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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9월 25일 (녹)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9.25|조회수257 목록 댓글 0

제1독서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3,1-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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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자,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베드로가 답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서 헤로데의 의문으로 제기된 예수님의 신원 문제는 오늘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드린 답변은, 안타깝게도 헤로데가 전해 들은 소문(루카 9,7-9 참조)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되살아난 옛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으로 삼으려고나 하였을 뿐(요한 6,15 참조), ‘수난을 겪는 메시아’ 곧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돌아가심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하실 구세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살리는 그 길을 방해 없이 끝까지 가시고자 베드로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가끔은 우리도 하느님의 계획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장의 변화만 바라다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군중의 몰이해와 외면을 이겨 내는 세월 끝에 성부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셨고, 성 비오 사제도 오십년이 넘게 오상(五傷)의 고통을 참아 내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면, 우리라고 어찌 그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때와 방식을 마련해 두셨음을 확신하며 언제나 희망 안에서 이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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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짧게 보도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것은, 루카 복음의 지속적인 서술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루카 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의 의도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와 서로 친교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공간적 흐름이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길에 십자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서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른바 승리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 성직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혜택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위로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들은 꽤나 풍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받고 또 받는 데 익숙해지면, 주고 나누고 함께하는 데 인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제 경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영성 훈련을 한들 제 삶이 풍요로우면 이웃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 삶에 부족함이 없으면 하루 끼니가 아쉬운 이들의 형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배부른 이만 모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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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분명하게 대답하지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른다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평화와 생명이 넘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평화와 생명을 얻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변하려면 먼저 내 안에 깃든 온갖 종류의 어두움과 악의 기운, 이기심들을 없애야 합니다. 반면 생명의 기운, 선한 마음, 남을 위하는 마음들을 살려야 하지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고, 증오와 의심을 사랑과 신뢰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내 생활에서 얼마만큼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변화하고자,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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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메시아 고백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실 수도 있고, 훌륭한 ‘멘토’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출세를 보장하는 ‘현자’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된 메시아가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1911년 비오 신부의 오상은 시작되었고, 1918년 9월 20일 비오 신부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던 중에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오상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꽃향기가 났다고 합니다. 

비오 성인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시관과 채찍질의 고통을 실제로 느꼈습니다. 1968년 성인은 오상을 받은 50주년 기념 미사를 장엄하게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9월 23일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선종하였습니다. 우리도 성인처럼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 안에 지니는 영광을 소망해 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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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더불어, 「코헬렛」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탄복하는 것이 ‘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관점에서 세상사를 하나하나 새겨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깁니다.

여기서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에트’를 종종 어떤 행위를 위하여 사람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적절한 시점’을 뜻하는 그리스 말 ‘카이로스’와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때’를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정하신 ‘주어진 기회’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은 우리가 행한 일들의 전적인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금’이 하느님께서 이 일을 위해 주신 때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의식’은 지니고 있으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체 내용을 시작과 끝의 흐름 안에서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이렇게 모두 정해진 때가 있고 그 세상사의 전체적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우리가 수고를 들여 행하는 모든 일이 어떤 보람을 가질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반복하는 근원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애써 해낸 일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질문을 조금 바꾸어 던져 보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 내가 한 일에서 내 역할이 미소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내가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코헬 3,20 참조) 내게 ‘주어진 기회’에 해 놓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의미를 찾게 되는가?’ 「코헬렛」이 던져 준 ‘허무’와 ‘때’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인간 조건 속에서도 충만한 의미의 비밀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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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 또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자신의 주변 인물 정도로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군중과 달리 베드로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 삶의 주변 인물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생각,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흔히, 예수님께서 ‘나’의 뜻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예수님을 주변 인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 자신이 중심이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맞추어 움직여 주시는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며, 또한 정반대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중심이시고, 그 중심에 맞추어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주님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청원과 함께 반드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중심이시며, 저는 그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제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하소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대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서는 그 고난 뒤에 반드시 우리를 되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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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인심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거꾸로 돌아가도, 곡식들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맞추어 충실하게 그 열매를 맺어 갑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가까이 오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유가(儒家)의 전통 가운데에는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에 딱 들어맞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시’는 곧 ‘천시’(天時)입니다. 하늘의 때이지요. 하늘이 정해 놓은 때에 딱 들어맞게 행하는 것이 곧 사람의 도리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면, 그가 곧 성인(聖人)이고, 그렇지 않으면 소인배에 해당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때가 이르자,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 또한 ‘시중’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이제 곧 때가 이르게 되니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제자들의 태도를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때에 맞춘다는 것은 신중하게 산다는 것이며,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식별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신중하거나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지만, 용케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실지에 대하여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각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때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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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구세주라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지녔기에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주님께서는 침묵을 명하십니다.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수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참메시아가 되십니다. 구세주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역사에는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을 살아 있는 구세주라고 당당하게 외친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다릅니다. 그러기에 분열만 일으키다 사라졌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면 메시아가 아닙니다. 고통과 수난을 피하려 들면 영적 지도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끌어 주셨기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언제라도 은총이 답인 것이지요. 사람은 다만 도구일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스피커’일 뿐입니다. 이를 잊어버리기에 자만에 빠집니다. 메시아 대접을 받으려 합니다. 

‘죽지 않으면’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훗날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희생하고 침묵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천상의 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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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스승의 이 질문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어떤 세상의 구원입니까? 당연히 우리 인류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내가 책임질 사람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세상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한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따르느냐? 무엇을 바라면서 신앙煇걋?하고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재앙을 없애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믿음은 불행을 피해 가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잘 극복해 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더 나아가 고통마저도 자기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여기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데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주인님’의 줄인 말입니다. 무엇의 주인이겠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내 모든 소유의 주인입니다. 그분께서 주셨기에 내 몸이 있고,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이 고백에는 이렇듯 엄청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들은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걱정을 하지요.

“별로 고생도 하지 않고 전쟁이나 혁명 등을 겪어보지 않아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에 대한 판단력도 부족하다.”

정말로 그럴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는 인터넷을 하면서 자란 세대라서 정보 습득이 빠릅니다. 따라서 나이 든 세대보다도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 역시 젊은이보다 더 나은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서 현재의 어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른은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현재를 바라보지만, 젊은이는 미래를 지향하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서로 간의 이렇게 좋은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즉, 어른에게는 지혜를 얻고, 젊은이에게는 실행하는 추진력을 얻어서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들을 추려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만 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지금 함께 계시는 살아있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있었던 한 분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침내 베드로에게 빛이 비치어, 그분께서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므로 어떤 예언자보다 큰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육화하신 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렇게 모든 시간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향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한순간에 머무시는 주님이 아니라, 또 미래에만 희망을 둘 수 있는 주님이 아니라, 모든 시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독서에 나와 있듯이,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코헬 3,11 참조).


시간이 가면 모든 게 바뀐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능동적으로 바꿔가야만 한다(앤디 워홀).


새로운 변화로 나아갈 때

2020년 1월 12일(주일). 갑곶성지에서 어느 성당의 구반장님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했습니다. 새해의 기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날, 올해에도 강의가 많겠구나 싶었습니다. 계속해서 강의가 끊이지 않았으며, 곧 다가올 사순시기에도 강의가 너무 많았고 심지어 연말인 12월의 대림 특강까지 잡혀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월 12일 이후 강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참, 5월 28일에 한 번 하기는 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며칠 이러다 말겠지 싶었습니다. 흔한 감기와 똑같거나 더 약하다고 방송에서는 말했고, 날이 조금 따뜻해지면 사라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코로나 확진자는 멈추지 않았고, 사람들은 마스크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비대면의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강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못할 지경이었는데 강의를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강의로 이제까지 바쁘게 살아오다가 마치 실업자가 된 기분으로 강의가 없는 한가한 생활을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다른 상황을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변화의 길로 나아갈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제 허무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에 이어, 오늘 코헬렛 저자는 우리에게 그 유명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씀을 주제로 가르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 그리 마음에 절절히 와 닿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코헬렛 3장 1~5절)


때와 관련된 코헬렛의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천번 만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일천한 경험과 보잘 것 없는 지난 삶을 통해서도 때의 중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런 때가 있더군요. 때로 인간적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도무지 방법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였습니다. 그때는 그저 마음 크게 먹고, 인내하며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경우도 평생에 걸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인간의 때입니다. 인간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입니다.

이상하게 움직일 때 마다 좌충우돌, 여기 상처 저기 상처, 상처 투성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입도 굳게 다물고, 조용히 침묵 속에 자숙하고 성찰할 때입니다.

순풍에 돛단듯이 만사 형통, 승승장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 마다 잘 되고, 탄탄대로를 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더 겸손해지고, 더 예의 바르게 처신 할 때입니다.

곳간마다 추수한 곡식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일 때, 갑작스레 은행 잔고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것들을 주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때입니다.


적당한 때를 파악하지 못해 패가망신하고 동네방네 창피스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해먹을만큼 해먹었기에, 이제 연세도 연세인만큼, 모든 것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물러설 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기 남아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추한 모습을 보이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늘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겸손되이 여쭈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제게 어떤 때입니까? 오늘 이 순간은 제가 어떤 일을 할 때입니까?’


코헬렛이 강조하는 ‘때’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말로 ‘카이로스’, 곧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올바른 때(제 때)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무 때나 의미나 가치가 있고, 아무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올바른 때의 선택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고, 성공에로 이끕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하느님 현존 연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화론에서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진화,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태어나서 부모 없이도 저절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진화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화할수록 부모에게 더 의존합니다. 어떤 인간도 부모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현존 안에서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사회생활도 배웁니다. 부모의 ‘부재’(不在)는 아이들을 다시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반대로 부모의 ‘현존’(現存)은 아이들을 부모의 수준이 되게 만듭니다. 앞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혼자서는 진화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혼자 기도하시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현존 연습’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법’(法)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사람이 지닌 뜻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이 됩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그 친구도 다이어트를 할 확률이 45%나 된다고 합니다. 저도 살을 빼니까 주위에 살을 빼는 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함께 머물면 이렇듯 변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세례자 요한처럼 될 수도 있고, 엘리야처럼 될 수도 있으며, 예언자 가운데 한 분처럼 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녀까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온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세상 누구보다 힘이 듭니다. 하느님을 옆에 두고 사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하는 일뿐만 아니라, 생각과 욕구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음마저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물으시고 곧바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베드로만큼 빨리 하느님의 자녀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의 현존 안에서 아기가 인간으로 자라나듯,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삽니까? 얼마나 기도합니까? 자주 주님의 현존을 잊고 내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기도하며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개신교 책 중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 있습니다. 1605년 프랑스 로렌느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의 평수사로 살았던 로렌스(Lawrence) 수사의 영성을 담은 책입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상처를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50세라는 늦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가 주방 허드렛일이나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면서 매우 빠른 영성의 진보를 보입니다. 장상의 명으로 이것을 기록한 것들이 지금 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느낀 것은 나무를 보면서였습니다. 잎이 떨어지고 다시 나고 하는 이 순환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시작한 수도 생활 안에서 오랜 기간 쌓여온 세속의 때는 좀처럼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삶이 그리워졌습니다. 주방 허드렛일이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마치 나무를 보고 주님을 느꼈듯이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의미 없게 느껴지던 일들이 참으로 달고 기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거창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하나 줍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의 변화에 많은 형제가 감명을 받았고 그 방법을 묻자 “매 순간 호흡할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영성과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저에게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저는 현존을 연습하기로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일하는 시간이 기도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처럼 깊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소유합니다. 저는 세상에 하느님과 저밖에 없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상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녀로 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훈련이 쉽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훈련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 훈련을 계속해나갔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하는 이 훈련을 제 본업으로 생각하고, 마치 하루 전체가 정해진 기도 시간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오로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 살아오다 보니 때로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이 몰려옵니다. 가끔 제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을 잊기라도 하면 하느님은 즉시 저의 내면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고백 드립니다. ‘하느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기쁘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곧 사랑의 하느님은 저의 고백에 흐뭇해하시며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편히 쉬며 거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아주 작은 고난도 주님을 위해 받을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할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며 나머지 것은 아무것에도 정신을 주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소명과 의무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출처: 『로렌스 형제의 생애; 하나님의 임재 연습』, 유튜브 성결출판사]


현존 자체가 법입니다.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킵니다. 그 현존을 연습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현존 연습을 하며 모든 시간이 기도와 찬미와 사랑이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누구를 두고 살아갑니까? 자아라는 뱀일 수도 있고, 사랑의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 홈페이지에 매일 오늘의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홈 페이지에 접속하려는데 인터넷이 굳게 닫혀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컴퓨터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성당의 사제관에서 인터넷을 열고 오늘의 묵상을 올렸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컴퓨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날 강풍으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인터넷 선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선을 다시 복구하였고, 인터넷은 다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추적, 검사, 치료입니다. 추적하지 못하면 검사할 수 없고, 검사하지 못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민들의 협조가 중요합니다. 코로나19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던 한국에서 다시금 확진자가 늘어난 것은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의 방역체계를 믿지 못하고,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행위는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대립은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정당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고, 정부의 방역지침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방업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잠시 내려 우리는 누구인지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해서, 병들어서, 직업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던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소중하다고 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실 것 같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이웃의 생명에 위험을 준다면 그런 예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강도당한 사람을 뒤로하고 예배하러간 제사장입니까? 율법을 이유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인입니까? 이방인이었지만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하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진료를 거부하는 의료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실 것 같습니다. ‘누가 아픈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꽃길만 걸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타인에게 짊어지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꽃길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길을 걷는 동안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는 동안에


길의 끝을

말하지 않는 거야


다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쉼 없이 내딛을 뿐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이에 제자들이 말하길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고 전해드렸습니다. 이어서 다시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착각 중에 하나가 신앙생활의 본질을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나 혹은 경험을 많이 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성당을 다녔다거나, 또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거나, 또 어떤 사람이 본당에 어떤 중요 직책을 맡았다고 했을 때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아이가 친구들에게 자기 집에 금송아지 있다고 자랑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곧 아무리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이 많다고 하더라도 스승이신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대로의 삶을 함께 살아가지 않을 때, 그리고 그분께서 걸어가신 수난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지 않을 때 그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리스도, 십자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금요일>(2020. 9. 25. 금)(루카 9,18-22)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저희는 스승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그리스도는 ‘정치적 해방자’였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 지도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또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올바르게 알고 믿게 된 것은 수난, 죽음, 부활 후의 일입니다.


“사도들과 몇몇 신자들은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과 부활 후에 믿은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혹시 차별이 아닌가?” 

차별은 아니고,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특별히 선택되고 뽑힌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믿음도 완전하지는 않았고, 그들도 예수님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완전하게 믿었습니다. 수난 전에는 머리로만 믿었고, 부활 후에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은 그냥 ‘아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는 것’은 지식으로만 그치고 ‘삶의 변화’가 없지만, ‘믿는 것’은 그 믿음 때문에 ‘온 삶’이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것은, 아직 머리로만 믿는(아는)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믿어야 남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 없이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남을 믿게 만들지 못하고, 역효과만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에도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마태 17,9; 마르 9,9).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즉 당신이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본 것만으로는’(‘아는 것’만으로는) 증언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온전히 믿게 된 다음에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에도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아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 설교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앞의 신앙고백이, 머리로만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또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진술이었다면, 오순절 날의 설교는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고백(증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은 이제 사도들이 온 세상에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확인해 주신 일이기도 하고, 그 선포와 증언을 도와주기 위해서 ‘힘’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은, 당신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 또는 과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죽음을 당신이 직접 짊어지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일이었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에 대해서,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냥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로 직행할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개인의 십자가에 대한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십자가를 건너뛰고 그냥 부활과 생명으로(또는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이시니 그렇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한 번에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옮겨 놓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긴 세월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 우리는 그 방랑의 이유와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서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 고난들은 바로 “믿음의 순수성을 위한 단련”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7).

신앙생활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한 생활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치가 없습니다.)




모든 착한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9-30: CCL 41,555-557)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올바르게 기르시고 당신의 양들을 당신의 양들이 아닌 것과 구별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를 따라온다.”

이 말씀에서 나는 한 목자 안에 모든 착한 목자들이 있음을 봅니다. 착한 목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이 한 목자 안에 있습니다. 목자들이 서로 갈라져 있을 때 그들은 여러 목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 한 목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일치를 권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여러 목자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한 목자가 언급되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양 떼를 맡길 다른 목자를 찾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사람에게 맡기실 때에도 일치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많았지만 한 사람에게만 “내 양들을 치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 착한 목자들이 없지 않기를 기원하며, 또한 주님의 자비가 그들이 없는 것을 허락치 않고 그들을 많이 보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착한 양들이 있는 데에는 분명히 착한 목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착한 양들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착한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고 한 목자입니다. 그들이 양들을 기를 때 그리스도께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신랑의 목소리로 인해 몹시 즐거워 합니다. 그들이 양들을 기를 때 그분 친히 기르시는 것이고 그분의 목소리와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실 때 그것은 한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었지만 그래도 베드로가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를 표상하는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와 베드로는 신랑과 신부처럼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실 때, 그 양들을 마치 다른 남에게 맡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두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다시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다시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세 번이나 사랑을 확인하심으로써 일치를 견고히 하십니다. 주님은 목자들 안에서 홀로 양들을 기르시고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서 양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여러 목자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또 동시에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자들은 자랑합니다. 그러나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친히 기르시므로 목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길러야 하며 그리스도 외에 자기 자신들을 위해 길러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맡길 자가 없어서 “내 양 떼는 내가 돌보리라.”고 하면서, 예언자가 장차 다가올 악한 시대를 예언한 것처럼 장차 목자들이 없으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을 때, 모든 목자들이 그분 안에서만 하나가 되는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자들은 한 목자 안에 있고 그 목자의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양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자기 목자를 따르며 이 목자 저 목자가 아닌 한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모든 목자들은 여러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그분 안에서 한 목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시기를 호소합니다.” 이렇게 양들은 온갖 분열과 온갖 이단에서 정화된 이 목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그 목자를 따라갑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를 따라온다.”




