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제1독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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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들은 헤로데 영주는 몹시 당황하며,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갈릴래아와 페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통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당황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디아포레오’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세 번 더 발견되는데(사도 2,12; 5,24; 10,17 참조),
그때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매우 특별하고 기묘한 행적을 목격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표현합니다. 사실 헤로데를 그토록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인지 엘리야인지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죽었던 이가 되살아났다는 바로 그 소문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은 사실 내세의 존재와 의로운 생애에 대한 죽음 뒤의 보상(상선벌악)을 뜻하기에, 헤로데처럼 세상의 재물과 쾌락만을 탐닉하며 오늘만 사는 이는 커다란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반복되는 세상사는 그저 인생의 권태로움과 무상함을 일깨워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냉정한 성찰을 기반으로,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찾으며 그분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을 이어 가는 가운데, 비로소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인생은 길어야 8, 90년이며,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찰나와도 같겠지요. 감정과 소유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헤로데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권태와 무상함, 모순과 한계에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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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이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꽤나 유명하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이천 년 동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하며 내친 결과가 예수님에 관한 무성한 소문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졌겠지요. 소문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문의 가치를 애써 무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소문을 통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제 모습을 유지하고 다듬어져 왔으니까요.
문제는 다양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한 것은 다른 뜻, 다른 권력, 다른 유명세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죽인 헤로데가, 새로운 가르침을 얻어 새롭게 거듭나고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헤로데의 호기심은 권력에 대한 애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문에 헤로데는 당황하였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잘못이었음이, 그 잘못이 드러날까 불안했을 터이지요. 헤로데의 모습이 저의 일상 모습인 것 같아 헤로데의 마음에 한참이나 머물며 이 묵상 글을 적고 있습니다.
무성한 소문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에도 교회는 지금껏 여유로운 의젓함으로 살아왔습니다. 잘못과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잘못과 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어떻든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예수님 앞에 솔직히 서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오늘도 여전히 끝기도 때 저는 하루 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아파하고 용서를 빌겠지요. 다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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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 생겼다가 또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재물도 명예도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겪게 되는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은 이런 무상하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에, 그 앞날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가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불안에 떱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고, 병을 낫게 해 주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소문은 꼬리를 뭅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헤로데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호기심에 못 이겨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는 결코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면 나도 믿겠다.”라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헤로데처럼 결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지요. 예수님께서 붙잡혀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징이라도 보려고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루카 23,9 참조). 예수님과 참된 만남을 이루려면 믿음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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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는 탐욕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에 젖어 살았기에,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는 소문에 집착했습니다. 한때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영험이 예수라는 자에게서 나오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회개를 요구하였습니다. 불같은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는 거짓 예언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하느님의 진리로 돌아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종종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법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이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을 견디어 내면 하늘 나라의 영광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헤로데처럼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허무의 심연 속에 빠져들지 맙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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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 가운데 「코헬렛」의 저자가 가장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의 흐름을 관찰한 뒤 모든 것은 ‘허무’라고 결론짓는 그의 모습에는 우주의 원리와 인생사의 의미를 캐묻는 고대 철학자의 풍모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저자가 경험하고 확인하는 허무는 경험을 초월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허무이기에 학문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가며 넘어서야 할 삶의 과제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추상적인 사유를 목적으로 하는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구도자이자 실천가로서의 철학자라 하겠습니다. 그가 직면한 허무는 인간의 수고와 삶 전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코헬렛」을 읽다 보면, 참으로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으로 일관하는 ‘허무의 철학’에 도달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의 견해처럼, 철저한 현상 인식은 사람들이 순진하게 의지하는 피상적인 낙천주의를 벗겨 내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 저자는 진정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 업적과 소유, 지식, 쾌락 따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는 것을 알기에 먼저 그 환상을 깨야 했을 것입니다. 「코헬렛」 1장과 2장에서 말하듯,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알아볼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삶의 덧없음’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즐거움’(코헬 2,24 참조)에 눈을 뜰 때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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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과 활동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에게는 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유와 해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살의와 증오에 불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더욱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여기고 죽일 궁리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디딤돌이 되었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에게는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제2의 요한 세례자’일 뿐입니다. 눈엣가시였던, 자신의 불의와 불순을 드러내 알렸던, 자신의 치부를 폭로했던 걸림돌 중의 걸림돌인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정의 앞에서 헤로데가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그는 예수님의 출현으로 다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봅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받아 모시는 성체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지금 듣는 하느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언제나 우리의 삶을 한층 더 새롭게 해 주시는 디딤돌이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걸림돌로 받아들이게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의 잘못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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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에는 질긴 악연이 존재합니다. 이 악연은 주님의 탄생 전부터 시작되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의 악연은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의 관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평화와 불화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헤로데는 탐욕스럽고 권력에 젖어 사는 가련한 인생입니다. 명분과 체면의 틀을 깨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헤로데가 보기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요. 그러나 그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변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종교도, 정치도 백성이 없이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모두가 백성을 위한 행위이고, 백성이 참여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종교이고, 정치이지요.
헤로데는 그러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 드는 가련한 정치의 수장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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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가 통치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을 보내 이스라엘을 지배했지만, 겉으로는 왕이 다스리는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임금은 ‘헤로데 안티파스’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과 부인 ‘헤로디아’를 비난한다고 요한 세례자를 죽게 했던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소문내자, 헤로데 임금은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주장에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신비스러운 사건’은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기적과 예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한번쯤 가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정말 ‘신비스러운 사건’은 성경 안에 넘치도록 있습니다. 성경의 기적에는 잠잠하면서 사람들의 소문에는 ‘혹한다면’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주변의 기적’에 눈떠야 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어디에나 기적의 꽃은 피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적에 놀랄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기적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주를 만드신 분을 모실 수 있습니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기적을 보고 예언을 들어도 ‘호기심의 만족’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의 모습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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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영적으로 뛰어났던 분이 한 여인의 증오로 말미암아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헤로데 임금과 불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꾸짖자 그를 제거할 기회를 찾던 여인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성경에서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등장을 준비하였던 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부르짖었고 위선을 질책하는 직언으로 이스라엘을 뒤흔든 분입니다. 그러한 요한에게 편안한 죽음은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억울함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습니다. 그 죽음들이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야 억울한 죽음이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려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봉헌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었다는 봉헌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았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느님의 도구였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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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많은 분이 말씀하십니다. 이 행복을 위해 우리는 노력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멋진 외모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신기루일까요? 돈을 벌어도, 소위 성공을 해도, 원하는 바를 이루어도 행복한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순간의 만족은 가져다주지만, 행복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한 만족은 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성취로써 얻게 되는 단기적인 만족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사랑하면서 저절로 얻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의 항상 일 순위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나만의 행복에만 머물게 됩니다.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랐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했던 자신의 말의 권위를 위해서 또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당황해합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을 때는 “내가 이렇게 힘 있는 사람이야.”라는 뿌듯함이 행복인 것처럼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 안에 있으면서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얻었던 사람은 헤로데처럼 의심을 품고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또 진리에 대한 확신을 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행복을 얻었지, 헤로데처럼 불안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아무런 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코헬렛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이 세상의 것들은 허무에 그칠 뿐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보여 주셨던 사랑만이 남게 됩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행복을 채워줄 것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허무한 세상 것이 아닌, 끝까지 남을 사랑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다워지는 길을 아는 것이다(미셸 드 몽테뉴).
나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생각
어느 회사에 노총각 과장님이 계셨습니다. 이 과장님이 생일을 맞이했지요. 동료 직원 중의 한 명이 영화표 두 장을 선물로 주면서 “빨리 여자 친구 만들어서 같이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과장님은 뭐라고 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싸! 두 번 볼 수 있겠다.”
곧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노총각으로 살아갈 것 같지 않습니까? 여자 친구 만들 생각보다 혼자 영화 두 번 볼 것을 먼저 생각하니 말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을 확장하기보다 자신의 틀에 가둬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생각들을 계속해야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솔직함이 주는 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 영주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정도 어느 부대의 중대장 운전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 기억으로 미스터 건국대였습니다. 대학에서 보디빌딩으로 일등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 중후반이 되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아서 근육이 한창 붙을 때고 그분은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그분의 대학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우나에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몸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멀리에서 해. 내 옆으로 오지마!”
다른 것은 몰라도 팔뚝은 제가 더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근육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조금 더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왓킨스 글렌(Watkins Glen) 주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지냈습니다. 5명이 함께 갔습니다. 모두들 장점이 있었습니다. 장을 보고 계획을 세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동료들을 위해서 맛있는 음료수를 만들어 주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야영의 꽃인 모닥불을 피우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향이 좋은 커피를 직접 갈아서 마실 수 있도록 해준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없는 저는 주로 설거지를 담당하였습니다. 공원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있었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오솔길도 있었고, 빙하가 남긴 멋진 계곡도 있었습니다. 폭포와 호수를 보고 싶으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면 오솔길을 걸으면 되었습니다. 공원을 나가서 20분만 걸으면 눈을 맑게 해주는 멋진 세네카 호수가 있습니다. 세네카 호수는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를 닮았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계곡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모닥불 주변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모닥불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타오르는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순서도 없이, 주제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생활의 지혜를 나누기도 하였고, 삶의 어려움을 나누기도 하였고,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신학교 이야기도하였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각자의 텐트로 돌아가고, 모닥불은 재가 되었습니다. 모닥불이라는 노래도 생각났습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약간의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야영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추억이 됩니다. 서로가 가진 장점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면 헤로데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무척 당황했다고 전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헤로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죄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헤로데 역시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나서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세례자 요한을 넘어서는 더 크신 분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 어쩌면 더 두려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마귀에게 발목이 잡혀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 구원의 가능성 역시도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인간 스스로는 참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잘 낫지 않는 상처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한 데 그 치유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곧 참된 회개입니다.
역사 안에서 볼 때 헤로데 안티파스는 결국 회개하지 못했고, 나중엔 헤로데 아그리빠 1세로부터 추방당하고 귀양 중에 쓸쓸히 죽어갔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두려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어서 회개하라는 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양심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했을 때 하느님은 그 회개를 받아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헤로데 영주의 또 다른 짓거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무참하게 죽인 중죄인, 또 소문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 예수에 대한 소문이 더욱 크게 증폭되자 헤로데는 미쳐간다. 권력에 대한 또 다른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고 또 다시 악행의 행위 보따리를 풀고 짓거리를 꿈꾼다.
하나의 짓거리는 헤로데 안에서 인면수심의 양육강식 동물적 본능이 발동한다. 인간관계는 꼬이고 또 다른 왜곡을 부른다. 행한 짓거리를 하느님 앞에 열어 보일 회개와 용서를 헤로데는 어린시절에 배우지 못했다. 다만 상대적인 비교에서 자기 보다 크다 싶으면 적개심을 갖고 또 다른 짓거리를 획책할 뿐이다.
이는 헤로데 안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자기가 잘못이 있을 때 상대에게 용서를 청하고 회개할 상생과 협력이라는 생명 공동체성의 부재가 있었다. 한 가정은 핵가족으로 부모 사이 한 자녀가 자라고 조부모 없이 자란다. 자녀는 자라나며 인간관계를 배우지 못하고 자기만 최고일 뿐이다. 잘못했을 때라도 용서를 청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그런자가 자라며 권력에 군림하면 폭군이 되어 안하무인이 된다. 그리고 자기가 못마땅하면 또 짓거리를 할 뿐이다.
해로데의 짓거리, 살인자가 되고 전과범이 된다. 요즘 사람들의 크고 작은 짓거리가 사도 때도 없이 극성을 부린다. 많은 형제들 속에서, 대가족 안에서 배워야할 바르고 넉넉한 성품을 오늘은 어디서 배울까? 나는 이를 배울 장소를 마련하고 형제들과 넉넉한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수평과 수직의 자리를 마련하고 배워가고 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요한9,7-9). 아휴! 어쩌나? 헤로데
<만남>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2020. 9. 24. 목)(루카 9,7-9)
성지에 가서 순례는 하지 않고 성지를 구경만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사참례를 한다고 성당에 앉아서 참례는 하지 않고 미사를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성경이라는 책을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예수님과 마주치거나,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가거나, 그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그 자리에 백스무 명가량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 1,15), 아마도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 때까지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일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성지 관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좀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한 일입니다.
미사참례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성경 독서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 ‘만남’은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내 삶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라고 말하지만,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헤로데가 당황하였다는 것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또는 “죄책감을 느꼈다.”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요한의 귀신이 해코지 하지나 않을까, 라는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백성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욱 자신감을 얻어서 예수님마저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것은 ‘불순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긴 합니다.
빌라도가 재판 도중에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루카 23,7).
그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관한 불순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자,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것은 만난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 없이 구경만 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죄만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와 완전히 대조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자캐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은, 한 번 구경이나 하려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도 새 인생,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설 용기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직업과 또 여러 가지 처지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셨는데 (루카 19,5), 자캐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더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마르 10,46-47).”
예수님께서 그날 그곳을 지나가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그냥 그 자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다가 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 앞으로 스쳐 지나가시는 그 순간이 일생일대의,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단 한 번의 기회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전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의 처지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앞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자캐오보다 훨씬 더 절박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았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입니다.)
자캐오도 그렇고, 바르티매오도 그렇고,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만남’은 ‘부르심’과 ‘응답’이 합해진 일입니다. ‘부르심’을 직접 받았지만 곧바로 응답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고추를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았는데, 비가 올 것 같으니까 집에 가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미사참례를 하다 말고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도 “죽은 이들의 일은 죽은 이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여기에서 나를 만나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예의’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고 있는가?”)
하늘마음 가져 행복합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아버지 헤로데는 4살 이하의 남자아기들을, 자기는 요한을 죽였습니다.
자기 남동생 부인을 가로채 살며, 요한에게 거리에서 비난 받았습니다.
예수님소문에 겁도 나지만 만나보고는, 빌라도에게 권력 회피했습니다.
권력이 좀 있다고 자기 기분대로 사는 왕가를 부러워하는 세상입니다.
신자들이 복음을 선교해도 아직 뭔가 두려워 회피하는 사람 많습니다.
보아도 만족 못 하고 들어도 마음 안 차 진리에 목마른 이세상입니다.
나를 권력에서 내리고 편안한 그냥 인간으로 마음 열 때 햇살 듭니다.
아집 버리고 창공날고 세상 놓고 영원보는 하늘마음 가져 행복합시다.
내 양 떼를 좋은 목장에서 기르리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4-25. 27: CCL 41,551-553)
“나는 내 양 떼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오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모아 들여 본고장으로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기를 것이다.” 이스라엘의 산이란 성서의 저자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안전한 데서 풀을 먹고 싶으면 성서에서 먹으십시오. 거기에서 듣는 것은 모두 다 기꺼이 맛보십시오. 그러나 성서 외에서 나오는 다른 모든 것은 거절하십시오. 안개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목자의 목소리를 잘 들으십시오. 성서라는 산위에 모여 드십시오. 거기에는 여러분 마음의 기쁨이 있고 독성이나 해로운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비옥한 목장입니다. 건강한 양들이여, 찾아가 이스라엘의 산에서 풀을 먹으십시오.
“시냇물이나 사람 사는 땅 어디서나 그들을 기를 것이다.” 사실 “그들의 소리 온 땅으로 퍼져 나갈 때”에 위에서 언급한 산들로부터 복음 전파의 시냇물이 흘러 나오고 사람 사는 땅 그 어디나 양들이 풀을 먹을 수 있는 즐겁고도 비옥한 땅이 되었습니다. “좋은 목장에서 기르며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은 그들의 안식처가 되리라.” 즉, 그들은 “참 좋구나.” 할 수 있고, “사실이다. 분명하다. 우리는 속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며 편히 쉴 수 있는 그 곳에서 안식하게 되고, 흡사 자신의 안식처인 듯 하느님의 형광 속에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잠을 잘 것이며” 곧 안식을 취할 것이며 “기쁨 중에 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좋은 목장을 찾아 다니며 기르리라.” 그리로부터 우리에게 도움이 오도록 우리 눈을 드는 그 좋은 산들인 이스라엘의 산들에 대해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을 그 좋은 산에다 걸지 않도록 주님은 “이스라엘의 산들에서”라고 말씀하신 다음 여러분이 그 산에 남아 있지 않게끔 덧붙여 “내가 내 양들을 기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로부터 도움이 오는 그 산으로 눈을 드십시오. 그러나 “내가 내 양들을 기르리라.”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그리고 나는 올바르게 그들을 기르리라.” 그분 홀로 올바르게 기르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양을 제대로 기르실 줄 압니다. 자기 동료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옳지 못한 판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했던 사람이 갑자기 회개하여 아주 좋은 사람이 되는 일도 있고 우리가 잔뜩 희망을 걸었던 사람이 뜻밖에 타락하여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도 확실치 않고 우리의 사랑도 확실치 않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현재 어떤 사람인지 자기 자신도 간신히 압니다. 그는 오늘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내일 어떤 사람이 될지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올바르게 기르셔서 모든 이에게 각자의 조건에 따라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것을, 각자가 응당히 받아야 할 이런 저런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인간으로부터 재판 받으심으로써 속량해 주신 이들을 올바르게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친히 올바르게 기르시는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이 ... 되살아났다. ... 엘리야가 나타났다. ...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루카 9,7-8)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많이 놀라웠던 겁니다. 헤로데도 몹시 당황했다고 복음사가가 전할 정도지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기가 꺽인 이들을 위로하는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 안에 등장했던 여러 하느님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코헬렛의 지혜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뼛속 깊이 박혀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을 이롭게 했던 예언자와 선지자들의 되풀이 또는 환생이나 부활이라고 추측하고 간주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너무도 당연한 '무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고대했더라도 하느님께서 친히 오실 것이라고까지는 짐작 못했겠지요. 메시아를 어느 지역 출신, 어느 지파의 후손의 사람의 아들로만 여긴 듯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이 예언은 존중해 세상에 오셨고요. 그래도 성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존재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에도 "완전한 새로움"이었으니, 경험과 관습에 기대어 살아온 이들에게 당연히 미지의 존재셨습니다.
그렇다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말씀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는 그렇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성자 예수님은 이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태양이시고 새로운 하늘이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는 완전한 새로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두고 이래저래 억측하는 군중이나 헤로데의 무지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인물들 중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는 헤로데지만, 그의 말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포착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헤로데가 묻습니다. 자기가 무고하게 죽인 요한까지 떠올리는 걸 보면 마음에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한가 봅니다. 하지만 두려움에서건, 앎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서건, 사랑에서건 이 질문은 인간 삶에 중요한 화두를 제시합니다.
새로운 사람이나 사건을 맞닥뜨릴 때, 경험이나 선지식이 새로움의 자기 계시를 가려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생을 거처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인 선입견과 편견이 새로운 만남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면 곤란하겠지요. 새로움을 마주하면, 있는 그 자체로 상대를 직관하며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는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질문은 갈망을 낳습니다. 보고 싶은 열망입니다. 내면에서 들썩이는 추측이나 지레짐작의 함정을 넘어서 진정한 앎의 관문을 통과하고 싶은 것입니다. 서로가 바람으로 이끌린 만남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일치를 기대합니다. 절대자와의 만남이 그렇고 사랑하는 이들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새로움이 다가올 때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은 늘 새로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선입견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도 맙시다. 과거에 묶이면 새로움이 가져온 은총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지금 새롭게 오신 이분이 누구이신지 직관하고 관상하며 방향을 돌려 만남에로 나아갑시다. 새로움은 "다시"나 "되풀이"의 향수에 젖은 상태에서는 알아보기 어려운 실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예전에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극한 현실을 지나고 있습니다. 흔히들 코로나가 끝나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 예전의 익숙했던 행복을 되찾으리라 내심 기대를 합니다만, 우리가 질문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어쩌면 "새로움"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마음을 때리는 구절을 만났습니다. "다시 시작할 것인지,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이 질문은 사회 지도층이나 신학자,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실존과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교회, 새로운 질서를 맞이할 것인
지 진지하게 기도하고 관상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만나 보려고 하였다."
