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 요한 2서의 말씀입니다. 4-9
선택받은 부인이여,
4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5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Sign of Son of Man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으니,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나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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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지역 교회를 “선택받은 부인”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으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머무르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 관해 말씀하시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고,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이 전하는 노아의 방주나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모두 죄에 따른 심판으로 재앙을 묘사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생각과 일만을 일삼았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없애 버리시기로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때에 물로, 소돔에는 불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두 이야기에 공통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위하여 재앙을 내리시지만 노아와 롯을 구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재앙 가운데서도 의로운 이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도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 예고 없이 심판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 예수님께 여쭙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죄와 악이 가득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사람들의 모습을 반복하여 묘사하는 오늘 말씀은 일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죄와 악을 피하고 선과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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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겪게 될 재앙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날에 아무런 준비 없이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지내던 이들이 맞이한 무서운 재앙을 이제 유다인들이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주후 70년경에 유다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짓밟혀 참혹한 재앙을 맞고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되는 아픔을 겪고 맙니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무너진 성전의 서쪽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며 그곳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탄원의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까요? 인류의 역사상 전쟁과 폭력이 멈춘 적이 없지만, 과학자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의 탐욕과 자만이 불러온 환경 파괴로 말미암은 갑작스러운 홍수, 태풍, 폭염과 지진 등과 같은 자연 재앙이 미래의 현실적인 종말의 두려움을 키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내가 맞이하게 될 개인적인 종말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을 마치는 순간이 곧 내가 사는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과연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마주 뵐 수 있을까요?
요한 사도는 종말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을 마주 뵙는 순간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문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맞이하게 될 종말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계명을 지키고 날마다 사랑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마주 뵐 종말의 날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날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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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은 단순히 생의 마지막 순간의 차원을 넘어,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이 한 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하고, 이 순간을 잘 맞이하려고 평생을 준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평생 동안 죽음을 잘 준비한다고 해도, 죽음은 어차피 한순간에 갑자기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노아의 홍수와 롯 시대의 유황불에 비유하십니다. 모두들 하늘의 징조를 무시하고 세상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가 구원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고, 홍수에, 그리고 유황불에 죽고 맙니다. 이렇듯 우리도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날 우리 삶의 진면목이 어떠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고, 그날에는 모든 진실이 명백히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소아시아 사람들을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그들에게 계명대로 진리 안에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 줍니다. 그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위대한 일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리와 계명을 평상심을 가지고 일상 안에서 늘 실천하라고 하시는 것뿐인데, 단순하지만 그냥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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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에서 묵시적이고도 종말론적인 담화들이 모여 있는 첫 번째 대목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며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묵시 문학적 표현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존재 방식에 대해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어제 복음의 정신에 따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종말론적 긴장’을 지니되, 이적을 동반하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가시적인 현상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는 경향에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그 때와 장소에 대한 우리의 철저한 관점의 전환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사람의 아들의 때’에 관한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본 범주인 때와 장소, 곧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크게 물리적 차원과 관념적 차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시간과 공간은 물리적 차원과 관념적 차원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하느님께서 ‘위에서’ 개입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물리적 차원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분명히 ‘실재’로서 현존하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자리로서의 공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사건’으로서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현존은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이 세상에 매이지 않는 사건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의 때’를 기다리는 이는 그 나라의 가치를 철저하게 실천하며 세상의 삶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참된 종말론적 윤리는 결코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맹목적 두려움에 따른 포기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의 자리와 일상이 하느님 나라가 현존하는 때와 장소가 되도록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의 모습을 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종말론적 차원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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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 과연 인류는, 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세상 종말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각 종교마다, 각 시대마다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왔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휩쓸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종말이라는 말 대신에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하늘의 불과 유황으로 소돔이 멸망했을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홍수가 나고, 불과 유황에 모든 것이 타 버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사람들이 짐작도 못한 시간에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이란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날은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께만 유보된 때입니다.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하여 일어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현상을 알 수 없고, 알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종이며 자녀로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걸어야 할 길을 다 걷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 곧 은총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뵙지 못하고, 죽음의 길, 멸망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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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의 홍수’는 창세기 7장에 나옵니다. 불신으로 얼룩진 세상을 주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신 사건입니다. ‘소돔’에 내린 불과 유황 역시 주님의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죄악의 상징이었던 도시를 태워 버리고, 의인 ‘롯’만이 구원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능력’을 뛰어넘은 사건들이었습니다.
미구의 종말 역시 인간의 상상력 밖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무관하게 찾아옵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재산과 물질은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우 종말은 개인의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저축한 돈이며 부동산이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호기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저세상’의 삶이 결정됩니다. ‘이승’의 인연과 체험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저세상을 살아갈 기초와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종말의 준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낙엽 지는 계절에 ‘현실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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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오늘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비장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곧 올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에서도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종말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오는 것일까요? 몰래 와서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덮치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종말은 마지막이면서 시작입니다. 이 세상의 끝이면서 저세상의 출발입니다. 한 해가 끝나면 새해가 시작되듯, 종말 역시 하나의 과정이지 그 자체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해마다 12월 31일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지나온 해는 아쉽지만 보내야 하고, 새해는 호기심으로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그러한 12월 31일과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이 세상은 분명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세상이 시작됩니다. 종말은 이를 구분 짓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저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이 세상 삶의 축적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그 모든 것은 저세상 삶의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중요한 종말을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준비 없이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처럼 비장한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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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은 ‘웰빙’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 속에서의 웰빙은 물론 죽음도 잘 준비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깨어 기다리는 죽음과 종말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가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깨어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소돔의 시민들처럼 그날그날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바라는 우리는 방주를 준비한 노아처럼 늘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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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많은 신자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하여 무서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러하지만,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온갖 재앙이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는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시한부 종말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재림에 관한 묘사는 사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적인 묘사라고 한다면, 각 복음서에서 전하는 재림에 관한 기록과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재림에 관한 기록,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재림에 관한 기록이 모두 한결같은 순서로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각각의 묘사가 다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말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당시의 문학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더욱 근본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이 세상은 언젠가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세상의 마지막은 모든 사람에게 불안감과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끝날 때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살리시고자 다시 이 세상에 오십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끝난다 하더라도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 보속이 아주 특이한 어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보속을 주신다고 합니다.
“시장에 한 시간 동안 있으십시오. 병원에 1시간 동안 돌아보고 오십시오. 공동묘지에 한 시간만 앉았다 오세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1시간만 봉사해 보세요. 장애인 집에 가서 1시간 동안 봉사하십시오.” 등등의 보속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에게 이런 보속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주는 보속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자리에서 만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한 것만은 아닙니다. 힘든 삶 안에서도 커다란 행복으로 기쁨을 외치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앞선 신부님의 보속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을 바라보면 힘듦의 기준을 제대로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을 먼저 바라보고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그때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이야기하시면서 심판 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옥상에 있는 이는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는 것은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집 안에 있는 세간을 챙기러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두지 말라는 것). 들에 있는 이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씨 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며 손에서 쟁기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 재산이 다 타 버린 소돔을 돌아다보았다가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영적인 삶에 집중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라는 것, 그리고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을 기준으로 내세우면 그 말씀이 와닿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사건, 그 밖에 성경에서 언급된 모든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 것과 생각해야 할 것이 길이 되어 주었다(천양희).
시대의 흐름 따라가기
현재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 친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퇴직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50이 넘었는데, 벌써 퇴직 준비를 해?”
“요즘에는 40대 말이나, 50대 초가 되면 눈치껏 퇴직을 해야 해. 그래서 ‘사오정’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래도 아직 퇴직하기에는 너무 젊지 않냐고 묻자,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어서 나이가 들수록 따라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노땅’소리를 듣는다고 하더군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은퇴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를 보면서, 교회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셨지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시대에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렇게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데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떤가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뭐니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언젠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께서 과월절 날 밤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밤은 심판이 시작되는 날, 그 밤에 주님께서 첫 단계로 하실 일이 악인들로부터 의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 봉헌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지옥에 버려질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천국과 지옥, 갈림길의 기준에 대해서 루카 복음 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복음 17장 34~35절)
무시무시한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묵상해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일종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 영적인 삶, 하느님 중심의 삶은 뒷전인채, 오로지 은행 잔고 늘이는데만 전념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끓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심을 늘 염두에 두고, 현세의 삶도 최선을 다하지만, 또 다른 삶, 영적인 삶, 하느님 안에서의 삶에도 소홀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분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살아있는 ‘시체’가 안 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심판, 혹은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나 세상의 심판을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칭하십니다. 아마 당신께서 ‘심판관’으로 우리 각자 앞에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여기서 ‘시체’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시체의 삶과 생명의 삶과의 차이점을 알고 결코 시체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가 언제 내려와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시체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당황스러워할 것입니다.
1977년 4월 20일 대낮에 쇠망치로 장정 4명을 죽인 사건이 광주 무등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살인자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던 ‘박흥숙’이었습니다. 박흥숙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형도 안타까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박흥숙은 중학교 수석 입학을 했지만,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던 작은 가장으로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흥숙은 무등산 중턱에 작은 움막을 짓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청 철거 일용직 7명이 들이닥쳐 집을 부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흥숙은 당시 23세였고 고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제발 불만은 지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짓지 말고 땅속으로 들어가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을 질렀고 3년 동안 가정부를 하며 모아둔 어머니의 돈 30만 원까지 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실신하였고 여동생은 반항했습니다. 박흥숙은 저들도 자신들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아프신 할머니들이 사시는 다른 움막들엔 불을 지르지 말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차 없이 모든 움막에 불을 질렀습니다. 가난한 이웃이었던 노인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육박전으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보고 노인들에게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법대로 하는데 사과는 무슨 사과야!”라며 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이 들고 온 쇠망치로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철거를 지시했던 정부는 불을 지르도록 지시한 사실을 일절 밝히지 않게 하고 박흥숙을 남의 돈을 빼앗아 광주에 집을 세 채나 소유한 깡패로 묘사하도록 언론을 조작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자신에게 피해를 본 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잠잘 곳이 없어서 남의 집 화장실이나 처마 밑을 찾아본 사람만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것이라 말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참조: ‘망치로 성인 4명을 때려 눕힌 무등산 타잔 박흥숙’, SBS NOW; 꼬꼬무 7화]
사실 그날 사망한 철거반원들도 박흥숙도 모두 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철거 반원들도 살기 위해 한 행위였습니다. 처음 박흥숙은 박해받는 사람으로서 죽어 있었으나 자신이 살아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죽어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나면 ‘시체’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시체가 되면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눈에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고, 세상에서 산 사람은 하느님 눈에는 시체입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것 자체가 세상에서 죽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갑자기 다가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체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구약의 두 사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홍수’이고 하나는 ‘소돔의 멸망’입니다.
노아는 홍수 때 홍수가 나자 노아는 침착했고 다른 이들은 당황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언젠가 닥칠 것으로 예상하여 세상에서 죽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홍수가 들이닥칠 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돔의 멸망 때입니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두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이 곧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돔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 위에 유황불이 불타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 것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 것을 섬기는 사람이 시체입니다. 시체에겐 심판이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절대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라는 죽음이 갑자기 내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죽읍시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죽음으로 보이나 우리에겐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하루에도 “나는 죽었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해보십시오.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비로소 시체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 전영준 바오로 신부님의 ‘영성신학’에 대한 글이 10회에 걸쳐 연재되고 있습니다. 영성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을 보내주신 전영준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10월 18일 지면에는 ‘정화, 조명, 일치’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정화, 조명, 일치를 성서의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정화, 조명, 일치는 영성의 과정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고,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15) 정화의 단계에서 악을 피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선을 행하고, 일치의 단계에서 평화를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정화의 단계에서 자신을 버리고, 조명의 단계에서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 일치의 단계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향주삼덕(向主三德)을 통해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멀리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며, 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하다고 말합니다. 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행하면 벌을 받을 것을 생각하여 악을 피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육신과 세상의 쾌락을 피할 것이며, 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정화, 조명, 일치의 단계를 운전면허 시험을 통해서 해석해 보았습니다. 정화는 필기시험과 같습니다. 교통법규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통신호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통법규와 신호를 모르고 운전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사용법을 알면 편리한 이동 수단이 되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조명은 실기시험과 같습니다. 수영은 이론만 알아서는 수영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직접 물속에 들어가서 해봐야 합니다.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감독관으로부터 검증을 받습니다. 신호의 준수, 법규의 준수, 주차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필기시험을 합격했어도 실기시험에서는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치는 운전면허증과 같습니다. 실기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은 자격을 주지만, 책임도 요구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거나, 신호를 어기면 벌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심각한 위반이면 운전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늘 준법운전, 안전운전, 양보운전을 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계명을 잘 지키는 분들은 준법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권하는 교육, 피정에 열심히 참석하고 선을 행하는 분들은 안전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은 양보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달았으면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 돈오돈수입니다. 깨달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더 이어가는 것이 돈오점수입니다. 정화, 조명, 일치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날 일치의 단계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돈오점수의 삶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주여, 당신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이 좋사오니 내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면 잠깐이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돈오점수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밭’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생기(生氣)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 힘찬 기운, 생명을 살리는 기운을 말합니다. 반면 살기(殺氣)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독살스러운 기운, 곧 죽음의 기운입니다. 우리가 생기를 지니게 될 때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이 같이 상생을 합니다. 그러나 반면 살기를 가지게 될 때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이 같이 죽어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가 살면서 어떤 때에 생기가 도는 가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서로가 사랑하고 나눌 때입니다. 그러나 반면 살기가 도는 때는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기적으로 가지려고만 할 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생기’를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 생기는 바로 하느님의 숨결이자 성령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생기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죽음은 매일 다가오는데 살겠다고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종말이란 말뜻은 물질세계는 과학적으로 끝이 있다는 물질 원리입니다.
식품의 유효기간 은퇴하고 늙는 인간 세상 모든 것은 끝을 향해갑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왜 사람들은 영원히 사랑한다 하죠?
영원이라는 말뜻도 모르면서 쓴다면 정신없거나 나간 사람들 아닙니까?
죽기 전에 죽을 준비는 무엇이고 영원이란 게 있다면 준비는 좀 해야죠.
종말까진 몰라도 자신의 죽음은 매일 다가오는데 살겠다고만 하다니요.
죽을 때 가져갈 것 하나 없고 내가 받은 세상살이 점수만 받아가겠지요.
하늘 갈 사람들은 재산욕심 꾸미기 명품자랑 먹보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땅에서 사는 여우와 하늘을 나는 독수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여우가 먹잇감을 나무 위에서 잡았다. 여우는 먹잇감을 마련했다고 신나하며 시식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늘의 날개 독수리의 위용을 펼치며 여우에게 다가왔다. 여우는 잠시 나무 아래로 피했고, 이때 독수리는 멋잇감을 살피고는 날아갔다. 다시 여우는 나무 위로 올랐고 먹잇감을 땅으로 내렸다. 하늘의 독수리는 이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채린 여우는 먹잇감을 놓은 채 달아났다. 그때 여우는 그 먹잇감을 포기 했어야 했다. 집착이 화를 불렀다. 독수리는 여우가 물어다 놓은 먹잇감을 물고는 들판에 떨어드리고 멀리 날아갔다. 여우는 옮겨진 먹잇감의 낙하지점을 알아냈고 달려들어 또 시식을 준비했다. 그때 독수리가 여우와 거리를 두고 앉았고 여우도 거리를 두고 마주했다. 여우에게 경고였다. 독수리는 다시 하늘을 향해 웅비했고 먹잇감에 집착한 여우의 모습을 지켜 본 독수리가 목표를 세운 것은 죽은 먹잇감이 아닌 살아있는 여우였다. 무서운 발톱을 세우며 날개를 펴고 하강하는 독수리를 여우는 피해 숨을 곳이 없었다. 먹잇감의 집착한 여우는 꼼짝없이 독수리에 잡혀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한테는 당해내질 못했다. 땅을 밟고 사는 놈들은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질 않고는 양육강식에 밀려 생명이 위태롭다. 여우가 영리하다 하는데 독수리는 여우보다 한 수 위이다. 땅에서 사는 동물을 포함한 인간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들기처럼 양순해야 한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예측할 수가 없다. 특히 인간은 위대하다 하지만 딱 하나 하늘의 음성을 담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먹잇감 플러스 물질의 풍요, 성의 노예, 인간을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노아의 시대의 홍수, 롯 시대의 소돔에서의 하늘 재앙, 불과 유황비를 사람들은 피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 보지 말고 하늘의 음성에 충실해 앞만 보고 달리는 방법이었다.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이더냐? 집착이 뒤를 돌아 보다가 생명은 커녕 돌이 되어 버렸다. 여우가 먹잇감을 쫒다가 하늘을 나는 독수리에 잡혀 먹힌 신세처럼 지혜롭지 못한 인간 역시 먹잇감에 집착할 뿐이다. 구원은 둘 중 하나 하느님의 음성에 충실한 자의 몫이다. 침상 위에 둘 중 한 사람, 맷돌질 하는 둘 중 한 사람은 구원에 이를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
우리를 불러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갑시다.
2세기 어느 저술가의 강론의 시작 (Cap. 15,1-17,2: Funk 1,163-165)
절제의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나의 권고는 쓸모 없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 권고를 따른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권고해 주는 나에게도 구원을 얻어 줄 것입니다. 길 잃고 헤매는 한 영혼을 다시 구원의 길로 발을 내딛게 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신앙과 사랑 안에서 말하고 듣는다면 우리를 지어내신 하느님께 이런 일을 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를 정의와 거룩함 안에서 꾸준히 간직하며 신뢰하는 마음으로 “네가 아직 부르짖고 있을 때 나 주님은 ‘보라, 나는 너와 함께 있노라.’고 대답해 주리라.” 하고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큰 약속을 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마음보다도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마음이 더욱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다 그분의 너그러우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받은 무수한 은혜에 대해 서로 질투해서는 안됩니다. 위의 하느님의 말씀이 그분의 뜻을 준행하는 이들에게 주는 기쁨과 그 뜻을 어기는 이들에게 내리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 기회를 포착하여 회개하고 때가 주어지는 동안 우리를 불러 주시고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육정을 끊어 버리고 방종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우리 영혼을 다스린다면 예수님의 자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풀무 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릴 심판의 날이 다가오리니, 불 속에서 납덩이가 녹듯이 하늘과 땅이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때에는 인간의 모든 행위 곧 은밀한 행위까지도 드러날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애긍 시사는 죄의 보속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단식은 기도보다 더 가치롭고 애긍 시사는 이 둘보다 더 가치롭습니다. “자비는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죽음에서 해방시킵니다. 이 세 가지 점에 있어 뛰어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애긍 시사는 온갖 죄를 씻어 줍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버림받는 자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해 참회의 생활을 합시다. 사람들을 우상 숭배에서 구출하고 그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라면,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는 모든 영혼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서로간에 충고해 주고 상호 협력하여 약한 이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며 모든 이가 구원받을 수 있게 합시다.
<사람의 아들의 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금요일>(2020. 11. 13. 금)(루카 17,26-37)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테살로니카 전서에 나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2-6).”
노아 때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던 모습들은, 또 소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했던 모습들은, ‘평화롭다, 안전하다.’ 하면서 일상생활을 했던 모습들인데, 그 일상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을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나 소돔 사람들이 일상생활 때문에 멸망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를 일으키시기 전에 그 일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창세 7,4).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레가 지나면”이라고 예고하셨는데, 그 7일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지시하실 때에 이미 대홍수를 예고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도 대홍수를 예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든 예고를 무시했고, 회개하지 않았고, 무사태평하게 일상생활을 하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또 소돔의 멸망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예고하셨는데(창세 18,16-33), 아브라함이 소돔의 멸망을 막으려고 애쓴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예고를 소돔 쪽에 전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소돔 멸망 전날 밤에 롯을 찾아온 천사들은 소돔의 멸망을 롯에게 알려 주었고, 롯은 다시 그 일을 사위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창세 19,12-14). 그때 롯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롯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태도는 곧 소돔 사람들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어떻든 소돔의 멸망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미리 예고된 일이었고, 그 예고는 회개하라고 기회를 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멸망 예고를 무시했고, 죄 속에서 살던 대로 살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신앙인은 ‘일상생활의 소중함’이 아니라 ‘회개의 중요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일상생활의 소중함만 생각하고 ‘삶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구원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1-33).”
이 말씀은, “세속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만 집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그날’이 된 뒤에 실행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날’이 닥치기 전에, 즉 ‘지금’ 바로 실행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속의 재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지 말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이 말씀은, “심판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회개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심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일’입니다. 동시에 각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각 개인별로 따로 심판함으로써 결정된다는 점에서 ‘개별적인 일’입니다.
