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가지 교훈>
▥ 잠언의 말씀입니다. 21,1-6.10-13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5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6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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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며 여러 가지 교훈을 들려준다(제1독서). 군중을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하자,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분을 찾아왔던 일은 공관 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습니다. 다만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이 사람을 보내어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려 하였다는 내용이나(마르 3,31 참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마르 3,33)라고 하신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반문은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가족들은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께 그저 방해가 되는 존재, 또는 그분에게서 외면당한 이들로 여겨지는 오해를 벗고, 독자의 관심은 오롯이 예수님과 그분께 귀 기울이는 군중에게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서민들은 하루 품삯으로 온 식구가 끼니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빠듯하였습니다. 작고 가난한 이 사람들이 당신 곁에 모여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듣고 새 삶을 결심하는 그 자리가 매우 소중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미루어 둔 채 이들에게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과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삶 안에서 열매로 맺어 내라는 가르침(루카 8,4-15.16-18 참조)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겉치레뿐인 예배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을 실현하고, 악인의 행실을 멀리하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삶입니다(제1독서 참조). 막연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으며 삶의 방향을 잡고,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주님의 어머니요 형제’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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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그 형제들을 외면하시는 예수님의 차가운 태도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마치 거사를 앞두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떠나는 영웅으로 여기지는 말아야지요. 요컨대 예수님의 새 가족은, 혈연이라는 굳건한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라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성모님 또한 말씀을 듣고 간직하실 줄 아는 이로 제시되십니다(루카 1,45; 11,28 참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잠 못 이룬 적도 있고,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의 말에 감동받아 평생을 두고 곱씹으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 자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은 서로의 관계를 위한 도구입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하고 있는지, 나 자신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서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상대를 참 피곤하게 합니다. 실컷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아 예수님과 갈라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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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께서 친척 형제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반가워하기는커녕 서운하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물론 이 말씀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부인하는 말씀은 아니지요. 다만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더 중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회 에서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많은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때로는 윤활유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폐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인위적인 관계에 얽매이다 보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하지 못할 때가 있고, 반대로 혈연이나 지연, 학연에 얽힌 굴레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마저 거절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 지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시켜야만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갈 것입니다. 아울러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형제자매들, 곧 새로운 가족들도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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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마음속에는 사악한 마음이 가득하여 이웃을 돌보려는 사랑의 마음은 없습니다.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그 행위 안에 약자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허영과 위선으로 바치는 제물보다 의로움의 실천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그저 생존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신비는 사랑입니다. 그 모든 행위와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짧은 단락은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알아듣기 어렵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이럴 때 보통 우리라면 뛰어나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려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구성원이 되고 천상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1,22 참조). 성모 마리아를 영적인 어머니로, 사도들을 영적인 형제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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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근래에 성인 반열에 오른 분 가운데 참으로 열렬히 공경을 받고 또한 그의 시성식이 큰 화제가 된 성인으로 꼽을 수 있는 분이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출신의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사제입니다. 성인의 인기가 고국인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높은지는 도시의 식당이나 카페들에서조차 쉽게 눈에 띄는 그의 사진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지닌 성덕의 위대함은, 세속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심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을 철저하게 증언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들고 인간적으로 추앙받던 상황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환심을 사기보다 때로는 거친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회개하고 참된 신앙을 다시 찾도록 인도했습니다. 또한 성체성사가 예수님과 나누는 참된 친교이며 신비적 실재임을 자신이 혼신을 다해 봉헌하는 미사를 통하여 느끼게 했습니다.
그가 직접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게 하였듯이, 비오 성인은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깊이 염려하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라고 부르듯이, 그의 다섯 군데의 상처는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하며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라는 점을 상징합니다. 그 유명한 ‘오상’과 또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어진 환시들과 수많은 치유의 기적 때문에 그의 존재는 현대에 시성된 어느 성인들보다도 우리가 ‘기적’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기적’은 현대 신학이 애써 외면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오 성인에게 일어난 기적들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피안의 세계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신비로운 ‘초월적 실재’와 마주하며 살아간다는 표징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초월’에 대한 의식과 경외심 없이는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과 희망을 두는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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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제주교구장을 거쳐 지금은 원로 사목자로 지내는 김창렬 주교님은 예수님을 ‘형님’이라고 자주 부릅니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그 까닭을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다듬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철이 나고 배울 걸 거의 다 배우고 섭렵했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늘 어린애라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냥 발가벗은 어린애처럼 거리낌 없이 예수님하고 함께 지내려고 해요. 그분께서는 마음이 아주 넓으시고 저를 위해 모든 걸 다 하시는 형님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드네요. ‘예수님께서는 저를 당신의 동생으로 삼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지.’ 제가 죽은 뒤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저를 데리고 가시어 ‘아버님, 이놈이 제 동생인데 아버님 아들로 좀 삼아 주십시오.’ 하실 것 같아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가 ‘그래, 너 이놈아! 내가 아빠다. 그래, 아빠야. 넌 내 아들이라니까.’ 하시며 반기실 것 같고요.
성부 하느님과 저는 부자지간, 또 성자 예수님과 저는 형제지간, 이렇게 한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요. 제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늘 떠나지를 않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림자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완전한 가족이 되지요.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교님의 이러한 말씀은 오늘 복음을 근거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를 둘러싼 군중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형님이시고 오라버니이십니다. 동생이 불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곧장 그 안에 뛰어드시어 꺼내 주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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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하철이나 버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켜 놓고 열심히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책을 읽으면 편한 마음이 생길까요? 아무도 없는 우리 집보다 더 편한 곳이 있습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편합니다. 왜 그럴까요? 모두 책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면 어색해지고 불안해질 것입니다.
함께 같은 것을 할 때 편안해지고 기쁨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도 한 편에서만의 짝사랑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랑이 더욱더 기쁜 것입니다. 혼자 하는 사랑은 어색하고 여기에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함께 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하는 사랑이 많아질 때, 마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 편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편해지고 더 많은 사랑을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누가 예수님께 성모님과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줍니다. 이때 어떤 행동을 하셨어야 할까요? 맨발로 어머니와 형제를 만나러 가야 할 것만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형제를 반가워하지 않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정말로 반갑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 피로 맺은 가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의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구약성경의 친족법을 의식적으로 뒤엎으시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가족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라면서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하느님 가족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자신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부터 시작하는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랑의 실천은 편안해지고 더불어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하느님 가족이 대가족이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게 늘어나면 변화가 일어난다(마이클 버나드 벡위스).
너무 빨리 늙어가는 우리.
‘사람은 왜 이렇게 빨리 늙을까?’라고 말하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작가는 100세 인생이니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한 60살까지는 20대 초반의 체력, 외모를 유지하며 신나게 놀다가, 80살까지는 지금 모습 그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세계 각지로 여행도 다니고, 그 후 80대 즈음에야 슬슬 늙어가며 여생을 보내면 좋을 텐데……. 100세 인생인데 젊은 날이 너무 짧다.”
공감이 갑니다. 젊었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했지만, 금세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안이 오고, 뜀박질도 못 하겠고, 어디 가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이제 젊은이라고는 못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남아 있는 날의 가장 젊은 순간을 사는 지금을 더 충실하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가 제게 각별히 좋아하는 구약 성경을 꼽으라 하신다면 코헬렛과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코헬렛과 잠언은 구약 성경 속 지혜 문학의 쌍두마차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산전수전과 허망함을 경험한 현인의 지혜로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헛된 인생사안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최고의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잠언은 각자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지혜를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잠언이 다루는 주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직면하는 문제들입니다.
가끔씩 세상과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할 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섰을 때, 제가 즉시 펴드는 책이 코헬렛이요 잠언입니다. 쿵쾅거리는 마음을 일단 진정시킨 후, 심호흡을 좀 하다, 천천히 코헬렛과 잠언을 펴서 읽기 시작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잠언 속 지혜의 스승들이 외치는 권고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촌철살인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을 자극하고 일깨웁니다. 지혜의 스승들은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우리에게 잠깐 브레이크를 잡으라고 외칩니다. 급히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권고합니다.
잠언 속 현인들은 분노하고 힘겨워하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시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문제를 한템포 늦춰서 바라보도록, 객관적 입장,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도록 요청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도록 안내합니다.
대표 저자인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거룩하고 고상한 일들 뿐만 아니라, 의식주를 포함한 매일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역사하시기에, 주님 마음에 들게, 지혜롭게 처신할 것을 당부합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박학다식했고, 지적 탐구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의 구체적이고 세부족인 삶의 요소 하나 하나를 주님 지혜의 눈으로 바라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끝도 없었습니다. 개인의 행실, 남녀관계, 사업, 부, 자선, 야망, 훈육, 빚, 육아, 성품, 술, 정치, 복수, 경건...그 숱한 주제들에 대해서 잠언은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잠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구하고, 얻고, 깨달으라고 권고합니다. 잠언은 또한 반복하여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합니다.
잠언은 금언, 비유, 속담, 격언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한자어 '잠언'(箴言)을 풀이하면 ‘바늘로 찌르는 말씀’입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잠언 내용의 대부분은 금언, 속담, 격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이 어렵지도 않고, 짤막하고 간결합니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요즘 시대와 부합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니 잘 새겨서 읽으셔야 합니다.
“아이를 훈육하는 데에 주저하지 마라. 때로 때려도 죽지는 않는다. 아이를 매로 때리는 것은 그의 목숨을 저승에서 구해 해는 일이다.”(잠언 23장 13~14절)
자녀 교육에 있어 체벌을 정당화하는 뉘앙스인데, 요즘 그랬다가는 큰 일 나니 절대로 그러시면 안됩니다.
반면에 오늘 날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유용한 구절이 있으니 바로 술꾼들에 대한 충고 말씀입니다.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마라. 그것이 잔 속에서 광채를 낸다고 해도, 목구멍에 매끄럽게 넘어간다 해도 그러지 마라.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독을 쏜다. 네 눈은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고 네 마음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 너는 바다 한 가운데에 누운 자와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와 같아진다. <사람들이 날 때려도 난 아프지 않아. 사람들이 날 쳐도 난 아무렇지 않아. 언제면 술이 깨지? 그러면 다시 술을 찾아 나서야지!> 하고 말한다.”(잠언 23장 31~35절)
술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진작 읽었으면 참 좋았을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로 봉독하는 말씀들도 귀담아 들을만 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장 3절)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장 12절)
가족과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 매정하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하실까요?
가족은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버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관계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가장 많이 사랑을 받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가족인데도 만나면 서먹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더 외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가족을 만나면 외롭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서먹하고 외로우셨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기쁘셨을까요?
먼저 사람이 왜 외로워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데르센은 어머니가 창녀였습니다. 그나마 안데르센을 잉태하고 결혼했지만, 그마저도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살하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다면 자녀는 올바로 클 수 없습니다. 마를린 먼로를 보면 압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사랑을 그토록 원했지만, 사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때, 그것이 자신이 찾던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고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합니다.
반면 안데르센은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자라나 그 많은 명저를 남길 수 있었을까요? 미운 오리 새끼가 외로웠을 때는 자신이 오리인 줄 알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임을 알고 백조 무리에 있을 때는 행복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백조가 오리 무리에서 자라면 왠지 오리 부모가 시키는 것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서먹해지는 것입니다. 가족과 있어도 외롭습니다.
사춘기 이전 아이들이 외로워 보이나요? 일반 가정이라면 외로움은 사춘기 때 시작됩니다. 사춘기 이후 부모가 더는 아이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몰입하지 못할 때 느낍니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외롭나요? 외롭지 않습니다.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으면 내가 외롭다고 말해 줄 자아가 그 말을 할 기회를 잃습니다.
사춘기 이전 자녀들은 부모의 뜻에 무조건 따르면 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부모가 더는 그 역할을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해 줘야 할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그 사람에게 순종하면 외롭지 않나요? 이제 머리가 커서 웬만한 사람에게는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순종하여 그 사람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일에 몰두할 때 외로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이 되시어 당신 뜻에 순종하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공동체입니다. ‘피’ 안에는 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뜻’도 들어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이 어릴 때까지만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피는 유한하지만, 하느님의 피는 무한한 결속력을 지닙니다. 그 피가 성령이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족 안에 들어오시면 그 가족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영원한 결속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이 그래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 가정에 성령께서 오시면 그 가족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하느님 뜻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골고타까지 아무 말 없이 따라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니 외롭지도 않고 그래서 서먹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핏줄이라는 끊어지기 쉬운 줄을 놓고 하느님의 핏줄이라는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우리 가족을 묶읍시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모르고, 그러한 가정은 끊어질 수 없는 결속력으로 행복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외국은 처음에 코로나19에 대해서 경각심을 크게 갖지 않았습니다. 마스크 착용을 거의 하지 않았고,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감염 된 후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습니다. 뒤늦게 봉쇄와 단절을 시작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으며, 거리두기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외국의 경우에 코로나19 확산의 주된 원인은 경각심 부족이며 그로인한 방역의 실패입니다.
메르스 사태를 경험한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졌고, 방역에 집중했습니다. 시민들도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코로나19가 확산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신천지’에 있었습니다. 신천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모략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천지는 밀착예배라는 독특한 예배방법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확진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밀착예배는 바이러스 전파에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처음 한국에서의 확진자의 대부분은 신천지와 관련되었을 정도입니다. 의료진의 헌신과 정부의 노력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한국은 신천지로 인한 코로나 확산을 막을 수 있었고, 코로나19의 방역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최근에 또다시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긴 대규모 집회와 교회를 통해서 확진자가 늘어났습니다. 일부 교회의 목회자와 신도들은 정치와 방역을 혼동하였습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고, 집회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기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엄중한 시기에 집회를 하더라도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더라도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자가 격리 대상이 되면 지켜야 됩니다. 그래야 본인은 물론 이웃을 보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방역을 혼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검사를 거부하고, 확진으로 입원했지만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는 신앙이 없습니다. 코로나19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사람을 숙주삼아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코로나19는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방역의 차원에서 막아내야 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모략전도로 사람들을 자신들의 모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정치와 방역을 혼동하며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는 행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목적이 좋다고 해서 나쁜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태도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참된 신앙인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종교의 이름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하느님의 말씀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귀로 듣는다
귀로 전한다
눈으로 본다
눈으로 건넨다
입으로 먹는다
입으로 외친다
마음으로 느낀다
마음으로 보낸다
손으로 만진다
손으로 나눈다
발로 딛는다
발로 옮긴다
삶으로 듣는다
삶으로 행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혹자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마치 혈연은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 안의 영적 인연만이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가 아는 십계명에서 4계명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혈연만을 중시하는 삶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적인 인연 곧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요 가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강조하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요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에 SNS상의 어느 동영상을 보니까 어떤 아이가 노래를 하는 데 랩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노래하는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악의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것에는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그렇게 어릴 적부터 공격적인 가사를 되뇌면서 성장했을 때 과연 그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그 삶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생각대로의 삶을 함께 이루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주님의 말씀 속에 참된 진리와 정의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대로의 삶을 이루어가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또 다른 시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인간의 시선은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 다시 혈연에 집중된다. 직계는 더욱 그러하다. 언제나 관심은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 작용한다. 혈연에 집중되는 것을 그 어떤 것으로 누구도 방해되서는 안 된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상황은 군중에 쌓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게된다. 군중에 쌓여 있는 예수님을 떼 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이 시선은 인간이 갖는 소극적 시선이며 혈연이 갖는 시선이다. 이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시선이다. 밖에서 우리의 본질을 정확히 들여다 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인간의 한계를 파격하는 적극적 시선이다. 예수님께서 군중에 쌓여 있는 것은 혈연의 관계를 넘어 모두에게 열려진 시선이다. 인간의 시선이 필요하나 믿음의 사람은 또 다른 시선으로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군중을 향하는 시선을 지녀야함을 깨닫게 한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19-21)
<예수님의 참가족>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화요일>(2020. 9. 22. 화)(루카 8,19-2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을 대립 관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큰 가정’이고, 각 가정은 ‘작은 교회’ 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은 신앙생활의 동료이면서 동시에 가족이고, 가정의 식구들은 가족이면서 동시에 신앙생활의 동료입니다.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생활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생활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아직 신앙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입니다.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에는 가족을 멀리하라는, 또는 버리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이 말씀들은 실제로 가족을 멀리하거나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 가정에 헌신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1티모 5,3-4).”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그들은 나의 가족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가족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영적인 참가족’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이라는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따라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는 말씀은, ‘영적인 참가족’의 정의를 내려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참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나의 참가족이 되기를 바란다면, 즉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모든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의 계명들을 (명령들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합니다. (그것은 그 계명들을 실천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믿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데, 머리로만 믿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 참례 잘하고, 공동체의 전례나 행사나 활동에 참여하는 일도 잘하는 것은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도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잘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명령하시는) 일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잘 안 보일 때가 많지만,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간에 충실하게,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바위’와 비슷합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또는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신앙에 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뿌리가 없는 신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말라 버리게 됩니다(루카 8,6).
