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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0년 10월 10일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0.10.10|조회수296 목록 댓글 0

제1독서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3,22-29

형제 여러분,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28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낳아 젖을 먹인 여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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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하다고 하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신자 분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사목회장을 10년 동안 하였습니다.”, “소공동체 구역장, 교리 교사, 사목회 임원 등 본당에서 안 맡아 본 직책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분들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직책이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 주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직책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제복을 입고서, 수도복을 입고서, 교회 안에서의 어떤 직함을 가슴에 달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사람들 눈에는 대단한 가치일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은 당신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 한 가지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이들 가운데 하느님 말씀에 가장 충실히 순종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께서 그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지키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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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던 한 여인은 감동하며, “예수님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한 분일까?” 하고 부러워합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키우는 어머니의 행복과 그 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때의 찬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혈육의 끈끈한 정과 사랑, 자녀의 성공에 대한 보람은 여인이 바치는 헌신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더 큰 차원의 행복을 알려 주십니다.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영의 기쁨을 얻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행복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성모님께서 가지신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을 뻔하였으며 이집트의 피난살이를 한 여인,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본 여인은 세속적으로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모님의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여 사람이 되도록 간택된 신약의 궤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모든 사건과 행적을 보시며, 하느님 구원의 성취를 마음에 새기시고 지켜보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행복은 예수님과 함께 수난에 참여하시며,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처음으로 참여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의 행복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입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이 세상의 화려한 명품 옷을 입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입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행복합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처럼 불멸의 몸으로 변화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 신앙인이기에 행복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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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신앙이 유다인들의 선민의식과 율법 신앙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힘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율법 준수를 통해 약속된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길이 선택된 자신들에게만 주어졌다는 편견을 가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창조 이래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당신 백성으로 초대하신다고 확신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위대한 보편성을,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라는 감동적인 고백으로 선포합니다. 분열의 고통과 따돌림의 상처를 지닌 이들이 왜 예수님 안에서 치유와 자유를 체험하게 되었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지구촌, 세계화’란 이름으로 하나의 인류를 꿈꾸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숨겨진 특권 의식과 선민의식으로 사로잡힌 세상을 만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 시대를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못한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 “돈에 대한 물신주의”가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를 만들어 내고, 인간을 “소비욕의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53-54항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는 한 여인의 탄복은, 성모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이미 주님의 어머니로 칭송받으셨음을 드러내는 대목이지만, 언뜻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을 토로하는 우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나보다 나은 이를 칭송하기보다 질시와 분노를 앞세우는 모순된 이 세상에 묻힌 또 다른 나의 얼굴이 아닐까 되돌아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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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산에 가면 가끔 산삼을 캐곤 하는데 그렇게 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산삼을 캐면 꼭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주인입니다. 건강하지 않던 사람이 그것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20,35)라는 말씀을 실감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 물질이 있는데 이는 우리 몸의 특별한 반응을 통해 생겨난다고 합니다. 곧,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거나 좋은 생각을 하거나 선한 일을 볼 때 신체 내에 면역 물질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체 현상을 인도 콜카타의 데레사 수녀의 이름을 따서 ‘데레사 효과’라고 부릅니다. 선한 일을 하면 남도 행복하지만 결국 자신에게도 이롭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바랍니다. 그런데 행복은 희생과 봉사를 통해 얻게 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행복과는 다르며 또 이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과도 다릅니다.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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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에서 어떤 여인이 주님께 목소리를 높여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주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는 소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주님의 어머니도 소중한 분이시고, 참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분이시지요. 게다가 주님의 어머니가 아니셨으면 이 세상에 구원이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참으로 고마운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칭송에 대한 대답으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행복을 참으로 맛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서 안에서 이러한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시지만, 그 속에 따뜻함이 녹아 있습니다. 그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께서 베푸시는 참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이 말씀을 삶으로 옮길 때, 우리는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현생활 안에서 어렵고 힘든 길이 되겠지만, 유한한 인생살이에서 어렵고 힘든 길은 잠시뿐이란 걸 우리는 압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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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숨진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리파티(1917-1950년)는 20세기의 뛰어난 연주가일뿐더러 연주만큼이나 아름답고 고귀한 인품으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스승 나디아 불랑제가 기억하는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한번은 제가 제네바에 그를 보러 갔어요. 그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어요. 제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저하고 같이 의사한테 가십시다.’ ‘아니, 왜?’ ‘선생님이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요. 진찰받으시도록 의사와 약속을 잡아 놓았어요.’ 그는 이미 의사와 얘기를 다 해 놓았고, 제가 묵을 테라스 딸린 방까지 잡아 두었던 겁니다.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저는 매우 피곤한 상태였거든요. 자기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제가 며칠 잘 쉴 수 있도록 챙기는 걸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죠. 삶을 사랑했고, 멋진 연주회를 열었고 ……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도 감동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몇 차례씩 수혈을 받으며 버티던 중이었는데 말이죠”(브뤼노 몽생종,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블랑제』에서).

리파티는 난치병과 투병하며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으면서도 자신보다는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였습니다. 하늘이 내린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과 나누려 한 이 음악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며, 그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긴 사람은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먼저 배려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어떤 명예와 즐거움보다 더 큰 행복의 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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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사목자로 지내다 보면 “신부님,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라는 말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식사에 초대되어 더러는 고급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얻어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그러한 자리가 사목자에게 참된 보람을 느끼게 하지는 않습니다.

사목자에게 가장 보람된 순간은 교우들의 신앙이 깊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 냉담 교우들이 주님께 다시 돌아와 신앙생활에 충실할 때, 하느님을 모르던 이들이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입니다. 사목자는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사제 생활에 필요한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고급 식당의 비싼 음식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 속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탄복하며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과 혈육의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복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젖을 먹인 것이 공덕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깨달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것이 공덕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과 어떤 면에서 관계를 이어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소홀하지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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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는 바다 밑 모래 바닥에서 숨을 쉽니다. 어쩌다 잘못되면 모래를 빨아들이기도 합니다. 연한 살 속에 모래가 박히면 조개는 통증을 없애려 ‘진액’을 짜냅니다. 끊임없이 짜내어 모래알을 에워쌉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지나면 조개 속의 모래알은 영롱한 ‘진주’로 탈바꿈합니다. 하지만 ‘조개 속에 박힌 모래’가 전부 진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모래 때문에 생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기도 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군중 속의 한 여인이 성모님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여인입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자녀를 진주로 키워 내는 어머니의 헌신을 체험해 본 여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어머니처럼 사는 것이 ‘말씀의 실천’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족과 이웃을 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들과의 부딪침을 ‘어머니의 인내’로 극복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삶의 진주’를 만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셨습니다.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도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답게 사셨던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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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군중 속의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가슴이 어떤 가슴인지 알고 있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따뜻한 가슴을 지녔습니다. 자녀에 관한 한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내부에 발전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발전소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마음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더라도 전기를 일으켜 그것을 이겨 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의 답변 역시 따뜻합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쉬운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따르면 행복이 옵니다. 그분의 말씀인 ‘사랑하며 사는 것’을 실천하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평범하면서 쉬운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길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네온사인도 전기가 들어와야 빛을 냅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차가운 유리 조각에 불과합니다. 전기는 따뜻함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닮는 행동입니다. 타인을 기쁨으로 대하면 자신의 운명에도 기쁨이 함께합니다. 짧은 인생에서 차갑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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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친구가 됩니다. 믿음으로 부부의 사랑이 더욱 돈독해집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믿음으로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이 세상의 혈연, 지연, 학연 등과 상관없습니다. 친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듣고 따르는 믿음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용 불량자가 되지 맙시다.


 


 

저는 소설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소설 중에서도 단편보다는 장편을 훨씬 좋아하고 재미있어합니다. 단편소설은 특별한 사건도 없고 얘기를 하다가 만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에 반해 장편소설은 이야기 중심이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문득 우리의 삶도 단편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문제의 해결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과의 갈등도 흐지부지하게 끝나곤 합니다. 정말로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면 10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삶이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독자를 이끄는 장편소설 같을까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어떤 일에 새로운 사건 몇 가지만 붙었을 뿐입니다. 또 명확한 해결을 원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삶도 바로 나의 삶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편소설의 재미는 세세한 감정들을 바라볼 수 있을 때입니다. 소소한 행복을 체험하는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의 해결이 힘들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다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면 자동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는 이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대단한 결말을 가져오는 행복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행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던 성모님은 분명히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의 행복은 단순히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행복은 대단한 결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편소설과 같은 작은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굳은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우리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메리 노리스).


소득 격차

불평등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불평등은 인구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1970년대 초기 연구에서부터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폭력 사건이 더 자주 발생하고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나라를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 국민 간의 소득 격차가 큰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7~80년대만 해도 도둑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카페에 노트북을 놔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정도로 정직합니다.

물론 지금도 소득 격차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옛날처럼 아주 잘 살고, 아주 많이 못사는 식의 격차가 아니므로 점점 범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소득 격차가 큰 나라는 강도가 많습니다. 강도의 타겟은 누구일까요? 부유하고 소위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차별하지 않고 사랑만을 강조하신 주님의 모습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잘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경청하신 분은 다시 또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복음 11장 27~28절)

이 복음 구절을 접하고 많이 의아해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모님께서 얼마나 서운해하셨을까?’ 안타까워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막중한 사명을 지니셨던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리 어머니께 냉정하실 수 있는가?’ 의문을 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 앞에서 ‘그렇습니다. 저희 어머니,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훌륭한 분이십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한 마디 해주시면 어디 뿔이라도 난답니까?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냐?’고 따질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알쏭달쏭한 예수님의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보니, 오히려 이 말씀은 성모님을 섭섭하게 해드린 말씀이 아니라 성모님을 향한 극찬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모님께 지상 최대의 영예를 드리는 선물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일생을 묵상해보면,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경청하신 분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응답한 분도 없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 앞에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순명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음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예수님을 낳으셨음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탄생시키셨습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과 삼십여년을 동고동락하신 성모님께서는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통해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접했습니다. 언제나 진지하게 묵상했고, 그 말씀을 충실하게 사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예수님이 말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성모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알쏭달쏭한 말씀는 곧 성모님을 향한 극찬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당신의 몸으로 잉태하시고 출산하신 것, 참으로 위대한 성모님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더 큰 업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충실히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이것입니다. 성모님은 단지 자신의 어머니, 즉 혈육관계라는 것 때문에 훌륭하거나 행복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 인해 훌륭하고 행복하심을 강조하십니다.

성모님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열 달 동안이나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른 세 해 동안 ‘말씀’ 곁에서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경청했고 관상했으며 그 말씀을 삶 가운데 실천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성모님의 충실성은 다음과 같은 응답에서 잘 드러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38절)




인간의 3대 고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마치 “저렇게 훌륭한 자녀를 두었으니 저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부러워하며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생각을 조금 바꿔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행복’에 관한 말씀이 됩니다. 이 짧은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려 하십니다. 


행복을 알려면 고통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진정한 고통이 아닐 수 있는 것도 고통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돌아가시면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고통이 불행이라고 믿는다면 젊고 예쁜 나이에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한 뒤에도 지금 행복하여 자신은 이전의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지선씨를 보면 될 것입니다.

혹은 못생기고 병이 들고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여긴다면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야 했던 김희아씨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가졌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불행과 고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저는 불행과 행복을 조금 더 본성적이고 근원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불행을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불행과 고통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제약받는 것입니다. 정태춘씨 노래에 ‘우리들의 죽음’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1990년 3월 실제 발생했던 어린 남매의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애절한 멜로디와 슬픈 가사로 표현한 곡입니다.

서울 지하 셋방에서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습니다.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힘에 겨워 서울에 올라와 지하 셋방을 얻어놓고 맞벌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방에 두 아이를 놓고 혹시 부엌에 칼을 만지거나 밖에 나가 길을 잃을까 봐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는 성냥으로 불장난하던 것이었고 그렇게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부모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인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는 오직 자유만을 위해 싸우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세상에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아의 본성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자아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기쁜 것을 우리 기쁨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자아의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자신이 늑대인 줄 알고 산다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것은 고통입니다.

마를린 먼로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였고,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많은 부자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자유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공허함을 마를린 먼로는 폐장한 해수욕장과 같다고 표현했고 헤밍웨이는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항상 다 채워져도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고통은 더 큰 행복이 무엇을 따름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 자신이 인간일 수도 있음을 믿어도 자신이 하는 행동은 늑대의 그것을 정확히 닮아있습니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이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가장 힘들었을 때를 보면 조금 늦은 나이에 성소를 느껴 ‘신학교 가야 하나, 이대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였습니다. 이때의 1년은 참으로 힘들어서 겨울 바다에도 빠져보고 술도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나서부터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 행복하셨던 것일까요?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인 마니피캇을 부르실 때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셨던 것입니다. 그 뜻을 따르는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건 여행일 수 있으나 그 당사자에게는 위 세 개의 인간의 큰 고통을 넘어서는 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에게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뜻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까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행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워싱턴 주 부시자로 활동하던 촉망받던 시각장애 정치인 사이러스 하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미주가톨릭평화신문 9월 13일자 보도) 하빌은 어린아이였을 때 안구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였지만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놀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다칠 수 있으니 감시 카메라 앞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하빌의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을 다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고, 머리를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영혼이 다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도록 해 주십시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하빌은 어머니의 격려와 도움으로 자신도 정상인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친 적이 있지만 하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하빌은 본당 신부로부터 ‘모든 것 안에서 계신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마틴 신부의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정치인으로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하빌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습니다.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남은 삶을 사제로 살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했습니다. 육체의 장애를 극복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영적인 장애를 치유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보다는 가난을, 건강보다는 아픔을, 오래 사는 것보다는 일찍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인전을 읽으면 공주였던 분이 수도자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군인이었던 분이 사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정치인이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각 장애이면서 정치인이 사제가 되었던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제의 길을 선택한 하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으셨다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예술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치고, 하느님과 멀어질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와 욕심 때문에 차별하였습니다. ‘종교, 국적, 신분, 계층, 성별, 이념, 사상, 학벌,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하였습니다. 육체적인 장애를 ‘죄인’이라고 차별하기도 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카메라 앞에 세워 놓기도 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젓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낳고 기르신

어머니를 행복하다하신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힘 있다는 이들은 밀쳐내고

배웠다는 이들은 업신여기고

의롭다는 이들은 손가락질하고

경건하다는 이들은 비난할 뿐


보잘 것 없는 이들은 어울리고

갈 곳 없는 이들은 찾아오고

버림받은 이들은 좋아하고

가난한 이들은 함께 하는


나를 낳고 기르셨기에

많은 이들이 불행하다고 여길

어머니를 행복하다 할 수 있는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셨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고, 늘 아들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신 것뿐만이 아니시라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던 성모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힘든 여정의 인생을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그러한 인간적 고통을 넘어서서 늘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셨던 분이셨기에 결국 하늘의 영광에 이르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육적인 안위가 행복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육적인 안위의 지속도 어느 정도 지나가면 인간적으로 무뎌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행복은 단순히 육적인 안위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은 바로 내가 하느님 안에서 참된 존재감을 찾게 될 때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적인 연줄로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얻어지는 참된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모님을 닮은 어머니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한 여인이 군중을 향해 가르치는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자식을 둔 모든 어머니는 자녀가 큰 자리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볼 때 자랑스럽고 뿌듯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의 한 여인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저 사람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할가? 부러움을 샀을 것이고 여인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 들으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

세상에 드러나고 뭇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출세한 자녀들을 볼때면, 뭇 어머니들은 ‘아, 자랑스럽구나. 나도 저런 자녀를 두고싶다’ 하며 부러워할 것입니다.

국정감사가 시작을 하나 봅니다. 권좌의 한 사람이 뻔뻔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의 치부도 함께 세상에 드러날 것 같다는 길한 예감이 듭니다.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와 결탁하고 불의를 위장하고 남을 죄인으로 만들고 살았던 권좌가 곧 끝없이 추락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진리입니다. 한 여인이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님께 부러움은 산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세속적에서 비롯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어머니라면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지키는 어머니여야 합니다. 모든 어머니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자녀에게 세속적 출세 욕심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죽는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한 여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아서 외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 영예를 돌림으로써 자녀인 예수님을 칭찬하는 겁니다. 실제로 자녀의 걸출함은 고생스러움이 없지 않았던 임신과 양육의 과정을 행복과 보람으로 승화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육적 관계성에 기인한 행복을 언급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관계 안에서 주고받는 행복도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행복입니다.