생명가꾸기 농사꾼에서 하느님을 본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태풍은 벼를 논바닥에 맥질을 했다. 인건비가 비싸 엎친 벼를 세울 수도 없다. 그렇게 방치할 수밖에 없기에 농부는 이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농부의 마음은 한 포기마다 정성껏 일으켜 세워 알알이 영근 알곡을 만들고 수확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마음은 ‘생명가꾸기’ 농부의 역할이고 책임이다. 농부는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또 다시 생명을 가꾸어 간다. 산고는 생명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이 산고의 극치는 예수님께서 본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생명되게 하시고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는 알곡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한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종교, 계시종교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신망애 삼덕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만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고백하도록 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자연종교는 절대자를 향하지만 믿음의 대상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을 찾아 진리에 접근한다고 말하지만 알곡을 수확할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계시종교는 믿음에 대한 확실하고 구체적안 삶을 통해 힘을 갖지만, 자연종교는 나약해 힘이 없어 기대여 살려는 기복종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기복종교는 결코 종교의 본질을 지니지 못한다. 기복종교는 미신과 약자들을 이용해 먹고 사는 무속일 뿐이다. 이들에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대한 앎은 세례성사를 통해 시작되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참뜻을 알아가며 영글어갈 때, 그 답은 정답이 접근해 간다. 베드로의 답은 그 믿음의 과정이 얕을 때는 할 수 없었으나 믿음이 깊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답은 분명하 진다.

농부는 엎친 벼를 바라 보다가 논바닥에 맥질한 엎친 벼포기를 땀흘려 일으켜 세우고 있다. 농부는 수확과 관계없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에 하는 일이다.농부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본다. 고난과 죽음이 생명이 된다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고 삶으로 실천하는 농부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어 예수님을 닮은 축복의 사람이다. 나는 생명을 일으켜 세우는 농부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9,22)




종교는 취미생활? 클럽활동? 아니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실을 아무에게 말하지 말고 죽은 후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는 말씀.

미래를 보듯 아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대화하기가 참 힘드셨습니다.

지나간 것 많이 안다 해도 한 치 앞 모르는 우리나 제자들 같습니다.


수석사제 율법학자들의 배척에 죽고 다시 산다는 구체적인 말씀이죠.

우리는 죽어서 다시 부활 못하고 이사하듯 하늘본향으로 옮아갑니다.

하늘본향 거부하는 사람들이 권력과 힘으로 죽이려 대들기도 합니다.


오늘도 이 사회엔 지도자 사제 학자들 많지만 영원세상 잘 모릅니다.

종교는 취미생활? 클럽활동? 아니고 인생 근본이라 알면 만점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때"에 대해 일러 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군중은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옛 예언자가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는데, 예수님은 바로 당신 곁에서 생활하고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과연 당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듣고 싶으신 듯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고백합니다. 루카 복음서와 달리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대답이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고 부연하지요.(마태 16,7 참조) 지금은 베드로가 주님의 영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때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21)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침묵해야 할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스승이 명하시니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루카 9,22)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이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고난, 배척, 죽임, 부활까지 단 몇 단어로 표현이 되고는 있지만 그 여정을 입에 올리는 것도, 듣는 것도 사실 두렵습니다. 고통의 길임을 뻔히 알고 향하는 여정은 모르고 가는 것 이상으로 어려우니까요.


제1독서에서 코헬렛 저자는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하느님의 계획 아래 세상은 저마다의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코헬 3,11)는 말씀이 참 멋지게 들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의 때에 자신만의 충만함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 계획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 안에 하느님의 때와 스파크를 일으키며 피어날  자기만의 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그토록 정교하고 섬세하게 정성을 들인 하느님의 계획이 온 세상 모든 역사의 날줄 씨줄 안에서 면면히 흐르지만, 우리 인간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저 당장 눈 앞에 닥친 일들을 감당하면서 한발짝씩 내디딜 뿐이지요.

그런데 이 무지가 반드시 저주나 불운만은 아닐 듯합니다. 각자의 "때"를 깨닫지 못하면서 묵묵히 나아가는 우리 인간은 어쩌면 몰라서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르니 희망하고, 모르니 기대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오늘 복음 속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미처 다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스승의 때가 오면 그 영광을 어떻게 받아 누릴지, 누가 가장 높은지가 내내 그들의 관심사인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침묵을 명하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들의 욕망이 아직 화해하지 못한 지금은 코헬렛의 단언처럼 "침묵할 때"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말할 때"(코헬 3,7)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완성된 후 제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변화될 것이니까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바와 본 바, 체험한 바를 증언하고 선포하게 것입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가 과연 "말할 때"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코헬 3,11)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심어 주신 "시간 의식"은 단순히 숫자로서의 시간 감각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간 의식" 안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아버지 뜻에 대한 순응, 결국 사랑으로 이끌리는 순리에 대한 신뢰, 마침내 이루어질 주님과 우리의 영원한 일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의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무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나의 때는 과연 언제인지, 찬란히 아름답게 빛날 "제때"를 속절없이 흘려보내고 만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올 것인지...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우리 여정이 "반드시 고난과 배척과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의 여정과 별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렵지만 진실입니다. 우리의 때는 이런 주님의 때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을 겁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기시고 평화의 존재로 우리에게 되돌아 오셨으니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견디게 합니다. 이 희망 앞에서는 무지조차도 축복입니다.

그러니 언제일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이루실 것이니까요. 사랑 안에서는 "때"를 알려고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답니다. 주님의 "때"에 나의 "때"를 결합해 그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하며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모르는 길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꿋꿋이 나아갑시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함승수 신부님

 요즘 사람들은 궁금한 것을 알고자 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네이버'나 '구글' 같은 검색엔진을 이용합니다. 검색창에 내가 찾고자 하는 단어를 입력하면 그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지요. 그러면 그중 가장 그럴싸한 것, 가장 내 생각과 비슷한 것을 골라 '나의 답안'으로 삼습니다. 이처럼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보니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관련된 정보를 조사하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가며 답을 찾는데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것을 쓸데 없는 일로 여기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 내가 직접 노력하고 연구해서 찾아낸 답이 아닌 남들이 써놓은 답은 내가 찾는 것과 '비슷한' 답일 수는 있어도 내가 찾고자 하는 '정답'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써놓은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지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도 없습니다. 쉽고 편하게 찾은 정보를 덜컥 믿었다가 그것이 사실과 다를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온전히 다 내가 감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남들이 얘기하는 것들을 생각없이, 여과없이 다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해야 하고, 어느 한쪽의 입장에 편향되지 않도록 객관적으로 다양한 입장을 고루 살펴보아야 하며,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해 나의 입장을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군중들이 생각한 예수님의 이미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린 '세례자 요한'이나, 빵을 많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엘리야' 예언자,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박해받고 죽은 옛 예언자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그 중에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정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먼저 물으신 것은 제자들을 떠보시기 위함입니다. 당신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이들로서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혹시 자기만의 확실한 '메시아상'을 지니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시려는 것입니다.

 다행히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그분이 생각하시던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답을 말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는 대신,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그분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올바른 결론에는 도달했지만, 그 결론이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인 고난과 죽음을 아직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님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냐?" 그 문제에 대해 각자가 찾아야 할 답은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쳤던 것처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그들을 위한 봉사의 소명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은 마더 테레사는 "나는 예수님의 몽당연필입니다."라는 답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답을 찾았습니까?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나로 인해서 주 예수님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받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송구스러움 속에서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들으신 후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20절) 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하러 보내주신 구세주이십니다라는 뜻이었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대답을 들으시고는 곧 바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21절)십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선입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지 않으셨는가 봅니다. 당대 유다인들이 바라는 메시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그리스도라는 말에 담겨 있는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잘 알고 게셨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메시아의 진실한 면모를 밝히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22절) 메시아는 정치적으로 점령군인 로마를 내쫓고 유다인들에게 해방을 안겨주고 강대한 유다 민족의 나라를 세우리라는 기대에 정반대의 모습을 제시하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기대를 품고 있는 유다 사람들의 원의를 들어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희생으로 그 원의를 채워주지 못한 미움과 원망을 한 몸에 받고 거부당하고 저주받아 죽어야만 하는 숙명 같은 처지를 알립니다. 물론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부활하리라는 사실도 함께.

  오늘 날 사람들의 기대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해 상처받고 미움받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한 가정의 부모와 자녀에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기대와 요구를 서로 주고받는 관계 안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하는 역할과 아픔도 기억합니다. 

  우리의 사랑과 기대를 온전히 받으시면서도 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소외되고 희생되셔야 하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로 인하여 고통받고 신음하시는 주님, 저희를 구하소서. 어머니 마리아님, 저희를 지켜주소서. 아멘.




나에게 예수님은?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다양한 의견을 전해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더 궁금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지금까지 당신과 제자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핵심적으로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당신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당신이 행한 일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묻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할 때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신념을 정립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참조할 수 있지만, 결국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증언하듯,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언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니라, 다만 그분을 증언하려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증언의 최종 목적입니다. 내 삶에서 예수님을 수단이나 방법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이라고 죽음이 달가웠겠습니까? 참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참 인간이셨던 주님은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그것을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기도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말씀 단 한 마디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인간으로 내려오셨고, 당신 직접 삶 안에서 노력하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셨습니다.

가끔 주변에 교회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에게 이런 말씀 들어보셨나 모르겠습니다. “구원받으셨나요?” 들어보셨지요? 대답을 어떻게 하셨나요? 성당은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구원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구원은 나중에 받는 것 아닌가... 이럽니다. 그렇다면 교회분들은 무엇이라 대답하실까요? 아, 믿음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이미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세례성사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결은 아닌 것입니다. 완결은 하느님 앞에 설 때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구원받았다고 속단하기 이릅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만 내가 생활을 올바르게 못한다면 분명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구원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겠지요. 그리스도이셨던 주님께서도 죽기까지 노력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마치 마라톤을 했던 선수에도 비유합니다. 승리의 월계관을 받으려 열심히 뛰었다는 것이지요.

교우여러분들, 제가 항상, 자주 강조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초대되었지만, 가는 중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벌써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삶 안에서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모신다는 것은, 제자로써 그분을 닮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도 그러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오늘 하루의 시간 안에서 은총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 18-22> 9월 25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시는 분을 알아보고 섬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옆에 주님이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했지만, 베드로 사도는 알아보고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 고백했습니다. 그런 일은 그 옛날 한 번 있고 지나간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삶의 중심에 주님이 현존하시는 것을 잊고 지나갑니다. 

주의 기도를 하시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하는가? 아무런 느낌도 확신도 없이 입으로만 외우고 있습니까? 

미사에 참례하고 외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듣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미사 끝에 주님과 함께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되었는데도 의식 없이 집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만 하시지 않습니까?

요사이 코로나로 인해 성당에 자주 가지 못하고 영성체하지 않는다고 주님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 않습니까?

주님은 더 가까이 당신 안에 살고 계십니다.

어떤 이는 성모님은 역사 안에, 현실에 자주 나타나시는데 왜 주님은 나타나셔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시지 않는가? 바라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다음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깊이, 더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성찬의 전례 때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셨습니다. 미사 때 빵이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주님의 피로 변화되어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음으로만 아니라, 늘 우리는 주님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형식적으로 피상적으로 깊은 의식 없이 전례와 기도에 참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기를 마음의 문 앞에 기다리고 계시며 마음의 문만 열면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진복팔단에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하심같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현재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어둠 속에 살지 않고 “빛으로 빛을 보는 사람이며” 빛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세상의 가치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권력에, 재력에, 명예에 눈이 가려지지 않으면 마음이 깨끗하여 어디서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지고 기진맥진하지 않고 주님에게 짐을 맡기고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 중에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아니면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청하는 사람의 마음은 깨끗할 수 없습니다. 

깨끗한 마음은 위와 아래를, 높고 낮음을, 크고 작음을, 잘나고 못남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어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이 하느님이시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보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뵙고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아침 제대 상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뵙고 저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며 ‘주님과 함께 사는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무한에 잠입하여 생각하며 감사, 찬미 드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카 9,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난이

시작된 곳에

구원이 있다.


예수는 고난을

온 삶으로

이겨내셨다.


죽이는

고난이 아니라

살리는 고난이다.


고난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고난은

아프게도

필수사항이다.


고난을 통해

배우게되는

삶의 겸손된

여정이다.


고난이 없는

삶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고난이 우리를

아름답게 머리를

숙이게한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되어간다.


고난이

실은 은총이다.


배척과 고난이

영혼을

되찾아 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고난을 주셨다.


고난속에서도

가을하늘을

맞이한다.


하느님께서는

고난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낼

은총을 주시는

분이시다.


고난이

믿음을 이룬다.


고난을 통해

빚어진

빛나는

열매이다.


고난을

비껴가시는 분이

아닌 고난을

믿음으로

통과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교수님께서 묻습니다. “교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일까요?” 이 질문을 받은 여러분들도 교수에게는 ‘가르치는 일’이 제일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공부하는 일입니다. 정확하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따라서 교수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일은 공부하는 일입니다.”


저 역시 신학교에 강의를 나가다보니 이 교수님의 말씀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1시간 강의를 위해서 4~5시간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잘 가르치는 것은 얼마만큼 공부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우리 삶 안에서도 중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옳음을 강조하면서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하는 것에 반대를 하면, 인정하지 않으면서 더 목소리를 키웁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을 가르치려고만 드는 사람을 가까이 하기란 참으로 힘듭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을 어떻게 편하게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나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많은 이들이 함께 합니다.


주님께서도 기본적으로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답변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요.


주님께서도 먼저 들으십니다. 답변에 맞춰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정답을 이야기했던 제자들에게만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군중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내 자신이 먼저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즉,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들어주셨음을 기억하면서, 배우는 마음으로 내 이웃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듣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이 내 말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웃의 말을 잘 듣는 사람만이 내 삶 안에서 계속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기의 서투른 말을 알아듣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법정).


61 신앙고백비

신앙고백비는 1866년 병인박해 전의 신자인 김삼록 도미니코(1843~1935)가 자기의 신앙 고백에 관한 내용을 비석에 새겨 그의 집 뒷산 바위 위에 세운 것입니다.

신앙고백비가 서 있는 상주군은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김해 김씨 집안의 4형제 중 둘째였던 김삼록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박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1886년 한불 수호 조약 이후에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자유가 허용될 무렵인 1894~1900년 초에 그와 그 집안의 문중들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의 현재 청리면 삼괴2리 안골짝의 쌍바위 중 오른쪽 큰 바위에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신앙고백비를 건립한 것입니다. 크기는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입니다.

김삼록은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 박해를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여러 나무를 심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이 신앙고백비는 비록 건립 연대는 100년 남짓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신앙의 증거를 위해서 돌에 비를 세웠다는 것과 아직 한국 교회에서 다른 신앙고백비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다 하겠습니다.

이 고백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소는 경북 상주시 청리면 삼괴2길이고, 관할 옥산 성당의 전화번호는 054-532-4507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내게 어떤 때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약성경 가운데 아주 짧은 책이 한권 있습니다. 전체 합해봐야 12장, 222절 밖에 되지 않습니다. 15~20분이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한때 전도서라고도 했는데, 요즘은 코헬렛이라고 표현합니다. 첫머리에 저자에 대해 언급되고 있습니다.“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코헬렛 1장 1절) 

 

코헬렛에서는 인간 삶의 다양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예를 들면 자연 질서의 순환, 재산의 축척, 적대 세력, 우정, 지도자의 덕행, 인생의 고통, 노년의 불행...특히 그중에서도 인생의 ‘허무’에 대해 자주 강조합니다. 제반 주제들을 다룰 때 마다 저자는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허무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결국 인생의 최종 결론은 죽음임을 천명합니다. 

 

코헬렛 책의 첫 대목은 “허무로다, 허무!”에서 시작합니다. 맺음말 역시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로 끝납니다. 짧은 코헬렛 서 안에 ‘헛되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소용이 없다’ ‘바람을 잡는 일이다’라는 등 회의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코헬렛이 철저하게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책은 아닙니다. 난다 긴다 할지라도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진리, 지금은 굳건히 두발로 서서 세상을 호령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줌 흙이라는 진리를 기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결국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이신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께만 신뢰를 두라는 요청입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에서 코헬렛은 그 유명한 ‘때’에 대해서 가르침을 펼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코헬렛 3장 1~4절)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 우리네 인생사에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설 때 나서야지, 아무 때나 나섰다고 큰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낄 때 끼어야지, 아무 때나 끼었다가 웃기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시작할 때가 언제인지,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를 잘 파악해야 인생의 추한 꼴을 보지 않습니다. 나서야 될때 안 나서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 끝까지 안 물러나고 버티다가 욕이란 욕을 바가지로 먹는 사람들을 한두번 본게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때를 잘 파악할 줄 알았습니다. 구세사의 서막을 알려야 할 순간, 예언자로서의 깃발을 들어야 하는 순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당당하게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다음, 이제는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할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추호의 미련도 없이, 털끝만큼의 아쉬움도 없이 쿨하게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는 정녕 지혜로운 사람,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하느님께서 주신 때를 기가 막히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행동은 아무 때나 가치가 있고, 아무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선택한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은 어떤 때인가 식별하고 또 식별해봐야겠습니다. 