인간의 고귀한 정신이 하늘소속이기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영적 형제관계 발표는 인류 진화의 혁명적 차원이라 봅니다.
예수님은 생물학적 혈연장벽 넘어 인류가족이란 단계로 높여주십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름에서 알게 하는 것은 인류 진화의 혁신교육입니다.
의형제도 가짜서류작성 혈서로 약속된 형제가 아니라 원천사실입니다.
이성적 동물로 자라며 급성숙하는 뇌기능의 마찰문제를 해결하셨지요.
육체는 물질 세상에서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왔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인간의 고귀성은 그 정신(혼)이 하늘나라 소속이기 때문임 깨달읍시다.
인간고귀성의 근원이 있어야 정상진화 가능하다고 느끼시면 남다르죠.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와 더 가까워지고자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21)
우리는 언감생심 주님의 가족이 될 꿈을 꿀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은 혈연, 즉 핏줄에 기인해서 이어지는 관계성인데, 예수님과 우리는 시대와 인종, 민족, 출신 등등 거의 모든 면에서 공통분모가 없으니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족의 의미를 재정립하십니다. 핏줄에 기인하지 않는 예수님의 가족은 무한히 확장될 가능성을 안고 있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 어디에나 선포되듯이, 그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 역시 온 세상 어디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리아와의 가족적 연관성을 부인하시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오늘은 비록 군중 때문에 밖에 서서 예수님 가까이 갈 수 없으셨지만, 말씀을 듣고 실행한 가장 탁월한 모범이요 증인이십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계시니, 성모님만큼 말씀을 듣고 실행해 열매를 맺은 이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오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듣고 머무르고 되새기고 품고 실행하는 말씀이 우리를 엮어 한 가족을 이루게 해 주었지요. 그런데 말씀은 지적 유희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식과 식견을 쌓는 것과 주님의 가족이 되는 일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듣는 이의 실행을 통해 진정으로 완성됩니다.
제1독서에서 나오는 여러 잠언 중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3)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의례를 행하고 제물을 바칩니다. 말하자면 절대자에 대한 경외와 찬양의 표현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제물보다 자비와 사랑을 바란다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위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목소리조차 낼 줄 모르는 이들의 외침이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는 일은 육화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이제 우리가 그분 대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꿈을 실현하라고 하십니다. 이쯤 되면 주님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읽고 실행하는 경지이니 최상의 가족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우리 모두가 더 친밀히 연결된 당신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독이고 일치하는 진짜 가족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도 주님의 가족입니다. 각자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을 각자가 처한 환경과 실존 안에서 실천하려 애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지요.
오늘 우리를 당신 곁으로 끌어당겨 가족의 연으로 품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가족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더 달아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8-19: CCL 41,544-546)
“내 양들은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온 세상에 흩어졌다.” “온 세상에 흩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온갖 지상적인 것을 따라가고 지상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고 사랑함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지게 하는 그 죽음으로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지상적인 것을 사랑하고 길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 흩어진 것입니다. 이런 양들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한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가 낳은 것처럼, 그들도 모두 한 어머니인 교만이 낳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만이 분열을 낳게 하는 것처럼 사랑이 일치를 낳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한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와 그 교회 안의 한 목자께서는 어디에서나 헤매는 이들을 찾으시고 허약자를 굳세게 하시며 앓는 이를 돌보시고 상처 입은 이를 싸매 주십니다. 교회가 어떤 이들은 이런 곳에서 찾고 또 다른 이들은 저런 곳에서 찾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교회는 모든 이와 합치되어 있으므로 그들 모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라나 온 세상에 퍼져 나간 포도나무와 같고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하여 농부의 낫으로 교회라는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쓸모 없는 가지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포도나무를 모조리 잘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려진 가지는 잘려진 바로 그 곳에 남아 있지만 그 포도나무는 모든 곳으로 자라나 붙어 있는 가지도 알고 있고 잘려져 떨어져 있는 가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 헤매는 이들을 되부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진 이 가지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여 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 때를 떠나 헤매는 양들이건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이건 최고의 목자이시고 참된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양들을 되부르시고 또 가지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 양 떼는 온 세상에 흩어졌지만” 그 악한 목자들 중에 “그들을 찾아 다니는 목자는 하나도 없었도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증거로 삼아 맹세하십니다. 목자들은 죽었지만 주님은 살아계시므로 양들은 안전합니다. “나는 내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런데 죽은 목자들은 어떤 목자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지 않고 자기 이익만 찾는 목자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찾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을 찾는 목자들이 앞으로 있겠고 또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있을 것이고 또 분명히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멋지고, 맛있고, 아름다운 삶 -말씀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제 취미는 단연 사진찍기와 독서입니다. 자연사진도 좋지만 인물사진도 좋습니다. 까닭을 어제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모습들입니다. 정말 마음이 예쁘니 얼굴도, 모습도 예쁨을 실감합니다. 나이 70넘어 이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깨달으니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어느 수녀님이 수녀원 정원 사진을 보내 줬기에 수녀님의 마음이 고마워 다음 같은 메시지를 나눴습니다.
-“아침 선물 감사합니다. 거기 수녀원 정원도 깊고 아름다운 숲같습니다! 그러나 나에겐 수녀님 마음의 숲이 훨씬 깊고 아름답지요!”
“신부님! 말씀에 힘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 ‘마음의 숲’처럼 아름답고 깊습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사랑의 눈에는 모두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는 아름답다(Each one is beautiful to God who loves us).’
그렇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의 눈으로 보면 고유의 '결'과 색깔과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체험도 생각납니다. 주문한 두권의 책을 받아 열어 봤을 때 책 표지의 디자인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책 내용도 깊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책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입니다.
예전 미국 생존 수도원에서 잠시 머물 때, 아름다운 환경에 신선하고 향기로운 공기를 숨쉬며 먹지 않아도 배불렀던 느낌과 흡사했습니다. 아름다움에 취하면 그 행복에 침식寢食도 잊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책 제목입니다. 아름다움은 발견이자 또 지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책 소개글도 좋았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던 것 같다. 읽는 내내 그 질문 겸 감탄사를 들었고 또 따라했다. 아름답지요?”
제가 요즘 자주 쓰는 말마디 역시 ‘아름답네요!’, ‘멋지네요!, ’예쁘네요!‘라는 표현입니다. 어제도 몇분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며 나눈 덕담입니다.
“시처럼 늘 멋지고 예뻐요! 늘 이렇게 사세요!”
“너무 멋지고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고 활기찬 청춘같아요! 늘 이렇게 사세요”
며칠전 읽은, 내용이 깊고 아름다워 메모한 글도 나눕니다. 귀농하여 18년동안 농사짓고 있는 50대 중반의 어느 자매입니다.
“귀농은 디자인이예요. 단순히 지역만 옮겨가는 게 아니예요. 일상생활을 새로 디자인해야 해요. 작게 쓰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 줄 알아야 맘 편하게 살 수 있어요. 본인에게만 맞춰 디자인을 해서는 안되요.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런 생각을 공유해야 하고, 모두가 어지간히 활동할 수 있는 그런 곳을 얻어야 해요.”
귀농만 아니라 우리 삶도 디자인입니다. ‘삶의 디자인’ 참 멋지고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디자이너입니다. 하루하루 생각없이 되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아름답게 삶을 디자인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정화하며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어떻게 삶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며 살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말씀보다 아름다운 것은, 맛있는 것은 없습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맛으로 사느냐 묻는 다면 저는 지체없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말씀 맛으로, 기도 맛으로, 찬미 맛으로, 바로 하느님 맛으로 삽니다. 말씀 맛이 바로 하느님 맛입니다.”
맛과 멋이 통합니다. 맛있는 삶이 멋진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참으로 말씀 맛, 하느님 맛으로 살 때 비로소 영육의 건강에 아름다움이요 세상 맛, 육신의 맛을 넘어설 수 있입니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재미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 종종 듣는 말입니다.
식욕食慾, 성욕性慾, 물욕物慾,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지나칠 때 중독입니다. 식食중독, 성性중독, 돈중독될 때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다’ 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말씀의 맛에, 말씀의 아름다움에, 하느님 맛에,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미칠 때 참 아름다운 사람,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에워싸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은 아주 짧지만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바로 당신을 에워싸고 말씀 맛에 심취하여 듣고 있는 자들을 지칭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시간과 장소는 문제가 안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계시며,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가족이란 말입니다.
말씀의 맛, 말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 맛,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말씀 맛, 말씀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말씀을 실행할 때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다음 제1독서 잠언의 하느님 말씀도 우리를 각성覺醒케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삶의 디자인에 하느님 말씀의 실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말씀 맛을, 말씀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 맛이 날로 깊어갈 때 멋진 삶,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복음 환호송이 이를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루카11,28)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그대로 말씀 예찬입니다. 시편집에서 가장 긴 시편으로 무려 176절까지 계속되며 오늘 시편은 그 일부에 속합니다. 말씀이 얼마나 우리 영적 삶에 결정적인지 구구절절 공감에 감동입니다. 몇절만 인용합니다.
1.“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이들!”
81.“제 영혼이 당신 구원을 기다리다 지칩니다.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97.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103.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도 답니다.
105.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127.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
130.당신의 말씀이 열리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이들을 깨우쳐 줍니다.
131.당신의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47.새벽부터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12,7."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 흙 도가니에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이어라.
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결국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은, 목마름은 말씀에 대한,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이자 목마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이런 말씀의 실행과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요, 성령 충만, 생명 충만, 빛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비로소 예수님의, 하느님의 참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 의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당신 도를 배우게 하시나이다." 아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함승수 신부님
'가족'을 소재로 다양한 영화를 연출해온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중에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유사가족', 즉 혈연이라는 법적 관계로 묶이지는 않았으나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이 가족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빠인 '오사무'와 엄마인 '노부요'인데, 이들이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이들을 한 사람씩 데리고 오다보니 총 여섯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이나 윤리관념도 없고, 자본주의 시대에 남들과 경쟁하여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며 또한 넉넉합니다. 항상 천진난만하던 아빠 '오사무'는 아들 '쇼타'가 친부모를 찾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헤어짐의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쇼타가 탄 버스를 쫓아 전력질주합니다. 딸인 '유리'는 '진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음에도 '가짜 엄마' 노부요를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고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습니다. '혈연'으로 뭉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면서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그렇게 만든 이유를 찾아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가족이니까 참아야 한다'며 '의무감'이라는 반창고를 붙이고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정말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단지 '피가 섞여서' 같이 살게 됐을 뿐인 가족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함께 살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진짜 가족'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과의 관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진짜 가족'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혈연처럼 수동적으로 부여된 관계도, '가족이니까 무조건 참아야한다'는 식의 의무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에 그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랑'이 더해져야만 '진짜 가족'이라는 끈끈한 유대로 묶여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아도, 주일미사에 참여하여 봉헌금을 내도,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신앙생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하느님의 '진짜 자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짜 가족'이 되기 위한 노력, 그분과 진정으로 일치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들만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족 사랑
김효석 요셉 신부님
성모님과 친척들은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늘 함께 지내고, 언제든 원할 때마다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은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갔으나, 군중에 막혀 그분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가족을 갈라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가족보다 군중을 더 가까이 하신 걸까요? 군중 때문에 예수님은 가족을 버린 걸까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군중 속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께 당신 가족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족들이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고 알려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혈육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지향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 가족을 통해, 군중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군중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군중은 예수님의 가족을 통해 주님의 가족이 될 길을 발견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사람을 갈라놓지 않고,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가족애도 깊어집니다.
하느님의 불으심은 받은 사람 복되도다.<9/9-13.>9/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높은 사람이 불으면 지체 없이 다려 가는 사람 복된 사람입니다. 에페서 1/18-19 에 하느님의 부르심은 희망에 차고 영광스럽고 부요한 상속을 받고 강력한 힘의 작용에 의해 하느님의 권능이 얼마 큰지를 깨닫게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불으심은 우리에게 강력한 힘으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하고 누리게 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불으시는가? 바리사이들이 마란 것처럼 주님의 찬지 상에는 세리와 죄인들 어울리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권력자 재력가 명예로운 사람은 부르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부르셨고 그 들은 모든 풍요롭게 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에 참례시키십니다.
가난한자는 불으심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아니 가난한자와 함께 일하시려 하십니다.
저는 불으심에 꿈은 초등하교 촐업 때 친구 세이 천주교 신자였는데 함께 놀다가 소신하교를 가자하여 준비하다가 차별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부자 집 아들이고 한 아이는 밥은 먹고 사는 사람이 였고 저는 6학년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졸업식에 참례 못할 정도여서 졸업장도 못 받은 가난뱅이 였는 데 한사람은 부모님의 반대로 못 기고 한사람은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들어가고 저는 준비 못하면 옷이라도 한 벌 해 입고 오라고 하여도 그것마저 할 수 없어 못 들어가고 8년 후에 왜관 수도원 입회를 하였습니다. 8년 동안 온갖 고통을 다 격고 세상에서 피난 노동 장사 쓰레기 조합 일꾼 조수 17에 운전하다 경찰에 결려 유치장 까지 경험하고 1956년 대신하교 입학 사제로 불리워 1963년 12월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모든 과정을 돌아보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시련이며 희망이었습니다.
성경의 부자 청년은 가진 바를 다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하였지만 그는 부지여서 응하지 않아서 근심찬 얼굴로 불으심에 응하지 못하고 세상에 머물려 살게 되었습니다.
이상 하리 만금 성당에는 가난한 사람으로 가득하고 힘이 없는 노인들만 넘치는 이유는 가난하기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겸손하게 응답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첫 본당이 지금은 공업단지가 되었지만 시골 가난한 동래여서 가난한 사람들과 사는 것이 운명이었지만 할일은 많이 있어 34세 농촌운동 외 가난한 집 아이들 중하교 고등하교 대학교 등록금 대주고 공부하도록 하고 청년들 일짜리 만들어 주고 농한기를 없이 일하도록 농산물을 추운겨울에도 도마도 오이 상추 제배를 하면서 교회가 없는 곳에 공소 짖고 한곳에는 150명 합동 세레식도 하고 환등기를 들어 매고 시골 공소에 까지 일하니 그당 시 김 추기경 가톨릭 신문사 사장님이 었을 때
잘한다고 친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소신하교부터 시작하였으면 조금 고급 사제가 되었을 것인데 제일 밑에 그당시 부자 집 학생은 유학을 가고 이름 있는 사제로 살았지만 수도원 들어와서도 제 밑으로 거이 유학을 갔다 왔지만 저는 나이 60이 돼서야 로마를 거처 이스라엘 까지 성지순례를 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 응답의 결실이라 생각하고 감사기도들이며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따르라고 하신다.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자리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스러운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인간의 본성은 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예수님이 부르시고 계신다.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나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 그분이 나를 부르시고 계심을 다시 알아 듣는 하루가 되고자 한다.