심판이 보편적이라는 것은, 아무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고, 어떤 특혜도 없고, 어떤 특권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심판이 개별적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죄는 각 개인에게 물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멸망을 당할 때, 그 죄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억울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회개한 의인이 구원을 받을 때, 그 의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의인과 함께 구원을 얻는 불공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죄’는 ‘나의 책임’입니다.
물론 어떤 죄에 대해서 ‘연대책임’을 묻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도, 내가 짓지 않은 죄인데도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선과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죄’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에게 그 살인죄를 물으시겠지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고관들, 무관들, 유지들에게도 (마르 6,21)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저희는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 라고 항의할 텐데, 그들이 헤로데와 공범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살인이 행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일도 안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죄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예수님께서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도 그 때와 그 시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말씀하시지요. 노아 때, 그리고 롯 때에 세상에는 극소수의 의인이, 악에게 휩쓸린 대다수의 사람들 틈에서 제 방향을 고수한 채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노아나 롯은 어려움 중에서도 그 경외심을 부여잡고 살았지요. 악을 일삼는 이들은 제 멋대로 욕망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멸망이 닥친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 내려가지 말고, ... 들에 있는 이도 뒤를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두고 온 재산이나 뒤에 남은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의미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살아온 지향과 방향성,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라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진작부터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그날을 맞이할 테니까요.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흘리는 교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2요한 5)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셨고, 행하라 명하신 사랑의 계명,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주님께서 떠나시고, 박해가 닥치고, 반대자와 이단 교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해서 간직해 온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2요한 9)
신앙은 연속성 안에서 성장합니다. 영혼은 처음 불리웠을 때 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더 깊고 풍부하게 자라나지요. 악은 한 영혼이 하느님과 더 친밀히 결속되는 것을 방해하려 속이는 자들을 앞세웁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이들의 빈틈을 파고들어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그대로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어떤 파도가 닥쳐도 헷갈리지 않습니다. 설령 "그날"이 닥친다 해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그 날, 그 때가 닥친 순간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구원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지상에서 구원을 앞당겨 살아온 이는 거대한 연속성 안에서 진정한 구원으로 유연히 건너갈 것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우리는 서로 참 다릅니다. 태생과 역사와 배경, 취향과 흥미와 성향 등등,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점 안에서조차 엄청나게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지요. 주님은 분명 자비하시지만 우리 각자가 맞이할 구원은 개별적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각자 삶에서 자신이 고수하고 머무른 모습이 연속성을 타고 구원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맘껏 탐하고 즐기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겠다는 욕심은 말 그대로 허욕이 되겠지요. 살아서 주님을 기쁘게 찬미한 이는 그 기쁨과 찬미의 완성을 누릴 것입니다. 살아서 베풀고 나눈 이는 그 나눔과 베풂의 절정 안에서 더없이 행복하겠지요. 이처럼 여한없이 사랑한 이는 마지막 때에 내려갈 필요도, 뒤로 돌아설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여태까지 걸온 그대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 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주님의 날"인듯 미련이 남지 않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모습을 주님께서 아시니, 그분은 한눈에 우리를 알아보시고 기뻐 뛰며 맞아 주실 겁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최고의 날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멘.
품위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 - 기도와 회개, 깨어있음의 은총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주 예전 목사님과의 간단히 주고 받은 대화 내용이 거의 20여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지금 물어도 이 대답일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품위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입니다. 대부분 산대로 죽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남은 위령성월의 날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늘 기도와 더불어 회개하며 깨어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깨어 맑은 정신으로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요, 참으로 불행한 이들은 준비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바오로 사도의 윗 말씀은 품위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을 위해 최고의 처방전 말씀입니다. 아마 제가 가장 많이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써드렸을 것입니다. 어제도 하루 단체 피정온 본당 자모회 6분 자매들에게 써드린 처방전 말씀입니다. 여기에 “웃어요!”라는 스탬프도 찍어 드렸습니다.
시간이 되기에 역시 성호경을 바친후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서 성화聖畫같은 사진도 찍어 드렸고 사진과 더불어 나눈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사랑하는 성녀聖女, --- 자매님!” 비슷한 내용의 카톡 메시지입니다. 어느 자매의 다음 답신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찬미 예수님, 인자하신 신부님 뵈니 맘이 편해지고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수도원 피정 특별한 은총과 기쁨으로 채워 주신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영광드립니다.”
요즘 만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드릴 메시지가 있으면 저는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성인聖人---형제님!’ 또는 ‘사랑하는 성녀聖女---자매님!’ 꼭 잊지 않고 써 드립니다. 사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모두가 성인성녀같다는 생각도 들고 모두가 성인성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원도 지닙니다.
정말 성인성녀처럼 깨어 사랑하면서 맑고 향기롭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감이 최고의 선종의 죽음 준비도 될 것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행복한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실감나는 장면 역시 회개하며 깨어 살아야 하겠다는 경각심을 줍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나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아, 이런 준비없이 갑자기 닥친 죽음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하고 불행하겠는지요. 예나 이제나 계속 반복되는 무지한 사람들의 현실이 아닙니까? 전혀 영혼을 돌보지 않고 육적 욕망에 눈먼 삶을 살다가 갑자기 닥친 불행한 죽음들이요, 오늘날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회개와 즉시 주님과 함께 앞으로 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방심으로 과거의 것들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여 뒤돌아 보는 순간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버리고 떠나는 회개와 탈출의 삶에 과감, 신속하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현실도 내적 삶은 판이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여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냉담으로 지옥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다음 복음이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내인생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좋고 아름다운 외적 환경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지체없는 회개가 구원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뜻밖의 사고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기도와 회개를 통한 깨어 있는 삶의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제1독서 요한 2서가 줍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의 방향 전환의 회개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의 행복은 나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실질적인 것이 가까이 있는 이웃 형제자매들을 깨어 살피고 아끼고 친절히 대하며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 준 선물이 가까이 만나는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가의 다음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우리 모두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을 모시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흥청망청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날에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흥청망청興淸亡淸
연산군 시대 흥청興淸이 있었지요. 얼굴이 예쁘고 춤과 노래가 뛰어나 연산군의 흥을 돋우어주는 여인들을 흥청이라고 불렀는데 연산군이 이 흥청들과 놀다가 망했고, 흥청들도 위세를 부리다 연산군과 함께 망했다고 해서 흥청을 망청이라고 부른 데서부터 이 말이 생겨났다지요.
그런데 연산군과 흥청만 망합니까?
인간에겐 망자와 망할 자가 있을 뿐 모두가 망할 것이며 망할 것을 아는 자와 몰라서 흥청대다 망하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흥하고 흥청흥청 살기만을 바라며, 흥할 때는 망할 것이라는 것을 도무지 생각지 않기에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Memento Mori!메멘또 모리라는 말이 있지요.
말 자체는 라틴말로 죽을 것, 망할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지만 여기에도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여러 설 중에 로마 장군의 개선식과 관련한 얘기가 귀담을 만합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장군에게 하루 동안 개선 행진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이 하루 동안은 신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되는데 이 개선 장군 뒤에 반드시 노예가 따라가며 이것을 외치게 했다는 거지요.
네가 지금은 개선장군이 되어 신과 같은 대접을 받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을 인간이요 망할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렇게 메멘또 모리를 염두에 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다 죽고 다 망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늘 염두에 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뭡니까?
알고 살건 모르고 살건 망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차피 다 죽고, 죽을 때 싸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재물을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도 움켜쥐지도 말고 흥청망청 쓰면서 즐기자고 늙어지면 못 노니 노세 노세 젊어서 놀자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메멘또 모리에는 젊어서 놀자, 즐기며 살자는 뜻도 있지요.
그래서 메멘또 모리는 시간은 금세 지나가니 지금 이 날을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사실 요즘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젊은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이든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이 꽤 많습니다.
더 늙기 전에 많이 놀러 다니고 다리 성하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성지순례, 해외여행 하자는 거지요.
그런데 죽음 이후가 없거나 죽음을 이후를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현명함입니다. 죽을 건데 뭣 하러 아등바등하고, 집착하고, 애착하고, 움켜쥐고 그럽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없고 죽음 이후의 영생이 없다면 우리에게 시간이란 죽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고, 아까운 시간이지만 신앙인에게는 죽은 뒤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이며 그래서 신앙인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메멘또 모리를 해야 합니다.
인디언 나바호 족은 이렇게 얘기한다지요.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어떤 시간입니까?
즐겨야 할 시간입니까,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까?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우리를 구원하는 생명의 손짓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세상에는 우리를 현혹하는 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온갖 화려한 재물의 손이 우리를 유혹하고, 젊고 아름다운 손이 우리를 향해 손짓합니다. 우리를 멸시하는 거친 손들도 있습니다.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한 손이 우리를 밀쳐내고 교만의 손은 때때로 신앙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립니다. 이러한 손짓들은 마치 우리의 목숨을 보존해줄 것만 같아 보입니다. 한편, 못 자국이 선명한 예수님의 피투성이 손은 더없이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손은 가장 아름다운 손, 사랑이 가득한 손임을 우리는 다시금 상기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는 자비의 손짓이며 우리를 영원한 삶, 구원으로 인도하는 손짓이기도 합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롯이 소돔을 떠날 때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이 내미시는 생명의 손을 바라보지 않고 아름다움만 좇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맞이한 끝은 허무한 멸망뿐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 보다는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의미합니다. 자, 다시 한 번 고개를 들고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어떤 손보다 사랑 가득한 주님의 피땀 어린 손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신학생 때 방학하기 전에 9일 기도를 노래로 합니다. 그 때 부르는 노래 가사 중에, 뒤를 돌아다 보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청원이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대해 이르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루카 17,26-27)
그리고 롯 때의 경우도 덧붙여 예를 드시며 이르십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31-33절) 롯의 아내는 롯과 함께 구원의 기회를 얻었지만, 호기심인지 두고 떠나는 세계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주님의 명을 거슬러 뒤를 돌아봄으로써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은총을 내려 주셨음을 깨닫고 감격하며, 그 은총을 내려 주신 주님을 맏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새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 접어들어 구원의 은총으로 평안하게 되면서, 그 은총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그리고 깊이 정진하여 더 거룩해지려고 하는 우리의 결심과 방향은 가끔 안주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매번 다시 우리에게 내려진 분에 넘치는 주님의 은총을 바라보며, 뒤를 돌아다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주님 사랑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아무도 종말의 시간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이다. < 루카,17/26-37> 11/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무도 각자의 죽음의 시간을 모르지만 죽음이 닥차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종말을 맞이하는가?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은 종말의ㅏ 시간이 닥아올 때 어디서 종말을 맞이하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있는 자리에서 종말을 맞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죽음 뒤에 자기 할 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걱정하다고 해결되는 일도 없습니다. 옥상에 있던 사람이 세간이 있는 집으로 내려가지 말라. 죽음 뒤에 좋은 옷 세간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들에 있는 사람이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살아서 필요한 것이 죽음다음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말을 맞이할 준비는 따로 있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지금이란 시간, 종말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 도미니코 사비루에 관 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선생 신부님이 아이들을 모아 “ 지금 세상의 종말이 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으니 어떤 아이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 보려 간다하고 어떤 아이는 신부님 만나서 고백성사 보러 간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성당으로 가서 기도하려 간다고 하는데 도미니코는 나는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있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각자의 죽음도 갑작 스러운 죽음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늘 준비된 상태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숨이 떨어 저도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게 되는 것을 의식하게하고 사람이 숨이 넘어서도 의식이 있고 귀는 30분 듣다고 합니다. 그래서 숨이 남아 갔다고 울고 불고 하면 가시는 분이 시끄러워 올 바른 준비를 못하게 됩니다. 오히러 작별의 인사말과 걱정을 덜어 드리고 감사의 말 귀에 대고 말하고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임종을 도와야 합니다.
전에 비안네 성인 에게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이 자살 했는데 지옥에 갔으면 너무나 불상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하소연 하니 걱정 말라 하시며., “ 당신 아들 죽으면서 뉘우치며 죽었으니 천당에 갔다.” 고 하시여 마음 편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임종 시 그들은 빛을 보고 호수천사가 마중 나오는 것을 보인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쁜 모습으로 하느님을 영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많은 죽음을 보고 체험하였지만 이런 죽음은 저를 행복하고 마음 편하게 합니다. 병자가 죽기 전 저를 꼭 보고 싶다고 하여 찾아간 분은 제가 퇴강 본당 임시 주임으로 6개월 사복할 때 총회장으로 계시던 분인데 갑자기 찾아가서 큰 준비는 없었지만 만나니 반갑고 좋은 마음에 기도와 고백성사를 들이고 손을잡고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바로 그날 저녁에 임종하셨다고 하여 장례미사를 위해 마산에서 퇴강 본당 까지 가서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많은 죽음을 보게 됩니다. 죽음은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세례 때 고백한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주님의 오심을 어느 때나 어디서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 기다리는 행복한 순간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넉넉한 허공이 내게 주는 선물이 많다.
최민석 신부님
두서너 달에 한 번씩 가는 병원 외래가 끝나고 병원에서 걸어서 터미널에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해는 지고 날은 점점 어두워질 때 차창밖에 선 나무들은 스산하다. 그러나 잃을 것 다 잃고 버릴 것 다 버린 나무들이 맨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풍경 아름답다.
11월 중순이다. 이맘때쯤이면 잎이란 잎은 다 진다. 나뭇잎을 잃고 선 나무들도 나도 마음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고속버스 안에 앉아 바라보면 차창 밖 산과 들에 선 나무들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잎이 다 지고 나면 나무들은 알몸의 빈 가지만 남게 되는데 그 세세한 잔가지들이 만들어 내는 그림이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다. 아니 사방팔방 진경산수 아닌 곳이 없다.
땅거미 내리자 어둠은 숲과 들, 하늘과 산을 고르게 덮으며 내려온다. 오늘 하루 내내 병원 일과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허물없이 하루가 지난 것에 감사한다. 몸은 피곤했지만 좋은 만남이었고 모두들 내 건강을 걱정하고 도와주는 눈에 보이는 천사들이다.
나의 인생을 이끌고 있는 분이 있다. 그 분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내 인생의 바탕이다. 그 분의 힘에 의지하고 나를 어디로 이끄시든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내 의지, 내 의무, 내 힘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일을 이루었을 때보다 일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그분이 일을 말리시는 어떤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내게 주어지는 일에 하루하루 순종하며 산다. 그 하루가 쌓여 한 해가 되고 인생이 된다.
이제 겨울이 오고 찬바람 불고 눈발이 몰아칠 터인데, 알몸으로 맞서야 하는 처절한 날들만이 남았는데, 그 모습이 그림이다. 가진 것 다 잃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도 그것이 탁 트인 그림이 되는 11월 중순의 풍경을 보며 인생의 깨달음을 하나 얻는다. 나의 지금 이대로의 빈 몸 또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다.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 어릴 때 비가 오면 개울에 가서 고기 잡는 건 좋아했어도 낚시는 배우지 못했다. 어른 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도 그런 잡기 같은 것들에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 어릴 때 민화투도 치고 딱지 치고 자치기 하며 놀기는 했지만 놀이에 대한 애착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축구나 농구를 하며 놀았지만 운동을 잘하지는 못했다. 대학 때 당시에 당구도 하고 볼링장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놀기도 했지만 시간이 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책 읽을 읽거나 친구들하고 술 마시고 노닥거리며 토론 하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노래하는 것은 좋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음악에 소질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기타도 조금 치다 말고, 노래도 잘 부르는 것 같지 않았다. 가끔 악기 다루는 것도 몇 가지 배워 두고 싶어서 피아노 배우기를 시작했지만 얼마 못가서 그만 두었다. 사제가 되어서도 골프니 승마니 하는 건 더더욱 관심 밖이 없다.
어느 날 본당 신부인 내게 가훈을 써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본당 신부님이 써 주신 가훈을 액자에 넣고 싶다는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어 써 드렸다. 의외로 기뻐 하셨다. 그 후로 원하는 사람이 들에게 가훈을 써주곤 했다. 그러다가 본당의 날을 기념으로 본당 공소 신자 거의 600 여명에게 가훈을 써 주면서 나만의 글씨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 그리는 것은 지금도 좋아한다. 그러나 잘하는 것 같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 미대에 편입하여 공부한 적이 있다. 그 동안 그림 그리기도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가 다시 그림 그리기 할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정말 여유를 찾고 그림도 다시 그리고 그래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혼자 명상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음악 듣고 혼자 산책하기를 좋다.
새소리가 새소리로 들리고 풀벌레 울음이 풀벌레 울음으로 들린다. 다시 소쩍새 운다. 밤이 깊어지니 소쩍소쩍 하는 소리가 떠 또렷하게 들린다.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소리 없는 침묵이 소쩍새 소리를 받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득히 먼 옛날부터
알 수 없는 마지막 날까지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온 누리에 넘쳐나는데
그 이야기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크게 둘로 나뉘는 거야
나의 이야기 아니면
남의 이야기
나에게 하는 이야기 아니면
남에게 하는 이야기
나의 것으로 삼고픈 이야기 아니면
남에게 돌리고픈 이야기
대개 사람들이란 이기적이라서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말이지
기쁜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축복 가득한 이야기들은
제 것처럼 여기고
슬픈 이야기
불행한 이야기
추악한 이야기
저주스러운 이야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듯하지만
사실
때와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무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이야기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인거거든
그러니 말이야
쓰면 뱉고 달면 삼키듯이
이야기 가운데 무언가를
취사선택하지 말고
모든 이야기들을
삶의 양식으로 받아먹어야 해
그러다 보면
좀 더 참다워지고
좀 더 착해지고
좀 더 아름다워지고
좀 더 사람다워지지 않겠어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함승수 신부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언제, 어떤 식으로 '종말'을 맞이할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가 어떤 식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들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대홍수나 대지진 같이 큰 자연재해가 일어나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거나 핵전쟁이 발발하여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누군가는 요즘 전 세계적으로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코로나처럼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여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시나리오가 우리에게는 생각만해도 두렵고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구에 어떤 재해가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기만의 대책을 강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가진 부자들은 지하 깊은 곳이나 사막 한 가운데에 미사일이 터져도 끄덕없는 튼튼한 벙커를 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높은 산 위에 자기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생존을 위한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종말을 피해 살아남겠다는 간절하고도 치열한 몸부림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의 순간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좀 다른 양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말'은 한 번 시작되면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공동 운명체'의 특성이 강하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은 각자가 얼마나 대비를 잘 했는가에 따라 파멸에 이르지 않고 오히려 구원까지 받을 수 있는 개별적 특성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종말의 순간이 모두에게 예고없이 닥쳐올텐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만 신경쓰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파멸에 이르겠지만, 하느님께서 언제 부르시든지 즉시 응답할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를 잘 한 사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그 때 그 때 실행에 옮긴 사람에게는 종말의 순간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기회, 기쁨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롯의 아내'가 그랬지요. 하느님의 배려와 남편의 도움으로 무시무시한 심판을 피할 소중한 기회를 얻었지만, 집에 두고온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우리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오직 하느님 그분만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나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드는' 법입니다. 썩은 고기가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에 물들어 부패해가는 영혼은 스스로에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준비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심판이 이루어지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문'이 언제든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진리요 생명인 예수의 길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둘 다 포괄적인 내용입니다.
길이요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독서는 요한 사도가 쓴 둘째 편지의 일부로서, ‘선택받은 부인’이라고 가상의 독자를 내세워서는 요한 사도가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함축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모두 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일깨워주는가 하면,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나 예수님께서 당신 생명을 바쳐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은 모두 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라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복음은 루카가 쓴 복음서의 17장인데, 죄와 용서, 믿음과 감사 같이 하느님 나라에서 메시아적 백성이 되기에 필수적인 덕목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바를 보도한 본문입니다.
그에 앞서 14장에서는 아픈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복음을 직접 행동으로 선포하신 내용이 보도되었고,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하시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묘사한 비유들이 15장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온 이들이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해야 함을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루카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상을 보도하는 관점은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처음에는 구경만 하던 군중을 상대로 믿음을 자라게 하여 다시 메시아적 백성의 일원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적 백성이란 메시아처럼 삶의 목표를 하느님과 그 나라에 두고 대속 신앙을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흩어져 살아가되 각성된 개인들의 연대로 뭉쳐있는 신앙인들의 모임, 즉 교회를 가리키는 성경 용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아직은 세상 속에 충분히 퍼져있지 않음을 직시하고 있으며, 이들이 예수님의 길을 뒤따라 걸음으로써 그 나라의 현실이 세상 속에서 앞당겨질 수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이들입니다.
대속 신앙으로 촉발되는 복음화의 사명과 선교활동의 필요성은 바로 이 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바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키워서 ‘아직 충분히 다가오지 못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완성하자면,
하느님 나라의 이 씨앗을 위협하는 어둠의 세력과 또 이 나라를 앞당기라는 사명을 소홀히 여기거나 외면하려는 유혹의 힘이 원심력처럼 작용하는 상황에서 이 사명에 투신하려는 구심력이 요구됩니다.
