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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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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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바오로 편이다, 아폴로 편이다.” 하고 다투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는데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와 병자들을 고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우리가 사는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 첫머리에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십니다. 시몬의 집은 신자의 집, 곧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집에도 때때로 분열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곳 또한 저마다의 욕망이 꿈틀대는 작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이 납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듯이, 교회도 병마와 싸우는 이들이 사는 곳으로 열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열병에 시달리는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신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기도의 집, 다시 말해 기도로 악에 맞서 승리하는 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열병을 낫게 하십니다. 병이 낫자 시몬의 장모가 곧바로 일어납니다. 그러고는 바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봉사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봉사의 집이고 섬김의 집입니다. 우리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봉사’(섬김)는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신약 성경은 “섬김”이라는 말로 구체적인 형제애를 지향합니다(1요한 3,16-18 참조). 예수님께서는 몸소 하느님과 형제들의 종으로 사셨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 때에,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우리가 예수님께 얻은 구원과 자유는 마귀들이 하는 것처럼 입으로만 하는 단순한 믿음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가난하고 약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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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가시고 질병이 사라지는 일은 기적이지요. 삶이 힘들 때마다 성경 안의 기적이 지금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우리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럼에도 성경의 기적은 글 속의 이야기일 뿐 우리의 현실 삶과는 연관이 없는 듯 건성으로 읽히고 곧장 잊혀집니다.
다시 묻습니다. 기적은 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다시 곰곰이 따져 봅니다.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 갖가지 질병을 앓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입니다. 오직 마귀들만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사람들을 서로 멀어지게 합니다.
가까이 가는 이와 멀어지는 이 사이에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기적은 멀리서 가까운 곳으로 모여든 이들이 있어야 일어나는 이른바 연대의 사건입니다. 멀어지고 외면한, 그래서 입을 다물고 떨어져 나가는 곳에는 멸망과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에 가까이 다가가셨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은 풍성히 베풀어집니다. 멀리서 바라는 기적은 요행이고 우연일 테지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신기하겠지만, 기적이 제 삶과 인연을 맺을 일은 없을 테지요.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와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맺고 살아갑니다. 기적은 지금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나와 함께 있는 그 자체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지금의 삶에 함께하는 이들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이에게는 매일의 삶이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나의 삶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고맙게 사랑스럽게 함께하다니요. 이렇게나 기쁜 소식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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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는 많은 이가 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곳까지 찾아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에 응대하지 않으시고 길을 떠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다 보면 복음 선포의 사명보다 편안한 신앙생활을 바라게 됩니다. 신자의 사명과 책임은 외면한 채, 그저 복을 받기만 바라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온갖 병이 치유되고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이기적인 신앙심이 생기게 되어 자신만, 자기 집단만 잘되도록 기도하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은 없어지게 됩니다. 이 사회가 어떻게 되든지, 옆 사람이 굶든지 아프든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되지요.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이런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늘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청하는 기도의 자세를 정화해 나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고 여겨질 때, ‘주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그 아픔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웃을 관심 있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 말씀처럼 우리도 안정된 현실에만 머무르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산하려고 늘 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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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신심 깊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이지요.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 주자 즉시 시중을 들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감사의 예를 다하는 자세이지요.
당연한 행동이지만 실생활에서 간과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주님께 절박하게 매달리지요. 하지만 막상 그 일이 해결되면 그만 하느님께 소홀해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하느님께 받은 것이 있으면, 하느님을 위해 또 다른 봉사를 해야만 합니다.
또한, 오늘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활동을 마치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활동으로 기도를 대신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활동도 기도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와 활동을 병행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머무르고 싶은 점은, 예수님께서 또다시 길을 떠나셨다는 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온갖 병을 다 고쳐 주셨기에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머무르신다면 온갖 대우를 다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새로이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우리도 늘 새로운 임무를 받습니다. 한 가지 일을 끝내고 이제 좀 쉬려 하면 주님께서는 또 다른 일을 맡기지 않으십니까? 피하고 싶기만 하지요. 하지만 새로운 일을 늘 고맙게,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결국, 나 자신이 영적으로 더욱 튼튼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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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자신의 60회 생일을 맞아 잔치 대신에 지인들과 함께 저명한 역사학자를 초대해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살펴보는 강의를 듣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십 년 가까이 독일을 이끌면서 유연성과 포용력 있는 태도와 균형 잡힌 정책으로 자국과 국제 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젊은 물리학자로서 정치에 입문했을 때 그녀가 이처럼 탁월한 정치력의 지도자로 성장하리라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지도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도 겸허한 마음과 깨어 있는 정신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늘 배우려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겠습니다. 신앙은 깨달음을 통해 넓고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성인들의 삶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참모습을 배웁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서 얻는 중요한 통찰은 인생에 대한 전체적 태도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인생을 무의식중에 ‘문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다가 지쳐 갑니다. 신앙과 영적 여정 또한 단지 지속적인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여기며 성공과 실패, 업적과 좌절의 관점으로 판단합니다.
성인들은 자신의 삶을 무엇보다 ‘하느님의 신비’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신비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집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도 그 신비 안에 머물 때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의문과 아픈 상처도 함께 끌어안고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을 비롯한 교회의 여러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울 점은 그분이 자신의 일에 도취된 것이 아니라 늘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 안에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약함이 자신의 힘’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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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의학 지식을 앞세워 질병과 믿음을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개입하시면 ‘못 고칠 병’은 없는 것이지요. 다만 그러한 청을 ‘감히’ 못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심하시고 병자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질병도 주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의 치유는 ‘그분의 다스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질병을 그분의 손길로 보게 합니다. 병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병이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병을 이기게’ 되는 것이지요.
병을 친구라 생각하면 인생의 또 ‘다른 불가사의’와 우정을 맺는 것이 됩니다. 그 우정을 주님께서 주관하신다고 여기면 마음은 달라집니다. 질병을 은총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주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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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수많은 환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당신께 그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교회에서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의 치유 기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증언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까요? 진정으로 그들의 병이 나았을까요? 분명 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신앙으로 병이 낫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든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시는 예수님과 지금 우리가 성체를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분이십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셨다면 성체의 예수님께서도 병을 낫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났다고 해서 그분의 치유 능력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고자 아픈 사람을 낫게 하셨습니다.
의학적인 지식만을 앞세워 질병과 믿음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신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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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견이 맞는 사람들끼리 한패가 되어 파벌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견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병자를 돌보아 주고 악의 세력을 쫓아내며, 바로 그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서로 취향이나 의견이 달라도,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사명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마흔 넘은 사람들이 하는 많은 걱정 중의 하나가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젊었을 때는 전혀 없었던 것 같은데 중년이 되면서 기억나지 않는 것이 왜 이렇게 많아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혹시 인지 장애, 소위 ‘치매’가 일찍 온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입니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정확한 정보가 기억나지 않아서 혀끝에서 맴돌다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설단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면서 걱정합니다. 만약 걱정된다면 이 사람의 일화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이 사람은 열차표를 잃어버려서 허둥지둥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열차표를 잃어버렸다면 다시 사거나 발권을 다시 받으면 되겠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반드시 열차표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를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건망증이 심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건망증이 심했던 이 유명인은 누구일까요?
최고의 천재라고 불렸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입니다. 일상 안에서 잊어버리는 것이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에 더욱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속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보다 중요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닙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듭니다. 그들에게 대접받으면서 편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머무시면서 아쉬운 사람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고장을 떠나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편하고 쉬운 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것보다 하느님 것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는 사랑보다 내가 베푸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오늘 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협력자이고, 하느님의 밭, 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생텍쥐페리).
인지 장애증
제 아버지는 인지 장애증 환자입니다. ‘인지 장애증’라고 하니까 조금 낯설지요? ‘치매 환자’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몇 차례의 수술 이후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기셨습니다. 지난번 면회 때에는 저를 보고서도 ‘누구지?’라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때마다 하시는 말씀은 “몰라~”입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단어일 것입니다.
인지 장애증을 앓는 아버지를 보며 안타까움을 갖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 외의 다른 환경에서는 인지 장애증 환자를 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인지 장애증 환자가 없을까요? 국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10%가 인지 장애증 환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나기 힘든 것은 그들이 모두 전국 5,287곳의 노인요양시설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요양원 숫자만 늘리면 될까요? 우선 ‘치매’라는 말부터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치매라는 말의 뜻은 한자로 ‘어리석고 미련하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치매보다 ‘인지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인지증 환자와 함께 살아가는 교육을 계속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요양원 숫자만 늘리는 것이 답이 아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살아야 하는 길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불편하다고, 힘들다고 공동체에서 쫓아내서 따로 살게 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며 자녀에게 순종을 기대한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 사실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 그 부족한 사랑을 내가 만나는 사람, 특히 새로 이룬 가정의 가족들을 통해 채우려 합니다. 특히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통해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용당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모기처럼 자기 피를 빨아먹고 있는데 그 모기가 엄마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이용당한 자녀는 커서도 또 다른 모기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 안의 악한 본성을 명확히 지적해주고 그것과 싸우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녀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그 본성을 지적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심리 상담가 박우란씨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에서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하루는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이대로 가면 도무지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찾아왔습니다. 항상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충분히 잘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하루를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느 선을 넘어갈 수 없는데 그 선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여학생이 그토록 힘들어하는 데는 엄마의 태도에 영향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놓는 분위기로 말하지만, 딸은 숨이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 안에 모호함이 있었습니다. 엄마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 때문에 딸은 더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넌 그걸 하고 싶니? 꼭 하고 싶다면 해. 근데 그걸 진짜 원하기는 하는 거야?”
어느 날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정확히 좀 말해줘.”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난 그저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그게 전부야.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돼.”
남들이 하는 만큼은 어느 만큼일까요? 명확한 선을 지어주지 않으니 아이는 답답하기만 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을 따라주고 싶습니다.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주는 밥을 먹고 그것이 고마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여기까지 큰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에게 명확한 선을 그어주고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도 자신 안의 선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이 명확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시달릴 때, 예수님께서는 ‘열’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을 꾸짖지 않고 열을 꾸짖었습니다. 사람 안에다 선을 긋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 명확히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아를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또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구분하셔도 양심의 가책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자신 안에서 그렇게 선을 긋고 사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신과 자아의 명확한 구분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자녀도 그렇게 됩니다.
‘고바라 스즈꼬’라는 사람의 『숨은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즈꼬는 부모로부터 ‘예!’라며 순종하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요즘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순종하는 자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주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면 주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선을 긋지 못하면 자녀에게도 그어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기에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 자신 안에서 먼저 구분하지 못하면 자녀에게서도 선을 그어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먼저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중에 강의를 듣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주원준 박사님의 ‘길가메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춘향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듯이, 구약성서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려면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는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이집트’의 문화와 역사를 의미합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7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신약성서의 세계보다는 2,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의 무대가 되는 세상보다도 1,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자랑하는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문자로 남겨진 작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고전인 논어, 맹자, 장자, 노자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학자들의 땀과 노력으로 우리는 고대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름휴가에 시간이 있다면 4,000년 전의 세상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마 그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행성의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작품의 내용은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죽음의 강 건너에는 대홍수를 피해서 살아남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노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인들에게 불로초를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버렸고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길가메시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노인의 지혜와 경륜이 젊음을 만나는 것입니다. 불로초의 모습은 ‘가시나무’였다고 합니다. 이 가시나무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떨기나무’가 되었고, 이 가시나무는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렸던 ‘가시관’이 되었습니다. 깨달음과 진리는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길가메시가 추구한 것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들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수메르의 뒤를 이은 아카디아의 왕 중에는 ‘사르곤’ 왕이 있었습니다. 사르곤 왕은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왕이었기에 사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르곤 왕의 어머니는 신전을 지키는 사제였습니다.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어머니는 바구니에 아이를 넣어 유프라테스 강에 흘려보냈습니다. 강 위를 떠오는 바구니는 아카디아의 공주가 발견하였고, 아이는 왕궁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구약성서는 아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를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 수용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는 다릅니다. 사르곤 왕은 스스로 높은 자가 되었고, 정복하는 왕이 되었지만 모세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었고 하느님을 높였습니다. 모세는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문화의 이야기를 수용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탈신화화라고 말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볼트만은 신약성서의 언어를 현대의 언어로 탈신화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였고, 고린토의 신자들에게도 전하였습니다.
사제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독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사제는 긍정적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 진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구름 뒤에 밝은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인 자세는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는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곳에서는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사제는 겸손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자세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아는 것은 나눈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위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있나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리하여 열 사람
열 가운데 한 사람
또 열 가운데 한 사람
그리하여 열 가운데 한 사람
누구를 만나고 있나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말 바쁜 사목일정을 소화하셨습니다. 먼저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고, 해 질 무렵까지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얹어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치유해 주셨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과 함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고을에도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가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아가면서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주고 따라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러한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명예롭게 안주하며 지내고 싶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곧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만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로서 세상에 파견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삶으로 초대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 후반부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2020. 9. 2. 수)(루카 4,38-44)
예수님은 ‘생명’이신 분이고(요한 1,4), 사람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을 많이 하신 것은, 바로 그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인도해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그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그 자체로 ‘복음 선포’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씀’으로도 이루어지고, ‘치유’로도 이루어집니다. 병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이고,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병’은 그 자체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새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병이 낫지 않고, 병 때문에 생을 마치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과 새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병자 자신보다 병자의 가족이 더 큰 고통과 절망을 겪을 때가 있는데, 그런 때에도, 가족들도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새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고통과 절망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별은 슬프지만 잠깐 동안의 이별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셔서 병이 낫고, 건강을 되찾은 경우에는,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 되고, ‘몸의 생명과 건강’보다 ‘영혼의 생명과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몸’은 이승에서 잠깐 지내는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2코린 5,1).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 덕분에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자만심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몸의 건강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무병장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날은 분명히 안식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예수님께 그 부인을 고쳐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이니 안 된다.” 라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회당이 아니라 개인의 가정집이라서 그랬을까?
루카복음 13장에,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라는 말이 나옵니다.
병을 고쳐 주는 일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단히 싫어하셨던 율법주의 입니다. 시몬의 장모는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집에 혼자 누워서 열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안식일을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병 때문에 못 지킨 것입니다. (안식일을 안 지켰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을 고쳐 주신 것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열을 꾸짖으시니” 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들’에게도 주님이 되시는 분입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40-41).”
‘해 질 무렵에’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셨다는 말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도 넓은 뜻으로는 병자 치유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항상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만 하는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세주) 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42-44).”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신 것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마르 1,35).
일 때문에 아무리 바쁜 때라도 예수님 께서는 기도를 거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고을로 가시는 것은 ‘이 고을’을 버리고 떠나시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곳,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붙들면 안 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라는 말씀은, 이 고을에서 하신 일들이, 즉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이 사실은 복음 선포였음을 나타냅니다. 아무도 주님의 복음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루카 24,47).
이제 그 일은 신앙인들의 임무입니다.
인생길 가르쳐 영원행복가족에 초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마귀들도 시대발전과 인간진화를 따라 함께 맞춰가며 발전하나 봅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대들던 어수룩한 방법에서 온라인 유혹을 활용합니다.
게임 격투 먹기 즐기기 쇼핑 과대 허위광고 해킹 등 끼어들 곳 많지요.
우리는 IT시대에 악의 유포 용납하지 말고 하늘 뜻 기준으로 사십시다.
예수님 찾아 외딴곳까지라도 따라가 하늘나라 기쁜 소식 배워야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나라 전파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하늘서 내려온 재주꾼점술가 유명인 정도로 생각하면 바보죠.
예수님은 내게 인생길 가르쳐 영원 행복가족에 초대하려고 오셨답니다.
복음을 다른 고을도 전해야 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기복의 종교는 언젠가는 타락한다. 복을 빌어주고 돈을 받는 행위 자체가 기복종교의 원인이 된다. ‘은혜입고 축복받는다’ 자기에게 청하여라. 이는 감언이설이다. 종교가 부정적이 되는 첫째가는 이유이다. 약자들을 돕는다며 약자들을 등쳐 먹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안주하기 전에 다른 고을로 떠나야 한다. 무당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세습의 이유가 모든 여건이 충족되고 편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벌써 말 잘하고 용하다고 소문나면 무당행세를 하기 시작하고 자기가 곧 신이 된다.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도 까불면 죽는다”고 뭐나 된 것처럼 함부로 말한다. 용하다는 그 사람에게 빌미붙어 사는 사람이 무리지어 생겨난다. 그 사람이 떠난다면 사람들은 가로막고 이동을 막는다. 그럴 때 일수록 파견된 자는 과감히 그 터에서 떠나야 한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2-43).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자기자신을 위해 인기몰이를 해서는 안 된다. 하루를 살아도 일용할 양식이면 족하고 복음을 위하여 모두를 버리고 비워야 한다. 사제인사이동이 있었다. 새 임지로 떠나기 위해 다 버리고 정리하고 가난한 삶의 자리로 떠났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며 또 새로운 마음으로 잘 살기를 바란다.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침묵의 시간을 보냅니까?
여러분이 만일 정말로 영적성장을 원한다면 얼마나 내가 침묵하고 있는지를 관찰해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어떠한 활동을 하든지 여러분이 행동한 동기를 자세히 조사해보아야 한다. 하루 동안 내가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많은 경우 거친 농담이든지, 잡담이든지, 아니면 험담을 하면서 자신의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했음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는 습관을 지니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의지의 힘은 굉장히 발전될 수 있다.
침묵의 이유는 이 시간동안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영적훈련을 돕게 하기 위해서이다. 침묵의 시간 없이 분주하게만 보낸다면 불필요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서거나, 인터넷의 세상으로 들어가 여러분의 정신을 허비하거나, TV중독에 걸리거나, 알코올중독에 걸리거나 하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왜 침묵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은 침묵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계신다.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여 계신다. 그분은 침묵으로서 침묵 속에 계시고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 침묵의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그 침묵의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이 쉬고 우리의 생각이 멈춘 그 자리에 침묵의 하느님, 진리의 영, 영(spirit)인 참 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홀로 계신 분이다. 홀로이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홀로이신 하느님 안에 있으려면 홀로 안에 홀로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속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다. 우리가 그 평화 속에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평화 속에서 참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은 엄청난 봉사의 삶, 섬김의 삶을 살면서도 날이 저물면 홀로이신 침묵의 아버지께로 돌아가 홀로 머물러 계셨다. 그 속에서 그분은 힘을 얻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뜻을 살아갔다. 낮 동안 우리 정신은 정신없이 이것저것을 찾아다닌다. 우리의 정신은 늘 밖으로 향하여 있다. 밖의 대상들에 마음을 두고 그 대상을 소유함으로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영적수련이란 밖으로 향했던 자기의 정신(mind)을 자신의 마음 속 깊은 동굴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돌려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낮 동안 자신의 정신(mind)이 밖으로 향하여 있다면 반드시 자신의 내부로 그 초점을 돌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위해 반드시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외적 침묵은 내적침묵으로 이어지고 내적침묵은 침묵이신 하느님께로 이어진다. 외적 침묵을 통해 자신의 마음 안에 흐르고 있는 생각들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침묵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더 나아가 생각과 생각사이의 침묵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깊은 침묵이다. 더 나아가 온전히 무심의 경지에 있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침묵의 하느님과 함께 사는 성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무심의 경지라고 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무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필요할 때 자신의 생각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잠자기 전 적어도 15~20분 정도는 묵상이나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계속해서 자신이 낮 동안 일 해왔던 내용을 꿈속에까지 끌고 가서 활동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한번 관찰해보면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자극적인 인터넷 사이트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 자게 되면 여러분은 밤새도록 비슷한 꿈을 꾸게 되고 꿈속에서도 같은 경험으로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리된 마음 안에서 잠자리에 들면 아주 깊은 잠을 자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잠자기 전 15~20분의 묵상이나 명상을 하고 나서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을 느끼며 잠에 들면 여러분은 다음 날 굉장히 가뿐한 몸과 맑은 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맑은 의식으로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훈련이다. 먼저 눈을 뜨면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는 습관을 갖도록 하라. 조금만 더 하면서 침대 속에 있으면 일어나도 더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침대에 앉도록 하라. 그리고 내 자신이 지금 살아있음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라. 하느님 현존 안에 현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몇 분이라도 체험하는 시간을 가지면 아주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세면을 하고 몸이 좋아하는 물 한잔을 마시고 사랑스럽게 천천히 몸을 움직여 성당으로 가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깊게 갖는 시간을 갖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나< 루카 4/38-4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나는 어릴 때 이 기쁜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요묘하게도 지금 아침 일어나 처음 찾아 가고 지금 제대 앞에 앉아 기도하는 베네딕도 수도원 선교사들에게 저 말리 독일 오틸이엔 수도자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 서울을 거처 원산 덕원에서 파견된 분도 수도자의 의해 전해듣고 1939년 6살 때 세례를 주신 탁 하비안 신부과 1939년 해성유치원의 지금 사수동에 거처하시는 분도 수녀원 수녀님들에게 얼마전 예비수녀로 계시며 돌보아주시고 돌아기신 수녀님을 마지막으로 기쁜 소식을 장해주신 분들은 다 돌아가시고 혼자 남아 있지만 그분들의 은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인연은 오묘하여 자게 남쪽으로 내려오시어 왜관이 자리잡은 수도자들과 신앙의 선교사들 밑에서 신앙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어 여기 살고 그 신앙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일 신기하고 오묘합니다.