가을의 정취가 한 몸으로 다가 온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영명축일을 맞으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다른 사람의 좋은 점과 가능성보다는 안 좋은 점과 현실의 모습으로 평가하고, 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평가절하면서 바라보고 기억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에게 “나를 따라라.”(마태 9,9) 하고 부르시고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러자 마태오의 동료인 세리들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친지들이 같이 와서 식사릏 함께하게 됩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비난 섞인 말을 내뱉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1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적을 들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어르신들이 가끔 하시는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퍼집니다. “사는게 죄지요.” 살면서 문득 문득 우리 모두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주님께 기꺼이 다다르며 주님과 형제들 앞에 겸손되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새로워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
한 마디가
우리를 살린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점점 더 말씀을
믿게되고
사랑하게 된다.
말씀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다.
말씀으로
정화되고
말씀의
실천으로
깊어진다.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바라보아야할
우리의
관계이다.
관계의 방향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의 가족이
되게한다.
가족은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간다.
가족의 인연은
말씀의 인연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가족의 힘은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거기가 가족이다.
실행하는
가족의 얼굴은
말씀의 얼굴이다.
말씀이 엮어주는
복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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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주에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전국 성지순례의 마무리를 위해서 제주도 6군데와 추자도 1군데를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꼭 들르고 싶었던 곳이 하나 있었지요. 바로 제주도에 있는 조그마한 책방입니다. 어느 가수가 쓴 책들을 좋아하는데, 이 가수가 제주도에 책방을 운영한다고 해서 가보고 싶었습니다. 책방에 가서 그 가수를 만난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단지 책 속의 글이 어떤 환경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만났어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니 책을 쓴 작가로, 또는 책방 주인으로 보지 않고. 단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을 만나서 사진 찍기 위해 온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저 역시도 다음 책에 못된 손님 중의 한 명으로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러면서 갑곶성지에 오시는 순례객 중에서 종종 “신부님 보려고 여기에 왔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연예인도 아닌데 왜 저를 보러 이곳까지 오실까?’라고 생각했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이해가 됩니다. 아마도 이분들도 제가 어떤 환경에서 글을 쓰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오시는 것이겠지요.
우리 삶 안에서 다른 이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길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즉, 입장 바꿔서 생각했을 때 많은 문제들은 사라지고 그 안에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옵니다. 그런데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지요. 하긴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가까이 들으려는 사람,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사람 등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있었으니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가까이 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누군가가 알려 줍니다. 그러나 반갑게 맞이하러 나가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가족을 외면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게 보겠습니까? 이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뜻을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바로 세상의 기준보다 하느님의 기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종종 주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어떤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찾아오면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이라면서 불평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이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보십시오.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58 진목정
경주시 산내면의 산중에 위치한 진목정은 인근 탑골과 상선필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피난 와서 살게 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후 1837년 파리외방 전교회의 신부들이, 1850년경부터는 최양업 신부에 이어 다블뤼 주교와 리델 신부도 상선필과 이곳을 순회 선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병인박해 때는 울산 살티에 모여 살던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의 가족이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산내면 소태동 범굴로 피신해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2년간 남자들은 나무그릇을 만들어 팔고 여자들은 동냥을 하여 끼니를 잇는 공동생활을 하며 살아갔으나 체포되어 약 세 달간 모진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8년 9월 14일 동천 강가 울산 장대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태연자약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마지막으로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른 뒤 휘광이의 칼을 받았다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 마리아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울산 장대 옆 동천 강가 외진 곳에 묻어 두었다가 진목정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교우촌 뒤편 도매산에 합장하였습니다. 지금은 대구 복자 성당으로 옮겨 모시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순교자들이 숨어 살던 범굴과 진목정 공소와 세 분 순교자들을 합장했던 묘지가 있습니다. 대구대교구는 순교자 묘소 옆에 순교자 기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고, 제대 뒤편에 ‘하늘원’(납골당)을 함께 조성하여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미사는 성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니 꼭 전화를 하시길 바랍니다. 주소는 경북 경주시 산내면 수의길 192이고, 전화는 054-751-6488입니다.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특별한 수녀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겸손하시고, 온유하신지, 또 소리 없이 많은 일을 거뜬히 해내시는지 신자들로부터 ‘살아있는 성모님’으로 통합니다. 수녀님과 한번 인연을 맺은 신자들은 얼마나 수녀님께 매료되는지, 그리고 존경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수녀님을 한번 만난 많은 사람들은 앞 다투어 수녀님의 팬클럽에 가입합니다. 수녀님의 영성과 정신,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에. 그런 수녀님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인품도 인품이지만, 탁월한 친화력과 중재력이 비결이었습니다. 이 수녀님의 특기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소지가 발생하면 아주 조용히, 지혜롭게, 소리 없이 개입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크게 하지 않습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빠져나가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습니다.
수녀님 자신이 본당 궂은 일은 거의 다 뒷전에서 도맡아하십니다. 그리고 뭔가 하나라도 잘 되면, 주임 신부님 덕분이라고, 작은 수녀님이 수고하셨다고, 신자여러분들이 잘 협조해주셨다고 칭찬하고 자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물론 신자들을 향해 거짓말도 많이 하십니다.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들께서 얼마나 신자 여러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고, 자나 깨나 신자들의 영성생활 성장을 위해 노심초사하시고, 오직 신자 여러분들 영혼구원만을 위해 존재하신다고 약간의 ‘뻥’을 칩니다. 그리고 신부님에게도 거짓말을 종종 하십니다. 신자들이 끔찍이도 신부님 생각한다고. 이런 좋은 신자들 처음이라고. 그러니 가시는 본당마다 갈등이나 불화가 생겨날 이유가 없습니다. 평화롭습니다. 늘 화기애애합니다.
한 사람의 그런 희생과 중재, 헌신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녀님의 그런 모습에 감동한 신부님, 사목위원들, 단체장들도 수녀님을 따라서 겸손하게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행복의 비결은 헌신이고, 희생이고, 자기낮춤이고,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들으셨을 때 몹시 섭섭해 하셨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적어도 이 정도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저희 어머님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저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묵묵히 많은 수고를 해 오신 분입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매정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참으로 성모님께서 들으셨다면 섭섭해 하실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 말씀의 배경에는 보다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나는 이제 인류구원이란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혈육과 가정과 부모와 고향을 떠나갑니다. 우리 어머님, 생각하면 제대로 한번 챙겨드리지 못해 늘 안쓰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면, 제가 더 이상 나자렛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제 어머님을 떠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지상과제인 인류전체의 구원을 위해 미련 없이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나갑니다.”
이런 예수님의 출가 선언 앞에 성모님 역시 아쉽지만 예수님을 떠나보냅니다. 10달 동안이나 자신의 배속에 들어있었던 예수님, 낳고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다했기에 애착이 가지 않은 수 없는 예수님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미련 없이 떠나보냅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Fiat(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도 가끔은 기쁘게 “예!”라고 응답합니다.
“생맥주 한잔하러 가자”는 형제들의 초대 앞에 저는 만사를 제쳐두고 기쁘게 일어섭니다. 뿐만 아니라 “손맛 좀 보러가자”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설레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낚시도구 챙깁니다.
이런 Fiat은 진정한 Fiat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다하는 Fiat이니까요. 진정한 Fiat은 바로 성모님의 Fiat입니다. 고통스러운 길, 정말 가기 싫은 가시밭길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주님을 위한 길이기에 기꺼이 길 떠나는 Fiat이야말로 진정한 Fiat입니다.
다가오는 삶의 모든 국면들이나 사건들,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고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직면하는 자세가 진정한 Fiat의 자세입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 억울하기 그지없는 사건들 앞에서도 나대지 않고 조용히 마음에 간직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자세야말로 참 Fiat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 새로운 성도 예루살렘이 됩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 계시는 계약의 궤가 됩니다.
편애와 공정함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11년 2부 리그 팀이었던 사간도스 축구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고 현재는 1부 리그에서도 1위를 하게 만든 윤정환 감독이 해임했습니다.
사간도스 구단 주장은 윤정환 감독이 선수를 편애하는 탓에 나중에는 더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는 저는 ‘선수를 편애하는데 저렇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편애하면 팀이 갈라져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은 팀을 만들어 준 윤정환 감독은 선수를 편애한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그리고 합당하게 선수를 기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감독이 이끌던 2부 리그 팀이 1부 리그에서 우승을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공을 잘 차는 사람만 뛰게 하고 못 차는 사람은 벤치에 앉혀 놓는다고 불평을 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운동장에서 뛰고 싶다면 그만한 능력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애와 공정함의 차이는 정말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 가장 고민은 누구를 편애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현명했던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못해주었다는 것이랍니다.
모두에게 해 줄 수 없거든 누구에게도 해 주지 않을 때 오히려 편애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분열을 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새롭게 하는 강의들이 많아서 바쁘기도 하였고 4천 명이 넘는 신자들과 일일이 다 친분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자들과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봉사자들과는 자리를 함께 한 적이 많았습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 불평하시는 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공정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봉사하는 분과 하지 않는 분과 똑같이 대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불공정한 것은 아닐까요?
잠언은 참 지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정의와 공정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대해주는 것일까요?
잠언에서는 “하느님을 비웃는 자는 하느님도 그를 비웃는다” 혹은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하느님도 그가 부르짖을 때 귀를 막으신다” 와 같은 식의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공정과 정의를 좋아하시는 하느님은 그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일률적으로 혹은 획일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정당하게 보상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한 이는 구원하고 악한 일을 한 이는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공정함이요 정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72제자를 택하셨고 그 가운데 12사도를 뽑으셨으며 그 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특별히 데리고 다니셨으며 그 셋 중에서도 베드로를 수장으로 뽑으셨습니다.
부활하셔서도 처음으로 수많은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고 당신을 사랑하는 순서대로 혹은 그 필요성에 따라 당신 부활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이라고 해서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여자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그 곳에 없었던 토마스에게는 8일이 지나서야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평함입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대해주는 것이 오히려 불공평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편애는 자신이 편애하는 기준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냥 예뻐서 좋아한다는 것은 편애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기준으로 판단해서도 예쁘게 보인다면 그것은 공정함입니다.
하느님은 이웃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 당신도 잘 해 주실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못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이요 정의입니다.
이 기준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편애와 공정함의 차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우리는 버린 자식 같아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편애를 해 달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면 나의 판단 기준이 모두에게 해당하는지를 먼저 살펴야만 합니다.
그래야 공정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수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기쁨입니다. 거시적인 우주이야기를 배웠고, 성과 사목적인 성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교우들이 성직자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직자는 경계(Boundary)를 잘 구분해야 한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는 성직자들의 모습을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그러기에 너무 밀착되거나,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담스럽게 된다고 합니다. 사목적인 관심과 지나친 밀착은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관심은 배려와 이해를 통해서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밀착과 집착은 내면의 모습까지 보여 줄 수 있어서 성직자와 교우의 경계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등대지기는 등대를 지키는 것이 본분입니다.
성직자는 차별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봉사를 잘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눔을 잘하는 교우가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분란을 일으키고, 냉담하는 교우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난하고, 금전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교우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교우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직자가 일주일 동안 만나는 교우가 누구였는지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받아들였듯이, 성직자는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성직자는 약점을 보이면 안 됩니다. 성직자의 약점은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지나친 음주를 삼가야 합니다. 성직자이기 전에 품격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하고, 검소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성직자의 품격과 성직자의 인품은 교우들에게는 깊은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는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성직자로서의 정체성은 인간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군에 입대하면 외워야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군인의 길, 군인 정신을 외워야 했습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조국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적과 싸우는 것이 군인의 길이고, 군인 정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듯이, 성직자는 양 냄새가 나는 성직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현 인류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현대인의 근원지는 아프리카 대륙이었으며, 어느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 조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여성에게 '아프리카 이브'라는 애칭을 붙여주었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다르던지, 유전자 조사를 통해 인류 가계도를 추적한 결과, 지구상의 인류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작은 호모 사피엔스 집단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70억 현대의 인류는 모두 한 가족임을 과학은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과학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사랑 받는 가족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망망대해의 우주에서 지구는 작은 점보다 작습니다. 그 작은 점보다 작은 지구에서 70억 명이 모여 있는 것은 먼지보다 작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을 가르고, 피부와 종교로 가르고, 신념과 계층으로 가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르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우리는 편을 갈라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어리석음을 보여 왔습니다.
사제로 지내면서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불쌍하고 가난해서 도와주신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가는 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같았기 때문에 도와주신 것입니다. 본당에서 사목할 때는 정말 많은 분이 자발적으로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행복했고, 즐거웠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 제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함께 연수를 받는 신부님들이 18명입니다. 처음에는 교구도 다르고, 사목의 현장도 다르고, 이름도 몰라서 어색했습니다. 10일 정도 지나니 얼굴도, 이름도, 교구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교구에서 왔지만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같은 길을 가는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청소를 잘하였고, 어떤 분은 필요한 간식을 준비하였고, 어떤 분은 소통 할 수 있도록 밴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형제들이 함께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할 수 있는 이시돌 피정 센터가 있어서 좋습니다.
<먼발치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9. 25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비록 당신과
옆에 하지 못해도
당신의 고운 눈망울
하느님의 선함 담았기에
먼발치에서 스치는
눈인사 나눔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비록 당신과
살가운 대화 나누지 못해도
당신의 부드러운 목소리
하느님의 온유 담았기에
먼발치에서 들릴 듯 말 듯
목소리 전해 들음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비록 당신을
품에 안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따스한 삶
하느님의 사랑 담았기에
먼발치에서 희미하게나마
벗들을 품는 웃음 봄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영적인 관계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시고 계시다. 즉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 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밖에서 친척들이 찾는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성경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고 잘 될 것이다.”(신명 5,16)고 하셨다. 그분께서 당신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형제들 뿐 아니라,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실 수 있었겠는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고 하셨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시는 말씀이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한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도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에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을 하는 중에 보인 것이 새로 산 휴대폰입니다.
몇 달 전에 외국에 있는 동기에게 휴대폰을 뺏기고(?) 나서 누나가 전에 쓰던 휴대폰을 썼습니다.
무겁고 커서 불편함이 있었는데요. 전에 쓰던 핸드폰과 비슷한 걸 바로 사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면 싸진다고 하기에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하루는 충전기가 고장 나서 핸드폰 가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충전기가 있냐고 물어보고 나서.. 몇 초 있다가 휴대폰 가격을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싸지느냐.. 지금 사면 얼마냐.. 하는 것들을 물어보았는데요.
가격차이가 많이 나지 않을 거고, 지금 가격도 많이 떨어졌다.. 는 말을 듣고 그냥 사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에 집에 갈 일이 있었는데 누나가 핸드폰 얼마주고 샀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가격을 말했더니 다른 데서는 그보다 낮은 가격인데.. 좀 알아보고 사지.. 하더라고요.
또 몇 주 뒤에 동기들과 휴가를 가서 보니 다른 동기 신부 하나가 같은 핸드폰을 샀는데 중고긴 하지만 약정도 없이 거의 절반 가격에 구입을 했더라고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조급한 행동의 결과가 어떠한지 보게 된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조금함 보다는 5절 앞부분의 말씀대로 부지런한 모습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핸드폰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중고시세는 어떤지..