이 어둠의 세력과 유혹의 힘을 원심력으로 인지하는 안목은 물론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저 자기자신과 가족의 범위만을 관심범위로 두고 있는 처지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 또 현세적 출세나 편리함과 명예 따위에 대한 관심범위에서도 탈출해야 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지적하고 계시다시피,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일상사에 매몰되어 살아갈 것이며 심지어 죄를 짓는 줄도 모르고 죄를 저지르며 살아갈 것이지만, 믿는 이들 특히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이들의 투신에 의하여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 가운데에 스며들 듯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 다가오는 모습이 객관적이고 역사적이어서 누구나 다 알 수 있기보다는 조용히 그러나 멈출 수 없이 보이지 않게 다가올 공산이 큽니다. 그래서 복음선포의 업적이나 실적에 대한 관심보다는 진정한 복음선포를 알아볼 눈과 알아들을 귀를 가진 이들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비록 숫적으로 소수라고 하더라도 정체성이 정확하고 분명한 이들이 메시아적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우리 시대에 그리고 우리 곁에서 시작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하시어 그 효과와 영향력을 일파만파로 키워주실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들 자신은 자신들이 해낸 그 엄청난 선교적 위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할 공산이 크지만, 그에 대해서는 관심도 별로 없기가 쉽고 차라리 자신들이 조금이나마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게 된 데 대해 더 큰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순도 100%의 믿음이지요. 이렇게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본령일진대, 그 시작은 가정을 나자렛 성가정처럼 성화시키는 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실로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신앙에 투철한 가정을 건설하는 일이야말로 평신도에게 부여된 특권입니다. 부부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자녀들을 세상을 성화시킬 사도로 키우고 가족이 그 가정에서 하느님 나라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온 교회가 도와야 하는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자면 가족이 한데 모여 바치는 기도생활은 하루라도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일과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평신도들이 기도생활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또 하나의 특권은 직업을 통하여 세상의 성화에 이바지하는 길입니다.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자기를 실현하고 무엇보다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닮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업의 수고와 보람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여, 일상에 매몰되기보다 일상을 성화시키는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은 마지막 부분이 약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침상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은 평안하고 풍요롭게 사는 사람을 가르킵니다. 두 사람은 세속의 재물을 넉넉히 가졌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침상은 휴식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하나만 데려가신다는 말씀은 재물을 많이 지니고 세상을 평안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악하고 무자비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구절은 반대로 노동으로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두 사람의 운명은 크게 달라집니다. 가난의 짐을 담대하게 지며 진지하고 덕성스러운 삶을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악한 일을 꾸미고 온갖 부끄러운 짓을 망설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똑같이 철저하게 밝혀져서, 선한 사람은 데려가시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버려두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독수리는 의로운 이들의 영혼일 것입니다. 자주 독수리로 비유되기 때문이지요. 독수리는 높은 곳을 추구하여 낮은 구렁을 멀리하고 오래 삽니다. 그러므로 독수리는 결국 주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과 사도들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를 성체성사로 모여드는 거룩한 백성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교회 전례력으로 올 한 해의 끝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슬슬 종말에 관한 복음말씀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복음말씀 해설을 해드렸습니다. 결국 결론은 사실 우리가 항상 들었던 말들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날을 준비해야 하고, 그러하기 위해서 평소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으로 그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교우여러분들, 제가 전에 몇 번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다면 태어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그 순간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영원한 생명을 위해 말이지요. 오늘 복음 환호송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며 마치고자 합니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으니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아멘.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께서 율법학자들을 향해 나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교리로는 배운 바로는 우리 개인의 죽음으로 ‘사심판(私審判)’이라하고 세상의 종말에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 받는 심판을 공심판(公審判)이라고 하지요. 사심판과 공심판을 앞두고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날이 어떤 특별한 날이기 보다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루카 17,26-27)
또 이어서 주님께서 같은 창세기의 롯 때에도 일상생활에 소돔에 유황이 쏟아져 사람들이 멸망했던 일을 회상시키십니다. 세상 종말에는 사람들이 일상생활 중에 일어날 것이며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구원되고 멸망될 것을 주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구원에는 어떤 신분이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을 믿고 성실하게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지혜서가 지적하였듯이 사람은 자기의 지위, 재산, 인간관계에 가려서 하느님을 잊고 살 수 있는데, 사실은 인간의 삶은 짧고 각자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이 천년만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상생활에서 언제 주님께서 부르시더라도 기쁘게 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sis)은 ‘사람이 오는 날’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마태 24,29-31; 마르 13,24-27; 루카 21,25-28) 마태오와 마르코는 구약의 이사야(13,10;34,4)의 종말론적인 표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환난이 지난 뒤 곧바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루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루카 21,20-24) 다시 구약의 표현을 다시 풀어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21,25)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하면서 ‘늘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덫에 걸려 넘어 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는 종말의 날을 준비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 올 죽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병이 들거나 노환으로 시름시름의 날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고통스럽기는 해도 시간이 있어 다행한 일이기는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애석한 것은 사고에 의해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평소에 자신의 마지막 날을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라.’하신 말씀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 든다.’라는 주님의 비유 말씀에는 어떠한 죽음에도 미리 징표를 읽을 수 있다는 의미가 배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징표 중에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 것입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의 죽음을 읽게 되지요. 또 무성하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바람이 흩날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의 삶에도 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갑작스런 죽음은 없다.’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요한 서간을 또한 묵상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2요한 9)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기는 위령성월의 하루입니다. 어느 것 하나 세상에 머무는 것은 없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지요. 종 말론적인 비유의 말씀을 새기며 위령성월의 복된 하루가 되시기 빕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엽도
길을 떠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떠나는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할
우리 마음이
다른 것들에
많이 빼앗겨
있다.
내려놓지
못하기에
떠날 수 없는
우리들이다.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우리들이다.
떠나는 길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무엇을 섬기며
살고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생명의 주인께
돌아가야 할
우리들 여정이다.
롯의 아내같이
무너져내리는
소돔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는 은총의
위령성월이다.
학교 간 중학생 아들의 방을 청소하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아들의 책상 위에 담배가 턱 하니 놓여 있는 것입니다. 중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담배를 피운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무작정 혼을 내는 것이 옳은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사춘기인 아들에게 자기 엄마가 얼마나 마음 넓은 사람인지를 알려주고도 싶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담배 피우는 것을 이해한단다. 뭐 어렸을 때의 호기심으로 피울 수도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다른 곳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리면 문제가 복잡해지니 엄마하고 약속하자. 담배는 집에서 피우는 것으로.”
아들은 엄마에게 자신을 이해해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했고, 고마워하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아들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엄마, 제가 미성년자라서 담배 사기가 너무 힘들어요. 엄마가 좀 사다주면 안 돼요?”
그리고 얼마 뒤에는 자기 친구의 담배까지 사달라는 부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머니의 열린 마음이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까?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열린 마음으로 자녀를 받아주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들어줘서는 안 되며, 때로는 무조건 거절하는 결단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임질 수 없는 것까지도 허락합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후회를 하지요. ‘그때 제대로 잡아줬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고, 롯 시대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 땅에 이루어 질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또한 하나는 데려가고, 또 다른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도 말씀하시지요. 공포감을 가져다주는 종말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주님,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 드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꾀는 자연 이치와 같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이치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하느님 뜻에 예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책임 지지 못하면서 결국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더 많은 책임이란 더 많은 사랑, 더 깊은 우정, 더 뜨거운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정여울).
110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한국 천주교회는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순교자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2천명도 채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2001년 당시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는 강화도에 ‘일만 위 수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하여, 이를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에게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인천교구가 2004년에 설립한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과 인접하여 있어 젊은이들과 자연과 순교자들이 어우러지는 ‘침묵의 순례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현양동산에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무명 순교자들의 흔적을 묵상할 수 있도록 조성된 무명 순교자의 길이 있고, 묵주 연못, 무명 순교자상, 십자가의 길, 일만 위 순교자 현양탑, 성모당 등이 있습니다. 또한 1866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 치명한 성 남종삼 요한의 유해를 모시고 있습니다.
현양동산은 ‘침묵의 순례지’로 불리기 원합니다. 이름조차 버림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무명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침묵 중에 자신을 성찰하며 기도하는 순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미사는 토요일과 주일 오전 11시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비고개로 741번길 107이고, 전화는 032-932-6318입니다.
나이 비록 늙었지만 저의 내적 성장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목숨! 목숨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고귀한 목숨, 찬란한 목숨이 있는가 하면, 비루한 목숨, 구차스런 목숨이 있습니다.
크고 높은 가치관과 더불어, 희망에 찬 비전을 마음에 담고, 헌신하고 증여하며, 봉사하고 나누는 형태의 목숨은 참으로 고결하고 참된 목숨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목숨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철저하게도 본능에 따라, 육적인 삶을 하루하루 마지못해 연명하는 목숨, 그 어떤 희망도 비전도 없는 목숨은, 살아있다 할지라도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목숨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복음 17장 33절)
참으로 안타까운 일 한 가지가 우리 한 가운데서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활화산처럼 활활 불타올라야 할 청춘의 불꽃들이 채 타오르지도 못한 채, 자취도 없이 소멸되고 있습니다. 나이나 얼굴은 분명 청춘인데,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 중이신 살레시오회 앙헬 페르난데스 아르티메 총장 신부님께서는 지금 가시는 곳 마다 크게 외치고 계십니다.
“채 피어나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는, 이 시대 청소년들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동반해줄 누군가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돈보스코처럼 청소년들의 마음을 읽어줄 줄 아는 교육자들, 그들이 매일 겪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속에, 함께 현존하고 동반해줄 사랑많은 교육자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비폭력 불복종 평화운동의 성자(聖者)로 평생토록 자기 손으로 노동하여 자기 먹을 것을 마련하는 삶, 정말 필요한 것 말고는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삶, 진실을 향해 쉼없이 투신하는 삶을 추구했던 간디는, 목숨의 진정한 의미를 잘 파악한 듯 합니다.
“나이 비록 늙었지만 저의 내적 성장이 끝났다거나 육신의 소멸과 함께 그 성장이 멈출 것이라는 느낌은 없습니다. 제 관심사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진실’에, 나의 신(神)에 복종할 준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몸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알고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몸을 이렇게 다룬다면 언제고 몸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모한다스 K. 간디, ‘간디의 편지’, 원더박스)
<심판의 기준, 바라는 마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사람이 세상에 매인 끈을 끊으려고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자기가 쓰려고 얼마간을 남겨서 숨겨두었습니다. 그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그의 행위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진정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마을로 내려가, 고기를 조금 사서 그대의 벗은 몸에 달아매고 다시 이곳으로 오게나.”
그는 스승의 지시대로 자기의 몸에 고기를 달고 산길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몸에 달린 고기는 흔들거리며 냄새를 풍겼습니다.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고기를 노리고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들개들과 새들에게 대항하며 도망쳤으나 그것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들개들과 새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너무나 지쳐버렸습니다. 이내 그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달린 고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차 없이 그 고기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짐승들은 자신에게서 떨어졌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와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이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돈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이처럼 공격을 한다네. 모든 것을 벗어버린 진정한 빈 몸이 되게나.”
오늘 복음에서 심판의 기준이 나옵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물속에 빠진 이들은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 것과 하느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로 가고 땅에 집착하는 사람은 땅으로 갑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 노아의 홍수와 비슷한 내용으로 롯의 아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으로 상징되는 소돔에 두고 온 것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유황불로 온 소돔 땅이 멸망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지 말라고 하시는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렇게 되자 소금기둥이 되어버려 더 이상 천사의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만으로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착한 일을 많이 했느냐, 안 했느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행위로는 그 사람의 본성을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심판은 ‘본성’으로 측정됩니다. 본성은 ‘욕구’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욕구의 본성이면 하늘나라에서 살 수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야하는데 여전히 꽃이 아닌 나뭇잎을 먹기를 원한다면 그 애벌레는 나비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비가 사는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하늘의 것을 욕망해야합니다. 하늘의 욕망이란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하나의 욕구이기에 본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은 행위와 관련이 없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침상에서 자고 있어도, 맷돌질을 하고 있어도 두 사람의 본성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한 사람은 세상 것을 좋아하고 한 사람은 천상 것을 좋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천상 것을 좋아하는 본성을 지닌 천국의 시민인지, 세상 것을 좋아하여 멸망할 본성을 지진 인간인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영화 ‘보헤미안 렙소디’에서 퀸의 보컬 싱어, 프레디 머큐리는 유명세를 타자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팀원들을 저버리고 혼자 솔로 엘범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만나고 있는 이들이 그를 병들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만나고 있는 이들을 차버리고 다시 동료들에게 돌아갑니다. 이 장면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이 잘못 가고 있었음을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썩었다. 그래서 주위에 날파리들이 많다.”
자신의 주위에 날파리들이 많은 것으로 자신의 본성이 썩고 있음을 눈치 챈 것입니다. 이렇듯 나의 본성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을 것이고, 내가 죽어있다면 날파리와 같은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면 세상을 좋아하는 이들과 어울리게 될 것이고, 천상을 좋아하면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 머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이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린 이스라엘의 미래를 상징하여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세상 욕구를 모두 끊고 오직 사랑만, 오직 그리스도만을 좋아하여 심판을 이기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이미 하늘나라에서 함께 살 사람들로 바뀐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분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분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사프로그램을 오래했습니다.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했고, 잘못된 것들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10년 이상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거울을 보면 늘 찡그린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아빠 곁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의를 드러내고, 불의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정의롭게 되지 않았고, 웃음은 사라지고, 짜증이 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세상은 불의를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연히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신자는 아니었지만 신부님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싶었습니다. 신부님의 사랑과 헌신을 보았고, 신부님을 따르는 수단의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거울을 보니 웃은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들도 아빠 곁으로 오고,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이야기, 감동을 주는 이야기, 사랑하고픈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치 있는 이야기, 보람 있는 이야기를 찾아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사건과 사고가 많이 보도됩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는 당리당략을 먼저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일들만 찾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돌 틈 사이로 피어있는 꽃을 봅니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한줄기 빛을 봅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책과 잡지가 있습니다.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글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아름아운 이야기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악의 뿌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악의 뿌리는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나태, 분노, 질투’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칠죄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의 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정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정화시켜 주실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생명의 은총으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일곱 가지 도움의 은사를 주시는데, 이를 성령칠은(聖靈七恩)이라고 합니다. 성령칠은에는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 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은사를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해 주셨습니다.
2018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5년 동안 살았던 교구청을 떠나서 제주도 엠마오 연수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교구의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는 것도 기쁨입니다.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매일 눈에 담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엠마오 연수원의 생활은 11월 30일이면 끝납니다. 12월에는 미국에 있는 동창신부를 만나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프기도 하셨고, 함께 하는 이들과의 헤어짐도 있었습니다. 감사하는 하루가 모이면 감사의 일주일이 되고, 감사의 한 달이 되고, 감사의 일 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루가 모이면 사랑의 일주일이 되고 사랑의 한 달이 되고, 사랑의 일 년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 중간에 보면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다음의 두 가지를 점검해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첫 번째는 온유한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감정일 텐데요.
보통 형제님들보다 자매님들이 그러한 감정을 더 잘 가지시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관에 가서 보면 어떻습니까.
형제님들은 하품을 하거나 팝콘을 열심히 먹고 있는데, 자매님들은 감정이입이 되어서 ‘얼마나 힘들까..’ 하고 눈물을 보이거나 안타까워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자매님들은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다보니 눈물이 나는 거겠죠.
남녀로 가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남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마음 없이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무척 냉랭한 기운이 감돌 겁니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듯이 살아가는 겁니다.
무척 쓸쓸하고 팍팍한 느낌이 들겠죠.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바라보실 때에 연민의 감정으로, 또 ‘네가 나의 눈에는 값지고 소중하며...’ 하고 바라봐 주십니다.
그러한 시선으로 나의 가족과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도 훨씬 더 따뜻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두 번째는 엄한 사랑입니다.
바른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저에게 아주 엄하셨던 철학 교수 신부님입니다.
돌이켜보면 입학 할 때부터 그분과 인연(?)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주기도문을 외워보라고 하셨는데, 그때가 기도문 말마디가 바뀌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구 기도문만 외우고 있었죠.
그래서 옛날 기도문을 외웠더니 교수님이 ‘이 친구는 정화가 많이 필요하겠네..’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저학년 때 그 신부님 과목이 많았었는데, 당시 저는 기본적으로 성실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러한 저에게 따끔한 회초리를 드셨던 분이 그 교수님이셨던 거 같습니다.
제가 리포트를 성실히 쓰지 않고, 성실하게 시험에 임하지 않았을 때 F학점을 주시고, 재시험을 주시고, 과제를 내 주셨던 거 같습니다.
당시에는 그분이 무척 싫었고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나..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 덕분에 불성실했던 제가 성실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고 배우게 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운동이 되었든, 공부가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성실하게 하면 된다... 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감사함을 느끼는데요.
살아가다보면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가짜 평온을 유지하는 거죠.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때로 엄한 사랑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나는 수술칼을 들고 째고 꺼내고 꿰매는 끔찍한 일은 할 수 없어..’ 한다면 관계는 조금씩 악화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정말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거 같다면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잡고 그를 불러내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좀 더 강한 표현과 행동이 필요하겠죠.
오늘 하루, 온유한 사랑과 엄한 사랑을 배워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동기 신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저녁 늦게 다른 신부와 장례식장에 갔었다.
인사를 하고 나서 동기 신부네 가서 자려고 그 친구 차를 탔는데, 운전은 내가 했다.
출발하고 조금 있으니까 옆에 신부가 피곤한지 잠이 들었다.
나는 길이 익숙하지 않아 네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긴 했는데, 내 거랑 조금 달라서 금방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갈래길이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어디로 가야 돼~” 하고 크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일어나서“무슨 일 있어?” 했다.
그 때는 이미 바른 길로 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아무 일 없다고 하니 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근데 왜 내 심장이 벌렁벌렁 하지?”
<믿는 이의 행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1. 14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루카 17,11-19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병 환자 열 사람 …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뼛속 깊은 나병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주님을 만났을 때
무엇을 청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주님과 마주했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온 몸 던져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께 되돌아온 한 사람 …
그 사람은 정녕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온 몸으로 체험했으니까요.
그의 깨달음은 그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으니까요.
실 날 같은 희망으로 채워진
주님과의 첫 만남은
감사와 찬미 가득한
믿음의 두 번째 만남으로
곱게 곱게 이어졌으니까요.
있는 그대로 나를 아는 것
주님과 마주하기 위한 첫걸음이기에
나를 아는 만큼 행복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주신 것들을 깨닫는 것
주님께 온전히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니
깨닫는 그만큼 더욱 행복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으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27-28절), 노아 때에는 홍수가 닥쳐 한 가족 말고는 모두를 멸망시켰고, 롯 때에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하였다. 이는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절) 이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 돌로 비유하고 있다. 그 돌은 믿는 이들에게는 주춧돌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라고 하였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절)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여 영적 삶에서 육적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에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절) 하느님의 말씀이 씨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하셨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에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과오가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절)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진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제가 만든 노래 중에 사랑의 날개 2집에 수록된 ‘영원을 꿈꾸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를 소개해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흘러내리는 차가운 눈물로 나의 세상이 흐려져 갈 때 빛이 되어 내게 다가온 모습 나는 잊을 수 없죠 내가 거친 삶의 그늘 속에서 힘없이 주저앉았을 때 나의 손을 잡아 주었던 모습 나는 잊지 못하죠 예전에 알지 못했던 아름다운 이 세상 이젠 우리 느낄 수 있죠 예전에 알지 못했던 가슴 벅찬 이 기쁨 말로는 설명 못하죠. 순간이 아닌 영원을 꿈꾸며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요. 세상이 무너져도 남아 숨 쉬는 그런 사랑을 우리 해봐요>
‘크로노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저 흘러가는 인간적인 시간을 대변합니다. 반면 ‘카이로스’라는 말은 하느님 안의 새 창조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진정 우리 신앙인들은 인간적인 시간 크로노스가 아닌 주님 안의 시간 카이로스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하느님 안에 순간이 아닌 영원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하며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참된 의미의 삶, 곧 영원을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깨어 사십시오!” -회개와 사랑-
이수철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살아야 합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에 살아야 합니다. 고운 잎들 다 떠난 보낸 만추의 나무들이 흡사 깨어 기도하는 듯 합니다. 얼마전 써놓은 겨울나무란 글이 생각납니다.
-고운 잎들/다 떠나 보내고
겨울/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
본질本質로/서있는
고독孤獨과/침묵沈默
무아無我/무념無念/무욕無慾/무심無心의
텅빈 충만充滿의/겨울나무가 좋다-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11월 위령성월입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늘 깨어 지내야 할 계절입니다. 기도-회개-깨어 있음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바로 수확이 다 끝난 후 하늘 향해 본질로 서 있는 만추의 나무들이 주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분도회에서는 13세기 독일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였던 성녀 제르투르다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헬프타 수녀원에서 중병을 앓다 세상을 떠날 때의 마지막 성녀의 임종어가 감동적입니다.