 

기도 안에 침묵 속에 기다려야 할 때인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크게 성찰할 때인가? 백번 천번 예행연습을 거듭하면서 준비하고 또 준비할 때인가?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전면에 나서야 할 때인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때인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위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즘 책 한 권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무리를 거의 1년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년 겨울쯤에 책이 마무리 되어 여러 출판사에 출판의뢰를 하였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안 되겠다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조금은 서운했습니다. 이미 강론 집을 세 권씩이나 낸 소위 작가반열에 든 사람인데 푸대접 받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부족한 면이 있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년 정도 고치고 또 고치고 보니 그때 출판해 달라고 한 것은 쓰레기 수준이었음을 알았습니다. 헤밍웨이는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1년 전 것이 초고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져 책이 출판되었다면 거의 쓰레기를 출판할 뻔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년 간 저와 많은 이들의 노력이 이 책에 더 담겼습니다. 그때 이만큼 더 노력해야 책이 출판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저 더 완성도 있는 책을 위해 하루하루 고치고 또 고치다보니 1년이란 세월과 노력이 더 투자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만족스럽게 출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번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나서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하십니다. 

당신을 엘리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잘못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그리스도로 올바로 알려지는 것을 왜 거부하셨을까요? 아직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십자가의 고통’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어버리면 그분을 왕으로 모시려고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시는 고통을 당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완성됩니다. 무언가 되어가는 중에 미리 축배를 들어서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당신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공부를 할 때 사람들은 이미 “어유, 박사님 오셨네!”라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석사과정을 마쳤고 박사를 마치려면 머리털 다 빠져가며 논문을 써야하는 힘겨운 과정이 남았는데도 박사님이라 불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쁠까요?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자칫 자신이 박사나 된 것처럼 거만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거만해지면 진정으로 박사가 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천재 났다고 말하면 언젠가는 아이들이 자신들이 천재가 아님을 알고 자포자기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칭찬들이 자칫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특별히 주의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져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사탄’이라고까지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라는 명칭에 걸맞기 위해 반드시 피땀을 흘리셔야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요즘은 웬만하면 ‘선생님’이라 불리고, 또 웬만하면 ‘사장님’이라 불립니다. 우리 또한 쉽게 ‘신앙인’, 혹은 ‘단장님, 회장님’ 등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예전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이들을 지칭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아니, 내가 그 이름에 합당한 수준이 되기까지 그렇게 불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알맞은 실력을 갖춰야합니다. 

신학생 때 한 교수 신부님이 말씀하시길, 7년간이나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 사제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문성을 갖춰야한다고 하셨습니다. 한 분야를 7년 동안 배웠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성경에 대해 평신도들이 더 잘 알고, 기도도 평신도들이 더 잘 한다면 사제라고 불리는 것에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7년 동안 신학교에서 잘만 버티면 사제가 되는 줄 알았던 저와 많은 신학생들에겐 참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면 삼사십 년 신앙생활 한 사람들은 거의 도사 수준이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를 주저하지 않아 발전을 멈추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합당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신앙인들이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추석에는 형님 가족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셔서 봉성체를 해 드렸습니다. 형수님은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돌보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언제나 말없이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시는 형수님이 있어서 가족이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형님은 늘 책을 가까이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가족을 이끌어 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 물질적인 성공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조카들도 기쁜 마음으로 추석에 함께 하였습니다. 삼촌 신부에게 용돈을 주는 것을 보니 대견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만 건강을 회복하셔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조화는 변하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지만, 생화가 주는 싱그러움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있기에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기 마련입니다.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가지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을 가지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궁금하셨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는 이야기,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왔다는 이야기,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검색하는 정보가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 주신,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대답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라는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 주신,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말해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터넷을 통해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얻어지는 정보는 왜곡되고, 한 부분만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갈 때, 고난과 십자가는 더 큰 영광을 얻기 위한 과정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길,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을 어쩌면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언젠가 나의 일과 관계가 회복되리라는 것을 믿읍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나의 일과 관계가 언젠가 회복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울 때가 있으면 언젠가는 웃을 것이고, 또 슬퍼할 때가 있으면 언젠가는 기뻐 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켄터키 마을의 주유소에 작은 식당을 열었습니다.

이 식당은 장사가 너무 잘 돼서 곧 거리 건너편 건물로 확장 이전을 했습니다.

몇 년 후 화재로 그 건물이 불타기도 했지만, 샌더스는 포기하지 않고 건물을 다시 세웠습니다.

열한 가지 양념으로 만들어지는 그의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샌더스가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에 그의 식당을 우회하는 간선도로가 생겨마을의 유동 인구가 크게 줄었습니다.

결국 그는 견디다 못해 식당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 나이에 그 정도쯤 되면 대부분은 포기하고 은퇴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샌더스는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는 가게를 팔고 빚을 갚았습니다.

그의 수중에는 105달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샌더스는 트럭 뒤에 튀김용 장비를 싣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다른 식당들에 치킨을 팔았습니다.

얼마 뒤 샌더스의 치킨이 기가 막힐 정도로 맛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샌더스가 70세에 이르렀을 때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브랜드가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현재는 세계적으로 1만 1천 개 이상의 체인점이 있습니다.】

샌더스는 자신의 일이 회복되리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회복되리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겠죠.


저도 추석 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관계가 회복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가족과 관계가 회복된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싸웠거나 갈등 때문에 가족들과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아니구요.

신부가 되고나서 집을 떠나 있다 보니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워졌고, 그러다보니 공유할 추억과 이야기 거리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몇 가지 다짐을 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알람을 이틀에 한 번씩 울리게 해놓고 알람이 울리면 집에 안부 전화하는 거나,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집에 가서 식사를 해야겠다.. 는 다짐입니다.

잘 지켰을까요? 거의 못 지켰습니다.

알람이 울리면 ‘이것만 끝내고 전화해야지.. 조금 있다가 해야지..’하면서 전화를 미루다보니 안부 전화도 제대로 못 드리고, 월요일에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또 밀린 일들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집에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추석이 되어 1박 2일 동안 집에 가게 되었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티비도 같이 보고 자유공원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차이나 타운에서 가서 외식도 하며, 그 동안 만들지 못했던 추억과 이야기 거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웃고 기뻐할 수 있는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행복했습니다.

나의 일과 관계가 언젠가 회복되리라는 것을 믿고 계속 노력할 수 있다면 언제가 그 결실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웃고 기뻐할 그 회복의 날을 희망하며 다시 한 번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성가대 남자 막내가 들려준 이야기...)

토끼와 열라 빠른 거북이가 달리기를 했다.

누가 이겼을까?

열라 빠른 거북이가 이겼다.

왜냐 열라 빨랐기 때문에..

그리고 토끼와 모자 쓴 거북이가 달리기를 했다.

누가 이겼을까?

모자 쓴 거북이가 이겼다.

왜냐 모자를 벗어보니, 아까 그 열라 빠른 거북이였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5주 금요일 

복음: 루카 9,18-22: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고,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보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대하신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임금으로 혹은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이에 군중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한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식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아는 만큼 그 분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야기 해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친구를 안다고 했을 때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그 친구와 참된 관계를 맺고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면 그분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 늘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삶을 받아들이셨고, 결국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언젠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나누어 받게 되길 기도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허무에 대한 답은 파스카의 주님뿐이시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 말씀이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아무도 이 때에서, 시간에서, 세월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때는 하느님 손 안에 있고 모든 때가 하느님의 때이기도 합니다. 결코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때에 순종하는 것이 분도수도자의 첫째 정주서원입니다.

 

그러니 지난 때들은 하느님 자비의 손에 내맡기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만약했더라면---좋았을 텐데’라는 후회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믿는 이들을 당신 만이 아시는 최상, 최선의 길로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 삶의 역사도 뒤돌아 보면 다시 산대로 이렇게 뿐이 못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습니다. 울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습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습니다.

 

구구절절 계속되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코헬렛입니다. 이런 때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요셉수도원 만31년의 역사만 봐도 선명히 구분되는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설립한 태동기의 때, 숱한 시행착오의 초창기의 때, 서서히 뿌리 내리기 시작한 정착기의 때, 발전기의 때, 도약기의 때, 안정기의 때가 흡사 한 산맥의 여섯 능선처럼 선명합니다. 

 

모든 때의 절묘하기가 ‘신의 한 수’와 같습니다. 특히 요즘 한반도의 흐름을 보면 바야흐로 하느님의 결정적 평화의 때가 도래하지 않았나 하는 예감도 듭니다.

 

삶의 리듬이자 삶의 변화입니다. 끊임없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넓고 깊은 시야로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삶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또 이런 때를 알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이고, 이런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인내의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때에 대한 감각에 극히 민감한 분들이 땅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일 것입니다.

 

오늘 코헬렛은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예들을 나열한후 하느님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허무는 물론 모든 때에 답은 하느님이심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이런 깨달음에서 시작되는 겸손이요 기도입니다. 제때에 맞게 아름답도록 살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잘 깨달아 살기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봄철 나이 때에는 봄철답게, 여름철 나이 때에는 여름철답게, 가을철 나이 때에는 가을철답게, 겨울철 나이 때에는 겨울철답게 사는 것이 진짜 내공이고 아름다움이요, 하여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필수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입니다. 가을이 되면서 서서히 가을병처럼 오는 인생허무감입니다. 하여 교회의 전례력이 고맙습니다. 허무에 휘둘리는 마음을 하느님쪽으로 방향잡아주는 9월 순교자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그대로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 되고 이어 주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망의 대림시기입니다.

 

무엇보다 가을철은 기도의 때입니다. 일년 인생농사의 좋은 결실을 위한 마무리 기도의 때입니다. 때중의 때가 기도의 때입니다. 기도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기도의 모범, 기도의 달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신의 신원을,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바로 기도를 통해 파스카의 주님으로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셨고 이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인정하시며,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통해 이들의 메시아관을 분명히 바로 잡아 주십니다. 바로 당신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즉 파스카의 주님이심을 밝히십니다. 새삼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자 파스카의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삶이 우리를 늘 새롭게 시작하게 함으로 인생 허무가 아닌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인생 충만을 살게 합니다. 한마디로 ‘허무’에 대한 답은 ‘미사’뿐이라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허무한 인생이 아닌 충만한 인생을,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람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알아주시다니! 인간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헤아려 주시다니! 사람이란 하나의 숨결과도 같은 것,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시편144,3-4). 아멘.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9, 18-22(연중 25주 금) 

 어제 <복음>에서는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말해줍니다. 군중들의 세 가지 대답에 이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 20)

 

 그렇다면,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를 스스로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 22)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고난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기름부음을 받고 부활한 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의 문장에서 “반드시”(Dei)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러니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고,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개의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와 셋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이요, <넷째>는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첫째>로 ‘많은 고난을 겪는 일’입니다. 한두 가지 고난이 아니라, 한두 번 겪는 관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여러 차례 고난을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필요를 위한 고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나아가서, 거부하거나 피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자발적으로 끌어않는 고난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겪는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단지 ‘많은 고난을 겪는 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그 고난이 단지 어려운 일 때문이거나, 우리의 무능력 때문이거나, 잘 풀리지 않는 어떤 상황이나 문제 때문이거나, 그런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아가서, 그 고난은 배척받고 거부되고 박해받는 고난을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근본적으로 배척과 거부당한 고통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친지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심지어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체험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와 세 번째>로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을 말합니다. 곧 그 배척은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고 수행하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뜻에 따라 닥친 일이 아니라, 당신 뜻에 따라 닥친 일에 자신을 내어드려 죽임당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자신의 생명이 아닌,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사랑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넷째>로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그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의 사랑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사랑의 죽음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받아 죽음을 당하면”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삶입니다. 그만 둘 수 없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아니면 결코 살수 없고, 그분과 함께 하지 않으면 결코 살 수 없는 “반드시” 그렇게 하신 그분과 함께 살아야만 살 수 있는 삶입니다. 바로 이 삶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우리 주님과 함께 우리가 가야 할 빠스카의 삶입니다. 아멘.




당신은 누구입니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9,18 /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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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두 번 하십니다. 

한 번은 군중들이 ‘당신을 누구’ 라고 하는지? 

또 한 번은 제자들이 ‘당신을 누구’ 라고 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늘은 같은 질문을 대상을 바꿔서 해보고, 그 답변을 구해보고자 합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로 불리는 이름들과 자신을 묘사하는 다양한 형용사적 표현을 듣고 삽니다.

그 많은 이름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은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 자신을 가장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결국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용이하게 접근하는 방법은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은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이름들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나 표현들이 선명하게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라면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이름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 사람인가?”

이런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부터 우리는 분명한 답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나는 어떤 인간이기를 원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나는 사람이다.” 에서 시작해서 끝을 맺어야만 합니다.

다음은 신앙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렵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다.”

이 고백이 우리의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최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결론짓습니다. 

“나는 사람인데,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창조된 그분의 자녀이다.”

이러한 굳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름들이나 묘사들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이 물으시거든>

상지종 신부님

2018. 09. 28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들을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사랑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빼앗음과 빼앗김 없는 세상 일굼으로써

당신은 정의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갈라져 싸우는 세상 이음으로써

당신은 화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사랑과 정의와 화해를 삶으로써

당신은 평화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착한 벗들에게 밝은 웃음 지음으로써

당신은 기쁨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슬픔에 젖은 벗들의 눈물 닦아줌으로써

당신의 위로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억눌린 벗들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당신은 해방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갇힌 벗들의 사슬을 끊음으로써

당신은 자유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외로움에 지친 벗을 품음으로써

당신은 연대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어둠을 사르는 작은 불쏘시개 됨으로써

당신은 빛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어가는 작은 벗들을 돌봄으로써

당신은 생명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을 살리기 위해 나를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음의 세력에 당당히 맞섬으로써

당신은 죽음을 이긴 부활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줌으로써

당신은 하느님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어느 할머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우리 딸이 시집살이가 너무 심해서 힘들어 합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겪어야할 것을 다 겪고, 채울 것을 다 채워야 할지 모릅니다.” 그분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겠지요.”

오늘 독서에서 코헬렛은 말합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0-11)

우리는 주님께서 정하신 때가 다 되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린다고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내가 한다고 해서, 또 내가 할 때에 다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나에게 맡겨진 그 때 그 순간에 해야 할 일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채워야만 한 단계씩 하나씩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주님의 섭리와 안배 안에서 그 다음 단계가 와서 다음 사람이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일을 내가 채우기를 믿고 맡기신 것이고,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구원의 역사는 진행해 나아갈 것입니다. 주님 구원의 역사에 미소한 도구라도 되도록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주님이셨네요. <루카 9, 18-22>

이석진 신부님

어떤 거룩한 사람이 큰 고통에 시달려 거의 죽게 되었다가 살아났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주님을 원망하면서 “어디에 계셨습니까?” 주님은 “네가 큰 고통 중에 있을 때 너희 깊은 곳에 너와 함께 있었다.” 우리는 함께 계신 주님을 못 알아보고 혼자서 고통 중에 외롭게 싸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데, 이는 의식의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다니셨지만 그들의 생각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큰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활의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발을 구르고 있을 때 주님은 언제나 “나다.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아니, 하느님은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는 사랑이 지극한 분입니다.

태풍과 비바람이 몰아치고 난 후 고요하고 아름다운 경치, 깨끗하고 신선한 환경을 맛보며 감동하고 행복하게 되듯이,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듯이 우리의 주님은 고통 뒤에 함께 계시며 함께 고통의 시간을 보내십니다. 

저희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저는 어려움이 끝나는 시간, 주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면 안도와 행복이 찾아옵니다.

주님은 나의 희망이며 기쁨이십니다. 시편 16편에 “하느님!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당신께서는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나이다.” 이 기도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나는 주님이 지옥에 계셔도 주님과 함께라면 그곳에 가겠다.”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신 곳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렁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안전하게 주님의 집에 이르게 하십니다. 주님은 공기를 마시게 하시고, 태양의 힘을 받게 하시고, 땅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생명을 보존하게 해주시고, 알아 할 것을 알고,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시고,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항상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며,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갑니다. 주여! 저를 지켜주시고 당신 안에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인생무상

김찬선 신부님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시간의 존재입니다.

물론 공간의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모두 한자어에서 사이 간間을 쓰고 있고 인간人間이라는 말도 같은 사이 간間을 쓰고 있는데 그러므로 인간이란 사이 가운데 있는 존재, 곧 유한한 존재라는 뜻이 있지요.

그런데 두 가지 인간 존재의 규정 중에서도 공간의 존재가 인간의 환경과 관련한 존재규정인데 반해 시간의 존재는 인간의 행위와 변화와 관련한 존재규정이지요.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고, 시작과 끝이 없으면 시간도 없습니다.

반대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래서 시간이 있기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 인생에 ‘항상’이라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젊을 수 없고, 항상 푸를 수 없습니다.

항상 같이 있을 수 없기에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항상 봄일 수 없고, 항상 여름일 수 없으며, 항상 가을일 수 없고, 항상 겨울일 수 없습니다.

