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지가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이 하느님께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11,9―12,8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Jesus house of anas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며, 먼지는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데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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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젊은 시절에 즐기고,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되 창조주를 기억하라. 나이 들면 먼지가 흙으로 되돌아가듯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은 이에 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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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카르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한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새 성전을 통하여 당신 백성 안에 머무르시겠다는 약속을 받는다(제1독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놀라워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젊음과 아름다운 시절을 기쁘게 즐기되, 하느님의 심판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에 빠져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노년과 죽음 그리고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고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기쁘고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이라야 시련과 불행이 닥칠 때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수난 예고(루카 9,22)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일을 전합니다. 사실 이때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과 더러운 영을 권능으로 쫓아내신 일(9,37-43) 바로 다음으로,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루카 18,32; 24,7.20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어깨가 으쓱하며 한껏 우쭐해졌던 탓인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직은 불길하고 굴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시련과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곤혹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고,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니 그 또한 감사드릴 일입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 시련과 단련의 시기를 만날 때도 한결같은 믿음과 평화 속에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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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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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찬사를 보내고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찬물을 뿌리듯이 수난을 이야기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인정하기 싫었고, 그 상황이 실감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의인들의 죽음은 많았으며 그들에 대한 박해와 죽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 시대에서도 종교 간의 충돌과 증오로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난민이 되고 고통과 죽음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 외면하고 싶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지구촌 가족인데 서로를 증오하고 피를 흘리게 하는 현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전쟁과 폭력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아들인 수난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을 기워 갚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노에 대해 온유함을 보여 주셨고, 증오에 사랑을,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보여 주신 길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여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겪어 낸 사람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귀담아들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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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의 「코헬렛」은 우리에게 ‘젊음의 날’에 즐기라고 권고하며, 허무를 인간 조건으로 안고 사는 우리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길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 ‘지금’ 즐기는 데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권고는 로마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유래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날을 잡아라!)이라는 격언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를 ‘쾌락주의’에 대한 권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이어지는 두 가지 구체적인 권고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하고 권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과 하느님을 알고 기억하는 것은 서로 다르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코헬렛」은 ‘젊음’이 상징하는 ‘현재’에 하느님을 경외하며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무는 것이 허무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체험하는 진정한 ‘삶의 기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자에게 ‘현재’는 ‘하느님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느끼는 행복’(코헬 2,24 참조)이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는 ‘현재’에 머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고통의 두려움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코헬렛」의 ‘행복의 철학’이 도달한 이러한 결론에 감탄하고 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답에는 여전히 허무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허무와 좌절을 넘어 근심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지난 일에 대한 감사와 앞날에 대한 희망 없이 그저 현재에 머무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누리는 현재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의 기억,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헌신하려는 결단, 나를 기다리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수렴되는 자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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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코헬 3,1-8).
구약 성경 코헬렛의 말씀을 길게 인용한 대로, 정말 그러한 것 같습니다.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쁜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쁜 때를 우리 삶에서 결코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이 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때는 오지 않고 웃을 때만 오기를,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만 누리기를, 죽을 때는 오지 않고 늘 생명력을 느끼기를, 나쁜 때는 오지 않고 좋은 때만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오 늘 예수님께서는 ‘좋은 때’를 맞이하셨습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에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이 제대로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수난의 때’를 예고하시며 미리 염두에 두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좋은 때라고 마냥 좋아하지 않으시고, 나쁜 때라고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떠한 때이든, 곧 그것이 좋은 때이든 나쁜 때이든 그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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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당신께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일러두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로 하신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입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고,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께 경탄을 보내던 사람들이 결국 주님을 팔아서 죽음의 손에 넘깁니다.
못 믿을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마저도 죽음에 부쳐 버립니다. 제자들 또한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 내십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어, 당신 생명에 참여시키십니다.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을 살려 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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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익점은 사신을 수행해 원나라에 갑니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이 득세했습니다. 그런데 원나라는 공민왕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문익점에게 반기를 들라고 종용합니다. 그러면서 3년을 붙잡아 둡니다. 그는 그곳에서 목화 재배를 눈여겨보며 ‘고려의 춥게 사는’ 백성들을 생각합니다.
3년 뒤 고려에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몰래 가져옵니다. 그러나 공민왕을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경남의 산청’에 유배됩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목화 재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면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합니다.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더라면 원나라에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귀양 갈 것을 알면서도 그는 목화씨를 가지고 왔습니다. 문익점은 ‘멀리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스승님께 해를 끼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멀리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보통 사람’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남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억울한 고통을 겪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부활은 ‘반전’입니다.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고, 억울함이 축복으로 바뀌는 ‘대반전’입니다. 부활을 희망하면 믿음은 삶의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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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설마하니’ 하는 생각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 그렇게 당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마귀를 몰아내고 숱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스승님께서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한 사람이 어느 날 빈민촌으로 봉사 활동을 갔습니다. 어렵고 힘겹게 사는 이들을 보면서 그는 기도 중에 따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이들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무슨 잘못으로 아무런 기쁨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이들보다 더 불행하게 사는 이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정녕 못 본 체하십니까?’
그의 이러한 푸념이 끝나자마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느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 비판의 화살을 보내는 인간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따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라도 건성으로 들으면 자신의 생각에 갇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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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내다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가 쉽습니다. 더 넓고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자들은 그러한 지혜를 군중에게 알려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흘러 자신이 직접 체험한 다음에야 다시 후대에게 그 체험을 전해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여전히 다음 세대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이 대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선대의 체험을 우리의 체험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을 이룩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보다 훨씬 더 하느님의 뜻에 가까이 있지 않을까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가벼이 보지 않고 귀하게 여기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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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양심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상태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소시오패시(Sociopathy), 우리에게는 사이코패시(Psychopathy)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수는 어떻게 될까요? 학자들은 그 수를 전체 인구의 4%로 즉, 25명당 1명에 이르는 것으로 봅니다.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의 수치가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도덕적 불감증이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상관없다는 생각,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생각, 내가 받을 사랑에는 민감하면서 남에게 베풀 사랑에는 무감각한 것 등등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아주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곁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지만 모두 큰 상처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한 번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반복된 행동으로 이런 모습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앞차가 속도를 내지 않고 있으면 막 화를 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앞차는 규정 속도를 지킬 뿐인데도,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며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내는 것에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반복된 행동을 통해 양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푸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쌓이고 쌓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준비시키기 위해,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혼란에 빠져 잘못 생각하는 제자들은 수난에 관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함께 먹고 마셨으며, 바로 옆에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표징들을 끊임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면서, 정작 가져야 할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곁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이 정도였는데, 우리는 어떠할까요? 더욱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의 사랑이 아닌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면서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용기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머잖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폴 브루제).
죽음의 힘.
죽음의 힘이 얼마나 센 지를 ‘천국의 문’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더 크게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 자신의 부모님을 개장해서 모신 팔십 대 후반의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80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가 30년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본인도 팔십 대 후반의 나이로 이제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안치 예식을 하면서 눈물을 터뜨리십니다. 아이 같이 소리를 내어 우시면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십니다.
죽음이 얼마나 힘이 센 지를 이 모습을 보며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에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생깁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고, 이렇게 힘이 센 죽음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편이십니다.
죽음이 다가온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죽음의 그림자는 새로운 생명의 서곡이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코헬렛은 열흘 붉은 꽃 없고, 달도 차면 기울듯이,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장엄한 한편의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렛 11장 9절, 12절)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월을 거스를수 없다는 것을 코헬렛은 온 몸으로 절절히 체험했겠지요. 저자는 그러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건네고 있습니다.
인간은 나이들어 늙고 나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에 자신의 인생과 그 인생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라고 당부합니다. 또한 그 모든 기쁨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므로 감사히 받아들일 것을 강조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백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들어 골골하니 그 아무리 좋은 풍경도, 그 어떤 산해진미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나 영적생활 역시 젊은 시절에 그 맛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좀 더 나이들면 기도를 시작해야지!’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 별로 못봤습니다.
나이들어갈수록 기력도 떨어지고,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면 기도도 힘들어서 못합니다. 그러니 기도를 미루지 말고, 한살이라도 젊을 때 본격적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깊은 맛을 들이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이 점점 심각해집니다. 급격한 노령화 탓인지,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산부인과나 산후조리원 같은 간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근근히 마을을 지켜오시던 주민들도 점점 노쇠해지셔서, 동네 전체가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론격으로 코헬렛은 불행한 날에 만나게 될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몰려오는 날은 희망이 사라진 노년기를 상징합니다. 파괴된 집은 노년기에 맞이할 고통을 의미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의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을 생기를 잃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는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트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기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코헬렛 12장 3~5절)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라는 표현이 어찌 그리 제게 ‘확!’와닿는지 모릅니다. 한 며칠 허리가 삐끗해서 거동이 많이 불편했었는데, 오르막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노쇠한 어르신들이 하루 하루 얼마나 힘겹게 견뎌내시고 계시는가를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한 인간이 수명을 다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현실이 있습니다. 노화와 그로 인한 고통들입니다. 심각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심연의 고독과 소외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코헬렛은 노화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순간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외칩니다.
“여러분들, 이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여행 가방을 쌀 시간입니다.”
나이 들어간다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작의 서곡이기 때문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렛 2장 7절)
불편하지 않은 진실은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이적에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반전을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필 이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스승을 따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을 영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으면 진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진리들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때에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셔야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은 성경에 수 없는 예시들이 나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아비멜렉은 이 세상의 왕에게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자신의 여동생이니 맘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내를 그렇게 쉽게 빼앗기는 무력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아내를 탐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의 중재를 부탁해야만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모든 행위도 하느님께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하느님께 많은 것을 해 드린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하는 성체에 감사를 드리지 못한 순간순간이 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의 사라처럼 무기력하게 넘겨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어드려도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관계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도 그렇게 계약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빚진 것을 깨달아 봉헌할 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진리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전의 내가 무지요 어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무지한 우리를 빛으로 밝혀주려고 옵니다. 무지한 자아가 죽기를 원하면 진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영화 ‘조커’에서 한 남자가 왜 무자비한 악당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착하디착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조커가 빠져있었던 것은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는 자아를 죽이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칼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은 이제 어둠만 더 짙게 만듭니다.
조커에겐 엄마가 있습니다. 조커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마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시장이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자신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잠깐 그 집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커는 엄마의 편지를 보고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조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더 많이 주고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억울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냉혹했습니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의 엄마가 과대망상증으로 미쳐있었고 조커는 입양한 아이라고 말해줍니다. 조커는 혼돈에 빠집니다. 엄마의 병력을 확인합니다. 사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해지고 싶거나, 더 악해지려거나. 여기서 조커는 악해지기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도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마스 웨인의 말대로 엄마는 자기애 과다 성격장애였고 밥도 안 주고 자신을 폭행하여 자신의 뇌까지 손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만약 토마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 많은 돈으로 병원의 기록까지 고쳐버렸다면 어쨌을까요? 조커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악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나를 죽이고 싶은지, 타인을 죽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커는 어머니를 죽이며 해방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나를 죽이며 기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면 영원히 그 불편했던 진리와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진리를 향한 나의 문이 열리고 참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정적인 가사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가수 존 덴버(John Denver)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존 덴버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 Sunshine on My Shoulder'를 들었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불렀던 ‘Perhaps Love’도 기억납니다. 안타깝게도 비행기 사고로 50대 초반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아! 그의 노래 중에 ‘Today'도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 중에 ‘오늘이 바로 중요한 순간이고, 지금이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순간입니다. 오늘 나는 웃고, 울고 노래 부르렵니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과 사랑을 주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제 세상을 떠났던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오늘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오늘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2020년 9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였고, 잔디밭에 물을 주기도 하였고, 오랜만에 야영도 하였습니다. 십자군 이야기, 신을 위한 변론과 같이 꽤 긴 책들도 읽었습니다. 가까운 퀸즈 한인 성당의 미사도 도와 드릴 수 있었고,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매주 주일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하루를 감사드리며 산다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풍랑을 잠 재우셨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넘겨지고, 박해를 받고, 죽을 것이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은 아직 오직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지금 처한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최악이 아직 오지 않았다.(The wor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만난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나쁜 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넘겨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모함과 질시를 받아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직 최선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같은 침상(寢床)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준비하셨지만 제자들의 경우는 예수님과 더불어 자신들이 차지하게 될 영광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요구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늘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일치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입니다. 기타의 경우도 여섯 개의 줄이 조율이 안 되어 있을 때 불협이 나면서 듣기가 아주 거북해 집니다. 그러나 기타가 잘 조율이 되어 있을 때 그 기타의 울림이 사람에게 제대로 전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늘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조율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준 ‘수난예고’가 그분 안에 더욱 구체화 될 때 베드로도 예수님께 들려준 응답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복을 바랬다. 그분을 믿고 따르면 멋진 인생길을 펴리라 기대했다. 제자들이 한껏 고무되어 예수님을 믿고 따른 이유가 되었다. 제자들은 목적으로의 예수님이 아닌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의 예수님을 따라나선 셈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대답이 영감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수난예고’를 들려 주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자기들이 바라던 기복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도저히 제자들 생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 말씀이었다. 그 일이 자기들 앞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제자들은 너무 끔찍해 그 말씀의 저의를 예수님께 소상히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기들의 기복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조금씩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기복에 매여있던 사람은 조금씩 실존적 인간으로 바뀔 것이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밝혀주신 번뜩이는 대답이지만 제자들 마음 안에 그 대답이 구체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수난예고’는 제자들에게 현실이 될 때,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대답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의 예수님이 된다. 수난예고 전 베드로가 들려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응답은 믿고 따른 이유가 되고 새롭게 실존하는 인간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9,43-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주님께서 사람들의 잔인한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예고를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들,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서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고,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하느님의 도성을 강물의 줄기들이 즐겁게 하도다.