“아! 신랑이 오신다.”
늘 일편단심 주님을 그리워하며 깨어 사셨던 성녀임이 분명합니다. 요즘 뉴스 보기가 두렵습니다. 갑작스러운 비참한 죽음이 너무 많습니다. 참으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어처구니 없이 당하는 죽음도 참 많을 것입니다. 너무 사람들이 거칠어지고 흉포해졌습니다. 인격적 응답應答은 없고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反應만 있습니다. 사람들이 천박하고 황폐해져 담아 둘 깊이와 넓이도 없어 보입니다. 자기를 잃고, 잊고 지내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희망이, 비전이, 꿈이 없습니다.
희망이, 꿈이, 비전이 있을 때, 기다림의 대상이, 그리움의 대상이 있을 때 저절로 회개와 깨어 있음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꿈, 비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다림의 대상, 그리움의 대상 역시 주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노아 때의 사람들, 롯 때의 사람들이 상징하는 바 희망이신 주님을, 자기를 잃고 육적 욕망따라 살다가 불행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이처럼 불의의 사고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한스럽겠는 지요. 가슴이 먹먹한 느낌입니다. 눈들어 하늘 보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여 회개의 삶을 살라고 직립인간에 눈들면 어디나 하늘입니다. 욕망따라 살지 말고 깨어 회개하여 주님의 뜻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똑같은 환경 중에도 내면은 전혀 반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던 이는 구원받고 자기를 잊고 욕망대로 살았던 이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맷돌질을 하던 깨어 있던 하나는 구원받았고 자기를 잊고 욕망따라 살던 이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살아있으나 실상 자기를 잊고 사는 죽어있는 삶은 얼마나 많겠는 지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 드는 법입니다. 자기를 잊고 죽어 있는 삶을 살 때 어김없이 다가서는 온갖 어둠의 유혹이요 공격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하는 심판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과 제1독서가 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이렇듯 화답송 시편대로 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진정 회개하여 깨어 사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바로 제1독서 요한 2서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진리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라 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라 하십니다. 선택받은 부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2요한5-6).
사랑이 답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회개하여 깨어있을 때 바로 이런 사랑의 열매입니다. 깨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바로 거기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그를 모든 재앙으로부터 구해 주실 것입니다. 다음 끝기도때 시편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에게는 불행이 닥치지 않고 재앙도 네 막사에 다가오지 않으리라.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91,10-11).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늘 깨어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시다. 다음 고백 기도대로 아름다운 하루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저의 기쁨/저의 사랑/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감동이요/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살려는 사람은 죽고 죽으려는 사람은 산다.<17/26-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떤 이가 배를 타고 황해 하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산 되었을 때 배 안에 자기 귀한 짐을 찾아 어깨에 들쳐 메고 자기 재산을 끊어 앉고 있으면 살아날 길이 없으나 가진 바를 모두 버리고 옷도 벗고 알몸으로 물에 뛰어 들면 살길이 열립니다. 노아시대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배에 오늘 사람은 살고 롯의 부인은 떠나가면서 내가 살던 집 세간사리 그 많은재산을 그리워 뒤르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이야기는 지금도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죽고 모든 것을 놓으려는 사람은 죽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암에 걸려 투병을 시작 할 때 보통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살 것인가? 생각하고 하게 되며 수단 과 방법을 찾지만 죽음을 받아들이고 지난날의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고 평화 속에 주님에게 의탁하고 사는 사람이 병에서 치유 받고 더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가 자기의 기를 한자라도 키우려고 걱정 한다고 기가 크게 됩니까?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 두 사람도 어떤 이는 거두어들이고 어떤 이는 버리신다는 말씀도 차별을 두시는 말씀이 아니라 각자 자기 할 탓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가 행복한 삶을 살까요? 행복한 삶은 각사람의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참 행복이 어딘 에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1. 주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사는 사람, 2, 가르침 따라 온전한 길을 걷는 사람, 3,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법을 찾는 사람, 4, 마음을 다하여 찾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 사람, 5 마음속 깊이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 6,제 눈을 열어 주시어 놀라운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게 은총을 구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며 주님의 영원한 행복 안에 살게 됩니다. 어떤 이가 너무나 살기 힘들어 죽어야 하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죽을 만금 힘 들려 살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 모두가 죽음을 다하고 주님을 따라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나뭇가지를 떠나는
나뭇잎을 봅니다.
미련없이 떠나고
벗어나는 모습은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순리입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모르며 살아갑니다.
떠나야 할
존재임을 모르기에
미련하고
어리석기만합니다.
생명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지
소금기둥이 되는
여정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듯
하느님을 잃어가는 것이
소금기둥의 모습입니다.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 깨닫습니다.
끝까지 믿고
희망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심을
소금기둥에서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 위령 성월이
우리자신을 살피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차의 바퀴입니다.
차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대부분 마차를 이용했었지요. 그런데 이 마차의 바퀴가 원래는 나무였다고 합니다. 나무다보니 너무 쉽게 닳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쇠로 만들었습니다. 쇠로 만드니 그렇게 닳지는 않지만 큰 문제가 발생했지요. 쿠션이 없어서 엉덩이가 너무 아팠던 것이지요. 이러한 아픔을 없애기 위해 쇠바퀴가 굴러가는 길바닥에 고무를 깔았습니다. 그제야 너무 편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큰 문제가 있었지요. 그 넓고 긴 길바닥에 고무를 까는 일에 너무 큰 비용과 노동력이 소모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한 사람이 “길바닥과 바퀴를 서로 바꾸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단한 쇠 바퀴도 마차의 무게를 견디기 힘든데, 가벼운 고무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는다면 곧바로 찢어져서 못쓰게 될 것이라면서 어리석은 생각이라면서 비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연구하다가 고무 속에 바람을 넣은 바퀴를 개발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바퀴의 모습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는 바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원래 처음부터 이런 바퀴를 사용했던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가능이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된 것이지요.
우리들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포기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지만 새롭게 가능한 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날은 우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고 하시지요. 언제일지 모르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 잘 준비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 그 날이 이루어질 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독수리들이 모여든 곳에 시체가 있는 것처럼 분명한 표지가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분명한 표지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이한 적이 없다면서 아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사람만이 살아남았고, 소돔을 떠나고 또 뒤를 돌아보지 않은 사람만이 살아남았던 것처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불가능한 날이 아니라, 곧 이루어질 가능한 날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에는 두 개의 F가 필요합니다. ‘Forget(잊어버려라)’과 ‘Forgive(용서하라)’입니다(채규철).
나는 세상의 왕이다(최천호)
어떤 한 남자의 이력서.
나이는 31세, 경력은 트럭 운전수, 학력은 대학교 중퇴, 학창 시절 왕따. 사람들은 그를 '찌질이 인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력서에는 적혀있지 않은 그의 또 다른 모습... 영화광, 놀라운 상상력, 풍부한 예술적 감각. 이력서에는 적을 수 없는 그의 잠재력, 그런 그가 가지고 있던 꿈, 영화 감독.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던 그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작은 영화 제작소에 취직한다. 일을 하며 그가 틈틈이 완성한 시나리오가 팔린 가격, 단돈 1달러, 그리고 그가 요구한 단 하나의 조건... "내가 이 영화의 감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그렇게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
'터미네이터 감독이 도대체 누구야?' 그에게 주목하기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이 찌질이가 계속해서 만들어 낸 작품들... 에일리언(Alien), 타이타닉(Titanic), 아바타(Avatar)...
그가 바로 지구 최고의 감독 칭호를 받은 제임스 카메론.
과거 그는 서른이 넘도록 변변한 일자리 하나 갖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이력서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가능성을 단순히 지금 내 이력에서 적을 수 있는 것들로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당신의 이력서가 지금 비어있다고 해서 당신의 미래까지 비어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찌질이라 불렀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훗날 오스카 상 수상대에서 이렇게 외쳤다.
"I'm the king of the world"
그렇습니다. 지금 내 이력서의 칸이 비어있다고 해서 나의 미래까지 비어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같은 말을 훗날 자신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세상의 왕이다.”
오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행복한 날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의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니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노아와 롯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짓고 하며 자기 일에만 몰두하다가 멸망하였지요(17,26-31).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심판의 날은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으나, 눈앞의 것에만 매여 제멋대로 살던 이들은 그날에 심판을 받고 정의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과학기술과 자동화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면서 생존의 몸부림 속에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아내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며 눈앞의 생존에만 목숨을 거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멋진 인생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듯 멋지게 살려면 이 세상의 움직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아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목숨 구하겠다고 세상일에 애착하고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지요.
우리 모두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듯 멋지게 살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지혜를 구했으면 합니다. 애착과 집착과 아집에 사로잡혀 분열된 자아를 버리고,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내 한목숨 살리자고 발버둥치면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의 생존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오늘이 마지막이듯 과감한 버림과 세상을 거스르는 결단과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며, 지금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라(17,34) 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좇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시체가 독수리의 먹이가 되듯 심판과 멸망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17,37).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각자의 처지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관계 중심, 타자 중심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만나는 사람을 선물로 여겨 소중히 대하고, 만나는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얼을 깨닫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눈앞의' 생존이 아니라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오늘이 마지막이듯 자신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멋지게 살아갔으면 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의 보물 1호는 무엇일까?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우리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루카 17,27.29) 라고 하시고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31절) 그리고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34-3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정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느 것도 내가 의지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겠구나!’ 하며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부모님도 가족도, 친구도,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누리고 의지해왔던 모든 사실이 죽음 앞에서는 다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 죽음 너머에 계시는 그 분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느끼며, 송구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주님, 저희의 비참한 처지를 굽어보시고 헤아려주시어 주님께 간구하는 저희를 어둠에서 구하소서. 아멘.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 마르티노 주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 늦가을 오후 참으로 재미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속에 마음씨 곱기로 둘째가면 서러워할 한 그룹의 후원자 부대가 찾아오셨습니다. 따뜻한 차를 한잔씩 대접해드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는데, 재미있기로 유명한 한 외국 할아버지 선교사께서 등장하셨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다들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있었는데, 운동을 다녀오시던 그 할아버지 신부님만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습니다. 손님들 가운데는 가볍고 따뜻한 메이커 점퍼를 입고 계셨던 형제님이 계셨는데, 신부님의 ‘헐벗은’ 모습에 몹시 마음이 찔리셨나 봅니다. 갑자기 입고 계시던 점퍼를(거의 새것이던) 벗어 할아버지에게 입혀드리는 것입니다.
너무나 돌발적으로 발생한 일이라 다들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장난기가 발동하신 우리 신부님, 너무 고맙다며 지퍼를 끌어올리시며 “딱 맞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입고 계시던 두꺼운 바지를 만져보시며 하시는 말씀...“이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ㅋㅋㅋ
낙엽이 떨어지고 날씨가 스산해지니 불현듯 그 마음 따뜻한 형제님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투르의 마르티노 주교님(316~397) 역시 마음이 따뜻하기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신부님에게 점퍼를 벗어주고 떠난 형제님과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군복무 중이던 청년 장교 마르티노는 말을 타고 성문으로 들어가다가 추위에 벌벌 떨고 있던 한 노숙인을 발견합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노숙인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구걸이라도 해야 하루를 넘길 텐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노숙인의 모습에 그는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박봉의 군인에다 마침 월말이라 수중에 지닌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군용 외투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장검으로 반을 잘라 떨고 있는 노숙인의 어깨에 둘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마르티노가 잠을 자던 중 특별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깜짝 놀랄 광경을 목격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더 놀란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깨에는 낮에 자신이 노숙인에게 걸쳐준 외투가 걸쳐져 있었습니다.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그는 신속히 그리스도교에로 회심을 하게 됩니다.
이 특별한 사건은 마르티노의 삶을 성직에로 이끌었습니다. 사제가 되고 파리 근처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체험이 남긴 교훈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자신의 사목 생활에 충실히 반영했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그의 모토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4~36절)
사제가 된 마르티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이웃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헌신했습니다. 당시 아리아파와 같은 이단이 횡행하던 시절이었기에 그의 복음 선포 활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교도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봉변도 부지기수로 당했습니다. 이교도들의 탄압이 극심할 때면 그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기도생활에 전념했습니다. 이때 그의 탁월한 인품과 영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수도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2016년도 교회 전례력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해도 이제 거의 막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와 자선과 보속의 시기 대림절이 눈앞입니다. 스산한 날씨 속에 몸과 마음이 추워지는 이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마르티노 주교님의 그 따뜻한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입니다.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다
- 윤경재 요셉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26~33)
현대인들에게 신앙은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할 것 같기는 하나 막상 깊게 빠지면 손해를 볼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쪽 발만 걸쳐두는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습관에 따라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증명 불가능한 것이라 말하며, 모든 신앙의 논리가 명징한 증명이 아니라 결국 무조건적 믿음을 고백하여야 한다는 데로 귀착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어버립니다. 그리고 교리와 신조들은 불확실성에 근거했으므로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모두 여기에서 기원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요한 18. 37~38)
과연 빌라도가 예수께 질문한 진리란 무엇일까요? 왜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답을 하지 않으셨으며, 빌라도는 그냥 유다인들에게 나가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다고 말하였을까요?
합리주의자들과 달리 낭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교조적이라고 말합니다. 감성보다 이성에 치우쳐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끈다고 비판합니다. 인간의 감성은 자유를 추구하며 변화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종교학에서는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항하여 ‘종교는 일종의 도덕체계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다.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신학적인 체계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인간에게는 본래부터 종교심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은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인간의 원초적 종교체험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체험은 감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체험이 일차적으로 감각과 감성에서 출발하나 곧 이성적 판단이 결부되어야 해석이 가능한 체험으로 남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시시대로부터 수많은 체험을 통해 존재의 유한성을 인식할 수 있었고, 모든 존재가 무한자인 신에게 의존한다는 점과 그럼으로써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유한한 존재 안에 무한자인 신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성을 직관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종교체험이 출발하였다고 종교학에서 설명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에는 죄의 인식과 은총의 체험이 덧붙여져 교리체계가 사후에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즉 먼저 각 사람이 실제로 체험한 중요 사건이 있었으며 그 사건에 대한 전달과정에서 교리가 이차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강력한 체험은 결코 잊히거나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 내포된 의미가 분명해지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경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사건을 기록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하느님과 일체성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 라고 표현한 예수 자신의 고백적인 언어 가운데서 확인됩니다. 이제 인간이 신으로부터 고립과 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우리더러 생생한 체험 속으로 들어와 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론적으로 합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읽기보다 자기체험을 통해서 읽고 재해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도 하나의 체계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공동 체험이 일어나는 공동의 장이 될 것이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면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그 의미를 뼈 속 깊숙이 알만한 사건을 다시 떠올려 주십니다. 체험의 현재화이며 의미의 재해석입니다.
구약에서 해석한 노아와 롯의 사건이 사람의 아들의 날에 일어날 사건의 전형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노아와 롯의 사건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알려주는 계기가 있었으며, 자세한 경고와 대처 방안이 사전에 고지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 사건을 중재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경고를 무시하였으며 중재자의 기도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복음 말씀에서 개별적 응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개인적 목숨의 보전보다 신속하고 분명한 응답이 더 절실한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 또한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다가오지는 않겠지만, 그 징조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멸망의 길을 밟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삶 안에서 지내왔던 체험을 꺼내 놓고 재해석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부모님께 전해들은 탄생의 순간부터 유아기, 학령기, 학창시절, 청년시절, 혼사, 직장생활, 사회생활, 가족관계, 친구관계 등등 전 생애를 하느님 앞에 봉헌하고 재해석하는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 재해석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 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십시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최 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던 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우호적으로 기사를 쓰던 언론들도 날카로운 펜으로 엄정수사를 촉구하고 있습니다.여왕처럼 모시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人生無常’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생각합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비단 언론에 드러나는 모습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타면 결국은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맙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권력, 출세, 성공, 재물’이라는 동아줄은 결국은 썩은 줄이 되어서 높이 올라갈수록 더 큰 상처를 만들게 됩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산행을 하던 사람이 미끄러져서 겨우 나무줄기를 잡았습니다. 날은 추워지고, 밤은 깊어서 어두웠습니다. 나무줄기를 잡은 사람은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살려 주세요! 그러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살고 싶은가? 지금 잡고 있는 나무줄기를 놓아라! 순간 나무줄기를 꽉 잡았던 사람은 고민합니다. 겨우 잡고 있는 나무줄기를 놓으면 죽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아래는 안전한 풀밭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이미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과 공간은 정신과 영혼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질 수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체험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물리적인 시간, 경제적인 시간, 정치적인 시간은 분명 시작과 마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시간, 의미의 시간, 희망의 시간은 또 다른 차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악의 뿌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악의 뿌리는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나태, 분노, 질투’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칠죄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의 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정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정화시켜 주실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생명의 은총으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일곱 가지 도움의 은사를 주시는데, 이를 성령칠은(聖靈七恩)이라고 합니다. 성령칠은에는 슬기 통달,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 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은사를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최후심판 -자비하신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강론 주제는 복음의 소제목 그대로 ‘최후심판’입니다. 가슴 철렁하게 하는 명쾌한 말마디 최후심판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묵상하는 11월 위령성월에도 알맞은 주제입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꾸로 미래에 있을 최후심판의 빛으로 현재를 조명하며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의 자비가 답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최후심판도 각자의 자비행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오늘의 복음입니다. 제 좋아하는 시편 화답송 후렴 둘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고 그의 규칙서에서 수도승들에게 말합니다. 이런 하느님께 바칠 마지막 기도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 하나뿐일 것입니다. 자비송을 바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당부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필생의 과제입니다.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으로 수렴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공적활동에 앞서 출사표出師表처럼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크게 깨달았고 평생 이 말씀대로 복음 선포와 더불어 자비행의 삶을 사셨습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자비로운 삶을 요약합니다. 바로 똑같은 주 하느님의 영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위에 내려 우리 또한 자비행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최후심판의 기준은 아주 간명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자비의 실천입니다. 최후심판의 기준은 신앙과 종파도 아니고 기도와 예배도 아니며 자비행 하나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주님은 곤궁에 처한 모든 가련한 이들을 당신의 형제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합니다. ‘내형제’란 말에서 보다시피 제자들만 아니라 곤궁에 처한 모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임을 선포합니다. 종파와 인종, 국적을 초월하여 곤궁중에 있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당신의 형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열거하신 자비행의 조목입니다.
“너희는 내가
1.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3. 내가 나그네 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4.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5.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6.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25,35-36).
최후심판의 조목은 모두 여섯입니다. 주목되는 것은 모두가 영적인 것이 아닌 육적인 것, 즉 인간의 몸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몸의 결핍을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몸이 고단한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 들이고, 몸이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며, 감옥에 갇힌 불쌍한 몸들의 사람을 찾아 주라는 것입니다. 곤궁한 이들의 영성화靈性化가 아니라 몸의 현실로써의 구체화具體化입니다.
과연 주님 앞에 섰을 때 이 여섯 중 내가 실천한 항목들은 몇이나 될까요. 우리 정주定住의 분도 수도승들에게는 나그네처럼 수도원에 피정차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따뜻이 맞이하는 환대가 가장 적절한 자비행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에 근거한 성 베네딕도 규칙 53장 1절 말씀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 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환대만 아니라 '자비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곤궁한 이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마르티노 주교의 유명한 일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르티노는 문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를 보자 자기 외투를 둘로 잘라서 반을 거지에게 주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 속에서 자기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리스도는 마르티노에게 말씀하셨다. “마르티노야, 네가 나에게 옷을 입혀 주었구나.”-
마르티노를 결정적 회심으로 이끈 영적체험입니다. 마르티노는 즉시 세례를 받았고, 세상 군대를 떠나 마침내 ‘그리스도의 군인(a soldier of Christ)’인 수도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자비행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2요한 4,7)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속말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요?
거짓 투성이요 가짜가 판치는 세상을 빗대어 "세상은 요지경"이라 하지요.
미국의 대선을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국정농단 사건을 봐도 정말 요지경이지요?
이런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허탈감에 분노하며 욕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그런다고 속이 시원해지지도 않으니 온 국민과 대한민국이 멘붕이군요.
요한서의 저자도 거짓이 판치는 세상을 접하며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허망해 하거나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더 몰두하라고...
그렇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서로 더 사랑하며 살아야겠지요.