지난여름 참으로 더웠는데 계절이 변하니 그 더위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졌습니다.

그런 것이기에 항상 기쁠 수 없고, 항상 슬플 리도 없으며 항상 즐거울 수 없고, 항상 괴로울 리도 없습니다.

항상 건강할 수 없고 그래서 아무리 아프지 않다가 죽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항상 성공할 수 없고 그래서 실패할 때가 반드시 있는데 성공만 바라고 실패를 못 받아들이고 못 견뎌 하면 때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고 인생무상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요 큰 주제는 삶과 죽음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어 영원이라는 것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고대 철학자들은 이런 변하는 것들 가운데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찾았는데 예를 들어 풀라톤 같은 철학자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이데아를 얘기하고 있고 우리는 하느님만이 시작도 끝도 없고 영원하신 분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어제 저는 영원 앞에서 허무, 하느님 앞에서 허무를 얘기했는데 오늘 우리는 영원의 하느님과 때의 우리 인간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성가 333번에서 “시작 없으시며 마침도 없고, 변하심도 없네. 영원하신 주”를 이 아침 새벽부터 흥얼거리는데 여러분도 오늘 이 성가를 펼쳐 흥얼거리며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삶을

만나는 곳은

분명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 여정을 

다시 우리들에게

일깨워주십니다.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십자가의 시간입니다.


생명은 결코 죽음을

건너뛸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분명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유한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가십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으로 참된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십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사랑과 용서라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시작도 마지막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임을 믿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데 이상하게 잠이 깨지 않습니다. 머리도 무겁고 몽롱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는 시원한 물 한 잔이 최고죠. 주방으로 가서 정수기에 앞에 섰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했다고 전과 같은 가격의 월 사용료로 업그레이드를 해 준 신상품 정수기입니다. 글쎄 정수기 안에 제빙기가 있어서 아무 때나 얼음이 나옵니다. 물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시원한 냉수를 담아서 벌컥벌컥 들이킵니다. 이렇게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니 잠이 깨고 머리도 말끔해집니다.


문득 얼마 전에 보았던 인터넷 기사가 떠올려집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물을 찾아서 길어오는데 무려 5시간이 걸리고, 이 물마저도 깨끗한 물이 아니라 오염된 물이고 또 시원한 물이 아닌 미지근한 물이라는 이야기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가요? 1분도 채 되지 않는 약간의 이동만으로도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 순간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편하게 그리고 좋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렇게 누리고 있는 것들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안일하고도 뻔뻔한 제 마음을 꾸짖게 됩니다.


사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 누리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누구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으며, 특히 주님의 손길 덕분에 이 자리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말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기적을 많이 체험해서였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몰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당연히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에게 내려주는 주님의 큰 사랑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감사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불평불만만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히 누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부족한 것들만 보이게 되고 그래서 받은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이유를 찾고 실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의 상황에 만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위의 감사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찾아보십시오. 이 과정 안에서 주님을 분명히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주님께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사랑해야지. 우리는 모두 인생의 손님인 것을(루쉰).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의 소원이 피아노 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집안 사정 상 피아노를 살 수도 없었고, 그래서 배울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던 사람이 “그러면 지금 여유가 되시니 피아노를 배우세요.”라고 말했지요. 이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지요.

“제가 지금 피아노를 배우면 몇 살 쯤 되면 능숙하게 칠 수 있는지 아세요? 이제 틀렸어요.”

그러자 상대방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알고 있지요. 그러나 피아노를 배우지 않아도 나이를 먹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사실 지상 최대의 두 가지 거짓말은 ‘그 일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와 ‘내겐 그 일을 할 만 한 돈이 없어.’라는 것입니다.”

저의 신학교 은사 신부님께서는 원로사목자가 되신 후에 곧바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성당에서 자그마한 연주회까지 하셨지요. 늦은 것이 아니라 아직 하지 않은 것이고,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를 세우지 못한 것뿐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나의 때와 하느님 섭리의 때 사이에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코헬렛은 하느님과 무관한 삶의 덧없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시고 사람의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으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3,1.11) 


세상만사는 우연히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기회 곧 ‘때’(kairos)를 통하여 일어나 일정한 기능을 한 다음 소멸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일어납니다. 인간은 일상의 만남과 일과 현상들 안에서 살아 숨쉬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곤 합니다. 


코헬렛에 따르면 ‘때’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정하신 ‘주어진 기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지요. 따라서 인간은 매순간, 그리고 지금 여기서 변함없이 함께하시고 은총을 주시며 길을 밝혀주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그분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때’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어 '카이로스'는 시간의 경과나 과정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때나 기회를 나타내는 초시간적 초공간적 시간이자 영적인 시간으로서 은총의 시간, 하느님 창조의 시간을 뜻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온 인류를 향한 복음의 선포의 시기(마르 1,14-1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성취시키는 결정적인 시기 또는 기회(요한 2,4), 종말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런 시간은 '영원한 현재'를 뜻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를 살고 있을까요? 그저 하느님과 무관한 물리적인 시간, 내가 중심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시간에 몰두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는 그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 창조의 때, 자비의 때, 은총의 때를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루카 9,18).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9,18.20).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일 뿐 아니라 제자들의 신원과 소명을 확인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때, 곧 구원을 향한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지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고백은 머리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인격으로 헌신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의 의미와 ‘때’에 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실천됨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매순간이 하느님의 때요,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그분과 더불어 실행하는 때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내 거짓 자아를 버리고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길거리로 나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때’를 삶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9,20)을 고백했으면 합니다. 그럴 때 나의 일상은 은총의 때가 되고 영원한 생명의 빛이 비출 것입니다. 


하느님의 때를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발자취를 걷는 것을 말하고, 그분이 직면했던 박해와 수난과 죽음의 ‘때’를 일상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한 현재'로 바꿔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이제부터 내 삶의 중심을 주님께로 옮겨 오직 그분의 창조의 때, 사랑의 때, 은총의 때, 구원의 때를 살아낼 수 있도록 일상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가슴 아프고 고달프고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았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님

평화방송과 함께 ‘사제’라는 제목으로 다큐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사제양성에 대해서 만들었고, 내년에는 사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큐를 제작하려고 합니다. 외국에서 우리의 작품을 보고 많이 놀란다고 합니다. 신학생들이 많은 것에 놀라고, 사제서품을 받는 분들이 많은 것에 놀라고, 열정적인 사목활동에 놀란다고 합니다. 저는 다큐를 제작하면서 우리의 성소가 계속 유지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다큐를 제작하면서 사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 있으며, 가치 있는 일인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합니다. 열흘 넘게 피는 꽃이 없고, 권력이 10년 이상 가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겸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 달 전쯤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자신이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았던 성인으로,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성인으로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난 지난주에 그 자매님이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제게 말하는 겁니다. ‘저요, 세례명 바꾸지 않을래요.’ 그러면서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었고,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명예와 자리를 너무 따라갔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주보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신의 것보다 더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처럼 때로 우리의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 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너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구원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고마운 다리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때를 아는 지혜, 때를 기다리는 믿음, 때를 받아들이는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코헬렛은 신심깊은 가난한 자가 아닌 배부른 학자나 부자가 보아야 할 글입니다.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글입니다. 

하느님 향한 신망애의 삶이, 기도가 빠졌을 때 코헬렛처럼 골수에 파고드는 허무라는 영혼의 질병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여 찬미의 감사의 삶을 사는 이에게는 이런 허무에 대한 사변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어제 코헬렛은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났는데 오늘은 때로 시작해서 때로 끝납니다. 

아무도 이 때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로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요, 때를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또 때에 맞게 처신할 때 아름답습니다. 

알고보면 모두가 하느님 은혜의 때요 하느님 선물의 때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뛸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마치 음악을 감상하는 기분입니다. 

오늘 말씀 중 일부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기로 하면, ‘건강할 때가 있으면 병들 때도 있고, 젊음의 때가 있으면 노년의 때도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고, 자리에 오를 때가 있으면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있다.’ 등 무궁무진합니다. 

봄의 꽃필 때가 있으면 가을의 열매 익어가는 때가 있어, 요즘은 배열매 수확에 분주한 수도원의 풍경입니다.


삶의 리듬은 때의 리듬이요 이 리듬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일희일비, 때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때의 리듬 따라 충실히, 마치 파도타기하듯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온갖 때를 길게 예로 든 코헬렛의 결론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오늘 여기 지금이 바로 살아야 할 제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며 제때에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갈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코헬렛에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바로 이런 하느님 찬미의 삶입니다. 


너무 사변에 치우치다보니 인격적 하느님을 잊었고,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이 없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누구나 저절로 허무주의자, 회의주의자가 될 수뿐이 없습니다.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화답송 후렴처럼 찬미의 고백이 코헬렛엔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코헬렛에 결핍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코헬렛에 대한 정답입니다. 


코헬렛 주석의 마지막 일부를 소개합니다.


-코헬렛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알지 못한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의미한다. 

결국 결론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코헬렛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품는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면서, 전통적 신앙이 거의 ‘학문적으로만’ 열어 둔 채 방치해 놓은 심연을 드러낸다.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만이 그것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허무의 심연’은 ‘사랑의 충만’이 되며 여기서 끊임없이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때를 아는 지혜와 때를 기다리는 믿음에, 살아계신 하느님과 사랑의 소통인 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기도를 통해 질문의 때를 깨달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이어 즉시 이어지는 주님의 첫 번 째 수난예고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고난과 배척, 죽음과 부활의 때를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며, 

제자들에게 지금이 바로 제자들에게 말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때와 하느님의 뜻이 늘 일치되었던 예수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모든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분별의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피시나이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헤아리시나이까? 

사람이란 한낱 숨결같은 것, 그 세월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사옵니다.”(시편144,3-4). 

아멘. 




모든일에는 때가 정해져 있다.

전삼용 신부님

제가 군 생활 할 당시 저는 8개월 정도 철책에 순찰차 운전병으로 파견 받아 소초 병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틈틈이 영어단어도 외우고 책도 읽으며 시간 나는 대로 대학 복학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둬 달에 한 번씩은 중대를 옮겨가며 자곤 하였는데, 제가 연대로 복귀하기 얼마 전 불과 며칠 전까지 자던 내무반에서 수류탄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행인지 수류탄을 바닥이 아닌 침상 위에 올려놓고 나와서 매우 많은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괴롭혔던 선임자의 머리맡에 놓고 나와서 그 주위에 있던 여러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 정말 아수라장이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까지 함께 먹고 자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만 더 머물렀으면 저도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입니다. 인명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말이 크게 다가온 사건이었습니다.

철책에서 내려오니 이미 부대에서 선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넓은 도로를 누비고 다니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강원도 고성에서 춘천까지 나름대로 장거리를 가게 되었습니다. 옆에 선탑자가 탔지만 거의 베테랑이 되어버린 저를 믿고 잠을 잤습니다. 저도 콧노래를 부르며 군견들과 군견 병들을 트럭 뒤에 태우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치원 아이들과 선생님의 귀엽고 예쁜 모습을 보다가 앞에서 튀어나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프라이드 경차는 크게 파손되었고 운전자는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뼈에 금이라도 갔다면 저는 군 영창을 가야하는 처지였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면서 범죄를 저지르면 경찰들 앞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야하는지도 느껴보았습니다. 다행히 돈을 물어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그때도 복학 준비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가 더 컸더라면 저의 모든 삶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꼬대를 하면서까지 영어 단어를 외웠던 고생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제대하고는 복학준비를 위해 운전기사 일을 하였습니다. 공장에서 자재를 나르는 것이었는데 제가 봉고차를 몰고 좌회전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정면에서 중앙선을 넘은 25인승 버스가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운전사의 눈은 떠 있었지만, 결국 제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습니다. 차는 폐차 되었고 다행히 저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만약 뒤에 차 한 대라도 더 서있었더라면 제가 뒤로 밀리지 못해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큰 사고였습니다. 그때 그 운전사는 눈을 뜨고 졸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주님은 살 수 있는 시간을 더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학 복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너무도 다르게 공부가 하기 싫었습니다. 한 순간 폭탄이 터지거나 원하지 않는 사고로 인생이 끝나버리거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데, 고작 원가 몇 십 원 아끼려고 머리를 싸매야 하는 삶이 너무 싫어졌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택했던 경영학이 이제는 너무도 부질없는 학문으로 느껴져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속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자 주님의 부르심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복학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하려고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했던 모든 노력들이 허무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정해져 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맞은 계획을 지니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세워 놓아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도 몇 살 때까지는 돈을 얼마 정도 벌어야겠다는 계획도 세워 놓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 뜻대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획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크게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우환이 닥쳐와도 그 안에서 주님의 섭리를 깨달으려 노력합니다. 이것이 모든 일에 모든 때를 정해 놓으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반응의 차이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 말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모든 주님께로부터 계획된 일이 이루어질 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내 계획에 주님께서 따라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를 실패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모든 계획을 세워놓으신 주님 앞에서 절망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안 좋은 일처럼 보이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코헬렛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주님은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하여 아름답게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그것이 비록 고생길일 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계획 세워 조급할 필요도 없고 지금 안 된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일이 실현되고 있음만 보고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나머지 개인적인 계획과 꿈은 모두 헛된 것이라 모든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모든 일에 주님의 때가 있음을 깨달으라 충고하는 것입니다. 

 



영이 없는 욕망의 기도

김찬선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그런데 그 이전에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제자들이 알고 있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시기 위하여 제자들의 생각을 묻기 전에 사람들의 생각을 물으신 겁니다. 

그랬더니 과연 제자들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는데 비해서 제자들, 정확하게 애기하면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자기 생각을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기도를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제일 앞부분에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과 그 자리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도에 제자들을 초대하시고,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에 함께 참여하였던 것이며 기도 안에서 주님의 영이 제자들의 영과 통교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하면 이렇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쏟아놓는 그런 기도만 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 안에서는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그 <기도와 헌신의 영>이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일할 때나 학문을 할 때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권고하는데 일이나 학문을 할 때만이 아니라 기도할 때도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영을 우리 안에 영접케 되고, 주님의 영을 영접해야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게 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영이 없는 욕망의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빠진 놈이라고 욕을 하곤 하는데 영이 없는 것이 우리말로 얼빠진 것이지요.

일을 할 때나 학문을 할 때는 물론 기도를 할 때는 더더욱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는 오늘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9,18.20)

오상선 신부님

우리는 무엇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정보에 많이 의존합니다.

특히 오늘날엔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덕분에 구글이나 네이버에 물어보면 그럴싸한 답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발품을 팔아서 답을 찾는 노력은 쓰잘데없는 시간낭비로 생각되고 쉽게 남이 찾아놓은 답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을 정답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답은 비슷한 답일 수는 있어도 정답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물으시고 이어서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가 생각하는 답을 찾아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 답을 찾았고 예수님은 그게 정답이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이야기하는 답은 참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깨달은 사람이 하느님은 이런 분이고 영성이란 이런 것이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라 해도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내가 깨닫고 체득한 답만이 정답입니다.

그 답을 찾는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당신이 물으시거든>

상지종 신부님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들을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사랑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빼앗음과 빼앗김 없는 세상 일굼으로써

당신은 정의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갈라져 싸우는 세상 이음으로써

당신은 화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사랑과 정의와 화해를 삶으로써

당신은 평화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착한 벗들에게 밝은 웃음 지음으로써

당신은 기쁨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슬픔에 젖은 벗들의 눈물 닦아줌으로써

당신의 위로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억눌린 벗들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당신은 해방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갇힌 벗들의 사슬을 끊음으로써

당신은 자유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외로움에 지친 벗을 품음으로써

당신은 연대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어둠을 사르는 작은 불쏘시개 됨으로써

당신은 빛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어가는 작은 벗들을 돌봄으로써

당신은 생명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을 살리기 위해 나를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음의 세력에 당당히 맞섬으로써

당신은 죽음을 이긴 부활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줌으로써

당신은 하느님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때를 지켜라. <코헬렛 3, 1-11>

이석진 신부님

모든 일에는 시간과 공간 안에 이루어지는 시기가 있고 사람은 그 때를 지켜야 합니다. 잔치 음식을 많이 먹으려고 아침부터 거르는 사람, 목마름을 준비하여 물을 많이 미리 마시는 사람, 내일 안락하고 편하게 살려고 오늘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아끼다가 내일이라는 때를 만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이가 이왕 죽을 것을 생각하고 먹지도 않고 숨을 쉬지 않으면 때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요사이 저출산으로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는데 이런 생각으로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교육비가 많이 들어 나중에 고생한다고. 결혼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려면 아이가 필요합니다. 지금 편하려고 미래를 잊어버리면 때를 지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무엇을 취할 때도 있지만 버려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버려야 할 때 취하려고 하면 욕심이며 이기심이고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있을 때 쓰지 않고 없을 때 쓸 수 없듯이 돈이 있을 때 쓰고 없으면 못 쓰는 것입니다. 일어날 때 일어나고 잠을 잘 때 잠을 자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사람,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지 못 하는 사람, 병으로 말하면 치매 증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때를 지키는 사람이 되려면 이기심, 무관심, 무능력, 시기 질투, 한계성을 극복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사이 지진이 없던 시대를 살다가 지진이 일어나니 우왕좌왕하며 "네 탓이다.