이는 초월적이고 영적인 행복입니다. 물리적 상황이 어떻든, 인간적 처지가 어떻든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는 영혼만이 누리는 행복이지요. 이 행복은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 그 무엇에도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속적으로 탁월한 위치에 있어도 태생 계급처럼 딸려 오지 않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열린 행복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지배를 벗어난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갈라 3,23)

율법은 세상에 구원자가 오시기 전까지, 말하자면 "감시자 노릇"(갈라 3,24)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주다 보니, 하느님 마음보다 인간의 해법이 더 강화되어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고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율법서의 문자는 우리의 육을 지배하기에 태도와 행위, 결과와 성취에 주안점을 둡니다. 이와 달리 성령과 하느님의 자녀됨은 영을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이는 마음과 정신, 지향과 의도, 동기에 불을 지피는 힘이지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3,27)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이든,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세례는 우리에게 하나의 옷을 입혀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이 옷은 우리가 더 이상 육의 원리에 얽매이거나 세속적 행복에 집착하지 않고, 영으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래서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지요. 세속이 씌워준 어떠한 불평등과 고통의 굴레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이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머물고 관상하고 실천합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를 이루며 누리는 행복은 육이 주는 다른 만족과 비교할 수 없이 충만하고 고귀합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말씀의 매력에 풍덩 빠진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말씀에 머물러 주님과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사목직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 (Hom. 17,3,14: PL 76,1139-1140. 1146)

주님이 설교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한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들은 적다.” 이 말을 할 때는 큰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밀 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일꾼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사제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직분을 완수 못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말씀을 귀담아듣고 숙고하십시오.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여러분은 우리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합당히 일할 수 있고 또 우리가 권고해 주는 데 혀가 둔하지 않으며 설교의 직분을 수락한 다음 우리의 침묵이 공정한 심판관 앞에서 우리를 고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설교자들의 혀가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자주 납덩이가 되는 일도 있지만 지도자들은 수하 사람들의 탓으로 말을 못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시편 작가의 다음 말씀에 따라 설교자들의 혀는 자기들의 과오 때문에 납덩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악인에게 하시는 말씀, ‘너 어찌 감히 내 계명을 이야기하느냐.’” 또 주님이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어떤 때에는 수하 사람들의 죄과로 인해 설교자의 입을 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족속은 본래 반역하는 일밖에 모르는 것들이라, 나는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 말을 못하게 하여 꾸짖지 못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흡사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합니다. 내가 너의 입에서 설교의 말을 빼내리라. 이 족속이 자기 행동으로써 나를 분노케 하는 동안 진리에 대한 훈계를 들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설교자의 말을 그의 입에서 빼내게 하는 죄과가 확실히 무엇인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목자의 침묵은 어떤 때에는 목자 자신에게 해를 주고 수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해를 준다는 점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제들의 생활에서 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이제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무에게도 수모가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이 점에 대해서 나 자신도 고발합니다. 나 역시 이런 상태에 있지만 그것은 내 뜻이 아니고 이 야만적 시대의 강요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여러 외적인 일들에 빠져 버려 그 일들을 어떤 때에는 영예로 받아들이고 또 다른 때에는 우리 사목 활동에 필요한 것으로 드러내 주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로 인해 우리의 설교 직분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도 불행히 계속 주교라 일컬어지고 그 이름의 영예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의무를 수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맡겨지게 된 백성들이 하느님을 버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침묵을 지켜 버립니다. 그들은 사악한 길에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꾸짖어 그들에게 개과시키는 손을 뻗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활을 소홀히 하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의 생활을 고치려 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근심에 휩싸이고 외적인 일들에다 더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만큼 더 내적인 일에 무감각하게 됩니다.

거룩한 교회가 앓고 있는 지체들에게 하는 다음 말씀은 훌륭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나를 포도원지기로 세웠지만 나는 내 포도원도 지키지 않았도다.” 우리는 포도원을 책임 맡았는데 우리 자신의 포도원마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직분과는 다른 엉뚱한 일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직분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강생의 신비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루카 복음 전반부에 나오는 두 임신부의 만남을 떠올리게 됩니다. 위대한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모태에 배었던 엘리사벳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모태에 배었던 성모님의 만남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라고 외친 군중 속의 그 여자가 이 만남을 보았더라면, 범상치 않은 두 여인의 잉태와 태중의 아들들에 대해서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성모님께 이야기하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위대한 인물을 자식으로 낳고 기르는 뿌듯함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이 더 큽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더 큰 행복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해줍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낳고 기를 기회가 없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말씀이 자라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의 모태에서 일어난 놀라운 강생의 신비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 마음은 주님을 모시는 감실이 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생명의 말씀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행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신 어머니 <루카 11, 27-28> 10월 1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 되심을 높이 인정하는 이유는 몹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셨기에 마리아의 복되심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구원의 협력자이시고,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주님 구원의 십자가를 향해 나가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을 배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하심은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에 절대 순종 자라는 말입니다. 삶 자체가 “은총을 충만히 받으신 마리아” 하셨듯이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지극히 높은 복된 어머님 되셨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가 순종을 너무 강조하여 신자들을 맹목적 신앙으로 이끈다고 하지만 우리는 진리와 사랑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해집니다. 

주님이 최초에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교회를 만들게 하신 이유는 공동체 안에는 순종이 없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순종을 통해서 진실과 사랑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순종은 한 사람의 취향이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진실과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쪽은 김 정은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죽음이 오고 멸망하니 순종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한동안은 유지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지고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삼위의 하나 됨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종은 성모님에게 너무나 어려운 명령입니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고 하면 그 당시 습관으로 돌에 맞아 죽는 벌을 받아야 하는데도 하느님의 뜻이어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순종하셨습니다. 이로써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고 이루어졌습니다. 

순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자기 이익이 있으면 순종하고, 자기 생각과 같으면 순종하지만, 진리에 순종하여 고통이 오면 피하거나, 이익이 없으면 거부하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순종하지 않으면 진리는 무너집니다. 사랑 때문에 순종한다는 것은 서로 자유, 평화, 기쁨을 위해 자기 생각과 자기 이익을 접고 공동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너무나 힘이 들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면 일치가 불가능하고, 일치가 없는 곳에는 분쟁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여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이 생각납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고, 만나고, 함께하는 이유는 지금도 하느님의 창조가 이루어져 숨 쉬고, 힘 받고 살기에 하느님을 떠날 수 없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순종> 이들은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도 믿는 이들이 하느님 말씀만 듣고 따르며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함승수 신부님

몇 년 전 어떤 20대 젊은 여성이 주점에서 술을 마신 후 술값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려다 주인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죄송하다고 사과하기는커녕, “우리 아빠가 누구인지 아느냐? 구의원이다”라고 당당하게 큰 소리를 쳤지요. 그 모습을 본 주인이 “아버지가 구의원이면 처신을 더 잘해야 하는게 아니냐”고 따져묻자 그 여성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배 이상 많은 엄마뻘 되는 사람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뺨을 두 차례나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여성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도 “우리 아빠가 구의원이다. 너희는 다 죽었다. 전화하겠다. 두고 보라”라고 엄포를 놓는가하면, 주점 밖으로 나가려다 제지를 당하자 경찰관의 다리와 급소를 걷어차 공무집행방해와 폭행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녀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160시간 동안의 사회봉사를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이나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나라에서건 이런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가족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그 가족인 자신도 똑같은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해서인지, 여기저기서 난동을 부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다니지요. 그러나 권력은 높은 지위에 있는 ‘누구의 가족’이라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위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사람만이, 또한 그 지위에 요구되는 규정과 소명들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 지위에 부여된 권한을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군중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은 여인이 그분께 이렇게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아기를 잉태하고 젖을 먹이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입니다. 즉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두고 예수님처럼 대단하고 훌륭한 아들을 두셔서 참 좋겠다는 부러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신앙생활이 주는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성’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혈연’처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인 관계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만큼 깊어지는 능동적인 관계입니다.




참행복, 참사람의 길 -말씀과의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말씀을 사랑하는 이들은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얼굴도 생명의 빛으로 환합니다. 어제 벼르고 별로 생전 처음 다섯분이 멀리서 1박2일 수도원에 피정왔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 매일 강론을 읽으며 삶의 지침으로 삼아 매일 말씀으로 살아 왔다는 참 아름다운 분들이라 사진에 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 절로 짧지만 울림은 참 깊습니다. 말씀 주제를 ‘한 부인의 성모 칭송’이라 일컫기도 하고, ‘참행복’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아이를 둔 모든 어머니들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한 여자와 예수님의 주고 받는 대화가 흡사 선사들의 선문답처럼 짧지만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행복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은!”

둘 다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셨기에 복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신앙인이기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참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위대함은 부여받은 은사와 특권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응답에 있습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의 참 원천은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천사의 수태고지시 무조건적 “예Yes”의 응답에 있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슬픔중에 서 계실 때도 참으로 믿음 깊이 '예Yes'의 자세로 응답하셨고, 시종일관 끝가지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모전자전, 성모님에 그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Yes’의 응답에서는 모자분이 일치합니다.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성모님이자 예수님입니다. 한마디로 “Yes-man”(‘예’의 사람)이자 자기를 비운 ‘케노시스, 비움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도 악령들에 대한 지배나 적대자들에게 침묵중에 보인 그분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지켰다는 데 있습니다. 하여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과 당신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이 전적인 일치를 이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예수님은 물론 성모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참행복한 삶을 위해 평생 끝까지 말씀사랑이 말씀들음과 말씀실천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겸손도 순종도 믿음도 이런 말씀사랑과 말씀들음과 말씀실천의 열매입니다. 저절로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이와 함께 하는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도이런 믿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여러분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믿음의 은총입니다. 세례은총은 물론 말씀을 통한 믿음은총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옷입게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믿음의 자녀가 되어, 믿음의 형제자매가 되어 온전한 평등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 날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구원의 열쇠인지 깨닫습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바로 평생과제입니다. 누구나의 공통적 소망은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 가끔 주고 받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 진국이다!’ 참되어 거짓이 없는 사람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진국입니다. 바로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이런 진국의 참사람에 참행복입니다.

말씀없는 영혼은 반쪽입니다. 말씀은 빛이자 생명이자 영입니다. 말씀과 영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생명의 빛을 발하는 성령 충만한 영혼입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는데 평생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의 응답뿐입니다. ‘예스 맨’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받고 위로받는 영혼들이요, 희망과 기쁨, 평화와 행복을 선사받는 우리들입니다. 시편1장도 참행복이 말씀에 있음을 밝혀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

시편 119장은 무려 176절까지 계속되는데 아마 시편에서 가장 길것입니다. ‘말씀 찬가’로 명명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가르침을, 말씀을 사랑한 시편의 사람들인지 깨닫습니다. 처음부터 마음 설레게 하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불의를 저지르지 아니하고 그분의 길을 걷는 이들!”(시편119,1-3).

시간되면 시편119장 176절 끝가지 잘 음미하며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영혼은 밥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영혼의 식이자 약인 주님 말씀만으로 채울 수 있는 영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혼과 육신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시고 튼튼히 하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살면서 가끔 듣는 소리가 있습니디. “자식이 원수다.” 살아가면서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가족이 오히려 짐이 되고 거부하고 반대하며 심지어는 괴롭히기까지 하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즘 자식이 부모 그것도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노부모를 핍박하고 노부모의 재산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임의로 처분하는 상황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라고 답하십니다.

  ‘내가 누구와 어떤 관계였느냐’ 등의 나를 둘러싼 환경과 지위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기로 합시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행복에 대해 함께 나눌까 합니다. 먼저 행복의 조건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먹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절반 밖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겨루었을 때 한 사람 정도는 이겨도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정도만 박수를 받는 말솜씨.

어떠한가요? 이것이 정말 행복의 조건은 맞는 것일까요? 네. 이것은 철학 자 플라톤이 제시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포인트는 처음부터 100% 완벽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부족한 가운데 그것을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그것을 행복이라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갖기를 바랍니다. 또한 100%나 그에 가까운 것을 바라고 삽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저는 인간적인 행복과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주님을 잉태했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인간적인 행복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신앙인들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은 쉽지 않지요. 신앙을 가지고는 있지만, 지극히 세상적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손에 꽉 쥐고 놓지 못하면서, 더 이상 손도 없으면서 그 손에 하느님 나라를 쥐어보려 애씁니다. 그러나 헛수고임을 우리는 머리로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손을 놓아야 그 손으로 하느님 나라를 쥘 수 있는데 말입니다. 

바로, 인간적인 것은 매우 부족하지만, 그 남은 공간에 하느님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여러분들, 내 마음에 세상 것 먼저 다 채우면,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모십니까? 오늘 주님말씀 잘 생각해보시고, 이제는 손을 놓고, 하느님 나라를 붙잡을 수 있는 교우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행복을 알고, 누릴 수 있는 교우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말씀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을 통해서

깨어난다.


말씀에서

행복으로

번져가는

우리들 관계이다.


말씀없이

행복할 수 없다.


흩어진 행복을

말씀으로

다시 만난다.


삶의 전부를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말씀에 모든

삶을 걸으셨던

성모님과 예수님의

삶이다.


모든 관계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며

성장한다.


말씀은 우리의

생활을 살리고

마음을 살린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행복은 말씀과

함께한다.


행복은

말씀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행복만이


서로를

살린다.


 


 

행복에 대한 유전 요인의 관여도를 따져보니 36% 정도가 연관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부모의 행복도가 자녀에게 유전되어 결정되는 부분이 내 삶 전체의 1/3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2/3는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문제는 어렸을 때에 그 환경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갓난아기가 “나는 이런 환경이 너무 싫어. 다른 곳에 가서 살래.”라고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모나 가정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양육 환경이 약해지기에, 자기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지면서 행복한 삶으로 반대로 불행한 삶을 만들 수가 있게 됩니다. 즉, 행복을 만드는 2/3의 환경을 자기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는 부모의 불행을 그대로 물려받았어.”, “지금 나의 불행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야.”, “가정환경이 너무 나빠서 지금 불행한 거야.” 등의 말을 하면서 불행의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이 차지하는 범위는 1/3에 해당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요? 지금 스스로 행복을 선택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을 행복의 삶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누구 탓으로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작은 것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절망적인 미래가 아닌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군중들은 주님을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할까를 이야기합니다. 혈육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혈육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하시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혈육을 통해서 행복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고 지키고 있는지가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행복은 혈육에 의해 결정되는 유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 내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환경을 만들고 있는가가 행복을 결정하게 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환경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절망 안에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희망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고통의 노예가 아닌,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작은 행동부터 변화해보면 어떨까요? 행복의 환경을 만드는 것은 작은 행동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다(할 엘로드).


76 매괴성모순례지

이 지역에 1894년 부임한 부이용 신부는 1896년 장호원의 매산 언덕에 있는 한옥을 매입했습니다. 이 집은 본래 임오군란 때 민비가 임시 피신하기도 했던 민응식의 한옥으로 일본군과의 전쟁으로 불타 버린 상태였습니다. 부이용 신부는 1896년 9월 17일 ‘장호원 성당’이란 명칭으로 설립하고 주보 성인으로 매괴(묵주기도)의 성모를 결정했습니다. 신자수의 증가와 함께 부이용 신부는 1904년 성당을 완공하였고 교육사업에도 눈을 돌렸습니다. 

1930년 임 가밀로 신부가 현재의 고딕 양식으로 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성당을 건축했고, 성모님께 약속한 대로 ‘매괴의 성모’를 주보로 삼고 뮈텔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감곡성당은 성모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표징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표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매괴 성모 광장이 일제강점기 중 신사 참례 터로 지정되었으나 천둥과 소나기, 벼락으로 일제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공산당원들이 총을 쏘았으나 7군데 탄흔이 남는 가운데서도 파괴되지 않아 지금까지 성모 칠고를 묵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감곡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4월 20일, 로마 성모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당 및 순례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미사는 일반 본당 미사 시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주소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성당길 10이고, 전화는 043-881-2808입니다.




<말씀의 전문가 성모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명 설교를 펼치고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율법학자들이나 유다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속보이는 설교와는 완전 비교 대조되는 예수님의 명쾌하고 감동적인 설교에 사람들은 탄복합니다. 


그중에 한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한참 설교를 하고 계시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칭송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토록 훌륭하신 예수님을 낳고 기르신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성모님을 향한 여인의 칭송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꽤나 의외입니다.


저 같았으면 극도의 칭찬 앞에 우쭐하며 그랬을 겁니다. 

“맞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의 어머니 정말 지금 행복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 낳고 키우시느라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제가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을 향해 여인이 보인 존경심과 예의를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분은 다름 아닌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성모님보다 더 맑은 정신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철저하게 준수해나가던 사람들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열 달 동안 ‘말씀’을 당신의 태중에 모시고 다녔고, 30년 세월 동안 그 ‘말씀’ 곁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성모님보다 더 전문가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군중들 가운에 한 여인의 칭송과 찬미에 가장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과 공경은 덧붙인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 명확히 인증된 것입니다.

보다 지속적이고 영원한 행복, 보다 가치 있는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지 또 다시 고민을 시작해봐야겠습니다.


때로 불나방처럼, 때로 철새처럼 여기 저기 세상 속의 행복을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어디 가도 우리의 끝도 없는 갈증을 완벽히 해소해주는 그런 행복,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충만히 채워주는 그런 행복은 없더군요.


다행히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조금만 손을 뻗으면 참 행복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보고인 성경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지인 성사입니다. 


우리의 눈이 좀 더 밝아지고, 우리의 마음이 좀 더 개방되어 그 값진 행복을 알아보고, 찾고, 만끽하는 그런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에겐 주님의 뜻이 행복인가, 괴로움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자로 수감돼 있는 형을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들어가 탈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교도소는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누구도 탈출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까지 죄인으로 자신을 찾으러 감옥에 들어왔으니 형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이 온 몸에 새긴 문신이 바로 그 교도소의 지도이고 완벽하게 짜인 탈출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형도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평생을 무기징역자로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형에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쫓아 감옥을 탈출하여 결국 누명을 벗게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우리 불행 안으로 들어오신 분의 뜻이 우리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복의 기준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머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은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는 분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옥이 행복이라고 믿으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을 탈출시켜 주려고 하는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합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결국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겐 장난감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닙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장난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고통스러움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뜻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참 행복의 이유인 것입니다. 