오늘 이 질문을 안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분께서 지혜와 사랑과 진리를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품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이 고통의 시간을 헤쳐 나아갑시다. 우리가 먼저 새로움을 맞이할 새로운 피조물이 됩시다.
충만한 삶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제1독서는 코헬렛입니다. 읽을 때 마다 충격입니다. 공감하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해 봅니다.
-“2.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태양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8.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11.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아주 예전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써보라 했을 때 한 수도형제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글을 읽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허무와 무지 역시 인간의 본질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떠났을 때 귀착점은 허무와 무지입니다. 영혼의 고질적 질병같은 허무와 무지의 어둠입니다.
윗 내용을 보십시오, 온통 회색빛 우울한 분위기 아닙니까? 결국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지혜로운듯 하나 어릭석은 무지의 코헬렛입니다. 제가 볼 때 코헬렛은 하느님 체험이 참 희박해 보입니다. 철인이지 신자는 아닌듯 싶습니다. 도대체 새로움, 놀라움이 없습니다. 삶에 감동도 감격도 감탄도 없습니다. 회개도 겸손도 기도도 사랑도 찬미도 감사도 기쁨도 평화도 행복도 자유도 희망도 믿음도 성령도 위로도 격려도 치유도 구원도 분별도 없어 보입니다.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도 없습니다. 빛이 아니라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흡사 태양이 진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그런 회색빛 분위기입니다.
보이는 현실뿐이요 현실 넘어 영원한 세상에 대한 초월적 비전도 꿈도 없습니다. 완전히 현실의 감옥에 갇힌 영적 수인같고 숙명의 노예같습니다. 병도 보통 병이 아닙니다. 너무 부정적이요 비관적입니다. 도대체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하느님 없이 이 거칠고 험한 인생 광야 여정,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우울증에 급기야는 자살에 이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코헬렛이 성서에 편입될 수 있음은 큰 축복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느님 체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론시 참 많이 썼던 제목이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삶은 여정이요,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례의 여정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체험을 바탕으로 강조한 ‘1.목적지;하느님, 2.이정표, 3.도반, 4.기도’라는 인생 순례 여정의 네요소도 생각납니다.
결국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인데 하느님이 빠졌으니 코헬렛의 허무한 인생에는 이런 ‘여정’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디에 가든지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삶의 중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에는 하느님이 빠져 있기에 삶의 중심도, 삶의 의미도, 삶의 목표도, 삶의 방향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허무와 무지의 어둠 가득한 현장입니다.
어떻게 삶의 목표도 방향도 중심도 의미도 없는 이런 무지와 허무의 분위기속에서 무미건조의 반복의 날들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말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 자리에 올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헤로데처럼 저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인 하느님이 빠진 허무한 삶, 헛된 삶의 전형이 헤로데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불안과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는 헤로데의 참 허약한 모습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바로 내면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이 그 삶의 중심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면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런 내적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없기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는 무지와 허무의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헤로데 임금입니다.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에 대한 궁극의 답은 태양같으신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이, 파스카의 예수님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을 때, 우리 삶의 더불어 여정에 목표이자 동반자가 되실 때, 허무한 삶은 충만한 삶으로 변합니다. 인생고해는 인생축제가 됩니다. 코헬렛의 허무에 대한 참으로 멋진 최고의 응답이 바로 이런 좋으신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4.17). 아멘.
<만나고 싶다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내가 바로 그를
만나야 해요
나의 욕망도
나의 의심도
나의 편견도
나의 이기심도
나의 호기심도
나의 질투심도
나의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내가 말이지요
그래야만
오직 그래야만
그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혹여
내가 아닌
나의 무엇이
만남의 욕구를
부질없이 자극한다면
나 아닌
나의 무엇들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그 만남 잠시 미뤄두어요
그래도 늦지 않아요
행여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 아닌 것들이
만나라고 부추긴다면
차라리 만나지 말아요
어차피
있는 그대로의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를
만날 수 없으니까요
그런 만남은
아니 만남보다 못하니까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내가 바로 그를
만나는 거예요
자비하신 주님과 무자비한 헤로데< 루카 9/7-9>9/2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역사적 두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헤로대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은 일을 듣고 무자비한 헤로데는 요한이 목을 짜른 죄가 두려워 주님이 누구신지 알보고 만나랴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형에 대한 일련의 책임도 져야 하는 헤로데의 삶은 권력을 이용하여 무자비한 행위가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우리는 역사 안에 자비로운 사람으로 남는 사람과 무자비한 사람으로 남은 두 부류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인지 들어나고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나는 자비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무자비한 사람이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넓게 깊게 살펴 보아야합니다.
헤로데는 자기에게 해롭게 말하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끝네 목을 짜른 사람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끝에는 세상에 자비를 주시려 온신 주님을 십자가형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장하고 의롭고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해로데의 말은 사치와 허세와 거짓말로 자신을 감싸고 이끌어 가기에 무자비함을 들어내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과 사랑이 없으면 무자비한 사람이 됩니다.
그럼으로 나는 말에 있어 자비로운 말을 하는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정 적 말, 흉보는 말, 냉냉 한 말, 단절을 선언하는 말, 허풍을 떠는 말, 경멸하는 말은 무자비한 사람의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자비한 행동은 힘으로 억누르고 악압하고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처럼 나누지 않고 주먹을 쥐고 때리고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발은 가야할 곳을 가지 않고 빛이 없는 어둠을 찾아 가고, 자기는 배부르게 막으며 배곺은 사람을 주지 않고 음식을 마구 버리는 사람, 죽음의 위험에 빠진 사람 구하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유티브에 개가 웅덩이 빠졌는 데 다른 개가 급히 달려가서 밧줄을 구해가지고 웅덩이에 빠진 개를 구하는 장면을 보면서 사ᄅᆞᆷ이 개보다도 못한 사람은 무자비한 사람입니다.
자살 하려는 사람보고 죽어라 버려두는 사람은 얼마전 서울 시자이었던 박 원순의 신비스로운 자살을 보고 살릴 수 있었는데 죽도록 버려두는 것처럼 느낌을 주는 뉴으스의 과장을 보면서 그것 아닌데 왜 죽음을 쫓아가고 막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과정을 보면서 무자비한 사람들 죄지으면 죽어야 하는 가 죽여야 하는 가 생각하면서 사형 재도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느낍니다.
말이나 행동은 생각에서 나웁니다. 우리는 생각을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움, 복수심, 교만한 마음, 거친 생각, 시기 질투심, 보다 윗자리를 탐하는 마음, 남을 자기 밑에 두려는 우월감 선민이식 요사이 저는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페권주의라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 위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서로 도우며 서로 부족한 것을 도우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속한 당이나 내가 있는 자리만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깨끗이 씻어내고 서로 좋은 자리를 만들러 나가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이 땅에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미사 시작에 자비를 구하고 영성체 전에 자비를 구하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게 기도합니다.
죄의 본성
김효석 요셉 신부님
꼬마 때 동네 구멍가게에서 껌을 훔쳤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왜 그렇게 그 껌을 씹어보고 싶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도둑질을 할 만큼 저에게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껌을 훔쳐 아무도 없는 산길로 뛰어올라가 한번에 껌 한 통을 모두 입 속에 넣어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금방 알아채셨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요한만 없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는 얕은 생각에, 자신도 원하지 않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 해결되었다고 믿는 순간,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문은 헤로데의 죄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죄가 다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래지 않아 예수님마저도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게 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숨기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의 죄를 드러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함승수 신부님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과 다른 점들 중 하나는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못하여 엄마에게 혼날 때에는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도 잠시 후면 그런 부정적 감정들이 어느 새 누그러져서 언제 그랬었냐는듯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기기도 하고 쫑알쫑알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그런 모습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까 아이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데, 더구나 사랑하는 아이를 울게 만들었다는 자책과 후회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아무렇지 않은듯 자신에게 다가오고 말을 거는 아이를 받아주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른은 아이보다 ‘감정 정리’가 느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이가 서로간의 잘잘못에 관한 것을 금방 잊어버리는데 비해, 어른은 그런 것들을 마음 속에 오래 담아두기 때문입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살면서 어떤 가치를 우선으로 여기는가 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잘못한 일은 고쳐나가면 되지만 한 번 잘못된 관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들을 마음 속에 오래 담아두지 않고 먼저 다가갑니다.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관계보다는 ‘잘못’을 우선으로 여깁니다. 나에게 잘못한 상대가 먼저 나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 그와의 관계는 절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간의 잘잘못을 확실히 가리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따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잘못된 관계를 재확립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잘못을 따지는 동안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식들을 전해 듣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자신의 체면과 비양심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되돌릴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기에, 애초에 예수님은 요한과 동일인물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요한과의 관계성 안에서 바라본 것은 아직 마음 속에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자’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그런 상태이니 자신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 헤로데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헤로데는 그런 예수님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자신에게 ‘위험요소’가 아닌지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지요.
헤로데는 그렇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보다는 자신의 잘못에만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위해 위험과 불편, 손해를 무릅쓰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그 잘못이 초래할 심판을 피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잘잘못을 따지는 일보다는 잘못을 저지른 이후의 대처를 현명하게 잘 하는게 중요합니다. 헤로데처럼 영적으로 주눅들어 주님과 온전히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다보면 그분의 자비를 입을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그러듯이 주눅들지 말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다가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더 바라고 좋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오늘 코헬렛의 구절이지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서의 쪽지를 끼워두고 항상 보았다고 하는데, 그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놀라게 하거나 불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영원합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 하고, 자동차는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뭐든 간에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고, 넣어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 안에서 이는 하나의 허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름의 경지에 이르고, 나름의 업적을 쌓고 더는 없기에 허무합니다. 마치 무엇인가 있는 듯, 사막에서 신기루를 쳐다보며 걷듯 손을 뻗고 살아가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허무입니다. 그리고 이는 영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비는 듯한 공허함을 그 무엇으로 채울려고 해도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즐거움, 쾌락, 만족, 소유 등으로 채워보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허무입니다. 오늘 코헬렛은 마치 우리네 인간의 이러한 삶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 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복음환호송은 말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처음 말씀드린 데레사 성녀의 말입니다. 성녀의 기도 다시 묵상하며 글을 마칩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놀라게 하거나 불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영원합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멘.
행복한 날엔 행복을 만끽하십시오! 불행한 날엔 인내롭게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치 흥미진진한 한편의 드라마같은 우리네 인생입니다. 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기도 합니다. 어떤 때 갑작스레 다가온,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 할말을 잊기도 합니다. 그럴 때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코헬렛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멋진 인생의 명언 제조기였던 솔로몬 으로 추정되기도 하고, 혹은 구약시대 위대한 현자의 한명으로 추정됩니다. 코헬렛에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정신세계, 사고방식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헬렛을 읽고 묵상하실 때 반드시 유념하실 사항이 한가지 있습니다. 코헬렛 문체의 분위기는 다분히 회색빛입니다. 꽤나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입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에만 해도 '허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허무라는단어는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총 73회 등장하는데 코헬렛 안에만 38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코헬렛 전체가 인생의 허무, 인간사의 무상함, 세상의 덧없음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헬렛 저자는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낙천주의자였으며,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아온 나이 지긋한 현자였습니다.
코헬렛이 반복해서 허무를 외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 들으라고 코헬렛은 외치는 것입니다.
하루 온종일 하늘 한번 올려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마치 한 마리 부지런한 일개미처럼 왔다갔다 갔다왔다 정신없이 움직입니다. 머럿속은 온통 눈앞의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너무나 작은 것에 혈안이 되어있고, 그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모아놓은 재산, 높게 쌓아올린 탑 하나 있다고 기고만장함이 하늘을 찌릅니다. 하느님 경외할줄 모르고 이웃을 돌아볼 줄도 모릅니다. 코헤렛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 1장 2절)
코헬렛 안에서 반복되는 가르침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인생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은 기껏해야 한줌 재이고,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시며, 그분께서 우리네 인생길에 함께 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너무 기대도 하지 말고, 매 순간을 즐기랍니다. 제한된 조건 고통스런 현실 한 가운데서도 소소한 삶의 행복을 찾고 만끽하랍니다.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색체에도 불구하고 코헬렛의 저자는 생을 찬미합니다. 부정을 인정하고 난 뒤에 얻게 되는 긍정인 셈입니다. 언제나 결핍 투성이며 부조리한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빛도 창조하셨지만 그림자 역시 동시에 창조하셨을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날엔 행복을 만끽할 것을, 불행한 날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꺼이 견딜 것을 당부합니다. 이것이 코헬렛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신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신자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거기에 맞춰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일일이 다 헤아리지 못하고, 온전히 채워주지 못하는 저 자신을 바라보며 송구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 나름대로 마음 속에 그리던 대상들을 연상하고 바라는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론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당대 유다인들이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루카 9,7)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8절)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8절) 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당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이분들과 연관하여 바라보는 이유는 이분들이 의인들이고, 다시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대 유다인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던 바로 그대로 유다인들에게 나타나지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시거나 그들이 바라는 것을 채워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주 에수님께 바라는 청원들이 혹시 주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하시는 데 방해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신 같고 이기적인 것만 같은 사람들의 원의를 다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원의들을 잘 알고 있기는 해야 유혹에 빠지거나 혼란 속에 헤매지 않고 주님 구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원의와 주님 구원사업의 토착화된 새로운 사목적 대응으로 오늘 이 시대에 하늘 나라를 만들어 나가도록 합시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올바르지
않는 것을
멈출 수 있는
지혜가 참된
지혜이다.
헛소리와
침묵사이에
우리가 있다.
그림자와
실체사이에
우리가
살아간다.
듣지 말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우리들
세상이다.
그야말로
절제가 필요한
세상이다.
절제란
떠도는 소문을
서로에게
옮기지 않는
언어의
침묵이다.
올바르지 않는
소문은 소중한
한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다.
헐뜯는 험담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인색한 마음
안에서는
소문만
무성할뿐이다.
소문이 아닌
참된 만남이다.
소문의
그 사람이 아닌
진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소문과 오해는
참된 만남을
언제나
방해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서둘러 단정하는
우리들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성찰이 필요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소문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한다.
말(言)의 순교가
필요한 때이다.
순교는
절제이다.
순교의 길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절제이다.
절제는 소문의
자리가 아닌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겸손이다.
교만과
소문사이에
우리가 있고
그 교만을
치유하는
절제와 반성이다.
소문의
예수님이 아닌
참된 예수님을
우리 내면에서
만난다.
소문이 아닌
소중한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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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고등학교 친구의 아버님 장례식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연락을 하면서 자주 만나던 친구도 있었지만, 몇몇은 고등학교 졸업하고서 처음 만난 친구였기에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30년 만에 만난 친구 중 한 명이 저를 너무나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멀리서만 신부님을 봤지 이렇게 가까이서 신부님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네가 신부님이 될 지는 정말로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학창시절에 너는 노는 것 정말로 좋아했잖아.”라고 말합니다.
노는 것을 좋아하면 신부님이 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미사를 봉헌하기에,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이 신부님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도 신부로 20년째 살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에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은 커서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사고 많이 치고 공부도 잘 하지 못했던 친구가 사회 안에서 더 잘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따라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 필요합니다. 그래야 좀 더 넓게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다양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가 두려워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큰 잘못 때문이지요. 그는 헤로디아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내주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커다란 고정관념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면이 깎일까봐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죄까지 지었습니다. 헤로디아의 춤추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 앞에서 말합니다. 어떤 소원을 들어도 다 들어주겠다고……. 그러자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체면이 중요하다는 고정관념이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결과는 더 끔찍합니다. 역사 안에서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못된 지도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올바른 판단은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게 만들며,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을 희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아인슈타인).
60 한티 성지
한티 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입니다. 을해박해(1815)와 정해박해(1827)를 전후하여 박해를 피한 교우들이 팔공산 중턱으로 숨어들어 1850년 말경에 한티는 큰 교우촌을 이루게 됩니다.
병인박해(1866)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많은 교우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하여 옮길 수가 없었기에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티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당시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넓게 흩어져 있습니다. 그중에는 당시 공소 회장이던 조대비의 친척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바르바라, 동생 조아기 그리고 서태순 베드로의 신원만 밝혀졌고, 그 외에는 신원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한티는 큰 고개, 큰 재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은 경상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공소 중의 하나이며, 대구대교구의 초석이 된 공소입니다. 대구 초대 주임신부인 김보록 로베르 신부는 1882년에 한티 공소에서 19명이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거룩한 순교지를 지키려고 공소 신자들이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성지에는 박해 후 재건된 공소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개인 또는 단체로 숙식이 가능한 피정의 집이 있어 순례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사는 토요일만 오후 4시이고, 매일 오전 11시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경북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이고, 전화는 054-975-5151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시절 갖은 우여곡절과 바닥 체험을 겪고, 인생의 신맛. 쓴맛, 매운맛을 다 맛본 빈첸시오 드 폴 사제(1576~1660)는 일찌감치 삶의 진리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취득한 모든 부귀영화나 성공, 재물과 명예는 다 허무요 헛것이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우리들 눈에 그리 좋아보이는 번쩍번쩍 휘황찬란한 모든 것들, 다 지나가고, 다 사라지고,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이웃들,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에게 우리가 행한 사심없는 자선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진리를 빈첸시오 드 폴은 깨달았습니다.
젊은 시절 그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사제품 이후 좀 더 깊이있는 신학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빈첸시오 드 폴에게 한 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르세이유의 한 귀부인이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유산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에 달려간 그는 두둑한 봉투를 건네받고 품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돈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모든 소지품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 몸은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사회 안에서 넘쳐흐르던 고아들과 과부들, 환우들과 임종자들, 노예들과 재소자들, 걸인들과 병든 나그네들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한 가장이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가 없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이 굶어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빈첸시오 드 폴에게 전해졌습니다. 저같았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는 선에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 당국에 부탁해 가장을 석방시켜주도록 탄원했습니다. 남은 형기는 자신이 대신 뱃사공 역할을 하며 채워주었답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비의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 ‘자선’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입니다. 그의 생애와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해 아낌없이 조각나고 나뉘어진 거룩한 성찬의 삶, 빛나는 자선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한 자비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많이도 결핍된 우리들, 피눈물 흘리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 앞에서도 조금의 흔들림없이 꿋꿋이 오늘 우리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향해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비롭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신과 함께 2 – 인과 연’에서 주인공 하정우는 저승사자로서 두 차사를 데리고 다닙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정우가 데리고 다니던 두 차사는 천 년 전 자신이 질투심에 불타 살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차사는 기억이 지워져 이 사실을 모르고 천 년 동안 하정우를 위해 일을 했지만 하정우는 천 년 동안 이들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과 천 년을 함께 일해야 하는 것이 벌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천 년 동안 이 사실을 숨기고 용서를 빌지도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이 시간이 지옥과 같았고 빨리 환생하여 전생의 기억을 지우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염라대왕의 계획으로 이 사실을 그를 섬기던 두 처사가 알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열등감과 질투심,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후회하는 하정우를 두 처사는 용서합니다. 하정우가 용서를 빌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용서합니다. 그들은 하정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비로운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정우만이 천 년 동안 그들이 용서해 줄 수 없다는 생각에 혼자 끙끙 앓고 지옥처럼 살아왔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는 원인은 서로 간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잘못은 쌍방과실입니다. 혼자서 잘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같이 붙어 있는 나라들은 항상 사이가 안 좋고, 함께 사는 부부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많은 경우 자신의 지례짐작으로 혼자 담을 쌓고 멀어지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어린이가 어른보다 더 자비롭다는 것을 이번 추석 때 보고 왔습니다. 저의 조카가 자신의 딸을 혼내는 것을 두 번 보았습니다. 그런데 조카의 딸이 혼날 때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불고 하다가도 어느새 엄마에게 달려와 용서와 화해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못 이기는 척 안아주면서도 아직 화해에 어색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감정정리가 아이보다 느린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잘못한 것을 엄마보다 더 먼저 잊어버립니다.
