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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10월 8일 (녹)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10.08|조회수185 목록 댓글 0

제1독서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3,1-5

1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5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율법에 따른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는지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는지 묻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냐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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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을 꾸짖으며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는지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는지 묻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달라고 졸라 대는 벗의 이야기를 하시며,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하면 그분께서는 이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분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때와 방식이 아니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령 꼬마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아빠는 그 간청을 곧바로 들어주겠습니까?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컸을 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하고, 그 뒤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에야 운전할 수 있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적절한 때를 살펴보고 계시며, 심지어 그때까지 우리가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주십니다.

또 아이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싸웠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여 엄마에게 달려가 그 친구를 혼내 달라고 청하면 엄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며 우선 화를 달래고, 무엇이 올바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준 뒤에야 그 친구에게 가서 진정한 화해를 이끌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뱀을 달라는 기도라면, 그분께서는 생선으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적절한 형태를 찾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침묵을 두고, 그분을 무능하게 보거나 선하지 못한 폭군으로 내몬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점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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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찾아가 필요한 것을 간청할 수 있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좋은 선물을 받으려면 우리가 청하는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욕심에서 나온 것인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을 갖고 주님께 간청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청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아 보이더라도 좋지 않은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간청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우리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그 간청을 물리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려고 우리의 마음이 맑아져 더 좋은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성령 안에 사는 삶’이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과 함께 머무는 사람은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을 언제나 잘 받을 수 있도록 채비를 차립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세속적 욕망이 가득 차면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위와 업적에 따라 성령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따라 성령의 은총이 내려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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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이 보이는 것들을 갈망하고, 소유하고, 집착하며, 때로는 경쟁 속에서 강탈하여 자족하는 것이 성공이라는 망상을 강요하는 반면에, 우리의 믿음은 세상이 감추고 보여 주지 않는 영적인 갈망에 대한 발견이자, 우리 안에 숨 쉬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 곧 성령을 따라 사는 기쁨의 삶입니다. 하지만 세상 속 우리 믿음은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내가 바라보고 청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 주는 것은, 요즘처럼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이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임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인디언들이 가뭄에 기우제를 바치면 꼭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바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내가 간절히 청한다고 언제나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야말로 우리가 거저 받은 최고의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내 의지로 청해서 얻는 세상의 행복과는 달리 성령은 우리 안에 숨 쉬고 계신 하느님의 영입니다. 믿음은 이 성령의 기운, 바람, 숨결을 내면에서 듣고, 그분과 머물며, 그분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恨)이 부활의 신바람[神明]이 되는 길을 찾은 영의 인간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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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을 위해서는 성찰과 반성, 새로운 깨달음이 늘 필요합니다. 그러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조건적으로 절대자를 향하고 청하며 의지하는 ‘원초적 종교심’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동 문학가 마해송 프란치스코 선생이 세례를 받게 된 과정을 자신의 인생사와 함께 들려주는 『아름다운 새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과 교회를 모를 때조차도 정성껏 ‘빌 줄’ 알았던 종교적 심성이 얼마나 오묘하게 명시적 신앙 고백을 준비시켜 주는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오랜 세월, 나는 많이도 빌며 살아왔다. 하늘에도 빌었다. 땅에도 빌었다. 달님에게도 빌었고 별님에게도 빌었다. 바윗돌에도 빌었고 대감님에게도 빌었다. 빌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살 때였을까?”

그는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뜨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체험하던 종교성이 이제야 비로소 그 본디 대상을 발견하게 되는 사실에 감동합니다. “‘천주님이 모든 근원?’ 그렇다면 내 평생 여태까지 급할 때면 손 모아 빌던 그이가 천주님이었단 말인가?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1년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빌던 그 대상이 천주님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어제오늘도 마음속으로 빈 그 대상이? 소름이 끼치고 그것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아침저녁 비는 마음 없이 지낸 날이 거의 없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참화로 말미암은 고단한 삶 속에서 비는 마음이 간절했던 마해송 선생의 시대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비는 마음을 많이 잃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머리가 앞선 나머지 마음으로 간절히 비는 법을 익히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아낌없이 청하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는 신앙심을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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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한 신체장애자 회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께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사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약하게 만드셨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느님께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게 허약함을 주셨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 주십사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주십사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하느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삶을 선물하셨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하느님께서는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시기 전에 하신 다음의 물음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면서도 이렇게 물으신 데에는 그가 청하는 것이 생선이 아니라 뱀이, 달걀이 아니라 전갈이 아닌지 스스로 먼저 살펴보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언제나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지향이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분의 응답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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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에게는 다섯 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의식주와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생리적 욕구’입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면 두 번째 단계는 신체적 감정적 위험에서 보호받고 안전하기를 바라는 욕구가 생기고, 이것이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 단계처럼 기도에도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기초 단계는 기복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는 자신의 건강이나 재산을 지켜 주고 지금보다 현세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고 성숙해질수록 기도의 내용도 바뀌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게 되며, 나아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알폰소 성인이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청하는 은총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현세적 욕구와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청하는 것은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는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처럼 눈앞의 욕구만 채우려는 것보다 영원성에 가닿는 단계로 성숙해야 합니다. 인간 욕구의 단계가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갔듯이, 우리의 기도도 기복적인 것에서 영성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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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 주지 않을 아버지는 없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의 간청을 모른 체할는지요? 다만 기도의 내용이 황당하거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 서간’에는 엘리야의 기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출을 냈습니다”(야고 5,17-18).

엘리야 역시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가뭄이 들었습니다. 무려 ‘삼 년 육 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비’를 청하자, 주님께서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엘리야의 청을 들어주시어, 당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문은 없습니다.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자꾸만 두드리면 답을 주십니다.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면’ 결국은 열어 주십니다. 옳지 못한 일이라면 ‘옳은 일이 되도록’ 사건을 일으켜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청원을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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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기록보다도 가깝고 생생하게 하느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선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라 했을 때는 느낌을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가르침은 어떤 신학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고 친근감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생선을 청하는 아들에게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이렇듯 오늘 복음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벌주는 하느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이 됩니다.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뻔뻔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위축도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부모 앞에서 벌벌 떠는 자녀를 좋아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짓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주님의 자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두드리면 아버지는 반드시 열어 주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두드리다 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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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간절히 청하면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희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 포로가 된 미군이 이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열악한 상황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이 끝나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서 돌아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풀려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희망은 삶에 힘과 용기를 줍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이분들의 고통은 이런 것입니다. “왜 저는 이렇게 예민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예민한 성격보다는 둥글둥글한 성격을 좋아합니다. “너는 성격이 예민해.”라는 말과 “너의 성격은 둥글둥글해.”라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좋은 말로 들립니까?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어떤 말에도 전혀 상관없는 성격이길 원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꾼 사람, 세상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은 모두 예민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민한 성격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도 있고 오히려 정반대인 나쁜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아이작 뉴턴, 윈스턴 처칠, 슈만 등은 모두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합니다. 예민한 성격이 결코 나쁜 성격이 아님을 인정하면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이 인정의 단계에 들어서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찾고 계속해서 주님께 매달리며 의탁하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우리는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 은혜로운 좋은 선물을 주는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다만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기도할 때, 몸과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것을 청할 때가 참 많습니다. 여기서는 자기만을 위한 주님의 특별한 손길이 필요해집니다. 이를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따라서 성령께로부터 오는 선물을 청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들어 줄 좋은 선물들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나의 변화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배움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법, 놓아주는 법, 자신과 타인을 향해 가장 친절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브로니 웨어).


나의 변화.

수피 바야싯의 글입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주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모두 이와 같았다.

‘제게 세상을 뒤바꿀 힘을 주소서.’

중년이 이르러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놓지 못한 채 반생이 흘러갔음을 깨닫고 나의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저와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가족과 친지들만 변한다 해도 저는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오늘내일 할 만큼 늙어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뿐이다.

‘저 자신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세상 사람들은 남의 변화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변하지 못하는 남을 향해서 판단력이 부족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쟁이라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는 ‘나의 변화’가 아닐까요?

내가 변화될 때 다른 사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맑을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만, 폭풍우 속에서도 찬미의 송가를 불러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은혜로운 예수님의 전도 여행과 복음선포 여정이 계속됩니다. 예리코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루살렘 근교 올리브 산으로...올리브 산은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입니다. 

강도높은 사목활동에 심신이 지치셨던 예수님, 적대자들과의 길고도 날선 논쟁으로 힘겨운 하루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종종 찾아가셔서 철야기도를 즐기셨던 단골 피정 장소가 올리브 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고, 오늘 참된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소상히 가르쳐주고 주셨습니다. 참된 기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니,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은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9~10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보다 하느님 아버지 마음에 드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구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있어 항구함은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기분 내킬 때는 하루 온종일 찬미가를 부르고, 묵주기도를 셀수도 없이 바치고, 그것도 모자라 철야기도까지 바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하루 종일 뒹굴뒹굴하면서도, 주님의 기도 한번 바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기도자라고 할수 없겠습니다.


건강할 때도 기도 바치지만, 몸이 아플 때도 기도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날씨가 맑을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만, 폭풍우 속에서도 찬미의 송가를 불러야겠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기도 바치지만, 내일도 간절히 기도바쳐야겠습니다. 곧 기도의 항구성입니다.

청하는 사람은 청하는 데 있어서 지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청하는 데 있어 지치지 않을 때, 그 청은 반드시 받아들여지고, 문이 활짝 열리고, 원하는 바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항구한 기도는 인간을 하느님께 더욱 더 강하게 붙들어 매줍니다. 변함없는 기도는 인간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동시에,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을 좀 더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이끕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요술 방망이가 결코 아닙니다. 기도 역시 자동판매기가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한 인간이 하느님 앞에 행하는 위대하고 거룩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에 지쳐서는 안되겠습니다. 무시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바치는 기도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고통스런 현실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뒤바뀌는 기적의 체험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에에 맞지 않는 건강과 강철 체력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런 바람을 가지는 것,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 그런 청들과 하느님과 연결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런 청을 기도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억지요 협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우리 시야를 넓혀줄 성령, 우리를 관대한 마음으로 이끌어줄 성령,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안내할 성령을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고통의 연속이요 결핍 투성이의 삶임을 인정하는, 그래서 기꺼이 수용하는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결코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는 기적을 청해야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사면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주님의 기도를 말씀드리며, 주님의 기도는 진리를 담고 있어서 ‘나침반’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는 사람은 인생의 방향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향만 안다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그 방향으로 나아갈 힘도 있어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계명을 주는 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킬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실상 파라오를 사랑하며 십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으며 집의 방향을 안다고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계명을 지키려 합니다. 우리 힘으로 지키려 하지 않고 그분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가 항상 청원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대로 나아갈 권한과 힘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나라물고기’님의 사연을 소개해드립니다.

“6년 전 한국에 들어와 건강 검진 4시간 마치고 어머님 산소를 이장 신청하러 갔습니다. 신청 도중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초음파상 간암이 보이니 내일 와서 CT 촬영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를 보여주는데 제가 보아도 큰 종양이 보이고 의사는 90% 간암이라 확신했습니다.

저는 올 것이 이제 왔다고 생각했지요. 의사를 만나고 나오며 마음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합니다. 제가 간암이랍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감사 찬미 기도하면 늘 그렇듯이 마음속 두려움이 사라져요. 저는 간염이 있었고 동생 둘이 이른 나이에 간암으로 죽었으니 이제 내 차례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CT 찍고서 일단 어머님 산소 이장 끝내고 보자. 할 수 있는 자녀는 저밖에 없으니까. 간암으로 수술을 한 동생은 2년 살고, 아무것도 안 한 동생은 7개월 살았으니 1개월 후에 예정된 아들 결혼을 보고 죽음을 준비하리라 생각했어요. 아버님 옆으로 이장 다 마치고 난 후 다음날 CT 결과는 간암은 아니었어요.”

이 일이 6년 전이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분은 간암 선고를 듣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감사와 사랑’으로 종합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 안에서 저절로 솟는 감정이 아니란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불만의 감옥으로부터 해방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기도에서 제시하는 방향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방향과 함께 나아갈 힘과 자유를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치라는 의미로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가난하여 벗에게 내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 세 개를 청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미 온 가족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괴롭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벗을 위해 그는 계속 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세속적인 것, 육적인 것, 세속적 명예를 청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들을 이길 힘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이길 힘을 주님의 기도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자기를 이기고 어느 상황에서건 감사와 찬미, 사랑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힘으로 주님을 한 발짝 더 닮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어떤 사람이 살인죄로 복용 중인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동생을 사면할 임금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묻습니다.

“만약 자유를 얻는다면 나가서 무엇을 하고 싶니?”

“나를 감옥에 처넣은 판사부터 죽여야지!”

그는 밖으로 나오며 사면권을 찢어버렸습니다.

사면권은 성령과 같습니다. 그 성령은 내가 그 성령을 주시는 분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의도가 있는지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고 주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성령의 오심이 합당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를 통해 성령을 청하면 성령을 주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성령은 세속-육신-마귀, 즉 파라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면권입니다. 이 빵 세 덩어리를 끊임없이 청하면 우리는 우리의 감옥인 자아로부터 탈출한 참 자유인이 됩니다. 참 자유인이 되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령의 열매인 감사와 사랑이 멈추지 않고 솟아나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 달 전에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9년 전에는 아버님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평생 그토록 사랑하셨으니 하느님의 품에서 두 분이 반갑게 만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잘 몰랐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니 가슴이 뻥 뚫린 느낌입니다. 동료 사제들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의지할 곳이 없어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저의 어머니께서도 평생 가족들을 돌보며 사셨습니다. 장례미사 때 유족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받아들여 형제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부모님께서 신앙 안에서 사셨으니 신앙에 충실하십시오. 고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십시오.” 저도 제가 강론 때 말하였던 것처럼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내려 합니다. 사제의 직무에 충실하려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보좌신부 때입니다. 인사이동으로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가기 전에 먼저 성당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들 신부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있을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미리 준비하였던 것처럼 어머니께서는 제가 가야할 본당에 미리 가셔서 어머니의 방법으로 준비하셨던 것 같습니다. 본당신부 때입니다. 신자 수가 적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 주일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 사제관에서 근무할 사람을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같이 지내면 좋겠다고 부탁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3년 동안 저와 함께 지내셨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셨던 아버님께서도 3년 동안 혼자 지내셨습니다. 자식을 위한 사랑은 아버님과 어머니가 같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따뜻한 밥을 해 주셨습니다. 항상 저보다 먼저 일어나셨고, 저보다 늦게 주무셨습니다. 레지오도 하셨고, 교리도 가르쳐 주셨고, 세례식 때는 대모가 되어 주셨습니다. 교우들도 어머니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버님도 가끔씩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르신 복사단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르신들과 장기도 두시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혼자 집으로 돌아가시는 아버님의 마음이 허전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버님은 강하신 분이기에 아무렇지도 않으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저를 도와 주셨고, 아버님께서는 지혜로 제게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담벼락 너머에 있던 은행나무의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람이 불어, 비가 내리면 가지가 부러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나가다 사람이 다치면 성당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못하였습니다. 사목회 총무와 함께 가지를 잘랐습니다. 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꽃을 보면 수녀님의 마음이 맑아 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수녀님이 기분이 좋으면 기쁘게 일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못하였습니다. 사목회 총무와 함께 채송화, 나팔꽃, 봉숭화,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꽃을 보니 제 마음도 맑아졌습니다. 이제는 두 분 모두 하느님의 품에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 청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죽은 모든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또 무엇인가를 찾고, 또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다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분이 무엇인가를 주실 분이시고, 찾으면 같이 찾아주실 분이시며, 문을 두드리면 곧 바로 열어주실 분이심을 믿고 그만큼 의지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간관계 안에서도 신뢰 안에서 그렇게 끊임없이 연락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 친교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엇인가 바라지도 않고, 무관심 속에서 연락도 하지 않을 때 그 관계는 소원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당신과의 신뢰와 친교의 관계이십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믿음을 드리고 의지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늘 함께하시며 당신의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목요일>(2020. 10. 8. 목)(루카 11,5-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안 주셔도 끈질기게 졸라 대면 마침내 주실 것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니, 당장 못 받아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하느님은 미적거리시지 않는 분, 우리 기도를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따라서 ‘미적거리시지 않는다, 지체 없이 들어 주신다.’ 라는 말은, 우리 쪽의 기준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쪽의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것’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바라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지금 당장’을 ‘가장 좋은 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것이고, 나쁜 것이라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언제 주실 것인지도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것이고, 필요하면 지금 당장 주실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백 년 뒤나 이백 년 뒤에 주실 때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종교박해 때에 순교자들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갈망했고, 그것을 하느님께 간절하게, 또 끈질기게 청했습니다. 그랬는데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삼백 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말씀은, ‘능동적인 수용’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청하여라.” 라는 말씀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아버지께서 주신 그것을 청해서 받아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 기도는, 안 주시려고 하는 아버지를 졸라서 받아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으려고 준비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청하지 않는 것은 받으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능동적으로 받기를 원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됩니다.