기쁜 소식의 시작은 일본말로 <지지도 고도 세이래이도 마나니 요리데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름으로 아멘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믿음 희망 사랑이 오늘 아친 아침기도 시작할 때 첫 입을 여는 기도는 “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라.” 2020년 9월 2일 까지 주님으로 인하여 기쁜 마음으로 춤추고 노래하며 주님을 흠승하고 찬미들임이 얼만 좋은고 행복하고 어려서 받은 신앙 고이 지키며 행보가게 사는 지금 전해주고 기원주고 성장 하도록 이끌어 주고 담이 되어 오늘 여기 수도원 성당 제대 옆에 기도시간 미사시간 앉아서 주님을 기리고 찬양하고주님이 전해 주신 대로 살겠다고 기도하는 시간과 환경 그 어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수도원 역사 관에가면 역사적 기록사진이 저를 믿음으로 살게 한 사진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산 성당의 미사 관경 넓은 마루에 앉아 있는 어린이 좌석을 보면서 저기야 내가 믿음을 듣고 성장한 자리와 시간이 지나서 1969년 놀촌 사목 협의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신부와 주교 신부님들의 사진은 볼 때 마다 춤추고 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들입니다. 믿음을시작한 원산 성당과 시간이 지나서 믿음을 증명하는 30년 후에 영상 나를 다시 감사와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신품 받고 오묘하게도 영새신부 밑에 보좌 신부로 부임해서 첫 본당을 갔을 때 부임해 갔을 때 희망과 기대가 벅차게 있었지만 본당 신부에게 올바른 믿음을 다시 배우고 기도하고 일하는 신부가 되어야지 두 번째 독일 인 신부님은 연세가 높았지만 사목적 열정을 전수받고 세 번째 본당 신부는 연길에서 오시고 만사가 태평하신 분이라 너그러움 아무 걱정 없고 주님에게만 의지하는 믿음을 배우고 원평 상딩 첫 본당신부로 부임 온갖 열정을 다해 전해받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전해주면서 첫 기쁜 소식을 듣고부터 80년이 지나 여기 87세의 노인으로 살아 남아있습니다. 입회 할 때 계시던 모든 사람 하나도 남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기고 나는 후배들과 함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지키며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고있습니다. 각자는 자기 몫이 있습니다. 나를 떠나 멀리 말리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기쁜 소식을 전하려 저 멀리 독일 땅에서 오신 수도자 와 수녀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파견 받은 이들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를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동선이 무척 분주하고 활동적으로 이어집니다. "회당"(루카 4,38)에서 "회당"(루카 4,44)으로 마무리되는 여정 안에는, 개인 시몬의 집, 군중들 틈, 밖의 외딴곳, 다시 군중, 그리고 여러 회당으로 연결되는 숨가쁜 움직임들이 들어있지요.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이가 그 사명을 수행하면서 겪는 사도직의 리듬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루카 4,40)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단 한 번의 말씀으로도 충분히 공동 치유가 가능하실 터이지만, 대개 육신의 치유는 마음의 위로가 병행될 때 진정한 회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 마음을 기울여 어루만져 주시는 듯합니다.
"외딴곳"(루카 4,42)
해 질 무렵부터 몰려 든 이들에게 치유와 구마를 베푸시며 분주한 저녁 시간을 보내신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러 외딴곳을 찾으십니다. 하느님과 독대하며 보내는 사랑의 시간은 예수님이 즐기시는 회복과 일치의 시간입니다. 파견된 이들은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더 많은 활동을 하는 것과 비례해 더 많이 외딴곳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활동의 중심은 하느님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복음 속 군중은 무척 놀라고 또 행복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원히 자기들과 함께 계시면 더이상 불행이나 고통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터입니다. 이른 새벽 외딴곳으로 가신 예수님을 찾아 헤매던 짦은 공백의 시간 동안 아마 그들의 불안과 조급함이 더 증폭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분열과 편가르기를 일삼는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는 사도 바오로의 엄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1코린 3,5)
아폴로 편이니 바오로 편이니 하며 갈라지는 교회의 모습에 바오로는 단호히 대응합니다. 이는 "육적인 사람"이 "시기와 싸움"을 일삼으며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습이지요.(1코린 3,3 참조) 바오로가 특별히 애정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여 이끈 코린토 교회지만,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 하느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이"의 모습과 분명 거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7)
바오로도 아폴로도 주님의 사업을 위해 선택되어 파견된 훌륭한 사도들임에 틀림없지만, 각각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통해 교회 분열이 야기된다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이 아님은 명백하지요. 오로지 모든 중심은 사랑과 구원이라는 당신 뜻을 이루시려고 일꾼을 파견하시는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복음 속 군중이 예수님을 붙들었듯이, 어쩌면 코린토 교회의 사람들도 제 뜻대로 무리지어 구성한 한 분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을 독점해 향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이라면 다 움켜쥐고 싶어하는, 바오로의 표현대로 육적인 사람이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습일 겁니다.
은총이나 직분, 권한의 사유화는 분열로 이어져 차별을 낳고, 불일치를 촉진해, 와해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연대와 협력, 일치를 지향하는 공동체 모습에 역행하는 숨은 악의 얼굴이지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모두가 당신을 추종하기 위해 모여 든 이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냉정하리만치 담백합니다. 인간적 욕망이나 공명심이 티끌만큼도 묻어 있지 않지요. 그분은 당신이 파견된 목적, 곧 아버지 뜻이라는 중심과 원칙에 충실하실 뿐입니다. 후일 이 모습을 바오로도 따랐고 아폴로도 따랐을 것이지요. 이제 코린토 신자들과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처럼 또 바오로처럼 우리도 자신을 있게 하시고 "지금 여기에" 파견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중심을 둘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보다 나을 수 없으니, 사실 교만할 일도 우쭐할 일도 없지요. 또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까지 쏟아주신 주님의 무한한 신뢰와 자비를 깨달으면, 그분의 사랑이 타인에게, 원수에게까지 흘러가는 것을 아쉬워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9)
이 말씀 안에 깊이 깊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옷깃을 여미게도 하고, 가슴을 쭉 펴게도 하며, 주변의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어지게 만드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 -기도, 일치, 치유, 선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시냇가 산책중 백로를 발견한 기쁨이 참 컸습니다. 두루미인가 황새인가 의아해 했는데 확인해 보니 여름 철새 백로였습니다. 이제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은 물론 동물과도 평화로운 공존공생,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참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아름다움은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젊음은, 아름다움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마음에, 정신에 있음을 봅니다. 영혼이, 마음이, 정신이 튼튼하고 아름다우니 외모도 나이에 관계 없이 아름답습니다. 바로 1936생인 85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최창무 전임 광주교구 대교구장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최 대주교님을 환대했던 어느 부부의 글이 생각납니다.
-“85세의 연세에도 대주교님은 살아오신 이야기, 집안 내력, 6.25 피난, 유학시절, 혜화동 시절을 풀어내시면서 얼마나 기억력이 명료하신지 젊은 우리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제자를 만나 신명이 나신 대주교님은 ‘군대 시절 이야기’도 참 재미나게 하셨다. 그밖에도 대여섯 시간을 어찌나 재미있게 지난날 얘기를 풀어주시는지 함께 오신 두 분 수녀님도 우리 부부도 정말 신나는 하루였다.”-
평범한 내용같지만 감탄했습니다. 85세 연세에도 저토록 총명할 수 있으실까 하는 경이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사제생활 초기부터 가끔 인용했던 팬티끈과 팬티천의 예가 생각납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20여년 만에 피정 왔던 자매가 상기해준 예화입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다. 팬티끈이 튼튼하면 팬티천이 어떻든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이 약해지면 아무리 천이 곱고 튼튼해도 팬티를 입지 못한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며 바로 영혼과 육신의 관계가 이러하다.”
제가 착안한 예화지만 참 기발한 지금도 공감이 갑니다. 참으로 영혼이 튼튼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영혼관리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입니다. 뿌리의 깊이는 관계의 깊이를 뜻합니다. 날로 주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는 삶은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뜻합니다. 하여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제생활 초기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도 강조해왔던 강론 주제중 하나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을 때,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참 허약하고 위태한 삶입니다. 십중팔구 불안과 두려움에 혼란하고 복잡한 삶, 제자리에 정주하지 못하고 뿌리 없이 표류하고 방황하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현대인의 위기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삶이 깊이와 무게를 잃고 날로 ‘천박(淺薄’얕고 가벼워짐)’해진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팬데믹의 위기 시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을 회복하는 일이,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는 기도와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도 ‘주님 중심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보십시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중심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상징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니 치유가 일어납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와 더불어 치유되는 영육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얼마나 신바람나는 장면입니까?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나니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시자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과 이웃을 섬기라 있는 건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집단적으로 전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보시고 만지시며 고쳐주십니다. 만나는 이마다 하나하나 미소에 눈을 맞추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연상케 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영육의 치유에 늘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 가까이 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태양빛에 밤의 어둠이 흔적없이 사라지듯 주님의 빛에 온갖 어둠의 세력들이 흔적없이 사라지니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 역시 늘 하느님 중심과 일치된 삶을 사셨기에 이런 치유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활동후에는 수시로 외딴곳에 머물러 아버지와 관상의 친교로 영육을 충전하셨던 주님이심을 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파견자로서의 신원의식, 인기에 영합하거나 현혹됨이 없이 참으로 무엇에도 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복음 선포의 삶에 매진할 수 있었음도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렸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이 평생을 깊은 내적평화와 안정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정주서원의 은총 덕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9월 기도 지향은 ‘지구 자원에 대한 존중(Respect for the planet’s resources)이고, 어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메시지 주제는 ‘창조주와의 평화, 피조물과의 조화(peace with Creator, harmony with creation)’였습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복음 선포의 영역은 피조물의 자연에 까지 확장된 느낌입니다.
분열의 치유도 하느님 중심의 일치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서로 뜻이, 마음이, 성격이나 취향이 맞아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중심이 같기에 일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방식대로 육적인 사람이 되어 시기와 싸움을 일삼을 때 공동체의 분열은 필연이며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합니다. 아폴로파와 바오로파의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의 처방이 참으로 명쾌明快한 명약名藥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오는 깨달음의 겸손, 분별력의 지혜, 질서와 평화의 회복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자들이 호오나 우열을 비교한다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서로 보완하여 살게 하는 ‘다름’이 공동체의 부요와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필수불가결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 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 보신다.”(시편33,12-13).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전에 어떤 신부님이, “신부는 자가용 운전사가 아니라 영업용 운전사야!”라고 하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가가 사목적 돌봄을 시행하지만, 어느 누구에게 국한되거나 특별할 수 없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을 고쳐주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43절) 라고 말씀하시고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십니다.
주 예수님은 어찌 보면, 우리만의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아는 이나 모르는 이나 다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주 예수님을 잘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을 돌보실 수 있도록 놓아드리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대신 이루고 지속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완성하는 데 일조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주님 십자가의 무게가 줄어들기를 기대하면서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봉헌합니다.
가장 좋았던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남창현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티브이 광고를 보다보니 재밌는 카피가 들립니다. ‘당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러면서 예쁘고 젊은 여자 모델의 얼굴이 클로즈업됩니다. 알고보니 기능성 화장품 광고입니다. 이 화장품을 쓰면 가장 예뻤던 때의 팽팽한 피부로 만들어준다는 뜻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오늘이야말로 내 남은 인생의 첫 번째 날이고, 지금이야말로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시간입니다. 나의 과거의 가장 젊고 싱싱했던 시간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들은 지금의 소중함을 잃고 맙니다. 아는 지인 중에 저보다 대여섯 살이 많은 신자분이 계십니다. 20대 초반부터 알고 지내는데 말버릇처럼 볼 때마다 제 나이를 확인하며 ‘아. 정말 좋을 때네요’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사십 대 그분은 오십 대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이 저에게 처음 ‘젊어서 좋겠다’ 했던 그 때, 그분은 싱그러운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군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두고 싶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떠나갈까 봐 두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설레입니다. 그분이 새롭게 만나게 될 사람들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의 성전에 대해 말씀하셨다.
오리게네스 사제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 (Tomus 10,20: PG 14,370-371)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자기 육신이나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여기서는 유다인들을 뜻합니다.) 즉 아버지의 집을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네들을 성전에서 쫓아낸 데 대해 화가 치밀어 하나의 표적을 청합니다. 그 표적을 통해서, 자기네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는 듯하지만 실은 당신 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하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성전과 예수님의 몸 두 가지 다 교회의 상징이라고 나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산 돌로 세워져 거룩한 사제로서 신령한 집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로 모시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참된 성전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돌들의 일치와 조화는 “내 뼈가 다 흩어졌나이다.”라는 시편 21편의 말씀에 따라 끊겨 나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박해와 혼란을 끊임없이 충동질하고 성전의 일치를 깨뜨리는 자들이 일으키는 전쟁으로 인해 이 일치는 끊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복구되고 몸은 사흘째 되는 날, 즉 환난의 날이 지나고 그 다음날인 완성의 날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을 세우는 이 뼈들이 주님의 위대한 날에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승리로 인해 다시 살아날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셋째 날이 참으로 동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수난을 뒤쫓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온 몸의 부활 신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묻힌 다음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도들의 온 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십자가에 못박혀 이제 생명이 끊긴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처럼 우리 각 사람도 그로 인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은 우리에 대해 죽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세상에 대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묻혔습니다. “실상 우리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우리도 하나의 보증을 얻었다는 뜻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함승수 신부님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 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무 것도 너를"이라는 제목의 성가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쓴 기도에 곡을 붙인 것이지요. 세상이 주는 것들은 언젠가는 지나가고 사라질 것들이니 그런 것들에 집착하여 일희일비 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그것이 참된 행복의 길이라는 데레사 성녀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느님은 대체 어떻게 '소유'해야 하는지 그 방법이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우리를 지어내신 하느님을,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마치 물건처럼 소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소유하는 과정은 크게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클수록 나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커집니다. 나에게 닥친 상황이 힘들고 괴롭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미워하셔서 고생시키시는게 아님을, 하느님께서는 변치 않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결국엔 나를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수용'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고 싫음'을 따지지 않고 그분께서 주신 선물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받은 것들에 만족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굳이 다른 것들을 욕심내거나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을 참되게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을 더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소유하려고 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주님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삼으려 하지 말고, 그분의 뜻과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인간들의 욕심을 채워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과 기적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과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끄신다는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을 욕심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쁜 소식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픔과
두려움을
함께 나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아픔을
걷어내시는
기쁜 소식의
주님이시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
예수님이
계신다.
기쁜 소식은
기쁨으로
살게하는 기쁜
만남이다.
주님 친히
기쁨이 되시어
함께
우리 곁에서
기쁨으로
생활하신다.
기쁨을
몸소 실천으로
옮기신다.
기쁨은
뜨거운
사랑이 되어
다가온다.
소란스러워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일을
하신다.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은
숨길수 없다.
기쁜 소식은
이론이 아니라
뜨거운 실천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된다.
삶의 소명은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시간을
깨어나게 한다.
우리의 시간에
이미 와 있는
복음이다.

어렸을 때 책은 정말로 읽기 힘든 커다란 벽이었습니다. 글씨 적혀있는 활자가 너무나 싫었습니다. 누군가 책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해서 누님이 보고 있었던 소설책을 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펼쳐지기는커녕 졸음만 쏟아졌습니다. 졸음이 쏟아지는 세상도 새로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책이 맞지 않는다면서 점점 더 멀리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의 제게 책은 지루하기만 할 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학교에 들어갔고, 여기서 책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면서 많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책 없이는 못 살 정도로 항상 책을 끼고 다니면서, 다른 이들에게 책의 필요함과 중요성을 끊임없이 외치는 책 예찬론자가 되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출판된 책도 8권이나 되고, 제가 쓴 글들이 잡지나 신문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분들이 저의 글을 좋아해주십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제 글이 어렵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실제로 저는 글을 쉽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보다는 쉽고 단순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바로 어렸을 때 가지고 있었던 책에 대한 어려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즉, 책을 읽기 힘들었던 기억들이 사람들이 어렵지 않고 쉽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작정 책을 읽으라고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보다는 스스로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도 의미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밝혔지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만이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선별해서 고쳐주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빠짐없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주십니다. 그냥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고쳐줄 수 있었지만 굳이 손을 얹으시는 모습에서 병의 치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의미를 발견한 사람만이 병의 치유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해의 위험도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의미를 발견한 사람만이 지금의 모습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마하트마 간디).
38 다산 초당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입니다. 다산은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1770년 후반 서학을 접하면서 천주교와 관계를 맺었고, 그 진리에 매료되어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입니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복자가 되었으며,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그 자녀입니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다산은 을사추조적발 사건과 진산사건 등으로 박해가 거세지자 수차례 배교의 뜻을 밝혔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어 결국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정약용은 자신의 호를 ‘여유당’이라 칭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순교의 길을 택한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으로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 유배지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백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유배 중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로 보입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중국인 유방재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약용은 자식에게 ‘근검’이라는 말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어떤 전례 행위를 하기는 힘듭니다. 담당하는 사제도 없고 미사를 할 곳도 없습니다. 주소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이고, 근처 다산 수련원에서 민박이 가능합니다. 관할은 다산 유물전시관으로 전화는 061-430-3620입니다.
붙드는 인간, 떠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탄복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나자렛 사람들은 박수와 찬사를 보내도 부족할 지경인데, 자신들의 치부와 속마음을 들킨 것으로 인해 크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 했습니다. 무슨 소나 돼지도 아니고 내몰기는 왜 내몹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벼랑 끝까지 몰고간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명백한 살의(殺意)를 지녔으니,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살인미수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보인 태도는 정 반대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거부한데 비해,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붙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메시아를 거부하고 추방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분은 붙드는 행위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듯 합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붙들어서는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구원하시고 다스리셔야 할 크신 분이기에, 작은 고을 카파르나움에만 머물러 계실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뿐만 아니라, 온 갈릴래아 지방을 넘어,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을 구원하셔야 할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 전체를 다스리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아쉽지만 떠나가시는 것입니다.
붙드는 인간, 떠나시는 주님! 오늘 우리 역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혹시라도 우리 역시, 크신 주님을 내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두려고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크신 하느님을 너무나 작고 하찮은 존재로 축소시켜 놓는 그릇된 신심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더 큰 바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셔야 할 분입니다. 우리 역시 그분을 따라 더 먼 세상의 끝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복음 4장 43절)
예수님의 말씀, 곧 복음 역시 더 넓은 세상으로 힘차게 뻗어나가야 할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 누구에 의해서,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제지당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의 활동 영역은 그 어떤 이념, 종교, 민족, 인종이든 경계를 초월해서 활발히 퍼져나가야만 합니다.
악에 무자비해야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린이를 사랑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 문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밤, 방정환 선생의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칼을 든 강도를 만난 선생은 차분히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까지 들이대고 그러시오.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소.”
너무도 부드럽고 친절한 방정환 선생의 말에 강도가 더 당황했습니다. 선생이 준 뭉칫돈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 하는 강도에게 방정환 선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달라고 해서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지 않소.”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경찰에게 강도가 붙잡힌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 집으로 들어온 경찰과 강도를 본 선생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허허. 또 오셨네! 방금 준 돈을 벌써 다 쓰셨단 말이오.”
그러자 경찰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자가 여기서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경찰의 말을 들은 방정환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내가 준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자가 강도입니까.”