네가 책임져라." 하지만 지금은 모든 이가 힘을 합쳐 지진을 대비하는 때이지 시간을 끌고 때를 놓치는 때가 아닙니다.

 

북쪽에 홍수가 나서 구호 요청을 하는데 핵폭탄 타령만 하지 말고 당장 북쪽 어린이와 집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의 닥쳐올 겨울옷을 보내고, 남아 돌아가는 식량을 보내면 쌀값도 안정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결실을 보아 회개와 대화의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지금 이북 수재민을 도울 때입니다. 지금 사랑을 할 때입니다. 때를 지키는 사람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 20)

한상우 신부님

고통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성 비오 사제는

우리 삶안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당신 삶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삶을 구원하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길을

알게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신비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이끄심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뒷받침는

십자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은총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좋으심은

고통속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좋으심을

전달하는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의 비오 사제는

주님의 십자가에

진정한 치유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믿음을

청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 모두를 살리시는

십자가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가

진정한 사랑임을

믿습니다. 



자신에게 완벽한 아내감을 찾아 오랜 세월을 혼자 지낸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형제님은 꿈에도 그리던 그런 완벽한 여자를 찾았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결혼을 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하고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매님 역시 완벽한 남편감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사람을 원한다면 스스로 먼저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완벽하지도 않으면서도 나와 관계되는 상대방은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며,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해의 기준 아래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분에 관한 질문을 하시지요.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말을 따라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는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시지요. 즉, 그토록 나와 함께 다녔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아왔던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진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당신께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완벽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완벽함을 제자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심을 복음서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보다는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키우시면서 스스로 완벽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자기 자신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도 남들에게는 철저하게 엄격했었던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의 부족함을 보기보다는 나의 부족함을 먼저 바라봐야 하며,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잘잘못에 대해 엄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셨던 완벽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해하고 기다리셨던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내 이웃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오늘 하루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익숙한 해변에서 눈을 뗄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지 못한다(앙드레 지드).  


행복이 있는 곳(‘좋은생각’ 중에서)

세미나실에 50명의 사람이 모였다. 강사는 각자 풍선을 분 뒤 그 위에 이름을 쓰라고 했다. 그러고는 모든 풍선을 다른 방에 넣었다.

이후 강사는 자기 이름이 쓰인 풍선을 5분 안에 찾으라고 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풍선을 찾았다. 서로 부딪히고 밀리며 방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5분이 흘렀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의 풍선을 찾지 못했다. 강사는 아무 풍선이나 집어 적힌 이름을 보고 그 사람에게 주도록 했다. 그러자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풍선을 갖게 되었다. 강사가 말했다.

“우리가 한 것은 삶과 같습니다. 모두 필사적으로 행복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죠. 우리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함께 있습니다. 그들에게 풍선을 주듯 행복을 주세요. 어느 순간 여러분은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행복을 나누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은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 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사랑합니다.




'때'의 신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순례38일차 입니다. 내일은 대망의 산티아고에 입성합니다. 어제의 순례일정은 많이 힘들었습니다. '파라스 데 레이'에서 '알주아'여기까지 24km정도로 알았는데 무려 30km정도, 아침6시에 출발하여 오후 2시 도착, 무려8시간 정도의 순례 여정 중 2번째의 장거리였습니다. 순례뿐 아니라 살다보면 이렇게 힘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도착한 후도 좀 헤매기는 하였지만 저렴(6유로)하면서도 쾌적한 공간의 좋은 알베르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 점심 대용으로 '멜이데'에서 유명하다는 문어를 먹을 수 있어 걷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때의 신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두 예화입니다.

 

"야, 이신부, 수도원에 살면 늙지 않을 줄 알았는데 수도원에서도 늙는구나."

수십년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의 신기해하며 한 말입니다.

 

"저는 신부님만은 그대로일줄 알았어요."

차마 늙었다는 말을 쓰지 않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자매의 진정성이 담긴 말입니다. 하느님은 신부라 하여 늙지 않는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모든 시간의 때는 하느님 손안에 있고 아무도 그 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국같은 수도원에 살아도 늙음의 때, 고통의 때, 죽음의 때를 피할 수 없습니다. 참 알 수 없는 게, 때의 신비입니다. 제게 이렇게 안식년에다 산티아고 순례의 때가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아마 이냐시오 형제도 이렇게 산티야고 순례의 때가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의 때 안에는 없었지만 하느님의 때안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때요, 이런 때를 아는 것이 지혜와 겸손이고, 이런 때를 받아들임이 순종의 믿음입니다. 저 역시 산티아고 순례에 자신이 없었고 주변에서도 모두 우려했기에 주저했지만 하느님이 주신 때로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막상 실행하고 보니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의 때로 깊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코헬렛의 1독서는 온통 때에 대한 내용으로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들입니다.

 

"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으면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하느님 주신 때의 리듬입니다. 이런 삶의 리듬, 때의 리듬을 잊고 사는 경우는, 또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때는 얼마나 많은지요. 이냐시오 형제와 함께 순례하면서도 때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서로에게 기도의 때가 있고, 침묵의 때가 있고, 대화의 때가 있습니다. 때를 분별함이 지혜요, 때를 기다림이 믿음이요, 때를 받아들임이 순종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는 하느님의 때에 겸손할 수뿐이 없고 그 때를 깨어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상식적인 때보다도 하느님이 주신 때를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와 믿음이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때는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난 예고를 통해 하느님 주신 당신의 때를 깊이 통찰하고 계심을 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울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은 당신 미래의 때를 정확히 예측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모두가 하느님의 때이자 동시에 나의 때입니다. 지금이 하느님께, 또 나에게 어느 때인지 늘 물어야 되겠습니다. 이 때에 대비하며 살아감이 유비무환의 지혜요, 때를 받아들이는 순종에 지체함이 없을 때 누리는 자유입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하느님의 때는 얼마나 많은지요. 하여 분도성인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시며 죽음의 때에 대비하라 하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때를 알아 대비하는 지혜와 때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시편145,15)

 

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주님은 매사 모두 제때에 잘 이루어주십니다. 아멘.


 


불안하면 조급해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의 과월절에 꼭 등장하는 노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 제목은 ‘아니마민’인데,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노래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모든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는 내용의 책을 저술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유태인 의사 빅터 프랭클은 당시 죽음이라는 엄청난 공포를 잘 이겨냈습니다. 바로 한 시간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하던 사람이 가스실에 들어갔다가 동태눈을 하고 들려나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음식을 입으로 떠 넣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감정결핍자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깨진 유리조각으로 수염을 깎았습니다. 피가 날 정도로 붉고 푸르게 턱이 변했습니다. 그리고는 반잔의 커피를 옷에 찍어 얼굴을 닦았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치 군인들은 그렇게 얼굴을 말끔하게 하고 있는 프랭클을 가스실로 집어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포기할 때 남들도 나를 포기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때’를 자신이 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느님이 정해주시는 때를 끈기 있게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낚시를 할 줄은 모르지만 낚시에는 참 좋은 철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마치고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렁이를 매달고 멀리 던져놓습니다. 그리고는 찌가 흔들리기만을 기다립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하는 것은 오히려 물고기를 잡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찌가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해서 바로 낚아채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확실하게 바늘에 걸리는 순간을 느껴야합니다. 그 때가 아니면 바늘이 물고기 입에서 빠져나가 허탕을 칠 수가 있습니다.

이 정확한 때를 물속에 들어가서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표징에 집중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지만 우리는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하느님이 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가장 적당한 때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면 그저 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멍하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 길을 다녀오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처럼 바람소리 속에서도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분간할 수 있는 마음으로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또한 하느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분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오면 오고 안 오면 마는 것이지만 올 때 스쳐가게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종말이 곧 오느니 마느니 하면서 불안함을 조장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어차피 가야 하는 인생인데 왜 그 불안함이 벌써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는 것일까요? 불안하면 서두르게 됩니다. 그들은 이것을 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분이 정하시는 것이고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조급함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망치는지 모릅니다. 경영학에서는 구매자와 가격을 흥정할 때 먼저 내가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상대가 내가 원하는 가격보다 더 많이 쳐 주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해버렸다가는 그만큼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서두르면 손해 봅니다. 모든 것을 정하시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모른다면 기다릴 줄 알면 됩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깨어 기다려야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렛3,1)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살면서 절실히 느끼는 부분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오늘은 섭리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섭리란 쉽게 말해 하느님의 이끄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간이 한참을 지난 후에야 그분의 뜻을 이해할 듯한 마음이 되는 경험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늘 과거형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저 역시 누구 못지 않게 우여곡절의 길을 걸어왔고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분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었지요.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 계획과 그분의 계획이 달랐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내 계획보다는 하느님의 계획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옳았음을 동시에 인정하게 됩니다.

여러분 힘드실 때가 많으시지요?

하느님한테 서운할 때도 많으시지요?

그 때는 분명 여러분의 계획이나 생각하고는 다르게 움직여지는 상황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적어도 “내가 세운 계획보다 나에게 더 좋은 계획을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옳지 않은 길임을 아시는데 가만 보고만 계실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내 계획이 옳지 않다면, 그것을 깨닫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응답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믿어야 합니다.

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한계라고 해도, 그분께서는 우리가 가장 행복한 길을 선택하기를 바라시며, 한결같이 옳은 길로 이끄시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기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상황으로 전개가 된다고 해도,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려는 마음만은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반드시 세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가 국운이 쇠하고, 조선이 새로이 등장할 때 고려의 충신이 지은 시조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작은 세포도,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몸도, 국가도, 별도, 은하도, 우주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겪기 마련입니다. 가을의 길목에서 아무리 봄의 따사로움을 기대해도 그것은 힘든 일입니다. 가을이 오면 나뭇잎은 떨어지고, 단풍은 들고, 그렇게 겨울은 준비하기 마련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언 땅은 녹고, 녹은 땅에서는 새싹이 나기 마련입니다.

 

가끔씩 어릴 때 놀던 동네가 생각납니다. 널찍한 공터에서 친구들과 놀던 일이 생각납니다. 저녁때가 되면 밥 먹으라 부르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생각납니다. 동네를 흐르던 작은 개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던 우물도 그립습니다. 초상이 나면 상중이라는 등을 매달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천막을 치고 상을 당한 유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 폰, 텔레비전, 가전제품들이 주는 편리함과 다양함은 적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줄 수 없는 ‘공동체, 나눔, 정, 그리움, 낭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희망과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게도 하셨고,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물위를 걷기도 하셨고,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화를 하셔도 당당하셨고, 오히려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용기와 힘을 주시고, 고통과 아픔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그리스도는 영광과 기쁨의 순간도 있겠지만 또 고난과 십자가도 질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고난과 십자가도 다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기쁨 속에서도, 행복 속에서도,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도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때 ‘무엇’을 하였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인류사상 완전히 부활하신 단 한 분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그 어떤 사람도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자연법칙이며 세상질서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게 자연 질서의 공평한 점입니다. 지위여하 부유한 자 가난한 자 권력자 노예 모두 세상질서에 속하지요.

 

예수님도 자연의 질서를 순순히 따르신 점에서 질서를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자연의 질서가 아닌 신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십니다. 인류사상 부활하신 단 한 분 예수님의 그 소속이 세상이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루카 9,22)”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를 일깨워주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고통과 실패속에서도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인생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유일한

분이시기에 늘 새로운

오늘이 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결코 판단하지 않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이러한 저를

사랑하게 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십자가가 위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더 많이 사랑하기위해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당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만드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고난과 배척을 받아도

살아갈 힘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유일한 분이시기에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의 기쁨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사랑할 수 없는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만드시는

십자가의 유일한 사람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으신

사람이기에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상처와 고통

죽음까지도

하느님의 생명이 되게하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조차

은총임을 믿게 하시는

유일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하루 되십시오.


십자가의 고통이

생명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은총임을 믿습니다.



어떤 화가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델들은 다 그렸는데 딱 한 사람, 유다를 그리기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에 적합한 모델을 찾고자 했지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유다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거리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사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너무나도 절망적인 모습의 노숙자였습니다. 머리는 길게 헝클어져 있고, 전혀 씻지를 않았는지 지저분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이 화가는 이 사람에게 웃으며 자기의 모델이 되어 주겠냐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선금으로 얼마를 주면서, 만약 모델을 잘 해준다면 많은 돈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지요. 이 둘은 다음 날 아침 화가의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오랜만에 돈을 만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거리의 노숙자로 사는 것보다 모델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첫 모델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옷가게에 가서 옷을 새로 사 입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말끔한 차림으로 화가의 작업실에 다음날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화가는 화를 내면서 이 사람을 쫓아내며 말했지요.


“당장 나가시오. 누가 당신의 모습을 바꿔서 오라고 했소? 나는 당신의 원래 모습을 원했는데, 왜 그렇게 바꿔서 내 일을 망친단 말이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모습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지저분하고 형편없어 보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아오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제대로 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겉으로만 그럴싸한 나를 만들려고 하면서 속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켜주는 주님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부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 제자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부른다고 말하지요. 군중들이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만을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 자신들을 편하게 해 줄 분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떨까요? 온갖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위선을 말끔하게 씻어 버리고, 주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귀한 분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당신이 큰 만족을 가졌다면 어떤 것을 소유하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은 변함없이 만족할 수 있다(달라이 라마).


정직합시다. 특히 주님께...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동업으로 골동품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빨리 돈을 벌겠다는 욕심에 그만 모조품을 진품으로 속여 팔다가 탄로가 난 것입니다. 많은 벌금을 낸 것도 문제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소문이 나서 장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둘은 의논했습니다. 한 친구가 말합니다.

“장사가 안 되는 것은 우리의 신용이 떨어져서 그런 거야. 따라서 우리 앞으로 10년 동안만 절대로 속여 팔지 말자. 딱 10년 동안만 정직하게 신용을 쌓으면 사람들이 믿어줄 거야. 바로 그때 한꺼번에 한탕하고 끝내자.”

10년을 내다보고 이 둘은 정말로 정직하게 장사를 했습니다. 10년째 되는 날, 이 둘은 다시 모여 예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한탕 할 것인지를 의논했지요. 그런데 속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믿고 찾는 집이 되었고, 그래서 폭리를 취하지 않아도 돈이 벌리고 번성하는 가게가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말합니다.

“속이지 않아도 잘 되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정직하게 살자.”

속일 것을 계획했던 사람. 그러나 정직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많은 거짓 고백을 합니까? 그런데 정직하십시오. 거짓 고백을 하지 않을 때 더욱 더 주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기쁨은

만남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고통 또한 어쩔수 없이 만나야하는

우리의 소중한 여정입니다.


기쁨도 고통도

그리스도께로 흘러가야할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어차피 가야할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만남이며

우리의 생명입니다.


고통 또한 하느님의 것임을

알기까지 많은 여정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도 탓하지 않으며

자신의 십자가를 힘겹게 지셨던

그리스도의 삶에서 한결같은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되풀이되는 기쁨과 고통보다

그 기쁨과 고통안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만남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남을 통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만남이

그리스도적인 만남이 되기위해서는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의 생수에 감사할 수 없는

우리들이기에 그리스도는 다시금

하느님의 십자가를 친히 지시며

우리를 일깨워주십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만남의 하루 되십시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요즘에는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을 종종 뵙습니다. 아마 평화방송에 몇 차례 나왔던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무척이나 쑥스럽기도 하기도 또 신기하기도 합니다. 저는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연예인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주 나온 것도 아니고, 또 공중파 방송도 아닌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는 케이블 방송에 나온 저를 알아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탄 뒤에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갔지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서 나오는데 어떤 분께서 저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십니다. 그리고는 제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텔레비전에 나오셨던 분 맞죠?”


저는 이 분 역시 평화방송을 보고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넵. 맞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정을 했지요. 그랬더니만 “맞죠? 전에 개그맨이었던 이원승씨 맞죠?”라고 말씀하시네요.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개그맨 이원승씨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지요. 그래도 요즘에는 이원승씨 닮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듣게 되었네요.


누구를 닮았다는 것, 그렇게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잘 생긴 연예인이 아니라, 못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을 닮았다는 말은 더욱 더 좋지 않지요. 가장 좋은 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보는 말입니다. 즉, 개그맨 ‘이원승’씨가 아닌 사제 ‘조명연’으로 알아보는 말이 가장 듣기에 좋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한 분’이라고 답변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 그리고 옛 예언자 중 한 분이 오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군중들의 말에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그렇게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으셨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 역시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알아보기를 간절하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주님으로부터 내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만을 청하고 있다면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이 또한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었을까요?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말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곧 당신의 구원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참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볼 때,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주님의 구원 역사에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남을 아는 것은 지(知), 스스로를 아는 것은 명(明)이다(노자).


여섯 가지의 감옥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는 여섯 가지의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빠져나오기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라고만 말하면서 현재에 충실하고 있지 못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떡이 더 크다’는 속담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사람이지요.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 모습에 배가 아파서 항상 헐뜯는데 최선을 다하지요.


우리 사람이 수감되어 있는 여섯 가지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이 감옥에 혹시 수감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감옥에 수감되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 나와 있는 여섯 개의 감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들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게 만들어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감옥에서 탈출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감옥에 들어있지 않을 때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식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만 들리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음식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그 음식 자체가 동이 나서 찾기 힘들 정도가 되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음식이 정말로 몸에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좋지 않은 음식까지도 소문에 의해서 명약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다른 이의 말에 쉽게 좌지우지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음식 외에도 많은 경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나요. 


