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 욥기의 말씀입니다. 42,1-3.5-6.12-17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12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과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13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
14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 둘째 딸을 크치아,
셋째 딸을 케렌 하푹이라 불렀다.
15 세상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도 남자 형제들과 같이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17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고 욥이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오자,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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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간 귀로만 들어 온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뵈었다고 아뢴다(제1독서). 파견된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기뻐하며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하느님께 찬미드리신 뒤,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강론을 준비하면 할수록 ‘성경은 교만한 자 앞에서는 침묵한다.’라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쓰인 글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이 넘게 탐구와 묵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를 지닌 말씀, 하느님의 섭리 속에 주어진 이 말씀을 고작 몇 년 공부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제아무리 똑똑하다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지식으로 성경 말씀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는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이렇게 세 성녀에게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글을 배웠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가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옮겨 쓴 것이라고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도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17살까지만 공부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4살에 수녀원에 들어갔기에 그리 오래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교회 학자라고 불릴까요? 지식의 차원으로만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똑똑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교회가 선포한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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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파견받은 일흔두 제자는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자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예수님께 전교 여행의 결과를 보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며 제자들이 받은 권한에 대하여 확인해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주님의 초월적인 힘을 체험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에 자만심을 품기도 합니다. 지혜롭고 강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참으로하느님의 행복을 얻으려면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은총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파악하는 순수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발휘될 수 있지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행복은 겸손과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가 행한 업적에 있지 않으며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성인들은 자신들의 업적과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성취한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곤궁에 빠지고 박해를 받는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인들은 하늘 나라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에 만족하였으며 다른 이들이 구원받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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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난과 비천함을 스스로 선택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빠졌을 때 체험하는 순수한 기쁨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헤세를 비롯한 유명 작가들의 성인에 대한 전기를 읽으며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이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성인에게서 우리가 향해야 하는 근원적 갈망을 봅니다. “우리가 진짜 살고 있는 곳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곳이 아니라, 무엇을 희망하는지도 모르면서 희망하는 그곳이며, 무엇이 우리를 노래하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노래하는 그곳이다. (중략) 하느님, 그토록 가난하신 하느님! 빛 속에서 빛이 지글거리고, 침묵이 침묵에 대고 속삭인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그처럼 침묵에 대고 말한다. (중략) 그는 사랑에 빠져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인에게 말을 한다. 오직 연인하고만 말한다.”
하느님은 가장 가난하시며 가장 높으신 분, 그러기에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작가는 그러한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프란치스코는 한 ‘어린아이’이자 ‘어릿광대’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한하신 하느님께서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후렴이나 가난한 이들이 흘린 피, 소박한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만 머무르실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안에 하느님을 붙잡아 둔다. (중략) 하느님은, 아이들만 알며 어른들은 모르는 무엇이다.”
지금은 먼 이국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의 동창 신부가 언젠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토로하던 순간이 문득 떠오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를 가난한 자유로 초대합니다. 그 초대가 우리 마음을 두드린다면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갈망의 불꽃이 타오른다는 신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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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가 어느 날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보육원의 건축 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때 데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 리의 힘만을 믿고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일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일하는 중에 불목과 갈등이 쌓이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도하신다면 힘이 들면서도 한마음으로 기쁘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오 늘 복음에서는 파견된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이 말의 핵심은 ‘마귀들까지 복종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철부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우리의 지혜와 슬기로 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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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두 제자는 돌아와 보고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을 알립니다.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이름을 내세우자 마귀가 복종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엔 힘이 있습니다.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체험했던 것이지요.
누구라도 마음을 모아 예수님께 매달리면 악한 기운은 물러갑니다. 경건하게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영적 기운이 함께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오랜 전통으로 성호경을 바쳐 왔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게 했습니다. 악의 세력에서 지켜 주시길 청했던 것이지요.
마귀는 ‘파멸로 이끄는 힘’입니다. 모르는 새 몸과 마음 안에 들어와 자리합니다. 그리하여 일치보다는 분열을, 긍정보다는 부정을, 기쁨보다는 우울을 먼저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힘과 기운을 모셔 와야만 사그라집니다.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예수님의 모습은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모든 것에서 그분의 능력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의 이름으로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힘을 보는 사람은 언제라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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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을 스승께서 격려하십니다.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없습니까?
그분의 힘은 숨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숨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을 잘 모릅니다. 잘되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이 앞설 뿐, 하느님의 도우심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만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한 삶이 계속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만에 빠지고 게으른 사람에게 어찌 하느님의 힘이 느껴지겠습니까? 오히려 그의 영혼은 생기를 잃고 재물에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어 갑니다.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련이 있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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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은 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평생 혼자 살아온 분이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과연 제게 어떤 도움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물론 그 어디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어서 저를 찾아오셨겠지요. 그러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정작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할까요?
우리는 종종 “당신이 뭘 알겠어?”라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내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너’만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을 향한 우리 생각도 바꿔버립니다. “주님께서 뭘 아시겠어? 정말로 계시기는 한 거야?”라는 생각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게 큰 도움이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만났을 때는 계속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자그마한 말과 행동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위치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부정의 자리인지, 아니면 긍정의 자리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위치에 따라서 내 문제 해결의 방향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72명의 제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제자들은 큰 기쁨에 휩싸였습니다.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자기들이 받은 사도의 명예로 인해서 크게 기뻤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으로도 하늘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기뻐할 수 있는데,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인정만을 따르다 보면 주님께 대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이제까지 어떤 임금들과 예언자들도 받지 못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선물을 우리도 받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간다면 말입니다.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이근우).
무엇을 청하고 계십니까?
제게 면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기대를 하고 오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망을 안고 돌아가시는 분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부이기에 삶의 나락에 빠진 것을 구해주고, 마음의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제게 이런 힘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전지전능한 힘이 제게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저와 함께 주님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즉, 제게서 전지전능한 힘 자체를 요구하시는 분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실망만 안고 가시지만, 기도 안에서 함께 대화하면서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려는 분은 기쁨을 안고 돌아가십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요구하기보다, 주님과 함께할 힘을 요구해야 합니다.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더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으로부터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단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직접 선발하신 12명의 제자 외에도,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단이 존재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70명의 제자단을 뽑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무사히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발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돈주머니도 식량자로도, 여벌 옷이나 신발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땡전 한푼도 없이 계속된 전도 여행길에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을텐데, ‘선교 여행 결과 보고회’ 분위기는 놀랍게도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의기양양한 얼굴, 세상을 다 얻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제자들의 성공담에 예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복음 10장 18~20절)
제자들은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고 물러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탄에 대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력했던니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뱀과 전갈을 짓밟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상, 생명을 위협하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졌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전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 독사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사자와 용을 짓밟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러한 능력을 고스란히 당신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게 선택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각 고을마다 그 고을 주민들의 명단을 명부에 써서 잘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고을에서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으로 간주된 하늘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명단이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명단에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생명의 책입니다.
생명의 책!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애용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서울구치소에서 무상 급식 잘 하고 계신 사이비 목사 역시, 틈만 나면 ‘생명책’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를 포복절도시킨 바 있습니다.
“누구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삭제시키겠습니다. 광화문 집회 안나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헌금 안내면 생명책에서 빼버리겠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의 책을 그토록 남용하고 훼손시켰으니, 조만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간 습관적으로 저질러온 신성모독을 어찌 감당해낼까 걱정입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지독한 허언증과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이비 목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만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관대한 용서와 자비를 기대할 뿐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언제 시작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며,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뒤의 쉼은 꿀 같은 기쁜 일입니다.
이들은 진정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휴식을 잘 취합니까? 주말에 온종일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한가요? 물론 몸은 그럴 것입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기쁘신가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완전히 개운하고 기쁜 휴식을 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식’, 즉 ‘휴식’은 이런 쉼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고생합니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인정받으려는 근저에는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부모가 다 채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도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더라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휴식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휴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버지에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휴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이무석 교수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심지어 증오하였습니다. 어느 날 휴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무석 교수는 휴가를 간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주지 않는 이유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사 시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자신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도 이 교수처럼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휴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무석 교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아버지를 투사하여 함께 박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아버지 소파에 앉아있는 한 마리 개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점점 커져서 소파의 수십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소파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개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소파보다 커 버린 자신은 더는 소파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의 시작입니다.
사탄이 사는 곳은 어딜까요? 지하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는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그 부모를 투사시킨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사랑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줘야 했지만 사랑해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그 사람에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다가 갑자기 미워한다면 그래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 바로 그 권세도 함께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모든 애증의 대상을 투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 산을 넘어 에덴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고생시키는 모든 하늘의 권세가 함께 못 박힙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질 때, 나는 참된 휴식, 참된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미움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투사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평화 책꽂이’가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필자의 느낌과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한영국 선생님은 정채봉님의 ‘초승달과 밤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국 작가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미주가톨릭신문 홈페이지 지면보기 9월 13일자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연좌제와 신분제’의 사회를 살았습니다. 연좌제는 부모의 잘못, 특히 사상과 관련된 잘못이 있으면 자녀들 또한 영향을 받는 제도입니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정보원에 의해서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승달과 밤배에서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손자와 손녀 역시 사상범의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의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연좌제의 벽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연좌제’는 더 이상 삶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가끔씩 큰 홍역을 치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입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흑인의 선조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를 통해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과 애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대부분의 나라는 신분제의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천민(賤民)’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람이 그 신분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도 없었고,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천하면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때로는 그 재능과 능력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피부색 때문에, 성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차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 선언문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우리 모두는 이성과 양심을 가졌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갖고 있는 의견이나 신념 등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연좌제와 신분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따라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인데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사상과 신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은 물질과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누면 해결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욥은 화이부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도 감사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재물이 많았을 때는 기꺼이 이웃과 나누었고, 재물을 다 잃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욥을 고통과 시련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욥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20년 이상 도시 빈민을 위해 사목하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다른 사목을 하는 동창을 존중하고, 경청합니다. 자신의 사목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늘 웃는 모습으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동창입니다.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배가 생명보다 중요하다며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는 어쩌면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 때문에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각 고을로 파견하셨던 일흔 두 제자가 돌아오자 이들의 성공적인 활동을 보시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할 때가 있곤 합니다. 곧 우리가 사도직을 수행하면서도 그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마귀들까지도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예를 들어 우리가 찬양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듣는 이들이 그 찬양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도록 이끌어 주어야지 자신의 음악적 역량만을 드러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서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듣는 이들이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 자신의 스피치 능력만을 전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곧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닙니다. 만약 어느 누가 나를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분명히 성찰해 보고 모든 것을 통해 오직 그분의 영광만이 드러나실 수 있도록 성령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권능은 겸손해야 볼 수 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시는 예수님을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제자들은 보는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본다.
파견받은 제자들로써 권능을 부여받고 실제상황에서 마귀를 쫓아냈다. 제자들은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제자들이 이를 예수님께 낫낫이 보고 한다. 제자들은 철부지 어린이처럼 예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신나게 조잘대다가 실제에서 진리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제자들의 행복이 시작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교감처럼, 이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교감으로 하느님께서 드러나고 있다. 제자들이 일을 통해 감춰계신 하느님을 보게 되었으니 놀라운 발전이다. 우리는 이를 ‘명오가 열렸다’고 말한다. 어린시절에 어른들이 ‘일곱살이 되면 명오가 열린다’고 말해주던 기억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여도 명오가 열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닫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잘못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보고 있으면서도 속 내용을 보지 못하는 교만함이 자신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더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으로부터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단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직접 선발하신 12명의 제자 외에도,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단이 존재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70명의 제자단을 뽑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무사히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발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돈주머니도 식량자로도, 여벌 옷이나 신발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땡전 한푼도 없이 계속된 전도 여행길에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을텐데, ‘선교 여행 결과 보고회’ 분위기는 놀랍게도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의기양양한 얼굴, 세상을 다 얻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제자들의 성공담에 예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복음 10장 18~20절)
제자들은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고 물러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탄에 대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력했던니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뱀과 전갈을 짓밟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상, 생명을 위협하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졌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전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 독사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사자와 용을 짓밟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러한 능력을 고스란히 당신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게 선택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각 고을마다 그 고을 주민들의 명단을 명부에 써서 잘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고을에서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으로 간주된 하늘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명단이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명단에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생명의 책입니다.
생명의 책!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애용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서울구치소에서 무상 급식 잘 하고 계신 사이비 목사 역시, 틈만 나면 ‘생명책’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를 포복절도시킨 바 있습니다.
“누구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삭제시키겠습니다. 광화문 집회 안나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헌금 안내면 생명책에서 빼버리겠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의 책을 그토록 남용하고 훼손시켰으니, 조만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간 습관적으로 저질러온 신성모독을 어찌 감당해낼까 걱정입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지독한 허언증과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이비 목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만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관대한 용서와 자비를 기대할 뿐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누가 주님의 신비를 대면할 수 있는지 봅니다.
