고, 당신을 잃으셨으며, 또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셨고(필립 2,7-8) 당신을 내던져 이웃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셨지만, 부활의 영광의 생명으로 당신 자신을 되찾으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다.그럴 필요도 없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고 우리를 잃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와 ‘이웃의 선익을 구함’(필립 2,21)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제2독서: 로마 12,1-2: 여러분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사도 바오로도 ‘십자가 위의 죽음’의 체험에 덧붙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1절). 자신을 이기면서 바치는 정신적 예배가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아픔을 요구한다.형제들에 대한 충실한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가 진정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형태로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원동일 신부님

+찬미예수님

다시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교우분들께서는 많이 실망스럽고 힘드시겠지만 하느님 안에서 조금만 더 함께 견뎌나가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기도합시다.

하느님체험을 자신의 에고(이기적인 자아)를 부풀리는데 쓰면 오늘 복음의 베드로 처럼 혼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나에게 사로잡혀 살다가 하느님께로 건너가는 것, 이것이 ’파스카’입니다. 그 과정에는 이기적인 나에게 ’아니오’라고 부정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순간,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은 내가 죽는 것과 같기에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숨어 있습니다..이것이 제2독서에 나오는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언젠가 수도원을 방문하여 도가 높은 수도승에게 물었다. 

“아직도 악마와 싸우고 계십니까?“

수도승: “젊었을 땐 그랬지, 그러나 이젠 나도 늙고 악마도 늙어서 서로가 서로를 내버려 둔다네.,

카잔차키스:“그럼 잘 된거 아닌가요?“

수도승: “아니! 더 나빠졌다네“...

카잔차키스: ?

수도승:“이젠 하느님과 씨름한다네“

카잔차키스: ?

수도승: “지금은 내가 하느님께 이기기보다는 지기를 바란다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2주일>(2020. 8. 30.)(마태 16,21-27)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쉽고 편한 구간도 나오고, 어렵고 힘든 구간도 나옵니다.

어렵고 힘든 구간을 만나면, “정말 이 길이 맞나?”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나?” 라는 생각에 다른 길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 어렵고 힘든 일은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그것을 참고 견디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믿음은 그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는 힘이고, 사랑은 그 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 제자들과 신자들은 메시아이신 분께서 사람들 손에 붙잡혀서 고난을 받고 살해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은, 당시의 제자들과 신자들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19-21).”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힘’을 생각하면,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께 굴복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반대로 그들 손에 의해서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말린 것도 같은 심정에서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4,26).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믿으면 수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가는 한 과정일 뿐이고,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허망하게 끝나버린 일은 아닙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네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제물로 삼으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고, 그 일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는데,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의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의 행동이 걸림돌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아’ 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모두 사탄과 같다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나에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나의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뒤를 제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해한 다음에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 길 끝에서 영광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이라도......)

처음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내 의지로 내가 하는 일이지만, 일단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 다음에는 나의 뜻과 의지를 버리고, 나의 판단도 버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는 ‘자신을 버리는 일’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길을 말리는 베드로 사도를 단호하게 물리치신 일도 ‘자신을 버리는 일’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편하고 쉬운 길을 찾고 싶은 소망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 소망 자체는 악한 일이 아니지만, 사탄의 유혹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사탄은 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는가? 편한 길이 있는데도 왜 힘든 길로 가는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말린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그가 한 말에는 “꼭 그 길로만 가야 합니까?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은 없습니까?”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은 사심 없이 예수님을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사탄이 유혹하면서 하는 말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도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편안해지고 싶은 소망’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도 ‘자신을 버리는 일’에 속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23A,1-4: CCL 41,321-323)

우리가 듣고 노래하는 것을 또 실천에 옮길 때 참으로 행복합니다. 듣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훈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성당에 다닌 이후부터 아무 열매도 맺지 않으면, 즉 이렇게도 아름다운 진리를 들은 후에 선행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상 과거 우리 생활에서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사랑하실 선행, 즉 “이 사람들의 생활은 선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서 도와주자.”고 하실 그런 선행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활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일도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당신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바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행한 바를 단죄하실 것이고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착한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한 이들을 위해서, 의로운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롭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시려고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에 더하여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을 용기가 있는 사람을 혹시 찾아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의화시킬 능력을 지니신 완전한 의인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누가 의롭지 않은 사람과 악한 사람과 죄 많은 사람을 위해 죽기를 원하겠습니까?


형제들이여, 우리는 선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은 다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행한 일은 이러하다 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을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금이나 은이 아닌 당신 피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흠 없는 어린 양처럼 허물로 물든 양들을 위해, 물들기만 했지 완전히 썩지는 않은 양들을 위해 도살자에게 끌려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이것입니다. 우리 생활이 이 은혜를 모독하지 않도록, 주어진 이 은혜에 따라 살도록 합시다. 참으로 위대하신 의사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병에 걸리고 싶어한다면, 우리 자신에게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의사께도 배은 망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길, 특히 당신이 걸어가신 겸손의 길을 따라가기로 합시다. 그분은 참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 길을 고통 속에 걸어가심으로써 겸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불사 불멸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도록,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무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도록 또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죽음을 멸하시기 위해, 불사 불멸께서 사멸성을 취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행하셨고 우리에게 이 은혜를 남겨 주셨습니다. 위대하신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심으로 죽임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어, 우리를 죽은 자로 지옥에 두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신앙과 고백으로 들어 높여지신 것처럼, 죽은 이들의 부활로 우리를 당신과 함께 들어 높이시기 위해 들어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겸손의 길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합당히 다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나이다, 하느님, 감사하나이다. 당신 이름 부르는 우리, 묘하신 일들을 일컫나이다.”




대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원로 신부님이 회고한다. “아마 그때 죽었으면 의미없는 생이 되었을 거예요” 신부님은 암투병 그리고 10년 이상을 살고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나에게 10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인생 헛살았을 거라 말한다.

신부님은 은경축 때의 이야기를 꺼낸다. “형제들이 본당 신자분들을 대신하여 은경축하잔치를 마련하겠다고 했어요. 제 형님 성질도 고약해 신자분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를 떠올리며 그 용서를 우리 형제들이 떠맡겠다고 본당 신자분들에게 말했어요. 동생들 덕분에 은경축이 지나고서야 제가 성질이 고약했음을 알았어요. 암이 걸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니 속죄의 기간이 없었어요. 살려달라 애원했고 10년 넘게 살고 있지요. 신자 분들에게 상처주며 살던 날들을 이제야 깨닫고 보속하며 지냅니다.” 신부님은 당신을 상대방에게 말할 때 언제나 죄인이라고 말했었다. 왜 자신을 ‘죄인, 사제’라고 말할까?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는 “네, 신부님, 성질 고약했어요” 내 말에 신부님도 한바탕 웃었다. 내가 봐도 지나치게 고약했다. 거기다 대쪽이었다. 그점은 단점도 되지만 신부님을 잘 드러내는 캐릭터였다.

오늘 복음(16,21-27)의 예수님 수난예고에서 비롯된 베드로와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며 십자가의 신비를 알려주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신분, 수준에 맞게 응대해 주신분, 나 대신 십자가를 떠맡고 고난과 죽음을 사신분, 제자들이 죄인일 때라도 수없이 용서해 주신분이시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 신부님은 왠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하신다. 나는 신부님의 얼굴을 찬찬히 드려다 본다. 환하게 어린이처럼 웃는 신부님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본다. 예수님께서 유연하게 만들어 주신 것은 병고를 거치며 이룬 십자가의 힘이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16,26)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 온 인류가 져야할 십자가가를 지고 당신은 죽으실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도 십자가를 지고 많은 이들을 위해 함께하고 기다려주고 그들 수준에 내려가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원로 신부님 덕분에 나 또한 지난날을 회고해 본다. 나도 작은 십자가 덕분에 상처준 분들의 용서를 청하고 지낸다.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xaultate) IV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제3장 스승님의 빛 안에서’,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라는 소제목에서 ‘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성덕’이라고 제시하십니다. 

  가끔 우리 스스로가 갈등의 원인이 되거나 적어도 오해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군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다른 데에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심지어 그 이야기를 각색하여 퍼뜨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파장이 클수록 나는 더욱 큰 만족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험담의 세계는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평화의 적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행합니다. 

  어떤 때 사람들은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좋은 점을 발견하여 지지하기 보다는 단점을 찾아내고 문제시 될 점만을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아마도 자신보다 더 칭찬받거나 대우받는 것을 참지 못하거나 자신이 남을 깍아내림으로써 그만큼 자신이 높아진다고 착각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부족하고 못난 면을 발견하는데 반하여, 누군가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 속에 하느님의 눈을 가진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장점을 칭찬하고 그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마음 속에 하느님 사랑을 가진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어두운 세상정세 속에서 내일 다가올지도 모르는 희망을 간직하고 기도하며 그 꿈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향한 꿈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참으로 평화를 '만듭니다.’ 그들은 사회 안에서 평화와 우정을 다져 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놀라운 약속을 남기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어느 곳에 가든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하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신자에게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과 함께” 평화를 위하여 일하라고 권고합니다(2티모 2,22 참조).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지기”(야고 3,18) 때문입니다. 일치는 갈등보다 낫기에, 우리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의문이 들 때면, “평화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 14,19)

  이러한 복음적 평화의 '건설'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적 평화는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다소 이상 한 사람,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 서로 다른 사람, 삶에 지친 사람, 그저 무관심한 사람조차 포용합니다. 복음적 평화는 어려운 일이고, 활짝 열린 정신과 마음을 요구합니다. “배부른 소수를 위한 잠시뿐인 평화나 허울뿐인 서면 합의”를 이루는 것, 또는 “일부를 위한일부의 계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평화는 갈등을 무시하거나 숨기려는 시도가 아니라, 반대로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건설하는 일은 평정심과 창조성과 감수성과 기술을 요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외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라는 소제목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줄지라도 날마다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덕’이라고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길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삶의 방식으로 사회에 도전을 제기히고 결국 성가신 존재가 되기까지 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깊이 헌신한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았고 또 여전히 박해받고 있음을 상기시키십니다. 평범한 세인들 속에 파묻히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편한 삶을 열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마태 16,25)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음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권력에 대한 야심과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복음을 구현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사회 조직, 생산 그리고 소비의 형태들이 자기 봉헌과 인간들 간의 연대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사회는 소외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소외된 사회에서는 정치, 매체, 경제, 문화와 심지어 종교 제도마저도 인간과 사회의 진정한 발전에 걸림돌이 돼버려, 참행복의 실천을 어렵게 하고 오히려 오명과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신자가 복음을 이루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면, 그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이 의구심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선거에 입후보하는가? 나중에 우리에게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인기를 얻거나 더 존경을 받을까 봐 그런지, 아니면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돼지 않을까 봐 그런지, 색안경과 의심을 품고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 발전과 구원을 위한 좋은 일을 하고 희생하자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망치거나 한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마귀들처럼 뭉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는 복음을 이루기까지 겪어내야 하는, 이른바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이 아니라 악마의 괴롭힘과 박해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정의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가 어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더라도, 그 십자가는 성장과 성화의 원천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위하여 견뎌내야 하는 고난’은 정확히 박해를 가리킵니다(사도 5,41; 필리 1,29; 콜로 1,24; 2티모 1,12; 1베드 2,20: 4,14-16; 묵시 2,10 참조). 피할 수 없는 박해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부당히 대우하여 자초한박해가 아닙니다. 성인들은 그들의 자만과 부정적 성향과 신랄함 때문에 참아 주기 어려운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이 일부 권위자들에게서 괴롭힘과 박해를 겪은 한편(사도 4,1-3; 5.17-18 참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사도 2,47 참조; 4,21.33; 5,13).

  박해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현대의 성인들이 피를 흘림으로써 박해를 당하든, 다른 교묘한 수단 곧 비방과 거짓말로써 박해를 당하든, 오늘날에도 우리는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믿음을 희화화히고 우리를 우스개거리로 보이게 하려고 조롱하는 박해도 있습니다. 

  ‘중대한 기준’이란 소제목에서는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참행복에 관하여 부연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눈에 드는 거룩함을 추구할 때 우리는 그 복음 구절에서 우리가 그에 따라 판단받게 될 올바른 행동규칙 하나를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35-36)

  이 구절은 결국 우리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해 왔고 앞으로 또 어떤 좋은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우리 자신을 내세우며 합리화를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도움이 필요하고 내가 무엇인가 어느 정도 했어야 할, 심지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의식도 채 하기도 전에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 속에 지나쳐온 사람들과 상황들을 기억합니다. 주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의 보잘것없는 노고와 시도들을 어여삐 헤아려주시고 부족하고 불충하며 나약했던 순간들을 용서해주시며 주님 친히 채워주소서. 아멘.




하느님께 봉헌할 세상 십자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베드로 사도는 주책부리기도 하고 열정도 있고 겁도 많다고 하더군요.

누구나 성경 읽어보면 베드로는 감정이 풍부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각한 죽음예고를 듣고 난리 피우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에게 걸림돌’이라며 꾸지람을 듣고 맙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드렸던 건 아닌지요.

그러니 하느님 일을 우선하고 사람의 일은 이에 맞게 살라는 것입니다.


물욕에 매인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께 봉헌할 세상 십자가를 져야겠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건지 분별하며 살아야지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선택과 집중을 이야기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분을 만류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호되게 그를 꾸짖으시지요. 수석 제자가 한 순간에 "사탄"으로, "걸림돌"로 전락합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같은 편에 있다면 참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러긴 어려운가 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자아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안위와 만족을 지향하기에 보편적 사랑을 추구하는 십자가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자아로 똘똘 뭉쳐 있을 때에 십자가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형벌이고 성가신 짐 덩어리일 뿐이지요.


모든 인간은 자신과 십자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 앞에 섭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인생길에서 만나는 고통과 나약함, 불합리성 등을 피할 수 없지요. 다만 십자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주님의 길에 들어선 우리 신앙인 역시 자신과 십자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매일 매순간 마주하며 삽니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그걸 버린다는 의미지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루뭉술 다 움켜쥔 채 대충 가는 중이라면 아직 예수님의 부르심을 인격적으로 직면하지 못한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볼멘 항변이 들립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

예언자는 주님을 말씀을 전하면서 날마다 "놀림감, 조롱거리, 치욕, 비웃음거리"가 되는 처참하고 고달픈 신세를 토로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제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그를 무시하고 박해하기 일쑤이니 그는 늘 외롭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게 다 자기를 불러 힘든 짐을 떠맡기신 주님 때문입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예레 20,9)

그래서 예언자는 주님과 거리를 두고 그분 말씀도 전하지 않겠다고 힘껏 버텨 보지만, 주님 말씀의 열기를 속에만 담아두고는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까지 그 속에서 출구를 찾아 활활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모두에게 버림 받고 등돌림을 당하고 죽음까지 당한다 해도 내 것 아닌 것처럼 외면하거나 자신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소명과 관련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세속의 원리나 인간적 욕망을 거스르지요. 베드로가 펄쩍 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피땀 흘리며 아버지께 기도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와 자아 앞에서 고뇌하는 우리를 위해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우리의 선택이 무엇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로마 12,2)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여전히 "사람의 일"이 우선하는 자아의 노예입니다. 반대로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지요. 인간적으로는 택하고 싶지 않고, 여건이 된다면 피하고 싶은 것도 하느님 때문에 감내하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아니라 동반자입니다.


괜히 십자가라는 말이 붙은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었고, 수치와 버림받음, 저주와 모욕의 상징입니다. 오죽하면 베드로가 그렇게 만류했겠습니까!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작아지고 움츠러드는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건, 억지로건 지고 가는 자신을 칭찬하고 위로해 주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주님께 항변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도 십자가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버겁고 힘든 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저야 할 십자가가 너무 버겁고 힘드시나요?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저마다 힘껏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소박하고도 치열한 일상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희망"(복음 환호송)이 아직 건재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알고 주님도 알아 주시는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며 오늘도 꿋꿋이 나아갑시다. 주님은, 세상은 우리의 희생과 사랑과 기도가 여전히, 너무도 간절히 필요하답니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바로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기 버림과 일상에서 다가오는 갈등과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주요 골자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든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보겠다는 생각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항상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마음자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완전한 자아포기입니다. 

이 일이 선결되어야만 그리스도의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단계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훌륭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자신을 내여준 빈 자리에 자리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안에는 예수님이 계실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제자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벗어버린 신앙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배제된 십자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담겨진 고통의 신비를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거쳐서 들려오는 소리라야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고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의 메아리를 들으려는 불타는 갈망을 가졌습니다. 성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쁘고 황홀한 때는 순간에 불과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말년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맛보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다음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임상만 신부님

아시시의 프란시스코 성인에게 두 청년이 찾아와 입회를 청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했다. 

“지금 내가 배추 모종을 심고 있는데 자네들도 같이 심어보게. 그런데 뿌리를 심지 말고 배추 잎을 땅에 심어야 하네.” 

이 말을 들은 한 청년은 시키는 대로 배추를 모두 거꾸로 심었다. 그러나 다른 한 청년은“이 분은기도만 하고 농사는 안 지어 보았나 보네. 이렇게 배추를 거꾸로 심으면 다 썩어버리지…”하며 지혜롭게 배추를 바로 심었다. 이 모습을 본 성인은 거꾸로 심은 청년은 수도회에 받아들이고 바로 심은 청년은 돌려보냈다. 

성인이 보고자 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젊은이인가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어 순종할 수 있는가를 보려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자기를 비운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대부분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이 먼저이다. 자기가 주장하는 것들이 당연히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자기 방식이 아니면 어떤 것도 절대로 수용하지 못하여 불화를 일으키거나 심지어 공동체를 깨뜨리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이르시는 것이다.


얼마 전 은경축일을 맞은 후배 신부와 사목 활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사제가 50세를 넘으면 아무리 확신이 있는 일이라도 우기지 않는 게 가장 큰 덕목”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모든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 있겠지만 자기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그 무엇이라도 고집하기보다는 이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일과 교회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가 ‘사람의 일’에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대부분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한다. 평생 그런 일을 학습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노후 설계도 잘해야 성공한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얻고 누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인데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으러 갈 것이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계획은 상식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길’을 택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일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면 원하는 것들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꺼이 하느님께 의탁하는 순간 가진 모든것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것을 깨닫게 된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늘 부족했는데 그것들이 사라져도 감사하고 살아가는 참 행복을 알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확신하며 고집했던 ‘사람의 일’ 방식을 내려놓으면 하느님께서성령으로 더 채워주시고 덤으로 영원한생명의 길을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14)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함승수 신부님

성모상 앞에 설치해 둔 봉헌함 속의 돈이 없어지는 일이 자꾸 생기자, 본당 신부님이 도둑을 잡기 위해 아기 예수님상 뒤에 숨어서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질녘이 되자 한 거지가 성당 마당에 들어와서는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모님, 오늘도 한 푼도 벌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아무 말씀 없으시면 허락하시는 걸로 알고 돈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계신 성모님께 꾸벅 감사인사를 드리고는 봉헌함 속에 손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본당 신부님이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안 돼!”

깜짝 놀란 거지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기 예수님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를 윽박지르듯 기고만장한 얼굴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너희 엄마가 가져가라고 하시잖아. 임마!”