성 힐라리오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Ps 64,14-15: CSEL 22,245-246)
“하느님의 강은 물로 가득 차 있나이다. 주님은 곡식을 장만하시어 사람에게 그것을 양식으로 주셨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강이란 그 의미가 매우 확실합니다. 사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도성을 강물의 줄기들이 즐겁게 하는도다.” 주님 친히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서 물이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하리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 강은 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로 흘러 넘치며 그 생명의 샘으로부터 하느님의 강은 범람하여 우리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또한 양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무슨 양식입니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케 하는 양식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몸을 영함으로써 훗날에 거룩한 몸의 공동체에 한자리를 얻게 됩니다. “주님은 곡식을 장만하시어 사람에게 그것을 양식으로 주셨나이다.”라는 위의 시편 말씀은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그 양식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에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대해서도 대비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로 새로 난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의 첫 열매를 맛보고 신비들에 대한 인식, 예언의 지식, 지혜의 말, 희망의 확실성, 치유의 은사, 그리고 악마들에 대한 지배권을 받게 되어 크나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이슬처럼 우리의 내부로 스며들어와 조금씩 조금씩 열매를 풍성히 맺기 시작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너희는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영광의 순간에 마치 찬물을 끼얹으시는 듯합니다.
"귀담아들어라."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립니다. 스승의 능력과 명성에 기대어 승승장구하리라는 제자들의 욕망을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진정한 메시아의 업적은 한갓 인간의 찬사나 호평에 있지 않고,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간에 있다는 걸 반복해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9,45)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모릅니다. 물리적인 귀는 열려있지만 마음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저 지금의 영광이 계속 쭉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이대로라면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은 물론 자기들의 입지도 탄탄히 보장될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으로 들뜬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갈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루카 9,45)
하지만 복음사가는 무지의 탓을 온전히 제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의 무지한 상태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한낱 인간이 알아낼 재간은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그 뜻을 감추셨다면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직 그들이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제자들은 지금 스승의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에 들떠 있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불안의 진동을 미세하게나마 감지를 하기 시작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뭘까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묻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답을 두려워할까요?
사람은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나름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실존적 불안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렵습니다. 그 불안에 얼만큼 관심을 기울이느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불안이 수면 위로 드러나거나 그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지요. 뭔가 자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미세한 불안을 일으킵니다. 이는 어쩌면 한치 앞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숙명같은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허무를 외치는 코헬렛 저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 12,6)
오늘의 대목에서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고가 자주 반복됩니다. 말하자면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 찬란한 젊음의 때에, 무사태평 아무 걱정 없을 때에, 행복에 겨울 때에, 누리고 즐길 때에, 힘과 재물이 넘칠 때에, 세상 부러울 것 없을 때에, 잠시 멈추고 피조물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시는 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기억은 인간이 자신의 허무와 약함을 인정하고 삼가며 옷깃을 여미게 해 줍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자신의 보잘것없는 실존을 깨닫게 되니까요.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7)
이것이 기억해야 하고 삼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직까지 모든 인간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니까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과학적 의학적 연구와 시도가 있고 죽음을 겪기까지 받는 돌봄에 질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예외없는 현실입니다. 죽음은 재산, 성별, 학식, 신분, 인종에 상관 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미래입니다. 그러니 지금 행복의 순간을 지나고 있건, 고통의 때를 지나고 있건 우리 모두가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세상도 좀 더 겸허해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지금 당장 제자들을 깨우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그들이 무릎을 치며 하느님 계획을 깨닫게 된 단초가 되었기에 복음서가 이를 기록한 것이지요. 훗날 스승의 수난 예고가 현실이 되었을 때, 이 기억은 그들에게 놀람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가 결국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온전한 순종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죽음이 나 아닌 타자에게 달려 있다는 인식이 자칫 허무주의를 낳기도 하지만, 바로 그 타자이신 절대자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내어맡기는 신앙으로 승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신앙은 더 견고한 희망이 되고 더 열렬한 사랑이 됩니다. 축배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나를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한뼘씩 더 자라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떤 처지에서나 주인이신 분을 기억합시다. 그분의 영광과 더불어, 그분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도 떠올립시다. 이 기억 안에는 이 험난한 지상 순례길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쥐고 계신 분 앞에서 겸허히 삼가며 온전히 의탁하며 나아갑시다. 오늘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벗님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사람의 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반가운 인사
열렬한 환호
따뜻한 위로
생생한 치유
뜨거운 사랑
넉넉한 포용
정갈한 기도
역겨운 가식
추악한 거짓
사악한 음모
냉혹한 협박
차가운 거부
매몰찬 비난
광포한 폭력
어느 손으로
벗들과 함께
하고 있나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포로들을 수용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습니다. '수용소'라는 말은 허울일 뿐,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지요. 이 곳에서 최소 250만명에서 최대 400만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유대인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 성탄과 새해 사이가 되면 사망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소보다 사망자 수가 늘어난 원인이 나치에 의한 직접적인 살해가 아니라고 합니다. 갑자기 노동의 강도가 강해진 것도 아니고,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연말 연초 시즌만 되면 이상하리만치 많은 사람들이 기력을 잃고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 것입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죽은 이유는 '희망' 때문입니다. '성탄이 되면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 '새해가 되면 풀려나 자유를 얻을 수 있겠지' 그런 희망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수용소에서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그들은 마음을 의지할 '희망'이 필요했고, 자신들이 바라는 '희망사항'을 투영하여 혼자만의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근거나 이유도 없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이루어질리 만무했고, 그 희망이 꺾이는 순간 삶에 대한 의지도 꺾여버렸던 것이지요.
살면서 참된 희망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이나 바란다고 참된 희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 명예, 사회적 성공처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들을 희망하면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나의 삶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가치,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될 때, 그 무엇보다 큰 행복을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각자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그분의 제자인 자신들도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바람이 투영된 희망이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말씀으로 그들의 희망을 산산히 부수어 버리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따른 대가로 이제부터 영광과 부귀영화가 시작되리라고 기대하겠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선포 활동을 통해 군중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인기와 영향력이 한창 고조되어 있던 그 순간, 찬물을 끼얹으신 것은 그들을 절망에 빠뜨려 불행하게 만드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잘못된 희망에 빠져 엉뚱한 것만 쫓다가는 더 깊은 절망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멸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신 번쩍 차리라는 뜻으로, 반복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상기시키시는 것이지요.
주님께 열심히 기도하는데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너무나 간절히 희망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주님을 원망하기 전에 먼저 내가 마음 속에 지닌 그 희망이 참된 희망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달콤한 사탕이 치아를 병들게 하듯, 인간적인 바람에서 나온 잘못된 희망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영혼에 해로운 것을, 우리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절대 주시지 않습니다.
호사다마< 루카 9/43ㄴ-45.> 9/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주님의 업적과 행위를 보고 놀라워하는 중에 이런 일 뒤에 “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자비롭고 의로운 일을 하시어도 사람들 율법학자 바리사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십자가 의 죽음을 당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러나 제자들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은 좋은 일은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이 당연하지만 좋은 일이 헛되게 돌아가 좋은 일에 마가 따라 온다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애 박해를 받는 사람들“ 주님은 주님의 선행 자비가 어떤 사람에게 방해가 되고 박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 하신 것 같이 우리의 삶도 이 원칙에 따라 갑니다. 반대로 악의 무리는 악을 선으로 위장하고 정의보다는 불의를 따라 살려고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으로 율법주의를 사랑의 정신으로 완성하려하니 끝까지 율법을 주장하며 주님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몰라 붙입니다. 사람이 모처럼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선심 쓴다 가짜 행위다 아첨 한다 하고 좋은 일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주님이 마귀를 쫓아내니 마귀의 두목이라고 비난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정의나 진실과 사랑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가치기도 합니다.
나는 요사이 무엇이 장의이고 진실이지 하기 힘든 일이 많이 주위에서 일어납니다.
사회주의가 이 나라가 나아갈 길인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가 나갈 길인지 사람들의 동향을 보면 어렵습니다.
나는 지금것 자유민주의가 나갈 길로 배우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자유 민주주의는 자유란 말이 자본주의 밑에서 자유지 평등과 공정위에서는 빈부 차이가 심하여 인민민주주의를 따라야 하나다는 이론에 반기를 들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배격하기에 너무나 늦은 것 같이 느껴 집니다. 그래서 이북을 동경하고 따라갈려는 사람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유의 개념은 주님과 같이 율법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 그 안에 자유가 살아 있습니다. 순명이란 법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순명을 넘어 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입니다. 침묵의 삶은 하느님을 더 큰소리와 드 높은 소리로 찬미 찬송하기 위한 것이지 벙어리가 되어 말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더 자유스럽게 살려는 것이지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구호처럼 자유 만주주의의 자유는 더 잘 살기위한 자유입니다. 진실과 사랑이 함께하는 자유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자유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저는 죽음을 통해서 참 자유를 얻게 됨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지향해나가는 것은 보다 낳은 삶을 살기 위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누리려면 참 평화를 누리려면 참 기쁨을 누리려면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늘나라에 살려면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임하시게 하시였음을 감사와 찬미를 들입니다.
기억하라, 사랑하라, 찬미하라. -늘 창조주 하느님을, 파스카 예수님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오늘 제1독서 맺음말입니다. 오늘로서 세차례에 걸친 제1독서 코헬렛도 끝납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납니다. 시작과 끝이 똑같습니다. 코헬렛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입니다. 희망이, 비전이, 꿈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무한 인생이니 인생을, 젊음을 말껏 즐겨라 권고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창조주는 꼭 기억하라 하십니다. 공감이 갑니다만 웬지 허전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여라.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뿐이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코헬렛은 젊은이에 대해 충고한 후 늙음과 죽음의 현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구나 겪게 되는 늙음과 죽음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너무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생각있는 젊은이나 늙은이라면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되돌아간다.”
너무 어둡습니다. 허무의 짙은 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쁨과 희망이, 찬미와 감사가 없습니다. 삶은 허무가 아니라 찬미입니다. 계속되는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약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할뿐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찬미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이, 하느님 찬미가, 하느님께 감사가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파스카의 예수님이 답입니다. 창조주 하느님뿐 아니라 파스카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허무가, 죽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허무가 아니라 충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 마지막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궁극의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내용은 이 간략한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우리는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기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매일 평생 끊임없이 젊어서나 늙어서나,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결코 허무의 어둠이 스며들 여지가 없습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젊으나 늙으나 생명과 희망의 빛으로 충만한 일상입니다.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삶입니다.