 

일반 대학교 다니며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쳤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1년간 버텼습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저를 수많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압니다.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바꾸어놓아야 행복해집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경에 나타난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신부님들은 각자 리더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리더는 파수꾼과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파수꾼은 공동체를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하고, 혹시 모를 위험을 미리 알고 대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갈 길을 알고 이끄는 사람이란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비전을 알고 비전대로 이끄는 사람이란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비전이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그 일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공동체에서 지내면서 생각이 다른 분들과 함께하는 방법을 알아보았습니다. ‘감마 프로그램, 엠비티아이, 애니어그램, 효과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일곱 가지 습관’에 대한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세상에서의 리더십은 조직을 잘 관리하고, 이윤을 창출하고, 성공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꽃꽂이를 하는 사람은 꽃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공간 배치를 잘 해야 합니다. 꽃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꽃을 잘 알고, 꽃이 잘 드러나고, 꽃을 보는 사람이 감동을 한다면 꽃꽂이를 하는 사람은 좋은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성찰하고, 신념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리더십은 조금 달랐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리더십이었습니다. 성경의 리더는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리더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하느님께서 부르셨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리더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주변도 없고, 사람을 죽였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모와 체격을 보지 않으시고 어린 다윗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모세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느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음에도 이스라엘의 군주가 된 것도 하느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리더는 능력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 리더는 업적을 인정받았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성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이는 우리 행복의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실패한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을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이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참행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0. 13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루카 11,27-28 (참행복)

한 여자가 성모님을 행복하다 합니다

한 여자가 성모님을 부러워합니다

예수님을 아들로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행복하다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전부터

하느님과 하나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을 행복하다 말한 여자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참행복은

‘무엇을 가짐’이 아니라

‘어떻게 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라고 감격에 찬 말을 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성장하였을 때, 의례히 받을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찬사라고 하겠다. 이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께 대한 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라고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에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을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뵈올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 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다른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였다(참조: 마르 3,35).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었던 한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면서 그 예수님을 낳고 기르신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할지에 대해서 부러워했습니다. 사실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도 자신의 아이가 정말 잘 되었을 때 행복한 것은 물론이고 그것이 진정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적인 행복보다도 더 큰 행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의 경우 사실 인간적으로 구세주를 낳고 기르신 것도 물론 행복하셨겠지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따라오게 될 고통은 정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그렇게 인간적으로 기구한 운명을 살아가셨던 분이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평생을 그 말씀대로 살아가시면서 더 큰 행복과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행복은 결국 유한한 것이고 하느님 안의 행복은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나가며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김성 세례자 요한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찬미 예수님!

신참내기 공무원이 처음으로 창구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칙대로, 소신대로 일을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이 공무원에게 첫 번째 민원인이 왔습니다.

“저 사망 신고하러 왔는데요.”

그러자 그 긴장한 그 신참 공무원은 

“본인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민원인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아, 꼭 본인이 와야 됩니까?”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렇게 말한 여인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고서 주님의 기적에 반박하는 군중들 중 몇몇에게 아마도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겠지요?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다는 모함에 논리정연하게 반박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들어도 참 멋진 그 말씀에 그 여인은 자연스럽게 찬탄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하다고 칭송합니다. 바로 그 어머니를 부러워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실은 얼마나 큰 염려와 고통 속에 사셨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하고 그를 키우면서 그리고 그의 고난을 눈으로 보고, 또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모습을 봐야만 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 여인을 짐작도 못하였겠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은 조금은 야박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잘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중의 으뜸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전언에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여 구원 역사를 시작한 분이 바로 그분이었고, 직접 하느님을 모태에 잉태하고 품고 기른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성모님이 염려와 고통 속에 사셨다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분은 사실 그 누구보다 큰 영광과 축복 속에 계셨다고 믿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가운데 우리 행복은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질문을 받는 오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전체를 놓고 추측을 해볼 때 어떤 여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여러 행적을 보고 너무나 멋져 보여 자기도 이런 아들을 뒀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도 컸고 그래서 그런 바람을 억제할 수 없었나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그런 바람을 토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바람이랄까 생각이 너무 인간적이고 참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여인 뿐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저희 형제들 서약식이나 서품식이 있을 때마다 제가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서약 형제들과 서품 형제들이 부모를 모시고 나와 인사를 시킬 때 예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그 부모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뿐 아니라 나도 저런 자식이 있으면 하는 부러운 듯한 시선을 느끼게 되는데 정작 그 부모들은 아들이 수도자요 신부인 것이 자랑스럽지만 자랑보다 더 큰 것이 부모들에게는 걱정이지요.

성모 마리아께도 예수 그리스도는 마찬가지, 아니 훨씬 더 그러셨을 겁니다.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인 것은 자랑스럽지만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로써 겪어야 할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면 시므온의 예언대로 가슴이 칼에 찔리는 아픔이셨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질문을 합니다.

나도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인가?

똑같은 질문이지만 저는 이렇게도 질문을 합니다.

죽고 난 뒤 다시 살아나게 되어 다시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면 지금의 아들의 엄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나도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인가? 


내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

내 아들은 포기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선택하는 어머니.

이렇게 내 아들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거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나의 행복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 오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합니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몇 년 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본당 청년들이랑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요.

그 때 한 자매님이 서품식에 왔었다며 두 가지가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사제될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예식이고요,

다른 하나는 맨 마지막에 사제들 부모님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고 하면서

“신부님 부모님들은 참 좋으시겠어요.” 하는 이야기를 하셨었는데요.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거 같지는 않습니다.

사제들의 부모님이 그 순간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고 박수를 받지만,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혹여 라도 자신의 활동이 아들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이 될 까봐 저처럼 존재감 없이 지내시는 경우가 많은 거 같습니다.

또 아들이 사제 생활을 잘 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하시며 매일매일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지내시는 시간이 대부분인 거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 신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은데요.

신부로 살아가는 제가 주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분들은 신자들인 거 같습니다.

저의 시간 대부분을 신자들을 위해서 뭔가 준비하거나, 전화하거나 만나거나 방문하는 일로 보내는데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문득문득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냉담자들 한테는 이렇게 열심히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면서 부모님에게는 전화 한 통 하지 않았구나... 가정 방문은 열심히 하면서 정작 내 부모님은 찾아뵙지 못했구나..’하는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올 해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에 알람을 맞춰놓았습니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전화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건 아니지만, 4시30분에 울리는 알람이 집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고 가능하면 전화를 드리게 만드는 거 같습니다.


또 반모임이나 기도모임 때문에 인천에 나가게 될 때가 있는데요.

가까운 동기들 본당에서 자게 되면 편하지만, 부모님을 뵐 시간이 거의 없어서 될 수 있으면 집에 가서 자고 아침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요.

만약 사제의 관심과 사랑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사제의 부모님과 신자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요?

물론 사제의 사랑과 관심이 부담스럽고 때로는 귀찮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신자들이 행복할 거란 착각을 해 봅니다.^^;


그럼 예수님의 사랑이라면 어떨까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시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함께 일하시고 땀을 흘려주신다면 어떨까요?

그분이 함께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거 같은데요.

그 행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하루, 말씀대로 살아가봅시다.

그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이고, 그 만남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신부님 차와 똑같은 차가 주차되어 있더라도,

신부님 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문구가 있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




참 자유롭고 겸손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일간신문중 한 기사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작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어느 시장 집무실 벽에 걸린 ‘총욕불경寵辱不驚’이란 액자와 그 아래 ‘달항아리’에 대한 시장의 설명입니다.

“총욕불경寵辱不驚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제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입니다.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해도 놀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와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달항아리를 놓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달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지만 어두운 곳을 밝게 합니다. 달과 같은 부드러움으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환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대로 믿는 이들의 삶의 지표로도 삼아도 좋은 생각입니다. 어제 금요강론 때 나눴던 참 자유인들이었던 옛 사막교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진지하고 자기에게 덜 진지할수록 이런 초연함의 자유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겸손한 삶이고 이런 겸손의 여유에서 유우머도 꽃처럼 피어납니다. 사실 이런 겸손한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이라 상처받을 ‘자기ego’가 없기 때문입니다.

총욕불경,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런 이들이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참 자유롭고 겸손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이라 정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세례받은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재물도, 명예도, 지식도, 건강도 다 사라져도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수차례 인용했던 지금은 고인이 된 옛 신학교 시절 교수신부님의, “인간답게가 아니라, (하느님) 자녀답게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답게’는 막연하지만, ‘자녀답게’는 분명합니다.”란 요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요건을 구비한 우리들입니다. 미사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아뢰오니’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 않습니까?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환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행복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재들인 우리의 신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가 되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가 됩니다.’(제가 넣은 말).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참 아름답고 자유롭고 겸손하고 행복한 삶의 비결이, 공동체 일치의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례받은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세레성사의 은총이자 매일 미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평생과제 수행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설파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이상이, 꿈이 현실화되는 것은 우리의 평생과제를 통해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그 답을 줍니다. 아주 짧은 두절로 이루어진 복음이지만 하느님 자녀로서의 참행복의 비결을 담고 있습니다.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같은 자식을 둔 어머니를 부러워함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군중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목소리로 부러움을 표현하자 즉각적인 예수님의 응답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바로 예수님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자신은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던 많은 이들을 통한 예수님의 확신을 반영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온통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그분의 말씀과 행위는 그대로 하느님을 반영했습니다. 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원성사原聖事라 일컫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닮아 참 자유롭고 겸손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삶도 보고 배웁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우리 역시 형제들로부터 반면교사로 삼아 매일 평생 배웁니다. 보고 배울 형제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서로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큰 거울은 주님의 거울이구요. 매일 공동전례기도 시간마다 깨어 주님의 얼굴에 자신을 비춰보며 알게 모르게 주님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기 보다는 모전자전母傳子傳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께서 보고 배운 최고의 스승은 성모 마리아였습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예스’로 시작해 ‘예스’로 끝낸 성모님의 삶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한 삶이셨습니다. 주님의 수태 고지에 예스로 흔쾌히 응답하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예수님 곁에서 함께 예스로 응답하신 순종과 겸손의 비움의 어머니, 영원한 ‘예스 맨(yes-man)’ 마리아였습니다.

십자가에 내리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피에타의 성모님’을 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새삼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부성애와는 비교되지 않는 모성애로 하느님 사랑에 가장 근접한 사랑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유지되는 것은 성모 마리아를 닮은 무수한 어머니들의 모성애母性愛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마지막 죽음에서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원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는 하느님께 달려있고 그냥 끝까지 묵묵히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노년인생을 살아가는 그 삶자체가 존경스럽고 거룩한 것입니다.

하여 늘 감동하는 것은 장례미사때 제대 앞에 놓여진 마지막 순종을 상징하는 관을 볼 때 입니다. ‘아, 이제 비로소 영원한 수도자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곤 합니다. 어느 분의 확신에 넘친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어떤 실수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사제로서 살고 사제로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분이다!”

참 자유롭고 겸손한, 아름답고 행복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은 평생과제입니다. 방법은 참 단순합니다. 평생, 하루하루, 항구히 충실히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이렇게 살다가 죽은 이들이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제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사람은 정말 혼자 가는 거구나!’ 하는 느낌이 확 다가왔습니다 혼자 가는 것을 ‘쓸쓸하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수식어가 전혀 필요없이 그저 그렇게 혼자 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로는 “사람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에는 열두 손가락을 꽉 움켜잡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지만, 떠날 때는 손을 쫙 펴서 다 내놓고 간다.”는 말을 듣고 해 왔지만, 정작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작 갈 때까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거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지금 이대로 내가 누리는 것을 그대로 다 누리고 또 그렇게 가지고 가기라도 하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를 배었던 부모와 일가친척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간구하면서도, 정작 마음속으로는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이율배반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오는 기쁨 그리고 그 말씀을 직접 실현했을 때 오는 뿌듯함이 진정 나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내 마음의 눈앞에 펼쳐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환희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말씀을 실현했을 때 세상 그 어느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주 예수님을 얻게 된다는 기쁨이 진정 나를 새롭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저희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심어주시고 그 말씀을 헤아리게 해주시며 진정 주님의 말씀을 실현함으로써 주님과 하나되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첫 발을 내딛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아는 것과 실천 <루카 11, 27-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알지 못하면 실천의 힘이 없지만, 실천이 없는 앎은 허상에 지니지 않으며 더 알기 위해 실천이 필요합니다. 의학 공부를 하여 교과서적 지식은 훌륭한 의사가 되지 못하고, 법을 학교에서 배웠다고 해도 실질적 문제에 대면해서 판례를 익히지 못하면 이름 있는 법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사는 일 년간의 수련을 받고 2차, 3차 거쳐 배우고 실천하여 전문 의사가 되고, 법관은 여러 차례 실습하여 유능한 법관이 됩니다. 믿음도 굳게 하려면 적어도 예비자 때 배우고 익힌 믿음을 견고히 하여 실천적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신 말씀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아는 바와 깨우친 것을 실천하면서 신앙의 참맛을 맛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새로 영세한 사람도 3년이 지난 다음 그 뒤에 행동이나 교회 직무를 맡게 됩니다. 즉,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은 영세한 지 3년이 지나야 합니다. 저와 같이 수도원에 입회한 사람은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아 영세한 지 3년이 안 되어도 수련까지 하고 수도원 퇴원하고 교구 사제가 되었지만, 역시 신앙의 부족으로 사제직까지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길은 기도의 길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의 기도인 전례 기도에 적극적인 참례야말로 신앙을 키우는 지름길입니다. 다만 전례가 뜻하는 의미를 알고 참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첫 번째 헌장은 전례 헌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제대 상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수난 십자가상 제사이며, 미사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미사 때마다 듣고 깨달아 하느님과 일치하여 변함없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전례를 알고 행하는 사람은 전례를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변함없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며 말씀을 실천하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것또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을 살게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 울려퍼집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의 행복은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말씀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말씀과 행복은

듣고 실천함으로

늘 함께합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을

비워내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서로에게

말씀이 중심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 사랑처럼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는

말씀이 잠자는 

우리를 깨웁니다.


하느님 말씀은

몸과 마음

우리의 삶까지

행복으로 이끕니다.


행복을 위해

우리가 먼저

들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은

분명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걸어가는

행복한 날 되십시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아메리카대륙개발은행은 볼리비아 띠띠까까 호수 근처의 작은 인디언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 마을에 수력발전소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조사를 마치고 보니 준비해 간 경비 중 꽤 큰 액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후원단은 마을 원로들을 만나서 남은 경비로 마을에 당장 시급하고 절실한 무언가를 해주고 싶으니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연 인디언 원로들이 청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이 후원단은 전기나 하수도, 재봉틀, 전화 같은 시설로 인한 ‘문명의 혜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원로들은 뜻밖에도 ‘새로운 악기’를 청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나 악기를 연주합니다. 주일에는 미사 후에 성당 마당에 모여서 음악회를 열고 연주가 끝나면 공동체의 문제도 의논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악기가 오래돼서 망가져갑니다. 음악이 없으면 우리도 그렇게 될 겁니다.”

물질적인 후원보다 음악을 원했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현대인에게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갖지 않았을까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은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 줄 뿐이지, 참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지금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하느님께서 내게 무엇인가를 딱 하나만 주겠다고 하신다면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믿음, 사랑, 희망, 평화, 기쁨, 행복 등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가치를 청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 속의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서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했고 키웠기 때문에 가장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랬을까요? 성모님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행복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평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심지어 사랑하는 외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직접 보고 견뎌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가치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가치에 집중하고 있을까요? 순간의 만족과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을 가져오는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느님의 가치에 집중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옷을 입으면 추위를 막듯이 인내가 불의를 막아줄 것이다. 추울수록 옷을 껴입으면 추위는 당신을 해칠 힘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큰 불의를 만날수록 인내심을 길러야 하며, 그럴 때 어떤 불의도 그대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다(레오나르도 다빈치).


축복된 삶(‘따뜻한 하루’ 중에서)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여인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제 삶은 너무 권태롭고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정말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테레사 수녀는 그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사는 인도에 오시면 진정한 삶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와 보세요.”

그 후, 그 여인은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인도로 떠났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그녀의 눈에 펼쳐진 풍경은 처참했습니다.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테레사 수녀와 같이 그들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기 시작하자, 그녀는 점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권태로운 삶에 눈물을 흘리던 그녀에게 활기가 돋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삶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삶이 어떠하십니까? 권태롭고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 자신만을 바라볼 때에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지만,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사랑’을 강조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말씀 안에서 행복을 퍼 올리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이르십니다(11,27-28). 


원래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이 복되다는 뜻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분이기에 복되시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이셨기에 복되다는 뜻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하느님 친히 인간과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시어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사랑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관계의 절정을 볼 수 있지요. 세상살이에서도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외에도 피조물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조건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다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맛보기도 하지만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혈연관계에서도 유산이나 다른 이해관계가 얽히면 철천지원수가 되는 경우도 흔하지요. 


문제는 무엇을 고리로 관계를 맺으며 왜 무엇을 위해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복되신 것은 예수님의 혈육의 어머니라는 생물학적인 관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고 싶거든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품어야겠지요.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십자가 사랑의 길, 보편적 구원의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금새 사라져버릴 돈이나 감성적 만족, 비슷한 취향과 성격 등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결정적 고리가 될 순 없을 것입니다. 


혈연관계라는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관계나 소수의 해당 구성원들만의 유익을 위한 울타리 속의 관계, 이해타산을 따지며 형성되는 인맥, 자본과 정치권력의 유착관계, 힘 있는 자와 약한 자들 사이에 맺어지는 갑을관계 이런 관계 속에서 행복이 꽃필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패거리 문화나 이익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이요 사랑 뿐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은 말씀의 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살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문을 통과할 때 행복의 들판이 펼쳐질 것입니다. 말씀을 아예 듣지 않는 이들이나 듣기는 하지만 실행하지 않는 이들도 행복을 퍼올릴 수는 없겠지요. 


