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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9월 28일 (녹)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09.28|조회수1,644 목록 댓글 0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욥기의 말씀입니다. 1,6-22

6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9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11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12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13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14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15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6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7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8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나리의 아드님들과 따님들이 큰아드님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19 그런데 사막 건너편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서리를 치자,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21 말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2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치셨지만,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자,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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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욥의 소유를 쳐 보시면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제1독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세우시고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자(루카 9,44-45 참조), 제자들은 그분의 최측근으로 얻어 누릴 영광을 기대한 듯 자기들끼리 서열을 매기려 합니다. 이토록 완고한 모습에 진노하실 만도 한데, 예수님의 교수법은 달랐습니다. 아직 어리석기만 한 제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기는 겸손으로 얻게 될 영광을 다시 한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마치 당신인 듯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선을 넘고 내 감정과 삶을 마구 헤집으며 나를 이기려고만 하는 이를 미워하고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사람, 못난 나보다 더 못나 보이는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참아 내고 용서하는 사람. 그가 당신 눈에는 진정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하지 않는 이에게도 이런 겸손과 포용의 마음으로 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의 주인공 욥은 흠 없는 의인이었지만,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로(의인의 수난을 ‘하느님께서 다 아셨고 허락하신 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 자연재해와 약탈자들의 손에 모든 재산과 자식들마저 잃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고 드렸던 욥의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욥의 삶이 그분께 영광과 승리가 되었듯이, 일상 속 고난과 시련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직 주님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삶도 하느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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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 세상의 상대적 논리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굳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나 찬성이 명확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리에 신앙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은 평범합니다. 악은 결코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악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 안에서도 옳은 것 안에서도 얼마간의 부족함과 어긋남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쉬운 답을 원합니다. 사실 쉽다기보다는 편한 답을 원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답, 모두가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답 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한 답은 옳더라도 피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 어렸을 때,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그렇게도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문 앞에서 호객하는 서커스단 관계자의 말은 늘 이랬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을 다시 고쳐 보면, 애들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애들’을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인간이 덜된 존재로 하찮게 여기던 어린이를 통하여 가장 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 답이 분명한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누구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한 사회는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선악과 정의를 논하면서 흡족해하는 이들의 편협성을 오늘 복음은 질타합니다. 절대 선과 정의를 좇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식별 안에 아름다운 척하는 섬뜩한 악마가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식별을 과신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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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갈수록 우리의 지성은 어두워지고 우리가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작아질수록 예수님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원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시기심과 허영심, 권력욕과 교만함을 내려놓지 않으면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의 친구가 많습니다. 반면에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기가 쉽습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사회적 의미는, 교회 공동체 안에 약자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미소하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작은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큰 사랑을 닮는 길을 알려 줍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다투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 길을 가장 잘 알아듣고 전 생애에 걸쳐 실천한 성녀이므로, 우리는 그를 ‘작은 꽃, 소화(小花)’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린이의 길’은 오직 하느님께 작은 사랑의 꽃을 바치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처럼 ‘우리가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는 소박함을 기억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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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에 버릴 수 없는 것, 모든 사람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력 욕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어린이의 단순함이 그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는 지상의 가치와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권력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곳에 있습니다. 가난과 겸손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하늘 나라의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작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의 전형은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욥 성인의 위대함은 자신의 재산과 자녀들, 곧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단순함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욥 성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되, 하느님만이 자신을 알아주고 그분이 준비하여 놓은 천상의 상급을 얻으려 살아가는 순박함과 겸손함을 간직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우리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천상 지혜가 넘치게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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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입니다. 일종의 권력 투쟁입니다. 제자들의 권력 투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탐하고 보자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습이고, 또한 공동체 안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는 혼자의 힘으로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지요.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알아들으려면, 사회적 통념과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내로라’하며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동체의 가족들은 이러한 속물적인 생각들을 과감히 털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모두가 다 “예.”라고 할 때, 과감히 “아니요.” 할 수 있는 신앙적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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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제자들은 논쟁했습니다. ‘누가 높은 사람인가?’ 우리 역시 가끔은 따집니다. 모임이나 식사 때 ‘자리 배정’에 신경을 씁니다. 말은 안 해도, 제대로 되었는지 관심을 가집니다. 권력과 이권이 개입된 자리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능력 있고 ‘자격 있는’ 사람이 윗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런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한 명을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이런 어린이를 제대로 받아 줄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눈치 보지 않고 사랑으로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약자’였습니다.그러므로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자격의 기준’이라는 말씀입니다. 

말 없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떤 단체든 ‘내색하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껴안으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인간관계를 늘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앞에서 ‘튀는 사람만’ 붙잡으면 점점 옹졸해집니다. 눈앞의 사건에만 매달리면 멀리 보지 못하게 됩니다. 깊은 강은 언제나 조용히 흐릅니다. 얕은 강이기에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속 깊은 사람’은 깊은 강을 닮기 마련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서울 대학교 병원에서 스트레스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연구진은 같은 환경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한 집단에는 2분마다 전기 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유리창 건너편에서 맞은 편 고통 받는 쥐를 관찰하도록 배치했습니다.

열여섯 시간 동안 실험을 진행하며 쥐들은 480회의 전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탈진한 쥐는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아니라 이 고통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쥐였다고 합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보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아픔이 더 큽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와 그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고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이겨낼 힘은 무엇일까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통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마음보다는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과연 마음이 편안할까요? 더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육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사실 다투게 되면 절대로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 다툼의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답게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까지 받아들여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눈높이를 낮춰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행동과 어린이의 말을 따라 하게 되지요. 어린이 앞에서는 세상의 체면이나 명예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낮춰서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낮춰서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생텍쥐페리).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방법

강의 부탁을 받으면 아무리 멀고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해외에도 또 사람이 없는 시골 본당에 가서도 강의를 해왔습니다. 저를 불러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지금까지 거부하지 않고 기쁘게 강의를 해왔습니다(물론 올해는 코로나19로 거의 강의를 못 했습니다). 그런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강의 청탁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은 신학교였습니다. 수준 높은 강의를 들어 온 신학생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부족한 저의 강의를 들어는 줄까? 등의 생각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불안을 멈추기가 힘들었습니다.

망설임, 두려움.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이 됩니다. 스티브 프레스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우리 내면에 있는 살지 않은 삶. 이 둘 사이에는 저항이라는 게 버티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항을 부숴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께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그런 체험 해보신 적이 있는가요? 불행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체험 말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그런 분들 참 많습니다. 불행이라는 것은 결핍투성이인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어야만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때로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롭고 만사형통하던 욥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시련을 체험케하십니다. 그가 연속적으로 겪은 불행의 강도가 얼마나 컸던지, 위로 방문 온 친구들은 할말을 잃습니다.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겨웠던 욥 역시 나중에는 자신의 태어난 날 마저 저주하게 됩니다.


평화롭던 욥의 집에 갑작스레 적군들이 들이닥칩니다. 적군들은 가축들 중에서도 가장 값나가는 소들과 암나귀들을 약탈했고, 가축들을 돌보던 목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달려와서 욥에게 사건의 개요를 보고했습니다.

유일한 생존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양치기 한명이 달려와서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6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양치기의 보고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와 외쳤습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7절)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욥은 설마 설마 했는데, 또 다른 이가 와서 가장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9절)


보십시오. 욥은 순식간에 재산이며 가축이며 자식들이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과 몇분 사이에 그간 욥에게 베푸셨던 모든 선물들을 다 거두어가신 것입니다.

제가 욥같았으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내게 이런 가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랴?’하고 울부짖으며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태도를 보십시오. 놀랄 지경입니다. 욥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통과 슬픔, 참회의 표시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더 놀랍게도 욥은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따지지도 않았으며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부당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욥은 흠 없고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런 욥이었기에 하느님의 축복도 풍성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당시 가축의 숫자는 부의 기준이었습니다. 욥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고,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의 숫자도 엄청났습니다. 

욥과 그 가족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동시에 선물로 주어진 부를 마음껏 향유하였습니다.


없이 살던 사람, 이미 밑바닥에서 살던 사람에게 시련은 면역이 되어 있어서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사람, 누리던 사람에게 시련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든 실패나 좌절이 없는 평탄한 인생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예외없이 시련을 체험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큰 시련 앞에서 처절하게 절망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원망도 하지만,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동시에 한 가지 큰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자신은 크신 하느님 앞에 한갖 티끌같이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좋은 것은 물론이고 나쁜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겪는 시련은 그 자체로 고통의 원인이지만, 결국 시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께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시련은 우리 인간을 더 큰 믿음의 사람, 더 큰 그릇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참으로 성공한 인생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눈에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크게 되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크기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이 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교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으니 겸손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까지도 잘 받아들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은 밀떡 안에 계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캐나다 몬트리올 어떤 초등학교에서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란 랄프라는 아이는 성탄 연극 때 여관 주인 역할을 하며 오갈 데 없는 요셉과 마리아를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태중에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은 또 하느님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늘만큼 큰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에게서도 단점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내세우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단점들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단점이 있으니 남의 단점도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 어머니께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어머니와 저는 서서 있었습니다. 한 정류장에서 앉아있던 사람이 내리자 어머니는 재빨리 그 자리로 뛰어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앉을 자리에 저도 앉으라고 손짓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그 자리를 맡으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창피해서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상도 찌푸렸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내려서 매우 서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종일 저 때문에 뛰어다녀서 몹시 지쳐있었는데, 어머니보다 그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을 지키려 어머니에게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나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어머니의 단점을 나의 것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받아들이면 나의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남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나의 단점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이 들며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남의 단점들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렸을 때 길을 잃어 고아로 크며 남의집살이하며 고생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이, 혹은 누군가가 버려지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십니다. 저희 집에는 이미 쓴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고 그것을 버리라고 하면 어머니에게 혼이 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흘려보내 주는 것을 배운다면 더욱 좋겠지만 지금처럼 사시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훌륭해 보이십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아이를 집에 들여 씻겨주고 재워주고 좋은 옷을 주시고 당분간 머물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은 사람이 자신의 옛 모습을 가진 이들을 이전의 자신처럼 대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익어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그 단점을 극복했어야 합니다.

쭉정이는 자신도 곡식이라는 것을 뽐내기 위해 익지 못한 것들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미 익은 곡식은 새싹이든, 자라고 있든, 속이 아직 차지 않은 쭉정이든, 자신이 그런 적이 있어서 언젠가는 가득 차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미 익은 곡식은 익지 않은 다른 것들도 자신처럼 곡식으로 봅니다. 부족한 이들도 모두 자기 자신처럼 보는 것입니다.

나이 들며 더욱 포용력이 향상되는 이유는 그만큼 이전의 단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도 벗어나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단점을 내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평화 책꽂이’가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필자의 느낌과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한영국 선생님은 정채봉님의 ‘초승달과 밤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국 작가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미주가톨릭신문 홈페이지 지면보기 9월 13일자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연좌제와 신분제’의 사회를 살았습니다. 연좌제는 부모의 잘못, 특히 사상과 관련된 잘못이 있으면 자녀들 또한 영향을 받는 제도입니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정보원에 의해서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승달과 밤배에서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손자와 손녀 역시 사상범의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의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연좌제의 벽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연좌제’는 더 이상 삶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가끔씩 큰 홍역을 치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입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흑인의 선조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를 통해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과 애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대부분의 나라는 신분제의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천민(賤民)’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람이 그 신분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도 없었고,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천하면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때로는 그 재능과 능력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피부색 때문에, 성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차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 선언문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우리 모두는 이성과 양심을 가졌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갖고 있는 의견이나 신념 등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연좌제와 신분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따라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인데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사상과 신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은 물질과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누면 해결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부자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후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워 주었던 자캐오를 축복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가난한 이들과 재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기쁜 마음으로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다고 전해줍니다. 가난한 사람도, 굶주린 사람도, 과부도, 어린아이도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우리가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음을 안다면 재물과 돈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기쁘게 나눔으로서 하늘에 보화를 쌓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쌓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입니다. 연좌제와 신분제의 벽을 허물었다면 가난한 이들의 아픔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대하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다 더 깊숙하게

보다 더 넓디넓게

보다 더 높디높게

보다 더 따뜻하게

보다 더 부드럽게

보다 더 너그럽게

보다 더 겸손하게

보다 더 평등하게

보다 더 편견없이

보다 더 갈림없이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부모라고 생각했을 때 자식들이 여럿이 있는 데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자식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집니다. 그게 부모 마음입니다. 어쩌면 가장 적게 가진 자식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애매한 말씀을 조금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가진 것이 많은 것처럼 자신의 교만이 가득 들어 차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 앞에 진정 겸손하게 자신을 비울 때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린이들에게서 큰 사람을 봅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엄청나게 주어진 시간 안에 큰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어른에게서 작은 사람을 봅니다. 앞으로의 시간이 작게 남아 존재의 크기가 점차적으로 소멸 되기에 작은 사람입니다.

어린이들에게서 작은 사람을 봅니다. 얼마 살지 않아 내용이 부실합니다. 미성숙합니다. 어른에게서 큰 사람을 봅니다. 살아온 날들이 내용이 충실해졌습니다. 성숙합니다. 나는 요즘 어린이들과 지내며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어린이의 미성숙 안에 성숙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큰 사람입니다.


나는 늙어가며 어떻게 지내야 하느님 보시기에 큰 사람일까 자주 생각해 봅니다. 살아온 날들의 내용이 남은 시간과 연결되고 힘차게 삶 속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신약과 연결될 때 큰 사람이 될텐데 수석사제, 백성의 원로들이 자꾸 작아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들은 나이만 먹은 작은 사람입니다. 어른답게 어린이 같은 마음하고 신약에 다가가야 큰 사람이 될 터인데 구약의 과거에 답습하고 붙잡고 늘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예수님은 한없이 커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앞에 어린이로 자신을 맡겼습니다. 가장 큰 사람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6-48).




<낮춤과 섬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월요일>(2020. 9. 28. 월)(루카 9,46-50)

‘교만’은 그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더 큰 죄로 이어지는 ‘죄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업신 여김으로써 사랑을 거스르는 죄, 하느님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 신성모독죄 등이 바로 그 ‘더 큰 죄’입니다.)

사탄은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된다고 유혹 했습니다(창세 3,5). 인간들은 하느님처럼 높아지고 싶은 욕심으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창세 11,4).

사도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거나 자리다툼을 한 일이 있는데, 그런 논쟁과 다툼은 명예욕, 교만, 우월감 등에서 생긴 잘못된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겸손’해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겸손’은 이웃 사랑 실천에 직결되는 ‘덕’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신앙인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나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나는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다.” 라고 겸손하게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으려면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서만 겸손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겸손하지 않다면 (교만하다면), 그것은 ‘가장 작은 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일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서만 겸손한 것은 사실상 ‘거짓 겸손, 위선’ 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6-48)>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제자들이 논쟁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나는 너희들보다 높다.” 라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 동시에 “너희들은 나보다 낮다.” 라고 다른 제자들을 낮추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도 잘못이고, 다른 사람을 낮추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다투고 예수님 앞에서는 겸손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그것을 반박했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말렸다가) 혼난 일이 있는데, 그때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은 겸손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이 말은, 예수님께서 판단을 잘못하고 계신다고 나무라는 말이고,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옳으니 자신의 충고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제자의 본분에서 많이 벗어난 교만한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긴 하지만,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즉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6,23).

이 말씀은, 베드로의 말과 행동이 사탄의 그것과 같다는 뜻이고, 또 제자의 본분을 지키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이고, 이 말은 “제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스승의 뒤를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배반자 유다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요한 12,3), 유다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라고 비난했습니다(요한 12,5).

유다의 말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재물을 쓸데없이 낭비 한다는 비난인데, 이 비난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행동을 내버려둔 예수님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한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도둑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기록했는데(요한 12,6), 어떻든 유다의 태도는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

루카복음 6장에도,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는(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을 인도하려고 하거나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죄이고, 신성모독죄입니다.

