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 9,1-12.14-16
욥이 친구들의 1 말을 받았다.
2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3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
4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무사하리오?
5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들을 옮기시고
분노하시어 그것들을 뒤엎으시는 분.
6 땅을 바닥째 뒤흔드시어 그 기둥들을 요동치게 하시는 분.
7 해에게 솟지 말라 명령하시고 별들을 봉해 버리시는 분.
8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
9 큰곰자리와 오리온자리, 묘성과 남녘의 별자리들을 만드신 분.
10 측량할 수 없는 위업들과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 이루시는 분.
11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네.
12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
14 그런데 내가 어찌 그분께 답변할 수 있으며 그분께 대꾸할 말을 고를 수 있겠나?
15 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16 내가 불러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해도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would-be followers of Jesus
말씀의 초대
욥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며, 누가 그분과 겨루겠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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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냐며,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무사하겠냐고 친구들에게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시고, 죽은 이들의 장사나 가족들과 작별 인사도 미루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려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마다(루카 9,57.59.61 참조) ‘주님을 추종하여 따름’을 표현하는 특별한 그리스어 동사 ‘아콜루테오’(따르다)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앞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마태오가 그분을 따라나선 대목에서도 사용됩니다(루카 5,11.27.28 참조).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사가는, 이 세 사람의 어정쩡한 태도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의 모습과 병행시켜 대조적으로 드러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이는 마땅한 거처도 없이 공생활 내내 떠돌아다니시던 예수님과 일행의 삶을 알지 못한 채 드린 공허한 다짐일 뿐입니다. 또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각각 아버지의 장례와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를 더 우선시합니다. 물론 유다인들에게 장례는 자식의 마땅한 도리고(토빗 4,3-4; 14,11-13 참조)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 또한 인지상정이지만, 그 어떤 관행이나 기본적인 도리도 결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욥은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라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데는 그 어떤 조건이나 타협도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차마 세상의 방식대로 할 수 없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하고 신앙 때문에 불편을 겪을 때마다, ‘그래, 내가 지금 주님을 올바로 따르고 있구나!’라고 확신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 결코 하느님의 일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소신을 품고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고 단호히 구원 여정을 이어 갑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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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잠시도 마음 편히 쉬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안타깝지요, 우리의 주님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니요. 그런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쉬실 곳이 없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례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함을 만납니다. 어디에 얽매여 있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그 어디에도 나만의 쉼터와 공간을 마련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복음을 논하고 묵상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알고 있는 신학이나 주석학 지식을 맹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 읽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기존의 지식으로 복음의 의미를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 버려야 해!’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쳤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보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기존의 지식과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기존에 즐기고 아끼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림으로써 아까운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떠날 때 기존의 삶이 아쉬운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유인이셨습니다. 저도, 우리도 자유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얼른 빠져나와 하느님 나라로 멋지게 여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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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위업들과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이 사방을 돌아다니시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든 일에 앞서야 하고 짧은 시간도 아껴야 하는 과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부모의 장례보다 주님의 일을 먼저 하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혈육의 정에 얽매이기보다 주님을 따르는 발걸음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고난과 가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쟁기로 땅을 갈아엎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일을 하지 않고 쉬는 사람이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힘차게 앞으로 걸어가는 투신이 필요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주님의 일을 하지 않고 미루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최상의 가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세로 구원 사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구원의 열매는 타성에 빠지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결심을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 사업을 수행할 쟁기 하나씩을 맡기십니다. 그 쟁기로 구원의 농사를 짓고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보금자리를 포기하는 노력과 희생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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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과 같은 삶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성공이 불확실해 보이고 역경이 가득해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길은 희생과 비움입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선택한 이들에게는 참된 행복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그전에 많은 것을 포기하여야 하고 갖가지 역경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보금자리’를 포기합니다. 자신이 편하게 살려는 타성과 안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끊임없는 노력과 투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주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구원의 쟁기’를 하나씩 손에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망설이는 가운데 그 ‘쟁기’를 내려놓습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일을 먼저 앞세우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생깁니다. 구원 사업은 인생의 최고 가치이며 가장 먼저 앞세워 진행해야 할 일입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구원 사업의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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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말한 ‘정화의 단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로 가는 과정에서 온갖 인간의 무질서한 욕망과 애착이 정화되는 단계를 말합니다. 요한 성인은 이 과정에서 육신의 온갖 달콤한 감각의 욕구들이 정화되려면 손발이 잘려 나가는 듯한 고통스러운 감각의 어두운 밤을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무엇엔가 중독되어 있다고 하지요. 술이나 마약, 도박과 같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영성에서 하느님 이외의 것에 집착하는 것은 다 중독으로 이해됩니다. 일상에서 건강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영적인 자유를 방해한다면 다 중독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독된 감각을 정화하고 영적인 자유를 누리려면 자신의 지체 일부를 잘라내는 아픔과 같은 힘겨운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세상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망설이는 이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자기가 붙잡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것은 삶의 가치의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에 주님을 두는 것, 그리고 그 가치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가을의 단풍나무처럼 우리도 자신을 비우고 버리기 시작할 때부터 아름다워집니다. 우리가 맨 앞에 내세우는 삶의 가치를 바꾸는 순간, 낙엽을 떨어뜨리는 나무처럼 버릴 것이 많아집니다.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삶이 단순하지만 아름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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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세 사람은 말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고백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두 번째 사람의 청원입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세 번째 사람도 지나친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었다면’ 뒤돌아보지 말라며 오히려 다그치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은 마태오 복음 8장에 따르면 율법 학자였습니다. 그는 ‘삶의 도피’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오해했던 것이지요. 둘째 사람은 아버지의 상속에 ‘미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그것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셋째 사람은 가족을 핑계 댑니다. 지난날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뒤를 자꾸 돌아보면 위험합니다. 인생 역시 ‘자주 후회하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앞날을 위한 도약입니다. 건너뛰는 행동입니다. 때로는 과감한 생략이고, 때로는 과감한 투자입니다. 그래야만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희생 없이는 은총도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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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입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방학 때 본당에 나가면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 합니다. 자유로운 생활은 자칫 나태한 생활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게으른 생활은 온갖 유혹이 찾아오도록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방학을 앞두고 성당에 모여 9일 기도를 바치며 ‘오 예수’라는 노래로 기도를 마칩니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예수! 나의 사랑하는 예수! 내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리이다.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이 신학교로부터 당신에게서 결코 떠나지 않으리이다. 우리를 보호 속에 지켜 주소서.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노래로 기도를 바칠 때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어떠한 유혹이나 어려움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 내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의 마음 자세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고난의 길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고독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듯이,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혈육의 정에 얽매이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개척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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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도 부르심의 하나다. 믿음의 길은 주님을 향한 기나긴 여정이다. 그 무엇에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마저 그냥 둔 채 오라고 하신다. 새로운 삶으로 부르는 데에 응답하라는 말씀이다. 소명과 추종 사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더 복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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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생활 속의 실천이지 그저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하느님의 뜻이라며 자신을 못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심도 지나치면 맹신이 됩니다. 도를 넘으면 광신으로 바뀝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고 남을 괴롭히는 신심이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신심을 어찌 바른 신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그런 일까지 매듭짓지 못하고 주님을 따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댔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밭을 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고랑은 비뚤어지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고 맡겼으면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 힘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의 힘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우리 인생도 그만큼 복잡해졌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신뢰하며 사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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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부담된다는 한 학생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고 부모님 기대에만 맞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대가 큰 것일까요? 이제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부모는 무슨 큰 기대를 할까요?
부모는 그저 이 아이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서 이 아이를 재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부모가 자신을 간섭한다고, 자신을 힘들게 하고만 있다고 생각하니, 부모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느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크게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혹시 자신을 간섭하고 힘들게 하는 어떤 의무감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이르십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고 하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장사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작별 인사도 못하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에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고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도 충분히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당신 안에서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일보다 먼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큰 사랑을 알아채고, 하느님께서 바라는 대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 따르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의 의무감으로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원하실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아니요.”라고 말해야 할지 알게 된다면, 정말 중요한 문제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라이언 홀리데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미국 배우 케리 워싱턴은 자신의 SNS 계정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할 때 신은 세 가지 답 중 하나를 주신다. 하나는 “예스(YES).”, 다른 하나는 “예스(YES). 그런데 당장은 아니야.”, 또 다른 하나는 “안 돼(NO). 왜냐하면, 내가 너를 위해 더 나은 걸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도 없고 언제나 희망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위의 세 가지 답을 우리 상황에 맞춰서 말해주십니다.
실망과 절망, 좌절의 삶이 아닌 희망의 삶. 기쁨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을 포기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년 여름 홀로 한달 간에 걸쳐 국내 성지순례를 떠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지만, 숙소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고마운 지인 댁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날은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어떤 날은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좋은 장소가 눈에 띄어, 텐트를 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당장 나가라시더군요. 한밤 중에 주섬주섬 텐트를 걷는데 기분이 참 그렇더군요. 당시 나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그 작은 공간 마저 포기하라시니,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정된 주거 조건 속에서 복음 선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셨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리코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떠돌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복음 9장 5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 무척이나 알쏭달쏭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씀, 꽤나 슬픈 말씀을 건네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복음 9장 58절)
공생활 기간 내내 펼쳐진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보니, 예수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꼭 붙들 때 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시며, 결연히 팔을 뿌리치며,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곰곰히 따지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유다 광야의 여우 한 마리, 갈릴래아 호숫가 나무 위에 깃들며 살던 하늘의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더라면, 경치 좋고 기후도 좋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커다란 대저택 하나를 짓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발로 직접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치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양떼를 찾아가기 위해 떠돌이 생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공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당신 사명의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의미심장한 예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상 임종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그게 아니라면 병원 침대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공중에서, 그 어디에도, 그 존귀한 당신의 머리를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 내내는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청빈과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어디로든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 시작합니다. 작게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직장, 결혼이나 수많은 인간관계도 우리의 결정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은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전체 인생도, 물론 처음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내가 잘살아보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도 중도 포기하거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얼마 전, ‘유퀴즈온더블럭’에 고독사, 자살, 범죄현장의 특수 청소 전문가 김새별씨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죽음 뒤에 남겨진 쓸쓸한 집을 수습하고 청소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도 감정이 북받쳐 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딸을 키우는 처지에서, 딸의 죽음을 이기지 못해 딸의 자리에 인형들을 동그랗게 둘러놓고 아빠가 죽음을 선택한 집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한번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을까요? ‘당신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어쩔 수 없을걸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나요?’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딸이 사라진 뒤에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놓지 못했나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이제 길어야 3개월 남았습니다.”라는 어쩌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처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꽃길이 아닙니다. 햇빛이 좋은 날도 있지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세상인데 우리에게야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타임」지의 수석 기자 아만다 리플리는 1917년 몽블랑 군선의 폭발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1만 5천 명의 생환기까지, 역사적인 재난의 생존자들을 추적해 『언씽커블』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제목은 우리 말로 ‘상상도 못 할 일’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쓰나미나 테러와 같은 재난을 당했을 경우 당연히 가능한 한 빨리 현장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생존자들은 재난 신호를 감지한 후 ‘한참 뒤에야’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 테러 당시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있던 사람 중 많은 비율이, 비상계단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고, 곧바로 대피해야 하지만 이리저리 전화하거나 사소한 물건들을 챙기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했습니다. ‘몸이 얼어붙는’ 반응 때문에 허둥대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불행은 남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암에 걸리기라도 하면 ‘왜 하필 나야?’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일어날까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꽃길을 가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가시밭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멀미하는 사람도 자신이 운전하면 멀미하지 않습니다. 예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닥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나에게 닥쳐올 일들에 대해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훈련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몸이 얼어붙는 상황에서도 훈련된 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종용하십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상하는 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단호해야 합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특정한 위기 상황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일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고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미적대는 이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그 일을 하기로 했다면 단호하게 그것만 행할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히노 오키오’의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란 책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조금 바꾼 제목입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죽음보다 삶에 더 충실하여지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해야 할 오늘의 일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는 당당히 십자가를 지셨고 수많은 성인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소명은 이웃의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꽃에 물을 줄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 지배당해 얼음이 되어버리는 삶을 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형님은 책을 좋아하셨습니다. 가끔씩 형님이 읽은 책을 읽곤 했습니다. 이광수의 흙, 펄벅의 대지, 스탕달의 적과 흑,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현실이라는 벽을 넘어서려는 내용이었습니다. 농촌의 계몽을 위해서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농민들과 함께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비천한 신분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고독한 영혼의 이야기였습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를 향해서 날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장미꽃을 담은 종이에서는 장미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담은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형님이 있어서 문학의 향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2020년 나는 이웃에게 어떤 향기를 나누어 주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분노, 시기, 욕심, 절망, 편견’이었다면 아마도 코를 찡그리게 하는 냄새가 났을 겁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인내, 친절, 온유, 나눔, 겸손’이었다면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는 향이 났을 겁니다. 오늘은 예로니모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성인과 더불어 존경받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입니다. 무엇보다 예로니모 성인은 평생을 성서를 번역하고, 성서를 연구하면서 지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은 구약성서를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심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멀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타락한 사람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믿는 이들의 구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가까이하면 믿음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사랑으로 꽃이 필 것입니다.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좋아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학교로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내려야 하는지 알았지만 어렵게 잡은 자리가 좋았고, 버스에서 내리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만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살면서 중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는 않지만 다른 면에서 중학생 때와 비슷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17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지 25년이 되었지만, 처음에 담배를 끊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담배가 가지는 중독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다음 날 일을 하는데도 지장을 줍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잔 술의 알뜰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의 정거장을 지나치곤합니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누겠다고 하면서 지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성당에서 주어지는 희생과 봉사의 시간들과 나의 여가 시간이 겹쳐지면 내 몸과 마음은 희생과 봉사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여가 시간으로 기울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한걸음 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
애써 한걸음 더 내딛는 거야
또 한걸음이 뒤 이을 수 있도록
가끔은 지금여기 잠시 머물러
지금까지의 소중한 걸음들
되새김질이 필요하겠지만
끝 모를 머나먼 길 위의
헤아릴 수 없는 걸음들을 이룰
단 한걸음 막아서는 안 되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수많은 걸림돌들이
여린 발걸음을 멈춰 세우겠지만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가볍게
한걸음 또 한걸음으로
꿈같은 지금여기 설 수 있듯이
여전히 남은 길이 있기에
길을 따르는 한걸음으로 길을 만들며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내딛는 거야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자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을 따르기 전에 아버지 장사를 먼저 드리게 허락해 달라는 이에게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하고 말씀하셨고, 가족들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때 갖추어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이는 머리를 기댈 곳과 같은 인간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 안에 참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따라나설 때 인간적으로 중요한 모든 경조사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일의 중요함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인간의 생명 역시도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었고, 죽음 역시도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하느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려는 이들은 언제나 시선을 하느님께로 향하고 다른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이며, 주님과 함께 늘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뒤를 돌아보지 마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소가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 때, 농부는 쟁기를 붙잡고 밭을 갈았다. 쟁기로 밭을 갈 때면 갈아 엎은 이랑이 똑골아 보기가 좋았다. 농부는 일단 쟁기를 잡으면 분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앞만 보고 똑바로 가야한다. 자칫 분심이 들어 뒤를 돌아보고 한눈을 팔 때면 이랑은 보기싫게 삐뚤어 지고 밭을 가는 농부의 프로근성은 볼 수 없게 된다.
시작한 모든 일도 그러하다. 특히 주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선 사람이 사람과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 산다면 하던 일은 그르치고 허사가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 사람이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면 순식간에 사람꼴이 망가지며 쓸모없게 되 버린다. 하느님을 따르기로 쟁기를 잡았으면 관심사가 있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롯의 아내가 생각났다.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이야기에서 천사는 롯의 일가에 명했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창세19,17) 롯의 아내는 소돔에 애착을 버리지 못해 뒤를 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돠어버렸다.(창세19,26) 롯은 천사가 이르는대로 이 분부를 지켰고 멸망 가운데 구원해 주셨다.