제1독서는 고통에 차 울부짖던 욥이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승복하는 장면입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풍요를 누리던 욥이 사탄의 농간으로 삶의 나락에 떨어지면서 욥기는 인간 삶의 고통과 실존을 치열하게 다룹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대목은 욥이 감정의 폭풍을 넘어 비로소 자신이 약하고 미소하며,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임을 절감하고 주님께 이를 고백하는 장면이지요.
욥기의 본문 안에는, 경솔한 세 치 혀로 욥의 잘못을 캐내어 자기들의 설익은 신학에 꿰어맞추려는 무례한 친구들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욥이 고통에 대해 항변하는 부분이 꽤 길게 차지합니다. 욥은 극한의 억울함과 서러움이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누르지 않고 모든 인간을 대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지요. 그리고 이제, 그는 "폭풍 속에서 말을 건네신 주님"(욥 38,1 참조) 앞에서 온전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작디 작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제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인간으로서 더는 견뎌낼 수 없는 한계점까지 갔던 욥이 주님을 봅니다. 고통과 함께 욥은 신비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주님은 욥이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깨닫자,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그의 자각과 회개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리하십니다. 고통의 강을 건넌 이에게는 주님의 신비를 마주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복음은 파견을 받아 선교 여행을 떠났던 일흔두 제자의 귀환 장면입니다. 일흔두 제자도 기뻐하며 돌아오고(루카 10,17),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루카 10,21)하시니 참으로 밝고 희망찬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하느님은 당대의 석학들이나 종교 지도자같은 제도권의 권위자들이 아니라, 어부와 세리 등 오합지졸처럼 모여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펼쳐 보이십니다. 여러 모로 부족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권한을 통해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민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선사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야말로 진정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루카 10,22)
아버지에 대한 앎은 아들에게만 유보되었고, 아들에 대한 앎 역시 아버지께만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 중에 이 신비를 허락받은 한 부류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내세울 것 없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별볼일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려 하십니다. 제도와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에 비해 공도 더 들고 실패 확률도 커서 그야말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대상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시지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제자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힘이, 부족한 자기들을 통해서 이루신 업적을 보았으니까요. 그들이 행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이 가장 먼저 변화시킨 이들은 바로 제자들 자신들일 겁니다. 그리고 치유받은 이들의 기쁨과 감사를 통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생생히 체험했을 겁니다.
지금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스승을 보는 행복 또한 무량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곧 하느님의 충만함이고 성령의 흡족함이니, 성삼위 하느님의 완전한 행복이 제자들의 영혼에도 흘러듭니다. 주님의 신비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의 겨자씨 한 알만치도 못 되는 믿음을 통해 작은 이들에게 내리고 작은 이들을 물들여 변모시킵니다. 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하늘 나라의 신비가 아닐까요!
자신의 약함과 작음을 인정하게 되는 여정에는 고통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자신이 한계에 갇힌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깨닫기 어려운 신비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보잘것없이 초라한 작음에 질식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철부지들입니다. 잘나서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이들이지요.
모두가 더 가지려, 더 올라가려, 더 드러내려 하는 세상에서, 비워서 나누고 낮추고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는 우리는 철부지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한 하느님의 귀하디 귀한, "작은 이들"이지요. 우리가 지나온, "악!" 소리 나게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의 자취는 어느새 알알이 영롱한 보석처럼 우리 영혼에 새겨져 빛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려는 우리에게 허락된 신비는 곧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증거입니다.
주님의 작은 이들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으로 철부지인 우리를 묶어 주신 주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영성체송) 하고 노래한 시편 작가와 함께 오늘도 말씀에 의지해 작음의 길, 비움의 길, 낮아짐의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이 여정에 길동무가 되어 주신 벗님께 감사합니다. 욥이 받은 축복 함께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파견된 이들의 기쁨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일흔두 제자가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을 보면, 이들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파견되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양들 같았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열악한 상태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제자들의 첫 반응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라고 보고를 하지요. 이들은 인간적인 준비나 능력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놀라운 기적들을 기쁨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기뻐하시며, 이 제자들이야말로 행복한 이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비단 일흔두 제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파견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고, 이를 통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에 파견하신 분께서는 이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하시며, 그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 과정은 완성됩니다. 사실, 이러한 참행복을 맛보게 하시려고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양한
곳으로 파견하고 계십니다.
<기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만나
벗이 기쁘답니다
나를 만나
기쁜 벗이 있어
나 역시 기쁘답니다
이 기쁨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벗과 나의 만남은
이내 헤어짐일 테니까요
나를 통해서
나를 보내신 분을 만나
벗이 기쁘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만나
기쁜 벗이 있어
나 역시 기쁘답니다
이 기쁨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벗에게 나를 보내신 분께서
벗에게 나를 맞이하게 하신 분께서
벗과 나 영원히 이어주실 테니까요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일일시호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일일시호일, 하루하루 좋은 날, 기쁜 날, 행복한 날을 사는 이들은 빈손으로 방문해도 기쁘고 반갑고 고맙습니다. 어제 이런 분들이 방문하였고 그대로 사진에 담으니 꽃보다 더 예쁜 모습들에 참 행복했습니다. 이런 분들은 꽃보다 아름다워 저절로 나오는 시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얼마전 방문했던 코이노니아 자매회 회장이 전해준 야생화 자수전 팜프렛 제목을 보고 떠오른 생각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바로 하루하루가 좋은 날(Everyday a good day)이라는 뜻입니다. 자수전 팜프렛에 나온 야생화 꽃들도 단순해서 좋았고 선물 받은 작은 작품 둘은 게시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맑으나 흐리나 비오나 눈오나, 하루하루 다 좋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사는 이들이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제 자작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다음 두연과도 통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습니다만 읽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네 글자, ‘한결같이’로 요약되는 삶입니다. 바로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이 의도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주님과 함께 날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믿음의 푸른나무로,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사랑의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구원의 표지요 그대로 미래가 됩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해피엔딩, 행복한 마무리 인생이 됩니다. 바로 오늘 욥기와 루카복음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내용입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 온 결과입니다. 바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욥기에서 사탄의 시도는 욥의 이런 한결같은 삶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결과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욥의 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욥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마침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런 하느님 체험의 고백입니다. ‘개안開眼의 여정’에 항구한 결과 마침내 때가 되어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뵙는 욥입니다. 이어 주님은 욥의 운명을 되돌리심으로 참 행복하게 마무리 짓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루카복음의 예수님 역시 욥처럼 해피엔딩, 행복하게 일단락 짓는 모습입니다. 성공적 선교사명을 마친후 귀환하여 기뻐하는 일흔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결정적 말씀을 주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미 불러 주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삼아 주신 것을, 바로 우리의 성소聖召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를 새롭게 불러 주시어 날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니 바로 이것이 기쁨의 원천이요, 그 무엇도,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 체험입니다. 욥처럼, 아니 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 아버지를 고백하며 감사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체험의 감사의 고백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이 지칭하는 바 순수한 영혼의 일흔 두 제자들은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4).
이렇게 날마다 주님을 뵙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참 행복이요 이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이름에는
그 나름의
의미있는
무게가 있다.
사람은
떠나가도
그 사람의
이름은 남는다.
우리 삶의
보호자가 되시는
우리 이름의
아버지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새겨지는
소중한
이름들이 있다.
기록과
기억사이에
눈물겨운
우리의 여정또한
뜨겁게 새겨진다.
하느님만으로
살아가는
이름들이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이름이 된다.
감출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선하신 사랑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구원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때안에서
언제든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
어떠한 삶을
만나고 어떠한
빛깔로 새겨지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새겨질지를
또한 반성합니다.
기쁨과 소중한
이름으로
새겨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어렸을 때에는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이든 다 할 것만 같습니다. 엄청난 발명을 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스포츠 선수로 이름을 널리 알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어떨까요? 대부분 엄청난 일도, 또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몫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평범한 어른으로 살 뿐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에 커서 신부님이 되고자 했고, 신부님이 되면 엄청난 일을 하고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후회하면서 자책을 할까요? 아닙니다. 엄청난 일을 하고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 안에서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얼마나 힘든지도 깨닫습니다.
우리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인 성녀들의 삶을 떠올려보십시오. 처음부터 엄청난 일을 하셨을까?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성인 성녀들의 삶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모두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평범함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충실하게 사셨기에 엄청난 일이 된 것입니다.
이는 저 역시도 크게 경험한 것이 있어서 분명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2001년에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시작한 것은 공부하고 있으면서 영성적으로 메말라 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는 내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충실해보기 위해 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별 것 아닌 묵상 글을 매일매일 18년째 쓰다 보니 별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능력 있고 지혜롭다는 소리를 듣는 똑똑하다는 사람에게가 아닌 철부지 어린이 같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음에 감사기도를 바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단순히 철부지 같은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영광을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에 큰 영광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 나간다면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기쁨의 감사 기도를 봉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나폴레옹)
69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신해박해(1791)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첫 순교자 복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 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형인 것입니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첫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 베드로 등 36명에 이릅니다.
미사는 매일 오전 11시(월요일 미사 없음)에 봉헌되며, 주소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63-58이고 전화는 031-749-8522입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해지고 소박해지는 것을 더없는 행복으로 여겨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집에 어린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로 만민의 사랑을 받고 계시는, 천사표에다가, 상뚜스 원로 신부님이 한 분 계십니다. 스페인 출신 선교사로, 한국 오신지가 50년도 더 지난 왕요셉 신부님입니다. 만 88세이신데도 아직도 88하십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시는 등 건강 관리도 철저하십니다.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하루 해가 짧습니다. 호출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십니다. 관구 문서고 담담자로 로마 총본부와 주고 받는 제반 서류들을 깔끔하게 번역하십니다. 여러 공동체 고백지도 신부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두살 위 환자 신부님의 지도 신부로도 활약하고 계십니다. 노인 수도자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일본을 거쳐서 한국에 오셔서 그런지, 한국말은 아직도 어눌하십니다. 한번은 공동체 식탁에서 한때 아재 개그의 단골 메뉴셨으며, 요즘도 ‘한국인의 밥상’ 같은 프로그램을 계속하고 계시는 최불암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왕신부님께 여쭈었습니다. “신부님, 최불암 선생님 아세요?”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갸웃갸웃거리시던 신부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선생님은 잘 알고 있지만, 최브라함 선생님은 잘 모릅니다^^.”
며칠전 한 수녀원 가족의 날 행사에 모시고 갔다가, 수녀님들께 덕담 한 마디 하시라고 초대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왕신부님께서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얼마 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한쪽 귀가 완전히 고장 났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다른 쪽 귀는 아주 조금 들립니다. 그래서 보청기를 끼고 아주 조금 들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크게 실망했습니다. 더 이상 운전도 못하게 되었고, 수녀원 미사도 못 다니게 되었습니다.
많이 슬펐지만, 그런데 기도를 계속하면서 마음을 바꿔먹게 되었습니다. 주님 은총 속에 평생을 건강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이 나이에 잘 안들리는 것,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견딜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귀는 잘 안들리고, 그래서 형제들과 소통도 잘 안되고, 인간적으로 외로워질 때도 있지만, 대신 좋으신 주님이 계시고, 성모님도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좋은 사람들,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수녀님들, 내게 없는 것들, 내게서 사라지고 멀어지는 것들에 대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대신 아직 남아있는 많는 것들에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뿐만 아니라 함께 했던 많은 수녀님들께서 왕신부님의 깊은 신앙과 탁월한 성모 신심에서 우러난 한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을 뵐 때 마다 우리가 기쁘고 충만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어린이와 같은 단순성과 순수성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공적인 복음선포 작업 후에, 잔뜩 들뜬 얼굴로 돌아온 일흔두 제자들을 맞이하셨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에 깜짝 놀란 제자들은 신명 난 목소리로 보고드립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예수님께서는 함께 기뻐하시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이 부여받은 은사나 능력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것을 당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복음 10장 20절)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 10장 21절)
철부지처럼 되는 것을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밑으로 내려서는 것을 민망스러워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해지고 소박해지는 것을 더없는 행복으로 여겨야겠습니다.
<나의 행복, 자아의 행복>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북방 라마교의 고명한 라마에게 남방 라마교의 라마로부터 불교 수행자들을 가르칠 슬기롭고 거룩한 스님 한 분을 보내주십사는 간곡한 전갈이 왔습니다. 뜻밖에도 북방의 대사는 스님을 한 사람이 아닌 다섯이나 떠나보냈습니다. 그때 모두들 그 까닭을 묻자 대사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합니다.
“다섯 가운데 하나만 끝내 남방 라마에게 당도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지.”
다섯 스님이 길을 가던 중 산속 외딴 오두막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에는 아리따운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처녀는 불심이 깊어 스님들을 극진해 대접했습니다. 산적들에게 양친을 잃고 혈혈단신으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가장 젊은 스님이 말했습니다.
“난 이 처자와 함께 있겠습니다. 내 진정 불자이건데 마땅히 자비심을 궁행해야 할 것입니다.”