그분의 가르침은 바로 사랑 안에서 꿋꿋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난국에 여느 때보다 더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서로를 격려합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제 목숨을 보존 하려는 사람은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때와 장소 및 재림의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인 오늘 <복음>에서는 ‘재림 직전의 세상의 상황’(7,26-30)과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7,31-37)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들이 단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간다하더라도, 혹은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이는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하더라도, 하나는 버려둘 것이요 하나는 데려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냥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 버려둘 것입니다. 그냥 심고 짓고 하면 버려둘 것입니다. 곧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면 생명이 버려지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내어놓으면 살게 될 것입니다. 타인을 향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면 데려갈 것입니다. 곧 구원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지 보다, 그것을 어떤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 일 것입니다. 곧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내어주고 타인을 향하고 있는지 일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그러니, 오늘 나는 썩어 부패하여 죽은 시체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생명이 팔딱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 들여다 볼 일입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자신의 보존을 위해 애쓰는 죽은 삶을 살고 있는지, 타인을 향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팔딱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 혹 우리의 눈이 독수리의 눈이 되어, 죽은 시체를 향하여 달려들고 있지는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사람의 아들을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은
불의하고 탐욕스런 이들은
가슴을 찢고 통곡을 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사람의 아들이 몸소 돌보시던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받은 이들은
찬란히 빛나는 부활을 맞이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스스로 재물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 닮은 사람을 짓밟은 이들은
고통스런 심판 앞에 두려워 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사람의 아들의 작은 벗들을 섬기려
재물과 권력을 아낌없이 나눈 이들은
사람의 아들의 소중한 벗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보이는 한 줌 세상과 뒹굴며
영원한 세상을 업신여기던 이들은
끝 모를 깊은 어둠에 잠길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영원으로 흘러가는 오늘을 살며
오늘 속에서 영원을 사는 이들은
마르지 않는 기쁨과 희망을 누릴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미 오셨고
사람의 아들은 지금여기에 함께 계시고
사람의 아들은 다시 꼭 오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모든 이에게 이루어질 그 모든 것은
비록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하더라도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보고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 루카, 17,26-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보고 들은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구약에는 노아의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부터 하느님의 뜻을 범하는 사람들은 멸망의 구렁이에 빠지고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는 역사의 비참한 현상을 보고 들어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비참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깨닫지 못하여 인명 살상 무기를 만들고 예측불허의 비참한 사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과 남이 전쟁을 벌여 비참한 현상으로 죽은 자와 산자들의 고통의 현실을 듣고 보고 하였습니다. “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든다.” 이 말씀은 눈에 보이게 일어나는 현상을 말씀하십니다. 저는 사람의 비참의 원인은 지난날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눈 앞에 이익에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축하 무드가 깨어지기 시작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자기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복수나 방해를 놓으려 합니다. 힐러리는 이메일 사건을 특검 하여 감옥에 넣어야하고 트럼프는 세금 포탈을 고발하여 서로 상처를 내려고 한다는 말은 반대에 익숙한 사람들의 또다른 불행을 초래하는 결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 루치펠 같은 악마적 요소가 들어 있어 시기 질투 모암 악선전으로 제대로 사람이 서있지 못하게 하는 악성이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 시기하고 자기보다 잘되는 사람 끊어 내리려하고 자기 콧털을 건드리는 사람의 눈썹을 뽑아 내려고 하고, 인간의 비참한 현상을 보고도 눈 하나 깜작도 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11월 죽음을 묵상 하는 시기 다른 이들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으로 의식하며 더욱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죽음이라는 존재를
잊었던 우리가
독수리처럼 죽음을
다시 깨닫게됩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우리의 죽음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 달아날 수
없는 우리의
죽음입니다.
죽음또한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머물러야 할
삶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삶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위령성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이라는 삶또한
삶의 재창조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불변의 진리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듯
우리또한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죽음을 기억할 때
진정한 삶을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루카 17, 37)
인생에서는 선택하지 못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태어나는 조건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살아가는 최종 목표와 종착지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은 인생이라는 열차 안에 있는 승차기간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인생은 영원한 시간이 아닌, 언젠가는 마쳐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뿐이겠습니까? 하지만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위의 세 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의 인생이라고도 말하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커다란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금이라는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미래도 또 과거도 내 것인 양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들은 결국 마지막 날에 후회할 일들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일본의 어떤 유명한 교수님이 계신데, 그분께 한 신문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만약 교수님께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조금의 생각도 하지 않고 “저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으며, 이 믿음 안에서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그런데 만약 다시 태어나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 교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을 통해서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이로써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의 징조들은 분명하겠지만 갑작스럽게 온다고 말씀하시지요. 노아와 롯의 때와 비슷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갑작스럽게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입니다. 그래서 옥상에 있는 이는 집 안의 세간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라고 하시지요. 또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세상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나’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으면서 또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에 충실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고서는 마음도, 정열도 전해지지 않는다. 행동으로, 대화로, 글자로, 생각을 모두 표현해야 비로소 사람과 유대도 생긴다(이케다 다이사쿠).
링컨의 리더십
미국 국민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은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가 남긴 업적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그가 보여준 인품이 어떤 대통령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이지요. 최근에는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편지 한 통이 공개되어 더욱 더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링컨이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게티즈버그 전투 때 마이드 장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보낸 짧은 편지 한 통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존경하는 마이드 장군!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만약 작전이 실패한다면 장군은 링컨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시고. 그리고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시오!”
책임은 자신이 지고 영광은 부하에게 돌린 링컨의 리더십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진정한 용기의 모범이 아닐까요? 무조건 ‘나를 따라라’하면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참된 리더의 모습이 아니지요. 또한 난처한 상황이 처해지면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리더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책임을 지고, 다른 이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리더. 그러한 리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밀당의 귀재,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참으로 ‘밀당’의 귀재였습니다. 때로 세상에 그런 따뜻한 위로의 말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 감미로운 위로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 포기하고 죽어가던 사람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때로 죽었다 깨어나도 정신 못 차리는 사람들,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성 발언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가슴이 섬뜩할 지경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복음17장 34~36절)
사람의 아들이 강림하는 그 날은 그분께서 하늘의 은신처를 떠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출발점입니다. 그날은 약속에 따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하느님께서 주재하시는 법정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정은 어떤 사람에게는 포상과 기쁨의 법정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징벌과 두려움의 법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야속하게도 그 법정이 언제 벌어질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인간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리게 됩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선인들입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다시 말해서 인류의 마지막 날을 미리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지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 때 부류의 사람들,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들은 그날이 결코 오지 않으려니 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흥청망청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날이 번갯불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한방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복음 17장 31절)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뿐입니다.
언젠가 북쪽 밤바다에 서 있다가 강렬한 군용 서치라이트 불빛이 제게 다가와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들고 있던 작은 랜턴의 불빛은 순식간에 의미를 상실해버리더군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인류 최후의 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 앞에 우리 인간의 나약함이나 죄, 불성실함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에게 거의 전부라고 여겨졌던 현세적 만족, 말초적 쾌락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복락 앞에 즉시 시들시들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날 항구하고 유일한 가치와 의미로 남게 될 것은 오직 오시는 주님뿐일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인정되면 좋겠지요.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서울 모 대학에 입학했다고 자랑하는 마을 사람들이 플랑카트까지 겁니다. 축구 4강일 때 전 국민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모두가 잘 알지요.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사람 되려고 목숨 걸고 노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의 권력이나 미모나 기술이 죽어도 하늘에서 보장된다면 참 좋겠지요. 신나고 기쁜 기분에 대한 축하가 하늘나라에서도 인정되면 좋겠는데요. 세상의 외적 여건은 세상의 것일 뿐, 내적 여건만 하늘의 것이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카 17,34)”
평생 순례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비행기를 타고 갈 때, 예나 이제나의 습관은 제 좌석 앞 화면의 비행지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먼저 번 파리에 갈때는 12시간 걸려 유라시아 대륙(大陸)을 건넜고, 이번 미국의 뉴욕에 올 때는 13시간 태평양 대해(大海)를 건넜습니다. 그 아득히 먼 거리의 목적지를 향해 푸른 하늘을 홀로, 용감히, 힘차게, 정확히 한결같은 속도로 날라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늘 신기하고 힘이 납니다.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구도 여정을 기막히게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느님 찾는 여정에 이상은 없으신지요?
비행기야 기껏해야 십여 시간 좀 넘지만 우리의 순례여정은 평생입니다. 하느님 목표를, 방향을 잃을 때 저절로 길을 잃어 일상의 늪에 빠져 두려움과 불안, 방황과 혼란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입니다. 이 목적지인 하느님께 도착하기 위해, '끊임없이'
1하느님을 찾아야 하고,
2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3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사랑을, 기도를 잃어버릴 때 사람들은 육적 욕망의 포로가 되어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예나 이제나 인간현실은 그대로 같습니다. 완전히 하느님이, 영혼이, 사랑이, 기도가 빠져버린 인간 현실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길 잃은 인간현실을 보여주는 듯하여 섬찍한 생각도 듭니다. 과연 인류의 진보가 가능은 한지 묻게 됩니다. 다음 주님의 엄중한 말씀이 고맙습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목표 하느님을 향해 부단히 전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비전을, 방향을 잃고 과거에 집착하여 머물러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가 상징하는바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평생공부는 하느님 사랑 공부뿐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말도 있듯이 하느님 사랑 공부도 매일, 평생, 끊임없이, 충실히 해야 길을 잃어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주님의 다음 비유가 적절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환경이 구원에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똑같은 환경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는 구원 받았지만 하나는 버림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각자 내적 상태는 판이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깨어 하느님 목표 지향적인 사랑의 삶에 항구했지만, 후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구원 받은 앞의 사람은 요한 2서의 말씀대로,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말씀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도 모시고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목적지에 도달하는 그날 까지 매일, 우직하게, 새로이 시작하는 길뿐이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순례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2).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았습니다. 인터는 ‘내면’을 뜻하고, 스텔라는 ‘별’을 뜻합니다. 의미를 합하면 ‘내면의 별 혹은 내 안의 별’이라 하겠습니다. 영화는 물리학의 주제들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보여 줍니다. ‘중력, 웜홀, 블랙홀, 상대성 이론, 5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수많은 물리 법칙들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중력을 넘어서고, 블랙홀을 통과해도 우리는 지구보다 더 아름답고, 더 환상적인 별을 만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우리의 내면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종말,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웜홀’을 통과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종말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원소들은 변화할 뿐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도 토성 넘어 새로운 행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시간의 연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의미의 시간이고, 가치의 시간입니다.
저는 너무나 사랑합니다. 서쪽 하늘로 빨갛게 물드는 석양과 동쪽 하늘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사랑합니다. 가을 산하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단풍을 사랑합니다. 바람에 떨어져 땅에 뒹구는 낙엽을 사랑합니다. 아이의 입에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눈빛을 사랑합니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희생, 헌신, 나눔의 행위들을 사랑합니다. 인류의 여명을 밝게 비추어준 지성의 별들을 사랑합니다. 시와 음악 그리고 문학이 있는 이 지구를 사랑합니다. 우리 안에 분명 ‘인터스텔라’가 있는데 어쩌면 우리는 ‘엑스트라스텔라’를 찾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밭’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중력장도, 웜홀도, 블랙홀도, 상대성 이론도, 5차원도 넘어서는 힘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계명은 사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의 극복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아직 멀리 있는 듯 바삐 살아간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과는 무관하게 때로는 생존을 위하여, 더 많은 것을 지니기 위하여,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인정받기 위하여 움직이고 때로는 끌려 다닌다. 이른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적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의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니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노아와 롯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짓고 하며 자기 일에만 몰두하다가 멸망하였다(17,26-31).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태워버리실 때 롯의 아내는 달아나다가 불타는 도시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해버렸다(창세 19,26). 이와 같은 일이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도 일어날 것이다.
아무도 그날을 미리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그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에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 실천은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던 이들은 심판을 받고 정의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똑똑히 목격할 것이다.
우리는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롯의 아내처럼 살아갈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다.
하느님의 심판 날, 즉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 불림 받기 위해서는 노아와 롯처럼 이 세상의 움직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본성을 잃어버린 자아를 떠나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만 충실해야 하며, 실천적 무신론자들처럼 심판의 날이 오는 줄도 모르고 먹고 마시면서 자기 편한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제자들이라면 롯의 아내처럼 세상의 삶에 미련을 두지 말고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17,31)는 말씀은 그만큼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은 필연적이며 무서운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도 일시적으로 뉘우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매순간 회개를 실행하도록(facere poenitentiam)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17,34) 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며, 지금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라는 뜻이다. 노아와 롯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서 목숨을 지키려 애썼다.
짐작도 못한 순간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면 정의를 실천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증오와 불의를 실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시간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매순간 하느님을 드러내는 선택과 결단을 분명히 하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애착과 집착과 아집에 사로잡혀 분열된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하고 싶은 대로 실천적 무신론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서약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일지라도 결국 나는 내 좋을 대로 나의 길을 가겠다는 식의 실천적 무신론의 태도에 깊이 젖어 살아간다. 오늘 예수님은 실천적 무신론자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올 때에 일어날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17,37)고 말씀하셨다.
그 뜻인즉 지금 여기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좇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시체가 독수리의 먹이가 되듯 심판과 멸망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각자의 처지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만나는 사람을 선물로 여겨 소중히 대하고, 만나는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얼을 깨닫도록 힘써야 한다.
또한 세상적인 애착과 미련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변함없이 실천해야 한다.
이제 자신 안에 스며 있는 실천적 무신론의 흔적을 성찰해보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지금, 여기서' 자신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실천적 무신론을 벗어나도록 하자! 더는 내가 뜻대로 내 편한대로 사는 걸 멈추도록 하자!
멈춤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사는데 정신없습니다. 오늘 약속은 무엇인가, 오늘 끝내야 할 일은 뭔가, 또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데 돌아보니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더군다나 날도 추워지니 걱정만 쌓이고 신경써야만 하는 일들은 쉴 새없이 몰려듭니다. 시편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는 멈추고 알아들어라. 내가 하느님이로다”(시편 46,11). 잠시나마 우리는 멈추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어디 계신지를 살펴야 합니다.
까마귀를 보면 기분이 나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 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아예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이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듣고 돌아보니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제대 위 성체로 계셨습니다. 그러고는 내 손에 오셨고 내 마음 안에 온전히 들어오셨습니다. 미사는 멈춤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순간입니다. 아니,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순간입니다. 놀라운 신비 안에 몰입하는 절정입니다. 이제 멈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이지요.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우리는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늘 재림을 사는 일상입니다. 재림은 저 멀리 한참 후에 일어날 무서운 시간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새로운 시작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 카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아우구스띠노성인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천상의 삶을 산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전에 이미 내가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삶이 심판의 자료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십시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심판을 두려워 말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외적인 환경과 예기치 않은 일에 마음을 상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무질서를 보고 언짢아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심판의 날은 곧 구원의 날입니다. 하느님을 마주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는 그야말로 심판이고 죽음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사랑합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심이 사랑인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아침에 성당에 앉아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많은 자매님들이 오셔서 기도를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3 수험생을 둔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제가 학력고사를 볼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날도 추웠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2교시 수학시험을 망쳐서 싸온 점심을 먹으며 ‘다 포기하고 재수를 해야 하나?’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철문 밖에서 차디찬 철문을 잡고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라고 결심하고 시험을 치렀더니 역시 수학성적은 형편없게 나왔음에도 다행히 간신히 지원한 대학에 붙을 수 있었습니다.
표현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만 우리를 사랑한다고는 하시며 인간이 되어 우리와 똑같은 처지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가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이 표현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면 어머니의 사랑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가 쓰여지던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육체가 물질세계에 해당되는 것이기에 더러운 감옥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거룩하고 깨끗하신 하느님이 육체를 취해 속박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이 육신을 취하셨음을 어떻게 해서든 부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거룩함이란 영적인 것이지 육체적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참 지식을 알아 육체와 물질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 여겼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 영지주의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어떤 부인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계명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그리고 곧바로 속이는 자들이 이 세상에 많다고 말하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고,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위 ‘적그리스도’는 그러니까 사랑의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사랑을 말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스스로는 거룩하다고 하면서 가장 낮고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다가가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 춥고 배고프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과 육이 하나임을 믿어야합니다. 영으로 사랑하면 육으로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체는 그리스도의 영과 밀떡의 물질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 물질을 무시하면 그 안에 계신 영도 무시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육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인간으로 내려오셔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영지주의는 따라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부자로 남아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부자인 교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비천한 육체를 취하셨듯이, 또 인간을 풍요하게 하기 위해 당신의 피와 물까지도 다 내어주셔서 한없이 가난해 지셨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야 참으로 사랑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입 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도 표현될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한번은 누군가 목사이자 신학자이고 동시에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슈바이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
아마 이 말 안에는 다른 많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는데, 왜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라는 가난한 곳에 와서 그런 고생을 하면서 사느냐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말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말씀만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사람이 되셔서 참 사랑은 낮아지고 가난해져야 함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 가난해짐을 실천하지 않으면 요한이 경고한 ‘그리스도의 적’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중한 목숨은
소금기둥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가는
의미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지녔기에
우리가 지닌 많은 것들로
서로를 죽여 가고 있는
아프고 슬픈 현실이 되었습니다.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잡으려 애쓰는
롯의 아내같은 우리들입니다.
욕망은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 치명적인
유혹의 산실인 소돔과
고모라로 반복될 뿐입니다.
생명의 길을 욕심으로
채우는 불행한 우리들에게
종말은 새로운 변화의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자신을
끝내 저버리고
파멸로 몰고가는 주체는
위험수위를 너무나 자주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자신들입니다.
또다시 우리 삶의 자리에서
불행을 반복하며 사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말씀하십니다.
행복한 사람은 없고
집착의 결정체인
소금기둥만 즐비한
우리들 모습을 반성해보는
한 해의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옆에 있는
가족을 바라보십시오.
롯의 아내또한
두고온 재물이 아니라
가족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하느님께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주님을 향해 가는
기쁨과 희망의 길임을
기억하는 위령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것의 끝은
모든 것의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독수리가 시체를
쫒듯이
우리는 무엇을
아직도 쫓으며 살고 있는 지를
성찰케 합니다.
사랑의 시작과
사랑의 끝은
언제나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언제나 사랑이듯
사랑의 종말이
죽음임을 묵상케 됩니다.
이렇듯 하느님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린 삶의 모습을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향해야 할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야 할
우리의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쫓고 있는지를
다시 물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종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의 본질이신
하느님뿐입니다.
시체로 모여드는
독수리들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다시 모여드는
하느님의 자녀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데려가고 버려둘 것이
무언지를 분간하는
생명의 오늘 되십시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첫 번째 시험을 치르게 되었지요. 시험이 끝난 뒤,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 물었습니다.
“몇 점 받았니?”
그러자 이 아이는 활짝 웃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30점이요!”
그 순간, 이 아이의 부모는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혹시 자신의 아이가 바보는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요. 어떻게 첫 시험인데 겨우 30점 밖에 못 받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랑스럽게 말하는 자녀에게 ‘그건 부끄럽게 여겨야 할 점수야...’라고 말하려다가, 이렇게 물었지요.
“그래서 넌 기분이 어땠어?”
이 질문에 이 아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우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맞힌 문제가 있다는 게 정말 신났어!”
이러한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정말로 신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30점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거둔 자그마한 성공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삶을 더욱 더 풍요롭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바라보십시오. 쓸데없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생산해내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들에게는 물론이고 내 가족들에게 또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아픔과 상처의 수는 정말로 무수한 것 같습니다. 바로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노아와 롯 시대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들도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마지막 날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로 주님께 선택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선택되겠습니까?
한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는 작은 것을 받아도 기뻐하고 신나합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는 아무리 좋은 것을 줘도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것을 왜 줘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아이를 좋아하시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 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모든 것에 대해(심지어 작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 아니면 모든 것에 대해(아무리 크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불평불만으로 사는 것. 정답은 우리 모두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을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날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가 아닐까요?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대니 서).
거절한다는 것.
어제 꾸르실료 입소식이 있었습니다. 마침 교구청에서 함께 근무하는 신부가 꾸르실료에 입소한다고 해서, 봉사자들과 신부님들 간식꺼리를 사러 시장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 한 분께서 제가 사려는 간식꺼리의 값을 대신 지불하시려는 것입니다. 제가 누군지를 알고서 대신 계산해주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서둘러 말했지요.
“제가 누구 선물하려고 사는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이 자매님께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하시더군요. 정말로 사주고 싶었는데, 제가 정색을 하면서 거절을 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에 저 역시도 약간 당황했지요. 그래서 사주시려는 마음만 받겠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어색해하시던 그 자매님의 표정이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네요.
묵상을 하면서 제가 지혜롭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그때 조금만 지혜롭게 이렇게 말했으면 어떠했을까요?
“이것은 제가 누구 선물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냥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자매님께서는 저를 위해서 하나만 사주십시오.”
저도 기쁘게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이 자매님도 좋아하시지 않았을까요?