행복의 샘이요 씨앗인 말씀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경청해야 합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멈추고 영혼의 귀를 열고 행복의 뿌리이신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이 우리 마음과 영혼에 스며들게 되고,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 행복의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고 싶거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교리적인 의무 실행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와 생명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사랑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애정어린 눈길로 세상과 동료 인간들을 바라보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며, 말씀 따라 하느님 나라의 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되도록 행복을 퍼올렸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수요일, 성소후원회 임원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올 것 같았지만 다행히 약간 흐렸고, 오후에는 날씨가 맑았습니다. 새남터 성지에서 기도를 하고, 절두산 성지까지 순례를 하였습니다. 함께 순례를 한 성소후원회 회원들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옥중서한’을 읽었습니다. 서한을 읽으면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오늘은 성인의 서한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편지들 때문에 많은 문초를 받았습니다. 함께 갇혀 있는 교우들에게 저는 고해성사로 힘을 북돋우고 있고, 또 두 예비 교우들에게 영세를 주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열 명이 있습니다. 다른 감옥에는 7, 8명이 갇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조선 교우들에게 선교사들을 영입하고 보호할 대책과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후에 교우들이 선교사들을 영입하러 가지 못하게 될지라도 신부님들이 영국 배로 오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공경하올 신부님들께 마지막으로 인사드립니다. 미구에서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다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저를 대신하여 다른 모든 신부님들께도 인사를 드려주십시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고 우르슬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묶인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김 안드레아 올림”

 

신부님은 모진 고문이 솔직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겨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최양업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곧 하느님 품으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같은 사제로서 진한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차는 연결된 객차가 많아도 늘 같은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피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단순한 가족의 틀을 벗어버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성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지만 우리를 모두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조직화하고, 나누고, 이방인들과 구별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사이게 놓여있는 장애물들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지연, 학연, 계층, 이념’의 벽을 허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 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순명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을 하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행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 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꼭 망해봐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 김미경 강사가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T.V. 강연을 하였습니다. 꿈을 꾸라, 꿈은 오늘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도 매일매일에 충실하다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는 식의 강연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논문표절의 시비에 9시 뉴스에까지 나오며 그녀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강사가 아닌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꾸었던 꿈속의 유명강사 김미경이 본래의 자신이 아니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지금의 김미경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사랑받아야 할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김 강사는 그 순간을 “만났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사로서의 꾸며진 이상적인 자신만을 원하면서 어느 순간 놓쳐버렸던 그래서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고 만나기조차 낯설고 두려운 참 자기 자신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힘이 생겼다고 하고 강의요청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데도 행복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꿈을 좇으라는 말을 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말하며, 먼저 참 자기 자신을 만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만나려면 반드시, 반드시 “망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보지 않고서는 지금의 자기모습에 취해 참 자신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망해서 완전히 다 잃어봐야 자신이 만들지 않은 순수한 참 자신을 만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꼭 망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이 걸려, 그래서 아름다운 몸매도, 얼굴도 모두 잃어버린 샤론스톤의 예를 들면서 그녀도 “만났구나!”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잃은 그녀도 지금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감촉을 느끼는 등, 사용해보지 않은 감각들을 느끼며 행복해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꼭 망해봐야 참 소중한 순수한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율법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게 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에덴동산을 불칼로 막으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는 생명나무까지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불을 통과할 수 있는 방화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방화복이신 주님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를 입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은 구약부터 있어왔던 율법인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라고 말하듯이 인간을 불로 둘러싸이게 만들어 유일하게 그 불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그리스도의 피를 갈구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 불을 통과해보겠다고 율법에 목숨을 거는 일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스스로는 그 불을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써만 그 율법의 불칼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커룹 천사들이 그려져 있던 성전의 휘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이 꿰뚫릴 때 찢어졌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입음으로써만 그 뜨거운 율법의 저주를 뚫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떻게 잘 지켰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입었는지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기에, 우리는 남들이 법을 지키던 안 지키던 판단할 처지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건 그리스도를 입는 믿음만 생긴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성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써 그렇게 변화되었기에 이 믿음으로 얻어지는 구원의 신비를 끊임없이 설파하는 것입니다.


망하기 전 김미경 강사는 세속적인 성공만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서 망해보라고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욥과 같이 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그런 죄인임을 깨닫게 만들어주어 그리스도께만 희망을 두게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넘어서보겠다고 노력하다가 결국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참 좋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될 때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꼭 붙어 있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모든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의 열매가 자신 안에 맺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행복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씀하십니다. 말이든 글이든 짧고 순수해야 좋습니다. 아주 예전 선배 신부님이 뉴튼 수도원에서 영어강론후의 주고받은 유우머를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강론 참 좋았습니다."

반색을 하며 무엇이 좋았는가 묻는 신부님에게, '짧아서 좋았습니다.'라는 어느 수사님의 답변에 신부님의 씁쓸한 미소와 수사님들의 폭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오늘 성무일도 아침 세번째 시편도  단 두절로 너무 짧아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뭇나라 백성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


오늘 복음이 짧고 주제도 선명하여 좋습니다. 단 두절에 소제목도 ‘참행복’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참행복-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로 정했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행복입니다. 행복은 인간의 궁극목표입니다. 참으로 행복할 때 자유롭습니다. 행복할 때 살아있는 보람을 느낍니다. 사람마다 행복도 저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진정한 참행복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참행복의 소재를 밝혀 줍니다.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군중 속의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 하는 말은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적 마음을 반영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즉각적 대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렇게 두절로 끝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이라는 무수한 시편의 고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참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친히 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참행복을 사셨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 참행복이니 말입니다. 멀리있는 행복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하는 행복이요, 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하는 평생수행의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말씀 실행을 통한 위로와 치유요 정화와 성화에 따른 참행복입니다. 

새삼 말씀의 힘은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여기서 생각난 것이 우리 수도자의 기본적 수행인 렉시오디비나 성독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평생 참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잘 아시다시피 렉시오디비나의 구조는 ‘들음-묵상-기도-관상’으로 이루어진 통합적, 전인적 성서독서법입니다. 여기다 행함을 더하면 4단계는 ‘들음-묵상-기도-관상-행함’의 5단계가 되고, 렉시오디비나는 삶 전반으로 확대되어 비로소 렉시오디비나의 생활화가 이루어 집니다. 

사실 옛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이렇게 살았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는 세가지 렉시오디비나입니다. 

1.성경독서의 렉시오디비나, 

2.자연성경의 렉시오디비나, 

3.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저는 성경의 범위를 넓혀 자연도, 내 삶도 성경에 포함시켜 렉시오디비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런 삶 전반에 걸친 렉시오디비나의 수행으로 참행복의 성취요 관상적 삶입니다. 이래야 참 풍요롭고 부요한 참행복한 삶입니다. 참으로 평범하고 건강한, 성경에 바탕한 관상적 삶을 이뤄주는 렉시오디비나의 생활화입니다. 

비단 신구약성경에 멈추는 렉시오 디비나가 아닙니다. 매일의 공동시편성무일도 시간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 시간도 일종의 렉시오디비나 시간입니다. 

그러니 렉시오디비나의 생활화보다 참행복의 관상적 삶에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습니다. 이렇게 신구약성경의 렉시오디비나가 전 삶에 확산되어 정착되는 것이 바로 렉시오디비나의 궁극목표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옛 교회의 교부들입니다. 서방의 4대 공교부인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대 그레고리오 교황, 모두가 렉시오디비나의 대가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와의 육친관계와 대립시키면서까지 신앙의 위대함을 선포하십니다. 이 선포의 대상은 모든 신앙인입니다. 루카는 이 구절에서 마리아에 대하여 무슨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묵상하며 살았던 전형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로 성모마리아 역시 참행복을 살았던 렉시오디비나의 대가였습니다. 성모마리아만 아니라 1독서의 갈라티아서의 저자 바오로 사도 역시 렉시오디비나의 대가이자 관상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다음 바오로의 갈라티아서의 깨달음은 깊은 렉시오디비나 관상의 열매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시간 역시 그대로 ‘들음-묵상-기도-관상’이 한 셋트가 실현되는 참행복의 렉시오디비나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임을 깨닫게 하시고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아멘. 




행복의 중심 이동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요즘 청소년들이 유명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졌나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중인데도 그리고 군중이 있는데도 큰 소리로 자기 속 감정을 그대로 토해내니 말입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그랬겠지요.

아니면 아들이 그리 변변치 못하거나 말썽을 부려 너무도 속을 썩이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무도 훌륭하기에 성모 마리아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이 여인이 정말로 행복한 여인이었다면 예수님 말 들으러 오지도 않고, 자기 아들 때문에 속상하지 않고 넘치도록 행복한 사람이라면 분명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행복하다는 소리는 나는 불행하다는 소리이거나 불행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다는 소리잖아요?


이런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그런 행복보다 더 행복한 길을 알려주십니다.

행복의 중심 이동입니다.

행복의 중심을 훌륭한 자식에 두지 말고 참 행복을 주는 하느님 말씀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며칠 전 제주도 강정 평화 센터에서 강의할 때 한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저의 강론을 매일 받아보는 분인데 제주에 여행 왔다가 제가 거기서 강의한다는 얘기를 듣고 태풍에도 불구하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아들하고 단 둘이 여행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저는 즉시 저의 어머니를 생각했고 저의 불효를 생각했습니다.

신품 받고 딱 한 번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한 것 외에는 단 둘이서 여행한 적도 없고 옆에서 잠을 자 드린 적도 없으며 그것까지는 안 해도 손 한 번 따듯하게 잡아드린 적이 없었으니 저를 제일 안쓰러워하시고 저의 따듯한 말을 제일 바라셨을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서운하셨고 저는 얼마나 불효자였는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아들이 그렇게 따듯하고 효성스러우니 어머니로서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제 눈에 그리 보였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저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런 행복도 물론 행복이고 못되어 먹은 자식이 많은 요즘 같은 때는 더더욱 행복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는 행복하다는 여인의 말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신 것이 성모 마리아는 불행하다거나 덜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지요.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처럼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데 그것이 인간적으로 효성스럽고 성공한 아들을 둬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실천하셨기에 행복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은 복음인 루카복음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사실 성모님은 인간적으로 못된 아들을 두셨잖아요?

어미보다 앞서 죽고 그것도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들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인 행복을 살아가라고,

인간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살아가라고,

인간의 사랑 받는 것보다 하느님 말씀 실천이 더 행복이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참행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여자가 성모님을 행복하다 합니다

한 여자가 성모님을 부러워합니다

예수님을 아들로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행복하다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참행복은

‘무엇을 가짐’이 아니라

‘어떻게 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 <루카 11, 27-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먹어야 할 것은 빵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광야에서 주님께서 악마에게 빵의 유혹을 받으실 때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도 산다.”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육신을 살리는 젖을 먹인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행복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생명이 되려면 음식을 먹고 소화해 삶의 활력소가 되듯이 하느님 말씀을 먹고 소화하고 힘의 원천이 되어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생명의 힘이 되려면 몸에 들어와 일정한 작용을 해야 하고, 물이 생명이 되려면 물이 몸 안에서 합당한 작용을 하기 위해 몸에 흡수되어야 하고, 공기도 코를 통해 몸 안에 들어가 내장 안에서 작용해야 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의 말씀이 먹이가 되어 사람의 인격 안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알고, 깨닫고, 의식 속에 잠겨 있어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는 사람은 먹이가 힘이 되는 것같이 내공의 힘이 되어 참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긍정적 사고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잘못된 먹이 사슬에 걸리면 권력의 노예가 되고, 재력가의 부정에 참여하게 되고, 명예를 얻으려고 자기기만의 덫에 걸려 교만하고, 옹졸하고, 편파적인 말을 들으면 쉽게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자연적 생명을 높이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찾고 찬미하고 따라가지만, 초자연적 생명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에 마음을 주고 살아갑니다. 오늘 피정을 마치고 서원 갱신을 하는 수사님들의 피정은 또 다른 형태의 하느님 말씀을 듣고 <먹고>수도 서원을 갱신해야 합니다.

 

서원식 때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수도자의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사는 믿는 모든 이가 바라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됩니다.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읽고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혈육의 굴레속에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시각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서로를 성장시키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우리 마음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성장시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 말씀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여정을

말씀안에서

걸어가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복음이라는

행복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는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분석하기보다는

말씀에 머무르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이러한 우화가 생각납니다.

돼지가 길을 가다 암소를 만나 쌓인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살코기와 베이컨을 제공하고 심지어 내 발까지도 맛있는 먹을거리로 그들에게 내주는데 사람들은 왜 나보다 너를 좋아하는 걸까?”

그러자 암소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지요.

“이유가 있지. 너는 죽어서야 유익한 것을 제공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우유를 나눠주거든.”


이 세상에는 움켜쥐는 데에만 급급한 사람들도 있고, 또 반대로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언젠가 여건이 좋아지면 다른 사람을 위한 큰일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시고, 또 어떤 사람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더 멋지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바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세 가지 질문’에는 이러한 질문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대답은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는 ‘현재’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행하는 선행‘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사실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얼마나 행복할 지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행하는 사랑의 실천,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말은 성모님께서 불행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보다 더 행복도가 높을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성모님께서는 더욱 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은, 단순히 과거의 일회적인 행동을 통해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에 매순간 행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만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에 답변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장 행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마법이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힘을 이미 갖고 있다. 더 나은 것을 상상할 힘이다(조앤 K.롤링).


언제나 청춘(용혜원, ‘지하철 사랑의 편지’ 중에서)

롱 펠로우는 지금까지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미국의 시인입니다. 롱펠로우는 하버드 대학에서 근대어를 가르치며 낭만적인 사랑의 시를 써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롱펠로우의 머리칼도 하얗게 세었지만 안색이나 피부는 젊은이처럼 싱그러웠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롱펠로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친구! 오랜만이군. 그런데 자네는 여전히 젊군 그래. 자네가 이렇게 젊은 비결은 뭔가?"

이 말을 들은 롱펠로우는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를 보게나! 이제는 늙은 나무지. 그러나 저렇게 꽃이 피고 열매도 맺는다네. 그것이 가능한 건 그래 봬도 저 나무가 매일 조금이라도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나이가 들었어도 매일매일 성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네!"


겉모습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 과연 ‘성형수술’에만 있을까요? 언제나 청춘이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다면 겉모습 역시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말씀 빼고 나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크게 성공한 사람이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다들 그의 부모를 칭찬하고 부러워합니다. ‘얼마나 자식 교육을 잘 시켰으면...’ ‘자식이 저리 잘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명 설교를 듣고 있던 한 여자가 작은 소리도 아니고 큰 소리로 성모님을 극찬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복음 11장 27절)

 

성모님을 향한 여자의 극찬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은 의아스럽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호응하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저희 어머니 저를 키우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저를 위해 큰 희생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꽤나 의외였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생뚱맞기도 하고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성모님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복음 11장 28절)

 

그러나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충실했던 분입니다.

 

결국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이것입니다. 성모님은 단지 자신의 어머니, 즉 혈육관계라는 것 때문에 훌륭하거나 행복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 인해 훌륭하고 행복하심을 강조하십니다.

 

성모님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열 달 동안이나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른 세 해 동안 ‘말씀’ 곁에서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경청했고 관상했으며 그 말씀을 삶 가운데 실천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성모님의 충실성은 다음과 같은 응답에서 잘 드러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38절)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가치를 외적환경에 두고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는 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충북음성이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고달픔도 감당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 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 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순명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끝까지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행복의 기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의 기초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참 행복도 없습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시편16,2).

위 시편 고백은 믿는 이들에겐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셨던 5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는 참 행복했습니다.

 

"어, 이냐시오 형제가 어디에 있지? 미사해야 하는데."

 

귀국하여 이틀이나 잠깼을 때 제 방을 스페인 알베르게 방으로 착각하여 이냐시오 형제를 찾았고 제 방의 책상위에 미사를 준비하려 했다가 좀 지나서야 장충동 수도원의 제방임을 알았습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50일간을 동고동락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제 가 몸이 무거운 편이라 2층 침대를 쓸 때 저는 1층을 썼고, 몸이 가벼운 이냐시오 형제는 2층을 썼습니다. 2층 침대가 아닌 경우는 언제나 옆 침대에 이냐시오 형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게 기적이요, 순례중 가장 큰 성과입니다. 순례중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도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 여 순례가 끝나는 50일차 이냐시오 형제 집에서의 미사가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순례가 성공했음을, 서로가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유종의 미사였기 때문입니다. 늘 행복의 기초인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기에 성공적 순례였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성모님이 행복한 것은 아드님 예수님 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행복의 가능성입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 역시 매일 미사와 시간경을 바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우 리는 각자의 기분 따라, 감정 따라, 마음 따라 살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 따라, 하느님의 뜻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기분은, 감정은, 마음은 수시로 변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뜻은 하나이기에 늘 내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에 맞추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했기에 성공적 순례였습니다. 

 

순례중 여러번의 특이한 체험도 소개합니다. 한 밤중 강론을 다 완성하여 기뻐했는데 깨니 꿈이었습니다. 말씀과 하루 체험을 간절히 묵상하다보니 꿈중에 까지 강론을 썼던 것입니다. 이런 때는 실망감에 속된 말로 김이 새서 강론 쓰기가 좀 힘들었지만 힘껏 써냈고 참 행복했습니다. 이런 행복감이 순례중 샘솟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 믿는 모두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이미 부여 받았습니다.

 

"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나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깨달은 사랑의 각자이자 성숙한 대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이런 진리의 깨달음입니다. 이런 진리를 깨달아 알 때 참 행복입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고스란히 체험하는 행복한 미사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삼 하느님은 행복의 기초임을 깨닫게 됩니다.