아이들은 잘못한 일은 고쳐나가면 되지만 잘못된 관계는 되돌리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죄책감과 수치심을 오래 지니지 않습니다. 관계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관계보다는 잘못에 더 민감합니다. 상대가 잘못의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고 나서야 관계를 재확립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잘잘못을 따지다가 결국 관계라는 큰 보물을 잃게 됩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잘못에 더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잘못했으니까 그것을 해결해야만 하느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잘못하지 않는 아담이 아니라 그냥 아담을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담은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해결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안 된다고 믿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헤로데의 반응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합니다. 자신이 요한을 죽였다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마치 자신이 요한을 죽인 것과 상관이 있어야만 하는 인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모든 사람을 자신을 심판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헤로데가 잘못한 것을 언제든 용서하고 관계 맺으실 준비가 된 분이셨지만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관계보다 잘잘못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자존심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죄책감을 넘으려면 벌거 벗겨져야하는 창피함을 감수해야합니다. 그 자존심 때문에 관계라는 큰 보물을 잃게 됩니다. 저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을 하고 사는데 그냥 상대가 자비롭다고 믿고 다가가면 저를 물리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합니다. 옳고 그름, 잘하고 잘못하는 것보다는 관계의 가치가 훨씬 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는 항상 나보다 더 자비롭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님
과학자들은 우주의 시작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에너지가 한 순간에 폭발했고 그 결과 시간과 공간이 생겼다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우주(宇宙)라고 부릅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원소들이 만들어졌고 원소들이 모여서 별이 되었고 별들 중에 하나가 지구라고 합니다. 지구라는 공간에 시간이 보태어져서 생명이 생겨났고 그 생명 중에 하나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주라는 시간과 공간에 지구라는 공간은 먼지보다 작다고 합니다. 지구라는 시간과 공간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사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거시적인 측면에서 사람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우리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벌어지는 것이니 헛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헛되고 헛된 것 같은 이 세상을, 순간처럼 사라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는 분명 우리의 몫입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살 수도 있고, 거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크기에서 우리는 정말 작고 또 작습니다. 그러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우리의 짧은 생은 온 우주보다 결코 작지 않습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들에 핀 꽃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낄 수만 있어도 좋습니다. 넘어진 이웃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면,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짧은 생일지라도 그것은 안드로메다은하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봄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을, 길가에는 예쁜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코스모스를 보면서 길을 걷는 분들은 마음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 봄에 코스모스만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은 것입니다.
일의 결과만 보면, 목적만을 추구하면 힘든 생활이 되겠지만,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보람을 생각한다면 다가오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무지개를 애써 쫓아가려하지 않고, 무지개를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오늘 하루가 즐거울 수 있습니다. 결혼만 하면 잘 살 것 같지만, 결혼을 하고나면 또 다른 일들이 생겨납니다. 아이만 낳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아이를 낳으면서 많은 일들이 생겨납니다.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해서 오늘 한걸음을 충실하게 걷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허무로다, 허무로다.’ 그리고 화답송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천년도 주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나이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헤로데는 왕으로서 많은 권세를 누렸지만, 많은 재물을 가졌지만, 삶의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허무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권세와 힘 때문에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화려한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어집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헤로데의 죄책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5주 목요일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용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꽤나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주님 앞에 참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자.
실천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어떤 일간지에 자동차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남자를 다룬 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남자가 혼수 상태에 빠진 기간은 19일도, 19개월도 아니고, 자그마치 19년이었습니다.
그러다 의식을 회복하고 깨어난 것입니다.
그를 인터뷰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다시 말을 하게 되었습니까?”
“글쎄요...” 그는 그 점을 생각해 보지 않은 듯 잠시 쉬었다 말을 이었습니다.
“뭐, 그냥 입술을 움직이니까 말이 나오던데요.”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조금 더 일찍 입술을 움직여 보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혼수상태로 지내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생각과 계획은 많은데, 실천이 없다면 어떨까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고,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본당에 넓은 뒷산이 있습니다.
아마 본당 소유로 그렇게 큰 땅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우리 본당 밖에 없겠죠.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면 초대 주임 신부님부터 늘 있어왔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에 십자가의 길을 만들자는 계획입니다.
첫 번째 신부님 때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거 같고, 두 번째.. 세 번째 신부님 때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산에 십자가의 길은 없습니다.
바쁜 일도 많았겠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실천이 중요할 텐데요.
만약 형제님들이 창고에 쌓여가는 고물과 폐지들을 보면서도 ‘창고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만 했다면, 창고 하우스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죠.
성당에 와서 크게 입술을 벌리지 않으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우렁차고 아름다운 성가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없고, 말씀을 수 없이 듣고도 단 한 번의 실천이 없다면 용서의 열매가 뭔지, 사랑의 열매가 뭔지, 위기에서 버텨내는 힘이 뭔지, 나를 지탱하고 살게 하는 힘이 뭔지... 전혀 알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도 행동하는 분이셨고, 그의 제자들.. 바오로나 베드로도 행동하는 분들이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교회에서 기억하는 빈첸시외 드 폴 성인도 행동하는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아들,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보고... ‘불쌍하다... 안 됐다...’ 하고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에 옮겼던 분인 거 같습니다.
그 결과 자선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한 교황님이 그를 성인품에 올렸던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좋은 계획들 중에 단 한 가지라도 우선 실천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미사 전에 아이들과 성경책을 읽었다.
읽기 전에 ‘예수님을 알려면 성경책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서, 일단 얘기를 하기 전에 왜 성당에 나오는지 물었다.
그러자 첫 번째 아이가 전혀 의외의 대답을 했다.
“기도하러요~”
이어서 두 번째 아이가 아이 다운 대답을 했다.
“의무감에...”
그리고 세 번째 아이가 대답을 했다.
“돈 내러요~”
가책(呵責)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2018년 9월27일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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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짖을 가(呵), 꾸짖을 책(責), 이렇게 두 번의 꾸짖음으로 이루어진 가책(呵責)이란 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책이란 저지른 과오에 대해 뉘우치며 자신을 꾸짖고 또 꾸짖는다는 뜻입니다.
가슴이 잠깐 뜨끔하는 정도의 것을 가지고 가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가책을 느낄 일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보통 우리의 마음입니다.
물론 같은 잘못의 반복으로 죄의식에 묶여 헤어나지를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아예 가책을 못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는 듯합니다.
무디어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타고난 마음의 구조가 잘못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잔인하다 싶을 정도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뉘우친다는 것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쉽게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후회란 항상 결과에 대한 느낌이니,
미리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그저 머무르지 말고, 뉘우침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뉘우침이 잘못의 영향을 상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대한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이없는 이유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헤로데는 모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잘못들, 실수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별 것 아닌 작은 부정적 감정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약함은 우리를 잘못된 길에 들게 합니다.
유혹은 늘 우리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인간적 약함 때문에 우리는 다시 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잘못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뉘우쳐야 합니다.
뉘우침이 아프면 아플수록 다시 제대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된 일에 대하여 자신을 탓하고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미신 손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뉘우쳤으면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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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영원한 길목에 서서’ 199쪽에서 201쪽까지의 내용입니다.
삶은 허무虛無이자 충만充滿이다. -텅빈 충만의 행복-
이수철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의 잠언에 이어 오늘 제1독서는 코헬렛입니다. 늘 읽어도 충격스럽게 와 닿는 코헬렛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공감하며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내용들입니다. 코헬렛, 욥기, 아가서가 성서에 편입됨으로 참 풍부해진 성서의 세계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가슴 써늘해 지는 코헬렛의 주제입니다. 코헬렛서에서 35회 반복되는 말마디가 허무이고 이어지는 9절에서 ‘하늘 아래 새것이란 없다’란 말마디도 무려 29회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상에서 허무의 체험을 합니다.
“영화는 재미있었는데 남는 것이 없다.”
이 또한 일종의 허무체험입니다. 평생 재미있게 살았는데 남는 것이 없는 인생이라면 참 허무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엊그제 허무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새벽 2-4시까지 정성껏 썼던 강론을 실수로 완전 날려 버렸을 때의 절망감은 그대로 머릿속 하얘지는 허무체험이었습니다. 불같은 열정으로 다시 썼습니다만 참 막막한 시간이었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가까운 친지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수히 허무체험을 합니다. 아니 우리 존재 깊이 속속들이 스며 들어 있는 허무라는 병균들같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때 공부 라이벌 이었던 여자 동창생의 이름입니다. 허무춘, 생각하니 의미있는 이름입니다. 허무에 봄 ‘춘春’자입니다. 죽음을, 절망을, 어둠을 상징하는 허무虛無라면 생명을, 희망을, 빛을 상징하는 부활의 ‘춘春(봄)’이라면 허무춘이란 이름은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의 신비를 상징하는 이름도 되겠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입니다.
또 하나의 기억은 오래전 수도형제들의 피정지도때 묘비명을 써 발표하도록 했을 때의 충격입니다. 적어도 긍정적인 성서 구절이 인용됐을 것이라 생각했는 데 상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한 형제의 묘비명이 바로 서두의 다음 구절이었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지금도 충격적 체험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또 하나의 기억은 ‘허무’라는 호를 가진 제 한 도반입니다. 얼핏보면 이상하겠지만 심사숙고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허무에 답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텅빈 충만’이란 말도 있듯이, ‘텅빈 허무’는 즉시 하느님의 ‘텅빈 충만’으로 직결되니 허무란 호는 역설적으로 충만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중세시대의 고전인 준주성범의 저자인 토마스 아 캠피스는 삶에 대한 부정적 비관적 묘사로 가득한 코헬렛의 내용이 ‘최고의 지혜’라 극찬했습니다. 바로 이런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허무이자 충만이다–텅빈 충만의 행복-’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허무입니다. 허무의 늪보다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삶의 허무감과 무의미감이 젖어들면 무의욕, 무감각, 무절제, 무기력이 온통 뒤따릅니다. 매사 의욕을 잃고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오늘 코헬렛은 주제에 이어 머리말로 끝납니다. 삶의 반복의 바로 허무의 본질임을 말합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일상의 거의 모두가 단조로운 반복입니다. 단조로운 반복으로 말하면 평생 언제나 여기에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보다 더한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복은 무미건조한 따분한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이요, 내적으로 깊어지는 반복입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늘 새하늘과 새땅의 삶입니다.
허무주의자들에게는 삶의 중심도 삶의 의미도 없습니다만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이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기에 늘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상의 늪,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 은총이 허무를 충만으로 바꿔버립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해,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삶의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도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4와17).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어찌보면 삶의 허무는, 삶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삶의 허무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응답하여 하느님을 선택할 때 삶의 허무는 삶의 충만이,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이 됩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텅빈 창공의 허무를 영롱한 별빛으로 충만히 채우는 하늘의 별들 같은 성인들입니다. 희망의 표지, 회개의 표지, 삶의 이정표같은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빈첸시오 역시 하느님과 인간을 섬기면서 80세 까지 허무한 인생이 아닌 충만한 인생을 사셨던 분입니다.
오늘 두려움과 불안에 싸인 복음의 주인공 헤로데는 전형적 허무주의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삶의 중심이 확고했더라면 무죄한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에 전전긍긍 중심을 잡지 못하고 혼란 중에 방황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화두처럼 던져지는 물음입니다. 새삼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은 파스카의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우리 모두 당신 안에서 삶의 중심과 질서를, 삶의 균형과 조화를 이뤄주시어 생명과 사랑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다음 화답송 후렴도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입증합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아멘.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일을 전해듣고 당황해 하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9, 7-9(연중 25주 목)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 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말한다. 곧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를 요한이라고 단정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요한의 목을 벤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뉘우침이나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그 일의 대가로 오는 심판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길을 찾지 못한 혼란과 당황 속에서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 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만이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도 아닐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고자 하는 유혹자의 왜곡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춘 딸에 대한 맹세로 유혹자에게 넘어가 결국 요한을 죽게 한 그는 이제 유혹자가 되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뒤에, 이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붙잡히시어 빌라도에 의해 헤로데에게 보내졌을 때의 일입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 11-12)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그분께서 바로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 저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소문으로 듣고 믿고 있는 이 분은 누구신가? 내가 찾기도 전부터 나를 찾으시고, 나를 훤히 아시는 이 분은 대체 누구신가? 나를 믿고 있고 사랑하고 있는 이분은 대체 누구신가?
당신은 설혹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당신은 저의 신자입니다.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오니, 당신의 저의 추종자입니다.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아주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영원 앞의 허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는 코헬렛서를 오랫동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사실 코헬렛서를 잘못 이해하면 신앙적으로 위험한데도 저는 좋아하고 중요한 때 이 말씀들을 떠올립니다.
특히 10대와 20대 때 저의 피가 너무 걸쭉하고 뜨겁게 들끓을 때는, 그때 전도서라고 했는데 이 전도서가 저의 피를 식혀주고 맑게 하였지요.
언젠가는 친구와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데 어떤 군인이 술에 엄청 취해 고등학생인 저와 친구를 붙들고선 싸우려고 드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지팡이 삼아 짚고 내려오던 몽둥이를 내 친구로부터 빼앗아 그것으로 제 친구를 때리려는 순간 제가 제 몽둥이로 선제공격을 하여 얼굴이 찢어졌고 피가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상처를 입혔지요.
그런데도 저는 아무 죄책감도 없었고 그를 치료해줄 생각도 없었으며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내려와 버렸는데 그 때도 저는 머리 꼭대기까지 차있는 화기가 빠져나가고 피가 맑아진 듯한 느낌과 함께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리며 그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했으며 오늘 전도서의 구절을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정욕이든 성취욕이든 욕망이 강하고 그에 대한 집착이 강할 때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는 말은 강력한 처방전이었으며,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너무 긴장하거나 조바심할 때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까짓것’할 수 있게 해줬지요.
아무튼 코헬렛서는 저로 하여금 심호흡을 하고 욕망을 대하게 하고, 인생 전체를 전망하면서 현재의 삶과 일들을 보게 함으로써 저는 마음을 가다듬고 삶을 관상하고 삶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코헬렛서가 이제는 욕망에 대한 처방전 정도가 아니라 현재 저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고 제 삶을 표현해주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경험한 사람이 젊은이에게 하는 교훈이 아니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의 나눔 같이 저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만족케 할 수도 없고 만족을 하지도 못하는 존재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마치 내가 그럴 수 있는 양 또 누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인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만족케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한 사람 만족케 할 수 없고 또 누가 나를 만족케 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만족을 구하지만 다 헛물을 킬뿐이지요.
또 설사 내가 너를 만족케 하고 네가 나를 만족케 하여도 그 만족이 영원하지 않으니 영원 앞에서 우리가 애쓴 것도 헛것이나 마찬가지고 만족도 허무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코헬렛은 이렇게 한탄하는데 절절하지 않습니까?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전에 피가 펄펄 끓을 때는 이 코헬렛서를 읽으면서 인생 전체를 놓고 현재를 보았다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시도하고 애를 많이 쓴 지금은 영원 앞에서 인생 전체를 보며 허무하다 할 정도로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보잘것없음을 묵상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영원 앞의 허무를 느끼는 우리는 하느님 앞의 허무를 느끼는 것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불의와 정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9. 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불의가 정의를 죽입니다
정의가 불의에 죽임 당합니다
불의는 정의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불의임을 증명합니다
정의는 불의에 죽음으로써
스스로 정의임을 증명합니다
불의가 살아남기 위해 정의를 죽입니다
정의가 살아남으려는 불의에 죽임 당합니다
불의는 정의를 죽임으로써 죽습니다
정의는 불의에 죽임 당함으로써 삽니다
불의가 정의를 죽일 수 없습니다
정의가 불의에 죽임당할 수 없습니다
불의가 정의를 죽인 듯 보일 따름입니다
정의가 불의에 죽임당한 듯 보일 따름입니다
살아 있는 듯한 불의는
죽임 당한 듯한 정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임 당한 듯한 정의는
살아 있는 듯한 불의를 지배합니다
불의가 사는 오직 하나의 길은
정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맑스의 공산당 선언에 보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마태 5,3) 라는 복음 말씀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하늘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자들을 사용자들 편에서 착취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람들을 속이는 아편이라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말을 듣고 당시 파리 대학의 프레드릭 오자남과 여섯 명의 대학생들이 직접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서 기도만 해주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 말씀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사는데 정작 필요한 것을 찾아 가난한 이들끼리 서로 나누고 채우면서 현세에서도 행복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학생들의 노력은 하나의 단체가 되어 전 세계 교회로 퍼져나갔는데 그것이 오늘날 전 세계의 여러 본당에서 교회를 대표하여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빈첸시오 드 폴회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라고도 번역하여 쓰기도 합니다. 이들은 17세기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영성을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자 오늘도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오늘 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같은 질문을 다른 형식으로 묻게 합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믿어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세상에 속한 다른 사람들처럼 권력있고 돈많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나약한 이들을 찾아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이루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게 합니다.
사람으로 오신 분 <루카 9, 7-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이 사람으로 오셨기에 사람으로만 보이고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의 감정에 따라 판단을 합니다. 이름 있고 자기를 앞지를 것 같은 사람을 시기 질투하여 없애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악은 선의 공존을 두려워합니다. 오늘 명성이 일어나는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헤로데는 자기가 저지른 악에 대하여 두려운 나머지 자기를 해칠 것 같은 주님을 찾아보고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오셨으면 그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의 모든 고난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하게도 나를 존재하게 하시고 온갖 자비로 살리는 분을 십자가에 처형하였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나 그 외의 벌을 받지만 죄 없이도 벌을 받고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헤로데 같은 독재자 밑에 사는 사람은 죄 없어도 고난을 겪고 죽음까지 당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가 사형을 하거나 강제 수용소에 사람을 감금하지 않지만 사랑의 법을 모르거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불의한 권력 행사를 합니다.
죄는 죄를 부른다고 한 번 잘못된 행위는 또 다른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가장 더러운 행위는 악의 무리가 합심하여 약한 사람 억누르고 자기 편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큰 소리로 분명한 말씀으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게 되는데 복수보다 용서가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기회가 됩니다.
희망이란?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하지 않으며 더 좋은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은 사람은 절망과 좌절이 따라옵니다.
희망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 희망으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회개하고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기도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사람이 되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성심 김연희마리아 수녀님
헤로데는 예수라는 사람이 행하는 놀라운 일들을 전해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리며 당황합니다.
자신이 요한을 죽인것이 죄책감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떳떳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살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나도 너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어딘가에 묶여 있다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당황하고,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며, 결코 자유롭지 못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주님! 오늘 어떤 일이 닦쳐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마음의 여유 주소서.