세상의 그 누구도 ‘No’라는 대답을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이들이 ‘Yes’를 원하고 있지요. 그런데 나의 불편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No’를 너무나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나의 불편한 마음도 좋게 만들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얼마 전, 전철을 타고서 어디를 가는데 전철 안에 서 있던 어떤 자매님들이 저를 보고 웃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생각했지요.
‘나를 아는 사람인가보다. 혹시 내 강의를 들었던 분인가?’
그래서 저는 반갑게 웃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지요. 그랬더니만 더 활짝 웃는 것입니다.
‘인사를 하길 잘했다. 아는 체를 하니까 얼마나 좋아하는가?’
하지만 잠시 뒤 저는 목적지에 도착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른 전철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매님들이 웃은 이유를 알게 되었거든요. 어느 정도 예상하시겠지요? 맞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웃을 때에는 먼저 “바지 지퍼가 열려 있지 않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착각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늘 착각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유혹으로 우리들은 커다란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즉,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내게 있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더 중요한 것을 행하지 못하고 욕심과 이기심으로 내 자신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할 날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우리들은 정작 행해야 할 사랑의 실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의 날’이 노아 때처럼 갑자기 들이닥칠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구약성경을 보면 세상 종말을 예고하는 예행연습 같은 사건이 두 번 있었지요. 하나는 노아의 방주라 일컫는 대홍수였고, 또 하나는 죄악의 도시 소돔을 순식간에 불비를 내려 멸망시킨 롯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앞날에 일어날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와는 먼 이야기,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의 아들의 날’은 하느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날로, 최후 심판의 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사람들이 살아오던 인생의 가치평가가 완전히 뒤바뀌는 날입니다. 이 가치 평가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롯의 아내처럼 세상 재물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는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시지요. 하지만 이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꾀는 자연의 이치처럼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날이 언제 어디에 있을 것인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나와는 상관없다고, 또한 나에게는 먼 이야기라는 착각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뿐임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깨어있는 사람이 가장 오래 사는 것이다(서양 속담 중에서).
승자와 패자의 차이(디아스포라)
승자는 언제나 답을 제시하는 편이지만, 패자는 언제나 문제를 제기하는 편이다. 승자는 언제나 계획을 갖고 있지만 패자는 언제나 변명을 한다.
승자는 “너를 위해 내가 그것을 하겠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승자는 모든 문제에서 답을 찾아내지만 패자는 모든 답에서 문제를 찾아낸다.
승자는 모든 모래 구덩이 근처에서 초원을 찾아내지만 패자는 모든 초원 근처에서 두세 개의 모래 구덩이를 찾아낸다.
승자는 “어렵겠지만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가능하지만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승자는 항상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항상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승자는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만 패자는 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승자의 입에는 솔직함이 가득차고 패자의 입에는 핑계만 가득 찬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고 패자는 일어나 뒤를 본다. 승자는 패자보다 열심히 일하지만 시간의 여유가 있고 패자는 승자보다 게으르지만 늘 ‘바쁘다’고 말한다.
승자의 하루는 25시간이고 패자의 하루는 23시간밖에 안 된다. 승자는 구름 위의 태양을 보고 패자는 구름 속의 비를 본다.
소돔과 고모라
-염철호 요한 신부님-
어릴 때 무엇을 하든 걱정이 없었습니다. 나는 절대 죽지 않으리라 여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된 지금 주변에서 죽음을 알리는 소식들을 많이 접하면서 죽음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죽음은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처럼 절대로 죽지 않는 사람 마냥 함부로 이런저런 말을 해 대고, 이런저런 행동을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죽음이 그들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느님의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 끝이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살았던 듯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롯이 그들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런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심판에 관해 우리에게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롯의 아내에 관해서도 알려 줍니다. 그녀는 오직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길을 따라 열심히 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남겨 둔 것이 아쉬웠던가 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 제자가 되려고 길을 떠났으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모두 버리고 나서야 얻게 되는 생명
박경선-
앞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어디서 오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있을지 없을지, 언제 있을지도 모를 일에 마음을 빼앗겨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오늘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잊을까 저어하신 까닭입니다. 이어서 이번에는 그 ‘오늘’ 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앞길을 예비했다는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는 말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그저 그동안의 잘잘못을 살피고 뉘우치는 평면적인 사색의 행위가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전적으로 새롭게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서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 하느님 나라를 위해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온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회개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단절과 충만한 시작을 잇는 ‘부활’ 인 셈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한 시대가 끝나고 또는 한 세상이 끝나고 전혀 다른 세상이 시작되는 마침점이 아닙니다. 그동안의 죄과를 셈하러 재판관으로 오실 하느님을 마냥 기다리는 무능력한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로운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느끼는 온갖 악의 징후 때문에 종말을 의식하게 되겠지만, 결국 그 악에 맞서 나를 던져 죽음으로써 내게, 그리고 우리의 시대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나의 결연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그날이 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의 날”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면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우리들의 날이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은 사람의 아들이 주인공이지 우리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날,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면 우리가 하던 짓거리들은 다 멈춰져야 합니다.
그때까지 하던 짓거리를 스스로 멈추지 않으면 노아 때 사람들처럼 소돔의 사람들처럼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사람의 아들과 상관없이 우리들끼리 하던 짓들은 다 멈춰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빼놓고 우리끼리 흥청대며 먹고 마시던 일, 우리끼리 시집가고 장가가던 일은 다 멈춰야 합니다.
오직 사람의 아들과 상관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던 짓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연도 끝을 내야 합니다.
룻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아들과 만나기 위해 미련 없이 고향 땅을 떠나야 하고, 고향 사람과 헤어져야 합니다.
그날이 오면 과거는 잊어야 합니다.
과거의 오늘을 살아서는 안 되고 사람의 아들과 새롭게 시작하는 새로운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안 좋았던 일은 물론 과거의 영화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까지 그날이 오면 과거는 정지되고 새로운 미래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짓과 과거의 인연을 다 끊는 날이 바로 우리가 사람의 아들을 만나는 날이라고.
종말 준비
-안문기 신부님-
창세기에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족들이 모두 달아나는데 롯의 아내가 달아나다가 불타는 도시를 돌아다봅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거역하여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으로 변했습니다(19,20).
예수님께서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라고 하시며 경고를 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유황불에 타는 마을, 그 속에 온갖 세상사가 다 들어 있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온갖 죄악과 부정부패를 일삼았습니다. 결국 일상생활 속에 최후가 있다는 뜻입니다. 롯의 아내처럼 그날이 오면 미련을 갖지 말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날’ ‘하느님의 날’ ‘종말 심판의 날’은 다 같은 날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바로 ‘사람의 아들의 날’입니다. 그날은 갑자기 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늘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결국 그날이 오면 가진 것을 모두 두고 가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일상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김수만 신부님-
노벨은 33세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노벨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기자가 소식을 잘못 듣고, 노벨의 사망기사를 실었던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라는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노벨은 생각했습니다. ‘오늘이라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노벨은 마음속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이제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 것을 다 내놓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너무나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잘못 이해하면 어떤 공포감과 위화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어떤 공포감이나 위화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어느 누구한테나 예외 없이 닥치게 되는데,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자연의 이치처럼 심판 또한 하느님의 뜻과 이치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날과 그때는 이 세상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관심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사랑을 잘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그 준비가 서툴렀다면, 지금 당장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그 준비의 첫 단추가 ‘하느님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제1독서 말씀이 마음을 건드립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이 파멸의 때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파멸의 때를 얘기합니다.
파멸의 때는 꼭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파멸의 때. 이 파멸의 때에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세상에 있을 것인가, 방주에 있을 것인가?
이 파멸의 때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먹고 마시고 할 것인가, 굶고 기도할 것인가?
이 파멸의 때에 나는 누구와 함께 있을 것인가?
사람들과 같이 있을 것인가, 하느님과 함께 있을 것인가?
방주에서 단식기도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정답일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하고 싶고 정답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파멸의 때가 언제란 말인가?
그 어느 때가 아니고 지금이 아니던가?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 한 가운데서 사람들과 먹고 마셔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나는 이 파멸의 때에 세상 방주 안에서 먹는 단식기도를 하며 사람의 아들이요,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난 여름방학 때 아일랜드에 있으면서 두 번 슬라이고란 곳에 갔었습니다. 그 동네는 바닷가에 위치해있습니다. 그 동네 사시는 분과 함께 우리는 바다낚시를 갔습니다. 팔뚝만한 돔들이 낚시를 던지자마자 계속 걸려 올라왔습니다.
물론 저는 낚시를 할 줄 모르고 잡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간 이유는 잡힌 고기를 그 자리에서 회쳐먹기 위해서입니다. 그 곳에 사시는 분은 능숙한 솜씨로 회를 뜨셨고 함께 간 신부님들과 함께 우리는 유럽에선 좀체 맛볼 수 없는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갓 잡아서 먹는 이 신선한 맛이란 횟집에서 먹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었습니다.
바닷가에 사시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생선은 신선하면 날것으로 먹고 신선도가 조금 떨어지면 굽고 더 안 좋은 것은 튀긴다는 것입니다. 그 분 말씀에 의하면 요리를 하는 이유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날것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그렇겠지만, 특별히 생선은 죽으면 더 빨리 썩고 냄새도 더 빨리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려서 운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꽁치는 특히 빨리 죽고 빨리 냄새가 나기 때문에 요즘은 마취하는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를 치고 남은 비늘과 껍질을 바다에 던졌더니 어디선가 갈매기 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상어는 피 냄새를 몇 킬로 멀리서도 맡을 수 있다고 하듯이 갈매기들은 생선의 냄새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는가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단순한 진리로 마지막 날이 어떻게 올 것인지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마지막 날이 노아의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처럼 누구도 예상치 못한 때에 오리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다른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오늘 복음은 우선은 예루살렘의 폐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고 동시에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선에겐 물이 생명이듯이 인간에겐 하느님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몰아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몰아내어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물고기가 물 밖에서 멀쩡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죽어서 냄새를 풍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겠느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박해하여 죽이거나 모두 쫓아냅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버리고 혼자 살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죽음이었고 그 썩는 냄새는 독수리들을 몰고 왔습니다.
로마군대의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서기 70년에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썩는 냄새를 풍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비록 예루살렘에만 해당한다고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도 그럴 것이고 우리나라도 그럴 수 있고 우리 가정도 그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 한 사람도 주님과 떨어지면 썩는 냄새를 풍길 수 있습니다. 썩는 냄새는 자신을 멸망시킬 것들을 불러들입니다. 파리가 몰려있으면 거기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이에나가 몰려있으면 거기엔 무엇이 있겠습니까? 썩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들을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서 싱싱한 물고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듯이 마지막 날엔 온 인류가 썩는 냄새를 풍길 것입니다. 그 때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혹 썩는 냄새가 무엇인지 궁금하십니까?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을 죽음이라 하시지 않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이다.”, 혹은 “라자로가 자고 있으니 깨우러 가자.”라고 하시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를 아시지요?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그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미움이 들어오고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무기력과 우울증만 심해지고 평화가 있어야 하는데 걱정과 두려움이 자라나고 절제를 하고 싶은데 절제가 안 되면 이미 나는 부패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 냄새를 맡고 더 안 좋은 것들이 나에게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태워 향기를 냈습니다. 그래서 악취가 그리스도의 희생의 향기로 중화되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벌하시지 않으셨습니다.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작은 향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작은 사랑의 희생은 죄의 악취를 중화시키는, 마치 썩어가는 물 위에 피는 연꽃처럼 하느님께 더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모이겠지만, 꽃이 있는 곳엔 꿀벌과 나비가 모일 것입니다.
<왕 사고뭉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린 시절 저는 왕 사고뭉치였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가족들이 모이면 제가 저질렀던 일들을 재미 삼아 돌이키며 저를 놀리곤 합니다. 꼬마 때부터 저는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그래서 깜짝 놀란 부모님으로부터 호되게 혼도 많이 났습니다.
한번은 제가 장독들이 줄줄이 놓여있는 장독대에서 사고를 쳤었지요.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이 장독 저 장독 무엇이 들었나 장독뚜껑을 열고 고개를 집어넣어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목(입구)이 좁은 한 장독 앞에선 저는 몹시 망설였습니다. 다른 장독들은 입구가 넓어서 고개를 집어넣는데 별 문제가 없었는데, 그 장독만은 입구가 유난히 좁아 머리가 잘 안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집어넣고 보자며 겨우 겨우 머리를 우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리 용을 쓰고 발버둥을 쳐도 한번 들어간 머리는 다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갑자기 답답하고 무서워진 저는 있는 힘을 다해 SOS를 쳤습니다.
제가 살려달라고 외치느라 기진맥진해진 한참 후에야 가족들은 저를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라 달려오신 아버지는 식구들과 합심해서 제 머리를 빼내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께서는 망치로 조심스럽게 장독을 조금씩 깨트려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물론 안에 들어있던 간장도 다 버리게 되었고 멀쩡한 장독을 없애버린 대가로 저는 눈물이 쪽 빠질 정도로 야단을 맞았습니다.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회초리도 맞았습니다. 그리고 반성문을 열 장이나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아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아이를 위해 인내합니다. 아이를 칭찬합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선물합니다.
그러나 때로 진정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위험한 짓을 할 때, 아이가 그릇된 길을 갈 때,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남의 물건을 훔칠 때, 타락의 길을 걸을 때, 다시 말해서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 절대로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것입니다. 아이가 개념 없이 빨간 신호등에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도 칠 것입니다.
상습적인 마약복용으로 제정신이 아닌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직접 아들을 신고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미워서, 아들이 싫어서, 아들을 고생시키려고 아들을 신고한 것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오직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고를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벌어질 무서운 광경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무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싹 쓸어갈 대홍수, 하늘로부터 내리 쏟아지는 불과 유황,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 누구는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며 기뻐 뛰노는가 하면 누구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지닌 예수님께서 어찌 이리도 험악한 말씀을 하시나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어찌 그리도 무섭고 강경한 표현을 쓰시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강경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길을 가로막고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위협도 하고 거짓말로 하고 과장된 말도 하고,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막을 것입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며 어떻게 해서든 죽음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되돌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 오늘 다시 한 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 그토록 강경한 어조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하느님의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의지가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구걸을 하던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로 옆자리에 또 다른 거지가 앉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제는 그 거지의 깡통이었지요. 글쎄 그 거지는 깨끗하고 반짝이는 은색 깡통으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내가 그래도 거지 짠밥도 훨씬 많고 이 자리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자기보다 훨씬 더 멋진 깡통을 가지고 구걸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저렇게 멋진 깡통을 주십시오.”
구걸을 하기는 하지만 항상 겸손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예쁘게 보신 주님께서는 그에게 금으로 만든 깡통을 내려주셨습니다. 거지는 그 깡통을 보고는 너무나 행복했지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추운 겨울이 오자 그는 주님께 다시 기도를 드렸답니다.
“주님! 너무 날씨가 춥습니다. 제게 보온도시락을 주십시오.”
금으로 만든 깡통만 팔아도 보온도시락 수십 개는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얼마나 좋은 것을 가졌는지 모르기에, 자신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것에만 관심을 갖다보니 그 은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시기 위해서 오늘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노아 때의 일, 롯 때의 일을 말씀해 주시면서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종말의 때를 깨닫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찾아오는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마련해 놓으신 은총을 찾으면서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찾아올 종말이기에 항상 깨어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는 C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선택(Choice)하며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언젠가는 다시 아무것도 없이 떠나야 하는 인생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많은 은총을 선택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힘든 삶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앞선 그 거지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의 선물을 찾아봅시다.
소음과 정겨운 소리의 차이(임소은)
교수님이 수업 중에 해 주신 얘기입니다. 교수님 특유의 예민함 때문에 생긴 사연이지요.
집을 옮길 때였어. 유난히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걸 못 견뎌 하는 남편이 이사 갈 집은 무조건 아파트 맨 꼭대기층이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그런 집이 나오기까지 일 년을 기다렸지. 어느 날, 부동산에서 꼭대기층이 나왔다며 전화가 왔는데 천만 원을 더 줘야 계약할 수 있다는 거야. 당장 계약금을 들고 달려갔지. 그런데 우리 말고 네 명이나 그 집을 보러 와 있었어. 결국 그 아파트의 다른 층보다 삼천만 원을 더 주고 계약했지.
우리 집이 20층인데 아래층에 젊은 애들이 살아. 밤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그럴 때마다 남편은 삼천만 원이나 더 주고 계약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우리가 18층에 계약했으면 위층 소리 들으면서 더 힘들었을 거야.”라고 돌려서 하지. 나도 예민한 편이라 아래층에 사는 밤잠없는 젊은이들 때문에 잠을 설쳐서 너무 힘들었거든.
어쨌거나, 하루는 15층에 사시는 노부부를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났어. 노부부가 “20층에 사시니까 좋죠?” 하시길래 “위층 발소리는 안 들려서 좋아요.” 그랬지. 노부부는 웃으면서 “우리 층 밑에는 애들이 사는데 애들 떠드는 소리 들으면 좋아요. 우리 손자 손녀가 집에서 떠드는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그 순간의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보는 각도에 따라 소음이 될 수도 있고 정겨운 소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건 바로 우리에게 달렸다는 거지. 그 뒤, 나는 잠을 잘 잘 수 있게 됐어.
그날이 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When the day comes.
그날이 오면.
그날은 그날이다.
다른 날이 아니다.
술 마시는 날은 술 마시는 날이다.
다른 날이 아니다.
장가드는 날은 장가드는 날이다.
다른 날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날이 오면
이전의 일들은 다 그만이고
이전의 인연들과도 작별이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날이 오면
우리의 하던 짓은 다 멈춰지고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이별이다.
그러니 뒤집어 얘기하면
우리가 지금 하는 짓을 그만 두고
같이 누어 자고 맷돌 돌리던 그 사람마저 내버려두고 냉정히 돌아설 때
사람의 아들은 온다.
빈곤과 빈부 격차
-임영인 신부님-
우리 사회의 빈곤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년 정부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빈곤 계층이 700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20대 80의 사회’가 의미하는 것처럼 빈곤 문제는 이제 빈부 격차 문제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88만 원 세대’라고 불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 결식아동과 노숙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해외 원조 명품’ 구입을 위한 해외 나들이가 늘어나고 ‘1억7천만 원짜리 벤츠’가 홈쇼핑에 등장합니다.
빈곤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70억 인구 중에 빈곤 상황에 처한 사람이 15억 명을 넘어선다고 합니다. 빈곤 문제는 소말리아·북한 등 절대적 빈곤 상태에 처한 나라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남미를 위시하여 아시아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을 보면 100명 중 20명이 영양부족이고, 1명은 빈사상태이고, 15명은 비만이라고 합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간다고 합니다.비타민 A의 부족으로 3분에 1명씩 시력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세계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5천만 명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라고 합니다. 반면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 사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미국에서는 곡물 값을 유지하기 위해 밀을 태우거나 바다에 버린답니다. 미국은 한 해 군사비로 5,287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이크업을 위해서 매년 180억 달러, 향수를 사기 위해 15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삶일까요?
어떤 가족이 성당에 가서 미사를 참석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먼저 아버지가 말씀하시지요.
“아니, 오늘 신부의 강론이 그게 뭐야? 참 내……. 묵상을 하기는 한 건지 그게 강론 맞아? 다른 성당에 가보면 신부들이 강론도 잘하더구먼. 우리 성당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신부만 오는 거야?”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강론은 그렇다고 쳐요. 성가대는 왜 이렇게 성가를 못 부르는거에요? 연습도 하지 않았나봐요. 목소리도 맞지 않고……. 실수도 많이 하고……. 영 분심이 생겨서 그 자리에 있지를 못하겠더군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이 이렇게 말하더래요.
“아빠, 엄마! 그래도 천 원짜리 치고는 괜찮지 않아요?”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지만, 사실 자기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천 원 짜리 한 장뿐이라는 것을 꼬집어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해 봉헌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요?
어떤 분은 하느님께 헌 돈을 드릴 수가 없다면서 빳빳한 새 돈이 생길 때마다 따로 모아서 주일이면 그 돈을 봉헌한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어떤 분은 꼬깃꼬깃 접어서 마치 구걸하는 거지에게 돈을 주듯이 합니다. 그렇게 성의 없이 하느님 앞에 나오면서도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던지고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말씀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약간 으스스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말씀을 자주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두려워 떨면서 살라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하느님 무서운지를 알고 있으라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하느님 앞으로 나오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분명히 오기는 하지만, 언제 올지를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하느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종말에 관한 말씀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똑같이 전해집니다. 이제는 제발 죄로 기울어지지 말라고, 이제는 제발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미움은 그만하라고, 이제는 제발 하느님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이제는 제발 하느님께 몸과 마음으로 진실된 봉헌을 하라고…….
이런 모습이 종말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준비 상태는 과연 어떤가요? 아직 준비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준비하도록 하세요. 더 늦기 전에…….