어느 미개한 나라에서 왕과 왕비가 엉터리 관상가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관상이 너무나 나쁘기 때문에 얼굴을 성형수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는 일이 잘 풀리고 남의 입방아에 덜 오를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소리를 듣고 왕과 왕비는 무모한 수술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답니다. 왕과 왕비가 성형수술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 안 백성들은 너도나도 앞 다투어 성형외과를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쩡한 얼굴을 째고 꿰매느라 비싼 돈을 들였습니다. 


과연 얼굴에 따라서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얼굴은 인생의 이력서라고 말하지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얼굴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스럽게 살면 덕스러운 얼굴이 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 살면 축적되어 아름다움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면서 위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나의 판단과 생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시지요.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 쓰라고 하신 질문이 아니었음을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재차 이어지는 질문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즉,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 흔들려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스스로의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통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신비를 가르쳐 주심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혹시 나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만을 참조해서 너무나도 크신 분을 아주 작은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그럼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늘나라의 놀라운 신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주님을 향해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우리가 더욱 더 주님을 잘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하늘나라의 신비는 나에게 더욱 더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참, 공지 한 가지 올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내일까지 1박 2일 동안 성소후원회 임원 연수를 다녀옵니다. 따라서 새벽묵상글과 방송을 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착오 없으셨으면 합니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이 보인다(정진규).


나의 아버지, 나의 스승(박민서 신부, ‘좋은생각’ 중에서)

어릴 때부터 청각 장애인 부모님께 소리 없는 언어, 수화를 배우며 자란 정순오 신부님. 청각 장애인의 애환과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으로 오랜 시간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무엇보다 청각 장애인이 고백 성사나 미사를 직접 드릴 수 있도록 한국에도 그들을 위한 신부가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고는 두 살 때 청력을 잃은 나를 사제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청각 장애인이 신부가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10년 만에 겨우 공부를 마치고, 다시 혼신의 힘을 들여 2년여에 걸쳐 작성한 논문 심사를 앞둔 날이었습니다. 유학 생활의 마지막 관문인 석사 학위 논문 심사였죠. 가슴을 졸이며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결과는 불합격! 가슴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쓰라린 아픔을 겪었습니다. 내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었기에,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좌절감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러다 가톨릭 신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 가정을 꾸릴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고민 끝에 새로운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신부님께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섭섭해 하거나 화내시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뜻밖의 답신이 왔습니다. “네가 네 삶을 주관하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네 삶을 결정해 주거나 강요할 수 없다. 가톨릭 신부가 되든, 결혼을 하든 나는 네 결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청각 장애인이 오래전부터 네가 신부가 되길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을 꼭 기억해라.”

신부님의 답신은 내게 힘찬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순간,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서툰 결정을 한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새로운 각오로 논문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반년 만에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유학 생활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내겐 자상한 아버지이자 인생의 스승이신 정순오 신부님. 그의 격려와 충고가 없었다면 아마 가톨릭 신부로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겁니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희망을 전하는 사제의 길을 가도록, 그는 밝게 빛을 비춰 주는 등대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이재순 수녀님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사는지 정직하게 성찰해 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상인가? 

나의 편리와 이익을 위한 존재인가? 

그래서 별 도움이 안 되면 버리는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함인가? 

내 중심으로 예수님을 찾고 이용하는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손해를 봐도, 더 나아가 아무도 모르는 고통과 죽음을 요구받아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끝까지 참고 받아들이는가? 

예수님은 순수하고 거룩한 사랑 자체이십니다. 

내가 모를 때 나를 있게 하시고, 지금도 나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나의 목숨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사는 목표인가?




용기를 내십시오.

류정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신 후에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창조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교회 행사에 몰두하는 건 아닌지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할 수 있는 흔들림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만 미사가 끝나고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식사 때 성호 긋는 일조차 남의 눈을 의식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일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우리 선조들의 박해 시대 때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작은 몸짓, 작은 동작 하나가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증거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보통의 삶을 사는 평균적인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하루에 한 끼나 두 끼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바깥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할 경우 용기를 내어 성호를 그으면 좌중의 한두 명이 기회가 있을 때 은밀한 목소리로 자신도 가톨릭 신자임을 고백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예수님은 오늘도 순간순간 우리에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작은 몸짓, 작은 응답으로 예수님을 창조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다리십니다.




때를 잘 알아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때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비근한 예로 먹을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12시가 점심때인데 그걸 모르고 있으면 굶겠지요.

그러니 어디를 가건 식사 때가 언제인지 잘 알아놔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오건 우리의 식사 때를 잘 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밥 먹을 때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간표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식을 하는 사람이 언제 주식을 사고팔아야 하는지, 이것을 잘 아는 것은 조금 더 어렵습니다.

주식 동향을 잘 예측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나의 욕심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사지 말아야 할 때 사거나 팔아야 할 때 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때를 판단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쉽지 않고, 특히 누구에게 충고할 때를 아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상태와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할 뿐 아니라 나의 상태와 상황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말하려고 하는 나의 동기와 목적, 사랑 때문인지 미움 때문이지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할 때는 아무 때나 함부로 지껄여대고 미움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독설을 퍼붓습니다.

나의 동기와 목적, 나의 감정까지 말할 적당한 때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잘 아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지혜와 덕입니다.

그런데 지혜와 덕이 필요한 것은 때를 잘 알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때를 잘 안다는 것은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커야 할 때 크고 공부해야 할 때 공부하고 도와줘야 할 때 도와줘야 합니다.

대전에서 재속 프란치스코회 영적 보조를 한 뒤부터 제가 자주 사용하는 표어가 있습니다.

“물들어 올 때 노 젓자!”

어떤 형제님이 이 말씀을 처음 하셨는데 이것이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서 당시 재속 프란치스코회 표어가 되었습니다.

물들어 올 때 노를 저어야지 물 빠지고 난 뒤 노를 저어야 소용없습니다.

애는 애대로 쓰고 소득은 소득대로 없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게으름과 망설임이 없어야 하고 열정과 용기와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들을 총 집결돼야 합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도 때를 놓치지 않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우리 대부분이 실패하는 것은 욕심과 조급증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삭이 여물지 않았는데 베는 것과 같고 밥의 뜸이 들기 전에 솥뚜껑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 농사 망치는 것, 대부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때를 잘 아는 것은 때를 기다렸다가 이때다 싶으면 놓치지 말고 온 힘을 다 쏟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가 작은 먹이 하나를 잡기 위해서 아주 긴 시간 끈기 있게 기다리다 때가 되었다 싶으면 전력 질주하여 먹이를 낚아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를 알고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다.

이 “때”를 모르고 하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가 바로 하느님의 때입니다.

 




한 소년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끙끙대고 있는데, 교리 선생님이 탐스런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이 빨간 사과 한 개에 다 담겨 있단다. 갖고 싶지 않니?”

소년은 벌떡 일어나 사과를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소년의 손은 사과에 닿지 않았습니다. 펄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키 큰 선생님이 들고 있는 사과까지 닿기에는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더 높이 뛰었습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과까지는 닿기에는 자신의 키가 너무 작았던 것이지요.

미친 듯이 뛰던 소년은 이제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움켜쥔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벌려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과를 소년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뜨렸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손을 가지런히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취하고자 계속해서 뛰었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나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능력의 많고 적음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시지요.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는 의견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정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 옆에 있었고, 예수님 뜻대로 실천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곧바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생각만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정답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한 마음으로 손을 앞으로 쭉 내미는 것임을 오늘 아침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음이 진실로 구한다면, 비록 적중하지 않아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대학).


평균의 오류

인류 최초로 ‘평균’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수학자 헤로도토스, 지금은 어린아이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지만, 당시만 해도 평균이라는 개념은 획기적이었다.

자신이 발견해 낸 평균에 대해 깊이 빠져 있던 헤로도토스가 어느 날 가족들과 소풍을 나갔다가 작은 냇물을 만났다. 얼핏 봐서는 꽤 깊어 보였던 터라 그의 아내는 다른 길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헤로도토스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냇물의 평균 깊이와 아이들의 평균 키를 재 보겠소. 우리 아이들의 평균 키가 냇물의 평균 깊이보다 높으면 문제없지 않소? 먼 길로 돌아가는 것도 수고로우니 잠시 기다리시오.”

그러곤 막대 하나를 들고 와 아이들의 키를 재 평균을 내고는 냇물을 돌아다니며 깊이를 쟀다. 모래사장에서 한참 계산에 몰두하던 그가 드디어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요. 냇물의 평균 깊이는 93Cm고 아이들 평균 키는 120Cm니 안심하시오. 자, 이제 냇물을 건넙시다.”

아빠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차례대로 냇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지점은 93Cm보다 훨씬 깊었고 막내 아이의 키는 120Cm보다 한참 작았다. 결국 막내 아이가 물에 빠졌고 그의 아내가 급히 뛰어와 아이를 구했다. 하지만 그때도 헤로도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래 위에서 검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평균의 오류에 빠진 수학자의 웃지 못할 이야기지만, 우리도 평균에 너무 의지한 나머지 표준이라 정해 놓은 선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물에 밀어 넣고 있지는 않은가. 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탓에 자녀를 냇물에 빠뜨린 헤로도토스를 기억하자. 현실에서 평균은 울타리에 갇힌 지식일 뿐이다.




<영적 삶이 성숙할수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진리를 간결한 한 마디 진술로 요약하고 계십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삶이 성숙할수록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는데서 오는 기쁨, 보람, 행복, 위로는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단맛들은 ‘이것’을 넘어서고 나서야 찾아오는데, ‘이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작은 죽음, 매일의 순교, 순간순간 나를 버림,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한 긍정적 수용...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내게 맡겨진 몫을 다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영성적 성숙의 결과는 겸손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영적 완성의 시작은 하느님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인정함입니다.”

한 저명한 성서학 교수님께서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피정강론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덕은 어떤 덕이겠습니까?”

“신앙? 희망? 사랑? 정의?...?”

“아닙니다. 다 부차적인 덕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덕은 겸손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특징 중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크심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겸손으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로, 건강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병든 사람들에게로...




사랑의 콩깍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신학교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좋아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한 때는 그 사람 없으면 못 살듯이 예뻐 보였는데 그 감정이 사라진 지금 보면 여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눈에 무엇이 씌었다가 떨어져나간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연구 기관에서 사랑에 빠진 남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멋지고 잘생긴 연예인들의 사진 속에 연인과 닮은 사람의 사진들을 끼워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여 준 결과 누가 봐도 잘 생기고 멋진 사진 속 사람보다 자신의 연인과 닮은꼴의 사람 사진에 더 큰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는 말을 증명해줍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미워하면 좋은 행동까지 위선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결혼해서까지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남아있는 부부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하고도 계속 상대가 예뻐 보이기도 하겠지만 또 많은 경우는 눈에 콩깍지가 떨어져 실제를 보고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처음엔 함께 살기 힘들었다가도 떨어진 콩깍지를 다시 찾아 씌워서 신혼 초처럼 다시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예뻐 보이고 안 예뻐 보이는 것은 그 상대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내 눈의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꽃을 본다고 합시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꽃을 아름답게 볼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저 다른 풀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게 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사람 안에 아름다움을 넣어 놓아서 그 아름다움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 안에 아름다움이란 것이 없어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진리란 것이 없어서 진리가 무엇이며, 또 선이란 것이 없어서 무엇이 선인지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이 특별히 아름답게 느껴졌다면 그 사람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면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콩깍지를 통해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이 고해성사 때 이런 고해를 들으셨다 합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싫은데 특히 몇몇은 더 싫어요.”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싫게 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정말 안 좋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고 유다까지도 사랑하셔서 제자로 뽑아주셨습니다.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내 안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관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자라 하고 어떤 이들은 또 다른 사람이라고 하며 각자의 의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이냐에 따라 상대를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을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 볼 수 있는 눈은 베드로가 스스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베드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그것을 일러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없었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넣어 주셔서 아름다운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셨듯이, 베드로에게도 ‘사랑’을 넣어주셔서 참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성령님’이라 부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황의 무류권의 근거로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느님은 베드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갈 최고의 권위자로서 오류가 없도록 선택하여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주신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식을 예쁘게 보이게 하신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객관적으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잘난 것이 없지만 자신의 자녀는 특별히 더 예뻐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모에게 콩깍지를 씌우신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예쁘지 않으면 부모는 책임감만으로 자녀를 키워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면 살아가는데 덜 힘이 듭니다. 저도 예전에는 미워하는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까지도 미워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고 노력해온 결과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삶이 힘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이 씌워주시는 사랑의 콩깍지를 씌워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이난호

아가다의 남편은 한창 나이에 실직하고 일터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아가다는 십여 년 넘게 두 나라를 오가며 혼자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키웠다. 나 같으면 팍삭 주저앉을 상황에서도 그는 늘 웃었다. 그것은 베드로처럼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믿고 기댄 사람의 느긋함이라고 나는 그의 웃음을 부러워하며 십여 년 연상인 내 신체 나이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혼자 익힌 중국어 실력으로 신구약성경 필사를 끝냈고, 얼마 전 한참 늦깎이로 방송대 중어중문학과에 들어갔다고 해서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요란하게 번쩍이지 않았지만 그는 빛났다. 그런 아낙들이 곳곳에 박혀 있어 우리나라가 이만큼 버티는 거라고 든든한 묵상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가다는 마침 중국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평화방송을 시청할 수도 없었고 주일에 한 번 중국 건물을 빌려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라 생각 끝에 아가다는 자기 집에 분향소를 차렸단다. 추기경님 사진을 모시고 촛불은 켰지만 영 송구스러웠고 그 며칠 간 옷 갈아입기도 민망했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어설픈 분향소를 송구해하며 드렸을 아가다의 간절한 연도가 연상되어 콧마루가 찡했다. 추기경님의 영혼이 가장 달게 가장 먼저 그의 연도를 흠향하셨을 것 같았다. 


사실 후닥닥 튀어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평소 그분을 ‘품고’ 그분을 ‘느끼고’ 그분을 ‘살았음’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아가다는 언제 어디서든 주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침묵을 알아들을 사람(루카 9,?21 참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넘어 부활의 영광을 맨 먼저 내다볼 사람이 아닐까?





어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테스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 마리의 사냥개가 족제비 한 마리를 뒤쫓고 있었다. 족제비가 나무 밑의 굴로 도망간 지 얼마 안 되어 그 굴에서 토끼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토끼는 잽싸게 큰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토끼가 아래로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사냥개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토끼는 위기를 벗어나 멀리 도망쳤다.”


선생님은 “이 이야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는 사람?”하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토끼는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없어요.”, “토끼가 어떻게 세 마리의 사냥개 위로 떨어질 수 있죠?”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계속 문제점을 말하라고 했지만 학생들은 선생님이 원하는 답을 말하지 못했지요. 그러자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족제비는 어디로 갔지?”


맞습니다. 학생들은 사냥개와 토끼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족제비의 존재를 잊었던 것이지요.


이 세상을 우리들은 숨 가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면 때로 사소한 문제들이나 ‘무가치한’ 일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샛길로 빠져 원래의 목표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앞서 사냥개들이 좇던 ‘족제비’가 사라진 것처럼, 우리의 목표를 이렇게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볼 뿐, 진정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새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이 아닌, 엉뚱한 답만을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지요. 그는 예수님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내게 있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요?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베드로와 같은 정답을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내게 있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묵상하여 봅시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신민영)

청운의 꿈을 안고 어렵게 들어간 외국어 고등학교. 그러나 그를 볼 때마다 추첨으로 신입생을 뽑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곤 했다. 눈은 잔뜩 풀린 데다, 도무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내 짝 P. 그는 늘 나사 하나가 빠진 듯 삐걱거렸다.

P는 등교하자마자 책상 위에 엎어져 논스톱으로 12시까지 자다가 점심을 먹고는 사라졌다. 게다가 P의 땡땡이에는 이유가 없었다. P가 땡땡이를 친 이유는 단지 학교에서 할 일이 없어서였다. 친구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의 반밖에 머물지 않던, 그나마 그 시간도 잠자는 데만 쓴 P의 성적은 역시나 전교 꼴등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10여 년. 누가 봐도 구제불능이던 P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지금은 번듯한 버스 광고 회사의 사장이다. 월수입이 자그마치 천만 원. 전교에서 1,2등을 다투던 친구들보다도 훨씬 낫다. 만날 잠만 자던 아이가 아침 일찍 나와서 거래처에 전화를 돌리는 모습을 보면 ‘내가 알던 P가 맞나?’ 의심날 때가 있다.

이쯤에서 던질 법한 질문. 이렇게 성실한 P가 왜 고등학교 3년 내내 눈이 풀린 채 살았던 것일까? 본인이 밝힌 이유는 참으로 심심했다.

“그땐 목표가 없었어.”

목표가 없으니 학교생활이 그렇게 무의미하더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왜 길에서 담배를 피냐, 왜 자꾸 수업시간에 자냐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은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그와 함께 진지하게 목표를 탐색하고, 학교생활이 그 목표 달성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려줬다면 고교생활을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엊그제 서점에 가 보니 자기 계발 서적이 가득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법’,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 법’ 등 저마다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좋은 답보다 중요한 건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내 목표의식이 여전한지’, ‘초심이 흐트러졌다면 왜 그런지’ 스스로 묻고 다시 심장에 불을 붙이는 것만큼 훌륭한 건 없다. 구제 불능 P. 그는 단 한 가지 질문에 답했을 뿐이지만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것은 연연해서가 아니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보통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즉 자신의 평판이 어떤지 궁금해 합니다.