행복을 부르는 사랑의 들음과 실행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분법적으로 말씀과 혈연관계를 나누어 혈연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겨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다음 군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계셨다. 사랑의 행위, 영으로 인도하는 길을 알려주시는 행동을 하신 다음 사랑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예수님의 사랑의 행동과 말씀에 감동하여 예수님의 어머니를 칭송한다.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과 방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며 변화시킨다. 사랑이야말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굳은 마음도, 맺어있는 미움도, 강철처럼 굳어진 생각의 편린들도 바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용해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세속적인 사고와 습관에 젖어 사랑이 아닌 돈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을 움직여보려고 애쓰는가?

 

군중 속에 있던 그 여인은 “목소리를 높여” 성모님을 칭송하였다. 그 여인의 높은 목소리에는 칭송하고자 하는 그 여인의 간절한 마음과 반드시 예수께 그런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절박감이 담겨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여인에게서 선을 향한 갈망과 사랑을 향한 열정과 고백의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 앞에 펼쳐진 그 놀라운 하느님 사랑의 업적에 경탄하고, 그 경탄을 공유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선포하였다. 그 여인은 선전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반사시켜 준 것이다.

 

나의 영성생활에 그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는가? 참으로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에 대해 진정 기뻐하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가?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하지 않은가? 성 프란치스코는 말한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입니다.”(권고 8)

 

그 여인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11,27) 하고 성모님을 칭송하였다. 여기서 모태와 가슴은 ‘어머니’를 부분이 전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분의 행동과 말씀을 보고 그분의 어머니를 칭송한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픔을 수도 낳을 수 없다. 성모님이 칭송을 받으신 것은 당신 아들 예수님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공해서가 아니었다. 그분은 예수님, 곧 사랑을 잉태하고 낳으셨기에 칭송을 받은 것이다. 성모님에 대한 칭송은 곧 사랑의 뿌리이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이다. 따라서 이 여인의 칭송은 하느님 찬가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11,28)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의 역동성과 사랑 실천의 항구함에 대해 강조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영성생활은 사랑이라는 관념의 이해나 사랑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랑행위를 내 밖에서 나와 무관하게 다른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일로만 바라보거나, 일시적으로 마음이 동하여 도움을 ‘베푸는’ 행위가 되어서도 안 된다.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사랑의 존재가 되고 그 사랑을 살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랑의 원천인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고, 마음에 새기며, 말씀이 움직이는 것을 열정적으로 항구히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항구한 마음으로 사랑의 말씀을 끊임없이 듣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도 하느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으로 사랑의 말씀을 퍼 마시고, 선포하며, 온 몸으로 실행함으로써 행복을 체험하는 역동적이고 경이로운 날 되길 기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절이 바뀔 때 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몸이 피곤하니 쉬라는 뜻입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약속을 줄이고, 며칠 쉬면 감기는 제 곁을 떠납니다. 이제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지친 몸을 더욱 혹사했을 것이고, 몸은 더 나쁜 상황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감기에 약을 먹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효과가 빠를 것입니다. 하지만 내 몸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적당히 쉬고, 기다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운전을 할 때 사람의 인격과 습관이 보이곤 합니다. 잠시도 못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깜빡이를 켜고, 빵빵 거리곤 합니다. 차선을 자주 바꾸고, 과속을 하고, 담배꽁초도 길가에 버리곤 합니다. 음주운전도 하고, 신호 위반도 하곤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자동차는 편안한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운전도 3단계로 구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준법운전입니다. 이렇게 운전을 해도 사람들은 존경합니다. 운전을 아주 안전하게 잘 한다고 합니다. 차선을 잘 지키고, 신호를 준수하고, 속도위반을 하지 않습니다. 제게 처음 운전을 가르쳐 주신 신부님은 늘 준법운전을 하셨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정해진 속도 이상으로 운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도착 시간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준법운전을 한다면 교통사고는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량의 흐름은 훨씬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운전을 하기 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합니다. 두 시간 운전을 하면 잠시 쉬면서 안정을 취합니다. 뒤에서 빠르게 쫓아오는 차가 있으면 옆으로 피해서 먼저 가도록 합니다. 커다란 트럭이 앞에 가면 추월을 하거나, 멀리 떨어져서 갑니다. 뒤에 오는 차들의 흐름과 앞의 차의 흐름을 함께 파악합니다. 차에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안전운전을 하는 분들의 차를 타면 마음도 편안해 집니다. 차 안이 아늑한 휴게소 같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짐을 들고 가는 분들이 있으면 가는 길까지 모셔다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차를 타면 피정 강의를 듣기도 하고, 성가를 듣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차 안이 마치 피정의 집 같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10개월 머물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이런 분들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 영원한 생명에로 가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욕심도, 원망도, 미움도, 두려움도 다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것과 복음을 따라 사는 것도 마치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도 칭찬 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루카11,27)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11,28)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하신 분인가를 표현했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지극히 원초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 질문일까요?

아니, 우리만 생각했던 질문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있었을 질문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싸움으로 역사는 진행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완벽하고 보편적인 답변을 찾지 못한 역사이고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행복의 조건에 대한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얻어낸 지금까지의 답들이 저마다 이유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야기도, 여인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행복의 조건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간단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한다고.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제시하신 행복의 조건이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잘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일단 달콤하고 감각적으로 쾌감을 허락하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의 조건,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일단 자기 십자가를 전제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때로는 자신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일단 그분의 말씀대로 살 수 있었을 때, 세상이 말하는 그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허락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삶의 구체적인 경험이 있어야 갖게 되는 확신입니다.

 

진짜 행복이라면 허무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행복은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결론을 내려봅니다.

우리 자신이 좇고 있는 것들이 진정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들인가를 항상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0131012)



칭송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네요. 토요일은 전통적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날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묵주기도도 성모님의 일생에서 가장 기뼜던 사건들을 기억하고 거기에 우리도 참여하는 ‘환희의 신비’를 정성껏 바치지요. 성경에서 사람들이 성모님을 칭송하는 구절이 몇 있습니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칭송한 것입니다. “여인 가운데 복되십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나옵니다.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 당신 어머니를 칭송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아이를 낳은 자매들은 즉각 이 말을 이해할 겁니다. 몸으로 아이를 양육한 그 노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칭송받아 마땅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동의하긴 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칭송을 하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말로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 하십니다. 성모님이야말로 복된 분이십니다. 말씀을 듣고 잉태하고 말씀 자체이신 당신 아드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가셨기 때문입니다.

 

세 례받아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 순간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는 은총을 간구하는 사람은 늘 설레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이 무슨 말씀을 건네실까?


  


복이 되어 주어라~

 -김기현 신부님- 

오늘 독서에 보면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민족들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축복인 동시에 그의 사명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요. 그는 그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하느님과 천사들이 나그네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왔을 때 그들을 환대하고 잘 대접함으로써 복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모습이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어떨까.. 하는 걸 생각해 보았는데요. 떠오르는 것들이 내가 복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복이 되어주는 모습들만 많이 보는 거 같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이 파바박 지나갔는데요. 첫 번째는 어머니가 밭에 나가서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일하시는 거를 보는 거 자체가 저에게는 힘든 일인데요. 제가 바쁘고 힘들까봐 그러시는지 ‘요거 마무리하고 같이 해요~’ 해도 말을 안 들으십니다. 지금도 고구마 밭에 나갔다가 한참 일하고 들어오셨습니다. 또 그렇게 들어오셔서 쉬지 않고 밥을 차려주십니다. 그리고 몸에 좋다는 것들을 알아두셨다가 마시라고 일일이 챙겨주시는데요.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는 거 같고, 나에게 큰 복이 되어주시는 느낌이 듭니다.

 

두 번째는 점심 즈음에 복사기가 새로 와서 나갔다가 뵙게 된 신자 분들과 얘기하면서입니다. 신자들 재교육 때문에 복사기를 많이 쓸 거 같아서 복사기를 새로 구입하게 되었는데요. 복사기 하시는 신자분이 거의 원가에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장님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무실 자동잠금장치도 서비스로 주신다는 말을 들으면서 성당에 무료로 뭔가를 해 주시는구나.. 하면서 감사했는데요. 조금 있다가 수녀원에 왔다간 형제님과 얘기를 하면서도 ‘성당 일 하는데 돈 받을 수는 없잖아요. 또 시골이라 신자들도 많이 힘드실 텐데 원가로 자재 가져다가 일할 줄 아는 사람들과 노력봉사하면 되죠~’ 하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복이 되어주시는 모습을 새삼 바라보고 느끼게 된 거 같습니다.

 

세 번째는 대림기도 책자 준비를 하면서입니다. 잠깐 의견차이도 있었지만 함께 하고자 했던 친구들은 이번에도 함께 하겠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신부가 이번에는 편집하고 기도문을 만드는 것을 본인이 하겠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요. 그 말이 참 감사했습니다. 작년에도 그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차비 줄여서 조금 더 좋은 일에 쓴다고 직접 배달을 했는데요. 그 친구가 많이 다녔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편집과 기도문을 작성해 준다고 하여서 감사하고, 또 저에게 작은 복이 되어준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네 번째는 수확물을 보면서 스쳐지나간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제 오늘 고추도 빻고 호박이랑 수세미 즙도 내고, 깨도 말려놓고 했는데요. 그걸 보니 생각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없을 때 밭 가느라고 죽을 뻔했다고 한 할머님도 생각나고, 모종 가져다 주시느라고 고생한 자매님도 생각나고, 하우스를 통째로 빌려준 형제님도 생각났습니다. 또 제가 갈 때마다 외면하지 않고 작업을 도와주신 형제님과 자매님 얼굴도 생각이 나고, 고추를 말려주신 자매님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복이 되어주신 얼굴들 아닐까.. 합니다.

 

복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복을 너무 많이 받으며 살아가는 거 같네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걸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복이 되어주고 선물이 되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복이 되어주고 선물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다른 신부님이 해 준 이야기.. 참고: 두 분 다 머리털이 부족하시다.)

영성 훈화를 하시기 위해 주교님께서 신학교를 방문하셨다.

요즘 머리털이 나서 기르고 계신 영성 지도 신부님을 보고,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부님 머리가 조금 지저분해 보이는데 관리를 좀 하셔야겠어요."

그 말을 듣고 영성 지도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주교님 머리에 소중한 머리털이 자라난다면 그거 자르시겠어요?"

그 말을 듣고 주교님께서는 아무 말도 못하셨다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말씀과

행복은 일치합니다.


행복이 먼 것은

하느님 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충실한

몸과 마음의 힘입니다.


말씀과 함께 살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이들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만이

다시 태어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그것은 말씀이며

말씀은 모든 것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실천보다

더 큰 실천은 없습니다.


연약한 우리자신을

받아들이기에 

행복한 우리들이 됩니다.


약함을 어루만지는

실천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사랑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행복은

공허한 말잔치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말씀의 잔치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받아들였듯이

우리또한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살아있음의 나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견디며 지켜나가는

이 여정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실천임을 믿습니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는

평생 함께 해야 할

하느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건

하느님 말씀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위한

말씀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머니안에 사랑이 담겨있듯

말씀안에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존재는

우리의 어머니십니다. 


말씀안에 어머니가 계시고

어머니안에 말씀이 계십니다. 


어머니는 말씀을 낳고

말씀은 행복을 낳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

말씀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고통도 어머니에겐 기쁨이 됩니다.

말씀의 마음이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걸

다 잃는다해도 잃을 수 없는 것이

어머니같은 말씀입니다. 


어머니의 시간처럼

말씀은 자라납니다.

어머니의 세월처럼

말씀은 모든 걸 베풉니다. 


어머니처럼

말씀이 가까웠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처럼

말씀이라는 자식을 위해

말씀에 헌신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을 내려놓고

말씀을 듣고 지켜나갔던 어머니처럼

말씀이 전부가 되는

말씀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처럼

말씀을 부르고

말씀을 되내이는 하루 되십시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 영글어가고

말씀을 통해 행복한 만남이 됩니다.

말씀을 만나십시오.




 

결혼을 한 뒤에도 옛날의 애인을 그리워한다면 결혼생활이 과연 행복할까요? 지금의 배우자에게 최선을 다하며 사랑할 때에만 행복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지, 과거의 애인을 떠올리면서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들이 과거에 연연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과연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집착했을 때 우리들은 오히려 큰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그 과거의 좋은 기억이었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만 얽매여 있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만을 바라보고 세상의 일에만 연연하고 있으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 세상의 일이 좋아 보이고 행복해보이지만 참된 기쁨과 행복을 전달해주지 못합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렇게 행복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과 달리 오히려 불행의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예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 버스 안에 모든 사람이 앉아 있는데 자기만이 유일하게 자리가 없어서 서 있다는 것이지요. 신경질이 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서 있다고 해서 부끄러운 일일까요? 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혼자 서 있는 나를 비웃을까요? 아닙니다. 단지 약간의 불편함과 힘듦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버스는 어떤 상황에도 상관없이 목적지까지 나를 데려다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목적지까지 나를 데려다 줄 버스에 탔다는 것뿐입니다. 그 안에서 앉아서 또는 서서 가는 것은 목적지까지 가는데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알고 있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의 어려움과 힘듦 자체가 원래의 목적은 아니지요.


예수님을 보고 있던 군중 속의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세상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갖는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있어서 때로 우리에게 보여 지는 고통과 시련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이니까요.

주님 안에서 갖는 이 행복을 떠올리면서 세상의 유혹을 거뜬하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님께 청하기를 바랍니다.


미래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늘 우리를 초조하게 해. 그렇지만 초조해하면 안 돼.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과거와 달리 반드시 찾아오니까(에쿠니 가오리).


창조적 마인드

네덜란드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에는 쓰레기 문제로 늘 고민이었지요. 벌금이 높아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도저히 줄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시 곳곳에 쓰레기가 쌓였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하나 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물리는 대신 포상을 하면 어떨까?”

그래서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면 쓰레기통에서 멋진 노래나 칭찬의 말이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이 쓰레기통에 열광했지요. 이후에 사람들은 쓰레기를 그냥 아무데나 버리지 않고 일부러 멀리 가더라도 포상을 주는 쓰레기통에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시도하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두려움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라네요. 그런데 스스로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후자인 즐거움인 것입니다. 즐거움을 준다는 그 사실에 변화를 시도하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으로 나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임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노력에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참된 복

-김희준 신부님-

우리는 늘 성모송을 외웁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외우며 늘 성모님께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라 칭송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 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즉, 성모님께서 지극히 복되신 분이 되시는 이유는 단순히 훌륭한 아들을 낳고 기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앞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명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모님께 공경을 드리며 그분의 전구를 겸손되이 청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의 지혜로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에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순명하셨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순명과 믿음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공경하며 그와 같은 복을 더불어 받고자 전구를 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모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복을 얻어 누릴 수 있도록 성모송을 외우며, 겸손되이 말씀에 대한 순명과 실천을 통해 복된 이들 대열에 들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

- 나영훈 신부님-

저는 5년차 된 신부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제가 말을 더듬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미사 중에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몹시 부끄러웠고 죽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체 앞에 앉아 주님께 많이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다음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인데, 마치 저에게 하는 말씀처럼 들렸고, 그 말씀을 통해 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 주님의 은총으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에 대한 답변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어떤 여자의 처지에서 행복한 사람이란 혈연적인 관계가 좋은 사람입니다. 집안 좋고 돈 많고, 그래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말씀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 행복은 오직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행복하게 하는 아기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남자가 맛볼 수 없는 행복이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 하나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지만 그런 여자, 아니 엄마가 저는 부럽습니다.

그래서 남자나 결혼생활은 싫지만 아기는 갖고 싶어서 애만 낳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처럼 될 수 있다면 그렇게 아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나의 젖이 그렇게 맛이 있다니.

나의 젖이 그렇게 맛이 있어서 먹어도 또 먹고 싶다니.

얼마나 황홀한 아름다움이고 행복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런 아기를 낳을 수도 젖을 먹일 수도 없지요.

그러나 대신 제가 매일 같이 하는 말씀 나누기가 그렇게 맛이 있어서 저의 말씀 나누기를 맛보고 또 맛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도 매우 행복하겠지요.

나의 젖이 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젖으로 아기가 생명을 싱싱하게 누리고  나날이 자라는 것이 보인다면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런 아기가 없지요.

그러나 대신 제가 매일 같이 하는 말씀 나누기가 또는 저의 사랑이 누구의 생명을 싱싱하게 하고 누군가를 새록새록, 나날이 자라게 한다면 저는 아주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미의 젖을 찾고 어미의 젖으로 생명이 날로 자라는 것은 아기일 때 그러하고 어릴수록 더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 때는 엄마 젖만 찾고 엄마 젖으로 나날이 자라지만 조금 커지면 이유식을 먹고 더 커지면 엄마 젖이 아닌 다른 젖을 찾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엄마 젖을 먹고 크는 것이 보일 정도로 쑥쑥 컸는데 웬만큼 자라고 나면 먹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저의 말도 그렇습니다. 

저의 말이 젊은이들에게는 받아들여져 나날이 쑥쑥 성장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저의 말에 대해 ‘옳소’는 많이 하지만 그 말이 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께 늙은이들이 되면 하느님 사랑을 찾기는 많이 찾아도 하느님 말씀을 듣기는 많이 들어도 그 말씀이 우리를 그리 성장케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아기처럼, 마리아를 행복하게 하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행복하게 하는 아기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물이 가득한 아주 커다란 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이 독에 빠진 아이를 바라보면서 발을 구르며 “아이고! 큰일 났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요. 왜냐하면 독이 너무 커서 독 위로 올라가기도 힘들었지만, 올라가더라도 독 안의 아이를 꺼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어떤 꼬마 아이 하나가 큰 돌을 가져와 사정없이 항아리를 쳐버렸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항아리는 깨졌지만, 그 바람에 아이는 무사히 살아났습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독을 깨뜨리지 않고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걱정으로 상징되는 큰 독을 깨뜨리는 결단과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결단과 지혜와 용기가 바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도구가 됩니다. 특히 주님을 선택하는 결단,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생활하는 지혜, 세상의 그릇됨에 반대하는 용기는 분명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해줍니다. 이를 우리들은 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가 있지요. 