방정환 선생의 말에 경찰은 의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었습니다. 경찰이 가고 나서 강도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와 사람은 분명 별개입니다. 죄가 사라져도 사람은 남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시각으로 사람을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병 자체를 나무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아마도 정황상 시몬의 장모는 자신의 딸은 버려둔 채 예수만 따라다니는 사위 시몬에 대해 화가 나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시몬의 장모를 탓하시지 않고 그를 잡고 있던 열을 탓하십니다. 장모가 아닌 그녀를 잡고 있는 열이 악이라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든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 탓을 하지 않으십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자비이고 어쩌면 그것이 당신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일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부터 먼저 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먼저 병을 이해해야 그 사람을 치유해줄 수 있습니다. 그 병을 얻은 사람의 탓을 먼저 하면 안 됩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그 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악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원죄의 영향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자신의 노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집단에서 머무르려면 그 집단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면 시몬의 장모처럼 그런 화병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임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자비를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과 그 사람을 잡고 있는 악을 명확히 분별해야합니다. 자비는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악의 잔악함을 명확하게 깨달을 때 나옵니다. 악의 힘이 큼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악에 당하는 사람에겐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자칫 우리는 악에는 자비롭고 사람에게는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악에는 무자비하고 사람에겐 자비로우십니다. 악이 당신을 찬미하더라도 예수님은 악에 무자비하게 대처하십니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악은 악으로 대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대해야합니다. 악과 타협하면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도 치유해줄 수 없습니다. 악의 잔악함을 알 때 사람을 자비롭게 대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특별히 치료할 것은 없지만 혼자서 거동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양병원에는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요양병원에는 간호사와 의사가 있고, 간병인이 있어서 어르신들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챙겨 주었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고, 현실적으로 거동이 어려운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 요양병원은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봉성체를 하면서 요양병원으로 오는 봉사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었고, 색소폰과 오카리나로 노래를 연주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중에도 어르신들을 위해서 봉사하러 오신 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 같았습니다.
산책하면서 중학교의 벽에 벽화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색의 차가울 것 같은 벽이었는데 벽화가 있으면서 상상과 꿈의 벽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걷다 보면 어느덧 학교의 정문에 다다를 것 같았습니다. 벽화의 주제는 ‘고백’이었었습니다. 벽화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있었고, 말하지 못한 것을 예쁜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등교하면서 꿈을 키울 것 같았습니다. 잘못한 것은 용서를 청하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벽화를 제안한 사람도, 벽화를 그린 사람도 모두 학생들을 위한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본당의 사목자가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늘 마음에 새긴다면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될 것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마음에 새긴다면 갑질 논란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이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마음에 새긴다면 당리당략으로 국력이 소모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입니다.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아픈 이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 또한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으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모두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은총을 받음은 봉사를 위한 것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2주 수요일
복음: 루카 4,38-44: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심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육신의 병고를 완치시켜 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 병의 치유의 의미는 바로 하늘 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궁극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이 열의 종류도 다양하다. 성을 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이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래서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바라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자신의 병이 완치되자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의 처지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또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에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길 원하십니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 마지막에 보면 ‘하느님의 협력자’ 란 말이 나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글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하루는 뒤뜰에 돌계단을 만드느라, 하루 종일 땀을 흘려가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돌멩이 하나만 해도 무게가 40~80킬로그램씩이나 나갔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진맥진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암석들을 제자리에 가져다놓느라, 몇 가지 장비들을 요령 있게 사용하는 일도 무척 신경이 쓰였습니다.
곁에 있던 다섯 살짜리 딸아이도 자기도 돕게 해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제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지만 그건 싫다고 했습니다.
직접 돕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돌을 옮길 때 손을 올려놓고 살살 밀게 시켰습니다.
물론 위험하지 않겠다 싶은 때에 한에서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딸아이의 도움은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계단 공사는 훨씬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이 마무리될 때쯤, 저는 새로 만든 계단은 물론, 자부심과 성취감으로 뿌듯해하는 딸아이까지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딸아이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랑 아빠랑 둘이서 계단을 만들었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장 먼저 맞장구를 친 건 바로 저였습니다.】
그 모습이 하느님과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우리와 함께 세상을 일구어 나가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동산을 돌보는 것을 우리에게 맡기셨고, 땅과 비와 씨를 주셨지만 땅에 씨를 뿌리고 경작하여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또 땅 속과 바다 속에 많은 자원이 숨겨져 있지만, 그걸 활용하고 계발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었습니다.
또 지상에 하느님의 거처를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막이나 성전을 짓는 데에 많은 예술가와 장인들, 그리고 일꾼들이 동원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베드로에게 말씀 하신 후, 그 말씀이 구체화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죠.
많은 선교사들, 순교자들, 봉사하고 희생하고 기도한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교회가 만들어 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 혼자 일하시면 더 빨리 더 멋진 무언가가 나오겠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일의 완성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와의 관계도 항상 생각하십니다.
우리와 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시고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은 늘 다음의 말씀과 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씨를 심지 않으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날 수 없고, 우리가 씨를 심어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필요로 하시고, 나도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8월초에 대구에 피정하러 내려갈 때, 기차 안에서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어떤 아버지가 3~4살 된 딸을 두 팔로 안고 다른 칸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문 앞에 섰을 때 아버지는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무언가 눈치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딸이 조금 있다가 눈치를 챘는지, 문이 열리는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딸은 다른 칸으로 이동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함께 일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 봅시다.
그리고 실행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고3 학생이 수능 시험이 다가오자 불안해졌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제발 며칠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더 주십시오.”
학생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너를 불쌍히 여겨 특별히 일 년이란 시간을 더 주겠노라.”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시고, 해 질 무렵에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 내셨으며 날이 새자 당신을 붙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복음 선포의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사실 우리도 얼마든지 자신의 삶 안에서 안주할 수 있습니다. 곧 신앙생활을 하면서 얻어지는 여러 가지 행복들에 취해서 그것에 만족을 하고 자신만의 안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당에 나오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친교를 이루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고, 또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재미와 보람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면서 얼마든지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행복한 일이며, 감사해야 할 일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처럼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않고 안주하지 않으며 오늘도 내일도 복음 선포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은 결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안의 모두를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의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은 나만의 복락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다른 모든 이들의 치유와 생명과 구원을 위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의 길을 재촉하셨던 주님의 뒤를 우리도 또한 따라 나설 수 있기를 바라며 힘과 용기를 주십사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루카 4, 43)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전국적으로 비가 온 후 가을 날씨가 좋습니다. 그리고 맑은 날이 되면서 다시 햇빛이 반갑게 나타났고, 하늘도 뭉게구름으로 가을의 풍경을 더 해주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으로 가시어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하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울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 43)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 하였습니다.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는데, 이 회당이란 유대인들의 회당을 말합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그리스도교가 분리해서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교적인 그런 분위기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유대교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역동적이고 복음선포적이며 인간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찬 기쁜소식이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병자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또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도 어루만져 주시고, 또 여러가지 속박으로 갇혀 있었던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런 새로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공동체를 형성에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 예수님은 어느 곳을 가시든지,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고쳐 주시고, 물론 그들의 믿음이 있어야만 되었고, 그래서 어떤 마을을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시면, 하느님 나라의 새로움과 희망으로 기쁨으로 충만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묶여 있는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루카 4, 42)고 예수님을 붙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 된 것이다." (루카 4, 43)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다시 또 다른 곳으로 발길을 향하셨지요.
•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대해 드리겠지요. 그러나 또 다른 마을에 가면 어떤 긴장과 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그런 두려움 가운데, 복음을 전하셔야 하는 수고를 다시 하셔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환대 받을 수도 있고 배척 받을 수도 있는 이러한 상황을 매번 겪게됩니다.
• 이것은 정말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 43) 라고 하시며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노고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시며 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수고스럽게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복음전파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듣게 되었습니까?
•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나그네와 순례자같이
김기한 베드로 마리아 수사님(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T.평화를 빕니다.
어느 회사나 단체 혹은 조직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하나의 편가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성당의 모임에서도 편가름이 생기게 되고 즉 쉽게 말해서 "마음이 잘 맞는사람 코드가 잘맞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물론 사람의 성장과정이나 생각하는 것도 다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도 다 다르기 때문에 마음이 맞는 사람 공감대가 잘 형성이 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고 사람에 따라서 쉽게 친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고 시기와 싸움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답시고 뒷담화를 까고 험담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해지고 친교를 나누는것은 좋지만 모여서 험담을 하면서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것은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제 1독서에서 바오로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편을 가른다고 하는 것은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서로에게 험담과 분열을 조장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서는 내가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것은 지금의 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세워주고 알아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누구라고 한들 어떠한 모임이든 속해 있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고을을 다니시며 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린 이들을 고쳐주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붙잡으시고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
그들이 붙들은 이유는 기적의 뜻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기적을 통하여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모습에 자신들의 편으로 삼고 싶어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우리도 역시 나를 인정해 주고 나를 알아주는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그곳에서 안주하지 말고 떠날수가 있어야 하고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읆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죠.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에서는 나에게 달콤함과 달달한 맛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읆매여 있다보면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 험담을 하고 분열을 일으킬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려면 그 좋음에 안주하지 말고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도 지금 나는 어떠한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 모임에서 주는 달콤함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영적 인식 지평의 확장.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영적 인식 지평 확장의 여정이라할 수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깊어지고 넓어져가는 영적 인식 지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은 앎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면서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영적시야, 내적시야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참으로 깊고 넓은 영적시야를 지닌 살아있는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얼마전 타계한 세계적 석학, 사회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생애 최후의 인터뷰중 끝부분을 길다싶지만 인용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대한 인간입니다. 그분은 교황에 선출된 후 첫 인터뷰를 무신론자라고 자처하는 이탈리아인 저널리스트와 가졌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진정한 대화는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소셜미디어는 우리에게 대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은 남들과 연대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여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소리만 듣습니다. 사람이 소셜미디어에서 보는 유일한 것은 자기 자신의 반사된 얼굴입니다. 소셜미디어는 매우 유용하고 사람들에게 쾌락을 주지만, 그것은 하나의 덫입니다.”-
‘소셜미디어는 덫이다!’,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새삼 일상의 크고 작은 살아있는 만남과 체험을 통해 영적 인식 지평을 넓혀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단연 부각되는 것이 공동체내의 관계입니다.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들입니다. 하느님을 중심한 공동체생활을 통해 다양한 만남을 통한 관계 체험을 통해 날로 넓어져가는 영적 인식 지평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영적 인식 지평은 얼마나 깊고 넓은 지요. 갈릴래아의 가파르나눔이 전 활동무대입니다. 어제 미친 사람을 고치신 주님은 이어 오늘은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런 일련의 치유 체험들을 통해 예수님의 내적시야는 참으로 넓어져 하느님의 시야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다음 대목이 중요합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활동의 한 복판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과 만남의 관상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지녀야 할 하느님과 만남의 외딴곳의 안식처이자 정주처이자 피난처입니다. 영적 인식 지평의 확장을 위해 활동과 관상의 리듬은 필수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활동과 관상의 리듬중에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영적 인식 지평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자작시 넷째 연도 이를 강조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외딴곳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어야 비로소 영적 인식 지평의 확장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 무지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듭니다.
집착하여 머무는 순간, 시야가 차단된 ‘우물안 개구리’의 처지로 전락됩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지 웅덩이에 고이면 썩어 탁해진 물입니다. 이기적 집착이야말로 영적 인식 지평의 최대 장애물임을 깨닫습니다. 내적 광야 여정중 끊임없이 영적 인식 지평을 넓혀가야 하는 예수님께 대한 무지의 반영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주변 모두에 활짝 열려있는 예수님의 깊고도 넓은 영적시야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영적 인식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바로 영적성장이 뜻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영적시야도 참으로 넓고 깊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육적인 사람이 시기와 싸움 등 인간의 이기적 방식대로 살아가는 편협한 시야의 속된 사람들이라면, 영적인 사람은 모두를 망라하면서도 올바른 식별과 분별의 지혜를 지닌 영적 인식 지평을 지닌 사람입니다.
과연 나는 영적인 사람입니까, 혹은 육적인 사람입니까?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비유와 분별이 얼마나 명쾌한지요.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며,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전체에서 부분을 보는 참으로 깊고 넓은 영적 인식 지평의 소유자, 하느님의 시야에 근접한 바오로의 영적 지평입니다. 영적 인식 지평이 넓어지면서 저절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가 되어버립니다. 하여 공동체내에서 비교로 인한 우열이나 호오의 문제는 저절로 해소되고 상호보완만 남게되니 여기서 샘솟는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감사입니다. 상호보완의 공동체! 참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공동체입니다.
문제는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습니다. 부단히 영적 인식 지평을 넓혀감이 답입니다. 우리의 평생공부가 목표하는 바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외딴곳 하느님께 활짝 열어두고 관상과 활동, 기도와 노동의 리듬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날로 영적 인식 지평도 넓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적 인식 지평을 넓혀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시편33,20-21). 아멘.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9. 05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게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 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 퍼질 테니까요.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4, 38-44(연중 22주 수)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 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 열을 몰아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루카 4, 39)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 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시고, 마귀들도 쫓아내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를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 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 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 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 43)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다고 밝히십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새벽에, “날이 새자”(루카 4, 42) 제자들이 외딴 곳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들었을 때 생긴 일입니다. 마치 마리아 막달래나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붙들고자 했을 때처럼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요한 20,17 참조). 곧 인간적인 인기나 자신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붙들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면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2-33 참조)라고 꾸짖으신 일을 떠올려줍니다. 곧 파견하신 분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일인 복음을 선포하시는 모습을 떠올려줍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 16)인 것입니다. 아멘.
살리는 힘과 죽이는 힘.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2018년9월5일 수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루카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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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류의 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의 힘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살리는 힘이고, 또 하나는 죽이는 힘입니다.
우리 모두는 숨어 붙어 있는 한, 일생을 두 가지의 힘을 함께 가지고 살아갑니다.
살리는 힘과 죽이는 힘. 오늘 복음은 많은 이들이 병을 치유 받고자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일일이 치유해주셨다고 전합니다.
살리는 힘, 즉 생명의 힘이었습니다.
지금껏 어떤 힘을 키우고자 애를 써왔습니까?
지금껏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힘은 어떤 힘이었습니까?
“엄마 손은 약손”이라며, 엄마가 어릴 적 배를 따뜻하게 문지르시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살리는 힘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미워서, 곱지 않은 눈빛을 그 누군가에게 보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죽이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한 전언은, 결국 살리는 힘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살리는 힘을 가능한 많이 쓰십시오.
죽이는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살리는 힘밖에는 없습니다.
살리는 힘을 더욱 강하게 키우셔야 합니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바로 이 살리는 힘에서 비롯되고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성령을 내쫓을 수 있는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바오로 사도가 어제는 코린토 신자들과 자신이 세상의 육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영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코린토 신자들이 아직도 육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세례를 받은 우리지만 아직도 세속적이라는 말과 같은 뜻일까요?
같은 뜻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설명은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령을 받았는데 왜 아직도 육적인가?
한 번 성령 받은 것으로 영적인 인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요.
성령이 쫓겨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령은 붙박이장이 아닙니다.
성령은 들락날락하시는 분이고, 우리가 영접치 않고 심지어 쫓아내면 쫓겨나는 분이십니다.
싫다는데도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는 분도 아니지만 나가라는데도 자존심도 없이 죽치고 있는 분도 아니라는 겁니다.
어제 봤듯 우리가 문을 꼭 닫아걸고 있지만 않으면 우리 안엔 성령이 들어올 수도 악령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악령이 나간 뒤 집이 깨끗이 비어있는 상태로 있으니 나갔던 악령이 일곱 악령을 더 데리고 와 오히려 전보다 더 안 좋은 상태가 된다는 주님의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을 쫓아낼까요?
성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거나 맛들이지 못해서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상한 표현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기서 젖은 뭐고 단단한 음식은 뭡니까?
즉시 젖과 이유식과 어른들의 거친 음식이 연상됩니다.
젖은 아이가 처음 접한 음식이요 맛이고 그래서 아이는 이 맛에 길들여졌을 뿐 아니라 어른들의 거친 음식보다 위와 장이 소화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엄마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엄마의 사랑이 직접 전달되고 엄마와 일체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에 비해 어른의 음식은 엄마와의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주거나 자기 스스로 해먹어야 하는 음식이고 무엇보다도 엄마와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남과 먹어야 하고 맵기도 하고 짜기도 하고 소화하기 힘든 거친 것들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것에 대입을 하면 지금까지는 나에게 너무 따듯하고 잘해주는 사람만 있었고 처한 상황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람만 있을 수 없고 상황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맞닥뜨려야 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셔야 했고 악령과 맞닥뜨려 대결을 해야 했고 그래서 그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맞닥뜨림과 도전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고통과 죽음까지도 사랑해버리게 하는 성령을 거부하게 되겠지요.
오늘 독서의 말씀에 적용하면 악마와 같고 원수 같은 사람은 거부하고 나에게 ‘좋다’, ‘예쁘다’하는 사람만 만나고 심지어는 패당을 짓는 거지요.
세상을 위해 나를 내어주게 하고 수난을 감수케 하는 보편적 사랑과 수난의 성령을 거부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시겠지요?
주님의 사명은 믿는 이들의 사명이다. <루카 4, 38-4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파견된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미사에 참례하는 이유는 방방곡곡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세상에 파견되지만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잘 알지 못해서 뒤로 듣고 앞으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미사가 끝나면 미사 때 받은 사명과 반대되는 일에 몰두합니다. 전례 헌장 2장 47-57을 참고하여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47항 1) 미사의 기원과 구성
2) 미사의 은혜 대한 신비
48항 1) 방관자 아닌 능동적 참례
2) 사제와 함께 하는 봉헌
49항 1) 사목 적 효과가 나타나는 참례 등입니다.
1) 저는 미사만큼 큰 기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이룩한 복음은 미사의 신비 안에서 종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미사 전례에서 기적의 순간을 우리는 지속해서 만나게 됩니다. 물이 술이 되는 기적보다 술이 주님의 피가 되는 기적, 빵을 많게 하는 기적보다 빵이 주님의 부활하신 몸으로 변화되는 기적이 미사 중에 이루어집니다. 미사를 참례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기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늘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미사는 십자가상 제사와 최후 만찬이 하나 된 찬미와 감사의 전례입니다.
2) 미사 때 받은 은혜는 자비와 일치와 사랑의 맺음이라고 47항 중간 구절에서 알려주십니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요, 사랑의 맺음이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기서 자비는 죄의 용서와 더불어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 은총입니다. 일치의 은총이란? 영성체라고도 하지만 일치는 말씀의 전례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감사합니다. 아멘”하는 말은 주님의 생각과 함께 주님과 하나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맺음은 부활하신 주님 몸과 영하는 사람과의 생명의 맺음입니다. 내가 활동하고 움직이기 위해 주님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성체입니다.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복음전파, 주님과 같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은 미사 때 받은 자비의 은총, 일치의 은총, 사랑의 은총을 나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이에게 전하는 것이 미사에 바로 참례하는 것입니다. 마사가 믿는 사람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참례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참례와 능동적 사목활동이 뒤따라와야 합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교회의 권고는 사제는 혼자서 미사를 드리지 말고 신자들과 함께 드리도록 합니다.
미사에서 우리는 구경꾼이나 수동적 참례자가 아니라 능동적이며 결실을 보아야 함을 알고, 깨닫고,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고, 자비와 일치와 사랑 안에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형식적 기도, 들음, 봉헌, 찬미가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나의 삶 안에 머무는 것이어야 합니다.
미사 끝에 성당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가 주님이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나는 성당에 오면 누구랑 이야기하고 어떤 종교행위를 주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알렐루야의 후렴은 예수님의 나자렛 회당에서의 소명 선포와 관련하여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라고 외칩니다. 이 말씀들을 들으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친교 클럽이나 취미활동의 아류로 그치지 않도록 스스로 모색하고 점검하여, 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육화하는 일에 투신하도록 노력합시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을 삶답게
사는 것이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삶의 기쁨을
되찾아 줍니다.
아픈 삶에서
기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게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우리를 위해
사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만듭니다.
모든 시간은
그야말로
축복이 됩니다.
아파하고 있는
우리를 끌어올려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기쁜 소식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예수님이라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기쁜 소식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선포됩니다.
충만한 기쁜 소식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 자신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1908년 조지 헤이시는 런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2시간 44분 18초로, 당시의 마라톤 세계 기록을 갱신한 것이어서 각종 매스컴에서는 “금세기 최고의 레이스였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지금 현재 이 정도의 기록을 내는 사람은 대략 3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즉, 현재에는 이 기록으로 최고의 레이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큰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글쎄 남자 다이빙 대회에서 한 선수가 공중 2회전을 시도하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할 뻔 했던 것이지요. 그 몇 달 뒤, 이 공중 2회전 기술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금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현재 공중 2회전은 입문자 수준의 다이빙 기술이라고 합니다. 보통 공중 네 바퀴 반을 돌고, 여기에 비틀기까지 동원한다고 하지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한 암기력을 자랑하는 사람, 각종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 부러움을 한껏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뛰어난 능력이라고 부러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조금 미래의 시간에 가서 보면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 안에서 누리는 각종 능력과 재주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삶 안에서 부러워할 것들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누리고 떵떵 거리며 사는 사람, 각종 능력과 재주로 뛰어남을 보이는 사람 등이 스스로 느끼는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다고 합니다. 이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만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은 받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스스로의 만족도는 누구보다도 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주안점을 두면서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에 주안점을 두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늘 주안점을 두어야 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천년 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승천하셨으니 이제 기쁜 소식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쫓아서 그리고 주님과 함께 바로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참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임을 약속해주셨습니다.