이 거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는 대상의 뜻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지요. 그런데 이런 ‘도둑 심보’는 우리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이 기도 안들어주시면 성당 안나올거예요’라며 하느님을 협박하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하느님의 뜻을 바꾸려 드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결국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탄’과 다를 바가 없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야할 길을 ‘절대 안된다’고 가로막는 베드로를 ‘사탄’에 비유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당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수난 당하시고 죽겠다고 하시는데, 베드로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200주년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에 가깝게 이렇게 번역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끌어당기며 꾸짖었다.” 이처럼 베드로가 조금은 과격해보이기까지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으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꺾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요.

첫째, ‘메시아는 이래야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메시아’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자였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시어 핍박받는 자신들을 승리와 영광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도 마음 속으로 예수님이 그런 메시아이시길 바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고통을 받고 죽는다고 하시니 그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평생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버려가며 예수님을 따른 의미가 사라진다고,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누리고자 했던 모든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난다고 생각하니 ‘죽기살기로’ 예수님을 말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둘째,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내가 아끼는 그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피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팔이 안으로 굽는’ 우리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로막는 베드로의 행동이 거칠었던 것은 그만큼 그분을 아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겠지요.

베드로의 의도가 둘 중 무엇이었든간에,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가라.” 내 뜻을 앞세우며 고집 부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뒤에서 따르는 것이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며 따랐을 때는 지상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인 교회를 떠받치는 ‘반석’이라는 칭찬까지 들었던 베드로가, 한순간에 예수님의 사명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이라는 비판까지 듣게 된 것은 자기 생각과 주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전광훈’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개신교 극우세력이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말로는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 운운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의 왜곡된 신념과 고집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너 까불지마! 하나님 너 나한테 죽어!”라고 정신나간 소리를 지껄이고 거기에 동조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그런 마음가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의 일’보다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기는 자라서 철이 들면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게 됩니다. 그 일에는 자기의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격증도 취득합니다. 수입을 쪼개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자기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보장하려는 노력이고,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잘하면 칭찬받을 일로 여겨집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다보면 신앙도 미래를 위한 ‘대책’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미래를 보장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편안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도록 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물질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넓은 시야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기꺼이,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나 스스로가 불편하고 견딜 수 없어서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더 깊이 일치되는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세상 중에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기위해 그에 따르는 대가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투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과 투신이 가능한 이유는 하느님만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굳은 희망과 믿음을 지닌 신앙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것을 마지 못해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싫어서 마지못해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삶 자체가 너무 좋아서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은 우리에게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로마12,2)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별해낸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 종말의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의 뜻을 실행에 옮긴 만큼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삽시다 -사랑하라, 새로워져라, 겸손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으로 살 수 있나? 요즈음 누구나 묻게 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 구구절절 처방도 많습니다만 딱 부러진 처방은 없습니다. 참으로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탐욕-기후위기-팬데믹19-홍수’라는 일련의 관계를 봅니다. 버려지는 무수한 쓰레기들을 볼 때 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싶습니다. 뿌리에는 무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제 읽은 ‘사제생활 십요司祭生活 十要’(산위의 마을; 박기호 신부)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사제만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할 내용도 있습니다. 아주 잊고 지내기 쉬운 일상적이자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1.오늘 미사를 나의 첫 미사처럼, 마지막 미사처럼, 오직 한 번뿐인 미사처럼 봉헌하자.

2.미사 30분전 반드시 제대 앞에 앉아 기도하자.

3.모든 사목에서 주님과 동업하고 동료들과 협력하자.

4.복음과 인문학 서적을 늘 가까이 하며 시대의 징표를 주시하자.

5.매일 한 시간 이상 육신 노동으로 건강과 창조성을 일깨우자.

6.매사에 옳음을 따르되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 말자.

7.화났을 때 결정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자.

8.경어와 친절과 예의를 습관되게 하고, 선물은 감사히 받되 즉시 나누자.

9.‘부러워할 것’과 ‘부끄러워할 것’을 가려 알자.

10.게걸스럽게 먹지 말며, 명품과 유락을 밝히지 말자.-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늘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음도 죽음도 아닌 녹슨 삶입니다.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이 아니라 웅덩이에 썩은 물같은 고인 삶입니다. 삶이 녹슬면,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막 살아도 안되지만 흐릿하게 살아도 안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참으로 맑고 향기롭게, 늘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제 주보에서 읽은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이 생전에 주고 받았다는 모자의 대화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0일전 1월1일 새해 인사차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그때 평소 안 하던 말씀을 하셨다.

“널 내가 낳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는 질문을 무심코 해봤다.

“어머니는 이 세상 다시 태어나고 싶으세요?”

“너를 아들로 만난다면 또 태어나고 싶지.”-

유언과도 같은 이말보다 자식에게 큰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 아들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있을 참 잘 사셨던 어머니임이 분명합니다. ME모임에서 다시 태어나도 부부가 되고 싶은 분은 손들어 보라 했을 때 가만히 눈을 뜨고 보니 자기 부부뿐이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 역시 다시 살아도 수도사제로 이렇게 뿐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즘 산책때 자주 즐겨 부르는 ‘늙은 군인의 노래’(김민기)가 있습니다. ‘이강산’ 대신에 ‘수도원’을, ‘군인’대신 ‘수도자’를, '어언 30년' 대신 '어언 40년'을, ‘푸른옷’ 대신 수도복 ‘검은옷’을 넣어 불러 보며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로서의 신원과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곤 합니다.

-“나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 되어/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0년

무엇을 하였느냐/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청춘”-

정말 하루하루 살아온 전혀 회한도 아쉬움도 없는 수도생활입니다. 그래도 저절로 후반부 “꽃다운 이 내 청춘”을 되뇌며 때로 거울을 보곤 합니다. 퇴영적이 아니라 오히려 저에겐 영적 전의를 새롭게 하는 노래입니다. 저절로 자문해 보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진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화답송 후렴처럼 늘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영입니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깨어 늘 말씀에 귀기울였던 말씀의 사람이자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말씀의 선포자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다섯 번째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예언직의 비극에 대한 원초적 고백입니다. 평생 매일 강론을 써야 살아갈 수 있는 저에게도 공감이 가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말씀을 사랑했던 예레미야인지 깨닫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입니다. 무지의 쓰레기를 태워버리는,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불, 사랑의 불입니다. 사랑의 불이, 말씀의 불이 불붙어 정화되고 성화된 영혼은 말씀을,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새로워져라!”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깊어져야 합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코 무감각, 무기력, 무의욕, 무의미, 무감정, 무의식이 되어선 안됩니다. 하여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에 앞서 나온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새로운 삶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의 권고를 통째로 인용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참으로 말씀을 사랑할 때,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에 충실할 때, 저절로 정화와 성화의 은총이요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늘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영혼으로, 늘 녹슬지 않고 반짝이는 영혼으로 늘 깨어 사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하라!”입니다.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삶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삶의 깊이를 반영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든 부정적 일들은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냥 두면 상처지만 겸손의 계기로 활용하며 치유와 더불어 영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섰다 하면 넘어집니다. 예수님의 인정과 축복에 잠시 방심했던 베드로 큰 유혹에 빠져 반석같은 존재가 걸림돌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순간 예수님의 충격적인 처방입니다. 말그대로 겸손의 수련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타고난 믿음도, 겸손도 없습니다. 겸손할 때 배웁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자기의 한계와 약함을 깊이 체험하면서 겸손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배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입니다. 겸손을 배워가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겸손의 여정에 결정적 처방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구체화됩니다. 답은 다음 말씀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로 십자가의 길은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참 내가 실현되는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이 갈수록 새로워짐),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생명의 바탕은 사랑의 힘이다.< 마태, 16/21-2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산다는 것은 무엇일 까?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노리하고 일하는 것 이라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숨이 끊지고 다시 숨을 쉬지 못하면 숨도 못 쉬고 먹지도 마시지도 노리도 일도 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하지 않으면 약도 없고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기와 같은 것이라 합니다. 저는 요사이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내 목숨을 하늘에 달려있는 데 걱정 한다고 해결되나? 그러나 코로나 수칙을 잘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세멘장만 들어가면 손을 씻고 전에는 비누가 일생 사용해도 하나면 되는데 요사이는 비누가 닭아 살아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마 나는 하느님의 믿음이 약해진 모양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날 젊은 형제가 저더러 조심 하세요 우리는 걸려도 저항력이 있어 소생하지만 신부님은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숨이 무엇인데 생명이 무엇인데 하여 생각하다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오늘 복음에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는다.“ 하는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은  알게 되었습니다. 
목숨이란? “ 살아있기 위한 힘의 바탕.” 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으려면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공기 태양의 힘 물 영양 그 외도 하늘과 땅 사이에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살려는 사람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일은 시간 공간 안에 잠시 있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일은 시간을 넘어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은 박해시절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됩니다.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수도자의 삶은 세상에 죽고 하느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 바탕이 하느님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함 같이 수도원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죽지만 하느님 안에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의 바탕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안에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사랑이 없으면 살아내지 못합니다. 수도원을 나가는 형제들에게 왜 나가느냐? 물으면 사랑이 없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수도원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하지 않아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악 조건이 많이 있지만 청원 기 수련기를 통하여 배운 바를  유기서원 기를 지내며 실습을 통하여 증명되어 종신사원을 하였으면 배우고 실습으로 몸에 수도생활이 몸에 배이고 어떤 수난에도 이겨 내여야 합니다. 어떤 때 죽기보다 힘이 들어도 세속적 목숨을 구하지 않으면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가정 안에도 사랑이 바탕이 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사랑이 없으면 생기도 없고 시들하고 재미도 없고 생명의 힘인 바탕을 잃어버리면 죽음이 옵니다. 우리를 행복한 삶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 내기위한 힘인 사랑을 기워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No Pain, No Glory

한재호 루카 신부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스페인을 횡단하는 약 780킬로미터의 길을 하루 여덟 시간 정도 걸었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보니,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훅 지나 버렸습니다. 그곳에는 순례객들을 위한 다양한 기념품이 거리마다 즐비했는데 그중에 티셔츠 한 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부르튼 순례자의 발이 그려져 있었고, 상처 나고 퉁퉁 부은 두 맨발 아래 다음의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No Pain, No Glory”(고통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이 말이 얼마나 와닿았는지요. 한 달 동안 땡볕 아래 더위를 이겨내고, 모기와 싸우고, 퉁퉁 부은 발 달래가며, 시린 무릎과 허리, 어깨를 다독이며 걷지 않았다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의 미사가 그렇게 아름답게 다가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원리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것, 날마다 자신을 죽일 때 진정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것, 참된 평화는 고통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슬픔에 빠져보지 못한 자는 기쁨을 모르고, 눈물을 흘려본 사람만이 웃음의 의미를 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살아가며 어떤 사람을 따를 것인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수난예고 직후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도 반박하며 한 말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람은 주어진 고난과 고통, 죽음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피한다면 그 순간 생은 끝난다. 의기투합하여 직면하면 생명이 되면 좋으련만 당장만을 생각해 이를 외면한다. 이런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된다. 그에게서 어떠한 희망을 볼 수 없을 뿐더러 그렇게 안이하게 살려는 사람과 누가 관계를 맺겠는가? 스스로를 작은 그릇이 되게 하는 일은 모두 사탄이 하는 짓이다.

하늘 나라를 사는 사람이 있다. 큰그릇이다. 진리와 의를 위해 고난과 고통을 넘어 죽음 후에도 큰그릇이기에 추종자들이 그 주변으로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추모하려 모여든다. 이런 큰그릇의 사람은 죽지않고 산이들의 마음 안에 살아 숨쉬고 영원성을 누리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한다. 따름의 지향점은 현세에도 있지만 영원성에 두고 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뜻을 살았던 본보기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커져가야 한다. 쪼모래기 그릇과 큰 그릇을 구분 짓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 스케일 면에서 자기 안에 있느냐? 자기 밖을 향하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끝내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행실이 되고

행실이 십자가가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찾게되는

십자가가

생명이다.


십자가의

언어가

영혼의

언어이다.


십자가를 질 때

모순의 굴레어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다.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자신을 버려야

십자가를

자연스레

질 수 있다.


목숨을 버려야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살아있기에

십자가가 있다.


흐르는 것이

십자가이다.


행실대로

갚아주는 것이

십자가이다.


끝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십자가이다.


사람을 키우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줄

나의 십자가에

감사드린다.


갚아야 할

십자가의

빚입니다.



제가 있는 성지에 봄이 되면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들레입니다. 민들레가 꽃을 피운 후에 홀씨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데, 이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면 잔디밭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민들레는 생명력이 뛰어나서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그 자리에 계속 자라기에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그분께서는 웃으면서 이런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모든 홀씨들이 다 뿌리를 내리면 아마 민들레가 세상을 다 덮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주 일부만 뿌리를 내리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의 민들레에 붙어있는 홀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홀씨들이 뿌리를 내리지 않으니 뽑으면서 민들레를 제거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는 평생 500여개의 난자를 만들지만, 남자의 정자 수는 수억 개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남자의 정자가 다 아이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지구는 사람들로 꽉 차서 발 디딜 곳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행인 상황을 바라보기 보다는 부정적인 상황만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합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수난과 죽음이라는 부정적인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의 직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런 베드로였지만 곧바로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바로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할 때에는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데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가 분명해집니다. 즉,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워서 주님의 뜻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황이라면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뒤를 진정으로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오쇼 라즈니쉬).


친구가 나더러 이렇게 살아보라 하네.(‘좋은 글’ 중에서)

말이 많으면

말을 많이 하면 반드시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온다. 귀는 닫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입은 언제나 닫을 수 있게 되어 있다.

허허허

잘 웃는 것을 연습하라. 세상에는 정답을 말하거나 답변하기에 난처한 일이 많다. 그때에는 허허허!~웃어 보라. 뜻밖에 문제가 풀리는 것을 보게 된다.

화를 내면

화내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 급하게 열을 내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대개 싸움에서 지며 좌절감에 빠지기 쉽다.

미소의 힘

미소 짓는 얼굴은 결코 밉지 않다. 아무리 곱고 멋지게 생겨도 찡그리면 흉하다. 미소를 연습하고 그 힘이 얼마나 큰 지를 경험하라.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는 말을 잘 사용하라. 모든 갈등과 다툼이 어느새 가라앉게 한다.

노래

힘들 때 짜증내면 더 힘들게 느껴지지만 노래를 들으면 새 힘이 솟는다.

훌륭한 대화

남의 말을 듣는 것을 잘하라. 사람들은 입으로 자기를 다 들어내기 쉽기 때문에 잘 듣기만 해도 훌륭한 대화가 된다.

욕은 어떤 것이든지 하지 말라. 장난삼아 하는 욕설이 습관이 되면 많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게 된다.

목소리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 빈 그릇은 부딪히는 소리가 심하고 열등의식이 강한 사람은 목소리라도 높여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나이

늙어서는 젊은 사람과 대화에서 이겨서는 안 된다. 설령 이겼다 해도 젊은 사람들은 절대 수긍하지 않는다.




오늘 순교할 각오로 살아가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수도자,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의(1858~1916) 전기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요즘 다들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 샤를르 드 푸코의 생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거기다 신앙마저 잃어버린 그는 젊은 시절, 그 어떤 사람보다도 깊숙히 세속적인 삶에 빠져들어 하느님과의 사이에 높은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샤를르 드 푸코의 생애 안에서 주목해야만 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세속에 빠질데로 푹 빠진 그, 계속된 타락과 방황의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절실히 느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를, 그분 없이 사는 삶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삶, 엄청나게 큰 구멍 하나가 뚤린 허술한 삶이란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 오랜 타락과 방황의 세월 중에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우리의 이 부끄럽고 남루한 일상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늘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샤를르 드 푸코가 28세되던 해인 1886년 10월의 어느날 그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단 하루만에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됩니다. 단 하루 사이에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10년 이상 신앙생활을 멀리했던 그는 매일 고해사제 위블랭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매주일 고백성사를 보았으며 매일 성체를 영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하느님을 찾은 샤를르 드 푸꼬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보여주신 가난하고 미천한 노동자로서의 숨은 생활을 본받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43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예수님의 나자렛 삶을 본받기 위해 사하라 사막 깊은 곳에서 가난하게 숨어 살며 민족과 종교의 담을 뛰어넘어 모든 이의 형제로 살다가 58세 되던 해 타만라셋트 원주민들에게 피살됐습니다.

샤를르 두 푸코가 남긴 '영적 일기'는 세월을 건너와 계속해서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이 시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하느님 사람’이란 칭송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샤를르 드 푸코는 예수님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과 단순하게 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멋진 수도복도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작고 단순한 공동체를 원했습니다. 세속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말고, 활동을 하되 관상적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단순하게 자신을 내맡기라는 가르침을 삶을 통해 전해줬습니다.

샤를르 드 푸코가 늘 지니고 다니던 작은 수첩의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좌우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1. 오늘 순교할 각오로 살아가겠습니다.

2. 이 지상에서의 삶이 궁핍하면 궁핍할수록 세상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십자가를 선물로 주십니다.

3. 우리가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안을수록 그 위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더 잘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또 다시 순교자 성월이 돌아왔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처럼 외쳐야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 순교할 각오로 살아가겠습니다.”

사제품 후에 샤를르 드 푸코 신부가 한 다짐을 보며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성직자가 된 나의 천상식탁은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들이 아니라 사제를 더 필요로 하는 지체장애우들, 시각장애우들, 더 궁핍한 영혼들에게 차려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 위에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였고,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도들의 무능함을 통해서였습니다.”




영광으로 가는 길인 십자가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이제 밤에는 날씨가 쌀쌀해서 따뜻한 이불을 찾게 됩니다.

한 낮의 햇살은 아직 따갑지만 가을이 이미 우리 생활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가을이 우리 삶에 자리잡았듯이 하느님의 말씀도 그렇게 우리 마음에 자리잡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자매님,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례 중의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 그 길은 어디로 연결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 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통스러운 고백의 한 구절입니다.  

예레미야는 태중에서부터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고, 소명을 받을 때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예레 1,10)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큰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매일 그들에게 놀림감이 되어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주님의 꾐에 넘어가 고생을 한다고 불평하며, 예언자의 소명을 저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하느님께서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시기에 그는 죽기까지 용감하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끝까지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뼛속까지 새겼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베드로는 죄가 없는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가치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 베드로의 행동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깨우쳐 주시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제 곧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삶이 열리리라는 큰 기대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꿈을 완전히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하고 있던 영광의 삶을 버려야 하는 괴로운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멸망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아셨기에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영광을 원합니다.  

그런데 세속의 가치관에 젖어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영광을 원한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그분을 따라야합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살고 있는지 반성을 해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도 생활 중에 내 십자가라고 느껴지는 어려움이나 고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이 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는 아닙니다.  

내 욕심 때문에 겪는 고통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런 고통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혹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형제를 사랑하는 데에 따르는 고통이나 어려움이 나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내가 마지못해서 지고 산다면 그것은 나에게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쁘게 끌어안고 생활할 때 그것은 우리를 영광에로 안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고통을 겪은 후에 영광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힘든 과정 중에서도 영광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의 과정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성령께서 힘을 북돋아주시는 은총일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활하면서 대인 관계에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져야할 십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용서를 청하면 쉽게 용서를 해주겠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용서해 주고 상대방을 끌어안을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행복을 원하는 우리를 향해,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새사람이 되라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즉 더 이상 인간적인 가치관에 따라 살지 말고 매사에 하느님의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내 뜻대로 행동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길 바랍니다.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박한 것도 바로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나는 정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살 것이다.’라고 결심을 했지만, 생활하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하느님께 매달리기 보다는 이웃에서 권하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 사도도 얼마 후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혹독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형제 자매님,

베드로 사도에게도 자신이 고백한 신앙을 생활에서 뿌리 내리기 위한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듯이 우리에게도 그 시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생활 안에서 작은 일들 안에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꾸준히 기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네”라고 응답을 드린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우리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제물로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가치로 볼 때 어리석고, 고통을 가져오더라도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로 마련해 주신 참된 행복,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굳게 믿읍시다.