하여 허무가 답이 아니라 충만이 답입니다. 회색빛 우울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찬미가 답입니다. 기억만으로는 너무 약합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열렬히 사랑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하여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삶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미사뿐입니다. 우리의 심중을 대변하는 바오로 사도의 두 말씀을 나눕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바로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이자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인 코헬렛에겐 이 기쁨이, 기도가, 감사가 없습니다. 기쁨과 희망이 없는 현실주의는 허무주의로 귀착되기 마련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바오로의 말씀도 코헬렛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이 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허무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허무’란 단어는 제가 집어 넣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구원 선물 둘이 영원한 생명, 하늘 나라의 실현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과의 일치를 실현시켜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생명의 사랑 충만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복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우리 사명의 마지막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는 화려한 성공의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꿈꾸는 길이 세상에서 바라는 비단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께서는 왜 그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만 했을까? 예수님께서 지니신 그 권능의 힘을 가지고 기적적으로 악마를 쳐이기고 내쫓고 사람들을 구하실 수 있지 않으셨을까? 점점 더 죄악으로 덮여져만 가는 세상. 그 세상에서 악마에게 빼앗겨만 가는 선과 주 하느님의 피조물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고 건지기 위해 주 예수님께서는 대신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우리를 구하십니다.
위험에 빠진 자녀를 위해 대신 자기 목숨을 던지는 부모님들의 거룩한 영혼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불의 앞에서 정의를 구현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무죄한 의인들을 기억합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묵묵히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오늘 살아있음에 겸허히 만족하는 선한 이웃 성인들을 기억합니다.
죽어야만 사는 부활의 신비! 내가 죽어야만 너를 살릴 수 있고, 우리가 다 함께 살 수 있는 신비를 주 예수님께서는 몸소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러주십니다.
주 예수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고, 저희를 구하소서!
자비로우신 어머니 저희를 지켜주소서. 아멘!
예수님에게 집중하려면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경탄으로 시작합니다. 세상의 약자인 어린아이가 더러운 영에게 괴롭힘 당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도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도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상황보다는 유쾌하며 즐거운 일을 경험하길 선호합니다. 어린아이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치유 받는 광경은 모든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환희의 순간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수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감동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복음을 유심히 보면, 감동하는 것은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는 대상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모두들 기쁨에 젖어 있을 때, 제자들에겐 냉철한 판단력을 유지하도록 요구하시는 듯합니다. 제자들마저 분위기에 휩쓸려 들떠 있지 않도록, 현실을 직시하도록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군중의 감흥에 제자들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관심거리보다는 예수님에게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흐트러진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가톨릭 신학 중에 ‘신인속성교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 대단하고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내용을 알고 보면 별거 없습니다. 하느님의 속성인 ‘영원’과 인간의 속성인 ‘유한’, 즉 ‘죽음’을 교환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이지요. 하느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그로인해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근간이 바로 십자가와 그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직 주님께서 수난받으시기 전이니 말이지요. 단순하게 믿고 따르던 주님이 죽는다니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과 더불어 그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하심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코헬렛은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저 인생이 헛되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없을 때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오늘 독서에서 젊음도 청춘도 허무이지만, 그 젊음의 날에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감사드릴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말고 지내실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아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넘어지고
넘겨지며
이 가을은
새로이 익어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 삶의
약함을 만나는
시간이다.
약함이
있는 곳에
강한 구원도
있다.
약함에
눈 감지
않는 것이
은총이다.
주님께서도
당신 약함을
나누신다.
가장 약한
모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끈다.
약함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넘겨지시는
아픈
사랑이다.
당신 먼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하느님께
무엇 하나
맡기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넘겨지심으로
하나가 된다.
넘겨지는
사랑으로
우리는 또
이 고개를 넘는다.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넘겨지시는
주님의
연약함을 통해
배운다.
사랑은 서로의
약함까지 언제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함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하고
약함의 이름으로
간절한 사랑을
청하는 순교자
성월이다.
눈물
글썽이게 하는
서로의 약함이
은총이며
감사이다.
단숨에
넘을 수 없는
이 신앙의 고개를
나의 약함과 함께
오늘도 앞으로
걸어 나간다.
모두의 약함은
넘겨지시는
주님을
향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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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갑곶성지를 저녁 늦은 시간이나 이른 아침에 돌아다니다보면 만나는 동물이 있습니다(물론 다른 시간대에도 볼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 시간대에 주로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청설모입니다. 처음에는 쥐인 줄 알고서 깜짝 놀랐지만, 잣이나 도토리를 나르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이제는 상당히 낯익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새벽에 삼위비 봉헌 초를 켜고 있는데 바로 제 옆을 지나가다가 저와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청설모의 손에는 잣나무 열매를 들고 있더군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설모는 제 마음을 몰라주더군요. 자기를 헤칠 것이 아니라 단지 그저 예뻐서 쳐다볼 뿐이었는데, 휙 하고 다른 나무 위로 올라가면서 제 곁을 휙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청설모가 왜 도망갔을까요? 분명히 저는 헤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청설모가 제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야 그런 의도가 아니지만, 힘이 약한 청설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야 하니 우선 피하고 보는 것이겠지요.
상대방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내 마음을 몰라준다면서 불평불만을 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하기까지 합니다. 하긴 고양이와 개가 싸우는 이유는 서로 좋아하는 표현이 달라서 그렇다고 하지요. 고양이는 좋아하면 꼬리를 아래로 내리는 반면, 개는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갖게 되면 꼬리를 아래로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마음으로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있으니 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마음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한다면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 예고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전혀 묻지 못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었고, 주님께서 그런 고통과 시련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힘없이 수난과 죽음을 당해야 하는 주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사랑 그자체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되려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지요.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잘못된 습관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로써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이 하는 것,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으니, 지금 시작하라!(요한 괴테)
만나고 싶은 만남(정채봉, ‘만남’ 중에서)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참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닳아 없어질 때에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오늘도 수많은 만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만남을 만들고 싶습니까?
돈 좀 씁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가량의 주식이 숨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동안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야채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매일 입버릇처럼 자신은 200살까지 살 것이라고 말했지만 운명은 그 돈을 쓸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절약하는 것만 미덕일 때가 있었습니다. 아껴야 산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쓸데없이 돈을 쓰면 낭비이고 그것도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끼는 것만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야우찌의 인생관은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행복인 것이었습니다. 굶어도 통장 액수만 보면 배가 부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삶입니까?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재물이 쌓이는 것으로 기쁨을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저렇게 쓰지 못하고 남기는 돈은 나에겐 후회가 되고 가난한 이들에겐 서러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구나 성당, 혹은 본당 단체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돈을 모으는 모습입니다. 이미 많은 돈이 있고 매년 규칙적으로 들어오는 돈도 있지만 다른 단체와 비교하여 더 큰 모습을 보이기 위해 저축하고 또 저축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인색한 단체라는 평을 받습니다. 세속적 마인드가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저는 그런 단체를 보면 입버릇처럼 “돈 좀 씁시다”라고 말합니다. 선임이 아껴가며 모아놓은 돈을 쓰게 만드는 못된 신부가 될 수는 있지만 왠지 돈을 모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당들도 돈을 써야 합니다. 건물을 비싸게 짓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주위에 돈을 뿌려야합니다. 그 혜택을 받은 이들이 차후에 새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뿌리는 씨가 없으면 나중에 추수할 것이 적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쓸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다면 다 써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말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주님은 당신 뜻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젊은이가 즐기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저도 어렸을 때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하루를 정말 행복하게 산 날에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죽음도 두려워합니다. 즐길 수 있을 때는 즐기는 것도 좋고 쓸 수 있을 때는 써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임플란트를 대대적으로 하고 계셨었습니다. 돈은 충분히 가지고 계셨었지만 임플란트를 하려는 결정은 하지 못하고 몇 년을 미뤄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돈이 아까워 고생만 하시다가 큰마음 먹고 돈을 쓰신 것입니다. 잇몸이 약하여 잇몸 안에다 인공 연골도 넣으셨습니다. 오랜 치료 기간이 마무리되어 가서 마지막 인플란트 치아를 넣는 약속을 잡고는 결국 그것을 끼우기 이틀 전에 입원하셔서 다시는 퇴원하지 못하셨습니다. 죽만 드시면 되는데 임플란트를 굳이 낄 이유도 없었습니다. 돈도 쓸 때가 있습니다. 저희가 더 일찍 임플란트를 하도록 종용해 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돈 좀 씁시다. 돈을 안 쓰면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망합니다. 돈은 피와 같습니다. 돌아야 삽니다. 자기 지갑 속은 물론이고 교회 단체나 본당들도 돈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며 빨리 털어버리고 쓸 수 있을 때 삶도 즐거워지고 교회도 젊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아봐야 썩습니다. 뿌려야 잘 사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식탁에서 이런 대화가 있었습니다. ‘자유, 진보,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과학적인 방법이 교회의 신학과 성서학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수긍이 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고생물학, 지질학, 유전공학, 진화생물학, 심리학,의학’의 발전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버려야 될 것들로 여겼습니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힘만으로도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담과 이브, 천사와 악마, 하느님나라와 지옥은 신화와 전설로 치부되었습니다. 빙산의 일부만 보고 바다 밑에 잠겨있는 빙산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의 바다에 떠있는 빙산의 겉모습만 보고, 숨겨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교회가 성소가 줄고,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풍요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처럼, 아침에 해가 나면 곧 말라버리고 마는 짧은 삶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인류는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어야 했고, 폭력과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갔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희생과 자비, 나눔과 사랑이 설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굳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이렇습니다.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지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차를 살 때, 집을 살 때 우리는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 판단을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내 귀가歸家 준비를 위한 임종어臨終語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임종어입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순교 직전 스테파노의 임종어입니다.
이밖에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요약하는 유언과도 같은 임종어를 가끔 발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임종어입니다.
불교의 고승들에게는 죽음을 맞이해 남기는 열반송涅槃頌이 있습니다. 처음 깨달음을 전하는 오도송悟道頌과 더불어 그 고결한 삶을 요약하는 열반송입니다. 당대 최고의 고승 성철스님의 널리 회자되었단 열반송입니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나름대로 깊은 회한과 더불어 구원의 기쁨을 노래한 시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내 유언과도 같은 임종어는 무엇이 될까요? 역시 묘비명墓碑銘처럼 자주 생각해 봐야 할 내 임종어입니다. 전 삶을 요약하는 좌우명座右銘과도 같은 내 임종어臨終語를 염두에 두고 산다면 그 삶은 더욱 그윽하고 깊어질 것입니다. 수차례 인용했던 부인에게 남긴 어느 남편의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모든 앙금은 눈녹듯 사라지고 남편 사후에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구원의 임종어가 되었다는 자매의 고백입니다. 마지막 선종을 맞이하면서 남긴 이런 임종어보다 남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알렐루야, 아멘.”
이렇게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 감사로 끝맺는 인생의, ‘알렐루야, 아멘’ 임종어라면 참 환상적일 것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의 코헬렛은 끝납니다. 허무로서 시작하여 허무로 끝나는 코헬렛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수차례 언급합니다만 결국은 허무로 끝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순간 저에겐 이 말이 코헬렛의 임종어로 들렸습니다. 얼마나 골수에 깊에 스며든 허무라는 영혼의 질병인지요. 이런 임종어라면 남은 이들에게 주는 부정적 충격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이젠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인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참으로 품위있는 노년은 물론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도 코헬렛의 지혜는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말할 때가 오기 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노년의 비참한 삶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특히 여기 요셉수도원에 오랫동안 정주하다 보니 흐르는 세월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마음은 청춘 같은데 몸은 서서히 노쇠해 갑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며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지혜중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간절히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코헬렛에게는 기도가 빠졌습니다.
하느님과의 살아있는 친교인 기도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사변적인 철학자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코헬렛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살아계신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이 없으면 허무의 질병은 피할 수 없습니다.
코헬렛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기도의 사람, 늘 아버지와 깊은 친교중에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어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루카9,43-45)에 안절부절 두려워하는 제자들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뿐 아니라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 합니다. 바로 제자들의 믿음 부족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담담한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바로 이에 앞서 예수님의 신비로운 변모체험(루카9,28-36)이 있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산 위에서 기도중에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기도와 하느님 체험을 통한 하느님과 일치의 삶이 바로 초연한 삶의 원천原泉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를 통한 주님과 일치의 삶만이 허무에 대한, 노년과 죽음의 귀가歸家 준비를 위한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마음속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며, 살아계신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때가 되면 알게 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 감탄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가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오늘도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매순간 주님을 기억함으로써 행복으로 가는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코헬렛은 하느님 안에서 진정 의미 있는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갈파합니다.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11,9)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12,1)
젊음도 젊은 시절의 기쁨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세상만사가 다 찰나의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들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참으로 많은 순간 눈에 보이는 현세의 것들을 붙잡으려 하고 거기서 가치를 찾으려 합니다.