무엇에 더 주안점을 두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잠깐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위한다면 선택이 분명해지지 않을까요?
오늘의 명언: 장애물이란 목표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목표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면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헨리 포드).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최천호)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난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 그리고 든사람은 학식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는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좀 살다보니그게 아니더라고요. 참사람, 난사람, 든사람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정말 힘 있는 사람, 정말로 돈 많은 사람, 정말이지 경륜 높은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는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법정스님의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앞에서 입을 벌렸습니다.
"내 입 안에 뭐가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안 보이느냐?"
"이가 모두 빠진지 오래되었는데 무슨 이가 보이겠습니까?"
"이는 다 빠지고 혀만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제자가 이번엔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다 빠져버린 것이요, 혀는 부드럽기 때문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니라."
부드러운 게 오래가는 법입니다. 무엇이든지 나이 먹으면 딱딱해지게 마련이고, 어린 것은 부드러운 법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게 제대로 사는 비결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내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참사람도 아니고, 난사람도 아니고, 든사람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드러운 사람은 어떨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좀 더 목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사람인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어 섬기고 투신하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의 두 번째 이적을 전해줍니다. 이 이적을 통해 사랑의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십니다. 사랑이신 분이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을 통해서 오고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실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품을 때 사랑이 드러나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자 사람들이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위해 그분께 고쳐주시라고 청합니다(4,38). 사랑은 그렇게 사랑이신 분을 ‘부르고’ 그분께 의탁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고 치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한없는 주님 사랑의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겸손하게 사랑의 도구로 삼아주심에 감사드리며, 더 열성적으로 자유와 해방, 기쁨과 정의를 퍼나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병자, 고통 받는 이들, 불의와 부당한 권력 앞에 짓눌려 억울한 이들, 소외되고 배척당하는 이들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복음적 소명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 때, 사랑의 샘물이 고갈될 때 우리는 사랑의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마귀의 영을 남자에게서 쫓아내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고 고쳐주십니다.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누구든 다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일치를 지향하고 어떤 차별도 없이 모두를 품습니다. 모두를 품는 그 사랑만이 치유와 해방과 변화를 가져옵니다.
심한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시자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4,39) 병의 치유는 하느님 선의 표지요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랑의 선물에 대한 그녀의 응답은 사랑의 섬김이었습니다. 우리도 병자처럼 섬김 받음을 통해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우고, 치유 받은 그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4,40).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각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모든 이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우리 모두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어, 다른 이들과 이 사회를 사랑과 정의의 땅으로 바꿔나가야겠습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해방을 가져오는 도구가 되도록 힘쓰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독서: 코린토 1서 3,1-9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고구려 보장왕 25년 당대 영웅인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남생은 연개소문의 자리를 맡은 다음 여러 성을 순찰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듣기 위하여 정사를 자기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어느 날 남건과 남산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남생이가 당신들을 장차 없애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 그의 대책을 모색하라고 하였습니다. 남건과 남산은 형님이 절대 그럴 이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고 보니 혹시나 하고 의심이 되며 염려가 되었습니다.
한편 남생이 민가를 순방하고 있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동생 남건과 남산이 당신의 자리를 탐하고 있으니 그 대책을 세우라고 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생은 믿지 않았습니다. 남생은 그 낯선 사람을 붙들고 동생들이 그런 음모를 품고 있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비밀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비밀사절이 동생들에게 잡혔고, 동생들은 왕명으로 형을 불러들였습니다.
남생은 자기가 보낸 신하는 오지 않고 자기를 불러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들이 음모를 꾸미는구나 하고 믿었습니다. 동생들도 형님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낯선 사람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남건과 남산은 군대를 동원하여 남생을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생은 국내성으로 피신하여 당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남생에게 현도군공에 봉하고 장군을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습니다. 전쟁 2년 만에 신라까지 합병하여 평양성을 에워싸니 한 달 만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 28대 705년간 천년 시작이 하루아침에 끝마치고 말았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는 하지만 각자의 핑계로 인하여 단합이 깨어지면 그 공동체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코린토 교회에서도 이런 분열이 있었습니다. 서로 자신은 바오로파오 자신은 아폴로파라고 하며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씨를 뿌렸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지만 그 복음을 키워주시는 분은 주님이신데 사람들은 주님보다는 바오로와 아폴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어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치아 하나만 아파도 그쪽으로는 아무 것도 씹을 수 없듯이 공동체가 분열되면 복음도 끝이 나고 맙니다.
교회 내에서 얼마나 분열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위 형제들의 마음이 갈라지게 만든 사람들이 있었듯이 항상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마귀와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일치시키고 마귀는 분열시킵니다. 전 신부님과 현재 신부님을 비교하며 본당 공동체가 분열되게 한다든가, 신부님 강론 내용을 들먹이며 보수니 진보니 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이들이 바로 여기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왜 사제가 정치에 관한 발언을 하느냐며 본인들 스스로 믿음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임을 자신 있게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제가 뭐고 보수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고 분열될 수 있습니까? 혹은 상처받았다고 성당에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상처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분열되는 이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런 코린토 공동체를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모임’, 혹은 ‘육적인 사람들의 모임’으로 규정합니다.그런 공동체는 참 신앙인의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린이가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더 심오한 진리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어떤 분열이 일어나는 성당에 새로 부임한 신부님의 부탁으로 화해와 용서라는 주제를 들고 강의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가 거의 끝마쳐 갈 무렵 제가 “그렇게도 용서가 안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큰 목소리로 “안 돼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습니다.
본인은 영원한 의인이고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은 영원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용서라는 딱딱한 음식은 소화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열되기 이전에 분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분열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위 예화로 든 이야기에서 고구려가 망한 것이 형제들을 분열시킨 어떤 이들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간의 우애가 그것 밖에 안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공동체가 분열되었다면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어쩌면 우리가 육적인 인간이고,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신앙인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분열되지 않는 공동체가 그 스스로 그 구성원들이 성숙한 신앙인이요 영적인 사람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교구청에도 한분이 오셨습니다. 신학교에 함께 입학한 동창신부입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쾌활한 성격이기 때문에 교구청에서도 잘 지내실 것입니다. 3년이 지나면서 저도 교구청에서 고참(?)이 되었습니다. 동창신부에게 이것저것 안내를 해 주려고 합니다. 성당, 식당, 교구청 회의, 미장원, 식당, 서점, 운동시설이 있는 곳들을 알려 주려고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을 했었습니다. 보좌신부님이 새로 오시면 ‘동네투어’를 함께 했었습니다. 2시간 정도 본당 관할구역을 돌면서 교우들이 하는 가게를 소개해 주기도 했고, 산보를 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해주기도 했습니다. 저희들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면서 교우들이 좋아하셨습니다.
교구에 많은 부서들이 있습니다. 저는 사제양성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을 만나고, 성소후원회 모임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서품식 준비를 하고, 성소주일 행사를 기획합니다. 청소년국은 교회와 사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사목국은 교구장님의 사목방침을 전하고 있으며, 교구의 사목현안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해외선교 봉사국은 해외선교를 하고 있는 신부님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선교를 지망하는 사제들의 모임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홍보국은 교구의 소식지인 주보를 발행하고, 교회와 사회의 소통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회사목국은 사회복지 시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관리국은 교구의 살림을 맡아하고 있습니다. 사무처는 이 모든 조직들이 서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조직이지만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각 부서가 자신의 일만이 중요하다고 하면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교구장님이 어느 한 부서에만 힘을 실어 주어도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제가 많고, 직원이 많은 부서도 있습니다. 작은 규모의 부서도 있습니다. 마치 여러 꽃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 듯이, 크고 작은 부서들이 모여서 교구청이라는 꽃밭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루 일과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 지방으로 가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만나셨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사람들의 깊은 탄식을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곳을 향해서 미련 없이 길을 떠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러한 은혜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나의 업적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마음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사업이 잘 되고 부유해지면 오히려 성당에 안 나오는 경우를 볼 때도 있습니다.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통한 희망으로 갈등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봉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느님파 사람들. -영적인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8월 마지막날 8월31일, 참 감회가 깊습니다. 요즘처럼 한 달이 길게 느껴진 때는 없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9월 순교자성월과 함께 ‘기도의 계절’이 시작됩니다. 심기일전, 매일 새롭게 처음처럼 살고 싶습니다.
어제 춘천에 다녀오던 중 지인과 나눈 대화가 생각납니다. 8월23일 더위가 끝난다는 처서處暑, 바로 로사축일에 손녀를 봐서 마침내 할머니가된 자매입니다.
“손녀 이름을 처서處暑라 하시고 세례명은 로사로 하세요. 너무 좋습니다. 이미 처서날 손녀를 봤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이름입니다. 유난한 불볕더위에 이번처럼 처서가 반가워보기는 처음입니다. 더위를 끝내고 집안과 사회에 시원한 가을을 가져다 주는 처서같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이름은 처서로 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렇게 작명하여 적극적으로 권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또 얼마전 수도원내에서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수도원에 난생 처음 1박2일의 피정을 왔다가 떠나는 할머니가 큰 가방을 들고 주차장앞에서 물끄러미 서있었습니다. 즉시 멀리 차옆에 수사님이 보이기에 손짓을 했고, 수사님이 쏜살같이 차를 몰고 와 짐을 싣고 할머니를 차에 태워 정거장까지 모셔드렸습니다.
“자매님, 수도원 천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세요.”
고맙게 차량봉사를 해준 수사님을 가리키며 수도원 천사의 얼굴을 잘 보라고 드린 덕담에 제 자신도 흐뭇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통해 때로 우리는 천사의 얼굴도 보고, 하느님의 얼굴도 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진정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처서와 같은, 천사와 같은 하느님파의 사람들입니다. 육적이나 속된 사람이 아닌 영적인 사람입니다.
아, 진정 속된 사람이 아닌 거룩한 사람, 육적인 사람이 아닌 영적인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시절입니다. 가볍고 얕은 천박한 사람이 아닌 향기 그윽한 깊이의 사람이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
시기와 싸움, 분열을 일삼는 자들이 속된 사람이요 육적인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하느님파 사람들입니다. 진정 공동체의 일치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분열이라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있는데 하느님파 사람들인 우리는 분열도 부패도 없이 주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 성숙합니다.
오늘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며 분열상태에 있는 속된 코린토교회 신도들을 준열히 꾸짖는 바오로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명쾌하고 적확한지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는 말그대로 ‘처서處暑’같은 하느님파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상호경쟁’이 아닌 ‘상호협력’ 관계에 있는 자신의 신원을 깊이 깨달은 지혜롭고 겸손한 바오로입니다.
비단 바오로뿐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모든 이들이 귀기울여야 할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평범하게 하느님파가 신자가 되어 서로 보완하며 상호협력관계의 사랑을 살아가는 공동체 형제자매들이 영적인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평상심이 도란 말도 있듯이 이렇듯 평범한 일상의 삶이 구원이요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모두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파를 이루니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알고보면, 깊이 들여다보면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모두가 주님께 치유받아야 할 병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활약상이 한 눈에 들어오는 오늘 복음 장면입니다. 심한 열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 주님은 자기에게 데려온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모두 고쳐주십니다. 마귀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소리 질르며 도주합니다.
흡사 모두가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어 하느님파 사람들로 변하는 모습 같습니다.
이어 날이 새자 예수님은 외딴곳으로 가시어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기도중에 당신의 하느님파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신 후 사명을 천명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당신을 닮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느님파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시편107.8-9).
아멘.
때를 안다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안정이 안주로 바뀐 삶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잘 아시다시피 오늘 복음은 주님의 일상을 우리에게 전하며 우리도 이런 일상을 충실히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복음입니다.
주님의 일상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 선포와 하느님 나라의 사랑을 드러내는 치유와 구마 활동과 이 복음 선포와 구원 활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기도의 세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고, 특히 프란치스칸이라면 더 잘 아시듯이 주님께서는 한 곳에 정주하면서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매일 같이 돌아다니시며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같이 하신 분이신데 행진 마무리 피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제가 혼잣말처럼 ‘이제는 그만 돌아다니고 집에 가서 푹 쉬어야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재가 얘기한 뜻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곧 이어서 대만에서 온 무용단 공연 뒷바라지 때문에 한 달을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서 좀 푹 쉬어야겠다는 뜻으로 한 것이었는데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말로 알아들으신 겁니다.
그 전화를 받고서 제가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일과 쉼, 일터 쉼터가 따로 없으셨는데 나는 순례나 행진, 그리고 강의 등이 큰일이고 큰일, 많은 일을 하고 나면 쉼의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구나!
2-30대 때는 내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신 주님, 말 그대로 동쪽에서 밥 잡수시고 서쪽에서 잠 주무신 주님과 이런 주님을 그대로 따라 한 프란치스코의 삶을 저도 따르고자 순회공동체 운동을 하고, 무전순례 프로그램이나 행진도 만들어 떠돌이 순례의 생활이 일상이 되게 하려고 했는데 지금의 저는 그것이 일상이 아니고 특별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차츰차츰 저는 저의 쉬는 시간과 쉴 곳이 있어야만 편안과 안정을 누리고 그렇지 않으면 불편한 것은 물론 불안정하고 불안하게 된 것이며 그렇게 해서 안정이 안주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린 삶을 이제 와 주님의 삶처럼 되돌리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이런 저에 비해서 복음 선포에 대한 주님의 열정은 얼마나 대단한지 감탄하며 아울러 완전하지는 못해도 어떤 식으로든 복음적인 불안정을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1코린 3,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람은 늘 편을 갈라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어릴 적부터 윗동네 아랫동네를 가르고 우리 반, 너네 반을 가르던 버릇이 남과 북을 가르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고 이렇게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그저 그렇게 물어뜯고 싸워야 직성이 풀리나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파벌을 가르고 그 중심에 신부님이 서 있기도 하고 회장님이 서 있기도 합니다.
모두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들인데 도대체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이런저런 편가름의 조짐을 보게 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구나.'
담박에 알아 차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면 한 형제끼리 서로 편가르며 물어뜯고 싸울 리가 만무하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누구 편입니까?
오직 하느님 편이시길 축복합니다.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게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시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 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 퍼질 테니까요.
기쁜 소식<루카, 4/38-4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 우체부였습니다. 기쁜 소식, 슬픈 소식, 조금 후에 전화 요사이는 무선 전화 스마트 폰 문자로 어떤 소식이든지 전해집니다.
저는 얼마 전 교통사고난후 검찰청으로부터 전해온 무혐의 통고는 하나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누구나 기쁜 소식을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은 기쁜 소식을 전하려 세상에 오시였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우체부 이시고 통신 기계이시며 모든 인류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어제 도곡동 성당에서 레지오 단원 교육을 하면서 레지오 단원 뿐 아니라 세례성사 받은 모든 신자는 복음전파의 의무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세례성사 때 예언자자적 소명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을 하면서 얼마나 이 소명을 실천하는지 반성의 기회를 가지고 기도의 삶을 가정에서부터 실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기도 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지고 그 말씀을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전하시는 기쁜 소식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사신다는 희망과 사랑의 소식이며 우리는 이를 따라 온 세상의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이 그렇게 하시였듯이 생각을 거처 말을 따라 행동이 따라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보다 해위를 봅니다. 기도하고 일을 하여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일이란 기도의 내용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의 구체적 삶입니다. 기도하는사람의 몸은 선행에 진리에 사랑에 전념하는 사람이고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 나리의 본질인 자유, 평화, 기쁨이 나라가 됩니다.
우리는 “믿나이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느님이 나의 희망입니다. 란 말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자, 억눌린 자, 빼앗기는 자, 무시당하는 자, 외로운 자, 소외된 자, 죄 속에 가쳐 사는 자, 죽음에 직면한 자, 병든 자 안에 희망과 사랑을 심어 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도 아침 기도 후에 오늘 상담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그분들의 초대에 네 하고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도록 성령이 저를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상담에 충실이 임해야 함은 상담자는 저에게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저를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3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쁜소식이란
멈출 줄 모르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기쁜 소식이
전하여 질 때마다
우리가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을
오늘도 우리들에게
건네십니다.
생명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순간순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사랑의 여정을 통해
드러납니다.
사랑의 여정과
사랑의 역사란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기쁜 소식을
어디에서
애타게 찾고
계신지요.
우리의 삶을
기쁜 소식으로
바꾸어주시는
예수님에게서
참된 기쁨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쁜소식은
우리 삶의
방향 전환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기쁜소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순간에도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선포되길
원하십니다.

점점 안색이 안 좋아지고 또한 작은 일에도 화를 많이 내는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는 평소 밝은 표정으로 지내셨던 이 자매님의 이런 변화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자매님을 불러서 왜 요즘 안색이 좋지 않은지를 물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자매님께서는 신부님께 그 이유를 힘겹게 말합니다.
“신부님, 사실 제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또한 이제까지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글쎄 연세대밖에 못 들어간 거예요. 친구들은 다 서울대, 하버드, 예일대에 들어갔거든요. 이것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 죽겠어요.”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친구들과의 차이만을 생각하면서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색도 좋지 않아졌고, 화를 내지 않아도 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게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러한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못하다는 생각에 열을 참을 수 없게 되었던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열을 내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하게 살아도 시간이 부족한 우리의 삶인데,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아까운 시간을 소비하며 불행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가졌던 병이 무엇입니까? 바로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지요. 감기 몸살일 수도 있고, 또한 앞선 이야기처럼 자신의 상황에 대한 화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어 쫓아내고,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심한 열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죄악과 불륜이 다양한 만큼 열의 종류도 다양하며, 각종 심한 열에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물질과 세속에 젖어 들어서,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부정적인 생각들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심한 열에 시달릴까요?
바로 이때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열을 가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사람뿐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 청을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열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이 가시게 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너그럽고 상냥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지닌 마음! 이것은 사람의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말할 수 없이 큰 힘인 것이다(파스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40 연승 무패 행진을 달리던 24세의 권투선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지 포먼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도전자였던 무하마드 알리에게 KO로 패배하고 맙니다. 이 덕분에 알리는 권투 역사상 전설적인 승자로 기억되었지만, 포먼은 그날의 충격 때문에 잇따라 패배하고 결국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지요.
포먼은 은퇴 후 흑인 청소년들이 범죄자가 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체육관을 만들어 무상으로 개방했지요. 건강한 운동으로 범죄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운영비가 바닥났고 체육관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궁리 끝에 포먼은 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마음먹습니다. 그의 나이가 38세였기에, 사람들은 그가 링에 오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말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재기하려는 이유는 아이들 때문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생명, 자유,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꼭 보여 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예를 위한 것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다시 링에 오른 포먼은 당시 챔피언이었던 29세의 모어와 싸워서 이겼고, 45세라는 젊지 않은 나이에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만약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면 그는 그런 영광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천했기에 그는 아이를 위한 일도 하고 자기 자신의 영광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을 위한 삶,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붙잡는 인간, 길 떠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붙잡는 우리 인간, 그러나 길 떠나시는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뭐든 붙잡는데 이력이 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 대상이 재물이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상관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조차 꼭 붙들어 내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우리 인간의 모습 앞에 씁쓸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고, 꼭 붙들어 새장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시도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자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동물,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새끼를 30년, 40년, 50년 동안 붙들고 있습니까? 사실 18년 세월이면 붙들어놓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긴 세월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놓아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자녀들을 ‘어른 아이’로 전락될 때 까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부모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충분히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학할 대학교, 학과까지 부모가 나서서 다 결정해줍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군부대 앞까지 따라가서 눈물을 닭똥 같은 눈물을 철철 흘립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녀 직장 상사들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려 듭니다. 자녀 대신 사직서까지 대신 써줍니다. 더한 것은 그런 치맛바람을 보면서도 당연한 듯 바라보는 자녀들입니다.