며칠 뒤, 일행은 왕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네 스님 중 한 스님이 유난히 왕의 눈에 들었습니다. 왕은 자신의 딸과 혼인하여 자신이 죽거든 왕위를 계승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스님은 ‘이 나라 억조창생에게 좋은 감화를 끼치기에 왕 노릇보다 더 지름길이 있으랴. 우리의 신성한 종교를 위하여 공헌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라고 생각하여 그 스님도 빠졌습니다.
세 스님이 길을 가던 중 마을의 한 심부름꾼이 달려와 길을 막았습니다.
“우리 마을 절의 주지 스님이 입적하셨는데, 후임자가 꼭 있어야겠습니다.”
한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 진정 불자일진대, 마땅히 여기 남아 이 마을 사람들을 섬겨야겠지.”
두 스님이 어느 불교도 마을에 이르렀는데,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 구루의 세력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스님이 말했습니다.
“난 여기 남아 이 가엾은 중생을 참 종교로 되돌아오게 할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있네.”
결국 남방 라마에게 이른 스님은 한 명 뿐이었습니다.
엔소니 드 멜로 신부의 ‘종교 박람회’에 실린 예화입니다. 신부님은 이 예화에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해 전에 나는 하느님을 찾는 길에 나섰다. 이따금씩 나는 그 길에서 옆길로 빠지곤 했는데, 으레 이유는 더없이 그럴듯했다. 전례를 혁신하겠노라고. 교회 구조를 개혁하겠노라고. 성서 연구를 현대화하겠노라고. 신학을 현실에 적응시키겠노라고. 애석하게도, 꾸준히 하느님을 추구하기보다는 무슨 행업이든지 종교적 행업에 몰두하기가 더 쉬운 법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빠져있습니까, 아니면 종교에 빠져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음성을 들었다고도 하고, 어떤 분들은 신기한 체험을 해서 주님의 사랑을 가슴 뜨겁게 느꼈다고도 하며, 어떤 분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본당이 매우 활성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기쁨은 내가 느끼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아가 느끼는 것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나와 자아를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다섯 스님 중의 네 스님은 자아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스님만이 라마의 뜻만을 참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참 기쁨을 어디 두어야하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기적을 하고 온 것에 대해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우리가 기쁠 이유는 주님 나라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가 뱀의 소굴에 갇히게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뱀은 다행히 독은 없지만 매우 사나워서 내 온 몸을 물어뜯고 휘감으며 나를 괴롭힙니다. 이때 이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 상황에서 명예나 쾌락, 인정이나 돈 등이 참 행복일까요? 참 행복은 그 뱀에게서 나와 사람들 사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뱀에게 사로잡혀 있는 한 다른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뱀을 자신이라고 믿으면 그 사람에겐 희망도 없습니다.
파라오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파라오라는 뱀으로부터 구해주셔서 가나안 땅에 살게 해 주시려고 했는데 그들이 찾는 행복은 여전히 파라오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광야에 나오기는 했지만 모두 뱀에 물려죽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려는 유일한 행복은 뱀과 함께 살고 있는 나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해 주시려는 것뿐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자아를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기쁨을 우리가 느끼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로지 당신의 유일한 뜻,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만을 기뻐할 수 있는 자녀들을 찾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2년째 같은 차를 타고 다니고 있습니다. 85년에 출시된 차종입니다. 33년째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장수 브랜드입니다. 이름도 부르기 좋고, 성능도 개선되었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차종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소비자들에게 계속 사랑을 받는 것은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이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찾아냈고, 기능과 디자인을 계속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교부들의 사제 영성’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메말라있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다른 곳을 찾지 않고 교회로 돌아 올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복음의 기쁨은 무엇일까?
욥 성인은 많은 고난과 아픔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 할지라도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욥 성인은 재물의 축복을 받았고, 자녀의 축복을 받았고, 건강의 축복을 받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살았습니다. 욥 성인은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72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고,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었고,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제자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영들이 여러분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예수님과 함께 했기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의 보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상의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기쁨을 줄 수 있는 교회의 보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는 기도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사람은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가정은 가난할지라도 웃음이 멈추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가정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선행입니다. 아픈 이, 가난한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행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말씀입니다. 물질과 자본의 힘에 의해서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의해서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교회에 묻혀있는 많은 보물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습니다. 수도회나 교구에서 마련한 피정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가까운 성당에서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신심단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안에 묻혀있는 보물을 보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보물을 찾는 것 같습니다. 주말입니다. 교회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주님께 전할 기쁜 소식을 만들고 계신가요?
김기현 요한 신부님
얼마 전에 ‘시골 신부가 사는 이야기’를 조금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는데요.
시골에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제 해야 할 일이 조금 보이는 거 같은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게 없을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생각해 본다고 하고, 저보다 먼저 글을 쓰신 분들의 이야기와 다른 시골 본당 신부님들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요.
‘이런 일들도 있구나.. 대단하다..’ 는 느낌을 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장수 본당 주임 신부님의 이야기인데요. 내용이 이렇습니다.
“전교에서도 큰 열매가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의 희생과 기도로 지난 3년 동안 167분이 영원한 생명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150분 정도의 시골의 작은 공동체에서 일어나기 힘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많은 분들이 냉담을 풀었습니다.
늘 한결같은 사랑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아버지 하느님,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그 품에 안겨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지난 3월에는 본당에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100분 정도가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주교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주교가 되어서 지난 20년 동안 수도 없이 장수 본당 공동체를 방문했지만, 이렇게 신자 분들이 많이 참례하는 미사, 활기 넘치는 미사 봉헌은 처음”이라며 얼마나 기뻐하시는지요.”
다른 하나는 요즘 매일 미사에 묵상글을 쓰시는 신부님의 글인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저는 해마다 시월이 되면 직접 키운 국화로 축제를 벌입니다.
국화 축제를 벌인 것이 올해로 벌써 8년째가 됩니다.
국화는 지조와 절개의 꽃이라고 합니다.
이 국화는 가장 늦게 피는 꽃이며 한 달 정도 피어 있습니다.
종류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운 꽃입니다.
겨우내 온실에서 연탄을 피워 가며 모종을 키웠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하루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름에 비닐 온실 안의 온도는 45도까지 올라갈 정도입니다.
그렇게 일 년 내내 땀 흘려 키운 국화가 이제 막 피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이 축제가 널리 알려져서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분들이 국화를 구경하러 옵니다.
지역 주민들 가운데에는 축제 중에 몇 차례씩이나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다고 봅니다.
병든 영혼이 치유되는 것도 기적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하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깨닫는 것도 기적입니다.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을 꽃을 통해서 곱게 만들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해마다 국화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두 분 신부님은 시골에서도 재미와 보람이 있다는 걸 삶으로 보여주고 계신 거 같은데요.
언젠가 그분들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기뻐하며 주님 앞에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도 한 번 주님께서 기뻐할 만한 소식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봉성체 하시는 할머니들에게 선물로 복숭아를 하나씩 드렸다.
아들 손자랑 같이 사시는 할머니에게는 세 개를 드렸는데, 좋아하시면서 두었다가 내일 손자 준다고 하신다.
그러자 같은 동네 사시는 할머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손자들 챙길 생각만 하지 말고~
복숭아 세 개니까, 지금 하나 먹고, 이따 하나 먹고, 저녁에 또 먹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0,17-24(연중 26 토)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 21)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 42)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 47)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와 감격스런 고백과 탄성은 ‘히브리인들의 축복기도의 전형적인 방식인 ‘감사’(berakah)를 통해 표현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 작은이들, 곧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심에 감사드립니다. 곧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잘난 체 한 이들이 창피를 당한 반면에,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들에게서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아들에게 넘겨주셨음을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 2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결코 제자들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아듣는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 23)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감격스런 탄성과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구원과 자비를 입은 같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을 불러봅니다.
“그분(아버지)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1-52)
주님의 이름으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고 끝마무리를 합니다. 기도를 하되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아버지 하느님을 통하여 그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흔 두 제자들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 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한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 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여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일보다 구원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의 상급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어 스승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랐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 앞에 자신들이 행한 모든 것을 기쁨에 넘쳐 보고 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드 그를 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 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고 말씀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와 같이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볼 수 있어 행복한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기 위해 죽이려는 우상의 시대에
살리기 위해 죽으시는 주님의 십자가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마저 꺼뜨릴 수 없는 희미한 빛줄기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에서
가야만 할 좁고 험한 길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모두 제 길 찾는 무관심의 늪에서
가던 길 멈추고 곁에 선 벗 하나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가짐이 미덕인 세상 안에서
모두를 넉넉하게 하는 정겨운 나눔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더 오르려 애쓰는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더불어 함께 귀하게 사는 고운 섬김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찰나의 성공을 부추기는 허무의 시대에
영원을 향한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한걸음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가슴앓이뿐 아니라 몸앓이까지 해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욥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그런데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하시는데 우리는 보통 보고 싶은 것을 볼 때 행복하고, ‘것’이 아니라 ‘분’을 보게 되었을 때 더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간극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과 보고 있는 사람이 다른 것 말입니다.
아주 안 좋은 예이지만 내가 지금 껴안고 있는 사람과 내가 껴안고 싶은 사람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가장 좋은 것은 껴안고 있는 사람이 내가 껴안고 싶은 사람인 경우이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이런 간극을 메우는 것이면 좋겠지요.
이것을 영성적으로 바꾸어 얘기하면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 안에서 재발견하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연예인이 보고 싶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예쁜 여자가 보고 싶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나이를 먹게 되니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가 좋고 어머니처럼 푸근한 여자가 좋은데 지금의 나의 남편과 아내가 천생배필, 곧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배필임을 신앙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욥의 경우를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욥은 이제 자기 눈이 주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욥이 한 고통 중에 있을 때 갈망하던 바가 이루어진 겁니다.
욥기 19장에서 욥은 이렇게 절규합니다.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저는 욥의 절규 중에서도 이 부분이 마음에 크게 울립니다.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내 몸으로 그러니까 존재로 하느님을 뵙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살갗이 이렇게 벗겨진 뒤라도 내 몸으로 하느님을 보겠다니 욥은 가슴앓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앓이’, 몸살까지 하며 하느님을 뵙고자 한 것이고 마침내 그 하느님을 오늘 욥기의 끝에 만난 겁니다.
오늘 욥기는 재산도 전의 몇 배가 되고 훌륭한 자식들도 다시 얻은 행복을 얘기하는데 사실은 이런 것은 해피엔딩의 신파극과 같은 것이고 욥의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제가 욥기를 쓴다면 이런 얘기는 쓰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느님을 온 몸으로 봐야 하고, 뵙기 위해서 가슴앓이는 물론 몸앓이까지 해야 함을 욥기에서 배웁니다.
10월 로사리오, 선교 기원 미사 ’18/10/06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또 전교의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어쩌면 아주 자주 하루에도 여러 번 기회가 될 때마다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합니다. '장미화관', '장미 꽃다발'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의 로사리움(rosarium)을 우리말로 번역 '묵주', 혹은 '묵주기도'라고 합니다. 묵주(默珠)란 구슬이나 나무 알을 열 개씩 구분하여 여섯 마디로 엮은 염주 형식의 것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물건이며, 이를 사용하여 성모 마리아께 전구를 부탁하여 드리는 기도를 묵주기도라고 합니다. 전에는 매괴신공이라고도 했습니다.
묵주기도는 도미니코 성인이 선교를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묵주를 주시며 기도하라 하셨다는 데서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또는 12세기에 글을 모르는 신자들이 미사를 드릴 때 시편 구절을 잘 읽지 못하니까, 그 대신 주님의 기도를 3회에 걸쳐 150번 암송하던 관습에서 발전되었다고도 합니다. 초기교회 순교자들은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장미화관을 쓰고 순교당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신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권장해 왔습니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묵주기도의 방식을 묵상기도와 염경기도로 구성하여 표준화시켰습니다.
성모님은 1830년 파리에서, 1846 라 살레떼에서, 1858년 루르드에서 벨라데따에게, 1871년 폰트매인에서, 1917년 파티마에서 6번이나 발현하실 때마다 죄인의 회개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통해 언제나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 속에 생활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묵상함으로써 더욱 우리 자신을 주님과 일치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염경 기도(기도문)를 계속 되풀이 하여 바치면서, 환희와 빛과 고통과 영광의 각 신비마다 제시되어 있는 묵상 주제를 따라 더욱더 깊이 주님 구원의 신비를 깨닫고, 주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주님의 모습을 뵈오며 또한 주님 그 신비에 참여하게 해줍니다.
염경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지어 주신 주님의 기도와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바치도록 기도문을 만들어서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분심을 떨쳐 버리고 신비 안에 깊숙이 들어가기 위하여,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과 영광송과 구원송을 계속 반복합니다.