우리가 선택하는 십자가의 길은 고통을 위한 길이 아니라 영광을 위한 길입니다! 




내가 주님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사탄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학교 1학년 때 강론 대회가 있었습니다. 1학년 대표로 제가 나가기로 했습니다. 일단 강론을 써서 교수 신부님들께 제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강론을 외웠습니다. 매우 긴장이 되어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하며 누워서도 되뇌고 또 되뇌었습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밤이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을 안고 강론하면 내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영광을 잃게 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어떤 일이든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하는 일들은 모두 주님의 뜻에 방해가 되는 행위입니다. 나의 영광과 주님의 영광이 양립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를 버릴 때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위해 어떤 말도 미리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그래서 다음 날 여전히 떨리기는 했지만 강론 원고를 가지고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대로 했습니다. 심사위원으로 앉아계신 신부님들은 강론 원고를 이리저리 뒤적거리셨습니다. 도대체 강론이 원고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고는 초안이지만 저는 성령님의 감도를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낮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 했지만 의외로 좋은 점수들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보다 제가 제 자신을 이긴 것에 기뻤습니다. 제 영광을 위한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에 제 자신을 빌려드린 것에 기뻤습니다.

 

박보영 목사님도 말씀을 참 못하시는 분이신데 유기성 목사님이 목사님 모인 곳에서 강의를 몇 시간 해 달라고 초청을 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간신이 살아가는 그 목사님은 많이 배우신 목사님들 앞에서 어떻게 강의를 할지 몰라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좋은 말들을 다 추려서 강의록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는 매우 흡족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올라가니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모습에서 주님께 배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찢어버리고는 나오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했고 매우 큰 감동을 목사님들에게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개입이 아주 적어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직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고통 받고 죽으셔야만 한다는 예수님을 위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얼마나 위안이 될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째서 사탄인지 이렇게 설명해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탄이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불어넣어주는 줄 알았지만 그냥 사람의 생각이 사탄의 생각과 같습니다. 나의 생각은 항상 하느님의 생각과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빛이 없습니다. 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오는 것이 다 악한 생각일 뿐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누구를 충고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처지를 알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내 자신이 사탄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어둠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내 생각이 조금이라도 옳다거나 빛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할 수도 있다고 믿는 이들은 빛이요 진리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의미 없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분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인데 인간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사탄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빛으로 오신다면 우리는 어둠이어야 하고 그분이 진리로 오신다면 우리는 오류에 빠져있어야 하고 그분이 길이라면 우리는 항상 길을 잃은 상태여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그분께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 일을 완수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개입을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투명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기를 원하십니다.

 

장자(莊子) 가운데 ‘재경의 북 만드는 기술’이 있습니다. 재경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 북을 만들었는데 그 솜씨가 귀신같았습니다. 그 때 노(魯)나라 임금이 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슨 기술이 있어 그렇게 북을 잘 깎는가?”

“저는 한낱 목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슨 비술(秘術)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이런 것은 있습니다. 제가 북틀을 만들고자 할 때에는 절대로 심기(心氣)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몸과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합니다(재계:齋戒). 3일을 재계하면 상을 받는다거나 벼슬을 얻는다는 따위의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5일을 재계하게 되면 세상의 비난이나 칭찬, 잘하고 못함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7일을 재계하면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제 자신이 사지(四肢)와 육체를 지녔다는 것조차 잊고 맙니다. 이때가 되면 이미 조정(朝廷)의 권세 따위는 마음에 없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기술에 전념하게 되고 밖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산속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무 본래의 자연스런 성질이나 모습이 가장 좋은 것을 찾아봅니다. 그런 다음 마음속에 이제 만들 북틀의 모양을 그려보고 비로소 손을 댑니다. 이렇게 하면 나무의 자연스런 본성(本性)과 저의 자연스런 본성이 하나가 됩니다. 기술이 귀신같다고 하는 것도 여기에 의한 것입니다.”

 

신의 경지의 본성이 내 안에서 발휘되기 위해서는 나를 잊어야만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다가는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이나 서양에서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이렇게도 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만나려면 이래야 한다고 외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회개의 열매란 나는 주님께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통해 당신 일을 하십니다. 내가 개입되면 주님의 일을 망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빼앗아서 자신이 더 잘할 것처럼 하지만 일을 망쳐버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내가 하려고 하면 주님의 일은 그만큼 망치게 됩니다.

 

결국 베드로도 자신을 비웁니다. 물고리를 밤새도록 잡았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할 때 반항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들을 상징하는 숫자의 153마리 물고기를 잡아 올립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힘이 완전히 빠져 자신이 존재하는 것까지 잊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인간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분에게 충고를 드렸으니 사탄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주님께 무언가 해 드린다고 생각하거나 그분의 뜻에 나의 생각을 첨가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탄에 가까운 것입니다. 내가 커지면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는 사탄이 됩니다. 그분 뜻이 온전히 내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나는 그저 내어드리고 비워드리고 사라지면 됩니다. 이것이 내가 사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자신을 채워 새 그리스도가 되는 길입니다.




고통 중에 드리는 사랑의 제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그분께서는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였고 지금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드러내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반박합니다. 그는 의인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모욕을 견뎌내고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에 반발한 것이지요. 그러자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16,23)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에 걸림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고백을 하여 축복을 받았던(16,17) 베드로는 예수님의 매정한 거절 앞에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말로 고백할 줄을 알았지만 아직은 하느님의 관점을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반박과 거절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적 사고가 문제였습니다. 그런 사고에서 그는 현실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 추종의 길은 그분처럼 섬기고 희생하고 목숨마저 기꺼이 넘겨주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그런데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신앙을 유혹하고 뒤흔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하며, 고통 받는 이들과 늘 함께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6,24-25)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주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참으며 짐을 지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짐을 지고 참음”으로써 희망이 솟아나며, 고통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을 지닐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고통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상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로마 12,1) 바치는 참다운 예배가 되도록 해야겠지요. 


우리 모두 고통과 시련 중에도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신을 중심에 둘 때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 중에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의 삶이 실패한 듯 보일지라도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네 삶이 자신의 소유와 동일시될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거든 “자기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야”겠지요. 죄에 묶인 나, 탐욕과 이기주의로 물든 나로 어두워진 껍데기 나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착각과 교만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야만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 자신의 목숨, 곧 육체적 생명만을 돌보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며 의미 없는 삶이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영적 생명에 이르기 위해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고, 내 안에 잠든 나를 깨워 그분의 사랑의 길을 따르며 ‘사랑의 제물’을 봉헌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김수원 바오로 신부님

신앙생활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을 일치시켜 나가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할 때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평화로우며 축복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는 아무리 재미난 삶도 그 결과가 불만스러워서 또 다른 욕망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 봤자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의 처지와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는 자기 백성들에 대한 분노와 고통을 담아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7-8)하고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하며,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예레미야처럼 실망스럽고 한탄스러운 어둠에 찬 시간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내던지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살기 위해서는, 하루의 삶 속에서 잠깐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머물러 내 모습을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내 삶이 하느님을 향해 방향 지워졌는지, 아니면 내 욕망만을 따라 살아가는지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하는 자리에 신앙이 자라나고 은총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새신부 시절 휴가를 청해서 꾸르실료 체험에 들어갔습니다.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체험에 들어간 첫날 벽에 붙어있는 한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가끔 우리 신자들의 신앙생활이나 기도생활을 살펴보면, 주 하느님께 주로 우리의 필요를 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것은 아니건만, 부모님께 이것 저것 달라고만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믿고 의지하며, 우리를 주님의 도구와 협조자로 쓰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는 명제는 신선했고, 참으로 한 층 더 커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가끔 우리가 주 하느님이나 교회에 우리 자신의 안위를 위한 주장을 하거나 요구를 하면서부터 내 안에 불평과 불안이 스물거리기 시작하고,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와 안녕보다는 불안과 불행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수고했습니다.”나 “감사합니다.” 라는 단어를 듣는데 아주 익숙해졌고, 그런 말을 듣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내 노고를 인정받지 못했다거나 무시당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4) 라는 말씀이 우리의 의식을 일깨워줍니다. 성품성사 예식의 한 성가 후렴이 생각납니다. “참새도 집이 있고, 제비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사와도 내게는 당신의 제단이 있나이다.”(시편 84,3 참조) 

어쩌면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보답을 받고 보상을 기대하는 것을 그리 나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 그 어느 물질이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곽이십니다.”(시편 71,3)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이요,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이십니다.”(시편 71,5) 

천주교 주일학교 교사의 기도문 끝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주여! 마지막으로 내가 받을 최대의 보상은 여기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해 주소서. 이 땅 위에서 당신을 빛낸 공로로 내가 가르친 학생들과 함께 나는 천국에서 별처럼 빛나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주님께서 대신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마태 16,21)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반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엄하게 이르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그리고는 주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로서 우리의 태도와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우리가 그러해야 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5-26절) 

그렇게 되면 마지막 날 구원의 날에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활시켜 새로운 삶으로 이끄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주님께서 갚아주실 상급은 바로 주님 자신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삶.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환희를 누리게 되는, 주님과 함께할 때 얻을 수 있는 그 충만한 상태. 그 누구도 빼앗아가거나 대신 채워줄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온전한 채워짐과 이루어짐.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천국이라고 하는 하느님 나라. 그것이 우리가 지상에서 추구하는 영원한 목표요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선물이요 보상입니다.

내가 주 예수님을 사랑하여 나를 바치고 형제들에게 희생과 봉사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보상은 주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의 진정한 기쁨과 구원입니다.

9월 순교자의 달입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 신앙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되새기며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은 무엇 때문에, 또 무엇을 바라고 순교의 순간을 맞이했을까? 

천주를 믿는 것이 곧 당대 사회 질서의 파괴자요, 가문의 패륜아요, 현세에서 재산과 관직을 모두 몰수당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분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신앙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으며 마침내는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썼을까?

그 때 그 시절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분들에게 천주교 신앙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현세에서 어처구니 없고 무모하기까지 한 신앙이 그분들과 우리에게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분들이 신앙을 시작하고 바라볼 때의 그것이 오늘의 우리와 어떻게 다를까 사뭇 비교하게 해줍니다.

그 옛날 순교자들이 읽었음직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 귀절 그대로를 오늘 다시 들어보고 우리 신앙을 이루어나갑시다. 오늘의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선택할 것인지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선택할 것인지 비교 검토하며 되새겨봅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무겁고 버겁기에 십자가라 합니다. 그 십자가를 달콤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무게만을 허락하신다고 성인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가 가장 무거운 양 힘에 벅찬 얼굴을 하고 삽니다. 십자가란 무엇인가요?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들을 떠올려봅시다.그리고 그것이 정말 십자가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힘이 들고 때로는 고통을 안겨주어도, 그로 인해 보람과 기쁨과 감사의 정을 체험하고 있습니까?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십자가 아닌 짐입니다. 그런 짐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셨습니다. 그분께는 우리의 죄가 십자가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이며, 그것은 성부와 우리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당신 사랑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고 있다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그 어떤 대의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고통 덩어리로 떨쳐내고 싶은 그런 것입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전제합니다. 마지못해 지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로 그저 고통일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인지 명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고통을 지는 것이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픔이던 사랑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과 연결되기에 그 무게가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짊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여,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것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 그것은 결국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할 아픔을 감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기 버리기, 제 십자가 지기, 예수님 따르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지금부터 25년전인 1992년 1월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때 최초로 한 강론 제목이지만 그 이후로도 자주 택했던 강론 제목입니다. 이와 비슷한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던 적도 있고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던 적도 여러번 있습니다. 모두가 절박한 심정의 근본적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0년전 출간한 제 졸서의 책명으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찾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어 출간된 책 제목이 우연의 일치처럼 답을 주고 있습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책 제목처럼, 모나지 않고 둥근 마음, 둥근 사랑으로 둥글게, 원만圓滿하게 살면 됩니다. 또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 제목처럼 사랑으로 살면됩니다. 사랑밖에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출간한다면 책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자작시로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정답입니다. 하루하루 살면 됩니다. 하루하루 살 때 환상은 걷혀 단순투명한 본질적 삶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과거의 어제도 미래의 내일도 아닌 현재의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과거의 상처에 아파할 것도 없고 미래에 대해 두려워할 것도 없고 오늘 지금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행복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의 처방전이 답을 줍니다. 저는 어렵고 힘들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추스르라고 역으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써드립니다. 내적으로 무너지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은 유혹이 들 때 마다 즉시 붙잡고 일어나야 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왕 죽지 않고 살 바에야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지혜롭게 잘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루하루 살면 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구체적으로 답을 줍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날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첫주일에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나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삼박자三拍子(버리기-지기-따르기) 구원의 삶입니다. 구원의 길은, 생명의 길은, 진리의 길은, 인간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세 측면에 걸쳐 구체적으로 삶의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자기를 버리십시오.

우리 삶은 버림의 여정, 비움의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매사의 어려움을 버림의 수련, 비움의 수련으로 삼아 살아갈 때 겸손이요 점차 주님을 닮아갑니다. 일상의 온갖 고통과 어려움도 자기를 버리는 계기로 삼을 때 주님을 체험하며 내적성장에 성숙입니다. 무엇보다 평상시 주님 말씀에 대한 사랑의 습관화가 중요합니다.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통이 참으로 처절합니다. 예언자는 분명 이 고통을 자기 버림의 계기로 삼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답을 찾은 예레미야입니다. 이 또한 진솔한 기도요 우리 성소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 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의 운명입니다. 모든 성소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치열한 내적투쟁의 모습입니다. 이런 고통을 그대로 감당하면 치명적 내상內傷으로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기 버림의 계기로 삼아 주님을 만나 다시 살아 일어납니다. 바로 이것이 성소의 진면목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만나 삶의 의미를 찾으면 삽니다. 


다음 예레미야의 고백이 감동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미야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우리 심장 속에서 샘솟는 주님 말씀이, 주님 열정의 사랑이 온갖 시련중에도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 백절불굴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지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도 남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릴수록 주님과의 사랑도 깊어집니다. 버림의 겸손의 빈자리에 가득 채워지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 깊이에서 샘솟는 사랑의 힘이 제 십자가를 자발적 기쁨으로 지게 합니다.

삶은 짐입니까 혹은 선물입니까? 

자주 신자분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짐입니까 혹은 선물입니까? 

선물입니다. 사랑의 선물입니다. 제 십자가를 억지로 찾아서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찾기 전에 이미 운명처럼 주어진 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제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제 십자가입니다. 내려 놓을 수도 없는, 누가 대신 저 줄 수도 없는, 피할 수도 없는 내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가볍게 해 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제 십자가의 열쇠가 아니면 천국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 운명의 십자가, 내 책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요, 끝까지 제 삶의 자리에서 책임적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있는 순교의 삶입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듯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없이는 영광의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없는 부활의 영광은 헛된 꿈의 환상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제대로의 방향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표이신 주님을 향한 방향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이자 생명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자 진리입니다. 주님 없이는 구원도 생명도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뿐입니다.


버리고 떠나기가 능사가 아닙니다. 버리고 떠나 예수님을 따라야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세상 우상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진정 생명의 길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탈선했을 때 주님의 즉각적인 질책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졸지에 사탄이 됐습니다. 바위같은 디딤돌의 베드로가 걸림돌이 되었으니 이 또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예수님을 뒤따르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라야 할 베드로가 예수님의 앞을 가리는 순간 졸지에 사탄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내 뒤로 물러가 제자리에 있으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혼자 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함께 가는 십자가 여정의 도반들이 서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바로 이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행위이자 합당한 예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십자가의 길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간곡한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각자 주어진 십자가의 길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아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오16,23)

김종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면서 고통과 죽음을 거부합니다.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고통을 받는 인간임을 거부하도록 하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고통이 항상 있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때로는 고통스러울 때가 있을 뿐이라고 믿게 하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겪는 고통을 영원한 것처럼 여기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믿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고통의 때를 회피하면 우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고통의 때를 잘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압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둔감한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고통을 피하고만 싶은 것은 그만큼 홀로 감당해야만 했던 고통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홀로 겪었던 고통이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있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가 혼자라고 외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일깨워 주십니다. 혼자라고 믿었기에 더 아팠던 고통을 기억하고 머물러 보십시오.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울고 계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나뭇잎은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불면 여지없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현명한 나뭇잎은 바람과 다투거나 싸우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을 맡길 것입니다. 흔들리는 나뭇잎은 바람을 느낄 것이고, 살아 있음을 또한 느낄 것입니다. 나뭇잎이 바람과 맞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면 무척이나 힘들 것입니다. 예전에 영화 대사가 생각납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다.’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데리고 시장엘 갔습니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를 말에 태우고 걸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네요. 이번에는 아들이 타고 아버지가 걸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저 아들은 효성이 없네요. 이번에는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당나귀를 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저 사람들은 당나귀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봅니다. 할 수 없이 아들과 아버지는 힘들지만 당나귀를 메고 갔습니다. 시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미쳤다고 비웃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동화책에만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도 참 많은 바람이 불어옵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친구의 말이 며칠 동안 내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업무 때문에 벌어진 논쟁인데, 나의 인격을 무시한 것 같아서 화가 납니다. 교구에 있으면 당연히 알아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교구에 있으면서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살아서 숨을 쉬는 동안, 우리는 바람을 만날 것입니다. 그 바람에 맞서거나, 그 바람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다듬고, 나의 내면을 키워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일관되게 이야기합니다. 바로 나의 내면을 키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마음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을 하여도 뼛속까지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바람이 불어도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니 견딜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의 바람이 되었습니다. 고통과 수난을 피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마십시오.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제 집자가를 지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일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아는 기원전 6백년 전후, 유다왕조가 이집트와 연합하여 바빌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오히려 “유다는 망해야 한다. 바빌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유다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사제, 거짓 예언자들과 관리들이 일어나 예레미아를 잡아 가두고 폭행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고통당하고, 폭행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원망조로 이렇게 읊조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20,8)

 

그러나 모두에게 저버림을 받아도,자신이 반역자로 취급될지라도, 결국 외쳐야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존재의 근거요 힘이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수락하는 삶,그 안에 구원이 있음을 본 까닭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본 까닭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믿음이 구체적으로는 봉헌이란 형태로 드러나게 됩니다. 곧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곧 일상의 크고 작은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거룩한 산 제물”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이는 우리도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제물을 통해서,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을 믿는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의 메시아적 행위, 곧 구원의 행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곧 당신 자신을“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말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21절)는 예고 말씀으로, 승리자와 통치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메시아가 수난을 받아 패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22-23절)는 베드로와의 대화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예고요,

<셋째>(24-28절)는 고난 동참 요구와 상급 약속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의 동참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 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양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하고 우리를 질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사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마주치게 되면, 곧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우선 그것을 피하려 합니다.그러다가 피해지지 않으면, 그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없애버리려 합니다. 풀어 해결해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피해지지도 제거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습니다. 어쩔 수없이 견뎌내야만 하고,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돌파구가 없다 싶으면, 결국 그것을 뛰어넘어버리려 합니다. 초월해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가 닿은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십자가인 현실입니다. 곧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적당히 거리 두는 법을 익히고, 적당히 무관심과 타협하고, 적당히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을 만큼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자신을 변호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자기기만과 자기 위선, 그리고 자기모순과 자기 부조리, 이 부조화와 혼란은 결코 벗어나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거하거나 없애려하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 견뎌 내거나,뛰어넘어버리거나 초월해버리거나,혹은 무관심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지 기꺼이 흔연히 자발적으로 오히려 순명으로 사랑으로 그것을 지고 가셨습니다. 바로 십자가 그것에 구원이 있음을 믿으신 까닭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할 때, ‘지고’ 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끓어 앉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처럼, 십자가는 마지못해 무겁게 억지로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는 것이요, 사랑으로 끓어 앉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억지로 지거나 마지못해 지지 말고, 오히려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으라고, 그리고 사랑으로 순명하여 끓어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십자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곧 십자가를 수락하는 삶 안에 구원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힘입니다. 아멘.