그 죄를 짓지 않으려면 예수님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린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보다도 더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진심으로, 또 진실하게 겸손을 실천하는 사람을 높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 때에도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 22,24).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께서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신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이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뉘우치는 삶인 가톨릭인 됩시다.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어린이시절 지나 초등학교~중등학교 배우고 듣고 보는 능력 배웁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기인생을 꾸미기시작합니다.

세상이 아직 물들이지 못한 어린이들은 하늘냄새를 고스란히 풍깁니다.


뇌 성장 따라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로 인간 개개인 모습 달라집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부모 가족 보며 교리 배워 하늘자녀 돼야하는데.

예수님의 ‘어린이처럼’이란 말씀을 ‘하느님 닮은’이라고 바꾸어 봅시다.


어린이=하늘냄새=창조상태=>순수 겸손은 누구나 뉘우치면 터득합니다.

세상욕심의 아집에 인간관계고뇌 말고 뉘우치는 삶인 가톨릭인 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줍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루카 9,46)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스승 예수님 다음으로 누가 가장  높은지 우열을 가리고 싶은가 봅니다. 세속적인 서열과 권력의 욕망이 아직 정화되지 않아서겠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답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세속의 질서와 역행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모두가 크고 힘 있고 강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려고 경쟁하는 세상에서, 작고 힘 없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

사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가 되기를 원하셔서 실제로 가난한 목수와 한 시골 처녀의 아들로, 그것도 객지에서 태어나셨지요. 공생활 동안에도 머리 둘 곳 없는 떠돌이 가난뱅이셨습니다. 죽음도 가장 작은 자로서 맞이하셨지요.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사형수로 생을 끝맺으셨으니까요.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은 비우고 낮추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이 그 바람을 이어받기를 바라시지요.


"막지 마라"(루카 9,50)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요한이 무용담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어느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제자 무리가 아니라서 못 하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를 막지 말라고 이르시지요. "우리"에게 속하건 속하지 않건 하느님의 선한 일은 널리 퍼져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화는 제자들은 이미 큰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반증 같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선한 일들을 규제하고 막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또다른 기득권 그룹을 형성해 버린 듯합니다. 이렇듯 악은 인간 욕망의 아주 미세한 빈틈을 노려 가차없이 파고듭니다.


"막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어떠한 욕망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바람은 오직 하느님 뜻과 사람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명성이나 권력 따위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허용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죽음까지도 말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욥의 신앙 여정이 시작됩니다.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 8)

주님께서 보시는 욥의 모습입니다. 그의 충실함과 신실함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부러울 지경입니다. 욥의 모습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 1,9)

사탄은, 주님께서 욥에게 축복을 내리셨으니 그가 응당 그런 거라고 응수합니다.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처럼 사랑이 아닌 거래로 보는 것은 악에서 오는 생각임을 알 수 있지요.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지금부터 욥에게 지난한 시련의 여정이 닥치겠지만, 아직까지 욥은 주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그동안 누린 것이 모두 주님의 축복이었으니 거두어 가신들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원망이나 항변이 아닌 오히려 찬미입니다.

이 고백 안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위해 당신께 떨어진 영광도 치욕도 가리지 않고 달게 받으셨지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은 철저히 당신 자신을 잊으셨던 것입니다.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모욕 당하고 조롱 받고 버림받고 실패하고 비천한 이로 내쳐지는 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지닌 사람입니다. 


제자들처럼 큰 사람,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이가 되는 것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어떤 면은 작은 이에게 무례하고 무자비하며 잔인하기까지 하니까요. 당장 제자들도 예수님을 등에 업고 "우리"가 아닌 이에게 힘을 행사할 지경이니 세상 편의 혹독한 갑질은 슬프게도 전염성이 매우 강한 듯 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래도, 작은 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작고 작아져서 눈에 띄지도 않는 지경에 다다르면, 비로소 거기서 사랑하는 주님을 발견할 것이니까요. 작은 이 안에 예수님이, 그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작아진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품는 것입니다. 또 작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속한 곳에서 작은 이를 환대하고 또 가장 작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찾고 바라고 갈망하는 주님의 거처는 가장 작은 이들의 마음이랍니다. 그러니 우리, 거기서 만납시다.




정의의 무기로 무장합시다.

성 폴리카르포 주교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Nn. 3,1-5,2: Funk 1,269-273)

형제들이여, 내가 정의에 대해서 쓰는 것은 내 독창적인 생각에서가 아니고 여러분이 나를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나 나와 같은 사람이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바오로의 지혜를 결코 얻지는 못합니다. 바오로는 여러분 가운데 계실 때 그 동시대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확고하고도 완벽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떠나 계실 때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신 바 있는데 그것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여러분이 전해 받은 신앙을 굳세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희망은 그를 뒤따르고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를 앞장서 갑니다. 이 삼덕에 이른 사람은 정의의 계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온갖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정의의 무기로 무장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계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배우도록 합시다. 다음으로, 여러분의 아내들에게도 받은 신앙과 사랑과 정결 속에서 거닐고 자기 남편을 충실성을 다해 사랑하며 다른 모든 이들도 정숙함 가운데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자녀들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가운데 교육시키도록 가르치십시오. 과부들 또한 주님의 신앙 안에서 분별력을 얻어 모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온갖 중상 모략, 험담, 거짓 증거, 탐욕, 그리고 모든 악에서 멀리 떠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바로 그들 자신이 모든 것을 샅샅이 살펴보시며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비밀까지 숨길 수 없는 하느님께 바친 제단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계명 가운데서 합당히 걸어가야 합니다. 부제들은 사람들의 봉사자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봉사자들로서 정의 앞에 허물없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중상 모략하는 자나 한 입에 두 가지를 말하는 자나 탐욕에 빠지는 자들이 되지 말고, 만사에 있어 진지하고 자비롭고 열심하며 모든 이의 종이 되신 주님의 진리에 따라 살아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승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분이 우리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때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미래의 복락을 얻게 될 것이며, 또 우리 믿음에 따라 하느님께 대해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새 신부와 판공성사

강석진 신부님

어느 날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된 ‘2020년 부활 판공’을 ‘성모승천대축일’ 전까지 실시하라는 교구 결정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부활 판공성사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신자들 간의 이동이 겹치지 않는 장소를 선정했습니다. 

이어서 판공성사 일정을 잡는데, 의외로 손님 신부님을 모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주임 신부인 나와 보좌 신부가 본당 교우분들의 고해성사를 주면 되겠다고 편하게 생각했지만, 본당 신자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손님 신부님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본당 신부님들과 교우 분들이 일상을 잘 지내는 것과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암튼 판공성사 일정 중 마지막 날 평일 저녁에, 손님 신부님 두 분을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무더운 때에 갑작스럽게 손님 신부님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보좌 신부님의 인맥과 노력으로 두 분의 신부님 물색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 중에 한 분 신부님께선 지난 해 12월에 사제품을 받았고, 해외 선교를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 해 12월 사제 서품이라…. 그러면 서품을 받은 지 만 1년도 되지 않는 새 신부님이네. 음, 판공성사를 잘 줄 수는 있을까!’

아니다 다를까, 판공성사 주러 온 날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데, 그 신부님 말로는 ‘고해성사는 준 적은 있지만, 판공성사 경험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신부님에게 겉으로는 편안하게 성사주시면 된다고는 말은 했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자들 모두가 영적으로 힘든 때, 모처럼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되게끔 신경을 쓰려고 했지만, 고해 신부님이 ‘새 신부님’이라는 생각에… 미심쩍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판공성사가 시작됐고, 손님 신부님을 안 불렀으면 어찌됐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교우 분들이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보고 돌아가는 신자분들은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나 또한 고해성사를 보고 가시는 신자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은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다 내 마음 속에서 어떤 울림이 밀려 왔습니다. 

‘석진아, 너는 언제 고해성사를 볼 거야?’ 

이에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그 신부님에게 고해성사 보기를 결심한 후, 판공성사를 마칠 즈음, 새 신부님이 계신 고해소에 들어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도 고해성사를 볼게요.”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 당황한 듯 손 사레를 치자, 나는 막무가내로 성호를 그어버렸습니다.

“나의 범한 죄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부님께 고백합니다 … 이러쿵 … 저러쿵 …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해 신부님이 내게 ‘지금 어려운 시기에 신자들을 위해 힘과 용기를 주는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훈화 말씀을 해 주셨는데, 마음이 어찌나 따스해지던지요. 

내가 그 신부님을 ‘새 신부’라는 딱지를 붙여서 그렇지, 그 신부님은 판공성사 주시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좋았다고나 할까!

살면서 나도 모르게, 서품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신부님께 ‘새 신부’, ‘젊은 신부’, ‘어린 신부’ 등의 말을 쓸 때가 있었고, 은연중에 그 신부님을 ‘어린 사람’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신부님을 ‘어린 사람’ 취급하면, 그 신부님은 결코 ‘형제 신부’, ‘동료 신부’로 생각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날, 그 신부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하느님의 종. -믿음의 대가;예수님과 욥-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부터 시작되어 토요일로 끝나는 제1독서 욥기가 반갑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예표처럼 느껴지는 욥이요, 두분의 믿음이 공통적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종, 믿음의 대가 예수님과 욥이요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모세, 다윗, 이사야처럼 두 분 다 하느님의 종이요 우리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살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인물이 욥입니다. 무죄하고 의로운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략된 첫머리 부분이 아름답고 참고가 되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그 사람 욥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다.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고, 종들도 많았다. 그 사람은 동방인들 가운데서 가장 큰 부자였다.”

설화상 인물이지만 실화의 인물처럼 느껴집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큰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오염되거나 중독되지 않고 참으로 겸손하고 초연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탄과의 대화중에 확인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인정한 욥이었습니다. 사탄은 창세기 하와를 유혹하던 뱀같지만 하느님의 수중에 있음을 봅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우리보다 우리를 환히 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며 세상 누가 뭐라든 요지부동일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허락이 떨어짐으로 사탄에 의한 욥의 시련과 고난이 시작됩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본 훼퍼의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네 차례 반복되어 전해진 불행의 소식입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이어지는 욥의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일체의 불평이나 원망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즉시 일어나 통회의 자세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고백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셔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참으로 순수하고 놀라운 믿음이자 겸손의 극치요, 이런 불행의 극한 상황에서도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의 믿음을, 찬미의 힘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평소 믿음을 반영합니다. 한결같이 ‘1.하느님을 경외하며 2.악을 멀리하고 3.올곧고 4.흠없이 살아 온 믿음 생활’의 반영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욥의 믿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하느님의 종 욥입니다. 하여 사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하느님의 1차 시련의 시험을 통과한 욥입니다. 하느님은 눈이자 귀자체입니다. 하느님은 침묵중에 사탄을 통해 일어나는 욥의 불행과 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눈이 되고 귀가 되어 보고 들으셨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보고 듣고 계십니다.

말그대로 욥의 믿음의 승리요 평소 쌓아온 믿음의 내공을 반영합니다. 모두를 다 잃었어도 찬미의 믿음이 있었기에 욥은 건강은 잃지 않았습니다.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욥의 믿음임을 짐작합니다. 우리 삶은 크고 작은 이런저런 시련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입니다. 살아 있는 마지막 그날까지 무너지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곧장 일어나 이런저런 시련과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주십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믿음을 배웁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났을 때 조용히 개입하셔서 제자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제자들을, 아니 우리 인간 모두를 상징합니다.

아, 이게 인간의 본질입니다. 수도공동생활을 통해 저는 물론 형제들을 통해 날로 깨달아 가는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자비를 강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상징하는 어린이는 ‘겸손’보다 ‘파견 받은 신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작은 사람이자 가장 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참으로 상처입기 쉽고 약하고 무력한, 그러나 하느님께 파견 받은 인간존재의 대한 깊은 연민을 지닌 가난하고 겸손한 ‘가장 작은 이’가 정말 큰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믿음이요 예수님이 그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존재들이요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연민의 믿음과 더불어 예수님은 관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은 자기 우월감에 젖어 주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막아야 한다는 유혹에 빠진 편협한 제자들의 마음을 넓혀 주십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러합니다. 온전한 진리는 우리를 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전히 하늘 나라를, 진리를 탐구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하늘 나라 건설에 누구든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우리 교회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계획을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 활짝 열린 넓고도 깊은 겸손한 자세의 관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인드를 지닌, 행동하는 믿음을 지닌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고자 모두와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교황님입니다. 193개국이 모인 UN총회에 보낸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모든 나라들이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의 집인 지구의 더나은 미래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수님과 욥은 정말 믿음의 대가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 악을 멀리하는 올곧고 흠없는 믿음, 연민과 관대한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종으로서 누구보다 하느님 가까이 사신 분들입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 좋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나는 누구의 말을 가장 귀여겨 듣는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싸우는 제자들을 바라보시고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내세우셨을까? 가끔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라고들 하며 요즘에는 자식이 상전일 때도 많지만, 실제 생활에서 어린이들의 의견이나 바램은 후순위로 밀려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어린이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뿌엘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한 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중시 여기지 않는 사람, 사람들이 귀여겨 들어주지 않는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고, 그들의 뜻을 받아주고 그 뜻을 펼치게 해주는 나라가 예수님이 시작하는 하늘 나라입니다. 

  보잘것없은 피조물에 불과한 나를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런 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치신 주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돌려드리오니 저를 구하시고, 세상에서 대우해 주지 않고 심지어는 버림받은 듯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묘로다< 루카 9/46-50> 9/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누가 더 잘하나 게임을 하고 끝나면 평가가 나옵니다. 평가에 따라 잘한 사람 못한 사람이 결정되고 세상은 잘란 사람 못난 사람으로 차별받지만 아무리 잘라도 시간과 일정한 공간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도 결국 땅에 떨어집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랐다 해도 내일이며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 자기는 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황금덩어리를 귀하다고  해도 금이 나를 먹을 것 숨 쉬는 공기가 되지못하고 어두운 창고에 가쳐 있습니다. 들에 흔히 있는 약초 한 잎만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 앞에 뛰어나고 높이 있으려 하지만 순간에 지나지 않고 오르면 울을 수록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있고 하늘보다 높이 오르지 못합니다. 사람은 가금 큰 착각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문제가 없다 하고 자기 욕망을 마구 휘 들다 정을 맞아 깨지고 맙니다.

욥기에 욥은 무난하고 보지로 착하게 살았지만 마귀의 유혹을 하락하신 주님은 인생의 제일 밑바닥 까지 끓고 가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그에게 낮은 자리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지금의 낮은 자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땅이 아무리 오르려 해도 하늘만금 올을 수 없듯이 우리는  올으려 하지 말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어떻게 사라야 낮은 자리로 내려가며 만족할 수 있을까 ?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가금 우리는 천주교가 종교중에 기장 완전하고 높은 종교다 생각하지만 제일 높게 보지 말고 제일 밑자리에서 모든 종교의 기초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천주교를 비난하는 타 종교의 말을 들으면 전에는 화를 내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생각을 바르게 하려 그들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고 우리의 태도를 바꾸려 합니다. 마리아교다 하면 아니다 하지 않고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이상의 것도 생각해주십시오 말합니다.  우리는 부배된 천주교를 개몽하였습니다. 하고 그당시 부패상을 이야기하면 더 낮은 자세로 안정하고 지금도 우리는 반성해야 할 일이 있다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응답합니다.  불교와도 우리가 가진 것이 있다면 불교가 가진 것을 못가진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랐다고 머리를 들고서 나설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을 내가 못가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거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고 네가 가진 것은 나는 가지고 싶지 않다 하면 나는 더 높이 올를 수 없습니다. 내가 최고가 되고 싶은면 네 밑에 들어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은 나의 우월감을 들어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섬기고 나누고 서로 손을 내밀어 친교를 맺으려는 것입니다. 높은 줄 위에서 두 사람이 재주를 부리는 광경을 보고 누가 더 잘랐다 할 수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하나가 되어 재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공동체가 누가 더 잘해서 아니고 모든 공동체 회원이 서로 도우며 잘하기에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모든 가정도 나라도 협치가 없으면 멀리 보지 말고 가까이 보며 서로 서로 손을 잡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갑시다.  함께 갑시다.  서로 반대하지 않으면 서로 지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일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과 안면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 이름을 부르며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 일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악을 이기는 힘이, 어떤 집단의 이름에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나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제자들 마음속에 배타적 정서가 생겨날 수 있음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우리만 사용할 수 있다든가, 예수님을 우리가 소유한 것처럼 여긴다든가,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닌 자신이 구세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이 예수님을 소유한다고 믿으면 착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은 오류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종교 전쟁은 실제로 이런 배타적 정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신념에 붙잡혀 계시지 않고, 교회의 경계를 언제나 넘어서시는 분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건 예수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린이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어린이라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무래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귀여움, 이쁨, 사랑스러움, 미래의 주역 등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이들 보면 얼마나 이쁩니까? 때론 장난치고, 말도 안 듣고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고, 순수합니다. 본당이든 가정이든 아이들에게 쓰는 돈은 아깝지가 않지요. 미래를 위한 투자이니까요.