또 몇 군데 대리점을 다녀볼 수 있다면 5절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겠죠.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공동체의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이든, 조경을 하는 것이든, 작은 공사들을 하는 것이든..
한두 가지 사례를 보고 진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책을 들여다보고, 견학을 다니는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길 수 있는 시행착오를 더 많이 줄일 수 있고, 본당에 적합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죠.
알고 있던 방식으로 쉽게 해 나가려고 하는 모습이 일반적인 거 같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길과 방식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다른 공사 방법이 있는지.. 싸게 좋은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적합한 교육방식이 있는지..’ 에 대한 고민 없이 너무 쉽게 일처리를 할 때가 있는 거 같은데요.
아마도 그러한 모습의 결과로 보여지는 것들은 풍요로움 보다는 궁핍함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당 안에 여러 가지 기도와 봉사와 일들이 풍요로워지려면 다양한 길을 찾고 시도해보고자 하는 부지런한 모습이 필요하겠죠.
즐거운 하루 되세요~^^
“화장실이 어디냐..” 하는 것을
중국어로 물어본다면?
“워따똥싸?”
수행자의 참행복.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수행자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압니다. 바로 여기 수행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가 수행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수행자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수행자입니다. 참 행복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될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흡사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하는 삶입니까? 하여 제가 고백성사때 마다 보속으로 써드리는 것이 말씀 처방전입니다. 죄로 인한 영혼의 병의 치유에 말씀 약보다 더좋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할뿐 아니라 실행할 때 말씀의 효력이 드러납니다. 언젠가 말씀처방전을 받아 든 수녀님의 환호를 잊지 못합니다.
“아, 보속이 아니라 보석같은 말씀이네요!”
모든 하느님의 말씀이 보석입니다. 생명의 빛으로 빛나는 보석입니다. 이 살아있는 보석같은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말씀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아니 귀를 기울여 경청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면 저절로 실행으로 옮겨지기 마련입니다. 하여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을 때 순종이요 겸손입니다. 침묵-경청-순종-겸손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공부에 말씀 공부는 필수입니다. 잠언의 말씀이 더욱 말씀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임금의 마음’은 ‘우리 마음’으로 바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 손 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끄신다. 사람의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제물보다 낫다.”
이처럼 말씀공부를 통해 하느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악인 역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악인의 영혼은 악을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빈곤한 이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치유받아야할 악인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위로와 치유요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말씀의 실행을 얼마나 강조하는 지요. 주님이 가장 혐오하신 것도 말씀의 실행이 없는 표리부동의 위선적 삶이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하다.’하며 부러워하는 여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수행자의 삶에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오늘 화답송 시편 첫 구절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지난 토요일 알렐루야 환호송, 바로 이 말씀 안에는 들음과 실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성서독서 수행인 렉시오디비나 역시 실행을 통해 완성됩니다. ‘경청-묵상-기도-관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렉시오 디비나 수행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같은 말씀도 생각납니다. 역시 말씀의 실행을 강조하십니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루카6,46-48)
“그러나 나의 이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 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7,26-27)
참으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가 지혜롭고 행복한 참 수행자이며 주님이 참가족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하는 당신의 참수행자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길의 인도자
이종훈 신부님
착하고 의롭게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아나? 예수님은 아드님이시면서도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한평생 오직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하셨다(요한 5,19).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제자들 중 사도를 뽑으실 때나 당신의 수난과 죽음 등 큰일을 앞두고 기도하셨고, 사람들이 당신에게 몰려들어 바쁘고 피곤하셨을 텐데도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으며, 악령을 몰아내실 때도 기도하셨을 것이다(마르 9,29). 하느님의 아드님도 이 땅에 사실 때는 기도하셔야했다.
우리는 뭔가 선택할 때 고민하고 자문을 구한다. 내 마음도 잘 몰라서 남에게 물어보거나 나대신 남이 읽어준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하고 의로운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겠나. 게다가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니 선하고 의로운 길도 어쩌면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길일지 모른다.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니(마태 19,17), 하느님께 여쭤야 한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21,2).”
그런데 설령 천사가 와서 그 길을 알려주어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역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겁쟁이 자아가 문제다. 자기 마음도 읽을 줄 모르고, 그것을 알아낸다 해도 그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이기적인 선택이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모님도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지는 못하셨지만 그분은 자신을 완전히 비워 하느님의 뜻에 맡기신 분이다(루카 1,38).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분을 우리 어머니요 길의 인도자로 내세워주셨다. 아이에게 엄마는 하느님이다. 어린 자녀의 마음으로 성모님을 부르면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의 길로 인도해주신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추석 한가위 가족들과 잘 지내고 계신지요? 어제 저희 삼남매가 모였는데, 막내가 저녁을 먹고 가라니까, “얼굴 봤으면 됐지 새삼 무슨 할 말이 또 있다고 오래 있냐?”고 일찍 갔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가족이란 존재로서 함께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 신자들의 관계를 되돌아봅시다. 천주교 신자로서 함께 취미활동을 하고 같이 운동을 하는 관계인지? 같이 사업을 하고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관계인지? 아니면,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활동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새로운 가족 관계인지? 그리스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함께 형제 자매로 모여 교회를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보다 깊은 관계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고 구원의 나라로 함께 걸어 나가도록 합시다.
한 말씀으로 세상이 생겨났다. <루카 8, 19-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힘이 있고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이루어졌으며 말씀에 따라 세상이 아름답고 살기 좋아졌습니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입니다. 오늘 복음에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글을 통해 듣고, 선지자나 예언자의 말을 통해 듣고, 각자 마음 깊은 데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듣는 대로 살지 않으면 모든 듣는 말이 헛말이 되고 말의 뜻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진실과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들어 알고 깊이 깨닫는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갔는데 어느 방에 가니 혀만 수북이 쌓여 있고 어떤 방에 가니 귀만 가득히 있어서 천사에게 물으니 하나는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은 사람의 혀이며, 하나는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은 귀라고 했다 합니다. 혀만 놀리고, 귀로만 좋은 말을 듣고 사는 사람을 두고 한 풍자의 말입니다. 미사 때 복음 낭독 전 이마에 입에 가슴에 십자가를 놓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 그저 형식적으로 따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 아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머리에 새기고, 입으로 말을 하고, 가슴에 새기라는 표 뜻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가슴에 새기는 십자가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겠다는 표시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진실하고 힘 있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주신 능력인 힘, 권력, 재력, 명예를 내 안에 가두어 두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려고 왔고, 나는 무엇을 받으러 오지 않고 내주려고 왔고, 나는 내 영광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서로 친교를 가지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런 의미의 실천을 살아서 생명이 다하는 한 봉사하고, 나누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갈 때 하늘의 아버지 뜻이 이 땅에 아니,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이루어져 모두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하기보다 실천이 힘들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주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게 살아갑시다.
순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제는 오늘 주님 말씀을 가지고 오해하거나 헛소리하는 사람 없을 겁니다.
이 말을 가지고 마리아를 당신을 낳아 준 분 이상으로 의미 부여하는 것을 주님께서 거부하신 표시라고 하거나 그래서 마리아를 너무 공경한다고 가톨릭을 비판하는데 깊은 의미를 안다면 오해이고 헛소리일 뿐입니다.
제 생각에 이 말씀을 더 완전하고 깊이 이해를 하면 이런 것이 될 겁니다.
곧,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는 뜻도 되지만 그보다는 ‘내 어머니 마리아처럼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면 여기 있는 이 모든 사람이 다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다.’는 뜻이 될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당신 어머니라고 하신 것은 좀체 들으려고도 하지 않던 우리가 듣게 되거나 듣고도 실천치 않던 우리가 이제 좀 실천을 하게 되면 이제 당신의 어머니라는 말씀 정도가 아닙니다.
그저 주인의 말씀을 듣는 것은 종도 듣고 주인 말대로 실천하는 것도 종은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종처럼 순종을 잘하라는 말씀 이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종처럼 두려워하며 듣고 실천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연인이나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듣고 실천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어머니처럼 그러니까 마리아처럼 듣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근자에 젊은 부부들을 만났습니다.
애 키우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 지 애 엄마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애 아버지까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를 또 낳으라고 하면 못 낳을 것 같다고 얘기하는 거였습니다.
하나 더 낳으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 입막음을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말도 못 꺼냈는데 아무튼 이 경우 애를 낳으라고 제가 말하면 이 때 말을 듣는 것은 곧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이 때 아이를 낳기로 할 경우 제 말에 순종해서 낳을 젊은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기에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사랑해서 아이를 낳거나 하겠지요?
한 인간 아이를 낳는 것도 이러한데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를 낳는 것은 더더욱 사랑이 아니고 순종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보겠는데 이 역시 순종으로 실천하는 것 이상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순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실천한다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그래서 제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봤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지금 내 옆에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성부의 뜻에 순종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싫어하는 일을 순종 때문에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싫어하는 일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싫어하는 사람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요,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아주 구체적인 말씀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가족이
되고싶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셨습니다.
사람을 향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또한
말씀을 통해
자라납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의 뼈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서로의 아름다움을
더 넓게 보게됩니다.
풍요로운 시간은
더 넓어지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말씀의 실행으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주님의 가족들을
만나게됩니다.
말씀으로
가족들이
모이게 되고
말씀의 실행으로
말씀의 진정한
가족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실행으로
가족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은
지금 이순간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가족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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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떤 신부님의 차를 얻어 타고 어딘가를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부주의로 다른 차와 부딪힐 뻔한 것입니다. 정말로 간발의 차이로 사고를 모면했지요. 그 차의 운전사도 크게 놀랐는지 쫓아와서 창문을 내리고 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신부님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점잖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차 운전수는 그 정도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겠는지 계속해서 옆으로 차를 붙으면서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부님만의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 역시 차선을 바꿔 들어오려는 신부님 차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런 위험 상황이 찾아온 것이니까요.
이제는 계속해서 욕을 해대는 운전수에 대해 저 역시 짜증이 나고 화가 나더군요. 그런데 그 순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허어, 저 친구가 나를 최고로 여기나봐. 자기 갈 길도 가지 않고 계속해서 내게 뭐라고 말하고 있잖아.”
순간 제 기분도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긴 굳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필요가 없지요. 차의 창문만 올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으니까요. 괜히 불편한 마음을 만들 필요 없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 마음을 밝게 만드는 것, 이 순간에 가장 필요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피한다고 해도 어느 곳에선가 또 만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잘 될 거야.’라는 희망입니다. 희망을 간직한 태도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커다란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희망을 우리에게 늘 주십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누구나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만이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주님의 울타리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 곧 주님 안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아닌 세상의 것들에만 희망을 두려고 합니다. 그 세상의 것, 물질적인 것들만 채우려고 애를 쓰지요.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희망을 얻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금세 절망에 빠지고 좌절해서 쓰러지고 말게 됩니다.
희망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 더욱 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있다(데스카).
무엇이 옳을까요?
제 친구 중에 융통성이 없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항상 원리 원칙을 내세우는 친구이지요. 그래서 늘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 친구가 거의 이기고 또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이 친구를 포함해서 몇몇 친구들이 유럽을 함께 여행 갔다가 어느 중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 저녁이었고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식사를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자리를 찾아 이곳 중국식당을 찾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한참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는데 한 친구의 입에서 철수세미 조각이 나온 것입니다. 기분이 나빴지만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냥 식사를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융통성 없이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친구가 앞에 나서서 화를 내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식사를 그만하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또한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서 배고픈 토요일 저녁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참 피곤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냥 종업원을 불러서 당신들이 실수했으니 빨리 새로운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왜 지배인을 부르고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요?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원리원칙일까요? 아니면 무조건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일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친구도 또한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친구도 역시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이든 상관없이 다른 이를 부정하고 거부할 때, 주님의 사랑은 희미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모든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셨던 주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넓은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기 위해.....
주님의 형제, 주님의 전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저와 순례중인 박이냐시오는 주님안에서 형제요 전사입니다. 서로가 '주님의 형제'요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렇게 남은 기간까지 무려 50여일을 어느 육친의 형제도 함께 미사하고, 기도하고, 먹고, 자고, 걷고, 대화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은 당신 말씀을 들으며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들을 향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냐시오와 저 역시 현재 온전히 주님 중심의 삶을 살기에 주님의 형제됨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오늘은 순례35일차가 됩니다. 어제의 순례과정에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틀아이카스텔라에서 이곳 살리아 알베르게까지 24.3km, 아침6시부터 오후1시까지 1회 쉬고 꼬박 7시간을 걸었으니 실제로는 24.3km를 훨씬 넘을 거라 생각됩니다. 서로가 생각해도 정말 잘 걸었습니다.
"형제님의 병과를 수송에서 보병으로 바꿔야 되겠습니다."
형제님의 논산 군번으로 하면 저보다 한참 빠릅니다. 재미있는 것이 40여년 지난 지금도 군번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며 저의 논산 군번은 12092299입니다.
"신부님은 더 잘 걸으십니다."
"저는 논산훈련소 28연대에 근무할 때, 연대 구보선수로 뛴적이 있습니다. 당시 병사들은 측정에 합격해야 진급도 하고 휴가도 가는데 측정에 사격과 구보는 기본이었습니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또 끊임없이 스틱대신 주님의 스틱인 묵주를 잡고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흡사 둘의 모습이 고지를 점령하며 나가는 보병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곳한곳 도착할 때마다 찍은 도장의 순례자 카드가 흡사 훈장처럼 생각되었습니다.
" 이제 몇곳의 고지 점령만 남았습니다. 장군들은 전쟁중에 승리하여, 결국은 사람을 많이 죽여 훈장이지만 우리의 훈장은 그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이 순례자 카드를 훈장으로 여겨 가슴에 달면 가득 찰 것입니다. 가보로 보관해도 될 것입니다."
도장 가득 찍힌 순례자 카드가 마치 빛나는 훈장들로 가득한 느낌이었습니다. 어제 순례여정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이곳 살리아까지는 산실을 통해 가는 18km, 지름길 코스와 사모스를 통해 가는 볼 것 많은 24.3km, 긴 코스 둘이었습니다. 전날 긴코스를 가기로 합의했고 출발했지만 출발하다보니 산실코스로 접어들었고 여러 사람이 이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해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짧은 코스를 가자 했지만 형제는 긴코스를 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형제님이 앞장서 인도하십시오."
후에 저의 분별과 결단, 실행에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하여 한참가다 되돌아와 다시 사모스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끝없이 난 도로였고, 팻말에는 살리아까지 20km라 씌어 있었습니다.
"이대로 도로따라 가다보면 살리아에 도착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도중에 빠져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도로만 계속되다가 마침내 1시간쯤 걸려 이정표와 더불어 샛길이 나타났고 장장 5시간 걸리는 오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다니지 않았던 길처럼 썩은 나무가 길 한복판에 있었고 나뭇잎들도 그대로 였습니다. 스페인 도착후 많은 새소리를 듣기는 처음입니다.
어둔 아침, 인적없는, 나무 우거진, 흡사 동굴같은 길을, 또 강물을 옆에 끼고 오솔길을, 숲길을, 계곡길을 한없이 걸었습니다. 분명 거의 다니지 않은 순례길임에 분명했지만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길은 처음입니다. 무려 5시간을 걸었지만 전혀 피곤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리 한국 농촌처럼 폐가가 된 집들도 많았고 문닫은 동네 성당들도 많았습니다. 성당 옆 마당의 공동묘지도 잡풀로 무성했습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성당이요 공동묘지였습니다. 걷는 도중 지천에 깔린 도토리들을 밟고 걸었습니다. 도토리 묵을 한다면 엄청난 양일 것입니다. 좌우간 5시간 걷는 동안 만난 순례자는 고작 셋이었고, 마지막 합류지점에서 쉽고 빠른 길을 택한 순례자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형제님, 어제의 불명예를 완전 회복했습니다. 오늘의 코스 아주 좋았습니다."