궁금해 하는 정도를 넘어 연연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을 놓고 볼 때 다른 사람의 평판에 연연하는 것은 불행의 지름길입니다.

연연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좋게 봐주면 다행이지만 나를 안 좋게 보면, 

분노하고,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고,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존재가 흔들리고 별 의미 없이 그냥 던진 한 마디에 뿌리째 흔들리기도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에 의해 행복하다 해도 의존적인 것이기에 진정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의 평판에 자유로우니 일단은 행복한 것 같은데 심각한 자기 착각과 고립을 살게 되기에 이 또한 진정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성 프란치스코는 어떠하셨을까?


물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으셨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분도 아니셨겠지요.

연연하지는 않으시지만 염려하고 배려하시는 관심은 있으셨겠지요.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심은 일종의 가르치심이고 당신의 정체를 확고히 심어주심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혼자 기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늘 기도하셨겠지만 복음에서는 중요한 때에 주님께서 기도하심을 전합니다. 

12 제자의 선택을 앞두고 혼자 기도하셨고, 수난을 앞두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당신의 정체를 알려주시는 이 때도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매우 고심을 하신 다음 당신의 정체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자기들의 스승이 비참하게 죽게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제자들이 갑자기 스승이 죽으면 엄청 혼란을 겪을 것이니 이제 당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어야 하고, 그렇게 죽는 당신이 누구신지 제자들이 확실히 깨닫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앞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으신 것은 당신은 사람의 아들로서 수난을 받아 죽게 되지만 하느님의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물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어제는 한 달에 한번 있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음악피정을 한다고 공지를 했기에 날짜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가위 연휴 바로 다음 날이었거든요. 더군다나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저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음악피정이 시작하는 10시경. 저의 불안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더군요. 너무나도 적은 교우들 그리고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 피정 강의를 해주실 신부님께서는 일찍 오셔서 강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이에 반해서 좌석을 채우는 숫자는 너무나 적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찬양을 시작하면서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함께 큰 소리로 찬양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나는 이 음악피정을 단순히 한 달에 한번 치루는 일로써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 더 가까이 체험하는 것이 목적인데 어느 순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치러야 하는 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에 연연하게 되고, 날씨가 안 좋으면 안 좋아서 불만이고 날씨가 너무 좋으면 사람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놀러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단 한 사람이도 이 음악피정을 통해서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피정을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지요. 


“저 역시 피정에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강의 때마다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드리겠습니다. 성사를 보실 분은 조용히 고해소로 오셔서 성사 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에게 고해성사를 드렸습니다. 저 역시 고해소에서 기도를 하면서 처음의 불편한 마음들을 하나씩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큰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고, 놀라운 것은 점점 사람들이 오셔서 음악피정의 빈자리를 채우시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재주와 능력이 중시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커 보이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주님 앞에서는 얼마만할까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인 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하는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이 보이는 예수님에 대해 들리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의 이름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 호칭을 받는 예수님에 대해 한껏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인기도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곧바로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려는 욕심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진정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해 봅시다.


기도(정채봉)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저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강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강좌 때 마다 한 인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돌아보니 꽤 많은 인물들을 소개했습니다. 성모님, 양부 요셉, 세례자 요한, 바오로 사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 베타니아의 마리아, 세리 마태오, 세관장 자캐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바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었습니다. 계속 파고들어보니 정말 존경스런 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존경하는 성서 상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으셨습니다. 제자공동체의 으뜸이 되셨고, 사도교회의 수장이 되셨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와 관련해서 복음사가들이 보여준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자중의 제자였던 베드로 사도,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 사도의 실수나 나약함, 인간적 부족함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관련한 기사들 살펴보니 수치스런 기록들이 꽤 많았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등 예수님께 신랄하게 혼나는 장면,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내쏟다가 주어 담지 못해 당황하는 모습, 최종적으로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모습 등등.

 

복음사가들은 왜 그런 부분을 좀 감싸주지 않고 신랄하게 보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참으로 의미 있는 묵상주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수도자란 누구입니까? 사제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그 신분이 단 한 번에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온 몸으로 말해주고 계십니다. 자신의 신원을 매일 새롭게 선택해야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제자요, 수도자요, 사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한 때 ‘반석’, ‘바위’라고 부르시기도 했지만, 다른 때 ‘사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가장 믿을만한 반석에서 배신자, 사탄로 넘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단 한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럴 듯 해보입니다. 거룩해 보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순식간에 사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배신자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래의 나약하고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지 않고서는 잠시도 홀로 설수 없는 부족한 우리의 근원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거의 죽음과 멸망에 도달한 베드로 사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당신 자비의 눈길을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습니다.

 

그 따뜻한 눈길,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의 눈길에 베드로 사도는 바닥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새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죄와 방황과 타락의 길을 거듭하는 우리를 인정사정없이 내치지 않으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총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되풀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배반했다고 해서, 타락했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한번 부여한 수제자 직분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나약함으로 인해 삶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베드로 사도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베드로를 신뢰하십니다. 밀어주십니다. 감싸안아주십니다. 수제자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 앞에 베드로는 비로소 진정한 수제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는 사도 중의 사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중한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오늘 신자로서 본분을 망각했다 할지라도, 오늘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하루를 보냈다할지라도 있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백

김인한 신부님

언젠가 사제서품식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젊은 사내들이 서툰 몸짓과 함께 일생을 두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이 담긴 그 모습을 보며 저의 고백도 떠올려보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지 않고 주님으로 인해 살겠다고 맹세한 제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라고 그때처럼 우렁차게 고백할 수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주님은 과연 누구신가요? 베드로의 저 가슴 가득한 고백을, 또한 그것을 일생을 두고 살아내는 그의 삶을 우리도 깊이 고백하고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 때 이전의 내가 죽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인이신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또 삶 안에서 주님을 형식적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우리의 첫 고백처럼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임을 삶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신앙고백

변진흥

어느 신심단체에서 ‘과연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자매는 ‘나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고, 어떤 형제는 ‘나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라고 했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과 평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풍토는 기복적 요소를 물씬 풍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예를 들면서 다시 제가 함께하고 있는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이분들의 대답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압축되었지요. 물론 정답입니다. 구원 신앙의 핵심을 꿰뚫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이런 질문을 제가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도구로 쓰시는 분’이라고요. ‘그분께서 언제 어떤 모양의 도구로 쓰시건 나는 그냥 그분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물속에 던져지건, 불속에 던져지건, 자갈밭에 던져지건 ‘내가 왜 그곳에 던져지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그냥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를 좋아합니다. 이 기도의 지향처럼 평화의 주님께서 쓰시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 미움을 사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어둠에 빛을 비출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만 있다면 들어오는 복을 걷어차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더라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강영구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만일 예수께서 저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저는 우물쭈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바르게 대답하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자기를 아는 사람이 예수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 있게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려면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지식(知識)이 아닙니다.

예수는 나자렛의 목수 출신이고, 그분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며 그분의 형제들이 누구인지(마태13,55) 따위를 아는 객관적인 지식으로 박사(博士)가 될 수는 있겠지만,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지식(知識)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을 줍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 안에 귀의처(歸依處)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나는 누구

조성풍 신부

성묘를 가거나, 장례 미사에 참례하게 되면 삶을 보다 진지하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 앞에서 그분을 기억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런저런 대답들이 오가고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여기느냐?”라고 직접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답을 함으로써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함께함의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 대한 고백과 그에 걸맞은 우리들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김병환 신부님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이는 신앙고백과 수난은 서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해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 당신 신원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마지막 과월절, 그러니까 예수께서 당신 수난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을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처음에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물으시자 제자들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란 말은 구약에서 예언된 왕,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 예수께서도 베드로의 대답에 깜짝 놀라신다.

베드로의 대답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었던 신앙이었다. 그런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언급하시면서 처음으로 당신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 수난의 엄청난 사건이 믿음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고 자신도 수난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고 또한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이해하고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예언자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이며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깨 1,15-2,9)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

경규봉 신부님

다리우스 왕 2년 6월 1일에 예언자 하깨는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에 백성은 회개하고 성전건축을 위한 재료들을 준비하여 드디어 6월 24일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초막절(레위 23,33-36)의 마지막 날인 7월 20일, 백성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또다시 예언자 하깨를 시켜 말씀을 내리셨다.

백성 가운데 솔로몬의 성전을 본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 가운데 노인들 중 몇몇이 어렸을 적에 화려한 솔로몬 성전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예언자 하깨의 독려로 1달 동안 열심히 일하여 윤곽이 드러난 성전은 예전의 웅장하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형편없었다. 때문에 노인들은 자신들이 재건한 성전을 보면서 실망하였다. 탈무드의 기록에 따르면 재건된 성전에는 솔로몬 성전과 비교해서 다섯 가지가 없었다고 한다. 재단의 거룩한 불,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세키나(Shekinah), 계약의 궤와 그룹, 우림과 둠밈, 예언의 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빠져 있는 성전을 본 노인들은 실망하였으며 그 동안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처럼 재건한 성전이 형편없이 초라한 것을 보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백성에게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전하시는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에게 힘을 내라고 3번이나 반복하면서 주님께서 함께 계실 터이니 일을 시작하여라. 이집트를 탈출할 때 약속하신 대로 함께 계시며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에 머물러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도록 할 터이니 겁내지 말고 힘을 내어라. 이제 곧 온 천하와 뭇 민족이 뒤흔들릴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뭇 민족이 가져오는 보화로 지은 하느님의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이다. 은과 금, 이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이므로 가난하고 어렵다고 걱정하지 말라. 주님께서 이 성전에 평화와 안녕, 번영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세운 성전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웅장하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에 비해 너무나도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하느님의 영광이 차고 넘치며 솔로몬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라고 하깨는 예언했다. 그것은 그들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궁핍과 고난을 이겨내며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이룩한 것일지라도 크고 화려하지 않으면 사람의 눈에는 보잘것없이 보이고 하찮게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해도 마음과 정성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눈에 들지 않는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과 정성을 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향하고 갈구하는 마음,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 당신을 희망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어여삐 보시고, 그 마음속에 머무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렇게 이룩한 당신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당신의 평화를 주신다.

나아가 그 성전은 이 지상에서 세워진 성전을 넘어서서 종말에 이룩될 천상의 성전이기도 하다. 하깨 예언자의 예언은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뭇 민족들은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보게 될 것이다. 야훼의 날에 우주가 진동할 것이며,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왕국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드리자.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당신의 평화를 가득히 채우시는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




권경렬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예수님께서 물어 보십니다. 이 물음은 우리들이, 매우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자의식을 갖게 되고 한번쯤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그리고 남과의 관계 속에서 남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를 묻게 되기도 합니다. 나 어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 우리는 거울을 보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비춰 보기도 하고 사람들의 말에 아주 예민해져 때로 남이 나를 두고 평가하는 말에 좌지우지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한 관심입니다. 내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관계들을 통한 의미추구가 아닐까싶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는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의미에 관심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됨의 본질을 이루는 인간성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삶은 의미가 있고, 인생은 진퓽?찾을 가치가 있음을 믿으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는 조바심을 심중에 품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실존의 유한함을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의 무한함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에 그토록 관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고 하더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사람됨에 관심하는 우리에게 사람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 단순한 존재를 넘어설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당신이 가실 길,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고 목숨까지 내어 놓는 그 길이 사람됨의 길이며, 존재 너머에 태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싫든 좋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이고 알든 모르든 우주 속에서 사람이라는 역을 맡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 자신을 내어놓고 세계에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끼치며, 이해하며, 찾아내며, 함께 세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열려져 있는 세상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 만나고, 함께 우정을 드러내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길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됨의 의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의미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을 걸고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쓰디쓴 시련, 실망, 좌절 뒤에 따라옵니다. 우리의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나옵니다. 삶의 진실로부터 뽑은 체험들입니다. 세상을 솜씨 있고 약삭빠르게 다루는 것으로는 삶의 참된 의미는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진실한 관계 속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걸 때 삶의 참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어지는 선택에서 옳은 선택이란 참으로 어렵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진지하게 다룰 중요한 결단은 과연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진리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를 위해 죽을 것인가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결정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따라 그 사람됨이 결정됩니다. 자기가 한 말들이, 자기가 한 행위들이, 자기에게 던져지는 물음들의 대답인 삶이, 자신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저절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가치 있게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존재 의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일 것입니다. 허무와 패배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 항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사명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냐 저 세상이냐를 선택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 하느님과 세상을 함께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서로 반대되는 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위해 살고 죽는 것이 곧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든지 상관하지 않게 되고,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며, 우리가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한창현 신부님

살아가다 보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좋게 말할 때가 있는가하면 나쁘게 말할 때도 있고, 정확하게 알고 말하는가하면 전혀 다른 것을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고요.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을 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하나...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씩을 했지만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나 신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장 정확하게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아마 우리들은 많은 말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말을 해서 상처를 주거나 신자답지 않게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엉터리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다른 이들의 말에 너무 힘겨워할수도 있습니다. 

또 남을 힘들게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합니다. 제대로 알고 말해야하겠습니다. 


한편 오늘은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오상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많은 성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오상을 받으신 성인들도 계심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오상을 받으셨던 분들 중에는 비오 신부님이 계십니다. 

2002년 성인 품에 오르셨고요. 이분은 50년 동안 손과 발 옆구리에 오상을 받으시고 수많은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어 주신 분이십니다. 

고백성사를 보고도 같은 죄를 또 짓게 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짐하지만 잘 안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은 단번에 여기에서 건져 주십니다. 

제대로 통회하지 않은 죄인들,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가벼운 죄만 고백하는 죄인들,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큰 죄인들을 낚시로 고기를 낚듯 한번에 걷어내십니다. 

이미 자신에게 올 영혼들을 13세때 환영으로 보신 분이십니다. 

하루 한두 시간만 주무시고 한끼 적은 식사로 평생을 사신 이분은 수많은 희생과 보속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에 관한 책을 읽은 어떤 사람은, 이 책을 한번 읽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아 고백성사를 보았는데 예수님께 성사를 본다고 하는 고백성사의 참뜻을 체험하고 참으로 기뻤다고 합니다.


오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분의 신앙을 본받고 또 터득하여 주님과 일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면서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에 화답하여, 본당활동과 소공동체운동 안에서 믿음의 씨앗을 전파하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매진한다면 우리 신앙의 기쁨은 거기서 배가 될 것이고, 우리 신앙에 확신을 준 비오 신부님 역시 천상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계시

박상대 신부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가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가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가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이루어낸 치적(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 바친 ‘감사의 기도’(루가 9,16)로 이루어낸 기적(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가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가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도고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적(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주시고 보충해주시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가 9,18-21)

유광수 신부님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유럽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발전과 한국인의 열심한 신앙 생활에 감탄하고 놀라워한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으며 아시아의 선교는 한국 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 한국 교회는 살아있고 아시아의 선교를 떠 맡을 만큼 성숙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비록 유럽 교회가 잠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내가 만나 본 유럽인들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적인데 비하여 한국 교회는 겉으로는 크게 발전한 것 같지만 안을 들어다 보면 왠지 미성숙하고 그리스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은 생각하는 사고가 그리스도적이고, 몸에 벤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적이고, 그네들의 문화가 그리스도적이다. 그네들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그리스도적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 나라는 어떤가?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 온 것은 불과 2백년이 조금 넘었다. 그 중에서도 약 백년동안의 박해와 교회 제도상 외국 선교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적인 신앙 교육을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유교, 불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우리들의 사상이나 마음까지 완전히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열심하고 희생적이고 생명을 바쳐 순교까지 하는 열성은 있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상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고 우리의 심성에까지 촉촉히 적셔주지를 못하고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지금도 복음보다는 불교적인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이 더 많이 마음에 와 닿고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신앙은 어설프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왠지 급조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의식 세계를 볼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마만큼 군중들과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한결같이 구약 성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물었다면 누구라고 대답했을까? 석가, 공자, 단군, 위대한 성현 중에 한 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교, 불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인 복음은 아무래도 낮 설은 것 같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리스도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즉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는 고백이다. 사실 이 말은 엄청난 말이다.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십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가?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생활 속의 구세주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재물이 구세주요, 권력이, 명예가 그리고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애인이 구세주이다. 나의 취미가 구세주요, 나 자신이 구세주인 경우를 많이 본다.

맥루한은 "아무도 아무에게 아무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어도 배우는 이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 즉 배우는 이의 열성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나를 구원해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가 복음적이지 못할 때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다.

나의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습관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발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과 제자들의 고백의 또 다른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즉 군중에게 있어서 에수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중에 한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절대적인 분이 아니니까 절실하게 믿을 필요도 없고 구세주라고 가지 고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여러분들 중에 한분일 뿐이다. 그분이 요한 세례자이든 엘리야이든 옛 예언자 중에 한분일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분이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에는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신 분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과 제자들과는 이런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군중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고 그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신 분인 예수님을 위해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렸고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고백은 나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누구인가? 이 말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신은 저에게 누구이십니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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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어느 별 어느 하늘이 이렇게 당신이 피워 놓으신 불처럼 밤이면 밤마다 이렇게 타오를 수 있나요?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번은 본 듯한 얼굴, 가슴속에 항상 혼자 그려보던 그 모습,

단 한번 눈길에 부서진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으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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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모래사장에 모닥불과 친구들.