“사랑 때문에”

박미라 도미틸라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 주신 후에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 엿새 뒤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예수님께서는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진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 모습 속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 그리고 또 엉뚱한 말을 하는 베드로! 

주님께서 분명히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 고 하셨건만, 거기에 초막 셋을 지어 그곳에서 살자고 하지요...

 

예수님이 카야파 대사제 저택에 끌려가시어 고초를 겪고 계실 때는 어떠했습니까? 안뜰에 있다가 자기도 잡혀 죽을까 두려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까지 했습니다. 으뜸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인간적인 상식으론 이해하기가 힘든 모습을 참 많이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그 중대한 일을 맡기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베드로가 그런 사람인줄 뻔히 아시면서 그를 택하신 그분!

그러기에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도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고 예고까지 하셨지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예전에 봤던 “쿼바디스” 라는 영화가 생각이 나네요. 그 영화에서 베드로는 로마에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 죽고 있을 때 자기는 죽지 않으려고 로마를 떠나 도망을 치고 있는데,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게 되어 너무나도 놀라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질문을 하니, 주님께서 “너 대신 죽으러 로마로 간다.”고... 그 말씀에 베드로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장면이 생각이 나네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 것을 상쇄시켜주시려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였고, 그런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거듭해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시며 “교도권 [敎導權]”을 맡겨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당신께서 먼저 친히 십자가를 지셨고, 사랑 때문에 나보고도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사랑 때문에 부족하고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이는 상식밖에 있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그 많은 제자 중 가장 으뜸제자로 삼으시어 교회를 맡겨 주신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다고 하시며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Ⅰ코린 13장 전체) 라고 외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 외에 달리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산다는 것은

늘 쉽지 않은

힘겨움입니다.


사람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

무기력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반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고통이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통해

진정한 자기자신을

보게됩니다.


보게될 때

버릴 수 있고

따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발전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을 찾게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끝내 하느님께로

귀결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게합니다.


삶의 의미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거기에서

우리의 목숨은 평화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올려드립니다.


일어나야 할

십자가의 일이

우리에게서 그냥

일어나게 하십시오.



오랫동안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랑은 하지만 결혼하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 않아서 연애만 10년 이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치마를 사서 입은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나 치마 샀는데. 이 치마 어때?”라고 묻습니다. 남자 친구는 한 번 휙 쳐다보고는 “너무 짧아.”라고 말하네요.


이번에는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를 만나기 직전에 요 앞 꽃집에서 꽃다발을 샀다면서 “이 꽃다발 어때?”라고 묻습니다. 이번에도 휙 쳐다보더니 “돈 아깝게 금방 시들은 꽃은 왜 샀어?”라고 말합니다.


한참 뒤에 여자 친구가 “자기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자 친구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힘드니까 그냥 집에 가자.”라고 대답하네요.


이 연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남자 친구의 이러한 무성의한 대답에 여자 친구가 기분 좋을 리는 분명히 없을 것입니다. 여자 친구는 치마나 꽃다발에 대해서는 예쁘다, 아름답다 등등의 긍정적인 대답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말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사랑 표현을 원했겠지요. 하지만 남자 친구는 오랫동안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뻔한 질문을 왜 하냐는 식으로 무성의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화를 보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원하는 대답과 행동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마음 없이 무성의한 대답과 행동들을 좋아하실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쁨, 평화, 행복, 사랑, 믿음, 희망, 일치 등등의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대답과 행동을 원하고 계시는데, 우리들의 대답과 행동은 욕심, 절망, 미움, 다툼, 분열, 슬픔 등등의 부정적인 것들이 아니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가리키며 ‘사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답과 행동에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사탄’이라는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방법을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 역시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불평불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답과 행동의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어렵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대답과 행동을 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의 모습이 아닌, 주님의 참 제자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고 잠시 뒤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월요일 묵상 글은 없고 화요일 새벽 묵상 글부터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조그마한 친절이, 한 마디의 사랑의 말이 저 위의 하늘나라처럼 이 땅을 즐거운 곳으로 만든다(J.F. 카네기).


행복의 열일곱 가지 특성(장준수, ‘힘들지 않은 인생 없고, 즐겁지 않은 여행 없다’ 중에서)

1)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2) 무엇이든 즐기려 애쓴다.

3) 소유하지 않고 향유하려 한다.

4) 가슴속 욕구에 귀 기울여 채우려고 노력한다.

5)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6) 노는 시간조차 중요하게 여긴다.

7) 거대한 세상 앞에 겸손의 철학을 배운다.

8) 새로운 사람과 쉽게 교류한다.

9) 파티에서 술에 취하려 하기보다 놀려고 한다.

10) 열정적이다.

11)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긴다.

12) 단순하게 산다.

13)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도 한다.

14) 여행하기 위해 좋은 컨디션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15) 날씨나 물가 등 세상에 관심을 갖는다.

16) 배우고 익히려고 한다.

17) 이 여행의 끝을, 생의 끝을 생각한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세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 속담에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힘든 사람들은 힘든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기에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아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정을 아심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려고 일부러 멸시의 길을 선택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난한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부와 가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가난하기에 더 기도하고 하느님께 더 많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베드로 사도의 그 심정이 잘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저 역시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습니다. ‘동생과 다툰다고, 공부하지 않고 논다고, 형제들끼리 티격태격 다툰다고, 성당에 가지 않았다고, 기도하지 않고 잔다’고 꾸중을 듣던 종류도 참 많았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야단맞을 때가 많았습니다. 단체기합을 받을 때도 있고, 숙제하지 않아서 혼나기도 하고,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 혼난 베드로 사도의 일이 꼭 저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교구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인사이동의 권한은 교구장님의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에 사제들은 순명하면서 새로운 임지로 떠나게 됩니다.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는 신부님들과 새로운 곳으로 가는 신부님들의 임지를 봅니다. 알게 모르게 저 자신도 인사이동에 대해서 몇 가지 기준을 갖는 것을 봅니다. ‘성당의 신자 수는 얼마인가, 새로이 성전을 신축해야 하는가, 재정 상태는 양호한가, 보좌신부님은 계시는가, 수녀님은 계시는지, 지역은 어떤 곳인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 꾸중을 들은 베드로 사도처럼 저 역시도 예수님께 꾸중을 들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이 희생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의 기준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힘들고 어려운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수인계를 할 때에도 재정 상태를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봉성체 환자는 얼마인지, 지역에 돌봐야 할 가난한 이들은 어느 정도인지, 상담해야 할 신자분들은 얼마인지를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제 동창 신부 2명은 10년 이상 ‘선교본당’에서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지내고 있습니다. 사제관이 성당이 되고, 회합실이 되고, 어린이들 놀이터가 되고, 사제관에서 음식도 나누는 생활을 10년 이상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도 이제 번듯한 성당에서 본당신부 한번 해야지!” 아버지의 눈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내는 아들 사제가 안쓰럽게 보였나 봅니다. 동창모임에서 해맑게 웃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아니 저에게,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말립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죽어서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이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참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기 죽음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의심과 절망이 뒤섞인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게쎄마니에서 “아빠 아버지, 당신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마르 14, 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라고도 기도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과연 알고 계셨다면, 이 기도들은 죽음의 비극성을 과장하며, 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스승을 말립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스승이 유대교 실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는 불행은 없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충직한 사랑에 감동받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면서, 당신에게 장애물이라고 꾸짖으시고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교회의 믿음을 수록한 문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바를 배워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초기 신앙공동체들입니다. 그들이 복음서들을 집필할 때,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기억하던 바와 믿던 바를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삶은 이미 변하였고, 그들은 그들이 기억하던 바와 믿고 실천하던 바를 이야기로 만들어 복음서들 안에 담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같이 말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피하다가 잡혀서 어찌할 수 없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가 죽음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도달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고, 그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셨습니다. 이 해석이 반영되어 각 복음서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리라고 세 번씩이나 예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스승을 말리자 예수님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실도 사실의 보도이기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전만 생각하고, 훌륭한 분이니까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겪은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주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철이 들면,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합니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일에는 자기의 미래를 위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격증도 취득합니다. 수입이 있으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자기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보장하려는 노력이고, 그것은 인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칭찬받을 일입니다. 그런 일에 익숙한 우리는 신앙도 우리의 미래를 위한 대책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거리 선교사들의 외침도 죽음 후의 일을 위해 각자 대책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는 미래를 보장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구원에 반대되는, 불행한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뜻도 그 말 안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넓은 시야 안에서 살겠다는 신앙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를 벗어나는 것은 때때로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을 오늘 복음은 ‘제 목숨을 잃는 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나 한 사람 배부르고, 나 한 사람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편안하겠다는 우리의 좁은 시야입니다. 주변에 배고픈 사람과 고통에 우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시야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을 위한 호신술(護身術)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교섭하여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잘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비록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가 있어도,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베푸시는 분이라, 자기 스스로 그 자비와 그 베푸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률적으로 강요된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의 능력만큼 또 원하는 만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라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강헌철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걸어가시는 그 길이 수난의 길, 죽음의 길임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 자신처럼 제자들에게도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초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이 바로 제자의 삶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하느님께 구원에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주의와 개인주의, 세속화가 짙게 물들어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신앙에 대한 수많은 위협과 신앙을 양보하고 타협도록 하는 도전들이 너무나 많기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난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이루어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시복식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강론을 통해 순교자의 삶을 통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한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 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세상 중에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위해 그에 따르는 대가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투신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한 선택과 투신이 가능한 이유는 하느님만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그 십자가를 기꺼운 마음으로, 희망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시련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과 희망을 두고 세상이 주는 기쁨과 행복보다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위한 포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하느님의 일

허성규 신부님

오늘 복음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로부터 교회의 반석이라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오늘은 사탄이라는 심한 꾸중을 듣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자 하느님 나라를 다스리시는 영광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철저히 힘없고 버림받은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셔야 할 하느님의 일은 바로 이 땅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려는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안에 모든 이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참다운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바쳐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사랑을 보여주고, 그 사랑을 베풀어 주며, 그 사랑으로 감동받아서, 그 같은 사랑을 베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너무도 잘 아셨던 것입니다.

능력과 권위를 갖추신 주님, 그분은 진실로 그리스도이시기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법인 사랑을 행하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과 그로 인한 마음을 마음 가득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한 번에 다 이 세상에서 없어지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은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택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강제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강요하면, 겉으로는 당신이 무서워 서로 사랑하는 척만 하고,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움만이 가득할것이란 사실을 주님은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택하십니다. 당신 자신이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행했을 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사실도 알려주시고 이 부활한 생명이 바로 진정한 승리, 진정한 영광,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 사랑을 행하게 하시고, 그 같은 사랑을 행하면, 당신과 같은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십자가의 주님, 영원히 살아계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사랑의 감동을 던지고 계십니다.




<자신을 버리려거든 감정의 변화부터 살펴라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모상 앞에 있는 봉헌함의 돈이 자꾸 없어지자 신부님이 도둑을 잡으려 아기 예수 상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해질녘이 되자 한 거지가 들어와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모님, 오늘도 한 푼도 벌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아무 말씀 없으시면 허락하는 걸로 알고 돈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계신 성모님께 꾸벅 감사인사를 드린 후 봉헌함에 손을 들이밀었습니다.

다급해진 신부님이 소리쳤습니다.

“안 돼!”

놀란 도둑 거지가 고개를 홱 돌리자 아기 예수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고만장해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너희 엄마가 가져가라고 하시잖아!”

[박용식 신부님 글 중에서]   


이 거지는 무릎 꿇고 기도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뜻을 버릴 마음이 없는 도둑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기도 안 들어주시면, 성당 안 나올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뜻으로 하느님의 뜻까지 바꾸어버리려는 도둑과 같은 마음입니다. 도둑? 아닙니다. 마귀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 반드시 그와 반대되는 감정이나 생각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 당신 뜻과 반대되는 뜻이 생기게 만들어 선택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도 이런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7,21)

이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뜻이 일어나게 만드는 장본인을 ‘자아’라고 하는데 우리가 자아의 정체를 쉽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그때그때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자존심으로, 어떤 때는 돈으로, 어떤 때는 쾌락으로, 어떤 때는 분노와 미움 등으로 바뀝니다. 사실 바뀐다기보다는 이 모든 집착들을 자아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빼앗기거나 그럴 위험이 닥치면 화를 내게 하거나 긴장을 하게 하거나 혹은 아예 무기력해지게 만듭니다.

따라서 나의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매 순간 올라오는 나의 감정들을 살펴야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긴장이나 두려움, 분노 따위를 ‘사람이니까, 당연하지!’라는 식으로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자아는 마귀라면 그런 감정들은 마귀의 감정들인 것입니다. 자아가 사탄인 이유는 자아가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서 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마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는 말씀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말하게 하는 그 자아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가 살면 다른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니면 사탄입니다. 나를 죽이면 하느님이 되고 내가 살면 사탄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그런 위인 중 하나인데 그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주위의 모든 환경을 통해 수련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말이 많고 성미가 고약했습니다. 사람들이 묻기를 “왜 그런 악처와 같이 사느냐”고 하니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말타기를 잘 하는 사람은 난폭한 말만 골라서 타지. 난폭한 말을 익숙하게 다루면 딴 말을 탈 때 매우 수월하니까 말이야. 내가 그 여자의 성격을 참고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 없지 않겠나.”

또 한 번은 부인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거야 없지”라고 대답하며 웃더랍니다.

어느 날은 부인이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붓다가 머리 위에 물 한 바가지까지 휙 끼얹었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말했다고 합니다.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비가 내리는 법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크산티페의 고약한 언동 때문에 같이 감정이 폭발하여 화병이 들고도 남을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재치 있게 긍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아예 분노라는 감정을 생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즉, 끊임없는 수련으로 자아가 일으키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수련이 결국 자아를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많이 들리는 말이 ‘감정노동’이라는 단어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고객님, 사랑합니다!”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일부 고객들은 그들이 조금만 잘못하더라도 모욕적인 말과 행동들을 해 댑니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어떤 분은 새치기 하지 말라고 했다가 고객센터에 고발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친절함과 공손함으로 손님들을 대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속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겉의 ‘나’와 속의 ‘나’가 완전히 달라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감정 노동자들은 다른 곳에 가서 자신들이 당한 것을 똑 같이 다른 감정노동자들에게 풀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서비스업비율은 2010년 기준으로 58.2%라고 합니다. 그들이 대부분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27%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징계 해직자 중 우울증 환자비율(28.5%)과 비슷하고 버스기사보다 2배나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비스업 종사자가 70%에 달하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우리나라 감정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고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노동 스트레스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평상시에 두 얼굴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괴물이 있고 외면에는 착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꾸며진 착한 외면에 속아서 내면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모습이 된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자신에게 못 되게 구는 세상 사람들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안에 그 화를 일으키는 자존심이라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에게 “개에게 빵을 줄 수 없다”라고 하시며 모욕적인 언사를 하셨을 때도, 그 여인은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며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즉 자아를 죽여서 멸시를 받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참으로 크다”라고 칭찬해주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자아가 성령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감정 노동자라 하더라도 다 우울증에 다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가 나는 것이 자신의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런 기회를 자신들의 자존심을 버리는 기회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들이 일어날 때 매번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자아를 버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증오나 분노, 미움이나 긴장, 혹은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일어나는데도 그것이 내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그 자아는 계속 내 안에서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이런 감정들에서 우리를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노예로 삼습니다. 무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노예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은 이미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도 우리 주인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자아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은 ‘평화’입니다. 참 평화가 와서 감정의 변화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면 자아를 많이 버렸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자아가 죽기 싫어서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의 반응이었음을 알았다면, 그런 감정인 상태에서 다시는 예수님께 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잘 살펴야합니다. 평화를 깨는 안 좋은 감정들이 나타날 때 바로 그것이 자아 때문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자아가 사탄이라 불려도 무방한 놈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자신을 버리는 연습,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평화로움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은 매일이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으려고 해야 하는 수련의 장입니다.




천당문을 여는 열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랑 안에 항구하게 머물러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성 요한 비안네에 의하면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란 말만 들어도 기가 죽는 게 현실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주님사랑의 표징이지만 막상 짊어지려고 하면 힘이 들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시간 삶의 여정에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할 힘을 주시길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입니다.”“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은 현실이고 그러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유혹이 쏟아져옵니다. 그 유혹이 강한 이유는 세속적인 가짜 제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확고한 믿음으로 십자가를 차지해야 합니다.“십자가의 신비는 기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울어야 합니다. 삶이 고달프고, 몹시 힘들어 지칠 때 푸념의 말을 하기보다 십자가 앞에 머물며 고통의 신비를 헤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십자가의 신비는 곧 사랑의 신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면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게 됩니다.

 

필리피서 2장 6절 이하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겸손의 길이요, 죽기까지 순명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령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25.).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자기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큰 것을 위하여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로마12,2)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는 구체적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을 보면 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순종하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져줄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두꺼비와 뱀은 앙숙이랍니다. 그래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독을 뿜어 낸답니다. 그런데 두꺼비가 새끼를 배면 일부러 뱀을 찾아가서 약을 올립니다. 그러면 뱀이 화가 나서 두꺼비를 통째로 삼켜 버립니다. 그러면 두꺼비는 뱀 속에 들어가서 독을 뿜어내고 마침내 뱀의 뱃속에서 숨이 막혀 죽고, 뱀은 두꺼비의 독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꺼비와 뱀이 썩은 시체 안에서 살아나는 새 생명이 있는데 그것이 두꺼비 새끼들이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 줍니다. 두꺼비는 자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뱀의 입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는 죽는 것인데 거기에서 새 생명이 살아납니다. 우리 주변의 식물도 마찬가지 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됩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 쾌락을 추구하는, 돈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거부해야합니다. 이기적인 사고를 버리고 내적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교황님이 말씀대로 “단순히 계명을 지킨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을 차지하여 변화시키게 해야 합니다.”이기심의 늪에서 벗어나 조금만 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집회서15장 14절에서 17절을 보면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4-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루가복음9장61-62를 보면 한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 보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주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는 일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은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나를 죽이고 포기하는 일이 곧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는 길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예례미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그래서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그러나‘욕을 먹고 조롱 받는 몸이 되어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위안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주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2). 그리고 마지막 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마태16,27) 보상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며 가야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할 길에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일상 안에서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요, 천국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주님을 등에 업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는 이들의 순례는 예외 없이 주님을 등에 업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과 흡사합니다. 제 십자가의 짐을 상징하는 무거운 배낭들입니다. 미사도구를 배낭에 담은 제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강론을 쓰는 새벽 2:30분, 여기는 떼스떼야 알베르게 입니다. 가격이 저렴하고(6유로) 친절한 시립 알베르게 이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알베르게 안내 판에도 유럽 여러나라들의 언어와 함께 '시립 알베르게'라는 한글어가 있어 반가웠습니다.