다시 오늘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시며 들려주신 말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예수님을 따르려면>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수요일>(2020. 9. 30. 수)(루카 9,57-62),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1)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하고,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고(마태 16,26),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열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루카 13,25) 가장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면, 한눈팔지 말고, 딴 생각 하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도 있고, 세속이 유혹할 때도 있고, 자기 안에서 유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간단하게 그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사탄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사탄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마르 9,29).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세속의 유혹이나 자기 안에서 생긴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3) 예수님을 따라 나섰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루카 14,28-30).
이 말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전력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 하고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심판이나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데리고 가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힘만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 보호와 도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노력한다면, 누구나 그 도움을 받아서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힘들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소연하면 우리를 업고서라도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5).>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온갖 고난과 시련, 사람들의 냉대와 배척을 참고 견딜 각오를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걸어가는 길은 ‘꽃길’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줄곧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험한 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길 끝에서 부활, 생명, 승리,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얻어 누리는 행복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시련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크고 강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떤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집에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마라.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그 제자는 아마도 장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아니라, 사소하고 세부적인 절차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라는 말씀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잊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일을 걱정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십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위선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신 분입니다(마르 7,9-13).
효도는 살아 있는 부모에게도 해야 하고, 돌아가신 부모에게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일 때문에 충격과 슬픔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 충격과 슬픔은 비난받을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을 중단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장례식의 세부 절차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거나 갈등을 겪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런 일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속 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마음이 그다지 간절하지도 않고, 또 그 마음이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세속 일을 ‘먼저’ 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그 마음은 잘못입니다.
종교목적은 육신성공 아니라 영혼성공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려면 작별인사 집안일 정리 같은 세상사 이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그 어떤 곳이나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비움과 무소유로 하느님나라와 아버지의 사랑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일 다음 하늘일 아니라 하늘일 우선으로 사신 분입니다.
지식 상식 방식 우선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잘 모르고 따르겠다합니다.
하느님나라 선포 하는 일은 기존의 지식과 삶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즉 세상의 물질문화로부터 우선 나 자신이 떠나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참 종교는 육신성공 아니라 영혼성공이란 것 공감하시면 멋진 분이죠.
예수님을 따르려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어떤 사람이 주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57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라고 하신다. 그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사도의 영예를 받으려는 것 같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에게 영예도 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를 바로 잡아서 하느님 안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의 새와 여우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채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들어오셔서 쉬실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하였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고 하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례로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61절)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간적인 일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되어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한다면 가차 없이 끊어 버려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끊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악마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반대의 길로 가려하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아무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몰두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데 망설임 없이 즉시 따를 수 있는 자세와,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사제의 ‘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 (Nn. 1. 2: CCL 73,1-3)
유다인들처럼 “너희는 성서를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는 성서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성서를 파고들어라.” 그리고 “찾으라.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명에 순종할 때,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권능이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시라면 성서를 모르는 이는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창고에서 새 것과 옛것을 끄집어 내는 집 주인을 본받고 싶으며, 또 아가에게 “아, 임이여, 햇것도 해묵은 것도 임을 기다리며 마련해 두었답니다.”고 말하는 그 신부를 본받고 싶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예언자 이사야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자요 사도로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다음 말씀을 자기 자신과 다른 복음 전파자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그리고 하느님께서 흡사 사도에게 말씀하시듯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고 물어보시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러나 내가 몇 마디 말로 주님의 모든 신비를 포함하는 이 성경 책의 내용을 다 취급하려 한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사실 이사야서에서는 주님이 동정녀에서 탄생하신 임마누엘로, 여러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을 행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만백성의 구세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물리, 도덕, 논리에 대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성서 전체에 나오는 모든 것과 인간의 혀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인간의 이해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 말씀에서 이 신비들의 깊이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계시되었지만, 그것은 밀봉된 책에 쓰여진 말씀과 같다. 글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책이 밀봉되었는데 어떻게 읽겠느냐?’고 할 것이다. 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글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증명이 만일 어떤 이에게 너무 빈약하게 보인다면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들으십시오. “두세 명의 예언자들만 말하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곁에 앉은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경우에는 먼저 말하던 사람은 중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침묵을 지키건 말을 하건 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영께 의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침묵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예언자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의 뜻을 깨닫고 있다면, 만사는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자신들이 하는 말소리의 진동만이 가 닿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언자들은 다음 말씀으로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 천사가 내 안에서 말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마음 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의 말씀을 내 듣고 싶사옵니다.”
참된 길의 인도자신 주님 <루카 9, 57-62> 9월 3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길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참 길의 인도자는 주님이시며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안전하게 주님이 마련하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하고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권하시는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는 이곳에 없다고 하시면서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며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는가?’ 생각하면서 가야 할 곳을 찾아보았지만, 사람이 찾고 가고자 하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 너머 세상에 있으며 길 가는 사람이 길을 가는 동안 쉼터, 아름다운 경치이지만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인정도 인연도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셨듯이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한사람이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니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이 없다.” 하신 말씀은 “내가 가는 길은 여기가 아니다. 저 너머 십자가를 건너 참 생명의 길을 가야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고 따르겠나?” 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얻고 살려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셨듯이 포기할 수 없는 길인데 가다가 세상의 일에 빠지기 쉽다는 이유에서 다른 사람을 부르니 아버지의 장사 핑계나, 집안사람에게 인사할 핑계를 대면서 따름을 미루는 행위는 마치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믿음을 떠나는 사람의 약한 믿음입니다.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려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기대하든지 자기 안일, 편안함 즉, 십자가 없는 길을 가고자 하였다면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주님이 지시하시는 길은 중단 없는 전진뿐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하고 길을 바꾸는 행위는 주님이 이끄시는 목적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온 길을 뒤 돌아보면서 뒤로 돌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갈 곳을 가려는 사람은 앞만 보고 희망과 사랑이 있는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을 가지려는 이유거나 부자가 되려는 이유도 아니고, 체면을 세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함께 가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 길은 가시밭길도 있고, 자갈밭도 있고, 깊은 물과 어두움이 깃든 길도 있으나 주님의 손을 잡고 가는 사람은 어떤 길도 발자국마다 향기가 넘치고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혹도 물리치고 빛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함께 계신 길은 어떤 적도 물리치고 어떤 방해물도 뚫고 지나게 됩니다.
저 너머 영광이 넘치는 나라, 흔들림 없이 견고한 나라,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나라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주님을 따라나선 사람은 중간에 길을 잃지 않고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벽을 만나면 뚫고 나가고, 깊은 강을 만나면 다리가 되어주는 주님과 함께 건너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주님과 함께 나아가고, 어떤 경우든지 주님의 손을 잡고 가야 할 곳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이 길이 믿음, 희망, 사랑의 길이며 벗어나지 않아야 할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변함없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를 기도합니다.
참된 제자의 삶. -진리와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성인의 생애를 요약한 아침성무일도 5개 연의 찬미가가 참 아름다워 2개 연만 나눕니다.
-“성경의 하늘나라 푸른목장을 땀흘려 정성다해 가꾸신 당신
여기서 모든이게 공급하셨네 백배의 풍요로운 영혼양식을
사막의 고요함을 갈망하면서 하느님 면전에서 늘 깨어있고
육신을 괴롭히고 극기하면서 자신을 주성부께 바치셨도다.”
어제 모든 천사들의 축일에 있었던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병원에 다녀오다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를 입었습니다. 대형 사고의 경우치고는 아주 경미한 상처였습니다. 즉시 병원 응급실로 이동하여 머리 사진을 찍고 주사를 맞은 후, 왼쪽 머리 상단 부분을 여러 바늘 꿰멘 다음 귀원하여 점심식사후 9시경을 바쳤습니다. 사고 즉시 원장수사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다행히도 경미한 사고입니다. 전례때는 외출시 쓰는 검정 모자를 써야할 것 같습니다. 상처부위가 커서 분심을 줄 것 같아서요. 깨어 살라는 싸인같습니다”
사고 즉시 떠오른 걱정은 내일 강론이었습니다. 저는 강론에 대해 남달리 집착이 큽니다. 게시판에 붙여져 있는 다짐입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운명이자 사랑이요, 구원이자 유언이다’, 구원과 유언이란 말마디는 나중에 붙였습니다. 정말 지금은 유언처럼 생각하고 씁니다. 이어 떠오른 생각은 ‘정신차려 깨어살라는 회개의 싸인이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귀원하여 떠오른 생각 둘은 ’아, 천사축일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통해 도와 주셨구나!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새삼스럽게 감사와 더불어 힘이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머리에 상처가 부끄럽고 분심을 줄 것 같아 전례시 상처를 가리기 위해 모자를 한 번 썼다가 즉시 짧고 부족한 생각임을 깨달아 모자를 벗었습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죄이지 상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모자를 썼더라면 죄를 지을뻔 했습니다. 저나 수도형제들이 직접 다친 부분을 보면서 전달되는 메시지가 참으로 중요하다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깨어 살라는, 회개하라는 표지처럼 생각됩니다. 마침 수도형제가 십자가 앞에 서도록 한 후 사진을 찍어준후 전달한 메시지의 재치와 유머도 고마웠습니다.
“주님의 전사, 이수철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들어도 반가운 주님의 전사라는 말마디를 들으니 힘이 불끈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 까칠한 별난 성인입니다. 그래도 당시 그 혹독한 은수 금욕생활에도 80세 장수를 누리신 것을 보면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전설적이 인물이요 파란만장한 생애였고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신비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힘든 성향으로 구설수에 많이 올랐을지라도 그의 학문은 당대 성 아우구스티누스외에는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이 두분과 성 암브로시오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네분은 서방 4대교부이기도 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깊은 영성과 삶의 준열한 고행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수처엔 몇가지 필수품에 십자가와 성서뿐이었고. 성인은 인생 후반부 거의 30년동안은 예루살렘에서 은수자로 보내면서 성서연구와 고행생활에 전념했습니다. 특히 가톨릭의 공인 라틴어 불가타 성서는 386년에서 시작하여 404년 18년동안의 작업이라 합니다. 또 성인은 원하지 않았던 서품이라 평생 동안 미사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열렬한 사랑이요 진리의 삶입니다. 성인의 굳건히 항구히 견뎌내는 견인堅忍이 놀랍고 성서연구를 통한 그 지칠줄 모르는 하느님 사랑의 열정이 불가사의입니다. 한결같고 오롯한 사랑과 진리에 헌신했던,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았던 참 자랑스런 성인입니다. 1600년전 성인이지만 시공을 초월 지금도 신선한 자극에 열정에 불을 붙여주는 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고난 받는 의인 욥 역시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주석부분을 읽다가 뒷부분이 좋아 옮깁니다. ‘선인善人의 아픔과 고통은 전혀 하느님의 불유쾌한 표지가 아니다. 이들 고통이나 시련은 때로 긍정적으로 그분과의 깊은 관계를 촉진하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표지로 보여질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우리 삶에 어떤 경우로 개입하든 수동적 비관주의에서 긍정적이고 환영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병이나 죽음은 궁극적인 악이 아니다. 정말 죄는 진리와 사랑의 부재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죄이지 상처나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상처나 병, 죽음보다 더 치명적이 영원한 병이나 죽음은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욥은 결코 혹독한 시련과 고통중에도 때로 불평하고 원망했을 지언정 끝까지 견인하며 하느님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참 제자의 길을 살았던 욥입니다.
오늘 루가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제자들의 조건을 언급합니다. 두 번의 수난과 부활 예고후 예루살렘을 향한 절박한 상황입니다. 세차례에 걸친 예수님 말씀에서 참 제자의 길을 배웁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곳조차 없다.”
여기서 강조점은 가난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난을, 단식을, 고행을 찬양하지도 않았고 노숙露宿하지도 않았습니다.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도 지니셨습니다. 바로 어디든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새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뚜렷이 부각되는 절대적 가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절박성은 가족, 전통, 문화의 필요성 모든 것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려는 결정은 결코 번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두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취해선 안됩니다. 루가복음의 참된 제자에게 무엇보다 강조된 주제는 다음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는 결코 기회주의자가 될 수 없고, 그가 하는 일은 ‘시간제part-time’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이든 아무것도 아니든 둘중 하나(all or nothing)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제자직의 사명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에게 준엄히 요구되는 길이지만 우리가 볼 때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동시에 아가페 사랑의 요구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최종 판단의 잣대는 아가페 사랑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하여 매순간 분별할 일은 그것이 진실로 사랑의 행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참된 제자의 길은 사랑과 진리의 길이고 사랑과 진리만이 유일한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사랑과 진리의 사람이,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세 가지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 열정으로 보면 아주 훌륭한 자세라고 할 수 있는데도, 예수님은 그를 만류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는 충만한데, 그분을 따르기 위해 겪어야 할 어려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저것 재지않고 무턱대고 돌진하다보니 주님을 따르는 삶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숙고도 부족한 상태이지요. 여러가지로 준비가 부족한 그가 제대로 능력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고된 세파에 꺾이지 않도록, 예수님은 그를 돌려보내십니다. 그가 내,외적으로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는’ 외롭고 힘든 소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면,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실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나를 따라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의 장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문율법을 해설한 ‘미쉬나’에 따르면, 장례를 치르고 있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절대 빼먹어서는 안될 ‘쉐마’(신앙고백문)나 ’18 기도문’(축복기도)을 바치치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후대에 기록된 바빌론 탈무드를 보면 “장례를 치르고 있는 사람은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언급하고 있지요. 그만큼 유대사회에서 장례는 ‘선행의 극치’로서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율법적으로도, 그리고 인간의 도리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라’는,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하시면서까지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가족간에 지켜야 할 사랑의 의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일이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인간적인 도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의 일을 준비하는 것보다 ‘지금’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지요.
세번째 사람은 ‘나를 따라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합니다. 주님을 따라 세상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다보면 언제 집에 돌아갈지 기약할 수 없으니, 가족들이 자신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도록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마음을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납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애착’을 갖게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만큼 나를 구속하는 힘이 강하기에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단호한 의지와 강한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일과 인간적인 관계 모두를 손에 쥔 채로는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가 강인한 힘으로 내가 잡은 쟁기를 사정없이 끌고가는 상황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면 넘어져 크게 다칠 위험이 있고 손에 잡은 쟁기는 놓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을 일단 받아들었다면 다른 곳에 한눈 팔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그분을 따라가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입니다. 일단 하느님께 나의 삶을 내어 맡겼다면, 다른 그 무엇보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느님보다 ‘앞장’서려는 과욕을 부리는 순간 우리 삶은 나아갈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예로니모 축일입니다. 영명 축일을 맞으시는 분들께 축하드립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 관리로도 일했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셨습니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 성경』이 그것입니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9,57) 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 라고 대답하십니다. 그 말씀은 마치 ‘네가 나를 따라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에게 아무런 자리도 그 무엇도 보장해 줄 수 없다.’라고 말하시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59절) 라고 이르시자,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이것저것 다 하고 나서 나를 따르려고 하지 말고, 무엇보다 먼저 내 말을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61절) 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라고 응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한 번 나를 따르겠다고 했으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재촉하시는 듯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면서도 그 대신 우리에게 주님을 사심없이, 그리고 맨 처음에, 무엇보다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맨 처음에 무엇보다 먼저 조건없이 사랑하시며 구해주시는 주님께 우리의 사랑으로 온 마음을 다해 갚아드리기로 합시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주님을 따라가겠다는데, 그것조차도 허락을 안 하십니다. 그리고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보면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은 가족을 다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결국은 내가 어디를 바라보고 사는가, 누구를 참으로 따르겠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 결정했으면, 언제나 하느님이 나에게 1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 발 붙이고 살고 있는 사람이기에 아마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세상에서 완전히 발이라도 떨어지면 쉬울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미사와 기도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방향을 잡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가장 우선은 무엇인가, 누가 나에게 첫째인가. 십계명도 이웃사랑의 출발점은 4계명, 즉 가족에 대한 사랑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하느님을 먼저 올바로 사랑하고 그 후에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추석연휴 첫째 날입니다. 주님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 사랑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좋은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아멘.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몇 가지 마음 자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우도 새도 모두 편안한 안식처가 있지만, 제자들은 때로 휴식처를 가질 수 없을 만큼 희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싶다는 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달라’는 표현은 지금 장례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그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자, 그 사람은 이런 핑계를 대며 그 부르심을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 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밭을 갈면서 뒤를 자꾸 돌아보는 사람은 밭이랑을 곧게 할 수 없습니다. 지난 과거에 얽매여 오늘을 망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희생할 마음을 가져야 하며,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고,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 6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치열한
사랑 없이는
말씀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말씀은
모든 시간의
마디마디와
함께한다.