주님께 봉헌할 것을 정성껏 준비하세요. 영적인 것이든, 물적인 것이든…….
종말론적 삶
-서현승 신부님-
저와 함께 종신서원을 했던 수사님의 서원식 소감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수도생활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제 입에서 나오는 마지막 말이 예수 그리스도이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가 다 울컥했지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직 한참 멀었다고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상 우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잊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소중하게 살아간다면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사는 셈입니다. 세상과 개인의 종말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모여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라며 죽은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참된 생명을 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일상 속에서 인간의 욕심과 중상, 싸움만 있는 곳이 곧 멸망일 테고 하느님의 현존이 함께하시는 곳이 곧 구원일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심고, 팔고, 집 짓는 일상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이는 종말론적 삶의 자세를 갖고 사는 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동기를 순화해야
-이인옥-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항상 좋은 말만 하는 자매가 있었다. 분개할 일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남을 비판하는 소리도 결코 하지 않았다. 성격이 원만한 그 자매를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욕심 없고 너그러운 줄 알았던 자매가 누구보다 많은 야심과 경쟁심을 숨기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자매는 모든 사람에게 립 서비스를 하는, 실속 없는 일에는 결코 개입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분개할 일이 생기고 비판할 일이 있을 땐 은근히 남을 부추기고 자신은 물러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매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끼며 하나 둘 떠나갔다.
나아가려는 자는 물러서고, 올라가려는 자는 내려가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 그런데 물러서는 척하고, 내려가는 척 보여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 자기의 이득을 노리는 것이 이른바 병법(兵法)이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러나 일시적으로 목숨을 내놓는 척 위선을 떨고, 겉으로만 자기 주장을 거두는 척 음흉스럽다면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까?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같으나 숨은 동기가 같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식별해 낼까? 우리는 시간이 걸려야 알아볼 테지만 주님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다 같이 좋은 일을 했는데도 누구는 데려가고 누구는 버려둘 수 있다. 다 같이 복음을 선포하고 봉사활동을 했는데도 어느 누구만 선택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말뿐만 아니라 숨은 동기까지 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
-김상균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다소 두려운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그 날의 일들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 일들에만 빠져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면서 돈벌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심고 짓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닥친 심판날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원히 살 것인 양 죽음 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모으려하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 인양 움켜쥐고 나눌 줄 모르고...또, 노아시대 사람들처럼, 롯 시대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일에만 신경 쓰고, 세상일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무상한 것들에서 벗어나서 저 멀리서 전체를 내려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과 그 세상 안에 있는 나와 타인들, 그리고 갖가지 것들을, 거리감을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누가 창조하시고 누가 지배하시는지, 나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앞으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나는 누구이고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또한 인간답게 사는 사람만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본질과 나의 본질을 보아야합니다. 세상의 본질과 나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세상과 내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하느님에 의해 생겨나고, 또 하느님에 의해 모든 것이 결론지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의 삶의 방식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주인이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종과 같습니다. 준비하는 것이죠. 하느님과의 만남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보여주는 허상에서 깨어나 참다운 진리와 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도 우리에게 닥칠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창조주 하느님을 느끼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어서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창조된 피조물을 섬기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얼마나 더 훌륭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처럼 어리석은 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용서받지는 못한다. 세상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세상을 만드신 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풍의 계절인 가을에 온 산하가 붉고 노랗게 물들었다. 참 아름답다. 이처럼 아름다운 단풍을 구경하면서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다.’ 하고만 느낀다면 신앙인이라고 하기에 조금 아쉽다. 신앙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단풍을 만드신 하느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실까?’ 하고 느끼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세상을 통해서 드러난 겉모습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속을 보며,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한층 더 깊이 바라보며 관조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속에는 하느님의 손길과 사랑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자연적 계시). 글씨를 보고 글씨를 쓴 사람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을 보여주는 책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세상이란 책을 통해서도 당신을 알고 체험하여 당신께 가까이 나오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의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사람들이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기에 자신의 원형이신 하느님을 희망하며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다. 하느님이 진. 선. 미의 근원이시기에 사람은 진. 선. 미를 찾고 추구한다. 사람들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에 감탄하는 까닭도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게 창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의 욕심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가려져 세상만 바라보고 세상 속에 담긴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세상을 가지려고만 하며, 삶에 얽매인다. 탐욕에 사로잡힌 결과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고자 해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루가 12,1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탐욕에 빠지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신 영혼을 깨끗이 간직하자. 또한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자.
나의 어려움을 이웃의 어려움과 동일선상에서 보라.
-최금자-
나는 작년 여름 누적된 피로 때문에 걸린 감기가 급성폐렴으로까지 발전하여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폐에 물이 차서 그것을 항생제로 말리느라 입원하는 내내 링거를 꽂고 있어야 했습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왼쪽 옆구리 통증이 너무 심하다고 하자 담당의사는 이 증상이 폐렴과는 무관하다며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여러 번 검사를 해봐도 옆구리 통증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담당의사는 혹시 뼈암이나 종양일지도 모른다며 종양 전문의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폐렴에서 종양이나 암 가능성까지 발전하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종양검사를 하는 동안 ‘암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나를 짓눌렀지만 내 문제에만 빠져 우울하게 지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동료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내 바로 옆에는 10년 가까이 의식불명인 부인을 간호하고 있는 우리 방 반장인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 오랜 세월 병간호를 하면서도 구김살이 없고 낙천적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른 환자들이 불편한 것, 필요한 것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보호자들이 자리를 비우면 잔심부름을 기꺼운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창가 오른쪽 침대에는 대장암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항암치료로 인해 먹는 것마다 토해내는 그분의 말동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침대에 놓인 묵주를 보자 그분이 마치 내 가족처럼 살갑고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라며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을 꼭 잡고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종양 전문의는 뼈검사 결과 다행히 암은 아니고 갈비뼈에 금이 가서 통증이 심했다는 소견을 내렸습니다. 입원한 열흘 동안 나는 살아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환자들과 가족들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넘나들며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신의 문제에만 연연하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며 동시에 이웃에게 개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나의 어려움을 이웃의 어려움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고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그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면
-장재봉 신부님-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말 그대로 파격입니다. 누가 오늘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느님 사랑의 법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슴은 벅차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하느님의 거룩하심까지입니다. 이만큼 또렷하고 명료하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신뢰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 또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엄청나게 믿고 계시다는 더 큰 증거가 필요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사도 요한의 설명이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죽은 세상에서 연연하여 지지고 볶는 인생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건너 뛴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된다면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들려드릴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때문에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원수 사랑’도 그분의 도우심에 의탁하면 해결됩니다. 사랑하고 싶다면 우선 내 마음을 열어 놓으십시요. 그것이 사랑의 첫 단추입니다. 내가 가졌던 것은
이미 죽었으며 이제 내 안에는 그분의 자비와 은총만이 살아 계시니까요.
‘원수 사랑?’ 그것까지도 우리의 마음 문만 열면 문제 없는 일입니다.
순교자들의 꽃을 활짝 피워라
-임종심-
지난해 중림동성당 자체로 순교자 현양의 밤 행사가 있었다. 올해는 제1지구 차원의 행사로 중림동(약현)성당과 새남터성당에 안치된 성인 11위 유해를 꽃장식 차량에 모시고 한강성당에서 시작해 제1지구 15개 본당을 순회했다. 이 순회길에는 ‘순교 성인 모시고 기도하기’와 함께 ‘순교자들의 꽃을 활짝 피워라’는 슬로건하에 약현·새남터 등에서 순교한 64위를 상징하는 만장과 행사기 등을 들고 행렬했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순교자 현양의 밤 기념미사’는 천주교 최대 성인 탄생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9월 23일 중서울지역 염수정 주교 및 제1지구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1,5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봉헌되었다. 행사 규모에 걸맞게 3개 성당 연합성가대가 미사 전례의 웅장함을 더해주었다. 과거 우리의 순교선조들은 순교와 배교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흔쾌히 순교를 택했다. 북소리에 맞춰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을 맞고 피흘리며 순교한 그 자리에 서서 그분들의 넋을 기리는 지금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치신 순교선열들께 감사드린다. 순교선열들은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는 오늘의 말씀을 살아가신 분들이다.
순교의 피를 머금고 자란 이 땅의 400만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얼을 이어받아 인류 구원과 평화의 도구가 되어 주님을 증거하며, 우리 자신과 이웃에 당신이 주신 평화를 펴나가게 해주소서. 아멘.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끝기도를 바치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루를 마감하는 밤 시간, 성직자들은 마무리 기도로 ‘성무일도’ 가운데 가장 마지막 기도인 ‘끝기도’를 바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본의 아니게 자주 빼먹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빼먹지 않겠다고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하루를 돌아보며 드리는 끝기도 내용 한 구절 한 구절은 얼마나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가슴 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님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수행생활에 투신하는 수도자들에게 있어 끝기도를 바치는 시간은 ‘작은 죽음’의 순간입니다. 끝기도를 바칠 때 마다 저희는 “또 하루가 저무는구나. 또 한 번 죽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경당을 빠져나와 침실로 올라가는 저희는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주님의 손에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일어날 광경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십니다. 말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가슴이 섬뜩해집니다. 엄청난 홍수가 들이닥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두 명 가운데 한명은 데려가시고 한명은 버려두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은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펼쳐질 미래입니다. 잘 준비된 사람들에게 주어질 상급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팔팔하게’ ‘싱싱하게’ ‘새파랗게’ 살아있을 때부터 종말을 잘 준비한 사람들, 죽음을 당연한 인간의 현실로 여기고 기꺼이 긍정적으로 수용한 사람들, 평소부터 당당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연습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그 날은 얼마나 은혜로운 날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게 될 때 주어지는 은총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 인간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식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위선적인 삶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하찮아보이던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다가오게 될 주님의 날, 갑자기 바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지불식간에 마주치게 될 마지막 날, 허둥대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무덤에서 편히 쉬신 아드님과 같이 우리도 편히 쉬게 되었으니, 내일도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하느님 나라의 표징
- 백광현 신부님-
주검 위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죽음의 장소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 나라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매일 자신을 죽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본성은 그렇지 않은데 하느님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죽이며 살아가는 사람들,모든 형태의 죄와 이기심에 죽고 강한 자기애의 애착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게 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윤지종 신부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롯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흥청망청 먹고 즐겼고, 세상의 쾌락만 쫓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일에만 몰두하였고, 하느님을 저버렸습니다.
심판이 곧 있을 거라는 노아의 이야기를 비웃으며 무시했고, 회개하라는 주님의 천사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홍수와 불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롯만은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의롭게 살던 노아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만들어 심판을 면했고, 롯은 하느님의 천사들의 말씀대로 죄악의 도시 소돔 땅을 떠남으로써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이 두 사건을 예로 드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에 일어날 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 이 세상에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날은 동시에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저버리고 세상의 일에만 몰두해서 흥청망청 먹고 즐기며 쾌락만 쫓아 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은 곧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며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날은 심판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님이 오시는 날은 어떤 날입니까? 심판의 날입니까?
구원의 날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온갖 탐욕과 쾌락, 미움과 다툼이 있는 죽음의 땅 소돔에 머물러 있진 않습니까?
하느님을 망각하고 세상일에만 몰두하며 독수들이 모여드는 주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진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여러분은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탐욕과 쾌락에 빠져 있지 말고, 미워하며 싸우지 말고 하루빨리 주검만이 기다리고 있는 소돔 땅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세상일에만 몰두하면서 제 멋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이 회개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랑과 용서로써, 나눔과 절제로써 생명의 방주를 만들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우리에게 심판의 날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오시는 날 우리에게 시체 썩는 냄새가 나서 독수리가 모여들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주검의 소돔 땅을 떠나 생명의 방주로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기뻐 용약하며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검의 땅을 떠나 생명의 방주로 들어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롯의 아내처럼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지 맙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어도 모세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맙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그렇게 더 사랑하고 용서하며, 더 나누고 절제하는 일에 앞장섭시다.
주님께서는 오십니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미 심판과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회개,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영적인 죽음
-이찬홍 신부님-
복음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 시에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곧, 재림 시에는 노아 때의 일과 롯의 시대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묻습니다.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라며 그 징조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몰려들 듯, 연기가 있어야 불꽃이 타오르듯, 천재지변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일에는 그 조짐, 징조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천재지변은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파키스탄의 지진은 분명,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 초래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을 때에, 능력을 뛰어넘어서 발생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아픔이요,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재 곧 사람에 의한 결과로서 초래되는 재앙은 다릅니다.
재앙이 발생되기 전 분명히 그 조짐이 보입니다. 재앙을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다.
장마 때마다 제주 지역에는 물난리가 많이 발생됩니다.
많은 도로가 신설되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20년 전 제주시와 모슬포를 잇는 산업도로가 만들어질 때, 신평리 사람들은 불평이 많았습니다.
계획대로 도로가 신설되면 엄청난 물난리가 날 것임을 알았음에도 관에 가서 한마디 못하고 가슴만 태웠습니다.
고작,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기는 숨골이라, 여기에 길을 내불믄, 우리 동넨 물난리 납니다.’ 라고 말씀 들여 보았자, 허사였습니다.
무시무시한 군사 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로가 신설된 후, 예상한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알맞게 잘 말려 놓고 공판 날을 기다리며 창고에 쌓아둔 보리가 모두 물에 잠겨 썩어 버린 것입니다.
매년, 이런 모습이 되풀이 되다가 90년대에 이르러서야 하수도 시설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물난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산풍 백화점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산풍 백화점의 붕괴된 주 원인은 부실공사입니다.
‘부실’은 내용인 충실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부실공사는 필요한 자재가 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자재가 더 들어간 경우와는 다릅니다.
과다한 자재 사용 시에는 어떠한 조짐이 없다가 그냥 무너져 버리지만, 부실 공사는 자제 부족이기 때문에 붕괴되기 전에 건물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균열의 조짐이 보일 때, 미리 피하면 됩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에는 균열이 심하게 발생되었음에도 위험 방송을.. ‘건물이 붕괴될 것 같으니, 빨리 피하십시오.’ 라는 안내 방송은 끝내 나오지 않았답니다. 회사의 운영진들은 모두 다 피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결과물로 인한 재앙에는 내적, 외적인 조짐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질 것 같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고 했으니,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주님의 재림을 추측해 본다면... 세상의 종말은 언제 어떻게 시작될 것 같습니까?
옛 소련이 붕괴되기 전 미국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4차 세계대전이 곧 세상이 끝나는 날이라 했습니다.
요즘 환경론자들은 지구멸망은 ‘지구가 오염되어 환경이 바뀌어 버려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발생될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노아의 방주 때와 롯의 시대와 같은 상황, 결과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버리는 때와 상황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버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이웃의 따스한 배려와 도움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늘 근심, 불안, 미움, 분노 속에서 홀로 헤매게 괴로워하게 된다면, 노아 때와 롯의 시대와 같은 느낌, 감정을 체험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떠한 희망과 평화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그 상황, 상태이기에 바로 노아의 때요, 롯의 시대와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음에도 그 자신이 늘 미움, 시기, 질투, 비난이 마음 안에 가득 차버리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상황은...아무런 희망과 구원이 없어 마치 지옥처럼 느껴지는 그런 결과는 천재지변처럼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자기 스스로 그렇게 초래되도록 만들어 놓고도 이를 알지 못하기에, 깨닫지 못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은 내적으로 병들어 가면서도... 영적인 죽음을 당하면서도 알지 못하기에 계속 자기 안으로 깊숙이 숨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멸망,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회개요, 하느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과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겸손되이 자신의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잃었던.. 손상되었던 영적인 생명을 늘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읽어보니, 좋은 책이 있어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바로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께서 쓰신 「용서하는 사랑, 용서받는 사랑」이란 책입니다. 물론, 짜짤하게 독후감은 없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끊임없는 회개로 마음이 깨끗해 질 때, 늘 새 날에 새 환경, 새 사람입니다.
그 날이 그 날이, 그 환경이 그 환경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 늘 새 날, 새 환경, 새 사람입니다.
그러니 바꿀 것은 날이, 환경이, 사람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회개로 마음이 새로우면 모두가 새롭기 때문입니다.
특히 안주와 타성에 빠지기 쉬운 정주의 삶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회개의 삶은 육적 욕망의 삶에 거리를 두는 초연의 삶을 뜻합니다.
육적 욕망 따라 현실에 푹 젖어 살다보면 자기도 하느님도 잊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노아 때나 롯 때의 현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가 닥쳐 멸망했고, 롯 때 사람들 역시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다가 하늘에서 쏟아진 불과 유황에 멸망했다 합니다.
하늘의 영적 현실을 까맣게 잊고 땅의 육적 현실에 올 인(All in) 했던 결과입니다.
회개의 삶은 과거와의 결별을 뜻합니다.
뒤를 돌아보며 과거에 미련을 둔 삶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며 사는 미래지향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인자의 날에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안에 있더라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말라 하시지 않습니까?
다음 한 구절이 이 모두를 요약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과거의 것들에 대한 미련으로 뒤돌아 봤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는 가련한 여인 롯의 아내였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이나,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외적으로야 똑같은 환경이지만 회개로 깨어있는 영혼은 구원 받을 것이고, 육적 욕망 따라 살면서 영혼을 전혀 돌보지 않은 자는 버림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천국을 사느냐 지옥을 사느냐는 회개의 선택에 달려있다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단연 회개의 삶에 초점이 있습니다.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 안에 깨끗한 형제애도 살아나 1독서의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진리 안에 살아가게 됩니다.
매일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 안에 꽃처럼 피어나는 형제애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은 행복하여라.”(시편119,1ㄴ).
아멘.
同床異命
-강영구 신부님-
잘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대에게
동상이몽(同床異夢)은 한 침대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다른 꿈을 꾸는 이유는 소망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명(同床異命)은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의 운명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한자리에 있지만 운명이 갈리는 이유는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가슴 속에 하늘나라(天國)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맑고 밝고 가난한 가슴으로 사랑하며 삽니다.
그에게서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납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너를 나라고 생각하며 동체자비(同體慈悲)를 실천합니다.
누구든지 그를 만나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는 늘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지옥(地獄)을 담고 삽니다.
온갖 욕망의 쓰레기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미움과 증오, 원망과 원한으로 부글거리는 가슴으로 살아갑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그는 늘 괴롭고,
증오와 원망의 칼날이 자신을 찌르고, 독선과 오만이 만나는 사람을 해칩니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어둡고 살벌합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하늘나라를 누리는 사람도, 지옥으로 빠지는 사람도 제 발로 걸어갑니다.
당신의 운명은 당신이 결정합니다.
오늘도 하늘나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지금’그리고 ‘여기’에 종말이 있다.
-박상대 신부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를 예수께 물었다.(20절) 그들은 구약을 통해 예고된 메시아가 올 때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로 믿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날이 요란하게 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 계신데 어떤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볼 눈이 있는 사람만이 메시아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2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 그리고 ‘벌써’로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면,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곧 인자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와 있음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22-35절) 그런데 재림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재림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언급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날은 온다. 단지 그 날이 언제인지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를 굳이 알고 싶으면 그 날에 일어날 일들을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날짜’를 먼저 정하고 난 뒤에 그 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이 방법이 인자의 재림에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날들을 결정하지만 재림의 시기는 하느님이 결정하신다. 인자의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 종말의 날에 관하여 ‘언제, 어디서’보다는 ‘어떤 모양으로’ 그 날이 들이닥치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지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창세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날들을 정하고 그 날들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집을 지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바로 그 날에 그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일상(日常) 중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노아와 소돔의 교훈은 일상 속에 최후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최후의 날을 정할 수는 없지만 살아가는 날들 속에 그 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아무도 ‘지금,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의 시점에 있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날과 장소도 바로 지금과 여기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 완성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가 되면 철저하게 혼자 서게 된다.(34-35절) 구원과 저주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구나 스스로가 져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다.