물론 화려한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는 결단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지혜를 간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는 용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역사학자였던 아놀드 조셉 토인비에게 누군가가 “역사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역사 그것 별것 아닐세. 우리 맘대로 못하는 게 역사일세. 역사는 전부 하느님이 맘대로 하신 걸세.”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그러면 우리가 역사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옷깃을 여미고 그 앞에 겸손해야 하는 것일세.”라고 답변했다고 하지요.

이 겸손의 삶이 앞서 말씀드린 겸손과 지혜와 용기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 앞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옷깃을 여미고 겸손하게 그 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함께 걸어가야 하는 행복의 길의 시작인 것이지요. 


나만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들어가야 하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서로가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모습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행해야 하는 결단, 지혜, 용기를 생각해 봅시다.


삶과 사랑은 서로 이해하는 것(‘내가 사는 삶’ 중에서)

아무도

삶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삶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며 성숙해 가는 것은

서로의 삶을 알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해 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삶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고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누군가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아픔을 알기에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씀 상본 

-김귀웅 신부님-

10년 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날 아침 일찍 성당 근처의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위로와 격려의 성경구절을 골라 종이에 프린트하여 사탕과 함께 돌돌 말아 진짜 말씀 사탕을 만들어 시험보러 오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떤 아이는 다른 친구의 것을 얻어 모아두기도 하였다는군요. 몇 해 전부터는 명함 만한 크기의 종이에다 제가 직접 찍은 사진과 성경구절을 넣어서 인쇄하고 코팅까지 해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각 단체 회합 때 말씀 상본을 하나씩 가져가서 그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해보자고 한 뒤 그런 경험을 다음 주 회합에서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그러나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회합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과 봉사에서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짧은 한 구절의 성경말씀을 살려고 노력했던 이들은 자신의 경험 끝에 늘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젖을 먹인 여인이기에 행복하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가 행복하답니다. 매주, 매일 성당에 나와 예수님을 모시기에 행복하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일상에서 노력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이 있습니다.




잘 새겨들으려면

-김지영-

오늘 말씀은 하느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성모님이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낳아 기르신 이유는 오직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복으로 가는 길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잘 듣는 것도 어렵습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좋은 것은 어려운가 봅니다. 사실 말씀을 잘 지키고 잘 듣는 것조차 어려운 것은 인간의 소통 수단인 말과 글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과 사람의 생각을 제대로 나타내기에 부족한 것이 말과 글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언어에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담았을 때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잘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리의 말씀은 종종 비유로 나타납니다. 진리를 말과 글, 곧 직설법으로 표현했을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과 시인들이 비유를 들어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말과 글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자연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천둥 번개와 함께 몰아치는 폭풍우, 폭풍우가 지난 뒤 활짝 갠 푸른 하늘과 산과 들, 바람과 꽃과 나무, 티 없이 맑게 웃는 아기의 얼굴, 사람보다 먼저 천하의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고 댓돌 밑에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 이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감동을 주고 경이로움을 자아냅니다. 자연은 말 이전의 말이며 글 이전의 글입니다. 때로 인간의 말과 글보다 훨씬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우리는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새로워집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어디에나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이든, 대자연의 말씀이든 잘 새겨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무지한 원리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또 말씀을 잘 새겨들으려면 센서, 곧 귀가 좋아야 합니다. 필경 깨끗한 마음,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이라면 내 귀가 더욱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제시된 복음은 무척 짧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복음말씀입니다.

3년간의 공생활 가운데 절정기를 보내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군중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목활동을 통해 하느님 무한하신 권능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감쪽같이 일으켜 세우시는가 하면, 지독하게도 떨어지지 않던 악령들도 예수님의 한 말씀에 하나같이 다들 나가 떨어졌습니다.

기적과 치유의 능력만 갖추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변도 얼마나 탁월한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입을 여셨다 하면, 주옥같은 말씀, 감칠 맛 나는 말씀이 샘물처럼 솟아나왔습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매너 좋지, 인물 좋지, 거기다가 겸손하지...

사람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 ‘뿅’ 갔습니다.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당신 자신으로 인해 모친 마리아까지 덩달아 칭송을 받으시니 예수님 입장에서 아주 기분이 뿌듯한 일입니다.

저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응답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무슨 뜻밖의 말씀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이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재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은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나자렛, 이스라엘에 안주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작은 시냇물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육적인 관계에 매달려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뜻을 성취하기 위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작은 물줄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참 신앙공동체는 폐쇄된 작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벽을 무너트립니다. 국경도 넘어섭니다. 민족도 초월합니다. 남녀, 빈부격차, 인종, 이념, 사상...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언젠가 큰 바다에서 이 세상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인류 전체가 크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표 유니폼

-김찬선 신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언젠지 정확히 기억치 못하지만 1980년대부터 교복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턴지 교복을 입는 학교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군대문화의 산물이고 획일화의 주범으로 몰려 없어졌다가 뭔 이유인지 모르지만 다시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복을 입지 않는 것이  개성, 자유로운 생각, 창의성 개발에 도움이 되지만 좋은 것 못지않게 나쁜 것이 있나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놀란 것은 수녀님들이 수도복을 입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남자 수도자들은 수도복을 입는데 수녀님들은 아예 입지 않는 것이 한국과는 반대 현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때 안식년 과정을 같이 한 수녀님들이 계셨는데 대부분은 안식년 마치고 무슨 일을 어디서 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받은 느낌은 공동체 안에서 소임을 받아 사는 수도자가 아니라 자기의 일을 가지고 각기 살아가는 직업인 같아 보였습니다.


옛날에 예비군일 때 신학교는 가톨릭 의대와 같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의사가 상당수였는데 그 점잖은 의사들이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똑같아집니다. 상스런 말을 일부러 하는 것 같고 괜히 일탈의 행동을 하곤 합니다. 그러니 어떤 옷을 입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옛날에 새로운 삶을 선택한 성인들과 그 추종자들은 통일된 옷을 입음으로써 자기들의 정체성을 공동 확인하고 같이 회개의 삶을 살고 같이 자기들의 공동 이상을 살아가는데 서로 자극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의 같은 자녀가 되었음을 얘기한 다음,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하고 복음을 생활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즉시 입던 옷을 벗어버리고 타우(T) 십자가 모습의 수도복을 입습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뜻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명 디자이너의 명품 옷을 입고 싶고 나의 개성을 한껏 드러내는 옷을 입고 싶을 때도 있지만 기꺼이 그리스도표 유니폼을 입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고 그 복장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행복한 어머니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가장 행복한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일까? 


오늘 어떤 여인(어머니)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낳아 기른 그 엄마는 얼마나 행복한 여인이겠느냐고 찬탄한다. 

엄마의 행복은 자식이 잘 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자식이 공부 잘 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짝을 만나서 잘 먹고 잘 산다면 그게 낙인양 생각한다. 

그런 자식 만들기 위해 쌩~ 고생을 다 한다. 


오늘 그 여인은 왜 예수님의 엄마가 부러웠을까? 

저렇게 훌륭한 랍비, 저렇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전해 주는 젊은이를 보면서 찬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현세적인 것 안에서 자식 잘 되는 것만 바라는 보통의 우리네 엄마들과는 조금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좀 특별하다. 

자칫 당신 어머니가 들으면 좀 섭섭해 하실지도 모를 표현이다. 

나를 기르고 젖먹인 그 어머니가 행복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표현은 자식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기르고 가르치고 젖먹이는 그 어머니의 행복도 행복이겠지만 실제로 당신 어머니가 복되신 것은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었다는 그 사실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하고 순종하고 그분의 말씀을 잘 지키신 분이기 때문에 더욱 행복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행복관을 한 단계 더 성숙시켜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의 행복이 단순히 자식 잘 되는 것이 전부라면 이는 현세적인 행복일지는 몰라도 사실 부서지기 쉬운 행복일 것이다. 

자식이 내가 바라는 대로 다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공들인 만큼 내가 사랑을 쏟아 부은 만큼 뜻대로 다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에 거기에만 행복의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모님처럼 하느님께서 이 자식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묵상할 줄 알고 내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이 되도록 내맡기는 것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아닐까?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내가 바라는 대로 자식들이 성장해 주기만 바라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식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려주고 기도해 주고 있는지... 

어떻게 보면 하느님이 진짜 내 자식의 아버지요 나는 요셉과 마리아처럼 그의 양아버지, 양어머니 역할로 불림받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이고 가장 행복한 부모의 길이 아닐까?




<독서강론> : 우리의 은신처이시며 산채이신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예언자는 주님께서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뭇 민족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한다. 뭇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악행에 대해 갚아주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가고 그들의 땅을 빼앗으며 그들을 팔아넘긴 모든 죄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 백성에게는 은신처가 되시고 산채가 되시어 이들을 살리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머무르시며 예루살렘이 거룩한 땅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날 유다의 땅은 산마다 포도즙이 흐르고 언덕마다 젖이 흥건하며 시냇물이 넘쳐흐르듯이 그렇게 차고 넘치는 풍요로운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당신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당신을 거역한 민족들은 쑥밭이 되고 허허벌판이 되어 황폐할 것이며, 그들은 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예언한다.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인하여 백성과 가축들조차 굶주리고 하느님께 봉헌할 제물조차 없는 상황을 통하여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다가옴을 보았다. 주님의 날은 악에 대한 심판의 날이며 종말의 날이다. 그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시작되는 날이다. 


때문에 주님의 날은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악을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을 거스른 다른 민족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르며 하느님을 섬긴 유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은 단순히 세상종말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이 새롭게 시작하는 새 시대의 날이라고 예언자는 예언한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의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또한 율법이나 제사에 충실한 것만으로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해야만 된다. 가슴을 찢는 참다운 회개를 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풍성히 내려 주신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예언자가 된다. 저마다 예언자처럼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3,1-2).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을 참된 마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다(3,5). 


인생이란 죽음을 향한 여정이기도 하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물질과 능력, 인간관계나 사랑까지도 모두 앗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죽음은 곧 파멸이요 허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들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허무이며 파멸이겠지만,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관문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개개인의 죽음이란 곧 개개인이 맞는 주님의 날이다. 


주님의 날을 선포하는 예언자 요엘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하느님을 향하는 회개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권고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격려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이름을 참된 마음으로 부름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도록 격려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은신처이며 산채임을 전하며 주님 안에서 생명의 샘물을 마시도록 초대한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가치와 기준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느님께 둠으로써 하느님께 충실하자. 우리의 은신처이며 산채이신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복을 누릴 것을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 신앙인이 되자............◆




 

얼마 전, 동창모임을 갔다가 어떤 동창신부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왜 뜬금없이 고맙다고 하는지 의외였지요. 그런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네요. 


“정말로 강론 준비가 안 되어서 급할 때는 네 묵상 글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 변함없이 매일 올려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계속 묵상 글 멈추지 않고 올려주었으면 좋겠어.”


그 신부는 신학생 때 저보다 훨씬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친구였습니다. 또한 못하는 것이 거의 없는 만능 신부였지요. 그러다보니 학창 시절에 이 친구의 능력과 재주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서 이 친구를 비롯해서 오히려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하긴 며칠 전에는 신학생 때 같은 방을 썼던 동창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것을 신자들이 알까? 아침에 못 일어나서 내가 깨워주고, 지저분하게 살았던 그 모습을 상상이나 할까?”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은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다릅니다. 이렇게 변한 이유는 바로 주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다보니 이렇게 변할 수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보니 이렇게 바뀔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주님을 몰랐더라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구멍가게 주인? 조그마한 회사의 샐러리맨? 혹시 예전에 탁구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탁구장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덕분에 출세한 것이지요. 주님 덕분에 이렇게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저에게만 특별히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많은 특권을 누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충만하게 베풀어주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잠시 뒤의 시간에서 바라볼 때 주님의 이끄심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복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이렇게 정의를 내려 주시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할까를 이야기하지요. 이렇게 훌륭한 분을 낳았다는 이유때문이지요. 그러나 더 행복한 사람은 세상의 판단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충만하게 받고 또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전에는 결코 산의 높이를 재지 말라. 정상에 오르면 그 산이 얼마나 낮은지 알게 될 것이다(다그 함마르셀드). 


성공한 인생(전하진)

나는 가끔 등산을 간다.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로 정상 주변에 가면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완만하던 길도 정상 주변에 가면 경사가 심해진다. 산을 자주 오르던 사람들은 가쁜 숨을 내쉬게 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 산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파른 정상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그러다 중간에서 정상을 쳐다보며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한다. 그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아직도 저만큼 더 가야 되나, 그렇게 높이는 못 올라가’라며 그 산을 오를 수 없는 수십 가지의 이유를 만들어 스스로의 의식 속에 심어 넣는다. 그리고 그들의 이식 속에는 이제 그 정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높은 산으로 남고 만다. 그들의 마음이 깨어나기 전에는 절대 그 산을 다시 오르진 못할 것이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큰 꿈을 꾸라고 하는데 큰 꿈을 꾸면 꿀수록 마치 초보자가 높은 산을 오르듯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없다는 것은 마치 배가 행선지도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배는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아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바다 위를 떠돌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표류하게 되지 않겠는가.

인생의 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크든 작든 자신이 가고자 하는 행선지는 정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하루하루의 삶이 의미가 있다. 마음에 꿈을 품었다면 그 이후에는 오로지 순간에 집중하면 된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긴 인생 여정을 잘게 나눠 보면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이루어진 한발 한발이 결국은 나를 정상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자신감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자신감이라 생각한다. 이런 자신감과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꾸준하게 도전을 지속하는 삶이야말로 천재적인 머리나 훌륭한 육체 그리고 사회적 배경이나 재산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성공의 무기임을 명심하라. 세상에 지름길은 없다. 단지 내가 선택한 길이 있을 뿐 그 길을 걸으며 자신이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인생 아니겠는가.




비록 자궁과 젖가슴이 없어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저처럼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둔 사람이라면 훌륭한 자식을 둔 것이 가장 큰 행복일 것입니다.

기업은 잘 키워놨지만 자식을 잘못 키웠다면 아마 자신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자식을 둔 사람을 무엇보다 부러워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자궁과 젖가슴은 행복하다고 하며 부러워합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도 젖가슴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다른 것은 여자가 안 부러운데 아기에게 젖을 물릴 수 있는 것만은 여자가 부럽습니다.

아기에게 생명을 주는 젖은 얼마나 숭고합니까?

젖을 물릴 아기가 있는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저는 젖이 없고 아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저와 여인을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복음의 다른 데(루카 8,28)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성모 마리아처럼 당신의 어머니가 되고 그래서 행복하다 하십니다.


그래서 비록 자궁은 없어도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마리아의 젖가슴은 아니지만 선행을 실천하면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보통 성지는 성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요즘 한국은 성지가 아주 잘 가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 유럽도 매우 많은 성지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지는 비단 그분이 사셨던 아씨시만이 아니라 그분이 돌아다니신 모든 곳이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스쳐간 곳은 모두 성지가 되었습니다.

성지는 거룩한 땅이란 뜻이지만 그 거룩한 땅에 사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거룩해 질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성지 안에 산다고 해서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지는 다만 성인들의 발자취를 기리고 그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분들이 스쳐 지나갔다고 해서 그 땅이 거룩해지고 그 안에 사는 사람도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순례자들은 성지에 도장을 찍고 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성인들의 삶을 본받고 그 삶을 실천해 나갈 때 비로소 거룩해집니다.

이스라엘 예수님의 성지엔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고 예수님께서 사신 곳에 살아도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통적인 사고방식은 거룩한 것과 접하면 거룩해지고 부정한 것과 접하면 부정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사제나 레위인들이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고 멀찌감치 돌아서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사고방식을 고치는데 매우 큰 노력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거룩한 것과 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거룩한 뜻을 실천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당신도 죽기까지 아버지 뜻을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정통적인 이스라엘 사람의 생각을 지닌 한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이렇게 칭송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성인들이 스쳐지나갔던 곳들이 성지가 된다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열 달을 머무신 성모님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얼마나 거룩해 졌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 단지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젖을 먹여 키운 것 때문에 복되시고 거룩하게 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거룩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께서 “주님의 종이오니,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여인 중에 복되신 여인이 되신 것이지 단지 예수님을 나았기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당 다닌다고 해서, 성경을 옆에 끼고 다닌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당이나 성경 자체는 거룩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쌀이 있다면 그것으로 밥을 해서 먹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 몫입니다. 먹지 않으면 그 쌀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과 삼년씩이나 깊은 관계를 맺으며 함께 있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룩한 분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거룩해지지 않았기에 더욱 책망 받을 이유가 큽니다. 우리도 미사를 하고 성체를 영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구원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면서도 성체의 참 뜻을 실천하며 살지 않았다면 더 큰 책망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면, 혹은 미사에 참례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좋고 거룩한 것을 지니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삶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차룡 신부님-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군중 속에 어떤 여인이 예수님 말씀에 대한 뜨거운 감동과 감탄을 나타내려고 여성답게 그분 어머니를 칭찬하였습니다. 자식의 위대함은 어머니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아들을 낳고 기른 어머니는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예언(루가 1,42-45)과 마니피캇(루가 1,48)의 첫 성취였습니다. 교회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라고 표현된 이 여인의 호칭을 동정녀 마리아께 드립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칭찬을 인정하셨으나 초자연적 질서가 얼마나 자연적 질서보다 뛰어나는가를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 완전한 전형이요 모델이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성모님은 정녕 복되신 분이십니다. 영광의 아들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이시기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이기에 복되신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는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수고보다 더 큰 수고는 없습니다. 성모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사촌 엘리사벳이 성모님에게 "당신은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되신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가졌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함께 따라가며 고통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내 가족과 친구와 가까운 이웃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진리이신 말씀을 거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나 혼자만의 행복을 누리며 살 것입니까?