‘성사’가 좋은 예입니다. 우리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는 받기를 원하고, 청하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어줍니다. 청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고,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억지로 베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기 위한 일’, 즉 주시는 은총을 잘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와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같은 뜻의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능동적인 수용’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잠겨 있는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려라.”가 아니라, “너희가 들어가야 할 문을 아버지께서 이미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뜻입니다. (그 문은, 아버지께서 자물쇠는 열어 놓으셨지만, 아직 닫힌 채로 있는 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문을 찾아서 열고 들어가는 일입니다. 표현은 그렇지만, 뜻으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청해서 받아라.”와 같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이 말씀은 ‘올바른 지향’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라는 말씀에서 ‘성령’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뜻하는 말인데, 그 은혜는 우리 생각을 초월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은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께 청해야 할 것도 ‘가장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에 ‘나쁜 것, 악한 것, 나만 좋아하고 남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을 청한다면,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그것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청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그것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와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 

그런데 ‘나에게 가장 좋은 것’, 또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모르니까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령의 도움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하더라도, 그것만 달라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또 내가 생각했던 때보다 훨씬 더 좋은 때에, 그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보게, 빵 세개만 꾸어주게’(루카11,5)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일을 할 때, 환희로 시작한다. 그 환희는 아직 기쁨이 아니다. 기쁨이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까지 가려면 때로는 한계에 부딪히고 극한에 이르기도 한다. 이는 내가 겪는 고통의 시간이다.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어쩌면 즐기면서 감내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초연하게 즐기기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오니 저절로, 어쩔 수 없이 즐기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냥 일이 그렇게 사면초가가 되는 때가 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때까지 인내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문제해결을 위해 전능하신 분께 내 자신을 ‘맡겨라’라는 뜻이 담겨있다.


야밤에 내 친구가 뜻하지 않은 일로 나를 찾아 왔다. 이럴 때 이런 일로 내가 당황하고 상대방이 미안해 하고 난감할 때가 있다. 일단은 나를 찾아온 벗이 어떤 처지인가를 살피는 일이었다. 배가 무척 고파 보였는데 자기로써는 한계였다. 나는 벗을 위해 옆집을 찾아가 비상을 걸었다.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갑자기 찾은 벗이 야속했지만 내 집에 찾아 왔으니 배고품을 해결해 주어야 했다. 벗의 문제는 나에게 넘겨지고 내 일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가? 옆집은 잠자리에 든지 오래이고 사정을 해 본들 퇴짜만 맞을 것이고 사면초가 상황인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빵을 찾아나선 나와 찾아선 옆집 사람과 또 문제를 풀려다 또 난감해졌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옆집 친구가 마음이 그러니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문제 풀이의 방법은 그래도 내 입장을 거듭 말하며 마음을 움직이도록 호소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 서로가 합심해서 찾아온 내 친구를 위해 돕자고 하면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내하며 나의 원의를 말하며 서로 다른 입장차를 좁혀가야 한다. 이렇게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에 개입하신다. 기다리고 함께하며 입장차의 수준을 고려해 접근할 때, 서로의 마음에 성령께서 동하게 하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은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찾아온 문제를 지닌 벗과 나로 넘어온 친구의 문제와 알어나 빵을 내어줄 옆집 친구가 마음을 고쳐 빵을 내주게 될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하는 문제는 해결되어 셋이서 빵 세개를 나누어 먹게 되는 편안함을 보게 될 것이다. 셋이서 편안함으로 전혀 문제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때, 서로가 미덕을 발휘하고 수용하며 긍정적 방향으로 움직인다.

환희는 고통을 지나 하느님의 빛을 발견한다. 찾아온 벗 뿐 아니라 나도, 옆집 친구도 셋이서 기쁨을 노래한다. 이것이 부활이며 영광의 때가 된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13) 대가족이 허물어진 핵가족에서 양산된 가족들의 핵분열은 과연 그들 안에서 성령께서 동하실까?




마진우 요셉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11,9-13)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7-10)




청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친구에게 빵을 징수하는 것도 빼앗은 것도 갈취도 아닌 청하는 겁니다.

하느님에게도 마찬가지로 징수 갈취 빼앗기가 아니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느님과 대화관계 유지하며 살았다면 그때 청하거나 졸라대면 받지요.


기도는 청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아빠와 대화 관계였어야 됩니다.

평소에 모르는 체 또는 일방적으로 내 얘기만 했었다면 염치가 없지요.

야밤중에 친구에게 때아니게 빵을 청해도 준다는 예 너무 맘에 들어요.


그러니 평소에 하느님사랑 이웃사랑하며 산다면 세상 살기 편하답니다.

그 편안함이 죽은 후에도 영원세상으로 이어질 게 빤한 거 아니겠어요?





원로들과 부제들과 더불어 주교는 하나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Inscriptio; nn. 1,1-2,1; 3,2-5: Funk 1,225-229)

테오포로스(하느님을 모신 자)라고도 하는 나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과의 화목 가운데 굳건히 되어 우리 주님의 수난 안에서 끊임없이 즐거워하고 그분의 부활을 굳게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 안에 온갖 은총의 선물을 누리는 아시아의 필라델피아에 있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그분의 피 안에서 인사를 보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특히 원로들과 부제들과 더불어 주교와 일치되어 있다면, 나에겐 영원하고도 시들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획에 따라 선택되었고 그분의 뜻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확인되고 인준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주교는 전 공동체를 다스릴 직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나 또는 헛된 야망에 사로잡혀 얻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겸손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침묵으로써 헛된 이야기를 하는 이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의 생활은 칠현금의 현처럼 하느님의 계명에 잘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덕행으로 꾸며진 그의 영혼과 그의 의연한 자세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온유하심과 같은 그의 인자함을 볼 때 나는 그를 복된 분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빛의 자녀들이여, 온갖 분열과 그릇된 교리를 멀리하고 목자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따라 다니는 양들이 되십시오.

누구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주교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교회의 일치에로 되돌아오는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산다면 하느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망상에 빠지지 마십시오. 분열을 조장하는 자를 추종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또 이단의 곁길로 걷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할 자격을 잃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나의 공통된 감사제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하나이고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일치시키시는 잔도 하나이고 제단도 하나이며 나의 동료 봉사자들인 원로들과 부제들과 더불어 주교도 하나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 마음은 여러분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 넘쳐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생기를 북돋아 주고 싶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은총으로 인해 사슬로 묶여 있지만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볼 때 나의 두려움은 점점 커질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는 나를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자로 만들어 주님의 자비로 내게 약속된 그 유산에 이르게 해주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현존시키는 복음과 교회의 원로단을 형성하는 사도들에게 나의 피난처로서 매달리고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자세를 일러 주십니다.


"줄곧 졸라 대면"(루카 1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밤중에 두 벗 사이에 생긴 일을 비유로 드시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일깨워 주십니다. 아무리 벗이어도 모든 요청을 다 수락하지는 않겠지만, "줄곧 졸라 대면" 결국은 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창밖에서 빵을 부탁하는 벗이 꼭 성가시고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 주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그 입장에 머물러 보면 다른 개연성도 없지 않습니다. 누군가 한 차례 거절된 일에 대해서 계속 간절히 매달린다면, 당장은 인간적으로 성가시고 짜증스러울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저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줄곧 졸라 대는 모습은 절박함의 표현입니다.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차선책도 대안도 부재한 생황에서 기대할 곳은 오직 상대방의 결정 번복뿐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이는 될 때까지, 들어 허락될 때까지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예수님께서 기도의 원리를 아주 단순하고 명백하게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체험으로 알고 계시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아직 기도한 바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때까지 기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이 말씀은 선택적 가설처럼 들릴 테지요.

반대로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체험을 간직한 이들은 그 기도를 들어 주실 때까지 인내와 끈기로 충실히 매달렸던 이들이겠지요. 그들에게 이 말씀은 흔들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도 제 자녀에게는 필요한 좋은 것을 주려 하는데 아버지 하느님은 어떠시겠는가?' 하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자녀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투영이고 닮음이니 그 원형이신 분이 어떠하실지는 유추가 가능하지요.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미리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갈망이 제 길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것을 우리가 갈망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청한 바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 주시리라 믿기에, 이루어 주실 때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거기에 성령까지! 주님은 우리가 바라던 것에 더하여 성령까지 주심으로써 당신의 응답을 완성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한 이가 체험한 하느님의 응답을 감사하게 하시고 계속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기억은 우리 삶에 주님의 현존을 지속시키는 영적 장치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더해 주시지요. 성령의 힘으로 이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로마 8,15 참조)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반어법적 질문을 연달아 던집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갈라 3,2)

갈라티아인들에게서 자신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눈에 쉽게 보이는 율법 준수적 행위로 구원의 보증을 기대하는 퇴행이 보였나 봅니다. 이에 사도가 다급히 그들을 일깨웁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에"(갈라 3,)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이루신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기적도 성령도 주신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그들이 신앙의 출발점을 기억하도록 질문으로 휘몰아치며 그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받은 것들은 겨자씨 한 알 만큼도 못 되는 보잘것 없고 유약한 믿음을 대견히, 어여삐 보신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성령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은총을 우리 영혼에 각인시키시어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니, 기도의 응답들은 회상에 머물지 않고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 동행합니다.


진정 기도하는 이는 청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의 갈망이 곧 이루어 주시려는 주님의 의지임을 직관으로, 체험으로, 관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바는 그저 지치지 않고 주님께 그분의 의지를 일깨워 드리는 것뿐입니다. 진정 기도하는 이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퇴로는 이미 끊어버렸으니,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오롯이 집중하고 전념하는 열렬한 사랑만이 오직 남은 외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영혼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깊이 바라보고, 이 마음을 주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을 주신 주님께서 성령과 함께 기도의 열매 또한 맺어주실 것입니다. 단, 그 "때"와 그 "방식"은 주님의 재량이고 몫이니 거기까지 넘보지 않도록 겸손히 삼가면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열렬히 그분 창문 아래 머무릅시다. 벗님이 간절히, 절박히 청하는 바가 꼭 이루어지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모습대로 나를 있게 하신 분께서

있는 내가 온전히 당신의 모습이도록

주시고 싶으신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사랑 믿음 희망 나눔 섬김 살림

용서 화해 일치 자유 정의 진리

공감 평등 평화 착함 비움 겸손


그 무엇이든 오직

당신의 모습대로 나를 있게 하신 분께서

있는 내가 온전히 당신의 모습이도록

주시고 싶으신 것만을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였으니 찾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습대로 나를 있게 하신 분께서

있는 내가 온전히 당신의 모습이도록

이미 주시고 계신 것을 찾는 것입니다


찾다가

굳게 닫힌 문에 가로막히면

힘차게 두드리는 것입니다


미움 불신 절망 독점 군림 죽임

거부 배척 분열 억압 불의 거짓

아집 차별 폭력 사악 탐욕 오만


그 무엇이든

당신의 모습대로 나를 있게 하신 분께서

있는 내가 온전히 당신의 모습이도록

주시고 싶으신 것을

이미 주시고 계신 것을

누릴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문들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여정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청하라고 하시지요. 이것은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아뢰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찾으라고도 하시지요.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더라도, 정작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찾으라는 이 말씀은 간절히 기도한 후에는 그 기도의 열매를 찾기 위해 행동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열매는 그 자체로도 기쁨을 주지만, 문을 두드려 열고 그 참 의미를 발견할 때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이렇게 볼 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기도하고 행동하고 또 그렇게 해서 얻은 바를 다시 관상으로 가져가 그 깊은 의미를 깨달으라는 초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 과정은 기도와 활동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여정,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이지요. 특별히 이 여정 중에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가 올바른 길을 식별하고 용기를 내어 그 길을 걷게 하십니다. 과연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십니다.




"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루가 11,5-13)

신은근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기록보다도 가깝고 생생하게 하느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선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라 했을 때는 느낌을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가르침은 어떤 신학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고 친근감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생선을 청하는 아들에게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이렇듯 오늘 복음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벌주는 하느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이 됩니다.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뻔뻔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위축도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부모 앞에서 벌벌 떠는 자녀를 좋아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짓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주님의 자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두드리면 아버지는 반드시 열어 주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두드리다 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가득한 기도 <루카 11, 5-13> 10월 8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기도는 육에서 나온 기도인지 영에서 나온 기도인지 구별되며, 기도는 성령이 가득한 기도여야 합니다. 

육에서 나온 기도는 이기적이며, 부정적이고, 파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영에서 나온 기도는 이타적, 긍정적, 건설적 기도입니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것,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구하는지 아닌지는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지나가는 벗, 나그네에게 줄 빵이 없어서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사랑과 진실이 담긴 간청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줄 것이 없어서 있는 사람에게 대신 간청하는 사람의 마음은 진실과 사랑이 깃든 간청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하느님께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시며 진실한 청은 하느님 자신의 영을 구하여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필요한 것이 긴박하게 다가올 때 우리는 거듭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작은 소리로 “사람 살려!” 하지 않고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쳐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실제로 십자가 위에는 아들 예수만 있지 않고 아버지와 하느님의 영이 함께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정성껏 놓은 성호경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부르고, 함께 있겠다는 청원입니다.

어떤 이는 “나의 청원은 하느님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합니다.  하느님의 영과 함께 하는 기도와 영이 없는 기도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 영의 기도는 사랑, 진실, 긍정과 용서, 축복, 긍정적 기도라면 하느님의 영이 없는 기도는 미움, 거짓, 부정, 복수, 저주가 섞인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와 일치와 생명이신 분이어서 그에 반대되는 무자비와 불일치, 죽음의 기도는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요즘의 정치적 흐름은 악순환의 원칙을  따름으로써 점점 더 무서운 악의 구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한번 잘못은 누구나 범하고 죄인이 됩니다. 일흔 본에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어디로 보내고 한 가지 잘못을 놓고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니 따라오는 사람도 모두 같은 취급을 해서 망언 망발을 하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로 떨어져 나가는 정치 형국을 보게 됩니다. 전 대통령을 쉽게 탄핵하니 뒤를 따라오는 대통령도 탄핵하려고 합니다. 그를 방어하려고 갖은 부정 불의를 하면서 막아보려고 하다가 시간을 다 놓치고 나라가 끝자리로 밀려납니다. 부정을 부정으로만 보지 말고 긍정적 일로 보고, 그렇게 되기를 노력하면 악도 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버려진 돌이 주춧돌이 될 수 있으며, 할 수 없다는 일이 긍정적 열정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사람은 믿는 대로 되지만, 의심을 가지면 베드로 사도 모양 자신감을 잃고 의심하여 물 위를 걷지 못하고 빠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갖고 구합시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하느님 영을 받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람마다 자기 신체 중에 약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목과 위 그리고 심장같이 느껴집니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자주 붓고 아픕니다. 그런가 하면 높은 곳에 올라간다든지 등의 경우에 가슴에 커다란 통증과 아울러 주저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힘겹습니다. 그리고 밤에 잠을 자다가 배가 그야말로 찢어질 듯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이런 몸의 증세들이 저를 겸손하게 하고, 진중하게 하는 외적 요인이자 선을 지키라는 경계음처럼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급하게 찾아온 친구의 절박함이나 반복해서 청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 상대를 움직인다는 예를 드시면서 주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별 어려움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뭐 특별한 일이 아니겠지만, 살면서 절박하고 간절한 소망을 간직한 사람들에게는 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나 또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없고 정말 마지막처럼 오직 주 예수님께만 청하고 매달리고 얻을 수밖에 없이 척박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쁜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도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무분별한 탐욕이나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목마름에 국한되거나 매달리지 않도록 하시면서, 우리 소망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랄 수 있는 구원의 희망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시편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 행복합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시편 84,5-6.11.13) 아울러 하느님의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기쁘게 응답한 성모님의 노래도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9)

  우리 모두가 주 예수님을 뵈옵고 그분 안에서 희망과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함승수 신부님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의 내용을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자신의 유일한 밥줄인 쇠도끼를 실수로 연못에 빠뜨린 나무꾼이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고 산신령이 나타났고, 그의 사연을 전해듣고는 연못속에서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를 들고 나옵니다. 정직한 청년이었던 나무꾼은 욕심에 눈이 멀어 거짓을 말하지 않고, 쇠도끼가 자신의 것이라고 솔직하게 답했고, 산신령은 그의 선하고 바른 성품을 칭찬하며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선물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나무꾼이 마음으로 바랐던 것은, 산신령이 찾아주기를 기대했던 것은 쇠도끼였습니다. 하지만 산신령이 자신이 청하지도 않았던 금도끼, 은도끼를 준다고 해서 그것을 받기를 거부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금도끼나 은도끼가 자신이 바란 쇠도끼보다 훨씬 더 귀하고 좋은 것임을 알았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겠지요. 즉, 나무꾼은 자신이 바라고 청한 것과 실제로 주어진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대와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산신령의 '응답'이 그에게는 큰 기쁨이 된 것이지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간절히 청하기만 하면 각자의 개인적 욕망을 무조건 이루어 주시겠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분명히 알아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들어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께 기대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하느님께서 알아주시고 당신의 사랑과 자비로 그 마음에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응답의 구체적 내용은 우리가 바라는 세부적 내용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내어주시는 차가운 '자판기'같은 분이 아니라, 늘 우리를 관심있게 지켜보시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시는 마음 따뜻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은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당장의 욕심과 쾌락을 채울 뿐인 '나쁜 것'을 청한다면 그런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장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의 부족한 지식과 생각으로는 무엇이 정말 '좋은 것'이고 무엇이 정말 '나쁜 것'인지를 제대로 구분해내기가 참 어렵지요. 그렇기에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지향'입니다. 나는 나에게 꼭 필요하고 정말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니, 하느님께서 그런 것들을 '알아서' 잘 챙겨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이루어지는 '완전한' 기도는 항상 이렇게 끝나는 법입니다. "주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미국 뉴욕의 신체장애자 회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 받은 자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기준은 아닐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도 나오듯 하느님은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어제 우리는 복음에서 주님의 기도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사랑받는 자녀이지만, 자녀로써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하루 안에서 주님의 뜻을 헤아려볼 수 있도록 기도 올리도록 합시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아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여전히 목마른

우리들 삶이다.