참으로 풍부한 체험의, 결코 잊지 못할 아름답고 신비로운 길이었습니다. 더불어 '둘의 신비'에 대해, 사람 인자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둘이었기에 이 길을 걸었지 혼자였더라면 애당초 포기했을 것입니다. '아, 혼자서는 사람이 될 수 없구나. 둘이 서로 보완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그래서 한자의 사람 인자구나.'하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졌습니다.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주님도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또 사람과 길에 대한 깊은 연관입니다. 길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이 길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더불어 인도, 도인이란 한자 뜻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순례여정중인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그대로 주님의 형제요 주님의 전사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주제도 길입니다. 오늘 순례길을 걸을 때마다 되뇌어야 할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진정 순례길에 충실한 이들은 주님 계명의 길을 좋아할 것이며, 다음 잠언의 말씀에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사람의 길이 제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 앞에서, 온갖 덧없는 환상을 벗어버리고, 정의롭고 공정한 인생순례여정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 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시하였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따라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억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 13절 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빠드레 삐오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이태리말로 ‘빠드레 삐오’(Padre Pio)라고 부르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경축합니다. 신부님은 50년 동안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몸에 지니고 사셨습니다. 그 상처에서 오는 통증도 십자가에서 주님이 받으셨던 것과 똑같이 실제로 밤낮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받으신 마음의 상처는 더 컸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과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기 위해서 비오 신부님은 내적 아픔을 인내하셨습니다.
하 느님의 말씀은 칼처럼, 못처럼, 가시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생각과 계획과 마음과는 다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우리 생각이 가는 길과는 하느님 말씀이 인도하시는 길은 어긋나기 십상입니다. 우리 몸은 핑게와 합리화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꾸 다른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되는 영예는 말씀을 전적으로 따를 때입니다. 예수님의 혈육들이 누리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이 기쁨은 주님이 친히 주시는 내적 평화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성 비오 신부님에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오는 상처를 당신처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루시’를 보았습니다. 영화의 주된 내용은 ‘뇌의 사용량’이었습니다. 우리의 뇌를 100% 다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영화는 상상하여 보여줍니다. 뇌의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자신을 통제하고, 타인을 통제하며, 물리법칙에서 자유로워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궁극의 과정에서 육체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시간은 영원하며 공간은 그 시간에 떠 나니는 알갱이와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감독 릭 베송은 ‘시간’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 생명, 문명, 역사, 신학은 시간이라는 밭에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모든 시간을 이끄시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간이라는 밭을 넘어서 분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지런한 것과 조급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밥을 할 때 ‘뜸’이 들어야 하는데 배가 고프다고 자꾸만 뚜껑을 열어보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뜸’이 들 때 까지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비가 빨리 나오라고 밖에서 틈을 벌려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비가 나오기는 하지만 한쪽 날개가 없는 나비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나비는 일찍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부부가 큰 소리가 나는 것도 대부분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끝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데 나의 기준과 나의 생각으로 듣고, 중간에 나의 생각을 말하면 나중에는 왜 싸우는지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정의 문제가 되고, 감정의 문제가 되면 다툼은 더 커지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꾸준하게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인내를 가지고 여유 있게 하면 됩니다. 아기가 조금씩 말을 배우고, 걷게 되듯이 기도도 꾸준하게 하면 나의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충실하게 하면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가난한 이와 불쌍한 이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또한 나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나의 삶이 변화되는 것, 내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나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 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정답이라 깨달았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언제부턴가 연인들이 결혼해서까지 여자가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건 그 후부터 점점 이혼율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둘이 한 몸인데 사랑의 호칭이 오빠라면 여동생, 누이라는 건가요?
그런가하면 알건 모르건 사람들끼리 형님 언니 동생 그러는데 이건 또 뭐죠?
어떻든 가족이라는 걸 무엇보다 앞세우는 인간관계를 바라는 게 신기하네요.
왜 모두가 가족이길 바라는가에서 예수님 말씀이 정답이라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족의 정체는
하느님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가족의 근원입니다.
가족을 신앙인으로
빚어내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제 가족을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이가
가장 행복한 자녀입니다.
사제가 있어야 할 자리또한
말씀을 사랑하는 자리임을
'오상의 비오 사제'는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일또한
말씀과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의
가족들은 성장합니다.
말씀은 실행을 통해
하나가 됩니다.
쉽게 끊어지고
쉽게 부서지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우리가 나태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말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모이게 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의 힘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행하는
우리 삶을 통해
모든 관계는 아름다워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정화시킵니다.
정화는 서로에게
매달리는 혈연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영원한 관계는
하느님 말씀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 말씀만이
점점 우리를
충만케 함을 믿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영원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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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기 전에 꼭 해야 할 것은 여행 가방을 챙기는 것이지요. 여행 가방을 어떻게 챙기는 데에 따라 여행에서 고생을 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 가방을 쌀 때, 이곳도 필요할 것 같고 또 저것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방의 부피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정작 가지고 가야 할 짐을 넣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후회하고 말지요. 따라서 어떻게 가방의 짐을 싸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가방의 짐을 가방 한 가득 채워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행지에 가면 구입해야 할 것들이 꼭 생기거든요. 따라서 여행지에서 구입할 것들을 채울 가방의 빈 여백도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여행 가방을 생각하다보니 우리가 장차 하느님 나라에 갈 때에도 이러한 가방을 싸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한 가방, 그래서 정말로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챙겨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물에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자리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필요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도 그 가방에 빈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채울 수 있는 여백, 그래야 먼 훗날 기쁘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챙기고 있는 가방의 내용물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쓸모없는 것들이 많아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챙길 수 없게 된다면, 모든 짐을 다 꺼내놓고 다시 짐을 싸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특히 그 안에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면 더욱 더 하루빨리 짐을 다시 풀고 다시 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로 짐을 다시 싸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정보다도, 심지어는 가족보다도 가장 중요한 짐은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에 군중들을 가리키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의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의 기준으로 싸는 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싸는 짐이 가득할 때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을 다시 싸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를 위해 내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십시오. 내게 정말, 정말,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 내게 필요 없는 이 한 가지를 과감하게 버려보십시오. 나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그 한 가지에서 해방될 때, 참으로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스승이다.(앤드류 매튜스)
행복한 인부(‘앰블러’ 중에서)
1924년, 영국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러셀이 중국 사천성을 방문했다. 그는 인부들이 드는 의자를 타고 어메이 산에 올랐다. 험한 산길을 오르는 그들의 옷이 금세 땀으로 젖었다. 러셀은 인부들이 더운 날씨에 산에 오르는 자신의 일행을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 중턱에 도착할 즈음 잠시 쉬어 가자고 했다.
러셀은 의자에서 내려 인부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재미있게 이야기할 뿐 더운 날씨나 고된 일을 원망하지 않았다. 러셀은 깨달았다.
자신이 있는 곳이 행복의 땅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지금의 내 자리는 어떻습니까? 내 마음에 따라 행복의 땅으로 들어갈 수도, 그 행복의 나라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과 땅도
어머니와 형제들도
하느님 말씀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영혼을 정화시킵니다.
정화되지 못한
가장 가까운 혈육의 관계가 도리어
더 큰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말씀으로 정화되기를 바라십니다.
말씀으로 매순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정화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떠나보내고 태우는
고통이 뒤따릅니다.
모든 것은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창조이며 정화입니다.
정화없는 창조는
함께 소멸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고
어리석은 행동을 봉헌하며
다시 말씀을 믿고 말씀을 실행하여야 합니다.
말씀같은 삶을 실행하는
기도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복음으로 드디어 정화되는
말씀의 여정에 충실한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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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겠지요. 그렇다면 미래는 어떠합니까? 이에 대해 미래는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미래가 변화가 될까요? 이에 대한 정답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최선을 다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끊기 힘들어하는 담배를 생각해보지요. 우리나라에서 매년 1월이 되면 담배 소비량이 급격히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2월이 되면 다시 원 상태로 아니, 더 많은 소비량을 보이게 된다고 하지요. 아마 예상하실 것입니다. 연초가 되면서 ‘올해에는 담배를 꼭 끊어야지!’라고 결심했다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기 때문이지요. 신경 쓸 일, 속상한 일이 없다면 거뜬히 담배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끊고 나면 왜 이렇게 속상하고 신경 쓸 일이 많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힘들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손에 쥐게 됩니다.
이렇게 담배 하나 끊는 것도 자기 의지대로 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더 어려운 이 세상의 삶을 사는데 자기 의지 하나로 버틸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것에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주관심사는 세상을 늘 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때문에 그토록 힘들어하면서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꽉 움켜잡으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주교님께서 아프리카의 주교님을 만나셨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사제가 많이 부족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사제를 양성할 비용이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한 명의 신학생이 일 년 동안 필요한 비용이 1,500~2,000불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비용을 만들 수가 없어서 사제 양성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저는 인천교구의 성소국장으로 다른 곳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구의 신학생, 우리 교구의 사제만을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나라에만 복음이 퍼져야 된다고 하시지 않았지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이 그 명령을 받아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안에 테두리를 만들고 그 테두리 안만 신경 쓰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처럼 혈육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적인 관계를 떠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은 계속해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관계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매일 같이 주님의 말씀을 산다고 하면서도 내 안의 테두리를 만들기만 했던 제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혹시 아프리카 신학생을 돕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032-765-6965로 문의하세요)
세상에서 보기를 바라는 변화, 스스로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마하트마 간디)
팔 때가 아니라 나누어 줄 때
옛날 심한 흉년이 들었던 유럽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흉년으로 인해 수확할 것이 없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었지요. 더군다나 식물이 말라 죽어버리는 마름병까지 휩쓸고 지나가서 사람들은 더욱 더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의 농장은 다른 곳과는 달리 마름병의 영향을 받지 않아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지요. 그래서 친구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밀농사가 흉년이 들어 밀 값이 매우 뛰었네. 지금이 밀을 팔 때야.”
그러자 이 남자는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아니, 지금은 팔 때가 아니라 나누어 줄 때이네.”
우리는 남의 어려움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 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의 어려움은 곧 내가 그를 도와야 할 때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남의 어려움에 나는 어떤 반응으로 다가섰을까요? 혹시 남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엄마를 부탁해
박기석 신부님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에필로그 ‘장미묵주’에는 다시 그 시작을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다.”라고 합니다. 엄마를 잃은 지 일주일에서 구 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엄마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엄마가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장미묵주를 산 주인공 ‘너’는 성 베드로 성당 안에서 피에타 상을 봅니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단아한 모습에 꼼짝없이 얼어버린 주인공 ‘너’는 “어미 됨을 부정당하고도 아들의 주검에 무릎을 내준 여인”을 통해 엄마를 생각하지요. 그리고 성모님께 하고 싶은 말로 소설을 마무리합니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성모님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부탁합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다.”(요한 19,27) 오늘 복음에서 아들로부터 어미 됨을 부정당하신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 그 아들의 죽음 앞에서야 다시 어미 됨을 인정받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결코 예수님으로부터 어미 됨을 부정당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아드님으로 잉태하신 그 순간부터 이미 취하셨던 것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오히려 성모님께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 우리를 부탁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를 잊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더 끈끈하게 묶어놓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묵주기도를 한 번 더 바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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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저의 축일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특별한 축하 행사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시고 또 많은 선물도 받았답니다. 아마 부족한 제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와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제가 받은 선물 중에서 정말로 감동받은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어린이 미사 전이었습니다. 한 꼬마 아이가 제게 다가오더니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영명축일이시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신부님께 선물을 드리려고요.”
그러면서 어떤 종이 딱지 하나를 줍니다. 그런데 그 폼에서 정말로 아끼고 있는 것을 주는 것임이 느껴졌습니다. 즉, 이 아이는 자신에게 있어 제일 소중한 피카추 딱지를 축일을 맞이한 저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지요. 사실 저는 이 딱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딱지를 구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문방구도 가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과 딱지놀이를 해서 이 피카추 딱지를 얻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전혀 필요하지도 또한 관심도 없는 딱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딱지를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선물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피카추 딱지는 물질적인 선물이 아닌 아이의 큰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선물인 피카추 딱지 한 장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드리는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기도와 선행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기도와 선행이 주님께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기도 한 번 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겠지요. 내가 착한 일 했다고 주님께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기도와 선행이라는 우리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단순히 인간적인 혈연 지연으로 얽혀있는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묶여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사랑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 진정한 사랑을 선물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 차고 남는 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앞서 그 꼬마처럼 자기에게 있어 첫 번째의 것도 주님께라면 봉헌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사랑을 주님께 봉헌하는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은 너 자신을 근사하게 보이려는 싸구려 방법이다.(앨렌 애펠)
좋은 것을 품고 살면(‘좋은 생각’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에 소중한 무엇인가를
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이는 슬픈 기억을 품고 살아갑니다.
어떤이는 서러운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어떤이는
아픈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아름다운 기억을 품고 살아갑니다.
기쁜일을 즐겨 떠올리며
반짝이는 좋은 일들을 되새기며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바로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기쁨과 슬픔,만족과 불만 중
어느것을 마음에 품느냐에 따라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입니다
맑고 푸른 하늘을 가슴에 품고 살면 됩니다.
아름다운 꽃 한송이를 품어도 되고
누군가의 맑은 눈동자 하나,
미소짓는 그리운 얼굴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품고 살면 됩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품고 살면
좋은 삶을 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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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어느 수도원의 원장이 많은 수도원생 가운데 한 사람만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수도원생들은 원장이 인간 차별을 한다고 뒤에서 투덜대며 그 수도원생을 미워했지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수도원장은 어느 날 모든 수도원생들에게 새를 한 마리씩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죽여 오라.”
얼마 후, 모든 수도원생들이 새를 죽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그 수도원생만이 새를 산 채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다른 수도원생들은 그가 수도원장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음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요. 이렇게 순종하지 않는 수도원생을 이제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원장이 사랑하는 수도원생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새를 죽여 오지 않았니?”
이에 수도원생은 고개를 숙이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저는 아무도 안 보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하느님께서 저를 보고 계셔서 도저히 새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원장이 다른 수도원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내가 이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 그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골방에 혼자 있다고 생각되는 그곳에도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자주 잊어버립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선 자체이신 하느님이 가리어지기 때문이지요.
저는 요즘 제 자전거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 인터넷을 뒤지면서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자전거만 눈에 보입니다. 바로 저의 모든 관심이 온통 자전거에만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하느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하느님만이 눈에 들어오고, 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죄만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하느님인가요? 죄인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께 관심을 두는 영적인 관계로 맺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혈연관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영적인 관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관심을 놓지 않는 우리들이 될 때, 영적인 관계는 더욱 더 두텁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의 영적 관계의 결속 상태는 과연 어떨까요? 두터울까요? 아니면 엉성할까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해봅시다.