지금 이 순간, 가장 옳은 것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이종경 신부님
2018/09/27/목
루카 복음 9장 7-9절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의로운 이에게 주어지는 승리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렸듯이 예수님께도 많은 관심과 인파가 몰리자, 그는 요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세상 권력을 가지고 폭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속에서 새어나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권력자 앞에서 의로움을 주장하다 겪은 것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을 닮았습니다. 헤로데가 세상 권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진리가 뿜어내는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황하였습니다. 의인은 떳떳하고 죄인은 부끄러워합니다. 의인은 빛을 향해 나아가지만, 죄인은 어둠 속으로 숨어듭니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공존할 수 없기에, 빛의 세상은 점차 넓어지고 어둠의 세상은 좁아집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자리할 곳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탄식에서 한없이 초라한 권력자의 불안함이 엿보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불의함 대신, 진정한 의로움을 선택해야겠습니다. 마지막 순간 하느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몫은 언제나 의로운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면서 소문에 들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며 만나보려고 했습니다.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수박장수가 수박을 실은 트럭을 몰고 가다가 그만 신호를 어겼는데 때마침 경찰차가 따라 붙었습니다. 그러자 수박장수는 일단 튀고 보자는 마음으로 도망을 쳤고 경찰차는 계속해서 따라 붙었습니다. 수박장수는 이리저리 골목으로 도망을 치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되었고, 그제야 수박장수는 차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경찰도 역시 차에서 내려 수박장수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수박 하나 사 먹기 되게 힘드네요.”
죄를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나서 어쩌면 심리적으로 불안 증세를 보이면서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 아닌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역시 살아가면서 나약한 인간으로서 죄를 짓곤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은 죄로 인해서 때로는 불안해하고 힘들어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당신께 자비를 청할 때 그것을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가 언제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더 이상 인간적인 모든 유혹에 빠지지 않고 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상처 많은
우리의 삶입니다.
상처와 아픔으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세상을 향해
봉사의 삶을
보여주십니다.
봉사의 삶으로
우리의 세상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게합니다.
헛되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한줄기 빛이 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봉사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봉사하는 이들의
사랑에서 만나게됩니다.
봉사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소문에 들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다시 봉사의 기쁨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만나는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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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니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지요. 지금처럼 시간 나면 책 읽는 모습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공부를 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중에서도 종이를 접어서 놀았던 기억이 떠올려지네요. 종이를 가지고 참 많은 것을 만든 것 같습니다. 비행기, 배, 딱지……. 당시의 유행이었던 만화인 마징가도 있었고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학을 만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이렇게 종이를 접으며 놀았던 것이 자그마치 40년 전의 일인데 어떻게 접었는지가 기억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았던 제가 기억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시에 정말로 재미있게 놀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당시를 떠올리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만큼 좋은 기억이라는 증거겠지요.
우리들 삶은 분명히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연속입니다. 대체적으로 좋은 일은 좋은 기억으로, 그리고 나쁜 일은 나쁜 기억으로 각인되곤 합니다. 그런데 나쁜 일 역시 기억 속에서 바뀌어서 좋은 기억으로 떠올려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종종 하지 않습니까?
‘그때 정말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그렇다면 나쁜 기억은 어떤 것일까요?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 때, 그래서 후회를 가져오는 말과 행동이 나쁜 기억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추억할 수 있는 과거의 시간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지금 현재의 행동으로 결정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억을 만들면서 사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는 나쁜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요. 바로 의로운 사람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신의 체면 때문에 베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나쁜 기억은 현재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에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짓고는 못산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로 죄가 나쁜 기억을 만들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기억을 만들면서 살아야 할까요? 죄로 물든 나쁜 기억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행하면서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후회하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세네카).
어떻게 말을 바꿀 것인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식당 앞에 걸인이 조그마한 피캣을 들고 누워있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도와주세요!”
그런데 지나가던 한 남자가 피켓의 내용을 새롭게 써 주었습니다.
“배고파 본 적이 있으신가요?”
잠시 후... 많은 사람들이 걸인의 깡통에 돈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던 남자는 마케팅 전문가인 패트릭 랑보아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호주머니를 열지 않습니다. 공감해야만 기꺼이 엽니다. 프랑스 시인인 앙드레 브로통의 이야기도 유사하게 사람의 감정을 잡아끕니다. 그는 길가에 있는 걸인의 푯말을 봅니다.
“저는 앞을 못보는 맹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지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이때 보르통이 이렇게 문구를 바꿔주자 많은 사람들이 호주머니를 열어 깡통을 채워줍니다.
“봄이 왔지만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말로 상처와 아픔을 주는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소유의식과 뒤바뀐 주인 의식을 버리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찾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어둠에도 불구하고 늘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나다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고 내가 따르는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에 대한 전인격을 건 인식과 삶의 고백이 있어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9,7-8).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헤로데는 스스로 의인으로 인정한 요한을 죽인 죄책감도 있었지만,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분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9,9). 그는 ‘질서와 안보의 이름으로’ 백성을 짓누르고 수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 나라의 의와 하느님의 자비를 삶으로 외치는 예수님의 존재는 큰 장벽으로 여겨졌음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한 것은 단순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세에 걸림돌로 부각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습니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헤로데처럼 살 수도 있고, 요한 세례자나 예수님처럼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자신의 권세를 통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야말로 왕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은 자신이었고 세상 권세와 힘에 의존했으며 양심마저 무뎌져 요한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코헬렛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저자는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1,3)라고 합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태양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며 백성들의 처지를 만천하에 고발하면서 인생의 허무함과 인간사의 무상함, 세상만사의 덧없음을 전합니다. 이런 비판과 경고는 헤로데처럼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무한 우리 인생에 의미가 되어주시고, 무상한 인간사에 영원성을 부여해주시며, 덧없는 인생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채워주시려고 수난을 겪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가치를 하느님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행동과 진리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며 좇는 어리석은 발걸음을 멈추어야겠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헤로데처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될지, 아니면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는 삶을 살 것인지 결단을 내리도록 요청받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주인으로 섬기고 현세 재물과 권세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요,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킬 뿐임을 상기하며, 하느님으로 인하여 행복한 충만한 삶을 이어가길 기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경상도 쪽에서 지진이 발생하였고, 여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학과 능력으로 지진이 발생하는 것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의 시스템입니다.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최대한 빨리 복구할 수 있는 대책의 마련입니다. 놀란 가슴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재해는 늘 있어왔습니다. ‘태풍, 지진, 홍수, 가뭄, 폭염, 빙하기’가 있었습니다. 인류는 손을 내밀어 피해자들을 도왔고, 자연재해를 극복하면서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더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 지진이 발생한다고 해도, 우리가 함께 하면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욕망, 재물,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쌓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원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념, 민족, 세대, 지역’이라는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있지만, 우리의 폭력과 전쟁 때문에 생겨난 난민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상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부와 권력은 지녔지만 ‘미덕’이 없었던 헤로데입니다. 그는 화려한 궁궐에 살았지만 인생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남을 위한 빵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많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편견을 깨끗하게 부셔버렸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골고타의 언덕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행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기심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단 10분을 살았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은 그 삶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겠지만, 인생은 그 삶의 가치로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中心. -삶의 허무虛無에 대한 유일한 처방處方-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매일미사 중 독서의 배치가 고맙습니다. 말씀의 편식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잠언에 이어 오늘의 지혜문학에 해당된 코헬렛 제1독서를 읽으니 신선한 느낌입니다. 짧지만 종파를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주는 코헬렛서 내용들입니다. 반박할래야 반박할 수 없는 실존적 체험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서는 1장1절 ‘허무’로서 시작입니다. 코헬렛서 전체의 주제 역시 ‘허무’로서 요약됩니다.
언젠가 수도형제들의 피정 지도시 황당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피정 마지막 날, 각자의 묘비명을 미리 써보라는 과제를 제시하고 발표하도록 했을 때 어느 형제가 윗 구절을 묘비명으로 택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던 듯 했습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 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 또한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사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다 그날이 그날같기도 합니다.
허무에 답은 오직 하나, 우리 삶의 중심인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믿어 마음이 새로우면 매일이, 모두가 새롭습니다. 바로 코헬렛이 절규하는 허무는 하느님을 찾는 영혼의 애타는 울부짖음처럼 들립니다.
마음 속에 스며드는 허무감은 바로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일찍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영적 고전을 썼던 ‘토마스 아 켐피스’는 코헬렛을 ‘최고의 지혜the highest wisdom’라 격찬했습니다. 삶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 코헬렛은 세상 모든 것을 허무한 것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최우선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게 해주는 코헬렛이야 말로 역설적으로 최고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태양에 사라지는 밤의 어둠이듯, 우리 삶의 중심에 빛나는 태양이신 하느님 앞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허무의 어둠입니다. 보십시오. 어둠 속에 잠겨있던 온 세상 피조물들이 일출과 더불어 제각기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고유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면서 온통 하느님을 찬미하는 듯 하지 않습니까?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나, 하느님뿐입니다. 생명과 빛의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잊을 때, 잃을 때 물밀듯이 밀려오는 허무의 어둠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충격으로 당황해 하는 심리적 공황을 겪는 모습에서 그의 내면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감지합니다. 도대체 그 삶에 중심이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없을 때 엄습하는 불안과 두려움이요, 분별의 지혜도, 안정과 평화, 희망과 기쁨도 실종입니다.
하느님만이 안정과 평화,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헤로데 영주가 찾는 우리의 영원한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을 통해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발견하기 직전의 헤로데 영주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의 선정이 절묘하고 적절합니다. 바로 시편저자는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삶의 중심이자 안식처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화답송에 이어지는 시편 90장의 시편내용은 그대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찾는 제1독서의 코헬렛과 복음의 헤로데 영주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새삼 우리 교회 전례주년의 배치가 고맙습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삶의 허무가 스며들기 쉬운 가을철, 기도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기 때문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모두가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찾아 기도에 전념하는 거룩한 기도의 계절 가을임을 깨닫게 합니다. 도대체 영혼의 질병인 허무의 어둠이 스며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령성월에 이은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대망待望의 기쁨의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내면의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당신 중심의 생명과 빛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 역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시편90,17). 아멘.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 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뭔가 더 잘 해보겠다고 또 더 잘 살아보겠다고 참 많이도 애써 보지만 뭐가 좀 되는 것 같아보여도 결국 허사임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회의와 모임, 피정과 세미나, 토론과 공부, 기도와 애덕실조차도 결국 '말짱도루묵'(?)이 되고맙니다.
좀더 거시론적인 담론이라며 떠드는 글로벌 경제와 국제정치와 군사적 균형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 세월호 문제와 위안부 문제 어떻게 살 것이냐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도 결국 옛부터 따져왔던 힛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저의 이 말씀나눔도 이미 교부들 시대 때도 시도했었던 일이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누고 있는 사실 별 것 아니고 보잘 것 없는 신앙의 한 작은 몸짓일 뿐이고 그럴싸 해 보여도 결국 이것으로 하느님 체험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이 또한 허무한 일 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이념들과 사상들 또한 돌아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하늘 아래 새로운 것 하나 없고 영원한 것 하나 없습니다.
영원하고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 한분 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며 영원을 탐하는 우리가 어리석고 불쌍할 뿐입니다.
오, 하느님 어리석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제 자신만 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처럼
예수님을 없애려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권력으로
자신의 삶을 살찌우는 사람은
정의로운 나눔과 섬김을 사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낡고 더러운 불의를 말끔히 씻고
정의의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둠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은
정의로운 자유의 길을 걷기보다
불의한 예속의 길을 걸음으로써
온 삶을 두려움 속에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목을 벤 것도 모자라
예수님을 없애려고 안달이 난
사악한 그러나 가련한 헤로데처럼.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추악하고 낡은 자신을 벗어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옷 입어
지금여기 또 하나의 작은
예수그리스도로 거듭 나기 위해서입니다.
참되게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끝없는 탐욕을 자극하는 재물과 권력 뒤쫓는
하느님을 내버린 불경스런 우상숭배의 세상을
예수님 닮은 나눔으로 다시 거룩하게 합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숨 막힐 것 같은 치열한 경쟁의 세상에
예수님 닮은 섬김으로 다시 살맛 돋웁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이여!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루카, 9/18-2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상에서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억겁의 인연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웃고 말하고 함께 살고 있으면서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무시당하고 외면당하고 외롭게 살아갑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시어 병자, 장애인,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 주옥같은 말씀을 하시고 옛 예언자들의 기록과 말씀이 있어도 당신을 우리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을 하기를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적 증언과 업적이 있어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순례자로 모여드는 이스라엘 성지를 그들은 외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들을 어리석게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신가? 알아보지도 않고 주님의 오신 나라에서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 기도에서도 시편의 구절구절이 주님을 증언하고 찬미 찬송드리고 있는데 오신 주님은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시어 우리가운데 살아 현존하십니다. 당신이 의문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나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규칙서 53장에 “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나와 인연을 맺은 당신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66장에 “ 문지기는 ....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간한 사람이 외치거든 즉시 ” 하느님 감사합니다. “ 하거나 강복하소서.” 라고 대답하고 온갖 양순함과 사랑의 열정으로 재빠르게 응대 할 것이다. “
주님을 주님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주님의 모습으로 오시는 이들을 정성껏 환대하여야 합니다. 4장 선의도구에서 14항-19항 까지“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라, 병자를 방문하라, 죽은 이를 장사지내라.
시련 중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라,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라. “
주님이 하느님이신 것을 증명하는 길이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하신 다음 사흘 만에 되살아나신다. 하심 같이 고통을 당하는 이 안에 현존하시고 부활의 영광 속에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 눈에 보잘 것 없이 보여도 당신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보여 주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깨닫고 신비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안에 주님을 보고 사랑하도록 기도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문의 실체를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우리의
올바른 마음자세입니다.
헤로데같은
우리의 욕망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부질없는 우리들의
힘의 논리속에서
많은 이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된 이웃사랑의
실천은 먼저
떠다니는 소문을
이웃들에게 옮기지
않는 절제입니다.
또한 자기만 옳다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된 나눔을
방해하는
우리의 거짓을
먼저 인정하고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참된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우리의 잔인함을
먼저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합니다.
자신의 분노로
시작된 험담과 미움이
끝내 소중한 시간을
서로 죽이는
악순환을 반복하게합니다.
이러한 작은 허용이
요한 세례자를
죽음에 이르게하는
원인이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소문이 아니라
참된 만남이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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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과 전철을 타고 함께 가는 중에 노약자 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같이 동행하던 분은 그 젊은이를 가리키면서 “젊은 사람이 노약자 석에 앉아 있다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 그리고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 행동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을 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이 불편해서 비어 있는 노약자 석에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노약자가 없으니까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도 않은 것이라 해도 법정에 설 만큼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요. 단지 친절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내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또 배려하지 않으면서도 남들에게는 엄격한 친절과 배려를 요구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사실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친절과 배려를 받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상관없이 그냥 저절로 나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불친절과 배려하지 않음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저절로 우러나오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매어 있으면 정작 자연스럽게 행할 나의 말과 행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기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사랑의 관점에서, 즉 주님의 관점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가져다 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신의 생일 날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춘 헤로디아의 딸에게 그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했었지요.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은 헤로디아와 상의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했고, 사람들 앞에서 한 자신의 헛된 맹세 때문에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이 중요했을까요? 아닙니다. 자기의 체면 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 헤로데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만을 얻습니다.
헤로데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섣부르게 계산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어떤 모습을 좋아하실지,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훨씬 더 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내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어떤 기적이 우리 인생 또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헬렌 켈러).
긍정의 달인(‘좋은생각’ 중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아홉 살 때 홀로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오사카로 떠났다. 초등학교 다닐 나이에 집을 떠나 일하러 간 것이었다. 후에 한 기자가 그 시절에 대해 물어 보았다.
“외롭지 않았나요?”
“그게 태어나 처음 탄 전차야. 무척 신기하고 흥분돼 잠잘 기분도 아니었지.”
기자는 다시 물었다.
“수습 사환일 때는 주인집 아기도 돌보셨잖아요? 힘들지 않았나요?”
“울 땐 사탕이라도 물리면 그친다는 것을 알았지. 아이를 등에 업고 내가 좋아하는 기계를 쳐다보면서 지내는 매일이 즐거웠어.”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전등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 한여름 무더위에 지붕 밑 다락방에서 웅크리고 지낼 때는 지겹지 않았나요?”
“지붕 밑 다락방은 정말 덥지. 하지만 거기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의 상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기분이었어.”
기자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무엇을 물어도 그는 ‘힘들었어.’, ‘싫었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러한 긍정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부정의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할 수 없는 것들만 늘어날 뿐입니다. 그러나 긍정의 마음을 통해서 나의 삶 속에 숨어 있는 기쁨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긍정의 달인이 되는 멋진 나를 만들어 보자구여.
자유를 누려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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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사랑의 중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순례37일차 입니다. 이제 두 고지만 통과하면 9.27일, 대망의 산티아고에 입성합니다. 시간이 남아 내친김에 피스테이까지 약4일 잡고 또 걸어볼 계획입니다. 어제의 폴토마린에서 파라스 데 레이, 여기까지 24km, 새벽5:30-12시 까지 6시간 반동안의 순례여정도 풍요로웠습니다.
완전히 개인 날씨에 선선하기가 전형적인 한국 날씨입니다. 순례 중반까지 지평선 아득한 '넓이'의 들길을 걷다가 큰 나무들 가득한 '깊이'의 숲길과 산길을 걸으니 비로소 마음도 넓이와 깊이가 조화되어 안정되는 느낌입니다. 갈수록 늘 새롭게 느껴지는 '길'에 활력도 샘솟습니다. 알베르게 정보없이도 일찍 도착한 덕에 충분히 관망하여 늘 좋은 곳을 선택할 수 있음도 감사합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제가 우선 물색하는 것은, 새벽 미사드릴 장소와 강론을 쓸 장소입니다. 하여 지금까지 늘 차질없이 강론을 쓰고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순례의 중심은 하느님이시기에, 매일 미사를 통해 '사랑의 중심', '활력의 중심'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에피소드가 오늘 강론 서두에 잘 어울립니다. 순례자 숙소에 도착하면 대충 짐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헤드랜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벽 이동시 필수품이 이마에 다는 헤드랜턴인데 참 암담했습니다. 하여 이냐시오 형제와 등산 물품 파는 곳을 찾아 스페인제 헤드랜턴을 샀는데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대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감이 이상하여 숙소에 도착한 후 샅샅이 수색하니 침대 사이에 헨드랜턴이 끼어 있었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새벽 캄캄한 길을 새로 산 대형의 헤드랜턴을 사용하니 얼마나 밝은 지 참 통쾌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생명임을, '빛의 생명'임을 절감했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전혀 없는 사랑의 중심, 사랑의 빛이십니다. 허무와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의 중심인 하느님 사랑의 빛만이 허무와 절망,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사람 누구나의 원초적 정서가 허무와 두려움입니다. 인간 본성에 DNA처럼 내재해 있는 허무와 두려움입니다. 바로 이런 허무와 두려움은 하느님을 찾으라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초대장입니다. 오늘 코헬렛의 고백에 공감하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지요.
"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제가 볼때 코헬렛의 하느님 찾는 절규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치명적인 영혼의 질병이 허무주의입니다. 바로 여기가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사랑의 빛, 생명의 빛 충만한 삶이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허무의 심연 속에 삶입니다. 허무감으로부터 시작되는 무감각, 무기력, 무의욕, 불안, 두려움에 온갖 정신질환입니다.