여전히

헤매는 우리들

시간이다.


마음을

가다듬게하는

기도이다.


기도로

이끌고 가시는

하느님이시다.


목마름에서

우리의 기도는

더욱 다채롭고

풍요롭다.


우리의 아픔과

목마름을

달래어주신다.


피가 도는

우리들에겐

기도가 있다.


하느님은

기도처럼

살아계시며

우리를 끝까지

받아주신다.


기도로

간절한 사랑을

만난다.


서로를

받아들임이

사랑의

핵심이다.


물리치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다.


도와주시는

은총이다.


서로를 위한

기도이다.


가장 필요한

사랑을 주시는

애절한

아버지시다.


 


 

중국 송나라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밭에서 일하고 있는 저쪽에서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혼자 나무 밑동에 머리를 들이박고는 기절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농부는 이렇게 불로소득으로 토끼를 쉽게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농부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무 뒤에 숨어서 ‘어디서 멍청한 토끼 한 마리 안 오나?’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멍청한 토끼를 기다린 농부이지만 실상은 본인이 더 멍청한 모습이었지요. 이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한비자에 나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우화입니다.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우화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과거의 성공만을 바라보면서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이라고 시작하는 말씀들을 얼마나 많이 하십니까? 


과거의 성공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잊어야 할 것은 과거의 실패입니다. ‘그때가 기회였는데.... ’, ‘내가 왜 그랬을까?’ 등의 말을 하면서 과거의 실패에 집중하면 지금 이 순간에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대신 불안한 마음으로 힘든 순간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연연하는 것 모두 쓸데없는 감정 소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지금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과거에 연연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전에도 청했지만 소용없었어.’,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 같은 죄인은 주님께 기도할 자격도 없어.’ 이러한 말들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과는 너무 다른 분이십니다. 귀찮고 힘들다고 누군가의 청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아무리 못된 자녀라고 해도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부모의 마음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시도하다 보면 실패하기도 한다. 문제될 건 없다.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라. 더 나은 쪽으로 실패하라(사무엘 베케트).  


74 배티성지

배티 성지는 한국 천주교 박해기에 형성된 배티 교우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깊은 산골로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 교우촌은 1837년 5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이를 전후하여 배티 골짜기 이곳저곳에는 비밀 신앙 공동체들이 형성되었습니다. 박해 소설 ‘은화’의 무대가 된 삼박골을 비롯하여 동골, 절골, 정삼이골, 지장골, 발래기 등 15곳의 비밀 교우촌이 있었습니다. 


1850년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가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 건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1853년 여름부터 신학교 지도를 맡게 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54년 3월 이곳에서 공부하던 학생들 중 세 명을 뽑아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유학을 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았습니다. 폐교된 신학교는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했는데,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 다섯 개 도를 순방하며 사목 활동을 했습니다. 현재 배티 성지에는 2014년에 문을 연 ‘최양업 신부 박물관’이 있습니다. 


배티 성지에는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14인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습니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 병인박해(1866)와 무진박해(1868)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고, 그 가운데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모두 34명에 이르는데 이 중 8명은 2014년에 시복되셨습니다. 


미사는 매일 11시에 봉헌됩니다(월요일에는 미사가 없습니다). 주소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이고, 전화는 043-533-5710입니다.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해도 기도해도 아무런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사방이 꽉 가로막힌 거대한 벽 앞에 마주설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하느님께 외쳐 봐도 감감무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감감무소식인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부모님들, 때로 자녀들의 얼토당토 않는 무리한 요구 앞에 어떻게 처신하십니까?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녀의 안녕과 유익, 성장을 위해 때로 부모님들은 마음 쓰라리지만 No!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리는 청원 앞에 늘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의 간절한 청원조차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 달라’는 예수님의 청을 끝끝내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우리의 청원은 하느님의 응답을 듣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문제에 대한 보다 성숙하고 이성적 전망을 갖추기까지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겸손의 덕을 쌓아나가기까지 하느님께서는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올리는 청원 가운데 우리 각자가 노력해야 할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지니게 되기까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결국 당신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력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할만한 기도의 대상인가 아닌가를 식별하기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만물 전체를 다스리시는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각자의 사소한 일상사까지 책임지지 않으십니다. 인류 전체를 생각하셔야 할 너무나 바쁘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재미로 즐기는 스포츠 게임의 승패에까지 관여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조그마한 부동산의 가격상승까지 책임지실 수 없습니다. 내 불찰로 인해 야기된 작은 질병까지 좌지우지하실 분이 결코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 세상에 왔지만 언젠가 다시금 그분께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 나약한 존재입니다. 생로병사의 흐름 안에 때로 건강하지만, 때로 아프기도 하고, 때로 기쁜 날도 맞이하지만 때로 고통스런 날도 맞이합니다. 높이 높이 올라갈 때가 있는가 하면 심연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쳐질 때가 있습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주님 밖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노년기도 맞이합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한계 앞에서 이런 커다란 인생의 흐름을 편안한 마음으로 수용해달라고 청하는 기도야말로 정말 중요한 기도입니다.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도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해달라는 기도,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우리 삶의 자세를 낙관적, 적극적, 긍정적으로 변화시켜달라고 청하는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기쁘게 응답하실 기도입니다.




기도가 이뤄졌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네모가 있었습니다. 네모는 언덕 위에 올라가 아래로 구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보다 더 빠르게 구르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동그라미였습니다. 네모는 동그라미가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자신도 동그라미처럼 빠르게 구르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동그랗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동그라미가 된 네모는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 언덕에서 자신보다 빠르게 구르는 것들은 없었습니다. 세모와 마름모 등을 추월하며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빠르게 구르다보니 천천히 구를 때 보였던 세상이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지나가버렸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구를 수는 있었지만 삶을 즐길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 가장 앞서 구르던 다 닳아 아주 작게 되어버린 동그라미는 ‘하느님께서 그때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 ’이란 후회스런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고: ‘언어의 온도: 동그라미가 되고 싶었던 세모’, 이기주] 

 

만약 주님께서 네모가 그때 그렇게 청하던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면 네모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청을 들어주실 때 꼭 좋아서 들어주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이 원치 않으셔도 어쩔 수 없이 들어주셔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이젠 밥을 먹어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계속 젖만 먹겠다고 떼를 쓸 때 한 번만 더 젖을 먹여주는 부모의 심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때 임금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유일한 임금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임금이 있는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 사무엘에게 와서 하느님께 임금을 보내달라고 쉼 없이 청했습니다. 사무엘이 그들을 말렸으나 그들의 청은 너무도 강력하였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라고 허락하시며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오늘 복음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청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아무 것도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나쁜 일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청하기만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 무엇을 청해야하는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즉, 우리가 청해야하는 것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님을 오늘 복음에서 ‘빵 세 개’와 비유하십니다. 한 밤중에 벗에게 찾아와 빵 세 개만 꾸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벗에게 내어줄 세 개의 빵을 청합니다. 그렇다면 이 빵 세 개가 바로 성령님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빵 세 개는 결국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성령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그 유혹을 무엇으로 이기셨을까요? 바로 기도로 얻은 성령의 힘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복음말씀을 통해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것이 ‘세 가지’임을 잘 압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추려 ‘삼구(三仇: 세 가지 원수)’라 부릅니다. 그 원수를 받아들이면 뱀이 되고 전갈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뱀과 전갈을 이기는 성령의 세 가지 힘인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뱀과 전갈은 남을 아프게 하는 본성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뱀과 전갈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세 힘을 우리는 ‘복음삼덕(福音三德)’이라 부릅니다. 삼구인 세속-육신-마귀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세 힘은 가난-정결-순명인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 기도 안에서 꾸준히 청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자아가 자아내는 육체적 욕구를 이길 수 있는 힘인데, 어떤 때는 그 육체적 욕구를 더 증가시키는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끔 들어주실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그렇게라도 당신 품에 잡아놓기 위함이지 결코 주님께서 좋아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유일한 축복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에 우리 자아를 죽이는 것만을 기뻐하십니다. 욕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자아의 욕구가 일지 않으면 참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세속적인 욕구를 증가시키려는 기도를 이젠 그만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오직 믿음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원하고 청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성령님’뿐입니다. 성령님의 가치를 아는 이만이 성령님만을 청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굿뉴스 사이트로 로그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전산실장 신부님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전산실장 신부님은 교구청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고맙게도 신부님은 로그인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같이 지냈다는 인연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일이 있어서 미사주례를 바꿀 수 있는지 부탁을 했습니다. 함께 있는 신부님이 기꺼이 바꾸어 주었습니다. 어느덧 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에 만났던 교우들이 제주도로 성지순례를 온다고 합니다. 제가 제주도에 있으니 강의를 해 줄 수 있는지 부탁을 하였습니다. 여름에 만난 인연도 있고, 제주도에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도와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人間’은 사람을 뜻하는 한자입니다. 사람은 서로 기대어서 살기 마련이며,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사람은 태어납니다. 스스로 몸을 뒤집을 수 있기까지 4개월, 혼자서 앉아 있을 수 있기까지 6개월, 무엇인가라도 잡고 설 수 있을 때까지 9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은 이제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달은 지구가 잡아 주기 때문에 같은 길을 다닐 수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이 있어서 생명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태양은 우리 은하를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한번 도는데 2억 5천만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만 서로 기대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들도 모두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태양은 한 시간에 70만 킬로 이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지구는 그 태양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별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명들도 모두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태계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점을 이야기 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니, 우리가 원하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은 겉모습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배우지 않아도 ‘양심’이 이끄는 데로 살아갑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겸손할 줄 압니다.

 

원망, 분노, 욕심, 시기, 질투, 폭력, 전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고, 거짓된 자아를 따라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사랑하면 비로소 보일 것입니다.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도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남들에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랑받고 싶으시면 먼저 사랑하십시오. 용서 받고 싶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먼저 선물하십시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그분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 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라고도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가며,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이것들이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겠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가요 중에 '말하는 대로' 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곤 믿지 않았지 믿을 수 없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건 거짓말 같았지 고개를 저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내 맘에 찾아온 작지만 놀라운 깨달음이 내일 뭘 할지 내일 뭘 할지 꿈꾸게 했지 


사실은 한 번도 미친 듯 그렇게 

달려든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봤지 일으켜 세웠지 내 자신을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보기로 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고갤 끄덕였지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그대 믿는다면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예전에 청년 피정을 하면서 누가 이 노래를 멋지게 불러줘서 참여한 친구들이 참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가사의 내용이 힘들고 외로운 청년들에게 희망적이고 또 힘이 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그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일치된 삶을 살아가며 주님 안에 기도할 때 우리가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김성 세례자요한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찬미 예수님!

여성단체에서 방송사를 통해 ‘모범 남성’을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수만 통의 추천서가 접수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자기 자신을 추천한 편지가 있었습니다. 내용을 확인한 집행부는 그를 모범 남성으로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자신을 추천한 남성의 추천 내용입니다.

“저는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음식의 정량 외엔 절대 과식하지 않습니다. 운동 시간을 정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나 아이들을 절대 구타하지 않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몸에 익혀서 질서 정연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비디오로 시간을 축내는 법이 없습니다. 규칙적인 삶을 위해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활을 7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집행부에서는 편지 내용이 사실인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로 연락을 했습니다.

잠시 후에 전화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네! 00 교도소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들어줄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실재에서는 또 여러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청할 것을 청해야 하고, 찾을 것을 찾아야 하고, 두드릴 것을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합니다. 그녀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녀는 바로 주님 발치에 조용히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청하려고 하는 데에 너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할 말이 있고, 청할 정도가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청할 것을 청하면 그분은 분명히 들어주실 것이고, 우리가 찾을 것을 찾으면 분명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 뜻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우리는 올바로 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끊임없이 두드립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 중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하고 말씀하시는데요,

그 앞에 빠진 말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뭘까요? 그 힌트를 앞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 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말씀대로 결실을 보려면 줄곧 졸라대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고 말할 수 있겠죠.

그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플로리다 키스제도에 “오늘이 그날이다.”를 모토로 삼은 멜 피셔라는 보물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1622년에 침몰한 스페인의 보물선을 찾던 그는 1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이 그날이다.”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다이버들을 바닷속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하지만 임금을 지급하랴.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랴.

사실상 여간 힘든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피셔의 가족은 오랫동안 바람이 들이치는 배 위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 하나와 며느리는 바다에서 보물을 찾다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래도 피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그 어떤 비난과 의심이 쏟아져도 꿈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피셔는 매일 같이 ‘오늘이 그날’일 거라는 희망으로 꿋꿋이 버텨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5년 7월, 그의 다이버들은 드디어 스페인 돛배의 잔해에서 금은보석의 원천을 발견했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이버들은 그 장소에서 보물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찾고 두드려야 그 결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에는 한두 번 두드리다 말고 포기하고, 비난 앞에 주저앉고, 실패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믿고, 한 번 더 두드릴 힘과 용기를 내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본당에서 제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한 두 번 좋은 강론을 했다고 해서 신자들이 변화하는 것도 아니고, 한 두 번 좋은 프로그램을 했다고 해서 신자들이 원하는 목적과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신자들의 마음을 두드려야 작은 변화를 볼 수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말씀 문자로 두드리고, 묵상글로 두드립니다. 

처음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작은 변화들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평일 미사에 나오지 않거나 본당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요.

 

주일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한 번 미사에 나와 보고, 본당 작업에도 동참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있을 때까지 한 발 물러나 계신 분들의 마음을 두드리려고 합니다.

전화도 하고, 방문도 하고, 안 나오시면 모시러도 갈려고 합니다.^^; 

내가 하는 그 일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한 번 더 두드리고, 한 번 더 찾고, 한 번 더 청하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작업을 마치고 신자분댁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둑 얘기가 나왔는데, 가장 연세가 많으시고 집 주인이신 형제님이 

“우리 집은 걱정 없어요. 뭐 훔쳐갈 게 없잖아요. 가져가봐야 저 사람 밖에 가져갈 게 더 있겠어요~” 

그러자 자매님이 좋아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 사람 눈에는 내가 아직도 우리 집의 보배로 보이나봐~^^ ”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1, 5-13(연중 27주 목)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첫 번째> 비유를 통해,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두 번째> 비유를 통해,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 10)

 

먼저 기도로 ‘청하라’는 것은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자신이 아닌 아버지께 두고, 그분께 겸손하게 자비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와 옥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요한 1, 58 참조) 하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찾아라’는 것은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 9) 하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길을 벗어나도 충실하고 신실하시게 우리를 믿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항구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믿음을 의탁하여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또한, “두르려라”는 것은 가슴으로, 곧 사랑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20)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우리는 말과 몸(행동)과 가슴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아니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자도, 열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 “성령”(루카 11, 13)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한 것, 그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마태 7, 11)을 주실 것입니다. 뱀이 아니라,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곧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일치와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전갈이 아니라,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곧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돌이 아니라, 빵을 주실 것입니다. 곧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좋은 것,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오니,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청하고 찾고 두드리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0. 11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렵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내가 나만을 위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찾으렵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내가 나만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드리렵니다

사랑 정의 생명 평화 가득한

더불어 사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이기심 탐욕 독선 배척에 찌든

갈라진 세상의 문이 아니라.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자문해 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려고 기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이루시려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는지.