들어 줘야 설득할 수 있다(신강균, ‘1000가지 설득비법’ 중에서)
미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카운슬러 중에는 의외로 현지 미국인이 많지 않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들이 오히려 인기가 많다. 왜 그럴까?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잘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한 주부가 찾아와서 자기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데 카운슬러는 자세히 알아듣지 못한다. 남편과 싸웠다는 이야기 아닌가 싶어 상대가 말하는 중간 중간 간단한 영어로 맞장구를 쳐준다. “오, 그래요?” “원, 세상에!” “당신 대단하군요.” 그렇게 두어 시간 들어 주고 나면, 고객은 두 손을 잡으며 “고맙다. 정말 시원하다.”고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인 카운슬러는 만난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아, 그건요. 일단 별거부터 하시고요...” 하는 식으로 해법을 제시한다. 겉으로만 봐서는 미국인 카운슬러가 더 많은 소득을 올려야 마땅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고객이 ‘왜 카운슬러를 찾아오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지금 잘 견디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영업 사원 시절, 어느 지자체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날은 “물건을 팔러 온 것이 아니고 농사가 풍년인 것 같아 어느 분이 이 마을을 관리하는지 한번 보고 싶어 왔다.”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냥 차 한 잔 마실 요량이었다. 그런데 지자체장은 도지사에게 했던 것처럼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고 난 뒤 “차 잘 마시고 갑니다.”라고 인사하고 문을 나서는데, 나를 불러 세우더니 대뜸 제품 주문서를 내놓으란다. 제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어 고맙다는 것이다. 결국 그 지자체장뿐 아니라 몇 사람을 더 추천 받고 돌아왔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말에는 ‘당신을 존경하오.’,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오.’라는 뜻이 숨겨 있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 중 ‘자기 존중의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두 귀는 상대를 향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른다. 들어 주는 것 이상의 설득은 없다.
부끄러운 모정
이난호
1987년 12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부정 투표로 얼룩졌다. 사태는 ‘구로구청 점거’로 이어졌고 그 진압과정에서 내 아들과 동갑인 이 군이 구청 옥상에서 추락, 허리뼈가 으스러졌다.
바로 전해, 내가 처음 본 그는 해맑은 웃음 때문인지 대학 2학년인데도 소년 같았다. 그때 이 군의 어머니는 얼마 전 최전방에서 생을 마감한 이 군의 형에 대해 묵상했다. 비리가 만연하던 시절 그의 집안은 이른바 최고위층과 선이 닿을 만해서 큰아들은 편한 군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본인이 이 검은 묘수를 단호히 거부하고 수순에 따라 배치된 곳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 그 올곧은 아들에게 묘수를 부리려 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정을 고백하는 이 군의 어머니가 내 눈엔 초인이었다.
그리고 일 년 뒤, 이 군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아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이 몸과 마음 바쳐 구현하려 했던 것들은 얼마쯤 당겨졌을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셨다. 실행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말씀’은 그 실행으로만 비로소 ‘말씀’일 수 있다는 진리를 나는 수없이 듣고 읽고 묵상하며 끄덕였다. 그러나 그뿐, 나는 데모대에 끼어드는 내 아들에게 제발 앞장서지 말고 어물어물하다가 꽁무니 빼라고 줄기차게 주문하면서도 가책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남의 집 아이들이 내 아이 대신 희생되기를 추호도 바라지 않았다. 그랬지만 나는 이 군의 휠체어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님, 이 군의 저 맑은 웃음을 지켜주소서. 그가 희망했던 걸 기억하소서. 그리고 용서하소서.” 내내 이 군의 미소를 피해 눈길을 다른 데 두고 속으로 성호만 긋고 또 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단순한 인간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교회가 창조되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 예루살렘이 성령님 안에서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이 모든 창조사업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신랑으로서 신부인 교회와 혼인을 하리라는 예언이 창세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 2,24)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와 혼인하게 될 신랑인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는 내용까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한 몸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 인간의 육체를 취함으로써 세상에 오시기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냐?”며 어머니를 떠나십니다. 이는 이미 예고 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에서 예수님은 삼 일 동안 당신을 찾아 헤매던 요셉과 마리아께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시며 미래에 교회에 혼인하기 위해 당신들을 떠나셔야 할 것을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정말 부모에게 매이면 참으로 아내와 혼인하여 한 몸이 될 수 없듯이 저도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참다운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걸림돌이 된 것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유일하게 대학에 다니고 있는 저에 대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지라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못 꺼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약주를 드시고 기분이 좋으실 때 방에 들어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그랬더니 매우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시다가 새벽에 저를 깨우시더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허락하지 않으셔도 제 뜻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는 말씀처럼 가족의 뜻이 하느님의 뜻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만이 제가 사제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저의 사제직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이후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말하기를, 제가 보좌신부로 있는 성당에 오셔서 사무실에서 저의 어머니라 하시며, “삼용이, 여기서 말썽 안 피워요?”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신부님인데 말썽 안 피우냐는 어머니의 말씀에 신자 분들이 웃으셨다고 합니다.
위신을 너무 세울 필요도 없지만 이렇게 위신이 일부러 깎일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저는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제가 있는 성당에 오시지 말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사제가 되면 이제 신자들의 목자가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어머니가 성당으로 저를 찾아오시면 마마보이가 되는 것도 같고 신자들 보기에도 좀 그러니 성당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제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내려갈게요.”
어머니도 이 말씀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사제관에 있는데 핸드폰이 왔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당에 저를 보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쯤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앞으로도 낫겠다싶어 전화로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고 다시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찾아오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참으로 사제가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려 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하느님을 뜻을 따르기 위함이지 부모님이 정말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더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가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하셨지만 이것은 성모님을 업신여기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모님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실 때 아버지의 뜻에 “Yes!”하신 것은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의 고통까지 다 받겠다는 의미로 Yes를 하신 것처럼, 성모님의 Yes도 처음부터 구속자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의미로 Yes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Yes, "Fiat!"은 예수님 다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가장 완전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셔도 성모님은 기분이 상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이 없으니 당신만큼 어머니 될 자격을 지닌 사람도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혈육관계는 하느님을 앎으로써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그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이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으로서 교회와 혼인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났지만 마지막엔 교회를 아버지와 어머니 집에 데려와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하여 신부를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와 살게 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남이 결코 영원한 이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욱 행복한 가정을 위한 일시적인 떠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시적인 이별은 더 풍요로운 가족을 위한 것이니 오히려 부모님께 참으로 효도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했으니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부모를 더 공경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교회에 나가 당신들을 조금은 떠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자녀들을 놓아 주어야합니다. 결국엔 꼭 껴안으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효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때가 많다.
강성덕 목사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늘 나자렛에서 생활하던 예수님이 공적 복음전도의 일을 시작하신 뒤로 그렇게 자주 가족을 만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온 가족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복음 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바쁘셨다. 복음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으며, 그리고 힘든 여행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어떤 사람이 가족이 온 것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사도직은 모든 인간이 본연의 하느님 자녀의 모습, 곧 한 가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이 그리운 가족을 상봉하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때가 많다. 내 지역사회, 내 종교, 내 나라, 내 민족이라는 장벽 안에 우리를 가두는 때가 많다. 예수께는 아무 장벽이 없었다. 예수님은 죄인들, 이방인들,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셨다. 그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하신 것이다.
한 아이를 위탁받아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 아이가 이 아이의 보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친동생을 챙기는 것보다 더 열성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남다른 기쁨에 잠긴다. 우리 장벽 뒤에 있는 이를 내 가족으로, 다같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웃으로 받든다면 복음 정신에 좀더 일치할 수 있지 않을까?
최경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짤막한 세가지 교훈의 말씀을 연결없이 모아놓은 단절어 집성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부터 25절에는 이 내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세가지 단절어를 설명해 봅니다.
먼저 이 말씀들의 상황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신 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명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첫번째 말씀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은 그릇으로 가리워지거나 침상 밑에 들어가 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듯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도 드러내야 할 것이며 때가 되면 밝히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은 당분간 사람들에게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환히 밝혀질 것입니다. 이로써 등불이 예수님이라면 등불을 올려 놓는 등경은 십자가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등불이신 주님을 환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야 합니다.
두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나라 정치가들, 공무원들과 재벌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격언이 동서고금에 널리 퍼져있듯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은 드러나지 않을 비밀은 없습니다. 지금 숨은 행적도 장차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서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다 알려지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야 만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전파를 독촉하고 격려하기 위해 다른 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26-27; 루카 12,2-3)고요.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 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어서는 부족합니다. 명백히 드러나게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달란트와 금화의 비유 등으로써 복음서에 여러번 나오는 말씀입니다.(마태 25,29; 루카 19,26 참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리는데에 잘 활용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 큰 일을 하며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도 있고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격언도 있듯이 현재 영적인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에 더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금 가진 것마저 종말에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연 사람은 더욱 더 그 신비를 잘 깨닫고, 마음을 닫은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가지 단절어를 통해 예수님의 교훈을 알아듣도록 합시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은 감추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리는 신자일수록 영적으로 부유해지고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론 왕이 된 첫해(기원전 538년)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예레 29,10)하신 대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다.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나라를 맡기셨고,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맡기셨다고 선언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에게도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예물을 가져가도록 지원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였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왕위에 오른 즉시 페르시아 제국을 통합하였고, 기원전 539년에는 바빌론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다음 해인 기원전 538년에 칙령을 내려 유다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유화정책을 폈고, 그들의 성전이나 제단 등을 복구시켜 주곤 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락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그가 진정 야훼하느님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깨닫고 섬겼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음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바빌론 제국의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남은 유대인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전을 지을 자원을 제공하도록 했다. 당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물을 주는 것은 고대 근동지방의 관습이었다. 상대의 물건이나 사람을 잘못 가진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속죄 예물(1사무 6,1-3)을 피해자에게 주었던 것이다(출애 12,35-36).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바빌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관습을 지키도록 주관하셨으며(출애 12,36), 이 예물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 각지에서 흩어져 살면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갖은 고난과 역경을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들은 언젠가 주님께서 불러주실 그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로마 5,3-4)는 말씀처럼 그들은 고통을 인내로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희망을 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포로가 되도록 하신 까닭은 그들을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거듭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했고,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느님만을 섬기게 되었고,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백성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때가 이르자 이방인인 고레스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당신 백성으로 하여금 새롭게 태어나 당신을 섬기도록 인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섭리 안에서 그처럼 당신 백성을 이끄신 것이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가 힘들게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 듣고 계신다. 다만 당신 섭리 안에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실 따름이다. 우리에게 적합한 때에 맞추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역경이나 환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가족
최혜영 수녀님
요즘처럼 가족해체 현상이 심각한 때에 예수님께서 혈연가족의 경계를 넘어 신앙가족을 이루어가시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는 대안가족의 역할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고 봅니다. 캐나다로 이주한 초등학교 1학년 여자어린이의 작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가족의 비전을 봅니다. 교회와 가족 간의 연대를 통해 좀 더 건강한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가족 모델을 만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의 엄마나 아빠가 아니어도 돼요. 당신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도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고아도 고아들로 만들어진 가족을 가지고 있어요. 가족 중에서 하나는 피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더 있을 수도 있죠.
그 가족은 그냥 많은 가족 중에서 한 가지예요. … 한 사람하고 같이 산다고 해서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가족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어요. 어떤 가족들은 당신이 태어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누군지 상관 없어요. 가족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가족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가족은 모든 사람들한테 있어요. 그래서 당신도 있어야 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한테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누가 나의 가족인가?
김덕진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주고 30년 동안 길러준 어머니를 외면하고, 대신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모든 이를 자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씀하신다. 아직도 유교적 가족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기 딱 좋은 행동이다.
우리가 ‘가족’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흔히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인자하게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들과 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의 그림이다. ‘화목한 가정’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 모습이 가족의 기준이고 올바른 모습인 것처럼 인식되는 일은 영 불편하다. 이혼이나 사별로 부모 한쪽만 있는 가정이 우리 주위에 매우 흔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기르는 비혼부모 가정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 아이를 공개 입양하여 기르는 가정도, 함께 사는 한 부모가 재혼해 ‘피’가 섞이지 않은 부모나 형제 자매들과 살아가는 가정도 있다. 사회가 많이 변화했지만 ‘정상 가정’의 범주를 벗어난 가정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그러한 가정, 가족관계도 아무런 불편 없이 존중받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독하게 고집하는 혈통주의나 가부장적 구조를 깨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예수님이 풀어 나가시던 방식으로 따라 배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을 지키고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가족하고만 살 수 없는 것이 사회이기에 가정의 테두리를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식들에게 먹이고 입히기 위해 해왔던 일들을 세상을 위해서도 한번 시작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과 형제 되기
유영일 신부님
우리는 합리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런 사고는 처녀가 애를 배어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자기 합리화의 구실은 다 있기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평소에 잘해 주다가도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걸리면 부모자식이건 부부사이건 소용이 없고, 법을 위반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법대로 처리합니다.
반면에 수천 년 동안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혈연, 지연에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는, 공동체란 울타리가 있어서 좋긴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고 감정에 치우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감정이나 파벌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교포사목을 하면서 이 두 사회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나를 기초로 한 이성의 차가운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인간미가 살아있는 공동체 사회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성이든 감성이든 그것이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개인 이기주의냐 집단 이기주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혈육인 어머니와 형제를 무시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정을 함께 언급한 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정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사랑에 바탕을 둔 공정으로 보완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될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6,63에서"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육이 없는 생명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생명을 주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고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신 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앞날에 대해 암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형제로 들어 높이십니다. 인간의 지위가 종에서 친구로, 그리고 형제로 상승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됨으로써 신적인 위치로까지 들어 높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코러스의 감동>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난 2004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 ‘코러스’를 혹시 보셨나요? 함께 본 형제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수작(秀作)이다’, ‘왕감동이었다’, ‘꼭 우리들 영화’라며 좋아들 하더군요.
성장통을 겪고 있는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 문제성 많은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신 선생님들께서도 꼭 한번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학교가 영화의 무대입니다.
다들 날개 다친 참새같이 불쌍한 아이들뿐입니다. 토요일마다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는 전쟁고아 페피노,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썽을 일으키는 모항주, 돌아갈 곳 없이 쓸쓸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의 학교에 미완성의 악보를 든 마티유가 사감선생으로 부임해옵니다.
기숙학교는 군대가 따로 없습니다. 안 그래도 부모사랑을 못 받아 삐쩍 마른 아이들을 교장은 병사 다루듯이 다룹니다. 잘못한 아이들에게 용서란 없습니다. 밥 먹듯이 아이들을 독방에 가둡니다.
마티유 선생은 출세지향적인 교장, 아이들을 위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는 교장, 그래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교장에 온 몸으로 맞섭니다.
마티유 선생은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팽개쳤던 악보를 다시 손에 듭니다. 합창단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구’를 만들어줍니다.
주인공인 사감선생 배역을 너무 잘 골랐더군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선생님, 머리가 시원하게 벗어졌지만, 그로 인해 더욱 편안한 분위기, 대머리라는 아이들의 놀림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옥 같은 분위기의 기숙학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음울한 학교에 마티유 선생은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통해서, 연민과 측은지심을 통해서.
잘못한 아이들에게 만회할 기회를 줍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들 편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음울하던 아이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게 만듭니다.
마티유 선생 한명의 헌신으로 인해 어두웠던 학교 전체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역시 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과 희망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결국 아이들 때문에 학교를 쫓겨나는 마티유 선생, 그러나 교장 선생의 지시로 인해 아이들은 작별인사도 배웅도 못합니다.
어쩔 수 없었던 아이들은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써서 떠나가는 마티유 선생 뒤로 날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코러스’를 창공으로 날려 보냅니다.
오다가다 만난 아이들이지만 혈육 이상의 정으로 대하는 마티유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다 큰 사랑, 보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은 모든 아이들을 내 친 자식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참 사랑은 모든 노인들을 내 어버이로 변화시킵니다. 참 사랑은 모든 가슴 아픈 사람들을 내 가족, 내 혈육으로 바꿉니다.