묵상 기도는 주님의 신비를 생각하고 기려, 자신의 매일 생활 안에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새기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첫 신비, '환희의 신비'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고 기뻐하는 천사들의 흥겨운 노랫소리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기쁜 소식에 대한 설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겸손과 순명에서 시작하여,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서 하느님의 소명을 확인하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윽고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세주의 탄생!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고, 예수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심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환희의 신비를 묵상하며, 1단에서 내가 해왔던 일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돌이켜 보고, 주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쓰시고자 하시는지 찾습니다. 2단에서는 주님의 복음 말씀을 따라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기가 알아들은 뜻이 참으로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공동 식별함으로써 확고하게 받아들입니다. 또한 그렇게 깨닫고 받아들인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청합니다. 3단에서는 하느님의 뜻이신 '말씀이 사실로 된' 구세주의 탄생처럼, 우리가 공동체의 식별 과정을 통해 온전히 깨닫고 받아들인 주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주님의 협조자가 됩니다. 또한 탄생하신 구세주를 알아보는 표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가 2,12)라는 예언을 기억하며,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내어줍니다. 4단에서는 마치 우리가 씨를 심고 물을 주어도 씨앗에서 싹이 돋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처럼, 우리가 애써 실천하는 이 일과 그 일이 주님 안에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 봉헌합니다. 5단에서는 우리가 바친 그 열매나 불안한 미래가 참으로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확인되어, 기쁨에 넘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빛의 신비’는 우리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즉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을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주시는 장면을 묵상하게 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쳐주시고, 실제 현실로 증명해 보여주시고,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한 가치 판단과 방법과 과정을 일러주시고 성체성사에 이르는 헌신적인 희생을 보여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주님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기도를 바치며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주님의 뜻을 명확히 체득하고 주님의 뒤를 이어 이 땅에 하늘나라를 이루도록 투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1-12)
우리는 빛의 신비를 묵상하며, 제1단에서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를 버리고 주님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와 인류사회를 위해 희생 봉사하고자 다짐합니다. 2단에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현세적인 어려움에 꿋꿋이 맞서 믿음으로 이겨낼 힘을 청합니다. 3단에서는 성령의 힘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복음을, 죄와 악의 굴레에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오류에 빠진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게 해주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청합니다. 4단에서는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현세적인 축복과 은총을 받아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하늘나라를 이루는데 헌신하고자 봉헌합니다. 5단에서는 주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으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머무는 곳곳에서 주님의 사명을 실현하고자 노력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수난 당하시는 ‘고통의 신비’는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이사 52,13-53,12)를 연상케 합니다. 특별히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이사 53,4-8)는 구절에서 수난 당하시는 주님이 연상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시느라고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바쁘십니다.(마르 3,20;6,31). 지금까지 당신 백성들에게 온갖 정열과 애정을 다 쏟아 부으신 주님은 오늘 마지막으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주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명확히 확인하고 기꺼이 받아들이시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십니다. 마침내 주님은 시기심 가득 찬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터무니없는 말로 고발당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애정을 쏟아 부었던 백성들은 주님을 거부하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이교 총독인 빌라도는 인간의 권위로 하느님의 권위를 누를 수 없음을 알았지만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주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주님은 온갖 모욕과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고통을 당하십니다. 주님은 혼자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변함이 없는 것인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기에, 그리고 진리와 사랑만이 악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기에 꿋꿋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악의 세력들은 마지막 죽음의 현장인 십자가상에서마저 주님의 사명을 포기하라고 유혹하지만, 주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다 이루십니다. 주님을 거부하는 이들을 위해 대신 용서를 빌어주시고, 자신은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자비하신 아버지께 향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단지 죄 없는 사람의 죽음과 그에 따른 감상적인 동정을 넘어, 인간에게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백인대장처럼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
우리는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며, 1단에서 나의 욕심과 의지와 생각을 감정과 함께 벗어 던지고 주님의 뜻을 찾습니다. 2단에서는 갖은 곤경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에게 들려주신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3단에서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되더라도 꿋꿋이 그리고 항구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4단에서는 십자가를 무겁게만 하는 우리의 악행과 십자가를 가볍게 하는 우리의 선행을 동시에 바라봅니다. 5단에서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주님께서 남기고 가신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를 기억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묵주기도 네 번재 신비인 ‘영광의 신비’는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구원을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주님은 악의 세력인 죽음을 누르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구세주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도시 갈릴래아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리스도 주님은 주님께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셨던 바로 그 사랑을,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도록 명하시고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마태 28,18-20).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를 그리스도 주님과 일치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건설하도록 이끄시고, 우리가 그 일을 하는 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은 교회의 생명이요, 운전사이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는 백성들의 모범을 주님의 모친이신 마리아에게서 발견합니다. 끊임없이 그리고 끝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묵묵히 따랐던 마리아의 삶을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 마리아에게 "(주님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전구기도를 바치며, 성모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썩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하늘로 불러 올리셨고, 하늘의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주님의 교회인 우리는 성모 마리아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누릴 기쁨과 행복을 갈망하며,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며, 1단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어려운 이들의 삶으로 들어갑니다. 2단에서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내 일상과 내 활동 안에서 삶으로 증언하기 위해 확고한 믿음을 다지며, 성령을 기다립니다. 3단에서는 성령을 받아,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가 됩니다. 4, 5단에서는 우리 교회의 모범이신 마리아를 공경하고 본받아, 우리에게도 주실 영광을 기억하며 주님 사랑의 사도적 열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많은 청을 드립니다. 기도가 주님께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충분한 도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많이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청하는 우리를 보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은총은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복을 주고 고통의 아픔을 치유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공동체 모두에게 주님의 뜻이 전달되고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주님의 은총이 현실적인 축복과 풍요와는 반대가 될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께 청할 때에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기를 빌어야 하며, 주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뜻에 맞추어 변화시켜 주시기를 아울러 청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영 안 들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기다리며,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 방향으로 나갈 때, 때가 차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뜻 밖에 있다면, 우리가 기도 생활 안에서 수정하도록 깨우쳐 주실 것이요,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다면,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애정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에페 3,20-21)
주 하느님께 틈나는 대로 묵주기도를 바치며 우리의 구원을 향한 정성과 노력 그리고 맞갖은 봉헌을 바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현세생활과 미래 구원을 위한 모든 필요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럼 우리는 그렇게 주님 은총으로 채워주신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웃과 나눔으로써 선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성 부르노 사제 은수자 기념일(2018년 10월 06일) 기쁨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오늘 복음사가 루카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에게 허락된 선익을 위해 예수님이 당신 아버지를 찬양하는 이유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겸손한 이들과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들에게 허락된 계시를 두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하느님이 말해주신 것을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기쁨을 드러내십니다. 다른 경우에서도, 당신 아버지와의 내적인 대화 중에 예수님은 또한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항상 듣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실 것입니다.
우리의 참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카르투시오 수도회를 창립한 성 부르노의 축일을 경축합니다. 성인은 고독과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성인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해 기뻐하도록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백 마디 말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 <루카 10, 17-2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구약에 하느님의 말씀을 예언자, 선지자를 통해 듣고 전하고 방대한 구약 성경이 쓰였지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한 번 보는 것만 못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예전에 예루살렘 성지에 가서 듣고 믿은 것을 눈으로 보고 그 장소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어찌 내게 이런 행복이 있을까?’ 하며 행복의 눈물을 흘리며 미사를 봉헌한 생각은 지금도 생각하면 행복해집니다.
저는 구약 시대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보다 신약시대에 살면서 분명한 믿음의 의미를 듣고 보고 체험하게 된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믿음은 들어서 믿는 것보다 보고 체험함으로써 믿음을 사는 것이 행복한 믿음의 삶입니다. 또한, 그런 삶을 사시던 믿음의 선조들이 앞서 있다는 것도 행복의 요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열정적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듣고 보고 체험하면서도 그 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작은 시련에도 절망하고 주님을 믿지 않고 사는 믿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명해주시고 이끌어주시는데 우리는 양의 우리를 떠난 양처럼 험한 산골짝에서 길을 잃고 헤맵니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기도와 묵상을 깊이 하며 주님을 찾아보고 믿음 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는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본 사도로부터 300년이란 시간 주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목숨 바쳐 믿음을 증거한 이유는 주님을 보고 굳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복음이 전해지고 주님의 현존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순교로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유약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믿음으로 살지 않고 각자의 생각이나 편리한 믿음으로 한국의 500만 신자 중 겨우 100만 명이 턱걸이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지만, 세상을 넘어 살 줄 알고 세상에 메여 노예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 호를 타고 밤과 낮에 살고 있지만, 밤을 낮처럼 살 수 있어야 모든 이의 삶이 행복해집니다.
밤을 지키는 파수꾼, 밤에도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군인, 밤일하는 노동자 등 이들이 없으면 삶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일이나 사건이나 기후 변화에 메여 살지 말고 초월한 삶을 믿음으로 살도록 기도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에 메이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오늘 현실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보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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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철부지 시절이 있었습니다.
좋아함도 싫어함도, 기쁨도 슬픔도, 꿈도 두려움도 모두가 고만고만 하던 우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화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되어 악당을 물리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거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리도 신이 났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옛날 이야기나 동화에 숨을 죽이며 귀 기울이다 얼굴을 붉히기도, 환한 웃음을 짓기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급 동무가 전학을 가면,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모두가 하나같이 울어 대던 일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네 동무들과 더운 지도 추운 지도 모르고, 날이 기울고 있는 것도 잊은 채 깔깔대며 신나게 놀던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에 때로는 감동해서, 때로는 기뻐서, 때로는 억울해서 소리내며 울던 일도 기억합니다.
소풍 가기 전에 새로 산 신발이 더러워질까 방에서만 신고 다니던 기억도 있습니다.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배우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아버지, 엄마를 떠올리며 무서워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어느덧 50년이 되어가는 기억들입니다.
한마디로 순수했습니다.
쉽게 받아들였고, 쉽게 믿었고, 쉽게 좋아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옳다 생각했기에 받아들였고, 믿었고, 좋아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만 허락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가장 맑고 때묻지 않은 마음이 허락된 시간이었습니다.
세월과 함께, 여러 이유로 우리의 마음은 혼탁해지고 때를 묻혀가며 지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은 어쩌면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수하고 맑아야 보고자 하고 듣고자 합니다.
그리고 옳음이 보이고 들립니다.
그 옳음이 기준이 되고 제대로 선택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 어린 시절이 그립다면 그 어린 시절의 마음을 되살려내야 합니다.
다행히 늙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호르몬의 변화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호르몬의 변화를 우리에게 코딩(Coding)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슬픈 것을 보면 슬퍼지고, 기쁜 것을 보면 기뻐합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쉽게 대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호라고 믿고 싶습니다.
결국 세상의 죄는 슬픈 것을 슬프다 하지 않고,
기쁜 것을 기쁘다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고 진행됩니다.
철부지가 엄마, 아빠의 말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를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을 때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해피 엔딩 happy ending -모든 것은 하느님 손안에 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손안에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때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난 때는 없습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둡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때 역시 하느님의 때였습니다. 어제 모처럼 온종일 비오는 날 오전 잠시, 농장 수사님의 부탁에 배밭 수확일을 도왔습니다. 해마다 10월초 이때쯤이면 어김없이 본격적 배수확이 이뤄집니다.
어제 오전 약간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젊은 수도형제들과 함께 일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농장 일에 큰 몫을 하는 젊은 형제와 덕담德談을 나누며 웃었습니다.
“내가 수도원에 와서 첫 가을 수확을 돕던 해, 1988년 수사님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내 나이 40이었고 지금은 70입니다. 30년 전, 누가 수사님이 요셉수도원에 들어오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하느님의 계획에 있었던 것이지요.”
새삼 삶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야기 나누며 기념 사진도 찍었습니다. 수확된 신고 배열매들을 싸고 있는 종이 봉투를 벗겨내면서 새삼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농사는 80% 하느님이, 20%는 사람이 하는 일이고, 최고의 농부는 하느님이시라고 들은 말도 생각났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고백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배열매들은 그대로 하느님의 작품이구나,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느님의 작품, 생명의 열매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소중히 고맙게 여겨할 하느님의 작품 가을 생명의 열매들입니다.
더불어 열심히 일하는 자매들을 보면서 ‘사람이 일을 못하면 어떻게 살 수 있겠나?’ 작금 일자리가 없어 고통을 겪는 많은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분도회의 모토는 믿는 모든 이들의 생활원리인데, 일이 빠져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겠나 하는 근원적 물음이었습니다.