더한 것은 이런 붙듬이 피조물을 넘어 하느님에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어떤 것입니까?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혈연, 학연, 지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무한히 크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크신 하느님,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니 그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으로 축소시켜 독차지 하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나만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작은 하느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고을 나자렛,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 전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다가오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혹시라도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 내 틀 안의 하느님, 내 방식대로의 하느님으로 가둬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때를 안다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임을 잊지 맙시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그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기적과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니다.“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누군가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즉위 미사에서 가진 강론에서 “나의 진정한 통치는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내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주님의 말씀과 뜻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인도를 받아 인류 역사 안에서 그분 자신이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황의 임기는 종신제입니다.
그런데 2013년 2월 10일 전격 28일자로 퇴임을 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하느님 앞에서 나의 양심을 거듭 성찰한 결과 고령으로 내 기력으로는 더는 교황의 직무를 적절히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교황의 직무는 영적인 특성상 언행은 물론 그 못지않게 기도와 고통으로 수행돼야 함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충실한 신앙생활에 대한 의문들로 흔들리는 오늘날 성교회를 다스리고 복음을 전파하려면 심신의 강건함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지난 몇 달간 저의 기력은 제게 부여된 직무를 적절히 수행하기에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결정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서, 완전한 자의에 의해 2005년 4월 19일 추기경단이 나에게 부여한 성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직의 포기를 선합니다.” 이로써 교회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시는 교황님과 더불어 우리도 때를 알고 처신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많이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4,43)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사흘 전 오후, 굉음과 함께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사제관을 흔들어댑니다.
성모동산 뒤편에 있던 벚나무 가지들 잘리는 소리입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길가로 늘어진 가지들을 잘라달라는 이웃의 민원이 들어와, 고심한 끝에 잘라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동시에 성당 뒷문 곁에 있는 소나무는 아예 없애야만 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고도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몇 십 년이 넘은 수령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을, 그 어떤 죄도 없는 녀석들이 인간의 기호에 의해 잘리거나 죽어야 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처리해달라고 불만을 이야기한 분의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나뭇잎들이 떨어져 청소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그런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아, 눈에 보일 때마다 열심히 나뭇잎들을 쓸어 담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불만을 이야기한 분의 집 뜰과 담장 쪽을 살짝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쁜 나무들과 꽃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
나이가 들수록 풀 한 포기, 작은 벌레 한 마리의 생명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버림받은 고양이나 강아지들을 보면 그리도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어리고 작은 생명들이 그리도 사랑스럽고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한철 서럽게 울어대던 매미가 땅바닥에 떨어져 떠날 길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자동차나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옮겨주곤 합니다.
성당에서 아이들이 벌레나 풀을 가지고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것이 눈에 띄면,
생명을 귀하게 여기도록 잘 이해시켜주는 편입니다.
육식을 좋아는 편이지만, 몇 년 전부터 심각하게 육식을 멈추어볼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없앨 수는 있지만, 잃은 생명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좀 더 모든 생명들에 대해 경이로움과 귀중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인간 중심이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식하는 우리이기를 희망합니다.
둘.
누군가가 미워지면 그 누군가의 모든 것이 미워지는 것이 우리의 약한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나무를 잘라달라고 한 그분은 아마도 우리 성당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주일이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성당에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소음은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늘 주차 문제로 몇 군데 장소를 빌려 주일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니 어수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국적 교회이다 보니, 언어문제로 이런저런 잡음이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리기도 합니다.
주의를 하고 있지만, 전 신자가 모여야 되는 날은,
신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편하게 휴일을 보내기에는 불편을 느끼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이곳도 60년 전에 성당이 세워진 후, 마을이 형성된 곳입니다.
허허벌판 땅을 사서 성당을 지었고, 그 이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연세 드신 분들께 들었습니다.
하여간 전후문맥 상관없이, 비신자인 성당 이웃들 입장에서는 성당이 그렇게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당의 모든 것이 불편하게 보였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벚꽃 가지와 소나무 잎이 눈에 거슬렸을 겁니다.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불편한 마음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생명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셋.
나는 개인적으로 화병에 들어있는 꽃들을 보면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가뜩이나 짧은 삶을 더 짧게 보내야 하는 것이 인간들의 욕구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모순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을 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에 대해 좀 더 섬세한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생명은 없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넷,
마지막으로 성당 주변의 신자가 아닌 이웃들에게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렵니다.
고통 때문인지 기쁨 때문인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일, 건강이나 생명에 관한 고통을 아주 힘겨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피하는 게 삶의 최고로 알던 옛과 지금 다를 바 없습니다. 육체나 의학은 진화 발전 하지만 사람의 정신이나 마음은 그대로라 봅니다.
봉사 희생 희망 사랑 기쁨 평화는 고통이 없을 때만 가능한 줄 압니다. 이런 것이 크고 강하면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며 감사할일일 수 있지요.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고통 때문인지 기쁨 때문인지 어떤 건가요?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루카 4,42)”
영적 미숙아는 분열을 일으킨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언제나 함께 다니는 얼룩소, 검은 소, 붉은 소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사자가 덤벼들면 셋이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얼룩소에게 다가가서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 소가 뽐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해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왔는데 붉은 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 하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룩소에게 거짓말을 한 사자는 붉은 소와 검은 소에게 가서는 “세 마리 가운데서 얼룩소가 제일 힘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 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니 그게 참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 소는 얼룩소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붉은 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 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있는 힘을 다해 덤볐습니다. 검은 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중 어느 편이 정말 센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같이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좋아라 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먹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불평을 듣다보면 사제들이 너무 권위적이기 때문에 신자들과의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방적인 결정 때문에 본당 공동체가 갈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제들과 신자들은 서로 평등한 관계가 되어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양들과 평등해지라고 목자를 보내주셨을까요? 조금 다른 뜻으로 목자를 세워주신 것은 아닐까요? 개신교의 목사들의 권위가 낮은 종파일수록, 즉 목사와 신자들과의 구분이 줄어들수록 더 많은 종파의 분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쩌면 사제들의 부족함 이전에 신자들도 그 사제들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까?
코린토 교회 내에서도 이런 분열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오로 파’다, 어떤 이들은 ‘아폴로 파’다, 어떤 이들은 ‘베드로 파’다 하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여야 하는데 이렇게 교회 내에서도 분열되는 코린토 인들을 바오로는 ‘육적인 사람’, 혹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 없어 젖만 먹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영적 어린이들은 아무리 원해도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코린토 교회의 분열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들이 불완전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어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렸다는 것은 ‘교만’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갈라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내가 배우자와 싸우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대의 잘못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잘못 다 용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내 안에 있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각자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분쟁이 일어나고 갈라지고 있다면 다른 것 볼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가 얼마나 겸손하지 못했느냐만 보면 됩니다.
본당에서는 사제를 좋게 보는 신자들, 안 좋게 보는 신자들. 혹은 정치적으로 우파와 좌파가 나뉘기도 합니다. 혹은 재정이나 건축, 봉사자들을 임명하는 것에서 반드시 반대하여 갈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제가 아버지로서 모두를 보듬어야 하는데 신자들이 갈라지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완전한 목자의 모습을 하더라도 신자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따라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이 있을 때는 무조건 사제에 순명하십시오. 죄가 되지 않는 한 순명하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 한 명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만 하늘 나라 열쇠를 주셨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구심점’이 있어야만 교회가 갈라지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분쟁이 있다면 교만한 사람이 있는 것이고 교만한 사람이 있다면 불순명이 있습니다. 평등을 주장하면서 싸운다면 교회는 갈기갈기 찢겨질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순명할 줄 알아 한 목자 밑에 한 무리를 이룰 줄 압니다. 갈라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아직 육적인 사람이고 어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바오로의 말을 명심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부릅니다. 신학교에서 7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기도하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영성, 건강, 지식’을 키워나갑니다. 동창 중에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그레고리오’가 있습니다. 노래를 잘 불렀고, 언변이 좋았고, 심리학을 전공해서 상담도 많이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창신부는 벌써 15년 이상을 투병 중에 있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고, 지금은 휴양 중에 있습니다. 가장 활발하게 사목해야 할 40대를 병원을 오가면서 지냈습니다. 동창 신부가 건강을 회복해서 신자들과 더불어 사목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제는 교구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정든 사목의 현장을 떠났고, 새로운 사목의 현장을 가셨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진실한 사제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들의 사목 방식도 참 다양합니다. 어떤 분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주도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확실하기는 하지만 본인도 피곤하고, 함께 하는 분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모든 것을 신자들에게 맡기곤 합니다. 사제는 기도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제는 본당의 재정, 행정, 사목의 모든 분야를 책임지기 마련입니다. 직원들을 잘 돌보고, 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교구장의 사목지침을 본당에서 실현해야 합니다. 본당 재정의 모든 전표들을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도하는 사제에게도, 모든 것을 맡기는 사제에게도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함께하는 시간이 축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떠난 자리에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제는 긍정적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 진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구름 뒤에 밝은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인 사제는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도 배가 12척이나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는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시작되는 곳에서는 씨를 뿌린다는 마음으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사제는 겸손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자세로 지내면 좋습니다. 아는 것은 나눈다든 마음을 가지면 좋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첫날을 지낸 신부님들께서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인사이동은 교구장님의 권한이지만 축복은 하느님의 몫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쁜 소식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길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산다는 것의 기쁨이
바로 사랑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기쁨은
모든 것을 다시
기쁨이 되게 합니다.
말씀 한 마디로
따뜻한 손길 하나로
우리 아픈 마음을 기쁨으로
어루만져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일과가
예수님처럼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뚤어진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주시는
기쁜 소식은 오늘도
사랑과 기다림으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한 줄기 빛은
기쁨으로 더욱
환해집니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참된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서로를
맞아들이고 안아주는
기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쁜 소식은
보이는 것마다
맑고 기쁜 사랑이
되게 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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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성지에서 본당으로 가라는 인사이동을 받고 그 날짜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성지를 찾으신 분들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성지에 계속 계시면 안 돼요? 신부님 안 계신 성지를 상상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정말로 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성지를 떠나서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된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성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떠난 성지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뒤로 몇 명의 신부님이 바뀌어서 지금은 정말로 그럴싸한 성지로 발전했습니다. 저 때에는 성당이 없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야외에서 미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현재는 아름답고 멋있는 성당이 있어서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있을 때에는 야외 조경이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어수선했으나, 지금은 깨끗하게 잘 정리된 조경으로 많은 이들에게 편안함을 줍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없기 때문에 지금처럼 아름답고 멋있는 성지로 거듭 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속에서 종종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중심이 되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은 믿음과 겸손한 마음만이 자신 안의 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다른 의사에게서 본 일이 있었을까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마귀들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요. 이런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 있다면 질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마귀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며, 배가 고파도 굶어죽을 염려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간청을 뿌리치기가 쉬웠을까요? 사람들의 간청에 응답해서 그 자리에 머무른다면 분명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고, 나중에 있을 십자가의 죽음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면서 그러한 간청을 가볍게 뿌리치십니다.
이렇게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외딴곳에서 하신 기도에 있었습니다. 즉, 인간적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로지 기도에만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인정받고자 하는 유혹. 그래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착각들...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만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빌 게이츠)
얼마나 행복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질병에 걸린 이들을 하나하나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시지요. 당시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단순히 병에 걸렸다는 생각보다는 죄 중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즉, 죄가 많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병자들은 곧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병으로 아파 힘들어 죽겠는데,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더 큰 고통 속에 빠지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죄인이라면서 피하는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따뜻이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병을 고쳐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이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지금 역시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얼마나 기뻐하며, 또 얼마나 행복해 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며,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이라면서 기쁨과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이기심과 욕심을 버린다면, 그 기쁨과 행복은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오늘 하느님께서는
친히 우리 삶의 외딴곳이 되어 주십니다.
외딴곳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외딴곳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만
더 힘있게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외딴곳이 없으면 실패와 좌절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외딴곳은 일과 기도의 건강한 균형을 잡는
은총의 본질적인 시간입니다.
외딴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
남도 잘 대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은
이웃, 형제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껴안을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남도 껴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딴곳은 자기자신을 신뢰하는 곳입니다.
하느님과의 친밀한 유대감만이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외딴곳입니다.
자신이 맡은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게
하는 것 또한 외딴곳이 주는 은총입니다.
외딴곳의 은총을 통해 소중한 가치와
소중한 삶의 뿌리가 언제나 하느님이심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이 확고해야
긍정적이고 행복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외딴곳, 그곳은 균형있는 일과 기도의 소통입니다.
나를 배려하는 것이며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정직하게 만나는 외딴곳을 통해
나와 이웃을 위해 기쁘게 봉사하는
소중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사랑과 참된 변화는
먼저 우리자신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외딴곳은 매일 반드시 필요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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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글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세 번 놀라게 된답니다.
첫 번째, “어머나, 내가 천국에 왔네. 웬일이니?”
두 번째, “어머나, 저 친구도 하늘나라에 왔네. 말도 안 돼. 저 친구가 얼마나 나쁜 놈인데 이곳에 올 수 있어?”
세 번째, “웬일이니, 웬일이니... 내 친한 친구 **가 안 보여. 그 친구 죽은지가 언제인데? 이곳에 없으면 어디에 있는 거지? 지옥?”
그러면서 이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연히 올 거란 사람은 안 보이고, 없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있다니……. 그러니 함부로 내 잣대로 판단하지 마세요.’
사실 하늘나라로의 초대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예수님 당신께 데리고 온 질병을 앓고 있는 모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시지 않습니까? 누구는 착하니까 고쳐주고, 누구는 악하니까 문전박대하며 그냥 내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도 제외 없이 당신만을 찾아온다면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즉, 병의 치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말씀 한 마디로 쉽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손을 얹으셔서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시면 예수님 스스로도 편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철저히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방해가 있습니다. 그 방해는 절대로 거짓을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치지요. 분명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을 때 하는 이 말을 통해서 혼돈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즉, 아직 주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단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말을 꾸짖으며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지요. 예수님만 있으면 자기들은 아프지도 않고 배고프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욕심일 뿐입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사랑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당신을 채점하러 올 때, 그가 보는 것은 당신의 승패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경기를 했느냐다(그랜트랜드 라이스).
나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들은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표는 절대로 끝이 아닙니다. 마치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목표라고 해서,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한 부부가 결혼을 했는데, ‘우리 50년만 함께 살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만 도달하면 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세우고 있는 목표는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 목표가 내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목표만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특히 그 목표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일 때에는 더욱 더 공허함만을 가져다줍니다. 한 증권회사 간부가 자살하며 유서를 남겼다고 하지요.
“얘들아! 사랑한다! 아빠는 지금까지 성실하게 온 힘을 다해 살아왔다. 누구보다 빨리 승진했고, 누구보다 빨리 돈을 벌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지금 아빠는 너무 허전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 먼저 간다. 너희는 아빠처럼 살지 말라.”
주님께서는 언제나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고 스스로 당신께서도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엉뚱한 것들을 나의 목표로 세워서 행복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을까요?
진정한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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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 있었던 부끄러운 일 하나를 고백하며 시작합니다.
어제 사무실 여직원이 제게 종이 한 장을 건네줍니다. 그리고 이 종이는 다름 아닌 교통위반 범칙금 통지서였습니다. 제가 무슨 교통법규를 위반했는지 보니 버스전용차선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버스전용차선을 위반한 적이 없다고 자신했거든요.
그래서 자세히 통지서를 살펴보니, 위반된 차는 제 차가 아니라 성소국에서 운영하는 승합차였습니다. 또 날짜를 보니 제가 운전한 것이 맞습니다. 문제는 저의 운전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위반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지요.
고속도로에서 보면 버스전용차선에는 사람 6명 이상만 타면 9인승 승합차도 다닐 수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시내에서도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떳떳하게 버스전용차선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내의 버스전용차선에는 35인승 이상의 버스만이 다닐 수가 있다고 하네요.
잘못 알고 있었으니, 교통위반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위반 범칙금 6만원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6만원으로 몰랐던 사실 하나를 배우게 되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네요.
모르기 때문에 틀린 것도 틀린 줄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정하는 것을 혼자서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있는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고 말하지요. 제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이 심한 열병이 혹시 ‘화병’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위인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쫓아서 이 고장 저 고장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 떠돌이 생활을 통해 온갖 부귀영화를 얻는 것도 아니지요. 이러한 사위를 보고서 화가 안 났을까요? 사위의 인품을 보고서 딸을 맡겼을 텐데, 딸과 가정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고 있으니 저 같아도 화방이 났을 것 같습니다. 특히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니 지금 하고 있는 사위 베드로의 모습이 옳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시몬의 장모는 그제야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시중을 들지요. 그들의 선택이 옳은 것임을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실수하기가 더 쉬우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모르면 그만큼 힘들게 이 세상을 살 수밖에 없으며, 내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래야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께 최선을 다해 시중드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운명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운명에 동의하지 않고 짊어지고 가는 용기이다.(E. 가이벨)
상대방에게 기준을 맞추는 앎
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떤 형제님의 하소연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친한 사이로 지냈던 옆집 교우와의 마찰로 힘든 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가를 제게 이야기해주시는데 그 말에 깊은 공감이 갔으며, 그 옆집 교우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후 이번에는 그 옆집의 교우분이 저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분 역시 먼저 저를 찾아온 형제님과의 관계 때문에 상담을 요청하신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분의 말을 듣는데 이분의 말씀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즉, 먼저 저를 찾아온 형제님이 잘못한 것이지, 이분은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두 분의 말씀을 모두 들은 결과 잘못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자기는 옳은데 남은 틀리다는 생각에, 둘 다 잘못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기준을 맞춘 앎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기준을 맞추는 앎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앎만이 다툼과 분쟁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만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사랑과 소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으로 많은 사랑이 ‘깨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랑이 비극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향기로움으로, 아름다움으로, 풍성한 결실로 열매 맺지 못하고 참담하게 끝나고 마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사랑과 소유를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소유를 혼동합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억압하기보다는 성장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편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속박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얽매이기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속박되고 싶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근원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인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마치 수족관에 들어있는 열대어처럼 생각합니다. 아니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애완견처럼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은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결과는 깊은 상처요, 괴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의 태도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 같으신 하느님, 좁디좁은 인간 세상에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오지 중의 오지 갈릴래아 지방에만 머물기에는 너무나 아까우신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셨기에, 이런 말씀을 내려놓고 또 다른 길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율법으로 좁혀진 세계를 뛰어넘는 그분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작디작은 사랑, 사랑도 아닌 사랑에 목숨 거는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신앙에 던진 도전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 점점 성장해나가길 바랍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가졌던 사랑에 대한 허상과 환영들을 깨트리길 요청합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청합니다. 상대방의 약함과 쓸쓸한 뒷모습, 실수와 허물 등등.
사랑이 쉽게 깨지는 또 다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기대입니다. 그토록 목숨 걸고 예수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사람들, 목숨 걸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맹세했던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다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잘 나가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죽어가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치유시키시는 ‘명의’ 예수님만 눈에 보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것 내려놓고 십자가 길을 걸어야만 하는 순명의 예수님은 죽어도 보기가 싫었습니다. 마침내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 치욕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고통의 예수님은 절대로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무너질 때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랑, 보다 영속적인 사랑을 추구하길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
정희완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 공생애 전체에 걸쳐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복음 선포 중심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것으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 갔기 때문에,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하느님 나라의 동일시라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가 오랫동안 잊혀져 온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에 힘주어 선포하신 것은 분명 당신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며, 하느님 그 자체에 대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설교의 대부분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였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신 그분의 행위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종의 징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모습은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조금은 허망한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아마 그 구원의 모습은 신나는 열정의 모습일 거라는 상상을 가끔 합니다.
우리의 생은 때론 고요하고 정적인 모습으로 속 깊은 신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무엇보다 환하고 밝은 그리고 기쁘고 열정적인 움직임들 안에서 보다 근원적인 속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생을 보다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서, 신앙의 열정이 더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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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침부터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과 새벽 방송을 한 뒤에, 아침 운동을 했지요. 그리고 곧바로 신학교로 갔습니다. 신학교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신학생 면담을 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곳에 사시는 형제님과 대화를 나눠야만 했습니다. 한낮이 되어서야 강화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교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저의 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5시에는 30년 동안 교구에서 근무하셨던 형제님의 퇴임 미사가 있었거든요.