코헬렛은 인간이 처한 그런 실존적 상황을 꿰뚫어보면서 변화무쌍한 삶의 현실과 우리가 겪는 희로애락의 체험들 안에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젊은 시절이든 노년이든, 기쁘든 슬프든, 행복하든 고통스럽든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제자 교육을 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십니다(9,38-42). 그 모든 일을 본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9,43). 병이 치유됨으로써 해방과 자유를 보고 체험한 이들은 큰 희망과 기쁨을 맛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의 문제와 관심사, 곧 민족의 정치적 해방, 영육의 치유, 재물의 더 많은 소유를 가져다주실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바로 자신들의 욕구와 기대가 예수님을 통해서 충족되었다고 믿은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과 기대를 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부활을 준비하도록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9,44) 하시며, 또다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9,45).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해오면서 그분이야말로 결코 실패하거나 고통을 받으실 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죽음을 당하실 분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지금껏 병자를 고쳐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권위 있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처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아직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 모두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십자가상 죽음을 겪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아니고서는 우리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수 없음을 잘 아셨기 때문이지요.
우리네 일상도 늘 수많은 변화와 희비애락, 고통과 슬픔, 시련과 좌절의 연속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행복하려면 변화무쌍한 변화와 잠시 사라져버리는 현세 물질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집중해야 합니다.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영원하신 창조주를 기억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요.
오늘도 모든 것 안에서 영원성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영혼의 어둠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겪는 고난을 견디게 해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연민의 마음을 기억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보통 듣기에 달콤한 말은 좋아하고 듣기 거북한 소리는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사고에 맞는 이야기는 "옳소!" 하며 박수를 치고 환영하지만 내 생각과 사상에 조금이라도 반할라치면 그만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도 그러시나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 보고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시는데 상상치도 못하는 불길한 말씀을 하시네요.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게 될 거라고...
제자들은 과연 귀담아 들었을까요?
그냥 말도 안되는 소리라 여기며 흘려 들었을 겁니다.
나중에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지자 그제야 "아, 그때 그 말씀이 그 말씀이었구나!" 깨닫게 되지만 이미 때가 늦어도 한참 늦었지요.
오늘 내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 어떤 말일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꼭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그 말을 잘 들어 주님의 뜻을 잘 헤아리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 안으로
들어오신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끝내 넘겨지려
하십니다.
수난이란 이와같이
맞대응하지 않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의
수난은 우리를
변화와 성숙으로
이끌었습니다.
수난을 통해
우리의
자질과는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수난속에서
더 적극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수난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생명은 내어주는
신비입니다.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사람들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넘겨짐과
내어줌속에서
우리는 살고있습니다.
넘겨짐이
작아짐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작아지셨기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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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예비신학교 모임에 갔다가 어느 교실에 떨어진 모의고사 수학 시험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에 수학을 워낙 좋아했었기에 ‘한 번 좀 볼까?’라는 마음으로 시험지를 펼쳐 보았습니다. 단 한 문제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학창 시절에 수학을 잘 한다고 학교 대표로 수학경시대회도 나간 경험도 있는 저였지만, 25년 동안 수학과는 담 쌓고 살다보니 공식 하나 생각나지 않고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모의고사 수학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한 0점인데 과연 사는데 문제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신부로 살고 있는 저에게 있어서 수능 수학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0점을 맞아도 누가 혼내지도 않고, 바보라고 놀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초등학교 때의 산수 실력, 즉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기 정도만 해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문득 학교 공부에 목숨을 걸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떠올려 집니다. 사실 모든 학생들이 1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공부를 가지고 평생 자신의 일을 꾸려가지도 않습니다. 굳이 학교 공부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시험을 망쳤다면서 심지어 자신의 생을 마감 지으려는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일등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세상은 경쟁자들로만 가득한 곳이 아니라, 협조자들과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 점을 잊어버리고 혼자서 끙끙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는 생각 때문에 협조자가 아닌 경쟁자로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해 줍니다. 즉, 당신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그런데 이에 대한 제자들의 모습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묻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하지요.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듣고 싶어 했던 제자들이었기에, 자기들 곁을 떠날 수 있는 수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협조자로 받아들여 당신의 수난을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에 진정한 협조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보십시오. 내 뜻을 펼치기 보다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랑의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다 보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라 로슈 푸코).
콤플렉스 벗어나기.
콤플렉스에 쌓여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하긴 저 역시 이런 콤플렉스에 시달릴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강의를 하면서 과연 내 강의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일까? 왜 나는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할까? 라는 생각을 강의를 하면서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매일 쓰고 있는 새벽 묵상 글도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수려하게 글을 쓰는 사람, 깊은 감동을 주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에 비해 저는 너무나 무능해보고 그래서 불안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위 하늘로부터 재능을 받았다고 평가되는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역시 당대에 콤플렉스로 인해 무척 힘들었다고 전해지지요.
중요한 것은 교만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콤플렉스에 휩싸여서 힘들게 살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으며 힘들어하는 콤플렉스로 인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안고 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콤플렉스로 얼굴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을 부러워하는 그 누군가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언젠가 묵상 글을 통해서 그냥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봤었다고 적었지요. 사실 이제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배우기에는 제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배울 시간도 많으며, 이를 활용할 시간도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배움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요. 내 자신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로 버리고 싶은 나의 콤플렉스도 조금씩 털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자라고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이 현재의 나를 있게 합니다.
내 생각과 주님의 생각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각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우리 자신을 속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묻혀 눈을 감아버립니다. 망상에 사로잡혀 헛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상상한 주님의 모습에 눈이 갈려 주님이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수난 예고에 두려워합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깨어 직시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계획을 귀담아 들읍시다.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의미를 만나면 세상은 허무가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일본의 토키치 이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무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살해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 사형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캐나다 여인 두 명이 그를 방문하여 창살 너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맛살만 찌푸렸을 뿐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여인은 포기하고 성경만 건네주고 떠났습니다. 이시는 그렇게 받은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씀에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구절에서 멈추었다. 마치 17~18cm 가량 되는 대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내가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강퍅한 내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를 형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온 간수는 자기가 예상했던 야수 같은 강퍅한 인간이 아니라, 얼굴에 광채 나는 웃음을 띤 사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의 특별한 만남으로 자신의 온 인생이 허무로 끝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톰 휴스턴,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누구나 다 보물찾기를 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어렸을 때 소풍가서는 보물찾기가 소풍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됩니다. 보통 보물찾기는 가장 마지막에 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보물을 찾아 상을 받은 아이들은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지만 찾지 못한 아이들은 슬픈 얼굴로 돌아와야 합니다. 보물을 찾지 못한 아이들에겐 소풍의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갑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보물을 찾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끝내 보물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물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게 되자 보물이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자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다시 의미 있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지 지금까지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의미 없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의미이신 보물을 만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허무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당장 죽어도 후회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밭에 묻혀있는 보물이란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어차피 모든 인생이 허무한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즐기려 해도 참 즐거움이 아닐 때에는 그것도 허무한 것입니다. 물론 즐기며 살지 못한 사람들보다야 낫겠지만 말입니다. 참 행복은 바로 허무를 의미로 바꾸어 주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난자가 일생 정자를 만나지 못하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지만 정자를 만나면 의미 있는 삶으로 바뀌는 것처럼 사람 또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만 허무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만남을 위해 시간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났다는 증거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무로 보이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입과 눈과 귀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소통이란 것이 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런 처지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소통한다고 만나는 모든 것들은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설리반이란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설리반이란 선생님을 통해 하느님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제 헛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참 고마운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솔로몬도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만나보았지만 결국 고백하는 말은 허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찾으라고 권고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무로 보인다는 말은 그분을 만났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오직 그분과의 만남만이 허무한 삶을 의미로 바꾸어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영원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진정 만나보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너무나도 기뻐서 이 순간이 영원이 될 것입니다. 지금 죽더라도 결코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허무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43ㄴ-45)."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알아듣지 못하거나(루카 9,45; 18,34),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리거나(마태 16,22; 마르 8,32), 슬퍼하거나(마태 17,23), 두려워합니다(마르 9,32; 루카 9,45). 제자들은 부활에 관한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만 듣고서 무서워했고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9월 27일의 복음 말씀에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은 당시의 제자들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이 말은 무서워서 못 물어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듣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어서 물어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라면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면 되는데,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말씀이었기 때문에 아예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신비'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고, 하느님도 예수님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3). 그러나 하느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이것은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믿음'과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깨달음'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도들이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믿었고, 부활을 믿었고, 그때 비로소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았고 증언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그냥 어리석은 일로 끝났을 것이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남았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도들이 복음서를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에 관한 일들은 당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잠시 남아 있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닌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설명하려면 먼저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부활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분'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십자가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정복한 일, 생명으로 이어지는 통로" 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은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한 단순한 역사책이 아닙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그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책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에도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9월 27일의 복음 말씀의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다음에 생략된 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생략된 말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이 말은 성전 정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인데, 사실 성전 정화 사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제자들이 제대로 깨닫고 믿게 된 것은 부활 후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누구든지 한 번쯤은 "왜 꼭 그런 방식이어야 하는가? 다른 방식은 없는가?" 라고 묻게 됩니다. 다른 방식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믿을 뿐입니다.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 가운데에는 기꺼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있고, 물리쳐야 할 악도 있고, 감수해야 할 보속도 있습니다. 참고 견딤으로써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된다면 그 고난과 시련은 십자가이고, 반대로 물리침으로써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악의 경우에 그것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십자가가 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일이라면 그것은 보속입니다.
십자가라면 언젠가는 부활과 생명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희망하면서 인내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됩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좋아하지요.
선배 한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 가면서 판단이 흐려지기 쉬운 것은 무엇이라도 선물 받는 것이 좋고 또 좋게 말하는 그것이 남들이 말하는 ‘아부하는 말’이라도 좋아지니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손자병법에서도 상대방을 우쭐하게 하는 심리를 만들어 승리로 이끄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만하거나 교만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우습에 하는 것으로 유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깊숙이 내재하고 있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로울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당신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그 때의 정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루카 9,43)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셨을 때 주님께서 당신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루카복음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묻기 조차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많은 인간사의 일도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나무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맛있는 많은 열매를 맺고 또 그 안에 자신의 종을 옮길 씨앗을 담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이 먹도록 유인하지요. 다람쥐가 도토리나 밤, 또는 잣을 옮겨서 자기의 은신처에 보관하는 법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땅에다 묻습니다.
그래서 냄새나 기억으로 묻어두었던 그것을 도로 꺼내어 먹습니다.
그런데 다람쥐가 기억의 한계가 있어서 70%는 찾아 먹지만 나머지는 찾는다는 것입니다.
다람쥐가 땅에 묻어둔 것이 그 씨앗이 그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자라기 때문에 산림은 골고루 새로운 나무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연의 순리입니다. 동물들의 먹이가 되지 않는 열매 속의 씨앗이 겪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참 놀라운 순리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땅 속에 묻힌 밀알’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지만 그것은 스스로 어둠에 갇혀야 하고 외형적으로는 그 형태마저 썩어야 새로운 싹을 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이 썩는 밀알이 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표현하기는 ‘썩는다’라는 표현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이 말씀은 그리스 사람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주님께서 하셨는데 그들도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께 그 뜻을 묻기조차 두려워 하였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젊은 이들에게 청춘도 허무로 끝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마음이 자신을 기쁘게 하도록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사람이 언젠가는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간다고 일깨워주면서 하느님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5-7)
주님께서는 한참 잘 나가시고 인기도 대단할 때에 이미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판의 나무들의 과일이 동물들을 먹이며 자신의 종을 퍼트리듯, 주님께서는 당신이 썩는 밀알이 되어 당신 자신을 바치십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시며 죽음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 말씀대로 자신을 희생하며 나누는 생활을 합니다.
나에게 머무르지 말고 잠시 지나가는 짧은 삶이나마 내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 나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머리로만 아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확신에 찬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십자가로부터 도피하려는
우리들에게 고통도
하느님의 일임을
절실한 사랑의 말씀으로
가르쳐주십니다.