해피엔딩의 가을입니다. 우연한 해피엔딩의 수확이 아니라, 겨울, 봄, 여름의 인고의 세월을 기다리고 견뎌내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기에 해피엔딩의 가을 수확입니다. 끝은 시작이라 수확이 끝나면 거름을 내고 전지함으로 또 배농사는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해피엔딩, 행복한 끝입니다. 파견받고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제자들은 귀환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기쁨에 넘쳐 풍부한 성공적 체험담을 보고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제자들의 보고에 곧장 이어지는 말씀이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참 큰 격려가 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궁극의 승리는 하느님께,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이제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바로 해피엔딩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더욱 본질적인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됐다는 하느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행복과 참기쁨의 원천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깨달음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동안 인고의 세월 하루하루 제자들과 함께 온갖 고통과 시련중에도 최선을 다했기에 이런 깨달음의 선물이요 확신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고백은 순전히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함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성취됩니다. 참으로 영적 사람들의 삶의 여정은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열매는 깨달음의 열매요 줄줄이 이어지는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입니다.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은 이런 은총의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의 확신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런 확신의 깨달음 역시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에 대한 참행복선언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제자들의 해피엔딩의 귀환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흥분하고 고무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하여 줄줄이 터져나오는 은총의 깨달음들입니다. 눈만 열리고 귀만 열리면 은총의 선물들 가득한 현실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끝과 시작이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시작에 해피엔딩의 끝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시련의 현장도 해피엔딩입니다. 하여 옛 선사들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이 좋은 날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욥기도 해피엔딩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하느님과 사탄의 경쟁에서 마침내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분투했던 욥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 때문입니다. 욥은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고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욥의 겸손한 참회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욥이 참으로 고맙고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참으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깨닫습니다. 실패인 듯 하나 결국은 성공이요, 패배인 듯 하나 결국은 승리요, 불행한 듯 하나 해피엔딩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손안에 있고 모두가 하느님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벽 독서의 기도시 시편 136장 24절까지 반복됐던 후렴,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말마디 기억하실 것입니다. 분도성인은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바로 욥이 그런 인물입니다.
부와 건강은 선이고 가난과 시련, 죽음은 악이 아닙니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부와 건강, 가난과 고통이나 시련, 죽음도 아니고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희망과 신뢰, 그리고 사랑입니다. 진짜 불행은 재산을, 건강을,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잃는 것입니다. 하여 참으로 신망애의 사람들이 진정 축복받은 행복한 자들이고 늘 해피엔딩, 일일시호일의 기쁨을 사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까지 놓지 말고 꽉 잡아야 할 하느님 희망의 끈, 믿음의 끈, 사랑의 끈, 생명의 끈입니다. 배들이 수확되는 순간까지 배꼭지로 배나무에 꼭 달려 있듯이 말입니다. 바로 욥이, 예수님이 무수한 성인들이 그 모범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늘 해피엔딩을, 일일시호일의 나날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소서.”(시편119,135ㄱ). 아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여정은
철부지들의 철 없는
여정들의 반복입니다.
철부지는
철부지일때
아름답습니다.
철부지들이기에
풍성한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철부지들과 아버지의
따뜻한 관계입니다.
살면 살수록
자만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강조하십니다.
순수한 철부지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하늘을
보게됩니다.
신비는 요란하지
않습니다.
철부지들의
소중한 여정안에서
순수한 겸손을 배웁니다.
가장 귀한 것은
겸손과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안에선
보잘것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비와 감사
철부지와 은총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여정이
감사와 은총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삶이란
좌충우돌하는
철부지들의 행복임을
믿습니다.
제가 아는 청년 중에서 말을 아주 잘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말을 하는 것도 좋아해서 어떤 자리에서든지 항상 주도를 해서 말을 하곤 하지요.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말할 기회가 많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물에 빠지면 입만 물 위에 동동 뜰 거야.”
그런데 아주 특이한 상황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이 여자 친구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이 하는 말을 끊기가 일쑤였는데, 끝까지 여자 친구의 말에 다 듣고서야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너 왜 그래? 원래 이렇지 않잖아?”라고 물었더니만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여자 친구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목소리에 집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여자 친구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고 그 목소리를 느끼고 싶거든요.”
하긴 저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정말로 존경하는 분의 말을 들을 때에는 온 감각을 다 동원해서 집중했지요. 왜냐하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말에 우리는 집중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감각을 다 동원해서 집중하지 못할까요? 주님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고, 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어서일까요?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당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계시며, 우리 삶 전체를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었던 일흔 두 명의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의 복종을 통해 얻는 기쁨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을 통한 기쁨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그 어떤 기쁨도 하느님 안에서 얻는 기쁨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모습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보여주셨지요. 그는 예수님과 가장 비슷한 삶을 사셨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받은 오상까지도 똑같이 받는 영광을 얻으셨지요.
주님께 철저히 집중하고 닮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께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얻는 기쁨을 뛰어넘는 하늘 나라의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슬픔 속에서도 의연하게 이해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헤르만 헤세).
연리목을 보면서...
어느 곳을 여행하다가 ‘연리목’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줄기가 이어져 한 나무가 되는데, 이런 나무를 ‘연리목(連理木)’이라고 합니다. 각자 떨어져 있던 둘이 만나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두 남녀의 지극한 사랑에 비유되어 사랑나무라고 불리지요.
그런데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는 그 처음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 처음에 우리가 그냥 한 나무로 살자고 약속하고 딱 붙어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그 시작은 사실 상처였을 것입니다. 나란히 자라다가 어느 날 줄기가 맞닿게 되지요. 바람이 불 때면 흔들리면서 서로 스쳤고, 이 과정이 계속되면서 저절로 나무줄기의 껍질이 벗겨집니다. 이런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이 두 나무의 물관과 체관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될 때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하지만 하나가 된 후에는 장점이 많아집니다. 두 개의 나무가 하나 되었으니 뿌리가 두 배로 넓어지고, 그래서 아주 강한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물어도 뿌리가 넓으니 다른 나무에 비해 훨씬 유리합니다.
연리목의 모습을 보면서 고통과 시련에 굴복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즉, 사랑하는 존재가 하나가 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참고 참으면서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 행복의 길이 펼쳐질 테니까요.
주님의 연인, 주님의 시인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한 성인이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특히 프란코 제피렐리 감독이 만든 영화 ‘태양의 찬가’(Brother Sun, Sister Moon)를 보고 반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수놓은 영화였습니다.
성인의 일생을 찬찬히 바라보면 주님의 아름다움에 반해 주님의 연인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 전체가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였습니다. 아름다움 안에서 사람과 자연을 만났습니다. 아름다움은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고통과 슬픔과 번뇌 속에서 더욱 투명해졌고 더욱 빛을 내었습니다.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살고자 하는 형제들의 요구에 성인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선종하기 2년 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라 베르나 산에서 깊은 기도 중에 세라핌 천사를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만났 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되었고 형제들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실제로 깊이 새겼습니다. 이제 흉물스런 십자가의 상처는 아름다움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아름다움 안에서 그 유명한 ‘태양의 찬가’를 지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주님의 시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주님의 연인과 주님의 시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태양의 찬가’를 마음으로 노래합시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친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 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민순 신부 역)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기42,2)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욥은 하느님께 두 손을 들고 맙니다.
어머니의 자궁마저 저주할 정도로 극도의 고통과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욥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옳게 살아왔다고 믿었던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었다고 인정하고 맙니다.
그리고 흔들렸던 자신의 신앙에 대해 통회를 합니다.
깨끗이 인정하는 승복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얻게 되고, 품고 있던 부정적 감정은 사라집니다.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복과 불행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며, 또한 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여 우리는 힘을 다하여 행복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을, 우리의 계획을 넘어서는 삶의 변수는 늘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람이 어긋났을 때는 고운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봅니다.
우리의 뜻에 하느님의 뜻을 맞추려고 합니다.
정말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잘못을 많이도 저지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마저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고 맙니다.
욥의 분노는 당연하고 정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욥기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의 옳으심에 대하여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이해를 못할지언정, 그분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뜻에 그분을 맞추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얻게 되는 은총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총을 청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분 앞에 설 때, 욥이 한 말이 자신의 말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들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 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한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 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써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 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의 삶을 묵상합니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젊어서는 향락을 추구하고 기사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그 가정은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가정이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 출세를 바랐지만 적에게 잡히고 중병을 앓는 포로생활을 경험한 후 마음의 큰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재물을 버리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성 다미아노 소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 프란치스코, 가서 허물어진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작은 형제회’를 창설하여 청빈, 순명 정결의 삶으로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마음으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1224년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인의 말씀중에 “네 생각을 주님께 맡겨라. 그러면 주님께서 잘해 주시리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맡긴다’는 말은 그것을 ‘내준다’는 뜻입니다. 내준다는 것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맡김을 받은 사람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것이지요. 결국 내 생각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생각을 할 때마다 혼자하지 않고 주님께 “어떻게 할까요?”하고 여쭈어 보고 나서
이 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여라. 하면 저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대신 주님께서 내 머리로 생각하시게 하고 그 생각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사시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씀하신대로 사셨습니다. 밥 먹고, 잠자고 사람들 만나고 하는 모든 일까지도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려고 늘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무슨 일이든 “예수님, 어떻게 할까요?”하고 여쭈어 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할 수 있길 바랍니다. 성모님도 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고 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서로에게 봉사자 처럼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국회의원직은 봉사직 이건만 왕직 처럼 행세하면 부자격자 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자녀들이 서로에게 봉사자 처럼 산다면 화목할 겁니다.
지위가 오를수록 겸손하지 못하면 미움을 사고 외면당해 마땅합니다.
존경심도 고마움에서 우러나와야지 명령과 복종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조차 모르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해지면 그 직책을 벗어야 합니다.
소작인이 주인행세하면 주인은 소작인을 바꾼다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마태오 21,41)”
프란치스코와 성 베네딕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순례 제46일차가 되는 날이자 제 영명축일입니다. 산티야고 순례의 말미에 맞는 축일이기에 느낌이 각별합니다. 이번 축일은 산티아고 순례후 받은 또 하나의 증서로 인해 의미가 깊습니다. 바로 올해는 전설같은 실화로 성 프란치스코가 산티아고를 순례한지 800주년이 되는 해라는 증서입니다. 마침내 성 프란치스코가 산티아고 순례 800년후 대한민국의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와 이냐시오 형제가 산티아고를 순례했습니다.
어제의 순례는 파티마에서 산티아고까지 장장 8시간에 걸친 버스순례였습니다. 파티마에서 현지시간 9:15분에 출발하여 산티아고에 도착하니 오후 현지시간 6:15분이었습니다. 10월2일(산티아고-파티마)처럼, 온종일 버스안에서 지낸 것입니다. 이틀 묵었던 '크리스토 레이' 호스텔에서 버스터미널까지 20분정도 힘차게 걸어오는 동안 산티아고 대성전이 있는 광장에서 잠시 주모경을 바친후 강복을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보호가 있었기에 대부분 좋은 날씨에 순탄한 일정에 둘 다 건강했습니다.
파티마에서 산티아고까지의 버스순례가 상징하는바 그 의미가 자못 깊습니다. 파티마에서 산티아고에 오는 차는 하루 1회로 이 시간을 놓치면 도저히 그날 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파티마에 도착하여 잔뜩 긴장한 것도 오전 9:15분의 차시간이었습니다. 제때 시간에 제대로 차를 타야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우리 인생내적순례여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제때 시간을 놓치고 제대로 인생 차를 타지 못해 낭패를 보는 인생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파티마에서 산티아고까지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순례여정 역시 목적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목적지가 없이 인생여행하는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죽음은 인생순례가 끝나고 목적지인 하느님께 귀가 하는 시점인데 하느님 목적지 없이 살아온 이들의 죽음은 참 착잡할 것입니다. 간혹 십자고상이 없는 거실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중심이 없는 삶을 상징하는듯 암담한 느낌도 들 때가 있습니다.
성인들은 인생순례여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목적지인 하느님의 집에 무사히 도착한 분들입니다. 어제 장장 8시간의 버스순례를 마치고 우리민박집 주인의 환대를 받으니 마치 하느님의 집에 성공적으로 귀가한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성 프란치스코는 물론 성 베네딕도 등 모든 성인들이 인생순례에 성공하여 무사히 하느님의 집에 귀가한 분들입니다. 오랜시간 걸려 하느님의 집에 귀가한 분도 있고 짧은 시간에 귀가한 분도 있으니, 성인들의 산 햇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집 귀가 시간을 염두에 두고 늘 깨어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되겠는지요. 하느님의 집, 목적지 없이 방황하다 인생여정 허무하게 마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 베네딕도의 대조가 재미있습니다.
전 교황님이 베네딕도 16세에 이어 프란치스코 현 교황입니다. 제가 개신교에서 개종전 알았던 유일한 성인이 프란치스코 였고 개종후 세례는 물론 수도명도 프란치스코로 택했습니다.
베네딕도회 입회과정 역시 똑같습니다. 유일하게 알았던 수도회가 베네딕도회였고 더 생각할 것 없이 베네딕도회에 입회했습니다. 그러니 제 수호성인이신 두분 프란치스코와 베네딕도는 제 운명이자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제가 자주 인용하는 베네딕도회 영성을 요약하는 자작시입니다. 제 경우에 빗대어 '밖으로는 베네딕도, 안으로는 프란치스코'라 칭하며 자족하기도 합니다. 산같은 수도승 베네딕도 성인과 강같은 시인이자 신비가였던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보완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 완벽합니다.