저녁 식사 후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일 바쁘다면 정말로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떠올려졌습니다. 제가 바쁘다 바쁘다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바쁨보다 더 바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 인간들을 지켜주시는 주님. 그런 주님이심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하루 일상이 나옵니다.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힘이 되는 좋은 말씀들을 건네주시지요.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베드로의 장모처럼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역시 치유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지요. 그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날이 어두워졌다고 “이제 영업 끝났으니 모두 돌아가십시오.”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날이 샐 때까지도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상처를 치유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지요.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날이 샐 때까지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기에 이제는 푹 쉬셔도 그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회당으로 이동하셔서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바쁨을 생각하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쁜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또한 쉬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바쁜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파견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일을 이어 받아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내 안에서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한 가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어떤 분께서 제가 있는 성소국으로 간편하게 뜨거운 물만 부어 먹을 수 있는 ‘쌀국수’ 1박스를 보내주셨습니다. 사실 어제 강화에 다녀온 뒤, 너무나 배고팠기에 쌀국수가 너무나 예뻐 보였습니다. 정말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화로 드려야 하는데,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서 이 지면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생이라도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와 가치가 있는 법이다(미치 앨봄).
스승의 참 모습(‘좋은생각’ 중에서)
프랑스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1학년 교사가 귀가하는 반 학생들 손에 가정통신문을 들려 보냈다. 그 가정통신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학부모님께, 저는 내일 파업에 참가하기 때문에 수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을 등교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이번 파업은 교육 예산의 확대를 요구하는 한편 교원 감축에 반대해서 수많은 교사들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교사들이 반드시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일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가정통신문에는 정부의 교육 정책으로 벌어질 상황과 그것에 대비한 교사들의 주장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모든 학부모가 교사들의 주장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사들도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수 있고 파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므로 이튿날 그 교사의 파업 참가로 수업을 못하게 된 것 때문에 학교 측에 항의하는 학부모는 없었다.
학기 말이 되었다. 그 1학년 학급에서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이 함께 모여 감사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학부모들은 작은 선물도 선생님께 전달했다. 그런데 이튿날 교사는 학교 게시판에 편지를 써서 붙였다.
“학부모님들이 제게 선물해 주신 알프스 산악지도와 망원경을 받고 감동했습니다. 언젠가 알프스에 오를 계획이라 꼭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망원경은 제게 과분한 물건입니다. 호기심 많은 우리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 같으니 학급 비품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대신 저를 1년 동안 믿고 아껴주신 그 마음은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파업 참가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 낯설겠지만 제자들을 위해 선물로 받은 망원경까지 내놓은 스승의 모습은 존경할 만하지 않을까?
본격 행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와 오늘의 루카복음은 주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행보를 시작하심을 소개하며 소위 말하는 “가파르나움의 하루”를 소개합니다.
가르치심, 병자치유, 악령퇴치. 이것이 주님이 하루에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공생활 내내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은 이런 일을 하실 때 주님의 모습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인에게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악령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드러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는 단호하고 엄한 아버지의 모습과 부드럽고 따듯한 어머니의 모습이 같이 있습니다.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하시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따듯하신 것이고 두 모습이지만 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 사랑의 두 모습입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없이 단호하시지만 그로 인한 사람의 고통에는 더 할 수 없이 인자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두 가지 태도를 자유로이 취하실 수 있는 주님이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사심이 없는 사랑과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사랑이 이렇게 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엄함과 인자함에서 자유로운 주님은 이제 머묾과 떠남에서도 자유로움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서 병자들에게 가까이 가시고 옆에 계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엄마 손은 약손”처럼 손을 얹어 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자하심이 넘치시기에 그렇게 엄하심에도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스스로 있을 곳을 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으면 더 있고 싫으면 떠나고, 누가 붙잡으며 더 있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정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입니다.
파견되는 대로 가시는 분이십니다.
저도 이런 것을 흉내는 내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디에 있겠다, 이제 그만 하고 떠나겠다고 제 의견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늘 관구장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군소리 없이 가고 가는 곳마다 열심히 했지만 속으로 보면 떠남의 미련 같은 것이 늘 있었습니다. 새로 가는 곳의 싫음은 없었지만 떠남의 미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래도 따듯해졌지만 전에는 떠나고 나면 아주 매정하게 딱 끊어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실 때 주님은 어떠하셨을지 궁금합니다.
기억하고 감사하기
최성기 신부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서간들을 보면, 편지를 시작하면서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오늘 독서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콜로 1,3)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크고 복된지를 마음으로 느끼고, 나와 함께 삶을 섞어가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형제 자매들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이런 여정에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 신앙 공동체가 걸어갈 길이자 하느님과 일치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결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모두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아픔과 고통으로 삶의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일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일입니다. 기적을 베푸는 이의 삶이 감사에 찰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에서 머무신 시간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삶에 대한 기억과 감사를 되살리는 시간, 참된 희망의 힘이 되살아나는 시간, 하느님과 하나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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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펜실베이니아로 가는 중앙 보도에 층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층계는 실력과 성실성이 널리 알려진 ‘옴스테드’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라는데, 글쎄 이상하게도 그 층계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입니다.
한번은 그 층계에서 넘어져 부상한 한 시민이 그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했지요. 그러자 옴스테드가 말합니다.
“나는 그 층계를 건축하기 위하여 내 집에 나무층계를 만들어놓고 오르내리며 오랫동안 실험한 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좀 조심해 걸으시지, 제 책임이 아니라니까요.”
옴스테드의 말에 부상당한 사람은 화가 치밀었으나 할 말이 없었지요. 수십 차례를 실험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시민이 걸어가는 옴스테이를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그는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옴스테이는 한쪽 다리가 다른쪽 다리보다 짧은 것입니다.
스스로 실험을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맞는 이 층계가 정상인 사람에게 맞을 리가 없을테고, 사람들이 계속 넘어져 부상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납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제 판단이 맞다고 박박 우길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되돌아보면 내 판단이 꼭 맞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요.
제가 신학생 때 좀 못살게 했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후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하는 유행을 다 따라하는 이 후배의 모습이 신학생으로써 맞지 않다고 생각을 했고, 많이 혼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후배의 따른 유행을 훗날에는 저도 똑같이 따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삐삐라고 불리던 호출기가 그랬고, 휴대전화가 그랬으며, 머리에 무쓰나 젤을 바르던 모습 역시 나중에는 저의 모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옳다는 것. 그것처럼 어리석은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고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군중들만의 판단이지요. 주님의 뜻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 전하는 것인데, 주님의 뜻을 자신의 뜻 아래에 놓으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가 없게 됩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보다 더 겸손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일을 합시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앨리스 휘톤, ‘용서’ 중에서)
회의나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청중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여러분 인생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가장 흔하게 나오는 대답이 바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평범한 직장이든 고위직이든 모든 사람이 이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적합한 매너나 사회적인 감수성을 기를 수 없을 것이다. 둥굴에 사는 한 부족 사람들이 구성원 한 명을 쫓아내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그 사람은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직결된다. 그런데도 이런 두려움이 없다면 그 사람은 부족의 안녕에 공헌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불안해하고 자신감도 부족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사회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요구한 것을 상대방이 거절하는 경우, 내가 속한 팀에서 내가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한 경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무시무시한 결과가 몰아닥칠지 미리 추측한다.
그런데 나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려면 반드시 다른 이에게 “Yes”라는 대답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기꺼이 “No”라는 대답도 받아들인다면 성공할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거절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힘을 기를 수는 있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마음, 네가 내 속에 들어와 살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나를 지배할 수는 없어. 너는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고 일과 인생에서 더 큰 게임을 즐기려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이런 태도를 취하면 두려움이 당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두려움을 소유하게 된다.
복음 선포
서북원 신부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면서도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 자체여야 합니다.
내가 기쁠 때 다른 이에게도 기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삶은 먼저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어떤 신자가 잘못했을 경우 그 개인에게 잘못을 돌리기보다 종교 자체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내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인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나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님, 부족한 저에게 당신을 전하기 전에 제가 먼저 올바로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바라보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소서. 아멘.”
결단에 이르는 신앙
이종진 신부님
필자는 주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늘 이런저런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된다. 위대한 성현들의 지혜나 통찰을 배울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체험하는 것은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갖는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대가도 있다. 지식이 쌓일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부담감과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곧 ‘아는 것’과 ‘실천적 삶’ 사이의 간극을 의식할 때 일어난다.
특히 신앙에 관한 지식을 접할 때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하느님의 신비를 벗겨내는 심오한 지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마음과 의지’로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원하고 행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못한다면 그 거룩한 지식은 결국 공허한 느낌으로 귀결될 뿐이다. 누구보다도 이 점을 깊이 통감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서 천국을 잡아채는데 우리는 마음이 없는 학문으로 살과 피의 진흙탕 안에서 뒹굴고 있구나.” 하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앎은 가장 거룩한 지식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귀들도 이런 지식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한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할’ 의사가 없다. 아니 그런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치 어둠과 빛이 함께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마귀들의 고백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신앙은 그 진리를 ‘아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원하고 행하겠다는 ‘결단’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의 신앙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신앙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결단을 유보하고 그저 아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어둠의 세력 역시 빛과 자신을 구분할 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양자 사이의 거리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가 아닌가!
심고 물을 주는 일꾼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갈라티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체 안의 파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1년 6개월 간 코린토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시리아로 떠난 뒤 아폴로가 바오로 사도의 뒤를 이어 코린토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그만 바오로와 상관없이 파벌이 생긴 것입니다.
종종 본당이나 공동체에서 그런 일이 생깁니다.
본당 신부님이 갈리거나 회장이 바뀔 때 전임자와 친했던 사람과 후임자와 친한 사람들 사이에 전임자 때와 달라진 것 때문에 갈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하느님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믿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고 적어도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이럴 수 없는데 하느님도 공동체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내편이냐 아니냐만 중요합니다.
이런 코린토 신자들을 바오로 사도는 육적이고 속된 사람(Unspiritual person)이라고 강하게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폴로도 다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자신은 교회를 세웠으니 하느님께서 심는 일꾼으로 쓰신 것이고 아폴로는 다음에 와 교회를 돌봤으니 물주는 일꾼으로 쓰신 거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코린토를 당신의 텃밭과 건물로 삼으시고 하느님께서 자기와 아폴로를 일꾼으로 삼으셨는데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믿음도 교회도 다 헛것이고 하느님이 아니 쓰시면 자기들도 다 헛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느님이 완전히 빠져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독서> :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하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고린토의 교우들 가운데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린 바울로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그들의 신앙을 길러주며 교회를 부흥시킨 아폴로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바울로나 아폴로를 추켜세우며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살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교회 밖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여 살았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파벌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바울로 사도는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며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권고한다. 바울로와 아폴로는 서로 다른 과업을 맡았다. 바울로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세웠고 아폴로는 교회를 이끌어 갔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에 알맞은 방법으로 각기 하느님의 일을 했다. 이러한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어떠한 과업을 맡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면서 자신을 죽이셨고, 자신 안에 오직 하느님께서 계시기를 기도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길,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을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자존심, 꿈,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을 버리면 죽는 것처럼 생각되어 버리지 못하고 꼭 움켜쥐고 산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맹인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맹인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미끄러졌는데 겨우 외나무다리를 붙잡았다. 그는 살기 위해 다리를 꼭 붙잡고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 다리를 붙잡은 손을 놓으라고 말한다. 손을 놓으면 강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데도 손을 놓으라고 한다. 맹인은 사람들의 말을 믿고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힘이 빠져서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떨어진 곳은 백사장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리를 놓으면 죽는다는 생각과 믿음이 그로 하여금 힘이 빠질 때까지 다리를 붙들게 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말을 믿고 손을 놓았으면 훨씬 더 빨리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붙잡고 있었기에 힘이 빠질 때까지 손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그처럼 자신을 놓지 못한다. 심지어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기보다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고자 한다. 교회 안에 살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다. 자신을 버린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꼭 움켜쥐고 산다.
고린토 교회의 교우들은 바울로 파, 아폴로 파라고 하면서 각자가 바울로와 아폴로를 추켜세웠지만, 그 안에는 자기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를 고집하고 내세웠던 것이다. 바울로와 아폴로가 전한 분이 주님이었지만, 그들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러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신앙인, 그는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달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다. 자신을 내세우고 고집하고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을 드러내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하자. 이 것 아니면 죽는다고 움켜쥔 그 손을 펴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됩시다.
김성남 신부님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탄복하고 경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는데, 마침 심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줍니다. 열이 내린 부인은 사람들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시기 전에도 시몬의 장모는 앓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명령 하시자 즉시 사라진 열병은 도대체 어떤 병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위에는 베드로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아픔과 고통도 동반해야 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위 시몬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몬의 장모는 시몬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 외면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시몬을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시몬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스승이신 예수를 장모의 집에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서 친히 장모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해 주고 기쁜 소식을 가르쳐주면 가정불화가 없어지겠지, 그렇게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모를 고쳐주는 치유 장면은 이례적으로 극히 짧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몬의 장인도 그론 되지 않고, 시몬의 아내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환자와의 대화도 없고, 환자의 믿음을 확인 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인 곁에 서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하시자 열이 내립니다. 부인은 열이 내리자 곧 예수의 일행을 위해 시중을 들고 봉사를 합니다. 여러 가지 세상일 집안일로 마음의 열병을 앓고 있던 장모는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파 누워 있던 사람이 낫자마자 즉시 사람들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시몬의 장모는 혼자만을 위한 삶의 방식에서 타인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 전에는 자신만을 위해 존재 하는 삶의 방식을 살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난 후에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각자 자신들의 삶 안에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며 감탄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들은 아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동참하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진정 예수님 말씀의 기쁨과 구원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일어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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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주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래요.
여자 친구는 반드시 쭉쭉 빵빵 절세미녀야 한다는 생활신조를 가지고 살고 있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우연히 유명한 심리 상담사와 고장 난 승강기에 갇히게 되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심리 상담사에 의해서 외모만 최고라고 생각을 바꾸는 특별한 최면요법을 받게 됩니다.
이 최면요법을 받은 뒤, 주인공의 앞에 늘씬한 몸매에 환상적인 금발 그리고 성격까지 천사와 같은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녀와의 데이트 시간은 항상 행복했지요. 하지만 이상한 일이 그녀에게 자주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녀가 엉덩이만 살짝 걸쳐도 앉은 의자가 다 박살나고, 아름다운 그녀의 속옷은 낙하산처럼 너무 큰 것이에요. 왜 그럴까요?
바로 최면요법을 받은 뒤, 외모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즉,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 역시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이 고아야지’라는 옛날 노래에서도 이런 가사가 나오지요.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점점 심해지는 외모지상주의 속에 빠져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성형수술도 과감하게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 번 해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영화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외모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고서 아름다움을 평가한다면 그때에도 지금처럼 성형수술이 판을 칠까요?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성서에서 혹시 이런 내용을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너무나 멋지고 예쁜 여성만을 가까이 하셨다는 내용을 또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서 뿅 갔다는 내용을……. 아마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외적으로 너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질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 외적으로 아름다워 보일까요?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은 어떨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을 보셨고, 그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세요. 내 마음을 주님께 드러내기에 떳떳하십니까? 과연 주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서 “네 마음이 참 예쁘구나.”하면서 칭찬하실까요?
겉으로만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속마음도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도대체 누가 안된다는 거야?('좋은 글' 중에서)
"넌 도대체 언제까지 체육관에서 온종일 운동만 하면서 환상 속에서 살 거냐? "
-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가족은 미스터 유니버스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라고 야단쳤다
"네 목소리는 좋지만, 특별하진 않아"
- 인기 가수 다이내나 로스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내에서의 공연하는 뮤지컬 배역을 얻으려고 오디션을 받은 로스에게 담당 교사가 불합격을 알리면서 한 말.
"그 사업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 매출액이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화장품 제국을 설립한 에스티 로더가 처음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회계사가 한 말.
" 너는 피아노를 칠 수도 없고, 노래를 부를 수도 없어. 차라리 의자 짜는 법을 배우는 게 나을 거다. 그러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을 테니까"
- 맹인 가수 레이 찰스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이 한 말
" 자네는 출판업계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훌륭한 편집자일세. 그런데 왜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작가가 되려는 거지? 나도 자네가 쓴 책을 읽어 보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저 그래."
- 뉴욕의 어느 출판업자가 제임스 미치너의 처녀작 [남태평양]을 논평한 말. 이 작품으로 미치너는 풀리처상을 받았다.
치유를 통한 은총
최혜영 수녀님
오늘날 질병의 고통만큼 인간을 위협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의기충천하다가도 덜컥 큰 병에 걸리고 나면 어깨가 축 쳐지고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에 안 걸리려고 온갖 좋다는 약은 어떻게든 구해서 먹으려 하고, 신약(新藥)을 개발하는 데 엄청난 돈이 투자되곤 합니다. 현대 의학이 과거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 감기 바이러스도 퇴치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신약이 많이 발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병도 많이 생겨 인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일뿐 하느님 자체는 아닙니다. 병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의 전부이시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며 해방입니다. 우리가 치유의 은혜를 청해야겠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넘어 하느님의 다스림을 맛볼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은 순례의 여정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한만옥 신부님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주셨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청한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따스한 사랑의 손을 얹어 고쳐주셨다.
날이 새자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셨다. 아마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분은 자주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으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시는 바로 그 기도 안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소외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본 군중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들을 떠나지 말고 함께 계시기를 청한다. 그분이 함께 계시면 모든 병도 낫게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신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복음서에서는 어느 한 곳에 안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늘 떠나신다.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에까지.
신앙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사제들도 이 본당에서 저 본당으로, 이 소임에서 저 소임으로 계속 이동하는 것이 아닐까?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하느님의 은총이 소낙비처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들께서 꿈꾸고 계시는 교회의 모습 어떤 것인지요? 아마도 신명나는 교회의 모습이겠지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밝아오고 기쁨에 젖어드는 교회의 모습, 언제든지 마음 놓고 찾아가 비빌 수 있는 든든한 언덕 같은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간의 일치와 친교, 가족적 만남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 약자와 병자들에 대한 배려와 치유가 활발히 전개되는 모습, 사목자들의 헌신적이고 겸손한 봉사에 신자들 모두가 행복해하는 모습, 지금 이 순간이 우리 교회가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이 순간이 영원이었으면 할 정도로 신명나는 교회의 모습...
오늘 복음에 제시되고 있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천상생활의 한 단면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와 충만한 사랑에 힘입어 예수님께서는 활발한 치유활동을 전개하십니다. 관대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소낙비처럼 죄인들 머리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얼마나 관대한지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다들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갖가지 질병에서 치유된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에 겨운 백성들은 그 순간이 너무나 은혜로워, ‘지금 이 상태에서 세상이 멈췄으면’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로 떠나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제발 자신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세상 끝날 까지 자신들 곁에 머물러주시라고.
오늘 설정된 복음 장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 한번만 주어진 이 소중한 우리의 생애, 사실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아쉽고도 아까운 우리의 나날들, 그렇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신명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나 발밑을 내려다보니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삶은 어찌 그리도 혹독한지, 우리의 인생은 어찌 그리도 팍팍한지...
부족하기에, 아쉽기에, 허탈하기에, 다시금 청해봅니다.
신명나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살맛나고 재미있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봅니다.
임성환 신부님
오늘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소문이 나돌았을까요?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신통방통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 그 사람이 손만 얹으면 어떤 환자들도 다 낫더라. 그러고도 돈을 요구하지 않더라. 와~’
이런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온통 예수님께로 모이게 되었고 예수님은 소문 대로 손을 얹으시고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서 함께 살자고 붙들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낫게하는 굉장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을뿐 예수님 그분의 참 모습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받았던 세례의 그 때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세례 예식의 첫부분은 사제의 3가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2가지의 질문이 끝나고 나면 사제는 세 번째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세례받을 사람들의 결심을 묻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세례성사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의를 가지지 못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며 기도에 참여하고 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약속합니까?” “예,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곧 아버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하는 동안 세례를 받을 예비신자들은 굉장히 가슴이 벅차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님이,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일치의 중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십인십색(十人十色)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저마다 달라 가지각색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쩌다 외출하다보면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새삼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공동체 일치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극명한 상징입니다.
마음, 생각, 나이, 취향, 기질, 체력, 재능, 지방 무엇 하나 똑같은 것 없는 유일한 개인들입니다.
이래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주장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다르다는 사실 안에 이미 분열의 씨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가장 어려운 게 분열일 것입니다.
내적으로 마음 갈릴 때, 공동체가 분열로 조각 날 때 그 소진되는 에너지는 참으로 막대합니다.
그래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큰 죄로 취급합니다.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을 잊어 육적인 사람들이, 속된 사람들이 될 때 분열은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시기와 싸움으로 갈라진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질책에서 이런 진리가 잘 드러납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농사짓는 누구에게 수긍이 가는 진리입니다.