오늘 주님께서 어린이를 두고 하신 말씀을 좀 생각해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조금 노력과 기도를 봉헌한다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말 너무나 이쁜 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 그렇게 쉬운 것을 주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씀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내가 하루를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각각 어떠한 마음으로 만날까요? 어떤 사람은 내가 좋아해서, 돈이 많고 능력이 있어서 조금 더 마음을 두고 만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내가 싫어해서, 미워서, 비천해서, 가난해서 등등의 이유로 마음을 멀리하고 만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멀리하는 행동입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볼 때 어린이와 같은 이들을 우리는 더 마음을 두어 만나야 합니다. 정확하게는 주님을 모시듯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을 뵐 수 있고, 주님을 뵙는 것으로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작은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들, 주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지내셨습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다니셨고,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이자 자녀인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 다시금 주님께서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그런 마음으로 조금 더 노력하고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작아지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너무

커져버린

우리자신을

보게된다.


꼭 빠르고

큰 걸음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작아짐의 길을

천천히

따라간다.


사랑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교만이 아닌

작아지는

겸손의 길이다.


작아지면

모든 것은

선물이다.


작아지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잃어버린

행복의 중심또한

작아짐에 있다.


자아를 버리면

작아질 수 있다.


작아지면

말씀을 간절히

들을 수 있다.


작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자아에

욕망에

갇혀있는

우리를

꺼내는 방식은


작아지는

복음의 길이다.


작아짐이

알차게

익어가는

삶이다.


작아지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작아짐이

삶의 참된

이정표임을

믿는다.



본당에 있을 때, 한 유치부의 꼬마 아이가 마구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제가 때렸어요.”라면서 서럽게 웁니다. 때린 아이를 보니까 초등부 2학년 아이였습니다. 저는 2학년 아이에게 “동생인데 왜 때렸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치부이면서 저한테 반말을 하잖아요.”라고 대답하면서 울먹입니다. 나이 많은 자신에게 반말한 것이 잘못인데 왜 자신에게 잘못했다는 식을 다그쳐서 억울했나 봅니다. 그래서 유치부 아이에게 “형인데 반말을 하면 되니 안 되니?”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아이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들 반말하는데 왜 나는 반말하면 안 돼요?”

형이긴 하지만 다들 반말을 하니까 자기도 반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유치원생의 눈에서는 누구에게 존댓말을 하고, 또 누구에게는 반말을 해야 하는지 구분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지요.

아이는 보고 들은 대로 따라합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합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실수를 많이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순수함에서 나오는 실수를 사람들은 잘못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안에서 각종 욕심이 커져갑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우리일까요? 혹시 자신의 바람만을 들어주는 주님만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보이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사심을 가지고 주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단순함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 낭에서 죄로 실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냥 주님과 함께 함 그 자체로도 충분히 커다란 행복을 체험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를 갖추어 나갈 뿐이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에이브러햄 링컨)


64 성 남종삼 요한 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서울대교구 길음동 성당 묘원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신 남종삼 요한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와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습니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십니다. 1863년 대원군의 부름으로 좌승지에 올랐습니다. 성인은 청백리로 외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관리들의 시기와 제사문제로 부친이 은거하던 묘재로 내려가 배론 신학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1863년 말경,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며 통상을 요구하던 차에 남종삼 성인은 ‘이이제이방아책’이라 하여 서양 프랑스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원군은 주교와 만나려 했으나 만남이 늦어지고, 정치적 상황이 바뀌며 1866년 2월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성인은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50세로 순교하였습니다. 남종삼 성인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절두산 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묘인 이곳(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습니다.

주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이고, 이곳을 담당하는 순교자공경위원회의 연락처는 031-850-1497~8입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12시에 미사가 봉헌됩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삶으로 들어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천년 가톨릭 교회 성인성녀(聖人聖女)들의 역사 안에 참으로 특별한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이십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짧게 소화 데레사라고도 합니다. 그녀의 삶이 마치 깊은 산속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작은 꽃 같다고 해서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부릅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성인(聖人)이 되기에 많이 부족해보였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셨다가 1897년에 돌아가셨으니 불과 23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그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 바라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짧디짧은 수도생활의 연륜, 그것도 봉쇄수녀원 안에서, 그마저도 지병으로 골골하면서...도무지 대단한 뭔가를 해낼 조건이 아닌 그녀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웬걸, 데레사는 자신의 탁월한 봉헌생활을 통해 나이와 연륜이 성덕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죽기 살기로 추구한다면 성화의 길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데레사의 수도 성소 입문 과정을 보면 누구라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가르멜 봉헌생활을 향한 갈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불과 15세의 나이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그러나 데레사의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은 더 강렬했습니다. 놀랍게도 교황님을 찾아뵙습니다. 그리고 교황님께 특별 청원까지 드린 것입니다. 마침내 1888년 4월 9일 꿈에 그리던 가르멜 수녀원 입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보십시오. 수도회나 수녀회 입회, 신학교 입학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세상이나 사랑에 실패해서, 아니면 제2지망이나 제3지망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데레사처럼 강렬한 원의를 가지고, 목숨을 걸고 지원해야 맞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그 어떤 성인보다 크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빛나는 성덕은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회 수도자였던 그녀를 전 세계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겸손, 복음적 단순함,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는 결국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戀人)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과 주고받은 대화 곧 기도는 마치도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하는 연인들끼리 주고받은 연서(戀書)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한 송이 작은 숨은 꽃이길 원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작은 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그녀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로 안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디작은 그녀를 당신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꼭 안아 주셨습니다. 숨은 것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녀 특유의 빛나는 작은 길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지상에서 불과 23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다간 데레사는 하루를 천년처럼, 천년을 하루처럼 그렇게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짧은 지상 생애가 너무 미안했던지, 그녀는 임종의 순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죽음이 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삶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천국에 가면 지상에 은총의 비가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관심-참견-모함을 구분하는 기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날 임금님이 시골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한 목동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목동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목동의 착한 인성에 끌린 임금님은 목동을 나라의 재상으로 등용했습니다. 

재상이 된 목동은 성실하게 사심 없이 일을 잘 처리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재상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자기가 살던 시골집에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신하들은 임금님께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재상이 청렴한 척하면서 아무도 몰래 항아리 속에 금은보화를 채우고 있다고 일러바쳤습니다. 

임금님이 재상을 앞세우고 신하들과 함께 재상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광속에 있는 항아리를 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항아리 속에 들어있었던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재상이 목동 시절에 입었던 낡은 옷 한 벌과 지팡이뿐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사연을 묻자 재상이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본래 목동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은혜로 재상이 되었지만 제가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이따금씩 제가 입고 있던 옷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나에 대한 시선은 크게, ‘관심-참견-모함’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구분은 그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의 존재와 함께 정해져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심만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참견만 하고 어떤 사람은 모함밖에 못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욥의 올곧음을 칭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나오더니 주님이 그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주님께 충실한 것이라고 간언합니다. 주님이 그래서 그의 재산을 없애버리십니다. 그래도 욥은 주님을 찬미합니다. 사탄은 다시 그의 가족들을 치면 주님을 원망할 것이라 말합니다. 주님은 그의 자녀들을 치셨습니다. 그래도 욥은 주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찬미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모함하기 위해 관심 갖고 참견합니다. 그러나 남의 일은 상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찬미하려고 하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그리고 욥을 위로해주겠다고 왔던 친구들은 욥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 벌을 받는다고 욥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참견입니다. 겉보기는 타인에 대한 관심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수 없습니다. 그 본성상 타인에게 주는 모든 관심은 다 모함이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관심과 모함을 하는 두 본성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대부분의 관심은 관심이라기보다는 참견입니다. 그래서 보다가 지치는 것입니다. 바로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본성이 관심만 가져줄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만 남아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언하였습니다(민수 11,25).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있었는데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예언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라고 간언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말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각하여 시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모함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상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아보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어찌 보면 “너나 잘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탄이 가지는 모든 관심은 모함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모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사랑이 되려면 내가 먼저 천사가 되어야합니다. 천사가 가지는 모든 관심은 사랑입니다. 사실 많은 관심을 받아도 외로운 것은 그 많은 관심들이 모두 천사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라도 한 사람에게 관심을 주더라도 그것이 사랑이 되도록 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0월의 첫날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10월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연히 고양이가 볼일을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양이는 땅을 조금씩 파고 그 위에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흙을 덮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잠시지만 고양이의 모습이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흘리고 다녔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말을 흘리고 다녔습니다. 남을 비난하고 탓하는 말을 흘리고 다녔습니다. 조용히 자신의 것을 덮고 자리를 떠나는 고양이가 저를 보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앞가림 좀 하고 삽시다.’ 10월에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것들을 모두 묻어버리면 좋겠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나쁜 것들을 모두 묻어버리면 좋겠습니다. 꽃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 보내는 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10월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소화 데레사 성녀는 24살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건강한 것보다 아픈 것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리게네스 성인은 성서해석의 3가지 방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축자적인 해석’입니다. 이는 성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성인은 이런 해석은 초보적인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해석은 광신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인 해석’입니다. 이는 성서의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침을 얻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었다는 것은 어둠과 악의 세력을 물리치신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넘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악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세 번째는 ‘영적인 해석’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부단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읽은 글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햇볕에 바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 신앙 안에서 음미해보고 싶은 글입니다. 과학이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모든 것을 분석하고, 규정하려하지만 인류는 과학 넘어 신화의 세상을 늘 동경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의 날개와 더불어 신화의 날개를 함께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월인천강지곡’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처님은 한분이시지만 그 가르침과 뜻이 온 천하 만대에 이르는 것은 달은 하나이지만 천개의 강에 비추이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의 몸으로 한 시간과 공간 속에 계셨지만 그분은 죽음을 넘어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막지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46-50: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들은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탄이 그들에게 뿌려놓은 욕망의 씨앗을 뿌려놓았고, 그 씨앗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셨다. 그것이 가라지가 되어 멸망하게 되는 것을 바로 잡아 고쳐주신다.

 

제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작은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아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48절)라고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를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49절) 제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도로 불림을 받지도 않았고, 교사로도 임명받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구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세가 70명의 원로들을 주님 앞에 오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진영에서 영이 내려 예언을 하였다. 이 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것은 성령께서 모세를 시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50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봉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주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에 맞는 은총을 구하자.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나라가 도래했을 때 가장 윗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으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한 논쟁을 하였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장 큰 사람에 대한 욕심, 어쩌면 그것은 명예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고, 존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받고 존중받고자 한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진정 가장 작은 자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찬미가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찬미가 답입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아름다움, 찬미의 순수, 찬미의 행복입니다. 참기쁨도 찬미에 있습니다. 세상에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 선물에 대한 우리 인간의 자연스런 감사의 응답이 하느님 찬미입니다. 하여 우리 그리스도교를 찬미의 종교라 부르고 수도자는 물론 그리스도인을 찬미의 사람이라 부릅니다.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동방정교회 모든 종교간의 일치에도 공통적으로 크게 기여하는 찬미입니다. 수도원에 가끔 피정오는 개신교 형제자매들이 충격적 감동을 받는 것도 수도자들의 장엄한 그레고리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입니다.


오늘부터 짧게 시작될 욥기도 특이한 작품입니다. 잠언에 이어 코헬렛, 그리고 욥기 모두 지혜문학에 속하는 성서입니다. 창세기의 노아처럼 욥의 인품도 매력적입니다. 또한 그가 진짜 하느님의 사람, 찬미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종인 하느님의 사람은 그대로 찬미의 사람입니다. 다음 ‘나의 종’ 욥이라는 호칭에서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 욥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대화입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욥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며 하느님의 욥 칭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탄이 흡사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뱀을 닮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사탄 역시 하느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십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기에 세상 그 누구도 손상을 끼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라는 개신교 신학자 본훼퍼의 말도 생각납니다. 다음 전개되는 욥의 고난과 불행이 점입가경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났을 때, 욥의 찬미의 응답입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욥의 이 고백에서 큰 격려를 받았다는 내용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진정 ‘주님의 종’으로 만드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는데 있음을 봅니다. 찬미의 모범, 찬미의 사람 욥입니다. 사실 찬미보다 더 좋은 기도도 없습니다. 찬미로 봉헌할 때 모든 것은 축복이 됩니다. ‘내 행복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아픔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상처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고통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등 내 희노애락, 생노병사 모두를 찬미로 봉헌할 때 놀라운 축복입니다. 젊고 힘있을 때 많이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는데 절대적 기여를 하는 찬미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전화시키니 바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운명을 바꾸는 찬미의 은총입니다.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느님 찬미라 합니다. “사탄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하면 사탄은 즉시 달아난다 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주님을 찬미함으로 사탄의 유혹에서 벗어남으로 하느님의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욥입니다. 욥처럼 ‘그래서’가 아니라 어떤 역경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찬미가 진짜 찬미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의 삶이 욥을 경외의 사람, 흠 없고 올곧은 사람, 악을 멀리하는 순수의 사람으로 만들어 줬음을 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죄없어서 순수가 아니라 한결같은 하느님 경외의 사랑이, 찬미가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을 볼 것이다.” 바로 욥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참행복선언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찬미가 흠없고 올곧고 악을 멀리하는 순수한 욥으로 만들어 줬음을 봅니다.


마음 순수한 사람은 바로 자비로운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요 관대한 사람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말하자면 예수님같은 분이요 욥같은 분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 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가난하고 약한 모든 이웃들입니다. 이런 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자비로운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장 작은 자비롭고 겸손한 사람이 역설적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가장 작은 자비롭고 겸손한 사람의 면모입니다. 스승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막으려는 제자들을 저지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또 가장 작은 이의 특징은 관대함임을 깨닫습니다.


“막지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참으로 마음 순수한 이가 자비롭고 겸손하고 관대한 사람이자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큰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한결같은 하느님 사랑의 찬미가 그 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중의 한 분이, 오늘 기념하는 성녀 소화 데레사입니다. 가장 작은 이가 역설적으로 가장 큰 이 임을 보여 주는 성녀 소화 데레사의 감동적 고백입니다.


“사랑은 스스로 행위들이 입증한다. 나는 내 사랑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 위대한 행위들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내 사랑을 증거할 유일한 길은 꽃들을 흩어버림에 의해서다.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모든 시선, 모든 말이다. 나는 사랑을 위해 가장 작은 행위들을 행하는 것이다.”


만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성녀의 마지막 임종시 고백도 참 감동적입니다.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러울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 있다. 모든 고통이 나에겐 달콤하기(sweet) 때문이다.”