두 분 모두 인생순례여정 성공리에 마치고 하느님의 집에 귀가하신 분입니다. 이들의 선종 실화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오늘 1독서, 욥의 내적순례여정이 참 파란만장한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성공적으로 하느님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참회를 통해 완전히 하느님의 집에 안착했고 그 인생 해피엔드로 마감합니다. 그의 참회 고백이 참 진솔하고 아름답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 자는 누구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겐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이런 참회로 성공리에 내적인생순례를 마친 욥에게 하느님은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한 대목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시고 내 인생순례의 목적지가 된 이들이 바로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이들입니다.
이 하나면 족합니다. 더이상 무엇을 바라고 욕심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더욱 열렬히 사랑함으로 하늘에 기록된 우리 이름이 더욱 선명히 빛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하루도 성공적 내적순례여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이런 하늘나라의 신비를 우리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3년 사제 생활을 하면서 ‘기쁜 일, 보람 있는 일, 즐거운 일, 행복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아쉬운 일, 속상한 일, 후회 되는 일, 부끄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오늘은 기쁘고도 행복했던 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 본당에서 만난 주임신부님입니다. 신부님께서는 무척 인자하셨습니다.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제 생활이 기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함께 동네 산보를 하면서 신자들이 하는 가게를 들리기도 하였고, 차가운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마음을 열게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처음 사제 생활을 하는 제게 견책과 비난 보다는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힘을 준 신자 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모든 본당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따뜻함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언제나 믿어 주셨습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도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어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고, 어떤 분들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여행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용문 수련장에 있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무실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은 작은 공사이지만 성실하게 일해 주셨던 교우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무실 앞에 모신 성모상은 기쁜 마음으로 봉헌해 주신 부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문은 저를 만나기 위해서 수련장을 찾아 주셨던 복음화 학교 임원들께서 봉헌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때로는 시련을 통해서,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 때로는 우연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도 삶의 순간 순간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보았으리라 생각하비다.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것,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계신 것, 하느님을 믿게 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축복이며, 기적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활짝 핀 장미처럼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프란치스로 성인의 축일입니다.
수 많은 기도를 통해
장미는 피어납니다.
장미를 피우는 방식은
주님을 사랑하는
가난의 방식이었습니다.
가난하기에 간략하셨고
간략하기에 향기롭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닮은
무소유의 장미는
더더욱 붉게 타오르며
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힘겨운 우리 마음 안에
맑고 투명한 그리스도의
얼굴을 다시 보여주십니다.
무너진 것들 사이로
허물어지는 것들 사이로
일어서지 못한 마음 사이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언제나 회개하며
그리스도께로 돌와왔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마음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좋으신 주님안에서
가장 좋으신 주님 사랑의
기쁨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아닌 것에서 벗어나
사랑 인 것을 찾고
만나셨던 그 기쁨의 여정이
바로 십자가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장미를
꽃 피게 하는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상처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랑의 상처가
영혼의 가장 짙은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참 얼굴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회개의 얼굴임을 믿습니다.
가장 좋으신 사랑은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마음의 가난함으로
십자가를 다시 세우는
은총과 평화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소중한 철부지들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최고의 신비는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사랑은
서로의 존재를 끝까지 사랑하기에
보다 더 깊은 신비가 됩니다.
철부지처럼 부족하지만
주고 받는 사랑을 하느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철부지들은 거짓없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압니다.
하느님께서 전부인 그 사랑입니다.
철부지처럼 경계심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비를 가로 막는 것은
우리의 경계심입니다.
철부지들의 순수한 눈동자 안에
하느님의 투명한 신비는
펼쳐져 나갑니다.
철부지처럼 아버지 하느님과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세상을 밝히는 건
언제나 맑은 마음임을 믿어야 합니다.
철부지처럼 더 단순하고
철부지처럼 더 진짜를 나누는
뜨거운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오히려 철부지의 신앙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신비를 살게하는
은총의 선물이 됩니다.
다시금 길을 잃은 우리에게
행복한 철부지를 일깨워주시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마음으로 보게 하십니다.
아버지와 철부지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철부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며
마음을 나눕니다.
철부지들은 압니다
삶의 모든 것이 신비이며
아버지의 선물임을 압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를 아십니까? 그는 자신의 나이 22살 때, 몸속의 운동신경이 차례로 파괴되어 전신이 뒤틀리는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진단과 함께 1∼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항상 희망을 가지고 7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학문에 열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온몸이 묶인 듯 휠체어에 고정되어 있고, 가슴에 꽂은 파이프를 통해서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휠체어에 부착된 고성능 음성 합성기를 통해서만 대화를 할 수 있으며, 전신마비로 인해 음식물의 거의 대부분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티븐 호킹 박사를 가까이 본 사람들은 그의 눈에서 불행의 흔적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루게릭병으로 평생을 고생한 스티븐 호킹 박사에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보다 더 많은 걸 어떻게 바라겠습니까?”라는 답변을 했다고 하지요.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세상에 보냈던 제자들이 전교활동을 마치고서 예수님께 자신들의 활약상을 보고하지요. 그들은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런 힘을 예수님을 통해 얻었음에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남기는 업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들은 앞서 스티븐 호킹 박사와 같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닌, 주님의 기준에 맞춰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자기 부모이길 바라는 사람, 또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아이가 자기 자식이길 바라는 사람은 어떨까요? 지금의 부모가 또는 지금의 자식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면서 미움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각종 불평불만을 하느라 힘과 시간을 소비하게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삶이 내게 주지 않은 것을 불평하기보다 삶이 내게 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덕을 갖춘 사람입니다.’라고 하지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기준에 맞춰서 생활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 우리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자기 그릇만큼밖에 담지 못하지(에밀리 디킨슨).
하느님 나라의 규칙을 지키자
어제 어떤 사이트에 들어갈 일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사이트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에 입장이 가능한 곳이었지요. 저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틀렸으니 다시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아이디와 비밀번호 찾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찾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제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의아했습니다. 보통 자신이 많이 사용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써야 나중에 헷갈리지 않을 테니까요.
그 이유는 이 사이트가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규칙 때문이었습니다. 즉, 제가 사용하고 있는 아이디로는 가입 할 수 없었기에, 제가 평소 사용하지 않는 알파벳과 특수기호를 이용해서 아이디를 만들어 입력했고 그래서 기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이트의 규칙을 지켜야 회원 가입을 할 수 있고, 이 사이트에 들어가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아이디로만 활동하겠다고 아무리 힘껏 주장한다고 해도 그 주장은 수용되지 않습니다. 저 하나 때문에 프로그램 전체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하느님 나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입장이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 하나의 모습에 기준을 맞추어 하느님 나라의 규칙을 변경할 리도 절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규칙에 맞춰야 할까요?
당연히 내가 하느님 나라의 규칙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 나라의 규칙은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정확하게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면 쉽게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이라는 하느님 나라의 규칙을 실천할 때 하느님 나라에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규칙을 지금 잘 지키고 계십니까?
어제는 공휴일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바쁜 날이었습니다. 새벽 미사 후부터 모임이 쭉 있었거든요. 특히 오후에는 어린이 꽃봉오리 창작성가제와 인천교구 꾸르실료 도입 4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거든요. 저는 오후의 일정을 보면서 자전거로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많이 오는 행사다보니 차가 많아 주차할 공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또한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저의 예상대로 행사장에는 차가 많더군요. 자전거 타고 오길 잘 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글쎄 꾸르실료 도입 40주년 기념 미사를 하고서 밖으로 나가보니 있어야 할 자리에 자전거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자전거를 세워 두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제 근처에 있었던 많은 자전거들이 다 없어지고 딱 한 대만 매어져 있더군요. 요즘에 자전거 절도범이 많다고 하던데, 제가 그 피해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화가 마구 납니다. 자전거의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1년 넘게 타고 다니면서 저와 함께 했던 정든 자전거를 누군가 훔쳐갔다는 생각에 화가 깊숙한 곳에서 부글부글 일어나더군요.
좋은 행사 마치고 기분 좋은 마음이 갑자기 안 좋은 마음으로 바뀌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겠지.’라는 생각을 하려 했지만, 저 역시 인간인지라 ‘남의 자전거 가져가서 얼마나 잘 되는지 보자.’라는 생각도 갖게 되네요.
사실 그 근처의 본당에 계시는 신부님께서 밖에다 자전거 세워 두는 것은 위험하니까 안에다가 세워 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저는 묶어 두어서 안 가져 갈 것이라면서 신부님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후회가 안 될 수가 없지요. 저의 안일한 마음이 정든 자전거를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따라서 저 역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 잘못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자전거 가져간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고 나쁜 생각들을 계속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은 점점 사랑을 강조하신 주님과 멀어지고 있었지요.
문득 이렇게 자전거 하나 잃어버린 것도 기분이 안 좋은데, 구원으로 이끌어야 할 인간을 잃어버리시는 주님께서는 얼마나 안 좋으실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죄로 인해서 그리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인간에 대해 어쩌면 제가 자전거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아픔을 겪으실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인간을 보면서 큰 기쁨을 얻으시지요. 그래서 일흔 두 명의 제자가 성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오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차피 지나간 일들로 인해서 주님과도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주님과 더욱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 나 역시 예수님께서 바치신 감사의 기도를 자신 있게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러한 깨달음을 위해 자전거를 잃어버리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물건에 대한 욕심을 갖지 맙시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시라가타 도시로, ‘부드러운 카리스마’ 중에서)
임종을 앞둔 스승이 제자를 불러, 자신의 입안을 보여 주며 물었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럽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네게 줄 가르침이 없구나.”
노자가 쓴 《도덕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과거의 수직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마음을 열고 신뢰와 존경을 쌓는 수평관계를 추구하는 지금, 최후에 웃는 자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람이다.
컨설턴트로 활동했던 나는 도산 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려 내거나, 볼품없는 작은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은 ‘부드러움’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큰소리치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와 신체를 통해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했다. 물론 주변에는 이를 믿고 따르는 충성 깊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나는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을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발휘할 줄 아는 지혜’라고 정의 내렸다.
만일 당신이 참나무와 갈대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참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커다란 독수리가 가지에 내려앉아도 끄떡없다. 반면 갈대는 잔잔한 바람에도 고개를 숙여야 하고, 작은 굴뚝새 한 마리가 앉아 쉬는 것도 버겁다. 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갈대를 선택할 것이다. 강한 태풍이 불어왔을 때 참나무는 뿌리째 뽑히거나 부러지지만, 갈대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 역시 가끔은 온몸이 휘청거리고 뿌리가 흔들릴 만큼 강한 태풍이 불어온다. 거대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방법은 갈대처럼 자신의 의지를 부드럽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명심하라. 가장 단단한 성공은 가장 부드러운 힘이 결정한다.
제가 어느 피정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이 행복한 이유 100가지를 적어 보시오.”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어떻게 100가지나 적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는 무조건 100가지를 적으라고 하십니다. 만약 100가지의 행복한 이유를 적지 않으면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고 하시네요. 화장실도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만약 정말로 급한 사람 역시 100가지의 행복한 이유를 다 적은 뒤에야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별로 잘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이것 역시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남보다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재벌 아들로 태어나서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하나도 쓰지 못했는데…….
저는 급한 마음에 다른 사람은 어떤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다들 저와 비슷한 것 같더군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의 친구가 정신없이 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어떻게 쓰고 있는지 살짝 컨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고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 나는 팔이 두 개라서 행복하다.
2. 나는 눈이 두 개라서 행복하다.
3.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어 행복하다.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이 친구가 장난하나 싶었습니다. 남들도 가지고 있는 뻔한 것들이 무슨 행복의 이유가 되나 싶었거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 역시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볼 수 없고, 만질 수가 없으며, 냄새도 맡을 수 없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팔과 눈과 코는 내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행복한 이유 100가지. 제가 과연 이 100가지를 쓰기가 쉬었을까요? 어려웠을까요? 너무나 쉬었습니다.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행복한 이유는 100개가 아니라 수천 개라도 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런데 사실 좀 어이가 없습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제자들, 그것도 당신께서 잡히시는 순간에는 모두 도망가는 철부지 같은 제자들인데 이들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다니요? 오히려 하느님께 원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행복한 이유가 그렇게 많기 때문에,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한 이유를 생각해보시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사람마다 역할이 다르다('좋은생각' 중에서)
공자가 타고 다니던 말이 어느 날 한 농부의 밭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망쳐 버렸다. 화가 난 농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을 끌고 가 버렸다. 공자가 제자들을 부러 누가 말을 찾아오겠느냐고 묻자 말재주가 좋다고 소문난 자공이 제일 먼저 나섰다. 그러자 마부도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말을 잘 지키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그래도 자공이 가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자공이 아무리 설득해도 농부는 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자공의 선비 옷차림과 공손한 말투는 농부에게 오히려 거부감만 주었다. 결국 자공은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공자가 이번에는 마부를 보냈다. 마부는 농부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은 농부가 아니오. 내가 깜빡 조는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이 밭에 들어가 저지른 일이니 한 번만 용서하시구려."