예수님과 형제 자매되는 법
이기양 신부님
예수님이 효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불효자이셨던 것 같습니다. 출생부터도 부모의 뜻은 전혀 개입이 안 되고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나 부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소년 시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며칠씩 찾아 헤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장가를 가서 부모를 모신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모보다 먼저 죽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은 불효 중의 불효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효자였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쫓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
이렇게 냉랭하고 섭섭하게만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불효자이셨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가정이라는 차원에서는 가장 효자이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부모 곁을 떠났고, 생업까지도 뒤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쫓아오라고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떠나온 집과 가족이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있는 고향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그것을 잘 알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예수님께서 효자였는지, 불효자였는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 이렇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제인 제가 효자이겠습니까? 불효자식이겠습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봐서는 그렇게 효자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옆에서 잘 모시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원의를 채워드리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불효자인가 하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다 집에 가면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치가 높고 또 많은 부분을 제일 먼저 저와 상의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신뢰하고 의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사목자로 있으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맨날 집에만 가 있으면 그것이 바른 효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저로서는 가장 큰 효도일 것입니다.
저도 이럴진대 예수님은 효자 그 이상인 분이시지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며 요셉 성인 역시 천사의 알림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순응하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성가정의 가족들은 효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식에 대한 존경심을 당연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위해서 이 모든 인간적인 인연을 끊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장 자랑스러운 분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은 섭섭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와 형제들이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는 말씀은 과거의 말씀만이 아니라 사목자인 제 안에서도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형제가 몇 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형제보다도 신자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목자로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목위원들이나 구역장, 반장 또는 단체장들이나 주일학교 교사 등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분들과는 저의 육적인 형제 자매보다 오히려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성당 초등부 교사들은 모두 어머니 교사들입니다. 행사 후 수고했다고 1박 2일로 단합대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한 지 15~2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남편 없이 밖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가는 것이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믿음이 있기에 남편이 보내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한 형제 자매임을 체험할 수 있었던 단합대회였지요.
예수님의 형제 자매 또 본당 사제의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해 나갈 때 새로운 형제자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봉사 직분에 더욱 성실히 임하고 항상 겸손된 자세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형제 자매이십니까?
하느님과 함께 하는 가족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만남의 하나의 장벽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찾아온 예수님의 가족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던 예수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들 사이에 자리하여 가족들의 귀한 만남을 방해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야속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나야 한다.
만나게 해 드려야 한다.
혈연을 가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해야만 한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 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의 외침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을, 예수님의 가족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 이 마음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때, 인간적인 것은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장벽이라고 생각했던 그 것 예수님께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 예수님께는 방해꾼이 아니라 한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테두리를 뛰어넘어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을 어머니와 형제로 받아들이셨을 뿐입니다.
복음은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적인 것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혈연 관계만을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를 제약하는 모든 인습적인 관계, 지연, 학연, 계층, 계급.....이 모두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폐쇄적이고 분파적인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의 기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이라는 기준으로 맺어지는 인간 관계는 다른 모든 인간적인 기준에 따른 관계에 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관계들을 완성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관념적이 아닌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정의 실현 과정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이 교회입니다.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부과된 여러가지 인간적인 제약을 깨뜨려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여,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이혼할까요? 말까요?
노우진 신부님
결혼 생활을 15년 가까이 해온 40초반의 엄마와 6개월 정도 1주일에 두세번씩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이 처음에 나를 찾아왔을 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었다.
대화내내 눈물을 흘리며
"이혼할까요? 말까요?와 자살할까요? 말까요?"였다.
사실 그분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혼하고 싶지 않고, 자살하고 싶지 않기에 나를 찾아왔으리라.
그래서 긴기간 동안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이젠 가끔 전화를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물론 지금 그분은 이혼도 하지 않으셨고 자살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내가 그분께 어떤 일을 행해서라는 말은 아니다.
그분이 이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 생활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외도 등도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15년 넘게 남편과 살아오면서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생활을 끌고 온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해결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기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쌓여온 슬픔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엄마처럼 감정적이 차원만을 생각하기가 쉬운 것같다.
또한 사랑이라는 것이 늘 내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곁에 있으면 가슴 설레이고, 상대가 나의 어려움, 슬픔을 함께해주고, 나의 실수를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것이라고 이해가기가 쉬운 것같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바라는 그런 사랑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사랑의 차원, 즉 '상대가 자유롭도록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어린 아이처럼 상대에게 바라기만 하기에 '상대를 자유롭도록 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나무뿌리가 되는 것이고, 상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 이라고 말했나보다.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서로에대한 구속력을 갖는 의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자유로이 자신의 방식대로 훨훨 날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의미로 말이다.
이런 사랑의 두가지 차원을 모두 실현하려 애쓸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와있는 대로 주변 사람들, 즉 사랑을 실천하려 애쓰는 모든 사람들을 나의 부모,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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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온 몸이 마구 쑤십니다. 아마도 어제 일을 특별히 더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네요. 사실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 오늘 제3회 순교자 현양 대회가 열리거든요. 따라서 그 준비를 위해서 어제는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혀있고, 자고 일어난 지금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쑤시네요.
평소에 저는 스스로 일을 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례객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제 방 청소는 잘 하지 않지만 성지 청소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예초기로 풀을 베는 것은 물론, 각종 삽질에 곡괭이질까지 안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따라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성지에서 열린다고 해도 제가 준비할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요? 왜 이렇게 부족한 부분이 많던 지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현양대회 준비를 위해서 일을 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많이 반성하게 되었지요. 평소에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해야 할 일보다는 스스로의 만족을 느끼는 일만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만약 이렇게 미진한 부분들을 평소에 조금씩 고쳐나갔더라면, 지금처럼 현양대회 준비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요. 중요한 일은 제쳐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편한 일만을 하려 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구분을 지으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던 경우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이 구분을 짓나요? 내 편, 네 편.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그러한 구분으로 인해서 정작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사랑을 전혀 실천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한정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직접 말을 합니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즉, 어머니와 형제는 특별하다고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과 예수님의 가족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분리시키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엮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구분을 짓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면서 한정짓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지금 구분 짓고, 한정짓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까지도 구분 지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분해서 차별하지 맙시다.
포기해서는 안될 것(박성철, ‘느리게 그리고 인간답게’ 중에서)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늘어가는 것. 그것은 주름살과 책임, 그리고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주름살과 책임이 늘어가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당연한 이치겠지요. 하지만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늘어가는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가족을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취미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고, 일과 가정에서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나만의 시간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수야 있나?'라며 포기하고 스스로 위안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린 그런 과정에서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고, 내 삶을 활기차고 박력있게 만들었던 소중한 것들을 가끔 잃어버리곤 합니다.
세상이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고 타이트하게 돌아간다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확신과 긍지를 갖게 해주는 일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가족과의 여행일수도, 독서일수도, 운동일수도 있습니다. 영화감상일수도 있고, 게임일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바쁘고, 힘겹고, 삶이 무미건조하고, 나 자신이 돈 버는 기계처럼 느껴질 떄, 꼭 한 가지쯤은 내가 소유해야만 하는 것을 남겨 두십시오.
그것을 가짐으로 인해 내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구나 라고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안에" 머물러야...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범주에 넣어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시는 내용이다. 복음의 같은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도 보도하고 있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그런데 이 병행대목들의 배치(配置)가 루가복음과는 다르다. 마르코복음은 이 대목을 전하기에 앞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3,21)고 함으로써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예수가 미쳤다는 말은 예수께서 혹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마태 12,24; 마르 3,22)
루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범주에 넣기 위해서 루가가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보도한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가 "하느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11절)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되는 것이다.(15.18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서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므로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과의 가족관계는 이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가족관계는 혈통이나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점을 나자렛에서 온 예수의 형제들은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성모님은 예외이다. 성모님은 벌써부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자렛의 형제들은 예수를 만나보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찍이 예수를 눈으로 보았으나(4,20), 예수의 실체를 보지 못한(4,22-23) 사람들이 아니던가?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밖에"(20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신다. 보려는 사람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참 가족>(루가 8,19-21)
유광수 신부님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등불을 켠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오늘 복음은 바로 말씀을 정성껏 듣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까지 변화될 수 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족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만일 예수님이 혈연관계로 맺은 이들을 당신의 가족이 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가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연 관계만으로는 안되고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우리가 에수님의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찾는 열성과 원의"가 있어야 한다. 루가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사용한 동사는 "찾다."와"보다."라는 동사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은 갈망과 원의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원의가 있는가? 모든 영성은 이 원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원의는 점 점 더 깊어지고 성숙되어 예수님의 가족으로 될 때까지 성숙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은 흡족하리니."(마태5,6)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배고픔과 목마름만이 우리를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하고 예수님을 찾게 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복음 묵상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이는 복음 묵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신앙인이라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만이 예수님의 가족으로까지 승화 될 수 있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분들과의 형제 자매들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의 어머니요 형제들로 바뀌어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의 위치는 밖에 서 있었다.
밖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늘 밖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더 깊이 더 가까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밖에 서 있는 자세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하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말씀을 잉태하고 말씀을 낳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성모님이시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낳으신 분이 아니시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천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을 낳으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을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때 형제가 될 수 있다. 즉 같은 일을 하는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형제는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라 다 같이 하느님의 생명을 낳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가 6,35)가 되어 모두 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두 번째는 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행은 항상 들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에서 이루워 진다. 그렇기 때문에 루가는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고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우리가 말씀을 잘 들으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아서"(18절)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까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종한 것이다.
한 마디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8절)는 말씀으로 시작한 8장의 결론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성모님이시다. 루가가 제시한 마리아의 모습을 요약해보면
첫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첫 번째 자세를 말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걸음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1,45)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임을 선언하고 그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받아들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받아들인 말씀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가꾸고 노력하고 돌봄으로서 말씀이 점차적으로 꽃이 피도록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세 번째.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20) 아이를 잉태한 엄마는 태아의 양육을 위해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항상 그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작업"즉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네 번째.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2,51) 성모님의 마음에는 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고 빛을 받는다. 즉 좋은 땅이다. 즉 마리아의 삶은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여러 가지 교훈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조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 왔을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하여 있다가 다음 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한 국치의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이 때 한양에 거주하던 많은 부녀자들이 적군에게 정조를 잃고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많은 가정이 파탄되고 사회가 아주 어지러웠습니다.
그 후 나라가 평정이 된 다음 조정에서는 묘안을 한 가지 구안해 냈습니다. 그 묘안은 홍제동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에 부녀자들은 몸을 씻음으로 부끄러움이 없어진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녀자들은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였는데, 이런 사람들만 부정을 씻은 것으로 인정하고 그 부녀자들에게는 정조에 대하여 다시는 재론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는 우리 세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물이라는 물질이 우리 생명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일구이언하면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세례의 영적인 씻음의 상징이 되기도 하니 앞으로도 물을 얼마나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인지 잘 느끼게 해 줍니다.
노자는 사람의 으뜸이 되는 선은 물과 같이 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물은 세 가지 성질이 있는데, 첫째, 만물에게 생명을 주고, 둘째, 그 특유의 유연함으로 다투지 않으며, 셋째,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물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온유하게 따르는 물질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 잠언에서도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라고 하며, 임금으로 상징되는 의인은 물줄기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물은 가장 유연한 물질로서 자연의 섭리를 순순히 따르며 다른 것들도 그 섭리를 따르도록 돕습니다. 그 섭리란 모든 것이 바다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위와 산들은 그것을 거부하지만 당신 말을 잘 듣는 물을 이용해 비록 시간은 많이 소비될지라도 그것들도 아래로 아래로 흐르게 합니다. 물이 없다면 주님은 이 세상을 당신 품으로 이끄시기 매우 힘이 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누군가를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물처럼 자신을 온전히 주님의 섭리에 맡길 준비가 된 의인들만을 이용하셔서 당신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잠언에서는 물을 닮은 사람을 의인이라 하고 그와 반대되는 성격을 지닌 이들을 악인이라 말합니다. 물은 자신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가져다주지만 오늘 독서에서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웃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잠언은 또한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옥상 한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물줄기와 상관없는 삶이 바로 다투는 삶이라 말합니다. 물론 물의 가장 커다란 덕은 아래로 흐르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입니다. 노자가 그리 보았듯이 잠언이 그리 이야기하듯이 물을 묵상하고 물의 성격을 닮는다면 우리는 주님 손 안에 있는 물줄기로서 마지막 때에 주님으로부터 ‘임금’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임금은 크고 강해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물줄기처럼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사람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웠던 미국 군인들의 처참한 죽음을 당한 기록이 있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고 죽었는데 죽은 시체마다 입안에 모래가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 사막에서 문득 저 멀리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을 때에 사람들이 “물이다!”고함치며 물이 있는 쪽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야자수 나무가 있고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눈앞에 시냇물이 흘러가니 사람들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물을 마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신기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래를 물 인줄 알고 허겁지겁 마시다가 죽어간 것입니다.
아마 물처럼 주님의 뜻에 순응하며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하는 물줄기들이 끊긴 세상이 이런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오아시스 있는 사막으로 만드는 참다운 임금들인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추석 연휴의 끝자락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서 함께 일하셨던 형제님과 아내가 오셨습니다. 그분들은 제게 할 말이 많으셨습니다. 저와 함께 한 시간들이 고맙고, 즐거웠다고 작은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을 받을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도와 줄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병든 사람,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 외로운 사람, 이방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이 있는 공간과 그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직책을 이용해서 향응을 대접받고, 잘못한 사람에게 면죄부를 준 검사가 지탄을 받았습니다.
봉사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께서 바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시골 본당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매달 서울에서 본당을 찾아오시던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을 위해서 무료로 법률 상담을 해 주셨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먼 길을 오셨지만 늘 기뻐하셨고, 시골의 깨끗한 공기를 선물로 받아 가신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기 때문에 행복하였을 것 같습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셨기에 하느님의 마음에 드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지내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불쌍하고 가난해서 도와주신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가는 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같았기 때문에 도와주신 것입니다. 꾸루실료를 함께하신 동기 분들은 24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만나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교포 신자 분들이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차량도 마련해 주셨고, 한국 음식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는 정말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행복했고, 즐거웠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제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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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드디어 갑곶순교성지에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이 순교자 현양 대회를 준비하면서 참 많이 힘들더군요. 더군다나 모든 행사 준비를 누구의 도움 없이 갑곶성지에서 독자적으로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생각하려고 해도 걱정이 많아지더군요. 특히 행사를 하루 앞둔 어제는 이제 어느 정도는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저녁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힘들다고 해서 그냥 포기하면 될까요? 마치 어렸을 때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힘이 들어서 뛰던 것을 걷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나서는 아예 천천히 걷던 모습처럼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던 모습처럼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순교자 현양 대회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우선 그렇게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순교자 현양대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봐서라도 행사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끝난 뒤에 얻게 되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안 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도 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은 분명히 신나게 내려올 내리막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뒤에 있을 기쁨이 있기 때문에 포기는 절대로 안 될 말이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리스도인이란 뒤에 있을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한 순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쁨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이 만약 한 순간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순교를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순교의 순간은 너무나 힘들겠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지금 한 순간의 기쁨만을 바라보기에 내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피하고 포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 편하고 쉬운 자리, 지금 영광을 얻는 자리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어떠한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 뒤에 있을 기쁨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고통을 겪고 나면 인생과 친구와 자신을 재발견하는 행복이 다가오는 법이다.(해럴드 블룸필드)
바닥짐.
바닥짐(Ballas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항해할 수 있도록 배의 바닥에 싣는 돌이나 모래, 물 등을 말합니다. 그래서 거친 파도와 비바람을 만나서 이리저리 배가 흔들릴 때, 이 바닥짐이 배의 중심을 잡아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바닥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좌초되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바닥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바닥짐의 재료들을 보십시오. 엄청난 무게로 배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닥짐이 항해를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도구가 됩니다.