잠들어 있는 침실을 조용히 빠져 나올 때 어지러이 널려있는 침실의 모습은 그대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남녀 혼숙의 침실이지만 참 자연스럽고 자유스럽습니다. 모두가 순례를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 때문일 것입니다. 

내일 새벽이 되면 하나 둘 다 배낭을 메고 떠날 것입니다. 저와 함께 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도반 둘 중 한 분(상암동 성당; 김승월 프란치스코)은 사정상, 오늘 귀국길에 오릅니다. '순례도우미'로서 그가 보여준 헌신적 사랑의 봉사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제 한분(서원동 성당; 박용대 이냐시오)의 도반만 남았습니다.


우리 삶은 결국은 '떠남의 여정'입니다. 언젠가는 이승을 떠나야 할 우리 모두의 운명입니다. 

참 축복 받은 땅 스페인입니다. 500년 전후의 마을과 건축물이 그대로요 사람들 순수하고 친절하기가 마치 중세 시대 무공해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어제 오후 관광열차를 타고 시내를 관광하며 새삼 깨달은 사실입니다. 밝은 햇빛, 맑은 공기에 풍부한 물, 끝없이 펼쳐진 좋은 땅 등 축복의 요소를 다 갖춘 스페인 나라입니다. 바로 이 나라를 관통하는, 계속 떠나야 하는 산티아고 800km 순례길입니다.


주님은 길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길이신 주님을 등에 업고 주님을 따라 계속되는 순례길입니다. 주님 사랑의 열정이 순례길의 원동력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인도자는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을 따라야 환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순례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 있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질책을 들어도 베드로처럼 즉시 뉘우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벗어났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인 사탄입니다.


주님은 생명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말씀을 통해 분명히 들어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 생명의 말씀에서 샘솟는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주님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미야의 감동적인 고백, 바로 이것이 성소입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생명의 열정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으로 끊임없이 영혼을 충전시킬 때 생명력 충만한 삶입니다.


주님은 빛입니다.

칠흑같이 어둔 밤, 헤드랜턴을 이마에 달고 미사를 드리며 빛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았습니다. '하느님은 빛'이란 말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헤드랜턴 하나로 오리손 산장에서 새벽에 미사를 봉헌했던 기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캄캄한 새벽길, 헤드랜턴을 이마에 달고 걸을 때, '주님은 내 발에 등불, 내 앞길을 비추는 빛이 옵니다.'란 시편 말씀도 실감했습니다. 말씀의 빛이, 은총이 우리를 진정한 내적변화로 이끕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바로 말씀의 빛이 우리를 현세에 동화되지 않게 하고 분별력의 지혜를 주어 바오로의 말씀대로 살게 합니다. 현세악의 어둠을,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말씀의 빛입니다. 결국 말씀은 '영혼의 빛'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등에 업고 주님을 따르는 순례여정입니다. 주님을 등에 업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를 업어 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생명과 빛으로 충만케 하시어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아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오16,24)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무겁고 버겁기에 십자가라 합니다.

그 십자가를 달콤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무게만을 허락하신다고 성인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가 가장 무거운 양 힘에 벅찬 얼굴을 하고 삽니다.


십자가란 무엇인가요?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들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십자가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힘이 들고 때로는 고통을 안겨주어도, 그로 인해 보람과 기쁨과 감사의 정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십자가 아닌 짐입니다.

그런 짐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셨습니다.

그분께는 우리의 죄가 십자가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이며, 그것은 성부와 우리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당신 사랑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고 있다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그 어떤 대의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고통 덩어리로 떨쳐내고 싶은 그런 것입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전제합니다.

마지못해 지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로 그저 고통일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인지 명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고통을 지는 것이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픔이던 사랑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과 연결되기에 그 무게가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짊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여,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것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

그것은 결국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할 아픔을 감내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로 우리의 삶을

다시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걸림돌이 아니라

징검다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저마다에게

길이 되어 주시는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나에게만 십자가를

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십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십자가는 결코

걸림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의 걸림돌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십자가와 한몸이 되기를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우리자신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허약한 자아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며

상처많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사랑의 힘찬 기도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실천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십자가는 뚜렷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십자가는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오늘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결코 익어갈 수 없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제멋대로 살고픈

우리자신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고해성사를 듣게 되면 안타까움을 갖게 될 때가 종종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서 느끼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제대로 죄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지요. 즉, 남의 죄만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 남편이 매일 술 마시고 들어와요.’, ‘자녀가 성당에 다니지 않아요.’, ‘아내가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대학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취업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집에만 있어요.’ 등등의 이상한 죄(?) 고백입니다.


물론 그래서 미워한다는 것이 죄의 요지이지요. 하지만 이 말을 다시 풀이하면, 내 주변의 사람들이 제대로만 산다면 자신이 절대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즉, 남의 죄 때문에 자신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내 주변의 사람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죄를 범하고 있는데 그 모든 원인을 내 주변 사람에게 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주님께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이지요.


요즘도 크게 문제가 되는 왕따 학생을 떠올려 보십시오.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은 말합니다. 왕따인 그 친구 자체가 문제이지, 자신들은 그 왕따 친구의 모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그러나 누가 문제입니까? 약한 친구를 폭력이라는 힘을 이용해서 왕따 시키는 가해자가 무조건 잘못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고백에 있어서 자신의 죄가 아닌 남의 죄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래, 알았다. 너는 죄 없어.”라고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악마는 우리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 탓, 환경 탓을 하면서 죄를 고백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정으로 깨끗한 내가 될 수 없도록 또한 주님을 똑바로 따를 수 없게 만듭니다. 고해성사를 보기는 하지만 고해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십자가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남의 십자가입니까? 모두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짊어지라는 십자가는 바로 내 자신의 십자가였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도 또 내 이웃의 십자가도 아닌, 바로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남의 탓, 내 주변의 환경 탓을 하고 있다면 이는 자신의 십자가가 아닌, 남의 십자가만 지겠다고 욕심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기에도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니까요.


인생은 대개 흐리거나 비 뿌리는 나날이고 활짝 갠 날은 드물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당신만의 멋진 우산이 생긴다(나해아).


죄 고백

고해소에서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께 죄를 고백합니다.

“신부님, 제가 밧줄 하나를 훔쳤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밧줄 하나 훔친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고 죄를 고백하는 이 형제님이 아주 열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밧줄에는 소가 매여 있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어떤 상황일까요? 단순히 밧줄 하나 훔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밧줄에 매여 있는 소 한 마리를 훔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소를 훔쳤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밧줄을 훔쳤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악마는 이렇게 자주 유혹합니다.

“죄를 고백해. 그러나 죄를 있는 그대로 다 말할 필요는 없어.”

죄를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마의 유혹에 오늘도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 겸손하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사람만이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로이 창조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는

정화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산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저마다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은총의 하루되십시오.





몇 년 전의 성지순례가 문득 떠올려집니다. 어떤 신부님의 부탁으로 지도 신부로 떠났던 성지순례였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순례였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낯설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했던 순례객들 중 몇몇의 행동이 몹시 거슬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안 좋은 모습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안고 다녔습니다. 결국 이 성지순례는 제게 너무나도 힘들었으며 괜히 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악의 순례가 되고 말았지요.


그로부터 몇 년 뒤, 또다시 지도 신부로 성지순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안 좋았던 기억이 있던 성지순례에 대해 반성하면서, 이번에는 어떤 분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들의 특별한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을 했던 성지순례는 제게 있어 가장 최고의 기쁨을 간직했던 성지순례로 꼽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했던 저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문제는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 자신의 모습에 따라 내 인생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좋은 것을 내게 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힘들게 살아가곤 합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많은 봉헌을 하려고 노력했지요. 그랬더니 제 일이 다 잘 풀리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지요. 주님 축복은 제 봉헌 뒤에 온다는 것을요.”


사실 모든 분들이 이러한 체험을 했으면 하지요. 그런데 이 상황과 정반대의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신부님, 제가 얼마나 많은 봉헌을 했는지 모릅니다. 각종 후원회에 가입해서 봉헌도 했고, 또한 주일에는 성당에 살면서 봉사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하는 일마다 쫄딱 망하기만 하는 것일까요?”


어떤 경우가 맞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속적인 가치로서 복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어렵고 힘든 삶의 무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긍정적인 모습을 간직하면서 당신을 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자기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기왕이면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선호하면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십자가와 달리 크고 무거운 십자가는 제발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뜨거운 열정을 갖고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철저한 노력 속에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점을 기억했을 때, 우리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좋은 동행자가 함께하면 그 어떤 길도 길지 않다(터키 속담).


식사예절

아버지와 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밥숟가락을 입에 넣는데, 바로 그 순간 아들이 급하게 말합니다.

“아빠~아빠~”

밥 먹다가 시끄럽게 얘기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야단부터 칩니다.

“밥 먹을 땐 시끄럽게 말고 밥부터 먹어라.”

밥을 다 먹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아깐 무슨 얘기하려고 했지?”

아들이 말하길 “아빠, 아까 아빠 밥숟가락에 똥파리 들어갔어요...^^;;”

식사 예절.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말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지난주에 어떤 농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농원에서 제배하는 연꽃을 볼 수가 있었지요. 연꽃의 화려함에 많은 이들이 감탄을 합니다. 그런데 이 화려함이 1년 내내 계속되는 것일까요? 이 연꽃을 보기 전, 우리들은 연못이나 논밭 위를 덮고 있는 연잎만 볼 수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7~8월 동안만이 아름다운 연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연잎만 볼 때에는 아름다운 연꽃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 화려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연꽃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요?

하긴 겉모습만 보고서 알 수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조그마한 꼬마아이들을 보세요. 지금 현재는 약하고 부족한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아이들이 장차 교회를 위해서 또 이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한 대리석이나 커다란 돌덩어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다.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한다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리석과 돌덩어리가 조각가를 만나면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바뀌게 되지요. 그 누구도 이 아름답고 멋진 작품을 연상할 수 없는 대리석과 돌덩이만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지금의 모습에 쉽게 단정 짓고 결론 내는 어리석음에서 자유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뜻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주님의 뜻을 감히 알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인 양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사실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었지요. 배우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어부였습니다. 또 다혈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폭력적인 모습도 띄고 있으며(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종을 향해 칼을 휘둘러 귀를 자름), 이러한 다혈질적인 성격에 비해서 나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그런데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저주의 말씀을 퍼붓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을 정도로 큰 영광을 얻었지만 곧바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욱 더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도 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의 일만을 내세우는 것인지를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 같나요? 아니면 혼날 것 같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들이 지겹게 느껴지면 그것을 모두 잃어버려 절실하게 그리워하는 상상을 해 보라(플루타르코스).


하느님의 이끄심은 아무도 모른다.

1979년 호주의 무명 배우가 길거리에서 술 취한 세 남자와 시비가 붙는 바람에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습니다. 배우는 다음 날 중요한 오디션을 앞두고 있었지요. 그런데 얼굴이 온통 상처와 멍투성이였으니 결과는 어떠할까요? 불을 보듯 뻔했지요.

그러나 배우는 포기하지 않고 오디션에 참석했습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기대를 접었지요. 정상적이어도 통과할까 말까 한데 이렇게 얼굴이 엉망이 되었으니 더욱 더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대본을 보고 몇 가지 장면을 연기했습니다. 감독 겸 제작자라는 사람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연기가 끝나자 자신에게 걸어와 악수를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오디션을 위해 얼굴을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건가?”

“아니... 어제 술 취한 놈들하고 문제가 좀 있어서...”

“잘됐어.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사람이야.”

이 무명 배우의 이름은 멜 깁슨이었고, 그들이 만든 영화는 ‘매드맥스’였습니다. ‘매드맥스’는 흥행 돌풍을 일으켜 멜 깁슨을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지요.

싸움에 휘말려 입은 부상,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하느님의 이끄심이 얼마나 오묘한지를 알 수 있지요. 따라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는 자는 하느님의 이끄심을 뿌리치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 캠프 중에 어떤 초등학교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남자 교리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고, 그 선생님에 대해서 그 아이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신부님, 저는 그 선생님이 정말로 싫어요. 그 선생님은 군대도 안 가요?”

저는 그 선생님이 왜 싫으냐고 물어보았지요. 그랬더니만 그냥 다 싫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특별한 무엇이 싫은 것이 아니라, 다 부정적으로 보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그 다음 날, 그 초등학생이 싫어하는 교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께서는 그 초등학생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해요. 

“신부님, 저는 아이들이 다 좋은데 왠지 그 아이만큼은 정이 가지 않아요. 괜히 싫고 가까이 가기 싫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서로가 싫어했던 상대방은 직접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상대방을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주 간단한 진리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완동물을 키워보신 분은 더 잘 아실꺼에요. 애완동물들은 자기를 좋아하면 자기 자신도 좋아한다는 애정표현을 끊임없이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싫어한다고 느끼면 적대심을 표현하지요. 

사랑이나 미움의 감정은 이렇게 내가 행한 대로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받고 싶습니까? 아니면 미움을 받고 싶습니까? 아마 100이면 100, 모두가 사랑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행하는 것은 사랑인가요? 아니면 미움인가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사랑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지요. 왜냐하면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미워하면 다시 내게 돌아오는 것은 미움밖에 없으니까요. 따라서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랑을 하라는 의도로써 이 세상의 법칙에서는 어긋나 보이는 행동을 하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만 사랑받고 싶은데, 나만 인정받고 싶은데,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하실까요? 계속된 말이지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사랑하고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십니다. 따라서 그 좋은 것을 받아먹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덕은 행복이고 행복은 의무이행의 부산물이다. 우리는 자기 역할을 다할 때 행복해진다(윌리엄 버로즈).


칭찬하고 또 칭찬하라(‘좋은 글’ 중에서)

1. 칭찬을 받으면 바보도 천재로 바뀌어진다.

2. 칭찬을 하면 칭찬 받을 일을 하고, 비난을 하면 비난받을 짓을 한다. 사람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칭찬밖에 없다.

3. 이 세상에는 외상이나 공짜가 없다. 칭찬을 하면 칭찬이 돌아오고, 원망을 하면 원망이 돌아온다.

4. 칭찬 노트를 만들어라. 남의 칭찬이나 자신의 칭찬이든 칭찬거리가 생각나면 바로 노트에 기록하라. 이 노트가 기적을 창출한다.

5. 돈을 주면 순간의 기쁨이 만들어지지만 칭찬은 평생의 기쁨을 안겨준다. 칭찬하고 또 칭찬하라.


한번 받은 비난이 회복될 때까지는 아홉번의 칭찬을 들어야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 처럼 우리가 뱉어내는 언어는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박병규 신부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시작기도 

일치와 화합을 바라시는 성령님, 죽음의 문화 속에서 생명의 길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맙소사!” 베드로의 탄식이다. 탄식의 이유인즉, 주님이라는 분과 죽음을 당하는 일이 도무지 연결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 생명일 수 없고, 생명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사람의 일과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하느님‘만’이 거룩하고 전지전능하니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르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것과 저것이 다른데 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느냐?’라는 질책 어린 물음을 머금고 있는 말이다. 베드로의 ‘맙소사’를 예수님은 인간‘만’의 일로 생각하는 ‘편협함’으로 이해하신다. 베드로는 하느님 일의 ‘다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편협함은 이분법적인 단절을 불러온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십자가 지고 죽는 일로‘만’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제 십자가가 뭔지도 모르게 만든다. 버리지 못해 얻으려고‘만’ 하고 십자가를 찾기 전에 ‘영광’만을 찾으려 하는 편협함은 버림과 죽음 뒤에 찾아올 아버지의 영광과 대척점에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면 나중에 만날 예수님의 보상이 아니라 지금 행할 예수님의 희생을 간절히 살아내야 한다. 

 

묵상(Meditatio)

대체 하느님의 일이란 무엇일까? 내 일이 잘되고 내 마음이 편하도록 하느님은 역사하고 계실까? 신앙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일을 얻어 만날 기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그 기회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리 각자는 자신의 행실과 그 행실로 인해 얻어 누릴 보상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보여줄까를 고민하는 방법과 실천을 잊어버렸음을 기억하자. 

사람들과 하느님의 일을 나누려면 인간의 일에 대한 일정 부분의 포기와 절제, 그리고 극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것을 ‘타 존재에 대한 열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자신의 것이 가치롭고 소중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관점에만 머물며 다른 이들의 가치를 하찮게 여긴다면 우리는 ‘만남’이 ‘단절’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복잡하고 시끄러운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내가 보고 싶고 사고 싶은 것들에 집중된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후 집으로 오는 길이 허할 수밖에 없는 경험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편협함은 이렇게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가 사는 것인데 말이다. 

 

기도(Oratio) 

주님, 다른 이들을 보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아멘.



 

<십자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강하게 반박합니다.

아마도 십자가, 수난, 죽음 같은 일이 왜 필요한 것이냐고, 그냥 부활, 영광으로 직행하면 안 되는 것이냐고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셨을 때, 사탄이 와서 세 가지 유혹을 했습니다.

사탄의 세 번째 유혹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도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빠진 것도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생략하고 부활의 영광으로 직행하자고 한 것은 사탄의 유혹과 같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신 것은 ‘없어져라, 사라져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베드로에게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하신 것은 ‘내 뒤로 가라.’ 라는 뜻입니다.

‘내 뒤로 가라.’ 라는 말은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제자로서 따르라는 뜻입니다.

제자로서 따르지는 않고 오히려 길을 막고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하십니다.

사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예수님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였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끔 야구 중계를 볼 때가 있습니다.

야구 경기의 규칙은 복잡하기도 하고 고지식하기도 합니다.

타자가 홈런을 치면 득점이 인정되는데, 홈런을 친 타자는 무조건 1루, 2루, 3루 베이스를 순서대로 정확하게 밟으면서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야 합니다.

만일에 하나라도 베이스를 밟지 않은 것이 나중에 드러나면 홈런이 무효가 됩니다.

(실제로 홈런이 무효가 되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홈런을 치면 당연히 득점이 인정되니까, 그냥 득점한 것으로 계산하고,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굳이 그렇게 고지식하고 엄격하게 형식을 지켜야 하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부활로 끝나게 될 일이라면, 중간의 십자가는 그냥 건너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어떻든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부활 없는 십자가는 무의미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는 것입니다. (홈런을 쳤으니까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돈 것으로 치고 그냥 생략하자, 라고 타협을 보는 야구 경기는 없습니다.)

가을에 추수를 하고 싶다면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내내 농사일을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노력도 하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는 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과 진주로 비유하신 말씀을 보면, ‘가진 것을 다 팔아’ 라는 말이 핵심입니다(마태 13,44-46).