말씀이
돋아나고
점점 자라난
말씀은 드디어
익어간다.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은
사랑으로
소통된다.
사람의 길은
말씀의 길이다.
말씀이 익어가면
마음도 익어간다.
말씀의 길은
소통과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향해
뜨겁게 타들어간다.
말씀에
자신을 봉헌한
성 예로니모
사제의 축일이다.
하느님의 빛은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밝힌다.
말씀의 빛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등불이다.
말씀을
사랑한 삶이
은총의 삶이다.
그에게서
성경의 번역은
가장 적극적인
말씀의 실천이었다.
말씀의 대중화는
귀한 말씀의
보편적 만남이며
새로운 시작이 된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말씀은
사랑처럼
가까이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풍요롭게
전하여 져야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말씀의 번역은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다.
말씀으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 물들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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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하 마트에 정전이 되었습니다. 이 마트를 책임지는 점장은 고민이 생겼지요. 언제 전기가 다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빠른 판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아마 여기서 할 수 있는 점장의 선택은 다음의 두 가지가 아닐까요?
첫째, 쇼핑한 물건을 모두 그 자리에 놓고서 가라고 한다.
둘째, 쇼핑한 물건을 집으로 가져가시고 나중에 지불해달라고 한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점장은 아주 뜻밖의 방송을 합니다.
“물건을 가지고 집으로 가십시오. 물건 값은 굳이 저의 마트에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물건 값을 여러분이 원하는 자선 단체에 기부해주십시오. 이제 모두를 안전하게 나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자, 저희 직원을 조심해서 따라오십시오.”
여러분이 사장이라면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기부하라고 발표하는 직원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정전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져간 물건 값은 총 4,000 달러였다고 합니다. 즉, 4,000 달러의 손해를 본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마트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퍼져나가면서 실제로 40만 달러 이상의 이익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이미지를 얻게 된 마트는 계속해서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방송을 통해 홍보를 한다면 분명 4,000 달러 이상의 비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엄청난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도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나눔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홍보가 되어 큰 이익을 얻게 되었지요. 만약 어떻게든 마트의 손해를 줄이려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실 많은 이들은 순간의 만족과 이익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다보니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좀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분명히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하고, 다른 이는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달라고 청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금 당장 따라야 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세상의 일보다 주님의 일이 먼저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한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훗날 들어가야 하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어떠한가요?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 있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또 미래를 걱정하다가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다(헨리 포드).
66 마재성지
마재 성지는 거룩한 부르심의 땅이자 성가정 성지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들의 생활 터전이며 가족 모두가 순교하고 시복시성의 영예를 얻게 된 정약종 일가를 기념하는 성지입니다.
마재는 세속적으로는 다산 정약용 세례자 요한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사적으로도 소중한 장소로, 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천진암 강학회에 참여하였던 정씨 형제들이 살았던 거룩한 부르심의 땅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에 의해 조직된 ‘명도회’의 첫 회장을 지내고,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정약종의 부인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 장남 정철상 가롤로 복자, 평신도 지도자로 ‘상재상서’를 저술한 차남 정하상 바오로 성인, 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 등 일가 5명이 모두 순교하고 복자, 성인이 된 거룩한 가정이 있었던 곳입니다.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고,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입니다. 이렇게 가계도만 보아도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들 중 다산 정약용 요한 세례자는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함으로써(‘자명소’를 올려 스스로 천주교를 떠남) 죽음을 면하고 유배를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긴 유배 생활 중 잃었던 신심을 되찾고,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이나마 참여하는 보속의 삶을 살다가 보속이 끝난 후 다시 완전히 교회로 돌아와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마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았던 우리 교회 창립의 주역과 온 가족의 순교로 하느님의 거룩한 가정을 이룬 이들을 기억하며 나와 나의 가정의 신앙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분들게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전구를 비는 신심의 장소입니다.
미사는 평일에는 오전 11시이고(월요일 미사 없음), 주일에는 오전 10시와 12시에 있습니다. 주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 전화는 031-576-5412입니다.
시련은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약 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 참으로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는 우리를 무죄한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에로 초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도 욥이 온 몸으로 겪었던 무죄한 의인들의 고통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 숱한 죄를 짓고 과오를 범하고도, 저리도 건강하게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무죄한 이들, 평생토록 신앙 안에서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채 인생을 꽃피우기도 전, 청춘의 나이에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녀, 그를 잃고 슬피 우는 부모, 아직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린 아이의 불치병, 평생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일만 해온 의인의 요절...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합니다.
평생토록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서 악을 멀리해온 욥 역시, 어느 날 갑작스런 큰 시련과 마주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으며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님께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가축들과 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쪽 같은 아들과 딸들도 데려가십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까지 심한 부스럼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느님이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차라리 주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조롱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기 2장 10절)
욥이 자신에게 닥쳐온 큰 시련 앞에 처음에는 그리도 당당했지만, 점점 증폭되는 고통 앞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런 독백을 남겼습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욥기 3장 3절)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욥기 3장 11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 앞에 욥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체험 사이에서 긴 내적 갈등을 거듭합니다. 위로하러 찾아온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위로보다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도 느낍니다.
동시에 자신의 지난 인생을 세밀하게 스캔하면서 혹시라도 주님의 뜻을 거슬렀던 요소가 있었는지 성찰합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우여곡절, 성공과 실패, 병고와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그분의 의지, 그분의 처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꿈꿉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지속되는 상승 곡선, 이 세상에서의 거듭되는 성공, 고통과 시련 없는 평화로운 인생. 그러나 근본적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존재들에게 시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인생 안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불행한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생의 단계 안에 화사한 꽃봉오리 같은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꽃이 떨어지는 낙화(落花)의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참혹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은 한낱 티끌같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사 모든 것, 성공도 실패도, 재산도 가족들도, 병고도 죽음도 그분 손길 안에 의탁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자주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더 자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해야곘습니다. 더 그분께 집중해야겠습니다.
또한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혹한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 측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초대, 더 성장하고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초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욕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안시성’에 고구려 신녀가 한 명 등장합니다. - 영화 줄거리가 들어있습니다 – 고구려 수호신인 주몽의 활을 지니고 있으니 보통 신녀는 아니었나봅니다. 환시를 통해 미래를 본다는 이 신녀는 어렴풋하게나마 안시성의 몰락을 보게 됩니다. 그녀가 원하던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안위입니다. 안시성이 항복만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당나라 황제의 말에 신녀는 목숨을 걸고 성주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5천 밖에 안 되는 안시성 군사들이 20만이 넘는 당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며 지쳐가던 때였습니다. 성주도 이제 당 태종의 마지막 공격 앞에서 처음 가졌던 기개를 잃어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신녀를 반역죄로 칼로 칠 수 없습니다. 그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성주를 시해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결국 성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사물이란 사람이 그녀의 목을 벱니다. 싸움을 멈추게 만드는 욕구를 계속 자아내는 그 신녀를 살려두고는 안시성의 모든 군인들의 패기가 떨어질 것이기에 개인적인 사랑은 접어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녀의 목을 베고 다시 전의를 불사릅니다.
우리 안에는 이렇게 양립할 수도 없고 양립해서도 안 되는 두 욕망이 있습니다. 내 욕구와 하느님의 욕구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욕망과 관련될 때는 큰 문제가 제기됩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하는데 세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과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자아’는 각자의 방식대로 설명이 되어 어떤 이들은 자아가 내 자신이라고 하고 그 자아의 욕망에 어느 정도는 맞춰줘야 정신이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허용되는 정도는 그 욕망을 풀어주고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자아의 욕망을 억누르지 말라고 합니다.
일면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아와 참 자신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참 자신과 동일시하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와와 뱀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뱀은 참 나의 육체적 욕구에 불과합니다. 그 육체적 욕구를 너무 억압하면 사람이 미쳐버릴 수 있다고 하여 육체적 욕구와 어느 정도 화해하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죄를 지으며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매우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만약 안시성 성주가 신녀와 화해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과 성 주민들은 당나라 군대에게 몰살당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와는 절대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순백의 토가를 새빨간 선혈로 물들이며 줄리어스 시저는 그렇게 쓰러졌습니다. 광란의 상태에서 그를 찌른 암살자들은 모두 열네 명. 그들은 모두 한 때 시저와 반대편에 서서 그에게 칼을 겨누었던 인물들이었지만, 내전에서 승리한 시저가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준 이후 그를 도와 일하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저가 베푼 관용은 비수로 돌아와 그의 심장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나간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지만, 암살자들은 그러한 그의 뜻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 안의 악이 선으로 돌아오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러면 쟁기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소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소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나의 뜻입니다. 뜻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자아)가 원하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문제는 이 두 욕구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악의’에 ‘노노구치 오사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단에 등단하기까지 줄곧 ‘히다카 구니히코’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의 육신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성취까지 모두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이에 ‘가가 형사’는 노노구치가 자백했음에도 그가 살인을 한 진짜 동기에 대해 추적하던 끝에, 그의 ‘악의’가 바로 살인의 진짜 동기임을 밝혀냅니다. 노노구치는 히다카로부터 어두운 과거를 용서받고 그의 도움으로 작가의 꿈 또한 이룰 수 있었지만 그것을 굴욕과 패배로 받아들이고 그 ‘악의’를 주체하지 못한 끝에 히다카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출처: ‘친구 혹은 은인, 그 양립할 수 없는 두 이름’, jinks30님의 블로그]
선의와 악의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가 강하면 다른 하나는 약해집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소의 힘은 약해집니다. 자아의 욕망에 자꾸 시선을 주다보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아의 욕구와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기까지 싸워 이겨야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아의 욕구는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수원 가까이에는 한림성당이 있습니다. 한림성당은 제주도의 오랜 친구이신 임피제 신부님께서 세운 성당입니다. 한림성당에서 제주 교구의 사목 지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주 교구장님이신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께서는 ‘생태적 증거의 삶을 사는 소공동체’라는 사목지침을 발표하였습니다. 환경과 생태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주교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우리가 불편을 참아내고, 우리가 조금만 늦게 갈 준비가 된다면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환경과 생태계는 보존 될 것입니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의 주요한 정책은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 북한의 비핵화와 북한의 경제 발전’입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3번을 만났고,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경제, 복지, 문화, 예술의 여러 중요한 현안들이 있겠지만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진다면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고, 남과 북의 화합은 경제, 복지, 문화, 예술의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국제사회가 함께 한다면 한반도의 비핵화와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상처를 받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뒤로 미루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좋아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학교로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내려야 하는지 알았지만 어렵게 잡은 자리가 좋았고, 버스에서 내리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만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살면서 중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는 않지만 다른 면에서 중학생 때와 비슷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17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지 23년이 되었지만, 처음에 담배를 끊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담배가 가지는 중독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다음 날 일을 하는데도 지장을 줍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잔 술의 알뜰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의 정거장을 지나치곤합니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누겠다고 하면서 지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성당에서 주어지는 희생과 봉사의 시간들과 나의 여가 시간이 겹쳐지면 내 몸과 마음은 희생과 봉사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여가 시간으로 기울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생스럽지만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살아 봅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지난 달 사제 기도 모임 때 국제 총회 준비를 했었습니다.
총회에서 요구하는 질문들을 함께 읽어보고 고민을 해보았는데요.
여러 가지 질문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만남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앎을 풍요롭게 합니까?’
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아니지만, 일단 그분들은 저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드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그 시간을, 그 가진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처음 신부가 되고 나서는 그러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가뜩이나 힘든데 신앙적인 부담과 짐을 떠 안게 되면 더 힘들거야..
그것마저 없으면 어떻게 살겠나..’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2년차 때 ‘엘리야와 과부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과부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양식을 요구하고, 과부는 ‘이게 없으면 난 죽습니다.’ 하는 그것을 내어놓는데요.
결과는 얼마 되지 않는 양식을 움켜 쥐고 있을 때보다 더 풍요로워집니다.
그 집에 먹을 양식이 끊이지 않는데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요구하는 일이 필요하겠다...
그것이 더 큰 풍요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시간과 힘을 봉헌해 보십시오..’ 하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거 같은데요.
지금 사는 섬에 와서 조금 더 깊이 신자들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그런 말을 하기가 힘들다..’ 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욕심이 없는 거 같습니다.
‘먹고 살 정도만 되었으면..’ 하시는데요.
그런데도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미사에 나오지 않고 바지락을 캐러 나가시는 걸 보면,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얼마나 힘드시겠나... 가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저 개인적인 생각이고,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양다리, 미지근한 신앙, 그리고 어중간한 선택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거 같습니다.
분명한 선택과 결단, 그리고 완전한 포기와 순종을 원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쉽지 않죠?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내가 헛디디지 않았구나...
말씀에 따라 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목적지로 향하는 든든한 디딤돌이구나...
더 풍요롭구나...’
하는 것을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고생스럽지만 하느님이 알려 주시는 대로 해 봅시다.
더 큰 풍요를 체험하게 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추석 때 친척들을 만났다. 첫 인사가 다들 비슷했다.
“이제 머리 좀 깎아야겠는데..
산에서 살다 내려온 사람 같다..
섬에서 살더니 시골 사람 다 됐네...”
<한걸음 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0. 03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
애써 한걸음 더 내딛는 거야
또 한걸음이 뒤 이을 수 있도록
가끔은 지금여기 잠시 머물러
지금까지의 소중한 걸음들
되새김질이 필요하겠지만
끝 모를 머나먼 길 위의
헤아릴 수 없는 걸음들을 이룰
단 한걸음 막아서는 안 되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수많은 걸림돌들이
여린 발걸음을 멈춰 세우겠지만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가볍게
한걸음 또 한걸음으로
꿈같은 지금여기 설 수 있듯이
여전히 남은 길이 있기에
길을 따르는 한걸음으로 길을 만들며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내딛는 거야.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9, 57-62(연중 26주 수)
오늘 <복음>은 ‘부르심’과 ‘따름’에 대한 세 편의 상황어입니다. 본문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데”(루가 9, 57)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는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앞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배척을 받게 되어 다른 마을로 길을 가신’ 것을 알려줍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갈릴래아에서 배척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듯이, 이제 예루살렘 상경기도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당하게 될 고난을 미리 암시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게레사인들의 지방에서도 배척을 받으셨고(루카 4, 28-30; 8, 37),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르고자 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하고 초대한 사람인데,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죽은 이의 장례는 매우 중요한 일었습니다. 그들의 불문율법을 해설한 미쉬나에 따르면, “장례를 치르는 사람은 쉐마(신앙고백문)나 18기도문(축복기도문)이나 기타 기도들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으며, 후대에는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바빌론 탈무드)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여겼습니다(토빗 4, 3-4; 6, 15). 그러니 그가 장례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율법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를 거절한 것은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루카 9, 60) 일을 더 중하게 여기십니다. 죽음의 나라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가 더 중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먼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되돌아보는 자는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는 삶은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그 무엇에게도 첫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이요,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배척과 고난을 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죽으시러 가는 길에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당신과 함께 가야 할 고난을 암시해줍니다. 아멘.
삶의 중심. -하느님,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벽에 일어나 집무실에 나와 십자고상 앞에서 잠시 머무는 순간 떠오른 시편 구절,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현대인의 영적 질병은 ‘멈춰 머무르지 못하는 것’과 ‘침묵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모두 천박淺薄한 삶에서 오는 내적 불안의 표지입니다. 삶의 중심이 확고하지 못함의 반영입니다.
그러니 잠시 접어두고 머물러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습관을 지니시기 바랍니다. 성당, 십자가, 성모상, 요셉상, 성가정상, 이콘등 모두가 잠시 머물러 기도 시간을 지니라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 부활상’ 역시 잠시 멈춰 기도하라는 거룩한 표지입니다.