행복은 더불어 함께 함에 있습니다. 자식의 불행은 어머니의 아픔이요 자식의 행복은 어머니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방탕한 자식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희생기도를 바친 어머니 모니카의 생애는 성모님의 생애와 다를 바 없으며 자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모습입니다. 성녀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는 모니카에게 암브로시오 성인이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식은 잘못된 법이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고향인 북아프리카에서 로마로 가면서 어머니를 따돌리려고 출항시간을 거짓말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도 모니카는 다른 배를 타고 아들을 쫓아갔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귀찮을 정도로 아들을 따라다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따돌리려고 자기만의 원을 그렸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더 큰사랑의 원으로 아들을 품었습니다.


오늘 내가 사랑의 원을 그려 품어야 자식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의 어머니들이여! 귀찮을 정도로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희생기도를 바치며 자식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면 많은 자녀와 젊은이들이 교회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네 신앙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무사안일한 마음으로는 자식이 예수님 안에서의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혼배미사나 관면혼배 또는 장례미사때에야 볼 수 있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성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단 10분이라도 기도하는 가정은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요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들은 구원의 진리를 내가 먼저 몸으로 살고 가족들과 친척, 직장 동료와 이웃사람들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성녀의 마지막 임종시 유언의 말씀입니다."아들아, 내게 있어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 것도 없다. 현세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 내가 이 세상에서 더 살고 싶은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주께서 과분하게 나에게 이런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향락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그리고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마마보이

-김정대 신부님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은 가끔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식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을 누가 나무라랴?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강인함은 자식을 키우면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물론 다른 문화권 어머니들도 마찬가지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남성 중심적이다. 남아를 선호해서 무죄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이나, 결혼을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남편 쪽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한 여자는 자신의 신원을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누구의 아내, 또는 누구의 엄마라는 종속된 인격체로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이런 구조에서 아이에게 집착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물심양면으로 자식에게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 자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다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한탄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단지 그 자식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의 배우자가 되는 사람한테도 영향을 준다. 그래서 새로 결성된 가정은 독립성을 잃고 엄청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자식에 대한 무질서한 집착 때문에 마마보이로 만들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 최영균 신부님 -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말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할 뿐 아니라 어떤 실행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많은 경우 말로 사람의 마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말하는 능력만 있고 듣는 능력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봅시다.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댈 것입니다. 거기엔 말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물원의 동물이 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같아질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언어행위에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말을 잘 하지만 듣는 것에는 서툽니다. 잘 들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고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특히 진리를 행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진리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명’이라는 말은 영어로 ‘Obedience’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ob’이라는 말과 ‘audire’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즉 ‘…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순명입니다. 진리에 순명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나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에 대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그만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어질 것입니다.




행복한 여인

-강영구 신부님-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대에게

아침저녁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기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지요. 규칙적인 생활과 체온 관리가 감기를 예방하는 길입니다.


저는 지금 어머니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늘 어머니께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5남1녀를 낳아 젖을 먹이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래도 환갑이 다 된 신부(神父) 아들 때문에 오늘도 로사리오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시집 장가 간 다른 자식들과 달리 신부(神父) 아들은 부뚜막에 앉혀 논 아이처럼 한 순간도 안심할 수 없으신 모양입니다. 사제(司祭)의 길을 가는 저는 불효막심(不孝莫甚)한 쌍놈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쳐다보면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만한 불효자(不孝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때문에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임신하던 순간부터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비명횡사(非命橫死)할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불효 중의 불효는 부모 앞서 죽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입니다.

그래도 성모님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된 여인’(루가1,42)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모자지간(母子之間)이라는 혈연(血緣) 때문에 복된 여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십니다.”(루가1,45)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린 성모님은 성당 앞뜰의 뿌리 깊은 느티나무처럼 폭풍우 같은 시련과 유혹,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었습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킨’(루가 11,28) 복된 여인입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특별한 수녀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겸손하시고, 온유하신지, 또 소리 없이 많은 일을 거뜬히 해내시는지 신자들로부터 ‘살아있는 성모님’으로 통합니다.


수녀님과 한번 인연을 맺은 신자들은 얼마나 수녀님께 매료되는지, 그리고 존경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수녀님을 한번 만난 많은 사람들은 앞 다투어 수녀님의 팬클럽에 가입합니다. 수녀님의 영성과 정신,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에.


그런 수녀님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인품도 인품이지만, 탁월한 친화력과 중재력이 비결이었습니다.


이 수녀님의 특기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소지가 발생하면 아주 조용히, 지혜롭게, 소리 없이 개입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크게 하지 않습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빠져나가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습니다. 수녀님 자신이 본당 굳은 일은 거의 다 뒷전에서 도맡아하십니다. 그리고 뭔가 하나라도 잘 되면, 주임 신부님 덕분이라고, 작은 수녀님이 수고하셨다고, 신자여러분들이 잘 협조해주셨다고 칭찬하고 자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물론 신자들을 향해 거짓말도 많이 하십니다.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들께서 얼마나 신자 여러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고, 자나 깨나 신자들의 영성생활 성장을 위해 노심초사하시고, 오직 신자 여러분들 영혼구원만을 위해 존재하신다고 약간의 ‘뻥’을 칩니다.


그리고 신부님에게도 거짓말을 종종 하십니다. 신자들이 끔찍이도 신부님 생각한다고. 이런 좋은 신자들 처음이라고.


그러니 가시는 본당마다 갈등이나 불화가 생겨날 이유가 없습니다. 평화롭습니다. 늘 화기애애합니다.


한 사람의 그런 희생과 중재, 헌신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녀님의 그런 모습에 감동한 신부님, 사목위원들, 단체장들도 수녀님을 따라서 겸손하게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행복의 비결은 헌신이고, 희생이고, 자기낮춤이고,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들으셨을 때 몹시 섭섭해 하셨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적어도 이 정도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저희 어머님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저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묵묵히 많은 수고를 해 오신 분입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매정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참으로 성모님께서 들으셨다면 섭섭해 하실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 말씀의 배경에는 보다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나는 이제 인류구원이란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혈육과 가정과 부모와 고향을 떠나갑니다. 우리 어머님, 생각하면 제대로 한번 챙겨드리지 못해 늘 안쓰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면, 제가 더 이상 나자렛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제 어머님을 떠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지상과제인 인류전체의 구원을 위해 미련 없이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나갑니다.”


이런 예수님의 출가 선언 앞에 성모님 역시 아쉽지만 예수님을 떠나보냅니다. 10달 동안이나 자신의 배속에 들어있었던 예수님, 낳고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다했기에 애착이 가지 않은 수 없는 예수님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미련 없이 떠나보냅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Fiat(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도 가끔은 기쁘게 “예!”라고 응답합니다.


“생맥주 한잔하러 가자”는 형제들의 초대 앞에 저는 만사를 제쳐두고 기쁘게 일어섭니다. 뿐만 아니라 “손맛 좀 보러가자”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설레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낚시도구 챙깁니다.


이런 Fiat은 진정한 Fiat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다하는 Fiat이니까요. 진정한 Fiat은 바로 성모님의 Fiat입니다. 고통스러운 길, 정말 가기 싫은 가시밭길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주님을 위한 길이기에 기꺼이 길 떠나는 Fiat이야말로 진정한 Fiat입니다.


다가오는 삶의 모든 국면들이나 사건들,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고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직면하는 자세가 진정한 Fiat의 자세입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 억울하기 그지없는 사건들 앞에서도 나대지 않고 조용히 마음에 간직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자세야말로 참 Fiat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 새로운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됩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 계시는 계약의 궤가 됩니다.




서보효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는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학생 때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지금은 좀 고생스럽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행복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좋은 대학교 들어가고, 또 열심히 공부한 덕에 좋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직장에서도 고생스럽지만 열심히 일해야 돈을 많이 벌고 행복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고생하며 살아갑니다.


과연 이러한 노력의 결과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일까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처럼 이러한 행복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는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며 외칩니다. 

놀라운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 여인은 행복을 예수님의 어머니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복은 그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지 않는 인간 욕망에서 나오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참다운 행복,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행복의 조건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쳐다보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세에서만이 아니라 현세에서 이미 참다운 행복을 누립니다. 

천국의 맛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행복은 어떠한 협박과 박해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우리들의 순교 성인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행복한 사람입니까? 내 십자가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있을 때, 아니 삶의 중심에 있을 때 그때야 비로써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박성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자녀입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부모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면 자녀 된 입장에서는 그 보다 더 큰 칭찬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녀의 부모도 자녀를 키운 보람을 맛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의 부모님과 자녀들을 생각해 봅시다. 과연 나는 부모님께 어떤 자녀일까? 또 내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일까?


모든 인간은 자연인 한 사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좁게는 가족, 넓게는 모든 인간과 깊이 연결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행위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칭찬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고, 비난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지만 결코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됩니다. 신앙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철저히 내버려진 고독한 존재가 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인간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넓게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인간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매우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처럼 학연과 지연 등을 습관처럼 따지는 사회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첫째, 자기 스스로가 강한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강력한 결속력을 보이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가족 관계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가족이란 이름 앞에서는 강한 책임감과 소속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개인사에서는 의형제 혹은 의자매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사회에서는 각종 단체들이 자매결연의 관계를 맺습니다.


둘째, 상대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뢰감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불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한 아무리 장엄하고 근사한 행사를 통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기본인 부부지간에서부터 모든 관계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입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신뢰감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는 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명하고 개인적으로는 손가락 걸며 굳게 약속 다짐을 합니다.


셋째, 자신의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소속감도 있고 신뢰심도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한다면 이것은 마치 펑크난 타이어인 채로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상 함께 생각 해본 바와 같이 올바른 관계 형성과 유지를 위해 소속감, 신뢰감 그리고 맡은 바를 책임 있게 실천하는 것이 상대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인간 관계에서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 나갈 때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참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한 영적 가족공동체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일년 365일의 매일미사 복음 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으로 기억된다. 비록 단 두절의 복음이긴 하나 그 담고 있는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감격하여 외친 행복찬사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찬사로 엮어져 있다. 희랍어 원문(原文)을 보면 "복되도다! 당신을 품은 태와 당신이 먹고 자란 젖은!"(27절) 하고 여인이 외쳤다. 여기서 태와 젖은 어머니를 가리키는 비유법으로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아들이 잘되어 존경을 받으면 그를 낳아 기른 부모도 덩달아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제자가 잘되면 스승이, 부하가 잘되면 상관이,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덩달아 기뻐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며, 사람들은 당사자뿐 아니라 당연히 그들을 가르치고 키운 사람들까지 존경하고 부러워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계산법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다. 예수님은 진정 당신을 따르는 방법으로 모든 혈통과 인연과의 단절뿐 아니라 모든 물질적 소유와의 이별을 요구하셨고, 심지어는 자기자신마저 버릴 것을 요구하셨다.(마태 19,29; 마르 8,34) 그분은 세상에 칼을 내리쳐 가족끼리 서로 맞서게 하려 하셨다.(마태 10,34-35)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만나려고 했을 때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들인가?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마태 12,48-50; 마르 3,33-35; 루가 8,20-21)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적이고 물리적인 혈통에 근거를 둔 가족공동체의 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그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새로운 의미의 영적(靈的) 가족공동체를 선포하신 것이다.

오늘 복음이 함께 외치는 한 여인의 마리아에 대한 행복찬사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 찬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실존(實存) 속에서 유효성을 가진다. 즉 여인이 외친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행복찬사가 예수님의 대응찬사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다. 여인이 감격하여 침묵을 깨고 예수의 어머니를 행복하다고 외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감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응찬사는 당신의 어머니를 외면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여인임을, 그래서 가장 행복한 여인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고 대답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실현되도록 사셨던 분이 아니신가?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비록 당신의 삶이 외롭고 힘들었을지언정 모든 여인 중에 복되시고, 모든 복된 사람들 중에 진복자(眞福者)가 되신 것이며, 영적 가족공동체의 어머니이시다




오히려 행복하다(루가11,27-28)

-유광수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을 보고 군중이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같은 여인으로서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식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아들을 생각할 때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행복관이다. 사실 어머니들의 행복은 자식들이 잘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식이 좋은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 여인은 소박한 여인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여인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기 위해 쏟았던 정성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이 말한 행복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 행복은 여인이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얻어진 행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행복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것을 정성껏 돌보고 가꾼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정성껏 가꾸고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이 육체의 모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라는 표현은 영적인 모성적인 표현이다. 다만 인간적인 모성이냐 영적인 모성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육체적인 모성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듯이 영적인 모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모성애는 행복의 근원이다. 다만 무엇을 배에 잉태하고 가슴에 안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은 제한적이고 또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도 있는 행복이다. 빼앗길 수 있는 행복이다. 불안한 행복이요 변할 수 있는 행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요, 영원한 행복, 늘 함께 할 수 있는 행복, 변치 않는 행복이다. 아무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맛보는 행복 그 이상의 행복 즉 영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여인이 생명을 배고 젖을 먹이듯이 그런 정성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태에 배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이는 정성과 사랑을 쏟는 이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꼭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든다. 자식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는 모성의 정열을 말한다. 자식과 운명을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그 합일의 정열이야말로 여성의 본능이며 위대함이기도 하다. 사실, 한자에서는 여성과 자식을 안데 합쳐서 "좋다"(好)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스칼은 합일의 정열만으로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식의 어리광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식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어머니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성의 "분리의 정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의 별개의 인간으로 나뉘는 사랑이다.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인 것이다. 사실 태아는 어느새 모태에서 미끄러져 나와 곧이어 젖이 떨어지고 마침내는 창세기의 결혼관에 나오듯이 "어버이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간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최종 단계를 다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를 멀리 놓아 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육이란,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을 말한다.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끔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서 세상을 비관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독립시켜 준 그만큼 자식은 부모를 독립시켜 주는 셈이고 그것이야 말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보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식의 도약대로서 짓밣히고, 자식의 비료로서 썩어갈 각오가 어머니 쪽에 있을 때에 비로소 자식은 주체성을 지닌 인격으로 커나가는 것이다. 

가장 숭고한 모성애는 "합일의 정열"이 아니라 그야말로 "분리의 정열" 속에 있음을 마리아는 몸소 증거해 보이셨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말한 행복은 자식과의 일치 즉 자식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다. 인간적인 행복관은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을 언젠가는 빼앗기기 때문에 서글프고 허전하고 외로운 행복관이라면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은 이별이 없는 영원히 함께 사는 행복관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인 합일의 정열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관이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이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의 행복

권혁주 주교님

예수님이 권위 있는 말씀으로 군중을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여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하고 말합니다. 여인의 이 말은 우선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탄복하는 말입니다. 이런 아들을 둔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며 한 여인으로서 최대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상상하며 꿈꾸는 모습입니다. 

예수께 드린 이 말씀은 분명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시며 은근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님은 마리아를 모범으로 우리도 이런 행복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예수님은 마리아의 진정한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시고, 이로써 우리 각자에게도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이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십니다.”(「주님의 말씀」 124항)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행복하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믿음으로 당신 안에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요한 1,14) 당신의 아들을 받아들이시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믿고 기꺼이 받아들인 마리아의 이 행복이 죄 많은 우리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간절한 심정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의 행복은 이미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8)




<지금 행복>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여기서 '이 말씀'은 '베엘제불과 악령'에 관한 말씀(루카 11,17-26)일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말을 하는데, 어떤 여자는 반대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여자의 말에서 '행복합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말은 '당신의 어머니는 틀림없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다.' 라는 뜻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음을 인정한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조금 수정하십니다.

'오히려'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렇기도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내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분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넓게 생각하면,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축복(행복)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미래의 축복(행복)이 아니라 현재의 축복(행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

나중에 축복(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신다는 말은 마리아 쪽에서도 주님과 함께 산다는 뜻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말은 미래의 일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일에 대한 증언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는 상태이고, 주님께서 '지금' 마리아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마리아의 기쁨과 행복은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또 엘리사벳은 이렇게 마리아와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엘리사벳의 찬양도 미래의 행복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현재의 행복에 대한 찬양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7)"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루카 9,23)'과 같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서 흔히 인내, 고통, 고난 같은 말을 연상하는데,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들기만 하고 그 자체에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나중에 하느님 나라의 축복(행복)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지금 행복하기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나중에 행복하게 된다는 것만 믿고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는 생활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갑니다.

십자가는 힘들지만,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을 기뻐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쁨 없이 원망하고 저주하고 분노하고 불평하면서 조금 지고 가다가 결국 포기합니다.

"찡그린 성인은 없다." 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그 많은 성인 성녀들은 모두 '기쁨'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




하느님 말씀 한마디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탄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향해 성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 한마디로 우리는 모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진심으로 뉘우칠 수 있고 오늘 하루 기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이렇듯 말씀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 하나하나에 하느님 마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생명의 빛이 있고 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자리에 가득 차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해 주신 그분의 넉넉한 사랑을 우리가 기억해 낼 수 있으며 참으로 가슴 설레는 행복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는 하느님만을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 찾아 주는 가장 본질적인 생명의 말씀을 이제 더는 나태함으로 잃어버리지 맙시다. 저 또한 하느님 말씀 한마디로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이 귀중한 말씀이 우리 모두를 빛나게 합니다. 