한결같은 하느님 사랑의 찬미가 가장 작으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큰 순수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바로 주님을 닮은 자비롭고 겸손하고 관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욥이, 오늘 기념하는 성녀 소화데레사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가장 작으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자비롭고 겸손하고 관대한 순수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9, 46-50(연중 26주 화)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병행 본문이로서, “가장 큰 사람”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먼저,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둔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큰 사람인 작은 사람’이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 곧 작은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능하고 힘없는 사람, 그래서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허물이 있는 채로, 결핍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바로 용서의 다른 형태이기도 합니다. 결국, 작은이를 받아들여 자신이 작아진 이가 되는 것, 그것은 허물에 떼를 묻혀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혁명을 부르짖으십니다.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이 됨을 말해줍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루카 9, 49-50)


이는 교회 안에서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의 정신을 가르쳐줍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파의식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곧 독점되어서도 배타적이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아멘.




고통이 성사가 되지 못하는 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잘 아시듯 욥기는 고통에 대한 심오한 담론집입니다.

고통이란 인간이 풀어야 할 큰 숙제이고 그래서 어느 종교든 어느 철학이든 나름대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고통이란 자업자득이기에 자기수행으로 벗어나자는 입장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로 벗어나자는 입장입니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고통의 원인과 해결을 얘기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고통을 설명합니다.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는데 그것을 남에게서 찾지 말고 철저히 자기에서 찾아야 해결도 자기에게서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시불교에서는 사성제, 곧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제시하는데 고통의 원인인 과거의 업보나 집착과 애착 같은 것을 없애는(滅) 길(道을) 알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간명하게 얘기하고 있지요.


저도 자주 이런 식의 얘기를 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를 하면 “준다고 다 받냐?”고 핀잔을 줍니다. 

주는 사람 탓을 하는데 그렇게 남 탓을 하면 영원히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지요.


주는 사람도 문제지만 받는 사람이 문제라는 거고, 안 받으면 되는데 받기 싫은 데도 받는 것은 받지 않을 수 없는 이유와 원인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이니 그 고통의 자기 원인과 이유를 찾아 해결하자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지만 저는 신앙인이기에 역시 신앙 안에서 고통을 보고 얘기하지요.

나의 죄와 잘못으로 인한 악, 곧 죄악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의 대표가 “왜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까?”라는 거지요.

우리말에도 고통을 받는다고 얘기합니다.


누가 주기에 받는 것으로 얘기하는 건데 사람이 준다고 많은 경우는 생각하지만 깊이 들어갈 경우 하느님이 준다는 것에 생각이 이르고 그래서 하느님께 항거하는 겁니다.


욥기 또한 고통을 자기도 아니고 다른 인간도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고 하느님께서 사탄이라는 카드를 이용해서 주신다고 오늘 얘기합니다.


이에 대한 욥기의 그 유명한 말이 바로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이지요.


얼치기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변호한답시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고통을 주시지 않고 다른 무엇에 의해 고통을 받는 거라고 얘기하지만 욥기는 분명하게 하느님이 주신 거로 고통을 얘기합니다.


그 고통을 왜 주시는지 그 답이 욥기 끝에 나오지만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 맞지만 주시는 이유가 역시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고 저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 우리가 성찰할 것은 우리는 자주 하느님 없이 고통을 당하고, 고통에 함몰되고 허우적대기만 할 뿐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고통 안에서 하느님이 발생하지 않아 고통이 성사聖事가 되지 못합니다.


오로지 고통밖에 없는 인간, 하느님도 없고 사랑도 없고 오로지 고통밖에 없는 인간이 

내가 아닌지 욥을 보며 돌아보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함께 가야 할 주님의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0. 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함께 가야 할 주님의 길>

나의 두 팔은

벗들을 품에 안으라고

주님께서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나의 두 팔로 나만을 감싸

나를 원하는 이 외면한다면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주님을 찾는 작은이에게서

모든 이를 품에 안으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나의 두 발은

벗들의 버팀목이 되라고

주님께서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나의 두 발로 내 갈 곳만 찾아

함께 가야 할 벗들을 내친다면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주님을 찾는 작은이에게서

버림받는 이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는 것입니다

나의 두 눈은

참 희망과 기쁨을 보고 벗들에게 심으라고

주님께서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나의 두 눈으로 내 것만을 찾으며

벗들의 삶에 눈감는다면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주님을 찾는 작은이에게서

아름다운 내일을 여시는

주님을 향한 희망을 빼앗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잃어버린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신과 미움과 절망을 심은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함께 가야 할 길이기에

나 혼자만의 착함

나 혼자만의 아름다움

나 혼자만의 올바름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불어 함께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질 소중한 주님의 선물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나를 감싼 벽을 허물고

열린 마음으로 벗들에게

한걸음 나아가고 싶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생애를 신비라고들 합니다. 아울러 그 인간의 신비 안에 고통도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고통 역시 어디서, 왜, 어떻게 오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고통이 그 고통을 주는 인간과 정작 겪는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지 정확히 알지 모르기 때문에, 신비라고 합니다.

오늘 구약에서 고통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욥기에서 가족과 재산을 잃게 된 욥이 말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그리고 욥기 저자는 고통을 당하는 욥에 대해 이렇게 서술합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22절)

고통이 왜 오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 고통을 겪어 무슨 효과를 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내려진 고통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것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고통을 짊어집니다. 설사 그 고통이 우리에게 내려지는 벌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짊어지신 고통에 합치되고 주님 구원사업에 미소한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청하면서.




마음 깊은 데까지 살피시는 주님 <루카 9, 46-5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마음속 깊은 데서 나오는 것인 줄 알면서 속은 보지 않아 판단의 오류를 만들어 서로 불편해집니다. 더구나 요사이 가짜 뉴스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시대적 변화나 위기를 모르고 지나갑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운전기사의 의도대로 길을 가도 믿고 운전기사 마음대로 운전하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셈한다고 하신다는 말씀처럼 우리의 깊은 마음도 아시면서 관리해주십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녀 소화 데레사의 삶은 성녀의 마음이 주님께 향해 있고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뜻을 담아 실천하신 분입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의 삶, 주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사는 믿음의 삶을 깊은 반성의 시간을 두고 알아보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진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어린이로 귀화하게 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높이려고 하지만 더 나아가 남의 자리를 시기 질투로 마음의 불편을 느끼며 어렵게 살아갑니다. 어린이는 자기 자리를 만족하게 생각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어린이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구별 못 하고 자연스럽게 대하고 가까이합니다. 어린이는 권력, 재물, 명예의 가치를 모르고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지 높고 낮음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높은 사람, 잘난 사람, 잘생긴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유명한 사람이란 의미가 없습니다. 단, 그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가를 보시고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만심에 빠져 있거나, 남을 깔보거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으며, 모두를 하느님의 눈높이로 보시고 마음과 마음의 일치를 기다립니다.

모든 척도를 마음에 두시고 그 마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한지를 보시고 그 사람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고자 하면 영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가난한 이로 오시고 높은 자리, 힘 있는 자리, 가진 것을 자랑하시는 자리에 계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셔서 십자가 밑에 깔리셨지만, 십자가를 승리의 도구로 만들어 그 십자가 밑에 모여들게 하셨습니다. 가장 비천한 형구가 가장 귀한 나무 되어 세상에 높이 서 있게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더메치한 세상이라도 수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세상을 탓하고, 원망, 실망, 절망, 폭망한 세상을 살면서 부정적 삶을 살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더메치>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세상에서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이런 것에 눌려 살지 말고 일어서는 삶을 살아갑시다.




영적 어린이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우리는 가르멜 수녀원의 거룩한 수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의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천진하고 단순한 삶을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큰 가르침을 줍니다. 곧, 그리스도교적 완덕은 매일 조금씩 조금씩 욕심내지 않고 영적 어린이로 변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작은 자녀임을 느끼는 이 사실이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이들에게 우리 마음을 열고 평화와 기쁨과 감사 안에 성장하게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결국엔 하느님 

사랑만이 

남을 뿐입니다.


하느님을 그리워했던

작은 꽃이 있습니다.


스스로 작아지는

작은 꽃입니다.


많이 아파했고

많이 사랑한

작은 꽃입니다.


작은 것들은

자신이 작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합니다.


작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픈 삶을 

어루만진다는 것입니다.


엄습하는 고독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일상을 우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는 

분이십니다.


살아가는 일이

나누는 일이며

기도하는 울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짧은 

삶의 시간속에서

영원한 사랑의 향기를

퍼뜨립니다.


무엇에다 

우리 마음을

두어야할지를 

깨닫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이

소화 데레사를 통해

번져갑니다.


가장 깨끗하고

가장 맑은 사랑은

어린이들처럼

작은 꽃처럼

작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아질수록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일을 이루십니다.


하느님 사랑만큼

강렬한 사랑은

없습니다.


다시 하느님 사랑을

맛들입시다.



어제는 정말로 바쁜 하루였습니다. 오전에는 교구에서 주최하는 순교자성월 기념 특강을 했고, 오후에는 전부터 알고 있었던 청년의 혼배미사 주례를 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지로 돌아오는데 피곤함이 밀려옵니다. 하긴 특강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서 새벽 2시에 일어났었거든요. 따라서 피곤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거죠.


졸음을 꾹 참고서 겨우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특강을 나가면서 창고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고, 계속해서 정리를 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옷을 갈아입고서 함께 했습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모두 창고에 보관하다 보니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고 그냥 창고 안에 묵혀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과감하게 버리자고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좋은 물건들이 많은 것입니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도 단지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로 이동된 것 같습니다. 이 물건을 처음 구입할 때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분명히 잘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구입을 했었고 기분 좋게 사용했겠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사용빈도가 줄게 되었고, 결국은 창고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것이지요. 즉, 낡고 보잘 것 없어서 버려진 것이 아니라, 버려져서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관심을 갖지 않아 버려지는 것이 꼭 물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 인간관계 안에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휴대전화 주소록을 한 번 보십시오. 주소록에 남겨졌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친분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이름 중에서 몇 년 동안 연락하지 않게 되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관심을 갖지 않다보니 점점 잊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당시에 어린이는 그리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설익은 과일처럼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방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가장 낮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려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버려져서 결국 낡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되는 물건처럼, 사람도 내 관심에서 사라질 때 보잘 것 없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관심을 늘 갖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힘을 모으면 더 위대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짧은 기억력의 힘

기억력이 좋은 것이 좋을까요? 기억력이 나쁜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기억력이 좋다면 생활하는데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기억력 좋은 모습을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 골프 세계 4대 대회를 모두 석권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3번이나 달성하여 골프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잭니클라우스는 자신의 성공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한 샷은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나쁜 샷을 오래 기억하면 경기를 망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미식축구에서 선수시절에는 패스의 달인으로 불렸고, 나중에는 명감독으로 자리를 매겼던 오토 그레이엄 역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지요.

“아주 짧은 기억력입니다. 실수를 잊고 빨리 다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신체 조건이나 재능보다 중요합니다.”

좋은 기억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나쁜 것은 기억하지 않고 지금에 충실하게 집중할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주님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 가르침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성경말씀을 쏟아내고 있을 때 이런 충고를 들었습니다.

“넌 너무 맞는 말만 해.”

맞는 말을 하는데 왜 충고를 받았을까요? 그건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 깨져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확신하고 있을 때가 가장 불안한 상태인 것을.

그래서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혹은 아직도 제가 그런 확신 속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무서운 생각까지 듭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전부일까요?

자신이 옳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옳은 모습일지라도 주님은 어떤 의도로 그 옳은 모습을 완전히 깨버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참으로 옳은 모습으로 살았지만 항상 죄를 지을 불안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다면 전과 같은 모습이 되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를 죄에 떨어지게도 하시고 견디기 힘든 고통도 주시는 것입니다. 금도 단련을 받듯이 성인도 단련을 받습니다.

욥기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욥은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데도 사탄의 말을 듣고는 욥을 사탄의 손에 넘겨버리십니다. 사탄에게 욥의 의로움을 증명한다고 사탄이 돌아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고통이 아니면 단련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시련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세력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죄에 떨어뜨리고 고통을 주기 위해 안달이 난 세력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그 사탄의 손에 넘기셔서 그를 단련시키십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 재난 영화 ‘월드워 Z(World War Z)’에는 위기관리에 대한 여러 가지 국가 모델이 등장합니다. 그중 이스라엘은 ‘고문 10명 중 9명이 같은 주장을 펼쳐도 나머지 1명은 어떠한 이유를 찾아서라도 그 의견이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는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로 묘사됐습니다.

전 세계가 좀비의 공격을 당할 때 고문 9명은 좀비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나 ‘10번째 남자’ 1명만은 좀비에 대한 방어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좀비로부터 안전한 독보적인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건강한 나라는 모두가 나라 편을 드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단련시켜 줄 반대 세력도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반드시 반대하고 어려움을 주는 사탄의 역할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가톨릭교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톨릭 시성 조사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칩니다. 그 과정 안에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변호사라는 역할을 두는데, 그는 사사건건 시성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은 의무적으로 '악마'의 관점에서 사사건건 의혹을 제기하고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자칫 조사위원들이 성인 후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로 기울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추대되는 것처럼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맡겨져 자녀, 재산, 건강, 명예 등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잃고 나서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참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하고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도 아직 욥과 같은 시련을 겪어보지는 않았으니 너무 자신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은 연옥과 같은 시련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단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시민 중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완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허세를 버리고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는 행복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수난을 예고하시고(9,44-45) 예루살렘을 향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에 대해 논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선 제자들이지만 아직은 영(靈)의 눈을 지니지 못한 소경이요, 세상과 육의 정신으로부터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십니다(9,48ㄱ) 


그렇게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받아들여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서로 사이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때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9,48ㄷ). 이런 가르침은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도록 재촉합니다. 요즈음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은 경향이 강해져, 심지어 ‘있어빌리티’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있어빌리티'란 '있어'와 능력이라는 영어의 ‘어빌리티’(ability)를 합성한 말입니다. 


‘부자형’ 있어빌리티는 고가의 물품을 SNS 속 사진에 살짝 드러냄으로써 우회적으로 재력을 과시합니다. '인맥형' 있어빌리티는 SNS상의 프로필 작성과 구구성원의 면모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과시합니다. '센스형'은 자신만의 장소나 음식을 올림으로써 독특한 취향을 알리려 합니다. 그러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SNS의 그런 모습을 진짜로 보는 의견은 6.4%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 허세라는 말이지요. 