허무와 절망, 두려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등질 때 허무와 절망, 두려움이요, 하느님을 향할 때 하느님 사랑의 빛,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삶입니다.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출현에 불안으로 전전긍긍하는 헤로데 임금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모두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
헤로데의 양심가책으로 인한 불안감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하느님을 떠나 사랑의 중심을 잃을 때, 허무와 불안, 두려움이요 급기야 헤로데 같은 범죄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기도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입증합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사랑의 중심이신 주님 안에 머물 때 치유되는 영혼의 질병인 허무와 불안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의 허무와 불안, 절망의 어둠을 일거에 날려 버리십니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아멘
삶이 힘겨울 때 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이게 뭔가?’ ‘대체 왜 사나?’하는 느낌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구약성경 중에 ‘코헬렛(Qoheleth)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저자는 멋진 인생의 명언 제조기 솔로몬 혹은 구약시대 위대한 현자로 추정됩니다. 코헬렛에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정신세계, 사고방식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코헬렛을 읽다보면 문체의 분위기가 다분히 회색빛입니다. 꽤나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나이 지긋한 현인의 가르침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꽤나 고달픈 이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주는 하느님의 작은 선물이 코헬렛이기도 합니다. 너무 작은 것에 지나치게 혈안이 된 우리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우리들을 향한 현인의 지혜로운 충고입니다.
반복되는 가르침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대단해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사실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노선을 거듭 강조합니다. 또한 기를 쓰고 아등바등해보지만 인생은 요지경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안개 속을 걷는 듯 단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쉽게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 한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그분께서 우리네 인생길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무 기대도 하지 말고 매 순간을 즐기십시오. 비록 모든 것이 희미할 지라도 매 순간 기쁘게 즐기면서 살아가십시오.
우리네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삶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열심히 기쁘게 재미있게 살아가십시오. 열심히 살수록 한 인생이 하느님의 신비로 충만한 무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예외 없이 그분께로 돌아가야 하는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헬렛의 요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헬렛의 저자는 생을 찬미합니다. 부정을 인정하고 난 뒤에 얻게 되는 긍정인 셈입니다. 언제나 결핍 투성이며 부조리한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합니다. 하느님께서 빛도 창조하셨지만 그림자 역시 동시에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행복한 날엔 행복을 만끽하십시오. 반대로 불행한 날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꺼이 견디십시오. 이것이 코헬렛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너무 작은 것에 목숨 거는 우리들, 그래서 스스로를 한없이 괴롭히며 갉아먹는 우리들입니다. 코헬렛 저자의 권고처럼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나야겠습니다. 이 세상이 대단해보이지만 사실 이 세상 순식간입니다. 때로 지긋지긋해 보이지만 어느새 지나갑니다. 또 다른 세상 하느님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진정한 의미의 세상이 다가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한,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한 ‘완전체’로서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측은지심의 눈동자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언젠가 그의 결핍을 주님께서 완전히 채워주실 그날까지 인내하면서 내가 대신 그의 결핍을 메꿔주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1,2)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도서라고 했던 공동번역에서는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 만사 헛되도다.”(전도서1,2)라고 번역된 구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은 공동번역이 보다 와 닿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번역이 어떻든 코헬렛서가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께서는 이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지시나요?
느껴지신다면 그 허무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보통 어렸을 때나 젊었다고 하는 시기에는 삶을 전체로 놓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가능성과 희망에 몰두하게 되는 시기이고,
허무하다는 느낌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들에 대한 체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삶 전체를 허무하다고 생각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더 많아 보이고 미지의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느끼고 받아들일 나이가 되면,
또한 실존적 실패나 이별의 반복 체험을 하게 되면 삶의 허무함이나 덧없음에 대해 느끼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나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삶을 부분적으로가 아닌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허무하다거나 덧없다는 말의 이면에 깔린 가장 큰 내용은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욕망이 추구하고 쟁취하고 보존하려 했던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거나,
손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흐름을 벗어날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어떤 관계와도 세상에서 이별할 시간은 늘 진행형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어떤 대단한 자리도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코헬렛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세상의 모든 일은 허무한 일뿐이니,
소용없는 일에 열심히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일까요?
결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허무합니다. 이를 실존적 이해라고 합니다.
세상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어려운 말로 존재론적 이해 혹은 신앙적 이해라고 합니다.
실존적 이해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전제할 때 얻어지는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이해 혹은 신앙적 이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삶의 한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허무함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며,
그 허무함을 넘어서는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도 하느님의 뜻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덧없는 것들에 영혼을 빼앗겨서 소중한 삶을 소비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위한 삶에 집중해야만 한다는 이해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해 가치 있는 삶을 만들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죽음조차 허무하게 할 수 없는 복음적 가치들을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덧없는 것과 가치 있는 것들을 식별하면서 살고자 지혜를 청해야만 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 희망을 살아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진짜 허무는 거짓에 모든 것을 거는 것임을 말입니다.
양심법이며 자연법은 신법에 기인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무서운 일들은 많습니다. 죽거나 살아난 일 같이 말입니다. 고발해 재판받고 형을 마치고 출감하면 보복 받을 일이 두렵다 합니다. 죽인 사람이 되살아났다면 그땐 보복 받을까봐 정말 더욱 두렵겠지요.
진 사람은 발 펴고 자고 이기면 발 오므리고 잔다는 말도 있지요.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런 감정을 왜 지녔다고 생각합니까. 양심법이며 자연법이고 더 올라가 신법까지 어겼다는 잘못 아닐까요?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생 수녀님이 휴가를 와서 어머니와 함께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세종문화 회관으로 가서 ‘이 미자 콘서트’를 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매일 어머니를 모시고 산책을 하겠다고 합니다. 시장에 들려서 장도 보고, 식사도 하겠다고 합니다. 마음 씀이 좋고, 고마운 동생입니다. 생각해 보면 동생은 늘 휴가 때면 부모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대천의 요나의 집엘 가기도 했고, 수안보 온천엘 가기도 했고, 제주도엘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저 필요한 경비를 보내 드리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휴가를 가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동생은 부모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은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선배 신부님께서 식당으로 오셨습니다. 저희는 식사를 마치고 계산으로 하려고 했는데, 선배 신부님께서 저희들의 밥값도 미리 계산하고 가셨다고 합니다. 평소에 그리 친분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참 고마웠습니다. 선배라고 권위를 내세우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이기 때문에 후배를 위한 배려를 하고, 부족한 것이 있어도 격려해주는 모습을 봅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욕망들 앞에서 오늘 제1독서의 말은 정말 사실인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하는 것,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봄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을, 길가에는 예쁜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코스모스를 보면서 길을 걷는 분들은 참 마음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 봄에 코스모스만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은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문속에서 살다가
소문속에서 떠나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소문으로 즐거워하는
사이에 소문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혀"는 결코
만족과 절제를 모릅니다.
흘러 넘치는 말과
소문들 속에서는 결코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차가운 마음안에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입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먼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거기에
예수님은 계십니다.
소문에는 온기라는
실체가 없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붉은 온기가 뜨겁게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들이
사람을 살리는
언어가 되기위해
희생되어진 많은 이웃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와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제자신에게로
되돌아올갈 수밖에 없는
생명의 이치입니다.
변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변화되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가 아니라
예수님자체를
만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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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가 너무나 안 돼서 걱정이 많은 형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요즘 너무나 힘들어서 소위 성공했다는 친구를 찾아가서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지요. 그러자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더니 이렇게 큰 선물을 주셨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감사헌금을 꼭 내겠다는 기도를 바치라는 말도 힘주어 덧붙였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이 형제님께서는 그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이번 장사에서 딱 천만 원만 벌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감사헌금으로 딱 절반 5백만 원 내겠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는지, 정말로 갑자기 장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장사가 끝나고 돈 계산을 해 보니 남은 돈이 5백만 원입니다. 그러자 이 형제님은 돈을 움켜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아이고, 하느님! 감사헌금을 미리 떼고 주셨군요? 그러면 그냥 5백만 원은 제가 다 쓰도록 하겠습니다.”
천 만 원의 절반인 5백만 원을 내기로 했다면, 당연히 5백만 원의 절반인 2백5십만 원을 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이 형제님은 자신의 주관만을 내세워 해석하고 있지요. 어쩌면 자신이 말했던 천만 원을 벌더라도 또 다른 이유를 들어서 감사헌금 내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뜻과 맞지 않는 행동이니까요.
자신의 주관만을 내세우면 절대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으며,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표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 헤로디아의 춤 값으로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요.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내 뜻만을 내세우면서 살아갈 때, 또 한 명의 헤로데 영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감사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뜻대로 뭐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쫓기보다는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고 하는 내 뜻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똑바로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 길만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천양희).
우리의 기도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기도 내용이 주로 이렇다고 하네요. 혹시 내가 여기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제게 십자가를 지라시면 기꺼이 지겠습니다. 그 대신 짐꾼을 사서 대신 지도록 해주십시오.
제게 정직하게 살라고 하셨지요. 단, 장사할 때만은 예외로 해주세요.
원수를 사랑하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대신 원수의 항복부터 받아내고 용서하겠습니다.
주님이 물질을 바치라시면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그러나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체면을 유지할 정도의 헌금을 드릴 테니 주보에 꼭 이름을 넣어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나만의 기도가 아니라, 진정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안으로 안으로 여물어가는 계절
가을입니다.
너무나 많은 헛소리들 속에
살고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시금 침묵의 귀중함을
만나게 됩니다.
헤로데가 만나야 할 사람은
소문의 그 사람이 아니라
헤로데 그 자신입니다.
모든 것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열매와 열매사이의 간격
사람과 사람사이의 간격
이와같이 간격이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야 행복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간격사이로
나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사랑을 전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기쁨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는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좋은 말 하기도 짧은 인생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살기에도 빠듯한 시간입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굳어진 우리 마음에
새로운 생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실체를
만나는 사랑의 하루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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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바꿔줘~~ 브라우니, 물어!!”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말이라는데 아주 큰 인기이지요. 상류층의 어떤 부인이 가게 점원에게 무조건 바꿔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때 하는 말, “바꿔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점원의 조리 있는 말이 이어지고, 이 말에 궁지에 몰리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온 강아지 인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브라우니, 물어!”
솔직히 왜 이 개그 프로그램이 재미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개그 프로그램을 보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도 사람들의 인기를 끌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우리들의 일상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시 말해서 자신과 비슷한 일상의 삶에서 공통점을 느끼고 그래서 그 상황을 재미있게 끌어낸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께 이러한 억지를 종종 부립니다. 자신의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또 어렵고 힘들다면서 그 상황을 바꿔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러나 그 상황이 바뀔 때도 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도 계속해서 우리의 요구는 ‘바꿔줘’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음을 알면서도 다른 이유를 들어 자신은 정당함을 피력하고 있지요. 그 모습이 앞선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브라우니, 물어!”라는 엉뚱한 말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억지로 짜 맞추기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주님 앞에 억지를 부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반성해보자는 의미로 상황을 맞춰 보았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러한 억지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없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보세요. 그는 양녀의 춤 값으로 의로운 세례자 요한의 목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불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활약상을 듣고는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라는 불안감 속에 살게 되지요. 바로 그 역시 억지로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았고, 그 결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뜻에 인간적인 욕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서도 탈피해야 할 것입니다. 대신 항상 주님께 순명할 수 있는 우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체험할 수 있으니까요.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 두렵다(탈무드).
죽산성지를 다녀와서
어제는 교구청에서 근무하는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직원 모두가 두 분 주교님을 모시고 수원교구의 죽산성지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해서 아주 뜻 깊은 하루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죽산성지에는 2000년에 다녀온 뒤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더군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2000년에 방문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과 정성을 쏟았을까 싶습니다. 하긴 순교자들이 보여준 최초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성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는 곳이 된 것이지요.
만약 이곳에 순교자들이 없었다면 성지가 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는 이렇게 순교하여 효수되는 이곳이 정말로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순교자들의 땀과 피로 인해 지금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곳으로 변해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자리가 너무나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고, 그래서 주님께 “바꿔줘”라고 소리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고 힘든 자리를 이겨냈을 때 바로 영광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과거 우리의 순교자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이겨내는 우리가 될 때, 우리 역시 현대의 또 다른 순교자가 되어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면 바로 지금이 주님을 증거 할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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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교구청으로 들어온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었습니다. 어제 인사이동이 된 것 같은 느낌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석 달이나 지났더군요. 사실 이 석 달 동안 이제까지 잘하지 못했던 것을 잘 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바로 정리정돈입니다. 워낙 정리정돈을 잘하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물건을 쓰고서 곧바로 제자리에 놓지 못하는 게으른 성격이 가장 큰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구청에서는 이 게으름을 한번 없애보겠다고 첫날 다짐을 했었지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잘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신부님께서는 제 방에 들어오시면 이러한 말씀들을 하셨지요.
“어? 아직까지도 깨끗하네?”
그런데 다시 정리정돈이 안 된 옛날의 제 방 모습으로 변하더군요. 이번 연휴동안 계속 손님들을 맞이하다보니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특히 낮부터 저녁 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방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젯밤에 외출 나갔다가 돌아온 뒤 곧바로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제자리에 위치시키고, 설거지 되지 않은 컵과 그릇들을 깨끗이 닦아놓았습니다. 침구 정리도 새롭게 다시 했습니다. 한참동안을 청소와 정리정돈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사람 사는 곳처럼 변했습니다.
잘 정리정돈이 되어 있을 때에는 몇 분만 정리하면 쉽게 정리정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방치해두니 나중에는 몇 시간을 소요해야지만 정리정돈을 할 수가 있더군요. 아마 죄란 것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깊이 뉘우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한다면 항상 깨끗한 나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키워 나간다면,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주 고해성사를 보라고 교회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영주가 나옵니다. 그는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주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는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을 죽입니다. 즉, 깨끗한 마음보다는 사람들의 비춰지는 겉의 모습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요? 계속해서 죄책감에 빠져서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당황해 했던 것이지요.
우리도 겉모습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매일 조금씩이라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청소할 수 없는 상태, 정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청소는 매일매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깨끗하고 잘 정리된 내 마음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었을 때 가장 풍요롭다(K.F.부코).
답변이 다른 이유(‘좋은생각’ 중에서)
‘열전’에 나온 이야기다. 어느 날,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실천해야 한다.”
이어 자로도 같은 질문을 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즉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어찌 바로 실천하겠는가?”
이를 이상히 여긴 자화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찌 같은 질문에 다른 답변을 하십니까?”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이재순 수녀님
골고타 언덕 위에 십자가가 세 개 서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
죄를 뉘우치며 구원을 비는 우도의 십자가,
그리고 불평과 저주를 하며 죽어가는 좌도의 십자가.
세례 받은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입었습니다.
나의 모든 고통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즉 용서와 사랑과 구원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 나의 죄뿐만 아니라 인류의 죄를 뉘우치며 예수님의 고통과 죽으심에 동참하는 영광이 신자의 사제직입니다.
나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나의 이익, 명예 등을 뜬구름처럼 바라보며 지금 닥친 고통 속에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것입니다.
이 고통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고통스러운 이 순간을 정성껏 그리고 깊이 가슴에 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계신 것처럼….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류정순
세레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만나서 없애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불안에 사로잡힌 그는 민심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면 자기자리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저는 불안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었는데 은퇴 연령은 50대인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는 은퇴 후 일자리 없이 살 동안에 궁핍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불안감은 공무원에게 뇌물의 유혹을 받게 하고, 자영업자에게 폭리를 취하게 하고, 가정주부에게 부동산 투기에 나서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녀들이 성적 경쟁에서 낙오되면 일생 동안 궁핍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무리해서라도 과외공부를 시키고, 경쟁에서 이기라고 재촉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더불어 공존하는 평등과 나눔의 공동체 사회를 열고자 하는 분입니다. 극심한 경쟁으로 많은 보통 사람을 낙오시켜 생계 불안으로 밀어내는 오늘의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는 예수님께서 이상적으로 생각하셨던 사회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는 글로벌 경제위기에도 끄떡없고, 국가채무도 적으며, 국민의 웰빙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모든 노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정도의 연금과 의료혜택을 받고, IQ 80~120의 고졸자 정도의 보통 사람들이 실업으로 인한 생계 불안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살도록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의 질을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영달에만 연연해하면서 공동체 사회의 근본 문제를 외면하고 살면 예수님의 뜻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예수님의 뜻에 가까운 ‘더불어 공존하는 나눔과 화해의 공동체 사회’?로 이행시키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참신자입니다.
허무와 친해지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오늘 저는 말씀 나누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고백성사를 보는 듯한 마음이기 때문이고 이런 고백을 하고나면 여러분이 전과 같이 저를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게 자주 엄습하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특히 올 해 들어와서 자주 드는 느낌은 서운함과 노여움입니다.
아주 별 거 아닌 것들에 서운하고 노여워합니다.
전에 같으면 지나칠 것들이 요즘은 다 눈에 들어오면서 서운해 하고 노여워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말씀 나누기에서 제가 한가위 인사를 했는데, 글을 읽은 많은 분들이 간단한 한가위 인사도 않습니다.
그것이 서운한데 전에는 서운하지 않았었습니다.
인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다른 분에게 인사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지요.
그런 제가 지금은 그런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가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강론에 전과 같은 신선함이 없다는 형제들의 말도 서운합니다.
형제들이 대 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농담이고 그런 얘기를 해도 그것을 제가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의 저는 그것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저의 강론에 신선함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전에는 그것이 진심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요즘은 별 거 아닌 말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 못합니다.
좋게 이해하면 작은 것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고 진지하게 대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강하게 드는 느낌은 허무감입니다.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
내가 한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느낌 등.
이런 얘기를 듣고 평소의 저를 아는 분들은 많이 놀라실 것입니다.
저도 이런 제가 요즘 매우 낯설고 덕분에 이런 저에 대한 내면 공부와 수련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 깨닫는 것은 이것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허무는 허무를 피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이니.
허무를 적어도 가치중립으로 놓고 껴안아야 하며,
허무를 앞에 놓고 “오, 나의 허무!”하며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허무를 나의 운명으로 껴안아야 하고
허무를 나의 본질로 껴안아야 합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다 뜻이 있으니 하느님을 만나는 장으로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허무이신 하느님이라고 전에 자주 제가 떠들어 댔는데, 이제 이 허무를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하느님으로 만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아직까지 허무는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머리로 아는 것처럼 허무가 사랑으로 느껴질 때까지 허무와 노닐며 친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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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할머니의 평생소원은 서울 구경을 한 번 해보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말하길, 서울 구경을 하다가 기차를 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깜깜한 굴을 지나서 다시는 이 세상에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마’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생각을 가졌지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서울 구경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서울 구경을 소원했던 할머니는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걱정이었지요. 특히 기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할머니의 불안은 더욱 커졌지요. ‘혹시 깜깜한 굴에 들어가서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불안이었지요. 그런데 이 기차가 긴 굴에 다다르기 전, 할머니는 너무 걱정을 해서인지 그만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 잠을 푹 잔 할머니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서울에 잘 도착해 있었지요. 이제까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 땅에서 눈을 감고 긴 굴처럼 느껴지는 죽음의 터널을 지난 뒤 눈을 뜨면 거기가 바로 하늘 나라인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걱정만 할 뿐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조금도 바꾸지 않으면서, 걱정만 하며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보세요.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큰 죄를 범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헤로데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확인을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만 싶어 하지요.
이 세상은 두려움에 떨면서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기쁘고 힘차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떤 삶을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꼬마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서 처음으로 성당에 갔습니다. 평소에는 안 따라 다녔는데, 그 날은 성탄절 전야라고 성당 다녀오면 선물을 준다는 조건으로 억지로 데리고 갔지요. 기도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느님 아버지.”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꼬마는 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자기는 족보를 따져서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말했지요. 꼬마가 하는 말을 옆에서 들은 아버지가 조용히 꼬마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도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는 거야.”
“그럼 하느님은 아버지한테도 어머니한테도 또 나한테도 아버지야?”
“그렇지, 역시 내 아들이라 똑똑하구나.”
그러자 꼬마가 갑자기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알았어, 형!”
이 꼬마는 나름대로 족보를 따졌지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앎입니다.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자신 있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합시다.