90년대에는 종말 소동이 참으로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정말로 세상 종말이 다가온 것처럼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말들을 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의 밑으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했던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 당시 종말이 온다고 천막에 모여서 손을 흔들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휴거’라는 말을 쓰면서 흰옷을 입고 날개 짓을 하면 하늘에 그대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새처럼 손을 흔들면서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방송사에서 그 안에 자신의 아내를 두고 있던 어떤 남편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남편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가 나와 자식들을 두고 자기만 하늘나라로 가겠다고 몰래 나와서 저러고 있는 것이 서글픕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즉, 하느님처럼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기 가족을 팽개치고 자기만 하늘나라에 가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사실 종말을 의미하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라는 것일까요?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날이니까 힘들게 살지 말고 그냥 대충 살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종말의 시간을 정해서 흰 옷 입고서 미친 듯이 날개 짓을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무도 모르는 그 시간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사랑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고, 롯 시대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 땅에 이루어 질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어떤 공포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두고서 사람들을 오히려 나쁜 길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니라는 이유를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이치에 맞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종말의 날이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인지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에 대한 준비는 흰 옷 입고 날개 짓하면서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는 것 역시 세상 종말의 준비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세상 종말에 대비하는 우리들의 가장 큰 준비인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그 준비를 하고 있나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사랑해야 합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어느 중국인의 좌우명(Plus 3H, '아침 묵상' 중에서)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서울 한복판에 있는 대연각 호텔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1층 커피숍에서 일어난 불길이 환기구를 통해 위로 솟구쳐 21층짜리 호텔 건물은 삽시간에 화염과 독한 연기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이례적으로 화재 현장이 TV생중계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비참한 장면들을 몸서리치며 지켜보았고 지금까지도 강렬한 기억으로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은 <타워링>이라는 유명한 재난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불길을 피하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고층에서 낙엽처럼 떨어지던 사람들, 구조 헬리콥터에 매달려가다가 바람때문에 추락하는 사람들.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안타까운 이목을 집중시켰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11층에서 젖은 담요를 몸에 두르고 창가에서 손을 흔들던 그는 몇시간에 걸친 소방대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간신히 구조됐습니다. 대만 공사로 한국에 나와있던 중국인 여선영씨였습니다. 화기와 가스를 견디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아 수건을 적셔가며 구조를 기다렸던 그는 그 와중에 욕조에 자신의 좌우명 네 글자를 새겨 놓고 끝까지 버텼다고 합니다.
'처변불경(處變不驚).'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위기 상황에선 웬만큼 경험이 많고 박식한 사람도 허둥지둥하게 마련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고 하지요. 좌우명이란 평생동안 앉은 자리 오른 편에 새겨놓고 명심 또 명심하는 글귀입니다. 그런 좌우명이 아니라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모의 좌우명만큼 소중한 유산은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좌우명을 내려 받고, 그 아이의 아이가 또 내려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훈이요, 명문가의 정신입니다.
생명과 죽음
최민석 신부님
‘죽음과 멸망’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저쪽 어디에 있다가 내게로 오는 것일까? 오늘 예수님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모든 어두운 것의 머리 또는 꼬리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면 죽음을 주시는 분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사람 목숨은 하늘에 있습니다. 죽고 사는 일은 본디 하나인데, 이것은 받아들이고 저것은 물린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거절하는 것은 삶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삶은 반기고 죽음은 꺼리고 있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체험해 보지도 않은 것을 무서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죽음과 멸망을 겁내는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인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2,23) 십자가를 지고 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이 끝나고 나서 죽음이 오는 게 아닙니다. 생명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새 계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새 계명은 내 안에 있는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2요한 5-6)
<행복이라는 이름의 함정>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노아 때의 홍수와 롯 때의 소돔의 멸망은 사람들의 타락이 원인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미리 예고되었던 일들입니다.
미리 예고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살든지 회개하지 않고 죽든지" 선택하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홍수와 소돔의 멸망은 사실상 사람들이 선택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라는 말은, 사람들이 심판, 회개, 구원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모습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일들 자체가 죄는 아니고, 사람들이 그런 일들에 몰두하는 모습 자체가 타락한 모습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그냥 인간 세상의 일상적인 일들이지만, 대홍수 때의 사람들도 그렇고 소돔 사람들도 그렇고, 자기들의 타락과 범죄에 대해서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런 일상적인 일들만 신경 쓰면서, 구원 받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만일에 대홍수가 닥치기 전에, 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지기 전에 사람들이 회개했다면, 아무리 심각하게 타락하고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종말과 재림의 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면서 종말과 재림을 맞이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냥 일상적인 일을 반복하다가 맞이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라.' 라는 말을 '죄를 뉘우쳐라.'로만 알아듣고, 자기는 특별히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회개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 교도소에 갈 정도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죄는 그저 약간의 실수, 약간의 게으름, 약간의 욕심, 약간의 이기심 정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법이 없어도 착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회개하지 않는 일이 생깁니다.
(실제로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들어간 사람들이 더 진실하게 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그것까지 포함해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노력입니다.)
또 대부분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무슨 대단한 권력이나 명예나 엄청난 액수의 돈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일 것입니다.
큰 욕심 없이 그런 작은 행복들에 만족하는 모습은 분명히 선(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이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분명히 선(善)인데, "그것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더 큰 선(善)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
그게 악(惡)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을 하면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인데, 만일에 신자로서 주일도 지키지 않고 그런 일들만 하고 있다면?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그런 작은 행복감에 취해 있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일상적이고 사소한 행복을 얻는 것에 만족하면서 나라가(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말든지, 이웃이 어떤 고통 속에 있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계명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은 분명히 죄라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을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라,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이 바로 그런 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하지 말라는 계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라는 계명이 세 개나 있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과 회개와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그때 제가 화장실 청소당번이었기에, 함께 당번을 맡은 친구와 열심히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녁 야간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왔는데, 잠시 뒤 담임선생님이 오셔서는 “화장실 당번 누구야?”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화장실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저와 친구는 정말로 열심히 청소했거든요. 그런데 꼬투리를 잡고서 혼내는 선생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화를 내면서 억울함을 표시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저와 비슷한 세대에 살고 계셨던 분들은 어떻게 되었을 지를 예상하셨겠지요? 맞습니다. 저는 교실에서 맞은 것은 물론, 교무실까지 끌려가서 매를 맞았습니다.
그 당시 분명히 억울했고, 내 자신은 죄가 하나 없는데 선생님의 괜한 심술에 희생양이 되었다고만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단정한 것 그리고 내 생각과 감정을 내세워서 일을 크게 만든 것 등등의 분명한 잘못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만약 “선생님, 죄송합니다. 청소했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나 보네요. 다시 청소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실 청소하고 나온 뒤에 누군가가 어지러 놓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조건 나 잘했다고 표현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나를 겸손하게 낮추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유익합니다. 특히 세상은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현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원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내 뜻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나를 겸손하게 낮추며 살고 있습니까? 억지의 삶이 아니라, 포용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자세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즉,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합리적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지막 날에는 내 뜻이나 세상의 뜻이 아닌, 바로 주님의 뜻에 의해 모든 것이 판결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철저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겸손함에 깊은 감동을 받은 어떤 젊은이가 프란치스코를 ‘성인님’이라 부르며 달려갔습니다. 그 말에 몹시 화가 난 프란치스코는 돌아서서 그 사람 앞으로 가서 말하지요.
“왜 나를 성인이라 부릅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지 않으면 오늘밤 나는 매춘녀와 잘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그래서 철저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 그것은 지상의 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빛나며 전혀 다른 향기를 흩뿌리는 하늘의 꽃이었다(알렉상드르 뒤마).
하늘에 보화를 쌓자.
소화 데레사 성인의 말씀입니다.
“저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냥 하느님의 은행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한 푼씩 모으면서 즐거워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받을 큰 몫으로 즐거워합니다. 제가 제 자신을 버리면, 그 큰 몫을 더욱 잘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제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계좌에 잔고가 늘어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은행 계좌에는 잔고가 얼마나 많이 남아 있나요? 지금 순간의 기쁨만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하느님 나라에 있는 내 계좌 잔고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의 기쁨보다는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소화 데레사 성인의 말씀처럼 진정한 부자가 되기 위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을 사람들은 ‘빼빼로 데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1996년 부산, 영남지역의 여중생들 사이에서 숫자 ‘1’을 닮은 가늘고 길쭉한 과자 ‘빼빼로’처럼 날씬해지라는 의미에서 친구끼리 빼빼로 과자를 주고받았던 것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합니다. 영남, 부산 지역 여중생들의 자그마한 행동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이지요. 아니 미국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보면, 전 세계적으로 퍼진 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이 빼빼로를 서로 나눴던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다이어트를 위한 것인데, 이 빼빼로 과자가 다이어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로리가 얼마나 많은 지 이 과자 한 봉을 먹어서 얻은 칼로리를 제거하려면 자전거를 최소한 30분에서 한 시간 이상을 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이어트의 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이제는 다이어트라는 말 대신에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을 전해 주는 의미 있는 날로 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11월 11일은 장애인의 날이며, 동시에 농업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즉, 오늘 기억되어야 할 장애인과 농업인 대신에 빼빼로만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 씁쓸한 마음을 품게 만듭니다.
본래의 의미(다이어트)와도 거리가 있는 빼빼로, 또한 더 중요한 날을 잊게 만드는 빼빼로. 이 빼빼로 데이를 맞이하면서 어쩌면 우리 삶 안에서 중요한 것은 잊혀지고, 대신 중요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과연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어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데, 그래서 빈 손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자신의 생명보다도 중요한 듯 많은 사람들이 꽉 움켜잡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더 중요한 것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사실 예수님 말씀처럼 종말에 대한 징조는 벌써 두 차례 있었습니다. 하는 노아의 방주라 일컫는 대홍수였고, 또 하나는 죄악의 도시 소돔을 순식간에 불과 유황을 내려 멸망시킨 롯의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종말의 시간에 중요한 것을 쫓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세간을 꺼내러 가지 말고, 자기 재산이 아깝다고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 그래서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날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당황하지 않도록 더욱 더 중요한 것을 쫓아서 행동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꿈을 밀고 나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다(도스토옙스키).
가장 중요한 것
-안승태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매 순간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긴급하다고 생각하는 것,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판단 기준은 조금씩 다릅니다.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노아와 롯 때를 예로 들어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평소 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는 임종 때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떤 이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취하고, 또 다른 이는 지니고 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놓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람에 따라 가치기준이 다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 생물학적이고 이기적인 목숨에 대한 집착은 놓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많은 은총은 우리가 세상의 많은 집착과 사욕에서 자유로워질 때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하는 생명력이 될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
-이대훈-
때를 아는 것은 어려운 그만큼 또 중요한 일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크로노스라는 시간과 카이로스라는 시간이 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처럼 계속 이어지는 시간인데 비해 카이로스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때를 안다는 것은 몇 시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을 안다는 것이다. 곧 현재 이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언제 일어나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이 언제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징표가 나타나는 곳이 ‘시체가 있는 곳’이라면? 왜 하필 시체가 있는 곳일까? 삶과 죽음은 언뜻 보면 크로노스처럼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예사롭지 않은 삶과 죽음 때문에 이 크로노스의 평탄함은 깨지기도 한다.
지구 생태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멀지 않아 제6차 대멸종의 때가 오리라고 예상한다. 지금까지 지구 역사에서 5번에 걸쳐 큰 멸종의 시기가 있었고 이제 그 여섯 번째 멸종의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지구온난화, 생태계의 축소와 파괴 등을 그 징표로 꼽고 있다. 실제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1년에 한 개 종 정도 멸종되던 생태계가 지금은 한 시간에 한 종씩 멸종되고 있다. 지구의 별다른 변동 없이 이렇게 급격하게 멸종 상황에 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원인은 현대 인류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라는 삶의 방식에 있다. 이처럼 대멸종의 원인이 인류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노아 때의 카이로스와 현대 인류에게 다가오는 카이로스는 얼마나 다를까?
그날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저희 수도회는 11월 첫 월요일에 위령의 날 행사를 가집니다.
천안에 있는 저희 수도회 묘지에서 위령미사를 드린 다음 먼저 가신 형제들을 기립니다.
돌아가신 몇 형제의 있었던 일이나 훌륭했던 점을 마음에 새기는데 한 선배 형제의 죽음의 장면이 아름답기가 선홍색이었습니다.
여러분 선홍색鮮紅色을 아십니까?
아니 선홍색의 느낌을 아십니까?
모르시면 지금 단풍나뭇잎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공해에 찌들어 말라비틀어진 잎 말고요.
좋은 공기, 좋은 햇빛을 받은 단풍나뭇잎은 칙칙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붉으면서도 선명하니 떨어질 때가 더 아름답습니다.
아무튼 그 형제님은 정말 큰 일도 많이 하고 살기를 잘 살았지만 그보다는 죽기를 잘 죽어 더 아름다웠습니다.
오죽했으면 임종을 지킨 형제들이 그 형제님이 돌아가시자 멋진 죽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성당 종을 치고 모두 순 잔을 채워 축배를 다 마셨겠습니까?
천상병 시인은 죽음을 귀천으로 노래하였지요.
이 세상 삶은 소풍이라고 하였고요.
그렇습니다.
죽음은 파멸, 멸망이 아니라 이 세상 소풍 왔다가 돌아감입니다.
하늘로 떠나가는 것이라면 룻의 아내처럼 혹 미련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니 소풍도 즐겁고 돌아가는 것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헤어짐이 아니라 재회입니다.
거기 가면 다시 만날 분이 있습니다.
나를 너무도 반겨 줄 분, 나를 꼭 안아 줄 분. 그 날은 멸망의 날이 아니라 그분을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저의 형제님은 그날 그렇게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형제님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다시 읊조려 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소풍 끝내는 날 가서 행복하였더라고 말하리라.”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카17,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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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침상에서 자다가도, 함께 맷돌을 갈다가도 한 사람은 그대로 버려지고
한 사람은 구함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무척 살벌한 말로 들린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하나라는 숫자에 묶이지 말고,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우리 삶의 뒷모습은 선과 악 중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삶이었던들 완전한 선 쪽의 삶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최종적 기울어짐은 선을 향해 있어야 한다.
어찌 완벽하게 살 수가 있으랴?
결코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선으로 무게가 더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 침상에 있다’는 말, ‘함께 맷돌을 간다’는 말은 누구도 예외는 없다는 말씀이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더라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삶이 같지 않다면 그들의 최종적 순간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게 된다는 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사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미래는 하느님께 맡긴다.
삶의 결과에 대해서 집착하며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허락된 시간에 감사하며,
지금을 열심히 살고자 한다.
선이 주는 기쁨이 그저 좋기에 선한 삶을 원하고, 삶은 자연스럽게 선을 만들어간다.
하늘 두려워할 줄 알고, 땅에 감사할 줄 알면서 맺어진 관계들 안에서 예쁘게 살고자 한다.
상처를 주었으면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하고,
상처를 받았으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청한다.
남의 눈물에 마음 아파하고, 남의 웃음에 행복해 한다.
낮아질 줄 알지만 비굴하지는 않고, 자기 뜻을 밝히면서도 교만하지 않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덧없는 욕심에 이 귀한 시간을 덧없이 써서는 안 된다.
지혜서가 말하는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지혜서13,9)
정말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보는 우리였으면 좋겠다.
< 웰 다잉 비법: 충분히 행복하십시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죽을 때 후회하는 다섯 가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호주 여성인데, 학교 졸업 후 은행에서 일하던 중 ‘그 직업은 평생 할 일이 아니다’ 싶어 일을 그만두고 꿈을 찾기 위해 영국으로 떠납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생활비를 벌기위해 시작한 일이 노인들 병간호, 호주에 돌아와서도 틈틈이 작곡 공부를 하며 노인들 돌보는 일을 계속했는데, 이 아가씨, 붙임성이 좋았는지 워낙 사람을 편하게 했는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노인들은 이 아가씨에게 평생 사는 동안 후회되는 일들을 묻기도 전에 다들 줄줄이 이야기했고 이 아가씨는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다가 똑같은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들은 다섯 가지 후회와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책으로 엮었는데 그게 곧 베스트셀러가 된 것입니다.
죽기 전 가장 많이 하는 후회 TOP 5
1. 난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고, 따라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대신 내 주위사람들이 원하는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삶을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 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애들은 이미 다 커버렸고 배우자와의 관계조차 서먹해졌다.
3. 내 감정을 주위에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내 속을 터놓을 용기가 없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살다 병이 되기까지 했다.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다들 죽기 전 얘기하더라고 한다. “친구 xx를 한번 봤으면..”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겁이나 변화를 선택하지 못했고, 튀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헨리 나웬은 “삶은 죽음을 준비하는 긴 여정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의 저자인 오츠 슈이치는“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역사이자, 자신을 대변하는 인생길이‘충분히 만족스럽다면’ 미소를 머금으면서 다음 세상으로 향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미소를 머금으며 다음 세상으로 향하기 위해서 위 말 중에서 ‘충분히 만족스럽다면’에 주위를 기울여야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이제 죽는구나!’ 생각이 들 때, 순식간에 너무도 생생하게 그동안 살아온 삶이 필름처럼 제 앞을 스쳐갔습니다. 지금은 그것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대부분 ‘후회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그 후회스러운 것들이 생각나니 하느님 앞에 가면 고개도 못 들것 같아서 지금 죽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숙제를 하지 않은 채 혼 날 것을 뻔히 알며 학교에 가는 기분이랄까요. 삶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죽을 때 반드시 미련이 남게 마련입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25가지건, 5가지건 결국 후회하는 것을 하나로 종합하자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주인이 되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조부모께서 돌아가신 기억이 저의 첫 기억이라는 은총으로 아주 어릴 적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이 물음에 하느님은... ‘행복해야한다.’는 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인생은 이 ‘행복’이란 단어에 맞춰지게 되었습니다. 이 목표를 위하지 않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브로니 웨어의 죽기 전에 하는 5가지 후회도 참 '행복'을 위한다면 다 해결될 것들입니다.
1. 남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서 후회된다?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생은 거짓이고 참으로 나의 인생이 아니라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저는 그것에 있어서는 부모님도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엔 이 세상에서 일을 열심히 하며 행복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들은 저를 절대로 배불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 것들은 가지면 더 배고파지고 부족해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3. 스트레스를 쌓으며 솔직하게 말도 못하고 풀지도 못했다? 솔직하지 못하여 쌓아놓고 살면 그것이 내 안에서 병이 될 뿐입니다.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도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최대한 거짓 없이 솔직하려 노력했습니다. 마음에 쌓이는 미움이나 안 좋은 감정을 절대 오래 남겨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하며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친구들이 보고 싶다? 결국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귐은 그만큼 나의 행복을 증가시켜줍니다. 저는 다행히도 주위에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행복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언제나 ‘관계’가 저의 묵상거리였습니다.
5. 내 인생을 내가 살지 못했다? 행복을 위해 인생은 내가 선택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와 다른 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언제나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꿉니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까요...
소돔을 떠나는 순간 자신이 살던 세상을 뒤돌아본 롯의 아내는 거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왜 세상에 미련이 남았을까요? 정말 행복했다면 후회 없었을 것입니다. 알면서도 행복하지 못했기에 채워지지 않은 아쉬움이 자꾸 나의 발목을 붙잡는 것입니다. 웰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웰 다잉이라고 합니다. 잘 죽기 위해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돌아가실 때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종말에 대한 이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잠잠하다가도 틈만 나면 수면위로 떠올라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종말론자들입니다. 지난 2000년 대희년을 전후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종말론자들이 우리 사회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종교적 심성이 강한 우리 민족이며 또한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우리나라의 풍토여서 그런지 때만 되면 종말론자들의 활개를 칩니다.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속출합니다.
언젠가 제가 목격한 사이비 종말론자들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민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인적이 드믄 산속에 날림으로 지은 조립식 기도원 건물이 서있습니다. 허름하고 열악하지만 당분간 숙식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한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수십 명의 신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합류한 사람들은 직장이며 가족들도 모두 뒤로 하고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종말이 눈앞인데 재산이 무슨 소용이냐며 교주에게 몽땅 바쳤습니다. 새벽 6시에 기상한 신도들은 그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거의 광란에 가까운 연속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토록 고대해왔던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약속된 정오가 되었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녁 6시로 종말이 연기되었습니다. 그러나 6시가 지났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밤 9시, 12시...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즉시 지도자에 대한 고소고발, 구속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을 사이비 교주에게 맡긴 사람들의 패가망신이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이래서 종말 신앙에 대한 이해, 정말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통상 사람들은 ‘종말’을 참혹하고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는 무섭고 절망스런 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말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종말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희망적입니다. 한마디로 장밋빛 청사진의 완성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은 우리가 그토록 고대해왔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날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다려왔던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습니다. 죽음을 절친한 친구요 형제자매처럼 대했습니다. 죽음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죽음을 복된 대상으로 파악했습니다.
한 개인의 종말격인 죽음은 한 인간이 오랜 허물과 나약함의 옷을 벗고 불멸의 갑옷으로 갈아입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인간의 비참 위로 하느님의 자비가 풍성하게 쏟아져 내리는 축복의 순간이 한 개인의 죽음입니다.
한 개인의 종말을 뛰어넘어 언젠가 우리 모든 인류가 맞이할 최종적인 종말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교정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찌 그리 종말에 대해 무시무시하게 설명하신 것입니까? 종말에 펼쳐질 광경을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홍수, 싹쓸이, 멸망, 불과 유황,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두고...
종말에 대한 무시무시한 설명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편의 강력한 경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 그래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강한 경고장이라고나 할까요.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소중히,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죄와 부족함,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는 것, 언젠가 이 세상이 지나가면 더 이상 울음도 눈물도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복을 누릴 것을 굳게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종말 신앙의 핵심입니다.