기도는 이처럼 일상에서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중심도 뚜렷해져 내적평화와 안정,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복잡하고 혼란한 삶도 단순하고 질서 잡혀질 수 있습니다. 가벼운 세상에서 깊이있는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갈망하는 바 자유입니다. 자유로워야 행복합니다. 자유와 행복은 함께 갑니다. 과연 자유롭다 여기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역시 삶의 중심이 확고할수록 삶은 단순해지고 내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분명 반갑고 고마운 일인데 때로 짜증스럽게 생각될 때의 선물이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등 흔히 있는 선물들입니다. 때로는 이런 선물들이 짐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옷장에 보면, 입지 않는 옷들이, 신장을 보면 신지 않는 신들이, 책장을 보면 읽지 않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모두가 공해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살아갈수록 몸도 소유도 비워져 가벼워졌으면 좋겠는 데 날로 채워져 무거워지는 현실입니다.
바로 사소해 보이는 이런 것들이 삶을 무겁게,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삶이 비워져 가벼워질수록 삶의 중심도 선명해 질 것입니다. 피정을 다녀간 수녀님이 남긴 글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요셉수도원의 모든 수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안하게 쉬면서 충전의 시간을 갖고, 소임지로 돌아가 다시 충실하게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감사의 마음 담아 수녀드림”
하느님의 영광의 상징하는 바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을 새롭게 확인한 수녀님입니다. 오늘 강론의 제목은 ‘삶의 중심-하느님, 하늘나라, 예수님-’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제목입니다. 하느님, 하늘나라, 예수님은 모두 하나의 실재, 중심을 가리킵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의 중심은 확고하고 분명합니까? 사제서품 받은 후 거의 30년동안 수도사제로 강론중 가장 많이 사용했던 주제가 삶의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상경기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절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째, 장소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첫 번째 등장한 이가 예수님을 따르겠다 했을 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집착없는 자유로운 처신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중심한 삶이기에 구름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복음 선포에 전념했던 참으로 자유로우셨던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머무는 곳 모두가 예수님의 집이셨습니다. 참으로 장소로부터 자유로우셨던 예수님이셨고 바로 하느님 중심에 정주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머무는 곳 어디나 고향이요 집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랐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면서 우리의 예수님 따르는 자세를 점검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람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두 번째 등장한 이가 “나를 따라라.” 주님의 명령에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는 청했을 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실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일이,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우선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엄중한 일인지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자유 역시 분별의 지혜를 요구합니다. 당장 아버지의 죽음이었다면 예수님은 장례를 허락했을 것입니다. 좌우간 ‘하느님의 나라’라는 삶의 중심이 확고할 때 사람들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둘째 등장한 이가 예수님을 따랐는지가 아닌 우리 삶의 자세의 점검에 있습니다.
셋째. 과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세 번째 등장한 이가 주님을 따르겠으니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 청했을 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답변합니다. 그의 반응이 궁금합니다만 역시 문제는 우리의 처신을 생각하게 합니다.
과거는 지났고 우리의 영역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목표로 한 이상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역시 문자 그대로 적용할 일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엄중한 삶의 중심이자 목표인지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경주하는 이가 자주 뒤를 돌아다보면 제대로 뛸 수 없습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과거로부터의 부단한 탈출이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과거에 사로 잡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들 가는 지요.
오늘 제1독서 욥기는 욥의 둘째 담론입니다. 친구인 발닷의 담론에 대한 답변입니다. 욥의 담론의 주제는 ‘하느님의 독단獨斷’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하느님이 삶의 모두임을 인정하는 욥의 담론으로 가득한 내용들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 하겠는가?”에 이어지는 욥의 고백은 얼마나 그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철저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욥의 삶의 중심이자 모두였음을 깨닫습니다.
흡사 수도원 배밭 배꼭지에 달려있는 무수한 배들을 연상케 하는 욥입니다. 저는 이를 믿음의 배꼭지라 칭합니다. 그 무거운 배가 작은 꼭지 하나로 배나무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믿음으로 달려있기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극한의 고통의 상황 중에 하느님까지 없다면 욥은 삶의 허무를 견뎌내지 못하고 벌써 삶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 물을 수 있는 믿음의 대상, 삶의 중심인 하느님이 계시다는 자체가, 우선 고통중에도 ‘하느님’이라 부를 이름이 있고 하느님이란 존재가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주시고, 참으로 온갖 불필요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아멘.
각자의 삶.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2018년10월3일 수요일 복음묵상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루카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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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어떤 이에게는, 당신의 길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삶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라는 듯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고 하자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뜻 모를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게는 가족에게 인사하고 오겠다 하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역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각자의 삶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각자는 그 삶의 주인공이 되어 줄거리를 만들어갑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어떤 줄거리로 진행될 이야기를 기대하시나요?
훗날 그 이야기에 만족하고 기뻐할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나요?
그 줄거리 안에 하느님은 등장하시나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안에는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을 얼마나 의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야기의 마무리 역시 각자의 몫입니다.
문제는 마감시간을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삶이든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그리고 아름답게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고통 받아도 억울하지 않아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재물과 가족을 잃을 때까지는 그 큰 고통에도 고통을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원망하지 않던 욥이 자신의 몸에 종기가 나니 마침내 하느님께 병 주신 것에 대해 원망하고 태어난 날도 저주합니다.
내가 건강하고 자식이 아플 때는 차라리 내가 아프게 해달라고 보통 부모들이 주님께 기도하기도 하지만 내 몸에 닥친 고통은 견디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은 결국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거라고, 자기 몸이 아프면 자식도 뭐도 없는 거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부모도 있지만 다른 측면이랄까 다른 차원이 있는 겁니다.
사랑으로는 대신 아플 수 있고 죽기까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작동하지 않으면 고통을 감수할 수도 없고 우리의 인내심과 인내력이 고갈되어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욥은 감내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는데 이때 친구들이 찾아와 고통을 당하는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하느님을 변호하며 죄를 뉘우치고 자비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욥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뭐냐고 친구들에게 반발을 합니다.
허나 오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는 어디 있냐고 합니다.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그러니까 오락가락하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욥은 하느님께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반발하는 걸 겁니다.
우리도 종종 그러하지요.
반박할 수 없는 어른이 잘못을 지적하면 잘못을 인정하는데 나보다 더 잘못이 많은 사람이 지적하거나 친구가 지적하면 비록 잘못했어도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반발하게 되지요.
너보다 낫다는 것이며 너한테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감정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잘못이 많으면서도 의인인양 훈계하는 친구에게는 화가 나고, 그런 친구는 고통이 없는데 오히려 의로운 자기가 고통 받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 대해서는 억울합니다.
그래서 욥기의 또 다른 주제는 죄와 벌 사이의 불공정성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죄인임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끽소리 않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면 선한 내가 왜 고통을 받고 나보다 더 죄 많은 사람은 떵떵거리고 사느냐고 의문을 제기케 되는데 욥기는 이런 문제에 답을 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사실 착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더 받는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남을 아프게 하면 몇 배 자신이 더 아프지만 악한 사람은 악한/나쁜 짓을 하고도 별로 괴롭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악한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악덕기업가나 싸이코 패스 환자와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희열을 느끼기에 나쁜 짓을 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고통을 주고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으며, 착한 사람은 더 고통스럽고 악한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악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며 반대로 고통을 받고 고통스럽다고 착한 사람이 불행한 것이 아니지요.
고통이 곧 불행이 아니고 고통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 사랑이 없고 하느님이 없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 그러기에 고통스러워도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믿고 착한 것 때문에 더 고통 받아도 억울해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신앙임을 착한 욥 그러나 고통 받는 욥 때문에 깨닫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욥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너무나도 나약할 뿐만 아니라 주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청할 수도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요구할 수도 없는 실존적인 처지를 한소연합니다. 욥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은 인생이 고달프고 힘겹지만, 아무 말도 들어주지 않고 일체의 항변을 부정하며 하느님의 무결성과 완전성을 내세워 자책만을 인정하라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허망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그저 주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지엄하심 앞에서 뭐라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되내입니다.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 그런데 내가 어찌 그분께 답변할 수 있으며 그분께 대꾸할 말을 고를 수 있겠나? 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욥 9,12.14-1) 친구들의 몰인정과 다그침 속에서 심지어는 주 하느님께마저 인간적인 희망을 두지 못합니다. “내가 불러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해도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16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상해 주실 수 없다는 것과 우리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해 주실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못박으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오로지 주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최우선의 자리에 있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 우리가 신경 쓰고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뿐이라고 제시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우리의 모든 처지를 아시고 위로해주시는 주님께서 여기서는 왜 이리 각박하고 매몰차실까?
주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렇게도 인간의 정과 인간의 현실적인 욕구를 다 뒤로 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선포하는 인간 구원을 위한 기쁜소식, 복음과 주 예수님께서 건설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시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꿈꾸는 이상과 목표보다 우선하고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표를 다 합친 것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는 우리의 꿈과 이상이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다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투신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외치며 다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필리 3,8-9 참조)
착실히 준비된 응답 <루카 9, 57-6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두 가지 형을 보여주시며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철저한 준비와 자기희생이 따른다고 하십니다.
길을 가던 중에 어떤 사람 “주님이 어디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하고, 주님이 사람을 초대하며 따르라고 하시니 “아버지 장사 지내고” “먼저 집에 가서 인사하고” 등 할 일을 다 해놓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사실로 먼저 사람에게는 준비 없이 나를 따라갈 수 없으니 준비하고 따르라 하시고, 다음 사람은 세상일을 다 하고 나를 따를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따르려는 사람은 세상의 의무를 다하고 따르고, 따라야 할 사람은 세상에 얽매이지 말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사제나 수도자는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에 얽매여 살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다주시며 그 나라에 초대하시고 살라고 하십니다. 메시아 구세주가 세상에 오시는데 얼마나 오랜 세원이 흘렀습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인류가 역사를 시작한 지 6,000년 지나서 오시고, 오시고는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그곳에 우리를 초대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첫 설교가 하느님의 나라가 동쪽에 동터 오듯 우리 가운에 오신 하느님 나라에 회개하여 따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의관을 정제하고, 버릴 것 버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순수한 사람의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고 하시며 한번 따른 사람은 뒤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 없는 응답은 미련한 동녀가 신랑을 기다리다 실패한 것처럼 주님을 따름에 실패합니다. 교회나 수도원에 소문만 듣고 호기심으로 들어온 사람 중에는 힘든 수도 생활과 교회의 많은 규정을 이해하지 못하여 포기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준비 과정은 믿음의 삶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수도원 삶의 어려움을 배우고 익히며 주님을 따름에 어떤 십자가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숙명적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 나는 그 의미를 배우고 익히고, 온갖 고난을 극복하는 능력을 키우고 익히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삶을 살아야 주님이 세우신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승리의 장막과 거룩한 산에 영원히 머물러 하느님과 함께 잔칫상에 살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다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리고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는 이에게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하고 말씀하셨고 가족들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이에게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적으로 불효자처럼 중요한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말고, 소중한 가족들과도 비상식적으로 인사도 나누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인간의 도리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내가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는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곧 내 아버지도, 나의 가족 역시도 그 하느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믿음의 쟁기를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쟁기를 잡고 자꾸 다른 것에 한눈을 팔 때 나는 하느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여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다른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버림과 받아들임
김혜종 신부님
누군가를 따른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름에는 두 가지 중요하고도 어려운 삶의 태도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태도는 ‘버림’입니다. 누군가를 따르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버리면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버림의 궁극적 대상은 사실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 자기답게 살지 못하게 만든 지난날의 자신과 이별할 수 있음이 진정한 버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따름의 두 번째 태도가 필요합니다. 바로 ‘받아들임’입니다. 신앙인에게 자신을 버림은 과거 자신과의 단절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자리를 비워둠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과정에서 그분께서 보여주신 가르침과 삶에 대한 시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그 빈자리에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름은 자신을 버림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진정한 따름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생긴 그 자리에 주님의 생각과 모습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자연스레, 따름은 나의 것을 버리고 그분의 것을 받아들이며 닮아가는 삶으로의 순례 여정이 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앞장서서
가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시고
뒤따라 가야할 이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뒤바뀔 수없는
주님과 우리의
자리입니다.
따름의 정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올곧은 정신입니다.
그 어떤 유혹속에서도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오롯한 마음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져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는 먼저
자아를 비워내는
비움의 진리입니다.
뼈저린 혈육의
정까지도
주님께 맡겨드리는
맡겨드림의 진리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그림자까지도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따름은 수단이 아닌
삶의 목적이며
따름은 핑계가 아닌
심장의 뜨거운
고백입니다.
이 순간
쟁기를 잡고
이 땅위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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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를 들어보니 이 가을비를 통해서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선선한 가을 날씨를 맞이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하긴 올 여름은 정말로 더웠고 그래서 많은 분들이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여름이 되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 남량특집입니다. 그리고 극장가에서는 ‘공포영화’가 등장하기도 하지요. 왜 여름에 이런 공포물을 상영할까 싶지만, 실제로 이렇게 무서운 것을 보게 되면 체온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하긴 무서움을 느끼게 될 때에는 서늘함도 동시에 체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런 공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에 인기 있게 방영되었던 ‘전설의 고향’ 남량특집을 볼 때면 무서운 장면에서는 눈을 꼭 감고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상황전개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무섭고 끔찍한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지금 역시 그런 장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을 얼마 전에 실제로 볼 수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거리를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승용차가 심하게 부셔져 있었고 곳곳에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끔찍했고 그래서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큰 사고로 인해서 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얼마나 많이 다쳤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을 어떤 엄마와 어른 아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엄마가 아이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가리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어린 아이에게 나쁜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착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악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많이 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선하고 긍정적인 것들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이 선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는 사람과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장사도 못 지내게 하고, 작별인사도 못하게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의 일이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주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 세상의 악하고 잘못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더 선한 것을 보고 실천해야 하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을 사랑할 때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게 된다(스캇 펙).
내일 싸우자.
어느 날 메뚜기가 길을 가던 하루살이를 때렸습니다. 하루살이는 너무나 화가 나고 억울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기를 그냥 때린 메뚜기를 용서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하루살이 친구 20,000마리를 데리고 메뚜기를 찾아갑니다.
메뚜기를 20,000마리의 하루살이가 포위한 뒤에, 마지막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이니까 소원 한 가지는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자 메뚜기가 소원을 말했습니다.
“애... 내일 싸우자.”
내일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하루살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소원을 들어주면 복수할 수 없고, 안 들어주자니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아무튼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해결의 방법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성공적인 삶을 만들어나가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영원한 행복을 위한 선택과 몰입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은 길입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집을 나서 귀가할 때까지 길을 걷지요. 그렇게 우리는 늘 길 위에 있습니다. 길은 의미와 정서를 발생시키고 만남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무대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살기 위해, 버리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고 계십니다.
길 위의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부르심에 응답하여 함께 걷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길이 어떤 길이며 왜 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자발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으나 어떤 길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9,57-58).