사도 바오로는 오늘 첫 독서에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갈라 3,2)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줍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모든 꿈과 청을 다 합친 하느님 나라와 그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길 간구합니다.




항구恒久하고 간절懇切한 기도가 답이다. -영적 탄력彈力, 근력筋力의 비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계속되는 루카복음은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에 이어 어제는 주님의 기도가 주제였고, 오늘은 항구히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비유, 그리고 온전한 신뢰심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라는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앞부분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의 결론 부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 예전 가난한 시골집에서처럼 당시 이스라엘 시골집 역시 방 하나에서 식구가 다 잠을 잤다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친구의 청이라 해도 한 밤중에 식구들의 잠을 깨우며 일어나 친구의 청을 들어주기는 정말 괴롭고 싫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주님의 강조어법입니다. 여기 ‘그가 줄곧 졸라 대면’의 직역은 ‘그의 끈기 때문에’입니다. 사람이 이럴진대 끈기있게 기도하면 하느님은 더욱 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의로우실뿐 아니라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끈기있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 부족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에 이어지는 다음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르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우리 모두를 향한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의 자세뿐 아니라, 믿음의 자세,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자주 흥겹게 부르는 가톨릭 성가 40장도 생각납니다.

 

“구하시오/받으리라, 찾으시오/얻으리라

 두드리시오/열리리라.”

 

백절불굴의, 칠전팔기의 자세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은, 삶은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이런 항구하고 간절한 자세입니다. 좋든 싫든 관계없이 항구하고 간절한 마음과 의지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자는 것입니다. 이 또한 겸손의 과정이요 비움의 과정입니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으며,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잘 주시겠습니까?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져 우리 삶의 실재가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닮아감으로 결국은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고, 그분을 더 ‘친밀히’ 사랑하게 되고, 그분을 더 ‘가까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탄력좋은 믿음의 자세가 필수적임을 봅니다. 아주 예전 제가 많이 강조했던 주제가 영적 탄력입니다. 믿음은, 기도는 바로 탄력입니다. 누르면 곧장 튀어나오는 용수철처럼 좌절함이 없이 다시 곧장 튀어 나와 청하고 찾고 두드리자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영적전쟁의 수행중에 이런 탄력좋은 기도와 믿음과 삶의 자세는 얼마나 절대적인지요. 바로 이런 삶의 자세에서 탄생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강처럼, 한결같은 항구한 기도와 믿음과 삶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좌우명 시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주님의 전사’가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기도와 믿음 생활에 소홀하여 영적탄력을, 믿음의 탄력, 희망의 탄력, 사랑의 탄력을 상실하면 영적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무기력, 무감각, 무의욕보다 영성생활에 큰 재앙도 없습니다. 

 

항구히 기도해야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三感이며, 항구히 기도하지 않으면 삶의 선물은 짐으로 변하고 절망, 실망, 원망의 삼망三望이 뒤따릅니다. 하여 이런 영적 탄력을, 영적 근력을 잃지 않기 위해, 감정에 기분에 치우치지 않고 일과표의 삶의 궤도에 충실하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영성생활은 순전히 습관입니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감정따라 기분따라 살지 않고 일과표의 삶의 궤도 따라 살기에 좋은 습관의 형성이요 한결같은 영적탄력의 유지입니다. 이런 삶의 궤도에 충실할 때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의 습관화, 생활화가 가능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현실적 지혜입니다. 저는 감히 일과표의 준수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고 균형과 조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형제들의 항구한 삶의 비결 역시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일과표의 시스템 따라 삶의 궤도에 항구하고 충실하기에 비로소 정주서원의 실현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참 좋은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복음이 분명 답을 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 선물중의 선물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모두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은혜 그 자체입니다. 진정 청할 보물은 성령의 선물뿐입니다. 성령 따라 살 때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분별의 지혜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최선, 최상, 최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말 성령 따라 살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의 뜻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디아 신자들은 물론 우리가 받은 성령을 환기시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성령을 잃으면, 다시 무지의 어리석음에 사로잡힙니다.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할 때, 항구히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참 좋은 선물, 성령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착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우리를 개방하는 만큼 우리는 착합니다. 모두가 성령의 은총이요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좋은 성령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본분이며

우리의 중심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기도보다 끈질긴 

믿음은 없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거듭되는

간구와 간청의

시간입니다.


기도로 아버지의 은총에

도달하게 됩니다.


청하는 기도로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로 공유되는

아버지의 은총입니다.


간절한 기도로

다시 돌아 가야 할

우리들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가장 필요한 믿음을

청합니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면서 많은 성당을 봤지만, “와~~ 정말로 대단하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했던 성당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성당들이 거의 비슷하니까요. 그런데 정말로 대단하다고 소리치게 했었던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입니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생전에 설계했던 성당으로 아직도 건축 중입니다. 이렇게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가우디의 뜨거운 열정의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열정과 노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이런 시선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자처럼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건축의 성자’라고 사람들은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많은 성인성녀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모습으로 생활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쩌면 그 순간에는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에게 세상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중요함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하느님께 열정과 노력을 봉헌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결국 나를 드러내기 위한 열정과 노력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몇 번의 거절을 받는다고 포기해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시지요. 주님께도 이렇게 매달릴 수 있는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매달리는 것은 인간들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 말씀에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눈보다는 하느님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함께 할 수 있는 열정과 노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는 똑같은 실수를 좀 더 일찍 저지를 것이다(탈룰라 뱅크해드).


죽어서도 사랑하겠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주례 선생님이 신랑에 묻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랑의 대답이 아주 의외인 것입니다. 신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그 순간에 하객들이 술렁대기 시작했지요. 주례 선생님께서도 당황하셨는지 다시 묻습니다.

“신랑은 장난하지 말고, 질문에 잘 대답하길 바랍니다. 신랑은 신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랑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겠습니다.”

이 정도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부부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많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을 잘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데도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벽돌을 싫어하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구약에서 거룩한 곳, 즉 제단을 쌓을 때에는 구운 벽돌이나 다듬은 돌로 만들어서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연 그대로의 것을 좋아하시지 인위적 노력이 가미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밑의 두 구절은 구운 벽돌 대신 일반 흙으로, 정을 대 다듬은 돌 대신 거친 자연적인 돌로 제단을 만들라는 규정입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서 너희의 번제물과 친교 제물, 그리고 양과 소를 바쳐라.”(탈출 20,24)

“너희가 나를 위하여 돌로 제단을 만들려거든, 다듬은 돌로 쌓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정을 대면 제단이 부정하게 된다.”(탈출 20,25)

그러나 일반 흙은 아무리 잘 다지더라도 구운 벽돌보다는 불안정하고, 또 다듬어진 돌로 쌓는 것은 안정적이겠지만 삐뚤빼뚤한 자연 그대로의 상태의 돌로 제단을 쌓으면 역시 불안정할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섬기는 제단이 인간의 힘에 의해 세워져야만 굳건하다는 생각을 빼어버리시기 위해 주님은 불안정한 상태 그대로 제단을 쌓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의 생각이 커져서 벽돌을 만들고 역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은 탑이 바벨탑이고, 그렇게 벽돌을 만들던 때가 이집트 노예 살이 할 때였습니다. 인위적인 생각이 강해질수록 주님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잊고 성전을 좋은 벽돌로 쌓았지만 결국 그런 성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태 24,2)라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그토록 자신했던 벽돌을 만들어 세운 성전이 부질없이 허물어질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우리 있는 그대로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나머지는 주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율법이란 내가 어떤 행위를 해야 그분께서 좋아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갈라티아인들이 믿음에 의해 성령을 받기는 하였지만 차차 율법주의에 젖어들어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둥의 말을 믿게 된 것에 바오로 사도는 격분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아무리 가려도 그것은 주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인위적으로 가리는 모습이 율법주의입니다. 미사에 안 빠지고 나온다느니, 묵주기도를 하루에 몇 백단을 한다느니, 이웃에게 얼마를 나누어 주었다느니, 선교에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한다느니 하는 것은 주님 앞에 설 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해야 주님께서 받아주신다고 믿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바리사이가 그렇게 성전에서 기도했다가 주님께로부터 의롭지 못하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자비에 의존한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받을 때 성령을 받았는데 그 성령을 받을 때 과연 그런 신앙의 행위들을 했기 때문에 받은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세례 받을 때의 예비자들은 오직 복음을 향한 믿음의 고백으로 그 어느 신자들보다도 가장 충만히 성령을 받습니다. 행위는 그 은혜에 감사해서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아야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모가 난 돌일지라도, 약한 흙에 불과할지라도 주님은 그것으로 쌓인 제단을 사랑하십니다. 인위적인 노력이 주님의 은혜를 받는데 어떠한 도움을 준다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도 율법학자, 바리사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냥 오늘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너는 지금 너의 모습으로 충분해!”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이웃에게도 너그러워지게 될 것입니다. 왜 바꾸려고 합니까?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고 배우자도 그 모습 그대로 괜찮고 이웃들도 지금 모습이 참 좋지 않습니까?

저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명도 심하게 들립니다. 만약 이런 불편함을 바꾸려 했다면 저는 몸 전체를 미워해야 했을 것입니다. 몸 전체를 받아들이려면 그 몸 가운데 부족한 부분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합니다. 괜찮다고 여기니 크게 불편하지 않고 이젠 신경 안 쓰면 평상시엔 이명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선악과 하나 따 먹었다고 화를 내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냥 벌거벗은 채 그분 앞에 나아가도 그분은 우리를 따듯이 안아주시고 우리 목에 걸린 선악과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너무나 충분하십니다. 괜찮으니까 너무 노력하려 들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에게 너그러우면 주님의 너그러움을 알게 되고 이웃에게도 너그러워지게 될 것이고 결국 너그러운 주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사랑을 위해 가난한 마음으로 인내롭게 청함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11,10)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마태 6,8) 주님께서 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실까요? 그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청하느냐, 왜 청하느냐에 앞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는 무엇을 달라는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친교 안에 머물겠다는 다짐이요, 주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거룩한 위탁의 행위이며, 주님을 믿는다는 확고한 신앙고백인 셈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권능을 믿고 그분 안에 머물 때 자비시오 선이신 분의 모든 것이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는 어미의 마음에 비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으로 더 좋은 것, 성령을 주고자 하시지만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면 아무것도 주실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주님께 등을 돌리고 제멋대로 살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쉬울 때만 애원하고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는 어리석고 뻔뻔스런 행동을 그만 둬야겠지요. 세상 이치에 밝고 자기잇속만 챙기는 사람은 정작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참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11,10)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당신 나라에 초대하시며 아무런 차별 없이 친교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자신의 지식, 신분, 외모, 재산, 인맥 등을 앞세워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주시는 끊임없는 사랑과 쏟아지는 은총의 폭포수 앞에 능동적인 응답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능동적인 자세란 주님과 상관없이 나 홀로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의탁하고 매달리는 가난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 인내심을 가지고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간절함과 당장 응답이 없어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영적 여유가 있을까요? 


한편 주님께 뭔가를 청할 때는 필요한 것이 있어서 청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왜 청하는 것일까요? 자신과 이웃, 교회와 세상을 위해 청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이웃의 희로애락에 함께하기 위해서 청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회개와 이웃 사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위해 청해야지 순전히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목적으로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청한다면 그 청을 들어주실 리 만무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하느님의 선과 사랑과 정의가 드러나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끈기 있게 청하며 기다리는 행복한 기다림의 날이길 희망합니다.




기도다운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사제 돈 보스코가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토리노 시 외곽에서 시작한 오라토리오의 발자취를 쫒아가며 얼마나 튼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라토리오가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큰 갈등과 고통, 수모가 뒤따랐는지 모릅니다.

 

야생마 같은 뒷골목 아이들 수백 명이 함께 모여 떠들어대니 가는 곳 마다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때는 병원 마당에서 어떤 때는 풀밭에서 모였습니다. 어떤 때는 본당 마당을 어떤 때는 공동묘지를 떠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 보스코는 피나르디씨가 임대해준 헛간에 꿈에 그리던 오라토리오를 정착시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삿짐을 싸서 이고 지고 나르면서 돈 보스코의 눈에서는 눈물이 쉼 없이 흘렀습니다. 9살 때 꿈에(이리떼가 양떼로 변하는 꿈)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에 드디어 한발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보여주시고, 완성시켜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시는 말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떠도는 오라토리오가 계속되던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상습 피로와 갖은 스트레스로 인해 돈 보스코는 몸과 마음, 정신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의 건강은 돌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풀밭에는 돈 보스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남의 속사정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고 재미있게 뛰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 보스코는 내일 당장 이 풀밭 오라토리오를 떠나야했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기약도 없었습니다. 아이들과 잠시 떨어져 나온 돈 보스코는 홀로 들판을 걸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는 수많은 아이들, 그러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 당국자들, 교회 장상들, 친구들...

 

아직 젊은 사제였던 돈 보스코였습니다. 앞길은 캄캄하고, 당장 아무런 대책도 없고, 돈 보스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씻어내며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나의 주님! 왜 제게 빨리 이 아이들을 위한 좋은 장소를 제공해주시지 않으십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십시오!”

 

곰곰이 생각해보니 돈 보스코의 기도는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였습니다. 그가 바친 기도는 자신을 위해 바친 기도가 아니라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내 집의 건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집의 건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적당히 바치는 미지근한 기도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바친 기도, 삶 전체를 바친 기도였습니다.

 

때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 가운데 많은 경우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너무 유치하고 기복적입니다. 또 어떤 기도는 너무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하느님을 힘들게 하는 억지요 강요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작업입니다. 지금 내가 바치는 이 기도가 정말 제대로 바치는 기도인가? 내 기도 지향에 문제는 없는가? 내 기도방식은 지금 성장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오늘 복음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청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서 즉시 들어주실 제대로 된 청원기도입니다.




반드시 주실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기도, 믿음,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믿음, 삶은 함께 갑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에 믿음이요 삶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이런 기도와 믿음, 삶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켜 치유와 변화의 기적입니다. 저에겐 감히 비유하자면 예수님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자매들이 있습니다. 기도와 믿음, 삶이 일치를 이룬 자매들입니다.


성전 오른쪽 감실 앞의 서양란의 조화가 참 단순하고 기품이 있어 볼수록 마음이 끌립니다. 바로 20년 이상을 제 영명축일 때 마다 화분을 선물한 어느 자매가 이번 영명축일에 선물한 것입니다. 참으로 열심히 성실히 한 눈 팔지 않고 믿음과 삶이 하나되어 살면서 가정을 지켰던 자매입니다. 초등학생이었던 남매가 이젠 나이 30이 넘어 딸은 시집갔고 아들은 직장생활에 충실합니다. 지금은 불의의 사고로 아직도 몸은 불편한 상태인데 어김없이 올해도 잊지 않고 서양란 화분을 선물했습니다. 이 또한 감동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전 왼쪽 성모상 앞의 꽃다발 역시 성모상과 조화를 이루어 참 단순하고 조촐해 보여 마음이 끌립니다. 역시 20년 이상을 제 영명축일 때마다 꽃다발을 선물한, 가장 역할을 하며 동생들을 성공시킨 믿음과 삶이 하나되어 살았던 참으로 성실한 자매입니다. 30대 후반의 나이가 이제 50대 후반이 된 자매입니다.

하여 영명축일날 미사후 수도형제에게 부탁해 감실과 성모상 각각 옆에 서서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카톡을 통해 감사의 선물로 전달했습니다. 새벽 기도하며 산책중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이런 깨우침 역시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어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오늘은 ‘기도의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비유의 끝 무렵 주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반가운 말씀인지요. 하느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확신에 넘칠 때 예수님은 꼭 이런 어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위력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데 궂이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으나 이것은 분명 단견입니다.