힘 좋게 타들어가고 있는 장작들과 서럽도록 고운 빛깔의 불꽃에 눈을 주며 모두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밤하늘 그리고 별, 파도소리, 그리고 모래사장과 모닥불, 술병과 술잔 그리고 적당히 상기된 친구들의 얼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놓아 불렀던 애창곡이었다.

30년 전 군부독재의 서슬 퍼렇던 시절,

시국의 아픔에 울분을 토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밤, 어느 섬 바닷가의 풍경이다.


당시 세상 돌아가는 꼴에는 어울리지 않는 참 예쁜 가사를 담고 있는 노래이다.

첫 눈에 마음을 빼앗긴 어느 누군가를 생각하며 써내려 간 고백.

오십이 넘은 이 나이에도 그 아름다움은 소멸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신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노랫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백의 대상은 아니었다.

갑자기 타올랐다 이내 꺼져버리는 그런 고백의 대상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가톨릭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고, 성당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놀이터였다.

늘 듣는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고 성인들 이야기고 성모님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가족 같은 분이셨던 것 같다.

부모님들은 언제나 힘들거나 기쁠 때 예수님을 떠올리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인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칭찬받고 싶은 일을 했을 때도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예수님이었던 것 같다.

혼잣말을 들어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셨던 것 같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뇌(?)가 된 예수님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분 때문에 개인적 삶의 방향은 늘 폭이 넓지 않았다.

삶의 기준도 그분 때문에 늘 한 방향이었다.

그렇듯 늘 함께 하셨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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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은 저에게 누구이십니까?

베드로처럼 거창한 고백은 저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내 삶 안에 당신은 계셨고,

제 삶의 이정표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보여드린 모습을 돌이켜보면, 세 번의 베드로의 배신은 배신도 아니었지요.

정말 등도 많이 보여드리고 말았네요.


주님,

저의 당신에 대한 고백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제가 행복하기를 누구보다도 바라시는 분이시라고요.




구원받았습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투브에 인라인 스케이트 대회 할 때 벌어졌던 재미있는 동영상이 하나 올라와있습니다. 어디서 한 건지는 모르지만 콜롬비아 선수가 혼자 가장 앞선 상태로 결승점을 향해 질주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다른 선수들은 매우 뒤쳐져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선수는 승리에 도취돼 손을 높이 들고 우승의 세리머니를 하였습니다. 그 때 한국 선수 하나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거의 비슷하게 결승선을 통과하였습니다. 콜롬비아 선수는 자신이 우승한 줄 알고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국 선수가 마지막에 간신히 추월하여 우승한 것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자만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개신교 신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아보지 않았습니까? 저도 받아보았던 것 같은데 대답을 못하고 매우 망설였던 것 같습니다.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질문에 조금은 주저할 것입니다. 개신교 분들은 세례를 받고 또 구원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은 것으로 확신해서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또 천주교 신자들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믿음이 없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 받았다고 해서 다 똑같이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가 셋째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을 알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첫째 하늘까지 오른 사람도 있는 것이고 둘째 하늘까지, 혹은 넷째, 다섯째까지 있다면 그 위까지 오른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라면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매우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해야 할 제자들에게 당신 정체에 대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함구하십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나 그 해답은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데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이 일이 완수되기 전까지는 당신의 정체를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완수하시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이시더라도 그리스도의 소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신 소명을 완수하여 온전한 메시아, 온전한 구원자가 될 때까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지 말아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항상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로서의 당신의 소명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기보다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겸손한 모습을 지키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아직 당신 소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과정에 계셨던 것입니다. 사제서품을 받았다고, “난 사제야!”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며 온전한 사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갓 사제가 된 사람과 사제 옷을 입고 관 속에 누워있는 사람과는 비록 같은 사제이지만 그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무언가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 자신을 소개할 때는‘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지금 떳떳하게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찍고 차를 달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도착했습니까?”라고 물으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목적지는 알지만 아직은 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조차 어쩌면 조금은 교만함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열심히 걸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구원으로 걸어가는 도정에 있는 것입니다. 콜롬비아 선수처럼 1등 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결승선까지는 아무 것도 정해 진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함구하라고 하신 것처럼, 구원받았다고 자신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오늘 하루 더 완전한 구원을 향해 한 발짝 더 내딛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 나

   윤성희

우리 스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뭘 잘 묻지 않으신다. 희한한 질문으로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놀라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선승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예수께서 뭔가를 물으시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중 특히 세 가지 질문이 마음에 떠오르는데, 요한복음에서 “무엇을 찾느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부활 사화에서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이다.

세례자 요한을 떠나 자기를 찾아온 제자들에게 던진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을 찾는 이들의 개인적 욕구나 원의, 진정한 목마름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며, 성경공부를 하고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진정으로 기대하는 게 무엇일까? 신앙심 깊고 올곧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일까? 자식의 승진이나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밭에 심어놓으신 사랑 때문일까?

“무엇을 찾느냐?”가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라면, “먹을 것이 좀 있느냐?”는 이웃에 대한 물음이다. 예수께서 먹을 게 있느냐고 물으시는 건, 단순히 당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는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뭔가 줄 게 있는지 알고 싶어 물으셨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제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물으셨다. 결국 “먹을 게 있느냐?”는 이웃과 나눌 것이 있느냐? 또는 이웃과 나눌 마음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남들이 가르쳐 준 답 말고, 내가 스스로 얻은 답을 듣고 싶어 하신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일까, 애인일까, 스승일까, 구세주일까? 어떤 답을 하건, 예수께서 말씀하신 으뜸 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려면, 하느님과 이웃과 나에 대한 물음이 빠져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런 물음이야말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긴 얼마 안 되는 귀한 화두이자 평생을 품고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질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고,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대답은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믿기 때문에 따릅니다." 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들은 자기들을 구세주라고 했습니다.

자기들만이 세상을 구원하는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라는 말은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구세주라고 자칭하는 그런 가짜 구세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참으로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진짜(또는 유일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을 "너희는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대답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이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가 됩니다.

그 '구원'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평화, 영원한 행복 등을 모두 누리게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분부를 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21)."

널리 알리는 것이 마땅한데,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 희생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옛날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는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무턱대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하고 다니면, 이스라엘 왕국 재건과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독립 투쟁을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단순히 비밀을 지키라는 분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하라.' 라는 분부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때는 수난과 부활 다음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세속적인 부귀영화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거나, '예수를 믿으면 선거에서 당선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거나, '예수를 믿으면 합격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거나, 기타 등등...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것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병장수를 누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예수님만 주실 수 있는 '참된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네가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라고 예수님께 요구합니다(마르 15,29-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9,23).

요즘에도 세속적인 구세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과 시련들을 없애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는 사람들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과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없애는 것과 극복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신앙 여정에서 십자가는 없애버려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끝까지 지고 가야 할 사다리입니다.

(하늘나라 좁은 문의 문턱에 그 사다리를 걸쳐 놓고서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할 그런 사다리.)

높고 험한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 산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 산을 넘어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깊고 넓은 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 강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 강을 건너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기적을 행하셔서 도와주시는 때가 있긴 있는데, 예를 들면,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빼내신 일(사도 12,6-11) 같은 경우...

그런데 그건 진짜로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개는 사람이 '스스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가 타고 있던 배가 폭풍을 만나서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었을 때(사도 27장) 바오로 사도가 기도를 안 했겠습니까?

그때 천사가 바오로 사도에게 나타나서 한 말은 '두려워하지 마라. 안 죽는다.' 라는 말뿐이었습니다(사도 27,24).

폭풍을 없애 준 것도 아니고, 배가 안 부서지게 지켜 준 것도 아닙니다.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

이장규 수녀님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작년 말, 선배 수녀님의 권유로 한 달 대피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저는 어떤 답을 하며 살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피 정 초입에 하느님께서 먼지로 인간을 만드시는 부분을 기도했습니다. 제 생명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와 그분께로 돌아갈 것임을 의심없이 믿지만, 제 깊은 내면에서는 하느님을 처음과 끝만 돌보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제 힘만으로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전쟁터 같은 곳이고, 그 보상으로 마지막 날 그분은 저를 돌보실 것이라는 참 이상한 하느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정 동안 하느님은 저와 늘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셨습니다. 자캐오와 예수님이 만나는 부분을 기도할 때였습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러 올라간 그 나무가 그날 딱 한 번 올라간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들반들 윤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예수님을 기다리며 무수히 올라가 앉아 있었던 제 마음속 무화과나무였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왜 당신은 늘 그렇게 멀리 계셨습니까? 하고 원망하듯 물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안에서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큰 십자나무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 어깨 위에 저를 태우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저는 등을 돌리고 예수님 반대방향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분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제 질문을 그 한 장면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 를 어깨 위에 태우고 묵묵히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 주신 예수님은 이제 제게 같은 방향을 바라보자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보고 함께 사랑하며 살자고 초대하십니다. 저는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앞으로도 자주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겠지만 오늘 다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남아 있는 제 인생을 통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첫 순간부터 영원까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한 사람이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묘지를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세워져 있던 묘비들을 읽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묘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너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었지요. 그 글은 단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답니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묘비의 글을 썼을까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것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사실 우리들은 모두는 매일같이 죽는 연습을 합니다. 즉, 누군가가 말했듯이 밤마다 자는 것은 영원한 죽음을 대비해서 미리 조금씩 연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때 지금 금방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이 들 수 있도록 매일의 삶을 가치 있게 살고 있습니까? 그보다는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시간의 빠름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매일의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갈 때, 더 이상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죽을 준비를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군중들이 말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거의 슈퍼스타의 평을 받고 계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분이 수난과 죽음을 당한다는 것,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난과 죽음은 패배자의 몫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는 바로 잘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과 시련에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 역시 분명 영광의 순간이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순간이 내게 찾아와도 포기,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가장 큰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소포클래스).


죽음에 대한 명상들

죽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네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가 세네카는 “너 성인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순간순간마다 나는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라.”라고 말했으며, 고대 그리스 철학가인 플라톤은 “훌륭한 죽음을 위해 연습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산 사람은 그날의 침상이 평화롭듯이 일생을 거룩하게 산 사람도 임종의 자리가 참으로 평화스럽다.”라고 죽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지요.

“오 하느님! 당신은 인간을 당신께로 향하도록 본질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제가 당신 안에 쉬게 되기까지는 항상 무섭고 고독하나이다.”


성경을 보면 성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1코린 15,31)이라고 하셨으며,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 역시 항상 죽음을 연습하며 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죽음에 대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고통과 십자가의 가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 사도께서 정답 중의 정답, A+에 해당되는 모범답안을 제출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 보다 더 명확한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보다 명료하게 설명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승리, 존귀와 위엄의 메시아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고난 받는 메시아이십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메시아,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높이 매달리는 수난의 메시아이심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통과 십자가를 피해가는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를 끌어안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고통과 십자가는 반드시 학점을 따야하는 필수과목이자 기본교과목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듯이 십자가 없이 구원 없습니다.

한계를 지닌 유한한 인간, 갖은 결핍을 끼고 사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신앙, 아무런 굴곡 없이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 삶은 솔직히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비오 신부님의 다섯 상처 앞에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몰려들었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고, 환호하고, 경외심을 갖고, 고해를 청하고...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비오 신부님 입장에서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현상 앞에 교회는 늘 신중하기 마련입니다.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좀 더 차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교회는 비오 신부님을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소 성당에서 외부인 참례 없는 미사만 집전, 편지 답장쓰기 금지, 미사 외 모든 성무 집행 정지 등.

오상으로 인해 비오 신부님께서 받으셨던 끔찍한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다섯 상처를 간직했던 50년 세월 동안 매일 흘렸던 피는 찻잔으로 한 잔 정도였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얼마나 아프냐고요? 굵고 네모난 못을 손에다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 보세요. 꼭 그만큼 아파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50년 동안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던 수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그 끔찍했던 고통을 매일 겪으며 살아가셨습니다. 매일 고통 속에 사셨기에 고통 받는 환자들,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큰 연민의 정을 지닐 수 있었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통한 수많은 사람들의 치유요 기적이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오상의 비오 신부님처럼 고통과 십자가에 담겨진 보화와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요?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것,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부활을 희망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오상의 비오 신부님처럼 나도 고통스럽지만, 내 십자가도 무겁지만, 나보다 더 고통스럽고, 나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나 예수는 당신에게 누구입니까?

심종미 수녀님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제가 자주 저에게 던지는 선문답과도 같은 물음입니다. 언젠가 피정지도 때 참석자들에게 이 주제를 주고 묵상한 후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답이 퍽 다양했습니다. 친구·오빠·형·선생님·스승·아버지·어머니·애인·남편 등. 결국 일상생활에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을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물음을 뒤집어서 ‘예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친구·동생·제자·아들·딸·애인 등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한테는 두 개의 테이프, 곧 일상 테이프와 성당 테이프가 있다고 합니다. 성당 문을 나가면 바로 성당 테이프가 멈추고 세상의 테이프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중적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성당에만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혹시 예수님을 평소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다가 중병에 걸리거나 대학입시나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나의 욕구나 필요를 채워주는 자동판매기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불안하고 힘들 때 먹는 신경안정제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일상 안에서 그분이 중심이 되고 그분과 의논하고 그분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나 예수는 당신에게 누구입니까?





어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 한가운데 주저앉아 서럽게 울고 있는 사내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서럽게 울고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 사내를 일으키면서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지요. 사내는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을 하더래요.


“저는 세 살 때 소경이 되어 이제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걸을 때는 발에 의지했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을 의지했습니다. 또 소리가 날 때는 귀에 의지하면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손과 발, 귀가 모두 앞을 보지 못하는 이 두 눈을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부터 눈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눈동자가 스스로 열린 것입니다.”


“그거 잘됐네요.” 라고 웃으면서 말하자 그 사내는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갑자기 만물이 요란하게 엉켜 눈을 가리기 일쑤고 오히려 의심이 생겨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게다가 오늘은 손과 발과 귀, 코가 착각을 일으켜서 우리 집 가는 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앞이 보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전보다도 더 못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앞을 보게 된 제 자신이 서러워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사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눈을 감아 보시오. 그러면서 원래대로 발, 손, 귀가 당신을 집으로 안내 할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그 눈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이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당신이 앞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오.”


어때요? 이 사람에게 이런 기적같은 일이 잘된 것일까요? 아닐까요? 분명히 앞을 보게 된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앞을 보게 된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혼란하게 만든다면서 하나의 불행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남들이 부러워하고도 남을 기적을 체험했어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도 이 사내와 같은 모습을 간직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많은 불만과 불평을 간직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지요. 바로 주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어떤 분인가요? 단순히 육체적인 병을 치유해주시는 분인가요? 아니면 승진을 하기 위해서 손을 써주시는 분인가요? 또 아니면 많은 돈을 내려줘서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면서 살도록 해주시는 분인가요?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떠나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늘나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베드로만을 정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은 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 나는 주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분이라고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증거하고 있는지요?


주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어떤 분인지를......


삶의 향기 가득한 곳에서('조은 글' 중에서)

그윽한 삶의 향기 소중한 인연은

언제나 흐르는 강물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맑고 순수한 인연으로

마음 나눌수 있기를 소망하며...


찌든 삶의 여정에 지치고 힘이들 때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정이 넘치는 우리들에 이야기로

우리 마음에 남겨지길

나는 소망하고 바랍니다.


언제나 좋은생각 푸른 마음으로

아픈 삶을 함께하고

글이나 꼬리로 배려하고 위로 받으면서

맑고 향기로운 삶의 향내음 가득

내마음 깊이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 가꾸면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정 나누면서

그윽한 향기 우리 삶의 휴식처에서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인연으로

영원히 남겨지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물으시는 뜻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늘 주님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먼저 군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집니다.

남의 평가에 연연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 하나이고, 나를 정확히 알기 위해 묻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자기 존중감이나 사랑이 떨어지는 사람은 보통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고 집착합니다.

내가 나를 존중치 않으면서 남이 나를 존중해주길 바라고, 내가 나를 사랑치 않으면서 남이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평가에 집착하고 연연하며 남의 평가에 의해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그중에서도 자기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의 평가가 중요하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좋게 평가하여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평가에 매우 집착하고 연연하며 좌우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의 평가보다 인간의 평가가 더 중요하여 인간의 평가에 나의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이런 뜻에서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심리 검사에서 다른 사람의 눈을 빌리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자기를 정확히 보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은 자신을 심히 과소평가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우들이 있고, 어떤 한 면을 보거나 왜곡하여 보거나 하는 경우들이 허다하기에 다른 사람,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관점에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묻는 것은 좋은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군중의 평가와 제자들의 평가를 물으심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일까요?


다른 이의 평가에 연연하고 집착하기에 물으시거나 당신을 잘 모르시기에 물으실 리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보다는 제자들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당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희 나의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끼는 제자들,

당신과 오래 살아온 제자들,

앞으로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당신을 이어갈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물으시며,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언제, 어떻게 제자들에게 알릴지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을 두고 세상을 하직할 부모가 자녀들에게 언제, 어떻게 자기 죽음을 알릴지 고민하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기도하신 다음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처음 알리시는데, 당신 수난의 사실을 알리기 전에 당신의 정체를 제자들이 확실히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돌아가신 다음 다른 사람들은 믿음이 흔들려도 제자들만은 당신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고 우왕좌왕하지도 말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제게 물으시는 듯이 제가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네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다르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스승이나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는데 너도 마찬가지이지는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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