예수님께서 길을 걷다가 만난 사람 중에는 그분께서 부르시자 자기 일을 더 중요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미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9,59-60). 또 따를 의지도 있고, 따르기 위해 애착을 두는 것들에서 떠날 의지도 확고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 얼마나 긴박한 일인지 알아차리고 못한 채 안일한 태도를 보인 사람도 만나셨습니다(9,61).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요?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않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길이나 공연히 헛수고를 하며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자꾸만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행복하게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야하지 않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 나만을 위한 만족을 찾는 자세를 버리고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가치 있는 것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와 소중한 것들을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하느님의 손길을 읽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가난의 길이요, 비움의 길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9,58) 예수님의 길, 곧 운명과 처지를 받아들여 그분과 함께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낭만적인 풍경도 아니요 일시적인 감각의 자극으로 맛보는 감상적 충족감도 아닙니다. 행복은 고통과 어둠을 겪어냄으로써 만나는 선물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버리고 떠나는 길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하느님의 미래를 향해 과감히 자신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애착이 많아 버리지 못하고 생각과 행동이 묶여있다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자유롭게 행복 자체이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애착이 있는 길은 폐쇄되고 말 것입니다. 영(靈)의 숨결이 막혀버리지요.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내 인생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소중한 것을 위해 '즉각적으로' 찾아나서고 '뒤를 돌아봄 없이' 몰입하며 항구히 투신해야겠지요. 주님께서 먼저 부르셨든, 주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어 내가 자발적으로 따라나섰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사랑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망설임없이 걸어갔으면 합니다. 거기에 참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백남기 임마누엘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고인을 추모하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 고인께서는 더 이상 폭력이 없는, 더 이상 아픔이 없는,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면, 더 이상 백남기 임마누엘 어르신 같은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 이 땅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보듬어 주는 세상, 약한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해방을 주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 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롱을 받기도 하고, 십자가를 져야 했고, 창에 찔리고,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이 나의 손이 되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나의 발이 되어 주십시오.’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 길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때로는 그 길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가슴 아플지도 모릅니다. 욥 성인은 그래서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도, 가족들이 행방불명 된 것도, 몸에 부스럼이 생기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이루어지기를 청했습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어르신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함께 연대하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믿음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느 때나 말세나 난세란 말이 오가지만 말그대로 말세요 난세같은 작금의 현실입니다. 새벽 강론 쓰기에 앞서 얼핏 인터넷 뉴스를 살핀 결과, 저절로 한숨같은 고백입니다. 역시 믿음으로 살아갈 수 뿐이 없습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여정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믿음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계속되는 욥의 시련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겪는 욥의 믿음의 시련입니다. 하느님은 욥은 물론 우리에게도 믿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친구들의 말을 받는 욥의 답변을 통해서도 그의 믿음이 환히 드러납니다.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무사하리오?”
오늘 화답송 시편의 탄원시는 그대로 욥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믿음의 힘은 바로 기도의 힘이요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아침에 드리는 저의 기도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주님, 어찌하여 제 영혼을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나이까?”
우리의 기도에 어떤 형태로든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과연 욥은 기도의 대가이자 믿음의 대가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청해야 할 우선적인 것이 바로 기도요 믿음의 은총입니다. 1독서의 욥과 복음의 예수님의 배치가 참 적절합니다. 욥은 예수님의 예표이자 두분 다 믿음의 거인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따름으로 표현됩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은 바로 주님을 따르는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세 사람의 경우를 통해 우리의 주님을 따르는 믿음을 점검하게 됩니다.
1.“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장소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난을 뜻하기 보다는 자유로움을 뜻합니다. 무엇에도 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께만 정주처를 정하고 모든 집착을 버리고 정처없이 자유로이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는 확인성 응답의 말씀입니다.
2.예수님; “나를 따라라.”라는 초대에 대한 두 번째 사람의 반응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가족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를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을 맨 앞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비전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기에 매사 하느님 나라를 판단의 잣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3.“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긴박성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믿음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과거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장소를, 가족을, 과거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영원한 비전인 하느님 나라에만, 하느님만 집착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영원한 비전인 하느님 나라를 알리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바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 자작시 세 번째 연같은 삶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느님 나라 향해 흐르는 여기 지금 이 순간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흐르는 우리 믿음의 여정을 축복하십니다. 아멘.
당신 밖에 없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결혼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서원을 하고 수품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항구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무엇에서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행을 맛보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차마 한 가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달리다 둘 다를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더더욱 되씹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묶이면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오늘 순간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최선으로 다하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음에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수품 때의 마음으로 기쁨이 넘쳐 나야 하지만 그 마음은 꼭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가시밭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고 세상의 것을 더 많이 즐기고 세상 것을 더 달콤해 했습니다. 또 거기에 끌려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상의 것을 더 찾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있는 저에게 그래도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두 마음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하는 제 마음을 당신이 아오니 부족함을 꾸짖어 주시고 당신께 대한 한결 같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장 어리석고 몹쓸 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을 따름과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경우는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 데 모아놓은 것일 겁니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음은 물론 얘기(story)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얘기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없어서 얘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가 궁금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에 따르기를 포기했는지, 죽은 이의 장사는 죽은 자가 치르게 하라는 무지막지한 말에도 따랐는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시다시피 그것은 알 수가 없지요.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사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입니까?
제 생각에 이 교훈은 주님을 특별하게 따르려는 성직자 수도자가 1차적인 대상이지만 꼭 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합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을 따름(Sequela Christi)은 주님을 닮음(Imitatio Christi)과 함께 주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어떤 길입니까?
첫째는 매우 불편하고 불안한 길입니다.
머리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은 먹고 자고 쉴 곳이 하나도 정해지지 않아 불편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 불안하기까지 한 삶입니다.
지난여름 저와 30여 명의 포르치운쿨라 행진단은 그야말로 이런 불편하고 불안한 행진을 하였지요.
어떻게 보면 무모하다고 할 이런 행진을 왜 하고, 뭣 하러 이런 고생을 사서 한 것이며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길을 끝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떤 불편과 불안도 무릅쓸 수 있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불편과 불안의 길이지만 열정과 열망의 길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죽은 자의 장사는 죽은 자가 치러야 하는 길입니다.
사실 머리 기댈 곳 없는 불편하고 불안한 길을 가는 것은 자기가 힘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무릅쓸 열정이 있기만 하면 되는 거지만 죽은 자의 장사마저 팽개쳐야 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문제고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팽개치고 망쳐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개인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아픈 길이며 인간으로서 해야 할 제일 크고 중요한 일조차도 팽개칠 정도로 주님을 따르는 일이 제일 중요한 사람만이 떠날 수 있는 길입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성당일 때문에 거기에 빠지는 거지요.
세 번째로 이 길은 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는 과거지향적이지 말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말씀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관계의 재편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면 옛 관계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모든 애착을 끊는 것, 이것이 큰 아픔이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픔을 주며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게 더 큰 아픔이지요.
그러니 이 길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끊어야만 하는 매정한 길이지만 이 매정한 짓을 할 정도로 주님을 사랑해야만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아무튼 주님을 따르는 길은 불편함은 무릅쓰고, 인간사 가장 중요한 일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포기해야 하는 길이며,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가장 어리석고 몹쓸 길입니다.
<“나를 따라라.”> (루카 9,5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세 사람의 유형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어디가시든 따라가겠다고 자신합니다.
두번째 사람은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부르시는데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네요.
세번째 사람도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부르시는데 가족들에게 작별인사 하고 오겠다네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해보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불러주셔야 한다는 것이 첫번째 조건인가 봅니다.
두번째 조건은 그분이 불러주실 때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버려 두고 즉각적으로 따라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그분이 부르실 때는 지금 오라는 것이지 좀 있다가 오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런저런 것을 해보겠다고 감히 욕심 부리지 맙시다.
그분이 나를 부르시어
"지금 기도하여라.
지금 저 사람을 도와 주어라.
지금 어디를 좀 다녀오너라." 하실 때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그분의 참 제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벗들과 함께 하는 피정>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피정을 합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보듬기 위해서 우리는 피정을 합니다.
우리는 피정을 마치고 고결한 다짐을 새기고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피정 전의 일상과 피정 후의 일상은 사뭇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피정중입니다.
언제 끝날지 어떻게 끝날 지 아무도 모르는 긴 피정 중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청정한 곳에 고요하게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깊숙이 들어와 죄 없는 벗들의 처절한 고통과 권력과 재물에 눈먼 탐욕이 빚어내는 광기를 온 몸과 마음으로 숨 쉬고 있습니다.
고요한 성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는 대신
삶의 터전과 일자리를 빼앗긴 벗들의 쓰라린 현실 안에서 여전히 피 흘리며 죽어가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벗들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한 구석에 곱게 담아놓는 대신
비록 짓밟힌 이들 고통 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힘과 격려가 되어주지 못한다 해도
그저 함께 있음만으로 그저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것만으로 그저 함께 맞고 함께 외치는 것만으로 예수님께서 보듬으셨던 작은이들을 또 하나의 우리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그들에게 벗으로 내어놓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대신
가난한 벗들을 짓누르는 이들에게 돈과 권력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선한 벗들을 주저 없이 억압하는 이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더 늦기 전에 이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참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호소합니다.
우리는 지금 피정중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하느님과 벗들과 함께 하는 피정중입니다.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서 말조차 잃어버린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입이 되어 외칩니다.
쓰러진 이웃들을 만나 부둥켜안고 함께 아파하고 다시금 희망으로 서로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처절한 죽음의 길 그러나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가야할 길을 가야만 하네.<루카,9/57-6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가는 세월을 아무도 막을 수 없듯이 가야할 길을 아무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일초도 뒤로 돌리지 못하듯이 지나간 시간은 지나갔으며 다시 돌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때를 놓치면 다시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고 부르심을 받고 되돌아가려는 사람은 계절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는 길을 중단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길을 가려고 할 때 장애가 있다고 중단 하면 길을 끝까지 갈수 없습니다. 자기 욕심 다 채우고 길을 가려고 하면 길이 막힌다고 하시며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음 사람이 지내도록 하라고 하시고 작별인사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애착은 하느님의 길을 가는데 장애됩니다. 출가한 여인이 자기 집을 생각하면서 시집을 온 곳에 마음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 생횔을 하지 못합니다. 60년을 주님의 길을 달려온 저는 후회 없이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분명이 오늘 참고가 되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역사를 뒤지며 이러니저러니 하거나 자기 지난 공적을 앞세워 자기를 들어내려는 사람도 발전이 없이 뒤로 역사를 돌리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가 현실성 있는 행동을 하면 그 현실에 적응되도록 받아드려야 합니다. 이런 말 저런 말에 흔들려 자기중심을 잃으면 아무것도 성취 되는 일이 없으며 제자리에 자신을 묶어 놓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시어 변함없이 자비를 베푸십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부르심에 마음속으로 믿음을 가지고 응답하는 삶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삶입니다. “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앞으로 가려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중지 합니다.
길을 가려는 사람은 짐이 가벼워야 하고 가야할 곳을 정확이 알아야 합니다.
나를 부르신 분이 전능하신 분이시고 변함없는 분이시니 하느님을 떠나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가는 길은 자유와 평화와 생명이 넘쳐흐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쟁기와 십자가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돌려드려야 할
봉헌의 모든
여정입니다.
결코 낯설지 않게 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아직도 많은 미련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미련과 집착에서
떠나는 법을
예수님에게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떠날 수 없기에
따를 수도
없습니다.
떠나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떠난 사람은 결코
뒤를 돌아 보았어는
안됩니다.
부르심이라는 땅을
일구어내기도
짧은 우리의 시간입니다.
분별과 식별이
필요합니다.
떠남은 새로워짐이요
따름은 머무름의
기쁨입니다.
쟁기처럼 갈아엎어야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아엎을 수 없기에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쟁기질에 필요한 것은
용기와 항구함입니다.
귀한 것은
가슴으로 갈아엎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지금 이순간입니다.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해
기도로 갈아엎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부르심의
분열증세를
치유할 수 있는 건
목적지를 향해 다시
쟁기를 잡고
앞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무 많은 것에
묶여 있는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부질없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우리의
오늘입니다.
온 힘을 다해
우리의 집착을
갈아엎기에도
부족한 우리네
시간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라는
쟁기를 잡고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을 때
가장 살아있는
오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따르는
이들의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소중한 오늘을
깨우쳐줍니다.
허망한 욕망을
내려놓는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예수님에게서
다시 배우십시오.
우리의 잘못된
방식이란
오늘이라는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것입니다.
참된 시간이란
바로 이순간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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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어떤 분의 차를 얻어 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 안에서 도로에 자전거 탄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워낙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어떤 자전거를 타고 있는지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지요. 이런 저를 보며 차를 운전하시던 이분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저도 도로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교통이 이렇게 복잡한데 몰상식하게 자전거를 타고서 도로로 나오다니요? 저 사람들은 도대체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기본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기만의 기본을 세워서 그 기본에 맞으면 좋고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솔직히 저는 이 분의 말에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았습니다. 마치 제가 욕을 먹고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아마 그분은 제가 자전거 좋아하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래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자신만의 기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기본도 인정하면서 서로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만이 어쩌면 하느님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실까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실 분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이와 조화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할 것 없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시지요. 이 말씀을 들은 어떤 이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달라고 청하고, 또 다른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청을 매정할 정도로 거부하시지요.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셨던 주님께서 왜 이렇게 매정하실까요?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대신 세상의 이런 면, 저런 면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만 주님을 진정으로 제대로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만 사는 것이 기본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이런저런 모습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기본입니다. 이렇게 기본을 잘 지키고 살아가는 나. 그래야 주님을 가장 잘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램프를 만들어 낸 것은 어둠이고, 나침반을 만들어 낸 것은 안개고, 탐험하게 만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그리고 일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의기소침한 나날이 필요했다(빅토르 위고).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
선배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또는 앞차가 차량의 흐름을 방해할 때면 그 차를 향해 축복을 빌어준다고 합니다. 아주 의외였습니다. 보통 운전할 때면 항상 내가 중심이 되지 않습니까? 다른 운전수가 실수를 하면 그렇게 욕을 해대지만, 자신이 실수를 하면 ‘그럴 수가 있지’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이 신부님께서는 욕하는 대신에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그렇게 한 번 해보았습니다.
갑자기 차가 끼어들면 축복을 빌어주고, 차의 흐름을 막아도 축복 주고, 몰상식한 운전수를 봐도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금방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운전할 수가 있더군요.
사실 화를 낸다고 또 경적을 울리면서 빵빵댄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만 불편해질 뿐이지요. 반대로 축복을 빌어주고 웃으면 이 역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편한 마음,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과연 축복을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욕을 하는 사람입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축복을 빌어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전진 신부님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지난 삶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고유한 성소를 살아가야 할 텐데, 성소가 꼭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기쁘고 감사하게 보람 있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기 성소를 살아가는 참된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삶이 사제나 수도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혼해서 가정생활을 하는 삶일 수도 있고, 사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활동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선물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평화는 결점과 부족함을 메우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현재에 충실할수록 우리는 보다 자유로워지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 보다 너그러워지게 됩니다. 자기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선물로 받아들이며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딱히 어느 특정인이 등장하고 예수님과 사건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불특정 다수가 등장하는 듯합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각기 다른 세 사람이 등장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묵상을 해도 좋겠습니다만, 어떤 면에선 다소 막연하긴 하나 복음 관상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복음 관상을 위한 배경으로는 적절한 상황을 설정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혼자 계실 수도 있겠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각자 자기에게 다가오는 대로 장면을 그려보면서 각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이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디든 예수님 가시는 곳이면 따르겠다고 자못 호기롭게 말하고 있는데 그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예방주사를 놓고 계십니다. 이 사람의 표정이나 풍기는 분위기, 그 사람됨 등을 살펴보면서 스스로를 비춰보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시는데 다른 조건을 달며 멈칫거리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시면서 당신을 따를 것을 독려하십니다. 이 장면에서도 이 사람의 인간됨 등을 살피면서 예수님께서 그런 이를 향해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계시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면서도 선행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모습 등을 통해 사람됨을 살펴보고 이런 이를 향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시며 이끌고 계시는지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반추해 보면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을 따르는 세 가지 모습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자세는 말대로라면 아주 훌륭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으로 보아 의지는 충만한데 주님을 따르는 어려움은 감안하지 않은 의지인 듯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재지 않는 사람, 그래서 충동적인 사람.
의지 하나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지는 크게 따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실수도 많이 하지만 일을 잘 저지릅니다.
잘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일을 많이 합니다.
성공과 실패를 크게 생각지 않고 의미를 많이 따지는 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의지만 내세우지 말고 당신을 따르는 것은 동가식서가숙해야 하는 고된 삶임을 일깨우십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먼저 따르겠다고 나서지 않고 주님이 따르라고 해야 따르는 조심 형입니다.
앞의 충동 형과는 정 반대입니다.
따르라는 초대에 따라 나서겠다는 것만으로도 장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유형이지요.
이런 사람은 사실 너무 재다가 아무 것도 못할 수 있습니다.
하기도 전에 끝을 가늠하고, 출발하기도 전에 도착을 예상합니다.
따라 나설 주님보다도 자기의 성공과 실패를 먼저 따집니다.