바오로처럼 하느님 중심의 통합적 시야의 안목을 지닐 때 비로소 다양성 안의 일치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은 한 부분을 책임 맡은 평등한 동료이자 형제요, 하느님의 협력자라는 겸손의 자각이 있어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분주한 치유활동과 구마활동도 바로 내적일치의 중심인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된 삶이였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아니 예수님의 전 활동이 하느님과의 내적일치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갈림 없는 마음일 때 바로 그 사람은 하느님 능력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붙잡아 두려는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적일치의 중심인 하느님 나라가 잘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의 핵(核)이자 예수님의 삶의 통합을 이룬 내적 중심임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하나의 비전이자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이 계실 때 비로소 내적일치요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이래서 공동미사와 공동기도가 절대적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새삼 분도회의 모토가 빛을 발합니다.
영원한 삶의 진리입니다.
기도 없이 일만 하다가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곧 내적 분열로 망합니다.
하느님의 성전 안에서 하느님을 상징하는 제대를 중심으로 모여 끊임없이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며 하느님 중심을 확인할 때 비로소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성격이, 취향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방향이 같아야 일치입니다.
하느님께 찬미 기도를 바치기 위해 모이지만,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살기위해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루 일곱 번 공동기도를 바친다는 그자체가 공동체의 일치가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지를 나타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공동체 일치의 비전이자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고 확인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므로 자신의 내적일치와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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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단 한 명도 고통과 시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어린 꼬마들도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조그마한 입에서 ‘힘들어 죽겠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제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삶 가운데에는 좋은 일만 있지 않았습니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도 있었고, 이 시간이 제발 휙 지나가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주님께 매달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지요.
“주님, 이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의 뜻에 맞게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바치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생각납니다. 신학생 때 한 가지 잘못을 했고, 이 일을 교수 신부님께 지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당시 신학교에서는 그 문제가 민감한 문제였고 성소를 잃을 위험도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신부가 되고 싶었던 저는 매일 성체조배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했지요.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로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멋진 사제가 되어서 당신의 일꾼이 되겠습니다.”
그때 쫓겨나지도 않고 이렇게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분명히 주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열심히 살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가 필요할 때만 주님을 불렀고,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는 주님과 멀리하면서 제 일 하기에만 바빴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내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았다면 당연히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 베드로의 장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의 장모는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청해서 장모가 낫게 됩니다. 그리고 장모는 열이 가시자마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지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순간의 위기만 극복되면 나 몰라라 사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몬의 장모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 기도의 응답을 받았어도 곧바로 주님을 외면했던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고통과 시련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자유인이라고 볼 수 없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에픽테투스)
고난과 시련(박성철, ‘희망 반창고’ 중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고난과 시련이 없을 수가 없지요. 아픔이나 눈물이 없을 수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가 가끔 잊곤 하는 사실이 있답니다. 시련과 아픔, 고난, 힘겨움 같은 것은 우리를 쓰러지게 하고, 삶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더욱 단련시켜 주고, 더 큰 교훈을 주기 위한 값진 것이라는 사실이랍니다.
헨리 제임스란 사람은 충고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런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충고를 한 마디 해 달라고 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난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머리를 하늘로 높이 쳐들고는 말하십시오. '나는 너를 이기고야 말 거야. 결코 너는 나를 꺾을 수 없어.'라고. 그리고 그 말 뒤에는 가장 위안이 되는 이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십시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아픔과 고난은 나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줄 거예요.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말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내 인생의 소음이 아닌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조화로운 멜로디.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김석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행적은 특별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릴적에 하루를 마무리를 할 때쯤이면 동네 비석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고, 길흉사가 있을 때면 모두들 그리로 모여들어 이야기꽃을 피우던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을 앓는 장모를 고쳐주셨으니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보고 아무도 그가 떠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침 일찍 외딴곳으로 가서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모든 능력이 아버지한테서 나오고 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항상 하셨으니 아버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참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이 시간에 와서 그 동네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하며, 그 일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이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과연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난 예수님이 아니기에 그러한 기적을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곁을 지나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의 얘기를 귀담아들어 줄 수 있다. 아니면 말없이 그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다.이것을 내 일상 안에서 시도해 볼 수 있다. 함께 사는 가족에게, 직장 동료에게, 학교의 모든 동료에게,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지는 등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순간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라고 하면서 항상, 즉시, 기쁘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복음 선포이며 하늘나라를 전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간다는 것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공생활 초기 예수님은 인기가 좋습니다.
초창기에는 예수님도 Populism을 잘 활용하셨던 것일까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사람들에게서 악령들을 몰아내주시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치유 은사와 구마의 은사를 받은 사람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몰립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요즘의 은사 받은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나 강의를 잘 하여 인기를 끌면 그 인기를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떠나십니다.
이것은 박수칠 때 떠난다는 그런 뜻도 아니고 떠나면 사람들이 더 열렬하고 극성스럽게 따르게 된다는 그런 전술적인 이유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인기 관리 차원에서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의 인연이나 사랑에 머물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상과 같이 떠났습니다.
예를 들어 짧은 본당 사목이었지만 떠난 다음에는 다시 찾아가지 않고 연락이 오기 전에는 제가 아무 연락을 취하지 않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추억을 버리고 떠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분들의 호의와 사랑을 매정히 끊는 것도 죄송하고 어떤 때는 마음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저의 경우에는 그 사랑에 안주할까봐
그래서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지 못할까봐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왜 떠나셨을까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신 다음 날 외딴 곳으로 가시자 사람들은 그곳까지 찾아 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잡을 때 예수님도 뿌리치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십니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당신의 삶이 어떤 삶일지 천명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파견되어 가는 삶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떠나는 것은 또 어떤 식으로든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인기와 인정에 머물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인간의 사랑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떠나가는 것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향해 감, 즉 목적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없다면 방황이겠지요.
방황이 아닌 이상 목적지는 반드시 있는데 예수님의 목적지는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가 계신 하느님 나라요, 우선은 옆 고을입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이것이 당신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처럼 하느님 사랑과 더 많은 사랑을 위해 떠나는 삶이길 기도합니다.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께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시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퍼질테니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맨홀 속 아이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은 제가 무척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 보다 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한국에서의 안정된 기반, 소중한 인연들을 뒤로하고 훌훌 몽골로 떠나신 선교사 신부님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심신은 비록 고달프지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손수 집도 지으시고, 가끔씩 아이들을 위해 팝콘도 튀기시는 신부님, 이 세상 어딜 가도 마땅히 머리 눕힐 곳조차 없어 맨홀 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찾아다니시는 신부님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편지를 통해서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시는 선배님의 삶이 오늘 따라 더욱 부럽습니다.
"양신부님, 오는 10월 6일 대림동 수도원에서 있을 축제-바자회를 저희 몽골을 돕기 위해 개최한다니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래저래 저를 움직이시고 작용하시는 듯 싶습니다.
제가 이곳 길거리 아이들을 위해 몽골에 도착한지 어언 1년, 이제야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뜻을 깨달아 갑니다.
짙은 어둠과 습기로 가득 찬 지하에서도 이곳 몽골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촛불을 밝힙니다.
저는 지금 당장 맨홀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게르(몽골집)를 뜯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 판입니다. 내년 4월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가 봅니다.
밤잠도 못 이루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좋은 소식을 보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래저래 하느님께서는 몽골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아이들과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몽골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제 어린 시절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듯 합니다. 어찌 그리도 꼭 60년대 우리들 모습과 비슷한지 모릅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때묻지 않고 살아가는 이곳 몽골의 <맨홀 속 아이들>을 지상으로 끌어 올려 주고 싶습니다. 맨홀에서 건져낸 아이들과 함께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몽골 아이들에 둘러싸여 진지한 모습으로 설탕을 녹여 소다를 살짝 쳐 젓는 모습, 조심스레 철판 위에 붇고 별 모양의 틀을 찍는 선배 신부님의 모습이 얼마나 기뻐 보이던지...
진정한 복음은 우리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복음, 우리끼리만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복음, 우리 민족만의 복음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점점 보다 큰 동심원을 그리며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도 지구 반대편, 세상 끝 오지에서 비록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가 뚜렷하지 않지만 꾸준히 복음선포에 매진하는 모든 선교사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강영구 신부님
+악마들도 여러 사람에게서 떠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대에게
태양은 ‘나는 태양이다!’하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대지(大地) 위에 묵묵히 밝고 따뜻한 햇볕을 비추어주기만 합니다.
동녘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의 여명(黎明)이 찾아옵니다.
깊은 잠에 빠졌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솟아오르고 어둠이 물러가면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때 묻고 더러운 것, 병들고 상처 난 것,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고, 가야 할 길도 보입니다.
태양의 밝음과 따뜻함으로 만물은 생명을 누리고 제 갈 길을 찾아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태양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에 쌓인 중생(衆生)들은 예수를 만나서 새 삶을 얻습니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듯 예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어둠의 세력인 악마도 물러갑니다.
만물이 따가운 가을 햇살을 즐기듯,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박상대 신부님
세례와 광야유혹 이후, 어느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자기 공생활(公生活)의 목적과 방향을 논리적으로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또 다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첫 공생활의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 회당을 나선 예수께서 오늘은 (아직 제자로 불림을 받지 않은)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뿐 아니라, 해질녘에 사람들이 데려온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다.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에 연결시켜 살펴보면 구마기적과 병자치유는 모두 같은 날, 바로 안식일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4,31-41)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분명히 이 ‘일’을 두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6,2.7)
앞으로도 자주 접하게 될 예수님의 구마기적사화나 병자치유사화는 그 서술상 일관된 구조를 보이고 있는 바, ① 마귀와 병자의 고백 및 상황묘사, ② 예수님의 기적적 구마 및 치유, ③ 구마 및 치유 실증(實證), ④ 당사자와 목격자의 증언과 반응 등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과 질병으로 앓는 사람을 분명히 구별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은 물론 천재지변까지도 마귀(악)의 다양한 작업이라 보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향하여 마치 ‘구마예식’을 행하시듯이 ‘열이 떨어져라.’(39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곧 이웃에 대한 ‘봉사’로 이어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는 마지막 날까지 연일 계속될 그분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구마와 병자치유가 예수님 일상의 스케줄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어디론가 따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이다.(42절) 왜 그곳으로 가셨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복음의 언급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것이다.(6,16 참조)
기도(祈禱)는 루가가 특별히 선호하는 복음의 테마이다. 루가는 공관복음 작가 가운데 기도에 관한 말씀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셨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권장하셨다. 많은 부분이 루가의 고유사료이다. 그러나 루가는 신자들의 믿음을 보존하고(22,32), 유혹을 이기며(22,40.46), 장차 재림하실 인자를 맞이하는(21,36) 방법으로 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가르침을 받고 치유와 구마기적의 은혜를 입은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늘 그들 곁에 두려고 붙잡았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마냥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으시다. 세상의 만백성을 위한 자신의 길을 가셔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속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만 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입은 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람이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를 묵상하면서 나의 하루는 과연 어떤지 생각해 본다.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루가 4,38-44)
유광수 신부님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는 열병이 무슨 병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감기 몸살이나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육체적인 열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하였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로도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은 지도 모른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신 후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일이 있다(마르 9, 33).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자기들 안에 부글 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하시면서 그들이 앓고 있는 열병에서 치료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시몬의 장모는 자기 집에 온 손님이 왔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열병 때문에 누워 있어야 했다.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사랑해야할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고, 봉사해야할 인간이 봉사를 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가정과 사회, 공동체, 교회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어떤 열병이든 열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악이다. 악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든다.
열병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즉 나로 하여금 아니면 공동체가 아니면 가정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공동체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이란 공동체가 서로 뜻이 맞지 않을 때 또는 공동체가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났을 때,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개인적인 열병 때문에 공동체가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또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때문에 개인적으로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가족간에 사랑이 없을 때 가족 모두가 열병을 앓는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녀들이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자녀들의 열병 때문에 부모가 열병을 앓고 누울 때도 있다. 가족간에 한 사람이라도 열병을 앓고 있으면 그 열병은 모든 가족에게 번지고 영향을 끼친다. 결국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나만 혼자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열병을 앓게 하는 원인 제공을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열병은 절대로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그래서 공동체가 또는 사회가 더 나아가 나라 전체가 열병을 앓게 만든다. 이런 모든 악(열병)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주위 환경의 잘못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그 열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시몬의 열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듯이 우리도 내가 앓고 있는 열병 또는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가족이 앓고 있는 열병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청하자. 오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앓고 있는 열병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조용히 성찰해보고 그 내용을 적어서 예수님게 봉헌하도록 하자. 아마 오늘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셨듯이 또 마귀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자 마귀가 나갔듯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의 악을 몰아내시어 치유시켜 주실 지도 모른다. 우리도 열병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도록 하자.
복음은 열병을 앓고 있던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손이 부인에게 봉사했던 것처럼 부인의 손도 "봉사하는 손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중들다."는 말은 희랍어로 "디아꼬니아" (Diaconia) 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세르비레"(Servire)라고 하고 영어로는 "써비스"(Service)라 한다. 이 동사의 뜻은 " 노예가 되다. 종 노릇하다. 종살이 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비위를 맞추다. 순종하다. 몰두하다. 힘쓰다"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즉 봉사한다는 것은 "타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요,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요, 타인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봉사하는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경우는 봉사자의 진정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봉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봉사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두가 봉사하려고 하지 않고 봉사를 받으려고만 하는 데에서 미움이 생기고, 상처를 받고, 불목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열병을 고쳐주시어 시중들게 해 주셨다는 것이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되찾아주신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병을 치유시켜 주셨다는 것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하신 것이다. 즉 잃어버렸던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아주신 것이다.
인간이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봉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먼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복음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기적이요, 선물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바로 우리 자신이고 또 열이 가셔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는 모습 또한 열병을 앓고 있는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열병으로 계속해서 누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치유 받고 일어나서 시중드는 아름다운 인간이 되고 싶은가?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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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터넷에서 ‘전국 맛 집 주소록’이라는 자료를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음식관련 프로그램에 소개된 맛 집 만을 정리한 자료였지요.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면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어제 동창 신부와 함께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맛 집 하나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자그마치 3군데의 프로그램에서 소개가 된 음식점이었지요. 얼마나 맛이 있으면 3군데에서나 소개가 되었겠어요?
하지만 동창 신부와 저는 그 음식점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 음식점에 전화를 하면 이러한 안내 문구가 나옵니다.
“고객님,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하신 후 다시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영어로 어쩌고저쩌고 말하네요(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 “The dail is wrong number, please call again.”). 그렇습니다. 가게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허무했습니다. 잔득 기대를 하고서 왔는데, 약도에 적혀 있는 곳에는 다른 식당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맛이 있는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들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게를 확장하는 경우가 있으면 모를까, 잘 되는 가게가 없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특별한 이유 때문에 없어지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세 군데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방송되었던 맛 집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점이 듭니다. 바로 이렇게 의문을 품는 제 자신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많은 기대를 가집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딱 맞게 이 세상은 돌아가지 않더군요. 전혀 뜻하지 않은 정 반대로 흘러갈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판단과 생각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음식점이 없다고 의심을 품고 있는 저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이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군중들의 기대는 자기들하고만 함께 하는 예수님을 원했던 것이지요. 예수님만 계신다면 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굶어 죽을 일도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하느님의 기대에 순종하는 인간의 모습 때문이 아닌,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기대를 주님께 가지고 있었습니까? 혹시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드러내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또다시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의 기대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간절한 기대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에 맞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스티븐 코비 외, ‘오늘 내 인생 최고의 날’ 중에서)
뉴햄프셔 주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 그곳에 아담한 별장이 하나 있다. 농어잡기 대회가 시작되는 날, 11살 난 어느 소년이 별장 선착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낚시찌가 크게 움직였다.
마침내 소년은 조심스럽게 힘이 빠진 물고기를 들어올렸다. 지금까지 잡은 물고기 중에서 가장 큰 농어였다. 소년과 아버지는 멋진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아가미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성냥을 켜서 시계에 비춰 보았다. 밤 10시였다. 대회 시작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물고기를 보더니 아들에게 말했다.
"그 고기를 놓아줘야겠다."
"아빠! 이렇게 큰 고기는 다시 잡을 수 없을 거예요."
소년이 놀라 소리치며 호수를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다른 낚시꾼이나 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원망하듯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농어의 입에서 바늘을 빼고 놓아주었다. 농어는 힘차게 헤엄치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34년 전의 일로, 소년은 지금 뉴욕에서 성공한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아직도 그 별장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소년은 그날 밤 대회에서 처음 잡았던 물고기만큼 큰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때 놓아준 농어가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도 옳은 일을 하는가? 제때 설계도를 제출하려고 눈속임을 하지는 않았는가? 내부 정부를 이용한 주식 거래를 거부했는가?'
만약 여러분이 어렸을 때, 물고기를 놓아주라고 배웠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리를 배웠기 때문이다. 옳은 결정은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생생하게 남는다.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러한 기억은 앞으로의 삶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안내하는 등대가 되어준다.
소년과 아버지가 물고기를 잡은 시각을 속였다고 해도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소년과 아버지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충실해야 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면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그 선택으로 그들은 마음의 안정과 자신감을 얻었다.
함께 머물기
김인한 신부님
같은 교구 빈민사목 위원회 신부님들과 함께 부산 범천동에 있는 ‘예수의 작은 자매의 우애회’ 수녀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사글세방에 세 분이 사셨는데, 한 분은 국제시장의 공동화장실 청소부로 일하시고, 다른 분은 양산 터미널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시고, 또 한 수녀님은 나이가 많으셔서 집안 살림을 하시며 동네 아이들의 친구로 살고 계셨습니다.
사도직의 방향이 어디냐고 묻는 저의 어리석은 질문에 수녀님들이 씨익 웃으시면서 ‘없는데요’ 하시고는 ‘우린 그냥 가난한 사람으로 무력한 사람으로 똑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해야만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을 해야만 예수의 제자는 아닙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그들과 함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있어 보이고 성과가 나와야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뜻을 이루고 나를 전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예수님께서 머물렀던 마을을 떠나셨듯이 내가 이뤄낸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에서 떠날 수 있는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합창
박기호 신부님
2007년 7월 6일은 한국교회에 특별한 날이었다. 한국 최초로 청각장애인을 사제로 서품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필자는 서품식장에 모인 청각장애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기에 창미사와 기도를 수화로 봉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웅장한 합창이었다.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였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기도였다. 자신들의 사제를 가졌다는 기쁨과 자부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었으리라. 필자 역시 장애인 사제 서품을 결정한 교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울먹이는 마음으로 고백했다. 새 사제로 인해 이 땅의 청각장애인들에게 주님의 은사가 풍요롭게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모든 존재에겐 언어가 있다. 자신들의 언어가 엄연히 있기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기도하고 찬양하는데 ‘말 못하는 이, 듣지 못하는 이, 보지 못하는 이’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진실한 것을 보기 위해 눈을 감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하지 않는가? 진짜 장애인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웃음도 눈물도 없는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부나 정치인들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당신께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긍휼히 여기시고 배려하고 사랑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얹으시어 치유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인격체로 소중히 여기시는데 왜 우리는 장애인들을 뭉뚱그려 보며 차별할까?
주님의 치유를 원하는 이는 모두 주님 앞에 나와 함께 찬양드릴 의무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명품(名品)으로 재창조되는 은총의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럽대륙에서는 14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소빙하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 나무들의 성장이 현저하게 지연되었습니다. 특히 1645년부터 1715년 사이 70년 동안이 가장 추웠답니다.
그런 까닭에 알프스의 가문비나무들이 예외적으로 단단하고 큰 밀도를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난히 많은 명품 바이올린들이 생산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혹한의 빙하기 시대, 추위로 인해 비록 나무들의 성장이 더뎠지만, 그래서 나이테를 살펴보면 이 기간이 유난히 촘촘하고 좁지만, 대신 나무의 밀도는 훨씬 높아진다는 것, 나무의 강도는 훨씬 세다는 것, 그 결과 명품 바이올린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경청’, 조신영, 박현찬 공저, 위즈덤 하우스 참조).
유독 혹한의 시기에 많은 명품 바이올린이 생산되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시련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란 너무나 힘겹습니다.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아픔, 아무리 노력해도 수용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물러서 바라보면 그 시련은 우리를 값진 ‘명품’으로 만들기 위한 은총의 도구란 것입니다.
최근 ‘투르 드 코리아 2007’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국을 방문한 사이클 계의 전설인 렌스 암스트롱의 인생 역시 혹한의 계절을 명품으로 꽃피운 모범 답안입니다.
그의 빙하기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이클 선수로 한창 잘 나가던 젊은 시절 그는 암 진단을 받습니다. 생존율도 높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뇌까지 전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 빙하기를 잘 극복했습니다. 2년 만에 다시 페달을 밟았고, 약 3주간 3500㎞ 남짓 달리는 지옥의 레이스 ‘투르 드 프랑스’에서 7연패(1999년~2005년)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그는 이제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고통 앞에서 포기하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고 크게 외치며 동료 암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손수 암(CANCER)이란 영어 단어로 6행시를 지었습니다.