우리 삶 안에서의 고통과 시련이 바로 바닥짐이 아니었을까요? 이 바닥짐을 포기하고 버리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순교적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우리의 영원한 자랑이신 ‘한국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순교성인들의 삶은 언제 들어도 늘 감동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순교성지들을 순례하며 삶의 위로와 평화, 용기를 얻는지요.
방금 부른 손상오 신부님 작곡의 화답송 후렴 역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단 거두리-다.”(시편126,5).
오늘, 아니 평생 끊임없이 짧은 기도로 바치고 싶은 참 은혜로운 시편구절입니다.
시편말씀 그대로 이루어져 우리 모두 기쁨으로 곡식단 거두듯 찬미와 감사 가득한 분위기에서 하느님께 거룩한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앞서의 입당성가 289장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병인순교자 노래 4절까지 역시 감동입니다.
어느 한 절 생략할 수 없고 4절까지 다 불러야 한다는 마르꼬 수사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우선 감동적인 1절과 4절만 다시 인용합니다.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 무궁화야/부르자 알렐루야 서럽던 이강산아
한목숨 내어던진 신앙의 용사들이/끝없는 영광속에 하늘에 살아있다
척화비 파묻히고 승리가 우뚝한날/예수님 그진리를 피로써 알았노라
후손된 우리들도 진리의 사도되어/죽도록 겨레에게 전하게 하옵소서.-
존경하올 최민순 신부님과 이문근 신부님의 순교영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불멸不滅, 불후不朽의 성가입니다.
조선시대 말 암흑暗黑의 분위기와 순교자들의 놀라운 활약상이 그림보듯 환하게 드러낸 4절까지의 가사입니다.
칠흑漆黑같은 어둠 속에 한줄기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그 빛을 따라 순교의 길을 가신 위대한 우리 순교성인들입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이런 교회 역사상 유례없는 대한민국 순교의 역사가 있어서 오느날과 같은 가톨릭 교회의 융성입니다.
대부분 한국교회가 이동경축으로 지난 주일에 대축일을 지냈지만 우리는 교회전례력대로 9월 20일 봉헌하니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가 똑같이 오늘 이날에 한국순교성인들의 기념미사를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9월20일의 감격을 못 있는 것은 2003년 미국 미네소타주에 소재한 세계에서 가장 큰 성 요한 분도수도원에서의 이 날 아침 전례입니다.
성무일도 독서기도시 2독서때 읽어준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편지,
그리고 미사가 끝난 후로 많은 분들로부터 받은 축하인사의 추억은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처럼 우리 한국순교성인들이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세계 가톨릭 공용 매일미사책 영어로 소개된 내용을 그대로 번역해 나눕니다.
-오늘의 축일은 한국의 103위 순교자들을 기린다.
이분들은 19세기 수차의 박해 중에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의 첫 사제였고, 성 정하상 바오로는 평신도 선교사였다.
세분 주교와 일곱분 사제외에 순교자들은 모든 연령층의 영웅적 평신도들을 망라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방문시 1984년 그들을 시성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로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100년 남짓한 동안 무려 일만명이상이 순교하셨습니다.
먼 지난 날의 일같지만 고작 150년전 이 땅의 현실이었습니다.
2004년 로마에서 분도수도자들 모임시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의아해 하던 호주 수녀의 반응도 잊지 못합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18-19세기에 걸친 만여명 이상의 순교자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이제 순교자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은 오늘의 우리에게 과제로 부과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기념하라’ 있는 것이 아니라 ‘따르라’ 있는 것입니다.
미사경문을 보니 순교자들의 등급은 바로 사도들 다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몸소 저희를 영원한 제물로 완성하시어 아버지께서 뽑으신 이들, 특히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의 배필이신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영광스러운 순교자들과’에 이어지는 모든 성인들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그 거룩한 죽음 자체가 하느님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에 이런저런 증거없이 직천당에 시성됨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념하라 있는 순교성인이 아니라 따르라 있는 순교성인입니다.
하여 제목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신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로 정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모두에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날마다 죽는 날까지 자신을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할 유일한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삶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항구히 충실히 살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답을 줍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비로소 지혜서의 의인이 지니는 내적평화와 ‘불사不死의 희망’이요, 주님을 항구히, 충실히, 기꺼이 따르는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늘 들어도 감격이요 백절불굴의 힘을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순교성인들로부터 순교영성의 DNA를 받았기에 모두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순교영성의 원천은 바로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성제임을 깨닫습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항구히, 충실히 따르는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특별한 가족
윤성희
효를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으로 삼아온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듯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삼키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일 테니 예수께서 가족을 내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이 그렇지가 않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알려주는 이에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다. 마치 피를 나눈 가족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예수께서 유독 가족에게 모질게 하신 것은, 가족을 보며 약해질 당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였을지 모르겠다. 모든 이의 가슴속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당신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었던 그분에게 당신 어머니의 삶은 얼마나 큰 울림을 일으켰겠는가! 우리도 예수님의 복음을 철저히 살려면, 가족이 걸림돌이요 유혹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식들 때문에’, ‘딸린 식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 말이 자신의 욕구를 감추기 위한 핑계라 하더라도 그 말에 진실이 전혀 담기지 않은 건 아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끈끈한 무언가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긴장을 이상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피로 맺어진 내 가족이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일 테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분명히 그렇게 되었다.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까지 예수님과 함께하셨고, 초대교회 안에서 몸소 참 제자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도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면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우리 주위에도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신앙을 거부하던 아버지가 수도생활을 시작한 자식을 보고 신앙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세속적인 재미에 푹 빠져있던 남자가 신앙심 깊은 아내를 만나 거룩한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옛 방식의 가족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온 가족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게 된 것이다.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다소 불편한 가르침은 요즘 목격하는 ‘특별한 가족’에게 위로가 된다. 도덕이나 관습의 힘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 피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이 종종 ‘탄생’한다. 이들은 모든 걸 희생하고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보다는,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린 이들이다. 이들에게 피로 맺어진 가족을 넘어서는 참 가족의 모습이 있다는 오늘 복음 말씀은 청량한 해방감을 안겨준다.
<예수님의 참 가족>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이 구절을 바로 앞에 있는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마르 3,20)."라는 구절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은 예수님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일한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되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미쳤다.' 라는 말은 '미친 것처럼 뭔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한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 (마르 3,22)"라는 구절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예수님이 마귀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되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미쳤다.' 라는 말은 '마귀 들렸다.' 라는 뜻이 됩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군중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소문과는 달리 예수님이 미치지도 않았고 마귀 들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마리아는 아들을 믿지 않고 소문만 믿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를 깎아내리려는 나쁜 의도로 하는 말입니다.
아들을 신뢰해도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 원래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아들이 집을 떠나 있으면 식사를 제 때에 잘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고, 이상한 소문이 들리면 그 소문을 안 믿어도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것 자체를 걱정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가족들이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군중이 가족을 가로막은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예수님의 설교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족들이 기다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르코복음에는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마르 3,31).'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역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찾아온 그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고, 이 사람들만 가족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이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가족이다.' 라는 뜻입니다.
'형제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혈육으로나 영적으로나 참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루카 18,29)" 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가족을 버리라는 뜻으로 잘못 알아듣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가족을 부정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을 실제로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초월'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처럼 가정을 꾸리는 생활은 포기하셨지만 가족을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어머니를 걱정하셨는데(요한 19,26-27), 만일에 가족을 버리셨다면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가정생활을 포기했을 뿐이고 가족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님은 인간 예수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인간 예수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예수님의 효도는 인간 예수로서만 하신 효도가 아니라 예수이면서 그리스도이신 분으로서 하신 효도입니다.
마리아는 영원히,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족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행을 '함께' 하라고 주신 동반자이고, 그래서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핑계로 버릴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데, 육적인 가족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영적인 가족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흔히 교회 공동체를 영적인 가족이라고 표현하는데, 교회 공동체만 영적인 가족인 것은 아닙니다.
가족은(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영적 공동체의 기초 단위이고, 신앙을 통해서 다 함께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신앙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
이장규 수녀님
오늘 복음 속의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문밖에 세워둔 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냉정하게 느껴집니다. 이 행위와 말씀으로 예수님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신 걸까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말은 특정한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 어떤 신분 또는 특권을 가진 이를 통칭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의문이 좀 풀립니다.
수도원에 입회한 후 저한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깊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날마다 좋은 강론 말씀을 듣고 성경 묵상을 하고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에 성체조배를 할 수 있도록 배려받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 마다 미사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배우고 싶지만 시간을 낼 수 없어 말씀에 목말라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저는 수도자라는 신분 때문에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십 년의 수도생활이 내 신앙의 깊이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후회할 때, 천 년쯤 살 것같이 작은 것에 집착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 그렇습니다.
오늘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밖에 세워놓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축복받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신분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가신 길을 기쁘게 따라오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수님의 참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 마리아..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루카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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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머니 마리아의 관점에서 묵상해보고 싶다.
아들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예사롭지 않다.
아들이 무리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닌다고 한다.
상종해서는 안 될 창녀들과 매국노인 세리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마귀의 힘을 빌어 요술을 부리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모두 하나같이 밥벌이도 제대로 하는 이들이 없다 한다.
더욱이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자들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대중들 앞에서 떠들어댄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다.
물론, 아들 예수를 몸에 가질 때부터 커가는 과정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크게 쓰실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신앙으로 아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들리는 험한 소문에 어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또 간직해도 편치 못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가까운 친척들, 특히 아들 예수의 사촌 형제들이 찾아와서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직접 한 번 찾아가서 예수를 끌고 오던지 아니면 상황이라도 파악하자고 한다.
결국, 아들의 사촌 형제들과 집을 나선다.
몇 날을 발걸음 재촉하여 아들 예수가 있다는 곳에 다다른다.
소문대로 아들이 머물고 있다는 집 문전에는 군중들로 꽉 차있었다.
아낙네로서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아들 예수에게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전한다. (루카8,21)
아들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설렌다.
잠시 후, 담장 안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아들의 음성이 귀에 들어온 순간, 어머니 마리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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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삶에서 죽음까지의 여정을 바라보아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분명 기쁨과 슬픔과 혼돈과 확신, 고통과 희망이 순서 없이 교차하는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포기하지 않은 선택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자식들에게 옳음을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그 옳음 때문에 어떤 역경이 찾아온다고 해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 복음의 전후 상황은 알 수 없다. 어머니 마리아가 왜 아들을 찾아왔는지에 대해서 복음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떠오르는 느낌만을 옮겨보았을 뿐이다.)
음미하고 되새김질해야 할 예수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의나 강론을 위해 사람들 앞에 설 때 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의 한계입니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말에 뒤따르는 진정성, 실효성, 육화된 말, 삶에 녹아든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멋들어진 말이라 할지라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에 부족합니다. 때로 많은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진정으로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인격,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어부 베드로와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세리 마태오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사이의 만남은 또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예수님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인간을 향해 펼치는 예수님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는 진실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해 던지는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심오한 의미로 충만했고, 동시에 힘과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 예수님 말씀에 힘입어 사람들은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새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던지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냥 흘려버릴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말이나 소가 곡물을 천천치 씹고 또 씹고 거기다 되새김질하듯이 천천히 음미해야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정녕 보물처럼 대하고 음미하고 또 음미할 때 그 말씀은 우리 내면 깊숙한 영혼에 와 닿을 것입니다.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깊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제 태도를 돌아봅니다. ‘쇠귀에 경 읽기’란 말처럼 건성건성 듣습니다. 많은 경우 형식적이고 의무적입니다. 소극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데 있어서 진실한 마음, 성의 있는 태도,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하는 사람들은 삶이 통째로 바뀌는 은총, 삶이 크게 한 단계 성장하는 은총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진지하게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표면적으로 꽤 의아하고 특별한 예수님의 말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어김없이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저것 보세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찾아왔는데도 나가서 인사도 않는군요.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인류 구원 사업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기본이 먼저 되어 있어야지요. 기본이!”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정성껏, 진지하고 성의 있게 귀담아 들은 사람은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기도 하지만 인류 전체를 구원해야 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에게 극진한 효심을 표해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명을 안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이나 이스라엘만 구원하실 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셔야 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새로운 주인, 새로운 왕으로 모신 우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가족들입니다. 피를 나눈 혈연도 중요하지만 영혼과 사랑을 나눈 영적 가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남자는 제 부모를 떠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무석 교수는 자신의 책 ‘30년만의 휴식’(231-232)에서 자신이 썼던 논문 주제인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분석해 놓았습니다.
고흐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을 시작해서 서른일곱 살에 자살하기까지 불과 10년 동안 850여 점의 창조적인 미술 작품을 그린 천재화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불행했고 정신이상으로 귀를 자르더니 2년 후에는 가슴에 권총을 쏘고 자살했습니다. 이 교수는 고흐의 이런 삶 이면에는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고흐는 엄격한 칼빈주의 목사인 아버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엄격함에 고흐는 죄책감을 많이 느꼈고 그것을 씻기 위해서는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지나친 연민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거 누예넨의 광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불쌍한 광부들을 위해 자기 빵과 매트리스까지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는 늙은 창녀와 그녀의 딸을 먹여 살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고 그들의 거친 손을 예찬했습니다. 이런 동정심은 바로 아버지에게 짓눌려 고통 받아온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약한 자들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 것이므로 죗값을 치르는 속죄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그림은 극적으로 발전했고, 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색채도 화려해 졌습니다. 아마 그를 괴롭히던 엄한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남을 비난하고 폭발적으로 화를 자주 냈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아주 안 좋았다고 합니다. 보통은 미워하는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는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는 이상 자신도 결혼하여 아내에게 폭력을 행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귀를 자르던 날 밤도 동거하던 고갱과 싸운 끝에 귀를 잘라 고갱의 단골 창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생겨난 분노와 죄책감, 자학성과 보복의 마음에 순종한 것뿐인 것입니다.
고흐를 도와 준 사람은 그와 네 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 매매업자였는데 고흐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 결혼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업도 잘 되지 않아 수입도 시원치 않게 되어 형이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자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서? 죄책감 때문에? 외로워서? 그건 본인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때까지도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귀를 잘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생에게까지 부담이 되어버린 자신을 그렇게라도 혼내고 벌줘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저는 사제가 될 때 이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했고, 이번 추석에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아들을 보고 싶어 성당에 찾아오시기도 하고 또 아들을 자주 보고 싶어 하지만 가끔은 ‘신자가 먼저냐 어머니가 먼저냐’를 놓고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차피 사제가 된 이상 신자를 우선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저를 낳으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저를 사제로 만들어 신자들을 돌보라는 궁극적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가 되려거든 부모나, 아내, 형제, 친구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시고, 또 과부가 된 불쌍한 어머니를 떠나지 않으시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머리요 신랑으로서 교회와 하나 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이상하지만 마마보이는 한 여자와 온전한 혼인생활을 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인은 더 넓은 세계로 향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에게 사랑을 주고, 혹은 상처도 주었던 부모를 떠나야만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고 그 영향 하에 있다 보면 고흐처럼 누구와도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영원한 아이로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형제가 결혼했는데 결국 며느리가 시어머니 등살에 견디지 못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이 복음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외면하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사실 당신을 믿는 이들을 제쳐놓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러 나가셨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외면하는 듯한 오늘 복음은 30이 넘어 아버지로부터 받은 공적인 소명을 위해 세상에 나온 성인으로서 제 부모를 떠나 교회와 한 몸을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