마부의 처지를 이해한 밭주인은 허허 웃으며 말을 되돌려 주었다.
공자는 왜 처음부터 마부를 보내지 않고 자공을 보냈을까? 공자가 마부를 먼저 보내면 자공은 속으로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그런 일쯤은 자기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서운한 감정을 가질게 분명했다. 공자는 자공이 실패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상대에 따라 사람마다 역할이 따로 있다는 점도 일깨웠다.
마음의 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교가 ‘들음’을 강조한다면 불교는 ‘봄’을 강조합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깨달음을 뜻하는 ‘각(覺)’이나 ‘견성(見性)’ 심지어는 우리의 ‘관상(觀想)’이라는 한자의 용어에도 꼭 ‘볼 견(見)’자가 들어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생활에서 잘 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고, 예수님 역시 주저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선입견이나 편견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볼 수 있을까요?
육안의 시력이 좋다하여 잘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탐욕이나 교만이 가득하거나 편견으로 물들어 있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좋아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춰지고 철부지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마음에 욕심의 안개가 말끔히 걷혀 깨끗한 마음이 될 때 있는 그대로의 실재, 하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든 수행은 마음의 순수를 목적으로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평생 꾸준히 기도와 노동, 성경 묵상 등 규칙적인 수행생활의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에 밝고 맑은 마음의 눈을 갖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아멘.
감탄 속에 계시는 하느님
-김경숙 수녀님-
어린이들은 단순하고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며 감탄을 잘한다.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 떼를 들여다보면서 신기해하고 V자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면서 환성을 지른다. 어린이 같은 단순한 마음을 지닌 우리 가족들도 “우와, 멋져요, 따봉, 정말 예뻐요, 맛있어요, 고마워요.” 등 감탄사를 연발한다. “수녀님! 저것 보세요.” 민순 씨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리니 동백나무 잎에 새 떼들이 모여 있었다. 마침 아침햇살을 받은 나뭇잎마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와아! 보석나무 같아요.” 정말 새 떼들은 눈부신 보석나무에서 미끄럼을 타듯 나무 위로 올라갔다 쪼르르 내려왔다 또 포르르 올라 앉았다. 동백새란다.
마음이 순수한 그들의 눈에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더 많이 보이나 보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감격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이곳 부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해 뜰 때나 해 질 때 금빛 은빛 물결을 자연스레 접한다. 찬란한 태양이 수면 위로 불끈 솟아오를 때, 또 석양에 붉게 타오르던 해가 바다 속으로 풍덩 잠길 때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요즘 점점 더 세상이 메마르고 감탄이 줄어드는 것 같다. 감탄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활력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줄 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시고 당신 영광을 나타내 보이신다.
겸손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루가 10, 17-24)은 앞 부분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결과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드문 표현인 예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파견 하실 때 그들은 문자 그대로 빈 털털이의 모습이었다. 단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란 선포의 말씀과 "병자들을 고쳐 주어라"란 치유의 명령만을 그들 스승에게서 부여받았다.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제자들의 앞길은 암담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을 따랐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기뻐하며 돌아온 제자들의 결과 보고를 듣고 예수도 큰 기쁨에 가득차 환희의 찬가를 부른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란 이방 칼데아 지방의 현인과 점성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인과 율법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 내신다. 이것은 복음서의 중심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며,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이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구약 묵시 문학에도 이와 비슷한 찬가가 있다. 다니엘 2장으로 지혜와 능력은 하느님의 것이니 이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 드린다 (2:20-23). 하느님께서는 당시의 유명한 마술가나 점성가를 물리 치시고 포로 출신인 다니엘에게 당신의 계시를 밝힌다.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뜻한다.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겸손하고 못난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예수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못난 사람들, 철부지들)에게도 실현 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아버지의 이 응답에 기뻐 감사한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니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신성을 나타낸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본성 자체의 탐구보다도 관계를 통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을 인간들에게 알맞게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아들이 택한 바로 그런 사람들 즉, 미소한 이들에게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마침내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절정에 달한다. 예수는 참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원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놀라운 기쁨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바로 예수와 같은 겸손하고 가난한 자세이다.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하는 이유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돌아온 제자들은 신바람이 나 있다.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성과과 좋았기 때문이다.
기대 이상의 성과 앞에 신바람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실 이 기대 이상의 성과는 그들이 잘 난 때문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그냥 들떠서 기뻐했지만 이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예수님은 씨-익 웃으시면서
<얘들아, 너희가 진짜 기뻐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거야>하신다.
가끔 강론을 하거나 피정지도를 하게 될 때 기대 이상으로 칭찬을 들을 때가 종종 있다.
오늘의 묵상에 변변찮은 묵상글을 올리고서도 참 고맙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다.
남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물론 좀 쑥스러울 때도 있지만...
하지만 기대 이상의 칭찬과 찬사를 들을 때 그 때문에 제 꼬라지도 모르고 들떠 기뻐만 한다면 이 칭찬과 찬사의 주인공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그분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셨을 뿐이고 내가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수도자요 성직자라는 것 때문에, 벌써 기대에 찬 눈길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결과일 뿐임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으로부터의 칭찬과 찬사에 우쭐하며 기뻐할 일이 아니라 아, 내가 주님의 말씀의 도구가 되었구나!
아, 내가 주님의 제자 반열에 들었구나!
하는 사실이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칭찬과 찬사는
오로지 주님의 것임을 깊이 알고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며 지존하신 하느님이시여,
모든 선이시고 지상 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신 당신께,
모든 찬미와 모든 영광과 모든 감사와 모든 존경과 모든 찬양을 드리오며,
온갖 좋은 것을 돌려드리나이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작은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기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체를 모시고 간 사제의 손을 잡아주시는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
해맑은 웃음 머금고 달려와 품에 안기는 철부지 어린이,
눈빛만으로 서로의 사랑과 따뜻함을 나누는 학생들,
바쁜 시간 쪼개어 가면서 함께 하려고 애쓰는 청년들,
지친 삶의 넋두리를 편안하게 풀어놓는 교우들,
신부님 떠나시면 안되는데... 마냥 아쉬워 하시는 교우 아주머니,
부족한 보좌신부를 언제나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격려해주시는 주임 신부님,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서로의 삶을 지켜봐주시는 수녀님들,
한 푼 적선에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눈 먼 아저씨,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사랑하시는 부모님,
함께 하지 못하는 안따까움 애써 감추며 나를 믿고 지켜보는 가족들,
가끔 전화로, 편지로 나에 대한 기억을 확인시켜주는 친구들,
오랫만이네요... 반갑게 맞아주시는 술집 주인 아저씨,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
여러 사람들...
참으로 작은 이들입니다.
가까이에 있기에 소중함을 잊곤 하는 이들입니다.
그렇지만 나를 아는 이들입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이들, 그렇지만 고마움을 쉽게 잊어버리는 이들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알만한 유명한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나에게 다가오기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으쓱해지는 기쁨에 젖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쁨을 생각합니다.
슬기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무시당했지만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그 기쁨을.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기뻐하는 제자들보다, 무지랭이같은 제자들이 당신을 알게 된 것을 보며 더욱 기뻐하시는 예수님,
흥에 겨워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나에게도 작은 이들이 있습니다.
나를 아는 이들, 나를 순수하게 받아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기쁨에 나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당신의 기쁨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이 기쁨에 취해 나 또한 아버지 하느님께, 예수님께, 그리고 나를 받아 준 많은 작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혜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조금만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깨물어보지만 악습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방황을 시작하는 알콜 중독자들, 마약환자들, 노숙자들, 정신 질환자들, 이 세상 어딜 가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몇몇 출소자들...오늘도 한 아이는 제게 "차라리 소년원에서 그냥 있을걸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너무나도 엄청난 벽 앞에서 제 정신이 아닌 형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큰 숙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새천년기"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새천년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이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이웃들의 고통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이웃을 바라봄에 있어 가장 필요한 노력이 영적인 눈(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눈, 이기적인 욕망이 배제된 영혼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육적인 것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영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형편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지니고 다가갑니다.
"저 사람, 비록 지금은 주어진 상황이 몹시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원인이 있었을거야. 저 사람 역시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나와 똑 같은 인간이다."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아무리 한심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 창조 때의 그 고귀한 품성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예수님도 인간을 위한 존재였고, 복음도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역시 어디 딴 하늘 아래, 딴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이십니다.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차례 준비하느라 완전히 녹초가 되신 분들도 계실 테고, 또 어떤 분들은 오랜만에 긴 휴식의 시간을 간직하면서 재충전의 기회를 얻으신 분도 계실 것 같네요. 아무튼 이번 명절 연휴 기간 동안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번 추석 연휴를 성지에서 보냈습니다. 11시에 미사 봉헌을 한 뒤에도 계속 방문하시는 순례객들 덕분에 잠시도 성지를 비울 수가 없더군요. 사실 이번 연휴 기간 동안 방문하시는 순례객들이 없을 것 같아서 성지 직원들 모두 쉴 수 있도록 했거든요. 그런데 갑곶성지가 궁금하다고 경상도, 전라도 등등 전국 각지에서 방문을 하시니 제가 어떻게 성지를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제 갑곶 성지를 많은 분들이 아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흐뭇한 마음도 생기네요.
정말로 많은 분들이 성지를 방문하십니다. 그런데 며칠 전 있었던 일입니다. 미사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합니다. 보통 미사를 주례하는 저를 보는데 어떤 한 사람에게 시선이 향해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보여서 그러나?’
저 역시도 사람들이 시선이 모여지는 그 사람을 자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상한 점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더군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힐끗힐끗 계속해서 쳐다봅니다. 미사와 성지 설명 후에 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탈렌트라고 하네요. 어떤 사극에서 출연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미사 후에는 몇몇 사람들이 그 분에게 다가가서 사인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거든요. 따라서 그 분의 얼굴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면식이 전혀 없는 그 분에게 제가 사인을 해달라고 할까요? 또한 괜히 친한 척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분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으며 그 분을 잘 알고 있다면, 그 분이 저를 몰라도 저는 과도하게 친한 척 할 겁니다.
문득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성서를 단 한 줄도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 기도를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성모님께 대천사가 나타나서 예수 잉태 예고를 해 주었을 때, 성모님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만약 하느님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귀신이야~~”하면서 기절하지 않을까요? 또한 “뻥치지 마세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겨요?”하면서 의심과 거절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지요. 주님의 뜻이라면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소에 주님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 각종 말씀 듣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잘 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께서는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십니다.
가족을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칩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행복만들기' 중에서)
사랑 속에 있는 섬세한 관심과
순수한 믿음, 더 바랄 것 없는 만족감,
미래에 대한 기대감, 이를 이루기 위한
열정과 성실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을 품는 것이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둘째, 행복은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되고 있음을 느낄 때 찿아옵니다.
셋째, 진실해야 합니다.
넷째,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다섯째, 긍정적인 생각이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여섯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일곱째, 나눔입니다.
여덟째,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홉째,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열 번째,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은
뜻하지 않게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듯 씨를 뿌리고
돌보아야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행복이 아닐까요?
선교의 참된 기쁨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21-24절)은 결과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담고 있다. 첫 부분은 루가복음의 고유사료로서 앞서 파견된 12제자의 귀환 때에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9,10)
예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는 대목을 보면, 12제자의 파견 때와는 달리, 다만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10,9) 그런데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두 가지 일에다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결과는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자들이 기뻐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의 행복선언에 관한 내용으로서 마태오복음(11,25-27; 13,16-17)에도 병행절이 발견된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지혜를 똑똑하다는 사람들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 때문이다.(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당대의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두루 다니며 선포한 것을 기뻐하는 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대가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무지(無知)로 이어진다. 무지는 곧 죄(罪)이다. 하느님과 일치하신 예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에 대한 인식(認識)과 지식(知識)이 허락된다.(22절)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어떤 누구도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23-24절)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교육
-이인옥-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걸작이십니다.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예수님의 표정과 몸짓이 상상이 가십니까? 제자들보다 한술 더 들떠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예수는 보통 분이 아니시니 사탄이 떨어지는 것이 눈으로 보이나보다’라든가, ’사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사탄은 없어졌는가?’등, 어떤 단어나 구절때문에 경직되어 읽는다면 예수님의 기막힌 유머와 해학, 위트를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은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날 선생님께 칭찬 받은 것을 신발도 벗지 못하고 숨가쁘게 이야기하면 엄마는 기특하고 대견해서 자신의 일보다 더 신이 나서 아이를 띠워주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참된 교육자라면 그 선에서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의 성공을 그들보다 더 기뻐 칭찬해 주시면서도, 악령이 복종하는 어떤 가시적인 효과를 기뻐하기보다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하늘 나라에 그들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는 올바른 가르침을 빼놓지 않으시는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신명이 나신(새번역) 예수께서는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이 기쁨을 아버지 하느님께 보고하시는데 이 때 성령이 함께 하심도 언급함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하는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또한 감동적입니다. 그렇게까지 칭찬해주시던 제자들을 <철부지 어린이들>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 말씀 안에는 또 하나의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요?