날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사람의 아들을
십자가의 제사에서 만납니다.
넘겨지는 일은
과거도 지금 이순간도
앞으로도 일어날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사람들과의 거리를 없애려고
몸소 사람들에게 넘겨지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
사랑과 희생이
하나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큰
봉헌입니다.
봉헌없는 희생은
결코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또한
결실을 맺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참된 사랑의 삶이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무한한 은총의 열매들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가장 진실된 봉헌은
우리의 십자가를
매순간마다 봉헌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십자가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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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을 빼고 나이 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이가 들면 노안도 오고, 잘 들리지도 않습니다. 또 몸 전체가 점점 약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심지어 기억력도 좋아지지 않게 되니까요. 그래서 활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을 보면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참 좋을 때다.”
이처럼 나이 드는 것을 신나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니까 나이 들면서 생기는 그 모든 단점들이 어르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라고 말하더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큰 것만 보고, 멀리만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귀가 잘 안 들리게 되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소리는 듣지 말고, 필요한 큰 소리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가 시리고, 약해지는 것은 따뜻하고 연한 음식만 먹어서 소화불량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은 멀리 있어도 연세 드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것은 살아온 복잡한 세월을 기억하지 않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만 바라보라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모든 것들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안에 하느님의 숨겨진 배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숨겨져 있어서 그럴까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하느님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잣대만을 내세워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이를 미리 준비시키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도록 미리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그 말씀에 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 침묵하고 말지요.
지금까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보아왔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영광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거부하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세상의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행동만이 삶에 힘을 주고, 절제만이 삶에 매력을 준다(장 폴 리히터).
하느님의 배려
재미있는 유머 하나를 소개합니다.
하느님과 아담이 에덴동산을 거닐 때 문득 아담이 하느님께 묻습니다.
“하느님, 하와는 정말이지 무척 예뻐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만 바라보지 않겠니?”
그러자 아담이 다시 하느님께 여쭙습니다.
“하와의 피부는 정말로 부드러워요. 왜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를 쓰다듬어 주지 않겠니?”
“그런데 하느님, 하와는 조금 멍청한 것 같아요. 도대체 왜 그렇게 만드신 거죠?”
“이 바보야, 그래야 그 애가 널 좋아할 거 아니냐?”
어때요? 정말로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통해 나와 연관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없어야 한다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나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는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하면서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약한 모습이 가장 강한 모습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위해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가장 강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십니다.
가장 약한 이름, 예수에 실망하지만
가장 약한 이름이 오히려 우리를
가장 뜨겁게 위로해 줍니다.
나약한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기에
나약한 모습에 이토록
우리가 잔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의 약함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약한 곳에서 하느님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연약한 한 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약함보다 더 절박한 기도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약함이었습니다.
버려진 거기에서 새역사가 쓰여집니다.
사람이 된다는 건
서로의 약함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중심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장 약한 모습이
결국 모두를 하느님께로 모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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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가면 저녁이 오는 것, 새 것은 헌 것이 된다는 것, 젊은 사람도 늙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진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지금의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요. 그래서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기도 하고, 때로는 할 수 있는 것도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희망도 간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신부님이 정말로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으로 ‘신부님’을 적곤 했었지요. 그리고 그 희망은 간직하고 신학교에 입학을 했었습니다. 입학 한 뒤 10년의 시간이 필요하더군요. 7년의 신학교 생활과 3년의 군대생활.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포기했을까요? 만약 신학생으로만 계속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아마 도중에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신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했기에 지금 이렇게 신부로 살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자리에 연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반대로 포기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변할 수 있다는 진리를 거부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거의 100%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다 보니 변할 수 없는 당연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나의 변화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즉,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알아듣지 못하고, 그 뜻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 변화가 두려워 예수님께 물어보지도 못하지요. 아마 지금의 자리가 영원하길 원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들 역시 예수님을 따르면서 행복만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고여 있으면 썩을 수밖에 없듯이, 이렇게 변화 없이 살아가면 타성에 젖으며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큰 변화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진실로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변화이기에…….
최고의 순간에서도 더 뛰어난 최고를 위해서 지금의 자리에서 변화를 꾀하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까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실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진실로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괴테).
친구
친구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친구란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친구란 좋을 때에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친구란 당신이 무엇을 하든 이해하는 사람이다.
친구란 당신에 대해서 진심을 말해주는 사람이다.
친구란 당신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친구란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친구란 언제든지 당신을 격려해주는 사람이다.
친구란 당신과 경쟁하지 않는 사람이다.
친구란 당신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사람이다.
친구란 일이 잘 안될 때 당신을 격려해주는 사람이다.
친구란 만약 그가 없다면 당신이 불완전해지는 당신의 반쪽이다.
수잔 폴리스슈츠의 ‘나누는 사랑을 알기까지는’ 중에서 골라 보았습니다. 지금 제 방에는 친구 한 명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서울 신학교에 함께 입학한 동창 신부입니다. 어제 늦게까지 술잔을 함께 기울이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지요. 그런데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우리의 관계가 나빴다면?
항상 좋은 만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미래에도 좋은 만남이 생길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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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저에게 강의 부탁이 들어옵니다. 사실 많이 부족한 저이지만, ‘빠다킹과 새벽을 열며’라는 이 묵상 글 때문인지 강의 부탁이 자주 있는 편이지요. 그런데 저는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상당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강의를 하러 갈 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출발합니다. 그래야 일찍 도착해서 강의를 위한 마음가짐을 다질 수 있으니까요.
어제 강남의 모 성당에서 레지오 전 단원 교육이 11시부터 있었습니다. 네비게이션을 켜서 검색을 해보니, 그 성당까지 약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넉넉잡고 그 두 배인 2시간 20분전에 출발했습니다. 즉, 8시 40분 쯤 출발했지요.
생각보다 길이 많이 막힙니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충분히 갈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갖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1시간이 지났는데 이제 겨우 목동입니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아직도 1시간 넘게 남았으니까 또 이제 곧 정체 시간이 풀리겠지 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네비게이션에 표시되는 도착 예정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도착 예정시간이 11시까지 늘어났습니다. 저는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골목길로 들어가기도 했고 또 추월도 과감하게 행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신호위반까지 하면서 간신히 성당에 도착하니 정확하게 11시입니다.
네비게이션에서도 1시간 10분이면 도착한다고 알려주었고, 그래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생각일 뿐 도로의 사정은 제 시간에 도착하는데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내 생각을 내세워 스스로 이쯤이면 되었다는 안일한 마음을 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일함 때문에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긴장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미리 제자들에게 예고해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왜 그럴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자신만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영원히 자신들과 이 세상에 계셔야 하며,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인간적인 고통이 따르는 수난을 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들만의 안일한 마음에서 나오는 착각인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자신의 판단 아래 두려는 잘못된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앞서도 말했듯이 ‘이쯤이면 되었다’는 안일한 마음과 ‘설마’라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크신 뜻을 판단해버리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판단하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제자, 주님 마음에 쏙 드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도록 합시다.
실수한 직원에게 건네는 한마디(무카이다니 다다시, ‘야쿠자 협상술’ 중에서)
자동차 딜러 사무실의 신입 영업 사원인 소노다는 신차 계약 마무리 단계에서 문제에 직면했다. 전에 타던 중고차 가격 책정액이 약속한 금액과 차이가 난다며 고객이 이의를 제기해 계약이 보류된 것이다.
소노다는 입을 삐죽거리며 상사인 하나오카 과장에게 “저는 잘못 없습니다. 중고차 가격 책정액이 그 정도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것뿐이지 확실하게 약속한 것도 아닌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하나오카 과장은 “응, 그랬어?”라며 소노다의 말에 맞장구쳤다. 질책을 들을 거라 생각했던 소노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니까 그건 순전히 고객 분이 착각하신 겁니다. 약속이 틀리다니 그건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응, 그랬군.”
또 맞장구를 쳐 준 하나오카 과장은 소노다의 말이 끝나자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건지를 물었다. 말문이 막힌 소노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결국 “고객님을 찾아 뵙고 오해를 풀고 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라지 않고 소노다의 변명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하나오카 과장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변명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궤변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뭔가 할 말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그가 속에 있는 얘기를 전부 쏟아내도록 해야 한다. 변명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은 점점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변명 좀 그만해!”라고 윽박지르는 상사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될 수 있는 한 부하 직원이 변명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부하 직원은 변명만을 늘어놓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몸소 깨닫게 된다. 변명을 할수록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사에게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해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를 부하 직원이 알게 된다면 그는 당신에게 있어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일이 잘 나갈 때
이재순 수녀님
좋을 때 더욱 조심하면서 고통을 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니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감탄했고 이에 제자들은 신바람이 났는데 예수님께서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고, 혹시 알아들었어도 마음에 걸려 묻기를 두려워합니다. 사람은 잘 되는 것만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본성이 있어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고통을 선호하시는데 인간은 잘 되는 것만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일이 잘 되면 들떠서 더욱 교만해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잘 될 때보다 어려울 때가 오히려 안전한 이유는 더욱 겸손해질 수 있고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신앙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길
류정순
어느 곳이나 지역 주민들이 믿는 종교에는 그 지역의 생태환경 · 역사 · 문화 · 윤리 · 가치관 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개인과 사회, 공동체 · 절대자 · 영성 · 종교지도자 및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시민의식 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기존 종교를 믿는 사회에 신흥종교가 출현한다는 것은 기존 종교에 대한 도전으로 종교권력과 그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은 박해로 그 싹을 잘라 버리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고 배척당하고 순교당하는 힘들고 어려운 박해 시기를 거쳐야 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은 사람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에게 배척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는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함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여지기까지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초기교회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신앙을 몸으로 증거한 많은 순교자들의 믿음을 토대로 그리스도교는 오늘날과 같이 번창하게 되었고, 우리는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야말로 유일한 진리이고 구원이며 생명과 자유의 길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길이자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입니다.
즐겨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라!”?
그러면 늙은이는 즐기지 말라?
그러면 나는 늙은이인가, 젊은이인가?
그제는 새터민 쉼터에 가서 아이들과 식사를 하고 노래방도 가고 오랜 만에 밤늦게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는 노래가 달라 찰찰이 반주만 신나게 하였지만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것을 보는 것이 저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즐기고, 즐거운 것은 역시 젊은이들에게 어울리지만 그런 젊은이들의 젊음과 즐거움이 갈수록 사랑스러운 저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즐거움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랑은 기쁨이라는 등식이 지배적이었는데 사랑이 즐거움이라는 것을 새록새록 깨닫는 요즘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노래까지 하고 늦게 돌아오는데, 낮에 타는 전철은 늙은이들뿐인데 돌아오는 길의 밤 전철은 젊은이들뿐이었습니다.
하기사 저도 8시 넘으면 돌아다니기 싫은데 10시가 넘었으니 늙은이들이 있을 리 없지요.
저는 부러 늙은이들이 앉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늙은이의 자리에 앉아 젊은이들을 보면서 늙은이와 젊은이의 경계감을 맛보기 위해서랄까요?
그러면서 생각도 해봤습니다.
지금 저들처럼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갈 것인가?
젊음이 부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가기는 싫었습니다. 제 젊었을 때 너무 고뇌를 많이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고뇌를 거친 지금이 좋기 때문입니다. 고뇌가 없어서가 아니라 고뇌를 거친 달관스러움 때문입니다.
達觀스럽다!
제가 지어낸 말인데 달관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달관스러움이 최고의 즐거움이고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며칠 전 나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서운함, 노여움, 허무감, 이런 것들을 보는 즐거움과 기쁨이 얼마나 크고 깊습니까?!
전 같으면 이런 감정들에 빠져 허우적거릴 텐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너니?”, “너구나!”하고 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고 하느님을 봅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봤다면 이제는 이 육화의 하느님을 포함하고 넘어서 하느님을 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보면서 시작과 끝을 보니 시작과 끝 가운데 있는 것에 어찌 달관스럽지 않겠습니까?!
젊음이 사랑스러운 것도 이런 달관스런 사랑스러움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젊음을 즐기겠지만 저는 이런 사랑스러움을 즐기겠습니다.