늦은 때란 없다(‘행복한 동행’ 중에서)
번화가에 있는 어느 외국어 학원. 젊은 학생들 사이에 허리 굽은 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었다. 수강 신청 접수처를 찾은 할아버지가 다가와 물었다.
“일본어 강의 등록하러 왔는데...”
“강의 들으실 분이 누구세요? 이름과 나이를 알아야 하는데요?”
접수처의 젊은 아가씨는 할아버지가 손자의 수강료를 대신 내주러 온 줄 알고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나요, 예순여덟이고.” 하는게 아닌가? 직접 강의를 듣는다는 말에 놀란 아가씨는 할아버지가 앞으로 공부를 하면서 고생하실 것을 생각하니 쉽게 접수증을 끊어 드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아세요? 젊은 사람 따라가려면 힘드실텐데요.”
“아니 일본어 하나도 몰라. 말하는 것만이라도 좀 배우고 싶어. 아들이 며느릿감을 데려왔는데 일본 사람이지 뭐야. 인상도 좋고 착해 보여서 마음에 드는데 영 말이 통해야 말이지. 며느리도 한국말을 배우겠지만 함께 대화하려면 나도 그쪽 말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아들 장가보내기 전에 얼른 시작하고 싶어. 글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우선 말부터 배우게 해 주소.”
“와! 할아버지 대단하시네요. 며느님이 감동하겠어요. 그런데 일본인하고 직접 말할 수 있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괜찮으세요? 칠순이 넘어야 말이 트일지도 몰라요.”
“지금 시작하면 그날이 더 빨리 오지 않겠소? 그리고 아무것도 안 배우고 그냥 지낸다고 해서 칠순이 오지 않는 건 아니잖소?”
그리스도인다운 삶
장수정
오늘 복음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이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오고(9,6 참조), 뒷부분에서는 그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결과 보고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9,10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한다. 그러한 일을 하는 제자들을 둔 예수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일화를 읽노라니 오래전에 읽은 가르멜 수녀의 전기가 생각난다. 너무 오래되어 세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데레시다란 이름의 그 수녀가 자주 바쳤다는 기도문 하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성모님, 사람들이 저를 볼 때 당신을 보는 듯하게 하소서!’ 데레시다 수녀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깊었다. 그는 성모님을 모범삼아 자신을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기도문에는 그러한 수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제자들이 복음선교 현장에서 보인 태도와 행한 일들은 유다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는 듯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헤로데는 ‘예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고, 유다인들도 “엘리야가 나타난 것일 게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난 게 아닐까?”,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게 틀림없어.”라며 수군거렸을 것이다.
가끔 “나를 보면서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길래….’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반성해 본다. 사람들의 관심은 두 갈래로 나눠질 수 있겠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저 사람이 선하고 인내심이 많을까?” 또 하나는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저이는 저렇게 이기적이고 편협할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어떤 길로 이끌고 있는가?
10여 년 전 남편이 나에게 “네가 신앙인이라면서 그럴 수 있느냐?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산다고 자부했던 내게 그 말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가 무얼 어쨌는데? 말해 주어야 알지.” 하고 쫓아다니며 물었다. 남편의 말은 내가 신앙인답지 않게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성급하게 굴고 편애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겨우 그걸 갖고 신앙인 운운하다니.’ 하는 서운한 감정이 있었지만 그런 게 아님을 곧 깨달았다. 내 행동이 남편의 눈에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비쳤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고, 그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음을 뜻했다. 남편이 지적한 것을 고치려고 꽤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지금도 불쑥불쑥 그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아, 오늘도 실패했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믿음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헤로데와 내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허무한 관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였다는 말로 끝납니다.
이 복음을 읽으면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사뭇 흥미로웠고 어떤 이유 또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는지, 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하였는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
안드레아와 베드로처럼 구도의 차원에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했을까?
자캐오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까?
맹인처럼 시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을까?
아니면 우리 보통 사람처럼 사람이 그저 그리워 보고 싶어 했을까?
이런 이유와 목적으로 만나고 싶어 하였다면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지만 헤로데에겐 구원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헤로데의 관계에 대한 공관복음을 보면 루카 복음만이 독특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루카 복음에만 나오고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헤로데 앞에 서셨다는 것도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
여기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하는데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만남으로 필요가 충족이 되고 만날 때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고 만남으로 기쁨과 슬픔이 발생하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소문대로 진짜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인지 궁금할 뿐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아무런 원의도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이고, 그저 호기심일 뿐입니다.
흥미 있게 보지만 마술이 끝나고 나면 돌아서 가고 돌아서 가면 곧 잊어버리는 그런 만남과 관계입니다.
감정이 투여되지 않는, 존재의 한 부분이 투여되지 않는 그런 관심을 우리는 많이 만납니다.
제가 북한 관계의 일을 하는 것을 알고는 이것저것 묻지만 묻는 것으로 끝나는 아주 허무한 관심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정말로 그렇게 굶주리는지 묻고는 굶주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연민도 발생치 않고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생각이 없는 관심 말입니다.
호기심 이상, 그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철학적 관심이 있지만 하느님이 전혀 발생치 않는 그런 관념적 만남도 있습니다.
이러한 헤로데였기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가 이것저것 묻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헤로데는 율법학자들과 수석사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고는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조롱당한 예수님께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은 빌라도가 불쌍합니다.
저 또한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는, 그런 허무한 만남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독서> : 세상의 헛됨과 부질없음을 깨닫고 하느님께 기대하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기대를 갖고 산다. 그런데 우리가 거는 미래에 대한 꿈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이를테면 부나 명예, 건강 등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육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며, 육신의 머리로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대부분 우리가 갖는 기대 역시 육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결국 실망으로 변하고 만다. 먼저 자신의 꿈과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한다. 세상은 결코 내 자신의 기대와 꿈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이다. 나아가 설사 꿈과 기대가 이루어졌다 해도 내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내 안에 또 다른 욕망 - 더 큰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서 그에 대한 꿈과 기대를 이루려고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걸었던 꿈과 기대가 결국은 이룰 수 없는 헛된 것임을 알게 되어 실망하고 만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전도서의 저자는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하고 말한다.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리는 숨이나 바람처럼 허무하다고 말한다. 세상에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세대는 늘 바뀌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늘 돌고 돌아서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들어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바라보면서 결국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온갖 부를 누렸고, 자신의 욕심대로 큰 사업을 하기도 한 임금이었다. 그는 대궐을 짓고, 커다란 포도원을 마련하고, 화려한 정원을 꾸몄으며 수많은 남종과 여종을 두고 살았다. 그처럼 부요한 왕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부를 통해서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는 향락에도 빠져보고, 술에도 빠져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만족을 얻지 못했다.
세상의 지혜를 통해서 행복을 구하기도 했지만, 세상의 지혜 역시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 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제 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본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코헬 2,21-22)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헛됨을 통해서 그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사물의 의미를 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삶의 모든 해답을 알 수 없으니 하느님께 경외심을 품고 하느님의 결정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누어주시는 바를 전폭적인 신뢰와 기쁨 가운데서 누리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하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지는 헛된 것이며, 그 썩어 없어지는 헛된 것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비록 육신을 취하여 살고 있지만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하느님의 숨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느님 품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헛된 세상을 기대하기보다 하느님을 기대하고 하느님을 바라며 하느님을 꿈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므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오늘, 코헬렛의 저자가 가르치는 대로 세상의 헛됨과 부질없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자. 헛된 세상에 얽매여 하느님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자. 우리의 고향이신 하느님을 바라고 꿈꾸며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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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에는 갑곶순교성지에서 인천교구 제6회 순교자 현양대회가 있었습니다. 이곳 갑곶성지는 저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곳입니다. 왜냐하면 성지의 초대신부로 3년 동안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체험을 제게 주었던 곳이었으니까요.
성지가 참 많이 아름다워졌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곳에 계속 있었으면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 제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기에, 이렇게 현양대회도 잘 치룰 수가 있었던 것이고 아름다운 성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본당 발령을 받고서 성지를 떠날 때,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3년 동안 나름대로 한다고는 했지만 부족한 것이 많았고, 따라서 내가 더 남아서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현양대회를 참석하면서, 내가 그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주 착각 속에 빠집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또 기를 쓰고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욕심 가득한 착각 안에서 우리들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도 그러했지요. 그는 자신과 헤로디아가 부정한 결혼을 했다고 비난하는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라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이에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지요. 그는 욕심 가득한 착각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이제 소문에 의해서 가책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남자가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기 시작합니다. 마침 뒤늦게 귀가하던 이웃집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함께 찾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던 다른 이웃도 거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열쇠를 본 곳이 어딘가요?”라고 물었지요. 이에 “현관문 근처요.”라고 답변합니다. 이웃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어요.
“그런데 왜 여기 가로등까지 나와서 찾고 있는 거죠?”
이에 이 남자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가 더 밝잖아요!”
우리는 편한 곳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편하게 내가 기준이 되어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답이 없습니다. 바로 주님이 기준이 된 상태에서 판단할 때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십시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조용히 흐를 뿐입니다.(도덕경)
하루를 이런 하루로 살게 하소서(‘좋은 글’ 중에서)
매일 아침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나로 인하여 남들이
얼굴 찡그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루에 한 번쯤은
하늘을 쳐다보고 드넓은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시고
일주일에 몇 시간은 한 권의 책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보낼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작은 일에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과
큰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있는
대범함을 지니게 하시고
적극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다정 다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할 수 있는 용기와
남의 허물을
따뜻이 감싸줄 수 있는 포용력과
고난을 끈기있게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더욱 길러 주옵소서
나의 반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시고
매사에 충실하여
무사안일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매일 보람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일을 그만두는 날
아니 생을 마감하는 날에
과거는 모두 아름다웠던 것처럼
내가 여기서 만나고
헤어지고 혹은 다투고
이야기 나눈 모든 사람들이
살며시 미소짓게 하여 주옵소서
그게 무슨 짓이여?
이난호
“그게 무슨 짓이여?” 성호를 긋는 내게 아버님이 물으셨다. 그것은 내가 처음 들은 아버님의 나무람 섞인 질문인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최초의 관심표명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대소가는 물론 근동에서 ‘생불’로 통하던 일자무식의 농부이셨다. 말씀도 적고 웃음도 적었지만 그 푸근한 성정에 나는 마음 깊이에서 며느리 아닌 딸이 되어 있었다. 물음에 답을 드릴 수 없었다. 그분의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을 충분히 이해했던 것이다.
아버님은 큰댁에서 모시던 전신불수인 당신 아버지를 화재로 잃었다. 큰댁 식구 모두 교회에 간 사이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예수라는 이가 그렇게 신령하다면….’ 당신 아버지의 횡액을 막아 줬어야 한다는 아버님의 단순하고 요지부동인 논리를 뒤집을 재간이 없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과 화해하시지 않았지만 성호 긋는 나를 외면하시지도 않았다. 그 참에 용기를 내어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한마디 했어야 옳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나는 친정·시댁 통틀어 맏이였고 최초의 천주교인 신자였고 타고난 쇠고집이었지만 턱없이 소심했다. 아버님이 타계했을 때 대소가 어른들의 뜻에 따라 유교의식으로 장례를 모시면서도 나는 속으로만 성호를 그었을 뿐이다. ‘나는 이미 전능하신 하느님께 씻긴 몸이다. 지상의 어느 의식을 따른들 시늉일 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행위가 얼마쯤 교리에 어긋나는지 알음알음했지만 속수무책 아닌가, 크게 가책한 것 같지도 않다.
이상한 건 우유부단하게 눈치 보며 몸 사리는 내게 미사 시간을 챙겨주는 이가 한둘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한 건 그즈음에 실로 열렬한 교우가 이웃으로 이사 와 동네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 일이다. 그의 직선적 언행이 너무 당당해서 가끔 거부반응이 있었지만 그는 밀리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했고 닥치는 일거리에 몸 사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예언자였다. 그는 내가 하고 싶었지만 용기 없어 못했던 말(예레 1,?10 참조), 미뤄둔 일들을 해치우며 내가 들어야 할 군소리를 내 대신 듣는 것 같았다. 그의 용기가 부럽고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웃들은 그의 언행일치의 신자다움에 차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세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시어머님이 대세로 종언하시자 잡음 없이 천주교 상례에 따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그 교우의 공이 크다. 고인께 송구하게도 모시는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나는 틈틈이 그 힘찬 교우를 보내주신 분께 감사의 성호를 그었다.
호기심과 관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굴까?
정체에 대한 호기심.
호기심.
옛날 수덕생활에서는 호기심을 아주 나쁘게 봤습니다.
그 영향인지 수도자가 호기심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저도 별로 좋게 생각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 마주 오는 수도자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면 민망합니다.
어떤 때 저도 두리번거리는데 그런 저를 보면 즉시 그저 앞을 보거나 눈을 내리 깝니다.
호기심이 나쁘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느님 이외의 것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무관심.
매주 화요일 단기 노인 보호 시설에 가면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그런데 게 중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할머니도 계십니다.
제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력이 떨어져 도무지 삶의 의지도 없고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심은 살아있는 표시이고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헤로데의 알고 싶어 함,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영어에 Discard란 단어가 있습니다.
‘버리다’라는 뜻인데 틀림없이 카드놀이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카드를 집어 패를 펴보기 전에는 무슨 패일까 기대를 걸지만 막상 펴보니 원하던 패가 아니기 때문에 실망을 하고 버려버린다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헤로데의 알고 싶어 함이 이러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알고 싶어 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알고 싶어 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오늘 이 아침,
저의 삶을 성찰합니다.
난잡하고 정결치 못한 호기심으로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리번거리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 대한 관심일지라도 호기심 그 이상이 아닌, 그래서 어떤 분인지 한 번 알아보고는 관심을 꺼버리는 호기심은 아닌지 성찰합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전심용 요셉 신부님
며칠 전에 가까운 동기 사제관에서 밤에 무서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차 뒤에 누가 앉아있는 것 같고 창문 밖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전 볼 때는 안 무서운 척 했지만 저도 모르게 팔찌 묵주를 빼어 들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제로서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사제가 되면 귀신을 만나도 절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 주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에 사제관으로 공소 회장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빨리 병자성사를 해 주어야 한다고 하며 차를 태워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다 귀신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혼자 당당히 들어갔고 누워있는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려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것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닦아보니 피였습니다. 신부님은 위쪽을 올려다보니 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천정에 붙어서 자신의 혀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뻘겋게 된 눈으로 신부님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선배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제가 되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매우 시골이었습니다. 밤에 집에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도 20분가량은 불이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야했습니다.
복사단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 오가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골길은 혼자 다니기에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소리를 크게 질러보기도하고 노래를 크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도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데 검은 마귀같이 생긴 것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주춤 했지만 용기를 내어 더 가보니 나무에 걸려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였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두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사람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많으신 분이지만 헤로데는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여깁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있는 ‘내적 법원’, 즉 ‘양심’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내립니다. 이 법정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죄인으로 찍히고 나면 ‘벌’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실 이 벌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반에서 시험을 잘 못 보아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때리려고 할 때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그 마음입니다.
유다처럼 그 벌을 못 기다리고 자신 스스로 그 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모든 사람이나 상황이 자신에게 벌로 다가올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위축되고 두려워지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집니다. 벌을 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또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는 이유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리만족으로 사람으로부터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움을 넘어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그러면 사람이든 귀신이든 두려워 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하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죄도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부모님도 자녀들을 혼내는 이유가 다 자녀가 다시 잘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다시 잘 하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입니다.
어제 식사하는데 한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막 나무라서 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도 다시 엄마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것입니다.야단맞았지만, 그래서 울고 싶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엄마 품밖에 없었나봅니다. 엄마는 야단친 것이 미안했는지 다시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모습이 참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엄마가 미워서 도망가 버렸다면 엄마는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잘못 하였어도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부모님께 예전처럼 달려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가끔은 매를 들 때도 있지만 두려움 없이 당신께 달려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하느님께 얼굴을 파묻으면 세상의 두려움은 다시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마치 아기가 부모가 곁에 없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나를 지켜 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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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본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입니다. 좋은 말씀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은혜로운 시간이지요. 그러나 이 음악피정이 저절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이 피정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우리 성당의 청년들이 전날에 미리 나와 스피커와 앰프, 악기 그리고 좌석배치까지 모두 미리 세팅해 놓습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밖에 나갔다가 다시 성당으로 들어오는데 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청년이 제게 전화를 합니다.
“신부님! 조금 이상합니다. 사제관 문이 활짝 열려 있고요, 신부님 방도 아주 이상합니다. 책상도 누군가가 뒤진 흔적이 있고, 옷장 문도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볼 때 옷장도 누군가가 뒤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도둑이 든 것 같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추석 명절 기간 동안 성당에 도둑 들은 곳이 많다고 하더니만, 우리 성당에서도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고 외출했던 제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지난번에 도둑을 맞아서 경비시스템을 새로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잠깐 경비세팅 하는 것도 귀찮다고 안하고 외출하더니만 이렇게 되는구나. 서랍에 돈도 좀 있는데, 참 노트북은 괜찮을까?’
부랴부랴 외출했다가 사제관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고 어수선한 제 방을 보고서 청년들이 오해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번 연휴기간 동안 어떤 작업을 좀 하느라 정리정돈을 전혀 하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마치 누군가가 뒤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어수선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제관 문은 아침에 빨리 나가느라 실수로 문을 열고 나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도둑이 들지 않았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만약 경비세팅을 해 놓고 외출했다면 걱정하지 않았겠지요. 경비세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했고, 도둑이 들었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전체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고, 그래서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어떠한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믿음’이라는 형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처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말로 걱정 없이 살기를 원한다면, 정말로 자신 있게 이 세상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소홀히 하지 맙시다. 특히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목숨을 구하는 본성(이옥순, '인생은 어떻게 역전되는가' 중에서)
노스님이 갠지스 강가에 앉아서 시를 암송하고 있었다. 그때 나무 위에 있던 전갈 한 마리가 강물에 빠져 버렸다. 전갈이 허우적대는 모습을 지켜본 스님은 전갈을 건져서 나무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전갈은 괘씸하게도 자신을 구해 준 스님의 손을 물어 버렸다. 스님은 개의치 않고 다시 강가에 앉아서 시를 암송했다.
얼마 후 전갈이 다시 나무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졌다. 스님은 다시 허우적거리는 전갈을 건져서 나뭇가지에 올려 주었는데 전갈은 또 스님의 손을 깨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갈이 또다시 강물에 떨어졌고 스님은 물에 빠진 전갈을 건져 나무에 올려 주었다. 이번에도 전갈은 은인의 손을 깨물었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이 물을 길러 왔다가 우연히 그 광경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님 곁으로 다가갔다.
"스님께서 저 배은망덕한 전갈을 여러 번 구해 주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전갈은 매번 스님을 깨물더군요. 저 못된 걸 죽도록 내버려 두지 왜 구해주십니까?"
그러자 스님은 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시오. 저 전갈도 어쩔 수 없는 거라오. 깨무는게 전갈의 본성이니까요."
"저도 그건 압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 스님은 왜 전갈을 피하지 않습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다오. 나는 사람이고, 목숨을 구해 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 아니겠소?"
자유
김인한 신부님
살아가다 보면 주위에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곤 합니다.
그 장애물만 그 사람만 없어지면 내 안에 평화를 얻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장애가 없어지면 또 다른 장애가 우리를 가로막고,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지옥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이 있는데 그것은 머리에 아홉 개의 물뱀이 달린 괴물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괴물은 머리를 잘라도 잘라도 계속 솟아나와 지옥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싸운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찌 보면 우리 안의 괴물과 싸우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의심과 미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의심과 불안의 사나이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불안해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미움과 화해하고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이 내 안에 보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악연
변진흥
이스라엘의 헤로데 가문은 불행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이역만리 먼 곳에서 찾아왔을 때 이를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를 해칠 생각을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가 탄생한 장소를 알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가자 헤로데 대왕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있는 두 살 이하 모든 어린이를 살해했습니다. 그 아들 헤로데도 동생의 아내를 탐내 자신의 아내로 삼자, 이를 꾸짖는 세례자 요한을 살해했습니다.