그래서 먼저 따질 것은 ‘주님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라는 뜻에서 주님은 먼저 아버지 장례를 치루겠다는 그에게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세 번째 부류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있기는 한데 두고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도 좋고 두고 떠나는 사람도 좋아서 떠나기도 어렵거니와 따라나선 다음에도 자꾸 뒷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의가 바르고 누구에게나 다 좋은 사람이라서 선택과 집중을 못하는 사람이며 그래서 결단력 있게 자기 길을 가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시는데 사실은 뒤만이 아니라 옆도 보지 말고 첫째 부류의 사람처럼 오직 앞만 보고 가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고픈 열망이 크고 강해야 하고, 매정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끊고 미련 없이 떠나야 하며, 따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수없는 장애와 고달픔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를 돌아보면 지금까지는 잘 따라온 것 같은데 그것은 겉으로 볼 때 그런 것일 뿐이며, 매일 새롭게 주님을 갈망하고 매일 새롭게 솟아나는 미련을 끊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많은 저를 오늘 다시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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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기 암 환자가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안 해본 일이 많은 건 후회하지 않아. 제대로 해본 일이 없는 게 정말 후회돼.”
이 암 환자의 후회가 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인생의 마지막에 이러한 후회를 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회되는 삶이란 안 해본 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해본 일이 없다는 것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말로서만 그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래서 더 큰 후회를 하게 되고, ‘나는 안 돼.’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후회를 하기 전에, 또한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 전에 먼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명 특허를 팔아 엄청난 수익을 올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가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의 성공은 60세가 넘어서 얻은 최초의 성공이라는 것이지요.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이 발명가에게 성공의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답니다.
“저는 인생이란 항상 축구 경기처럼 전반전이 있고, 후반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비록 전반전에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반전까지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경기의 승패는 전반전이 아니라 후반전에 결정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전반전에 5:0으로 지고 있다고 해서, 이 경기를 진 것이라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5점을 만회하고 역전시킬 수 있는 후반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려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달라고 청하며, 또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 당연히 들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지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인간사에서 당연하게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을 왜 이렇게 반대하셨을까요? 바로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야 함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순간에 제대로 해본 일이 없다면서 후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 있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또 미래를 걱정하다가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승리의 여신은 노력을 사랑한다. 노력이 없는 인생은 수치, 그 자체이다.(M 마르코니)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이동연,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중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풀어야 할
삶의 숙제들을 떠 안고 살아간다.
숙제를 두려워하면
성적이 안오르는 것처럼
삶의 퍼즐을 두려워하거나
짜증내면 인생은 더 고달프다.
현실의 퍼즐을 보고 미리 겁을 내거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그 해답을 찾는
인생은 퍼즐이다.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최악의 결과를 속단하지 말고
최선의 결과를 생각하라.
퍼즐에는 이미 해답이 있으며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하라.
소피아의 성경
이난호
동서 소피아의 성경이 군데군데 뜯겨 있었다. 웬일이냐니까 어머님이 뜯어 잡쉈다고 한다. 이어 그는 성경을 뜯어 잡숫고 돌아가신 어머님은 더 바랄 게 없을 거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또 뜯겨진 대로 그냥 두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시집오던 날부터 어머님이 타계하시기까지 줄곧 맏며느리인 나 대신 어머님을 모셨다. 어머님의 마지막 십 년 가까이는 치매로 진종일 밥과 엄마 두 단어만 뇌며 닥치는 대로 씹어 삼키고 배설하는 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동서는 그분의 밥이요 엄마였다.
그동안 동서는 천주교에 입교했다. 입교 전에도 그는 엄마만큼 대범하고 힘찼다. 어머님은 타계하기 이틀 전에야 잠깐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머님은 성하셨을 때의 차분한 표정과 나직한 목소리를 되찾고 무섭게 탐하던 밥그릇을 밀어내셨다고 한다. 의아해하는 동서에게 밥그릇을 밀면서 “엄마, 밥 많이 먹어. 그리고 아프지 말어.” 성하실 때의 그 어투 그 음성으로 천연덕스럽게 말씀하셨단다.
나는 단박 동서의 어설픈 구어체 흉내에서 어머님의 목소리, 어머님의 유언을 읽었다! 그것은 당신 생애 마지막으로 반짝하는 순간을 틈타 혼신으로 당신의 ‘엄마’에게 드린 기원이요 덕담이었다. 동서는 혼이 빠져나간 어머니의 빈 몸을 갓난아이처럼 먹이고 씻기고 안았던 사람이다. 혼이 뜬 ‘몸’의 허망함을 십 년 가까이 묵상했던 사람이다. 말 그대로 예수님을 따라 산 사람이다.
나는 동서 앞에서 늘 할 말을 잃는다. 짧은 순간이나마 어머님께 맑은 말미를 허락하신 분에게 성호를 긋는다. 문득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시었으나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의 고독을 이해할 것 같다. 나는 동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사랑으로 가는 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름과 관련한 세 가지 경우에 대한 얘기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스스로 따르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 장사를 치루고 따르겠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장사는 죽은 이가 치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가족에게 인사하고 따르겠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세 사람 중에 누가 예수님을 결국 따르게 되었는지 오늘 복음에서는 그 결과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는 진지하게 이에 대해 자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반대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르지 않겠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 따르겠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지금 바로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길, 가시밭길이어도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 죽음까지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성찰을 하니 하루를 시작하는 이 새벽 참으로 슬픕니다.
40년 가까이 수도생활 한 것이 헛짓을 하고 허송세월 한 것 같아 슬픕니다.
주님은 저 앞에 가시어 가물가물한데 저만 혼자 한참 뒤처져 갈 길 아득하니 외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을 따름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방자하지 않고 겸손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소풍이 아니라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므로 들떠서 가지 않고 인내와 열정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말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사랑과 포기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요즘 길에서 차를 볼 때마다 공부 끝내고 와서 어떤 차를 사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부좌 때 2000cc 급의 차를 탔는데 강론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가난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1600cc 정도면 문안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사제는 가난해야 하니 돌아오자마자 딴 생각이 들기 전에 마티즈와 같은 더 작은 차를 사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옵션은 밖에서 보이지 않으니 좋은 사양으로 선택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것은 가난도 아니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무엇처럼 생각이 되었고 내 자신이 가식적으로까지 느껴졌습니다.
신학생 때는 차도, 핸드폰도, 옷도 사지 않고 참으로 가난한 사제의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정신이 사라지고 ‘사되 남들이 보기에 적당한 수준으로...’라고 하며 세상과 타협해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차와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신부님도 알고 있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 결국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조금씩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40대 전후로 보이는 어떤 자매님이 면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얼핏 보니 결혼을 못 한 것 같았고 그래서 좀 외롭고 날카로워 보였습니다.
그 자매님은 그 본당에 처음 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냥 성당을 지나다가 갑자기 그 성당에 들어가 보좌신부를 만나보라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 안에는 마귀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완전 전설의 고향 분위기였지만 기세에 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집무실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자매가 사는 곳을 틀리게 이야기 했더니 목소리까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이 안 되게 위협적으로 변하면서 그것도 못 기억하느냐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일면 겁도 났지만 겁내면 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당신은 한 번 들은 것은 다 기억합니까?”하며 도리어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물론 아니지요.”하며 좀 수그러들었습니다.
물론 예상대로 노처녀였고 직업은 보험설계사였으며 마귀와 이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밤에 함께 잠자리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께 “사실 마귀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허락해서입니다. 내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마귀는 물론 하느님도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귀가 내 자신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이유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외롭지 않게 관계 맺으며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지만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을 버리고 외로워져서 결국엔 마귀라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쪽을 받아들이느냐가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매님이 마귀를 버리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싶으시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교만과 육정과 욕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결국 자매님이 순종과 정결과 가난을 선택하시면 마귀는 떠나고 하느님과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매님이 지금 원하시고 있는 것들을 계속 원하신다면 마귀는 항상 자매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제 마귀와 육정과 재물의 욕심을 끊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는 ‘나는 그것들을 끊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질 수 없을까요?’하는 뜻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배가 하나는 강을 따라 내려가고 하나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두 배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 배에 올라타면 다른 배는 포기해야 합니다. 신앙이 그렇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육체적인 편안함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결정을 하라고 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않는 자녀는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완전히 떠나라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그리고 자신이 버리고 온 것들을 뒤돌아보는 사람, 특별히 가족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영웅적인 포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도 십일조를 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쩌면 적당히 타협하여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외에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에 대해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면 자신을 온전히 잊어야합니다. 자신을 먼저 찾으면 상대를 잊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 때문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한 포기를 전제로 하고 타협이란 참사랑을 오염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이게 당신께서 십자가상에서 모범을 보이셨던 영웅적인 포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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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용서의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러한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가 어떤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관심을 끌고 싶었는지 아버지의 코를 잡고 넥타이를 입으로 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뺨을 힘차게 때립니다. 바로 이 순간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까요?
“나는 내 아들을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이 어린아이를 집어 던질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어린아이이기에 무례한 행동을 할지라도 용서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행동을 다 큰 어른이 했다면 어떨까요? “나를 이렇게 모욕하다니…….”라고 말하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상대의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즉, 10살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아니지요. 이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어린이일 때에는 그 눈높이로 어린이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상대방이 어른이 될 때면 상대방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만약 주님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는 주님이기에 우리들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으신 분이기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첫째 자리에 반드시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지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주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청을 거절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장례도 치루지 않는 불효막심한 자녀가 되는 것일까요? 또한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몰인정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눈높이를 맞추시는 주님께, 우리 역시 눈높이를 맞추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내 자신의 눈높이에 모든 기준을 맞추기보다는 주님의 눈높이에 맞춰 나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주님처럼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세운 눈높이가 아니라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는 오늘을 만따뜻한 이웃('좋은 생각' 중에서)
수년 전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우편집배원, 조셉 룰랭 초상화' 전이 열렸다. 겨우 7점의 초상화들로 특별전을 연 것을 보면 고흐와 룰랭의 인연이 남달랐음을 짐작케 한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고흐는 1888년 아를로 내려갔다. 그떄 우편집배원이던 조셉 룰랭은 고흐에게 동생 테오의 편지와 세상의 소식을 전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 호탕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했던 그는 가난해서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고흐를 위해 아내, 아이들과 함꼐 초상화 모델이 돼 주곤 했다. 고흐는 룰랭 가족을 만나면서 진정으로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을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나 부인의 초상화에는 고흐 특유의 소용돌이, 약동하는 붓 터치가 없고 녹색, 연두색, 노란색 등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색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무엇보다 룰랭 부부는 고흐가 고갱과의 다툼 끝에 귀를 잘랐을 때 그를 정신병원에 데려가 진료받게 하고 입원한 동안 돌봐 주었다. 퇴원 이후엔 아침 식사를 들고 고흐의 작업실을 찾아가 함께 먹으며 고흐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룰랭이 마르세이유로 전근가게 되면서 그들은 헤어져야 했다. 여전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만약 룰랭 가족이 평생 고흐의 이웃에 살았다면 고흐가 자살하는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늘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소외감에 시달리던 그가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친구를 이 세상에서 만났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수도생활이든 세속에서의 신앙생활이든 어려움은 마음이 갈릴 때 일어납니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저기에 있는 경우로, 주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옆으로 뒤로 한눈팔 때가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아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마음이 갈리면 에너지도 분산되고 갈라진 틈으로 온갖 유혹도 들어와 마음이 들떠 살기 참 힘듭니다. 그러니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마음이 갈리면 살기 힘들지만, 몸이 약하고 병이 있어도 마음만 주님을 향해 모아져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낼 수 있습니다. 진정 믿는 이들은 주님을 따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에 마음 또한 단순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연연하거나 온갖 세속 욕심에 휘둘릴 때 삶은 복잡해지고 혼란해집니다.
저절로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에 빠지고 불평불만도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니 때로 과일나무 전지하듯 이런저런 불필요한 것들은 정리하고 삶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가려버리는 것들은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삶이 어렵다하여 지난 추억에 머물거나 탈선하여 방황해선 안 됩니다.
지금 여기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타개해가면서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여 또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여기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김경숙 수녀님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ㄴ)라고 했다.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거처할 곳도 없이 하루하루 생활하셨다. 가난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다.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쉴 곳도 없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나가며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고통이 닥치면 우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이리저리 방황하고 피할 방법은 없는지 찾게 된다.
우리 시설에 입소할 때는 만신창이의 몸이었던 이들이 점점 안정을 찾고 건강을 회복해서 시설 밖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퇴근 후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잠잘 곳도 없었는데, 이제는 따뜻한 밥을 해놓고 기다리는 사람과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해요.” 찬바람 몰아치는 추운 겨울 몸 아프고 배고프고 이야기할 사람도 거처할 곳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 아픔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 화려하고 부유한 주님을 기대하기보다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가난하고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과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병환 신부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께서 당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다.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보금자리를 얻고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을 때 그 사람이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장례는 아들에게 중요한 도리요 윤리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를 거부하시는 것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도리와 윤리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다. 훗날 예수님의 수난을 보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박해와 방해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곧 죽음을 각오하고 하느님 나라 소식을 전하는 길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훗날 예수님의 삶이 그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 도리와 윤리에 얽매이지 말기를 바라신다.
또한 예수께서는 집에 가서 작별인사를 나누게 해 달라는 사람에게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라고 하신다. 열왕기 전서 19장 20-21절을 보면 엘리야는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엘리사에게 집에 가서 모든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런 연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가 되어 엘리야를 따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그 순간부터 모든 인간적 일들을 미련없이 끊어버려야 한다는 단호함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십자가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인간적 정리에 끌려서도 안 되고, 과거에 미련을 가져서도 안 된다. 인간사의 인연을 끊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묵묵히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투신(投身)과 투심(投心)
조성풍 신부님
도시에서 생활하는 내가 쟁기를 이용한 밭갈이 장면을 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기억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쟁기질을 할 때 잠시 한눈을 팔거나 목표점을 놓쳐버리면 밭이랑과 고랑이 고르지 못하고 제멋대로의 모습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눈을 팔거나 목표점을 잃어버리면 방황하게 됩니다. 더구나 뒤를 돌아보고 있으면서 올바른 쟁기질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거의 삶은 중요합니다. 지금의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빠져 있으면 결코 현재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현재는 다가올 미래의 과거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라는 수렁에 빠지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삶에 충실했으면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다가올 현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를 보람되게, 그리고 미래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오늘 지금이라는 현재에 온전히 투신(投身)과 투심(投心)을 다했으면 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수사님께서 남기신 유품 한 박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공동체에서 그간 모시고 있었던 할아버지 수사님의 임종과 장례식 때문에 한 몇일 바빴습니다. 돌아가신 수사님께서는 첫 한국 살레시오 회원이셨고, 한 평생 낮은 곳에서 굳은 일만 골라해 오신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돌아보니 수사님은 젊은이들로만 이루어진 저희 공동체에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기나긴 투병생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늘 장난스런 얼굴로, 손을 꽉 쥐시며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던 재미있던 어르신이셨습니다.
수사님을 묻고 돌아와, 수사님께서 머무셨던 방에 들어갔었는데, 어찌 그리 황망하던지요. 수사님께서 남기신 소지품을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사님의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고 떠나신 것은 겨우 낡은 옷가지 몇 벌, 이젠 구식이 된 라디오 하나, 쓰시던 안경, 틀니, 다 합해서 한 박스도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당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 않으셨던 분, 거의 외출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시며 공동체 안에서 머무르시던 분, 단 한 번도 공동기도에 빠지지 않으셨던 분, 언제나 먼저 팔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삽을 드시던 분, 참으로 좋은 모범을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건강문제로, 또 성소문제로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결국 ‘떠나기로’ 거의 마음의 결정을 짓고 수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수사님께서는 길게도 아니고 딱 한 말씀만 해주시더군요.
“서원한 수도자가 가긴 어딜 가! 그냥 계속 가! 가다보면 길이 생겨!”
단 한마디 말씀, 단순한 말씀, 투박한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선배로서 방황하는 후배에게 건네주신 참으로 값진 말씀이었습니다. 수사님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그 말씀을 이제 저는 후배들에게 다시 건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도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때 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었건만,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이쪽에 한 발, 저쪽에 한발,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주 돌아다보니 삶이 비뚤 비뚤, 흔들리고 방황하기 마련이지요. 뒤를 돌아보느라 앞에 있는 암초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된통 크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뒤를 돌아보다 큰 나무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기도 합니다.