<독서> :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가장 늦게 창조하셨다. 이는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신 다음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며 살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만드시고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가 나게 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곳으로 데려가시어 그들로 하여금 과일을 마음대로 따먹으며 살도록 배려하셨다. 에덴이란 낱말의 뜻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란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즐겁게 살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은 이 세상을 고통스럽고 비탄에 잠겨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복되고,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이며 기쁨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뻐하며 사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로도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로마 12,12)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 하고 말했다.
오늘 독서 전도서에서 설교자는 언젠가는 늙고 죽게 될 것이므로 청춘을 놓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젊음을 즐기며 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경박하게는 살지 말고, 하느님께서 심판 하실 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함을 생각하며 즐기라고 말한다. 사람이 늙으면 팔다리나 이목구비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 때에는 온갖 보약도 소용없다. 어떤 일을 하는 것도 겁이 나고 모든 일들이 두려워진다.
은사슬이 끊어지면 금그릇이 부서지고, 두레박 끈이 끊어지면 물동이가 부서지듯이 사람의 기능이 쇠하면 결국 죽게 된다. 사람은 언젠가 죽어서 몸은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어진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사는 동안 즐겁고 기쁘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만 에덴동산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류 전체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부족함이나 아쉬움이 전혀 없으시다. 그러나 당신이 만드신 사람이 행복하길 원하신다. 사람의 행복을 보시고 더없이 행복해 하신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전혀 부족하거나 아쉬움 없이 행복하게 살면서도 자식의 행복을 원한다. 아버지는 자식의 행복을 보고 더 행복해 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행복을 원하시며, 사람의 행복을 보시고 더 기뻐하신다. 그래서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람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물로 바치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의 행복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하고 말했다. 행복은 감사에서 비롯된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행복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음에 감사해야 한다. 태어났기에 구원받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받은 여러 은혜나 능력 등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야 한다.
나아가 세상이 헛되고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 것은 언젠가 없어지는 헛된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여야만 세상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삶을 즐길 수 있다. 세상 것의 노예가 되어있는 한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세상의 헛됨을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하자.
헛된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하자.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드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삶을 즐겁고 기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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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200Kg 정도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고, 100미터를 5초에 뛰는 준족이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날카로운 이빨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물어서 죽일 수가 있지요. 그래서 호랑이를 동물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무거운 몸무게를 가지고 있고,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사냥을 하는데 느릿느릿 다닐까요? 아무런 힘도 없는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도 호랑이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호랑이로부터 도망치는 토끼는 어떨까요? 백수의 왕이 자기를 쫓아온다고 ‘도망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하면서 포기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쫓아오는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토끼는 최선을 다해서 도망을 칩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토끼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어쩌면 포기하고 주저앉는 것은 우리 인간뿐이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고 주저앉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어떤 석공이 돌덩어리를 해머로 내려치고 있었습니다. 100번이 넘게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돌덩어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101번째 그 꿈쩍도 하지 않았던 돌덩어리가 ‘쩍’ 하고 갈라집니다. 그렇다면 그 돌이 이렇게 두 조각이 난 것은 101번째 내리쳤던 해머질 한 번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첫 번째부터 101번째까지의 해머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야 합니까? 스승님께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혹시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차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들은 모두 무서워하며 뿔뿔이 흩어지고 말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미리 말씀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놓일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면서 살라는 의미로 미리 수난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질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영혼에게는 죽음이 없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없다.(캐리)
남이 모르는 틈새시장(‘행복한 동행’ 중에서)
1999년, 모리 마사부미는 도쿄 신주쿠의 밤거리를 처량한 심정으로 걷고 있었다. 한 고객사의 업무 입찰에 참여했다가 고배를 마신 직후였다. 얼마 전까지 다니던 보험사를 그만두고, 경영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지만 고객사를 따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모리 마사부미는 저 멀리 반짝이는 고급 호텔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보란 듯이 저런 호텔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순간 모리 마사부미의 눈에 번뜩이는 사업 아이템이 들어왔다. 고급 호텔들의 화려한 불빛 사이로 군데군데 불 꺼진 창들이 눈에 띈 것이다.
‘저 많은 방들이 다 빈방이라면 아무리 고급 호텔이라도 영업 손실이 꽤 클 텐데... 저렴하게라도 저 방들을 팔면 이익이 나지 않을까?’
모리 마사부미의 생각은 그 다음 해 바로 창업으로 이어졌다. 고급 호텔 인터넷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잇큐’를 설립하고 당장 여러 호텔을 찾아가 직접 사업 설명을 했다. 당시 일본은 장기화된 경기 침체로 고급 호텔들의 타격이 큰 상황이었다. 호텔 입장에서도 새로운 고객 확보가 절실했던 터라 “인터넷으로 고객을 확보해줄 테니 저렴한 가격을 적용하라.”는 모리 마사부미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온라인 예약으로 최대 70%까지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고급 호텔들이 생겨났다. 지갑이 얇아 고급 호텔을 체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잇큐는 창업 7년 만에 38배의 영업 이익을 내는 회사로 성장했다.
잇큐의 성공은 아무도 생각 못한 틈새시장을 직관으로 읽어 낸 결과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불황의 결과에 그쳤을 호텔의 불 꺼진 창들을, 새로운 수요자들이 탐낼만한 상품으로 바라본 모리 마사부미의 남다른 안목이 돋보인다.
`들을 귀`의 한계
이난호
텔레비전 화면에 낙타 시장이 비쳤는데 한 사람이 낙타를 모질게 때렸다. 낙타는 매를 피하느라 긴 목을 이리저리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어떤 이가 때리는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매질하던 이가 대답했다. “나는 이 낙타와 오래 같이 살아 깊이 정이 들었다. 이젠 팔지 않을 수 없어 정을 떼려고 어제부터 때렸는데 아직도 나를 따라오려 한다.” 끝내 그의 눈이 젖었다. 자막을 읽던 나는 낙타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항상 다정하던 주인이 왜 때리는지도 모르고 호되게 맞으면서 낙타는 얼마나 황당하고 서럽고 막막했을까? 그 막막한 낙타의 눈을 어디선가 본 듯하다.
소통은 이만큼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절벽일 수 있음에 어찌 감히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기 쉽겠는가. 그분의 위대하심에 놀랄 수는 있다. 그러나 정작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루카 9,?44 참조)을 알아듣기는 어렵다. 제자들의 한계이고 나의 한계이며 곧 ‘들을 귀’의 한계다. 그분은 끊임없이 여러 방법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려 하셨다. 마침내는 최대한 당신을 낮추어 당신의 아들로 다가오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세상은, 아니 나는 매 맞는 낙타, 그분의 침묵이 답답하고 노엽고 어리둥절해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그분은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지만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의심을 품으면 두려움만 커지므로 그분을 따르려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기에게 닥친 고통에는 그것을 감내할 힘까지 곁들여 주어진다는 역설에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침묵 속에서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만 놓치지 않고 견디면 된다.
곁눈 팔지 않고 곧은 앞길만 보며 버텨내는 이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이신다. 그 신비 안으로 그를 끌어들이신다. 하마 아득하다, 막막하다, 엄살해선 안 된다. ‘한 생각’ 돌리면 ‘천 년이 하루’인 것. 유독 참을성 없는 나는 일쑤 그 ‘한 생각 찾기’에서 맥이 풀린다. 그런 때 내리 두세 시간 성경을 읽으라던 한 수도자가 있었다. 그대로 해봤고 몇 번 안정을 찾은 경험도 있다.
감추어진 말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짧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이 짧은 복음을 읽으면서 두 단어가 눈에 특별히 들어왔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과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귀 담아 들으라고 하셨는데도 제자들은 당신이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감추어져 있습니까?
주님께서 감추셨기에 감추어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숨기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귀 담아 들으라고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 뜻이 감추어진 것은 주님 탓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입니다.
그 말씀의 진의를 알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못들은 척,
또는 못 알아듣는 척,
또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척,
그 무엇이든 척하는 것입니다.
군 생활할 때입니다.
신병 하나가 저희 부대에 새로 왔는데 이 친구가 오늘날부터 못 듣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하기 싫은 것을 시키는 상황이면 못 듣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8월 뙤약볕에 벽돌을 찍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참들이 물 좀 떠오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못 듣는 척하는 것입니다.
고참들이 의논을 하였습니다.
연병장을 계속 돌게 하자고.
그래서 연병장을 돌게 하면서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돌게 한 다음 연병장 정 반대 편쯤을 돌고 있을 때 작은 소리로 “그만!”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그 친구가 그 작은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는 안 듣고 듣기 좋은 소리만 듣는 것이 탄로 난 것이지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 기적을 하신 주님의 그 영광만 보고 싶지 수난은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난에 대한 얘기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기 위해 묻는 것도 두렵습니다.
어쩌면 이리 저와 똑 같은지!
믿기를 두려워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리서치에 의하면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이탈리아에서 예수님보다도 존경을 받는 성인이십니다. 내년엔 교황님이 직접 가셔서 그분 기념 미사를 집전하시겠다고 발표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상의 비오 신부님도 처음부터 삶이 순탄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사제가 되자마자 오상을 받고 많은 어려움에 휩싸이셨습니다. 오상이 마귀의 힘에 의해서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는 조사를 마치고 비오 신부님의 오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근거가 희박하여 신자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게 합니다. 당사자는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런 방침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비오 신부님은 아무런 말없이 2년 동안 경당에서 복사와 단 둘이서 미사를 거행합니다. 사제가 혼자 미사 한다는 것은 마치 반쪽이 된 느낌과 같습니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은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무슨 뜻이 있겠거니 하십니다.
그의 전기에 보면 비오 성인도 끊임없이 마귀와 싸웁니다. 마귀는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 오상이나 기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을 품게 합니다. 교회의 결정을 믿는다는 것은 곧 마귀에게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명성보다는 교회의 뜻을 따를 줄 알았습니다.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곧 자신이 마귀에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자신을 버리고 더 큰 뜻을 따를 줄 알았습니다.
사실 오상 때문에 시성 조사 위원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실제로 그 분을 성인품에 올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순명 때문입니다. 이 분의 순명으로 현재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고 말하는 모든 집단들이 거짓임이 증명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고 그런 권위를 갖는데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스스로를 박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태리 시골본당에 갔더니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한 아주머니께서 ‘나주 성모님’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저는 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부러운 눈빛으로 자신은 그 곳에서 오는 회지를 받아본다고 하였고 그 마을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나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크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주를 꼭 한 번 순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 성모님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기적’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두 번씩이나 방영했고 교황님 앞에서 실제로 성체가 피가 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나주 율리아 자매의 사적 계시는 마귀에게 속은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나주 율리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교령을 믿으려하지 않고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고 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얻은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교회의 교령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결국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은총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만약 그들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믿었었더라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그렇게 모두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나 하느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 하느님이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들이 메시아라고 따르던 분이 그런 죽임을 당한다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리한 대답을 들을 바에야 아예 묻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도 또 그것에 대해 여쭈어볼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면 행복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제가 된다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믿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합니다.
절벽에서 나무를 잡고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살려거든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하신 것처럼 우리가 잡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믿을 수도 없고 그 분의 말씀이 진리임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믿었다면 그 상황이 왔을 때 덜 당황할 수 있었을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아무리 큰 일이 일어나도 흥분하지 않고 담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름을 한국에서 지내면서 많은 신자 분들을 만났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 분들이 공통적으로 크고 작은 한 가지 이상씩의 어려움들을 안고 생활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이런 불행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이용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다 주님의 뜻이 있겠거니 하면서 믿음으로 극복하고 계셨습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음을 선택함으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신비로운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나라를 얻을 수 있는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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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옆집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와서 그늘을 만들어 채소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담장을 넘어온 가지를 잘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옆집 주인은 나뭇가지를 자르면 볼품이 없기 때문에 자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재판장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은 두 사람 말을 듣더니 재판을 하루 늦추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재판정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왜 판결을 하루 늦췄는지 그 이유가 너무나 궁금해서 재판장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재판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나뭇가지를 자르도록 판결하려고 했는데 우리 집 나뭇가지가 옆집에 넘어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서 가지를 자르고 와서 오늘 판결을 한 것입니다.”
남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면 나부터 그렇게 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이 모습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남은 올바르고 조금도 거짓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에게는 왜 이렇게 관대할까요? 이렇게 자신의 관점대로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랑이 가득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시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사람들이 쓰는 언어인 아람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뛰어난 학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단어를 써 가면서 말씀하셨나요? 모두가 아닙니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더군다나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한 분이 어떻게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입니까?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보고는 모두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처럼 살기 시작합니다. 즉,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용기 있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사랑이 가득 담긴 그 메시지가 이해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사랑이 담긴 착한 일을 합시다.