길을 가다가 우연히 줍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한 일도 없이 당첨되는 복권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먼 친척에게서 횡재하듯이 상속받는 것도 아닙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서 얻게 되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고향으로 들어가기까지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고 마음껏 신앙생활을 하고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삼백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조선에서는 백 년 이상의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왜 꼭 그래야 하는지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이 원래 하느님의 방식이고, 하느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과정 자체를 생략하고 결과만 얻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드러내던 베드로 사도가 혼이 나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베드로가 몰랐기로서니 “사탄”이란 표현은 너무 심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단호한 말씀 속에는 분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적 감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면서 베드로는 간섭하였습니다. 인간적 애정으로 스승님의 앞날에 참견하였습니다. 동기는 순수했지만 베드로가 나설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인간 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지, 주님께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은 단지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는 수단이라는 착각입니다. 점치고 굿하는 기복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인지요? 주님께서 중심이 되는 믿음인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믿음인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꼬마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된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은 참 간단합니다.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그 글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엄마는 나를 예뻐해 줘서 고맙다. 냉장고는 먹을 것을 줘서 고맙다. 강아지는 놀아줘서 고맙다.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꼬마의 말이 맞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아빠 없이는 이 꼬마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빠의 존재는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아빠와 만나기 힘들다는 이유로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문득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참 힘들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의 말씀도 듣지 못한다고 우리는 주님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과연 우리가 주님 없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요?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세상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렇다면 태양이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구름 뒤에 분명히 태양이 있으며, 언젠가는 구름이 걷혀서 태양이 다시 나올 것이라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 주님이 가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기 보다는 끝까지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우리들은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은총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고통과 시련을 부정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꾸중을 듣게 되지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람의 일로서 고통과 시련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로서 고통과 시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본 글 하나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에 동네 약수터에 온 할머니에게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시라고 했더니 정색을 하며 화를 낸다. 팔순 나이에 온 몸이 아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앞으로 20년을 더 고생하란 말이냐고 따진다. 그때 깨달음이 왔다. ‘죽음도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을 바꾸어 나갈 때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들, 고통과 시련을 피하기보다는 그 안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긍정적인 자세들이 바로 하느님의 생각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불행이나 고충을 털어 놓는다든지 동정을 구걸하지 않는다. 남몰래 참아내면 언젠가 고통도 사라지고 도움의 손길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발타자르 그라시안)


웃음

미 개척시대에 한 영국 선교사가 미국에 도착했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신대륙에서 온 몸에 털이 난 동물(?)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보면 원숭이 같고 또 저렇게 보면 사람 같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요.

“사람과 원숭이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전보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웃는 놈은 사람이고, 웃지 않는 놈은 원숭이이다.”

사람이기를 피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웃기보다는 화를 내는데 먼저인 분들이지요. 사실 웃는 얼굴과 화를 내는 얼굴, 어떤 얼굴이 보기 좋습니까? 스스로 보고 싶은 얼굴은 웃는 얼굴이면서도 왜 남에게는 화낸 얼굴을 더 많이 보여주는지요?

예수님께서도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지요. 남이 원하는 웃는 얼굴, 이 얼굴을 할 때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야말로 웃음이 그치지 않는 세상, 아마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이란성 쌍둥이가 이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먼저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했지요.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했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동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말해줄 게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나서 말했지요. 

“엄마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너는 본 적이 있어?” 

오빠의 기세에 눌린 동생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가끔 무언가 꽉 조여 오는 것 같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고 어떤 때는 아프기도 해.” 

“나도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음, 내 생각엔 이 꽉 조여 오는 게 다른 곳,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 엄마 얼굴을 보게 될 곳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표시인 것 같아. 오빠는 흥분되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하면서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누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나요? 여동생일까요? 아니면 오빠일까요? 지금 이들d의 상황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배 밖을 상상 하기 힘들며,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배 밖으로 나와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엄마가 없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또한 배 밖의 이 넓은 세상이 가짜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사실 현대인들은 합리적이지 않으면 또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지 않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분들도 있지요. 

“하느님이 어디 있어? 내게 보여줘. 그러면 내가 믿을게.”

그러나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이 꼭 진실만은 아님을 앞선 이란성 쌍둥이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인간적인 지식과 판단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예고는 누구의 뜻을 밝히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것이지요. 이에 반해서 베드로의 말은 누구의 뜻일까요? 바로 자신의 뜻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뜻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 윗자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낮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은 첫째 자기 자신을 버리고, 둘째 자신의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어야 하며, 셋째 무조건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자신을 버리는 것도 어려워하고,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십자가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지요.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왕이 평복을 입고 지방을 순찰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와서 무엇을 좀 달라고 손을 내밀더랍니다. 이에 왕은 그 거지에게 “네가 먼저 무엇을 내게 주면 나도 네게 주겠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거지는 왕에게 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앞 동네에서 받은 옥수수 한 되 가운데서 다섯 알을 집어주며 “제게는 이것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하였지요. 그것을 받은 왕은 뒤에 따라오던 재정대신에게 “금자루에서 이 옥수수 알만한 금덩이를 5개 꺼내게.”라고 한 뒤 그것을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거지는 속으로 크게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아하!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옥수수 주머니를 아예 다 그분께 드릴 걸! 그랬으면 그만큼 금덩이를 받았을 텐데. 내가 왜 다섯 알만 드렸던가!”

그렇습니다. 자기 것을 더 많이 챙기는 마음,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하기에 우리들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맡기는 마음,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이 우선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영혼을 망치려면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화단을 망쳐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화단에 불을 지르고 물을 많이 부어버린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쉽게 망쳐 버리는 방법은 그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잡초가 무성해져 저절로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하면 부부간의 사랑이 깨어질 수 있을까? 매일같이 트집을 잡아 헐뜯고 상대방의 약점을 노골적으로 공격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수고할 필요가 없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내버려두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망쳐버릴 수 있을까? 방탕하게 생활하며 법을 어기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그저 나를 맡겨두면 저절로 나는 망쳐져 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내 영혼을 어떻게 하면 망쳐버릴 수 있을까? 하느님의 존재와 그 진리를 철저하게 배척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내 영혼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관심 없이 내버려둔다면 곧 무참히 망쳐져 버릴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 것들의 가치를 잘 깨닫고 있다든지 혹은 세상의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행동한다든지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세상의 흐름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갇혀서 흑은 그 물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세상적인 욕심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세한 세균이 침투해 들어와서 서서히 증상이 악화되어 나중에는 온 몸에 퍼져 어쩔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는 것과 같다.

이 세대는 나날이 새로운 모습으로 신자들을 유혹하여 갖가지 우상을 좇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낼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허무의 나락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날마다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몸부림이다.

 



그래도 계속 가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죠셉 M 마샬이란 특별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태어났는데, 현재 교사이자 역사가, 민속학자이자 인디언 전통 공예품 장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 삶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간간이 인디언의 전통적인 삶과 철학에서 길어 올린 지혜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난해한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을 내어놓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그래도 계속 가라’(Keep Going)입니다.

저자는 강조합니다.

“인생에 있어 기쁨의 순간은 찰나입니다. 때로 기쁨이 오랜 장마 간간이 먹구름 사이를 뚫고 잠깐 내비치는 햇살처럼 미약하기만 하고 대부분 슬픔과 고통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래도 계속 가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는 ‘그래도 계속 가라’를 충실히 실천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보여준 모습, 예수님 보시기에 참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해왔지만, 오늘 보시다시피 베드로 사도는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살상과 정복을 일삼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비폭력의 하느님, 고통의 메시아, 산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임을 그토록 강조해왔건만, 베드로 사도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허황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매섭기만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아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의 위신이 공개적으로 완전히 찌그러지는 순간입니다.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시며 정곡을 찌르는 예수님이 오늘따라 엄청 밉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참혹할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자존심이 구겨진 베드로 사도의 머릿속은 ‘이런 말까지 들어가며 계속 가야 하나?’하는 의구심으로 가득 찼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래도 계속 갑니다.

여기에 베드로 사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은 행복과 기쁨만이 아닙니다. 때로 온 우주가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 같은 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풀잎 끝에 잠시 맺혀있는 아침이슬과도 같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자기 관점에서 듣기’ 

홍금표 신부님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들어주는 것」 이상의 것이 없다 한다. 여기서 들어주는 것은 단순히 사실이나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감정과 느낌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들어줌을 방해하는 것은 선입견이나 추측, 반박이나 비난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근본적인 것은 남녀가 쓰는 언어가 다른데서 오는 이해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 한다, 


즉, 남녀가 쓰는 언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말을 번역」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이해하는 「자기 방식의 이해」가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듣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방식의 이해」를 고집하게 될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배우자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배우자」, 「내가 욕구하는 배우자」를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고, 결국 그러한 삶은 나와 배우자의 사이를 갈라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섬겨야 될 참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하느님」이나 「우리의 욕심의 투사인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그 하나의 예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교육하시면서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 준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은 제자단의 으뜸이요 성급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말렸다는 것이다.


200주년 성서에 보면 『예수님을 끌어당기며 꾸짖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예수님의 뜻을 꺾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베드로 사도의 의지를 볼 수 있는 행동이다. 


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반응했을까!

첫번째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메시아관에 대한 차이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와 제자들 그리고 당시의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자, 영광스런 왕좌에서 통치하는 영광과 현세적인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지난 주 베드로 사도가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3가지 약속, 이 모든 것을 베드로 사도는 현세에서 이루어질 영광과 승리의 무엇으로 생각하고 몽상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통을 받고 죽는다. 


아마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기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꿈꾸었던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다를 때 현실을 부정해 보고 싶은 심리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 이 마음이 베드로 사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눈먼 사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이 고통을 받고 죽는다. 사람들이 갖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관계를 맺었던 이들의 고통 앞에서 보이게 되는 무조건적인 거부,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의 순수한 열정이었고, 아마 이러한 열정이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감정적 차원의 애정」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의 일면을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원인은 오늘 복음에서 지적하듯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였기 때문이리라! 세상의 많은 일들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베드로 사도가 반대를 표현하게 된 것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하느님 편에서 예수님의 수난 사건을 보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해석해 버렸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하는 마음보다는 하느님의 뜻마저 자신의 방식과 세속적인 이해득실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사탄의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자기 방식의 해석과 들음」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2독서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을 본받지 않는 마음의 쇄신」이 하느님의 뜻을 분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일"

이기양 신부님

'냉탕과 온탕을 넘나든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 베드로 사도의 하루가 그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답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극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를 받았지만 바로 이어서 미래에 있을 스승의 수난에 반대하고 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고 호된 야단을 맞습니다.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 주인이 되는 영광과 졸지에 '사탄'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듣고 얼어붙어 있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흘러나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베드로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일은 끝없는 갈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 또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지금도 미국의 매사추세추주 플리머스항에는 102명의 청교도들이 타고 왔던 메이플라워호가 전시돼 있습니다. 또 1620년 그들이 지어놓은 우람한 교회도 보존돼 있지요. 그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곳에 와 땀과 눈물로 교회부터 지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교회를 완공했으며 일 년 동안 농사를 짓고 그 추수를 하느님께 드리면서 최초의 추수 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지켰던 믿음과 감사와 희생의 씨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최대 강국인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유럽인들 가운데 황금을 찾아 남미로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다지를 찾았고 황금 덩어리를 캐냈습니다. 그들은 당시 북미로 갔던 청교도인들보다 훨씬 부자가 됐지요. 하지만 그 후손은 지금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두 예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과 인간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의 결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아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자녀 교육과 재물, 건강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는 무엇을 우선에 두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모두가 자녀들 성공을 위해 헌신한다고 해도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 자녀는 세상에서 성공할 뿐만 아니라 부모의 노후에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내 돈 내 마음 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자신의 안일에만 급급할 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나눔의 삶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신자들입니다. 

건강에 있어서도 세상 사람들은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최상의 관리를 하며 살지만 신자들은 영원한 세상을 지향하고 믿기에 죽음에 있어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에 자유로운 자의 노력은 집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잠시였지만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했다가 예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보다는 세상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 될 것 같아도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때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확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고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가정생활을 해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신자들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그 속에서 내딛는 미약한 한 걸음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배광하 신부님

착각

19세기를 지나며 과학자들은 빛의 정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빛은 다양한 길이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데, 파장이 짧을수록 온도는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결국 파장이 긴 빨간색보다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파란색은 언제나 차가운 색깔로 인식되어 왔었는데, 파란색이 뜨거운 색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물질이자 시작인 원자 역시 파란색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 말고도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속속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착각과 판단, 편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이 같은 착각과 편견은 계속되어 왔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는 일, 부활만을 꿈꾸며 십자가는 멀리하는 안일한 신앙,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며 심판과 정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릇됨, 또는 그 반대의 신앙으로 심판과 징벌만을 강조하는 믿음, 기복적인 신앙만을 추구하며 교회는 복을 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는 신앙, 이 모든 그릇된 신앙 뒤에 반드시 존재하는 오류는, 자기 희생의 십자가는 싫고 축복의 부활, 영광, 행복만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반대했던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 같은 그릇된 믿음을 추구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우리의 믿음은 종종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생각, 편견, 착각, 교만함 속에 있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는 신앙이 아닌 무엇인가 계속 움켜쥐는 신앙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니 자유롭지 못하고 신앙의 참된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유와 기쁨을 살지 못하였기에 십자가는 늘 짐이었고, 신앙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짜증과 미움과 절망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피하면 피할수록 지겨움을 만들고, 불평불만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는 그 모든 무게가 사라지고 인내가 생겨 힘 있게 안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산 제물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너무 벅차 하소연 합니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조롱과 치욕이 그를 괴롭힙니다. 


우리 또한 참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같은 아픔을 겪게 됩니다. 직장 동료들이나 가족, 친지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보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십자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보로 사는 것, 손해보며 사는 것, 계산적이지 않고 세속적인 이윤의 잣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가 너무 힘겨워 울부짖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래도 끝내 하느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 9)


우리가 세상에서 십자가를 살기에 너무도 힘겨워 할 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위로와 용기를 가지면, 말씀 안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운 권능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들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의 십자가가 결코 고통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부활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975년부터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미국인 ‘봅 멕카일’ 신부는 그곳 방글라데시의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무얼 주겠냐는 질문에,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대답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십자가의 역설적인 신비가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사탄아, 물러가라

곽승룡 신부님

역시 베드로는 너무 인간적입니다. 방금 전에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라는 질문을 하셨을 때, 자신 있게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 즉..."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근데 베드로는 방금 전의 자신의 고백을 잊었나요, 아니면 뭡니까? 베드로는 그런 엄청난 고백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 안심이 되셨던지, 자신, 즉 하느님 아들에 대한 앞날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 대사제, 율법학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고백을 하시기가 얼마나 어려우셨겠습니까? 자신이 돌아가시는 것도 힘든 일이건만 그 사실을 의미도 모르고 있는 제자들에게 수난의 고백을 하시기가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자신의 고뇌에 대해서 말씀을 피하시는 주님께서 수난의 고백을 하셨습니다. 근데 뭡니까?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고백에 찬물을 뿌립니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그러면 무엇은 된다는 말입니까? 초막 짓고 행복스레 함께 사는 거 말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느님 계획을 방해하고 간섭하는 자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느님과 인간을 어떤 형태로든 떼어놓는 자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 즉 하느님을 모시고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막는 사탄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는 십자가 말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진정 하느님의 신비와 예수님의 신비에 부합하는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최고의 칭찬과 사명을 받건만, 이제는 정반대의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러한 대조법은 마태오가 좋아하는 서술 양식입니다. 

‘그때부터’(21절)로 시작하는 이 대목은 새로운 전환기를 표시합니다. 갈릴래아의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일어날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앞으로 여러 차례 고난을 예고하실 텐데 이 대목이 그 첫 번째 예고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받아들이셨고 지금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며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앞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입니다. ‘사흗날에 되살아나신다.’는 말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듯합니다(1코린 15,4 참조). 일찍부터 그들은 종말에 의인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예언서에서 읽어 알고 있던 터입니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 살게 되리라.”(호세 6,2) 


모든 노력이 죽음으로 끝나버릴 수 있을까?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말에 강하게 반발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22ㄴ절) 승리의 월계관을 기대했던 베드로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환상에 사로잡힌 그의 발언은 예수님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ㄴ절) 베드로는 자기 신앙을 말할 줄은 알았으나 아직 하느님의 관점을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적 사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적대적인 사탄으로까지 불립니다. 


예수님 추종의 신비를 보여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ㄴ절) 고통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장애물이지만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가 섣불리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거부했던 것에 견주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잘되고 행복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고 하느님까지 자신을 위해 끌어내리려는 이기적인 성향과 내적인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소유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하느님이도록 두면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금욕적인 말씀이 아니라 신비적인 말씀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예수님 생애 말기쯤에는 종교계 지도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처단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역설적인 답변이십니다. 일시적인 목숨에 연연해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라는`…. 자기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여기는 사람은 이미 자신을 잃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인 듯 보여도 오히려 그것이 자기를 지키는 길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온 세상을 다 얻었다 하여도 인간의 삶이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다.”(시편 49,8)는 말씀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고난 받는 예수님의 나약한 모습을 보고 떠나겠지만, 굴욕의 길 끝에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27절)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심은 것은 거둘 것이고 처신한 것에 따라 상벌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들은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28절).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정작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별난 기적을 행하거나 용한 예언자로 소문만 요란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받길 원하셨습니다. 위대한 고백을 한 베드로도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 예수님께 혼쭐이 납니다. 한순간에 성인에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적대적인 사탄으로 몰락합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변덕스런 만족을 채우려 하는 우리도 예수님의 매몰찬 질책을 들을 것입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백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길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하느님 체험은 자신을 떨쳐버릴 때 이루어집니다. 나약한 자신을 하느님께 내드림으로써 약한 마음이 강해지고 넓어집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실패를 통해 승리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 승리는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다.”(시편 49,8)





어제 역시 자전거를 타고서 운동을 나갔다가 왔습니다. 요즘은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골길을 달리고 있지요. 비록 시골길이 길이 좁고 조금 위험하기도 하지만, 해안도로에서 쌩쌩 달리는 차로 인해 발생하는 먼지를 생각한다면 이 시골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어제도 저는 이 시골길을 따라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보니, 논길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논길을 따라서 쭉 가면 성지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사실 자전거로 못가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산에도 올라가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 논길에 들어섰습니다. 생각보다 농로가 넓었고, 그 길을 자전거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논길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 것과 동시에, 아울러 길 양 옆으로는 무성히 자란 잡풀이 저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어제 반바지를 입고 있었거든요. 따라서 풀에 다리가 쓸려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또한 길도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울퉁불퉁해서 위험했던 순간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결국 도착은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다니던 큰 길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힘들게 지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그 길을 쫓아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오히려 좁고 힘든 길이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즉,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그 시작점만을 보고서 그 길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편하게가 아니라, 아주 힘들게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십자가를 어떻게든 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칙을 어기고 편하고 쉬운 길만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향해서 가는 것뿐, 그 어떤 방법도 우리들 모두가 원하는 하느님 나라를 쉽게 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마치 제가 더 빠른 길로 가겠다고 농로로 들어갔다가 오히려 더 고생을 했던 것처럼, 비록 그 시작은 힘들어 보이지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르는 길만큼 편하고 가장 확실한 길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나는 나의 십자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 혹시 그 십자가가 무겁다고 편하고 쉬운 길을 찾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힘들다고 남에게 투정 부리지 맙시다. 나만 힘들지 않습니다.