하느님의 감동은 물론이고 우선 나 자신부터 이렇게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다보면 놀라운 변화가 뒤따릅니다. 이런 기도 자체가 축복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마음도 정화되어 주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되며 더불어 믿음과 삶의 점진적인 성장과 성숙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다시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함을 또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주님은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확신에 넘쳐 말씀하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이런 백절불굴百折不屈, 칠전팔기七顚八起의 탄력좋은 기도의 자세는 그대로 믿음과 삶으로 직결됩니다. 이런 기도와 믿음과 삶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이웃을 감동시키며 내 자신의 놀라운 내적성장과 성숙을 이루어줍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선물인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 역시 통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성령보다 더 좋은 선물을 없습니다. 바로 성령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분은 성령이신 하느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의 덕담도 생각납니다. 어느 수녀님이 저에게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마 선물하고 싶었던 마음인 것 같았습니다.

“수녀님을 원하고 좋아합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원하지 않습니다.”

수녀님 대신에 하느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을 원하고 좋아합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원하지 않습니다.’ 

실제 주님과 이와 비슷한 문답을 주고 받았던 성인이 가톨릭교회의 굴지屈指의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네가 나를 위해 놀라운 저술을 했는데 나는 너에게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느냐?’ 물으셨을 때,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 하나 뿐입니다.’라고 답했다는 두 분의 대화를 문틈으로 엿들은 도미니코회 수사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게 죄’라는 것입니다. ‘살기위하여’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기도와 믿음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 주십니다. 오늘 1독서의 갈라티아 교우들의 어리석음도 기도의 부족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움을 받았다면 지체없이 율법이 아닌 믿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이래야 매사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으로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마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믿는’, 또 당신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아멘.




돈 대신 성령을 주시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께서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실 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돈을 달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신다며 성령을 주시면 여러분은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왜 이렇게 질문을 하느냐 하면 같은 내용의 마태오복음은 성령을 꼭 짚어 얘기하지 않고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로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루카복음은 마태오복음처럼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거라고 그저 일반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그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굳이 꼭 짚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돈 대신 성령을 주신다면 감지덕지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돈을 달라고 청한 적이 거의 없고 십여 년 전부터 제가 화살기도처럼 자주 하는 기도가 “오소서. 성령님. 저를 당신 사랑의 불로 태우소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시면 왜 최고의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열정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두려움이 없어질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고통을 무릅쓰고 사랑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치명적인 상처까지 치유될 겁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어느 것보다도 완전한 만족을 줄 겁니다. 


성령 하나로 이렇게 많은 것을 받게 되니 우리가 청하면 어련히 성령을 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돈 대신 성령을 청하는 제가 성령 대신 돈을 청하는 분들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산다고 저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돈을 청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제가 돈을 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족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뒤집어 얘기하면 돈이 절실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여러분은 살아가다보면 돈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기에 저는 여러분이 돈을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전혀 속물스럽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절실한 가난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충분히 있는데도 욕심 때문에 돈을 더 달라는 분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이 돈보다도 성령을 더 원하는 분이 되면 좋겠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돈은 필요를 채우는 것이지만 

성령은 만족을 채우는 것이고

돈은 만족을 모르고 더 욕심을 부리게 하지만

성령은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완전한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돈은 꼭 필요한 만큼만 주십사고 청하고 성령을 꼭 주십사고 청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11,1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면 그것을 잘 얻곤하나요?

아니면 기도한다고 하는데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 것 같나요?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께서 안 들어 주실 리가 없다네요.

그럼 뭐가 문제일까요?


첫째는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청해야 하는데 조금 해보고는 안된다고 포기하기 때문일 거라네요.

뭐든지 때가 있는 법 99일을 마늘과 쑥을 먹고도 하루를 못 기다려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처럼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청하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두번째는 우리가 가당찮은 것을 청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주시려는데 우리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을 청할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큰 선물은 성령, 곧 거룩한 생각과 마음이지 부귀영화와 같은 욕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 그러니 주님께서 인색하셔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안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거룩한 생각과 정신을 주십사 끊임없이 청하기만 하면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큰 선물, 곧 하느님의 영을 얻게 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자비로이 베푸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청하렵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내가 나만을 위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찾으렵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내가 나만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드리렵니다

 

사랑 정의 생명 평화 가득한

더불어 사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이기심 탐욕 독선 배척에 찌든

갈라진 세상의 문이 아니라

 



살려면 기도하라 <루카,11/5-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엣 말에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위급한 사항이라도 기도하면 면할 수 있다. 위급한 사항에도 기도하지 않고 당황하거나 근심 걱정에 빠지면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해서 생각 없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해하거나 남을 해치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고자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분간하여 바른 판단을 못하면 넘어지거나 쓰러져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때 주의 기도 한 번 하고 생각하고 말을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오늘 복음에 친구에게 빵을 얻기 위하여 <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체면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간청하여 필요한 만큼 받게 된 것 같이 우리가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주인이신 분에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받고 얻고 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자만심 때문에, 신뢰 부족으로,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등의식으로 자신감 있게 구하지 않은 사람은 기도를 잃은 사람이며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병자가 나는 이병으로 죽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간청합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간청하지 않고 의사에게 자기 병의 상태를 말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서로 신뢰감이 없어 병치료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모두가 겸손과 온유로 간절히 이 곤궁에서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시편 98<99> 6절 엣 선조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 하느님께 부르짖는 그들의 기도를 당신이 들어주시었도다. “ 8절 ” 우리 주 하느님 당신이 그들에게 응답하셨나이다. “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하느님은 직접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심으로 하느님의 영을  주셨습니다. 멸망하고 죽는 자가 있다면 우리가운에 계신 주님을 찾지 않고 눈에 보이는 권력, 재력, 명예를 찾고 구하고 열려하니 그 허망한 것들과 같이 죽음에 길을 가고 힘없이 쓰러져 버립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손을 주님에게 내여 주시고 주님의 손을 꼭잡아보세요 당신은 주님 안에 생명을 발견하고 기뻐 춤추고 노래하며 행복해질 것입니다.

 

청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아버지께서야, “ 성령을 얼마나 더 주시겠느냐?”

아버지에게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가듯 항구하게 기도하기 원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는 기도를 통해

알게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청할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열게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게합니다.


청하는 기도의

여정에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게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으뜸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관계안에서의 

풍요로운 맛은

기도로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기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세상과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기도로

점점 믿음의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진실이 아닌 생각을 곧이곧대로 믿는 대서 모든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님을 만났는데 그 형제님께서는 자신에게 모든 잘못된 일들이 닥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남들에게는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재수 없는 일들이 자신에게는 꼭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오히려 꼬이기만 할 때를 소위 ‘머피의 법칙’에 빠졌다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철을 타야 하는데 플랫폼에 도착할 때 지금 막 떠나는 전철을 보는 것, 마트 계산대에 서면 내가 선 줄의 계산이 가장 느린 것, 버스를 기다리다가 너무 안와서 늦을까봐 택시를 급하게 잡아서 탔더니 바로 뒤에 버스가 부우웅 하고 오는 경우, 목욕탕에 갈 때마다 정기 휴일일 때 등등.... 이런 경우를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이 형제님 자신이 늘 이런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그 형제님은 자신에게만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고 하면서 불평불만을 던지십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부정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책에서 유유상종의 법칙이라는 내용을 보게 되었지요. 즉,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들을 끌어당긴다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화를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 많이 찾아오며, 반대로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편안하고 기쁜 상황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부정적인 행동들을 따라오게 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의 부산물은 아닐까요? 


‘할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상황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주님께 매달려야 하는지를 복음 말씀을 통해 전해 주십니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문을 계속 두드려서 원하는 빵을 꿀 수 있었던 사람의 비유를 전하면서, 주님께도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졸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 가득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까지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을 접고, 대신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께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내가 필요한 일들을 끌어당길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참 평화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실과 조금 밖에 빗나가지 않은 것이라도 후에는 천 배나 벌어지게 된다(아리스토텔레스).  


3대 33의 법칙

부정적인 소식은 긍정적 소식보다 일곱 배 정도 빨리 퍼진다고 합니다. 이를 일본 경영 컨설턴트 간다 마사노라는 ‘3대 33의 법칙’이라고 말하면서, 긍정적인 소식이 세 명에게 전파되는데 반해 부정적인 소식은 33명에게 전달된다고 하더군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소문들은 얼마나 빨리 퍼집니까? 그에 반해서 좋은 소식은 그리 빨리 전달되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긍정적인 소식, 좋은 소식 역시 비록 3:33이라는 낮은 비율이어도 분명히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달해야 할 소식은 어떤 것일까요? 세상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답고 사랑 가득한 곳으로 만들려면 내가 전달해야 할 소식부터 바꿔야 할 것입니다. 긍정적인 소식, 좋은 소식, 행복한 소식만 전달해야 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늘…"(루카11,13)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지난 10월5일부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요청으로 시노두스(SYNODUS)가 로마에서 19일까지 진행됩니다.

시노두스란 ‘함께 걸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회의 권위 하에 개최하는 ‘회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번 교황님 주최의 시노두스의 주제는 ‘가정이 직면한 복음화에 대한 도전들’이라고 합니다.

가정의 붕괴, 이혼, 자녀의 신앙교육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 듯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 끝자락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늘…”이라는 구절이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습니다.

누구든지 악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부모들에게 더욱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뱀을 생선이라고 착각하는 부모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불행하게도 그런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것을 채워주려 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이 너무도 노골적입니다.

세류에 휩쓸려 그저 남들한테 뒤쳐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독인지도 모르고 자녀들의 입에 넣어주려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정말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지 늘 생각해야만 합니다.

특히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주려고 하는지를 말입니다.

 

가정답지 못한 가정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부모 중, 누가 없는 것을 결손가정이라고 하지만, 자녀가 얻어야만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가정을 결손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십시오.

기도하는 모습이 자식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큰 답이 바로 기도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가르치십시오.

반드시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누구보다도 부모에게서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짜 사랑을 하십시오.




청하여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기억 하실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시합 응원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표현했고 그 희망이 기쁨을 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2,4).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구한다 해서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 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청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주시는 것은 그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66장 18절을 보면 “나 나쁜 뜻을 품었더라면 주께서는 아니 들어주셨으리라”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없신 여긴 탓이다”(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하라!’ 하느님의 손길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기다림, 항구함, 겸손의 은총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우린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비웃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들어맞지 않아” 하며 무시 하닌 무시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분열이 있는 것이지요. 믿으면서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분열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주님은 꾸준히 청하라, 찾아라, 두드려라고 하시는데 우린 포기하고 맙니다. 기다리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조급함이 앞섭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다는 것은 열매만 바라지 열매가 익을 때까지의 그 애절함과 자기 낮추임과 인내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 무엇보다도 기다림의 은총, 항구함의 은총, 겸손의 은총을 구합시다. 하느님은 아버지로서 참 좋으신 분임을 가슴 깊이 신뢰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씩 신자 분들의 차를 탈 때가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함께 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바칩니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신자 분들도 좋아하십니다. 처음부터 차를 타면서 기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는 운전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일 년이면 30,000킬로를 달렸습니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진 적도 있었습니다. 빙판길에 차가 한 바퀴 돈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 가는 길에 차를 잠시 세워 묵주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제 앞에 커다란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만약 제가 묵주를 꺼내지 않았다면 큰 사고 날뻔 했습니다. 그 뒤로는 차를 타면 언제나 짧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차를 운전할 때도 몇 가지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차문을 열고, 의자를 조정하고, 룸 미러를 조절합니다. 시동을 걸고, 계기판을 살핍니다. 그리고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급하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초를 켜고,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미리 준비를 합니다. 머리 손질도 하고, 옷차림도 정돈하고, 약속 시간에 미리 가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입니다. 아무런 갈망이 없으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텔레비전은 채널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채널을 맞추어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도 약속 시간을 정해서 만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정해진 시간에 하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을 정하지 않으면 기도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넷째, 매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숨을 쉬면서 살아갑니다. 5분만 숨을 쉬지 않아도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식사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매일 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영양실조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매일 나의 몸을 돌보듯이 매일 기도를 통하여 나의 영혼을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점을 이야기 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이는 또한 우리도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린 갈라티아인 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권위와 율법이 아닌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나의 힘과 능력을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정신이 엔진 노릇을 해야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포기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니 끈기 있게 노력해야 결과를 얻겠지요. 

다이어트, 몸매 만들기, 건강관리, 피부 관리 같은 육체에 관한 거나,

기술 예술 전공 등과 같은 것도 이 원리에 해당되는 몸의 조건입니다. 

몸의 상태를 위해 정신이 엔진 노릇을 해야 그렇게 되는 인간조건입니다. 

여기서 그 목표가 무엇 때문이며 왜 그래야 하는지의 이유가 중요합니다.

목적과 이유는 자기나 사회 국가 인류 나아가 하늘까지 득이 돼야 옳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9)”


  


< 같은 행위, 다른 본성 >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몇 년 전부터 술이나 고기를 먹거나 햇빛을 많이 쐬면 얼굴에 붉은 반점들이 돋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가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에 나갈 때는 얼굴이 희게 되는 선크림을 바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크림을 지우고 나면 그 붉게 올라온 것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어쩌면 위선이란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일시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화장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화장은 자기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뿐 아니라 천연두 등의 자국을 감추기 위해서도 했고, 서커스를 위해 우스운 화장을 하는가 하면 전쟁터에서 상대에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도 우리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려고 말과 행동에 화장을 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조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느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변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구원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다시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갈라티아인들에게 잘못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옛 계약(구약)이었고 이는 그리스도와 맺은 새로운 계약(신약)으로 파기되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의 희생 공로가 무의미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해성사를 하고 사제가 내준 보속을 하지 않았다고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의미 없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보속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 죄가 용서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약간은 흥분된 듯 이렇게 말합니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바오로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닌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듯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란 바리사이처럼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여겨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할 때 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구원은 무화과 잎이 아닌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죽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 일부 신학자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한 번 구원받으면 그만인데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고도 계속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주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이 말하는 행동은 진정으로 믿는다면 행동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야고보가 왜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가톨릭이 행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율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지녔느냐의 판단이 결국은 행동의 열매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도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 행동이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알려면 열매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도 아니면서 겉으로만 그런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위선자요 율법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신앙 안에서도 이런 잘못된 사고가 많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즉, 봉사를 많이 한다면, 혹은 미사나 기도를 많이 한다면, 혹은 선행이나 자선을 많이 한다면 하느님께서 더 즐겨 보아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을 가장 많이 했던 이들이 바리사이들입니다. 착함이란 나의 존재가 변하여 저절로 나오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했다고 보상이나 인정받기를 원하는 의도로 했다면 이는 위선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는 자신들이 한 선행과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도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세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따지며 교만해 졌다가 하느님께로부터 큰 벌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받아들이면 자신도 모르게 선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신의 본질과 벗어나 위선적일 수 있고 반면 본질에서 나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둘이 같이 맷돌질을 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지며, 같이 밭을 갈아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리"에로의 귀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영합니다. 고생하셨어요.-302호-"

장충동 수도원 숙소에 돌아왔을 때 게시판에 붙은 메모지가 마음의 불안을 불식시키고 깊은 위로와 평화를 주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의 최종 목적지는 산티아고가 아닌 여기 제자리의 내집임을 깨닫습니다. 돌아올 집이 있었기에 발걸음이 갈수록 가볍고 힘찰수 있었습니다. 어제 비행시간 12시간 내내 피곤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돌아올 제자리의 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형제의 집에서 미사와 식사를 하면서 깨달은 것도 이런 순례의 최종 목적지인 집이 상징하는바, 평생순례후 죽음을 통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이었습니다. 인생 마지막 돌아갈 집, 아버지의 집이 없다면 그 인생 얼마나  쓸쓸하고 허무하겠는지요.

 

"내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는 주님 말씀처럼 이냐시오 형제나 저나 제자리의 집에 돌아오니 참 넉넉하고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제자리가 꽃자리입니다. 순례후 돌아온 제자리의 집은 예전의 제자리가 아닌 새로운 출발점의 제자리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끝났지만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사는' 제자리에서의 내적순례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주신 제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예전 자작시 1연에서 처럼 다시 제자리에서 정주의 나무가 되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감정이나 기분이 아닌 순수한 믿음입니다. 정말 위대한 힘은 체력도, 정신력도 아닌 믿음의 힘, 신력입니다. 바로 복음에서 주님이 그 삶의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제자리 정주의 삶에서 기도의 원리, 믿음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늘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기도요 믿음입니다.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신자요 구도자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 아버지로부터 하사되는 참 좋은 선물, 성령입니다. 우리는 바오로의 말씀대로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항구한 믿음의 삶을 살 때 성령 충만한 삶이요,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제자리에서의 내적순례에 항구할 수 있는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시기에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모든 것은 소중합니다.