Courage(용기)
Attitude(태도)
Never give up(포기하지 않기)
Curability(치료 가능성)
Enlightenment(깨달음)
Remembrance of my fellow patients(동료 환자들에 대한 기억)
그는 97년부터 ‘암스트롱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Cancer’의 ‘r’(remembrance of my fellow patients: 동료 환자들에 대한 기억)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해질 무렵까지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일일이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도 예수님으로 인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불치병을 앓던 사람 역시 말끔히 치유되어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오랜 혹한기를 꿋꿋이 견뎌온 가난한 백성들이 그간의 모진 고통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명품’으로 거듭나는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고통 앞에서도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뚜렷해졌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명료해졌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신앙의 사막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머지않아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간 우리가 겪어온 오랜 방황과 갈등의 세월을 마무리지어주실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시달려왔던 굶주림과 갈증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부족한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값진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유재훈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이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외치는 악마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알려지면 더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게 말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면 자기들을 강대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곧 정치적인 해방을 꿈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까 봐 악마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에는 기복적입니다.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들을 위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청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단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단계를 벗어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과 아픔까지도 받아들이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미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일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최종수 신부님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특히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말 한 마디면 모든 병을 낫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씩 치료하지 않고 병자들을 한꺼번에 치료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씩 치료하셨습니다.
때로는 흙으로 이용하시기도 하고 죽은 사람 위에 올라가시기도 하십니다.
공생활 동안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으니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치유의 은총을 받았을까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도전과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치유의 기적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병자들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이 기적을 가능케 했던 것은 아닐까요? 바로 사랑의 힘에서 기적이 나왔던 것이지요.
현대인들에게 치유의 기적은 의술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기적 역시 사랑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가 내 아내나 딸을 수술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 수술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잘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기적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셨다.
이기양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선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년 동안 예비신자 한 명씩은 다 봉헌하도록 하자고 전에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유, 작년에 괜히 다 해버렸네. 좀 남겨둘 것을…”
부담이 있지요. 많은 신자분들이 선교에 대해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내 신앙도 형편없는데 이 상태에서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더군다나 교리 지식도 짧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괜히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망설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선교는 나 같이 주일 미사만 겨우 나오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장님이나 총구역장, 꾸리아 단장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야."
한편 선교를 하자고 하면 선전문을 들거나 요란하게 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큰 거부감을 나타내고 힘겨워 하기가 쉽지요. 그렇다면 선교는 신앙심이 깊고 교리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지요.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느 성당에서 8개월 정도의 기간을 갖고 선교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부와 중등부, 어른들 모두가 참여한 행사로 학생들은 각 학년별로, 또 어른들은 각 구역별로 나름대로 목표량을 정해주고 함께 할 것을 제안하였지요. 초등부도 유치부부터 6학년까지 실적표를 다 그려 붙여서 어느 학년이 잘 하는지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잘 하는 어린이한테는 상을 주고, 또 잘하는 학년에는 특별히 칭찬을 해 주며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하고 많이 아는 6학년 학생들이 제일 잘했을 것 같지요?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놀랍게도 유치부 꼬마 어린이들의 결과가 제일 좋았습니다. 처음에 유치부 어린이들은 한 열 명 정도 되었는데 6개월이 지나서 확인해 보니 세배로 늘어 있었습니다. 삼십 명도 넘는 어린이들이 성당 마당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선교를 잘했을까요? 유치부 어린 꼬마들의 신앙이 뛰어났겠습니까? 아니면 교리 지식이 풍부했을까요? 아닙니다. 답은 유치부 어린이들의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선교는 용기입니다. 선교는 용기를 내는 것부터 시작되지요. 유치부 어린이들은 성당에 안 다니는 자기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이 다음 번 성당에 올 때 친구 한 명씩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너 나랑 같이 우리 성당에 가자."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그래." 그리고는 따라나섭니다. 그래서 같이 오면 간식도 주고 또 선생님이 잘 왔다고 칭찬도 해주고 하니까 다음에 또 오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교는 용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어린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6학년만 되도 뭔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제일 못하는 학년이 6학년입니다. 자기 생각이 많아지고 이것저것 따지고 재는 것이 많아지지요.
"내가 저 친구에게 말을 했을 때 저 친구가 어떻게 나올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에게 어떻게 세상과 신앙을 조목조목 이야기해서 완전히 항복시켜 성당으로 끌고 나올까?"
이렇게 생각하면 시작도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이야기 꺼냈던 사람이 주저앉고 말지요. 처음 시작이 틀렸습니다. 신앙이 어떻고 성사가 어떻고 이 세상이 어떻고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아주 사소한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친한 친구가 성당에 다니니까 한번 가서 보고 싶어진다거나, 나무를 좋아하는 이웃이 있으면 어느 날 “나무를 참 좋아하시네요. 우리 성당에 참 멋진 소나무가 있는데 한번 구경 가실래요?” 그리고 그냥 가볍게 한번 와서 보는 겁니다. 오면 나무만 보고 갑니까? 성모님도 보게 되고 성당 건물도 보고 해서 눈에 익숙해지는 것이지요. 또 어떤 경우에 이웃과 나란히 성당 앞을 지나 가다가 “우리 차 한 잔 하고 갈까요?”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차는 찻집에만 있습니까? 성당에 와서 차 한 잔씩 뽑아들고 편안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누어 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선교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작은 것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을 해서 서서히 하느님을 알아 가는 것이지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인간적인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은 또 아닙니다. 더불어 필요한 것이 있지요.
두 번째로 꼭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선교를 시작했다가 상처를 받기가 쉽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고 오히려 내가 흔들릴 수가 있지요. 친구한테 성당에 한 번 가보자고 제안했다가 무안만 받고 친구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성당에 가자고 하면 얘기 한 즉시 싸구려 장사꾼 취급을 하며 너무 쉽게 반응을 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하려고 시도했다가 상처를 받고는 다음에는 말도 못 꺼내고 어색해지고 맙니다.
그러면 선교할 때 오는 그런 부담감을 어떻게 소화하면 좋겠습니까? 방법은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로 준비하면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반응에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절에 나가자거나 교회에 가자고 하면 “그래, 당장 갑시다.”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겁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에 오는 사람은 “내가 죄가 많은데 성당 갔다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어쩔 줄 몰라 하지요. 그러므로 성당에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을 내 입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다음 동네에도 이 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제자들이 찾을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피곤하고 지칠 때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재충전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에서 오는 많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상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선포는 특별한 누구만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 신자들이 일년에 한 명 하느님께 예비신자를 봉헌하는 것이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 먹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복음 선포는 해서 뭐합니까? 신자들이 많아져봐야 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교가 교회의 생명이라고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복음 선포가 개인의 신심을 성화 시키는데 첫 번째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복음 선포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가 또 가정이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풍성하게 살고 싶으면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언행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저는 사목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심도 약하고 교리 지식도 짧은데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면 걱정말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면 신심이 탄탄해집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 교리 지식이 나도 모르게 풍부해지지요.
나 개인에게 오신 주님을 이제는 이웃에 전함으로써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내 신앙을 이제는 개인에서 이웃에게로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선포는 이웃 사랑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구를 정말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만난 주님, 나의 삶을 정화시켜 주시는 주님을 어떻게 전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전하게 되는 겁니다.
정승환 신부님
오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십니다. 우선 예수님은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십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했다는 보기 드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열을 적대적이고 반항적인 하나의 권능으로 보셨고, 그 악의 세력을 어제 복음에 이어 물리치고 계십니다.
병은 죄와 함께 이 세상에 들어왔고, 이제 예수님은 그 원래의 상태를 복구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영혼과 육신은 온전히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부터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이고, 주님과 함께 미구에 영육으로 고통이 없는 영광에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고통 중에 시달리던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구원의 손길이 그들 앞에 서 계심을 직감하고 주님께 달아드는 것입니다. 마치, 바르티메오처럼 육신과 영혼의 눈이 뜨이기를 희망하면서... 이제 안수를 통해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벌어집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리 덮는 것은 이 치유의 원천이 저 높은 곳,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은총의 내적 효과는 바로 성사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허약하고 병든 육체를 고쳐주시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시고자 그 동네를 떠나게 되십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데 비해 가파르나움의 군중은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나 그분은 떠나셔야했습니다. 당신의 사명은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골로사이서의 말씀처럼 복음은 온 세계에서 열매를 맺으며 널리 퍼져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오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나의 생활은 과연 어떠한지를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나 가파르나움의 병자들처럼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들이며 주님의 자비로움과 사랑 안에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언제나 평화를 전하면서 시몬의 장모처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주님께서 한 곳에 안주하지 않으셨듯이, 폐쇄적인 자아를 부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주님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적 신앙인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보석 - 주님을 가슴 가득 품고 세상을 향해 그분의 사랑을 외쳐야할 것입니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 그 깊은 곳까지 치유해 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임성환 신부님
오늘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소문이 나돌았을까요?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신통방통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 그 사람이 손만 얹으면 어떤 환자들도 다 낫더라. 그러고도 돈을 요구하지 않더라. 와~’
이런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온통 예수님께로 모이게 되었고 예수님은 소문 대로 손을 얹으시고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서 함께 살자고 붙들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낫게하는 굉장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을뿐 예수님 그분의 참 모습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받았던 세례의 그 때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세례 예식의 첫부분은 사제의 3가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2가지의 질문이 끝나고 나면 사제는 세 번째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세례받을 사람들의 결심을 묻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세례성사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의를 가지지 못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며 기도에 참여하고 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약속합니까?” “예,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곧 아버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하는 동안 세례를 받을 예비신자들은 굉장히 가슴이 벅차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님이,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의 하루 선교 일정에서 우리는 사랑의 분별력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선별하지 않고 누구나 고쳐주셨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열린 자세로 맞으셨음을 기억하자.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예수님의 이런 자세가 사람들을 대하는 내 자세가 되기를 빈다.
둘째, 예수님은 그들을 고유한 사람으로 대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성껏 손을 얹어서 치유해 주셨음에 머무르자. 이런 예수님의 자세를 나 자신의 태도와 비교하고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 처리할 일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태도로 대할지를 결심하자.
셋째,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기도하러 외딴곳에 가셨다. 그분의 사랑은 위에서오는 사랑이다.(「영신수련」 184, 338번 참조) 그분의 시선은 늘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선교를 위해 떠나는 태도 또한 단호하시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남을 위한 삶을 사시지만, 사람들의 반응이나 기대에 좌우되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른 구도나 기획에 따라 움직이신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신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유를 나도 갖기를 원한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저의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루카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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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하늘 나라에 간 어린 친구가 떠올랐다.
이름은 정현진 스테파노, 나이는 12살이었다.
서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풋내기 신부로서 남대문 시장 상인 사목과 주로 피정 지도로 나름대로 열정을 쏟고 있을 때였다.
전화기가 울어댄다. 인천의 어느 본당에서 열심히 사목회 전례분과장으로 활동하시던 분의 음성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저에요. 신부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신부님, 아이를 하느님께서 불러가시려나 봅니다.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분의 말씀은 병자성사를 부탁한다는 말씀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정말 어렵게 생활하며 신앙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던 분이었다.
너무 사람이 좋아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의 눈에 들었고 공장장 역할을 하던 정말 착실하고 소위 세상이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분이셨다.
그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가정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찾아온 것이다.
일단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 순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한 구석에서 슬픔과 분노가 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부모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 가능하단 말인가!" 등등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약속한 날이 되었고 차를 몰고 강남으로 향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도저히 무슨 말로 부모들을 위로할 수 있을 지 난감했다. 결국 병실 문 앞 이름표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는 순간까지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병실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창문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고, 엄마는 아이의 침대에 올라앉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아이를 내려다 본다. 머리에는 아기 손만한 혹이 서너 개가 나와 있었고 한 쪽 눈도 암 세포가 번져 퉁퉁 부어있는 상태로 감겨져 있었다.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스테파노가 복사를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와 복사를 처음하고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티없이 잘생긴 모습이 순간 지나쳐 간다.
아무 말 없이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이내 병자성사를 주려고 영대를 매고 책을 펼쳤다. 성호를 그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나를 도와서 성호경을 대신해준다. 정말 힘들게 병사성사를 집전하고,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 목례와 함께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날 저녁 전화가 걸려왔다.
"신부님, 아이가 성사를 받고 아주 평화롭게 갔습니다."
" ---- ---- "
이틀 후,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해 다시 성모병원을 향해 달려간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병원 영안실 옆에 장례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몇몇 안 되는 조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지칠 때로 지친 상태로 제대를 옆으로 하고 앉아, 관이 놓인 곳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그렇다. 정말 하느님은 이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구나."라는 어떤 깨달음이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미사가 시작되었고,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를 무척 사랑하시나 봅니다. 우리 눈물을 그만 흘립시다. 그리고 기쁘게 이 미사를 드립시다.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우리는 길어야 백 년을 산다고 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놓고 볼 때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여정이지요. 하지만 그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미움과 고통과 욕심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우리 앞에 누워 있는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 아이는 고작 열 두 살입니다. 이 아이가 죄를 지었다면 과연 무슨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성적표를 엄마에게 보일 수가 없어서 엄마 몰래 도장 꺼내서 찍은 것? 아니면 친구들하고 오락실 가고 싶어서 엄마 몰래 주머니 뒤진 것? 이것이 죄입니까? 우리들이 이 삶 안에서 짓는 죄에 비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슬퍼하지 맙시다. 이 아이는 하느님께서 천사로 쓰시려나 봅니다. 죄의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당신 옆에 두시고 싶을 정도로 이 아이를 사랑하셨나 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이 아이는 천사가 되어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엄마, 아빠에게 아무 걱정 말라고 말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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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을 받고 그 병을 치유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절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는 참 많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을 보면서 “하느님은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픈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치유해주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언젠가 말했듯이, 우리의 육체란 완전한 치유를 경험할 수 없다.
반드시 우리의 몸은 끝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치유의 대상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다. 그 치유를 위해 치유를 청해야만 한다
당신을 따르는 이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는 예수님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06년 5월 2일자 중앙일보에 ‘보은의 장기 기증’이란 제목으로 이런 기사가 오른 적이 있습니다.
신승경(1981- )선수는 2004년 프로축구 팀인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해 올 시즌 초반 선발로 출장했던 골키퍼입니다. 신 선수는 2006년 3월 중순 팀 훈련 도중에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주전 골키퍼이었기 때문에 신 선수는 물론 팀에서도 걱정이 컸습니다.
신 선수가 계속 운동을 하려면 파열된 십자인대를 제거하고 다른 십자인대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는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지난달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대를 기증받아 성공적으로 수술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신 선수 고향인 충북 제천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씨 없는 수박 농사를 짓고 있던 신 선수의 형 승우(35)씨가 지난달 29일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졌습니다. 병원에서는 회생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뇌사 상태 신 선수의 형을 보며 가족들은 슬픔 속에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신 선수의 형인 승우 씨의 장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삶을 보다 값지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버지 신순선(67) 씨는 "2남3녀의 막내인 승경이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돼 보답하는 마음에서 큰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엄금선(66)씨를 비롯한 전 가족이 이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승우 씨는 지난달 29일 서울 강동성심병원에서 자신의 장기를 7명의 난치병 환자에게 이식해주었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시 갚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또한 그 받은 사람에게 직접 갚을 수 없다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보은의 마음을 표현해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의 장모 집에 가십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다고 아룁니다. 예수님은 곧 가서 장모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직접 고쳐 주십사고 기적을 청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렸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도 치유해 주시는데 하물며 당신을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의 장모인데 그냥 모른 채 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베드로의 장모는 ‘화병’에 걸려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딸을 시집보내 놨더니 딸을 벌어 먹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예수라고 하는 가난한 사람을 쫓아다니며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위를 어떤 장모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성경엔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또 그의 집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것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바로 베드로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서 그의 빈자리를 더 큰 은총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당신께 잘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 많은 은총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떤 수도회의 수녀님들이 저를 그 수도회에 입회하도록 무던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더구나 수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 없었는데 자꾸 그러시니 적당한 핑계를 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형 둘이 대학을 못 갔으니 저라도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님이 “네 빈자리는 하느님께서 몇 배로 채워주실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가 사제로 살아보니 정말 맞는 말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몇 배로 저의 빈자리를 메워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집 핑계를 댈 수 없게 하십니다.
어디서 읽은 건데, 남편이 아내와 싸웠을 때, 화해하기 위해 쓸데없이 꽃이나 선물을 사오기 보다는 아내의 친정 부모님께 살짝 용돈을 드리고 오라고 권합니다. 물론 아내가 남편 모르게 시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면 그것만큼 남편을 기분 좋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면 그 배우자의 부모님 또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만큼 잘 키워서 나의 배우자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잘 키워서 당신 제자로 봉헌한 부모님들을 어찌 그냥 보고만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족을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아직 가족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가정 때문에 주저함이 있으신 분들은 걱정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내가 있을 때보다 주님을 따르면 훨씬 더 많은 은총이 가족에게 내릴 것입니다.예수님은 결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고마움을 잊고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가장 반가운 단어, 치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가장 기본적으로 꿈꾸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 다하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큰 고생 않고 세상 떠나는 일입니다.
영안실에서 가끔씩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병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난 분의 장례식장에서 듣는 말입니다. “호상(好喪)이다!”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신 할머니, 평생 어디 한 군데 크게 아픈데도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민폐 한번 끼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도 안색이 안 좋다든지 특별한 이상 징후가 없었습니다. 평소처럼 오전 내내 텃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며느님이 차려준 점심 잘 드셨습니다.
다 른 때와 다른 것은 오직 한 가지, 점심식사 후에 오랜 시간 정성껏 샤워를 하시고선 깨끗한 모시옷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며느님보고 낮잠이나 한잠 잘란다며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그 길로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정말 누구라도 부러워할 호상(好喪)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호상을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원치 않는 병고가 찾아옵니다. 하나의 병은 또 다른 병을 몰고 옵니다. 계속해서 다양한 병치레를 하며 괴로운 투병생활로 삶을 마무리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 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우들, 불치병 환우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 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ㅋㅋ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 받게’ 생겼습니다.
예 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 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오 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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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현재 시간만 나면 사제관에 들어갑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저에게 있어서 사제관은 단순히 잠자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제관은 잠자는 곳뿐만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 곳이며 공부하는 공간이 되어 있답니다. 즉, 사제관만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냥 편안한 느낌이 든답니다.
사실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사제관이지만, 다른 분들은 테라스만 마음에 든다고 하지 사제관 자체가 좋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조립식 판넬로 지은 집이고, 그 안에는 에어컨, 텔레비전, 냉장고, 책상, 옷장 등등 소위 생활필수품이라는 것들이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제관보다도 마음에 드는 공간이고, 사람들을 만나면 이곳 사제관 자랑하기에 바쁘답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사제관을 이번에 새로 신경을 써서 지은 것이고, 그래서 그만큼 애착이 가기 때문이지요.
남들에게는 별로라고 느껴지는 이 공간이, 저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멋져지게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나에게 참된 기쁨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형편없다는 평을 받는 사제관이 저에게는 그 어떤 사제관보다도 멋있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외적 아름다움이 내 자신의 행복을 이끌어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러한 외적인 아름다움이 최고인 듯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신 뒤에 다른 고을로 건너가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외적인 좋은 모습만을 보고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면서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후에 힘없는 약자의 모습을 갖추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면서 큰 소리로 외치지요. 즉, 그들은 이렇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힘없고 나약한 모습을 갖춘 메시아는 필요 없다면서 이제는 자기들 곁을 떠나라고 아니 자기들이 예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이 세상의 좋은 것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이 아님을 우리들의 삶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지금 나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남들이 말하고 있는 아름다움만을 쫓으면서 괜히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참된 기쁨을 쫓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생활 속의 작은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맑은 물처럼 맑은 마음으로('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중에서)
소중한 것은
행복이라는 것은 꽃 한 송이
물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우리는 오직 눈으로만
감각을 통해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정작 찾지 못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눈으로 소중한 것을
찾을 줄 알아서..
작은 꽃 한 송이에서
상큼한 행복을 들추어 내고
물 한 모금에서 감동의 눈물을
찾을 줄 아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감동할줄 알고
사소한 물건에서도 감사를
느끼는 맑은 마음을 ..
단 하루라도 간직하고
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도 이토록
아름다울수 있구나 하는
느낌이 1분이라도 내게 머물러서..
마음으로 조용히 웃을수있는
그런 순수한 미소를 ..
잠시라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