참 행복

어떤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동네에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정직하고 친절하게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점점 많아졌고, 물건이 달리게 되어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놓으며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하여 바쁘게 장사를 하고 있는 부인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이제 손님이 거의 없대. 저 건너가게는 아예 곧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그 부인은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줄여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물건은 건너편 가게에 가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장사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많아진 부인은 좋아하던 독서에 빠질 수 있었고,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잘라 먹은 십자가

박상대 신부님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세례 받은 한 신자가 있었다. 그는 다른 어느 신자보다도 모범적인 신자로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신앙인답게 살았으며,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 미사도 곧잘 참례하고, 레지오에도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성당일이라면 두발 벗고 나서는 성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다른 어느 신자보다도 신심이 깊다고 자부했다. 사실이 그랬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누구보다도 열심 했던 요한은 3년이 지나자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물음을 던지고 자기 믿음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어느새 불규칙적으로 변했고, 어려운 일들을 참고 잘 해결해 내던 그는 이제 신경질적이고 화도 곧잘 내는 신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요셉은 ‘신앙생활의 권태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그는 직장과 성당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자기의 어려움을 아무도 몰라주고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셉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무거운 십자가였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짓눌러 땅에 처박을 만큼 그런 육중한 십자가였다. 간신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니 자기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제각기 지고 가는 십자가의 모양은 서로 달랐다. 자기 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 더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어느새 요셉도 사람들 틈에 끼어서 십자가를 짊어진 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길은 항상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산길이며, 자갈길도 있었고, 모래밭도 있었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그런 길도 있었다. 그냥 맨몸으로 걸어간다 해도 어려울 그런 길이었다. 요셉은 문득 이렇게 가다간 도중에 꼬꾸라져 죽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새 요셉은 자기 십자가의 한 귀퉁이를 자르고 있었다. 져보니 전 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한 귀퉁이를 잘라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넘어져 다친 사람도 있었고, 무릎이 깨져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가고 있었다. 바위투성이인 산길을 내려오다가 십자가가 나무에 걸리자 미끄러져 굴러 떨어진 요셉은 하마터면 바위에 부딪혀 머리가 깨질 뻔했다. 죽을 뻔했던 그는 십자가의 밑동을 사정없이 잘라 버리고 말았다. 십자가는 매우 가벼워 졌다. 요셉은 나르듯이 뛰어 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 같은 사람들, 사람이란 자고로 나처럼 머리를 써야 하단 말이야.” 하고 비웃으면서 앞질러 갔다. 평탄한 길에 접어들자 요한은 더욱 속력을 내어 뛰어갔다. 얼마나 뛰었든지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앞에 보이는 저 언덕에서 좀 쉬면서 고생하며 오는 사람들 구경이나 좀 하자라고 생각한 요셉은 단숨에 언덕을 올라갔다. 올라서자마자 갑자기 비쳐오는 광채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요셉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그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바로 천국이었다.

성경에서 읽었던 많은 분들과 성인성녀들이 나르는 천사들에 둘러 싸여있었다. 그 중에 한분이 광채를 온 몸에 뒤집어 쓴 모습으로 요셉에게 가까이 왔다. 요셉은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 말을 건네셨다. “요셉아, 먼 길을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 네가 보고 있는 저 나라가 바로 내 아버지의 나라인 천국이다. 이제껏 네가 어깨에 지고 온 십자가를 앞에 가로 놓고 그 위를 지나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지고 온 십자가를 앞에 놓기 위해 아래를 쳐다 본 요셉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 오른쪽,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이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자기 십자가를 그 절벽에 가로 놓으려 했지만 어찌되었겠는가? 그러기엔 너무 짧았다. 너무 많이 잘라 먹고 말았던 것이다. 아쉽고 후회스럽고 코끝이 찡한 온갖 감정이 솟구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지칠 대로 지치고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제각기 자기가 지고 온 십자가를 가로 놓고 그 위를 지나 예수님께로 건너갔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하나 반겨주시면서 땀을 닦아 주시고 감싸 주셨다. 그러고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지막 사람이 건너가자 예수님은 요셉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가 버렸다.

그제야 예수님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울부짖었건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을 가버렸다. 머리를 땅에 박고 땅을 치며 통곡하던 요셉은 그만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었기에 얼마나 다행스러웠는가. 그날부터 요셉은 달라졌다. 무거운 십자가에 억눌려 잘라먹었던 요셉은 영원한 천국의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자기의 어려움을 남은 몰라도 하느님만은 알고 계셨다고 굳게 믿은 요셉의 신앙생활은 예전 보다 더 성실히 변해갔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이었다. 요셉의 생활은 나날이 기쁨으로 충만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복음에서 다루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연결되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참된 제자의 길’에 관한 말씀이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어떻게 따라야하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을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스승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은 지난주일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베드로의 숙제를 풀어가는 교과서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느닷없이 듣게 된 스승의 비참한 종말에 제자들은 모두 놀랐다.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방금 스승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권한을 스승의 비참한 종말을 제지하는 데 쓰려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방법)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방법)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는 바로 ‘사탄’으로 취급된다. 스승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구두시험 100점을 맞았던 베드로가 당장은 아니지만 실기시험에서 곧바로 빵점을 맞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도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스승의 ‘사탄’이란 표현은 사뭇 지나치게 들린다. 그러나 결코 지나치지 않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생각이 몰고 올 최악의 상태를 미리 보고 계신 것이다. 이는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의 도움으로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던 시몬 베드로에게 ‘진복’을 선언하시고, 엄청난 권한과 함께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경우와 마찬가지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으나, 원문에는 “사탄아 내 뒤로 가라.”고 되어있다. 이것이 올바른 제자 됨의 방법이요, 길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에서, 즉 하느님과 예수님의 생각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수난의 길을 가셨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오히려 목숨을 얻어 생명의 주인이 되셨듯이, 예수님의 제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스승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자신을 버리고, 목숨을 내어놓는 것만이 능사(能事)는 아니다.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단지 긍정과 사랑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론)과 모범(실천)에 질서 지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를 글자그대로 따를 수도 있지만, 일찍이 도미니코(1170-1221) 성인 시절에 “카타리파”(극단 순결주의)나 “발덴파”(극단 청빈주의)가 교회의 단죄를 받았듯이 어느 것도 극단적인 방법은 옳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며, 자연과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의 십자가를 잘라 먹는 일 없이 성실히 지고 영원한 생명의 그곳을 향하여 살아가는 일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일괄 거래되어야 하는 하나의 상품, 즉 패키지(package)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수고 없이 금메달을 딸 수 없으며, 열매를 먹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 생각과는 달리 주시는 모든 고통과 시련은 더 큰 영적성장을 위한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텍사스의 돈 많은 목장주가 세계 여행을 하면서 영국의 버킹검 궁전 앞에까지 왔습니다. 화려한 궁전을 밖에서 보면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 실내의 모습도 보고 싶었지요. 그래서 궁전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1,000 달러짜리 지폐를 주면서 “이 정도면 들어가겠지?”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떳떳하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요. 하지만 병사는 그를 가로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을 주어야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초청장을 주셔야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 초청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 달러도 없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지만, 당신처럼 초청장이 없는 사람은 1,000달러 아니 10,000달러를 가져와도 왕궁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돈 많은 목장주인은 돈이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돈으로 될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이 세상에서 벌어들인 재화가 필요할까요? 그래서 부자는 하느님 나라도 쉽게 들어갈까요? 


오히려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하셨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는 현세의 재물이 내게 더 큰 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 세상 것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며, 이 세상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그 판단에서 벗어날 때에는 반대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의 의견을 내놓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고난을 당하고 결국은 죽임까지 당한다고 하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고난과 죽음을 이렇게 미리 알 수 있다면, 미리 피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베드로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자기를 생각하고 한 말도 아닌데, 스승님을 생각했고 스승님이 걱정되어서 한 말인데, 어떻게 ‘사탄’이라고 표현하실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오늘 복음의 바로 직전(지난 주 복음)에는 ‘베드로’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시면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180도 바뀔 수가 있다니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라 할지라도 ‘사탄’이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주님께 ‘사탄’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는지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 세상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하고 판단함으로써 점점 주님께 멀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데 그토록 열심했던 베드로도 ‘사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사탄’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조금 걱정이 되네요.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예수님으로부터 계속 듣게 되는 것 같아서……. 


착한 행동을 많이 하는 주일이 되세요. 


기쁨을 주는 삶('좋은 글' 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 주어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햇빛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줍니다.

웃는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고 사랑을 받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면

먼저 찌푸린 얼굴을 거두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건강법입니다.

값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강영구 신부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


그대에게

사탄은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은 사탄이 아닙니다. 

베엘제불이 마귀 두목이지만 나에게서 멀리 있다면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멀리 있는 마귀 두목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가까이 계시지만 사탄도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 베드로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하늘의 소리(天命)를 외면하고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도록 유혹합니다.


가까이 있는 제자가 장애물이 되어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멀리 있는 것은 이미 장애물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멀리 있기 때문에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함께 있는 제자가 장애물이요 사탄입니다.


사탄은 내 가슴 속에 있고 장애물도 내 가슴 속에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이 사탄이요 이웃과 형제들이 장애물입니다. 

십자가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그 길을 회피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사탄이요 장애물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걷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강영구 신부님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대에게

당신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는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처형 도구였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수치스러운 처형도구였던 십자가가 성당과 예배당을 알리고 장식하는 상징물로, 개인에게는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裝身具)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십자가를 장식용 상징물이나 장신구쯤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낭패로군요.


사도 바울로는 십자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에페소 2,16)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자가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너와 내가 만나는 용서와 화해, 평화와 구원의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환희와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으로 다가오기에

예수님처럼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고자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사람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과

십자가를 피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십자가 짓눌려 망해버리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십자가 뒤에 있는 생명과 구원을 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만 봅니다.


당신의 오늘도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우리가 밝힌 등

최종수 신부님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가까운 사찰의 큰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부근에서 양로원을 운영하시는 수녀님들과 함께 큰스님 방에서 차와 다과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과를 나누던 중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극진히 모시는 것을 보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위해 그렇게 헌신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큰 희망을 보았습니다. 수녀님들의 삶이 바로 세상을 밝히는 사랑의 연등입니다.” 

다식과 여러 가지의 떡을 큰스님의 덕담과 함께 맛있게 먹었습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깔깔거리는 수녀님들과 환한 웃음꽃밭을 만들었습니다. 

큰스님과 함께 배웅을 나온 마당에 오색연등이 별처럼 반짝입니다. 

먼저 가시는 수녀님들을 입구까지 배웅합니다. 입구에 밝힌 연등이 세상과 마음을 밝힙니다. ‘미운 이에게 용서의 등’, 

‘고마운 이에게 감사의 등’, ‘착한 이에게 축복의 등’, ‘소외 받는 이들에게 관심의 등’, ‘북한 동포들에게 통일의 등.’ 

‘빈자의 등이 꺼지지 않는다’는 큰스님의 말씀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어두운 곳에 등불을 밝히다보면 우리가 밝힌 삶의 등만큼 하느님께 그 갚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유재훈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끊어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생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본능적인 즐거움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본능적인 즐거움·재물·권력·명예·성·건강 등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평화·기쁨·깨끗함을 동시에 모두 누리려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본능에 따라 살려는 나’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결단을 촉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만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된다고 하자 펄쩍 뛰며 안 된다고 말립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베드로를 꾸짖고 계십니다. 베드로도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 나’와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과 영생을 보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지난 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을 가리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기초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고, 맺고 푸는 권한까지도 주셨다.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그를 그토록 축복받은 사람이 되게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원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단란하게 살던 어부였다. 풍족한 생활은 못했을지 몰라도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부인도 있었고 아마 자식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별다른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고 말씀하시어 그 말씀에 따랐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베드로는 겁이 나서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고 베드로를 부르셨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그렇게 많이 잡은 고기도, 그물도, 배도 버리고, 아버지와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말이 그렇지 직업을 바꾼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평생 해왔던 직업을 버린다는 것은 어렵다. 나아가 가족까지 버린다는 것은 더욱 큰 아픔이다. 누가 가정을 버리겠는가! 오죽하면 가정을 버리겠는가! 가정을 버릴 만한 중대한 사연이 없으면 가정을 버릴 사람은 없다. 그런데 베드로는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배도, 그물도, 가정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았다.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는 힘과 원동력을 주님으로부터 발견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삶의 희망이며 꿈이요, 모든 것이었다. 그는 그처럼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모든 것을 건 예수님께서 수난당하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자신의 꿈과 인생이 예수님께 달려 있는데, 그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고 말씀하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지 않겠는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산헤드린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다. 원로는 열두 지파 가운데에서 재덕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행정 지도자들이며, 대사제는 솔로몬 시대의 사제 사독(1열왕 2,35)의 후예들로서 사두가이파 사람에 속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였으며, 율법학자는 율법을 보존하고 백성의 종교교육을 담당했던 무리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대변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계 전체가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것을 뜻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약에서부터 약속된 이스라엘의 구세주라고 믿었는데, 그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로부터 배척을 받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다고 하니 어찌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결코 안 된다고 누차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신다. 주님께서는 지난 주 복음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니 이제 사탄이라고 꾸짖으신다. 사탄의 도구가 되었고,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고 꾸짖으신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사탄이란 하느님을 거스르고 하느님을 대적하려는 악한 존재이다. 사탄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악한 영적 존재이다. 사탄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장애물이며,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을 생각한다. 돌려 말하면,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곧 사탄의 하수인이 된 것이라는 말씀과 같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런 사탄의 하수인이 되었다고 꾸짖으신다.


하와가 처음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동산 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으려고 그녀는 그 열매를 만지지도 않을 결심을 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하자 그녀의 마음이 달라진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본모습인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탄의 말에 넘어가 그 열매를 바라보니 이제 그 열매가 보기에도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그 열매를 따먹었다. 그것이 곧 원죄이다. 죄란 이처럼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르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 곧 죄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9-11)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그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니 사람은 좋은 것을 받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대가까지 치르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하와와 아담이 얻은 것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 앞을 가린 것밖에 없다. 오히려 그들은 온갖 고통을 겪게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좋은 생각이며, 좋은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죄이며,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베드로?입장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이며 주이신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어떻게 방치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입장에서는 말리는 것이 지당하다. 우리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하느님의 뜻과 일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그것이 바로 사탄의 하수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일, 즉 하느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대로 예수님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사람의 일, 스승이며 주이신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만 집착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을 모르신 것이 아니다. 다만 베드로도 앞으로 당신 제자로서 걸어야 할 고난의 길을 준비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다.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께 온전히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 고집을 버려야 한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곧 자신을 버리는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한다. 이웃과의 다툼이나 분쟁도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불평과 원망도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자기에게서 비롯된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자기를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자기를 버리면 하느님께서 온전히 모두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이다.


나아가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다. 때문에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만이 아니라 부활의 상징이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수난과 죽음처럼 생각되지만 부활과 영생의 길이며 영광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이 세상에서 십자가가 죽음이라고 느껴질지라도, 결구 십자가는 부활과 영생의 보증이므로 자신의 십자가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고 이끄시고 격려하시는 것이다.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따르거나 이따금씩 주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주님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초대의 말씀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이지만, 그의 믿음은 실로 미흡하기 그지없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을 한 단계 더 성숙시키시기 위하여 그를 사탄의 도구며 장애물이라고 꾸짖으시고, 그에게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셨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사람의 뜻과 일을 생각하기보다 하느님의 뜻과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을 받는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을 보는 사람들이다.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오늘 그러한 참된 신앙인이 되기로 다시 한 번 결심하고, 주님께 나아가자.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1요한 2,17)




열성적인 신앙과 인간적 욕망

송봉모 신부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나서,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겪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예고 앞에서 베드로가 심하게 반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향해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꾸지람 앞에서 머물러 보고 싶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이 꾸지람은 베드로는 물론 모든 제자들을 향한 꾸지람입니다. 이 점은 마르코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기 전에 먼저 다른 제자들을 둘러보셨던 것입니다(마르 8,33 참조). 


열성적인 신앙과 인간적 욕망으로 갈라져 있는 베드로의 이중적인 모습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했던 말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22절)는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신해서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 목적만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주님이 우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할 일을 정해 주기보다는 우리가 주님에게 할 일을 정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다음과 같은 성가가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우리가 입으로 이 성가를 부르면서 우리 몸과 마음도 이 성가를 부르고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입으로만 이 성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양손은 재물을 잔뜩 움켜쥐고 있고, 입으로는 예수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마음은 세상 온갖 명예와 인간적 정념(情念)에 붙들려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베드로처럼 자기 내면에 있는 어떤 이해나 욕망을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분명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섭리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예언자 요나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 때 요빠 항구에서 배 한 척을 발견합니다. 막 출항하려는 배를 보면서 만약에 요나가 하느님 섭리로서 그 배를 타고 도망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기 식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사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말립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서는 일어난 과거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사실만 보도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당신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참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죽는 인간은 자기 죽음 후의 일을 모릅니다. 인간 체험에 죽음은 의심과 절망이 뒤섞인 심연으로 빠져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게쎄마니에서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기도하셨다고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과연 알고 계셨다면, 이 기도들에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말린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승이 유대교 실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스승에 대한 베드로의 충직함에 감동하고 감사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면서 당신에게 장애물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가혹한 꾸짖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교회의 믿음을 수록한 문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교회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실천합니다. 그들이 복음서들을 집필할 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기억과 믿음과 실천을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미 어떤 실천을 하고 있었고,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실천하는 바를 그들의 복음서 이야기들 안에 담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피하다가 잡혀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도달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쳤고, 그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베푸셨습니다. 이 해석이 반영되어 각 복음서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리라는 예고를 세 번이나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스승을 말리자 예수님이 보이시는 격한 반응도 사실 보도이기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반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스스로를 내어 주는 데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그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스승에 대한 인간의 정리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시니까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제자의 당연한 생각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신앙인이 읽어야 하는 하느님의 일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철이 든다는 것은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것은 자기의 미래를 위한 대책도 자기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젊을 때 공부하여 자격증도 따고, 수입이 있으면 저축도 하며,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자기의 미래를 자기 힘으로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일입니다. 이런 생활 태도에 익숙한 우리는 신앙도 자기 한 사람의 미래를 보장하는 대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리의 선교사들이 잘 외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도 각자 자기 미래를 위한 대책을 세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이라는 미래를 쟁취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불행한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가르치신 하느님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한 대책을 세우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를 중심에 둔 우리의 좁은 시야를 버리고,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넓은 시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 목숨을 잃는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한 사람이 배부르고, 내 한 사람이 편안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배고픈 사람, 고통스런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없애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넓은 시야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되기 위한 호신술(護身術)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기적적 혜택을 얻어서 자기 한 사람 잘되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비록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자비와 베푸심을 자기 주변에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강요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또 자기 능력만큼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하고 나서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라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

방선도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주님이시라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분. 그분은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사셨기에 누구보다도 더 사람의 본성을 잘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명예, 권력과 사랑, 세속적인 쾌락과 행복이 있음을 주님께서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분은 제자들 앞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수많은 세속적 가치를 쫓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겁니다.