제자들의 경우도 하느님도 예수님도 아닌 자신들이 지닌 것들을 내세워 서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허세를 부린 것입니다. 우리도 속물근성이 발동하면 그런 처신을 하곤 하지요. 그렇다면 참으로 실속 있고 ‘큰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려는 태도를 버려야겠지요. 내 삶의 기준이 하느님과 예수님으로 삼는다면 삶의 방향이 뚜렷해집니다. 시작도 선택도, 관계맺음이나 일의 실행도, 궁극적인 내 인생의 목표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착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기준인 이타적 사랑을 지니지 않은 채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하여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비교하려거든 하느님과 비교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작아지시고 비우신 예수님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할 줄 아는 하느님 앞에서의 정직함과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있어빌리티'의 허세를 철저히 버리고, 다른 이에게 드러나는 선을 시기하지 않으며,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이들 아래 자신을 둘 줄 아는 겸손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 높아만 가는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님을 향한 그리움을 키워가고, 허세를 버리고 겸손하게 일상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견뎌내며, 가난하신 예수님을 품음으로써 진정 '있어 보이는'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목요일 ‘은경축’ 미사가 있었습니다. 저와 동창들이 추기경님께서 주례하시는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은경축을 축하하는 작은 안내책자가 있었습니다. 책자에는 신부님들의 사진과 그동안 거쳐 온 사목의 자리들이 있었고, 서품 성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희들의 은경축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부족한 저희들이 25년을 사제로 재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들의 서품 성구를 보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서품 성구와 신부님들의 지난 25년을 돌아보니, 대부분 서품 성구의 말씀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고, 어떤 쌍날칼 보다 예리한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을 듣고, 안내책자에 있는 신부님들의 사진과 서품 성구를 보았습니다. 정말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자신들이 선택한 서품 성구의 말씀처럼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15년을 ‘빈민사목’을 하고 있는 동창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서품 성구를 정했습니다. 13년을‘교정사목’을 한 동창도 묶인 이를 풀어주겠다는 서품 성구를 정했습니다. 12년 동안 ‘장애인’을 위한 사목을 하고 있는 동창 역시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는 서품 성구를 정했습니다. 다들 자신들이 정한 서품 성구를 삶으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많은 결실을 맺도록 은총을 주셨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25년을 생각하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서품을 받고 첫 본당에 갔는데 곧 ‘열병’에 걸렸습니다. 보름동안 입원을 했었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엄한 신부님으로부터 사제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웠고, 사랑이 넘치시는 신부님으로부터 사제직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사목국에서 교육 담당을 하기도 했고, 청소년국에서 수련장 업무를 하기도 했고, 지금은 성소국에서 사제 양성을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기회가 있었고, 복음화 학교를 담당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주님의 은총입니다.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잘 모를 때입니다. 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의심을 통해서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합니다. 과학자들에게 의심과 회의는 필요한 연구 자세입니다. ‘왜’ 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과학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계속되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던 적이 있으면 지금은 바람을 피우지 않더라도, 늘 의심을 하게 됩니다. 도박도 비슷합니다. 한번 잘못한 적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던 ‘보호감호’가 이와 비슷합니다. 잘못을 했던 사람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범죄자의 ‘전자발찌’ 부착도 이와 비슷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인들에게도 자주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사업에 실패를 하는 경우,봉사를 많이 했는데 어느 날 건강이 나빠진 경우,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는데 대학 입학에서 떨어진 경우 등이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21년 전쯤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목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저에 대해서 주교님께 말을 하였고,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주의를 받았습니다. 주교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의심을 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은 나와 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돌아와서 성경책을 보았는데,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간다 해도 감사 할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욥은 가진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잃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누구를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저는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고,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계속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분노하면서 지냈다면 저는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제게 다가온 위기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욥 성인의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God)과 사탄(Satan)의 게임. -유혹, 고통, 시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부터 시작되는 역시 지혜문학에 속한 욥기가 반갑습니다. 잠언과 코헬렛에 이은 셋째 순서로 욥기의 등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는 ‘천상회의’에 이은 욥의 ‘첫째 시련’으로 이루어 집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대상은 하느님과 사탄, 그리고 하느님의 종 욥입니다. 

욥은 하느님의 자부심같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을 자랑합니다. 여기서 사탄은 아직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적수인 마귀를 가리키지 않고, ‘고발자, 고소자. 적대자, 반대자, 원수, 적수’등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쓰입니다만 역시 사람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존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의 장면은 흡사 하느님의 종 욥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같습니다. 욥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은 하느님의 호기심이 발동하신 것 같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유혹, 고통, 시련-’이라 정했습니다. 먼저 하느님은 사탄앞에서 욥을 자랑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없다.”


하늘에 계시면서도 땅위의 사실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신 하느님이란 사실이 두려움과 동시에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이 인정하시는 욥이니,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최고의 영예임을 깨닫습니다. 

흡사 오늘 복음중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욥입니다. 하느님께 반기를 들고 나서는 사탄입니다. 남 잘되는 것을, 남 칭찬하는 것을 못견뎌하는 사탄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욥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주고받는 대화가 점입가경 흥미롭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탄에게 이르십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종 욥을 사이에 두고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제부터 바야흐로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중에 시작되는 욥의 시련입니다. 주목할 점은 사탄은 하느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 예속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안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우리에게는 든든한 위안이 됩니다. 2차 대전 중 나치스에 희생된 현대의 순교자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본 훼퍼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대로 욥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 욥의 시련을 허용하셨지만 분명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어 연속되는 욥의 시련에 불행입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중에 겪게되는 우리의 고통과 시련이란 생각이 드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무려 4회에 걸쳐 욥이 닥친 불행을 전하는 소식들입니다. 하느님과 사탄만 알고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도대체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황당한 소식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의문을 품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욥의 기민한 대처가 참 반갑고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첫째 시련을 통쾌하게 통과한 욥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첫째 게임은 하느님의 일방적 승리입니다.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욥의 처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철석같은 믿음이 시련과 불행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욥에 대한, 무죄한 이들의 시련에 대한 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영원한 승리의 표지입니다. 무수한 사탄의 유혹과 시련을 아버지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로 통과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요 위로가 됩니다. 온갖 유혹과 고통, 시련을 겪을 때마다 바라보며 힘을 얻으라 있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겪는 유혹과 고통이요 시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온갖 시련을 믿음으로 겪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사탄의 게임이 벌어진 상황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처가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유혹과 고통, 시련을 잘 통과해 갈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 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장 작은 사람에겐 유혹도 힘을 쓰지 못하고 고통과 시련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의 전형적 본보기가 십자가의 주님을 충실히 항구히 추종했던 성인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소화 데레사, 마더 데레사입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작아짐으로 가장 큰 사람이 된 윗 성인들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관대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선사되는 이 관대한 마음이 유혹과 고통, 시련을 잘 통과하게 합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막지마라’, 건들이지 말고 ‘그냥 놔두라(leave him alone)’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기고만장한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제자들의 분위기를 바로 잡으며 시야를 넓혀 관대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바로 겸손하고 관대한 믿음만이 유혹과 고통, 시련의 영적전투에서 하느님의 승리로 이끄는 최상의 영적 무기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온갖 유혹과 고통,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아멘.




겸손한 마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 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십니다.“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가9,48).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하든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뜨는 신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신자 한 분이 매번 자리를 뜨니 그 이유를 좀 알아봐 주세요.’하고 회장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아니나 다를까 강론을 시작 하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기다리던 회장님이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어떤 사정이라도? 그랬더니 신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예. 저는 화장실에 갑니다. 무슨 특별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잠자기 전에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이 있거든요. 뭐 잘못됐습니까?” 

   

@@@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첫 인류인 아담(?????)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해도 안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되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한다[글/허준혁].




경쟁과 편 가르기 없는 하느님 나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다.”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저>스럽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짓이 제가 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제가 하는 짓이 제자들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제자들 내부적으로는 자기들끼리 누가 더 크냐 경쟁을 하고 외부적으로는 우리 편이다, 아니다 편 가르기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경쟁>과 <편 가르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는 것 아닙니까?

세속 집단에서 많이 보는 것이고 특히 정치권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넓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 인간이 사는 데서 흔히 보는 거지요.   

그런데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없다는 말이지요.

하느님 중심이 아닌 사람중심이고, 사람중심 중에서도 나 중심, 우리 중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쟁>은 나 중심이고, <편 가르기>는 우리 중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인 하느님 나라에서는 다릅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천사건 사람이건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어린이답지 않았던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려면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린이처럼>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나(ego)'가 없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는 있지만 '나(ego)'가 없는 겁니다.

   

우선 경쟁하는 ‘나’가 없는 것입니다.

경쟁하는 ‘나’는 나만 있는 나입니다.

일등의 자리에는 나만 있어야 하고 아버지의 사랑은 나만 받아야 하고, 진급은 나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는 ‘너’가 있어야지 나이지요.

‘너’없는 ‘나’가 어디 있습니까?

‘너’가 없으면 ‘나’도 없기에 경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너’는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너’를 인정하는 경쟁을 선의의 경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이런 선의의 경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춘기 철이 들기까지는 아예 자아개념이 형성되지 않기에 너나 개념이 없어서 남의 것을 남의 거라고 생각지 않고 가져오잖아요?

물론 동생이 바로 생기면 엄마를 뺏길 때 엄마를 안 뺏기려고 하고 그래서 경쟁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엄마를 뺏기지 않으려는 것이지 자아의식이 있어서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요.

   

다음으로 어린이는 <편 가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나 어린이 같은 노인들은 누구와 만나도 금방 친해지고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다고 배타적이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살 때 보면 노인들은 말을 못해도 잘 어울리고, 어린이들도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인종차별이 없는 편입니다.

지금 트럼프라는 대선 후보가 유색인종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고 이들이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치겠다고 하고 지지를 받는데 이것은 하느님 나라와 완전히 다른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인 거지요.   

허나 하느님 나라는 너를 받아들이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말씀하시지요.

   

아무튼 우리는 오늘 ‘너’를 잘 받아들이고 요즘 부쩍 늘어난 다문화 가족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인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욥기 1,2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내가 가진 모든 소중한 재산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황당하게 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럴 때조차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하느님의 뜻이라고 순명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우리는 원망하여 울고불고 야단을 떨다가 결국엔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고 말겠지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구요.


오늘 하느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말씀하시네요.

"만일에, 만일에 말이다.

내가 너에게 준 것 하나 둘씩 다 거두어 간다면 너는 어쩌겠니?"


원래 제 것이라고는 아무것 없었던 걸요.

하느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통해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살 수 있도록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머물 곳도 마련해 주셨지요.

그리고 함께 의지하며 험한 세상 살아가라고 좋은 사람들을 보내 주셨지요.

때가 되면 하나 둘씩 떠나가게 마련이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을 돌아가는 인생 당연하지 않겠어요.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 거져 받은 것들을 하나씩 다 돌려 드리고나서야 우리의 본향인 천국에 이를 수 있답니다.


오늘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잘 쓰고 깨끗하게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함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종교일치<루카, 9/45-5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종교는 창조주인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지역이 다르고 시작한 나라나 사람이 달라도 인간의공동적 양심의 소리에 의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종교일치는 책임진 지도자나 기관이 통일된 것이 아니라 각자 있는 자리에서 공동의 문제를 진실과 사랑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일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부정과 불의를 제거하고 바른 삶을 위하여 협력 하고 일치하는 협의체는 필요합니다.사회 복지를 위하여 세워진 단체가 사로 다른 분야에 종사해도 모여 협의를 하면 더 효과적 결실을 맺게 됩니다.

 

저는 34살에 한 구미선산 지역에서 교회 일치운영회를 성당에서 주체하여 그 지방 목사님들과의 협의체를 만들어 2년간 이곳과 저쪽 임원, 장로들 까지 모여 식사도 함께 하고 지역 사회의 필요성에 교회가 응답해야 할 일을 의논하다가 목사님들 8명의 불일치로 그 좋은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당 신부에게 이용당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여기에는 각자가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자기교회의 이익을 찾으려고 하다가 불가능해 지니 일방적으로 해산 통보를 받아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니 서로 방해 되지 않은 한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요사이 목사님과 가까운 연락을 받으며 그분의 보내주시는 글을 읽으며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9월 29일은 동국대 경연전문대 사찰 운영위원회 스님들과 대화 시간이 준비되어 있는데 서로 일치점을 발견하고 사찰 운영의 도움을 주고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인류 구원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공유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은 사람.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공유하려면 땅의 원리를 따르지 말고 하늘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땅의 원리는 누가 더 큰 사람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듯이 땅에서 서로 더 우위를 점유하려고 하거나 크게 보이려고 하면 모든 것이 파괴 됩니다.

 

너는 틀렸고 우리는 옳다 고집하면 종교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듯이 서로 조심 있게 받아들이고 받아주도록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저는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름 같이 땅에 모든 종파에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자신이

누군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을 지어내신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모두 작은

존재들입니다.


신앙이란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자신이

뒤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큰 것에 집착하는

우리들을 일깨워

주시기위해

친히 가장 작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작아지는 기쁨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목적은

작아지는 참된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방향이

하느님 앞에서

작아지는 

아름다움에 있음을

기억하는 순교자 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작아지는 여정이

생명의 참된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되게

사랑한다는 것은

진실로 작아진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

깨닫게됩니다.


작아지는 것이

가장 자유로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선교활동을 나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과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요. 그러나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지역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지인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온 것입니다.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생각했지요. 이 헬리콥터를 태워준다면 분명히 원주민들이 감동해서 더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부탁을 해서 원주민 몇 명을 태워서 마을 위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원주민들은 그 누구도 감동을 하거나 놀라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그래도 속으로는 ‘감동을 받았겠지’라는 생각으로 원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숲과 동네를 내려다 본 느낌이 어때요?”


그러자 한 원주민이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곤충들도 하는 것을 가지고 뭐 대단하다고 물어요?”


그렇습니다. 날아다니는 곤충들도 많지요. 따라서 하늘 위를 난다는 것은 곤충들도 하는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대단한 것도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일이 될 수 있으며, 또 별 것 아닌 것이 대단한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고정관념을 버리고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자기 포기식의 생각의 전환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보다는 긍정적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출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큰 사람이냐라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큰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바로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 예수님과 친한 사람만이 큰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세우시며, 어린이와 같이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어린이는 그 당시에 아직 성숙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 등을 갖추어야 주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들로 큰 사람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는 큰 사람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큰 사람일까요? 세상이 인정하는 큰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인정하는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존경하라. 그러면 그는 더 많은 일을 해낼 것이다(제임스 오웰).


어린아이

어린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면 ‘참 맑다’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거짓말을 해도 어색해서 금방 탄로가 나지요. 그래서 더욱 더 눈이 맑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린이들과 그 아버지들이 캠핑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그런데 어린이들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도 의심하지 않고 다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눈을 더욱 더 맑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와 같이 눈이 맑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능수능란하고, 어떤 말에 대해서 먼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가졌던 천진무구함이 무너져 갑니다.

어른이 되어 버린 내 눈을 바라봅니다. 너무나 혼탁한 눈, 그래서 실망스러운 눈입니다. 어렸을 때의 천진무구함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거짓말과 거짓된 행동을 피하고, 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믿음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어렸을 때의 맑은 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연도 중요하지만

조연도 주연만큼 중요합니다. 


조연없는 주연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주연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함에도 주연이신 분이

오히려 우리의 조연이 되십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주연이 아닙니다.

서로를 주연이게 하는

조연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연이 더 큰 사람으로

대접받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삶의 행복은 주연이 되고픈

욕망으로 더 치닫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오히려 조연처럼 작아지며

예수 그리스도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그 믿음이 가장 큰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삶이란

우리의 작은 관심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과 가장 큰 사람은

결국 하나입니다.

작은 시내가 모여

가장 큰 강을 이루듯

하느님 사랑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가장 존귀한 이들입니다. 


가장 작은 자는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가장 작은 자는 어린이처럼

빨리 주님께 돌아서는 이들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는 마음때문에

가장 소중한 이시간을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을 드러내는

가장 아름다운 조연이 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신 빛과 소금이

가장 향기로운 하느님 나라의 조연임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하늘나라는 언제나

가장 작은 이들의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며칠 전 저녁은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소후원회 임원 MT로 속초를 다녀온 뒤에, 곧바로 또 다른 모임이 있었거든요. 이 모임을 마치고 들어온 늦은 밤에는 성소후원회 회원 모집 미사를 위해 강론을 써야만 했습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되는 듯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그냥 피곤하다고 잘 수만은 없었지요. 특별 강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더군다나 신학교에서 부제님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해야 합니다. 따라서 강론과 특강 준비를 어느 정도 해 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어느 정도 끝낸 시간이 자정을 넘었습니다. 완전히 지쳤지만, 그래도 해야 할 것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침대에 눕는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라는 생각을 저절로 갖게 되었지요. 


사실 행복이란 커다란 것을 얻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지요.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갖게 되어야만 행복할 것 같지만, 행복은 작은 것에서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피곤했을 때 침대에 눕는 것, 슬펐을 때에는 남이 건네준 손수건 한 장에도 커다란 위안을 받으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주 배가 고팠을 때에는 아주 맛없는 음식을 먹어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행복이 크고 화려한 곳에 있지 않고, 작고 소박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사람이 바로 어린이와 같이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어린이들의 꾸밈없는 순수함이 또한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이 이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가장 크게 받아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들여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래알이 모여서 해변이 되기도 하고, 모래알이 모여 사막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은 세포들이 모여서 한 몸을 구성하지요. 이처럼 작은 것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보잘 것 없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하나하나를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요? 진정으로 행복해지길 원한다면 작은 것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작은 것에 의미를 찾고 그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길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행복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앞질러 가는 사람이 자꾸 눈에 보일 때는 뒤따라오는 수많은 이를 생각하라(세네카).