살아 있게 합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참 행복의 순간

-김대한 신부님-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 보면 지나간 추억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모든 기억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억으로 남은 것들은 늘 행복해 보여서인지 ‘그땐 참 행복했는데!’라는 말을 되뇌며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땐 그때 나름대로 많이 힘들었는데도 지나고 나니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우습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하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에 주님을 품고 살아가던 가슴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님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행복은 추억에 머물 뿐인 지나간 것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주님을 믿고 그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행복이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며 살아가셨기에,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씀을 남기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제’ 행복했던 우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마지막 ‘오늘’까지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새로운 세상의 ‘오늘’도 늘 당신 곁에서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고통스러운 그러나 행복한 자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고통스러운 그러나 행복한 자궁.

불가능한 일이지만 저는 아기의 임신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경험이 불가능하니 이 글을 읽으시는 어머니들께서는 임신하셨을 때 그 느낌을 댓글로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튼 경험이 없기에 상상을 한다면 아기의 임신은 매우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전철을 타면 임산부 석이 있고, 임산부 석 위에 보면 임산부가 얼마나 힘든지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임산부는 몇 십 권의 책을 배 위로 늘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이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의 그림입니다.


입덧은 어떻습니까?

아기가 들어서면 더 헛헛하고 많이 먹어야 하는데 입덧 때문에 오히려 먹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새끼를 밴 개들이 헛헛해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봤고, 가끔 약 먹고 죽은 쥐를 먹고 죽은 어미 개를 본 적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상상하는 임신의 괴로움의 전부인데 이것 말고도 괴로움이 많고도 많겠지요?


임신은 이렇게 임산부를 괴롭게 하지만 또한 행복하게 할 것 같습니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고통은 행복할 것 같습니다.

태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을 느낄 때 행복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서 한 생명이 시작되고 자란다니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대단한 생명을 내 안에 모시고 키우기 위해 낭만적인 행복은 불가합니다.

고통 없이 생명을 모시는 것은 불경스럽습니다.

그래서 입덧이 있나 생각합니다.


입덧은 음식에 예민해지고 까탈스러워지는 것인데, 음식을 막 먹어서는 안 되고 이전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됨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함부로 몸을 굴리지 말고 아기 중심으로 삶을 바꾸라는 요구이고,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며,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가 되는 것임을 인식하라는 것이겠지요.


육신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해 이렇게 입덧이 있어야 한다면 영신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해서는 어떤 입덧이 있어야 할까요?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해 입덧을 한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해 입덧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해 이전의 모든 잡스런 소리들을 다 거부하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출산하기 위해 이전의 모든 못된 행실을 그만 둬야 합니다.


아기를 위해 태교를 하고 그런 음악을 듣듯 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도 하듯 하느님의 말씀을 입으로뿐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였기에 행복한 여인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였기에 여인 중의 복된 여인인 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얻은 참행복, 인류의 꿈

- 이요한 신부님-

우리는 소화 데레사 대축일부터 오늘까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참된 자유와 그것의 중요성, 얻는 방법, 그리고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우리 선조들은 이 진리를 듣고 싶었으나 때가 되지 않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하느님의 진리를 듣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악마들은 이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말 성령께 지혜를 청해야 할 때입니다. 참되고 중요한 정보를 골라내고 정리하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지는 우리의 시간은 매 초 매 초 소중한 것입니다.


참행복은 바로 이런 소중한 시간에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자유를 얻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 자유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 하느님 뜻에 노예가 되는 것 같지만, 하느님의 뜻이 바로 우리를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 인류 본연의 꿈을 하느님의 뜻을 소유함으로써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이 참행복을 차지하시길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합니다. 아멘.




 

그저께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제가 한 달치 강론 원고 쓰느라 무척 정신없다는 것을 알려드렸지요. 그리고 그저께는 하루 종일 글이나 쓰겠다고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지까지 했는데 과연 며칠 분량의 글을 썼을까요? 딱 열흘치의 묵상 글을 썼습니다. 그 열흘치의 글을 쓰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정말로 힘든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조금만 부지런했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 텐데…….’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뿐이었습니다. 


어제도 또 이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지금 이 묵상 글을 하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하신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정작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묵상 글 쓰는 것을 하나의 일로만 생각했으며, 그만큼 귀찮고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스스로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저께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열흘치의 묵상 글 쓰는 것도 힘들어 했는데, 어제는 반나절만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는데도 열흘 치 묵상 글을 다 쓰는 것은 물론 수험생에게 힘이 되어주는 글(현재 본당의 수험생들에게 매일 전달되는 글입니다)까지도 일주일 치나 썼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을 간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나를 변화시킴은 물론 내 주위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랑을 머릿속에만 간직할 뿐 실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들은 나와 연관된 세상을 사랑하는 데에만 온갖 정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에 대해서 다시금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랑은 특별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와 관심 안에서도 큰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보면 어떨까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 사랑을 해보세요.


실수 속에서 장점 찾기('행복한 동행' 중에서)

한때 영국 수상을 지냈던 윌슨이 겪었던 일이다.

어느 날 윌슨은 광장에 모인 대중에게 정책 추진에 관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당시 광장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가 한창 연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청중석에서 달걀이 날아들었다. 달걀이 윌슨의 얼굴을 강타하자 경호원들은 재빠르게 인파 속으로 들어가 범인을 색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달걀을 던진 사람은 어린아이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윌슨은 일단 꼬마를 풀어 주라고 지시하고, 대중이 보는 앞에서 아이의 이름과 집, 전화번호, 주소를 기록하게 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윌슨 아이를 처벌하려는 게 분명하다며 수근거렸다.

이때 윌슨이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때로는 상대방의 실수 속에서 의외의 성과를 건질 수도 있습니다. 방금 저 어린아이가 나에게 달걀을 던진 것은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영제국의 수상으로서 나라를 위해 공헌할 될성부른 인재를 발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렇게 먼 곳에서도 달걀을 정확하게 내 얼굴에 명중시키다니 저 아이는 분명 던지기에 비범한 재주를 지녔을 것입니다. 이름을 기록해 둔 것은 저 아이를 어릴 때부터 집중 훈련시켜 장래 구위를 선양하는 훌륭한 야구 선수로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윌슨의 말에 관중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며 감탄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양승국 신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주교이셨던 바실 흄 추기경님께서는 기도의 전문가로 손꼽히셨습니다. 기도하기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추기경님의 말씀은 큰 도움으로 다가옵니다. 추기경님께서 내린 기도에 대한 정의도 아주 명료합니다.


“기도란 나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기도의 길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기에,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도록 권유하셨습니다.


바라보기:

“저는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병석에 누워서는 기도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저는 장기 입원환자 또는 중환자들에게 십자가에 입 맞추는 것으로 충분한 기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기도입니다. 다른 기도는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귀 기울이기:

“성전에 들어섰을 때 멋진 성가대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성가를 음미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집중시킵니다.”


“때로는 말 대신 침묵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그저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가 그분의 팔 안에 혹은 그분 곁에 있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느끼기:

“어떤 이유로든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은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우리는 비참한 감정에 젖은 채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너무 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하느님의 현존 안에 그대로 머무십시오.”


쓰기:

“쓰는 것은 제게 매우 유용한 기도 방법입니다. 특히 과로하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또는 걱정거리가 있거나 머릿속이 잡념으로 가득할 때 그렇습니다. 그럴 때 저는 앉아서 기도 내용을 적어 봅니다. 하느님께 편지를 쓴다는 생각으로 그저 내 마음 속에 있는 잡념을 백지 위에 쏟아놓고 나면 어느새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러한 기도방법을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녀는 자기 방문에 ‘내 사랑은 하느님뿐’이라는 낙서를 써놓았습니다.”


기도하기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추기경님께서는 이런 소중한 권고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여러분들, 기도하기가 신물이 날 때가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기가 싫증날 때, 또는 기도생활을 통해 아무런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거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때 기도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기도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소중한 권고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의 문턱으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입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나요?

-안성철 신부님-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행복이란 내 욕구가 충분히 채워졌을 때 느끼는 감정인데, 우리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욕구가 존재한다. 식욕·성욕을 비롯하여 재물욕·명예욕·권력욕 등`…. 

이 중에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가장 큰 욕구가 있으니, 바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 이는 모든 욕구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이 욕구는 물질적인 것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부자이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사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나를 무시하면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창조하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한테서만 가능하다. 이 욕구가 채워졌을 때, 곧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뵈올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가르쳐 주신다. 이제 더 이상 행복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것들을 갖추는 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찾는 데 자신을 투신하자. 사랑받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행복의 비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재혁 신부님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은 한 여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해주시는 분을 낳은 여인은 참으로 행복한 분일 거라는 생각에 그 어머니를 칭찬합니다. 이 여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성모님은 천사 가브리엘에게서도 엘리사벳에게서도 은총이 가득한 분으로, 복된 분으로 칭송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성모님의 생애,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엄청 서글프고 안타까웠던 것이 성모님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것도 편안한 곳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낳으셨고, 산후 조리도 하기 전에 이집트로 피신을 해야만 했으며,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성전에서 다시 찾는 일도 겪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몸과 지혜가 날로 새로워지는 예수님을 보면서 대견스러워하시고 기뻐한 것도 잠시. 청년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이후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예수님을 보면서 예리한 칼에 찔리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자신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예수님, 비록 예수께서 메시아란 사실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엘리사벳을 통해서, 시므온을 통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인간적인 마리아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성모님은 눈물을 머금고 자기 자신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인간적인 시각을 접고 천사를 통해서 전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성모님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듣고 간직한 말씀의 실천을 위해서 지속적인 봉헌과 겸손한 자기 비움을 계속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성모님의 신앙은 날로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모님의 신앙은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이제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서 행복한 여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심으로서 참된 행복에 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참된 행복에 들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듣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바로 성모님처럼 매일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소화되고, 우리 정신 안에 각인되며, 우리 영혼 안에 살아 숨 쉬도록 해야 말씀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인간적인 욕망이나, 현세적인 유혹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말입니다.


매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힘들다고 생각되는 모든 분들 오늘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성모님의 삶을 뒤따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참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됩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루카11,27)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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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하신 분인가를 표현했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지극히 원초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 질문일까?

아니, 우리만 생각했던 질문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있었을 질문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싸움으로 역사는 진행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완벽하고 보편적인 답변을 찾지 못한 역사이고 현실이다.


물론, 우리는 행복의 조건에 대한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얻어낸 지금까지의 답들이 저마다 이유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야기도 여인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음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행복의 조건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간단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행복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한다고.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그것은 그분께서 제시하신 행복의 조건이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잘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일단 달콤하고 감각적으로 쾌감을 허락하는 세계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의 조건,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일단 자기 십자가를 전제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힘이 들더라도, 때로는 자신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일단 그분의 말씀대로 살 수 있었을 때, 세상이 말하는 그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허락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삶의 구체적인 경험이 있어야 갖게 되는 확신이다.


진짜 행복이라면 허무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행복은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행복이다.

그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결론을 내리자.

우리 자신이 좇고 있는 것들이 진정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들인가를 항상 생각하도록 하자.




신앙 안에서도 부모가 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김기현 신부님-

오늘 복음에 보면 군중 가운데 한 여인이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먼저 떠오른 것이 우리 공동체 식구 중에 제일 젊은 부부가 낳은 아기 그레고리오입니다.

얼마 전에 돌잔치를 했는데요. 가끔 그 집에 가거나 지나는 길에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기를 돌보는 모습을 보는데요. 정말 행복해 보이십니다. 할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도 좋다고 아기를 들었다 놨다 하시고, 할머니도 평소에 다른 이야기는 잘 안하시지만 어제 구역미사 때 보니 아기에 관한 에피소드를 얘기하시면서 미소를 지으시는데 정말 행복해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미사에 나온 어머니들(?), 할머님도 계셨는데요. 한 번 물어봤습니다. 아기를 키우실 때 어떠셨어요? 행복하셨어요? 그러자 할머님 한 분이 ‘행복했죠. 오히려 더 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죠.’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나머지 세 분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난 단어가 ‘맛보기’ 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아기를 돌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 참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가운데 고생하며 열매를 맺는 것도 기쁨이지만 그것은 맛보기이다. 인류라는 더 큰 공동체를 사랑하고 돌보고 나누는 가운데 얻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너희도 느껴보아라.’ 하는 느낌이 듭니다.

가족이라는 끈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뭔가 나눈다는 것은 더 큰 결심과 더 큰 희생이 필요할 텐데요. 예수님께서는 더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일이 더 큰 행복의 열매를 맛보게 해 준다고 하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얼굴과 모습을 말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정말 행복해 보이지 않으시나요? 정말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안아주시는 그분들의 모습에서 큰 사랑을 보기도 하지만, 그분들의 얼굴을 보면 힘든 일에 짜증을 내거나 스트레스에 찌들린 모습이 아닙니다.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계신 듯이 보이는데요.

그러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신앙 안에서도 부모가 되어 가는 과정을 견뎌내고 살아내 야 합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쁨과 행복이라는 열매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 행복과 불행의 원천인 '양심'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 박사의 환자 중에 루시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는데 갑자가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신경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형부에 대한 사랑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언니가 병으로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언니의 시신 곁에 서 있는 형부를 보며 속으로 ‘이제 형부는 자유인이야. 나와 결혼할 수도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다리가 감전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습니다. 이때부터 마비가 시작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마비와 형부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프로이트 박사가 루시의 숨겨진 마음 즉, 형부에 대한 사랑과 언니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의식 아래 숨어 있던 감정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시는 극적으로 치료되었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이런 환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마음의 지하실을 비의식이라 불렀습니다. 모든 병과 마음의 문제들이 여기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출처: 이무석, 친밀함, 13]

 

프로이트는 비의식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저는 비의식에 있는 ‘양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하느님 뜻에 맞으면 기쁨을, 그것에 맞지 않으면 고통을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께 벌을 받기 전에 이미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숨고, 가리고, 서로를 탓하였습니다. 이는 그 내면의 양심이 이미 그들을 죄인으로 판결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가지거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양심의 법에 어긋나게 살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거나 자신의 뜻대로 살거나에 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낳으신 어머니가 행복하겠다고 말하는 여인에게, 참 행복의 원천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즉 당신을 낳으셨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 성모님도 행복하실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아 하늘나라 들어갈 보장을 받았다고 다 행복할까요? 혹은 사제가 되었다고 해서 다 행복할까요? 서품을 받으면 그 사제의 어머니는 기쁨과 걱정이 동시에 밀려옵니다. 당신의 아들이 사제가 되는 영광을 받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사제로서 끝까지 잘 살아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자녀가 하느님 뜻에 끝까지 잘 따라줄 때 행복한 것입니다. 만약 사제인 아들이 사제직을 내려놓아야 할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지금까지 맛보았던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제로서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태석 신부님 같은 경우는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먼 아프리카 가난한 땅에 가서 생을 바쳤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마음이 아프셨겠지만, 불행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드님이 아버지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태석 신부님도 고생을 하면서도 편하게 사는 신부님보다 불행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 있다고 ‘양심이 칭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느님 뜻을 알면서도 사제의 삶에 목숨 바치는 것보다는 다른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그 사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원천은, 오늘 복음말씀대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이유는 고통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에서 오는 행복을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모님께서 구세주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위대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사셨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라고 바로잡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라는 이유는 자아를 죽여 내 주인을 주인으로 삼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항상 반하는 나의 자아가 곧 불행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참 행복이란 나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행복과 고통의 원천은 양심에 있습니다. 어차피 지니고 태어난 양심을 버리고 살 수 없다면,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제가 묵상 소재로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아마도 ‘자전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고, 그러다보니 이를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자전거를 좋아하다보니, 며칠 전에는 자전거에 관련된 책과 잡지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잔뜩 구매를 하기도 했지요.


어제 그 책들이 모두 성지로 배달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았습니다.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기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읽었습니다.


오늘 새벽, 경당에서 기도와 묵상을 한 뒤 이제 이 새벽 묵상 글을 써야 하는데 바로 책상 위에 얹어져 있는 어제 다 읽지 못했던 자전거 잡지책이 보입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책장을 펼쳤습니다. 결국 묵상 글 쓰는 것을 뒤로 한 채 열심히 잡지책을 보면서 저의 만족만을 채우고 있네요.


문득 시계를 보니 4시가 넘었습니다.


“이런, 어떤 묵상 내용을 쓸 지도 정하지 않았는데……. 오늘 복음 내용은 뭐더라…….”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유 있는 마음이 아니다보니 묵상 글도 잘 써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만족을 더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렇게 바쁜 새벽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칭찬하면서 이러한 부러움의 말을 전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바로 이렇게 훌륭하신 예수님을 낳고 기른 성모님께서 얼마나 행복하겠냐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만족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보이는 행복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행복을 좇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까요? 그래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새벽 시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뒤로 하고서 제 만족을 위해 시간을 소비했던 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겠다는 약속을 감히 해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데 시간을 좀 더 투자하세요.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박성철, '행복한 아침을 여는 101가지 이야기' 중에서)

부모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고 슬픔과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한 친구가 찾아 갔습니다.

그 친구는 많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슬픔에 빠져 있는 그 사람은 쉽게 안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또 다른 친구가 그를 찾아 갔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 한 장을 내밀고는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그 친구가 떠나가자 이상하게도 슬픔에 빠져 있던 사람이 주위를 추스리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내 슬픔을 함께 아파해준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많은 말보다 함께 있어줌이 상대방에게 더 깊은 감동을 줄 때가 있습니다.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은 말로만 위로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할 사람입니다.

너의 슬픔을 모두 이해한다며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아파하고 힘들어 할 때면 마음의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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