세상에 만연한 세속적 가치들보다 더 귀하디 귀한 그 무엇이 있음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말씀만이 아니라 행위로도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그 분께서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주고자 하신 그 고귀한 것을 베드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믿고 따르던 스승의 목숨과 명예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겠지요. 저라도 그 상황이라면 주님을 말렸을 겁니다. 스승의 목숨과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제자의 마음 그리고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바쳐서라도 가장 고귀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스승의 마음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지키고자 그 가시는 길을 말렸는데도 그 때문에 심한 꾸중을 듣습니다. 


베드로보다 못한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서글픕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소중한 한 가지, 하느님의 일,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그 길을 알면서도 사람의 일에 여전히 매여 있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하느님의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자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어느새 사람의 일에 마음이 매여 있고 세속적 가치를 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단호히 당신의 길을 가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아무리 붙들고 말려도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그 고난의 길을 향해 가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은 참된 스승이십니다.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들도, 사도들도, 성모님도, 주님마저도 자신을 버리고 세속적인 가치들을 뒤로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쫓아서 가신 그 고난의 길,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임을 가슴깊이 새기고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제2의 그리스도로서 살아내고 싶습니다. 


이제 사제 생활 만 4년이 지났는데 처음의 그 마음이 무디어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 자신을 가다듬고자 이제 또 버리고 비워야 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유영봉 신부님

초 점 :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이 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그런 격이었다. 베드로는 군림하는 영광의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길을 가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십자가, 거기에 구원이 있음을 깨닫자. 


1. 예수님과 베드로의 동상이몽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정체를 옳게 본 것이었다.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 16,17)고 하시며 기특하게 여기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 안됩니다."(마태 16,22)하고 펄쩍 뛴다. 베드로가 기대한 메시아는 저 지긋지긋한 로마 군사들을 싹 쓸어버리고 대권을 쥐고 그 옛날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만인 위에 군림할 영광의 메시아였다. 그렇게만 되면 자신도 한자리 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택한 메시아의 길은 율법학자들이 한번도 메시아를 뜻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고통받는 야훼 종' 의 길이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내놓는 분" ,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이사 53,4) 고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셨던 바로 그 메시아의 길이었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깊이 알아들은 수제자를 얻은 줄 알았던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막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크게 야단치셨다.


2. 십자가에 매달리는 메시아.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수치와 모독의 상징이다. 십자가형을 받고 죽는 것, 그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며 그런 자들은 인간 쓰레기에 속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며 대망 했던 메시아가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된 바로 그 사람이라니! 메시아에 대한 모독도 보통 모독이 아니다. 경건한 유다인들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권능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영광 중에 오시는 메시아를 기대하던 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큰 배신이며 참을 수 없는 허탈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경건한 바리사이였던 사울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메시아라고 외치는 추종자들을 잡아들이고 처단하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사도 8,3). 그러나 자신이 그토록 박해했던 그 사형수 예수께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자신에게 발현하여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하신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개종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도 바오로는 결국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1,23) 하고 말할 수 있었다. 


3.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포한 구원.

현대인들은 "힘들고 어려운 것은 모두 나쁘고 무가치한 것" 이고, "쉽고 편한 것은 바로 좋은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쉽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고통(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당신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서야 비로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런 잔인한 하느님을 나는 믿을 수 없다" 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잘못이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듯이, 예수님은 예상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스라엘 민중들이 야훼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하늘나라를 차지할 주인공임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당신께 몰려오는 모든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뜨거운 사랑으로 어루만지며 치유하는 분으로, 야훼의 이름을 팔면서 살아가는 그 당시 위선적인 기득권자들을 '독사의 종류'라고 몰아세우는 분으로 사셨다. 그래서 빛을 싫어하는 어둠의 세력은 예수님을 없애야만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당신이 아버지께 받은 사명으로 받아들이셨다. 그 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잘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충실함으로써, 당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그 길을 택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순명의 결과요, 소외된 민중에 대한 사랑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제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고통과 십자가는 바로 구원으로 통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 나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기 위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모든 고통은 참 생명을 주는 십자가임을 매일의 삶 안에서 깨닫도록 하자. 


우리는 가장으로, 어머니로, 아빠로, 아내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신앙인으로 나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많은 고통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한 고통, 이것이 이 세상을 떠 바치며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몫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십자가를 함께, 대신 져주는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교회 안과 밖에서도 같은 얼굴로”

김영수 신부님

오래전에 방영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두 얼굴의 사나이-헐크」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본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인 주인공이 화가 나거나 심한 자극을 받으면 온몸이 부풀어 커지고 옷이 찢겨지고 얼굴은 괴물처럼 변하고 괴력을 발휘해서 위기를 탈출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샤프츠버리가 『한쪽 얼굴로는 미소를 억지로 짓고, 다른 쪽 얼굴로는 노여움을 드러내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얼굴』로 표현한 로마신화의 야누스도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만 두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낮에 쓰는 가면이 다르고 밤에 쓰는 가면이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얼굴을 하고 교회 바깥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바꾸어 쓰고 생활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얼굴의 사나이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랑받는 제자 중의 한사람이었고, 예수님께서 중요한 기적을 베푸시는 자리에 항상 함께 했습니다. 이전 복음에서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올바로 대답했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야무지고 열정에 찬 베드로의 모습의 이면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쯤 되면 알아들을 줄 알고 십자가의 수난을 이야기 했더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고 나섭니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 안에 머물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준엄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베드로인데 어느 때는 예수님의 칭찬과 함께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았고 어느 때는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요, 악의 상징인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같은 사람이 「베드로」(반석)라고 불려 지기도 하고 또 「사탄」(분열시키는 자)이라고 불리기도 할 수 있는가?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은 천사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사실은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비극이 있다』고 말합니다. 짐승처럼, 악마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진실하고 참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데 살아온 결과를 뒤돌아보면 때로는 짐승처럼 내 만족만을 채우려, 내 욕심만을 채우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을 깊이 체험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 7,15).


신앙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을 일치시켜 나가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할 때에는 아무리 힘든 고통도, 어렵고 두려운 일도 그 결과가 평화로우며 축복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만으로 살아갈 때에는 아무리 떠들썩하고, 재미난 삶도 그 결과가 어수선하고 불만스러워서 또 다른 욕망의 늪 속에서 빠져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을 일치 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고 내 뜻만을 고집하다가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삶이어야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루의 삶 속에서 잠깐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머물러 내 모습을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내 삶이 하느님을 향해 방향 지워졌는지, 아니면 내 욕망만을 따라 살아가는지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하는 자리에 신앙이 자라나고 은총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이며,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 2).




십자가가 은총임을 깨닫는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며칠 전에 한 아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직 '새파란' 나이임에도 꾸부정한 어깨에 잔뜩 주눅이 들고 '삭은' 얼굴을 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듯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는 이미 두 번이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을 나온 후 '더 이상 방황은 없다'며 굳은 각오를 세웠지만, 와 닿는 현실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람들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취직하는 곳마다 뭔가 꼬여서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나오기를 밥 먹듯이 반복했답니다. 아이의 그런 모습 앞에 저는 너무도 안타까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녀석이 왜 이렇게 힘이 없냐고 가슴 딱 펴고 힘내라고 잘 될 거라며 어깨를 두드려줬지만, 아이는 피식 웃기만 했습니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해서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세상 어딜 가도 절 받아주는 데가 없어요.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는 게 오히려 편할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일자리든, 있을 만한 곳이든 조만간 알아봐주겠노라고 타일러 겨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나 커보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아이가 지고 있는 십자가 무게를 덜어줄 수 있겠는지, 며칠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에 수반되는 좌절, 고독과 직면하게 됩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병고, 실직, 가정파탄, 우울증, 신경과민, 거듭되는 실패…. 그 끝도 없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의문 앞에 서게 되겠지요.

'진정 하느님이 계시긴 하는 걸까?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데, 어찌 이렇게도 철저하게 나를 망가트릴 수가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어찌 이리도 큰 십자가를 내게 보내시는가?'

때로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십자가는 난데없이, 그리고 쉼 없이 다가오는 것입니까? 피할 방도는 없습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까?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 길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 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런 날과 마주치겠지요. 수많은 지난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가슴 치게 되는 날이. 그 혹독했던 고통이야말로 그분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날카로운 비수 같아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그때 말 한마디야말로 가장 효과가 탁월한 내 인생의 보약이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던 그 지루했던 일상의 굴레들이 행복의 원천이요 도구였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시시해 보이는 순간순간이 꽃봉오리였음을 깨닫는 순간. 결국 십자가는 은총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온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 순간은 우리 삶과 신앙이 크게 한 단계 비약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정녕 깨달음의 순간이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버들 피리

심한구 신부님

제가 갖고 있는 어릴 적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버들피리에 대한 추억입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보리피리나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곤 했습니다. 물오른 버드나무를 칼로 잘라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버드나무를 비틀면 속나무와 껍질이 분리됩니다. 적당한 거리로 칼로 구멍을 내고 한쪽 끝의 껍질을 적당히 긁어내지요. 그리고 껍질을 나무에서 조심스럽게 빼내면 훌륭한 피리가 됩니다. 구멍 크기와 길이가 제각각이어서 도레미솔의 정확한 음색이 나질 않아도 적당하게 배합하여 불어대면 아주 신이 나고 즐거워지지요. 버들피리를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 불 때면 더욱 재미있고 신이 났습니다. 들판을 걸으며 제각각 신나게 피리를 불어댔습니다. 먼저 소리가 나는 것이 신이 나서 좋았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친구들이 자기 멋대로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재미난 화음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경제적으로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아주 낮게 평가를 합니다. "내가 이것 밖에 못되나."하고 자책하기도 하고, 자신의 못난 부분만을 확대시키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 자신을 그렇게 낳아준 부모나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피정 중에 면담이 있었는데 한 피정자가 "자신은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서품을 앞둔 사람이었는데 그 뉘앙스가 하느님께 초점을 둔 고백이 아닌 자신에게 초점을 둔 고백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이러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대나무 파이프와 황금 파이프, 보석으로 장식된 파이프, 프라스틱 파이프가 있다고 합시다. 이러한 파이프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대나무 파이프나 황금 파이프,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장식된 파이프나 프라스틱 파이프 이들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 파이프가 하느님이라는 바다와 연결 되어 있다면 모두가 같은 물을 세상에 흘러 보냅니다. 거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피정자는 얼굴이 활짝 펴졌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마음에 내 전존재를 박고 그분 진리의 말씀이 흘러나오도록, 그분 사랑이 흘러나오도록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이 아닐까요?


어릴 적 버들피리의 추억을 다시 떠 올립니다. 굵은 버들피리는 굵고 낮은 소리를 냅니다. 가는 피리 소리는 가늘고 높은 소리를 냅니다. 굵고 가는 피리소리가 어울려 함께 소리를 내면 더욱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 푸른 들판을 더 빛나게 만들었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두 개의 태양

차혁준 신부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착한면이 있는가하면 나쁜면도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빛과 그림자와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해도 맞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항상 착한 사람도 없고 항상 못된 사람도 없다. 어떻게보면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못된 사람도 선한구석이 있고, 아무리 착한 사람도 실수하고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인간은 항상 의인도 항상 죄인도 없다. 왔다갔다 하는 존재이다. 단지 어느쪽에 더 치우쳐 있느냐가 문제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잘못하는 부분이 고의냐 실수냐 하는 것도 따져 봐야 할 부분이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실수로 예수님께 사탄이 되고만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질만큼 예수님께 신뢰를 받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엄청난 푸대접을 받은 것일까?


엄청난 신뢰와 푸대접의 갈림길의 정점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중심으로 하느냐, 인간의 일을 중심으로 하느냐에 달렸던 것 같다.


하느님 중심의 삶 :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시선으로 맞추고 만들어 가는 삶. / 인간 중심의 삶 :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을 더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 인간의 시선에서 머무는 삶.


물론 인간 중심의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문제점은 없다. 단지 하느님 중심이냐, 인간 중심이냐의 갈림길의 기로에 서있을때가 문제인 것이다.


나는 군종신부로 4년을 살았다. 군종신부로 사는동안 좋은 점도 있었으나 못내 아쉬운 점도 있었다. 아쉬운점 중에 하나는 군인 신자에게는 태양이 2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부대의 지휘관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안에서의 하느님이다. 그들이 이 두개의 태양 안에서 시소개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사회생활을 포기하라는것은 아니다. 단지 갈림길에 서있을 때 어느 길을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 갈림길에서 인간중심으로 방향을 틀었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하느님 중심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나를 버리는 것, 내 십자가를 지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제 목숨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중심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도 이런 갈림길의 연속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느님의 길이냐, 사람의 길이냐, 우리가 만약 이 갈림길의 기로에 서있다면 어느길을 선택하겠는가?




그냥 콱! 죽자!

김종길 신부님

얼마 전 미사 때 제가 사고를 하나 쳤습니다. 강론 때 했던 말 한마디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경위는 대충 이렇습니다.


그 날 복음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마귀에 들려 고생하는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돌보라고 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인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는 것은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이야기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장한 믿음을 칭찬하시며 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람의 자존심에 대한 강론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물론 자기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칫 자존심만 내세우다 보면 보통 인간관계는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마저도 깨질 수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이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이 자존심이라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려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도 자기를 스스로 강아지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 앞에서 완전히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을 잘 죽일 때 사람은 엄청난 자유와 해방을 맛 볼 뿐만 아니라 비어있는 자기 마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도 만날 수 있게 된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잘 죽이자.' 대충 이런 내용의 강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았던 것 같은데 그 다음에 한마디 붙인 것이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를 죽이는 일은 참 어렵다. 누구나 자기를 죽일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강아지 취급하신 것도 어쩌면 그렇게 자기를 잘 죽이지 못하는 인간을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신 것일 지도 모른다. 앞으로 혹 내가 자존심 상하는 어떤 일이 생기거든,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시기 위해 내 마음을 비우기 위한 작업을 하신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잘 죽이자.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면 절대로 자기를 못 죽인다. 다음 일을 다 계산해 놓고 죽는 것은 그냥 죽는 척하는 것이지 정말 잘 죽는 것은 아니다. 그냥 콱! 죽자!'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냥 콱! 죽자!'... 미사가 끝나고 성당 밖에서 교우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젊은 교우 한 분이 오셔서 조용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늘 신부님 말씀이 자칫 이야기거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귀가 어두우시거나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께서 앞뒤 이야기는 생각 못하시고 '그냥 콱 죽자!'라는 말씀만 들으시고 서운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설마했습니다. 아무리 귀가 어두우시더라도 그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쯤을 아시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저기 뒤에서 서성거리시던 할머니 두 분께서 저한테 오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아이고~~, 신부님이 우리 할망구들은 그냥 콱! 죽어삐라카네예~~... 우째 죽어삐까예? 목메달고 죽어삐까예!?" "아니요 아니요 할머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그제서야 그 남자 교우분 말씀처럼 진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게 그런 내용이 아니라고 진땀 빼면서 다시 설명을 드릴려고 하는데, 그 할머니께서 한 말씀하십니다. "아이구~~ 우리 신부님 진땀 빼시겠네... 무신 말씸인지 다 압니더. 좋은 말씸 감사합니더." 그러시고는 두분 할머니께서 다정히 성당 밖으로 나가시면서 한 말씀 더 하시는 거였습니다. "아이고~ 재미있어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자기를 잘 죽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잘 죽이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당신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반드시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자기를 죽이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탄이자 당신의 장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당장은 자기를 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예수님을 더욱 더 잘 따를 수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아멘. "할아버지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아름다운 산행”

김부호 신부님

몇 년 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하며 알게 된 잊지 못할 아저씨 한 분이 있습니다. 천왕봉 아래 장터목 산장에서 그분을 처음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하고 근처 너럭바위로 가면서 저는 그분이 몸의 절반을 쓰지 못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주 산행이 쉽지 않은 것을 알기에 저는 먼저 아저씨께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종주하시는 데 며칠 걸리셨어요…?” “다섯 밤을 잤습니다.” “많이 힘드셨을텐데 어떻게…” 아저씨는 조심스레 던지는 저의 질문과 입속에서 맴돌고 있는 질문들을 모두 알아들으셨다는 듯이 당신의 산행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사고로 장애를 얻으셨고, 지리산은 그분이 태어나서 처음 오른 산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평소에는 다정했던 아들이 산행하기 며칠 전 격앙된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놀림 받은 이야기를 했답니다. “아버지는 다리도 절고 손도 쓰지 못하는 병신이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래서 창피하다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은 아저씨께서는 비록 반신불수의 몸일지라도 아들을 위해 아버지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험한 지리산 종주 산행을 결심했고 이튿날 길을 떠났습니다. 등산용 신발도 아무런 산행 장비도 없었고, 무엇을 챙겨가야 하는지도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산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산행을 하며 힘에 겨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아저씨는 아들만을 생각하며 걸었다 하셨습니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어느새 눈은 젖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아들에게 산행 이야기를 해 주며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실 거라며 웃으셨습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잘 모르면서 상처를 주었던 철부지 아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내내 저는 그분을 생각했고 또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살아날 것임을 알려 주셨다.(마태 16,21)


아들을 위해 산에 오르신 아저씨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도 모른 채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들을 위해 오늘도 십자가를 수락하시고 죽음의 언덕을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심으로써 우리들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하루하루 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당신처럼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몸소 보여주시는 십자가의 길이 바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들은 당신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뜻을 알아주는 우리들로 말미암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6)




우리도 오늘 베드로처럼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박승원 신부님

성서의 메시아사상은 언젠가 메시아가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고 만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구원)의 실체는? 돈·권력·지식, 아니면 예수인가.


제1독서는 유다 히즈키야 왕 때 시종장 셉나가 아시리아의 침공을 막기 위해 친이집트 정책을 꾀하자, 이사야는 이 정책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반대하면서 셉나의 퇴진을 요구한다. 셉나가 시종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엘리아킴이 다윗왕가를 책임지는 시종장으로 발탁되면서 ‘다윗가문의 열쇠’를 받게 된다. 문을 잠그고 여는 기능을 가진 열쇠를 준다는 것은 전권(全權)을 맡긴다는 신임이다. 이 ‘다윗 가문의 열쇠’는 후에 메시아사상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오늘 본문에서 셉나와 엘리아킴이 주는 교훈은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일지라도 그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내치신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천사들·선택된 백성·충실한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메시아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특히 하느님의 선택과 위임받은 사명에 근거해서 하느님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뜻한다. 초대교회는 이 개념을 예수의 인격과 특성을 강조하는 데에 적용시켰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유일하고 특별한 부자관계를 가진 분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셨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16절) 베드로의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이시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전도 여행에 줄곧 함께 하면서 예수의 삶에 동참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그가 모든 이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 때문에 하나씩 예수의 곁을 떠나고 있을 때, 그가 예수께 이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고백은 예수의 삶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선택했다는 선언으로, ‘당신을 따르는 길’에 위배되는 것에 대한 일체의 거부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실현으로 표현되는 삶의 투신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성세성사를 통해서 엘리아킴이나 사도 베드로처럼 하늘나라의 열쇠를 위임받은 작은 그리스도들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은 우리가 그분의 삶을 철저히 추종하면, 우리도 ‘그분이 도달한 죽음을 넘어서는 참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오늘 베드로처럼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돈과 권력, 명예, 쾌락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사회에서 오늘 나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지금 나의 삶, 나의 마음 한 가운데 돈과 권력, 명예, 쾌락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지금 예수님은 나의 메시아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날 셉나나 엘리아킴처럼 뿌리째 뽑혀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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