생생한 믿음은

청하는 기도로

오늘을 깨웁니다.


주님께 청하는

기도가 있기에

우리의 오늘은

낯설지 않습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떤 순간에도

주님께 청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

청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우리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기도의 변화는

주님과 함께

주고 받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기도의 깊이는

삶의 깊이 입니다.


기도는 빛으로

우리자신을 비추기에

우리자신을 보게되며

우리자신을 정화시킵니다.


최초의 시간도

최후의 시간도

모두 청하는 기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과 믿음은

언제나 기도로

시작됩니다.


청하는 기도로

다가서지 못할 것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도록

눈부신 아침 햇살속에서

기도로 기쁨을 청합니다.


기도는

가장 좋으신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기도는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주님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하지 않고서는

실천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찾지 않고서는 은총을

알 턱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참된 자신을

만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기도가

삶의 본질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삶의 본질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랑의 여정이란 결국

놓고, 비우고, 돌아가는

감사의 여정임을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없이는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를 다시 살게하는 힘이 됩니다. 


불확실한 현실마저

감사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가 되고

행복이 되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과 기쁨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 그것은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우리의 시간을

채우는 기쁨입니다.




 

언젠가 자전거로 논두렁을 지나고 있었는데 들판에 세워둔 많은 허수아비를 보게 되었습니다. 허수아비를 보니 예전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하긴 예전에는 이런 허수아비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허수아비 찾기도 쉽지 않지요. 그 이유는 요즘 참새들이 영약해서 허수아비가 있다고 곡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심지어 허수아비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참새도 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참새에게 처음부터 허수아비가 무섭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허수아비를 세워 두었던 것이지요.

아마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고 무서워서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가만히 보니 사람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지요.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과 달리 이 허수아비는 너무나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다가섰고 결국은 허수아비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가까이 갔기 때문에 허수아비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불안하다고 또 힘들다면서 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많은 이들이 각종 불안감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불안은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즉, 문제의 해결은 바로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은 비유 말씀을 전해주시지요. 계속해서 졸라대면 귀찮아서라도 빵을 내어 주는 친구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 끊임없이 매달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 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참새가 조금씩 허수아비에게 다가서면서 불안감을 없애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조금씩 다가서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들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 다가서는데 있어 특별하고 거창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께 무조건 매달리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우리들보다도 훨씬 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불안하십니까? 또 힘드십니까? 아직도 내 자신이 주님 앞에 나아가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산다면 우리 마음은 어떻게 될까. 램프 없는 환등기와 다를 바 없을걸세(괴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람들이 제게 “신부님은 못하는 것이 뭐에요?”라는 말씀을 종종 하십니다. 솔직히 못하는 것이 더 많은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제게 너무 많은 재능을 주셨다고, 하느님께서는 참 불공평하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 분명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을 많이 했었고 또 닮고 싶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보다 정말로 우리가 되어야 할 사람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내 자신의 친구로 함께하고 있으며, 그리고 나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보세요. 인간성이 더러워도 상관없이 무조건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이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친구로 함께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재능, 똑똑함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함이면 충분합니다.
재능이 많고 똑똑한 친구보다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 자신이 먼저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을 청하지 말고요…….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권혁주 주교님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를 무조건 들어주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청원기도는 감사기도나 찬양기도보다 못하다.’고 혹평하면서 기도를 게을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청하기도 전에 이미 그 내용을 다 알고 계신다.’고 하면서 항구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끊임없이 간청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8절) 그리고 ‘불의한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루카 18,1-8)를 통해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께 간청하는 기도들을 자주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자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가던 베드로가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4,30) 어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호되게 마귀 들린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 지르며 도움을 청합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15,22.25) 사람들이 청할 때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꼭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은 늘 있습니다. 청하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9,29) 이제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청합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청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짧은 청원기도를 반복해서 드려도 좋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

송영진 모세 신부님

10월 9일의 복음 말씀은 '끊임없이 간청하여라.'(루카 11,5-8)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루카 11,9-13)인데,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믿음, 올바른 지향, 간절함, 정성, 기다림, 끈질김, 인내" 등입니다.


1) 믿음

믿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기도한다고 될까?" 라고 반신반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안 되는 일을 너무 많이 보거나 겪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그런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하나마나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2) 지향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아무거나 다 기도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향이 선해야 하고, 하느님 뜻에 맞아야 합니다.

남 생각은 안 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기도, 남을 저주하는 기도, 선이 아니라 악을 향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특히 이기적인 기도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대규모 야외 행사를 앞두고 비가 안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

그 시기에 농부들은 비가 안 와서 가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행사를 연기하거나 취소하더라도 고생하는 농부들을 위해서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합격자 수가 제한되어 있는 어떤 시험의 경우, 또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어떤 시합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험을 앞두고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그런 시합을 앞두고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는데, 그런 기도도 올바른 지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합격해서 웃을 때 누군가는 떨어져서 울게 되고,

누군가는 승리해서 웃을 때 누군가는 패배해서 울게 되고...

하느님은 어떻게 해야 하나?

더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당연한 일.

아마도 분명히 하느님은 중립을 지키실 것입니다.

실수하지 않도록, 또 준비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정도의 기도라면 좋은 기도이지만,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기도는 옳은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3) 간절함

"기도한 대로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같은 태도로, 또는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간절하게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공동체 전체가 바치는 기도이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국 통일을 위한 기도의 경우, 정말로 통일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이 많겠지만, "통일이 되면 좋고 안 되어도 할 수 없고"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4) 정성

간절함은 정성으로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간절하게 바랄수록 온갖 정성을 다 쏟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정성이 부족한 것은 간절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정말로 바란다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입술로는 기도를 하면서 눈으로는 티브이 연속극을 보고 있다면...

그런 식으로 바치는 기도를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5) 기다림

아마도 기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기다림'일 것입니다.

믿고,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정성을 다 쏟아도 언제 어떻게 기도가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믿는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입니다.


6) 끈질김

기다린다고 해도 겨우 기도 몇 번 한 다음에 그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7) 인내

'인내'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종합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인내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있기 때문에 인내합니다.

또 인내할 수 있기 때문에 정성을 다 쏟아서 기도하게 되고, 기다릴 수 있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틸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실 인내의 연속입니다.

만일에 인내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루카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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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라면 다 알고 있는 성서구절이다.

이 말씀에 우리는 희망을 갖기도 하고 실망을 하기도 한다.

청할 것이나 찾을 것이 있을 때, 원하는 길이 열리기를 바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희망이 된다.

반면, 온갖 정성을 드리며 기도를 했는데,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실망을 한다.


정말 우리가 간절히 청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다 들어주시는 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다운 모습이고 옳은 일일까?


식별이 요구된다.

이 말씀은 분명 간절히 청하는 마음, 즉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시는 말씀이시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전제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으려 하고, 어떤 길로 들어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결정적 열쇠가 된다는 말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귀를 기울여보자.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11,11-12)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달리 말하면, 독사와 전갈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절대로 허락하실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생선과 달걀을 청해야 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좋은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올바른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의 요구가, 우리의 청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파멸로 가는 길임을 모르면서 기어이 가고자 하려는 자식들을 보아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자.


우리가 무엇을 청하기 전에,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선인가 악인가, 아니면 약인가 독인가? 아니면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청이 선이고, 약이고, 살리는 일이라면 반드시 받을 것이고, 얻을 것이고, 그 길이 열릴 것이다.

우리의 청이 악이고, 독이고, 죽이는 일이라면 절대로 허락하실 하느님이 아니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정말 잘 되기를 우리보다도 원하신다.




성실하신 하느님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 이르는 가장 아름다운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사랑의 힘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는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열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온 마음으로 얻은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문을 열어 주시는 하느님을 알기에 이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관계의 단절을 체험한 것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자만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려 했을 뿐 하느님 자비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나눌 때입니다. 

철저히 혼자라고 여겼던 우리가 하느님과 마음을 나누게 되면 우리가 걸어온 모든 시간이 하느님과 함께 걸어 온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당신의 자녀가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 주지 않겠습니까. 

가장 좋은 하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입니다.




끝이라 생각이 들 때 한 번 더 기도하십시오.

-김대한 신부님-

집에 가 보니 한참 뜸을 뜨고 계신 어머니께 외삼촌이 “효과도 없는데 뭐 그렇게 열심히 뜨냐?”며 핀잔을 주셨습니다. 효과가 왜 없냐고 반문하시는 어머니께 외삼촌은 지난번에 두어 번 떠봤는데 별로 효과를 못 봤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고작 두 번 뜨고 말았으니 효과가 없지! 한동안 꾸준히 해봐. 분명 효과가 있을 테니까!”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기도를 해도 효과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처럼 올바른 지향을 두지 않은 경우이거나 몇 번 기도하고 말았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오늘 복음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청하라고 말합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100퍼센트의 기도 성공률을 자랑하는데, 그 이유는 기우제를 시작하면 비가 올 때까지 계속 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벽을 부수는데 몇 번 치다가 금방 포기해 버리는 것도, 딱 한 번만 더 치면 되는데 그 앞에서 그만두어 버리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한두 번에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열릴 때까지 두드린다면 분명 열릴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한 번만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야 말로 행복한 사람이구나.”

어제 묵상하다가 문득 들은 생각입니다. 뜬금없이 왜 이런 생각을 했냐고요? 며칠 전에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께서는 요즘 다니는 일 때문에 너무나 힘들다는 고민을 호소하시더군요. 지금 당장 때려 치고 싶지만, 돈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분이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일을 즐기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의 경우 돈 벌기 위해서 하는 일들은 아니거든요. 그 자체로 재미를 느끼고 또한 여기서 큰 기쁨도 체험하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요? 저처럼 일 자체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억지로 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스스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전혀 다른 세상을 체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가두어버린 마음으로 인해서 항상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에는 그의 유언이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세월을 보내면서 좋고 의미 깊은 기회를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이렇게 좋고 의미 깊은 기회를 잡아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길이 바로 믿음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내게 항상 좋은 것만을 주신다는 믿음, 나를 배신하지 않으시고 항상 나에게 사랑을 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우리가 청하는 대로 주님께서 모두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행복한 사람일까요? 불행한 사람일까요?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으로 모두가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인생의 반환점에서 찾은 행복(김병숙)

5년 동안 직업 상담을 진행하면서 공통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4학년, 남성 30세와 43세, 여성 27세와 40세 때 진로에 대한 갈등을 집중적으로 했다. 나는 이때를 인생의 직업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 분기점에서 ‘나는 누구일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직면한다.

40대 인생의 반환점에 선 이들이 갖는 갈등은 주로 직장에서 나타난다. 부하 직원이 나보다 먼저 진급하는 것, 징계 대상이 되는 것, 점점 한직으로 밀려나는 것은 이제 얼마 있으면 해고를 당하거나 체면이 서지 않아 스스로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징조다. 이때 사람들은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이 일로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한다.

상담실을 찾은 한 고객은 전공에 맞는 직장을 선택하여 나름대로 잘나갔다. 하지만 높은 지위와 풍요로운 경제력을 갖췄어도 텅 빈 자신의 마음을 채울 길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공허한 것일까?’ 몇 차례 상담 결과 그는 자신만의 인생 철학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나날을 어릴 때부터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생활은 무지막지한 건설 현장 감독자로서의 일상이 다였다. ‘내 꿈은 언제나 실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되자 하루하루가 마치 고역의 연속으로 느껴졌다.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두 자녀를 가진 40대 아버지가 내린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난 뒤 다시 상담실을 방문한 그는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 미숙했다고 털어놓았다. 그와 나는 상담을 통해 그가 자신의 철학에 부합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현재 그는 아직 확고한 위치를 잡지 못했지만 꿈을 만들어 가는 일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40대가 되면 사람들은 으레 자신의 인생 전반이 거의 결정 났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결정났다고 생각한 그때를 인생의 반환점이라 여기고 또 다른 삶을 준비한다면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냐?”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왜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 탓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사탕을 달라는 아이에게 우유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할 때마다 부모가 사탕은 이빨을 썩게 할 뿐이라고 하며 우유를 주면, 아이는 그 다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근원적인 불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달라는 대로 주지 않으신다는 불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은 사실은 불신이 아닙니다.

미성숙할 때는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좀 크고 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뿐 부모는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청원기도를 하고, 그래서 우리의 청원이 가납되려면 우리의 청원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육적인 것이 아니고 성령이어야 합니다.

남이 잘못 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부귀영화도 아닙니다.

사랑을 달라고 청하고 성령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듯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고 청해야 합니다.




 

저는 며칠 전 미사 중 강론 시간에 깜짝 놀랄만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강론을 하기 위해 새벽에 썼던 강론 원고를 펼쳤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원고를 잘못 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날의 원고가 아닌, 일주일 전에 했던 강론 원고가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더군요. 


사실 한번 했던 강론 원고는 곧바로 휴지통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원고는 휴지통 속에 들어가지 않고 책상 위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나중에 버려야지 라고 마음먹었다가 깜빡 잊고 버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던 원고를 그날의 강론 원고인줄 알고 미사 때 가지고 올라간 것이지요. 


만약 강론 원고를 곧바로 휴지통에 버렸다면 그럴 일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버려야지’라는 안일하고 뒤로 미루는 행동으로 인해 미사 중에 당황한 일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이 왜 잘못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강론 원고를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지금 해야 할 강론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과거에 연연함으로 인해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충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의 일로 인해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랬더라면...’ 식의 아쉬움으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기를 할 때 뒤를 돌아보면서 달리면 어떨까요? 절대로 빨리 달릴 수 없으며, 제대로 달릴 수도 없습니다. 목표점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려야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으며, 그 목표점을 향해 제대로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의 목표라고 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우리는 어떻게 달리고 있었을까요? 바로 지금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려야 하는데, 혹시 과거만을 계속 뒤돌아보면서 엉뚱한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님 앞에 다가가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주님께 청하고, 주님을 찾고, 주님의 문을 두드리는 행동은 바로 지금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과거에 연연하면서 행하는 행동이 아닌,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써 살아갔는지를 다시금 반성하면서, 이제 과거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이라는 현재에 충실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늘의 당신의 모습을 보라. 내일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늘의 당신을 보아라. 그것이 바로 미래의 당신이다.(삼세인과경)




<기도 중의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무엇을 청할 것인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을 청하기만 해왔습니다. 때로 그 청하는 바가 너무나 허무맹랑한 것이어서 송구스러웠습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청해서 하느님을 곤혹스럽게 해드린 것이 아닌가, 반성이 되었습니다. 어떤 청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너무나 이기적인 청이어서 슬펐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하느님께 청하는 내용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우선 내 가족, 내 자녀, 내 부모의 안녕을 청하는 것,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내 학업, 내 사업의 번창을 청하는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입니다. 내 앞길, 내 건강, 내 계획을 보살펴달라는 청,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청원은 너무나도 황당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 입니다. 어떤 청원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터무니없습니다. 어떤 청원은 슈퍼맨 할아버지라도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정확한 의미로 기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기도라기보다는 하느님을 힘들게 하는 억지요 강요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청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강조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한 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기도가 한 차원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느님의 손수건이 되기를 원하셨고, 후배 살레시안들에게도 장상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손수건같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접든 펴든, 더러운 손을 닦든 코를 풀든, 그저 주인의 손아귀에 든 손수건처럼 하느님의 손수건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야 말로 기도 중의 기도입니다.

성모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의 외침을 생각해보십시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느님의 뜻, 우리의 구원

- 이요한 신부님-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그 뜻을 우리는 청하고 찾고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고 의지와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분명 그 의지와 뜻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우리의 해방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나 신앙생활이 의무나 책임, 두려움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정말 좋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에 대한 잘못된 희망이 파괴와 소외를 가지고 왔듯이 올바른 자유에 대한 갈망이 완성과 일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청해야 합니다, 올바른 희망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참된 자유를. 그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십시다. 주님을 모실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류 보편의 꿈과 희망인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유산입니다. 주님께 달려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겠다고 가득히 넘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주십사고 간절히 원하는 것뿐입니다. 주님께 조릅시다. 간절히 청합시다.




끈질기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에 이어 주님께서는 오늘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은 기도를 하되 끈질기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들어주시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 편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가?

두 가지의 경웁니다.


하나는 절실하지가 않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실하지가 않으면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에 사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청하지 않습니다.