자신들의 성공과 예수님의 칭찬에 고무되어 하마터면 자신들이 무지하게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기고만장할 뻔했던 제자들은 이 기도를 듣고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또한 이런 성공을 이룬 것은 실은 아버지의 업적이었다며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보고를 마치시는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무엇을 가슴에 새겨 넣었을까요?
이제 기도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그윽히 바라보시며 다독여주십니다. 그들이 미처 깨닫지는 못하고 있는 사실 즉,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이 이상의 교육방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철부지들
권혁주 주교님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21절)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표현한 곳은 이 대목뿐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슬기롭고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목격하신 예수님이 일흔두 제자를 통해 연약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21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들’에게는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철부지들’은 누구입니까? 우선 가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마태 18,4)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루카 18,13) 간절히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세리와 같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몸소 선택한 이들로 고아와 과부들,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 죄인들과 세리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과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뽑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철부지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2-1226년) 성인은 참으로 하느님의 ‘철부지들 중의 철부지’였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했습니다. 하느님께 순명하기 위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마태 18,4) 이 세상에 살면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루카 18,17) 그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상의 은총도 받았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파견하셨던 일흔두 제자가(루카 10,1)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라는 말은 '저희들이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는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음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귀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복종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 때문에' 라고 말하긴 했는데, 아마도 마귀들을 쫓아낸 일에 대해서 흥분해서 그랬는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마귀들이 주님의 이름에 복종합니다.'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믿음도 없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마귀들을 쫓아내기는 커녕 마귀들에게 봉변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라고 하면서 악령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는데,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라고 하면서 달려들어서 그들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참한 모습으로 달아나야만 했습니다(사도 19,13-16).
믿음이 없는 사람은, 또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마귀를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흔두 제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힘과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마귀들을 쫓아낸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루카 10,19)."
이 말씀의 핵심은 '내가 너희에게 권한을 주었다.'입니다.(뱀과 전갈과 원수는 마귀들과 사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었다.' 라는 말은 완전히 넘겨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위임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하셨다는 말은,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제자들은 마귀들을 쫓아내는 힘의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권한을 자기들 것이라고 착각해도 안 되고, 자기들이 마귀들을 쫓아낸 것이라고 착각해도 안 됩니다.
그런 착각에 빠지면 교만하게 되고, 교만에 빠지면 기도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결국 자기들이 받은 힘과 권한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열두 사도가 잠깐 그런 함정에 빠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사도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셔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 산 밑에서 기다리던 다른 사도들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마귀 들린 자기 아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는데 사도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습니다(마르 9,14-18).
그 일에 대해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라고 묻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마르 9,28-29).
사도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힘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시도했다는 뜻입니다.
이미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에게 특별히 당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이 말씀은, "마귀들을 쫓아냈다고 해서 교만에 빠지지 말고, 너희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도와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고, 마귀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힘과 권한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 기뻐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 말씀에서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정말로 쓸모없는 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이 진짜로 쓸모없는 종이고,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쓸모 있는' 일꾼이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언젠가 아는 지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에서 한 분이 저의 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또 이러한 식을 바꿨으면 좋겠다는 조언도 해주시는 것입니다. 조언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앞에서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책을 7권이나 출판했는데, 이제까지 글 한 번 쓰지 않은 사람에게 이러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이런 식으로 간섭받으면 기분이 어떠십니까? 또한 내 일에 대해 사사건건 관여하려고 한다면? 물론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간섭하고 관여하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내가 제일 잘 하는 부분에 대해서 간섭하고 관여한다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나의 재능과 능력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바로 주님 덕분인 것이지요.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물건과 달리 하나 하나 다르게 만드신 주님의 위대한 작품이 바로 우리 각자 각자입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스스로 가진 재능인 것처럼, 또한 주님께서 주신 남의 능력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해 기분 나빠하고 더 심하면 화도 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특히 주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세요. 베드로가 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치고 있을 때, 목수였던 예수님께서 간섭하고 관여하셨지요. 그때 베드로는 그대로 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리고 이 겸손이 제자들 중에서 으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겸손이 오늘 복음에서도 나옵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지요.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자기가 잘 해서 그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가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이름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주님 때문에 성공적인 전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나의 모든 일에 대해서 만약 그 일에 대해서 누가 간섭하고 관여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이름 때문에’ 내가 하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겸손의 마음을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겸손의 마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멋진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범을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다(슈바이처).
예수님의 선택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 제자들을 뽑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보잘 것 없고 다른 이들로부터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지요. 어부, 세리, 혁명당원,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길 배반자도 있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른 이들에게 기꺼이 권한을 주십니다. 즉,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할 힘을 주셨던 것이지요.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 주신 것을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온전히 받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받은 것을 세상에 어떻게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루카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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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TV를 켰다.
S방송사의 ‘궁금한 이야기’라는 프로가 방송되고 있었고, 그 중 한 내용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느 홀트 복지 센터에 살고 있는 중증 장애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 중 성별과 연령의 차이를 떠나서, 28명으로 구성된 ‘영혼의 소리’라는 합창단이 그 주인공이다.
말 그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는 다양했고, 두 개 이상의 장애를 지닌 중증 장애인들이다.
몇 명의 클로즈업된 이들의 소개와 함께 방송은 진행되고 있었다.
제일 먼저 클로즈업된 주인공은 ‘우유빛깔 대영이 형님’이라고 불리는 지적 장애와 백색 증후군 장애(Albino syndrome)를 가지고 있는 54세의 위암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하고 상관없이 지능은 일곱 살 어린아이 정도...
그는 네 살 때 부모로부터 길거리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항암 치료의 고통 중에서도 성하지 못한 몸으로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것을 삶의 이유로 여겨질 정도로 열심인 모습이다. 합창 연습이 있는 날은 몇 시간 전부터 몸도 마음도 바빠진다. 작은 화분을 합창 연습장으로 소중히 들고 간다. 그리고 지휘자에게 내민다.
한번도 힘들거나 아프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를 지켜보던 한 여인은 그에게 있어서 노래는 전부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소개된 친구는 ‘연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다운 증후군의 아가씨이다. 합창단에 들어가기 위해서 10년간 오디션을 보았고 끝내 단원이 되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어눌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선생님의 특별 과외도 지속되지만 그저 행복한 얼굴로 최선을 다해 안 되는 발음으로 노래를 연습한다.
세 번째 소개된 이는 ‘혜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뇌병변 일급 장애자의 여성이었다. 몸은 마비로 인해 제대로 가눌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었지만, 일반인 지능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고 한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스스로 고아원에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가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벌려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왜 그렇게도 노래가 좋으냐는 질문에 혜영씨는 부끄러운 듯 힘들게 대답한다.
“합창을 할 때는 ‘해냈다’라는 기쁨이 있어요.”라고.
해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기쁨보다 더 기쁜 거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 마디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말을 이어간다.
“노래할 때는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에요.”
드디어 합창대회가 열렸고 그들의 노래를 듣는다.
울컥하는 마음을 자제할 수 없었다.
방송 제목처럼 불협화음의 특별한 합창이었지만, 그 어느 화음보다도 감동적인 무대였다.
노래와 함께, 가사의 자막이 눈에 들어온다.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 본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빛으로.
똑바로 걷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기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작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 … …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 것을 보니 아마도 개신교의 복음성가가 아닐까 싶다.
그들이 부르기에 합창단 이름처럼 ‘영혼의 소리’로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천사의 얼굴들이었다.
해맑은 눈동자와 웃음, 장애를 이겨내려는 힘겨운 싸움, 모두가 내 자신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이들이 보여준 행복한 아름다움을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려본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 마음의 어머니 >
-전삼용 요셉 신부님-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면접 때마다 번번이 떨어졌어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면접에서도 떨어지게 되자 청년실업자는 회장님을 붙잡고 호소했습니다.
“늙으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삽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뜻밖에도 회장님은 관심을 보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노모가 계시다고……, 그러면 발을 씻겨드리고 내일 다시 오게”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회장님의 요구대로 생전 처음 어머니의 발을 씻겨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발에 박힌 굳은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발이 아니었습니다. 거북이 등처럼 굳어진 발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발톱은 닳아 검게 오그라져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가셨던 길은 천 걸음인가, 만 걸음인가?’
아들을 위해 발이 닳고 피멍이 들도록 걸어온 어머니의 사랑과 슬픔의 흔적이었습니다. 청년은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지요. 어머니의 발을 만져보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마음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회사로 다시 찾아간 청년은 회장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회장님은 저에게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면접도 마다하고 돌아서 나오는 청년에게 회장님은 말했습니다.
“되었네, 내일부터 출근하게”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본 어느 기업의 면접시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회장님은 왜 청년을 채용했을까요? 효자라서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죠? 몸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고객에게도 똑같이 관념이 아닌 가슴으로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으로 만져보세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거기 있습니다.
[출처: 유투브, 이어령 교수의 80초 생각나누기]
‘어머니’라 부를 때, 이 청년에게 어머니의 발을 씻어주기 전과 후의 어머니란 이름의 차이는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몸이나 머리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가슴’으로 느끼고 아는 것이 온전히 어머니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시며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육신을 나으신 어머니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영적으로 새로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탄생 이면에 마리아란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어머니라 하면서 우리를 낳고 기르시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느끼고 마음에 새기지 못한다면 온전히 성모님을 어머니로 아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이 곧 ‘성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듯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피와 물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피는 죄를 사해주고, 물은 깨끗해진 영혼에 들어오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피와 물, 즉 성사로 새로 태어난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죄의 용서(피)와 성령의 임하심(물)’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성체를 영할 때나 고해성사를 할 때도 죄의 용서와 성령의 오심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만 보면 성모님이 교회의 탄생을 위해 고생하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은총을 중재해 주시는 분은 실제로 성모님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그 피와 물을 담는 신비로운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5천명을 먹일 빵을 살 생각만 하지 감히 기적은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한 번도 기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지만 예수님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얻어내셨습니다. 그만큼 성모님의 믿음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깨끗하고 완전한 그릇이기에 하느님을 품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에게 중재하시는 모든 은총은 바로 당신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피와 물입니다. 따라서 은총을 중재하기 위해 성모님의 영혼은 예리한 칼에 찔리는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성모님께서 오늘 십자가에서 당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당신 품에 안으시는 것은 당신 아드님을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피와 물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다시 살리시기 위해 어머니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보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고통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셔야만 당신 아드님의 피와 물을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6.25때 한 겨울 어떤 어머니가 다리 밑에서 아기를 낳고 당신의 옷으로 아기를 감싸 당신은 죽고 아기는 지나가는 미군에 발견돼 미국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성장해서 한국에 찾아온 그 아이는 어머니 무덤에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드리고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성모님을 어머니라 불러도 성모님의 발을 씻어드리기 전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가슴으로는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성모님이 십자가 밑에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 어머니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영혼이 예리한 칼이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깊이 깨달으며, 우리도 당신 아드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신 어머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소년들을 위한 피정 집에 잠시 일을 할 때였습니다. 여름 겨울 같은 경우 200명 300명씩 2박 3일에 걸쳐 피정을 들어오는데, 한 차수가 나가면 들어오고, 그 그룹이 나가면 또 다른 그룹이 들어왔습니다. 형제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다들 슈퍼맨처럼 1인 2역, 1인 10역을 척척 해냅니다.
이윽고 모든 피정이 마무리되고 나면 함께 고생했던 형제들이 한 자리에 앉아 평가회를 합니다. 얼마나 피곤한지 다들 머리 눕힐 자리부터 찾긴 하지만 회의를 시작하니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할 말이 많습니다. 청소년 사목 성공 체험담, 감동수기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납니다. 참으로 은혜롭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씩 짝지어 사목 실습을 떠났던 제자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긴 여정에 많이들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사뭇 들뜨고 흥겨웠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은 충만한 기쁨과 보람, 성취감으로 빛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여해주신 능력에 힘입어 제자들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가는 곳 마다 능력을 발휘하여 마귀들을 물리치고 병자들을 치유했습니다. 힘차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고 신기했습니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뵙자마자 즉시 보고를 드립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그 말을 인정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고 나신 예수님께서 뭐하셨을까요? 제자들 없는 틈을 타서 좀 쉬어야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촉각은 항상 제자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첫 번째 사도직 활동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뒤에서 열심히 기도로 뒷받침하셨습니다. 흥에 겨워 신이 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오늘은 추임새까지 넣습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혹여 교만에 빠질까봐 한 마디 사려 깊은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사도직 실습 파견에 앞서 스승님으로부터 ‘실탄’을 지급 받았습니다. 스승님만의 비결, 스승님의 능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 똑같은 권위와 능력으로 악령을 물리치고 환자들을 치유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때만이 든든한 지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 교회의 일, 공동체를 위한 일을 할 때에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당신의 권위와 능력을 부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일, 그래서 치유와 기적을 행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주님의 제자로 뽑힌 일, 그리스도인으로 초대받은 일은 얼마나 대단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