말이라는 것은(‘좋은생각’ 중에서)

어느 날 자금이 묵자를 찾아왔다. “저는 말 잘하는 사람만 보면 존경심이 절로 솟아오릅니다. 그런 사람은 발음이 정확하고 태도도 바르지요. 그런데 저는 사람들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말을 잘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말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오. 세상 만물이 다들 말하고 살지는 않소. 해와 달은 천지를 비춰도 늘 말없이 제 일을 할 뿐이오. 나무가 말을 안 해도 우리에게 주는 이로움이 줄지는 않소. 아무리 언변이 좋아도 까만 말이 하얗게 변할 수 없는 법이오.”

자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말을 잘하는 능력이 있다면 유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술이 뛰어날까요?”

“그대가 그리 간절하니 예를 들어 설명해 주겠소. 파리와 모기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소리를 내지요. 하지만 그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던가요? 이들이 내는 소리는 아무 작용도 하지 않고, 사람을 괴롭힐 뿐입니다. 하지만 수탉이 아무 때나 울던가요? 날이 밝기 시작할 때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사람들이 잠에서 깨 움직이지 않습니까?”

자금은 무릎을 탁 쳤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말할 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말할 필요가 없을 때는 입을 열 필요도 없다는 거군요.”


묵자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사람

이재순 수녀님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나자렛 성가정의 중심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작은 자, 낮은 자 안에 계십니다. 

작은 자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냥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크신 하느님이 거처하실 수 있으나, 소위 스스로 큰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으니 하느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 그리고 모든 성인 성녀와 치명자들이 작은 자들입니다. 자기가 없으므로 하느님이 되신 분들입니다. 

내가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충고나 뒷자리를 싫어합니다. 

앞장서서 큰 소리로 남을 부리는 사람은 참으로 조심할 일입니다.

 



막지 마라.

류정순

1930년대 미국은 메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빈민의 삶이 처참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무렵 무신론적 사회주의자이며 여성운동가, 반전평화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노동자」 신문을 발간하고, 노숙인을 돌보는 시설을 운영했습니다. 

당시 데이의 활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교회 산하 신문도 시설도 아닌데 가톨릭이라는 이름 (브랜드) 을 쓰는 것은 그의 좌파 성향을 위장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비판하면서 신문과 시설 이름에서 가톨릭 명칭을 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통하여 열정적으로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가 더 정의롭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녀의 삶이 소외되고 고통 받는 노숙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데 감명 받은 교회는 가톨릭이란 명칭을 사용하도록 허용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사칭하며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제자들이 못 하게 막으려 했을 때,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지요. 

교회의 넒은 아량에 깊이 감명 받은 데이의 신앙은 더욱더 깊어져 ‘미국의 마더 데레사’ 로 존경받고, 지난 백 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자’ 로 꼽히는 사회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데이를 가난한 사람의 아픔 속으로 인도하여 우리 사회를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이끄는 데 기여하도록 한 것은, 자신을 사칭하는 사람조차 막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인생은 거대한 시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첫 번째 독서는 욥기의 시작입니다.

욥기는 하느님께 대한 욥의 경외와 올곧음을 시험하기 위한 천상 모의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욥의 경외와 올곧음을 믿지만 사탄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과 사탄의 차이가 많지만 그 차이 중의 하나가 믿음의 차이입니다.

존재를 선이라고 믿는가, 악이라고 믿는가의 차이이고, 존재가 끝까지 선할 것으로 믿는가, 언젠가는 악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가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은 존재들을 선이라고 믿으시고 존재가 끝까지 선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묵상을 발전시켜 저에게 적용시켜 보니 섬뜩합니다.

같은 존재를 놓고 하느님은 선으로 보시고 사탄은 악으로 보며, 같은 존재가 하느님은 선할 것이라고 보시고 사탄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데, 마찬가지로 제가 어떤 존재를 사탄스럽게 볼 수도 있고 하느님스럽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더라 하신 그분의 창조물들, 그 중에서도 인간을 내가 나쁘다고, 악이라고 보면 바로 제가 사탄스러운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찌 같은 존재를 보고 하느님은 선으로 보고 사탄은 악으로 볼까요?


하느님은 결핍, 부족함이 없는 충만(充滿)한 선이시기에 당신 안에 불만(不滿)이 없으십니다.

불만이 무엇입니까?

불만이란 덜 찼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당신 선으로 스스로 꽉 차신 분이시고 당신 안에 불만이 없으시기에 당신 아닌 다른 선으로 당신 불만을 채우려 하지 않으시며, 그래서 아무에게도 당신 불만을 채울만한 선이기를 요구치 않으시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불만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충만하고 넘치는 당신 선으로 존재를 창조하시고 존재의 결핍을 당신의 선으로 채우십니다.

이에 비해 사탄은 선으로 충만하지도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선의 결핍을 채우려 하지 않고 피조물로 결핍을 채우고 만족하려 하기에 자신의 결핍을 다 채워줄 수 없는 피조물들에게 늘 불만이다.


이런 사탄에게 하느님은 욥을 맡기십니다.

사탄은 욥이 고통을 당하면 하느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고통으로도 그가 하느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악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욥에게 신뢰를 보이십니다.


하느님은 사탄이라는 카드를 쓰시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혹독한 악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고 단련하고자 하십니다.

자기 입맛에 맞을 때만 하느님 선하심을 믿는 얕은 믿음을 어떤 고통에도 하느님 선하심을 믿는 큰 믿음으로 키우고자 악으로 선을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은 당장은 분명 악이지만 자기 입맛대로 하느님 선을 재단하는 우리 믿음의 자기중심성을 정화시키고 절대적인 하느님 선에로 나아가게 하는 악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공원 산책을 갔다가 한 장면을 보고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장면은 바로 한 꼬마아이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지요.

비가 와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는 길 위에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한 여자 아이가 우산을 끼고 앉아서 땅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더랍니다. 그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무엇을 보고 있는 지 궁금해서 형제님께서 그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개를 들은 여자 아이가 형제님께 “아저씨, 지렁이가 나 물어요?”라고 물어보더랍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잘 몰라서 “글쎄”라고 우물쭈물했더니만, 이번에는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지렁이가 나 물어요?”라고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할머니께서는 “아니다, 지렁이는 너를 물지 않아.”라고 답을 해주셨지요. 그러자 이 여자 아이는 할머니에게 거듭 다시 확인을 하더니만, 아스팔트 위에서 바동대던 지렁이를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쥐고는 저쪽 화단 흙 위에 놓아주더라는 것입니다.

형제님께서는 이 아이의 깜찍한 행동에 마음이 훈훈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자신도 어렸을 때에는 이렇게 작은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작은 것을 사랑하는 깜찍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마음이 사라졌던 것이지요. 


사실 어른들은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의심을 하면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바로 순수한 마음이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어른의 스승이다.’ 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어린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힘이 세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이 더 깊이 와 닿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아직 미성숙의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지요. 그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긴 예수님도 가장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요. 그래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마지막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초라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결국 어린이와 같이 사회적 약자의 모습이 예수님 모습이었고, 이 세상에서 소위 강자라는 사람들에게 휘둘림을 당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과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그리고 윗자리에 앉으려고만 한다면, 또 사회적 약자를 누르려고만 한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기는 너무도 쉽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 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엄청난 금리에 놀란다(미야베 미유키).


여기가 내 집입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테레사 수녀는 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제대로 먹지 않아 깡마른 소년의 행색은 너무나 더럽고 초라했다. 수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자신이 운영하는 <어린이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년의 더러운 옷을 빨아 입혀준 뒤 따뜻한 국물을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소년을 침대에 데려다 뉘였다. 소년은 평화로운 얼굴로 깊이 잠들었다.

그런데 이튿날 소년은 <어린이의 집>을 도망쳐 나갔다. 이를 안 수녀들이 소년을 쫓아가 다시 데려왔다. 그러나 소년은 기회를 엿보다 또 다시 도망쳤다. 깨끗한 옷과 따뜻한 음식, 잠자리를 왜 마다하는지 수녀들은 의아스러웠다. 다른 수녀들로부터 소년의 얘기를 전해들은 테레사 수녀가 말했다.

"여러분 중 한 분이 소년의 곁을 지키다가 소년이 가는 곳을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래서 한 수녀가 소년을 지켰다.

다음날 소년은 어김없이 도망을 쳤고 수녀는 소년을 몰래 뒤따랐다. 소년은 커다란 나무 밑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밑엔 한 여인이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듯한 온갖 음식 찌꺼기들을 작은 질그릇에 담아 끓이고 있었다. 소년은 그 옆에서 기쁜 얼굴로 음식이 끓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녀가 소년에게 다가가자 소년은 두려운 눈빛을 띤 채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수녀가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너는 왜 <어린이의 집>을 도망쳤니?"

소년은 여인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죠. 여기가 내 집입니다."

수녀는 <어린이의 집>으로 돌아와 눈물을 글썽이며 그간의 일을 테레사 수녀에게 들려주었다. 테레사 수녀는 잔잔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있는 그곳이 소년의 집이지요. 그리고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기 때문에 소년에겐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것일지라도 맛있는 성찬이지요."




하느님보다 경찰

이난호

동행을 잃어버렸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이 가끔 목소리를 높이는, 여행자들이 약간 꺼리는 루트에서였다. 동행은 카미노(길,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일컬음)가 처음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었고 끈기도 지구력도 믿을 만해서 내가 방심한 탓이었다. 늦가을 해는 짧고 인가 하나 없는 첩첩산중이었다.굵은 비가 내려 잠시만 멈춰서도 한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길가에 배낭을 부려놓고 오던 길로 뛰었다가 되돌아 뛰기 두 시간여, 결국 나 혼자 숙소에 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밤이 깊었을 때 영어통역을 동반한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새삼 사고의 크기가 실감되어 절망했다. 하느님은 멀고 그분 힘을 빌릴 염치도 없었다. 카미노를 앞두고 드렸던 9일 기도의 은혜는 진작 까먹었다는 인간적 계산이 나오자 죽을 맛이었다. 


나는 네 번의 산티아고 순레길을 무사히 마치면서 은연중 하느님의 가호를 확신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능력이 절실한 순간에 나는 불길한 생각만 부풀리며 지옥을 오가는 것이다. 주변엔 비를 피할 곳 하나 없다,겨울비는 밤들면 언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에게 인질로 잡힌다면? 어둠 속을 헤매다 낭떠러지를 구른다면? 온갖 해괴망측한 상상을 끌어다 간을 졸였다. 나는 이미 내 얇다란 신심을 부끄러워할 여유도 없었다. 경찰관에게 당장 주변 산을 수색해 달라고 떼를 썼다. 그들은 어이없어하다가 내일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동행의 신심에 매달렸다. “하느님, 제발 저를 데려가시고 그를 살려주십시오.그는 무죄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밝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튿날 동행은 나를 보고 어린애처럼 웃었다. 나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크게 외치는 순간 가슴이  따끔했다. 어린애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기댄 동행은 편한 밤을 보냈구나. 하느님께보다 경찰을 붙잡고 늘어졌던 나는 당연히 지옥을 오르내려야 했구나.




통 큰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누가 큰 사람인가?

키가 큰 사람?

통이 큰 사람?


누가 높은지를 따지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높이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임을 얘기하시는 것으로 보아 키가 큰 사람이 아니라 통이 큰 사람입니다.


통이 제일 큰 사람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것에 견주어 얘기한다면 바다보다도 크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다는 제일 크지만 제일 낮습니다.

낮을수록 크니 하느님은 바다보다 낮으시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만큼 낮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어린이보다 낮아야 하고 어린이보다 낮으신 그리스도보다 낮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처럼 낮은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통이 큰 사람은 낮고 작은 사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패거리 짓을 아니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마당발입니다.

요즘말로 까칠하게 좋고 싫음이 너무도 분명하고 유치하게 애증에 따라 네 편 내편이 갈리고 영악하게 유익이 되고 해가 됨을 너무 따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처럼 사랑이 엄청 큰 사람입니다.




포용력과 겸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현재 상영 중인 ‘내 사랑 내 곁에’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슬픈 영화라고 해서 오랜만에 눈시울을 적셔보려니 했는데 이상하게 전혀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거부하는 모습에서 조금 답답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중 인물들의 모습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니 그들의 캐릭터에 동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루게릭으로 죽어가던 남자 주인공이 여자에게 “너는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왜 너는 너만 생각해.”하며 불평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실 여자는 남자가 어차피 죽을 운명이기에 자신을 떼어놓으려 하는 것으로 알고 끝까지 참고 견디려 하였지만 아기까지 지워버리라는 말에 “누가 이기적인지 한 번 잘 생각해봐.”라고 하며 결혼반지를 빼서 던져버리고 남자를 떠나갑니다.

제가 보아도 이기적인 것은 오히려 남자였는데 남자는 조금씩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너무 받아들이기 싫었는지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물론 저도 그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유학을 하면서 속이 더 좁아지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외국 유학을 하면 시야가 넓어진다고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한국에 있을 때는 그냥 웃어넘길 일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힘이 들어서 이기적이 되는 것인지 이기적이어서 힘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만 생각하다보면 상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저는 할머니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오늘 아침도 식사를 하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지나가시다가 제가 먹고 있는 과일 깎아 놓은 것들을 손으로 다 집었다 놓았다하시며 결국 물렁한 복숭아를 하나 드셨습니다. 그것이 맛있었는지 나머지 하나까지 손으로 집으셔서 드시려 하는데 다른 할머니들이 신부님 것을 손으로 다 주물러 놓았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어차피 주물러 놓으신 것을 드시라고 하였는데 다른 할머니들은 그 치매 걸린 할머니를 쫓아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들도 치매 걸린 할머니의 행동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을 꼬치꼬치 따져가며 수긍이 가는 것만 받아들이려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공식적인 제자가 아니라고 하여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말리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넓은 포용력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지는 하지 않을지라도 반대하지 않는다면 제지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한 것보다 사도로서의 특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안에는 약간의 특권의식과 이기심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의 공식적인 제자들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다가 개신교 신자들이 불교 사찰 그림에다가 십자표를 하고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등의 글을 써 놓은 것을 보고 저자 유홍준씨가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을 대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쓴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이렇게 포용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사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려다가 쫓겨난 대천사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커지면 상대를 포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라며 판단을 할 때, 그 말 안에는 ‘나는 안 그런데.’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만을 생각하고 그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만큼 상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상대를 판단하면서 자신이 더 커지는 것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포용력과 겸손은 별개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여자, 노인과 함께 사람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어린이도 받아들이고 그렇게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그 분을 보내신 아버지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비우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이미 내 자신이 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공간을 충분히 지닐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버리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저 사람은 왜 저래?’라고 생각하지 말고 먼저 포용력이 부족한 내 자신을 탓합시다. 먼저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인간을 받아들이신 분이 가장 완전하신 하느님임을 깨달읍시다. 예수님께서 완전무결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유다를 품어 안을 수 있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입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겸손으로 가장 작아 진 이가 가장 큰 사람입니다.

“주여, 당신의 종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소서.”

시편 말씀처럼, 우리위에 주님의 얼굴이 빛날 때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의 은총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으로 사는 이가 진정 주님의 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을 때 주님은 한 말씀으로 말끔히 정리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하시며 역설의 진리를 설파하십니다. 겸손으로 가장 작아진 이가 실상 내적으로는 가장 큰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들은 역시 예수님을 닮아 겸손과 더불어 넓은 마음을 지녔습니다.

“막지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결국 가장 작은 분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중심에 현존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역시 겸손으로 가장 작아진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가장 작은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자 동시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가장 작은 분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누구나 공동체의 중심에서 주님과 함께 가장 작은이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여 이 가장 작은이들 역시 그대로 예수님의 현존이자 하느님의 현존이 됩니다.