한 번 툭 던져봐서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의 사람에게 기도를 들어주심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은총을 허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허비되는 것은 하느님으로서도 마음 아프시지만 무엇보다 인간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것이 사람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도록 우리의 갈망을 키우시고 간절히 그리고 정성껏 기도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히 믿지 못하면 한두 번 기도해보곤 ‘역시 안 들어주시는구먼!’ 하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선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이 선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하지 않다면 악마이지 그게 무슨 하느님이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라면 선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믿지만 자기에게 좋으신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일생에 한 번도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좋은 분으로 어디에 처박혀 계시는 하느님이시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분이신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었던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있었던 불행한 일만을 봅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일만 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만 봅니까?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좋은 것만 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것도 크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눈에 띄지 않지만 싫은 것은 좋은 것만 있기를 바라기에 특별히 의식이 되고 그런 기억만 남을 것이고 일상의 소소한 좋은 일은 눈에 차지 않고 자기에게 과한 욕심을 부리며 거기에 미달하는 악만을 보고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의 문제는 자기가 보기에 나쁜 일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자기에게 나쁜 일이 사실은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에 주신 것임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 이런 깨달음과 믿음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인생의 많은 경험을 통해서 힘들게 그리고 드물게 주어지는 은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은총 많이 받는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는데 동네에 집이 일곱 채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구멍가게도 없어서 군것질이란 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유일한 군것질이 가끔 오는 엿장수 리어카 아저씨에게 집에 있는 쇠붙이며 병 등을 팔아 받아먹는 뻥튀기 과자가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은 사은 대잔치를 한다고 동네 아이들에게 뻥튀기를 공짜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달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각자 그릇들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 그릇의 크기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저는 내심 ‘그래도 공평하게 나눠주겠지!’라고 생각하고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는 두 손에 쏟아질 만큼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각자 가져온 그릇에 가득가득 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숫대야를 들고 나온 아이도 거기에 가득 채워갔습니다. 저는 가장 많이 받아간 아이에게 비굴하게 붙어서 얻어먹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치 큰 공을 세운 사람이 큰 상을 받는 것처럼, 각자의 크기를 따지지 않고 똑 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공평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그릇의 크기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그릇을 가지고 왔느냐에 따라 그만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은총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의 그릇을 지니고 있어야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먼저 은총을 주시는 분이 매우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위에 한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뻥튀기를 적게 받은 이유는 그 아저씨가 인심이 그렇게 후할 것이라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그 아저씨를 후한 분으로 판단했고 본인들이 판단한 만큼 받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풍부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는 자비로운 분임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두 번째는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크기가 감자크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인은 과일 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 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그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먼저 청해야 하는 은총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사랑, 평화, 기쁨 등의 온갖 열매를 맺게 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청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청하는 것이고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것들도 덤으로 얻게 될 터인데 성령의 은총보다 세상 것들을 더 청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은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진정으로 원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복음에서 친구가 빵을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을 때 그냥 포기했다면 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친구가 빵을 줄 것을 믿고 끈질기게 청했기 때문에 그것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청하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그것은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죽기까지 청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시고 금방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청하려고 할 때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청하려는 마음을 지녀야합니다.

기도는 마치 활을 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냥 허황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과녁이 확실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쏘아서 맞지 않는다면 맞을 때 까지 줄기차게 쏘아야 합니다. 그래도 잘 맞지 않는다면 하느님 스스로 그 과녁을 우리 코앞에 놓아주실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은 계절을 타서 그런지 나이에 맞지 않게 자주 지난 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내 생애 안에서 가장 절실히,가장 간절히 기도했던 때가 언제였던가?"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지 10년 정도 된 시기로 기억합니다. 제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많이 노력했었지만 노력만큼이나 방황이나 좌절이 많았던 시기,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던 시기, 더구나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종신서원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여러 측면에서의 다가오던 스트레스들, 거기다 지극히 소심했던 제 성격은 제 영육을 완전히 다운시켰습니다. "이렇게 소화가 안되고, 통증은 계속되고 혹시라도 큰 병은 아닐까? 아직은 좀 더 살아야 되는데..."하는 걱정에 내시경까지 해봤지만 아무런 이상은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다보니 몸이 맛이 가고, 몸이 맛이 가다보니 정신도 약간씩 맛이 간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공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또 스트레스를 받고...아무튼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다보니 삶을 완전히 포기할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소문을 통해서 제 근황을 알게된 어머니께서 하루는 큰 가방을 들고 수도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애야,수도생활도 좋지만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이제 수도생활도 할만큼 했으니, 그만 됐다. 원장 신부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이젠 시마이하고 집으로 가자!"

당시 너무도 심신이 지쳐있던 저는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만큼이나 노력했는데, 시대가 나를 안 받쳐주니 할 수 없지"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귀향열차를 탔습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집에 와서 투병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몸이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지"하고 완전히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는 제게 어느 순간 "그래도 내 청춘을 바쳤는데, 너무 억울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가는데 까지 한번 가봐야 되지 않겠나?"하는 오기가 은근히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는 집 가까운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정말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수도자로서 봉헌된 삶, 봉사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협조 안하시냐"고 인정사정 없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 제 안에 남아 있는 에너지 전부를 기도에만 다 쏟아 부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도 기도가 지나쳤던지 탈진할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절실히 기도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고 느껴지던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제게 건네셨습니다.

"애야, 이제야 알겠느냐? 네게 고통을 보낸 이유를. 정화가 단련이, 거듭남이 네게 필요했었단다. 이제 걱정말로 다시 한번 새출발해 보거라."

이런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그때 당시의 고통을 가장 큰 선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보내시는 이유는 보다 절실한 기도, 보다 처절한 기도를 통한 새 삶을 준비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시 제가 틈만 나면 밥먹듯이 되풀이하던 기도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느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여전히 하느님을 "왕실망"시켜드리지만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닿는다는 확신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 한 차원 도약을 위한 것, 영적인 삶을 위한 것,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을 위한 것일 때 하느님께서는 100%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두드리시는 하루, 다시 한번 좌절을 딛고 힘차게 일어서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기도 안하는 변명들

-이인옥-

연일 기도에 관한 말씀이다. 얼마 전에 기도에 관한 나의 안이한 생각을 뒤엎어주는 책을 만났다. 안토니 블룸이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쓴 ’기도의 체험’, ’살아있는 기도’를 읽고 난 충격은 그 동안의 내 게으른 기도생활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평소에 기도란 호흡처럼 숨쉬듯 가볍고 편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건성으로 하는 염경기도 백 번보다 정성껏 드리는 화살기도 한번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도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정중히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봉사를 하는 것으로, 성서를 읽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으며 기도를 너무 ’나’ 중심적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쩌면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위로해왔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인격의 만남이며 관계라는 것, 곧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어떤 교수에게 졸업한 제자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했다. 한 시간 동안의 면담 도중 핸드폰이 네 번 울렸는데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문자를 날리고 통화를 하는 모양을 보고 주례를 거절했다고 한다.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의 주례를 청탁하는 자리에서 단 한시간도 눈을 마주하고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없는 산만한 사람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혹시 교수는 하느님이시고 제자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기도가 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있게 의식하고 나누는 대화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안토니 블룸은 기도란 하느님의 인격적인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느님 면전에 선다는, 마치 최후의 심판정에 임하는 것처럼 두렵고도 떨리는 자세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매번 그럴 수 있냐고 한숨 쉬기 전에 하루에 단 한 번 아니 일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그토록 진실하게 주님과 만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하면서, 온갖 분심 속에서, 길을 가면서, 아무 때나 틈새에 잠시 불렀다가, 힘들고 바쁘다고 다시 구석으로 밀쳐놓는 분이 소위 나의 <주님>이다. 이렇게 소홀히 대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즉각 달려오지 않는다고, 침묵한다고 주님을 원망한다.

또한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도 좋지만, 교회와 신앙의 선배들이 고심 끝에 마련한 기도문은 옛 선조와 내가 공동으로 드릴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기도라는 것도 재인식했다. 더구나 사랑이 언제나 달콤함만 있지 않듯이, 무덤덤한 기도의 때도 있는 것이어서 그 때를 위하여 염경 기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 역시 그런 때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도했다는 안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올 감미로운 기도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 쉽고 편한 기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태한 기도생활로 이어져 이런 저런 핑계로 변명하다가 다른 활동이나 영적 독서로 대체시켜버렸던 때도 많았었다. 다시 기도가 필요하다는 열망이 끓어오를 때면 그동안 주님과의 거리를 의식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얼마동안 다시 기도를 하다가 또다시 반복되는 나태한 생활에서 신앙은 늘 제자리를 답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독서,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도를 <안하면서> 그것을 기도로 핑계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정말 하루 몇 분을 쪼개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현존과 마주하지 못할 만큼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말 아무 때나 그분을 불러내고 아무 때나 그분을 뒤로 물리칠 만큼 그분을 아무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불러낼 때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그분의 침묵-하느님의 자율권-에 그렇게나 도전할 만큼 그분을 종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정말 기도를 부담으로 느낄 만큼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닐까? 

 

 

 

 

지난 8월 달에 원고 청탁을 하나 받았습니다. 12월에 나갈 잡지에 낼 글로 12월 한 달 동안의 묵상 글을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 홍보실에 근무할 때, 원고청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거든요. 즉, 저는 누구에게든 원고청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요. 


아무튼 저는 한 달 동안의 묵상 글을 쓰겠다고 약속을 했고, 더군다나 10월 20일까지만 써서 보내주면 된다고 하니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그마치 두 달이나 남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시간을 두고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틀에 하나의 묵상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바쁜 일정들이 하나 둘씩 생기면서 그 결심을 지키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이유로 쓰지 않고 뒤로만 미루게 되더군요. 


9월 20일. 원고 마감까지 딱 한 달 남았습니다. 이제 이틀에 하나의 묵상 글이 아니라, 하루에 하나의 묵상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하나. 그것도 A4용지 13줄 정도의 분량이니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결심도 또 지켜지지 않더군요. 왜 이렇게 새로운 일정들이 생기는지……. 더군다나 하루에 한 개의 묵상 글은 별로 부담되지 않기에 또 뒤로 미룹니다. 


10월 5일. 이제 보름 남았습니다. 이제는 하루에 두 개의 묵상 글을 써야 합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10월 11일. 이제는 미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하루에 세 개의 묵상 글을 써야지만 원고마감을 간신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 하지 뭐.’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미루다보니, 이제는 써야 하는 묵상 글들이 점점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부담되는 원고청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는 저의 모습이 바로 부담되는 원고청탁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는 특별히 시간이 더 많이 있는 줄로 아는지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내일’이라는 시간. 그 시간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시간인데도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올 시간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지금 당장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시간 날 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요? 혹시 계속해서 뒤로 미루다가 저처럼 별 것도 아닌 것을 큰 부담꺼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내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맙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괴롭혀드리는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끔씩 우리는 하느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의 머릿속을 아주 복잡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기도가 그렇습니까?


월드컵 8강 경기가 벌어지기 직전입니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가 맞붙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승리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철야기도까지 하면서 간절히 승리를 기원합니다.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에서는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습니다. 수많은 성당에서 승리 기원 미사가 봉헌됩니다.


이럴 때 하느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시겠습니까? 이런 스타일의 기도는 기도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괴롭혀드리는 일이며, 하느님을 기적의 요술방망이로 전락시키는 장난일 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즘 로또 복권을 많이들 사시지요. 로또 복권을 한 장 손에 든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이번 딱 한번만 신경 좀 써주세요. 큰 걸로 당첨되면 제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반을 뚝 잘라 하느님께 봉헌하겠습니다.”


그리고는 9일기도를 바친다, 철야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런 기도가 허락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라는 하늘에 내리치는 날벼락 맞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고교 내신 성적이 거의 바닥입니다. 수능도 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학생이 내놓으라는 유수대학, 그것도 제일 잘 나가는 학과에 응시했습니다. 그리고는 백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가 결코 드리지 말아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심껏 기도바치지만 하느님께서 절대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기도, 허무맹랑한 기도, 우리를 위험과 악, 죽음으로 몰고 가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영혼의 유익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앞의 작은 이익, 우리의 끝도 없는 사리사욕, 이기적인 바람의 지속적인 충족을 위해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기도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유가 타당합니다. 아주 내용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실 때 위험천만한 기도가 많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것은 무엇입니까?


눈앞의 작은 것이 아니라 보다 멀리 있는 큰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을 건너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보다 영원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영속적인 것, 말초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것, 결국 영혼의 구원, 공동선, 가난한 이들의 행복, 하느님 나라의 도래, 이런 것들이 우리 기도의 주 대상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지금 잘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결국 우리가 취할 자세는 기도의 결과가 어떠하든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이 내게,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보다 이타적인 기도, 보다 영성적인 기도, 보다 수준 높은 기도, 결국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탄력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느 손님이 수도원을 찾아 노수도자에게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수도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아주 예전에 공감하며 읽었던 일화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누군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포자기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더 큰 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고…. 바로 이게 우리 일상의 삶이요, ‘십자가의 길’이 뜻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적극적이고 항구한 좋은 기도의 자세를, 믿음의 자세를,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한 번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부단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집요한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자세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청할 때, 찾을 때, 문을 두드릴 때, 하느님은 우리 생각이 아닌 당신 생각대로 최고, 최선의 방법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어려워 마, 두려워 마!

-안성철 신부님-

우리는 대부분 저 사람은 내가 부탁하면 귀찮아하고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미리 단정해 버린다. 이렇게 나름대로 생각하고 나서는 아예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아주 어렵사리 부탁한 것을 상대방이 의외로 기쁘게 들어주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된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하느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서 내가 먼저 해결하려고 하고, 다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그분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면서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외롭고 힘들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언제든지 달려와 주는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늘 가까이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망각한다. 하느님은 나를 늘 첫자리에 두시는데, 정작 나는 그분을 맨 끝자리에 놓고 한참을 헤맨 뒤에야 찾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제발 아버지 하느님을 좀 귀찮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는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종용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늘 의식하면서 순간순간 그분께 도움을 청한다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면서 우리가 청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부모를 어렵게 대하는 것을 바라겠는가? 우리 모두 그분을 너무 어렵게 대하지 않고 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박성태 신부님-

동물들의 달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뜻밖의 경기결과가 나왔습니다. 우승자는 사자나 치타 표범도 아니었고 작은 개미였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이변을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연습을 했기에 이런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개미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기자들은 고성능 최첨단 장비를 마련하여 개미의 대답을 듣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개미씨, 오늘 우승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과연, 개미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스피커를 타고 크게 들려온 개미의 대답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유머이긴하지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수능이나 취업을 위해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좋은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좋은 기록과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정치인들은 모든 국민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한 가정의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부양을 위해, 주부들은 가족의 건강과 편리한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가만히 둘러보면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이유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먼 길에 지친 한 여행자가 기후 특성상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한밤중에 친구 집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피곤과 굶주림에 지친 여행자를 대접할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의 천사를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후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을 하는 것을 그들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분의 빵이 하나도 없었던 주인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이었지만 염치불구하고 친구에게 빵을 빌리려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찾아간 친구 집은 벌써 문이 닫혀있었고 빵을 꾸어달라는 말에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귀찮게 굴지말게. 벌써 문들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하는 거절하는 대답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빵을 꾸어달라고 하면 마침내는 귀찮아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청을 들어줄 것이며 원하던 빵을 얻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빵을 구하러간 친구가 건성으로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했다면 "귀찮게 굴지 말게...."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심지어는 배신감까지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길에 지치고 배고픈 친구를 진정으로 위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빵을 얻을 때까지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기도할 때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라도 해봐야지' 하는 얄팍한 기대 심리로는 온전한 기도를 바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이며 성령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까? 어떤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또한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친구는 없는지 부족하지만 나의 작은 손길을 아쉬워하는 이웃은 없는지 생각하고 살펴보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하시어 이 세상이 태초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되기를 바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자기라는 우상을 벗어나도록 선포하는 말라키 

- 경규봉 신부님-

말라키서는 대 예언서에서 소 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 전체를 마감하는 예언서이다. 저자는 “말라키(나의 사자란 뜻)”라고 불리는데, 그는 기원전 480-460년경에 활동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유배에서 돌아왔고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지어졌으며, 경신례를 다시 거행한 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에즈라의 대개혁(기원전 440년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까이와 즈카르야 예언자가 성전을 재건하면서 불어넣었던 희망은 기대하던 대로 성취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실망에 빠져 신앙이 식어졌다. 그들은 전례를 등한시하고, 사람을 매수하며, 여러 가지 불충과 부정을 저지름으로써, 다시 과거의 죄와 잘못에 빠진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말라기 예언자는 사제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유배 이후 유다교가 결정적인 꼴을 갖추는 중요한 시기에,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생활의 개혁자요, 동시에 유다 공동체의 안내자로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적대시하고도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점을 지적해준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쓸데없으며,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고 회개하는 것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제 맘대로 살면서 못된 짓을 해야 성공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멀쩡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똑똑히 들으시며, 그러한 이들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당신 책에 적어두고 기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 백성이며 당신의 소중한 아들로 삼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에게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실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 행실에 따라 갚아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도 풍족하고, 분쟁이나 다툼 없이 평화를 누리며, 질병이나 사고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러한 삶을 누려야만 하고, 악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해야 마땅하며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을 믿는 까닭이 어디에 있냐고 묻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이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거나,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 신심 깊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러나 바로 그처럼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죄라는 점을 말라기 예언자는 깨우쳐준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 속에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마음속에 있고, 하느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상 하느님을 자기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죄이며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님이시다. 사람은 다만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사는 것일 따름이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가 17,10)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착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역시 하느님께서 모두 갚아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주이시며 선하신 아버지이심을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오늘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신앙이 참된 신앙이다. 