아름다운 것들을 끝내 보지 못보고(이해인, '기쁨이 열리는 창' 중에서)
어쩌면 아름다운 것들을
바로 곁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으로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듯하다.
음악을 듣다가,
그림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
사람을 만나다가,
항상 새롭게 감동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름다움을 향한 그리움을 키워가야겠다.
현인들의 지혜
최혜영 수녀님
때로 노학자의 글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리도 최신 현안 문제에 대해 지혜롭게 답할 수 있을까 탄복하게 됩니다. 인생의 경륜이 모든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평화를 주나 봅니다.
최근 피에르 신부님의 <하느님… 왜?>(샘터, 2006)라는 책을 읽었는데“영원한 질문에 답하다”라는 부제처럼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서였습니다.
95세 노인의 생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참신한 생각으로 사제들의 독신과 결혼, 여성 사제 문제, 동성애자들의 결혼과 입양 문제, 교황의 선출 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명료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용기 있게 발언할 수 있는 것은 평소 단순하고 욕심없이 생활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줄기를 세울 줄 압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진보’다 ‘보수’다 하여 틈만 나면 연령별, 계층별, 지역별로 편을 가르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새것과 옛것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들의 지혜가 절실한 때입니다.
진짜 믿는다는 것
김덕진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믿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또 그 수난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서도 모른 척 태연하게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예수님. 또 자기를 팔아 넘긴 그 제자가 대가로 고작 은전 30냥을 받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하셨을까? 용서의 주님, 화해의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이미 헤로데에게 잡혀가기 전부터 유다를 용서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복음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유다의 죽음이 예수님께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또 세 번에 걸친 베드로의 배신은 어떠했을까? 그리스도는 곧 주님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 오신 분이시기에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며 참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누군가를 믿는다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믿을 만하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사람을 믿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진짜 믿음’이 아닐까? 바로 예수님이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믿음. 그런 믿음을 친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 절대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 자비로운 용서. 그렇다고 무조건 아무나 믿어서야 낭패를 볼 수도 있겠지만 기왕 누구를 믿고 용서하려면 예수님처럼 제대로 하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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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가 키우고 있는 개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것도 4마리를 낳았지요. 저는 한동안 창고에서 키우다가 비좁은 창고보다는 밖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어미젖을 뗀 다음부터 성지 마당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성지를 방문하신 순례객들은 이곳 갑곶성지에서 손바닥만 한 아기 강아지들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너무나 예쁘다고, 귀엽다고 하면서 난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4마리의 강아지들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 강아지가 더 예쁘다. 저 강아지는 너무 못생겼어. 저 강아지는 왜 흰색이지?”
그저께 드디어 강아지를 분양했습니다. 두 마리의 강아지가 어떤 신부님의 사제관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금 성지에는 두 마리의 새끼 강아지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마리만 남으니, 사람들의 말이 달라지네요. 전에는 못 생겼다고 하시는 분들도 꽤 많았는데, 이제는 모두가 귀엽다고 그리고 예쁘다는 식의 긍정적인 말씀만 하시는 것입니다.
즉, 4마리일 때에는 비교가 되었지만, 2마리만 있다 보니 비교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들을 해 봅니다.
많은 것을 가졌을 때 비교하는 못된 습관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모습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교하면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은 것만을 가졌을 때에는 어떻게든 좋은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결국 지금 내가 부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어떤 비교를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2000년 전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직접 볼 수 있는 커다란 영광을 가졌지만, 그들은 그 큰 영광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과 비교함으로써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치유의 은사를 받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든, 마음의 위안이 되는 말씀을 듣던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은총을 받았지만, 그들은 과거의 율법에 얽매어서 그 기준으로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주님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요? 혹시 그들처럼 예수님을 제거하고서 악으로 기울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더욱 더 감사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감사하는 은총의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떠올려 봅시다.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지요?
아픈 마음 풀어주기 ('좋은 글' 중에서)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아픈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라기보다는
위로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에..
그러나 돌아오는 말이 나의 단점이나
실수를 지적받는 충고라면
오히려 나를 매몰차게 나무라는 충고라면
가까운 사람마저 먼 타인으로 느껴지고
마음 문을 닫게 하여
더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파서 날 찾으면
그냥 그 사람의 아픈 심정만을 읽어주려 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편히 기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마련하여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하여 줌으로서
서로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 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하나 더 얻는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의
아픈 마음을 풀어주는
사랑의 청량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일설에 의하면 예로니모 사제는 세속에 몸담고 있을 때, 잘 나가던 때, 휘황찬란했던 날들의 기억을 떨치기 위해 성경을 펴들었고, 제대로 된 성경번역을 위해 한 평생 매진하신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대로 된 성경 번역작업을 위해 오랫동안 그 어려운 히브리어 공부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유혹의 높은 파도가 다가올 때 마다 예로니모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성서 번역과 연구는 예로니모의 본업이자 아르바이트, 특기이자 취미였습니다. 하루 온 종일 성서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 동안 한사코 미사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서에 대한 번역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 다시 20여 년 간의 세밀한 번역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경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 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마리의 사자가 절룩거리며 예로니모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발을 내밀었습니다. 예로니모가 자세히 보니 사자의 앞발에 커다란 가시가 박혀있었습니다. 보기가 딱했던 예로니모가 그 가시를 빼주었습니다.
사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갈기로 덮여있던 자신의 머리를 예로니모의 몸에 비볐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성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지병철 신부님
예수님께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더구나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모르면 물어야지요...
설사 알기가 귀찮거나 공부하기 싫으면 질문을 안하면 되지 두려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워할까요?
지금 분위기를 보면 그리 무서운 분위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떤 분위기냐 하면 예수님 일행은 갈릴래아로 향해 가시는데 일부러 사람들을 피해 외진 길이라면 외진 길로 가십니다.
왜 그렇게 가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따로 과외수업을 해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리면 시끄러워서 수업도 되지 않을 것이고 ‘주님, 도와주십시오...고쳐주십시오...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등
온갖 요구에 시달리다보면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공부고 뭐고 다 피곤해질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을 피해서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수업을 하고 계십니다.
특별 과외수업이니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 줄 수 없는 비장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가르쳐주시는 건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어렵게 말하거나 비유로 말씀하시거나 비비 꼬아서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한테 특별히 가르쳐주시는 건데 얼마나 자상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그리고 비비 꼬고 그러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알아듣질 못합니다.
알아듣질 못할 뿐만 아니라 질문 하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스파르타 학원 선생님처럼 몽둥이 하나들고 문제 하나 틀릴때마다 자 패고 그랬겠습니까...
공포 분위기도 아닌데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였을까요...
우리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이 방금 말씀드린 수난의 길입니다.
고통 받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을 이야기 하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자기들이 보았을 때 ‘예수님은 이 정도는 삶의 길을 걸어가실 꺼다’라고 보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는 적어도 이 나라의 왕정도는 안 되시겠나...잘되면 로마 황제이상도 될 수 있을끼다’ 라는 자기들이 만든 삶의 길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예수님 죽기 전에 최소한 어느 정도 높은 자리는 차지를 해야하는데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외수업이고 뭐고 틈만나면 자신들내에서 서열 싸움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 이룩할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길을 이야기하는데 제자들은 죽음을 통해서 보다는 죽기 전에 올라가야할 자신들의 삶의 길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두려워합니다. 괜한 질문을 했다가 자신들의 속내가 들어날까 두려워합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이렇게 하질 않겠습니까...
‘예수님...자꾸 수난을 당하신다...고통을 받으신다...죽으신다...이야기하시는데 그러면 후계자라도 미리 정해두시는게 안 좋겠습니까...
저희들이 꼭 그걸 바래서라기 보다는 미리 정해두면 예수님 돌아가시고도 혼란이 없지 않겠습니까...우리들 중 누가 제일 높을까요?‘
죽음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삶의 길을 바라보자라는 말이 죽기 전에 한 몫 떼어주고 가십시오라는 말로 바뀌어 버리는게 우리들인가 봅니다.
삶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보라는 하느님의 생각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없애 주시고 이왕이면 한 세상 조이 살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진 않았는지..반성하면 좋겠습니다.
깨달음의 길, 함께 가는 길
강영구 신부님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대에게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비 그친 아침 하늘은 맑고 푸릅니다.
몸에 와 닿는 공기도 상쾌합니다. 건강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삶과 운명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과 신명(身命)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분 가는 길에 대한 깨달음이 필수적입니다.
그 깨달음은 머리로 얻는 지식이 아닙니다.
자기 비움과 그분에로의 철저한 귀의(歸依)가 깨달음의 바탕입니다.
예수께서 걷는 길을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함께 걷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자기를 꼿꼿하게 주장하고 고집하는 사람은 예수의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예수를 따르는 사람 또한 예수의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께서 걸었던 길을 함께 걸을 수 없음도 자명합니다.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며 손익(損益)을 따지고 계산 하는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ㅣ) 너와 내가 만나는(ㅡ) 자리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만나게 합니다.
여기 하늘나라(天國)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계시
박상대 신부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가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가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가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이루어낸 치적(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 바친 ‘감사의 기도’(루가 9,16)로 이루어낸 기적(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가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가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도고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적(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주시고 보충해주시는 것이다.
귀담아 들어라(루가 9,43-45)
유광수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상황에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우연히 이 말을 하신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임에 분명하다.
우선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이다.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어린이를 고쳐주고 나니까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고 하였다. 놀랄 만도 하다.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그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며 들 떠 있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제자들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어제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했지만 제자들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그런 것을 바라고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모르고 다만 병이나 고쳐달라고 그런 것만을 쫓아다니며 거기에 매달리는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제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병을 고쳐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고백한 그리스도는 단순히 병을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분이시다. 악령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는 것도 좋지만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한 발짝 더 나아가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병을 고쳐 달라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당신께서 하라는 대로 나는 할 것이며 또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구원자(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라고 고백한다면 오늘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희생을 치루셔야 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분이 치루신 희생을 나도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순히 말씀 한 마디로 나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가셨고 그 길이 곧 내가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믿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셨다.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듣는 것에 따라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귀담아 들은 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에 들어 간 말에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 마치 땅에 떨어진 씨가 그곳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무슨 말을 귀에 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서부터 열매를 맺게 된다. 루가는 이 말씀 앞에 어린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영이 사로잡히기만 하면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영은 아이를 뒤흔들어 거품을 물게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마르고 복음에서는 여기에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고 하였다. 더러운 영이 들어가면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흘리며 땅에 뒹군다. 아이는 더러운 영이 들어갔고 그 영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귀에 무엇을 담느냐 즉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매일 욕하는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욕을 하게 되고, 좋은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좋은 말을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법이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신명 6,4-7)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아마도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이 감히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와 지금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을 귀에 담아두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 속으로 들어 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 없이 우리 나름대로 말하고 행동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이 말을 명심하여라."고 "이 말을"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귀에 담아 두어야할 말은 바로 "이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의 다른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만큼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는 말은 권고의 말씀이 아니라 명령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은 내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내 운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손에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하는 종, 즉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듯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베드로의 신앙 고백
I. 칭찬받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람이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에게 올바른 신앙이 있느냐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 고백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단이냐, 아니면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는 판단도 역시 신앙 고백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은 제자들에게 과연 영생을 약속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해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 일반적인 그리스도관
성서에는 주님을 대면한 사람,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 그로부터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판단도 여러가지였습니다.
(1)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명을 가진 예언자인 줄로 알았다는 것과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헤로데왕처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후 다시 살아나서 활동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2)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말라 4,5절에서 엘리야는 메시야가 아니라 그의 길을 예비하는 예언자자로 예언되어 있으며, 이들은 주님이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은 예레미아나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옛 에언자 중에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성서를 잘 못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올바른 그리스도관
예수님은 이같은 제자들의 말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선듯 나서며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즉, 메시야란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에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모세가 율법에서 증거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오신 에언자이어야 합니다. 이 일에 히브리서(1,2)에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그에게 대사제적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110,4)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야훼께서 한번 맹세하셨으니 취소하지 않으시리라. "너는 멜기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족보를 계승한 영원한 왕이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진 이가 바로 메시야의 자격자인 것입니다. 이같은 분은 예수님 이외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와 기원을 함께 하시고 영광이나 본체나 인격이 동격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3. 베드로와 하늘나라의 열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는데 이 이름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그에게 부쳐진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우리가 반석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에 나오는 두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이름은 페트로스( )로 이 단어는 작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반석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석의 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석에 페트라( )란 말이 있습니다.