한 평생,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하셨던 수사님, 아무리 큰 풍랑과 시련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던 바위 같던 수도자, 그리고 영예롭게도 가난하고 겸손한 수도자의 신분을 간직한 채 삶을 마무리하신 수사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수사님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서원한 바를 죽기까지 지키겠다는 투철한 수도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앞만 바라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 안식처, 하느님
이성우
사람의 아들이 머리를 두고 쉴 곳은 어디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내가 편히 쉴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내가 쉴 곳은 아버지 품이고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나는 오직 그곳에서만 머리를 두고 쉴 수 있습니다.
나의 안식처는 바로 하느님뿐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보금자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나의 안식처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람, 힘, 명예, 재산, 권력, 지위 등등, 그 어느 것도 나의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지도 못하는 것에 내 인생을 걸고 나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편히 쉬지도 못하는 그곳에 내 모든 것을 걸고 가고 있다면, 잠깐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가?
나에게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가?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 때로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영원한 안식은 하느님뿐이시고, 근본적인 행복의 원천도 하느님뿐이십니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일생을 어디에 가치를 두고, 어떻게 보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시어머니의 틀니
홍선미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아쉬운 점들이 자주 떠오른다. 내가 실수로 떨어뜨려 금이 간 시어머니의 틀니를 즉시 고쳐드리지 못해 오래 불편해하셨던 것도 그 중 하나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너나 잘해라.” 마음 아플 때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를 이해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 그분은 이미 훌륭하게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셨고, 내가 그 의미를 받아들여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면 어머니는 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거라고.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시작되었을 즈음 어느날이었다. 나의 부주의로 남편과의 관계에서 그동안 쌓였던 소원한 것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마침 아들도 사춘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던 터라 모든 것이 내 못난 탓인 것만 같았다. 먼저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나를 초대하셨다. 뒤돌아보지 말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사람들은 늘 자신의 생각 속에 머무른다. 그 안에서 궁리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 생각이 우리의 운명도 되고 굴레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생명의 길이다. 예수님은 쟁기를 들고 뒤돌아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생명의 길을 따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데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존재론적인 결단이 요구됩니다.
홍성만 신부님
어제에 이어 오늘의 복음에서도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마음이 굳히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토록 마음이 무거운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접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의 속마음은 아마 이러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네가 나를 따르겠다고?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길인데, 세상의 일들은 완전히 포기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이렇게 끝내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존재론적인 결단이 늘 요구됩니다.
그만큼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내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데 나를 가로막는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이 유혹과 타협하지 마시고 앞만 보고 나아갑시다.
"쟁기에 손을 재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힘차게 주님의 뒤를 따르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
강영구 신부님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세 사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떠돌이다.
너도 무소유(無所有)의 자유인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출가하여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따위의 인연을 끊었다.
너도 모든 인연의 끊을 끊고 무애인(無碍人)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서 현재에 충실 하는 사람이다.
너도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겠느냐?”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자유를 누리는 길이자 부요하게 되는 길입니다.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학연(學緣) 따위 인연 묶여 편 가르고 이익을 추구하는 생활은 죽은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혈연(血緣)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대자비를 실천하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과거는 오늘을 있게 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딛고 서야할 소중한 발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을 잡혀 미련과 회한(悔恨)에 빠지면 현재를 잃게 됩니다.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모든 것을 실리 위주로 따지고 처신하는 현대인들에게 전부를 요구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루가 9,57-62]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난다. 즉, 첫번째 사람에게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 조차없다." 하신 말씀이요, 두번째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신 말씀이고, 세번째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첫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따르려면 "희생"을 각오 하라는 말씀이다. 즉, 짐승에게는 그들이 안식을 누릴 굴과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만, 당신은 그러한 안식처, 휴식처를 가질 수 없을만큼 희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구도 거짓 구실에 속아서 예수를 따르도록 설득 당했고, 사기 당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실에 매혹되어 신뢰하며 따랐으며,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현실의 모든 것을 뛰어 넘는 하늘나라의 이상을 보여 주었고, 그것을 취득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요구보다 더 큰 노력과 희생이 요구되기에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두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얼른 듣기에 무자비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들의 풍습에서 보면, 그의 부친이 죽지도 않았고 죽어 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에게 부친이 있는데, 그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하는 지금 당장 따르기를 핑계대고 미루는 표현의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요점은, "모든 일에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미루다가 놓치면 목적하는 바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다.
심리학자들도 말하기를 기분이 좋을 때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을 일으키기가 점점 어려워 진다고 한다. 예를들면,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지!" 하고 마음 먹었는데, 그 순간에 쓰지않고 다음날로 미루면, 그 편지는 그때 마음으로 쓰기가 어려워 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번째 사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즉,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자가 밭이랑을 곧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고자 하는자는 석양을 향해서 걷는자가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앞일에 몰두하는 적극적인 생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안 하겠다는 말
남상근 신부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또 다른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려 왔습니다. 그 역시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루카 9, 61).
불치의 질병 중, ‘나중 병’이 있습니다. 나중에, 다음번에, 다음 주부터, 내년부터, 지금은 말고, 조금 후에 등등. 생각해보면,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좋은 일들, 그 많은 하고 싶은 일들이 무산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하고 싶지 않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까지는 이렇게 하고 내일부터 할래, 이번 학기까지는 놀고서 다음 학기부터 공부해야지, 지금은 말고 나중에, 다음번부터. 다음에는 또 다음이 있다고 유혹받을 것입니다. 내일이 오면 또 내일이 있을 거라고 속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원하십니다.
나의 지금은, 나의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그 누군가가 그렇게 누리고 싶었던 내일이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는 삶
배광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님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교황주일입니다.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교황님으로 칭송받는 요한 23세 교황님은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교회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과감히 교회의 썩은 환부를 제거하려 하셨고, 가톨릭 교회의 이름처럼 보편된 못브의 교회를 만들려 애쓰셨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창문을 열고 숨통을 트이게 하셨습니다.
짧은 5년간의 임기 중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위대한 공의회로 평가받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자주 과거에 아주하여, 그 영화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들을 향하여 엄한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려는 교회의 으뜸 지도자의 살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썩은 냄새가 나는 교회의 창문을 열게 된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1.12)개막연설에서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만 매달리면서 귀중한 보물을 지키려는 태도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제게되는 과제를 알고 단죄보다는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현 상황을 인식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것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움직이고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고, 이 시대의 정당한 요구를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세상에 선포되고 인식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스승 예수님의 삶을 따랐던 바오로 사도는 신분과 남녀의 차이가 분명했던 그 옛날, 놀랍게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
그리고 스승님께서 사셨단 자유와 해방을 위한 삶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세례받은 거 무를 수 없나요?
이기양 신부님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루는 어느 신자 한 분이 저를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세례 받은 것을 도로 무를 수는 없겠습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더러는 슬쩍슬쩍 거짓말도 좀 하고, 앞으로 모르는 척 하고 뒤로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있는데, 천주교 신자가 되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세상살이가 너무나도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니 오히려 신자이면서도 세상과 전혀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과 반대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신자들은 이 세상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많은 갈등과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신자의 길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6-17)며 신자들이 살아가야 할 길이 세상과 다름을 강조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며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의 장사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작별인사 조차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당신을 따르는 일에만 진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는 순간 농부로서 가장 중요한 소는 잡아서 제물로 바치고 쟁기는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함으로써 이제는 농사일도 과거지사라는 결심을 드러내며 엘리야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무섭게 결단을 하여도 쉽지 않은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세례성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지만 세상의 한복판에 살기에 쾌락과 돈과 권력 등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 나도 모르게 흔들리고 유혹에 빠져들게 되지요.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스티븐 지라드'라는 대부호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토요일, 그는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일 정상 출근해서 오늘 도착한 선박의 짐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갑작스러운 업무에 직원들은 투덜거리며 불평들을 늘어놓았습니다. 못마땅해 하며 흩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한 청년이 지라드 앞에 다가와서 정중히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내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저는 나와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을 그만 두게."
이렇게 청년은 그 직장에서 해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고가 된 후 청년은 3주간이나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다녔으나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필라델피아 은행 총재가 지라드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 좀 해 주게나."
순간적으로 지라드의 머리 속에는 몇 주 전에 해고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지라드가 그 청년을 추천하자 은행 총재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 청년은 자네가 해고하지 않았는가?"
"물론일세. 그러나 내가 그 청년을 해고한 것은 사람이 나쁘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네. 주일에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해고한 것일세.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바꾸지 않던 그 청년은 믿어도 좋은 사람일 걸세."
그렇습니다. 결국 청년의 굳은 믿음은 그를 보증하는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는 신자들은 신앙과 세상의 요구에 갈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따를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에 걸맞게 살 것을 결심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만을 따르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더욱 정진하여 주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며, 특히 교황주일을 맞이하여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고 주님만을 따르는 교황님께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려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불러내려 불살라 버리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예수님을 따르겠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식구들과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보도하는 문서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구약성서를 잘 아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그들이 한 새로운 체험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분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향해 가셨고 그것은 하늘에 올라가시는 일이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구약성서(2열왕 2,1)는 예언자 엘리야의 죽음을 하늘에 올라간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분노하여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말하는 것은 구약성서 열왕기 하권(1,10. 12)에서 빌려 왔습니다. 사마리아의 왕이 엘리야를 잡으러 군사를 보내었더니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언자들은 복수하고 벌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을 꾸짖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자를 고쳐 주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생활 조건이 개선되는 것도, 경제적, 사회적 수준이 격상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도 외면하는 패륜아가 되라는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여기서 죽은 이는 하느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같은 루가복음서에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갔다가 폐인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15,24).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라’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죽음을 위한 대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집에 있는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식구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과거의 자기 공적에서 보람을 찾지도 않고, 과거에 남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거나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다보는 어리석은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새로운 내일이 펼쳐집니다.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내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무서운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 덕분으로 재물이나 지위를 얻어서 이 세상에서 행세하고 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행세하는 일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따라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소박하게 삽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이나 지위에서 삶의 보람을 찾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분의 은혜로우심이 자기를 통하여 주변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죽음 후의 일을 걱정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새롭게 삽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그분의 자녀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기에 우리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의 공로에 자만자족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과거에 대해 통회(痛悔)의 눈물만 흘리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봅니다. 그분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실천하면서, 그 자비가 흘러 넘쳐 이웃에게 흘러들어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우리 안에 고여만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듯이...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의 뜻을 성취한다.”(55,10-11).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를 흠뻑 적시면, 그 자비와 용서는 주변을 위한 우리의 새로운 실천 안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열리는 내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새로운 실천 안에도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디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참된 자유란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이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에, 자신의 성소에 충실할 때, 자유로운 자 될 수 있다. 자기의 성소란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여 나가면서 자기실현이 가능하며, 이 때에만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9,51-62]
예수님의 사명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고 사랑을 드리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또한 인간으로서 갈등이 있었다(겟세마니).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죽음을 통하여서까지 이루시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분이 되셨다. 바로 아버지의 뜻은 인간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구원이었다. 여기서는 한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구원하려는 의지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실현하시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 맡기자. 제자들의 말에 그들을 꾸짖으시는 주님이시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인간들을 향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조건이 없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라”,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데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른다. 이것이 유혹일 것이다. 예를 들면,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에, “돈을 좀 더 벌면...”,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죽을 때 대세나 받지” 등등 여러 가지로 핑계를 댄다.
은혜의 때가 있다. 그 때는 아무렇게나 다가오는 때가 아니다. 그 때는 지금 바로 복음을 듣는 그 순간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이웃 사랑에 대한 자세도 중요하다.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세례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순간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하느님의 뜻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제2독서: 갈라 5,1.13-18]
이에 대해서 바울로 사도께서 잘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란 법 없이도 살 사람일 때이다. 그가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의 지배를 받으며, 법을 의식한다는 것은 법을 잘 지키려는 의미도 있지만, 그 때문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법이 어떤 것인지 몰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을 때, 율법을 의식하지 않는데도 율법을 완성하는 자들이다. 예: 신학교의 종소리-타성에 젖는 삶이 될 수 있고, 수도원의 삶이나, 매 일상도. 우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하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주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자들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자이다. 주님의 뜻을 어겼을 때, 즉시 그 잘못을 아는, 그리하여 즉시 자유롭기 위해 애쓰는 매 순간 회개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며 평화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러한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는 끊어버림에서 온다.
유영봉 신부님
묵상 길잡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시며,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 제자 됨의 길은 갈림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름에 있다.
1. 철저히 버려야 완전히 얻을 수 있다.
“버림으로 얻고, 미워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극복하기 힘든 대표적인 욕심이 물욕, 성욕, 권세욕이라고 한다. 물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사심이 없기에 많은 돈을 관리하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성적(性的)인 욕구를 철저히 끊고 뛰어넘은 사람만이 모든 이성(異性)을 참으로 자유롭게 대할 수 있고, 소유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권위와 권력이 지배가 아니라, 봉사를 위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만이 참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해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있는 한,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상대방이 나를 소유하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없을 때 참으로 사심 없이 대하고 위할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2. 깨달음을 얻는 첫걸음은 끊어버림이다.
불교에서 특별한 전통과 맥(脈)을 이어온 종파는 선종(禪宗)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전부터 중국에는 이미 불교의 교리를 꽃피울 충분한 정신적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선(禪)불교가 중국에 소개되기 이전에 장자(莊子)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본질을 꿰뚫어 봄(본질직관:本質直觀)’에 대하여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본질을 꿰뚫어 봄’이란 바로 ‘깨달음’ 즉 ‘득도(得道)’를 말하는 것인데, 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하면서, 심재(心齋), 좌망(坐忘), 조철(朝徹)을 이야기하였다.
심재(心齋)란 마음의 재(齋)를 말함인데, 마음이 제 멋대로 오락가락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을 뜻한다. 즉 심지(心志)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세상만사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깨달음을 얻는데 온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좌망(坐忘)이란, ‘모든 것에서 마음을 거두어 잊어버림’을 말한다. 이는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심지어 살겠다는 욕심이나,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마저 끊어버리는 ‘완전한 자기 비움’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朝徹)이란, 이는 문자 그대로 ‘아침의 맑음’을 말함인데, 새벽 여명(黎明)이 밝아 올 때 어둠이 걷히면서 온 천지가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모든 애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완전히 비움으로, 어떤 것에도 얽매임이 없는 고요와 평화와 맑음’을 말함이다.
이런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본질직관(本質直觀)즉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장자(莊子)의 가르침은 이미 선(禪)불교가 말하는 선(禪)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3.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보면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
‘하늘나라를 얻음’은 바로 ‘하느님을 뵈옴’이 아닌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추종의 자세를 역설하신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모세와 많은 예언자들과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세기 12,1)야 했고,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겨야 했다. 성모마리아도 일생동안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하는 자세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며 사셨다.
하느님은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갈림 없는 마음’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너희는 다른 신(神)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34,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마태18,8) 하셨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때의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림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마저도 포기 할 수 있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추종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성생활의 첫 단계는 ‘정화의 시기’이다.(이어서 조명과 일치의 시기가 이어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세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나를 비울 때 하느님은 당신으로 나를 채워주신다. 나를 비우는 만큼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더 많이 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분의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 따르기
김영국 신부님
신앙생활도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여름이 되면 몸이 지치기 마련이고 자칫 영적인 생활도 느슨해질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들고 해이해진 마음을 다시 추스르게 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올라가신다’는 것은 승천을 의미하지만,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사명만을 생각하며 예수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마음을 굳히셨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원문은 ‘자신의 얼굴을 그 방향으로 고정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감하고 길을 떠나는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와 비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제자들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하고 여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운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사람들의 배척은 예수님의 운명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이기도 합니다(루카 9,51-56).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부터 예수님은 고향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고(루카 4,16-30),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의 마지막 시점에서 예루살렘 시민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루카 19,28-40).