헤로데 부자(父子)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그 손에 끊임없이 의로운 피를 묻힌 것입니다. 헤로데 가문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진정한 정치 지도자였다면 메시아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에 의지하여 정복자인 로마를 몰아내는 역사를 이루어야 했고, 진정 백성을 사랑했다면 백성을 회개토록 하여 진정한 삶의 길로 이끈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해 더러운 손에 피를 묻힌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외침도 너무나 공허해 보입니다. 헤로데가 소문을 듣고 만나 보려 했던 예수님은 바로 그의 아버지가 죽이려 했던 아기 메시아였고, 그가 살해한 세례자 요한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했던 분,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에 빌라도가 자신에게 보낸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신 예수님을 실컷 조롱만 하고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사형선고를 받게 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예수님의 피마저 그 손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속 권력을 뜻합니다. 헤로데 가문과 예수님의 악연은 하느님과 세속을 함께 섬길 수 없는 우리 신앙인들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은 헤로데를 따르는 욕망으로 넘실거립니다.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김병환 신부님
헤로데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불안해한다. 여러 가지 일이란 복음서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풍랑을 잠재우신 일이라든지, 마귀 들린 사람한테서 더러운 악령을 쫓아내신 일이라든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신 일이라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헤로데는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이 자신의 권력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헤로데는 어떤 사람인가? 당시 헤로데는 로마의 통치하에서 유다 팔레스티나(이스라엘) 지역을 지배하던 왕이었다. 헤로데의 통치기간은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4년까지로 알려져 있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기 전에 먼저 갈릴래아와 이두매와 사마리아를 장악하고 유다의 땅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왕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헤로데는 유다의 왕이 되면서 유다인들의 적개심을 없애고 자신의 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많은 선심성 일들을 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증축한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헤로데는 유다교로 개종한 자의 후손으로서 그 태생만 유다인이었다. 그가 한 일들을 보면 유다인이라기보다는 악행을 많이 저지른 하잘것없는 이방인 독재자였다. 이러한 그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헤로데는 세속의 권력에 맛들여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자주 폭력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왕권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당시 유다인들이 따르던 최고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도 그였다. 헤로데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가뜩이나 불안하게 생각했다.
세상의 권력이란 이처럼 진리를 외면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죽이고 하느님의 아들마저 경계하면서 죽이려 한다. 따라서 권력은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장애물이다. 권력은 왕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교만과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이웃을 지배하려 하고,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이웃을 누르려 하는 것 모두가 권력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믿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권경렬 신부님
오늘은 배와 항해를 우리의 삶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배에는 바닥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를 다 만들고 나면 맨 밑바닥에 바닥짐을 싣는다고 합니다. 배를 바다에 띄우기 위해서는 바닥에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바닥짐이 없다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뒤집히고 만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이 바닥짐은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중심일 것입니다. 그 바닥짐은, 무겁고 힘들다고 내던질 수 없는 인생의 알맹이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항해할 수도 없습니다. 항해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하는 당연하고도 소중한 바닥짐이며 중심입니다.
슈바이처도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며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배에 여러 가지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항해에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성공. 명예. 부. 정의. 평화. 진실. 나눔. 사랑, 등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것들은 항해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 많은 짐들은 배를 무겁게 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힘겹게 합니다. 풍랑이라도 만나면 침몰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진실을 저버리고, 정의에 눈감고, 나눔은 나중으로 미루고.. 항해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빨리 나아갈까만 고심하며 마구 치달아갑니다. 짐이 없어 가벼운 배는 빨리 나아가 목적지인 항구에 빨리 닿습니다. 그러나 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빈 배인 것입니다.“
바닥짐과 빈 배 이야기...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레아의 영주 헤로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고 두려워하며,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헤로데. ‘그의 삶의 중심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그를 보호해주리라 믿고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나의 중심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끝내 붙잡으려는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하깨는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임을 깨닫고 ,하느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성전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너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돌아보아라..”
복음은 나의 삶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삶에서 중심은 올바른지 그리고 나의 삶의 태도는 성실한지? 나의 항해는 어디쯤에 와있으며 배에는 무엇이 실려 있는지? 항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선한 의지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무겁다는 이유로 바닥짐을 내던지고 출렁이는 물결에 균형을 잃고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아무리 벌어들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니었는지 지난 삶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세상의 모습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새로운 파도가 우리를 덮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소용돌이가 치는 한가운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중심이 있듯,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심중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출렁이며 소용돌이치는 물결의 중심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닥짐이 없이는 항해할 수 없는 이치를 알기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디 중심인 하느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용기와 지혜와 성실을 주시기를 청하며 마침내 다달은 항구에서 빈 배의 허무가 아닌, 만선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누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며, 남은 항해가 빈 배가 되지 않고 마칠 수 있기를 원한다면, 바닥짐이란 내어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거짓과 불의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과 함께 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위하여 기꺼이 투신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항해가 빈 배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올바로 하기
조성풍 신부님
동해의 해변을 따라 가다보면 어촌 마을들의 작은 포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작은 포구에는 작은 등대들이 있습니다. 등대란 배들이 밤에 뱃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위의 말이나 자신의 그릇된 방향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등대라는 정확하고도 안전한 방향을 향해 배는 움직입니다.
이처럼 인생에서도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헤로데는 소문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진실을 덮으려고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끔 헤로데와 같은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예 또는 아니오’의 확고한 기준을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준, 삶의 등대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력은 민중을 두려워해야
김덕진
예수님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온갖 기적을 행하시자 민중은 예수님을 칭송하고 따랐다. 그러자 당시 식민통치를 하던 위정자들은 예수님의 움직임에 바짝 긴장했을 것이 분명하다. 세례자 요한에게 누명을 씌워 죽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례자 요한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이후 ‘사람으로서 생명’을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유로 잃게 되시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도 발견한다.
역사의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늘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역사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멀지 않은 708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아무런 죄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으며 결국에는 죽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진실은 밝혀지고 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로 모든 것이 투명해진 것처럼. 예수님은 엘리야이기도 하고 세례자 요한이기도 하셨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해 죽였지만 민중한테는 그리스도라는 더욱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난 셈이다.
우리 역사도 그랬다. 민주화를 외치고 인권과 평화를 지키려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진 고초를 당했지만 그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 강력하게 싸워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지켜왔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평생을 농사짓고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야 하는 농민들이 있고, 경찰의 진압방패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비정규직 노동자도 있다. 권력은 민중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민중을 힘으로 누르려고만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모두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사회, 하느님 나라는 그런 곳일 것이라 믿는다.
지병철 신부님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왜 만나고 싶어할까요?
그냥 예수님이니깐 죽이고 싶어서일까요?...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수 있었던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 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세례자요한이라 쉬이 죽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딸아이의 소원때문에 할 수 없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잃었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는데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떠돌기시작하는 것입니다.
헤로데에겐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영역에 또다시 누군가가 끼어들지 모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만나서 회유를 하든 안되면 죽이려 들것입니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이런 이유로 그는 예수님을 실제 만나다하더라도 예수님의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고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 기억하고 싶어 예수님을 만나보려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안경을 쓰고 예수님을 보기에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삶이 모습이 너무나 틀린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떠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암울한 상황을 벗아나가해줄 예언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을 맞추어버립니다.
로마의 지배와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없애줄 위대한 예언자가 바로 저 예수님이라 하여 만나고 싶어 따라다닙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기에 언젠가 초라해지는 예수님을 보면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답답할 정도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못하는 머리를 가진 12제자들의 무리입니다.
그들에겐 이 예수님은 정치적 인물로도, 세례자 요한으로도, 예언자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조차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 자체가 좋아서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그들의 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와 같은 상태에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둘씩 칠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들은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이 그들에겐 좋은 복이 될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늘 만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보기에 만나고 싶어하는지 어떤 이유로 만나고 싶어하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설령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예수님 자체, 하느님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면 그래서 무언가를 바래서라면 헤로데의 모습, 요한을 기억하는 사람들, 예언자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는것이 있다면 지워버리는 연습을 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로 만드셔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려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헤로데 콤플렉스>
윤경재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가 9,7-9)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13,31)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23,8.11)
루가 저자는 헤로데라는 인물을 통하여 예수님이 사셨던 시간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 됨됨이를 통하여 인간이 지닌 어두운 모습의 한 면을 그립니다.
헤로데는 남들의 이목과 소문에 민감한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가 행동하는 판단기준은 자기의 주관이 아니라 체면에 달렸습니다. 그런 인물들은 자기 내면의 의지와 실제 들어난 자기 행동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항상 갈등 속에 살게 됩니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했어야 속이 후련할 텐데 결국 남의 이목에 따라 행한 꼴이니 생각할수록 분합니다. 그 갈등이 크면 클수록 그는 더욱 포악한 성질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 그는 그 성질을 해소할 대상을 찾게 되고 아마도 예수님을 잡아다가 모든 자기 고민을 분풀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헤로데 콤플렉스라고 부를 만합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처와 아이들을 구타하는 폭력도 이와 흡사하다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알고 보니 가정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랍니다. 그들은 외면과 내면의 갈등을 만만한 상대에게 투사하는 못난이 일뿐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남들이 자기를 좋게 평가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르는 구타와 폭력을 정당하다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남들도 인정할만한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하던 차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자기 앞에 서 계십니다. 헤로데는 만사가 제 뜻대로 되가는 통쾌한 기분을 만끽합니다. 헤로데와 같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 인물들의 특징대로 그는 짐짓 거드름을 핍니다. 제 눈앞에서 어떤 기적이라도 보여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더 높고 힘 있는 자라고 증명해주기를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어도 믿지 못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체면을 살려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철저히 조롱하고 깔아뭉개어 버립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정당한지 아닌지 여부는 애당초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루가저자는 빌라도와 헤로데가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하여 똑같은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참수하는 대목을 읽으며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이 지닌 폭력성이 여실히 들어나는 장면이 바로 전쟁이며 사형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그저 자기의 체면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합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자기의 힘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 사형이라는 극형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형 제도를 행사하는 이유를 공공질서와 안녕을 지키려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지녔다는 만족감을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사형제도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그 제도를 반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사형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1,사회정의 실현 2,흉악 범죄 예방 3,교도행정 비용절약 4,피해자와 피해자 유가족을 위한 처벌 5,국민의 법 감정 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위에 열거된 이유들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여서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역사상 폭력으로 폭력이 잡힌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폭력은 폭력을 낳았을 뿐입니다. 흉악범죄 예방효과는 강력처벌보다는 반드시 잡혀서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고려해야 될 사항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런 제반 사항이 충족되고 모든 국민들의 법 감정이 수긍될 때까지 인간 생명의 고귀함과 사형 제도의 부당함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국민들의 중의가 모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헤로데라는 이름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 세상의 권력자로서 대칭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쥔 지상권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인물로서,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적 권력은 없지만 성령과 사랑의 능력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평화의 왕이라는 분으로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헤로데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크게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헤로데 대왕과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모두 예수님 때문에 당황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들고 찾아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하자 자신의 왕권에 도전 할 또 다른 유다인의 왕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고 불안하여 헤로데는 예수님 탄생전후 두 살 이하의 남자아기들을 죽여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헤로데 대왕이 죽고 또 그 자리를 계승한 헤로데 안티파스(Herode Antipas)는 갈릴레아와 페레아 지역의 영주이면서도 헤로데 대왕처럼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이복형제인 헤로데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했었습니다. 의인이었던 요한은 누차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간하다가 헤로데 안티파스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서, 어느 축제일에 그녀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왕을 기쁘게 하고 왕의 환심을 얻어 요한을 죽이게 했던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모욕한 인물입니다.
헤로테는 심리적으로 의인을 죽였다는데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큰 예언자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는데, 헤로데도 비록 그를 죽였지만 그의 인물에 대해 어떤 위압감마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등장하여 요한과 같은 일을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요한 보다 더 큰 인기를 획득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그리 쏠리자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권력자가 불안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을 제거할 뿐 아니라, 그것은 가족, 형제들까지도 그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나라의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그러한 면이 나타났지만, 로마의 갈리굴라 황제도 자신이 황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제거하고 자기는 새로운 태양, 왕이며 신으로 떠 받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 형제를 죽인 양심의 가책으로 미치게 되어 피비린내 나는 폭정 끝에 그도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헤로데는 의인 요한을 죽이고 양심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차에, 그 요한과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에 그의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누구냐"라고 묻는 질문처럼, 우리는 소문에 들리는 그분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분에 대한 증언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는데, 예수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예수님 한테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울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구속공로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헤로데처럼 에수님에게서 단순히 기적적인 것을 보고 싶다거나 혹은 물질적인 유익함을 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원하는 뜻, 자기자신을 그분께 신뢰를 드리고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문에 진정 자신과 타인의 올바른 구원을 위해 예수를 찾아가 볼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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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떤 자매님의 팔꿈치를 보고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팔꿈치가 멍투성인 것이에요. 부부 싸움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멍투성이냐고 여쭈어보니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팔꿈치뿐만 아니라 다리에도 멍투성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직 자전거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이 넘어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많이 넘어졌지요. 심지어 몇 달 전에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양 팔이 골절되기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저의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상처 뒤에 자전거 타는 실력이 부쩍 향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전거 잘 타야지.’라는 생각만으로는 실력이 향상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그래서 이곳저곳이 깨지면서 자전거를 잘 탈 수 있게 되더군요.
이렇게 자전거를 잘 타기 위해서는 시퍼런 멍이 생길 정도로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저절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 행복일까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떠한 시련 없이 내게 오는 것이 행복일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런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가 두려워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큰 잘못 때문이지요. 헤로디아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내어주었거든요. 그런데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리니 그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사실 그는 체면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은 행동을 했었던 것이지요. 헤로디아의 춤추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 앞에서 말합니다. 어떤 소원을 들어도 다 들어주겠다고……. 그러자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했던 약속을 스스로 철회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체면 손상을 걱정했던 그는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에 두려움에 체력 손상까지 입게 됩니다. 만약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지 않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래서 자신이 내뱉은 말이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도 나쁜 인물로 기록되지 않았겠지요. 쉽게 행복을 얻으려는 그의 안일한 마음에 행복과는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각자는 과연 어떤가요? 혹시 이 헤로데처럼 쉽게 행복을 얻으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때로는 불의도 저지르는 못된 짓도 과감해서 행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전거를 배우는데도 멍이 들 정도로 힘듭니다. 그런데 행복을 얻는데는 얼마나 힘들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행복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운동을 합시다.
펌프가 가르쳐 준 깨달음 (박종철)
옛날에 쓰던 펌프를 아십니까?
우물가 옆에 설치되어 있는 펌프.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단지처럼 생긴 그 펌프 주둥이 안에 물을 조금 부어넣어야만 그 펌프에서는 많은 물이 쏟아져나오는 것이지요.
주둥이 안에 물을 붓는 작은 노력으로 인해 물이 나오지만 그냥 펌프질을 하면 결코 물이 나오지 않는 내 어린 시절의 펌프.
인생살이도 그 펌프와 그리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삶에게 아무런 노력도 주지 않으면서 삶이 나에게는 너무 큰 것, 너무 많은 것을 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살아 있는 평화
최혜영 수녀님
벌써 오래 전의 일이 되어 형량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아마도 무기징역이었던 것 같다.
선고를 받은 박노해 시인의 해맑은 웃음이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애써 고뇌하는 듯한 심각한 얼굴의 검사나 판사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로운 웃음을 간직할 수 있는 그의 모습은 한 점 두려움도 없어 보였고,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자유와 정의와 해방의 정신을 꺾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물리적인 공권력을 이용하여 요한을 신체적으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고귀한 영혼만은 꺾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라는 소문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강한 척했지만 탐욕과 허영과 두려움에 갇힌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에게서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강인한 힘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될 인간에게 굴복하기보다는 비록 고통과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하느님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기도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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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제게 있어서 참으로 기쁜 날이었습니다. 즉, 영명 축일이었지요. 그래서 많은 분들로부터 축하 인사도 받고, 선물도 많이 받았답니다. 하지만 이번 영명 축일이 예년과 달리 특별하게 기쁜 이유가 있답니다. 선물을 많이 받아서? 문자 메시지를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받아서? 새벽을 열며 카페를 통해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아서?
물론 저를 기쁘게 했던 일들이지요. 하지만 저를 더욱 더 기쁘게 했던 것은 이번 영명 축일에는 특별히 많은 신부님들의 축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제가 본당을 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군다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서, 아무런 축하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연세 많으신 신부님들로부터 후배 신부님들까지 저에게 많은 축하를 해주셨다는 것은 저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료 사제들의 기억 속에 제가 있다는 이야기이니까요.
이렇게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기에 더 커다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리고 큰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더 커다란 실망도 하게 되는 것 같더군요.
사실 얼마 전에는 교구의 어떤 신부님께 약간 서운한 감정을 가졌었답니다. 그 본당 교우들이 9월을 맞아서 성지순례 장소로 제가 있는 갑곶성지로 정했답니다. 그리고 그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갑곶성지는 부자라서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불과 한 달 전에 통장 안에 들어있는 잔액이 7,000원 밖에 되지 않았던 이곳 갑곶성지가 부자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면서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더군요(마음만큼은 부자 맞습니다 ㅋㅋ). 더군다나 그 신부님은 이 갑곶성지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으셨거든요.
이렇게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힘을 얻기도 하고, 또 반대로 실망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는가 라는 생각……. 과연 여러분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망을 안기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그리고 커다란 힘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사랑과 힘을 보여 주면서, 우리 역시 그 모습을 간직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요? 그러한 사랑과 힘을 받기에만 급급하지, 정작 자기 자신은 그런 모습을 간직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벱니다. 그런데 그 명예가 헤로데의 마음을 과연 편하게 했을까요? 오히려 더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는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갖으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습니다. 갈릴래야 영주인 헤로데가, 즉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은 왜 일까요? 바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힘을 받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명예가 그렇게 중요했던 것이지요.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내 이웃에게 힘과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때 마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것입니다.
내 가족에게 사랑과 힘을 전해 줍시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는 이유(이진우, 지하철 '사랑의 편지' 중에서)
어느 유치원에서 소풍을 갔습니다.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시냇물은 왜 소리를 내며 흘러가요?"
아이의 질문에 선생님은 시냇물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정말 시냇물은 '졸졸' 정겨운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소풍에서 돌아온 선생님은
이 책 저 책을 들추며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는 것은
물 속에 돌멩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들쑥날쑥한 돌멩이가 있기 때문에
시냇물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우리의 인생도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곱고 성숙한 인격은 고난의 돌멩이와
함께 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인생의 돌멩이들을 바르게 보는
우리네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치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큰 죄를 짓고는 불안하여 살기 힘들다고 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반문하며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하는 헤로데 영주, 바로 내면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이런 저런 상처들로 인해 그 내면 깊이에는 이런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이 깔려있는 법입니다.
이런 불안이 잠재해 있는 한 참으로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 영혼에 또 하나의 심각한 질병이 있으니 삶의 허무감입니다.
유한한 인간조건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허무의식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생명의 하느님을 찾는 코헬렛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짙어져가는 삶의 허무감입니다.