오늘 자기라는 우상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섬기는 참다운 신앙을 갖도록 주님께 기도하자................◆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이정희 -

“예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께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다면 그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기도는 많은 사랑을 담고 있는 기도이다. 영혼의 눈길이 더 많은 사랑으로 차 있을수록 또 영혼이 그의 하느님 앞에서 더 상냥하고 애정 깊게 머물수록 그만큼 더 좋은 기도가 된다.”(샤를 드 푸코)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다.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알 것 같은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푸코의 묵상이 이런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제나 같이 있고 싶고, 그를 찾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자체가 좋고 기쁘고 힘이 난다. 어느 책에선가 기도는 사랑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도와 하느님 사랑은 순환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 모임에서 만난 자매는 아이의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구하지 못해 애태우다가 마지막 순간 꼭 그만큼의 돈을 마련하게 됐을 때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라는 말이 무엇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노라고 했다. 


오늘 복음은 한 걸음 나아가 성령을 주신다고 한다. 가스파리노 신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목표는 언제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승낙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사랑의 풍요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을 긷는 사람이 없어도 샘물은 솟아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을 길어야 비로소 그 샘물은 ‘우리를 위한 것’이 된다.” 오늘 그 샘물이 나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기를. 그래서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도록 주님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와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자네가 애완용 새를 구입하면 나에게 만원을 주게나. 만약 구입하지 않으면 내가 자네에게 만원을 주지.”

이 친구는 평소에 새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또 기르지도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승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며칠 뒤 이 친구에게 비싸고 아름다운 새장을 선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모가 적혀 있었지요.

“친구, 이 새장은 자네가 새를 살 것이기에 미리 선물로 보내는 것이네. 물론 새를 사고 안사고는 자네의 마음이네. 하지만 이 새장만은 자네 거실 한가운데에 걸어주게나.”

이 친구는 ‘그런다고 내가 새를 살 것 같은가? 나는 절대로 새를 사지 않을 거야. 내기에서 지면 안 되니까.’ 그러면서 그 멋진 새장을 거실 한가운데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이 비어 있는 새장을 보고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새가 언제 죽었어요?”

손님들의 질문이 계속되자 친구는 그 내기를 일일이 설명하는 일이 귀찮아졌고, 결국 비어 있는 새장을 채울 작은 새를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만원 때문에 사람들의 귀찮은 질문을 계속 받기는 힘들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의 귀찮은 질문 때문에 이 사람은 내기에 지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새를 좋아하지 않았고, 내기에 일부러 지기 위해서 새를 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결국 자신의 의지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특히 이러한 변화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도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귀찮을 정도로 말하고, 마음의 감동을 일으킬만한 외적인 행동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노력을 강조하십니다. 어떠한 청도 바로 이런 노력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쉽게 포기하는 우리들의 나약한 마음입니다. 물론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말하지요. 그러나 정말로 최선을 다했을까요? 하늘을 움직일 만큼의 노력을 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3년의 공생활을 위해서 자그마치 30년을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밤을 새워 기도하였고, 그 잠깐의 기도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했던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신앙인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심어 주셨으니까요. 바로 이 희망을 간직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오늘도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같은 눈 높이('좋은 글' 중에서)


교통사고로 양쪽 시력을 다 잃어버려 비관에 빠진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배우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에 학교도 그만두었지만, 부모의 제안으로 맹인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먹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학교에 도착하자 교장 선생님과 젊은 목소리의 선생님 한 분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젊은 선생님에게 교정과 학교 건물을 소개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젊은 선생님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뒤 학생을 데리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 이젠 계단을 내려가야 한답니다. 이 계단의 층계는 모두 열다섯 개입니다. 보통의 돌계단이니까 한 계단을 짚어보면 그 높이를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바로 오른쪽에 화단이 있습니다. 그 화단 앞에 교정이 있답니다. 그곳에는 학생과 같은 친구들이 함께 뛰놀고 함께 공부하는 교실과 운동장이 있답니다. 가만이 귀기울여보면 싱그러운 젊음들이 생활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제 말을 잘 기억하고 한 발 내디뎌보세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내 손을 학생의 팔꿈치뒤에 대고 있겠습니다. 불안하면 언제 든지 내 손을 잡으세요."

너무나도 친절한 선생님의 말씀에 학생은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습니다. 층계를 하나하나 세면서 내려갔고 화단 앞을 지날 때는 꽃내음을 맡으면서 교정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학교를 모두 둘러본 학생은 이 학교를 꼭 다녀야겠다는 생각과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저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정말 잘 이해해 주셔서... "

그러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물론, 이해하고 말고요.... 저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 의지, 청원, 인간적인 노력, 성령

-이성우 -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빠, 아버지이십니까?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이 있습니까? 내가 하느님과 아빠와 자녀의 관계에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에,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으며, 또 지금 당장 주시지 않을 때는, 지금 주시지 않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으며,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 전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하느님이시지만, 나의 노력이 있어야 주실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주를 진주로 알아보지 못하고, 보물을 보물처럼 사용하지 못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 갈망하고 노력할 때, 하느님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실 때, 나는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으며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 가장 효과적으로 알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갖고 성령을 청하며 성령과 함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할 때, 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고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의 갈망

-김정대 신부님-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면 하느님을 만난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나는 호주 사막 한가운데서 8일 피정을 했다. 멜버른에서 사막까지는 기차로 꼬박 29시간이 걸렸다. 아침 여명이 밝아오면서 드러나는 벌건 사막엔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사막이 주는 위압감에 눌렸고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원주민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도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피정을 지도해 주실 수녀님께 멜버른을 떠나 이 사막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이야기하였더니 수녀님은 간단히 “두려움이군요. 피정 동안 이 사막의 환경에 자신을 열어보는 연습을 하세요”라고 하셨다. 

피정 첫날, 나는 피곤해서 낮잠을 잤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찾아가듯 나는 소리나는 곳을 찾아갔다. 그 소리가 나는 곳은 마을회관이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혹시 나를 거부하면 어쩌나 싶어 망설이다 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내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나에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수녀님은 위축되어 있는 나에게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세요. 그러면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가 그 회관에 편안히 들어가는데는 약 4일이 걸렸다. 첫째 날은 문에서 1미터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날은 주변 의자에 앉아서 10여 분을 있었다. 그 다음날 갔더니 어린아이들이 먼저 와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놀았다. 경계의 대상이었던 원주민들에게 환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강영구 신부님-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그대에게

이렇게 기도해보시겠습니까?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원에 전급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참 삶의 길 중에서 ‘감사의 기도’)


감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이미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진정으로 구하고 찾아야 할 것은 감사할 줄 아는 것이고

두드려야 할 문은 감사의 문입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모자라서 허덕이게 되는 이유는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르게 기도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고 소유하려고 덤빕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미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행복을 손에 쥐고도 불행해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환희와 기쁨마저도 고통으로, 성공도 실패로 느끼게 됩니다.


당신은 이미 은총과 축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매사에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시기 바랍니다.(一明)




상처와 용서

-최영균 신부님 -

사목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한숨을 잘 쉰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허무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러냐고 물으면, 정말 어려울 때 찾아갈 친구가 없다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 외모가 못나서 자신이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한숨을 쉬는 일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세상이 젊은이들을 움츠리게 만드는 외적인 원인도 제공하지만, 사실 이런 한숨 속에 배어 있는 대책 없는 허무주의는 예부터 늘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주카페에 가서 점을 보기도 하고, 점쟁이가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거기에 기분이 좋아져 잠시나마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위안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점집에 가는 것이 이 모든 허무함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허무함에 위축되어 있는 우리들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 은총의 자유로운 개입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우리는 해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자는 가능한 꿈도 이루지 못합니다. 지금의 모습에 한숨을 쉬기보다 꿈을 꾸고 그 꿈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를 살려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느님

-박상대 신부님-

기도 중의 기도요, 가장 완벽한 기도이며,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일용할 양식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할 것을 허락하신다. 아니, 청할 것을 서둘러 권고하신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청원기도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첫째는 청원기도를 드리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도의 항구함과 인내와 끈기이다.(5-10절) 둘째는 청원기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11-13절)

우선 루가복음이 독자적으로 보도하는 예화가 바로 기도에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예화는 한밤중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은 다른 친구가 내놓을 빵이 없어서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을 청하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화의 결론은 사람이 우정만으로는 빵을 얻지 못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졸라대면 결국 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청원기도에는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찾는 사람에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청을 거절하지 않고 꼭 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니 청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청원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예수께서는 일단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들어줄 줄 아는 이 악한 세대의 아버지들과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비교하는 대비논법(對比論法)을 통하여,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암시하신다. 나아가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던,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란 바로 하느님을 자신을 가리킨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 자녀들이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주고,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주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보다 더 좋은 "하느님 당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사와 찬양으로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깡그리 비운 두 손을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림으로써 그분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을,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청하는 것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청한 바로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기도를 바칠 수 있다면 어떨까? "당신께서 가난하셨는데 내가 어찌 부자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거짓 예언자를 높이고 참 예언자를 돌로 쳐죽인 자들의 후손들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내가 어찌 사람들 눈에 유명하고 권세 있는 자 되기를 애써 바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겠다는 희망을, 그 희망이 결국은 절망을 가져다 줄 뿐인데, 내가 어찌 그런 희망을 가슴속에 품어 기르겠습니까?"




청하여라(루가 11,5-13)

-유광수 신부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항구하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청하고 찾고 두드린다. 그러나 각자 다를 것이다. 내가 늘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재물, 권력, 명예, 쾌락????

우리는 매일 청하고 찾고 두드리지만 한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얻었다 싶으면 또 다른 것을 갖고 싶고, 찾았다 싶으면 무엇인가 부족해서 또 다른 것을 찾고, 두드려서 열린 것 같은데 열어보면 더 오리무중이다. 매일 매일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가야 하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인간은 매일 찾고 청하고 두드리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부족하고, 늘 허전하고, 늘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럼, 무엇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가? 무엇을 얻고 찾고 열리면 더 이상 청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 않는가?

시편에 이런 노래가 있다.

" 주여, 잘난 체 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131)

시편의 전반부를 보면 얼마나 잘난 척을 많이 했고, 콧대가 높았고, 자기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다녔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잘난 척 하는 마음도, 눈이 높지도,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내게 겨운 일들도 모두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제는 고스란히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인 듯 젖 떨어진 아기처럼 얌전하게 있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 안 해 본 것 없고, 안 가 본 데 없고, 안 나서 본 데가 없이 다 해 보고, 다 가 보고, 다 가져 보았지만 그런 것들로 마음이 편안해져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행복이 없었다는 것이다. 늦게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로 바쁘게 살지 않고 "차라리 마음을 다스리고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처럼 지내겠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주여, 당신을 떠나서는 내 마음이 늘 불안했나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늘 불안하고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은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을 만났을 때만이 행복을 느끼고 평화로울 수 있다.

인간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은 어떤 일도 아니고, 어떤 사람도 아니고, 어떤 장소나 재물도 아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사랑이다. 즉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을 만났을 때만이 행복할 수 있고 더 이상 이것저것을 청하거나 찾거나 두드리지 않는다.

"너희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뱀도 전갈도 아니라 성령 즉 사랑이시다. 성령은 하느님이시오, 사랑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때만이 채워질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즉 성령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은 우리 안에 올 수 없으면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지만 전혀 느낄 수 없고 활동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 하느님은 내 안에 와 계시고 성령은 세례성사 때에 오셨다. 이마 와 계신 성령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다른 것을 청하고 구하고 얻으려고 밖에서 찾으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 행복한 사람이여 불신자들이 꾀하는 말을 그는 아니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망나니들 모임에 자리하지 않나니 차라리 그의낙은 야훼의 법에 있어 밤낮으로 주님의 법 묵상하도다."(시편 1)라고 노래한 것처럼 조용히 복음을 묵상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을 더 잘 묵상하려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밤낮으로 야훼의 법을 묵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으리라. 더 잘 묵상하기 위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러면 젖떨어진 아이처럼 어미 품에 안겨서 평화스럽고 행복함을 느끼고 맛 볼 수 있으리라. 

 

 

 

< 하느님께 사랑을 증명할 기회를 주라 >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해마다 초봄이 되면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 일부 강 하구에서 볼 수 있는 큰가시고기. 큰가시고기는 지구상의 어떤 생물보다도 부성애가 강한 물고기랍니다.

큰가시고기는 봄이 되면 암수가 무리지어 하천으로 올라옵니다. 산란을 위해서입니다. 수컷은 물풀이 무성한 곳을 찾아 둥지부터 짓는데 둥지가 완성되면 암컷을 정중히 맞아들입니다. 그러나 알을 낳은 어미는 곧장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나 버립니다. 자식과 남편을 버린 비정한 어미인 셈입니다.

그 때부터 큰 가시고기의 눈물겨운 희생이 시작됩니다. 큰 가시고기는 알의 부화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느라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앞 지느러미로 쉼 없이 부채질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새끼들을 부화시킨 큰 가시고기의 주둥이는 다 헐고 몸은 만신창이가 됩니다. 마침내 부화한 자식들이 모두 떠나간 둥지 앞에서 큰 가시고기는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며칠 후 둥지를 떠났던 새끼들이 죽은 아버지의 몸 주위로 모여듭니다. 새끼들은 자신들을 위해 죽기까지 희생한 아버지의 살을 파먹기 위해 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물고기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이 물고기보다 덜하다고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당신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있는 하느님 사랑 앞에서 ‘감히 이런 것을 청해도 되나?’ 하며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 자비와 사랑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당신 눈에는 죄를 짓는 사람들보다 더 안타깝게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청하지 않으면 줄 수 없고, 찾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으니, 제발 다 해 줄 테니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을 깨닫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제가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학사님과 술내기가 벌어졌습니다. 이미 둬 병씩 마신 상태에서 누가 시작도 안 했는데 자연스럽기 똑같이 한 잔씩 완샷 하는 시합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내기를 반드시 이기게 해 주세요.’

저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길에서 잔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 각자 소주 여섯 병씩을 더 마신 것 같습니다. 그 학사님은 세병 정도 마시더니 휴지로 입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연신 휴지에 소주를 뱉어 냈습니다. 저는 그대로 다 마셨습니다. 나중엔 그 학사님 앞에 젖은 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러고도 그 학사님은 K.O. 당하였습니다. 저는 다른 날보다도 멀쩡하여 그 학사님을 업어 바래다주었습니다.

저는 이 일로 한 가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를 관리하시기도 바쁘고, 온 세상의 평화와 구원, 또 각자의 어려움들을 돌보시기도 바쁘신 하느님이시지만, 결코 이와 같은 하찮은 청원도 그냥 흘려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매우 절실한 것에 대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보다, 이런 하찮은 것을 들어주셨을 때 하느님의 사랑을 더 느끼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여자와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도 화가 풀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주일학교 학생에게 야단쳤는데 그냥 집에 가버렸을 때 미사 전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시험 잘 보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사람에게라면 어떻게 그런 하찮은 것들까지 청해서 하느님을 귀찮게 해 드리느냐고 야단을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작은 청들까지도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시는 것을 보고는 믿음도 많이 커졌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더 커졌습니다. 하느님은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고 도와주시면서 우리에 대한 당신 사랑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까지 청해도 될까?’라고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든 청하십시오. 두드리십시오. 찾으십시오. 하느님은 지금도 당신 사랑을 증명하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청해야만 그분 사랑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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