성 바실리오 수도공동체 수도승들은 가장 낮은 자리의 가장 작은이가 되고자 경쟁이 치열했다 합니다. 겸손으로 작아지고 낮아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복음적 공동체입니다. 사실 똑똑하고 큰 사람들보다는 겸손으로 작아진 이들의 공동체가 평화롭고 힘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공동체의 모델은 1독서의 즈카리야 예언자가 말하는 예루살렘 공동체입니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예루살렘은 그대로 예수님의 교회공동체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교회공동체의 진실과 정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됨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공동체의 중심에 가장 작은 분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 우리 또한 주님의 가장 작은이들이 되어 공동체의 중심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노라.”(마르10,45). 아멘.



 

<재수 좋은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하루는 제게 참으로 신명나는 하루였습니다. 아이들과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부르르"하는 진동이 왔습니다. "혹시 지난번처럼 어디 미사 깜박하고 안 왔다고 전화 온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으로 잔뜩 긴장을 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기쁜 일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받고 싶은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10여 년 전쯤에 이곳에서 살았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이름을 듣자마자 즉시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 친구가 당시 온 집안을 뒤흔들던 유명했던 장난꾸러기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사고 안치고 잘 지내냐?"는 제 농담 섞인 물음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따, 신부님도. 이제 저도 벌써 나이 삼십이여. 온양에서 조립식 주택 짓는 일 하고 있는데, 이제야 조금 자리 잡았슈. 이제 장가가는 일만 남았슈. 한번 놀러갈께유." 

그렇게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10시 미사 때는 또 다른 한 친구가 미사 시간 맞춰오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왔습니다.물론 그 친구 역시 이곳 출신으로 8년 동안이나 저희와 함께 살았던 친구였습니다. 미사 후에 그 친구와 차 한잔하고 있는데, 또 다른 두 명의 출신자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점심이라도 한끼 하려고 나가는 순간, 또 다른 친구를 만났고, 또 그 친구가 전화를 해서 또 다른 친구를 데려오고...그래서 정말 너무도 기쁜 하루였습니다. 

다들 홀로 바둥바둥 세상을 헤쳐가느라 얼굴들이 많이 삭았지만 제 눈에는 아직도 사고뭉치들, 안쓰러운 아이들로만 보였습니다.용돈 때문에 저하고 티격태격하고 싸웠던 철부지 시절의 아이들 모습,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삐쳐서 말도 안하고 밥도 안 먹어 속을 태우던 말썽꾸러기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나마 아이들을 성장케 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제가 늘 고민하는 한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따끔한 매일까? 아니면 제대로 된 엄격한 규칙일까? 보다 완벽한 교육시스템일까?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겸손이란 옷을 입은 교육자의 헌신과 봉사" 그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교육자가 지녀야할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겸손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자가 아이들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아이들 사이에 현존하는 것, 아이들을 위해 한번 인내하고 좀더 희생하는 것, 그것처럼 바람직한 교육적 봉사는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교육자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교육자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모습으로 접근하는 순간입니다.

부모나 교육자들은 보다 자주 아이들을 향해 고개 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게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애야, 미안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부족했다", "미안해! 내가 좀더 너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되는데..." 우리가 참 부모 참 교육자로 거듭 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권위를 버리는 순간, 겸손하게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한 보석 세공인을 불러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나를 위하여 반지 하나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매우 큰 승리를 거둬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그리고 동시에 그 글귀가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나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느니라.”

보석 세공인은 명령대로 우선 매우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지 안에 새겨 넣을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다윗 왕이 원하는 그 글귀를 도저히 써 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지혜롭다는 평을 받고 있는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답니다. 그리고는 말했지요. 

“임금님의 황홀한 기쁨을 절제해 주고 동시에 그가 낙담했을 때 북돋워 드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말을 써 넣어야 할까요?”

그러자 솔로몬은 별로 어렵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말을 써 넣으시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아마 임금님이 승리의 순간에 이것을 보면 곧 자만심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만약 임금님이 낙심 중에 있다면 이내 표정이 밝아질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을 우리들은 얼마나 집착을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순간이고 곧 지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이러한 집착에서 헤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하늘나라에서의 삶에도 똑같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너희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만 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어린이처럼 약한 모습을 절대로 간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한 사람을 무시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내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영원할 것 같다는 이 세상도 결국은 스쳐지나가는 한 순간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곳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늘나라인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집착을 버리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 세상. 결국은 이것 역시 곧 지나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집착이나 절망에 빠지려 할 때, 종이에 적어 보십시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고정관념 버리기('좋은 글' 중에서)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사는 요셉이라는 양치기는 공부하기를 좋아해서 양떼를 지키면서도 책 읽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양들이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 채소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막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1백 미터쯤 되는 울타리 가운데 반쯤은 장미나무로 만들어졌고, 나머지 반은 보통 철사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양들은 항상 그 철사줄 울타리로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장미나무에는 가시가 있어서 못 나가는 거야. 철사줄에 가시를 만들어 붙이면 좋겠구나.’

그래서 철사를 짧게 잘라 가시처럼 만든 것이 바로 가시 철사(철조망)입니다.

그랬더니 다시는 양들이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특허내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당신이 예수입니다.

강영구 신부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편지를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 거기 어린이가 없었더라면 무엇이라 말씀하셨을까요? 

틀림없이 아무나 앞에 세우고 이렇게 말씀하셨겠지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사람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도 저도 태어날 때는 작고 약한 어린아이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당신은 어른이 되었고 저는 중늙은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 적의 ‘나’나 ‘당신’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 적의 ‘나’나 늙은이가 된 ‘나’는 같은 ‘나’입니다. 

어린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어른 안에도 예수님이 계시고 늙은이 안에도 틀림없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눈을 뜰 차례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예수님이 현존(現存)하시고 나아가 하느님이 현존(現存)하십니다. 

그가 비록 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를 사랑한다면 미움은 이미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뀌고 말겠지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돈이 없거나 지식이 없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서가 아닙니다.

눈을 뜨지 못해 ‘너’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돈이나 재물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행복을 줍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예수님이자 하느님입니다.(一明)




들꽃의 영성

조성풍 신부님

어떤 모임이나 교육에서 처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으레 등장하는 물음들이 있습니다.

“고향은, 출신 학교는, 사는 곳은, 본관은 어디인지?”

거기에 은근히 나이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싶어 하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너무 심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모습을 보게도 됩니다. 

사실이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높이려고만 애쓰는 모습만큼이나 초라한 모습은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더 큰 인정이 돌아옴을 겪곤 합니다. 

나는 이런 겸손의 영성을 ‘들꽃의 영성’이라 부르곤 합니다. 

산에 가면 피어 있는 들꽃은 낮고도 낮은 자리에 피어있습니다.

더구나 한 송이가 아니라 여러 송이가 함께 어우러져 있을 때 더 아름답습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 자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 그리고 혼자 두드러지기보다는 함께 돋보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김병환 신부님

제자들이 왜 다투었는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복음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수난에 대한 두번째 예고를 하신 뒤였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누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걱정이 되어 다투지 않았나 싶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다투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지도자가 어때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신다. 어린이를 비유로 말씀하시어 어린이를 통하여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당신의 성심을 제시하고자 하신다.

어린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표상이며 곧 예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의미는 매우 깊다. 어린이는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사랑과 신뢰, 순종과 겸손, 변함없는 성실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어린이는 맑고 깨끗하고 순수함을 지니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표본으로 가장 좋은 생활 자세의 가치 기준이 된다.

진실로 위대하게 되는 비결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데’ 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참된 신앙행위이며, 이것 없이는 누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도 예루살렘이 어머니로 의인화되면서 어린이는 거룩한 도시,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백성임을 나타낸다. 어린이는 하느님의 본성과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제자들에게 하느님 본성의 상징인 어린이가 될 것을 가르치신다. 어린이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수난 신비를 깊이 깨닫게 되고, 자신들도 수난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며, 또한 참다운 지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 나라 주인의 상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특정인에게만 제한을 두고자 하는 요한에게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말라”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 한 모두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예수 제자의 길

대기업에 함께 입사한 한 동료는 대리가 되고 다른 한 동료는 평사원 그대로였습니다. 또 몇 년이 지난 뒤 한 동료는 부장이 되고 다른 한 동료는 과장으로 있었습니다. 진급이 늦은 동료는 속으로 늘 불만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회사 상사에게 잘못 보인 것은 아닐까? 아니면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사관학교에 함께 입학하여 열심히 학업과 군사훈련 등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소위”계급장을 달게 됩니다. 먼 훗날 누구는 별을 단 장성이 되고 누구는 군대 문을 나서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경험하게 되고 피라밋의 장점을 향하여 가는 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음을 실감합니다.


경쟁사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를 점령하고 같은 위치라 하더라도 서열이 높고 싶은 심정은 다 같은 인간의 욕심에 틀림없다 할 것입니다. 더더욱 우리 주변에서 40-50代에 명예 퇴직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늘 스트레스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높은 위치로 가고 싶은 인간의 욕심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추구하는 현실입니다.


각박한 오늘의 현실에서 잠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오늘 루가 복음의 첫 구절이 우리 마음속을 맴맴 돌고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는 내용입니다. 열 두 제자들의 이력을 상세히 알고 있지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 당대 유대사회에서 내노라 할 만큼 이름 꽤나 있는 인물들은 아님에도, 사도단에서 서로 높낮이에 관하여 좌충우돌한 모양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신 다음 하신 말씀을 잘 새겨 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어린이의 모습은 힘없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낮추는 작은 사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내리 누르는 자가 아닌 봉사자로 섬기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임을 가르치시는 예수께서는 그 당시 얼마 안 있어 그 길을 가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교회 공동체에서 봉사하고 있는 신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직책이나 직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으로 자처하고 너를 위한 봉사가 진정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는 제자일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를 눌러야 내가 올라갑니다. 너보다 내가 이겨야 합니다. 소위 경쟁입니다. 그런데 선의의 경쟁이기 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넘어서야 하는 현실은 너무 각박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너를 이기기보다 나를 이겨야 합니다. 나를 제어하고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근간에 소개된 책들 중 “느리게 사는 법”의 의미를 소개한 내용도 보았습니다.


  “진정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라고 누가 말한다면 받아들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너를 위한 어리숙한 삶이 하늘나라를 위한 지름길임을 암시하는 듯도 합니다.




 † 루가가 전하는 갈릴래아 활동기의 마무리 설교

박상대 신부님

루가복음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광야유혹의 40일을 보낸 후 자신의 고향인 나자렛과 갈릴래아 지방을 거점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셨음을 보여준다.(4,14)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대목(이사 58,6)을 빌려 메시아로서의 자기 신원(身元)과 사명(使命)을 명백히 선포하신 점이다.(4,16-22) 


따라서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신원과 사명을 그 내용과 함께 구체적으로 밝혀나가는 것이 루가복음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숙제의 핵심은 메시아이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루가는 자신의 숙제를 예수님의 직접적인 활동으로 하나씩 풀어간다.(4,31-9,50)


우선 이 땅에 도래한 메시아의 활동은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구마기적과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병자치유기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가르치고 그들 가운데서 뽑은 사도들을 교육시킴으로써 미래의 선교를 준비한다. 


급기야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파견되어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을 예의주시한다. 와중에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구약율법의 근본정신을 새로 세우고 죄의 용서를 발설(發說)한다. 그들에게 예수가 걸림돌이 되는 만큼 예수의 신원은 서서히 밝혀진다.


결국 제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고백한다.(9,18-21) 그러나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정작 예수의 참된 신원과 평행선을 긋는다.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자기 신원에 대한 확신과 사명에 대한 다짐은 두 번씩이나 수난과 죽음의 예고로 이어지는데 제자들은 이를 간파하지도 물어보지도 못한다.(9,45)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발설한 목소리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툼이 있어난다.(46절) 이처럼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둘 이상 모인 곳에 누가 더 높은가를 가름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늘 있는 일이다. 어떤 공동체든 그 안에 리더가 있기 마련이며 또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 공동체가 누구에 의해, 무엇을 위해 창설되었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공동체라면 이는 필시 예수의 정신을 담보(擔保)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신 것은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회의 힘없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를 받아들임은 곧 예수를 파견한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 가운데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원칙이 세워진다.(48절)


계속두면 스승의 책망이 더 이어질까 두려웠던 것인가? 요한이 나서서 엉뚱한 말을 던진다. 예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49절) 사실 이 지적은 제자들의 질투와 투기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제자들에게도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가 주어졌다.(9,1) 그러나 제자들은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는 9장 40절을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올라가 계신 동안에, 악령이 들린 아이를 아버지가 데려와 제자들로 하여금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했던 것이다.(9,40)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라.”(50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는 쫓아내었으나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서로 다른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음이 암시되었다. 여기까지가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가 4,16-9,50)이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유광수 신부님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마르코 복음을 보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사람이란 첫째가 되는 사람이다. 첫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다른 이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더 좋은 옷, 더 좋은 집, 좋은 차를 가져야 하고, 더 아름다워야 한다. 한 마디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자기가 첫째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사람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하는 제자들 앞에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선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예수님이 내세운 어린이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이란 아주 하찮은 존재이며 사람이기는 하지만 "가장 작은 사람"이다. 가장 큰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린이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찮은 존재요, 없이 여길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생각과는 정반대 되는 생각이다.

그럼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가장 작은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자기가 첫째가 되는 데 필요한 사람이지 어린이처럼 하찮은 존재, 가장 작은 존재가 아니다.

 

그럼 누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가? 

어린이를 사랑하는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어린이를 자기의 경쟁의 상대자로 보지 아니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절대로 높아지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는 어린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허리를 굽혀 자기 자신을 낮춘다. 받아들이려면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열어야 하고 손을 내밀어야 하고 가슴을 벌려야 한다. 즉 어린이가 들어 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어린이가 편안하게 안기기 위해서 어린이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빈잔 즉 잔이 비어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고 손을 벌려야 상대방을 안을 수 있는 법이다. 

하찮은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겸손함을 의미한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가장 작은 사람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장 큰 사람이란  늘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을 상징한다. 즉 자기가 가장 높고, 많은 것을 알고, 높은 자리에 있고, 가장 좋은 옷과 좋은 차와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섬겨야 한다. 자기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섬겨야 한다. 자기가 하느님인 사람에게 어린이와 같은 하찮은 가장 작은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욕적인 일이고 창피한 일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자기를 높여주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다른 삶과 함께 생활할 때 어떻게 인간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웃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서 자기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쟁의 상대자로 생각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한다면 진정한 이웃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내가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할 나의 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공동체가 일치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으며 평화를 가질 수 없다.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미워해야 하고, 자기는 잘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잘 안 되기를 바라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다른 사람이 경쟁의 상대자가 아니라 사랑해야할 사람들이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수록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의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2,6-8)

가장 큰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은 누구나 이런 원의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정말 가장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가장 큰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결국 추한 인간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4 번이나 "받아들이다"라는 말씀을 사용하셨다. 오늘 우리도 4 번쯤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가장 큰 사람이 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 방법에 의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날이 되도록 하자. 내가 속해 있는 가정, 공동체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어느 유대교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 랍비는 매일 저녁마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그날에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나 알아보곤 하였습니다. 그 마을에 또한 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땅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자는 파수꾼을 고용해서 매일 저녁 자기의 땅을 둘러보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랍비가 마을을 둘러보는데 파수꾼을 만났습니다. 랍비와 파수꾼은 함께 걸으면서 마을을 둘러봅니다.

랍비가 파수꾼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오?" 

"나는 마을 부자를 위해 일합니다. 매일 저녁 그의 땅을 둘러봅니다." 

파수꾼이 랍비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오?" 