늘 반복되는 제자리의 삶,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자각, 예기치 않은 죽음들, 모든 것이 잊혀 져 간다는 사실 등, 모든 것이 허무로 귀착되는 듯합니다.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은 평화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요, 허무의식은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불안과 허무의식이 깊어질수록 갖가지 중독에 정신질환이 뒤를 잇고, 십중팔구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비전을 지니지 못함으로 인해 자초한 화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태양이 지면 온통 밤의 어둠이듯이, 하느님 태양이 사라지면 마음은 온통 불안과 허무의 어둠입니다.
이런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과 허무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은 하느님 하나뿐입니다.
생명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너무나 잘 잊고 지내는, 너무나 평범하고 자명한 진리입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살아있는 중심이, 비전이 될 때, 비로소 단조로운 반복의 나날은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날로, 불안과 허무의 나날은 빛과 생명, 평화로 충만한 날로 변모될 것입니다.
오늘도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영혼의 질병인 불안과 허무의식을 치유해 주시고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하루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 베어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하면서 예수를 한번 만나 보려고 하였다.
강영구 신부님
요즘 인기 있는 책 중에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위즈덤하우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49가지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자기를 잃지 않는 삶’과 ‘사랑하는 삶’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리고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도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중에서 단 하나라도 제대로 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짧고 유한한 인생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도 많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생명을 해치고 이웃과 형제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생명을 파괴하고 형제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만과 사련(邪戀) 빠진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는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하여 세례자 요한을 살해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도 있지요.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그의 목을 짓누릅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업보(業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헤로데의 호기심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을 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開始)를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둔 시점에 두었다.(마태 4,12; 마르 1,14) 그 후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는 반응과 함께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마태 14,1-12; 마르 6,14-29)
여기서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는 전승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삭제하고, 헤로데의 호기심을 덧붙여 그가 예수를 만나 보려하는 의도를 지적하고 있다. 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은 당시 누구에게나 있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바로 곁에서 보고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당시 팔레스티나의 최고 권력가인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가 관연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던 것이다. 헤로데는 아직 예수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이 그의 귓전에 몰려왔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두고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아니면 옛 예언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헤로데에게 있어서 예수는 소생한 세례자 요한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보도되는 배경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관련성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가는 이 관련성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헤로데와 예수를 관련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예수를 정말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어차피 법정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루가 23,6-12) 그러나 그는 예수를 진정 알려고 하기보다는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한 번 보고 싶어 했을 뿐이다.(루가 23,8)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예수를 경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아인 동시에 종교적인 메시아여야 한다.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부분이 헤로데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헤로데 자리는 위태로워지게 될 것임으로 그는 자연히 불안에 싸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결국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당황한 헤로데 대왕이, 겉으로는 자신도 경배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몽땅 죽여 버릴 음모를 품지 않았는가 말이다.(마태 2,3.8.16)
헤로데 대왕은 그 음모를 실행에 옮겼고,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또한 겉으로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결국은 예수의 사형선고에 적극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빌라도와의 반목을 깨고 친분을 다지게 된다.(루가 23,6-11)
누구든지 예수를 대면하려는 자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헤로데 대왕도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도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려 했기에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그분께 다가서느냐에 따라 그분 또한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오실 것이다.
우리의 윤리적 환경
윤성희
신약성경에는 헤로데라는 이름의 인물이 여럿 나오는데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헤로데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다. 유다인의 법을 거슬러 형수와 결혼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버렸으며, 빌라도가 보낸 예수님을 실컷 조롱하다 되돌려보낸 이 난폭한 인간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다.
아버지인 헤로데 대왕은 원래 안티파스가 아닌 다른 형제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왕위를 물려받기로 되어있던 형들이 반역죄로 아버지에게 처형당하고, 이복형제인 안티파트로스 2세도 아버지를 독살하려다 실패하자 비로소 안티파스가 왕위 계승자가 된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티파트로스 2세가 처형당하자 헤로데 대왕은 다시 마음을 바꿔 자기 나라를 아들 셋에게 나누어 주기로 한다. 그리고 안티파스는 왕보다 못한 영주라는 직함을 달고 갈릴래아와 페레아를 다스리게 된다. 그 후 40여 년 간 별 탈 없이 사는 듯했으나 세례자 요한까지 죽이고 결혼한 형수이자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결국 사달이 난다. 헤로디아의 남동생이 황제에게 모함하는 바람에 재산을 몰수당한 채 쫓겨나 유배 중에 죽게 된 것이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삶을 살았던 게 헤로데 영주였고, 이런 사정을 알고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이 누구냐고 궁금해하는 그의 모습에도 뭔가 짠한 데가 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죽고 죽이는 걸 보고 자란 아이 마음에 뿌리 깊은 불신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모두를 의심하며 사는 그에겐 누구보다 구원의 손길이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원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헤로데는 그 기회를 잡지 못한다. 이미 불행의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졌기 때문일까? 빌라도가 보낸 예수님에게 온갖 불행을 단숨에 없앨 기적만 바라다가, 구원을 놓쳐버린 것이다.
요즘 신문을 읽다 보면 ‘패륜적 범죄’ 기사가 종종 눈에 띈다.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가장 가혹한 징벌을 내리라고 소리치고픈 마음이 솟구치지만, 그런 이들을 자꾸 만들어 내는 이 사회에 대한 반성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물론 환경이 나쁘다고 전부 흉악한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잉태하는 환경을 만든 게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중에 무한경쟁과 불신의 유해가스가 끊임없이 늘어난다면, 우리의 윤리적 환경은 결국 위험 수준에 다다를 것이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 (루카 9,7)"
'이 모든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같이 있는 것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시기 시작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다음부터이고, 또 예수님의 초기 활동이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몹시 당황했다는 것은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 아닙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자기가 잘못했음을 느낄 때의 일이고, 지금 헤로데가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의 권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힘의 작용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라는 말에는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등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소문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헤로데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말은 헤로데의 호기심을 나타내는 말이고,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라는 말은 궁금하니까 그냥 한 번 보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진짜로 되살아났다면, 그래서 그것을 헤로데가 확인했다면, 헤로데는 요한을 다시 죽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부하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조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라는 이름의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불안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하고 말하였다(루카 13,31)."
지금 이 구절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알고 미리 와서 예수님께 알려 드린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은 헤로데가 바리사이들을 보내서
'살고 싶으면 이곳을 떠나라.' 라고 위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2-33)
이 말씀은 아무도, 헤로데도 예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죽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여우'로 표현하신 것은 그가 간사하고 교활하고 비겁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하찮은 존재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하는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었고, 또 떳떳하게 일을 하지 못하고 숨어서 음모나 꾸미는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로마제국의 권력 앞에서 하찮은 존재였고,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는 더욱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다음에 기고만장 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처음에 세례자 요한이 그의 죄를 비판했을 때 회개하기는커녕 요한을 죽여 버린 것도 그렇고, 요한이 예수님으로 되살아났다는 소문을 듣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도 그렇습니다.
죄로 죄를 덮으려고 하는 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범죄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 라고 표현합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만 주변에 두고, 자기가 할 수 없는(하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옳은 일이라고 착각하고...
그래서 사과해야 할 일도 사과하지 않고, 뭔가 잘못되어도 남 탓만 하고...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
이 말씀은, 자기 안의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된다는 뜻인데, 스스로 그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그 어둠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있어야 할 곳은 지옥뿐인데, 그 지옥이라는 곳 자체가 언젠가는 소멸되어 사라지게 될 곳입니다(묵시 20,14).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
이장규 수녀님
참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새 삶을 살게 된 사람들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분을 증오하고 심지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오늘 복음의 헤로데는 후자의 모습입니다.
공관복음 여러 곳에서 나오는 헤로데의 모습을 따라가 보면 그는 처음부터 뼛속까지 악인은 아니었던 같습니다. 비록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탐해서 아내로 취했지만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었던 때도 있었습니다.(마르 6,20) 그랬던 그가 많은 신하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요한의 목을 베어 헤로디아의 딸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후 헤로데한테 들려오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그를 몹시 당황스럽고 불안하게 합니다.
병 자를 치유하고 죽은 이를 살리며 죄인을 용서한다는 그 거룩한 분의 소문은 하느님의 사람 요한을 죽인 헤로데의 죄책감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기회를 노립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난 헤로데는 그분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빌라도한테 넘깁니다.
헤로데의 모습은 한번 악의 유혹에 굴복한 인간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헤로데의 모습만 보면 한번 죄에 빠진 사람은 점점 커져가는 악의 세력에서 헤어나오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으로 착하게 살고자 마음먹었음에도 삶의 어려움 앞에서 자주 악의 유혹에 넘어지는 약한 우리의 모습을 만나더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녀인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못 박아 죽인 인간의 가장 깊은 어둠이며 최고의 악을 뚫고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넘어진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군가 깊은 어둠 속에 있다고 느낀다면,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예수님께 손을 뻗을 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희망을 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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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책상 앞에 앉아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고 있어도 머릿속이 새하얄 뿐입니다. 특히 시간이 부족하거나 어떤 문제로 인해 고민이 생겼을 경우에는 글 한 줄 쓰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여유가 많거나, 또는 별다른 고민이 없을 경우에는 글이 의외로 술술 풀어 써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갔다가 글귀가 떠올려지거나 아침에 자전거를 타다가 좋은 생각이 날 때도 있지요.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할 때 역시 제가 글을 쓰는데 좋은 여건을 만들어 줍니다.
결국 시간 없다고 서두를 때, 또한 고민 속에 있을 때에는 글이 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여유를 갖고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 글도 잘 써집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전체가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것에 집착합니다. 집착을 해야지만 문제의 해결을 더 빨리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뜻밖의 상황에서 이루어질 때가 더 많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을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지금 힘들어하는 문제들을 의외로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보십시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주었습니다. 그 역시 세례자 요한을 존중했었지만, 자신의 체면 때문에 죄 없는 의인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등장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을 때, 열린 마음을 갖고 체면보다 의로움을 선택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체면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맞추려 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인간적인 기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에는 이러한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하지요.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러한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즉, 이제 더 이상 우물쭈물하면서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지금 주님께서 주신 기회를 최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든 장애물에 부딪혀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실패 역시 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슈레더)
나는 늦깎이?
그는 22세에 사업에 실패했다.
23세에 주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24세에 또 사업에 실패했다.
26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29세에 의회 의장 선거에 낙선했다.
31세에 대통령 선거에 낙선했다.
34세에는 국회의원 선거에도 낙선했으며,
39세에 또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했다.
46세에 상원의원 선거에 낙선하고,
47세 부통령 선거에 낙선하고,
49세엔 상원의원 선거에서 또 낙선했다.
그러나 51세에... 그는 드디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실패에 대해 좌절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후, 아니면 조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분명히 빛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두려움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내 헤로디아의 꼬임에 빠져 본의 아니게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고 난 뒤 후환이 두려웠던 헤로데였습니다. 괜히 잔칫상 앞에서 우쭐하는 기분에 만용 한번 잘 못 부린 것이 대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참수로 이어진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수백 번 후회해 봐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 뒤로 그의 꿈자리는 얼마나 뒤숭숭해졌는지 모릅니다. 잠을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의인의 목숨을 날려버린 헤로데, 큰 악행을 저지른 헤로데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살아생전부터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이은 예수님의 출현은 더욱 그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세례자 요한이 환생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린 자신을 찾아와 보복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헤로데의 모습이 참으로 비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헤로데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한 두려움의 지배를 받아 삶이 위축되고 힘이 소진되어 힘겨운 나날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 이웃에게 저지른 과오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잊혀질 것에 대한 두려움, 소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느님 진노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무기는 사랑입니다. 요한 1서는 이를 잘 뒷받침 해줍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한1 4장 18절)
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저 두려움이 사라지기만을 희망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두려움에 당당히 직면해야 하고 대처해야 하는데, 그 비결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열렬하고도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수시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끊임없이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두려움의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권고하십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희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야 41장 10절)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데, 두려움을 느끼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자리하시고, 그분의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면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의 해독제는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신앙입니다. 또한 굳건한 신앙의 기초는 열렬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할 때 우리에게 두려움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헤로데가 남은 생애를 두려움 속에 부들부들 떨면서 살았던 것에 비해 세례자 요한의 삶은 정녕 두려움에 당당히 맞선 빛나는 삶, 두려움을 넘어선 승리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내면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과 굳건한 믿음으로 가득 찼기에 자신의 목을 베러 온 휘광이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겁내서도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시면서, 너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신명기 31장 6절)
무의식적 갈망
심종미 수녀님
요한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던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죄책감과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죄책감, 걱정과 공포 속에서 떠오르는 예수에 대한 궁금함…. 이것은 단지 ‘요한일까’라는 의구심과 두려움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안에 드리워진 하느님께 대한 갈망, 목마름일 것입니다.
유영철 사건이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을 살해하고도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하며 잡혀가던 그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마음속에도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한테 숱한 폭언과 폭행을 당하며 자라난 그였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한 인간의 죄스러움 속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에는 치유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을 진작 알았더라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진솔하게 받아봤더라면…. 그가 그렇게 살인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한테도 숨겨져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스러움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발견하고 또한 이웃한테도 그 갈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심심풀이 땅콩, 예수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소문을 듣고 헤로데는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저는 요즘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눈이 안 좋은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은 매일 꼬박꼬박 챙겨서 읽고 자세히도 읽습니다.
책을 읽더라도 뭔가 새롭게 깨달아 알기 위한 책은 읽지 않고 수필처럼 그저 부담 없는 글만 읽습니다.
새롭게 깨달아 알기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거나 알고 공감되는 얘기를 읽으면서 마음의 위안이나 삼고자 함입니다.
이는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10대와 20대 때와는 달리 알 만큼 아는 이제 더 이상 뭘 깨달아 알고 싶은 것이 없고, 새로운 배움과 깨달음으로 나를 바꾸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새롭게 하려는 생각은 없고 새로운 것만 호기심(?) 차원에서 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을 많이 보게 되는 것보다 새로운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이 더 우리에게 필요하지요.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 자못 흥미롭지만 이 관점에서 보면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더 잘 그리고 더 많이 알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기의 인생을 바꾸려 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말이 있는데, 심심한 헤로데가 예수님을 심심풀이 땅콩 삼은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읽는 것도 이런 것은 아닌지. 내가 좋은 강의를 찾아다니는 것도 이런 것은 아닌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까이 예언자의 한탄은 오늘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고생을 다하지만 손에 쥐게 될 결실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늘 뭔가 아쉽고, 부족하고, 충족되지 않아 슬픕니다. 기를 쓰고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한 충만감’ ‘완벽한 충전’을 느끼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지요. 목숨 걸고 노력한 끝에 뭔가 손에 넣었다하면, 그것도 한 순간입니다. 순식간에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맙니다.
결국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만사는 유한합니다. 오래가지 않아 연기 사라지듯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결국 믿을 곳이라곤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며 그분의 나라만이 절대적인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왕, 비록 로마 식민지 체제하에 제한된 권력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속국의 왕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권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참수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헤로데의 한 마디에 한 사람의 목숨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원하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즉시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그였지만 그 역시 늘 허전했습니다. 늘 뭔가 모자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 예수님의 진리 앞에 큰 혼란과 불안,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껍데기뿐이 헤로데의 실체, 권력 뒤에 숨어있는 인간적 나약함과 한계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지니고 있었던 진리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헤로데 왕이었지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했던 것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느님 앞에 승복하기 위한 만남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고, 신앙의 진리 앞에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헤로데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여행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하느님은 절대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생애 전체를 걸 가치가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선으로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죄의 인정은 뉘우침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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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짖을 가(呵), 꾸짖을 책(責), 이렇게 두 번의 꾸짖음으로 이루어진 가책(呵責)이란 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책이란 저지른 과오에 대해 뉘우치며 자신을 꾸짖고 또 꾸짖는다는 뜻이다.
가슴이 잠깐 뜨끔하는 정도의 것을 가지고 가책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구나 살면서 가책을 느낄 일을 경험한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보통 우리의 마음이다.
물론 같은 잘못의 반복으로 죄의식에 묶여 헤어나지를 못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아예 가책을 못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는 듯 하다.
무디어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타고난 마음의 구조가 잘못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잔인하다 싶을 정도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뉘우친다는 것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선물일지도 모른다.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쉽게 주고 받는다.
하지만 후회란 항상 결과에 대한 느낌이니, 미리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삶이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그저 머무르지 말고, 뉘우침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다.
뉘우침이 잘못의 영향을 상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대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어이없는 이유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헤로데는 모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잘못들, 실수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별 것 아닌 작은 부정적 감정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인간적 약함은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게 한다.
유혹은 늘 우리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간적 약함 때문에 우리는 다시 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께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잘못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뉘우쳐야 한다.
뉘우침이 아프면 아플수록 다시 제대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잘못된 일에 대하여 자신을 탓하고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미신 손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뉘우쳤으면 다시 일어서는 거다.
호기심과 관심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개신교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한 사람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베드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개신교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가 베드로가 아닌 그의 신앙 위에 세워졌다거나, 아니면 베드로가 그냥 모든 신앙인을 대표해서 불림을 받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를 부르시고 그의 이름을 반석이라는 의미의 케파, 즉 베드로로 새로 지어주셨다고 믿습니다.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실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당신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성령을 부어주셨음을 보고는, 그를 기초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이 땅에서 죽음의 힘도 그 교회를 누르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구체적으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데,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이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이기에, 하늘나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구원의 열쇠를 이 땅에 맡기고 가신 것이기에, 그 권한을 꾸준히 행하며 또한 교회 일치의 중심이 될 베드로의 후계자들이 이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성당 밑에 베드로의 유해가 있다고 말로만 전해져 내려왔지 거의 2,000년 동안 확인을 하지 못한 ‘물음표’였습니다. 그래서 대성당 지하를 발굴해 보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물론 일부는 반대했습니다. 팠다가 유해가 발굴되지 않으면 가톨릭의 정통성 자체가 의심받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나와도 진실이고, 나오지 않아도 진실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라며 발굴을 명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가 단순히 예수님이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인지 아닌지만을 알기 위해 만나보기를 바라는 모습과는 차이기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만 던지고 나가버린 빌라도와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관심’은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1939년 교황 비오 11세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에 안장할 때 중앙 제대 밑 갈라진 벽 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무덤에는 서기 150년경에 만들어진 천개(덮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 벽에는 ‘여기 베드로가 있다.’는 문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9년 8월 이 무덤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성당 제대 밑에서는 한 유골이 발굴 되었는데 조사 결과 그 유골은 1세기경 골격이 큰 발목이 잘린 60대 중반 남자의 뼈로 밝혀졌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사형을 당한 베드로를 내리기가 어렵게 되자 병사들이 그의 발목을 끊어서 시체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티칸에 대성당을 세우도록 지시한 이유는 당시 바로 그 곳에 베드로가 묻혀있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당시 7개의 대성당을 세우라고 했는데 각 성당에 합당한 유물이 없이 세워진 성당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베드로 성당은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져 죽음의 힘도 그 것을 누르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것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관심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직 관심은 없습니다. 호기심은 자신의 궁금증을 채우려는 것이지만 관심은 내가 그 궁금증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호기심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아무 투자도 하지 않지만,관심은 많은 노력과 투자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호기심은 구원을 주지 못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파고드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십니다. 헤로데가 관심만 있었어도 본인이 찾아나서는 노력쯤은 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탄 트리는 무엇입니까? 왜 장식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을 호기심만으로 보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파고든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이 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든 생명나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즉 몸이 생명나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생명나무가 태어나신 날이기에,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생명나무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성탄트리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참으로 관심이 있다면 성경책이 너덜너덜하게 닳아 있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나를 움직일 수 있어야 관심이고 믿음이고 사랑입니다.그러나 호기심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한 특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헤로데나 빌라도도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호기심이 관심으로 성장하지 못했기에 구원을 받지 못했음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