이 반석이란 말은 거대한 반석으로써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고 했습니다(1고린 10,4).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고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신앙 고백으로 그 반석의 한 부분이 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이며, 또한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그러나 각 종파간에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또한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열쇠란 구원의 열쇠, 생명의 열쇠를 말합니다. 너라고 하신 대상은 베드로 한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지칭합니다.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그리스도와 합치한 몸이 되어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우리의 신앙이 이같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면 우리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같은 신앙은 하느님이 주신 신앙이며 이런 신앙에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II. 책망받은 베드로의 메시아관
베드로는 주님께 칭찬들을 만큼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한지 얼마 못되어 그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하는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신앙을 뒷받침할 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주님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긴 했지만 그러나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직 이같은 지식이 없는 베드로는 사탄의 대리자 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베드로가 들은 책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발길은 죽음을 향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같은 고난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주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난의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 곳에서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죽음의 고난을 이기시고 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하여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53장에 나오는 고난의 메시야에 대하여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으로 오르시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일에 대비하여 좀 더 높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은근히 서로간에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누려야 할 주님께서 왕은 고사하고 잡혀서 죽게 된다고 하니, 결코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도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말리면서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뒤돌아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고 하시는 책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메시야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하셔야 할 활동을 몰랐기 때문에 왜 대사제나 율법학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도 세상 마지막에 있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선생이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부활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지, 즉 올바른 메시아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이유는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가 율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2)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아버지의 뜻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죄인의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3)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그는 그의 백성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요한1서 4,10)고 하셨습니다.
3.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로서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영광을 구합니다. 하느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앞세웁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정욕에 의하여 그의 생각이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탄이 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사탄의 대변자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는 준엄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사탄은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8)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하면 사탄은 그 때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나와 가까운 내 주변의 사람을 통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온갖 계교를 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자라나야 하며 언제나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을 하여 영생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와도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옵니다.
[두올묵상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군 생활 할 당시 저는 8개월 정도 철책에 순찰차 운전병으로 파견 받아 소초 병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틈틈이 영어단어도 외우고 책도 읽으며 시간 나는 대로 대학 복학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둬 달에 한 번씩은 중대를 옮겨가며 자곤 하였는데, 제가 연대로 복귀하기 얼마 전 불과 며칠 전까지 자던 내무반에서 수류탄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행인지 수류탄을 바닥이 아닌 침상 위에 올려놓고 나와서 매우 많은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괴롭혔던 선임자의 머리맡에 놓고 나와서 그 주위에 있던 여러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 정말 아수라장이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까지 함께 먹고 자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만 더 머물렀으면 저도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입니다. 인명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말이 크게 다가온 사건이었습니다.
철책에서 내려오니 이미 부대에서 선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넓은 도로를 누비고 다니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강원도 고성에서 춘천까지 나름대로 장거리를 가게 되었습니다. 옆에 선탑자가 탔지만 거의 베테랑이 되어버린 저를 믿고 잠을 잤습니다. 저도 콧노래를 부르며 군견들과 군견 병들을 트럭 뒤에 태우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치원 아이들과 선생님의 귀엽고 예쁜 모습을 보다가 앞에서 튀어나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프라이드 경차는 크게 파손되었고 운전자는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뼈에 금이라도 갔다면 저는 군 영창을 가야하는 처지였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면서 범죄를 저지르면 경찰들 앞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야하는지도 느껴보았습니다. 다행히 돈을 물어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그때도 복학 준비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가 더 컸더라면 저의 모든 삶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꼬대를 하면서까지 영어 단어를 외웠던 고생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제대하고는 복학준비를 위해 운전기사 일을 하였습니다. 공장에서 자재를 나르는 것이었는데 제가 봉고차를 몰고 좌회전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정면에서 중앙선을 넘은 25인승 버스가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운전사의 눈은 떠 있었지만, 결국 제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습니다. 차는 폐차 되었고 다행히 저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만약 뒤에 차 한 대라도 더 서있었더라면 제가 뒤로 밀리지 못해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큰 사고였습니다. 그때 그 운전사는 눈을 뜨고 졸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주님은 살 수 있는 시간을 더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학 복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너무도 다르게 공부가 하기 싫었습니다. 한 순간 폭탄이 터지거나 원하지 않는 사고로 인생이 끝나버리거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데, 고작 원가 몇 십 원 아끼려고 머리를 싸매야 하는 삶이 너무 싫어졌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택했던 경영학이 이제는 너무도 부질없는 학문으로 느껴져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속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자 주님의 부르심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복학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하려고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했던 모든 노력들이 허무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정해져 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맞은 계획을 지니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세워 놓아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도 몇 살 때까지는 돈을 얼마 정도 벌어야겠다는 계획도 세워 놓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 뜻대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획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크게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우환이 닥쳐와도 그 안에서 주님의 섭리를 깨달으려 노력합니다. 이것이 모든 일에 모든 때를 정해 놓으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반응의 차이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 말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모든 주님께로부터 계획된 일이 이루어질 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내 계획에 주님께서 따라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를 실패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모든 계획을 세워놓으신 주님 앞에서 절망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안 좋은 일처럼 보이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코헬렛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주님은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하여 아름답게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그것이 비록 고생길일 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계획 세워 조급할 필요도 없고 지금 안 된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일이 실현되고 있음만 보고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나머지 개인적인 계획과 꿈은 모두 헛된 것이라 모든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모든 일에 주님의 때가 있음을 깨달으라 충고하는 것입니다.
참사람
윤성희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흔히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일컬으신다.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셨는지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지난 100여 년 간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견해는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자이자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예수께서 정말로 그런 의도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을지는 확인할 수 없겠지만,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을 떠올렸을 법하다. 예수님 시대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건,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분이 사람들 손에 넘겨져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한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내 아버지가 재벌인데, 나는 곧 쪽방촌에서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니, 왜?” 하고 물으며 무슨 꿍꿍인지 알아내려 할 것이다. 물론 이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재벌 아들이라는 걸 별로 의심하지 않을 경우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반응이다. 만일 그 사람이 재벌 아들인지 완전히 확신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침묵할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만 ‘이거 재벌 아들 아닌 거 아냐?’ 하고 생각할 것이다.
재미있는 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반응이 꼭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에 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한다. 예수님이 평소에 너무 무서워서 묻지도 못했던 것일까? 아이들하고도 부둥켜안고 놀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분인 만큼, 질문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제자들이 침묵한 이유는 ‘이분, 혹시 메시아 아닌 거 아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늘 곁에 두고 아끼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향한 의심을 알게 모르게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왠지 예수님이 느끼셨을 허전함에 마음이 저려온다. 예수께서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는 그런 분이셨던 거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묘한 위로를 주기도 한다. 우리도 살다 보면 늘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있다. 아무리 말로 설명하고, 진심을 전달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참사람이셨던 예수께서도 그러셨다니, 어쩌면 그런 빈자리가 참사람이 되긴 위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진짜배기 사람이니까 허전한 거고, 진짜배기 사람이니까 아픈 게 아닐까?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3ㄴ-45)."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루카 9,28-36) 뒤에 어떤 아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신(루카 9,37-43ㄱ) 일이 있었고, 그 다음에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악령을 쫓아내시는 권능' 때문에 '수난을 예고하신 첫 번째 말씀(루카 9,22)'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예고 말씀을 하시는데, 첫 번째 말씀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루카복음에는 부활에 관한 말씀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루카복음서 저자가 부활에 관한 말씀을 생략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못 알아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왜 메시아이신 분이 수난을 당해야 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고 죽게 된다는 말씀은 듣고 싶지도 않고, 자세히 묻고 싶지도 않은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두려워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서워서 눈을 감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무서운 일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면 '예수님을 넘겨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첫 번째 예고 말씀 때 언급하신 '원로들,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인데(루카 9,22), 넓게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당시의 제도권 사람들이나 기득권층 사람들의 박해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안 믿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믿지는 않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박해자 속에 포함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면서, 또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놀라고 감탄하고 감동해도 그것이 믿음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놀라고 감탄하고 감동하는 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일'을 '구경'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고, 신앙생활은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는 생활이 아니라 '내 삶'이 변화되는 '나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일에 많은 관심을 가져도 그냥 구경꾼으로 그치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님을 한 번 만나 보려고 했던 헤로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루카 9,9).
나중에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 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8-9)."
만일에 전후 사정을 모르는 채로 '기뻐하였다.' 라는 말과 '보고 싶어 하였다.' 라는 말만 본다면, 헤로데가 오랫동안 메시아를 갈망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려고 한 것과, 이것저것 물은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이지 신앙인의 믿음이나 희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헤로데는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에 빌라도에게 돌려보내는데(루카 23,11), 그런 헤로데의 태도는 처음부터 그가 불순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예수님을 보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요즘에도 종교와 신앙에 관한 일을, 또는 구원에 관한 일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어도 신앙생활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면서 겉돌기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수난 예고 말씀에 관하여 묻지 못한 것도 그들이 아직은 예수님의 수난을 완전히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신앙인은 토마스 사도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하는(고백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예수님의 일은 곧 '나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곧 나도 가야 하는 길입니다.
사람이니 사람의 손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드님이 자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본래 사람의 아들인 저는 사람의 아들이 아닌 양, 다른 차원의 존재인 양 착각을 하고 행세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당신 스스로 사람의 아들로 자처하십니다.
아니 완전하게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육화하시어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릴 때부터 사람의 손에 넘겨지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잘못해서 사람의 손에 넘겨지신 것처럼, 꼭 그렇게만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폭력에 의해 돌아가신 것도 사실이지만 삶아먹든 잡아먹든 알아서 하라고 인간의 처분에 맡기신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사람의 손에 넘겨지신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지 우리의 폭력 때문이 아닙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우리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셨다면 그분의 죽으심은 봉헌도 사랑이 아닌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육화에서부터 사람의 손에 넘겨지신 수난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과정을 관통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육화케 하고 인간의 그 어떤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의 아드님이 당신 스스로 그 신적 본질을 버리고 인성을 취하시게 하고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우리와 완전히 같아지신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내 손에 넘겨지시는 예수님
이장규 수녀님
저희 수도회 입회식 때마다 입회자들의 부모님과 친지들께 드리는 원장 수녀님의 인사말씀 중에 제가 참 좋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새로 입회하는 지원자들을 저희 모두 귀하게 대하겠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누나, 언니, 친구를 수도원에 남겨두고 집으로 향해야 하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에게 이보다 더 위안과 안심이 되는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인사말은 부모와 친지들께 드리는 약속이자 수도회 회원들에게 수도가정 안에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들어오는 지원자들을 우리 모두 귀하게 대해야 한다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나 세 번째 예고 때처럼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같은 특정권력집단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심사숙고하면서 고르고 골라 진심으로 자신처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줄 거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악할 대로 악해진 사람들의 손에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넘겨주신 하느님이나, 그 아버지의 뜻에 순명해 자신을 모욕하고 매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할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예수님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부자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건 믿음과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모상으로 만든 자녀인 우리가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목숨 바쳐 보여주신 예수님을 언젠가는 알아보고 사랑하며 귀하게 대할 것이라는 희망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포기를 모르시는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내시고, 그 아들 예수님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미소한 자의 모습으로 날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십니다.
진실 앞에 서야 한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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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신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물어보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을 때 준비 없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뿔뿔이 도망쳤고,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서도 의심과 혼란을 피하지 못한다.
가끔 우리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두려움을 동반하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물론 긍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긍정적’이라는 말의 의미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피하고 싶은 상황을 달리 해석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말이다.
불편을 느끼게 하는 진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만난다.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자 하는 우리의 움직임은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미봉책으로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진실만이 우리가 옳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려운 진실일수록 용기를 내어 그 앞에 서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틀렸다면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고, 숨겨진 참된 뜻을 신앙 안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려는 이들이 많아 보이는 세상이다.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진실을 거짓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많아 보이는 세상이다.
최소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앙 안에 살고 있다면, 진실 앞에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