랍비는 머릿속으로 만군의 야훼 하느님을 위한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파수꾼의 질문을 받고 보니 정말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일하나 의심도 되고 자책도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랍비가 말합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말하기가 망설여지는군요.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마을의 랍비입니다." 두 사람은 침묵가운데 한참 걸어갑니다. 랍비가 다시 입을 엽니다. "나를 위해 일하지 않겠어요?" "물론이죠. 어떤 일을 하면 되죠?" "단 한가지 일만 하시면 됩니다. 그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늘 일깨워 주세요. 늘 새삼 생각나게만 해주면 됩니다." 


랍비가 파수꾼을 고용해서 자신을 위한 파수꾼이 되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견해서 읽으면 그런 대로 의미가 있구나 생각되는데 자꾸 읽고 또 읽으면 점점 더 메시지가 강하게 들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제가 사목자이기에 더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랍비의 지혜는 바로 오늘 현대 사목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지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랍비는 그 마을의 영적 파수꾼입니다. 그런데 이 랍비는 그 마을의 참 파수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한 파수꾼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무엇인가 경종을 울려주는 파수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예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씀에는 오고가는 모든 세기의 신앙인들을 위해 경종을 울려주는 파수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묻습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이 말씀의 배경을 먼저 살펴봅시다. 이 때는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막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때가 아닙니다. 오늘의 배경은 주님과 3년간 생활한 때에 일어나는 대화입니다. 제자들은 3년 전에 자기의 모든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세리 마태오는 하늘의 보화를 사모하며 부의 길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벌써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지 3년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이 만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3년간 따랐다면 여러분의 모습은 지금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께 무슨 질문을 하겠습니까?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므로, 그 주님을 따르는 삶 안에서 보상을 받는 차원에서 제일 으뜸이 되길 원했습니다. 최고의 명성을 원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길이 남게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주님께서 한 파수꾼을 불러 세우십니다. 누구일까요? 어린이 하나입니다. 그 어린이 한명을 제자들 가운데 시우시고 말씀하시길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이 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알기 전에는 이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옛날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이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낙태가 편만했고 비록 낙태되지 않아 세상에 태어나도 가정에서 버림받기가 일쑤였습니다. 병약한 아이나 원하지 않는 아이들은 산 속에 버려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동물에게 잡혀 먹히거나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집에 데리고 와서 노예로 부려먹곤 했다고 합니다. 


유아시기를 넘기는 아이들이 약 2/3 가 되는데 겨우 살아남은 이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유가 됩니다. 아버지는 마음대로 자녀를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약 반 정도가 8살을 넘깁니다. 로마시대에는 자녀를 죽이는 것을 하나의 'act of beauty(멋진 행위)'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노예로 팔기도 하고 제멋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곧 이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어른들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짓밟는 사람들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아이들은 늘 자신을 죽이고 낮출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어린아이를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제자들 앞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제자들 눈앞에 파수꾼으로 선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한번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밝고 아름답고 명랑한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둡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을까요? 그림으로 된 성서책들을 보면 예수님이 예쁜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화가들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그렇게 귀엽고, 예쁘고, 명랑한 아이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수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었고 어른들의 이용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 앞에 어린아이를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21세기의 유복한 어린아이들을 세우시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어린아이 자리에 누가 파수꾼으로 설까요? 


오늘복음 묵상을 준비를 하면서 'Kids on the street' 이란 책을 접해 보았습니다. 평생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위해 살던 두 분이 지은 책입니다. 오늘 미국에는 150만 명의 아이들이 homeless가 되어서 길거리를 배회한다고 합니다. 그중 57%는 이혼한 부모의 자녀라고 합니다. 16%는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25%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48%는 한번 이상 자살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40%가 15세 이하의 아이들이라 합니다. 이들은 'America's lost trib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떠한 이유로 homeless가 되었든지 가정을 떠난 이들의 삶은 비참합니다. 


'Youth Worker'라는 잡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길거리의 아이들이 매시간 접하는 폭력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끝없는 성폭행을 당합니다. 소녀들은 납치되고 마약주사를 강제로 맞습니다. 아이들은 폭군들에게 끌려 다니기 일쑤입니다. 이들의 반 이상은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바로 이러한 아이들을 오늘 주님은 우리 기성교회 교인들을 위해 파수꾼으로 세우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파수꾼의 모습은 유복한 자녀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homeless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자, 이 시간 우리 앞에 homeless 어린이가 파수꾼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십시다. 이 어린이의 어떤 모습이 우리를 가장 압도할까요? 우리가 보는 것은 고통의 얼굴 모습일 것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입니다. 자살도 여러 번 시도해 보았습니다. 이 땅위에서 자기가 설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안전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려서 세상 고통을 다 겪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아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세워 놓으신 아이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는 그날도 어른들에게 도망 다니던 아이였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죽이겠다는 아버지에게 눈물을 쏟으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던 아이였을지 모릅니다. 이 땅위에 자기를 반기는 곳이 아무도 없는 상처투성이의 아이였을 것입니다. 쓸모없는 아이입니다. 하루 밥만 먹여 주면 만족해하고 자신이라는 긍지는 전혀 없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린아이를 놓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제자들에게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주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저 비천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도 아닌 저런 아이처럼 되란 말인가?" 


이렇게 당혹해 하고 있는데 한수더 떠서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또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 거지와 같은 아이를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받아들이다는 의미의 영접이란 단어를 풀어 보겠습니다. 저는 개신교에서 잘 사용하는 영접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이 '영접'이란 해석이 아주 잘된 해석이라고 봅니다. 사실 헬라어로 ' ' 인데 영어로는 'receive'라고 번역이 됩니다. 'Receive'란 동사는 대등한 관계의 뉘앙스가 있습니다만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대등한 관계에서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 '는 대등한 관계보다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모시는 것으로 해석함이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잘것 없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받아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찮은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은 자가 되어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곧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천한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아 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지들을 영접한 적이 있으십니까? 자선은 베풀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들을 영접하라 하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아마도 고개를 흔들다 못해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어릴 때 이미 어린아이의 고통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그 고통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 뿐 아닙니다. 어린아이보다 더 낮아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때야 비로써 그토록 원하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 어린아이들보다 천해진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죽이는 일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곧 자신의 ego를 완전히 무시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ego를 위해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길 원했는데 천국에서는 실제로 자신의 ego를 완전히 버리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후 제자들은 어린아이만 보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저렇게까지 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그런데 이들은 갈등하면 할수록 자신의 ego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시길 원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겐 파수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겐 갈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렇게까지 하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이 갈등을 시작하신 분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ego를 죽이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St. Therese of Lisieux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어릴 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영혼으로 보는 체험을 합니다. 이 분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작아지는 삶' 입니다. 그분은 스물 네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삶이 위대함을 보질 못했습니다. 도리어 가까운 주변에서는 아무런 덕행을 하지 않은 평범한 수녀로 알려진 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little flower'(소화)로서, 가장 작은 자로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된 성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소화 데레사(St. Therese)가 쓴 글로 얼마나 그가 작은 자로 살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제가 언제나 작은 한 톨의 모래로 남아 있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모든 눈에 숨겨진, 단지 주님만 볼 수 있게 말이에요..." 이 분은 늘 큰 자가 되길 원하는 세상에서 모래처럼 작은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평범한 소녀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아는 자기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한 톨의 모래와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이 소화 데레사 성녀(St. Therese) 는 잠시 후 또 다른 글을 씁니다. 

"하나의 모래알이 atom(원자)가 되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오직 주님만 나를 볼 수 있게 말이에요..." 백사장의 모래가 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얼마 지난 후 생각해보니 백사장의 모래도 사람의 눈에 보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고 주님의 눈에만 보이는 atom(원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St. Therese가 세상을 떠날 때 수도원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St. Therese는 친구들 눈에 띄이는 일은 하질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 눈에 띄이는 일만 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모래가 되다 못해 원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래가 되다 못해 원자가 되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안띄어도 주님에게만 보여지는 삶을 사는 것,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도 이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St. Therese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모래가 되고, 아니 그것을 넘어 원자가 되어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막연했습니다. 혼자서 모래라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인지, 원자라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인지... 


오늘 복음은 확실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모래가 된다는 것은, 원자가 된다는 것은 고통의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서지는 삶이었습니다. 매일같이 나약함에 노출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의 삶처럼, 오늘 거리의 어린아이들의 삶처럼... 자기의 ego를 깨뜨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래알보다는 바위가 되고 싶어합니다. 모두가 바위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위가 모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뜨려져야 합니다. 매일 깨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라는 바위를 깨뜨리기는 커녕 매일 커지려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파수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자가 되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나의 ego가 깨지는 경험을 하십시다. 우리의 ego가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인정하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그때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만은 보십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복음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길거리의 어린아이보다 더 낮은 삶을 산 아이들은 옛날 노예생활을 했던 흑인 노예 아이들일 것입니다. 어느 흑인 노예 소녀가 다음과 같은 글을 아빠에게 썼습니다. 

"나의 주인은 가면 갈수록 더 악해집니다. 오늘 아침 나는 무릎을 꿇고 복도를 닦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내가 일하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마치 새가 벌레를 쏘아보듯이... 그는 무엇인가 나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모른척 하고 마루를 닦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자기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아빠, 나는 그들이 하라는대로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더 원할까요?" 


이 소녀는 주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니 존재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주인 앞에서 ego는 깨어질대로 깨어져서 원자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아빠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빠에게만 자신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의 아빠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요? 


우리도 우리 아빠되신 하느님께 이러한 편지를 쓰는 작은 모습의 사람이 되십시다. 

"아빠, 나는 그들이 하라는대로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더 원할까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느님은 나의 작은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두올묵상팀]

 


 

마음의 대화

이인옥

나를 홀대하는 사람에게는…… 

오늘 복음에서 루가 복음사가가 전하는 상황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역사적 현실처럼,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역사적 갈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엄청난 적대감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어떻습니까? 비극의 연속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구원의 길을 향한 여정에서 잠시 사마리아에 머무르시고자 심부름꾼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예수를 맞아들일 생각을 접었습니다.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며 노기에 찬 모습으로 예수께 말씀드렸으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하십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갚는” 보복율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주시고자 하시는 모습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보여 주시듯, 이웃이 아닌 원수 같은 처지에서도 어려운 경우를 만났을 때 도우는 사람을 격려하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앙갚음의 현실을 뒤바꾸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나에게 당장 모함을 하고 남에게 나의 단점을 말해 이간시키고자 하는 사람을 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복수와 징벌보다는 용서와 회개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그 모습에 우리 신앙인들은 다시 한번 고개 숙여야 합니다. 가까이서 우리를 소홀히 하거나 홀대하거나 멀리 하는 사람들과도 좀 더 친근해지기 위한 노력은 신앙인의 숙제일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본 글인데요. 글쎄 독수리에게 가장 훌륭한 먹이는 두루미라고 하네요. 두루미는 떠들기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날 때 가장 큰 소리를 낸답니다. 따라서 이 소리를 들은 독수리에게 두루미는 좋은 사냥감인 것이지요. 하지만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두루미들은 이 약점을 드러내지 않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경험 많은 두루미들은 여행 전이면 항상 부리에 돌을 물기 때문이지요.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두루미의 현명함은 우리 인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요? 자기 잘났다고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말로 자기를 더욱 더 높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스스로 망신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데일 카네기는 “자기의 말은 1분만 하고, 상대방의 말은 2분 동안 들어주고, 3분 동안은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쳐 준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말이 아닌 상대방의 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상대방의 말을 카네기의 말처럼 75% 듣기보다는 반대로 자신의 말을 75% 하는데 더 힘을 쏟습니다. 그 결과 제대로 된 대화를 통해 일치하기 보다는 분열과 다툼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겸손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며, 주님으로부터 큰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당시의 어린이는 미성숙 그 자체로 판단을 했었지요. 즉,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한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시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족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높고 낮음을 떠나서 차별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로부터는 작은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사실은 가장 큰 사람으로 주님께 인정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어제 저녁 프로야구 경기를 시청하다가 ‘야구는 참 겸손한 경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강타자라고 해도 남들보다 한 번 더 칠 수 없지요. 단지 자기 차례가 돌아와야지만 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발이 아무리 빨라도 앞 주자를 제치고 먼저 홈에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만약 앞 주자를 제치고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아웃이 되고 말지요. 또한 철저하게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만 합니다. 홈런을 많이 친다고, 또 삼진을 많이 잡았다고 해서 규칙을 어길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이 규칙을 모두가 지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야구는 너무나도 재미없는 경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세상도 이렇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갖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존중하고 철저하게 지켜야 기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유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내 마음은 주님의 뜻을 어떻게 따르고 있었는지요?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훨씬 더 깊은 법이다.(모로코격언)


버려야 남는다.

파키스탄 시골 마을에 나무를 깎아 코끼리를 만드는 유명한 노인이 살고 있답니다. 소문을 들은 한 다큐멘터리 제작 팀이 그를 찾아갔지요.
“할아버지! 얼마나 오랫동안 코끼리를 만드셨기에 이렇게 실력이 대단한가요?”
“오래 했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멀리서 왔으니 비결 좀 가르쳐 주세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무 한 토막과 조각칼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머릿속에 그린 코끼리 모양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을 모두 깎아 내 버려요.”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깎아 버리라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주님의 뜻에 맞게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한 욕심이 겸손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의 뜻과 점점 더 멀어지게끔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깎아 버릴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씩 하나씩 과감하게 깎아 버릴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음양화평지인陰陽和平之人

전진 신부님

오늘 복음에, 제자들은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관해서 논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소홀히 하고 함부로 하는 것들을 하느님께서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동양적인 가치관에는 음양오행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태극기에 이 원리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태극太極은 무극無極으로서 하늘과 땅, 불과 물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또 너와 내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몫이 있는 것입니다. 음양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사람을 음양화평지인陰陽和平之人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너희를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듯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마음은 좋고 나쁨도, 옳고 그름도 넘어섭니다.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하느님 생명에 일치를 이루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나 자신이 온전히 작아지고 비워지면 비워질수록 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채워지게 됩니다. 겸손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생명력이 충만해지길 바랍니다.




바다처럼 넓고 깊게

심종미 수녀님

‘바다’의 이름은 ‘받아들이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바다가 넓고 깊은 이유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넓고 깊어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받아들이다 보니까 넓고 깊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나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까지도 소중하게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편이 아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반대만 하지 않으면 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다처럼 넓고 깊은 분이십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다처럼 넓고 깊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닮고자 인종·성별·빈부·학력 등의 차별을 하나씩 허물어 보려고 노력하며 걸어오고 있습니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나의 생각과 습관, 사고방식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며 한 자매로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와 맞지 않고 함께 살기 힘든 사람을 마침내 이해하게 되고 거부감이나 편견 없이 수용하면서 평화롭게 살 때가 가장 행복하고 보람됩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족이지만 부모로서 자녀로서 서로의 기대만을 주장하기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논쟁은 이렇게 끝났을 것 같습니다. ‘바다처럼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큰사람이다.’

 



주님을 해방시켜드리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한 번 이런 경우를 상상해봅시다.

프란치스칸이 아닌데 어떤 사람이 프란치스코 전문가인 양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얘기하고 다닙니다.

그때 제가 못마땅하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히려 기쁘게 생각해야 할까요?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잘못 얘기하지만 않는다면 저는 기쁘고 그분께 고마워 할 것입니다.

저와 저희 형제들은 프란치스코를 사부라고 하지만 프란치스코를 독점하려 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진정 프란치스코의 제자라면 프란치스코가 널리 사랑받고 그래서 널리 회자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리스도교 신자만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따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더더욱 예수님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파당에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입니다.

성령은 어디에 가둘 수 없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모세는 영을 독점하지 않고 원로들에게 나눠주고 천막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립니다.

영은 천막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고백한다면 

교리 안에 예수님을 가둬서는 안 되고

제도 안에 예수님을 가둬서도 안 되고

교파 안에 예수님을 가둬서도 안 되고

이념 안에 예수님을 가둬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이 널리 퍼져나가려면 우리의 독점으로부터 예수님을 해방시켜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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