주님의 운명이 그러하듯, 주님 따르기는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닙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예수님은 편히 쉴 곳조차 없이 동물들보다도 못한 처지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친척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마르 3,21).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뿐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먼저 지내고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하시며,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로마 14,9)이신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하라고 단호히 대답하십니다.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루카 9,60).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요구하십니다. 엘리야는 쟁기질을 하던 엘리사가 부모와 작별인사를 하도록 허락했지만, 주님은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잘라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고정하시고(루카 9,51)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시는 주님을 따르는 일은 한가한 소풍길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숭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원하는 사람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홍승모 신부님
우리가 예수님의 여정을 따를 때, 내면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한 저항들 중에 오늘 복음에서는 3가지 내면적 장벽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물질적 안정에 대한 장벽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루가 9,57).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 사람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확고한 의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여정을 따르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물질적 안정을 통해 세상에 안주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보금자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변화하기를 꺼려합니다. 우리는 예전의 안정된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새로운 차원으로 한 걸음 내딛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는 내면적인 바람이나 애착에 대한 장벽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루가 9,59). 이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바람입니다. 예수의 답변은 확고합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루가 9,60). 이 말씀 속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인간적 희생이나 일의 선후(先後)에 대한 차원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여정을 바라보는 영적 식별에 대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여정에는 두 가지 상반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움직임이란 '예수님의 부재(不在)' - 예수께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 삶의 여정에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 숨 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멀리 떨어져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은 반대가 아니라 주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세상적인 바람이나 애착으로 인해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완고히 닫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사랑 안에서 확신을 가질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개인적인 '나(ego)'에 관한 장벽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루가 9,61).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신의 것에 대한 내면적 저항을 말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 9,62). 예수님의 답변은 일의 추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나만의 것'이 죽어 없어져야 비로소 그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외부나 내부에서 오는 어떤 저항이나 장벽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떠남의 아름다움
평화신문
일터를 바꿀 때마다 후임자의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몸만 떠나는 사목자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후임자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물건들도 있겠지만, 후임자가 또 다시 목돈을 들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세심한 배려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지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목자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은 '칼같은' 처신으로 유명합니다. 후임자에게 털끝만큼의 누도 끼치기 않기 위한 그분의 모습은 '칼' 그 자체입니다. 떠나온 임지의 신자들이나 후원자들, 열성 팬들이 그리도 집요하게 '많이도 말고 딱 한번만 얼굴을 보자'고 애원해도 후임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완강히 거절하십니다. 후임자가 새로운 분위기에 최대한 빨리 적응하도록 칼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같이 지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떠나고 나면 그야말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이 되고 맙니다. 신부님의 그런 칼같은 모습, 그 이면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후임자에 대한 배려, 신자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신자분이 제게 본당 수녀님들 인사이동 방식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2-3년간 동고동락하던 수녀님, 잔정이 유달리 많아 마치 친정언니같던 수녀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온다간다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사발령이 난 것입니다. 완전히 뒤통수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답니다. 정들었던 수녀님을 위해 조촐하게나마 송별식이라도 해드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저는 내심 기뻤습니다. 그 수녀회가 어떤 수녀회인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나름대로 수도자다운 수도자를 양성하려고 각별히 노력하는 수녀회가 틀림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참 수도자는 매일 매순간 주어진 처지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모든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상황 안에서 최대한 노력합니다. 그러나 떠나야하는 순간이 오면 지체 없이, 아무런 미련도 없이 가방 두 개만 달랑 양손에 들고 기쁘게 떠나갑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인연도, 열정을 불살랐던 직책도, 정들었던 공간도 뒤로하고 또 다른 미지의 세계, 하느님께서 열어주시는 미지의 땅을 향해 홀연히 길 떠나는 사람, 그가 참 수도자입니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 시급하니 장례도 가족들과의 작별인사 마저도 신경끄고 빨리 따라나설 것을 재촉하십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저울질하다가 한없이 늘어지던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입으로, 마음으로는 수백 번도 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던 사람들, 결국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결단을 번복하던 많은 사람들을 봐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앞뒤 재지말고 즉시 따라올 것을 강하게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지닌 본질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순례성'입니다. 순례한다는 것은 어느 한곳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떠나는 자유로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이방인들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 순례를 끝내고 나서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이 세상의 이방인들인 것입니다.
길 떠난다는 것은 아쉽기 그지없는 일, 서글픈 일이지만 결국 떠남으로 인해 삶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떠남으로 인해 인연은 더욱 가치를 발합니다. 떠남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다 단순하게, 보다 소박하게, 보다 홀가분하게 살기 위해서 버리고 또 버리는 이번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이란 참으로 큰 것이어서 모으면 모을수록, 쌓이면 쌓일수록 점점 더 갖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면 청빈한 생활, 단순하고 소박한 삶과는 담을 쌓게 되고 말지요. 결국 그 모든 것들은 복음 선포나 자기 이탈의 가장 큰 장해물이 되고 맙니다.
묵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지닌 것이 많으면 그 지닌 것들에 신경을 쓰게 되어 복음전파나 영혼구원은 뒷전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나무가 봄에 꽃피우고 여름에 애쓴 이유는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떨어져 내릴 그 낙화의 순간을 위해서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님
루카 복음사가는 ‘구원의 길’을 묘사하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길을,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의 도착점으로 수난·부활·승천을 통한 당신의 사명을 마친 곳입니다. 동시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길’의 시작점이요, ‘구원의 길’을 이루는 중심지입니다.
전반부 갈릴래아 활동기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만(9,20)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할 때를 감지하십니다. 비록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마음을 굳힙니다. 겪어내야만 하는 수난이지만 그 뒤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예루살렘 여정을 시작하며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9,51)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여러 일이 일어납니다. 이 일들은 곧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 현장이 되기도 하지요. 먼저 오늘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반목하는 관계이기도 하고, 또 예수님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대응을 보면 아직도 스승님을 이해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마치 그럴 힘이 자신들에게 있기라도 하듯 묻습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8)는 말씀을 체화하지 못하고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는 옛 삶의 범주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라티아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5,13)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격분`…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5,20)
힘의 과시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책이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롭고 굳건히 서 있는 자는 오히려 온유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땅을 차지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힘의 무기를 이용하고자 하나, 스승은 ‘온유한 사랑’의 무기를 쓰십니다. 그러나 이 무기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교회 역사 안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 곳곳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라크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우리 마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보복의 불, 이 불은 하늘에서 불러와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꺼야 할 불입니다. 미운 너 대신 내가 죽는, 힘없는 무기를 사용하는 그 어려운 방법으로만 꺼지는 불입니다. 예수께서는 ‘불을 지르러’(루카 12,49)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보복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꽃’(사도 2,3)은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도 알아듣는 일치의 불이요, 화해와 사랑의 불임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가르치신 대로 발에 먼지를 털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고을을 떠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만은 알아두라고 이르셨겠지요(루카 10,10-11). 그 사마리아가 이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복음을 전파할 때 제일 먼저 복음화의 대상이 될 것(사도 1,8; 8,25)임을 사도들도 그때는 미처 몰랐겠지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여정은 이렇듯 보금자리는커녕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나그네 여정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민감하게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전하는 것이 그토록 급하고 중요하기에 아버지의 장례도, 가족들에게 하는 작별 인사도 뒤로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가 결코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부리던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워먹고는 엘리야를 따라나섰듯 단호한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루카 18,29-30)이며, 이제 그들의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1)로 구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버려야 할 힘든 고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마저 버리는’(루카 9,23) 일입니다. 그러니 이 철저한 추종의 삶을 어찌 쉽게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탑을 세울 때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고 일을 시작하듯(루카 14,28)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무게,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잘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안이한 마음으로 선택하여 현세의 안전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사실은 죽은 자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불교 조주선사는 제자의 장례 행렬에 참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쫓아가는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나는 죽은 자입니까, 살아 있는 자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려면>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보다 '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어떻게?'에 대해서는 저절로 답이 나올 것입니다.
반대로 '왜?'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면 '어떻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마르 16,16)"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왜?'에 대한 답입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일입니다.
그 구원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것인데, 그 길을 가려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난의 가시밭길'만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가다가 그런 고난을 만나더라도 감수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즐기는 종교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어내는 종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좋은 날, 편한 날도 있고, 힘든 날, 고통스러운 날도 있는데, 편하다고 방심하지 말고, 힘들다고 좌절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왜 그 길을 가는지 이유와 의미와 목적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 길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공부가 쉬워도 자만하지 않고, 공부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훈련을 하는 운동선수는 훈련이 쉽든지 어렵든지 간에 계속 훈련을 합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그러나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는 학생은 공부가 쉬우면 자만심에 빠져서 안 할 때가 많고, 공부가 어려우면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표가 없는 훈련은 의미가 없고, 무의미한 훈련을 할 선수는 없습니다.
'왜?'에 대한 답이 분명하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도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기 위해 집에 가겠다는 제자를 못 가게 막으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긴 가되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는 일도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초상이 났을 때, 신자들이 모여서 연도를 바치고, 장례식을 도와주는 일들을 하면서 오히려 선교 효과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초상집에서의 신자들의 봉사와 기도 모습을 보면서 감명을 받게 되고, 그래서 믿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에 대한 답이 분명하다면, 미루지 말고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데, 이 말은 작별 인사를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미루겠다는 뜻입니다.
작별 인사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는데, 주님을 따르는 일을 일단 보류하고 나중에 따르겠다는 태도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레위(마태오)의 태도와 정반대가 되는 태도입니다.
세리 레위(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따라나섰는데, 그 뒤에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루카 5,29).
보통 그 잔치를 동료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한 잔치로 해석합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에 함께 계셨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일을 먼저 했고, 작별 인사를 나중에 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먼저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뒤로 미루다가는 영영 따르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아주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늦추겠다는 것인데 그걸 못 기다려 주시나?' 라고 불평할 사람도 있겠지만, 시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조금만 뒤로 미루고 세속 일부터 먼저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죽음이, 또는 종말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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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부님이 계셨는데, 그 신부님께서는 말 재주가 그렇게 좋지 않았나 봅니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이 강론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딴 짓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쳐다보지 않고 주보만을 읽고 있거나, 또 피로를 푸는 시간으로 아는지 강론 시간을 이용해서 졸고 있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걱정이 점점 쌓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강론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또 다시 딴 짓 모드로 들어서려고 했지요. 바로 그 때, 신부님께서는 강론대 밑에 숨겨 두었던 축구공을 꺼내어서 제대에서 공을 차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저 신부가 미쳤나? 제대에서 뭐하는 거야?”
한 참 동안 공을 차던 신부님께서는 마이크를 잡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더니만, 이렇게 인간의 놀이를 하니까 관심을 갖는군요.”
하긴 우리들이 얼마나 하느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혹시 모든 관심사가 인간 세상의 쾌락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요즘 제가 얼마나 바쁜 지 몰라요. 이 일만 끝나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습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지금 성당 다닐 시간이 어디있어요? 공부하기도 바쁜데... 수능 끝나면 성당 나갈께요.”
“남편이 바쁜 직장 일로 성당에 못나가거든요. 그래도 신앙 생활은 함께 해야지요. 어떻게 저만 성당 다녀요? 남편이 좀 한가해지면 성당에 잘 나갈께요.”
“제가 요즘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계속 침묵하고 계시더라구여. 그런 하느님 저는 안 믿을꺼에요.”
“아직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확신이 생기면 나갈께요.”
이밖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이유가 합당할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모든 이유가 다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세요.
오늘 복음에서 바로 이유, 조건을 달지 말라고 하시지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것,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이 정도는 충분히 허락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조차도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을 다시금 떠올려 보세요. 혹시 각종 조건을 내걸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남의 말을 잘 경청합시다.
귀머거리 두꺼비의 승리('어머니의 편지' 중에서)
두꺼비 선수들이 누가 제일 먼저 탑 꼭대기에 오르는지를 놓고 시합을 벌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구경하는 두꺼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쟤네들한테 어려운 일이겠는걸. 저렇게 높은 꼭대기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안 되고말고!" 구경꾼들의 김새는 소리에 두꺼비들은 기운이 빠졌다. 그래도 성실한 두꺼비들은 고군분투하며 계속 위로 기어올라갔다. 구경꾼들이 계속 소리쳤다. "너무 어려워! 너희들은 탑 꼭대기에 올라갈 수 없을걸!" 비아냥대는 소리가 계속되자 대부분의 두꺼비들은 기운이 빠져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오직 한 마리의 두꺼비만이 멈추지 않고, 홀로 외로이, 처음과 같은 속도록 계속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경기가 끝났다. 승리자는 한 마리뿐. 어떻게 힘든 고지에 이를 수 있었는지 두꺼비들은 신기할 뿐이었다. 너무 궁금해 승리자에게 앞다투어 물어보았다. 그러나 무성한 질문에도 묵묵부답. 알고 보니 승리자는 바로 귀머거리였던 것이다.
험난한 인생길에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까? 자신의 능력을 깎아내리거나 하고자 하는 뜻을 꺾는 말이라면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만약 어떤 이가 "너는 너의 꿈을 실현할 수 없어" "너는 능력이 모자라"라며 당신을 폄하한다면 당신은 흔쾌히 귀머거리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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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저녁 9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잠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있는 갑곶순교성지에서 순교자 현양대회를 어제 개최했었거든요. 참석하신 숫자는 2천~3천 사이(어떤 분은 5천명이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신데 그 정도는 안 될 것 같네요) 정도 된답니다.
아무튼 저는 어제 새벽 4시부터 성지에서 손님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순례객들이 오고 난 뒤에 드러나는 쓰레기였답니다. 작년 제1회 순교자 현양대회를 끝내고서 나온 쓰레기를 처리하느라 거의 일주일 내내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졌거든요.
그래서 주교님께 미사 중에 공지사항을 할 수 있도록 청했고, 저는 “이곳은 쓰레기 치울 사람이 없습니다. 관리인도 없고, 제가 모든 것을 다 합니다. 만약 이 많은 분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가신다면 저는 또다시 일주일 내내 쓰레기를 치우다가 시간 다 보낼 것입니다. 따라서 쓰레기는 그냥 가지고 가셨으면 합니다.” 라는 말씀을 신자분들에게 드렸습니다.
사실 오신 신부님들은 제가 공지사항을 한다고 하니까, 후원회 가입하라는 이야기를 한다든가 아니면 제가 쓴 책이나 성물을 사달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성지가 그러니까요.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쓰레기를 꼭 치우고 가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서 내려오니까 어의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미사 끝나고 제게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세요.
“이렇게 많이 오셨는데, 쓰레기가 안 나오겠니? 따라서 여기 힘든데 도움 달라는 말이나 하지, 쓰레기 치워달라는 말은 왜 하니?”
갑곶성지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돈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기도를 많이 해달라고 하지요. 이 성지가 돈으로 만들어지는 성지, 대신 기도와 사랑이 가득한 성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요. 왜냐하면 제 개인적으로 그런 체험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기도가 어제 또 이루어졌답니다.
비록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글쎄 제가 미사 후 성지를 돌아다니면서 주운 쓰레기가 딱 한 줌 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즉, 사람들은 이 성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분이 오셨는지 모를 정도로 깨끗한 성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습을 보고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곳을 사랑해주시는 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아래 모인 신앙 공동체의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도와 사랑만 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늘 강조하셨지요. 그리고 이런 자세를 갖추고 항구하게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주니까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이 세상 것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와 사랑만을 간직하려는 사람은 하느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요?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
새벽기도를 상징하는 종('좋은 글' 중에서)
서대문구 충정로에 "종근당"이라는 제약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이름도 "종근당"일뿐 아니라, 상징물도 종(鍾)입니다. 종이 이 회사의 이름과 상징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서대문 영천 시장에는 콩나물 장수 아주머니들이 많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신앙심 깊은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새벽마다 콩나물 통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나가는 길에 꼭 교회에 들러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아들들을 축복하시고 가정이 복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이 콩나물 장사가 잘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며 아들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시켰는데, 그 아들 중 하나가 큰 제약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사장이 된 아들은 자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옛날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상징하는 종을 자기 회사의 상징물로 정하고 회사 이름도 "종근당"으로 한 것입니다. "종근당"은 그의 어머니가 거둔 새벽기도의 결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